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을 떴을 땐 혼자였다.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생각보다 더 취했었구나.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이토록 허름한 공간에서 눈을 뜨게 될 줄은 몰랐다.
희락은 침대에 멍하니 앉아 허탈하게 웃었다. 촌스러운 성냥갑. 출장 마사지 번호가 큼지막하게 적힌 티슈 케이스. 협탁 위를 굴러다니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은 더더욱 짙어졌다. 사물 중 눈에 익은 건 자신의 시계와 차 키, 지갑뿐이었다.
가볍게 샤워라도 하고 싶었지만 욕실 문을 열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 희락은 낡은 옷걸이에 걸린 자신의 옷가지로 손을 뻗었다. 이런 와중임에도 우스움과 간지러움에 픽 웃음이 터졌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 정신머리로 옷을 옷걸이에 걸어 두진 않았을 테니 이게 누구의 작품인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누굴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경악을 뱉고 싶은 욕실도,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도, 정체 모를 오메가도.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더 버틸 틈이 없었다. 퇴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화 덕분에 잠에서 깬 참이다. 어찌 됐든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희락은 모텔 카운터에서 딱 하나의 정보만을 얻었다. 어떤 남자가 고주망태가 된 자신을 부축한 채 야간 숙박을 잡았다는 것이다. 남자의 생김새나 옷차림 등을 물었지만 직원은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그냥…… 뭐, 아주 평범했는데요?”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러면 CCTV 좀 확인해 볼 수 있겠습니까?
희락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겨우 다시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자신의 얼굴은 그럭저럭 알려져 있다. 각별히 말조심을 해야 했다. 자기를 데려온 사람 얼굴 좀 확인하자고 CCTV를 보여 달라니. 누구라도 수상하게 생각할 거다. 물론 직원도 그러자며 시원스레 허락해 주진 않을 테지만.
희락은 바깥으로 나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사방이 밝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주변 곳곳 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까 머물렀던 방 창문에는 두꺼운 가림막이 버티고 있었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다가 드디어 바깥으로 나오니 이토록 밝은 햇살이 거리를 비추고 있는 거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제야 몇 시인지 궁금해서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1시 35분이다.
휴대폰을 꺼내 든 김에 전화도 한 통 하기로 했다. 2번을 길게 누르자 액정에 곧장 ‘민석찬’이 떴다.
[대표님? 어쩐 일로……. 무슨 일 있으십니까?]
대기음이 채 두 번을 다 울리기도 전에 상대편이 전화를 받았다. 심지어 놀라고 다급한 음성이었다.
민석찬은 희락의 오른팔과도 같은 존재다. 여태까지 골백번도 넘게 들었을 수행 비서의 목소리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 목소리를 들으며 반가움에 몸을 떠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대표님? 여보세요?]
“푸후……. 아하하.”
오늘 새벽부터 지금 이때까지 사라지고 없었던 현실감이 이제야 좀 머릿속에 감돌았다. 그 덕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꿈인가. 꿈을 꾸나. 그런 생각들을 반복적으로 하다가 현실로 끌려 나오니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대표님, 혹시…….]
석찬이 앓는 소리를 냈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주말에 전화하는 법이 없는 자신의 상사가 전화통을 붙잡고 끅끅 웃어 대니 이상하기도 할 거다.
[낮술 하셨습니까?]
“아하핫! 아니라고!”
술 때문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희락이 조용히 덧붙인 말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한숨이 쏟아져 흘렀다. 당장 찾아뵙겠다는 말에 희락은 그러라고 했다. 안 그래도 지금 누군가를 붙잡고 어제저녁, 혹은 오늘 새벽에 일어났던 기이한 체험을 말하고 싶던 참이다.
모텔 주차장에서 그 어떤 차량보다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 보니 속이 쓰렸다. 현실감이 돌아오자 이번에는 두통과 공복이 찾아왔다. 희락은 메신저를 열었다. 올 때 해장할 것 좀 사 오라는 단문을 남기고서 곧장 시동을 걸었다.
*
*
석찬은 역시 척 하면 탁이었다.
그가 포장해 온 삼선 짬뽕은 희락이 평소에 해장으로 즐기는 음식 중 하나였다. 집에 와서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가장 좋아하는 소파에 몸을 앉히자마자 떠올랐던 음식이기도 했다.
숙취 드링크까지 알뜰살뜰 챙겨 온 비서 덕분에 술의 여파가 한결 나아졌다. 희락이 식사를 다 마치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던 석찬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으음.”
담배를 물자 석찬 역시 자연스럽게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비서가 붙여 주는 불에 담배 끝을 가져가며 희락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씻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기억나는 게 그다지 없단 말이지.”
“기억나는 거라도 일단 말씀해 보세요.”
비서의 채근에 희락은 기억을 다시 한번 가다듬었다.
무리가 엉망진창으로 취한 곳은 <호디에>였다. 여러 사업장에 대표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희락이 운영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스무 개 남짓의 별실이 있었고 백 퍼센트 예약제로 운영됐다.
처음에는 이런 곳이 있으면 편할 거 같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사이에 입소문이 퍼져서 호황을 이뤘다. 비밀스러운 얘기를 그 누구보다 은밀하게 하고 싶은 이들이 이곳에 찾아와 머물렀다.
희락과 친구들이 술잔을 주고받은 곳은 호디에에서 가장 큰 별실이었다. 늘 시선을 신경 쓰며 사는 이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마음껏 마시고 아이처럼 떠들었다. 몇 병을 마셨는지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했다며 일찌감치 테이블 위에 고개를 처박은 친구 한 놈을 보고 다 같이 낄낄거린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머지않아 차례차례 초주검이 됐다. 또 머지않아 하나둘 자리에서 사라졌다. 각자 측근들이 데려갔거나 혹은 직원들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벗어났다.
마지막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던 희락은 지배인에게 대리운전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술기운 탓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친구들 앞이면 족했다. 어지러워서 약간 비틀거리긴 했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배인에게 차 키를 넘기면서 앞 벤치에 앉아 있을 테니 대리운전 기사가 도착하면 그쪽으로 보내라는 말도 혀 한 번 꼬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희락이 직원들 앞이라고 센 척했다는 걸 빙빙 돌려 말하는 동안 석찬의 표정은 조금씩 구겨졌다. 그다음, 그 표정과 꼭 어울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표님이 대리운전이라니요. 모양새 안 좋게. 차라리 저를 부르지 그러셨어요.”
“그럴까 했는데 주말이잖아. 우리 민 비서님도 쉬셔야지.”
희락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석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거기서 필름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시죠?”
“응. 내가 차 뒷좌석에서 잠들었던 기억이 나. 누구 어깨를 베개 삼은 채로. 그다음은 정신 차려 보니까 섹스하고 있었지. 또 그다음은 난생처음으로 모텔 침대에서 눈을 떴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없네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잠시 생각하던 석찬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문 지배인한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대리운전 업체에 연락해서 누가 대표님 차를 몰았는지 알아내고, 그 사람을 알아내면 어제 대표님께 어깨를 빌려줬던 사람의 인상착의 정도는 딸 수 있겠죠.”
희락이 푹 웃었다.
“아니. 물어봤자 소용없을걸. 평범한 남자였다는 소리가 전부일 거니까.”
“이미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으신 겁니까?”
“안 그래도 모텔 나오면서 카운터 직원한테 물어봤지. CCTV 좀 볼 수 있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니까?”
“CCTV. 그거네요.”
“응?”
“호디에 CCTV를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호.”
희락이 눈을 빛냈다. 갑갑했던 기분이 그제야 좀 풀리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정확한 이유를 못 들었습니다. 그 남자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꼭 있는 겁니까?”
“안으면서 굉장히 좋았던 거 같아. 색다른 오메가였어. 정신이 끊길 때까지 허리를 흔든 기억만큼은 아주 생생하다고.”
석찬이 쓰게 웃었다. 희락 역시 따라 웃어 버렸다.
“그렇군요. 그리고요?”
“콘돔을 안 꼈어.”
이번만큼은 석찬도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희락의 ‘술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라는 말은 지극히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찾아야겠네요.”
“찾아야지.”
임신했으니 책임지라며 덤벼드는 골치 아픈 일은 사양이었다. 고작 손깍지 하나에 기뻐하던 그 오메가가 부른 배를 안고 찾아와 대담하게 책임을 요구하는 모습은 쉽게 상상 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고 사람만큼 무서운 게 또 없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다.
* * *
토요일은 숙취가 남기고 간 나른함과 싸웠다. 일요일은 늘 그렇듯 평일을 버티는 원동력을 마련하고자 오로지 휴식에 할애했다. 머리를 비우고 침대와 한 몸이 된 것처럼 집에 틀어박힌 채 지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꽝이었다.
호디에 건물 주변에 설치해 둔 CCTV 영상을 모조리 걷어서 확인 작업을 했다. 원했던 영상을 확보하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오메가의 얼굴을 알아내는 건 실패였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다만, 상황 파악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영상 속에서 희락은 앉은 채 목을 뒤로 젖혀 벤치 등받이에 뒤통수를 대고 있었다. 아마 저 상태로 잠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몇 분 뒤 그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순간 단번에 느낌이 왔다. 화면 속 저 인물이 자신과 밤을 보낸 그 오메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희락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이런 곳에서 잠드시면 얼어 죽어요’라는 말이 나올 계절은 아니지만 인사불성이 된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했던 거 같다.
이 험한 세상에 취객을 걱정할 수 있는 용기를 내다니. 어지간히 착하거나 혹은 어지간히 미련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지나가다가 날 주웠나 봐.”
“농담하실 땝니까.”
말을 붙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희락이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더니 대뜸 앞에 서 있는 오메가의 손목을 잡았다. 대화를 나누던 영상 속 두 사람은 이윽고 도착한 차의 뒷좌석으로 함께 모습을 감췄다. 차 역시 순식간에 영상에서 사라졌다. 그게 끝이었다.
“새벽 1시입니다. 저 시간에 호디에 앞뜰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이야 한정되어 있죠. 쉽게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필요하다면 호디에 내부 CCTV도 죄다 걷어서 확인해 보죠.”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적어도 손님은 아닐 거니까. 저 옷차림만 봐도 답이 나오지.”
모텔 직원이 평범하다고 말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청바지에 티셔츠. 길에서 열에 다섯은 마주칠 수 있을 거 같은 지극히 평범하고 흔해 빠진 옷차림이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두드러진 용모거나 알려진 유명 인사가 아니라면 평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그러네요. 그렇다면…….”
석찬이 말끝을 흐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희락 역시 자신의 비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호디에 관계자 중 하나가 아닐까.
희락이 대표이긴 하지만 이곳의 운영 및 관리 등은 지배인에게 일임하고 있기에 직원들 중 눈에 익은 얼굴은 극히 일부였다. 하물며 희락이 늘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얼굴을 안다고 해 봤자 지배인과 건물 로비에 상주하며 예약 확인과 입장을 전담하는 몇 명 정도다.
“문 지배인한테 슬쩍 말이나 흘려 봐.”
“알겠습니다.”
*
*
토요일 새벽 1시경, 대표님을 부축해서 차에 태워 준 고마운 사람을 찾고 있다. 대표님이 아주 ‘애타게’ 찾고 있으니, 그 사람이 혹시 우리 직원 중 하나라면 꼭 나타나길 바라 마지않는다.
석찬이 문 지배인에게 전달한 말은 곧장 호디에 직원 전부의 귀에 들어갔다. 덕분에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사건이 해결됐다.
“찾았다고?”
[네.]
석찬의 연락을 받은 것은 부친의 호출을 받아 오랜만에 HW 그룹 본사에 얼굴을 디밀었을 때였다. 회장실을 코앞에 뒀을 때 걸려 온 전화에 일단 그 자리에서 후퇴했다. 부친의 얼굴을 보며 나눌 대화가 아닐 거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잘됐네. 역시 직원 중 하나였어?”
[그렇습니다.]
희락이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쯧, 직원한테 손을 댔다니. 술을 끊든가 해야지.”
[그것도 문제이긴 합니다.]
“다른 문제도 있다는 거야?”
[네.]
석찬이 애매모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봤을 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잘된 거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표님이 생각하시기에는 큰 문제일 거 같아서요.]
뭔 소리야, 그게.
희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해 봤자 답이 나올 거 같지도 않으니 이쪽으로 건너오시라는 석찬의 말을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락은 문제의 오메가와 독대할 수 있었다. 사람을 죄다 물린 호디에의 사무실에는 단둘뿐이었다.
희락은 사무실에 도착하고 10분이 지나도록 말 한 마디 꺼낼 수가 없었다. 대표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사람에게 “편하게 앉아요”라고 건넨 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소파에 꼿꼿한 자세로 앉은 ‘오메가’를 한동안 멍청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마치 정신 불안증에 걸린 사람처럼 사무실 주변을 서성거렸다. 책상과 테이블을 한 바퀴 돌고, 사무실 창가에 한 번 멈춰 섰다가, 다시금 소파 근처로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시선 끝에는 계속 문제의 남자가 있었다.
희락은 책상 위 얇은 서류를 다시 한번 읽었다. 아까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 석찬이 봐 두면 좋을 거라며 떠안긴 것이었다.
베타.
생년월일부터 기타 잡다한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그 단어만이 희락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아까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긴 했었다. 남자에게서 어떠한 페로몬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페로몬 탈취제를 상시 뿌려 대는 오메가나 알파가 없는 것도 아니니 눈앞의 남자도 그런 사람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이 서류가 거짓이 아니라면 말이다.
“몇 가지 좀 물읍시다.”
희락이 드디어 입을 열며 남자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남자 역시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들은 말에 대꾸했다.
“네.”
“베타네요?”
“네.”
본인의 입으로 확인 사살까지 받았다. 이제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 됐다.
아니, 아니지.
희락은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판단을 성급하게 내릴 필요는 없다.
“토요일 새벽에 나를, 그…….”
이름이 뭐였지?
그러자 남자가 희락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조용하게 대꾸했다.
“윤도선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도선 씨. 도선 씨가 나를 부축해서 차에 태웠어요?”
“네.”
“도선 씨도 나랑 같이 차에 탔고요?”
“네.”
“그다음은요? 도선 씨는 어디에서 내렸어요?”
질문에 즉각적으로 날아오던 대답이 여기서 끊겼다. 대신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이쪽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 눈빛에 희락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잠깐 침묵 끝에 도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과 같은 곳에서 내렸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내렸는데요?”
희락의 생각은 그랬다.
그래. 우리가 차에 같이 탔을 수도 있다. 날 걱정해 준 직원에게, 퇴근길이라는 직원에게 그럼 내 차 타고 가라며 술김에 선심 한 번 썼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태운 사람과 나랑 모텔에서 뒹군 사람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거다.
CCTV에 부옇게 찍힌 모습을 본 순간부터 저 사람이 바로 밤을 함께 보낸 오메가라고 확신했었다. 이제는 그 확신이 제발 착각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희락의 바람이 무색하게 도선은 담담히 대꾸했다.
“모텔이었습니다.”
“후우…….”
이제 도망칠 구석이 없다. 눈앞에 디밀어진 사실을 인정해야 할 순간이다. 조희락이 베타랑 잤다고. 술김에 베타랑 뒹굴었다고. 그게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희락이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자세하게…… 아, 저기 미안한데 내가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거든? 그러니까 그날 일 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요?”
도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할까요.”
“도선 씨가 날 발견했던 순간부터요.”
“퇴근길에 대표님을 봤습니다. 벤치에서 주무시고 계시니까 걱정이 됐습니다. 대표님 얼굴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으니까요. 괜찮으시냐고 물었고, 지배인님을 불러 드릴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표님이 갑자기 제 손목을 잡으셨어요.”
“그랬군요.”
“제 얼굴을 한동안 보시더니 ‘나랑 할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여쭸더니 ‘섹스 말고 또 있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믿기지가 않아서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라고 여쭸고요. 제 말에 대표님이 웃으시면서 ‘이보다 더 진심일 수 없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듣다 듣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희락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으, 시발!”
도선의 무뚝뚝한 얼굴에 설핏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희락은 손사래를 가볍게 치면서 반대편 손으로 눈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아, 미안. 도선 씨한테 한 말이 아니라 내 혼잣말. 계속해요.”
“네. 그러다가 차가 왔고 일단 대표님과 함께 동승했습니다. 어디로 모실까 여쭸고 대표님은 ‘가장 빨리 뒹굴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하시자마자 곧장 잠드셨습니다. 대표님 의향을 물을 겨를이 없었기에 저는 기사님께 이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숙박업소로 가자고 부탁드렸습니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을 기세였던 희락이 그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도선의 말은 전부 사실임에 틀림없다. 의심조차 가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능수능란한 달변가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들은 말 역시 자기가 하고도 남을 법한 대사들이다.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희락은 왜 이렇게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윤도선 씨. 우리 하나만 확실하게 합시다.”
“네.”
“그날 내가 도선 씨 안으면서 물었죠. 강간이냐고.”
도선이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도선 씨가 내 질문에 어떻게 반응했었죠?”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죠? 도선 씨는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듣다 보니까 좀 이상하네. 도선 씨 내가 대표라고 알고 있었다면서.”
“네.”
“그럼 도선 씨는 대표가 요구하는 잠자리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승낙한 건 아닌지. 내가 굉장히 걱정…….”
희락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단호한 대답이 들렸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요? 그럼 도선 씨가 나랑 모텔에 들어간 이유는 뭐였는데?”
그 즉시 도선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희락은 조금 초조해졌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을 했음에도 엄청난 말실수를 한 것처럼 느껴지는 거였다.
“대표님.”
힘주어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희락 역시 “네?”라고 대답하며 그 눈빛을 마주했다. 그다음,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 귓가에 들렸다.
“대표님 유혹을 진심으로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
희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하, 아하하! 뭐야, 그거. 칭찬인가? 와, 좀 부끄럽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사람이 웃음을 터트려 가며 재잘거려도 도선은 목석처럼 가만히 앉은 채 무표정만 유지했다. 희락은 머쓱한 마음에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희락은 맞은편에서 흐트러짐 하나 없이 앉아 있는 남자를 마냥 응시했다. 자기였어도 누군가에게 이 남자를 설명할 때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을 게 분명하다. 오메가였더라면 페로몬의 향이라도 설명했겠지만 베타인 남자에게는 그런 것도 무리니 말이다.
실례인 줄 알지만 자꾸만 위아래로 뜯어보게 됐다. 그리고 뜯어보면 볼수록 자기가 그날 만취 상태였다는 사실만 다시금 직시하게 됐다. 이 정도 얼굴이면 베타든 나발이든 한 번 따먹어 보고 싶었을 거라고. 이런 핑계가 통할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오죽 좋았을까.
그야말로 평범하다.
정말 흔한 얼굴이다.
“내가……. 내가 정말 당신이랑 섹스를 했다는 거군요.”
허무함에 사로잡힌 혼잣말이었다.
입 밖에 낸 순간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됐지만.
무심코 뱉은 이 말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베타랑. 당신처럼 평범한 사람이랑. 어쩌다가 내가. 여러 후회와 갑갑함이 뒤섞인 중얼거림이었다.
그가 이 혼잣말을 무슨 뜻으로 이해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 희락의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엔 어렵지 않았을 거다.
“네, 술이 과하셨거든요.”
“…….”
희락의 얼굴에서 일순 표정이 사라졌다. 화사한 얼굴이 눈앞의 남자와 꼭 닮은 무표정으로 변했다. 들은 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어서다. 또,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선의 목소리는 마치 위로하는 듯 들렸다. 그게 더 사람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가만 보니 이쪽이 무례한 화법이라면 저쪽은 황당한 화법을 구사한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희락은 건조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취하지 않았으면 도선 씨를 거들떠도 안 봤을 거라는 소린가요?”
“네.”
물론 그렇다.
지극히 사실이다.
취하지 않았더라면 베타를 붙잡고서 뒹굴자는 제의 따위를 할 턱이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은 정말 묘하기 그지없다.
굳이 질문하는 자기도 그랬지만 거기에 흔들림 하나 없이 대답하는 남자 역시 이상하다. 자학이나 한탄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더할 나위 없이 사실만을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다. 망설임도 없고 구슬픔도 없다.
“대표님께 죄송합니다.”
도선이 허를 찌르듯 툭 입을 열었다. 희락의 눈동자가 보다 더 가늘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계속 겹쳐진다.
“나한테? 왜요.”
“그날은 저도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고민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대표님을 위해서라도 거절해야 했다는 후회가 들더군요. 대표님께서 취중이었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 같은 사람을 안으신 건데 지금 얼마나 마음이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와아…….”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희락은 차마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생각만 머릿속에서 연거푸 되뇌었다. 이건 일종의 정신 공격 같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대표님께 저도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희락이 이마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네, 해 보세요.”
“왜 저를 찾으신 겁니까?”
“아……. 난 그날 나랑 뒹군 사람이 베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안 했고, 도선 씨 만나기 직전까지 오메가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그런데 내가 그날 피임에 전혀 신경을 못 썼잖아요? 겨를도 없었고. 그러니까…….”
도선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제가 대표님께 더더욱 죄송한 일을 했네요.”
나도 뭔가 사과해야 할 시점인가? 그런 식으로 따먹어서 미안하다고?
희락은 잠시 고민했으나 아무래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지금 당장은 숙취에 시달릴 때보다 더 머리가 아팠다.
어쨌든 이 대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두통에 머리를 싸매며 죽을상을 짓는 것은 이 이상 사양이었다.
“도선 씨, 원하는 게 있으면 편하게 얘기해요.”
“원하는 거요?”
“네, 현찰도 좋고. 차나 집도 괜찮고. 내가 도선 씨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 텐데요.”
뭐든 다 좋았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것을 건넬 때 그날 밤 벌어진 일을 가지고 평생 귀찮게 굴지 않겠다는 서류 한 통을 받아 내면 이 일은 해결이었다. 기억까지는 어쩔 수가 없기에 이따금 하룻밤 실수가 생각날 때면 쓴웃음 몇 번 짓긴 할 테지만.
무언가를 생각하던 도선이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미 받았습니다.”
“받았다고?”
석찬이가 벌써 손을 쓴 건가?
희락은 흐릿한 미소를 흘렸다. 석찬이 일 처리가 빠르다지만 이렇게까지 빠르진 않을 거 같았다. 아직 자기와 얘기도 하지 않은 상대를 붙잡고서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 원하는지 협상을 진행했으리라는 생각은 쉬이 들지 않았다.
“내 비서랑 얘기했어요? 나 오기 전에?”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줄곧 망부석처럼 딱딱하던 표정이 아주 조금 흘러내렸다. 살짝 주저앉는 눈가를 희락이 신기함에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실은 제가 여태까지 누구와도 동침한 적이 없습니다. 대표님이 처음입니다.”
“……!”
희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무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다. 도선이 고개를 살짝 올리며 건조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일단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최대한 얼굴에 감정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처녀였다고? 미치겠네, 시발!
여기서 도선이 내 처음을 가져갔으니 책임지라는 고릿적 유물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가까스로 유지하는 제정신이 단숨에 날아갈 게 분명하다.
“대표님이 그날 밤 제 손목을 붙잡으셨을 때 정신없는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분과 잘 수 있는 기회가 평생 또 있을까 싶더군요. 하물며 첫 경험을 대표님 같은 분과 할 수 있다니 엄청난 행운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당혹스러움에 아무 말 못 했다. 지금은 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 희락은 반쯤 입을 벌린 채 들리는 목소리에만 귀 기울였다.
“대표님께는 그날 밤이 불행한 사고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다시없을 좋은 추억이 됐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을 마치며 도선이 살짝 허리를 숙여 보였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희락은 터무니없다는 표정을 유지한 채 눈앞의 남자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도선은 이제 나가서 일 보라는 얘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추억이 됐다. 그게 답니까? 끝이에요?”
드디어 목소리가 나왔다. 표정 관리는 어떻게든 됐다지만 황당함이 진하게 깔린 음성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뭐가 더 있어야 합니까?”
“물질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내 속이 편할 거 같거든요.”
나중에 딴소리하면 이쪽이 정말 곤란하고 피곤해진다고.
희락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뒷말을 애써 눌렀다. 그 대신 한숨을 몇 번이고 내뱉었다. 그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무리 호흡을 가다듬어도 답답함이 사그라지진 않았지만.
“대표님께서는 이 일을 아예 없었던 일로 하고 싶으신 거죠.”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이번에도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쯤 되면 정말 대단한 남자다. 이런 질문을 눈 한 번 깜짝 안 하고 해치우다니.
희락은 순간 멈칫했다.
“네.”
아주 잠깐이지만 대답을 망설인 게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희락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손으로 주름진 이마를 재빨리 문질렀다.
도선은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죠.”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보며 도선이 말을 덧붙였다.
“그날 밤은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대표님이 제게 뭘 해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다 됐죠? 얘기 끝났나요?
그렇게 묻는 듯한 시선을 고개 돌려 피했다.
이제 희락이 대답하는 것만 남은 상황이었다.
뭐지, 이거?
별별 감정이 다 들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긴 거 같아 자존심에 흠집이 좀 난 거 같다. 또, 이 상황에 황당함으로 아연실색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인 듯하니 그것 또한 미칠 노릇이다. 마치 자기가 안달 나서 날뛰는 꼴을 보다 못한 상대가 ‘그래,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라며 달래 주는 것처럼 돌아가는 상황이 가장 열받았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오늘은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도 내일이면 또 달라질 수 있는 게 사람 마음 아닙니까? 나한테서 받아요, 뭐든. 내 마음이 편해지게.”
희락이 자포자기하듯 내뱉은 말에 도선은 또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다.
“그러면 4만 원만 받겠습니다.”
“4만 원?”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액수인가 싶었다. 희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으나 도선은 진지한 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날 모텔비가 8만 원이 나왔거든요.”
드디어 희락은 무너졌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허리를 앞으로 푹 숙였다.
“아하하…….”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음밖에 안 나왔다는 게 더 정확할 거다.
오메가만 먹어 치워 왔던 자기가 베타랑 잤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이 남자다. 눈앞의 베타는 조금 전부터 자기가 예측조차 불가능한 말만 해 대고 있다.
인생에서 고배를 마실 때도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따윈 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도 다 경험이고 경험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했다.
오늘은 다르다.
오늘만큼은 정말 시간을 돌이키고 싶었다. 그날 밤이 벌어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이 상황에는 어떤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같았다.
희락은 도선이 조금 전부터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기로 했다. 맥 빠진 목소리를 겨우 입 밖으로 내보냈다.
“일단, 나가서 일 보세요…….”
“네, 대표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그제야 희락은 허리를 펴서 등 돌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흰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가 휘감은 몸은 그날 밤 먹어 치웠던 벌거벗은 뒷모습과 쉽게 겹쳐지지 않았다. 하물며 시종 담담한 태도와 목소리라니. 정말 그날 밤 남자가 저 사람인가 싶을 정도다.
손깍지에 목덜미를 붉히던 그 귀여움은 어디다 내버렸는지.
희락은 쯧, 혀를 차며 한숨 쉬었다.
석찬에게는 미안하지만 앞으로는 만취하면 주말이라도 꼭 자신의 비서를 부르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이런 이상한 일은 두 번 다시 사양이다.
* * *
조희락, 서른둘.
HW 그룹 회장 조희탁의 넷째이자 극우성 알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승계에 뜻이 없음을 밝혔다. 상상을 초월하는 형제들의 혈투에서 일찌감치 발을 빼고 싶었다. 부친은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고 모자라지 않게 영리한 막내아들을 예뻐했다. 그 막내아들이 경영권 싸움에 적극 동참하여 훌륭한 헤살꾼으로 활약하길 바라 마지않았다. 당연히 희락의 이탈을 반대했고 적극 만류했다.
승계권 이탈은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희락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였다.
물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운이 따라야 한다. 하물며 치열하게 성과를 올리며 독보적인 무언가를 매번 양친과 이사진에게 보여 줘야 했다. 출발이 늦기에 이미 형들과 누나가 하나둘 쌓아 둔 실적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핸디캡까지 끌어안은 마당에 말이다.
희락은 생각했다.
최후의 승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건 바꿔 말하면 최후의 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거였다. 매일 숨이 막히는 인생을 살고, 그 과정에서 형제들과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 결국 운마저 따라 주지 않아 패자 딱지를 붙인 채 고만고만한 계열사 몇 개로 만족해야 하는 삶. 그게 자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건 사양이었다.
그런 인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없었다.
자식 한 명 정도는 어떠한 계산 없이 오직 자식으로만 품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으시냐고. 진심과 설탕 발림이 반씩 섞인 설득에도 부친은 호락호락 넘어가 주지 않았다. 희락은 방향을 틀었다. 부친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남성 오메가이자 극우성인 자신의 모친뿐이었다.
모친을 포섭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부친은 자식 이기는 부모였으나 모친을 이길 수 없는 애처가였다. 부친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탈의 승낙이 떨어졌다.
승계 구도에서 완전히 이탈한 막내를 형제들은 앞다퉈 제 편으로 두길 원했다. 가장 사이가 좋은 큰누나와는 못해도 1주일에 한 번씩 꼭 식사를 함께 했고 큰형, 작은형과는 골프나 각종 행사를 함께 다니며 우애를 다졌다. 희락이 생각했던 청사진은 별 어려움 없이 척척 진행됐다.
금수저 덕에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이제는 남이 부러워하는 삶을 본격적으로 살게 됐다.
계획대로만 진행되면 재미가 없다는 걸 알려 주듯 청사진에 적신호가 켜진 적도 물론 있었다. 모친의 도움을 받아서 론칭했던 프랜차이즈 카페는 거하게 말아먹었다. 이윤 창출에서 실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뿐이었다. 희락에게는 망한 것과 다름없었다. 한정판 텀블러가 뜨면 그걸 사려고 사람들을 새벽부터 줄 서게 만드는 그 브랜드를 무슨 짓을 해도 꺾을 수가 없었다.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고 홍보팀을 쥐어짜며 매진해 봤지만 부동의 1위는 굳건했다. 1등이 아니면 승계 싸움을 제 발로 차고 나온 의미가 없다. 희락은 일찌감치 브랜드를 매각하고 차선책에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요식업이었다. 희락은 샐러드바를 기본으로 한 패밀리 레스토랑 <사르타고>를 론칭했다. 양친은 물론이고 형제들까지 이미 레드오션이라며 성공에 회의적이었지만 억척스럽게 밀고 나갔다. 한 달에 한 번씩 전 세계의 지역 중 한 곳을 선정하여 그 지역의 대표 요리를 특별 샐러드바에서 맛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번 달에 부산의 밀면이 나왔으면 다음 달에는 시카고의 시카고식 피자가 나오는 식이었다. 거기에 패밀리 레스토랑의 연이은 부진의 이유가 높은 가격대라는 것을 파악하여 기본 이용료까지 대폭 낮췄다.
대박이 났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렸던 1등의 맛이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듯 대대적으로 점포를 늘렸고 이젠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간판을 볼 수 있을 정도다. 투자금을 대면서도 그다지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던 형제들도 그제야 우리 막내가 할 땐 또 할 줄 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각종 정보지에서 패밀리 레스토랑을 줄 세울 때 사르타고를 리스트 가장 앞에 올릴 수 있게 된 희락 역시 드디어 만족감에 웃을 수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희락은 염색을 했다.
처음에는 아이보리색이었다. 그건 2주를 채 넘길 수가 없었다. 빛을 조금만 받아도 흡사 백발처럼 보이는 눈부신 머리칼에 부친은 의외로 껄껄 웃어넘겼지만 모친이 문제였다. 메신저에 뜬 ‘우리 아들은 뭘 해도 다 멋있어서 좋아. 하지만 조금쯤 자제라는 걸 했으면 더 멋있었을 거 같아’라는 메시지에 희락은 오소소 떨며 재빨리 타협했다.
형제들이 경제지에 딱딱하고 고상한 옷차림으로 틀에 박힌 사진 몇 장을 올리는 동안, 희락은 윤기가 흐르는 밝디밝은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양한 매체를 휩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락에게 대중의 관심이 쏟아졌다.
188센티의 신장과 관리 잘 받은 하얗고 투명한 피부. 미인이라 해도 부족함 없는 화사하고 유려한 생김새. 그런 희락이 디자이너 브랜드 옷과 장신구를 휘감은 채 당장 런웨이를 걸어도 손색없을 모습으로 나타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희락은 SNS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달의 1일은 희락이 대표로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특별 샐러드바의 첫 시식을 하는 날이었다. 물론 ‘이번 달 거 마음에 들어. 대박’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이번 메뉴는 호불호가 갈릴 거 같다’라거나 ‘내 입에는 좀 아쉬움. 매운 거 좋아하는 분들은 나랑 비슷할 듯?’이라는 말도 여과 없이 SNS에 적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희락은 SNS에 거리낌 없이 사생활도 노출했다. 새벽에 펜트하우스 옥상 정원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진도,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슈퍼카가 드디어 도착해서 기쁨에 몸을 떠는 사진마저도.
대중은 그런 희락의 모습에 우호적이었다.
스케일의 차원이 다르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조차 우스워지기 마련이다. 열등감을 느끼는 대신 희락의 일상을 바라보며 호기심을 충족하는 이들이 늘어 갔다. 굴지의 대기업 자제나 유명 사업가들은 늘 모든 게 너무 비밀스러웠다. 대중은 그들이 언제까지나 비밀스럽게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걸 희락이 깨 버린 것이다.
희락은 ‘출출해서 편의점 왔는데 뭘 사면 좋을까요? 맛있어 보이는 게 너무 많아’와 같은 글을 썼고 사람들은 댓글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도시락과 샌드위치를 추천했으며 그럼 희락은 추천받은 것을 사서 먹고 ‘인증 샷’까지 친절하게 찍어 올렸다. 먹은 감상도 함께 말이다.
인터뷰도 들어오는 족족 다 받아 주었다. 대신 모든 언론사에 일종의 협조 공문을 보내 ‘후계자’, ‘재계 3세’, ‘세습’처럼 HW 그룹 회장의 막내 아드님을 조금이라도 연상시키는 단어를 기사 및 자막에서 전부 제외해야 한다는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그건 형제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었고 앞으로의 미래를 위함이었다. 언론사는 그 요구를 충실히 따라 주었다.
희락은 ‘젊은 신화’, ‘새바람’, ‘독보적 존재감’ 등의 수식어를 붙여 가며 경제지와 연예지를 넘나들었다. 더 나아가 TV 출연까지 서슴지 않았다. 요리 버라이어티에서 희락이 ‘탕수육 부먹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연 떡볶이파입니다. 떡볶이 앞에서 순대는 영원한 2인자일 뿐이죠’ 같은 대사를 날릴 때마다 사람들은 폭소했고 신기해했다.
모두가 이 소탈하고 대중 친화적이며 ‘젊고 아름다운 대표님’에게 호감을 가지게 됐다. 결국 각종 매체에서 좋아하는 경영인, 영향력 있는 인물 등등 여러 줄 세우기 리스트 대다수에 이름 석 자를 상단에 올릴 수 있었다.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자 청사진의 종착지가 코앞이었다.
희락이 인생 목표로 삼았던 쇼핑몰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할 수 있었다. 서른 중반을 생각했으나 서른 초반에 이룰 수 있게 된 거였다.
쇼핑몰의 착공식 테이프 커팅을 할 땐 멋있는 대표님을 보고자 모여든 인파와 언론 매체로 장사진을 이뤘다. 희락은 그들에게 연거푸 감사함을 표현했다.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악수와 포옹도 너그럽게 베풀었고, 함께 사진 찍자는 요청도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다 받아 주었다.
모든 게 전부 순조로웠다. 물론 카페 생각만 하면 열이 확 올라오긴 했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건 여기까지 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하나의 시련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뿐일 일이다.
그런데 이번 일은.
이번 일만큼은.
“내가 베타랑 잤다니까. 믿어져?”
희락이 중얼거리자 석찬이 실소하며 대꾸했다.
“그 말씀을 도대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하셔야 만족하실 겁니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러잖아.”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희락 역시 맛있는 걸 좋아했다. 그 맛있는 것에는 ‘오메가’도 포함이었다.
그동안 청사진을 위해 섹스는 했으나 연애는 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와도 잘 수 있다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생기기 쉬웠다. 희락은 섹스만을 위해 뒤탈 없이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상대를 몇 명 만들었다. 그들은 죄다 페로몬이 짙은 우성 오메가였다. 품으면 향기로웠고 안을 때마다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침대에서 그 무엇보다도 맛있고 탐스러운 페로몬을 흘리는 오메가들이다.
감정적인 그 무언가가 오가지 않아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즐거운 섹스라는 연결 고리에 그들도, 희락도 언제나 서로의 우성 페로몬에 흠뻑 취한 채 만족스러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베타랑 동침한 것이 문제 될 건 없다. 베타랑 섹스해 본 알파가 주변에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알파들에게 그것은 특별한 여흥의 하나였을 뿐 진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희락이 충격을 받은 것은 말짱한 정신으로 그 특별한 여흥을 즐긴 것이 아니라, 취중에 정신을 반쯤 잃은 상태에서 생각지도 못한 베타에게 잠자리를 구애했다는 거였다.
그날 밤 사건은 ‘페로몬에 반응해서 유혹했다.’라는 핑계를 댈 수 없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거나 자기가 반응했을 포인트가 존재할 거다. 그러니 그 취중에 다짜고짜 뒹굴자는 소리를 지껄였을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밤을 함께한 오메가들은 속된 말로 전부 급이 맞는 이들이었다. 누군가는 단순한 여흥에 급을 맞춰야 할 필요가 있냐고 말할 수 있을 거다. 다 모르니까 하는 소리다. ‘그 나물에 그 밥’은 몹시 안전한 노선이었고 늘 걱정하는 ‘뒤탈’이 있을 수 없다.
이번 섹스는 다르다.
그 베타는 하룻밤 일이 세간에 알려져도 잃을 게 없지만 희락은 아니었다. 술 먹고 인사불성인 상태에서 직원을 꼬드겨 속전속결 먹어 치웠다는 게 알려지면 지금껏 열심히 쌓아 올린 호감도에 금이 쩍쩍 갈 게 분명했다.
침묵하던 석찬이 불쑥 질문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얘기는 어떻게 됐습니까?”
“4만 원을 달라는 거야.”
희락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석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예? 4만 원요?”
“어. 웃기지? 다른 건 됐으니까 모텔비 반씩 부담하자는 소리거든.”
“와, 그거참…….”
석찬이 말끝을 흐리며 희락을 힐끗 응시했다.
“대단한 사람이네요.”
희락은 잠시 4만 원을 달라던 남자의 표정을 떠올렸다. 웃음이 절로 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문 지배인 말도 그렇고, 제가 잠깐 대화를 나눴을 때 받은 느낌도 그렇고 괜찮은 사람 같더군요. 어디 가서 그날 밤 얘기를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거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그래서 정말 4만 원만 주고 입단속을 하자고? 나랑 장난해?”
석찬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뒤탈이 날 거 같지 않으니 따로 입단속을 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는 뜻이었습니다만.”
“그 사람 뭘 믿고? 난 못 믿어. 어떻게든 윤도선 씨 손에 뭔가를 쥐여 주고 끝낼 거라고.”
희락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뒷맛이 좋지 않다. 빨리 이 상황을 종결짓고 싶었다.
* * *
묵묵히 걸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연거푸 터지는 헛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희락은 이마 주변을 손끝으로 문질러 가며 입술 주변에 힘을 넣었다. 소용없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떠름한 미소가 몇 번이고 튀어 나갔다.
조금 전 들었던 비서의 보고가 머릿속을 끊임없이 쾅쾅 울렸다.
<오늘도 그분 대답은 계속 같습니다. 윤도선 씨는 대표님과 만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희락은 누나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자리를 벗어나 복도에서 전화를 받은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스테이크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희락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자마자 누나에게 일이 생겼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정신없이 호디에로 향했다.
지배인이나 직원들, 하물며 오가는 손님들까지. 호디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얘기들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만남의 장소로 적합하지가 않았다. 협상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려면 시선과 관심이 쏟아지지 않는 별도의 자리가 필요했다.
수집한 정보 중에는 도선의 휴일이 목요일이라는 것도 있었다. 희락은 석찬을 통해서 목요일에 반드시 약속을 잡으라고 부탁했다. 그건 희락 나름의 배려였다. 물론 새벽 1시에 일이 끝나는 사람을 붙잡고 제대로 된 협상을 할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희락 역시 목요일에 있던 일정을 전부 뒤로 미뤘다. 도선이 몇 시가 괜찮다고 말할지 몰랐기 때문에 이쪽이 최대한 맞춰 주고자 아예 통으로 비워 둔 것이다.
석찬은 첫 시도에서 ‘잘 안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건 꽤 충격이었다. 설마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희락은 아주 잠시간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거기서 포기하고 넘어갈 순 없었다. 석찬에게는 도선이 좋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 연락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오늘, 수요일.
석찬이 세 번째 퇴짜를 알려 온 것이다.
희락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내 권유를 세 번이나 까? 하아!
세 번이나 용케도 참았다. 최대한 배려했다고도 생각한다. 이제 희락은 분통이 터졌다. 누가 손톱으로 콕 하고 찌르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도선과 함께 호디에에 있다는 보고를 들으며 희락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석찬에게 자기 전용실과 다름없는 VIP룸에 도선을 붙잡아 두도록 했다. 그 지시를 내리며 문 지배인이나 다른 직원들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석찬은 별 어려움 없이 요구 사항을 해낼 테지만 직원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까진 막을 수가 없을 거였다.
희락에게는 지금 당장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며칠 전까지는 그런 것들이 중요했는데 이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알 바 아니다. 당장 도선의 얼굴을 마주 보고 몇 마디 해 주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가 않을 거 같았다.
“윤도선 씨!”
희락은 8층 복도 끝에 위치한 VIP룸 문을 벌컥 열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예, 대표님.”
소파에 앉아 있던 도선이 벌떡 일어나더니 “안녕하십니까”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희락은 등 뒤의 문을 쾅 닫으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흡을 다듬는 건 성공했으나 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천천히 상체를 올리며 자신과 눈을 마주 보는 남자의 무뚝뚝한 얼굴에 오히려 분통이 더 끓어오를 지경이다.
희락의 입술 끝이 비웃음으로 살짝 올라갔다.
“윤도선 씨는 나랑 잤다고 뭐라도 된 거 같습니까?”
희락의 명백한 비아냥거림이었다. 네 그 망할 무표정 내가 아주 깡그리 뭉개 주겠다, 하는 기분으로 내뱉은 폭언이다. 그럼에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선은 그저 눈을 느리게 깜빡깜빡하더니 이윽고 무척 미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희락이 울컥하며 소리쳤다.
“나한테 4만 원 받겠다면서요!”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읏.”
희락은 신음했다.
짜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눈알이 괜한 환각을 보여 준 게 아니라면 조금 전, 도선은 아주 조그맣게 웃었다. 채 10초도 유지되지 않았던 그 미소에 희락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비웃음으로 지어진 것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지어진 것도 아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굉장히 낯간지러운 단어를 나열해야 설명이 가능할 법한 미소다.
“네, 그렇게 말하기는 했었습니다.”
다시 목석같은 표정을 되찾은 도선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희락이 대꾸를 기다리는 모양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희락은 잠시간 말문을 잃은 채 도선의 얼굴만 빤히 바라봤다. 그는 그 시선이 꽤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희락은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그럼 만나 주길 하든가!”
하하, 미치겠다. 나 지금 말 더듬은 거야? 환장하겠네, 시발!
희락은 짜증을 꾹꾹 참았다. 조금 전부터 목소리가 자기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신경질이 스민 음성이 좀처럼 평소의 유쾌함을 되찾지 못한다. 이게 다 눈앞의 남자 때문이다.
“만나 주지도 않으면서 돈은 어떻게 받을 생각입니까.”
도선이 의아한 눈초리를 했다.
“제가 들은 얘기랑은 다른데요.”
“뭐가 어떻게 다른데요.”
“민 비서님께서는 대표님이 저랑 식사하길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선이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옳은 판단이었다. 그 이상 얘기했더라면 희락의 화사한 얼굴이 일그러짐으로 엉망이 됐을 거였다.
“그게 왜? 돈 주면서 밥도 한 끼 같이 먹을 수 있지. 아니면 나랑 밥 먹기가 치 떨리게 싫었어요?”
희락이 소리 없이 벙긋 웃었다. 말해 놓고도 스스로 우습다. 굉장히 유치한 말이었고 말투마저 그랬다.
“예? 아니, 그런 게 아니…….”
“그런 게 아니면! 나랑 밥 좀 같이 먹어 준다고 뭐가 어떻게 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일부러 도선의 말을 끊으며 제 할 말만 했다. 유치한 어조가 굉장히 민망해서 서둘러 말을 이은 것뿐인데, 그다음 말이 더 유치한 것 같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같다.
희락은 팔을 올려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참 이상하다.
이런 적은 처음인 거 같았다. 평정심을 좀처럼 되찾을 수가 없다. 무덤덤한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서 길길이 날뛰는 자기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잠자코 있던 도선이 불쑥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는 정말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저 같은 사람이랑 식사까지 하실 필요 없으실 텐데요.”
“…….”
희락은 말문이 막혔다.
저번부터 생각했지만 굉장히 이상한 화법을 쓴다. 자존감이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으로 보이기보다, 굉장히 당연한 걸 말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기이함에 한 몫 더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희락이 피식 미소 지었다.
“내가 도선 씨 같은 사람이랑 식사까지 할 필요가 없다. 그게 나를 세 번이나 깐 이윱니까?”
“아뇨, 제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몰랐다면 이제 알아 두세요. 내가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도 덧붙여서 얘기하겠는데, 내 비서가 세 번이나 까였다는 소리에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내가 직접 말 안 하고 비서 통해 전달해서 윤도선 씨가 기분이 상한 줄 알았단 말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호.
희락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망부석 같던 도선의 얼굴이 아주 조금쯤 당황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희락은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흡족했다.
“앞으로 내가 윤도선 씨한테 몇 번이나 밥을 먹자고 할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그럴 땐 좀 더 괜찮은 대꾸나 변명을 생각해 놔야 할 겁니다. 알겠어요?”
“죄송합니다.”
도선이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했으나 희락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지금 사과받자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잖아.”
희락은 말을 마치며 서너 걸음 앞으로 이동했다. 도선이 앞으로 다가오는 기척에 천천히 몸을 올렸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시선이 오갔다.
“어쨌든, 내 비서를 세 번이나 깐 윤도선 씨한테 이번에는 내가 직접 말하러 왔어요. 이번에는 거절하지 마요. 비서한테 까였다고 전해 듣는 것보다 더 열받을 거 같으니까.”
희락이 재차 세 번이나 까였다는 걸 강조했다. 도선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무어라 대꾸를 해야 하긴 할 거 같은데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는 듯하다. 절로 픽 웃음이 났다. 자기가 도선이라도 이 상황에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거 같다.
“나랑 밥 먹읍시다.”
희락이 양팔을 뻗어 도선의 어깨를 가벼이 붙잡았다.
아주 잠깐 눈앞의 남자가 베타라는 게 속절없이 아쉬워졌다. 극우성 페로몬을 살살 흘려주면 당장 이 자리에서 자지러지며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하겠다고 말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예.”
붙잡은 어깨가 더더욱 딱딱해지는 게 느껴졌다.
희락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눈앞의 남자가 생각보다 꽤 긴장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짜증이 나서 유치한 말들을 퍼붓긴 했지만 상대를 압박감으로 숨 막히게 할 생각은 없었다. 직장의 대표님과 폐쇄된 공간에서 독대하는 것도 부족해, 그 대표가 갑자기 길길이 날뛰면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할 거였다.
희락은 쯧 혀를 차며 잠시 생각했다.
어깨를 붙잡은 양팔 중 오른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엄지와 검지가 도선의 볼을 아주 가볍게 꼬집고 떨어졌다.
“내 비서한테도 진작 이렇게 대답하면 얼마나 좋아.”
아, 또다.
도선의 얼굴 위로 몇 분 전 봤던 작은 미소가 한 번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사람을 감질나게 한다.
“말 나온 김에 오늘 당장 먹죠.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겠는데.”
“죄송합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대표님.”
희락이 또 거절의 시작이냐는 듯한 표정을 했다. 못마땅한 눈빛을 멀뚱멀뚱 응시하던 도선이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저 오자마자 계속 여기서 대기했습니다. 오늘 근무도 해야 합니다.”
희락은 코웃음으로 받아쳤다.
“그게 뭐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데려간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문제 삼겠어요.”
“그러니까 더 곤란한 겁니다.”
희락은 가볍게 웃었다.
도선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입장이 꽤 난처해진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걸 무시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희락은 조용히 속삭였다.
“나 지금 정말 배고픈데. 세 번이나 까인 게 너무 열이 받아서 오늘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거든요. 체하는 줄 알았다고, 진짜.”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또 허리를 숙이려는 남자의 어깨를 힘주어 단단히 붙잡았다. 깜짝 놀란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고 희락 역시 그 눈빛을 똑바로 마주했다.
“나랑 가요, 밥 먹으러.”
도선은 말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희락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무뚝뚝한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희락이 터트린 웃음으로 조용하던 공간이 가볍게 울렸다.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뒤늦게 알아차려도 소용없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다.
주객이 전도된 이상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이.
마치 함께 밥을 못 먹어서 안달 난 사람의 행동이었다. 식사라도 하자는 것은 오직 협상을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제 깨달아도 소용없는 것이기에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VIP룸이 있는 8층에 인적 하나 없는 것은 믿음직한 비서의 작품이 분명했다. 보는 눈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더 과감해졌다. 덕분에 희락은 미적지근한 도선의 손목을 잡아끌며 무사히 지하 주차장까지 올 수 있었다.
오후 4시였다.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다. 도선을 옆 좌석에 무사히 태웠으니 이대로 시간을 때울 겸 근처를 가볍게 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희락은 곁눈질을 했다. 도선은 딱딱한 얼굴로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어깨며 목이며 늘 꼿꼿함을 유지하는 몸이 지금 이 순간 한층 더 굳어 있는 듯 보였다.
아까 석찬의 연락을 받고 흥분해서 이곳으로 오는 내내 페로몬 갈무리를 하지 않았다. 분노에 휩싸인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농후한 향기가 아직도 차 내부에 은은히 맴돌았다.
다시 한번 도선이 베타라고 느낀다. 오메가라면 호흡마저 헐떡거리며 아래를 적시고도 남았을 텐데 도선은 그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극우성의 페로몬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다. 새삼스럽지만 베타가 자기 차 옆 좌석에 타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희락은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도선의 고개가 비스듬히 이쪽을 향해 기울어지는 기척이 났다.
“출근은 6시로 알고 있는데.”
“예, 맞습니다.”
“나 때문에 일찍 나온 거예요? 미안하게 됐네.”
도선이 대답하길 머뭇거렸다. 희락이 왜 그러느냐는 듯 턱짓하며 대꾸를 재촉하자 그제야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민 비서님이 제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하셨습니다.”
“뭐라고요? 아하핫! 왜?”
“제가 식사를 거절하자마자 민 비서님이 이번에는 이쪽도 양보할 수가 없다고……. 집에 오셔서 무릎을 꿇든 싹싹 빌든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석찬이가 애썼구나.
희락이 쓰게 웃으며 핸들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저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하긴. 놀랍기도 하겠죠.”
“민 비서님이 그러실 필요 없다고, 제가 찾아뵙겠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더니 호디에라고 하셔서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찌 됐든 석찬의 애걸복걸이 통했다는 거다. 덕분에 지금 이 베타가 자기 옆에 앉아 있다. 희락은 고생해 준 비서에게 밥이든 술이든 거하게 사기로 마음먹었다.
“뭐 좋아합니까.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전 다 괜찮습니다.”
“피하는 거나 가리는 건요.”
“대표님 드시고 싶으신 거 드셨으면 합니다.”
희락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도선이 의아해하는 시선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어진 웃음은 오래간 입술에 머물렀다.
그날 마가 제대로 낀 모양이다.
대표와 직원이라는 상하 관계를 감안해도 이건 너무 딱딱하다. 표정과 목소리에서 단단함과 딱딱함이 아주 뚝뚝 떨어진다.
이게 이 사람의 성격인 거 같다. 사람 성격이 갑작스레 180도 바뀔 리도 없으니 그날 밤도 도선은 이 목석같은 태도를 유지했을 거였다.
도대체 뭘까. 뭐에 홀려서 이런 사람이랑 잤을까.
불현듯 머릿속에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자기 밑에 깔려서 목덜미를 벌겋게 물들이던 모습이다. 그걸 바라보며 정신없는 와중에도 귀엽다고 느꼈다. 아마 마주 보고 있었더라면 무심코 입이라도 맞췄을지 모른다.
듬성듬성 날아간 그날의 기억은 무슨 짓을 해도 되찾을 수 없을 거다. 술 탓을 골백번 해도 소용없다.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섹스를 한 건 둘째치고라도 그 과정까지 어떻게 이르렀는지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정신 차리니까 이 남자 구멍을 쑤셔 대고 있었다. 이 남자를 상대로 자기 것이 섰고 반응했으니까 그게 가능했던 것일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던 희락이 앓는 소리를 냈다. 조용하던 대표가 갑자기 신음하는 게 이상했는지 도선이 힐끗 응시해 왔다.
“내가 계속 당황한 상태라 내 정신이 아니었네요.”
“네?”
“묻는 게 늦었는데……. 아니, 물어 봤자 소용없을 거 같지만 일단 물어는 볼게요.”
“예.”
“그날 괜찮았어요?”
“네? 뭐가 말입니까.”
“뭐긴 뭐야. 몸 상태 말이에요. 어디 아픈 곳은 없었고? 내가 처음이었다며.”
가만히 듣던 도선이 “아……”라고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무슨 소린지 알아차렸다는 듯 눈을 두어 번 끔뻑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정말 괜찮았습니다.”
희락이 후우, 하고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괜찮았을 리가 없지. 그날 기억나는 것만 떠올려 봐도 내가 꽤 제멋대로 굴었는데.”
이 사람은 베타다.
오메가처럼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는다. 은밀한 안쪽이 알파 페로몬에 흠뻑 젖지 않는다. 자기를 갈구하며 깊게 찔러 오는 알파의 것에 오직 환희만을 느끼지도 않았을 거다.
안을 충분히 적시기는 했을까. 아니, 그랬을 거 같지 않다. 오메가라고 착각까지 했을 정돈데. 그럼 아무런 전희 없이 다짜고짜 찔러 대기라도 했으면 어쩌지. 그날 그 뻑뻑함을 생각하면 더더욱 있을 법한 일이다.
희락의 안색이 변했다.
운전 중에 할 생각이 아니다. 일단은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 옆에서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잠자코 정면만 바라봤다. 지금 입을 열면 스스로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리가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술에 취한 조희락 대표가 동침을 권했다.
이것만 알려져도 문제다.
유혹에 응해서 동침을 했는데 얼마나 매너가 없는지. 다짜고짜 쑤셔 대는 바람에 몸이 아주 남아나질 않았다. 아파서 죽는 시늉을 했지만 조 대표는 들은 척도 않더라. 고주망태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쪽의 호소는 씨알도 안 먹혔다.
가뜩이나 문제라는 거다. 거기에 이런 것까지 덧붙여지면 정말로 최악이지 않은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희락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석찬은 말했다. 입단속이 필요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그 앞에선 강하게 부정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석찬은 사람을 보고 그런 판단을 했을 테지만, 희락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 일을 빌미 삼아 한탕 제대로 벌어 볼 거였으면 도선의 이런 태도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벤치에 접근했을 때 술에 취한 대표를 보며 하늘이 내려 주신 횡재라 여겼다면 뭐든 받으라는 권유에 4만 원을 얘기하진 않았을 거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쪽이 채근하자 아주 마지못해 한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게 됐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대표님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예기치 못했기에 웃음부터 터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마냥 웃음이 나오진 않는다. 그날 밤 일은 상식을 비추어 생각해 봤을 때 ‘거절할 수 없었다’라는 말 한 마디로 정리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기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랬기에 이 목석같은 남자가 실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거였다. 무뚝뚝한 얼굴은 그저 가면일 수도 있다. 저녁 식사 자리를 세 번이나 깐 것도 몸 좀 한번 달아 보라는 계략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무슨, 의심병 환자라도 된 거 같네.”
나직한 속삭임에 꼿꼿하게 앉아 있던 도선이 반응했다.
“예? 대표님. 지금 저한테 뭐라고 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내 혼잣말.”
의미 없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선에게 뭘 좋아하느냐고 묻긴 했어도 이미 장소는 정해져 있던 것과 다름없다.
석찬이 미리 예약을 잡아 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직원이 안내해 준 별실에 마주 앉고서 잠시간 침묵했다.
희락은 경직된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도선은 시선을 마주할 생각이 없는지 테이블 위의 작은 화병을 응시한 채다. 그 덕에 이쪽도 다소 편안하게 상대를 관찰할 수 있었다.
윤도선. 나이는 서른넷. 믿기지 않게도 연상. 호디에에서 근무한 지는 5개월. 중산층 베타 양친과 세 살 터울 누나가 있음. 큰 굴곡 없이 살아왔고 별다른 특이점 없음.
석찬이 가져다줬던 서류는 앞장만 확인했다. 그것만 확인해도 충분했다. 뒷장에 무언가 자잘하고 세밀한 정보가 더 있었던 거 같지만 굳이 읽어 보진 않았다. 어쨌든 핵심은 도선이 서너 줄로 요약 가능한 삶을 살아왔다는 거다. 언뜻 봤을 때 무언가 큼지막한 사건 사고 하나 없다. 희락이 보기엔 평탄하면서도 심심한 인생이었다.
우선은 식사였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도저히 밥을 먹으면서 할 얘기가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서 접시가 치워지고 놓이길 몇 차례 반복할 때마다 미션을 완수하듯 음식물을 입 안에 꾸역꾸역 넣었다.
희락은 아무런 대화 없이 이어지는 식사가 참 불편했다. 도선이 무언가 말할 낌새가 없으니 이쪽이라도 분발해야 할 텐데 그게 참 어렵다. 평소에는 잘만 떠오르는 농담 몇 마디가 나가질 않았다.
“입에 맞아요?”
드디어 떠오른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이게 뭐라고 그토록 생각이 안 났는지. 이런 말을 머리 쥐어짜며 해야 할 정도면 지금 자기가 생각보다 꽤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도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네,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거 다행이네.”
그 후로 시답지도 않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돌을 씹는지 고기를 씹는지 모를 식사였지만 말을 섞다 보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접시가 차례차례 머물다 사라진 자리에 드디어 후식인 커피가 놓였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더는 직원들이 들락날락하지 않을 거다. 밥을 먹으면서 도저히 입에 담기 거북했던 말들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쉽게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진 않았다. 그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지만 꽤 질이 나쁜 성희롱을 하는 모양새가 될 거 같아 몹시 찜찜했다.
“윤도선 씨.”
“네, 대표님.”
“내가 그날은 너무 경황도 없고 당황도 해서 제대로 묻지 못한 게 몇 개 있거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일 게 분명하니까 미리 미안하다고 말해 둘게요.”
희락의 떨떠름한 표정과 달리 도선은 시종 담담하다.
“아닙니다. 편하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희락은 커피 대신 얼음이 든 물 잔을 쥐었다. 이상하리만치 갈증이 난다.
“윤도선 씨는 비록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아픈 곳은 없다고 대답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내가 그 와중에, 하아…….”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희락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서 어렵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취중에 제대로 된 행위를 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윤도선 씨가 오메가였더라면 이렇게까지 걱정하진 않았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내가 무리하게 삽입해서 혹시 어디 다치거나 했다면 솔직하게 말해요.”
가만히 듣던 도선이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다정하셨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표정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희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내가?”라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네, 안심하셔도 됩니다.”
“난 믿을 수가 없는데. 윤도선 씨가 어떻게 내 걸 제대로 먹어 치……, 아니, 아니지.”
방심하는 사이에 아주 선정적인 단어를 제 입으로 말할 뻔했다. 희락이 휘휘 머리를 저어 가며 헛기침을 할 때였다.
도선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혹시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삽입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으신 겁니까?”
“……!”
저쪽이 먼저 말해 주니 이보다 더 기쁠 수 없다. 도선의 별거 아니라는 어투는 기가 막혔지만 대화를 무리 없이 이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희락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바로 긍정했다.
“하하, 네. 그거. 바로 그게 내가 알고 싶은 거죠.”
“대표님께서 삽입 시 어려워하셨습니다. 저도 긴장했었고 무작정 삽입하면 꽤 아플 거 같더군요. 당황하던 차에 마침 화장대 위에 로션이 보여서 임시방편으로 그걸 썼습니다. 로션을 바르면서 미숙하게나마 안쪽을 제 스스로 넓혔…….”
희락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잘라 냈다.
“그만, 그만! 알았어요.”
적나라하게 이어지는 말을 도무지 더 들을 수가 없었다. 어지간한 음담패설 정도야 웃으면서 받아친다지만 이번에는 그것도 어렵다. 이쪽의 얼굴이 점점 당혹감에 구겨져도 도선의 얼굴은 특유의 무덤덤함을 유지하는 게 열받을 정도다.
기억나는 게 없으니 상대의 얘기를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믿는다기보다 일단 넘어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아무리 제 스스로 로션을 바르고 풀어 줬다고 해도 아프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괴롭혔다.
여기서 멈출 순 없다.
오늘 물어볼 게 산더미처럼 있다.
질문을 전부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차곡차곡 쌓아 왔던 궁금증은 수도 없이 많다.
뭐였더라, 또 뭐였더라.
많기야 많은데 그걸 갑자기 생각하려니 머릿속이 새하얗다.
희락은 팔꿈치를 테이블에 댄 채 손가락으로 이마 부근을 가볍게 눌렀다. 물잔 옆 휴대폰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오늘 하리라 마음먹었던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윤도선 씨.”
“네.”
“내가 지금 질문 하나를 할 텐데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요. 그냥, 정말로 단순히 확인차 한 번 물어보는 거니까.”
도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대답했다.
“네, 뭐든지 괜찮습니다.”
이런 질문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은 변함없다. 희락은 꽤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도선 씨 휴대폰에 내가 걱정해야 할 만한 게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사진이라거나 동영상 같은 것 말입니다.”
“…….”
달싹거리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그 움직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희락은 저도 모르게 딱 굳고 말았다. 기대했던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해 주지 않는 도선의 입술이 믿기지 않았다.
뭐야, 이거.
그때까지 억지로나마 미소 짓던 예쁜 얼굴이 천천히 싸늘해졌다.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습지만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석찬에게는 어떻게 믿느냐며 큰소리를 쳤으면서도 내심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인생의 추억을 운운하는 와중에도 속으로는 그날 밤의 증거를 들이밀며 한탕 해 먹어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희락의 안색이 달라진 걸 도선 역시 눈치챈 듯하다.
“제 휴대폰에 대표님 사진이 있냐고, 그렇게 물어보시는 겁니까?”
도선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담담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희락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질문에 묻어나는 망설임이 마음에 들 리 없다.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지도 못한다. 결론은 하나뿐이다. 슬슬 상황을 가늠하며 주도권을 잡았을 때 꺼내고 싶었을 말이었겠지. 그걸 이쪽이 먼저 선수를 친 게 저쪽을 당황하게 했다는 생각뿐이다.
희락은 날카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있어요, 내 사진?”
잠시 사이를 두고 도선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네, 있긴 있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희락은 버럭 소리 질렀다.
“뭐? 있어? 와아. 끝내주네.”
안 물어봤으면 어쩔 뻔했냐.
석찬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괜찮은 사람 좋아하네. 걔 보통 아니거든?’이라고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아주 굴뚝같다.
희락은 냉수로 분노를 삭이려 노력했고, 도선은 허리까지 굽혀 가며 사죄의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지웠어야 하는 건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컵을 쾅 내려놓는 고운 손이 일순 움찔했다.
지웠어야 했다고?
이건 좀 새로운 말이었다. 예상 밖의 말이기도 했다.
울분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던 눈동자가 삽시간에 의아한 기색으로 덮였다.
희락은 건너편을 빤히 응시했다. 무표정한 낯이 반쯤은 허물어져 있다. 꽤 마음에 들었다. 매사 뚱한 표정을 짓던 눈빛이 연한 흔들림을 머금은 것도 착각이 만든 환각 같은 게 아닐 거였다.
“그 사진 좀 봅시다, 일단은.”
“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선이 잠금 패턴을 풀자마자 곧장 휴대폰을 내밀었다. 희락은 어렵지 않게 ‘갤러리’를 찾고서 폴더를 살폈다. 폴더는 서너 개였고 사진들도 정말이지 별거 없었다. 폴더별로 몇백 장씩 사진이 저장된 자기 휴대폰과 천지 차이다. 셀카 하나 없는 갤러리는 꽤 충격적이었다. 지하철의 급행 시간표나 지도 등을 캡처한 것이 고작인 빈약한 갤러리를 보며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 이건…….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도대체 어디에 사진이 박혀 있는 건가 싶어 이것저것 열어 보다가 마침내 ‘Download’ 폴더에서 자기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이거는…….
사진은 세 장 정도다. 화면을 슬라이드하며 사진을 다 확인한 희락은 그 상태로 꽁꽁 굳고 말았다. 잠시간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도선 씨.”
“네.”
“휴대폰에 있다는 사진이 이거예요?”
희락이 앞쪽으로 액정을 들이밀었다. 도선은 힐끗 시선을 내려 확인하더니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희락이 한숨을 쏟아 내며 허리를 숙였다. 테이블에 이마를 댔지만 두통과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듯 “대표님?”이라며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어도 지금은 거기에 반응할 기운이 없다. 말 그대로 기력이 죄다 빨려 나갔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목구멍으로 이상한 신음도 튀어 나갔다.
잠시 뒤, 희락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기세에 도선의 어깨가 크게 한 번 튕겼다.
“깜짝 놀랐잖아!”
도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네?”
“사진이 있다고 그러니까 나는! ……와아, 나는 내가 술로 떡이 된 채 나체로 모텔 침대 위를 굴러다니는 그런 사진이라도 찍었나 싶었다고요!”
“제가 그날 대표님 사진을 몰래, 그러니까 도촬을 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희락은 내심 뜨끔한 마음을 감추며 서둘러 대답했다.
“내가 언제 그렇다고 했어요? 했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니까? 했냐고 물어본 거지. 그런데 도선 씨가 사진이 있다고 하니까 내가 어땠겠어.”
마치 변명을 늘어놓는 듯한 어조다. 희락은 그게 꽤 자존심 상했어도 지금은 별수 없다. 잠시뿐이긴 했지만 이쪽의 일방적인 오해였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다.
“절대 그런 짓 안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희락은 자리에 다시 앉으며 움켜쥔 도선의 휴대폰에 시선을 줬다. 꺼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듯 부옇게 변한 액정에 손끝을 가져가 다시금 선명하게 했다. 언제 봐도 참 그럴싸한 미소를 매단 얼굴이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이건, 내 사진을 다운받은 겁니까?”
도선은 조금 망설이더니 “네”라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러자 도선이 아주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요.”
“……!”
미소는 언제나 그렇듯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언제 웃었냐는 듯 다시금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희락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선은 그 모습을 오해했는지 서두르듯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당장 지우겠습니다.”
“아니, 아니. 그게, 그러니까.”
희락이 두서없는 말을 줄줄 늘어뜨렸다.
“꼭 지우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 일단 나는 지우라고 강요할 생각 없으니까. 애초에 이런 사진이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고. 어쨌든, 나는 이 정도 사진이면 상관없고 괜찮다는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도선은 얼추 이해한 모양이다. 정신 산만한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딱딱한 표정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도선이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정말 괜찮을까요? 대표님께 폐가 되는 일은 아닐지.”
“괜찮지. 아니, 그보다 폐는 무슨 폐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동침 상대가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게 대표님 입장에선 꺼림칙하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비아냥거림으로 오해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말 좀 몇 번 섞어 봤다고, 희락은 지금 도선이 그럴 의도로 꺼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럼에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뭔가 굉장히 찝찝하다. 가슴 한쪽이 미세하게 부스럭거렸다.
“지우지 마.”
저도 모르게 딱 자른 말이 튀어 나갔다. 희락은 그런 자기 모습에 속으로 놀라면서 그다음 말을 재빨리 덧붙였다.
“내 사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면서요.”
도선이 고개를 두어 번 힘주어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건 나한테 오히려 감사한 얘기지. 고마워요.”
희락이 윙크하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우리 이 얘기는 여기서 끝냅시다. 괜찮죠?”
“네.”
고비 하나를 넘기고 나니 탈력감이 장난이 아니다. 하려던 질문도 다 까먹었고 지금 당장은 머리를 쥐어짠다고 해도 생각나지 않을 것 같았다.
희락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무표정을 유지하는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머릿속으로는 아주 단편적인 것만 기억나는 그날을 더듬었다. 손깍지에 귓불을 물들이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간지러운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풋풋한 게 취향이었나 싶을 정도다.
그날을 돌이키던 희락이 이윽고 “아”라며 짧게 신음했다.
“도선 씨.”
이름을 부르자 도선이 고개를 올리며 시야를 마주해 왔다.
“네.”
“그날 내가 합의하에 우리가 뒹굴고 있냐고 물었잖아. 기억나요? 도선 씨한테 강간이 아니라고 확답받고 나서.”
희미하게 우물거리던 입술이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 속에 있는 그날과 꽤 비슷한 상황이다. 그걸 의아하게 여길 무렵 아주 작은 대꾸가 들렸다.
“네.”
따져 묻는 말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희락이 최대한 가벼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강간이냐는 질문에는 대답이 속전속결이었는데, 합의했냐는 말에는 지금처럼 대답을 망설였지. 이것도 기억나요?”
“네.”
“왜 망설였어요?”
잠시 침묵 후 도선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완벽한 합의는 아니었으니까요. 대표님은 취중이셨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태였죠. 어떻게 보면 제가 그걸 이용한 것과 다름없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대표님께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말은 귀 기울여야 들릴 정도로 작디작았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희락은 알 수 없는 씁쓸함에 냉수를 찾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도 마찬가지다. 도선이 틈만 나면 사과를 하는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그가 이유까지 덧붙여 가며 하는 사과 자체는 꽤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또, 그 이상으로 굉장히 엉망진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다.
희락은 이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도선이 속삭이는 ‘죄송합니다’는 이제 더 듣기 싫었다. 여기서 한 번만 더 들으면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생각 좀 해 봤어요?”
희락은 말을 돌리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곧장 본론으로 넘어간 것에 가깝다.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를 원해서 그딴 질문을 한 게 아니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생각도 안 나는 질문들을 모조리 생략하고 빨리 해결을 보는 게 나았다.
“어떤 걸 말입니까?”
“나한테 받고 싶은 거. 받으면 좋을 거 같은 것들.”
“없습니다, 그런 거.”
희락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오늘은 이쪽도 각오를 하고 나왔다.
“4만 원, 그리고 추억이라. 내 자존심 깔아뭉개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도선이 살짝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예?”
“그러니까 더 받아요.”
도선이 무어라 대꾸하기 전 희락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나와의 하룻밤을 고작 4만 원 받고 끝내겠다는 건, 바꿔 말하면 그날 밤이 고작 도선 씨한테 4만 원의 가치밖에 안 됐다는 뜻 아닌가?”
맞은편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아주 보기 좋았다.
“대표님,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아니라면 받으라는 소리야. 내가 안심하게 그렇게 좀 합시다.”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던 도선이 이윽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는 못 합니다.”
“왜요.”
“대표님께 물질적인 것을 받으면 제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사실, 그날 밤을 마냥 좋게 생각할 수만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표님께 무언가를 받게 되면 제 자신이 정말 쓰레기처럼 느껴질 거 같아서요.”
“……!”
“거듭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도선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제 충동적인 선택으로 대표님께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하신 말씀은 듣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
또 사과를 받았다.
그다음, 희락은 스스로 생각해도 꽤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막말로 내가 도선 씨 월급 통장에 돈 꽂아 넣으면 어쩔 겁니까.”
도선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면 지배인님을 통해서 돈을 돌려 드리고 호디에를 관두도록 하겠습니다.”
“와아…….”
희락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도선이 호디에를 관두는 것은 멀리 내다봤을 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자기 구역에 있어야 관찰을 하든 낌새를 살피든 할 수 있다. 갑자기 잠적하면 그것만큼 불안한 일이 또 없다.
“알겠습니다. 도선 씨 말, 다 알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가 어쩔 수 없지.”
희락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도선 씨 이거는 알아야 돼.”
도무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얼굴이 심히 냉랭하다. 싸늘함 가득한 눈빛이 맞은편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선 씨는 쓰레기가 되지 않아서 속 편하겠지만, 나는 도선 씨 거절 탓에 굉장히 피곤하겠지. 앞으로 계속.”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은 도선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무뚝뚝한 표정이 완전히 흐릿해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즉시 희락이 언성을 살짝 높여 대답했다.
“사과하지 마.”
“대표님…….”
“상황이 이 꼴인데 내가 도선 씨 사과 들어 봤자 무슨 생각을 하겠어. 미안할 짓을 왜 하냐는 생각밖에 더 하겠어?”
마음이라도 시원하도록 한껏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속은 되레 더 불편해졌다. 희락은 조명 빛에 반짝거리는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침묵이 흘렀다.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공간이다.
죽을상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희락이 힐끗 시선만을 올렸다. 그다음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도선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딱딱했다. 그건 놀랍지 않다.
희락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눈가였다. 발갛게 변해 버린 눈 주변을 보자마자 잠깐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가 우는 건 아니었다. 다만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듯 보였다. 그걸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도선이 지금 느끼고 있을 기분이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지금 울고 싶은 게 누군데!
속으로는 그렇게 외쳤다. 정말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마음과는 반대로 희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가벼운 소음을 냈다. 맞은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세에 컵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도선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희락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도선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다시 의자에 앉혔다.
“방금은 내가 말이 심했습니다. 미안해요.”
사과는 진심이었다.
그게 희락은 놀라웠다.
사회생활을 하며 습관적으로 입에 담는 사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도선의 눈가와 창백해진 안색을 보자마자 일단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울고 싶은 게 지금 누구냐는 푸념은 그다음에 들었다. 짜증이 확 올라온 탓에 날 선 목소리를 냈다고 자책도 했다. 꼭 이렇게까지 톡톡 쏘아붙일 필요는 없지 않았냐는 후회까지도 자책에 섞여 있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희락은 살짝 움켜쥐었던 어깨 부근을 달래듯 쓰다듬었다. 기분 탓인지 손길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도선의 어깨는 조금씩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이 상대에게 긴장과 당황을 유발시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쉽사리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어깨가 부드럽고 말랑해질 때까지 쓰다듬을 이어 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희락은 남몰래 웃었다.
지금 이 순간, 손깍지 때보단 덜하지만 엇비슷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오늘 감정 기복이 꽤 심하다. 이 사람 때문이다.
울컥 솟구치는 짜증 다음에는 어쩔 줄 몰라 절절매는 모습이 있다.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감정이 이다지도 오락가락하는 것은 처음 느껴 보는 신선함이었다. 꽤 충격적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이 꼴이 났으니 어차피 대화는 불가능했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선은 지금이라도 호디에로 돌아가서 근무를 하고 싶은 듯했다. 물론 희락은 “집 앞까지 바래다주겠다”라는 말로 맞섰다. 하소연 비슷한 말들이 들려왔어도 끄떡없었다. 강경하기 그지없는 대표님 태도에 결국 도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했다.
“아.”
별실을 나오려던 참에 무심코 테이블을 한 번 응시했다. 그 위에 도선의 휴대폰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핫.”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자기도 지금 정신이 없지만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인 거 같다. 그의 휴대폰을 손에 쥐고서 몸을 틀었다. 뒷모습이 바로 보였다.
희락은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가까운 곳에서 바라본 그 뒷모습에 그날의 등을 겹쳐 보는 게 가능했다.
“도선 씨.”
희락이 팔을 뻗어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손바닥에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듯 완전히 뻣뻣해진 남자가 고개를 느릿느릿 들어 올렸다. 희락도 뚫어지게 바라봤던 목덜미에서 시선을 올리며 그 눈길을 마주했다.
“대표님?”
“갑자기 생각난 거 있는데 물어볼게요.”
“네.”
“그날 한사코 얼굴 보이기 싫어했잖아. 왜 그랬던 거야?”
여기서 ‘부끄러웠다’라거나 ‘창피했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건 또 꽤 간지러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한 번도 들을 수 없어 아쉬웠던 목소리가 그런 대답을 건네면 생각보다 등줄기 부근이 가려울 것도 같다.
하지만 도선은 정말 예측 불가의 남자였다.
조금 사이를 두고 나온 대답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종류였다.
“저도 딱 잘라 이거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책감도 있었고, 불안함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불안함? 죄책감?”
희락이 멍한 목소리로 들은 단어를 나열했다.
“그날 전 반쯤 꿈을 꾸는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과 눈이 마주치면 그 상황이…… 그냥 그대로 끝날 거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순간적인 욕심으로 대표님을 거절하지 못했던 죄책감도 있었고.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교차했던 거 같습니다. 그토록 혼란스러울 때 대표님과 눈을 마주하는 게, 굉장히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말을 이어 나가는 목소리는 몹시 건조했다. 무뚝뚝함이 빚어낸 음성이라기보다 긴장감으로 딱딱해진 음성에 가까울 거였다. 중간마다 내뱉는 한숨이 있었고 또 중간마다 어조가 일그러지는 흔들림이 있었다.
목소리까지 귀 기울여 듣게 되네. 나도 모르게.
희락은 소리 없이 웃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한 음절 한 음절 세밀하게 들으며 지금 그의 기분이 어떨지 파악하려는 자기 모습이 굉장히 낯설다. 너무 이상한 나머지 소름이 돋을 정도다.
“썩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네요.”
잠시 침묵하던 희락이 딱 잘라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아니, 아니. 도선 씨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기분이 아주 엿 같다고.”
희락이 왼손을 들어 입술을 엄지로 문질렀다. 오른손으로는 그때까지도 붙잡고 있던 손목을 더욱 힘주어 잡게 됐다.
기분이 왜 엿 같을까.
그건 아주 쉽게 답이 나왔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성격이나 심성이 좋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피곤한 건 딱 질색이고 귀찮은 것은 사절이었다.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대외적인 성격으로 지낼 순 있었지만 본질까진 뜯어 바꿀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시간만 해도 그렇다.
평소 자기 성격을 비추어 생각해 봤을 때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도선의 입방정이 진심으로 걱정됐다면 사람 하나 붙여 놓고 일거수일투족 석찬에게 보고하게끔 하면 그만인 일이다. 굳이 식사 약속을 잡으라고 한 것부터가 이상하기 짝이 없다.
무언가 계속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일단 걷잡을 수 없이 속이 상했다.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마치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게 기분 좋을 리 없다. 통제가 좀처럼 마음대로 안 되는 일상이라니.
거기에 하나 더.
희락은 고개를 살짝 숙인 도선의 정수리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은 이윽고 어딘지 모르게 축 처진 어깨로 떨어졌고, 그다음 붙들린 채 미동도 없는 손목으로 향했다. 손바닥이 감싼 피부가 이상하리만치 차가웠다. 체온이 낮은 건지 긴장해서 그런 건지.
아니, 그런 건 지금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자기가 이 손목을 왜 계속 붙잡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거다.
도선은 말했다. 강간이 아니라고.
희락도 쾌감을 좇아 허리를 돌리며 물었던 그때나, 두근대는 마음으로 재차 확인까지 했던 그때나. 매번 그것만큼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도선은 추억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날 일에 대한 보상을 다 받았다는 말까지 덧붙여 가며 말이다. 기분이 나쁜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그거다.
희락이 생각했을 때 그딴 건 전혀 추억이 될 수 없다.
그걸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날 기분이 좋았던 건 자기뿐이다. 눈앞의 이 사람은 그날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말하고 불안함을 말한다. 모든 걸 다 둘째치고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아주 자존심 상했다. 마음이 좋지 않다. 기분이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여태까지 밤을 함께 보낸 ‘오메가’들에게 ‘조희락과의 섹스는 어땠나’라고 물어보면 적어도 지금 도선이 한 말을 꺼낼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였다.
여기까지 생각하고서 희락은 스스로 비웃듯 미소를 흘렸다.
나도 참 인내심과 참을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모양이라고. 이건 정말 타고난 성격이라 어쩔 수가 없는 거 같다고.
이 생각을, 이 짜증이 솟구치는 잠깐의 신경질을 무시하고 묻어 두면 그만이다. 그러면 지금 이 남자에게 꺼낼 말들 역시 안 하고 끝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선 씨.”
“네.”
그게 안 되니까.
도무지 그게 안 되는 성격이니까 이렇게 또, 방금 생각난 그대로를 입에 담는 거였다.
“지금부터 내가 아주 미친 소리를 할 건데 싫으면 싫다고 해요. 강요처럼 들릴까 봐 미리 말하는 거니까.”
“예, 어떤……?”
“나랑 한 번 더 합시다, 섹스.”
무뚝뚝한 표정이 일순 흔들렸다. 그러더니 눈알을 굴려 가며 화사한 얼굴을 관찰하듯 올려다봤다. 희락은 미소를 싹 다 지웠다. 대신, 그 어떤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도선의 얼굴을 바라봤다.
애꿎은 손바닥만 쥐고 펴길 반복하던 도선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음성이다. 희락은 그제야 은은히 미소 지으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도선 씨, 그날도 나한테 그렇게 물어봤다면서? 내가 할 대답도 그날과 같아.”
“하지만 방금, 미친 소리라고 운을 떼셨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나는 진심이어도 도선 씨한테는 그렇게 들릴 테니까. 기막힐 거고, 웃기기도 할 거고.”
농담을 섞어 가며 말해도 도선은 반응하긴커녕 미동조차 없다. 평소보다 더 무뚝뚝해진 얼굴을 보며 희락 역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표님이 저랑 하고 싶으시다고요.”
잠깐 침묵이 흐르고서 도선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겠다는 듯한 어조에 희락은 냉큼 대꾸했다.
“네.”
“그러면…….”
말끝을 흐리는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다. 도선의 무표정은 언제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항상 종잡을 수 없다. 그게 지켜보는 사람을 무척이나 초조하게 한다는 걸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다.
“저도 좋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기도 하다.
도선이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솔직히 말해 스스로 센 척을 하고 있었던 것과 흡사하다. 여태까지 누군가에게 동침을 권유해 거절당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을 위안 삼으며 이번에도 당연히 까일 리가 없다고 믿고 싶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센 척이 무색하게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일단 다짜고짜 입이 움직이는 대로 지껄이긴 했다. 퇴짜 맞으면 득 될 거 하나 없는, 정말 개소리 한 번 제대로 한 걸로 끝나게 되리라는 불안감 쪽이 더 컸다.
“갑시다.”
질러 놓고 후회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후회보다 상쾌함마저 들었다.
희락은 손목을 잡아끌었다. 도선이 거부감 없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