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9)

2.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 표현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희락은 마치 섹스에 까막눈이 된 거 같았다.

식사했던 레스토랑은 호텔 내부에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동하지 않고 그곳에서 바로 스위트룸을 잡을 수도 있었다. 보통이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곧장 그렇게 했을 거다. 사람 왕래가 잦은 호텔 프런트에 베타와 서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는 변명 같은 건 할 수 없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얬다.

왜 이렇게 여유가 없는 건지 정말 모를 일이다. 괜히 속이 울렁거렸고 식은땀마저 등을 적셨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수십 번, 수백 번. 끊임없는 의문만이 자꾸만 머릿속을 괴롭혔다.

왜 자기는 그 순간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 또 이 사람은 왜 아무렇지 않게 요구에 응한 건지.

참 이상했다.

미친 소리를 예고하고 그걸 실제로 뱉었던 순간에는 이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진 않았다. 가슴이 심각할 정도로 뛰었던 건 도선의 손목을 잡고 나오던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이다지도 심장이 날뛰고 있는데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희락은 무언가 말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고, 도선은 늘 그렇듯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정적에 숨이 막힐 법도 했을 텐데 그런 걸 의식할 수 없었다. 그만큼 정신이 홀라당 빠져 있었다는 소리다.

약간이나마 진정이 됐던 것은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익숙한 공간에 도달하니 그제야 조금 숨이 고르게 쉬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표님, 저 먼저 씻을까요.”

덤덤한 표정으로 집 안을 두리번거리던 도선이 불쑥 그런 말을 했다. 희락은 거기서 자존심이 한 번 상했다. 이쪽은 지금 여유도 없고 이상하게 심장도 뛰고 정신이 오락가락 난리도 아닌데 말이다. 지극히 태평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저딴 소리를 하니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마치 ‘어차피 할 거는 정해져 있으니까 빨리빨리 하자’라는 말을 들은 듯했다. 무드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을 수가 없는 이 순간이 우습기 그지없다.

“어차피 나도 씻어야 하니 같이 씻죠.”

희락은 일부러 그런 말을 하며 짓궂게 웃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번엔 센 척이라기보다 그저 도선이 자기처럼 조금이라도 당황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 네. 대표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선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실패로 끝났다.

이번에야말로 희락은 웃을 수 없었다.

빈틈 하나 찾을 수 없는 담담한 얼굴이 저런 대답을 하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저 얼굴이 한 번쯤 당황하거나 환하게 웃을 수 있는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졌다.

이 펜트하우스에는 욕실이 세 개나 있었지만 희락은 그런 정보를 굳이 입에 담지 않기로 했다. 같이 씻자는 말은 반쯤 농담이긴 했지만 뱉은 말을 기꺼이 실행하리라 마음먹었다. 같이 홀딱 벗고 살이라도 부딪치면 어찌 됐든 지금과는 다른 표정이나 반응을 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안내한 욕실 앞에서 옷을 벗는 도선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옷가지들을 하나둘 신체에서 제거하는 손동작도 망설임 따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슈트를 벗는 희락의 고운 얼굴이야말로 점점 울긋불긋해졌다.

성인이 서넛 들어가도 여유 있는 거대한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도선은 얌전히 선 채 널찍한 욕실을 둘러보았다. 희락은 콸콸 떨어지는 물줄기에 고개를 고정하고서 이따금 곁눈질로 바르게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치 보면 안 될 걸 훔쳐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어났다.

베타의 몸이었다.

베타의 나신을 본 건 도선이 처음이었지만 오메가와 다르다는 건 매 순간마다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벌써 야릇하고 색정적인 페로몬이 코끝을 간질여야 정상이다. 알파의 페로몬이 가득가득 차 있는 이 집에서 이토록 멀쩡하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부터가 도선이 베타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서로의 페로몬을 맛보는 건 섹스의 가장 기본적인 전희다. 적어도 희락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쪽이 페로몬을 흘려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상대의 페로몬마저 일절 느끼지 못하는 이 상황이 매우 어색하면서도 생소했다. 너무나도 낯선 나머지 조금 전부터 정신이 반쯤 나간 게 아닐까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도선이야 자기의 나신을 기억하겠지만 이쪽은 맨정신으로 처음 보는 것이다. 힐끗힐끗 눈짓만으로 몇 가지의 정보를 확인했다. 아주 평범한 몸이었지만 군더더기 없이 늘씬했다. 지속적으로 돈을 발라 가며 관리한 희락에 견줄 바는 아니었어도 나름 균형 잡힌 몸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시선으로 남몰래 위아래 훑어 가며 품평하는 사이 욕조에 그럭저럭 물이 채워졌다. 희락이 먼저 들어가며 손짓했고 도선이 그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따라 들어왔다.

살면서 사우나나 목욕탕 같은 건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곳에 있는 욕탕에 앉아 있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싶었다. 아무런 대화도 없고, 조금 떨어져 앉은 채, 따뜻한 물로 몸을 데우는 게 고작인 이 썰렁한 상황을 곱씹기를 두어 번.

희락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드넓은 욕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박장대소에 도선도 이번만큼은 표정이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소리 탓에 놀라움으로 커진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그 표정이 희락의 웃음보를 더더욱 자극했다.

“이게 말이 돼? 아하핫, 우리 앞으로 한…… 30분? 그 정도 지나면 침대를 구르고 있을 텐데 지금 이 분위기가 말이나 되냐고.”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자기 자신에게 혼잣말을 건넨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도선은 슬쩍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죄송합니다”라고 대꾸해 왔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사과 다음에는 아주 작디작은 목소리로 그런 말도 덧붙였다. 그게 제법 귀엽게 여겨졌다. 희락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냅다 옆으로 이동했다.

자세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희락은 도선의 등 뒤로 이동했다. 두 팔로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바로 보이는 목덜미를 지긋이 바라봤다. 레스토랑에선 반신반의했던 뒷모습이 이제야 좀 확실하게 겹쳐졌다. 귓불이 도톰한 귓가며 조금 마른 듯한 어깨며 전부 기억에 있는 모습이었다.

희락이 사실 확인에 기뻐하고 있을 무렵 도선은 완전히 굳어 버린 자세로 미동조차 없었다. 희락이 키득거리며 “나한테 등 기대요”라고 속삭였지만 그의 얼굴은 좌우로 두어 번 흔들릴 뿐이었다. 도선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지금 이 행동이 희락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이거야말로 머리에 자리 잡은 그날의 기억 중 가장 확실한 거였다.

싫다고 해도 소용없다. 희락은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넣었고 그의 등이 자기의 상체에 달라붙을 때까지 절대로 손을 풀지 않았다. 엉겁결에 희락에게 기대게 된 도선의 귓가가 점점 붉은빛을 머금었다. 비단 욕조의 더운 물 때문만은 아닐 거였다. 희락은 점점 이 상황이 즐거워졌고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한두 시간 전만 해도 사춘기 소년처럼 난리 법석을 떨던 머리통이 드디어 제대로 기능을 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지금, 둘은 욕실에서 나와 침실로 이동한 참이었다.

희락은 머리를 싸매며 난동을 피우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도선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야 정말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기 때문이다.

“도선 씨.”

“예.”

도선은 널찍한 침대 중앙에 목석처럼 누워 있었다. 희락은 그 옆에 누우며 팔을 뻗어 어깨를 잡아 옆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손에 담긴 뜻을 이해했는지 도선이 망설임 없이 옆으로 몸을 누이고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미안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도선이 조금 사이를 두고서 “네? 왜 갑자기……”라며 반문했다.

“콘돔이 없어.”

“아…….”

그런 게 집에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섹스를 목적으로 누군가를 집에 끌어들여 본 적이 없으니까. 부모 형제와 석찬이 가장 자주 오는 이들이었고 그들마저도 지금 이 침실과 욕실에 들이지 않았다. 아주 친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친구들도 이 집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뭔지 알아요?”

“예?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희락이 가볍게 헛웃음을 지었다.

“러브젤도 없어. 내가 이걸 차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기억을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까맣게 잊고 만 거야.”

자기 기준으로 있을 수 없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 실수를 굳이 입에 담은 이유는 오직 하나다. 도선의 양해를 구하기 위함이다. 오늘도 그날처럼 로션을 대용품으로 써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린 거다.

그러니 그다음, 무언가를 잠자코 생각하던 도선이 느릿느릿 내뱉은 말에 희락의 얼굴이 구겨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표님이 콘돔이나 러브젤이 없어서 불편하신 거면, 제가 나가서 사 올까요?”

“…….”

희락은 재빨리 입술을 다물었다. 반쯤 벌린 입 사이로 무언가 아주 괴상하고 이상한 소리가 튀어 나갈 거 같아 그걸 사전에 차단한 거였다.

아주 가깝게 자리한 도선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담담한 얼굴과 안정적으로 깜빡이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울화통이 치밀었다.

“윤도선 씨.”

“네.”

“어떻게 내 사과를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저도 모르게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울컥한 목소리에 도선도 조금은 당황했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는 대표님 사과를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요.”

짤막하게 이어진 말이었지만 희락은 여기에서 더더욱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번에는 표정 관리마저 무너질 정도다. 화병이 난다거나 혈압이 오른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거다.

나가서 사 오라는 말을 돌려 말했다고. 에두름을 위한 사과였다고. 이 남자는 지금 자기의 미안함을 그딴 식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돌겠네, 진짜……!”

희락은 눈앞의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품 안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게 시시각각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오히려 팔에 힘을 꾹꾹 넣어 가며 끓어오르는 분을 목소리에 담아냈다.

“왜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데? 하자고 한 주제에 잘하는 짓이라고 날 비웃으라는 거잖아! 오늘도 저번처럼 로션 같은 걸 써야 할 수밖에 없을 거 같다고 멋쩍어하는 거잖아! 오늘은 내 준비성이 이따위라서 미안하지만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는 거잖아! 이게 바로 이해가 안 가? 사람이 왜 그래요, 도대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얼싸안은 어깨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된 것 같았다. 희락은 내심 혀를 찼다. 생각보다 더 흥분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이 정도로 언성 높여 할 말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표님.”

“뭐!”

침묵이 흐르고서 들려온 목소리에 희락은 냉큼 대꾸했다. 그다음 또 속으로 아차 싶었다. 이래서야 마치 분노로 길길이 날뛰는 사람의 음성이 아닌가.

이런 일은 정말 오랜만이다.

마치 애새끼 같은 말투와 음성이다. 늘 사람 좋은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몄고 그게 지극히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웠었다. 내숭과 겸손이 필요했기에 늘 그렇게 맞춰 지내 왔다. 이처럼 삐죽한 목소리로 감정을 그때그때 토로하는 건 유년기 때도 해 본 적 없는 짓이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거 같긴 한데…….”

아까 고함을 치듯 대답했기 때문일까. 도선이 머뭇머뭇하며 그다음 말을 꺼낸 것은 꽤 시간이 흘러서였다.

“뭔데 그래요. 말해 봐.”

이번만큼은 희락도 조금 굽히기로 했다. 호흡 두어 번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름 차분히 대꾸해 주었다.

“그, 저기. ……설마 다음도 있는 겁니까?”

이번에는 이쪽이 침묵할 차례인가.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알싸한 감정이 지나가자 순식간에 볼이 뜨거울 정도로 창피함이 몰려왔다.

아까 미친 소리를 내던졌을 때도 내심 후련함이 들었다. 분통이 터져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지껄이긴 했지만 그런 말을 한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그 순간이 닥쳐도 똑같이 ‘미친 소리’를 할 게 확실하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그 미친 소리를 실천에 옮기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음을 바라고 있다는 게 좀 낯간지럽긴 하지만.

이 이상 침묵하면 좋을 게 없다.

희락은 딱 잘라 대답했다.

“나는 있었으면 좋겠는데.”

품 안의 어깨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가벼운 떨림을 느끼며 희락은 약간 초조한 기분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도선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대표님이 원하시면 저도 좋습니다.”

도선이 냉큼 입을 열었다. 던져진 질문에 우선 대답부터 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대꾸를 한 듯하다. 소리 없이 한동안 달싹거리던 입술이 무어라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렇지만…….”

말끝이 뭉개졌다. 이 이상 더 이을 생각이 없는 듯 목소리가 희미하게 사그라진다. 희락은 재빨리 “그렇지만?”이라며 그다음 말을 재촉했다.

“아마 다음은 없지 않을까요.”

“왜?”

“그냥…….”

목소리에 아주 연한 웃음이 섞였다.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끄무레한 음성은 순식간에 공중에서 녹아 사라졌다.

희락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런 말이 어디 있냐고 타박하거나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꼬치꼬치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도선 역시 어떠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희락은 침대를 벗어났다.

주방으로 가서 생수 두어 통을 집고 파우더룸에 들러 가장 좋아하는 보디로션까지 챙겼다.

다시 침실을 찾았을 때 도선은 정자세로 누워 있었다. 멍한 시선으로 높은 천장만 바라보는 옆모습을 자리에 선 채로 응시했다. 눈꺼풀을 가끔 깜빡일 뿐 움직임이 일절 없다. 그게 이상하리만치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워낙 무뚝뚝하고 담담한 표정만 짓는 사람이기에 무슨 일이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느껴졌었다.

“긴장했어요?”

희락은 질문하며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체중을 싣지 않게 조심하며 몸을 겹쳤다.

“네.”

“그날보다?”

잠시 생각하던 도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런 거 같습니다.”

“다행이네. 도선 씨도 긴장이라는 걸 하긴 하네요? 그래, 좀 해. 나만 하면 억울하니까.”

희락이 키득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보이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가볍게 소리 내며 피부를 훑었다.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히터도 잠시 생각했고 이불도 생각했지만 전부 지워 냈다.

어차피 금방 더워질 거였다.

“대, 대표님.”

“네.”

희락은 부름에 대답하며 입술을 보다 더 아래로 떨어뜨렸다. 맞닿은 피부에서 전해지는 떨림이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았다.

“너무 가까운 거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더니.

희락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로의 코끝이 살짝 부딪쳤다. 아주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얼굴을 확인한 도선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하핫! 아니, 안 가까우면 어떻게 섹스를 해?”

바쁘게 눈을 끔뻑끔뻑하던 도선이 짧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요.”

그러더니 서둘러서 말을 덧붙인다.

“그럼 불을 좀, 한두 개라도 끄면 어떨까요?”

희락은 픽 웃었다. 방금 들은 말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아까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리모컨으로 이 공간을 밝힐 수 있는 모든 등을 죄다 켰었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나도 이렇게까지 밝게 하면 무드가 없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어요.”

희락이 이해를 구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그날 어떻게 했었는지 몰라. 그러니까 도선 씨한테는 미안해도 나는 오늘 이 밤에 베타랑 처음으로 섹스하는 겁니다. 도선 씨 표정도 살펴야 하고, 안을 풀 때도 다치지 않게 신경 쓰고 싶다고. 그러려면 잘 보여야지. 내가 재깍재깍 판단할 수 있게끔.”

가만히 듣던 도선이 작디작게 속삭였다.

“대표님께 번거로움을 끼치네요.”

희락의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무엇에 이토록 심기가 뒤틀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들은 즉시 인상을 쓸 정도로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면 제가 좀 그날처럼 대표님을 도울까요.”

“뭘 어떻게?”

도선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희락 역시 일단은 몸을 비켜 주었다.

돕는다고?

이 짧은 순간, 몇 가지 상황이 뇌리에서 번개처럼 떠올랐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쩌면 이 사람에게 자기 것을 빨아 달라고 요구했을지 모른다. 또 어쩌면 자기가 좋아하는 곳을 만져 달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다. 그게 뭐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또한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그저 기우이길 바란다.

처음이라 바짝 긴장한 사람한테 그날 밤 일방적으로 이딴 강요를 입에 담았다면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 같다. 매일 밤 자괴감에 몸부림을 치며 이불을 걷어차겠지.

전전긍긍 정신없어 보이는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도선이 이윽고 천천히 움직였다. 희락 역시 허공을 향하는 그의 팔에 시선을 고정했다.

도선이 움켜쥔 것은 보디로션이었다.

어리둥절해하던 얼굴에 조금씩 당혹감이 깃들더니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선이 로션을 손바닥에 짤 때까진 그럭저럭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쿠션에 등을 기댄 그가 손바닥을 망설임 없이 아래로 떨어뜨린 순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잠깐만, 잠깐만!”

희락은 재빨리 손을 뻗어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찔한 나머지 무심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볼 뻔했다. 일촉즉발로 정신을 차린 덕분에 보지 않고 끝낼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도선 씨.”

희락이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씩씩대며 이름을 불렀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도선도 조금 놀랐는지 “예?”라며 눈을 여러 번 끔뻑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황당함에 터진 말임에도 도선은 착실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제 아래를 적시…….”

“그만!”

희락이 빽 소리를 지르며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가 지금 뭘 했다고 벌써? 아니, 아니. 이것도 문제지만.”

흥분한 목소리가 침실을 쨍쨍 울렸다.

“이 거짓말쟁이! 완전 사기꾼! 윤도선 씨, 나한테 거짓말했네요?”

이번만큼은 도선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흐려진 낯빛이다.

“아닙니다. 저 대표님한테 거짓말 같은 건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아니, 도선은 분명히 크나큰 거짓말을 했다.

엄청 울컥했다. 혈압이 콱 오른 나머지 머리가 띵, 하고 세게 울릴 정도다.

“다정했다며!”

그래, 아무리 만취했어도 내 매너가 죽진 않았겠지. 그럼 그렇지. 취해서 정신없었어도 이 남자가 ‘추억’이라 삼겠다고 했을 정도니 나도 나름대로 실력 발휘는 했을 게 분명하지. 여태까지 밤을 함께한 오메가들에게 불평불만 한 번 들어 본 적 없다. 내 솜씨가 그날도 어디 가질 않았을 게 당연하지.

희락이 스스로 비웃듯 코웃음을 한 번 치며 벌컥 소리 질렀다.

“그날 밤, 내가 다정했다고 말했잖아! 도선 씨, 그렇게 말했잖아요?”

“예, 맞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이죠. 다정하셨으니까요.”

“어디가? 어떤 점이?”

섹스하자고 유혹해서 침대까지 끌고 갔는데 전희를 죄다 생략하고 삽입부터 한 새끼의 어디가 다정한 거야?

희락은 점점 더 속이 부글거렸지만 그와 반대로 도선은 조금씩 평소의 담담함을 되찾아 갔다.

“아프냐고 여러 번 물어봐 주시기도 했고, 제가 좀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걱정도 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시고서 계속 손을 꼭 잡아 주시기도 했고요.”

이 정도면 충분히, 차고 넘치게 다정하지 않습니까?

대답을 요구하는 대표님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 덕에 도선은 사실만을 나열하고 자신의 의문은 굳이 입에 담지 않기로 한 것 같다. 물론 희락은 도선의 눈동자에서 그 궁금증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분통이 터졌다.

희락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딴 건 내 기준에서 절대 다정한 게 아니야.”

“그런가요?”

대답을 하긴 하면서도 수긍하긴 어렵다는 어조다. 희락은 또 한 번 터질 거 같은 한숨을 꾹 참았다. 그 대신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하던 양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내 말 잘 들어요, 도선 씨.”

다짐을 받겠다는 어투에 도선도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

“그건 그냥, 당연한 거야.”

“…….”

“아주 당연한 거요. 내가 당연히 해야 할 거. 나한테 몸을 열어 준 도선 씨한테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최소한의 확인 같은 거. 고작 그런 걸 다정하다고 포장해 주면 안 돼요. 절대로.”

도선이 꿈을 꾸는 듯한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희락은 거기에 가볍게 미소 지으며 차근차근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자리 만들어서 그날 일을 여러 번 물었을 때 도선 씨는 그러면 안 됐어.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안 됐다고. 쓰레기 같은 새끼라고 욕을 했어야지. 너 같은 새끼한테 내 처음을 빼앗긴 게 억울하고 분해서 잠도 오질 않는다고 말했어야지. 그러니까 지금 내 입장이 뭐가 돼. 지금껏 자뻑하고 있던 내가 너무 같잖아지잖아.”

담담한 표정 위로 이따금 혼란스러움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도선이 꽤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희락은 어깨를 조금 더 힘주어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날 도선 씨는 처음이었고, 긴장도 했다고 하니까 정신이 쏙 빠져 있었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도선 씨가 누구와 섹스를 하게 되더라도 상대방의 그런 걸 절대 다정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해요. 이것저것 요구도 많이 하면 더 좋고. 상대도 아마 좋아할 거야. 또, 도선 씨는 베타니까 누군가를 안는 일도 생길 수 있겠지. 그러면 그땐 그날 밤 나처럼 굴면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오늘 밤 나처럼 해요.”

이거 좀 이상한데.

도선에게 꼭 필요한 얘기임에 확실하다고 판단해서 얘기했다. 나름 경험자가 초심자에게 줄 수 있는 팁 정도였다. 그런데 말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어떻게든 말을 다 잇긴 했어도 마지막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난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가만히 듣던 도선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갈증마저 느끼던 그 미소가 눈앞에 펼쳐지자 희락은 거의 새겨 넣을 기세로 눈앞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번에도 미소는 채 몇 초를 유지하지 않았다. 애태우다 못해 약 올리는 것만 같은 웃음이다.

희락이 불만스러움으로 입술을 비죽거릴 동안, 도선은 망설임이 섞인 어조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전 앞으로 다른 사람이랑 할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확신까진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왜?”

“그게 누구든 대표님이랑 겹쳐질 거 같아서요.”

“……!”

이것도 좀 이상한데.

신경질이 날 정도로 엉겨 붙어 있던 짜증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아니, 착각 같은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일 거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큰 실례를 하는 것이니까 그냥 아무와도 하지 않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아하하! 그거 나랑만 하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 건가?”

“네? 아니, 아닙니다.”

도선이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대표님께 부담을 드리려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

“아, 좀!”

희락이 발끈하며 이어지려는 말을 쳐 냈다.

“사람이 기분 좋아지려고 하는데! 또 사과한다, 또!”

“대표님 기분이 좋……?”

희락이 창피함에 씩씩거리며 말을 가로챘다.

“그래요, 그 대표라는 소리도 좀 집어치우고! 우리가 지금 침대 위에서 직함 불러 가며 업무 볼 건 아니잖아?”

인정사정없이 쏘아붙인 덕분일까. 도선이 눈을 여러 번 깜빡거리며 서둘러 말을 꺼낸다. 더듬기까지 하는 걸 보니 꽤 당황한 모양이다.

“그, 그러면 뭐라고 불러 드리면 될까요.”

“희락 씨? 아니다. 나보다 연상이잖아. 그럼 ‘희락아’라든가? 하여간 이름을 부르라고, 이름. 내 이름요.”

“……!”

여러 번 이름을 강조한 게 무색할 정도로 들려온 대답은 너무나 단호했다. 심지어 그답지 않게 제법 큰 소리다.

“못 합니다!”

희락도 지지 않겠다는 듯 큰 소리를 냈다.

“왜!”

“제, 제가 어떻게 대표님 이름을 막 부릅니까?”

“왜 안 돼? 막 부를 수 있지. 그놈의 존대도 때려치워요. 침대 위에서는 대표 아니니까!”

“존대까지요? 안 됩니다. 저는 절대 못 합니다.”

“하핫, 와아. 진짜 미치겠네!”

희락은 와락 웃고 말았다.

도선의 어깨를 떠난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일단 이 상황이 웃기니까 웃고는 있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이 입씨름이 다 뭔가 싶다. 서로 벌거벗고 있을 뿐 농후한 분위기는커녕 그럴싸한 끈적거림 하나 없다. 이래서야 아침까지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듯하다.

“그래요. 내가 강요는 안 하겠지만 계속 꼬투리는 잡을 거야. 그거는 각오하라고.”

일부러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그거에 꼭 어울리는 웃음도 한 번 내비쳤다. 그러자 마주한 얼굴 역시 아주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손바닥 위에서 체온으로 물크러진 로션이 시선을 잡아 끈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그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삽시간에 뻣뻣해진 손을 달래듯 희락의 엄지가 아주 부드럽게 움직였다.

도선은 고개 숙여 엄지가 자기 손바닥 곳곳에 머무는 것을 홀린 듯 바라봤다. 손끝이 크게 원을 그리고, 손가락 사이사이를 느릿하게 파고들며, 손가락 마디를 확인하듯 가볍게 누른다. 엄지가 차분하고 더딘 속도로 손에 로션을 펴 바를 때마다 그의 뺨과 귓불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희락은 그런 도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손도 훌륭한 성감대다. 심지어 손잡는 걸 좋아하는 도선이라면 더더욱 통하리라 예상했다.

가장 예민한 손끝부터 손목 부근까지. 빠트림 없게끔 엄지로 부드러이 문지를 때마다 붙잡은 손은 점점 따뜻해졌다. 엄지에서 검지로 이어지는 부근을 손끝이 느릿하게 문지르며 지나갈 때 도선의 고개가 더더욱 아래로 떨어졌다. 얼굴에 들이찬 열기로 더는 버틸 수가 없는 듯 보였다.

더는 손바닥 위에 로션이 남아 있지 않아도.

희락은 엄지로 손을 보듬었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시야에 보이는 목덜미며 뺨에 울긋불긋함이 덧대질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얼굴이 아주 익어 버리도록 해 줄까 싶은 장난기도 생겨난다.

“도선 씨.”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어깨마저 튕겨 가며 대답한다. 희락이 키득 웃고서 낮게 속삭였다.

“나 좀 봐요.”

“지금은, 지금 당장은 못 합니다.”

그렇다면 별수 없다. 이쪽이 하면 그만이다.

희락은 허리를 조금 숙이고서 몸을 가까이 가져갔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얼굴이 아래쪽에서 훅 하고 들이닥치자 도선이 깜짝 놀란 표정을 하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반사적으로 휙 올라서는 고개를 희락도 놓치지 않고 뒤따랐다.

서로의 입술이 살짝 닿고 떨어졌다.

도선은 한동안 눈을 깜빡거렸다. 왼쪽을 보면서 서너 번, 오른쪽을 보면서 서너 번. 정신없이 움직임을 반복하던 눈꺼풀이 딱 행동을 멈췄다. 주춤주춤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 위로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시야를 꽉 채운 바로 그 순간.

“와아, 이렇게 붉어진 거 처음 봐. 도선 씨, 굉장히 예쁘게 물드네요? 귀여워.”

“……!”

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무언가만 뻐끔대는 입술에 한 번 더 입 맞췄다. 도선은 이제 숨을 쉬는 것도 까먹은 사람처럼 몸만 들썩거렸다.

희락이 한 팔로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아래로 몸을 숙였다. 거기에 이끌리듯 도선도 천천히 시트에 몸을 뉘었다.

수없이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닿고 떨어지는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 도선은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희락을 애써 응시했다. 입술이 뺨에 닿고, 앞머리를 가르며 이마를 누르고, 코끝에 장난스럽게 비벼지는 동안 눈동자는 떨림 가득했어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희락도 마찬가지였다. 얼굴 곳곳에 입술 도장을 찍으면서도 그때마다 자기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살피듯 응시했다. 뻣뻣해진 표정이 못내 신경 쓰였어도 볼이며 목덜미에 자국처럼 남은 홍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도선이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건 입 안으로 혀가 파고들 때였다.

혀끝이 안을 탐색하듯 움직였다. 혀를 빨아 당기고 머금으며 가볍게 자극을 주자 끌어안은 어깨가 잘게 떨렸다. 희락은 반대편 손으로 흑색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혀끝이 여린 살을 두드리며 얽힐 때마다 머리칼에 파묻은 기다란 손가락도 함께 온기를 맛보듯 움직였다.

입 안을 전부 기억할 때까지 혀끝은 진득하게 안에 머물렀다. 도선이 가장 좋아하는 곳도 찾았다. 입천장을 간질이듯 혀끝으로 눌러 주면 참을 수 없다는 듯 달콤한 신음을 냈다. 그 희미한 숨이 자기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게 무엇보다 뿌듯했다. 벌벌 떨리는 몸을 꽉 끌어안으며 희락은 속으로 몇 번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타액이 몇 번이고 오갔고 앗아 갈 듯 숨결을 모조리 들이마셨다. 끈적끈적한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 틈도 없이 붉어진 입술을 먹어 치우듯 덮었다. 각도를 바꿔 가며 입을 맞추는 사이 어쩔 줄 몰라 하던 혓바닥도 어느 순간부터 부드러움을 띤다. 침범한 살덩이가 뜨거움을 나눠 줄 때마다 그것에 필사적으로 응할 때면 이상하리만치 가슴 부근이 뻐근해져서 그것이 꽤 멋쩍었다.

사랑스러움이 피어오른다.

입술을 놓아주며 그 주변에 묻어난 타액을 다정스레 핥아 주었다. 색색 숨을 쉬며 게슴츠레 눈을 떠 올린 도선의 눈꺼풀 위에도 기습하듯 입 맞췄다. 얼굴만 가까워지면 자동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는 모습에 키득 웃음이 터졌다.

희락이 아쉬운 눈빛을 지으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한두 시간 입술만 빨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오늘은 갈 길이 멀다. 맛보고 싶은 곳이 수두룩하다.

얼굴을 보며 애무하는 건 도선의 표정을 시시각각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 장점이 희락은 마음에 쏙 들었다. 붉어진 뺨을 보는 것도 좋고 이따금 입술을 잘근 씹으며 움찔하는 모습에 희미한 현기증마저 일었다.

도선은 표정이 큼지막하게 바뀌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섹스를 할 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을 찾으려면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손끝에서 간헐적으로 느껴지는 피부의 떨림이 어떨 때 더 격한 것으로 변하는지 차근차근 살피는 것은 생각보다 더 즐거웠다.

이런 일은 여태껏 없었다.

이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는 페로몬이라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매개체가 존재한다. 침대에서 오메가와 뒹굴 때면 굳이 많은 말과 관찰이 필요하지 않았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페로몬에서 상대방의 기분과 쾌감이 시시각각 전해져 왔다. 요동치는 허리 짓과 시트를 움켜쥐는 손을 매번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끊임없이 흘러들어 오는 정보에 맞춰서 손과 아랫도리가 자연스레 움직였다.

어느 순간부터 페로몬에 잠식당한 채 반쯤 정신을 잃고 허리를 쳐올리곤 했다. 이 오메가는 자기 손바닥 안에 있노라고. 페로몬으로 전부 파악 가능한 안도감을 기반으로 자기 쾌감을 보다 더 충실히 좇을 수 있었다.

그런 섹스가 익숙했고, 그런 섹스가 전부였으며, 지금까지 줄곧 그런 섹스만을 해 왔었다.

그러니 지금 이 섹스에 불편함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희락은 지금 굉장히 조심스러우면서도 그 어떤 때보다 공들이고 있다. 유두를 입술로 머금고 양 옆구리를 손끝으로 정성껏 더듬으면서 몇 번이나 시선을 위로 올려 도선의 표정을 확인했다. 점점 쾌감으로 얼룩지는 눈빛을 확인하며 혀끝의 강도를 조절했다.

손짓이 더해질 때마다 피부가 물렁해졌다. 한껏 부드러움을 띠게 된 몸의 반응도 조금씩 선명해졌고 알기 쉬워졌다. 피부에 맺힌 땀방울에서도 이젠 긴장이 아닌 열기가 느껴졌다. 희락은 시야를 살짝 내려 하반신을 바라보았다. 도선의 것이 살짝 고개를 든 채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가 지금보다 조금 더 강한 자극을 맛볼 준비가 됐으리라는 확신도 들었다.

희락이 잘게 떨리는 양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발가락, 발목, 종아리. 혀끝을 세워 차례차례 정성껏 핥은 뒤 먹음직스러운 허벅지에 입술을 가져갔다. 두 손으로 양 발목을 잡고 무릎을 세우자 탐스러운 허벅지와 은밀한 곳이 보다 또렷하게 시야를 사로잡았다.

열을 머금은 허벅지의 감촉은 생각보다 더 좋았다. 희락은 혀와 입술로 맛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주 가볍게 이를 세웠다. 심혈과 정성을 기울여 예쁘고 또렷한 자국 서너 개를 만들었다. 완성된 흔적을 보고 있자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기분이 점점 더 좋아졌다.

페로몬에 취해 있을 땐 당장 이 오메가의 안을 뚫고 들어가 마음껏 쑤시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휘몰아쳤다. 본능의 노예가 된 채 정신없이 자기 것으로 은밀한 곳을 후벼 파며 엉망진창으로 뒹굴고 있었다.

그런 섹스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게 당연했기 때문에 싫다는 생각을 할 수조차 없는 삶이었다. 하나하나 반응을 살피고, 더 나아가 비교적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며 마음껏 애정 어린 행위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붉은 흔적을 곳곳에 아로새기고서 입술을 조금 더 아래로 떨어뜨렸을 때였다.

“읏!”

희락은 회음부와 아랫구멍을 맛보는 와중에도 놓치지 않고 신음을 들었다. 도선이 서둘러 입 주변을 손으로 덮어 봤자 소용없었다.

“아팠어요?”

여유 있는 척 웃고는 있지만 희락은 나름 진땀이 났다. 도선에게는 비밀이지만, 사실 가느다란 비음을 듣는 순간 하반신이 삽시간에 뻐근해졌다. 희미하게 귓가를 두드리던 탄식에 조금 더 진한 쾌감이 스몄을 뿐인데 이게 듣는 순간 사람 머릿속을 아주 미치게 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도선이 그다음 조그맣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락은 다시 한번 미소 지으며 짓궂게 질문했다.

“그럼 느꼈어요?”

즉각적인 고갯짓은 없었다. 한참 뜸을 들이던 도선은 확인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시선에 마지못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어 보였다. 솔직한 대답에 환하게 웃던 희락은 다시금 못마땅한 표정을 꾸미며 투덜거렸다.

“그 손 좀 치우면 안 돼?”

이번에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살짝 울컥했어도 일단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어차피 저 손은 금방 치워 버릴 수 있을 거였다.

희락은 회음부를 혀끝으로 꾹 누르며 망설임 없이 도선의 것을 감싸 쥐었다. 위아래로 부드럽게 흔들며 일정한 자극을 주자 반응은 아주 즉각적이었다. 손안의 것이 점점 열기와 크기를 더해 가는 것이 느껴지자 절로 흡족한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무슨, 잠, 대표님……!”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키려는 도선의 배를 조금 강하게 눌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면서도 기겁한 표정은 여전했다. 희락은 개의치 않고서 입술을 사용해 귀두를 간질였다.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고 혀끝으로 살살 건드리다가 아주 천천히 입 안으로 머금었다.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한 쾌감에 도선이 상반신을 배배 꼬듯 연거푸 뒤척거렸다.

“……!”

잇따른 쾌감에 눈을 질끈 감고 입술만 달싹대던 도선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절정이 바로 코앞이었다. 뚝 끊어진 자극에 온몸이 아쉬움으로 부들거렸다. 도선이 당혹감 서린 눈빛으로 조심조심 아래를 응시했다. 그 순간, 이번에는 놀라움에 어깨마저 경련으로 꿈틀거렸다. 한껏 냉담함을 아우른 시선과 맞닥뜨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기에 정말이지 깜짝 놀란 듯했다.

“대표님?”

희락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죽거렸다. 싸늘함의 이유를 어느 정도 알아차린 도선은 그제야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읏……!”

희락이 음경을 거머쥔 손에 작게 힘을 주며 음모에 숨을 옅게 불어넣었다. 부들대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에 안쓰러움마저 들었다. 자칫하다간 애써 꾸민 표정이 허물어질 뻔했다. 희락은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서 “대표님?”이라고 좀 더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이 순간만이 오기를 조금 전부터 기다렸다.

희미한 울음과 수치심이 만든 음성이 몇 번이고 대표님이라 중얼대는 것도 지금을 위해 무시했었다. 고쳐 주겠노라고 속으로 이도 갈았다. 그러니 마음이 약해져서 이 순간을 허투루 만들면 아쉬운 건 이쪽의 몫이다.

“대표면 누구라도 다 좋아? 회장은 싫어? 사장은 어때요?”

차디찬 목소리로 틈을 주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도선이 강하게 부정하듯 고개를 연거푸 좌우로 흔들었지만 희락은 모조리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대표만 해도 열댓이 가볍게 넘거든. 내가 걔네 소개해 주면 당신은 그 사람들이랑 할 수 있어요? 그래?”

또다시 도선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번에는 “절대 아닙니다”라는 목소리도 함께였다. 거의 쥐어짠 목소리에 희락도 이번만큼은 마음이 약해져 눈썹이 아래로 주저앉았다.

조금 더 심술궂은 말을 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 몰아세운 것 가지고는 도선이 쉽사리 고쳐 주지 않을 거였다. 그런데도 이 이상 냉기 어린 음성을 꾸밀 수가 없었다. 옅은 울음 섞인 목소리가 고막에 달라붙은 느낌마저 들었다.

희락은 손바닥으로 벌벌 떨리는 무릎을 감싸듯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도선이 살짝 젖은 눈을 끔뻑끔뻑하며 흐릿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해 왔다. 한참을 서로 바라보았다.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우물우물하면서도 끝끝내 말을 꺼내지 않는다. 희락은 참을 수 없어서 푹 웃고 말았다. 그러자 도선 역시 안심한 눈초리로 조그맣게 따라 웃었다.

“흐, 흣!”

사정을 앞둔 것을 내버려 둔 채였다. 희락은 사과하듯 귀두를 머금으며 혀끝으로 쓰다듬었다. 어설픈 열에 움찔대던 성기가 기다렸다는 듯 반응을 했다. 잔인한 짓을 했는데 본전도 못 찾았다. 희락은 귀두를 정성껏 빨고 성기를 조심스레 주무르며 속으로 연거푸 혀를 찼다. 눈물로 젖은 눈을 보고 있으려니 굳은 결심도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렸다.

위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치우라거나 그만하라는 칭얼거림을 희락은 깡그리 무시했다. 이러다가 기절하는 게 아닐까 겁이 날 정도로 강한 거부와 헐떡거림이 귓가를 두드려 댔다. 붙잡은 허벅지에서 경련과 흡사한 떨림이 느껴졌다. 입 안에 퍼지는 비릿하고 미지근한 액체를 꿀꺽 삼키고서 귀두에 묻은 것까지 남김없이 핥아먹었다. 꽤 진했지만 생각보다 거북하진 않았다.

희락은 입술로 귀두 주변을 두드리듯 간질이고서 슬쩍 고개를 들었다. 도선과 바로 시선이 부딪쳤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나름 항의할 생각으로 노려보는 거겠지만 이쪽이 보기엔 그저 귀엽게 느껴졌다.

“그런 눈빛 하지 마. 나야말로 아직 얘기 안 끝났어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선의 눈매가 또 아래로 풀썩 꺼진다. 희락은 키득키득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까 가지고 왔던 생수 뚜껑을 따서 몇 모금 입 안을 헹구듯 우물대다가 꿀꺽 삼켰다. 그걸 두어 번 반복하자니 옆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도선 씨도 마실래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희락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많이, 그, 비리실 거 같아서……. 그러니까 놔 달라고 부탁드린 건데.”

마지막 말은 희미한 원망도 섞여 있었다. 희락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드디어 짐작 가는 것이 생긴 듯 소리 내 웃었다. 눈을 찡긋대며 장난스러운 중얼거림도 입에 담는다.

“내가 지금 비려서 물 마시는 거 같아요?”

“예?”

“아니야. 당신이랑 키스하려고 마시는 거잖아.”

“……!”

예고도 해 놨겠다, 희락은 침대로 돌아가자마자 달싹거리는 입술을 몇 번이고 품었다. 도선이 좋아하는 입천장도 마음껏 쓰다듬었고 입 안 여린 점막도 남김없이 핥았다. 냉수로 차가워진 입 안은 건네받은 체온으로 다시 따뜻함이 차올랐다. 갈증을 해소하듯 입 안 곳곳을 먹어 치우던 희락은 옅은 위화감을 느꼈다. 아까 맛봤을 때와 조금 다른 감촉이었다. 곧장 얼굴을 떼고서 위화감의 정체를 확인했다.

“쯧.”

얼마나 물어뜯는지. 도선의 입술 이곳저곳에 부르튼 흔적이 매달려 있다. 희락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생채기가 생긴 입술을 혀끝으로 쓸어내렸다.

“나 좀 봐요.”

희락이 부드럽게 중얼거리자 꼭 감겼던 눈꺼풀이 조심스레 눈동자를 드러냈다.

“우리 확실하게 할 거 남았잖아.”

희락이 장난스럽게 중얼거리자 도선은 제발 그냥 좀 넘어가자는 눈빛을 한다. 이번에는 어림없다. 나름 최선을 다해 윽박을 질렀어도 결국 자기가 버틸 수 없어 때려치웠다. 이제 딱 하나 남은 방법이라고는 어르고 달래는 것밖에 없다. 이것도 실패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아서 초조해졌다.

땀으로 젖은 뺨에 입 맞추고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다정스레 쓸어 넘겼다. 부드럽고 애정 어린 감촉이 지속적으로 주어지자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씩 달짝지근하게 변해 갔다.

“도선 씨는 누구랑 하고 싶은데.”

귓가에 속삭이며 살짝 떨리는 입술에 입 맞췄다.

“누가 지금 당신을 안고 있는데.”

또 한 번 닿고 떨어지는 키스를 했다.

도선의 대답을 기다리며 희락은 얼굴 곳곳에 가벼운 입맞춤을 건넸다. 눈썹과 관자놀이, 턱과 귓불 아래. 입술이 장난을 걸듯 이리저리 오가는 동안 어깨만 바르작대던 남자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온 신경을 청각에 기울이던 희락은 아주 작은 음성으로 속삭여지는 자기 이름을 똑똑히 들었다. 순식간에 기쁨으로 입술이 히죽댔다. 그다음 도선이 곧장 ‘님’을 붙여 오지 않았더라면 한동안 온몸을 사용해 환희를 표현했을지 모른다.

“희락 님?”

눈썹을 확 모으면서 들은 말을 고대로 입에 담자 도선이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피하지 못하게끔 두 손으로 그의 두 뺨을 거머쥐고서 코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맞닿은 피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게 뭐야. 나랑 장난해?”

“그럼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애썼으니까, 그거 아니까 이번 한 번만 농담으로 넘어가 주겠지만 다음은 없다는 거 명심해요. 또 그렇게 부르면 내가 정말 속상하고 섭섭할 거라는 것도 알아 두면 좋고요.”

와아, 대박.

희락이 속으로 감탄했다. 표정이 급격하게 변하는 법이 없는 얼굴이 눈앞에서 확 달라지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엉망이고, 울상이다. 그것 하나가 딱 아쉽다. 환한 미소였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희락아. 이거 한 번이 그렇게 힘들어? 그런 표정 지을 만큼?”

그러자 도선이 너무나 미안하다는 눈빛과 함께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막상 확인까지 하자 그리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쪽도 표정 관리가 안 되긴 마찬가지다. 희락은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꽤 섭섭한 표정을 짓게 됐다.

“그…… 음에…….”

달싹거리는 입술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네? 뭐라고 했어요?”

희락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시선을 쭈뼛쭈뼛 마주하며 도선이 다시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다음도 있다고 하셨으니까, 그러면 다음에…… 우읍!”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안을 진득하게 빨아 당기며 타액을 남김없이 핥아 마셨다. 놀라움으로 굳은 혓바닥을 자신의 것으로 강하게 옭매고 조이며 입술을 먹어 치우듯 키스했다. 움직임은 과격하고 거침없었다. 달뜬 한숨조차도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포악스러웠다.

“진짜지.”

희락이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숨을 몰아쉬며 도선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런 건 또 기가 막히게 기억한다고.”

이번에도 도선은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좋아요. 그럼 그거 꼭 지켜. 이 순간 모면하려고 한 거짓말 아니었다고, 내가 ‘다음에’ 꼭 확인할 수 있게 해 줘요.”

희락이 타액으로 범벅된 입술을 혓바닥으로 쓸어 주며 만족했다는 듯 웃었다.

이쯤에서 도선이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를 애무하며 뻐근함이 한계까지 차오른 아랫도리 사정을 이제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쪽은 아직 쌩쌩하다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애무를 받아야 했던 도선은 조금쯤 지친 듯했다. 가뜩이나 긴장했을 텐데 쉼 없이 쾌감과 열에 시달려야 했으니 지치지 않는 게 되레 이상할 것이다.

희락이 보디로션을 손에 쥘 때였다. 상기된 얼굴로 숨만 색색 쉬던 도선이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러느냐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의 입술이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중간중간 수치심으로 뭉개졌고 흐려졌기에 온전히 알아들을 순 없었다. 그나마 들은 단어들을 어찌어찌 머릿속으로 나열해 보니 ‘받기만 하는 것은 미안하니 나도 당신 것을 빨고 싶다’ 정도로 때려 맞추는 게 가능했다.

한쪽 팔을 뻗어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이쪽으로 기울어지는 이마에 기다렸다는 듯 입도 맞췄다.

“나도 다음에.”

희락이 웃으며 낮게 속삭였다.

“오늘은 나한테 다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마요. 그냥 느끼기만 해.”

끌어안은 어깨를 보다 단단히 붙잡은 채 힘을 주었다. 팔이 이끄는 대로 다시금 침대 시트에 푹 파묻힌 도선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 눈빛에서 희미한 불만을 읽었지만 희락은 능청스럽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희망 사항은 접수 못 해. 난 지금 다른 건 하나도 모르겠고, 그날을 만회할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꽉 찼거든요.”

희락이 로션을 듬뿍 짰다. 차가운 액체가 손바닥의 온기를 충분히 빼앗아 머금을 때까지 기다리고서 천천히 팔을 뻗었다. 긴장으로 움찔거리는 오밀조밀한 주름과 그 주변에 로션을 바르며 손끝으로 가볍게 자극을 주었다. 시선으로 확인한 얼굴이 딱딱해 보이는 건 비단 기분 탓이 아닐 거였다. 농밀함과 가벼움을 넘나들던 애무와는 차원이 다른 거다. 로션을 바르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제 이 안을 뚫고 들어갈 거라는 선전포고. 그날 맛봤던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다시금 몸으로 느껴야만 할 거라는 경고. 그런 것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머릿속을 울려 댈 것이 분명하다.

도선만큼은 아니겠지만 희락도 긴장으로 가슴 주변이 지끈거렸다. 여태까지 많은 오메가의 은밀한 곳을 손가락으로 쑤셔 왔고 벌려 댔지만 이런 기분을 맛본 적은 없었다. 손가락을 넣으면 더 크고 뜨거운 걸 넣어 달라며 조르고 애원하는 오메가들과 나눴던 경험은 지금 이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회음부와 주름 근처를 손끝이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잘게 들썩거리는 도선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쪽까지 목구멍이 바싹바싹 탔다.

와아, 돌겠네.

망설이다가 엄지 손끝을 살짝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구멍에 로션을 펴 바르며 조금씩 진입한 손끝으로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도선이 긴장으로 저도 모르게 힘을 줄 때마다 희락은 연거푸 탄식을 쏟아 냈다. 미칠 것만 같다. 그날 밤 이 구멍이 자신을 품었던 매 순간이 아찔할 정도로 머릿속을 잠식했다.

엄지를 간신히 찔러 놓고 원을 그리듯 천천히 돌렸다. 입구 주변이 오물오물 움찔대는 감촉에 눈이 자꾸만 부릅떠졌다. 이러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정신을 잃고 달려들진 않을까 걱정이다. 여태까지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았는데 어느 순간 충동을 못 이기고 그걸 죄다 물거품으로 만들지는 않을까. 자꾸 그런 걱정이 들었다. 걱정만으로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도선 씨, 아프진 않죠? 어때요?”

목소리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흥분으로 들쑥날쑥 정신없는 음성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필사적인지 모른다.

“네……. 아프진 않고 그냥, 약간 이상한 기분입니다.”

말끝이 희미하게 갈라지긴 해도 자기보다 침착한 목소리다. 어쩐지 패배감마저 들었다. 이쪽은 지금 마치 섹스를 처음 하게 돼서 흥분을 주체 못 하는 발정 난 애새끼가 된 기분인데. 안절부절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희락이 슬며시 엄지를 잡아 뺐다. 살짝 벌어진 채 벌름대는 안쪽으로 검지와 중지를 천천히 밀어 넣자 위쪽에서 후읏, 하고 숨을 짧게 들이켜는 기척이 났다. 아직 두 개까진 무리였나 싶어 시선을 위로 올리자 망설임 가득한 눈빛이 기다렸다는 듯 이쪽을 응시해 왔다.

“저기, 대표님.”

“네.”

부름에 바로 대답했지만 그다음 말이 없다. 무언가 또 생각을 한두 번 거치고 말해야 할 고민이 생긴 듯하다. 희락은 채근하지 않으며 그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실은 제가 지금 긴장을 정말 많이, 굉장히 많이 하고 있거든요.”

“……!”

생각지도 못한 말에 희락은 눈을 크게 떠 올렸다. 이 정도로 강조할 정도면 그 긴장이라는 게 상당한 모양이다. 혹시 어디 불편한 건 아니냐고. 솔직하게 말해도 좋으니까 힘든 부분이 있으면 꼭 얘기하라고. 희락이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도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다.

“저도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날보다 더 긴장돼요.”

“진짜? 그런데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표정도 평소랑 같고. 난 나 혼자 긴장한 줄 알았네. 모양 빠지게.”

“그러니까, 제가 막…… 헛소리 같은 거 지껄여도 그냥 무시해 주세요. 지금 그나마 정신이 있을 때 말해 두고 싶어서요.”

희락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거 아주 별로네요.”

“예?”

“난 정신이랄 게 손톱만큼도 없는데 당신은 그나마 있다고? 불공평하잖아, 그런 거.”

“읏!”

희락이 말을 마치며 손가락 두 개를 부드럽게 휘저었다. 안을 살피고 탐색하는 손끝에 조금씩 속도감과 율동이 붙는다. 깊숙하고 은밀한 공간을 파헤치고 꾹 누르면서도 시선은 오직 도선의 얼굴에 고정해 두었다.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진 눈빛이며 입술의 달싹거림이 얼마나 좋은 자극제인지 모른다. 가까이 마주하지 않아도 저 반듯한 이마에 맺힌 땀방울 역시 모를 수가 없다.

입구를 늘리는 것에만 시간을 할애하진 않았다. 희락은 열과 성을 다해 도선이 느끼고 좋아하는 곳을 알아냈다. 자기 것을 이 안에 찔러 넣었을 때 어떻게 해야 저 얼굴이 쾌감으로 일그러질지 미리 실험하는 느낌이었다.

시트 위에 굴러다니는 로션을 쥐고 다시 한번 듬뿍 짰다. 손으로는 입구와 그 주변을 충분히 적시며 되도록이면 유심히 보지 않도록 조심했다. 아까도 느꼈지만 흰 로션이 덕지덕지 흐르는 하반신은 그 어떤 것보다도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가뜩이나 간당간당한 인내심이 뚝 끊길 것 같았다.

희락이 도선을 바라봤다.

이제 넣을 거라고. 마음의 준비는 됐냐고. 어렵겠지만 힘 좀 빼 보라고. 여러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것을 입에 담을 기회는 없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저쪽이 먼저 위아래로 고개를 흔들어 댔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절로 웃음이 터진다.

저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먼저 고갯짓을 하는 걸까. 이따 물어볼까.

한숨을 작게 내쉬며 입구에 귀두 끝을 맞추고 안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위쪽에서 잔뜩 짓이겨지고 억눌린 신음이 들렸지만 희락은 지금 당장 거기에 반응할 정신이 없었다. 예상했고, 한 번 맛보기도 했던 압박감이다. 하지만 역시, 이 사람은 쉽지 않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쌍욕이 터질 것만 같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오늘만큼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극우성 페로몬을 어느 순간부터 줄줄 흘려 대고 있었다. 흥분으로 날뛰는 페로몬에 스스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절반 정도를 가까스로 찔러 넣었다. 좁디좁은 입구를 맛본 자기 것이 넣으면서 점점 더 커지는 바람에 곤욕도 이런 곤욕이 없었다. 삽입 때 이렇게 애를 먹어 본 적 역시 처음이다.

흥분이 휘몰아치는 하반신 사정과는 별개로 머릿속엔 안타까움이 뒤따른다. 초심자 혼자 이 행위를 시작하고 끝낸 거였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아프긴 또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걸 이것저것 생각하면 마음이 굉장히 좋지 않다.

희락은 최대한 신중을 기울여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팔꿈치를 시트 위에 세워 몸을 지탱하며 조금이라도 도선에게 체중을 싣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였다.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다. 도선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죄다 가리고 있었다. 손바닥으로도 막을 수 없는 희미한 신음이 귓가에 들려올 뿐이었다.

“도선 씨, 손 치워요.”

“못 합니다.”

“왜.”

“엉망일 테니까요.”

이쪽도 썩 좋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도선의 목소리에 견줄 바는 못 됐다. 통증과 긴장이 한데 뒤엉킨 음성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무척이나 작디작았다.

마음만 먹으면 얼굴에서 손을 치워 내는 것 정돈 아무것도 아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곧장 행동으로 옮겼을 거다. 오메가였다면 페로몬으로 굴복시키는 것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댔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다음에는 어떨지 몰라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런 식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희락이 조용히 속삭였다.

“뺨이나 머리, 어디든 좋으니까 나 좀 쓰다듬어 줄 수 있어요?”

이것 외에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이 상황에서 도선에게 요구 사항을 들이미는 건 너무한가 싶으면서도 입이 저절로 움직인다.

“목이나 등을 안아 주는 것도 좋고.”

얼굴을 덮은 손바닥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뭐라도 좋으니까 도선 씨가 해 주면 정말 기쁠 거 같은데.”

말은 역시 하고 볼 일이다.

드디어 궁금했던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눈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긴 했지만 심한 통증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 같진 않았다. 그게 나름 위안이 됐다. 간헐적으로 신음과 호흡을 내뱉는 입술에 고개 숙여 입을 맞췄다.

잠시 허공에서 맴돌던 두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머뭇거리던 손바닥이 희락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엄지 손끝이 뺨과 이마에 맺힌 땀을 훑었고 관자놀이와 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가늘게 뜬 맵시 좋은 눈이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희락은 잠시 그 감촉을 즐기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답례하듯 손목에 여러 번 입 맞췄다.

희락은 아래로 떨어지려는 한쪽 손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베개 위에서 손을 가볍게 눌러 잡고 손깍지를 꼈다.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이자 눈만 휘둥그렇게 뜨던 도선의 표정도 천천히 변했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우물거리던 입술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굉장히 좋은 걸 꾹 눌러 참는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반대편 팔을 시트 밑으로 집어넣어 도선의 어깨를 힘주어 안았다. 이어진 부분이 조금 흔들리자 끙끙 앓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희락은 달래듯 고개 숙여 턱과 목덜미를 차례차례 입술로 눌러 주었다.

이 이상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압박해 오는 입구가 슬슬 힘에 겨웠다. 그럼에도 힘 좀 빼 달라는 말이 쉽사리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도선도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했을 거다. 자존심 문제도 있었다. 사정사정해서 제발 안에 더 파고들 수 있게끔 협조 좀 하라고 지껄이는 자기 모습을 상상만 해도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희락의 고갯짓이 분주해졌다.

양손이 어깨와 깍지에 붙잡혀 있으니 자유로운 곳은 얼굴뿐이다. 고개를 들어 보이는 모든 곳에 입을 맞추고 혀끝을 가져다 댔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쏟아지는 키스의 향연에 도선이 움찔하며 하체에 힘이 풀리는 순간순간을 기다리며 차분하게 내부를 점령해 나갔다. 안을 고스란히 내줄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꾹 다물린다. 마치 실랑이를 벌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한 번만 쳐올리면 단숨에 꿰뚫을 수 있을 거였다. 초마다 한 번씩 그 충동이 드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했다.

섹스 한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희락은 남몰래 웃었다.

“하, 엄청나네…….”

마침내 승리했다.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인내심이 안겨다 준 승리다. 뜨거운 숨을 비 오듯 쏟아 내는 도선에게 미안해도 잠깐은 이 기쁨을 누리고 싶다. 끈질기게 설득하고 달랜 끝에 결국 자기 것을 남김없이 먹어 치워 준 뜨거운 내벽이 시시각각 엄청난 흥분을 안겨다 주었다. 마치 큰 포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혼자만 이 기쁨을 만끽하는 것은 좋지 않다.

희락은 달뜬 숨을 뱉는 입술을 덮어 누르듯 키스했다. 가뜩이나 타들어 가는 입 안이 삽시간에 신음 섞인 호흡으로 더더욱 뜨거워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혀끝으로 달래 가며 미처 삼키지 못하고 흥건히 고인 타액을 빼앗아 목구멍 안쪽으로 흘려보냈다.

오, 이것도 잊지 않고 해 주는구나.

등을 와락 끌어안듯 도선의 팔이 감겼다. 키스하는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그 손짓에 부응하듯 몸을 조금 더 밀착했다. 땀으로 흥건한 두 나신이 야릇한 소리를 내며 빈틈없이 겹쳐졌다. 깍지 낀 손에 힘을 넣자 등에 둘린 팔도 거기에 답하듯 어깻죽지를 꼭 잡는다. 희락의 얼굴에 다시 한번 미소가 어렸다.

키스를 이어 가며 천천히 허리 짓을 했다. 내벽을 전부 차지했다고 다가 아니다.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 수 있다.

희락은 아까 손가락으로 탐색하며 도선이 몸을 들썩대던 지점을 살살 매만지듯 귀두 끝으로 자극했다. 허리를 빙글빙글 돌리자 자기 것을 촘촘히 감싸 쥔 내벽도 움직임을 허락한다는 듯 부드럽게 풀어졌다.

접혔다가 펴졌다가. 침대 시트 위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허둥대는 두 다리가 안쓰럽다. 희락은 입술을 떼고서 “다리, 내 허리에 감아 봐요”라고 속삭였다.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끔뻑대던 눈동자가 이윽고 창피함으로 물들었다. 희락은 눈웃음을 치며 채근하듯 허리를 가볍게 쳐올렸다.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모른다. 벌벌 떨리는 종아리의 감촉이 엉덩이 근처에서 느껴졌다.

섹스치고는 정적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

격정적인 움직임이 없으니 살과 살이 부딪치며 내는 음란한 소리가 그리 나질 않는다. 페로몬에 온 신경이 절여진 채 온갖 소리를 내뱉는 오메가도 여기에 없다. 자기 목소리가 알파의 자극제가 된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오메가의 외설적인 대사와 비음이 없는 섹스. 호흡과 탄식은 겹쳐진 입 안을 울릴 뿐이다. 희락이 허리 짓을 할 때마다 이어진 부근에서 들리는 끈적끈적한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귓가에 와 닿았다.

“흣, 흐읏! 우으읏…….”

내벽 안을 끈질기게 문지르며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 어느 한곳을 찔렀을 때 도선이 비명과 흡사한 소리를 냈다. 키스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선명하고 또렷하게 청각을 사로잡았을 게 분명했다. 희락은 반가움에 몸을 떨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웃, 잠……, 잠깐, 대, 대표님, 거기……!”

입술을 놔주자마자 도선이 온 얼굴 근육을 사용해서 간절함을 부딪쳐 온다. 거기만 찔러 대는 걸 좀 그만두라는 신호였다. 그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알고 있다는 티를 낼 필요가 없다. 희락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딴청을 부렸다.

“응, 계속 찔러 줄게요. 당신이 좋아하는 여기.”

말을 이어 가며 허리에 차근차근 속도를 붙인다. 부글부글. 확 몰아치는 쾌감에 도선이 고개를 뒤로 꺾어 가며 호흡을 토하듯 뱉었다. 한 번, 두 번. 희락의 것이 존재감을 더더욱 키워 가며 내벽을 적응시켰다.

더더욱 깊은 곳으로. 더 안쪽으로.

도선이 좋아하는 곳만을 눌러 가며 안을 파고들 때마다 하복부에 뜨끈뜨끈 열이 고인다. 강렬한 쾌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열기가 시시각각 전신을 다 태울 듯 달궜다.

“내 거가 그렇게 맛있어요? 아주 놔줄 생각을 안 하는데.”

“아니, 아! 읏, 아냐, 그게 아니……, 잠깐, 아, 아아…… 제발…….”

창피함과 수치심으로 벌게진 눈가를 혓바닥으로 핥아 주었다. 이런 작은 행위에도 입술에서 신음이 쏟아졌고 내벽이 꿈틀거렸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은 이제 온몸이 성감대라고 해도 다름없을 거였다. 희락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보다 마음껏 허리를 놀렸다.

“안, 잠, 대표, 대표님, 흣, 아……, 하아, 앗!”

“그날도, 그 와중에도……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귓불과 목덜미에 차례차례 이를 세우며 희락이 중얼거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에 목소리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며 낮게 으르렁거리자 끌어안은 몸이 요동을 친다. 희락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간신히 허리와 엉덩이에 걸쳐 놨던 두 다리도 정처 없이 흔들거렸다.

“아니, 그런 말……! 아, 흐, 흐읏…….”

“그날보다 훨씬 더 좋아. 굉장히 뜨겁고 사랑스러워요.”

내벽이 점점 물크러지자 왕복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것 역시 몹시 갈망하던 순간이었다.

연하고 말랑해진 안쪽을 마음껏 치댔다. 어깨를 보다 힘주어 안으며 희락은 계속 참고 또 참아 왔던 흥분을 분출하듯 허리를 움직였다. 들려오는 호흡과 신음에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젠 일말의 망설임조차 전부 사라졌다. 오로지 이 사람을 쾌감으로 엉망진창 울도록 하겠다는 충동이 아주 강하게 일었다.

“……! 하, 읏, 대, 대표, 너무 깊, 빠르……!”

“싫은 건 아니잖아.”

“제발, 그, 아! 조금, 조금만…… 웃, 으읏, 잠, 안……! 흐, 흐읏, 흐우읏!”

어깨를 안았던 손을 내려 흔들리는 엉덩이를 거머쥐었다. 다소 우악스러운 손길에 밑에 깔린 몸이 있는 힘껏 전율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오동통한 살덩이를 주무르고 터트릴 듯 움켜쥐자 억눌린 피부 주변이 희미한 붉은빛으로 삽시간에 물든다.

와, 시발. 이거 뭐지?

희락은 거칠게 신음을 뱉으며 선이 예쁜 어깨에 이를 세웠다.

완전히 부드러워진 내벽은 자기 것이 왕복할 때마다 마치 정성을 다해 품어 주는 듯했다. 큰일이었다. 아찔함은 아까 찾아왔으니 이번에 한 번 더 머릿속에서 별이 보이면 이성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진작 끊어질 이성조차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열기로 이글거리는 시야가 어느 한곳에 오래 머문다. 마치 고정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베개 위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서로의 손이 만든 깍지였다. 참 이상했다. 파고들고 헤집기를 반복하는 하반신의 감각보다 어깻죽지를 연거푸 쓰다듬는 손길의 감촉이 더 생생하다. 손끝이 절박함을 담아 등을 두드리고 손톱을 세울 때면 그 어떤 순간보다 아랫배가 사정감으로 부글거렸다.

어떡하지. 이거, 시발…… 어떡하지.

희락이 이를 꽉 씹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건 다 참을 수가 있다. 사정감 역시 조금 더 이 순간을 지속할 수 있다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싶은 마음뿐이다. 지금 자기를 초조하게 하는 것은 여태까지 그 어떤 섹스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강렬한 충동 탓이다.

노팅하고 싶다.

노팅뿐만이 아니라 아예 각인까지 해 버리고 싶다.

도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정작 자기가 그 꼴이다. 이건 너무 말도 안 됐기에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너무 열이 오른 나머지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등골이 오싹하다. 스스로 제정신인가 싶어 굉장히 소름 끼쳤다.

이 사람은 베타다. 어지간한 우성 오메가에게도 알파의 노팅은 매우 버겁고 힘겨운 행위다. 그걸 모르는 이가 있을까.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알파나 오메가라면 교육 기관에서 혹은 양친과 주변 사람에게 골백번 들었을 거였다. 희락 역시 그랬다. 피임의 중요성만큼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어왔다.

그런 고통을 굳이 이 사람에게 줄 필요가 없는데. 소용없는데. 어차피 내 새끼를 잉태할 수 없는 사람인데. 잠시 도선이 베타라는 것을 잊었나.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페로몬이 전무한 베타를 안으며 노팅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게 가능한가.

노팅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각인은 정말이지 큰 문제다.

각인. 그건 바꿔 말하면 이 사람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싶다는 거다.

내가? 내가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고?

머릿속이 아찔하다. 새하얗게 변했다가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인다.

내가 정말 섹스 한 번에 노팅에 각인까지 바랐다고. 나중에 누구와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내 인생에 각인 따위는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내가. 그런 내가 지금…….

“와아. 이거는 진짜, 하핫. 와…….”

힘없는 미소를 연거푸 터트리자 위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대, 대표님?”

열기로 물든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희락이 중얼거렸다.

“도선 씨, 나 말이야…… 미쳤나 봐요.”

“예……?”

“미치겠다, 미치겠다. 계속 이렇게 생각하다가 진짜 미쳐 버렸나 봐.”

왜 그러냐는 시선에 그저 벙긋 웃고 말았다. 도선을 붙잡고 하소연할 때가 아니다. 갑작스러운 충동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이함을 느꼈다 한들 그것 역시 자기가 알아서 추슬러야 할 감정이다.

희락은 아래에 깔린 몸을 단단히 덮어 누르며 허리를 가감 없이 움직였다. 숨이 턱 막힌 듯한 탄식이 귓가에 들려올 때면 땀과 열을 머금은 목덜미를 달래듯 핥아 주었다. 느끼는 곳만을 퍽퍽 사납게 두드릴 때마다 도선이 울먹임을 섞은 앓는 소리를 냈다. 희락도 그 울음에 답하듯 어깨와 목에 이를 세우며 낮게 신음하고 으르렁댔다.

머리끝까지 사정감이 차오른 건 도선이 무의식적으로 맞잡은 손에 힘을 넣었을 때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강하게 얽히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그 무언가의 감정으로 꽉 들이찼다. 더 깊은 곳으로 가고자 탐욕스럽게 안을 먹어 치우던 자기 것도 그 순간 더더욱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강력한 쾌감 아래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순간이 끝나면 몸이 부서져도 좋을 것처럼 허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빈틈없이 달라붙는 신체 사이에서 여러 번 짓눌리고 비벼진 도선의 것은, 엄지로 귀두를 누르며 몇 번 주물러 준 것만으로도 사정에 도달했다. 손가락에 미지근한 점성을 느끼며 희락 역시 절정을 맛볼 수 있었다.

호흡이 편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희락은 무언가에 이끌린 듯이 도선의 얼굴 곳곳을 쪽쪽 소리 내며 입 맞췄다. 붉게 상기된 뺨이 보기 좋았다. 막 사정을 끝마친 것이 다시 흥분으로 날뛸 것만 같다. 아직도 연한 떨림을 머금은 내벽이 다시 존재감을 키우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도선의 눈빛에서 순식간에 긴장감이 깃든다. 희락은 키득 웃고서 이마에 입술을 비볐다.

“괜찮아요? 마지막에 너무 세게 한 거 같아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대꾸가 몹시 야릇하게 들린다. 격렬했던 움직임 탓인지 쉰 목소리로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네, 괜찮…….”

도선이 말끝을 흐렸다. 겸연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손에 쥐가 난 거 같긴 합니다.”

그제야 희락도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베개 위에 엉겨 붙은 손을 바라봤다. 얼마나 서로 단단히 붙잡았는지 피부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약간 힘을 빼자마자 오만상이 일그러지는 찌릿찌릿한 느낌이 손목까지 올라왔다.

“아, 나도 쥐 난 거 같은데.”

끙끙 중얼거리자 도선이 소리 없이 벙긋 웃었다. 이번에는 몇 초 안에 사라지는 미소가 아니라는 게 희락을 기쁘게 했다. 웃음을 잔잔히 머금은 입술은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들뜬다. 언제까지고 이 상태로 도선이 웃는 걸 마냥 바라보고 싶었다. 워낙 웃지 않아서 그럴까. 웃음 한 번에 이리도 감질이 난다. 평소에도 이렇게 웃고 있으면 좀 좋을까 싶다.

“아!”

코끝에 코끝을 비비며 장난을 치던 희락이 짧게 탄식했다.

“하아, 완전히 잊고 있었네.”

“대표님?”

“도선 씨 미안해요. 안에다가 할 생각 없었는데 도중부터 까먹었던 거 같아. 오늘 왜 이렇게 까먹는 게 많은지.”

“아…….”

도선은 그거였냐는 듯한 눈빛으로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표정이며 말투며. 희락은 좋지 않은 예감에 눈을 찌푸렸다.

“내가 그날도 안에다가 했어요?”

“네.”

물어 뭐 할까 싶지만 일단은 입에 담아 본다.

“도선 씨 허락은 받았고?”

“으음.”

도선이 짤막하게 웃었다. 입술에 번진 떨떠름함에 희락은 벌써 좌절감이 들었다.

“그날 대표님이 제게 허락을 구할 상태는 아니셨던 거 같습니다.”

“하아.”

도선은 아마도 자기를 위로한답시고 고르고 골라 대답한 듯하다. 그 마음이야 고마워도 또 한 번 자괴감에 머리가 띵 울렸다.

“대표님…….”

속으로 연거푸 혀를 찰 때였다. 나직한 부름에 희락이 정신을 차렸다.

“네.”

“지금 몇 시나 됐을까요.”

“그러게.”

환한 조명으로 눈부신 이 방에서 시간을 가늠하는 것은 어려웠다. 시선만으로 침대 헤드와 옆의 협탁을 살폈지만 휴대폰이며 손목시계며 아무것도 없다. 아까 욕실 앞에서 슈트를 벗어 던질 때 그것들도 죄다 내팽개치고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잡고 있던 손을 드디어 천천히 놓았다. 서로의 표정이 비슷한 모양으로 일그러진다.

희락은 키득거리며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젖은 허벅지를 부드럽게 잡고 이어진 곳에서 허리를 뺐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피부에서 연한 떨림이 전해졌다.

재빨리 고개를 위로 쳐올렸다. 음모에 엉겨 있는 체액이나 로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반신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한 번 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 냈다.

“이대로 얌전히 있어요. 알겠죠?”

“네.”

몸을 일으키면서도 시선이 자꾸만 도선의 하반신 쪽으로 향하게 된다. 흐물흐물한 육신을 시트에 묻은 채 나른함에 푹 젖은 표정을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희락은 애써 다리를 움직여 침실을 벗어났다. 도망치는 기분이었다. 인내심이니 자제심이니. 그런 것들이 이 상황에 가능하다는 게 스스로 신기하기 짝이 없다.

욕실 근처에 굴러다니는 슈트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석찬에게 전화가 한 통 와 있었다. 메시지는 없는 거 보니 급한 용무로 연락을 넣은 것은 아닌 듯했다. 도선과 어떤 식으로 얘기가 진행됐는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꽤 진지하고 농밀한 대화를 하긴 했지. 몸으로 했다는 게 문제지만.

희락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냉수를 꺼내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도선은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휙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끔뻑거렸다. 궁금증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희락은 “자정이 넘었어요. 생각보다 시간이 꽤 지났네요”라고 바로 그의 호기심을 풀어 주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선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서 희락이 질문하자 한숨 섞인 대답이 바로 흘러나왔다.

“버스가 다 끊겼을 거 같아서요. 아, 대표님. 제가 이 근처는 잘 모르는데 혹시 택시 잡는 곳은 가까운가요?”

가만히 듣던 희락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집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대표님도 피곤하실 테고, 저도 오후에 출근하려면 일찌감치 집을 나서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도선이 말을 잇는 사이 희락은 그 근처로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출근? 도선 씨 오프잖아요.”

상체를 일으키려는 몸을 부드럽게 잡았다. 침대 헤드에 쿠션을 대고 축 늘어진 몸을 기댈 수 있게 도왔다. 도선이 눈빛으로 감사를 표현하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오늘…… 아니, 어제 불가피하게 쉬지 않았습니까. 이틀이나 쉴 순 없습니다. 지배인님께 사정 설명도 해야 하고요.”

“도선 씨가 사정 설명을 왜 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다 내가 알아서 해요. 그리고 난 오늘 도선 씨 집에 보낼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희락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차디찬 생수통의 뚜껑을 비틀어 땄다. 그걸 도선의 손에 쥐여 주고서 자기도 새롭게 딴 생수통을 입에 가져갔다.

“어, 그건…… 대표님 말씀은 여기서 자고 가라는 뜻입니까?”

“당연하지.”

냉큼 대답부터 해 두고서 그다음 보란 듯 이마를 찌푸렸다.

“도선 씨.”

“네.”

“만약 도선 씨가 당장 집에 가고 싶었으면 거기서 버스니 택시니 그런 소릴 할 게 아니잖아.”

“예? 그러면…….”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다. 희락은 픽 웃고서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 태워 달라는 얘기가 나와야지. 나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 가라는 말이 나왔어야지. 그게 뭐야. 내가 뭐가 돼요. 내 태도가 나 할 거 다 했으니까 넌 이제 집에 알아서 가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어?”

도선이 어깨를 움찔하며 곧장 대답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대표님께 그런 부탁을 합니까?”

“누가 대표한테 그런 부탁 하래? 조희락한테 하라는 거지. 도선 씨랑 뜨거운 시간을 함께 보낸 나한테 하라는 거지. 그리고 부탁? 무슨 부탁. 부탁 같은 거 할 필요 없어요. 도선 씨가 나한테 할 수 있는 요구지. 아주 당연한 요구.”

도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들을 뿐이다. 불리하면 대꾸 안 하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걸 선택하는 이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왜 대답이 없어. 내 말 이해했어요?”

“이해는 했습니다.”

도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표정이 어딘지 뚱하게 보여서 슬쩍 웃음이 난다. 자기도 고집이 꽤 있는 편이지만 이 사람도 한 고집하는 모양이다.

“이해는 해도 따를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

희락이 키득 웃었다.

“뭐, 좋아요. 그런 쓸데없는 생각 같은 건 내가 앞으로 죄다 뜯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힘을 넣자 기운이 죄다 빠진 몸이 얼떨결에 그 손길에 응한다.

도선은 안아 올리는 몸짓에 기겁하며 앓는 소리로 당장 그만둘 것을 부탁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솜털처럼 가볍다고 할 순 없어도 이대로 욕실까지 못 갈 정도로 무거운 것도 전혀 아니다. 희락은 “얌전히 내 목에 팔 둘러요”라고 속삭이며 엉덩이와 등을 꽉 감싸 안았다.

*

*

도심이 보랏빛이다.

도무지 잘 수 없을 것만 같다던 도선은 침대에 눕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나라로 향했다. 희락 역시 아주 피곤했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들기가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사람은 마음이 들뜨면 쉽게 잠이 오지 않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잠에 푹 잠겨 든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깨지 않을 거 같았다. 희락은 손가락으로 코끝을 톡톡 건드리고 볼에 입도 맞춰 봤지만 도선은 세상모르고 눈을 꼭 감은 채였다. 반쯤은 기절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어느 순간부터 도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암막 커튼으로 사방이 어두운 방에서 은은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한 채 잠든 이의 얼굴만 줄곧 쳐다보는 건 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해 보는 짓이라서 더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모난 곳도 없고 딱히 두드러진 곳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베타의 얼굴을 마치 홀린 것처럼 응시하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도 참 믿기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잠은 계속 오지 않았다.

고른 호흡을 유지하며 잠에 빠진 도선을 뒤로한 채 희락은 일단 방을 나섰다.

일을 치른 침실의 시트는 땀과 정액으로 눅눅했다. 거기에서 잠들고 싶지 않았고 재우고 싶지 않았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나이트가운을 입힌 도선의 몸을 들쳐 안고서 곧장 별실로 이동했다.

조금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도선에게 “아까 거긴 우리가 너무 적셔 놔서요”라고 중얼거렸더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귀여웠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볼이 살짝 불그스름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뺨에 참지 못하고 입을 맞추고야 말았다. 그러자 도선이 또 사람을 미치게 하는 연한 미소를 살그머니 흘려 댔다. 불쑥 든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입술을 찾았다. 침대에서 누가 봐도 달짝지근한 키스를 기나길게 주고받았다.

밤새도록 잠든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것만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기어코 침대를 빠져나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휴대폰을 챙겨 오고 싶었고, 욕실에 너부러져 있는 옷가지들도 좀 수습하고 싶었다. 그 김에 도선의 옷을, 정확히는 사이즈도 알아 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따 집에 바래다줄 때 하루 온종일 바닥에 방치한 옷과 속옷을 입히고 싶지 않았다. 집 근처에 백화점이 있다는 것에 오늘만큼 감사한 적이 또 있었던가.

이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좀 들떴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무언가 자기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는 있는데 이게 썩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한두 주 전까지만 해도 도선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엉망이었는데 이제는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작 섹스 한 번을 더 했을 뿐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머릿속이 개운해졌는지 그건 앞으로 좀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 것은 침실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희락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방 안은 페로몬으로 자욱했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어찌나 매섭고 농밀한지 당장에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자기 페로몬을 맡으며 머리가 아파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건 아마 대다수의 알파가 경험하지 못할 일이다.

당시엔 정신이 없어서 느끼지 못했던가.

섹스하며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알파나 오메가는 없겠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히트사이클을 맞이한 오메가를 상대해도 이 정도까지 페로몬을 쏟아 내진 않았다. 페로몬의 농도도 문제지만 페로몬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더더욱 문제였다. 이 정도면 명백한 낙인이고 협박이다.

아무도 이 사람을 건드리지 말라고.

내 거라고.

욕실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고 도선을 씻길 때도 사실은 제법 창피하고 쑥스러웠다. 도선의 온몸에서 자기 페로몬을 맡을 수 있었다. 가뜩이나 진하고 농후한 극우성 페로몬을 이 정도까지 뒤집어쓴 거다. 이건 탈취제 한두 통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도선이야 모를 테지만 다른 알파나 오메가들은 아마 근처에만 와도 질색을 할 게 확실하다.

뒤처리를 위해 아래를 씻겨 줄 땐 너무 낯 뜨거운 나머지 목구멍까지 뜨거워졌다. 머리에서 김이 나는 착각이 인다. 사정을 하면서 페로몬을 얼마나 쑤셔 넣었는지. 그의 하반신에서 페로몬 냄새가 아주 진동을 했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비록 쪽팔려서 내색할 수 없었고, 내색한다고 해도 베타인 그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에 그저 입만 꾹 다물었을 뿐이다.

자기가 생각보다 더 흥분했던 모양이라고.

욕실을 나섰을 땐 딱 그 정도 생각뿐이었는데.

희락은 침실에서 한동안 아연실색한 채 묵묵히 서 있었다.

머리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도선을 안으며 노팅을 생각했고, 각인을 생각했다. 그런 걸 생각했을 정도면 자기가 그 순간 어느 정도의 페로몬을 흩뿌렸을지 짐작이 간다.

단지, 딱 거기까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각인과 노팅을 생각했을 때 들었던 희미한 공포감이 다시금 가슴에 자리 잡았다. 자기가 정말 어떻게 된 게 아닐까. 그 막연한 감정이 사실로 바뀌어 코앞에 디밀어지는 순간이다.

너 정말 어떻게 된 거 맞다고.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이 페로몬에 뒤엉킨 감정들을 좀 보라고.

한참을 미동 없이 서 있다가 휴대폰을 챙겨 도망치듯 침실을 뒤로했다. 지금 당장은 도무지 도선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잠든 모습만 쳐다봐도 머리끝까지 피가 몰릴 것만 같았다.

거실 테이블에 굴러다니는 담배를 챙겨 옥상 정원으로 나갔다. 머리를 좀 식혀 줄 찬 바람이 필요했다. 뼈가 시릴 것 같은 바람이면 더 좋았을 테지만 새벽의 서늘한 공기도 제법 도움이 됐다.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싸매 가며 담배를 축냈다.

희락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병원에 가서 치료나 상담을 받아 볼까’였다.

최근 자기 상식으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오늘은 거기에 아주 쐐기를 박은 듯하다. 다른 건 몰라도 통제가 안 된 것이 명백한 페로몬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흥분했어도 침실의 그 페로몬은 도가 지나쳤다. 제어력을 완전히 상실한 거다. 갈무리는 본능이나 마찬가지다. 하물며 괜히 극우성이 아니다. 그 어떤 개체보다 뛰어난 페로몬의 농도와 조절력을 지녔기에 극우성 딱지를 붙이고 사는 거였다.

이제는 어디 가서 극우성이라고 말하기에도 창피할 정도다. 조절이고 제어고 모든 게 불가능했다는 거다. 그 순간 자기 페로몬은 완전히 통제 밖의 영역이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이러니 무섭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여기까지라면 어찌어찌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다. 치료나 상담 같은 단어가 떠오른 건 종잡을 수 없는 자기 마음 때문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충격적이다.

자기 모습이 생경하고 이질적이다.

아무리 흥분했어도 페로몬의 억제를 실패했다는 게 막연한 두려움을 낳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실들을 차례차례 열거하면서 되짚는 지금 이 순간, 심각하고 자극적인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게 싫지는 않았다. 거부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였다.

이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두려움과 싫음은 이처럼 따로 놀 수 있는 감정이라고.

두려우면 싫은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적어도 오늘 자기에게 벌어진 기이한 일들만큼은 확실히 그랬다.

도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떻게 하면 조용히, 뒤탈 없이 모든 걸 없던 일로 할 수 있을지만을 생각했다. 그런 상대에게 느닷없이, 자기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를 해 댄 것부터가 참 신기한 일이다. 생각만 해도 초조함이 느껴지던 상대를 안으며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페로몬으로 범벅된 몸을 안으며 노팅과 각인을 생각하고.

머리가 아팠다. 여러 가지 고민스러웠다.

그럼에도 이 순간 역시 싫지 않다. 그게 헛웃음을 자아냈다.

그 후로 한참을 더 생각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희락이 등진 도심 풍경은 이제 보랏빛이 완벽히 걷어져 있다. 햇볕이 사방을 밝혔다.

손을 씻고 내친김에 세수도 한번 했다. 날이 밝자마자 석찬에게 전화를 넣을 참이었지만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오늘은 목요일이다. 도선과 협상을 위해 모든 일정을 비워 두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 전화해도 늦지 않다. 석찬에게 다시 연락이 오는 걸 기다리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석찬과 전화하면 휴대폰을 붙잡고서 미주알고주알 어쩌면 좋겠냐며 온갖 소리를 할 거였다. 믿음직한 비서는 묵묵히 듣겠지만 그럴싸한 해결 방안까진 말해 주지 않을 거다. 이건 오로지 자기 혼자 매듭지을 문제라는 걸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아.”

희락은 거울 앞에서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가며 얼굴을 확인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잠 좀 못 잤다고 멋지고 화사한 이 미모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지만 피곤함이 역력히 느껴지는 얼굴색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잠을 자긴 해야 할 거 같다. 이런 몰골을 도선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도선의 휴대폰 속에 저장된 사진을 떠올렸다. 희락도 내심 잘 찍혔네, 하며 흡족해했던 사진들이었다. 그는 반짝거림이 뚝뚝 떨어지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었다. 사진에게 지는 건 싫었다. 사진보다 더 반짝거리려면 일단은 충분한 수면부터 챙겨야 했다.

“도선 씨?”

느긋하게 별실로 들어서던 희락은 어두운 방에서 꼬물대는 사람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대표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도선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양팔을 희락이 부축하듯 붙잡고서 고개 숙여 시선을 맞췄다.

“왜 벌써 일어나요. 화장실?”

“아니요, 대표님이 안 보여서요.”

그런 이유라면 굳이 일으켜 세워 줄 필요가 없다. 희락은 도선을 다시 침대에 밀어 넣었다.

“잠이 안 올 거 같다더니 눕자마자 훌쩍 자 버리고.”

“죄송합니다. 그 말을 했을 땐 잠이 정말 오지 않을 거 같았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잃은 거 같습니다.”

상체를 일으킨 채 멀뚱멀뚱 앉아 있는 도선 곁에 희락 역시 몸을 앉혔다.

무심코 손이 뻗어 나갔다. 손끝에 뺨과 이마의 감촉이 달라붙었다. 만지기만 하는 게 아쉽다고 생각하자마자 이번에는 머리가 절로 움직였다. 눈썹 위에 조그맣게 입술을 세우며 입을 맞추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하염없이 매만졌다.

눈만 깜빡대던 도선이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혹시 출근하신 게 아닐까 했습니다.”

“도선 씨 혼자 두고?”

희락이 키득거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나 오늘 출근 없어. 원래는 도선 씨랑 오늘 보려고 했었으니까 일정을 죄다 빼고 미뤘거든.”

그래. 생각해 보면 지금 이 모습도 굉장히 이상하지.

그랬다. 정말 이상했다.

손을 잡고, 끌어안고,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춰 가며 최대한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화를 이끈다.

하룻밤 사이에 바뀌어 버린 풍경이다. 섹스 한 번이 변신에 가까운 변화를 일으킨 거였다. 그간 어땠는지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이런 것 역시 한 번도 없던 일이다.

희락은 스킨십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치댄다 싶을 정도로 들러붙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런 건 폼이 나질 않았다. 웃음을 팔아 가며 마치 구애를 하듯 엉겨 붙는 행동 따윈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다.

이렇게 또 한 번 우스워진다.

“도선 씨.”

“네.”

“내가 이렇게 만지고 입 맞추는 게 싫진 않아요?”

이마에 입술을 비벼 가며 할 질문인가 싶지만 어쩔 수 없다. 희락은 좋은 대답을 조르는 것처럼 어리광을 피우듯 얼굴 곳곳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저는 대표님이 만지실 때마다 긴장되지만 그 이상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와…….”

이런 건 얼굴 좀 붉혀 가며 머뭇거리듯 해야 할 대사가 아닌가.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업무 보고를 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왜 부끄러움은 이쪽의 몫인지.

희락은 픽 웃고서 도선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별 저항 없이 끌려오는 상체를 양팔로 부드럽게 감싸 안고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페로몬을 머금은 피부가 코끝에 닿았다. 잠시 잊고 있던 창피함에 얼굴이 또 뜨거워질 것만 같았다.

“어디 아픈 곳은 없죠?”

“허벅지랑 허리가 조금 저린 정도입니다. 그거 외에는 괜찮습니다.”

“출출하진 않아요?”

“예. 저는 괜찮은데, 대표님은…….”

“나도 아직. 아, 그리고 오늘 뭐 약속 있거나 그런 건 아니죠?”

“네. 없습니다.”

희락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주 잘됐네. 그럼 우리 눈 좀 붙였다가 느지막이 일어나서 점심 같이 먹어요. 저녁도 같이 먹을 수 있으면 더 좋고.”

가만히 듣던 도선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하루를 전부 저한테 쓰시게요?”

“문제 있어요? 그러면 안 되나?”

장난기 어린 말이 무색하게 도선이 몹시 진지하게 대꾸했다.

“문제 있습니다.”

이번에는 희락도 고개를 들었다. 이쪽까지 얼굴이 가라앉고 만다.

“무슨 문제.”

“제가 워낙 재미없는 사람이라 대표님이 지루하실 거 같습니다.”

“아하하! 뭐야, 그게. 괜히 긴장했네.”

희락은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리고서 도선을 다시금 와락 끌어안았다.

이쪽은 지금 궁금한 것투성이라고. 아주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고. 지루하기는커녕 오랜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까지 들 지경이라고.

많은 말이 떠올랐으나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번 입을 열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별별 소리를 죄다 지껄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다. 그런 건 역시 창피하고 겸연쩍다. 이런 앓는 소리를 도선에게 하면 제 살 깎아 먹기밖에 안 되는 거 같아 말을 아끼는 게 나을 거 같다.

점심은 뭐가 좋을까.

도선에게 물으면 어젯밤과 똑같은 억양으로 ‘뭐든 좋습니다’, ‘다 좋아합니다’라고 대꾸할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니 이번에는 질문을 바꿀 생각이다.

도선 씨가 나랑 같이 먹고 싶은 음식은 뭐예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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