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8/21)

2. 도현 킬스버그, Let me see….

젊은 나이의 여성, 그것도 아름답고 가진 게 많은 젊은 여성을 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들 가만히 두지 못하는 모양이다.

“와, 정말 너 대단하다. 그런데 그런 거 남들 보기엔 역시 그렇지 않나? 외국에서도 그럴걸~”

“야,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벌써 나이가 몇인데.”

“그래서 결혼은 누구랑 할 거야?”

“넌 왜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녀? 그러고 다니면 얕본다고. 다들 널 예쁜 인형 같은 여자라고만 생각한다니까?”

다들 이래라저래라. 도현은 동생인 도진 라인하트에게까지 한차례 잔소리를 듣고 집을 나왔다. 동생은 좋지만 참 피곤하다. 아마 엄마도 그랬겠지.

‘이렇게 안 입는다고 사람들이 날 예쁜 여자 이상으로 봐주는 것도 아니라는 걸 왜 모르지?’

도현은 도진만큼 키가 큰 것도 아니고 도진처럼 그렇게 입었다고 ‘남자’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살도 잘 찌지 않고 체구도 작다. 도진의 말대로 그처럼 해봤자 남자 흉내를 내는 여자처럼 보일 뿐. 그래,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건 의미가 있겠지.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선, 아니, 도현의 입장에선 아무리 봐도 모양이 빠지는 짓이다. 미성숙한 어린애같이 보인다. 어린애같이 보이는 거? 그거야말로 사람들이, 사회가 가장 만만하게 보는 약자가 아닌가.

이것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미가 없다.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건 ‘어떤 사람’들에겐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현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차림을 바로 했다. 짙은 파란색에 고급스러운 재질을 가진 값비싼 정장 드레스였다. 1자로 된 가느다란 클리비지가 있었고 팔꿈치까지 오는 슬리브에 무릎에 딱 떨어지는 몸매에 핏이 잘 된 드레스였다. 힐은 8cm짜리에 옷과 같은 색으로 된 도로시를 신었다. 왼손목엔 검은 가죽으로 된 시계를 차고 있었고 귀걸이는 다이아몬드였다. 머리는 깔끔하고 우아하게 올렸다. 검은색의 차분한 미노디에르백은 각이 딱 떨어졌다. 반지는 셋 다 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부유한 젊은 사업가로 보이길 바랐다. 물론 이렇게 보니 상속자에 가깝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착각하든 중요한 건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계급이 높아 보이는 것이다.

‘도진이가 가족, 가족 하는 건 정말 엄마 덕분이야. 엄마 덕을 볼 수 있고 서로의 덕을 볼 수 있는 가족이기 때문이지.’

전에는 엄마가 라인하트의 오너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누구에게, 적어도 알 만한 사람에게 ‘내가 알렉시스 라인하트의 딸’이라고 말하는 게 누군가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된다면 그것도 앞으로 충분히 써먹어야 하는 것이다. 써먹을 수 있는 것도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동정하여 써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세상이 만만한 줄 아는가. 그것도 여자에게. 자신이 써먹을 수 있는 건 무엇이라도, 전부, 100% 이상 써먹어야 한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역시 약간 떨린다.’

도현은 잠시 거울을 보며 마음을 다시 다잡은 후 밖으로 나갔다. 야외에 꾸민 커다란 회장이었다. 세계물리학회의 건물 앞 잔디밭 위였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혹은 여유로운 얼굴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무대의 앞에는 좌석이 있었고 그 뒤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인파를 이루어 자리하고 있었다. 군경이 질서를 지키고 경계를 계속하고 있었다.

뒤의 인파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도현도 어렸을 때 배웠던 노래였다.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묻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을 담을 동요였다.

무대에는 거대한 별과 그 주위를 도는 혜성들을 도식화한 마크가 홀로그램으로 떠 있었고 그 아래로 20개 정도의 국기가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국기들이 그 마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빈 좌석은 양쪽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는데 한쪽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격식 있게 차려입은 각국 정상들과 그들의 배우자들, 관련 부처 장관들과 실무자들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정장이 어색해 보이는 학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앞뒤로 취재진들이 정해진 자리에서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무대의 위에는 15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쪽에 바로 발표를 위한 단상이 있었다. 15자리는 가운데 자리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모두 착석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그들을 비추자 여기저기 홀로그램 영상이 떴다.

가운데 바로 옆자리에 있는 사람이 가장 나이가 많았다. 노학자는 웃으며 자신의 왼쪽에 앉아 있는 신경질적인 인상의 중년의 학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인상을 팍 쓰고 노학자의 얘기에 뭐라고 대꾸하고 있었다. 빈자리를 건너뛰고 옆에는 얼굴 신경이 마비된 것 같은 인상에 짧은 머리를 가진 40대 중반 정도의 사람이 앉아 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또 다른 중년의 학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에 앉은 사람만이 남자였는데 나이가 그중 가장 젊어 보였고 잘생겼다. 그는 약간 긴장한 얼굴이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내빈 여러분은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곧 <아칸소 다이아몬드 국립공원 웜홀 연구 프로젝트> 착수식이 거행됩니다.”

한민유의 목소리였다. 이런 자리에서 아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퍽 생소한 일이다.

‘진짜 대단한 사람….’

도현은 방송에 약간 더 긴장했다. 자리를 찾아가야 했다. 받은 ID에 표시된 자리를 찾았다. 조급한 티를 내지 않고 천천히 회장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눈에 띄는 남자라도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찾기가 힘들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그때 때마침 딱 맞게 안내 요원이 다가왔다. 도현은 그에게 자신의 자리표를 보여주었다.

“이쪽으로.”

그녀는 무대를 보는 방향에서 왼쪽으로 안내되었다. 각국 정상들과 학회 외 인물들의 좌석이 있는 곳이었다. 자리는 중간보다 뒤쪽이었다.

“에반.”

“도현아.”

회장의 앞에서 만나 같이 들어가기로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엇갈려버렸다. 안전 문제로 입장 직전에 순서를 바꿔버린 탓도 있었다. 에반이 좌석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손을 잡고 곧 같이 자리에 앉아 식을 기다렸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오른편에 있는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다니엘로 보이는 뒤통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앞에서 7번째 정도의 줄에 아마도 치엔위로 보이는 박사와 같은 줄에 앉아 있었다.

‘저쪽도 뭔가 순위나 서열 같은 게 있는 걸까.’

입지는 중요하다. 곧 프로젝트 착수식이 거행되었다. 한민유가 끝에 있는 진행 석에서 순서를 안내했다. 그 뒤 그녀가 누군가를 소개했다

“아칸소 다이아몬드 국립공원 게이트 빅 크런치 프로젝트의 최고책임연구자이신 세현 퀸 교수님 입장하십니다.”

그러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 위에서도 노학자와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과 에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의 인파는 환호성을 질렀다. 전에 방송에 나왔을 때와 달리 머리를 짧게 다듬은 세현 퀸 교수가 걸어 나왔다.

큰 키, 당당한 걸음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저 무심함. 그녀는 권력을 잡기 위해 그 누구의 환심도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애초에 왕자(王者)로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단상에 서자 세계물리학회의 마크가 그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눈짓하자 모두 자리에 다시 앉았다.

“세현 퀸입니다. 학회까지 먼 길 오느라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통칭 아칸소 프로젝트 연구팀은 2129년 4월 30일 05시 13분 아칸소 다이아몬드 국립공원에 위치한 웜홀을 부작용 없이 영구 소멸시킬 겁니다.”

그러자 다들 환성을 내며 열렬히 박수를 쳤다. 그녀는 양쪽에 있는 홀로그램 영상을 조작하였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아칸소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 문서였다. 부작용 없이 기존 웜홀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서 간략하게(그래서 아마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말을) 설명했다.

“북미 대륙에 거주하고 있는 8억 시민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가적인 이점이 있습니다.”

그녀의 건조하면서도 차분한 말투는, 마치 프로젝트의 성공을 당연시하는 듯해 신뢰감이 대폭 올라갔다. 아니, 이것도 말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세현 퀸이기에 비로소 저 말이 이토록이나 힘을 가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열렬한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20년 전 아칸소 게이트 발생으로 집과 터전을 잃은 사람이 천만 단위를 넘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회전 웜홀을 소멸시키는 것에 성공하면 일반 방정식을 도출할 수 있게 되고 이를 역산하면 새로운 웜홀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즉, 인류에게 드디어 우주 대항해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쳤다. 에반도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쳤다. 인류를 미래로, 우주로 이끄는 위대한 과학자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 그리고 주인인 그 사람은 사람들이 마음껏 박수를 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정도의 관대함은 있었다.

“우리 학회는 아칸소 프로젝트를 아주 오랫동안 기획해 왔습니다. 최고책임연구자인 제가 연구 전반과 게이트 소멸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 통괄하며 게이트 소멸을 직접 시행합니다.”

현대에는 그 어떤 국가의 리더도 전쟁의 최전선에서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지 않았고 외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꺼이 우주와 인류의 무지의 최전선에 가장 앞장서서 자신을 따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것을 인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왕은 왕으로 태어나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그런데도 그것이 모든 인류에게 이토록 막대한 은혜를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최초 발안자이시자 우리 세계물리학회 회장이신 캘리 박 교수님.”

노학자, 캘리 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친근하게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세현 퀸은 그녀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명을 계속했다.

“저와 함께 전반적인 연구 계획 수립과 게이트 소멸 실험에 직접 동참하실 스웨덴 온살라 연구소 소장 세리나 이예프 교수님.”

캘리 박의 왼쪽에 앉아 있던 이예프 교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질적인 표정을 풀지 않은 채였다. 다들 박수를 쳤다. 학자들이 앉은 쪽 두 번째 줄에 앉은 학생들이 전원 동시에 기립하여 절도 있고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함께 실험 진행하실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물리학과 알라나 루소 교수님.”

비어 있는 세현 퀸 자리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루소 교수가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로봇 같은 얼굴로 잠깐 일어났다가 정확하게 초를 세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함께 실험 진행하실 영국 OC 대학교 물리학과 세실 필리페 교수님입니다.”

루소 교수의 옆에 앉아 있던 필리페 교수가 웃는 얼굴로 일어나 가볍게 묵례했다.

“그 외 참여하시는 모든 교수님들과 박사, 석사들이 이 자리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앞서 소개된 교수들도 다시 일어나 박수를 쳤고 세현 퀸도 자신과 자신들의 성과에 박수를 쳤다. 세현은 그 뒤로 아칸소 프로젝트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한 뒤 한민유를 보고 진행을 확인한 후 순서를 넘겼다.

“그럼 다음으로 학회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그녀는 캘리 박에게 진행을 넘겼다. 참여한 20개국 정상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들과 함께 한 부처 장관과 실무자들도 기립 박수를 쳤다.

캘리 박은 웃는 얼굴로 단상을 두 손으로 짚으며 말을 시작했다.

“자자. 이제 다들 앉으시죠. 하하. 이렇게 큰 행사는 오랜만입니다. 10년 만인가요? 제가 최근에 이도 다시 하고 관절염 수술도 받았습니다. 어때 보입니까? 괜찮지요?”

캘리 박이 이를 드러낸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웃었다.

“요즘은 세상이 좋지요. 마도의학의 발전으로 기록된 역사상 최초로 현재 167세까지 생존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도쿄대학병원 원장 엘리야 민 교수를 비롯한 많은 의사와 연구자들의 덕에 제가 아직 인생의 반도 안 살았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엘리야 민 교수도 이 자리를 빛내 주고 있습니다.”

캘리 박이 손으로 학자들이 앉아 있는 곳을 가리키자 엘리야 민이 일어나 주변에 가볍게 묵례를 하며 인사를 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우리 이예프 소장이 예전부터 수술을 받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었는데 막상 해보니 진작에 받을 걸 그랬습니다. 오랜만에 땅을 밟고 걸으니 기분이 좋군요. 활기가 생기는 느낌입니다. 예전에 카시아키 교수도 그랬죠. 스승인 저에게 ‘땅을 밟고서야 우리는 위대한 꿈에 매몰된 몽상가로 끝나지 않고 진정으로 위대함을 실현한 자들이 될 것이다’라고 건방지게 충고한 적이 있었지요.”

캘리 박이 추억을 떠올리며 즐겁게 웃었다.

“아~ 카시아키가 얼마나 건방졌는지 아십니까? 자기한테 1, 2, 3, 4부터 죄다 가르쳐준 저에게 현실 감각이 없다면서 점잖은 척, 깨우친 척 저런 말을 수시로 했다니까요? 거참, 건방지기로는 걔가 제 제자들 중에 지금까지도 제일입니다. 걔가 그렇게 조용히 이 스승의 심기를 건드리는 그런 싸가지였단 말입니다. 겉보기에는 안 그래 보였지 않습니까.”

그녀가 낄낄 웃자 사람들도 잠깐 따라서 웃었다. 그녀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먼 밤하늘을 한 번 바라보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2099년 3월 25일 16시 44분, 브랜다 카시아키 교수는 마츠모토 중력 연구소의 <인공 퀘이사 생성 77차 실험>에서 연구소 설계 결함으로 인하여 함께 연구에 매진하던 33명의 연구원과 학생들, 그리고 연구소에 근무하던 직원 211명과 함께 사망하였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2129년 3월 25일, 그리고 현재 시각 16시 43분….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잠깐 브랜다 카시아키 교수를 기리는 묵념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오랫동안 묵념을 하고 사람들은 자리에 앉았다. 노학자의 눈은 총기와 생기로 반짝였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는 미래를 가리키는 자의 무게, 그리고 왼쪽 어깨에는 죽은 제자들의 무게가 얹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굳건히 서 있었다.

그녀는 명실상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뛰어나고, 그리고 가장 위대한 인간이었다.

“내가 제자라고 인정하는, 지금까지 21명의 교수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를 고르라고 하면 나는 세현 퀸 교수를 고를 겁니다. 가장 강한 자를 꼽으라고 하면 세리나 이예프 소장을 꼽을 겁니다. 가장 멀리 보는 자를 말하라 하면 알라나 루소 교수를 말할 것이고 가장 훌륭한 교수를 뽑으라 하면 세실 필리페 교수를 뽑을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교수들은 내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입니다. 나머지 7명은 이들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머지 일곱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았다.

“진 카시마 교수, 금성위 교수, 브랜다 카시아키 교수, 세린 세르게이 교수, 헤더 블레어 교수, 크리스탈 요한 교수, 미란다 보위 교수…. 이들은 이렇게 성장하기도 전에, 나보다도 먼저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캘리 박의 목소리는 슬픔을 담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한 번 더 말했다.

“먼저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 일곱 명의 제자를 잃은 것은 제 인생에 있었던 그 어떤 일보다도 가장 뼈아픈 일이었습니다. 눈물이 흐르고 피를 토할 것처럼 괴로웠습니다. 제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왜? 그 아이가 나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낮다는 건 알고 있지 않았나? 그런데도 왜?”

캘리 박은 미소를 지었다.

“제 생각이 잔인하다고 느껴지십니까. 하지만 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모든 제자들에게, 아주 공평하게, 그 모두에게 나를 뛰어넘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내가 찾는 답을 나보다 먼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자. 천재. 위대한 자. 제자, 아니, 내 스승이 될 만한 자.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이 스승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단 한 명도. 기대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이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캘리 박은 그렇게 말하면서 현재 남아 있는 자신의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세현 퀸, 세리나 이예프, 알라나 루소, 세실 필리페 등은 그녀의 눈빛을 똑바로 받아내었다. 몇몇은 슬픈 표정을 짓기도 했다. 왕리밍 등은 자존심이 상해 표정을 굳혔다.

“카시아키에게도 실망했죠. 분노했었죠. 얼마나 혼을 냈는지 모릅니다. 이 캘리 박의 기대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나 자신이 아니라 너한테도 걸었는데 이 기대에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다니. 밥버러지 같은 것이라고 끊임없이 갈구고 괴롭히기까지 했습니다. 카시아키도 다른 대부분의 제자들처럼 아슬아슬하게 제 기준의 하한선을 넘겨 겨우 졸업장을 받았죠. 어린애처럼 울면서 졸업장을 받아갔습니다, 걔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라고 키워진 아이들이 천 명 넘게 제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학부까지 합쳐도 수천 명 수준이죠. 50년이 넘게 고르고 골라 수천 명, 그중에 천 명, 그중에 단 21명만이 제 졸업장을 받아갔는데…. 그중 일곱 명이 벌써 죽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자신의 눈 밑을 훔쳐서 그걸 바라보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걸 보세요. 제가 눈물을 흘립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던 년들인데. 내게 가장 큰 실망을 주었던 것들인데. 나와 함께 길을 찾고 중력을 연구하며 꿈을 이룰 방법을 개발하고, 가장 힘든 시기에도 나를 믿고, 나를 스승으로 여기고, 그래도 아주 가끔은, 10년에 한 번 정도는 조금이라도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던 그런….”

캘리 박은 말을 잊지 못하고 잠시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추모했다.

“내 세상에 나와 함께 걸을 수 있는 인간은 내 제자들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만큼은 나와 같은 기준을 세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나와 같다고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이, 150억 중에 단 21명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언젠가는… 나를 뛰어넘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가진 제자들이, 나도 모르게 걸고 있었던 내 기대와 함께 죽어버려 나는 이렇게나 슬픈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일곱 명이나. 벌써 일곱 명이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래에 앉아 있는 좌석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며 단상으로 손수건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걸 오랫동안 깨닫지 못해 이 슬픔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하고 떠올리면 애간장이 끊는 듯이 괴로운데 왜 괴로운지 스스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민유가 가져온 손수건 더미에서 아무거나 골라 코를 휑 풀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작년, 퀸 교수가 드레이닝에 걸리고 나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던 세현 퀸 교수를 일제히 카메라로 잡고 퀸 교수도 캘리 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려움이라니. 내가. 이 내가. 이 캘리 박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내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제자를 또 이렇게 앞서 보내야 한다니. 모든 가능성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더군요. 퀸 교수의 죽음이 어쩌면 나의 가장 큰 실패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로 이 내가 말입니다.”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나는 올해 80살이 되었습니다. 이제 인류의 수명은 160살을 넘어 200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오래 살아 많은 것을 이룰 겁니다. 내 생애 진리를 이루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걸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제자들이 나를 앞설 가능성도 있지요. 나는 제자들에게 항상 나보다 뛰어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지금도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실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지금쯤 되니 그래도 이 스승의 뒤를, 보폭을 맞춰 잘 따라오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럼 분명히, 혹여나 내가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도 내 제자들은 계속해서 나를 넘어 앞으로 갈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캘리 박이 뒤를 돌아보자 세계물리학회 건물 앞에 커다란 천으로 가려 놓은 오벨리스크가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드러났다.

“실패와 희생에 굴하지 않고 고난과 장애에 쓰러지지 않고 사람들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모든 것을 이끌어온 것은 바로 나와 내 제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모든 위험에도 앞장섰던 내 제자들…. 진 카시마 교수, 금성위 교수, 브랜다 카시아키 교수, 세린 세르게이 교수, 헤더 블레어 교수, 크리스탈 요한 교수, 미란다 보위 교수.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연구하며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장렬하게 산화한 이 아깝기 짝이 없는 위대한 인재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천이 스르륵 뒤로 떨어지며 위대한 이름이 새겨진 아름다운 오벨리스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여기엔 언젠가 내 이름이 새겨질 것이고, 언젠가 이예프 소장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고 필리페 교수와 루소 교수, 그리고 우리 세현 퀸 교수의 이름도 적힐 테지요. 그렇게 우리는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도 그에 따라 번성하겠지요. 그걸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에 되새기는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그 어떤 고난도, 역경도, 슬픔도 우리가 오늘날에 이르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캘리 박이 마지막 말을 끝맺었다.

“앞으로 그 어떤 고난과 역경과 슬픔도 우리가 미래로 향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겁니다.”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도현 킬스버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위대한 자가 있었다. 아마도, 아니, 확실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 존재만으로도 인류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모두가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가능성이라도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저 앞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그 위대함을 가장 위대하게 발현한 인간이 서 있는 것이다. 인류의 이상이, 많은 이들은 제대로 상상조차 할 능력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 인류의 이상이 화신으로 현실에 나타난 것이 바로 저 사람이었다. 150억 인류 중에 단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자신이 인류애가 그렇게 큰 사람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도 도현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니, 몹시나 개인주의적인 도현이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 인간이라는 집단이 너무나 추악하고 흉하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도 저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저렇게 강한 인간이 이미 대단하고 위대하면서도, 나이가 80이 되어서도 여전히 더 높은 곳을 추구하며 굳건히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역경을 넘어서도 여전히 꺾이지 않고 더 지혜로워진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얼마나 위대한가.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인간은 저렇게 될 수도 있는 존재라고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저 한 명의 위대한 자의 존재만으로도 150억의 그러지 못한 인간들이 존재하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이 도현 킬스버그라는 존재의 정당성마저 주는 느낌이었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얘기를 해본 적도 없는데. 도현은 손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치다가 숨을 내뱉었다.

‘모든 사람이 기꺼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진정으로 첫눈에 반한다는 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사실상 잘 알지도 못하면서, 캘리 박에 대한 무한한 호의와 존경이 솟아올랐다.

다니엘을 가까이서 보았을 때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의 위대함을 말이다. 자신의 권력만 지키려고 아웅다웅하며 자신이 지배하는 인간들을 속이고 갈취하는 다른 권력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미래와 인류의 번성을 말하고 사람들을 따르게 만들고 기어코 실현해내는 사람이라니. 저런 사람이 존재한다니.

우레와 같은 갈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 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작음을 인정할 수 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럴 것이다. 캘리 박의 등장 이전까지는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정한 지도자를 맞이하여 인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나 발전할 수 있었다. 캘리 박은 웃는 얼굴로 갈채를 받으며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을 내려가고 모두가 박수를 좀 더 치다가 자리에 앉았다.

“아.”

도현은 에반에게서 행커칩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도현이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놀랐어…. 난 그냥 지루한 공식행사일 줄이나 알았는데.”

“대단한 사람이지? 저렇게 뛰어난 능력과 저렇게 뛰어난 리더십을 다 가진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을 거야.”

누가 똑같은 말을 했다고 해서 이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캘리 박이 이런 말을 해서 이렇게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녀가 잃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 7백만 명, 7천만 명 죽은 것보다도 아까운 것이다. 그걸 같이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이다.

“직접 만나본 적 있어?”

도현이 에반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로 저 사람은 아무나 못 만나. 난 로라라는 사람만 만나봤는데.”

에반은 고개를 돌렸다.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한민유와 뒤편에서 군인과 경찰들을 관리하고 있는 로라가 보였다. 원래 ‘그쪽’에서 암암리에 이름이 있던 여자였는데 학회 쪽 사람인지는 이번에 에반도 처음 알았다. 군인이나 용병처럼 짧은 머리카락에 새카만 눈동자를 가졌다. 눈매가 약간 졸린 듯이 나른한 눈에 가무잡잡한 피부였다. 키는 에반 정도로 큰 장신이었다. 직접 만날 때는 군복이나 게릴라 용병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다가 정장을 입은 걸 보니 퍽 신기하다.

교수 15인은 전부 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칸소 프로젝트, 터널 프로젝트, 그리고 빅뱅 실험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아직 빅 크런치 실험도 많이 남았고 웜홀 방정식 역연산을 실행하는 문제도 남아있었는데 그 뒷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들었을 때는 영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로 들렸다.

“이 모든 것도 결국은 우리 우주에 국한된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 우주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137.98억 년 이전에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이런 우주 하나가 축소하여 점 하나가 되고 그게 다시 팽창하여 지금의 우주가 된 거라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퀸 교수가 또 다른 화두를 던졌다. 빅뱅 실험보다도 더 나간 이야기였다. 이제 이야기는 형이상학적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상상의 영역이다.

“신?”

캘리 박이 반문하듯 말했다.

“여기서 신이라는 개념을 꺼내는 건 인류가 말하는 신이야말로 인간의 무지, 그 자체라는 걸 뜻하죠.”

이예프 교수가 말했다.

“분명 무언가의 우연이겠지. 우리가 관찰 가능한 모든 것이 그렇듯이.”

루소 교수가 기계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 우리가 정말로 무존재라는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존재하는 우리 우주와 바로 접하고 있는 게 무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걸?”

필리페 교수가 물었다. 퀸 교수가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진실을 담은 중력 방정식을 칠판에다 썼다. 우주가 팽창하고 줄어들고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식이었다. 현재로써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이었다.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기가 힘들어. 인간의 언어 중 신의 언어라 할 수 있는 물리적 현상을 그나마 해석해낼 수 있는 건 수학밖에 없지…. 이게 우리 우주를 넘어서 정말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까.”

“웜홀 역연산으로 우주의 끝까지 갈 수 있는, 아니, 우주의 너머로 갈 수 있는 터널을 만든다면 우리는 뭘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을까?”

“인간의 감각은 과학 문명을 통해 팽창하였으니 계측기든, 뭐든 만들어 봅시다.”

“존재가 무존재를 밝혀낼 수 있을까?”

“무존재…. 중력 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나?”

“존재는 정말 무한할 수밖에 없는 건가? 그렇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밝혀낸다고 해도 또 그 너머가 있게 되는 것인가? 하지만 존재라는 게 무한할 수가 있나? 존재하는 건 존재하는 거잖아? 이 우주에 존재하는 중성자 수마저도 전부 셀 수 있는데. 무한히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으로 무한을 증명하는 건가? 쿼크 같은 미립자 하나의 삶이 이 우주의 삶과 같은 건 아닐까? 이 모든 게 정말로 무슨 의미일까. 왜 이렇게 만들어진 거지? 왜?”

이들이 진정으로 대단한 것은 이런 자신들의 목적과 꿈에 매몰되지 않고 도덕도 대중의 심리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미래를 말하면서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는 이들의 미래를 기꺼이, 가차 없이 짓밟아버리는 것이다. 보통의 권력가들이 권력을 고작 사치나 쾌락을 위해 사용하는데 저들은 오로지 신으로의 길을 위하여 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쾌락이었다. 지금은 인류가 가장 이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제정일치의 시대다.

위대한 인간들, 위대한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좀 더 이어지고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 있는 이 15명의 인간들은 한 명만 문제가 생겨도 전 세계에 비상이 걸렸다. 따라서 한꺼번에 이렇게 모이는 일도 거의 없으니 그들에게도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학자와 내빈들은 학회 건물 안으로 자리를 옮기고 인파는 질서에 따라 해산되었다.

서해상에 위치한 세계물리학회의 건물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지진, 해일, 근거리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문제가 없는 건물이며 외부 공급 없이 영구 자생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소행성이 날아와도 버틸 수 있지 않냐는 말이 있는데 여기 있는 마도물리학자들의 능력을 생각해보자면 소행성 자체의 궤도도 틀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휴식 뒤에 연회장에서 모인다. 도현은 잠깐 침대에 누웠다. 에반은 씻고 재단장을 하고 있었다. 도현은 탈력감에 꼼짝없이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지친다기보단 새롭고 놀랍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난 뒤의 나른한 소화 과정에 가까웠다.

도현 킬스버그는 자기 자신이 좋았다. 그건 당연히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도 포함한 것이었다. 그것도 그녀였기 때문이다. 늙고 나이가 들어도 좋아할 것이다. 늙고 나이가 드는 것도 그녀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둔한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다. 자신이 얼마나 열등한지, 혹은 우등한지. 정확하게는 스스로가 사회의 기준이나 다른 사람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현실은 이미 다른데도. 똑바로 보는 것보다 그저 남들이 말하는 대로, 사회상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뭐라도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회피한다. 그게 부모의 말이든, 선생의 말이든, 친구의 말이든, 남자의 말이든, 하물며 인권단체나 사회단체의 말이든. 자기 자신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따라 하는 주제에, 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자신은 인정받지도 행복하지도 않냐고 불평한다. 바보가 아닌가.

물론 도현 킬스버그도 누군가의 말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정확하게는 그 말을 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알렉시스 라인하트

도진 라인하트

에반 블랙

로웰 리

‘한민유, 캘리 박….’

만날 수 있을까? 다니엘의 곁에 있으면 가능할 것도 같다. 정말 너무나 대단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인류의 지도자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도현은 지금까지 자신이 작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작게 느껴졌다. 정말로,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위대한 인간들이 모두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흠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위대하다. 도현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평생의 영광이라 생각해도 될 정도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최대한으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디서든지. 어떤 입장이든지. 오늘의 감동만으로도 이미 많은 걸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여기에 있는 클래스가 더 높은 다른 인간들은 분명히 손익을 따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는 힘의 세계다. 많은 사람의 생과 사가 저울질 되는 곳이다.

에반이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도현이 그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뭐야. 엄청 꾸몄잖아?”

“나도 이런 덴 처음이야. 여기에 나도 회사도 돈을 엄청 들이부었어.”

“얼마나?”

도현도 저번에 학회가 어려움에 처해 자금을 모으기 힘들다는 다니엘의 말에 도현이 가진 돈의 80%를 투자했다. 에반은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설 것 아닌가.

“수에즈 프로젝트 투자 끝물부터 들어갔으니까 하여튼 많아. 학회가 투자금을 반이라도 돌려주지 못하면 솔직히… 목숨 내놓아야 할 상황이랄까.”

“설마.”

도현이 허풍 치지 말라는 듯이 말하자 에반이 여전히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만지며 거울 속을 통해 도현에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직 Too big to die 수준이 아니야. 사람들의 돈을 전부 잃는 날이 오면 정말 살아남기 힘들지 않을까? 제1세계는 좀 나을지 모르지만, 또 그렇지도 않잖아? 크든 작든 사업은 목숨 걸고 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연관될수록 실패가 힘들겠지. 나 정도는 아니더라도 결국 원한을 사게 되니까.”

승패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정정당당하더라도 모든 승리에는 원한과 시기, 질투가 따른다. 힘을 잃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도현은 가만히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반이 넥타이를 바로잡으며 물었다.

“만약에 다니엘 스톤하츠가 네 돈을 전부 날린다면 너도 그를 죽여버리고 싶지 않겠어?”

“…….”

노크 소리가 났다. 에반이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여니 다니엘 스톤하츠가 서 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그쪽에서도 청일점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에반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다니엘.”

다니엘은 그의 얼굴을 잠깐 보고는 바로 도현을 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뵐 수 있는 시간이 나서 왔습니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조금요.”

도현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니엘이 다가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입술에도 입을 맞췄다.

“저도 옷 갈아입으려구요. 뭐로 입지?”

다니엘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드레스룸으로 가서 다니엘과 에반과 함께 옷을 골랐다. 두 남자는 도현의 시중을 들었다. 에반은 뒤에서 그녀의 드레스 지퍼를 올려주었고 다니엘은 귀걸이를 해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자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도현에게 준 이 반지들처럼 아름다운 보석들이 아니던가.

[넌 왜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녀? 그러고 다니면 얕본다고. 다들 널 예쁜 인형 같은 여자라고만 생각한다니까?]

누군가의 말은 분명히 나에게 이롭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은 분명히 나에게 해롭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말을 듣더라도 그것을 핑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상, 도덕, 윤리, 누군가의 말보다 나 자신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자라고 하지 않은가.

옳고 그름이나 사회적 올바름을 위하여 왜 그녀가 아름다운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가.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움이 아닐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결국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부정하고 사회상을 무작정 따라갔기 때문에 괴로웠을 것이다. 따라간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다니엘 스톤하츠처럼 똑똑한 지능과 능력일 수도 있고, 에반 블랙처럼 자신의 비참했던 과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둘 다, 자신의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면이든 아니든, 스스로를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던 이상과 멀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스스로를 부정하고 남을 따라 하는 인간들은 그 어떤 사회에서도 불행하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똑같지 않다. 같은 여자라고 같은 것을 바라고 같은 것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여자를 개인의 사람으로 보지 않고 쉽사리 일반화, 사물화하는 생각이지 않은가. 여자도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냉혹한 실력주의다. 그래야만 뛰어난 자들이 날개를 펼 수 있다. 거기엔 성별이 아니라 오로지 실력만이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모두에게 진정한 기회가 오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재능도 노력도 없는 겁쟁이뿐이다. 불리한 입장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생존과 자존, 성공의 열쇠인 건 인류의 시작 때나 문명의 전이나 중세 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누군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을 다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어쩌면 가장 올바른 말일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 것이 인생의 시작이자 마지막이고 목적이다.

준비를 끝내고 다 같이 나섰다.

“긴장되십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도현이 대꾸했다.

“조금.”

에반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도.”

다니엘이 말했다.

“이런 긴장은 기분 좋은 겁니다.”

살아있는 게 느껴지니까 말이다. 도현은 자신의 목덜미를 한 번 쓸어 헤어스타일을 점검했다. 그리고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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