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2부 2권) (7/21)

그 여자의 애로사항 (2)

“어, 어째서 그러십니까.”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다니엘이었다. 무표정하고 변화 없는 그의 얼굴도 이제는 조금 읽을 수가 있게 되었다. 도현이 답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때리는 건 좀….”

사실 누굴 때려볼 일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지금 기억나는 거라곤 미르 킹쉴드의 뺨을 몇 번 때린 것뿐이다.

“제, 제가 잘못한 것이 왜 없습니까. 멋대로 도현 씨를 내버려 두고 두 번이나 도망가고…! 도망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말도 안 듣고! 진도 나가는 것도 버벅거리고 그랬으니 잘못한 게 많지 않습니까…!”

이 남자가 진짜 맞고 싶긴 한가 보다…. 그는 스스로 죄목을 낱낱이 고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왼손으로 그의 어깻죽지를 잡고 다시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가 움찔하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도현은 치켜든 손으로 다니엘의 왼쪽 뺨을 쳤다. 찰싹 소리는 났지만, 손에도 그닥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면도가 잘 된 약간 까쓸한 느낌이 날 뿐이었다.

“앞으로 그러지 말아요.”

약간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이라 도현이 그렇게 덧붙였다. 다니엘은 눈을 슬그머니 떴다. 그리고 뺨에 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런 것도 연습이 필요한가 봐요.”

역시 미적지근한 느낌이다. 도현은 그의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어땠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도현 씨가 절 때려주신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빨리 뛰었습니다. 뺨에 손이 닿았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별로 아프지 않았는데도 괜찮았어요?”

“절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도현의 손을 여전히 잡은 채였다. 도현은 ‘흠’ 하고 고민스러운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때리는 건 아직 잘 못 할 것 같은데. 묶는 건 어때요? 전에도 묶여 봤잖아요. 저온초 같은 건 안 써본 거고.”

도현은 뒤로 돌아 박스 안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그래도 그녀가 관심이 있어 보여서 다행이다. 다니엘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고통스러운 것도 좋지만… 명령을 내려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도현이 다시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예를 들면?”

“그, 글쎄요…. 도현 씨가 시키시는 거라면 뭐든 좋을 것 같은데.”

“흠….”

[도, 도현 씨에게 그런 식으로 폭력을 쓴다든가…! 아니면 감금을 한다든가, 그, 그런 야한 옷을 입힌다든가, 아이처럼 엉덩이를 때린다든가…! 개처럼 기어 다니게 한다든가, 공을 물어오게 한다든가, 암퇘지 취급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도현은 아까 다니엘이 한 말과 작품에서 묘사했던 BDSM 관계에 대해서 잠깐 생각했다.

‘간단한 규칙부터 정한다던가….’

“이런 건 어때요? 앞으로 또 도망가면 엉덩이를 맞는 거예요. 거짓말을 하면 손바닥을 맞는다거나.”

도현의 말을 듣자 다니엘이 제법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지키겠습니다.”

“평생은 너무 힘들지 않겠어요?”

도현이 웃었다. 그녀가 웃으니 다니엘은 좀 더 용기가 났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양팔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서게 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정말 기쁩니다.”

뭔가, 귀엽네…. 힘도 세고 커다랗지만, 겁이 많고 얌전한 강아지 같다. 도현은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설정 연구 겸해서 제법 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 때리는 건 아직 그렇지만 이런 규칙이라면 하나씩 정해도 좋을 것 같고. 때리는 건 아직 좀 그렇지만 간단한 본디지나 안대는 괜찮지 않을까?

‘다니엘 같은 남자도 묶이면 위축될까? 전에 보니까 되게 야하던데.’

도현은 사진을 위해 그를 두 번 정도 묶어본 적이 있었다. 두 번째 때는 그가 제법 야한 얼굴을 해서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도현이 ‘아’ 하고 물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맞거나 명령을 듣고 싶기만 한 것도 아니잖아요. 난 맞는 건 싫은데….”

얼굴은 당연하고 어딜 맞아도 싫을 것 같다. 도현이 자신의 몸을 이쪽저쪽 내려다보았다. 다니엘이 움찔하더니 그녀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도 해도 되는 겁니까?”

“음, 크게 아프지 않는 거라면 시험 삼아서 괜찮지 않을까요? 글 쓸 때 도움도 될 것 같고.”

도현은 그대로 박스 안을 뒤적거렸다. 역시 아프지 않은 거라고 한다면…. 그녀는 티클러(Tickler)를 꺼냈다. 그리고 다니엘과 눈을 마주쳤다.

“이건 아직 포장도 안 뜯은 거예요.”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그것의 포장을 뜯어 그에게 주었다. 그는 티클러를 받아 들고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았다.

‘간지럽히기…. 어, 어디까지 간지럽힐 수 있는 걸까? 다, 다리? 발바닥? 손? 가슴도? 그, 그녀의 거, 거, 거기도 간지럽혀도 될까?!’

그녀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졌다. 원래는 땀도 잘 안 흘리는데 손에 촉촉하게 땀에 약간 잡혔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부위별로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그녀의 왼손, 검지와 엄지 사이를 티클러로 살짝 간지럽혔다. 그녀가 움찔하며 손을 피했다.

“이거 생각보다 되게 간지럽단 말이에요.”

그녀가 웃었다. 다니엘은 자신의 집중력이 비정상적으로 확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도현의 엉덩이를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앗! 아…! 잠깐만요. 간지러워요!”

그리고 그는 그녀의 가슴골을 티클러로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그녀가 다니엘의 팔뚝을 꽉 잡았다. 다니엘은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의 비명 같은 웃음소리가 그의 심장을 마구 주무르는 것 같았다. 흥분되었다.

“아! 하하하! 아, 진짜!”

그녀가 다니엘의 어깨를 끌어안아 그의 손을 피하자 그는 그녀의 치마를 확 걷어 그녀의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꺄악! 하하하! 앗! 안 돼! 아…! 너무 간지러워! 멈춰요! 그만!”

그녀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녀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다니엘의 손길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가 허락한 것이었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다니엘은 잔뜩 흥분해서 생각했다.

‘그녀의 유두를 간지럽히고 싶어. 그녀의 XX를 간지럽히고 싶어….’

그래서 다니엘은 그녀의 스커트 속에 손을 넣어 그녀의 코발트색 속옷을 확 내렸다.

“다니엘!”

깜짝 놀란 도현이 그의 뒤통수를 세게 팔꿈치로 쳤다. 그대로 그가 하던 걸 뚝 멈췄다. 도현은 그를 밀어내고 바로 섰다. 속옷을 끌어 올렸다.

“다니엘 씨…. 이런 건 상호합의가 중요하다구요. 그렇게 마구 흥분해서 하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혼났다. 그녀에게 맞았다. 도현은 그의 손에서 티클러를 빼앗았다. 도현은 약간 당혹스러워 하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리고 그를 다시 보았는데, 그가 발기한 걸 발견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변태….”

그러자 그가 움찔하더니 더 세웠다. 본인도 그걸 느꼈는지 다리를 오므리고 두 손으로 자신의 국부를 가렸다. 그는 귀가 새빨개졌다.

“죄, 죄송합니다….”

“내가 분명히 그만하라고 말했잖아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러면 저 다니엘 씨랑 이런 거 못 해요. 알죠?”

누군가에게 강제로 붙잡혀 있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경험이다. 도현은 그를 못마땅한 얼굴로 보며 채근했다.

“네, 네…. 죄송합니다. 안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고개만 숙이지 말고! 내 눈 똑바로 봐요. 앞으로 정말 안 그럴 수 있어요?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한다구요. 숙맥 같이 굴다가 자꾸 이렇게 폭주하면 내가 어떻게 감당해요? 이러다 사고라도 나면 다니엘 씨가 책임질 수 있어요? 못 지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아! 못 미더워. 고개 다시 들어요! 다시는 안 그렇겠다고 내 눈 보면서 똑바로 말해요! 얼른!”

“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다시!”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이러고도 못 지키면 어쩔 거예요? 어쩔 거야?”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뭐든지 뭐? 뭐?”

“무릎을 꿇고 하루종일 있으라고 해도 있겠습니다. 어디를 때려도 다 맞겠습니다. 기절할 때까지 때리신다고 해도…!”

“확 거기 못 쓰게 만들어 버릴 거예요! 알았어?!”

도현은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다니엘은 목과 귀까지 벌게져서는 눈을 질끈 감고 어쩔 줄 몰라하며 끙끙거렸다.

“도, 도현 씨…!”

“…왜 이래요?”

그가 안절부절못하자 도현이 언성을 낮추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낭패한 기색으로 땀이 촉촉하게 배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도현의 손을 덥썩 잡았다.

“사, 사정할 것 같습니다. 해, 해도 될까요?”

뭐라고? 도현이 인상을 확 쓰며 그를 쏘아보았다.

“지금 혼나고 있는데 혼자 뭐 하는 거예요! 변태!”

도현은 다니엘의 따귀를 세게 때렸다. 그걸로 다니엘은 참지 못하고 실례를 하고 말았다. 소파를 짚은 그의 손에 핏줄이 잔뜩 섰다. 다른 손은 여전히 국부를 꽉 누른 채다. 그는 수려한 얼굴에 벌건 손자국이 남은 채로 헐떡거렸다. 그의 뺨을 때린 도현도 헐떡거리고 있었다.

“…….”

“…….”

넓은 서재에 두 사람이 정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친 숨으로 인해 몸이 약간 움직이고 있다. 묘한 분위기다. 두 발로 단단히 서서 뺨을 때린 자세 그대로 있는 여자와 그 앞에 뺨을 맞아 몸이 기울어진 남자.

‘뭐야…. 이것까지 결국 플레인가?’

도현은 숨을 가다듬으며 서로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창피한지 여전히 얼굴이 벌겠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지금 그가 예뻐 보이기도 했다.

“…많이 아파요?”

도현은 그의 얼굴을 만졌다. 다니엘은 바닥을 보고 있다가 처연히 시선을 돌렸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디 봐요.”

도현은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내려다보니 그가 가만히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벌건 그의 뺨을 엄지로 쓰다듬어 보았다. 조금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도현은 다시 그의 눈을 보았다. 사위는 조용했다.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말 잘 들어요?”

“네….”

“대답 잘 했어요.”

그러자 그는 한 손으로 도현의 허벅지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뭐지…? 뭔데 정말 귀엽다. 이 맛에 다들 이걸 하는 걸까? 도현은 알쏭달쏭한 기분을 느끼며 그의 머리카락을 한참 쓰다듬었다.

‘앞으로 좀만 더 해볼까?’

*

송선호는 삐져서 그다음 날부터 연락이 없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어쨌든 집으로 무사 귀가했으며 미르 킹쉴드는 귀찮게 굴고 있었다.

<제발. 미안, 응? 내가 잘못했어. 뭐든 내가 잘못했다니까, 어? 용서해줘~.>

수신차단을 할까 하다가 그건 안 하고 일단 메시지는 확인하고 있었다. 디바이스에 며칠째 끊임없이 반짝반짝 불빛이 났다. 송선호야 원래 도현의 집에 들어와 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그거 몇 달이라고 그 커다란 남자가 집에서 없어지니까 적적하다.

“사람 난 자리가 티는 많이 나네요, 작가님.”

심지어 로웰마저도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 스톤하츠야 원래 조용했지만 미르 킹쉴드는 로웰 리나 어시스턴트들과도 금세 친해졌기 때문이다(하여튼 여자들 대하는 데는 선수다). 그들이 그의 몸을 볼 때마다 감탄하면 서비스 정신에 입각하여 멋진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집안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데리고 사는 재미가 매우 있는 남자였다는 거다.

‘아… 그런데 너무 개념이 없어.’

원래도 그런 기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틀에 박히지 않은 느낌이 오히려 매력이라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그날은 너무 화가 나서 다 때려치우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게 되었다.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현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남자와 두 번 본 적이 없었다.

도현은 평소처럼 로웰과 같이 아침을 먹고 티 타임을 가졌다. 열심히 작업하고 의견을 나누고 점심을 먹기 전에 간단히 같이 정원을 산책했다. 나가서 점심을 먹고 들어와 다시 작업하고 또 밤에는 야경을 보러 나갔다. 미르 킹쉴드는 오늘도 하루종일 연락을 했다. 도현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았고 답장은 당연히 보내지 않았다.

도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강을 바라보며 칵테일을 마셨다. 그녀는 가만히 생각에 빠져있었다. 주 2회 연재, 수요일 마감을 끝낸 로웰이라 그녀는 아예 양주를 한 병 시켰다.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작가님?”

“아뇨… 기분이 이상해서요.”

“뭐가요?”

“…미르 킹쉴드.”

도현이 창밖의 야경을 보면서 그의 이름만 말했다. 그러자 로웰이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보고 싶어요?”

“그런 걸까요?”

“어떤데요?”

“그냥 기분이 좀… 남자랑 이렇게 본격적으로 같이 살아본 건 처음이거든요. 그것도 몇 달이나. 다니엘 씨가 돌아왔어도… 좀 적적한 것 같고….”

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옛날에 제일 오래 만났던 남자랑은 여행을 2년 정도 같이 다니긴 했는데… 그 남자랑 헤어졌을 때도 이렇진 않았거든요.”

“음… 세상에 남자는 많지만 킹쉴드 씨 같은 남자는 별로 없죠.”

신이 내린 피지컬이 그렇게 흔한가. 게다가 그는 얼굴도 아주 잘생겼다. 선수 중에 외모랭킹 매기면 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었다.

“네… 그렇죠.”

그 머리카락에 그 눈동자, 그 몸에, 그리고 그 미소라니. 도현은 고민스러운 한숨을 다시 지었다.

“아까워요?”

“그런 가봐요…. 이런 적은 처음인데.”

“그래도 영 아니다 싶었다면서요. 그런 식으로 여자 내팽개치고 싸움 벌이는 놈은… 진짜 누구한테 물어봐도 다 만나지 말라고 할 거예요.”

“그건 그런데….”

아마 다른 누가 그런 남자를 만난다면 도현도 만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현 스스로도 그 같은 남자는 성가시고 다시 만난다면 분명히 또 사고를 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생각이 났다. 이런 게 나쁜 남자한테 빠져드는 여자의 알고리즘인 걸까.

그는 도현이 만나봤던 남자들 중에서, 아니,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남자들 중에서 따져서도 월등히, 정말 훌륭한 수컷이었다(근데 개념이…). 정말 수컷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문명과는 약간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신이 빚어 내린 아름답고 끝내주는 육신을 가진 강한 남자였다(그래도 개념이……). 성격도 정말 매력적이고…(아무리 그래도 개념이……).

모름지기 좋은 남자란 그렇게 털 한 가닥조차도 다른 법이다.

도현은 미르 킹쉴드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좋았다. 환하게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 똑같이 반짝거리는 아이스블루 아이, 2m나 되는 키에 온몸이 쪼개지는 것 같이 탄탄하고 건장한 근육. 부드럽고 탱탱한 피부. 향기로운 체취.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모습을 한 그였다. 정말로 남신이 내려온 듯 완벽한 수컷. 그의 오만한 미소는 애당초 스스로가 얼마나 잘 빚어진 남자인지 알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었다. 도현의 침실에 있는 침대는 패밀리 사이즈보다 큰 침대인데도 그는 아주 꽉 들어찼다. 그 모습이 여자의 마음에도 꽉 들어차는 것이다.

‘아… 그래도 개념이 너무 없어.’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남자한테 휘둘리는 여자들, 항상 바보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도 그건 그런데… 저도 바보가 되는 걸까요?”

“킹쉴드 씨 그렇게 좋아했어요?”

“좋아했어요. 같이 있으면 정말 즐겁고 재밌고… 뭔가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여자에게 좋은 기운을 준달까.”

“그건….”

로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어떤 여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같은 남자는 옆에 세워두기만 해도 여자에게 활기를 준다.

“그리고….”

“그리고?”

도현은 창밖을 보면서 한숨을 깊게 쉬었다.

“뭐랄까… 예전에 헤어진 남자들은 볼 장을 다 봤다는 느낌 때문에 헤어졌달까, 더 볼 게 없으니 헤어졌달까. 그런 느낌인데 아직 미르는… 다 못 본 것 같을까요? 재미있는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덮은 느낌이에요.”

다니엘 스톤하츠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복잡한 과거를 가진 남자고 배운 것도 많고 숨기고 있는 것도 많은 느낌이라 그렇게 덮어버리기는 누구도 아쉽다 말할 남자였다.

하지만 미르 킹쉴드는 굉장히 단순한 남자였는데도, 어째서 그런 느낌이 나는 걸까? 너무 단순해서 도리어 파악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쉬운 남자였는데. 도현은 불가해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아쉬우면 다시 만나요.”

“아… 근데 분명히 이 남자 다시 만나면 또 사고 칠 텐데.”

이미 이런 생각을 한다는 시점에서 틀린 것이다. 도현도 그걸 알았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지금 분명히 걸즈랑 같이 있을 거고.”

도현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천장을 잠깐 보며 한숨을 쉬었다.

*

도현이 생각했던 대로, 미르 킹쉴드가 달리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돌아왔고 거기엔 아직 거처를 정하지 못한 그의 옛 여자친구들이 잔뜩 있었다.

“미르~”

레이시는 거의 입으나 마나 한 금빛 속옷을 입고 침대에 엎드려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미르 킹쉴드의 태평양 같은 등짝 위에 올라갔다. 그도 금방 씻고 나온지라 반라였다. 그는 아무런 답장이 없는 도현 때문에 상당히 초조한 상태였다.

‘진짜? 진짜 이대로 끝이야?’

몇 번 하지도 못했는데…. 미르는 한숨을 푹 쉬며 자신의 뺨을 살살 깨물며 애무를 하는 레이시에게 물었다.

“야… 화난 여자 기분은 어떻게 풀면 되냐?”

“응? 해러드 가서 사고 싶다는 거 다 사주면 되지 않을까?”

“가자고 했는데 답장도 없다.”

“잘못했다고 하긴 했어?”

“어… 집에도 계속 찾아갔더니 신고한다고 해서… 사실 메시지도 계속 보내면 신고할 거라고 했는데….”

포기가 안 돼서 계속 보내긴 하고 있었다. 레이시가 피식 웃었다.

“걔 진짜 삐꺽하면 다 신고한다네. 경찰 없으면 못 살았겠어.”

“조금 겁나긴 하던데…. 로드리게스 그 씹새끼도 결국 들어갔잖아.”

“아, 그렇지….”

혐의가 제기되자마자 구단은 미하엘 로드리게스를 경찰서에 자진 출두시켜 일단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형이 선고되면 유치장에 있었던 시간도 형기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구단은 형기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태다. 그도 그럴 게 5개월 뒤면 올해 엘 드라카가 시작된다. 4개월이나 감방에 있다간 웨스트이글 미드필드 측 전력이 확 약화될 것이다. 그는 TFC 세계랭킹 3위,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였다.

일단 본인은 엄청 억울해하고 있었다. 변호사가 입조심하라고 해서 공석에선 아무 말 못했지만 치엔이 루카스 같은 놈도 감옥 문턱을 안 밟아봤는데 본인이 먼저 밟았다는 것이 상당히 열 받는 모양이었다. 웨스트이글 선수들이 한 번 면회를 가서 그런 그를 엄청나게 놀려댔다.

“그런 애 이제 됐잖아? 우리랑 다시 같이 살자.”

“아….”

미르는 한숨을 쉬며 바로 누웠다. 레이시는 그의 몸 위에 다시 올라탔다. 제시카가 들어왔다. 그녀는 아예 검은색 T 팬티만 입고 화려한 스모키 화장을 한 채로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미르, 보고 싶었어.”

그녀는 늘씬한 다리를 그의 몸에 걸치며 옆으로 섹시하게 누워 미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미르는 뚱한 얼굴로 미녀 둘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천장을 보았다. 그 뒤로 줄줄이 파티마, 셀리, 타냐까지 들어왔다. 그들은 다시 미르의 걸즈가 되기 위해 작정하고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침대가 꽉 찼다. 미르 킹쉴드는 생각했다.

이런 걸 봐도 역시

그는 참 괜찮은 수컷이었다.

선수들이 그렇게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 다섯 명이나 되는, 이렇게 아름다운 걸즈가 자기 선수가 돌아오길 몇 달이나 기다린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중간에 딴 놈들 간을 보긴 엄청 봤겠지만, 그렇기에 더 의미가 있었다. 딴놈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결국 미르만 한 놈이 없었다는 소리 아닌가.

“미르가 왜 굳이 그런 까다로운 여자를 만나.”

타냐가 말했다.

“얼굴도 우리가 더 예쁘고 몸매도 우리가 더 좋은데?”

“제대로 해주지도 않는다면서?”

걸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줄줄이 말했다. 미르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하는 건 어떤 여자든 크게 다른 건 아니지….’

미르가 지금까지 만나봤던 여자들은 그의 쾌락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자들이었다. 어떤 독한 약이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언제든 어떤 체위든 오케이. 그렇게 편하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여자를 만나는 것에 그렇게 공을 들이는 게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일까.

“…니들이 보기엔 나 어떻냐?”

“미르? 멋있지. 잘생겼고.”

“통도 크고 남자다워.”

“최고야. 사실 그것도 진짜 잘해.”

걸즈는 그렇게 속삭이며 미르의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예전 같으면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내가 불쌍해?]

[…조금요.]

[그러면 오늘은 계속 여기 있어.]

그날은 좋았지.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 웃었다.]

[아니에요.]

[웃었잖아.]

[아니라니깐요.]

[화 풀렸어?]

[안 풀렸어요.]

[미안, 응? 미안.]

그날도 좋았다. 역시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자국 남아요!]

[하아… 좋아해요….]

[진짜! 미르~!]

[아! 화장 망가져요…! 오늘따라 왜 이래, 이 남자가…!]

그녀는 미르가 어린애 같다고 말했다. 어리광이 심하다고 말이다. 그녀는 미르가 단순해도 쾌활해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보기보다 사람의 말을 잘 들어서 놀랍다고도 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라고 해도 다쳐서 약해지면 불쌍하게 여겨줬다. 그녀는 미르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그녀의 솔직한 생각과 마음을 말했다. 그녀의 말에 스스로를 알아갈 수 있었다.

“…근데 나 안 돌아왔으면 어쩔 뻔했냐?”

미르는 그렇게 물었다. 걸즈는 서로의 눈을 보았다. 타냐가 대답했다.

“미르 좋아서 기다린 거야.”

“자꾸 입바른 소리 하지 말고.”

셀리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솔직히… 미르 그 여자랑 잘 안 될 줄 알았어.”

“왜?”

“미르 같은 남자 감사할 줄도 모르는 거만한 여자잖아. 미르가 뭐가 아까워서 그런 여자를 만나?”

“게다가 미르는 우리 구해주고 싶었던 거잖아. 다른 놈들한테서.”

“…….”

그런가. 그때는 그냥… 일단 다른 놈들한테 당했다는 게 분해서 뛰쳐나간 것 같은데. 이성적으로 뭘 판단해서 그런 게 아니다. 본능적인 무언가였다.

“그래도 나 그 거만한 여자 계속 만나고 싶다.”

슬슬 미르를 빨아주려고 하는 레이시의 머리를 밀어내며 미르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타냐가 징하다는 듯이 미르를 보았다.

“걔가 왜 그렇게 좋아? 가슴도 작던데.”

“음, 그건 그런데… 그냥… 그냥 그 여자랑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 웃으면 더 좋고. 그게 나 때문에 웃는 거면 그것보다 더 좋고.”

그리고는 미르가 웃었다.

“그 여자 웃기려고 괜히 더 바보짓 했다, 나? 웃기지?”

“…그 여자 사랑해?”

누군가 물었다. 그러자 미르가 천장을 보며 살짝 고민하더니 개구지게 씨익 웃었다.

“그런가 봐.”

미르는 다시 엎드려 누워 디바이스를 보았다. 미르의 등짝에 두 명, 양옆에 한 명씩, 머리맡에 한 명까지 5명의 쭉쭉빵빵한 미녀와 함께 디바이스의 작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야, 니들이 같은 여자 입장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냐?”

“아, 줘봐.”

레이시가 미르의 손에서 디바이스를 뺏어 가져갔다. 그녀는 메시지들을 보더니 미르를 책했다.

“아~ 정말. 미르 답답하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이것밖에 없네. 읽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야 할 거 아냐.”

“어? 어떻게?”

“일단 사과를 할 때는 미안하다, 잘못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뭘 잘못했고 그게 왜 잘못한 건지를 말해야 하는 거라고.”

“어, 그럼….”

미르는 천장을 잠깐 보며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그때 싸운 거?”

“그래. 그때 싸운 게 왜 잘못한 건데.”

레이시가 물었다. 이번엔 한참 생각했다. 여자들은 그의 대답만 기다렸다.

“…왜 잘못한 거야? 그건 아직도 모르겠는데.”

미르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걸즈도 서로를 보았다.

“일단… 미르가 데리고 온 파티잖아. 그런 파티에서 미르가 걔 놔두고 눈 돌아서 싸움부터 하려고 뛰어들었잖아. 그 애한테 설명도 안 해줬지?”

셀리가 말했다. 그러자 레이시가 덧붙였다.

“그래. 걔가 GAS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아… 그렇지.”

“엄청 겁났을 걸. 그때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나랑 걔 끌고 가고 딴 놈들도 다 하나씩 끌고 가려고 했으니까… 우리야 뭐, 그런 일 종종 있어도 걔는 그런 거 처음일 텐데.”

“…….”

미르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파티마가 약간 주저하다가 말했다.

“애초에 구단 파티에 외부인을 데리고 오는 게 좀… 사람들이 걔 뉴걸, 뉴걸 이렇게 불렀지만 사실 걔 GAS 아니잖아. 돈도 많다며. 걔 뉴걸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던 거야?”

“무슨 뜻인데?”

결국 GAS라는 건 선수를 만나는 여자라는 소리 아닌가. 뉴걸이란 건 처음 선수를 만나기 시작한 여자라는 뜻… 아닌가? 미르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선수들한테 몸을 팔기 시작한 여자라는 뜻이잖아.”

타냐가 말했다. 미르는 그런 타냐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침대에 얼굴을 박았다.

“그래서 그때도 화낸 거였구나….”

미르는 처음에 도현에게 걸즈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바로 박차고 나갔다. 미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빚도 많다는 여자가 그걸 갚아주겠다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이후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서 흐지부지되었다. 미르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걸즈라는 게 결국 돈을 주고 만나는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르가 사는 세계에선 그게 너무나 당연해 별 생각이 없었다. 여자를 만난다는 건 결국 그 여자에게 돈을 주고 만나는 것이었다. 어리면 어릴수록, 예쁘면 예쁠수록 좋았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 다 돈에 팔리고 파는 그런 인생이다.

하지만 원래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팔지 않았다. 그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팔지 않는다. 알고 있다.

‘주기는 할 건데….’

미르는 도현의 빚을 갚아줄 생각이었다. 이미 그보다 잔뜩 갚아준 송선호보다도 더 갚아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1등이 되고 싶었다. 다른 놈들 같은 건 다 떨궈내고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다른 여자를 돈 주고 만나는 것과는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아마 돈을 줬다는 이유로 걸즈처럼 취급을 한다면 도현은 그 돈을 다시 돌려주고 미르를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같은 돈을 주더라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녀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을 써야 했다. 더 써야 했다.

“어렵다….”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살자니까, 미르? 더 잘할게.”

타냐가 그의 등위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그의 귀를 앙 깨물었다.

“…니들은 내가 돈 안 줘도 나한테 이럴 거냐?”

“어?”

미르가 이상한 질문을 하자 걸즈가 괴상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왜 이래, 프로답지 못하게? 남자는 얼굴이랑 능력이라며? 그런 말은 없는 놈들이나 하는 말이라며.”

제시카가 되물었다. 미르가 ‘응?’ 하고 그녀의 말을 반추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명품 안 좋아하는 여자는 별 볼 일 없는 여자라더니.”

“아, 그건 진짜 맞아.”

어쨌든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는 몸으로 부딪쳐 경험하면 금방금방 쑥쑥 배우는 남자다. 걸즈가 하는 조언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었다 하면서 배우고 있는 동안 레이시는 미르가 보낸 메시지들을 죽 읽더니 말했다.

“내가 보내줘?”

“응? 뭐라고?”

미르가 고개를 빼서 레이시가 들고 있는 자신의 디바이스 화면을 보았다. 레이시는 아예 홀로그램으로 좀 더 큰 화면을 띄웠다.

<나 정말 반성했다. 너 두고 싸움 벌인 것도 미안하고 애초에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파티에 데려와서 미안했다. 나는 그냥….>

레이시는 그렇게 적다가 미르를 보았다.

“미르, 솔직히 그 여자 자랑하려고 파티에 데려온 거지? 미하엘네 애들이 그러던데. 미르가 구장에서 그렇게 자랑을 했다고. 다들 배 아파 죽는 줄 알았다던데?”

“어? 어… 뭐. 어… 응. 아니, 킬스버그 같은 여자 만날 수 있는 놈이 거기 어딨어. 나나 되니까 만나는 거지.”

미르는 약간 겸연쩍어했지만 그래도 당당했다. 그러자 레이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수들 어떤지 알면서 참… 아주 걔를 호랑이 아가리 안으로 들고 들어갔네. 괜히 우리까지 피 봤잖아.”

“어… 왜….”

“만약에 그때 정말 큰 일이라도 생겨서 조나단이나 미하엘이 그 애 강간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사랑한다며. 미르는 그런 거 괜찮아?”

“내가 지켜주면 되잖아.”

“다구리 당해서 뻗어있었던 주제에 무슨.”

그때는 타냐마저도 그렇게 픽 말하고 말았다.

“그런 곳인 줄 알았으면 그런 애 절대 그 파티 안 갔을걸. 알려주지도 않고 사랑한다는 여자를 자랑하려고 그런 데 데려가는 남자는 나 같아도 싫겠다.”

걸즈야 당연히 도현 킬스버그와는 연적이었지만 그래도 킹쉴즈 걸즈는 미르 킹쉴드와의 관계가 좋은 편이고 분위기에 따라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사는 편이었다. 미르 킹쉴드가 선수들 중에 GAS에게 관대한 축에 든다는 소리가 괜한 소리가 아니다.

미르는 입을 뻥긋거리다가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건 미리 좀 가르쳐주지!”

“집에도 안 들어왔으면서 우리가 무슨 수로 미리 가르쳐줘?”

“그래도!”

그제야 그녀에게 용서받기 위해 급급했던 마음보다 잘못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만약 그때 그녀에게 정말 큰일이 있었다면… 정말로 다시 만날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계속 만나고 싶어….’

미르는 본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있는 남자였다. 여자들은 그를 좋아했다. 비단 GAS나 그의 걸즈가 아니라도 말이다.

도현 킬스버그를 신줏단지처럼 모시며 어찌할 줄 모르는 다니엘 스톤하츠나 그녀를 좋아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모를 송선호나 하나같이 그녀를 어려워하고 어쩔 땐 겁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자를 겁내는 남자가 여자의 눈에 매력적으로 보일 턱이 없다. 그녀는 잘난 남자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여자였다. 아니, 잘난 남자란 누구의 눈으로 봐도 잘난 법이다. 그리고 그런 남자란 언제나 잘난 여자랑 찰싹 요철이 들어맞았다. 그 파티의 전까지는 미르와 도현의 사이가 다른 두 놈과의 사이보다 훨씬 좋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더 조심하면 되는 거지? 내가 더….”

미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레이시가 메시지를 대신 보내면서 대답했다.

“그 전에 얘가 용서해야지.”

“아~~!”

*

<나 정말 반성 많이 했다. 너 두고 싸움 벌인 것도 미안하고 애초에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파티에 데려와서 미안했다. 나는 그냥… 너 자랑하고 싶었어. 네가 너무 좋아서….>

미르 킹쉴드의 문자 스타일이 좀 바뀌었다. 도현은 곧바로 그게 그의 걸즈가 그를 코칭해준 거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짜로. 뉴걸이라든가 걸즈라든가 그런 소리 앞으로 절대 안 나오게 할게. 난 걸즈가 그런 뜻인 줄 몰랐어ㅜㅜ 그냥 내가 만나는 여자들을 사람들이 걸즈라고 부르니까 별생각이 없었어.>

<이제 절대로 다른 놈들한테 너 안 보여줄 거야. 진짜로.>

<나 진짜 잘 할 수 있어. 나 말 잘 듣는 거 알잖아.>

<너 절대 위험한 데 안 데리고 갈 거고 네가 시키는 것만 할 거고 절대로 내가 멋대로 안 할 거고>

<좋아해. 진짜 짱 좋아해. 나 이런 거 진짜 처음이야ㅜㅜ 나 좀 만나줘. 보고 싶어>

웃기다… 귀엽기도 하고. 덩치가 아주 집채만 한 남자다, 이 남자가.

“참나.”

도현은 그의 문자를 보면서 그렇게 헛웃음을 지었다. 보니까 걸즈 도움을 받는다 치더라도 자기가 보내는 것 같긴 했다. 내용이 유치하다. 처음에는 아예 그의 문자는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보면서 웃는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이랬다. 도현이 싫어할 만한 짓을 골라서 하는데도 미워하기가 참 힘든 남자였다.

‘좋아할 만한 짓도 골라 하는 남자라서 그럴까.’

도현은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결국 말았다. 그리고 치장이 다 끝나서 샵을 나왔다. 오늘은 새하얀 원피스를 입었다. 무릎까지 쫙 달라붙고 가슴이 V자로 파인 정장 스타일의 각이 잡힌 원피스였다. 그녀의 여성스러운 몸의 곡선이 드러나면서도 고급스럽다. 하얀색 도로시를 신었다. 색깔을 맞추어 하얀색 코트를 걸치고 머리를 깔끔하게 올렸다. 보석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눈이 시릴 정도로 짙은 청색의 사파이어로 통일했다.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 사파이어의 주변은 약간의 다이아몬드가 빛을 더했다.

밖에는 송선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짙은 남청색 슈트를 입었다. 그 위에 더 짙은 색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색깔이 잘 맞을 것 같다. 도쿄 엠페리오스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기다렸어?”

“아니.”

“아직 삐졌어?”

“…아니.”

송선호는 아주 약간 인상을 썼으나 풀었다. 냉전을 이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가 일방적으로 삐진 것이긴 한데, 그래도 약속 날에는 이렇게 멋있고 번듯하게 하고 왔다. 차도 새 차다.

“차 샀어?”

“아니, 집에 있던 거.”

보통 때 끌고 다니는 것보다 더 고가의 차량이었다. 예쁜 차라서 쭈욱 훑어보게 되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하여 조수석에 태우고는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그는 멋진 명품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그게 왠지 섹시하게 느껴졌다. 차 안은 따뜻해서 그는 곧 장갑을 차례로 벗었다. 도현을 그런 그를 감상하듯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잘생긴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로 만난 남자인 데다 저쪽도 선을 확실히 그었던 터라 그런 쪽으로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나중에는 꽤 밉살스러운 소리를 많이 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넌 입만 다물고 있으면 진짜 멋있단 말이야.”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있는 남자였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송선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나 또 뭐 잘못했어?”

“응? 아니?”

“근데 왜 계속 괴롭혀.”

“이게 뭐가 괴롭히는 거야?”

그렇게 대꾸하며 거울을 보다 그를 돌아보니 그가 살짝 못마땅한 얼굴로 운전을 하는 게 보였다. 도현은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을 손가락으로 슬슬 쓸었다.

“또 삐졌어?”

“아, 그 소리 좀 하지 마.”

“왜?”

“짜증 나니까.”

“삐졌구나?”

“아니라고.”

뭐랄까. 참 괴롭히는 재미가 있는 남자다. 아마 다니엘 스톤하츠가 이 모습을 봤다면 송선호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괴롭힘 당하는 걸 좋아하는 시점에서 괴롭힘 대상으로는 탈락인 법이다. 그들은 그렇게 툭닥거리면서 비행차 타워로 향했다. 도쿄로 가기 위해서 송선호의 비행차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송선호는 코트를 벗어들고 비행차에 올라탔다. 도현도 그렇게 했다. 송선호는 비행차 안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슈트의 단추를 풀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런 건 참 그림 같은 남자다.

‘이제 그만할까.’

도현은 그를 그만 건드리기로 했다. 진짜로 화내면 성가시다. 비행차는 자동으로 주행이 되었기 때문에 약 30분 동안은 망망대해 위에 두 사람뿐이었다.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쿄 엠페리오스는 도현이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오늘 기분도 아주 좋았다. 도현은 송선호의 옆에 앉았다. 그가 아닌 척 힐끗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30분 뒤 도쿄의 비행차 타워에 도착했을 땐 송선호의 얼굴은 빨간색 립스틱 범벅에 머리카락도 잔뜩 흐트러진 채 도현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벌써… 도착했어…?”

송선호는 턱을 살짝 들어 전면의 유리창을 확인했다. 비행차가 자동으로 주차되기 시작했다. 도현은 씨익 웃으며 그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아쉬워? 내리지 말까?”

“어….”

송선호는 벌게진 얼굴로 멍청하게 도현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도현은 키득키득 웃을 정도로 즐거워했다. 그녀는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거울을 보면서 잠깐 상태를 확인하고는 코트를 들고 비행차 밖으로 내렸다. 송선호는 겨우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 이 상태로 어떻게 나가….”

그녀는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유리창에 얼굴을 비추어보며 입술에 발랐다. 송선호는 눈을 감은 채 한 1분 정도 그러고 있더니 겨우 밖으로 나왔다. 바로 코트를 걸치고 머리를 정리했다. 얼굴이 립스틱으로 엉망이긴 했지만 다시 멋있어졌다. 도현은 그런 그가 웃겨서 소리를 내서 웃다가 사진을 한 번 찍고는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밖에 춥다.”

그는 도현의 허리를 끌어당겨 그녀의 코트 깃을 여미고 허리를 꽉 묶어주었다. 도현은 ‘흐응’ 하고 또 웃더니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금방 닦았는데.”

“그래서, 싫어?”

“…….”

하여튼 간에 건드리는 재미가 있는 남자다. 출발할 때보다 그의 기분이 현저히 좋아진 게 느껴졌다. 그는 도현의 왼손 채로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거기 런치 타임도 있어?”

“있긴 한데 점심은 다른 데서 먹고 쇼핑 좀 하다가 가자. 내일은 호텔에서 쉬고. 프라이빗 수영장도 있으니까.”

“아, 수영복 사야겠다. 어떤 스타일이 좋아?”

“…….”

이런 걸 선뜻 말하면 쉬운 남자 같이 보일까 걱정이 되어서 이러는 것일까. 갈등하는 송선호의 얼굴이 참 재미있다. 그는 그대로 비행차 타워에서 최고급 세단을 하나 렌트해서 도현을 태우고 도쿄만으로 갔다. 거기서 지중해식의 해산물 코스 요리를 먹었다. 도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가 데리고 가는 가게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맛있었다.

아주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고 커피숍으로 갔다. 알아온 시간은 길었지만 연인으로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대화거리는 다양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의 이면과 지금까지 넘지 못했던 선의 안쪽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게다가 도현 킬스버그는 송선호를 놀리는 걸 정말 좋아했다.

“야, 손… 손…!”

“좋으면서 또 그런다.”

“사람들 봐. 본다고.”

“좀 보면 어때.”

그러면서 은근히 만지던 그의 허벅지를 혼내듯 아프게 꼬집었다. 그가 움찔하며 좀 화난 얼굴을 했다. 도현은 그의 그런 얼굴이 웃겨서 하하 웃으며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아마 여기 다니엘 씨 있었으면 너 엄청 부러워할걸.”

“…다니엘 스톤하츠, 다시 집에 들어왔어?”

“응? 응.”

물론 도현은 여기서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니엘과는 다른 남자들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지만, 심지어 미르마저도 그럴 수 있었지만 송선호는 아니었다. 그의 분노 버튼이나 다름없는 주제였다. 그런데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렸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그래….”

그는 잠깐 도쿄만을 보다가 한숨을 쉬며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도 조심해.”

“어….”

이제 좀 적응한 걸까? 그는 절대 바뀌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 사실 지금까지도 많이 굽힌 거겠지… 자기 나름대로는.’

하지만 기분이 다운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지 그는 도현이 장난을 쳐도 전만큼 반응하지 않았다. 재미없네. 도현은 커피를 마셨다. 손은 마주 잡고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건 사러 가자.”

“응.”

그는 자연스럽게 도현의 코트와 자신의 것을 챙기며 그녀를 앞서 나가며 계산을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자연스러웠다. 도현은 그가 어깨에 걸쳐주는 코트를 입으며 차로 향했다. 그들은 테이토 백화점으로 향했다. 신장개업한 테이토 백화점은 그 규모도 화려함도 아주 남달라졌다. 도현은 가볍게 감탄사를 내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명품관을 돌다가 아시아에 두 개밖에 없는 보석 브랜드점이 있자 도현이 씨익 웃으면서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다이아몬드 다 사줄 수 있다면서?”

“사.”

“진짜?”

“뭐 사고 싶은데.”

놀리려고 말을 꺼낸 건데 남자가 진담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도현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갔다.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손에 이끌려갔다. 천장이 아주 높고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로 이루어진 화려한 샹들리에가 버드나무처럼 늘어져 있었다. 거기엔 환한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와 유색 보석들이 잔뜩 있었다.

“요즘 대세가 심플한 스타일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는 고객님들 사이에서도 만족도가 높은 스타일입니다. 오늘 입으신 옷차림과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물론 어떤 차림을 해도 고객님의 미모를 빛내줄 좋은 악세서리입니다.”

직원은 다이아몬드가 4열로 주르륵 연결된 팔찌를 면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설명했다. 송선호는 잠깐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저건 뭡니까?”

매장의 한 가운데, 주변으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게끔 라인이 그어져 있었다. 송선호는 강화유리박스 안에 들어있는 보석 세트로 시선을 주었다.

“아, 저건 남미에서 발견된 태양의 다이아몬드를 세공해서 만든 작품입니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 티아라가 세트로 되어 있습니다.”

송선호가 도현을 보았다. ‘어때?’ 라는 눈빛이었다. 도현은 잠깐 그 다이아몬드 악세서리 세트에 눈이 팔려서 멍하게 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빚 다 갚을 때까지는 이런 사치는 안 하기로 로웰 선생님이랑 약속했어.”

“그건… 좋은 생각이네.”

차라리 저거 사줄 돈으로 빚을 더 갚아주는 게 나으려나? 송선호도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이아몬드는 줬다는 티라도 나지 빚은 갚아줘도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니 금방 잊어먹는 것 같다. 일단 지금은 정말 현금이 부족하기도 하고….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도현이었지만 막상 다이아몬드를 보니 견물생심이라고 계속 마음이 가는 모양이었다. 다른 쇼핑에는 집중을 잘 못 하는 것 같았다.

수영복 전문점에 도착해서도 도현은 여러 가지 집어보다가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뭐 입을까? 이런 거?”

그러면서 도현이 아주 천박하기 짝이 없는 수영복을 집어 들어 심드렁한 얼굴로 자기 몸에 대보며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직원들이 전부 송선호를 쳐다보았다. 고급스럽게 빼입은 여자가 우아하게 집어 든 수영복이 별모양 니플패치에 똑같이 별모양으로 국부를 가리는 금색 T팬티다. 송선호는 얼굴을 확 붉히며 헛기침을 하면서 그녀의 손에서 수영복을 빼앗아 얼른 제자리에 걸었다.

“이런 거 말고…! 좀 제대로 된 거 입어!”

“그러니까 뭐.”

“나가자, 어? 아까 그거 사줄게. 사주면 되잖아.”

“누가 그거 사고 싶대!”

도현이 버럭했다. 지금까지는 도현 킬스버그가 여유롭게 송선호의 기분을 천국으로 승천시켰다가 지옥으로 떨어뜨리기를 반복했는데 다이아몬드 때문에 그녀의 기분이 나빠지자 송선호는 우왕좌왕했다.

“그, 그럼 내가 어떻게 할까? 응?”

“…그럼 네가 이거 입어.”

그녀가 들어올린 남자 수영복은 엄청나게 작은 빨간색 삼각으로 무려 엉덩이가 시스루였다.

“…….”

송선호는 당연히 싫다고, 미쳤냐고 기겁을 하려다가 그녀의 뚱한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붙잡고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직원들이 키득거린다. 그러자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녀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음~ 그럼 난 이거 입을까? 어때?”

“입어… 예쁘다….”

“그럼 이거는?”

“그것도….”

송선호는 자신의 수영복을 내려다보았다. 빨간색 시스루 삼각 수영복. 보는 것만으로도 남자로서의 자존심에 엄청난 스크래치가 난다. 왜일까.

둘은 백화점을 나왔다. 렌터카를 타고 도쿄 엠페리오스로 향하며 도현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서울에서 갔던 거기도 진짜 좋았어. 너무 멋있더라. 야경도 진짜 예쁘고 음식도 맛있고 직원들도 훌륭하고.”

그때 도현은 그 장소도 음식도 송선호도 너무나 마음에 든다며 먼저 키스를 하기까지 했다. 송선호는 약간 으쓱한 마음에 쑥스럽기까지 했다.

“또 가자.”

“응. 엠페리오스도 비슷해? 어때?”

“음, 여긴 미술관 같아.”

쇼핑한 것은 차에 두고 발레 파킹을 맡긴 후 두 사람은 VIP 엘리베이터를 타고 석양 아래에 빛나는 레인보우 브릿지를 보면서 도쿄 엠페리오스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들어가니 일단 바닥부터 비취색으로 은은한 연녹색, 벽은 아이보리와 황금빛을 기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거대한 회화가 한쪽 벽면을 가득 차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각종 미술품이 벽을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강화 유리 박스 안에서 은은한 조명을 받아 나열된 작품은 마치 과거에서 건져 올린 시간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회화의 반대쪽 벽에는 수십 명의 유명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있었다. 그 소리가 귀를 적신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은 도쿄만과 레인보우 브릿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름다웠다.

“와… 아주 정석이구나.”

도현이 유럽에서 가봤던 회원제 레스토랑들과 분위기가 비슷했지만 여기가 더 화려하면서도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되어있었다. 규모 면에서도 훨씬 컸다.

“메트로서울은 이런 곳 치고는 너무 모던했지.”

“응. 그랬네. 와… 되게 정신 사나울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깔끔하다…. 멋지다.”

도현은 안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전 세계 1,000호의 패밀리만이 등록할 수 있는 회원제 레스토랑이다. 메트로서울의 회원제 레스토랑보다도 사람이 훨씬 적었다. 적당한 지점에서 그들의 코트를 받아들기 위해 직원 둘이 다가왔다. 그들이 인이어를 통하여 다른 직원에게 알렸다.

“KP그룹 송선호 님과 약혼자 도현 킬스버그 님 오셨습니다.”

응? 도현이 송선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송선호는 그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면서 속삭였다.

“가족만 들어갈 수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너 이렇게 약혼자 자리 팔아도 돼?”

송선호의 변명에 도현이 약간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한국의 재벌가는 유럽의 왕실과 비슷해서 끼리끼리만 집안을 합친다. 송선호가 한숨을 약간 쉬며 도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너 내가 결혼하자는 말 도대체 뭐로 들었냐?”

“어? 그냥 들었지?”

“…심각하게 좀 들어.”

“응? 왜? 지금도 하고 싶어?”

“…….”

매달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일단은 관두었다. 자리로 안내되고 보니 확실히 서울과는 다른 게, 서울은 실내를 어두컴컴하게 유지하여 좀 더 프라이빗한 느낌이 났는데 여기는 밝은 데다가 미술품을 구경하기 위해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어 굉장히 사교적인 느낌이 났다. 걸어 다니다가 누군가와 마주치면 그게 아는 사람인 게 당연하고 세계 최상위의 사람들만이 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 격차를 느낄 일도 딱히 없는 그런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당연히 메트로서울에서처럼 키스를 한다든가, 스킨십을 진하게 하는 것은 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기는 했다.

“로댕이 많네.”

“로댕 좋아하잖아.”

“응. 로댕이나 피카소는 딱 보면 바로 알잖아? 그런 게 좋더라고.”

“나도. 보고 올까?”

“응.”

메뉴를 시키고 나서 둘은 천천히 손을 잡고 미술품을 보면서 한 바퀴 돌았다. 간혹 서로 귓속말도 속삭였다. 이미 다 아는 미술품에 관한 얘기보다는 금방 스쳐지나간 사람이 어디의 누구다, 라는 식의 이야기가 더 많기는 했다. 그러다가 직원이 음식이 나올 것이라 미리 언질을 주어 자리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이런 것도 좋다. 다음에는 미술관 갈까? 집에 새로 걸 그림도 하나 사고 싶고.”

“좋아. 어디로 가고 싶은데?”

“음. 샌프란시스코?”

도현은 오랜만에 미술품을 보니 또 영감이 와서 글을 쓰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참았다. 이런 곳까지 와서 디바이스만 잡고 있는 것은 정말 꼴불견이다. 새하얀 테이블보를 깐 테이블 위로 핑거푸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도현은 눈을 살짝 감으면서 그것을 하나 집어먹었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맛있었다. 깔끔하고.

“전에 로얄팰리스에서 한 파티에 간 적이 있거든.”

“언제?”

“얼마 안 됐어. 거기 음식은 맛있긴 해도 좀 투박했는데… 세상에. 거긴 음식에 전부 금박을 씌워둔 거야.”

“중국인이지? 인도인?”

“중국계 인도인.”

“그래. 그쪽이 음식에 금박 씌우는 거 진짜 좋아해.”

“난 처음 봤어…. 보통 음식 먹으면서 그런 생각 안 하는데 그건 볼 때마다 이거 얼마일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적당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쪽에서는 적당히 하는 게 오히려 예의가 아니야.”

“아, 그런 거야?”

“근데 무슨 일로 그런 데를 다 갔어?”

송선호가 물었다. 아까도 괜찮았겠다, 도현은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 솔직하게 대답했다.

“웨스트이글 준우승 파티. 그런 파티는 처음 가봤는데 화려하긴 진짜 화려하더라. 금괴를 산처럼 쌓아뒀었어.”

“…거길 갔다고?”

“응.”

“그때 사고 일어나지 않았어? 신문에서 봤는데? 싸움 일어났다고.”

“아… 응.”

“큰일은 없었어? 무슨 일 있으면 내가 꼭 말하라고 했잖아.”

“아니… 딱히….”

“그때 미하엘 로드리게스도 잡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거 너랑 관련된 거야?”

그는 어떻게 이런 것까지 다 아는 것일까? 그는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보통 TFC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그들끼리 해결하지 정말 큰 사고가 아니고서야 선수가 잡혀들어가는 일이 없다.

“아, 그게….”

송선호는 이마를 짚으며 이를 악물었다. 언제나 이랬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한참 나중에 알려줘서 그가 미리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손을 쓸 수 없게 만든다.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아니면 모든 걸 전부 송선호에게 밝히든 그중 하나라도 한다면 이런 일은 절대 안 일어나게 해줄 거 아닌가.

‘바보야? 지가 선수들 만난다고 걔들이 사람처럼 보여? 거기가 어디라고 가? 씨발. 그 새끼들 설마 얘 몸 파는 여자 취급한 건 아니겠지? 그것들이 만나는 것들이 다 창녀들인데… 씨발. 씨발.’

내 여자가 누구한테 그런 취급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송선호가 이를 갈 듯 중얼거렸다.

“저번 주 금요일이지….”

“별일 없었다고 했잖아.”

“무슨 일 있었는데?”

“아, 됐어.”

“되긴 뭐가 됐는데? 빨리 말해.”

송선호가 정색하고 말했다. 도현이 인상을 썼다.

“이런 데까지 와서 왜 이래. 그만해.”

“그러니까 빨리 말해.”

“내가 알아서 잘했어. 나중에 얘기해.”

송선호는 시선을 야경으로 돌리고 화를 억누르다가 물었다.

“그럼 이제 확실하게 킹쉴드는 안 만나는 거야?”

“…….”

“너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

결국 그 뒤로는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둘 다 기분이 상한 것이다. 음식은 제대로 손도 대지 않고 둘 다 와인만 마셨다. 분위기는 완전히 망가졌다. 후식도 거의 들지도 않고 일어났다. 도현은 그냥 빨리 여기를 나가고 싶은 모양인지 아무 말없이 아무 엘리베이터 버튼이나 눌렀다. 먼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그냥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내부에서도 서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손 같은 건 잡지 않았다. 근사한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 도쿄만의 화려한 야경을 등에 지고 층이 넘어갈 때마다 반복적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침묵과, 그에 깔린 분노가 흐른다.

꼭대기 층에서 반쯤 내려올 때까지는 아무도 타지 않았는데 상가가 밀집한 층수에 이르자 갑자기 중국인 관광객들이 잔뜩 타면서 곧 만원이 되었다. 도현은 구석으로 밀리고 송선호는 그걸 보다가 결국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

도현은 야경이 훤히 보이는 유리벽에 등을 기댔고 송선호는 그녀가 사람들에게 눌리지 않도록 간격을 유지하며 그 벽을 짚고 서 있었다. 잠깐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송선호는 야경으로 도현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걱정돼서 이러는 건 아는 거야?”

송선호가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날이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살든 사사건건 평가하려고 들지 마.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아.”

“알아서 잘 살아서 빚도 천억이 넘게 지고 남자도 그런 병신들만 만나?”

“누가 갚아 달래? 그런 나한테 울고불고 매달린 남자가 누군데?”

송선호는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존심 상한다. 부글부글한다.

“너 같은 여자는 결국…!”

“결국 뭐?”

“…….”

“뭐?”

송선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노려보았다. 송선호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전부 내려 또다시 둘만이 엘리베이터에 남고도 계속 그랬다. VIP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할 층에 도달하자 도현이 송선호의 몸을 밀쳤다.

“나 한국 간다.”

송선호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왜?”

그녀가 짜증스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송선호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는 VIP 엘리베이터를 다시 눌렀다.

“…….”

“…….”

일단 호텔로 갔다. 도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었다. 거실로 야경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도현은 구두를 벗어던진 후 바로 욕실을 찾아서 들어갔다. 송선호는 쇼핑백을 거실의 카우치 위에 올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양복 상의와 베스트를 벗고 넥타이도 벗어서 던졌다. 목을 조이던 셔츠 단추를 단추를 두 개 정도 풀고 나니 몸에서 긴장이 약간 사라진다. 그는 잠깐 카우치에 앉아 미간을 손으로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잠깐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그녀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 자신은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그녀가 자신을 선택할 일은 없어 보였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할 수 없다면 이 사랑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째서 나를 한순간도 남자로 보지 않을까. 그런 원망만이 깊어져 사랑이 미움이 되어 그녀를 괴롭혔다.

이제는 함께인데도 어째서 그녀를 괴롭히고 마는 걸까. 나는 왜 괴로운 걸까. 원래 사랑이란 괴로운 것일까.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또 괴롭다.

그런데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송선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문을 두드렸다.

“다 씻었어?”

그러자 대답도 없이 문이 확 열렸다. 바스타월을 두른 그녀가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 한쪽으로 내리고 그의 앞에 바로 서 있었다.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시선을 위로 돌렸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듯 손바닥으로 살짝 입을 가렸다. 표정을 가리고 싶었다.

“아깐 미안… 내가 말이 너무 심했다. 진짜 미안….”

하지만 도현은 화가 안 풀렸다. 그녀는 송선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면서 그의 가슴팍을 검지로 찔렀다.

“난 네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너무 싫어.”

“…알아.”

그는 도현에게 밀려서 뒷걸음질을 쳤다.

“네가 나한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으면 내가 고쳐야 해? 내가 왜? 넌 나 좋아한다면서 왜 자꾸 날 고치려고 들어?”

“미안….”

그는 도현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그대로 밀려서 반대쪽 벽에 등을 대고 섰다.

“나 같은 여자가 뭐? 나 같은 게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도현아….”

“네 말대로 하는 여자 원하면 그냥 그런 여자 만나. 왜 나한테 이래? 나야말로 너 같은 거 없어도 상관없어!”

기세를 꺾고 그녀에게 사과를 하던 송선호가 그녀의 말에 움찔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럼 넌 왜 나 만나는데? 나 같은 거 필요 없으면 왜 만나는데?”

도현이 그의 턱을 한 손으로 콱 잡아서 끌어당겼다.

“그렇게 잘난 척하던 놈이 내 앞에서 병신같이 구는 게 웃겨서 만난다, 왜?”

그녀는 송선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껏 그의 심장을 찔렀다. 지금껏 송선호가 심한 소리를 하고 괴롭힌다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듣는 도현이 아니었다. 그녀는 배로 돌려줄 수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에게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하지만 상처받은 얼굴을 숨기지는 못했다.

“나는….”

그가 도현의 등을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잡은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았다. 상처를 받아 심장이 욱신거렸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목이 메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너한테 무슨 일 있었다는 걸 한참 나중에야 듣는 내 심정은 어떨 거 같은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하는데? 그래! 내가 네 앞에서 병신인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네가 중국에 팔려가거나 다른 새끼들한테 창녀 취급받는 꼴을 내가 어떻게 봐! 내 여자가 그런 일 당하는 걸 내가 어떻게 가만히 두냐고!!”

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송선호는 이게 더 그녀의 성질을 긁을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모르는데. 왜. 너한테 평생 그런 일 일어나지 않게 해줄 수 있다고. 네가 원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다고. 난 평생 너만 사랑하고 너만 볼 거야. 그래! 지금은 다른 놈들 실컷 만나!! 그래도 결국 너한텐 나밖에 없어!”

“…….”

“윽….”

송선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잠시간 씨근거렸다. 기분을 억눌렀다. 방비가 필요했다. 그녀가 또 어떤 칼을 휘둘러 그에게 반격해올지 모른다. 도현은 ‘하’ 하고 헛움음을 지었다.

“참나… 이 남자들이 차례로 진짜….”

도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송선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남자답고 근사한 얼굴이 분노, 초조함, 억울함 등으로 젖어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정말 도현 앞에서만 이랬다. 도현의 앞에서만 희비애락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런 송선호의 얼굴을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코가 닿을 것만 같았다. 그의 피부가 열기와 땀으로 촉촉했다. 그녀가 속삭였다.

“웃기지 마. 나한테 너밖에 없는 게 아니라 너한테 나밖에 없는 거잖아.”

“…너한테 나만큼 좋은 남자는 없어. 결국엔 나밖에 없는 거라고.”

“흐응, 이런 멍청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나한테 자꾸….”

“…….”

송선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턱이 아플 정도로 강하게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그의 목덜미를 감싸 잡으며 손가락이 그의 목깃의 안으로 들어갔다. 금방까지는 화가 나서 심장이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그냥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뛰었다. 분위기가… 욕실에서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주홍빛 불빛이 그녀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여성스러운 실루엣이 더욱 마음을 혼란하게 했다. 그녀의 밝은 갈색 눈동자가 빛을 내었다. 살짝 내려 뜬 눈으로 송선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도 피부도 손도 서늘하게 촉촉했다. 송선호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지며 침묵을 점차 달구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해?”

그녀가 송선호의 양 눈동자를 천천히 번갈아 보았다. 코끝으로 그녀의 향기로운 체취가 예민하게 느껴졌다. 송선호는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키며 약간 긴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실수 안 해야겠다는 생각.”

그러자 그녀가 드디어 웃었다.

조금 전까지 싸워서, 더 흥분하고 말았다. 입술이 잠깐 스쳤는데 심장이 쿵 떨어진다. 송선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하하하…! 야, 갑자기….”

그녀의 웃음소리가 급격하게 기분을 고조시켰다. 그녀가 흘러내리는 바스타월을 가슴 부근에서 잡았다. 송선호는 온몸에 열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도현아….”

송선호는 그녀의 쇄골과 윗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엄청, 엄청 부드러웠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결국엔 그도 섹스에 정신이 팔린 남자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야. 얘 아니면 싫다고… 절대 싫어.’

“아, 간지러워. 잠깐만… 으응….”

송선호가 한쪽 팔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다른 손으로 등을 쓰다듬으니 그녀가 살짝 몸서리를 쳤다. 그는 그녀의 살에서 얼굴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입이 말랐다. 얼른 그녀의 입안을 탐해야 할 것 같았다. 잔뜩 핥고 빨아주고 싶었다. 그녀가 송선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쪽, 쪽 천천히 입술을 붙였다 뗐다 반복했다. 귓속이 간질거렸다. 아랫배가 엄청 뭉친다. 송선호는 눈을 감으며 그녀의 입안에 혀를 넣었다.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혀로 그녀의 촉촉한 입안을 핥고 건드리다가 입술이 떨어지면서 서로의 혀를 핥았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으응….”

그녀가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송선호는 그녀를 들고 키스를 하며 비틀거리다가 겨우 방향을 잡고 침실로 향했다. 그녀를 덮치며 커다란 침대에 쓰러졌다. 침실에는 은은한 주홍빛 불빛이 켜져 있었다. 입술을 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침구에 푹 가라앉듯 누운 그녀는… 정말 예뻤다. 송선호는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진짜 벌벌 떨었다.

“하하, 송선호. 왜 이렇게 떨어?”

“아… 웃지 마. 지금 죽을 거 같아.”

싸워서 그럴까. 전에 그녀의 집에서는 그래도 티 안 나게 잘했던 거 같은데 한 번은 쫓겨나고 한 번은 손만 잡고 잤다가 아침에 기겁을 했다 보니 지금은 숨기지도 못하고 덜덜 떨었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송선호는 스스로를 꾸미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아까도 그랬다. 지금은 더 그랬다.

도현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면서 예쁜 속눈썹에 휩싸인 눈을 아래로 내리뜨며 그의 탄탄한 가슴을 보았다. 송선호는 너무 긴장한 데다가 심장이 목구멍과 배를 왔다 갔다 하며 쿵쾅거리고 있어 단전이 당겨 아팠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서 셔츠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송선호가 엄청 움찔거렸다. 도현이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처음도 아니고 왜 이래?”

송선호는 입을 뻐끔거렸다.

‘씨발… 차라리 말하는 게 나은 건가? 지금? 진짜 병신 같다. 병신… 제발 저번만큼만 해라, 송선호! 병신아!!’

그런데 그게 안 된다…. 송선호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그러니까….”

“…너 설마 처음이야?”

송선호는 얼굴이 거의 터질 것처럼 빨개져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도현도 깜짝 놀랐는지 입을 떡 벌렸다가 다시 풋 하고 웃었다.

“하하하.”

“아! 웃지 말라고!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했잖아! 그때 내가 22살이었다고!”

도현이 웃기 시작하자 송선호가 화가 난 얼굴로 빠르게 변명했다. 도현은 그걸 보고 더 웃었다.

“아, 잠깐만. 하하하. 아, 송선호 진짜.”

“야!!”

도현이 눈가에서 눈물을 닦아내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를 침대에 눕히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바스타월이 자연스럽게 스르륵 흘러내리며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송선호는 화를 내다가 그녀의 알몸을 보고는 진짜 깜짝 놀라서 바로 한 손으로 두 눈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

미쳤다… 봤다. 윽, 젠장… 씨발. 아, 죽을 거 같아. 심장 터질 거 같아. 이게 뭐라고 땀이 줄줄 난다. 아니, 이게 뭐긴…! 무려 그녀와의 진짜 첫날밤이다. 송선호는 그녀를 마구 만지고 싶은 충동과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것만 같은 묘한 저항감 사이에 괴로워했다.

“키스도 잘하고 스킨십도 잘하길래 역시 놀 만큼은 놀았겠구나 했는데.”

“그건 뭐야….”

“여자랑 데이트도 잘 하더니. 다 잘 안 됐나 봐?”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송선호는 눈에서 손을 떼고 겨우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좀 억울한 표정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니까. 좀 믿어라.”

“뭐야. 내가 첫사랑이라도 돼?”

“…….”

“진짜?”

“그러면 안 되냐….”

도현은 눈을 두 번 깜박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곧 그의 몸을 짚고 자세를 낮추어 그의 얼굴에서 주먹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부드럽게 그의 눈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그럼 오늘 내가 신경 써서 살살 해줘야겠네.”

송선호의 얼굴이 펑 하고 더 빨개졌다. 그는 바짝 긴장해서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그의 코를 손가락으로 살짝 튕기면서 그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알몸으로 침대에서 내려갔다. 송선호는 얼굴을 붉힌 채로 몸을 좀 일으켜서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그녀는 거실로 가서 핸드백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비싼 티슈를 하나 꺼내더니 송선호의 손부터 닦았다. 전에 그녀가 손을 안 씻었다며 불쾌해 했던 게 기억나서 움찔했다가 가만히 있었다. 앉아 있는 송선호의 무릎 위에 올라탄 그녀는 꼼꼼하게 그의 손톱 밑까지 싹 다 닦았다.

“그냥 샤워하고 올까?”

“음… 그냥 됐어.”

송선호는 약간 진정하여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요염한 느낌이 나는 남색 머리카락… 날개뼈 정도까지 가지런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송선호는 항상 그녀의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둘러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손가락으로 만졌다. 손에 꼬듯 감아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이제 송선호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단정하고 깨끗한 이마와 오똑한 코, 뺨, 입술을 지나 그녀의 동그란 어깨가 보였다.

그녀의 허술한 옷차림을 볼 때마다 티셔츠를 들추고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깨였다. 송선호는 눈을 감으며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묻으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정말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그녀는 왜 이렇게 부드러운 것일까. 그대로 슬금슬금 그녀의 등허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허벅지를 만졌다. 숨이 다시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벗기는 대로 박자를 맞추어 엉덩이를 들어주고 그도 알몸이 되어 그녀와 마주했다. 송선호는 인상을 약간 찌푸렸지만 많이 떨지 않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송선호….”

계속 송선호의 몸을 보던 그녀도 양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몸이 마음에 드는 것일까. 송선호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자 참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하아… 도현아. 도현아. 사랑해, 도현아….”

알몸으로 서로 끌어안으니 온몸으로 그녀가 느껴졌다. 그건 송선호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훨씬 감동적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살을 맞대는 건… 지금이라면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것이다. 그냥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돼?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할게.”

너무 좋으면 괴롭다. 그녀에게 미움받는 것이 두려워 오히려 확실하게 미움받을 수밖에 없는 짓을 먼저 했던 것이 아닐까. 잘 보이려다가 미움을 사면 더 괴로우니까.

도현은 또 미소를 지었다. 사실 송선호가 그녀의 앞에서 병신같이 구는 걸 즐긴다는 건 반쯤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폼을 잡고 강하게 나오는 거야 익숙하다면 익숙했지만 그가 이렇게 도현의 말에만 따르겠다며 긴장한 얼굴을 하면 역시 웃음이 나온다. 유쾌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다.

“이럴 거면서 그렇게 미운 말만 하고.”

도현은 그의 입술을 깨물면서 그렇게 속삭였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기도 자기가 잘못한 걸 아는 거다. 그런데도 안 그런 척하니까 괴롭히고 싶어진다. 이런 게 타고난 걸까? 그대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의 것을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체로 남자는 이것만 봐도 그 남자의 모든 것을 평할 수 있다.

“크네….”

의외로 색은 붉은빛이 강한 진한 분홍색으로, 정말 색이 좋았다. 핏줄이 두어 개 바짝 올라와 큼직하게 두툼한 그의 훌륭한 물건에 두께를 더했다. 게다가 정말 야하게도 그의 것은 위로 현저하게 휘었다. 도현이 그의 것을 가만히 관찰하자 맞닿은 피부의 온도가 확 올라가며 땀이 배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언니가 크고 휜 게 최고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진짜 그러려나.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이미 훌륭하게 기립하여 아랫배에 닿을 정도로 섰다. 손가락으로 살짝 모양이 잘 나온 그의 귀두 끝을 건드리자 그가 움찔하며 긴장했다. 그의 근육에 빵빵하게 힘이 잡혔다. 도현은 왼손으로 그의 가슴을 주물거리며 물었다.

“그럼 그동안 어떻게 했어? 항상 내 생각하면서 혼자 했어?”

그렇게 묻자 송선호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표정이 굴욕을 참는 것도 같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도현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그의 것을 잡아서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선을 피했던 그가 바로 그녀의 손을 보았다. 머리카락이라도 곤두서는 표정이었다.

“아… 윽… 아, 씨발… 어떡해….”

그는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송선호는 성인 남자의 이미지가 강한 남자라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정말 없는데, 처음이라 그런지 어리숙한 풋풋함이 있었다. 그런 그가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혼자 할 때는 어떻게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은데? 처음이라니까 내가 신경 써줄게.”

“아니… 아니. 아니. 그, 그냥… 평범하게….”

“평범하게? 어떻게? 이런 건 좋아? 이런 건?”

“윽…! 자, 잠깐만. 손 좀 떼 봐. 왁…! 아, 잠깐만…!”

그녀가 그의 것을 거침없이 슥슥 문질렀더니 송선호는 그녀를 말리지도 못하고 온몸이 벌게져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흐응.”

도현은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송선호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술을 대었다. 송선호는 움찔하면서 그녀의 리드에 맞추며 입술과 혀를 움직였다. 그의 얼굴에서 땀이 흐르고 숨소리가 엄청 섹시해졌다.

“봐. 벌써 이렇게 됐어. 귀엽네.”

“하아… 윽, 놀리지 말라고.”

자존심이 약간 상한 걸까. 그는 그렇게 답하고는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송선호를 희롱하면서 물기가 어려 촉촉해진 그녀의 것이 뜨거워진 그의 것에 약간은 차갑다 싶을 정도로 닿아왔다. 그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윽…! 하아… 도현아…!”

“으응… 송선호….”

그녀의 다리가 활짝 벌어지며 그의 허리를 감쌌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여자와 커다랗고 잘생긴 남자가 값비싼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의 고즈넉한 조명 속에서 알몸으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동정인 주제에 진짜 야한 걸 가지고 있는 그였다. 그의 뜨거운 기둥이 그녀의 흥분해서 젖은 부분을 꾹 눌렀다. 그의 휜 부분(?)이라든지 굴곡(?)이라든지 꽉 맞대어 비비니까….

“하아… 하아. 으응… 아… 송선호… 송선호… 아앗. 앗.”

게다가 피부도 좋고 단단한 근육도 그녀의 것에 맞닿아 눌러지고 비벼질 때마다 황홀감이 들었다. 그의 남성기에 그녀의 여성기가 문질러졌다. 모양이 탱탱한 귀두가 그녀의 소음순 사이를 가르고 음핵을 긁었다. 그대로 꽉 맞닿아 질척한 체액으로 서로의 민감한 부분을 문질렀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송선호의 단단한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도현아… 하아… 윽….”

이런 목소리를 낼 줄은 몰랐다. 진짜 섹시하다…. 도현은 그와 하는 것이 생각보다도 기분이 좋아 그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뭐야… 하읏…. 우리 잘 맞나 봐… 아아앗. 기, 기분 진짜 좋아….”

서늘했던 그녀의 피부가 화악 달아올라 땀이 배어 촉촉해졌다. 온몸으로 서로 맞닿고 있었다. 그녀가 기분 좋아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대로 느끼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와, 그녀와 드디어 섹스를 하고 있었다. 꿈에서나 그리던…. 송선호는 확 흥분해서 그녀를 침대로 쓰러뜨렸다.

“도현아…!”

“앗…! 그렇다고 세게는…! 아…!! 송선호! 으읏… 살살, 아…!”

“사랑해. 사랑해. 진짜… 너무 좋아. 죽을 거 같아. 도현아. 도현아….”

“으읏. 송선호…. 하앗. 아앗! 잠…! 으으응…! 아아앗!”

“으으윽…!”

발끝까지 짜릿했다. 저절로 몸이 수축하며 움찔움찔 엉덩이가 움직였다.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의 무게가 아주 묵직하다. 그의 아름다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도현은 몸을 떨면서 길게 숨을 내뱉었다. 부드러운 침구와 섹시한 남자. 아주 정석적인 첫날밤이다. 기분 좋은 오르가즘이 온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아….”

송선호는 도현의 몸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으흑….”

“응…? 으응?! 너 울어?”

도현은 깜짝 놀라서 그의 양 뺨을 잡고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언젠가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현의 얼굴을 괴로운 듯 환희에 찬 듯 내려다보았다.

“나 진짜… 너 너무 좋아. 너무 좋아해. 사랑해. 사랑해… 너무 좋아. 사랑해.”

“송선호….”

하고 나서 우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다…. 도현은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역시 그가 귀엽기도 했다. 큰일이다. 정드나 봐.

“아, 울지 마. 귀여우니까.”

그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며 그렇게 그를 달랬다. 송선호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몰려오는 6년간의 감회를 견뎠다. 그리고 그는 남은 눈물을 떨구어내고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도현은 그런 그의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 잘생긴 남자는 우는 얼굴도 예쁘니까. 그가 도현의 눈을 바라보며 조르듯이 말했다.

“한 번 더….”

“응? 벌써?”

원래 도현의 계획은 오래 안 정으로라도 그의 동정을 아주 살살 떼어 줄 생각이었는데, 잔뜩 흥분한 그는 그대로 그간의 금욕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심보인지 오히려 그녀를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게 했다.

*

눈을 떴다. 깜박였다가 다시 떴다. 가지런하게 눈을 감고 있는 송선호의 얼굴이 보였다. 단정한 이마에 오뚝한 코와 깊은 눈매, 남자답게 각진 턱과 의외로 도톰한 분홍빛 입술. 항상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의 다른 팔은 도현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묵직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새삼 신기하다. 얘랑 이런 사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현은 그의 이마에 입을 한 번 맞추고는 침구를 어깨까지 덮어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기록이다….’

엄청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손가락으로 꼽아서 세어 보았다. 좋은 섹스를 하고 난 다음 날의 개운함과 나른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샤워를 할까 하다가 일단 물부터 마시고 싶어서 가운을 찾았다.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송선호의 셔츠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걸 집어 들어 입었다. 얘는 분명히 이런 거 좋아할 것 같다. 도현은 거실로 나갔다.

높은 천장에 한쪽 벽면이 전부 유리창인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의 거실이었다. 늦게 잠들어서 늦잠을 잤다. 벌써 10시 반이었다. 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유리창 안으로 들어왔다. 도현은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유리창을 마주 보고 있는 카우치 위에는 어제 산 쇼핑백이 잔뜩 놓여 있었고 송선호의 양복 상의와 넥타이도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구겨졌겠다….”

도현은 물잔을 테이블 위에 두고 그의 옷을 집어 들었다. 옷장에 걸어야겠다. 같이 몇 번 백화점을 다니면서 보니 그는 엄청 비싼 브랜드를 입었다.

‘음… 이 브랜드로 하나 사줄까?’

근사한 남자를 근사하게 입히는 것도 나름의 재미다. 송선호는 회색이 잘 어울리던데…. 그렇게 생각하며 옷장에 베스트와 상의, 넥타이까지 잘 걸고 모양을 잡아두는데 그의 양복 상의 안에 무언가 들어있어 손에 잡혔다. 빼서 따로 둘 생각으로 꺼냈다.

“…….”

도현은 가만히 그걸 보고 있다가 거실로 가지고 왔다. 그녀는 쇼핑백이 잔뜩 있는 카우치 한켠에 앉아 물을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보라색 벨벳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백금과 금이 섞인 링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줄지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메인 보석은 가장 전통적인 커팅으로 조각된 커다란 최고급 다이아몬드였다. 그리고 그 다이아몬드 주변으로도 작은 다이아몬드가 꽃잎처럼 휘감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백금이 그 모양을 아름답게 잡아주는, 크고 화려하면서도 클래식한 반지였다.

도현은 한 모금 더 물을 마시고 그걸 손에 끼어보았다. 그리고 손을 위로 들어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비추어보았다. 한참을 햇빛에 이렇게 비추어보고 저렇게 비추어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침실 쪽에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발걸음 소리가 쿵쿵 크게 들리더니 침실의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속옷만 입은 송선호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도현을 발견하고는 숨을 멈추었다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그래?”

도현이 물었다. 머리가 잔뜩 솟았는데도 근사한 남자였다. 거의 양복만 입고 다니는 송선호였지만 역시 벗은 것도 멋졌다. 그렇게 또 도현이 그를 감상하고 있는데 송선호가 그대로 얼굴을 한 손으로 비비고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없는 줄 알았어….”

“응? 내가?”

송선호는 그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약간 쉬고는 다시 도현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거….”

현실부정을 하고 싶은 목소리였다. 도현은 다시 반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물을 마셨다.

“응. 아까 네 옷 정리하다가.”

“아, 아니… 그, 그거… 그거 그러니까….”

송선호는 패닉이 빠져서 도현에게 막 다가갔다가 더 이상 다가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뭐든 빨리 변명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말을 제대로 못 했다.

“그게…….”

그녀는 송선호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가늘고 기다랗고 예쁜 그녀의 손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다이아 반지였다. 송선호는 점점 더 말을 잃었다. 그녀가 저 반지를 끼고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제 태양의 보석 세트가 마음에 드는데도 사지 못해 상심했었는데 이렇게 예쁜 반지가 기대도 못 했는데 생기니 아침부터 기분이 엄청 좋다. 도현은 질리지도 않는지 다이아몬드를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어가며 감상하고 있었다.

“예쁘다.”

도현이 말했다.

“이거 나 한다? 나 주려고 산 거 맞지?”

그녀가 웃는 얼굴로 송선호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반지를 보며 물었다. 요즘 그녀를 만날 때 가끔 챙겨서 나오곤 했다. 다시 프로포즈를 하고 싶다기 보다는… 모르겠다.

“…그래.”

그녀가 몰라서 저러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하지만… 역시 송선호가 혼자 가지고 있으면서 궁상을 떠는 것보단 저게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녀의 말대로 예뻤다. 송선호는 카우치 뒤로 다가가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뒤에서 다른 쪽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잃어버리지나 마.”

“하하하. 알았어.”

송선호는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내리고는 도현의 옆으로 바로 다가가지 않고 가만히 벽에 기대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다.’

다이아 어지간히도 좋아한다…. 큰 걸 사기 잘한 모양이다. 그때 완전 정신이 나가서 산 거였지만 몇 달 동안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담긴 송선호의 마음도 더 깊어졌다. 자주 꼈으면 좋겠다. 송선호는 드디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도현이 그의 무릎 위로 자신의 다리를 올려 걸쳤다. 그리고 송선호에게 반지를 낀 자신의 손을 보여주었다.

“네가 골랐어?”

“응.”

“직접?”

“응.”

“너도 꽤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송선호는 그녀의 허리에 가만히 팔을 두르고 자신이 사준 반지를 보고 있는 도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와 사귀기로 해놓고도 불안하고 가끔 화가 나고 초조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왜일까. 이렇게 밤을 함께 보낸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된다. 그녀에게 특별한 남자가 된 것 같다. 함께한 동안만큼은 그녀가 정말 자신의 것이 된 것만 같았다.

“요즘에 자주 쇼핑 안 하니까 여기서 이런 디자인 내놓는 것도 몰랐어. 진짜 예쁘….”

송선호는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녀의 입술에도 입을 맞추었다. 뜬금없는 키스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드디어 송선호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유례없이 부드럽다. 도현이 웃었다.

“뭐야.”

“예뻐서.”

“얼마나?”

“세상에서 제일.”

“하하. 정말?”

“진짜야.”

송선호는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남자일 줄이야. 잘 아는 남자라고 생각해서 그럴까. 의외의 면모가 정말 많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도현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는 어제처럼 떨지 않고 도현의 다리를 만졌다. 이어진 키스도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카우치 위에서 또 연인의 시간을 보내다가 같이 샤워를 했다.

“아, 옷 좀 입자.”

“입지 마.”

“안 나갈 거야? 수영하자며.”

“그냥 여기 있자….”

이런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자랐고 많은 사람의 관심을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그는 사람에 대한 기준이 높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은 무엇도 빼고 더할 필요가 없이 완벽했다. 그냥 이렇게 영원히 둘만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제 싸웠나 싶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던 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만이 그에게 이런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아니, 나 너한테 그 수영복 꼭 입혀야겠어. 보고 싶어.”

“…꼭?”

“응.”

“내가….”

선글라스를 챙겨왔나…. 송선호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도현은 기분이 한껏 좋아져 룰루 노래를 흥얼거리며 쇼핑백을 뒤지러 갔다. 도현은 어제의 그 빨간 삼각 수영복을 가지고 왔다.

“남자는 사각 아니야? 왜 항상 삼각만 고집해?”

마지못해 받아들였던 어제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송선호는 유례없이 그녀에게 흐물흐물한 상태였다. 어젯밤 스스로 인지했다시피 지금이라면 그녀가 말하는 건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부 오케이 할 기세인 그였다.

“으으응. 아니야. 아니야. 남자라면 삼각이지. 몸 좋은 남자일수록 삼각이야. 허벅지랑 엉덩이가 딱 부각되게.”

“알았다….”

송선호는 순순히 그녀의 손에서 수영복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의 아래쪽으로 시선을 두며 첨언했다.

“음… 깎아야 하지 않을까? 보일 텐데? 난 깎은 게 좋다고 전에도 말했다.”

그의 베냇나루는 다듬은 듯이 아주 근사했지만 도현은 깔끔하고 위생적인 걸 좋아하는 여자다. 송선호는 약간 한숨을 쉬었지만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면서 대꾸했다.

“알았어.”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말 잘 들어.”

그렇게 칭찬하고 그녀는 욕실 밖으로 나갔다. 도현도 어제 산 수영복을 입었다. 새카만 색에 엉덩이 양쪽에 살짝 슬릿이 나있고 어깨끈이 없는 수영복이었다. 꼬리뼈 부분과 가슴 한가운데 작게 로고가 금속으로 달려 있었다. 거기에 옅은 회색 맥시 드레스를 입었다. 어차피 호텔 내부는 어디 할 것 없이 따뜻해서 이 정도로도 괜찮을 것이다.

‘비치타월은 거기 있을 거고… 알로에랑 디바이스랑….’

필요한 걸 커다란 백에다가 다 챙기고 나니 송선호가 나왔다. 도현은 그를 보자마자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칭찬했다.

“진짜 잘, 어울린다.”

“네가 입으라고 했으면서 웃지 마.”

그가 그 위에 걸칠 옷을 찾는 사이 도현은 그의 뒤로 돌아가 그의 뒷태를 감상했다. 죽인다.

“사진 찍으면 안 돼?”

“너 왜 자꾸 이상한 사진만 찍으려고 해?”

“예뻐서.”

도현이 키득키득 웃으며 기어코 사진을 찍었다. 송선호는 그냥 포기했다. 그는 수영복 위에 옷을 입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끊임없이 입을 맞추며 수영장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민폐라는 걸 알 법도 한데 그냥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다른 사람이 눈에 안 보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온천수로 된 자쿠지가 딸린 호텔의 프라이빗 수영장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선호야? 선호 아니니?”

송선호는 도현과 입을 맞추다가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도현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들~”

하고 밝게 미소를 짓는 아름다운 여성과 송선호를 매우 빼다 박은 미중년의 남성이 하나 있었다. 송선호와 도현과 비슷한 구도로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듯한 행복감이 사르륵 사라지며 송선호의 등으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어머니… 아버지….”

송선호는 곧바로 눈만 돌려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 어떤 여자도 여행을 왔을 때 남자의 부모님이랑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송선호는 본인도 자신이 꽤 보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가정환경에서 나왔다고 해도 무방했다. 송선호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송선호에게 커다란 난관이었다.

“안녕하세요.”

도현은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송선호의 어머니, 지연 이바노프는 송선호의 아버지, 송영제의 등을 찰싹 치며 “어머, 맞나봐!” 라고 면서 깜짝 놀라더니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송영제도 웃는 얼굴로 그렇게 인사를 했다. 송영제가 ‘흠흠’ 하고 약간 목을 가다듬더니 송선호에게 작게 속삭였다.

“딴 데 가라.”

송선호가 부모님과 마주쳐 자기들의 분위기가 망가졌다고 생각한 것처럼 송영제도 똑같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아내랑 오붓하게 지내려고 서울을 빠져나왔는데 거기서 그녀를 사이에 둔 인생의 라이벌(?)인 아들내미가 나타났으니 이게 무슨 불상사인가. 하지만 이미 지연 이바노프는 아들네 커플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렸다.

“어머… 너무 예쁘다. 우리 아들이랑 만나는 거 맞죠? 만난 지 얼마나 됐어요?”

“저희 이제 한 달 좀 넘은 거 같아요.”

도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지연은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머! 너무 좋을 때다~”

“아, 엄마… 그만하세요. 저희가 다른 데 갈게요.”

송선호가 어머니의 손목을 잡았다. 지연이 아들의 얼굴을 보며 살짝 울상을 지었다.

“왜? 많이 불편해? 너무 반가운데. 미안해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너무 반가워서….”

신수가 아주 훤한 아들이었으나 언제 제대로 여자를 만난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연초에는 덥썩 결혼을 하겠다고 선을 봤다가 일방적으로 여자를 차버리질 않나. 이제 나이도 슬슬 차고 있는 아들이라 조금 걱정이 되던 차였다. 그러다 얼마 전에 메트로서울 회원제 레스토랑에 여자를 데리고 가기 위해 자기 할머니에게까지 부탁해서 깜짝 놀랐다. 역시나 여자가 있어서 그랬던 거라고 남편이랑 쑥덕거리면서 누구냐고 한동안 들들 볶다시피 채근했는데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걸 여기서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이야.

아니나 다를까. 제 아빠 닮아서 여자 보는 눈이 얼마나 높은지. 고급스러우면서도 은은하게 섹시한 매력도 있는 미녀를 데리고 이런 곳을 다 왔다. 그 여자를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주 그냥 물고 빨고….

“그래, 애들끼리 놀게 놔둬. 불편하게.”

송영제가 아내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송선호도 도현의 귀에 속삭였다.

“미안. 다른 데 갈까?”

수영하고 싶은데… 도현이야 송선호의 부모님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놀 수 있었다. 신경을 쓰는 것은 송선호였다.

“진짜 잠깐만 얘기만 좀 하면 안 되나…. 그렇게 불편하려나….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우리 아들 만나준다고 해서… 너무 고마워서….”

10분만… 지연 이바노프가 간절한 눈빛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항상 부모님 궁금했어요.”

“어머, 정말? 왜요? 우리 아들이 설마 못된 짓 하고 그랬어요? 가정교육 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지연은 그간 아들의 빈약한 연애경력 때문에 자기 아들이 제대로 팔리는 물건인지 의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도현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얘가 저한테 쌍….”

송선호가 번개같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지연과 송영제 둘 다 송선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송선호는 다시금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그렇게 두 커플은 함께 프라이빗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다른 객실의 손님과 섞이지 않고 이 호텔에 딱 두 개 있는 프레지덴셜 스윗룸 손님만 올 수 있는 곳이라 그들 넷뿐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쭉 뻗은 벽면을 꽉 채우는 기하학적인 창문을 통해 도쿄만이 그대로 보였다. 아름다운 직원들이 그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상주하고 있었다.

수영장 사이드에는 커플용으로 세련된 아크릴 선베드가 널찍하게 두 개 놓여 있었다. 원래는 따로 놓여 있었는데 가까이 붙여서 지연과 도현이 양 베드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운데는 샴페인과 와인, 맛있는 핑거푸드와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째 둘 다 비슷한 걸 시킨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양쪽 외곽 쪽에 앉아 있었다.

“어머~ 작가 선생님이었어. 너무 멋있다. 우리 아들이 맡은 작가 선생님이면 정말 억 소리 나게 버는 유명한 작가일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것도 예전 일이에요.”

“아, 정말 멋있다. 난 무슨 고조선 시대 여자처럼 이 남자한테 대학생 때 낚여서 팔려갔어. 나도 일도 해보고 사회생활도 해보고 싶었는데….”

지연 이바노프가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래서 내가 미술관도 하나 지어 준다고….”

송영제가 움찔하며 변명하듯이 끼어들었다. 어쩐지 여자 둘은 이렇게 만난 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남자 둘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네, 말씀하세요.”

“설마 그거… 우리 아들이 준 거예요?”

지연이 도현의 손에 시선을 고정하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아무리 봐도 프러포즈용 반지로 보이는 화려한 다이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지연은 눈치로 만져봐도 되냐는 듯 도현의 눈을 보았다. 도현이 먼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네.”

“어머… 너무 예쁘다.”

그러자 또 옆에서 송영제가 내가 그것보다 더 예쁜 거 사줄 수 있다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결국 자기 남편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주책이다.

“아직 만난 지 한 달밖에 안 됐다고 안 했어요?”

“네.”

“근데 벌써?”

도현이 약간 소리를 내서 웃었다.

“사실 얘가 처음 고백했을 땐 제가 찼거든요. 아니, 생각 좀 해보겠다니까 며칠도 안 돼서 바로 프러포즈부터 하고 너무 급하게 굴어서요. 그때는 반지도 안 가져왔었는데. 술 먹고 진상짓 하고….”

그러자 말없이 술만 축내던 송선호가 귀까지 빨개졌고 지연이 어머, 하며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 집 남자들은 성격 급한 게 유전인가봐. 어떡해. 내가 다 미안하네…. 우리 신랑은 소개팅 자리에서 청혼했어요.”

“아.”

유전이구나. 도현이 지연의 너머에 앉아 있는 송선호의 아버지를 보았다. 그는 아들만큼 당황하지는 않고 술을 마셨다.

“제가 딱히 결혼 생각은 없어서요. 그런데 반지는 예뻐서 일단 받았어요. 그냥 말도 없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더라구요.”

“잘했어요. 우리 때는 이런 게 유행이었는데 요즘은 이렇게 화려하게도 하는 구나.”

“그것도 진짜 예쁜데요? 클래식하고. 결국 베이직한 게 뭘 입어도 다 잘 어울리잖아요.”

“그렇긴 한데… 가끔 다른 것도 좀 끼고 싶은데 결혼반지 안 끼면 이 남자가 그렇게 화를 낸다? 웃겨.”

“음… 아버님도 화가 많으신가요? 얘도 좀 그런데….”

“어머, 진짜요? 선호야, 너 왜 그래!”

“아니, 엄마 그게 아니라….”

“그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화내는 거 아니다.”

송영제가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었다. 지연은 그를 귀찮아하면서 밀어냈다.

“아, 당신은 가서 수영이나 해.”

“애들은 애들끼리 놀라고 하자, 응? 오랜만에 같이 나왔잖아, 지연아.”

지연은 그를 다시 밀어냈다.

“결혼은 진짜 신중하게 생각해요. 결국 나중에 제일 귀찮은 건 남편이다? 원래 이번 주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여행 가기로 했는데 이 인간이 이번 주밖에 시간 안 된다고 자기 마음대로 여기 예약해서 나 결국 친구들이랑 못 가게 했어요. 참나.”

지연은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송영제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도현은 그를 슬쩍 또 보았다. 그리고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결국 이 남자(?)가 저 남자(?)로 진화하는 것일까. 하는 짓이 어쩐지 비슷한 것 같다….

‘유전….’

이래서 남자는 가정을 봐야 하는 거구나. 도현은 미소를 장착한 채로 송선호라는 남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송영제는 결국 휴, 하고 한숨을 쉬고는 포기했다. 너무 치근거리면 더 싫어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들에게 말했다.

“수영하러 가자.”

“…아… 저는….”

아버지는 벌써 수영복을 입고 있었지만 아들은 티셔츠만 벗고 아직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아주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도현은 빵 터질 뻔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지연도 아들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 아빠랑 수영하고 와. 나 조금만 더 도현 씨랑 얘기 좀 하자. 괜찮죠?”

“그럼요.”

도현은 씨익 웃으면서 그의 엉덩이를 한 대 살짝 쳤다.

“갔다 와.”

“야….”

송선호가 인상을 썼다. 웃겼다.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했다.

“눈치 없게 왜 그래, 아들. 원래 이럴 땐 여자들끼리 남자 욕도 좀 하게 해주고 해야 하는 거야.”

“그래.”

“너희 아빠도 자리 비켜주잖아.”

결국 송선호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쪽팔려 하면 더 쪽팔린다. 그가 결국 바지를 벗자 그의 수영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연과 송영제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며 기겁을 했다.

“어머! 엉덩이 다 보이게! 쟤가 미쳤나봐!”

도현은 결국 빵 터졌다. 진짜 근래 이렇게 크게 웃은 적이 있나 싶었다. 폭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흐윽, 하… 죄송해요, 어머니.”

송선호는 어깨까지 벌게져서는 얼른 수영장에 들어갔다. 송영제는 지금도 눈을 크게 뜬 채 자기 아들을 무슨 외계 생명체 보듯이 보고 있었다. 지연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기 아들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다가 아직도 웃고 있는 도현의 팔을 살살 두드리며 물었다.

“설마… 도현 씨가 입으라고 했어요?”

“강요한 건… 아닌데요….”

도현은 너무 웃어서 배가 아팠다. 그녀는 겨우 심호흡을 하면서 웃음기를 잠재우며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또 빵 터져서 그냥 포기하고 웃었다. 아, 송선호의 부모님과 마주친 건 진짜 신의 한 수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아들을 외계인처럼 보며 멀찍이 떨어지는 송영제와 벌게진 채로 입까지 물에 푹 담구고 슬슬 수영하는 송선호가 진짜 웃겨 죽을 것 같았다. 나중에는 멀찍이서 ‘너 진짜 깎았냐?’ 라고 물어보는 송영제였다.

지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저 인간은 내가 입으라면 저거 입을까….”

그걸 들었는지 송영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난 절대 안 입어! 저런 걸 어떻게 입어…!”

“…….”

지연은 살짝 인상을 쓰곤 샴페인 잔을 들었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냥 확 이혼해 버릴까 봐.”

“어머… 왜요, 어머니.”

“몰라요… 그냥 요새 그런 생각이 가끔 들어서요.”

라고 말했다가 지연이 어머, 하며 입을 가렸다.

“미안해요. 이런 얘기 부담스럽죠….”

“아니… 솔직히 좀 참고가 되는 것 같아요. 만약에 송선호랑 결혼하면 저도 비슷한 걸 겪는 거 아닐까요?”

물론 결혼 생각은 전~혀 없지만.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연은 고민스러운 얼굴로 샴페인을 조금 더 마셨다. 도현은 그녀의 잔에 조금 더 술을 따라주었다.

“그래도 우리 아들은 애 아빠랑 세대가 다르니까 좀 낫지 않을까….”

“쟤도 참 보수적이던데요… 제가 조금만 짧은 옷 입어도 그렇게 뭐라고 하더라구요. 사귀지도 않고 일 관계로 알 때였거든요. 입는 거, 먹는 거, 뭐 하는 거… 잔소리하고 간섭하고. 명령조에다가….”

“어머… 진짜 쟤 안 되겠다. 자기 아빠도 그런 식으로는 안 그랬는데. 미안해요. 집에 가면 꼭 혼낼게요.”

“네, 많이 혼내주세요. 꼭.”

도현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자 지연이 웃었다. 그리고 본론을 이었다.

“애 아빠가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애 아빠랑 결혼은 안 하고 연애만 하면 더 좋았을 거 같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요?”

“사람들은 우리 애 아빠 같은 남편은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못 만난다고 그러던데… 솔직히 말하자면, 자기가 아무리 좋다, 좋다 해도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느낌이랄까. 우리 애 아빠 덕분에 얻고 누린 것도 많았지만 너무 어릴 때 결혼해서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뭔지 생각을 못 해보고 결혼을 했어요. 잘난 남자라서 더 그렇겠지만, 결국 난 우리 애 아빠 와이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이랄까.”

지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도현을 보면서 웃었다.

“그러니까 요새 꼭 젊은 아가씨들 보면 결혼 신중하게 하라고 말하게 되더라구요. 정말 나도 나이 들었나 봐요.”

“아니에요, 어머니. 누가 어머니를 저 정도 아들 있는 사람으로 봐요.”

“그건 그래.”

그리고는 둘이서 밝게 웃었다. 서로 잘 맞는 모양이었다. 도현은 항상 연상의 여자들이랑 잘 지냈다.

“그래도 참 대단하다. 우리 아들도 성격이 꽤 있는 편인데 어쩜 그렇게 잘 휘어잡아요? 좀 가르쳐줘요.”

진짜 저걸 어떻게 입혔지… 지연은 놀랍다는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말 안 들으면 헤어지면 되죠. 우리가 뭐가 아쉬워요.”

도현이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지연이 눈을 약간 크게 뜨면서 잠깐 자기 남편을 보았다.

“그런가…?”

“헤어지기 싫으면 말 듣겠죠. 그게 싫으면 내가 싫다는 거니까 깔끔하게 헤어지면 되는 거구요.”

“그래도….”

지연이 저어되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현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좀 까다롭게 굴긴 해도 결국 송선호도 말 잘 들으려고 하더라구요. 아직 한 달째라서 그럴까요? 6년이나 저 좋아했다는데요?”

“맞아… 우리 애 아빠도 그러려고는 하긴 해.”

자기주장도 강해서 그렇지… 도현이 지연에게 속닥거렸다.

“생각날 때마다 기를 꾹 눌러줘야 해요. 송선호 보면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에요. 얼마나 잘난 척을 하는지.”

“와… 그런 것도 어떻게 그렇게 닮지? 아, 징그러워.”

“이것도 유전이에요?”

“그런가 봐.”

“아, 더 많이 눌러야 되는구나….”

도현은 또 하나 얻어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연은 난처한 얼굴로 자신의 뺨을 쥐고는 말했다.

“나도 사실 누른다고 누르긴 하는데… 별로 안 먹히는 느낌이야. 도현 씨는 어떻게 해요?”

“음… 난 너 같은 거 없어도 잘 먹고 잘산다고 해요.”

“진짜?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

“네, 어젯밤에….”

“그래도 괜찮아요?”

지연의 물음에 도현이 웃었다.

“안 괜찮을 건 뭐예요.”

“그렇게 말하면 우리 애 아빤 화낼 것 같아….”

“송선호도 화내요.”

“그럼 어떡해?”

“제가 더 화내요. 아, 근데 송선호 진짜 울보거든요. 딱 울기 직전까지만 해요. 그래도 울면 어쩔 수 없구요.”

“아, 진짜?! 쟤가??”

지연이 경악했다. 빨간 망사 수영복 다음으로 놀라운 얘기였다.

“사실 저한테 고백할 때도 울면서 고백했는데… 진짜, 울면서 고백한 남자는 처음이라 참 인상 깊었어요….”

“내 아들이지만 참….”

진상이다… 이렇게 도현이 자기 엄마한테 본인의 흑역사를 마구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송선호는 그냥 그쪽을 힐끗거리면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야, 엉덩이 좀 어떻게 해라.”

보다 못한 송영제가 송선호에게 한마디 했다. 송선호가 대꾸했다.

“지금 수영복 이거밖에 없어요.”

“밖에서 이러고 다니냐.”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두 개나 나가는 경우는 잘 없잖아요. 한국도 아니고 해서….”

“네가 자체적으로 입은 거야, 여자친구가 입으라고 해서 입은 거야?”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맞을까. 모르겠다. 그래서 송선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자친구가요.”

“야… 공처가와 애처가는 한 끗 차이다, 아들아. 어? 조심해.”

“…….”

그걸 송선호가 정할 수 있는 거면 이 꼴을 했겠는가. 송선호는 그냥 온몸을 물속에 가라앉히고 엉거주춤 둥둥 떠다녔다. 송영제는 자기 마누라가 뭘 하고 있나 보면서 말을 이었다.

“여자친구 예쁘네. 너 여자 있으면서 선본다고 한 거냐?”

“아뇨… 그때는 사귈 때 아니에요.”

“결혼하고 싶은 여자면 빨리 결혼해. 예쁜 여자는 노리는 놈들도 많다.”

아주 같이 살면서 노리는 놈이 두 놈이나 있습니다…. 송선호는 한숨을 쉬며 도현을 돌아보았다. 엄마랑 무슨 얘기를 저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보였다. 송선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왜? 결혼하기 싫대?”

“그것도 그렇고….”

송선호는 약간 고민하다가 아버지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버지는 튜브에 몸을 의지한 채 둥둥 떠계셨다. 송선호도 튜브를 하나 잡고 그냥 편하게 떴다.

“옛날에 엄마 아는 오빠들이 한 트럭이었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지. 너네 엄마 엄청 인기 많았어. 아, 그때 생각하면 끔찍하다.”

“도대체 그 남자들은 어떻게 다 제꼈어요?”

“응? 웬만한 놈들은 나한테 쨉도 안 됐지. 너네 엄마 단속만 하면 됐다.”

“…….”

좋겠다…. 엄마 성격이야 도현 킬스버그에 비할 바 없이 정숙하시다. 단속은 무슨. 송선호가 요새 더 단속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 그래도 고생 많았다. 네 엄마 좋다고 결혼식 전날까지 쫓아온 놈도 있었다. 그 새끼 팼다가 경찰서 간 적도 있어.”

“진짜요?”

“네 여자친구도 인기 많구나?”

그래 보인다. 송영제는 자기 와이프랑 웃는 얼굴로 밝게 얘기를 하고 있는 아들의 여자친구를 보았다. 아들이랑 결혼하면 와이프에게 좋은 딸이라도 생기는 모양새가 될 것 같다. 그는 저기서 그들이 지금 자기 아들이랑 싸잡아서 그를 욕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네….”

“잘해. 무조건 잘하면 돼.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라.”

“네…….”

송영제는 하품을 한 번 하고는 화제를 바꿨다.

“다음 주 토요일에 예정 있냐?”

“아뇨.”

“스위스 좀 가자.”

“왜요?”

“스위스에 있는 ATNT 주식 담보로 대출받게.”

“아버지 ATNT 주식도 있어요? 얼마나요?”

“어, 너한테 내가 얘기 안 했냐? 네 명의로 되어있는 건데. 너 어렸을 때 사놓은 거. 보니까 증권위탁은행 바꿀 때는 직접 안 가도 돼서 그냥 옮겼는데 대출은 네 서명 필요하다.”

“그런 거 얼마나 더 있어요? 제 명의로 된 거. 저 급하게 돈 필요한 일 있을지도 모르는데.”

저기 앉아 있는 그의 여자는 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여자였다. 송선호가 저도 모르게 아버지를 채근하듯이 물었다.

“너 전에도 말없이 돈 쓰더니. 안 된다. 지금은 돈 없다. 아껴 써라.”

“어쨌든 더 있긴 해요?”

“집에 가면 한 번 다 따져보자. 네 이름으로 옮겨서 쓰는 것도 꽤 있긴 하지.”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히도 생각했던 것보다 송선호의 이름으로 된 자산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주식이 꽤 되는 모양인데 이러면 매년 나오는 배당금만으로도 점진적으로 도현의 빚을 다 갚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식 안 팔아도 되겠다.

“할머니한테 가서 아양 좀 떨어라.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어?”

“아버지부터 하세요.”

“나는 매주 한다. 너희 할머니 가족들이 당신한테 얼마나 잘 하는지 다 체크하는 양반이시다. 섭섭하게 하면 대번에 점수 팍 깎는다고.”

“네. 할머니 스케쥴 보고 약속 잡고 갈게요.”

“그래.”

그리고 송영제는 몇 번이고 자기 와이프랑 아들 여자친구가 있는 곳을 힐끗거리더니 결국 아들에게 성을 냈다.

“너 이제 여자친구 데리고 어디 좀 가라, 어? 내가 왜 여기서 너랑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아, 저도 그러고 싶다구요.”

그리고 둘 다 본인의 여자를 설득하기 위해 수영장을 기어 나와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아주 화기애애했다. 송선호는 도현의 발치에 앉았다. 물론 부모님은 송선호의 궁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수영하고 싶다며.”

“아, 맞다.”

“어머,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봐. 수영하고 와요.”

“그럴게요, 어머니.”

어머니… 그녀가 살갑게 자신의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걸 들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좀 좋다. 그녀는 드레스를 벗어 옆에 두고 송선호와 같이 수영장으로 들어가 부모님이 계신 곳에서 멀리 떨어졌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창 바로 앞에 있는 자쿠지로 가셨다. 그러니 아예 널찍한 수영장에 끝과 끝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어머니랑 무슨 얘기 했어?”

“네 욕.”

“나 뭐 또 잘못했어?”

“어머니는 아버님 욕하시던데.”

“어?! 진짜?”

당연히 도현이 자신의 욕을 했다는 것보다 엄마가 아버지의 욕을 했다는 것에 더 놀랐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한테 잘하기로 유명한데….”

“유명한 게 뭐가 중요해.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지.”

도현은 그렇게 정론을 말하며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했다. 송선호도 수영을 해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물속에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수영장 바닥에 팔을 걸쳐 두 사람분의 무게를 지탱했다. 송선호가 물었다.

“난 뭔데? 말해. 고칠게.”

“나중에 집에 가서 엄마한테 들어. 어머니가 대신 다~ 혼내주신대.”

“뭐길래….”

송선호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도현은 씨익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론 그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망사가 사륵사륵 느껴진다. 도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너희 부모님 표정 봤어?”

“아… 우리 아버지 진짜 나 괴물 보듯이 보시더라….”

“근 몇 년 중에 제일 웃겼어.”

“그래… 다행이다….”

너라도 좋아서… 송선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결국 자기도 피식 웃었다.

“미안. 많이 불편했지?”

“네가 제일 불편해해. 난 재밌었어, 너네 어머니랑 얘기하는 것도. 너에 대해서 참 많이 알게 됐달까.”

“응…? 뭐야. 무섭게.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는데.”

“뭐~ 송선호랑 결혼하면 송선호 와이프로 인생 끝나는 거구나~ 뭐, 그런 얘기.”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송선호가 입을 딱 벌렸다. 그가 마구 고개를 저었다.

“절대! 절대절대 집에 안 가둬 놔.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준다니까? 글도 쓰고 싶은 것 천천히 쓰고 여행도 다니고 그래도 돼. 애는 네가 가지고 싶으면 가지는 건데 솔직히 너 몸 상할까 봐 너무 걱정되는데… 차라리 대리모를 하든가, 네가 스트레스 받을 것 같으면 애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어.”

“아~ 그래도 아기는 귀엽지.”

“그럼 넌 손 하나 까닥 안 하고 아기 재롱만 보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나랑 네 아기면 진짜 귀엽긴 하겠다.”

그녀를 결혼 쪽으로 몰고 가기 위하여 여러가지 구멍을 열심히 막던 송선호는 도현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만지자 갑자기 확 하고 실감이 나서 긴장했다. 마음을 로켓으로 쏜 것처럼 들뜬다.

‘애라니….’

도현이랑 나랑? 얼마 전까지는 꿈도 못 꾸던 얘기다.

‘그래도 몇 년은 둘만 있고 싶어. 아니, 솔직히 애한테 정신 안 팔렸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은근히 자신을 견제하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그녀가 가끔 이렇게 결혼을 고려해보는 말만 해도 가슴이 엄청나게 설렌다. 평생 내 곁에 있는 걸 생각해본다는 거니까. 송선호는 기쁘면서도 가슴이 욱신거려서 도현의 얼굴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소중하게 보았다. 도현이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난 애들 좋아. 잔뜩 있었으면 좋겠어. 딸이 잔뜩 있었으면 좋겠어.”

가슴이 뻐근하다. 기분이 흐물흐물 녹는 것 같다. 송선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응… 나도.”

하여튼 송선호라는 남자는 조금만 비위를 맞춰 속삭여주면 금세 앞뒤를 잊어버린다. 그렇게 잘난 척하고 그렇게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그런 면이 좀 우스워 보이는데 본인은 되려 이상한 곳에서만 폼을 잡으려고 한다.

‘도대체 나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고백하면서 울고, 하고 나서 울고, 이럴 땐 아주 헤벌레… 첫눈에 반해서 6년 동안 좋아했고(아마 중간에 싫어하려고 엄청 노력했던 거 같고) 고백-프로포즈-실연을 일주일만에 해치우던 남자다. 결국엔 도현이 또 다른 남자를 만나더라도 포기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결혼을 어필하고 있기도 했고….

‘첫눈에 반하는 것도 유전,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엄청 밀어붙이는 것도 유전, 한 번 마음 정한 여자만 보는 것도 유전, 자기 여자한텐 결국 꼼짝도 못 하는 것도 유전? 그리고 기타 등등도 유전….’

가만히 두면 이 남자가 저 남자로 진화하는 건 거의 확정…. 뭘 어떻게 먹으면 이렇게 똑 닮은 아들이 태어난단 말인가. 신기하다.

“도현아….”

그가 도현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도현은 그의 턱을 살짝 깨물었다가 입을 맞추면서 계속 생각했다.

‘아, 일단 미르랑 다니엘 부모님도 다 봐야 하나. 진짜 남자는 가정환경이 중요한 거였어, 아니, 다인가봐… 미르는 부모님이랑 연 끊은 지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던데. 음… 하긴 어렸을 때 부모 빚 때문에 팔려갔을 테니까 안 끊기는 게 이상하지… 좋을 턱이 없다. 그러니까 미르가… 다니엘 씨는 자기 부모님이 진짜 평범하다고 했는데. 그런 아들이 나온 집이 진짜 평범할 수가 있나? 아니, 생각해보자면 다니엘 씨 집이 제일 걱정돼.’

남자가 셋이면 생각해야 할 것도 세 배가 된다. 아니, 그냥 잔뜩 놀 때는 이런 거 상관없이 놀 수 있었다. 어차피 그녀가 왕이고 신이었으니까. 모두가 그녀의 비위를 맞추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0점짜리이기 때문에, 정말 잘났기 때문에 그녀에게 비굴하지 않고 도리어 그녀에게 뻔뻔하게 사랑과 애정을 요구하는 이 남자들은 가끔 도현을 엄청 짜증나게도 했지만, 그럼에도 자꾸 손에 쥐고 보게 만들었다. 이렇게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더 궁금해진다.

그가 도현의 허리를 쓰다듬어 올라오다가 가슴을 쥐었다. 그의 뺨을 살짝 쥐며 도현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간지러웠다. 이런 남자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쓰다듬는 것은 굉장히 기분이 좋은 일이다. 도현이 송선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희 부모님이 보시면 어떡해.”

“신경 쓰지 마. 안 추워?”

“조금.”

“우리도 자쿠지 가자.”

송선호가 먼저 수영장 밖으로 훌쩍 올라가서 도현을 쭉 들어 올렸다. 도현은 그의 수영복을 보자 또 빵 터져서 웃다가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그를 놀렸다.

“이야~ 엉덩이 탱탱한데?”

“너 나 놀리는 맛에 만나는 거지?”

“응.”

그러면서 창과는 반대편 자쿠지로 가서 서로를 껴안고 앉았다. 그대로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계속 입을 맞추고 쓰다듬으며 기분 좋게 쉬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당신 같은 거 제일 싫어!”

송선호는 남몰래 그녀의 수영복 안에 손을 넣어 그녀의 살을 원없이 주무르다가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꽉 끌어안고 뒤를 돌아보았다. 도현도 움찔하면서 송선호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 상황을 살폈다. 송선호의 어머니인 지연 이바노프가 바스타월만 들고는 수영장을 나가버렸다.

“지연아! 지연아! 잠깐만…!”

송선호의 아버지인 송영제는 기겁을 해서 그녀의 옷을 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

올해의 운을 다 끌어쓴 덕분에 여행지에서 부모님과 마주쳐도 어색한 거 없이, 오히려 더 훈훈한 분위기가 되어 엄청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그거 얼마나 됐다고… 도현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송선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송선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감싸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부모님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설마….’

아까 자신이 지연에게 한 말 때문일까?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분이 팍 상한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까다로운 남자다. 슬슬 일어나야겠다.

*

“아~ 작가님~”

“네~ 선생님~”

두 여자는 거실의 카우치에 늘어져 있었다. 둘 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비축분이 다 떨어졌다. 로웰은 비축분 떨어진 지 꽤 되었고 도현도 저번 주로 비축분이 똑 떨어졌다.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소설판과 만화판의 갈래가 갈라졌다. 소설판은 4명의 남자와의 연애적 스토리와 함께 아람 첸이 저널리스트로서 정의구현을 위해 사회악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가 절찬리에 진행되고 있었고 만화판은 4명의 남자와의 섹슈얼한 텐션과 일상 이야기에 좀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매출은 전고점을 회복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그냥 유지되는 수준이었다.

저번에 원금을 4분의 1 정도 갚은 상황이라 이자가 많이 줄어 계획대로 원리금을 막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도현이 자기 돈으로 쇼핑을 하러 나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긴 했다. 본인의 감상은 예전에 자포자기했을 때보다도 더 손발이 묶여있는 것 같단다.

“작품도 안 나오는데 마실이나 나갈까요, 작가님?”

“좋아요, 선생님.”

“그냥 나갔다간 송 편집장이 뭐라고 할 것 같은데 입 좀 막아봐요, 작가님.”

“제가 걔 잔소리를 어떻게 막아요, 선생님.”

“왜 못 막아요. 남친이잖아요.”

“걔가 제일 말 안 들어요.”

“묶어서 엉덩이 때려요.”

“아, 그건 다니엘 씨.”

“아.”

이런 날은 의욕도 없었다. 로웰이 구실을 생각해냈다. 배경 자료를 사진으로 찍겠다고 하고 외출을 하기로 한 것이다. 메트로서울의 TFC 경기장, 게헨-세나로 가기로 했다. 보통 선수들은 6시까지 훈련을 하니 그 이후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마주치면 껄끄러울 게 분명한 남자도 있었고.

“가도 괜찮은 거 맞죠?”

“시간 안 맞으면 어차피 볼 일도 없고 괜찮죠, 뭐.”

“킹쉴드 씨한테 미련 남은 거 아니었어요?”

“남기는 한데… 그래도 어쩌겠어요. 만나봤자 분명히 또 사고 칠 텐데.”

그들은 약간 우울한 분위기로 리니어카에 몸을 실었다. 로웰은 차 손잡이에 팔꿈치를 댄 채 축 늘어진 모습을 했다.

“역시 주 2회는 너무 무리였나 봐요….”

“저도 그건….”

로웰과 도현은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빚을 같이 갚기 시작한 지도 어언 9개월이 넘었다. 로웰과 도현의 수입은 로웰이 좀 더 많은 수준으로 비슷했다. 크루즈쉽을 렌트로 돌리는 것, 해외 부동산 임대 수익과 생활비 등을 전부 고려해봤을 때 지금 수준을 유지하면 빚을 다 갚는 데 약 20년 정도가 걸릴 예정이다.

“선생님, 죄송해요. 이게 다 저 때문이에요. 너무 힘드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절대 원망 안 해요. 선생님 덕분에 제가 서울 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걸요.”

도현이 로웰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로웰은 고개를 저었다.

“작가님, 또 그 소리. 또 그런 소리 하면 화냅니다. 저 화내면 엄청 무섭습니다.”

“선생님….”

도현은 오늘도 또 로웰 리에게 반했다.

물론 다니엘 스톤하츠가 올해 연봉의 3분의 1 정도를 원금 상환에 넣어주기로 했고 송선호도 말은 안 해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어 보였지만, 최근에 일어났던 일들을 보았을 때 결국 남자와의 관계란 언제 어그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돈 때문에 남자들에게 매달리는 건 영 아니다. 자존심이 있지. 예전에 아주 핀치에 몰렸을 때도 차라리 협박(?)을 했지 매달리지는 않았다.

어쨌든 빚을 갚겠다고 둘 다 너무 무리해서 연재 계획을 잡았다. 로웰은 만화가의 고질병인 건초염, 어깨허리 통증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도현은 안구건조증에 걸렸다. 게다가 연재 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에 컨디션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스트레스 지수도 생각보다 높고…. 그들은 그렇게 축 늘어진 채로 메트로서울 과천구 게헨-세나로 향했다.

“어? 선수들 아직 안 나간 걸까요? 차들이 꽤 있네요.”

그들은 자연스럽게 방문증을 끊고 열려 있는 문으로 스윽 들어갔다. 과천구 게헨-세나 TFC 돔은 평시에도 팬들을 위해 열려 있었다. 훈련하는 선수들을 구경하거나 응원하기 위해 꽤 많은 사람들이 시즌이 아닌데도 들어가서 구경을 하곤 했다.

“아직도 훈련중인….”

쾅!!

관중석으로 올라가자마자 로웰과 도현은 흠칫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누가 날아와서 투명한 벽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관중석과 경기장 사이에 황금색 벌집 문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관중석을 보호하기 위한 대미사일 보호 쉴드를 응용한 장치가 켜져 있는 것이다. 오늘 놀러 온 사람들이 저마다 디바이스를 켜놓고 촬영을 하고 있다가 경비에게 제지당했다.

“이 씹새끼들아!! 니들 다 제삿날이다!”

“좆 까, 이 병신 새꺄! 내가 너 벼르고 있었다!!”

“아가리 좀 닥치고 그냥 덤벼라, 좆밥들아!”

선수들끼리 쌈박질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로웰이 입을 떡 벌렸다가 도현을 돌아봤다.

“이거였어요?”

“…이거였어요.”

“와… 개판이다.”

저기 보니 감독이나 코치진은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로웰과 도현도 자리에 앉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람들 안 다친 게 용하네요.”

저 멀리서도 부모 형제의 안부를 묻는 얘기나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게 들렸다. 그중에는 당연히 미르 킹쉴드도 있었다.

“근데 이 수컷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신기하다. 왜 이러는 거죠?”

로웰은 의외로 이 개싸움에서 영감을 받은 듯했다. 도현이 대답했다.

“서열정리래요. 루크 씨가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소드마스터 선수들이 문명화가 덜 되어서 가끔 이렇게 서열 정리를 해줘야 한다고. 이렇게 싸운다고 사이가 나빠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래요.”

“진짜 신기하다….”

로웰은 가방에서 멀티스크린을 꺼내서 디지털 펜으로 슥슥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다른 클럽도 이러려나? 이스트드래곤도 이렇대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 씨한테 물어봤는데 그렇대요. 그래도 이스트드래곤은 근 2년 동안은 잠잠하대요.”

“왜 그렇죠?”

“글쎄요….”

아주 의욕적으로 관람을 하고 있는 로웰과는 달리 도현은 뭔가 맥이 빠진 얼굴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역시 바뀔 수가 없는 걸까?

이런 일로 도현과 헤어지기까지 했으니 그도 조금 자숙하리라 생각했던 건 도현의 오만이었을까. 그는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잘못했다고, 다시 받아달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차단하지도 않고 그대로 보고 있었던 건 어쩌면 그가 그 말대로 반성을 하고 앞으로는 그런 사고를 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역시… 조금 속상하다.’

미련을 버려야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멀찍이서 미르 킹쉴드를 보고 있었다.

로얄팰리스에서의 싸움 이후로 웨스트이글 선수들의 분위기는 터지기 직전의 가스탱크 같았다. 다들 살기가 흐르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스파크가 한 번 튀기라도 하면 곧바로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긴장감이 있었다. 평소처럼 농담을 하거나 이야기를 해도 그 속에 날이 번뜩거렸다. 훈련 중 부상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서로 봐주지 않는 것이다.

올해 시즌까지 4개월이 남았다. 따라서 평소처럼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당연하다시피 일이 터졌다. 제수스 강이 조나단 훅의 코뼈를 날려버렸다.

“아, 쏘리.”

제수스는 자신의 주먹을 한 번 보고는 그렇게 짤막하게 말했다. 선수들 중에 요즘 가장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사귀던 여자에게 대차게 차인 미르 킹쉴드가 아니라 제수스 강이었다. 그는 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빠졌다가 소위 한 번 먹고 버림당한다는 ‘먹버’를 당한 것 같았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자 몇 명 따먹다 끝나는 건 일도 아닐 남자가 뭔 유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요새 제일 사고를 많이 치고 있었다.

조나단 훅은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가 코치와 의사가 다가와 얼굴을 보는 사이에 열이 받아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야!”

“내가 일부러 그랬냐. 사고지.”

“뭐라고?!”

조나단 훅은 화를 냈다. 그리고 누가 제수스 강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사과를 하려면 좀 성의 있게 해라!”

미르 킹쉴드였다. 그는 제수스 강에 뒤이어 두 번째로 사고를 많이 치고 있었다. 사실 로얄팰리스 사건 직후부터 얼마 전까지의 그는 사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는 데 요근래 급속도로 흑화되고 있었다. 그는 동료 선수들에게 ‘니들 때문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빈번하게 꺼내기 시작하더니 격투 훈련을 하다가 좀 오버해서 상대를 겁나게 두들겨 팼다.

“넌, 씨발, 갑자기 왜 끼어들고 지랄이야?”

제수스가 입술이 터진 걸 확인하고 미르를 노려보았다.

“네가 저 새끼 코 부러뜨렸잖아!! 안 그래도 못생긴 새낀데!”

“뭐라고, 새끼야?”

조나단이 버럭 했다.

“씨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찌~인한 동료애다, 개새야. 그것도 모르냐?”

그는 말도 안 되는 걸 갖다 붙이고 있었다. 그냥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한 것이다.

“좆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제수스는 그대로 미르의 귀싸대기를 날려버리려고 했다. 미르가 그의 팔을 흘려보내며 그에게 파고 들어갔다. 그는 제수스의 목을 휘감아 허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으로 그의 명치를 세게 올려 쳤다. 제수스는 헉하고 잠깐 숨을 쉬지 못하다가 그대로 미르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그의 위에 올라타서 그의 잘난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래, 씨팔! 네 얼굴에도 줄 그어줄게! 찌~인한 동료애로!”

“아, 씨발… 저 새끼가 요새 돌았나.”

조나단이 의사를 밀어내고 제수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를 발로 걷어차려고 했다. 제수스가 묘기에 가까운 텀블링으로 훌쩍 피했다. 그러자 조나단의 발길질을 피하지 못한 미르가 대신 맞았다.

“어… 쏘리.”

그러자 미르 킹쉴드의 눈에 이글이글한 살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들이 못 배운 티를 내도 작작 내야지! 쏘리 한 마디로 끝나면 경찰이 왜 있냐!!”

그대로 미르 킹쉴드가 튀어올라 조나단 훅의 목을 옆구리에 확 끼더니 뒤로 확 넘어졌다. 레슬링 기술인 DDT를 날린 것이다. 머리를 바닥에 퍽 하고 박은 조나단의 거구가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미르 킹쉴드가 그에게 욕지거리하는데 제수스가 그의 허리를 덮치며 바닥을 굴렀다. 정신을 차린 조나단도 당연히 끼어들었고 말리다가 맞은 새끼들이 빡쳐서 같이 패는 상황이 확대되다가 결국 거의 모든 선수들이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관중석 쉴드 켜라….”

스튜어트 감독도 그냥 빨리 서열 정리를 시키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이번에는 말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코치진이랑 의사, 그리고 오펜스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 구경이나 했다.

“이번에도 훅이 이길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

“부퍼도 요새 날아다니던데.”

“그 새끼가 이길 수도 있지.”

“리한이 맷집이 좋아서….”

“그렇게 치면 제수스도 방어력이 좋으니까.”

그렇게 감독과 코치, 의사가 의견을 나누었다. 오펜스들은 관심 없는 얼굴로 장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튜어트 감독이 모자를 벗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스트드래곤은 이것도 이제 잘 없다는데? 스즈키가 교육을 잘 시켜서 그런 거냐?”

보통 사람들은 이스트드래곤 선수들이 웨스트이글 선수보다 아주 쬐~끔 더 문명화 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자 코치 하나가 스포츠음료를 빨며 대답했다.

“신태호 들어오고 나서부터 그런 거더라구요. 걔들도 우리랑 별반 다를 거 없어요.”

“아, 그런거냐?”

강력한 원탑이 생기니까 서열이 안정화된 것이다. 여기는 아무리 봐도 저 새끼가 나보다 아래로 보이고 틈만 나면 서열이 뒤집히니까 자꾸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자한테 차였다고 자꾸 시비 걸래, 이 찌질이 새꺄?! 그냥 걸즈한테 좆이나 빨아달라고 해, 이 병신아!”

“뭐라고?!”

미르 킹쉴드와 제수스 강이 동시에 버럭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넘게 매우 폭력적인 장면이 연이어 벌어졌다. 이번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미르 킹쉴드였다. 그는 입안이 터져 맺힌 피를 마지막으로 쓰러뜨린 동료에게 퉤 뱉었다.

“다시는 덤비지 마라, 이 좆밥 새끼들아.”

그리고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고 크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덤비는 새끼가 있나 없나 살피다가 문득 뭔가를 본 것 같아 다시 시선을 돌렸다. 관중석에는 구경 온 팬과 구경꾼이 있었다. 팬이 아닌 구경꾼은 대부분 매니저나 GAS… 그리고 도현 킬스버그가 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처음에는 그녀의 집에도 자주 찾아갔지만 그녀가 정말 싫어해서 그녀의 말대로 집에는 찾아가지 않았다. 수신을 차단한 것 같진 않았지만 그녀는 미르의 메시지에 전혀 답장을 주지 않았다. 미르 킹쉴드의 성격에 자그마한 디바이스를 잡고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성격에도 맞지 않았지만 그 수밖에 없어서 보일 때마다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곤 했다. 자기가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 그녀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의 말까지 그녀에게 마구 보냈다. 그리고 최근엔… 화가 나기까지 했다.

보고 싶어서 화가 나는 마음. 그런 거 처음 알았다.

‘나… 보러 온 거겠지? 나 보러 온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이걸 얼른 그녀에게 변명해야 할 것 같았다. 이건 저번 같은 그런 게 아니라고. 그냥… 그냥 장난 같은 거라고. 그렇게 말해야겠다.

그의 걸즈(정확하게 옛 걸즈)가 말하기를, 보통 여자는 남자가 쌈박질에 눈 돌아가는 걸 아주 싫어한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남자는 말하더라도 폭력적인 남자를 보면 결국 자신을 때리는 것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는 폭력을 쓸 거라고. 그거야 결국 남자들에게 맞아본 적이 있는 걸즈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도현이 여자에게 폭력을 쓰는 그런 남자를 만나본 적은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도…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일리가 있기 때문에 더 초조해졌다. 그는 걸즈도 때려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도현은 괜찮다고 생각해줄까?

미르는 관중석 쪽으로 달려갔다. 바로 그쪽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직 관중석 쉴드가 켜져 있었다. 미르는 감독이 앉아 있는 벤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거 꺼!”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스튜어트가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아직 위험하다는 거다. 미르는 마음만 초조해져 도현이 보일 때까지 뒷걸음질을 쳤다. 도현이 난간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킬스버그!”

내가 잘못했다고. 이건 다 장난이라고. 별거 아니라고. 나 용서한 거냐고. 용서해달라고. 근데 나 솔직히 화났다고. 답장이라도 하나 보내주지. 네가 정말 별세계 사람이라서 내가 너랑 만나면 안 되는 거냐고. 그런 거 싫다고. 그런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미르를 내려다보았다. 미르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그렇게 말했다가 미르는 아차 하고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주먹도 피투성이다. 그는 두 손을 가리며 뒷짐 졌다. 도현은 그런 미르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지냈어요.”

도현이 대답했다. 그리고 물었다.

“미르는 잘 지냈어요?”

“아니.”

미르가 대답했다. 그는 싸움질을 해서 아주 야만적인 모습을 하고는, 시선을 내리며 좀 처연한 얼굴을 했다.

“보고 싶었어.”

“…….”

그때 슬슬 쓰러진 선수들의 상태를 살피던 감독진이 서열 정리가 끝난 것으로 보고 관중석 쉴드를 해제했다. 미르는 계단으로 가지 않고 한 발자국 정도 내디디고 훌쩍 뛰어올랐다. 난간을 짚고 넘어오는 그의 몸짓이 고양잇과 맹수처럼 우아했다. 미르는 손을 벅벅 바지에 닦으며 도현에게 주춤주춤 다가갔다.

“가까이 가도 돼?”

“벌써 오고 있잖아요.”

“미안… 보기 싫지?”

그는 유례없이 기가 죽어 도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정말 반성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이러는 것은 처음 본다.

“또 싸웠네요.”

“아, 아니…! 이, 이건… 연례행사 같은 거야. 저번이랑 다른 거야. 그냥 서로 실력이나 알아보는… 그런 거야…! 다들 하는 거야. 우리만 이러는 것도 아니고….”

미르가 재빨리 변명했다.

“그래도 네가 싫어하면 다시는 안 할게.”

“왜요? 다시 걸즈한테 돌아간 거 아니었어요?”

“아니! 아니, 아니! 절대 아닌데?! 손가락 하나도 안 댔어!”

“진짜요?”

“진짜야. 그거, 그거 해봐. 그거…! 검사하는 거!”

그렇게 말했다가 미르는 곧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두 눈을 감쌌다.

“아… 나 왠지 꼴사납다.”

미르는 손을 떼고 입을 꾹 다문 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화장기가 옅은 피부에 가벼운 차림새를 한 그녀였다. 그의 뺨을 때리고 갔을 때처럼 우아하게 꾸민 것도 아니고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긴장되었다. 그는 정말 풀이 죽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었어. 나 정말 반성 많이 했어. 내가… 아직도 모르는 게 많지만 그래도, 그래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나 한 번도 여자한테 이렇게 한 적 없어. 네가 처음이야. 진짜 좋아해.”

그는 도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어 보였다. 역시… 다시 받아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좀 문지르다가 짧게 한숨을 지었다.

“그냥… 얼굴 보고 이 말 하고 싶어서 그렇게 연락했나 봐. 그래도 네가 진짜 싫어하면… 이제 안 해야 되겠지….”

막상 그녀가 쫓아냈을 때는 안 이랬는데 지금은, 벌써부터 짙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더 노력하고 더 조심하고 그녀가 말하는 대로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걸즈의 말처럼 그런 것도 그녀가 기회를 주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가질 수 없는 건 빨리 포기하는 게 맞다는 걸 아는데도, 가슴이 좀 먹먹했다. 이런 건 오랜만이다. 미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다시 마음먹고 밝게 씩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진짜 좋았어. 나 보러 와준 거지? 고맙다. 저번 같은 게 마지막이면 너무 아쉽잖아.”

“미르 보러 온 거 아니에요.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간 맞춰 왔는데 있었던 것뿐이에요.”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움찔하고 당황했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도 나 보러 온 거라고 해줘.”

“싫어요.”

“왜?”

“아직 미르가 좀 미우니까요.”

“…왜? 저번 일 때문에? 그건 내가… 계속 잘못했다고….”

“그것도 있지만… 몰라요. 미르 때문에 계속 속상해요. 헤어진 남자 때문에 고민한 적 없는데….”

“…….”

…응? 미르가 고개를 팟 들었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미르 같은 남자….”

그렇게 그녀가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관중석으로 누군가 훌쩍 올라왔다. 미르는 화들짝 놀라서 도현을 끌어안고 로웰도 등 뒤에 숨겼다. 제수스였다. 그는 잠깐 관중석을 둘러보고 미르 쪽과 눈이 마주쳤다가 맥 빠진 얼굴로 다시 경기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저….”

씹새끼가 사람 간 떨어지게… 미르는 속으로 마저 욕설을 중얼거렸다. 도현은 미르의 번개 같은 반응에 더 놀랐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서로의 사이에 작별의 말만을 남겨두고 있었는데도 지켜주고 싶었던 걸까.

“미르, 여기는 서울이잖아요. 저한테 무슨 짓 하면 한 사람이 큰일나죠.”

그녀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미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싫어. 네가 무슨 일 당하는 거.”

그가 말했다. 그는 경기장 쪽을 한 번 경계하듯이 살펴보았다.

“그럼 파티는 왜 데려갔어요?”

“…몰랐어.”

“바보.”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미르가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좀 억울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보고 싶었어.”

“솔직히… 나도 보고 싶었어요.”

“진짜?”

“네.”

미르를 보는 도현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도현은 옷소매를 당겨 미르의 얼굴을 살살 닦아주기 시작했다. 미르는 일렁이는 눈동자로 도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한 거야?”

“원망하는 말이요.”

“나한테?”

“네.”

“뭐였는데?”

“미르 같은 남자 다시 만난다고 해도 또 사고 칠 건 불 보듯 뻔한데 왜 이렇게 잘생겨서 미련을 남게 하나, 뭐 그런 말이었어요.”

이 말이 뭐라고… 기분이 확 좋아졌다. 항상 그랬다. 그에게 그녀의 언어는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상처를, 때로는 기쁨을 주고는 하였다.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미르는 두 팔을 그녀의 허리에 감고 그녀의 손길에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안 쳐… 사고. 절대 안 쳐.”

“다시는 사고 안 친다는 남자치고 진짜 사고안치는 남자 드물다던데. 미르 주변 환경도 그렇고. 사고가 안 날 수가 없달까.”

“술, 약, 여자, 싸움만 조심하면 되는 거 아냐? 할 수 있어.”

“진짜요?”

“진짜.”

미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는 눈을 뜨고 도현과 눈을 마주쳤다. 도현은 닦을 수 있는 데까지 그의 얼굴을 다 닦고 그의 얼굴을 손으로 만졌다.

“경기 중에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렇게 다치는 거 마음 아파요.”

미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 뺨에 눌렀다. 그녀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응….”

그대로 둘은 마주친 눈빛을 영원히 떼지 않을 것처럼 서로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둘밖에 없는 것처럼. 천천히 둘 사이의 간격이 좁아져 갔다.

“저기, 한창 중에 정말 죄송한데. 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그때 로웰 리가 손을 들고 그렇게 끼어들었다. 저번에 스캔들이 나서 마음 조마조마했던 건 잠깐 잊어버린 모양인지 도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가 웃으니까 미르도 웃었다.

“아, 그래도 검사는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제는 미르 믿는데도,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달까.”

“그게 무슨 말이야?”

“무지에서 비롯되는 실수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달까.”

“아! 그거 나 바보라고 놀리는 거지! 그 정도는 알아!”

“하하하. 미르는 자꾸 이상한 데서 사람을 웃게 한다니까.”

“그건 좋은 거지?”

“네.”

미르는 곧 금방의 싸움 때문에 의사를 보러 가야만 했다.

“기다려줘.”

미르가 도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미르는 도현을 잠깐 보고 있다가 다시 훌쩍 경기장으로 내려갔다.

“…….”

“…이렇게 즉흥적으로 다시 만나도 되겠어요, 작가님?”

“…후회할까요?”

도현이 물었다. 로웰이 흠, 하고 잠깐 생각하더니 선창했다.

“뭐… 한 번 사는 인생.”

“하아, 먹고 죽는 거죠.”

짝. 그들은 힘없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

그렇게 미르 킹쉴드는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어때? 마음에 들어?”

“미르….”

잠시 외출하고 돌아왔더니 도현의 침실이 꽃밭이 되어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꽃향기가 쏟아지듯 밀려왔다. 맡는 순간 기분이 상쾌해졌다. 갖가지 색깔의 장미, 백합, 프리지어, 수국, 튤립 등등 도현의 넓디넓은 방이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정원이 보이는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내리 쬐고 꽃이 환하게 빛났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도현은 가까이 있는 백합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았다.

“예쁘다….”

도현은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면서 그렇게 감탄했다.

거기에 그녀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미르 킹쉴드는 가볍게 회색 니트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육감적인 체격이 흡족하게 드러나 캐쥬얼 하면서도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상자 뚜껑을 달칵 하고 열며 보는 사람이 다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지었다. 투명색과 분홍색의 다이아몬드가 줄지어 이어지는 아름다운 귀걸이가 나왔다.

도현은 어쩐지 못 말린다는 듯이 한숨을 살짝 쉬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도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도현의 손을 잡아서 끌어당겼다. 도현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바로 앉고는 도현의 귀걸이를 하나씩 뺐다. 그리고 자기가 산 귀걸이를 끼워주더니 음! 하고 감탄사를 냈다.

“역시 예쁘다.”

그는 도현의 귀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녀를 보았다. 도현이 말했다.

“고마워요, 미르. 진짜 보는 눈이 있다니까… 사 오는 것마다 다 예뻐.”

도현은 디바이스로 자신의 귀를 살펴보다가 한쪽을 빼서 다시 보았다. 미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왜. 하고 있어.”

그리고는 다시 끼워주었다. 참… 그는 웃음소리마저도 멋있고 좋았다. 그가 물었다.

“마음에 들어?”

“네.”

그녀는 귀걸이를 만지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너무 예뻐요.”

“이것도 하고 있네.”

그는 도현의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미르는 도현의 목걸이도 보았다.

“이것도.”

“너무 예뻐서 드레스룸 가니까 이것만 보이더라구요.”

“흐응.”

미르는 기뻐하며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자꾸 도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하고 다니는 거 보니까 기분 좋다.”

미르는 잠시 헤어지기 전에도 도현에게 한 번씩 깜짝 선물을 사주곤 해서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런데 그가 집에 다시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날마다 생일인 것처럼 자꾸 뭔가를 갖다 바치기 시작했는데 그냥 선물만 던져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떤 식으로 하면 여자가 기뻐하는지를 아주 잘 알았다. 그는 선물을 고르는 센스도 있었지만 여자를 깜짝 놀라게 하며 기쁘게 하는 데도 센스가 있었다. 식사를 하다가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가볍게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는 그런 소소한 서프라이즈도 있고 같이 밤을 보내고 난 아침에 일어나고 보니 손목에 팔찌가 걸려 있다든가 아예 오늘처럼 짠! 하고 방안을 꽃밭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원래도 단순한 남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니, 원래 남자란 좀 단순하고 원시적인 남자가 최고인 걸까? 그는 수컷이 구애를 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들 중 가장 정공법만 사용했다. 첫째, 자기가 얼마나 잘난 수컷인지 과시한다. 둘째, 여자에게 선물을 한다. 셋째, 둘 다 동시에 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도현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것처럼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손끝을 검지와 엄지로 쥐었다 놨다 하면서 흡족함을 드러냈다. 도현도 남들과 비슷하게 연애 경험을 쌓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자기가 선물을 해주고도 뭔가 강요하는 느낌 없이 선물을 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뻐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도현은 미르의 머리카락을 살살 만지면서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아… 참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남자다. 이렇게 꽉 차는 남자라니.

“미르.”

“응?”

“손 줘봐요.”

미르는 턱 하고 자기 손을 도현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진짜 솥뚜껑만 한 손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크고 멋진 손이었다. 도현은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냈다.

“짠.”

“…응?”

미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현은 그걸 침대에 놓고 안에서 물건을 꺼내서 자신의 손바닥 위에 얌전히 있는 그의 손목에 직접 채워주었다. 시계였다.

“엄~청 비싼 걸로 사주고 싶었는데 그래도 미르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요. 나중에 돈 더 벌면 엄~청 더 비싼 걸로 사줄게요.”

그렇게 말은 해도 고가의 명품 브랜드였다. 미르는 여전히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자신의 손목을 보더니만 그녀의 허리를 잡고는 번쩍 일어났다.

“아…!”

도현이 깜짝 놀라서 허리를 잡은 그의 두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를 들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기뻐했다. 그리고 침대에 털썩 뒤로 누었다. 자연히 그녀는 그의 위에 올라타게 되었다. 그는 시계를 찬 손목을 다시 보고 다른 팔로는 자신의 머리를 괴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맨날 하고 다녀야겠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자한테 이런 걸 받은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가 만났던 GAS라고 해봐야 어차피 돈을 받고 선수에게 몸을 파는 여자들이었으니 뭔가를 해준다면 성적인 부분이 컸지 이런 걸 사주거나 했던 적은 없었다. 거기에 대해서 별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당연한 거였다. 미르 킹쉴드의 철학에서는 여자가 돈을 쓰게 하는 남자는 병신이었기 때문이다. 돈 없는 사람이 사치를 하는 게 욕먹을 일이라면, 돈 없는 새끼가 여자를 만난다는 건 그것보다 두 세배는 더 욕먹을 만한 짓이다. 사치를 하는 건 혼자 팔려가면 끝날 일이지만 후자는 남에게 고통을 주는 짓 아닌가.

그래서 그녀나 걸즈나 돈이 드는 건 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섹스를 하고 싶어서 여자에게 돈을 지불하는 거와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선물을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몸을 파는 여자에게 선택권은 없지만 구애를 받는 여자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그에게서 아무리 선물을 받고 칭찬을 듣더라도 그를 거절하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자신을 선택해주는 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다른 남자들과 경쟁을 해서 여자를 차지하는 것보다도 훨씬, 훨씬 기쁜 일이었다. 전에는 그걸 몰랐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기쁨을 주는 여자를 자신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이런 선물을 주었다. 역시 그녀는 안목도 높아서 굉장히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면서도 미르에게 잘 어울리는 그런 선물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응.”

미르가 도현이 준 선물을 계속 뚫어져라 보고 있자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미르가 좋아하니까 나도 기뻐요.”

미르는 그걸 한참 보고 있다가 물었다.

“너 돈도 없으면서 이런 거 어떻게 샀어?”

“아, 매너 없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어… 그런 거야?”

“당연하죠.”

“미안… 근데 진짜 좋다.”

미르가 씨익 웃으면서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도현이 들어올 때부터 기분이 좋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더 좋아진 게 눈에 보였다. 그는 도현의 입술에 입술을 누르고 또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아…! 미르! 간지러워…! 앗! 하하하!”

“가만히 있어도 예쁜데 예쁜 짓 하니까 더 예뻐.”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아…! 미르~!”

도현도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를 간지럽혔다. 그렇게 서로 애무하면서 꺅하고 비명을 질렀다가 이내 소리 내며 웃고 어린애처럼 침대를 같이 뒹굴었다. 그리고 다시 도현이 미르의 위를 올라오면서 그의 두 팔을 잡아서 침대에 눌렀다.

“하아, 내가 이겼어요.”

숨이 차서 약간 헐떡거리며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웃었다.

“나한테 이길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진짜요?”

“응.”

자기 동료라고 하나 봐주는 것도 없이 싹 다 때려눕히는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듣기로 그는 GAS 사이에서도 여자에게 ‘관대’한 편이라는 말을 듣는다는데.

전에 파티장에서 봤던 바대로 거기는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이 베이스에 어떤 폭력적인 위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는 그냥 그런 세상에서 지금까지 쭉 살아왔던 남자였다. 그때는 화가 나서 그냥 그렇게 그를 떨쳐버리고 집에 와버렸지만… 이렇게 보면 그가 그런 곳에서 살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보통 사람들처럼 폭력과는 담을 쌓은 상당히 젠틀한 남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뭐… 솔직히 지금이 더 매력 있을 거야.’

사고 치는 남자의 매력을 알아버렸다. 도현은 미르의 콧등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도현은 침대 서랍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미르가 앙! 하고 도현의 옆구리를 물었다. 다시 장난을 치며 한 바퀴 굴렀다. 도현은 겨우 미르 킹쉴드의 장난에서 벗어나 침대 옆 서랍에서 손 세정제와 항균 티슈를 꺼낼 수 있었다. 머금고 난 뒤 마셔서 목까지 소독할 수 있는 구강세정제도 있었다. 미르는 잠자코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그녀도 싹 했다.

도현은 미르가 자신의 얼굴에 입을 쪽쪽 맞추는 사이 미르의 손을 다시 향균 티슈로 닦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 손톱 밑까지 싹 말이다.

“네가 해주니까 기분 좋아.”

미르가 말했다. 도현이 웃었다.

“이상한 데서 어린애 같다니까.”

미르는 도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코를 살짝 물면서 미소를 씨익 지었다. 그녀의 원피스를 엉덩이까지 싹 올리면서 그녀의 매끈한 다리를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고 위치를 잡아 옷 위로 꾸욱 눌렀다.

“으응….”

“너 말이야… 민감해서 넣어도 잘 느낄 거 같은데.”

“싫어요.”

“알았어.”

음, 잽을 날려 봤지만 소용이 없다. 미르는 침대와 그녀의 등 사이로 손을 넣어서 원피스의 지퍼를 내려 그녀의 옷을 벗겼다. 검은색 레이스로 장식된 짙은 코발트블루색 속옷이 드러났다.

“아… 넌 이런 거 어디서 사서 입는 거야?”

예쁘고 섹시하다…. 살이 많이 드러나는 것만 섹시한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도현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미르였다. 그도 옷을 벗으려고 하자 도현이 주문했다.

“세상에서 제일 섹시하게 벗어봐요.”

도현이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미르를 올려다보았다. 미르가 씨익 웃으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상의 아랫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 위로 천천히 끌어올리다가 끝에 쭉 빼서 휙 벗어내며 눈을 감았다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복근, 활배근, 흉근, 이두박근까지 전부 얼마나 아름답게 움직이던지. 도현은 머리를 괴지 않은 손을 뻗어 그의 복근 가운데를 손톱으로 간지럽혔다.

“하하.”

간지러웠다. 미르가 그녀를 위해 약간 오버하며 허리를 움츠렸다. 그의 미소가 아름다웠다. 도현도 웃었다. 그는 자신의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었다. 침대 밖으로 그의 바지가 털썩 떨어졌다.

“오늘은 여기 끼우고 하면 안 돼?”

미르가 그녀의 어깨 끝에 쪽 입을 맞추면서 그녀의 오므린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어 그녀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손에 착 달라붙는 피부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음… 그럼 이거.”

그러자 도현이 침대 옆 서랍에서 뭔가 하나를 더 꺼냈다. 미르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 그거 진짜… 그거 꼭….”

처음에 도현과 여기 들어와서 싸우게 된 게 저것 때문이었다. 도현이 처음에 저걸 건넸을 때 미르는 저게 그냥 평범한 콘돔인 줄 알았다. 착용을 해보고 기겁을 하고 그녀에게 화를 냈다가 쫓겨날 뻔했던 것이다.

“익숙해지면 나쁘지 않대요.”

그녀가 너무나 섹시하고 매력적으로 웃으면서 그에게 그걸 내밀었다. 미르는 눈썹 한쪽을 꿈틀하면서 그녀의 예쁜 손에 들린 작은 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미르는 잠깐 그걸 아주 뭐 보듯이 내려다보다가 결국 항복했다.

“알았어…. 네가 해줘….”

“색깔은 검은색 할까요?”

“마음대로 해….”

도현은 발가락으로 미르의 드로즈를 잡아 슥 내렸다. 그러자 그의 것이 팽팽하게 선 채 튀어나왔다. 언제 봐도 깜짝 놀랄 정도로 크다. 보기만 해도 뭔가 가슴이 뭉클한 게… 도현은 삽입이라는 개념 자체부터 매우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이건 그냥 여자의 본능인 것 같다. 심미적인 문제도 있는 것 같고. 아주 거대한 페니스다. 도현이 지금까지 봤던 것들 중에 제일 컸다. 다음에 자로 한 번 재봐야지.

도현은 케이스의 입구를 거물의 끝에 대고 버튼을 눌렸다. 그러자 옅은 파란색 빛이 한 번 지잉 나오더니 곧바로 케이스에서 뭔가 쉬리릭 나와서 저절로 남자의 페니스와 고환, 엉덩이까지 싹 덮었다. 그리고 지잉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나며 살균 기능이 켜졌다가 꺼졌다. 성기의 모양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변태적인 속옷을 입은 것 같달까.

미르는 팬티를 마저 벗어 던지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자기 자지를 한 번 쥐어봤다.

‘아… 이거 존나 두껍잖아….’

콘돔 두께가 이렇게 두꺼운 건 처음 봤다. 이래서는 아무런 느낌도 안 날 것 같은데? 미르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도현에게 뭐라고 할까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는 이 부분에 있어선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하아….”

미르가 한숨을 푹 쉬자 도현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금방까지만 해도 어린애처럼 장난을 치며 함께 뒹굴었던 여자가 지금은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미르를 관능적인 시선으로 즐기고 있었다.

미르는 그런 도현이 좋았다.

예쁘고 요염하고 강한 힘을 가진 여자였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배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가 그녀의 브래지어에 검지를 살짝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에 입을 쪽 맞추며 그녀와 눈을 그대로 마주친 채 입을 맞춰 올라갔다. 그녀의 브래지어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어느 순간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탱글하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같이 만져 올라가며 그녀의 브래지어를 끌어 올려 머리 위로 벗겼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싹 들렸다. 목이 시원하게 다 드러나는 게 섹시하다.

“하하하! 아, 미르…! 자꾸 간지럽혀…!”

그녀의 팬티도 천천히 내리면서 그녀의 옆구리를 입술로 또 물었더니 그녀가 미르의 머리카락을 쥐며 밀어내려고 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미르는 불쾌했던 기분이 사라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전엔 한 번도 섹스를 이렇게 느리게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현과 하는 거라서 기분이 좋은 것 같다.

그녀는 피부가 좋고 몸이 예뻤다. 옆으로 살짝 비틀어 누워있는 그녀의 옆구리, 골반과 다리를 잇는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곡선을 따라 입술을 비비며 내려갔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문지르듯 만졌다. 무릎까지 주욱 그녀의 여성성을 찬양하듯 입을 맞췄다. 그녀의 종아리와 발목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도현은 몸을 다시 살짝 바로 틀며 다리를 꼬아 발끝으로 미르 킹쉴드의 우람한 어깨를 건드렸다가 그의 쭉 뻗은 남자다운 목을 발가락으로 걷듯 살살 타고 올라갔다. 미르가 웃었다. 그녀의 발이 턱 끝까지 오자 미르는 한 손으로 그녀의 발을 잡고 쪽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발바닥까지 낼름 핥았더니 그가 좋아하는 예쁜 목소리로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미르 너무 좋아요.”

“진짜?”

미르는 도현의 다리를 벌리며 그사이에 자리를 잡고 몸을 맞대었다. 2m가 넘는 미르는 키뿐만 아니라 근육 크기도 남달랐다. 그녀는 174cm의 키에 여리여리한 듯하면서도 건강하고 여성적인 선을 가져서 품에 쏙 들어와 안는 맛이 났다. 도현은 미르의 얼굴을 잡고 쪽쪽 입을 맞추며 정을 나타냈다.

“같이 있으면 재밌고 좋아요.”

“나도. 너무 좋아.”

그대로 미르는 자신의 자지를 그녀의 다리 사이 얹어 꾸욱 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비볐다.

“으음….”

일단 좀 핥아야겠다. 윤활이 될 만한 게 없어서 뻑뻑한 느낌에다가 그녀가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 미르가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목과 쇄골, 봉긋한 가슴을 혀로 간지럽히고 부드러운 배와 그 아래까지 주욱 내려갔다.

“으응… 미르….”

도현이 자신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아래로 눌렀다. 미르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입술을 댔다.

“으음.”

그런 소리를 내서 진동을 주며 그녀의 예쁜 음핵을 쪼옥 한 번 빨았다가 혀로 붙였다 뗐다 하며 자극했다.

“아아응… 하아… 앗. 앗. 아… 미르….”

그녀가 신음을 흘리면서 숨이 섞인 목소리로 미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점점 흥분해 가는 목소리를 들으니….

‘아… 씨발. 내 걸즈는 진짜로 연기한 거냐고….’

사실 아직도 반쯤은 안 믿었는데. 미르는 여자를 혀로 애무해준 적이 별로 없었는데도 본능적으로, 아주 훌륭하게 그녀를 흥분시켰다.

“아… 미르… 미르…!”

킬스버그가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좋았다. 목소리도 예쁘고… 뭔가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나도 도현이라고 부를까?’

미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가기 직전에 입술을 뗐다. 도현이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 미르… 빨리.”

이렇게 두꺼운 콘돔을 하니 확실히 둔한 느낌이었지만 그녀의 다리 사이에 끼우고 비비며 그녀가 성적 쾌감에 고조되어 가는 것을 보니 덩달아 미르도 불끈불끈해서는 흥분했다.

“아… 으윽. 진짜… 너무 좋아. 킬스버그… 도현….”

도현이 그의 목 뒤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대로 입을 맞추고 몸을 꽉 붙였다.

“아…! 아앗…! 으으응… 미르… 하… 조금만 더 세게….”

“이렇게?”

“흐읏…! 응… 그렇게… 하아….”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햇빛 아래 서로를 드러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알몸으로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었다. 도현은 눈을 감고 집중하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화려한 블론드에 남자답고 잘생긴 얼굴. 아, 속눈썹마저도 예쁘다. 도현은 점점 더 젖어 들며 오르가슴의 직전 가장 좋은 파트에서 늘씬한 다리로 미르의 단단한 허리와 허벅지를 비비며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하아… 미르… 너무 좋아…. 으응… 최고….”

“으윽… 하….”

둘은 그대로 절정까지 빠르게 달렸다. 그 뒤에는 몸을 겹쳐 끌어안은 채 거친 숨을 잠재울 때까지 가만히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도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부드러워… 냄새도 좋아….’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후희를 느끼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이렇게 좋다는 생각도 들다니. 정말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는 몇 번이고 그를 다시 보게 만드는 저력을 가졌다. 그대로 있다가 자연스럽게 또 얘기를 나누고 장난을 치고 다시금 사랑을 나누다가 지쳐서 함께 잠들었다.

점점 해가 빨리 뜨기 시작했다. 빨리 잠들어서 일찍 일어났다. 여명이 트는 새벽이다. 보통 식사를 잘 거르지 않는 편인 미르였으나 어제는 그녀와 있겠다고 저녁도 걸렀다. 그렇게 일어나 품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뭘까, 이거….’

뭔지 잘 모르겠다. 미르는 불가해한 기분을 느꼈다.

영원히 이대로 있고 싶다.

이대로 영원히 그녀의 얼굴만 보고 싶다.

이런 걸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 걸까. 그렇게 가만히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을 느끼고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들었다. 자신의 몸에 닿는 그녀의 피부와 향기도 음미했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짙은 속눈썹이 돋보이는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르의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마주쳤다.

“잘 잤어요?”

“…응.”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그는 그녀의 허리를 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좀만 더 누워있자.”

“으응… 그래도 배고프지 않아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미르의 품에서 벗어났다. 해는 떴지만 아직 어둑한 새벽, 그녀는 햇살이 막 들어오기 시작한 창가에 서서 기지개를 켰다. 미르는 가만히 그녀의 아름다운 피부와 선을 보고 있었다.

“…나 진짜 너 좋아하는 거 같아.”

미르의 입술 사이로 어느새 그런 말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도현이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저두요.”

“정말로.”

“네.”

“진짜.”

“아침 먹을까요?”

진짜로… 도현이 슬립과 속옷만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간단하게 아몬드 샐러드와 우유, 과일주스, 미르가 좋아하는 고기를 먹기 편하게 찹 스테이크로 만들어서 가져왔다.

“너… 원래 남자들한테 이렇게 안 하지?”

미르가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하는 걸 딱 봐도 남자한테 받으면 받았지 뭘 해줄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고 어제도 그렇고… 미르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빨대를 꽂아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어린애 같은 남자는 딱 질색인데. 뭔가 미르는… 기르는 맛이 있달까.”

그러면서 도현이 미르의 코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그의 입에 우유도 물려주고 음식도 넣어주었다. 소스가 그의 입맛에 착 맞는다. 그가 입술을 핥아 먹었다.

도현은 자신의 침대 위에서 끝내주는 근육을 과시하며 누워있는 남자를 먹이는 게 마치 맹수에게 먹이를 주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약간 으쓱하면서도 좋았다. 미르는 도현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다른 손으로 슬슬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너도 좀 더 먹어.”

“왜요?”

“좀 더 쪄.”

“지금 가슴 작다고 하려고 그러는 거죠? 참나. 내 가슴이 뭐가 작다고.”

“그것보다도… 그냥 더 먹어야 할 거 같아. 이렇게 조금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은 거 아냐?”

미르는 아침엔 고작 풀떼기나 음료수밖에 안 먹는 그녀가 조금 걱정되었다. 점심이나 저녁은 좋은 데서 시켜서라도 잘 먹긴 하는 것 같은데. 일하다 보면 때에 맞춰서 먹는 것 같지도 않고….

“너도 먹어.”

“음… 그냥 아침부터 과하게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러는 건데.”

“사람은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하는 거야.”

“하나만 먹어볼까요?”

도현이 미르의 아침을 검게 칠이 된 고급 나무젓가락으로 고기를 하나 집어먹었다.

“음, 맛있다?”

본인이 했는데도 맛도 안 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미르의 입에 샐러드를 넣었다. 미르는 입에 안 맞는 걸 먹는 듯 그냥 우걱우걱 먹었다. 도현이 웃었다.

“표정 봐.”

미르는 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는 건 딱 질색이었다. 갇혀 있는 것만 같고 기분이 더럽다. 그런데 그녀가 병원에 와주기 시작하면서부터 아프면 그녀 생각부터 났다. 와서 만져주면 기분이 나아질 거다, 그런 생각부터. 그녀가 자신을 만나러 와주는 게 좋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보살펴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았다.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는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그를 만나준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자신을 보며 웃는 그녀를 보니 심장이 간지럽고 뭔가 속에서 울컥 나올 것만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미르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맞댄 채 물었다.

“한 번 더 할까?”

도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입술에 쪽 다시 입을 맞췄다.

“좋아요.”

그대로 쟁반을 옆으로 밀고 둘이서 침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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