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9)

7.

눈을 떴을 때, 오두막 안은 흐릿한 어둠에 잠겨있었다. 화롯불은 꺼진 지 오래인 듯, 전반적으로 공기가 차가웠지만 알렉사는 그다지 춥지 않았다.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는 라인하르트의 체온이 얼마나 높은지, 오히려 찬 공기가 약간 상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알렉사는 제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라인하르트의 팔을 치우고 일어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아주 살짝 고개를 뒤로 물려서 잠든 라인하르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긴 눈꺼풀에 매달린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을 한참 보다가 얼굴선을 따라 눈을 굴렸다. 높은 콧대하며 단단히 다물린 입술, 깨끗한 턱선. 아카데미 때보다 좀 더 어른 남자의 얼굴이 된 라인하르트는 낯선 듯하면서도 익숙했다.

죽을 수도 있었던 고비를 넘기고 알게 된 ‘사소한’ 진실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그를 마음에 담았듯 그 또한 그녀를 똑같이 가슴에 품었다. 라인하르트의 ‘두려움’과 알렉사의 ‘오해’는 같은 마음을 가진 두 사람을 이토록 멀어지게 만들었다. 차라리 둘 다 솔직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약 그녀가 대귀족이라는 라인하르트의 신분을 불편해하지 않고, 그의 냉랭한 태도에 겁먹지 않고 “사실 나는 너를 좋아해.”라고 말했다면…….

아니,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런 가정을 해보아야 그들의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애매한 거리감을 가진 상사와 부하 관계를 만들어냈다.

‘그럼 앞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알렉사는 흠칫 놀랐다. 미래? 라인하르트와의 미래를 왜 생각한단 말인가.

그가 과거 자신이 ‘디어’였다는 사실을 밝혔더라도 그들의 사이가 극적으로 변화할 만한 일이 생기겠느냐 말이다.

마음이 불편해지자 라인하르트의 품에 안겨있는 게 껄끄러워졌다. 알렉사는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꼼지락대며 몸을 빼려 애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거의 그의 팔에서 다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강한 힘이 알렉사를 훅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는 짙은 녹색 눈동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거의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알렉사를 당겨온 라인하르트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왜 도망가지?”

“도망이라니, 무슨…….”

그때, 코와 코가 닿았다. 아주 작은 점이지만, 화끈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라인하르트의 뜨거운 숨이 고스란히 입가에 느껴졌다. 그는 느릿하게 코끝을 비비며 속삭였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될까.”

“…….”

이렇게 몸을 바짝 붙인 채로, 서로의 숨이 뒤섞이는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고 싶다는 뜻은 대체 뭔데. 알렉사의 파란 눈동자가 도전적인 빛으로 반짝였다. 과거에 네 마음이 어땠든 그럼 지금은 어떤 건데? 왜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데?

그녀는 대뜸 라인하르트의 몸통을 끌어안았다. 흡, 하고 라인하르트가 숨을 참는 게 보였다. 알렉사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는 채로 그대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곧장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붙었다. 제가 이대로 끌어안고 있자고 한 주제에, 막상 알렉사가 입술을 붙여오니 당황한 게 빤히 보였다. 그 꼴을 보며 알렉사는 흥, 코웃음을 치고는 뒤로 물러났다.

막상 더 가까워질 거 같으니 무섭니, 겁쟁이야! 그렇게 타박을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어라……. 알렉사는 순간 라인하르트의 눈이 약간 맛이 갔다고 느꼈다. 그녀의 촉은 항시 잘 들어맞았다. 본능이 ‘도망쳐!’라고 외치는 순간, 라인하르트가 으스러질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숨을 모조리 앗아 갈 듯한 키스를, 당했다. 정말이지 이건 ‘당했다’라는 말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급하게 알렉사의 입술을 탐하던 라인하르트의 혀가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걸 알렉사는 막아내지 못했다.

헐떡이며 뒤로 물러나려고 할 때마다 그는 오래 굶은 짐승처럼 그녀를 쫓아왔다. 마치 그녀를 도망가지 못하게 결박이라도 하듯, 라인하르트의 혀는 집요하게 알렉사의 것을 휘감고 빨아댔다.

“하, 흐으… 잠깐, 만!”

“안 놔줄 거야…….”

이 순간을 얼마나 원했는지 너는 몰라. 빠르게 속삭이는 라인하르트의 목소리는 음침한 열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널 사랑해. 알렉산드라 린다우.”

“…라인하르트.”

“너는, 모를 거야. 솔직하지 못했던 내 어리석음이 모든 걸 망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네가 내 품에… 이렇게 있다니.”

내가 어떻게 너를 놓을 수 있겠어.

알렉사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에 오싹해졌다. 적을 앞에 두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그녀건만, 라인하르트의 절절한 고백은 이상하리만치 무서웠다. 대체 왜?

‘이대로, 잡아먹힐 거 같아.’

뭐라 답할 새도 없이 다시금 입술을 뺏겼다. 라인하르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렉사를 모조리 씹어 삼킬 것만 같았다.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서, 숨결을 앗아 가는 키스에서, 배에 닿아오는 딱딱한 무언가에서 느껴지는 집요함이 섬뜩했다.

이런 감정을 숨기고서 그렇게 주변에서 거리를 두고 배회했다고? 알렉사는 라인하르트가 품은 그 ‘호감’이 과연 자신과 같은 깊이인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또 숨을 못 쉬고 기절할 것만 같아서 그녀는 힘껏 라인하르트를 밀어냈다.

“숨, 막힌다고!”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알아, 아는데! 이러다 죽겠어!”

어쩐지 그의 눈이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알렉사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열심히 밀며 말했다.

“일단 좀, 얘기부터 하자.”

“하하, 알렉사.”

라인하르트가 웃으며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추었다. 자잘한 키스를 얼굴 곳곳에 뿌려대던 그는 귓가를 지나 목덜미에도 입술을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

“얘기를 하기엔 이미 늦었어.”

“아, 잠깐… 앗! 지금, 문 거야?”

알렉사는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물린 목을 짚었다. 여성의 연한 살에 일부러 잇자국을 내는 오덴발트 공작이라니, 이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알렉사가 아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녀의 어깨 언저리에 뺨을 댄 라인하르트가 슬쩍 올려다보며 속살거렸다.

“안 돼?”

“너, 진짜… 아윽!”

그가 같은 자리를 한 번 더 물자 알렉사는 몸서리를 쳤다. 아프냐고 하면,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그러나 생경한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정직하리만치 검과 수련 일변도로만 살아온 알렉사에게는 이런 밀접한 접촉 자체가 낯설기 짝이 없었다.

마음의 준비는커녕 경험도 일천하면서, 너무 무모하게 상대를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등에서 식은땀이 쭉 흘렀다.

그녀가 속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라인하르트는 오히려 거침이 없었다.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그는 이제는 빗장뼈에 자잘하게 입을 맞춰댔다. 두 사람 다 젖은 겉옷을 벗어 널어놓은 터라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게다가 알렉사가 열이 나며 답답해해서 단추 몇 개를 풀어두었기에 그녀의 윗가슴까지 거의 다 들여다보였다.

“라인, 라인하르트.”

“응. 듣고, 있어.”

“거긴, 아!”

“내가 싫으면 지금 밀어내.”

라인하르트는 부드러운 속살에서 입술을 떼고는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어쩐지 결연하기까지 해서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싫으냐고? 그 물음에 알렉사는 절대 싫다, 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싫은 사람 목숨을 구하겠다고 뛰어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전에 라인하르트가 오러를 쓸 수 있는 것을 숨겼을 때도, 배신감을 느꼈을지언정 그를 미워하진 않았다. 그냥 그는 그런 존재였다.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언제나 벽이 느껴졌던.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어서 끝끝내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던.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라인하르트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물론 불편하고 좀 짜증 나긴 하지만 그가 ‘디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이유 없이… 편해졌다. 아니, 친근해졌다. 게다가 라인하르트가 알렉사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처음 본 순간 왕자님 같았던 그 소년이, 제게 용기와 기운을 북돋워 준 그 얼굴 모를 존재가, 언제나 호승심을 돋게 하는 목표였던 그 남자가 전부 같은 사람이었다. 그 모든 사실들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켜서는 끝끝내 그녀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어렵게 생각할 게 뭐 있어?’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너 사실 계속 라인하르트를 의식했잖아.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를 마음에서 내쫓은 적도 없으면서!’

점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돼!

그러나 놀랍고 부끄럽게도, 그녀에게는 그 마음의 소리를 부정할 방법이 없었다.

밀어내라는 말에 알렉사가 대답 없이 얼굴만 붉힌 채 바라보고 있는 걸, 라인하르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서는 알렉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쪽, 하고 맞추었다.

“내가 싫은 건 아니지?”

“…싫진 않은 거 같은데.”

“그럼 아직… 이런 일은, 하기 두려울까?”

아, 제기랄. 알렉사는 제 위에 올라탄 미끈한 얼굴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라인하르트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녀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도 아주 잘 알았다. 두려움이라니, 그것도 라인하르트를 상대로? 그런 말은 알렉사에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라인하르트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는 걸 알아차렸는지 라인하트의 잘생긴 얼굴에 짙은 미소가 번져갔다. 이거 역시 일부러 그딴 말을 선택한 거지. 알면서도 알렉사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두렵기는 누가 두렵다고.”

“하하…….”

“너나, 나중에 후회하지 마.”

그 말에 라인하르트는 곧장 답했다.

“후회라면 이미 널 처음 만난 순간, 제대로 인사하지 못한 때부터 내내 했어.”

그러니 이제는 후회할 일 따위는 만들지 않을 생각이야.

속삭이듯 읊조리며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한번 맞붙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알렉사는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서는 라인하르트의 목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단단히 밀착되었다. 그녀는 제 배에 닿는 아주 단단한 무언가를 느끼고는 잠시 흠칫했지만, 곧 대담하게 일부러 허리를 더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몸 사이에서 발기된 제 물건이 자극되자, 라인하르트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흘겼다.

“이렇게 자극하면 곤란한데.”

“뭐가, 좋은 거 아니야?”

“너무 좋아서 곤란한 거라고.”

둘의 입술이 서로를 찾아들었고, 혀가 부드럽게 얽혀 들었다. 알렉사는 마치 불덩어리를 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라인하르트는 그저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뜨거웠다. 이미 잔뜩 달아오른 남자의 몸은 오래도록 원했던 상대를 안는 것 외에는 식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둘 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상대의 셔츠를 벗겨냈다. 대충 옆으로 던져놓으려 했지만, 그 와중에 라인하르트는 그 셔츠 두 장을 겹쳐 그녀의 등 뒤에 깔았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가슴이 서로 맞닿았다. 하의까지 벗어버리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온전히 나체가 되자, 알렉사는 순간 밀려드는 민망함에 라인하르트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았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키득거리며 귓불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부끄러워서 그래?”

“남 앞에서 이렇게 다… 벗은 적은, 없다고.”

“괜찮아, 알렉사.”

그는 알렉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쉬이 소리를 냈다. 그녀가 조금 안정된 듯하자 라인하르트는 천천히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이미 맛보았던 목덜미와 빗장뼈를 지나, 완만하게 솟은 윗가슴에 다다르자 알렉사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긴장한 탓인지 솜털이 서있었다.

알렉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얼거렸다.

“아, 진짜… 미치겠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러면 안 되지.”

“부끄러우니까 그만 쳐다… 꺄악!”

낯선 감촉에 알렉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라인하르트가 한껏 그녀의 가슴을 베어 문 탓이었다. 축축한 혀가 그녀의 말캉한 살을 핥다가, 발딱 일어난 젖꼭지를 나긋하게 짓눌렀다. 그리고 커다란 손이 다른 한쪽 가슴을 그리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츄웁, 츕, 가슴을 빠는 소리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알렉사의 귀를 때렸다. 젖도 안 나오는 가슴인데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빠는 건지! 하지만 그런 물음 따위 던질 새가 없었다. 그의 혀와 손가락이 단단해진 정점을 희롱하면 할수록, 발끝과 다리 사이의 깊숙한 곳에서 저릿저릿한 감각이 올라와서 알렉사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아직 경험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맹탕은 아니었다. 남자투성이인 기사단에서 구른 세월이 몇 년인가. 오히려 ‘이론적’으로는 알 거 다 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그냥 빨다 못해 라인하르트는 숫제 유두를 이로 잘근잘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찌릿한 아픔과 쾌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입을 열면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아서, 알렉사는 얼굴을 가렸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라인하르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는 끌어 내렸다.

“막지 마. 듣고 싶으니까.”

“으, 하지만… 아!”

“네가 느끼는 소리가 좋은걸.”

느끼는 소리라니, 그런 말을……. 알렉사는 끙끙대며 한 손으로 라인하르트의 머리를 밀어내 보려 했다. 그가 제 가슴을 더 희롱했다가는 정말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아서.

그런 알렉사의 생각을 읽었는지 라인하르트는 일부러 더 그녀의 가슴을 질척하게 애무했다. 그의 이가 여러 차례 유두를 긁고 잘근거리다가, 어느 순간 옆으로 살짝 물러나더니 흰 살결을 조금 세게, 꽉 물어버렸다.

“아흣!”

놀라움을 뒤덮는 짜릿한 감각에 알렉사는 신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의 허리가 팔딱 튀었지만, 라인하르트가 제 몸으로 단단히 누르고 있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알렉사가 결국 흘린 신음을 들은 라인하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는 붉게 멍이 올라오는 가슴에 쪽쪽 입을 맞췄다.

“알렉산드라, 너무 좋아. 좀 더 들려줘.”

“아프잖아. 뭘 더… 아, 흐으… 간지러, 간지러워!”

남자의 입술이 납작하고 단단한 배를 유영했다. 슬며시 제 모습을 드러낸 혀가 길게 배꼽부터 가슴 아래까지를 핥다가, 이내 돌아와서는 다시금 옴폭 파인 배꼽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뭐 먹을 거라도 되나. 왜 이렇게 물고 빨고 핥고……! 알렉사는 끙끙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샅샅이 발라 먹기라도 할 기세로 온몸을 훑는 라인하르트가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이런 놈이었나? 고고한 얼굴을 해선, 금욕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질척한 놈이었어? 도무지 피할 수가 없어서, 알렉사는 그의 입술에 몸을 모조리 내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의 입술이 아랫배보다 더 아래쪽으로 향하자, 알렉사가 빽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거긴 안 돼… 흐아아!”

금지하는 말 따위, 라인하르트는 깡그리 무시했다. 그는 잽싸게 두 손으로 알렉사의 허벅지를 밀어 올리며 누르고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혀로 길게 핥아 올리자마자 그녀가 자지러지는 신음을 흘렸다.

그게 만족스러웠는지 라인하르트는 더욱 열렬하게 알렉사의 밀지를 헤집었다. 혀는 음모를 헤치고 그 안에 숨겨진 부드럽고 연약한 살덩이를 끝끝내 찾아냈다.

그녀 외에 누구도 손댄 적 없는 곳에, 심지어 입을 처박는 이 상황에 알렉사는 미칠 것만 같았다.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어 피해보려고 했지만, 다리를 붙든 남자의 두 손은 마치 형틀인 양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러지, 마. 으, 으읏… 더러, 더럽다고! 아, 아흣!”

“더럽긴…….”

라인하르트가 입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 울림이 또 자극적이라서 알렉사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름다워, 알렉산드라. 네 어느 곳도 나한테는 전부 최고일 뿐이니까.”

“으, 흐앙, 거기, 그러면… 아아아!”

“여기가, 기분 좋은가 보군.”

도톰한 두 살덩어리 사이에 자리 잡은 조그만 살점을 혀와 코로 문지르던 라인하르트는 알렉사가 좀 더 격렬하게 반응하는 지점을 찾아내고는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댔다. 알렉사는 몸 여기저기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라인하르트가 주는 쾌락은 거대한 해일처럼 그녀의 몸을 덮치고, 휩쓸고, 무너트렸다.

그녀가 내뱉은 뜨거운 숨이 작은 오두막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알렉사는 본능적으로 잡을 것을 찾았고, 그녀의 손이 다다른 곳은 라인하르트의 머리카락이었다. 적당히 짧은, 그나마 손에 쥘 수 있는 길이의 금발이 손에 닿자마자 알렉사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수치스럽다면, 그가 주는 감각이 낯설어 싫다면 그대로 끌어당겨 떼어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알렉사는 제 음부를 헤집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손에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댔다. 그런 그녀의 갈등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라인하르트가 입을 벌려 음부를 머금고는 힘껏 빨아들였다.

“……!”

알렉사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짜릿하고 절절 끓는 기이한 감각. 그에 발끝이 쫙 펴졌다가 곱아 들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라인하르트를 제 가랑이에 처박는 꼴이 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코를 울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의 혀가 능란하게 알렉사가 원하는 쾌락을 계속 일으켰다.

“아, 흐앙! 흐으, 거기, 아……!”

기분이, 좋아서 미칠 거 같아! 알렉사는 도리질을 하며 다리를 동동 굴렀다. 그녀의 발꿈치가 라인하르트의 어깨를 몇 번이나 찼지만, 그는 꿈쩍도 안 했다. 도리어 혀에 힘을 주어서는 좁은 틈새로 불쑥 밀어 넣어버렸다.

“아흐으…….”

이미 흥건하게 젖은 아랫도리를 더 적시려는 듯, 그녀의 좁은 통로에서 왈칵 물이 새었다. 라인하르트가 그것을 생명수인 양 기껍게 빨아 먹더니만, 아예 혀를 들락거렸다.

안에 손가락 한번 넣어본 적 없는 알렉사는 끙끙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혀로 안이 자극될 때마다, 그의 코가 음핵을 스치다 짓누르길 반복할 때마다 그녀의 배 속에 생경한 감각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알렉사는 문득 두려워졌다. 무언가 그녀가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제 안에 자리를 잡아서는, 그녀를 멋대로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가 멀지 않았음을 알렉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헐떡거리면서 라인하르트에게 애원했다.

“라이, 라인, 하르트, 아읏, 아, 제발……! 이제 놔, 놔야, 흐아앗…….”

알렉사의 애처로운 부탁이 라인하르트에게 닿은 걸까. 그가 아래에서 얼굴을 떼고는 몸을 일으켰다. 알렉사의 체액과 제 타액으로 입가가 젖은 라인하르트의 모습은 이전에는 상상해 본 적 없을 정도로 야했다.

그가 떨어져 나가자 알렉사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라인하르트가 알렉사를 덮치듯 꽉 끌어안았다.

“뭐 하는… 아흑!”

“아직, 안 끝났어.”

굵고 긴 손가락 하나가 다리 사이로 파고들자, 알렉사가 기겁하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하지만 도망갈 수는 없었다. 이미 라인하르트가 한 팔로 그녀를 아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가락이 들락거리자 찔꺽찔꺽하는 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에 알렉사는 도리질을 치며 흐느꼈다.

“아, 라인하르, 트. 이건, 아으윽, 이상… 아앙!”

그의 손가락이 두 개로, 세 개로 늘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미 흐물흐물해진 안쪽 길은 라인하르트의 손가락을 수월하게도 덥석덥석 잘도 받아먹었다. 이제는 질퍽거리는 소리가 나는 아래를 들쑤시는 라인하르트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네가, 절정에 오르는 걸 보고 싶어.”

“앙, 아앙! 라, 라인, 흐아앙, 아! 안, 안 돼, 나아……!”

“전부, 보여줘…….”

그리고 알렉사는 제 안에서 뭔가 펑 터지는 걸 느꼈다. 왈칵 쏟아져 나온 액체가 라인하르트의 손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라인하르트는 손가락으로 쑤시는 걸 멈추질 않았다. 알렉사는 벌벌 떨면서 뒤통수를 바닥에 대고 마구 도리질 쳤다.

음부가 조이는 듯하면서도 저릿하고 또 근질거리면서도 팔딱거렸다. 이런 기이한 감각이 어째서 사그러들지 않는 걸까? 알렉사는 연신 라인하르트의 이름만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만족스러웠는지 라인하르트는 절정에 다다른 알렉사의 이마와 뺨, 그리고 입술에 계속 입 맞춰댔다.

마침내 천천히 절정이 사그라들자 라인하르트가 느릿하게 손가락을 빼냈다. 그러나 그걸 구부려서 질벽을 긁으며 나오는 바람에, 알렉사는 또 한 번 그의 품 안에서 벌벌 떨며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눈물에 젖은 푸른 눈가에 입을 맞춘 라인하르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무 예뻐서… 억울한데.”

“흐으, 흐… 무슨 소리야.”

“내가 좀 덜 머저리였으면 훨씬 일찍 이런 모습을 봤을 거 아니야.”

“아, 진짜…….”

이거 변태 아닐까! 알렉사는 작게 할딱이면서 라인하르트를 째려보았다. 지금까지 라인하르트에 대해 가졌던 모든 이미지는, 전부 그녀의 선입견 혹은 편견, 그도 아니면 망상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왕자님? 엄숙하고 고고하고 차갑고 뭐 어쩌고저째?

야한 얼굴을 하고는 사람 홀리게 웃으면서 ‘네가 절정에 다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는 이 인간이?

이런 면을 감쪽같이 숨기고 오만하고 위엄 있는 대귀족이자 기사단장인 척하고 살았던 걸까. 알렉사는 새삼 그런 라인하르트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러다 문득, 제 배를 쿡쿡 찌르는 것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 이거…….”

“그래서 말인데, 알렉사.”

어느새 그녀의 애칭을 부르고 있는 라인하르트를, 알렉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길고 굵은 것을 한 손으로 쓰다듬는 걸 보면서도, 알렉사는 여전히 제대로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설마, 저런 흉악한 걸로… 뭘…….’이라는 생각 쪽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라인하르트가 다정히 말했다.

“이전에 못 봤던 만큼… 앞으로 많이 보면 되지 않을까?”

“뭐? 아, 잠…까안! 아악…….”

배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대한 부피감에 알렉사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벌벌 떨어야 했다. 그녀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자, 라인하르트도 고통스러운지 미간에 고랑이 패었다.

“후우, 숨 쉬어. 괜찮아. 천천히…….”

“아, 아파… 아프다고!”

“이대로 끊기면 내 일부가 알렉사 네 안에 남겠지…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아쉬우니까, 힘 풀어봐.”

“이거, 완전… 흐윽, 미친, 미친놈 아냐.”

그 말에 라인하르트는 뭐가 좋은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성기를 밀어 넣는 일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것이 천천히 밀려 들어와 마침내 모조리 모습을 감추고 나자, 라인하르트는 알렉사의 손을 끌어와서는 아랫배에 대고 슬쩍 눌렀다.

“여기, 들어가 있는 거 느껴져?”

“아으, 누르지… 마!”

“후우, 나한테 화내면 더 조이는 거 같은데…….”

“흐아앙!”

라인하르트가 허리를 콱 찧자, 알렉사는 속절없이 울부짖었다. 연달아 콱, 콱, 안을 사정없이 짓찧고 헤집는 페니스 때문에 알렉사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아까 맛보았던 그 짜릿한 쾌감이 다시금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헐떡거리면서 라인하르트를 노려보며 짓씹듯 말했다.

“내가, 흐, 오덴발트 공작이, 변, 변태라고, 소문낼 거야. 아, 아앗! 너무 빨, 라앗, 아아앙!”

“소문내. 변태처럼 구는 건, 너한테뿐이니까…….”

그럼 다들 내가 누구를 마음에 품었는지 알겠지. 그렇게 말하는 라인하르트의 웃음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워서 알렉사는 억울해졌다. 하지만 그 억울함은 곧 그의 허릿짓이 격해지면서 날아가 버렸다.

척, 척, 살과 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느새 라인하르트는 알렉사를 꽉 끌어안은 채 정신없이 허릿짓을 해댔고, 그 아래에 꿰여 흔들리는 알렉사도 팔다리로 라인하르트를 단단히 붙든 채 열락에 가득 찬 교성만을 흘려댔다.

작은 오두막이 두 사람이 내뿜는 열기로 후끈해졌다. 배 안쪽 가장 깊은 곳에 라인하르트의 페니스가 콱콱 와 닿을 때마다 알렉사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그리고 오로지 그와 연결된 이 순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라인하르트가 주는 쾌감이 너무나도 좋아서, 그게 너무나도 만족스러워서 놓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 사랑해, 알렉사…….”

거의 흐느끼듯 라인하르트게 제 사랑을 쏟아냈다. 오로지 ‘사랑해’와 ‘알렉사’ 말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그 두 어절을 주문처럼 되뇌며 라인하르트는 한껏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알렉사는 가끔씩 눈앞이 희게 변하는 걸 느끼며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 순간.

“아아……!”

라인하르트가 짐승처럼 탄성을 토해냈다. 그의 둔부에 깊은 우물이 파이고, 몸이 덜덜 떨렸다. 몇 번이나 몸을 움찔거리면서 그는 제 씨물을 쏟아냈다. 그러더니만 돌변해서 미친 듯이 박아대기 시작했다.

애액과 정액이 뒤섞인 음부에서 쯔억쯔억 음탕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한계 근처까지 다다랐던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의 급격한 허릿짓에 단박에 절정을 느끼고 말았다.

“……!!”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알렉사는 입만 벌린 채 발발 떨었다. 세상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반복하더니 귀에 들리는 소리들이 일시에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연달아 배 속을 후려치는 열락에 그녀는 채찍질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움찔거렸다.

곧이어 아까 흘린 것보다 훨씬 많은 물이 마치 실례라도 한 것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질 안쪽이 쾌감에 경련하자, 라인하르트도 자극받은 듯 또다시 끙끙댔다.

두 사람은 온갖 체액에 범벅이 된 몸을 끌어안은 채 격해진 숨을 몰아쉬었다. 완전무장 후 전력 질주를 해도 이보다는 덜 숨차고 덜 힘들 듯했다. 알렉사는 자꾸만 저를 더 꽉 끌어안으려고 하는 라인하르트의 등을 탁탁 치며 중얼거렸다.

“숨 막혀… 좀 놔봐.”

그제야 라인하르트는 미련이 철철 흘러넘치는 몸짓으로 그녀를 놓았다. 땀에 젖은 이마를 손으로 쓸어 닦아준 그는, 알렉사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는 세상 둘도 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랑해.”

“…그 말 백 번도 더 들었을 거야.”

“그래도 또 하고 싶은걸.”

“아, 진짜…….”

얘는 낯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하네! 알렉사는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도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라인하르트는 또다시 알렉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 라인하르트를 내버려 두던 알렉사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끔뻑거리고는 라인하르트의 몸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질린 목소리로 더듬더듬 물었다.

“잠깐, 다 했는데… 왜 또 커져?”

“음… 네가 있는데 서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릴… 당장 빼… 야!”

그녀의 몸 안에서 다시금 단단해지고 있는 성기를 빼내는 대신, 라인하르트는 싱긋 웃으며 알렉사를 번쩍 들어 제 배 위로 옮겨 앉혔다. 그러고는 위로 힘차게 퍽, 찧어 올렸다. 아까보다 더 깊숙하게 페니스가 박히자, 남은 쾌감이 알렉사를 후려쳤다. 그녀는 숨도 못 쉬고 부르르 떨다가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판판하고 널찍한 가슴에 뺨을 대고 쌕쌕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라인하르트가 속삭였다.

“아직 시간이 더 있으니까, 즐겁게 해줄게.”

“즐, 즐겁긴… 흐아앙!”

그로부터 한참 동안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에게 붙들려서 몇 번이나 절정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완전히 뻗어버린 알렉사는 결국 기운이 모두 소진되어 그대로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어쩐지 기쁜 듯한 라인하르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저 짐승 같은 자식…….

*

알렉사가 푹 자고 일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있었다. 몸은 보송하게 닦여 옷까지 다 입혀져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자신이 다 했노라며 뿌듯해했고, 알렉사는 민망함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또 들러붙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라인하르트는 생각이라는 걸 하는 인간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공간 이동 마법은 마탑의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시전 지역에서 아주 멀지 않은 곳까지밖에 닿지 않아. 그러니 기사단과 함께 온 마법사들이 역추적을 하면 우리를 찾아낼 수 있겠지.”

“그렇구나…….”

알렉사는 오두막 입구에 대충 걸터앉은 채로, 라인하르트는 조금 걸어 나와 선 채로 그들을 찾으러 올 이들을 기다렸다. 알렉사는 기운 없이 하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제 돌아갈 수 있겠습니다, 단장님.”

“아직 다들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단장님으로 돌아간 거야?”

“버릇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상관없는데.”

“전 있습니다.”

알렉사를 돌아보는 라인하르트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말이 공손한 것치고는 상당히 편한 자세인 그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리라. 알렉사가 서있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밤새 라인하르트의 성기에 꿰뚫린 채 흔들리고, 온몸을 쪽쪽 빨아 먹혀서 솔직히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피곤한 기색이 남은 알렉사를 살피던 라인하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알렉사.”

“응?”

“내가 널… 연인으로 소개해도 괜찮을까?”

그 말에 알렉사는 화들짝 놀랐다. 그래서 눈을 데굴 굴리다가 시선을 피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연인이라니! 아니, 물론 이미 사고는 쳤다. 칠 만큼 쳐서 모르는 척 뭉개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연인? 이렇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장님이 자꾸 친한 척하니까 내가 오해받아서 불편하잖아요!”라며 쏘아붙이고 일부러 데면데면하게 지내려고 했던 우리가… 곧장 연인?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핑계임을 알았다. 사실 알렉사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디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라인하르트가 나쁜 놈은 아니며 오히려 괜찮은 녀석에 심지어 저를 오랫동안 좋아하는… 그런 순정남이었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쟤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심술이 돋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뭐, 친구부터 하는 게 어때.”

“미안하지만 알렉사, 그건 어렵겠는데.”

“왜?”

“난 친구하고는 입 맞추지 않거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라인하르트가 그녀를 보고 씩 웃었다. 뭐라는 거야, 라고 투덜거릴 사이도 없이 라인하르트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사이에 익숙해져 버린 입맞춤에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으응…….”

그녀의 입 안을 유영하고 난 뒤 라인하르트는 아쉽다는 듯 느릿하게 제 입술을 떨어트렸다. 뭔데 얘는 이렇게 키스를 잘하는 걸까. 알렉사는 조금 몽롱한 기분이 되었다. 서로의 타액으로 촉촉하게 젖은 알렉사의 입술을 엄지로 스윽 문지르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안 돼. 난 너랑 계속 이러고 싶거든. 이거보다 더한 짓도 하고 싶고.”

“…너 원래 이렇게 좀 능청스러웠어? 아니, 좀 밝히는 거 같기도 하고?”

“너만 보면 그랬어. 처음부터 쭉.”

약간 질린 기색의 알렉사의 얼굴에 쪽쪽 소리 나도록 여기저기 입술 도장을 찍어대는 라인하르트는 정말이지 예전에 그녀가 알던 남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 고결하다 못해 수도사 같은 줄 알았더니만! 알렉사는 끙끙대며 그의 입맞춤을 받다가 비명을 지르듯 고했다.

“어, 어쨌든! 너무 빨라! 일단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그 친구… 빨리 그만둬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친구 그만하는 거지?”

“그…….”

순간 알렉사의 머릿속에 반짝,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너 이기면, 그때 사귀는 걸로 해.”

“뭐?”

그녀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걸 보자 알렉사의 얼굴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뭐야, 내가 못 이길 거 같아서 그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나 나한테 이기고 싶어?”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아카데미 내내 너한테 진 게 얼마나 분했는데.”

“하하… 그랬구나. 그래.”

어쩔 수 없네. 라인하르트는 마지막으로 알렉사의 관자놀이에 길게 입 맞추고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빨리 날 이겨야 해, 알렉사. 나는 오래 못 참을 거 같으니까.”

그러고는 그는 몸을 일으켰다. 해를 등진 채로 빙긋 웃는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잘생겨서 알렉사는 하마터면 ‘내 말 취소, 그냥 오늘부터 연인 해!’라고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잘 참아내고는 알렉사도 곧 그를 따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건 제법 지루했다. 게다가 아직 제대로 마르지 않은 옷은 꿉꿉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참을 만했다. 이제 돌아가면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뻐근한 몸을 씻은 뒤―이건 전적으로 라인하르트 때문에 생긴 근육통이었다― 푹 자면 되는걸.

그리고 한나절 정도 지나자, 라인하르트가 예고한 대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두막 앞에서 기다리는 둘을 발견한 건지, 그들의 웅성거림이 커졌고, 다가오는 속도도 빨라졌다. 마침내 두 사람에게 다다른 기사단과, 그들을 찾아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을 마법사들이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르며 두 사람을 불렀다.

“단장님!”

“단장님도, 린다우 경도, 살아있을 줄 알았습니다!”

“제기랄,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어흐흑!”

저기 우는 놈 누구야? 알렉사는 키득거리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라인하르트도 덩치가 산만 한 인간들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울먹거리는 꼴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기사들 뒤에서 어떤 남자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는 라인하르트의 뒤에 선 알렉사에게 곧바로 뛰어가서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부지불식간에 웬 놈에게 껴안긴 알렉사는 반사적으로 그자를 엎어트리려 했지만,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알렉사 선배,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마티어스? 너 여기 어떻게…….”

“소식 듣자마자 바로 왔어요. 진짜, 그게 무슨 마법인 줄 알고 달려들어요!”

마티어스는 숫제 울먹거리고 있었다. 알렉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의 등을 토닥거리려다가… 뭔가 불길한 기분에 옆을 흘끔 보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됐네.

거기 있는 건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죽일 듯한 얼굴을 한 라인하르트였다. 알렉사는 당황해서 마티어스를 얼른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보다 라인하르트 쪽이 훨씬 빨랐다. 그는 마티어스의 어깨를 덥석 붙들고는 제법 거칠게 알렉사에게서 떨어트려 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강한 힘으로 밀려난 마티어스는 얼빠진 얼굴로 주춤 물러났다가, 자신을 밀어낸 게 라인하르트인 걸 알아차리고는 오묘한 얼굴이 되었다.

라인하르트가 제법 차분한, 하지만 아는 사람이 듣는다면 꽤 열받은 게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이들에게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은 삼가는 게 좋겠는데, 필라흐 소백작. 린다우 경은 기사이긴 하지만, 아직 미혼의 숙녀인데.”

“…오덴발트 단장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실례를 저질렀군요.”

서로 아는 사이임에도 자리가 자리여서 그런지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높였다. 알렉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라인하르트는 그녀를 마음대로 끌어안은 마티어스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또 마티어스는 마티어스대로 라인하르트의 견제를 느낀 모양이었다.

높은 분 둘이 살벌한 분위기를 자꾸 조성하며 점점 분위기가 괴상해지는 걸 알렉사는 금방 눈치챘다. 그녀는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하하, 어쨌든 안 죽고 다들 만나서 너무 다행입니다! 찾아준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 린다우 경. 정말 다행이야!”

“얼른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단장님. 돌아가서 어디 문제없는지 진찰도 받으셔야 하고…….”

“예, 그리고 국왕 폐하께서 심려가 크십니다.”

주변에서 한마디씩 얹자 라인하르트의 눈매가 슬쩍 풀어졌다. 이 자리에서 마티어스와 대거리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알렉사는 라인하르트가 제 위치와 임무를 잊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매우 마음에 들었다.

라인하르트는 마티어스를 한번 흘기고는 명령을 내렸다.

“바로 주둔지로 돌아가도록 하지. 필라흐 소백작과 다른 마법사분들은 이동 마법을 시전해 주십시오.”

그의 말에 마법사들이 얼른 자리를 잡았다. 마티어스는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곧 다시 밝은 얼굴이 되어서는 알렉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중에 돌아가면 다시 얘기해요.”

“어? 음…….”

그 말에 알렉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곁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라인하르트가 어쩐지 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을 했다. 설마 라인하르트가 치졸하게 질투하고 뭐… 그러겠어?

곧 마법사들의 마법이 번쩍이며 기사들을 감쌌다. 알렉사는 아마도 별일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게 되었지만.

“흐응, 읏, 으으읍…….”

자신의 오판을 깨닫는 데는 고작 두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콜로만 영지의 주둔지로 돌아오자마자 의사에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받은 알렉사는 곧장 라인하르트에게로 불려갔다. 그사이에 그녀는 미리 준비된 뜨거운 물에 씻고 깨끗한 제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대접받는 느낌이 좋은데? 그렇게 중얼대며 걷는 알렉사의 걸음이 가벼웠다. 라인하르트가 찾은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몸 상태를 물어보고, 앞으로 할 일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커다란 기사단장의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알렉사는 그대로 라인하르트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 입술부터 빼앗겼다. 그녀는 계속해서 달려드는 라인하르트를 밀어내고는 애써 목소리를 죽여서 쏘아붙였다.

“뭐 하는 거야, 진짜! 누가 들으면 어쩌려… 읏, 하지, 말라니까!”

“후우, 여태까지 참은 걸 칭찬해 줘야지.”

“뭘 참아, 참, 기는, 아! 목 물지, 마! 상처 남… 아윽!”

“마티어스가 널 끌어안았을 때 검을 뽑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참았어.”

알렉사는 지금 저를 끌어안고 제복 앞섶을 거칠게 풀어 헤치는 이 남자가 자신이 알던 그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라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거 완전 미친 짐승 새끼 아니야?

“라인, 하르트. 우리 아직 친구…….”

“친구라도 넌 내 사람이잖아. 다른 놈이 널 넘보는 건 못 참아.”

알렉사가 어찌 반항할 새도 없이 그녀의 제복 재킷은 이미 벗겨져 근처 의자에 널브러졌고, 셔츠는 단추가 모조리 풀려버렸다. 제복 안에 입는 밋밋한 속옷은 벌써 끌어 내려져 동그랗고 예쁜 가슴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짜부라트릴 듯 꽉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알렉사의 유두 양쪽을 꼬집고 비틀자, 알렉사가 몸을 떨었다. 그녀는 팔꿈치로 조금 세게 라인하르트의 몸통을 치며 그를 말려보려 애썼다.

“그만, 하, 흐응, 그만!”

“오래전부터 마티어스가 널 마음에 두었단 건 알고 있었지만… 후우, 눈앞에서 보니 상당히 열 받는군.”

“무슨 말도, 아, 으흑… 말도 안 되는…….”

“네가 그런 면에서 둔해서 다행이야, 알렉사.”

이거 욕이야, 칭찬이야? 알렉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더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어느새 그녀는 그의 막사 한쪽에 놓인 탄탄한 야전침대에 엎드리게 되었다. 바지는 속옷이 끼워진 채로, 훌렁 벗겨져 한쪽에 나뒹굴었다.

엉덩이를 치켜든 채 얼굴을 침대에 박고 있는 자세는 상당히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단단하고 커다란 몸이 그녀를 짓누르는 데다, 그의 한 손이 알렉사의 두 손목을 단단히 잡아 머리 위에 고정한 바람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맨 엉덩이에 닿아오는 옷 너머의 단단한 살덩어리를 느끼고는 허리를 비틀었다. 알렉사 딴에는 피해 보려는 수작이었지만, 오히려 라인하르트를 자극하기만 했다.

라인하르트는 알렉사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어 그 자리에 잇자국을 남겨댔다. 그가 깨물 때마다 찌릿하게 아파서 알렉사는 끙끙댔다. 곧 목덜미에 붉은 잇자국이 여럿 남았다. 그걸 바라보며 라인하르트가 만족스레 웃다가 혀로 핥았다.

부드러운 살덩이가 주욱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선득해서 알렉사는 그만하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의외였다.

“싫어.”

“뭣, 아흑!”

“이렇게 흔적을 잔뜩 남겨야… 안심이 되는걸.”

그리고 곧 이미 선단이 축축하게 젖은 페니스가 도톰하게 부푼 알렉사의 아래에 닿아왔다. 알렉사는 곧 닥쳐올 열락에 미리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라인하르트는 주저하지 않고 제 것을 곧장 밀어 넣었다. 뒤에서 삽입하는 건 이게 고작 두 번째였지만 알렉사는 자신이 앞으로 이 자세를 가장 좋아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짝 우로 휜 라인하르트의 것이 뒤쪽에서 긁고 들어올 때의 감각이… 소름 끼치게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날것의 신음이 그대로 튀어나올 거 같아서 알렉사는 침상에 깔린 모포를 입에 꽉 물었다. 우웃, 우웃, 하고 틀어막힌 신음성이 흘러나오자 라인하르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냥 내뱉으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다른 새끼들이 알렉산드라 린다우의 남자가 누구인지 다 알 텐데.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너무 차분해서 도리어 조금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라인하르트의 상식이 완전히 증발해 버린 것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알렉사의 가슴을 꽉 쥐고는 허리를 퍽 치받았다. 알렉사가 읍, 하고 내뱉은 교성이 모포에 먹혔다.

“후우, 딴 놈들이 네 야한 소리를 듣는 것도, 싫으니까.”

“흐응, 읍, 으으읏!”

그러고는 정신없이 흔들렸다. 기다란 페니스는 그녀의 배를 뚫을 기세로 계속 안으로, 안으로 처박혔다. 음낭이 흔들리며 그녀의 보드라운 음순을 사정없이 쳐댔다.

알렉사가 부딪치는 힘에 자꾸 밀려 올라가자, 라인하르트가 허리를 붙들고 확 끌어당겼다. 또 한 번 자궁구 뒤편이 꽉 짓눌리는 감각에 알렉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마저 고여있었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알렉사의 귓불을 입에 머금고 쭙쭙 빨아대다가 속살거렸다.

“미안, 알렉사. 발정 난 개새끼처럼 굴어서.”

“으응, 으, 흐으… 응응……!”

“사랑해, 알렉산드라 린다우. 사랑해…….”

그의 사랑한다는 말은 기이하게도 알렉사를 꼼짝 못 하게 했다. 놀랍게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말이 기꺼워서 마음이 몽실몽실해졌다. 라인하르트가 치졸한 질투를 하는 것도 귀엽기 짝이 없었다. 다리 사이의 물건은 흉흉했지만, 어쨌든.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렉사는 조금 지친 얼굴로 막사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녀를 본 다른 기사들이 혹시 단장님에게 뭐 싫은 소리라도 들었냐고 물었지만, 알렉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막사 안에서 라인하르트가 눈이 돌아버려서는 한참 배 맞추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이유는 모르겠지만 라인하르트를 만나고 나온 알렉사의 얼굴이 썩 좋지 않다며 수군수군 단장을 흉봤지만, 알렉사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어쨌든 내전은 끝이 났고, 왕실 기사단은 승전의 소식을 안고 수도로 돌아왔다. 어린 왕 알폰소와 대비가 궁궐 밖까지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늠름한 자태로 가장 앞에 선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주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승전 소식을 전했다.

“신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 콘스탄츠의 우환이며 주군의 근심인 사악한 역도의 무리를 물리치고 그 수괴인 니콜라스 콜로만의 목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사방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알폰소 왕은 울먹울먹한 얼굴로 제 앞에 꿇어앉은 오덴발트 공작을 바라보다가 이내 체통도 잊고 그를 와락 껴안았다. 라인하르트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조심스레 왕을 부축해 일으켰다.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군신이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보던 알렉사는 괜히 더 뿌듯해서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반역자를 물리치고 돌아온 수도는 축제 분위기였다. 거리 곳곳에서 박수와 노래, 춤이 이어졌다. 궁에서도 승리하고 돌아온 기사들을 위한 연회가 벌어졌다.

알렉사는 귀족들이 잔뜩 모이는 연회 같은 건 아카데미의 성년식 연회 외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빠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런 속셈을 어떻게 알았는지 라인하르트가 사람을 보내왔다.

“연회에 참석하시는 걸 도우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하녀 여럿이 기숙사 방문 앞에 서서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알렉사는 어쩐지 아득해졌다. 그들은 손마다 뭔가 잔뜩 들고 있었는데, 분명 드레스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알렉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방으로 들이며 말했다.

“다 좋은데… 드레스는 안 입을게요. 어차피 참전한 기사 자격으로 가는 거니, 드레스보다는 제복이 어울리겠지요.”

그녀의 말에 하녀들은 토 달지 않았다.

하녀들은 손이 빠르고 솜씨가 좋았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알렉사는 화장과 머리 손질을 모두 마치고 섰다. 어느새 하녀들은 알렉사의 제복까지 주름 하나 없이 다려 와서는 입혀주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다른 때보다 좀 더 예뻐 보였다. 알렉사는 씩 웃으면서 하녀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은 마법으로 켠 불로 환했다. 궁 곳곳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서 알렉사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연회장 입구는 짝을 맞춰 온 귀족들로 붐볐다. 알렉사는 저 사이를 뚫고 가야 하는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툭 쳤다.

“어?”

“뭐 하고 서있어?”

울리히가 씩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곁을 보니 곱게 단장한 아리따운 아가씨도 함께였다. 아마도 울리히의 약혼자인 모양이었다. 알렉사는 기사의 예로 그녀에게 인사하고는 울리히에게 물었다.

“울리히 경… 저기 어떻게 들어가죠?”

“뭐, 그냥 들어가면 되지. 네 얼굴 모르는 사람도 없을 텐데?”

“파트너 없이 들어가도 돼요?”

“하하, 그 걱정 때문에 서있었어? 파트너라…….”

그는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파트너를 그 자리에서 바로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알렉사는 기사 제복 차림이었다. 어떤 귀족 남자가 제복 차림의 아가씨와 손을 잡고 들어가려고 할까?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곧 조용히 다가온 한 사람의 손이, 알렉사의 앞에 내밀어졌기 때문이다.

“같이 들어가지.”

“아, 라이… 단장님.”

“단장님, 때맞춰 잘 오셨습니다. 린다우 경이 파트너가 없어서 못 들어간다고 서있어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울리히의 웃음이 어쩐지 짙었다. 그는 알렉사의 팔을 한번 툭 치고는 제 약혼자와 함께 먼저 들어가 버렸다.

둘이 남자, 알렉사는 멋쩍은 얼굴로 라인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라인하르트가 조용히 물었다.

“파트너는 나 아니었나?”

“어, 하지만… 난 제복 차림이고 기사라……. 보통 남자 귀족은 다 드레스 입은 아가씨랑 들어가잖아.”

“옷이 무슨 상관이야.”

그는 조금 부루퉁해 보였다. 설마 삐진 건가?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의 토라진 얼굴이 신기해서 빤히 바라보다가 까르르 웃었다. 그녀가 웃자 라인하르트는 좀 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나만 기대했나 보군.”

“아니, 나는 좋지, 너랑 들어가면.”

그렇지만, 이라고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괜히 민망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였다. 그렇지만 난 우아한 귀족 아가씨처럼 네 에스코트를 받고 연회장에 들어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이잖아. 그러나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려니 괜히 속이 쓰렸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종종 기사의 길을 걷고 싶은 열망의 반대편에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아가씨가 되고 싶은 희망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기사 서임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알렉산드라 린다우는 그냥 그녀 자신으로서 충분히 두 발로 딛고 서있을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라인하르트를 만나니 괜히 자기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알렉사는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았다. 홀로 섰을 때는 자신으로서만 온전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곁에 있으면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알렉사가 시선을 슬쩍 비껴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자, 정수리 위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팔짱을 낀 채 라인하르트는 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너만큼 대단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주눅이 들지?”

“…그렇게 보는 건 너뿐 아닐까?”

“알렉사, 그런 말을 하다니 양심에 손을 얹고 다시 말해보는 게 어떨까.”

그는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알렉사의 양 뺨을 잡아 올리고는 눈을 맞췄다.

“옷차림이 널 말해주는 게 아니야. 알렉산드라 린다우라는 이름만으로, 너는 저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충분히 빛나.”

낯 뜨거운 소리를 잘도 한다. 알렉사는 괜히 멋쩍어져서 콧잔등을 찌푸리고는 그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그러고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뭐, 그래. 괜히 내가 움츠러들 필요는 없지.”

“하하.”

“우아한 에스코트는 안 되겠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갈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단장님?”

“기꺼이.”

라인하르트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바라보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알렉사는 그가 바라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 강하고 멋진, 내 목숨까지 구해준 파트너 님. 이제 가실까요?”

“그럴까요?”

알렉사도 마침내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연회장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알아보는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홍해 갈라지듯 두 사람 앞의 길을 내주었다.

여기저기에서 슬며시 눈으로 알은체하거나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우아하게 그들에게 눈으로 인사했고, 알렉사는… 그냥 웃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게 가장 나을 듯싶었다.

두 사람이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자, 왕궁 시종이 목소리를 높여 그들의 도착을 알렸다.

“오덴발트 공작,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와 왕실 기사단의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이 입장합니다!”

소란이 일시에 잠잠해졌다. 수많은 이들의 눈이 쏠리자 알렉사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그걸 금세 눈치챈 라인하르트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살며시 톡톡 쳤다.

“긴장하지 마.”

“…긴장 안 했어.”

“그래. 잘하네.”

라인하르트는 연회장의 안쪽, 곧 왕이 앉을 단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도착한 두 사람을 본 기사단원들이 우르르 두 사람을 향해 몰려왔다. 역시 툭툭 건드리고 놀리기 쉬운 쪽은 알렉사였기에 모두의 관심은 그녀 쪽으로 쏠렸다.

“워, 이게 무슨 일이람. 화장한 거야?”

“딴 사람 같네! 드레스도 입지 그랬어.”

“저는 기사인데, 드레스는 무슨 드레스입니까?”

“아, 그래도 이런 때 아니면 예쁜 옷 입을 일이 얼마나 있다고 오늘까지 제복이야?”

“그러는 여러분도 다 제복 입고 오셔놓고…….”

알렉사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다들 와르르 웃으며 ‘아쉬워서 그런다’며 또 얼른 그녀를 달랬다. 그때 라인하르트가 은근히 알렉사의 앞을 막아섰다. 아마도 시커먼 기사 놈들이 그녀에게 말 붙이는 걸 보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리라. 알렉사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괜히 알렉산드라 경을 놀리지들 말고. 연회는 잘 즐기고들 있나?”

“물론입니다! 어휴, 이게 얼마 만에 누리는 호사인지.”

“만날 경계하고 경비만 서다가 연회장에 들어와 있으니 어색할 정도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

“진짜라니까!”

새삼 알렉사는 이들이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라는 사실이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다. 물론 라인하르트처럼 한 가문을 이어갈 후계자가 아닌 경우가 많으니 기사단 외에는 발붙일 데가 없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연회 자체를 어색하게 여기질 않았다.

이런 데서 계급의 차이를 느끼게 되네. 알렉사는 약간 마음의 거리가 생기려고 하는 걸 애써 다시 이어 붙였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알폰소 왕과 라리에트 대비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들의 옆에는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인 예비 왕비 로제와, 왕의 누나인 테레지아 공주도 함께였다.

왕은 짧고 가벼운 인사만을 했다. 이미 미사여구 잔뜩 붙인 거창한 발언은 낮에 기사단을 맞이하며 다 한 터였다. 왕의 말이 끝나자 곧장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고, 춤을 출 이들은 연회장의 가운데로, 아닌 이들은 벽 쪽으로 빠져 섰다.

알렉사는 벽에 붙어 서서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느 선배 기사가 건네준 잔 하나도 손에 쥔 채였다. 그사이에 라인하르트는 알폰소 왕이 불러서 그리로 가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의외로 혼자 온 선후배 기사들이 꽤 있었고, 그녀는 그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니까.

깔깔대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녀의 온 신경은 라인하르트 쪽으로 향했다. 언제쯤 돌아오려나. 아마도 제법 오래 걸리리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오늘 연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고, 왕은 그에게 누구보다도 가장 감사하고 있을 테니까.

다만 조금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다면 테레지아 공주 쪽이었다. 조금 주워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테레지아 공주는 대외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책벌레라나 뭐라나. 그런데 그런 공주가 아리땁게 꾸민 채 라인하르트의 근처에 있으니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라인하르트와 테레지아를 힐끔거리던 때였다.

‘어라?’

알렉사의 감이, 저기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마구 신호를 보냈다.

대비가 대놓고 테레지아를 라인하르트 쪽으로 슥 미는 게 보였다. 뭐야, 저게? 알렉사의 눈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라인하르트는 거의 뒤로 돌아서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만이라도 옆으로 떨어지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알렉사는 흠칫했다. 나 지금 굉장히 질투하는 연인처럼 생각한 거 아니야? 아니, 고작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하루쯤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서로 말랑말랑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다른 여자가 라인하르트의 옆에 다가가는 꼴을 멀리서 보고만 있어야 했다.

정말 이게 무슨……. 알렉사는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그냥 저쪽에서 진행되는 상황은 이 먼 자리에서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건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 기사인 알렉사에게도 빤했다. 대비는 아예 라인하르트를 왕실에 들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알폰소 왕의 입지를 완벽하게 탄탄히 하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지만 알렉사는 고개를 저어서 그것들을 흩어버렸다. 그러고는 잔을 단번에 비워버렸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알리고는 자리를 떴다.

어떻게든 라인하르트 쪽을 안 보려고 노력했기에 그녀의 등 뒤로 달라붙는 라인하르트의 시선과, 그녀를 따라오는 사람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깥의 공기는 약간 습했지만 그래도 선선한 편이었다. 대충 근처의 화단에 걸터앉으려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뒤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대체 누가 이렇게 소리도 없이. 휙 돌아보자마자 알렉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비앙카!”

“어휴, 무슨 걸음이 이렇게 빨라?”

양손에 술잔을 하나씩 든 비앙카가 살짝 숨을 몰아쉬면서 투덜거렸다. 그녀의 손에서 잔을 받아 든 알렉사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마탑에 있을 줄 알았는데.”

“너 보려고 나왔지. 무려 오덴발트 공작의 목숨을 구한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을 보러.”

“아, 뭐야. 놀리는 거야?”

“그래, 놀리는 거다.”

키득키득 웃으며 비앙카는 알렉사를 근처의 분수대로 이끌었다. 다른 아가씨들에 비해 덜 풍성한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그래도 차려입은 그녀를 위해 알렉사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깔아주었다. 그걸 보여 비앙카가 방정맞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오, 이거 오러를 쓰는 대단한 기사님께 대접을 다 받고.”

“아, 진짜. 그만해.”

“킥킥. 알았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비앙카는 기다렸다는 듯 철썩 알렉사의 등을 내리쳤다. 아야, 하고 약하게 비명을 지르는 알렉사에게 비앙카가 따따 쏘아붙였다.

“내가 다 들었어, 응? 겁도 없이, 무슨 마법인 줄 알고 뛰어들어!”

“…이미 혼났거든.”

“알 수 없는 주문이 발동되었을 때 함부로 손대거나 발 들이지 말라고 아카데미 때 배웠잖아!”

“아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으휴, 으휴. 비앙카는 한숨을 내뱉더니 알렉사를 꽉 끌어안았다.

“진짜 다행이야. 안 다치고 몸 성하게 돌아와서.”

“미안해. 걱정했지?”

“소식 듣자마자 널 찾으러 가고 싶었는데, 이미 마티어스랑 다른 마법사들이 출발했다고 하더라고. 하여간 마탑은 소식이 늦어.”

투덜거리는 비앙카를 보며 알렉사는 잠시 마음의 갈등을 겪었다. 그러고 보면, 비앙카는 아카데미 내내 자신이 라인하르트 때문에 속 끓이고 불편해하는 걸 다 본 친구였고, 또 디어에게 바람맞았을 때도 달래준 이였다.

적어도 비앙카에게는…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녀가 라인하르트와 과거와 감정을 확인하자마자 일부터 치고 왔다는 사실을 알면 까무러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에, 혼자 떠들던 비앙카는 알렉사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가볍게 알렉사의 뺨을 꼬집어 흔들었다.

“너어, 너. 뭐야. 뭘 숨기는 거야?”

“아얏, 비앙카! 아프잖아!”

“얼굴에 다 쓰여있거든?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게 다 보여!”

“진짜……?”

“으이구, 진짜로 나한테 뭘 숨기곤 있구나? 뭔데! 빨리 말해봐! 설마 라인하르트 그 자식 구하다가 다친 데라도 있는데 감추는 거야? 아니, 그 인간이 너한테 뭐 못된 소리라도 했어? 구해줬는데도 재수 없게 굴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라인하르트와의 역사(?)를 아는 비앙카가 오해로 파라락 불이 붙기 전에, 알렉사는 차라리 진실을 말하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허벅지 위에 놓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알렉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예전에… 아카데미에서 내가 누구 만나러 나갔다가 바람맞고 들어온 거 기억해?”

“음… 그런 적 있었지.”

“그때 사실 나, 어떤 사람이랑 쪽지를 주고받고 있었거든. 익명으로. 그 사람 만나러 나간 거였는데…….”

거기까지만 말했는데 비앙카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비명을 참는 얼굴로 빠르게 속삭였다.

“설마 그게 라인하르트였어?”

“…응. 그걸 이번에, 둘이 마법 때문에 따로 떨어져 있던 때에 알게 됐어.”

“세상에… 그때 그 정신 나간 새끼가 라인하르트… 가만. 그때 그 자식, 갑자기 아카데미 그만뒀었잖아.”

“맞아. 그때 가문에 일이 있어서 못 나오게 됐었다고 그러더라고. 근데 내가 남긴 쪽지를… 갖고 다녔더라고. 로켓에 넣어서 계속.”

비앙카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러더니만 그녀는 알렉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알렉사, 그 인간이 너 좋아한대? 혹시 이미 잤어?”

“비앙카!”

“여태껏 네가 준 쪽지를 그렇게 품고 다닐 정도면 널 좋아한단 뜻이잖아! 지금도!”

알렉사는 자신의 친구가 그토록 사악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비앙카는 깔깔 웃어대며 알렉사의 어깨를 팍팍 쳤다. 마법사가 무슨 힘이 이렇게나 센 거야! 알렉사는 그녀가 제 어깨를 칠 때마다 휘청거렸다. 얼빠진 얼굴을 한 알렉사에게 비앙카가 또 물었다.

“그래서 너 좋다고 고백했어? 넌 어떻게 했는데?”

“하아… 그냥, 그게…….”

대답을 끝까지 하지 않았지만 비앙카는 다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볼이 발그레해져선 시선을 피하는 게 딱 티가 났다. 비앙카는 마치 체기가 내려간 사람 같은 얼굴이 되어서는 손가락으로 딱 하는 소리를 냈다.

“이럴 줄 알았지! 하, 버티더니만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비앙카, 너… 알았어?”

“뭘?”

“내가 라인하르트를…….”

“그건 알긴 했지. 근데 네가 너무 상처받는 일이 많아서 마음 접고 다른 괜찮은 놈이나 만나길 바란 거고. 그보다 라인하르트가 너 좋아하는 게 빤히 보였거든.”

“뭐어?”

“하, 근데 그 인간이 애늙은이처럼 가문이 어쩌구 정혼이 어쩌구… 하면서 계속 너 안 좋아하는 척하잖아. 하지만 결국 봐. 너 좋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잖아?”

비앙카는 싱긋 웃으면서 들고 있는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알렉사는 엉거주춤하게 손에 든 잔을 마주 내밀었다. 그러자 비앙카가 신나게 제 잔을 부딪치고는 말했다.

“축하해, 알렉사.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통하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야?”

“음, 그래. 고마워.”

어색하지만 수줍은 얼굴로 웃는 알렉사가 귀엽다는 듯, 비앙카는 또다시 친구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고는 단번에 잔을 쭉 들이켜더니 아참,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결혼은 언제 해?”

“결혼은 무슨, 고백… 들은 지 겨우 하루 됐거든.”

“무슨 소리야. 이미 둘 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잖아. 게다가 얼마나 오래 오덴발트 공작가 안주인 자리가 공석이었니. 몸이 단 건 라인하르트 쪽일걸?”

그 말에 알렉사는 문득 라인하르트와, 그의 곁에 얌전히 서있던 테레지아 공주를 떠올렸다. 보드라운 밤색 머리카락에 동그란 어깨를 가진 조그마한 공주님. 사람들이 떠올리는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라면,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물며 오덴발트 공작가인데, 검을 휘두르는 평민 기사가 가당키나 한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히 가슴이 아파서 알렉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일부러 투덜거리며 제 속내를 감추었다.

“굳이 결혼까진…….”

“왜?”

“공작 부인이 되면 기사는 못 할 거고… 뭣보다 이제 겨우 시작할까 말까인데 벌써 결혼 얘기까지 나오는 건 부담스러워.”

먼 데를 보며 술을 홀짝이는 알렉사를 바라보는 비앙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충 제 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는 건 잘 알았다.

어쩌면 라인하르트가 넘어야 할 가장 큰 고비는 알렉사의 이 낮은 자존감이리라. 비앙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알렉사는 누가 보아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젊은 나이에 도달했다. 그녀는 검을 잡을 때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사람, 특히 이성을 대할 때는 주눅이 드는 게 빤히 보였다.

로맨스 소설이 애 버려놨지. 비앙카는 제 친구가 몰래 보던 그 로맨스 소설과 서정시들을 탓했다. 그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나오는 남녀 관계를 동경한 알렉사의 선택이 나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인데 그것이 이상적인 관계인 양 여기다 보니, 알렉사는 제 장점을 자꾸만 약점처럼 여기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비앙카가 그걸 고쳐줄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뭐, 라인하르트가 잘하겠지. 알렉사가 밀어낸다고 해서 포기할 인간도 아니고.’

포기할 거였다면 아마 진즉 정리하고 이렇게 뒤늦은 고백조차 안 했을 녀석이다. 그토록 오래 돌고 돌아 손에 넣은 사랑인데, 그 집요한 인간이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모쪼록 알렉사가 라인하르트의 집착적인 애정에서 행복을 찾아야 할 텐데. 친구를 걱정하면서도 비앙카는 어쩐지 기대됐다. 어쩐지 앞으로 재미있는 걸 볼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날 알렉사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라인하르트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겼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오덴발트 공작을 원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그들에게서 라인하르트를 빼앗아 오는 건 너무 어려웠다.

대신 비앙카와 실컷 수다를 떨고, 동료 기사들과도 잔뜩 마시고, 오랜만에 아카데미 마법부와 행정부를 졸업한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한껏 기분이 좋아진 채―그러나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찜찜함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기사단의 숙소로 돌아와서는 화장만 겨우 지우고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술기운 때문에 머리가 뱅뱅 돌았다.

그리고 어쩐지 라인하르트가 찾아왔던 것도 같다. 제 뺨과 귓가에 자꾸만 입을 맞추는 그를 밀어내면서 ‘졸려’, ‘귀찮아’ 따위의 말도 한 듯했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라인하르트가 낮은 소리로 쿡쿡 웃는 소리는 남았다. 그는 미안하다느니, 너와 있고 싶었다느니,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알렉사는 글쎄, 입술을 비죽거렸던가. 뭐라고 더 했던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는 걸 보면 라인하르트가 와서 수발을 들고 간 게 맞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거울에 비춰 본 목덜미에 남은 새빨간 순흔까지……. 알렉사는 낯부끄러워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발을 동동 굴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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