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1)

Paradise (1)

2128년 엘 드라카가 마무리되고 메트로서울은 눈이 가득 쌓였다. 도시에 한파가 몰아쳤다. 겨울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도현은 뜨거운 열기가 좋았다. 몸이 찌뿌둥한 건 단지 미르 킹쉴드가 시즌 때문에 집에 자주 오지 못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작년엔 로웰 리와 도현 킬스버그의 재정적 상태가 좋지 않을 때라 소소하게 식구들끼리만 여행을 갔다 왔다. 배를 움직이는 것 외엔 그다지 돈도 안 들게 갔다 왔다는 것이다. 몇 달 전 최근의 불경기로 팔리지 않았던 도현 킬스버그의 해외 부동산 세 개가 연달아 팔렸고 작품 매출은 12월 완결까지 꾸준히 높게 유지되었다. 그 덕에 지니호는 몇 달 동안 새롭게 단장하여 퀸룸의 인테리어를 다시 하고 카지노장을 개설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세이셸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팔라완과 싱가포르 등 동남아의 도시를 거쳐 마다가스카르와 세이셸까지 가는 항로였다. 항구를 등지고 석양을 향해 출발한 지니호는 사방으로 강한 조명을 쏘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야외 풀장의 물이 일렁거리고 흥겨운 노랫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스테이지의 위에는 도현과 로웰이 올라갔다. 백스테이지에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로웰은 여전히 작업할 때나 입는 늘어진 티셔츠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고 도현은 파티복이었다. 둘 다 파티 선글라스를 끼고 양손에 총 모양의 장난감을 들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극에 달하며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박이 터졌다. 꽃가루가 휘날리며 플래카드가 펼쳐졌다. 다 같이 외쳤다.

“축!! 빚 청산!!!!”

스테이지에서 불꽃이 터지며 로웰과 도현은 머니건을 쏘기 시작했다. 100달러짜리 지폐가 마구 날아가 꽃가루와 함께 사방으로 퍼졌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지폐를 잡으려고 난리를 쳤다. 스트리퍼들 중엔 서로의 머리를 쥐어뜯는 남자들도 있었다.

네 명의 남자는 제각각의 얼굴로 거기 서 있었다. 송선호는 머리가 아프고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다니엘 스톤하츠와 에반 블랙, 미르 킹쉴드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다니엘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에반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박수를 치고 있었으며 미르는 ‘오오!’ 하며 열심히 박수를 쳤다.

로웰이 마이크를 잡았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렇게 다들 지니호에서 다시 보게 되어 기쁩니다. 벌써 1년 반이나 됐네요, 저랑 우리 작가님이랑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힘든 일도 많았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그리고 드디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드디어 우리가 1억 달러에 달하던 빚을 다 갚았습니다!!”

다들 북을 치고 환성을 지르며 그들을 축하했다. 도현도 상기되고 밝은 얼굴로 박수를 쳤다. 그들은 미르 킹쉴드에게 지금까지 그가 쓴 생활비나 집을 부순 돈을 제한 금액을 싹 갚았다. 그도 바로 동료에게 빌린 금액을 갚은 모양이었다. 물론 송선호의 돈은 꿀꺽했다.

“작가님도 한 말씀 하시죠.”

“네. 아…. 정말 다시 이런 날이 올지 몰랐어요. 앞으로 부동산은 절대 안 사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부동산은 모르고 투자하면 안 돼요. 사채는 쓰지 맙시다. 제가 힘들 때도 저를 모른 척하지 않고 곁에 있어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선생님 없었으면 정말 전….”

도현은 일렁이는 눈빛으로 로웰을 보았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로웰은 ‘넣어둬. 넣어둬’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그런 로웰을 끌어안았다. 로웰도 그녀를 끌어안는 모습에 다들 박수를 쳤다. 도현은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검지로 눈물을 훔쳐 닦고 다시 스테이지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르…. 미르도 고마워요. 사랑해요.”

도현은 스테이지 아래에 있는 미르 킹쉴드를 그윽한 눈으로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주위에서 마구 호응하며 분위기를 올렸다. 그들은(물론 다른 세 남자를 제외한) 미르의 등을 치며 그를 스테이지로 밀었다. 그는 의외로 좀 쑥스러워했다. 스테이지로 훌쩍 올라온 그는 크루가 건네주는 마이크를 잡고선 얼떨떨한 얼굴로 사람들을 보다가 도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별거 아닌데… 솔직히 나한테 돈 안 갚아줘도 됐어. 난 다 니 거야.”

미르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들 휘슬을 불고 야유를 보냈다. 그는 사람들의 반응에 살짝 머쓱해하며 뒷머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칭찬을 받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도현은 그를 와락 안았다.

“우리 미르 오늘 왜 이렇게 귀여워요?”

“나? 난 항상 귀엽잖아.”

미르도 도현을 끌어안았다. 이때 나머지 세 남자 중 오로지 에반만이 그대로 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고 나머지 두 남자는 완전히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크루는 <$100,000,000 debt>이라고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를 가져왔다. 연주가 중 하나가 빠르게 드럼을 쳤다. 로웰과 도현은 커다란 가위를 함께 쥐고 그것을 싹둑 잘랐다. 다들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크루는 왕관을 가져와 로웰과 도현에게 주었다. 그들은 직접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그리고 황금색 목걸이도 걸었다. 커다란 목걸이 명패엔 라고 적혀 있었다. 앞에 작게 라는 말도 덧붙어져 있었다. 크루들은 아래에 있는 송선호와 에반에게도 목걸이를 주었다. 그들은 앞뒤로 아무런 덧붙임도 없는 깔끔한 라는 명패였다. 에반은 주는 걸 웃는 얼굴로 받아서 걸었으며 송선호는 끝까지 그걸 모르는 척하려고 했으나 마지못해 받아 들기는 했다. 미르에게는 <미르 킬스버그>라고 적힌 명패를 주었고 다니엘 스톤하츠에게는 라는 명패를 주었다.

그때까지 별다른 불쾌한 기색 없이 파티를 즐기던 에반은 살짝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흠, 하고 다니엘의 명패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다시 새카만 머리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다니엘에게 제안했다.

“바꿀래요?”

그는 자신의 빌리언에어 황금 명패를 내밀었다. 다니엘은 잠깐 그를 보다가 다시 도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싫습니다.”

다니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에반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명패를 걸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돌아가 도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거기에 환대했다.

“그럼 2128년 지니호 연말 파티를 시작합니다!”

그대로 쿵쿵 노랫소리가 울리며 다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작년에 춤을 출 땐 그래도 약간 쭈뼛쭈뼛했던 로웰이나 어시들도 이번에는 완전 광란의 헤드뱅잉을 했다.

“아, 스트레스 풀린다!”

그녀는 이스트드래곤의 우승 실패로 꽤 많은 돈을 날렸다. 거의 살풀이에 가까운 춤이었다. 그래도 많이 벌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었다.

“카지노에서 딸 겁니다!”

“선생님… 도박은 자제하도록 해요, 우리.”

도현이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작년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스트리퍼나 크루들과 춤을 췄던 도현이었으나 올해는 미르 킹쉴드였다. 미르는 도현을 뒤에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같이 춤을 췄다. 오늘도 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지니호의 남자 스트리퍼들은 다들 쟁반에 마리화나나 시가와 불을 피울 도구를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도현은 두껍고 비싼 시가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하늘로 후우,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머리가 약간 몽롱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미르는 도현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시가에 자신도 입술을 갖다 대며 강하게 빨았다. 그의 옆얼굴이 아름답고 섹시했다. 소드마스터라 한 번에 저렇게 많이 빨아도 크게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약간 나른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도현의 몸을 자신의 쪽으로 돌려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너무 좋아…. 도현아….”

마치 개다래 나무를 먹은 고양이처럼 그는 골골거리며 도현에게 몸을 비볐다. 정말 품에 가득 차는 남자다. 웃으면서 그의 몸을 끌어안는 도현을 보며 로웰이 그녀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연애하지 말고 춤춰요! 춤!”

“아, 선생님…!”

“헹.”

도현은 로웰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다 같이 춤을 췄다. 그들과 멀찍이 있던 송선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술을 찾았다. 그리고 월 플라워를 자처하며 난간 쪽으로 향했다. 그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해가 거의 진 밤바다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걸 또 보고 있다, 내가…. 정말 그녀의 이런 면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았으므로 그냥 조용히 술만 마실 생각이었다. 송선호는 바짝 조여져 있는 자신의 넥타이를 아주 약간 헐겁게 했다. 그는 쓰리피스 양복에 비큐나 코트를 입고 그 위에 캐시미어 목도리를 걸치고 손엔 검은색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아주 꽁꽁 감싸 놓았다. 여기 있는 다른 남자들은 죄다 지골로처럼 헐벗고 있었다. 진짜 지골로라서 그런 거겠지만. 마음에 안 든다. 적도 쪽으로 내려가려면 한참 남은 상태였고 난로를 곳곳에 켜 놓았지만 분명 추운데. 뭐 하는 짓거린가, 저게.

“어머, 오랜만이에요.”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송선호는 흥미 없는 얼굴로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돌아보았다가 술을 풉 하고 뿜었다. 그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눈을 크게 뜬 채였다. 윤진가, 뭔가 하는 1년 전에 송선호를 겁탈하려고 한 여자였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얼굴로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를 보다가 스테이지 위에 있는 도현을 돌아보았다. 이미 스테이지 위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이 여자를 안 잘랐다고?!’

송선호는 황당하다 못해 얼이 빠진 얼굴로 도현을 보다가 인상을 팍 썼다.

“알은척하지 말고 저리 꺼지시죠.”

“까칠한 건 여전하시네요. 그러면 여자들에게 인기 없어요.”

“…….”

진짜 성격 같아선 엎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참았다. 도현과의 사이에 어색한 공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지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송선호는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는데 완전히 기분이 잡치고 말았다. 그는 술잔을 두고 도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하하하! 진짜 대박이에요, 킹쉴드 씨!”

“어쩜~ 미르는 못 하는 것도 없어요.”

지니호에 있는 스트리퍼는 당연히 다들 남자들이다. 그들이 엉덩이를 흔들며 공연을 했는데 ‘저 정도 가지고 뭘’, 이라고 말한 미르 킹쉴드가 아주 멋지게 트월킹을 췄다. 로웰과 도현은 바로 자지러질 듯이 웃으면서 그의 팬티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꽂아주며 놀고 있었다. 저 걸레 새끼는 지가 지금 주체적으로 창놈들을 따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원래 걸레 새끼니까 그런 걸 안 따지는 건가.’

다른 여자들도 그에게 팁을 꽂아주고 있었다. 그는 도현의 손을 잡고 몇 바퀴 휘리릭 돌리며 자신의 품에 안았다. 도현이 까르르 웃었다.

송선호는 그녀에게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놈들은 뭐 하고 있는가.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녀의 곁에 있었지만 당연히 춤을 추거나 하진 않았고 에반 블랙은 멀찍이 자리를 깔고 앉아 비싼 칵테일을 마시며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웃었다. 배알도 없는 새끼들이다.

송선호는 그녀의 곁에 가서 크게 헛기침을 했다. 도현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약과 술이 좀 돼서 그가 뭐가 웃기다고 까르르 또 웃었다.

“송선호. 하하하! 여기 너무 안 어울린다.”

한겨울인 한국에서 출발했지만 다들 옷차림이 가벼웠다. 미르 킹쉴드는 웃통을 다 벗고 있었고(여자들이 한 번이라도 그를 만져보려고 난리였다) 에반 블랙도 도시가 아니니 양아치 본성을 버릴 순 없는 것인지 허술한 옷차림이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도 보란 듯이 셔츠 단추를 다 풀어놓고 있었다.

스트리퍼나 미르 킹쉴드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머지 둘도 창놈끼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송선호만이 아주 각 잡힌 클래식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좀 벗어. 안 더워?”

“넌 안 추워?”

그녀는 반짝이는 황금색 스와로브스키가 잔뜩 달린 고급스럽고 짧은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은 얼굴로 자신에게 안겨 오자 송선호는 짐짓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차가운 허벅지를 손으로 문질러주었다. 도현은 그의 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춤추면 안 추워.”

“추워?”

그러자 미르 킹쉴드가 그녀의 등 뒤에 딱 붙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잡았다. 미르는 그녀의 엉덩이에 자신의 몸을 꾹 누르며 송선호와 눈을 마주쳤다. 송선호는 심하게 인상을 찌푸렸고 미르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미르는 안 추워요?”

도현은 훤칠하고 건장한 남자 사이에 끼어 있었다. 누군가와 이러고 춤을 췄던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나 잘생기고 스펙 좋은 남자를 앞뒤로 데리고 있는 것은 역시 으쓱한 일이었다. 도현은 미르를 돌아보았다.

“하나도 안 추워.”

미르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송선호는 부글부글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도현 킬스버그.”

도현은 미르에게서 입술을 떼고 그를 돌아보았다. 송선호도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도현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캐시미어 목도리를 스테이지 아래로 던졌다. 송선호는 그녀와 이마를 맞댄 채 말했다.

“저거 비싼 거야.”

“그래?”

도현은 그의 옷을 하나둘 계속 벗겼다. 스트리퍼들이 웃음을 쉽게 팔며 싸구려 옷을 훌떡훌떡 벗는 것도 나름의 재미는 있었지만 이런 남자를 이런 곳에서 이렇게 벗기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는 도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비싼 포장지를 아무렇게나 벗겨서 사람들에게 던졌다. 송선호가 투덜거렸다.

“니가 쏜 돈보다 금방 던진 내 옷들이 훨씬 비싼 건 알아?”

“뭐? 진짜? 그럼 안 되지!”

다시금 머니건을 든 도현을 보며 송선호는 혀를 찼다. 스무 번은 더 쏴야 할 거다. 그는 어느새 바지에 셔츠 차림이 되어 있었다. 제일 배알이 없는 건 자신이었다. 도현은 웃는 얼굴로 송선호에게도 머니건을 권했지만 그는 이런 것까지 쏘고 싶진 않았다. 미르는 그의 손에 있던 것도 빼앗아 양손으로 머니건을 쐈다. 두 번 정도 더 쏘니 현금량이 똑 떨어졌다.

사람들의 함성이 서해를 울리고 있었다. 즐겁고 흥겨운 파티가 해 질 녘부터 시작하여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밑에서부터 조명을 쏘며 샴페인 타워를 쌓아 다 같이 샴페인을 부었다. 핑거 푸드를 쟁반에 들고 다니던 남자 크루들도 어느새 짓궂은 승객들에 의해 윗도리가 벗겨지곤 했다.

술이 별로 강하지 않은 송선호는 도현이나 로웰이 권하는 술을 마시다가 완전히 대취하였다. 다니엘은 말없이 주변을 살펴보며 파티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미르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도현은 친근한 친구들과 끌어안고 다음 날 기억도 나지 않을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웃다가 약간 지쳤다. 그녀는 사람들 무리를 빠져나왔다.

어느새 그녀는 에반의 곁에 서 있었다.

“뭐야. 왜 춤 안 춰?”

도현은 난간에 등을 기대며 에반에게 말했다. 그는 메트로서울에 있을 때와는 달리 캐쥬얼한 차림새였다. 헐렁한 니트를 입은 그는 어쩐지 따뜻해 보였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춤 잘 추면서.”

“내일은 같이 출게. 오늘은 그냥 보고 있고 싶어서.”

“사람들 춤추는 거?”

“너.”

도현은 그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부드러운 골든 블론드에 같은 색 속눈썹, 아름다운 비취색 눈동자…. 도현은 습관처럼 그의 속눈썹을 만졌다. 간지러워서 에반이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나?”

도현이 되물었다. 에반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계속 보고 있는 거 기분 좋지 않았어?”

“역시 지니호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널 찾아…. 네가 없을 때도.”

“지니호에서만?”

“넌?”

“오늘도 스위트 마티니 마셨어. 나 원래 달아서 안 마셨잖아, 이거.”

“어… 정말.”

도현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잔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잔을 그들의 얼굴 사이로 가져왔다. 도현이 거기에 담긴 술을 마셨다. 에반도 이어서 그녀와 눈이 마주친 채로 술을 마셨다. 도현이 이유 없이 미소를 지었다. 에반도 아무 이유 없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영원히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반이 말했다.

“나도.”

도현이 말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맞췄다. 에반은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도 그를 꽉 끌어안았다. 너무나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예전처럼, 망망대해 위에서, 마치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주변의 풍경도 소음도 멀어지고 오로지 파도 소리만 들리는 것 같은 평온함.

“안 돼….”

뒤에서 누군가 도현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 도현은 에반과 입술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송선호였다. 송선호는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제일 배알이 없고 제일 질척거리는 건 송선호였다. 그는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역시 싫어. 이 새끼랑 있지 말라고….”

“송선호?”

“가지 마… 도현아…. 나 두고 또 어디 가지 마….”

그는 뒤에서 두 팔로 도현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도현은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정수리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에반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크게 웃었다.

“너 때문에 얘가 이렇게 쌓인 게 많은 줄 알았어?”

“널 미워하지 못하니까 날 미워하는 거야.”

에반은 송선호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네가 선택해서 떠난 건데 나 때문에 떠난 거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흐응, 웃겨.”

도현은 그렇게 대꾸하며 한 손으로 송선호의 뺨을 감쌌다. 그녀의 손은 다소 차가웠고 그의 얼굴은 뜨거웠다.

“정말. 울보.”

도현은 그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의 반듯한 이마에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남았다. 도현은 그걸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네 영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그게 부러운가 봐. 넌 특별하니까.”

그녀가 말했다. 에반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스위트 마티니를 마저 마셨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기분 좋아?”

“조금… 우월감이 느껴져.”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태도였다. 도현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얘한테 열등감 느낀 적이라도 있어?”

송선호 같은 남자에게 우월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도현이 그 점을 캐치하자 에반은 약간은 실수했다는 얼굴이었지만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아니.”

“아닌 게 아닌데?”

“아닌데. 내가 왜?”

“그러게.”

도현이 다 안다는 식으로 씨익 웃으며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송선호만큼 고집을 부리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아니…. 나 송선호 아버지랑도 거래하잖아.”

“아.”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송선호 부러워했던 적 많아. 쥐고 태어난 게 좀 달라야지. 집안 환경이 좀 너무 가부장적이라 딸로 태어났으면 그래도 송선호만큼 누릴 수는 없으려나 싶기도 했는데.”

“너라면 그런 거 상관없을걸.”

“그렇지? 그러니까 부럽더라고.”

도현은 후후 웃으며 그의 목젖을 살살 긁었다.

“그런 걸 생각하는 남자였단 말이지.”

“음… 그런 걸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는 않는데. 난 주로 네 생각밖에 안 하는데.”

“정말?”

그녀의 질문에 에반은 고개를 약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해~”

“하하하.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남자였단 말이지.”

그녀의 웃음소리에 송선호가 다시 정신이 약간 든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도현의 귓가에 입술을 눌렀다. 그녀의 배를 감싸 안고 있던 그의 손이 거침없이 그녀의 가슴으로 올라왔다. 도현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고 송선호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지는 건 예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미르 킹쉴드는 약간 예외지만.

“내가 더 사랑해. 이런 양아치보다 내가 훨씬 더 사랑한다고.”

“앗, 송선호.”

도현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말했다.

“나도 마음대로 만지고 싶어.”

“취했어, 송선호.”

에반은 송선호의 손목을 잡아서 그녀에게서 떨어뜨렸다. 도현은 송선호의 코를 꼬집었다.

“얘는 재워야겠다.”

에반이 송선호의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며 도현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까?”

“음, 퀸룸.”

여기서 제일 가깝게 갈 수 있는 방이었다. 에반은 인사불성이 된 송선호를 제대로 부축하려고 한 번 들썩하고 몸을 움직였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얘 남자로 생각했던 적 없다고 했으면서.”

“오늘따라 질투가 많네.”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에반도 그걸 느꼈는지 한숨을 쉬었다.

“지니호라서 그런가 봐. 여긴 정말 너랑 내 놀이동산이었는데.”

“하하.”

지니호의 꼭대기에 있는 퀸룸에 가기 위하여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새로 바뀐 진주빛 가구들이 보였다. 도현은 송선호를 침대에 눕히게 했다.

“너무 마시게 했나.”

도현은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에반은 자신의 시계를 보았다. 도현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가자.”

턱. 도현은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잠든 줄 알았던 송선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도현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무릎에 올라타게 되었다.

“참, 강압적인 남자는 안 좋아요.”

도현은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그렇게 말하며 송선호의 코를 꼬집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현의 허리와 허벅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가지 말라니까. 가지 마. 나랑 있자.”

“아직 2시밖에 안 됐단 말이야.”

도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송선호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도현의 뺨에 입술을 누르고 천천히 목덜미에도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유혹했다. 그는 그녀를 유혹하는 데 박했다. 언제나 도현이 먼저 자신을 유혹하길 바라는 남자였으니까 말이다. 도현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으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런 남자랑 몸을 맞대고 있는 건 역시 흥분이 된다.

“아….”

에반은 다시 시계를 보았다.

“30분 정도는 괜찮겠지.”

그는 도현의 뒤로 다가와 송선호의 어깨를 밀었다. 송선호와 도현은 털썩하고 침대에 누웠다. 도현은 등 뒤를 살짝 눌러오는 무게를 느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장이 쿵 하고 세게 뛰었다. 진짜? 뒤를 돌아보니 에반이 섹시한 미소를 지었다.

“상상해본 적 있을 거 아냐.”

*

몸이 무겁고 머리가 아팠다. 송선호는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아, 젠장…. 다시 술 마시면 내가 성을 간다.’

숙취가 심했다. 어제 도현과 로웰이 주는 대로 호기롭게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가 얼굴을 손바닥으로 비비니 얼굴에 까끌까끌하게 뭐가 묻어나왔다. 뭔가 거스러미 같은 것이 있었다. 약간 냄새가 났는데 낯설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마저 훔치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녀의 것을 잔뜩 핥으면 가끔 그녀의 체액이 얼굴에 말라붙어 있을 때가 있었다. 어제 또 술 취한 채로 도현과 한 모양이다. 또 그녀가 마음대로 그를 가지고 놀았겠지. 기억이 흐릿했다. 그는 침대 위를 더듬거리며 그녀를 찾았다. 곧 그의 손에 그녀의 뭉클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닿았다. 송선호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어쨌든 그녀는 좋았다. 이제 어떻게 해도….

“…?”

그녀를 끌어당기는데 뭔가 이상한 게 그의 명치에 닿았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자신의 손등에도 살짝 건조한 듯하면서 매끄럽고 뜨거운 감촉이 닿았다. 이건 사람의 피부였다. 착각한 건가 싶어 그게 뭔지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단단한 근육의 느낌, 탄탄한…. 송선호는 뻑뻑한 눈을 겨우 떴다.

“…!!!”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도현이 아니라 그 망할 양아치 새끼의 잠든 얼굴이었다. 주먹 하나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송선호는 너무 깜짝 놀라서 아무런 소리도 못 내고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헉…’ 하고 겨우 숨을 내뱉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리고 보니 그와 자신의 사이에 도현이 있었다. 그녀는 174cm의 키로 절대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송선호는 194cm였고 아마 에반도 그 정도였다. 도현은 에반의 팔을 베고 자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어제,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 이 새끼도 다 벗고 있었다. 도현 킬스버그도 다 벗고 있었다!!

‘설마…. 설마…!!’

드문드문 몇몇 장면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아, 도현 킬스버그…. 아, 이 양아치 새끼…. 송선호는 화가 났다. 술 취한 사람을 가지고…! 그때 도현이 뒤척거리더니 송선호의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녀는 송선호의 허리에 팔을 걸치며 중얼거리듯 말을 걸었다.

“일어났어…?”

“……어.”

“빨리 일어났네….”

화를 내고 싶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송선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끄응 하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는 도현을 껴안은 채로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에반과 그녀의 사이에 자신의 몸으로 장벽을 만들었다. 그녀와 이 새끼를 단둘이 놔두고 침대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같이 누워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차악 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송선호는 이 억울함의 보상이라도 받고 싶어 잠든 그녀의 알몸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무릎을 넣고 그녀의 예쁜 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르고 화를 참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대로 다시 잠이 잠깐 들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커튼이 자동으로 걷히며 밝은 햇살이 퀸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으응….”

도현이 신음을 흘리며 송선호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그녀의 손이 송선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송선호는 뻑뻑한 눈꺼풀을 들 수가 없어 끙끙거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퀸룸에서는 가볍게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 맞다….’

송선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무거운 머리를 돌려 창가 쪽을 보니 누군가 서 있었다. 그는 이미 씻은 모양인지 목욕 가운을 입고 젖은 머리를 한 채 크리스탈 잔을 들고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골든 블론드가 햇빛에 반짝거렸다. 그의 비취색 눈동자가 햇빛에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송선호에게 미소를 지었다.

“일어났어?”

“…….”

송선호는 당연히 기분을 잡쳤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에반은 침실과 거실을 구분하는 가벽을 넘어가더니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그가 들고 있던 크리스탈 잔과 똑같은 것으로 숙취해소제가 들어 있었다. 그는 송선호에게 그걸 내밀었지만 송선호는 인상을 팍 쓴 채로 받지 않았다. 그때 도현이 꿈틀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다소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송선호는 차라리 도현을 보는 것이 훨씬 좋았기 때문에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녀는 침대 시트로 가슴 위를 덮어 몸을 가리며 숙취로 인상을 찌푸렸다. 에반은 도현에게도 숙취해소제를 내밀었다.

“네 것도.”

도현은 에반이 준 크리스탈 잔을 받은 뒤 여전히 그의 잔을 받지 않는 송선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송선호 뭐해? 안 받아?”

“…….”

송선호는 인상을 팍 쓴 채로 그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숙취해소제를 마셨다.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에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럴 때 더 친절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그래도 밤을 같이 보낸 상대에겐 친절하고 싶잖아.”

에반도 도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송선호는 에반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한 번 치를 떨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도현의 손을 잡았다.

“같이 씻어.”

“그럴까?”

도현은 다 마신 잔을 에반에게 넘겼다. 송선호는 한쪽으로 쏠려 잔뜩 흐트러진 머리였지만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턱을 치켜든 오만한 태도로 그녀를 데리고 욕실로 쌩 가버렸다. 에반은 재미있다는 듯이 한 번 웃었다. 그는 숙취가 좀 가시자 VVIP룸 중 하나로 돌아갔다. 그의 짐과 옷이 전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송선호는 욕실에서 도현의 머리를 감겨주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뭐야.”

“응? 뭐가?”

거기 좀 더 세게.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화를 냈다.

“뭐냐고, 이거. 아무리 내가 술에 취했다지만!”

“뭐야. 네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난 너랑 하고 싶었던 거라고.”

“에이, 기분 좋았으면 됐지.”

“안 됐거든!”

“아, 또 화낸다. 남자가 너무 화가 많으면 매력 없다니까. 적당히 해, 적당~히.”

“적당히 할 게 있고 안 할 게…!”

도현은 손에 샤워볼을 들고 그의 목덜미와 가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눈을 마주쳤다. 그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남자에게 휘두르는 힘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도현은 물에 젖은 그의 입술을 검지로 부드럽게 만지며 속삭였다.

“난 정말 기분 좋았는데….”

남자와 단둘이 연인의 시간을 가질 때야말로 여자가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그 침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도현은 정말 믿을 만한 남자가 아니라면 절대 둘이서 밤을 보내는 일이 없었다. 물론 그 ‘믿을 만한’이라는 부분은 각별히 신경 써서 가치평가를 해야 하는 부분이다.

스트리퍼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노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런 남자들이 이곳에서 도현에게 실수를 했다간 도현이 그를 태평양 한가운데 던져도 다들 입을 다물어줄 것이다. 그러니 여기가 도현의 성이고 놀이동산이었다. 그녀가 왕이고 여기는 왕국이었다. 그런 위계질서가 누구도 그녀에게 아무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자신의 배우자를 덜 죽이는 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문제다.

어젯밤은 정말 즐거웠다. 그녀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남자들 중에 가장 괜찮은 남자 둘이 그녀의 온몸을 샅샅이 핥으며 그녀의 쾌락을 자신의 쾌락으로 착각하고 그녀에게 극상의 엑스터시를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여전히 뱃속이 따뜻하고 든든할 정도로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즐거운 밤이었다.

“난 또 하고 싶은데.”

“…싫어.”

“진짜?”

“싫다니까.”

“에반 잘 하지 않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에이, 자기도 좋았으면서.”

그는 심기가 안 좋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도현은 후후, 웃으면서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그러니 그는 예상대로 화악 짜증을 냈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남자다. 욕실을 나와 송선호도 자기 짐을 놔둔 VVIP룸으로 돌아갔다.

퀸룸만큼은 아니었지만 VVIP룸도 화려했다. 이 배 자체가 돈을 처바른 배였다. VVIP룸은 300개의 객실 중에 10개 정도가 있었다.

송선호는 여행을 다니거나 출장을 갈 때 적당히 챙겨 다니는 편이었다. 격식 있는 차림이 필요할 때가 자주 있으니 정장을 많이 챙겼지만 그것도 필요한 양만 챙겼다. 요즘은 그것도 비서가 다 챙겨서 신경을 쓴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 달가량 여행을 나온 것이고 그의 본가 드레스룸 반을 챙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옷을 챙겨왔다. 그는 다른 그 어떤 남자들에 비해서도 꿀려 보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비싸고 고급스러운 명품 속옷을 갖춰 입고 쭉쭉빵빵하게 잘 가꾼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며 옷장에 걸어둔 옷을 하나하나 보며 고심했다.

‘셔츠는 흰색…. 아, 근데 도현이는 내 스타일보단 좀 화려한 걸 좋아한단 말이야. 아, 남자는 중후한 맛인데. 음, 그러면 아예 더 짙은 색 셔츠를 입자….’

그는 광이 나는 짙은 파란색 셔츠에 그것보다 약간 어두운 회색과 군청색의 중간 색깔을 띠는 슈트를 갖춰 입었다. 정갈하고 자연스럽게 체크무늬가 들어가 있는 멋있는 정장이었다. 넥타이는 짙은 보라색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빛나는 실크 넥타이, 행커칩은 밝은 로지브라운 실크로 했다. 커프스 버튼은 사파이어, 시계는 파텍필립이었다. 옷도 시계도, 그가 차고 있는 그 무엇도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가 머리까지 만지고 거울 앞에 서니 훤칠하고 잘생기고 고급스러운 멋진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거울을 보고 그대로 나가려다가 아차 하고 어떤 병을 집어 들었다. 어느 날 다니엘 스톤하츠가 엄청난 양의 화장품을 구입하는 걸 보고 살짝 위기감(?)을 느껴 하나 구입한 에센스 미스트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얼굴에 살짝 뿌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살살 두드린 후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그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지니호 크루 중 하나가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가 아차, 하고 손에 든 걸 내밀었다.

“어제 킬스버그 님이 던지신 VVIP님 옷인데요.”

“아.”

어제 도현이 집어 던진 그의 옷들이 말끔하게 드라이클리닝까지 되어 돌아왔다. 다들 꿀꺽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들 개념이 그렇게 희미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넥타이는 없었지만 코트와 정장, 캐시미어 목도리 등은 다 돌아왔다. 송선호는 꽤 기분이 좋아져 지갑을 꺼내 거하게 팁을 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들고 온 옷값만 해도 어젯밤 말했다시피 100달러짜리 지폐를 100장 넣을 수 있는 머니건을 스무 번 이상은 쏘아야 소비할 금액이었다. 그녀는 다만 파티를 관리하던 다니엘 스톤하츠의 말에 따라 그의 옷을 수거하여 건네준 것뿐이었다. 그녀는 거금을 받아 기뻐하며 돌아갔다. 송선호는 자신감을 다시금 장착하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리고 계속해서 킬스버그 보이즈가 어떻게 자신을 꾸미는지 살펴보자면,

아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에반 블랙은 평소 지니호에서 지냈던 것처럼 간단하게 입을 생각으로 바지와 셔츠를 대충 꺼내다가 멈칫했다.

‘송선호나 다니엘 스톤하츠는 은근히 신경 많이 쓰던데….’

그는 거울 앞에서 잠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꽤나 양가적이었다. 뭘 더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은 근사하게 정장을 입고 꾸미고 다녀야 하는 게 싫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일할 때가 아니면 예전처럼 아무거나 대충 걸치고 다녔다. 바지에 얇은 셔츠에 추우면 거기 위에 두꺼운 걸 걸치고 아니면 그냥 그렇게 다니고. 다소 사회에 반항적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오늘도 예전처럼, 원래 이 배에서 살았을 때처럼 아무렇게나 입고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쩐지 주저되었다.

‘좋은 건 보는 순간 안단 말이지….’

어제 도현은 에반에게 명패를 주었고 다니엘 스톤하츠에겐 명패를 주었다. 그녀는 그가 에반보다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얼굴로 꿀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돈이야 그녀도 많다. 돈이 많다는 인정보다는 그녀에게 잘생겨 보이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는 일단 비싼 옷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 티셔츠에 약간 더 밝은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쳤다. 그의 골든 블론드와 잘 어울렸다.

‘이 정도면…. 음, 머리는 좀 다듬을까? 별로일까? 머리를 이쪽으로 넘길까?’

그는 그렇게 고민하면서 한참 거울을 보다가 나갔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부터 마사지 살롱에서 갖가지 서비스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삼각팬티 하나만 입은 그의 전신에는 온갖 화장품이 올라와 있었다. 소위 ‘먹지 말고 피부에 양보해야 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전신을 사해의 소금과 흑설탕, 꿀을 섞은 필링제로 부드럽게 마사지하고 난 뒤, 천연화장품과 오이, 감자, 꿀 등을 섞은 보습 및 미백제로 또다시 온몸에 팩을 올렸다. 그리고 비싼 코코넛 오일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동백나무 오일로 발끝부터 얼굴까지 부기를 제거하는 경락 마시지를 받았다. 머리카락과 얼굴을 담당한 마사지사는 여자였고 나머지 부분을 담당한 마사지사는 남자였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안 그래도 나는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 한 번씩 밤을 새우거나 하면 피부를 해치게 된다. 머리숱과 피부는 남자의 생명이다. 이런 데 돈을 아낄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어젯밤 파티 때문에 매우 늦게 자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수분 섭취를 꾸준히 하며 피부를 위하여 달고 짜고 매운 음식은 전부 피하고 피부에 좋은 베리류와 귀리, 그릭요거트 등으로 간단히 배를 채웠다. 나중에 도현과 아침 식사를 할 것이지만 그래도 피부를 위해서 미리 영양소를 보충해줘야 했다. 피쉬콜라겐, 호박주스, 양배추즙 등도 차례차례 복용했다. 그의 마사지실에는 부드러운 명상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스트레스 완화에 좋은 아로마 향기도 나고 있었다. 그는 심신을 이완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자신을 마사지하는 손길을 느꼈다.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피부와 머리카락은 원래도 훌륭했지만 관리를 받기 시작하고 난 후로는 실로 극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2시간 동안의 마사지를 다 받고 나온 다니엘 스톤하츠는 몸이 가뿐한 것을 느꼈다. 피부와 머리카락의 상태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며 디바이스로 전화를 걸었다.

“셀레나.”

자신의 VVIP룸으로 돌아간 그는 옷장을 전부 활짝 열고 셀레나와 오늘의 스타일에 대하여 고민했다. 몇 번 옷을 입고 벗고 한 끝에 블랙진에 갈색 벨트, 명치까지 훅 파이는 하얀 니트를 입기로 했다. 가슴 가운데 선글라스까지 끼웠다. 도현이 마음에 들어 하는 미르 킹쉴드나 에반 블랙의 스타일까지 고려한 옷차림이었다. 물론 그가 이런 식으로 입으니 그들에 비해서 그의 무서운 인상이 좀 더 돋보이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분명히 섹시했다. 그의 멋진 몸매와 어깨, 가슴골이 부각되었으며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그 외에도 팔찌나 시계, 목걸이, 귀걸이 등이 어울릴지 대보았다. 다들 잘 모르는데 명품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계층은 여자들이 아니라 30대 남성이다. 그들이 가장 명품을 좋아하고 가장 명품에 돈을 많이 쓴다. 남자를 꾸미는 데 필요한 물건은 있어도 있어도 모자란 것이다.

[춥지 않겠어요?]

“괜찮습니다. 도현 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이런 추위 따위.”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셀레나와 전화를 끊은 뒤 지니호에 위치한 헤어 및 메이크업 살롱으로 향했다. 그는 머리카락 끝을 살짝 다듬고 드라이를 넣었다. 몸의 털은 아까 마사지삽에서 정갈하게 정리했고 얼굴은 여기서 정리했다. 피부결을 화장품으로 정돈하고 입술 색깔을 좀 더 넣었다. 머리나 화장이나 전부 자연스러움이 중요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아름다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깐깐하게 머리나 피부에 대해서 아티스트에게 주의 사항을 말한 뒤 치장이 다 끝나자 일어났다. 요요할 정도로 색기가 도는, 건장하고 근사한, 흑표범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마사지 받고 치장하는 데만 4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리고 제일 늦게 일어난 미르 킹쉴드는 더벅머리가 되어 고개를 들었다. 오늘 새벽까지 같이 마셨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침대와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화장실에 가서 물을 빼며 하품을 크게 했다. 그리고 샤워를 간단하게 하고 팬티와 청바지와 티셔츠를 하나 걸쳐 입고 거울 앞에 섰다.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울끈불끈한 자신의 근육을 이리저리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 같은 남자가 둘은 없지!’

역시 내가 최고! 그리고 그는 룰루랄라 즐거운 마음으로 도현을 찾아갔다.

*

다들 도현이 수영장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밖을 보니 수영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니호는 유유히 서해를 남진하고 있었다. 기온이 점점 올라가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지만 여전히 추웠다. 수영장으로 통하는 복도에서 다니엘 스톤하츠와 송선호가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송 편집장님.”

“…….”

다니엘은 송선호에게 인사를 건넸고 송선호는 그걸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오늘도 수영장 입구 앞에는 괴상한 옷을 입은 경비가 서 있었다. 송선호는 아차 했다.

“설마 드레스 코드가 있습니까?”

다니엘이 대답했다.

“날이 따뜻해지기 전까진 수영복 드레스 코드는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먼저 문을 열고 야외수영장으로 나가자 송선호는 당황했다. 어떻게 저 사이코가 그런 것까지 다 아는 것인가. 송선호는 그를 따라 나갔다. 이미 야외수영장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옷차림도 괴상하고….

‘돈 다 갚았다고 사람들 죄다 불렀나.’

송선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며 잠깐 혀를 쯧 찼다. 다니엘이 마치 그의 심중을 꿰뚫어 본 듯 얘기했다.

“지인들은 공짜로 탄 건 아닙니다. 다들 승선료를 내고 탔으니까요. 여행 경비는 다 충당하고도 좀 남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스톤하츠 씨가 다 아는 겁니까?”

“사랑의 힘입니다.”

다니엘은 뻔뻔하게 그렇게 말하며 걸어갔다. 송선호는 표정을 구겼다.

‘도현이가 말을 안 해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자존심은 약간 상했다. 그녀에 대해 이 사이코보다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니호의 운행 방향을 바라보는 수영장 앞부분에 도현이 있었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을 연상하게 하는 가짜 기둥을 세우고 린넨 천을 아름답게 늘어뜨리고 그 가운데 화려한 의자와 테이블을 두고 고대 그리스식 복장을 입은 이들이 잔뜩 있었다. 로웰 리와 에반 블랙, 미르 킹쉴드, 샐리 록하트, 이번엔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나카지마 시즈카 등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의 주변은 전부 금발투성이라는 것이다.

“이건 클레오파트라가 먹던 미용 음료이옵니다.”

“이건 양귀비가 매일 먹던 리치이옵니다.”

샐리와 시즈카가 웃는 얼굴로 양쪽에서 은쟁반을 들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도현과 로웰은 아주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흐캬캬! 이런 게 사는 맛이군요, 작가님!”

“호호호! 바로 우아하게 사는 맛이죠, 선생님!”

그들은 건강 음료가 든 잔을 짠하고 부딪치고 마셨다. 그들의 뒤에는 온풍기의 바람이 적절하게 섞여 그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커다란 부채를 들고 부채질을 하고 있는 웃통을 벗은 금발 남자들이 있었고 로웰과 도현이 드러누운 화려한 의자 옆에도 각양각색의 금발들이 모여 있었다. 서연도 금발 가발을 쓰고 또 다른 미식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건 진시황이 먹던 불로장생의 묘약이옵니다, 킬스버그 님! 선생님! 수은은 뺐어요~”

“어머~ 예쁘다.”

“좋네요!”

브런치를 저런 코스로 먹을 작정인 모양이다. 세상 각종 보양식을 먹으면서 말이다. 숱 많고 기다란 금발을 허리까지 기르고 그리스식 튜닉 드레스를 입을 샐리가 양손을 모아 잡고 그들에게 말했다.

“많이 드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돼요, 킬스버그 님! 로웰 선생님!”

“우리 앞으로도 오래오래 재밌게 놀아요~ 킬스버그 님, 로웰 선생님.”

시즈카도 비슷한 옷을 입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아첨했다. 아니, 거기에 있는 모두가 로웰과 도현에게 아첨하기에 바빴다. 도현 킬스버그는 위기를 맞이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빚도 다 갚고 다시 부자가 되어, 왕이 되어 돌아왔다.

“역시 도현이가 최고야, 짱이야. 이건 뭐야? 대박.”

미르 킹쉴드는 들뜬 목소리로 그녀의 곁에서 온갖 산해진미를 바라보았다. 그도 화려한 광경은 많이 보았지만 이런 건 또 처음 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멋지다. 에반 블랙은 은쟁반을 들고 그 안에 든 리치를 은수저에 덜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

“폐하, 아~”

미르 킹쉴드고 에반 블랙이고 뭘 차려입고 왔건 간에 금방 벗겨지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드레스 코드가 없기는 개뿔. 들어오자마자 벗겨지는 모양이었다. 미르 킹쉴드는 대놓고 예전 검투사 같은 복장에 에반도 등과 가슴이 다 보이는 튜닉 복장이었다.

“…….”

“…….”

송선호는 말할 것도 없이 썩은 표정이 되었고 다니엘 스톤하츠도 표정이 굳었다. 그때 서연이 몹시나 간신배 같은 제스처로 로웰과 도현에게 크게 말했다.

“폐하! 저기 감히 드레스 코드를 지키지 않은 남자들이 있사옵니다!”

“뭬야?!”

그러자 샐리와 시즈카도 정색을 하며 서연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당연히 송선호와 다니엘이 있었다. 금발 가발을 쓰고, 금발로 염색을 한 남자들이 척척 그들에게 다가갔다. 송선호는 질색을 했고 다니엘은 스스로 앞으로 척척 나섰다. 그는 도현 킬스버그만 제외하고는 금발이 가득한 곳에서 혼자 흑표범처럼 고고하게 섰다. 그리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과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머리카락을 다시 검은색으로 바꾸라고 하신 건 폐하이시옵니다.”

이 배신자!! 송선호는 금발 머리 시큐리티들에게 끌려오며 그렇게 외칠 뻔했다. 그는 4시간 동안 공을 들인 치장이 아깝지도 않은지 의상을 금방 골랐다. 그중에서도 노출도와 아름다움이 딱 적정선을 이루는 한쪽 어깨와 다리를 훌렁 드러내는 복장이었다. 요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그의 섹시함이 빛을 발했다.

“아, 잠깐…! 놔!!”

송선호는 몸부림을 쳤지만 건장한 남자들 셋이 잡아 누르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그는 금방 도현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그녀는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늘씬한 목을 드러내는 가슴이 파인 튜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왕관을 쓰고, 그녀의 양손에는 송선호가 준 투명한 다이아몬드 프로포즈 링과 다니엘 스톤하츠가 준 바이올렛 스타가 끼워져 있었다. 송선호는 화를 냈다.

“장난치지 말고!”

그가 그녀를 노려보며 소리를 쳤다. 도현은 진주로 장식된 은쟁반 위에 있던 굴 요리를 다시 쟁반에 놓아두고 송선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사극 드라마에서 나오는 톤으로 바뀌었다. 송선호는 황당해서 하, 하고 힘 빠진 소리를 냈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다니엘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물론 모두에게 들렸다.

“불충하기 짝이 없는 놈이옵니다, 폐하. 엄하게 꾸짖어 일벌백계함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흠~”

그는 머리가 좋은 남자답게 금방 분위기를 맞춰서 그녀에게 진언했다. 그녀는 짐짓 고심하는 얼굴을 했다. 에반이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간청했다.

“폐하~, 저 남자에게 무슨 죄가 있겠사옵니까. 모든 것은 다 신첩이 내명부를 다스리지 못한 탓~ 신첩을 벌하여 주십시오~”

많이 해봤다, 이건가. 에반은 정말 잘했다. 그의 말에 도현이 자지러지듯이 웃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네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아! 그만하고 놔달라고!”

“어허! 매질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아!”

송선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좌절했다. 여기에 제정신인 건 그밖에 없었다. 샌들을 신은 그녀의 발이 그의 턱밑을 받쳐 슥 들었다. 서연이 간신배처럼 외쳤다.

“어디 허락도 없이 고개를 숙이느냐!”

송선호가 째릿 그녀를 노려보자 그녀는 도현의 뒤에 쏙 숨었다. 도현은 자신의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그를 가까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짐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이냐?”

송선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그리스의 여신처럼 차려입고 왕관을 쓰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아름답고 섹시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말대로 할 거라는 걸 이미 아는 것이었다. 송선호는 그것만으로도 뭔가 억울해서 입술을 움찔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짐을 미워하는 것이냐?”

“아니…!”

송선호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외쳤다가 뒤에 슬그머니 덧붙였다.

“요….”

아…. 또 졌어…. 그는 결국 어깨에 힘을 뺐다. 그의 대답에 도현이 씨익 웃었다. 그녀는 그의 턱을 받치고 있던 발에 힘을 빼며 자연스럽게 다리를 꼰 자세로 늘어뜨렸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면 짐의 발에 입을 맞춰 보거라. 짐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

송선호는 이제 더 이상 몸부림을 치진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기는 했다. 그가 물었다.

“그러면 놔줄 거야?”

“옷 갈아입으면.”

그는 그 뒤로도 잠깐 더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결국 다소 체념한 얼굴이 되더니 그녀의 발가락에 입을 맞췄다. 약간 차가운 발가락에 그의 입술이 굉장히 뜨겁게 느껴졌다. 꽤 짜릿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데려가서 옷을 갈아입히거라.”

시큐리티가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자 송선호는 그들을 뿌리치고 알아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는 겨우 몸을 가장 많이 가리는 종류의 옷을 골라 입고 창피함에 얼굴이 벌게져서 나왔다.

그렇게 어느 나라의 황제인지도 모를 플레이를 하며 산해진미를 마음껏 즐겼다. 그리고 새롭게 품평회가 시작되었다. 서연이 고풍스럽게 파피루스 종이에 적힌 명단을 읽었다.

“박지훈.”

“서, 서연아, 오빠가 올해는 좀 바빠 가지고, 그게….”

서연이 호명하자 화들짝 놀란 단발머리 금발 가발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서연은 질색인 얼굴을 하며 더 크게 외쳤다.

“박지훈!”

그는 쭈뼛거리며 제단의 가운데 섰다. 작년은 바다 수영을 즐기고 온 남자들도, 그들을 바라보는 여자들도 은근슬쩍 품평회를 진행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스테이지에 세웠다. 두 개의 왕좌와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발치에 동그랗고 하얀 스테이지가 있었고 박지훈은 그 위에 서 있었다. 도현과 로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스크린에 뜬 그의 스펙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훈이 얘가 안 되겠네. 완전 빠졌네. 이거 뭐야. 지방 덩어리잖아.”

시즈카가 말했다. 서연이 뒤에서 첨언했다.

“D컵은커녕 A컵도 안 되겠어요.”

샐리와 퀸, 사라도 의견을 냈다. 그러자 로웰과 도현이 흠, 하고 서로 눈빛을 나누더니 만장일치를 하고 판결을 내렸다.

“평점은 4.5점! 4점대라니! 이 어찌 참담한 숫자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하루 6시간 웨이트 트레이닝 형벌을 내린다! 일주일 뒤에도 호전되지 않으면 남중국해에 버리고 가겠다!”

“어, 억울하옵니다, 폐하! 절대 4점대까지는 아니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바로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억울함을 읍소했다. 그가 시큐리티들에게 끌려가자 로웰이 판사봉을 땅땅 두드렸다. 시즈카가 키득키득 웃었다.

“주드 킴!”

서연은 그다음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다갈색 머리에 키가 188cm 정도 되는 주드가 긴장한 얼굴로 앞에 섰다. 그는 튜닉으로 된 바지만 입고 상체는 헐벗고 있었다. 그는 금발 가발을 쓰고 도현과 로웰에게 부채질을 해주고 있던 부채꾼이었다. 그는 로웰과 도현의 얼굴을 보고 그리고 샐리의 얼굴을 보았다.

‘어, 어떡하지…. 우, 운동은 열심히 했는데. 그래도 샐리는 모자란다고 생각할까….’

미르 킹쉴드 정도가 아니면 무성체로 보인다는 말을 했다던데…. 그는 도현의 옆에서 계속 먹으며 남 일처럼 품평회를 관람하고 있는 미르를 힐끗 보았다. 그는 아직 대학생이라 방학 때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무조건 했다. 샐리는 정규 직원이었고 그녀를 만나려면 그에겐 아르바이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음, 주드가 작년보다 근육이 3kg 늘었네요.”

“그나저나 작년에 주드가 8점이었어요? 엄청 높았네?”

“작년엔 뉴페였잖아요.”

“아아~”

그들은 주드의 머릿결, 얼굴, 목선, 어깨 너비, 가슴 크기, 허리,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비율, 손 모양, 발 모양 등등 모든 것을 샅샅이 평가했다.

“7.5점! 노력이 보여서 0.5점을 가산했다. 하지만 운동법을 잘 숙지해서 좀 더 아름다운 근육을 만들도록 하도록! 특히 어깨 운동을 잘못하면 승모근이 올라가서 어깨와 목 라인을 망친다! 엉덩이 운동을 잘 못 하면 허벅지만 발달해서 오히려 엉덩이가 작아 보이기도 하니 유의할 것!”

로웰이 평가 내용을 읊었다. 7.5점이면 꽤 높은 점수다. 작년은 신입이었기 때문에 1.5점에서 2점 정도 더 받았을 거라는 걸 감안하고 몸을 더 열심히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6점 이하로 떨어지면 일하는 시간 외는 전부 운동으로 보내야 할 수도 있다. 5점 이하로 떨어지면 아까 말했다시피 중간 항로에 버리고 가기도 했다.

그 뒤로도 몇 명 지나갔다. 다들 중간 평을 내렸다.

“지훈이 빼고는 그래도 다들 노력은 보이네요.”

“노력이라도 해야지.”

“아, 예전엔 참 많이 버렸죠. 이만큼 교육시키는 데도 4년이 걸리는 거였어요.”

잠시 음료를 마시며 도현과 로웰은 마사지를 잠깐 받았다. 그리고 서연이 또 이름을 호명했다.

“송선호.”

“나도?”

도현의 뒤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 세상을 비관하고 있던 송선호는 또?! 라는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또 무슨 수치를 당하라는 것인가. 다들 고개를 들어 그를 돌아보았다. 송선호는 그들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싫어.”

“그럼 빵점인데. 중간에 내릴래?”

“…….”

도현의 말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가 슬그머니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는 빠르게 마음속에서 타협을 봤다. 어디인들 그가 그녀보다 유리하겠냐만 이 배는 정말정말 그가 불리한 장소였다. 그가 말했다.

“그럼 그냥 네가 평가하는 것만 넣어줘.”

“에이, 너만 그렇게 하면 다른 남자들이 억울하잖아.”

“그렇게 치면 이 평가회 자체가 억울해!”

“응? 이게 왜? 재밌자고 하는 건데?”

도현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송선호는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냥 포기했다. 아….

‘그래, 포기하자. 포기하면 편하다. 눈 딱 감고 1분만 참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앞에 섰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돌렸다. 그러면 여자들이 자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품평하는 것을 보지는 않아도 됐지만 다 들리긴 했다.

“내 취향. 10점.”

로웰 리의 어시스턴트 윤지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평을 내렸다. 작년에는 제법 쑥스러워하며 점수를 매기곤 했지만 한 번 겪어보니 그가 편집장이나 회사 사장이나 그런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쭉쭉빵빵한 남자로만 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에이, 너무 성급한 평가 아니에요? 이제 VVIP 님도 아홉순데. 꺾여도 한참 전에….”

서연이 금방 점수를 매기는 그녀를 보며 ‘이래서 신참자는!’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참견했다. 송선호는 ‘하!’ 하고 그녀를 홱 노려보았다. 서연은 역시나 도현의 뒤에 숨었다.

“음…. 송선호… 송선호….”

도현은 그의 이름을 마치 노래처럼 부르며 항목을 하나하나 체크해 나갔다.

<4부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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