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외전) (17/21)

1. 에반 블랙, 모두가 노리는 그 반지!

세상이란 언제나 그 남자에게 다소 불쾌한 곳이다.

“크하하핫! 야, 와, 아까 그 할배랑 그 할배 후처가 동시에 니 엉덩이 만진 거냐? 미친. 큭큭큭. 야, 너 아직 안 죽었다. 킥킥.”

그도 그럴 게 ‘여전히’ 그를 그저 예쁘게 생긴 금발 미남으로만 생각하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함께 이 사업을 일군 EB 뱅크의 부사장인 페르난데스 카를로스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치며 웃고 있었다.

“큭큭. 벌써 28살인데도 여전히 몸뚱이로 벌어먹겠는데? 든든하겠다, 야~”

“…….”

너무 예뻐서 인생이 피곤한 그 남자, 에반 블랙은 시선을 돌려 그를 잠깐 노려보았다. 그러자 페르난데스는 겨우 웃음을 멈추며 너무 웃어 배가 아파 손으로 문질렀다.

“칭찬인데.”

“그게 어떻게 칭찬이냐.”

“칭찬이지.”

페르난데스는 여전히 피식피식 웃으며 싸구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쨌든 먹고 살 순 있다는 소리잖아.”

“그거 내 사무실에서 피우지 마라. 냄새나.”

“뭐, 어때. 너도 가끔 피우잖아.”

“이걸로 피워.”

에반은 서랍에서 누군가에게 받은 고급 시가를 꺼내 페르난데스에게 주었다. 페르난데스는 딱히 거절하지 않고 시가를 받았다. 그는 시가의 냄새를 맡았다. 아주 향기로웠다. 시가의 끝을 자르고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들이켜자마자 일순 나른해졌다. 뒷맛도 쓰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시가를 보았다.

“아, 역시 비싼 게 좋긴 좋구나.”

“그 싸구려 좀 끊어.”

“음, 니 말 듣고 다른 거 피워보려고는 했는데. 내가 은근히 또 순정파 일편단심 아니냐.”

페르난데스는 다갈색 머리에 짙은 푸른색 눈,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코가 우뚝하고 골격이 뚜렷한 미남자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천박하고 가벼워 보였다. 묘하게 퇴폐적인 느낌이 나긴 해도 날 때부터 천사같이 예쁘고 기품 있었을 것 같은 에반 블랙과는 굉장히 대조적이었다.

“이걸로 우리 유동성 문제는 당분간 괜찮겠지.”

에반은 사인이 끝난 계약서를 보며 페르난데스가 피우고 있는 시가와 같은 것을 물고 불을 붙이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비싼 시가를 다시 케이스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가 있는 곳은 제네바의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회사 건물은 제네바에서도 가장 비싼 오피스 건물이다. 에반의 오피스는 그 건물에서 가장 고층에 위치했다.

“너 그 학회에서 돈 회수 못하면 이런 거 아무 의미 없는 거 알지?”

페르난데스는 의자에 거꾸로 앉아 등받이에 턱을 기대며 에반에게 말했다.

“알아.”

“그러니까 내가 백 보 양보해서 그거 반만 들어가자니까 너답지 않게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냐?”

“미래가 보였으니까.”

에반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에반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야 항상 꽃이 피듯 웃는 얼굴로 다녔지만 페르난데스의 앞에서는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아무 말 없이 에반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 난 모르겠다.”

그는 시가를 든 손으로 머리를 벅벅 털다가 재가 옷에 떨어졌지만 아무렇지 않게 털었다. 그가 투덜거렸다.

“거기 그 교수라는 아줌마들 너무… 너무 뭐냐, 너무 사람이 좀 사람 안 같고 눈빛은 쎄~한 게 무슨 사이코패스 같고 그렇잖아. 분명히 우리 돈 다 날려도 입 싹 닦을 얼굴이라고. 그런 상이야, 얼굴이. 우리가 우리 돈만 노리는 사기꾼들 한두 번 보냐?”

“지중해 게이트 쪽으로 군수 물자만 제대로 돌리면 설사 그 돈 다 날려도 우리가 쓰러지는 일은 없어.”

“아, 뭐 그거야. 지중해 게이트 생겨서 천만다행이라니까. 그건 못해도 30년짜리 돈줄이니까. 음. 역시 한국제가 좋긴 좋아. 역시 선진국. 근데 그렇게 잘 안 망가지면 많이 못 파는 거 아냐? 원래 우리 입장에서는 총도 잘 터지고 오발도 많아야 많이 파는데.”

페르난데스가 말했다.

“아니. 우리는 처음으로 게이트 발생 초기 시장에 들어온 거야. 예전에는 용병도 무기도 싸게 팔아서 이득 봤지만 지금은 아예 초기부터 시장을 전부 우리가 독점해야지. 좋은 물건을 좋은 가격에 팔아서 경쟁 업체가 발도 못 붙이게 해야 돼. 그 뒤에 가격을 올리고.”

“오오.”

페르난데스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들이 사람 장사나 무기 장사를 10년이나 했지만 항상 선점 기업이 있던 곳에서 후발 주자로서 시장을 장악해왔다. 지금은 그것과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게다가 당연히 용병 장사보다 무기 장사가 훨씬 쉽고 돈도 더 잘 번다.

“물량은 안 끊기고 댈 수 있는 거야? 우리가 거래했던 동유럽이나 러시아제 물건들은 자꾸 물량도 못 맞추고, 품질도 못 맞추고, 기한도 못 맞춰서 짜증 나게 했잖아.”

“한국제라니까. 걔네들은 밤새워서라도 공장 돌려서 다 맞춰. 품질도 좋고. 지금은 재고가 넘쳐서 문제라는데.”

“배달은?”

“터키까지는 알아서 올 거야. 거기서부터는 우리가 배달하면 되고.”

“어우, 뭐야. 일이 너무 쉽게 돌아가니까 오히려 무섭다? 사기 아냐?”

돈 다루는 사람들이야 자나 깨나 사기꾼 조심이 우선이다. 에반이 피식 웃었다.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KP글로비스랑 하는 거야.”

“KP? 혹시 그 KP냐? 킹앤폰즈?”

“맞다.”

“저번에 우리가 돈 빌려준 인연으로 해주는 건가?”

그는 그렇게 의아해다가 아! 하고 손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이거 니 여친 다른 남친이 해준 거네? 맞지? 아, 이름 뭐더라? 송선호? 재벌 3세?”

그러더니 페르난데스는 다시 폭소하기 시작했다.

“야~ 니들 구멍 동서들끼리 너~무 사이가 좋은 거 아니냐. 큭큭큭. 미치겠다. 서로 치고받고 싸워도 모자랄 판에 사업을 같이하냐. 큭큭큭. 니 여친은 니들 보고 기특하겠다, 야.”

에반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평소 때와 같이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

“그 여자가 그렇게 좋냐? 니가 여자한테 그렇게 빠진 건 처음 본다. 평생 여자들한테 돌아가며 쪽쪽 빨리다가 갈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야. 그것도 남자가 셋이나 더 있는 여자한테. 아, 이걸 오히려 너답다고 해야 하는 건지.”

“시끄러워.”

“그래서 언제 보여줄 거냐? 나한텐 보여줘야지, 어?”

에반은 말이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보여줄 거냐?”

“…….”

“진짜 좋은가 보네…. 알겠으니까 정색 그만해라. 까다롭다니까.”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툴툴거렸다. 에반은 인상을 팍 쓰고 있다가 다시 그를 보며 말했다.

“그 싸구려 끊어. 경박한 말투도 고치고. 그러면 소개해줄 테니까.”

에반은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넌 내 형제야.”

에반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페르난데스도 당연히 그를 형제처럼 생각하고 그런 말을 쉴 새 없이 했지만 그가 입 밖으로 말한 건 처음이었다.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하고 섭섭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면 그런대로 또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 형제면 좀 있는 그대로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냐? 지금까진 그렇게까지 말 안 했으면서….사람 속상하게시리…. 너 진짜 내가 그렇게 부끄럽냐? 어?”

그래서일까. 오히려 페르난데스는 따졌다. 에반이 말했다.

“지금까진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놔뒀는데 이제 안 되겠어.”

“왜!”

페르난데스가 바보도 아니고 에반의 태도를 보고 어찌 모르겠는가. 좀 쌓였다. 같이 힘든 시절을 겪어온 정으로,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를 이해해왔지만 자꾸 이러면 그도 화가 났다. 에반이 대꾸했다.

“도현이한테 아이 가지고 싶다고 말했어. 도현이랑 내 아이. 너한텐 조카야. 애한테 너 같은 삼촌이 모범이 되겠어?”

“…….”

“절대 안 돼. 식사 예절을 아직도 다 모르는데. 절대로 안 돼. 그러니까 빨리 고쳐.”

페르난데스가 경악으로 입을 딱 벌렸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너… 미쳤냐?”

페르난데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에반은 손목에 차고 있는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명품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림 같은 남자였다. 그의 약지에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났다.

“간다.”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르난데스는 입을 떡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반은 그의 어깨를 한 번 짚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페르난데스는 그를 돌아보며 여전히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

에반은 안 그러는 척 잠깐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괜찮았다. 그리고 너무 과하지는 않게, 하지만 여유로운 태도로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따라가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떨린다.’

긴장되었다. 만나자고 한 것은 상대 쪽이었다. 왜 만나자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 자신이 먼저 만나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선공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일찍 왔군요.”

너무나 좋은 목소리, 귀에 익은 느낌이었지만 동시에 미묘하게 달랐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깐 생각에 빠져 있던 에반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내색을 숨기고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며 미소를 지었다.

“오셨습니까.”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어머니.”

그의 말에 알렉시스 라인하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에반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예쁜 아들이 생길 줄은 몰랐네요.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에반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녀의 외투를 받아 종업원에게 넘겨주고 그녀의 의자를 빼주었다. 그리고 종업원이 빼주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제네바에 올 일이 생겨서 왔는데. 내가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한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어머니. 먼저 연락 주셔서… 기뻤습니다.”

에반이 말했다. 그러자 알렉시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녀의 말에 에반은 어쩐지 좀 더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송선호처럼 오두방정을 떨 생각은 절대, 절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무조건 잘 보이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아주 좋게 봐줬으면 좋겠다. 그게 무언가, 그의 존재에 단단한 정당성을 줄 것만 같았다. 이런 기분 자체가 처음이었다. 친부모에게도 일찌감치 포기했던 기대와 바람이다.

그래서인지, 노소를 불문하고 여자에게 잘 보이는 법은 그에게 숨 쉬는 것보다도 더 쉬운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쩐지 어려웠다. 그녀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도현보다도 더. 그리고 그것이 어쩐지 긴장되었다. 도현에게는 이제 자신을 모두 보여주어도… 떨리고 가끔은 똑같이 긴장되어도 그녀가 자신에 대해 알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알렉시스 라인하트는… 그녀의 어머니가 아닌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는 그의 가장 좋은 면만 보여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인정이, 그녀의 평가가 도현에게도 큰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이, 모든 걸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필요 이상으로 말이다.

“입을 다물 줄 아는 멋진 남자는 분위기가 있지. 도현이가 그런 면을 좋아했을 것 같네요. 보통 남자들은 너무 수다스럽잖아.”

“아닙니다, 저는… 긴장되어서요.”

“그래요? 왜요?”

“모르겠습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도현이가 예전부터 어머니의 말씀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굉장히 존경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말은 못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상대가 모든 걸 꿰뚫어 볼 수 있다면, 결국 이쪽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솔직함뿐이다. 그의 약점 쪽으로 그녀가 언급하지 않기를 바라며….

“엄마라고 도현이에게 크게 이래라저래라 안 해요.”

알렉시스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에반은 좀 더 긴장해서 뻣뻣해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께서 여전히 도현이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분이시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씀일 뿐입니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알렉시스는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되물었다. 에반은 속으로 탄식했다. 식은땀이라도 날 것 같았다. 얼마나 꼴사나울 것인가.

“우리 도현이에 대해서 잘 아나 보군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만났습니다.”

“오래 만났다고 남자가 여자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보통 착각 아닌가?”

“보통의 연인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도현이와 저는… 닮았습니다.”

에반은 그렇게 말했다가 퍼뜩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변명했다.

“닮은 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도현이가 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공통점이,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점이….”

“하하하.”

알렉시스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에반은 자신의 무언가가 확 드러난 느낌에 다소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입을 다물었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런 걸 못 지킨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이는 왜 가지고 싶지?”

그녀가 물었다. 역시 도현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건 사람의 장단을 잘 파악한다는 말이다. 에반은 그녀가 자신을 너무 착실하게 알아내는 느낌이라 점점 더 긴장되고… 속된 말로 쫄렸다.

“그, 그건… 도현이의… 저와 도현이의 아이가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서….”

그는 점점 자신이 사라지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다시금 마음을 잡고 알렉시스 라인하트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도현이의 발목을 잡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이에게도 최선을, 제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바란 건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도현이는 이미 제게 저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이는 아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제?”

“어머니가 오셨을 때…. 그때 도현이와 어머니와 동생분이 같이 있는 걸 보고…. 도현이를 닮은 제 아이가 있다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에반은 그녀의 추궁에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줄줄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망했다.

송선호만큼 자신이 있었더라면 이러지 않았을까. 그는 근본이 있는 남자였기에 마음껏 부딪치고 깨질 수 있는 것이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어느 것에도 깨지지 않는 다이아몬드 같은 남자다. 미르 킹쉴드는 너무나 유연해서 어디 부딪쳐도 잘 아파하지도 않는다. 그에 비하자면 에반 블랙은 철옹성을 쌓아 자신을 지켜야 하는 유리 같은 남자였다. 그 안으로 누군가를 들여다 놓는다는 것은 결국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말이었다.

알렉시스는 또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후후. 우습네. 아이는 완전히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을 것 같나 봐.”

“…….”

그녀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에반의 왼손에 있는 반지를 보았다.

“어머, 도현이가 준 거야?”

그녀는 이미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의 근본을 다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말투는 하대로 바뀌었고 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의 왼손을 끌어당겨 반지를 살펴보았다.

“네….”

“예쁘네.”

알렉시스는 한참 반지를 이렇게 저렇게 돌려보며 반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문 제작한 건가? 링 모양도 많이 신경 썼네. 이런 거 남자들한테 잘 안 어울릴 법도 한데. 손이 예뻐서 잘 어울려.”

“감사…합니다.”

에반은 그렇게 대답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퓨즈가 나갈 것만 같았다. 긴장이 과부하되었다. 알렉시스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자식이란 거… 이런 것만 봐도 ‘역시 내 딸’이라는 생각이 드는 존재야. 말만 조금 빨라도, 걷는 게 조금만 빨라도 대단하게 느껴져. 그게 마치 내 대단함인 것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못하면 나의 부끄러움처럼 느껴지기도 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얼마든지 선을 그을 수 있어도 내 자식을 칭찬하는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더 좋아지고 나쁘게 보는 것 같으면 그것만으로도 증오스러워지지.”

“…….”

“내 덕이 아닌 기쁨이 찾아오고 내 탓이 아닌 슬픔이 찾아와 나를 흔들어. 내 것이 아닌데도 내 것이란 생각이 들고 내 것인데도 내 것이 아니야.”

알렉시스가 말했다.

“내 인생에 대한 통제력을 다소 잃게 되지. 그런 게 싫어서 이런 남자가 된 거 아닌가? 그런데도 자식이 가지고 싶다고?”

에반은 분명히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말이다.

“누가 자신의 운명을 휘두르는 게 싫어서, 주어진 상황대로만 사는 게 싫어서 모든 걸 가진 남자가 되었으면서 너는 내 딸에게, 그리고 자식에게 다시금 휘둘리며 살고 싶은 건가? 주인님이 없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나 보지?”

“그런 게 아닙니다…!”

“결핍이 있는 아름다운 남자는 보는 순간 빠져들 것만 같이 매력적이지. 도현이가 널 좋아하는 이유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아버지감은 아니지.”

“…….”

“안 그래?”

알렉시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알렉시스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반은 자신이 어떻게 그녀를 배웅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자신이… 그런 시궁창에서 태어난 티가, 그 근본이 여전히, 이렇게나 드러나는 것일까? 저런 사람은 보는 순간 저렇게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많은 것을 배워 교양 있는 말투를 써도,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그 모든 것으로부터?

흔한 통속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 자식을 너같이 근본 없는 것에게 줄 수 없다며 소리를 지르고 물이라도 뿌렸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알렉시스 라인하트는 그런 통속극에서 나오는 어머니들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품위 있었으며 강하고 냉혹했다. 그녀는 그의 급소를 정확하게 알아보고 주저 없이 찔러버렸다. 그 타격이 얼마나 강했는지 에반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몇 시간이나 앉아 있어야 했다. 이런 무력감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그는 시간이 되자 그를 데리러 온 비행차가 도착했다는 알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원래는 여기서 출발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메트로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스위스에서의 일을 다 했기 때문이다. 한 달 반 만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 또 헤어지는 건가?]

가슴까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마음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황폐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걸 가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하지 못했다.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사랑이 운명처럼 다가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거기에 저항하려고만 했다. 언제나처럼 누군가가 힘으로 그를 지배하려 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이제 정말로 나 자신을 모두 기꺼이 바쳐도 좋을 것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자신이 다시금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착취당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에반은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어 괴로웠다. 학대에 익숙한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금 고통을 찾는다. 고통이 없는 인생이 너무나 공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구질구질하고 역겨운 사고방식이고 에반이 가장 경멸하는 종류의 인간들이 그런 인간들인데도, 에반 자신이야말로 누군가에게는, 아니, 알렉시스 라인하트에게는 그런 인간으로 보이는 것일까.

충격과 황망함이 가시자 고통과 괴로움이 찾아왔다. 이 고통은 바로 자괴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든다.

비행차는 도현 킬스버그의 집 정원에 착륙했다. 그리고 자율 주행으로 비행차 타워로 갔다. 에반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로 정원을 가로질러 길로 나와 저택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녀와 나의 집.’

함께 이것을 지을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렇게 즐거운 날이 그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그는 정문의 앞에서 몇 번 더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는 웃는 얼굴만 보여주고 싶다.

집에 들어가니 거실엔 미르 킹쉴드가 카우치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누가 들어오자 그가 에반을 돌아보았다.

“응? 왔냐?”

에반은 한 달 반이나 집을 비웠다. 미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반은 자신의 넥타이를 왼손으로 약간 헐겁게 하며 물었다.

“도현이는요?”

“…너 말이야….”

미르 킹쉴드가 인상을 팍 쓰며 그를 쳐다보았다.

“?”

에반은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미르는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 보란 듯이 말이야!!”

“네?”

에반은 이 멍청이가 갑자기 왜 이러나, 하고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내가 그런 건 나도 받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 너보다 먼저 받았거든?! 자꾸 아닌 척 자랑할래?! 얼굴 보자마자 재수 없게!!”

“네? 아. 아아.”

에반은 자신의 왼손을 보았다. 누가 그냥 못 본 척 지나치기도 어려울 만큼 예쁘고 화려한 반지였다. 에반은 자신의 반지를 보았다. 그녀가 준 반지. 마음의 불안이 약간 가셨다.

“이게 그렇게 눈에 띄나요? 큰일이네요. 다른 사람들도 재수 없다고 생각할까요? 이런 거 주는 ‘와이프’ 있다고 너무 부러워하면 안 되는데. 사업하는 사람이 남에게 너무 쉽게 반감을 사면 안 되거든요.”

에반이 자신도 매우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미르 킹쉴드는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뭔진 모르겠는데!!! 너 진짜 존나게 재수 없어!!!”

“하하. 저도 도현이가 이런 걸 줄 줄은 몰랐다니까요.”

“악!!!!”

바보는 참 인생 살기 쉬운 것이다. 다루기도 쉽다. 에반은 약이 바짝 오른 미르를 뒤로 하고 도현을 찾아 나섰다. 2층으로 올라갔다. 로웰과 어시들, 그리고 송선호가 있었다.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크린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 블랙 씨였네요. 스톤하츠 씨 온 줄. 일은 잘 해결됐어요?”

로웰이 그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에 아주 잘 끝났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그래도 같이 살던 사람 하나 없어졌다고 집이 휑한 게.”

“그랬습니까? 말씀만으로도 기쁩니다. 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방해를 한 거면 어떡하죠?”

“아닙니다. 블랙 씨가 스위스에 가 있는 동안 나랑 작가님이 새로 할 작품 구상이 제법 됐거든요.”

“좀 봐도 괜찮을까요?”

“네.”

에반은 풀어헤친 자신의 넥타이를 곱게 접어 들고 로웰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자신의 스크린을 보여주었다.

“정말 선생님의 그림 실력은 놀랍네요. 이렇게만 봐도 정말 예쁘고 매력적이에요. 특히 이런 표정들.”

“오, 문외한인데 이런 걸 또 알아보네요? 이런 거 많이 신경 쓰죠.”

“이번 작품도 아주 잘 될 것 같습니다. 나오자마자 읽겠습니다. 댓글도 꼬박꼬박 달구요.”

“그렇죠! 그런 자세입니다.”

로웰은 아주 호쾌하게 웃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로웰과 어시들과도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신재인이 자신의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분명히 억대가 넘을 다이아몬드에 시선이 흔들거리다가 결국 말했다.

“와, 근데 반지 진짜 예뻐요. 잠깐만 봐도 괜찮나요?”

“그럼요. 여기요.”

에반은 웃는 얼굴로 자신의 왼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손도 정말 하얗고 곱고 예쁘다. 손톱마저 하나하나 예쁘게 생겼다. 이런 남자가 무슨 고생을 하고 자란 것 같이 보이는가. 로웰과 윤지호도 관심을 가지고 그의 반지를 만져보았다.

“작가님 덕분에 여자들 하는 주얼리에 대한 눈은 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들 건 역시 좀 다르긴 하네요.”

“블랙 씨가 안 꼈으면 이런 느낌 아니었을 걸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지.”

“아, 저도 왜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하는 줄 알겠어요. 유색 보석일수록 더 다이아몬드가 예쁘더라구요. 에메랄드는 생각보다 안에 흠이 많더라구요?”

신재인은 자료 조사 겸 찾아본 보석들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우리 작가님도 그래서 보석은 한사코 다이아라잖아요.”

로웰은 에반의 손을 들고 요래조래 반지를 살펴보며 그렇게 말했다. 에반은 웃는 얼굴로 다이아몬드 결혼반지에 어울리는 훌륭한 모델이 되어 그들에게 반지를 선보이고 있었다.

“마음에 드나 봐요? 맨날 끼고 다니네.”

로웰이 그렇게 물었다. 에반이 웃으며 대꾸했다.

“빼면 그게 결혼 반진가요. 저 유부남이라고 하고 다닌다니까요. 빼고 가면 큰일 나요, 이제.”

“하하하. 뭔가 기특하네요. 반지 줄 만한 남자야.”

“과찬이십니다.”

화기애애했다. 미르 킹쉴드야 원래부터 반짝반짝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였으니 언제나 그의 주변은 웃음꽃이 피었지만 에반 블랙도 그러고자 한다면 언제든 그럴 수 있었다.

물론, 그 화기애애함에 동참할 수 없던 남자는 그걸 외면하기 위해 필사적이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남자 반지가 그렇게 화려해서 어디다 씁니까? 나이 먹을 것도 생각해야지. 괜히 전통적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남자 반지면 밴드 정도로 심플한 게 좋은 겁니다.”

송선호는 멀티스크린을 보고 있는 채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여자 반지야 얼마든지 화려해도 좋지만 그럴수록 남자 쪽이 좀 더 진중한 느낌이 들어야 안정적인 거죠. 안 그래도 저런 반지 같은 거 없어도 쓸데없이 화려한 스타일인데. 그러니까 그럴수록 정도를 지켜서….”

그가 일장 연설을 시작하자 로웰이 잠깐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그에게 대꾸했다.

“아니, 반지 하나 사달라고 작가님한테 말을 하라니까?”

그러자 송선호는 깜짝 놀라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제 말은…! 그러니까 부, 부럽다는 게 아니라! 그냥 보통 통념이 그러니까…! 남자 반지가…!”

“아휴, 알았어요. 알았어.”

로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송선호는 몹시나 억울해져 그녀에게 더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시들도 로웰을 따라 일로 돌아갔다. 송선호는 너무나 당혹스러웠고, 또 창피하기도 했다.

‘저런 거 하나도 안 부럽다고! 저런 거…! 저런 거 몇백 개라도 살 수 있어!’

그렇게 송선호는 속으로 부글거림을 참고 있었다. 그때 에반이 다가왔다.

“요새 너무 일 열심히 하는 거 아냐? 나야 회사가 스위스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어도. 남자가 너무 일일거리면 금방 버림받는다? 도현이는 그런 거 싫어한다고.”

에반이 몹시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당연히 더 빡쳤다.

“내 일에 신경 꺼.”

“넌 요령만 있으면 딱 좋은데.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야.”

“안 꺼져?”

그는 강한 척 고깝게 말했지만 표정은 울먹거리기 직전이었다. 에반은 그 정도에서 그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고 웃는 얼굴로 물러났다.

‘아, 스트레스 풀린다.’

송선호를 괴롭히는 것은 언제나 좋은 기분전환이 되었다. 아마 도현도 그럴 것이다.

“그럼 다들 수고하십시오. 전 가보겠습니다.”

에반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짐은 사람을 불러 정리할 것이다. 그는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향기로운 입욕제를 넣고 느긋하게 목욕을 시작했다. 이럴 땐 사람들의 시중을 잔뜩 받으며 황제처럼 씻어도 좋겠지만 오늘은 혼자 있는 편이 좋았다. 거품에 잠겨 가만히 욕조의 마사지 기능을 느끼며 머리를 뉘고 있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들어보았다.

부드러운 황금색이 살짝 나는 백금 반지에 푸른색 다이아몬드. 욕실의 조명을 받아 정말 찬란하게 빛났다. 에반은 한참을 그걸 이리저리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싶은데…. 빨리 안 오나.’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자신이 지금까지 이런 감정을 솔직하게 떠올리거나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찌 나쁘다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그를 학대했었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를 해칠 구실이 되었다. 그러니 모두를 거부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그러니 이런 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느끼는 것이 이 나이가 되어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게 보인단 말이지.’

도현에게도. 알렉시스 라인하트에게도. 에반은 복잡한 눈빛으로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물속에 온몸이 잠기게 했다. 모든 게 멈춘 느낌은 안정감을 준다. 에반은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 씻고 나와 거울을 마주했다. 그는 거울 가까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얼굴을 볼 때는 잘 없었다. 항상 남의 얼굴을 보듯 타인의 입장에서 보기 좋게 꾸며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얼굴인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 숱이 많고 짙은 눈썹과 속눈썹. 비취색 눈동자. 붉고 글래머러스한 입술. 이런 게 눈에 띄긴 하지만 그냥 보면 역시 평범한 인간 아닌가? 다들 눈 달리고 코 달리고 입 달리고….

그리고 그는 얼굴에 바를 스킨케어 제품을 찾았지만, 전부 다 쓰고 없었다. 캐리어에도 없었다. 스위스에도 따로 구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떨어지지 않게 비치해 두도록 고용한 사람에게 얘기를 다 해놨는데 한 달 반 동안 그가 집을 비운다고 대충하고 있는 모양이다. 잘라야겠다. 그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고개를 뺐다.

“송선호, 나 로션 좀 빌려줘.”

이게 또 하다 안 하려고 하니 묘하게 불안한 게. 전에는 뭐가 있든 없든 신경도 안 쓰고 살았지만 다니엘 스톤하츠 때문에 이것저것 해보다 보니 확실히 효과가 있어 꾸준히 하게 되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에반같이 금발에 환한 눈동자를 가진 것도 아닌데도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데도 미모 관리 또한 그가 최고다. 옆에서 그런 남자가 그러고 있는데 불안감이 안 들면 남자가 아닐 것이다. 과하게는 못해도 기본은 해야지….

“에반?”

에반은 머리를 마저 닦다가 시선을 돌렸다. 도현이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도 함께였다. 오늘 토요일이었지. 데이트를 갔다 온 모양이다.

“도현아.”

에반은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그녀에 대한 애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스스로 놀랄 정도로. 그녀는 에반에게 다가오더니 똑같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이제 일 다 끝난 거야?”

“응.”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뭐야, 이거. 서비스?”

그녀가 헐벗은 그의 어깨를 검지로 매만졌다. 물에 젖은 미남은 언제나 아름답다. 에반도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그런 걸 노린 건 아니었는데. 그녀와는 항상 이랬다.

“마음에 들어?”

“음… 역시 예뻐.”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에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도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오늘 늘씬한 몸매를 잘 드러내는 남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목걸이는 샤샤 다이아몬드를 하고 손에는 그가 준 반지를 끼고 있었다. 좋았다.

‘이런 게 좋다는 것도… 부정하면서 살았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에반은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지금도 이렇게나 소중한데, 어쩌면 그는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지금 느끼는 것보다도 그에게 더 중요하고 큰 존재인지도 모른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그는 생각보다도 그녀와의 입맞춤에 빠져들어 그녀의 뺨을 한 손으로 감싸고 계속 입을 쪽쪽 맞췄다.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누르고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허리를 감싸고 있는 수건이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웃었다. 그녀가 그의 엉덩이를 만졌다. 에반은 너무 열중해서 그녀의 웃음에 맞춰 미소를 짓지도 못했다.

“으음….음. 에반…. 에반. 하아, 잠깐만.”

“응…?”

“인사치고는 너무 길어. 다른 사람도 있는데.”

그는 도현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한 템포 늦게 나른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무생물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반은 잠깐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그게 뭐?’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천천히 한 번 더 그녀에게 애틋한 입맞춤을 건넸다.

“사랑해.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좋아서.”

에반은 속눈썹을 내리뜨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도현의 눈빛도 깊어졌다. 그녀는 그의 뺨을 말없이 살짝 쓰다듬었다. 그녀도 잠깐 홀려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탄식 같은 한숨을 약간 쉬고, 고개를 돌렸다.

“다 같이 저녁 준비하고 먹죠, 다니엘.”

“네, 알겠습니다.”

다니엘이 대답했다. 고용한 셰프팀이 이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도현은 에반을 돌아보며 말했다.

“옷 입고 내려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그의 눈동자를 보며 가만히 있다가 뺨에 입을 맞추고 먼저 내려갔다. 에반은 그녀의 뒷모습을 사랑과 애정,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을 여전히 빤히 보고 있는 다니엘을 알아차렸다. 에반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

“아, 로션 좀 빌려주실래요, 다니엘? 제가 쓰던 게 다 떨어져서요.”

에반은 그의 이름을 마치 도현처럼 친근하게 부르며 그렇게 부탁했다. 다니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표정을 드러내는 게 몹시나 드문 남자였는데 말이다. 그가 대답했다.

“싫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에반은 웃는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잠깐 보았다. 역시 쪼잔하단 말이지. 그리고 에반은 다시금 송선호를 불렀다.

“송선호~ 나 그냥 니 방에서 들고 간다?”

*

도현 킬스버그는 심미안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역시 알렉시스 라인하트 같은 어머니를 가져서 그런 것이었다. 아이는 주변에 있는 어른들을 본능적으로 따라 한다. 그녀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우아하다. 그녀가 남들처럼 불안과 조급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근본은 그런 것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다는 것이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상태, 그런 게 그 사람의 본성이고 근본이다. 누가 시키는 걸 하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게 아닌 자연스러운 존재의 상태다.

토요일의 서퍼(Supper)는 서퍼라는 말이 걸맞도록 성대해졌다. 처음에는 간단한 저녁 식사였지만 시간이 가며 ‘가족 모임’의 형태가 되니 자연스럽게 격식으로 존중해야 하는 행사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모두가 존중하게 만드는 법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스스로와 자신이 의미를 두는 것을 매우 존중했기 때문이다.

“일주일간 잘 보냈나요?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오늘 같은 자리가 소중해요. 에반도 스위스로 갔던 일이 잘 풀려서 다시 이렇게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도현이 식사를 앞두고 주최자로서 짧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우아한 남청색 쉬스 드레스에 머리를 틀어 올리고 어깨와 팔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사슴 같은 목에는 샤샤 다이아몬드가 걸려 있었고 손과 손목에는 다채로운 보석들이 빛났다. 저렇게 많은 다이아몬드가 있는데도 전혀 과해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어울렸다.

“여행 다닐 때 먹었던 음식들이 그리워서 라만 셰프를 특별히 모셨어요. 오늘의 이 작품들은 라만 셰프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라만 셰프가 부엌 쪽에서 까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박수를 쳤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아.”

에반은 전채를 한 숟갈 입에 넣자마자 감탄사를 냈다. 일이 바쁘면 저도 모르게 식사가 부실해진다. 그에게는 추억의 음식이라고 여길 만한 것이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녀와 여행을 다니던 2년 동안 매일같이 먹었던 라만 셰프의 음식만큼은 그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세계적인 셰프가 된 지금의 라만을 생각해보자면 굉장히 호사스러운 개념이다.

“타이밍이 잘 맞는단 말이야, 항상.”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에반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난 이런 운은 좋지.”

다들 근황을 나누면서 식사를 즐겼다. 기본적으로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도현과 로웰, 그리고 송선호가 이야기를 주도했다. 미르 킹쉴드는 고래처럼 잔뜩 먹고 있었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군더더기 없는 태도로 천천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어쩐지 피부에 좋은 음식만 골라 먹고 있는 것 같다. 진짜로 그러고 있다고 해도 놀랄 것 같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언정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 있어 저 남자가 가지는 철저함은 보통 사람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독한 남자다.

‘독사 같은 남자.’

다니엘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나 잘 어울려서 어쩐지 웃겼다. 에반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음식을 즐겼다. 스위스에서는 그렇게 참담할 수가 없었는데. 집에 돌아오고, 도현을 보니 그 기분이 어느샌가 많이 물러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칵테일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당구를 치기도 했다.

“물건은 비행기, 기차, 트럭, 드론으로 다 출발했다.”

“비행기로 들어온 건 받았어. 기차는 일주일은 걸리겠네?”

“그렇지.”

“찍어내는 건?”

“팔리는 거 보고.”

송선호의 말에 에반이 인상을 썼다. 송선호는 큐대 끝에 초크를 바르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지금이 물량 공세를 할 때라니까. 초기에 다른 업체들을 눌러야 독점할 수 있다고.”

“알겠는데. 찍어내는 건 문제가 아니니까 지금 시장이 얼마나 되는지 재고 소진되는 걸 보면서 우리도 가늠해야지.”

당구를 치는 자세는 여자든 남자든 굉장히 섹시한 느낌을 낸다. 송선호는 집중해서 공의 각도를 가늠하고 있었다. 도현의 일로 허둥지둥 대지 않는 그는 굉장히 귀족적인 태가 나는 남자였다. 그는 느긋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비행기로 들어온 건 벌써 다 팔렸다고.”

“그래? 빠르긴 하네. 얼마 만에?”

“36시간 만에.”

“음.”

차례가 돌아와 에반도 큐대를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바로 쳤다.

“돈 주고 우리가 물량을 떠안는데 왜 생산을 안 해?”

“이건 30년이 넘는 장사잖아. 니 은행은 레버리지가 너무 높아. 이번에도 유동성 문제 해결하러 간 거고. 니가 물량 떠안는다고 호언한다고 없는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냐?”

“다른 데 컨택했어? 지금?”

“그런 건 아니고.”

송선호는 자신의 큐대를 잡은 채 당구대를 돌아갔다. 그리고 한 번 자세를 잡았다가 고개를 갸웃하고 일어나서 한 번 더 각도를 가늠하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에반과 눈이 마주쳤다.

“마음이 급하네. 사업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송선호가 그렇게 말했다. 에반은 갑자기 머릿속이 확 환기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항상 여유가 강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도현과의 일, 아이, 알렉시스 라인하트와의 일 등으로 난생처음 기대와 실망, 불안과 설렘, 초조함을 잔뜩 겪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마음이 급했다.

[…야, 형제면 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지금까진 그렇게까지 말 안 했으면서…. 사람 속상하게시리…. 너 진짜 내가 그렇게 부끄럽냐? 어?]

페르난데스 카를로스. 그를 사랑했다. 그는 지금까지 에반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형제였다. 도현 외에 에반이 이 세상에서 가깝고,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밖에 없었다. 그도 대단한 남자였다. 그때, 거기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은 자들은 전부 대단한 사람밖에 없었다. 에반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네가 내 형제였다면….’

험한 세상으로부터 처자식을 지키고 아들이 다 자랄 때까지 기꺼이 기다리고 이끌어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수 있는 아버지, 상냥하고 정이 많으며 세상에서 아들을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닮아 뛰어나고 당당하며 평생을 겨룰 수 있는 형….

에반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싫어하고 거부했던 것들은 전부… 내가 원래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군.’

[결핍이 있는 아름다운 남자는 보는 순간 빠져들 것만 같이 매력적이지. 도현이가 널 좋아하는 이유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사람들이 그를 여전히 그저 예쁘게 생긴 금발 미남, 정확하게는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가난하고 초라한 남자로 취급하는 것이 싫었다. 앞만 보며 살아왔다. 언젠가는 거기서 헤어나올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런데 지금의 그를 보라.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욕망과 처음으로 대면하여, 처음으로 거울을 똑바로 직시하여 보니 지금까지 외면했던, 그러면서 예전보다는 나아졌을 것이라 막연히 기대했던 그 거울에 비치고 있는 남자는 여전히 결핍이 있는 아름다운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아닌가.

에반은 어찌할 수 없는 허무함에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집에 와서, 도현을 봐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알렉시스 라인하트는 자신이 도현의 엄마라고 하여 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으면서도 에반에게는 넌 내 딸이 가질 아이의 아버지감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지금 그걸 떠올리자 다시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송선호에게도 그렇게 말할까?’

에반 블랙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질투

시기

열등감

자격지심

그는 그런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멸시했다. 그런 인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싫었다. 저런 감정을 많이 가진 인간들일수록 에반을 더욱 학대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운도, 재능도, 외모도, 능력도, 지능도, 심지어 노력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증오하고 학대했다. 그들은 자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자신을 하찮게 보지 말라고 붉게 상기된 추한 얼굴로 침을 튀기며 외친다. 세상을 잘못되게 만드는 건 자신들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외면한 채, 똑같이 추하고 하찮은 이들끼리 모여 서로를 자위하고, 하지만 동시에 서로가 가진 하찮음을 혐오하며 빛나는 것을 시기할 때만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쏟는 벌레만도 못한 오물들이다. 에반은 그 시궁창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절대 그런 인간만큼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마치 그 사람들 같지 않은가.

‘이런 생각은 무의미해. 절대 그렇지 않아.’

에반은 스스로를 강경하게 다그쳤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하지만 가라앉은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컨디션이 별로야. 니가 이긴 거로 해.”

“뭐야. 끝까지 해.”

에반은 술을 찾았다. 도현 취향의 고급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가 이것마저도 술을 입에 달고 살던 친부의 기질을 물려받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완전히 기분을 잡쳐버렸다.

“아.”

그는 조명에 아름답게 일렁이는 수영장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보고 싶었다. 사방이 탁 트인 망망대해를 바라보면 이 답답한 가슴도 뻥 하고 뚫릴 것만 같았다.

‘당장 갈까?’

가지 못할 이유가 뭔가. 그에게는 돈도 권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피하는 게 답인 문제도 있지만 역시 피해서는 안 되는 문제도 있다. 그것이 자신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면 특히. 그는 손에 든 와인잔을 굴리기만 하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송선호가 눈에 들어왔다.

‘왕자.’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났다. 부유함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다.

다음으로 미르 킹쉴드가 눈에 들어왔다.

‘바보.’

하지만 그는 분명히 강한 남자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언제라도 자기 자신을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그다음으로 다니엘 스톤하츠가 눈에 들어왔다.

‘사이코패스.’

그는 자신이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몸소 보여주며 위압적으로 경쟁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세상 전부를 적으로 돌려도 이겨낼 남자다. 강하고 똑똑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다. 무서운 남자다.

그리고 도현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심장이 지끈했다.

‘나의….’

로웰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던 그녀가 이끌린 듯 에반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에반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남자로만 보이는 것이 싫었는데 지금은 그녀에게 자신의 미소가 아름답게 보이기를 바랐다. 정원의 풀 내음과 조명,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우아한 여가 시간. 도현은 서로의 거리를 좁혀 에반에게 다가왔다.

“이겼어?”

도현은 자연스럽게 에반의 무릎에 앉았다. 에반은 그녀의 손이 얼굴에 닿는 걸 기분 좋게 느끼며 대꾸했다.

“졌어.”

그는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어.”

“계속 말하네?”

“응…. 진짜 보고 싶었어.”

도현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는 아름답고 매력 있는 남자였다. 이러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도현은 예쁘게 자라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에 비비 꼬았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다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이 씻고 잘 준비를 하는 동안 남자들은 제각각 모양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에반은 여유롭게 그대로 카우치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블랙 씨.”

“스톤하츠.”

“음… 송 사장?”

로웰과 어시들은 여느 때처럼 내기를 했고 잠시 뒤 나온 도현은 에반의 이름을 불렀다. 로웰은 의기양양하게 자기 밑에서 일하는 인간들의 돈을 뜯었다.

“니들은 아직도 이걸 모르냐.”

“아, 한 달 반 만에 돌아왔죠, 참.”

윤지호는 로웰에게 돈을 뜯기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했다. 연장자의 연륜이란 이런 것일까.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여러분.”

에반은 웃는 얼굴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르 킹쉴드는 쩝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암, 잘 자라.”

어차피 평균 주 3일 이상은 미르 킹쉴드가 도현과 함께 잤다. 그는 별 타격 없는 얼굴로 로웰과 어시들을 포옹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집에 돌아올 때는 무조건, 100% 도현과 함께 잠자리를 했기 때문에 토요일에 다른 남자에게 밀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가만히 에반을 쳐다보았다. 에반은 씨익 웃었다. 송선호는 자존심이 팍 상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오, 이긴 거로 치라고? 이 양아치 새끼….”

“오늘은 어쩔 수 없잖아. 한 달 반 만에 얼굴 보는 건데.”

에반은 그렇게 송선호에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에반을 노려보았다. 에반은 미소로 그 눈빛을 받고는 도현의 방으로 갔다.

도현은 실크 나이트가운을 입고 머리를 빗고 있었다. 에반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로 가서 그녀의 빗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겨주었다. 거울을 통해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에반은 다시금 그녀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는 것에 집중했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반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도현은 그의 양쪽 눈동자를 번갈아 보다가 날름 그의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웃었다. 에반도 웃었다.

둘은 입을 맞추며 침대로 갔다. 도현은 그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녀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도현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이런 남자를 벗기는 건 그것만으로도 재미다.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단추를 하나하나 풀 때마다 딱 적당하게 그을린 그의 피부가 아름답다. 부드럽고 탄력 있었다. 그리고 누가 정교하게 하나하나 비율을 맞춘 것처럼 조각 같은 그의 몸매가 드러났다. 쭉 뻗은 그의 목에 튀어나온 목젖은 글래머러스했고 쇄골이 깊고 어깨가 넓었다. 키가 크고 옷태가 잘 받아서 마른 게 아닌가 싶어도 잘 보면 역시나 군살 없이 근육이 잡힌 몸매가 탄탄하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기품 있고 우아하면서도 색기가 도는 남자.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는 언제나 눈빛 한 번으로 여자를 홀릴 수 있을 정도로 매력이 철철 넘치는 남자였다. 그는 사람을 홀리는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그의 단추를 끝까지 풀고 그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코가 마주치고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그녀와 그만이 세상의 전부가 된 것만 같다. 에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사람에게 신뢰를 준다. 둘의 입술이 살짝 스쳤다. 그들의 표정이 안타까워지며 다시금 입술을 섬세하게 문질렀다.

“사랑해….”

에반이 속삭였다. 그러자 도현도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에반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둘 다 오래도록 외면했던 사랑의 마음이었다. 에반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눈동자를 정념을 담아 바라보았다.

“정말?”

그가 물었다.

“응.”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에게도, 세상에게도 당당했으니까. 에반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남자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에반은 그걸 알 수 있었다. 도현도 아마 에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난 영원히 너를 사랑할 거야….”

“후후… 그 말이 아직도 조금 어색해.”

도현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에반은 자신의 셔츠를 마저 벗으며 허리를 일으켰다. 몸을 비스듬히 하고 자신의 위에 올라온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가 천진한 듯, 하지만 역시나 사람을 빨아들이는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유혹에 이끌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게 보였다.

“널 좋아해. 사랑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넌 항상 그랬어. 그런 존재였어. 하지만… 미래라는 거 모르는 거잖아. 나도, 너도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송선호가 말해도 그렇게 말할 거야?

“맞아…. 하지만 이건 달라. 난 정말 그럴 거야.”

에반은 눈을 감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도현은 그의 속눈썹을 엄지로 쓰다듬고 뺨을 만졌다.

“어떻게 알아?”

그녀가 물었다.

“그냥… 알아.”

그가 대답했다.

도현은 그의 옷을 마저 벗겼고 에반도 그녀의 옷을 벗겼다. 사실 둘은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나날들. 지금도 그렇다.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품에 서로를 가득 안고 입맞춤을 나누었다.

“으응… 하아…. 기분 좋아.”

그저 껴안고 서로 입을 맞추는 것뿐인데 하늘에 둥둥 뜨는 것만 같다. 도현이 붉어진 얼굴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에반은 그녀의 턱과 목에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 그녀의 손이 황홀했다. 자신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몸이, 피부가 자신의 몸과 피부에 닿아 너무나 부드럽고 기분이 좋았다. 서로에게 찰싹 붙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원래 그렇게 태어났던 것처럼.

그리고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성기를 맞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따뜻했던 서로의 몸이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그녀의 여성기가 질척질척했다. 어느새 젖어서 그의 것을 흠뻑 적셨다. 그는 섹시한 얼굴로 그녀를 품에 더 꽉 안았다.

“도현아….”

둘은 언제까지 해도 좋다는 듯 천천히 서로를 문질렀다. 그녀의 손이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며 그녀의 등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의 귀에 속살거렸다.

“아아.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앗. 왜… 아아…. 에반….”

“도현아… 도현아. 도현…. 하아. 도현아….”

“안 끝났으면 좋겠어….”

도현이 신음처럼 속삭였다. 에반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녀가 자신과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게 너무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그랬는데도, 언제나 그랬다.

“나도…. 도현아, 내가 정말 특별해?”

“응…. 하아. 알잖아. 넌 특별해…. 내 일부같이….”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에반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깐 입을 다물었다.

‘특별함만으론 부족해.’

가장 특별한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도현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말했다. 여유를 부렸다. 그러면 항상 스스로가 강하게 느껴졌으니까.

‘나도 전부를 원해. 다른 남자들 따위 없어도 돼. 우리는 우리 둘만으로도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어. 너도 알잖아.’

논리나, 합리로는 수없이 자신의 마음에 반박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도현과 자신은 둘이서 세상이 될 수 있었다. 서로만 있어도 충만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아무도 필요 없었다. 이 집에 지금처럼 사람이 많지 않아도, 그 누구도 더 있을 필요 없이 단둘만 있을 때 가장 충만했다. 그걸 에반은 알고 있었다. 도현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완벽한 건 언제나 위태롭다. 둘은 둘로 너무나 완벽했는데도, 그랬기 때문에 위태로웠다. 그래서 다시 만날 때 에반 스스로도 그녀와 자신의 사이에는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좋다고 인정하고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에게 자신은 영원히 특별하다.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후후. 우습네. 아이는 완전히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을 것 같나 봐.]

비겁하다…. 스스로가 그렇게 느껴졌다. 여전히 자신의 감정에도 솔직해지지 못하는 겁쟁이.

“아…!”

둘은 동시에 환희에 찬 신음을 흘리며 절정에 올라섰다. 서로의 살이 찰싹 맞붙고 그 접촉감이 너무나 황홀하여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둘은 침대로 함께 쓰러졌다. 서로를 향한 채 옆으로 누워 눈을 감고 헐떡거리다가 눈을 떠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도현은 그의 아름다운 금색 머리카락과 눈썹, 속눈썹, 눈동자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을 만졌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서로를 다시금 끌어안고 몸을 붙였다. 영원히 이렇게 있어도 좋을 것처럼.

도현은 그를 눕히고 그의 위로 다시 올라탔다. 그녀의 무게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서로의 숨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아무것도 안 물어봐? 그렇게 스위스 가놓고?”

도현이 물었다. 에반은 궁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부담 주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고민 많이 했어.”

“…진짜?”

“응…. 몰라. 너는 진짜…. 네가 아니었으면 이 정도까지 고민 안 했어.”

“응….”

그녀의 말이 기쁘다. 에반은 자신의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정말 그것만으로도 기뻐….’

그것은 정말이다. 그래서 에반은 또,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바람과는 반대의 말을 늘어놓았다.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되는 거니까. 생각해준 것만으로도 기뻐.”

사실을 섞으면 본심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는 게 쉬워진다. 에반은 부드럽게 미소를 띤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진짜?”

“응. 기뻐…. 널 아니까. 아이라는 거 부담스럽잖아.”

“그렇긴 해. 솔직히 지금 당장은 아니야. 10년 뒤에나 한 번 더 생각해보려고.”

“…….”

10년 뒤에도 난 네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아이를 가지기로 결정해도 그 아이가 내 아이일 수 있을까? 에반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물… 날 것 같아.’

후회를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만 같아서 무슨 일이든 절대 후회하지 않으려고 했다. 남 탓도 마찬가지다. 남 탓을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까, 모든 것은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무것도 후회할 것은 없다. 내가 선택한 것의 결과는 전부 받아들인다.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그때 너와 헤어진 것, 그것만큼은… 정말로….

“어머니…가 만나러 오셨어. 제네바까지.”

“응? 진짜?”

도현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제네바에 올 일이 있으셨다고 먼저 연락하셨어. 커피 한 잔 같이 마셨어.”

“…안 믿겨….”

도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반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처럼 자식들에게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서 널 사랑하지 않거나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신 게 분명해. 널… 분명히 사랑하고 아끼고 계셔.”

“…….”

도현은 에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내가 결핍을 느꼈던 건 엄마라고 생각했어? 어머니를 어릴 때 잃은 거?”

도현이 물었다. 에반은 으음, 하고 잠깐 말을 골랐다.

“같이 산다고 해서 엄마에 대해 결핍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닐 거야…. 실제로 자식에게 적절한 사랑을 주는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보다 훨씬 적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네 어머니가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분명히 너에게 충분한 사랑과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너는 이르든 늦든 독립했겠지만… 역시 조금 일렀던 게 아닐까. 헤어졌던 시점이나 상황이. 그게 네게 영향이 없진 않았을 거야.”

“그건 그렇지…. 엄마가 날 사랑하고 아낀다고 하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어…. 생각보다 훨씬 더.”

도현은 에반의 어깨에 다시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보고 싶다, 엄마….”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물었다.

“설마 엄마가 나랑 헤어지라고 했어?”

그랬으면 진짜 충격적일 것 같은데. 도현이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에반은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왜? 딸 가진 엄마들 입장에선 내가 조건이 안 좋은가?”

“으음, 여자 문제 많을 것 같지, 인생이 막 파란만장할 거 같지. 엄마들은 자식에 대해선 보수적일 수밖에 없잖아? 그래도 엄마가 내가 만나는 남자에게 내 딸이랑 헤어지라고 말할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지?”

“아니야.”

“그럼?”

“으음.”

“세상에. 엄마가 뭐라고 하긴 했구나? 아, 뭔가 기분이 이상해. 엄마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엄마가….”

도현은 놀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에반이 말했다.

“반지 예쁘다고 하셨어. 이런 것만 봐도 ‘역시 내 딸’이라는 생각이 드는 존재래, 자식이란 게.”

“아, 내가 엄마한테 말해서 그런가? 아이 문제. 나한테 아이가 생기면 자기는 할머니가 되는 거냐고. 기분이 이상하시다고 했어.”

“하하. 생각보다 좋은 할머니가 되실 것 같은데.”

“그런가? 그럴지도. 그래서 엄마가 뭐래?”

도현이 물었다. 에반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말을 하려다가, 반지 얘기를 좀 더 하든가, 아니면 만났던 장소나 커피에 대한 얘기라도 하려다가 말문이 떨어지지 않아 인상을 살짝 썼다. 도현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의 입술을 검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정말 나쁜 소리라도 들었나 보네. 자꾸 말 돌리고. 이러는 거 처음 봐.”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의 탄생은 그녀의 부모에게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첫 마디, 첫걸음은 그들에게 환희를 주었을 것이다. 도현 킬스버그는 알렉시스 라인하트 같은 대단한 사람의 마음에 가장 첫 번째로 자리 잡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걱정하고 아끼고 보살피며 행복을 느끼던 부모가 있었다.

“아버지감은 아니라고….”

에반이 시선을 약간 피하며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툭 말했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놀랐다는 건 알았다.

“엄마가?”

“응….”

“무슨 드라마 같아.”

“조금.”

도현도 잠깐 아무 말 없이 에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도현의 말에 에반은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아, 진짜 눈물 나올 것 같다. 그는 약간 인상을 찌푸린 채로 시선을 배회하다가 그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도현은 그의 눈을 내려다보며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진짜야. 너 유부남이라는 것도 섹시한데 애 아빠라고 하면 더 섹시할걸?”

“…….”

그를 그저 매력적인 아름다운 남자로만 보는 것은 사실 도현이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는 알 것 같아. 내가 아이라는 존재에 이상한 기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어떤 애가 태어날지도 모르는 건데.”

에반이 그렇게 말했다.

“게다가 가정환경이 안 좋았던 부모는 아이에게 저도 모르게 그런 걸 물려줄 수도 있다잖아. 그런 건 진짜 싫다.”

에반은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너도 과거가 날 얼마만큼 차지하고 있는지 물었었지.”

도현은 하하, 하고 웃었다. 에반은 분명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녀의 웃음에 어쩐지 무언가 거절당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덜컹했다.

“불안해?”

도현이 물었다. 에반은 역시나 낭패한 기분에 입술을 움찔거리기만 하고 바로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언제나 여유로운 태도로 불리함을 요리조리 피하던 그가 아닌가. 그는 분명히 예전에 비하자면 무척이나 솔직해졌지만 그래도 자신을 숨기던 습관에 저항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아기 귀엽잖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 많아. 그런 걸 바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건….”

“그런데도 가지고 싶다고 처음으로 솔직하게 말해봤는데 우리 엄마가 그렇게 말해서 상처받았고?”

에반은 탄식을 내뱉었다. 도현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번 자신을 내비치면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낼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좋아했다. 그래서 그때는 전부 보여줄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를 볼 때 그런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아이 원한다고, 아니, 나 원래 애 안 좋아해.”

“근데?”

“그런데도 널 닮은 내 아이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에반은 애처로운 눈길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하면서 에반의 머릿속에 알렉시스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누가 자신의 운명을 휘두르는 게 싫어서, 주어진 상황대로만 사는 게 싫어서 모든 걸 가진 남자가 되었으면서 너는 내 딸에게, 그리고 자식에게 다시금 휘둘리며 살고 싶은 건가? 주인님이 없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나 보지?]

‘그래도 좋아요…. 도현이와 우리 아이라면.’

“너라서…. 그러면 안 돼?”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흥, 하고 그의 입술을 잡아먹듯 한 번 깨물었다.

“네가 그런 눈빛으로 보면 네 말대로 해주고 싶어진단 말이야.”

“정말?”

“아, 정말 꼬리 아홉 개 넘게 달려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

에반은 도현의 얼굴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도현은 그의 귀를 부드럽게 만졌다.

“넌 여전히 아무 말도 안 하잖아.”

“뭘?”

“너에 대해서. 네 과거에 대해서.”

“이제 다 알잖아.”

“신문 기사? 그걸로 끝이야? 그리고 여전히 거기에 대해서 너와 얘기를 나누는 건 불가능한 거야?”

“…….”

“만약에 우리 아이가 너에게 아빠는 어렸을 때 어땠냐고 물으면? 그러면 그때도 신문 기사를 내밀 거야?”

도현이 그렇게 묻자 에반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녀의 말이 폐부를 깊숙이 찔렀기 때문이다. 에반은 미간을 좁히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난… 앞만 보고 살아왔어. 과거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별로 좋은 기억도 아니고….”

“힘들었어?”

도현이 물었다.

“…응….”

에반이 답했다.

그의 미간이 좀 더 좁혀지고 그의 속눈썹이 약간 떨렸다. 이윽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응…. 힘들었어.”

도현은 에반의 이마를 살짝 만졌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에반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둘은 한참 그러고 있었다.

“나도 어렸을 때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 같아. 보고 싶은데도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우리 엄마는 보다시피 내가 없어도 엄청 잘 살 사람이잖아? 날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적어도 엄마 자신보다 내가 소중하진 않은 거구나. 그렇게 느꼈으니까.”

도현이 말했다.

“그런데 크고 보니까 그때 엄마가 할 수 있는 선택이 그것밖에 없었어. 그리고 엄마가 날 떠나기 전까지는 분명히 날 특별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보살펴 주셨고 아픈 도진이도 데리고 가셨지.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런데도 역시 약간 남아 있나 봐. 엄마를 그리워했던 어릴 때의 마음…. 외면했으니까 더더욱….”

그녀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도 로웰 말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누구에게 말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말이라고 느꼈다. 이 모든 건 그녀에게 과거였다. 정말로 과거였기 때문에 그녀의 현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게 설사 자신의 일부가 이미 되어버렸다고 해도,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 소중히 여길 것이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다 알 수는 없겠지, 너도 나를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고 다 말할 필요는 없어. 약해지는 느낌은 나도 싫어해. 약점을 보이는 것도. 그러니까 스스로라도 알아줘야 하잖아. 네가 힘들었던 거, 슬펐던 거… 너 자신이라도.”

도현은 에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난 네가 좋아. 내가 좋으니까. 네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나도야…. 나도 네가 없었으면…. 나는….”

“뭐야, 너. 우는 얼굴도 예쁘네.”

정말 천하절색이라니까. 이런 미남의 눈물이란 여자의 마음을 흔드는 법이다. 도현은 그의 눈물을 기꺼이 닦아주었다. 다른 남자였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둘은 더 가까워지는 것이 어색하여, 두려워 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기꺼이 더 가까워지기로 마음먹었다. 이 완벽함이 가지는 위태로움을 안고서라도 끝까지 가보기로 약속했다.

“도현아… 사랑해. 앞으로도 계속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후후…. 좋아. 하지만 그렇게 참지 마.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 하지 마. 네가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아. 차라리 말해. 그러면 우린 괜찮을 거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에 무엇이든 하지 않아도 좋다는 대답이 감동적일 수 있다는 걸 에반은 몰랐다. 에반은 그녀의 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허락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힘을 가져도, 아무리 강해져도 가질 수 없었던 안온함. 에반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응…. 너도 말해. 네가 말하는 건 들어주고 싶어. 다….”

“정말?”

“응. 네가 나 때문에 웃으면 항상 행복했어.”

도현은 미소를 띤 얼굴로 그와 코를 마주 댔다.

“앞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멀리 가지 마…. 나도 보고 싶었어.”

“응….”

에반은 그녀의 말이 기뻐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걸 솔직하게 인정했다.

다음 날 아침은 마치 첫날밤을 치른 것처럼 조금 쑥스러웠다. 에반도 그랬고 도현도 조금 그랬다. 둘은 같이 씻고 약간 장난을 치기도 하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다. 스위스에서 전화가 와서 에반은 욕실을 먼저 나와 전화를 받았다.

“알았어. 언제 시간 돼? 메트로서울로 와.”

[응? 왜?]

“소개해줄게. 도… 내 와이프.”

[응?! 벌써 와이프야?! 언제 결혼했는데?! 결혼식은?! 야!!]

“그런 건 의미 없어. 벌써 반지도 서로 끼우고 다니는데. 어쨌든 시간 생각해 놔.”

에반은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닦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나 이런 얼굴인가….’

잘생기고 행복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뭔가, 역시 쑥스러웠다. 에반은 수건으로 괜히 앞머리를 더 닦으며 다시 욕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노크 소리가 났다.

“도현 씨.”

다니엘 스톤하츠의 목소리였다. 에반은 침실의 문을 열었다.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아, 다니엘. 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일이세요?”

“도현 씨는 어디 계십니까?”

다니엘은 잠깐 똑바로 에반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반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도현이는 잠깐…. 급한 용건이면 전해드리구요.”

에반은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을 왼손으로 쓸어 넘기며 다니엘의 시선을 따라갔다. 다니엘의 시선이 그의 왼손 약지로 향했다. 보석 같은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정념을 담고 에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좀 더 행동에 주의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제 인내심은 오로지 도현 씨만 쓸 수 있는 겁니다. 다른 인간들에게 소요할 인내심은 전혀 없습니다.”

“네?”

에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그의 시선이 자신의 왼손을 한 번 보고 돌아오자 아아, 하고 자신의 반지를 보았다.

“아, 이게 그렇게 눈에 거슬리십니까? 킹쉴드 씨도, 송선호도 제 반지만 보면 과민반응하던데. 다니엘은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으시네요.”

에반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자신이 세계 최고의 남자라고 자부하는 남자다. 다른 남자들과 수준이 똑같다는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화가 날 것인가. 다니엘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두 남자의 코가 서로 닿을 듯하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오늘도 자신의 미모를 한껏 뽐내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고 에반은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굳이 옷을 입는다고 해서 그가 다니엘 스톤하츠의 앞에서 덜 무력한 것은 아니다. 벌레만도 못하게 눌려 죽일 수 있었다.

“기억하십시오. 언젠가 제가 그 손목을 잘라버릴 겁니다. 고통에 빠진 당신의 눈앞에서, 당신의 잘린 손을 들고 그 반지를 빼서 가질 겁니다.”

다니엘은 감정을 전혀 담지 않아 더더욱 서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에반은 그래도 웃었다. 그가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들었어, 도현아? 나 어떡해~”

다니엘의 눈이 커졌다. 도현이 욕실에서 나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문 쪽에서 보이지 않아 다니엘은 그녀가 다가오는 걸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바스 타월로 몸을 감싸고 가까이 다가와 황당한 얼굴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다니엘? 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

“아, 아니… 도현 씨…. 제 말은….”

“싸우는 건 안 된다고 했죠? 폭력은 안 된다고 분명히 했죠? 알겠다고 했었죠? 두 번 다시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분명히 다니엘 입으로 말했죠?”

“거짓말이 아닙니다. 두 번 다시 도현 씨의 뜻을 거역하고 싸움을 벌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방금 그것은 그저 집안의 위계질서를 잡기 위한 푸닥거리 같은 것으로….”

“위계질서? 푸닥거리?! 그런 걸 왜 다니엘이 잡아요? 아니야. 변명하지 말고 이리 와요. 무릎 꿇어.”

“도현 씨, 제가 정말로 블랙 씨의 손목을 당장 자르겠다는 게 아니라 블랙 씨가 하는 행동이 그런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주의가 없었다는 뜻으로…!”

도현이야말로 분노한 얼굴로 라이딩 크롭을 찾아왔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길로 바로 도현에게 뺨을 후려 맞았다. 그녀가 저렇게 화가 난 얼굴도 처음 봤고 다니엘 스톤하츠가 저러는 것도 처음 봤다. 에반은 놀란 얼굴로 어후, 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럼 난 아침 준비하고 있을게.”

에반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방을 나왔다.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그는 그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아 스스로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 그는 과거가 아니라 도현을 택했다. 그 사람이 하는 선택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송선호가 아무리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났어도, 미르 킹쉴드가 그 어떤 조건에서도 살아남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남자라도, 다니엘 스톤하츠가 아무리 똑똑하고 무서운 놈일지언정 이기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기는 것은 기분 좋다. 언제나 그랬다. 그녀에게 선택을 받는 것도, 그녀에게 특별한 것도 언제나 자신이었다. 그는 그녀와 아침을 먹고 메트로서울에 차린 사무실에 출근을 했다. 점심시간에는 육아 서적을 잔뜩 샀다. <사랑받는 남편과 아빠가 되는 법>이라는 책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읽다가 4시쯤 퇴근을 했다. 책을 몇 권 더 살까 하고 차를 세워두고 역 근처의 서점에 가려는데 누군가 그를 붙잡았다.

“자네, 아이 가질 예정인가?”

사이비 종교를 포교하는 사람인가. 이런 것에 걸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에반은 아직 육아 서적을 사지도 않았는데 그가 그런 말을 하니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반지를 하고 있어서 그렇게 물어본 거겠지.’

에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딸?”

“네. 뭐….”

에반은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역 앞에 버젓이 있는 자신의 사이비 역술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나 한잔하지? 복채는 별로 안 비싸.”

정말로 복채는 별로 비싸지 않았다. 에반은 단 한 번도 이런 점을 본 적이 없었는데도 홀연히 그를 따라 가게로 들어갔다.

“그래서 아이는 몇 명이나?”

“아직은 한 명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건 와이프 의견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요.”

“음, 그렇지. 아기 좋아. 귀엽고. 집안에 웃음이 마를 날이 없다니까.”

“와이프도… 딸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긴 합니다.”

에반은 시선을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역술인은 그의 생년월일과 생시를 받아 잠깐 따져 보더니 말했다.

“근데 애는 전부 자네 닮겠구만.”

“…네?”

“애들이 전부 자네 닮겠다고. 뭐 괜찮지 않나? 자네도 이렇게 미남인데.”

“아니, 저는 엄마를 꼭 닮은 딸로….”

“으으응, 보니까 전부 아빠 닮을 거야. 얼굴부터 성격까지 아빠 똑 닮겠네.”

“…….”

복채는 분명히 쌌다. 분명히 쌌는데…. 그 사이비 역술인의 가게에서 나올 때 에반의 손에는 오백만 원짜리 부적이 쥐어져 있었다. 엄마를 닮은 딸이 나오게 하는 부적이란다.

‘…저 인간 대단한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돈 놓고 돈 먹는 업계에서 날고 긴다는 그를 벗겨 먹다니. 에반은 약간 한심함이 들어 부적을 버리려고 하다가 복잡한 마음으로 다시금 부적을 바라보고 고이 디바이스 커버 안에 넣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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