소설리스트

외전 (9/9)

The look of love

다시 잠들기가 어려웠다.

눈을 꾹 감고 5분 정도 있었다. 이제는 포기할 때라는 것을 깨닫자 미련 없이 침대를 박차고 일어설 수 있었다. 도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방을 벗어났다.

너무 넓다.

오직 이 이유만으로 정신 사나울 수 있다는 건 이 펜트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느꼈다. 사람으로 정신없이 북적이거나 온갖 잡기가 쌓여 있지 않더라도 사람은 이토록 불안정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참 신기한 감각이다. 어쩌면 방의 넓이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낯설고 어색한 감각이 자꾸 머릿속을 울려 댄다. 자기 기분이 너무 산만해서 모든 게 정신 사납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희락은 집을 나서기 전 ‘푹 자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알겠다며 고개까지 끄덕여 보였는데 결국 지킬 수가 없게 됐다. 아무리 그의 말이라도 이건 무리가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점심 직전까지. 도선은 이 잠깐의 헤어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저녁부터 희락이 이 일을 가지고 얼마나 울화통을 터트렸는지 모른다. 도저히 날짜와 시간을 변경할 수 없는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 휴일을, 목요일 절반을 회사에서 날리게 됐다며 희락은 표정과 손짓을 동원해 아쉬움을 표현했다.

사실, 여태까지 그가 매주 돌아오는 목요일을 통으로 비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무척 서운해하는 그의 앞에서 내색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점심은 기필코 함께 먹을 거라고, 그전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에 돌아오겠다고. 희락은 연거푸 다짐하며 이쪽을 슬금슬금 곁눈질했다. 이때, 자기도 그처럼 좀 섭섭해하거나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어 주었더라면 좋았을까. 그를 앞에 두고 표정을 마음대로 꾸밀 수 있었더라면 진작 하고도 남았다. 아직도 심장이 제멋대로 콱콱 멈추는 거 같은 긴장감을 수시로 느끼고 있다. 표정을 꾸밀 여유까지 갖추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어찌어찌 말을 놓고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일단 씻기로 했다.

욕실과 파우더룸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걷다가 세탁 바구니와 마주쳤다. 아까 새벽에 희락이 침대에서 걷어 내서 처박은 시트가 그 안에 있었다. 어쩐지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더한 화끈거림이 기다리고 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 때문이다. 어깨와 옆구리 근처에 새겨진 흔적이 생각보다 꽤 적나라했다. 따져 보면 채 몇 시간도 안 됐다. 침실에서 욕실로 이동할 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아릿하고 저린 감각이 이제야 허리와 허벅지 부근에서 피어오른다.

좀 더 여러 생각이 떠오를 거 같은 머릿속을 비우고자 휘휘 고개를 털었다. 희락의 가는 얼굴이나 낮은 속삭임이 언뜻 뇌리에 스쳤을 뿐인데도 벌써 하반신에 반응이 온다. 이 정도면 변태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다. 굉장히 낯 뜨거워졌다.

도선은 물을 약간 차갑게 틀고 재빨리 샤워를 했다. 주인 없는 집에서 씻자니 아무래도 느긋하게 욕조에 몸을 담글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새벽에도 씻긴 했지만 자기 손으로 씻었다기보다 희락이 뒤처리를 하며 씻겨 준 것에 가까웠다. 가벼운 샤워라도 제 손을 움직여서 비누칠과 샴푸를 하니 이제야 좀 씻은 거 같았다.

파우더룸에 도착하자마자 도선은 까먹지 않게 계속 기억하고 있던 것을 그 즉시 실행했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페로몬 탈취제를 잡았다.

희락과 함께 지내며 평생 인연이 없던 것들을 하나둘 체험하는 나날이다. 익숙해진 것도 있고, 그럭저럭 적응기에 돌입한 것도 있다. 하지만 페로몬 탈취제를 뿌리는 것만큼은 아직도 생소하기 짝이 없다. 까먹을 때도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희락이 웃으며 챙겨 주는 게 너무나 다행이었다.

그는 말했다. 자기 손으로 직접 당신 몸에 스민 페로몬을 제거하는 것과, 당신이 자기 페로몬을 제거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어느 쪽이 더 기분 나쁜지 선택할 수가 없다고. 양쪽 다 그의 머릿속을 불쾌감으로 젖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니 가장 좋은 것은 희락이 없을 때 자기가 슬쩍 탈취제를 분사하는 것인데 이따금 깜빡깜빡 잊어버린다는 게 문제다.

아침에 나갈 준비로 분주한 희락의 기척을 오직 청각으로만 확인했다. 쉽진 않았다. 그의 집임에도 어찌나 살금살금 걷고 소리 한 번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지. 귀를 기울이다가 까무룩 잠들고, 또 설핏 정신이 들었다가 어느 순간 눈꺼풀이 감기는 시간이 흘렀다.

태평하게 누운 채 그의 외출 차비를 확인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게 끝나자 이번에는 이 지나치게 넓은 집에서 자기 혼자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다. 빨리 이 공간을 탈출해야 안정감을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드디어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어색하고 생소한 느낌을 맛보다가 밖으로 나오니 이제야 좀 살 거 같았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시간도 넉넉하니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출근 시간이 지난 역사는 한산했다. 플랫폼에 서자마자 딱 맞춰 도착한 지하철에 탑승해 의자에 앉았다. 아까 침대에서 비몽사몽 검색해 봤던 곳을 이번에는 또렷한 정신으로 재확인했다. 그 근처는 대충 알지만 장소 자체는 처음 가 보는 곳이기에 조금 긴장됐다.

지하철의 와이파이를 누리는 것은 고작 10분도 안 돼서 끝났다.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 버렸다. 근방에서 커피라도 마시며 시간을 때울까 싶기도 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이러다가 엇갈리기라도 하면 낭패다. 점심때까진 오겠다고 말했으니 생각보다 일찍 출발할 수도 있을 거였다.

도선은 건물 앞에서 조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아까 앱으로 확인했던 가장 가까운 출구로 나가 몇 분 정도 걸었더니 목적했던 곳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사르타고’의 본사 건물이다. 지금쯤 희락이 머물고 있을 곳이기도 하다.

안으로 들어가길 좀 망설였지만 계속 건물 앞을 서성거리기도 뭐해서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가장 먼저 안내 데스크에 직원 둘이 보였다. 로비를 돌거나 곳곳에 자세를 잡고 서 있는 보안 요원들이 꽤 많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경비가 삼엄해서 어깨가 슬금슬금 움츠러들었다.

잠깐 둘러보고 있자니 안내 데스크에 있는 직원들과 차례차례 눈이 마주쳤다. 확신할 순 없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본 모양이다. 희락이 요즘 SNS에 함께 찍은 사진을 엄청 올려 대고 있으니 그를 팔로워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법하다. 알은척하는 시선이 쏟아지는 게 부담스러워 고개를 슬쩍 숙였다.

괜히 들어왔나 싶은 후회가 이때부터 들었다. 낭패였다. 혹시라도 안내 직원이 과한 친절을 베풀어서 자기의 방문을 알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일에 지장을 주려고 온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들어오자마자 도망치듯 나가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다. 도선은 잠시 고민하다가 로비 한쪽에 비치된 소파에 앉았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어깨 좋은 보안 요원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내방 이유를 묻겠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역시나.

도선은 슬쩍 고개를 올려 요원의 얼굴을 시선만으로 살폈다. 넉살 좋게 ‘지하철을 타고 왔습니다’라는 농담을 던지면 콧방귀도 안 뀔 인상이다. 조희락 대표님을 만나러 왔다. 이 말을 결국 꺼내야 하나 싶어서 도선이 망설이던 때였다. 요원이 인이어에 손끝을 가져가며 무언가를 심각하게 듣더니 그다음, 허리를 숙여 냅다 사죄의 말을 꺼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예……?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건 꽤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도선이 열심히 손사래를 치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아까 눈이 마주쳤던 안내 데스크 직원 중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요원보다는 훨씬 대하기 편한 인상의 청년이다. 그는 테이블 위에 시원해 보이는 녹차를 내려놓으며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무척이나 상냥하고 친밀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통에 굉장히 겸연쩍어졌다.

“죄송합니다. 번거롭게.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도선의 말에 직원은 “아닙니다. 편하게 계세요”라고 다시 한번 웃어 보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상황이 닥치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너무 아무 생각 없이 굴었나 싶어서 조금쯤 우울해졌다.

아아, 이분들이 ‘상사 애인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먹고살기 더럽게 힘들다’라는 생각은 부디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여러 생각으로 머리를 싸매다가 불쑥 떠오른 ‘애인’이라는 단어에 잠시간 목덜미가 뜨끈뜨끈해지기도 했다. 가져다준 녹차에 입을 안 대는 것도 미안한 일이라 열심히 잔을 비웠다.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도선은 어느 순간 눈을 부릅떴다. 생각해 보니 희락이 1층으로 나올 리가 없을 거 같다.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타지 않을까. 이게 왜 이제 생각났을까. 애초에 주차장에서 기다렸으면 직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끝났을 텐데. 아니, 아니다. 그것도 쉽진 않았을 거다. 지하로 내려갈 때 거기서 한 번 저지당했겠지. 주차장에 덩그러니 서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또 여기 직원들에게 엄청 신경 쓰이는 행동이었을 거고.

아, 정말 상황이 안 따라 주는구나.

도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희락이 늘 자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번에는 이쪽이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왔던 것인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이제 어쩌지.

그때였다. 손에 쥔 휴대폰이 진동했다. 희락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고 있냐는 질문과, 지금 일이 다 끝났으니 곧장 출발하겠다는 말이었다. 도선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깜짝 방문 대작전’은 실패인 거 같다. 그러니 여기서 접어야 할 때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도선은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1층으로 오세요. 문장을 전송하기가 무섭게 확인한 남자는 그 뒤로 답이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 뒤쪽이 웅성거렸다. 도선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등을 돌렸다. 기역 자로 꺾인 복도 쪽에 시선을 가져가자마자 바로 희락의 얼굴이 보였다. 멀찍이서도 눈이 마주친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손에 슈트 상의를 움켜쥐고 있는 게 묘하게 간지러웠다. 슬쩍 웃음이 나왔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단숨에 뛰쳐나왔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희락의 옆에 서 있던 석찬이 묵례했다. 도선 역시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희락은 성큼성큼 소파로 한달음에 뛰어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조금 전까지는 드문드문 감지했던 시선이 이번에야말로 따가우리만치 느껴졌다. 도선은 내심 감탄했다. 희락을 앞에 두면 여전히 심장 주변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긴장이 몰려오는데 이 와중에도 주변의 눈길을 느낄 수 있다니. 자기가 진화한 건지, 아니면 예전보다는 조금쯤 긴장을 덜하게 된 건지.

“실패했습니다.”

“응? 뭐가요?”

도선은 고개를 살짝 올려 희락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눈매가 웃음으로 풀썩 주저앉아 있다. 입술은 또 얼마나 해밝게 웃는지 눈이 부시는 느낌마저 든다. 지금 그의 기분을 굳이 입으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저도 대표님 하시는 것처럼 일 끝나는 거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깜짝 놀라게 해 드릴 겸.”

그러자 희락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완전 제대로 성공했는데? 나 지금 놀란 거 안 보여요?”

“아닙니다. 제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요. 좀 더 완벽한 거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완벽해, 완벽해.”

“제가 1층에 있다고 대표님께 말하는 상황 같은 게 아예 없는, 정말 철두철미하게…….”

“잠깐, 잠깐.”

희락이 손짓까지 동원해 말을 끊으며 눈을 흘겼다.

“나 당신 깜짝 방문에 놀란 거 맞는데, 그 이상으로 지금 대표님과 존대에도 엄청 놀라고 있거든요? 몇 시간 안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희락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도선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여기 대표님 회사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는 눈도 많고요.”

“그러니까 더 이상하죠!”

희락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속삭였다.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애인이라니. 사람들이 보기에도 진짜 이상하잖아, 그런 거!”

“아.”

도선은 잠시 생각하고서 “그건 또 그러네”라고 작게 대답했다. 희락은 가볍게 불평하긴 했지만 사실 어찌 돼도 좋은 모양이다. 시종 지어 올린 웃음은 아직도 사라질 기미가 없다. 완벽하게 놀라움을 떠안기는 것은 실패했지만 그가 이토록 좋아하고 즐거워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희락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도선도 자동적으로 팔을 뻗어 그 손을 붙잡았다. 단단히 깍지를 낀 채 엘리베이터 앞까지 이동했다. 일순 주변 시선이 또 한 번 신경 쓰였지만, 앞장서서 걷던 그가 슬쩍 고개 돌려 활짝 웃는 바람에 정신이 쏙 빠졌다. 역시 저 웃는 얼굴을 보면 딴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나 그런데, 아주 조금은 기분이 나빠요.”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타자마자 희락이 낮게 중얼거렸다. 도선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전히 웃고는 있지만 조금 전보다는 약간 기운이 빠진 듯했다.

“왜?”

“탈취제를 도대체 얼마나 뿌린 거야? 오늘 계속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 새벽까지 작정하고 공들여서 적셔 놨단 말이에요. 그게 아주 흔적도 없어.”

“그럴 거 같아서 당연히 평소보다 신경 써서 뿌렸지.”

“너무 지나치게 신경 썼다고요.”

입술을 비죽거리며 불평해도 잠깐으로 끝난다. 시선이 마주치자 또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싱글벙글 웃는다. 도선도 이제야 조금 긴장이 풀려 따라 웃을 수 있었다.

“점심은 뭐 먹을까요?”

“입맛이 없어.”

“와아, 나 지금 ‘아무거나’가 안 나와서 참 좋은데 입맛이 없다니까 좋은 마음이 1초를 못 가네.”

“난 정말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같이 먹으면 그게 뭐든 다 좋고 뭐든 먹을 수 있으니까.”

희락이 눈을 찡긋거리며 농담조로 재잘댔다.

“요리가 별로라도 나만 있으면 된다는 거야?”

도선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식사할 때마다 음식 맛을 제대로 느껴 본 적은 아직 없는 거 같아. 네 얼굴 보기 바쁘니까. 네 목소리만 신경 쓰이고.”

“와아, 진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희락은 그다음, 눈을 샐쭉 뜨고서 항의했다.

“언제는 다 맛있다며! 내가 물어볼 때마다 맛있다고 했잖아요.”

“당연히 맛있……, 아닌가? 맛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거 같기도 해. 네가 골랐으니 오죽 맛있는 거겠어.”

희락의 표정이 모호해진다. 웃고는 있지만 쨍한 기운이 조금 누그러진 미소다. 도선은 약간 자책했다. 여태까지 희락에게 거짓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간 늘 자동적으로 말해 왔던 ‘맛있습니다’는 거짓말에 포함되는 거였나 싶어서 고민됐다.

“좋긴 좋은데 또 마냥 좋진 않네.”

희락의 말에 도선은 생각을 정지하고 곧장 대답했다.

“왜?”

“내가 여태까지 정말 맛있는 걸 당신에게 먹여 주진 못했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래?”

“응. 진짜 맛있는 거면 그때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감탄이 쏟아지면서 혀끝에만 집중하게 되지 않나? 긴장도 좀 풀리고.”

도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집중하는 건 언제나 너야. 어떤 산해진미라도 내 집중력을 방해할 순 없을 거고. 네가 앞에 있는데 그깟 음식이 대수겠어.”

“…….”

희락이 한 손으로 입가 주변을 가렸다. 척 봐도 울긋불긋 물든 눈가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지막한 웅얼거림이 들렸다.

“나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갓길에 차 세워지고 싶었던 거 면허 따고 처음이야.”

“괜한 말을 했나?”

“아니,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도선은 희락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가끔 이다지도 풋내 나는 얼굴을 하며 부끄러워할 때가 있다. 이런 모습을 코앞에서 볼 때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한테 있을 수 있지’라며 속으로 연거푸 감탄할 뿐이다. 이 남자와 일상을 함께하며 조금씩 나아지려던 ‘의심병’도 이럴 때 어김없이 재발하곤 한다.

근사한 대표님, 멋있는 대표님, 유쾌한 대표님.

희락의 그런 모습을 남들처럼 액정 너머로 바라봤고, 멀찍이서 지켜봤다. 인생을 바꿔 버린 그날 밤 이후부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게 됐다. 이제 여기서 더 바랄 게 있을까 싶을 정도라는 거다. 더 바라는 것조차가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순간처럼 남들은 모를 그의 표정이나 눈빛을 확인할 때면 ‘내가 정말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심장 주변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욱신욱신 아팠다. 긴장과 기쁨으로 가슴이 꽉 조이는 통에 숨 한 번 쉬는 것조차 어렵다고 느껴졌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못 할까.

사실 도선은 딱딱함을 가득 두르고서 이쪽을 응시하던 희락의 모습도 꽤 좋았다. 이따금 날이 바짝 선 음성도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거기에 신경질적인 눈빛이라든가, 짜증과 울분으로 구겨지던 이마라든가. 생각해 보면 싫었던 모습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정신없이 눈에 담기 바빴으니까. 아마 이제 다시 보기 어렵겠지. 미래는 알 수 없다지만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모습이었다.

변태 같은 소리지만, 도선은 그게 이따금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간혹 그가 볼멘소리를 할 때마저도 거기에 싸늘함이나 냉기를 느낀 적이 없다. ‘화가 났다’라기보다 ‘삐쳤다’ 정도로 느껴지는 거다. 심지어 그것도 채 한두 시간을 넘기질 못한다. 삐친 상태가 10분 이상을 유지하면 애썼네, 싶을 정도다.

대표님도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볼 수 있구나. 그런데 그걸 보고 있는 게 나라니.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4만 원 운운 오가던 그 시절. 집에 누워 잠을 청할 때면 그런 생각까지 하곤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곤 하지만, 아마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생각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빤히 보면 나 열 식힐 시간도 없잖아요.”

희락이 손바닥으로 휘휘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그 바람에 도선도 너무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서 슬그머니 고개를 바로 했다. 그 대신 곁눈질로 훔쳐보기를 택했다.

역시, 웃는 모습이 최고로 예쁘고 멋있긴 하다.

그가 입가를 우물거리며 몰래몰래 웃는 걸 보고 있자니 도선도 괜스레 웃음이 날 거 같았다. 입술 위로 비죽비죽 올라오는 웃음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 긴장과 간지러움이 가슴을 꽉꽉 메우듯 차올랐다.

*

*

점심 식사는 집에서 해결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것저것 먹거리를 샀다. 도선을 혼자 두고 차에서 내린 희락이 돌아올 땐 손에 음식이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걸 한 두세 번 반복하자 뒷좌석에는 누가 다 먹나 싶을 정도로 갖가지 봉투가 쌓여 있었다.

최근에는 자주 이런다. 초반에는 희락이 즐겨 가는 식당에서 별실을 잡아 식사를 하는 일이 많았지만 근래엔 집에서 해결하는 일이 잦아졌다. 식기를 치우고 나르느라 직원이 가끔 들어오는 것마저도 희락에게는 ‘방해’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도선은 이 집 주방에서 서너 번 정도 요리를 하기도 했다. 요리를 하고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희락보다는, 독립하고서 어찌어찌 먹을 만한 걸 만들어 본 자기가 그나마 요리하기에 더 적합한 사람이었다.

도선이 생각하기에 이 펜트하우스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은 냉장고였고, 가장 불필요한 공간은 주방이었다.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요리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날이면 마트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구입했다.

희락은 가리는 게 없었다. 뭐든 잘 먹었으며 입맛이 까다롭지도 않았다. 도선이 별거 아니라고 하며 식탁에 올리는 요리를 늘 호들갑 섞어 가며 칭찬하고 먹어 주었다. 그가 이토록 좋아하기도 했고, 늘 바깥에서 먹는 것도 좋지만은 않으니 종종 할까 싶었다. 그게 생각만으로 끝나고 만 것도 전적으로 희락 때문이다.

<한 달에 한두 번이면 ‘그래, 애인이 날 위해 해 주는 이벤트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고맙고 기쁘겠죠. 하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거 같아요.>

그런 말을 들었다. 예상했던 말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완곡한 승낙을 기대했는데 들려온 건 에두른 거절이다.

일단 희락의 말이기에 그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했다. 긴장의 방해를 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이 생길 때면 ‘견딜 수가 없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도대체 그 말이 왜 거기서 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답이 안 나오는 건 그냥 물어보는 게 낫다. 희락은 질문을 듣는 순간 웃었고, 그런 걸 고민했냐고 걱정했으며, 굉장히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가며 대답을 해 줬다.

<요리도 노동이잖아.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나 때문에 노동을 한다는 게 생각만 해도 너무 싫은 거예요. 차라리 그럴 시간에 내 옆에 앉아 있으면 좋겠고, 손이나 잡아 줬으면 좋겠고, 목소리나 더 듣고 싶지.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래요.>

희락이 그렇게 말한다면 이쪽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도선도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어떻게 해도 뺄 수 없는 일이 생겼거나, 혹은 목요일을 통으로 쉬는 것을 조건으로 야근을 하는 것. 이런 게 아니라면 희락은 언제나 퇴근길 마중을 나왔다. 최근에는 출근길마저도 함께하는 일이 잦다. 이것도 굉장한 일이지만 더 굉장한 건 사실 따로 있다.

이게 가능하려면 희락이 자기 일과에 시간을 맞춰야만 했다. 이쪽이 퇴근하기 전까지 모든 업무를 전부 해결하는 거다. 최근에는 그가 저녁 약속이나 접대를 절대로 잡지 않는다는 것을 석찬에게 굳이 듣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다. 실제로 안타까운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 자리에는 꼭 나가셔야 한다는 애원에도 희락은 코웃음을 치며 ‘무너지라고 해. 무너지면 무너지는 거지 어쩌라고’ 식으로 대꾸하곤 했다. 옆에 서 있는 내내 마음이 아주 좋지 않았다. 석찬이 그러실 줄 알았다며 일정을 다시 조정하겠다고 한숨을 푹 쉬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도선은 희락에게 얘기했다.

네가 날 위해 매일같이 시간을 맞춰 주는데 내가 가끔 널 위해 요리하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냐고. 할 줄 아는 사람이 좀 하면 안 되는 거냐고. 노동이 아니라 네가 나한테 이렇게 해 주듯, 나도 네게 해 주고 싶은 게 있는 거라고.

이 정도면 꽤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했다.

긴장한 탓에 생각해 뒀던 것보다 조리 있게 말할 순 없었다. 정말 고맙게도 희락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웃었고, 그다음 바로 이쪽의 비장의 카드를 깡그리 분쇄했다.

<나랑 같이 있는 거 좋지 않아요? 나도 그렇거든. 하루에 조금이라도 같이 있는 시간을 더 늘릴 수 있다면 그것도 정말 좋지 않겠어요? 그렇지? 나도 그래요. 그러니까 도선 씨 시간에 맞추는 건 우리에게 서로 좋은 일이야. 그리고 하나 더. 당신은 마치 내가 일방적으로 손해 보거나 헌신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이게 상황만 놓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오히려 내가 굉장히 이기적이고 배려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진 않았어요? 일하는 시간 빼면 내가 전부 당신을 가지려고 드는데?>

목소리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반쯤 농담조로 말하면서도 사실 마음에 걸렸던 것을 확인받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도선은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이기적이라니. 희락의 행동을 그런 식으로 느끼거나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의 말처럼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진다면 이쪽 역시 나쁠 게 없다. 오히려 굉장히 좋은 일이다.

비장의 카드가 아니라 함정 카드였던 모양이다.

도선은 열심히 아니라고 말했고,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며, 혹시 이것 말고라도 다른 걱정이나 근심거리가 있으면 뭐든 얘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많은 얘기를 나눴다.

출발은 도선이 먼저 끊었다. 매 일상이 아찔할 정도로 순식간이고 황홀경이라 고민을 할 시간이 그리 많진 않다. 어찌 보면 고민이라기보다는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 정도일 거다. 도선은 그것을 슬쩍 입에 담아 왔다. 바로 긴장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에 좀 나아졌다고 해도, 사람이 변신한 수준으로 달라진 것은 또 아니었다. 좀 나아졌다는 것도 이름을 부르거나 말을 먼저 붙이는 것 정도다. 요즘은 그나마 자기 자신의 모습이 지금 꽤 딱딱하다거나 음성이 너무 얼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게 됐다. 초반에는 그런 것도 몰랐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웃는 것도 그랬다. 희락이 왜 웃질 않냐고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모르고 있었을 거다.

<날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야?>

도선은 비장하게 말했지만 정작 희락은 생글생글 예쁘게 웃으며 그런 말을 꺼냈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물어보기 전에 일단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봤지만 역시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쪽이 끙끙 앓고 있는 것을 눈치챈 듯 희락이 손을 꼭 잡아 주며 보충설명을 해 줬다.

<그런 거 있잖아요. 의도적 내숭이 아니라 본의 아닌 내숭 같은 거?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고, 실수하기 싫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줄곧 하고 있으면 긴장을 놓을 수가 없게 될 거고요.>

듣는 순간 굉장히 솔깃했다. 어쩌면 이게 정답에 가장 근접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자기보다도 자기를 잘 아는 희락이라니. 꽤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희락이 말하면 무조건 다 맞는 말처럼 들리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홀린 느낌 없이 순수하게 긍정할 수 있었다.

이게 정답이면 걱정되는 일이 또 생긴다.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텐데 그럼 이 긴장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까. 또, 점차 긴장이 사그라져 가면 좋아하는 마음도 점점 연해지는 걸까. 여러 가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이 걱정에 희락은 이번에도 웃었다. 맞잡은 손을 좀 더 힘주어 고쳐 잡고서 정말로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을 꺼냈다.

<그거는 내 숙제지 당신이 해야 할 걱정이 아니야. 도선 씨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변함없이 당신에게 반해 있고 언제까지고 당신만 사랑할 거라고.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부서지지 않을, 나에 대한 믿음이 도선 씨 마음에 생기는 순간 전부 해결되는 문제거든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내가 더 잘하면 되는 거고.>

이번에는 마음 편안하게 들을 수 없었다. 예전에 의심병 환자가 된 기분이라고 말했던 걸 희락이 신경 쓰고 있는 걸까. 그의 행동이나 말을 믿지 않는다는 식으로 들렸던 게 아닐까. 눈동자를 이리저리 흔들어 가며 어찌어찌 입에 담아 봤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다고 대답해 줄 생각이었다.

<당연히 당신은 날 믿겠죠. 내 애정을 믿을 거고. 근데 믿음이라는 건 좀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태풍 같은 거가 한 서너 번 정도 흔들고, 벼락도 한 두어 번 치고. 그런 걸 겪으면서 강해지고 견고해지는? 내 생각이긴 하지만요. 지금 도선 씨가 내게 가진 믿음이 작고 귀여운 믿음이라면, 앞으로 여러 일을 겪으면서 점점 더 커지고 단단해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그 믿음을 예쁘고 소중하게 키우는 거나 바라봐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난 그걸로 충분해요.>

대답이 잘됐냐고 묻는 듯한 표정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창피하게도 가슴이 꽤 벅차올랐다. 입을 열면 괴상한 소리가 튀어 나갈 거 같았기에 그저 고개만 연거푸 끄덕였다. 희락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치키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원래는 이렇게 말주변이 좋다고. 초반에는 너무 당황하고 정신없어서 폼 잡을 기회가 없었는데 요즘은 약간 자신감이 붙었다고. 희락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웃으면서 늘어놓았다.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도선도 연하게 미소 지었다. 한결 마음이 나아졌다.

그다음에는 희락의 고민을 들었다. 도선이 대강 예상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바로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기복이다.

물론 예전에 비해 나아진 편이다. 누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 통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가 도선을 힐끗 쳐다만 봐도 갑작스럽게 속이 확 뒤집어졌다. 가눌 수 없는 짜증 때문에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희락을 아는 사람이면 그의 애인도 모르지 않게 된 최근에 와서야 그 이상한 뼛성이 꽤 나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단둘만 있고 싶다는 마음은 고쳐지질 않았다. 희락이 생각하기에 누군가의 시선이나 접근으로 말미암아 부아가 치미는 건 차라리 나은 축이다. 그건 알아서 자제하고 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만 있고 싶다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도선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이 갔다. 다른 건 일단 둘째 치고라도 데이트가 너무 집으로만 국한된다는 것은 꽤 심각한 상황이라 여겨졌다.

희락은 결국 온갖 창피함을 무릅쓰고 석찬에게 슬쩍 얘기를 꺼내 봤다. 그의 비서는 기겁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혀를 쯧쯧 차며 이렇게 말했다.

<누가 극우성 아니라고, 연애도 참 극적으로 하십니다.>

석찬은 코웃음만 칠 뿐 별 도움이 안 됐다. 그걸 지금 고민이라고 털어놓는 거냐는 표정만 돌아올 뿐이다. 단둘만 있고 싶어 하는 건 어떠한 연인이라도 비슷할 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가 지나친 듯했다. 희락은 자신의 독점욕이 날로달로 깊어져 가는 게 이젠 좀 무섭기까지 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의사인 친구에게 상담을 했다. 친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경악과 폭소를 동시에 터트리면서 몇 가지 얘기를 꺼냈다.

전문 분야가 아니기에 정확하다고 할 순 없지만 일단 네 얘기만 들어보면 각인이 의심 가는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사랑이 큐피드의 화살이라면 각인은 페로몬의 화살이다. 쌍방 각인이든 일방 각인이든 어디까지나 페로몬의 영역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상상 각인 정도인데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상대가 베타이기에 각인이 성립될 수 없다는 걸 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상황이니 상상 각인 역시 아닐 게 분명하다. 즉, 결론을 말하자면 네가 참 유별난 새끼라는 거다.

정 심각하다 싶으면 정신과적 상담이라도 받아 보라며, 아는 전문의의 명함을 건네던 친구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고. 희락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도선은 생각보다 고민의 농도가 꽤 짙은 것이 놀라웠다. 본격적인 상담을 고려할 정도면 그간 혼자서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도선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둘이서만 있고 싶어 하는 것을 내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고. 너와 함께라면 뭐든 좋고 어디든 좋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과 충돌하는 부분이 없지 않냐고. 그러니 그건 고민할 거리도 안 된다고 딱 잘라 대답해 주었다.

생각을 서툴게 말로 옮기는 동안 희락은 가만히 들었고 고맙다고 속삭였다. 고민을 전부 다 털어 버린 것까진 아닌 듯했으나 어느 정도는 꽤 안심하고 위로받은 모양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우리 하나씩 문제가 있네요. 본인이 생각하기엔 문제인데 상대방이 생각하기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똑같고.>

희락이 웃으며 말했다. 도선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네’라고 대답했다. 서로 마주 보며 웃다 보니 불현듯 떠오른 게 있었다. 도선은 스스로 든 생각이 우스워서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웠어도 어찌어찌 입에 담을 수 있었다.

<휴가 때 단둘이 실컷 지내볼까.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한 며칠을 꽉 채워서 둘만 지내본 적은 없는 거 같아. 좀 외진, 사람 신경 안 쓸 수 있는 데서 함께 지내면 네 속도 약간이나마 풀리면서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 순간 희락이 눈을 반짝거렸다. 마치 이런 말을 꺼내 주길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보였다.

<나도 며칠 전에 그 생각을 했거든요! 안 그래도 이미 석찬이한테 좀 알아보라고 말해 놨어. 섬을 하나 살까 해서. 무인도로!>

듣자마자 놀라움으로 입이 반쯤 벌어졌다. 칭찬을 조르는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점점 더 정신이 날아갔다. 희락에게는 미안했으나 그 순간만큼은 당장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끔뻑끔뻑 눈꺼풀만 움직이며 활짝 미소 짓는 예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난 뭐든 다 좋으니까.>

이런 대답을 해 버려도 괜찮을까 싶지만 희락의 얼굴이 점점 걱정으로 물드는 것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다. 한두 번은 뜯어말리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좋았을까 늦은 후회는 속으로만 할 뿐이다.

희락이 손을 뻗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안긴 것은 이쪽임에도 어쩐지 희락이 자기에게 몸을 맡기고 안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선도 아무렇게나 내버려 뒀던 두 팔을 올렸다. 맵시 좋은 어깨와 등을 품에 담으며 다정한 포옹을 되돌렸다.

* * *

녹여 먹을 듯한 섹스가 있으면, 씹어 먹을 듯한 섹스도 있다.

오늘은 후자였다.

혀끝과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화끈거렸다. 전신이 발긋발긋 물들어 있을 거였다. 조금은 아픈 곳도 있었다. 혀끝에 세워지고 여러 번 공들여서 빨린 젖꼭지와 허벅지 부근에서 알싸한 감각이 피부 곳곳으로 흩어졌다. 살갗이 여열을 머금게끔 부드럽고 세밀하게 어루만지는 손끝에 익숙해진 탓일까. 오랜만에 격정적으로 이곳저곳을 주무르고 눌러 오는 손가락에 몇 번이고 입술이 달싹거렸다.

희락의 손에서 사정을 한 번 마친 후였다. 자기가 분출한 욕정이 그의 곱고 예쁜 손을 적시는 것은 이상하리만치 배덕감이 든다. 그게 또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 역시 낯 뜨겁고 창피하다. 이런 말을 하면 그는 아마 최고의 칭찬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턱을 치키며 의기양양 웃을 거 같다. 그 모습이 머릿속에 쉬이 그려졌다.

도선은 달뜬 숨을 내쉬며 꾹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 떠 올렸다. 뜨끈뜨끈한 시야를 내려 아래를 훔쳐보듯 살피니 적나라한 풍경이 바로 보였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부근을 가벼이 붙잡은 채 반대편 손으로 안쪽을 러브젤로 적시고 있었다. 피가 뒤끓는 기분이다. 하반신에서 올라오던 감각과 눈에 보이는 것이 딱 겹쳐지자 일순 머릿속이 뱅그르르 돌았다.

뚫어지게 보는 것이 민망해서 재빨리 시선을 바로 했다. 방금 확인한 적나라한 풍경 속에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한 희락의 것도 있었다.

처음 그의 나신을 바라봤을 때도 생각보다 굵고 기다란 그의 것에 얼마나 마른침을 삼켰는지 모른다. 예쁘장한 얼굴과 상반되는, 흉포함마저 머금은 듯한 저것을 자기가 과연 품을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인체의 신비라는 거다. 희락이 안으로 진입할 적에 격통에 가까운 아픔을 느꼈지만 아주 잠깐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지만 이쪽이 어떤 상태인지를 끊임없이 신경 써 주었다. 깊은 곳으로 파고들기 바쁘던 몸짓도 느릿해졌다. 느끼는 부분을 찾고자 안을 탐색하듯 휘저었으며 기어코 찾아낸 곳을 부드럽게 눌러 주었다. 통증은 곧 그 이상의 쾌감으로 상쇄됐다. 아픔으로 끙끙대던 자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쾌감으로 신음하게 됐다.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신기하다. 언제까지고 잊히지 않을 순간이다.

희락이 원하면 그날 밤을 열심히, 최대한 빠짐없이 말로 옮겨 줄 수도 있다. 물론 굉장히 부끄럽고 낯 뜨겁겠지만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마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거 같았다. 그는 그날 밤을 떠올리면 많은 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고 하니 말이다. 그날 밤에 부채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이쪽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난리가 날 거다. 희락 역시 자기 이상으로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이 그랬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희락은 아무리 다급할지라도 아래를 적시는 것만큼은 열과 성을 다했다. 속살이 연해지고 점막이 한없이 풀어질 때까지를 기다린다. 완벽하게 허물어져서 무리 없이 자기 것을 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고 싶은 듯했다.

어서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고. 빨리 네 것으로 기분 좋아지고 싶다고.

반쯤은 진심이고, 또 반쯤은 희락을 위한 자극제이기도 했다. 백발백중 먹혔기 때문에 긴장과 창피함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어찌어찌 입을 열어 말을 꺼내곤 했다. 그게 요즘은 잘 통하질 않았다. 오히려 너스레를 떨듯 웃으며 눈을 찡긋해 보이기까지 한다. 손끝으로 당신 안쪽을 좀 더 맛보고 싶은 기분이라고. 손가락에 달라붙는 이 감촉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즐거운지 알려 줄 수가 없어서 안타까울 지경이라고. 환한 눈웃음과 함께 그런 말을 들으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긴장마저도 잠시 잊을 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대치의 부끄러움을 맛보며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아래가 충분히 적셔졌다는 것은 밑에서 올라오는 느낌을 가늠할 필요가 없었다. 희락만 보면 충분했다. 열 때문에 아른아른 일렁거리는 시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눈에 띄게 달라졌다.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이 이때만큼은 잠시 무표정이 된다.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며 시선만으로 자신의 하반신을 범하는 남자에게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자기가 베타이기에 맡지 못하는 페로몬이 지금 이 방에 진동하고 있으리라는 확신도 더해졌다. 욕정에 사로잡힌 강렬한 시선이 허벅지에서 배꼽으로, 자기 얼굴까지 올라오면 저도 모르게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시선의 교환은 그리 길지 않다. 그건 다행이었다. 얼굴 곳곳이 빨리고 핥아지는 눈빛을 길게 마주했다가는 정신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둔부에서 간질이듯 비벼 대는 그의 것이 느껴졌다. 신호였다. 도선은 시트를 아무렇게나 움켜쥐었다. 초반에는 무심코 하반신에 힘을 넣게 됐다. 그러면 둘 다 아주 잠깐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아래에 힘을 빼고 그 대신 시트를 움켜쥐는 것에 집중하며 곧 있을 삽입을 준비한다.

희락의 것이 자기 안에 천천히 자리 잡았다. 밀려드는 감각에 달뜬 호흡을 뱉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눈을 감으면 오직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열기에 집중할 수 있다. 버거울 정도로 꽉 들어차는 묵직함에 안쪽이 타들어 갈 것만 같다. 깊은 곳을 향해 파고들 때마다 터트릴 듯 팽창하는 것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거침없다. 오늘은 특히 더했다. 가끔 이렇게 사람이 돌변한 것처럼 굴 때가 있다. 그러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날이다. 절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였고 나중에는 그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쾌감에 신체가 마비됐다. 장난기 어린 농담이나 통증의 여부를 묻는 목소리마저 없다는 것은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라는 걸 입증한다. 짐작건대 아마 말을 하는 것조차 까먹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만큼 자기 몸과 쾌감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으로 여겨졌다.

눈꺼풀을 조금 열고서 굼뜬 시야로 눈앞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번에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것이 안을 꿰뚫고 파헤치는 적나라한 광경을 보는 게 차라리 나았을 거 같다. 그 어떤 것보다도 자극적이다. 만족감과 정복욕으로 범벅된 얼굴이 소름 끼칠 정도로 예뻤다. 아찔해졌다. 도선은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눈을 꾹 감았다. 귓가에 흐릿한 웃음이 들렸다.

몸에 닥치고 있는 일을 언제나 머리가 따라갈 수 없었다. 그의 양어깨에 걸쳐진 두 다리가 한껏 더 벌어지면 기다렸다는 듯 안을 격정적으로 침범해 왔다. 느끼는 곳만을 골라서 잔뜩 들쑤시고 찌르는 통에 전신이 얻어맞은 것처럼 화끈거렸고 열로 들끓었다. 견딜 수가 없어서 통사정을 하듯 신음을 연거푸 뱉는다. 그러면 끈질기게 안을 헤집던 움직임이 그제야 조금쯤 느슨함을 찾았다.

희락이 가장 깊숙한 곳에 끝을 박아 넣은 채 허리를 돌린다. 안이 빙글빙글 휘저어지고 비벼질 때면 아무리 입에 힘을 주어도 어느 순간부터 앓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뜨거움과 간지러움, 애정과 탐욕. 섹스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런저런 감각을 여린 내벽에 새기듯 움직였다. 전신에 흩어져 있던 쾌감을 보다 더 깊은 안쪽으로 그러넣을 듯 움직이는 남자에게 완전히 함락당한 채 열락의 구덩이로 떨어진다. 희락에게 안기고 있다는 정신적인 만족과 육신에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불꽃이 동시에 맞물리는 순간. 도선은 그때까지도 가슴에 도사리고 있던 긴장을 전부 떨쳐 내고서 한없는 만족으로만 울 수 있었다. 자기의 꼴사나운 흐느낌과 희락이 낮게 웃는 소리가 동시에 고막을 파고들었다.

상접된 곳에서 질컥질컥한 소리가 끊임없이 방 안을 메웠다. 희락이 허릿심만을 사용해 안을 내리꽂고 새김질하듯 박아 댈 때면 온몸을 벌벌 떤 채 전기에 맞은 것처럼 자지러졌다. 입구를 도발하고 놀리듯 살짝살짝 잘게 쳐올리다가도 어느 순간 가장 깊숙한 곳에서 굵고 뜨거운 것이 꿈틀거렸다. 잠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허리를 뒤틀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 봐도 아래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쾌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지금은 무섭다. 자기가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사람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체로 탈바꿈하는 게 오싹했다. 아직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건 다행이다. 머지않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될 거였고, 곧 새하얗게 변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거였다.

기세 좋게 안을 왕복하던 것이 어느 순간 쑥 빠져나간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진동하던 음란한 소리도 드디어 끊겼다. 여유를 갖고 쉴 시간은 없었다. 아찔함에 어릿어릿한 머릿속을 가다듬을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희락이 도선의 몸을 모로 누이고 자기도 그 옆에 바싹 달라붙어 누웠다. 상실감으로 벌름거리는 벌그무레한 구멍에 그의 것이 성마르게 파고들었다. 아주 잠깐이었는데 그새 촘촘해진 거냐고. 굵직한 그것이 마치 따져 묻는 것처럼 안을 들입다 치고 올라왔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도선은 연거푸 앓는 소리를 토했다.

반쯤 발기한 도선의 것을 희락이 망설임 없이 거머쥐었다. 시트와 옆구리가 맞닿은 틈을 파고든 반대편 손은 단단히 솟아 있는 젖꼭지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 대며 내리눌렀다. 반사적으로 몸이 버둥거렸다. 허리가 한껏 요동칠 때마다 희락은 유두를 가볍게 꼬집었다. 겨드랑이 근처의 여린 살을 힘주어 주물거리고 어깨에 이를 세웠다.

전신을 후려치는 쾌감으로만 쩔쩔매는 것이 차라리 낫다. 도선은 귓가에 생생하리만치 닿는 숨결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쉰 목소리가 자기 이름을 부르고, 안을 찌를 때마다 으르렁 낮게 신음하면 정말이지 곧 죽을 거 같았다. 희락이 자기 사정을 부추기는 행동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 최고는 역시 낮디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게끔 종용하는 것이었다. 귓불을 깨물어 가며 “도선아, 윤도선. 당신이 누구 건지 말해 봐. 누가 당신을 가졌는지 어서 말해 봐요”라고 속삭이면 그때야말로 정신을 놓는 순간이었다.

도선은 까무러치듯 울며 희락의 이름을 불렀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내겐 너뿐이고 네가 주는 쾌감만 알고 싶다고. 맨정신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을 울먹임과 함께 쏟아 냈다. 그러면 귓가에 기쁨의 탄식이 들려왔다. 한계까지 커진 그의 것이 사정없이 퍽퍽 안을 쳐올리는 통에 신체가 이리저리 뒤흔들렸다. 둔탁한 충격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터졌고, 그와 동시에 희락의 손안에서 욕정을 배출했다. 사정감의 만족과 나른함을 느낄 찰나가 없다. 존재감을 내뿜으며 내벽을 왕복하는 것이 보다 더 과격해졌다. 신체 곳곳에 잔류한 사정의 만족감과 아래에서 폭발적으로 올라오는 쾌감이 겹쳐진다. 도선은 입을 벌리고 소리 없는 신음을 꺽꺽거렸다. 어찌어찌 버티던 제정신이 불꽃같은 열기로 산산이 부서진 채 사방으로 튀었다.

문득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체위가 바뀌어 있다. 이번에는 엎드린 채 그의 것을 받고 있었다. 배 속과 내벽이 온갖 감각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느낌만 알 수 있었다. 다른 것은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모르게 됐다. 희락의 몸에 전신이 덮여 눌린 채 안이 꿰뚫린다. 달궈진 호흡에 베갯잇이 흠뻑 젖었다. 이젠 질퍽질퍽하고 야릇한 소리마저 없다. 맞닿은 살결은 땀을 접착제 삼아 단단히 맞물려 있다. 그는 오직 안에서만 움직였고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는 듯 굴었다. 연속되는 왕복으로 안쪽 속살은 완전히 흐물흐물하고 연해졌다. 엉덩잇짓만으로 말캉말캉한 내부를 는질는질 희롱하고 파헤치는 것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자르르한 진동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음을 뱉으며 훌쩍이면 희락은 마치 달래 주듯 어깻죽지와 목덜미를 빨고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갈증과 다정함에 전신이 희열로 나긋나긋 풀어졌다.

뜨거운 손이 옆구리를 잡고서 몸을 바로 누였다. 희끄무레한 시선 바로 앞에 희락의 얼굴이 있었다. 도선이 양손을 뻗어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쓸어 주었고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도 떼어 냈다. 그러면 희락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미소 지었고 가장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려함을 잃지 않는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도선 역시 가슴 뻐근한 만족감에 환히 웃었다. 연결된 부분이 다시금 한계까지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뼛속까지 파고들 것처럼 무언가가 피부로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페로몬일까. 아니면 그가 전해 주고자 하는 감정들일까.

굵직하게 부풀어 오른 그것이 세차게 안을 치댔다. 희락이 시트 사이로 손을 넣어 땀에 젖은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도선 역시 팔과 다리를 이용해 자기를 꿰뚫어 대는 남자에게 매달렸다. 시야가 탁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야 탓에 현기증이 물씬 올라왔다. 여린 안쪽을 때려 박으며 밀고 들어오는 것에 하반신이 물어뜯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혀끝으로 입을 벌리고 안을 파고든 살덩이가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아래가 쑤셔지면 그만큼 입천장과 여린 살이 혀끝으로 눌렸다. 순식간에 차마 삼키지 못할 타액이 흥건히 고였다. 격한 움직임에 이리저리 비벼진 자신의 것이 애액을 잘금거릴 때면, 희락도 사정을 향해 정신없이 치닫고 있었다.

양손이 깍지 끼워진 채 베개 위로 눌렸다. 호흡하느라 잠시 떨어졌던 입술도 다시 찾아와 순식간에 입 안을 장악했다. 떨어졌다 다가붙길 반복하던 움직임이 드디어 멈췄다. 도선은 아찔함에 눈 감았고 희락은 쾌감으로 완벽하게 물크러진 안쪽에 뜨거운 욕정을 쏟아 냈다.

도선은 아래에서 채워지는 감각을 맛보며 꾹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시선이 있었다. 독점욕으로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에 정신이 아질했다. 기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였다면 당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 시선에서 벗어나려면 뭐든 해야 했다. 도선은 갈라진 목소리로 키스를 졸랐다. 희락의 표정이 화사하게 풀어졌다. 다가오는 입술을 바라보며 부연 눈을 서서히 감아 내렸다.

*

*

예상했던 것처럼 역시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둘 다 정신이 쏙 빠진 채 뚫고 뚫리는 몸짓으로 서로를 나눠 가졌다. 시선만으로 대화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어림도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건 마치 뚫고 뚫리겠다는 신호와 같았다. 피부만 닿아도 머릿속에 쾌감이 되살아나며 불꽃이 튈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경험했다.

도선은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이 방에 어느 정도로 페로몬이 고여 있을까.

“괜찮아요?”

어떠냐고 묻는 희락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축이다. 도선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대답다운 대답이 되지 않았기에 간신히 고갯짓을 덧붙였다. 어깨 근처에서 흔들리는 머리에 희락이 옅게 미소 지었다.

몹시 지친 것까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아직 온몸이 묵직했다. 섹스가 남긴 후폭풍이 늘 그런 것처럼 잠시간은 나른함에 잠식된다. 땀으로 젖은 피부가 녹진녹진 흐무러졌다. 맹렬하게 파고드는 살덩이를 받아 냈던 하반신은 아직도 찌릿찌릿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희락의 손이 젖은 등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도선은 그 손길에 반응하며 그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힘을 넣어 보았다. 살과 살이 닿고 떨어질 때마다 끈적끈적한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듯 찾아왔다.

도선은 침대에 걸터앉은 희락에게 안겨 있었다. 여운을 한껏 즐기고 나면 희락은 이대로 도선을 안아 올려 욕실로 향하는 게 늘 정해진 순서였다.

“읏.”

도선이 짧게 신음했다. 아래에서 뜨끈뜨끈한 것이 느껴졌다. 자기 못지않게 희락도 꽤 나른하고 기진맥진할 거였다. 그런데도 이 열기라니.

“오늘…… 무슨 일…… 있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질문했다. 희락은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웃음이지만 살짝 갈라지는 음색 탓에 머릿속이 흔들거렸다. 이건 약인지 독약인지 분간을 못 하겠다.

“아뇨, 아무것도. 당신이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거 외에는?”

“…….”

목소리가 지나치게 색정적이다.

도선은 볼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말문마저 완전히 막혀 버렸다. 그저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몰랐으면 몰라도 알아차린 이상 무시하기도 싫다. 까슬까슬한 음성으로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나직한 답변이 들렸다.

“손을 빌릴까.”

도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약했다.

“입으로 해 주는 건……?”

그러자 희락이 감탄과 함께 기분 좋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와아, 너무나 좋죠. 하지만 한껏 지친 도선 씨한테 거기까지 바라긴 싫다.”

잘 돌려 말하면서도 아쉬움까지는 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말끝에 고여 있는 갈증이 느껴져서 도선은 소리 없이 벙긋 웃었다. 머릿속이 완전히 굼떠 있는데도 이럴 땐 또 재빠르다. 희락이 어떤 말을 하면 기뻐할지 아주 자연스레 떠올랐다. 신기한 일이다.

“그럼, 그러면…… 기왕 지친 거…… 이대로 한 번 더 하면?”

등과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그의 것이 보다 더 뻣뻣해지는 것도 모를 수가 없다.

“이야, 눈치챘죠? 나 방금 위험했다?”

“응, 알아.”

희락이 도선을 고쳐 안으며 끙끙 중얼거렸다.

“이번 유혹은 거절하기가 어렵네.”

“거절하라고 한 말 아니야.”

희락이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도선 씨야말로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없지. 네가 너무 멋있고 잘생겼다는 거 외에는.”

좀 더 박력 있게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말을 꺼내자마자 희락이 행복에 겨운 듯 웃어 줬기에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될 뿐이다. 그는 매번 폼 잡을 틈이 없다고 말하지만 자기야말로 늘 그렇다.

도선은 한쪽 팔을 뒤로 해서 그의 것을 쥐려 했다. 이대로 안쪽에 넣고 품을 생각이었다. 그 손짓은 단번에 저지당했다. 희락이 도선의 팔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리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나 꼭 안아 줘요. 그거면 돼.”

키스를 하면 어떨까. 그럼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 귓가에 계속 내려앉는 음성에 조금씩 가라앉던 떨림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맞닿은 피부에서 떨림을 느낀 듯 희락이 키득 웃었다.

“그리고 날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돼요.”

도선이 색색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응? 내가…… 먹히는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읏, 흐으……!”

희락이 엉덩이를 움켜쥐고 양옆으로 벌리자 내벽에 머물러 있던 애액들이 아래로 조금씩 흘러내렸다. 벌름거리는 구멍에 그대로 자기 것을 꽂아 넣었다. 물기가 충분한 그곳은 굵직한 그것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당신 여기가 날 먹어 치우는 거지.”

손끝이 이어진 부분을 가볍게 쓸고 훑었다. 그 감촉에 온몸을 부들거리며 도선이 끙끙 신음했다.

“아, 아읏, 아…… 깊, 이거 좀 너무…… 으, 우웃…….”

“굉장히 좋다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되는 거겠죠?”

단숨에 쑥 들어온 살덩이는 안을 빈틈없이 채우듯 율동했다. 쾌감에 절여졌던 몸에 다시 그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아주 쉬웠다. 내부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크기를 더해 갈 때마다 입술이 절로 악물어졌다.

남은 힘을 팔에 전부 그러모았다.

도선은 있는 힘껏 희락을 끌어안았다.

* * *

“대표님.”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온 지 1분은 지난 거 같다.

석찬은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희락을 바라봤다. 부름에 반응이 없다. 이상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한번 “대표님” 불러 보았지만 역시 무반응이다. 석찬은 대표님의 안색을 살폈다. 가만두라거나 방해하지 말라는 기운은 풍기지 않았다. 그저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듯하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약간 풀이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아.”

참으로 요란한 한숨이었다. 슈트로 휘감긴 맵시 좋은 어깨가 솟구쳤다가 털썩 주저앉는다. 그 바람에 이 널찍한 공간마저 그의 어깨와 함께 들썩거리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석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제오늘. 일단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일에 차질이 생긴 적은 없다. 잡다한 문제가 여럿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물며 자기가 모시는 대표님은 돌아가는 꼴이 탐탁지 않아도 그걸로 한숨을 쉬는 남자는 아니었다. 차라리 분노로 날뛰거나 어떻게든 해결 짓고자 동분서주를 하면 몰라도.

요 근래 대표님을 한숨 쉬게 하는 일은 뭐가 있을까. 오가며 마주한 덕분에 이제는 꽤 눈에 익은 베타의 얼굴이 단숨에 떠올랐다. 정말 연애 사업 때문인가. 그렇다면 꽤 좋지 않다. 희락이 자그마치 1주일간 일을 내던지고 집에 은둔했던 때가 떠오른다. 죽어 나가는 것은 또 자기 몫이다.

하지만 그 정도 사건이면 여기 이렇게 앉아 있을 리가 없지. 오늘 아예 출근을 안 하셨을 테니까.

석찬은 자기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며 책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가는 기척과 발걸음에도 시선 한 번 안 돌린 채 미동도 없다. 주먹을 가볍게 쥐고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보다 음성을 한 톤 올려 말을 건넸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굳어 있던 몸이 움찔하며 턱을 괴던 손을 내렸다. 그제야 앞에 서 있는 석찬을 확인한 희락이 눈을 크게 떠 올렸다.

“어? 언제 들어왔어?”

“좀 됐습니다.”

희락이 떨떠름하게 웃었다. 석찬은 슬쩍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한숨을 다 쉬시고. 제가 모르는 심각한 일이 생긴 건 아니죠?”

“심각한 일은 아니야.”

심각하진 않지만 일이 있긴 있다는 거네.

석찬이 확신하는 동안 희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짓에 따라 일단 소파에 착석했다. 뒤따라 앉은 희락이 느릿느릿 테이블 위 담배로 손을 가져가며 말을 꺼냈다.

“뭐 있어?”

그제야 석찬은 잠깐 잊고 있었던 용무가 떠올랐다.

“아! 그저께 말씀드렸던 인터뷰 건 말입니다. 사전 질문서가 도착해서 그거 보여 드리…….”

저절로 말끝이 흐려졌다.

희락은 건조하게 연기를 내뱉으며 멍한 시선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블라인드가 전부 올라간 전면 유리창이 있었지만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거 같진 않았다. 자기가 내민 철 된 파일을 받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무색해진 손은 파일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무릎 위로 돌아왔다.

뭘까. 도대체. 출근을 했다고 안심하는 건 좀 이른 판단이었나.

“석찬아.”

희락은 몇 모금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 손을 바라보며 석찬은 “예”라고 부름에 재빨리 대꾸했다.

“금요일 저녁에 식사 같이 할까.”

“…….”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진다. 짜증이 나서가 아니다. 지금 들은 말이 굉장히 이상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환청이라도 들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석찬은 안경을 한 번 치키고서 천천히 되물었다.

“대표님, 죄송하지만 확인 한 번만 하겠습니다. 금요일, 저녁에요?”

“그래.”

그간 저녁을 피해 일정을 짜느라 머리를 쥐어뜯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정말 제 선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며 저녁 식사를 들이미는 순간, 노골적으로 싫은 기운을 팍팍 풍기는 대표님 때문에라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첫눈에 반한 것도 알겠고, 처음 해 보는 본격적인 연애에 정신이 홀랑 나가 있는 것도 알겠고, 지금 당장은 도선 씨 외에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알겠다. 다 잘 알겠다는 거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지 않느냐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이어지는 대표님의 일정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퇴근을 마치면 곧장 애인에게로 달려가서 저녁을 함께 먹고, 집에 가서 오붓한 한때를 보낸다. 주말에도 출근을 하는 애인을 호디에 앞까지 바래다주고 곧장 피트니스클럽으로 향한다. 가장 좋아하는 수영을 시작으로 짐에서 기구 몇 개를 오가며 시간을 때운 뒤 다시 애인을 데리러 간다.

자기가 알기로 이게 근래에 틀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니 대표님이 갑자기 대뜸 금요일, 그것도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는 것은 상당히 수상쩍은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이게 오늘 한숨의 원인과 연관이 있으리라는 짐작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석찬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고 재촉하는 시선에 그제야 대답을 아직 하지 않았다고 깨닫는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저 선약이 있어서요.”

“…….”

설마 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희락이 입을 꾹 다문다. 그다음, 갑작스레 눈을 가늘게 뜨며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입을 연다.

“그거 데이트지?”

“그렇습니다.”

“좋겠다.”

“…….”

이번에는 석찬이 입을 꾹 다물 차례였다.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 굉장히 부러운 듯한 음성이었던 거 같다. 기가 막힐 따름이다. 매일같이 데이트를 즐기는 남자가 모처럼 데이트를 하게 된 자기한테 할 소린가 싶다.

“왜 절 부러워하시는 겁니까. 대표님은 매일 하시지 않습니까?”

“난 금요일에 못 하거든.”

희락이 뚱하게 대답했다. 석찬 역시 새치름한 말투로 받아쳤다.

“드디어 도선 씨가 답답함에 눈을 뜬 거군요. 매일같이 대표님과 붙어 있는 것도 지칠 때가 된 거죠. 오히려 여태까지 대표님 속박에 군말 없이 따라 주신 게 대단하지 않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락이 눈을 확 치켜뜨며 언성을 올렸다.

“야! 너 말을 해도! 가뜩이나 사람이 신경 쓰고 있는 걸!”

이러다 한 대 치시겠습니다?

물론, 이 말까진 입에 담을 수 없었기에 석찬은 그저 빙글 웃기만 했다. 희락은 씩씩거리며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농담한 겁니다, 대표님. 아직까지 도선 씨는 대표님 얼굴만 봐도 분위기부터 달라지던데요. 모르는 사람이 봐도 도선 씨가 얼마나 대표님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니까요.”

석찬은 일단 희락의 마음을 달랠 겸 입을 열었다. 약간 과장을 섞긴 했지만 빈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 그래?”

희락이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굉장히 좋아진 모양이다. 반짝거리는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석찬은 “그럼요”라고 태연하게 대꾸해 주었다.

“흐음. 난 나만 너무 노골적으로 티 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설마요. 도선 씨도 대표님 못지않습니다. 언제 어느 때고 대표님만 끊임없이 바라보고 계시잖아요.”

못 박듯 한 번 더 강조해서 말해 주자 이번에는 슬금슬금 웃기까지 한다. 석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희락은 차라리 웃는 게 나았다. 한숨을 팍팍 쉬어 가며 맥 빠진 얼굴을 하면 이쪽이 괜스레 불안하고 불편하다.

“석찬아.”

“예.”

“너 애인이 약속 있다고 하면 ‘누구랑, 어디서, 몇 시부터 몇 시까지’라고 물어볼 거 같아?”

석찬은 잠시 생각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건 너무 나간 거 같고요. 마치 들볶는 거 같지 않습니까. 나머지는 뭐……. 예, 넌지시 물어볼 거 같은데요.”

“그래? 애인이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

“그것보다는 말투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서로 가볍게 물어보곤 하니까요. 추궁하듯이 물어보면 당연히 기분 나쁘겠죠.”

대답을 잘 마쳤으니 이번에는 이쪽이 질문할 차례였다. 석찬은 약간의 웃음기를 담아 슬쩍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도선 씨가 금요일에 약속 있다고 합니까?”

놀리는 듯한 말투에 희락이 눈을 흘기면서도 “그래”라고 대꾸를 한다. 석찬은 그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조금 더 심술궂게 질문했다.

“그래서 대표님은 ‘누구랑, 어디서, 몇 시부터 몇 시까지’라고 물어보셨고요?”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들렸다.

“아니. 그냥 잘 다녀오라고만 했어.”

“예?”

석찬은 깜짝 놀랐다. 오늘 희락이 반쯤 정신이 나간 이유가 바로 이건가 예측하고 있었는데 꽝이라는 소리다. 너무 꼬치꼬치 지나치게 캐물어서 도선이 질겁했고, 그 바람에 희락도 의기소침해진 게 아닐까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안 물어보셨어요?”

믿기지가 않아서 다시 물었다. 희락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질문을 바꿔 보기로 했다.

“왜 안 물어보셨어요?”

희락이 뺨을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표정이 몹시 심란해 보였다.

“물어봐도 되는 건지 자신도 없고, 도선 씨가 만에 하나 기분 나빠 하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하나를 물어봐서 도선 씨가 대답해 주잖아? 그럼 그때부터 내 질문이 두 개, 세 개. 막 늘어날 거 같은 기분도 들더라고.”

“누구랑 어디서 몇 시까지 같이 있을 거냐. 이거 외에 물어볼 게 있긴 합니까?”

“구성원이 정확히 몇 명인지, 거기서 알파는 몇이고 오메가는 몇이며 베타는 몇인지. 구성원은 전부 당신이 ‘친구’라는 카테고리에 확실하게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인지. 전 직장에서 만난 사람인지, 학창 시절의 인연인지. 거기서 당신 부모님이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아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지. 뭣하면 나도 같이 좀 동행하면 안 되냐고 슬쩍 말이라도 꺼내 본다거나.”

“…….”

“안 했어. 말 안 했다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희락이 뾰족하게 말했다. 석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 순간 한없는 진심을 담아 대답을 건넸다.

“안 하시길 정말 잘하셨습니다. 대표님이 그런 말을 도선 씨한테 했다고 상상만 해도 아주 제 얼굴이 다 뜨겁네요. 민망합니다.”

“하아.”

석찬이 뭐라고 떠들든 희락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다. 애수에 차오른 얼굴도 그림이 따로 없지만 들은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오늘만큼은 순수하게 대표님의 미모에 감탄할 수 없었다.

“아하하…….”

마른세수를 하던 희락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힘없이 픽픽 웃음 짓는 남자에게 “왜 웃으십니까?”라고 물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도선 씨한테 잘 다녀오라고 했을 때 말이야.”

“네.”

“도선 씨는 속으로 ‘잘 다녀오라는 얼굴이 아닌데요’라고 생각했을 거야. 나 그때 표정이 완벽하게 썩어 있었을 테니까. 뻔하지. 도선 씨가 친구를 만나겠다는 말에, 난 마치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은 사람처럼 한참 멍하니 있기도 했고.”

대꾸해 줄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전에 말씀하셨던 상담을 이제라도 한번 진지하게 고려할 때가 아니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석찬은 어색하게나마 입술에 미소를 올려 가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뭐, 이러면서 연애 배우시는 거죠. 그럼 대표님도 오랜만에 친구분들과 자리라도 만드시면 어떨까요. 한동안 뜸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락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싫어. 아주 내 얼굴 보자마자 도선 씨 얘기부터 물어볼 텐데.”

“그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오히려 좋지 않습니까. 다들 궁금해하면서 멍석 깔아 주면, 대표님도 어깨 으쓱하시면서 애인 자랑 좀 하시면 되죠.”

“도선 씨 좋은 점은 나만 알고 싶어. 그리고 도선 씨 얘기 하는 순간, 그 즉시 얼굴이 보고 싶어질 거 같아. 나 회까닥 돌아서 자리 박차고 뛰쳐나가지 않을까.”

“세상에, 대표님…….”

비서의 경악 어린 탄식에 희락은 쓰게 웃을 뿐이다.

“도선 씨 연관된 거면 나는 이제 나 안 믿어. 못 믿지. 내 자제력을 그리 신용할 수가 없다고.”

석찬은 머리가 아팠다. 여태까지는 대표님께 말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잔소리가 필요할 땐 했고, 대표님이 듣고 싶어 하는 말도 곧잘 입에 담아 가며 잘 지내 왔다. 오늘은 꽤 어렵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나는 게 없다.

“그리고 애들 만나면 술 안 마시겠어? 한두 잔은 또 거절할 수도 없잖아.”

“그게 왜요. 드시면 되죠.”

“도선 씨도 친구들 만나면, 심지어 모처럼 만난 건데 한잔 안 하겠어? 당연히 하겠지. 술자리는 보통 그렇듯 늦게 끝나기 마련이고. 교통편 다 끊겨서 택시라도 타야 하는 상황이 올 때 내가 데리러 가면 좋겠다 싶잖아.”

“그래서, 혹시라도 있을 연락 때문에 집에서 휴대폰 붙들고 대기하고 계시게요?”

“응. 그러려고.”

희락이 대답하며 또다시 마른세수를 했다. 석찬은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기함을 하며 그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희락이 얼굴을 감싸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서 석찬을 힐끗 바라봤다. 또 어떤 얘기를 하려고 저런 눈빛인가 싶어 절로 긴장이 됐다.

“석찬아.”

“예.”

“나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숨 막힐 거 같아.”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나 금요일 저녁에 뭐 할 거 없나? 나와 있는 기획서 같은 거 있으면 가져와 봐. 뒤로 밀어 둔 일정 앞으로 당기거나…… 아니, 하여간 뭐라도 만들어서 나 금요일에 야근 좀 빡세게 돌려 줘.”

“…….”

대표님 데이트가 파투 났다고 해서 기분 좋은 금요일 저녁에 저까지 피 말리게 하지 마세요.

시원하게 말할 수만 있다면 오죽 좋을까.

석찬은 그저 안경을 치키면서 남몰래 한숨 쉬었다. 머리를 굴려 본다.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뭐든 해야 할 거 같기도 하다.

“농담이야, 농담.”

희락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석찬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니죠. 방금 대표님은 진심이셨습니다.”

“어, 그건 그래.”

건조하게 대답하던 희락이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당일에 미쳐 돌아서 도선 씨 뒤라도 밟고 있으면 어쩌지. 실은 그게 가장 걱정이야.”

석찬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조금 전부터 대꾸할 말이 계속 막히던 참이다. 그중에도 이번 거가 가장 난이도 높았다. 이럴 땐 무시가 답이다. 도선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 거는 못 들은 걸로 해야겠다.

석찬은 안경을 벗고서 눈가를 꾹꾹 주물렀다.

* * *

내가 주간으로 바꾸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격하고는.

자기가 생각해도 실로 어처구니없고 옹졸해서 픽 웃음이 나와 버렸다.

도선이 제출한 근무 시간 변경 신청서를 바로 승인하도록 문 지배인에게 지시할 때 희락은 그 즉시 결심했던 것도 함께 실행에 옮겼다.

호디에 분점을 올릴 거였다. 보유하고 있는 것들 중 놀고 있는 건물 한 채를 리모델링했다. 인테리어 공사까지 마치고 나면 아마도 도선이 생각했을 ‘자기 때문에 주간 신청에서 밀린’ 직원들을 대상으로 가장 먼저 분점 이동 희망자를 뽑을 예정이다. 교통비 지원까지 아낌없이 해 줄 생각이다.

도선은 특혜를 받는 게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러면 특혜가 아니게끔 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가 불편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이쪽도 단연코 사절이었다.

그런 짓을 바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도선의 근무 시간 변경을 강력하게 희망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끽해야 도선이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통보 한 번에 이토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스스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도선이 야간에 일했더라면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을 거라고. 그러면 오늘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음습한 생각을 어떻게든 털어 버렸다.

어제는 ‘손가락만 빨았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밤이었다. 도선이 쉬는 날이었기에 하루 내내 붙어 지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손을 잡고 포옹을 했으며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입도 맞췄지만 그 이상의 스킨십은 온 힘을 다해 힘껏 참았다. 몸을 겹치면 한두 번으로 끝낼 자신이 없었다. 금요일 저녁에 떨어져 지내는 것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한없이 갈구하고 범했을 거다.

오늘이 바로 문제의 금요일이다.

오늘 호디에 앞에 도선을 내려줄 때가 최고의 고비였다. 정확하게 말할 순 없어도 그 순간 굉장히 이상한 소리를 해 댈 것만 같았다. 입술이 근질근질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쉬운 소리나 애원의 소리가 나갈 것만 같았다. 어찌어찌 잘 눌러 참아 가며 열심히 연습했던 말을 그럭저럭 태연하게 꺼낼 수 있었다.

잘 다녀오라고, 맛있는 거 많이 먹으라고, 모처럼 친구들과 만나는 거니까 즐겁게 보내라고, 가끔 내 생각이 나서 연락 넣어 주면 기쁠 거라고.

말하면서 줄곧 웃었다. 속으로는 억지웃음처럼 보이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일단은 웃고 봤다. 웃는 얼굴이라도 계속 유지를 해야만 이상한 소리를 내뱉지 않을 거 같았다.

혼자 밥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거나.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다거나. 이런 상황에 놓인 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입맛도 없다.

저녁에 가까운 시각이지만 해가 긴 탓에 아직 주변이 훤하고 밝다. 이제 집에 들어가서 홀로 어둑해지는 하늘이나 보고 있겠구나 싶었다. 일단 사무실을 벗어나서 주변을 차로 빙글빙글 돌고 있지만 마땅히 시간을 때울 거리나 먹고 싶은 음식 같은 게 단 하나도 생각나질 않았다.

정말 집에 가는구나.

습관처럼 호디에 쪽으로 방향을 잡을 뻔했다. 매일같이 정기적으로 해 왔던 마중 나가기도 오늘은 할 수가 없는데 말이다.

먹을거리를 좀 사서 들어갈까 했지만 금세 시큰둥해졌다. 희락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서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도선이 없는데 먹는 게 의미가 있냐는, 정말이지 이상한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어김없이 소름 끼치는 순간이다. 자기 자신에게 소름 돋는 일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찾아올까. 모르긴 몰라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있을 거 같았다.

현관에서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슈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집이 워낙 조용해서일까. 귀에 익은 벨임에도 평소보다 훨씬 더 크고 낯설게 들렸다.

“우와, 뭐지. 벌써……?”

잽싸게 휴대폰을 손에 쥐고서 액정을 바라봤다. 고작 반나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당장 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이 떠 있었다.

희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퇴근하고 곧장 약속 장소로 이동하기 바빴을 사람이다. 벌써 연락을 주는 게 신기했다. 어쩌면 자기가 연락 주면 기쁠 거라고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신경 쓰이게 한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물씬 들었다.

“아, 미쳤나 봐.”

이름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벨 소리도 망각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던 희락은 허둥지둥 액정으로 손끝을 가져갔다.

“여보세요? 도선 씨?”

[혹시 전화받기 곤란한 상황이면 내가 다시 해도 되는데.]

생각해 보면 도선과 너무나 오랜만에 통화를 하는 듯하다. 전화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늘 붙어 지내니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거였다.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늦게 받아서 미안해요. 이제 막 집에 들어왔어요.”

[벌써? 저녁 민 비서님이랑 같이 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희락이 떨떠름하게 웃었다.

“아, 내가 말 안 했나? 걔 오늘 데이트 있대요.”

[어어…… 그럼 저녁은 어떻게 하려고.]

“으음. 일단 좀 씻고? 더우니까 샤워부터 하고 싶더라고요. 그다음에 저녁 메뉴를 생각해 보려고 했죠.”

전화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만약 앞에 있었으면 이토록 태연하게 말을 에두르거나 거짓말을 할 수 없었을 거다.

[혹시 옷 갈아입었어?]

눈가가 절로 가늘어졌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들은 질문에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네? 옷요?”

[응. 오늘 입은 슈트 예뻤는데.]

“아니, 아직. 정말로 이제 막 들어와서 구두 벗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설마 사진 찍어서 보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인가?

목소리만 듣고 있어도 마음이 사르륵 녹아 흐른다. 희락은 속으로 연거푸 웃음 지었다. 어쩌면 도선도 오늘 잠깐의 헤어짐을 꽤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너무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거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예요?”

말을 이어 나가며 희락은 곧장 파우더룸으로 이동했다. 불을 전부 켜고 바로 앞에 있는 거울에 얼굴과 옷차림을 이리저리 비춰 봤다.

[저기, 음. 나 부탁이 있는데.]

어, 정말 그런 건가?

“뭔데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썩 탐탁지 않았다. 휴대폰을 스피커로 돌려놓고 테이블에 내려놨다.

[좀 이상한 부탁이라도 들어줄래?]

“그럼. 당연하지. 나야 당신 말이라면 기꺼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거 아직도 몰랐어요? 편하게 말해요.”

손이 분주해진다. 일단은 빗으로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부터 다듬었다. 아침에 나갈 때랑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마음이 들었다. 이럴 바에야 샤워를 한번 하고 다시 슈트를 입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좀 김칫국 같지만, 혹시라도 찍어 보낸 사진을 도선이 친구들에게 보여 주는 상황 같은 게 있을 수도 있다.

[앞으로 딱, 으음. 한 5분 정도? 그 상태 그대로 내가 다시 전화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

“네……?”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양손이 딱 멈췄다. 희락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5분 동안 그냥 이대로 있으라고요?”

[응. 서 있지는 말고, 어디에 좀 앉아서. 딱 5분만 옷 갈아입지 말고 내 연락 기다려 줘.]

도선은 평소처럼 그 특유의 말투로 말을 꺼냈다. 담담하고 조용한 음성은 언제나 듣고만 있어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 순간도 물론 마찬가지다. 대신, 부탁이라고 들은 말이 너무나 예상 밖의 것이기에 바로바로 웃음이 튀어 나가진 않았다. 그가 ‘이상한 부탁’이라고 했는데 딱 그 말대로였다.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다.

희락은 호기심 가득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어, 물론 하긴 하겠는데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건 5분 뒤에 알려 줄게.]

질문을 예상한 모양이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꾸하는 목소리에 이번에야말로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다.

“우와, 사람 궁금하게! 5분은 너무 길잖아요.”

[미안해. 금방 다시 전화할게.]

“그래요, 알겠어.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후다닥 전화가 끊겼다. 도선의 음성과 자신의 재잘거림이 채우던 파우더룸이 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희락은 테이블 아래 있는 의자를 빼서 털썩 주저앉았다.

5분은 너무 길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아예 한 30분은 어떠냐고 제시해 볼 것을 그랬다. 5분이면 샤워, 머리 말리기, 잡다한 손질을 할 시간으로는 너무나 촉박하다.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세수라도 해 볼까 싶었지만 그것 역시 마음을 접었다. 씻는 사이 전화가 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니 그저 깨끗하게 전부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5분이 이렇게나 긴 시간이었나. 마치 50분 같고 다섯 시간 같다.

파우더룸 곳곳을 힐끗힐끗 응시하고, 테이블을 두드리며 손가락 장난을 하고, 벌떡 일어서서 심호흡을 한두 번 하고 다시 자리에 앉고. 그러다가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괜스레 멋쩍고 창피해져서 의미 없는 헛기침을 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만 있자니 이상하리만치 답답했다. 차가운 냉수라도 한 잔 마시면 나을까 싶어서 부엌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와아, 타이밍.”

희락이 키득 웃으며 조금 전처럼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봤다. 물도 못 마시게 하는 건 너무하잖아요. 그런 말도 안 되는 푸념을 속으로만 건네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많이 기다렸지.]

“말도 마요. 아까도 5분은 너무 길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정도가 아니었어. 마치 세월이 천년만년 흐른 기분이었다니까요?”

[푸흣.]

짤막하게 터지는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희락은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바싹 귓가에 붙였다. 수화기 너머로 웃음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감질나서 죽을 맛이다. 가뜩이나 웃는 얼굴 한 번 보려고 혈안이 된 사람한테 지금 이 상황은 꽤 가혹하다. 그가 지금 어떤 표정으로 웃었는지, 눈빛은 어떻고 입술은 또 어떤지 당장 확인할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나한테는 너무 짧았는데.]

도선이 작게 중얼거렸다.

“네……?”

놓치지 않고 듣긴 했지만 쉽게 이해하긴 어려웠다. 도대체 5분 동안 도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굉장히 궁금했다.

[지금 정원으로 와.]

“……!”

희락이 눈을 부릅떴다.

숨이 턱 멎는 기분이었다.

뭐지, 뭐지.

[여보세요?]

“아, 응. 지금 가요. 지금 바로 갈게요.”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뾰족이 이렇다 할 원인조차 모를 두근거림으로 전신이 저릿저릿했다.

뭘까, 이거 뭐지.

희락은 어제저녁부터 오늘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를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도선이 자기의 눈을 피해 정원에 나가 뭔가를 가져다 놓을 시간이 있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다. 어째서 정원에 무언가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걸 생각하느라 머리가 바쁘다.

아주 빠듯하게 움직이면 가능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아니지. 아무래도 불가능해. 아침에 씻을 때 빼면 거의 매시간을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떨어져 있었던 순간이라고 해 봤자 화장실 정도고. 그게 몇 분이나 걸린다고. 그냥 던져 놓고 나온다고 해도 계단 오르락내리락하는 시간도 있는데. 옥상 정원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거의 뜀박질 수준으로 움직여야 할 테니까 숨이 안 찰 수가 없다고. 그런 모습은 못 봤잖아.

[희락아.]

“……!”

집이 넓어서 가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 적은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희락이 씩씩거리며 복층 계단을 두 개씩 밟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불쑥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전화를 끊지 않았다. 자기 역시 휴대폰을 바싹 귓가에 붙인 채였다.

“네? 전화 아직 안 끊겼었네?”

[응. 거의 다 왔지?]

“네. 코앞이에요.”

복도를 지나치자 옥상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이 바로 앞에 보였다.

[그럼 나, 이제 전화 끊을 건데 그 전에 하나 얘기해 둘 거 있어.]

“뭐예요?”

[문 열면 꽤 시끄러울 거야. 놀라지 말라고 미리 얘기하는 거니까.]

“왜 시끄……?”

희락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자리에 멈춰 선 채 이미 대기 화면으로 돌아온 액정만 멍하니 바라봤다. 잠깐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다음, 걷잡을 수 없을 속도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심장 박동이 최고조로 뛰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유리문 손잡이를 조심스레 거머쥐었다. 일단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평소와 같다. 지금 당장 시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잘 조경된 나무와 잔디 정도다.

심장이 지나치게 뛰는 나머지 기력이 훅 빨려 나가는 듯했다. 문을 어서 열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잠깐 시간이 필요한 거 같기도 했다.

문을 열자마자 시끄러울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문 여는 거에 반응해서 터지는 박 같은 거? 아니, 실질적으로 그거는 무리잖아. 왔다 갔다 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런 것까지 설치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여기서 이래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이 끊임없이 샘솟는다. 희락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가며 머릿속을 비우고자 노력했다.

그래.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희락은 숨을 열심히 몰아쉬었다.

괜히 김칫국 마시지 말자는 거다. 왜 정원에 뭐가 있을 거라고 단정 지은 건지 모르겠다. 시끄럽다고 미리 경고를 받을 만한, 그런 종류의 무언가가 있긴 하겠지. 어찌 됐든 이렇게까지 두근거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심지어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다. 자기 혹은 그의 생일도 아니고, 연인들이 꼭 챙긴다는 기념일도 아니고, 기업 상술에 커플 지갑이 무차별적으로 털려 나가는 이벤트가 있는 날도 아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면서 결국 또 이런다.

희락은 쓰게 웃고서 다시 한번 표정을 정돈했다. 계단이며 복도를 엄청난 속도로 내달린 바람에 이마에 땀이 맺혔다. 얼굴이 지금 얼마나 엉망일까. 도선이 사진을 찍어서 보내 달라고 하면 잠시간 시간을 달라고 해야 할 거였다. 원판 불변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기왕이면 가장 예쁜 모습으로 찍어서 보내 주고 싶은 게 당연하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바닥도 땀이 흥건하다.

희락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손에 힘을 주었다.

문을 열고 천천히 걸었다. 정원으로 나오면 그 바로 옆에 자쿠지가 있는 야외 욕실이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모퉁이를 돌아야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모퉁이를 다 돌아 드디어 확 트인 정원이 한눈에 시야로 들이쳤다.

그때였다.

펑!

옆쪽에서 들린 소리에 희락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곱송그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나풀나풀.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머리며 어깨, 발등으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오색빛깔 찬란한 릴 테이프다.

깜짝 놀랐다. 낯 뜨거운 신음과 비명을 뱉지 않고 끝날 수 있었던 건 도선이 친절하게 경고해 줬기 때문이다. 덕분에 계속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어서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아직. 한 번만 더.”

도선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이 사람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네? 잠깐, 도선 씨 왜 여기…… 읏!”

다시 한번 펑,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 또다시 펼쳐졌다. 이번에는 반짝거리는 핑크색 하트가 쏟아져 내렸다. 희락은 도선의 얼굴만 바라보며 눈만 끔뻑끔뻑 뜨고 감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척 봐도 굉장히 뿌듯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도선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어깨에 내려앉은 비닐 하트를 떼어 내 멍하니 서 있는 희락의 뺨에 살짝 붙였다. 땀에 젖어 있는 피부에 핑크색 하트는 아주 잘 달라붙었다.

“내 마음이야.”

“우와…….”

희락은 잠깐 고민했다. 뺨에 붙여 준 하트를 떼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감탄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도선이 너무나 흐뭇하고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자기 얼굴을 보고 있지만 않으면 당장 그렇게 했을 거다.

“있잖아요, 도선 씨……. 너무 고마운데, 어, 근데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에요? 왜 여기에 있어요?”

“……?”

그러자 도선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락은 몇 번이나 손을 꽉 쥐고 펴길 반복했다. 자칫하다간 달려들어서 키스할 뻔했다. 키스하면 멈출 수 없다. 아직 이유도 듣지 못했고, 본능적으로 이게 끝이 아닌 것도 알고 있으니 지금 당장은 참아야 한다.

“방금 나랑 전화하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거 눈치 못 챘어?”

희락은 눈만 깜빡깜빡 뜨고 감으며 멍하니 대꾸했다.

“네, 전혀. 그건 생각도 안 했어요. 친구 만나러 가겠다고 했으니까 그런 줄로만……. 당신 나한테 거짓말 안 하겠다고 말했고, 여태까지 한 번도 한 적 없으니까.”

“읏.”

바라본 눈가가 풀썩 주저앉는다. 순식간에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바뀐 얼굴을, 희락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미안해. 친구 만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 핑계랄까. 음. 하다못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아아…… 네, 알았어요. 그럴게요.”

희락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말라는 말도 열심히 덧붙였다.

“다행이긴 다행이야.”

“네? 뭐가요?”

“생각해 보니까 너를 여기로 오게 하려면 내가 연락을 해야 하잖아. 또 완벽한 서프라이즈는 실패한 거 같아서 속 쓰렸는데 네가 전혀 생각도 못 했다니까 좀 좋다. 이번에는 성공했네.”

“네, 성공했어요. 정말, 나 지금 정말 좀…… 되게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너무 놀라서.”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속은 자꾸만 뜨거워지는데 머릿속은 그 이상으로 몽롱하다. 의심이 드는 거다. 반나절도 그리움을 참지 못해서 결국 이런 꿈까지 꿀 정도인가. 어쩌면 지금 자기는 집이 아니라 사무실 책상에 엎어져서 단잠이라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잡다하게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겼다.

도선이 불쑥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희락은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우고 다가온 손을 꼭 움켜쥐며 습관처럼 깍지를 꼈다.

팔이 이끄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이때부터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희락은 뺨에 붙은 비닐 하트를 떼어서 주머니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도선이 친구를 만나러 간 게 아니었다. 실은 자기를 놀라게 해 주고자 이 더운 날에 야외에서 자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폭죽까지 터트렸으니 몰래카메라는 대성공이다. 당연히 행복하다. 기쁨이 차고 넘칠 따름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김칫국은 마시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억지로 입을 벌려 김칫국을 넣어 주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는 지금, 아무래도 뭔가가 더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놀라움은 혹시 이제부터 시작인가 싶었다. 긴장 때문에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다.

코끝에 익숙한 향이 났다. 페로몬 향이다. 얼마나 정신이 쏙 빠진 걸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갈무리마저 잊어버릴 정도면 굉장한 일이다. 하긴. 숨 쉬는 것도 깜빡깜빡할 정도니 페로몬 갈무리 정도는 까맣게 잊을 만도 하다.

이윽고 원목 테이블이 보였다. 뭔가 여러 가지가 그 위에 놓여 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 끈 것은 멀찍이서 보기에도 꽤 큼지막한 붉은 장미 꽃다발이다. 희락은 저도 모르게 하, 숨을 토하듯 짤막하게 내쉬었다.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도선이 가장 먼저 불쑥 내민 것도 그 꽃다발이었다. 조심스럽게 받아서 품에 안은 희락은 잠시간 꽃다발과 눈앞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도선이 살짝 탄식하며 조용히 웃었다.

“어때?”

“어떠냐고요? 그야, 그거야…… 와, 진짜 나 지금 심장이 너무 아파. 미칠 거 같아요. 말도 잘 못 하겠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꿈이라면 일어나서 며칠간은 세상이 원망스러울 거 같다고요. 아니, 사람 심장이 이렇게까지 뛸 수 있는 거야?”

“푸훗.”

애인이 아파 죽겠다고 말하는데 도선은 마냥 좋은 모양이다. 희락이 숨도 제대로 못 쉬고서 겨우겨우 질문에 대꾸하는 걸 보고 있는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하다.

“꽃바구니는 어떠냐고 추천받았는데 난 역시 꽃다발이 더 좋더라. 내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해. 네가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는 거 보고 싶기도 했고.”

“그, 그랬어요?”

도선에게도 말했지만 정말로 말다운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가질 않는다. 사람의 말을 하고 싶은데 정작 나오는 건 신음과 무지막지한 떨림이 뒤섞인 앓는 소리 정도다. 긴장으로 손끝이 얼마나 딱딱한지 모른다.

“받는 사람 옷차림이 밝은 네이비 슈트라고 했더니 거기 점원분이 그럼 포장지를 블랙으로 하겠다고 하셔서. 포장하는 거 볼 때도 너랑 잘 어울리겠구나 싶었는데 실제로도 잘 어울린다. 이따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눈을 반짝거리며 질문하는 도선에게 언제나처럼 ‘물론이죠!’라는 대답이 쉽게 나가질 않는다. 희락은 애매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 장이 아니라 백 장도 찍을 수 있어요. 나도 도선 씨랑 꼭 찍고 싶고. ……그런데 그 전에 샤워 좀 하고 찍으면 안 돼요? 안에 티만 좀 갈아입을게요. 지금 땀 때문에 내 얼굴이며 머리 꼴이 말이 아닐 건데.”

도선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 얼굴은 언제나 예쁘고 근사한데, 그깟 땀 정도가 네 미모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

희락은 입을 반쯤 헤, 벌리고서 눈만 뜨고 감았다. 상황도 상황이고 들은 칭찬도 칭찬이라 머릿속이 아주 엉망진창이다. 이젠 아주 헛구역질마저 올라온다. 사람이 긴장으로 절여지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밀려드는 행복으로 머릿속이 쑥대밭이 된 거 같다.

희락이 품에 안은 꽃다발을 보다 더 소중히 고쳐 안을 때였다.

“아!”

도선이 난데없이 크게 소리쳤다. 잠시 꽃다발에 시선을 빼앗긴 희락은 눈을 크게 떠 올리며 허둥지둥 “왜, 왜 그래요? 갑자기 뭔데요?”라고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아아……!”

급기야 도선이 양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희락의 눈은 이제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랗게 변했다.

“왜요, 왜요. 응? 왜 그러는데.”

그러자 도선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순서를 틀렸어!”

“네? 순서?”

“꽃다발이 먼저가 아니었어. 어쩐지 나치고 실패 없이 잘 나간다 했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희락은 일단 입을 열었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눈앞의 도선은 몇 시간 전 자기 모습을 보는 거 같다. 완전히 풀이 죽은 채 앓는 소리만 중얼거리는 연인을 위해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했다.

“실패한 거 없으니까. 틀린 순서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틀리면 어때. 나 지금 사시나무 떨듯이 몸 덜덜 떠는 거 안 보여요? 눈치챘겠지만, 나 긴장 때문에 혀도 잘 안 돌아간다고요……. 눈물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니까?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데.”

마지막 말은 괜히 꺼냈다.

희락은 속으로 후회했다. 소리 내서 말하고 나니까 눈시울이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크게 일렁거렸다. 여태까지는 다리에만 힘을 꾹 넣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자리에 주저앉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눈가에 힘을 꾹 넣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기쁨을 우는 것보다는 미소로 표현하고 싶었다.

“어? 왜 가져가요?”

희락이 멍하니 있을 때였다. 도선이 그의 품에 안긴 꽃다발을 슬쩍 빼냈다.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웃음이 터졌다.

“줬다가 뺏는 게 어디 있어.”

“미안. 이따가 다시 줄게.”

“아하하.”

도선은 넘겨받은 꽃다발을 살며시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려놨다. 그러더니 그 옆에 있는 손바닥만 한 종이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작은 케이스다.

“……!”

보기만 해도 벌써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잠시 식었던 희락의 눈가가 다시금 뜨거워졌다.

“와아, 안 돼…….”

절로 신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불가항력이다. 기어코 말끝에 울음이 스민다.

“이건 아니잖아요…….”

다시금 자기 앞에 선 남자를 내려다보며 희락이 울먹거렸다.

“이건 안 되지, 당신. 이거까지는 진짜…… 와아……. 나 어떡하라고…….”

도선이 희미하게 웃음 짓는 걸 확인한 게 마지막이었다. 희락은 허겁지겁 오른손을 들어 눈가를 거머쥐었다. 손바닥으로 눈 주변을 꾹꾹 눌렀으나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끝을 모르고 줄줄 떨어졌다.

긴장으로 굳어진 손끝이 왼손에 느껴졌다. 희락은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창피하고, 긴장으로 죽을 거 같고, 이번에야말로 선수를 제대로 빼앗겼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아도. 지금 이 광경을 눈에 똑똑히 새기지 않으면 두고두고 평생토록 후회할 거였다.

희락은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렸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두어 번 눌러 닦은 뒤 손을 천천히 내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도선의 표정은 아주 딱딱했다.

요즘 그는 조금씩 말랑한 표정을 짓게 됐다. 눈앞의 표정은 최근 잊고 있었던 아주 초창기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긴장으로 숨 쉬는 것마저도 잊을 정도라고 말했던 시절의 얼굴로 돌아가 있다. 왼손에 느껴지는 떨림도 자기만의 것이 아니다.

희락은 이제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뒀다. 눈물을 눌러 닦다가 아주 잠깐이라도 이 순간을 눈에 담지 못하는 게 더 아쉬울 거였다.

도선이 왼손을 꼭 잡고서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열대야를 예고하는 바람이 뜨거웠다.

눈물로 흠뻑 젖은 뺨은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뜨거웠다.

반지는 꼭 맞았다.

희락은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민무늬의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마음에 쏙 들었다. 부연 시야로 바라보는 반지는 그 무엇보다도 반짝거렸다.

확 치밀어 오르는 감동과 쉼 없이 뜨거워지는 눈가를 내버려 둔 채,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올렸다. 조금 전까지도 흡족하게 미소 짓던 도선은 하나 남은 반지를 들고 고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왜 그래요?”

도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내가 직접 끼는 건가?”

“뭐라고요?”

희락이 울며 웃었다.

“나한테 끼워 달라고 해야지!”

도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은 했는데,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뻔한 것도 고민하게 된다.”

들리는 목소리의 높낮이가 여러 번 바뀌고 흔들거렸다. 듣고 있는 이쪽의 마음까지 흔들흔들 정신없다.

도선이 가까스로 말을 마치며 멋쩍게 웃었다. 희락은 들은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는 지금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하물며 도선은 오죽할까. 가뜩이나 자기 앞에서는 긴장으로 죽을 거 같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이런 일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희락은 반지를 받아 들고 그의 왼손을 살며시 거머쥐었다. 자기 손도, 그의 손도. 양쪽 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하다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손이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걸 확인하고서야 떨림을 알아차렸다. 도선도 동시에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이다. 요동치는 손을 보는 그의 입매가 아주 조금쯤 느슨해졌다.

그의 약지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 넣었다.

잠시간 반지가 끼워진 그 손을 바라봤다. 그다음, 자기 왼손에서 반짝거리는 반지를 찬찬히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가 닿은 곳은 도선의 얼굴이었다. 우물우물. 여러 감정이 교차된 눈빛으로 연하게 미소 짓는 사람을 바라보자 눈시울이 확 뜨거워졌다.

손이 다가왔다.

도선의 손가락이 눈물로 젖은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오히려 눈물샘을 자극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도선은 오히려 연하게 웃으며 몇 번이고 닦아 주었다. 울지 말라는 말은 없었다.

천천히 허리 숙였다.

눈을 깜빡깜빡하며 다가오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도선도 손을 내리면서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곳곳에 입 맞추는 입술 못지않게 그의 얼굴도 뜨거웠다. 이마에, 코끝에, 관자놀이에. 살짝살짝 닿고 떨어지는 입맞춤을 건네던 입술이 이윽고 살짝 벌어진 틈을 파고들었다.

품고 어루만지는 키스를 했다.

자기가 건넬 수 있는 최고의 다정함과 사랑스러움만을 입술에 담았다. 각도를 바꿔 가며 깊숙하게 맞대고 있으니 육안으로만 확인했던 떨림이 더더욱 크게 전해져 왔다. 희락은 혀끝으로 여린 안쪽을 여러 번 쓰다듬듯 쓸어내리며 그의 긴장을 나눠 가졌다.

겹쳐진 입술을 살며시 떼어 냈다. 두어 번 턱 끝과 뺨에 입 맞추자 눈을 뜨려던 도선의 눈꺼풀이 다시금 꾹 닫혔다. 그게 또 귀여워서 눈가와 미간에도 입술 도장을 찍었다.

“누가 내 심장을 쥐고 흔드는 거처럼 아파. 내가 준비한 거 내가 직접 하고 있는 건데도 왜 이렇게 아프지?”

“나도요. 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입장이라 더 아파.”

“난 대신 오래 아팠잖아. 며칠 전부터 계획하면서 따끔따끔 아팠어. 아까 너한테 전화할 때가 최고로 아팠고. 마음의 준비로 5분은 역시 짧았으니까.”

아픔을 토로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긴장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그의 긴장이 생각보다 더 크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조금 전까진 자기도 긴장으로 온몸이 마비된 거 같아 그의 마음까지 헤아릴 틈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도선의 목소리가 이렇게 떨렸더라면 그가 얼마나 긴장으로 얼어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런데, 키스는 내가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오늘은 내가 전부 다 할 생각이었는데.”

도선의 말에 웃음이 났다.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음성으로 이런 말을 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골백번 귀엽다고 말해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하나쯤은 나한테 양보해도 괜찮잖아.”

“그런가.”

서로 마주 보며 키득 웃고 난 다음,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상대의 몸을 끌어안았다. 등에 팔이 둘리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서 격해진 숨을 여러 번 토해 냈다.

도선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날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거든.”

“그날?”

“네가 운 날. 내가 고백할 줄 알고 네가 기대했던 날.”

“아…….”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괜한 얘기를 했나 싶다. 그걸 계속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미안함이 물씬 밀려왔다. 희락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품 안의 사람을 보다 더 힘껏 끌어안았다.

“꽃이나 반지를 사서 제대로 된 이벤트를 할 생각이었다고.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럼 내가 이번에야말로 그렇게 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더라.”

“내가 할 생각이었다니까요? 내가, 그때 내가 말했잖아. 꼭 할 거라고. 계획 완벽하게 잘 짜서 온갖 폼 다 잡으면서 하려고 했다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웃음소리가 났다. 그는 숨죽여 웃었지만 희락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끌어안은 팔을 풀기가 아쉬워서 꾹 참았다.

“너 그날도 내가 오기를 열흘간 기다릴 생각이었다며.”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와요?”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네가 잡는 인내심의 기간과 내가 잡는 인내심의 기간은 꽤 차이가 나는 거 같더라고.”

“으읏.”

그럴 리 없다.

도선의 인내심보다 자기 인내심이 더 길 리가 없을 테니까. 아니, 애초에 인내심 혹은 그 흡사한 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물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 한다. 선수를 빼앗겼으니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네가 불시에 꼭 하겠다고 말했으니까, 나는 이따금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아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너랑 있을 때 이제야 좀 긴장이……, 물론 전부 없어진 건 아니지만 그나마 심장이 아픈 수준까지는 아니게 됐으니까 내심 좋았거든. 그런데 그것만 생각하면 다시 숨이 턱 막혀 오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다고 너한테 불시가 정확하게 언제쯤인지 알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우습고. 그럼 차라리 이럴 바에야 내가 먼저 해 버리자 싶잖아.”

희락은 쓰게 웃었다. 여기까지 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원래 한 줌도 안 남긴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폼이란 폼은 죄다 구기고 말았다. 이제 남은 건 변명을 빙자한 해명뿐이다.

“나는 기왕 늦은 거, 프러포즈랑 같이 하려고 했지.”

“……!”

끌어안은 몸이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희락은 나직이 웃으며 그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물론 할 거지만. 불시에.”

도선이 몸을 슬며시 떨어뜨렸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불만이 가득하다. 표정이 알기 쉽게 바뀌진 않지만 이제는 눈빛만으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너, 성격은 아주 조금 안 예뻐.”

“아하하!”

희락이 와락 웃었다. 도선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중얼거렸다.

“청혼도 내가 먼저 해 버릴까.”

“와아, 그것도 정말 좋긴 한데 이번에는 나도 양보 못 해.”

말을 마치며 희락이 조금 벌어졌던 둘 사이를 좁혔다. 도선은 순순히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낮게 속삭였다.

“또 당분간,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굳는 긴장을 맛보며 살아야 한다고?”

희락이 힘주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목소리에 한없는 진심을 눌러 담는다.

“이번 달 안에 할 테니까.”

“뭐……?”

도선이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탄식하며 되물었다.

“이번 달이라고 해 봤자 얼마 안 남았잖아?”

“응. 그러니까 며칠만 고생해요. 이 정도는 괜찮지?”

“전혀 괜찮지 않아. 또 심장이 아프기 시작하는데.”

불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성이다. 굉장히 얼떨떨하고 아연한 목소리를 들으며 희락은 소리 없이 벙긋 웃었다.

어느덧 주변이 어둑어둑해졌다.

조금 전보다 주변 건물들의 불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좀 더 편안하게 몸을 안고, 손을 잡아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잠깐으로 끝난다. 딱 몇 분만이라도 조금만 더 도선을 끌어안고서 행복의 여운을 만끽하고 싶었다.

“내 반지 호수는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그게 가장 큰 걱정이라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까 링 게이지라고, 반지 호수 측정기를 팔더라고. 너 잘 때 이것저것 끼워 봤어.”

“정말? 나 세상모르고 잤구나.”

“너 깰까 봐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가만히 웃던 희락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걸 사러 갈 틈이 있었나?”

“사러 갈 틈은 없지. 그래서 온라인으로 주문했어. 주소지를 호디에로 해서.”

희락이 푹 웃었다.

“와아, 엄청나다. 치밀했는데요?”

도선 역시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이번에 좀 작정했거든. 며칠간 계속 생각했어. 정작 이벤트 순서는 틀리고 말았지만.”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늘 도선은 지배인에게 부탁해서 일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으로는 이것저것 준비가 필요한 이벤트를 해치울 수가 없었기에 불가피하게 휴일을 받았다. 또, 어쩔 수 없이 친구도 팔았다. 오늘은 집에 가고 싶다거나, 혹은 좀 혼자 있고 싶다거나. 없는 약속을 꾸며 내는 것보다 그런 변명을 하는 게 더 괜찮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희락이 혹시라도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괜한 기우가 들었다.

희락은 듣자마자 아주 잘했다고 말했다. 차라리 친구와의 약속이 낫지,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하루 내내 심란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둘은 테이블 위에 있는 것들을 정리해서 걸음을 옮겼다. 잠깐 내버려 뒀던 꽃다발은 다시 희락의 품에 안겼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갈무리를 포기한 탓일까. 꽃향기보다도 페로몬 향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도선에게 비밀이다. 갈무리를 까먹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헛웃음이 지어졌다. 어디 가서 얘기할 것도 못 됐다. 얘기를 듣는 사람도 믿지 않을 정도로 황당한 일이니까.

희락이 팔을 뻗어 손가락을 걸었다. 도선도 자연스럽게 다가온 손을 맞잡았다. 땀으로 끈적거렸다. 불같은 뜨거움이 겹쳐진 손바닥 안에 고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꽃다발은 하지 말 걸 그랬어.”

도선이 툭 던진 말에 희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난 정말 좋았는데?”

“네가 좋다면 다행이지만.”

도선이 고개를 올려 희락과, 그의 품에 안긴 꽃다발을 번갈아 곁눈질로 응시했다.

“꽃다발 안은 너 볼 때마다 장미가 안쓰러워. 아무래도 꽃한테는 못 할 짓을 했어. 장미가 네 미모에 주눅 들었을 거 같아서. 명색이 꽃인데.”

“와, 정말…… 아하핫! 그런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냥 떠올라. 난 떠오른 걸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고.”

희락이 푹 웃었다. 장미를 힐끗거리는 도선의 시선이 정말로 불쌍한 것을 보는 듯해서 자꾸만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사실 한동안은 아무 이유 없어도 이렇게 웃고 지낼 거 같다. 헤실헤실 웃음꽃을 짓는 자기 얼굴이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깍지 낀 손에 힘을 꼭 넣었다.

프러포즈는 러닝 타임 다섯 시간으로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 *

희락은 손수 편지지를 샀다.

굉장히 오랜 시간 팬시점의 편지지 진열대 앞에 서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눈에 들어오는 편지지가 서넛 있어서 그것을 전부 샀다. 하루에 한 통씩 쓰면 머지않아 금방 다 쓸 거였다.

사인이 아닌 손 글씨도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사무실에서 편지를 쓰고자 가장 좋아하는 만년필도 집에서 챙겨 왔다.

폭죽 다음에는 반지, 그다음에 꽃다발과 함께 편지를 건네는 것이 그날 도선이 기획했던 이벤트의 순서였다. 그는 연인에게 할 수 있는 이벤트를 이것저것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중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도 있었고, 인력이 동원되는 것도 있었다. 전자는 아무래도 무리였고, 후자는 희락이 그리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탓에 생략했다고 한다.

<장소 대관해서 출장 연주까지 생각했는데. 뭔가…… 좀 아닌 거 같은 거야. 네가 좋아하는 얼굴이 잘 안 떠오르더라. 나 혼자 하게 되면 엄청 투박하고, 짧고 굵게 끝나겠지만…… 그래도 그건 네가 웃는 얼굴이 훨씬 잘 그려졌어.>

희락은 잘했다고 말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연거푸 도선의 생각을 긍정해 주었다. 자기한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인데 그걸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했다면 이따금 굉장히 싫은 기분이 들었을 거라고. 앞으로도 당신 외에 그 누구에게도, 설령 가족이라도 우는 모습은 보이기 싫다고. 아주 잠깐이라도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서 표정 관리를 하려는 자기 모습 역시 굉장히 싫었을 거 같다고. 희락은 아주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목소리로 옮겼다. 도선도 역시 자기 생각이 맞았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땀으로 엉망진창이 됐지만 이게 또 기념이라며 각자의 휴대폰으로 서로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이건 남한테 절대 보여 주지 말자는 약속도 주고받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꽃다발을 안고 있는 희락의 모습. 도선은 그날 몇 번이고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굉장히 부끄럽지만 그가 굉장히 행복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자기도 그저 픽 웃고 말았다.

씻고 나서 도선이 다시금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때 같이 건네받은 것이 바로 편지였다. 편지는 정말 도선 그 자신 같았다. 절절한 문장이나 달콤한 단어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고마움과 감사함, 오랜 시간 함께 있고 싶다는 희망 사항,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 잘하겠다는 결심 등이 적혀 있었다.

편지 봉투를 받자마자 기껏 씻고 나온 얼굴이 또 눈물로 뒤덮였다. 편지를 읽을 땐 더했다. 자꾸 울리는 거 같아서 미안하다는 말에도 희락은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은 정말 눈물샘이 고장 난 것 같았다.

편지를 한 열 번 정도 정독해서 읽었을 때였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사실에 희락은 눈물짓는 대신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도선 씨, 글씨가…… 하핫. 나 정말 옛 생각이 절로 나네. 나 초딩 때 글씨 보는 거 같아서요.>

도선의 얼굴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붉어졌다. 그게 그나마 가장 노력한 결과라고 말하면서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글씨도 그랬다. 굉장히 귀여웠다. 자칫 긴장을 풀면 해석이 필요한 악필로 변하기 때문에 한 자 한 자 쓸 때 꾹꾹 눌러서 천천히 썼다는 것을 글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도 딱 이랬어요. 아니, 이거보다 더했지. 지금 내 글씨는 만들어진 거라고 해도 좋을 거야. 어버이날에 편지나 카드 같은 거 쓰잖아요. 아주 어렸을 땐 글씨가 삐뚤삐뚤하고 날아가도 예쁘다 잘했다 하시던 아버지가 점점…… 어우, 어느 순간 인내심의 한계가 오셨던 거죠.>

양친의 권유로 형제들은 악기나 그림을 배웠다. 그 어떤 것에도 재능이 없던 희락은 대신 서예를 택했다. 오랜 시간 글씨 교정을 받다가 뭔가를 쓰고 적는 것에 재미를 붙여서 서예까지 이어진 거였다.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일기나 메모 등을 수기로 작성했다. 최근에는 결재 서류에 사인이나 하는 게 고작이지만.

도선은 글씨를 궁금해했고, 보고 싶다고 말했다. 희락은 흔쾌히 그를 서재로 데려갔다.

뭘 쓸까 물었더니 예상했던 것처럼 ‘아무거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희락은 키득 웃고서 붓펜으로 ‘sartágo’와 ‘hódĭe’를 적었다. 보자마자 도선이 ‘아!’ 탄식을 터트렸다. 늘 보던 글씨가 눈앞에 있었다. 희락은 사르타고 엠블럼과 호디에 간판에 들어가는 글씨도 자기 손 글씨가 맞다고 약간 겸연쩍은 듯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고 말할 필요가 없었네. 매일 같이 보고 있었던 거잖아.>

도선이 신기해하는 음성으로 중얼거렸고, 희락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펜을 고쳐 쥐었다. 윤도선을 적었고, 조희락을 적었다. 얼굴처럼 글씨도 예쁘고 훌륭하다는 칭찬에 모처럼 어깨가 으쓱으쓱했다. 오늘 날짜, 도선의 집 주소와 자기 집 주소. 생각나는 것들을 그때그때 끼적이다가 은근슬쩍 ‘도선 씨, 사랑해요’를 적자마자 여태까지 들어본 적 없는 탄식이 옆에서 들려왔다. 으아아, 우와앗. 희락은 참을 수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지만 도선은 완전히 혼이 나간 사람처럼 글씨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종이 내가 가져도 될까!>

그다음, 정말 중대한 말을 꺼내는 사람처럼 비장함까지 담아 가며 부탁했다. 희락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리며 승낙했고, 다음에는 더 예쁜 종이에 제대로 써서 주겠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도선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희락아, 너 아까 나한테 프러포즈 할 거라고 했잖아’라고 말했다. 희락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 ‘당연히 하지. 불시에. 이번 달 안에’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도선이 눈을 빛내면서 ‘그러면 우리 나중에 청첩장 같은 거 돌리겠지?’라고 말했다. 이제야 희락은 도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감이 왔다. 장난기를 듬뿍 담아 ‘나보고 쓰라고?’ 질문하자 짧은 순간 고개가 서너 번은 끄덕여졌다. 희락은 푹 웃고서 ‘글씨에 영혼을 갈아 넣어야겠네’라고 말했고, ‘하지만 우리 식인데 나만 쓰면 의미가 없으니까 당신도 같이 써야 돼요’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도선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열심히 글씨 연습을 하겠노라고. 희락도 답했다. 자기가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그리하여 요 며칠 도선의 글씨 연습을 틈틈이 돕게 됐다. 교정용으로 나오는 연필을 직접 사서 손수 깎아 주었고, 쥐는 법과 자세 등도 바로 잡아 주었다. 쥐는 법을 알려 주겠다며 슬며시 손을 어루만지는 것은 은근한 즐거움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잡을 수 있음에도 이게 꽤 묘미였다. 대놓고 손을 잡는 것과 이쪽의 사심만으로 이루어진 손잡기는 어딘지 모르게 차이가 있었다.

어제, 도선이 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아직 답장을 아직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물론 그가 답장을 바라고 쓴 편지는 아니겠지만 이대로 받기만 하고 끝내는 것은 굉장히 미안한 일이었다. 생각날 때마다 편지를 보관해 둔 서랍장을 열어 보고, 편지가 거기에 있음에 안심하고, 이미 내용을 전부 외워 버린 편지를 조심조심 꺼내 읽어 보고. 편지를 볼 때마다 반쯤 정신을 놓아 버릴 정도니 답신 생각을 여태껏 못 하고 있었다.

오늘, 희락은 인생 최초로 러브레터를 쓸 것이다.

일단 자기가 초반에 저질렀던 어리석은 행동과 말들부터 사죄할 생각이다. 아마 입으로는 골백번 했던 거 같은데 편지에 적을 생각을 하니 다시 한번 창피함과 멋쩍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용서를 구하는 것을 끝맺고 나면 그다음은 러브레터에 걸맞은 사랑을 길게 노래할 거였다. 써도 써도, 한 번에 전부 다 쓸 수 없을 행복한 마음을 편지지에 담아야겠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당신이 내 사람이라서 매일 얼마나 기쁜지를.

희락은 웃으며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이클립스 eBook 출간 도서 목록

신영미디어(www.sybook.co.kr)에서 출간된 유료 eBook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하게 낮과 밤을 지배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유료 eBook으로 만나 보세요!!

루즈 컨트롤(LOSE CONTROL) / 희사랑

15년 전 호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던 그 남자와 게이 바에서 다시 조우했을 때, 호준은 무척이나 불안했다.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날까 봐, 자신의 보금자리를 빼앗길까 봐. 이대로 남자를 실망시켜 커뮤니티에서 발을 빼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가 자신으로 인해 흥분한 모습을 본 호준은 순간 당황해서 그대로 내빼고 마는데…….

“정말로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호준 씨가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

빈방 / 한시원

화가 송진호는 소위 ‘팔리는’ 작가완 거리가 멀다. 거기에 사기꾼 갤러리 사장한테 만날 등쳐 먹히는 신세!

돈이 없어 가장 아끼던 작품 <석양>도 팔아 넘겼고, 아는 사람 집에 세 들어 살라는 마수도 받아들였다.

그런데 새집으로 막상 짐을 옮기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웬 남자가 방 하나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긴, 어떻게, 들왔어요?”

“어…… 글쎄요, 제가 왜 여기 있죠?”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왔으면 해명을 해야 할 거 아냐!”

그 도성욱이란 이름의 룸메이트는 대단히 미스터리했다.

첫날은 헛소리를 해 대서 웬 미친놈인가 싶었는데 진호의 이름 석 자를 듣고는 갑자기 태도 돌변!

이전부터 화가인 그를 동경해 왔다느니 하며 이상한 수작을 걸기 시작하는데……?

심연 / 노에

[타깃 접촉 성공했습니다.]

상류층 자제 모임 케틀 클럽. 그곳에서 마약 유통의 단서를 잡은 형사 유정우는 신분을 속이고 그들의 파티에 잠입하여 우두머리격인 동하파의 후계자 신승제를 마주한다.

하지만 중간에 몸을 빼려다가 도리어 약에 당해 케틀 클럽의 또 다른 실세, 도준호에게 정체를 들킨 그.

마약 수사 협조를 약속받은 정우는 준호의 가짜 연인 행세를 시작하고…….

“그렇다면 저도 호칭부터 바꿔야겠군요. 사람들 앞에서는 준호 형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분명 어느 때보다도 숨 가쁘고 힘겨운 수사이건만 준호의 달콤함에 마음이 무장 해제 되는데……!

“너는 내 거야. 더 이상 달아날 생각 하지 마. 네가 형사든, 뭐든 또 그런 짓 했다가는 죽여 버릴 테니까.”

2111 / 돌체

의뢰를 받고 홍콩 섬으로 향한 수리공 림.

“오랜만이야.”

낯이 익은, 수없이 꾼 악몽 속의 흰 얼굴…… 뤄신.

그는 여전히 차가운 멸시로 수치심과 두려움을 안겨 주며 림을 절벽 위의 한 저택으로 끌고 갔다.

게임의 초대장을 받은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그곳으로.

“제발 보내 줘!”

“차라리 덤벼들기라도 했으면 혐오스럽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때마침 발생한 사건에 결국 림은 저택에 발이 묶이고 만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 솔로몬의 씨앗>

의문의 메시지와 전염병 ‘솔로몬 그런디’에 감염된 시체. 그리고 폭설과 고립.

연이은 재난에 저택은 순식간에 공포에 잠식되고, 림은 자꾸만 과거의, ‘학교’와 ‘그 아이’의 꿈을 꾸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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