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9)

5.

꽃밭의 꽃이 다 시든 걸까.

그렇지 않으면 날로달로 커지는 이 불안감을 설명할 수 없다.

쉬는 시간이었다.

도선은 직원용 휴게실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희락의 SNS에서 사진을 구경 중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사진을 올리려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매일 새로운 사진이 뜨는 그의 계정은 일상의 피로 회복제나 다름없었다. 날마다 원 없이 실물을 본다. 목소리와 체온, 눈길까지 덤으로 따라오는 풍족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사진은 사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다른 건 일단 젖혀 두고 긴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하아.”

도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희락이 집에 들이닥쳤던 날. 계란을 사러 다녀오겠다는 것은 반쯤 구실이기도 했다. 집에서 나서자마자 곧장 동네 슈퍼가 아닌 대형 마트로 향했다. 땀으로 엉망이 된 슈트와 속옷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자기 옷을 건네는 것도 참 망설여졌다. 희락이 입기에 품이 넉넉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손때가 탄 옷과 속옷을 그가 개의치 않고 입어 줄까 걱정이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희락이 샤워를 끝마치기 전까지 돌아가야 했다. 백화점이나 값비싼 의류 매장에서 이게 어울릴까 저게 어울릴까 고민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대형 마트에 들어간 거였다.

검은색 드로어즈, 흰색 무지 반팔 티셔츠와 베이지색 반바지. 가장 무난한 것만을 골라서 몸을 돌리려던 참에 진열대에서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이 있었다. 남색 바탕에 큼지막한 노란 꽃이 그려진 아주 화려한 비치웨어 반바지였다. 도선은 잠깐 고민했지만 그것 역시 손에 쥐었다. 반쯤은 장난이지만 또 반쯤은 진심이기도 했다. 무채색보다 화사하고 컬러풀한 슈트를 선호하는 희락이기에 이것 역시 잘 어울리지 않을까. 그가 입든 안 입든 이걸 보자마자 와락 웃음을 터트릴 건 확실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구매 가치가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전력 질주로 집에 돌아갔다. 희락은 아직 욕실에 있었다. 거의 다 씻었다는 그에게 욕실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 쓰라고 말해 주고, 문을 조금 열고서 사 온 옷가지들을 건넸다. 잠시 뒤, 안쪽에서 요란하게 손뼉 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났다. 근처를 서성거리던 도선도 들려오는 웃음에 전염된 것처럼 소리 없이 히죽 입술을 올렸다.

희락은 꽃 바지가 매우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음 날 집을 나설 때도 그대로 입고 나가려 해서 기겁하며 말렸다. 함께 사 온 다른 반바지로 갈아입길 권했으나 콧방귀도 뀌질 않았다. 그 옷차림으로 차가 있는 유료 주차장까지 걸었을 희락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심란했다. 설마 바깥까지 입고 나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SNS 사진 속 희락은 최근 그 바지를 입을 때가 잦았다. 벌써 서너 장은 올라온 거 같았다. 옥상 정원에서 맥주를 마실 때도, 석찬과 함께 서재에서 일정 검토를 할 때도. 희락의 옷차림은 언제나 주목받았기에 가뜩이나 시선을 강탈하는 꽃 바지가 화제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의 팔로워들이 삼삼오오 댓글을 남겼다.

내 남동생도 대표님이 입은 꽃 바지랑 비슷한 게 있다.

저거 마트 갔다가 본 거 같은데 설마 같은 건 아니겠지.

그러다가 희락이 며칠 전 꽃 바지를 입은 사진을 한 번 더 올리면서 ‘선물 받은 바지인데 마음에 쏙 들어서 자주 입게 되네요’라는 코멘트를 남긴 게 문제였다.

도대체 누가 조 대표님께 마트 브랜드의 옷을 선물이랍시고 내민 걸까.

꽃 바지는 궁금증의 시발점이 됐다.

포털 사이트에서 희락의 이름을 검색하면 뜨는 포스트의 댓글이나 뉴스의 코멘트에서 많은 이들이 최근 꽃 바지 이상으로 사진에 자주 보이는 손을 언급하곤 했다. 어쩌면 그 손의 주인공이 꽃 바지를 선물한 사람이 아니겠냐는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하는 이도 종종 있었다.

희락의 계정을 자주 열어 보는 사람들은 최근 그가 누군가와 함께 붙어 다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누군가와 보통 사이가 아닐 거라는 추측도 아주 쉽게 할 수 있었다. 사진에 얼굴이 잡히는 석찬과 다르게 미지의 인물은 여태껏 손과 어깨만이 전부였다. 또, 그 누군가는 항상 희락의 옆에 앉아 있었고, 오후 시간대를 거의 함께 보내는 듯했다.

사람들은 떠보듯이 혹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듯이 코멘트를 쓰곤 했다. 대표님 사진에서 핑크빛이 감지된다는 장난스러운 얘기를 꺼내는 사람도 점점 늘어만 갔다.

그가 그런 코멘트를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도선은 불안함으로 심장이 떨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있는 힘껏 욕심냈던 일상이 점점 막바지에 치닫는 것만 같았다. 희락이 호기심으로 이 관계를 시작했든 아니든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이 만남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리가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그럴 때면 도선은 잠들기를 포기하고서 여태까지 일어난 일들을 쭉 돌이켜보곤 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많은 것들을 하나둘 떠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불현듯 알아차린 사실이 있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왜 대표님이 요즘 매일같이 자기와 함께 지낼까.

항상 얼굴을 보고 싶어 했고, 늘 옆에 있고 싶어 했다. 섹스가 끝나고, 혹은 저녁을 함께 먹고 나면 조심스레 꺼내 보던 ‘이제 가 보겠습니다’라는 말은 요즘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로 말미암아 희락이 무시무시한 눈빛과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잠들 때 얼굴을 보고, 깨어나서 얼굴을 보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아마도.

희락에게는 그날이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그는 조용한 해결을 원했고 빨리 수습하고 싶어 했다.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던 그 말을 강하게 거부한 게 정말 잘한 일이었을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희락이 자기와 함께 지내는 이유가 ‘불안감’ 때문인 거 같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막말로 자기는 희락이 취중이라는 것을 이용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자기를 절대적으로 신용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을 공유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떠벌리거나 폭로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뭐가 있을까. 딴생각하지 못하게끔 옆에서 지켜보면 되는 게 아닐까. 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노라고 경고하듯 일상을 장악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 희락이 자기 곁에 머무는 것처럼.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졌다.

감시를 위해 언제까지 옆에 머물 순 없었다. 그는 입막음의 보장이 생기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희락의 사진 밑에 달린 무수한 코멘트를 보며 점차 숨통이 막혀 오는 느낌이 드는 건 그래서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윤도선’이라는 인물을 궁금해하기 전에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그가 그렇게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도선 씨.”

“……!”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크게 흠칫했다. 도선은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멍한 시선으로 휴게실 문을 응시했다.

“대표님?”

희락이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했다. 옅은 분홍색 슈트에 검은 브이넥. 멋스러운 구두와 손목시계까지. 오늘 아침에 희락이 차려입는 걸 옆에 서서 지켜봤음에도 이상하리만치 몸이 떨린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뭐야,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놀랐으니까요.”

희락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수상한데? 뭐 하고 있었어요.”

“쉬는 시간이라 쉬고 있었습니다.”

희락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도선은 얼굴에 무뚝뚝함을 지우는 대신 한껏 걱정스러움을 올렸다.

“이러셔도 됩니까?”

“뭐가요?”

“직원용 휴게실까지 찾아오시는 거요. 저와의 만남이 목적이라고 너무 공공연히 보여 주는 거니까요.”

“사람들한테 알려져도 도선 씨 상관없다면서.”

“예, 그렇지만 대표님은 아니시잖아요.”

“나도 상관없다니까 그러네?”

희락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제가 그간 대표님과 아무 사이라도 아니라고 해명한 게 몇 번인지 아십니까. 그거 도로 물거품 됐습니다.”

“물거품? 해명?”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단어를 나열하더니 그다음, 바로 눈을 가늘게 뜨면서 짐짓 진지하게 중얼거린다.

“맞아, 나 안 그래도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대답해요? 사람들이 나랑 무슨 사이냐고 물어볼 때마다? 내가 당신 퇴근 시간 맞춰서 매일같이 오는 거 모르는 사람 없잖아.”

“없죠. ……뭐라고 하긴요. 아무 사이 아니다. 대표님이 취중에 어려움을 겪으실 때 한 번 도와 드린 적이 있다. 그 후로 종종 밥을 사 주시는 것뿐이다. 이 정도로 대답하면 더는 묻지 않습니다.”

“내 극우성 페로몬이 당신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을 때도 그랬어요?”

“네, 언제든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극우성 알파가 워낙 드무니 페로몬 주인이 대표님일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긴 했겠죠. 하지만 저한테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건 완벽한 성희롱이니까요.”

짐작하는 사람이 있긴 했을 거다.

사실, 도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백이면 백 직원 모두 희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게 분명했다. 자기 딴에는 전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그가 조금쯤 안심하길 바라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독이 된 거 같다.

눈앞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긴 할 거다? 그럼, 다른 알파 새끼 페로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거네?”

들리는 목소리 역시 완전히 가라앉은 채다.

잠시 시선을 내리깐 채 미동도 없던 희락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섰다.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짜증과 분을 삭이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도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도선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폭풍 전야를 앞둔 것처럼 눈앞의 남자 모습이 심상치 않다.

슬프게도 희락의 페로몬은 평생 허락되지 않을 테지만. 그의 향을 맡고, 느끼고, 그게 얼마만큼 향기롭고 눈물겨운지 죽어서도 알 수 없을 테지만.

“대표님, 안 됩니다. 절대로요.”

그럼에도 어쩐지, 지금 아주 조금쯤은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게 느껴졌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단순히 눈치가 빨라진 것뿐이다. 그의 ‘다름’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도 조금쯤 기뻤다.

도선은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

“여기 직원용 휴게실입니다. 저 지금 탈취제도 안 가지고 있고, 여기서 대표님이 페로몬을 흘리시면 모든 직원들이 대표님 페로몬 향을 알게 되는 거 아닙니까.”

“잘됐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모양이다. 냉랭한 목소리에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이미 갈무리를 포기하고 페로몬을 흘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대표님, 제발…….”

“어차피 다들 확신하고 있을 텐데 거기에 종지부를 찍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안 됩니다. 대표님, 이런 공공장소에서 페로몬 갈무리 안 하시면 큰 문제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희락이 낮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알아야 하나?”

답답함에 절로 큰소리가 나갔다.

“아셔야죠! 더더군다나 대표님처럼 극우성이면 정말 큰 문제가 됩니다.”

희락의 페로몬을 묻힌 채 아무렇지도 않게 일하러 나갔고 장 보러 나갔다. 나중에 사실을 알자마자 곧장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몇 번이고 허리 숙여 사죄했다. 자기를 계속 휴게실에서 대기시킨 문 지배인에게도 몇 번이고 감사의 말을 건넸다. 베타라서 페로몬이 묻었는지 일절 몰랐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 가능했었다. 자기야 쉽게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지만 희락은 그런 것도 아니다. 저녁 뉴스에 희락의 얼굴이 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도선은 머리를 쥐어짰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대표님 외에 다른 사람, 다른 알파 페로몬이 제 몸에서 풍기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거…….”

슬그머니 확인한 희락의 눈가가 조금쯤 부드러워졌다. 도선은 안심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거 대표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괜한 생각으로 화내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맞아요.”

희락이 낮게 속삭이며 코앞까지 걸어왔다.

“앞으로도 없어야 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한 음절 한 음절 강조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일이 생기면.”

손이 다가왔다. 기다란 손가락이 어깨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긴장을 늦출 새가 없었다. 도선은 빨려 들어가듯 스산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나 정말 미쳐 버릴 거야.”

협박인지 경고인지 모르겠다. 희락은 늘 다정다감하게 웃다가도 가끔 이렇게 오싹한 면모를 보일 때가 있다. 늘 햇살 같은 미소에 익숙해져 있던 탓일까. 정색하며 온몸으로 불쾌감을 표현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어쩔 줄을 모르겠다.

도선은 긴장을 떨치고자 농담하듯 말을 꺼냈다.

“‘앞으로도’라는 건 평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즉답이었다.

별 고민 없이 딱 자른 대답이 생각보다 빨리 들려오니 이쪽의 말문이 막힌다. 도선은 멀뚱멀뚱 눈만 뜨고 감았다. 아직 웃음을 되찾지 못한 희락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건 좀 큰일이네요.”

“뭐가?”

“평생은 좀 긴 거 같아서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락이 확 언성 높여 대꾸했다.

“뭐야, 그게? 저번에 그랬잖아. 나 외에 다른 사람이랑 하고 싶지 않다며. 나랑 겹쳐질 거 같다면서!”

“예, 그랬죠.”

도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보라는 눈동자에 속으로만 웃고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확신까진 할 수 없다는 것도 덧붙여서 말했던 거 같은데요.”

희락이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당신 미래 몰라도 괜찮아요. 내가 아니까. 당신이 당신 미래를 어떻게 설계했든, 어떻게 상상해 왔든 그것도 다 무용지물이에요. 왜냐. 앞으로 내가 당신 삶에 철저하게 개입할 테니까. 당신 생각 이상으로 많은 부분이 달라질 거니까.”

단정적인 말투에 다시 한번 입이 꾹 다물렸다. 더는 생각나는 말이 없어서 희락의 얼굴만 훔쳐보았다. 잠시 사이를 두고 뚱하던 입가에서 슬금슬금 미소가 번졌다. 도선 역시 살짝 안도하며 연하게 웃었다. 살갗을 푹푹 파고들던 찌릿찌릿한 분위기가 사그라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희락이 두 팔을 뻗어 도선을 안았다.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 장소라는 것을 환기시켰어도 그 말을 잔소리쯤으로 치부하며 보다 더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을 알기에 도선 역시 체념하고서 얌전히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대표님,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아. 완전히 잊고 있었네.”

희락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분침 끝이 머무른 숫자를 확인하고서 짤막하게 한숨을 쉰다. 왼팔은 재빨리 도선의 등을 다시 휘어 감았다.

“아는 사람이 할 말이 있다고 좀 보자고 해서요. 그런데 장소를 호디에로 하자고 그러는 거 있지. 나야 잘됐다 싶잖아요.”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앞으로 20분 정도 여유 있어요.”

“저는 나가 봐야 합니다. 진작 쉬는 시간이 끝났거든요.”

“그래서? 불만 있으면 들어와서 도선 씨 끌고 가라고 해요.”

대표님 앞에서 그런 간 큰 행동을 할 사람이 이 건물에 존재합니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항의는 그저 목구멍으로 삼켰다.

오늘 저녁도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함께 맥주를 마실 거였다. 그때 희락에게 공과 사에 대한 구분을 조금 언급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이따 맥주 같이 마실 수 있나? 오늘 만나는 분이랑 저녁도 같이 드시지 않을까?

도선은 불쑥 올라온 궁금증을 입에 담았다.

“만나시는 분이랑 저녁 같이 드시나요?”

“아니? 내가 왜. 도선 씨 퇴근 전까지 얘기 마무리 짓고 여기서 시간 좀 때우다가 당신 모셔 가야지.”

희락은 저녁 메뉴에 대해 물었다. 도선은 언제나처럼 “대표님이 드시고 싶은 거요”라고 대답했다. 늘 같은 대꾸만 반복하기에 이제는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임에도 희락은 언제나 거른 적이 없다. 점심은 뭘 먹었는지 묻고, 점심과 전혀 다른 종류의 메뉴 몇 가지를 입에 올리며 도선에게 선택하게 하는 것도 항상 정해진 일이었다.

희락이 기운 좀 나게 해 달라며 손짓을 졸랐다. 도선은 마지못해 그의 등을 가볍게 어루만졌고, 손을 뻗어 자기 목덜미를 간질이는 머리칼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희락이 단숨에 기분이 좋아진 듯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휴게실 문을 누군가가 서너 번 두드렸다. 노크라기보다는 신호를 주는 듯한 소리였다.

“대표님.”

석찬의 목소리였다.

도선은 흠칫 몸을 떨며 희락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물론 단숨에 제지당했다. 힘을 주는 팔에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워낙 꽉 끌어안는 통에 얼굴이 품에 푹 파묻힐 정도였다.

“이제 나오셔야 합니다.”

다시 들려오는 석찬의 말에 희락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벌써? 아직 시간 남았는데?”

“예, 정 사장님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난해? 평소에는 30분 늦는 건 일도 아니면서 오늘따라 왜 이래. 도움이 안 되네, 진짜.”

“그건 정 사장님께 직접 말씀하세요.”

희락이 짤막하게 한숨을 토했다. 못마땅한 듯 작은 목소리로 불평불만을 꿍얼대는 통에 도선이 터질 거 같은 웃음을 참았다. 그가 아무리 자기가 웃는 걸 좋아해도 이 순간에 웃으면 그리 좋은 표정은 짓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에 휘감겨 있던 팔이 천천히 풀렸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두 손이 그다음 향한 곳은 도선의 양어깨였다. 허리를 숙여 얼굴을 바싹 들이댄 남자의 눈동자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다.

“도선 씨.”

들리는 목소리 또한 그랬다. 앞으로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할 거 같은 음성에 잠깐 잊고 있었던 긴장이 다시금 몰려오는 듯했다.

도선은 얼어붙은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네.”

“앞으로는 내가 놔줄 때까지 기다려요. 석찬이가 인기척 좀 했다고 나한테서 멀어지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완전히 엉망진창, 쑥대밭이 되지 않겠어요?”

“……?”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희락에게는 미안했어도 한동안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를 굴려 보고,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그의 기분이 쑥대밭으로 변하는지 가늠해 보려 애썼지만 도통 떠오르는 게 없다.

도선은 결국,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희락이 연하게 웃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도 좋아. 대신 기억은 해요. 내 말 알겠어요? 도선 씨가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거야.”

화사하게 웃고는 있지만 목소리와 눈빛에 스민 진지함은 여전하다. 어찌 됐든 장난으로 치부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만큼 확실하다. 진지함에는 진지함으로 응하는 게 정답이다. 도선도 고개를 힘주어 끄덕이며 최대한 명확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희락이 만족했다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슈트 상의 주머니에서 작은 스프레이 병을 꺼내 들었다. 도선은 그게 뭔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페로몬 탈취제다. 아까 느꼈던 불길한 예감은 역시 정확했다며 속으로 연거푸 혀를 찼다.

“그렇게 보지 마. 아주 조금 흘린 것 정도라고요.”

“대표님한테나 조금이겠죠. 극우성 페로몬은 조금이든 많든 모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도선 씨 몸에서 내 흔적을 손수 지워 주고 있잖아. 사실 난 지금 칭찬을 받아도 부족해. 알파나 오메가한테 이 행위가 얼마만큼 짜증 나는 일인지 모르죠?”

그건 몰랐다. 페로몬과 완벽하게 거리가 있는 삶이었으니 알 턱이 없다.

“그렇습니까?”

희락은 뚜껑을 열고 도선의 어깨 부근과 머리칼에 꼼꼼히 분사했다.

“아주 짜증 나는 일이죠. 아, 진짜 열받네.”

희락의 말은 빈말이 아닌 듯했다. 말을 이어 가는 희락의 눈만 봐도 그건 확실했다. 미소가 점점 빠져나간 눈빛은 냉랭함이 차오르고 있다.

“어쨌든 가지고 다니길 잘했죠. 석찬이 덕분이긴 하지만.”

희락이 말을 꺼냈다. 도선의 눈에는 그게 마치 탈취제를 뿌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정신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페로몬 갈무리로 문제 생긴 적 한 번도 없고, 완벽하게 처신할 자신도 있으니까 안 가지고 다니거든요. 그런데 석찬이가 그러더라고. 요즘 나 보면 문제 생길 거 같으니까 평소에도 항상 상비하라고.”

“민 비서님께 감사하다고 해야겠네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맵시 좋은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간다. 정말 어렵다. 오늘은 무슨 말을 해도 혼나는 날인 것 같다.

“해도 내가 해. 당신은 하지 마. 나 외에 다른 알파랑 말도 섞지 마.”

희락의 소원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전부 알겠다고 해 주고 싶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그럼 저, 손님맞이는 어떻게 합니까?”

희락이 질겁한 표정을 꾸미며 혀를 내둘렀다.

“어우, 그거 얘기하지 마요. 다시는 꺼내지 마. 내가 매일 필사적으로 애써 잊고 있는 거니까.”

희락이 도선의 흰 와이셔츠 옷깃을 매만졌다. 그가 확 끌어안은 바람에 약간 주름지고 흐트러진 매무새를 꼼꼼하게 챙겨 주었다.

호디에 직원들의 유니폼인 흰 와이셔츠와 검은 슈트 하의는 그간 오가며 지겹게 봤다고. 그럼에도 당신이 입은 걸 보면 왜 이리도 섹시하게 보이는지 미칠 노릇이라고. 기회가 된다면 내 손으로 한 번 벗겨 보고 싶다고. 희락이 푸념과 욕망을 중얼거리는 동안 도선은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휴게실을 나가기 전, 희락이 도선의 이마에 서너 번 입술 도장을 찍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앓는 소리를 내던 그가 드디어 문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도선은 팔을 올려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서너 번 가볍게 문질러 봤지만 손끝의 촉감으로는 입술이 닿았던 촉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선이 마른세수를 하며 서 있던 자리에서 몸을 수그렸다.

“하아.”

양 손바닥 틈을 비집고 마른 한숨이 흘러나왔다.

희락의 다정함이 무섭다.

불안함으로 심장이 떨리는 감각은 그의 다정함을 맛볼 때마다 더더욱 커다랗게 변해 갔다.

도선은 많은 이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처럼 희락을 좋아했다.

얼굴을 보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쪽을 보고 웃으면 덩달아 행복해졌다. 곁에 머물 때면 스스로 왜 이렇게 변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늘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긴장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어서 함께하는 시간이 제법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요즘은 긴장감과 동시에 마음을 아우르는 행복감 덕분으로 숨을 쉬고 말을 하는 것은 처음보다 조금 쉬워졌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첫눈에 반한 것도 맞다.

그게 물론 희락의 전부가 아닌 그의 얼굴에 국한됐을지라도 이런 사람과 밤을 보내면 인생에 다시없을 행운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였으니 보통 반한 게 아니다. 하룻밤 실컷 눈 호강을 하는 것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던 화사하고 아름다운 얼굴. 그 용모를 매일같이 코앞에서 바라보는 나날이 이어지게 됐다. 그때마다 인생 참 무궁무진하다며 감탄하곤 했다.

희락이 좋다.

좋아하는 것은 많다. 여태까지는 그 좋아하는 것들과 비슷하게 그를 좋아했다. 함께 지내면서 허락되는 게 많아질수록 더 좋아졌다. 좋아한다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가장 좋아한다.

지금껏 따로따로 나눠서 생각하고 좋아했었다. 대표님이 밝게 웃는 얼굴, 대표님이 읊조리듯 속삭이는 목소리, 대표님이 장난스럽게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 좋아하는 그것들을 다 더해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여태까지 자기 가슴이 이 감정을 어떻게 감당해 왔나 싶을 정도로 커다랬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다.

아니, 사랑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더더욱 큰일이었다.

이 좋아함에 욕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도 모르게 철저하게 배제하려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그동안은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었다.

욕심낼 사랑이 아니다. 자기 자존심이나 자존감이 낮은 것도 아니다.

그는 조희락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배경을 지녔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전국을 통틀어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 사람을 욕심내거나 연애적인 무언가를 꿈꾸는 것은 대단히 파렴치한 것처럼 느껴졌다. 욕심은 그날 모텔 침대에서 잠든 대표님을 등질 때 함께 두고 나와야 했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 무엇보다 주제 파악이 중요한 법이고 그걸 먼저 배우게 되곤 하는데, 가장 필요한 이 순간에 그게 안 된다는 게 덜컥 겁이 났다.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 자체가 희락에게 굉장히 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대표님이 어떻게든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던 그 순간을 함께한 것뿐이다.

대표님이 도대체 무슨 죄인가. 취중에 자기와 함께 동침한 것도 부족해, 그런 사람의 사랑까지 받게 되다니. 자기가 아니어도 대표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주변에 차고 넘쳤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이 감정은 대표님께 가져다 댈 게 아니다.

정신 차리자.

빨리 어떻게든 하자.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을 되뇌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일상이 더는 이어지면 안 될 것만 같다. 대표님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호감이 사랑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정신 차려 보니 이렇게 됐다.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사랑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기까지는 무수한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아서.

쉬는 시간은 아까 끝났다.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는 것을 잘 알지만 아직은 꼼짝도 할 수 없다.

도선은 이를 질끈 악물었다.

* * *

잠이 오지 않았다.

도선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스마트폰 때문에 불면증에 걸렸거나 그럴 기미가 보이는 사람이 전 세계에 넘쳐 난다는데 자기도 거기에 포함인 거 같다.

습관처럼 희락의 SNS 계정으로 들어갔다. 요 며칠 얼굴을 보지 못한 대표님의 행적이 거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폭풍 업데이트에 사람들은 좋아했지만 너무 바쁘신 거 아니냐는 걱정스러운 코멘트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희락을 붙잡고서 무슨 말이든 일단 해 보려고 했다.

자기의 불안이나 두려움을 모조리 표현하지 않고 이 일상을 마무리 짓는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테지만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를 앞에 두고 말을 조리 있게 하거나 감정 표현을 능숙하게 하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 여태까지 계속 안 됐던 것이 갑자기 잘될 리가 없다. 주량과 혓바닥으로 승진 코앞까지 갔었는데 희락 앞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며칠 정도는 고민을 했다. 겨우겨우 용기를 내서 한번 말을 꺼내 볼까 입을 열기로 결심했더니 이번에는 희락이 바빠졌다. 문제는 왜 이다지도 한꺼번에 일어나서 대표님을 못살게 구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올리고 있는 쇼핑몰 시공에 문제가 생겼고, 그의 작은형이 갑작스럽게 부탁을 하는 바람에 새벽같이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한두 주 사이에 연속으로 발생했다. 그는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일정을 계속 소화하고 있다. SNS로 희락의 동태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당연히 만날 수가 없었다. 잘 시간도 부족할 거 같은 사람이 자기 퇴근 시간에 맞춰 호디에로 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매일 밤, 잠들기 전까지 희락의 얼굴을 휴대폰으로만 확인하는 것도 참 오랜만에 다시 겪게 된 일이었다. 사진을 볼 필요가 없었다. 밤마다 고개를 살짝 올리면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얼굴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 예쁜 얼굴을 실컷 바라보며 밤을 지새울 수도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어젯밤은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아, 이런 식으로 영영 못 보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겠구나.

이별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붙이고 싶진 않았지만, 어찌 됐든 관계의 정리는 꽤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도 있다. 멀어질 마음이 희락에게 존재하냐 아니냐는 일단 제쳐 두고서라도, 점점 발걸음이 소원해지다가 이제 더는 눈앞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을 거였다.

아니, 그래도 대표님은 여전히 마음에 걸리시려나.

이 관계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4만 원’ 혹은 희락이 제시했던 물질적인 보상 때문이다. 그게 제대로 정산이 안 됐으니 아마도 희락은 그걸 해결하지 않는 이상 주기적으로 자기에게 연락을 하거나 만남을 청하는 일이 생길 듯하다.

점점 안 보다가, 나중에는 이런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아까워지다가. 그러다 그가 더는 견딜 수가 없다며 이 모든 것에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하면, 그땐 저번처럼 민 비서님과 연락을 하게 되려나. 또 저번처럼 무릎 꿇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만나 주십사 애원하시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할 테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눈에서 멀어지고 어쩌고를 논할 단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최근 통화 기록을 확인하는 게 무서울 정도니 말이다. 메신저의 대화창도 언제나 최상단을 놓치지 않는다.

통화며 메신저며 거의 비슷한 얘기였다. 출근 잘했는지, 점심은 먹었는지, 퇴근은 잘했는지, 저녁은 먹었는지. 이쪽이 SNS로 대표님의 일상을 그럭저럭 파악 중이라면, 희락은 하루에 네다섯 번은 전화를 하며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사이마다 메신저로 이것저것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덤이다. 떨어져 지내도 자기 일상은 대표님 손바닥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희락은 자기가 집을 비우는 동안 그 펜트하우스에서 지내라고 말했다. 강요 아닌 부탁이라고 말하면서도 꼭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사족을 붙였기에 완전한 부탁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도선은 거절했다. 어지간하면, 정말 불가능한 것이 아니면 희락의 말은 일단 들어주고 싶었으나 그것만큼은 도저히 할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았다.

대표님도 없는 그 집에서 지내기 싫다. 대표님이 없는데 거기서 지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도선이 머뭇거리며 그런 말을 차근차근 입에 담았을 때 희락은 놀라웠는지 눈을 크게 떴고, 잠시 뒤 이쪽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 예쁜 미소를 제대로 감상할 틈이 없었다. 순식간에 와락 끌어안기는 바람에 그의 품에서 눈을 끔뻑거렸다.

당신이 우리 집 현관문 앞에 서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내 피로가 확 풀릴 거 같았는데.

그 중얼거림에 순간 갈등이 생겼으나 희락은 그 이상 부탁하지 않았다.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어도 어딘지 모르게 기쁜 기색이 역력하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희락이 좋아하는지 잘 알 순 없었지만 어쨌든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잘 마무리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자정이 넘었으니 목요일이다. 일을 쉬는 날이다.

정말 막막하다. 그동안 쉬는 날에 뭘 했는지 모르겠다. 끽해야 집 안을 청소하고 장을 보거나 느긋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소식 등을 접하는 게 고작이었을 거다. 그것도 아니면 큰 모니터로 그간 저장했던 대표님의 사진을 마음껏 구경하는 것 정도다.

사진 속 희락은 언제나 그렇듯 늘 눈부셨다. 예전에는 사진으로 보는 게 익숙하고 당연했기에 별생각 없었는데 최근에는 사진을 보며 못마땅한 것이 하나 생겼다. 희락은 사진발이 안 받았다. 실물이 더 낫기도 했고, 정지된 화면으로는 희락의 매력을 전부 담아내기에 역부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목소리가 겹쳐지고, 웃음소리가 겹쳐지고, 시시각각 변하는 눈빛과 입술 모양이 전부 겹쳐지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다웠고 해밝음이 묻어 나왔다.

대표님 사진을 볼 때마다 피부가 깨끗한 것에 놀랐는데,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훨씬 깨끗하다고. 도선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희락이 박장대소를 했다. 그가 지속적인 관리와 시술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말을 능청스럽게 꺼내는 바람에 도선 역시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게 노림수였는지, 희락은 도선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더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당신 웃는 얼굴을 봤으니 일진이 아주 좋을 거라는 농담을 덧붙이기도 했다. 도선은 겸연쩍은 마음에 그런 민망한 말은 좀 안 하면 안 되냐는 볼멘소리를 중얼거렸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날을 떠올리니 괜스레 입술이 씰룩거렸다. 도선은 약간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희락 앞에서는 좀처럼 마음대로 되질 않는 얼굴 근육이 집에서는 무리 없이 움직였다. 희락이 웃기를 원할 때마다 웃어 주고 싶은데 늘 마음뿐이다. 스스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대답하고 있는지 분간도 할 수 없는데 의식적으로 웃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읏!”

도선이 눈을 부릅떴다. 바깥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무너질 때 이런 소리가 날까 싶을 정도였다.

허둥지둥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향했다. 빗줄기가 미친 듯이 바닥을 때리고 있다. 굉장한 소음을 동반한 소나기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일단 창문을 꼭꼭 닫고서 베개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날씨를 확인하자 앞으로 두 시간 정도 소나기 예보가 있었다. 요란한 천둥 번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구절을 읽기가 무섭게 주변이 번쩍거렸다. 아까는 보이지도 않던 집 안을 짧은 순간 시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이런 걸 치 떨리게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도선은 아니었다. 소리에 놀랐을 뿐 이런 상황에 공포를 느끼진 않았다. 하늘이 쩍쩍 갈라지는 듯한 천둥이 자꾸만 고막을 때렸다. 굉장히 거슬리는 소음이다. 이 난리 법석에 잠이 올 거 같지 않다. 어차피 잠이 오지도 않았지만.

도선은 한숨을 내쉬면서 방 안 불을 켰다. 막 새벽 1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요즘은 해가 뜨는 시간이 빠르다지만 이 소낙비가 한두 시간 안에 그친다면 적어도 주변이 밝아지기 전에는 잠들 수 있을 거였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빗줄기가 내리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흣!”

축 늘어져 있던 어깨가 마치 발작하듯 움찔거렸다. 도선은 자기 몸짓에 민망해서 헛기침을 서너 번 했다. 천둥소리 때문이 아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전화벨이 울린 탓이다.

“우와, 이번에는 진짜 놀랐다…….”

떨떠름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쥐고 있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머릿속이 조금 멍해졌다.

“여보세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손끝이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해졌다.

[잤어요? 내가 깨운 건 아니죠?]

착각일까. 들려온 음성에서 꽤 다급함이 느껴졌다.

도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 자려다가 빗소리가 나서 아예 일어나 있던 참입니다. 대표님은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그다음, 희락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은 완전히 예상 밖의 것이었다.

[나 문 좀 열어 줘요.]

“네?”

[앞이야.]

도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런 괴담 있지 않았나.

현관으로 이동하는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 픽 웃음이 났다. 전화로 자기가 바로 코앞에 있음을 알려 주고, 호기심에 문을 여는 순간 현관이 아닌 바로 등 뒤에서 식칼을 든 영적인 무언가가 싸늘하게 웃고 있는 그런 호러물이 떠올랐다.

현관문을 열었다.

물에 푹 젖은 희락이 서 있었다.

“대표님? 왜 이렇게 젖으셨어요?”

발치에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자기 상태를 잘 아는지, 희락은 현관 안쪽으로 들어오길 망설이며 질문에만 대답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확 쏟아지더라고요. 깜짝 놀랐잖아.”

이대로 세워 둘 순 없었다. 도선은 “잠깐 계세요”라고 말하며 손에 잡히는 대로 타월을 들고 돌아왔다. 희락은 머리와 어깨 부근을 대충 닦고 남은 타월로 전신을 꼭꼭 싸매며 욕실로 들어섰다.

“도선 씨.”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희락에게 받아 든 보스턴 가방의 물기를 닦던 도선은 욕실 근처로 가까이 다가가 “네”라고 대답했다.

“샤워해도, 지금 물 써도 괜찮은 건가?”

도선이 두어 번 눈을 끔뻑거렸다. 희락의 목소리가 꽤 망설임으로 가득했기에 농담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뜨거운 물로 어서 씻으세요. 욕조가 없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욕조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당신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욕조에서 느긋하게 씻을 생각 없어요.”

“…….”

그간 전화나 메신저로도 가슴 근처를 세게 치고 가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니 이제 이 정도는 제발 긴장 없이 넘길 수 있었으면 오죽 좋을까. 듣는 순간 심장이 난동을 피웠고 어깨도 자동적으로 딱딱해졌다.

도선이 손으로 경직된 뺨을 문지를 때였다. 다시 희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다세대 주택에서 야심한 시각에 물 쓰면 주민들이 싫어한다고 그랬는데. 시끄럽다고.”

“예?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푸흡.”

생각지도 못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꼭 닫혀 있던 욕실 문이 빠끔히 열리면서 그 사이로 희락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웃는 얼굴을 훔쳐보는 듯한 시선에 입술에 고인 웃음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못마땅한 시선에 슬쩍 고개를 숙이고서 도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지금은 물 쓰는 소리보다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더 시끄럽고요.”

“하긴. 그건 그래요.”

으르렁으르렁. 고막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거센 빗줄기가 쉼 없이 쏟아졌다. 세상을 뒤흔드는 듯한 강렬한 소음에 희락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다시금 쏙 욕실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드디어 서로의 얼굴을 좀 느긋하게 볼 수 있게 됐다. 희락은 선풍기 앞에 앉아 머리를 바람에 말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릴 때마다 아직 물기 머금은 갈색 머리칼이 허공에서 흩날렸다.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 내며 머리를 말리면 더 빨리 마를 테지만 그의 손은 다른 일로 바빴다. 양손으로 도선의 왼손을 만지작거리고 쓰다듬으며 오랜만에 맛보는 감촉을 만끽 중이었다.

“대표님, 몇 시간 전만 해도 부산이지 않으셨어요?”

“맞아요.”

도선은 희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아직도 꿈인지 현실인지 제대로 분간이 안 가는 느낌이었다. 얼굴에 시선이 가다가도 힐끗힐끗 아래를 응시하게 됐다. 그가 문제의 꽃무늬 바지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보스턴 가방에서 옷을 좀 꺼내 달라는 말을 듣고 별생각 없이 지퍼를 열었는데 저 바지가 보였을 땐 잠시 아연해졌다.

“거기 일 다 끝나고 오신 거예요?”

희락이 쓰게 웃었다.

“아니. 저녁쯤 다시 가야 해요. 오전부터 또 일이 있어서.”

“그럼 왜 오셨어요? 왔다 갔다 피곤하실 텐데.”

별걸 다 묻는다는 듯 희락이 눈웃음을 쳤다.

“보고 싶으니까 왔죠.”

도선은 입을 꾹 다물고서 눈만 끔뻑거렸다. 바라보는 눈빛에 장난기가 듬뿍 담긴 걸 확인하기가 무섭게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 목요일에 죽어도 일 안 하는 거 몰랐어요?”

“그건 알지만요. 그래도 왕복은 너무 힘드시잖아요.”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충분히 감수할 수 있고.”

단호하게 대답한 희락이 그다음, 갑자기 풀 죽은 표정을 꾸미며 섭섭해하는 목소리를 냈다.

“나만 보고 싶었나 봐.”

“그건 아닙니다.”

눈앞에서 표정이 확 바뀐다.

“와아, 나 보고 싶었어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서 빛이 뿜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역시 사진은 이 남자의 매력을 올곧이 담을 수가 없다.

도선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럴 땐 사진을 보면 됩니다.”

딱딱한 어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희락이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근데 다시 생각을 해 보니까 안 될 거 같더라고요, 나는.”

“예? 왜요?”

“더 보고 싶어질 거 같아서.”

희락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도선도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늘 부족한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도 그 생각을 한 참이다. 사진에는 희락의 좋은 점이 전부 다 담겨 있지 않다.

말뜻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이게 자기 얘기라고 생각하면 확 가슴에 와닿는 얘기는 아니었다. 사진으로 보든 실물로 보든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말투는 늘 긴장으로 딱딱했다. 희락이 매번 섭섭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웃는 얼굴도 한 번 꾸미기가 어렵다.

“갑자기 물벼락을 맞긴 했지만 역시 오길 잘했어요. 얼굴 보니까 좋아요.”

왼손을 꼭 붙잡던 양손이 허공에 들리며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도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뺨을 부드러이 어루만지는 손길과 함께 입술에 따스한 촉감이 느껴졌다. 아무렇게나 두던 양팔을 올려 자기 쪽으로 몸을 튼 남자의 어깨와 등을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맞닿은 입술이 살며시 호를 그리는 게 느껴졌다.

*

*

비도 천둥도 어느덧 사그라졌다.

도선은 새벽녘 푸르스름한 빛에 시야를 의지하며 희락의 잠든 얼굴을 바라봤다.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에게 꼭 안겨 있다가 품에서 벗어나면 아쉽게 팔을 뒤척이던 몸짓이 오늘은 전혀 없다. 깊은 숨소리만 고르게 낼 뿐 잠들기 전 자세 그대로를 유지한 희락을 보고 있자니 점점 더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희락이 이토록 피곤할 법도 하다. 그는 저녁까지 일을 하고 KTX를 잡아타 곧장 서울로 왔다는 얘기를 마치 무용담 얘기하듯 재잘거렸다. 그걸 가만히 듣던 도선의 표정은 걱정으로 흐릿해졌다.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어요, 아까는.>

희락의 얘기는 이랬다.

미팅, 현장 점검, 접대, 회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찬 일정을 소화하고 드디어 호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 너무 지쳐서 슈트 상의를 벗고 그걸 소파에 팽개치려던 순간, 굉장히 이상한 기분과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몽롱하고 멍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목요일이다. 그러니까 도선 씨랑 하루 종일 있을 수 있는 날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옷을 왜 벗지? 어차피 다시 입어야 할 건데. 도선 씨를 만나러 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

짧은 순간 이어진 그 생각에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바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속절없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헛웃음이 쏟아졌다. 일정을 잡을 때 습관적으로 목요일은 모조리 피했던 것이 떠올랐다. 자기 비서가 그때 얼마나 기이한 표정을 했었는지도 생각났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 말이라도 해 주지. 애꿎게 비서를 원망할 시간도 없었다. 정신 차려 보니 다시 슈트 상의를 입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움켜쥔 채 서울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열심히 검색했다.

<아까는 정말…… 뭐랄까요. 좀 무섭다고 해야 하나? 그냥 내 모습이.>

가장 먼저 항공편을 알아봤다. 거기서 한 번 좌절하고 그다음에는 KTX를 알아봤다. 아슬아슬하게 가능한 시간대가 있었다. 당장 전화를 걸어 표를 예매하고 정신없이 호텔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는 대학 졸업하고 탈 일이 없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탔다고. 타자마자 기사님한테 ‘최대한 빨리!’를 외쳤다고. 이런 건 남의 얘기인 줄 알았다고. 내가 그 어떠한 드라마나 영화보다 가장 애타는 남자 주인공이 된 거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고.

희락은 경쾌하게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도선은 듣는 내내 얼굴이 딱딱해졌다.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들어야 하면 좋을지 몰랐기에 최대한 담담함을 가장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석찬은 노발대발했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키스를 저지한 것이 다름 아닌 석찬의 전화였다. 우리 민 비서님이 오늘은 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 하냐는 농담을 희락이 꺼내기가 무섭게 석찬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큰소리를 냈다.

텅 빈 방을 봤을 때 아주 잠깐 때려치울까 싶었다고. 그새를 못 참으신 거냐고. 언제 한 번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고. 왜 전화를 안 받으시냐고. 제가 지금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지 아시냐고. 정 못 참아서 뛰쳐나가실 정도면 저를 부르시든 연락을 하시든, 뭐든 하나는 해 주셨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정말 너무하신다고. 금요일 일정은 도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이냐고.

희락은 또 시작이냐는 듯 표정을 찡그렸지만 도선은 놀라움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스피커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싹싹하고 친절하던 민 비서님이 이렇게까지 목청 높여 화를 낼 정도면 사태가 꽤 심각하게 느껴졌다.

항공편 수배해서 오전 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석찬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와아, 석찬이가 진짜 화났네. 희락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도선은 그 말에 이제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희락은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라는 말도 덧붙였다.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아까 나도 내 모습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 번 인내심이 끊겨 버리면 사람은 이렇게 되는 거 같다고. 그런 말을 하면서 희락은 도선의 얼굴을 매만졌고 양 엄지 손끝을 이용해서 입술 끝을 문지르듯 들어 올렸다. 떨떠름하게나마 미소 띤 얼굴이 된 도선을 보며 희락은 흡족한 듯 웃었다. 이쪽은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불안함과 공포. 이제는 거기에 암담한 기분마저 들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위기감을 느껴 본 적은 처음이다.

희락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도선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럼에도 신음 비슷한 것이 흘러나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결국 손을 뻗어 입 주변을 틀어막았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됐는지 모르겠다. 대표님이 지극히 사사로운 ‘일탈’ 한 번에 이런 식으로 휘둘리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관계를 유지하면 종지부가 닥칠 때 같이 보낸 시간만큼 더 아쉬워지고, 더 속상해지리라는 것을 잘 안다. 여태까지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행운에 너무 취해 있었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었다.

그간 불안감과 초조함, 공포까지 동반한 그 감정들을 애써 무시하지 말 것을. 그런 감정이 더 커지기 직전에 어떻게든 하는 게 좋았을 것을.

후회가 몰려왔다. 후회는 늘 늦지만, 이번에는 너무나도 늦은 후회다.

자꾸만 늦장을 부렸다. 어떻게든 하자면서도 마음뿐이다. 조금 더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복에 겨운 욕심을 한 번 부릴 때마다 정신 차리라고 누군가 경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더는 이렇게 지낼 수 없다.

언젠가 끝나 버릴 신기루에 목을 매는 것은 좋지 않다.

나를 위해서도, 대표님을 위해서도.

* * *

희락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오늘은 그가 오랜만에 호디에로 도선의 퇴근길 마중을 나온 참이었다. 자기를 보며 반갑게 눈웃음을 치는 얼굴을 보며 도선은 거두절미하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앞뒤를 다 자르는 건 초반에 희락을 앞에 두고 즐겨 쓰던 수법이었다. 지금도 나아지진 않았지만 초반에는 눈앞에 대표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으로 몸이 굳고 얼굴이 딱딱해졌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으니 혹여 헛소리를 내뱉진 않을까, 아차 하는 사이에 말실수라도 할까 싶어 단답형으로 말을 꺼내기 일쑤였다. 시간이 흐르고 거의 일거수일투족 붙어 지내면서 그나마 좀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웃음 한 번이 어려워서 매번 희락을 낙담시켰다.

마지막까지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굉장히 미안했다.

희락은 차에 타자마자 할 말이 뭐냐고 궁금한 듯 물었다. 도선은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차에서 할 말도 아니었고, 저녁 식사를 앞두고 할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따 집에 가서 말씀드리겠다. 딱 그렇게만 말했다. 희락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혹시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라고 물었다. 잠깐 고민하던 도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자기에게도 중요한 얘기였다.

생각해 보면 이런 것도 우습다.

오늘은 4만 원을 주시려나, 아니면 오늘도 역시 물질적인 무언가를 요구하라고 고운 눈을 찡그려 가며 불쾌한 표정을 지으시려나. 희락을 만날 때마다 매번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그 생각을 언제부터 안 하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졌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늘 여러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희락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시선으로 따라 좇았다. 그 팔이 자기 등과 어깨를 감아 오면 마치 기대했던 심장을 들킨 것처럼 겸연쩍었다. 그가 다양한 표정을 얼굴에 지어 올릴 때마다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게 됐다. 그러다가 그가 이쪽을 보고 눈웃음을 치며 눈을 찡긋거리면 줄곧 보고 있다는 걸 들킨 것만 같아서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이제 그것도 오늘로 끝이구나.

마음이 울적했다. 아직 중요한 말은 입에 담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기분과 감정에 휩싸이기 싫었다. 긴장으로 얼어붙는 얼굴이 매번 못마땅했지만 오늘만큼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희락처럼 감정이 이끄는 대로 표정이 달라지는 사람이었더라면 아마 이토록 평정심을 가장할 순 없었을 거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입술을 벌벌 떨었을 거고 눈동자에는 불안이 둥둥 떠다녔을 테지.

식사를 했다. 도대체 뭘 먹었는지 모르겠다. 앞에 앉은 희락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이것도 먹어 보라며 음식을 권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희락의 목소리를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모른다. 특유의 다정함이 스민 음성을 들을 때마다 행복해지곤 했는데 그 음성마저도 제대로 귓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면 지금 자기 상태를 알 만하다. 거의 강박증에 사로잡힌 기분이다. 오늘 무조건 말해야 한다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말들을 꼭 대표님 앞에서 꺼낼 거라고. 그런 결심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확답을 받듯,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스스로 타이르듯.

도선의 이런 태도에 희락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긴 듯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는 서로 할 말을 잃은 채였다. 마치 두 번째 섹스를 앞뒀던 그날 밤을 재현하는 듯했다. 희락은 그저 운전만 할 뿐이었으며 도선 역시 지금 입을 열어 봤자 서툴게 단어 몇 마디 나열하다 끝일 게 분명했기에 줄곧 말을 아꼈다.

“할 얘기가 뭐예요?”

둘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집에 돌아오면 함께 욕조에 들어가 그날 피로를 씻어 내고 침대로 가서 열정적인 밤을 보내거나, 그러지 않으면 맥주를 서너 캔 들고 옥상 정원으로 가서 야경을 보며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거나. 거의 정해진 수순과도 같던 것들을 생략하는 것부터 위화감이 들었다.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아니다. 도선은 일단 모든 잡념과 불필요한 감상을 깡그리 무시한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내 착각일까. 마치 나처럼 긴장하신 거 같다.

희락의 입술은 평소처럼 매끄러운 호를 그린 채였다. 그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시선 때문이다. 조바심이 나는 것처럼, 혹은 애가 탄다는 것처럼. 또 어떻게 보면 한껏 기대에 차오른 것처럼. 여러 감정이 순식간에 교차하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또 말문이 막힐 것만 같다.

또 이렇게 하루를 넘기면, 또 말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다음 날이 온다.

그걸 몇 번 반복했으면 충분하다.

도선이 마음을 굳히고자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대표님.”

희락이 떨떠름하게 웃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것 좀 제발 어떻게 해 줘요. 그리고 이 순간에 대표님은 더더욱 아니지 않아요?”

이 순간에?

도선은 마른침을 삼켰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슴 근처가 뜨끔했다. 어쩌면 희락은 지금 자기가 무슨 얘기를 꺼낼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면 왜 이 순간에 ‘대표님’이라는 호칭은 안 된다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은 지금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희락이 호칭을 가지고 문제 삼기 시작하면 대화가 산으로 갈 것도 뻔하다.

도선은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오늘은 ‘희락 씨’로 부르겠습니다. 대표님만 좋으시다면요.”

“음. 아주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요. 대표님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희락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을 빤히 응시했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은 표정에 도선도 더는 망설일 수 없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제가 계속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말씀드리는 걸 까먹었어요. 그런데 이제 더는 미루면 안 될 거 같아서 오늘은 꼭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잠깐만.”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희락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확 붉어졌다. 도선은 슬쩍 당황했다. 이제 막 운을 뗐을 뿐이다. 이건 뜻밖이다. 그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런 표정은 예상 밖이었다.

희락이 한쪽 손바닥을 쫙 펼쳐 보이며 대화를 중지시키고, 반대편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채질했다.

“미안해요, 도선 씨. 나 잠깐만요. 휴우, 아주 조금만요.”

“네.”

도선은 잠자코 희락의 얼굴만 응시했다. 호흡을 여러 번 몰아쉬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이쪽도 지금 긴장으로 죽을 맛이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희락 역시 그런 것 같았다. 사람마다 긴장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 다를 거였다. 지금 눈앞의 남자는 긴장을 어떻게든 완화하고자 애쓰는 사람을 떠올릴 때 가장 대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선 씨, 얘기 듣기 전에 나 변명 좀 해도 돼요?”

“예? 변명요?”

뜬금없는 단어다. 놀라움에 입이 살짝 벌어졌다. 도선의 얼굴을 바라보던 희락이 굉장히 창피한 듯 손바닥으로 뺨을 비비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난, 아…… 도선 씨가 날 어떻게 봤는지는 모르겠는데, 나 되게 초짜예요. 이런 경험이 별로 없다고. 섹스는 잘하는 거 같은데 다른 건 그냥 그래.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그동안 도선 씨한테 좀 막무가내로 돌진한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도선 씨한테 나 지금 잘하고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좀 우습고 그래서 말을 못 했거든요.”

“…….”

도선은 눈을 여러 번 뜨고 감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기를 듣고 있는 걸까. 이 순간에 왜 이런 얘기를 들어야만 하는 걸까. 희락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감이 오는 게 전혀 없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희락이 다시금 말을 꺼냈다.

“어쨌든 오늘 도선 씨가 할 얘기는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다는 거야. 난, 와아. 아하핫……. 이런 식으로 선수를 빼앗길 줄은 몰랐어. 정말로……. 도선 씨가 먼저 말해 줄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을 못 했단 말이에요.”

“예? ……아.”

도선은 이제야 좀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희락도 그간 계속 말을 꺼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가 지금 꺼낼 말을 그가 어떻게 먼저 알아차리고 이런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역시 대표님은 대단하신 분이야’라는 감상 한 줄로 정리가 가능했다.

희락은 굉장히 더운 모양이다. 슈트 상의를 벗어 소파에 팽개치는 것도 부족해 리모컨으로 에어컨까지 켰다. 그의 행동을 잠시 바라보고서, 도선이 약간 눈치를 보듯 중얼거렸다.

“그럼 대, 아니, 희락 씨가 먼저 말씀하셔도 저는 괜찮습니다.”

“으음.”

희락이 양손으로 가볍게 머리를 감쌌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한참 고민하던 그가 다시금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상기된 얼굴은 여전했지만 조금쯤 마음이 진정된 듯 눈빛은 다소 편안한 기색을 띤다.

“아뇨, 도선 씨 말을 먼저 들을게요. 한발 늦은 거 쿨하게 인정해야지.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도선 씨가 말했다고 해도 나한테 기회가 없는 건 아니잖아.”

그 말이 맞다. 자기가 말을 꺼낸 순간 최종적으로 구체적인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희락의 몫이다.

도선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희락 씨, 제가 오늘 말씀드릴 건…….”

눈앞의 남자가 입술 주변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는 게 보였다. 그 바람에 도선은 멈칫하면서도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단숨에 죄다 말해 버릴 생각이다. 그동안 골백번도 넘게 머릿속에서 말해 봤던, 어느 순간부터는 잊고 있었던 그 말을 전부 토해 내야 할 순간이다.

“4만 원은 언제 주실 건지 구체적으로, 정확한 시일을 좀 알고 싶어서요. 아니면 처음에 말씀하셨던 물질적인 보상, 그거 아직도 유효합니까?”

말하면서 내심 제발 4만 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상으로 넘어가면 이 이상 말을 꺼내기가 어려울 거 같다. 그날 밤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어느 정도의 액수를 불러야만 대표님이 만족하실까. 얼마를 받든 그 돈은 절대로 쓸 수 없을 거였다.

“도선 씨.”

얼마간 침묵이 흘렀을까. 희락이 입을 열었다.

“네.”

도선은 재빨리 대답하며 슬금슬금 눈짓했다.

눈앞의 대표님이 이상하다.

입을 헤,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짓던 얼굴에서 하나둘 감정이 빠져나갔다. 조금 전까지는 이쪽을 보며 마냥 기쁘게 웃던 눈동자도 완전히 초점을 잃은 채 무미건조한 깜빡임만 반복할 뿐이다. 순식간에 넋이 나간 듯한 대표님을 보고 있자니 도선은 점점 초조함이 몰려왔다. 말을 꺼낸 순간 드디어 저질렀다, 하는 해방감을 맛볼 겨를도 없었다. 너무나 기이하게,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을 하는 희락을 보며 타들어 가는 목구멍에 마른침을 넘겨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감정이 전부 배제된 눈동자가 드디어 이쪽을 바라봤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지만 도선은 있는 힘껏 이겨 내며 얼굴에 잔뜩 힘을 주었다. 가뜩이나 경직된 뺨이며 턱이 이젠 경련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다. 참아 내는 수밖에는 답이 없다. 자칫하다간 바로 고개를 떨어뜨리거나 옆으로 꺾거나 할 것만 같았다.

묘한 기류가 흘렀다. 서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시선을 마주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도선은 혼란스러웠다. 정신이 까무룩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름만 겨우 부른 희락이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기에 더더욱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쪽이 먼저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하는 건가 싶어서 마땅한 말을 찾아보아도 쉽지 않다. 희락이 왜 갑작스레 표정을 바꿔 가며 얼이 빠진 거 같은 눈빛을 짓는지 이유를 모르니 운을 떼기가 어렵다.

“있잖아요.”

드디어 희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도선은 “네”라고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그의 음성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다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낮디낮은 음성은 최대한 귀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로 아주 작았다. 꺼슬꺼슬하고 쉰 목소리가 등줄기를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그 말, 농담은 아니죠?”

“아닙니다.”

도선은 이번에도 빠르게 대답했다. 이것 외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을 잘 보고 있고, 제대로 목소리도 듣고 있다고. 그런 신호를 주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재빠른 대답에 희락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표정이 허물어지듯 흔들리며 눈동자가 매우 불안정하게 떨리는 것이 속속들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이번에는 도선도 말문이 막혔다. 언뜻 봐도 지금 그의 모습은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

도선이 눈을 부릅떴다.

뺨을 보기 좋게 물들였던 홍조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희락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히 질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고자 달싹거렸지만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는 일은 끝끝내 없었다.

희락 못지않게 도선의 얼굴도 점점 질려 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눈앞의 남자를 보고 있으면 지금 무언가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게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무릎을 감싸 쥐던 두 손 중 한쪽 손이 허공으로 올라섰다. 눈가를 천천히 가린 채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었다.

“대표…….”

도선의 목소리가 중간에서 희끄무레 변해 사그라졌다. 오늘은 희락 씨라고 부르겠다는 말을 기억해서가 아니다. 눈앞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툭, 투둑.

눈가와 손바닥 사이의 틈을 비집고 무언가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턱 끝을 타고 바닥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것을 처음에는 홀린 듯 보기만 했다.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희락이 울고 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도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순 정신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창백해진 뺨은 이제 이것보다 더 심할 수 없을 정도로 허옇게 질려 버렸다. 긴장으로 딱딱했던 어깨도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뻣뻣해졌다.

“대표님, 대표, 대표님…… 지금…….”

대표님, 지금 우시는 거예요?

온전한 말은 머릿속으로만 겨우 할 수 있었다. 이토록 간단하고 쉬운 문장 하나가 입 밖으로 고스란히 나가질 않는 거였다. 그 대신 앓는 소리와 헛소리가 범벅된 목소리만이 입 밖으로 연거푸 튀어 나갈 뿐이다. 우느냐고 물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지금 자기 정신이 이상하고 얼이 나갔어도 이 광경은 환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쉬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탄식과 마른 한숨만 연달아 내쉬던 도선이 주춤주춤 다리를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정확히 세 걸음을 떼기도 전에 희락이 얼굴을 거머쥔 손을 내리지 않은 채 반대편 손을 들어 두어 번 흔들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손짓을 정확히 알아차린 도선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미안한데, 오늘은 돌아가요.”

“대표님…….”

혼신의 힘을 다해 멀쩡한 목소리를 꾸민 것 같은 음성이었다. 거의 쥐어짠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도선 역시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음성을 내뱉은 입술은 다시금 꾹 다물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매를 보면서 가슴이 통증과 두근거림으로 엉망이 됐다. 그저 서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자리를 지킨 채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정수리만 응시했다.

“가 보겠습니다.”

도선은 천천히 속삭이고서 등을 돌렸다.

이대로 돌아가는 게 정말 옳은 걸까. 대표님 눈물이 그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 있다고 한들 그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그가 말한 대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

돌아서는 순간에도 머릿속에 여러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멀찍이 보이던 현관문이 이젠 코앞이다. 현관이 가까워지자 아까는 바로 앞에서 보이던 희락의 모습이 굉장히 작디작게 보였다. 새삼 이 집이 참 넓구나 생각했다. 그동안은 오직 희락만을 바라봤다. 이 집은 그저 풍경이었다. 그가 앉아 있고, 서 있고, 잠드는 모습을 꾸미는 배경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집 자체를 본격적으로 구경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거 같다.

현관으로 오기까지 서너 번은 몸을 돌려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바라볼 때마다 그는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은 채 어떤 미동도 없다.

도선은 문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희락이 울었는데 뭘 제대로 생각할 정신머리가 있을까.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런 끝은 바라지 않았다.

* * *

요즘 대표님 사진 잘 안 올라오더라고요.

오늘, 동료가 힐끗 눈치를 보며 그런 말을 했다. 은근슬쩍 떠 보려는 말투가 웃음을 자아냈다. 물론 속으로만 웃을 뿐이다. 겉으로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꾸미며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여기서 동료가 눈치 없이 ‘도선 씨는 뭐 아는 거 없으세요?’라고 말하면 그 즉시 ‘제가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라고 말끝을 흐려 가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줄 거였다. 다행스럽게도 동료는 도선의 맞장구에 비실비실 웃음만 흘리며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오늘 말을 꺼낸 동료뿐만이 아니다. 모든 직원이 호기탐탐 무언가를 캐낼 생각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는 나날이다. 호기심과 궁금증 어린 시선들이 어디에 있어도 살갗을 쿡쿡 찔러 대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희락의 SNS가 완전히 얼어붙은 것과 동시에 호디에로 오는 발걸음도 완전히 끊겼다. 매일같이 앞뜰이든 주차장이든 도선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오던 남자가 도통 보이질 않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문 지배인이 엄포를 놓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자세하고 세밀한 것까지 캐묻듯 질문을 하는 동료는 여태껏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문 지배인마저도 정말이지 참을 수 없다는 눈초리를 던져 대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우는 희락을 뒤로했던 그날이 벌써 1주일 전 얘기다.

그리고 도선은 여름이 지나기 전에 문 지배인에게 호디에를 관두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구직 활동, 더 나아가 회사 생활을 할 생각에 벌써 머릿속이 잿빛이다. 일탈 한번 제대로 즐겼으니 그것으로 된 거 아니냐며 마음을 달래는 게 고작이다. 남들은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닐 뿐 막상 상사 앞에 던지는 것에는 무수한 고민을 거듭한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런 것도 없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표를 썼고, 쓰자마자 바로 제출했다. 운명 같은 것은 그다지 믿지 않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이 일탈을 누리기 위한 하나의 고비 정도가 아니었나 싶어서 슬쩍 웃음이 나곤 했다.

출근이 있으면 퇴근도 있다.

이 칼퇴근도 정말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였다.

직장 다닐 땐 퇴근을 기다리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영업부 직원에게 퇴근이란 회사 정문을 나설 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처 접대를 한 식당에서 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건조한 기분으로 출근을 하고 술기운으로 울렁거리는 배 속을 부여잡고 퇴근을 했었다.

요즘은 퇴근을 꽤 고대했다. 제시간에 딱딱 퇴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희락이 매번 마중을 나오면서 이 칼퇴근이 더더욱 좋아졌다. 좀 늦을 거 같다고, 기다리지 마시라고. 그런 말들을 희락에게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퇴근은 어느 순간부터 일의 마감이 아닌, 희락과 함께 보내는 저녁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이제는 아니지만.

도선은 직원 유니폼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호디에를 나섰다. 날이 무더웠다. 아까 아침에 긴급 재난 문자라며 폭염 주의보를 알리는 진동이 연달아 울렸을 땐 기겁할 정도였다.

“어?”

부리나케 걷던 도선이 발걸음을 뚝 멈췄다. 호디에 건물 앞뜰. 잘 조경된 나무와 추억 깊은 벤치를 지나쳤을 때 거기에 아주 익숙한 인물이 서 있었다.

“민 비서님……?”

손수건으로 땀을 닦던 석찬이 가볍게 웃어 보이며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도선 역시 허둥지둥 허리를 굽혀 “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받았다. 동시에 허리를 다시 펴고서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자마자 석찬이 안경을 치키면서 망설이는 어조로 질문했다.

“도선 씨, 폐가 아니라면 잠깐 시간 좀 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저랑 얘기 좀 하셨으면 하는데요.”

들은 목소리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미안함이 뚝뚝 묻어 나왔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석찬에게는 꽤 내키지 않는 상황인 듯했다. 그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선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석찬이 다행이라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럼 요 앞에서 커피 한잔하죠.”

*

*

석찬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쟁반에 올리고서 카페에서 최대한 구석지고 사람들 왕래가 적은 곳을 찾았다. 그 뒤를 도선이 쫄래쫄래 따랐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았는지 석찬이 자리에 앉았고 도선도 그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둘 중 누구도 커피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한동안 멋쩍은 분위기가 흐를 뿐이었다.

“도선 씨, 그거 아십니까?”

석찬이 슬쩍 중얼거린 말에 도선이 눈을 끔뻑거렸다.

“예? 뭐를…….”

“대표님이 이런 카페, 프랜차이즈 카페를 굉장히 싫어하세요. 대표님 옆에 붙어 있다 보니 저도 덩달아서 마시지 않게 됐죠. 정말 오랜만에 이런 카페에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네요.”

“왜요?”

석찬이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본인이 야심 차게 차렸다가 말아먹어서요.”

“푸, 아하핫!”

도선도 웃음이 터졌다. 씩씩대며 입술을 비죽거리는 모습도 쉬이 상상이 갔다.

“주변에서 말아먹은 거까지는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듣는 척도 안 하세요.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신지 모릅니다. 속도 좁으신 편이죠.”

말을 마치더니, 석찬이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궁금증 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짤막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도선 씨한테 부탁드려 볼까 했던 게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어떤 건데요?”

“도선 씨가 아무 프랜차이즈 카페 들어가셔서, 아무 커피나 사셔서 대표님께 내밀면. 과연 대표님은 그걸 드실까 아니면 적당히 에둘러서 안 드시고 버틸까. 꽤 궁금했는데 말이죠.”

도선은 그저 연하게 웃었다. 아마 석찬은 이 농담에 어떠한 대답이나 대꾸를 바라는 게 아닐 거였다. 이다음 나올 말이 진짜겠지.

“제가 오늘 도선 씨를 보자고 한 건, 이 부탁을 드려도 도선 씨가 곤란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석찬이 떫게 웃었다. 도선도 이번만큼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것이 꽤 어려웠다. 어찌어찌 웃기는 했지만 슬그머니 중얼거린 목소리는 꽤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곤란할 거 같은데요.”

“하아.”

석찬은 예상했던 대답이었는지 한숨과 함께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참…… 제 입으로 이런 질문 드리기가 굉장히 껄끄럽고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도선 씨가 불쾌하게 여기실 수도 있겠지만 일단 묻겠습니다.”

“네.”

“도선 씨, 혹시 대표님이랑 싸우셨어요?”

정말 참을 수가 없다는 어조였다. 도선은 무언가 확 치밀어 오른 표정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그다음, 아직 질문에 대답을 안 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싸운 건 아닙니다. 설마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석찬이 헛웃음을 쳤다. 들은 말을 비웃는 게 아니다. 무언가 석찬에게 기가 막힌 일이 생겼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니요. 대표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십니다. 아무것도요.”

석찬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딱 잘라 대답했다. 도선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저도 모르게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석찬이 이해를 돕듯 말을 몇 마디 덧붙였다.

“손톱만큼도 아무 얘길 하지 않으세요. 하루 이틀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사나흘 넘어가니까 이젠 무서울 정돕니다.”

“…….”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도선 씨를 찾아온 겁니다. 대표님이 갑자기 이러시는 건 너무 이유가 빤해서요. 도선 씨랑 뭐가 있었구나 싶었죠.”

석찬이 앓는 소리를 내며 안경을 벗었다.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모습을 보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깨가 두어 번 꿈틀거렸다. 굉장히 이상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표님, 요즘 사진도 안 올리시던데.”

도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찬이 “하하핫”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진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집에 틀어박혀서 나오시질 않는데요.”

“그럼 일은…….”

“어지간한 건 제가 맡아서 하거나 대충 처리하고 있습니다. 대표님 사인이 반드시 필요한 서류들은 계속 쌓여만 가는 거죠. 제 전화도 안 받으시고, 메시지를 넣어 봐도 묵묵부답이라.”

“…….”

석찬이 한숨과 함께 미간 주변을 엄지로 문질렀다.

“일도 일이지만, 다른 것보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실지. 그게 가장 걱정입니다.”

“예……?”

도선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점점 하얗게 변해 가던 머릿속이 갑작스러운 진동에 사방팔방 부서지는 감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민 비서님 안 가 보셨나요?”

자기 목소리에 움찔 놀랐다.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는데 저도 모르게 입에 담고 말았다. 석찬에게 미안하고 또 주제 파악에 실패했다며 가슴을 치기도 했지만 후회는 들지 않았다. 말투가 다소 원망 조로 들려도 별수 없다. 1주일이나 칩거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의 비서인 석찬이 가서 상황 파악이라도 해야 맞는 거였다.

“가 봤죠. 아니, 가 보기야 했죠.”

조금 전 앙칼진 말투를 석찬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오히려 그 말에 헛웃음을 치면서 정말 기가 차다는 한숨만 연거푸 흘릴 뿐이다. 안경을 다시 고쳐 쓰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도선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문 앞에서 쌍욕이 나왔습니다. 대표님이 부디 못 들으셨어야 할 텐데.”

“예?”

도선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석찬은 쓰게 웃었다. 드디어 아이스커피에 손을 가져가더니 플라스틱 뚜껑을 벗기고 서너 번 목을 축였다.

“제가 대표님 비서이기도 하지만, 알파이기도 해서요. 문을 여는 순간 자욱한 페로몬 때문에 도무지 안에 들어갈 수가 없더군요.”

“아…….”

“그 페로몬을 맡자마자 바로 알겠더라고요. 그건,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들어오면 죽여 버린다는 거거든요. 동류가 작정하고 뿜어 대는 페로몬을 계속 맡고 있자니 구역질도 올라오고. 도저히 거기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건 바로 포기했죠.”

석찬은 이제 애가 타고 초조한 기색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아니, 숨기길 포기했거나 아예 숨기는 것 자체를 생각조차 못 하는 것도 같다. 이따금 표정에만 비치던 갑갑함이 눈이며 손짓에 연속적으로 묻어났다.

잠시 가만히 있던 도선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민 비서님, 실은 제가…….”

석찬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워어! 아니요, 아니요!”

“……!”

도선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석찬은 겸연쩍게 한 번 웃으며 턱을 치켰다.

“도선 씨, 지금 대표님과의 자초지종 말씀하시려고 한 거죠?”

“네? 맞는데…….”

다 끝나지 않은 말을 석찬이 서둘러 잘라 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절대로요.”

“네? 왜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속이 얼마나 좁으신지 모른다고요. 여기서 제가 그걸 미주알고주알 다 듣는 순간 나중에 대표님 신경질을 어떻게 감당하면 좋을지 감도 오질 않습니다.”

“…….”

“어떤 이유로 두 분이 지금 이러고 계시는지 전 모릅니다. 계속 모르고 싶고요. 나중에 해결이 되고, 대표님이 창피하게 웃으면서 그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다. 그렇게 실실 쪼개실 때 전 옆에서 맞장구 좀 쳐 드리고 잔소리나 몇 마디 하는 걸로 끝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단지, 제가 지금 도선 씨를 찾아온 건 당장 기댈 곳이 없어서죠. 염치없지만 어떻게 좀 해 주셨으면 좋겠고, 그게 가능한 것도 도선 씨밖에 없을 거 같아서요.”

민 비서님. 저 대표님을 울렸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저 때문에 우신 거 같아요.

석찬이 원하지 않으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은 그저 마음에서 중얼거릴 뿐이었다. 싸운 게 아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언성을 높여 가며 말을 꺼낼 새가 없었다. 그날의 마지막을 몇 가지 추측해 봤을 때 떠오르는 상황이 한둘 있었다. 거기에는 다툼까진 아니라도 가벼운 입씨름 정도는 오갈 수도 있겠다는 예상도 있었다. 완전히 빗나갔다. 상상 속의 마지막 중 그 어떤 것도, 희락이 울음을 터트리며 돌아가라고 말하는 상황 따윈 없었다.

“도선 씨, 제 연락처 아시죠?”

마지막 동아줄을 부여잡는 사람의 표정이 이것과 같을까. 간절함을 담아 중얼거리는 석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붙잡은 동아줄이 튼튼하리라는 보장은 줄 수 없다. 오히려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도선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석찬이 그제야 좀 환히 웃으며 두 손을 교차해 꽉 잡았다. 마치 이쪽에게 기도라도 하는 듯한 손 모양이라 슬쩍 웃음이 났다.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어떤 대답이든 좋으니까 빠른 시일에 연락 주시면 정말 감사할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석찬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하는 제 입장도 정말 편하지 않다는 거, 아무쪼록 도선 씨가 이해 좀 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도선 역시도 허겁지겁 허리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민 비서님. 정말 괜찮습니다. 오히려 심려를 끼쳐서 제가 더 죄송합니다.”

둘은 한동안 계속 사과를 반복했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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