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볕이 좋았다.
둘은 옥상 정원에 있는 자쿠지를 만끽 중이었다. 희락은 새벽녘 짙게 안개 낄 때나, 혹은 약간의 보슬비로 대기가 촉촉해질 때 자쿠지에 들어가면 가장 기분 좋다고 말했다. 지금도 물론 좋지 않은 건 아니라면서 말이다.
저번부터 옥상에 올라올 때마다 궁금하긴 했었다. 무슨 온실이 다 있나. 상추라도 키우나 싶었다. 이제 보니 자쿠지가 있는 곳이었다. 불투명한 반사 유리라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야 호기심이 하나 해결됐다.
“희락아.”
“…….”
등 뒤에 남자는 대답조차 없다. 허리에 둘린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도선도 슬쩍 거기에 손바닥을 겹쳤다. 삽시간에 두 손을 붙잡혔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꾸는 없다.
도선은 말갛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삐친 거예, 아니, 아직 화 안 풀린 거야?”
“앞으로 딱 서너 번만 더 이름이랑 반말 들으면 풀릴 것도 같아요.”
“무슨 얘기를 하지. 어떤 말을 듣고 싶은데?”
“아무거나.”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그러자 희락이 코웃음을 치며 속삭였다.
“맞아요, 정말 어렵지. 저녁 메뉴를 묻는 내게 우리 도선 씨가 매일같이 하는 말인데 들을 때마다 죽을 맛입니다.”
“으읏.”
“이제야 내 고충을 좀 알겠어요?”
더는 도망칠 구멍이 없었다. 입술만 우물거리며 잠자코 있자 등 뒤에서 나직한 웃음이 들렸다. 도선 역시 그제야 안심하며 슬쩍 웃을 수 있었다.
홀가분해질수록 부끄러워졌다.
예전에는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자기의 긴장만이 전부였다. 그래서 희락의 눈과 입술, 뺨과 눈썹을 어렵지 않게 바라볼 수 있었다. 오히려 언제 또 이렇게 가까이서 볼까 싶으니 더더욱 눈에 새기듯 빤히 바라봤던 때도 있었다.
대표님이 날 좋아한대. 사랑하기까지 한다는데.
매일 아침, 자기 옆에서 곤히 잠든 희락을 보면서 그걸 되새김질할 때마다 어쩐 일인지 긴장은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게 처음에는 기뻤다. 이제 희락이 원할 때마다 조금쯤 편안하게 웃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그렇게 됐다. 생판 타인에게 웃어 주는 것보다야 아직은 힘들지만, 처음을 생각하면 놀라울 만큼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다만, 긴장이 사라진 공간을 부끄러움과 창피함, 겸연쩍음처럼 궤를 함께하는 감정이 채우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물며 그걸 의식하고 나니 더더욱 격한 움직임을 띠며 머릿속을 장악해 버린 느낌이었다.
왜 싸웠더라.
사실 싸웠다고 말하기엔 너무 과장인가 싶기도 하다. 약간의 옥신각신, 희락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싸움 비슷한 거였다. 낯간지러워서 차마 자기 입으로는 도무지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지만.
어쨌든 그 옥신각신 중, 희락은 오랜만에 눈을 가늘게 떴다. 눈빛마저 형형히 빛내 가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당신이 베타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거야.>
오싹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손끝이 긴장으로 저릿저릿해지는 감각도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희미하게 속삭이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만 멀뚱히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었으면, 당신은 벌써 각인을 당해도 백 번은 넘게 당했을 거라고. 나 아니면 일상생활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나 없인 숨 쉬는 것도 못 하게끔 구속했을 테니까.>
그는 진심이었다. 눈빛과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꽉 붙잡힌 손바닥에서도 희락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새삼스럽지만 역시 저돌적일 땐 참 저돌적인 남자다.
분위기를 깨는 거 같아 미안했지만, 도선은 그 말을 들으며 불쑥 생각난 게 있었다.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적어도 좋게 좋게 마무리됐을 거였다. 결국 입에 담았기 때문에 희락은 마지막에 골난 표정마저 지었다.
<각인이 먼저 나오는 거야? 알파들은 보통 노팅으로 협박하는 거 같던데. 임신시켜 버릴 거다, 내 애를 낳게 할 거다. 뭐 이런 거 많이 말하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락이 눈을 번쩍 뜨며 짜증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래서 막장 드라마가 문제야, 문제! 베타나 오메가들은 그런 거나 보고 알파에 관한 인식을 아주 획일화하니까 속 터져. 다른 알파 새끼는 어떻든지, 일단 나는 아니거든요?>
희락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당신이랑 나중에 부부싸움이라도 할 때, 나한테 정이 떨어졌지만 애 때문에 산다. 애 보면서 참고 산다. 농담이든 진담이든, 뭐 이런 소리 나와 봐. 나는 아주 미쳐 버릴 거라고. 내가 그 미래를 가끔 상상할 때마다, 당신이 베타라서 나나 당신에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니까요?>
꿍얼꿍얼. 바깥에서는 폼과 각으로 승부를 띄우는 남자가 집에서 단둘이 있을 때면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비죽거리고 말도 안 되는 불만도 입에 담는다. 도선은 그때마다 귀엽다고 말했고, 이번 역시도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알파가 어떻든 내 눈에 최고로 예쁘니까 다 괜찮다는 말도 안 되는 대답도 했다. 희락은 거기서 기분이 완전히 풀렸지만, 그다음 도선이 주춤하며 입에 담은 말에 다시금 눈을 확 치켜떴다.
<근데 부부싸움이라니. 나랑 결혼도 하게?>
여기서 희락이 제대로 폭발했다.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냐며 쏘아붙였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원래 연애하면 결혼하는 미래 정도는 당연히 상상하고 그려 보는 거 아니냐는 말도 덧붙였다. 당신이나 나나 같은 마음이 확실한 거 같긴 한데, 왜 언제나 내가 혼자 앞서 나가는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말을 할 땐 좀 서운하고 속상해 보였다.
그래서 여차여차 자쿠지에 왔지만 희락은 아직도 꽁한 상태라는 거다.
“희락아.”
도선이 속삭이듯 이름을 불렀다.
“왜요.”
퉁명한 음성이지만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꾸만 웃음을 자아냈다. 도선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서 천천히 생각난 것들을 입에 옮겼다.
“미안한데, 난 아직 믿기지 않을 때가 좀 더 많아. 지금도 이따금씩 현실과 꿈속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도 들고. 내가 마치, 의심병 환자라도 된 거 같다니까.”
“흐음.”
“그러니까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까지 그려 볼 여력이 없는 거야. 난 진짜…… 아침에 눈떴을 때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신기해서 속이 다 울렁거릴 때가 있다고.”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지만 어쨌든 희락의 섭섭함이 다소 가시기라도 하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걱정하지 마요. 금방 나아지고, 믿어지고, 나만 보게 될 거야.”
“그럴까.”
“그럼요.”
희락이 딱 잘라 대답하더니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우리가 한 섹스를 천 번쯤 하면? 키스는…… 우리 이미 백 번은 넘게 하지 않았어요? 그럼 한 만 번으로 책정할까.”
“푸흣.”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희락이 이토록 마음을 어루만지듯 해밝게 속삭이면 어떤 고민과 근심이 들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을 다해 웃을 수 있었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참 신기한 감정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도선은 아차 싶었다. 희락이 혹 기분 상해 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오히려 밝디밝았다.
“괜찮아, 지금은 의심해도.”
“……?”
“나중에는 의심한 거 자체를 후회하게 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되도록 할 거니까요.
희락이 조금 붉어진 귓가에 입술을 대고서 연하게 중얼거렸다. 삽시간에 뜨거워지는 목덜미를 내버려 두며, 도선은 입술을 마냥 우물거렸다.
그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매일 올라오는 의심을 뭉개지 말고 내버려 둘까. 희락은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했고, 그렇게 되도록 하겠다며 자신만만하다. 기왕 후회하는 미래가 기다린다면 아예 거창하게 후회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후회하면서 쓰게 웃으면 그 옆에 희락이 그것 보라며 의기양양 턱을 치키고 있을까.
그와 함께 확인할 미래는 그런 미래일까.
나쁘지 않다.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 미래를 확인할 때까지 계속 함께할 수 있다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