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9)

8.

연회가 끝나고 난 뒤, 어쨌든 라인하르트와 ‘연애’를 시작했으니 알렉사의 마음이 보송보송해져야 마땅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기분은 땅을 뚫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우선 라인하르트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적었다. 내전 종료 후 처리해야 할 문제들은 산적해 있었고, 왕실 기사단장이며 왕의 근신인 오덴발트 공작 각하께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기사단의 통솔은 부단장인 오버팔츠가 거의 도맡을 정도였다. 알렉사는 비어있는 단장실을 보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한편으로 알렉사는 은근히 주변을 맴도는 날파리들 때문에 짜증스러웠다. 내전에서 오덴발트 공작을 구한 여기사에 대한 미혼 남자 귀족들의 호기심과 호감은 연회장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폭발한 모양이었다. 뭐라더라, 다른 귀족 아가씨들과는 다른 생기발랄한 매력이 있다나. 그 이야기를 듣고 알렉사는 혀를 찼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인간들이…….”

그런 인간들을 쫓아내는 건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저랑 싸워서 이기면 사귀지요.”라는 말에 대부분 꼬리를 내리고 도망갔으니까. 뭐, 그 날파리들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런 인간들이 나타나면 라인하르트가 귀신같이 알고 어떻게든 짬을 내어 왔기 때문이다. 오래는 아니라도 어쨌든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단 사실에 알렉사는 기뻤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내 남자다’라고 이마에 새긴 것도 아니라서, 알렉사에게 자꾸만 불쾌한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어떤 남작가의 아가씨가 그의 앞에서 일부러 쓰러졌다더라. 공작가에 직접 찾아간 백작가 둘째 아가씨도 있다더라. 어떤 아가씨는 아예 반쯤 벗고 돌격했다고 하던데? 오만 아가씨들이 라인하르트의 옆자리를 노리고 덤벼든다는 소식은 매일 들려왔다.

게다가 그들을 대하는 라인하르트는, 이야기 속에서 어찌나 정중하고 다정한지. 그래서 알렉사는 그와 겨우 만났을 때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사실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 없는 거 맞지?’ 하고 확인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하지만 이런 것들을 압도하는 근심거리는 따로 있었다.

“국왕 폐하께서 국혼을 올리시고 나면 다음은 공주마마라며.”

“어, 나도 들었어. 세상에, 테레지아 마마는 좋으시겠다.”

“대비마마께서 아주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계신다며.”

“오덴발트 공작 각하와 결혼이라니, 하아… 너무 부러워.”

귀족 아가씨들이 모여 재잘대는 소리를 들으며 알렉사는 얼굴을 왈칵 찌푸리지 않으려 애썼다.

어느새 라인하르트가 알렉사에게 관심을 뒀다는 소문은 쏙 들어가 버렸다. 대신 그 자리를 라인하르트와 테레지아 공주의 결혼 이야기가 차지했다. 그 소문은 연회에서 시작되었는데, 라리에트 대비가 두 사람을 엮어주려고 하는 걸 알렉사도 이미 보았기에 그저 소문만이 아님을 더 잘 알았다.

소문은 점점 더 살을 붙여가더니 구체화됐다. 결혼식은 최대한 서둘러서 3개월 뒤. 이미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 제작자가 테레지아 공주의 궁으로 갔다고 했다. 온갖 선물들이 왕궁에서 공작가로 줄줄이 들어가는 중이라고도 했다. 공작가에서 수도의 모든 보석 상점을 휩쓸다시피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게다가 소문의 정점은 알렉사의 심장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어느 늦은 밤, 달빛이 쏟아지는 공주 궁 후원에서 오덴발트 공작은 테레지아 공주 앞에 무릎 꿇었다. 현숙하고 아름다운 공주의 마력의 포로가 되었다고 고백하며, 오덴발트 공작은 비둘기 알만 한 다이아 반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테레지아 공주는 수줍은 얼굴로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며 언제나 그의 곁에 서고 싶었다고, 오래전부터 당신을 마음에 담아두었다고…….’

뭐, 이따위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도는 것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라인하르트는 언제나 진실되게,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사랑한다고 수차례 속삭였다. 그의 눈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렉사는 그에게 테레지아 공주와의 결혼 이야기는 어찌 된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묻는 게 구차하고 비참했다. 자신이 아는 라인하르트의 성품상 연애는 알렉사와, 결혼은 테레지아와 하는 쓰레기 같은 짓은 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상상도 못 한 대답을 듣게 될까 봐 겁이 났다.

탁. 탁.

허리에 찬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는 저도 모르게 툭툭 쳤다.

그 모든 소문이 생겨나고 또 퍼져나가는 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라는 것도 몹시 고통스러웠다. 오늘만 해도 이렇게 경계 근무 중이지 않은가.

왕의 집무실이 있는 궁 근처를 돌며 알렉사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이제 소문은 거의 기정사실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고, 라인하르트와 얼굴을 맞대지 못한 지 이틀째였다. 얼굴만 못 보았을까. 소식 하나 없었다.

알렉사는 제 머릿속에서 나쁜 생각이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지 못하게 하려 애썼다. 그러나 대개 나쁜 생각은 쑥쑥 자라는 담쟁이덩굴 같은 것이라서, 아무리 견고하게 벽을 치고 이겨내려고 해도 그 벽을 타고 올라와서는 쉬이 침범해 버렸다.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탁. 탁. 탁.

검 손잡이를 치는 손길이 좀 더 빨라졌다. 아주 불량한 근무 태도라고, 누군가가 보면 지적할 만했지만 지금 알렉사는 혼자였다. 어차피 근위병들이 있고, 왕실 기사단원은 이렇게 궁 주변을 순찰하거나 왕의 뒤를 지키는 일을 할 터이니.

이따가 왕의 뒤를 지키고 있는 선배가 나오면 그녀가 뒤를 이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대강 시간이 되었으니 들어가 보자. 알렉사가 궁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알렉사 선배.”

익숙한 목소리에 알렉사는 고개를 돌렸다. 마티어스는 손에 서류와 지도로 보이는 종이 묶음을 들고 있었다. 마티어스를 다시 본 건, 그때 콜로만 공작의 마법으로 조난당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알렉사는 씩 웃으며 그를 기다려주었다. 곧 두 사람은 발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폐하를 뵈러 가는 모양이지?”

“네. 국경 지대 군사 재배치 관련해서 논의를 하기로 해서요.”

“그렇구나. 나도 이제부터 폐하 뒤에 서있을 건데.”

“그럼 내내 같이 있겠네요.”

마티어스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그녀의 팔을 팔꿈치로 툭 쳤다. 그리고 잠시 대화가 멎었다. 침묵을 먼저 깬 쪽은 마티어스였다.

“선배, 라인하르트 형이랑 사귀어요?”

“으, 응?”

“설마 내가 늦은 거예요?”

그 말에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생각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녀의 놀란 기색을 알아차린 마티어스는 여느 때처럼 웃는 듯 보였지만, 어쩐지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둔한 게 죄네.

아직까지는 친구…라고는 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건 자신의 억지임을 알렉사도 잘 알았다. 여기에서 마티어스에게 ‘우리는 친구 사이’라고 말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기만이었다. 알렉사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뱉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마티어스가 하, 하고 작게 탄식했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날 공작 각하께서 나를 죽일 듯이 바라본다 했어.”

“뭐어… 그렇게 됐어.”

“그런데 괜찮아요, 선배는?”

“뭐가?”

“테레지아 공주와의 소문, 못 듣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얘는 아픈 데를 잘도 찌르네. 알렉사는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 안 써.”

“…왕실의 의지라면 아무리 오덴발트 공작이라고 해도 무시하기 어려울 텐데요.”

“그러니까 더 신경 안 쓰려고.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될 문제야?”

저절로 목소리가 뾰족하게 나갔다. 그녀의 기분이 상한 걸 안 마티어스가 바로 사과했다. 같이 걷는 길이 조금 어색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왕의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아직 안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모양인지 시종이 잠시 기다려달라고 했고, 결국 알렉사는 마티어스와 나란히 불편하게 서있어야 했다. 알렉사는 마티어스 쪽을 보지도 않고 정면만 본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런 알렉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마티어스가 불쑥 물었다.

“나는요, 선배. 아직 안 늦었다고 생각해요.”

“…뭐가?”

알렉사가 마티어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여느 때와 달리 진지했다.

“지금이라도 나는 선배가 그 사람 대신 날 선택하면 좋겠어요. 난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그때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알렉사는 그 순간 마티어스를 보고 있느라 문이 열리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 난 널 그렇게 생각 안 해서 안 돼. 너만 상처받을걸.”

그리고 마침내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반사적으로 알렉사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왕의 집무실에서 나온 건 라인하르트와 테레지아 공주였다.

혹시 나와 마티어스가 한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닐까? 알렉사의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로 라인하르트의 낯빛을 살폈는데,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덤덤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못 들은 걸까?

그러나 그의 기색을 살피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라인하르트만이 아니라 왕실의 일원인 공주가 있지 않은가. 알렉사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왕족에게 예를 표했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테레지아 공주는 창백한 얼굴에 무표정했다. 라인하르트와 나란히 서있으니 마치 밀랍 인형 한 쌍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알렉사를 한번 흘끗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에 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라인하르트는 알렉사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지금 공주를 수행 중인 거니까. 알면서도 알렉사는 괜히 속이 쓰렸다.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어느새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알렉사와 마티어스의 앞을 스치고 지나가자, 드디어 그녀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표정이 많이 좋지 않았던 걸까. 곁에 서있는 마티어스가 나직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이만 들어가시죠.”

알렉사는 가까스로 표정을 가다듬고는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만약 뒤를 돌아보았는데 라인하르트가 공주와 조금이라도 친밀한 모습을 보인다면, 참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날 밤, 혹시라도 라인하르트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알렉사는 기다렸다. 그녀가 그를 찾아 공작저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을 때까지 라인하르트는 오지 않았다.

*

알렉사는 일단 휴가를 쓰기로 했다. 마음이 시끄러운 건 다 시끄러운 소문을 듣고 있어서니까, 거기에서 멀어지면 나아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휴가에서 돌아왔을 즈음엔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간에 말이다.

“고향에 간다고?”

“북서부에서도 그랬지만, 왕실 기사단으로 오고 나서도 한 번도 못 갔거든요.”

“허어… 그럼 대체 얼마나 가족을 못 본 거야?”

기사단장의 대리를 맡은 오버팔츠 부단장은 혀를 차며 휴가계에 서명을 해주었다. 알렉사는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빠르게 짐을 챙겨서 수도를 벗어났다. 어차피 안다 해도 라인하르트가 쫓아올 리도 없는데, 마치 도망치듯 그녀는 빈터투어를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딸의 얼굴을 본 부모님은 눈물부터 터트렸다. 게다가 내전 소식은 이 작은 마을에까지 닿은 모양이었는지, 두 분 모두 그녀 몸에 흠 하나 없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했다. 부모님의 눈물을 보니 알렉사도 참지 못하고 울었다. 세 사람은 부둥켜안고 엉엉 울면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건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가장 많이 운 아버지는 눈이 붕어 눈처럼 부어서는 계속 훌쩍였다.

“일단 먹자. 너 어쩜 이렇게 빼빼 말랐어! 너무 혹사당하는 거 아니야? 전처럼 매일 훈련한다고 밥도 거르는 거 아니야?”

“엄마… 저 하나도 안 말랐거든요.”

“무슨 소리야!”

어머니는 알렉사의 등짝을 찰싹찰싹 치며 ‘이거 봐라, 뼈가 다 만져지지 않느냐, 기사단에서 밥도 안 주는 거냐’며 화를 내셨다. 그거 뼈 아니고 근육인데……. 그러나 알렉사는 긴말하지 않고 네네, 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다 걱정해서 하는 소리인 걸 아는 까닭이었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알렉사는 떠날 때와 똑같이 정돈된 자신의 방에 누웠다. 창 너머로 보이는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는 라인하르트를 떠올렸다. 저 고요한 달 같은, 하지만 속내는 이글이글 끓는 용암 같은 그 사람. 막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바빠졌고, 소문이 돌았다.

차라리 말하지 말지. 네가 디어라는 사실을 끝까지 숨기지. 괜히 말해서 왜 사람 애만 태우는 거야. 저절로 투정과 원망이 샘솟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그의 얼굴을 지우려고 애썼다. 여기까지 와서 라인하르트를 생각하면서 속 끓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달에게서 몸을 팩 돌리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고향에 돌아온 알렉사는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만도 바빴지만, 영주의 초대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그리고 스승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작은 항구 무스의 왈가닥 소녀가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대단한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기뻐했다. 사심 없이 기뻐해 주는 사람들 속에서 알렉사는 오랜만에 편안했다.

휴가로 받은 일주일은 너무나 짧았다. 별다르게 한 것도 없는데 어느새 날이 다 가버렸다. 다시 수도로 가야 하는 알렉사를 붙들고 아버지는 또다시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가 혀를 차며 도닥였다.

“바쁘겠지만, 그래도 올 수 있을 때마다 와. 알았지?”

“알겠어요. 두 분 다 건강 잘 챙기시고, 좋은 거 많이 드시고요. 제가 보낸 월급 아끼지 말고 그냥 다 쓰세요. 알았죠?”

“그걸 어떻게 쓰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거 다 너 결혼할 때…….”

“아, 아아아! 알았어요. 저 가요. 또 올게요.”

멀어지는 알렉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부모님을 뒤로한 채 그녀는 다시 수도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가면 반드시 결판을 지어야겠다고.

라인하르트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머저리처럼 그의 곁에서 의미 없는 사람인 척 위장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런 건 알렉사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일주일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어느 정도 급한 불은 껐는지 라인하르트가 기사단에 복귀해 있었다. 휴가 신청할 땐 오버팔츠 얼굴만 보면 되었는데, 돌아오니 어딘가 불편한 표정의 연인과 마주해야 했다. 알렉사는 태연한 척 복귀 신고를 했다.

“알렉산드라 린다우, 휴가 마치고 금일 복귀했습니다.”

“…왜 말도 안 하고 간 거야?”

“부단장님께 허가를 받았습니다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알렉사.”

알렉사는 통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제대로 답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라인하르트는 입술을 깨물고는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쟤는 꼭 난감할 때 저러더라. 알렉사는 속으로 픽 웃었다.

단장실에서 나오기 전, 알렉사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라인하르트. 부탁이 있는데.”

“무슨 일인데?”

기다렸다는 듯 라인하르트가 답했다. 엉거주춤 일어날 듯한 자세에 알렉사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이따가… 한 두 시쯤? 그때 바빠?”

“아니, 전혀.”

“그럼 그때 제3 연무장에서 잠깐 볼래?”

라인하르트는 그 말에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받아내고 알렉사는 가벼운 걸음으로 단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건물 밖에서 만난 동료 기사를 붙잡고는 뭐라 말을 했다. 그녀의 말에 동료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되어서는 고개를 끄덕이곤 멀어졌다.

‘자, 이제 되돌릴 수 없어, 알렉산드라.’

라인하르트와 결판을 볼 시간이라고.

알렉산드라는 주먹을 한번 불끈 쥐어보고는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짐을 내려놓고 준비를 마치면 아마도 라인하르트와 약속한 시각에 딱 맞출 듯했다. 그녀의 입매가 결연한 다짐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대로 준비를 마치고 제3 연무장으로 향하니 거의 두 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예상대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만난 동료가 말을 잘 전해준 모양이었다. 알렉사는 후우, 하고 숨을 내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 온다!”

“린다우 경, 진짜야? 어?”

“야, 가만히 있어봐, 좀!”

알렉사를 발견한 기사들이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지만, 알렉사는 그들을 돌아보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오로지 단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연무장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라인하르트. 그는 평소의 담담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에 당혹감을 잔뜩 묻힌 채로 알렉사를 돌아보았다.

그가 급히 알렉사를 향해 걸어오려고 한 순간, 알렉사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멈추라고 표시했다. 말 잘 듣는 개처럼 라인하르트의 걸음이 대번에 멈추었다. 무언가 두 사람 사이에 심각한 기운이 감돌자, 시끌시끌하던 기사들도 곧 고요해졌다.

뚜벅뚜벅. 곧게 걸어 라인하르트의 앞에 다다른 알렉사는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라인하르트의 가슴에 툭 던졌다. 흰 덩어리가 그에게 가볍게 부딪치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 물건을 알아본 이들이 히익,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당사자 또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라인하르트는 입술을 깨물고는 제 발치에 떨어진 하얀 예식용 장갑을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알렉사를 바라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렉산드라 경, 이걸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기사가 장갑을 던지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묻는 겁니까, 단장님?”

두 사람 사이에 심각한 기운이 맴돌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을 거라고 해서 모였던 기사들은 일제히 얼어붙었다. 알렉사와 라인하르트의 사이가 그렇게 화기애애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번 내전에서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나.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로 그녀가 단장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건지 다들 이유를 알지 못했다.

혹시 두 사람만 있던 그때 혹시 크게 싸우기라도 한 걸까. 단원들은 다들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물론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건 라인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사가 말도 없이 무스로 휴가 간 사실을 늦게 알게 된 바람에 따라가지 못해서 속이 쓰리던 차였다. 그런데 잘 쉬고 돌아온 듯하던 그녀가 이렇게 장갑을 던지리라고는…….

라인하르트가 말없이 알렉사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이, 그녀는 길게 늘어트렸던 붉은빛 도는 갈색 머리를 하나로 바짝 올려 묶었다. 그러고는 허리에 찬 검을 손으로 툭툭 쳐보고는 라인하르트를 등 뒤에 두고 세 걸음 걸어갔다. 다시 돌아보았을 때, 라인하르트의 얼굴에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본다.’

알렉사는 짐짓 쾌활히 목소리를 높였다.

“단장님, 만약 제가 진다면 하극상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서 제가 있던 북서부 국경으로 다시 보내주십시오.”

그 말에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미 그의 얼굴에는 ‘그럴 수 없다’는 뜻이 명백하게 쓰여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단장에게 공개적으로 결투 신청을 한 기사가, 지고도 그대로 남아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라인하르트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진다면? 내게 바라는 게 있나?”

“그러면 제게 사과하십시오.”

“무엇을 사과해야 하지?”

“그건 검을 맞대고 나서, 결과가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저절로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테레지아 공주랑 진짜 결혼할 거니? 나는 그럼 뭐야, 정부로라도 삼겠다는 거야?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심지어 찾아오지도 않았어? 단둘이 있을 때 말했던 네 마음이 고작 그런 거야?

퍼붓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알렉사는 꾹 눌러 참았다. 어차피 지면 사과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얼굴 안 보면 되는 거니까.

지금 자신이 매우 비이성적으로 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알렉사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사람이 꼭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행동해야만 하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멋대로 굴면 안 되는 건가?

그녀는 내내 평민이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아카데미 때부터 기사가 된 이후까지 행동과 말을 조심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게 끔찍하게도 괴로워서 그렇게 지냈다. 심지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오러 발현자가 된 이후에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 다 알 게 뭐냐, 싶었다.

스르릉! 검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뽑혔다. 번뜩이는 날은 진심으로 상대를 베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발도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알렉사를 라인하르트는 침통한 얼굴로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마침내 자신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알렉사는 입술을 일자로 꽉 다물었다. 그녀의 검이 노란 불꽃으로 타오르는 듯 일렁이자 기사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단장 상대로 결투 신청도 모자라서 오러까지 꺼내 들다니, 정말로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건가? 누군가는 말려야 하는 게 아니냐고도 했지만 기사의 결투는 방해할 수 없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몰아쉬더니 똑같이 오러를 발현했다. 새하얀 빛의 오러는 마치 그를 닮아 깨끗하고 정순하게 보였다. 반면 알렉사의 것은 불꽃인 양 자유분방하고 생기가 넘쳤다.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땅을 박차고 서로 달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가까운 과거에 서로 꼭 끌어안은 채 서로의 체온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려고 애썼던 사람들 같지 않게,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부딪쳤다.

채앵, 챙! 소리가 요란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각자의 오러가 상대를 잡아먹을 듯 웅웅댔다.

알렉사는 힘을 주어 라인하르트를 밀어내고는 자세를 낮추어 그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래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검을 쳐낸 라인하르트가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알렉사가 빠르게 그에게 다가가며 정신없이 검을 놀렸다.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라인하르트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했다.

“피하지도, 봐주지도 마.”

“꼭 이래야만, 해?”

“그래. 이래야만, 직성이 풀리겠어.”

라인하르트의 검이 팔을 노리고 뱀처럼 휘며 들어오자 알렉사는 검을 세워 막으며 그의 검을 타고 도리어 더 바짝 붙었다. 그러고는 왼팔 팔꿈치를 번쩍 치켜들어 라인하르트의 턱을 가격했다. 빠악! 큰 소리가 나며 라인하르트가 비틀대며 물러났다.

알렉사는 검을 늘어뜨린 채로 그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제법 큰 충격이었지만 라인하르트는 금방 자세를 바로 하고는 알렉사가 위로 크게 베는 검을 막아냈다.

검날끼리 맞물려 긁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끼기긱, 끼기이익. 시작은 비통했을지언정 막상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니 라인하르트 또한 호승심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짙게 빛나고 있었다. 알렉사는 씩 웃으며 검으로 그를 세게 밀어냈다.

둘의 검이 수십 번, 수백 번 맞부딪쳤다. 알렉사는 라인하르트를 상대하는 내내 과거를 되짚었다. 처음 맞붙었던 라인하르트와의 대련과 충격적인 패배도, 둘만 만나서 몰래 대련하던 날들도, 처음 라인하르트의 오러를 보았던 평가전도… 단 한 순간도 알렉사는 잊은 적이 없었다.

‘네가 나를 잊지 못한 만큼… 그래, 나도 솔직히 말해서 널 잊은 적이 없어.’

애써 묻어두고 감춰둔 채로 외면했을 뿐이다. 라인하르트라는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알렉사의 안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자꾸만 툭툭 튀어나왔다. 게다가 그는 알렉사가 모르는 사이에 디어라는 존재로 그녀의 인생에 제법 큰 흔적도 남기지 않았는가.

디어를 꿈꾸던 때 라인하르트가 나왔던 건 어쩌면 은연중에 그녀가 바라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본 순간 반해버렸던, 왕자님 같던 그 소년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그를 이겨 그에게서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그런 바람.

하지만 이제는 그런 바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욕망하는 만큼 그녀도 욕망했다. 누구와 나눌 수도 없고, 그러느니 차라리 멀어져 다시는 보지 않을 곳으로 떠나고 싶을 만큼.

그러니 오늘 알렉사는 라인하르트를 이겨야만 했다.

그녀의 검이 예리함을 더해갔다. 급소만을 노리는 검에도 라인하르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알렉사는 제 왼쪽 옆구리를 비웠다. 여기로 와, 라인하르트.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검사는 빈틈을 보면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인하르트의 검이 찔러 들어오는 순간 알렉사는 그의 검을 따라서 빙글 돌았다.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너는 기억이나 할까? 이 똑같은 모습으로 나는 너에게 패배했었는데. 네 오러에 잘려 나간 검을 보면서 좌절했는데.

마침내 그의 등을 알렉사가 잡아냈다. 사방에서 급히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등을 뺏겼음에도 라인하르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당연히 뒤를 방어하러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라인하르트가 이런 수에 쉬이 당할 리 없다는 걸 알았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이길걸! 알렉사는 그의 목을 공격하는 대신에 그대로 몸을 낮추었다. 그러고는 잽싸게 라인하르트의 다리를 걸었다.

“어어……!”

참을성 없는 누군가가 놀라 고함을 쳤다.

라인하르트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뒤로 몸을 빼낸 알렉사는 다시 한번 생긴 라인하르트의 빈틈으로 검을, 그대로 내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대로 멈추어 섰다.

노란 오러가 담긴 검 끝이 라인하르트의 목젖 앞에 멈추어있었다. 알렉사는 눈을 반짝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심으로 기쁜 표정으로 알렉사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내가, 후우, 후, 이겼어. 라인하르트.”

그녀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한 발 물러났다. 그의 눈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그리고 두려움이 동시에 읽혔다. 마침내 자신을 이기고야 만 알렉사를, 패해놓고서도 그토록 사랑스럽다는 듯 볼 수 있는 건 역시 라인하르트이기 때문이리라.

그는 천천히 검을 집어넣고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다.

“내가 졌군.”

단장의 패배 선언에 기사들이 단박에 시끄럽게 떠들었다.

“이런 젠장! 진짜로 단장이 졌어!”

“린다우 경의 마지막 수 봤어? 거기에서 그렇게 대담하게……!”

“와, 정말 어마어마한 대결이었어.”

알렉사는 왁자지껄한 기사들에게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올곧게 오직 라인하르트 한 사람에게만 고정된 채였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걸어서 라인하르트의 앞에 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글거리는 파란 눈을 바라보는 라인하르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내가 사과할 일이 있다고 했지?”

“그래, 라인하르트.”

갑작스러운 반말에 기사들은 일제히 눈이 동그래졌다. 둘이 아카데미 동기라고는 해도 철저히 위계를 지켜왔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다들 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알렉사는 후우, 하고 숨을 내뱉고는 덥석 라인하르트의 멱살을 잡았다. 그녀는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말했다.

“테레지아 공주님과 결혼할 거라며?”

“무슨, 그런…….”

“돌고 있는 소문을 모른다고는 하지 마. 공주님과 결혼할 거라면 내게 사과해.”

그 말에 이제 구경꾼들의 표정은 정말 형언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 알렉사가 단장 멱살을 잡은 건가? 게다가 지금 들은 말은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들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대체 테레지아 공주님과 결혼하는 라인하르트에 대한 이야기와, 알렉사가 무슨 관계가 있단 건지…….

알렉사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건 라인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 있는 기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의 말이 뭔지 바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대번에 그는 알렉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히이익……!”

그 철두철미한 단장이 결투에서 진 것도 모자라 무릎까지 꿇자 단원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 중인 이 광경이, 죽을 때까지 두고두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만한 엄청난 것임을 직감했다.

주변에서 무슨 생각을 하건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알렉사의 두 손을 꽉 붙들었다. 그의 눈가가 금방 붉어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에게는 오직 너뿐이라고 말했잖아. 그건 영원히 변하지 않아.”

“그럼 왜 그날 안 온 건데? 왜 두 사람이 함께 집무실에서 나왔는지,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나에게 설명조차 하지 않은 이유가 뭔데?”

알렉사는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정말 많이 화를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잠시 찾아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는 조금도 괜찮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적당히 좋은 시간을 보내고 마는 게 아니라, 알렉사에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일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해놓고, 기만한 거야?”

“절대 아니야, 알렉사. 나는… 공주마마와 아무 관계도 아니야. 맹세하건대 진실이야. 네게 진작 이야기하지 않은 건 정말 미안해. 무조건 내 잘못이야.”

그는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알렉사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털어놓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에게는 알렉산드라 린다우, 한 사람뿐이었어. 오로지 너만 사랑해.”

알렉사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라인하르트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젠장, 망했네! 알렉사는 자신이 완전히 그에게 넘어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안 좋아했으면 공주랑 결혼하네 마네 소리 나왔을 때 다 때려치우고 이미 튀었을 것이다. 이렇게 일을 벌인 건, 말하자면 그녀 식대로 라인하르트를 제 남자라고 여기저기 공표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어느새 알렉사의 얼굴이 풀리고 약간 웃음기가 돌자 라인하르트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씩 웃으면서 물었다.

“네가 날 이겼으니까… 이제 친구 그만해도 되는 거지?”

“어… 그, 그게 그렇게 되네?”

그러자 라인하르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는 성큼성큼 연무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얼빠져 있던 기사들은 기겁하며 단장님, 단장님, 하고 그를 불러댔다. 애타게 저를 찾는 기사들에게 라인하르트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오늘 일은 비밀에 부치지 않아도 좋다! 이대로 해산!”

그의 말에 알렉사는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황망한 단원들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연무장을 나왔다. 점점 두 사람의 걸음이 빨라지다 못해, 마침내 둘 다 달리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필로그

“으응… 응, 그만…….”

“조금만 더, 안 될까.”

“안 돼, 라고 해도… 흐으… 멋대로 할 거면서…….”

“네가 싫다고 하면 당연히 멈추지.”

웃기시네,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알렉사는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싫지는 않았으니까. 싫었으면 진즉에 발로 차서 침대에서 떨어트리고도 남았다. 그녀가 절대로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지 라인하르트는 후후 하고 웃으면서 다시 그녀의 목덜미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라인하르트는 알렉사의 목덜미와 등에 입을 맞추는 걸 좋아했다. 왜 자꾸 그 부분만 집착하냐고 물었더니 “나 말고는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라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답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옷으로 잘 가려지지 않는 위쪽에 자주 흔적을 남기곤 했다.

어느 날 동료 하나가 “벌레한테 물렸어?”라고 물은 날 알렉사는 시뻘게진 얼굴로 라인하르트를 찾아갔다. 또 한 번 이래 놨다가는 다시는 한 침대에 못 있을 줄 알라는 엄포에 그는 착실하게 그녀의 경고를 새겨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목과 등에 집착하는 라인하르트는 오늘도 견갑골과 어깨에 한참이나 입을 맞추었다. 정사의 나른함에 파묻힌 채 그의 후희를 기껍게 받던 알렉사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참, 공주마마는… 음, 잘 지내신대.”

“으응.”

“흐응, 으, 간지러워. 비앙카가, 후우, 거기에서 몇, 년, 아! 산 사람, 같으시다고…….”

“음.”

“듣고 있는 거야?”

“아니.”

“아……!”

왜 듣질 않느냐고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라인하르트의 것이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바람에, 알렉사는 탄성을 터트리며 베개에 머리를 처박았다. 풍성한 거위 깃털로 채워진 베개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이지러졌다. 느릿하지만 알렉사의 배 속 깊이 제 성기를 꾹꾹 밀어 넣으며 라인하르트가 속삭였다.

“다른 사람 얘기 하지 마.”

“공주, 마마, 얘기잖, 하윽!”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너 말고는 아무도 안 궁금해. 라인하르트는 알렉사의 귓불을 물며 중얼거렸다. 정말 다른 사람들도 신경 좀 쓰라고 하고 싶었지만, 알렉사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좀 전에 이미 한바탕 혼절 직전까지 알렉사를 몰아붙여 놓고, 어떻게 또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갈 수 있는지! 점점 거세어지는 허릿짓에 그녀는 다시금 정신없이 흔들렸다. 잠잠해진 듯하던 쾌락의 바다가 다시금 출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알렉사의 전신을 단번에 삼켜버렸다.

정신이 아득해지기를 수차례. 마침내 온몸이 뻣뻣해지도록 절정에 시달리고 나서야 알렉사는 겨우 라인하르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땀에 잔뜩 젖어 완전히 널브러진 알렉사는 여전히 쾌락에 젖어 혼몽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라인하르트의 침실 천장 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리고 있는데, 불쑥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끼어들었다.

“무슨 생각 해?”

“아무 생각도 못 해.”

너 때문에 지쳐서. 그녀의 힘 빠진 목소리에 라인하르트가 킥킥 웃으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훈계하는 척했다.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 체력을 좀 더 키우는 게 좋겠어.”

“하… 단장님 체력이 이상한 게 아닐까요?”

그 말에 라인하르트가 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음, 나는 아직도 더 할 수 있는데.”

“그만해! 이러다 말라죽겠어!”

알렉사가 얄미운 얼굴을 손으로 밀어 치우려 했지만, 오히려 그 손을 붙들리고 말았다. 손바닥에 또다시 입을 맞추는 라인하르트를 보며 알렉사는 ‘고지식하고 금욕적으로 보이던 라인하르트가 이런 색에 미친 짐승이었다니.’라는 생각을, 오늘도 했다.

테레지아 공주와의 결혼설 때문에 화가 나서 장갑을 던졌던 날, 알렉사는 그대로 라인하르트의 손에 이끌려 공작 저택으로 들어섰다. 공작이 여자를 데려왔다는 사실에 얼어붙은 사용인들을 지나쳐 들어간 그의 침실에서, 알렉사는 그날 목이 쉬도록 울부짖어야 했다. 고통이나 슬픔이 아니라 절정에 못 이겨서.

‘질투하는 알렉사, 너무 사랑스러워.’

‘너 말고 아무도 없다는 말을 못 믿었던 거야?’

‘그럼 믿을 때까지 하자.’

‘알렉사, 사랑해.’

미친놈인가 싶을 정도로, 라인하르트는 몸을 섞고 또 섞었다. 알렉사는 절정이 도를 넘으면 애액이 물처럼 줄줄 흐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침대 시트가 축축해져서 더는 뒹굴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두 사람은 엉겨 붙어있었다.

몰아붙여지다 못해 까무룩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침대는 다시 보송보송해져 있었다. 방에 들어온 순간에 뜯기듯 벗겨져 이내 체액 범벅의 알몸이 되었건만, 깨어나 보니 깨끗하게 닦여있었다. 그녀의 옷은 잘 손질되어 토르소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 잠든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부루퉁하게 그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던 알렉사는 코를 꽉 쥐어서 그를 깨웠고,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라리에트 대비의 반대로 마탑에 가지 못하고 궁에 처박혀 마법만 들입다 파던 테레지아 공주는 결혼설이 나자마자 라인하르트를 찾아왔다고 한다. 결혼에 뜻도 없고, 자신은 마탑에 가고 싶다고.

‘그래서 그날 집무실에 같이 가서 폐하께 공주마마도, 나도 뜻을 제대로 전했던 거야.’

‘왜 미리 말을 안 했는데?’

‘전말을 알게 된 폐하께서 도와주시기로 했는데… 혹시라도 대비마마의 귀에 들어갈까 봐, 절대로 함구하라는 명을 내리셔서. 그래도 네게는 말할 걸 그랬어. 불안해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뭐?’

‘그게…….’

도끼눈이 되었던 알렉사는 이어지는 라인하르트의 말에 곧 화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너는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하는 너에게 공주마마와 결혼할 게 아니라는 둥 말하는 건 좀… 네가 어이없어할 것 같았거든.’

우리가 뭐 얼마나 깊은 사이냐는 말이라도 나올까 봐 무서웠다고 부끄럽게 웃으며 말하는 라인하르트에게 더 이상 알렉사는 화를 내지 못했다.

어쨌든 오해가 풀린 것은 잘된 일이었지만, 그다음의 후폭풍도 대단했다. 두 사람의 결투와 그 이유가 거의 수도 전체에 빠르게 퍼졌던 것이다. 기사단의 동료들이야 그저 놀랐다느니, 대단하다느니, 잘되었다느니 덕담을 해주었다. 하지만 귀족 사회, 특히 미혼 여성 귀족들은 거의 까무러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전에 알렉사가 어떤 불쾌한 일을 당했는지 기억하는 라인하르트가 먼저 나섰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내 마음에 두어온 사람이니, 불만이 있거든 내게 말하고 탓하려거든 날 탓하도록 하십시오.’

오덴발트 공작이 먼저 나서서 그리 말하니, 다들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눈물을 흘릴지언정 아무도 알렉사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공인된 연인이 되고 나자 라인하르트는 거의 매일 알렉사를 제집으로 ‘모셨다’. 아직 혼인한 사이가 아니기에 공작 저택에서 머물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라인하르트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려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알렉사는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질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작 부인이 된다면 지금 자신의 자리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기사의 직을 지킬 수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비앙카와 주변 친구들에게 슬쩍 물어보니, 여태껏 어떤 귀족가의 안주인도 기사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평민이었던 경우는 오히려 찾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불안함을 알아차린 건지 라인하르트는 굳이 밀어붙이지 않았다. 분명 가문 안에서 압박이 있을 텐데도 말이다. 알렉사는 그런 그가 고마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그래서 오늘도 결국에는 이렇게 공작 저택에 와서 밤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한 것이었다.

알렉사는 몸을 꿈틀꿈틀 움직여서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한참 그녀의 손가락 끝을 물었다가 빨았다가 하던 라인하르트도 그녀를 마주 보고 누웠다. 그는 계속 장난질을 이어가려다가 알렉사의 낯빛이 조금 심각해 보이자 곧 멈추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너는 괜찮아?”

“내가 괜찮지 않을 일이 뭐가 있지?”

네가 있는데.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라인하르트가 웃으며 말하자 알렉사도 덩달아 픽 웃었다. 그녀는 라인하르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깍지 낀 그의 손은 커다랗고 뜨거웠다. 알렉사는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이렇게 계속, 음… 나랑 연…인 관계로만 있는 게.”

“걱정 안 되는데.”

그의 다른 한 손이 알렉사의 턱을 슬쩍 들어 올렸다. 고개까지 슬쩍 움직여서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하는 게 가상해서 알렉사는 깔았던 눈을 다시 바르게 했다.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한 녹색 눈동자에 알렉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라인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네가 좋다고 하는 때가 나도 좋아.”

“…내가 계속 주저하면? 그럼 어떡할 건데?”

“그래도 돼, 알렉사.”

그는 깍지 낀 알렉사의 손을 들어 그녀의 약지를 살짝 깨물었다. 붉은 잇자국이 올라오는 데에 입을 맞춘 라인하르트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답했다.

“혼인하지 않더라도 내 옆자리에는 영원히 너뿐이야.”

“부인, 이나… 자식은? 가문에서 그냥 두겠어?”

“누가 나에게 감히.”

왕이 가장 신임하는 대귀족이자 최대 공신이다. 게다가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단 두 사람 중 하나인 그를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알렉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렉사, 너도 마찬가지야. 누가 뭐라 하든 넌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공작 부인이자 기사이고 싶으면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기사만으로 남고 싶다면 그렇게 해.”

“…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난 그저 네가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한걸. 몇 번이나 널 놓치고, 실수했는데도 내 곁에 있어주기로 한 너인데…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어.”

그 말이 너무나도 보드랍고 따스해서 알렉사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눈가가 발그레해진 건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뻗어 라인하르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다가 뗐다. 그것만으로도 놀랍게도 충만해진 기분이었다. 이마를 마주 대고 알렉사는 눈을 감았다.

“늦을지도 몰라.”

“그래.”

“어쩌면, 널 힘들게 할지도 모르고.”

“응.”

“그래도 조금만, 더…….”

그녀가 더 말을 이을 필요도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알렉사는 새삼, 어릴 적 자신이 라인하르트를 보고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왕자 같은 사람.

내가 주인공인 로맨스에 등장하는 왕자가 라인하르트라 다행이야.

머지않은 미래에 조금은 달라진 그들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그려보며, 알렉사는 제 사랑하는 이를 마주 끌어안았다.

확신하건대 두 사람이 만날 이야기의 끝은, 분명 ‘영원히 행복했습니다’이리라.

외전

지금껏 나는 갯벌에 팔다리가 묶인 채 밀려오는 밀물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삶을 살았다. 곧 저 바닷물에 내가 잠기겠구나, 하고 예상하면서도 팔다리를 묶은 사슬을 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 팔다리를 묶은 사슬의 이름은 가문과, 가족이었다. 누구도 나의 이런 감상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만약 알았다면 배가 부른 소리를 한다며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콘스탄츠 왕국의 가장 고귀한 귀족 가문인 오덴발트 공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난 내가, 그 가문과 가족 때문에 곧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한다면 누가 이해하겠는가.

오래도록 쌓아온 부와 명예, 권력이 오덴발트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아니 잉태된 순간부터 정해진 길을 따라가면 도달하는 곳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나 다름없었다.

그 자리에 마침내 앉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엄격하다 못해 혹독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교육은 오덴발트의 후계자라면 응당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숨을 막히게 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교육에 감사했다. 어디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쌓은 지식과 검술, 교양은 모두 나의 자양분이니 당연했다.

내 숨을 막히게 하는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한 듯 정해져 있는 나의 삶이 바로 숨구멍을 틀어막으러 오는 바닷물이었다.

“너는 나의 하나뿐인 후계자란다, 라인하르트.”

훌륭한 성취를 보일 때마다 어머니이자 오덴발트 공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아버지 또한 등을 툭툭 두드려주셨다.

그분들의 눈에 나는 예쁜 자식 이상으로 오덴발트의 이름을 더욱 빛낼 훌륭한 후계자였다. 그 외의 길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후계자로서 필요한 자질을 기르는 것 외에 어떤 다른 활동도 나는 손에 쥐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그분들 나름의 사랑이었으리라. 그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서 그런 회의가 들었다. 나의 가치라는 건, 결국 오덴발트의 이름을 잇는 것 외에는 없는가.

대귀족 후계자로서 필요한 모든 교육을 받은 뒤,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로서 아카데미에 입교,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 왕실을 위해 기사로서 복무하다가 가문을 잇고 공작으로서 가문을 번영시키는 것.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사소한 애정 따위도, 나는 감히 마음에 품어볼 수가 없었다.

“언젠가 네게 걸맞은 짝을 찾아서 약혼부터 하자꾸나.”

내가 막 열넷이 되었을 즈음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가 툭 던진 말에 나는 눈을 껌뻑이기만 했다. 보통의 귀족들이 가문 간의 약속에 따라 혼인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말에 속이 뒤틀렸다. 대체 왜였을까. 나는 항시 부모님의 말씀을 진리처럼 따르는 아이였는데 말이다.

‘내게 어울리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요?’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오덴발트에 견주어 격이 떨어지지 않는 가문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왕실의 일원과는 절대 혼사를 맺지 않는 게 가문의 철칙이었다. 왕실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되, 그들에게 목줄을 쥐여줄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저렇게,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삭제되어 가면서 나는 그렇게 갯벌에 드러누워 물에 잠겨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인간처럼 변해갔다.

얼굴에는 표정이 적어졌고, 말수도 줄었다. 어떤 이는 그런 나를 보며 절제를 잘한다 했고, 어떤 이는 오만하다고 했으며 또 어떤 이는 냉정하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권태로웠다.

모든 삶이 예측 가능할 때, 대체 무엇이 즐거울 수 있을까?

그렇게 열여덟이 되었을 때, 역시나 정해진 대로 콘스탄츠 왕립 아카데미에 시험을 보러 갔다. 그것은 그저 형식적인 행위였다. 오덴발트 공작가의 후계자를 감히 아카데미에서 떨어트릴 리 없지만, 그렇다 해도 절차는 절차. 당연히 시험장에 나가야 했다.

시험장에서 대기하는 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이미 아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수도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어디선가 한 번은 보았다. 대부분 사내놈들이었는데, 아주 가끔 여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대부분 알 수 없는 걸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변경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거나, 평민일 가능성이 컸다.

무료한 기분으로 나는 시험을 지켜보았다. 대충 보면 탈락할 자와 아닌 자가 보였다. 그즈음의 나는 동년배의 실력을 이미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비상했으나, 특히 검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나를 가르친 전 왕실 기사단장 비스바덴은 ‘몇 걸음만 더 내디딘다면, 오덴발트 소공작은 곧 오러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행위라는 거다.

어쨌든 그렇게 내내 시험 응시생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웬 일렁이는 붉은색이 툭 튀어나왔다. 불꽃처럼 새빨갛지는 않지만 어째서인지 눈을 사로잡았다.

동글동글한 흰 얼굴에는 약간 붉은 기가 돌았고, 콧잔등에는 약간의 주근깨가 있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에는 열의가 가득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는 후후 숨을 내뱉으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손발을 툭툭 터는 모양새가 꽤 익숙해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주변의 소리가 모조리 사라졌다.

어느새 나는 펄에서 일어나 앉아있었다. 팔다리를 엮고 있던 사슬에서 풀린 채로. 어느새 나를 질식시킬 정도로 차오른 바닷물을 알아차리게 만든 그이는 바닷물이 닿지 않는 저편, 마른 땅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저 멀리, 깊고 넓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새파란 눈으로.

그 시리게 새파란 눈동자는 나와 마주치자마자 반짝반짝, 빛났다. 눈이 조금 크게 동그래지더니 이내 눈꺼풀이 끔뻑끔뻑, 몇 번이나 감겼다 떠졌다. 우습게도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 보였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사랑스러운걸.’

그리고 그런 단어를 떠올린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랑스러워? 처음 본 소녀를 보고서 지금 그런 말을 떠올렸다고?

하지만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키는, 나의 어깨까지나 겨우 올까? 꽤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훈련을 열심히 한 건지 잔근육으로 탄탄해 보였다.

그리고 가느다란 허리. 나의 두 손으로 붙들면 모두 잡힐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렇게 작고 귀여운 소녀가 검을 쓴다고? 나는 괜히 입술이 말라서 혀로 입술을 쓸었다.

어쩐지 소녀의 귀 끝이 조금 발그레해진 듯도 했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곧 소녀가 내게서 눈을 떼자, 나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싶었다. 여기가 시험장만 아니라면 당장 다가가서 이름이 무언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등등 물었을 텐데.

그리고 그런 생각을 줄줄이 떠올리던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감히 타인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수험 번호 56번, 57번. 발도!”

보드랍고 작은, 맹수의 어린 새끼 같던 소녀는 놀랍게도 검을 뽑아 들자마자 기세가 바뀌었다.

그녀의 검은 빨랐고, 변화무쌍했으며, 변칙적이었고, 예측이 어려웠다.

저런 검술은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정석적인 귀족의 검술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디에서 저런 재미있는 검술을 배운 걸까. 그녀를 상대하는 이는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쩔쩔맸다. 보통 실력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순간 호승심이 일었다. 그동안 검에 관련하여 나의 흥미를 이끌어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저 소녀의 검은 당장이라도 검을 빼어 들고 싶게 만들었다.

대체 넌 누구지.

네가 너무 궁금해.

그러나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시험은 계속 이어졌고, 소녀와 나의 자리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시험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인파에 휩쓸려 금세 사라졌으니까.

다만 분명한 것은 나와 그녀의 눈이 그 뒤로 두어 번은 더 마주쳤다는 것.

그 소녀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가슴이 뻐근해졌다.

나는 나의 외모가 이성에게 아주 매혹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가문에서 정해준 짝과 혼인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수많은 귀족가의 아가씨들은 용감하게 내게 구애했다. 그러나 그들의 청을 받아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누구도 부모님의 뜻을 어길 정도로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기에.

하지만 그날 소녀가 나를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는 사실에, 나는 기뻤다. 누가 보아도 혹할 외모를 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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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소녀는 낮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나의 꿈에 나왔다. 다만 하나로 올려 묶었던 탐스러운 붉은빛 도는 갈색 머리카락은 풀어 내린 채였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자, 내 뱃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머릿속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기이한 열기에 휩싸인 채로 내가 한 걸음 다가서자, 소녀도 내게 다가왔다. 어느새 우리는 반 발짝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두고 마주 서있었다.

나는 무슨 용기에서인지 두 손으로 소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들었다. 그러자 소녀는 양손을 들어 내 뺨에 얹었다. 그러고는 빙긋이 웃는 게 아닌가.

소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붉은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하얀 치아가 언뜻언뜻 보였다. 그녀의 입술이 그리는 모양은 익숙한 것이었다.

‘라, 인, 하, 르, 트.’

소녀가 내 이름을 부르자 컥,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가는 허리를 꽉 끌어안고서 납작한 배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이름을, 이름을 알려줘. 네 이름이 궁금해.

하지만 내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런 나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약간 차가운 듯한 손은 내 목을 타고 내려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천천히 배꼽을 지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마주한 채.

소녀가 싱그럽게 웃었다.

아, 제기랄. 나는 꿈에서 욕을 내뱉었다. 현실에서는 해본 적도 없는 상스러운 말들이 잇따라 튀어나왔다. 내 몸에 맞닿은 그녀의 몸은 너무나도 뜨겁고, 부드럽고, 말랑하고……. 도대체 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건지!

이제 소녀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까르르, 비눗방울 터지듯 퐁퐁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팔에 힘을 주어 나를 꽉 끌어안고는 내 가슴에 뺨을 기대었다. 말랑한 몸이 밀착되어 눌리자, 나는 허덕였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라인하르트.’

그녀가 내 가슴에 대고 내 이름을 읊자 그 울림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퍼졌다.

그리고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하늘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나는 그 어스름한 빛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젠장…….”

이번에야말로 현실에서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나이가 몇인데 이런 수치스러운……. 얼굴만 아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소녀에게 발정해서는 꿈을 꾸고는 몽정까지 할 줄이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나는 한참이나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앉아있었다.

*

나는 그 이름 모를 소녀와 일단 좋은 관계를 쌓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우선은 그녀가 입학식에서 내 옆에 앉았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렇게 곧장 가까이에 있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수석이니 그녀가 차석이라는 뜻이었다. 실력이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에 감탄할 여력이 없었다.

“저기, 안녕?”

솔직히 말해서, 살면서 우아하고 고운 목소리는 많이 들어보았다. 하지만 소녀의 목소리만큼 매력적인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턱에 힘을 잔뜩 줄 수밖에 없었다.

미친 새끼… 고작 목소리만 들어놓고서 기분이 이상해지다니. 나는 내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짐승 새끼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입학식장에서 뛰쳐나가지 않으려면 진정해야 했다. 바로 옆에 있는 낭창한 몸의 소녀는 아직 너와 생판 모르는 사람이다. 라인하르트, 이 정신 나간 자식아. 무슨 정신으로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 나는 알렉산드라 린다우라고 해. 너랑 같은, 검술부인데…….”

“…그래?”

그래? 그래애? 그게 대답이라고 한 건가?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 뒤통수를 세게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 어찌 되었든 그녀의 이름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알렉산드라 린다우. 그리고 곧장 내가 알아챈 사실은 ‘귀족이 아니다’란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내게 어떤 감상을 주었느냐 하면, 제법 큰 충격을 주었다고만 해두자.

나는 그녀가 어디 변경의 군소 귀족 집안 출신이 아닐까 했다. 아니, 사실은 그러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얼굴을 모른다는 점에서 이미 알렉산드라는 부모님이 말하는 ‘적당한 상대’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나마 이름만이라도 귀족이라면 어떻게든 우겨볼 방도라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평민이라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알렉산드라가 내게 물었다.

“음, 만나서 반가워. 너는 이름이 뭐야?”

아,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가.

나와 통성명을 한 이들은 대체로 비슷한 반응이었다. 경탄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대귀족이란 건 그런 존재였다.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면서도 가까이하기에는 어려운 상대.

내가 나의 이름을 밝히면 알렉산드라,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처음으로 나는 내 이름을 말하는 게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녀가 두려워하며 멀어지는 것도, 그도 아니면 눈을 반짝이며 친해지려고 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

“어, 음, 그러니까… 오덴발트 공자…님?”

알렉산드라의 얼굴에 스치는 난감한 기색을 알아차리자마자 내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나를 두려워하고 피할까. 그런 건 싫은데. 너에게서 공자님 따위의 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는걸. 내 입은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붙드는 말을 내뱉었다.

“그냥 라인하르트면 충분해.”

“그으래…요.”

“같은 학년으로 입학하는데 존대할 이유도 없고.”

나의 말에 납득한 걸까?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바른 자세로 앉아 단상을 바라보았다. 나는 계속 그녀를 보고 싶었지만, 귀빈석에서 지켜보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해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옆에서 알렉산드라가 나를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너는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 걸까. 그 조그만 머리통 속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입학생 대표로 선언서를 낭독하는 동안에도, 교장과 귀빈들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나의 눈은 계속 알렉산드라를 좇았다.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게 되리라고, 나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해가 쌓이고 쌓이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나는 알렉산드라를 높이 평가했지만, 내 목소리보다는 주변의 질시 어린 목소리가 그녀에게 더 크게 들렸다. 게다가 재앙을 부르는 나의 입은…….

나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내 위치에서는 그래도 괜찮았고, 내가 한 말을 듣고 불쾌감을 표시하는 이도 없었다.

나의 언어 습관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굳이 따져본다면, 당연히도 나의 사랑하는 부모님인 공작 부부에게서였다. 그분들은 권위 의식이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고 사셨다. 그냥 그분들의 행동과 말, 그 모든 것이 권위 그 자체였다.

누구도 그들을 오연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분들의 태도를 그대로 체화하였고, 그리 살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곧장 알렉산드라의 심기를 건드리고야 말 줄은.

내가 진심을 담아서 하는 조언이 그렇게나 불쾌했을까. 그러나 몸에 배어있는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고, 격에 맞는 이와 어울리라는 말은 꼭 해줘야 할 것들이었다.

게다가 다니엘 폰 슈베린이나 헨드릭 엔스헤더, 에릭 폰 니에빌 같은 놈들이 감히 알렉산드라에게 어울리기나 하느냔 말이다. 주제넘게 알렉산드라에게 다가갔던 놈들은 적당히 경고하는 것만으로도 잘 알아듣고 꽁무니를 뺐다.

그러나 나의 어떤 행동도 알렉산드라에게는 비호감인 모양이었다. 도통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나는 결국 조언자를 찾았다.

“당연하지. 너 말하는 거 재수 없어.”

알렉산드라의 룸메이트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비앙카 폰 바이로이트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말했다. 심지어 눈은 책에서 떼지도 않은 채였다. 나는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녀의 앞에 놓인 책을 집어서 뒤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비앙카는 눈꼬리를 매섭게 치켜올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거 봐. 재수 없잖아.”

“네가 말하는 자세가 틀려먹은 거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을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일단 그 노친네 같은 말투부터 문제야. 딱 공작 각하처럼 말하잖아.”

그 말에 내 입이 꽉 다물어졌다. 한 번도 의식한 적 없었지만, 은연중에 위엄 있는 말투를 써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은 게……. 내가 말을 하지 못하자 비앙카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너, 단어 선택마다 아주 망했어. 딱 사람 깔아보는 식이라니까?”

“나는 한 번도 그런 마음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건 소공작님 사정이시구요. 듣기에 그렇다니까? 이제 와서 고치려면 애 좀 먹겠어?”

비앙카는 일찌감치 내 속내를 알아차리고 경고까지 하러 왔던, 나름 오래된 악우였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비앙카는 혀를 차고는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내가 전에 경고한 건 새겨듣긴 한 거야?”

“…생각 중이다.”

“그게 생각할 거리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앙카는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어쩐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점점 더 예의 없어지는 게, 아무래도 후작 부인에게 조만간 된통 혼날 듯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후계자로만 살지, 제대로 부딪쳐 볼지 정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그건 단번에 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와, 뭐 이런 멍청이가 다 있지.”

그녀가 굳이 일깨워 주지 않아도, 나도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머저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콘스탄츠 왕국의 그 누구도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가 이토록 우유부단하고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나는 여전히 두려웠다. 알렉산드라를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만큼, 내 어깨에 올려진 가문과 가족이라는 무게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웠다.

내 인생은 전부 가문과 가족에게 있었다. 알렉산드라에게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그들의 기대를 배반해야 했다. 내게 걸린 기대를 모조리 꺾어야 했다.

내 얼굴이 어두워진 걸 알아차렸는지 비앙카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목줄 걸린 거 벗어 던지는 게 어려우시겠지. 말 잘 듣는 개로 사는 게 얼마나 편해?”

제법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말 잘 듣는 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살아온 삶이 잘 길들여진 개와 뭐가 다르겠는가.

점점 침울함으로 가라앉아 가는 나를 비앙카는 위로해 주지 않았다. 다만 한 번 더 경고할 따름이었다. 내 친구 눈에서 눈물 나면 네 눈에서는 피눈물 나게 해주겠다고.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피눈물이 흐르게 만들 거라고. 한다면 하는 비앙카라서 등골이 오싹했다.

*

마치 타인의 삶을 일일이 지켜보는 범죄자처럼, 나는 알렉산드라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의 일과를 관찰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니, 그냥 그건 핑계에 불과했고 그냥 나는 알렉산드라를 알고 싶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은, 알렉산드라가 도서관에 자주 간다는 사실이었다. 또 거기에서 로맨스 소설과 서정시를 빌려 읽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로맨스 서가 2열. 알렉사는 그곳에 서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동그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품에 책을 꼭 안고 도서관에서 뛰어나가는 걸 볼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호선을 그린 입술을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러려고 배운 건 아니지만, 나는 기척을 감추고 도서관 안까지 알렉산드라를 따라갔다. 그녀는 서가에 서서 책을 넘겨 보며 희미한 웃음을 띠기도 하고, 눈이 동그래지기도 했다가, 볼을 붉히거나 작게 탄성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솔직히 즐거웠다. 알렉산드라는 내게 인상 쓰는 얼굴 외에는 잘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가 웬 종이쪽지 하나를 놓고 나가는 걸 본 건, 천행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펼쳐보았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혹시 없을까.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

나에 대해 알지 못하더라도 이야기를 듣고 나눌 사람이 있을까.]

여기, 내가 있어! 나는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알렉산드라를 붙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리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나를 싫어하니까. 어쩐지 서글펐지만, 그런 우울한 감정에 머물러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똑같이 종이를 꺼내어 답을 썼다.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뭐든 들어줄 테니, 답을 남겨줘.

기다리고 있을게.]

얼굴 없는 청자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알렉산드라는 나의 필체를 모른다. 아마 관심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종이를 정성스럽게 접어 아까 알렉산드라가 쪽지를 놓았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이 종이를 발견하길. 그래서 마침내 전해지길. 이렇게라도 하여 너의 안에 내 자리가 조금이라도 생길 수만 있다면. 이름 없는 이로 남는다고 해도 기쁠 텐데.

과연 관대하신 신은 나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큰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들어준 걸까.

그때부터 알렉산드라와 나의 쪽지 교환이 시작되었다.

나는 디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우리 가문의 상징인 수사슴을 떠올리며 지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귀족 가문의 문장을 알 리가 없으니.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는 쪽지 안에서 다정하고, 상냥하고, 천진했으며, 사랑스러웠다.

[우리 아빠는 아직도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편지 한 바닥이 걱정뿐이야.

아빠 딸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고 말이지.]

이렇게 쉽게 네 성별을 알려주기도 하고.

[오늘은 2학년 선배를 이겼어!

사실 이길 줄 알고 있었다고 하면, 너무 재수 없을까?

하지만 그 선배랑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싸워봤는데,

내가 이길 게 분명했거든!]

뿌듯해하는 귀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웬 녀석이 주말에 같이 나가자고 하는데

귀찮아서 거절해 버렸어.

디어는 그런 사람 없어? 주말에 같이 나가자고 하는 사람.

어쩐지 디어의 글만 보면, 그런 사람이 줄을 섰을 거 같아!]

기특하게도, 주변에 들끓는 파리 떼도 잘 쫓아내는 모양이었다.

그녀와 쪽지를 주고받을수록 마음속의 욕망은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네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처음에는 이름 없는 이로 충분하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네게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네 삶에, 내가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되길 원했다. 이기적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라, 너는 너무나도 나를 목마르게 해서…….

결국 나는, 사고를 쳤다.

성년 연회가 열리기 전, 나는 흰 수사슴이 부조된 브로치를 주문했다. 그렇다고 해서 알렉산드라에게 파트너 신청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분명 거절할 테니까. 하지만 디어가 주는 이 브로치는 반드시 받아줄 것이다. 세심하게 세공된 브로치를 바라보며 나는 그것을 단 채 나타난 알렉산드라를 상상했다.

역시나 알렉산드라는 기뻐하며 브로치를 받았고, 그것을 연회에 달고 나왔다. 비록 그녀의 옆에 마티어스 녀석이 있었지만―눈치 빠른 그놈은 나 보라는 듯 알렉산드라의 옆에 붙어있었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마티어스는 브로치를 보고 누가 준 건지 알아차린 듯했지만,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회 내내 내 눈은 알렉산드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때를 보아 그녀의 댄스 파트너로 끼어들었다.

나를 본 알렉산드라의 눈이 흔들렸지만, 그녀는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과 숨결에서 느껴지는 약간 달콤한 향이, 그녀가 술을 마셨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 매달린 브로치를 보자 저절로 얼굴 근육이 헤실헤실 풀어지려 했다.

한 곡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떠나려는 알렉산드라를 나는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오늘 밤 말고는 어쩌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

겁쟁이인 내가 결국 알렉산드라 대신 가문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를 대비해서, 나는 나만의 작은 기억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춤이 이어지니, 나와 한 곡 추지.”

떨떠름해 보였지만, 알렉산드라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내 팔 안에 감긴 그녀의 몸통이 너무 작았다. 내 손이 닿자 그녀는 놀라 몸을 빼려 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는 내 품 안에 있어야 해. 널 놓아줄 수 없어. 나는 팔에 힘을 주어 알렉산드라를 바짝 끌어당겼다. 헉, 하는 짧은 숨소리가 기꺼웠다. 맞붙은 몸은 천천히 연회장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알렉산드라는 먼저 말을 할 생각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늘 많이… 괜찮아 보이네.”

“소공작님 눈에 그렇게 보인다니 영광이네?”

“진심이야.”

“그래, 뭐. 고마워?”

그러고 씩 웃는 알렉산드라 때문에 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녀의 웃음에 정말이지 나는, 면역이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그녀를 두 팔로 꽉 끌어안고, 그녀의 볼을 감싸고, 깊게 입을 맞추고, 그대로 그녀를 끌고 나가 둘만 있을 수 있는 은밀한 곳으로 향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제기랄. 알렉산드라에게 춤을 추다 뺨을 맞고 싶지는 않아서 열심히 진정하려고 애썼다.

내가 어떤 괴로움에 시달리는지 모르는 알렉산드라는 언제 제게 질 거냐며 농담을 했고, 나는 그에 대답하면서 다행스럽게도 불뚝거리는 성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언제든 그녀의 검을 상대할 수 있다는 대답은 진심이었는데, 과연 알렉산드라가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여 줬는지는 미지수였다.

드레스 자락이 다리에 휘감기고, 풀렸다가 다시 감겼다. 다리가 엇갈렸다가 나란히 진행하고, 또다시 얽혔다.

어느새 우리 둘 사이에 말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이 넓은 연회장에 둘만 있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디어라고. 네 비밀스러운 속내를 듣고 있는 자가 나라고. 그러나 그건 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다만 그녀의 눈이 내 크라바트에 달린 장식에 고정된 것을 보며 어떤 희망을 가질 뿐이었다. 일부러 나는 알렉산드라의 브로치와 맞추어 내 크라바트 장식을 만들었다. 같은 수사슴이 조각된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끝끝내 알렉산드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작은 실망감이 일었지만, 나는 묵묵히 그녀를 떠나보내 주었다.

그날 밤에도 역시나 알렉산드라가 나타났다. 그러나 평소 꿈에 나타났던 것과 다르게 오늘 입었던 드레스 차림이었다. 아, 나는 진정 개였던 모양이다. 그도 아니라면 상종할 수 없는 변태이거나.

나는 대번에 알렉산드라를 쓰러트리고는 그녀의 드레스 자락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습한 열기와 짙은 알렉산드라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대련 후 그녀의 곁을 지나가면 나는,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그 냄새였다.

나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는 게걸스럽게 탐했다. 두꺼운 천 너머로 들려오는 알렉산드라의 헐떡임과, 경련하는 허벅지가 나를 만족스럽게 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나는 알렉산드라를 더 느끼고 싶었다.

두 손에 힘을 주어 속옷을 찢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말캉한 속살에 입술과 혀를 대자 알렉산드라가 흐느꼈다. 아아, 너를 울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 저열한 욕구는 네가 아니면 해갈되지 않아. 나는 비열하게 웃으며 혀를 밀어 넣었다.

그녀의 몸은 달콤했다. 그저 달아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것이 꿈임을 깨달았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꿈에서 빠져나왔다. 또 젖어버린 속옷은 비참하기만 했다.

아무리 알렉산드라를 욕망하여도, 결국 손에 잡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아서.

그럼에도 나는 운이 좋은 인간이었다. 하긴 대귀족의 가문에서 하나뿐인 후계자로 태어나 굴곡 없이 살았던 것 자체가 운이 좋은 표상이긴 했다.

알렉산드라와 단둘이 대련을 계속하기로 약속하게 된 날, 나는 너무 기뻐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동안 소공작으로서 감정을 절제하는 연습을 많이 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일부러 그녀를 인적이 없는 교수동 뒤편 후원으로 불러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그저 둘이서만 있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과연 알렉산드라는 지치지 않는 도전자였다. 그녀는 나의 검로를 모조리 꿰고 있었고, 그 속에서 틈을 찾기도 하고 일부러 가짜 빈틈을 만들어내어 나를 유인하기도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알렉산드라의 검은 항상 나를 즐겁게 했다. 검을 부딪칠 때면 머리가 깨끗해졌다. 오로지 알렉산드라의 눈과, 그녀의 검만이 가득 찼다. 그게 어찌나 충만한지 그 외의 다른 시간은 하나도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대련 중에 조심하는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오러를 발현하지 않는 일이었다. 비스바덴 전 단장의 말대로 나는 신년 연회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오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 비밀에 부쳐졌다.

“아직 정세가 애매하니, 네 능력을 전부 내보이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어머니는 심상찮은 왕실의 분위기를 이유로 능력을 숨길 것을 요구하셨다. 나 또한 그에 별다른 이의가 없었기에 오러 사용을 감추었다. 웬만한 이와 겨루어서는 오러를 드러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웬만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와 겨루려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그 와중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오러는 자꾸 제 존재를 드러내려고 했다.

그 익숙하지 않은 힘을 나도 모르게 사용했다가 알렉산드라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나는 내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려는 그 기이한 힘을 느낄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둘이 남들 모르게 대련하는 동안은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다만 남들 다 보는 자리에서, 그것도 알렉산드라에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알렉산드라는 검에 한해서는 집요했다. 어떻게든 나를 이기겠다며 이를 으득으득 가는 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

나는 본능적으로 내 목으로 날아드는 그녀의 검을 쳐냈다. 알렉산드라가 나와 수없이 검을 맞대는 동안 나의 빈틈을 찾아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녀는 그만큼 검에 집착했고, 승리를 갈구했다.

특히 나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몹시 분하게 여겼다. 아마도 모든 이들 앞에서 한 번이라도 나를 꺾고 말겠다는 의지로 해낸 일일 것이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비열한 수를 쓰는 자였다면, 그 순간에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그녀에게 나의 목덜미를 내어주고는,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라에게 졌다는 것쯤이야 사실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그건 그녀에게 거짓을 말하는 짓이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비열하지 못했고 거짓된 행동을 하지 못했다. 아마 나중에 알렉산드라가 ‘져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화를 냈을 테니, 그녀의 검을 쳐낸 일 자체에는 후회가 없었다.

다만 그것은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절제와 자제를 뼛속 깊이 새기며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목으로 다가오는 검을 본 순간, 나의 육신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그래서 하필이면, 선명하게 오러를 내보이고 말았다.

오러를 두른 검은 무딘 검을 너무나도 쉽게 잘라버렸다. 내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알렉산드라의 얼굴은 반면 멍하게, 표정이 사라졌다.

“세상에, 라인하르트 소공자가 오러를 쓸 줄 알았어?”

순식간에 사방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는 조금도 내게 닿지 않았다. 내 눈에는 오로지 멍한 표정의 알렉산드라만이 보였다.

그녀는 반 토막 난 검을 끔뻑거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오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긴 것이 죄인가? 아니, 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알렉산드라는 내가 오러 발현을 숨긴 사실에 분명 화를 낼 거라고.

나는 그녀에게 부러진 검 조각을 주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심장이 사정없이 뛰었다.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당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돌아가긴커녕 얼굴 근육도 굳었다. 꿀 먹은 벙어리 꼴이 된 나를 보며 알렉산드라가 허탈하게 웃었다.

“재밌었어?”

“무슨…….”

“이미 경지에 이르신 분을 이겨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내 꼴이 참 우스웠겠지.”

창백해진 얼굴로 알렉산드라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라인하르트, 진짜 넌 내가 같잖았겠다.”

“알렉산드라, 잠깐…….”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을 들어줘, 제발.

너를 기만하려던 건 절대 아니었다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고, 나는 항상 너를 진심으로 대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라의 눈에 눈물이 고인 걸 나는 처음 보았다. 어떤 힘든 훈련이 있어도, 누가 그녀를 두고 뒤에서 수군거릴 때도 알렉산드라는 운 적이 없었다. 내 칼에 몇 번이고 나가떨어졌을 때도 씩씩하게 털고 일어났지, 울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이렇게 빌 테니까 제발 화를 풀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빌어먹은 입술은 아교로 단단히 붙인 듯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알렉산드라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덴발트 소공자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알지도 못하고 감히 이겨보려 해서 죄송합니다. 이미 처음부터 경고하셨는데 말이죠.”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혓바닥은 완전히 굳어서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패배 선언을 하고 돌아서는 알렉산드라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나를 잡고 흔들며 환호성을 지르고 어찌 된 거냐고 묻는 소리에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멀어지는 알렉산드라를 잡아야 하는데. 변명이라도 주워섬겨야 하는데. 이렇게 보내면 안 되는데. 네게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그러나 나라는 머저리는 그대로 알렉산드라를 보내고 말았다. 머저리에 겁쟁이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날 저녁에 곧장 비앙카가 쫓아왔다. 그녀는 시뻘게진 얼굴로 내게 삿대질을 하며 따져 물었다.

“대체 너 뭐 하는 놈이야? 알렉사에게 무슨 짓을 한 건데?”

“그녀는, 괜찮나?”

“괜찮겠어? 완전히 풀 죽어서는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있다고! 아니, 숨길 거면 끝까지 들키질 말든가. 하필이면 남들 다 보는 자리에서 오러를 써서 애를 밟아버리면 어떡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알렉산드라의 공격이 너무 예상외의 것이라 나도 모르게 손을 쓴 게 조절을 하지 못해서…….”

“알렉사는 네가 일부러 엿 먹이려고 그동안 오러 발현을 숨긴 줄 아는걸! 차라리 걔한테만은 말하지 그랬어. 둘이서 수련 많이 했다며. 기회 있었잖아?”

“비밀로 하기로 어머니와 약속했다.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고…….”

“그런 사람이,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화려하게 오러를 내보이셨어? 으이구, 정말!”

비앙카는 이마를 짚으며 끙끙 앓았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고위 귀족 집안의 비앙카는 왜 내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는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옳다. 숨길 거면 끝까지 철저히 숨겨야 했다. 완벽을 기할 수 없다면, 알렉산드라에게 은근슬쩍 언질이라도 줘야 했다. 모두의 앞에서 너무나 처참하게 그녀를 꺾어버린 꼴이라, 만회하기도 어려웠다. 전부 내 불찰이었다.

답이 없는 일에 비앙카는 혀를 쯧, 차고는 결국 다시 알렉산드라의 곁으로 돌아갔다.

알렉산드라는 심하게 낙심한 모양인지 도서관에도 오지 않았다. 몇 날 며칠 쪽지 없는 서가를 확인하고 나는 기운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차라리 그녀가 쪽지라도 남기면 모르는 척 위로라도 할 텐데. 아니, 그녀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기회라도 잡을 텐데.

나는 혹시나 그녀가 왔을 때 바로 읽을 수 있도록 매일 쪽지를 바꾸어 써놓았다. 로맨스 소설이 잔뜩 꽂힌 책장의 세 번째 칸에는 일주일이 넘도록 그 자리에는 내가 남긴 쪽지만이 외로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또 쪽지를 남기러 간 날이었다.

내가 남겼던 것이 아닌 다른 쪽지가 있었다. 나는 급히 그것을 펼쳐보았다.

[너와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디어.]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혹시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보자고 하는 걸까? 하지만 디어가 나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쪽지로 보자고 남겼을까? 알렉산드라 성격에 달려와서 멱살이라도 잡지 않았을까? 그럼 이건 무슨 의미일까. 정말로 내가 보고 싶다는 뜻일까.

숨이 자꾸만 가빠졌다.

만나도 괜찮을까. 만약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와 쪽지를 주고받던 사람이 나라고, 디어가 바로 나 라인하르트라고. 어떻게 쪽지를 발견했느냐고 물으면, 그러면? 로맨스 소설을 나도 좋아해서? 그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그럼 널 따라다니다가 발견했다고……. 뺨이라도 맞지 않을까. 아니, 그 전에 만나러 간 자리에 내가 있으면, 알렉산드라가 과연 반기기나 할까?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손바닥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입이 자꾸 말라서 나는 억지로 침을 삼켰다.

그러나 나에게 다른 선택이 있기는 한가.

아니,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만나서, 그녀가 싫어하더라도 다리를 붙들고 매달려 제발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사정할 수 있는 기회.

결심이 서자 행동은 빨랐다.

[나도 네가 보고 싶어, A.]

급한 마음으로 쓴 마지막 A의 획이 비뚤어졌다. 나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접어 자리에 놓고는 그 자리를 떴다.

그녀를 만나면 모든 걸 사실대로 이야기해야지. 그로 인해 경멸받을지라도 이제는 알렉산드라에게 무엇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알렉산드라가 다시는 얼굴이 보고 싶지 않다고, 꺼지라고 한다면 명을 받드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자비롭게도 기회를 준다면, 곁에 있어도 괜찮다고 한다면 친구로라도 남고 싶었다.

친구라. 쓴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처음 본 순간 완전히 사로잡힌 주제에, 그러면서도 겁을 내며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주제에… 친구라…….

과연 알렉산드라가 나에게 줄 답이 무엇인지를 상상하며,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확정했다.

그러나 나는, 알렉산드라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사망, 삼촌과의 싸움은 내게 날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알렉산드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영지로 돌아가야 했다.

삼촌과 그의 사병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아직 어렸고, 공작위를 받을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으며, 앞장서 지휘해 본 일도 없었다. 나는 애송이였고, 철부지였다. 부모님의 비호가 없는 상태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를 버티게 한 것은 로켓에 담은 알렉산드라의 쪽지였다.

[너와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디어.]

힘겨울 때마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나는 로켓을 붙잡고 오래 기도했다. 이 싸움에서 이기고 너를 찾겠다고. 꼭 내가 너의 디어라고 말할 거라고.

뜻하지 않게 홀로 선 길은 고통스러웠으나 가치 있었다. 나는 단단해졌으나 이전에 비해 둥글어졌다. 말단 병사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다른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말은 가려 하게 되었다. 가신들과 언쟁을 벌이더라도 그들을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삼촌에 맞서 공작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나의 힘이 되어주어야 했기에, 나는 저절로 깎여나갔다.

일전에 비앙카가 재수 없다고 했던 이유를, 나는 그 시간 동안 알게 되었다.

부딪치고 깨지며 삼촌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했을 때는, 이미 1년 하고도 반이 지난 뒤였다. 당연히 콘스탄츠 왕립 아카데미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동기들은 이미 졸업하여 각자의 길을 걸었다. 완전히 공작위를 차지하고 난 뒤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알렉산드라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사실 당연히 그녀 정도의 실력이라면 왕실 기사단이나 세 개의 왕국 기사단 중에 배속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가 간 곳은 저 먼 북서부 국경, 오리악 왕국과의 싸움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곳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알렉산드라 정도의 실력자를 어째서 그런 변방으로 돌린단 말인가? 그러나 답은 곧 쉽게 나왔다. 실력이 있다 한들 그녀는 평민 여자 기사였다. 그녀에게는 왕과 궁성의 자리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여러 방면으로 알렉산드라를 수도로 불러들일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또한 왕실 내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어린 왕은 나처럼 그의 큰아버지에게 위협당했다. 왕의 가장 충실한 신하로서 나, 오덴발트 공작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콜로만 공작과 맞서야 했다.

그사이에 나는 알렉산드라 곁에 사람을 붙였다. 수하는 알렉산드라에 대한 보고를 매주 보냈다. 음습하고, 변태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척박하고 폭력적인 장소에서도 여전히 아름답고 강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녀를 그리며,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격랑에 휩쓸렸다. 부모님의 아래에서 지낼 때는 밀물에 잠겨 서서히 죽어갈 것 같았다면, 알렉산드라를 떠올리면서는 몰아치는 태풍에 휩쓸려 바다 위 높이 떠올랐다가 물속에 처박히는 듯했다.

“이번 주 보고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사에게서 받아 든 편지 봉투를 뜯는 것은 일과의 시작이었다. 북서부 변경에서 매주 날아오는 몇 장의 보고문에는 그리운 이에 대한 소식이 담겨있었다.

나는 봉투에서 보고서를 꺼내 읽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는 입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아마 내가 웃는 걸 보았다 하더라도, 집사가 그걸 구태여 입에 담지 않을 테지만.

알렉산드라. 나는 오늘도 입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굴려보았다. 이렇게 멀리에서, 한심하게 네 소식을 훔쳐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심장이 마구 뛴다. 그저 종이 위에 새겨진 네 행적에 숨이 막힌다.

정말이지, 죽을 것만 같은 짝사랑이었다.

“아.”

다른 때와 다르게, 이번 주의 보고가 담긴 종이를 하마터면 떨어트릴 뻔했다. 나는 내가 읽은 문장을 다시 한번 읽었다. 내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일 오후에 벌어진 오리악군과의 전투에서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은 오러를 발현하였습니다. 아마도 곧장 왕실로 보고가 올라갈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린다우 경은 오러 사용 여부에 상관없이 북서부에 남기를 강하게 희망한다고…….]

“그럴 수 없지. 그럴 수는 없어.”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러를 사용하는 이는 대부분 수도로 와서 왕실 기사단 소속이 된다. 그것은 가장 강한 이로 하여금 왕과 그 일가를 지키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이 관례였지만, 본인이 강력하게 희망하는 경우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수도로 올 것이다. 와야만 한다. 아무리 그녀가 북서부에 있길 원한다 한들, 나는 그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눈앞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보고도 놓치면 정말로 내 이마에 ‘머저리’라고 낙인을 찍어야 마땅했다.

본인의 희망을 거부할 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나는 쥐새끼 같은 낯짝의 콜로만 공작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대가 있어서 알렉산드라를 수도로 불러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왕이 당장 왕위를 위협받는데 왕국의 가장 강력한 무력을 변경에 두는 건 말이 안 된다.

알렉산드라, 너는 내 곁으로 오고야 말 것이다.

어릴 때의 멍청한 라인하르트는 이제 없다. 이것을 걱정하고 저것을 우려하여 네게 한 발 내딛는 일조차 두려워하던 겁쟁이도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여 또다시 미움을 사고, 멀어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너를 보지 못한 6년여의 시간 동안, 내가 깨달은 건 오직 하나였다.

나는 알렉산드라 린다우를 사랑한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곁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고작 친구 따위에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다. 네 곁에는 오직 나만 있어야 하고, 네 손에 닿을 수 있는 것도 나만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랜만이야, 알렉산드라.”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친근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고.

“단장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네.”

휘둥그레지는 네 파란 눈은 여전히 사랑스러워서, 하마터면 나는 그대로 네 앞에 무릎을 꿇고 섣불리 연심을 토해낼 뻔했지만 잘 참아내었다. 셔츠 안에 매달린 로켓이 뜨겁게 느껴졌다.

애써 떨림을, 오랜 기다림을 숨기며 네게 한 발 다가가 본다. 너를 이토록 오래 기다려온 나를, 이제는 봐주지 않겠어? 처음 만난 순간에 건네고 싶었던 미소를 담은 얼굴로, 나는 그녀를 불렀다.

알렉산드라, 하고.

(로맨스 서가 2열 세 번째 칸을 보세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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