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2권) (5/9)

룩 앳 미(Look at me) 2

4.

입술이 얼얼했다.

도선은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더듬었다. 부풀어 오른 형태가 손끝에서 느껴졌다. 새벽까지 집요하게 물고 빨린 입술이 온전한 감각을 찾으려면 이번에도 시간이 꽤 필요할 듯하다.

마비가 된 것 같은 입술임에도 촉감이 거칠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에 희락이 무언가를 열심히 발라 주었던 기억이 났다. 비몽사몽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희락이 입술에 감각이 없다며 키득거리던 모습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번 주부터 근무 시간을 야간에서 주간으로 옮겼다. 희락이 원했기 때문이다. 주간에서 야간으로 바꾸는 건 쉬워도 반대는 어려웠기에 신청서를 쓰면서도 별 기대 하지 않았다. 넣자마자 한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로 허락이 떨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조금 고심한 끝에 희락에게 혹시 ‘대표님의 입김’이 들어갔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도선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이러면 이러실수록 점점 불편하고 거북한 분위기가 된다는 것을 최대한 에둘러서 겨우겨우 입에 담았다. 희락에게 싫은 소리를 꺼내는 것은 정말이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매번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다.

얘기를 끝마치기 무섭게 희락이 설득하듯 말했다.

<그냥 도선 씨가 나를 포기하고 이런 일에 익숙해지면 안 돼요? 그게 더 빠를 거 같아. 난 글렀거든, 이미.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일단 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도선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면 희락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골몰히 생각하며 무심코 앞쪽을 바라봤다. 그에게서 침울한 기운이 느껴졌다. 희락이 꽤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이쪽의 눈치를 보듯 눈짓하고 있었다.

도선은 그 즉시 모든 생각을 접었다.

이런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대표님이 자기로 말미암아 어깨가 처지는 모습을 보는 건 너무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도선이 생각하기에 희락은 웃을 때가 가장 멋있었고 빛났으며 밝은 표정이 그 화사한 얼굴에 제일 잘 어울렸다.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항상 결론은 같다.

희락과 함께할 때마다 늘 머릿속에 되새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희락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또한, 이토록 분에 넘치는 배려를 받을 수 있는 시간 역시도 곧 끝날 거였다. 가끔 그 배려가 부담스럽고 난처하더라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한쪽이 조금쯤 홀가분해졌다. 지금은 희락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두는 것이 이쪽의 정신 건강을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어찌 됐든 희락의 의기소침한 얼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웃는 모습만 기억에 담기에도 부족한 나날들이다.

입씨름이라고 하기에는 참 부족하지만 여하튼 그 비슷한 것이 오갔던 적이 근무 시간 외에도 한 번 더 있다. 희락의 비서인 석찬에게 지나가듯 말했던 고민 때문이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석찬이 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염려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희락에게도 귀띔을 넣어 준 모양이었다. 그 덕에 언제 말을 한번 해 볼까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들을 생각보다 빠르게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 그 카테고리와 완벽하게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던 도선은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이 정도로 주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걸 실제로 체감하는 날이 올 줄도 몰랐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보다 바로 옆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더 크게 와닿는 것과 비슷했다.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하던 것이 어느 순간 자기 일이 되어 버렸으니 꽤 당황스러웠다.

<내 페로몬을 두르는 게 도선 씨를 불쾌하게 합니까?>

도선의 결론은 ‘자제를 부탁드린다’였고, 그 말에 희락은 곧장 정색하며 차디차게 대꾸했다. 머리가 아팠다. 알파라는 생명체는 다 이런 건가. 자제를 부탁한다는 말에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려고 해도 그게 가능할 거 같지 않다.

도선이 생각하기에 강력한 극우성 페로몬이 주변 사람의 기분을 불쾌하게 한다면 당연히 그만두는 것이 옳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두서없지만 자기의 생각을 냉랭한 표정을 지은 희락에게도 최선을 다해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쉽지 않았다. 이쪽이 난감해하면 할수록 희락의 얼굴 역시 싸늘하게 식어 갔다.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도선은 최후의 항변으로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얘기까지 입에 담는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도 계속 꺼림칙한 시선이 느껴져서 마음이 초조하다고.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기를 일으키듯 뒤로 물러서는 모습에 마음이 굉장히 위축되고 온몸이 얼어붙는다고.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이라고.

별 기대 없이 한 말이었다. 자기가 지금 처한 상황을 희락이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원했다.

그런데 이게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가만히 듣던 희락은 ‘죄인’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팔을 뻗어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귓가에 들리는 사과에 도선은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할 생각은 맹세컨대 손톱만큼도 없었노라고 속삭였다. 경솔했다고 말했다. 생각이 짧았던 거 같다며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도선은 따뜻한 품 안에서 그저 고개만 저어 보였다. 조금씩 축축 처지는 희락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쪽 기분도 완전히 밑바닥을 기어가는 기분이었다.

희락의 말에 따르면 체내 사정을 할 때 페로몬이 더 오래, 더 강하게 머무는 듯했다. 여태까지는 콘돔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어도 거의 대부분 무용지물로 끝났다. 하지만 죄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이후, 그는 한 번도 빠짐없이 콘돔을 챙겼다. 또, 집을 나설 때마다 페로몬 탈취제를 직접 꼼꼼하게 뿌려 주었다.

입술을 질끈 악물어 가며 협탁 위 콘돔을 거칠게 잡아채는 희락의 모습도 아직 낯설다. 그것 이상으로 탈취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뿌리는 자기 모습 역시 여태껏 생소하다.

어느 것이 먼저 익숙해질까.

익숙해지는 날 따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희락과 이런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그날까지도 영영 찾아오지 않을 수 있을 거였다.

익숙함보다 낯섦이 좋다.

다시 보통의 일상에 던져졌을 때 둘 중 어느 쪽을 빨리 잊고 떨칠 수 있는지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

요즘은 생경함과 밀접함의 경계선이 아슬아슬하다. 희락에 연관된 것 전부가 그렇다. 2, 3일에 한 번은 꼭 있는 섹스는 물론이고 그의 손길, 눈빛, 체온과 목소리까지. 머나먼 곳에 존재하던 그 무언가가 삽시간에 일상과 어우러졌다. 그런 나날에 점점 매몰되는 자기 모습을 확인하게 될 때마다 왈칵 겁이 났다.

오늘은 대표님의 이름을 부르고야 말았다.

다음에는 꼭 대표님이 아닌 이름을 부르겠노라고 약속했었다. 그래서 지켰느냐 하면 역시나 지킬 수 없었다. 희락이 거짓말쟁이라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하소연했지만 좀처럼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희락은 꽤 상심한 듯했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꺾여 주곤 했다.

상심한 모습이 여러 겹 머릿속에 더해졌다. 이번에는 이쪽이 마음을 접을 차례가 온 거였다. 삽입하며 어김없이 손을 꼭 잡아 오는 희락의 얼굴을 보며 가만히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달뜬 신음과 울음에 완전히 뭉개진 음성이었다.

희락은 감격하며 웃었고 행복하다는 듯 눈매를 접었다.

홀린 듯 그 얼굴을 바라봤다. 잠시간은 하반신에서 저릿저릿 올라오던 알싸한 통각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웃는 얼굴에 전신이 마비된 채 언제까지고 바라볼 것처럼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꼴사납게도 눈물이 찔끔 났다.

그 얼굴에 좀 더 빨리 입에 담아 볼걸, 하며 속으로 조금 후회했다.

그건 그렇고.

눈을 뜨고서 꽤 오랜 시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등을 휘감은 팔을 좀처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몸과 몸이 아주 가깝게 밀착됐기에 섣불리 움직이면 희락을 잠에서 깨울 것만 같았다.

고개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우와아.

도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코앞에 희락의 얼굴이 있었다. 어스름한 방 안에서도 놀라우리만치 확실하게 생김새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잘 정돈된 눈썹과 맵시 좋은 입술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다.

희락과 말을 주고받다가 그의 용모를 멋있다거나 훌륭하다고 표현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가 종종 있다. 이를테면 무심코 빤히 보게 됐는데 시선을 느낀 그가 ‘내 얼굴이 좀 잘생기긴 했죠?’라고 물을 때가 그렇다. 혹은 희락이 먼저 ‘나 오늘 어때요?’라고 묻는 날도 있었다.

도선은 그때마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유려하고 능숙한 칭찬은 도무지 할 수가 없어서 단답형으로 멋있다, 아름답다 정도로 말을 마치지만 희락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간 사회생활 하며 단련된 말주변이나 호들갑은 희락 앞에서 정말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괜찮은 미사여구 하나 떠오르는 게 없고 어휘력이 이렇게나 부족했던가 자책하는 나날이다. 긴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는 거 같다. 아주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틀에 박힌 칭찬 한두 마디만 겨우겨우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희락은 멋있다고 말할 때마다 어깨를 으쓱하며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도선은 이따금 눈꺼풀만 깜빡깜빡 움직일 뿐 꼼짝없이 희락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어떤 순간이든 사람을 압도하는 이 외모에 심장 주변이 아프게 뛴다. 희락을 매일같이 만나고 거의 매시간 붙어 있다는 석찬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기도 매시간 붙어 있진 않지만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이 얼굴을 코앞에서 목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언론 매체를 통해 보는 게 당연했던 사람이다. 호디에에 들어갔을 땐 아주 가끔이지만 멀찍이서 보는 게 허락됐다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며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이제는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여가를 보내기도 하며, 심지어 밤에는 섹스까지 하게 됐다. 자기에게 최근 일어난 일임에도 거짓말 같다. 머릿속에 지극히 일어난 사실만을 열거할 뿐인데도 마치 허상처럼 느껴졌다. 잠들어 있는 게 아닐까. 이건 단지 오래도록 꾸는 꿈이 아닐까.

“……!”

도선의 어깨가 움찔했다. 조용하던 방 안에 기계음이 난입했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라고 알리는 것처럼.

등에 둘린 팔이 움찔했다. 도선은 속으로 혀를 차며 허둥지둥 머리맡의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재빨리 알람을 끄긴 했지만 희락이 잠에서 깨어나는 걸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아. 벌써 보낼 시간이야.”

게슴츠레 눈을 떠올린 희락의 첫마디가 이거다. 자기 출근 시간을 언제나 ‘보낼 시간’이라며 볼멘소리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늘 들어도 항상 가슴이 간지러웠다.

“근무 시간을 또 바꾸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당연하지. 그건 아니고.”

도선은 상체를 일으켰다. 희락도 조금 꿈틀대더니 바로 뒤따르듯 몸을 올렸다.

“욕실 좀 쓰겠습니다. 대표님은 더 주무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락이 인상을 팍 썼다.

“대표님?”

“…….”

뾰족한 반문에 고개를 황급히 아래로 내렸다. 당장은 원망의 눈초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읏!”

눈이 다시 마주쳤다.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양 뺨을 휘감은 두 손이 얼굴을 치켰다. 그것도 부족해 눈동자까지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만 움직이면 코끝이 스칠 거리에서 희락이 속삭였다.

“내가 누구라고?”

고민 끝에 도선이 중얼거렸다.

“제발 봐주시면 안 됩니까? 제정신일 땐 도저히 무리입니다.”

“섹스할 때 빼고는 제정신이라는 거네? 왜 제정신이야. 그러면 안 되지. 하루 24시간 제정신이 아닌 나는 억울해서 미치겠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이런 얘기를 한다. 도선은 점점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입술만 우물거리고 있자니 희락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재촉해 왔다.

“해 봐요, 빨리.”

도선이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다면 빨리 해 버리는 것이 더 나을 거였다.

“희, 희락아.”

정말 기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낸 부름에 희락이 더할 나위 없다는 듯 흡족하게 웃었다.

“그렇지. 잘하는데? 자꾸 불러 버릇하면 곧 괜찮아지겠어요.”

함께 방을 나섰다. 더 자라는 만류에도 희락은 꿈쩍도 하지 않으며 같이 씻길 원했다. 하도 욕조에 같이 들어가니 이제 이런 상황도 꽤 익숙해지고 말았다.

같이 씻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희락은 호디에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그러실 필요 없다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도 이 집에 오가다 보니 이제 이곳 드레스룸에 도선의 겉옷과 속옷도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하물며 희락이 어울릴 거 같아 샀다며 떠안긴 옷도 제법 있었다. 이런 것은 받을 수 없다고, 부담스럽다며 여러 번 거절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이미 산 걸 어떡하겠어요. 당신이 입거나 버리거나 둘 중 하나겠지.>

거기에 변변한 대꾸 몇 마디가 떠오르질 않아서 일단은 주는 대로 받았다. 하지만 그냥 받아 놓고 이곳 옷장에 걸어 두는 게 전부였던 것도 희락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건 버리는 것과 다름없다며 도선이 씻고 옷을 입을 때마다 자기가 산 옷을 기어코 입혔다.

도선의 옷을 몸소 고르고 입히던 희락도 뒤늦게 채비를 했다. 드레스룸 문 앞에서 멍하니 선 채 시간을 보냈다. 희락은 도선의 옷을 고를 때도 시간을 쏟는 편이지만 자기 옷차림에도 엄청나게 시간을 할애했다. 희락이라면 지하상가에서 파는 두 장 만 원짜리 티셔츠를 입어도 태가 날 거고 그걸 본인도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말이다. 왜 그렇게 전신 거울 앞에서 이 옷 저 옷 대보는지 모르겠다. 그가 가끔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거릴 때가 있는데 무어라 대꾸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드레스룸에 걸린 그 엄청난 옷가지들은 옷이 아니면 뭘까. 처음 그 드레스룸 앞에 섰을 때 널따란 공간을 꽉꽉 채운 슈트와 장신구를 보며 속으로 경악을 했던 것이 떠오른다.

“어때요?”

드디어 희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오자마자 이쪽을 향해 질문하는 통에 도선은 일단 입버릇처럼 “멋있으세요”라고 말했다. 그의 전신을 찬찬히 시야에 담은 건 그다음이었다.

남성 슈트의 색깔은 검은색이 대표적이고 좀 밝아 봤자 남색이나 회색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희락의 옷차림을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파격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행보답게 슈트 역시 화려했다. 선명한 와인색 슈트가 그림처럼 어울렸다.

깨끗하고 하얀 피부. 골격, 몸매, 신장의 조화까지. 부족한 점이 손톱만큼도 없어서 늘 경이로운 감탄을 이끌어 내는 남자다. 보통의 남성들이 부담스러워할 법한 옷차림이나 색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화하는 건 희락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건 콩깍지 같은 게 아니다. 희락을 아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였다.

오늘 입으신 것도 사진 찍어서 보내 주시면 좋겠다.

도선은 속으로 내심 기대했다. 희락이 갤러리에 자기 이름으로 된 폴더 하나를 만들어 두라고 했을 때만 해도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 말을 꺼낸 이후로 하루에 한두 번씩 SNS에서 보지 못했던 사진이 메신저로 보내졌다. 갤러리의 ‘대표님’ 폴더에 저장되는 사진들은 순식간에 눈덩이 불어나듯 많아졌다.

그건 그렇고.

도선은 입을 우물거렸다. 희락이 오늘도 언제나처럼 끝내주게 멋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머릿속에 수없이 떠올리는 순간에도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었다. 일단은 말이라도 꺼내 보자는 심산이 들었다.

“대표님.”

바로 잔소리가 나와야 하는 호칭이었지만 희락은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감을 잡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조금쯤 다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응? 왜요. 별로야?”

도선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궁금증 가득한 눈동자를 바로 보기가 조금 부담됐다. 도선은 슬쩍 눈알을 굴려 시선을 피하고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제 희망 사항 하나 말해도 됩니까?”

“뭔데요? 빨리 말해 봐.”

희락이 감질나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는 미안해도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늦은 후회기는 했지만 이런 요구를 하는 게 정말 괜찮을까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어차피 희망 사항을 입에 담았기 때문에 이 이상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다. 도선은 희락을 보자마자 생각났던 것을 천천히 속삭였다.

“저는 대표님이 셔츠 말고 브이넥 입으셨으면 좋겠어요. 이건 제 희망 사항이긴 하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러길 바라지 않을까요.”

희락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나 셔츠 안 어울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선이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요. 대표님한테 안 어울리는 옷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하핫!”

희락이 환하게 웃었다.

어깨가 들썩거릴 때마다 밝은 머리칼도 함께 흩날렸다. 미인이 흐드러지게 웃는 모습은 눈에 보약이다. 도선은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차곡차곡 시야에 담았다. 절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런 생각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쪽에서 의기양양함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희락의 SNS 팔로워 중 한 명에 불과하던 자기가 그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다. 우쭐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였다.

희락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선의 뺨을 꼬집듯 아주 가볍게 잡으며 눈웃음을 쳤다.

“내가 매번 말하잖아. 칭찬할 땐 좀 웃으면서 하면 안 되나? 그런 표정으로 들을 말이 아닌 거 같아. 기분은 좋지만요.”

“저도 정말 답답합니다. 대표님 앞에서 언제쯤 이 긴장이 떨쳐질까요. 사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 같기도 합니다.”

“내가 조만간 당신 환하게 웃는 거 한 번은 꼭 볼 거라고. 그건 그렇고, 브이넥은 왜요?”

“셔츠는 쇄골이 잘 안 보여서요.”

희락이 의외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끔뻑하더니 이윽고 음흉한 시선을 꾸미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밤에 실컷 본 걸로는 부족했어요?”

“저야 실컷 봤지만 대표님 주변 분들은 그게 아니니까요.”

좋은 건 다 같이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가슴 근처를 여민 셔츠는 아무래도 불만스럽다. 희락의 말마따나 자기야 쇄골뿐만이 아니라 그의 전신을 1주일에 서너 번씩 보고 있다. 어쩌다 보니 그게 가능한 사이가 됐기 때문이다. 희락에게서 매력 포인트가 아닌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중 쇄골은 마른침을 여러 번 삼키게 했다. 굉장히 예쁘게 떨어지는 목선과 어우러지면 환상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으음.

도선은 슬쩍 희락을 올려다봤다. 빛을 뿜어내는 거 같던 얼굴에서 미소가 아주 약간 옅어졌다. 말실수를 한 걸까 조바심이 나던 참에 희락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뭔가…… 되게 이상한 기분이네, 이거.”

희락이 애매하다는 듯 흐릿하게 웃었다.

“나는 도선 씨가 욕심을 좀 냈으면 좋겠어. 내 주변 사람들 생각을 뭐 하러 해? 당신 예쁜 건 나만 보고 싶고 나만 알고 싶다, 하는 말이 나왔으면 진짜 기분 째졌을 거 같은데.”

도선이 진지하게 질문했다.

“대표님 예쁜 거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뭐, 그거야 물론 없겠지만?”

희락이 먼저 웃었고 도선도 거기에 이끌리듯 엉겁결에 미소 지었다. 마주한 시선이 바로 그거라며 기쁨으로 반짝였기에 ‘아, 내가 지금 웃었구나’라고 알아차렸다. 희락이 좋아하는 걸 이다지도 쉽게 알 수 있으니 좀 자주 웃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웃음이 희락 앞에서는 좀처럼 되질 않으니 이쪽도 미칠 노릇이다.

도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정도로 큰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큰 욕심은 언젠가 화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희락이 코웃음을 쳤다.

“큰일 날 소리를 다 하네? 큰 욕심이라는 게 어느 정도야. 막말로 복권 1등 당첨되길 바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이 다 불행한 일을 겪겠어요?”

들은 말은 매우 그럴듯했다. 도선도 그 1등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복권을 산 날은 물론이고 사지 않은 날에도 ‘아, 1등 당첨되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우스운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렇죠? 욕심이 있어야지, 사람이.”

희락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함께 집을 나섰다.

다소 불평하긴 했지만 들은 말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희락은 재빨리 셔츠를 벗어 던지고 브이넥으로 바꿔 입어 주었다. 도드라진 쇄골을 힐끗힐끗 훔쳐보며 도선은 남몰래 웃음 지었다.

* * *

3년간 다녔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사람이 직장을 그만둘 땐 여러 이유가 있을 거였다. 도선의 경우는 반쯤 충동적이었다. 또 반쯤은 그때 그만두지 않으면 영원히 그만둘 수 없을 거 같아서였다.

영업부 동료들은 매일 술 때문에 죽는소리를 했고, 죽음의 문턱 가까이에 도달하는 이도 있었다. 도선의 경우 술은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매일같이 마셨기에 퇴사 직후 한동안 입에 대지도 않았을 정도로 이골이 나긴 했지만 그걸로 몸이 축나진 않았다.

동료, 상사, 접대하는 거래처 사람들. 그들에게 크게 스트레스 받는 것도 없었다. 성격이 예민하지도 않고 오히려 무덤덤한 쪽에 가까웠기에 인간관계로 타격을 받는 일은 원래부터 없었다. 다만, 직장 생활 하며 하루에 허락된 모든 웃음을 그들에게 죄다 쏟고 나니 막상 집에서는 웃을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게 약간 허무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 일상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다들 이렇게 살 거였다. 우는소리를 할 시간이 있다면 쪽잠이라도 자는 편이 더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들 이렇게 산다’라는 것에 위안을 받고 있는 자기 모습이 싫어졌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회사에 종속된 삶은 계속 유지될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는 안정적인 유지를 바라겠지만 도선은 그 누군가가 될 수 없었다.

숨 돌릴 틈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버겁다고 느낀 순간부터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버겁다고 느낀 게, 그것을 알아차린 게 실수였던 것도 같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온몸을 짓눌러 왔다.

아들의 퇴사에 양친은 미쳤다고 말했다.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며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호통쳤다. 여태까지는 아들이 무슨 일을 하든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양친이 처음으로 자길 붙잡고 등을 퍽퍽 때려 가며 역정을 내는 모습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 일상에서 탈옥하고 나니 좀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도선도 사직서를 쓰던 그 당시의 자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수가 된 채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이 더 절망적인 것일 텐데 그땐 참 이상하게도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불안감이 더 컸던 거 같다. 아마 다시 사직서를 내던지던 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 게 분명했다. 주말에 메신저의 단체 대화방을 신경 쓰지 않는 삶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카드값과 집세, 온갖 공공요금에 묶인 삶이라는 거였다. 퇴직금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일정 수입이 있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막말로, 일하기 싫다고 뛰쳐나온 것과 다름없는데 결국 한 달을 못 버티고 다시 일자리를 찾아보는 자기 모습에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물론 집에 처박힌 채 허송세월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돈도 문제였지만 아주 간단한 거라도 주기적으로 해야 그나마 바깥공기를 마시며 살 거 같았다.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적거리던 도선에게 때마침 눈에 띄었던 것이 바로 호디에의 채용 정보였다. 월급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높은 데다 어지간한 회사보다 훌륭한 복리후생에 한 번 더 눈을 의심했다. 그 흔한 경험자 우대라는 문구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정도 조건이면 이미 사람을 구했을 듯했다. 반신반의하며 연락을 했더니 당장 면접을 보자고 했다. 그때부터 속전속결이었다. 호디에의 총책임자인 문 지배인은 도선이 쓴 간단한 이력서를 보자마자 언제부터 나올 수 있겠냐고 물어 왔다.

나중에 동료를 통해 대강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베타’인 점이 점수를 많이 먹고 들어갔을 거라고. 구인 구직 시 ‘베타 우대’ 등을 내걸면 채용 차별 금지법에 걸리기 때문에 일단 면접이나 연락으로 채용을 진행하고 아쉽지만 귀하의 건승을 기원하니 어쩌니 메일이나 보내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접객이 필수인 서비스업에서 베타를 선호하는 것은 도선도 익히 알았다. 하루에도 수백 건 페로몬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나니 거기에 자유로운 베타가 상대적으로 점수를 얻는 거였다.

알파와 오메가가 대다수인 이 세상에서 베타로 사는 것에 별다른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아주 이따금 소외감이 느껴졌으나 그뿐이었다. 오히려 ‘그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 보기엔 각인이니 페로몬이니 참 피곤하겠구나 싶은 정도의 감상이 고작이었다.

호디에에 채용됐을 때 처음으로 이 나이에 베타라서 득이 되는 일도 다 있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베타라서 참 다행이고 운이 좋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희락과 두 번째 섹스를 했던 날.

도선은 인터넷에 떠도는 무수한 상담 글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자기 인생에 벌어졌다. 그게 매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자아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떨치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몇십 개의 글을 읽는 내내 가장 많이 보인 단어는 ‘호기심’이었다. 알파가 베타와 자는 이유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었다. 이색적이고 색다른 것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것을 일탈이라 여기고 즐기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냐는 말도 어느 정도 수긍 가는 점이 있었다.

다음은 없을 거 같다고.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섹스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주기도 점점 짧아졌다. 최근에는 거의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날들이다. 호기심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충족되는 때가 반드시 온다. 이제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침대에서 얼굴을 마주했으니 대표님의 호기심은 꽤 해결됐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그런데도 꾸준히 이어지는 이 관계의 이유는 뭘까.

섹스할 때 번거롭고 귀찮은 준비 과정. 섹스할 때 임신과 콘돔 걱정 없는 편리함. 잘은 모르겠지만 머리를 쥐어짜서 생각해 봤을 때, 이 저울질에서 아직까진 후자가 승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니면 도무지 현재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호디에에 출근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님을 보게 됐다. 그간 동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던 그 얼굴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명불허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랬다. 이유가 있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온갖 수식어로 찬양할 만했다.

도선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대표님을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었다. 희락은 SNS에서 아주 유명한 인사였고, 사진과 정보가 인터넷에 넘쳐 났으며, 심지어 TV를 틀면 그가 출연한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덕분에 취미 생활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누나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보며 인생의 활력소라고 말했던 것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딱 그 정도였다. 희락을 좋아하는 이들처럼 도선 역시 딱 그 정도 선에서 인생의 활력소를 누려 왔다.

희락이 호디에에 가끔 데리고 오는 예쁘고 아름다운 오메가들을 보며 저 사람이 애인인가 친구인가로 동료들이 입방아를 찧어도 그저 흘려들었다. 속으로는 한두 번 ‘저들이 아무리 외모로 날고 긴다고 해도 대표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구나’ 싶은 생각만 조금 했다. 저도 모르게 외모 품평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생각들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벤치에서 잠든 희락을 목격했을 때.

정신 차려 보니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신나서 활짝 웃고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원 없이, 그리고 의식하지 않고 웃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촌스럽지만 ‘심봤다’ 정도는 외치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고개를 앞으로 떨어뜨렸다가, 화들짝 놀란 것처럼 자세를 바로 했다가, 어느 순간 옆으로 슬금슬금 숙어지는 얼굴을 한참 구경했다.

희락은 언제나 말끔한 모습으로 호디에를 찾았고, 그건 온갖 사진과 영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무방비로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술에 취해 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런 광경을 보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더더욱 기뻐졌다.

희락을 앞에 두면 항상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도무지 떨칠 수 없는 인생 최고의 긴장감이다. 다른 하나는 그날 잠든 희락을 발견했을 때 맛보았던 기쁨이다. 아주 강한 두 감정이 머릿속에서 초마다 충돌을 했다. 이러니 안면 근육은커녕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매번 그렇다. 그저 질문이 들리면 대꾸를 했고 부름이 들리면 대답을 했다. 희락이 다가오면 엉겁결에 시선을 마주하고, 그가 키스하면 또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감는다.

희락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자기만 그런 것 같아 억울한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차마 대꾸할 순 없었지만 이쪽은 지금 제정신이냐 아니냐를 분간할 수도 없는 상태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눈앞에 희락만 존재한다면 언제 어느 때고 머릿속이 꽁꽁 얼어붙게 됐다.

도선은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아주 날카롭고 저릿저릿한 무언가가 가슴을 후벼 파듯 전하는 감정이 있었어도 깡그리 무시하는 쪽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이 꽃밭이기만 한 것도 좋지는 않지만, 꽃밭을 굳이 뭉개 가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다.

이를테면 희락은 자기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을까, 하는 거다. 그래도 무엇인가가 그의 흥미를 끌었기에 계속 만남을 요구하는 거겠지. 그게 뭘까. 이런 생각 같은 건 지금 이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생각하면 무서워지는 것을 굳이 붙잡고서 고민하기 싫었다. 고민 좀 한다고 이 순간이 당장 끝나거나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황을 바로 보고 무언가를 판단하기가 굉장히 꺼려졌다.

그가 내게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내가 그를 어떤 마음으로 품고 있는지 나 역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요즘은 희락을 볼 때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세뇌하고 타이르듯 연거푸 읊조렸다. 이대로가 좋다고. 이런 행운 이제 다시는 인생에서 없을 거라고. 지금 이 순간을 누리기도 벅찬 마당에 사서 고민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희락이 사람은 욕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자기도 한번 어리광을 부려 보기로 했다.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바람을 최근에는 꽤 선명하고 또렷하게 머릿속으로 되뇔 수 있었다.

불안하면서도 즐거운 이 일상이 조금 더 오래 이어지기를 바란다.

* * *

“대표님.”

“또!”

“하아…….”

실수했다. 아예 호칭을 생략하고 용건만 말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은 게 몇 시간 전인데 왜 이렇게 자꾸 까먹는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긴장으로 굳은 얼굴이 희락의 쀼루퉁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더더욱 딱딱해지는 걸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저기 말입니다.”

“이름!”

“으읏.”

오늘따라 호락호락하지 않다. 양보가 없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도망칠 구석은 없어 보였다. 도선은 속으로 연달아 한숨을 내쉬며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희락아. 그, 뭐였지…… 아! 부탁.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존대!”

“…….”

말문이 턱 막힌다. 이름을 부를 때 타격 입은 게 아직 회복도 안 됐는데 여기서 반말까지 하는 것은 너무 장벽이 높은 주문이었다.

“그래, 내가 한 번 봐준다. 부탁이 뭔데요?”

부탁이고 나발이고,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참이다. 그걸 귀신같이 눈치챈 것처럼 희락이 재촉했다. 도선은 속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는 남자에게 감탄하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맞은편에 앉으시면 안 될까요?”

희락이 눈을 확 치키며 투덜거렸다.

“그런 부탁이 어디 있어. 왜? 나랑 붙어 있는 게 싫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도선은 슬쩍 시선을 굴렸다. 중앙에 있는 테이블을 기준으로 앞에도, 좌우에도 벤치가 있었다. 그럼에도 희락은 자기 옆에 착 달라붙어서 어깨를 끌어안고 놔주질 않았다. 시시각각 느껴지는 팔의 감촉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도선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얼굴 기왕이면 똑바로 마주 보고 싶어서요.”

“와, 진짜……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희락이 새치름하게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까 당신, 내 얼굴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잠시 생각하던 도선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처음에는…… 네,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목소리도 좋아지고, 손과 발도 좋아지고, 훤칠한 키마저 좋아지더라고요. 그다음에는 다 따로따로 좋아하게 됐습니다. 대표님 눈이 좋아요. 코도 좋고, 입술도 정말 좋습니다. 목소리도 그래요. 허스키한 목소리라거나, 웃음 섞인 목소리도 좋고…….”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은 말을 희락이 다급하게 끊었다.

“그만, 그만!”

야경의 어스름한 빛으로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양 볼이 터질 듯 붉다. 도선이 곁눈질로 그 얼굴을 훔쳐보고 있을 때 굉장히 창피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요. 그다음은 나중에, 응? 이따가 찬찬히 들을 테니까. 술이 확 올라올 거 같네.”

희락이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며 후, 하고 연거푸 숨을 몰아쉰다. 이런 칭찬에는 이골이 났을 법도 한데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되레 이쪽까지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둘은 옥상 정원에 있었다. 귀갓길에 사서 온 맥주와 치킨을 먹고 마시며 밤을 보내는 중이다.

고층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아찔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것도 늘 그렇듯 잠깐으로 끝난다. 옆에는 그 풍경보다 눈부신 생명체가 있다.

늘 희락 때문에 온몸이 마비된 것 같은 긴장감을 맛보고 있지만 이따금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지는 팔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들리는 말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또 말대꾸는 어울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맞다. 아까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예. 있습니다.”

그랬다.

도선은 오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실은 며칠 전부터 계속 입에 맴돌던 말이다. 여태까지 참아 왔던 이유는 이런 말을 해도 될 입장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희락이 혹여나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다. 한두 번은 정말 말해야겠다는 순간이 찾아왔었지만 말을 꺼낼 기회를 잡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희락이 활짝 웃으면서 다가오면 일단 머릿속이 암전됐다. 그가 말을 걸면 무조건 착실히 대꾸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전부다.

이러다가 몇 달이 걸려도 말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얼마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찌 됐든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말이기에 조금 전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할 말이 있노라고 질러 놨던 참이다. 희락이 기억해 준 덕분에 까먹고 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대표님, 저기…….”

“또!”

희락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을 막았다.

“안 들어, 안 들을래요.”

“읏.”

이쪽을 응시하던 고개가 홱 돌아가며 딴청을 피웠다.

도선은 속으로 연거푸 혀를 차며 심호흡을 했다. 남들 이름은 잘만 불러도 희락의 이름을 부르는 건 무수한 각오를 거듭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갑의 눈치를 보는 을의 입장 때문도 아니고,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입에 익어서도 아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매우 긴장감 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희락아.”

완전히 뭉개진 음성이다. 입을 조잘거리며 최대한 빨리 읊조린 이름을 들은 순간 희락이 푸, 하고 짤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호구가 된 거 같네.”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으며 도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호구요?”

“그래요, 호구. 억지 부려서 이름 한 번 불린 것뿐인데 난 또 완전히 기분 좋아져서 히죽 웃기나 하고. 모양 빠지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얼굴은 웃음꽃이 가득했다. 살살 눈웃음을 치는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던 도선은 입술만 우물거렸다.

“할 말은 뭐예요?”

경청하겠다는 듯 얼굴을 바싹 당겨 오는 바람에 절로 어깨가 굳었다. 흐드러지게 미소 짓는 입술에 아주 잠깐은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변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말을 하긴 할 거였지만 좀처럼 운을 떼기가 어려운 느낌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희락이 마냥 웃으면서 들어 줄 거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처럼 계속 웃어 주면 좋겠는데 자기 말로 말미암아 미소가 사그라지면 굉장히 우울해질 거 같다.

도선은 머뭇거리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요즘 제 퇴근 시간에 맞춰서 계속 기다리시잖아요.”

“그게 왜요?”

“호디에로 오시지 말고 제가 이쪽으로 바로 오거나, 하다못해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니,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목소리가 자꾸만 기어들어 갔다. 도선은 흠, 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대표님과 제가, 좀 이상하다고 말입니다. 지금이야 어찌어찌 넘어간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소문이 어디까지 퍼질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아차, 또 대표님이라고 불렀네.

도선이 움찔하며 희락을 곁눈질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눈치채지 못한 듯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다.

자기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민망한지 모른다. 이럴 때만큼은 희락 앞에서 늘 긴장하는 게 꽤 득이 됐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낯 뜨거움이 몰려오는지 들키지 않고 끝날 수 있었다.

잠자코 있던 희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윤도선 씨는 나랑 소문나면 곤란합니까?”

어조며 음성이며 한결 딱딱해졌다. 도선은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저보다야 대표님이 곤란하시죠.”

희락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난 곤란할 거 전혀 없는데.”

“…….”

태연스러운 목소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락은 곤란한 것투성이다. 대중도 그렇고, 그의 가족들도 그렇고. 자기 같은 사람과 염문설이라도 나면 썩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물론 고작 이런 가십 정도로 그가 별다른 타격을 받진 않겠지만, 한동안은 이것과 관련된 질문을 주변에서 받을 거였다.

그건 희락이 이 관계를 정리할 때까지 계속될 게 분명하다.

희락이 자기를 멀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거다. 그러나 그가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면 하다못해 남들 눈앞에서만큼이라도 아무 사이 아니라고 시늉하는 척 정도는 필요할 거 같았다.

“당신이 걱정하는 건 뭔데요.”

“여러 가지 있죠.”

“나는 굳이 꼽으라면 딱 한 가지 정도가 생각나요. 주변 사람들이 이것저것 질문해 대면서 당신을 귀찮게 하는 거. 요즘도 그래요?”

“몇 번 질문을 받긴 했는데 그때마다 오해일 뿐이라고 하긴 했습니다. 그 뒤로 더는 저한테 그쪽으로 묻질 않더군요.”

희락이 픽 웃으며 코웃음을 쳤다.

“오해? 퍽이나 믿었겠네요. 나라도 안 믿지. 내가 당신 꽁무니 쫄래쫄래 따라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당신 몸에서 극우성 알파 페로몬이 아주 진동을 했는데. 요즘은 내가 자제하지만.”

“하아.”

도선이 한숨을 가늘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제 좀 만나는 장소라든가 행동거지를 조심히…….”

느릿느릿 이어지던 말을 희락이 잘라 냈다.

“그러니까! 그런 짓을 왜 하냐고. 의미 없잖아. 이미 다 소문난 거 편하게 만나면 좋지 않아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지면 어떡합니까. 이를테면, 대표님 가족분들 귀에 들어간다거나.”

“흐음. 그러게. 그러고 보니 거기까진 아직 생각 안 해 봤네.”

희락의 말에 창피함이 몰려왔다. 이쪽이 엄청나게 앞서 나간 모양이다. 자기 딴에는 걱정돼서 말한 것인데 희락은 어떤 식으로 이해했을까.

잠깐 생각하던 희락이 그다음 딱 잘라서 말했다.

“상관없을 거 같은데요? 알려져도.”

“예?”

“왜요. 도선 씨는 불편해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재빠른 대답에 희락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럼 됐지, 뭐.”

둘이 나누는 화제는 금세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내일도 희락은 호디에로 도선을 데리러 올 것이며, 도선 역시 희락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이 집으로 귀가하는 하루가 될 거였다.

“아까 엄청 웃었잖아.”

희락이 키득거리며 팔에 힘을 넣었다. 그 바람에 그의 옆으로 바싹 당겨진 도선은 움찔하면서도 잊지 않고 대꾸를 건넸다.

“좋은 일 있으셨어요?”

“좋다기보다 석찬이랑 얘기하면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거든요. 내가 당신이 내 이름 부르는 걸 너무 어려워한다고 고충을 좀 털어놨거든. 내가 비서님 붙잡고 징징 짜면서 이런 고민 상담을 하게 한 거야, 도선 씨가.”

희락이 ‘도선 씨가’를 워낙 힘주어 말하는 통에 절로 몸이 움찔했다.

“으읏.”

“거기에 덧붙여서 나도 ‘도선 씨’나 ‘당신’은 너무 딱딱한 거 같다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석찬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애칭으로 부르면 해결할 수 있다는 거야.”

“애칭요?”

“내가 어떤 애칭이냐고 물어봤더니 석찬이가 아주 능청스럽게, 당신처럼 무뚝뚝한 표정 하면서 ‘많지 않습니까. 자기야, 여보야, 애기야 등등. 붙이기 나름이죠’라고 하는데…… 아하핫! 오늘 하루 내내 그거 생각날 때마다 웃음 터져서 혼났어요.”

석찬 특유의 음성을 흉내 낼 땐 눈가 주변을 집게손가락으로 한 번 치키는 시늉까지 곁들였다. 도선 역시 석찬이 안경을 고쳐 쓰며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 한 번에 상상할 수 있었다.

딱딱하던 입술에 미소가 슬그머니 번졌다. 희락은 도선이 희미하게나마 웃는 것을 바라보며 해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느끼한 거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석찬이한테 저 말 듣자마자 대놓고 말하기도 했고요. 오글거려서 죽을 거라고. ……그런데.”

희락이 장난기 어린 눈동자로 도선을 응시했다.

“도선 씨가 자꾸 날 이름이 아니라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저런 애칭으로 불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이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불러 볼래요? 자기야, 애기야, 여보야. 어떤 게 좋아요?”

도선이 질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자신 없습니다. 못 합니다!”

“딱딱한 대표님보다야 훨씬 낫지.”

“그럼 저도 차라리 이름을 부르는 게 낫습니다.”

“불러 봐요, 내 이름.”

기대에 찬 눈빛이 반짝거렸다. 도선은 어쩐지 낚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에 부응하고자 “희락아”라고 불러 주었다. 여태까지 통틀어서 가장 자연스럽게 부른 거 같았다. 그것을 희락도 느꼈는지 빛을 뿜어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눈가를 접었다.

“엎드려서 절 받아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네요.”

희락이 활짝 웃으며 도선을 와락 끌어안았다.

잠자코 안긴 채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눈만 끔뻑거렸다. 좋은 냄새가 났다. 아마 보디로션의 향이거나 샴푸의 향일 거다.

가끔 이렇게 좋은 향을 맡을 때마다 희락의 페로몬 향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그 향을 맡아 봤을 누군가들이 아주 조금쯤 부럽기도 했다. 여태까지 살면서 자기가 베타임에 싫거나 불편한 적은 없었지만 최근 희락으로 말미암아 ‘다름’을 느끼면서 아쉬운 감정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희락을 닮은, 굉장히 예쁜 향기겠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노력을 해도 평생 허락되지 않을 거였다. 한편으로는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은, 희락과 함께하는 시간이 언제든 없어질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을 충실히 만끽하려면 아쉬울 시간도 아깝다.

*

*

섹스가 없는 밤은 잠들기 직전까지 대화를 한다.

정말 사사롭고 별거 아닌 얘기를 이다지도 시시콜콜 말했던 건 교복 입던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거였다. 그 시절엔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은 서로 먹고살기 바빠 얼굴 보는 날이면 근래의 주요 굵직한 일만을 얘기하는 게 고작이다. 메신저가 있긴 하지만 서로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 쉬는 시간에는 뭘 했는지 미주알고주알 떠들진 않는다.

희락은 궁금한 게 많았다.

왜 직장을 관두게 됐는지 물었고, 오늘 점심에는 뭘 먹었는지를 물었다. 묵직함과 가벼움을 넘나드는 질문에 도선은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는 어떤 것이든 관심 있게 들었고 뭐 하나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 듣고 있다는 신호나 추가 질문을 하며 이쪽이 혼자 떠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신경 쓰는 티가 났다. 그런 희락을 보면 예전 거래처를 접대하던 자기 모습이 떠올라 속으로 슬쩍 웃음이 나곤 했다.

희락은 질문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일과를 얘기하기도 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어도 도선이 생각하기에 그리 즐거운 일상은 아니었다. 이따금 친한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게 유일한 휴식이라고 본인도 말할 정도다. 그에게는 기본적인 업무는 물론이고 식사도 일이었고, 골프도 일이었고, 하다못해 누나와 함께하는 쇼핑마저도 일의 일환인 듯했다. 평일에 사무적인 업무를 본다면 주말은 사교적인 업무를 보는 식이다. 그의 비서가 잡은 일정과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일정으로 매일 움직인다. 거기엔 하나같이 강한 의무감이 느껴졌다. 반드시 해야 하는 직분인 듯했다. 들을 때마다 희락이 일을 좋아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굉장히 빡빡하게 들리네요. 심신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게 자는 시간뿐이라는 건.>

도선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희락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요즘은 매일 도선 씨 만나면서 마음의 평화를 원 없이 즐기고 있는데.>

들려온 말은 무척 뜻밖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고마움이 물씬 들었다. 이쪽이야말로 매일같이 희락을 바라보며 시각적 호강과 더불어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고 있었다. 희락이 자기와 시간을 보내며 다소나마 마음 편하게 여겨 준다면 그거야말로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입을 열어서 감사함을 표현하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희락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선 역시 의아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스름한 스탠드 불빛에 정확하지만 않지만 예쁜 얼굴이 지금 꽤 당황스러워하는 듯이 보이는 건 착각 같은 게 아닐 거였다.

<내가 당신을 소홀하게 대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야!>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대꾸해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어도 갑작스럽게 들린 얘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선은 대답을 생각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침묵이 흘렀다. 그 정적에 희락은 더더욱 당황한 듯 정신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을 만나면 피곤이 풀리고, 그날 받았던 짜증도 싹 다 날아가고…… 하여간 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진다는 뜻이지, 내가 당신을 그런 이유로만 만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마치 도선 씨를 스트레스 해소 감으로 여기는 그런 오해는 없었으면…… 아, 미치겠네!>

다급히 말을 잇던 희락이 급기야 머리를 싸맸다. 양손으로 머리 좌우를 움켜쥐며 있는 대로 한숨을 쉬는 남자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대꾸할 말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시시각각 억양과 음성의 높낮이를 바꿔 가며 당황함을 표출하는 희락이 눈앞에 있으니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이런 모습은 굉장히 기뻤다. 희락이 스스로 잘난 걸 아주 잘 아는 사람만 지을 수 있는 표정을 하는 것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이따금 한껏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팍팍 풍길 때면 그게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굉장히 귀여웠다. 이런 모습은 앞으로도 TV나 SNS 등에서 볼 수 없을 거였기에 볼 수 있을 때 실컷 봐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지금 꼴사나울 정도로 절절매는데 계속 그렇게 입 싹 닫고 있을 거예요?>

희락의 말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언제부턴가 당황한 표정 대신 삐친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지금도 왜 갑자기 그가 당황해서 이런저런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귀여우세요.>

결국, 지금 드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대표님께 귀엽다는 표현은 좀 아닌가 싶었지만 이 말 외에는 별다른 대꾸가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가만히 있던 희락이 새치름하게 물었다.

<얼마나?>

도선은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주 많이요.>

그러자 희락이 샐쭉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말로만?>

이때 아주 약간이나마 긴장이 풀렸다. 기대감에 부푼 눈빛을 보고 있자니 절로 입매가 느슨해졌다.

도선이 희끄무레 웃자 희락은 성공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조르는 몸짓에 잠자코 순응하듯 도선의 손이 허공으로 훌쩍 올라섰다. 목적지는 희락의 밝은 머리칼이다.

희락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굉장히 반색하고 좋아했다. 32년 만에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뜨게 된 거 같다고 농담도 했었다. 섹스할 때는 물론이고 아무 일 없어도 가끔씩 만져 달라거나 은근히 머리를 내미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도선도 좋았다. 부드럽고 살랑거리는 머리칼을 만질 때면 긴장감 이상으로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하고 몸이 움츠러들었는데 희락이 워낙 좋아하고 그걸 숨기지 않고 표현해 주기 때문인지 어느 사이엔가 처음보단 자연스럽게 머리를 매만질 수 있었다.

손길에서 최대한 투박함을 제거하고 부드러움을 가득 담아 머리칼을 어루만진다. 처음에는 딱딱하게 겉만 쓰다듬는 것으로 족했는데 요즘은 약간 용기가 붙어서 손가락을 머리칼 사이로 넣거나 손끝으로 간질이는 것도 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 대신 희락은 불쑥 두 팔을 뻗어 몸을 끌어안았다. 으스러뜨릴 듯 꽉 안고서 두어 번 좌우로 흔들흔들 허리를 움직이다가 어깨에 이마를 묻고서 아주 얕은 한숨을 흘리곤 했다. 그러면 그다음, 희락의 주입식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굳은 채로 가만히 있던 도선 역시 허둥지둥 두 팔로 등과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목덜미를 찾은 입술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리면 그제야 도선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이름 부르기는 아직도 좀 어렵지만 이 정도의 요구 사항은 이제 어느 정도 수월하게 해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반복 학습이라는 게 꽤 효과가 있다는 걸 몸소 증명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밤도 매일 밤처럼 비슷한 일을 거쳤다.

질문하고, 대화하고, 머리를 쓰다듬고, 서로를 꼭 부둥켜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드는 그런 밤.

도선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고개를 올려서 잠든 얼굴을 확인할까 고민했지만 금세 포기하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는 스탠드 불빛마저도 없다. 어둠이 드리운 방에서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고 답답해하느니 체온만 올곧이 만끽하는 것도 좋을 거였다.

원래 머리만 대도 곧장 잠에 빠지는 편이다. 희락 앞에서 아무리 두근거리고 긴장감으로 웃음 한 번 짓기가 어려워도 베개만 베면 순식간에 잠들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요즘은 잘되지 않았다.

잠들기가 어렵다는 것.

어쩌면 이제는 자는 시간조차 아깝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정도면 병일까. 숙면해야 말짱한 정신과 깨끗한 시야로 희락을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었고, 그러니 언제 끝나든 후회가 남지 않게 이 상황을 실컷 즐기자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건재하다. 하지만 요 며칠 그 생각을 웃도는 불안감이 조금 더 커진 것도 같다.

차라리 날짜를 받아 놓고 싶다, 하는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

희락도 아마 구체적으로 이 상황을 언제 어떤 식으로 끝낼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거냐며 정확한 시일을 알고 싶노라고 말하는 것도 참 민망한 일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기적과 다름없는 일상에 깊은 고민과 번민은 불필요하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으면 좋겠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눈앞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던 그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머릿속에 자꾸만 부질없는 걱정과 고심이 겹쳐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런 게 생기니까 잠도 잘 오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도선은 감은 눈꺼풀에 억지스레 힘을 넣었다.

어서 잠들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곳으로 피하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 * *

도선은 오늘 퇴근하고 모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근무 시간을 야간에서 주간으로 바꾸고 집에 돌아온 건 처음인 거였다. 해가 긴 탓에 아직도 집 안이 밝디밝았다. 집에서 워낙 밥을 먹지 않아 음식물 걱정은 없었지만 밀린 빨래와 청소는 이제 더 방치하면 큰일 날 수준이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으며 도선은 이따금 히죽히죽 웃음을 터트렸다. 퇴근을 30분 앞뒀을 때부터 문 지배인을 시작으로 동료들까지 죄다 비슷한 얼굴을 한 채 자기를 곁눈질하던 게 떠올라서다.

도선은 생글생글 사람 좋게 웃었으며 모두에게 친절했다. 그런 사람이 희락과 관련된 질문에는 얼굴을 싹 굳혀 가며 ‘그런 사이 아닙니다’ 혹은 ‘전부 오해입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니 모두가 그쪽으로는 이제 더 묻지 않았다.

희락은 주로 주차장이나 건물 앞뜰에서 기다리곤 했다. 가끔 친구들과 방문하는 게 고작이던 희락이 요즘은 아주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지만 모두 침묵했다. 그의 목적이 오로지 도선뿐이라는 것도 직원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도선 앞에서 말만 안 할 뿐이었고, 도선 역시 동료들의 배려를 당연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희락이 오지 않은 것이다.

참 머쓱했다. 호기심과 걱정으로 점철된 기색과 시선을 느낄 때마다 어설프게 웃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작 도선 자신은 별생각 없었다. 오히려 매일같이 만났던 것이 퍽 이상했던 거다. 한창 불타오르는 연인 사이도 이렇게 자주 만날까 싶었을 정도였다.

그의 일 중에는 접대가 목적인 점심 약속도 있었다. 식사에 술이 따라붙기 편리한 저녁 약속도 당연히 있을 거였다. 자기가 영업부이던 시절만 해도 거래처 접대는 거의 대다수 저녁에 이루어졌다.

물론, 딱히 일이 아니라도 괜찮다.

사람들 눈에는 날마다 반복되는 정기적 행사처럼 보였기에 오늘의 방문 없음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도선은 희락이 매일같이 자기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생각 자체가 과신이라 여겨졌다. 그 때문에 이런 일이 있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살면서 어떤 일을 당해도 희락이 자기 손목을 잡아끌며 ‘나랑 할래?’라고 들었던 그 순간보다 놀랄까 싶다. 그때 평생 놀랄 걸 전부 발산한 덕분인지 이제 어지간한 일로 놀라는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긴장감도 놀라움처럼 좀 없어지면 좋을 텐데 말이야.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증가하는 느낌인데.

그런 생각이나 하며 시간을 때우는 오후였다.

집안일을 얼추 마무리 지을 무렵, 드디어 창밖 풍경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슬슬 백열등 스위치를 켜도 부족함이 없다.

딩동!

거실이자 주방의 불을 켤 때였다. 집 안이 떠나가라 초인종이 울렸다. 도선은 그 순간에도 아주 잠깐 초인종 소리 역시 참 오랜만에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날을 잡은 거 같다. 오늘 여러모로 잊고 지냈던 것과 조우하고 있다.

딩동, 딩동, 딩동!

딴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날리듯 초인종이 연거푸 울렸다. 도선은 이번에야말로 허둥지둥 현관으로 나섰다. 도대체 누가 이토록 끈질기게 벨을 누르는지 모르겠다. 우유나 종교 권유가 이런 늦은 시간에도 다녔던가 싶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민폐다.

“누구십니까?”

도선이 약간 짜증을 섞어 질문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상대방이 혹시 돌아가기라도 한 걸까. 동태를 살피기 위해 좀 더 가까이 현관으로 다가갔을 때, 아주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겠어요?”

“……!”

도선이 눈을 휘둥그렇게 떠 올렸다. 손은 자동 반사적으로 허둥지둥 현관 자물쇠를 풀고 있다. 이쪽이 문을 열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문손잡이를 잡고 확 열어젖혔다.

예상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도선은 고개 올려 눈앞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한두 걸음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정도로 짜증 어린 표정을 본 건 처음일 듯싶다. 초기에 4만 원을 가지고 입씨름이 오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냉랭함을 한껏 두른 미인은 꽤 박력 있다. 평소에는 미소 한 번으로 사람을 홀릴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라면, 오늘은 비웃음 한 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 같은 얼굴이다.

내가 뭔가 했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나 때문에 이러시나. 뭐지. 문을 너무 늦게 열어서?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또, 이런 와중에도 땀으로 젖은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이며 붉어진 입술이 너무나 자극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대표님,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이 모습은 몹시 진귀하다. 흐트러진 대표님의 모습이라니.

씩씩 호흡을 가라앉히던 희락이 생각만 해도 억울하다는 듯 빽 언성 높여 말을 꺼냈다.

“뭐 이딴 건물이 다 있어!”

흥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도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가 혹시 잘못들은 게 아닐까 의심했다.

“예?”

“나는 마음 급해 죽을 거 같은데, 사람 인내심 테스트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문제라도…….”

“엄청난 문제가 있지! 여기 주차장 뭐 이따위예요? 기가 막혀서! 있음 뭘 해? 차로 아주 꽉꽉 차 있는데! 외부 차량은 어쩌라고! 장난하나! 아니, 구석에 박힌 차는 이따 나갈 수 있는 거예요? 앞차 나가려면 저 주차장에 있는 모든 차주들에게 전화 돌려야 할 판인데? 하! 미친 거 아니야?”

희락이 씩씩대며 소리치는 게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도중에 말을 끊기에도 뭐했기에, 그저 몸을 숙이고 팔을 뻗어 현관문을 꼭꼭 닫았다. 도선이 그러거나 말거나 희락은 하소연을 토로하듯 숨도 한 번 안 쉬고 불평을 쏟아 냈다.

현관문을 닫느라고 옆으로 틀었던 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선은 희락을 빤히 보다가 그제야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서둘러 입을 열었다.

“차라리 길에 잠깐 대 놓으시고 절 부르셨으면 됐는데.”

희락이 코웃음을 쳤다.

“저 좁아터진 길목에? 그 잠깐 사이에 차 지나가다 사고라도 나 봐요. 나야 없던 일로 하자며 훈훈한 미담 하나 만들 수 있어 좋다지만, 상대방은 내가 저 말을 꺼내기 직전까지 감당할 수 없는 숫자로 머릿속이 엉망일걸.”

그건 맞는 말이다.

도선은 그 말에 동의하듯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그다음, 꽤 얼떨떨한 어조로 조그맣게 목소리를 냈다.

“아니, 애초에 대표님이 여기까지 올라오시지 않고 저한테 전화하셔서 내려오라고 했으면 됐을 거 같은, 그런…….”

“아.”

희락이 짧게 탄식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게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다시금 입을 열었을 땐 얼굴에서 혼란스러움이 뚝뚝 떨어졌다. 스스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 두어 번도 느릿느릿 흘려보냈다. 잠자코 바라보던 도선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차는 어떻게 하셨어요?”

희락 역시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을 하면서도 던져진 질문에 대답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유료 주차장 내비 찍어서 거기에 두고 왔어요.”

“가깝다고 해 봤자 꽤 거리 있는데. 적어도 5분 이상 걸어야 하지 않나요?”

희락이 멍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정신없이 막 뛰어서.”

도선은 시선만으로 눈앞의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쩐지. 아무리 더워도 땀을 너무 많이 흘린다 싶었다. 에어컨을 빵빵 틀어 놓은 차에서 막 내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무더위에, 이 슈트에, 이 구두로요?”

미안하지만 얼빠진 목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희락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왜요. 이렇게 입은 사람은 날 더울 때 뛰면 안 돼?”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요.”

도선은 서둘러 부정하고서 다시금 땀에 젖은 얼굴만 빤히 바라봤다. 푹 파인 브이넥 덕에 목덜미에 흐르는 땀이 지나칠 정도로 잘 보였다.

꽤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희락은 여전히 멍한 눈빛을 하고 있고, 그건 도선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그저 침묵하는 시간이 몇 분간 이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푸, 후훗, 하하핫!”

“……!”

도선은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희락이 눈을 크게 뜨며 마치 외계인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는 것도 더더욱 웃음보를 부채질했다. 꽤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한번 터진 웃음을 그치기는 쉽지 않았다.

보자마자 씩씩대기에 화가 난 줄 알았더니 주차장이 어쩌고저쩌고. 전화할 생각은 못 했지만 유료 주차장을 찾아서 주차할 생각은 했다니. 하물며 이 옷차림에 슈트 상의도 벗지 않고 그대로 전속력을 다해 뛰어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거기에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내가 왜 그랬지’라고 고민하는 얼굴까지 더해지니 웃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도선은 헛기침과 함께 서둘러 씰룩대는 입술 주변에 힘을 넣었다. 경악에 가깝던 표정에 점점 묘한 기색이 어렸기 때문이다. 희락은 시선만으로 얼굴을 뚫어 버릴 기세였다. 강렬한 시선이 이쪽을 똑바로 응시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섣불리 시선을 돌렸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아.”

희락이 천천히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가 현관 천장을 바라보며 짤막하게 탄식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는 고양이 앞에 쥐가 된 것처럼 숨도 쉴 수 없었다.

강렬했던 시선이 사라진 것에 안도할 틈은 없었다. 도선은 사과하고자 마음먹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앞에 두고 박장대소는 너무 무례한 행동이었다며 속으로 자책도 여러 번 했다.

목구멍까지 나왔던 미안하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불쑥 두 손이 다가왔다.

뜨거운 손가락이 양 볼에 부드러이 휘감겼다. 뺨에 달라붙는 감촉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는 것만이 그 순간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손가락보다도 뜨거운 입술이 겹쳐졌다.

더운 열기가 입 안에 확 들이닥쳤다. 침범한 혓바닥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안쪽을 탐했다. 입천장과 여린 살결을 건드리는 혀끝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했다. 타액과 숨결을 모조리 먹어 치우며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금방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았다.

도선은 자리에 주저앉는 대신, 아무렇게나 두던 양팔을 뻗어 매달리듯 희락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 포옹에 답례하는 것처럼 희락은 각도를 바꿔 다시금 농밀한 키스를 퍼부었다. 아찔하고 자극적이다. 심장이 얼마나 거세게 뛰는지, 이젠 연한 통증마저 느껴졌다.

모든 게 뜨거웠다.

입 안을 자유롭게 휘감는 혓바닥도, 뺨과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는 손끝도, 타액과 함께 넘겨 마시는 숨결마저도.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열기다. 전신이 타오르는 듯했다. 희락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였다. 그가 지금 얼마나 뜨거운지 맞닿은 입술로 시시각각 전해졌다. 그의 등을 끌어안은 손바닥에서도 옷가지를 뚫고 전해지는 더운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드디어 슬며시 입술이 떨어졌다. 도선은 색색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그러자 마치 기습을 하듯 아랫입술이 가볍게 빨렸다. 어루만지듯 한 번 훑고 떨어질 뿐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어깨가 크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희락이 연하게 눈웃음을 쳤다.

“미안해요.”

“예?”

나직이 들린 사과에 도선이 상기된 얼굴을 갸웃거렸다. 희락은 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땀을 많이 흘렸잖아. 불쾌하진 않았어요?”

“아니요. 전혀.”

도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저 뜨겁기만 했다. 희락이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는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 걸 느낄 여력도 없었다.

무심코 오른손을 뻗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손으로 닦아 주듯 쓸어내렸다. 희락이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 덕분에 손을 좀처럼 거두지 못했다. 몇 번이고 뺨을 쓰다듬자니 희락 역시 팔을 뻗어 도선의 왼손을 잡아 왔다. 손목 부근을 가볍게 쥐고서 손등과 손끝, 손바닥에 닿기만 하고 떨어지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손 곳곳에 와 닿는 뜨거운 숨결 덕에 다시금 전신이 흐물흐물 녹을 것만 같았다.

“당신이 웃을 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희락이 낮게 중얼거리며 엄지와 손목으로 이어지는 부근에 입 맞췄다.

“그게 날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말을 이으면서도 그의 입술은 어느덧 동그랗게 솟아오른 손목뼈를 간질였다.

“모르니까 그렇게 웃었겠죠?”

손등에 쪽 소리를 내며 입 맞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자기 손에서 이리저리 오가는 입술만 멍하니 응시하던 도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느릿느릿 대답을 건넸다.

“웃지 말까요, 앞으로.”

물론 희락이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이 순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나는 것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대꾸한 것뿐이다.

“자주 웃으라는 소리잖아.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희락이 키득거리며 붙잡았던 손목을 천천히 놔주었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서 들어오라는 말도 못 했다. 희락은 내내 구두를 신은 채 현관에 서 있었던 거다. 도선은 왜 이제야 눈치챘는지 속으로 후회하며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

“엄청난 하루네.”

희락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도선은 에어컨의 바람 세기를 강하게 조절했다. 벗어젖힌 슈트 상의를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손길에 기겁하며 허겁지겁 낚아챘다. 값비싼 옷가지가 자기 집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꼴은 도무지 두고 볼 수 없었다. 희락이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며 주름지지 않도록 옷걸이에 잘 걸어 두었다.

“정신 차려 보니까 당신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더라고요.”

반쯤 예상했던 것처럼, 오늘 희락은 바빴던 모양이다. 몇 가지 문제가 생겼고, 석찬에게 ‘없다고 해’라고 말할 수 없는 손님의 방문도 있었다고 했다. 하나둘 일을 해결하다 보니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싶을 정도로 지나 있었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왜 전화할 생각을 못 했을까.”

희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부리나케 사무실 빠져나가서, 그냥 무작정 차에 시동 걸고 있었다니까. 도선 씨가 전화하지 그랬냐고 하는 말을 듣기 직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어.”

말을 잇는 내내 이따금 스스로 우스웠는지 픽픽 웃음도 터트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선이 슬쩍 질문했다.

“저녁은 드셨어요?”

“아니. 도선 씨는 먹었어요?”

아직 식전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먹었다고 대답하면 희락이 아주 섭섭해할 게 틀림없었다. 지금 질문하는 것만 봐도 단번에 감이 왔다.

“저도 아직입니다. 뭐 하기도 귀찮고 해서 라면이나 끓일까 하던 참이었어요.”

“와아, 라면.”

희락이 요리 프로그램에서 순대와 김밥을 먹거나, SNS에 좋아하는 간식이라며 컵라면과 핫바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신기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희락이 ‘저 같은 사람은 스테이크나 썰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닙니다’라며 온갖 편의점 음식과 인스턴트 식품을 즐기는 걸 공공연히 밝히곤 했다. 그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운 좋게도, 희락이 가장 좋아하는 라면이라고 말했던 것이 주방 선반에 있었다. 계란이 없는 게 약간 아쉬웠다.

“도선 씨, 라면 먹고 가라는 말. 굉장히 중의적인 표현인 거 알고 있어요?”

장난기가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도선은 속으로만 웃으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저 라면 드시고 가라는 말은 안 했습니다. 제가 라면을 먹겠다는 거죠. 대표님도 드실 거면 두 개 끓이고요.”

“쳇. 두 개가 뭐야. 배가 차겠어요? 그리고 왜 도선 씨가 끓여? 내가 해요, 내가. 잠자코 있어 봐요. 나 씻고 나와서 얼른 끓여 줄 테니까.”

“예? 대표님이요? 아니, 대표님 씻으시는 동안 제가 끓이면 되죠.”

“아냐, 그냥 있어요. 아니면 내가 못 미더워? 나 라면 무지 잘 끓인다고.”

“그런 게 아니라, 손님한테 그런 걸 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거의 대다수가 라면 정도는 잘 끓입니다. 저도 라면을 실패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한동안 서로 자기가 끓인다며 입씨름이 이어졌다. 결국, 도선이 꺾였다. 대신 희락이 씻는 동안 계란을 사러 마트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집을 나서기 전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 문을 잠시 응시했다. 고개를 떨어뜨려 현관에 가지런히 벗어 둔 구두에도 시선을 줬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아까 직접 걸어 놨던 슈트 상의까지 확인을 마쳤다. 참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들었다. 그간 희락의 집을 오갈 땐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다. 그가 자기에게 가장 친숙한 이 공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상기되자 여태껏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재확인하는 듯한 감각이 드는 거였다.

선뜻 믿어지지 않았던 현실이 이제야 비로소 인식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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