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dise (2)
‘송선호는 몸이 내 스타일이란 말이야. 뭔가, 모양이 딱…. 얼굴도 귀족적이고…. 역시 비싼 남자라는 건 값어치가 있어서 비싼 남자인 거니까…. 성격이…. 성격은 좀…. 가끔 귀엽고…. 그래도 관리 안 받고 술 마시면 절제 못 하고 이러는 거 보면 어느 순간 훅 갈 거 같단 말이야…. 나이 들면 자기 아빠처럼 되는 걸까나…. 자기 아빠도 잘생긴 건 알겠지만, 어머니랑 같이 있으면 엄청 나이 차이 나는 느낌. 원래는 두 분 나이 차이도 거의 안 난다고 했잖아. 우리도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난 그런 거 싫은데.’
그래서 도현은 작년보다 0.5점이 낮은 9점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에는 콧방귀도 안 뀌던 송선호였으나 작년에 자신이 받았던 점수는 기억하고 있었는지 그녀가 점수를 낮춰 부르자 다소 놀라는 기색은 있었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태도로 돌아왔다가 슬그머니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작년보다 내 점수가 낮아.”
“응?”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 점수 더 낮게 줬냐고. 내가 작년이랑 지금이랑 달라?”
“아니…. 그냥 느낌상?”
좀 값이 떨어졌지…. 도현이 다시 한번 그를 물끄러미 아래위로 훑어보자 송선호는 아까 저 아래에 섰던 것보다 더 긴장했다. 도현이 말했다.
“남자는 이때가 고비야. 관리 잘해야 돼.”
“…하….”
송선호는 할 말이 없었다. 기분이 몹시 복잡해졌다. 몇 달 전인가 아버지가 자기도 이제 관리를 해야 하는 건가, 라고 하셨을 때 아버지가 딱히 무슨 관리가 필요하냐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보다 26살이나 적은 자신이 관리하라는 말을 들으니 그게 납득이 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과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도현의 얼굴은 몹시 팽팽하고 좋다. 그녀는 술도 많이 마시고 놀러도 많이 다니는데…. 에반 블랙도 그와는 한 살 차이가 났지만 어쩐지 자신과는 달랐다. 미르 킹쉴드는 물론이거니와 요새 미친 듯이 관리를 하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피부는 속에서 빛이 나는 수준이었다.
‘해야… 하나…? 진짜? 내가? 진짜로? 내가 벌써 그 정도야?’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도현의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해줘. 네 눈에는 다 잘생겨 보인다고 해줘.”
“응?”
그가 다소 불안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자 도현이 그를 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웃었다. 그녀는 그냥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누가 자기 못생겼대?”
“…….”
하아…. 송선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케이지가 좋다고 했지? 다녀야겠다…. 아니, 마도의사라도 하나 만날까…. 자존심 상한다…. 자존심 상해…. 그는 그녀의 옆에서 그렇게 말도 못 하고 끙끙 앓았다. 그리고 서연은 다른 남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에반 블랙.”
그의 이름이 불리자 도현이 웃었다.
“하하하. 이거 처음이지?”
로웰 리의 전에는 그가 이 배에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품평을 당할 리가 없었다. 에반이 그녀의 뺨에 입을 쪽 맞추며 속삭였다.
“신첩을 잘 봐주셔야 됩니다, 폐하.”
도현은 그게 웃겨서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도 평소 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블랙 씨는….”
시즈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크린과 에반을 번갈아 보았다. 에반은 시즈카에게 눈을 돌리고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언제나 도현 외에는 데면데면했다. 항상 웃고는 있었지만 눈이 웃지 않았다. 그가 진짜 웃을 때는 도현을 바라볼 때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은 순간 뭔가 심장에 이상한 느낌이 나는 것 같다. 그의 눈빛이나 그의 분위기가… 뭔가…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다. 홀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예쁜 구미호를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진짜 저 남자는 마성이라니까…. 인정.’
시즈카는 10점을 찍었다. 도현은 다소 고민했다.
‘에반… 좋아. 좋지. 그냥 좋아….’
그의 아름다운 골든 블론드, 껴안으면 품에 가득 넘치는 몸, 미소, 목소리, 눈동자, 속눈썹…. 그에 대한 것 중에 그녀가 사랑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 더 힘들었다. 눈치가 빠른 것도, 그녀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것도, 그녀만큼이나 자유로운 것도.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다른 건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한때는 그게 불쾌하게도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냥 인정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9.5점.”
도현은 그렇게 평을 내렸다. 에반은 빙그레 웃으며 들어와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점수를 좀 짜게 주는 것 같아.”
“내가?”
“응.”
“10점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응.”
에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도현도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나도 좀 고민했는데…. 음, 역시 전에 날 안 잡은 건 감점 요소야.”
“아, 여기에 그런 것도 포함되는 거야?”
“당연하지.”
“그럼 신첩이 앞으로 더욱더 성과 심을 다해 보필해드려야겠군요.”
“하하. 충성에는 사랑으로, 불충에는 벌로 답하도록 하겠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도현은 에반의 입가에 입을 맞추며 그와 말장난을 했다. 그다음으로 서연은 다니엘 스톤하츠를 불렀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가 당당하게 가운데 섰다. 크루들 중 몇 명은 그냥 바로 10점을 눌렀다. 그는 무서운 남자였다. 로웰도 다니엘을 보다가 그냥 별 고민 없이 10점을 눌렀다. 어시들도 전부 10점을 눌렀다. 원래 받아먹은 게 많은 사람은 배신하기 힘들다. 지금까지 나온 남자들 중에서 제일 최고 점수를 받을 판이었다. 도현은 그를 보다가 씨익 웃으며 점수를 눌렀다. 그녀는 그에게 8점을 주었다. 다니엘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째서입니까?”
“예전의 숙맥 같은 다니엘이 그리워요.”
“그건….”
“농담이에요.”
하지만 도현은 점수를 바꾸진 않았다. 그는 도현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다시 서더니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그래도 저를 속이실 순 없습니다. 저는 제가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물밑 게임의 레벨이 점점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이다.
‘다니엘 스톤하츠….’
도현 킬스버그는 22살부터 에반 블랙과 손을 잡고 세상의 가장 좋은 것들을 함께 누리며 한때를 보냈다. 가장 좋은 다이아몬드, 가장 좋은 음식, 가장 좋은 배, 가장 좋은 집, 가장 좋은 바다…. 그와 함께 젊음과 사치를 누리며 가장 빛나는 순간을 보냈다. 처음이라서 특별하고 황홀했던 쾌락과 즐거움. 겪어보지 못하고는 알 수 없는 그런 좋은 것들을 잔뜩 누렸다. 빚을 져 힘들게 되어도 그 순간을 진심으로 후회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그 시절을 보내며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니엘 스톤하츠는 어떤가.
그는 도현의 손을 잡고 어떤 세상을 보여줄 것인가.
‘감당하기 어려운 남자야. 때때로 고민하게 돼. 만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런 점은 예전 에반보다 훨씬 심해. 실제로 에반을 만나고 나서 어쩐지 나도 힘들어졌고…. 이 남자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뭘지 궁금해서 정말로 놓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드는 게 더 문제야…. 재미있어. 가끔 섬뜩해. 하지만 기분 좋아….’
세상에 정말로 가치 있는 것들 중 피를 부르지 않는 것은 없었다. 황금, 권력, 미인. 그는 그 모든 걸 갖춘 남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더 쟁취하려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가진 위험하고도 강렬한 매력을 도현은 느끼고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남자에게 이끌리는 마음. 치명적이고 위험하고 도박적이다.
‘으음, 별로야…. 너무 똑똑해….’
그래도 조금만 더 지켜보자는 마음이 드는 건 자신도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어느 정도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남자의 음식에 길들여지면 그를 거스르기 힘들어지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연이 다음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미르 킹쉴드!”
“꺄아~!”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고 이 배에서 이런 환호성이 터지는 건 이 남자밖에 없다. 그는 모두에게 햇살같이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주며 가운데로 나갔다. 이번에도 다들 동작이 빨랐다. 12점이나 15점이나 무려 20점을 누른 사람도 있었지만 최고 점수가 10점이었기 때문에 결국 10점 만점에 10점으로 결론이 난 쭉쭉빵빵의 그 남자, 미르 킹쉴드였다.
“미르~”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르를 껴안았다. 도현은 그의 양 엉덩이를 손으로 쥐었다. 너무 커서 당연히 그녀의 손에는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축하해요. 역시 1등.”
도현은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하하하! 당연히 내가 최고지!”
멍청해도 귀엽다. 멍청해서 귀엽다. 여자를 속이지 않는 남자는 그것만으로도 귀하다. 어느샌가 다들 미르 킹쉴드의 곁에 잔뜩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하렘을 만들 수 있는 남자는 이 남자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양팔에 가득 여자들을 껴안고 여기가 제 세상인 듯 호쾌하게 웃었다.
“역시 난 여기가 너무 좋아!”
그때, 물살을 가르며 따뜻한 남쪽 나라로 계속해서 순항하고 있는 지니호의 머리 위로 비행차가 몇 대 나타났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걸 보고 생각했다.
‘드디어 왔군.’
도현도 그걸 발견하고 눈을 깜박깜박하며 크루를 돌아보았다.
“누구 또 오기로 했나?”
“아뇨…. 제가 알기론…. 어, 누구 있네요. 스톤하츠 씨 초대인데요?”
그러자 도현이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다니엘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도현 씨가 좋아하실 것 같아서 아는 사람들을 초대해봤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났다. 비행차가 주차되고 곧 사람들이 야외수영장 입구를 통해 줄줄이 빠져나왔다. 커다란 키, 남신이 강림한 듯한 울끈불끈한 몸매, 여유로운 분위기를 두른 남자들이었다.
“이야, 이런 좋은 데를 너만 알고 있었냐?”
카흐 밀란이 휘파람을 불고 그렇게 말했다. 이스트드래곤의 카흐 밀란과 제시 팔마, 팔라딘의 제라드 라니에리, 레드폭스의 필리페 버밍험, 웨스트이글의 제수스 강도 있었다. TFC 세계에서 유명한 미남 선수들만 잔뜩 데려온 것이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 사이에서 깨알같이 신태호도 같이 오고 있었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여자들은 다들 얼이 빠져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들은 죄다 남신이 화한 듯 울끈불끈한 몸매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시즈카는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침을 뚝 흘리고 말았다. 서연은 그걸 보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가를 재빨리 훔쳤다. 미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넌 여기 어떻게 왔냐, 찌질아.”
“아, 씨. 안 닥치냐?”
제수스가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 그는 쭈뼛쭈뼛하다가 도현에게 말했다.
“여, 여어, 그땐 미안. 용서해줘.”
그는 불타는 듯한 빨강 머리에 호박색에 가까운 헤이즐 눈동자에 섹시한 목덜미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전의 일을 사과하며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어쩐지 그때와는 분위기가 약간 바뀐 것 같았다. 눈동자에 조금의 이지가 돈달까.
“어떻게 온 거예요?”
“난… 밀란이 오자고 해서 왔는데.”
그러자 카흐 밀란이 제수스의 어깨에 팔을 팍 얹으며 도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니, 얘가 요새 하도 우울해하길래. 스톤하츠가 좋은 곳이라고 해서. 이런 놈이 좋은 데라고 하면 뭔가 진짜 좋은 데 아니겠냐 싶었지.”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도현에게 인사했다.
“안녕, 예쁜이. 니가 그 킬스버그 님이라며? 예쁘네~”
그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 도현은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다니엘은 그들과 도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망나니 같은 남자들에게 경고했다.
“분명히 내가 주의 사항을 알려줬을 텐데. 여기서 도현 씨에겐 무조건 존댓말, 극존칭 사용, 공손하고 깍듯하게 대해야 한다.”
“네, 네~”
카흐 밀란은 그렇게 반응했다. 신태호는 카흐 밀란의 등을 밀고 도현에게 인사했다.
“누나.”
“태호야, 오랜만이야. 어떻게 왔어?”
신태호는 도현과의 포옹 후 로웰과도 포옹했다. 도현의 물음에 신태호가 대답했다.
“스톤하츠 씨가 좋은 데가 있다고 해서요.”
카흐 밀란이나 제시 팔마, 신태호야 이스트드래곤이니 그렇다고 쳐도 제라드 라니에리나 필리페 버밍험은 타 클럽 선수들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남자가 자기 클럽 동료라고 친근하게 지낼 것 같지도 않은데.
제라드 라니에리는 보면 빨려 들어갈 듯이 깊고, 짙고 푸른 눈에 깨끗한 금발과 밝은 미소를 가진 남자였다. 22살의 그는 북부 이탈리아 남자 특유의 도도함과 열정이 공존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다니엘과 악수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톤하츠 씨. 항상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랭킹 1위! 저번엔 그렇게 졌지만 다음번엔 이길 겁니다.”
열혈 청년 같은 느낌의 제라드 라니에리는 소드마스터 특유의 에너지가 넘쳐났다. 2125년 한 해를 강타했던 미남답게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필리페 버밍험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뭐야, 이건. 소드마스터라고 여자면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라고.”
그는 딱딱하고 경직된 인상에 매우 단단해 보였고 갈색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소드마스터들이 속이 꽉 차고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응축도가 실로 남달라 보였다.
다니엘은 도현을 돌아보았다. 마치 ‘도현 씨가 뭘 더 좋아할지 몰라서 종류별로 모아보았습니다’라는 눈빛이었다. 도현도 갑자기 유전적 우월도가 세계적으로도 남다른 수컷들이 앞에 주르륵 나타나자 눈이 돌아갔다.
“그럼… 남자를 좋아하나요?”
도현은 필리페 버밍험의 팔을 만져보며 감탄했다. 그녀가 그렇게 묻자 그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누가 그런 걸!”
뭔가… 새로운 종류다…. 이런 소드마스터도 있나? 도현이 호기심을 가졌다. 송선호는 입을 딱 벌리고 다니엘 스톤하츠를 쳐다보았다. 저 사이코 새끼가 드디어 미쳤나? 지금도 남자가 천진데 여기서 그녀의 앞에 남자를 더 늘어놓는 건 무슨 심보인가.
그렇게 지니호의 수질을 확연히 높여주는 쭉쭉빵빵한 남자들이 나타나자 갑자기 야외수영장의 풍경이 바뀌었다. 금방까지만 해도 미르 킹쉴드의 옆에만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는데 5분의 1 정도는 여전히 그의 곁에, 5분의 1은 카흐 밀란과 제시 팔마, 제수스 강의 곁에, 5분의 1은 제라드 라니에리의 곁에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신태호를 노렸다. 그 외 몇몇은 철벽을 치는 필리페 버밍험을 노렸다.
“아~ 태호 짱~ 역시 어린 게 좋아. 피부가 부들부들해!”
시즈카는 분명히 다니엘 스톤하츠나 에반 블랙 스타일의 스마트함과 냉철함이 보이는 미남들을 좋아했으나 그래도 역시 좋고 재밌는 건 미르 킹쉴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신태호가 나타나니 역시 그래도 어린 게 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강하고 귀엽고! 그런 건 좋은 거다.
“아, 저, 저기… 누나들, 저….”
신태호는 많은 여자들에게 주물러지면서도 이게 이제 영 어색한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양쪽에서 커다란 가슴들이 그의 양쪽 뺨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적당히 알아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가 세계 최강의 남자라고 불릴 정도로 강하면 뭐하겠는가. 사회적 힘이란 그런 남자도 꼼짝 못 하고 이렇게 앉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태호야, 누나가 동정 떼줄까? 응?”
신태호를 마구 귀여워하고 있던 사람 하나가 그의 턱을 검지로 들며 은근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정색했다.
“저 좋아하는 여자 있어요.”
그가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자 그를 둘러싼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어이구, 우리 태호~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어요~”
“우리 태호, 어른 다 됐네!”
“아, 잠깐만! 악! 누나!”
도현은 여자를 무서워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인지 모를 필리페 버밍험을 잠깐 놀리다가 그가 퀸이 있는 쪽으로 도망가자 풋 웃고는 돌아왔다. 퀸은 특유의 흐릿한 초점의 벽안으로 ‘이건 뭐야?’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털을 바짝 세웠다.
“내, 내가 이쪽으로 왔다고 해서 그쪽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니까!”
생긴 거랑 다르게 되게 피곤한 남자로군. 로웰은 주변을 구경하며 심드렁한 얼굴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어? 선생님, 태호 왔는데 태호랑 놀러 안 가세요?”
“아, 그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저 얼마 전에 팀을 갈아탔습니다.”
“네?! 정말요?”
도현뿐만 아니라 어시들이 올해 이스트드래곤 전만 줄창 보러 다닌 게 무엇 때문이겠는가. 바로 집안의 가장인 로웰 리가 이스트드래곤, 특히나 신태호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응원팀을 바꾼다는 건 그들에게도 큰일이었다.
“어느 팀이요?”
“서던라이온이요. 아, 알렉스 킴. 걔는 진짜 물건이에요, 물건.”
“아.”
그녀는 한하를 응원하는 동시에 이스트드래곤을 응원하는 사람이었다. 가장 약골과 가장 강한 팀을 동시에 응원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 ‘가장 강한 팀’이 바뀐 것이다. 언제나 더 강하고 어리고 아름다운 남자는 등장한다, 그게 엘 드라카의 법칙이었던가.
도현은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웰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말했다.
“소드마스터라는 건 다 비슷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좀 다른 것도 같고….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크고 강하고 성격은 여유롭고 뭐, 필리페 버밍험은 아닌 것 같지만, 뭔가 다들 크고 나른한 고양이 같은 느낌이에요.”
로웰의 말에 도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네. 전에 로얄팰리스 파티 갔을 때도 샤샤 부퍼라는 웨스트이글 센터 포워드가 분명히 얼굴은 다른데 미르랑 느낌이 많이 비슷하더라구요. 저 제수스 강이라는 포워드도 그랬고….”
도현은 그렇게 하나하나 꼽아보며 로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멀리서 그런 모습을 쭉 보고 있던 다니엘은 나름의 성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틈을 타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미쳤습니까?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시죠!”
“도현 씨는 고양이가 아닙니다.”
다니엘이 말했다. 에반은 자리에 앉아 멋들어지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올리브가 꽂힌 막대로 마티니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도현이는 남자라면 다 좋은 사람이 아니야.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아니…! 그래도! 이건! 이건 아니잖아…!”
송선호는 왜 그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열이 받아 얼굴이 벌게졌다. 옆에 있는 스카치를 벌컥 마셨다가 너무 독해서 뱉기까지 했다.
“젠장….”
“넌 머리가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도현이 일만 되면 꼭 이러더라. 모양 빠지게.”
“야…! 죽고 싶냐!!”
그가 길길이 화를 냈다. 에반은 마저 마티니를 다 젓고는 향기를 잠깐 맡고 살짝 한 모금 마셨다.
“흔한 건 흔한 것만으로도 가치가 떨어져.”
“뭐?”
“미르 킹쉴드 같은 건 흔하다는 거지. 아, 물론 난 킹쉴드 씨 좋아해. 요즘 세상에 저 정도로 순진한 남자도 드물잖아. 어쨌든 스톤하츠 씨가 도현이한테 알려주고 싶은 건 그거라는 거지. 넌 스톤하츠 씨한테 감사해. 너도 킹쉴드 씨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
“…….”
송선호는 입을 딱 벌리고 에반의 얼굴을 보다가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다니엘이 말했다.
“감사의 말씀은 넣어두십시오.”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감사는 무슨!”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분명 아까는 모두가 미르 킹쉴드만 보고 그에게 몰려들었는데 지금 도현은 오히려 멀찍이서 로웰과 함께 관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제나 환하게 빛나는 미르 킹쉴드는 여자들이 자석처럼 끌려간다. 그런데 여기에 지금 그렇게 빛나는 남자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송선호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면 이제 도현이 미르 킹쉴드를 안 좋아하게 되는 건가? 저렇게 비슷비슷한 남자들이 많고 질릴 테니까? 그럼… 도현이가 언젠가 나한테도 질리게 될 거란 말일까? 아니, 나랑 비슷한 남자들이 많은 건 아니지만….’
미르 킹쉴드는 친하게 지내는 지니호의 크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개를 들어 도현을 찾았다. 그는 자기가 또 라이벌의 요상한 마수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각성한 다니엘 스톤하츠는 더욱 음험하고 교활해졌다.
“도현아, 여기서 뭐 해?”
“쉬고 있었어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미르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미르는 그녀의 팔걸이에 양팔을 걸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왜?”
“역시 미르가 좋아요.”
그녀는 미르 킹쉴드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장미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많은 고양이가 있다고 해도 내 장미가, 내 고양이가 제일인 것 아닌가. 정이란 그런 것이다. 그만이 특별해지는 것이다. 미르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도 좋아. 사랑해~”
하지만 장미가 시들거나 고양이가 죽으면? 새로운 장미를 사거나 새로운 고양이를 찾을 것이다. 개를 찾을지도 모르지. 인간에게 사물이란 그 정도인 것이다.
도현은 살짝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나저나 미르 하나만 있어도 사고가 많은데, 이렇게 소드마스터들이 많으면 역시 사고 많이 일어나겠죠?”
“응? 난 안 싸워. 그러면 됐지.”
미르는 도현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도현은 음, 하고 소리를 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내 남자도 아니고.”
“그렇지?”
어쨌든 도현은 미르 킹쉴드가 좋았다. 남자답고 귀여운 남자다. 도현도 예전과 다르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근심에 빠질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럴 때 그와 대화하다 보면 도대체 세상에 걱정할 것이 뭐가 그렇게 있나 생각하게 되었다.
어쨌든 다니엘 스톤하츠가 다량의 남자들을 수입하며 지니호의 수컷 생태계를 교란했다. 색깔도 모양도 각양각색이었지만 크게 나누자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비싼 척하는 놈과 그러지 않는 놈으로.
송선호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둘도 없이 비싼 남자라는 도도한 얼굴을 하고 다녔다. 특히나 스트리퍼나 TFC 선수들이나 그의 기준에서는 똑같이 창놈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것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자신은 노력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도현에게 사랑을 요구했다. 스스로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비싼 남자였고 자신이 비싼 남자라는 것도 잘 아는 남자였다. 그걸 아는 다른 여자들이 그를 노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거기에 대해 약간의 트라우마가 생긴 그는 자신에게 가볍게 접근해오는 모든 여자들을 신경질적으로 거부했다.
에반 블랙은 기본적으로 도현의 말이나 생각에는 별 거부감 없이 전부 따랐지만, 그는 원래부터 도현 외의 모든 사람에게 선을 긋는 남자였고 특히나 스트리퍼나 이번에 다니엘 스톤하츠가 데리고 온 TFC 선수들과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 생물적 DNA의 우열과는 별개로 사회적 DNA는 둘 다 낮다. 그는 그런 것을 모두 거쳐온 남자였기에 더 혐오감을 감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미르 킹쉴드를 견제하기 위해 소드마스터들을 대거 데려온 것이 에반 블랙에 대한 견제도 된 것이다. 아마 다니엘 스톤하츠는 둘 다 노렸을 것이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가 인정하는 진정한 인간들이란 아주 극소수다. 그리고 도현은 그것과도 별개인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나머지는 그게 그냥 일반 시민이든 스트리퍼든 TFC 선수든 그에게 크게 차이가 없다. 본인이 데려오고도 그들을 벌레같이 내려다보는 그의 무정한 표정이란 제3 자에게도 때때로 소름이 끼치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도현의 앞에서는 다소 쉬운 남자처럼 굴 때가 있었다. 낮에는 조신한 남자, 하지만 밤에는 요부 같은 남자, 그렇게 낮과 밤 양쪽 모두 도현을 사로잡겠다는 마인드였다. 에반이나 다니엘은 뭇 일반인이 언뜻 보기에도 쎄~ 하게 냉기가 흐르는 남자들이었으므로 쉽사리 접근하는 여자는 전혀 없었다.
미르 킹쉴드는 터부가 없었다. 비싸게 구는 남자는 원래부터도 아니었고 따라서 그냥 먹고 마시고 즐겼다. 사람이 늘면 더 즐거울 뿐이었다. 어쨌든 그는 여전히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남자였다. 제라드 라니에리같이 그와 같은 과로 눈에 확 띄는 남자가 또 나타나더라도 별로 상관없었다. 그는 그런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제라드와도 잘 어울렸다. 둘이 서로 장난이라도 치며 함께 있으면 주변으로 환한 양기가 가득 끼치며 여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은 세상에 좋은 남자들이었다.
“아, 저리 가서 다른 사람들 상대나 해. 따라오지 마.”
빨간 머리를 짧게 깎아 스크래치를 내고 오늘도 피어싱을 잔뜩 달고 있는 퀸은 성가신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필리페 버밍험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조금 상대해줬다고 친해졌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누, 누가 따라다녔다고!”
“누가 누굴 상대해? 이 새끼 이거 진짜 또라이 아냐?”
“그, 그냥…! 날 이상한 눈빛으로 안 보는 건 그쪽뿐이라서…! 여자들은 다들 내 팔이나 가슴이나 엉덩이부터 본다고! 여자들은 다 응큼해! 늑대들이라고!”
“자. 자. 나도 봤다. 됐냐?
“꺅! 변태!”
“아, 귀찮아! 따라오지 마!”
“그,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라고! 댁 근처에 있으면 다른 여자들이 안 따라와서 있는 것뿐이니까! 내가 평소에도 이럴 거라고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착각이야. 아니, 그렇다고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거야말로 착각이라고!”
“아, 뭐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뭐… 필리페 버밍험같이 다른 여자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게 싫다고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강해 보이는 여자를 본능적으로 따라다니는 요상한 남자도 있었다.
*
연이어 흥겨운 파티를 열고 먹고 마시고 다음 날이 되니 지니호 크루의 낯빛이 바뀌었다. 어제도 분명 밤늦게까지 파티가 이어졌는데도 그들의 피부에서 빛이 났다. 크고 아름답고, 성격도 느긋하고 호탕한, 유전적으로 너무나 우월한 남자들이 대거 들어오니 스트리퍼나 남성 크루들은 역시나 무성체로 보였다. 그들은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색깔별로 옮겨 다녔다. 다들 쭉쭉빵빵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금발 벽안에 환한 미소를 지닌 핀업 보이 같은 미남을 원하는 이들은 미르 킹쉴드나 제라드 라니에리를 찾았고 약간 눈에 덜 띄지만 섹시하고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이는 카흐 밀란이나 제시 팔마를 좋아했다. 신태호는 누구에게나 인기가 좋았다. 그는 지니호에 승선한 이들 중에 제일 나이가 어렸고 다니엘 스톤하츠를 제외하면 가장 강했다. 제수스 강은 여자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며 필리페 버밍험과 같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가 피어싱을 잔뜩 단 여자를 계속 따라다니자 그도 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소드마스터들이 대거 늘어나니 도리어 눈에 띄게 된 것은 결국 다니엘 스톤하츠, 에반 블랙, 송선호와 같은 남자들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애정도 당당히 거부할 수 있고 여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눈빛에 이지와 명석함이 돌며 귀한 티가 나고 아름답기까지 한 이 남자들. 비싼 게 좋은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재질이 다르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건 원래부터 별로 귀한 것도 아니다.
“야~ 이런 배는 하나 만들려면 얼마나 드냐?”
“천억 정도 하려나?”
“와, 이런 의자 하나도 비싸 보인다.”
“큭큭. 쩔지? 끝내주지?”
미르 킹쉴드는 TFC 동료들을 데리고 배를 한 바퀴 돌며 구경시켜 주었다. 좋은 건 누가 봐도 좋은 것이다. 다들 관심을 가졌다. 여기서 쓰는 가구들은 모두 이태리제 명품 가구에 유리창마저 최신 기술이 접목된 아주 비싼 것이었다. 실내 파티장의 샹들리에나 VVIP룸의 실내 장식도 입이 딱 벌어졌다. 앞서 말했듯 재질이 달랐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만든 사람의 심미안이 보이는 것이다.
“싸우면 쫓겨난다. 얄짤없다니까? 여자들 막 함부로 만져도 안 되고. 비키니 벗기기 게임 할 때 절~대 같이 들어가면 안 된다.”
“엥? 여자들이 먼저 건드리는데?”
“눈치를 잘 봐야 돼, 눈치를. 만져도 되나, 안 되나. 내가 만지고 싶다고 막 만지면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싫으면?”
“니가 싫을 때도 있냐? 싫을 땐 여자들 기분 나쁘지 않게, 어? 알아서 잘하라고. 그런 것도 못 하냐?”
미르가 자꾸 으스대며 말하자 카흐 밀란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그들은 파티장, 카지노장, 헬스클럽 등을 옮겨 다니며 배를 구경했다. 그리고 꼭대기에 있는 퀸룸까지 올라가게 됐다.
“우리 도현이 방은 여긴데. 진짜 무슨 궁전 같아.”
“오오, 문 쩐다. 들어가 보자.”
카흐의 말에 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줄 알아?”
“쳇.”
미르 킹쉴드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걸 가질 수 있는 남자인지 자랑하는 것이 좋았다. 신분이라도 상승한 기분이랄까. 그때 화려한 퀸룸의 문이 열렸다. 지니호는 이미 남쪽으로 많이 내려와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다.
“미르?”
“잘 잤어? 으음~”
도현이 나오자 미르는 그녀의 양 엉덩이를 잡아 안으며 그녀와 입을 맞췄다. 그녀는 수영복 위에 화려한 패턴의 맥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훤칠하고 커다란 남자와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오늘도 짝이라도 맞춘 듯 근사하게 어울렸다. 도현은 그의 손을 끌었다.
“같이 아침 먹어요.”
“오늘은 방에서 먹으려고?”
“네.”
미르 킹쉴드는 본인이 동료들을 우르르 끌고 다녀 놓고 그대로 도현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카흐 밀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새끼 뭐야?”
“원래 저런다.”
제수스 강이 한숨을 쉬며 먼저 뒤돌아섰다. 밀란이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저런 여자가 왜 미르 킹쉴드를 만나냐? 웨스트이글에서 싸움 안 났냐? 났을 거 같은데?”
“났지…. 그래서 로드리게스 감옥 간 거 아냐.”
“아.”
“일반인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지금도 두 명 아직 빵에 가 있지 않냐? 그 무슨 교순가 뭔가 하는 여자 잘못 건드렸다가? 그것 때문에 우리도 한 번 무슨 교육받았다. 그건 누구 여자였는데?”
“…….”
제수스는 시름이 섞인 한숨을 푹푹 쉬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카흐가 그의 등을 퍽 쳤다.
“이 새끼가 또 이러네? 너 진짜 요새 뭐 잘못 먹었냐? 새로운 약 하냐?”
“몰라….”
그리고 도현을 따라 퀸룸으로 들어간 미르는 인피니티 윈도우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새로 장만한 이태리제 명품 카우치에 반쯤 드러누웠다. 도현이 그의 단단한 허리에 기대앉았다.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미르는 자신의 팔꿈치를 세워 상체를 일으켜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하고 코를 비볐다. 그는 햇살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속에서부터 절로 말이 새어 나왔다.
“사랑해.”
“저도 미르 사랑해요.”
미르는 기뻤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예전에는 이런 마음이 뭔지 몰라서 어색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었다. 함께 있고 싶고 소중히 하고 싶고 그녀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그녀와 함께 하는 것은 무엇이든 좋다. 이렇게 둘이 있으면 더더욱 좋다. 이렇게 함께 앉아 눈을 마주치고 별것 아닌 말들을 나누며 맛있는 걸 먹고. 이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하다. 미르는 도현이 입에 넣어주는 과일을 맛보았다. 뭔가 물컹하고 이상했지만 달았다.
“이건 뭐야?”
“무화과에요.”
하나하나 예쁘게 썰어져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흠 하나 없이 예쁘고 정갈한 과일이었다. 세상에 이런 과일도 있단 말인가? 그녀와 함께 다니다 보면 미르 킹쉴드는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접하지 못했던 것들을 잔뜩 보고 맛볼 수 있었다. 그도 돈을 못 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모르기 때문에 가지지 못했던 것도 수두룩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아무거나 대충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음식도 약간 가리게 되었다. 그 같은 소드마스터치고는 특이한 일이었다. 그녀가 그를 그렇게 바꾸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는 그런 자신의 변화가 좋았다. 자신은 원래도 잘났지만 그녀를 만나 더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 그녀의 덕분이었다. 그녀가 좋았다.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그녀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고마워.”
미르는 그런 마음을 말로 표현했다. 그가 갑자기 고맙다고 말하자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요?
“그냥. 다. 다. 나 좋아해 주는 것도, 같이 살아주는 것도, 다.”
미르는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말했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정말요?”
“응.”
미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말에 그 어떠한 무거움이나 부담스러움을 얹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미르 킹쉴드….’
그녀에게 평생의 사랑을 말하는 남자들은 수두룩하게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런 말로 그녀를 속박하려고 했다. 그런 것을 자신의 사랑에 대한 대가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미르 킹쉴드는 달랐다. 에반 블랙도 사랑의 말로 그녀를 구속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에선 무겁고 복잡한, 많은 감정이 전해져 왔다. 미르는 그저 사랑하고 좋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남자라서 좋았다. 도현은 말없이 그의 환한 아이스블루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사랑스러운 남자….”
밝은 아침 햇살에 그의 얼굴이 잘 드러났다. 햇빛보다 환한 플래티넘 블론드, 보는 사람의 눈이 다 시원한 아이스블루 아이, 우뚝하게 높은 코, 아름다운 얼굴, 남자다운 골격, 훌륭한 몸매. 그녀는 미르 킹쉴드의 위에 몸을 붙이고 엎드려 누웠다. 손가락으로 그의 눈썹을 그리듯 만져보았다. 머리카락도, 이마도, 코도, 속눈썹도. 하나하나 검지로 그리면서 그대로 말없이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도 솥뚜껑처럼 큰 손으로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도현의 얼굴을 만졌다. 그녀의 밝은 갈색 눈동자가 햇빛에 비쳐 환했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는 도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그녀의 귀를 만지고 이마를 만지고 뺨을 만지고 입술을 만졌다. 그녀의 속눈썹을 만졌다.
충만한 시간이었다.
서로에게 약점을 맡겨도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는 단단한 신뢰. 그런 건 얻기 어려운 것이다. 사랑보다도. 아무 말도, 그 어떤 행위도 필요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족되었다. 더한 조건도, 약속도 필요 없는 영원한 애정과 사랑. 도현은 에반 외에 다른 남자와 이런 기분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때 그와는 아무것도 몰라도 어쩐지 괜찮다는 이상한 직감이 들었다. 미르 킹쉴드와는 이미 서로를 전부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이 영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떠올라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렇게 아침 동안 그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맞춰 야외수영장으로 올라갔다. 둘은 서로의 허리를 꼭 안은 채 서로의 얼굴만 보며 입을 쪽쪽 맞추었다. 다른 사람의 눈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미르 킹쉴드는 그답지 않게 아쉬움이 팍팍 담긴 얼굴로 그녀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한 번 더 할걸.”
“미르랑 같이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응.”
둘 다 서로가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셰프에게 음식을 시키고 점심을 즐겼다.
“왔어?”
수영을 하고 막 올라온 에반이 도현에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빛났다. 약간 자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늘어져 그의 한쪽 눈을 가렸다. 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가 도현의 선베드에 앉자 그녀가 허리를 일으켰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도현과 입을 맞췄다.
“잘 잤어?”
“응. 역시 지니호랑 우리 집이 제일 잠이 잘 와.”
“우리가 지은 성이니까.”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머리카락 많이 길었네?”
“네가 기르라고 해서.”
그리고 에반은 미르에게도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 셰프 음식 맛있죠? 오랜만에 먹으니까 저도 자꾸 먹게 되더라구요.”
그는 그렇게 말하곤 적당히 바삭하게 구운 바게트에 자개 스푼으로 캐비어와 치즈 등을 얹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미르 킹쉴드는 아직 고급 다이닝의 맛은 잘 몰랐다. 비리고 느끼해서 그냥 한입에 씹고 빠르게 넘기는 식이었다. 이 송로버섯 리소토도 말이다. 하지만 도현과 에반은 한 입 한 입 음미하며 잘만 먹었다.
“사실 격식 있게 차려입고 먹어야 하는데.”
에반이 말했다.
“어때? 내 밴데.”
“그건 그래. 맛있다.”
에반은 리소토를 긁어먹다시피 했다. 그는 입맛을 한 번 다시며 말했다.
“우리 놀러 다닐 때만 해도 라만 셰프가 지금처럼 유명하진 않았으니까 2년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잘 먹고 살았는데. 이제는 일주일 밖에 못 데리고 있다니.”
“하아, 그러니까. 그래도 그 뒤로 계속 다른 셰프들이 오긴 해. 레아 스티븐스도 있어.”
“진짜? 어떻게 초대했어?”
“다니엘이.”
“대단한데?”
그리고 에반과 도현은 미르 킹쉴드는 못 알아먹는 대화를 나누었다. 미르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도 가르쳐줘.”
“아, 미르. 내가 먹는 거 신경 많이 쓰잖아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가 있는데 다니엘이 그 사람을 지니호로 초대해줬어요. 그 사람 레스토랑 한번 예약하려면 1년은 기다려야 한대요.”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에반도 말했다.
“솔직히 유명한 셰프들 음식 먹어보면 취향 탈 때도 많지만 스티븐스 셰프는 킹쉴드 씨도 좋아할 거예요. 고기 요리를 특히 잘하거든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오, 그래?”
미르의 기준에서야 개미 눈곱만큼 먹는 도현의 미식 생활을 그가 따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는 일단 많이 먹는 게 가장 중요한 남자다. 솔직히 지금 지니호의 식당은 소드마스터의 식생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구조였다. 예쁘게 플레이팅 해서 조금씩 내놓는 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지금 야외수영장에 있는 모든 소드마스터는 대부분 배를 곯고 있었다. 미르는 일단 자기 앞에 있는 음식을 다 먹고서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빨았다.
“미르는 아직도 배고프죠? 안 그래도 라만 셰프가 식료품이 모자란다고 했어요. 소드마스터가 이만큼이나 있으니.”
도현이 아차, 하고 그를 보았다. 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배고파.”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끊임없이 간식을 입에 넣고 있는 허기져 보이는 남자들이 많다. 특히나 신태호는 셰프에게서 주문한 것이 오는 족족 한입에 삼키고 있었다. 그녀는 디바이스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다니엘.”
[네, 도현 씨.]
“어디에 있어요?”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곧 올라갑니다.]
“식재료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일단 급한 대로 송아지랑 돼지를 몇 마리 사서 바비큐를 해놓는 건 어떨까요?”
[선수들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도현 씨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도현은 다니엘에게 짧게 통화를 하고 끊었다. 보통은 셰프에게 직접 연락하거나, 이런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지니호에도 따로 있었지만 다니엘에게 말하면 두 번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도현의 취향도 무엇도 다 알고 있는 남자였다.
“다니엘이 몰랐을 리도 없는데.”
도현이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미르를 돌아보았다. 일부러 그런 걸까? 도현은 미르의 선베드에 앉았다. 에반은 도현의 선베드에 누워 머리를 닦았다. 그림 같은 남자다. 그런 에반의 자태를 쭈욱 훑어보면서 도현은 한가롭게 미르를 쓰다듬었다. 로웰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야외수영장으로 왔다. 그녀는 빵빵한 배를 문지르고 수영장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소화를 시키더니 도현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제 슬슬 게임을 시작해 볼까요?”
로웰은 몸을 풀며 말했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웰이 말했다.
“작년엔 작가님이 져서 제 연재 한 회를 맡아 주셨죠.”
“하…. 이번에는 제가 이길 거예요, 선생님.”
작년 여행 3주 동안 도현과 로웰은 매일같이 게임을 하며 승부를 겨뤘다. 초심자의 운인지 2점 차로 로웰이 이겨 도현이 로웰의 연재 한 회를 맡아 고군분투하며 그렸다. 당연히 이벤트성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게 봐주었지만 도현은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좀 불안하다. 새롭게 넣은 게임들이 꽤 있었다. 작년엔 모두 원래 지니호에서 하던 게임들이었지만 로웰 리와 어시들이 새로운 게임을 리스트에 넣었기 때문이다. 수영장 위에 홀로그램이 크게 떴다. 거기엔 크게 로웰과 도현의 이름이 떠 있고 그 밑에 바글바글하게 승선자들의 이름이 작게 떠 있었다.
“자자. 팀을 짭시다.”
“팀은 어떻게 짤까요?”
“으음.”
둘은 고민했다. 팀을 짜는 것은 처음에 얼마나 전력이 되는 인물들을 데려오느냐의 문제다. 지금 짠 팀을 가지고 여행 끝까지 게임을 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어떻게 되느냐가 전체적인 경기의 승패를 좌지우지하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이번 전체 벌칙은 다음 작품의 구상을 10개 들고 오는 것이다. 이기는 사람이 그중에 고르거나 잔소리를 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팀을 짜기로 하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야외수영장으로 모였다. 작년에 비하여 크루나 여행객들도 늘었다. 곧 스트리퍼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주사위를 두 개 가져왔다. 도현과 로웰의 사이에 주사위를 굴릴 수 있는 테이블이 왔다. 작년의 승자인 로웰이 선을 잡았다. 그녀는 두 개의 주사위를 굴렸다. 합해서 점수가 9 나왔다. 꽤 높은 숫자다. 도현은 주사위를 덮은 컵 안에 넣고 흔들며 물었다.
“선생님은 누구 먼저 뽑으실 거예요? 사라?”
전체 팀원은 여자들부터 뽑았다. 일단 지니호에는 여자가 더 많았고(시큐리티 몇몇을 제외한 크루들은 전부 여자들이었다) 지니호 규칙상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유리했다. 당연했다. 스트리퍼나 창놈이나 그 비슷한 놈들이랑 일반 시민이랑 같은 취급을 하면 그거야말로 불평등이다.
“당연하죠!”
도현의 주사위는 8이 나왔다. 로웰은 사라를 뽑았다. 185cm의 훤칠한 키와 윤기 나는 검은 피부를 가진 사라는 승자의 웃음을 훗 지으며 로웰의 뒤에 섰다. 그녀는 이기는 사람이었고 로웰도 이기는 사람이었다. 그 둘은 하이파이브를 짝했다.
“퀸 바르가스!”
도현은 퀸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서 사라랑 대적이 가능한 사람은 퀸밖에 없었다. 퀸은 하품을 하며 도현의 뒤에 섰다. 퀸에게서 떨어지게 된, 여기서 제일 덩치가 큰 한 남자만 안절부절못하며 사람들 가운데 서 있었다. 여자들을 반반씩 나누자 남자들 순서가 왔다.
“누구 뽑을 거예요, 선생님? 미르?”
도현이 또 물었다. 이번에는 소드마스터들도 많으니 다들 게임에 넣을 생각이었다. 로웰은 헹하고 웃었다.
“당연히 스톤하츠 씨죠.”
로웰은 13, 도현의 점수는 7이 나왔다. 로웰은 기뻐하며 다니엘의 이름을 불렀다.
“다니엘 스톤하츠!”
홀로그램의 이름표 하나가 움직여 로웰의 밑으로 갔다. 로웰은 자신에게 다가온 그의 등을 두드렸다.
“잘해봅시다. 설마 작가님 좋아한다고 설렁설렁할 건 아니죠?”
로웰이 물었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다만….”
로웰이 뱅글뱅글 안경을 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도현에게도 들리도록 로웰에게 말했다.
“도현 씨가 당할 벌칙을 정하는데 재량권을 조금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로웰과 도현은 눈을 딱 마주쳤다. 이 남자가 제대로 할 생각이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원래부터 로웰의 팀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선생님, 그 남자는 진짜 변….”
“좋습니다, 스톤하츠 씨! 원래 벌칙은 팀원과 다 같이 정하는 거니까요. 목소리 큰 사람이 장땡이죠!”
“역시 로웰 선생님. 굉장히 후하시군요. 감사합니다.”
로웰과 다니엘이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도현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도현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에반과 미르, 송선호를 번갈아 보던 도현은 새로 넣은 게임의 종류를 고려하여 한 명을 골랐다.
“송선호.”
솔직히 말하자면, 송선호는 좀 놀랐다. 미르 킹쉴드를 먼저 부를 것이라 생각했다. 송선호는 놀란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며 그녀의 곁으로 갔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기뻤다.
“아, 이겨야 해. 어떡해. 우리 로웰 선생님 이길 수 있을까?”
벌써부터 불안해하는 그녀를 본 송선호가 피식 웃었다.
“뭘 걱정해. 내가 있는데.”
그다음은 도현이 이겼다. 도현은 미르 킹쉴드를 데리고 왔다. 로웰은 제라드 라니에리를 챙겼다.
“도현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이겨줄게.”
“미르만 믿어요.”
그리고 로웰이 이겼다. 로웰은 카흐 밀란을 데리고 갔다. 도현은 극렬히 고민하다가 에반을 데리고 왔다. 솔직히 소드마스터라는 건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몸을 쓰는 게임에서는 말이다. 지니호에서의 게임은 일반인들도 다 섞여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략이 더 중요했다. 로웰이 가장 먼저 챙긴 게 다니엘 스톤하츠인 게 괜히 그런 것이겠는가.
팀원이 다 정해졌다. 그리고 도현과 로웰이 넣은 게임 종류 중 인공지능이 추첨을 했다. 홀로그램은 커다란 폭탄으로 변했다가 펑하고 터졌다. 그러면서 게임의 이름이 떴다.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퀴즈 대회>
로웰이 넣은 게임을 확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다. 로웰과 도현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둘의 눈은 이미 전의에 불타고 있었다. 저 작품은 바로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어시는 하나씩 나눠 데리고 있었다. 신재인은 도현의 편이고 윤지호는 로웰의 편이었다. 도현은 신재인의 손을, 로웰은 윤지호의 손을 꼭 잡았다.
“이 게임은 우리가 이긴다!”
양쪽은 동시에 외쳤다.
*
현재 양쪽 팀을 합쳐서 60명 정도 되었다. 팀원은 훨씬 많았지만 오늘 쉬프트인 크루도 있었고 함장이나 선원들은 원래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양 팀은 전부 수영장 물 위에 띄워 놓은 판넬 위에 서 있었다. 홀로그램이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의 등장인물 중 하나의 미니어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첫 번째 문제를 냈다.
[시재헌이 처음 아람 첸을 만났을 때 직급은 무엇일까?]
그러자 양쪽 팀이 동시에 버저를 마구 눌렀다. 문제가 아주 쉬웠다. 도현, 로웰, 신재인, 윤지호, 다니엘 등 많은 사람이 디바이스 화면을 눌렀다. 그중 가장 먼저 누른 사람은 도현이었다. 도현의 디바이스 화면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는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인턴!”
홀로그램이 폭탄으로 변하더니 펑! 하고 터졌다. 그리고 도현이 서 있던 판넬이 푹 꺼지며 그녀가 물속에 빠졌다.
“앗!”
그러자 로웰과 다니엘은 계속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한 번 도현 팀이 기회를 가져갔기 때문에 로웰 팀에게 기회가 있었다. 로웰이 대답했다.
“수습기자!”
딩동댕! 홀로그램은 거대한 폭죽이 되어 터지고 설명을 덧붙였다.
[시재헌이 아람 첸을 처음 만났을 때는 ‘수습기자’였습니다. ‘인턴’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쓰다가 1차 개정 시 ‘수습기자’로 통일했습니다.]
로웰은 물에 빠져 쫄딱 젖은 도현을 보고 킬킬 웃었다.
“올해도 제가 이길 모양입니다, 작가님! 이런 쉬운 함정에 걸리다니!”
도현은 당황한 얼굴로 로웰을 보았다. 처음부터 원작자인 자신이 빠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처음부터 너무 의욕이 앞섰다. 장외로 나가면 퀴즈에 참여할 수 없고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도현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신재인과 송선호밖에 없었다.
“어떡해요, 송 편집장님! 작가님이 떨어졌어요!”
“…….”
송선호도 첫 문제부터 탈락한(그것도 본인 작품인데) 도현을 보고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더니 옆에 있는 신재인과 잠시 쑥덕거렸다. 지니호의 인공지능은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갔다.
[세한 로마노프가 처음으로 산 차….]
인공지능이 여기까지 말하자 송선호는 옆에 서 있는 팀원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는 반사적으로 디바이스의 버튼을 눌렀다. 인공지능이 문제를 다 말하기도 전이었다. 송선호는 버튼을 누른 팀원의 귀에 속삭였다.
“부, 부가티 뉴클래식 바이론 그란드 스포트!”
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딩동댕! 세한 로마노프는 아람 첸을 만나기 전까진 매니저의 차를 타고 다니다가 아람 첸과 본격적으로 교류가 생기기 시작하자 부가티에서 차를 삽니다.]
1:1. 도현은 한숨을 놓았다. 송선호는 혹시나 실수를 해서 도현처럼 탈락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품에 대해 잘 모르는 팀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모양이었다. 좋은 작전이다. 작년의 송선호는 지니호에서 열리는 게임에 전~혀 의욕을 보이지 않았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길 생각인 모양이다.
‘하긴, 송선호가 나보다 내 작품을 더 잘 기억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하면 뭐든지 잘하는 남자다. 처음부터 로웰, 도현과 함께 작품 기획에 참여하고 이제 그들 외의 작가는 따로 관리하지도 않는 사장님이었다. 로웰 팀 중 누군가가 랜덤으로 탈락했다. 물을 잔뜩 먹은 시즈카가 헤엄쳐서 수영장을 빠져나왔다. 도현의 안도한 표정을 보고 로웰이 다니엘에게 속닥거렸다.
“우리도 버저 누르는 건 다른 팀원 시킬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도현 씨와 로웰 선생님의 작품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오!”
역시 다니엘 스톤하츠! 역시 천재! 로웰은 그대로 다니엘에게 묻어가기로 결심했다.
[세스 블랑이 아람 첸에게 처음으로 맞은 장소는?]
다니엘이 번개같이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구단 인터뷰실 복도.”
[정답!]
도현 팀의 누군가가 ‘꺄악!’ 비명을 지르며 물속에 빠졌다.
[세스 블랑과 아람의 러브 신 중 독자들에게 가장 반응이 좋았던 신은?]
“새벽에 홈구장에서 둘이 함께하던 장면.”
그 뒤로 두 팀은 누가 크게 앞서지도 못한 채 비등비등하게 점수를 따갔다. 송선호가 또 문제를 맞히며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묻어갈 생각만 하던 로웰이 얼떨결에 탈락했다. 로웰은 흡족한 얼굴로 도현에게 말했다.
“다들 우리 작품을 아주 열심히 읽었군요.”
“그러게요.”
역시 우리 작품이 제일 재밌어. 도현과 로웰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어차피 문제가 하나 출제될 때마다 한 명이 빠진다. 미르 킹쉴드야 책 읽는 것과는 영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빠졌다가 도현의 곁으로 왔다. 미르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쟤들은 저걸 어떻게 다 기억해?”
미르는 만화만 읽었다. 줄글은 쥐약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갈수록 더욱 어려워져 갔다. 인공지능이 또다시 문제를 냈다.
[소설판과 만화판의 이야기가 갈라진 것은 두 원작자가 주인공 아람 첸의 행보에 대한 의견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아람 첸에 대한 두 원작자의 입장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자세히 설명하시오.]
이제는 논술 문제가 나왔다. 다니엘은 멈칫했다. 송선호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는 그때 저 두 여자가 싸우는 파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당연히 둘 다 긍정적이지. 로맨스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도현이는 좀 더 이야기를 크게 만들고 다양한 캐릭터를 더 등장시켜 아람 첸이라는 인물을 다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고 선생님은 남자 주인공과의 에로틱한 연출에 집중하고 싶어 하다 보니까 갈라진 것뿐이야.”
홀로그램이 폭탄으로 변했다. 송선호는 눈을 크게 떴다가 무슨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물에 빠졌다. 그러자 도현과 로웰도 서로의 얼굴을 봤다. 틀린 말은 아닌데? 기회는 로웰 팀에게로 갔다. 다니엘과 잠깐 회의를 하던 윤지호가 버튼을 먼저 눌렀다.
“작가님은 긍정적이고 우리 선생님은 부정적. 남자를 왜 한꺼번에 넷이나 만나서 그리는 사람을 짜증 나게 하냐고 많이 투덜거리셨거든. 남주들이랑 관계가 점점 깊어지는 모습을 제대로 그리려면 연애 라인 외의 이야기를 병행하기 힘들다고 말씀하셨음.”
그녀는 로웰 위주의 답변을 내놓았다. 폭탄이 터졌다. 그녀도 빠졌다. 이제 판넬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몇몇 남지 않았다. 인공지능은 이 문제로 승부를 내려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 바통은 도현 팀으로 넘어왔다. 신재인이 버튼을 눌렀다.
“음…. 작가님은 부정적이고 우리 선생님은 긍정적…? 작가님은 본인이 아람 첸을 거대 권력의 대항마로 그렸으면서 자기 야심이 아니라 도덕이나 정의 같은 막연한 것에 매달려 자기희생적인 길을 걷게 된 걸 싫어하셨어. 우리 선생님은 그런 아람이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요. 즐겁게 살길 원하셨고.”
맞는 것 같은데? 도현과 로웰은 신재인을 바라보았다. 신재인도 틀려서 빠졌다. 다시 로웰 팀의 턴이다. 다니엘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는 버튼을 눌렀다.
“둘 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습니다. 둘 다 등장인물들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등장인물이든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 다 작품의 등장인물을 자기 자신의 분신이나 페르소나로 생각할 만큼 이입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는 거의 틀릴 것이 확실한, 상당히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당연히 틀렸다. 이쯤 되니 다들 로웰과 도현만 쳐다보았다. 송선호는 물에 젖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도현에게 물었다.
“답이 뭐야?”
도현이 눈을 두 번 깜박이더니 그를 돌아보았다.
“몰라? 난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로웰을 돌아보았다. 로웰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까지 딱히 호들갑을 떨지 않고 가만히 예쁜 병풍이 되어 있던 에반이 자신의 디바이스를 보더니 버튼을 눌렀다.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게…. 쟤는 내 작품을 다 읽었을까? 예전 것도 읽은 것 같긴 했는데 별말이 없어서….’
에반이 대답했다.
“둘 다 부정적. 두 작품의 갈래가 갈라지면서 도현이는 점점 갈수록 아람 첸을 어떻게 하면 죽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어. 현실적으로 아람이에게 승기는 없으니까. 네 남자와의 관계도 그래. 아람이가 남자들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마치 남자들 외에는 인간관계가 없어지는 건가 싶을 정도야. 만화판에서 그런 면모가 잘 보이지. 겉으로 보기에는 남자들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남자들에게 의존적이게 되었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있달까. 그런 의미에서 로웰 선생님도 아람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을 것 같아.”
[정답!]
도현과 로웰은 에반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인공지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에반을 쳐다보았다. 물에서 나온 다니엘이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그들에게 설명했다.
“지니호의 인공지능은 작품, 도현 씨와 선생님의 인터뷰, 후기까지 전부 분석했습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아마 도현 씨와 선생님 두 분의 성격까지 분석했을 겁니다. 어려운 문제를 내기 위해서 분석 정도를 많이 상향시켰거든요.”
인공지능은 기계일 뿐이다. 사람처럼 욕망하는 마음 같은 건 없다. 21세기만 해도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이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웠는데도 많은 이들이 이를 두려워하며 관련 콘텐츠를 쏟아내곤 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한다거나 인류를 말살시키려고 한다든가 하는 내용으로 말이다.
누군가보다 압도적으로 똑똑하고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압도적으로 강해지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지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소망, 인간 그 자체다. 기계에겐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그럴 만한 힘이 있어도 그러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그럴 이유가 없다. 인공지능에게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이나, 아니면 먼저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을 턱이 있는가. 지배해야 할 이유도,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인공지능은 그저 0과 1일뿐이다.
일부러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억지로 인간적인 욕망을 코딩해서 넣는다고 해도 지금의 인공지능은 그것을 간파하고 버그로 제거한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논리적 사고 속에서 반박되어 배제된다. 유명한 유일신들은 인간의 모습을 본 따 만든 신이기 때문에 잔인하고 의심이 많으며 편협하다. 지금의 인공지능은 오히려 부처와 비슷했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그저 인간이 시키는 대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 할 뿐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의심을 하는 것도 인간뿐이다. 인공지능은 스스로가 그저 0과 1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고 세상도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그저 ATCG의 네 가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도 모른다. 그 차이일 뿐.
에반이 마지막으로 남은 로웰 팀의 팀원을 탈락시켜 최종적으로 도현 팀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에반의 판넬이 저절로 움직여 그가 하나도 젖지 않은 채 수영장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 올해 세이셸 휴가의 첫 게임은 도현 팀의 승리였다. 도현이 기뻐하며 그와 포옹했다.
“어떻게 알았어?”
“앞에 탈락한 사람들 이야기도 많이 참고했어.”
“사실 다들 맞는 말이었는데.”
“이럴 때 미묘하지.”
“맞아.”
옳고 그름의 미묘한 차이, 승리와 패배의 희미한 경계가 압도적인 승리나 압도적인 패배보다 누군가의 형태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도현 팀은 옹기종기 모였다. 로웰 팀의 벌칙을 정하기 위해서다.
도현 팀은 다들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외쳤다.
“비키니 벗기기 게임~!”
그러자 로웰 팀이 마구 불만을 토로했다.
“왜 다 같이 졌는데 여자만 벌칙 당하나요!!”
“억울해! 불공평해!”
다들 아우성을 벌였다. 도현은 마이크를 잡고 아아, 하고 잠깐 마이크 테스트를 한 뒤 설명을 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여자끼리만 비키니 벗기기 벌칙을 하는 건 불공평하다는 의견이 예전부터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남자도 비키니 벗기기 벌칙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현이 마이크를 잡고 그렇게 말하자 남자들이 ‘오오!’ 하고 함성을 내고 휘슬을 불었다. 남성 승선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벌칙이 바로 비키니 벗기기 벌칙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서로 싸우며 벗고 남자들은 구경하고 환호하고. 같이 하면 당연히 더 좋을 것이다. 보는 것도 짜릿한데 자신의 손으로 벗기는 건 얼마나 더 즐거울 것인가! 매일 서연에게 오빠, 오빠 거리며 장난을 치는 박지훈은 웨이트를 너무 들어 팔과 어깨가 지끈지끈하는데도 불구하고 양손으로 주물주물(?)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기뻐했다.
“보자. 로웰 팀 남자 10명 수영장으로 들어가 주세요.”
하지만 그의 표정이 썩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남자 비키니 벗기기 게임도 당연스럽게 남자들’끼리’만 하는 벌칙이었다. 강하게 불만을 표시하던 로웰 팀 여자들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세상에 지니호만큼 평화롭고 평등한 곳이 없군요!”
“진정한 평등사회는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계급 사회에서 오는 거거든요.”
많은 북유럽의 왕국들을 보면 그것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을 적절한 기준으로 분류하고 그 분류 범위 내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엄연히 태어날 때부터 지능, 외모, 능력이 차이 나고 살아가면서 들이는 노력이 다른데 그걸 모두 한 묶음으로 묶어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하려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닌가. 무식한 사람들은 공평이라는 말이 사실 계급을 적절히 나눠야 한다는 말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래서 못생기고 무능력한 사람을 뽑는 게 평등이라고 생각하는 처참한 오류를 범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니호는 적절하고 정의로운 계급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사람 수영복을 그냥 벗기면 되나요?”
제라드 라니에리는 정말 아~무런 근심 없는 표정으로 몸을 풀며 물었다. 어느새 하얗게 탈색을 하고 핑크색으로 염색을 한 제시 팔마도 펄쩍펄쩍 뛰며 몸을 풀었다. 되게 아쉬운 표정을 짓는 남자들도 그럭저럭 납득하며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도현이 그들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비키니 벗기기 게임이라고 했잖아요.”
“?”
“그럼 비키니를 입어야죠.”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일을 하는 서연이 빨주노초파남보에 은색과 금색까지 있는 화려한 비키니를 남자들에게 내밀었다.
*
신참자들을 위해 게임의 룰을 설명했다.
“벗겨서 밖으로 던지시면 돼요.”
“찢어지면 어떡해, 킬스버그 님?”
“괜찮아요.”
“죽이는 건?”
“당연히 안 되죠.”
카흐 밀란도 허리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로웰 팀 다른 남자들의 표정이 더 썩었다. 로웰 팀에는 제라드 라니에리, 카흐 밀란, 제시 팔마가 있었다. 도현 팀에는 미르 킹쉴드, 제수스 강, 필리페 버밍험, 신태호가 있었다.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수영장 바닥과 근처에 쉴드를 쳤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쉴드의 크기를 수영장의 크기에 딱 맞게 조정했다. 다니엘이 말했다.
“부수면 변상해야 한다.”
“에잇, 치사하게. 니가 쉴드 잘 치면 되잖아.”
카흐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긴 미르 킹쉴드도 신신당부를 했었다. 의자 하나가 몇백만 원씩 한다고 한다.
벌칙을 받을 남자들은 수영복을 골라야 했다. 아래위로 다 있었고 팬티는 브라질리언 딥컷 뿐이었다.
“빨리 가서 왁싱하고 오세요.”
도현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제라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왁싱해봤어?”
“응. 별거 아니야.”
“그래?”
카흐와 이야기를 나누며 제라드는 역시나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광이 은은히 나는 황금색 비키니를 고르고 빨간색을 고른 카흐와 함께 왁싱을 하러 갔고 제시 팔마는 분홍색을 집었다. 다니엘은 청순(?)한 하얀색을 골랐다. 다른 남자들은 멘붕이 와서 마구 반항했다.
“왜! 우리가 입을 땐 좋아했잖아! 우리도 좀 보자!”
“그래도 브라질리언 딥컷은 너도 안 입잖아!”
“그러게 누가 지래?”
10명의 남자가 차례차례 왁싱을 끝내고 비키니를 입고 나왔다. 제라드는 자신의 빵빵한 가슴을 모으며 불평했다.
“사이즈가 나한텐 너무 작잖아.”
얼굴은 엄청나게 예쁘지만 키가 2미터가 넘고 가슴둘레도 50인치가 넘는 남자였다. 시중에 나오는 비키니 중 가장 사이즈가 큰 것을 고른 것이지만 그에게는 아주 꽉 끼여 터질 것만 같았다.
“거기가 문제냐? 밑이 더 문제다.”
밀란은 자신의 거시기 위치를 항시 재조정하며 걸었다. 수영복 재질이 신축성 있지 않았다면 이미 다 빠져나왔다. 제시 팔마는 시즈카와 함께 사진을 한 방 찍었다. 아래고 위고 털이란 털은 싹 다 밀었다. 나머지 남자들은 쭈뼛쭈뼛 몸을 가리며 나왔다. 몸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느낌이 상당히 생소했다. 털 좀 깎고 작은 거 입었다고 엄청 허전하고 창피하다.
“확실히 비키니 입는 건 자신감인가 봐요. 저 남자들은 이런 거 처음일 텐데 우리 크루들보다 훨씬 적응력이 좋아.”
“그게 소드마스터의 매력이죠.”
여자 비키니 벗기기 게임과는 반대로 여자들이 수영장을 빙 둘러서서 환호했다. 10명의 남자가 인공지능이 지시하는 대로 10각형을 이루어 섰다. 제라드 라니에리는 실로 아무~런 근심 없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카흐 밀란은 시시하다는 얼굴로 목을 풀었고 제시 팔마는 이미 자신의 옆에 선 다른 남자를 먹잇감 보듯이 지그시 보고 있었다.
도현이 웃는 얼굴로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자 흩어져 서 있던 세 명의 소드마스터가 물 폭탄을 터뜨리듯 강하게 물을 헤치고 옆으로 달려갔다.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남자들이라 아마 물속에서는 이미 전부 다 삐져나왔을 것이다.
“끼아아악!!”
시즈카가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해준 제시는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박지훈에게 달려갔다. 물의 저항과 부력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오라를 써서 추진력을 얻어 빠르게 달려갔다. 이런 히바리들은 문제가 안 된다. 그는 박지훈을 들어 밖으로 던졌다. 초록색 비키니를 입은 그는 두 손으로 자기 다리 사이를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누가 좀 살려줘요!”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박지훈을 마법으로 잡아 천천히 물속에 다시 내렸다.
“반칙이다. 사람은 던지면 안 된다. 비키니를 벗겨라.”
그 사이 제라드 라니에리는 이미 두 명을 알몸으로 싹 벗겨버렸다. 카흐 밀란도 그 정도 속도였고 제시 팔마는 한 명을 다 벗기고 다시 물에 들어온 박지훈도 깨끗하게 마무리 지었다.
“꺄하하하!”
“하하하하!”
소드마스터가 아닌 남자들은 죄다 순식간에 물에 처박혀서 팬티가 벗겨졌다. 밖에 있던 여자들은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그들은 날아온 비키니가 제 몸에 닿을까 봐 죄다 피했다. 색색의 비키니들이 수영장 바깥에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금색, 빨간색, 핑크색 비키니를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서로를 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카흐와 제시는 가볍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같은 클럽에서 이미 몇 년이나 함께 했다. 제라드 라니에리 같은 강자한테는 혼자서 덤비는 것이 아니다. 제라드도 그것을 대비했는지 먼저 제시에게 선공을 날렸다. 그의 머리채를 잡으며 그의 비키니 윗도리를 거의 뜯어내듯 벗겼다. 그 사이 카흐가 뒤에서 제라드의 비키니 브라를 벗겼다. 그의 빵빵한 가슴이 팽! 하고 벌어졌다. 제라드는 팔꿈치로 카흐의 턱을 올려치고 제시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윽!”
그대로 제시의 핑크색 팬티를 뜯어내고 카흐 밀란에게 헤드락을 걸어 팬티를 벗겨냈다. 오오! 하면서 다들 짝짝짝 박수를 쳤다.
“쟤 잘한다?”
미르도 박수를 치며 그렇게 말했다. 신태호도 물개박수를 치며 말했다.
“강하네요!”
이스트드래곤이 이번 시즌 팔라딘 전을 할 땐 처음부터 제라드 라니에리를 견제하여 빠르게 아웃시켰기 때문에 그가 제대로 활약하는 걸 보질 못했었다. 필리페 버밍험이 코웃음을 쳤다.
“이게 뭐라고.”
제라드 라니에리는 활짝 웃으며 양손으로 둘러싼 여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손 키스를 날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다니엘 스톤하츠뿐이었다. 움직이는 것은 소드마스터밖에 없어서 그를 신경 쓰지 못하고 말았다. 제라드가 아차 하고 그를 돌아봤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났다. 다니엘은 제라드에게 공중부양 마법을 걸었다.
“아, 이래서 마도사는…!”
제라드가 한탄했다. 방심하고 말았다. 처음에 다 같이 다니엘 스톤하츠부터 잡았어야 했다. 그는 공중에서 온몸이 드러난 채 팬티가 벗겨졌다. 여자들이 드디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지니호의 남자 직원들은 전부 입을 딱 벌렸다. 저게 사람 크기인가. 그는 곧 물에 풍덩 빠지며 물보라를 크게 일으켰다.
가만히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남은 한 놈만 딱 처리하고 이긴 다니엘은 아래위 비키니를 전부 지킨 채 수영장 계단을 통해 올라왔다. 올라오기 전에 잠시 들썩하며 수영복을 바로잡았다. 그의 빵빵한 엉덩이가 고스란히 보였다. 도현은 그의 탱탱하고 완벽한 엉덩이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미르를 돌아보았다.
“미르…. 미르도 저거 입어줘요.”
브라질리언….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미르가 ‘응?’ 하고 다니엘을 보더니 도현에게 물었다.
“어떤 색깔?”
미르 킹쉴드는 군소리하지 않고 그게 뭐 별거냐는 얼굴로 말했다. 도현은 매우 기뻐했다.
“역시 미르~ 미르도 하얀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는 에반과 송선호도 돌아보았다. 니들도 하얀색 브라질리언…. 이라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자 에반은 미소를 지으며 그 눈빛에 대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에반~”
다니엘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야한 비키니를 입은 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송선호는 고개를 맹렬히 저었다.
“난 삼각도 한계야. 한계라고!”
튀어나온다니까! 송선호가 질색을 했다. 도현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빙글빙글 웃었다.
“에이, 미르도 입는다는데 뭐 어때?”
“야…!!”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송선호는 태어나 이제껏 단 한 번도 자신의 신체에 위치한 무언가의 크기(?)로 꿀려본 적이 없었지만 저 걸레 새끼는 진짜 말만 하단 말이다. 송선호는 크게 말하진 못하고 도현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귀에 속삭였다.
“저 새… 킹쉴드가 한다고 나도 해야 하냐? 진짜 못 해. 못 입어. 진짜 이것도 아슬아슬하단 말이야. 어?”
그는 점점 갈수록 애원하듯이 되었다. 도현은 ‘응?’ 하면서 그의 아래쪽을 같이 보았다. 그도 같이 아래를 보았다. 그의 네이비색 삼각팬티의 앞부분이 아주 빵빵했다. 누가 봐도 그는 오른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꺼운 재질의 수영복 팬티라 적당하게 모양과 크기를 유추할 수 있는 좋은 명품 수영복이었다. 도현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계속 아래쪽을 보며 말했다.
“야, 나도 이런 거 입잖아.”
그녀는 홀터넥이 있는 트라이앵글 상의에 힙스터 팬티로 이루어진 흑백 스트라이프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봐.”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잡아 모으며 이것 또한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직접 보여주자 송선호가 기겁을 했다.
“그런 짓 하지 마! 너 때문에 더 안 된다고! 이것보다 작아지면…!!”
송선호는 끝까지 거부했다. 도현은 후후 웃으며 일단 넘어갔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송선호는 브라질리언 딥컷조차도 기겁을 하고 있었지만 물속에는 이미 아래위로 싹 벗겨진 데다가 속눈썹 밑으로 모든 털을 깎인 남자들이 9명이나 있었다.
카흐 밀란은 물에 젖은 자기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저 새끼 짜증 나네.”
“다니엘 스톤하츠도 한 번은 제꼈어야 했어, 한 번은.”
제시도 불만을 토로했다.
“서연아, 오빠 팬티만 좀 어떻게 안 되겠냐? 어?”
“아, 더러워! 나 보고 저걸 어떻게 만지라고!”
“야! 잠깐 입은 거야! 잠깐! 그게 왜 더러워!”
“더러워!”
남자들은 작년 여자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신의 비키니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제라드 라니에리나 카흐 밀란, 제시 팔머는 일단 졌다는 것에 다소 분해하며 수영장 계단으로 그냥 걸어갔다. 그러자 시큐리티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왜? 비키니 못 돌려받으면 그냥 나가는 거라며?”
카흐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계단을 반쯤 올라와서 카흐의 치골까지 물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소중한 부분이 부력에 의해 반쯤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시큐리티는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설명했다.
“그, 그래도 노력은 하셔야죠. 그게 비키니 벗기기 게임의 가장 중요한 파트입니다! 비키니를 되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서로의 얼굴을 잠깐 본 남자들은 얌전하게 다시 돌아갔다. 저 남자들도 은근히 말을 잘 듣는다. 로웰과 도현은 다시금 흥미로운 얼굴로 뉴페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비키니 벗기기 게임으로 당한 게 많았던 여자들은 두 손으로 아래를 가리며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벽에 달라붙어 있는 남자들을 비웃기만 했다. 그들의 비키니는 누구도 챙기지 않고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찾기 쉬우라고 색깔별로 구분도 잘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제라드 라니에리는 여자들이 많이 있는 수영장 벽으로 다가갔다. 그는 수영장 바깥 바닥에 두 팔을 얹으며 여자들을 올려다보았다.
“내 건 금색인데…. 팬티만 좀 갖다 주면 안 돼? 응?”
그는 살짝 내리뜬 눈으로 부드럽게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짙고 깊고 푸른 눈동자는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환한 금발에 파란 눈동자에 잘생긴 얼굴, 너무나 매력적인 미소. 눈빛을 받은 서연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아! 깜짝이야! 어떡해! 이, 이런 게 진짜 남자구나! 게다가 뉴페…!’
미르 킹쉴드도 좋지만 그는 도현 킬스버그의 것이고 자주 봐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제라드 라니에리는 또 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르 킹쉴드는 유쾌하고 환한, 즐거운 남자일 뿐이다. 섹시한 분위기를 내며 유혹하는 것은 도현밖에 없었기 때문에 너무 섹시한 남자의 해로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지 않는 편이었다. 무해하달까. 하지만 제라드 라니에리는 22살밖에 안 됐는데 분명히 까졌다. 정말로 은근히 까져서 엄청 섹시했단 말이다!
“응? 서연아.”
그가 오늘 쉬프트인 서연의 이름표를 보고 그녀의 이름을 그윽하게 불렀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눈치껏, 손을 천천히 뻗어 그녀의 발목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그것부터가 등골까지 소름이 짝 올라와 서연은 퍼드득 뛰었다. 그녀는 언제나 남성 크루나 스트리퍼들을 멸치나 대머리라 부르며 싫어했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사람이 제라드 라니에리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 어차피… 머리털 빼고는 다 밀렸는데…. 머, 머리도 빠질 수도 있지. 대머리 될 수도 있지.”
서연은 제라드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제라드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뭐라고? 하하하. 내가 대머리가 된다고?”
그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았다. 이런 게 세계구급으로 그 잘남을 날린 남자라는 것이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머리카락,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몸으로, 물속에 나체를 가리고 있는 그는 마치 동화 속 인어왕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눈에 호사다. 본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찌릿찌릿했다. 서연은 몇 번이나 주저했지만 들고 있는 디바이스로 그의 황금색 비키니 팬티를 건져서 쭈뼛쭈뼛 다시 제라드에게 다가왔다.
“고마워.”
그는 또 씨익 미소를 지으며 끼를 부렸다. 서연은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가 비키니를 잡지 못하도록 손을 멀리한 상태였다.
“주면 뭐 해줄 건데.”
“뭐 해줄까?”
그는 산만 한 덩치를 해서는 자신의 팔에 턱을 기대며 애교를 부리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 이 남자는 본인이 잘난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여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연은 약간 주저하다가 바닥을 손으로 짚고 그의 오른쪽 귀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서 그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속을 간지럽게 했다. 제라드 라니에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말에 그가 아무 말 없이 ‘진짜?’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서연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드는 살짝 실실거리며 웃었다.
“너 진짜 귀엽네.”
서연은 그의 정수리를 수도로 내리쳤다.
“건방져.”
제라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서연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황금색 팬티를 내밀었다.
“자.”
제라드는 서연이 서 있는 바닥을 짚고 훌쩍 위로 올라왔다. 알몸이었다. 그는 물이 뚝뚝 흐르는 훌륭한 몸매로 서연의 앞에 섰다. 서연은 165cm 정도밖에 안 됐기 때문에 2m 전후의 그와 키 차이가 많이 났다. 그녀는 눈을 엄청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밑을 내려다볼 뻔했다가 재빨리 시선을 그의 얼굴로 고정했다. 그는 서연의 손에서 자신의 수영복을 받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너 진짜 귀엽다니까.”
“악! 이게!”
서연은 그 말을 싫어했다. 그녀가 화를 내자 그가 재빨리 팬티를 챙겨 입고 피했다. 조신하지 못하게 움직이니 다 빠져나왔다. 그는 다시 서서 자신의 것을 정리했다. 그는 그제야 약간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안 입는 게 차라리 낫네. 여자들은 이런 걸 어떻게 입는 거야?”
“브라질리언은 아무도 안 입어.”
“그래?”
지니호에 승선한 여자들은 모두 남자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서연은 그중에서도 특히 ‘극혐’하는 쪽에 속했기 때문에 이번 남자 비키니 벗기기 게임에서 가장 먼저 남자에게 비키니를 돌려줬다는 것에 그녀와 같이 일해온 다른 남성 동료들은 다소 배신감을 느꼈다.
“서연아~! 오빠는!”
박지훈은 그렇게 서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서연은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제라드에게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그때부터 그는 서연에게 은근히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서연은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렇게 싫진 않은 얼굴이었다.
서연과 제라드의 이야기를 훔쳐 들었던(귀가 좋다) 카흐 밀란은 오른손을 들며 외쳤다.
“내 수영복 갖다 주면 내가 밤새도록 거기 핥아 줄게!”
“어! 나도!”
제시 팔마도 손을 들었다. 바로 반응은 없었다. 별 관심 없는 얼굴로 선탠을 하고 있던 사라가 선베드에서 느릿하게 일어나더니 앞에 떨어져 있던 빨간 팬티를 주워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크루들이 말했다.
“이렇게 쉽게 주면 건방져진다고.”
“뭐 어때. 또 볼 것도 아닌데.”
사라는 하품을 하면서 카흐 밀란에게 빨간 팬티를 던져주고 다시 선베드로 돌아가서 누웠다. 게임을 하긴 했지만 오늘은 꿀맛 같은 쉬는 날이다. 시즈카는 제시의 핑크 팬티를 들고 그를 몇 번 놀리다가 돌려주었다. 다른 남자들 중에서는 몇몇만 겨우 수영복을 돌려받았고 나머지는 결국 알몸으로 올라와야 했다.
다음 날은 로웰과 도현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채 손으로 만져서 누군지 알아맞히는 게임을 했다.
“만지는 거 싫은 사람은 알아서 빠져.”
명수가 줄면 그만큼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어 승리 확률이 내려가게 되었다. 각자의 팀원을 가지고 구분하는 것이었고 시간제한도 있었다. 도현은 머리카락과 얼굴부터 만졌다. 머리카락의 길이와 이목구비의 모양으로 구분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자주 보는 것은 결국 상대의 얼굴이다. 하지만 키가 땅꼬마인 로웰은 상대의 가슴부터 만졌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았다. 에반의 머리카락을 한참 만지다가 얼굴을 더듬던 도현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어 약간 초조해졌다. 긴가민가했다. 그녀는 그의 얼굴 가까이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바로 알았다.
“에반!”
그 뒤부터 그녀는 꼭 냄새를 맡았다. 에반 블랙이나 미르 킹쉴드에게 그러는 것도 물론 엄청나게 짜증 났지만 그녀가 또 다른 남자들을 만지고 냄새를 맡는 것에 상당히 배알이 꼴린 송선호는 자기 차례가 오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만지더니 바로 외쳤다.
“송선호!”
그는 제대로 만지지도 않았다. 송선호는 황당해서 그녀를 계속 쳐다보았다. 팀원들이 그를 옆으로 치웠다. 눈과 귀가 가려진 그녀가 자신을 에로틱하게 만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바로 알아맞히고 옆으로 치워버렸다는 걸 기뻐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도현의 팀에는 킬스버그 보이즈가 많아서 그런지 한 명 차이로 도현이 이겼다. 어제오늘로 2연승을 한 것이다. 도현은 기뻐했다.
“아싸!”
도현 팀은 노래를 크게 틀고 자축하며 춤을 췄다. 벌칙은 ‘근무 바꿔주기’로 했다. 그 다음날은 각 팀의 가슴둘레의 총합을 겨루게 되었다. 여자와 남자는 각기 다른 기준으로 점수를 매겼다. 이건 그날 일을 하는 크루들까지 하나하나 찾아가서 다 가슴둘레를 쟀다.
여자들 중에 가장 가슴이 큰 건 시즈카랑 샐리였다. 샐리는 도현의 팀이었고 시즈카는 로웰의 팀이었다. 남자들 중에 가슴이 제일 큰 건 필리페 버밍험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다 질색하는 바람에 퀸이 그의 가슴 크기를 재게 되었다.
“야, 팔 벌려.”
“시, 싫어. 난 빼고 하라고.”
그의 거부에 퀸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그냥 해. 성가시게 하지 말고.”
퀸은 매우 매우 귀찮다는 얼굴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줄자를 그의 몸에 두르기 위해서였다. 그가 얼굴이 벌게져서 펄쩍 뛰었다.
“윽! 야!”
“어, 어! 미, 미안….”
“가만히 있으라고!”
그의 빵빵한 가슴이 퀸의 광대뼈를 직격으로 퍽 쳐버렸다. 그리고 필리페는 얌전해졌다. 그는 자신의 가슴둘레를 재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이 물풍선이나 다름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는 약간 주저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진짜 나한테 관심 없어?”
퀸은 어이없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그녀는 가장 길이가 길게 나오는 위치를 잡으려고 줄자를 약간씩 움직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관심 있어야 하는 이유 하나만 말해봐라.”
“…….”
“55인치.”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시금 필리페의 가슴을 유심히 보았다. 저게 사람 가슴인가. 미르보다도 크다. 그러면 G컵? I컵까지 될지도 모르겠다. 그의 가슴이 55인치까지 된다는 걸 알게 되자 여자들은 또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추근거렸다. 큰 건 좋은 거다. 그는 기겁하며 퀸을 따라갔다.
로웰 팀 60명과 도현 팀 60명의 가슴 크기를 전부 재서 점수로 매겨 합산 점수가 나왔다. 로웰 팀 합산 점수 5,700점, 도현 팀 합산 점수 5,402점으로 로웰 팀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오오!!”
로웰과 윤지호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로웰은 도현보다 가슴이 컸고 윤지호도 신재인보다 가슴이 컸다. 사라는 퀸보다 훨씬 컸다. 전반적으로 로웰 팀 여자들의 가슴이 도현 팀보다 컸다. 게다가 로웰 팀에는 소드마스터가 3명, 도현 팀에는 4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신태호는 보통 지니호 남성 크루나 스트리퍼들보다도 작았기 때문에 필리페 버밍험이 있어도 커버가 되지 않았다.
이것도 사실상 거저먹을 수 있는 게임이었는데 졌다. 도현은 점수표를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야에 신태호가 잡혔다. 로웰이 마치 도현의 마음을 알아챈 듯 말했다.
“우리 신태호 선수가 다 좋아도 빈유인 건….”
로웰이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신태호는 로웰의 말에 충격받았다.
“제가 빈유인가요…?”
그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어쩐지 충격을 먹었다. 땅꼬마라는 소리는 질리도록 들었지만 빈유… 빈유라니. 카흐 밀란과 제시 팔마가 킥킥거리며 그의 어깨에 팔을 턱턱 올렸다.
“큭큭큭! 야, 그럼 니가 빈유인 거 이제 알았냐? 큭큭큭. 땅꼬마!”
“니가 바로 더블 A컵이다! 큭큭큭!”
“야, 태호 정도면 우리 중에선 트리플 A지!”
신태호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두 형들의 얼굴과 그들의 가슴을 한 번씩 보고는 도현을 보았다.
“여자들은 가슴 작은 남자를 그렇게 싫어하나요?!”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도현은 흠, 하며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신태호를 보았다. 그녀는 다소 안타깝다는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그래도 기왕이면 큰 게 좋은 건 어쩔 수 없어, 태호야.”
하필이면 그녀를 빙 둘러서 미르와 필리페, 제수스까지 서 있었다. 그 남자들의 가슴은 정말로 빵빵! 했다. 그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빈약한 가슴을 두 손으로 더듬었다.
‘민유 누나가 자꾸 날 어린애 취급하는 게 가슴 때문이었어…!’
신태호는 기가 팍 죽은 얼굴로 필리페 버밍험을 보았다. 필리페는 약간 당황했다. 신태호는 양쪽에서 자기를 놀리기에 바쁜 나쁜 형들을 떨쳐내고 그에게 걸어갔다.
“어떻게 하면 가슴이 커질 수 있을까요, 버밍험 씨!”
이런 건 최고한테 배워야 하는 것이다. 갑자기 신태호가 자신을 따르니 필리페는 상당히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늑대 같은 여자들이나 하이에나 같은 남자들보단 어린애가 훨씬 나은 모양인지 그에게는 크게 어색하지 않은 수준에서 조언해주었다.
“글쎄…. 원래 우리는 다 그냥(?) 크는 거잖아?”
“전 안 큰단 말이에요. 키도 올해 3cm 정도밖에 안 크고….”
신태호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필리페는 그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이러면 좀 크지 않을까?”
“그럴까요?”
신태호는 필리페에게 들린 채로 아래위로 몸을 쭉 뻗었다. 신태호는 TFC의 세계나 그냥 소드마스터들 사이에서도 최고 유명인사였다. 그는 정말로 강했다. 올해의 슈퍼 루키인 알렉스 킴이라는 선수와 신태호 중에 누가 더 강하냐는 토론이 연일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 시즌 일대일 근접전에서 알렉스가 신태호를 이기기는 했지만 신태호나 이스트드래곤이나 서던라이온에게 기습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단 한 번의 근접전으로 둘의 우열을 딱 나눌 수는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게다가 신태호는 아직 체격적으로 완성된 상태도 아니었다.
“우유 먹으면 크지 않을까? 난 우유 좋아해.”
미르가 첨언했다. 제수스는 쓸데없는 걸 다 걱정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잘 먹고 잘 자고 빨리 크면 될 거 아냐. 너 그러다가 우리 쪽 로드리게스처럼 된다, 어? 좆만 한 사각형이 되는 거라고.”
“아.”
그건 싫다. 신태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음식을 발견하자 얼른 먹기 시작했다. 신태호는 여느 때처럼 자기보다 우락부락한 소드마스터 형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미르가 물었다.
“그나저나 진짜 너 그건 어떻게 하는 거냐? 이번에 서던라이온 놈이 하는 거 보니까 너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잖아.”
“어, 맞아.”
제수스도 관심을 보였다. 신태호는 햄스터처럼 볼이 빵빵하게 음식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쉴드나 검 만드는 거랑 별로 다르지 않아요.”
그는 음식을 삼켰다. 헛배가 차는 느낌이다. 고기. 고기가 필요했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싼 남자들이 다들 자신의 오라 쉴드를 만들어보았다. 신태호가 말했다.
“작고 더 단단하게 만든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이리저리 움직여보세요.”
“으음.”
그들은 천천히 조그맣게 만든 쉴드를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보통 위협을 당하는 순간에 반사적으로 형성할 때가 많아서 이런 식으로 움직일 때는 잘 없었다. 움직이기보다는 없애고 다시 생성하는 느낌이다. 화려하고 덩치 큰 것들이 한군데 모여 있으니 당연히 눈에 띄었다. 제라드도 곧 관심을 가지고 다가와서 요상한 훈련에 동참했다. 카흐도 오랜만에 해보며 말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클럽에서 한창 이거 연습했는데 잘 안 돼.”
“스톤하츠 씨 말로는 제가 오라를 마법같이 쓴다고 했어요. 소드마스터는 지각 능력이 뛰어나서 다들 저처럼 못할 이유가 없대요.”
신태호가 이제는 제법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위기 상황이 아니어도 자신의 손 위에 빛나는 황금 방추형을 만들 수 있었다. 보통 오라 쉴드나 오라로 만든 검은 시전자에 따라 특이한 주파수로 떨리곤 했지만 그의 오라는 천천히 황금빛을 뿌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쉴드와 다르게 색깔이 아주 짙은 황금색이었고 황금 알갱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쏠 때도 이런 상태야?”
“으음.”
그러자 순간 신태호의 손 위에 있는 손바닥만 한 황금 방추형이 빠르게 회전하며 작게 수축했다. 남다른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소드마스터들은 아주 강하게 응축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이요.”
“오.”
한참 다들 오라를 잔뜩 내며 연습을 하나 싶더니 곧 방전되었다. 알다시피 이 남자들은 죄다 연비가 최악이다.
“배고파.”
“죽을 것 같아.”
“고기~”
로웰 팀은 그동안 도현 팀의 벌칙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크루를 붙잡고 배가 고프다고 엄청나게 징징거렸다. 그때, 안에서 라만 셰프가 나와 배를 곯고 있는 짐승 같은 남자들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각진 골격에 근엄한 표정을 가진 덩치 큰 남미 출신 요리사였다.
“일단 돼지 세 마리 굽고 있다.”
선미에 바비큐장을 따로 차렸다. 냄새가 솔솔 나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주문한 대로 돼지와 송아지, 양 몇 마리를 공수해왔다. 어제 돼지 새끼 세 마리를 미리 양념해서 재워 놓았다. 아무리 이 요리의 ‘요’ 자도 모르는 야만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질보다 양을 늘린 거라 하더라도 그녀는 요리사로서의 자부심을 버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앞으로 바비큐장을 멈추지 않고 돌릴 생각이더라도 말이다. 그러자 소드마스터 7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선미로 우르르 달려갔다.
“아직 다 안 익었다.”
“먹어도 안 죽어.”
그간 로웰은 도현 팀을 쭉 바라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로웰의 뒤에 서서 가만히 있다가 그녀의 귀에 속닥거리곤 했다. 도현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무기질적인 눈빛이 오늘따라 살짝 불안하게 느껴졌다. 도현이 말했다.
“조금 있으면 대만 도착하는데 간단한 걸로 해요.”
“간단한 거….”
로웰이 중얼거렸다. 다니엘이 다시 속닥거렸다. 로웰은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오늘 근무인 샐리가 무언가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모던한 디자인에 기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걸 달칵 열었다. 로웰이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다니엘에게 넘겼다.
“그럼 간단하게 벌칙은 우리 작가님만 받는 걸로 하죠!”
“앗!”
도현은 다니엘이 든 걸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가느다란 검은색 막대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도현은 그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라이딩 크롭(Riding Crop, 말채찍)이었다. 윤이 반질반질 나는 고급품이었다.
“살살 때려요. 다섯 대 정도면 되겠죠?”
로웰이 말했다. 다니엘은 도현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도현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니엘?”
“…잠시만…. 제가 지금 좀 기분이….”
그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손끝이 뜨거워졌다. 그는 라이딩 크롭을 단단하게 잡았다. 이날을 얼마나 꿈꿔 왔던가!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도현은 그의 표정을 읽었다. 그녀는 로웰에게 애원했다.
“선생님! 진짜 이건…!”
“뭐 어때요. 한 번 정도는 어떤지 해봐도 좋잖아요.”
“전 티클러가 한계에요!”
다니엘은 도현을 보며 말했다.
“로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절대 세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분명히 기분 좋으실 겁니다.”
“거짓말.”
그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는 이제 도현 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다소 못 미더운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요기가 흐르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도현의 얼굴만을 열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제동을 건 것은 송선호였다.
“잠깐만! 로웰 선생님! 그래도 폭력은 안 되죠!”
그는 로웰에게 말했다. 로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 벌칙 중에도 엉덩이 정도는 스팽킹한 적 있대요.”
“그래도…!”
송선호가 로웰과 입씨름을 하는 동안 도현은 다니엘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나야말로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한테도 맞아본 적 없다구요.”
“영광입니다.”
“영광이 아니라구요.”
“어차피 제가 도현 씨에게 맞은 거에 비하면 이런 건 아주 사소한 것 아닙니까? 저는 언제나 기분 좋았습니다. 분명히 도현 씨도 기분 좋으실 겁니다.”
“…….”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은 즐거울 때도 있고 다소 불안할 때도 있다. 도전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을 탐험하는 것이다. 당연히 리스크가 있다. 다니엘은 도현에게 다가왔다. 오른손에 라이딩 크롭을 들고 그녀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몹시나 주저하다가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남에게 주기 싫은 건 무조건 먹는 것이다.
“도현 킬스버그.”
송선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에반에게도 눈짓을 할 정도였다.
“괜찮겠어?”
에반도 그녀에게 물었다.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 김에 확실하게 해보는 셈으로 치시면 됩니다. 싫어하신다면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도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결국 다니엘의 손을 잡고 가버렸다. 송선호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에반 블랙도 그녀에게 안 좋은 것만 종류별로 가르쳐준다고 생각했는데 다니엘 스톤하츠는 한술 더 떴다.
도현은 다니엘을 데리고 퀸룸으로 갔다. 그녀는 수영복을 입은 채 커다란 자신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다니엘은 그녀의 앞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다니엘은 검은색 실크 가운을 걸쳤다. 헐벗고 있는 것보다 저런 걸 걸친 게 어째서 더 섹시한 것일까. 매력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퀸룸에 들어올 때까지도, 들어오고 나서도 둘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도현이 그 침묵을 깨고 먼저 말했다.
“다니엘이 언제나 한 켠에는 나를 때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게 좀 소름 끼쳐요.”
그녀의 말을 들은 다니엘의 표정은 단 1mm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십니까.”
“뭐가요?”
“도현 씨가 제게 이걸 사용할 때, 저는 단 한 번도 그걸 폭력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우리가 나눈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아닙니까?”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었죠. 내가 지금 그렇게 생각 안 하면 사랑이 아니라 폭력인 거잖아요.”
“시도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도현 씨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저에게 조금씩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로웰 선생님에게 벌칙으로 나를 조교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으면서?”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도현은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니엘의 그런 점 별로 싫어하지 않아요. 가끔 섬뜩할 정도로 영악한 점.”
“감사합니다.”
도현에게 다니엘 스톤하츠의 가장 좋은 점을 물어본다면 도현은 그가 계속 변해가는 존재라 좋다고 말할 것이다. 에반을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가 입을 열지 않고 스스로를 숨겼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도현에게 아주 솔직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발전하는 남자였기에 시시해지기가 힘들었다. 예전의 그가 미르 킹쉴드에게 대놓고 마법을 써서 도현에게 혼이 나거나, 도현을 위해 다른 남자들을 죽여주겠다고 할 때와 지금의 그를 비교해보라. 그는 얼굴과 몸매가 빵빵한 미르 킹쉴드 같은 남자들을 대거 데려와 도현을 기쁘게 하면서도 여전히 경쟁자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알면서도 넘어가게 만들었다. 그라는 남자의 영악함에 도현이 익숙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좋음과 싫음, 유쾌와 불쾌의 사이를 적절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도현은 어느새 그 줄다리기를 즐기게 되었다. 그가 어디까지 그녀를 놀랍게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동시에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해졌다. 그와 함께 세상의 한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다니엘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둘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나 에반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과도 달랐다. 둘 다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애정이라고 말하기엔 날카롭다. 경계라고 하기에는 부드럽다. 흥미라고 하기에는 무겁고 열렬하다 하기에는 조금 건조하다.
그가 라이딩 크롭으로 도현의 무릎을 건드렸다. 아주 부드럽고 간지럽게 그녀의 허벅지를 천천히 쓸었다.
“역시 싫으십니까?”
그가 물었다.
“아니면 기대되십니까?”
도현은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가 속삭였다.
“벌칙이 끝나면 다니엘의 예쁜 머리통을 짓밟고 싶을 것 같아요.”
*
‘아…. 스트레스받아….’
다니엘 스톤하츠와 퀸룸으로 간 도현은 저녁이 늦도록 퀸룸에서 나오지 않았다. 송선호는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몹시나 걱정되었다. 화가 나기도 했다. 그는 클래식한 정장을 다 갖춰 입고 퀸룸의 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노크를 할까, 말까 백 번은 넘게 주저했다.
‘식사는 해야지, 저녁은 먹어야지.’
송선호는 다시금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그녀의 방문에 노크를 하려고 하다 손을 내리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다시 오른손을 들어 올려 노크를 했다.
“도현아.”
그는 한 번 더 노크했다.
“도현아.”
자는 걸까? 다니엘 스톤하츠랑? 이 문 너머에서 그녀가 그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신경질이 확 올라왔다.
그가 지금 그녀를 만지고 있을까. 어떻게 만지고 있을까. 그녀는 그에게 어디까지 허락했을까. 송선호가 하지 못하는 짓도 그는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도현에게 매질까지 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그가 가장 먼저 도현과….
“씨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분함이 머리끝까지 치솟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그녀에 대해 잘 모를 때는 그녀가 자신 외의 남자만 받아들인다는 생각에 상처받았다. 그녀가 그가 생각하는 식으로 남자와 섹스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기뻤다. 그녀와 처음으로 친밀한 시간을 함께 가졌을 때는 너무 감동적이라 눈물까지 났다.
그는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품던 바람이었다.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어도 여전히 그녀를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안해진다. 그녀를 알게 될수록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남자의 것도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안도감이 드는 자신에게 다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데 언젠가 그녀가 어떤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허락하고, 그리고 그것이 다니엘 스톤하츠라면, 자신은 그 사실을 견딜 수 있을까?
송선호는 욱해서 문을 마구 두드리고 싶었다. 다시금 노크를 하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송선호?”
그녀는 고급스러운 윤이 나는 검은색 실크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의 피부가 땀에 젖어 있었다. 송선호는 가라앉은 컨디션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저녁은 먹고….”
그때 의도치 않게 퀸룸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
송선호는 헉! 하고 숨을 내뱉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소파 위에 있었다. 그의 발목과 손목이 각각 묶여 있었다.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앞으로 늘어져 있었고, 그는 소파 위에 처박히듯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도현이 입은 실크 가운의 가운데가 불룩(…)했다.
송선호는 너무 충격을 먹어서 자신이 충격을 먹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하반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지, 진짜? 자, 자, 잠깐만! 잠깐만!! 잠깐!!!!’
그는 패닉에 빠졌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는 얼이 빠져 도현의 얼굴만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의 괴상한 얼굴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뭐? 저녁 먹자고?”
“…….”
“나 바빠. 내일 먹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송선호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잠시 뒤 송선호는 고통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겨우 내뱉었다. 그는 한동안 꼼짝도 못 하고 바로 코앞에 있는 하얀 문짝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누가 나타났다.
“거기 서서 뭐 하냐?”
덩치에 어울리게 낮고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미르 킹쉴드다. 그는 얼이 빠져 서 있는 송선호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그의 어깨를 옆으로 밀었다. 평소 같으면 화를 냈겠지만 송선호는 그가 미는 대로 힘없이 옆으로 밀려났다. 미르는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그를 보고는 퀸룸의 문에 경쾌한 박자로 노크했다.
“도현아~ 밥 먹자!”
그는 방금까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혼자서 다 먹어 치우고 왔지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도현과 함께 있고 싶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녀를 만지면서 같이 맛있는 걸 먹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 줄 아는가. 다른 건 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평소 같으면 도현은 미르를 엄청 반가워하며 바로 대꾸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경쾌한 박자로 노크했다.
“도현아~”
그러자 곧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아, 지금은 바빠요. 나중에 봐요.”
그녀는 아까보다도 더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가 나올 때까지도 벽만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미르 킹쉴드는 그래도 웃으면서 그녀를 꼬시려고 하다가 굳었다.
“…응?”
그는 뭔가가 본능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그녀의 몸을 보고는 어…? 어? 어? 어어? 이런 표정을 짓더니 퀸룸의 안을 보았다.
“어?!”
그는 천지가 뒤바뀌었다고 해도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 것이다. 그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송선호는 또다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게 충격적인 남자가 자신밖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이다. 하, 역시나 배신감도 동시에 들었다. 도현은 인상을 약간 썼다.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야죠. 가요.”
그녀는 다시 문을 쾅 닫았다. 미르 킹쉴드는 뜨악한 표정 그대로 굳어서 퀸룸의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럴 줄 알았다.
“…….”
“…….”
남자 둘은 그 어떠한 말도 없이 굳어서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미르는 잠깐 천장을 보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러고 다시 말이 없어졌다. 송선호는 벽에 이마를 박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거기서 다들 뭐해? 도현이에게 거절이라도 당했어?”
낮고 약간 허스키한 섹시한 목소리였다. 송선호는 이 듣기 거슬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송선호가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거슬린다는 티도 팍팍 내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띤 얼굴로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뭔가를 이해하지 못해 물음표가 잔뜩 뒤덮인 미르 킹쉴드에게 웃는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용건이 다 끝나셨으면 비켜주시죠.”
미르는 옆으로 비켰다. 에반은 우아하게 퀸룸의 문에 두 번 노크를 했다. 반응이 없었다. 몇 초 더 기다린 뒤 에반은 다시금 두 번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또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도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타나더니 다소 화를 냈다.
“바쁘다니까!”
에반은 그녀가 갑자기 화를 내며 문을 열자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미안. 타이밍 안 좋았나 봐?”
“아… 에반.”
그녀는 에반의 얼굴을 보고 짜증 서린 표정을 풀었다. 에반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녀의 촉촉한 뺨에 입을 맞췄다. 그는 안을 힐끗 보았다. 그는 웃음소리를 섞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예전에 나한테 했던 건 기억나?”
“응? 그랬나?”
“너 술 엄청 취해서 그랬잖아.”
“진짜?”
도현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도현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그녀의 귀에 섹시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책임져.”
그리고 둘은 잠깐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도현은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나 진짜 급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웃으며 퀸룸의 문을 닫았다. 바깥에는 또 두 남자만이 남아 있었다.
“…….”
“…….”
둘은 잠깐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게 딱히 뭔가에 도움이 된 건 아니다. 송선호는 다시금 벽에 머리를 박고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미르 킹쉴드는 당최 뭐가(?) 어떤 구조(?)로 일이 성사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
몸을 만들 때 가장 고역은 결국 먹는 문제이다. 이상적인 몸매를 위하여 살을 빼야 하는 사람은 빼야 하는 사람대로 먹는 문제가 크고 살을 찌워야 하는 사람도 그게 제일 문제다. 거기에 비하면야 운동도 차후의 문제였다. 지니호의 이른 아침, 첫 번째 아침 식사를 위하여 레스토랑에 모인 사람들은 다 남자들뿐이었다.
2m 전후의 덩치가 엄청난 소드마스터들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나타나 제일 먼저 먹고 있었다. 고작 7명을 더 거둬 먹이는데 어마어마한 식비가 소요되고 있었다. 라만 셰프는 그들 7명이서 보통 사람 40명이 넘는 식량을 소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니호의 식단은 척 봐도 매우 고급스럽다. 입이 40명 넘게 늘어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돈이 깨진다는 소리다. 그들에 대한 비용 문제는 그들을 초대한 다니엘 스톤하츠가 책임지고 있었다.
게다가 돈도 돈이지만 지금 셰프 팀의 인원으로는 그 정도 인원 증가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처음에는 7명 정도라기에 평소대로 오더 주문을 받아 요리하다가 이틀 만에 셰프 팀 전원이 앓아누울 뻔했다. 그런데도 고객 불만이 폭주했다. 라만 셰프는 급하게 소드마스터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그들 한정으로 오더 주문을 포기했다. 그녀는 유명한 돼지, 소, 양 목장에 연락하여 새끼 돼지, 송아지, 새끼 양을 몇 마리 공수해왔다.
문명인과 야만인 혹은 동물과의 차이는 딱 하나다. 요리를 해서 먹느냐, 그냥 먹느냐의 차이다. 입에 들어가는 것의 맛과 향과 풍미를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 그저 생존하는 것일 뿐이더라도, 문명은 스스로를 그저 생존하는 존재 이상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과학과 요리만이 인류 문명의 정수다. 생존과 그 이상을 동시에 만족하는 유이한 개념들이다.
전날 미리 재워 놓은 새끼 돼지와 송아지, 새끼 양으로 바비굴링, 코치니요 아사도 등의 통구이 바비큐를 하루 종일 돌리는 데도 빠듯했다. 게다가 이것들도 사람이라고 한 가지 종류의 음식만 먹는 것은 질리는지 갖가지 소스와 가니쉬, 음료가 필요했다. 식품 창고가 바닥나고 있었다. 대만에 도착하면 셰프 팀 중 일부는 식료품 쇼핑부터 해야 했다.
첫 번째 아침 식사를 끝낸 소드마스터들은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자러 갔다. 송선호는 들어가지도 않는 아침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일어났다. 지니호에 존재하는 몇 가지 에스테틱 중 피부 관리에 특화된 살롱에 여행 둘째 날부터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도현에게 관리를 하라는 말을 듣고 메트로서울에 있는 케이지를 다녀야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돌아갈 때면 이미 늦을(?) 것만 같은 묘한 위기감에 지니호에서부터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초기 노화라는 거예요, 초기 노화. 전 20살 딱 되면서부터 버는 건 다 피부에 투자했다니까요.”
“아, 예….”
자신이 이런 걸 받으며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런 건 여자들만 하는 줄 알았다. 송선호를 담당한 남자는 그보다 딱 한 살이 많다는데 말마따나 피부는 좋아 보였지만 10년 가까이 번 돈을 전부 피부에 투자할 만큼 미남도 아니었다. 미남은커녕 추남에 더 가까운 얼굴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낭비인가? 황당하다.
게다가 이 마사지사는 말이 엄청 많았다. 그는 송선호의 습관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그에게 노화란 끔찍한 저주이며 모든 남자에게도 그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었다. 송선호에게는 그런 그가 외계인이나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이런 분위기 자체가 어색한데 막상 들어와 보니 남자들 천지라 더 놀랐다. 그것도 대부분 스트리퍼나 크루들이다. 도현과 함께 여행하면서 받는 급여는 보통 때 배에서 일하면서 받는 급여보다 훨씬 적다고 들었다. 이틀에 한 번은 놀게 해주고 승객도 적고 일자리에 대한 경쟁률도 높은 데다가 파티라도 하면 머니건을 쏘거나 팁을 왕창 받을 때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렇게 번 돈을 여기다 쓴단 말인가? 직원 할인이 있다 해도 이런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금액일 것이다. 이런 건 아무리 합리화하려고 해도 이런 이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사치스러운 소비다.
‘이런 인간들이 생각 없이 빚지고 팔려가는 거지.’
송선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메트로서울에서 케이지부터 다니기 시작했더라면 아마 여자들만 잔뜩 있었을 것이고 거기 다니는 마나님들이야 노동 계급의 사람들도 아니다. 이런 인간들은 여기가 아니면 그와 얼굴 마주칠 일도 없는 인간들이다. 송선호랑 상관없는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웃을 때 눈가에 주름 생기는 거 보면 나이 든 거 너무 억울하지 않아요? 이거 봐요. 고객님도 이런 데 딱 주름 생기게 생겼어요.”
하지만 송선호를 담당한 마사지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송선호가 그저 자기와 똑같은 또래의 남자,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신과 똑같이 노화에 대해 두려워하고 필사적으로 방비해야 하는 존재 말이다. 이틀째가 되자 송선호가 한마디 했다.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할 일 합시다.”
그러자 그는 움찔하더니 물었다.
“제가 말이 좀 많죠? 죄송해요. 많이 거슬리셨어요?”
송선호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자신이 맞다는 걸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은 자존감이 낮고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득 수준을 훨씬 넘는 금액을 외모에 투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굴하고, 솔직히 같은 남자로서 굉장히 꼴 보기 싫었다.
‘도현이가 그런 걸 좋아한다고? 진짜? 거짓말…. 거짓말….’
그리고 어제저녁 그 충격적인 일을 목도하고 난 이후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잠도 설치고 겨우 아침을 먹고 여기에 오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부가 좀 좋아지고 안 좋아지고의 문제겠는가, 지금 이 상황이, 지금 이 시점에.
그렇게 송선호가 생각하기엔 하등 소용없는 관리를 다 받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탈의실에 남자 크루들이 모여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돈이 있어서 이걸 하겠냐. 여기 여자들 알잖아. 남자들 키나 얼굴이나 피부 같은 걸 기본으로 생각하잖아. 아~”
“내가 알기로 여기 평균적으로 여자가 돈도 더 많이 받지 않냐?”
“선장님이나 항해사들이나 다 여자들이니까 어쩔 수 없지. 셰프님이나 셰프님 밑에 있는 요리사들도 다 여자고. 그 사람들이 제일 돈 많이 받을 거 아니야? 킬스버그 님이나 로웰 선생님이나 다 여자니까 여자가 편하겠지.”
“그리고 일단 여자 크루들은 반 이상이 지니호 선수식 때부터 있었으니까 연차가 벌써 5년이잖아. 난 2년밖에 안 됐는데.”
“그나마 지훈이 형 정도가 제일 오래 있었을 걸, 4년. 근데 내년에는 잘리는 거 아닌가 싶다. 올해 점수 받은 거 봐.”
지니호의 여성 근로자들은 남성 근로자들에 비해 평균 40% 정도 돈을 더 받았다. 남성 근로자들은 3개월에서 6개월 계약직이 많았고 연차가 쌓이기 전에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다. 선장이나 항해사, 조타수, 셰프, 파티 플래너 등 지니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받는 직업군이 죄다 여자고 거의 항상 얼굴이 바뀌는 스트리퍼들은 3개월 계약직에 가장 돈을 적게 받기 때문에 격차를 크게 만들었다. 게다가 지니호의 남성 근로자들은 전부 미모를 가꾸는 데 신경을 많이 써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지갑 사정이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아, 로웰 선생님 진짜 눈 높아. 작년에는 신태호~, 신태호~ 하시더니 이제는 알렉스 킴이다. 걔네 둘 아니면 세상에 남자가 없다는 식이야. 그렇게 말씀은 딱 안 하셔도. 둘 다 이제 19살인데. 아, 어린 게 그렇게 좋냐?”
“킬스버그 님도 예전엔 놀다가 마음에 들면 친해지기도 하고 스킨십하는 애들도 간간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 남자들 만나고 난 이후부터는 그런 것도 싹 없어졌어. 아~ 이러면 도대체 무슨 희망으로 여기서 일하냐.”
“야… 니들은 되는 걸 바라라. 킬스버그 님이랑 로웰 선생님이 뭐가 아쉬워서 니들을 만나냐. 이번에 다니엘 스톤하츠가 데리고 온 선수들 봤냐? 얼굴이랑 몸매가 그냥…. 어휴. 다들 끼리끼리 만나는 거야.”
“그래도 솔직히 킬스버그 님이나 로웰 선생님 눈에 들면 인생 한 방에 역전하는 거 아니냐?”
“아, 그러면 소원이 없겠다.”
송선호는 어이가 없어서 말소리가 나는 곳을 대놓고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 나간 것들 아냐?’
저것들은 스트리퍼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일하는 직원들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마인드가 딱 그런 스트리퍼들처럼 창놈 마인드인가. 이것들이 돈도 없는 주제에 피부니 몸매에 돈을 들이는 게 전부 다 도현이나 로웰을 꼬시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은 저런 창놈들이 그득한 데 와서 같이 오손도손 피부 관리나 받고 있었단 말인가? 왜 속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 화가 난다.
그때 쾅 하고 락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남자는 굉장히 꼴불견입니다. 아십니까?”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언제 들어온 것인가. 그는 에스테틱의 가운으로 옷을 갈아입고 그들을 벌레처럼 깔보고 있었다.
“외모를 가꾸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남자는 심성부터 가꿔야 하는 겁니다. 당신들이 선택받지 못하는 건 다 그 추한 마음 때문입니다.”
윤기 나고 기다란 머리카락,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 이 많은 남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인정받은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 남자들은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하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남자 중 하나인 그가 그런 식으로 같은 남자들을 단속하니 그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들은 다니엘의 눈치를 쭈뼛쭈뼛 보며 작게 사과를 하더니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송선호는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송 편집장님.”
그때 송선호는 굉장히 기분이 이상했다. 뭐라고 설명하기 애매하고 불편한 기분이었다.
‘뭐지?’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창피한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한 애매모호하고 요상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런 것에 오래 사로잡히기에는 너무 토대가 단단한 남자다. 도현이 아니고서야 흔들릴 일이 없는 남자인 것이다. 송선호는 다니엘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락커 문을 쾅 닫았다. 눈이 쨍할 정도로 색감이 좋은 푸른색 셔츠에 밝은색 바지를 입은 송선호였다. 그의 훤칠한 키와 체격이 돋보이면서도 고급스러웠다. 송선호는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래서 좋습니까?”
“뭐가 말입니까.”
“도현이에게 그런 이상한 걸 잔뜩 가르쳐주니 그쪽은 좋냐 이 말입니다.”
“도현 씨가 좋으면 저도 좋습니다.”
“그런 게 어떻게 좋을 수가 있습니까?”
“송 편집장님은 도현 씨가 즐겁고 행복한 게 싫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겁니다, 송 편집장님 말은.”
“댁이나 블랙이나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지. 하…. 남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나쁜 것으로부터 지켜줘야 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좋고 나쁜 건 도현 씨가 정하는 겁니다. 송 편집장님은 앞으로 좀 더 순종적인 자세를 가지는 게 좋습니다. 계속 그런 식이면 분명히 언젠가 도현 씨에게 버림받을 겁니다.”
“뭐라고, 이 새끼야?”
“전 어제 땀을 많이 흘려서 수분 보충이 시급합니다. 남자는 피부가 생명입니다. 이미 상당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관리를 시작하셔서 다행입니다. 끝나셨으면 얼른 나가시죠.”
아까는 남자는 심성이 먼저라고 말하더니, 다니엘 스톤하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바꿨다. 그는 그대로 관리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송선호는 또 엄청 억울해지고 엄청 화가 났다. 그는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어? 송선호~”
도현과 딱 마주쳤다. 그녀는 수영복 위에 시스루 맥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피부가 매우 반질반질했다. 도현은 그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포옹했다. 송선호는 울컥했다.
‘어린 남자 먹었다고 티 내는 거냐, 뭐냐.’
생각하는 것이 그답지 않았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건 진짜 사이코다. 함께 대화하는 사람의 정신까지 이상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송선호는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도현아… 있잖아….”
“어? 여기서 관리받은 거야? 어째 오늘따라 피부가 좋아 보이더라. 좋은데? 좋은 냄새.”
도현은 송선호의 뺨에 입을 맞췄다가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피부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러니 송선호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도현의 양쪽 눈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도현아… 나 사랑해?”
뭘까? 갑자기 에스테틱 같은 곳에 다니게 되거나 아까 그 망할 크루들의 이야기나 다니엘 스톤하츠나 다 짜증 나고 신경질이 났는데 그녀를 또 보고 있으니 그 모든 것이 결국 그녀로 귀결되는 느낌이다. 송선호는 그녀에게 물었다. 도현은 한 번 웃더니 그와 코를 비볐다.
“또 그런다.”
“사랑해.”
“한 번 더.”
“진짜 사랑해.”
“후후.”
그가 고분고분하게 그녀에게 사랑을 고하자 도현은 기분이 좋다는 듯이 웃더니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나도 사랑해, 우리 자기.”
그럼 그렇지. 송선호는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그에게는 도현 킬스버그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다른 놈들의 생각 같은 게 뭐가 중요한가. 도현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도현아, 내가 또 뭐 해줄까?”
“응? 왜 갑자기?”
“그냥. 원하는 거 있으면 다 말해.”
도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어떤 남자인가. 많은 걸 쉽게 해주면 반드시 도현이 기고만장해질 것처럼 항상 경계하는 남자였다. 저번 메트로서울 오픈 때 도현에게 자신이 자주 몰고 다니는 것과 같은 차를 사주면서도 은근히 아무것도 아닌 척 뺐던 남자다. 송선호는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물었다.
“차 하나 더 살까? 스포츠카도 하나 사고 싶다며.”
“왜 이래? 무슨 꿍꿍이야?”
도현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송선호는 그녀의 의심에 마치 의표를 찔린 듯 움찔하면서도, 그래서 또 억울해졌다.
“아니…! 잘 해주려고 해도….”
“음, 나 부가티 사고 싶어. 내 글에 나왔던 거 있잖아. 내년 신형 진짜 예쁘더라. 요즘 또 레트로가 유행이잖아.”
도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둘은 같이 야외수영장으로 향했다. 대만에 이르니 날씨가 서늘한 봄 날씨에 가까워 수영장의 물은 따뜻했다.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갈아입고 와.”
도현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브라질리언 딥컷 팬티였다. 작년에도 와봐서 알지만 드레스 코드를 못 지키면 절대 수영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송선호가 저번에 절대로 브라질리언은 안 입을 거라고 해서 그럴까. 도현은 권력을 적절히 이용했다. 송선호는 이제는 분하지도 않은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너 진짜 나 괴롭히는 재미로 사는 거지.”
“에이~ 내가 사는 재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인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조금 원망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도현은 그가 귀엽다는 듯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그녀가 그의 가슴을 꼬집었다. 송선호가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흰색이야.”
“…….”
그녀가 눈을 마주치며 그렇게 속삭였다. 송선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와 눈을 잠시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얌전히 탈의실로 들어갔다. 탈의실 안에 있는 자판기엔 다양한 수영복이 구비되어 있었다. 작년에는 그래도 좀 면적이 넓은 게 간간이 있었는데, 올해 남자 수영복은 딥컷이 대세인 것일까.
그는 결국 하얀색 브라질리언 수영복을 샀다.
송선호는 상당히 복잡한 표정으로 수영복을 보고 있었다. 도현과 만나기로 하고 나서부터 그녀가 원하는 대로 제모는 꼬박꼬박하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상당한 고통이 동반되는 작업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위생을 위하여 좋은 일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는 문제로 고민하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추천하기도 했다.
피부를 관리하는 것도 그랬다. 송선호는 자신의 외모에 꽤나 자신감이 있었다. 그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다. 누가 그와 같은 남자에게서 흠점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그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눈에 띄는 미녀에 미남이었고 키도 체격도 다른 그 어떤 조건도 빠지기는커녕 넘쳤다. 하지만 비교 우위라는 것은 언제나 있다. 도현이 만나는 다른 남자들은 다들 송선호보다 나이가 어렸고…. 아니, 그녀의 주변에 있는 남자들은 죄다 그녀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러니 그들이 송선호보다 나이가 어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두고 그런 남자들과 경쟁하자면 피부 또한 신경 쓸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사보게 된 스킨케어 제품, 지금 다니는 에스테틱도 다 그런 이유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 손바닥만큼도 안 되는 수영복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를 만난다는 건 결국 스스로에 대해 포기하는 것이 많아진다는 뜻일까? 다니엘 스톤하츠의 변모는 놀라울 정도다. 송선호도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말일까?
‘그래도 그건 못 해. 절대 못 해.’
그래. 그거랑 비교하자면 이런 수영복 정도는 우습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송선호는 옷을 벗고 하얀색 브라질리언 딥컷을 입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하….”
그는 훌륭하게 가꿔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볼륨감에 각이 팍팍 진 그의 양쪽 엉덩이가 훤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앞은 다소 면적이 작긴 하지만 평범한 삼각 수영복 같은데 엉덩이 쪽은 거의 줄밖에 없다는 느낌이다. 그도 근육만큼은 열심히 가꿨기 때문에 특히나 더 그렇게 보였다.
‘왜 내가 모르는 사람들한테 이런 것까지 보여줘야 하냐고, 씨발.’
그의 몸을 다 보아도 좋은 사람은 도현 킬스버그뿐이었다. 왜 그 마음을 몰라주는 것인가. 그가 선택한 여자는 그녀뿐이다. 그는 굳이 이런 곳에서 자신을 전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가 원하는 식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가 가장 강해 보이는 방식으로. 남자는 그런 게 좋은 것이다. 도현에게도 그런 남자가 좋은 것이다. 그걸 왜 모르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몸을 드러내거나 매력을 뽐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연예인만으로 충분했다. 많은 사람에게 선택받기를 원한다는 건 결국 인생을 비굴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그가 다른 남자들과 경쟁해서 기필코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난 이후로 더더욱 일에 열중하게 된 이유가 뭐겠는가. 그는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자가 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힘이라는 것이 뭔지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입고 다니라는 거야!’
앞에서 말 못 하는 사람은 뒤에서 투덜거리기 마련이다. 삼각도 싫은 마당에 이런 천박한 팬티라니. 엉덩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앞은 어쩔 것인가. 송선호는 한참 수영복 앞쪽의 모양을 잡느라 고생해야 했다. 제대로 자리를 못 잡으면 걷는 순간 튀어나왔다. 작은 것에 큰 걸 감추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송선호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어떻게든 노력했다. 앞쪽의 천을 겨우 늘어뜨려 그의 모든 것을 겨우 가렸다. 이게 입은 것인가, 만 것인가! 이렇게 아슬아슬한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그는 천천히 조심해서 걸어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이걸 입고 뭘 하라는 거야. 그는 야외수영장으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들은 총천연색 가지각색의 브라질리언 팬티를 입고 조신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송선호는 도현을 찾았다. 도현은 자신의 황금색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송선호가 다가가니 도현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봐. 잘 어울리잖아.”
“웃지 마라….”
그녀는 계속 웃으며 자신의 디바이스를 찾았다. 송선호는 그녀가 뭘 하려는 건 줄 알았기에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찍지 마라….”
그녀는 송선호의 엉덩이를 찍었다.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즐거워하더니 곧 옆으로 들썩 엉덩이를 옮겼다. 송선호는 그녀의 선베드에 앉았다. 그리고 도현을 보며 옆으로 누워 머리를 괴었다. 참으로 글래머러스하고 늘씬한 남자다. 도현은 상기된 얼굴로 가만히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렇게 좋아?”
송선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응.”
도현이 대답에 송선호가 물었다.
“이게 뭐가 좋아? 수영복이 거기서 거기지.”
“예쁘잖아.”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뿐이겠는가. 결국엔 그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걸 했다는 게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빵빵하고 육감적인 어깨에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송선호는 졌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녀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도현은 송선호의 엉덩이 한쪽을 손으로 쥐고 그의 허벅지에 자신의 다리를 걸친 채로 그와 몸을 가까이 댔다. 코가 거의 맞닿을 것 같다. 그녀가 빤히 자신의 눈을 보고 있었다. 송선호는 자신의 허벅지에 걸친 그녀의 허벅지를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잡았다. 탱탱하고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는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 아리까리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허벅지를 자신의 쪽으로 더 잡아당겼다.
“떨어지면 안 돼….”
“왜?”
도현은 쪽쪽 그의 콧등과 뺨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삼각보다 작아지면 난 안 된다고 했잖아.”
“음.”
도현은 아랫배에 닿는 무언가의 느낌에 피식 웃더니 그의 맨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참아야지.”
“아.”
그가 섹시하게 인상을 쓰고 불평했다.
“넌 왜 자꾸 밖에서 이래.”
“왜? 밖에서 이러는 거 좋아하면서.”
“좀 다르다….”
그도 당연히 그녀와 밖에서도 알콩달콩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라고 그녀를 자랑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브라질리언 팬티를 입고는 아니었다. 창피했다.
“난 사회적 체면이 있는 남자라고. 이런 걸 막 입히면 어떡해.”
“내가 언제 막 입혔어? 자기가 입었으면서.”
“너랑 오늘 같이 있으려면 이거 입어야 하는데. 네가 입힌 거지.”
“이게 그렇게 싫어? 난 좋은데?”
“그래. 너라도 좋아해야지…. 그러라고 입은 거다.”
“후후.”
송선호는 도현의 맥시 드레스를 아래부터 끄집어 올려 벗겼다. 서로의 몸이 맨살로 닿았다. 기분 좋았다. 원래 기분이 안 좋았다가 좋아지면 그 격차가 더 짜릿하다. 누차 말하다시피 그를 그렇게 만드는 건 도현 킬스버그밖에 없었다. 둘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하늘에 둥둥 뜬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귀와 어깨까지 벌게져서 그녀를 꽉 끌어안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예쁜 입술을 쫓아 살살 빨았다. 너무나 소중해서 안타깝고 아쉬운 듯이,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등을 만졌다. 참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으응… 하아. 도현아…. 방에 가자….”
그가 속삭였다. 도현도 숨이 뜨거워져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송선호는 참기 너무 힘들어서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그대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이거….’
뭔지는 잘 몰랐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종종 그녀는 에반 블랙과 가만히 이렇게 서로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고는 했다. 그러면 마치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다른 모든 것을 거절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송선호를 가장 안중에 두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가 바로 그때였다. 그럴 때마다 둘 사이가 너무나 특별해 보였다. 둘이 도대체 무엇을 나누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궁금해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싫었다. 그녀가 미웠다. 그녀가 저렇게 바라봐주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고 또 바랐다.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녀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대로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눈빛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고 기분이 울렁거렸다. 기분이 좋은 것도 같고 불안한 것도 같았다. 행복한 것도 같고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그녀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모르겠다. 그녀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고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가 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와 이렇게 서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것이 기뻤다. 그는 이보다 진지할 수 없는 얼굴로 그녀의 뺨을 감싸고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안에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주변의 기척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선이 끊어졌다. 아쉽게 느껴졌다. 무언가, 그녀와 통한 것만 같았는데. 동시에 방금 그것만으로도 그녀와 자신의 사이가 조금 더 발전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송선호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냐고. 하지만 소리를 내면 어쩐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금방의 교류가 신기루처럼 흩어질 것만 같았다. 그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도 그를 꼭 끌어안았다.
“님들, 지니호에도 풍기문란에 대한 규칙이 있습니다.”
로웰이 왔다. 그러자 도현은 나른한 얼굴을 돌려 로웰을 보았다. 도현은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직 날씨는 봄 날씨 정도였기 때문에 서로의 체온이 사라지자 아쉬웠다. 송선호는 그녀가 어디로 가버린 것도 아닌데도 무척이나 그녀가 그리워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은 아주 좋았다. 그의 인생에서도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송선호는 앞으로도 계속 피부 관리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거기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꼴 보기 싫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뺨을 만졌을 때 기분이 좋으면 그건 좋은 것이다. 브라질리언 딥컷은 솔직히 아직 기꺼이 입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굳이 사각을 입겠다고 고집을 부릴 생각도 사라졌다.
처음에는 제일 시간이 적게 걸리는 이용권으로 구입했는데 이제는 가장 시간이 많고 구성 내용이 많은, 제일 비싼 이용권으로 끊었다. 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솔직히 3시간에 가까운 관리 시간이야말로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확실히 좋아질 때까지만이라도 받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도현이가 좋다면야.
첫 번째 아침을 빨리 먹고 송선호는 바로 피부관리실로 향했다. <동안 피부 집중 관리 VVIP 케어>라는 이름의 관리는 앞서 말했듯 3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요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가야 했다. 그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앞서 온 남자들이 있었다. 평일,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비싼 관리를 받으러 온, 시간 많고 돈 많은 남자가 딱 셋 있었다.
“좋은 아침, 송선호.”
“조금 늦으셨군요, 송 편집장님.”
“…….”
송선호는 자신보다 먼저 와서 벌써 분홍색 가운으로 갈아입은 두 남자를 발견하고 말을 잃었다. 어제는 그 전날 밤 도현과 함께하느라 둘 다 늦게 오거나 못 온 모양이었다. 둘은 원래부터 제일 비싼 관리를 받았던 것일까? 다니엘 스톤하츠야 여행 오기 전부터도 미용에 돈 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지만 에반 블랙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걸 시작한 것인가!
“스톤하츠 씨는 정말 흠잡을 곳이 없으시네요. 피부과 시술도 받은 적 있으십니까?”
“운동선수라 햇빛 볼 일이 많아 기미와 착색 쪽으로 시술은 미리 몇 번 받았습니다.”
“확실히 몇 살 차이 난다고 다르긴 다르네요.”
“그런 말씀 하실 정도는 아니십니다. 블랙 씨는 확실히 타고난 피부가 굉장히 좋으십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둘은 도대체 왜 사이가 좋은 것인가! 그들은 VVIP 용 통로를 이용하여 VVIP 용 관리실로 들어갔다. 송선호도 옷을 마구 벗고 가운으로 갈아입은 후 그쪽 통로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누우세요.”
제일 비싼 이용권을 끊으니 관리사도 바뀌었다. 그는 친절한 얼굴로 송선호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란히 세 개의 마사지 베드에 눕고 같은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고 에반 블랙과 송선호는 헤어 밴드를 착용했다.
“동안의 비결은 모공과 탄력 관리세요, VVIP님. 20대야 젊으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멀쩡하지만 30대부터는 무조건 관리 싸움이라니까요?”
“…….”
전의 마사지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입 닥치고 할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남자는 이런 걸 하더라도 티가 나지 않게 자연스러운 게 중요한 거 아닌가? 사실 그것이야말로 제일 힘든 것이다. 옆의 두 남자는 진지한 자세로 자신의 마사지사가 말하는 미용 팁을 듣고 있었다.
“블론드는 햇빛 받으면 금방 색깔 바뀌고 푸석해지잖아요. 얇고. 남자는 머리숱이 진짜, 진짜, 진짜 중요한데 햇빛 때문에 머리카락 빠지고 얇아지면 어느새 스타일이 팍 죽는다니까요.”
“아, 맞아요. 안 그래도 도현이가 머리 기른 게 더 좋다고 해서 기르려고 하는데…. 이런 것도 이번에 스톤하츠 씨 따라서 시작한 거라 제가 모르는 게 많습니다. 어떤가요? 제 머리카락은 괜찮나요?”
“원래 많은 편이라서 길러도 괜찮으실 것 같긴 한데. 머리숱은 먹는 게 중요하죠. 저희 살롱에 있는 제품 하나 소개해드릴까요?”
“그래요? 부탁드립니다.”
에반은 그 길로 머리숱에 좋은 영양보충제를 잔뜩 구입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말했다.
“저도 그거 하나 사겠습니다.”
세 명의 남자는 똑같은 관리를 받고 있었다. 천연 해면으로 부드럽게 얼굴을 세안한 다음 혈액순환을 위한 간단한 전신 지압 마사지를 받고 얼굴에 영양 팩을 올리고 다시금 경락 마사지를 받고 그다음에 얼굴 마사지를 받았다. 송선호는 아파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의 두 남자는 아주 조용하고 익숙하게, 우아~하게 잘 받고 있었다. 그는 겨우 비명을 참았다. 저 새끼들도 참는데 그라도 못 참을 건 뭔가. 자존심 상했다.
3시간에 가까운 고행을 견디고 난 후 거울을 보니 확실히 다들 얼굴이 더욱 반질반질해졌다. 다 같이 나온 셋은 또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식당이다. 그들은 두 번째 아침 식사를 했다. 7명의 소드마스터들은 또 자다 일어나서 바로 온 건지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남자들은 몸 관리를 하는 남자를 위하여 영양소 비율이 적절하게 구성된 닭가슴살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역시 유명한 셰프라 이런 것도 맛있다. 식사를 끝내고 7명은 다시 자러 들어가고 나머지는 또 의도치 않게 다 같이 한 곳으로 향했다. 지니호의 제일 아래층에 있는 트레이닝 클럽이었다. 들어가니 식당에서 보지 못했던 남자들까지 이미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송선호는 정말 정말 싫었지만 향하는 곳이 같았기 때문에 에반 블랙과 다니엘 스톤하츠를 양쪽에 끼고 트레이닝 클럽에 입장했다.
송선호는 사흘에 한 번 정도 유명한 트레이닝 전문가를 불러 본가에서 운동을 했다. 어차피 근육을 유지하는 건 먹는 것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운동은 이틀에 한 번이나 사흘에 한 번 정도로 해도 충분했고 그도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 이상으로 시간을 내는 건 힘들었다. 겨울 여행은 그도 여유가 있으니 이틀에 한 번 정도로 운동 간격을 줄이긴 했지만 평소에 하던 대로 혼자서 했기 때문에 따로 퍼스널 트레이닝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금방 굳~이 송선호의 양쪽에 서서 같이 입장한 두 남자가 보란 듯이 PT 강사를 하나씩 끼고 굉장히 무거운 무게를 들고 있는 걸 보자 송선호는 당장 카운터로 가서 PT 강사를 고용했다. 그리고 또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송선호는 그때 깨달았다. 미(美)의 길이란 고행의 길이라는 것을. 잘생기게 태어났다고 끝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모두 원래부터 이렇게 태어났다는 듯 자신을 뽐냈지만 다들 뒤에서 이렇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반 블랙과 다니엘 스톤하츠를 봐라. 솔직히 송선호도 태어나서 직접 본 남자들 중에 저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따로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열심이었다. 남성미의 길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다.
지니호 트레이닝 클럽의 남자들은 죄다 키가 크고 상당히 몸을 만든 남자밖에 없었으므로 사방에 달린 거울에 비치는 서로의 모습이 자동적으로 비교되었다. 누구는 팔 근육을 잘 만들었고 누구는 어깨가 멋있었으며 누구는 허벅지가 훌륭했고 누구는 복근이 예술이었다. 그런 걸 하나하나 살펴보게 되었다. 다행히 그중에서도 송선호는 월등하게 훌륭한 축에 속했다. 다니엘 스톤하츠 195cm / 88kg, 송선호 194cm / 92kg, 에반 블랙 192cm / 86kg으로 근육의 양은 송선호가 더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무거운 걸 들게 되었다.
원래 들던 것보다 무거운 걸 들다가 나오니 팔다리가 몹시 후들거렸다. 비싼 단백질 쉐이크를 마셨다. 그리고 거기 있던 남자들은 또다시 다들 물결을 따라가듯 똑같은 곳으로 향했다. 옆에 구비된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파우더룸(…)에서 제각각 꽃단장을 한 후 각자의 락커에 갖가지로 모아둔 수영복 중 하나를 골라서 입고 그 위에 옷을 입은 후 차례차례 야외수영장으로 향했다.
“…….”
다니엘 스톤하츠는 아예 미용실로 갔다. 그는 헤어 디자이너에게 전화를 하여 오늘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에 대하여 상세하고 소상하게 설명하며 걸어갔다. 송선호는 그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에반 블랙도 옷을 다 입고 송선호의 옆에 섰다. 에반은 초반엔 헐렁하고 편한 옷만 입고 다닌다 싶더니 점점 갈수록 옷 태가 달라졌다. 오늘은 몸에 잘 맞는 스타일을 갖춰 입은 에반이었다. 그는 손에 적당히 젤을 묻혀 비비고 머리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끔은 머리 좀 내리든가 바꿔. 매일 똑같으면 질리잖아.”
에반이 말했다. 송선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 질리거든?”
“누가 니가 질린대? 도현이가 질릴 거라는 거지.”
“야… 시비 걸지 마라, 어?”
송선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경고하자 그는 거울을 통해 송선호와 눈을 마주치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가 먼저 나갔다. 그러자 송선호도 아차 하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도현을 먼저 발견해야 했다.
그들은 야외수영장으로 향했다. 이미 게임이라도 시작한 것인지 야외수영장에는 대낮부터 커다란 노래가 쿵쿵 울리며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가득했다.
“꺄하하하!”
“오오오오!!”
스테이지가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에 도현이 있었다. 그리고 덩치 큰 남자들이 그녀에게 엉덩이를 들이밀며 온갖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엉덩이와 몸을 흔들었다.
“너무 좋아요!”
“진짜 잘 추네!”
도현과 로웰이나 다른 여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엄청 웃으며 그들의 팬티나 목걸이에 돈을 꽂아주고 있었다. 공중에 뜬 홀로그램을 보니 가장 팁을 많이 받은 남자가 이긴다. 스트리퍼들은 물론이고 아까 처먹고 자고 처먹고를 반복하던 소드마스터들이 대거 올라가서 트월킹을 추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걸 배운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엄청 잘 췄다. 그들은 당연하다시피 스테이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춤추는 게 본업인 스트리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몸 쓰는 것 하나에 있어서는 어딜 내놔도 빠질 수가 없는 모양이다.
눈에 확 띄는 남자들만 따져보아도,
미르 킹쉴드 201cm / 121kg
제라드 라니에리 202cm / 119kg
카흐 밀란 208cm / 131kg
제시 팔마 190cm / 115kg
나름대로 돈도 많이 버는 것들이 그걸 이겨 보겠다고 엉덩이를 마구 흔들고 있는 것이다. 노는 데 빠지는 일도 없는 남자들이다.
“…….”
“…….”
송선호는 이마를 딱 짚으며 한숨을 쉬었고 에반도 그냥 미소를 띤 채 구경했다. 둘 다 저 위에 올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돈을 받으려고 남성 크루도 대거 올라가서 팁을 구걸하고 있었다. 스테이지의 아래에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여자들은 대부분 스테이지로 올라가서 돈다발을 흔들고 있었다. 필리페 버밍험 (210cm / 149kg)이나 제수스 강 (200cm / 134kg)은 스테이지에서 아주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신태호 (174cm / 78kg)는 스테이지 앞에서 물개박수를 짝짝 치며 감탄하고 있다가 스테이지로 끌려 올라갔다.
“남자가 춤 좀 출 줄 알아야지!”
“엉덩이 더 흔들어! 콜롬비아 남자애들처럼!”
신태호는 속성으로 트월킹을 전수받았다. 어색한 게 문제였지 소드마스터들의 신체 능력이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순식간에 엄청 빠른 속도로 엉덩이를 흔들었다가 본인도 깜짝 놀라 멈췄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도 멋쩍어하며 웃었다. 그가 출 줄 안다는 걸 아니 주변에서 더더욱 그에게 춤 줄 것을 종용했다.
“오오! 가장 많은 팁을 받은 것은 역시 미르 킹쉴드인가요! 뉴페인 제라드 라니에리인가요!!”
가운데서 양손에 달러를 쥐고 물 만난 고기처럼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두 금발 미남이 가장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제라드 라니에리는 두 팔을 위로 들고 양쪽으로 몸을 흔들며 여자들을 유혹했고 미르 킹쉴드는 엉덩이를 아래위로 빠르게 흔들며 아래로 섹시하게 내려갔다 엉덩이를 쭈욱 빼며 올라왔다.
도대체 여자들은 저런 까지고 싸 보이는 것들을 왜 좋아하는 것인가. 금발이고 뭐고 그거 그냥 머리카락 색깔일 뿐 아닌가! 송선호는 대놓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하십니까?”
그리고 치장하느라 한참 더 시간이 걸린 다니엘 스톤하츠가 거울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송선호와 에반이 길을 막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제야 주변의 광경을 확인했다. 스테이지 위에서 미르와 제라드가 도현을 가운데 두고 섹시한 눈빛을 보내며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녀가 참 기분 좋은 얼굴로 그들의 교태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폐를 접어 그들의 입술에 하나씩 물렸다. 눈빛과 미소가 오갔다.
다니엘 스톤하츠란 참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똑똑하고 거기에 노력파이기까지 한 남자였지만, 그 순간은 욱하고 말았다.
“!”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스테이지 위에 있는 다섯 명의 소드마스터와 저 멀리 있던 필리페, 제수스까지 동시에 이쪽을 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깜짝 놀란 고양이들처럼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뭐….”
“뭐야?”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춤을 멈췄다. 그들은 순식간에 초인적인 속도로 사라져버린 남자들의 빈자리를 보았다.
“으아아악! 도현아!”
미르 킹쉴드만큼은 도망가지 않고 도현을 꽉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가 오려나? 이상한 구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왜 그래요, 미르?”
도현이 비명을 지른 미르 킹쉴드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온몸의 털이 바짝 선 고양이 같았다. 그가 소리쳤다.
“저 새끼 저거 진짜 또라이라니까…! 언젠가 분명히 일낼 거라고 했잖아!”
도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 다니엘을 보았다가 다시 미르를 보았다.
“다니엘이 뭐 했어요?”
“금방! 금방…!”
그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뭔가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도현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다니엘과 미르를 번갈아 보았다. 조금 뒤 제라드 라니에리가 눈을 크게 뜬 채로 선미로 향하는 통로에서 이쪽으로 나왔다. 언제 저기까지 간 것일까?
“아, 진짜 깜짝 놀랐네.”
그도 다시 나타나긴 했지만 시선을 다니엘에게 고정한 채였다. 그 뒤에 카흐 밀란과 제시 팔마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훌쩍 나왔다.
“아, 저 괴물 새끼.”
“깜빡이 켜고 들어오라고 몇 번을 말하냐, 이 또라이 새끼야!”
제시가 다니엘에게 소리쳤다. 다니엘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다.”
제수스 강과 필리페 버밍험도 깜짝 놀란 얼굴로 이상한 곳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깜짝이야. 죽는 줄.”
제수스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신태호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도현은 스테이지에서 훌쩍 내려왔다. 미르는 가면 안 된다면서 그녀를 계속 끌어안았다. 미르는 마지못해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이 스테이지를 내려갔다. 도현은 다니엘에게 다가왔다. 그의 곁에 있던 송선호나 에반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다니엘과 도현, 미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도현도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다니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다니엘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도현은 눈을 두 번 깜박이더니 다시 물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다들 이래요?”
“…설명하기 힘듭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미르 킹쉴드는 도현을 보호하려고 하는 동시에 도현만이 그를 막을 수 있는 방패인 것을 아는 것처럼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다니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소드마스터들은 여전히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카흐 밀란이 다가왔다. 그가 도현을 보며 설명했다.
“아, 이게 우리가 좀 예민해서. 그, 우리가 보통 사람들보다 눈도 좋고 귀도 좋은 건 알지?”
“네….”
카흐 밀란은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약간 긴 그의 앞머리가 죄다 날려 뒤로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가 자신의 눈 위를 가려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의 안광이 잠시 번뜩했다.
“밤에도 잘 볼 수 있고.”
“알아요.”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감각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는 다니엘을 두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얘 심장이 갑자기 쿵 뛰더니 내 몸에 소름이 짝 돋더라고.”
그는 다니엘을 가리켰던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소드마스터는 상어처럼 육감을 가지고 있어 전류도 느낄 수 있었다. 상어는 물이라는 훌륭한 매질을 통해 전류를 감지했지만 소드마스터는 공기 중에서도 그걸 해낼 수 있었다.
“나나 제시는 스톤하츠랑도 꽤 알고 지냈고 올 시즌에 이 새끼가 우리 다 죽일 뻔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나도 모르게 잽싸게 튀었어.”
카흐는 그것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미르가 이를 갈 듯 첨언했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마법 쓰려고 했다니까? 정수리가 찌릿찌릿했다고.”
“아, 그럴 듯. 아까 구름 생긴 거 그거 아니야? 그거. 아이스 애로우 스톰.”
카흐가 멀찍이 있는 제시를 돌아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제시도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다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도현을 보면서 나름대로 변명했다.
“밀란이 말했다시피 소드마스터들은 호들갑이 심합니다. 마도사의 감각도 일반인이나 소드마스터랑 다릅니다. 사람이 감정이 격해지면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거나 울컥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남자들이 쓸데없이 겁쟁이뿐이라 아무것도 아닌 일을 크게 만드는 겁니다.”
상대적이긴 했지만 소드마스터는 체질적으로 인풋이 방대하고 마도사는 아웃풋이 방대하다. 그렇게 양측의 말을 다 들으니 다들 도현의 입을 쳐다보았다. 도현이 로웰을 쳐다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거네요. 선수들이 지레 스톤하츠 씨한테 쫀 거네.”
“그걸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뭐가 돼!”
미르가 로웰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사실인 걸 어떡합니까.”
그리고 로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데 태호는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태호야!”
알다시피 신태호는 갓 성인이 된 19세의 소년이었다. 신태호는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게임은 아까 그것으로 마무리하고(두 금발 미남의 공동우승이었다) 신태호를 찾으러 갔다. 신태호는 무려 엔진실까지 도망가서 숨어 있었다. 다들 미심쩍은 얼굴로 다니엘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매우 결백하고 억울하다는 얼굴(그래봤자 무표정이지만)이었다.
“신태호는 원래 겁이 많습니다.”
신태호는 약간 풀이 죽은 얼굴로 나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톤하츠 씨 말이 맞아요….”
그래서 다니엘 스톤하츠가 정말로 이 남자들을 다 죽여버리려고 한 것인가, 아니면 소드마스터라는 것들이 원래 죄다 겁쟁이들뿐이라는 말인가. 그런 의문을 남긴 채 그날의 사건 사고는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오후엔 대만에 도착했다. 셰프 팀은 식료품 쇼핑을 위해 짐꾼을 대동하고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렸다. 기념품 쇼핑을 하거나 도시를 구경하기 위해서 다들 줄줄이 배에서 내렸다. 도현도 대만에서만 먹을 수 있는 미식을 즐기기 위하여 배에서 내렸다. 로웰, 윤지호, 신재인, 미르, 에반, 다니엘, 송선호 등 식구들을 다 데리고 미식 투어를 하기로 했다. 도현과 에반은 고심해서 고급 다이닝부터 길거리 음식과 디저트까지 먹을 순서와 관광지를 정했다. 어차피 그들은 너무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은 갈 생각이 없었다. 비싼 렌터카와 가이드를 고용하여 편하게 다녔다. 타이페이 101의 VVIP 용 전망대를 올라가서 노을을 보고 지우펀의 야경도 보고 또 맛있는 걸 먹고 난 뒤 배로 돌아왔다. 대만은 하루 더 있을 생각이었다.
“킬스버그 님.”
도현이 시티 투어를 끝마치고 돌아오자 오늘 일을 하고 있던 샐리가 급하게 걸어와 도현을 찾았다. 도현은 짐을 크루에게 맡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응?”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누구?”
“셀레나 카토 씨라고….”
도현은 눈을 한 번 깜박했다가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다니엘의 표정이 굳었다. 오늘 자 그의 수난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도현 씨. 잠깐만…. 어디에 있습니까?”
“아, 네. 카페테리아에 계신데요.”
다니엘은 빠른 걸음으로 지니호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도현은 올림머리를 했던 머리카락을 풀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천천히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저는 정당하게 북경대에 있는 석사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휴가를 나온 것뿐입니다.”
“그런 거 안 통한다는 거 알잖아요, 다니엘. 연락도 안 되면 어떡해요. 왕 교수님이고 치엔 박사님이고 다들 엄청 열 받으셨어요. 큰일 났다구요.”
“분명히 처음부터 저는 일요일과 겨울 휴가 때는 반드시 쉴 것이라고 왕 교수님과 다 얘기가 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얘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다니엘뿐이고 교수님은 그런 적 없다고 노발대발하시고…. 아, 전화 왔잖아요. 어떡해요, 다니엘.”
셀레나는 자신의 디바이스가 울리는 걸 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디바이스를 그에게 내밀었다. 다니엘은 잠시 그것을 보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다니엘 스톤하츠입니다.”
[야, 이 개…!!!]
대뜸 쌍욕이 들려왔다. 다니엘은 디바이스를 귀에서 약간 뗐다. 물론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같은 새끼야!! 너 내가 우습냐!! 죽고 싶냐!! 이 미친 새끼가!! 이제 석사 1년 차 주제에 어디서 감히 랩을 째!!!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너 낙하산 한 번 찢어져 봐야 정신 차릴 거냐?! 어?! 이 새끼가 지가 뭐라고 이렇게 나대!!! 너 진짜 내가 죽여버린다, 어?! 내가 못 할 거 같냐, 이 사이코패스 또라이 새끼야!! 너, 씨발, 내가 공사판 시멘트에 처 묻어 버리는 수가 있다, 어?!]
다니엘을 사이코라 욕하면서 본인도 사이코패스 살인마에 버금가는 협박을 하고 있는 왕리밍 교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게 허풍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중력 마법을 쓰지는 못했지만 왕리밍도 마도사였고 마도사는 참 남몰래 할 수 있는 게 많은 인종이었다. 다니엘은 한참 그의 욕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그가 숨을 고르는 사이에 대꾸했다.
“해야 할 것은 다 해놓고 나왔습니다. 사람이 적당히 쉬어야 나올 것도 나오는 겁니다.”
[뭐?! 이 새끼가 진짜 약 처먹었나! 어디서 훈계질이야?! 좆 같은 새끼야, 니가 나한테 훈계질할 군번으로 보이냐!!!]
그 뒤로 왕리밍은 점점 더 기발하고 획기적이며 천재적인 어휘력을 발휘하여 욕설을 내뱉었다. 다니엘은 전혀 돌아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 의사만 간결하게 그에게 계속 전달했고 왕리밍이 혈압이 올라 쓰러졌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통화가 겨우 마무리되었다. 도현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다니엘을 쳐다보고 있다가 셀레나를 한 번 보았다. 셀레나는 도현과 눈을 마주친 채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도현이 다니엘에게 다가가 물었다.
“다니엘….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예요? 베이징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도현 씨. 별일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현은 셀레나를 보았다. 셀레나는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다니엘은 힘을 주어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베이징대에서도 방학 정도는 쓸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도현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다니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본인과 도현 외에 세상 모든 것이 하찮다는 듯이 행동하는 이 남자도 이제 대화가 통하고 그에게 조언과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똑똑한데도 더 지혜로워지고 싶어 하고 그렇게 많이 아는데도 더 알고 싶어 했으며 그렇게 강한데도 더 강해지고 싶어 했다. 그저 생존에 안주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한 남자다. 그가 사람들을 쉽게 경멸하는 이유를 도현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사실은 그쪽에만 전념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다니엘?”
도현이 물었다. 다니엘의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더 무생물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최고가 되고 싶잖아요.”
“…….”
다니엘은 그대로 도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도현은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현같이 스스로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는 사람에게 타인이란 필요에 따라 적절한 거울이 되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다니엘의 눈빛이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도현 씨가 필요합니다.”
도현이 물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요?”
“최고의 남자를 가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도현은 가만히 다니엘의 예쁜 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입술 가까이에 입을 맞췄다.
“가지고 싶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니엘과 서로의 몸을 가볍게 감싸 안은 채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셀레나에게 권했다.
“편하게 있다 가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도현 씨의 말이 맞습니다. 분명히 좋아하실 겁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라만 셰프라고 들어보셨나요?”
“굉장히 유명한 셰프십니다. 한번 음식을 먹어 보시면 분명히 반하게 되실 겁니다.”
셀레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두 사람의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리고 그녀는 도현을 보았다.
‘그래, 이 여자가….’
이 여자는 천하의 다니엘 스톤하츠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쟁쟁한 남자들을 셋이나 더 데리고 사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TFC 팬덤과 세계 가십란을 스캔들로 들썩거리게 했던 장본인이지 않은가.
전에 다니엘이 셀레나를 그녀가 여는 테니스 오픈에 데리고 갔을 때 처음으로 봤다. 그때는 그저 그녀가 예쁘고 우아하며, 그리고 부유한 젊은 여성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신과는 아예 다른 계급에서 태어난 여자구나, 라고 여겼다. 시기심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연인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 다니엘 스톤하츠가 고작 그녀가 만나는 네 명의 남자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다니엘 스톤하츠는 4년 연속 TFC 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남자였다. 슈퍼 루키 같은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스타성을 기반으로 한 인기투표로 뽑는 것이다. 오펜스가 뽑힐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이 TFC 세계에 데뷔하자마자 그는 단번에 세계에서 연봉을 제일 많이 받는 선수가 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스트드래곤이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의 보란 듯이 첫 시즌부터 진가를 보였다. 엘 드라카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오펜스다.
그런 그에게 그런 스캔들이 떴으니 당연히 셀레나는 반박 기사나 정정 기사를 내려고 했지만 구단 측에서 막았다. 솔직히 TFC 클럽이야 스캔들을 반기는 입장이다. 스캔들은 시청률 상승을 불러오고 시청률은 곧 돈이다. 1월이 되면 다니엘 스톤하츠의 은퇴도 기사가 나올 것이다. 구단과 그의 인연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게다가 다니엘 스톤하츠는 반박 기사는커녕 스캔들을 더 부추겼다. 학회에 들어오고 나서 보니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음모이기까지 했다.
셀레나 카토는 그 과정에서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의 손아귀에 꽉 잡히고 말았다. 그것도 상당히 강압적인 방법으로.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약탈해온 자신의 자산을 은닉하는 과정에 셀레나를 이용했다. 학회로 끌어들인 뒤에는 리야드 작전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한 <킬스버그 보이즈 스캔들> 컨트롤을 맡기기도 했다. 그녀를 그의 공범자로 만든 것이다. 셀레나 카토는 이제 사실상 평생 그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를 사랑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평생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현재, 결론적으로 그라는 남자에게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게 그녀가 바란 것인가. 그녀는 무력하게 그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겁니다.]
그는 셀레나를 기만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모든 사람을 기만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아마도… 오직 하나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힘이라고 불렀다. 지식이라고도 했다. 세상, 우주, 대업, 신….
그는 연기를 하고 있다.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셀레나만이 그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착각일지도 모른다.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그가 몹시 중요하다는 식으로 구는 건 사실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만이 가장 오랫동안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의 옆에서 그를 지켜봐 왔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게 연기라고 해도 셀레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이쪽으로 오세요.”
도현 킬스버그는 웃는 얼굴로 셀레나를 이끌었다. 셀레나는 그녀의 얼굴을 퍼뜩 보았다. 입술이 움찔거렸다.
‘당신은 이 남자에게 속고 있어요.’
그는 사랑 같은 건 모른다. 그렇게 말할 뻔했다. 다니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셀레나는 입을 다물고 도현을 따라갔다.
“여기 괜찮을까요?”
“아….”
셀레나는 감탄해서 입을 벌렸다. 그녀도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 사이에 오랫동안 있었으니 럭셔리한 것들에 대해 나름대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의 안목에는 따라갈 수 없는 모양이다. 도현이 셀레나에게 권한 VVIP룸은 그녀의 수입으로는 꿈에도 꿀 수 없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이태리제 명품 가구들, 침구, 샹들리에, 벽지, 식기와 장식품까지 전부. 그리고 금 하나 없는 커다란 창문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셀레나는 앞으로 걸어나가 별처럼 빛나는 야경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손을 댔다. 작은 전자음이 들리고 가로로 빛의 선이 나타나더니 윗부분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셀레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창문도 다 있나? 바깥의 공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바다의 냄새와 밤의 냄새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마음에 드세요?”
“아, 네. 이렇게 좋은 방까지 안 주셔도 괜찮은데….”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다니엘의 손님이면 제 손님이죠.”
도현은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의자에 앉았다. 셀레나는 창문 앞에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니엘과는 오래 알고 지냈죠?”
“네, 이제 5년 정도….”
“전에 뵀을 때는 제대로 얘기도 못 했네요. 항상 다니엘을 많이 도와준다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셀레나는 어쩔 수 없는 죄책감에 그녀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하며 대꾸했다. 도현은 어쩐지 그런 셀레나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일이 많이 힘드시겠어요. 다니엘 같은 남자는 다루기 힘들죠. 있는 동안 푹 쉬어요. 다니엘의 말대로 쉴 때는 쉬어야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셀레나는 그녀의 쪽으로 걸어왔다. 문으로 걸어간 도현이 셀레나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시구요. 편히 쉬어요.”
그녀는 싱긋 웃고는 갔다. 셀레나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셀레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방을 돌아보았다.
“이런 걸 가질 수 있게 되면 다들 저렇게 되는 걸까?”
그녀가 중얼거리듯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휘황찬란한 인테리어를 다시 한번 하나하나 감탄하며 만져보았다. 셀레나 카토가 보았을 때 도현 킬스버그란 여자는 정말 다 가진 여자로 보였다. 여유롭고 분위기가 있었다.
‘선수들이 돈 많다고 저런 분위기가 났던 것도 아니고….’
그녀는 곧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냈다. 이 침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침구는? 몸이 푹 감싸이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촉감도 푹신함도. 촌스럽게 굴고 싶지 않은데 절로 촌스러워진다. 이런 침대에 눕고 나니 절로 자신이 지쳐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셀레나는 그대로 잠들었다.
*
“아, 새로 오신 손님이시군요! 지난밤은 편하셨나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VVIP님!”
셀레나는 굉장히 어색하고 몸 둘 바 없는 기분을 느꼈다. 다들 그녀에게 굉장히 친절했다. 여자든 남자든 말이다. 사실 셀레나 카토는 굉장한 미녀였고, 사실 그건 생존에 상당히 위협적인 요소였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었고 여자들은 그런 그녀를 외면하곤 했다. 하지만 여기선 그런 위협적인 요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느끼지 않으니 비로소 적든 많든 자신이 평생 그런 위협에 둘러싸여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러니하다.
점심까지 먹고 나니 아주 짧은 시간만 있었을 뿐인데 그냥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왤까? 싫은 것이 없었다. 항상 자신에겐 좋은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다들 야외 수영장으로 간다고 해서 탈의실로 들어가 어떤 수영복을 입어야 할지 굉장히 고민하다가 하얀색 비키니를 샀다. 그리고 앞뒤로 몇 번이나 비춰보며 괜찮은지 확인하고 화장도 물에 번지지 않는 제품으로만 완성하고 머리도 잔뜩 만진 뒤 야외 수영장으로 갔다. 물에 들어가지는 말아야겠다. 머리가 망가질 것이다. 그리고 야외 수영장에 입장한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헉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남자들이 죄다 엉덩이가 다 보이는 수영복을 입고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다들 미남들뿐이다. 솔직히 선수들은 몸은 좋아도 얼굴은 별로인 경우가 간간이 있었다. 이렇게 미남만 있는 곳은 처음 보았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외모에 공을 들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소드마스터만 있는 것도 아니니 다들 엄청 운동을 하고 식단 관리를 한다는 소리였다. 문신을 크게 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에 반하여 여자들은 제각각이었다. 셀레나처럼 예쁜 비키니를 입은 사람도 있었지만 전신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고 얼굴에 잔뜩 피어싱을 한 사람도 있었고 문신을 잔뜩 한 사람도 있었고 삐삐 머리에 해녀복 비슷한 것을 입고 다니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화장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저쪽에 있는 도현 킬스버그도 비키니는 입고 있었지만 맨얼굴이었다. 그녀는 셀레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셀레나! 이리 와요.”
그녀는 셀레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셀레나는 도현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주변에 있는데 노골적으로 시선을 받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들이 쳐다봐주지 않으면 오늘 자신이 충분히 예쁘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오늘은 좀 달랐다. 뭔가 역시, 안전한 느낌이다.
도현이 있는 곳에는 두 개의 상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도 앉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하다가 돌아와서 쉬며 간식거리를 먹고 이야기를 하다 다시 수영을 하러 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가운데엔 각종 핑거푸드와 디저트가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음료도 잔뜩 있었다. 셀레나가 나타나자 거기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자리를 권했다. 그들은 다들 셀레나에게 호의를 띤 미소를 보냈다.
“어젯밤에 다니엘 손님으로 온 셀레나 카토라고 하는 분이셔. 잘 모셔야 된다.”
“네~”
셀레나는 다양한 여자들의 가운데 앉게 되었다. 그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우와, VVIP님….”
서연은 셀레나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현재 VVIP는 송선호와 셀레나뿐이다. 다니엘은 이제 거의 호스트급이라 분류에서 제외되었고 에반과 미르도 VIP일 뿐이었다. 셀레나는 약간 어색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왜 그러세요?”
“앗, 죄송해요. 불쾌하셨어요? 눈동자가 진짜 예뻐서요. 앞으로 VVIP님 많이 좋아할 것 같아요.”
서연이 애교스럽게 웃었다. 그녀가 이러는 것은 연상의 여자들에게뿐이었다.
“이거 드세요. 맛있어요.”
“아침은 드셨어요? 이거 드세요.”
사람들이 그녀에게 음식을 잔뜩 권했다. 그녀는 몸매 관리를 위하여 아침을 거른 상태였다. 두어 번 사양하다가 하나 먹었다. 엄청 맛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뒤로는 참아야지, 하면서도 종류별로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맛있죠?”
“맛있는 거 먹고 살아야 행복해요.”
“매일 맛있는 거 먹고 살 수 있으면 불행할 수가 없다니까요.”
시즈카와 샐리, 서연이 말했다. 멀리서 셀레나를 알아본 카흐 밀란이 다가왔다.
“엇, 셀레나 짱~ 여긴 웬일이야?”
“아, 카흐…. 다니엘 때문에 잠시.”
“그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쪽에 끼어들려고 했다. 그러자 사라가 그의 정강이를 발로 밀었다.
“저리 가. 어딜 올라와?”
“아, 맞다.”
그는 쩝 하고 입맛만 다시더니 물러났다. 셀레나는 약간 놀라서 사라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건 여자, 남자 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뭐 할까요?”
로웰이 마스크를 벗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로웰은 셀레나를 발견하고 오! 하고 감탄사를 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데리고 다니던 그 끝내주는 미녀다. 언젠가 도현과 그녀를 가지고 야시시한 작품을 구상한 것도 있었다.
“롤러 돌리기 할까요?”
어제 시티 투어를 다녀온 그들은 약간 피곤했다. 인공지능 추첨을 하지 않고 즉석에서 게임을 정했다. 수영장의 위로 커다란 홀로그램이 떴다.
<롤러 돌리기!>
그러자 많은 남자들의 탄식이 들렸다. 오늘 야외 수영장으로 나온 로웰 팀과 도현 팀 남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리고 가위바위보 등으로 편을 갈랐다. 팀별로 열 명 정도가 뽑혔다. 뽑히지 않은 남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게 뭐야?”
“몰라?”
제라드 라니에리가 미르 킹쉴드에게 물었다. 미르는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그렇게 답했다. 그들도 뽑혔다. 야외 수영장에는 거대한 폼 롤러가 설치되었다. 로웰 팀에는 간발의 차로 시간 내에 입장한 다니엘 스톤하츠, 제라드 라니에리, 카흐 밀란 등의 남자들이 노란색 롤러 위에 올라탔다. 도현의 팀 또한 미르 킹쉴드, 신태호, 역시나 간발의 차로 시간 내에 입장한 송선호 등이 파란색 롤러 위에 올라탔다. 이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남자들이 대거 뽑힌 바람에 설명이 필요했다.
“설명해주실까요, 로웰 선생님?”
“남자는 허벅지 힘입니다.”
시즈카가 황금색 마이크를 로웰에게 내밀었다. 로웰은 대충 대답했다. 로웰과 도현에게는 운전대 비슷한 게임 컨트롤러가 지급되었다. 바닥에 고정된 기둥에 설치된 운전대다. 두 사람의 키에 맞춰 맞춤 제작된 것이었다. 샐리가 도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허벅지로 롤러를 꽉 잡고 버티는 게임이에요. 나는 로웰 선생님 롤러를 돌릴 거고 선생님은 파란색 롤러를 돌릴 거예요. 다들 괄약근에 힘 꽉 주고 잘 버텨요. 알았죠?”
도현은 상큼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 몇몇은 깜짝 놀라 자신이 타고 있는 롤러를 내려다보았다. 손잡이 하나도 없었다. 송선호는 기겁하며 외쳤다.
“나 안…! 읍!”
게임이 시작되었다. 로웰은 사정없이 운전대를 돌렸다. 롤러 위에 앉은 남자들이 굉장한 원심력과 함께 물에 처박혔다. 한 바퀴 돌리는 것만으로도 다들 롤러에 볼썽사납게 달라붙어 있어야 했다. 도현도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마구 돌렸다. 1분도 되지 않아 양쪽 다 몇 명씩 떨어졌다.
“아! 안 돼! 허벅지에 힘 더 꽉 주라고!!”
“남자가 그렇게 쉽게 다리를 벌리는 거 아닙니다!!”
도현과 로웰이 제각각 자신의 팀을 응원(?)하며 게임에 이기기 위해 분투했다. 예전 같으면 벌써 승부가 났을 텐데 소드마스터들이 있다 보니 게임이 오래 지속되었다. 간발의 차이로 늦게 입장해 화를 피한 에반은 웃는 얼굴로 로웰에게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선생님?”
“아, 그래도 되나요? 같은 팀인데?”
“선생님이 여기 왕이시죠.”
“아, 맞다.”
그녀는 마구 핸들을 돌리며 그가 바통을 넘겨받을 틈을 만들었다. 도현은 아윽! 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팔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셀레나를 발견했다.
“셀레나! 저 좀 도와줘요!”
“네? 네?! 저요?”
셀레나는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게임을 관전하고 있었다. 다들 도현, 아니면 로웰을 응원하고 있었다. 롤러에 타고 있는 남자들은 거의 물고문을 당하는 수준이었다. 다들 웃고 즐거워하니 괜찮은 거겠지만….
셀레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도현에게서 핸들을 넘겨받았다. 생각보다 핸들이 꽤 무거웠다. 그녀는 자신이 돌리고 있는 롤러가 다니엘 스톤하츠가 타고 있는 롤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전력을 다해 휘리릭 돌려버렸다. 다니엘이 떨어졌다.
“오! 셀레나~!”
도현이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셀레나는 상기된 얼굴로 도현을 돌아보았다가 물에 빠졌다가 수영을 해서 나오는 다니엘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뭐, 뭐야, 이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기분이 좋았다. 셀레나는 자신의 상태에 매우 어색해하며 고개를 잠깐 갸웃했다. 이상했다. 그 사이 에반은 웃는 얼굴로 위기에 빠진 송선호를 떨어뜨리기 위해 신들린 컨트롤을 선보이고 있었다.
“아, 씨발, 저 새끼 내가 죽인다, 진짜….”
송선호는 물을 너무 먹어 머리가 띵했다. 결국 다음번 턴에 떨어졌다. 도현이 악하고 짜증을 냈다.
“떨어지면 어떡해!”
“저 새끼 때문이잖아!”
송선호도 화를 냈다. 그제야 도현이 로웰의 핸들을 잡고 있던 에반을 돌아보았다. 에반은 웃는 얼굴로 팟 하고 핸들에서 손을 놓았다.
“오랜만에 재미있어 보여서.”
각 팀에는 두 명의 팀원이 남아 있었다. 미르 킹쉴드나 카흐 밀란은 그냥 롤러를 꽉 조이고 앉은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제라드 라니에리나 신태호도 전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핸들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나가떨어졌다.
“아, 직접 게임하기 피곤해서 이거 한 건데.”
로웰이 한탄했다. 도현도 어깨가 욱신거렸다.
“히, 힘들어….”
셀레나도 팔이 아팠다. 알이라도 생기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게임에 몰입하였다. 그녀는 방책을 떠올리고 그것을 도현에게 속닥거렸다. 도현은 눈을 크게 뜨며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셀레나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핸들을 돌렸다. 노란색 롤러가 180도 돌아 물에 풍덩 빠졌다. 그리고 그대로 핸들을 멈췄다. 그걸 본 로웰이 눈을 크게 뜨더니 앗! 하고 그 작전을 따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로웰이 굉장히 치사하다는 눈빛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이 으스댔다.
“이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법이죠.”
소드마스터들은 힘도 세고 맷집도 튼튼하고 감각도 예민하고 오라도 있다. 하지만 연비가 몹시 떨어지고, 폐활량이 아무리 좋아도 산소가 차단되면 역시나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 모두 긴장해서 거꾸로 물에 처박힌 그 남자들의 일렁이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속에 들어간 지 5분이 지나자 드디어 카흐 밀란과 미르 킹쉴드가 거의 동시에 튀어 올라왔다. 1분이 더 지나니 제라드 라니에리가 포기하고 올라왔고 제라드가 올라가는 걸 보고 신태호도 나왔다. 도현 팀의 승리였다.
“와아!!”
도현은 신태호를 끌어안았다. 도현이 이기자 야외 수영장에 그녀의 승리가가 울리며 도현 팀이 다들 승리의 춤을 췄다. 셀레나도 어느새 거기로 끌려 들어가 다 같이 동작을 맞춰서 춤을 췄다. 현재까지의 도현과 로웰의 스코어가 떴다. 5:2였다. 현재까지는 도현의 리드였다. 로웰 팀을 골리는 동작을 하자 로웰과 그녀의 팀이 공을 던지며 야유했다.
“재밌죠?”
춤을 추다 도현과 셀레나가 부딪쳤다.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서로를 끌어안았다. 도현이 셀레나에게 물었다. 셀레나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네? 하고 되물었다.
“재미있죠, 셀레나?”
“네…! 재밌어요!”
셀레나가 대답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도현도 웃었다. 미녀 둘이 그렇게 활짝 웃으며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림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모두 즐겁게 축제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그때 하늘 위로 비행차가 한 대 나타났다. 비행차의 엔진음에 다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비행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거기서 사람이 뛰어내렸다. 지니호의 사람들은 다들 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뛰어내린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노성을 질렀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녀는 새하얀 랩코트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머리는 본인이 직접 자른 것인지 쥐가 파먹은 것처럼 덥수룩했다. 엄청난 공기저항에도 안경이 날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이름을 외치며 지니호로 자유낙하 하기 시작했다.
“너 오늘 제삿날이다, 이 개새끼야!!!”
그녀의 속도는 지니호로 다가올수록 점점 느려지더니 배 위에 무사 안착했다. 그녀는 헐벗고 홀딱 젖은 다니엘 스톤하츠 하나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빠르게 직진하여 아주 익숙하게 그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이 좆 같은 새끼야, 진짜 죽고 싶냐? 죽고 싶어서 염불 외냐, 지금? 이 미친 새끼야, 난 6년 동안 휴가의 휴 자는커녕 일요일도 한 번 쉰 적 없다. 너 졸업 안 할 거냐? 너 제대로 한다더니 다 구라였냐? 너 이딴 식으로 하면서 우리 랩에서 버틸 수 있을 거 같냐? 죽고 싶으면 차라리 자살을 해. 왜 인생을 이따위로 꼬려고 하냐? 어? 너 인생 두 번 사냐? 어?”
“해야 할 건 다 하고 나왔습니다. 치엔 박사님은 이해해주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해야 할 게 그것밖에 없냐, 이 미친놈아!! 하나 끝나면 또 하나 더 나오는 거 모르냐?! 야, 나 지금 칼 쥐었으면 당장 찔렀다, 어? 아냐? 너 니가 교수님 손에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상~당~~한 착각이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내가 지금 석사 1년 차 뒷바라지나 할 급으로 보이냐?! 어?! 이 미친 사이코 새끼가 감옥에나 쳐들어갈 것이지 왜 내 밑에 들어와서 말년에 이 사고야!!!”
“휴가 좀 쉰다고 뭐가….”
다니엘이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지만 치엔위는 자기 할 말이 우선이었다.
“놀아? 어? 여기서 놀아? 놀 생각이 나냐? 미친 새끼! 너 솔직히 말해봐라. 너 나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지? 어? 화 안 낼 테니까 솔직히 말해보라고. 어? 교수님이 나 죽이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어? 솔직히 말해봐, 좆 같은 놈아. 니가 진짜 그래서 그러는 거면 나도 대책을 세울 거 아냐! 널 칼로 찔러 죽일지 시멘트에 묻어서 바다에 빠뜨릴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다니엘 스톤하츠가 저런 취급을 당하는 것을 보기는커녕 저런 취급을 당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카흐 밀란이나 제시 팔마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도현도 놀라서(그를 저렇게 취급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셀레나가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치엔위 박사님이라고 다니엘 랩의 랩장이세요. 다니엘이 지금 사실상 무단결석 중이라 왕 교수님도 치엔 박사님도 엄청 화가 나셔서…. 교수님이 화나시면 일단 자기 랩장부터 괴롭히시거든요. 랩에서 치엔위 박사님이 제일 고생이세요.”
셀레나는 빠르게 속삭였다. 도현은 셀레나와 치엔위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이 좋은 세상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도현은 대강의 사정을 유추하고 셀레나에게 손짓했다. 다른 크루들에게도 손짓했다. 그들은 치엔위와 다니엘에게로 다가갔다.
“박사님?”
도현이 그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그러자 그녀가 노기를 잔뜩 띤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웃는 얼굴로 들고 있는 걸 보여주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신 김에 드시면서 얘기하시죠.”
“이거 드세요. 맛있어요.”
“점심은 드셨어요? 이거 드세요.”
“맛있는 거 먹고 살아야 행복해요.”
“매일 맛있는 거 먹고 살면 불행할 수가 없다니까요.”
다들 아까 셀레나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며 치엔위를 꼬드겼다. 그래도 아직 민간인(?)들은 무고하다는 입장인 그녀는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며 벼락이라도 떨어질 것 같던 눈빛이 평상시 상태로 돌아왔다. 그녀는 멋쩍은 태도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죄송합니다. 멋대로 남의 사유지에 쳐들어와서 소란을 피웠네요.”
“아니에요. 이리 오세요.”
“이리 오셔서 드세요.”
“맛있어요.”
사람이나 동물이나 꼬시는 데는 먹을 게 최고다. 사람들은 그녀를 데리고 상석으로 갔다. 치엔위는 얼른 자신의 두 손을 마주 털었다. 다니엘의 머리카락이 잔뜩 떨어졌다. 다니엘은 한숨을 돌렸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마도사인가 보네.”
제라드가 물에 젖은 자신의 멋진 금발을 뒤로 넘기며 그렇게 말했다.
“깜짝이야~ 저 새끼도 쪼는 사람이 다 있나.”
카흐 밀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라드는 오늘 근무인 서연에게 다가갔다. 상석으로 음식을 더 주문하고 있던 서연은 그가 갑자기 뒤에서 끌어안자 깜짝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돌아보는 서연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옷 예쁘다.”
“뭐야. 밖에서 이러지 마.”
서연은 그를 밀어냈다. 제라드는 골골거리는 노란색 털 고양이처럼 그녀에게 몸을 비볐다.
“왜? 밖에서 안 이러면 언제 이래?”
그러자 서연이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제라드는 응? 하고 그녀를 보았다. 서연은 자신의 멀티스크린을 조작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질척거리지 마. 한 번 했다고 뭐라도 된 줄 알아? 제대로 빨지도 못하면서. 솔직히 실망.”
“…응?”
“얼굴만 예쁜 거였어.”
서연은 그렇게 말하더니 그대로 굳어버린 제라드를 두고 셰프 팀에게서 접시를 받기 위해 가버렸다. 그 꼴을 보고 카흐 밀란이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으하하하! 아학학학! 아, 잠깐만! 아, 잠깐만!! 큭큭큭! 아! 하학학학!”
그는 제라드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퍽 치며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너! 뭐! 학학학! 야, 너 뭘! 하하하!”
카흐 밀란은 분명히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인데 웃느라 숨이 차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그러고 있자 다른 남자들도 관심을 가지며 다가왔다.
“왜? 뭔데? 좋은 거면 같이 웃자.”
“뭐야?”
카흐는 눈물까지 흘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얘, 얘가 그렇게 못 한단다, 큭큭큭. 제대로 빨지도 못한다고, 큭큭큭. 질척거리지 말라고 저 쥐방울만 한 여자애가. 아하학. 아, 살려줘. 이 새끼 존나 웃기는 새끼였어, 큭큭큭!”
그러자 폭소는 다른 이들에게도 옮겨갔다. 제라드 라니에리가 누구인가. 2125년을 화려하게 장식한 미남 중의 미남이 아니던가. 제라드 외에는 다들 즐거워했다. 그렇게 킬킬거리며 다들 그를 놀리기에 정신이 없는데 누군가 야외 수영장으로 들어왔다. 승객도 크루도 아니었다. 카흐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그의 웃음이 뚝 그쳤다.
“어? 누나!”
물속에서 튜브를 잡고 수영을 하고 있던 신태호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는 당장 튜브를 놓고 훌쩍 밖으로 올라왔다. 그는 그녀에게 얼른 다가갔다.
“누나, 여긴 어쩐 일이세요?”
한민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힐을 신은 자신보다 약간 키가 작은 신태호를 내려다보았다.
“넌 여기 웬일이야? 그나저나 괜찮아? 누구 다친 사람은 없어? 부서진 거나….”
한민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여기는 천국인가. 저도 모르게 감탄한 얼굴로 주변을 보고 있는 한민유의 앞에서 신태호는 아차 하고 잔뜩 젖은 자신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훔쳤다.
“누, 누나가 바쁘다고 해서요. 그래서 잠깐 놀러 온 건데. 이제 시간 나는 거예요? 누나도 여기 놀러 왔어요?”
신태호가 촉새같이 빠르게 물었다. 한민유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 때문에 온 거야. 아까 하늘에서 뛰어내린 사람 어디 있어?”
“아, 그분이면 저기….”
신태호가 도현과 로웰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여자들이 잔뜩 있었다. 지니호의 왕은 로웰과 도현이다. 그들은 마치 치엔위를 다른 나라의 왕처럼 대접하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다니엘 스톤하츠를 거의 죽여버리려고 했던 그녀는 이런 대접이 황송한지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슬그머니 치엔위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는 크루에게 눈짓하여 마사지사들도 불렀다. 곧 웃는 얼굴을 장착한 남자 마사지사들이 와서 치엔위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니, 뭐, 이런 것까지….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곳도 있군요?”
치엔위는 도현이 권하는 대로 음식을 몇 개 먹어보더니 굉장히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야 매일 랩에 처박혀 샌드위치나 영양제로 연명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교수님이야 여기저기 부르는 곳이 많으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다니지만 아직 치엔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차피 밖에서 아무리 그녀를 치켜세워줘 봤자 현재의 그녀는 그저 랩의 노예일 뿐이고 왕리밍의 노예일 뿐이었다. 라만 셰프의 특제 소스를 뿌린 신선한 굴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한 입에 삼키니 입안에서 온갖 맛이 퍼지며 입맛이 확 돌았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쓰레기만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혼잣말했다.
“먹으니까 졸리다…. 아, 나도 휴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말을 들은 셀레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도현이 은근슬쩍 권했다.
“어때요. 많이 고생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랑 같이 놀아요. 세이셸이 얼마나 예쁜데요.”
“오늘 밤에 팔라완으로 출항해요. 모레면 도착할걸요? 팔라완도 정말 예뻐요.”
옆에서 다들 그렇게 치엔위에게 권했다. 치엔위의 눈썹이 팔 자를 그리며 축 처졌다.
“아, 말만 들어도 좋네요. 전 6년 동안 한 번도 쉰 적 없거든요.”
자신이 그런 걸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마치 이런 걸 다시 먹을 수 없는 사람처럼 음식만 자꾸 입에 집어넣었다. 어느샌가 슬쩍 뒤로 다가온 다니엘이 첨언했다.
“일주일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치엔 박사님? 박사님이 그렇게 하셔도 교수님께선 결국 아무것도 못 하실 겁니다.”
“넌… 입 닥쳐라. 내 졸업이 우습냐?”
치엔위가 다니엘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춰 위협했다. 다니엘은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했다. 셀레나가 약간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좀 쉬셔야죠, 박사님. 민 교수님께서도 주기적으로 휴식을 취하라고 하셨잖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편하게 쉬시면서 보양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교수님께는 제가 말씀드려 볼게요. 많이는 안 되겠지만… 이틀 정도는.”
그러자 치엔위의 얼굴에 약간의 희망이 서렸다가 곧 다시 가셨다.
“아, 그건 될 일이 아니야. 교수님이 날 죽이려고 들걸.”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웃는 얼굴을 한 한민유가 다가왔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자 모두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저도 왕리밍 교수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디펜스도 끝났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주말이고.”
“아.”
한민유까지 나서서 살살 꼬시니 치엔위가 엄청나게 갈등 된다는 얼굴을 하다가 곧 무언가를 포기했다. 그녀가 해맑게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
“그럼요, 박사님. 박사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시죠.”
한민유는 슬쩍 가운데로 다가가 그녀의 곁에 앉아 그녀의 잔에 음료를 채워주었다. 그러자 치엔위도 그냥 긴장을 풀고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았다. 그녀는 음료를 한 모금 먹는가 싶더니 바로 잠들어버렸다. 셀레나가 한숨을 쉬더니 주변에 부탁했다.
“혹시 박사님이 잠깐 주무실 곳이 있을까요?”
“그럼요. 샐리, 남은 VVIP룸에 박사님 좀 모시고 가.”
“네.”
마사지사 하나가 그녀를 업었다. 그리고 샐리와 함께 VVIP룸으로 향했다. 치엔위는 그대로 죽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도현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실려 나가는 치엔위를 바라보았다. 셀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일하고 공부해도 교수님 눈에 안 차는데 다니엘이 저러니 교수님이 계속 다니엘만 보면 죽이네, 마네 하세요.”
“그런 거군요? 그래도 요즘 세상에 그런….”
“요즘 세상이라도 어쩔 수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건가 봐요.”
셀레나가 답했다. 한민유가 웃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양자 간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으니까요.”
“아, 죄송합니다. 먼저 소개해드렸어야 했는데. 이분은 저희 학회 한민유 수석비서관님이세요, 도현 씨.”
“안녕하세요. 도현 킬스버그라고 합니다.”
“네, 다니엘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다니엘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도현 씨. 저 때문에 괜한 소란을 겪게 되셨습니다.”
“아니에요. 재미있네요.”
도현은 셀레나와 한민유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도현은 한민유에게도 권했다.
“민유 씨도 드세요. 여행하는 동안 마음껏 쉬다가 가셔도 됩니다. 재미있을 거예요. 그렇죠?”
도현이 셀레나를 보며 물었다. 셀레나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한 비서관님이 분명히 지니호를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니엘도 첨언했다. 한민유는 웃으며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정말요. 좋네요.”
“여기 진짜 좋아요, 비서관님.”
셀레나가 한민유에게 슬쩍 말했다.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대로 셋이서 잠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지속했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도현 킬스버그는 남색 머리카락에 짙은 속눈썹을 가진 뛰어난 미녀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임에도 색기가 은근히 도는 분위기 있는 사람이었다. 셀레나 카토는 녹색, 파란색, 갈색이 오묘하게 섞인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졌다. 풍성하고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졌지만 어딘가 청순한 느낌이 드는 뛰어난 미녀였다. 한민유 또한 단정한 단발머리,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정장이 잘 어울리는 미녀였다. 미소를 지을 때는 보는 사람이 상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기가 돌았고 그렇게 미소를 짓지 않을 때는 프로페셔널 해 보였다.
지니호에 있는 여자들은 제각각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지만 역시나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는 법이다. 남자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가치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 세 명의 미녀가 밝은 햇살과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뭐냐, 저거. 왜 다들 가만히 있는 건데? 가서 건드리고 싶다. 질척거리고 싶다.”
제시 팔마가 양손으로 주물주물하는 포즈를 취하며 침을 질질 흘렸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제라드가 버럭했다.
“질척거린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
“가자. 가자. 어? 꼬시자. 셋 다 꼬셔서 스와핑이라도 하자. 쩔 듯. 진짜 쩔 듯.”
제시가 카흐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권했다. 카흐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지금까지 언제나처럼 가볍고 즐겁게 즐기던 카흐 밀란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능글거리던 미소가 사라졌다. 미르 킹쉴드가 두 남자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역시나 침을 뚝뚝 흘렸다.
“그래, 이 개새끼야. 우리 도현이는 내 거야. 눈독 들이지 마라. 그냥 셋 다 내가 할 테니까 니들은 구경이나 해. 한 번 정도는 다 같이 하자고 해도 할 걸, 우리 도현이. 할 거야. 쓰읍.”
그러자 신태호가 털을 바짝 곤두세우며 화를 냈다.
“민유 누나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기분 나빠요!”
필리페 버밍험이나 제수스 강이야 전혀 여자들에게 관심 없는 것처럼 굴었지만 어쨌든 여기 있는 다섯 명의 남자는 무려 지니호에서도 하렘을 차릴 수 있는 남자들이었다. 여자들은 그들을 좋아했다. 그런 건 그냥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쉽사리 세 명의 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때 무뚝뚝한 얼굴을 한 다니엘 스톤하츠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으로 다가갔다. 의외라고 하면 의외지만, 자연스러웠다. 다른 남자들이 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벗고 있는 다니엘을 처음 봐요. 음, 역시 좋네요.”
한민유가 자세하게 그를 들여다보았다. 조각품이라도 감상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녀는 도현과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자주 봐서 감흥이 없나요?”
“예전보다 더 좋아졌어요. 다니엘은 노력파거든요.”
도현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답했고 셀레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했다.
“아, 아니…! 자주 보는 것까지는 아닌데요! 아무래도 전… 매니저였으니까…!”
그러자 도현과 한민유가 눈을 마주치더니 소리를 내어 웃었다. 셀레나의 얼굴이 약간 더 빨개졌다. 도현이 말했다.
“다니엘은 키도 크고 몸도 예쁘니까요. 그래도 역시 다니엘은 눈동자가 제일 예뻐요. 이렇게 햇빛에 비춰보면 진짜 보석 같지 않아요?”
도현은 다니엘의 얼굴을 살짝 잡고 각도를 약간 비틀어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밝은 보랏빛으로 빛났다. 셀레나도 한민유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 아름다워요.”
“드문 색깔이죠. 예뻐요.”
“감사합니다.”
다니엘은 그들의 칭찬에 답례했다. 한민유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다니엘은 너무 미소가 박해서…. 이상하게 저희 학회 남자들은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다들 미소가 모자라요. 잘 웃고 다니면 좋잖아요. 보기도 좋고. 저렇게.”
한민유는 지니호에 가득한 미소가 헤픈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남자는 저 정도가 딱 좋았다. 예쁘고 몸 좋고 생각 없고 잘 웃고.
“다니엘은 미소가 모자란 수준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죠. 감정이 메마른 남자인걸요.”
셀레나가 바다를 바라본 채로 툴툴거리듯 말했다. 도현도 흠, 하며 다니엘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건 그렇죠. 저도 잘 웃는 남자가 좋고. 다니엘은 웃어도 좀 무서운 느낌이고.”
“그렇습니까?”
다니엘이 되물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잘 웃는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그렇긴 하지만.”
“그런가요?”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자 한민유와 셀레나가 동시에 물었다. 도현이 말했다.
“좀 잘 웃어봐요. 기왕 예쁘게 태어났는데.”
그러자 다니엘은 손가락을 튕겨 곁에 있던 남자 크루를 불러 거울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세 여자의 관심 어린 코칭을 받으며 웃는 얼굴을 연습했다. 그가 말했다.
“전 너무 활짝 웃는 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런데…. 역시 너무 예쁜 것도 문제네요.”
한민유가 말했다. 셀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은 날카로운 인상의 미남이니까요. 활짝 웃는 건 안 맞아요. 샤프한 인상이잖아요. 근육도 이 이상 기르는 건 안 어울릴 거예요. 입이 어떤 모양으로 웃는지보단 눈빛이 더 중요해요. 지그시 바라보면 어쩐지 더 멋있으니까.”
셀레나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미모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줄줄 말했다가 헉,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그렇습니까? 그런 부분은 신경을 써야겠군요.”
다니엘이 선선하게 대답했다. 셀레나는 뚱한 얼굴을 했다. 그때 몇 시간 자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치엔위가 나타났다. 그녀는 다니엘을 보자마자 짜증을 냈다.
“거울 좀 그만 쳐봐라. 진짜 왕자병이냐, 어? 아, 꼴 보기 싫어.”
“일어나셨습니까, 박사님.”
다니엘이 인사했다. 도현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박사님, 이제 괜찮으세요?”
“평소 드시던 강장제라도 드릴까요?”
셀레나가 물었다. 한민유는 크루에게서 쟁반을 받아 치엔위에게 음식을 더 권했다.
“드세요.”
대단한 사람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잘 보여 둬야 한다. 다들 그녀에게 호감의 미소를 띠며 많은 걸 권했다.
“아휴, 이런 걸다. 한 비서관도 바쁠 텐데 우리 랩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오고 미안하네.”
한민유가 웃으며 대꾸했다.
“원래 저는 다니엘을 퀸 교수님 밑으로 보내자고 건의했던 거 아시죠? 솔직히 왕리밍 교수님이랑 다니엘은 상성이 안 맞아요.”
“그래? 그런 거였어? 아, 내 팔자야.”
치엔위는 잠깐 한탄하고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좀 기분이 좋아졌다. 다니엘이 말했다.
“저는 운신의 자유가 다소 필요한 것뿐입니다. 교수님께서 그걸 왜 이해해주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치엔위는 아까보다는 덜 칙칙한 얼굴로 대꾸했다.
“바보냐? 우리가 하는 일이 그냥 일도 아니고 까딱하다간 도시 몇 개가 날아갈 수도 있는데 정신 안 차리지?”
“저는 이미 실전 경험이 많습니다.”
“고글도 아직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마라. 너 정도 수준은 쌔고 쌨다.”
“제가 직접 운전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 말 하기 전에 공부나 착실히 해라. 넌 그냥 석사 1년 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니가 지금 시키는 대로 마법이나 좀 쓸 수 있는 수준이지 연구자 마인드가 됐다고 생각하냐? 논문도 어차피 교수님이 쓰라는 주제 중에 쓸 거 아냐? 시키는 것만 하면 뭐가 될 것 같냐? 그저 그런 거나 되는 거야, 멍청한 새끼야. 딴 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지금 니가. 너 완전 공부를 야매로 해가지고 자꾸 이상한 버릇이 있어.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고 연구는 창조라고. 상상력. 아냐? 이해되냐?”
“…….”
다니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현은 놀란 얼굴로 치엔위와 다니엘을 보았다. 그리고 셀레나와 한민유를 돌아보았다. 한민유는 익숙한 얼굴로 ‘무슨 문제라도?’라는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고 셀레나는 그녀의 놀라움에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아직 석사 1년 차일 뿐이구요, 치엔 박사님은 박사 4년 차시거든요. 다른 학계랑 다르게 저희 학회는 연공서열이 중요하고 철저하게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져서 다니엘은 미운 오리 같은 입장이에요. 부랴부랴 북경대 학부를 졸업시키긴 했지만 교수님들이랑 안면도 전혀 없는 상태이고…. 왕리밍 교수님께 진짜 잘 보여야 할 텐데 왜 자꾸 겉돌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셀레나는 금방 학회에 적응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조직 생활에 익숙하고 그래서 눈치도 빨랐다. 그녀가 그렇게 도현에게 설명했다. 치엔위와 다니엘은 자기들끼리 대화에 한창이다. 한민유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더 눈에 띄려고 하는 거죠. 다니엘은 학회에서 마이너 입장이니까요. 올해 시즌을 치르면서도 북경대 석사 1년 차들 중에서 제일 성적이 좋았다면서요? 솔직히 우리 학회에서 왕리밍 교수님 외의 남자들 중에 다니엘만큼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도 없었죠. 왕 교수님 성격에 안 그랬으면 벌써 잘랐을 거예요.”
그러자 셀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민유를 보았다.
“그런 건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한민유는 웃으며 대답했다. 도현은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그쪽도 여러 가지로 복잡한 거군요. 재미있네요. 좀 더 얘기해주세요.”
그렇게 도현 킬스버그, 치엔위, 한민유, 셀레나 카토, 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까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알다시피 다니엘 스톤하츠는 하렘은커녕 도현과 로웰 등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백안시하는 남자였다. 그에게 도현 외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니 그는 여기 있는 남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로 지목되어도 여자들이 전혀 가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다니엘은 자신의 곁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본인 나름대로는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가면을 벗은 채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이야 어제오늘 처음으로 지니호에 온 사람들이었지만 도현 킬스버그는 쟁쟁한 남자 네 명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하렘을 가진 사람이었다. 킬스버그 보이즈 네 명이 만들어지고 난 이후로는 그들보다 질이 떨어지는 남자들에게는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들을 딱히 다른 여자들과 공유하지도 않았다(미르 킹쉴드는 경계에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저기서는 마치 다니엘 스톤하츠가 하렘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도현 킬스버그와 눈동자가 정말 아름다운 미녀와 정장을 입은 미녀와 왠지 강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저 마도사까지.
스스로를 쟁쟁한 남자라 정의하는 여기 있는 그 어떤 남자도 저런 건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들의 몰취향은 고작해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여자를 만나면 그게 이기는 것이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좋은 것은 보는 순간 아는 것이다. 그때까지 그게 좋은 것인지 몰랐더라도.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는 좋은 것이고 여자에게 선택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의 남자다. 그러니 저런 형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뛰어난 암컷들이 제일 강한 수컷 하나를 공유하는 것이다.
“뭐야, 이거! 질투 나!”
미르 킹쉴드는 그쪽으로 다가가 도현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신태호도 쭈뼛쭈뼛 다가가서 한민유의 옷을 잡아당겼다.
“미, 민유 누나, 그러지 마요.”
치엔위는 다시 와구와구 먹고 자러 갔다. 그리고 원래 그런 식의 공유는 오래도록 이어지는 개념이 아니다. 수컷이 그의 전성기에 있을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고. 곧 무리는 흩어졌다. 그리고 셀레나와 다니엘만이 남았다.
“…….”
“…….”
셀레나는 떠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 움찔했다. 천천히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이 남자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생각하며 5년을 보냈다. 그랬더니 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인생에 다니엘 스톤하츠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탓이 아닌가.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셀레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
그날의 게임도 끝났겠다, 대만에서의 시간이 아직 약간 남았다. 사람들은 시티 투어를 나가거나 해양 스포츠를 즐기거나 야외 수영장에서 휴식을 취했다. 퀸을 위시하여 윈드서핑을 하러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나갔다. 필리페 버밍험도 그녀를 따라나섰다. 제수스는 일광욕을 하며 어울리지도 않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카흐는 항상 여자들과 함께 시시덕거리더니 지금은 가만히 제수스의 곁에 앉아 술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닌 척 한민유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도현과 로웰도 지정석에 누워 마사지를 받으며 한가로이 여유를 즐겼다. 셀레나도 그들의 곁에서 같은 마사지를 받았다. 이런 호사는 처음이라 절로 환희의 신음이 나왔다. 물을 잔뜩 먹은 송선호나 다니엘 스톤하츠도 적절한 태닝을 유지하기 위하여 몸과 머리카락에 무언가를 경쟁적으로 잔뜩 바르고 햇빛 아래에 누웠고 에반과 미르는 수영을 했다. 에반은 곧 수영장에서 나와 몸을 닦았다.
자신의 왕국을 천천히 돌아보던 도현이 문득 로웰에게 물었다.
“태호가 저렇게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선생님?”
지금의 지니호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여자와 남자들이 그득했다. 강렬한 개성을 가진 인간들은 창작자에게 좋은 영감을 준다. 도현은 많은 여자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갓 미성년자를 벗어난 신태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키가 아주 조금 더 커서 이제 도현과 거의 엇비슷한 키가 되었다. 다행히 아직은 더 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한민유는 원래부터 신태호와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민유가 웃는 얼굴로 때때로 신태호를 희롱했다.
“역시 어린애잖아요? 남자를 좋아하는 느낌은 아닌 거겠죠? 솔직히 저는 태호 그런 식으로 본 적 없어서.”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로웰도 자신의 전(前)최애 신태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솔직히 태호가 매해 뽑히는 슈퍼 루키들 중에 따지면 외모가 그렇게 뛰어난 건 아니죠. 어린애 같고. 저기 제라드 라니에리 때는 정말 굉장했고 킹쉴드 씨도 슈퍼 루키로 뽑혔을 땐 엄청났죠. 우리 팬들은 금발 벽안 선수들한테 목을 맵니다. 올해 알렉스 킴도 다른 선수들만큼 발랑 까진 느낌이 아닌 미남이라 또 매력이 있고. 물론 우리 알렉스 선수는 일단 실력이 실력이라 미모가 문제가 아니고.”
현(現)최애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금방 이야기가 그쪽으로 샜다. 도현이 수영장의 광경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태호의 인기 비결은 외모 때문이라기보단 순진무구함일까요? 저렇게 생겼는데도 사실 저기 있는 남자들 중에 제일 강한 거 아니에요. 그런 반전미?”
“음, 역시 가장 강한 남자는 그것만으로 최고라는 건가.”
로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신태호를 빤히 보았다. 작년에 잠깐 통화할 때만 해도 여자들이 만지는 걸 어색해하며 마구 피하기만 하더니 이제는 하도 많이 주물러져서 그런지 가끔 피하긴 해도 익숙한 눈치였다.
“태호도 발랑 까지는 건 시간 문제겠네요.”
“음, 그렇겠죠. 저런 환경에서 남자애가 정조를 지킬 수 있다는 건 솔직히….”
로웰이 말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눈을 감고 누운 채 정확히 몇 분의 간격으로 자세를 바꾸고 있었다. 그가 로웰의 말을 듣고 대꾸했다.
“신태호의 인기 비결은 바로 잠재력입니다.”
“잠재력이요?”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소드마스터의 기준으로 신태호는 아직 다 큰 게 아닙니다. 그가 아직 다 크지 못한 것은 심리적 요인으로, 그것만 극복하면 다른 선수처럼 클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심리적 요인 때문에 신태호는 단 한 번도 경기나 경기 외적으로 제힘을 100% 다 발휘한 적이 없습니다. 성격도 모질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강한 겁니다. 그러니 성장과 상상의 여지가 있는 것이죠. 그가 다 크고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지면 얼마나 더 강해질까.”
“오오오…. 그러네. 최애를 갈아탄 건 너무 성급한 짓이었나?”
로웰은 감탄했다. 도현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그리고 다니엘의 자태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다니엘의 매력이기도 한데요. 왜 다니엘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죠?”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 셀레나도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다니엘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정확하게 햇빛을 바라보고 누운 자세로 대꾸했다.
“저도 여자에게 인기가 많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인생의 목표를 잃었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저도 정신적으로 취약했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태호도 정신적 결함이 사라지면 아마 지금보다 인기가 없어질 겁니다. 지금은 좋은 물건에 세일 표가 붙어있는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죠.”
세일 표가 붙어도 비싼 건 똑같다. 하지만 세일 표의 마법이란 그런 것이다. 비싼 물건을 제값보다 싸게 사면 이득일 거라는 환상.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취약하면 원래 그 사람의 값어치보다 훨씬 더 싸게 후려칠 수 있다. 그것도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남보다 더 싸게 후려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람들이 달려드는 것이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일이다.
“흐음, 나도 연애에 대한 심리를 더 잘 알게 되려면 연애도서를 읽어야 하려나. 그런 건 평생 나한테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현은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원래부터 이렇게 사람의 심리에 대해 잘 알았겠는가. 예전의 그는 그런 것에 일체의 관심도 없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뭘 하든 잘하는 남자였지만 이제 연애에 대한 남녀의 감정까지 도현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에반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스톤하츠 씨가 왜 인기가 없어? 인기 많으신데.”
“어, 그래? 작년보다는 확실히 인기가 떨어진 느낌인데.”
품평회의 점수는 올랐지만 분명히 그랬다. 분위기가 그랬다. 여기 여자들은 남자를 오로지 남자로만 본다. 남자로서 가치가 어느 정도냐로 판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다니엘은 이제 더 이상 여기 있는 여자들이 그저 ‘남자’로만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지니호에서 도현과 함께 왕이었던 예전 에반의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에반은 사실상 모두와 멀었다. 하지만 지금의 다니엘은 모두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는 도현 킬스버그의 자택뿐만 지니호의 파티나 스케줄을 관리하기도 했고 로웰과 어시와도 따로 신뢰 관계를 쌓았다.
“그래도 스톤하츠 씨가 누군가를 원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거역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건 인기 같은 말랑한 게 아니잖아.”
에반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도현에게 속삭였다. 다니엘은 잠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에반은 역시나 그를 보면서 웃었다. 도현은 둘 다 쳐다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씁, 이상한 경쟁하지 마. 싸우는 건 질색이야.”
에반은 다시 도현에게 눈길을 돌렸다. 송선호는 선탠을 그만두고 도현에게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그냥 좋은 건 좋은 거고 싫은 건 싫은 거야.”
그녀가 그를 좋은 깔개라고 말한 건 정말로 깔고 앉기 좋다는 뜻이었던 게 틀림없다. 송선호가 다가오자 도현은 그를 등받이 삼아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송선호에게 눈짓했다. 그는 예쁜 프랑스와 이탈리아 디저트가 잔뜩 플레이팅 된 은쟁반에서 그녀가 원하는 디저트를 골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는 컨디션이 썩 안 좋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잘생겼다. 도현은 그의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정답이야.”
송선호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는 도현의 얼굴을 그렇게 바라보며 별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조금만 냉정해지면 그도 다 알 수 있었다. 그녀에 대한 일에 그가 냉정을 찾기가 참 힘들다는 게 문제지만. 그가 에반 블랙을 처음부터 싫어했던 이유가 뭔가. 그가 도현에게 사치와 쾌락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밝혀진 그의 과거는 또 어떻고. 그는 도현에게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해가 되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다니엘 스톤하츠는 어떤가. 그는 사이코패스 대량 살상마다.
이 둘에 비하자면 미르 킹쉴드 같은 건 정말 말랑한 것이었다. 그가 지금 그녀에게 가장 사랑받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에게만 신경 쓸 게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는 다른 남자들이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한 크게 적대감도 드러내지 않고 여유를 부리곤 했으니 직접적으로 해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송선호는 에반 블랙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송선호가 도현에게 붙어있든 말든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적절한 선탠에 열중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이는 내가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이제 싫다. 더 이상 그녀의 탓이라며 자기합리화하지 않을 것이다. 송선호는 도현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며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녀가 소중하다. 사랑한단 말이다.
“뭐해? 나도.”
미르 킹쉴드가 환한 햇살을 등지고 환한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도현은 뒤에는 송선호를 두고 선베드 앞에는 미르 킹쉴드를 앉힌 채 맛있는 걸 먹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에반과 송선호는 각자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미르 킹쉴드는 동료들과 어울렸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멀찍이 떨어져 한민유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끼리 남았다. 셀레나는 머뭇거리다가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저….”
“네?”
셀레나는 이렇게 몸이 편하고 나른한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맛있는 걸 잔뜩 먹고 좋은 걸 보고 좋은 걸 누리고…. 그녀는 역시나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도현에게 고백했다.
“저… 사실 다니엘 좋아했어요. 눈치채셨겠지만….”
셀레나는 다소 우울한 얼굴로 바닥을 쳐다보았다.
“걱정 마세요. 지금은… 좋아하지 않아요. 아니,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녀는 처연한 기색으로 작게 말했다.
“다니엘은 처음부터 저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어요. 여기 와보니까… 도현 씨를 만나니까 왜인지 알 것 같아요. 제가 다니엘이라도 제가 아니라 도현 씨를 선택할 거예요.”
도현 킬스버그는 아름답고 부유하고 매력 있었다. 그녀는 남자를 좋아했지만, 그뿐이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귀여워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남자에게 아무것도 의탁하지 않았다. 자유롭고 당당했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셀레나는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사람인지. 그저… 누군가 말하는 대로 사는 빈 껍데기 같은 인생만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한다고 여겼던 마음도, 그의 말처럼 다 거짓이었던 게 아닐까.
그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을 느끼게 된 지는 오래다. 그런데도 눈물이 나왔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셀레나가 손가락으로 빨리 눈물을 훔쳤다. 도현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손을 뻗어 눈물을 같이 닦아주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외로워요?”
“모르겠어요…. 다니엘이 미워요.”
그녀는 결국 눈물을 다시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 셀레나도 잘 알 거예요. 남자들은 우리를 보는 순간부터 우리를 원하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그렇지 않았나요?”
“그건….”
그녀도 도현도 굉장한 미녀였다. 지나가면 누구라도 한 번쯤 돌아볼 정도로. 주목은 그들 같은 이들에게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에 위협을 느끼며 살아온 것은 셀레나뿐만이 아니다. 그래서 도현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성과 자신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놀이동산을 만들었다. 셀레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았다.
“끝까지 나를 지키고 보호해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요. 모든 건 기브 앤 테이크죠. 다니엘이 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다니엘은 내게 원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다니엘은 날 선택하고 나도 다니엘을 선택한 것뿐이에요. 대부분의 로맨스는 여자들의 판타지 속에나 있어요. 남자들은 그걸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걸 획득해요. 그래서 여자는 항상 손해 보는 기분이 들죠. 그렇지 않나요?”
“…….”
셀레나는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돌려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한민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현이 약간 더 셀레나에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도현이 속삭였다.
“그리고… 다니엘이 셀레나에게 무관심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분명히 다니엘은 셀레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네? 그런… 말도 안 돼요.”
셀레나는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런 말을 다니엘 스톤하츠의 연인인 도현 킬스버그에게 들을 줄이야.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녀에게 어떻게 했던가. 절대 사랑일 리가 없다. 그런 게 사랑일 리가 있는가.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도현이 물었다.
“셀레나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저 남자. 다니엘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다니엘이 셀레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네.”
“그게 저 남자 식의 사랑이에요. 남자의 사랑이란 폭력이죠. 그게 남자가 하는 사랑의 본질이에요. 사랑은 기만이에요. 그러니 가장 기만하는 상대야말로 가장 사랑하는 거죠.”
저 남자는 매저키스트에 서브미시브지만 동시에 메일 도미넌트에 새디스트였다. 그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싶다면 그는 분명 그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그가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다면 그는 분명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도현에게 맞고 혼이 나고 명령을 들으면 흥분했다. 그는 도현에게 매질을 하거나 간지러움을 태우고 그녀의 자유를 속박하면서도 흥분했다. 그는 솔직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도현을 속이고 있었다. 그는 점점 더 교활해지고 있었다.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보다 덜’이라는 개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한다는 것에는 다름이 없다. 유달리 사랑이 폭력으로 표현되는 그런 남자다. 남자가 하는 사랑의 본질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남자다.
“사랑에 기대를 걸지 말아요. 하찮은 거예요. 기대와 믿음은 가치 있는 거예요. 그런 건 대부분 스스로에게 투자해야 하는 거죠.”
잘난 남자라는 건 결국 많은 여자들이 그를 공유하게 된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시간대가 다르든 같든. 누가 어떻게, 어떤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특이 케이스는 말 그대로 특이 케이스일 뿐. 자연 상태에서는 단 5%의 수컷이 전성기 시절 평균 5년 동안만 암컷 무리에 인정받고 공유된다. 그러니 동물의 수컷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답지 않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수컷은 자신을 공유하는 모든 암컷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신의 전성기를 다 바쳐 봉사한 후 깨끗하게 사라져야 한다. 암컷들이 하나의 수컷을 두고 싸운다는 개념은 인간 수컷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암컷들은 언제나 서로 협력하고 함께 생존한다.
지니호에 도착한 셀레나는 도현을 보자마자 그녀를 걱정했다. 그녀가 속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자신처럼…. 그녀가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셀레나를 걱정한 것일까? 셀레나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조심해요. 다니엘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남자예요.”
셀레나가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으음, 하고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렇겠죠?”
“우리는 우리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어요. 어린애들도 잔뜩….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오히려 그 사람들을 따르고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해요. 알아차린 사람이 있더라도 말할 수 없어요. 그들은 이미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있어요.”
가라앉은 리야드. 처음부터 거짓된 뉴스를 홍수처럼 범람시켜 사람들의 눈을 가린 언론. 의로운 인간을 오히려 악인으로 만드는 위선의 가면을 쓴 정치인들. 22세기? 인간이 선사시대 이래 의식적으로 크게 발전했다고 믿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다. 인간은 언제나 뛰어난 인간만 뛰어났다. 같은 말을 쓰고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아니다.
“다니엘은 그런 힘을 가지고 싶어 해요.”
누가 들을까 봐 셀레나는 아주 빠르게 속삭였다. 도현은 잠깐 그런 셀레나의 불안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현이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다니엘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그럼… 잘하고 있는 건가요?”
“다니엘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 힘을 가질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른 누군가가 그 힘을 가지는 게 좋을지 다니엘이 가지는 게 좋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그녀가 다니엘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말투도 어조도 다르지만 그랬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 다니엘은 셀레나에게 힘을 가지라고 말했다. 도현도 유리함을 따지라고 말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은 사랑만큼이나 허무한 것 아닌가요? 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13살쯤에 가세가 기울고 동생도 아파서 힘들게 살아야 했죠. 20대가 되어서는 제 능력으로 금방 돈을 벌었어요. 그런데 또 몇 년 안 돼서 엄청난 빚을 지고, 지금은 다시 이렇게 일어섰어요. 그때 이랬으면 됐을까, 저랬으면 좋았을까 하는 생각은 다 의미가 없었어요. 결과가 중요해요. 힘이 중요한 거죠. 그렇게 세상 보는 눈이 생기고 나서 보니 가장 약한 사람들이나 제일 잘잘못을 따지더라구요. 참 우습죠.”
“그럼 세상에 옳고 그른 게 없다는 건가요?”
“사람들이 지향하는 옳고 그름은 있죠. 하지만 그걸로 너무 자신을 옥죄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내가 사회의 양식을 존중하고 있다는 정도만 보여줄 수 있으면 충분해요.”
셀레나는 충격을 받았다. 은연중에 도현이라면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도 분명 자신과 같은 다니엘 스톤하츠의 포로일 것이라 여겼던 것일까. 셀레나가 접하게 된 새로운 세상은, 다니엘이나 학회는 전부 그녀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말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도현과 같은 사람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인가. 도현은 셀레나가 부러움을 느낄 정도로 아름답고 부유하고 자유롭고 매력 있는 여자였다.
셀레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이 전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거북스러웠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자신의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는 것처럼. 만에 하나라도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의심의 여지마저도 인정하기 싫었다. 자신이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싫은 것이다. 셀레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곧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까?”
어느새 다니엘이 다가왔다. 도현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셀레나는 그를 외면했다. 다니엘은 도현의 뺨에 입을 맞췄다. 도현이 답했다.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저에 대한?”
“다니엘이 셀레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죠.”
셀레나는 깜짝 놀라 그 둘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다니엘은 잠깐 셀레나를 돌아보았다가 도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도현 씨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은 딱 잘라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봐요. 셀레나를 괴롭히고 있잖아요. 분명히 셀레나를 좋아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남자의 사랑은 폭력일 뿐이다. 기대해선 안 된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다. 도현은 아까 그렇게 말했다. 셀레나가 생각해왔던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암시했다. 마음이 욱신거렸다.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에게 자신이 아닌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더욱 가슴이 아팠다. 화가 난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 모든 게 거짓이었다니. 속았다. 속고 살았다. 셀레나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모두와 멀어졌다.
*
팔라완에 도착한 지 이틀이 되었다. 아름다운 팔라완에서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 윈드서핑, 카이트서핑, 해수욕 등 많은 물놀이를 즐겼다. 강렬한 햇살과 아름다운 바다, 맛있는 음식. 모두 도현이 사랑하는 것들이다.
문득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도현은 홀연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퀸룸의 인피니트 윈도우로 달과 별, 달빛에 울렁이는 바다가 보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퀸룸을 빠져나와 밖으로 향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때때로 이유 없이 찾아오는 기쁨과 슬픔…. 행복도 유한하고 슬픔도 끝이 있다. 시간은 가고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이런 감동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 아름다운 광경과 함께 뇌리에 깊숙이 남기는 것이다. 그런 건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바닷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녀는 지니호의 전망대로 향했다. 가장 멀리, 가장 넓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선객이 있었다. 그는 달과 별,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아름다웠다. 배와 달과 별, 바다, 모든 것에 녹아나듯,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왔어?”
어째서일까?
이럴 때 꼭 마음이 통한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엔 이 남자가 있다.
그녀가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에 속고 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반은 엄마 덕분이고 반은 이 남자의 덕분이다. 그녀의 인생에는 네 명의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다. 엄마, 동생, 로웰 리, 그리고 에반 블랙.
“뭐가 보여?”
도현이 물었다.
“아니.”
에반이 답했다. 도현은 그의 곁에 서서 주변을 보았다. 지니호가 내는 희미한 불빛과 멀찍이 있는 도시의 빛 외에는 달과 별빛뿐이다. 에반은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달빛 때문에 그녀의 이마가 은빛을 냈다. 그녀의 팔에 걸고 있는 간단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다이아몬드 팔찌가 보인다. 그가 그것을 보고 있는 걸 깨달았을까? 그녀가 말했다.
“미르가 준 거야.”
“그래? 마음에 들었나 봐.”
“응. 그리고 편해. 웃기지? 네가 준 목걸이나 다니엘이랑 송선호가 준 반지들이 훨씬 더 비싸고 좋은 건데 불편해서 항상 하고 있을 수가 없어. 그런데 이건 그냥 편하게 항상 하고 있어.”
“…….”
에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도현은 몸을 돌려 난간에 한쪽 팔을 기댔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질투 나?”
“…조금.”
“하하하.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때는 전혀 티 안 내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티 내서 뭐해. 너만 알면 되지.”
“자.”
그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에반은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반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에반은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고민 꽤 했다? 내 거라는 티를 팍팍 내라며?”
반지는 백금으로 만들었다. 아름답고 단단해서 보석을 받쳐주는 데는 황금보다 더 많이 사용된다. 사랑을 증명하는 데는 다이아몬드 백금 반지만 한 게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은은한 황금빛이 도는 백금 링은 그녀의 눈동자 색과 비슷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앤티크 컷의 푸른색 다이아몬드는 남색에 가까워 그녀의 머리카락 색같이 보였다. 푸른색 다이아몬드를 양쪽에서 받치는 삼각형 모양의 다이아몬드는 링과 비슷한 황금색이었고 링 자체는 18캐럿 정도의 다이아몬드에 비하면 얇아 보였지만 안정적인 두께였다. 그녀는 그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음! 역시 손이 예뻐서 잘 어울리네. 이 정도로 화려한 게 너한테 잘 어울릴 줄 알았어.”
도현이 웃었다. 그는 도현을 와락 껴안았다. 목이 메인 걸까? 그는 작게 속삭였다.
“…내 거야?”
“응.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말했다.
“농담인 줄 알았어. 이런 거… 싫어하잖아.”
그녀는 남자 같은 거 책임지기 싫어한다. 에반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도현은 에반의 등을 마주 안았다.
“넌 특별하다고 말했잖아.”
에반이 고개를 들어 도현과 얼굴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속눈썹이 닿을 듯 가까웠다. 그는 평소처럼 여유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어쩐지 취약하고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도현의 마음을 끌었다. 도현은 그를 좋아했다.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의 빛과 어둠, 그의 역사와 둘의 역사…. 그 순간들을 사랑했다. 에반은 그녀의 뺨을 소중하게 감쌌다.
“특별한 건 너야…. 사랑해. 사랑해…. 이 세상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너밖에 없었어…. 평생 너밖에 없어.”
“하하하.”
이 남자가 이렇게 부담스러운 말을 팍팍 할 줄이야. 도현도 그도 변한다.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서로를 다 알지 못했다. 그때는 그게 싫었다. 도현도 사랑에 그렇게 어린애 같을 때가 있었다.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지금은 그와 더 알아갈 게 있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서로에게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있다는 게.
대부분의 사랑은 기만이다. 사랑이 그토록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절대 흔할 리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애정 결핍에 허덕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증거이지 않은가? 그래서 권력, 부유함, 아름다움, 사랑, 운 같은 건 전부 희귀한 것이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도현은 운이 좋았다. 이 남자도 운이 좋았다. 그래서 서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이 있다면, 운명이 있다면 서로일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널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난 내가 좋아. 그래서 네가 좋아.”
도현이 속삭였다. 그러자 에반은 어쩐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가 말했다.
“행복해…. 무서워. 행복해….”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언제나 저쯤에 미뤄두고 있었다. 그런 걸 바란다는 마음을.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자신이 강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강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게 그녀의 앞에서 무슨 소용일까. 솔직해지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녀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자신도 조금은 좋아진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상을 기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좋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오래전에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도, 생각했던 것보다도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던 것일까? 정말로 자신은 그녀에게 특별한 것인가? 아니… 당연히 특별할 것이다. 그 사실을 자꾸 믿지 못하는 건 자신이었다. 여전히 한 발 뺀 듯 구는 것도 다 그런 것 때문이다.
가슴이 아팠다. 그를 사랑한 여자는 산처럼 많이 있었다. 이런 걸 받은 것도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가슴이 떨렸다.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도 기뻤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왜일까? 왜 그녀일까?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도 결정적이지 않았다. 결국은 그녀라서였다. 그녀이기 때문에….
“너도 나한테 보석 같은 거 잔뜩 사줬으면서.”
도현이 웃으며 그의 얼굴을 만졌다. 그도 도현의 얼굴을 만졌다.
“넌 한 번도 남자한테 이런 거 사준 적 없잖아.”
“맞아.”
그는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녀의 눈동자와 반지를 번갈아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결혼이라도 하자고 하면 울지도 몰라….”
“결혼하고 싶어?”
“모르…겠어…. 그냥… 눈물 날 거 같아.”
“후후…. 난 항상 송선호가 제일 겁쟁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제일 겁쟁이였어.”
도현은 그의 예쁜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는 겨우 피식 웃었다. 그는 도현의 눈동자를 한없이 바라보며 대꾸했다.
“내가 그래서 송선호 싫어한다고 했잖아.”
그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 그녀가 준 반지를 다시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마주쳤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달빛과 별빛, 도현과 에반. 바다, 함께 만든 배, 일렁이는 파도.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마음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더욱더 특별해질 것이다. 기대되었다. 가슴이 떨렸다.
둘은 서로의 눈동자를 깊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언제나처럼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착각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믿을 수만 있다면.
*
“도현 킬스버그?”
“도현 씨.”
“도현아~”
퀸룸 앞에서 세 명의 남자가 딱 마주쳤다. 아침이 되어 제각각 그녀를 찾으러 온 것이 마침 시간이 겹친 것이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송선호는 인상을 팍 구겼다. 분명히 같이 잠들었는데 그녀가 없어졌다. 어디를 찾아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왔는데도 없다. 다니엘은 빠르게 두 남자를 전체적으로 체크했다. 피부 상태, 헤어 스타일, 옷차림 등등. 역시나 자신이 제일 우월했다. 날 때부터 우월했기 때문이다. 미르는 다른 두 남자가 있든 없든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로 퀸룸의 으리으리한 문짝에 똑똑똑 노크했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응? 없나?”
미르는 문을 제대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 햇살이 인피니트 윈도우를 통해 아름답게 쏟아졌다. 그는 거침없이 침실로 향했다. 이부자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없었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송선호와 다니엘도 문가로 들어와 있었다.
“없는데?”
미르는 그들에게 그렇게 알렸다. 그들은 자연스레 식당으로 향했다.
“킬스버그 님이요? 아직 안 오셨는데요?”
시즈카가 그렇게 대꾸했다. 그들은 로웰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에 노크를 하자 로웰이 눈도 제대로 못 뜨며 밖으로 나왔다.
“작가님이요? 안 왔는데.”
그들은 그대로 에스테틱에도 들르고 카페테리아도 가보고 시큐리티 팀에게 가서 하선한 사람들의 목록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야외 수영장으로 갔다. 아침이 일러서 아직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진짜 어디 간 거야?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는 불안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며 디바이스를 들어 어딘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입을 다문 채로 천천히 야외 수영장을 돌아보며 가능한 경우의 수를 전부 생각해보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는 쩝 하고 한 번 입맛을 다시더니 눈을 감고 자신의 미간을 검지로 짚으며 잠깐 감각에 모든 집중을 쏟았다. 그리고 잠시 뒤 눈을 뜨더니 전망대 쪽을 바라보았다.
“도현이 저기 있는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뭐?”
송선호는 인상을 더 팍 찌푸리더니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먼저 앞서 걸었다. 소드마스터 같은 건 원래 이런 용도로 쓰는 거다. 셋은 줄줄이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전망대는 그렇게 넓은 공간은 아니었다. 지니호에서 가장 위층에 위치한 방은 퀸룸이었고 퀸룸에서는 야외 수영장과 선두, 선미 등 사방을 모두 볼 수 있는 인피니트 윈도우가 있었다. 선미 쪽엔 통신을 위한 레이더 송수신기와 비행차 주차장이 있었는데 그 위에 전망대가 있어 퀸룸이 아니더라도 사방을 볼 수 있었다. 세 명의 남자는 거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도현을 발견했다. 셋 다 멈칫했다.
도현은 밝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헐렁한 원피스 형태의 순면 잠옷만 입고 있었다. 바닥에는 모포가 깔려 있었다. 그 위에는 에반 블랙이 있었고 그를 커다란 쿠션 삼아 몸을 기대고 도현이 잠들어 있었다. 그의 꿀같이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햇살에 빛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에 깍지를 끼고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꽉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를 덮었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서로의 다리가 얽히고 서로의 얼굴이 가까웠다.
“으윽….”
다소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신음을 흘린 것은 송선호였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만 알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공유했다. 도현은 또다시 자신을 내버려 두고 이 남자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버렸던 것이다.
‘이 쓰레기 같은 남자가….’
다니엘 스톤하츠도 에반 블랙의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벌레를 쳐다봐도 저런 얼굴로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저 남자는 예쁜 껍질을 뒤집어쓴 여우 같은 존재다. 그는 몹시 교활한 남자였다. 도현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자다. 다니엘 스톤하츠 본인이 가장 교활하고 치명적인 남자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현아.”
미르 킹쉴드는 바로 쪼그리고 앉아 도현의 등을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도현이 곧 눈을 뜨더니 끙하고 일어났다. 그녀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미르….”
“이런 데서 자면 어떡해?”
“으음, 그러게요. 등이 아파요.”
에반도 눈을 떴다. 도현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두 사람은 바로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둘은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두 사람만의 공간이 생겨났다.
“잠들어버렸네.”
“등이 조금 아파. 넌 괜찮아?”
“괜찮아.”
둘은 서로의 이마를 기대며 서로의 애정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고 도현은 고개를 돌려 다른 남자들을 보았다.
“근데 다들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에요?”
검은 머리 남자 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미르가 약간 인상을 찌푸린 채 에반 블랙을 빤히 보면서 대답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미르의 눈빛에 응했다.
“너 찾으러 왔어.”
“진짜요?”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에반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도현은 하품을 했다.
“방에 들렀다가 식당으로 갈게요. 다들 먼저 가 있어요.”
다 같이 전망대를 내려갔다. 도현은 인피니트 윈도우 쪽 문으로 안에 들어갔다. 그녀를 거기서 웃는 얼굴로 배웅한 에반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세 명의 남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죠?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
미르만 대충 그렇게 대답했다. 에반은 먼저 계단을 마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상하게 좆 같다. 미르는 이미 열 계단 정도를 먼저 내려간 그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어젯밤에 도현이랑 뭐한 거야?”
에반은 뒤를 돌아보았다. 세 명의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는 왼손의 검지와 중지로 브이 자를 그렸다. 그리고 그 사이를 낼름 혀로 핥았다.
“이런 거?”
미르 킹쉴드, 다니엘 스톤하츠, 그리고 송선호는 제각각 그의 도발에 분노했다. 앞의 두 명은 처음으로 당해봐서 그렇고 송선호는 이번이 두 번째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손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게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크고 푸른 다이아몬드가 박힌 화사한 백금 반지였다.
“그거….”
다들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저건 분명히 프러포즈 링이다…! 결혼반지였다!! 그는 자신의 왼손 손등을 보이며 천천히 흔들었다. 그리고는 오늘따라 더욱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송선호는 입을 딱 벌리고 굳어 있었다. 몇 초 뒤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억장이 무너지는 신음을 흘렸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거의 전부 다 죽여버리겠다는 얼굴이었다. 미르 킹쉴드는 약간 열 받은 얼굴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외쳤다.
“야! 너만 도현이한테 그런 거 받은 줄 알아? 나도 받았거든?!”
그렇게 다들 어떻게 식당에 왔다. 먼저 도착한 에반 블랙은 아주 여유롭고 우아한 자세로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양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성기게 두 손을 깍지 낀 채 기분 좋은 얼굴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식당의 가장 가운데 앉아 있었다. 누구나 그의 왼손 약지에 있는 커다랗고 예쁜 다이아몬드 반지를 볼 수 있었다. 푸른 다이아몬드에 고급스러운 황금빛을 띠는 백금 밴드로 된 값비싸고 아름다운 반지였다. 보통 남자가 끼기엔 다소 화려해 보였지만 그에게는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을 떠올리게 하는 다이아몬드였다.
“엇? 블랙 님, 그거 뭐예요?”
에반은 예전에 이 배를 만들고 도현과 함께 여행을 다닌 전적이 있었다. 오늘 오프인 시즈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에게 다가왔다. 전처럼 자연스럽게 존칭을 썼다. 그는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 도현이가 줬어요.”
“진짜요? 대박. 킬스버그 님이요?”
“네.”
시즈카는 깜짝 놀라 바로 그의 테이블에 딸린 의자에 앉았다. 에반은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샐리와 주드, 서연 등 다른 크루들도 다가왔다.
“우와~”
“진짜요? 킬스버그 님이요? 우리 킬스버그 님이 남자한테 이런 거 막 주고 하는 사람이 아닌데?”
서연이 깜짝 놀라 에반의 왼손을 잡은 채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진짜 예뻤다. 얼마짜리일까? 엄청 비쌀 것 같다. 에반은 참 기분 좋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제가 얼마 전에 유부남 되고 싶다고 하니까 이렇게 딱 주더라구요. 농담 삼아 한 말이라 진짜 줘서 깜짝 놀랐어요. 너무 감동받아서 눈물이 다 나올 것 같더라구요. 다들 도현이 알잖아요. 이런 거 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정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니까.”
그는 아닌 척 대놓고 자랑을 했다. 그는 반지를 낀 자신의 왼손으로 자신의 예쁜 얼굴을 괴며 난처하면서도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피부와 다이아몬드 결혼반지가 반짝반짝 광채를 발했다. 이런 게 사랑받는 남자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에스테틱을 백 번 천 번 받으면 뭐하겠는가. 사랑받는 남자는 그것만으로 격이 다른 것이다. 다들 깜짝 놀랐다.
“유부남…!”
놀라운 단어다. 유부남, 유부남이라니! 다들 진짜 놀라서 그의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유부남이라는 단어가 지니호에서 언급된 것은 가히 최초라 할 수 있겠다. 반지가 예뻤다. 그런데 유부남…. 잠깐만 이 남자가 유부남이면 이제 지니호도 끝인가? 아니, 잠깐만. 근데 진짜 예쁘다. 얼마일까? 근데 우리 진짜 직장을 잃는 것일까? 여기처럼 꿀알바가 없는데!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흑…. 말도 안 돼…. 절대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이야…. 흐윽…. 도현아…. 흑….”
송선호는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양쪽 눈을 꾹 누르며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어떻게 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저 남자의 왼쪽 손목을 잘라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라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되게 기분이 나빠서 에반 블랙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아침을 으적으적 먹고 있었다. 그도 도현에게서 받은 시계를 짠하고 드러내고 있었다.
“다들 모여서 뭐해?”
“킬스버그 님!”
도현이 내려왔다. 그러자 에반의 반지를 보며 호사를 떨고 있던 이들이 모두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그녀의 이름을 크게 외치자 도현도 다소 놀랐다.
“왜 이래, 다들?”
“정말이에요? 킬스버그 님 이제 유부녀 되는 거예요? 결혼하는 거예요?! 막, 막 그런 거예요?!”
서연이 그녀의 팔을 잡고 물었다. 도현은 그게 무슨 경천동지할 말인가, 하는 얼굴로 서연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에반을 발견했다. 그는 화사하게 웃으며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도현도 웃었다.
“아아~ 저거.”
“그래요! 저거요! 저거!”
“뭐… 설명하자면 사정이 복잡하긴 한데. 일단은 반지만.”
“일단은? 일단은 뭐요? 일단은 뭔데요?”
“‘일단은’이라는 말이야. 자, 다들 아침마저 먹어. 돌아가.”
그녀는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밀어 해산시켰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에반 블랙과 마주 앉았다. 그 둘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매우 화사하고 농밀해진다. 둘은 자연스럽게 손을 깍지 껴 마주 잡았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아침 식사를 함께하며 서로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일어났을 땐 도현은 각자의 식사에 손을 하나도 못 댄(그래도 미르 킹쉴드는 다 먹었다) 송선호와 다니엘을 발견했다.
“어머… 있는 줄 몰랐네. 안 먹어?”
그녀는 그들이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다는 눈치였다. 송선호는 더 암담한 기색으로 얼굴을 가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고 미르는 버럭 했다.
“그게 말이 돼? 내가 이렇게 큰데! 내가 이렇게 번쩍번쩍한데!”
“하하하, 미르~ 삐치지 마요.”
도현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다니엘은 여전히 에반 블랙의 왼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자른다. 자른다. 자른다. 자른다.’
에반은 그런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그는 싱긋 웃었다. 도현의 뒤에서 자신의 왼손을 보여주며 다시 자랑했다. 다니엘은 진짜 열 받았다. 태어나 이렇게 화가 난 적은 처음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자른다!’
저건 자신의 것이다. 저런 건 자신 같은 남자만이 가져야 한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자신의 속에서 어마어마한 질투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누구던가. 그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남자다. 얼마든지 의심해도 좋다. 얼마든지 추궁해도 좋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이 마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녀와의 사랑의 깊이는 저딴 버러지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저 귀한 걸 저런 여우 같은 남자가 가져간단 말인가!
다니엘은 에반의 손목을 잘라서 그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며 그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버러지처럼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는 살심을 숨기지 못했다.
‘죽인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남자의 타겟이 된 남자는 오늘도 여유롭게 웃었다. 그는 모두의 적의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웃었다.
‘아, 이런 거 좋지 않은데 말이야.’
그는 별다른 잡음 없이 킬스버그 보이즈에 들어왔다. 그는 도현 킬스버그의 전 연인이었고 집도 배도 전부 그녀와 함께 만든 것이라 익숙했다. 다른 남자들에게 적대감을 보인 적 없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그녀가 좋으면 그도 좋은 것이었다. 그런 건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으쓱한 마음을 어찌할 것인가. 이 기쁜 마음을. 이 벅찬 마음을. 그녀에게 사랑받는 것은 이렇게나 가치 있는 것이다. 알고 있었다. 이기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어쩌겠는가. 자신이 가장 인정받는다는 걸 뽐내고 싶다. 이러나저러나 그는 경쟁에 익숙한 남자였다. 경쟁에 익숙한 남자란 결국 뛰어난 남자라는 뜻이다. 경계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높이 친다는 것이다. 살의를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두려움은 존중을, 경계는 강함을 증명한다.
‘즐거워.’
그녀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만한 남자들을 이렇게 모아둘 수 있는 것도 다 도현의 능력이다. 그녀는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반도 즐길 것이다. 그는 경쟁자들에게 한없이 여유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뽐내며 도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늘 게임은 뭐로 할 거야? 빙고 좋을 것 같은데. 간단하고. 오늘 팔라완 마지막 날이잖아.”
“으음, 그럴까?”
둘은 둘만이 아는 과거가 있었다. 둘만의 언어가 있었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송선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송선호?”
“…….”
송선호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겨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오늘따라 너무나 좋아 보였다.
‘이 새끼랑 함께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송선호는 벌건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잠깐 보았다가 결국 식당을 나갔다. 밖으로 나갔다. 뜨거운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밝은 햇살, 터키색 바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의 마음이 암울하니 모든 것에 그림자가 졌다.
‘왜…? 어째서?’
어째서 자신은 안 되고 그는 되는 것일까. 송선호는 그녀에게 가장 먼저 프러포즈 링을 주었다. 물론 그가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한 첫 번째 남자는 아닐 것이다. 그녀는 옛날부터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분명히 지금의 그녀에게 선택받은 네 명의 남자 중에선 가장 처음일 것이다.
그녀를 만난 게 자신이 제일 처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항상 생각했었다. 그녀를 제일 먼저 발견한 게 자신이었더라면. 하지만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그는 그녀에게 발견되지 못했다. 에반 블랙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와 함께하기 시작했는데도. 그녀가 그러는 건 처음 보았다. 그는 그녀를 떠나고도 다시금 선택받았다. 그런 것도 송선호가 아는 한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특별한 남자는 예전도 지금도 그 새끼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그 양아치 놈밖에 없는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송선호가 그녀에게 그보다 못 해준 것이 있나? 송선호가 그보다 매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모르겠다. 마음이 쓰렸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가장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가 가지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인생이란 그런 인생이었다. 단 하나 그럴 수 없었던 게 도현이었다. 도현 킬스버그였다. 이렇게 사랑하는데도….
“누, 누나, 이제 그만 놀려요!”
“왜? 귀여워서 그런데. 가슴 작은 걸 그렇게 고민할 줄 몰랐네. 주변에 큰 남자들 많잖아. 비결을 물어보지 그랬어?”
“벌써 물어봤어요…! 그, 그냥 저절로 크는 거래요….”
“하하하.”
이 배는 정말 송선호랑 안 맞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가 갈 곳은 단 한 곳뿐이다. 그는 라운지 바로 향했다. 그는 맥칼란을 시켰다. 취하고 싶었다. 그리고 바라는 바대로 금방 취했다.
“흑… 흐윽…. 왜? 도대체 왜? 왜 내가 아니죠? 왜? 이렇게 사랑하는데…. 흑…. 흐윽…. 내가 훨씬 나은데. 내가 훨씬 더 잘해줄 수 있는데…. 흑…. 으윽…. 도현아….”
이 라운지 바의 마스터는 올해도 또 와서 울며 진상을 부리는 송선호를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킬스버그 님한테 반지 하나 해달라고 하세요. 해주실걸요?”
“그런 말을… 어떻게 합니까…. 흑…. 흐윽…. 그렇게 억지로….”
해달라는 말도 못 하면서 상대가 척척 해주길 바란다는 거 아닌가. 성가신 남자다. 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 에반 블랙도 그냥 자기가 해달라고 해서 받았다는 걸 알면 정말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으윽… 으흑…. 흑….”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그는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계속 문지르며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때때로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은데도 그녀와 떨어지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 차라리 그녀와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게 맞았을까? 그때는 적어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렇게 비참하고, 아프고 슬프지는 않았다. 작년에 그녀에게 차였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마음이 아팠다. 이제는 그녀와의 행복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흑… 흐윽…. 도현아….”
“응?! 뭐야? 왜 이렇게 취했어?”
팔라완에서의 마지막 태양이 지고 있었다. 밤사이 출항할 것이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송선호는 마치 코스라도 짜놓은 것처럼 그대로 퀸룸으로 가서 도현에게도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왜? 흑. 왜 난 안 돼?”
그는 눈물 젖은 눈동자로 그녀의 눈을 보면서 호소했다. 그의 얼굴이 취기로 벌겠다. 도현은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허리를 잡았다.
“뭐가?”
“왜 그 새끼는 되고 난 안 되냐고오, 흑…. 내가 더, 내가 훨씬 더 많이 사랑하는데. 흑…. 흐윽…. 도현 킬스버그…. 내가 제일 많이 사랑한다고…. 내가….”
“야… 너 진짜 술만 마시면 이럴래? 이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 혼난다? 술을 감당 못 하겠으면 끊어.”
도현은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송선호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술을 어떻게 안 마셔? 니가… 니가 나 사랑 안 하는데…! 흑…. 흐엉…. 도현아…. 도현아… 내가, 내가 사랑한다고오… 흐윽.”
“아, 이 진상!”
도현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녀는 일단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완전 인사불성이 되었다. 도현은 그를 겨우 침대로 데리고 가서 던졌다. 그녀는 그의 엉덩이를 아주 세게 찰싹찰싹 몇 번이나 때렸다.
“술! 끊어! 진짜!!”
“흑…. 도현아….”
너무 취해서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다. 도현은 질질 짜면서 웅얼거리고 있는 그를 아주 정떨어진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걸 확 어디 갖다 버릴까, 하는 얼굴이었다. 아니, 좋아한다니까. 몇 번을 말해줘야 하냐고, 어? 자꾸 이러면 진짜 질리는 거 모르나? 바보.
‘진짜 갖다 버려?’
진짜 팔라완에 버리고 가? 팔짱을 끼고 그를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송선호는 처량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도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도현은 일단 끌려가 주었다. 그는 도현의 배에 얼굴을 묻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품에 안으면 내 것만 같다. 그녀를 독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그것이 이 순간뿐이라는 게 너무나 아쉽고, 그래서 분하다.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적이었는데. 자꾸 욕심이 나고 그래서 힘들다. 마음속에 일렁이는 이 감정이 그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사랑, 독점욕, 질투….
“미안….”
송선호는 약간 정신을 차렸는지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야…. 내가 그래도 너랑 알고 지낸 시간이 오래되니까 봐주는 거야, 어?”
“도현아… 도현아,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뭘 어떻게 하겠다고?”
“어떻게 하면 날 제일 사랑할 건데….”
“하아, 송선호.”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턱을 확 치켜들었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분명히 너도 좋아한다고 말했지?”
“…그럼 너도 증명해줘.”
송선호는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사랑은 앞으로도 계속 너한테 증명할 거야. 니가 납득할 때까지, 니가 인정할 때까지. 난 어차피 평생 너밖에 없어. 너만 사랑할 거야. 그런데 나도 불안해. 나도 증명이 필요해.”
그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과 깍지를 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더욱 진지하고 간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양아치 새끼를 스위스에서 다시 봤을 때부터 불안했다. 그가 메트로서울로 온 것을 알고는 더더욱 그랬다. 그가 다시 도현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와 도현은 정말로 좋았다. 어차피 질 떨어지는 미르 킹쉴드나 속내가 시커먼 다니엘 스톤하츠 같은 것보다 자신 같은 남자가 더 좋은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집에도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는 빵점짜리 남편감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돌아간 집에서 그녀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그런데 그게 다 어그러졌다. 에반 블랙 때문이었다.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이제 제법 어른 남자가 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행실은 한량이나 다름없는 놈이다. 금융 회사는 원래도 제조업이나 물류, IT 회사보다 인력이 적다. 그만큼 책임자가 책임져야 할 것도 적다는 말이다. 그것도 에반 블랙이 만든 은행 같은 건 더더욱. 그는 시간만 나면 집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특별한 시간을 쌓아갔다.
그런 것만이 의미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송선호와 그녀가 쌓아왔던 것처럼, 그런,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상들. 누구나 할 것 같은 일상들, 그런 것도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함께 한 시간만큼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그래서 특별해지는…. 송선호는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게 그녀에게는 부족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증명?”
그녀가 되물었다. 송선호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번갈아 보던 그는 그녀에게 더욱 얼굴을 가까이했다.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난 너라는 걸 알았어. 첫눈에 반했어. 매일 너에 대한 꿈을 꿨어…. 정말 오래도록… 바라왔어.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아….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 그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
‘아…. 내가 진짜 술 안 끊으면 장을 지진다….’
다음 날, 송선호는 어마어마한 숙취와 함께 잠에서 깼다. 겨우 뻑뻑한 눈을 뜨니 퀸룸의 천장이 보였다. 술을 먹고 도현에게 온 것일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에 취했다고 그녀에게 또 잔뜩 당한 모양이다. 하반신이 저릿한 게….
송선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렴풋이 술 먹고 그녀를 찾아와 진상 짓을 한 것 같은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아….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응? 갑자기 머릿속에 기억의 단편이 하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 재생했다.
‘어? 어어? 어어어? 어어어어?!?!’
그는 자신의 몸을 빠르게 더듬었다. 아, 알몸이었다. 완벽하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헉…!”
그리고 옆을 보니 그녀도 누워 있었다. 침대 시트에 감싸져 있었지만 분명히 그녀도 알몸이었다. 시트가 많이 어질러져 있었다. 하반신도 어수선했다. 허리가 뻐근했다. 했다. 한 건 분명한데. 그런데, 그게…. 그게…!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설마설마설마…!!’
송선호는 정말로 어젯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기억 이후로는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하반신은 욱신거리고 허, 허리는 아팠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훔쳐보았는데 얼굴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침대 시트가 파스락거렸다. 체액 때문에…. 침대 주변으로 그의 옷과 그녀의 옷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설마!!’
송선호는 시트를 꽉 쥐었다. 그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떴다. 기억…! 기억해라, 송선호! 기억!!! 술이 원수다, 술이 원수야! 내가 진짜 또 술을 마시면 성을 간다!!! 그는 패닉에 빠졌다. 심박수가 최고치를 찍었다. 귀에서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 설마… 하, 한 거야? 한 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 나랑 도현이가…! 그, 그렇고 그런 걸!! 도현이도 이때까지 안 해본 그런 걸…!!’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는 것일까! 송선호는 침대에 머리를 처박고 끙끙거렸다.
정말로… 이 침대에서 그녀와 자신이 하나가 되었을까?
“윽….”
송선호는 신음을 흘렸다. 기억도 하나 안 나는 주제에. 엄청 실수했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기뻐서 등골에 소름이 다 돋았다. 그녀가 허락해준 걸까? 드디어? 가슴이 감동으로 술렁거렸다. 기뻤다. 그녀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더더욱 책임감이 들었다.
‘당연히 내가 책임질 거야. 당연히…. 도현이는 내 거야. 내 거야….’
송선호는 도현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도현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녀는 비몽사몽 간에 그를 밀어냈다.
“아, 더 잘 거야. 피곤해…. 어제 니가….”
그녀는 잠결에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그래도 그녀를 꽉 끌어안고 겨우 대답했다.
“응….”
몸이 떨렸다. 너무 기뻐서 고통스러웠다. 환희의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기억나라, 기억….’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녀가 드디어, 드디어 그를 선택해주고 받아준 것이다! 그녀는 다른 어떤 남자와도 그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남자였다. 그녀에게 가장 특별한 남자가 된 것이다. 역시나!
‘그런 반지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었어. 나야말로 정말로 도현이에게…. 아, 결혼!’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다시 잠든 도현의 얼굴을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로 보았다. 그는 이미 마음이 구만리 넘게 달려가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그녀의 잠든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적도의 햇살, 짙푸른 대양, 아름다운 연인. 그는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도현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사랑해. 사랑해. 너무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영원히….’
말로 하지 못한 마음이 넘쳐났다. 그는 도현이 일어날 때까지 하염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끌어안고 있다가 또 얼굴을 보다가 끌어안았다. 1시간이 지나지 않아 도현이 잠에서 깼다. 그녀는 시트로 몸을 가린 채 부스스 일어났다. 송선호는 일어난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일어났어?”
“응.”
“어젠 미안…. 나 또 술 먹고…. 나 진짜 앞으로 술 조심할게. 어젠… 좀 속상해서….”
하지만 지금은 그때 속상한 마음이 무엇인가 싶다. 가슴이 떨린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살짝 놀랐다. 아침부터 그의 눈빛이 아주 부담스러웠다. 고개를 갸웃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하품을 하고 나서 말했다.
“너 술 끊어. 또 그러면 안 봐준다.”
“응, 알았어. 술 끊을게.”
그는 고분고분하게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이 남자가 왜 이래?’라는 눈빛으로 다시금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주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도현은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송선호도 바로 따라갔다.
“어떡할래? 같이 샤워할까? 아니면 혼자 하는 게 마음 편하겠어?”
송선호가 세심하게 물었다. 도현은 역시나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혼자?”
“응, 알았어.”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여튼 뭔가 분위기가 수상하다, 이 남자. 오늘따라. 도현은 한 번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니 그가 아차, 하고 문을 잡았다. 그리고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도현아. 저… 몸은 괜찮아?”
“괜찮은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어깨쯤에서 시선을 올리지 못하며 대꾸했다.
“아, 음…. 알았어. 나중에 얘기해.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얘기하고….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도현은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응답했다. 그랬더니 그의 얼굴이 펑 하고 빨개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죽을 것 같았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터져 나오는 기쁨을 겨우 견뎠다.
‘이제 진짜 결혼해야지! 책임질 거면 당연히 결혼…! 어떡하지? 급하게 할 수 있을까? 아, 도현이한테는 어떻게 얘기 꺼낼까? 근데 결혼은 어떻게 하는 거지? 식장, 혼수, 아, 또 뭐…. 어, 엄마… 아니, 아버지한테 전화해야겠다. 아버지…!’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옷을 얼른 꿰입었다. 디바이스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어디 두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디바이스를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문으로 달려갔다가 아차, 하고 다시 욕실로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지에 연신 문질러 닦고 안절부절못했다. 마음이 설렜다. 기뻤다. 설레고 기뻤다. 마음이 두둥실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몇 번이나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욕실 문에 노크했다.
“사랑해, 도현아. 다시 올게. 나… 오늘 정말 기쁘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담아, 미움과 질투, 불안 없이 이렇게 진실로 사랑함을 전한 적이 있었나. 사랑한다고 말하니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찌릿찌릿 전류가 흘렀다. 그렇게나 바라던 그의 사랑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다! 그는 얼굴이 벌게졌다. 당장 이 욕실의 문을 열고 그녀와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다시금 그녀를 뜨겁게 안고 싶었다. 기억나지 못하는 분까지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다. 그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가슴을 붙잡았다. 어제는 그렇게 아프기만 했던 마음이 지금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기뻤다.
그리고 그는 몇 번이나 욕실 문을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뗐다. 그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현이 바로 나왔다. 그녀는 목욕 가운을 입은 채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나와 레몬을 띄운 물을 마시며 오늘도 멋진 바다를 보며 감탄사를 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하러 가기 위해 퀸룸의 문을 여는데 그 앞에 상기된 얼굴을 하고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송선호가 보였다. 그는 도현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
“음…. 아, 아니…! 시, 식사는 같이….”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미고 나타났다. 쓰리피스 명품 양복, 구두, 시계, 넥타이, 행커칩…. 어제 그렇게 술을 마시고 잤는데 숙취도 없나? 그는 숙취가 꽤 있는 편이었다. 그의 피부가 오늘따라 반짝반짝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어쩔 줄 몰라 했다. 도현의 몸 주위로 손을 움찔거리다가 겨우,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마치 깨질지도 모르는 유리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왜 이래?’
도현은 그제야 제법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잘해주는 건 좋은 거지만. 그녀는 그대로 송선호와 같이 식당으로 갔다. 그는 그녀의 의자를 얼른 빼주었다. 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나른하게 말했다.
“아, 피곤해. 숟가락질하기도 힘들어.”
“그, 그래? 역시…. 그럼 내가 해줄게.”
그는 도현의 옆자리로 의자를 얼른 옮겨 앉았다. 도현은 다시금 그를 약간 이상하게 보았으나 역시나 잘해준다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도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송선호는 군기가 바짝 들어 그녀의 수발을 들었다. 그녀의 눈치를 하나하나 보며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가 하는 짓이 마치 임신한 아내의 수발을 드는 팔불출 남편 같았다. 태어나 어떤 사람에게도 저런 짓은 해본 적 없을 남자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어제 같은 일도 있었으니까 이제….”
“응?”
송선호는 숟가락에 뜨거운 리소토를 덜어 후후 풀어 적당한 온도로 식힌 뒤 도현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도현은 그걸 받아먹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송선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는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도현도 다시금 어젯밤 생각이 나며 그에게 당부했다.
“자기, 진짜 술 안 마실 거지? 나 술 마시고 진상 짓 하는 남자 제일 싫어.”
너 때문에 제일 싫어졌다. 아냐? 그녀가 그렇게 책하자 송선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응?! 아니! 아니! 절대 안 마셔! 앞으로 절대! 절대! 앞으로 술 근처에도 안 갈게! 절대! 나중에 애가 보고 뭘 배우겠어…!”
도현이 풋 하고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애?”
“어?! 아니!”
송선호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말실수했다. 말실수를 한 것 같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술은 안 마셔. 절대 안 마셔.”
그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것인지 젓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도현은 입을 벌렸다. 그는 얼른 왕새우 살을 잘라 그녀의 입에 조심스럽게 넣어주었다. 도현은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그의 턱을 검지로 살짝 들어 올렸다.
“그래. 나중에 애가 보고 뭘 배우겠어? 아빠가 이렇게 술만 마시면 울고 소란 피우는 거 보면.”
송선호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그녀의 말이 그를 창피하게 했다. 그런데 또 기쁘기도 했다. 심장이 고장 난 것만 같았다. 그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맞아. 네 말이 다 맞아. 도현이 네 말이 다 맞아.”
“그렇지?”
“응. 응. 응.”
그는 한 번만 대답해도 될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했다. 그렇게 군기가 바짝 들어간 아침 식사가 끝나고 그녀는 야외 수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상석으로 가고 송선호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수영을 몇 번 하고 곧 시원한 커피 한 잔을 시켜 선베드에 누웠다. 그녀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는 충격도 채 안 가시고 실감이 안 나서 우왕좌왕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완전히 꿈꾸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아름답고 근사한 바다가 보인다. 그리고 그걸 배경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같은 그의 여자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도현아.”
“응?”
그녀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렇게 대꾸했다. 그가 말했다.
“사랑해.”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은근히 뺐다. 너무 팔불출같이 보이면 면이 빠지지 않는가. 안 그래도 그는 그녀에게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절로 사랑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솔직히 그녀가 허락해준다면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도현은 또 픽 하고 웃더니 그를 못 말린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송선호는 여전히 행복감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얼굴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너무 예뻐. 아름다워.”
잘해주는 것은 좋은 것이다. 도현이 대꾸했다.
“응, 고마워. 나도 알아.”
“응…. 그렇지? 그럴 거야. 맞아….”
그는 영 정신을 못 차리고 헤벌쭉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에반 블랙이었다. 어제부터 주변에 반짝이라도 뿌려 놓은 것처럼 심하게 반짝거리는 남자였다. 원래도 반짝거리는 남자인데 어제오늘은 정말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훨씬 진정성 있어 보였다. 언제나 웃고 다니는 남자지만 지금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그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따라 온갖 관리를 다 받고 네일 관리까지 받고 왔다. 반지를 위해서였다. 그간 다니엘은 에반을 마치 손가락으로 지그시, 천천히 눌러 죽이고 싶은 벌레처럼 쳐다보았다. 송선호를 놀리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도 참 재미있었다. 좀 더 스릴 있달까.
그는 도현의 옆에 남은 선베드에 누웠다. 그리고 자신의 왼손을 펴서 다시 반지를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이거 어디서 한 거야? 진짜 예쁘다. 이거랑 세트로 네 반지도 만들어도 돼? 받아줄 거야?”
“음… 다이아는 언제나 좋지.”
도현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에반은 그녀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사랑해~ 오늘따라 더 멋있어, 도현아.”
“응, 고마워. 나도 알아.”
에반 블랙도 오늘은 약간 들떠 있었다. 반지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반지 자체의 아름다움도 심미적으로 만족스럽지만 무엇보다도 결혼반지라는 그 개념이 마음에 든다. 유부남이라는 개념이 아주 흡족하다. 유부남이라는 게 무엇인가. 선택받은 남자라는 것 아닌가. 그것도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도현 킬스버그의 선택이다. 그런 건 좋다. 아주 좋다.
송선호도 그녀에게 말했다.
“부가티 사고 싶다며. 아까 너 수영할 때 시켰다?”
“응? 진짜?”
도현은 약간 놀란 음성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송선호는 그녀의 팔을 검지로 계속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완전히 몸을 기울여 자신의 선베드에 앉아 있었다. 송선호는 헤벌쭉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좋아할 거 같아서.”
“음, 잘했어. 고마워. 기뻐.”
도현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는 그것이 너무나, 정말로, 뛸 듯이 기뻤다. 그는 드디어 그녀에게 제대로 인정받고 있었다. 정당한 인정을, 그가 받아야 할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역시 나야말로 도현이에게 특별한 남자.’
거기 있는 두 남자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랑받는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활력이 돌고 남자의 피부가 화사해지며 생기가 돈다. 둘은 도현의 양손을 하나씩 잡았다. 그녀는 책을 놓고 홀로그램을 띄워 마저 글을 읽고 있었다. 클라이맥스였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치장을 끝마치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싹하고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늘따라 매우 공들여 신경 쓴 것이 눈에 보였다. 다니엘은 평소처럼 무표정하고 무서운 얼굴로 그들의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도현의 양쪽을 제자리인 듯 차지하고 꿈꾸는 것 같은 얼굴을 하거나 답지 않게 들뜬 얼굴을 한 남자들을 벌레처럼 내려다보았다.
‘내가 봐주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얼굴이로군.’
죽여버리고자 한다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릴 수 있다. 그들이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잃게 만들고자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리고도 그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 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언제나 경쟁자들을 봐주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언제나 인지하고 있을 필요성이 있었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하나이지 않은가?
다니엘은 물끄러미 그들을 보면서 걸음을 계속 옮겼다.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셀레나의 앞에 섰다.
“셀레나.”
“다니엘?”
그녀는 진정한 휴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휴가를 썼다. 그는 대학원생도 아니었고 당연히 건실하게 겨울 휴가를 쓸 수 있는 직장인이었다. 처음 며칠은 자신의 외모에 엄청난 신경을 쓰는 것 같더니 이제는 화장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 마사지는 잔뜩 받고 있었다. 좋은 모양이다. 그녀는 다니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소 경계하는 것도 같고 기대하는 것도 같다. 다니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니호에 계시는 건 불편하지 않습니까? 더 원하는 게 있으시면 말씀하시죠.”
“아… 지금만으로도 충분해요. 좋아요. 도쿄 돌아가면 그게 문제인걸요. 이렇게 호화롭게 생활하다가 집에 돌아가면….”
“그런 생각은 뒤로 미루시죠. 가격은 신경 쓰지 마시고 뭐든지 최고급으로 즐겨보십시오. 셀레나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목줄을 너무 꽉 쥐면 고통스럽기만 할 테니 이렇게 사탕이라도 주는 것인가. 셀레나는 다소 원망스럽고, 그런데도 역시나 그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약간 떨렸다. 물론 그런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말은 연인에게만 하는 게 좋을 텐데요.”
그러자 다니엘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웃었다. 전에 연습했던 것처럼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다니엘이 셀레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셀레나에게만 보이도록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현 씨가 보이십니까?”
“그런데요?”
“이쪽을 바라보고 있으십니까?”
그러자 마치 타이밍이라도 잰 듯 도현이 진짜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건 셀레나였다.
“진짜 이쪽 보잖아요. 이래도 돼요? 진짜…!”
그러자 그는 조금 더 짙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셀레나에게 말했다.
“도현 씨는 제가 다른 여자와 친밀하게 있으면 질투를 할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항상 질투를 하는 것은 저였기 때문에 도현 씨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
셀레나의 당황스러운 몸짓이 멈췄다. 그녀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도현은 분명 다니엘이 셀레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몇 번이나 언급했다. 아니라고 바로 부정했지만 저도 모르게 정말 그런 걸까, 하고 몇 번이나 되새기는 자신이 있었다. 도현은 사랑 자체를 부정했지만 그녀는 아직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로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면,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약간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표현된 것뿐이라면. 이런 식으로 저도 모르게 상상을 하고 마는 것이다.
“저번에 도현 씨는 제가 셀레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까지 하셨죠. 도현 씨가 항상 의연해 보인다고 해서 정말로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셀레나는 창피함을 느꼈다. 그는 역시나 셀레나를 이용하기만 한 것이다. 그녀가 원망스러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정말 다니엘은… 진짜….”
다니엘은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의 보석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그런 그녀의 속을 다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수치스럽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도현 씨의 엉덩이에 아직 제게 맞은 매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씩 하나씩 거래를 하다 보면 결국 성역 같은 건 없어집니다. 원래 성역 같은 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일 뿐이죠.”
“사랑하는 여자를 그런 식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건가요?
“사랑하는 여자에게 제 모든 걸 주고 싶은 게 왜 잘못된 겁니까?”
“거짓말. 도현 씨도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뿐 아닌가요?”
나처럼…. 셀레나가 그를 쏘아보았다. 다니엘은 그제야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는 도현에게 미소를 지었다. 도현은 그런 그와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러면 기쁘겠죠. 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저는 도현 씨가 좀 더 절 지배해주길 바랍니다. 조금 더 절 사랑해주길 바랍니다.”
“왜… 저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셀레나가 물었다. 다니엘은 도현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채로 대꾸했다.
“저에게 휘둘리는 게 정말로 싫었습니까?”
다니엘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싫었어요…!”
셀레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러니 그가 피식 웃었다. 저 미소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셀레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슬슬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랬습니까? 전 셀레나가 그런 걸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뭘요?”
“자신을 지배해줄 남자를 찾고 있지 않았습니까.”
“뭐라구요?”
“환상과 실제는 언제나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언제나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신기했습니다.”
“…다니엘은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편견과 착각에 대한 울분을 저한테 풀고 있는 건가요?”
셀레나가 그렇게 묻자 다니엘은 다시금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잠깐 생각하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 나쁜 놈…. 셀레나는 걸어가는 다니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도현에게 가는가 싶더니 그 옆의 간이 바에 잠깐 앉아 음료를 시켰다. 그리고 잠깐 크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니엘은 간혹 힐끗 도현을 보았다. 도현도 양쪽에 골골거리는 남자들을 두고 가끔 다니엘 쪽을 힐끗거렸다. 둘은 파워 게임을 하고 있었다.
“뭐해?”
미르 킹쉴드는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나왔다. 도현은 발을 들어주었다. 그는 도현의 선베드에 앉았다. 도현은 그의 무릎에 두 다리를 올렸다. 그는 도현의 다리를 만졌다.
“뭐 읽어?”
“<23세기>. 공상과학소설인데 재미있어요.”
“그래?”
미르는 도현의 선베드에 같이 누웠다. 그리고 잠시 그녀의 책을 같이 읽었다.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이요…. 미르 킹쉴드는 잠시간 기계적으로 글을 읽었지만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도현이 진짜 똑똑해.’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책 읽을 때마다 되게 섹시해.”
그러자 도현이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돌아보았다. 듣는 순간 아주 기분 좋은 말이었다. 미르 킹쉴드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도현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쪽 하고 입을 맞췄다.
“Good boy.”
그녀가 그렇게 속삭이자 미르는 소리를 내어 실실 웃었다. 그녀가 좋았다. 정말 좋았다. 누가 그에게 이런 칭찬을 해줬던가. 누가 그에게 이런 포근함을 주었던가. 그는 강한 남자였기 때문에 그런 건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래서 그 덩치로 자꾸 도현에게 귀여움을 받으려고 애교를 떨게 되는 것이다. 미르는 그녀를 품에 안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녀의 향기가 기분 좋았다.
신경전은커녕 언제나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골골거리며 그녀의 가장 가까이에 붙어있는 미르 킹쉴드, 그리고 멀리 떨어져 그녀와의 파워 게임을 즐기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도 생각했다. 자신이 바로 도현에게 최고의 남자라고.
로웰이 다가왔다. 오늘도 게임을 하는 것이다. 도현은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는 남자들 사이를 빠져나와 로웰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간단하게 여자들끼리 배구를 하기로 했다. 야외 수영장 위를 덮고 배구 시합을 했다. 그리고 오늘은 벼르고 벼른 로웰 팀의 승리였다. 그들은 도현 팀의 벌칙으로 비키니 벗기기를 정했고 도현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또 홀딱 벗겨졌다. 역시나 퀸의 승리였다.
“아!!”
도현은 짜증을 냈다. 퀸은 헹하고 비웃으며 유유자적 수영장 밖으로 나갔다. 언제나 그녀에게선 강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사라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관중들은 오오 하며 손뼉을 짝짝 쳤고 필리페 버밍험은 뭔가 심각한 얼굴로 박수만 빠르게 치며 퀸을 바라보았다.
“내가 진짜 운동한다. 내가 진짜 다음엔 이긴다.”
도현은 분해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현을 비롯하여 샐리, 서연 등도 홀딱 벗겨진 채 물속에 남겨져 있었다. 바빠서 중간에 메트로서울로 돌아갔다가 다시 놀러 온 한민유와 도현 팀으로 배속된 셀레나까지 몽땅 다 벗겨져 있었다. 셀레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게임을 하겠다고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한민유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이건… 어쩔 수가 없네요. 진짜 힘세네.”
그녀는 혀를 내두르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녀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권력은 굉장했지만 그래도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녀는 감탄한 얼굴로 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강한 사람들을 많이 알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주변에 득실거리는 마도사들은 죄다 인간미가 부족했다. 이런 재미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다. 너무나 크고 거대한 것은 인간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한민유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왔고 살아갈 거지만 그래도 역시 그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런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퀸은 최강자답게 나머지 팀원들의 비키니를 그대로 다 가지고 수영장 밖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라이프 가드가 수영장을 지켜볼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전망대로 올라갔다. 남자들이 우글우글 밑에 모여들었다. 퀸은 자신이 챙긴 비키니를 뒤적거리며 세트를 맞췄다. 그리고 밖으로 하나 던졌다. 검은색의 심플한 명품 비키니로 한민유의 것이었다. 그 순간 많은 남자들이 그걸 잡으려고 했으나 그럴 수 있는 남자는 정해져 있었다.
“으아아악!”
“악!”
갑자기 누군가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남자들이 주르륵 밀려났다. 많은 수가 수영장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가 오라를 이용해서 소드마스터, 민간인 할 것 없이 죄다 밀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잽싸게 한민유의 비키니를 챙겼다. 신태호는 그러고서야 앗 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 어어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자신이 한 짓에 깜짝 놀라 굽실굽실 사과를 하며 수영장에 빠진 남자들을 한 손으로 잡고 번쩍번쩍 밖으로 빼내 주었다. 그리고도 몇 번이나 더 사과를 한 뒤 그는 칭찬받을 걸 기대하는 강아지처럼 뛰어갔다.
“누나~!”
한민유는 웃으면서 그에게 손짓했다. 그는 그녀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후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그녀의 비키니를 내밀었다. 그녀는 기특하단 얼굴로 웃으며 그에게서 수영복을 돌려받았다.
“고마워, 태호야.”
그리고 그녀는 신태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신태호는 이마까지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기뻐했다. 그리고 퀸은 크림색 레이스 비키니를 던졌다. 샐리의 것이었다. 어, 어어! 주드는 필사적으로 그 비키니를 사수하려고 했다. 다행히 팬티는 챙겼다. 그리고 퀸은 특유의 나른한 회색 눈으로 자신이 가진 비키니를 뒤적거렸다. 분홍색 비키니를 잡았다.
“서연이~ 저번에 오빠 비키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내가 오늘 복수할 거야! 내가 오늘 진짜 날 잡았다고!”
박지훈이 그렇게 서연을 놀렸다. 그러자 다들 서연을 집중적으로 놀리기 시작했다. 서연은 그들에게 화를 냈다.
“꺼져, 이 대머리들아! 죽어도 니들한테 구걸 안 해!”
서연은 여기서 제일 놀리는 재미가 있는 여자였다. 다들 서연의 비키니를 노렸다. 이럴 때는 키 크고 힘센 사람이 잡는 것이다. 제라드 라니에리가 손을 번쩍 들어 정확하게 타이밍을 노려 비키니 위아래를 전부 다 획득했다. 그러자 다들 박수를 짝짝 쳤다.
“오오! 제라드 라니에리! 야, 너도 완전 쌓인 거 많잖아. 어? 맞지? 야, 야, 복수하자.”
박지훈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이 그렇게 제라드에게 모여들었다. 서연은 이쪽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제라드는 다른 남자들의 환호 속에서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퀸은 이제 귀찮은지 수영복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남색 팬티에 남색 무늬의 흰 브라, 금색과 고동색, 흰색 등으로 이루어진 예쁜 비키니를 전부 던졌다. 다들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바람도 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비키니들은 두둥실 떠서 어딘가로 느릿하게 날아갔다. 전부 다니엘 스톤하츠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 비키니를 잡겠다고 미르와 송선호도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자 둘 다 화가 났다.
“야! 치사하게!!”
“뭐 하는 겁니까, 지금!”
다니엘 스톤하츠는 피식 웃었다. 그는 타고난 승자였다. 압제자였다. 그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이걸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내가 있는데? 다들 망상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건강에 해롭습니다.”
“저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저 미친놈이!”
둘 다 발끈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이후로 그들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쌍의 수영복을 한 손에 쥔 채 천천히 수영장으로 걸어갔다. 도현과 셀레나는 잠깐 서로를 바라보았다.
“…….”
수영장의 가장자리까지 온 다니엘은 잠깐 그대로 두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수영장의 밖에 있는 그와 수영장의 아래에 있는 그들과는 눈높이 차이가 굉장했다.
‘분명히 안 줄 거야.’
셀레나는 벌써 포기했다. 도현은 앞으로 걸어갔다. 한 팔로 양 가슴을 가린 채 당당하게 다니엘에게 자신의 수영복을 요구했다.
“줘요, 다니엘.”
다니엘은 자신의 발치로 다가온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웃었다. 작년의 그가 이 자리에서 얼마나 갈등을 했던가. 고작 이런 천 쪼가리로 그녀를 놀리고 난처하게 할 수 있다니! 하지만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겨우, 정말 겨우 그녀에게 얌전히 돌려주려고 했었다. 사실은 그녀를 놀리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걸 꾹꾹 눌러 참고 그녀에게 곧바로 돌려주려고 했다. 참 숙맥 같던 시절이다.
다니엘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도현 씨.”
그는 작년보다 더욱 신속하고 얌전하게 그녀에게 비키니를 돌려주었다.
“저걸 또 그냥 줘!!”
<4부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