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권
Money Talks
엘 드라카 (1)
Money Talks
22세기 메트로서울의 외곽엔 도현 킬스버그라는 여자가 살았다. 그녀는 성실하게 글을 써서 인세를 받아먹고 살던 작가였다. 어느 날부터 사람들은 그녀의 글을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다. 그 뒤 5년이 흘렀다.
“작가님, 원고는요?”
“…….”
도현 킬스버그는 그렇게 지금까지 글로 벌어먹고 살았다. 벌어먹기만 했는가? 흥청망청 써 볼 정도로 벌었다. 지금의 그녀에게 명작을 남기겠다는 사명감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읽어 잘 팔리는 글을 적는 것이 그녀의 지상 과제였다.
그런데, 잘 나가는 마도사에게서 마력이, 강력한 소드마스터에게서 오라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거 다 대출받아서 산 집 아니십니까, 작가님?”
말을 한 남자는 깐깐한 분위기를 풍기는 안경잡이 편집장이었다. 훤칠하고 탄탄한 몸에 잘 맞는 멋진 슈트를 입은 근사한 남자였다. 도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한때는 들고 가라며 그의 얼굴에 원고를 던진 적도 있었지….
“으, 응, 맞아….”
“1년만, 1년만 하다가 벌써 5년입니다. 있던 독자도 다 떨어져 나간 거 아시죠? 올해는 작년보다도 인세가 적게 들어올 것 같은데, 도대체 여기 이자 어떻게 내시려고 이러고 있는 겁니까, 예? 올해는 회사 빌딩 하나 세워주신다면서요!”
“…….”
그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갚아야 할 돈이 주택자금대출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전 들이닥친 채권자 중 하나는 사채 회사 사장으로….
[한창 창창할 아가씨가, 어? 이런 데서 돈을 이렇게 빌리고 그러면 어떡하나?]
얼굴에 심하게 스크래치가 난 대머리 뚱뚱보 아저씨였다. 아~주 험악하게 생겼다. 도현은 며칠 전 그렇게 험하게 생긴 아저씨들에 둘러싸여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게… 제가 너무 돈이 급해 가지고….]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그건 알고 이러는 거 맞지? 응?]
[네….]
[거, 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방법이 없어. 응. 알지? 그… 요새는 중국이야, 중국. 북경이나 상하이가 돈이 돼요. 반반하니까 가서 한 10년 헐렁~해질 때까지 구르면 대충 이자랑 원금은 갚지 않겠어?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
편집장은 그녀가 제1금융권, 끽해도 제 2금융권(뭐 요즘 세상에 그쪽도 장난 아니지만…)에서 빌린 돈이 많아 허덕이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미 기존 인세는 은행에 저당 잡힌 지 오래라 도현에게는 생활비 하나 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자 막을 돈과 생활비가 쪼들려 한 푼 두 푼 급전을 땡기던 것도 이제는 막을 길이 없어서… 먹고 죽을 돈도 없었다. 아니, 마이너스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까딱하다간 진짜….’
도현도 글을 일부러 안 쓴 것은 아니었다. 전작, 즉 6년 전의 <그 XXX의 사랑은 바로 나!> 시리즈로 준수하게 아시안 히트를 친 도현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 돈에 행복해했다. 몇백억짜리 집, 몇십억짜리 차들, 몇백억짜리 크루즈를 구입하곤 했다. 거기에 한 3년은 전 세계에 돈을 펑펑 뿌리고 다니며 놀았다.
그녀가 없는 집에서 태어난 건 아니었지만 곧 없는 집이 되어버린 환경에서 컸으니 겁이 날 법도 한데 이상하게 돈 쓰는 게 겁이 나지 않았다. 그 정도의 글은 언제든 마음먹은 자리에서 뚝딱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또 돈을 그만큼 벌고 그러면 또 흥청망청 쓸 수 있겠지. 살면서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그런데 이상했다.
글이 나오지 않았다.
졸부가 되고 나니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감각을 잊어버려서 그런 것일까?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그녀가 써 내린 프롤로그만 수백 개는 될 것이다. 그렇게 보낸 불멸의 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어느 것도 딱 하고 느낌이 오지 않았다. 앞부분을 그럴듯하게 쓰면 그 다음 내용이 아예 백지다. 이렇게 저렇게 끼워 맞춰도 괜찮은 스토리가 나오질 않았다. 게다가 빚이 더 쌓여가니 그나마 쓸 수 있던 프롤로그도 못 쓰게 되었다.
“삽화가로 만화가 로웰 리 선생님도 섭외해놨다구요. 작가님이 제대로 글만 쓰시면 문제없단 말입니다.”
도현도 아는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요즘 메가히트를 친 <다시 만난 시간>이라는 영화의 원작자였다. 그런 사람이 삽화를 그려준다면 그림을 보기 위해서라도 글이 어느 정도는 팔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성격이 나쁜 편집장은 아주 깔보듯이 도현을 보았다. 이딴 쓰레기나 쓰는 작가도 아닌 년. 그냥 얼굴에 쓰여 있었다.
“작가님같이 할 줄 아는 거라곤 타자 치는 것밖에 없는 사람이 이 일 말고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 졸부 근성만 생겨서 돈 밖에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누구 밑에서 쥐꼬리 같은 월급 받아 가면서 근근이 살아갈 수 있겠어요?”
“…너처럼?”
“하, 이 미친….”
‘년’이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도현은 정좌한 자세로도 아주 반항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작가님이랑 다르게 전 개념 있게 돈을 잘 쓰거든요. 그리고 제가 말 안 했습니까? 제가 우리 출판사 창립멤버라 주식도 많고 지금 작가님보다 훨씬 돈 많~습니다.”
거기까진 몰랐다…. 도현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구시렁거렸다.
“그렇게 돈 많으면 좀 빌려주든가.”
“댁 같이 밑 빠진 독에 어떤 정신 나간 남자가 돈을 넣어줍니까? 병신도 아니고.”
편집장은 냉정하게 말했다. 도현은 한숨을 쉬며 정좌한 다리를 풀고 카우치에 바로 앉았다. 공중에 떠 있는 멀티스크린에 7개의 프롤로그를 띄웠다.
“일단… 내가 지금까지 썼던 것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다 싶은 것 좀 골라봤는데 네가 한 번 보고 골라봐.”
그는 자기 휴대용 디바이스에 그것들을 쓸어 담고 도현의 멀티스크린에 트렌드 분석보고서와 구입한 대세 작품을 탈탈 털어 넣었다.
“요새 인기 키워드들 들고 와봤습니다. 대세 작품도 몇 개 가져와 봤구요.”
“나 이런 거 안 읽는 거 알잖아.”
“자기는 더 쓰레기 적으면서 지금 작품 가립니까? 표절이라도 하든 뭐든, 먹고 살려면 일단 뭘 쓰긴 써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들은 앉은 자리에서 서로가 넘겨준 자료를 보았다. 트렌드 분석표를 본 도현의 표정은 구겨지기만 했다. 게다가 대세작들은 몇 장 보지도 못하고 접었다. 하지만 편집장, 송선호는 도현이 쓴 프롤로그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어느새 도현은 멀티스크린을 치워버리고 카우치에 엎드려서 송선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편집장 역시 잘생겼구나…. 몸도 좋고…. 옷도 좋은 거 입었고 머리도 깔끔하고…. 근데 성격은 나쁘고…. 음? 이런 남자를 남주로 한 글이나 적어볼까? 먹고 살 만한 글이 나오려나?!’
도현은 집중해서 송선호의 얼굴을 보며 뭔가 더 많은 영감을 받아보려고 애썼다. 송선호는 그때부터 도현이 쓴 글에 영 집중하지 못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 얼굴 그렇게 본다고 뭐 안 떨어집니다.”
“아니, 뭔가 떨어질 것도 같아서….”
그렇게 계속 그의 얼굴을 보았더니 그가 짜증이 났는지 갑자기 절찬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리 집이라지만 옷이 그게 뭡니까? 돈도 많았던 양반이 왜 집에서 입는 옷은 그 꼬라지에요? 그게 옷을 입은 겁니까? 아무리 편집장을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게 본다지만!”
여자들이 이런 남자를 좋아할 리가 없다. 이렇게 여자한테 험한 말만 하는 남자. 도현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집이라서….”
도현은 짧은 요가 팬츠에 그 위에 가볍게 빅 사이즈 반팔 셔츠를 입은, 아주 평범한 집순이 여성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쓰리피스 양복을 입고, 멋진 시계를 차고,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송선호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자기 옷을 보았다. 그러니 거적때기를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다.
“갈아입고 올게.”
“아니, 글이나 읽으라니까…!”
송선호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송선호가 볼 수 없는 곳까지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다만 문이 없는 드레스룸의 입구 안쪽에는 벽면에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었고 거기에 비쳐서 그녀의 벗은 뒷모습이 송선호에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오, 저 미친년…. 저러니까 남자들이 쉽게 보지….”
위에 속옷도 안 입고 있었다. 송선호는 칠칠치 못한 도현 킬스버그의 모습에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도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가 그제야 거울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뒤를 돌아보자 황급히 휴대 디바이스로 눈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 땀이 쥐여 있었다.
그가 그녀를 알아온 지는 벌써 6년, 다시 만난 지는 이제 고작 반년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일까. 예전에도 이랬나? 그는 일할 때 절대 딴짓을 하거나 딴생각을 하지 않는 남자였다. 낙하산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었고 그런 소리 듣지 않을 만큼 일 잘하기로는 자타공인이었다. 하지만 꼭 이 여자 앞에서는….
그녀는 몸에 딱 맞는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송선호는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말했다.
“누가 집에서 그딴 걸 입고 있어요? 클럽 갑니까? 하여튼 머릿속에 놀 생각밖에 없어. 아주 그냥….”
송선호가 불평했다. 도현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좀 제대로 된 거 입으라고 해서 입은 건데.
“제대로 된 건 이런 거밖에 없어. 그리고 별로 딱히 클럽 안 가도….”
“됐습니다. 앉아서 책이나 읽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이제 집중하자고 자신을 다스렸다. 그는 도현이 쓴 글에다가 첨삭을 하고 전개를 제시했다. 얌전히 앉아서 책을 읽는가 싶던 도현은 영 집중을 하지 못하다가 카우치에 다시 엎드려 누웠다. 송선호 쪽으로 다리를 뻗고 말이다. 다리를 쭉 뻗어 다른 쪽 발목에 발등을 얹고, 짧은 원피스를 입고….
송선호는 아주 짜증이 탱천하는 얼굴을 했다.
‘저러다 보이지…. 저러다….’
시선을 느낀 도현이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저도 모르게 이상한 상상을 하던 송선호는 이번에는 타이밍 좋게 피하지도 못했다. 송선호는 핫, 하고 제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이야…. 줘도 안 먹어. 줘도….”
“뭐가?”
“아닙니다. 일합시다.”
송선호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은 얼굴로 냉철한 표정을 하더니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고 다시 글을 읽었다. 프롤로그 7개를 전부 첨삭하고 앞으로의 전개 방향에 대해 코멘트를 달고 보니 도현은 카우치 위에서 쿨쿨 잠들어 있었다.
“일할 생각이 없구만, 이 여자. 일을 할 생각이 없어. 이러다 빚 못 갚아서 어디 팔려가면 누가 찾아주나? 왜 난 재수 없게 이런 여자 담당이나…. 어휴, 내 팔자야.”
그는 그녀를 깨우려고 하다가 아까의 상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짜증이 났다. 그래서 더러운 것을 건드리듯 디바이스로 그녀의 어깨를 찔렀다.
“회의합시다, 회의! 침 닦고 일어나세요, 킬스버그 작가님.”
“아… 으응….”
도현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들은 7개의 작품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프롤로그를 보면서 설정을 합치거나 지우면서 같이 작품을 만들었다. 트렌드 분석 리포트도 참고했다. 끝까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아니라면 못 쓰겠다던 도현도 목구멍이 포도청인지 이번에는 말하는 대로 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첨삭을 끝낸 송선호가 집을 나서면서 도현에게 말했다.
“로웰 리 선생님이 한 번 뵐 수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예전부터 팬이었다구요.”
“어… 난 그런 거 싫은데.”
귀찮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지 괜히 신상이나 얼굴이 팔려봤자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같이 일하면 만날 텐데 그냥 만나요. 킬스버그 작가님과는 다르게 개념 있고 조신하고 참하고 괜찮은 여자니까 좀 보고 배우시든가.”
“어깨에 비듬.”
도현은 송선호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그의 어깨를 털었다. 송선호가 화악 하고 화를 냈다.
“그 수법에 제가 두 번 넘어갈 거 같습니까? 저 비듬 없습니다!”
“응, 잘 가. 머리 잘 감고.”
“없다고!”
“다음 주까지 시놉시스 짜볼게.”
송선호는 부글부글한 얼굴로 도현의 얼굴을 보다가 결국 돌아갔다.
*
하지만 다음 주는커녕 2주가 지나도록 시놉시스의 ‘시’자도 나오지 않았다. 도현은 명품 가방을 들고 명품 원피스를 입고 명품 구두를 신고 명품 선글라스를 쓴 채 만 원짜리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좌절하고 앉아 있었다.
‘난 안 될 거야. 안 될 거야….’
중고시장에 나머지 물건도 다 올려야 할 때가 온 걸지도 모르겠다. 이대로라면 언제 빚쟁이들이 집에 쳐들어 와 난장을 피워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그 아저씨들도 난 영 안 되겠다 싶어서 내 집도, 차도 다 팔아버리고 나도 어딘가 팔려 가서 변태 아저씨들이나 상대하면서 평생 빚 갚는…. 이걸로 할까? 이런 걸 써볼까?’
제목은 <돈이 XX>…. 하지만 도현은 곧 자신의 이마를 쥐어짜며 끙끙거렸다. 내 스타일이 아니야. 도현은 벼랑 끝까지 몰린 심정으로 휴대용 디바이스 화면을 보면서 이걸 썼다, 저걸 썼다 하다가 결국 늘어졌다.
‘그냥 죽자. 죽어. 인생 한 번 화려하게 살아봤으면 됐지. 별로 미련 없다. 죽자. 그냥 콱 죽어버리자.’
빚 앞에는 어떤 우아함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도현은 이마를 짚고 인상을 썼다. 그리고 지끈지끈한 이마를 부여잡고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스타벅스 건물의 저편에는 메트로 스퀘어가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큰 스퀘어였다. 마천루 사이로 거대한 홀로그램이 떴다. 곧 함성과 함께 마도사와 소드마스터들이 나와 시합을 벌이는 영상이 나왔다.
[<이스트드래곤>의 심장! 다니엘 스톤하츠!]
[<웨스트이글>의 날개! 미르 킹쉴드!]
불꽃을 내뿜는 마도사와 용병을 하다 스포츠 스타로 전향한 소드마스터가 화면에 나왔다. 9명이 한 팀으로 겨루는 현대판 글래디에이터 시합, TFC 경기 영상이었다. 밥 먹듯이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정말 살벌한 스포츠였다.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는 저쪽에 대해 잘 모르는 도현도 지나가다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남자들이었다. 둘 다 실력도 굉장하지만 미모가 뛰어나다 보니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라이벌 클럽의 양대 얼굴마담이다 보니 많이들 비교도 하고….
저 인기에 편승해볼까 하고 무작정 프롤로그를 써서 넘긴 것도 있는데. 그래서인지 도현은 머나먼 곳에서 방영되는 광고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도현 킬스버그 작가님이시죠?”
“아, 네…. 아, 로웰 리… 선생님.”
도현은 약속대로 만화가 로웰 리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샛노랗게 염색한 금발에 삐삐 머리, 뱅글뱅글한 안경. 엄청 예쁘고 어른스러운 그림체를 그리는 만화가가 아동용 만화에서 나올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신기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키가 150이나 될까 말까 한데도 굉장한 존재감이었다. 아무리 요즘 세상이라지만 이러고 다니는 데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도 사람은 좋아 보인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선글라스 안에서 그녀를 아래위로 품평했다. 하지만 티는 내지 않고 웃으면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와… 작가님 진짜 미인이시네요.”
아마 품평은 저쪽에서도 했던 모양인지 로웰 리가 도현을 보고는 그렇게 감탄했다. 도현이 사람 좋게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선생님 뵙는다고 오랜만에 힘 좀 줘봤어요.”
도현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만화 재밌게 잘 읽었어요. 팬이에요. 특히 <다시 만난 시간>은 진짜 명작…. 그리고 그림체도 너무 예쁘구요. 영화도 드라마도 좋았는데 역시 저는 원작이 좋더라구요.”
송선호가 잔소리를, 잔소리를 그렇게 하고 간 날은 글도 안 써지겠다 싶어 로웰 리의 작품을 밤새워 가며 전부 읽었다. 그림체나 내용도 내용이지만 순간순간 앗 하는 표정과 연출이 정말 대단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빨려 들어가서 읽었다.
“선생님은 천재예요. 제발 후속작 좀 써주세요.”
“아니에요. 작가님이야말로…. 저, 작가님 <바로 나!> 시리즈 보고 만화가 됐어요. 글 쓰는 재주가 없어서 만화로라도 이런 작품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로웰은 쑥스러운 듯 코를 슥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그녀가 자신의 팬이라는 얘기는 미리 들었지만 이렇게 진지한(?) 팬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장르가 장르인지라.
“그거… 고맙습니다.”
도현도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진짜 별거 아닌데 그거… 그냥 지름작이었고….
“송 편집장님한테 얘기는 들었어요. 이번엔 TFC 선수와의 사랑 얘기를 적으신다면서요? 제가 거기에 확 꽂혀서 삽화 그린다고 했거든요. 한 번쯤은 피와 살이 난무하는 그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달까!”
송 편집장이 로웰에게는 그렇게 얘기했나 보다. 하긴 넘겨준 7개 프롤로그 중에서는 그게 제일 낫기도 했고. 달달~하고 가슴이 찡~한 로맨스 만화를 그리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기엔 신기한 말이었지만 도현은 개의치 않았다. 먹고 사는 것과 취향이 다른 것은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도현은 아직도 그 7개 중에서 뭘 선택해서 써야 할지도 감을 못 잡고 있었다. 도현은 겨우 한숨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도 사람들이 좋아하니까요. 큰돈도 왔다 갔다 하고. 근데 솔직히 선생님한테만 말씀드리자면… 잘 모르겠어요. 뭘 써야 할지…. TFC 관련 얘기 적으면 재밌을 거 같긴 했는데….”
그 뒤를 어떤 내용으로 채워 나가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냥 초반에 잔뜩 떡밥만 던졌다. 뒤에서 당최 회수를 할 수 없었다. 역량에 넘치는 걸 도전하려고 하는 느낌이랄까. 로웰이 오히려 눈을 반짝이더니 의견을 제시했다.
“아예 대놓고 실존 인물을 캐릭터로 차용해서 쓰는 건 어때요? 스톤하츠나 킹쉴드 같은 남자들, 진짜 로맨스 판타지에나 나올 것 같은 남자들이잖아요. 잘생겼고, 성격도 대조적이고….”
“그렇죠….”
인생을 쉽게 살자면 영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 실제로 있는 놈들을 어떻게든 버무려서…? 어차피 단군 이래 이 땅에 새로운 건 없다고도 하고. 로웰의 말에 도현은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적겠다고 마음만 먹어 놓고 TFC에 대해서 잘 몰라서요.”
“그래도 스톤하츠랑 킹쉴드는 잘 알지 않으세요? 동인 쪽에서는 요새 안 팔아서 못 살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요.”
“뭐가요?”
도현이 갸웃했다. 동인 쪽은 손 뗀 지 오래다. 로웰이 말했다.
“TFC 팬픽이요. 특히 스톤하츠랑 킹쉴드는 요새 번갈아 가면서 올해의 선수에 뽑히기도 해서 인기가 대단하죠. 미하엘 로드리게스나 치엔이 루카스도 인기 많구요. 신태호는 말할 것도 없구요. 팬픽을 보면서 그쪽 트렌드를 알아 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피와 살이 난무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더니 TFC 팬인 모양이었다. 무슨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외견을 하고 의외다.
“그쪽에 관심 많으신가 봐요? 전 정말 이름만 들어본 정도라서요….”
“사전조사 많이 하셔야겠네요….”
그제야 로웰도 도현이 얼마나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같이 일을 하기로 한 사람이 이러니 얼마나 못 미덥겠는가. 도현은 다시 ‘그냥 죽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웰이 갑자기 덥석 도현의 손을 잡았다.
“작가님, 저 작가님이 정말 좋은 글 쓰시리라고 믿어요. <바로 나!> 시리즈도 외견만 보면 가벼운데 그 안에 있는 진정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거잖아요. 작가님이라면 분명히 그 어떤 소재로도 로맨스 덕후들을 빠지게 만들 대작을 적을 수 있을 거예요!”
금발 삐삐 머리에 뱅글뱅글 안경이 열정을 담아 말했다. 도현은 솔직히 진짜 감동먹었다. 이런 말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선생님…!”
맨날 편집장한테 구박만 듣던 지난 세월이었다.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같은 편집장 담당이기도 했고.
‘역시 못생긴 애는 착하다니까!’
*
미르 킹쉴드. 다니엘 스톤하츠. 필리페 버밍험. 미하엘 로드리게스. 제수스 강. 치엔이 루카스. 신태호. 카흐 밀란… 지금까지 TFC 쪽은 잘 몰랐는데 팬 커뮤니티나 잡지, 채널, 스페이스 여기저기에 정보가 굉장히 많았다. 너무 많아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동아시아의 경우 강호 클럽이 다수 포진하고 있는 데다가 한국은 메트로서울 연고 클럽 <웨스트이글>이 존재하여 <웨스트이글>에 대한 정보가 많았다. 거기에 근 2~3년 올해의 선수, 즉,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로 떠오른 이들이 바로 이웃 나라 도쿄의 <이스트드래곤> 소속 다니엘 스톤하츠나 <웨스트이글> 소속 미르 킹쉴드로 둘 다 굉장한 미남이다 보니 정보가 제일 많았다. 무슨 팬아트도 수두룩하고 2차 창작물이 넘쳐났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검고 긴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수려한 얼굴선과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현대식 미남의 기준에 부합하다 못해 넘치는 스펙이었다. 여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은 현실감이 없을 정도다. 경기에 집중을 하고 있는 얼굴이 멋있다. 인터뷰 영상이 적은 게 좀 아쉬웠다.
미르 킹쉴드는 소드마스터답게 아찔할 정도로 굉장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키는 2미터에 달했고 어깨는 아주 부자에다가 팔도 다리도….
‘그리고 이 엉덩이….’
진짜 탄탄해 보인다…. 노출 화보 같은 거 없나…. 속옷광고…. 도현 킬스버그는 자료조사 중 본능에 이끌려 그녀가 가진 모든 서치 능력을 동원하여 그의 노출사진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아니…! 이런 자본주의 세상에! 어떻게 이런 남자 벗은 사진이 하나 없을 수가 있지! 이렇게 원하는 사람이 많은(?)데!’
도현은 분노했다. 그녀의 커다란 빚덩이 중 하나인 으리으리한 집의 한가운데 앉아 집중해서 글을 쓰려다가 결국 또다시 실패했다. 그녀는 요가 팬츠에 박시한 후드 저지를 입고 선글라스만 낀 채 집 밖으로 나갔다. 사랑하는 비싼 애마를 끌고 스타벅스로 향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도현은 차를 주차해두고 커피를 든 채 어슬렁어슬렁 공원을 걸었다. 이런 백수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다 관광객일까? 커피를 다 마시곤 공원 한가운데 있는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또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어쩐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점점 싫어져서 구석진 곳으로 가다가 보니 요즘은 잘 쓰지 않는 굴다리 같은 게 나왔다.
‘예전엔 다 이런 데로 걸어 다녔지….’
요즘은 이런 외진 곳은 다 막아 놓을 텐데. 테러 위협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며 화려한 그래피티를 감상하며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안에 있는 걸까? 탁탁탁, 뭔가 일정한 박자로 소리가 난다. 야외에서 나는 소란과는 다른 이질적인 소리였다. 딱히 관심이 드는 건 아니고, 이쪽으로 나갈 생각이라 계속 걸었다. 코너를 돌다가, 후다닥 뒤로 돌아왔다.
‘엉덩이…!’
어떤 커다란 남자가 자위를 하고 있었다. 변탠가? 물론 변태겠지. 근데 그 변태의 엉덩이가 끝내줬다. 볼륨감이 일단 탈 인간계급이고 각이 팍팍 진 근육이 그리스 조각상 저리가라였다. 어우, 그래도 요즘 세상에 너무 부주의하게…. 도현은 슬그머니 휴대 디바이스를 꺼내 촬영을 시작했다. 섹스라면 차라리 그러려니 했겠는데 저런 남자가 여기서 자위….
‘변태다. 순도 100% 변태야!’
이건 소재감이다! 도현은 이 소재를 어떤 캐릭터에 어떻게 탑재하여 내놓을지 즐겁게 상상했다.
저렇게 좋은 몸을 가진 남자가 사실은 여자들에게 인기도 없고 가난해서 집에선 할 곳이 없어서 항상 낡은 굴다리에 와서 자신을 달래다가 순진한 여주와 딱 마주친다…. 오랜만에 초조하지 않은 상상이었다.
도현은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참 좋은 엉덩이야…. 거의 킹쉴드 급….’
자신의 티셔츠를 끌어 올려 입에 물고 있던 남자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옷깃을 놓았다. 그의 근육질 복부가 꿈틀거렸다. 뭔가 픽픽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옷을 추켜올리고 몸을 돌렸다.
“와, 진짜 킹쉴드…!!”
하늘색 눈동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콧대, 햇빛의 색깔 같은 플래티넘 블론드, 저 오만한 표정! 도현은 비명을 질렀다. 물론 미르 킹쉴드도 도현을 발견했다. 미르는 곧바로 도현에게 쇄도해왔다. 그렇다. 이건 쇄도였다. 진짜 눈 한 번 깜빡했을 뿐인데 그가 도현의 앞에 도달했다. 그는 도현의 휴대 디바이스를 빼앗아 우그러뜨렸다.
“이 여자가 겁도 없이… 도촬하면 경찰한테 잡혀가는 거 몰라?”
맞는 말이다. 인터뷰에서 들었던 것보다 멋진 목소리였지만 분위기가 험악한 게 문제였다. 하지만 도현 킬스버그는 이제 인생에서 더이상 잃을 게 없는 여자이지 않았던가! 그녀는 개겼다.
“공연음란죄도 벌금 셀 텐데요. 돈 많으셔서 상관없으려나?”
“…지금 협박하는 거야?”
그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여자가 사람도 하나 없는 곳에서 그에게 개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남자인지 모르는 건가. 게다가 놀랍게도 그녀는 거기서 더 개겼다.
“그리고 제 폰 그거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한 번 해봐. 누구 말 믿나.”
“저 벌써 영상 저장했어요. 클라우드에도 있고….”
“지워. 당장 지워. 고소한다?”
“근데… 좀만 떨어져 주시면 안 될까요? 냄새나는데.”
“!”
오만을 빚어 놓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사는 남자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는 건 꽤, 장관이었다. 혹시나 사람을 칠까 봐 좀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 막장인 남자는 아닌 것 같았다. 도현은 웃으면서 말했다.
“일단… 제가 좀 바빠서. 연락처 주시겠어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곰곰이 생각 좀 해보다가 연락드릴게요.”
이거 좀 대박 맞지? 응? 인생 죽으라는 법만 있는 건 아니구나. 채무탕감의 길이 좀 보이는 것인가! 인생 낭떠러지에 이른 도현에게 무서울 것은 없었다. 도현은 미르 킹쉴드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미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 주면?”
“그것도 차차 생각해보구요.”
“너… 인생 두 번 사냐? 그러다가 진짜 인생 조진다.”
미르 킹쉴드는 아주 고깃덩어리를 보듯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더 이상 조질 인생이 없어서요.”
네가 빚 때문에 남의 나라에 팔려갈 지경에 이르러 봤니?
*
“오, 대박! 진짜 킹쉴드 전화번호!”
도현은 현물로 받은 비즈니스 카드를 보면서 좀 흥분했다. 돈을 달라고 할까? 급전이라도 빨리 갚으면 그래도 숨통이 좀 트일 텐데. 나도 행복, 빚쟁이 아저씨들도 행복~.
“에잇, 기분이다!”
도현은 그대로 쇼핑을 하러 갔다(…). 방금 미르가 부숴버린 최신기종 휴대폰을 새로 샀고(당연히 신용카드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쫘악 빼입고 화장에 머리까지 완벽하게 세팅을 했다.
“아, 오랜만이야! 이 기분!”
가진 게 많~은 거 같은 이 기분! 그 순간이었다. 방금 그녀가 나온 백화점이 갑자기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으악!!”
“테러! 테러다!”
“꺄아아악!!”
총을 쏘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비명과 총성이 사위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테러다…!’
전 세계가 전쟁통이니 이젠 메트로서울에서도 테러가 빈발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런 대형 쇼핑몰에서 폭탄이 터진 건 그녀가 알기론 처음이었다. 도현은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총알이 빗발치는 소리를 들으니 그대로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이대로 죽는 걸까?’
죽는 게 나은 걸까. 도현은 덜덜 떨었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앙! 엄마!! 엄마!!!”
어린애였다. 나이는 여섯 살이나 됐을까. 아이는 부모와 떨어지게 되었는지 혼자 울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이를 보지 못하고 픽픽 치고 지나갔다. 저러다간 총에 맞기 전에 사람들에게 밟혀서 죽을 것이다. 도현은 그 순간 높은 구두를 벗어서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쉿. 쉿….”
“엄마…. 엄마아….”
“괜찮아. 언니가 엄마 찾아줄게.”
어디로 가야 할까. 어느새 사람들이 주변에서 싹 사라졌다. 도현은 콘크리트 가루와 연기로 가득한 주변을 불안하게 돌아보며 걸었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텅! 팅! 그런 소리가 들리며 총알이 튕겨 나갔다.
“여자랑 애한테까지….”
묵직한 목소리였다. 도현은 덜덜 떨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나로 내려 묶은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한 체격. 그는 도현과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괜찮습니까?”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걸 알았지만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고급 쇼핑 거리이니 충분히 그가 있을 법도 했다. 도현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니엘은 그녀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다른 곳을 경계하다가 다시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그렇게 도현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유명한 마도사인 그는 주변에서 아무리 총알이 빗발쳐도 문제가 없었다. 아예 총알이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어떻게 한 것일까. 사람들이 주변에 너저분하게 쓰러져 있었다. 몇몇은 움직이고 몇몇은 움직이지 않았다. 곧 짙은 남색으로 도색한 대테러진압부대 차량들이 나타났다. 차가 우르르 지나가고 나서는 뒤따른 부대원들이 민간인들을 이동시켰다.
일단 위험구역 밖까지 나온 세 사람이었다. 구급차에서 모포를 받아 도현과 아이를 같이 감싸주고 가만히 곁에 있어 주었다. 연기를 마셨을까 봐 산소호흡기까지 대어주었다.
‘이런 남자가 진짜 있구나….’
몸을 날려 여자와 아이를 구하는 남자. 물론 마도사라는 사기캐이긴 하지만. 표정이 무뚝뚝한 것이 어쩐지 더 믿음직한 남자였다. 도현은 그제야 조금 생각할 만한 정신이 들어서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도현을 보고 있던 다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다니엘 스톤하츠! 스톤하츠 씨 아닙니까?”
민간인들을 이동시키고 있던 대테러부대 SEAL 부대원이 다니엘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는 다니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테러 조직 쪽에 마도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반격이 안 먹힙니다. 부대 마도사는 지금 서울에 없어서 당장 대응이….”
그는 약간 당황하더니 도현을 돌아보았다.
“여기 가만히 있으십시오. 금방 돌아올 겁니다.”
“…….”
“여기 있을 겁니까? 대답하십시오.”
“…네.”
도현이 대답하자 다니엘은 그제야 안심하고 부대원을 따라갔다. 10분쯤 뒤에 찡하는 고주파 음이 퍼져 나갔다. 귀가 먹먹했다. 건물이 마저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30분쯤 뒤에 그가 돌아왔다. 그의 발걸음이 빨랐다. 구급차에서 응급처치를 받던 사람들도 위험하다고 다시 대피를 하고 있었다. 도현은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경찰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걷다가 그에게 어깨를 잡혔다.
“기다린다고 했지 않습니까.”
“나가야 한다고 해서요.”
그는 도현의 벗은 맨발을 보더니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리 오십시오.”
“네?”
“여기 앉으십시오.”
도현은 아이를 꼭 안은 채로 엉거주춤 그의 무릎에 앉았다. 무거워서 힘들어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단단했다. 그는 어느새 상처투성이가 된 도현의 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빛이 은은하게 나더니 상처가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원래 이런 거 잘 못합니다만….”
좀 무뚝뚝해 보일 수도 있는 그의 말투였지만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도현의 손에서 구두를 빼앗아(진짜 뺏는 수준이었다) 다시 발에다 신겨주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안은 도현을 그대로 슥 안아 들었다.
“아! 괜찮은데…! 걸을 수 있어요!”
도현은 깜짝 놀라서 그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구두 신고 어떻게 여길 걸으시겠습니까. 아직 많이 떨고 계십니다.”
방금까지 쇼핑을 하던 백화점이 바로 뒤통수에서 터졌는데 안 떨리고 배기겠는가? 도현은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자기 발로 서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은데…. 괜찮아요. 무거워요.”
“안 무겁습니다.”
그렇게 계속 실랑이를 하다 보니 벌써 봉쇄된 거리를 빠져 나왔다. 거기도 경찰이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유명 스포츠 스타가 나오니 기자까지 달려들었다. 도현이 깜짝 놀라서 얼굴을 가리니 다니엘이 모포로 도현과 아이의 얼굴을 살짝 가려 주었다.
“부상자가 있습니다. 인터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비켜주십시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기자들도 빨리 비켜주었다. 카메라 세례는 뒤따랐지만 말이다.
“이제, 이제 걸을 수 있어요.”
인파가 좀 적어졌다.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좀 아쉬운 표정으로 도현을 내려주었다. 도현은 히끅 거리면서 자신의 품에 얌전히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리고 다니엘을 보면서 감사의 말을 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다니엘은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역시나 좀 쑥스러워했다. 헛기침도 몇 번 했다. 도현은 여전히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걸 알아차릴 새가 없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응?”
도현은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물었다. 애는 그제야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아….”
애가 엄마를 찾기 시작하자 도현은 아차, 하고 자신의 쇼핑가방을 뒤졌(그 난리 통 속에서도 챙길 건 챙겼다)다가 아직 뜯지 않은 디바이스를 바로 쓰기엔 무리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니엘은 도현을 보고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를 보며 아주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녀가 그렇게 부탁하자 다니엘은 얼른 주머니를 뒤져 자신의 디바이스를 꺼내 주었다.
“제 디바이스가 아직 개통도 안 돼서요. 얘, 얘. 엄마나 아빠 전화번호 기억하니? 응?”
그러자 다니엘은 뭔가 더 혹한 거 같은 얼굴이 되더니 말을 걸었다.
“여기 아동용 목걸이 있습니다…. 유부녀 아니셨군요….”
다니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아차 하고는 얼른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아이가 있으시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젊고 아름다우셔서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만….”
그제야 도현은 다니엘이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라면 아마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물론 감상은 간단했다.
‘역시 TFC 선수….’
이 상황에도 여자가 여자로 보이는 모양이다. 살짝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가 갑자기 그가 부자라는, 아니,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호호.”
도현의 얼굴에 꽃같이 환한 미소가 피었다.
*
[작가님! 벌써 한 달 지났습니다, 예?! 일주일이면 시놉시스 나온다면서요!]
“아, 그게 일이 좀….”
[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또라이년이! 당장 글 안 써?! 또 뭐하고 노닥거리고 다니는 거야! 너 진짜 그러다가 어디 팔려간….]
도현은 전화를 뚝 끊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테이블의 건너편에는 돈이… 아니, 다니엘 스톤하츠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잠깐 일 관계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실례가 아니라면.”
“소소하게 여행 다니면서 칼럼 쓰고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 호호.”
“작가셨습니까…. 어쩐지 정말 똑똑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것저것 많이 알게 된다. 다니엘은 보기보다 굉장히 무뚝뚝한 남자였다. 말의 내용은 배려심이 깊었지만 표정도 어조도 크게 변화가 없었다. 저렇게 화려하게 생겼는데 숙맥일 리도 없고…. 그렇게 웃으면서 식사를 하는데 그때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분명히 고의로 다니엘의 잔을 넘어뜨렸다. 순식간에 다니엘의 옷을 적셨다.
“어머!”
도현이 깜짝 놀라서 다니엘을 보았다가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 미안.”
쨍한 하늘색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다운 변태, 미르 킹쉴드였다. 다니엘은 확 하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도현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마법으로 옷을 적신 술을 깨끗이 날려 보냈다. 미르는 도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아주 탐탁지 않은 기색을 내비쳤다.
“실례인 줄 알면 그냥 가지.”
“이런 미녀랑 이런 곳에서 밥을 먹냐, 네가…. 좀 놀라서.”
도현을 미녀라 칭하는 그의 뒤로는 쭉쭉빵빵한 미녀들이 줄을 이었다. 미르 킹쉴드의 난봉질이야 유명했다. 미르 킹쉴드는 대놓고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시비를 걸었다. 둘은 라이벌 클럽에 소속되어 있고 서로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은 어디서 들어봤지만…. 여자를 데리고 있는 선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반은 짓궂은 장난이고 반은 그가 데리고 있는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는 표시이기도 했지만 도현은 그 사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런 재미없는 놈이랑 놀지 말고 난 어때? 내가 진짜 끝내주기로 소문이….”
그러면서 미르가 도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고 하자 파칭, 하며 미르의 손이 얼었다! 미르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콰직 하고 주먹을 쥐어 그 얼음을 깨부쉈다.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시시한 놈.”
그 말에 다니엘은 얼굴을 팍 구겼다. 미르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곤 아주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자들을 끼고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다니엘은 굳은 얼굴로 도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아니에요. 스톤하츠 씨 때문이 아니라 킹쉴드 씨 때문인데요. 게다가 지금은 제가 감사의 의미로 밥 사드리기로 한 거고…. 그때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거든요.”
도현은 그렇게 말을 돌렸다.
“거의 다 먹었는데 일어날까요? 다른 데 가서 술이나 한잔해요.”
도현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웨이터를 불렀다. 계산 후에 잠깐 화장을 고치겠다고 화장실에 간 도현은 가만히 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거짓말처럼 미르 킹쉴드가 나타났다. 그는 도현을 발견하자마자 아주 기뻐했다.
“역시 그 새끼는 시시했지?”
그때 떡진 머리에 후드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더니만 도현을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미르는 마치 이 세상 여자들은 다 자기 거라는 듯이 바로 도현을 품에 안으려고 시도했다. 도현은 새로 산 휴대 디바이스의 화면을 켜서 내밀었다.
탁탁탁탁!
“…….”
미르의 웃는 얼굴이 바로 정색으로 돌변하는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서더니 곧바로 디바이스를 또 뺐었다. 도현이 질색을 했다.
“부수지…!”
우드득. 이미 새 디바이스는 콩알만 해졌다. 도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거 진짜 손해배상 청구할 거예요. 똑같은 걸 두 개나…!”
“이 목소리… 그때 그….”
미르는 충격을 먹어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도현은 그를 비웃었다.
“어지간히 잘하시겠네. 그렇게 잘하시는 분이 저런 데서 왜 그런 걸 해? 지금도 하러 온 거지? 이런 데서나 꼴리는 거야. 맞지? 맞지? 변태 새끼.”
겁대가리를 아주 상실한 년이었다. 미르 킹쉴드는 여러 소드마스터들과 같이 다혈질이었다. 그는 욱했다.
“너…!”
그 순간 도현의 머리카락이 휙 바람에 휘날렸다. 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의 주먹이 꽂혀 있었다. 도현은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팔을 힐끗 돌아보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들 중 하나였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탱크를 날리고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그런 남자였다.
‘근데 내가 요새 이거 말고도 죽을 뻔한 적이 있어서!’
누차 말했지만 도현 킬스버그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미친년이다.
“그래, 그냥 쳐라. 쳐. 어? 치자. 아르바이트 좀 해보자고.”
도현은 허세를 부렸다. 한 대 맞으면 아마 아르바이트까지 갈 것도 없이 저승행이겠지만.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계속 들이대니 미르는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연락 안 하길래 조용히 짜져 있는 줄 알았더니만…. 너 도대체 뭐야? 스톤하츠는 또 어떻게 낚았냐? 쟤도 뭐 약점 잡았어?”
“그럼 어쩔 건데? 어? 어쩔 건데?”
“…사람 피 말리지 말고 빨리 액수나 불러.”
미르 킹쉴드는 그렇게 말했다. 오. 얘기가 빨라, 빨라. 도현은 슬그머니 운수를 뗐다.
“얼마나 줄 수 있는데?”
“얼마 부를 건데.”
도현은 아주 아무렇지 않게 한 번 운을 띄웠다.
“50억 정도는 어때?”
“이 미친년이!”
그의 입에서 바로 욕설이 나왔다. 그래… 그건 안 될 줄 알았다. 도대체 이런 건 시세가 얼마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괜찮은 건수 같은데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제값 꽉꽉 채워 받고 싶단 말이다.
“너무 비싸다,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응?”
“너 같으면 그딴 거에 50억을 내겠냐? 차라리 공연음란죄로 벌금을 내겠다!”
“에게…. 이런 거 인터넷에 퍼졌다간 광고고 뭐고 다 잘릴 지도 모르는데. 이미지 어쩔 거야…. 아무리 돈 많다지만 남 보기 부끄러울 텐데.”
“까짓것 내가 얼굴에 철판 깔아버리면 어쩔 건데?”
어, 그러게…. 그리고 미르 킹쉴드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나서 내가 너 어떻게 엿 먹일 줄 어떻게 알고? 내가 인생을 좀 험하게 살아서 할 줄 아는 게 좀 많은 남자거든?”
미르는 도현을 깔보며 내려다보았다. 도현은 심플하게 대답했다.
“그럼 죽죠, 뭐.”
“…….”
마치 베짱이가 겨울 되면 굶어 죽지, 뭐, 하는 것과 비슷한 어투였다. 미르는 이런 미친년은 세상 처음이다, 라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도현은 슬슬 다니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한 번 살핀 그녀는 미르를 지나쳐갔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너… 스톤하츠 저 새끼가 얼마나 고지식한 놈인지 알고나 있냐? 네가 이런 썅년인 거 알면 걔가 너 같은 년 만나줄 거 같냐? 어?”
도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미르를 돌아보았다.
“저런 숙맥은 내가 안 만나.”
밖으로 나가니 다니엘이 초조한 얼굴로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두 번 봐도 좋은 차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가 열어주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디로 갈까요? 혹시 좋아하는 데 있으세요?”
도현이 물었다.
“제가 술집은 잘 몰라서…. 도현 씨 좋아하는 곳이면 어디든 좋습니다.”
“음….”
도현은 약간 고민을 하는 척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실례가 되는 게 아니라면… 저희 집 괜찮을까요? 집에 선물 받은 술이 좀 많아서….”
그러자 다니엘 스톤하츠가 눈에 띄게 긴장해서는 정면만 보고 있다가 겨우 대답했다.
“…좋습니다.”
다니엘은 더욱 긴장하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동차는 알아서 자율주행 중이다. 도현은 GPS를 찍어서 주소를 차에 등록시켰다. 그 뒤로 집에 갈 때까지 도현은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지지리도 말을 잘 못했다. 이제 보니 누가 봐도 숙맥이었다. 참 의외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다.’
아, 그건 맞나? 그렇게 그들은 서울의 외곽에 위치한 도현의 집에 도착했다. 도현의 집을 본 다니엘은 꽤 놀란 것 같았다.
“집이 진짜 좋군요.”
공원 같은 정원에 3층짜리 모던한 대저택이었다. 은은하게 주홍 불빛이 나고 있으니 더욱 운치가 있었다. 도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거의 은행 거예요.”
영원히 은행 거가 될지도 모를 지경이고. 도현은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3층에는 세련된 재즈바가 마련되어 있었다. 테라스 밖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그대로 보인다. 조명을 켜니 분위기가 정말 근사하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은은한 음악을 틀고 술을 골랐다.
“위스키 괜찮으세요?”
“…네. 주종은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얼음 넣어 드릴까요?”
“아뇨. 그냥 주십시오.”
다니엘은 거의 예, 아니오만 말하고 있었다. 도현은 그러려니 하면서 그의 잔에 위스키를 약간 따랐다. 그리고 자기 잔에는 얼음과 탄산음료를 잔뜩 넣고는 위스키를 약간 따랐다. 도현이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제가 독한 건 잘 못 마셔서요.”
“괜찮습니다.”
그 뒤로 다니엘은 긴장한 티를 팍팍 내면서 위스키를 연달아 세잔이나 벌컥벌컥 마셨다. 도현은 남자가 술 때문에 바로 맛이 가길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입가에 과일을 들이밀었다.
“안주도 드시면서 마셔요. 속 버려요.”
“쿠, 쿨럭. 아니, 괜찮습니다. 제가 먹겠습니다.”
다니엘은 당황해서 심하게 기침을 하고는 겸양했다. 도현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냥 드세요. 손 무안해요.”
그러자 다니엘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먹었다. 도현이 웃었다.
“술 잘 드시나 봐요?”
“아뇨. 그냥 남들 마시는 정도만….”
“TFC에는 관심 없었는데 다니엘 씨 때문에 찾아봤어요. 멋지더라구요. 올해의 선수로 뽑히셨다면서요? 대단해요. 자기 일에서 인정받는 남자, 정말 멋있는 것 같아요.”
“아닙니다….”
다니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그의 귀는 벌겠다. 도현은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의 귀를 만졌다.
“잘생겼는데 귀엽기까지 하네요.”
옛날에 한창 놀 때 같이 놀던 남자가 그랬다. 네 목소리로 남자를 띄워주는 말만 잔뜩 속삭이라고. 그러자 다니엘이 흠칫하더니 도현의 허리를 확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는 긴장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그날 구해준 답례로 이러시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까 식사 대접으로 갚았잖아요. 저 그런 거 때문에 이런 거 안 해요.”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니 다니엘이 결국 못 참고 도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거의 그냥 들이박는 식이었다. 의외로 숙맥인 것 같다 싶었는데 진짜 숙맥인 데다가 키스도 못했다. TFC 선수들의 난봉질이야 유명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전쟁터를 전전하거나 사람이나 몬스터를 죽이는데 도사가 된 이들이 스포츠랍시고 격투 및 살인 시합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남자들에게 내일이 어디 있는가. 술, 여자, 마약. 그런 게 항상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미르 킹쉴드처럼.
‘진짜 의외네….’
다니엘은 엄청나게 긴장해서는 이를 부딪치곤 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변명했다.
“도현 씨 같은 미녀와 이런 거 하는 건 처음이라….”
“거짓말이라도 기분 좋네요.”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이번엔 도현이 그에게 입을 맞췄다. 키스 실력을 뽐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에 깃털처럼 입을 맞추었다. 쪽쪽.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다니엘의 손이 도현의 허리와 허벅지를 꽉 잡았다. 도현이 민감하게 움찔하니까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도현은 입술을 떼고 그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하아… 기분 좋아요….”
그러자 다니엘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파드득 떨더니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그의 취향인 얼굴이었다. 거기에 도회적이고 세련되었다. 깡촌에서 자라 공부와 마법밖에 할 줄 모르던 그였다. 어렸을 적의 그는 항상 세련된 도시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시에 왔더니 온통 그의 돈이나 배경만 보고 달려드는 천박한 여자들뿐…. 남자는 몸만 들이대면 어떻게든 자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례한 사람들뿐이었다.
가녀리다 싶을 정도의 얼굴선. 눈빛. 하지만 도톰하고 붉은 예쁜 입술과 여성적이면서 뚜렷한 눈썹. 짙은 속눈썹이 그녀의 눈매를 더욱 깊고 그윽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키가 꽤 큰데도 여리하고 의외로 골반과 가슴이 돋보이는 여성적인 몸매도 가지고 있었다. 가만히 들을 때마다 기분이 둥둥 뜨는 것 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세상에 더이상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아니, 이런 걸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총알이 빗발치는데도 모르는 아이를 구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천사라도 떨어진 줄 알았다.
‘이 여자야…. 이 여자.’
몰랐다. 이런 여자가 자신의 취향이라는 것도. 이런 여자가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다니엘은 황홀했다. 이런 기분이 너무 어색해서 이상하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이 여자라면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정말, 엄청난 용기를 말이다.
“저… 제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천만 원이요’라고 거의 동시에 말할 뻔한 도현이었다. 그녀도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나중에 다 끝나고 입 싹 닦아버릴 수도 있으니까 미리 얘기를 해야….
“마, 말씀하실 거 있으신 거 아니셨습니까?”
“아뇨. 아뇨. 먼저 말씀하세요. 듣고 말씀드릴게요.”
“네… 네… 그게… 제가… 제가 사실은….”
다니엘은 말을 더듬거렸다. 무뚝뚝하고 누구만큼 사교성이 없어서 그렇지 뭐가 덜 떨어지거나 그런 것은 아닌데도 이 말을 하는데 너무나 큰 용기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다니엘도 전쟁터를 누볐다. 죽을 뻔하기도 하고 많이 죽이기도 하고. 경기에서 팔을 날려 먹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 맞설 때보다도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 말은.
‘아아. 내가 넘겨짚는 거 아닐까? 도현 씨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는데 내가 마음만 앞서서… 그런데 도현 씨도 지금 내 무릎에 앉아 있고… 내가 허벅지를 만지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고… 그녀도 날 원하는 거겠지? 그렇겠지?’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현 씨와… 오늘 밤을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제가 사실… 사실… 바, 발기부전이라 제대로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도현 씨가 좋습니다. 같이 있고 싶습니다. 괜찮습니까?”
진짜 머저리 같아 보였을 것이다…. 다니엘은 말을 한 걸 곧바로 후회했다. 도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의외의 말이긴 한 모양인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에 다니엘은 더더욱 후회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의 앞에서도 이렇게 머저리처럼 행동한 적이 없는데. 꼭 이렇게 잘 보이고 싶은 여자의 앞에서만 바보 같아지는 걸까. 하지만 도현은 곧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한 도현은 대답했다.
“그럼 2천이요.”
“…네?”
“돈 말이에요.”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현은 다니엘이 살려준 그 날 질렀던 카드값을 막아야 했다.
‘난봉질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였구나.’
그래도 하고 싶어 하는 걸 보니까 돈은 주겠다고 판단한 도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 다니엘 스톤하츠의 표정은 완벽하게 굳어 있었다. 긴장으로 굳은 게 아니었다. 화가 난 것에 가까웠다. 몇 초간 겨우 충격을 소화시킨 그가 입을 뗐을 때는 확실하게 화가 나 있었다.
“…이렇게 항상… 남자들을 데리고 왔습니까? 이 집에? 이러려고? 작가라고 하는 말이나 여행을 다닌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습니까?”
아니, 그건 거짓말이 아닌데…. 다니엘은 아주 화가 난 것 같았다. 생각보다 숙맥인 것 같아서 당황하긴 했지만 다른 남자도 아니고 TFC 선수들의 난봉질은 진짜 유명했다. 그들이 걸즈나 시스터즈를 유지하기 위해서 쓰는 돈을 생각한다면 2천만 원이야 우습다. 다니엘은 도현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하룻밤 삯으로는 좀 과하더라도 제안을 받아줄 줄 알았다.
‘너무 비쌌던 걸까?’
도현이 이런 시세를 알 턱이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글도 못 쓰고 빚쟁이들이 잔뜩 쳐들어 와서 집이고 차고 배고 다 날리는 것도 모자라 어디 멀리멀리 팔려갈 것은 눈에 선한 일이었다. 그런 도둑놈 같은 남자들에게 수수료 잔뜩 떼이면서 팔리느니 차라리 자유의 몸일 때 알아서 파는 게 수수료도 굳히고 이자도 막고 일석이조 아닌가?
“많이 화났어요? 미안해요. 원래는 천만 원만 부르려고 했는데 제가 요새 좀 힘들어서….”
다니엘이 솔직했던 만큼 도현도 솔직하게 다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모욕을 당한 것 같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도현이 무릎에 앉아 있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섰다.
“그런 문제가…!!”
다니엘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가 참았다.
“다시는… 다시는 저한테 연락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볼 일 없을 겁니다.”
어어… 도현은 약간 당황했다.
‘이런….’
역시, 주변에 여자가 천지인 이런 남자는 하룻밤 섹스가 아쉬울 리 없는 것인가.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가격이었나? 도현은 혹시나 싶어서 미리 안전장치를 해 놓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뒤도 안 돌아볼 것 같이 나가는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도현은 숨겨뒀던 카메라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제가 사실… 사실… 바, 발기부전이라 제대로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
다니엘이 경악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도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킹쉴드야 개새끼니까 그렇다 쳐도 다니엘에게는 아주 양심이 찔렸다.
“미안해요…. 제가 진짜 돈이 급해서….”
“…….”
다니엘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 무표정해졌다. 그리고 앗 하는 순간 도현의 손에 있던 카메라가 녹아버렸다. 도현이 녹아내리는 카메라를 놓쳤다. 그것은 바닥에 떨어져서도 계속해서 녹아내렸다. 마도사나 소드마스터나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괴물이다, 괴물.
“벌써 클라우드에 업로드 됐어요.”
하지만 킹쉴드 때도 몇 번 겪었던 것이라 도현은 무난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양심에 찔려서 좀 변명했다.
“혹시 할 거 다 해 놓고 입 싹 닦을까 봐서요. 설마 그런 고백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
“얼마 주실 수 있어요?”
“당장 지우십시오.”
“돈 주시면 지울게요.”
“…저 마도사입니다. 흔적도 안 남기고 사람 죽이는 건 일도 아닙니다.”
다니엘이 되려 협박했다. 도현이 ‘하하’하고 웃었다.
“그래도 요즘 세상에.”
“농담 아닙니다.”
다니엘이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도현은 양심이 팍팍 찔렸다.
“생각하실 시간 드릴게요. 생각해보시고 되는대로 금액 말씀해주세요.”
미르 킹쉴드한테는 한 번 크게 들이대 봤는데 역시 다니엘은 잘못한 게 없는지라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한동안 그녀를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자동차가 거칠게 달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바에 앉아서 다니엘이 남기고 간 술을 홀짝 마셨다.
“아, 쓰다….”
*
“작가님은 인간이 글렀습니다, 예? 아십니까?”
“…네….”
“대답만 고분고분하게 하면 단 줄 알아!”
송선호는 아주 빡치는 얼굴로 도현 킬스버그를 다그쳤다. 그녀는 카우치 위에 무릎를 꿇고 앉아 있었다. 게다가 송선호의 옆에는 로웰 리까지 있었다. 오늘도 뱅글뱅글 도는 안경을 쓴 그녀는 도현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창피했다. 그녀는 도현의 글이 좋아서 자기도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고 말해주었다. 한때 적지만 그저 그녀의 글을 읽어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엔 혼자 일하는 거 아니잖아요, 네? 로웰 리 선생님도 바쁘신 분이에요. 이런 분이 삽화 그려준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이 이기적인 여자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도현은 오랜만에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요새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빚이 사람을 망친다. 송선호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흥분에 씩씩거렸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있다고 얌전한 척하는 거야? 진짜 앙큼한 년….’
송선호는 겨우 후 하고 흥분을 가라앉히고 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보통 때 같으면 당장에 때려치우셨을 테지만, 그래도 로웰 선생님께서 작가님 팬이라서 이렇게 찾아와주신 겁니다. 작가님께 좋은 제안까지 가지고 오셨구요.”
“저한테요?”
저같이 쓸모없고 버러지 같은…. 도현이 로웰을 물끄러미 보았다.
“도현 작가님이 슬럼프에 빠지셨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것저것 다른 얘기도….”
송선호가 얼마나 자기 욕을 했을지 상상이 갔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네….”
“그래서 그런데… 작가님, 차기작 저와 함께 하실 생각 없으세요?”
“네? 삽화 말씀이신가요?”
로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전과 같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아뇨! 만화요! 제 스토리 작가가 되어주세요, 작가님!”
로웰이 뱅글뱅글 안경을 빛내며 말했다. 도현이 입을 딱 벌렸다.
로웰은 인기 만화작가다.
원래 소설보다 만화가 더 읽기 쉽다.
수출하기도 쉽다.
대박 치면 영상화도 쉽다.
그런 계산이 좌르르륵 지나갔다.
“게다가 로웰 작가님이 수익 배분도 5대 5로 해주시겠답니다. 보통 만화가 노동력이 더 들어가니까 그 정도까지 스토리 작가한테 배분을 안 하는데 로웰 작가님이 특별히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이 밥 버러지 같은 여자야.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5대 5…! 지금처럼 손 빨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게다가 로웰의 그림체면 아무리 후진 얘기라도 정말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그, 그치만… 저 만화 스토리텔링은 잘 모르는데요…. 괜찮을까요? 연출이나 이런 건….”
하지만 아직 약간의 양심이 남은 도현은 그렇게 우려를 표했다. 로웰이 고개를 저었다.
“저 작가님이 적으신 프롤로그랑 시놉시스 다 읽어봤어요. 솔직히 다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도 그중에서 작가님이 골라 두신 7개가 제일 괜찮더라구요. 그리고 특히 TFC 관련해서 적고 싶으시다는 그거! 그거 진짜 괜찮을 거 같았어요. 전쟁통을 떠돌다가 귀환한 남자가 TFC 스타 선수가 되어 명예와 돈도 얻지만 PTSD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여주가 치료해주는 거요!”
로웰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도현이 얼떨떨하게 말했다.
“근데 그거… 너무 뻔하지 않아요? 진짜 어디 동인지에서나 나올 것 같은 설정이잖아요.”
“뻔한 걸 안 뻔하게 하면 되는 겁니다!”
로웰이 뱅글뱅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녀는 콧김을 훅 뻗었다.
“22세기에도 여성들의 성적 판타지는 거세되어 있다구요! 우리 이걸로 <블랙의 50가지 그림자> 따윈 저 멀리 묻어버리는 여성 19금의 금자탑을 함께 쌓아봅시다!”
“!”
도현은 찌릿하고 뭔가가 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오랫동안 가출하였던 ‘영감’이라는 것이었다.
“…PTSD에 걸렸던 용병은 아무리 약을 먹어도 치료가 될 수 없었죠….”
도현이 그렇게 운을 떼자 로웰이 핫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벌을 받고 싶었던 겁니다.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돌아왔는데, 그는 전쟁영웅에다가 스포츠 스타까지 되어 있으니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는… 스스로도 모르고 있지만 사실 자신을 벌할 신과 같은 존재를 찾고 있었던 겁니다!”
“그겁니다, 작가님!”
도현과 로웰의 눈이 딱 마주쳤다. 흐흐흐흐, 두 여자들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들은 바로 태블릿과 멀티스크린을 공중에 띄웠다. 그들의 주위로 어두운 기운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 사실 제가 전에 좀 소재 거리를 발견하긴 했는데…. 이 스포츠 스타가 일주일에 한 번씩 공공장소에서 자위를 하는 거죠. 최대한 몰래 숨어서 하지만 사실은 누군가 발견해서 그를 혼내 주길 바라는 거예요.”
“오, 그거 좋은데요? 어디서 보셨어요?”
“후후, 이거 비밀이긴 한데…. 제가 나중에 우리 선생님한테만 특별히 공개해드릴게요. 놀라지 마세요.”
“흐흐… 기대됩니다. 역시 작가님이랑 저는 잘 통할 줄 알았어요.”
금발 삐삐 머리에 뱅글뱅글한 안경을 쓴 자기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여자와 멀끔한 외모를 해서는 속은 버러지 같은 여자 둘이 머리를 맞대어 멋지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 하나를 병신 만드는 이야기를 아주 열변을 토하며 만들고 있었다. 송선호는 약간 소름이 끼쳤지만 ‘아니야….’하고 수긍했다.
‘그래…. 그렇게라도 해라, 진짜… 진짜 어디 팔려가면 어떡하려고….’
전 세계에 전쟁통이 아닌 곳이 없지, 몬스터는 들끓지…. 파산? 그런 건 21세기에나 가능한 절차였다. 빚지고 못 갚으면 그 빚 갚을 때까지 이리저리 팔려 다니고 몸으로 굴러야 하는 건 이제 글로벌 기본 상식이다.
‘근데 저걸로 될까? 너무 마이너한 소재 아냐? 게다가 지금 덕후 둘이 만나니까 얘기가 더 산으로 가는 거 같은데?’
일해도 돈 갚을 정도로 못 벌면 결국 팔려가는 건 매한가지다. 송선호는 욕지거리를 하며 여차하면 급한 건 자기가 갚아주고 평생 빚쟁이 노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지만, 당최 이 여자가 벌여 놓은 판이 커서, 아니, 그것보다 얼마나 빚졌는지 말도 안 해준다. 그도 곧 작품 회의에 들어갔다.
“잠깐, 잠깐만요. 너무 나갑니다, 지금. 예? 아직 우리 정서가 그게 아니에요. 좀 진정합시다. 이런 건 느낌이 더 중요한 거라구요, 느낌이.”
“잠깐만! 그거 동의할 수 없네요!”
“맞아! 여자는 야한 건 야할수록 좋은데!”
“세상 여자들이 다 당신들 같은 줄 알아? 그리고 이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 사이즈가?”
“왜? 여자는 큰 건 클수록 좋은데!”
“맞아요! 뭐든지 대대익선!”
“그죠, 선생님? 역시 배운 분은 다르시다. 전 남자는 D컵이라고 항상 생각했어요.”
“크, D컵 좋죠. 손에 꽉 차게.”
여자 둘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송선호는 거기서 아주 큰 사명감을 느꼈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 돈을 벌려면 이 여자들의 고삐를 내가 잘 쥐어야 한다, 송선호! 그래야지 부채청산, 빌딩건설!
도현 킬스버그의 빚덩어리 스윗홈은 그렇게 덕후 둘과 엘리트 편집장 하나의 아지트가 되었다. 사람이 모이니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무려 5년이나 버벅거리던 도현 킬스버그도 일주일 만에 아주 흡족한 콘티와 주옥같은 대사를 써내렸다. 로웰은 아주 쌍 따봉을 치켜들며 내릴 줄을 몰랐다. 도현은 로웰이 아주 좋았다. 송선호와는 달리 사람을 으쓱하게 하는데 큰 재주가 있었다. 힐링포션이다, 진짜.
연출과 세세한 콘티 작업은 셋이서 같이 했고 일주일이 더 지나니 컬러풀하게 색칠까지 다 된 만화 한 편이 완성되었다. 도현은 눈을 반짝거리며 몇 번이고 프롤로그를 읽었다.
“진짜 멋있어요, 선생님. 진짜 예쁘고 재밌어요.”
“다 작가님 글솜씨 덕분인데요.”
로웰이 코를 슥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다.
“기획이랑 이거 들고 회사에서 회의하고 연재랑 홍보 계획 짜올게요. 둘 다 이름 있는 소설가랑 만화가니까 아마 입소문 많이 날 거예요.”
송선호는 자신의 명품시계를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언제나 아주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녔다. 요새는 거의 도현의 집에만 있었는데도 자기 집에 꼬박꼬박 왔다 갔다 하면서 옷도 갈아입고 오고. 여자 둘은 아주 개판이 되어가는데 말이다.
“안 피곤해?”
로웰은 마감을 다 하고 카우치에 뻗어 있었다. 도현도 단순 색칠을 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같이 밤을 새웠지만 그래도 로웰보다는 괜찮아서 송선호를 배웅했다.
“네가 마지막 대사 한 줄만 계속 안 고쳤어도 덜 피곤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 집에 있을 거야? 연재하는 동안?”
“속도 나올 때까지는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로웰 선생님은 믿는데 너는 못 믿겠습니다.”
송선호가 명품 구두를 신으면서 그렇게 틱틱거렸다. 잠을 못 자서 그도 영 컨디션이 안 좋았다. 도현은 이제 그의 짜증이 너무 익숙해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그의 셔츠 카라가 약간 접힌 것을 보고 손을 뻗었다.
“그럼 그동안엔 옷이랑 물건 여기다 놓고 생활해도 돼. 방도 많고.”
그녀가 옷을 바로잡아 주자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아랫배를 확 긴장했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엄청 가까워졌다. 살 냄새가 날 정도다! 송선호는 털을 세우듯 화악 화를 냈다.
“너 같은 여자가 창놈들 재워준 방에서 내가 지낼 것 같아?!”
“또 말 못되게 한다… 나만 왜 이렇게 미워하나 몰라.”
도현은 한숨을 쉬더니 돌아섰다. 송선호는 화가 나 흥분해서 헉헉거리다가 홱 돌아서 그 집을 나갔다.
“질질 흘리고 다니는 거 봐라, 저… 내, 내가 넘어갈 줄 알고….”
송선호는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얼른 차를 타고 도망치듯이 회사로 향했다.
*
“새 유니폼 착용감은 어떠십니까, 킹쉴드 씨?”
“좀 가벼워진 것 같네.”
2미터의 키, 빈틈없는 근육질의 몸매. 그 몸을 꽉 조이고 있는 검은 전투복은 22세기 군사과학의 정수나 다름없었다. 방탄, 방검, 방마 기능에다가 흡수한 타격을 점수로 환산하는 기능까지 지니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의 TFC 클럽 <웨스트이글>은 중국계 인도사람인 제임스 첸을 구단주로 가지고 있는, 전 세계 4,500개가 넘는 클럽 중에 가히 최고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은 곳 중 하나였다. 메트로서울을 연고지로 한 다국적 선수들로 이루어진 클럽이다. 벤치까지 합치면 30명 정도가 있다. 물론 벤치라고 해서 훈련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엘 드라카>가 시작하고 반년이 지나면 주력 선수 9명에 벤치 21명이 전부 주전으로 뛴다. 사실상 모두가 주전이다. 리저브 팀(Reserve Team)도 30명 정도 있다. TFC 특성상 유스 팀(Youth Team)은 없다.
메트로서울의 외곽 과천구에 위치한 <웨스트이글>의 홈구장 <게헨-세나>에 위치한 의 제1 개별 테스트실이었다. 30명의 1군 멤버들이 전부 경기용 전투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전투복은 방위산업체 <한하방산>이 개발 및 검수하였다. 검은색 전투복 등 쪽에 양각으로 각 멤버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 외엔 아무런 무늬가 없었다. 다만 경기에 들어서면 클럽 후원자의 로고 광고가 홀로그램으로 뜬다.
목까지 꽉 감싸는 전투복이었다. 미르는 이리저리 팔과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은 헤드기어도 썼다. 미르가 헤드기어를 만졌다.
“헬멧 아니네?”
앞에 멀티스크린을 들고 있는 <한하방산> 직원이 테스트 봉으로 미르가 입은 전투복 곳곳에 전기자극을 주며 수치를 체크했다.
“광고주도 팬들도 선수들 얼굴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리퀘스트를 제일 많이 보내서요. 대미사일 도시방어 쉴드 기술을 접목해서 이렇게.”
그러면서 직원이 미르의 얼굴 앞을 봉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벌집 같은 문양이 허공에 생기면서 봉을 막았다. 그리고 전기를 주자 수치도 기록되었다. 미르가 자기 얼굴 앞을 한 번 스스로 만져보았다.
“뭐… 저번 리그 때 목 날아간 놈이 다섯 명이나 되니까.”
“그렇죠. 이제 목은 안 날아갈 겁니다. 미사일도 막는 기술인데요, 이거.”
“이거 군복에는 언제 적용되냐?”
“글쎄요…. 이거 하나만 해도 몇억은 하는 거라. 수가가 떨어지기 전까진…. 전투 슈트도 군복으로 못 만드는데요, 뭐. 그래도 이건 단가 5천까지 낮추긴 했는데.”
“그렇지….”
직원은 수치를 보면서 톡톡 멀티스크린을 탭 했다.
“이제 전쟁은 드론전이다, 뭐다 해서 드론에 투자한 돈 다 날렸습니다. 원격 조종해봤자 금방 해킹당하지, 방해전파 쏘면 그냥 고철덩이 되지. 결국 전쟁은 사람이 하는 거더라구요. 몬스터전에나 좀 쓸 만한데…. 비싸다고 사주나요, 걔네들이.”
“그렇더라.”
미르는 전쟁터에서 꽤 이름을 날린 전쟁 용병이었다. 남들보다 수십 배는 더 좋은 신체조건에, 엄청난 맷집과 파워를 가지고 오라를 날릴 수 있는 능력은 단 한 명만으로도 전선을 흐트러뜨리고 게릴라 전의 효용을 월등히 높일 수 있었다. 대몬스터전이든 대인전 마찬가지였다. 10대 중반부터 활동해서 주로 대몬스터전 위주로 전선을 전전했다. 동해, 체첸, 수에즈, 남중국해같이 각종 물류 활동의 중심지에 나타난 몬스터 게이트를 막았다.
보통 이런 전쟁에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용병이라고 해봤자 서민층 이하 빚 많은 가정 출신이 대부분이다. 이런 장비가 제공될 리가 없었다. 그나마 운 좋게 능력을 타고난 이들은 좀 오래 살 수 있을 뿐이었다.
“성 팀장님, 로드리게스 선수 수치 10%씩 더 나오네요. 조정 부탁드립니다.”
“아,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미르의 앞에 있는 직원, 금 팀장이 마이크에 대고 그렇게 말하자 저쪽에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금 팀장은 그 이후로 테스트 봉의 수치를 점점 높였다. 미르의 복부에 대고 테스트 봉의 수치를 최대로 해서 충격을 주자 미르가 움찔했다. 미르의 목에 붉은 불빛이 나며 경고음이 삐삐 울리기 시작했다. 전투복이 감당할 수 있는 타격 수치를 넘었다는 신호였다.
“아프셨어요?”
“정전기 나는 수준이었어.”
그런 식으로 새 전투복을 테스트하고 나왔다. 갈색 머리카락에 짙은 푸른 눈을 지닌, 약간 말상 얼굴을 가진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미르에게 다가왔다.
“킹쉴드.”
“왜.”
미르는 키가 2미터였기 때문에 170인 미하엘에 비해서 훨씬 큰 느낌이었다. 덩치도 훨씬 컸다. 미하엘은 잠을 약간 설친 얼굴로 말했다.
“나 니 걸즈 중에 그… 분홍색 머리 누구냐….”
“리자?”
“어, 어. 걔. 걔랑 잤다. 혹시 내 쪽 애들 중에 마음에 드는 애 있으면 한 명 데리고 가.”
미르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그 망할 년…. 걔는 6개월 넘게 같은 자지를 못 끼우는 병이라도 걸렸나. 밀란한테서 나한테 올 때는 내가 마지막이니 어쩌니 지랄을 하더니.”
미하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걔네 욕할 군번이냐. 하암. 어쨌든 별로 마음 상하는 건 없는 거지? 예고 없이 이러는 건 나도 별로 원치 않은 바였다.”
“그런 건 떡 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니냐.”
“씨팔, 지는 먼저 생각하고 하나. 돔 페리뇽에다가 헤로인 잔뜩 넣어서 빨다가 일어났더니 걔도 있던데 나보고 어쩌라고.”
이 새끼가 월드 TFC 선수 순위 5위다. 그리고 경기 도중에 뒈질 가능성보다 약 때문에 뒈질 가능성이 더 큰 놈이기도 했다. 미르는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에 첨언했다.
“차라리 코카인 해라. 헤로인 그거 없는 놈들이나 하는 거다.”
“안 그래도 섞어서 했다. 하암. 난 자러 간다.”
“리자한테 안부 전해줘라.”
“엉.”
그리고 센터 밖으로 나오니 각각의 선수들이 자기 차를 직접 운전해서 숙소나 메트로서울에 구한 집으로 향했다. 혹자는 누가 데리러 오기도 했다.
“미르~!”
파파라치들까지 잔뜩 끌고 온 번쩍번쩍한 금색 컨버터블카가 있었다. 거기엔 탱크탑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허리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쭉쭉빵빵한 여자들이 타고 있었다. 일명 <킹쉴즈 걸즈>라고 불리는 미르의 여자친구들이었다. 다른 선수 중에서도 이런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이들은 많았지만 이번 킹쉴즈 걸즈 6명(이제 5명)의 미모가 매우 뛰어나서 제일 유명했다. 연예인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미르는 파파라치의 카메라 셔터 세례를 받으며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 탔다. 30분 뒤 미르의 펜트하우스에서는 술과 약, 담배 냄새가 진동하며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방방 울리는 가운데 난교가 펼쳐졌다. 그리고 2시간 뒤에는 다들 술이나 약 둘 중 하나에, 혹은 둘 다에 꽐라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미르는 마지막으로 코카인을 조금 빨았더니 기분이 차분해지면서 정신이 말짱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널브러져 있는 여자들을 남겨두고 집에서 나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 그리고 모자를 쓴 미르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아래로 걸어 다녔다. 사람들은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많았다. 아니, 이런 거리는 밤에 더 사람이 많았다. 미르는 그렇게 걸어 다니다가 중간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들어갔다.
‘젠장….’
미르는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렸다. 원래 미르는 공원이나 저번의 굴다리같이 아예 탁 트인 장소를 선호했다. 하지만 그 망할 꽃뱀한테 동영상을 찍힌 후에는 찝찝해서 도저히 그런 장소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사실 미르는 이상 성적 취향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여자가 좋았고 그래서 <킹쉴즈 걸즈> 같은 것도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1년 전부터는 그들에게도 이상한 짓을 잔뜩 하다가 몇몇은 걸즈를 떠나기도 했고 가십지에도 이상한 기사가 잔뜩 떴다. 반년 전부터는 자신의 몸에도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문신을 했다가 지웠다가 했다가 지웠다가 할 때마다 자해를 하기도 했다. 아픈 것은 질색을 하는데도. 그러다가 석 달 전부터는 공공장소에서 이 짓이다.
미르는 자신이 무엇이 잘못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미르는 전역한 지 4년 정도 되었고 TFC에서는 바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돈 먹는 하마 같은 여자들을 6명이나 데리고 살면서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명성도 명예도 이 정도다. 그런데 뭐가 부족한 걸까?
이걸 한다고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10분 뒤 미르는 자괴감을 끌어안고 칸막이에서 나왔다.
“씨발….”
미르는 세면대에서 손을 박박 씻었다. 그런데 소변기에 있던 남자가 옆으로 와 손을 씻고는 갑자기 미르의 뒤에 서더니 그의 허리를 잡았다.
“멋진 엉덩이네요….”
“이, 씹!!”
미르는 그 새끼의 멱살을 잡아 바로 벽에다 꽂았다. 그는 ‘커헉’하고 숨을 내뱉더니 당황하고 겁먹은 얼굴로 미르를 보았다.
“가, 갑자기 왜, 왜 이러세요….”
“씨발! 내가 할 소리다, 이 변태 새끼야!!”
“네, 네? 게, 게이 아니세요?”
“뭐라고?!!”
남자는 엄청 당황해서는 허우적거렸다.
“여, 여기… 마, 만남의 장소인데요.”
“뭐?”
“그러니까… 게이들… 만남의 장소….”
미르는 주변을 확확 돌아보았다. 그냥 공중화장실이었다. 미르는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온갖 욕설을 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
현타가 심하게 왔다.
‘내가 진짜 미친 걸까? 이러다가 다 말아먹는 거 아냐?’
한창 용병으로 뛸 때도 미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이러는 게 말이 되냐고. 만약에 그 꽃뱀이 찍은 동영상이 풀리기라도 하면… 사실 어디서 그런 게 또 찍혔을지 모를 일 아닌 거 아닌가. 게다가 이번엔 남자 엉덩이나 쫓아다니는 변태 취급을 당할 뻔했다. 여자들한테 변태 짓을 좀 해서 가십지를 오르내리는 것과 게이들이 만나는 공중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다가 걸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그냥 입을 터는 것과 동영상도 급이 다른 문제다.
‘50억… 씨발, 그 미친년이 50억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용병짓을 다시 하겠다. 그 돈… 미르한테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주려면 줄 수도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그걸 협박을 당해 뜯기는 것과 그냥 적선을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미르는 그 이후로 그녀를 찾으려고 꽤 노력을 했다.
‘근데 그 썅년이 뭐 하는 년인지 어떻게 알아. 선수들 쫓아다니는 년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러다가 스톤하츠라도 찾아가서 물어봐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그 샌님 같은 스타일은 미르가 제일 싫어하는 족속이었다.
*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쿄를 연고지로 한 <이스트드래곤> 클럽에 소속되어 있는 TFC 선수였다. 집은 서울에 있고 왔다 갔다 하면서 생활했다. 어차피 출퇴근 도합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서 도쿄 내에서 다니는 것보다 나은 편이었다.
다니엘은 스포츠 스타였지만 깊은 학문적 지식을 가진 고급 마도사였다. 한일 양 정부 및 대학, 기업들의 연구목적 마력 제공 및 마법 시연에도 흔쾌히 도움을 주는 편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돈을 꽤 두둑이 받아 전부 미혼모나 저소득층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기부했다.
오늘은 <영구 마력 및 마법 보존 장치 R&D>를 위한 부양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현재 가정에서 사용하는 멀티스크린을 아무런 지지대 없이 공중에 띄워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이 연구의 성과 중 하나였다. 말 그대로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서 1년에 한 번씩은 마력 보충이나 재시전이 필요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스톤하츠 씨.”
“아닙니다.”
그리고 잠깐 커피를 한잔하면서 해당 연구소의 연구원과 마도 연구 및 마도과학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공유했다. 새로운 마도 논문을 읽고 적힌 대로 시전을 해보기도 했다.
“역시 이런 건 개발자가 아니면 바로 하기는 어렵군요.”
“그래도 스톤하츠 씨니까 논문을 읽고 바로 시전할 수 있는 거지 다른 마도사 같으면 꿈도 못 꾸죠.”
“아닙니다.”
연구원이 잠깐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 TFC가 돈을 많이 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너무 위험한데…. 그만두시고 그냥 학계로 완전히 들어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저희 연구소는 언제나 양팔 벌려 환영입니다. 아니면 HNU(Hankuk National University)라도… 월급은 짭니다만.”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전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고는 연구원이 말을 돌렸다.
“혹시 요새 안 좋은 일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한숨을 자꾸 쉬시던데….”
“…아닙니다.”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또 한숨을 쉬면서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렇게 학계 및 정부와 관련된 용역(?)을 끝내고 다니엘은 메트로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청명 명상원>으로 향했다. 방음설비와 각종 식물을 배치하여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돌아다녀서 천장이 높은 실내인데도 아무런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다니엘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그 중 룸으로 향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아무런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무취, 무음, 암흑의 방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무섭다고 명상할 때 잘 쓰지 않는 방이었지만 다니엘은 그 방을 가장 좋아했다. 일주일에 3번, 2시간을 통째로 예약하여 혼자만 들어가서 앉아 있고는 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 텅 빈 공간이 자기 자신만큼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후우….”
다니엘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머리와 가슴, 온몸에 찬 모든 생각을 빼내기 위해 노력했다. 전신의 힘도 뺐다. 자신의 숨이 어떻게 들어가고 나가는지 천천히 그렸다. 피가 어떻게 심장에 들어가고 나가는지도 이미지화했다. 자신의 마력이 어떻게 신체를 순환하는지 그려 나갔다.
[제가 독한 건 잘 못 마셔서요.]
[그때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거든요.]
‘집중하자…. 집중.’
사람을 죽이는 공격 마법만 하는 거라면 사실 이런 건 필요 없었다. 하지만 팔다리를 쓰는 것처럼 물리적 한계가 명확한 움직임과는 다르게 마력의 움직임은 생각의 움직임이었다. 생각의 움직임을 칼로 재듯 정량화하기 위해선 마음의 정진과 수련이 필수였다. 진정한 마도의 길은 사실 수도의 길과 같았다.
한때 자신이 가진 마도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어 전쟁까지 참여했던 다니엘이었으나 그가 4차 중러전쟁 중 하인델토크 전투에서 개전 즉시 11만 5,426명의 러시아군을 죽이고 난 뒤엔 곧장 용병일을 때려치웠다.
[혹시 실례가 되는 게 아니라면… 저희 집 괜찮을까요?]
[저 그런 거 때문에 이런 거 안 해요.]
[정말 잘생겼는데 귀엽기까지 하네요.]
[하아… 기분 좋아요….]
다니엘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계속 생각나는 것일까. 날카롭게 벼려진 다니엘의 정신은 마치 백일몽처럼 그녀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그것도 이 암흑의 방에서는 더더욱…. 남빛의 머리카락, 세련되고 도회적인 스타일, 차분하면서도 어쩐지 요염한 분위기. 그녀의 목소리가 정말로 들려오는 것만 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반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여자는 나쁜 여자다.’
그녀는 다니엘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니엘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신의 흠에 대해서 고백을 한 것을 녹화하여 돈을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처음부터 다니엘에게 몸을 팔려고 접근한 것이었다. 속이 상했다. 그런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녀에게 속았다는 걸 알았을 땐 속에 불이 나는 것처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일까.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여자들이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가십지는 TFC 선수를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미녀들에게 어떤 걸즈니 무슨 시스터즈니 날마다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그들은 연예인처럼 TV에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몇몇은 정말 연예인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여자들이었고 다니엘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마 그들은 발기부전은커녕 페니스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니엘은 도저히 그들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의 돈이나 명성만 보고 쫓아온다는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들을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가 정말 누군지 알고도 그렇게 할까.
그래서 그 연기 속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그때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자신에게 스스로가 더 놀랐었다. 분명히 자신의 취향인 얼굴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여자였다. 그래, 메트로서울은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니까 그럴 수도 있다. 테러에서 아이를 구하는 여자였다. 가까이에 있는 어린아이를 못 본 척 지나갈 수 없는 여자는 그녀가 아니더라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목소리가 예쁜 여자였다. 그래, 목소리가 예쁜 여자는 더 많겠지. 차분하면서도 요염한, 묘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였다. 이유 없이 그냥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여자였다.
“…….”
작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을 때, 다니엘은 2시간 동안 오로지 그녀의 생각만 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하지만 거의 예견한 대로랄까. 리&킬스버그 호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우리가 너무 모르는 분야를 건드린 게 아닐까요, 선생님?”
“…저도 동의합니다.”
슬슬 야시꾸리한 장면이 나와야 할 즈음이랄까. 지금까지 훌륭한 떡밥과 에로틱 포인트를 여간 잘 뿌려 놓은 것이 아닌데 정작 정말로 섹시하고 꼴려야 할 파트가 개성도 없고 밋밋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 연재는 시작 전이었고 비축분도 꽤 있었지만 이래서야…. 로웰 리는 원래 성인 만화가가 아니라 순정 만화가였다. 중요한 장면에서 인체 비율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둘 다 너무 산으로 간다 싶었다고, 말려야 했어…. 이제 어쩔 거야! 벌써 홍보도 다 하고 일정도 다 나왔는데!”
송선호가 화를 냈다. 멀티스크린 안에는 난잡하고 괴상한 그림과 콘티가 난무했다. 로웰과 도현이 마구잡이로 ‘꼴리겠지?’하면서 토해낸 것들이었다.
“작가님 글만 보면 오히려 섹시한 것 같은데….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요.”
로웰이 도현의 글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진짜 저도 어디서 주워들은 것만 대충 나열한 것 같은 느낌이라….”
도현도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거실 전방에 있는 거대한 통유리를 스크린으로 전환했다.
“일단… 다 같이 SM 야동이라도 봅시다. 제가 365개 정도 다운 받았어요.”
매일 하나씩 보면서 연재하면 그래도 언젠가는 통달하지 않을까, 염원하며 정한 숫자였다.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로웰은 바로 앉아서 스크린을 주시했고 송선호는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보았다.
“너… 돈은 어디서 나서….”
“카드….”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도현이 송선호를 보았다.
“너 그렇게 돌려막기 하다가 진짜 어쩌려고!! 얼마나 썼어? 너 도대체 지금 빚이 얼마야!”
송선호가 폭발해서는 그녀를 다그쳤다. 도현이 찔려 하면서도 변명했다.
“아, 얼마 안 썼어…! 작품은 만들어야 할 거 아냐!”
“이건… 이건 비용처리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빨리 영수증 보내, 빨리!”
“알았어….”
“그냥 내놔.”
송선호는 도현이 디바이스로 카드결제내역을 보고 있자 그냥 그걸 그대로 뺐었다.
“너 또 가방 샀어? 넌 진짜 정신머리가 있는 년입니까, 없는 년입니까? 어?”
“아니…. 보다가 예뻐서….”
“정신 나간 년, 어휴.”
송선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곧 인트로 부분이 지나가고 본 영상이 시작되었다.
[어때? 기분 좋아?]
[흑. 네. 네, 주인님! 좀 더…!]
때리고 섹스. 묶고 섹스. 촛농 떨어뜨리다 섹스…. 며칠 동안 몇 편의 야동을 봤는지 모르겠다. 셋 다 얼굴이 칙칙해졌다. 송선호는 원래도 AV 같은 건 보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절대 야동을 보고 자위를 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야동을 본 보람이 있었는지 도현 킬스버그의 글이 꽤 괜찮아졌다(콘티를 짜면서 소설로도 적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절로 뭔가(?) 뭉클해질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칭찬은 해주지 않았지만… 그 쓰레기 같은 영상들을 보면서도 이런 영감을 받은 게 좀 기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로웰의 그림이 나아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그려보기도 하고 영상을 그대로 트레이싱을 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섹시하지도 않고 뭔가 딱딱한 데다가 계속 인체 비율이 망가졌다. 로웰 리 표 만화의 장점은 바로 개연성과 현실감이었다. 그걸 살려주는 사실적이면서 예쁜 그림체가 절대적인 강점이었다. 이러면 아무리 해도 사람들이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도현은 로웰이 이때까지 실패한 그림들을 보고 있었다. 로웰은 카우치에 쓰러져 영혼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난 죽어야 돼. 난 죽어야 돼. 살 가치가 없어. 죽어야 돼. 아, 스트레스받아. 그냥 아무나 죽이고 싶다.”
금발 삐삐 머리를 한 뱅글뱅글 안경의 입에서 나오기엔 몹시도 음산한 대사였다. 송선호도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올라와 안경을 벗은 채 잘생긴 얼굴을 두 손으로 꽉 누르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 미친년들을 데리고 도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이번 기획 망하면 삼촌이 나 잘라버릴 거야. 그러면 난 백수 되는 거고 그냥 마포대교 가는 길밖에 답이 없다. 뛰어내리자. 그냥 뛰어내리자. 아니, 내가 왜 뛰어내려? 망하면 이년들부터 집어 던질 거야.”
빚도 없는 사람들이 저러고 있는 것을 보니 도현은 퍽이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현은 계속 로웰의 그림과 로웰이 참고했던 여러 사진을 비교해보다가 손바닥을 딱 쳤다.
“야동에서 나오는 남자들이랑 TFC 선수들이랑 비율이랑 체격 차가 너무 나서 그래요!”
그러자 둘은 뭔 소리… 이런 얼굴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너 키 얼마더라, 송선호?”
“내가 너보다 1살 많은 건 알죠? 194다, 왜?”
“내가 172니까… 대충 여주, 남주 키 차이 정도 될까요?”
“음… 네, 그러네요.”
남주가 조금 더 크지만… 뭐, 송 편집장도 비율이 아주 끝내주니. 로웰이 설정기획서를 띄워보며 답했다. 도현은 로웰이 그린 스케치를 스크린에 띄워보면서 송선호에게 다가갔다. 송선호는 ‘이 미친년이 또 뭘 하려고’하면서 보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그가 앉아 있는 일인용 소파로 다가와서 그의 무릎에 앉자 깜짝 놀라서 얼어버렸다. 그리고 엉덩이를 뒤로 쭉 빼서 그의 아랫배에 엉덩이를 닿게 했다. 송선호가 기겁을 해서 비명을 질렀다.
“미, 미쳤어!!!”
“아, 깜짝이야. 조용히 해. 일 좀 하자.”
“이, 이, 이, 일은 무, 무, 무슨…!”
말은 물론이고 손을 덜덜 떨었다. 그녀의 몸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도현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로웰의 그림을 보며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벌리고 송선호의 손을 하나는 배에, 하나는 허벅지 안쪽을 잡게 하며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어깨에 푹 기댔다. 그는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손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눈만 돌려 그림을 확인하며 로웰에게 물었다.
“이거 맞죠? 이거?”
“어… 진짜 비율이 이래서 안 맞았던 건가….”
에로 만화를 그려본 적이 없는 로웰이었다. 순정만화를 그릴 때는 좀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작품을 위해 좀 더 리얼하게 그림체를 바꾸었다. 그러면서, 특히 남녀 주인공이 붙어 있을 때 문제가 생겼다. AV 남자 배우도 배우는 배우라지만 잘해봐야 B급, 대다수 C급이라 사이즈가….
“잠깐만. 두 사람 잠깐만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조명, 조명 들고 와야겠다. 사진 찍어야 돼.”
“힘드니까 빨리 가져와요~.”
도현이 로웰에게 소리쳤다. 송선호는 진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떨지 좀 마. 안 그래도 힘든데.”
“내, 내가 힘들지 네, 네가 왜 힘들어, 이, 이 쌍년이….”
“욕 좀 하지 마, 진짜. 너한테 푹 앉으면 너 무겁잖아. 다리 벌리고 이러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도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섹시했다. 귀가 녹아내릴 것만 같다. 송선호는 마음속으로 애국가를 미친 듯이 부르고 있었다.
“다, 다리에 힘 더 줘. 나, 나한테 기대지 마. 토할 것 같아.”
“알았어. 로웰 선생님 올 때까지만 좀 참아. 진짜 좀 쉽게 살지, 별 난리는….”
도현이 투덜거렸다. 송선호는 땀을 뻘뻘 흘려서 이미 자기 명품 셔츠를 다 적셨다. 도현도 거기에 불만을 표했다.
“너 손에 땀… 아, 진짜. 너 다한증 있어? 왜 이래?”
그가 잡고 있는 허벅지랑 아랫배가 축축했다. 그녀의 티셔츠가 다 젖을 정도였다. 송선호의 얼굴이 거의 시퍼레졌다.
“더 못 참겠어….”
“선생님~ 멀었어요? 얘 토하려고 해요!”
“아, 잠깐만요. 다 들고 왔음.”
로웰은 다이닝룸 조명과 침실 조명을 가지고 와서 설치했다. 그리고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사진을 몇 장 찍다가 물었다.
“근데 그 자세 편해요? 뭔가 어색한데.”
“아, 얘가 저 닿는 게 싫다고 해가지고….”
“송 편집장님, 잠깐 협조 좀 하시죠.”
그렇게 말한 이 금발 삐삐 머리 양아치년(그래도 로웰에겐 선생님, 선생님 꼬박꼬박 붙이던 송선호였다)이 도현의 허리를 잡아 아예 푹 눌러 앉혔다. 다리에 쥐가 날 뻔한 도현은 좀 살 것 같았지만 송선호는 ‘헉!’하고 영혼이라도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음… 작가님 좀만 더 릴랙스 해주세요. 송 편집장 덩치도 있는데 작가님 무게 정도는 괜찮잖아요. 다리도 좀만 더 자연스럽게… 송 편집장님도 그렇게 얼어 계시지 마시구요. 어떻게 하는지 아시잖아요! 좀 자연스럽게 스킨십 해봐요. 그리고 각도 상 작가님이 엉덩이를 좀만 뒤로 빼고….”
로웰의 지휘 아래 작가와 편집장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정확하게는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도현뿐이었고 송선호는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송선호는 얼굴이 시퍼레져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집안 족보까지 외우고 있는 상태였다.
‘부드러워. 부드러워. 부드러워!! 냄새… 좋은 냄새 나. 살냄새… 설 것 같아. 미친. 안 돼. 이런 싼 년한테 세울 것 같아? 씨발, 죽어도 싫어. 싫어. 싫어.’
로웰이 짜증을 냈다.
“진짜 편집장님 협조 안 해요? 아니, 나 같으면 이런 미인이 가까이 있으면 옳다구나! 하고 주무를 텐데!”
“미, 미인은 썅… 어, 얼어 죽을….”
“죄송해요, 선생님. 얘가 성격이 많이 지랄 맞죠…. 장가도 못 갈 거예요. 왜 이러나 몰라.”
도현이 대신 사과했다. 여전히 협조적이지 않은 송선호 때문에 자세를 잡아야 하는 도현만 죽어 나갔다. 덩치 큰 남자 위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고 계속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 게 어디 쉬운가. 그녀는 힘든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아, 힘들어….”
섰다.
“씨, 씨발…….”
섰어. 섰잖아. 씨발. 진짜 섰다. 윽, 씨발. 죽고 싶어. 송선호는 ‘으응….’하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결국 몸에서 힘을 풀고 말았다. ‘어랏?’하고 송선호를 돌아본 도현은 이땐가 싶어 제대로 자세를 잡아 그에게 기댔다.
“지금 찍으세요. 지금.”
“아, 그러게. 작가님 좀 더 릴랙스해서 표정도… 표정도 뭔가 좀 더 야한 표정으로….”
“으응….”
도현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송선호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입을 벌렸다. 찰칵찰칵. 사진이 바로 찍혔다. 송선호가 완전 파드득 떨었다. 도현이 아차, 하고 말했다.
“저도 모르게 효과음까지….”
“괜찮아요, 뭐. 금방 사진 좋았어요, 작가님. 일단 이거부터 그려볼게요. 수고하셨어요. 두 분 다 일어나도 될 것 같아요.”
로웰은 곧바로 책상에 앉아 작업에 들어갔다. 도현은 끙차 하고 불편하게 있던 자세에서 벗어나 땅바닥에 발을 대고 일어났다.
“아, 다리 아파.”
도현은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러고 있는데 송선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왜?”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땀범벅이고….
‘진짜 얘 어디 아픈 거 아냐?’
도현은 갑자기 좀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그를 살피기 위해서 그의 얼굴을 잡았다.
“괜찮아?”
“난 너 싫어, 이 쌍년아.”
송선호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도현의 손을 아주 찰싹 쳐냈다. 송선호의 폭언이야 너무 익숙해서 간지럽지도 않을 지경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좀 타격이 들어왔다.
도현은 그에게 잡힌 손목을 팍 빼냈다. 세게 잡혀서 좀 자국이 남았다. 맞은 손도 마찬가지였다. 송선호는 스쳐 지나가는 도현의 얼굴을 본 순간 후회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도현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기고는 로웰에게로 다가갔다.
“어때요, 선생님?”
“좋아요. 봐봐요, 작가님.”
“그러게. 훨씬 낫네요.”
“아까랑 똑같은 자세에서 조금만 바꿔서 다시 해줄 수 있어요? 사진 없이 그냥 하려니까 또 이렇게 됐어요.”
훌륭한 비율로 예쁘게 그려진 그림과 조금 자세와 각도가 바뀐 것뿐인데 비율이 폭망이 된 그림을 보여주며 로웰이 말했다. 도현은 ‘아….’라는 소리를 내면서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송 편집장, 더 못할 것 같은데….”
도현은 그렇게 로웰에게 속닥거렸다. 로웰이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왜?’라는 물음이 그득한 얼굴이었다.
“송 편집장, 게이인 걸까요?”
“글쎄요… 개인적인 일까지 터놓고 지낼 만큼 친하지가 않아서….”
“혹시 부를 만한 남자 모델 없을까요? 송 편집장만 하거나 아니면 좀 더 큰 남자로… 몸도 적어도 저 정도는….”
“으음….”
저 정도 신장에 체격이 어디 흔한가. 아는 남자들이야 많으니 찾다 보면 나올지도 모르겠다. 도현은 며칠 동안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자기 휴대폰을 찾으러 갔다. 집안 어디에 있든 자동충전이 되는지라 꺼지지는 않았지만 무음이라 지금까지 어떤 연락이 왔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친구들, 아는 남자들 연락도 있겠지만 아마도 빚쟁이에게서 온 게 대부분….
<그래서 얼마면 됩니까?>
<사람 피 말리게 하지 말고 전화 받으십시오.>
<저 도현 씨 집 압니다.>
<이런 적 한두 번이 아닌 겁니까? 이런 식으로 남자 피 말리면서 돈 뜯어낸 겁니까? 도현 씨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전화 받으십시오.>
이런 다니엘 스톤하츠의 연락과,
<이 개 돌은 년, 진짜 겁대가리는 엄마 배 속에 쳐 놔두고 태어났냐?>
<야? 내가 너 못 찾아낼 줄 알아? 아직 어디다 올린 거 아니지?>
<어? 씨발, 이 쌍년, 내가 너 찾아내면 대가리에 바람구멍 낸다. 어? 콘크리트에 파묻어서 동해에다 던져버릴 거야!!>
이런 미르 킹쉴드의 연락이 빚쟁이들의 연락 사이사이에 아주 가득했다.
인생의 은인인 로웰 리와 만나 새 작품을 만드느라 두 사람에 대해선 아예 잊고 있었다. 도현도 돈을 벌어본 여자라서 잘만 하면 이 작품이 빚 청산의 꿈을 이뤄줄 거란 촉이 들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본인 돈 벌어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그런 남자들이 무에 소용이라. 아예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둘은 진정으로 명실상부 TFC 선수들이었다. 그냥 아주 몸도 좋고 와꾸도 되는 탈인간계급 스타란 말이다.
*
도현은 아주 참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깔끔하게 몸매에 딱 들어맞는 하얀 명품 셔츠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튤립 스커트. 진주 귀걸이에 단정하게 한쪽 어깨로 내린 남색 머리카락. 가볍고 청순하게 한 화장.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분홍빛 손톱.
“정말 두 분께는 입이 열 개라도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빚 때문에 이판사판이다 싶어서….”
공원 같은 정원을 지나 대궐짝 같은 집의 너른 현관으로 들어온 미르 킹쉴드는 이런 돈을 처바른 집에 사는 여자가 돈을 뜯어내기 위해 자신에게 그런 협박을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고 나니 다니엘 스톤하츠까지 있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그를 지나쳐 현관문에 발을 들여놓았더니 이름이 도현 킬스버그라는 그 여자가 처연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그들을 맞이했다.
“제 클라우드 아이디랑 비밀번호에요. 들어가셔서 두 분 다 영상 지우시면 됩니다.”
그녀는 자기 휴대 디바이스를 두 남자에게 진상하듯이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미르는 어이가 없어서 다니엘을 보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이 병신 새끼도 너 같은 꽃뱀한테 물릴 줄 알았지.”
“…설마 킹쉴드도 저처럼 건드린 겁니까?”
난봉꾼으로 유명한 킹쉴드까지 이런 문제로 협박했을 정도면 이건 거의 프로라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다니엘은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여자한테 첫눈에 반해서…! 그것도 그런 고백까지 해가며…!! 게다가 그녀의 뒤에는 또 어떤 잘생긴 남자가 아니꼬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저 남자는 또 뭡니까? 기둥서방이라도 됩니까?”
“미쳤습니까? 내가 이런 미친년하고 살게!”
송선호가 아주 질색을 했다. 도현은 무릎을 짚고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제가 투고하는 출판사 편집장입니다. 제가 글 밥 먹고 산다는 건 사실이에요, 스톤하츠 씨. 제가 몇 년 동안 슬럼프라서 글을 못 썼는데 여기 계시는 로웰 리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다시금 펜을 잡았습니다. 이제는 나쁜 짓 안 하고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영상도 돌려드리고 사과도 할 겸 연락드렸습니다.”
“퍽이나 네가…. 어휴….”
그녀가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를 어떤 식으로 낚았는지 그 내역을 들은 송선호는 그녀에게 없던 정도 전부 다 떨어지고 말았다. 다니엘이 먼저 자신의 영상을 디바이스에서 지우고 미르는 아예 클라우드 전체를 삭제한 후 탈퇴도 해버리고 디바이스를 우그러뜨려버렸다. 세 개째였다.
“너… 이래 놓고 복사본 있고 그러면 진짜 국물도 없다. 어? 아주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릴 거라고.”
미르가 불량하게 쪼그리고 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현의 단정한 이마를 보며 미르가 살벌하게 협박하자 송선호와 다니엘이 움찔했다. 도현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인지 별달리 달라진 것 없는 표정으로 그냥 고개를 숙여서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흥.”
미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달간 그를 잠 못 이루게 했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다니엘은 무릎을 꿇고 있는 도현을 착잡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앞으론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그러고 둘 다 집을 나가려고 하는데 도현의 그 둘의 바짓가랑이를 동시에 붙잡았다.
“저….”
다니엘과 미르가 돌아보았다.
“저 이렇게 용서해주시는 김에 하나만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제가 앞으로 먹고사는데 아주 중차대한 일이라서….”
도현은 아주 눈물이 그렁그렁할 태세로 두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속눈썹이 아주 깊고 풍성해서 눈이 정말 아름답다. 둘은 분명히 이게 미인계라는 것을 알았지만, 들어나 보자고 결론을 내릴 정도였으니까.
둘은 결국 집안까지 들어왔다. 저번에 온 적이 있는 다니엘도 깜깜했던 당시에 거실은 제대로 보지 못해서 몰랐지만 정말 훌륭한 집이었다.
‘아니, 그렇게 돈이 없어서 문제라면 일단 집이라도 처분하면 될 것 같은데….’
매우 다른 둘이었지만 똑같은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50억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들었던 미르는 분명히 이 집이 50억보다 더한 집이라는 걸 바로 알았기 때문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실에는 열댓 명이 앉아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앉을 자리가 있었다. 창밖의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는 메인 카우치는 덩치 큰 남자 여섯 정도가 앉아도 괜찮을 정도였고 그 양 옆으로 삼인용 카우치가 ㄷ자 모양을 그리며 배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우치를 지나 좀 더 창문 쪽으로 가니 이상하게도 침대와 테이블, 벽 같은 것이 서 있었고 그 주위로 조명과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현 킬스버그는 그런 협박을 행한 여자라고는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참하게 차를 내어왔다. 그때 어느 방에서 노란 삐삐 머리를 한 뱅글뱅글 안경 땅꼬마가 나왔다. 도현이 활짝 웃으면서 그녀를 맞이했다.
“로웰 선생님! 뭐 드실래요?”
“전 녹차면 됐습니다.”
선생님…. 누가 봐도 도현 킬스버그가 더 선생님 같았다. TFC 선수 두 명은 창을 바라보는 제일 큰 카우치에 앉았고 그 왼쪽에 로웰과 도현이, 그리고 오른쪽에 송선호가 앉았다. 송선호는 대놓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저희가, 그… TFC 선수와 관련한 글과 만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송선호가 그렇게 운을 뗐다. 그는 자신의 비즈니스 카드 두 장을 두 남자에게 내밀었다.
“여기 계시는 킬스버그 작가님은 6년간 전 세계에 1억 부가 넘는 책을 파신 작가님이시고, 여기 계시는 로웰 리 선생님은 최근에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영화, 드라마 제작까지 된 <다시 만난 시간>을 그리신 만화가 선생님입니다. 아마 그쪽 분들은 잘 모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대충 두 분이서 근 6년 동안 회사에 1조 넘는 매출을 내주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여자가 돈 때문에 겁대가리도 없이 전쟁 용병들을 협박했다고? 다니엘과 미르는 아주 미심쩍은 얼굴로 명함과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이쪽 시장이 그만큼 큽니다.”
송선호는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로웰이 말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 작가님하고 제가 이번에 여성향 계에 길이 남을 금자탑을 쌓아보고자 TFC 선수를 주인공으로 한 성인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데 제가 성인물은 처음이라서 도저히 그림이 안 나오더라구요. 참고자료에서 나오는 대로 그리면 당최 비율이 안 맞아서요. 원체 TFC 선수들이 크고 하니까 말이죠. 다 제 업보로….”
로웰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 저… 혹시 모델을 좀 해주십사 하고….”
“…나 보고 지금 야만화 모델이 되라고 하는 거냐? 어?”
미르 킹쉴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적나라하게 지으면서 말했다.
“차라리 모델을 찾아? 어? 이런 거 하는 애들 있을 거 아냐?”
“그게 찾아보긴 했는데… 다들 분위기도 뭔가 안 맞고 계속 두 분 생각만 나서요.”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겠지. 내가 세계 최고 TFC 선수인데. 근데 씨발, 너 내 모델비 댈 수 있냐?”
“아까 그걸 모델비라고 생각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
“너! 진짜 이 쌍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다니엘은 인상을 좀 쓰고 송선호는 왠지 한숨을 푹 쉬었다.
“…험한 말 좀 그만하지, 킹쉴드. 듣기 상스러워서….”
“뭐, 인마? 너 지금 여기서 시비 트는 거냐? 진심으로? 나 지금 좀 빡 돌겠는데? 너 금방 이년이 하는 말 못 들었어?”
“…그래도 사람이 나쁜 짓 하려다가 마음 다시 먹고 건실하게 살겠다는데. 도와줄 수도 있잖아.”
“성자 나셨다, 어? 성자 나셨어. 얼씨구.”
미르는 자세를 확 틀어서 카우치에 불량스럽게 기대어 앉았다. 도현과 로웰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러면 도와주시는 거예요, 스톤하츠 씨!”
“일단 내용을 좀 듣고… 정확하게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가만히 서 있거나 하면 되는 겁니까?”
도현과 로웰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로웰은 스크린에 사진을 하나 띄워 다니엘에게 건냈다.
“이런 자세를 좀 해서 사진 자료를 남기고 싶은데….”
“!!”
다니엘은 ‘헉!’하고 놀라서 도현의 얼굴을 봤다가 송선호의 얼굴을 봤다가 다시 사진을 보고는 했다. 확실히 남한테 보여줄 만한 사진은 아니었다. 이 남자에게는 좀 찔리는 것도 있어 도현은 얼른 변명했다.
“예시에요, 예시. 우리 편집장이 키도 크고 몸도 좋아서 대충 우리끼리 해결을 보려고 했는데 송 편집장이 죽어도 못 하겠다고 해서 이렇게…. 하하.”
“이거… 그냥 포즈만 취한 거죠? 설마 진짜로….”
“네? 아니요. 아니에요. 우리 편집장 표정 썩은 거 안 보이세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도현이 농담도 심하다는 듯 그렇게 웃으며 대꾸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단다. 송선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미르 킹쉴드가 ‘뭔데?’하고 다니엘이 들고 있는 사진을 슬쩍 보았다가 도현의 얼굴을 헉 하고 쳐다보았다. 이럴수록 얼굴에 더 철판을 깔아야 하는 것이다. 도현은 눈이 마주치면 그게 뭐 별거냐는 얼굴을 했다.
“일단 여자 모델은 굳이 저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이건 예시니까요. 여자 모델도 계속 찾고 있는데 우리 선생님께서 확 하고 영감이 오는 분이 안 나오신다고 해서 아직은 못 구했어요.”
사진 몇 장을 더 보더니 미르가 말했다.
“나 할래, 할래. 네가 모델 해. 알았지?”
“네?”
그러면 모델비가 굳지. 도현은 미르 킹쉴드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사진에 나온 도현의 얼굴과 몸을 뚫어져라 보다가 물었다.
“진짜로 하는 건 안 되냐?”
“!!”
“!!!”
다니엘과 송선호가 거의 자리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 도현은 로웰의 얼굴을 보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그건 좀… 싫은데요.”
많이. 다들 미르를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왜? 진짜 TFC 선수까지 찾는 마당에 진정한 리얼함을 위해서 진짜 할 수도 있잖아. 나 진짜 잘하는데?”
“…그런 분이 왜 공공장, 읍!”
“입 닥쳐.”
미르가 엄청난 속도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니엘은 아주 무뚝뚝하게 정색을 한 얼굴로 말했다.
“…킹쉴드는 원래 안 한다고 했으니 됐고 저만 한다고 하면 하겠습니다.”
“엇….”
그러자 도현과 로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두 분이 체격이 달라서 두 분 다 합을 맞춰보고 싶었거든요. 나중에 서브 남주가 나오면 참고할 수 있었으면 해서, 기왕이면 두 분 다….”
그러자 미르는 그냥 그런 표정이었고 다니엘은 완전히 표정을 구겼다. 도현은 슬쩍 다니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고 협조해주신다면 정말…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또 간절한 눈빛을 발사하니 다니엘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오늘은 카메라 테스트만 한다고 생각하고 해볼게요. 작품 진행이 아직 초기라 설정이 세세하지 않아서…. 그래도 웬만한 데 나온 자세들은 차차 다 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둘 다 그냥 서 있는 걸 360도, 위아래로 다 찍었다. 그리고 도현과 함께 서 있는 걸 각각 찍었다. 앉은 자세, 선 자세, 엎드린 자세, 누운 자세, 이런 걸 찍다 보니 미르 킹쉴드가 아주 볼멘소리를 냈다.
“섹스는 언제 하는 건데!”
“진짜 하는 거 아닙니다. 자세만 하는 겁니다.”
송선호가 대꾸했다. 고깃덩어리로 만들고 싶다던 여자한테 그런 짓을 하고 싶을까. 송선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분명히 그의 폭언을 들은 도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이. 송선호도 도현에게 폭언을 해왔지만(그래도 저 새끼처럼 살벌하게는…) 남이 그녀에게 그러는 건 듣기 싫어서 표정이 안 펴졌다. 하지만 한 게 있으니 뭐라고 하진 못하겠고…. 도현과 로웰은 사진을 찍을 때마다 같이 모니터링을 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다니엘은 집중을 해서 일을 하고 있는 도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도 PTSD나 그런 건 없었습니까, 도… 킬스버그 양.”
“네?”
“센트럴 백화점 테러 말입니다. 그때 한복판에 있었는데. PTSD 겪는 사람들, 많다고 들었는데 킬스버그 양은 괜찮은가 싶어서….”
로웰과 송선호가 깜짝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한 적 없었다.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때 거기 갔었어? 내가 쇼핑 좀 작작 하라고 했지? 어디 다쳤어? 괜찮아?”
“괜찮아. 스톤하츠 씨가 계셔서 하나도 안 다쳤어. PTSD도 걸리는 사람이나 걸리는 거지 내가 걸릴 거 같아?”
“그래…. 너 같이 양심도 얼굴도 두터운 년이 그런 거 걸릴 리가 없지….”
송선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기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걸 홱 놓았다. 손을 닦았다. 다니엘은 그 모습을 보고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늦었으니까 기본적인 것만 두 개 하고 끝냅시다.”
그림은 로웰이 그리는 거다 보니 전반적인 촬영 진행은 그녀가 총괄하였다. 미르가 먼저 하겠다고 손을 들었지만 다니엘도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미르 킹쉴드보다는 다니엘 스톤하츠가 훠~얼씬 더 신사였기 때문에 도현은 다니엘을 택했다. 그녀는 좋은 건 먼저 먹는 스타일이었다.
“그럼 작가님 침대에 누우시구요. 스톤하츠 씨가 그 위에… 어, 작가님 옷 갈아입어야 할까요?”
다리가 벌어질 수가 없는 옷차림이었다. 도현은 사무적인 태도로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아요. 좀 걷어 올리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옆에 뜬 멀티스크린을 확인하면서 치마를 허벅지 끝까지 쭉 올렸다. 남자들의 집중도가 확 올라갔다. 그녀의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다니엘은 더 했다.
‘…야하다. 섹시해….’
발기부전이라서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데. 어째서 이런 기분을 지금, 이렇게 느끼는 걸까? 그녀는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의 그 날처럼 그녀가 계속 다니엘의 얼굴을 보고 있었더라면 그녀를 욕정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걸 들키고 말 것이다. 물론 회의감도 찾아오긴 했다.
‘그런 협박이나 했던 여잔데….’
“이제 이리로….”
계속 스크린만 보던 도현이 갑자기 다니엘과 눈을 맞추며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가슴이 두근했다. 계속 두근거렸다. 심장 박동은 점점 더 강해져 어느샌가 입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대로 천천히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하반신을 갖다 대었다. 고작 몇 겹의 얇은 천을 사이로 맞닿았다. 그대로 큐 사인이 떨어질 때마다 위아래로 자세를 조금씩 바꾸며 문질러졌다.
‘이상하다.’
다니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니엘은 자세를 낮추어 그녀와 뺨을 맞대는 포즈를 취했다. 정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도현이 속삭였다.
“다행이에요.”
듣는 순간 귀가 멀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만 같이 느끼며 겨우 되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남자들 이러면 싫어하는 여자한테도 서잖아요. 다니엘 씨, 아니, 스톤하츠 씨는 안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저번에 우리 편집장 보니까 거의 죽고 싶어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녀가 웃었다. 다니엘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도현은 ‘어라?’하면서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
그리고 다니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니엘은 계속 신경 쓰던 일이었는데도 도저히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작가님! 이제 엎드리세요. 후배위!”
도현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니엘을 밀어내며 몸을 뒤집었다. 다니엘은 오랜만에 오는 느낌에 뱃속이 다 아찔아찔했다. 이대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녀를 덮칠 것만 같았다.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그녀의 옷을 벗기고 싶었다.
‘나 같은 거… 돈으로밖에 안 보는 그런… 그런… 다른 여자들이랑 똑같은….’
다니엘은 혼란스러웠다. 까딱했다간 그녀의 엄한 곳을 움켜쥘 것만 같아서 그나마 괜찮을 것 같은 그녀의 손을 움켜쥐며 엎드렸다.
“아, 그거 좋아요, 스톤하츠 씨! 야하다.”
그나마 저 삐삐 머리가 추임새를 넣어줘서 겨우 현실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손이 축축했다. 아마 그녀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핑글핑글 머리가 돌았다. 다니엘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살려줘요, 도현 씨… 죽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금방 끝날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억겁 같기도 했고 금방 같기도 했다. 촬영이 끝나자 그녀는 금방 옷깃을 추스르며 다니엘에게서 떨어졌다. 다니엘은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왜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후회가 들었다. 왜 이런 걸 하겠다고 했을까?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미르 킹쉴드는 침대에서 겨우 내려온 다니엘을 지나쳐서는 도현의 허리를 확 감아 안았다.
“그때 저 숙맥이랑 밥 먹고 있을 때도 괜찮다고 생각했지. 응. 한 번쯤은 먹을 만은 해.”
미르가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이 그의 등을 퍽 쳤다.
“작작해. 일이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지도 즐길 거 다 즐긴 얼굴로 남 말 하시네.”
“…….”
미르는 다니엘에 비해 아주 호쾌하게 하고 싶은 걸 다 했다.
“보통 정상위면 여기까지도 하지 않나? 이 각도, 이 각도도.”
“아…!”
동영상에 고화질 사진 촬영까지 연속으로 되고 있는지라 그가 포즈를 자주 바꿔주면 더 많은 자료가 나와서 이득이었다. 물론 체격차가 엄청나서 도현은 죽어 나갔다.
“숨 막혀요.”
후배위 자세로 그가 배를 꽉 끌어안자 도현이 그의 팔을 손으로 치며 타임을 외쳤다. 다니엘은 그를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의외로 송선호도 마찬가지였다.
“나 벌써 섰는데. 어떡해? 책임 안 져? 어? 어?”
그의 우람한 성기가 도현의 엉덩이를 자꾸 찔렀다. 도현은 짜증을 냈다.
“진짜 킹쉴드 씨랑 만난 여자들은 대단하네요. 이렇게 막 하는데 기분 좋았을 리도 없고… 불쌍해.”
“뭐?!”
“앗…! 아파!”
그가 도현의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송선호가 곧바로 촬영을 중지시키고 뛰쳐 나와 미르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당겼고 다니엘은 그의 온몸을 얼려버렸다. 도현은 깜짝 놀라서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그를 돌아보았다. 얼음 속에 갇혀 눈만 굴리던 그는 조금의 시간을 들여 얼음을 힘으로 산산조각냈다. 그리고 ‘허억!’하고 숨을 쉬며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누구 잡을 일 있냐, 이 또라이 마도사 새꺄!”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다니엘과 미르가 그대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송선호도 그들을 노려보다가 일단 도현을 일으켰다.
“괜찮냐?”
“괜찮아. 고마워.”
도현은 옷을 툭툭 털었다. 그녀는 잠시 미르를 쳐다보았다가 로웰에게 다가갔다.
“어때요, 선생님? 사진은 잘 나왔어요?”
“네, 사진은… 괜찮으세요, 작가님? 우리 작가님 심신의 안정이 제일 중요한데…. 진짜 여자 모델 빨리 구해요, 우리.”
“그래요.”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아까두요.”
그녀는 미르에게는 다가가지 않았다. 로웰과 도현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는 로웰이 말했다.
“스톤하츠 씨, 앞으로 또 시간 되실 때 있을까요? 되도록 빨리면 좋겠지만 저희가 최대한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여자 모델도 한시바삐 구하도록 하구요. 아무래도 첫 모델이 저희 작가님이라 작가님이랑 비슷한 체형으로 골라 보긴 하겠는데 혹시 따로 주의해야 할 사항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미르 킹쉴드는 아예 기분이 잡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더 이상 이런 바보 같은 짓 못 하겠다.”
다니엘은 계속 도현을 보고 있다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가 나가자 다른 세 사람은 한숨을 푹 쉬었다.
“TFC 선수 같은 거 상종할 만한 인간들이 못 되는 구만….”
야만인들. 송선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웰도 동감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송선호는 도현을 노려보았다.
“겁대가리도 없는 년…. 저런 놈들을 고작 그런 몰카로 협박해? 넌 목숨이 12개라도 되냐?”
“그럼 어떡해. 돈은 없고 빚은 잔뜩 있고…. 돈 많은 놈 둘이 아예 약점 잡으라고 내미는데 무슨 수로 배겨. 이러다가 어디 팔려가도 이상하지 않은데.”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그렇게 윽박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송선호는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리려고 했다.
“어디 봐봐. 저 새끼 힘이 보통 장사여야지. 다친 거 아냐?”
“몰라…. 아직 찌릿찌릿해.”
도현도 자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로웰도 다가갔다.
“작가님, 괜찮으신 거죠? 약 발라야 할까요?”
그녀의 뽀얀 가슴골이 드러났다. 작지도, 그렇다고 엄청 크지도 않았다. 손에 쥐면 분명히 말랑하고 딱 흡족할 만한 크기 정도…. 그 순간 송선호는 자기가 뭘 하고 있는 것인지 퍼뜩 깨달았다. 역시나 도현은 그를 남자로는 전~혀 보지 않는 것인지 그대로 가슴을 살펴보았다. 송선호의 시선은 절로 천장을 향했다.
“아, 좀 빨갛기는 하네요. 멍들려나.”
“멍은 안 들 거 같아요.”
그들의 대화에 송선호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들의 말대로 좀 빨갛기는…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댔다.
“아파?”
“이제는 별로….”
송선호는 붉은 자국이 조금 남은 부위를 손으로 눌러보며 다시 물었다.
“진짜 안 아픈 거 맞아? 병원 안 가도 돼?”
“안 아프다니까. 그리고 너 지금 내 가슴 만지고 있는 거 알아?”
“…!!”
송선호는 두 손을 퍼뜩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곤 기겁을 해서 외쳤다.
“줘도 안 먹어!”
“안다…. 귀에 인이 박히겠네.”
그리고 누가 준다고. 도현이 혀를 쯧 찼다.
“왜죠? 전 주면 땡큐 할 거 같은데.”
로웰이 의아하다는 듯이 송선호를 보았다. 그리고 납득했다. 역시 게이….
*
“역시 남자는 강하고 다 가진 것 같지만 여주에게만 약하고 여주는 청순하고 예쁘면 장땡이죠.”
“그렇죠? 우리 이번엔 좀 쉽게 가요, 선생님.”
두 여자의 앞에는 35인치짜리 대형 스크린이 두 개 떠 있었다. 하나는 로웰 리&도현 킬스버그의 합작 만화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하나는 소설 판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가 떠 있었다. 이제 SNS나 검색엔진, 각종 연재 플랫폼에 광고 노출이 많이 되고 있었다. 연재까지는 이제 딱 44일 남았다. 소설은 일주일 1회 연재, 만화는 일주일 2회 연재로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소설은 만화 연재 후 두 달 뒤부터 연재되기 시작할 것이다. 만화 버전의 오디오 드라마는 연재 후 반응을 보고 곧바로 붙일 예정이었다. 만화를 먼저 연재하고 2주 뒤에 오디오 드라마가 서비스되면 조회 수를 꾸준히 올릴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만화도 소설도 광고란은 경매로 전부 팔렸다. 기본요금 + PPC(Pay Per Click) 방식의 수익구조였다. 초기 10편을 제외하고 연재 시 선착순 1만 명 및 추첨 1만 명만이 당일 연재분을 무료로 볼 수 있고 나머지는 전부 유료로 결제해서 봐야 했다. 오디오 드라마는 추가 요금이 붙었다. 요즘 세상에 불펌 같은 걸 해서 무료로 풀었다간 바로 잡히고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감방 행이다. 만화의 경우 10개국어, 소설은 4개국어로 서비스될 예정이다. 각국의 반응을 보아 단행본 및 이북 출간 시에는 아마 더 많은 나라에 서비스될 것이다.
“결국 남자 주인공 모델은 다니엘 씨로 낙점이네요.”
로웰의 그림을 찬찬히 보던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머리카락은 짧았지만 확실히 무뚝뚝하고 진지한 분위기나 표정, 체격은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전 킹쉴드 씨 같은 몸을 더 그리고 싶긴 한데…. 역시 여성향에서 그건 무리죠. 킹쉴드 씨를 남주 모델로 하면 바로 <남십자의 권> 같은 만화가 될 거에요.”
그런데 이런 무뚝뚝하고 성실해 보이는 느낌으로 미르 킹쉴드의 이상 성적기호인 야외 자위플을 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런 짓을 할 것 같은 남자로는 안 보이는데, 역시 겉모습으론 모르는 거야.’
저번에 다시 만난 미르 킹쉴드를 떠올리며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서브 남주로는 괜찮지 않을까요?”
“큰 건 클수록 좋으니까요.”
“네…. 전 벌써 소설에 등장시켰는데요, 킹쉴드 씨.”
두 여자는 이번 작품으로 아주 돈을 쉽~게 벌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TFC 여성 팬을 노리고 있었다. TFC 여성 팬들은 10대 중반에서 70대를 아우르며 TFC 스포츠복권이나 투기에도 적극적인 이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사회 계층이건 간에 TFC에 상당한 돈을 투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보통 로맨스 팬들(라이트 리더)에게는 새로운 소재로 인한 자극을, TFC 팬(헤비 리더)에게는 금손이 같이 덕질을 해주는 쾌감을 선사해주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주인공, 아람 첸은 국어국문과 졸업하고 대형 미디어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신입 기자였다. 그녀는 신입 기자로서 대중의 흥미를 끌 만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회사의 플랫폼에 게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읽어 광고가 노출되면 그만큼 인센티브를 받았다. 이제 막 회사에 들어온 신참이라 아직 유명한 선배들처럼 잘 해내지 못해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도박 빚으로 순식간에 빚더미에 나앉은 남자 주인공 세한 로마노프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드마스터로 태어나 15세에 곧바로 빚쟁이들에 의해 전쟁 용병으로 팔려간다. 그리고 대인전과 대몬스터전을 가리지 않고 돌면서 이름을 알리고 돈을 벌어 빚을 갚고 유명 TFC 클럽 신(新) 상하이의 <천하일로>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게 되고 메트로서울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7년의 격세지감을 느끼며 신 상하이와 메트로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하지만 악몽과 폐소공포증, 공황장애 등의 증상을 앓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습관이 생겨나고 마는데….
“근데 로마노프도 배운 게 없는 애고 킹쉴드 모델 서브남주도 영 배운 거 없는 스타일이라 우리 아람이가 정신적으로 교감할 만한 남자 캐릭터 하나 정도는 있어줘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작가님?”
“음… 송선호를 모델로 입에 걸레 문 설정만 빼고 한 번 가볼까요? 툴툴대지만 아람이한테 신경 쓰고 이것저것 해주려고 하고 이해해주기도 하고….”
그냥 캐릭터를 주변 인물로 대충 때우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물론 로웰은 반대하지 않았다.
“음… 그럼 직장 선배가 좋으려나요, 작가님? 근데 TFC 선수들이랑 경쟁하기엔 너무 모양이 빠지는데?”
“그럼 진짜 송선호처럼 집이 재벌이라고 하죠, 선생님. 돈보다 좋은 스펙은 없어요.”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로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송 편집장 집이 재벌이에요?”
“모르셨어요? KP그룹이 걔네 아버지 쪽, 할머니가 회장이라고 들었어요.”
한국에는 글로벌 디바이스 시장을 지배하는 SS그룹을 비롯한 대단한 기업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아시아 콘텐츠 시장을 장악한 KP그룹도 유명했다. 방송, 뉴스, 소설, 웹툰, 드라마 등 온갖 콘텐츠를 생산, 소비할 수 있는 거대 플랫폼을 가지고 있었다.
“헉. 진짜요? 그럼 우리 출판사도 거기 쪽이니까… 송 편집장 낙하산이었어요?”
“낙하산이긴 한데…. 대학도 좋은 데 나오고 능력도 좋아서 낙하산이라고 뭐라고 할 만 한가요. 송 편집장 일하는 거 보면 완전 귀신이잖아요.”
“아, 하긴. 어째 송 편집장 때깔이… 편집장 때깔이 아니었어요.”
“그죠? 저도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스토리라인을 점검하고 각자 약간의 작화나 문장 수정을 한 뒤 의견을 다시 나누었다.
“이제 슬슬 진짜 SM 플레이가 나와야 하는데.”
365개의 SM 야동을 벌써 3분의 1이나 본 도현과 로웰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플레이를 작품에 묘사한 적은 없었다. 로웰조차도 연습을 위해 트레이싱을 한 적은 있지만 그대로 그림을 그려 넣은 적은 없었다.
“역시… 야동도 그렇고 실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썰들도 그렇고, 이게 실제라고 생각하면 깬단 말이에요. 뭔가 더럽고.”
로웰이 말했다.
“저도 그 생각은 들었어요. 섹시하지가 않아요.”
“참…. 그래서 제가 2D만 팝니다만.”
그리고 로웰과 도현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 덕질은 자급자족이죠.”
“맞아요, 선생님.”
이심전심. 그들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여자 둘은 쑥덕거리면서 기상천외한 플레이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플레이만 하는 것은 진짜 그거 안 하면 못 사는 변태들이나 모를까 일반인들은 괴리감만 느낄 뿐이다. 결국 앞뒤 상황과 두 주인공의 심리와 교감이 중요한 것이다. 그게 바로 로맨스 판타지다.
“역시 야동은 볼 게 못 돼요. 이런 건 분위기니까요.”
“그렇죠.”
송선호가 말했을 때는 아주 대놓고 부정했던 그들이었으나 그 일은 이미 까마득히 잊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현이 말했다.
“아람이가 처음 로마노프를 인터뷰할 때 로마노프가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그게 얼마나 비참한 삶이었는지 처음 깨닫게 되잖아요.”
“로마노프 주변에도 비슷한 사람들 밖에 없었고 있어도 제대로 그랑 교감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사람이라는 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있을 때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현이 말했다.
“그때 아람이가 조금이라도 성향을 깨닫게 되면 어떨까요, 선생님? 이미 소설에선 약간 낌새를 넣었는데….”
“어디 봐요.”
“로마노프가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 닦을 때 뭔가 확 오는 거죠.”
“좋은데요….”
그렇게 그들이 작품 활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송 편집장…은 아닐 거고. 혹시 스톤하츠 씨 오시나요, 작가님?”
송 편집장은 초인종 같은 거 안 눌러도 바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생체정보까지 등록해서 그냥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다.
“오늘이… 아! 모델. 모델들 보기로 했잖아요. 그때 우리 80명이나 체크한다고 눈 빠지는 줄 알았잖아요.”
“아, 맞다.”
도현은 바깥 CCTV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곧 모델 에이전시에서 나온 4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얼굴이 손바닥만 하고 키가 훤칠하고 날씬한 여자가 4명 들어왔다.
“선생님, 송 편집장한테 전화 좀 해주세요. 전 마실 거 내올게요.”
도현이 부엌으로 가면서 로웰에게 말했다. 로웰은 4명의 모델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예시 사진을 모델들에게 보여주면서 먼저 설명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신작 만화를 그리고 있는데 이게 19금 만화라 포즈 모델이 필요합니다. 남자 모델은 구해 뒀고 간단하게 카메라 테스트를 한 후에 결정할 거고, 촬영은 여기서 합니다. 매일 하는 것은 아니고 필요할 때마다 스케줄 짜서 알려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적어도 2주일 전에는 스케줄을 미리 잡을 거구요. 그럼 잠깐 보고 계십쇼.”
로웰은 그러고선 자기 삐삐 머리를 습관적으로 당기면서 송선호에게 전화를 했다.
“송 편집장님, 어디십니까. 늦으십니까.”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 모델들 도착했나요?]
“4명 다 와 계십니다.”
[3분이면 도착합니다.]
“오케이~.”
도현이 그새 음료를 가져왔다. 4명의 모델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사진을 보고 있다가 도현까지 자리에 앉자 물었다.
“남자 모델 분은 이쪽이신가요? 사진에 나오시는?”
도현과 송선호가 나온 사진을 보면서 한 명이 물었다. 도현은 로웰을 보았다가 로웰이 어깨를 으쓱하자 다시 그녀를 보았다.
“글쎄요…. 그렇다고 딱 말하기가 좀. 곧 올 텐데 다시 얘기해봐야 하거든요. 일단 다른 분은 확정이에요.”
송선호를 모델로 한 캐릭터도 결국 출연 예정이라 포즈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기왕이면 쉽게 갈 생각이라 각자 모델별로 외견도 대충 따라가고 있었다. 3분 걸린다더니 송선호가 금방 도착했다. 초인종 같은 건 누를 필요도 없이 자동문이 벌컥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하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놈의 정원은 쓸데없이 더럽게 넓다. 송선호가 투덜거림을 삼키며 넥타이의 목 죄임을 풀었다. 그리고 안경을 벗으며 얼굴 위로 흐르는 땀을 닦자 모델 4명이 절로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 에이전시지? 진짜 잘생겼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걸 보고 그는 바로 영업용 미소를 띠며 인사를 했다.
“멀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KP노벨 편집장 송선호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송선호는 그들에게 명함을 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얼굴도 엄청 잘생기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쓰리피스 양복을 입고 나타난 탄탄한 몸매의 남자라 커머셜 모델일 줄 알았는데 완전 화이트칼라다. 모델들은 송선호를 아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사리나 씨부터 촬영해볼까요?”
네 명의 모델들은 바로 선 자세, 앉은 자세, 누운 자세, 엎드린 자세, 기댄 자세 등 전에 다니엘과 미르도 한 차례 거쳐갔던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다.
“어떠십니까, 선생님?”
송선호와 도현이 로웰의 기색을 살폈다. 여기선 그들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 로웰의 영감이 중요한지라 그녀의 마음에 드느냐, 들지 않냐가 모든 걸 결정했다.
“송 편집장님, 죄송하지만 사리나 씨랑 간단하게… 포옹하는 포즈 취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봐서는 사리나 씨가 주인공이랑 제일 비슷한 느낌인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송선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리나라는 호리호리한 모델에게 다가가서는 양해를 구했다.
“아까 잠시 걸어오느라… 땀 냄새나지는 않으세요?”
“아, 아뇨…. 괜찮아요. 좋은 냄새밖에 안 나요.”
도현에게는 절찬리에 쌍욕밖에 하지 않던 송선호가 모델에게는 아주 친절했다. 참나…. 도현은 어이가 없어서 픽 하고 웃었다.
“저러면 송 편집장도 포즈 모델 시켜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작가님, 혹시 송 편집장님한테 죄지은 거 있으세요?”
“음… 제가 기억하는 한으로는 딱히… 큰 건 없는데요?”
“작은 건 있어요?”
“작은 거라면 뭐, 이것저것….”
도현과 로웰이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송선호는 공중에 있는 멀티스크린의 자료를 보고 자세를 잡았다. 킬스버그 스윗홈의 1층 거실에는 이미 침대, 벽, 의자, 소파 및 조명 등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사리나의 등을 벽에 붙게 세운 후 바짝 붙어서 섰다. 마치 다른 것에서 그녀를 가리듯이 말이다. 전방위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가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사진을 확인한 로웰은 직접 사진기를 들고 와서 미묘한 각도에서 그들을 찍거나 했다.
“역시 사리나 씨가 제일 잘 맞는 거 같아요, 작가님.”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여자 모델이 결정되었다. 다른 모델들에게 카메라 테스트를 한 수고비를 주고 사리나와는 앞으로의 얘기를 잠깐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약속을 잡고 그녀도 보내고 도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송선호에게 말을 걸었다.
“나랑 선생님은 너 게이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뭐? 그런 얼토당토않은 얘기가 도대체 어디서….”
송선호가 말하다가 픽 비웃었다.
“뭐? 너랑은 죽어도 안 하겠다고 해서? 그건 너 싫어서 그래. 너 싫어서.”
“안다. 알아. 나도 너 싫어하는 건 알지?”
도현과 송선호가 여느 때와 같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로웰은 가만히 스크린으로 사진을 보면서 그림을 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송선호와 도현의 사진을 몰래 찰칵 찍고는 다시 그림을 그려보았다.
‘…이거 안 되겠는데?’
처음부터 도현을 이미지화한 그림을 그렸다 보니(도현만큼이나 로웰도 아주 쉽게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하니까 로웰이 그림을 그리는 맛이 안 났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모델 그거 하나 바꿨다고 아예 마음속 이미지와 달라 어색하다. 그리는 사람이 어색해하니 그림도 어색하다. 심지어 아람 첸을 도현과 많이 닮게 그린 것도 아니다. 그냥 체형이 비슷하게끔….
‘어쩌지….’
다니엘 스톤하츠야 사람이 좋아서 이런 것도 해준다고 했지만 미르 킹쉴드는 물 건너갔고, 만약 도현이 계속 모델을 한다 하더라도 송선호는 절대 안 하려고 할 것이다.
‘뭐…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로웰 리는 펜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
“어… 진짜 다니엘 스톤하츠다.”
사리나는 깜짝 놀라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밀유지계약서까지 썼지만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니엘은 여자 모델을 구했다는 얘기를 미리 듣긴 했지만 낯선 여자가 곁에 있자 조금 긴장했다. 낯설고, 특히 예쁜 여자는 어쩐지 경계심부터 든다.
“이번부터 여자 모델을 대신해줄 사리나 씨라고 합니다. 사리나 씨, 이쪽은 다니엘 스톤하츠 씨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와, 작가님 어떻게 TFC 선수를 다 아세요? 신기해요.”
TFC 선수라 하면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인간을 뛰어넘는 남자들의 세계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도현은 호호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뒤에서 송선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상대는 프로라 아까 전의 발그레한 얼굴은 사라지고 자료를 보고 요구되는 자세를 정확하게 잡는 것에 집중했다. 이런 것이 어색한 다니엘은 많이 버벅거리면서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가기 급급했다. 사실 다니엘은 아까부터 자신이 이런 걸 하고 있는 게 영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걸 왜 한다고 했었더라….’
차마 진지하게 포즈를 잡는 모델이나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한숨을 크게 내뱉지는 못했지만… 역시 영 바보 같았다. 모니터를 보고 있는 로웰과 도현이 속닥거렸다.
“뭔가 영 느낌은 안 나지만… 그래도 체위는 나오니까 그림은 나오겠죠, 선생님?”
도현이 물었다. 로웰은 애매하게 태도를 보였다. 이번 촬영에서 로웰은 그다지 열의가 없어 보였다. 전에 도현과 다니엘이 촬영할 때는 자신도 카메라를 들고 이것저것 훈수를 들면서 지시를 했는데 말이다. 진짜 모델을 쓰니 그래야 할 필요성이 없어진 걸까. 그래서 촬영은 전보다 빨리 끝났다. 예정대로 주요 체위 중에 5개 정도를 끝냈다. 100가지 세트를 등장인물 별로 만들면 그때부터는 촬영이랄 게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다니엘의 촬영이 끝나자 송선호가 나갔다. 사리나는 다니엘보다는 송선호가 취향이었는지 송선호와 촬영을 할 때는 말을 꽤 걸었다.
“운동 많이 하시나 봐요.”
“아, 네…. 스트레스도 풀 겸 자주 합니다.”
“어디서 운동하세요?”
“KN 파이낸셜 근처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요.”
“아! 케이지 피트니스요? 거기 연예인들 진짜 많이 가는 덴데. 저도 거기로 옮길까 봐요. 트레이너들도 좋나요?”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유례없이 촬영이 화기애애하게 느껴졌다. 도현은 촬영을 유심히 보면서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소재나 사건, 줄거리 같은 것을 스크린에다 작성하고 있었다.
‘남녀 사이에 저런 느낌도 괜찮지.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은근한 유혹이랄까…. 남자는 예의 바르지만 좀 철벽 치는 느낌…. 로마노프한테 이런 일이 있게끔 해볼까?’
사리나는 모델답게 키도 크고 늘씬했다. 화려하게 예쁘다는 느낌보다는 피부가 투명한 느낌의 예쁜 얼굴이고 그래서 오히려 남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 나는 미녀였다. 게다가 말하는 걸 보니 사근사근하고…. 도현은 이것저것 적어보다가 카우치에 앉아 있는 다니엘에게 물었다.
“다니에… 아니, 스톤하츠 씨.”
“다니엘이라고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도현 씨.”
그만둔다고 할까 말까 고민을 하던 다니엘은 그녀가 말을 걸자 깜짝 놀라서 뭘 생각하고 있는지 까먹었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벌써 습관이 됐나 봐요.”
도현이 웃으면서도 스크린에 눈을 고정하고는 말했다.
“음… 남자들 입장에선 어떤 여자들이 매력이 있나요? 물론 이런 건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많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런 쪽은 잘 모릅니다.”
다니엘은 솔직하게 답했다. 주인공 세한 로마노프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모델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스타일의 남자가 어떤 여자한테 호감을 느낄지 궁금했다. 어떤 식으로 느끼는지도 말이다. 도현은 두다다 타자를 치면서 다시 물었다.
“음… 이런 거 많이 실례지만, 사리나 씨는 어떤가요? 날씬하고 예쁘고…. 그리고 성격도 좋으신 것 같은데.”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아주 딱딱하고 형식적인 답변이군…. 도현은 그런 느낌도 자신의 언어로 적어 넣었다. 그에게 송선호 같은 유연함은 없다. 칭찬이지만 타이밍과 딱딱함 때문에 오히려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다. 도현은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다니엘 씨는 여자를 볼 때 뭐부터 보세요?”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니엘의 얼굴을 보았다. 다니엘은 일을 하고 있는 도현의 옆모습을 흘긋흘긋 보고 있다가 깍지를 낀 자신의 손으로 바로 눈을 돌렸다.
“얼굴…인 것 같습니다.”
“앗, 그래요? 남자는 어릴 땐 얼굴부터 아래로 훑어보지만 나이가 들수록 밑에서부터 위로 시선이 올라온다는 말이 있던데요?”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스타일의 얼굴이 좋으신데요? 백인? 흑인? 아시안? 아니면 남미? 혼혈? 혼혈이라면 어느 쪽으로….”
“그런 것보다는… 분위기… 뭐라고 해야 할지…. 그냥… 제가 끌리는 스타일의 얼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스타일이 뭘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라고 말을 하면서 또 스크린에 타자를 치다가 도현이 앗, 하고 손바닥을 쳤다. 그리고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혹시 제 얼굴이 취향이세요?”
“…….”
“아, 내 얼굴이면….”
다니엘은 센트럴 백화점 테러 사건 때부터 바로 도현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 난리의 와중에 말이다. 그것도 이렇게 무뚝뚝한 숙맥이. 안절부절못하면서 도현과 어떻게든 말을 섞으려고 애썼다. 도현은 자신의 얼굴이 가진 매력이 무엇인지, 어떤 느낌에 남자들이 매료되는 것일지 곰곰이 고민을 하면서 생각나는 이야기를 바로바로 기록했다. 거울까지 들고 와서 자신의 얼굴을 골몰히 보고 있기도 했다.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남자의 심리를 적고 싶다.
“내가 절대 못생긴 얼굴은 아니지…. 예쁘지… 예뻐…. 음, 그래도 남자가 반한다면 어떤 식으로 느끼는 걸까….”
걔들이 내 눈화장이 잘 됐거나, 립스틱 색깔이 뭐라던가 이런 걸 세세하게 따질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예뻐서 끌렸다, 이런 표현은 여자들이 안 좋아한단 말이다. 뭔가… 오히려 이럴수록 좀 더 서정적인 느낌이 필요했다. 본인의 얼굴이라서 점점 더 난해해졌다. 도현이 아주 골몰하는 표정을 지으며 거울을 보고 있자 다니엘이 주저하다가 말했다.
“저… 뭔가… 분위기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자신을 추궁할 때는 도망가고만 싶었는데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보며 고민하니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 본능적인 이끌림이 있었다.
“제 분위기요? 내 분위기….”
그런 표현은 너무 애매하다. 도현은 일단 그의 말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도 고민을 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남자들은 투박하다고 해야 하나, 여자 앞이라고 말을 안 하는 건가. 보통 여자들은 저 남자가 괜찮다 하면 이것저것 막 얘기하거든요. 머리 스타일이 이래서 좋다든가, 저래서 좋다든가, 키가 커서 좋다든가, 몸이 좋아서 좋다든가, 하다못해 돈이 많아서 좋다든가. 그런 거 듣다 보면 대충 감이 잡히는데. 자기들끼리는 잘 말하면서. 솔직하지가 못해.”
도현이 그렇게 푸념하니 다니엘은 갑자기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귀를 벌겋게 하고는 열심히 말을 자아냈다.
“여성스럽고… 눈이 정말 예쁘십니다. 속눈썹이… 머리카락도…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세련되고…. 키도 크신데 어딘가 가녀리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데도 보면 정말 당차고…. 뭘 어떻게 할지 예상을 할 수가 없어서 항상 당황스럽고….”
다니엘은 누군가에게 재촉이라도 당한 것처럼 어떻게든 도현의 매력을 말로 표현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다들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건지 순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도현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가 다니엘 씨에게는 그렇게 보이나 봐요? 나쁘지 않네요.”
“…놀리지 마십시오.”
다니엘은 무릎 위에 깍지를 껴서 둔 자기 손만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런 진지한 남자는 지금까지 본 적도 없었다. 도현은 호기심이 생겨 그에게 엉덩이를 당겨 더 다가갔다.
“좀 더 말해봐요. 글 쓸 때 참고 하게요.”
다니엘은 도현이 다가온 만큼 엉덩이를 움직여 멀어졌다. 그러니까 도현이 더 다가갔다. 다니엘은 또 도망갔다. 아니, TFC 선수로 그 험한 경기를 하는 남자가 자기 몸무게 반 정도밖에 안 나갈 사람이 무서운 모양이다.
“지금 저는 어때요? 전에 다니엘 씨 만날 때는 열심히 꾸미고 나갔는데 지금은 화장도 안 하고 옷도 이렇고. 실망스럽진 않으세요?”
“절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맨얼굴이 더… 좋습니다. 예뻐요….”
다니엘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기어들어 가듯 말했다. 그녀가 자꾸 다가왔다. 왜일까.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도현은 후후 웃으면서 그를 계속 희롱했다.
“에이, 거짓말. 어떻게 맨얼굴이 더 예뻐요. 네?”
“아닙니다. 전 사실대로… 더 오지 마십시오. 자리, 자리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제 얼굴 자세히 보세요. 마저 도와주셔야죠.”
그러고 있는데 촬영이 끝난 송선호가 다가와서 도현의 팔을 잡아 다니엘을 구해주었다.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만하시죠, 작가님. 그거 성희롱입니다.”
“아, 그런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왕년에 놀았던 습관 여기서 펼치지 맙시다, 네?”
“아, 음.”
생각해보니 예전에 이러고 놀았지. 술 따르는 남자들을 이런 식으로 희롱하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이래서 유흥 즐기는 사람들이 꼭 사회에서 사고를 치는 것이다. 돈을 받으니까 그런 거 견뎌주는 거지 보통 사람들한테 그런 짓 하면 큰일 난다는 걸 깜박하는 것이다. 도현은 웃는 얼굴로 으레 이런 경우에 단골로 나오는 대사로 다니엘에게 사과했다.
“놀려서 죄송해요. 장난이었어요.”
“…….”
장난…. 다니엘은 목이 뻑뻑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려 자기 무릎을 보면서 맹렬하게 자신을 타일렀다.
‘이 여자는 나쁜 여자다. 처음부터 나쁜 여자였다. 나쁜 여자다. 나쁜 여자다. 나쁜 여자….’
*
“아, 죽어야 돼. 난 죽어야 돼. 답이 없어. 답이 없다고. 그냥 누구 죽이고 싶다. 아무나 지금 당장 죽어라. 제발 누구 한 명만 죽어라.”
금발 삐삐 머리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킬스버그 스윗홈의 번쩍뻔쩍한 6인용 소파에 엎드려 세상을 비관하고 있었다. 합작 작품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난 뒤론 로웰은 아예 도현의 집에 둥지를 튼 지 오래다. 연재까지는 이제 딱 한 달이 남았다.
“선생님… 괜찮아요. 곧 다시 잘 그릴 수 있게 될 거예요.”
도현 킬스버그는 언제나처럼 로웰 리를 열성적으로 응원했다. 로웰은 여자 모델을 바꾼 후 슬럼프로 곤두박질쳤다. 도현은 로웰의 덕분에 슬럼프에서 벗어나 글을 다시 쓸 수 있게 된 만큼 그녀를 돕고 싶었다.
“제가 어떡할까요, 선생님? 말만 하세요. 다 해드릴게요. 우리 기분 전환하게 쇼핑 갈까요? 배 탈까요? 전화하면 2시간 내로 준비되는데.”
카우치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 있는 금색 삐삐 머리를 보며 도현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로웰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거렸다. 어휴, 고생은 우리 로웰 선생님이 다 하시지….
로웰은 삐이걱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딱딱하게 목을 돌려 도현을 보았다. 그녀의 뱅글뱅글 안경이 오늘따라 아주 어두침침했다.
“작가님… 그럼….”
“네, 말씀하세요!”
며칠 동안 이러고 있었던 로웰이었다. 드디어 로웰이 입을 떼자 도현은 뭐든지 듣겠다는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였다. 클래식한 초인종이 울린다. 그리고 다른 때와는 다르게 저택의 인공지능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석기 채권자님 오셨습니다.]
“!”
전에 미르 킹쉴드가 고깃덩어리가 어쩌고 콘크리트가 저쩌고 하는 협박을 들었을 때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던 도현이었는데 그 순간 아주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이 되더니 벌떡 일어나서 두다다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머리고 옷이고 현관 옆 거울에 비춰서 막 정리를 하는데 곧 현관문을 누군가 쾅쾅 두드렸다.
“거, 아가씨 집에 있지? 어? 문 열어.”
도현은 심호흡을 하고 일단 로웰을 돌아보았다.
“서, 선생님… 방에 가 계시겠어요?”
“손님이세요?”
“네, 네.”
로웰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도현의 집이니 그녀의 개인적인 손님이 올 수도 있는 일이다. 로웰은 암흑의 기운을 흩뿌리며 발을 질질 끌며 2층으로 올라갔다. 도현은 로웰이 올라가는 걸 보고 문을 열었다.
“여, 작가 아가씨. 오랜만이네.”
“네, 네. 오셨어요….”
문을 열자 거의 로웰만큼 짤똥한 키에 옆으로 잔뜩 부푼 험악하게 생긴 대머리 중년 남성이 제각각으로 생긴 덩치들을 다섯 명이나 데리고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왔다. 몇몇은 야구 배트도 들고 왔다. 도현은 안색이 시퍼레져서는 그들을 따라갔다.
“차, 차 드시겠어요?”
“어, 난 아이스아메리카노~.”
도현은 얼른 부엌에 가서 커피를 내리고 각종 차를 담은 쟁반을 들고 거실로 왔다. 얼굴에 흉터가 크게 있는 대머리 중년 남성, 채석기는 커피를 반이나 쭉 마시더니 캬~ 하고 감탄했다.
“거, 그거 알어? 난 우리 작가 아가씨 집에서 먹는 커피가 그렇게 맛있더라고. 제일 맛있어.”
“네, 네. 감사합니다….”
“거기, 그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 옆에. 어, 그래. 이리 와. 이리 와.”
채석기의 옆에 앉자 도현은 험악한 덩치들 딱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었다. 채석기는 자기 주머니에서 고물 디바이스를 꺼내 공중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상태가 좋지 않아 가끔 지직거렸다. 도현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쁜 얼굴 밑으로 각종 글자, 숫자가 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그녀의 얼굴 위에 빨간색 도장처럼 찍힌 라는 표시와 <6개월 이자 연체>라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나 솔직히 진짜 좀 감명받았다.”
짤동한 채석기는 퉁퉁한 팔을 도현의 어깨에 턱 걸치고 담배부터 입에 물었다. 옆에서 도현을 툭툭 치며 라이터를 건넸다. 도현은 아주 공손하게 불을 켜고 한 손으로 가리며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가 발을 한 짝 들어 까딱하자 다른 덩치들이 테이블을 당겨 그가 발을 얹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다리를 쭉 뻗어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위에 올리고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솔직히 요즘 같은 세상에 우리한테서 돈 빌리자마자 연체하는 사람은 잘 없어. 그, 아가씨도 잘 알잖아. 요즘은 말이야, 요즘은, 응?”
“네, 네. 맞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참 나쁜 사람들로 생각을 하는데. 사실 우리야말로 참 착한 사람들이다? 은행도 버린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는 믿고 돈을 빌려준다고. 그래서 그 사람들도 숨통 좀 트고, 먹고 살고. 그리고 곱게 갚아주면 우리도 감사하고. 어? 우리가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는 거지, 비즈니스. 우리가 땅 파서 장사하나? 어? 우리가 자원봉사자야? 돈을 빌렸으면 따박따박 갚아야 할 거 아냐. 그러기로 하고 빌려 간 거잖아. 아냐?”
“네,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완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채석기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하고 한마디 했다고 갚아야 할 돈이 딱 튀어나오면 얼마나 좋겠어? 작가 아가씨도 좋고 나도 좋고. 어휴, 참. 옛말 틀린 거 없다고 돈 주고 나면 돈 먹은 놈이 왕이야. 빚쟁이가 빌어야 해. 돈 좀 갚아주십쇼. 제발 돈 좀 갚아주십쇼. 이게 세상이 맞게 돌아가는 거야? 어? 이게 말이 되냐고. 세상에 정의가 없어, 정의가!”
그가 언성을 높이자 도현이 움찔했다.
요즘 세상에는 파산이라는 게 없었다. 돈을 빌리면 무조건 갚아야 한다. 물론 대출사기를 당한다든가 범죄에 휘말리면 나라에서 구제해준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신용으로 돈을 빌렸는데 먹고 짼다? 이제는 불가능한 얘기다. 왜냐? 제1세계 금융기관들이 전 세계적으로 소송을 걸고, 승소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기관은 자기 자신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주체로써 합리적 의사판단을 하는 자연인을 존중하는데 어떻게 자연인은 자신의 의사결정으로 계약한 채무 관계에서는 그 책임을 저버릴 수가 있는가. 자신의 의사결정을 책임지지 않는 자연인은 자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 분류되지 않든가, 아니면 계약관계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게 판결이었다. 제1세계 국가기관까지 줄줄이 파산해대자 결국 그런 결론이 나왔다.
빌리면 갚는다.
22세기 자본주의의 간단한 정의였다.
“제가… 제가 이제 진짜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한 달 뒤부터 연재도 시작하구요. 그러면 이제 인세도 더 들어올 거고 그러면 정말 연체 안 하고 잘 갚을 수….”
세상 무서울 게 없이 사는 것 같아 보이던 도현이었다. 한철 살다 죽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메뚜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오히려 빚 때문에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도현은 사실 아주 오랫동안 빚을 가지고 살아왔다. 돈을 꽤 벌기 시작한 초기부터 말이다. 예전에는 원리금을 꼬박꼬박 갖다 바쳤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런 건 유동성이 한 번 막혀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어지는 법이었다.
게다가 요즘 빚이 보통 빚인가. 도현은 빚에 팔려가 생활하는 자신을 아주 리얼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작가적 상상력과 통찰력까지 합쳐서 아주 사실적인 상상을 말이다.
“이번엔 진짜예요. 그리고 이번 작품 진짜 대박 칠 거라…. 벌써 광고도 많이 했는데 보셨을 거예요. 저….”
“아니, 아니야. 아니야, 아가씨. 아직 내 말이 안 끝났거든. 얘기 좀 들어봐봐.”
“네….”
“그, 아가씨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 비즈니스는 안정성이 최우선이야. 도박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일확천금 노리고 하는 사업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네….”
“그, 작가 아가씨가 한때는 잘나간 거 나도 알아. 그러니까 이런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배도 있고 그렇지.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다 누리은행 거잖아. 어? 작가 아가씨가 이렇게 겉보기엔 멀쩡해도 이대로라면 우리가 건질 게 없다는 말이야.”
“아니, 제가 연재만 시작하면…!”
“어허. 내가 뭐랬어? 우리 사업은 안정성이라 그랬지? 아가씨가 인세 몇 푼 벌어 봤자 어차피 다 누리은행으로 들어갈 건데. 한물간 작가 아가씨가 이번 책으로 얼마나 벌지도 솔직히 우리는 의문이고 그냥 아가씨를 상하이에다 팔아버리는 게 우리가 봤을 땐 더 확실하게 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거 같다는, 뭐 그런 계획이 잡혔어.”
“아, 아니, 잠깐만요…!”
“우리가 아가씨 취업준비하느라 고생할까봐 벌써 이력서 쫙 돌려봤다. 볼래? 아가씨 생각보다 더 인기 있더라. 경매가 계속 오르고 있다. 볼래?”
다른 홀로그램 창이 떴다. 그녀의 각종 사진과 신상정보, 이력 등이 낱낱이 뜨고 그 밑에는 불이 반짝반짝하며 각 업소에서 조건과 가격을 실시간으로 부르고 있었다.
“솔직히 가난한 집 여자들이야 예뻐도 몇 푼 안 돼서 팔리는데 아가씨는 부자였잖아, 응? 남자들은 그런 여자가 화류계 들어오는 거 엄청 좋아해. 아무리 잘난 여자라도 돈만 주면 붕가붕가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아. 값도 잘 쳐줘.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석이조.”
“…….”
“10년… 뭐 관리 잘하면 20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남자는 많고 취향은 다양하고. 다원화 사회, 다원화. 알지?”
채석기는 도현의 턱을 잡고 고깃덩어리 살피듯 이리저리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그녀는 이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원금만 자그마치 40억이다, 40억. 이자까지 하면 벌써 50억이야. 내가 작가 아가씨 뭘 믿고 그 큰돈 빌려줬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젖통도 작은데.”
팔릴 만하려면 가슴이라도 커야지. 그게 요즘 담보 같은 건데. 채석기가 담배를 하나 더 물며 질겅거렸다.
“어쨌든 그렇게 됐어. 어허음. 여기 술도 좀 있지 않나? 야, 저기 가서 좀 꺼내 와봐라. 축하주 들어야지.”
그러자 덩치들이 어기적어기적 집을 뒤졌다. 술과 잔, 각종 안줏거리를 내놓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도현에게 말했다.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또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동네라. 너무 걱정하고 그럴 필요 없어요. 잘 팔아서 돈 빨리 갚으면 또 금방 끝나요. 작가 아가씨가 다 하기 나름이지. 응?”
“그래도, 쩝, 상하이가 낫대요. 서울이랑도 가깝고.”
덩치 하나가 둔한 목소리로 그렇게 첨언했다.
“그래. 가끔 놀러와. 술 정도는 사줄게.”
“…….”
올 게 드디어 온 것이다. 이제 도현 킬스버그의 인생은 끝났다. 도현은 두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며 ‘아’하고 숨을 내뱉고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끝났다…. 끝났어….’
그때 초인종이 또 울렸다. 그리고 인공지능 비서가 방문자를 알렸다.
[누리은행 하나 신조 팀장님 오셨습니다.]
“…문 열어줘.”
도현은 이제 그냥 다 놓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석기가 깜짝 놀라서 허리를 일으켰다.
“응? 뭐야? 누리은행?”
곧 정장을 멀끔하게 입은 여자와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집에다 빨간색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도현 로렌스 킬스버그 씨, 2127년 6월 11일 17시 34분 가압류 절차 진행하겠습니다. 부동산, 차, 크루즈쉽 및 동산을 확인합니다. 선고 시간 이후 14일 내 연체 이자를 납입하지 않으면 강제집행 들어갑니다.
50대 중반 가량의 팀장은 그렇게 무덤덤하게 선고하고는 종이로 된 문서를 도현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까 채석기가 띄운 것과 비슷한 홀로그램을 띄우더니 말했다.
“그리고 스톤캐피탈이라는 회사에서 킬스버그 씨를 경매에 올린 것을 확인했는데 맞습니까.”
“네….”
“거, 잠깐 당신….”
채석기가 테이블에서 다리를 내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경매소 및 법원에 취소신청 보냈습니다.”
“어, 야! 잠깐만! 우리가 먼저야, 씨팔!”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 채석기가 펄쩍 뛰며 일어났다. 메트로서울 인공지능 판사에게 사건을 넘기자 곧바로 판결이 떨어졌다.
“취소되었습니다. 킬스버그 씨의 신변은 누리은행 쪽에서 경매에 부칩니다.”
“야, 이 개년아! 우리는 신용으로만 빌려준 거라 우리가 먼저야! 몰라서 이래!!”
“킬스버그 씨는 누리은행에도 신용대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50억이야!”
“저희는 이자 포함 50억 5,231만 원입니다.”
“이, 씨팔 미친…!! 야! 이 쌍년아! 진짜 인생 두 번 사냐!! 돈을 이렇게 대책 없이 빌리면 어떡해!!! 암퇘지처럼 애 뽑다가 장기까지 뜯기고 싶어?!”
지금까지 여유작작하던 채석기의 얼굴이 완전 푸들푸들 떨렸다. 돈 떼먹히게 생겼다. 그것도 50억이나! 그는 곧바로 변호사를 통해 메트로서울 지법 인공지능 판사에게 다시 사건을 넣었다. 누리은행 쪽에서도 넣었다. 채석기가 아주 쌍욕을 해댔다. 이럴 땐 까닥하면 작은 영세기업이 당하기 마련이다. 한참 각자의 입장에서 판사와 사건을 조정하려고 하다가 판사가 둘에게 조정안을 보냈다.
<메트로서울지법 금융 및 경제 관련 사건 전문 인공지능 판사 MSFTT-31로부터 누리은행 및 스톤캐피탈 자연인 담보 압류 분쟁 조정 권고안입니다.>
“리젝트! 우리 거야!!”
“거절합니다. 100% 누리은행이 인수합니다.”
둘 다 권고안을 읽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그러자 곧바로 도현의 스윗홈 인공지능 비서가 알렸다.
<메트로서울 파이낸셜 판사 MSFTT-31이 메인 TV 접속을 의뢰합니다. 받아드리겠습니까?>
도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름다운 정원을 전망할 수 있는 전면 유리창이 화면으로 바뀌며 <메트로서울 파이낸셜 제3 지법 : 판사 MSFTT-31>이라는 글자가 고딕체로 떴다. 누리은행은 변호사를 멀티스크린에 곧장 연결했다. 스톤캐피탈도 마찬가지였다.
[분쟁번호 319902 : 자연인 담보 압류 분쟁 조정을 맡은 MSFTT-31 판사입니다. 누리은행 대변인 하나 신조 및 변호사 알베르토 강 맞습니까?]
“네, 판사님.”
[네, 판사님.]
하나 신조와 그녀의 변호사가 대답했다.
[스톤캐피탈 대표 채석기 및 변호사 신조현 맞습니까?]
“네, 판사님.”
[네, 판사님.]
그리고 판사 앞에서 고성과 자료가 마구 오갔다. 여기서 도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 와중에도 누리은행 직원들은 열심히 딱지를 붙였다. 도현은 실의에 빠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카우치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비난하고자 한다면 쉽게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함부로 빚을 졌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ᅌᅳᆯ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이렇게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간에도 죽어버리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상황이 그녀의 컨트롤을 벗어나면서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으면 적어도 그녀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다 진행되겠지. 그래도 마지막에는 조금 희망이 보였는데. 너무나 큰 절망에 오히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도현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작가님?”
삐삐 머리를 한 만화 캐릭터 같은 여자가 안경 아래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현을 보고 있었다.
“아…!! 아,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
도현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진짜 까먹고 있었다. 로웰이 이 난리를 알아차리고(모를 리가 없지. 벌써 3층까지 올라가 딱지를 붙이고 있는데) 내려와 있었다. 도현은 본인의 인생에 드디어 종말이 도래한지라 아주 멘탈이 나가 있었다. 도현은 신조 팀장을 불렀다.
“저… 2층에 있는 물건 중에는 제 거 아닌 것도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로웰 리 선생님 물건들이라….”
그렇게 말하자 신조 팀장은 도현을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은 바코드를 검색하여 물건을 가려내 딱지를 떼거나 다시 붙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 앞으로 작업같이 못하게 될 것 같습니다. 시놉시스랑 스토리는 많이 나왔으니까 앞으로 다른 스토리 작가 구하셔서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도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눈물이 핑 돌았다. 도현은 창피하고 또 절망스럽기도 해서 로웰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한참 도현의 얼굴을 보던 로웰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한 번 잡았다.
“괜찮아요, 작가님.”
“네…. 흑….”
살아있다면 결국 사람은 살게 된다. 여기까지 와서도 도현을 손가락질하거나 비난을 하는 게 아니라 위로를 해주는 로웰이었다. 도현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후회를 해왔지만 지금처럼 후회가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믿어주고 또 자신도 누구를 믿고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면서 응원을 해주고… 그런 사람은, 그런 우정은 로웰 리가 태어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정은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에 의해 미래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도현은 눈물을 닦으며 로웰을 현관으로 안내했다.
“선생님이랑 같이 작업해서 진짜 행복했어요. 감사합니다. 잊지 못할 거예요. 선생님은 제 은인이세요…. 흑.”
“잠깐만요. 잠깐만요, 작가님.”
로웰이 도현의 손을 잡았다. 도현은 눈물을 줄줄 흘리다 결국엔 흐엉하고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키가 훌쩍하게 큰 도현의 손을 잡고 로웰이 빚쟁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도현을 어디에다 얼마에 팔아 예상 수익을 얼마로 나눌지, 그 후에도 빚이 갚아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에 대해 판사와 격렬하게 의논 중이었다.
“저기, 판사님. 제가 여기 우리 작가님 돈을 좀 갚아드리면 일이 어떻게 되나요?”
“선생님… 안 그러셔도….”
도현이 깜짝 놀라 그녀를 말렸지만 그녀는 도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도현은 더 질질 울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그러자 하나 신조 팀장이나 채석기 대표나 아주 노골적으로 로웰 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몇 살인지도 모르겠고 철없어 보이는 금발 삐삐 머리에 뱅글뱅글 안경, 늘어진 티셔츠에 멜빵을 입고 있는, 더없이 금융적 신용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인공지능 판사도 카메라로 그녀를 그렇게 바라보았을까? 판사가 먼저 입을 뗐다.
[채무자 도현 로렌스 킬스버그의 4개월 연체 원리금 33억 1,341만 4,110원을 누리은행에 납입하면 부동산 및 동산 압류 강제집행이 취소됩니다. 채무자 도현 로렌스 킬스버그의 6개월 연체 원리금 9억 9,768만 1,121원을 스톤캐피탈에 납입하면 자연인 담보 압류 및 경매가 연기됩니다.]
로웰도 이래저래 창작의 세계에 있으면서 주워들은 지식들이 많았다. 그녀는 한쪽 손을 들며 판사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리젝트. 변호사 선임하여 대출조건부터 범법사항이 없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누리은행은 대한민국 제1금융기관으로써 모든 법적 사항을 준수합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스톤캐피탈은 법을 준수합니다.]
곧바로 양 금융기관 변호사가 반박했다. 판사가 말했다.
[받아들입니다. 채무자 도현 로렌스 킬스버그는 대출계약서 및 납입내역을 지법으로 송부하십시오.]
“아, 아. 네….”
도현은 당황했다. 여러 사람을 돌아보다가 겨우 자기 디바이스를 조작했다. 늑장을 부리자 판사가 말했다.
[디바이스 조정 권한을 지법에 양도하시면 개인정보 보호법에 맞추어 금융 관련 계약서 및 금융거래 내역만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도현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목소리를 떨었다. 오히려 지금이 더 겁이 났다. 아까만 해도 혼자라 현실감이 안 났는데 이렇게 로웰이 함께 하니 몸이 떨렸다. 이렇게 해도 뭔가가 잘못될까 봐 무서웠다. 로웰은 그사이 금융 관련 변호사를 선임하여 똑같은 정보를 그에게도 넘겼다.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 제임스 엘레스네입니다.]
[확인했습니다.]
인공지능 비서가 다들 딸려 있다 보니 자료 분석은 아주 바로바로다.
[모든 대출 사항에서 당시 신용등급에 비하여 0.01%에서 22%까지 이율이 높습니다. 특약사항에 대하여 인공지능 비서 동행 제도 이전 비전문가인 도현 킬스버그 씨에게 제대로 위험 고지를 하지 않은 계약 성립으로 보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의 사항 받아들입니다. 양 금융기관은 계약 당시 녹음 및 녹화 기록을 지법으로 송부하십시오.]
그러자 채석기가 ‘이런 씨팔’하고 욕을 했다. 인공지능 비서 동행 제도 이전 기록은 판사가 금융기관에 불리하게끔 판결한다. 자료를 받아들인 판사는 1분 뒤 선고했다.
[누리은행 주택청약대출 원금 249억 9,999만 9,999원에 대하여 연이율 0.38%에서 0.37%로 조정합니다. 연체이율은 1.01%에서 0.76%로 조정합니다. 기납입 원리금 및 연체금에 대하여 선고 이율을 적용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선고문을 필히 읽어 주십시오. 강제 사항입니다. 누리은행 저금리부동산담보 대출 104억 9,999만 9,999원에 대하여 연이율 1.77%에서 1.75%로 조정합니다. 연체이율은 3% 유지합니다. 기납입 원리금 및 연체금에 대하여 선고 이율을 적용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선고문을 필히 읽어 주십시오. 강제 사항입니다. 누리은행….]
하나 신조 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누리은행 쪽 선고가 끝나고 나서는 스톤캐피탈이었다. 스톤캐피탈은 조정 이율이 더 컸다. 채석기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판사가 말했다.
[채무자 도현 로렌스 킬스버그는 4개월 연체 원리금 29억 7,366만 220원을 누리은행에 납입하면 부동산 및 동산 압류 강제집행이 취소됩니다. 채무자 도현 로렌스 킬스버그의 6개월 연체 원리금 2억 968만 7,787원을 스톤캐피탈에 납입하면 자연인 담보 압류 및 경매가 연기됩니다.]
“일시불로 내면 되나요? 계좌 좀…. 그리고 판사님, 어떤 대출부터 갚는 게 좋은지 추천 좀 해줄 수 있나요?”
로웰이 물었다. 도현은 그녀의 옷을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꽉 잡고 있었다. 판사가 답했다.
[가능합니다.]
그러자 이율이 높을수록, 중도상환이율이 적거나 아니면 아예 이자가 줄어드는 쪽부터 순위가 화면에 주르륵 떴다. 로웰은 카드값, 소액(은 아니지만)고금리부터 대략 12개 정도의 대출을 일시불로 갚아주었다.
“선생님….”
도현이 펑펑 울었다. 서로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도현을 뭘 믿고 이렇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일까. 로웰은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갚아주세요, 작가님.”
도현은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인공지능 판사는 사건을 종결하고 물러났고 로웰과 도현은 판사의 권고에 따라 채권자들과 채무를 갚는 일정을 조정했다. 도현도 진짜 이번엔 정신 차렸는지 먼저 말했다.
“일단 빨리 팔리는 차랑 가방이랑 보석부터 팔게요. 배랑 부동산은 팔릴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하나 신조 팀장이 무덤덤한 얼굴로 홀로그램 창을 뒤적거리더니 말했다.
“일단 지금 이 집값은 오르는 추세니까 팔지 마십시오. 급한 불은 일단 껐으니까. 다음 달부터 연재 들어가신다면서요. 광고 봤는데 재밌을 것 같더라구요. 보석은 그냥 명품들만 있습니까, 아니면 이름 있는 보석도 있습니까? 있으면 저희 쪽에서 수수료 받고 경매에 부쳐주겠습니다.”
“아, 어… 세 개 정도 있긴 한데.”
도현은 급히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더니 크리스탈 케이스에 담긴 함을 들고 나왔다. 다이아가 엄청 박힌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티아라 세트였다. 그리고 두 번 더 왔다 갔다 했다.
“이건 살 때 67억 주고 샀는데….”
이러니까 빚을 지지. 다들 똑같은 눈으로 도현 킬스버그를 보았다. 어떤 보석들인지, 진품인지 확인한 신조 팀장은 곧바로 인수 계약서를 썼다. 경매비용 및 1%의 수수료를 떼겠다는 거였다.
“비싸게 팔아주세요….”
도현은 이제 구사일생했다 이건지 다소 아쉬워하며 보석들을 떠나보냈다. 장갑을 낀 직원 셋이 조심스럽게 함을 챙겼다. 이번 기회에 딱지를 붙이면서 싹 확인한 도현의 부동산 및 동산 목록을 쭉 보던 채석기가 말했다.
“배도 팔지 말고… 그, 나한테 빌려줘라. 이렇게 놀릴 거 같으면 렌트를 돌려. 이 좋은 배를 왜 그냥 두냐?”
“남들 손타는 거 싫어서….”
채석기가 혀를 쯧 찼다.
“운영비 40%는 내가 들고 갈 거고 60%는 아가씨 주고. 어때?”
그러자 로웰이 손을 들었다.
“20%요.”
“…그… 성함이….”
“로웰 리입니다.”
“그… 이 선생님, 제가 청소하고 쓸고 닦고 다 해서 매출의 40%를 들고 가고 나머지 여기 작가 아가씨한테 주는 건 작가 아가씨한테 손해가 아니라니까요. 어차피 놀리던 밴데….”
“변호사가 그래도 20%라는데요? 그것보다 더 줄 바에야 차라리 진짜 렌트 업체에 맡기라네요.”
“…알겠습니다.”
“로웰 선생님 진짜 최고….”
도현은 깜짝 놀라서 로웰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하는 것이다. 변호사 하나만 달려도 이렇게 다르다. 물론 도현도 조금은 알았지만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었다. 인공지능 비서가 이번에도 단번에 계약서를 찍어서 내밀었다. 도현과 채석기가 사인했다. 도현은 갑자기 또 눈물을 글썽하더니 말했다.
“깨끗하게 써주세요…. 저 그 배 진짜 좋아한단 말이에요.”
“알았다, 알았어. 팔려간대도 안 울더니 좀 살 만하니까 질질 짜네. 이상한 아가씨야.”
채석기가 투덜대듯이 말했다.
“이제 절약하면서 잘 살면 되죠.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 킬스버그 씨.”
신조 팀장이 그렇게 부언했다. 도현이 또 펑펑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빚쟁이들이 가자 도현은 로웰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로웰은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작가님, 우리 힘내요.”
그리고 로웰은 흡, 하고 디바이스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니, 진짜 힘내야 해요. 저도 이제 돈 없어요. 완전 거지….”
도현이야 6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세를 받았지만 로웰은 2년 전 데뷔였다. 작년에 <다시 만난 시간> 연재 완결, 단행본, 광고,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오디오 드라마, 각종 굿즈, 사인회, 팬미팅까지 했으니 아직 인세 및 수익이 빠방하게 들어오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마 다음 달 도현의 원리금을 간신히 때울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도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로웰을 보았다. 4개월 연체되면 압류 들어오고 6개월 연체되면 팔려간다. 보석은 언제 팔릴지 모르는 일이고 배도 언제부터 돈을 뱉어낼지 모르는 일이다.
이번 작품은 연재부터 대박을 못 내면 진짜 큰일 나게 됐다. 그러자 로웰이 풀썩 카우치에 엎드려 쓰러졌다.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아, 난 죽어야 돼. 어쩌자고 이랬지. 그림이 안 나온다. 내가 고자 손이라니, 내가 고자 손이라니!”
“악! 선생님,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뭐든 할게요!”
*
코카인, 엑스터시, 흥분제, 대마. 미르가 주로 하는 마약이었다. 의외로 헤로인은 하지 않았다. TFC 선수는 경기보다 헤로인으로 죽는 숫자가 더 많아서 TFC 선수하면 헤로인인데도.
“하아… 미르… 미르….”
레이시라는 빨강머리의 쭉쭉빵빵이 미르 킹쉴드의 밑에 엎드려 있었다. 미르는 집중하여 몸을 움직이다가 짜증을 냈다.
“아… 파티마, 이리 와.”
그는 레이시를 밀어내고 다른 여자를 불렀다. 약을 피우며 춤을 추고 있던 화려한 금발머리를 가진 또 다른 쭉쭉빵빵이 다가왔다.
“왜 그래, 미르?”
“옷 벗고 엎드려.”
“오늘따라 짜증 이빠이네?”
그녀는 미르의 말대로 옷을 벗고 엎드렸다.
[진짜 킹쉴드 씨랑 만난 여자들은 대단하네요. 이렇게 막 하는데 기분 좋았을 리도 없고… 불쌍해.]
“아!!”
미르는 짜증을 냈다. 그는 파티마의 몸을 돌려 바로 눕히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야, 내가 못하는 건 아니지 않냐?”
“왜…? 잘해. 잘하지, 우리 미르….”
그러면서 그녀는 미르의 목을 껴안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니, 진짜로.”
“잘한다니까?”
옆에 있던 레이시가 거들었다. 미르가 그냥 다 관두고 침대에 앉더니 진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진심으로.”
그러자 파티마랑 레이시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으음….”
레이시가 살짝 미르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뗐다.
“솔직히… 미르가 잘한다 만다 말할 게 있나? 눕히고 넣고 흔들고 싸면 끝인데?”
그러자 파티마가 일순 ‘풉!’하고 웃었다가 표정 관리를 했지만 저기서 약을 하고 있던 또 다른 금발 머리 타냐는 배를 잡고 웃으며 자지러졌다.
“으학학학! 아학! 그걸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으학학!”
“뭔데? 뭔데 그래?”
타냐가 아주 죽어라 웃는 것을 보며 나머지 걸즈 둘이 춤추던 걸 멈추고 미르를 돌아보았다. 파티마가 설명했다.
“아니… 미르가 자기 잘하냐고 물어봐서.”
나머지 걸즈, 밝은 금발 머리 제시카와 갈색 머리 셀리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그냥… 팩트?”
레이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제시카랑 셀리도 막 웃었다. 결국 파티마도 못 참고 웃었다. 아름다운 여자들이 웃는 건 분명 마음이 뿌듯할 정도로 보기가 좋은 건데… 미르는 얼굴을 확 구겼다. 제시카가 말했다.
“미르는 힘이 너~무 좋아서 문제야. 조금만 손에 힘줘도 숨이 턱턱 막힌단 말이야.”
그녀는 밝은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리고는 레이시가 덧붙였다.
“뭐 우리 일이 그런 미르 밑에서 ‘아앙~ 아앙~ 미르 최고야~’ 이런 거 하는 거니까 너무 고깝게 듣진 말아~.”
“게다가 정상위 하면 너무 무겁지.”
파티마가 말했다.
“맞아. 그리고 좀만 취하면 바로 넣으려고 하잖아. 아무리 우리라지만 항상 그렇게 스탠바이가 되는 줄 아나.”
제시카가 부언했다. 타냐는 저기서 아주 죽어라 웃고 있었다. 경기를 일으켜 넘어가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아, 게다가 자기는 좋다고 막 흔들면 솔직히… 멀미 나. 욱.”
“맞아. 약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니까.”
“자기 힘 좋다고 그냥 퍽퍽 박기만 하고.”
“반반 아냐? 반은 진짜 뿅 가는데 반은 연기지.”
“그 뿅 가는 것도 약 덕분이지, 솔직히.”
“으햑학학학!”
미르의 얼굴과 목에 핏줄이 확 올라왔다. 그리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나가! 다 나가!!!”
그리고 그가 씩씩거리고 있자 걸즈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래도 우린 미르 좋아해~.”
“사랑해~.”
걸즈는 미르의 이마에 쪽쪽 입을 맞추고는 그의 말대로 침실에서 나갔다. 한쪽 벽면이 모두 유리창으로 도시의 야경이 파노라마로 보이는 멋진 침실이었다. 미르는 홀로 남아서 짜증을 곱씹었다.
‘젠장! 뭐 어쩌라고? 내가 돈까지 주면서 저년들 비위도 맞춰줘야 해? 어?’
아!! 미르는 화가 났다. 뭐가 화가 나는지도 모르겠다. 못한다는 말을 들어서? 그 쌍년의 말이 맞아서? 왜 내가 그딴 년들 말을 신경 써야 하는데? 내가 왜!! 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남자한테 몸이나 파는 여자들이나 빚 때문에 협박이나 하는 버러지 같은 년이 어디서 날…!’
<킹쉴즈 걸즈>니 뭐니 하면서 TV고 기자들이고 사람 취급을 해주니까 기고만장해서 자기들 입장을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미르가 없으면 단 하루도 못 살아갈 년들이었다. 분수도 모르고 그렇게 돈 쓰는 맛을 들인 년들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금세 쥐도 새도 모르게 팔려 가서 운 좋으면 몇 년만 구르는 거고 돈 쓰는 버릇을 못 버리면 못 쓸 때까지 구를 거고 그래도 다 못 갚으면 남들 대신해서 5명 10명씩 애를 낳고 그래도 못 갚으면 장기를 다 떼이고 죽는 것이다.
‘씨팔, 솔직히 전쟁터에 팔려 가서 한 방에 죽는 것보다 그게 더 비참할 거 같은데 요즘 여자들이 간댕이가 남다른 거냐, 아니면 이년들은 지 얼굴 반반하다고 잘 팔릴 자신이 있는 거냐, 씹. 뭐가 그렇게들 잘나셨다고 씨팔, 사람 성질을 긁어?!’
“으윽… 짜증나….”
남중국해에서는 단 한숨도 못 자고 12일이나 몬스터를 썰어야 했던 때도 있었다. 팀원 중 미르 혼자 살아남았던 적도 부지기수다.
총화기는 총알을 쓰는 만큼 돈이지만 사람은 밥만 먹이면 된다. TFC에서 몇백억, 몇천억의 연봉으로 계약하여 돈 버는 남자들 중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하루 5만 원도 못 받고 구르다 살아남은 남자들이다.
게다가 요즘은 일급이 더 떨어졌다고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새끼를 엄청 많이 까니 사람값이 값이 아니다. 사람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헐값에 팔리는 재화 중 하나였다. 그나마 미르나 TFC 선수들은 능력이라도 있으니 그 정도 값이라도 받았지 아무런 능력 없이 소총만 든 어린애들은 첫 전투에서 몬스터들의 고기밥이 되고 그것들이 사람 고기를 뜯을 동안 살아남은 자들이 몬스터를 죽이는 그런, 그런 나날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미르는 살아남은 자였다. 미르는 그런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수천, 수만, 어쩌면 수십만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남자란 마땅히 인정받고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르는 사회로 돌아오고 나서도 이렇게나 성공했다.
그런데 이 망할년들이 미르를 별것 아닌 남자처럼 취급하는 게 화가 났다. 그런 년들의 말 따위 무시하면 될 텐데, 왜? 왜 이렇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나지? 미르는 알 수가 없었다.
*
그리고 심란한 것은 미르 킹쉴드뿐만이 아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는 근 몇 주 동안 명상에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혹시 제 얼굴이 취향이세요?]
분명히 자기가 예쁘다는 걸 알 텐데 그런 건 왜 물어봐서…. 다니엘은 그 뒤 자신이 한 말까지 그대로 기억해냈다.
[여성스럽고… 눈이 정말 예쁘십니다. 속눈썹이… 머리카락도…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세련되고…. 키도 작지 않으신데도 어딘가 가녀리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데도 보면 정말 당차고…. 뭘 어떻게 할지 예상을 할 수가 없어서 항상 당황스럽고….]
정말 병신 같았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살아생전 이렇게 자괴감이 들었던 적이 있었나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기까지 했다.
[제가 다니엘 씨에게는 그렇게 보이나 봐요?]
[좀 더 말해봐요. 글 쓸 때 참고 하게요.]
[에이, 거짓말. 어떻게 맨얼굴이 더 예뻐요. 네?]
[그러지 말고 제 얼굴 자세히 보세요. 마저 도와주셔야죠]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긴장감이 다시 살아났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때를 떠올리면 부끄럽고 창피했다. 머저리 같게 행동한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떠올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자신이 이런 인간적인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자각하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놀려서 죄송해요. 장난이었어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어쩐지 좀 발끈했지만, 하루가 지나니 몇 번이라도 그런 장난을 다시 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홀딱 빠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다만 매일매일 정신수양을 하듯이 타일렀다.
‘약속만 끝나면 만나지 말자. 그 여자는 나쁜 여자니까. 약속… 약속 때문이다. 약속 때문에 가끔 보는 걸로 이렇게 마음 흩트리지 말자. 다니엘 스톤하츠, 정신 차리자.’
그렇게 2시간의 명상을 또 헛된 망상으로 끝내버리고 다니엘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잠시 물을 마시며 대기실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는데 몇 번 마주쳐 얘기를 해본 적이 있는 청명 명상원의 회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어머, 스톤하츠 씨. 오늘도 오셨네요.”
“아, 네….”
진한 갈색 머리에 쌍꺼풀이 없는 눈을 가진 여자였다. 얼굴은 본 기억이 있는데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이름을 가르쳐줬던 것 같은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에게 물었다.
“여기 자리 비었으면 앉아도 될까요?”
굳이 멀리 있는 자리도 있는데 다니엘의 옆에 앉겠다고 하는 건… 다니엘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에 다닐 정도면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여성일 텐데….’
다니엘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여성을 이렇게 속으로 매도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도 여성 불신이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하고 있었다.
“항상 룸 가시죠? 거기 무섭지 않나요? 저도 몇 번 도전해봤는데 영 못 하겠더라구요.”
“저는 명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도 수련 때문이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어쩜, 멋져요.”
다니엘은 그녀가 좀 부담스러웠다. 누가 봐도 그녀의 눈에는 아주 하트모양이 뿅뿅이었으나 다니엘만은 그녀가 돈이나 명성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한 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팬이라서요. 이거 받아 주실 수 있을까요? 명상원에서 팔던데… 집중할 때 좋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이건 집에서 만들다가 너무 많이 만들어서…. 그리고 이것두요. 제가 사실 디자이너라….”
여자는 고급 명상용 방석에 정성 들여 잔뜩 만든 쿠키에다가 예쁜 접시가 담긴 상자까지 내밀었다. 그러고 그녀는 얼굴을 확 붉히면서 변명했다.
“감사합니다만 그래도….”
“다, 다른 생각 있어서 그런 건 아니구요…. 지, 진짜 팬이라…. 그,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다니엘이 돌려주기도 전에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달려가 버렸다. 다니엘은 휴, 하고 한숨을 쉬며 물건들을 보았다. 이런 일이 왕왕 있었다. 아무리 이래도 소용없는데….
물론 다니엘은 미르 킹쉴드처럼 인생을 허비하며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걸즈니, 시스터즈니 이런 데는 전혀 관심도 없었고 만들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여자들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이었다. 문자 그대로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니엘이 정부, 대학 및 기업 용역으로 버는 수익은 전부 미혼모 및 저소득층 아이들의 교육비로 기부하고 다니엘이 TFC 선수로 뛰어서 버는 돈은 다니엘의 생활 및 학업, 수련을 위한 금액 0.5%와 마도의학 발전을 위한 기부금 5%를 제외하고는 전부 러시아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그렇게 가만히 또 실패한 명상을 반성하며 앉아 있으니 다니엘의 클럽 <이스트드래곤>에 소속되어 있는 다니엘의 매니저, 셀레나 카토가 나타났다. 도쿄에서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벌써 6월. 시즌은 8월 시작이라 보름 뒤부터는 합숙에 들어가게 된다.
“긴장 안 돼요? 태호 군은 요새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데?”
셀레나는 파란색과 녹색, 연한 갈색이 섞인 오묘한 눈동자를 가진 뛰어난 미녀였다. 다니엘은 자가용 비행차의 좌석에 앉아 물끄러미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주차빌딩에서 떠오른 차는 곧바로 최적 루트에 따라 하늘을 날았다. 이대로 도쿄까지 갈 것이다. 다니엘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신태호는 시즌만 시작하면 날아다닐 겁니다. 강하니까요.”
“그래도 아직 너무 어려서….”
신태호는 작년 초 <이스트드래곤> 클럽에 입단한 혜성 같은 신예였다. 나이는 무려 17살. <이스트드래곤> 스카우터가 남중국해에서 스카우트해왔다.
“그래도… 작년 <써드 포틴>에서 경기에서 혼자 상대 클럽 선수들을 다 죽여 버려서 충격이 컸잖아요.”
“그랬죠.”
셀레나는 요즘 영 컨디션이 좋지 못한 다니엘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선수들 중에서는 태호 군한테 좋은 영향을 미칠 만한 사람이 영 없어서…. 다니엘이 한 번 태호 군을 따로 만나주면 안 될까요?”
“저보다 차라리 다른 선수들이 나을 겁니다. 약을 배우게 하고 여자들한테 둘러싸여서 사는 게 선수 생활하는데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다니엘….”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않습니까.”
전 세계 4,500여 개 클럽이 전부 참여하는 <엘 드라카 리그>. 24주 동안 진행되며 <드로우 선데이> 이전 매치는 인공지능에 의한 추첨으로 결정된다.
첫 2주, 14일 동안 하루 320여 개의 클럽이 서로 경기를 한다. 그렇게 첫 2주, <비기닝 포틴> 때 반수가 솎아지면 나머지 반을 다시 인공지능이 추첨하여 조를 짠다. <비기닝 포틴>의 마지막 일요일에 경기를 치렀던 클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다음날, 월요일 바로 경기를 해야하는 <체이닝>에 걸리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평균적으로 23개 정도의 팀이 <체이닝>에 걸렸다. 운이 나빴던 경우는 <비기닝 포틴>과 <세컨드 포틴>에서 둘 다 강적을 만난 클럽이었다. 아마 주전으로 등록된 30명 중 반 정도는 경기장에서 죽고 반은 병원에서 죽었던 걸로 기억한다. 평균적으로 한 시즌에 200명 정도가 경기장에서 즉사한다. 3~4백 명 정도는 병원에서 죽고 말이다.
셀레나는 말을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벌써 바다가 보인다. 그리고는 물었다.
“그럼 다니엘은 왜 TFC에 남아 있어요? 다니엘은 굳이 경기에 안 뛰어도 괜찮잖아요. 존스홉킨스에서 위약금 물어줄 테니까 자기네 쪽으로 오라고 했다면서요.”
“마도의사가 되는 거엔 딱히 흥미 없습니다.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구요. 전 TFC가 좋습니다.”
“…다니엘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다니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선수였다. 하지만… 셀레나는 그가 TFC를 고집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 오히려 안타까웠다.
‘융통성 없는 남자….’
셀레나는 얼굴을 붉혔다. 위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위로해줄 텐데. 그렇게 창밖을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문득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혹시 여자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네, 네?”
셀레나는 깜짝 놀랐다. 다니엘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말이었다. 다니엘은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돈을 제일 좋아하는 여자라는 건 알지만 그래서 돈은 싫고….”
셀레나는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다니엘은 더 복잡한 얼굴로 변명을 하듯이 말했다.
“호…감을 사고 싶은 건 아닙니다. 다만 요즘 자주 방문하는 집에 항상 맨손으로 가는 게 걸려서…. 뭐가 좋을까요? 마실 거라든가… 그런 거면 괜찮을까요?”
“지, 집들이라면 그런 게 무난하긴 하죠….”
“근데 그런 건 너무 심심하진 않습니까? 킹쉴드가 보면 분명히 비웃을 겁니다…. 젠장.”
다니엘은 그답지 않게 뒤에 작게 욕설을 붙였다. 여기서 킹쉴드의 이름이 왜 나오는가? 미르 킹쉴드는 왜인지 모르게 다니엘을 싫어했고 그래서 다니엘도 그를 꽤 싫어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다니엘은 창문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술…이 좋을까요? 집에 와인셀러도 있고… 술이 꽤 많던데. 좋아하려나….”
“술은… 애매하네요. 애주가시라면 좋긴 하겠죠.”
“애주가라는 느낌은 아닙니다만… 역시 돈….”
그러자 다니엘은 ‘하아, 싫다….’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고민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언제나 물심양면, 몸과 마음으로 그를 보필할 마음이 충만한 셀레나 카토는 그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 그리고 그가 이런 식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게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연적을(분명히) 도와줄 만한 말을 하고 말았다.
“꽃은… 어떨까요?”
그러자 수심에 잠겨 있던 다니엘이 찡그렸던 얼굴을 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좋아할 거 같습니다.”
저렇게 웃는 얼굴은 처음 본 것 같다. 셀레나는 말을 하자마자 후회했지만 그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조금은 보상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
[하아… 아… 흣… 아앙….]
부드러워.
기다랗고 부드러운 남빛 머리카락. 왠지 섹시해…. 그리고 키가 크고 나긋한 몸매도 예쁘다.
[읏. 아앙. 앗. 조금만… 핫. 살살….]
부드러워. 부드러워. 정말 부드러워.
[으으응…!]
가끔 바락바락 달려들고, 재수 없고, 개념 없고, 겁대가리는 더 없고… 엉덩이 가벼운 걸레년. 흥청망청 돈 쓸 줄이나 알지 그렇게 하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여자. 결국엔 다리를 벌리고 남자한테 달라붙을 수밖에 없는 그런, 그런 여자.
그리고
그 남자가 내가 됐으면 좋겠다
“헉…!”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꿈을 꾼 거야….
‘아오… 무슨 더럽게 재수 없는 꿈을….’
또… 오늘도 일진이 사나우려고 아예 작정을 했나 보다. 저번에 그딴 걸 해서 그렇다. 그런 걸… 씨발, 그러니까 내가 하기 싫다고 몇 번을 말했냐고. 송선호는 잘생긴 얼굴을 왕창 구기고는 뉴스를 틀었다. 그리고 아침 발기 따위는 무시했다. 씨발, 그런 여자 가지고 내가 할 거 같아?
‘그딴 년… 더러운 년….’
돈 좀 벌었다고 곧장 분에 넘치는 고급 저택을 사고 크루즈를 사고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를 남자들을 불러서 흥청망청 파티나 하고 그렇게 살던 년이었다. 돈 좀 없어지니까 돈 많은 남자들 물어보겠다가 협박질을 하지 않나. 진짜 내가 그년 부모 형제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살 것이다.
아침으로 간단하게 샐러드나 깨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하필이면 꿈속의 그년이다. 송선호는 미리 한숨을 팍팍 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용건을 듣고는 더 한숨을 쉬었다.
“모델을 잘랐다구요? 왜요? 네?”
송선호는 미간에 내 천자를 강하게 잡고는 전화통화를 했다.
“아니, 그러니까 로웰 선생님은 왜… 알겠습니다. 네. 네. 네. 스톤하츠 씨한테는… 네. 네.”
이놈의 두 여자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지 않는 날이 없었다. 송선호는 회사에 들러 미팅에 참여하고 다른 작가 둘의 상태를 파악하고 난 뒤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팀원과 통계자료를 보며 입씨름을 하다가 퇴근했다.
사실 이런 쪽의 관리자가 하는 일이란 통계와의 싸움이다. 그리고 통계에 나타나지 않는 침묵하는 소비자의 의중을 파악해내는 것, 그리고 그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기획하는 것, 그리고 밑에 부리는 사람들을 잘 관리하는 것. 지금 송선호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에 제일 큰 것이 로웰과 도현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매번 갈 때마다 누구 하나는 죽는소리를 하고 메인인 만화가가 모델이 없으면 그림이 안 나온다고 자꾸 드러눕는다. 미친년. 그러고도 자기가 만화가라고 그림 밥을 먹고 산다.
퇴근을 한 송선호는 업계 관계자와 밥을 먹고 술을 한 잔 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독서를 하고 잤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더 칙칙한 얼굴로 일어났다.
“…….”
송선호는 잠시 꼼짝도 않고 침대에 앉아 있다가 TV를 틀었다. 꿈의 잔향을 빨리 지우고 싶었다. 저번에 뭘 보다가 끈 것인지 트니까 이상한 지역 광고가 나온다.
[이상한 꿈을 자주 꾸시나요? 증상을 없애고 싶으신가요? 1788-1919! XX역 4번 출구 앞 차맥도사! 흉몽을 단돈 10만 원에 쫓아드립니다!]
“…….”
22세기에도 저딴 광고가 나온다니 시대착오적이지만… 바로 송선호와 같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송선호는 오늘 밤에도 그런 꿈을 꿀까 봐 솔직히 두려웠다. 그 꿈을 다시 꾸지 않기 위해서라면 10만 원이 뭐냐, 100만 원이고 1,000만 원이고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송선호와 같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퇴근을 하고 들른 XX역 4번 출구 앞 차맥도사 철학관 앞엔 번호표를 받고 대기를 하는 사람들이 5명이나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기 싫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서 커피도 시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작은 종이컵에 나오는 커피가 쓸데없이 비쌌지만 그냥 사서 앉았다. 아무도 안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안이 조용해서 상담을 하고 있는 목소리가 다 들렸다.
“그래서 그 여자가 계속 나온다?”
“네…. 진짜… 진짜 나쁜 여자거든요. 돈 때문에 사람 약점을 잡아서 협박하지를 않나, 이용하지를 않나… 집에 다른 남자가 있지를 않나….”
그의 목소리가 점점 우울해졌다. 도사가 질문했다.
“예쁜가?”
“…예뻐요. 분위기도 너무 매력적이고… 섹시하고….”
“예쁜 여자 나오는 흉몽은 거의 쫓기가 불가능한데….”
“그래도 방법이 없을까요, 도사님?”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게 또 방법이긴 한데….”
“그건 좀….”
그리고 차맥도사라는 사기꾼은 그에게 무려 5백만 원짜리 부적을 팔았다. 저게 진짜 효과가 있겠어? 어쨌든 그 상담자가 나갈 때는 그냥 슬쩍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송선호의 차례가 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는 무슨 일이신가.”
“계속 재수없는 년이 꿈에 나와서요.”
“어허, 요새 젊은 남자들이 양기가 넘치나. 여자가 그렇게 꿈에 나와.”
“그런 거 아닙니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고 짜증 나는 년이라니까요.”
“예쁜가?”
송선호는 잘생긴 얼굴을 아예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예쁘기는 개뿔. 그냥 화장발이에요. 가슴도 작고 비리비리하고.”
“예쁜 거 같은데.”
송선호는 뜨끔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평타도 못할 수준입니다.”
하지만 도사는 영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 여자한테 차였나?”
“고백도, 아니, 좋아하지도 않는데 차이긴 뭘 차입니까?”
“짝사랑인가?”
“안 좋아한다니까요! 재수 없는 년이라니까요!”
“흐음… 그럼 젊은이도 다른 여자를 만나야 하겠는데?”
“저도 만나고 싶습니다. 참하고 조신하고 예쁘고 순한… 그런 여자요! 아시면 소개나 시켜주시든가.”
도사는 아래위로 그를 훑어 보더니만 그에게 말했다.
“그런 여자가 또 있기는 한데.”
그가 지나가듯이 그렇게 말했다. 도대체 이게 뭘까? 송선호는 그의 말에 순간 혹하고 말았다. 그는 날짜와 시간, 장소를 받아들고, 5백만 원을 카드로 결제를 해준 뒤 철학관을 나왔다.
“…….”
병신….
송선호는 날짜와 시간, 장소가 적힌 비즈니스 카드 뒷면을 잠깐 보다가 구겨서 툭 버렸다…가 다시 돌아가서 구겨진 명함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도현 킬스버그의 집으로 출근해서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는 두 여자를 몰매질하여 일이 돌아가게 한 후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하고 나왔다.
“올 때 메로나.”
도현은 송선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메로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송선호는 명함에 적혀 있는 대로 커피숍을 찾아갔다. 정확하게 약속 시간이 되자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주변을 살피더니 송선호를 발견하고 그의 앞에 앉았다.
“이모부 말씀대로 정말 미남이시네요, 호호. 진짜 전 이모부가 또 장난하시는 줄 알고….”
“아, 네.”
정말로 그녀는 착해 보였다. 조신해 보이기도 했다. 참하고…. 그리고 이렇게 막 나온 소개팅치고 심하게 떨어지는 외모도 아니었다. 아마, 진짜 그 도사가 용하기는 용한지 송선호가 생각하는 참하고 조신하고 착한, 그런 여자를 그려놓은 것만 같은 여자였다. 딱히 특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흐릿하고… 어디에 있어도 무난할 것 같은 그런 여자.
“…….”
송선호는 2시간 정도 그렇게 그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터덜터덜 도현의 집으로 돌아갔다. 차를 타고 커다란 대문을 통과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제 막 샤워를 했는지 또 허술한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대충 닦고 있는 도현이 보였다.
섹시한 남색 머리카락….
거기에 어울리는 옅은 분홍빛을 띠는 하얀 피부….
부드러운….
“메로나 사 왔어?”
“…….”
송선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메로나가 열 개 든 봉투를 들고 냉장고로 향했다. 냉동실에 넣으면서 하나를 뜯었다. 그녀의 헐렁한 박스티가 한쪽 어깨를 드러내며 흘러내렸다. 송선호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예쁜 여자…. 그녀가 어깨 깃을 추슬러 올리는 걸 보며 송선호는 상상했다.
그녀의 티셔츠를 다시 끌어 내리고 그 어깨에 입을 맞추는 상상을 말이다.
‘…나가 뒤질 새끼….’
송선호는 자학했다.
‘세상 여자가 다 죽었냐? 어? 착각이야. 착각이지? 오늘 그딴 꿈을 꿔서 그래. 착각이야. 그 도사 말대로 여자를 안 만나서 그래. 주변에 있는 젊은 여자라고는 저년밖에 없으니까 그래! 환기 좀 시키자, 선호야. 선호야! 모임을 나가자. 소개라도 받자.’
“오늘 다니엘 씨 시간 되신다고 하셔서 좀 있다 오실 거야.”
도현이 말했다. 송선호는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스톤하츠 씨, 스톤하츠 씨 하시더니 이제 다니엘 씨냐? 정분나겠네. 아니면 원래 났던 정분인 건가.”
“그런 거 아니야.”
도현은 송선호의 말을 흘려들으며 대답했다.
“저번에 너랑 했던 포즈, 로웰 선생님이 마음에 드신다고 혹시 느낌이 다를까 해서 다니엘 씨랑도 해보려고.”
“…….”
송선호를 거의 죽일 뻔했던 그 포즈… 그걸 그 보라 눈깔 새끼랑 같이한다고?
“여자 모델은 도대체 왜 자른 건데? 그거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 모델이 훨씬 예뻤는데.”
송선호가 짜증을 냈다.
“너 요새 나한테 말이 점점 짧아지는 거 같아.”
도현이 약간 인상을 쓰며 말했다. 송선호는 열이 받아 받아쳤다.
“내가 너보다 1살 많다고 몇 번을 말하냐!”
“비즈니스에 나이가 어디 있어? 난 작가, 넌 편집자. 오케이?”
“그래서 언제까지 어울리지도 않는 모델 일을 계속하실 건데요, 이 작가 년아. 그런 괴물 새끼랑 몸 맞대다가 진짜 몸 축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송선호는 속이 아주 베베 꼬여서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 싸우기도 귀찮다. 도현이 한숨을 쉬며 대충 대꾸했다.
“그러니까 네가 해주면 좀 좋아?”
“…….”
“좀 쉽게 쉽게 살지. 우리가 안 지 몇 년인데 그거 그렇~게 싫다고 애처럼….”
“나랑 하고 싶어?”
송선호는 투덜거리는 도현의 손목을 잡았다. 도현은 그 손목을 보았다가 다시 송선호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래?”
“그래서 나랑 하고 싶냐고.”
“그거야….”
도현이 뭐라고 대답을 하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그대로 둘은 몇 초 더 눈을 마주치고 있었지만 도현은 갸웃하고는 그의 손을 치웠다.
“다니엘 씨 오셨나 보다.”
“…….”
도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송선호는 ‘후하’하고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부엌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의 멀끔한 쓰리피스 양복이 아주 답답하게 느껴졌다. 도수가 거의 없는 안경을 이마로 올리며 미간을 주물렀다.
‘방금…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을 뻔한 기분이야….’
오늘 일진 사나울 줄은 아침부터 알고 있었다. 그 돌팔이 도사 새끼… 그리고 송선호는 기분을 추스르고 현관 쪽으로 갔다. 다니엘 스톤하츠만 온다더니만 미르 킹쉴드도 딸려왔다.
“어….”
“그런 표정 하지 마.”
미르 킹쉴드는 기세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직 시즌 기간이 아니라서 꽤 시간을 낼 만한 두 사람이었다. 들어오는 남자들을 보고 로웰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더니 미르가 버럭 했다.
“아, 나쁜 놈 보듯이 보지 마!”
그럼 네가 좋은 놈이냐…. 역시나 다들 비슷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도현은 그들과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잊은 것인지, 아니면 무시를 하는 것인지 그냥 웃는 얼굴로 물었다(빚쟁이들 상대하면서도 배 째던 배포이니 이 정도는…).
“메로나 드실래요?”
송선호는 아주 치사하게도 ‘내가 산 거야’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아이스크림을 다 같이 먹고 로웰이 미리 그려놓은 그림과 사진 자료를 참고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죠.”
다니엘이 긴장한 얼굴로 1인용 소파에 앉았다. 그는 마치 명상원에 있듯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꽃은 금방 줬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준 것이지 절대! 다른 생각은 없었다.
‘이번만 끝나면 끝이다.’
만나지 않으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도현의 모습을 보았다. 괜찮아. 그리고 그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의 하반신에 엉덩이를 깊숙이 포개고 몸을 기댔다.
“!”
송선호는 아차 했다. 옷을 갈아 입히는 걸 깜박했다. 저런 차림을 하는 게 이제 익숙해서… 짧은 요가 바지에다가 속옷도 안 입고 저 헐렁한 박스티를 입었으니.
‘씨발…. 저 새끼도 볼 거 아냐. 씨발…. 저년은 진짜 개념이 어디로 새는 거야? 옷 좀 조신하게 입고 있으면 누가 죽냐.’
송선호는 안경 밑으로 또 미간을 주물렀다. 이유도 없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 저 썅년이 맨날 하듯이 쉽게 구는 건데 내가 왜 이렇게….
“괜찮습니다, 도현 씨. 힘 빼십시오. 그냥 편안하게 앉으셔도 됩니다.”
“아, 그래도 무거울 텐데….”
“전에 그 꼬마랑 도현 씨 같이 들었을 때도 하나도 안 무거웠습니다. 괜찮으니까 그냥 앉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그 꼬마는 잘 있는지 아십니까?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마, 아빠랑 잘 만났어요. 다니엘 씨가 구해줬다고 기사도 났는데 신문 안 읽나 봐요.”
“네…. 신문을 좀 읽어야겠군요.”
“아니에요. 신문 같은 거 보면 답답하기나 하죠.”
전에는 그렇게 복잡한 표정을 하던 다니엘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좀 편한 얼굴로 도현과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로웰이 요구하는 대로 조금씩 조금씩 자세를 바꿔보았다. 로웰은 전의 프로모델과의 촬영과는 다르게 아주 열의가 강했다.
다니엘의 손이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도현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그도 말은 못 하고 가슴이 술렁술렁하는데 도현이 움찔하면서 신음을 흘렸다.
“으으응….”
세 남자, 전부 흠칫했다. 도현이 앗 하고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제가 거기가 좀 민감해서….”
뭐라고…!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저번에 그녀의 허벅지를 만졌던 걸 절찬리에 상상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송선호!’
그리고 부적의 힘으로 말미암아 평정심을 가지고 약속한 바를 이행하고 있던 다니엘은 갑자기 또 발기가 되어 기분이 무지하게 복잡해졌다.
“죄송합니다….”
다니엘의 무뚝뚝한 얼굴은 너무나 솔직하고 진지하게 당황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 났다. 도현은 약간 어색한 미소를 한 번 짓고는 대꾸했다.
“아니에요. 축하할 일이죠. 축하해요.”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니엘은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아주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이상한 표정을 지을까 봐 두려웠다. 게다가 전과 다르게 도현은 포즈 중간중간에 영감이 떠오르면 다니엘을 방치한 채 몇 분이고 타자를 치고 있었다. 깔린 남자는 딱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천국과 지옥에 반씩 발을 걸친 것 같은 촬영을 끝냈다.
‘저 여자는 날 등쳐먹으려고 한 여자다.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내 스타일이어도… 아무리 섹시해도… 저 여자는 날 협박해서 탈탈 털려고 했던 나쁜 여자다…. 나쁜 여자….’
다니엘은 그렇게 구석에서 자신을 타일렀다. 또다시 묘한 상실감을 외면하면서. 송선호는 그런 다니엘을 보며 그가 확실하게 도현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그런 협박을 당하고도 저런다고? 미친놈. 마음에 안 든다…. 그리고 미르 킹쉴드가 일어났다.
“어허. 이제 그쪽은 우리 작가님한테 손 못 댑니다.”
“멈춰. 뭐 하려는 거야?”
송선호랑 다니엘이 동시에 그의 앞을 막아섰다. 미르는 그들을 보지 않고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로웰과 촬영한 것을 모니터링하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 남자를 보았다.
“왜 그러세요?”
“부드럽게… 할게. 하면서 나랑 얘기 좀 해.”
“…진짜죠.”
“진짜야. 진짜. 니 말대로 할게.”
로웰과 도현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로웰은 도현 보고 정하라는 제스처를 했다. 지금까지의 콘티와 앞으로의 콘티를 생각해보면, 이미 미르 킹쉴드를 모델로 한 남자 주인공도 비중이 크게 나올 것은 확실하다. 지금의 남자 주인공은 거의 다니엘의 스케치를 따고 있으니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작가님, 제정신이에요? 한 번 여자 때리는 놈은 두 번도 때리고 세 번도 때려요.”
“그럼 네가 좀 말려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송선호가 인상을 팍 구겼지만 어쩔 수 없이 초조하게 그 둘을 지켜보았다. 미르 킹쉴드가 먼저 털썩 자리에 앉았고 도현이 송선호나 다니엘 때처럼 최대한 몸이 닿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앉으려고 하니 미르가 그냥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자기 허벅지 위에 잘 앉혔다. 힘 엄청 세다….
“엉덩이 뒤로 해. 이 각도로 어떻게 넣냐?”
“아, 네.”
“그리고 이 자세로 남자 어깨에 머리 기대려면 허리 밑부분, 여기가 어쩔 수 없이 뜨는 느낌이야. 여기. 빠듯하지?”
“네, 네…. 읏.”
“힘들어?”
“조금.”
“이 자세로 섹스 많이 안 해봤어?”
“안 해봤어요.”
미르 킹쉴드의 발언은 아주 성희롱의 영역에 똥을 싸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게 일이라는 범위에서 허용이 되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미르는 정말로 도와줄 작정인지 로웰을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허벅지랑 배를 만지는 것보단 허벅지 잡고 그 밑에 만지는 게 더 맞지 않아? 여기 만져주면 여자들 진짜 좋아하는데?”
“오. 그렇죠.”
도현의 거기에 그의 손가락이 거의 닿을 뻔했다. 다니엘과 송선호 둘 다 테이블에 무릎을 찧으며 일어났다.
“적당히 해!”
“진짜 고소합니다! 예?!”
“어우, 깜짝이야….”
미르는 쟤들이 왜 저러는지 영 이해가 안 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도현에게 물었다.
“기분 나빴어? 싫어?”
진짜로 만진 건 아니라…. 하지만 도현은 이 상황에서 느낀 감정과 분위기를 톡톡 디바이스에 기록했다. 그러면서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뇨. 괜찮아요. 근데 갑자기 왜 이러세요?”
“아니…. 저번에 네가 한 말이….”
미르가 약간 곤란한 얼굴로 말문을 뗐다.
“계속 생각이 나서….”
“어떤 말이요?”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냐고 한 거…. 힘들기만 하다고.”
“아, 그거요….”
“그래서 내가 진짜 그렇냐고 내 여자들한테 물어봤더니… 맞다고 아주 웃고 지랄을 하더만.”
“진짜요? 하하하하.”
도현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미르가 한숨을 쉬었다.
“아, 열 받아…. 엄청 열 받았어. 왜 그것들은 나한테 얘기를 안 해줘 가지고 이렇게 사람을 쪽팔리게.”
“말해줬으면 상냥하게 해줬을 거예요? 그런 스타일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도현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언제 나자빠질지도 모르는 새끼, 돈만 보고 들러붙는 년들인데 내가 그렇게까지 의리 지켜야 하나… 싶기도 하고.”
“와, 나쁜 놈.”
미르는 얼굴을 팍 구겼다.
“너한테도 엄청 열 받았는데…. 젠장. 왜 지금까지 너 말곤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을 안 했냐고. 내가 무섭게 굴기라도 했나.”
심지어 도현이랑은 진짜 한 것도 아니었다. 미르는 짜증스러운 기색을 팍팍 내며 한숨을 쉬었다. 안하무인처럼 보였는데…. 도현은 그런 그가 상당히 의외였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빤히 미르 킹쉴드의 얼굴을 보았다.
“왜?”
“뭔가 좀 의외라서요.”
“뭐가?”
“그러니까요. 뭘까요? 근데 이 느낌을 뭔가… 적고… 싶다….”
도현은 이미 미르한테 뒤에서 껴안긴 채 투다다 전투적으로 타자를 치고 있었다. 미르는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뭘 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뭘까, 이 느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콧대가 높을 것만 같은 남자였다. 무슨 말을 들은 걸까. 기가 좀 죽었다. 귀엽다. 나쁜 짓을 해도 매력 있는 남자란 이런 것일까. 미워하기 힘든 남자다.>
뒤로도 더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몇 문장을 읽자마자 미르는 뭔가 두근하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이후로 몇 주나 도현의 말이 머리를 맴맴 돌아서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현도 싫고 걸즈도 싫고 다른 여자들도 눈에 띄면 같은 여자라고 싫었는데. 그녀의 또 다른 말에 뭔가 엉킨 매듭이 잘린 듯 마음이… 풀어졌다. 이상하다. 이상한 느낌이다. 그는 작가가 아니라서 그럴까. 설명할 길이 없는 기분을 언어로 옮기기가 힘들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아? 좋아?”
미르가 물었다.
“나쁘지는 않아요.”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촬영은 계속되고 있었다. 미르는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싫으면 말해.”
그러면서 손을 아예 그쪽으로 향하며 간지럽게 쓰다듬자 도현이 디바이스를 놓치고 ‘앗앗’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배 위에 있던 그의 손이 티셔츠 위를 타고 올라왔다.
“원래라면 가슴을 만져야 하는데…. 만져도 돼? 이번에는 살살 만질 수 있는데.”
“싫어요. 거기도 민감하단 말이에요.”
“그래? 근데 너 웬만한 덴 다 민감한 거 같은데.”
미르 킹쉴드는 검지와 중지 손톱을 그녀의 등에 닿게 한 후 주륵 부드럽게 긁어내렸다.
“아아앗.”
도현이 엄청 움찔움찔했다. 보통 그녀랑 촬영을 하면 남자들만 죽어 나갔지 그녀는 별 반응도 없었는데, 미르 킹쉴드가 비슷한 포즈에서 조금만 달리 한 걸 가지고 저렇게… 느꼈다.
“타임.”
송선호는 오른쪽 손바닥 밑에 왼손을 세우며 말했다. 같이 얼굴을 벌겋게 하고 침을 꼴깍 삼키며 보고 있던 다니엘도 정신을 퍼뜩 차리며 다가가 그녀를 훌쩍 일으켰다. 그리고는 벌건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도현 씨를 만져도 되는 거였습니까?”
“네?”
도현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로웰에게 다가가서 모니터링을 했다.
“오, 이거 자세 잘 나왔다.”
“확실히 킹쉴드 씨가 난봉질로 유명해서 그런지 잘하네요.”
“그러게요.”
로웰과 도현이 미르에게 엄지를 치켜들어 주었다. 나머지 남자 둘은 미르를 노려보았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미르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는 더 잘난 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넌 그렇게 막사는 여자 치고 별로 경험이 없는 거 같다?”
“설마요…. 쟤가 만나고 다닌 남자들만 해도 얼만데.”
송선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웰과 포즈 사진을 정하고 있던 도현이 말했다.
“아, 삽입섹스는 한 번도 안 해봤거든요. 아픈 건 딱 질색이라.”
“아, 진짜?”
“!!”
“!!!!!”
미르 킹쉴드, 다니엘 스톤하츠, 송선호 순이었다.
*
송선호는 완전히 경악해서 얼이 빠져 그녀를 바라보았고 다니엘은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곧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때 했어야 했는데…. 아….”
진짜 이건 아까운 정도가 아니다. 다니엘은 자기 몸을 비틀고 싶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게?!”
송선호가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저는… 도현 씨가 아무 남자한테나 그러는 줄 알고 거절했는데 그게, 그게 아니었던 거였습니까. 아, 진짜….”
다니엘은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며 침음을 길게 흘렸다. 병신이 따로 없었다. 진짜 병신….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싶다. 송선호가 뜨악한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그런 송선호의 표정을 본 도현은 그걸 어떻게 해석을 한 것인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그때 돈이 너무 급해서.”
그 말은 다니엘과 송선호를 깊이 격침시켰다. 그래도 저번에는 미안해서 말도 조심하는 것 같더니 이제 좀 편해졌다, 이건가. 미르 킹쉴드는 뭐가 웃긴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진짜 돈이 급하긴 급한가 보네. 그때 이 숙맥한테는 얼마 불렀는데? 내가 따블로 줄 테니까 나랑 하자.”
송선호 및 다니엘 스톤하츠는 뭘 추스를 새도 없이 도현과 미르를 번갈아서 봤다. 저 말은 바로 자신이 먼저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로웰 선생님께서 제 급전을 좀 갚아주셔서요. 이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이제 나 진짜 잘할 수 있는데. 너 빚 더 있는 거 아냐? 내가 갚아줄 수도 있어.”
그러자 도현은 확실히 고민된다는 표정으로 미르를 보았다. 미르는 반짝이는 플래티넘 블론드에 환할 정도로 빛이 나는 아이스블루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매력적으로 웃었다.
“하자~.”
그가 도현에게 졸랐다. 도현이 약간 기가 찬 지 피식 웃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송선호는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금방이라도 미르 킹쉴드를 얼려버릴 생각으로 마력을 지글거리고 있었다. 도현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금액이 얼마냐에 따라서 조금 흔들릴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사양할게요. 작은 것도 아플 것 같은데 미르 씨는 너무 큰 것 같아요. 역시 돈은 일해서 버는 게 최고죠.”
그런 건 제발 빨리 깨달아라, 이 멍청한 여자야. 송선호의 심장이 이리 뛰었다가 저리 뛰었다 지랄 생난리를 쳤다. 그리고 나니 곧 원망만이 그득그득해졌다.
‘내 6년…!’
저 여자를 만나고 그의 인생은 제대로 풀린 적이 없었다. 휘둘리고! 마음 졸이고! 화가 나고! 스트레스 엄청 받고…!!
‘그래, 걸레는 아니다 치더라도…. 씨발, 그래도 그거 말곤 할 건 다 했다는 거 아냐? 거기다 쟤가 명품 좀 밝히냐. 만나는 남자 등골 빼먹는 건 일도 아니다. 애 낳는다고 생각해봐. 애가 도대체 뭘 배우겠어? 지금부터 앉혀놓고 하루 12시간씩 가르쳐도 될까 말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은 도대체 누가 처음 한 것일까. 송선호는 가슴이 떨렸다.
‘그래… 그래…. 가르치면 돼. 아니… 아니….’
그냥 이대로도 좋다. 아니, 그냥 이대로가 좋다. 마구, 마구 휘둘러도 괜찮았다. 지금까지 보다도 더. 밤새도록 마음 졸이게 만들어도 된다. 밤새도록 마음을 졸여도 좋을 정도로….
‘처음 봤을 때부터….’
송선호는 덜덜 떨면서 겨우 입을 뗐다. 그의 눈에는 도현 킬스버그 밖에 보이지 않았다.
“좋아합니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때, 그 백화점 앞에서부터…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도현 씨… 저랑 사귀어 주십시오.”
다니엘 스톤하츠가 도현에게 걸어가서는 덥썩 손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도현도, 심지어 로웰마저도 ‘으엑’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도현이 로웰을 돌아보며 세상 참 살기 싫다, 이런 표정을 지었다.
“진짜 남자들 속 보이지 않아요, 선생님?”
“그러니까요. 진짜 머릿속에 XX 밖에 안 들어있나 봐요.”
“새 XX다 싶으니까 다들 눈빛 달라지는 거 봐. 아, 소름 끼쳐.”
다니엘이랑 송선호는 입을 딱 벌리고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변명을 하려는데(송선호는 자기가 아직 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미르 킹쉴드가 낄낄거리며 또 웃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냐? 신품이랑 중고랑 같나.”
입 닥쳐, 이 개새끼야! 송선호고 다니엘이고 그의 주둥이를 뜯어버리고 싶었다.
“아, 저는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남자 왜 이렇게 극혐일까요? 여자가 물건이야? 그렇게 치면 본인은 쓰레기통 행이지.”
좀 귀엽다 싶더니, 쯧. 도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자 로웰이 대꾸했다.
“전 원래도 다 별로요.”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거 아니겠어요?”
로웰은 스크린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으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도현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렇게라도 여자들의 판타지를 지켜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 희망이 없어.”
도현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웰은 삘을 받는 대로 빠르게 스케치를 해나가며 말했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내가 괜히 여자들 희망 고문하는 건 아닌가. 여자들이 괜히 있는 줄 알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다가 몸 버리고 마음만 버리게 만드는 건 아닌가, 그런 죄책감이 들 때가 있어요. 사실 진짜 없어서 유니콘인 건데.”
로웰의 말에 도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전 빚쟁이가 하느님이라… 이젠 죄책감 같은 것도 없습니다.”
남자 둘은 아예 기둥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버렸고 미르 킹쉴드만이 계속해서 소리 내 웃었다.
“뭐, 또 그렇게까지 비관할 필요 있나. 세상에 좋은 남자들도 좀 있지 않겠어?”
그 말에 로웰은 도현을 보았다.
“전 애초부터 희망을 접어서… 2D를 이길 수 있는 건 없더라구요.”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놈이 그놈…. 그럼 이 셋 중에 누가 제일 괜찮은 거 같으세요, 선생님?”
굳이 따지자면? 남자들이 살짝 움찔했다. 로웰의 뱅글뱅글 안경이 그들을 스윽 훑었다. 그리고 스크린으로 되돌아가 작업을 계속했다.
“다니엘 스톤하츠 씨요. 그나마 낫죠. 그 생각도 금방 고백으로 슝 날아가 버리긴 했지만요.”
남자들의 얼굴에서 희비가 갈린다. 물론 승자는 없는 답변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작가님은요?”
그러자 남자 셋이, 특히 둘이 엄청나게 긴장을 했다. 한 명은 손을 떨었고 한 명은 아까의 실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가만히 그들을 보던 도현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로웰 선생님이요.”
“!”
송선호와 다니엘이 헉하고 로웰을 쳐다보았다. 도현은 참으로 존경스럽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렇게 해달라고 얘기 꺼낸 적도 없는데 제일 급한 것부터 화끈하게 갚아주시고, 그것도 무이자로. 이 남자들은 옛~날부터 제가 빚 때문에 고생한다는 거 알아도 국물도 없더라구요. 그런데 무슨… 로웰 선생님이 짱이에요. 최고~ 사랑해요~.”
도현이 하트가 뿅뿅 날리는 목소리로 로웰의 어깨를 애교 있게 두드렸다. 남자 둘이 마음속의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갚아주고 싶었습니다. 정말 갚아주고 싶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전부 갚아주고 편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다만, 다만… 다만…! 도현 씨가 그렇고 그런 여자일까 봐…! 절 이용만 하고 버릴까 봐. 그게 무서워서…. 그렇습니다. 제가 겁쟁입니다. 제가 바봅니다. 멍청입니다. 병신입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다 갚아드리고 한 푼도 되돌려주시지 않아도 되니까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빌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제발…!’
‘아냐! 젠장! 아니라고! 난 언제나…! 항상 언젠가는…! 항상 널 구해주는 상상만 했어. 전부, 전부 내가 책임지고 싶었어. 젠장. 젠장. 씨발. 근데 난 너한테 두 번째나 세 번째나, 씨발, 백 번째나 그런 남자 같은 건 되기 싫었다고! 가볍게 만나다가 쉽게 버려지는 니 병신 같은 전남친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난 걔들보다 훨씬, 훨씬, 훨씬, 훨씬! 괜찮은 남자란 말이야! 말이 6년이지, 6년이나…! 씨발! 그래, 내가 너 처음 될 수도 있다는 거에 좀 설레면 안 되냐?! 그 정도도 안 돼?! 그냥 차라리 약 먹고 죽으라고 해라, 씨발! 나쁜 년!’
로웰이 실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작가님이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그렇게 치면 저도 우리 작가님이 최고죠. 완전 머리 좋고 완전 아이디어 뱅큰데. 색칠시키면 그것도 척척 잘하고 모델도 시키면 척척 하고. 예쁘고. 완전 만능꾼~.”
이 여자들만 둘이서 살판났다. 남자 둘은 아주 죽어가는데 말이다.
“그래도 우리 중엔 누구라고.”
미르 킹쉴드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저 주둥이를 안 꿰맨 보람이 있었다. 다들 도현의 입만 쳐다보았다. 도현은 열기 없는 얼굴로 셋을 보다가 말했다.
“미르 씨요.”
“왜! 제일 싫다며!”
송선호가 참지 못하고 그렇게 외쳤다. 도현은 굳이 이유를 말하라면… 이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일단 다니엘 씨는 고작 내 몸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세포조직이 있고 없고로 사람 가치를 정하는 것 같아서 정말 정이 똑 떨어졌고….”
“그게 아니라!!! 저는…!!”
“솔직히 송선호 너는….”
도현은 다니엘의 변명을 들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처음에 그에게 접근해서 몸을 팔려고 했던 건 다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다니엘은 땅을 파고 들어가서 비석이라도 세울 정도로 절망을 느꼈다. 도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송선호를 보았다.
“넌 도대체 여기 왜 욕심내는 거야? 난 나한테 막말하는 남자는 진짜 별로…. 솔직히 진짜 친한 친구 사이더라도 남자가 그러면 좀…. 네가 여자라면 너한테 쌍년, 미친년, 걸레 같은 년 이런 말 하는 남자한테 무슨 생각이 들겠냐? 그냥 쟤는 저러다 언제 죽을까, 하는 거지.”
“…….”
“그래서 미르 씨요. 미르 씨는 처음엔 영 개새끼에 변태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그래도 말하면 발전하는 게 있을 것 같다는 기대라도 좀 들게 해주는 남자인 것 같아서.”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미르가 씨익 웃었다. 그는 아주 예쁜 아이스블루 눈동자로 살살 웃으며 물었다.
“서론이 길다만, 그래서 내가 최고긴 최고라 이거지?”
“뭐, 희망 고문이라도 가능한 남자도 잘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랑 할래?”
“안 해요.”
다른 남자 둘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어 닥치고 있었다. 미르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결국 제일 나은 놈이랑 하게 돼 있어.”
미르 킹쉴드는 언제나 막무가내인 것 같은데 의외로 설득력이 있다. 도현은 고민했다. 안 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그럼… 제 것만 부드럽게 빨아준다고 하면 생각해볼게요. 전 안 할 거예요. 오랄도 하기 싫어서 한 번도 안 했어요. 구역질 날 거 같아.”
“야… 넌 내가 인정한다. 대단한 년이네…. 그럼… 그렇게 할 테니까 만지게 해줘. 내 건 내가 만져도 되지?”
안 돼…. 바보 같은 겁쟁이 남자 둘은 침음을 흘리면서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이 미심쩍은 눈으로 미르를 보았다.
“여자들 많이 만났잖아요. 걸즈도 잔뜩 있고. 병 있는 거 아니에요? STD 검사 사소한 것까지 싹 다 해오면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 그리고 검사하면 뭐해요. 그동안에 병 있는 여자들이랑 하면 말짱 도루묵인데.”
“거참, 까다롭기는… 알았어.”
그러자 다니엘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저도 해오겠습니다…! 전 애초에 저 난봉꾼처럼 난잡하게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도현은 더 실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진짜 남자들이란…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겠어요? 진심으로?”
하지만 이번에는 다니엘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니엘의 무뚝뚝한 보랏빛 눈동자가 당황과 흥분, 초조 등으로 마구 일렁였다.
“전… 진짜 도현 씨 좋아합니다. 진심입니다…. 제가 싫다면 그저 마음속으로만 좋아하겠습니다. 이런 적, 이런 적은 진짜 처음이라….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저도 도현 씨를 만질 수 있다면, 만지고 싶습니다.”
도현은 다니엘을 아래위로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참나…. 그쪽도 생각은 해볼게요, 생각은…. 둘 다 확답은 못 드려요. 아시겠어요?”
그러자 미르가 좀 짜증을 냈다.
“그런 게 어딨어?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검사받고 나서는 다른 여자들이랑도 하지 말라는 거잖아.”
“아! 그럼 그냥 다른 여자들이랑 하세요. 내가 먼저 하자고 했나. 그냥 지금 있는 사람들한테나 잘하세요. 아니! 그냥 됐어요. 없던 일로 해요. 하기 싫어요.”
“그럼 저는….”
“아! 싫어! 다 싫어! 이제 다 끝났으니까 더이상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나가기나 해요!”
도현은 계속 야한 짓을 할 궁리만 하는 남자들을 쫓아냈다. 물론 그들은 저항했지만… 일단 아직까지는 누리은행이 아니라 도현 킬스버그가 집주인이었다. 그녀는 남자들을 쫓아내고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송선호를 발견했다.
“거기 서서 뭐해? 좀 치우자.”
다른 여자를 만나도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뭐든 다 떼올 테니까.
제발 만지게 해달라고.
“…….”
빌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고작 그녀를 가졌다고 생각했던 다른 남자들보다 순위가 밀리기 싫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상상만 하다가 결국엔 지금도 다른 남자들한테 널 뺏기게 생겼는데.
[네가 여자라면 너한테 쌍년, 미친년, 걸레 같은 년 이런 말 하는 남자한테 무슨 생각이 들겠냐? 그냥 쟤는 저러다 언제 죽을까, 하는 거지.]
‘…씨발….’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열렬히 원하고 욕망하던 여자가 진심으로 그를 싫어하고 있었다. 어쭙잖은 자존심 때문에 솔직해질 수가 없어서 오히려 험한 말을 하며 괴롭히고, 절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되새기면서도 주변에 맴돌며 계속 질척거리고 후려치고… 싫어하는 게 당연했다.
‘나도 내가 밉다…. 싫다고.’
훨씬 괜찮은 남자는 개뿔…. 씨발. 최악이다. 송선호는 몹시 우울해졌다. 카우치에 털썩 앉아서는 안경 밑으로 두 손을 넣고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왜 그래? 메로나 먹을래?”
상태가 이상한 그의 옆에 앉아서 도현이 물었다. 송선호는 후우, 하고 깊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아니… 미안…해서…. 너한테 너무… 못할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서.”
“왜 그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어.”
도현이 그에게서 한 엉덩이 더 멀어졌다.
“…….”
사람이 진심으로 말하는데…. 한소리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아니…. 진짜로 미안. 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 더 섭섭한 거 있으면 말해. 고칠게. 아니, 고치겠습니다. 오래 알고 지냈더니 너무 편하게… 아니, 편하게 생각했더라도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죄송했습니다.”
“너 진짜… 어디 죽으러 가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오늘은 뼈아픈 반성이 필요한 날이었다. 송선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집을 좀 치웠다. 그리고 집에 가기 위해 현관으로 간 송선호는 그를 배웅하러 나온 도현을 돌아보았다.
“…나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돼?”
“도대체 뭔데?”
안 하던 짓을 하는 송선호를 아주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도현은 팔을 벌렸다. 송선호는 조금 떨면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를 이렇게 품에 안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 키가 큰데도 가녀려서 품에 쏙 들어왔다. 진짜 기분 좋을 정도로 쏙….
‘젠장…. 진작 부탁해 볼걸….’
꿈속보다도 부드러웠다. 게다가 좋은 향기가 났다. 뱃속이 두근거렸다. 황홀하다. 황홀했다. 왜일까. 차라리 미워하겠다고 그렇게나 마음을 먹었는데. 고개를 돌리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그녀인 것일까. 그리고 왜 이렇게 황홀할까. 송선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인상을 찌푸렸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첫사랑의 열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