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MOST PARADISE(1)
엘 드라카가 끝났다. 피날레가 메트로서울에서 열려 피프쓰 세븐 이후로 전세계에서 온 팬들 때문에 경기장 주변과 도심이 거의 마비가 될 뻔했다(애초에 인구가 많은 거대 도시의 교통 시스템으로 겨우 버텼다). 게다가 웨스트이글이 석패하고 나니 한동안 몇몇 구역은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치안이 좋지 않아 피날레 2주 전부터 피날레 이후 지금까지 무장경찰이 메트로서울 시내에 쫙 깔린 상태였다.
준우승. 작년 4강 때 메트로서울은 축제 분위기였다. 4강이라니. 첫 4강이었다. 다들 기뻐했다. 하지만 이번의 준우승은 너무나 아쉬웠기 때문에 어디서든 우는 소리뿐이었다. 웨스트이글의 기량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평가된 올해였으니 더더욱.
‘져서 우리 작품은 더 잘 되는 거 같은데.’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술병으로 나발을 불며 고성방가를 지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지나 차를 운전해가고 있는 송선호였다.
아쉽고 분한 마음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스트호크, 레드폭스를 이기고 피날레까지 간 웨스트이글이 피날레에서도 강팀을 꺾고, 그것도 작년 우승자인 이스트드래곤을 꺾고 승리하기를 바란 것은 비단 메트로서울의 웨스트이글 팬뿐만이 아니었다.
피날레 이후 이스트드래곤과 레드불의 경기 이전 기준으로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만화판의 매출이 5배, 소설판은 12배 늘었다. 예전 도현의 <바로 나!> 시리즈에 비하자면 적은 매출이었지만 아직 연재를 시작한 지 4개월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볼 때 전망은 순조로웠다. 엘 드라카의 인기도 매해 더욱 대단해지고 있으니 앞으로 시즌 때마다 꾸준히 매출이 오를 기대도 할 수 있었다.
‘완결되고 난 후에도 시즌 때마다 특별편이나 스핀오프 연재를 하면 더 좋을 것 같고….’
엘 드라카도 끝났으니 리오 정에게 담당을 넘겨주어도 좋을 것 같아 앞으로 3주분의 소설판, 만화판 연재분을 확인하고 마지막 인사를 할 생각인 송선호였다. 그리고 나서는 그도 늦은 겨울 휴가를 갈 것이다.
예전에도 마음고생을 제법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송선호를 대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도현 킬스버그를 상대하는 것은 그의 인생을 너무나 고달프게 만들었다. 그는 하루하루의 안녕과 평안을 되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송선호는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한참 차를 몰고 가는데 훌리건 때문인지 평일인데도 문을 닫은 꽃가게가 보였다. 문득 그녀가 다니엘 스톤하츠의 꽃다발을 받고 기뻐하던 게 기억났다. 명품 같은 것만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좋아하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한 번쯤은 줬어도 좋았을 텐데….
‘아, 또 쓸데없는 생각. 평정심. 마지막이다.’
도현의 집에 도착한 송선호는 잠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예전에도 한 번 접었던 마음이니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빨리 정리하고 이번엔 진짜 좋은 여자를 만나서 제대로 연애나 해야겠다.
차를 주차하고 정원을 가로질러 셀 수 없이 방문했던 도현 킬스버그의 대저택 앞에 섰다. 생체인증을 하고 들어가니 집 안이 조용했다. 마감을 하고 자나 싶어서 침실문에 노크를 했는데 반응이 없었다. 문을 열어보니 그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송선호는 2층으로 올라가서 로웰의 방도 확인해보았다. 온갖 것이 다 있는 그녀의 방이었지만 로웰 리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디바이스로 연락을 했다. 받지 않는다. 송선호는 자신의 물건이 있는 게스트룸으로 가서 종이가방에다 물건을 쓸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카우치에 앉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것들이 전화도 안 받고 다 어디 간 거야?”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전화를 거는데, 카우치 앞의 세련된 테이블에 위에 쪽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 보였다.
<우리 그냥 간다. 마감은 그대로. - 도현>
<갔다 와서 봐요. ㅂㅂ - 로웰>
세련된 필체는 도현 킬스버그였고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날려 쓴 악필은 로웰의 것이었다. 송선호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3주분, 6회나 되는 내용을 직접 확인도 안 하고 어떻게 올리라는 것인가! 엘 드라카가 끝난 직후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게 얼마짜리 사업인 줄 아는 년들이 프로답지 못하게 이게 무슨 짓인가!!
“진짜 마지막까지…!”
송선호는 열이 받아 도현과 로웰의 디바이스로 끊임없이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전혀 답이 없었다. 송선호는 하는 수 없이 디바이스에 예전에 쓰던 GPS 추적 어플을 다운로드 받았다. 들어가니 그의 계정으로 자동 로그인이 되었다. 그러자 추적 신청이 되어 있는 몇 개의 항목이 떴다. 죄다 문제 작가들의 디바이스나 차였다. 그중에 <킬스버그 크루즈쉽>을 눌렀다.
“아…!!”
벌써 일본을 지나서 태평양 위다. 일이 꼬인다…. 예전에도 이러면 헬기라도 타고 잡으러 가느라 돈도 꽤 깨지곤 했다. 이제는 비행차가 있어서 그럴 것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송선호는 한숨을 쉬며 잘생긴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눌렀다.
‘내가 그 크루즈에서 못 볼 꼴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진짜 가기 싫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시간을 계산했다. 주차타워까지 갔다가 가려면 못해도 2시간은 걸릴 것이다. 1시간은 메트로서울 내 교통체증 때문이다. 계획대로 휴가를 가려면 적어도 10시간 내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송선호는 인공지능 비서에게 물었다.
“누구야.”
[다니엘 스톤하츠 씨와 미르 킹쉴드 씨입니다.]
“…….”
내가 집주인도 아니고 그 새끼들을 굳이 집에다 들여놓을 필요는 없지…. 송선호는 그들에게 답변을 주지 않고 일단 집을 나왔다. 그러자 아주 머~얼리 있는 대문 너머로 그들이 보였다. 도현의 집은 사유지를 둘러 낮은 벽이 쳐져 있었다. 그 너머로 차 두 대와 서 있는 인영도 두 개 있었다. 송선호는 우습게도 거기에서 약간의 승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송선호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끌고 대문으로 향했다. 대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밖으로 차를 뺀 송선호는 차창을 내려 남자 둘을 보았다.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에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다니엘 스톤하츠의 무뚝뚝한 얼굴과 플래티넘 블론드, 환한 벽안의 화려한 미르 킹쉴드의 짜증이 섞인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본 송선호는 짧게 알렸다.
“지금 도현 킬스버그 집에 없습니다.”
“뭐야. 어디 갔어? 전화도 안 받던데?”
“도현 씨가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송 편집장님?”
둘이 동시에 물었다. 송선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일도 하다 말고 그 삐삐 머리랑 배 타고 날랐습니다. 지금 태평양 한가운데 있습니다.”
송선호는 그렇게 알리고 차창을 올리려고 했다. 이제 이들도 더이상 볼 일이 없는 남자들이다. 그러자 미르 킹쉴드가 차창을 손으로 잡았다. 창이 안 올라간다.
“정확하게 위치 어딘지 알아? 비행차 타고 가면 되잖아.”
미르가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도 맞다, 하는 얼굴로 송선호를 쳐다보았다. 물론 송선호가 그들에게 그런 걸 알려줘야 할 의무 같은 건 하등 없었으나… 심술이 솟았다.
“…안 그래도 지금 가려던 길이었습니다. 크루즈가 비행차 3대까지는 수납이 가능한데 아마 한 대는 이미 들어가 있을 거라… 제 차로 같이 가시겠습니까?”
“오케이.”
미르는 쿨하게 바로 그렇게 대답했다. 다니엘은 약간 한숨을 쉬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송선호는 시계를 잠깐 보았다가 말했다.
“좀 있으면 막힐 시간이라 차를 세 대나 움직이는 건 별로일 것 같고… 안에 주차하고 제 차로 다 같이 움직이시죠.”
송선호는 도현의 집 대문을 열었다. 미르는 바로 차의 자율주행기능을 실행해 자동으로 주차가 되도록 설정하고 바로 송선호의 차에 탔다. 다니엘은 뭔가 복잡한 얼굴로 열리는 대문을 보다가 똑같이 하였다.
“아니, 배 타고 나가서 할 게 뭐가 있다고 3주나 나갈 걸 벌써 나가?”
미르는 이미 도현이 휴가를 간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그렇게 투덜거리자 다니엘이 대꾸했다.
“도현 씨는 바다를 좋아하신다. 자주 여행을 다시 다니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다니엘은 도현에 대해 몰지각하면서도 그녀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드러내는 미르 킹쉴드가 예전보다도 훠~얼씬 싫었다. 피날레에서 2급 부상 정도는 먹였어야 했나 보다. 그가 아직 도현과 정식으로 사귀는 것이 아니라서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는 미르를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배 타고 나가면 하루 이틀 좋은 거지. 질린다고. 할 것도 없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기만 하는 건데.”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배를 통통배(?) 수준으로 생각하는 게 뻔했다. 송선호는 그렇게 대답하며 아무~것도 모르는데다가 아무~런 상상력도 없는 그들을 조금 동정했다. 그 배에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꼬박 두 시간이 걸려 도현 킬스버그의 크루즈쉽 에 거의 도착했을 땐 미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가락질을 했다.
“저거야? 저거?”
“네.”
해가 거의 넘어가 노을만이 붉게 남은 저녁이었다. 아름다운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으리으리한 크루즈쉽이 떠 있었다. 4층짜리 크루즈쉽 치고는 굉장히 컸는데 주문제작을 한 것으로 보였다. 배 자체는 시설이 많아 굉장히 컸지만 인원은 최대 1,000명 정도 태울 수 있는 고급 크루즈였다. 일단 비행차에서 내려다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조명을 켜놓은 넓은 수영장과 자쿠지, 그리고 하늘을 울리는 클럽 음악과 왁자지껄하게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로웰 리 선생님과 도현 씨 둘만 휴가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뭐… 어시스턴트 둘도 데리고 간다고 했고. 스트리퍼도 잔뜩 있을 거고 요리사나 웨이터도 있을 겁니다.”
송선호가 무심한 척 대답했다. 스트리퍼?! 다니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그 의미 그대로 그 ‘스트리퍼’가 맞는 것인가! 다니엘은 입을 딱 벌리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여기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크루즈의 승차장에 차를 대자 저절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기계식으로 주차가 되었다. 송선호는 5년 전에 하도 많이 와봐서 아주 길을 외우고 있었다. 그는 파티가 열리고 있는 야외 풀장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미르는 대놓고 휘파람을 불며 안을 구경했다. 엄청 멋진 배였다. 마감 하나가 허투루 된 것이 없다. 몇 번 TFC 연맹의 선상 파티 같은 곳에도 가봤던 미르라 이 배가 정말 잘 만들어진 배라는 걸 대충은 알 수 있었다. 밖에서 해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그녀는 정말 심미안이 높은 여자다. 파티가 열리고 있는 야외 수영장으로 가자 생풀을 태우는 냄새가 자욱하게 났다.
“꺄하하하하하! 흐흐흐! 작가님! 너무 재밌어요!!”
한동안 도현 킬스버그에게 많은 인생의 가르침을 주었던 로웰 리였으나 이번에는 도현에게서 인생을 한 수 배우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금발 삐삐 머리는 집에서 입고 다니던 그 후줄근한 차림 그대로 의자가 된 스트리퍼의 등에 앉아 수영장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돈을 뿌리고 있었다. 손바닥에다 만 원짜리 백 장을 놓고 카드를 날리듯 휘리리릭 날렸다. 수영장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잡으려고 아우성을 치며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로웰은 앉아 있는 스트리퍼의 등을 팍팍 치며 정신을 반쯤 놓고 깔깔깔 웃었다. 다른 남자 스트리퍼는 때에 맞춰서 로웰의 입에 불을 붙인 마리화나를 갖다 댔다.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로웰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눈에 들려고 했다. 이 배에선 그녀가 무엇을 하든 자유였다. 그녀가 이 세상의 왕이었다.
같이 온 두꺼운 안경을 쓴 어시스턴트들도 반쯤 정신을 놓고 웃고 울며 술과 대마를 했다. 다른 스트리퍼들과 직원들을 앉혀놓고 만화가 어시스턴트로서의 애환을 구구절절이 얘기하고 있었다.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한 여자가 로웰을 보며 활짝 웃었다.
“재밌죠!”
“네!! 캬학학학! 세상에 이런 노는 맛이 있는 줄 왜 모르고 살았죠! 아학학학! 우리 자주 놀아요!!”
대마를 처음 해보는 로웰은 약 기운이 잘 도는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 후하게 스트리퍼의 팬티에 오만 원씩 꽂아주기도 했다. 도현도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잎을 태우며 춤을 추니 아주 날아갈 것 같은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여자들과 몸을 붙여서 마구 춤을 추다가 다음엔 섹시한 남자들과 몸을 붙이고 춤을 추고 눈이 마주치면 깔깔 웃고 껴안고 또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했다.
미르는 역시나 휘파람을 불며 구경했고 다니엘은 입을 딱 벌리고 굳어있었으며 송선호는 아주 질린다는 얼굴로 사람들을 헤치고 가서 도현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너 돈 벌자마자 이럴 줄 알았다!”
“어! 송선호~!”
앞뒤로 잘생긴 남자들과 달라붙어 야시시하게 눈빛을 나누며 춤을 추고 있던 도현은 갑자기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얼떨떨해하다가 송선호의 화난 얼굴을 발견했다. 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우리 편집장님 오셨네~.”
그녀는 송선호의 목에 두 팔을 걸며 그에게 몸을 붙였다. 송선호는 화들짝 놀라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야…! 윽! 안 떨어지냐? 어?!”
“아잉, 또 화내고 그런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인 거 몰라? 응? 같이 놀자, 응? 같이 놀아~.”
아주 그냥 취했다. 취했어. 송선호는 그녀가 이렇게 취한 꼬라지로 남자들과 헤프게 춤을 추면서 노는 걸 제일 싫어했다. 그래, 싱글이니까 놀 수도 있는데! 뭘 하든 그녀의 마음이긴 한데…! 그래도 존나 싫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다. 씨발.
“이 미친년들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너 돈 다 갚았냐? 아직 갚을 돈 많이 남았잖아! 일해!”
그가 그렇게 화를 내거나 말거나 도현은 실실 웃으면서 송선호의 턱에 쪽 입을 맞추었다.
“너 뭐하는…!!”
송선호가 기겁을 하든 말든 그녀는 그의 턱선을 따라 입술을 비비며 올라가 귓가에다 속삭였다.
“우리 편집장님은 너무 일만 해서 문제라니까. 응? 가끔 이렇게 놀 줄도 알아야지~.”
“으윽… 야, 자, 잠깐만… 으….”
귀가 녹는 것 같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다리가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오며 은근히 압박했다. 짧고 야한 옷을 입은 그녀의 나긋한 몸이 안겨오며 좀 취한 눈빛을 마주쳐오자 송선호는 욕도 하지 못하고 얼굴이 벌게졌다. 가슴이 쿵 하고 한 번 크게 뛰고 난 이후론 심박수가 확 올라갔다. 그녀의 눈빛이 빨려들 것만 같고 또 무언가가 빨려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놀고 있는 그녀를 끌고 간 적은 많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게다가 원래 여자가 취하면 득 보는 건 남자…. 그녀는 지금 송선호를 유혹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등과 허리를 손으로 감쌌다.
“도현 킬스버그….”
이제 다 관두겠다고 벼르고 있던 남자는 벌건 얼굴로 자기가 약에 취한 듯, 어디 홀린 눈빛으로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오. 우리 송 편집장 스위치 들어왔어, 들어왔어. 얘들아, 이리 와봐. 우리 편집장 잘생겼지?”
그녀는 송선호한테 몸을 붙이고 있는 채로 주변에 춤을 추고 있는 다른 여자들을 불렀다. 송선호는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녀와 다시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계속 그녀의 눈이나 입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완전 넋이 나가는 기분이다.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
“어머~ 진짜. 완전 귀신이라더니만. 이런 귀신이라면 환영~.”
“잘 모셔라~.”
그러자 몇 쌍 손들이 나타나 갑자기 송선호를 훅 끌고 갔다.
“야…! 자, 잠깐…!”
그때 화득 정신을 차린 송선호였지만 그대로 저항도 못 하고 끌려갔다. 몇 초 뒤 보니 그의 멋진 양복은 이미 벗겨지고 있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게 보였지만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곧 로웰의 의자를 하고 있는 남자처럼 로프로 묶이고 술이 잔뜩 위에 쏟아 부어질 것이다.
“참나….”
그 꼴을 보고 있던 미르는 그렇게 한마디 하더니 결국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여자가 즐기기 위한 파티라는 점에서 미르가 즐기는 그런 것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긴 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엉겨 붙어서 즐긴다는 점에서 공통점은 있었다.
‘그래, 일 열심히 하더라. 인터뷰도 열심히 하고…. 사람이 가끔 이런 것도 필요하지.’
미르 킹쉴드는 그쪽 세계에서도 여자에게 관대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 파티처럼 사람을 부려 자기가 좋아하는 술을 앞에 깔고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들을 주변에 앉히고 놀기 시작했다. 코르크에 오라를 실어 다트판 한가운데 꽂아주거나 술병을 좌르르 세워놓고 차례로 한꺼번에 코르크를 튀겨주거나 하면 아주 분위기 달아오르는데 제격이다. 그렇게 또 한 쪽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아름다운 지니 호의 화려한 파티 속에서 오로지 다니엘 스톤하츠만이 적응하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로웰이 그를 발견하고 술병을 막 흔들었다.
“스톤하츠 씨! 술 드세요, 술! 캬학학학!”
다니엘은 이런 분위기 자체가 당황스러워 말을 더듬었다.
“저, 전… 술은….”
여자들이 관심을 보이며 팔짱 같은 걸 껴오자 다니엘은 식겁하며 그들을 떨쳐냈다. 그러다가 다니엘은 도현이 또 다른 남자들과 춤을 추는 것을 발견하자 아주 그냥 속에서 욱하고 뭐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힘으로 밀치며(“악!” “억!” “꺅!” 그는 TFC 선수다) 그녀에게 일직선으로 향했다.
“도현 씨.”
다니엘은 그녀의 앞뒤로 붙어있는 남자들과 그녀의 사이에 두 팔을 넣고 양옆으로 조금 힘을 주어 벌리는 것만으로도 그 둘을 완전히 떼어내었다. 도현이 다니엘을 발견했다. 그녀는 남자들에게 왜 왔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다니엘 씨도 오셨어요? 다니엘 씨도 노실래요? 다니엘 씨 같은 스타일 좋아하는 애들도 있을 텐데….”
또 도현이 다니엘에게도 다른 여자들을 붙여주려고 하자 그가 저도 모르게 얼른 말했다.
“전 도현 씨가 좋습니다.”
말하고 나서는 말한 본인이 엄청 깜짝 놀랐다. 티는 내지 못했다. 이상하게 들리진 않았을까? 하지만 도현은 약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술과 약간의 약에 취한 사람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니엘의 목에 팔을 헐렁하게 두르고 고개를 기울이며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다니엘 씨 좋아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뛴다. 미르 킹쉴드는 알아서 놀고 있고 송선호는 저기 끌려가서 벌써 묶였고… 오늘의 승자는 다니엘 스톤하츠인 모양이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있었다. 평소에 집에서 일을 하거나 심지어 얼레리 꼴레리 한 포즈를 취할 때보다도 색기가 남다르다. 당연한 거겠지만…. 다니엘은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가까우니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도 몰라 멈추고 딱딱하게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아니, 잡지도 못하고 허공에 손을 띄운 채랄까.
“하하. 귀여워.”
도현은 하하, 웃으면서 다니엘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다니엘의 팔로 감싸게 했다. 남자들의 보균 유무에는 철저한 그녀니 논다고 해서 입을 맞추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다니엘의 뺨에 그녀의,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보드라운 입술이 닿고 향수와 체취가 섞인 달콤한 내음을 맡자 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힐을 신은 도현은 다니엘과 10㎝ 조금 넘을 정도로 키 차이가 났다. 도현은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마주친 눈빛을 떼지 않았다. 다니엘은 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그는 이런 데서 놀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들은 이런 긴장감을 어떻게 즐기는 것일까. 사람들이 이렇게 주변에 많은데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단둘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건 다니엘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춤… 춰본 적 없어요?”
“없습…니다.”
“가르쳐드릴까요?”
“…네.”
그렇게 서로의 사이에 주먹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거리를 두고 다니엘의 품 안에서 도현이 춤을 췄다. 다니엘의 머리카락과 목을 간지럽히고 그대로 가슴까지 스르륵 쓰다듬으며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었다. 그의 손과 손목에 그녀의 허리가 비벼졌다.
‘섹시해….’
다니엘은 도저히 그녀의 눈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도취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도 그녀의 입술과 목과 가슴과 자신을 만지는 손과 허리, 엉덩이, 다리… 이런 곳까지 꼭 시선이 내려갔다. 이렇게 더듬듯이 그녀의 몸을 보는 것을 그녀가 싫어할까 봐 겁이 나는데도 멈출 수가 없다.
“하하.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요. 다니엘 씨도 춤춰요.”
“어떻게… 해야 할지….”
다니엘은 그녀가 자신을 보며 또 웃으니까 괜히 기분이 막 좋아지는 걸 느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술도 한 잔 안 마셨는데 엄청 취한 기분이다…. 그때 마침 도현이 웨이터의 쟁반에서 칵테일을 잡았다. 그녀는 그걸 한 모금 마셨다가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 씨… 여자랑 키스해본 적 있어요?”
다니엘은 그녀의 질문에 깜짝 놀라서 굳었다가 귀가 벌게져서는 시선을 내렸다.
“…그때 도현 씨랑 한 게 처음입니다.”
그러자 도현이 어쩜, 하며 미소를 지은 얼굴로 다니엘의 얼굴을 가까이서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다니엘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다니엘은 그녀가 또 자신을 놀리려고 한다는 걸 알았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아깝게….”
도현은 다니엘의 얼굴 바로 옆을 손으로 짚고 가볍게 엉덩이를 흔들며 계속 그의 품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취했고 섹시했고 예뻤다. 다니엘은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저도 그때 정말 오랜만에 키스했어요…. 그리고 그때 이후로 지금이 처음이에요.”
도현은 술을 한 모금 입에 담고는 바로 다니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다니엘은 아찔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목으로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알코올이 넘어갔다. 도현은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요즘 남자들은… 키스할 수 있는 남자들이 별로 없거든요.”
“네….”
다니엘은 벌써 얼큰하게 취한 것만 같았다. 그녀와 키스했다. 그녀와 키스했어!
‘더…!’
다니엘은 그녀를 확 끌어안고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도현은 다니엘의 뜨거운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다니엘이 입술을 살짝 떼자 그녀가 웃었다.
“이렇게 말고… 혀 내밀어 봐요.”
미치겠다…. 다니엘의 손이 어느샌가 그녀의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를 만졌다. 그녀의 맨살을 만지고 싶었다. 손에 착 달라붙게 촉촉한데다가 부드럽고 탄력 있었다. 이런… 인간답기 짝이 없는 욕망이 자신의 안에 있었다니.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예쁜 그녀를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눈을 마주치면서 부드럽게 혀를 핥아주는 걸 받고 있다가 다니엘도 그녀를 따라 혀를 움직였다. 그녀의 짙은 속눈썹에 감싸인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게 너무나 좋았다.
곧 다니엘은 용기를 내어 입술을 붙이고 그녀의 입안에 혀를 넣었다. 미끌거리고 부드러웠다. 다니엘은 엄청 흥분했다. 세상에 이렇게 흥분되고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 수가 있을까. 너무 기분이 좋았다. 너무 좋았다.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심장마비가 올 것 같다. 배 속이 마구 불끈거렸다.
그대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마구 밀어붙였더니만 도현이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신음을 흘리더니 다니엘의 엉덩이를 한 대 때렸다. 그는 움찔하며 입술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상태를 파악하고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다니엘은 도현의 다리 한쪽을 자신의 허리에 걸치게 하고 치마 속에 손을 넣어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게다가 발기해선 그녀의 속옷 위에다 누르고 있었고 말이다.
“동정이라면서 손은 빠르다니까.”
“아, 그게….”
다니엘은 얼굴이 펑 빨개져서는 당황했다. 도현은 피식 웃으면서 다니엘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귀엽다구요.”
“…놀리지 마십시오.”
“놀릴 건데.”
도현은 다시 입을 맞추면서 손을 움직여 다니엘의 몸을 만졌다. 단단하고 예술 조각같이 아름다운 몸이었다. 도현은 그의 셔츠를 바지에서 빼내고 그의 상의 안에 손을 넣어 그의 등 근육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감상했다. 다니엘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열기 어린 숨을 내뱉었다. 누구와 비견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과 진중한 분위기를 가진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그런 그가 성적 흥분에 휩싸인 얼굴은 굉장히, 돋우는 맛이 있었다.
‘진짜 잘생겼네.’
도현은 다니엘의 등을 다 만지고 그의 가슴을 만지고 싶어 단추를 풀다가 귀찮아서 그의 셔츠 단추를 북 찢었다. 다니엘은 움찔하지도 않았다. 그는 입맞춤에 열중하여 한 손으로 부드럽게 도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도현은 그의 단단한 가슴과 근육으로 꽉 짜인 복부를 만졌다. 열기가 도는 그의 살결은 건조한 듯했다가 지금은 땀으로 젖어 미끈해졌다. 체취가 좋다. 향기롭다. 돌처럼 단단해진 그의 아랫배를 간지럽히다가 그의 배꼽에 손가락을 넣어 살살 긁었더니 그가 도현을 아예 들어 올려 벽에 밀어붙였다.
“앗…!”
도현이 살짝 비명을 질렀다가 웃었다. 다니엘은 정신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고 숨을 들이마셨다.
“도현 씨… 도현 씨… 하아….”
다니엘은 도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며 눈을 질끈 감고 잠시 정동을 견뎠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한 시간은 넘게 입을 맞춘 것 같았다. 도현은 오랜만에 포식했다는 얼굴로 입술을 떼었고 다니엘은 천국에 갔다 온 기분이라 그 이후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미르가 곧 다니엘의 옆에 앉았다.
“야… 너 치사하게 너만 자꾸 킬스버그랑 키스할 거냐? 어? 전에도 했다며?”
미르 킹쉴드가 매우 불만인 표정으로 백안시하여 다니엘 스톤하츠를 아래위로 꼬나보았다. 아무리 보고 또 보고,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이런 샌님보다 자신이 수백 배는 나은데 왜 미르에게는 그런 걸 안 해주는지 모르겠다.
다니엘이 대꾸했다.
“…어?”
“아, 씨팔. 난 그렇게 하자고 해도 병 있을 거라느니 바이러스 있다면서 절대 안 하려고 하는데 왜 넌 검사 결과도 안 갖다 주는데 그냥 하게 해주는 거냐? 어? 이거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어?”
“야, 인마. 씨발. 너 지금 내 말 안 듣는 거냐?”
“…어?”
“너 여자랑 안 해봤다는 거 구라지? 어? 딱 봐도 구라야. 맞지?”
“…어?”
안 듣는다. 미르는 아주 열이 받아서 도현을 보았다.
“킬스버그!”
도현은 스트리퍼의 등에 앉아서 로웰과 이야기를 하다가 미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잘 봐라.”
그러더니 미르는 다니엘에게 쪼오오옥 입을 맞추었다. 다니엘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그리고 순간 사방에 빛이 번쩍하면서 파직 전기가 튀더니 미르가 파드득 감전해서 쓰러졌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피했다. 다니엘은 손등으로 마구 입술을 문지르면서 뒤로 파바박 물러났다.
“킹쉴드…!!!”
미르는 감전돼서 꼼짝도 못 하면서도 헹, 하고 비웃었다.
“너 이제 킬스버그랑 키스 못 한다. 내가 못하면 너도 못하는 거야!”
“!!!”
다니엘은 헉하고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하하… 하면서 고개 돌려 그를 외면했다. 천국에 갔던 다니엘은 지옥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
그렇게 광란의 파티가 끝나고 다들 각자의 선실로 기어들어가 잠들었다. 짧은 밤이 지나고 새벽을 넘어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몇 명이 일어나서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왔다.
캐리비안으로 향하고 있는 크루즈쉽 지니는 한국보다 한참 남쪽으로 내려와서 운행되고 있어 날씨가 딱 좋을 정도로 따뜻했다. 창밖으로는 잔잔한 망망대해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다.
다니엘은 지니 호의 승무원에게서 STD 검사 키트를 구할 수 있었다. 구강, 사타구니, 문제 부위 등을 가볍게 채혈하여 거의 모든 병을 검사할 수 있는 키트였다. 가격이 썩 싼 것은 아니지만 배 주인이 그런 것에 엄격하다 보니 잔뜩 있었다. 그걸 본 다니엘 스톤하츠는 당연히 기분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과거는 과거일 뿐….’
다니엘은 도현이 어디 있나 찾으려고 했지만 크루즈가 너무 넓어 찾을 수가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휴가를 즐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다니엘은 승무원을 잡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도현 킬스버그 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어제 광란의 파티를 같이했던 사람 중 하나로 보이는 승무원은 웃는 얼굴로 스크린을 확인했다. 그래도 크루인지라 밖으로 숙취나 피곤함이 드러내지 않는 프로페셔널함이 보였다. 그녀는 크루즈 주인의 스케쥴을 확인하고 다니엘에게 알려주었다.
“지금 킬스버그 님은 야외 수영장에서 마사지를 받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기억을 더듬어 야외 수영장으로 가려고 하자 승무원이 그를 잡았다. 다니엘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지금 야외 수영장에 가시려면 꼭 드레스코드를 지켜주시길 권장하고 있습니다.”
“드레스코드…말입니까? 뭘 입으면 됩니까?”
호화 크루즈다 보니 그런 게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챙겨온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미남은 꼭 면적이 삼각 이하인 수영복을 착용하셔야 하거든요. 없으시다면 이쪽으로.”
“…….”
크루즈쉽에 대해 설명하는 그 편집장의 미묘한 표정을 보았을 때 이런 걸 예견해야 했던 것일까. 아니, 다니엘 스톤하츠가 독심술사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인가. 다니엘은 그 승무원에게 끌려가 그녀의 취향을 팍팍 넣은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짙은 남색에 밴드는 빨간색과 하얀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가 있었다. 물론 승무원이 처음 권한 것은 T자형 수영복 팬티였으나 다니엘이 극구 사양하여 겨우 삼각은 지킬 수 있었다.
‘심각하게 불안정한 옷차림이군….’
다니엘도 이런 수영복을 입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삼각이니 쉽게 삐져나오거나(?) 할 것 같진 않았지만 뭔가 절로 조신해질 수밖에 없는 차림새이기는 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승무원이 아래위로 그를 훑어보았다.
“좀 태우셔야겠네요, 스톤하츠 씨. 킬스버그 님은 구릿빛 피부의 미남을 좋아하시거든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이 깜짝 놀라 자신의 피부를 보았다. 햇빛을 많이 봐도 전투복에 헬멧 사용이 필수인 스포츠라 하얬다. 애초에 백인의 피가 많이 섞인 혼혈이기도 했다. 다니엘의 뇌에는 곧바로 선탠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야 할 필요성이 입력되었다.
“또 다른 건 없습니까? 그녀가 선호하는 취향….”
의외의 득이다. 다니엘은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에 아주 관심이 많았지만, 역시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은 너무 모양이 빠졌다. 승무원은 열변을 토하여 다니엘의 정보수집에 도움을 주었다.
“엉덩이가 중요합니다, 엉덩이! 남자는 엉덩이부터 봐야 한다는 게 우리 킬스버그 님 지론이었는데 이제는 크루 사이에서도 그렇게 만장일치가 났습니다.”
“엉덩이….”
“킬스버그 님은 다양한 미를 존중하기 때문에 굳이 정형화된 엉덩이 스타일을 고집하진 않으십니다만 최소 조건으로는 역시 일정 수준 이상의 볼륨감! 근육의 정도와 각도!”
그녀는 손바닥으로 사선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죠.”
어렵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 엉덩이는 그럼 괜찮은 편입니까?”
다니엘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엉덩이를 탈의실 거울에 비추어보았다. 볼륨감이라. 승무원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제가 본 엉덩이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뭔가 이것도 미묘한 기분이다. 일단 다니엘은 승무원이 말한 것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기억해놓고 야외 수영장으로 올라갔다. 어제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한 사람들에게는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럴까. 수영장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수영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수영장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장소에 햇빛을 가리는 차양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밑엔 마사지용 침대 두 개가 있었고 거기에 여자 둘이 엎드려 누워 세상 편하게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마사지사는 둘 다 남자다. 다니엘은 이런 곳 하나하나에서까지 질투를 느끼는 자신에게 좀 놀랐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분홍색과 하얀색이 잘게 스트라이프로 들어간 비키니를 입고 있는 도현이었다. 버클을 풀고 엎드려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가녀린 듯 건강하고 여성스러운 등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다가 다른 남자가 그걸 만지고 있는 꼴을 보는 것은 상당한 부아가 치밀어 오르게 했다.
‘이건 그냥 마사지다…. 마사지. 그냥 마사지….’
다니엘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렸다. 다갈색 머리에 구릿빛 피부의(반드시 태워야겠다) 잘생긴 남자 마사지사가 살짝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아…! 간지러워. 왜 그래?”
“다니엘 스톤하츠 씨 오셨어요, 킬스버그 님.”
그는 도현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괜히 저러는 거 같다. 지금 저 마사지사가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건 분명히 착각이 아닌 것 같다! 다니엘은 그 마사지사를 아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모르쇠,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벌이 너무 많아….’
다니엘은 속으로 그렇게 신음을 흘렸다. 지지 않겠다.
“다니엘 씨?”
도현은 아래에 깔린 부드러운 수건을 팔에 끼워 들어 가슴을 가리며 상체를 살짝 들었다. 피곤한지 약간 나른해 보이는 표정에, 사실상 반라로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그녀의 몸을 더듬는 마사지사가 짜증 나서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거의 헐벗고 있었다! 다니엘은 벌써 화끈하게 귀와 목이 익어버렸다. 아침부터 이런 걸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 그러니까… 저… 이거….”
다니엘은 제대로 말도 못하고 검진키트로 구강 내의 타액과 혈액을 채취하여 뚜껑을 닫았다. 화면을 한 번 확인하고 휴 하고 한숨을 짓더니 도현에게 내밀었다. 그때 곧바로 마법으로 전신을 소독한 보람이 있었다.
마사지사는 도현의 다리 쪽으로 가서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그가 지속적으로 매우, 아주 신경에 거슬렸다.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신경에 거슬릴 수가 있는 건가? 그녀의 가슴 윤곽이 조금 보이는 게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지금 너무 숙맥처럼 보여서 그녀에게 점수가 깎일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그의 신경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하하.”
응? 하고 다니엘이 건네주는 걸 받은 도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니엘 씨, 진짜 귀엽네요.”
‘뭐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은 걸 참았다. 저 말이 좋은 점수를 땄다는 건지 나쁜 의미인지 여전히 헷갈리는 다니엘이었다. 도현은 좀 더 상체를 일으키며(‘보인다… 보여…!’) 다니엘에게 자기 쪽으로 다가오라고 했다. 엉거주춤 다가가 허리를 숙이니 도현이 쪽 하고 다니엘의 입술과 볼을 걸쳐 가볍게 한 번 입술을 대었다가 뗐다.
“잘 잤어요?”
“네….”
여전히 승리자는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좋다. 너무 좋다. 그녀가 너무 좋았다. 이젠 왜인지 따져보는 것도 관둔 지 오래다. 더 하고 싶다. 만지고 싶다. 그녀를 더 웃게 하고 싶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뭉게뭉게 부풀었다. 그녀의 가녀린 목과 어깨, 등을 잇는 라인이 섹시했다. 키도 크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데도 뭔가 선이 섬세하고 아슬아슬하다.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독차지하고 싶었다. 콧김이 훅하고 나왔다.
“다니엘 씨도 마사지 받으실래요?”
도현은 그가 그렇게 느끼든지 말든지 영 관심 없는 나른한 얼굴로 다시 엎드려 누웠다. 다니엘은 갈등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마사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몸을 만질 수 있는 절호의 수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가 이런 쉽고 얄팍한 추파를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아뇨…. 전 선탠을 좀….”
게다가 그녀의 곁에 계속 있다간 요새 온오프 기능이 제멋대로인 그의 그게(?) 반응을 할 것만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지금은 삼각 수영복을 입고 있어 매우 위험했다.
‘평정심… 평정심…. 그녀를 위해서 멋진 남자가 되자, 다니엘 스톤하츠.’
다니엘 스톤하츠는 명상을 할 때처럼 심호흡을 하면서 햇빛을 바라보는 선베드로 갔다. 직원이 미리 세팅을 해주었다. 책 하나와 선글라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부탁하고 누웠다. 물론 그러고도 다니엘 스톤하츠는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마사지를 받고 있는 그녀의 피부를 하염없이 훔쳐보고 있었다.
예쁘다…. 분홍빛이 도는 건강한 하얀 피부…. 백인의 피부와 다르게 동양계의 하얀 피부는 아름답다. 다니엘은 어제 만졌던 그녀의 다리를 떠올렸다. 진짜 부드럽고… 손에 착 달라붙었다.
‘오늘 밤에도 파티를 할까?’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처음으로 그런 파티를 즐겨본 다니엘은 벌써부터 다시 파티에 참여할 기대에 부풀었다. 그녀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니엘과 교감을 시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만졌던 기억을 떠올리자 저절로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안 된다…. 평정심. 지금은 삼각 수영복을 입고 있다…. 삼각….’
다니엘은 그렇게 책에 눈을 고정하고 한동안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마도순환을 통해 몸의 열기를 좀 떨쳐버렸다. 하지만 다시 도현을 훔쳐보기 시작하니 그것도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욕망과 질투, 기타 등등으로 계속 마음이 심란해졌다. 다른 남자가 자꾸 그녀의 몸을 만지고 있는 건 아무리 자기세뇌를 계속해도 짜증이 났다. 살짝만 얼음 마법을 쓸까 말까 고민했다. 민간인한테 그런 거 썼다가 고소당하면 정말 큰일이니 아주 약간(?)만….
“작가님…?”
“네, 선생님.”
그때 정신을 잃은 것 같이 보이던 로웰 리가 일어났다. 그녀의 삐삐 머리는 놀랍게도 타고난 곱슬머리 덕분에 묶으나 푸나 하늘로 치솟은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상체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도현과 쑥덕쑥덕 대었다. 그리고는 마사지사를 시켜 마사지 베드의 방향을 돌려 수영장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다니엘은 곧바로 시선을 책으로 원위치시켰다. 그 여자 두 분이 아주 뚫어져라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다니엘은 긴장해서 사레가 걸릴 뻔했다.
‘뭐지? 뭐지? 내가 훔쳐보는 걸 아신 건가?’
전에 컨셉화 포즈를 취했던 날처럼…. 도현은 남자들이 그렇고 그런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걸 불쾌해할 때가 있었다. 조심해야 했다.
다니엘은 지금껏 공부, 수련, 전쟁, TFC, 즉, 마도 연구에 온 인생을 다 바쳐서 살아왔고 전쟁 이후론 이유도 알 수 없는 발기부전까지 걸려 여자와는 영 거리가 먼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아왔다. 여성에 대한 환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원하지는 않았다. 별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환상은 그저 어린 날의 잔해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초반 도현 킬스버그와 데이트를 할 때 엄청난 감점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고, 무엇보다도 ‘도현 킬스버그’라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감을 못 잡았다. 그는 자신이 여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투른 남자였다는 걸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엄청나게 노력했다. 시중에 나온 연애 관련 서적을 전부 독파하고 도현을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입증하고. 그는 아예 <도현 L. 킬스버그 학론>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각고의 노력 끝에 가점을 쌓아와 그녀에게 호감을 얻고, 그래서 어제처럼 꿈결 같은 보상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객관성을 바탕으로 연구하며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에 있어서, 그는 멍청한 미르 킹쉴드나 그 편집장과는 차원이 다른 남자였다.
그들은 도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놈팽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도현은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한 분야(?)답게 다니엘도 모르는 것이 수두룩했다. 다니엘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그들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왜 저렇게 쳐다보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아으… 씨발….”
송선호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잠에서 깨자마자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부터 했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 모퉁이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다. 머리도 옷도 엉망이었다. 어젯밤에 미친 듯이 게워내고 쓰러져 잠들었다. 송선호는 지니 호에 설치된 인공지능 비서를 불렀다.
“지니야… 누가 숙취 제거제 좀 가져오라고 해줘….”
송선호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어디선가 대답이 들려왔다.
[네, 알겠습니다. 추가 요금이 붙습니다.]
“알았어….”
이 배를 렌트로 돌려서 돈을 번다더니만. 이제 자기 파티용으로만 쓰는 게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송선호는 쓰러진 채 손가락 하나도 꿈쩍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아프고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좀 있으니 직원이 노크를 했다.
“주문하신 숙취 제거제입니다.”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간 송선호는 바로 옆의 벽에 기댄 채로 문을 열었다. 승무원은 약간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송선호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며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따 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키가 엄청 큰데도 비율과 몸매가 끝내주는 남자였다. 굉장히 비싼 셔츠일 텐데 단추는 몇 개 날아가 있었고 단정했을 머리도 엉망이 되어 엘리트 풍의 단정하고 훤칠한 미남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면서 예의는 바르고….
‘완전 취향이다…. 왜 어제 못 봤지? 누구지? 킬스버그 님이 데려오셨나?’
이런 스트리퍼도 있었나? 스트리퍼면 좋겠다…. 승무원은 그런 기대를 가지며 숙취 제거제를 마시는 그의 찌푸린 얼굴을 감상했다. 목젖이 확 도드라진, 남자답게 두껍고 긴 목도 완전 섹시하다. 그냥 확 자빠뜨려서 마저 저 셔츠 단추를 뜯고 싶은 그런 남자였다. 방 안엔 그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 보이고….
‘내일 파티에서 노려야겠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송선호는 약간 의아해서 그녀를 다시 보았다.
“가셔도 됩니다.”
“아, 더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그렇게 승무원이 물어보자 송선호는 그제야 자신이 여기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승무원에게 말했다.
“그… 제 차 조수석에 종이가방이 있는데 그것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도현 킬스버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송선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숙취 제거제는 속에 들어가자마자 효과를 발휘하여 일단 두통이 조금 사라졌다. 역시 이게 금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얘기를 괜히 하는 게 아니다. 정신이 드니 그가 지금 예약한 모든 휴가 일정에 늦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제 들어온 비행차 말씀하시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접근 승인을 내주시면 말씀하신 건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킬스버그 님은 지금 야외 수영장에서 마사지를 받고 계십니다.”
디바이스를 들어 크루즈 주인의 스케줄을 확인한 승무원이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뒤태도 죽인다…. 승무원은 그와 더 대화를 하고 싶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물었다.
“야외 수영장에 가실 예정이시라면 수영복을 준비해드릴까요?”
“네?”
숙취 제거제를 먹어 훨씬 컨디션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송선호는 약간 인상을 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냐는 거다. 예의 바르다고 생각했는데 성격은 좀 있는 것 같다.
‘더 좋아.’
승무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프로답게 안내했다.
“야외 수영장 입장 드레스코드가 있습니다. 미남은 꼭 삼각 이하의 수영복을 착용하길 권장해 드리고 있습니다.”
“뭐라구요?”
송선호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자 승무원은 디바이스의 화면을 송선호에게 보여주었다. 지니호 선내 규칙에 진짜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가지가지 해라….”
송선호는 질린다는 얼굴로 승무원에게 말했다.
“됐습니다. 그냥 말한 거나 갖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강권하지는 않았다. 물론 속으론 ‘못 들어갈 텐데….’라고 생각했다. 말이 권장이지 이 배에서는 도현이 하늘이고 신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는 송선호는 그녀를 보내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서 고급스러운 욕실에서 샤워부터 했다.
“…씨발.”
어젯밤은 송선호의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 흑역사였다. 저번에 반지를 산 사건의 뒤를 잇는 어마어마한 병신짓이었다. 어제로 다 그만두겠다는 건 또 하루 늦춰진 데다가 그녀가 다른 남자들에게 하던 것처럼 조금 쉽게 군 것으로 완전히 혹해서는 그대로 다른 여자들에게 끌려가서 그들을 위한 하룻밤 장난감이나 되었다. 억지로 술을 마시고 희롱이나 잔뜩 당하고… 정말 끔찍한 기억이었다.
알다시피 송선호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디어 그룹 회장의 손자였고(물론 그녀는 손주들이 많았다) 똑똑하고 잘 배웠고 뭐든 잘하고 게다가 인물도 좋아 그룹 내 3세대들 중에서 꽤 건실하게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경쟁자들이 원체 많은데다가 아직 부모 세대도 남아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 못해도 계열사 몇 개 정도는 승계하지 않겠는가. 당장 KP노벨만 해도 삼촌인 제임스가 자식이 없는지라 송선호의 손에 떨어질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제는 무슨 스트리퍼처럼 옷이 벗겨져서 술안주처럼 사람들에게 소비되었다. 자존심이 대단한 그의 입장에서는 굴욕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년이랑 엮이면 되는 일이 없지.’
송선호가 이를 갈았다. 빨리 일이나 끝내고 다른 담당자에 대해서 알려주고 바로 갈 것이다. 샤워를 끝마치고 방으로 다시 들어오니 방 안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가 입었던 옷도 그렇고 침대도 그랬다. 냄새를 맡자마자 다시 숙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숙취 제거제를 하나 더 먹어야 할 것 같다. 송선호는 지니 호의 인공지능에게 숙취 제거제를 하나 더 주문하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건 어떻게 여는 거야?”
통유리로 바다가 훤히 보이는 그의 방은 지니 호에서도 가장 좋은 방 중 하나였다. 풍경은 끝내줬으나 송선호는 환기가 절실했다.
“지니야, 이거 어떻게 여는 거야?”
[창문을 여시겠습니까?]
“어, 확 열어줘….”
그러자 지이잉 하면서 통유리의 한가운데에 가로로 빛의 선이 나타나더니 위쪽 부분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송선호는 ‘하….’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 배는 예전부터 참 돈을 처발랐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돈을 아주 처발라 놓았다. 재벌 출신인 송선호도 돈을 이렇게 써본 적은 없었다. 돈을 쓰는 것도 상상력과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송선호는 어이가 없어서 도대체 이건 얼마짜리 창문인가, 그건 도대체 빚이 얼마나 있는 걸까 생각하며 계속 창을 위아래로 보고 있었다.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허리에 바스타월을 두르고 머리를 마저 닦으며 창문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 채 문으로 다가갔다. 인공지능을 이용하면 바로 문을 열 수 있었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그러지 않도록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았다. 문을 열면서 드디어 창문에서 눈을 떼고 앞을 보았다. 아까의 승무원이 숙취 제거제와 송선호의 물건을 들고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이번엔 확연히 깜짝 놀라더니 송선호의 몸을 쳐다보았다. 송선호는 약간 머쓱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입을 게 없어서….”
이런 배면 목욕용 가운이 비치되어 있을 법도 한데 없었다. 일부러 안 넣은 건가…. 송선호는 그녀에게서 물건을 받고 바로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물건을 든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녀는 송선호의 목선, 어깨, 가슴, 배, 그리고 아래까지 눈을 떼지 못하다가 갑자기 물었다.
“혹시 여자친구 있으신가요?”
“네?”
“아니면 캐쥬얼한 건 싫으세요?”
그녀가 드디어 송선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서는 말을 빨리 했다.
“원래 근무 중에는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제 스타일이라서 안 되겠어요. 지금 바쁘세요?”
“아….”
송선호가 아무리 일에만 매진하며 젊음을 보내고 있다지만 이런 유혹을 받지 못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아니, 많이 받는 편이었다. 물론 이런 캐쥬얼한 접근보다는 정식으로 교제 요청을 받는 경우가 좀 더 많긴 했지만 둘 다 비등비등한 수치였다. 송선호는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거절을 하기 위해 입을 뗐다.
“죄….”
그런데 그 순간 어젯밤 다니엘 스톤하츠와 입을 맞추며 애무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좀 찌푸렸다. 씨발….
‘씨발. 그건 할 거 다 하고 사는데 뭐 하려고 난 이렇게 사냐. 젠장. 뭔 부귀영화를 더 누리겠다고….’
송선호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엄청난 미녀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피부가 깨끗한 호감형이었다. 날씬하고….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그럴 정신이 아니라서요.”
승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송선호였으나 엄청난 갈등 끝에 결국 거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는데 승무원이 잡았다.
“그건 그럴 정신이랑은 별로 상관없을 텐데요? 20분이면 되는데요?”
이 배 직원들이 다 이런 것인가, 아니면 그 여자의 주변에는 꼭 자기 같은 사람들만 모이는 것일까. 아무리 요즘 시대라도 한국은 한국인데. 그녀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건 꼭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송선호는 그렇게 앞의 승무원에게서도 그녀의 일면을 찾고 마는 자기 자신에게 좀 질렸다. 예의 바르게 거절을 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한숨을 쉬고 말았다. 시선을 돌리면서 약간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20분보다는 더 걸립니다. 죄송합니다. 가주시죠.”
“…….”
그녀는 문에서 손을 뗐다. 문이 닫혔다. 승무원은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더 걸린데!! 와아아악! 완전 심쿵! 내가 따먹는다, 진짜! 반드시 따먹는다!’
그렇게 자신이 누군가의 사냥감이 된 줄은 꿈에도 모르는 송선호는 컨디션이 안 좋은 얼굴로 옷을 다 챙겨입고 도현 킬스버그를 찾으러 갔다. 역시 이 배는 싫었다. 빨리 내리고 싶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아니, 잠깐이면 된다니까요? 제가 쟤… 아니, 도현 킬스버그 출판사 편집장입니다.”
“알겠는데요. 어쨌든 안 됩니다. 드레스코드는 지켜주시죠.”
야외 수영장 앞에 서 있는 시큐리티조차도 작은 삼각형 검은색 수영복 팬티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추가로 맨몸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검은색 보잉 선글라스와 애나멜 챙이 달린 경찰 모자도 쓰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와 실랑이를 하다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을 즐기고 있었다. 송선호는 고개를 옆으로 해서 커다란 유리문 너머로 도현에게 손을 흔들었으나 그녀는 송선호에게 힐끗 시선만 한 번 주고는 다시 로웰과의 대화로 돌아갔다. 미칠 노릇이다.
“…….”
참자. 참자… 참자. 마지막이니까 참자. 참자…. 시큐리티는 손가락으로 탈의실을 가리켰다.
“수영복을 안 가져오신 분을 위하여 탈의실 내에 구비되어 있는 게 있으니 구입하고 착용하시죠.”
이 망할 새끼는 입 좀 안 다무나. 송선호는 괜히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가 탈의실을 보았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아무거나 골랐다. 옷을 마구잡이로 벗어던진 뒤 그것을 입었다.
‘내가 진짜 저년 쪽으로는 앞으로 기침도 안 한다.’
그리고 그는 디바이스만 챙긴 채 야외 수영장으로 입장했다. 뭔가 시선이 쫙 몰린다. 뭐야? 송선호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짜증스럽게 받아쳤다. 야외 수영장에는 승무원을 포함하여 서른 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는데 여자는 점점이 흩어져 둘이나 셋씩 모여 앉아 있었고 남자는 정확히 수영장의 오른편, 태양을 바라보는 선베드에 누워 선탠을 하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도 있었다.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는 차양의 아래에서 수영장 쪽을 바라보며 망고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선베드에 기대어 앉아 마사지사에게 발과 다리 마사지를 계속 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송선호가 들어오자 바로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노시느라 아주 다망하신 건 잘 알겠습니다만 일은 좀 제대로 하시죠, 작가님.”
송선호는 그녀에게 곧장 직진하여 디바이스로 그들의 눈앞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도현과 로웰은 홀로그램 뒤로 고개를 삐쭉 빼서 송선호의 하반신, 정확하게는 그의 엉덩이로 시선을 집중했다.
“야, 좀 뒤로 돌아봐.”
도현이 가만히 관찰을 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로웰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저번에 아예 다 봤다고 하지 않았어요, 작가님?”
“그랬는데 워낙 순식간이라 자세히 못 봤어요. 게다가 그때는 다 벗고 있어서 딴 거(?) 보느라.”
송선호는 머리로 열이 확 뻗치는 걸 느꼈다. 이유는 그냥 생각하기도 싫었고 그들의 태도가 매우 신경을 긁었다.
“빨리 체크한 부분 확인해주십시오. 저 가야 합니다.”
“응? 왜? 무슨 일 있어? 너도 쉬다 가. 우리 바하마랑 푸에르토리코 가는데?”
“두 분이나 많이 가시구요. 빨리 확인이나 해주세요.”
“일단 뒤로 돌아보라니까.”
“쓸데없는 말 자꾸 하게 하지 마십시오….”
송선호는 평소처럼 험한 말을 쓰거나 하진 않았지만 목소리를 꾹꾹 눌러서 말을 하는 걸 들으니 도현과 로웰은 그의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봤다가 약간 구시렁거리며 홀로그램을 보았다.
“치사하네요, 작가님.”
“제 말이요. 우리가 하루 이틀 알던 사이도 아닌데.”
“식구끼리 참 섭섭합니다, 이런 거. 보여준다고 그게 닳나.”
“제 말이요, 선생님.”
“일합시다, 일!”
송선호가 짜증을 냈다. 그러자 그들은 좀 더 불평을 하다가 체크포인트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권고사항에 따라 바꿀 것은 바꾸고 동의가 안 되는 부분은 송선호와 상의했다. 송선호는 스크린을 보지 않아도 메모해놓은 사항을 다 기억하는지 바다나 쳐다보면서 그들의 말에 대꾸하고 있었다. 애초에 어젯밤 이후로는 도현과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송선호였다.
“이제 됐어?”
둘 다 마지막 체크를 끝내자 송선호가 한 번 더 확인을 하고 그것을 디바이스를 통해 회사 DB에 업로드시켰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송선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도현을 보았다. 그녀는 옅은 분홍색과 하얀색 스트라이프가 번갈아 교차하는 튜브탑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분홍빛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다. 그녀의 남색 머리카락과도 잘 어울렸다. 섹시하고, 뭔가 오늘은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두 분 담당이 바뀌게 될 것 같습니다.”
송선호는 다시 시선을 피하고 얼른 말했다. 말하고 나니 기분이… 하지만 무시했다. 송선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리오 정이라고 김선아 작가님이랑 전소연 작가님 담당하고 있는 편집장입니다. 실력도 괜찮고 사람도 괜찮습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휴가 끝나고 연락드릴 겁니다. 따로 인사까지는 안 시켜드려도 될 것 같아서 바로 출근시키겠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선호의 말을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슬그머니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앞으로 마감 잘 지키고 이렇게 도망 안 칠게.”
“저도 지금까지 엘 드라카 본다고 정신 팔려서 죄송했습니다, 송 편집장님.”
그들은 이게 협박 비스무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송선호는 약간 한숨을 쉬었다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제가 좀 바쁘기도 하고 그래서요.”
“그래도 우리 작품기획 처음부터 같이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빠지면 어떡해요. 새로운 편집장이랑 하다가 의견 안 맞으면 어떡해요? 막 아수라장 되면 어떡해요?”
로웰 리는 벌써부터 스트레스받는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송 편집장님은 말 안 해도 척척 다 알아서 해주는데 그 남자는 그런 거 모를 거 아니에요? 저 주 2회 연재하는데 잘못되면 진짜 헬 된다구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제가 자세하게 새로운 친구에게 얘기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작품 의도나 방향은 물론이고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거나 싫어하시는 것까지….”
“아아악, 위염 도질 것 같아.”
아무리 요즘 세상이라도 주 2회 만화 연재가 쉬운 게 아니다. 로웰 리의 걱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하지만 로웰 리의 담당을 계속하게 되면 어차피 도현을 보게 된다. 담당을 바꾸는 의미가 없었다. 조금 더 로웰을 설득하다가 송선호는 인사말을 했다.
“그럼 휴가 잘 보내십시오. 전 가보겠습니다.”
송선호는 결국 끝까지 도현의 눈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야외 수영장을 바로 나왔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뭐가 달라진 게 있다고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이 지끈거렸다. 잠깐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예전에도 똑같이, 이 장소에서 이런 기분을 느꼈었다. 그때 그걸로 끝냈어야 했는데 병신같이 또 이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정말 끝이다. 끝이야….’
겨울 휴가는 일정을 전부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다. 송선호는 터벅터벅 탈의실로 향했다. 락커를 여는데, 점점 갈수록 마음이 아팠다. 예전에는 항상 화가 차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슬펐다. 슬펐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 씨발….’
송선호는 울컥 뭔가 올라오려는 걸 참으며 락커를 다시 쾅 닫고 거기에 이마를 쿵 박았다.
‘이제 다 끝났잖아. 씨발. 작작 좀… 젠장. 씨발. 아….’
사랑한다고 한 번만이라도 말해볼 걸 그랬다. 처음부터 포기하지 말걸. 그녀에게 심하게 대하지 말걸. 그 전에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적어도 이 마음만은 전했어야 했는데. 왜 나는 병신같이 사랑하는 여자한테 그런 짓이나 했을까. 왜 그녀를 싫어하려고 했을까.
모든 게 다 후회가 되었다.
*
송선호는 한참 그러고 있다가 겨우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숙취 제거제를 한 병 더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팠다.
“벌써 가려고?”
그녀가 탈의실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나왔는데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너 요새 진짜 무슨 일 있어? 왜 갑자기 담당을 그만둔다고 하고 그래?”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방비상태에 놓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냥 이렇게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들킬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니야. 좀 개인적인 일이라….”
송선호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진짜 그만둘 거야? 안 그만두면 안 돼?”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눈을 피했다.
“벌써 다 얘기해놨어. 정 편집장이 잘할 거야.”
“이제 와서 새로운 사람이랑 같이 하려니까 좀…. 난 너밖에 일 같이 안 해봤는데.”
도현도 나름대로 걱정이 되는지 그렇게 말했다. 아까는 사람도 많아서 바로 뭐라고 하기가 그랬다. 그녀에게도 이 시점에 편집장이 바뀌는 건 매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전에 다른 편집장도 하려다가 결국 그쪽이 바꿔 달라고 했잖아. 나 이번 작품은 진짜 잘해야 하는 거 알잖아. 항상 이게 얼마짜리 프로젝트인지 알고 일하라고 말했던 건 너면서…. 다시 한번만 생각해보면 안 돼?”
“…안 돼.”
송선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안 돼.”
“진짜 왜 그러는데, 요새. 무슨 일 있어? 응?”
도현이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그저 그가 그만두는 이유를 알고 싶은 것뿐이겠지만, 송선호는 매서운 추궁을 받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에 대한.
“…….”
송선호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자 도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알겠어…. 너도 무슨 사정이 있으니까 그러겠지. 괜히 이러는 것도 아닐 거고. 일이라면 예전부터 철저했으니까.”
도현은 그렇게 수긍하며 약간 아쉽다는 표정으로 뒤집힌 송선호의 자켓 목깃을 바로 해주었다.
“그래도 그동안 정 많이 들었는데 아쉽네. 앞으로도 일 잘하고. 가끔 보자.”
“…안 봐. 너 평생 다시는 안 볼 거야.”
송선호는 눈을 감은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도현이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긴 왜야. 꼴 보기 싫으니까 그러지.”
그러자 도현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송선호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그만두는 거야?”
“…….”
“설마… 너 아직도 나 좋아하는 건 아니지?”
뭐?
송선호가 시선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그녀가 뭐라고 한 건가. 도현은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송선호는 충격을 받았다.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다….’
“웃기지 마…. 뭐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송선호는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아서 그렇게 되물었다. 도현은 말하기 껄끄럽다는 듯이 약간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
“아니… 처음에… 우리 만난 지 반년 정도 됐을 땐가. 네가 일식집 데리고 갔을 때. 나 좋아하나 싶었는데….”
“…….”
“그 뒤로 나 남자친구 생기니까 바로 그런 기색 없어져서 그냥 프로페셔널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리고 잊어버렸는데 니가 갑자기 이러니까….”
갑자기가 아니다. 송선호는 뭔가 슬금슬금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윽박을 지를 것만 같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참았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중엔 네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고….”
“사랑해.”
씨발… 송선호는 한 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미친 새끼. 병신 같은 새끼.
“사랑한다고…. 씨발… 미안하다. 사적인 거 일에 끌어들여서. 근데 이젠 진짜 못 하겠어. 너무 힘들어….”
송선호는 파랗게 얼굴이 질려서는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꼴사납고 병신 같아서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런 말은 평생 죽어도 하기 싫었다.
“알았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송선호의 한쪽 어깨를 잡으며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다 잘되길 빌게.”
눈물이 흘렀다. 송선호는 그렇게 떠나가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다 큰 남자가 실연 때문에 질질 짜고 있으니 얼마나 꼴사나울지 안 봐도 비디오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였어? 네 마음에 들려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밑바닥까지 다 보인지라 이제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병신 같은 놈들만 만났는데 왜 나는 안 됐어?”
“야… 그 말은 아주 많이 실례다. 내 남친들이 뭐가 어때서.”
도현이 살짝 어이없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송선호는 계속 눈물이 뚝뚝 흘러서 주먹으로 거칠게 눈을 비볐다. 씨발…. 그가 그러고 있으니 도현도 약간 마음이 안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래 안 정이라는 게 있었다.
“야, 그만해. 뚝. 눈 상해.”
도현은 그의 손을 잡아 치우고 그의 양 뺨을 잡고 엄지로 눈 밑을 슥슥 닦아주었다. 송선호의 눈동자가 확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 위에 있는 그녀의 양손을 잡으며 또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 이러는 거 처음 봐. 왜 이래? 인기도 많으면서.”
다른 여자는 다 필요 없다.
네가 내 여자였으면 좋겠다.
송선호가 아무리 다른 여자를 만나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스스로를 속이려고 해도 효과가 없었다. 아무리 후회하고 스스로를 다그쳐도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왜 난 안 됐던 거냐고.”
송선호가 세상 억울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도현은 약간 당황했다.
“아니…. 나한테 그렇게 물어봤자…. 난 네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다니까? 자기 입으로도 싫어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면서. 아니, 그것보다도 너 너무 범생이 도련님 같은 느낌이라 내 타입도 아니었고. 자존심 센 것도 별로고….”
“…….”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응? 이제 와서?”
이제 그만 둘 거라며…. 도현이 무심코 그렇게 되물었다가 그가 다시 뚝뚝뚝 눈물을 흘리자 좀 웃었다.
“글쎄…. 나 요새 딱히 누구랑 진지하게 만날 생각이 없어서. 지금이 딱 좋은데.”
“…스톤하츠는.”
“음… 다니엘 씨 좋긴 한데…. 누구랑 정식으로 사귀면 왠지 좀 귀찮아져서. 그리고 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당연히 싫지. 젠장… 어떤 남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딴 놈이랑 놀아나는 걸 좋아하겠냐고.”
씨발…. 송선호가 신경질을 좀 냈다. 도현이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닌데? 남들 다 하는 정도 아닌가?”
“아니거든?”
그때 송선호는 자신이 좀 많이 진정이 된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고백을 하면 마치 모든 것이 일순간에 끝나버릴 것처럼 항상 무서워했다.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고 거절하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그렇게 끝날 거라고 항상 생각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송선호에게 남자로서의 관심을 전혀 보이지도 않았고 송선호도 그녀에게 엇나가게만 대했다.
“…지금 좀… 엄청 쪽팔리네…. 씨발….”
뭔가 다양하게 쪽팔렸다. 지금까지의 흑역사나 오늘 일이나…. 송선호는 자신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걸 느꼈다. 도현이 손가락을 튕겨 그의 입술을 때렸다.
“앞으로 내 앞에서 욕하지 마.”
“…….”
어차피 그만둘 거다, 만나지 않을 거다, 등등 할 수 있는 말이 엄청 많았다. 하지만 송선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알았어.”
송선호는 약간 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진짜 쪽팔렸다. 그녀가 송선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송선호는 그게 좀 아쉬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못내 좀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만두겠다고 이 지랄을 해놓고 또….
“그럼… 진짜 그만둘 거야? 우리 좀 조율이 안 될까? 나나 선생님이나 너 없이 일하기 솔직히 벅찰 거 같은데.”
“…….”
송선호는 다시금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도현은 싱긋 웃으면서 그의 팔을 손으로 두드렸다.
“일단 3주 정도 시간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정 네가 안 되겠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여기 VVIP로 등록해줄 테니까 있는 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해.”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하고 싶은 걸 다 하란 말에 송선호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헉하고 본인이 더 놀랐다. 씨발! 이 배알도 없는 새끼가! 곧바로 욕이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데 금방 그녀가 한 말이 팍 떠올랐다.
[자존심 센 것도 별로고….]
윽… 송선호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자신의 미간을 검지와 중지로 꾹꾹 누르면서 엄청나게 용기를 내서 그녀의 손가락을 건드렸다가 살짝 잡았다.
“…….”
도현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호기심이 어린 표정이랄까. 그녀는 관찰하는 시선으로 송선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왠지….’
엄청난 소재감이 가까이에 있었던 것 같다…. 6년 짝사랑, 메가츤츤데레, 재벌 3세, 미남….
“뭐하게?”
도현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송선호가 엄청 당황하더니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시선을 돌렸다.
“아니…. 별걸 하자는 건 아닌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니라고.”
송선호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며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니면 됐고. 난 이제 수영장에서 놀 거라. 너도 들어오려면 다시 옷 갈아입고.”
도현은 야외 수영장 입구로 몸을 돌렸다. 이렇게 두고 갈 생각인가. 송선호는 갈등하다가 결국 그녀를 따라 야외 수영장으로 나갔다. 물론 드레스코드는 지켰다.
약간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가는데 그들이 다시 오는 것을 발견한 금발 삐삐 머리가 양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며 어떻게 됐냐는 제스처를 취했다. 도현은 한 손의 손등을 하늘로 향한 채 살짝 흔들었다. 반은 성공, 반은 실패라는 제스처다.
“저기 가서 누워 있어.”
송선호가 일단 그녀의 곁에 앉으려고 직원과 눈을 마주치자 도현이 수영장의 오른편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
그곳은 남자들이 일렬로 좌르륵 누워 선탠을 하거나 책을 읽고 있는 곳이었다. 남성전용석인 모양이다. 하나하나가 다 화보에라도 나올 법한 모습인 게… 송선호는 드디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약간, 아니, 또 좀 많이 그녀에게 질리는 걸 느꼈다. 이런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만두는 게 진짜 나은 거 아냐, 씨발….’
분명히 나을 것이다. 젠장…. 회의와 기대, 흥분과 두려움… 그런 게 그의 안에서 마구잡이로 교차하고 있었다. 빈자리를 찾다가 스트리퍼들은 정말 싫어서 차선책으로 다니엘 스톤하츠의 옆자리에 앉았다. 다른 곳은 꽉 찼는데 그의 옆자리는 텅텅 비어있었다.
모델 뺨은 이미 애저녁에 치고도 남는 그였으니 선글라스를 끼고 반라로 책을 읽는 모습이 굉장히 멋졌으나 얼마나 햇빛에 나앉아 있었는지 전신의 피부가 벌겠다. 다니엘이 다가오는 송선호를 발견하고 눈인사를 했다.
“숙취는 괜찮으십니까?”
“네, 그럭저럭….”
그리고는 별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서로가 경쟁자라는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서로 그녀에게 밉보이기만 바랄 것이고…. 송선호는 또 약간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선베드에 푹 누웠다.
이게 다 뭘까.
그녀는 송선호의 알몸을 봤을 때만큼이나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역시 후회가 되기도 했다. 말하지 말걸.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잘 말했다 싶기도 했다. 뭔가 바뀔 수 있을까. 그런 기대가 없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쪽팔리기는 존나 쪽팔렸다. 다 커서 누구 앞에서 울어본 건 처음인데 그게 하필이면 그녀의 앞이라니…. 이 생각은 계속하면 진짜 어디서 뛰어내릴 것 같아 외면하고 싶다.
“발리볼 할 사람!”
여자들 중 하나가 비치 발리볼을 들고 그렇게 외쳤다. 직원들이 수영장에 네트를 설치하고 있었다. 차양 밑에서 선크림을 바르고 준비를 하고 있던 도현과 로웰이 손을 들며 일어났다. 남자들은 안 끼워주고 그들끼리만 할 모양이었다.
5대 5로 네트를 사이에 두고 도현 팀과 로웰 팀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지금 이 크루즈의 최고 대빵들이었다. 키가 작은 로웰은 물에 푹 잠겨 있었는데도 의외의 운동력을 발휘하며 잘 방어하고 있었다.
“아~ 킬스버그 님 오늘 왜 이렇게 못 해요!”
로웰이 서브 넣은 걸 도현이 잘 못 받자 팀원 중 하나가 웃는 낯으로 짓궂게 말했다. 도현도 오늘 자신의 기량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이 수영복. 자꾸 벗겨질 것 같아서 불편해.”
“그래요? 어디 봐요.”
금발 머리에 도현만큼 키가 크고 날씬한 여자가 그녀에게 다가가 튜브탑을 조정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경기를 재개하자 평소에 도현을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던 남자들은 그녀의 수영복이 벗겨지기만을 바라며 경기를 진지하고 즐겁게 관람했고,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들은 그녀의 수영복이 벗겨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벗겨지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는 양가적인 감정에 괴로워하며 경기에 집중했다. 승패(?)에 아슬아슬한 기분만큼은 최고라 할 수 있겠다.
“로웰 선생님 팀이 이긴다.”
“난 킬스버그 님.”
“어… 난 벗겨진다 쪽에 걸란다.”
“큭큭. 그럼 난 벗겨져라 쪽에 건다.”
오늘 오프인 남자 승무원과 스트리퍼들이 경기의 향방에 대해 내기를 걸고 있었다. 송선호와 다니엘은 확 열이 받아 그들을 잠깐 노려보았다.
‘씨발, 저것들이 어디서….’
‘얼려 버릴까….’
물론! 그들이라고 그녀의 가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웃으면서 열심히 경기를 하고, 그것도 아주 헐벗고… 대단한 눈요기였다. 그 와중에 사랑스러운 여자의 수영복이 실수로 약간 벗겨지며 그녀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가린다고 생각해봐라…. 생각만으로도 좀 아찔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더 바짝 그녀를 향했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공을 따라가고 다른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송선호는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도리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가 아까 그녀에게 일생일대의 고백을(물론 한 번도 그런 식으로 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했는데도 진짜, 정말, 1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나 그녀에겐 그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 걸까? 하지만 고백을 했을 때의 반응은 송선호가 생각했던 것만큼 최악은 아니었다. 눈물을 닦아주기까지 했다. 앞으로 노력하면 정말 그녀가 자신을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걸까? 지금까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쟤가 왜 좋은 걸까….’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으니 아주 근본적인 질문부터 떠올랐다. 그는 언젠가부터 그녀를 싫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정말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송선호는 가만히 도현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스톤하츠 씨는 도현 킬스버그가 왜 좋습니까?”
책은 그냥 장식품이고 도현만 쳐다보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물론 송선호도 그랬다. 송선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가 당황스러운지 송선호의 옆얼굴을 잠깐 보았다가 대답했다.
“처음엔 얼굴이나 외모가 제 스타일이라 끌린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도현 씨가 좋습니다. 종잡을 수가 없고 매력 있고 섹시하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합니다. 저도 도현 씨에게 그런 행복을 줄 수 있는 남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아주 솔직하고… 또 송선호를 좀 부끄럽게 하는 답변이었다. 다시금 근본적인 문제점이 하나 떠오른다.
‘내가… 도현 킬스버그라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는 남잔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는 다니엘 스톤하츠가 부러웠다. 역시 송선호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괴로웠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