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늘은 저녁에 접대가 있었다.
석찬에게 마법을 부려 달라고 해도 취소할 수 없을 아주 중요한 만남이었다. 왜 하필이면 저녁 접대냐는 푸념을 해 봤자 소용없었다. 별 기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비서의 눈초리만 받았을 뿐이다.
저녁 접대는 보통 술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요즘 희락은 저녁때 최대한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건강 생각은 아니었다. 담배랑 술을 전부 즐기니 하나라도 그만두자는 결심이랑도 거리가 멀다. 요 며칠 과음해서 위장이 경고음을 울려 대며 적신호를 깜빡거리고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술을 마시면 운전을 못 하기 때문이다.
석찬에게 운전을 못 하니까 술을 마실 수 없다고 말하면 결과야 불 보듯 뻔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제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꾸할 거였다. 여차하면 대리운전이라는 아주 간편한 수단도 존재한다.
석찬이든 대리운전이든. 전부 이용할 수 없는 편리함이다. 왜냐. 새벽에 전적으로 자기가 핸들을 쥐어야 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희락은 접대 장소로 향하는 차 뒷좌석에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석찬이 백미러로 이상하다는 듯 시선을 던졌으나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이 보일 때까지 술을 마셔 본 적은 없다. 늘 자기처럼 사업에 파묻혀 사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고삐 풀릴 때가 간혹 있을 뿐, 어느 정도는 절제할 줄 알았고 도를 넘어 본 적도 없다. 접대도 마찬가지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가도 한계를 넘진 않는다. 하물며 자기가 접대하는 사람들은 이쪽도, 그쪽도 서로 상대의 술잔을 거절할 수 있는 위치다. 그러니 이 이상 마실 수 없다고 적당히 에두르는 것쯤은 여태까지 수도 없이 해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꽤 까다로운 조건이다. 너도 나도 술 몇 잔은 비우리라 암묵적 동의가 성립되는 저녁 식사 자리.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딱 한 잔도 못 마시겠노라 하는 것은 지금껏 접대하며 해 본 적이 없다.
강 이사가 자리를 비웠을 때 휴지통이나 어디에 슬쩍 쏟아 버리기라도 할까. 아니지. 첫 잔은 무조건 받아서 마시는 걸 서로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잖아. 그럼 이건 어떨까. 최근에 위장에 구멍이 뚫려서 도저히 술은 안 된다고 말한다거나. 근데 몸이 그 정도로 축난 사람치고 나 너무 쌩쌩해 보이지 않나. 나 같아도 안 믿겠지. 티 나는 거짓말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안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차라리 거짓말이나 변명을 죄다 때려치우고 아예 이실직고를 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물론 희락은 생각난 그 순간 자기 자신에게 단호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것만큼은 죽기보다 더 싫은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 핑계를 대거나 파는 거 같은 행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접대 장소에 도착했다. 독대를 원할 줄 알았는데 강 이사가 너무나도 흔쾌히 석찬의 동석을 권했다. 희락은 자기 비서에게 미안했어도 그 순간만큼은 낭패라고 생각했다. 뭐가 뭐든 이제 강 이사에게 거짓말을 늘어놔야 한다. 그걸 듣는 순간 석찬이 어떻게 생각할까. 속으로 쓴웃음이 연거푸 쏟아졌다.
희락은 최대한 난처하고 미안해하는 표정을 꾸몄다.
“죄송합니다, 강 이사님. 제가 몇 시간 뒤에 해외로 나가는 출장 일정이 잡혀 있어서요. 술을 입에 대면 너무 피곤해질 거 같으니 오늘은 따라 드리기만 하겠습니다.”
참 같잖고 엉성한 변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생글생글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 이사는 호들갑스럽게 여러 말을 늘어놨다. 조 대표님 요즘 바쁘다고 들었지만 내 생각보다 더 바쁜 모양이라고. 일 끝나고 좀 쉬어야 할 텐데 괜히 시간 빼앗은 것은 아닌가 걱정이라고. 진작 말을 하고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았을 거라고.
그 말에 웃으며 열심히 추임새를 넣었지만 실은 자기 옆에 앉은 비서의 얼굴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죽을 맛이었다. 눈치가 절로 보인다.
간단한 얘기와 식사를 마치고 강 이사를 배웅했다. 나가는 길에 내심 아쉬워하는 거 같은 남자에게 골프 얘기를 흘렸다. 조만간 필드에 나가자고 말할 땐 강 이사가 줄 서고 싶어 안달이 난 자기 작은형 이름도 팔았다. 이쪽이 아쉬운 소리를 했으니, 이번에는 저쪽을 애타게 해야 공평한 만남이다. 셋이서 골프. 그 립서비스가 오늘 오간 계약 얘기보다도 더 큰 수확이라 여겼는지, 강 이사는 웃음으로 입술을 찢어 댔다. 출장 조심히 잘 다녀오라며 한껏 걱정해 주는 것은 덤이었다.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 공항으로 가면 됩니까?”
차에 타자마자 석찬이 운전석에서 스윽 뒤돌며 그렇게 물었다. 희락은 한쪽 손으로 눈가를 감싸며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래서 아까 석찬이 동석하는 게 내심 안타까웠던 거다.
“아닌 거 알면서 뭘 물어.”
민망한 나머지 되레 타박을 늘어놓자 석찬은 “혹시 모르는 거 아닙니까. 대표님이 요즘 너무 비밀주의시라, 제가 모르는 해외 출장이 생겼나 한 거죠”라고 능글맞게 대꾸했다. 비밀주의. 이 단어만큼은 꽤 찔렸기 때문에 희락은 더 아무 말도 못 했다.
희락은 석찬에게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 말에 석찬이 한결 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해외 출장을 핑계 댄 거치고는 목적지가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진심이냐고 묻는 듯한 눈초리에 희락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석찬이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몹시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대표님, 다른 건 다 숨기셔도 좋은데 건강 관련은 미리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회장님이나 본부장님께 무릎을 꿇더라도 변명 몇 줄은 준비를 하고 꿇어야죠.”
듣는 순간, 희락은 손뼉을 크게 쳐 가며 박장대소를 했지만 석찬은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닌 눈치다. 표정이 썩어 버린 비서에게는 미안하지만 희락은 한동안 그치지 않는 웃음을 멈추느라 꽤나 고생했다.
어찌 됐든 석찬에게는 참 미안할 뿐이다. 자기가 술병이 났든 감기에 걸렸든 집안사람들은 또 호들갑을 떨며 자기 비서를 붙잡고 면박 몇 마디는 할 게 확실하다.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집에 가고 싶어서 그랬다고.”
반쯤은 사실이고, 또 반쯤은 변명 비슷한 것이기도 했다.
나중에 석찬이 ‘섭섭하다, 서운하다, 너무하시다’ 잔소리 세트를 들이밀 때 ‘숨기는 것은 있었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적어도 없는 소리는 안 했다고 어깨를 의기양양 으쓱해 보이려면 석찬에게 결코 거짓말은 할 수가 없다.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라는 희락의 대답에 석찬은 더더욱 기가 차다는 듯 바람 빠진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집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술 한 잔도 한사코 마다하진 않았을 거다.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말이냐는 표정에 희락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이제부터는 침묵으로 일관하겠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핸들을 돌려 집으로 방향을 잡은 석찬이 골치 아픈 목소리를 냈다.
“또 어디 가서 사고 치지 마세요. 아니, 사고 치셔도 저한테 바로바로 말씀은 해 주세요. 그도 그럴 게, 아직 수습이 안 된 일도 있지 않습니까?”
입이 간지럽다.
여기서 ‘네가 말하는 그건, 이제 수습할 생각이 없어졌다’라고 하면 자기 비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라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경악 수준까진 아닐 거였다. 석찬과 함께 지낸 시간을 생각하면,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건 석찬이 먼저 ‘그’의 언급, 하다못해 ‘요즘 만나는 분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안 하는 것만 봐도 확실하다. 잔소리를 아무리 해도 도망칠 구석 정도는 마련해 주는 게 석찬의 총명하고 똑똑한 점이다. 요즘 일정이 전부 끝나면 무조건 집으로 가자고 하는 대표가 얼마나 수상쩍고 의심스러울까. 도대체 집에서 뭘 그렇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할 텐데.
물론, 물어봐도 아직 대답할 생각 없지만.
말을 안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독보적인 건 창피함이다. 아무리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고 지내는 비서라도, 말하는 순간은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당장 쥐구멍을 찾고 싶어질 거 같다.
그렇게 날뛰었는데. 그렇게나 싫은 표정을 하며 질색했었는데.
희락은 웃을 수밖에 없어서 웃었다. 요즘 자기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다. 정말이지 ‘그날’부터 어떻게 된 거 같다.
도선과 두 번째로 자고 난 다음부터 말이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석찬 앞이라고 여유롭게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모습은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어디에도 없다. 희락은 현관문을 거칠게 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욕실로 직행했다. 슈트를 거의 내동댕이치듯 벗어젖히며 시각을 확인한다. 저녁 11시 10분 전이다. 초조함 탓에 짜증 어린 욕설 몇 마디가 나갔다.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세안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거품 목욕이 아닌 샤워 부스에서 씻는 걸 택했다.
파우더룸에서 에센스니 수분 크림이니 이것저것 찍어 바르고 펴 바르며 얼굴에 한껏 광을 낸다. 머리칼도 이제껏 없던 정성으로 열심히 말리고 헤어 제품으로 가볍게 손질도 했다.
그다음 드레스룸으로 향한다. 발걸음이 무겁다. 여기가 본격적으로 한숨이 나오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독보적인 미모를 가진 사람 중에 자기 외모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희락도 그랬다. 그러니 이 외모를 잘 활용하려면 걸치는 것에 더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여태까지는 외모를 믿고 스타일리스트가 가져오는 것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을 걸쳤다면 이제는 뒤바뀐 것이다.
옷을 고르고, 또 고르는 작업이 이어진다. 오늘 가장 예뻐 보일 옷을 선정하는 것은 제법 진을 빠지게 했다.
저녁 시간이라도 언제든 달려와 줄 스타일리스트가 있었고, 예약을 잡지 않아도 전화 한 통이면 오시기만을 기다리겠다고 말해 줄 단골 고급 뷰티 살롱이 있다. 이 좋은 수단을 언제나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는 것은 바로 석찬 때문이다.
이 수단을 매일 늦은 밤마다 꼬박꼬박 쓰면 자기 비서 귀에 며칠 안으로 들어갈 거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어 잔소리가 이 정도로 끝나는 건데, 거기에 떡하니 ‘나 요즘 밤놀이 하느라 너무나도 바쁘단다’라는 증거를 제 손으로 건넬 순 없다.
아직은 그러기 싫었다.
결단코, 그와의 관계를 들키기 싫은 것이 아니다. 이제 와서 베타니 뭐니 왈가왈부하는 것은 완전히 우스운 일일 뿐이다. 단지, 지금 이 두근거림을 당분간은 그 외에 다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직은 스스로 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또, 잘 이해할 수 없기에 그저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해 보자는 심산도 있었다.
최근 명품관 라운딩을 돌며 온갖 브랜드의 옷을 닥치는 대로 보고 다녔다. 퍼스널 쇼퍼가 어울린다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 오더를 넣었고, 스타일리스트가 추천하면 그것 역시 거침없이 카드를 긁었다. 그때마다 자기 비서 입이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는 모습이 굉장히 웃겼다. 요즘 쌓인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푸는 거라고. 말은 그렇게 해 뒀다. 물론 석찬은 믿지 않았을 테지만.
옷은 늘 스타일리스트가 알아서 구입하곤 했다. 하지만 이젠 오히려 희락이 자투리 시간을 쥐어짜서 쇼핑에 함께하길 원하는 판국이다. 스타일리스트도 석찬만큼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늘 알아서 하라던 대표님이 갑자기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이 명품관 저 명품관 누비며 카드를 긁고 다니니 놀랄 만도 했다.
그래서 ‘집에 방도 많으니까 드레스룸을 하나 더 뺄까’라는 생각을 최근 하게 됐을 정도로 옷들이 즐비하게 쌓여 갔다. 그간 정기적으로 사들인 기존의 옷들이 있고, 어제도 맞춤 오더를 넣었다. 주문한 것들이 속속 도착하여 드레스룸은 말 그대로 포화 상태다. 그럼에도 항상 전신 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대보면 부족하다 싶은 거다.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렵다기보다, 뭘 입어도 자기 외모만큼 만족스러움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남들이 들으면 욕하겠지만, 희락에게는 요즘 그 무엇보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옷을 고르고, 신발을 고르고, 가장 마지막으로 손목시계까지 결정하고 나면 드디어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이 짓을 반복할 때 항상 같은 것을 생각한다.
나 지금 뭐 하는 걸까.
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아마도 정답에 가까운 것들이 금방금방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만, 아직 그걸 정답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인정해도 괜찮을까 망설여졌다.
훌쩍 인정해 버리면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뭘 해 봤어야 알지. 이런 게 죄다 처음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결정하고 판단하는지. 연애하는 사람들이 전부 대단해 보일 따름이다.
드디어 차에 올라탄다. 핸들을 잡고 목적지로 향하는 순간까지가 가장 긴장되는 거 같았다. 막상 얼굴을 보면 계속 쪼개기 바빠서 긴장다운 긴장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이 허락하고 컴퓨터와 휴대폰을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희락은 늘 인터넷을 검색했다. 최근에 가장 자주 검색했던 것은 ‘데이트 코스’였다. 세상에 이렇게 데이트를 할 곳이 많다니. 나 그동안 인생 헛살았네. 그런 자조 섞인 혼잣말을 하면서 이것저것 탐방했지만 뾰족이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일단, 서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주로 새벽 1시가 넘어서다. 여기서 대다수의 데이트 코스가 잘려 나간다. 딱히 어디로 이동하기에도 뭐하다. 하물며 자기도, 그 사람도 이제 막 퇴근한 참이니 부담되고 무리일 거 같은 코스는 엄두도 나질 않았다.
시간대가 문제라고.
사실, 이건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핑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검색에 걸리는 데이트 코스는 자기도 지나다가 한두 번은 들어 봤던 곳이 자주 나왔다. 이른바 명소라는 거다. 추천 글에 곁들여서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늘 ‘사람’이었다. 한둘이든 인산인해든. 사진 어디에나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주말엔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라고 적힌 명소의 사진을 보면 아주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람이 바글거렸다.
그 사진들을 보며 이런 상상을 했다.
거리를 걷다가 그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칠 수 있다. 어깨까지는 아니더라도 옷깃 정도는 스칠 수 있을 거다. 가끔 무언가를 바라보다가 예기치 않게 인파 중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일도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저께, 함께 편의점에 갔다. 오늘은 바빠서 간식을 허술하게 먹었더니 약간 출출한 것도 같다는 그의 말에 불쑥 편의점이 떠올랐다. 편의점 음식을 한창 찍어 올릴 때 ‘대표님, 그거 아세요?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 게 또 엄청 별미예요’라는 댓글도 같이 떠올랐다.
대표님이 최근 집까지 데려다주셔서 택시비가 엄청 굳는데 제가 이 정도는 살 수 있다, 라고. 그가 그렇게 말하며 계산하려고 했기 때문에 한바탕 만류했다. 조용한 심야의 편의점은, 희락이 한껏 흥분해서 내는 목소리 때문에 단숨에 시끌벅적해졌다. 결국 희락이 이겨서 카드를 꺼낸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그가 편의점 직원에게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인사를 하고야 말았다.
‘하고야 말았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자기에게 있어 그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 내 눈앞에서 벌어지면 절대로 안 됐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펼쳐졌고, 그려졌으며, 소리까지 시시콜콜 다 기억났다. 직원과 그가 시선을 마주쳤을 때 그의 사과에 괜찮다며 생글생글 웃던 직원의 입술, 돌아 나오며 서로 주고받았던 인사말들.
그의 앞에서는 차마 티를 낼 수가 없어서 일단은 계속 웃음꽃만 유지했다. 손끝이 온갖 짜증으로 딱딱하게 굳어 가도 최선을 다해 웃었다. 다만, 댓글이 권했던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은 실천할 수 없었다. 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굴뚝같았다.
이게 짜증이 날 일인가? 이렇게까지,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솟을 일이라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봤지만 늘 나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그랬다. 이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니 화가 날 일조차 아니다. 그런데 고작 그런 일에 자기 직전까지 분노로 이를 갈다니. 이 정도면 제정신이 아니지 않나. 너무 미친놈 같은 거 아닌가.
각인…….
그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다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쓰게 웃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떨칠 수 없는 단어였다.
그와 보낸 두 번째 밤을 기억한다.
각인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노팅까지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생각만으로 그친 건 자신의 자제력이 월등해서가 아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오메가가 아닌 그가 노팅으로 받을 신체적인 고통을 떠올려 가며 참은 것에 가깝다. 그를 엄습할 막대한 고통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거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각인도, 노팅도. 더 나아가 그날 우리가 뒹굴었던 침실을 자욱하게 뒤덮었던 자기 페로몬까지 다 그렇다고 치자. 섹스 한번 참 격정적이게 했다고, 정말이지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이었다고. 그날 그 충격적인 모든 것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도, 그보다 더한 문제가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은 ‘각인’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즉시 베타인 도선을 상대로 각인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물씬 들었다. 예사로운 아쉬움이 아니다. 아주 음습했고 끈덕졌다.
그가 각인됐으면 그 일도 없었을 텐데. 편의점에서 직원이 뭐라고 하든 그는 입도 벙긋 못 했을 거고, 대답 한 마디 할 수 없었을 거고, 갑자기 가라앉은 내 기분만을 염려하느라 오로지 이쪽만 응시했을 건데.
그랬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하고서 침대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날 밤을 꼬박 지새웠다. 도저히 잘 수 없었다.
자기가 이렇게 미친놈 같은데 사람으로 붐비는 데이트 코스가 다 뭔가 싶어졌다. 그의 얼굴이 코앞이라 당장은 싱글싱글 웃을 수야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굉장히 초조해질 거였다.
설마 분노 조절 장애 같은 건 아니겠지.
아직은 그런 농담도 속으로 해 보며 쓰게 웃을 수 있다.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일상은 변함없다. 그저 그가 얽힌 일에 미친놈이 되는 거 빼면 말이다. 머릿속이 풍비박산이다.
상황이 이러니, 그가 일하는 모습은 가급적 상상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가 입은 흰 와이셔츠를 벗기거나 칼라 안쪽에 입술을 묻고 연한 잇자국을 남기는 모습까지만 상상하고 멈춘다. 직접적으로 접객하는 모습까지는 절대로 그려 보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열이 확 끓어오른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볼만하겠지.
광기가 심해져서 똘기를 부리기도 하겠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간다.
예를 들어 도선이 오늘 어떤 음식을 누구에게 날라다 줬으며, 또 어떤 술을 누구에게 날라다 줬고, 또 어떤 주문을 누구에게 받아 왔는지. 그들이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그 누구든 간에 도선에게 지나치게 치근덕거리는 낌새를 보이진 않았는지. 그의 행적과 그를 둘러싼 모든 일을 문 지배인이나 석찬을 통해 시시콜콜 알아내려 한다거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문제다. 이 허무맹랑한 일이 불가능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이용하면 말 몇 마디로 아주 쉽게 할 수 있기에 더더욱 문제다.
지난 일을 이것저것 떠올리며 ‘내가 미친 거 같다’라는 생각이 ‘나 진짜 미쳤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뀔 때쯤 호디에가 코앞이었다. 희락은 오늘 호디에 바로 앞이 아닌, 한 블록 못 가서 차를 멈춰 세웠다.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시간을 확인한다. 그의 퇴근까지 앞으로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언제나 30분 정도는 일찍 도착하고 싶었지만 늘 생각만으로 끝나는 게 문제다. 오늘은 절대적으로 시간 부족이 이유다. 평소에는 전신 거울 앞에서 온갖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굴 때가 일상다반사다.
휑한 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일단 내렸다. 창문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 가며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지 확인했다. 옷매무새도 이동하는 도중 어디 주름이라도 잡히지 않았는지 살피고 또 살핀다.
최근에는 계속 이렇다.
어디 가서 사진이라도 찍힐 거 같거나 혹은 이따금 요청받고 나가는 프로그램 출연 등을 앞뒀을 땐 철저하게 점검했다. 그가 ‘대표님’ 사진을 저장하고 방송도 종종 찾아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사진이나 방송을 보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어딘가에 얼굴을 비칠 땐 예전과 차원이 다를 만큼 각별히 신경 썼다. 물론 그를 만나러 갈 때 가장 공들이는 것 역시 변함없다.
“나왔어, 나왔어.”
이미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굳이 목소리를 내 가며 자기 자신에게 확인 사살을 해 줬다.
멀찍이서 도선이 보였다.
희락이 연거푸 호흡을 가다듬었다.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서너 번. 긴장이 살짝 풀렸다는 게 느껴지자마자 성큼성큼 앞쪽으로 이동했다. 도선이 택시 정거장 쪽으로 가고자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잡아야 했다.
“도선 씨!”
쏜살같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도선이 움찔하며 천천히 등을 돌렸을 땐, 이미 바로 앞에 희락이 있었다. 심야의 어둠을 모조리 빛으로 채울 것처럼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며 도선이 끔뻑끔뻑 눈을 뜨고 감았다.
“대표님, 오늘도 오신 거예요?”
서프라이즈는 나름 성공한 거 같다. 담담한 표정이지만 눈동자에 깃든 놀라움이 손쉽게 읽혔다.
희락이 키득거리며 질문했다.
“왜요. 나 안 반가워?”
도선은 서둘러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요.”
그러더니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어 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 퇴근하고 쉬셔야 할 텐데, 요즘 계속 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오시잖아요. 죄송하기도 하고, 걱정도 돼서요.”
“죄송할 필요는 없지만 걱정은 조금 해도 돼요. 도선 씨가 내 걱정하면 기분이 좋으니까. ……아, 너무 많이는 하지 말아요.”
횡단보도 앞에서 차로 이동하기까지, 채 1분도 안 걸리지만 희락은 굳이 손을 꼭 잡았다. 매일 밤마다 손을 잡고 깍지를 끼지만 도선은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지 그때마다 눈을 휘둥그렇게 떠올리곤 했다. 겸연쩍은 눈빛을 감추듯 고개를 숙이는 것도 항상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여러 스킨십을 해 봤지만 도선이 가장 좋아한다고 느끼는 건 바로 손을 잡는 거다. 알아냈으니 그걸 실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희락은 생각이 날 때마다 손을 잡았고, 깍지를 꼈으며, 그 손을 끌어 올려 손등에 입 맞추곤 했다. 그러면 도선은 정말 보기 어려운 미소를 그 순간만큼은 희끄무레 지어 올려 주었다. 그가 기뻐하면 자기도 덩달아 기뻐진다. 그랬기에 최대한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해 주고 싶었다.
가까이 있는 몸에서 은은하게 페로몬 향이 났다. 희락은 기분이 좋아져서 푹 웃고 말았다. 페로몬이 짙은 극우성이라 이런 건 좀 이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은 별생각 없이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실수’에 가까웠다. 무심코 저질러 버린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바래다주는 길,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가벼운 포옹을 하며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묻히고 말았다. 아주 잠깐은 후회했고, 또 아주 잠깐은 무의식적으로 갈무리를 하지 않게 된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그러나 그다음, 코끝에서 솔솔 느껴지는 자기 향에 대단히 만족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는 계속 이어졌다.
다음 날 만난 도선의 목덜미와 손에서 자기 향이 거의 날아간 것을 인식했을 때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가슴 근처에서 희미한 초조함과 불쾌감이 꿈틀댔다. 헤어지는 길, 좋은 꿈 꾸라며 포옹할 때 전날보다 훨씬 더 가감 없이 페로몬을 흘리고 말았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있는 요즘이다.
희락이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던 몇 번을 제외하고는 거의 고정적으로 이 짓을 반복했다. 도선이 근래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공공연하게 알려 버리겠다거나, 하다못해 한번 해보자는 생각 아니면 관심 끄고 알아서 떨어져 나가라는 작업 걸기 퇴치용도 아니다.
그저 도선 몸에서 나는 자기 페로몬 향을 맡으면 이상하리만치 안심이 됐다. 기분이 날아갈듯 좋아졌다. 도선에게 불편함을 주진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매일 밤 집으로 들여보낼 때마다 자제가 안 됐다. 이미 자제의 영역이 아닌 듯도 했다.
도선을 보조석에 태우고서 희락도 운전석에 자리했다. 차를 출발시키며 일단은 가볍게 주변을 돌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정면만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간식은 뭐였어요?”
“오늘은…… 문 지배인님이 쏘셨는데.”
말을 멈추며 도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지어졌다 사그라진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해 보였다. 명백한 헛웃음이다. 곁눈질로 그 얼굴을 확인한 희락이 “왜요?”라고 물었다. 도선은 다시 한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래 간식 정할 때 사다리타기를 가장 많이 하거든요. 직원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승자가 번호를 지정하는 건데요.”
“와아, 나도 해 보고 싶어. 메뉴는 몇 개나 있어요?”
“여섯 개? 일곱 개? 대표님도 언제 한번 오셔서 같이 하시면……. 다들 좋아할 겁니다. 대표님 오시는 거 직원들이 기다리기도 하고요. 요즘 발걸음 뜸하신 거 같다고 얘기도 나오고.”
“아하핫!”
한 번 웃고 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곁들였다.
“얼굴 한번 비쳐야겠네.”
“매번 그런 식인데, 며칠 전부터 지배인님이 저한테 직접적으로 물으시는 일이 좀 생겼어요. ‘도선 씨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라고요. 전 좀 당황했는데 직원들도 전부 저한테 고르라고 하고.”
눈치들도 빨라, 하여간.
희락은 내색하지 않으며 속으로만 쓰게 웃었다.
“그래서 오늘은 출근하면서 본 튀김이랑 전을 무심코 말해 버렸는데, 그게 실수였던 거 같아요.”
“실수? 왜요. 맛이 별로였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 근방에 배달해 주는 곳이 없거든요. 전 손님이 오셔서 휴게실 나가는 바람에 몰랐는데, 나중에 동료가 귀띔을 해 줬어요. 지배인님이 직접 나가셔서 한 보따리 사 가지고 오셨다고. 너무 죄송한 거예요. 만만한 피자랑 치킨으로 할 걸 후회도 들었고요.”
희락도 그 말을 들으며 잠깐 고민에 빠졌다.
석찬을 통해 격려금 조로 금일봉 봉투를 몇 개 찔러 넣어 주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다. 다만, 이게 너무 노골적이라는 거다. 여태까지는 눈치껏 챙겼다지만, 이쪽이 대놓고 포상을 해 버리는 순간 지금보다 더한 배려가 도선에게 주어질 거였다. 희락 입장에선 꽤 좋지만 도선 입장에선 아마 상당히 부담스러울 게 확실하다. 가뜩이나 지금도 여러 가지 질문이나 시선을 받을 텐데.
“지배인이 나가서 직원들 간식 좀 사 올 수 있지 뭐 어때. 편안하게 생각해요.”
도선은 쉽게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을 지었지만 희락은 일단 무시하고서 이것저것 질문을 꺼냈다. 빨리 저 야식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날려 버리는 게 우선이다.
“그럼 아직 출출하진 않아요?”
“네, 대표님은요?”
“나도 오늘 저녁을 늦게 먹어서. 피곤한 건 어때요?”
“저야 아직 쌩쌩할 시간이죠. 저보다 대표님이 더 피곤하실 거고요.”
“나도 괜찮아. 내일은 또 웬일로 오전 일정이 없어서요. 점심때까지 집에서 늘어지게 잘 수 있어.”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면서 심야의 쾌적한 도로를 누빈다. 최근 며칠은 거의 드라이브 데이트를 했다. 도선이 누굴 보는 것도 싫고, 누가 도선을 보는 것도 싫고. 이러니 밀폐된 장소에서 단둘이 데이트 같은 기분을 좀 내려면 드라이브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어차피 이런 시간이니까 뭘 하고 싶어도 마땅히 할 게 없다며 자기 자신에게 열심히 변명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올림픽 대교, 청담 대교, 영동 대교, 대교, 대교, 대교……. 말 그대로 ‘야호, 신나는 심야의 대교 투어!’ 이런 거지.
언제였더라. 친한 친구들끼리 술을 마실 때였다. 이름만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배우와 만나고 있는 녀석 하나가 키득거리며 그런 말을 했었다. 데이트 코스라고는 집 아니면 드라이브 정도라고 불평하면서도 얼굴은 아주 웃음으로 녹아 흘렀다. 집에서는 늘어지기 쉬우니 잠깐 얼굴만 보고 헤어져야 할 땐 차가 답이라고. 너희들이 이 고충을 알겠냐면서 우는 시늉을 했지만 거기 모인 사람 중 그 누구도 그걸 고충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희락을 빼고 말이다.
서로 외로울 때 부담 없이 만나서 곁을 나눠 가지는 사람은 몇 있지만 본격적인 사랑이나 연애라는 단어를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사람 얼굴만 봐도 가슴이 터질 거 같다거나.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싹 풀린다거나. 그런 건 정말이지 남의 얘기였다.
사람은 조금만 달려도 가슴이 터질 거 같고, 아주 극하고 무서운 상황에 처했을 때도 가슴이 터질 거 같다고들 하는데. 매번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터져 버릴 거 같으면 연애 한번 하기 무진장 어렵겠다. 매일 심장이 펑펑 터질 걸 각오하고 만나야 하다니.
친구나 지인의 연애담을 들을 때마다 그런 우스운 생각이나 했었다. 스스로 농담 따 먹기나 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희락은 친구의 ‘고충’을 들으며 녀석의 처지가 꽤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연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남의 장소가 그토록 제한되면 무척 고달플 거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 즉,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거 같다’라는 그 괴상망측한 말을 자기가 자초해서 입에 담을 수 있게끔 하는 사람이 생기면 차와 집 정도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아지지 않을까. 골프나 볼링, 수영. 애인이 위험한 것도 괜찮다고 하면 보드나 스킨스쿠버도. 오페라를 보거나 쇼핑을 하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그보다는 정기적으로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락이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들을 줄줄 늘어놓으며 ‘애인이 생기면 이런 걸 같이 하고 싶다’라고 말했을 때, 친구들은 반반으로 나뉘었다. ‘취미 생활 같이 하면 좋기야 좋지’라고 찬성하는 몇몇이 있었다면, 또 몇몇은 ‘애인이랑 계절별로 종목 바꿔 가며 운동을 하시겠다? 연애 말고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삼으면 되긴 되겠네’라며 박장대소를 했다. 그때 그들이 비웃든 말든 희락은 기필코 좋아하는 사람과 운동 두세 가지는 꼭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뭔지.
이제 친구가 이상한 멜로디를 붙여서 흥얼대던 그 ‘대교, 대교, 대교’ 노래를 자기도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과거의 자기 모습을 돌이켜볼 때마다 쓴웃음이 터진다. 물론 같이 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다만, 자기가 그걸 버틸 수 있겠느냐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머릿속에서 종목을 바꿔 가며 이것저것 상상해 봤지만 쉽지 않다. 수영장이든 볼링장이든, 더 나아가 오페라하우스나 백화점도 하루하루 대관해 버리는 식으로 진행하면 가능할 것도 같다. 물론 도선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러니 여기서도 시간 핑계를 댄다. 도선과 생활 패턴이 맞지 않으니 뭘 함께 하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라면서 말이다.
오늘 아침부터 도선을 보면 꼭 말하리라 마음먹은 게 두 가지 있다.
지금 이 중 하나를 실행할 참이다.
이걸 입 밖으로 꺼내 운 좋게 도선의 승낙까지 떨어지는 순간, 이제 시간 차 변명은 스스로 할 수 없을 거다.
희락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도선 씨, 있잖아요.”
“네.”
“호디에 면접 때 처음부터 야간 파트를 희망한다고 했었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왜요? 페이가 세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변화라고 해야 할까요.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나왔지만, 생활비 정도는 또 벌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집에 오는 일과를 반복하면 또 평소와 다를 게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생활 패턴을 깨 보고 싶은 충동적인 마음으로…….”
“으음.”
희락은 앓는 소리로 달싹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생각보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차라리 돈 때문이라면 좀 더 이런저런 허울 좋은 소리 붙여 봤을 텐데 그게 아니라니 더더욱 말이 잘 나가지 않는 거다.
아니야, 결심했잖아. 오늘은 말을 꼭 할 거라고.
희락은 고민을 끊어 내듯 마음을 다잡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도선 씨가 나랑 비슷한 시간에 일을 시작해서 끝마치면, 음,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같이 있는 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니까, 나는 그게 정말 좋을 거 같거든요?”
“아…….”
무슨 소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듣기에도 무지막지하게 두서없고 정신 사나운 말투다. 도선이 이해했다는 듯 가볍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게 고맙기까지 했다.
“그렇지. 이거 절대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요? 내 희망 사항, 그랬으면 좋겠다는, 아…… 근데 이미 이런 말을 도선 씨에게 해 버렸으니 아예 강요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요.”
핸들을 있는 힘껏 쥐고서 계속 막히는 말을 어찌어찌 이어 붙였다. 옆에서 대꾸가 들려오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곁눈질을 했다. 도선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잔잔하게 이어지는 미소를 바라보며 희락이 혀를 찼다.
나 왜 지금 운전 중이지. 키스해야 하는데.
희락은 아쉬운 마음으로 계속 곁눈을 유지했다. 생각보다 오래 지어졌던 미소가 드디어 천천히 사라졌다. 늘 보는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간 도선은 차분히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사이를 두고서 미안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런데 좀 어려울 거 같네요.”
희락은 낙담했다. 강요는 아니라고 말한 주제에 말이다. 조금 전 확인한 미소 때문일까. 이것보다는,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침묵할 때는 아니다. 그냥 한번 해 본 소리라고, 괜찮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도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간은 경쟁이 좀 있어서요. 야간에서 주간으로 시간대를 옮기는 게 그리 쉽게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신청서는 한번 써 보겠습니다. 하지만 대표님이 크게 기대하시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구나.”
아주 짧은 대답이 나갔다. 왜냐하면, 듣는 즉시 머리를 풀가동했기 때문이다.
문 지배인에게 조금만 언질하면 바로 해결될 문제지만 그러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그걸 했을 경우 도선이 느낄 부담이다. 그가 느낄 부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생각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 사이를, 이 시간을 좀 더 길게 이어 가려면 부담은 정말이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감정이다. 가뜩이나 도선이 자기를 어려워하는 거 같은데, 여기서 그런 감정까지 쌓이기 시작하면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어쨌든 그게 문제라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겠다.
희락은 몇 가지 떠오른 해결책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서 힐끗 도선을 바라봤다.
석찬의 말에 따르면 문 지배인이 도선을 채용한 것은 모든 걸 다 젖혀 두고 그가 ‘베타’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구할 때 대놓고 베타 우대를 적진 않지만 아무래도 주류를 취급하는 곳들은 베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사불성이 된 손님이 페로몬으로 사고를 치는 일이 생기면 알파나 오메가는 수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앳된 얼굴도 한몫했겠지.
자기보다 두 살 연상인 사람에게 앳되다는 표현을 쓰는 날도 다 오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동안은 도선의 무기 중 하나임에 확실하다. 처음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수수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생각을 해 보니 절대 그렇지 않았다. 판단 착오다. 자기가 지금 완전히 홀려 있고 미쳐 있는 상태라, 객관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호디에 채용에 나이 제한은 없지만 문 지배인과 희락의 의견에 따라 갓 스물을 넘긴 20대 초반의 지원자들에게는 ‘이번에는 아쉽게도……’로 시작하는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을 선호하긴 했으나 서른 중반에 접어든 사람을 냉큼 뽑은 일도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면접을 본 순간 문 지배인 머릿속에는 나이 따윈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겠지.
그 판단이 자기에게는 꽤 감사한 일이다. 문 지배인이 발탁하지 않았으면 그와의 만남도 없었을 테니까. 덧붙여서, 도선의 동안에도 굉장히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 사람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잘됐다고.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
*
오늘도 무사히 대교 탐방을 마쳤다. 그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면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시각을 확인하니 이제 머지않아 해가 뜰 시간이다. 여름에는 왜 이렇게 해가 빨리 뜨는지 원망스러운 요즘이다.
처음에는 좁디좁은 길목에 당황했지만 이제는 비교적 수월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양옆으로 즐비하게 펼쳐진 술집이며 주점도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불 켜진 곳이 드물다.
조금 더 앞으로 이동하면 모텔촌이 버티고 있다. 여기는 아직도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하다. 희락이 속으로 혀를 차는 지점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곳을 보고 우범 지역이라고 하는 거겠지.
술집과 모텔촌을 지나면 드디어 낡은 빌라들로 형성된 주택가가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도선의 보금자리였다.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 집 놀고 있는 방도 많은데. 호디에랑 거리도 엄청나게 가까운데.
입술을 간질이는 이 생각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좀처럼 목구멍으로 튀어 나가질 않았다.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나름 이성의 한 줌 정도는 남아 있는 거 같다. 이런 말까지 입에 담으면 그땐 부담의 차원을 한층 더 뛰어넘는 거라며 자기 자신을 어르고 달랬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도선이 꾸벅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매번 감사합니다. 매일 밤마다 대표님 덕분에 집에 편안하게 오는 거 같아요.”
“내 이름 부르면서 반말로 해 줬으면 더 듣기 좋았을 텐데.”
희락이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대꾸하자 도선이 눈가를 찡긋거렸다. 아직 맨정신으로 그걸 하기엔 도무지 무리라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희락은 한 번 웃고서 멀뚱히 서 있는 도선의 몸을 끌어안았다. 매일 이어지는 이 의식과도 같은 행위에 그 역시 익숙해진 듯 거부감이 없다.
도선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늘 빙빙 돌아서 집에 오는 거 싫거나 귀찮지는 않아요?”
“아니요,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습니다.”
딱 자른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희락은 기분 좋게 웃으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넣었다.
드디어 오늘 하고자 마음먹은 것 중, 남은 것 하나를 해야 할 순간이다. 이건 아까 ‘출근 시간대 이동’보다 더 입에 담기가 어렵다. 자꾸 이유 모를 근질거림이 온몸을 들쑤셔 댔다.
“도선 씨.”
“네.”
“내일, 아니지. 이제 오늘이구나. 하여간 목요일이잖아요.”
“그렇죠.”
“도선 씨 오프라는 거기도 한데.”
“맞습니다.”
“그, 혹시 이따 약속 같은 거 있다거나…….”
희락이 졸지에 말끝을 흐리더니 결국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운 이마며 눈가가 삽시간에 확 일그러진다. 표정만으로 지금 이 순간 분출할 수 있는 온갖 짜증을 다 발산했다. 도선에게 이 낯짝을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야! 아니지, 아니잖아! 약속을 왜 물어봐. 있다고 듣는 순간 끓어오르는 짜증은 어떻게 할 건데. 잠이 오겠냐? 그러니까 그냥 좋은지 싫은지만 물어볼 거였잖아! 이거 하나를 제대로 못 해! 거울 보면서 이 순간을 뭐 하러 연습했냐! 아오, 이 등신! 머저리 새끼!
도중에 말을 흐린 탓일까.
도선은 잠자코 희락의 말을 기다린 듯했다. 그럼에도 다음 말이 좀처럼 이어지지 않으니 뭔가 이상하다 싶은 모양이다. 도선은 희락의 품에서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일단 들은 질문에만 대꾸해 주었다.
“약속은 없습니다.”
“……! 와아.”
희락이 도선의 어깨에 이마를 푹 묻고서 안도의 웃음을 터트렸다.
“도선 씨, 지금 도선 씨가 사람 하나 살린 거 알아요?”
“네? 제가요?”
“응. 하여간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희락이 천천히 몸을 떨어뜨렸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과 단번에 시선이 부딪쳤다. 그 눈빛에 그 어느 때보다도 초조함과 긴장이 몰려왔다.
“도선 씨만 괜찮다면, 우리 집에 갈래요?”
덕분에 목소리가 엉망이다. 마지막에는 음 이탈과 엇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가기까지 했다. 최악이다. 가까스로 웃고 있는 입술만큼은 제대로 된 형태로 보이게끔 최선을 다할 뿐이다.
도선이 두어 번 눈을 끔뻑이더니 이윽고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요?”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도선의 얼굴이 한층 더 이상하다는 빛을 띤다. 들은 말이 쉽게 이해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가느다랗게 유지했던 평정심이 뚝 끊겼다.
희락은 되는대로 생각나는 말을 꺼냈다.
“음흉한 생각도 아니고, 그, 뭐지? 뭘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손끝 하나 안 건드리, 아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네. 이거는 무시해요. 못 들은 걸로 해 주고요. 그냥,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우니까? 내가 당신을 보내기 너무 싫으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좋을 거 같은, 그런 기분……. 아! 내가 도선 씨 집에 가는 것도 좋긴 좋지만, 그래도 침대가 우리 집이 좀 더 넓으니까 잘 때 편안한, 아! 잔다는 건 야한 뜻으로 한 게 아니……. 하아. 미치겠네.”
뭘 위안으로 삼을까. 그나마 육두문자는 안 섞었다고? 아무리 쪽팔려도 그의 시선만큼은 피하지 않았다고?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얼굴이 뜨겁다. 보나마나 뺨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붉디붉어졌을 거다. 정말 미칠 거 같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이해할 수도 없고, 생각나지도 않았다. 땅을 파서라도 구멍을 만들어 숨고 싶었다. 얼마나 진땀이 나는지 제대로 서 있는 것도 어렵다.
뺨을 손바닥으로 비벼 가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있던 도선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대표님, 제가 잘 이해가 안 가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뭔데요?”
“정확하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호디에랑 대표님 집이 차로 10분도 안 걸릴 거 같거든요.”
“네, 그렇죠. 맞아요.”
“그럼 여기까지는 왜 오신 거예요? 아까 진작 말씀하시지.”
“그거야……!”
무심코 던진 목소리가 너무 커서 허겁지겁 말을 멈췄다. 이쪽은 지금 난리가 났는데 앞에 서 있는 도선의 얼굴은 너무나도 담담하다.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 비교가 되니까 당혹스럽고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거야, 말할 타이밍을 못 잡아서.”
그랬다.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아까 몇 번이고 말할 기회가 있었지만 좀처럼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말하기보다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만약 운전하며 말했다면 창피함과 흥분으로 광란의 질주라도 했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사고 나기 딱 좋았으리라.
“대표님.”
도선이 무뚝뚝한 얼굴로 희락을 바라봤다.
“네?”
“대표님, 정말 사랑스러우신 분이세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좀 식을 거 같은 열이 삽시간에 다시 치솟는다. 심지어 아까 얼굴에 들이닥쳤던 열기보다 한층 더 뜨거워졌다. 우는 것도 아닌데 눈 안쪽까지 타들어 갔다. 이런 뜨거움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뭐, 뭐예요! 갑자기 왜 그래!”
한껏 당황하는 희락과 다르게 도선은 여전히 담담하다.
“지금 대표님 보니까 굉장히 말하고 싶어져서요. ……아. 이거 혹시 실례되는 말일까요?”
희락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야 좋죠. 당신이 예쁘게 봐 주면…….”
이마를 비비며 열을 어떻게든 삭이려 노력했다. 가뜩이나 열대야로 바깥이 더운데 몸까지 뜨거우니 숨이 턱턱 막힌다.
도선이 조용히 속삭였다.
“왜 대표님이 타이밍을 못 잡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다음부터는 말씀 편하게 하세요.”
“……!”
“미리 말씀 주시면 더 좋을 거 같아요. 그래야 저도 목요일에 가급적 시간을 비워 두기 편할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덧붙여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방문을 권유하실 땐 딱히 목요일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희락이 소리 없는 탄식과 함께 살짝 입을 벌렸다. 이쪽은 말 한 마디 내뱉는 게 어려워서 전전긍긍 난리도 아니었는데 도선은 너무나도 담담하게 술술 말하니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대표님이 제 쉬는 날에만 맞춰 주시면 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대표님은 보통 주말에 쉬시나요?”
“네? 아, 네! 거의 그렇죠?”
“저 주말 평일 상관없이 6시까지만 나가면 되니까요. 시간 잘 맞추면 대표님과 지금처럼 얼굴 보고 얘기할 시간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생각…… 대표님?”
눈앞의 남자를 낚아채듯 품 안에 가두고 꽉 끌어안았다.
“당신 진짜 대단한 거 알아?”
감탄으로 범벅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도선이 “네? 저요?”라며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그래요, 도선 씨. 내가 정말 어렵게 꺼낸 얘기를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니까 부럽기까지 하다고.”
그러자 도선이 잠시 고민하더니 슬쩍 대답했다.
“대표님도 저처럼 약간 긴장을 하시면 좋아요.”
“뭐요? 긴장?”
그거 오늘 수도 없이, 정말이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했는데 말입니다.
뒷말은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할 뿐이다. 거기까지 말해 버리면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모양새가 깡그리 무너질 판이다.
“저는 늘 긴장하니까요. 좀 지나치게 긴장하는 편인 거 같긴 합니다. 뭘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일단 들은 말에 대답하고, 좀 부족하다 싶으면 덧붙이기도 하고. 딱 그것만 생각하게 되거든요. 매 순간 집중력 향상 테스트를 하는 기분으로…….”
희락이 큭큭 웃으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 사람, 담담한 얼굴을 하면서도 속은 또 굉장히 소심한 타입인가.
두 번째 몸을 섞던 날에도 그가 ‘긴장’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지금 긴장을 정말 많이 하고 있다고 중얼거렸던 그의 정신없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긴장을 하고 있으면 바로바로 머리가 안 돌아가잖아요. 얼어붙으니까요. 깊게 생각하고, 들은 말에 의미 부여를 한다거나, 내 모습이 어떨까 점검하고. 이런 걸 할 겨를이 손톱만큼도 없거든요.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제가 평소에도 그렇지만 대표님께 한층 더 딱딱하게 굴 때가 있을 텐데요.”
이 사람도 알긴 아는구나.
희락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죠. 아주 섭섭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럴 땐 제가 늘 하는 긴장보다 두 배? 아니, 한 서너 배? 그 이상 하고 있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얼굴을 뒤덮은 웃음이 한결 더 짙어졌다.
“어떡해요? 매사 그렇게 긴장하면.”
“그러니까요. 저도 좀 나아지면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의 허락도 떨어졌기에 이제 집에 데려가는 일만 남았다.
차에 도로 태울 생각으로 꼭 안고 있던 몸을 풀어 준 거였다. 그런데 도선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예상 밖의 얘기를 꺼냈다.
“그럼 저, 기왕 이렇게 왔으니 집에 좀 들어갔다 오겠습니다.”
목소리가 나가기 전에 눈빛이 먼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도선이 아주 잠깐 미소 짓고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대표님 집에 묵는 거니까요. 저번에는 옷을 빌려주셨는데 아무래도 좀 커서. 제 옷을 가지고 오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아…….”
그런 거라면 괜찮다. 희락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와요”라고 말하자, 그도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라고 대꾸하며 등을 돌렸다.
도선이 빌라 현관 안으로 자취를 감췄을 때,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희락은 무릎을 접어 몸을 수그렸다.
사랑스럽다고 들었다.
“와아…….”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여러 번 헤집으며 실실 웃음을 쪼갰다. 폼이 안 나도 이렇게까지 안 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말실수는 오늘 전부 다 한 거 같은데.
그럼에도 도선은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이거는 진짜…… 아, 장난 아니네. 좀 아픈데.”
희락은 가슴 근처를 여러 번 손바닥으로 누르듯 비볐다.
오늘 드디어 알았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 * *
이렇게만 보면 화보집이 따로 없다.
잘나가는 광고 모델들과 미팅도 갖고 촬영 현장도 몇 번 드나든 적 있지만 그때마다 늘 ‘대표님’을 떠올렸다. 몇억씩 돈 발라 가며 굳이 모델을 기용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처음에는 농담처럼 생각했는데 요즘은 정말 진지하게 ‘대표님이 하시죠’라고 권해 볼까 싶었다. 물론 대표님은 깔깔 박장대소를 하며 별소릴 다 한다고 말하겠지만. 대표님이 인터뷰와 SNS 등으로 대중에게 얼굴이 팔리고 심지어 방송에도 이따금 출연하는 와중이다. 눈앞의 대표님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모델이 되리라는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해졌다.
좌우지간 지금 그 멋진 대표님은 책상에 앉은 채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다.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고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대표님은 어떤 각도에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화사하고 우아하다.
하지만 그 대표님이 눈을 빛내 가며 바라보는 내용물은 대낮부터 회사 사무실에 앉아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님은 러브젤 고르기에 한창이다.
지금은 아침 10시다.
“대표님.”
석찬이 정말 어렵사리 운을 뗐다. 희락은 어깨를 살짝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 너무 몰입했네.”
“그렇습니다. 제가 옆에 서 있는 것도 잊으셨죠?”
“그러니까 말이야. 음, 역시 이번에도 향은 무향으로 해야겠어. 향이 있는 건 아무래도 거북하더라고.”
“그러십니까.”
정말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에 대충 맞장구를 쳐 주며 석찬이 한숨을 푹 쉬었다.
희락이 성인 용품 사이트에서 러브젤 사용 리뷰를 읽는 풍경을 목격한 것도 벌써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기겁하며 ‘아침 댓바람부터 뭐 하시는 겁니까. 사무실에서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잔소리를 했다. 희락은 키득 웃으며 ‘이 대표실에 선약 없이 들어올 사람이 우리 비서님 말고 또 있어?’라고 반박했다. 그다음부터는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대표님이 좀 이상하다.
그날이라 함은 윤도선과 이번에야말로 협상을 마무리하겠다며 대표님이 이를 갈던 날이다.
희락이 정확하게 말해 준 것은 그다지 없었다. 은근슬쩍 ‘비밀주의’라는 말을 입에 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애매모호한 것들이다. 구체적인 말을 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걸까. 어쩌면 본인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어느 선까지 말하면 좋을지 모르는 거 같기도 하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말하기 싫다거나.
석찬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협상은 어떻게 됐냐고.
희락 역시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실패했다고.
그 대답을 들은 순간부터 석찬은 무언가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실패를 말하는 희락의 표정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자존심 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희락이 실패를 운운하는데 이런 눈빛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통을 삭이거나 씩씩대거나. 정말이지 혈압이 콱 터질 것만 같은 눈빛으로 욕설 한두 마디 정도는 입에 담아야 그게 자기가 아는 대표님의 모습이었다.
그날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 자꾸만 벌어졌다.
일단, 희락은 몸소 쇼핑을 했다. 그동안은 일체 스타일리스트가 전임하다시피 했다. 옷걸이가 이렇게 훌륭하니 뭘 걸쳐도 태가 나지 않냐며, 쇼핑할 시간 있으면 서류나 한 장 더 보겠다고 말하던 그 대표님이 말이다. 시간을 쪼개 몸소 명품관에 발걸음을 하고 라운딩을 돌며 이것저것 사들이는 모습은 아주 적응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푸는 거라는 그 말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대표님 역시 믿으라고 한 소리가 아닐 거다. 그저 핑계일 테지.
또, 희락은 늘 시간을 엄수했다.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을 싫어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허송세월 보내는 걸 아주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싫어하는 걸 남에게도 권하는 사람이 아닌 희락은 늘 칼같이 시간을 지켰다.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대표님의 출근길을 수행하는 석찬은 항상 죽을 맛이었다. 정해진 시간보다 십여 분 정도 일찌감치 내려오는 대표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정해진 시간이 훌쩍 넘도록 대표님이 주차장에 내려오지 않았던 그 첫날. 석찬은 내일 아침 지구가 멸망하거나 희락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연락을 하는 것도 시간이 아까웠다. 발을 동동 구르며 펜트하우스에 들이닥쳤다.
희락은 드레스룸에 있었다. 불길한 예감과 다르게 상사의 얼굴이 아주 멀쩡하다는 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멀쩡하진 않았다. 전신 거울 앞에서 이 슈트 저 슈트를 몸에 대보는 표정이 그리 밝진 않았으니까.
희락은 오늘따라 이거다 싶은 게 없다고 했다. 거기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고민 끝에 ‘그러셨군요’라는 대답 한 줄만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희락은 자기 옷차림을 정기 보고 하듯 사진을 찍어 누군가에게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SNS에 올리는 줄 알았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석찬은 그 ‘누군가’를 떠올릴 때 단번에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물론, 희락이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입에 담을 생각이 없었다. 휴대폰을 꼭 쥔 채 끙끙대던 대표님이 답장이 오기가 무섭게 냉큼 확인하고 안심했다는 듯 씩 웃는 얼굴을 매일같이 보고 지낸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입에 담으려면 어느 정도 두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다.
초반에는 느닷없이 일정 취소를 요구하는 대표님 탓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요즘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일에 더 매진했다. 아니, 매진했다기보다 일을 몰아서 하는 것에 가깝다. 워커홀릭인 대표님이 요즘은 최대한 많은 휴일을 만들고자 혈안이 됐다. 특히 ‘목요일’을 통으로 비울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만 같았다. 희락은 이따금 주말 출근은 물론이고 그토록 싫어하던 야근을 할 때도 있었다.
대표님이 달라졌다.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유도 짐작 가는 게 있다.
짐작 정도가 아니라 백 퍼센트 확신해도 부족함이 없다. 속으로는 ‘언제는 베타랑 잤다는 충격에 하늘이 무너진 거 같은 표정을 지으시더니’라고 골백번 놀리더라도 절대 입에 담진 않았다. 감히 대표님께 그런 망발을 할 수 없다는 충성심 따위는 아니다.
희락이 언젠가는 그 스스로 말을 할 거였다.
그때 어떤 표정을 지어 가며 그 사실을 고백할까. 기대가 아주 컸다. 그 순간이 빨리 오기만을 은밀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 석찬은 그 기다림을 접고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참 아쉬웠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대표님, 저한테 잠깐 시간 좀 내 주셨으면 합니다.”
그제야 희락이 모니터에서 눈을 거두며 우두커니 서 있는 석찬에게 시선을 기울였다.
“아, 나한테 할 말 있었어?”
“예.”
“그러고 보니 내가 앉으라는 말도 안 했구나? 미안. 내가 요즘 이래.”
“괜찮습니다.”
희락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파로 몸을 앉혔다. 담배가 매달린 손에 불을 붙이고서 석찬 역시 상석과 가장 가까운 우측 소파에 자리 잡았다.
“대표님. 제가 요즘 호디에에 들를 때마다 문 지배인이 절 붙잡고 도선 씨 얘기를 합니다. 오늘은 어땠다거나, 어제는 어땠다거나.”
석찬이 은색 안경테를 한 번 치키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문 지배인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아실 테니까요.”
“큭큭.”
희락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좋은 기분도 아닐 거였다.
잠시 생각하던 석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
“특정인 한두 명 입을 틀어막는 건 아주 쉽습니다. 하지만 불특정다수 입을 틀어막는 건 꽤 어려운 일이죠. 이것도 아실 테지만요.”
“그렇지.”
희락이 깨끗하게 수긍했다. 은은한 미소가 감도는 남자는 유유자적 담배를 피울 뿐이다. 무어라 더 말할 기색이 없는 대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석찬이 결국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 호디에 직원들 사이엔 소문이 거의 다 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아 전무님이나 상무님, 회장님 귀에도 들어갈 텐데요. 그럼 저한테 오는 연락은 어떻게 응대할까요.”
석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락이 딱 잘라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석찬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알겠습니다.”
“귀찮겠지만 수고 좀 해 줘.”
“제가 귀찮을 게 뭐 있습니까. 제 선에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긴 합니다만.”
“그렇지. 네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순간 나한테도 연락이 오겠지.”
미소 짓는 얼굴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무척이나 건조했다.
“시간 끄는 거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어. 아직 답이 안 나왔으니까. 아니, 답은 진작 나왔지만 아주 정확하게까지는 또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을 때까지 끌고 싶은 마음도 있고.”
답이 안 나왔어요? 직접 러브젤까지 고르시면서요?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 싶었다.
석찬이 부들대는 아랫입술을 윗입술로 꾹 짓누르듯 덮었다. 이런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가만 보면, 대표님은 지금 에두르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온갖 뒤치다꺼리를 다 맡아 왔다. 그 대표님이 이번만큼은 왜 자기에게 디테일하게 얘기하는 것을 꺼리는가. 대표님은 ‘그’가 화제에 오르면 슬쩍 발을 빼는 듯하다. 그걸 느낀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최근에는 ‘너 좀 빠져 있어라’로 느껴질 때가 더 많은 거 같다. 그렇기에 이쪽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석찬아.”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서 희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재떨이에 비벼 꺼지는 담배를 멍하니 바라보던 석찬은 반사적으로 “예”라고 냉큼 대꾸하며 즉각 고개를 들었다. 보는 눈이 있을 땐 석찬 씨였고 단둘이 있을 땐 친밀함과 장난스러움을 한껏 담아 비서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희락에게 이름을 불린 건 오랜만이다. 이건 지금부터 할 얘기가 그리 가벼운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노팅이나 각인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예?”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정말로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심지어 질문의 종류도 굉장히 놀라웠다.
함께 지낸 시간이 긴 만큼 서로 막역해진 둘은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했다. 지금 이 질문은 그간 잘 그어져 있던 그 선을 까마득히 뛰어넘었다. 이제 희락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역시 현실은 훨씬 녹록지 않다.
희락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석찬은 긴장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느릿느릿 대답했다.
“없습니다.”
“나는 있었거든.”
“그러셨군요.”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각인이든 노팅이든, 그거 통할 사람이 아니잖아.”
“그렇죠.”
오가는 대화에 명백한 주어가 없어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석찬은 듣는 족족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했다.
통할 사람이 아니다.
희락은 그런 게 통할 사람이 아님에도 노팅이나 각인을 떠올린 것에 충격을 받은 걸까. 이쪽은 그것보다도 대표님이 누군가에게 그런 것을 하고 싶어 한 것 자체가 충격적이다.
“그날 당일은 너무 놀라서 상담이나 치료를 받아 봐야 하는 건가 싶더라. 무섭잖아. 내가 갑자기 이상해지니까.”
석찬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구멍이 쩍쩍 타들어 갔다.
“전문가분이랑 언제 한번 자리라도 만들까요.”
“아니, 괜찮아. 아마 소용없을 테니까.”
조금 사이를 두고 희락이 희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기도 하고.”
희락이 맵시 좋은 턱 끝을 매만지며 연하게 웃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다. 굉장히 고민스러워 보이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이기도 한다. 석찬은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그저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린다.
“석찬아.”
“예.”
“내가 연애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잖아.”
조금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에 석찬 역시 긴장을 풀고 평소처럼 대꾸했다.
“믿기지는 않지만 사실이죠.”
“아하하! ……나도 확실한 거 참 좋아하는데, 확실한 거 아니면 취급 안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라. 내가 이 감정에 시간을 쏟는 건, 신중하고 싶다는 거 이상으로 이 순간을 좀 더 만끽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거든. 그 사람이랑 함께 지내면서 굉장히 고민하는 게 많아. 그러다 보니까, 기왕 하는 거 지금 할 수 있을 때 다 몰아서 해 버리는 게 나을 거 같기도 하고? 어차피 나중엔 고민 같은 건 개나 주라는 식으로 나갈 텐데.”
“대표님 성격이 좀 그러시죠.”
석찬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희락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 웃었다.
“그래도 나, 요즘 그 사람이랑 같이 있을 때 그런 생각 가끔 해.”
가끔이라는 단어에 말꼬리를 잡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희락이 이다음 무슨 말을 할지 대충 감이 왔다.
“연애를 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고.”
바로 이거다. 예상했던 말이다.
희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찬은 있는 힘껏 허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런 날도 오는군요.”
눈을 휘둥그렇게 뜬 희락이 그다음, 소파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박장대소를 했다.
“뭐야. 나 벌써 축하받아도 되는 거야? 아직 고백은 안 했단 말이야.”
석찬은 천천히 허리를 펴며 딱 잘라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고백이 대순가요. 전 이보다 더 축하할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쇼핑몰 착공식 때보다 더 감격스럽습니다.”
“뭐야, 그게.”
희락이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꽤 겸연쩍은 듯 보였다. 거친 손짓이 머리를 오갈 때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사르륵 흩날린다.
“와아,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다들 그렇게 시작하지 않을까요. 대표님의 즐거운 고민을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사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뭐 하는 짓이지?’라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미 게임 끝난 거긴 합니다.”
장난기가 살짝 깃든 목소리에 희락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비서님 말은 여태까지 틀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말이지.”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석찬이 자신 있다는 말투로 응수했다.
“제가 그래도 대표님보다는 연애 경험이 좀 있지 않습니까.”
일부러 어깨까지 으쓱해 보이자 희락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지금 자랑하는 거야?”
“예. 잘난 척 좀 해 봤습니다. 이런 기회 좀처럼 없죠.”
“아하핫!”
머리칼을 한껏 괴롭혔던 손이 슬며시 아래로 떨어졌다.
희락은 웃음이 번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비비면서 나직이 한숨 쉬었다.
“석찬아.”
“예.”
“도선 씨가 일하면서 귀찮아하지 않을까? 문 지배인이 너 붙잡고 슬슬 알랑방귀 시동 걸 정도면 이미 도선 씨 거쳤을 거 같긴 하거든. 내가 그 사람 통해서 들은 것도 좀 있고.”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문 지배인이 도선 씨 따로 불러서 이것저것 물은 거 같은 눈치입니다. 제 생각이긴 하지만 한두 번으로 끝났을 거 같지도 않고요. 문 지배인뿐이겠습니까. 호디에 직원들 전부 돌아가면서 한두 번은 붙잡고 물어봤겠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락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 시발. 다들 남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한가해서 아주 좋겠네. 부러워서 살 수가 없는데? 진짜 가서 한바탕 확 해 버릴까 보다.”
“대표님. 방금 ‘연애사’라고 하신 겁니까?”
“…….”
희락이 겸연쩍은 듯 짤막하게 헛기침을 했다. 와하하 소리 내 웃을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다. 석찬은 속으로만 폭소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도선 씨랑 아까 잠깐 마주쳤습니다.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따로 말씀드린 건 없습니다만, 알아서 잘 처신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쪽으로는 나도 걱정 안 해.”
딱 잘라 대답하는 희락을 보며 석찬은 이번에도 말꼬리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말을 어떻게 무조건 믿냐고. 반드시 뭔가 쥐여 주고 입막음을 하시겠다던 대표님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아, 진짜……!”
희락이 창피함에 볼을 붉혀 가며 눈을 확 치켜떴지만 석찬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물론 도선 씨가 꽤 귀찮아하긴 하겠죠. 제 앞이라 내색하지 않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척 보기에 도선 씨가 그런 일로 스트레스 받는 기미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웃으면서 모르쇠로 밀고 나가는 중이라고 하시지 뭡니까. 저도 덕분에 웃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희락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애매하다. 석찬은 그게 신경 쓰였지만 일단은 말이 나온 김에 자기 용건부터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것보다, 대표님은 지금 다른 걸 걱정해야 하시는 게 아닙니까?”
희락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데?”
“그 대답을 드리기 전에 잔소리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대표님, 도선 씨한테 정말 너무하십니다.”
“뭐? 나? 내가?”
그 어떤 말을 들었을 때보다 격렬한 반응이다. 희락이 고운 눈매를 꿈틀거리며 속사포로 입을 연다. 그 기세에 잠깐 움찔하면서도 석찬은 꿋꿋하게 대꾸했다.
“예, 대표님이요. ……뭡니까, 도대체? 그 페로몬은.”
“읏.”
이번에도 희락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어지간히 찔린 모양인지, 끙끙 앓는 소리마저 입 밖으로 흘려보낸다.
“도선 씨는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요. 아주 진동을 하더군요.”
희락이 뺨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당황한 듯 대꾸했다.
“그, 그 정도는 아니잖아?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대표님뿐일 겁니다. 제가 괜히 오늘을 잔소리의 날로 잡은 게 아닙니다. 대표님이 그 페로몬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신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석찬이 딱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희락이 한발 물러서는 기미다. 하긴. 양심이 있으면 여기서 더 우기지 못하는 게 맞기도 하다. 도선의 몸을 휘감은 그 페로몬은 누가 봐도 질색할 수준이었다.
“아마 그 페로몬만 없었어도 문 지배인이 도선 씨를 불러내서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을 겁니다. 어느 날 직원이 극우성 페로몬을 몸에 두르고 출근을 했죠. 그 직원은 심지어 요즘 부쩍 대표님과 ‘친밀해’ 보이니 말입니다. 극우성 알파가 흔한 게 아니니, 최근 도선 씨 몸에 들러붙은 그 극우성 향이 누구의 것이라고 추측하는 건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도 쉬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막힘없이 이어지는 목소리에 희락이 풀 죽은 표정을 했다.
“그거야, 뭐…….”
“이러니 문 지배인은 뭐라도 알아 놔야 속이 편했겠죠. 제가 문 지배인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석찬은 생기 잃은 얼굴을 보며 쓰게 웃었다.
“문 지배인이 조금쯤 딱했습니다. 대표님 페로몬이라고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당장 탈취제로 냄새 빼고 오라고 구박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페로몬을 두른 채로 홀을 누비게 할 수도 없고. 매일같이 오죽 고민되겠습니까?”
“으음.”
“도선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꽤 답답하셨는지 저한테 슬쩍 물어보시더군요.”
희락의 눈이 번쩍 빛났다.
“뭐라고?”
“문 지배인이 계속 준비실에서 대기시키는 모양입니다. 그것도 고민이신 거 같고, 요즘 출퇴근을 비롯해서 어디 한번 나가기라도 할 때마다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큰 걱정인 거 같았습니다.”
“뭐? 아하하!”
석찬이 안경을 치키며 심각한 어조를 꾸몄다.
“대표님, 이거 웃을 일 아닙니다? 그러다가 도선 씨가 경찰한테 불심 검문으로 붙들리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희락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럴 수도 있나?”
“그럴 수 있죠. 그 정도 페로몬이면.”
모세의 기적은 절대 과장된 말이 아닐 거였다. 자기라도 그 정도의 페로몬이 주변에서 느껴지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을 게 분명하다.
석찬은 눈썹을 찌푸렸다. 협박과 경고로 점철된 극우성 알파의 험상궂은 페로몬. 도선과 옷깃만 스쳐도 쫓아와서 죽이려 드는 게 아닐까 싶었을 거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 페로몬과 맞닥뜨려야 했을 사람들이 속으로 얼마나 기겁했을지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도선 씨한테 뭐라고 대답했어?”
“제가 뭐라고 할 말이 있나요. 대표님께 한번 여쭤보시는 게 어떠냐고 말하는 게 고작이죠. 도선 씨 웃는 얼굴에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희락의 얼굴이 단숨에 미묘해졌다. 조금 전에도 비슷한 표정을 했었다. 석찬이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희락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도선 씨가 네 앞에서 그렇게 잘 웃어?”
“대표님. 혹시나 해서 미리 드리는 말인데 저한테 괜히 애꿎은 질투의 화살 돌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야.”
발끈한 목소리를 가볍게 흘려들으며 석찬이 중얼거렸다.
“잘 웃으시죠. 저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라도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 주시는 분 아닙니까.”
“…….”
희락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무표정에 당황하며 석찬은 말을 끊었다. 굉장히 심기가 좋지 않을 때 보이는 표정이다. 최근 몇 년간 보지 못했던 얼굴을 왜 지금 이 순간 보게 됐는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
분위기를 읽자마자 입을 꾹 다물어 버린 비서를 재촉하듯 희락이 가볍게 턱짓했다. 석찬은 일단 생각나는 말들을 눈치껏 늘어놨다.
“손님들 사이에서 싹싹하고 친절하다며 평판도 아주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 지배인도 도선 씨를 홀에 쓸 수 없게 된 지금 이 상황이 꽤 속 쓰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대표님. 제가 저번에 드린 서류 혹시 읽어 보셨습니까?”
“앞에 한 장만. 자세히 읽긴 싫더라고.”
석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락이 읽지 못했을 정보를 입에 담았다.
“도선 씨가 예전에 일하던 직장에서 영업부였다는 건 아시죠? 그쪽에서 아직까지도 전설이랍니다. 도선 씨가 사표 던졌을 때 거기 회사 임원진이 총출동해서 뜯어말렸을 정도라더군요.”
말을 잇는 내내 석찬은 열심히 곁눈질을 했다. 희락은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심기가 좋지 않다, 라고 말할 만한 정도가 아니다. 그것보다 훌쩍 뛰어넘어 있다. 거슬린다거나 짜증이 났다거나, 그런 종류의 감정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훨씬 더 깊은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듯한 얼굴이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미동도 없던 희락이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담배를 쥐는 손을 보자마자 석찬도 자동적으로 라이터를 꺼냈다. 재빠른 행동이 무색하게 희락은 자기 손으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허공에서 머쓱해진 석찬의 손이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후 스케줄이 어떻게 됐더라.”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 냉기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대표님의 기분이 왜 이렇게까지 언짢아졌는지 이유를 생각하던 석찬은 들려온 질문에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를 술술 입에 담았다.
“별다른 건 없지만, 저녁에 영림 건설 박 본부장님이랑 식사가 잡혀 있습니다.”
“그것 좀 미루자.”
“대표님, 이미 한 번 캔슬했다 다시 잡은 약속입니다. 이번에 또 그러시면…….”
더 들을 거 없다는 듯 희락이 손짓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담배 연기도 허공에서 함께 흔들렸다.
“어떻게 좀 해 봐. 할 수 있잖아.”
“하아.”
석찬은 마른세수를 했다. 최근 일절 없었던 대표님의 ‘거부권 행사’가 방심하고 있을 때 들이닥친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미 대표님은 스케줄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 역력하다. 이따 또 무슨 욕을 얻어먹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희락의 단답형이 더 무서운 것도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빨리 연락을 넣어야 했다. 인생 페이지에 ‘연애사’ 챕터를 쓰게 된 대표님 탓에 요즘 전화를 돌릴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밑천이 바닥나고야 말았다. 이제 써먹을 수 있는 그럴싸한 변명이 남아 있는 게 없다. 잔머리 잘 굴리는 직원 몇을 소집해서 머리라도 쥐어짜야겠다.
석찬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대표님, 왜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으신 겁니까. 제가 혹시 언짢은 얘기를 해서 대표님께 불쾌감을 드렸다면…….”
이번에도 희락은 더 들을 거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대표님의 기분을 상한 게 자기 탓이 아니라는 건 다행한 일이다.
긴 침묵 끝에 희락이 대답했다.
“말하기 싫어. 지금보다 더 열받을 거 같으니까.”
*
*
한 시간 뒤.
희락은 호디에 앞뜰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날 그 자리다.
호디에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알아보는 로비 직원들에게 그 누구에게도 방문을 알리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다. 문 지배인에게만 은밀히 연락해서 도선을 밖으로 내보내도록 부탁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람이 보였다. 멀리서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라는 게 스스로 신기했다. 남들이 평범한 얼굴이라 말했고 자기도 그 말에 동의했었는데. 이젠 그 어떤 것에서보다도 시선을 뗄 수 없다.
희락이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걷던 다리에 점점 속력이 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선의 코앞에 설 수 있었다.
“대표님? 갑자기 무슨, 읏……!”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희락은 손목을 움켜쥐자마자 몸을 틀었다.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한 빠른 걸음에 도선도 마치 경보를 하듯 다리를 움직였다.
도착한 곳은 주차장이었다.
희락은 망설임 없이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도선을 밀어 넣고 문을 쾅 소리 나도록 거칠게 닫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정신이 반쯤 나간 거 같은 도선의 얼굴 위로 기다란 손가락이 다가왔다. 희락은 양 뺨을 감싸 살짝 위로 올리며 곧장 입술을 내리눌렀다.
쉼 없는 키스였다.
각도를 바꿔 가며 끈질기게 달라붙는 입술이 시시각각 야릇한 소리를 냈다. 딱 굳은 채 허공에서 미동도 못 하던 도선의 두 손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양팔을 가볍게 쥐었다. 팔꿈치 위쪽을 부여잡는 손길에 반응하듯 희락은 겹쳐진 입술을 먹어 치울 것처럼 농밀한 키스를 퍼부었다.
“대표님…….”
타액을 전부 빼앗긴 탓인지 도선의 목소리가 건조하다. 희락은 부름에 대꾸하지 않는 대신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아 당겼다. 거침없이 덤벼드는 입술과는 다르게 뺨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은 매우 부드러웠다.
도선은 얼굴 곳곳에 떨어지는 입맞춤에 어깨를 부들 떨면서 겨우겨우 목소리를 냈다.
“왜 화가 나신 겁니까. 무슨 일 있으셨어요?”
“나 화 안 났어.”
잠시 말이 없던 도선이 담담하게 속삭였다.
“저 대표님한테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대표님도 그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입 맞추던 희락이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입술을 조금만 내밀면 체온을 머금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눈빛을 바라본다. 흔들림 없이 응시하는 도선의 눈동자를 희락이 먼저 피했다. 시선을 슬금슬금 옆으로 옮기며 가볍게 한숨 쉬는 남자를 도선이 “대표님” 하고 조용히 불러 봤다.
희락은 무엇을 망설이는 사람처럼 표정을 흐리며 입술만 달싹인다. 도선도 더 채근할 생각이 없는 듯 그저 조용히 눈앞의 수심 깊은 얼굴만을 응시했다.
“당신, 그렇게 잘 웃는다며?”
지나치게 조용하던 정적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깨졌다.
“예?”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는지 도선이 눈을 조금 크게 떠 올렸다. 희락은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웃음 한 번 보기가 난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도선이 확인하듯 무뚝뚝하게 물었다.
“지금 그거 때문에 화나신 겁니까?”
그러자 희락의 얼굴이 단숨에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창피함과 분통이 뒤섞인 표정과 그에 꼭 어울리는 목소리 역시 함께 어우러졌다.
“그래! 나 유치해요! 됐어?”
“그런 말까진 안 했는데요.”
“방금 표정이 그렇게 말했다고!”
말을 마치며 희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짤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 자체가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듯했다. 도선 역시 그 미소에 옮은 듯 옅게나마 웃어 보였다.
“제가 그렇게 안 웃었나요.”
“그걸 말이라고 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늘 어떤 표정인가!”
희락이 새치름하게 투덜거렸다. 도선은 난감한 듯 눈매를 내리깔며 조용히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이건 대표님 양해를 구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제가 어지간한 일에 긴장하는 편이 아닙니다. 담력이 좀 있다고 해야 할까요.”
희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들은 말이 굉장히 이상하다. 매일같이 올라오는 긴장 때문에 고생스러워 보이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자기 입으로 담력이 좀 있다고 말하니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게 아니다.
“그런데 제가……, 대표님 앞에서만 그렇게 됩니다.”
도선이 곧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건 예기치 못한 통증이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죽도록 긴장이 돼요. 대표님 앞이라면.”
희락도 그 눈길에 사로잡힌 것처럼 마주 바라봤다.
내 앞에서만.
지금 이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오싹했다. 노팅과 각인을 처음 생각했던 그날 가슴을 덮어 오던 그 감정과 꽤 닮았다.
아까는 그렇게나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한달음에 튀어 왔는데.
속을 다 뒤집어 놓을 것처럼 가슴 근처에서 포악하게 난동 피우던 좋지 않은 감정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도선의 단 한 마디에 그렇게 됐다. 역정과 부아, 온갖 불쾌감이 깡그리 사그라진 자리에 두근거림이 꽉 차올랐다.
“대표님 앞에서는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때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아무 생각도 못 합니다. 안 웃는 게 아니라, 못 웃는 겁니다. 그저 질문에만 답하고, 대꾸하고. 그게 고작이에요. 다른 건 아무것도 모르겠고, 전부 잊히고.”
정신이 까마득하다. 환희와 기쁨으로 멀미가 날 거 같은 기분이다.
“왜 그럴까요.”
도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락은 딴청 부리듯 웃으며 들은 말을 고대로 따라 했다.
“왜 그럴까.”
도선의 눈동자가 맑은 기운을 띤다.
음성도, 눈빛도. 평소대로 돌아온 남자를 바라보며 안심한 듯하다. 조그맣게 미소 짓는 입술에 닿고 떨어질 뿐인 입맞춤이 서너 번 이어졌다.
희락이 낮게 속삭였다.
“이번에는 안아 줘요, 도선 씨.”
입술이 다시 한번 닿고 떨어진다.
“대표님…….”
“날 꼭 안아요.”
양 엄지 손끝이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도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호흡이 가까워졌다. 따스한 온기를 서로의 입 안에 불어넣었다.
머뭇거리던 두 팔이 아주 천천히 희락을 품에 안았다.
꼭 힘주어 끌어안았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