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9)

6.

왕실 기사단에서 일하는 건, 좋게 말하면 평화로웠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했다. 북서부 국경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주로 적국과의 전투였지만 가끔은 기사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있었다. 매일 시끌벅적하고, 피 냄새도 나고, 근육통과 땀과 혼란이 가득했다.

알렉사는 그런 곳에서 5년을 보냈기에 수도 왕실 기사단 생활은 너무나도 자극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아직 알렉사가 수도와 왕실, 귀족들 사이의 문제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녀는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완전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어린 왕과 그 모후의 입지가 그리 탄탄하지 못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마 좀 더 깊이 파고들고 나면, 이쪽도 만만치 않게 피곤한 세상일 테다. 어쩌면 매일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사방을 주시하며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당장은 너무나도 고요하기만 했다.

다만 그런 알렉사의 삶을 조금 복잡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단장님, 진짜 왜 이러십니까?”

“어차피 다 알아야 할 사항이다. 그리고 내가 알려주는 쪽이 가장 정확해.”

“여기… 저를 도와주실… 다른 선임들도… 많이 계십니다만…….”

알렉사는 이를 꽉 깨물고 낮게 웅얼거렸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눈썹을 한번 삐죽 올렸을 뿐, 전혀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렉산드라 경, 저기 있는 녀석들에게 궁정 알력 관계에 대해서 듣겠다고?”

“다들 귀족이고, 여기에서 오래 근무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알렉사는 자신이 약간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제안 혹은 배려는 굉장한 것이었다. 기사단장이며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귀족인 오덴발트 공작이 이 궁정의 생리와 왕실―귀족 간 역학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면 당연히 두 손 들고 환영해야 마땅했다.

다만 그녀는 라인하르트와 너무… 접촉하는 시간을 갖고 싶지 않았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이미 라인하르트는 몇 차례에 걸쳐 알렉사에게 이곳에서 일하는 것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교대 근무에 대해서, 국왕이나 대비, 공주의 곁에 있을 때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왕궁을 자주 방문하는 귀족들에 대해서, 왕실 기사단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등등.

언뜻 주변 사람을 떠보니 라인하르트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부하 직원에게 과도하게 ‘친절’하게 굴지 않았단 뜻이다.

결국 주변에서도 ‘기사단장이 린다우 경을 특별 대우 해준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아직까지는 그 때문에 기사들이 그녀를 고깝게 보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사는 이런 식으로 해서 겉도는 존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제가… 알아서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음, 알렉산드라 경.”

라인하르트가 눈을 슬쩍 내리깔고는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가 슬며시 알렉사를 보며 물었다. 아주 불쌍한 얼굴이었다. 알렉사가 거절하기 어려운 그런 얼굴.

“내가 불편해서 그래?”

“…단장님은 바쁘실 텐데, 굳이 저한테 따로 시간을 내실 필요가…….”

“바빴으면 이러지도 못하지.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면 안 될까?”

아카데미 동기로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묻는 라인하르트의 목소리가 어쩐지 맥 빠진 듯했다. 아냐. 정신 차려, 알렉사! 라인하르트가 거절당했다고 풀 죽을 리 없잖아! 그녀는 속으로 외쳤지만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얼굴이었다.

“…이번까지입니다. 특혜받는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누가 그런 소릴 해?”

“아니요.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단장님이 저를 편애한단 소리가 나올 거 같습니다.”

“하하하…….”

어쩐지 그의 웃음이 묘하게 들렸다. 알렉사는 일부러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확실히 라인하르트는 다른 기사들에 비해 알렉사를 ‘편애’하긴 했다. 다른 기사들도 “같은 아카데미 동기라더니…….” 하며 좀 신기하게 여기는 듯했다. 알렉사는 분명 이러다가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알렉사의 의문에 답을 해준 건 울리히였다.

“뭐, 단장님은 좋은 사람이니까. 다들 단장님이 알렉산드라 경에게 뭔가 좀 더 해주는 건 이유가 있겠거니 하는 거야.”

“…좋은 사람이라고요?”

“왜, 아니야?”

울리히의 되물음에 알렉사는 손을 내저으면서 부인했다.

“아뇨,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뭐, 알렉산드라 경이 기억하는 단장님은 어떤 사람인지 나도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는 있거든. 하지만 뭐, 그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단장님도 좀 바뀌었지. 기사들하고 허물없이 잘 지내는 거 봤잖아?”

“그러게요. 그건 좀 놀랐어요.”

“이상적인 리더지. 누구보다 앞에 나서고, 부하들을 잘 감싸주고,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도와주고……. 물론 그 과정이 좀 고되긴 하지만, 어쨌든.”

알렉사는 울리히가 라인하르트에 대해 가진 감정이 제법 좋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건 주변 누구와 이야기해도 알 수 있는 바였다. 왕실 기사단의 단원들은 그들의 단장을 참 좋아했다. 비록 그가 지위에 비해 매우 젊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고참까지도 라인하르트를 존중하는 게 느껴졌다.

그때 울리히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라 경은 단장님을 불편해하는 거 같더라고.”

“네?”

“라인하르트 단장님은 꽤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거 같은데… 아카데미 때 안 친했어?”

“그게… 음…….”

안 친했느냐고? 비록 라인하르트가 사과를 했다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정말이지 그토록 나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다신 안 봐도 되어서 후련할 정도였으니까.

“너무 불편해하지 말라고. 그냥 즐겨.”

하지만 불편한걸요. 알렉사는 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러나 진짜 불편한 일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걸 그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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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교대 근무를 마치고 기사단 건물로 돌아온 알렉사는 누군가가 뒤에서 큰 목소리로 외치는 걸 들었다.

“선배! 선배!”

궁에서 선배라는 말을 쓸 일도 있나? 알렉사는 이상하다 여기기만 할 뿐,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서 함께 걷던 동료 기사도 관심이 없는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말에 알렉사는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선배! 아휴…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

궁에서 자신을 부를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의아한 기분으로 그녀는 멈춰서 뒤를 돌았다. 그리고 곧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 마티어스!”

“선배, 내 목소리도 잊어버렸어요?”

시원한 웃음을 띤 마티어스가 성큼성큼 알렉사에게로 걸어왔다. 알렉사의 옆에 서있던 선임 기사가 흥미롭다는 듯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티어스는 최근 마법과 행정 양쪽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필라흐 소백작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대귀족인 바이로이트 후작의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다.

그런 이가 너무나도 스스럼없이 친근하게 신입인 알렉사를 불러대니 당연히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왕궁에 있는데 이렇게 만나기가 힘들어서야. 잘 지냈어요? 세상에, 변경에서 오자마자 연락이라도 올 줄 알았는데 비앙카 누나만 만나고. 이러기예요?”

“미안, 너무 정신없었어. 게다가 네가 바쁠 것 같아서. 비앙카에게 들으니 요새 일이 많다며.”

“그래도 선배 만날 시간 정도는 충분히 있다고요! 아, 젠장. 지금은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는데……. 세 시간 뒤에도 여기 있을 거예요?”

“응. 그럴 거야.”

“그럼 제가 이리로 올 테니까 그때 봐요!”

마티어스는 스스럼없이 팔을 뻗어 알렉사를 가볍게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어라, 어라. 알렉사는 약간 당황한 채로 그의 포옹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선 알렉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마티어스는 그대로 어디론가 뛰어 사라졌다.

얼떨떨한 기분인데, 옆에 있던 선임 기사가 어쩐지 능글맞은 얼굴로 그녀의 팔을 툭 쳤다.

“뭐야, 필라흐 소백작이랑 잘 아는 사이?”

“아, 네. 소백작의 친척 누나가 저와 친합니다.”

“아하. 그래애?”

두 사람은 기사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오는 걸 보고 몇몇이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알렉사는 더 이상 아까의 그 화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선임은 마티어스의 일이 너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목청이 큰 그는 귀 따갑게 떠벌려 댔다.

“필라흐 소백작이 이따 오면, 뭐 할 거야? 응?”

“카셀 경, 제발…….”

“아무리 봐도 소백작은 린다우 경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던데.”

“뭐? 필라흐 소백작이라고?”

“린다우 경, 데이트 해?!”

순식간에 기사단 건물이 와글와글해졌다. 알렉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체 이놈의 기사단은, 별것도 아닌 일에 왜 다들 야단법석인지! 남의 일에는 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알렉사는 사춘기 소녀들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어 떠들어대는 덩치 크고 수염 난 기사들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고는 손을 내저었다.

“일단, 다들 진정하십쇼. 저 데이트 안 해요. 마티어스는 친구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밀린 이야기나 하겠죠!”

“하지만 ‘그’ 마티어스 폰 필라흐랑 그냥 친구라고?”

“‘그’ 마티어스 폰 필라흐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친구 사촌 동생이고, 친구예요!”

“허, 요새 구혼자가 쏟아지는 수도의 인기남을 두고 친구 동생이란다.”

“린다우 경,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알렉사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고는 연신 아니라고, 아니라고 부인하고 또 부인했다. 사실이 그러한데 어쩌겠는가.

“마티어스는 진짜 그냥 친구라고요.”

하지만 알렉사는 몰랐다.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의 뒤편에 라인하르트가 있다는 사실을.

“친구일 수밖에 없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단장님의 목소리에 모두가 기겁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라인하르트는 미묘한 웃음을 띤 얼굴로 팔짱을 낀 채로 말을 이었다.

“경들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알렉산드라 경의 이상형은 내가 잘 알거든. 동기니까.”

“앗, 단장님!”

저 인간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알렉사는 당혹스러웠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알아봐야 뭘 얼마나 안다고 저런 말을 지껄인단 말인가. 어째서인지 여러 기사들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힘으로는 라인하르트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라 경은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더군. 그리고, 잘생겨야 하고.”

와. 이런 미친…….

알렉사는 속으로 상소리를 지껄였다. 그건 불쾌감이나 당황스러움보다는 놀라운 감정 때문이었다. 라인하르트가 그런 걸 알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변의 친한 친구들에게는 몇 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말을 하긴 했었더랬다. 하지만 그걸 그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라인하르트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단장의 말에 주변에서 작은 야유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럼 린다우 경은 평생 연애고 결혼이고 안 할 생각인 거야?”

“실력에서 탈락도 수두룩하지만 얼굴에서 이미 많이들 탈락하겠는데.”

“아니 근데, 필라흐 소백작은 그래도 얼굴은 통과잖아!”

“에이, 그래도 린다우 경을 어떻게 이기겠어? 마법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오러를 쓰는 기사는 못 이기지.”

다들 한마디씩 얹어대는 동안 알렉사의 얼굴은 점점 새빨개져 갔다. 그러다가 결국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다.

“그만 좀 하십시오! 어휴, 왜 이렇게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습니까?”

알렉사는 불퉁한 얼굴로 일부러 험하게 사람들을 헤치고 나섰다. 신입 놀리기와 호기심에 모였던 기사들이 얼른 길을 비켜주었다. 그녀가 멀어져 가는 걸 보며 기사들은 저들끼리 낄낄대거나 실망하거나 하며 조잘댔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라인하르트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번져갔다.

“다들 한가한 모양이지.”

어쩐지 서리가 내린 듯 차게 들리는 단장의 목소리에 풀어져 있던 기사들은 급히 바짝 긴장하며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얼굴이 희게 질린 부하들을 향해 그는 좀 더 활짝 웃어 보였다.

“아니면 다들 기운이 넘치거나.”

“아니, 아닙니다!”

뭔가 틀어졌다고 느끼며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부정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작게 혀를 차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여기 있는 인원 전부, 다들 연병장에 집합한다. 시간도 힘도 남아돌아서 이렇게 농땡이 칠 수 있으면 좀 더 훈련을 해도 되겠어.”

아닙니다, 아니에요! 다들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뿌리며 라인하르트를 향해 외쳤지만, 그 목소리가 그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3분 후 연병장에서 모두 보도록 하지.”

젠장, 우리 이제 다 죽었다. 재미있는 일 하나 생겼다고 모여들었던 기사들은 완전 죽상이 되어서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보던 라인하르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조금 침울해졌다.

연병장으로 뛰어가던 중, 한 기사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아!” 하고 외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제 옆을 나란히 뛰던 동료의 팔을 툭 치고는 말했다.

“아니 근데, 린다우 경 이상형 말이야.”

“야, 이 새끼야. 이 와중에도 그게 생각나냐?”

“아, 좀 들어봐. 지금 그 조건 맞는 사람이 과연 있겠냐, 하고 생각했는데 딱 한 사람밖에 없지 않냐?”

그 말에 동료 기사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워, 잠깐. 정말이네?”

“그럼 어, 린다우 경 이상형이 단장님이라는…….”

그들의 추측은 비약이긴 했지만, 의외로 또 잘 맞아떨어졌다는 게 함정이었다.

*

왕궁에서 일하게 된 지 이제 겨우 두 달째지만, 알렉사는 제법 유명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녀의 명성은 우선 실력에서 먼저 알려지긴 했다. 그러니까, 나라에 단 하나뿐인 오러 발현자가 둘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린다우라는 인물을 더 유명하게 만든 요소들은 따로 있었다. 그중 하나는 출신. 평민이 아카데미에 차석 입학해서 수석 졸업을 했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게다가 그런 능력자를 북서부로 보냈다는 것 또한.

어떤 이는 알렉사를 북서부로 보냈기에 이를 갈고 싸운 끝에 오러를 사용하게 된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런 개고생을 하지 않고 처음부터 성적에 맞게 왕실 기사단에 입단했다면―보통 수석 졸업자는 그랬다― 어련히 오러를 썼으리라고 반론했다. 어쨌든, 알렉사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알렉사의 이름은 좀 더 다른 방면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특히 귀족 여성들 가운데서도 미혼이거나, 미혼 자녀를 둔 이들에게 그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알렉사는, 사실 잘 알지 못했다.

그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 알게 된 건 아주 뜻밖의 일 때문이었다.

그날은 알렉사가 본궁에 들어가게 된 날이었다. 어린 왕은 드디어 약혼자를 맞이했고, 그녀는 혼인을 석 달 앞두고 궁에 들어왔다. 예비 왕비인 라이헨할 백작가의 장녀 로제는 왕과 비슷한 연배인 10대 후반으로, 상냥하고 다정하지만 강직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어쨌든 로제 폰 라이헨할은 궁에 들어와 적응하다가, 가벼운 다과 모임을 열었다. 친한 이들만 부르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왕실 일원이라는 자리는 그런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제법 골고루, 다양한 집안의 아가씨들을 불러 모으게 됐다. 그 인원이 약 열댓 명에 이르렀다.

“해서, 알렉산드라 경이 레이디 라이헨할의 곁을 좀 지켜야겠어.”

“알겠습니다.”

라인하르트는 빙긋 웃으며 몇 장의 서류를 건넸다. 로제 폰 라이헨할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사항들이 적힌 그 서류를 받으며 알렉사가 물었다.

“저 말고 누가 또 배치됩니까?”

“음, 아쉽지만 경 혼자야.”

“…네?”

“레이디 라이헨할이 기사들을 잔뜩 두고 싶지 않다고 계속 거부해서. 사실 알렉산드라 경 한 사람으로도 경호는 충분하니까.”

라인하르트의 말은 가벼웠지만, 알렉사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단독으로 왕실 일원의 경호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무위를 지닌 이는 맞았지만, 왕실이나 귀족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스스로 어떤 실례를 저지를지 몰라서 그동안은 부득불 근접 경호를 피해왔다.

하지만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렉사는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가 한숨을 작게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레이디 라이헨할은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도 아니고, 그저 짧은 시간 가벼운 사교 모임을 갖는 것뿐이니까.”

라인하르트가 그렇게 말한다면, 아마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알렉사는 라인하르트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은 신뢰했다. 그가 일부러 알렉사를 곤경에 빠트릴 사람이 아닌 것도 알았고, 공적인 면에서는 아주 공정하고 칼 같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고, 예비 왕비의 티 파티에 갔는데…….

‘…대체 뭐야, 이 분위기는.’

딱히 예비 왕비의 다과 모임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고, 환한 응접실에는 세 개의 탁자가 놓여 다섯씩 모여 앉아있었다. 화려하지만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게 꾸며진 탁자마다 향긋한 차와 함께 가벼운 핑거 푸드와 디저트가 놓여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다과 모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알렉사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로제 폰 라이헨할의 뒤에 서있어서 모두 그녀를 바라보는 것일까? 그럴 순 없었다. 이 모임의 주최는 로제이니 다들 당연히 미래의 왕비를 쳐다보는 게 마땅할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아가씨들의 눈길이 자꾸만 알렉사에게로 향했다. 기사이기에 타인의 기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알렉사는 거의 티 파티가 시작하자마자 알아차렸다.

대체 왜 자꾸만 날 쳐다보는 거지? 알렉사는 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눈길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호기심이나 호감이 아니었다.

아주 노골적인 시기와 질투, 불쾌가 알렉사의 온몸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제는 아리따운 웃음을 띤 채로 제 근처에 앉은 귀족 아가씨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오가는 이야기를 듣자니 로제가 갑자기 왕비에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기는 이가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로제의 어깨는 아주 약간 굳어 보였다. 이 자리가 좀 불편한 모양이었다.

알렉사는 미간을 찌푸리거나 헛기침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되도록 무표정을 유지한 채, 오로지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에게만 신경을 집중하려고 했다. 로제와 모든 귀족 아가씨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신과 상관없는 것들이어야 했다. 그녀의 임무는 로제를 지키는 것뿐.

그러나 그런 그녀의 노력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결국 아가씨들의 수군거림이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별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분이 그리도 아끼신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네요.”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긋하거나 순한 것도 아닌 듯하고요.”

“어떻게 그러겠어요? 남자들이랑 매일 부대끼고 검을 휘두르는데…….”

저건 절대로 내 얘기잖아. 알렉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가씨들은 그녀가 알아차린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갔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알렉사에게 꽂혀있었다.

“근데 정말 사실이긴 할까요? 전, 정말이지 믿고 싶지가 않아요. 그분께서 어떻게 저런…….”

“흥, 사내들과 한 공간에서 지내는데 꼬드기는 방법 같은 거야 금방 배우지 않겠어요?”

“정말 말도 안 돼요.”

…대체 누가 나를 아낀다고 저렇게 씹어대는 거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비난에 알렉사는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들이 저렇게 자신을 싫어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갑작스럽게 로제가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나저나… 다들 아시겠지만, 제 뒤에 있는 분이 바로 얼마 전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이랍니다. 왕실 기사단의 유일한 여자 기사이자, 오러 사용자죠.”

로제가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알렉사는 당황했지만, 가까스로 의무적인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덕분에 레이디 라이헨할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실 여기 있는 모두가, 아니 수도의 모든 아가씨들이 린다우 경을 궁금해하고 있답니다.”

“저를…요?”

그때 건너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당연한 일이죠!”

뭐가 당연하냐는 물음을 할 새도 없었다.

“오덴발트 공작 각하가 경을 아주 아끼고, 또 편애하신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그 냉정한 분이 가까이 둔 여자는 린다우 경이 처음이랍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누가 누구를 아끼고 편애해? 알렉사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단장님이, 저를 아끼고, 그, 편애를… 대체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어머, 모른 척하시기는. 이미 수도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는걸요.”

“그렇게 칭찬에 박한 분이 린다우 경만 보면 칭찬 일색이라던가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나서서 고쳐주려 하신다고도 하고…….”

“아카데미 동기라고 들었는데, 예전부터 그랬던 건가요?”

“정말로 공작 각하가 경을, 설마하니…….”

정말 그 남자가 너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니!

단박에 아가씨들이 와글와글 들끓어 올랐다. 먼저 말을 꺼낸 로제를 바라보며 알렉사는 ‘어떻게 좀 해달라’는 애타는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로제는 빙긋 웃을 뿐, 가타부타 말을 보태지 않았다.

알렉사는 로제가 이 자리에서 자신을 써먹을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에게 쏠릴 여러 관심을 알렉사에게 돌리기로 한 것이다. 예비 왕비로서 여는 첫 다과 모임이란 압박감에서 탈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 않은가?

그걸 미리 생각해 두었기 때문에 알렉사 한 사람만 호위 기사로 보내라고 했던 걸까? 알렉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려 입술을 감쳐물었다. 시끌시끌한 아가씨들에게 곧장 반박하려 했지만 어쩐지 목이 잠겼다.

‘라인하르트가 나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와 자신이 얼마나 데면데면하게 지내는지 옆에서 보면 다들 알 수밖에 없다. 애초에 라인하르트가 알렉사의 편의를 봐주고 다른 이들과 차별했다면, 이미 기사단에서부터 말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단의 누구도 그녀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가 잔뜩 불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린다우 경의 이상형이 바로 오덴발트 공작 각하라면서요?”

“…네?”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알렉사는 얼빠진 얼굴로 그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하는지 목소리가 한층 당당해졌다.

“기사단에 계신 분에게 들었어요. 린다우 경이 오덴발트 공작 각하를 이상형으로 두고 마음에 담았다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십니까?”

기가 차서 알렉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럴 자리도, 입장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과열되는 듯하자 아주 시기적절하게 로제가 끼어들었다.

“이런, 다들 진정하세요. 정확하지 않은 사실로 린다우 경을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안 되지요.”

알렉사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대체 누가 이런 상황을 조장했는데? 상대가 왕비마마가 될 분이라 참는 수밖에 없었지만 생각 같아서는 정말……. 그녀는 속으로 참자, 참자, 하고 되뇌었다.

“린다우 경이 아니라고 하니, 더는 이걸로 경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로 하죠.”

가장 높은 사람이 그리 말하니 아가씨들은 입이 뾰로통하게 나와서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사나운 눈길은 여전했다. 그들이 대충 진정이 되었다고 생각한 건지, 로제가 알렉사를 보며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린다우 경.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어 경을 불편하게 만들었군요.”

일부러 그런 게 빤히 보이는데, 윗사람이 사과를 하니 안 받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렉사는 부글거리는 속을 꾹 눌러 참고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레이디께서 일부러 만든 상황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다들 경에 대해 궁금해하던 걸 못 참고 말았네요.”

그 뒤로 티 파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렉사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로제를 그녀의 방까지 모셔다드린 뒤, 알렉사는 정신없이 걸어 기사단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진 걸까.

라인하르트가 자신을 특별 대우하던가? 알렉사는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사실 별다른 게 없었다. 얼굴이 보이면 인사하고, 불편한 게 없는지 묻고, 마치 아카데미 때처럼 대련을 하고, 또 지고 말았지만 어쨌든 전과는 달리 그녀의 장점을 칭찬하고……. 고작 이런 걸로, 남들에게 미움을 산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알렉사 또한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선을 긋고 있는지. 또 얼마나 엄격하고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에게만 그토록 풀어진 얼굴로 미소를 짓는 것 또한.

‘하지만 그게 뭐?’

알렉사는 억울했다. 고작 그 정도 일에 라인하르트가 알렉사를 마음에 두었다든가, 하는 염문설 비슷한 게 도는 거라면 이미 세상 모든 사람이 모두 눈만 마주쳐도 서로서로 붙어먹었다는 이야기가 돌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쩐지 가슴 안에 커다란 바위가 얹어진 기분이었다. 왕실 기사단에서 라인하르트와 다시 만난 뒤로, 아카데미에서처럼 날 세우거나 빈정대지 않고 지낸 건 사실상 전부 라인하르트의 행동 덕이었다.

내심 알렉사는 먼저 다가와 준 라인하르트에게 조금은 고마워하면서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마운 마음보다는 오로지 부담감만이 잔뜩이었다.

침울한 얼굴로 알렉사는 기사단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예비 왕비를 호위하는 임무를 마쳤으니 보고를 해야 했다.

그 말은 즉, 지금 당장 라인하르트와 얼굴을 맞대야 한단 뜻이었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건물 안으로 내디딘 걸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어째서 기사단장실까지의 거리는 이토록 짧은지. 문 앞에 선 알렉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곧 “들어와.” 하고 라인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사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곧장 경례를 올렸다. 평소 같았으면 똑바른 시선으로 라인하르트의 얼굴을 보았겠지만, 지금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시선이 저절로 조금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라인하르트는 기민하게 알렉사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알렉산드라 경, 호위 과정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걱정 어린 그의 물음에 알렉사는 문득 라인하르트가 자신에게 말할 때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기사들에게는 이렇게 부드럽게 묻지 않는다. 격의 없이 지내긴 해도 그는 기사단장이며 공작이었다. 숨길 수 없는 권위와 엄격함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라인하르트가 알렉사에게 물을 땐 어떠한가.

저토록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다른 이들에게 내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닙니다. 레이디 라이헨할의 티 파티는 별다른 문제 없이 잘 마쳤습니다. 방까지 모셔다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런 건데? 레이디 라이헨할이 경에게 뭐라고 하던가?”

뭐라고 하면 어쩔 건데. 미래의 왕비마마가 기사 나부랭이에게 성질을 내더라도,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괜히 불뚝, 심술이 솟았다.

알렉사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라인하르트가 알렉사의 눈동자에 어린 불꽃을 보고는 약간 움찔하는 게 보이자,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왜, 내가 이럴 줄 몰랐어?

어쩌면 애초에 라인하르트가 아카데미에서 했던 조언을 뼛속 깊이 새기고 수도로 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고, 서로 다른 격을 인식하고 그 경계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어린 소공작님의 소중한 조언을 무시해선 안 될 일이었다.

아니, 아예 수도에 오지 않고 북서부에 처박혀 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오러 따위 감추고, 그냥 조용히 살았어야 했는데.

라인하르트가 변했다고 해서 마음을 풀어버릴 일이 아니었다. 그와는 지금까지 거리를 두고 살았듯,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멀리 있어야 했다.

괜히 어린 날의 슬픔이 이 순간에 치고 올라왔다. 너는 왜 그때 그렇게 예뻐서는. 어째서 단숨에 내 눈을 사로잡아서는. 그 짧은 순간 마음을 한번 사로잡혔던 게 이토록 두고두고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장님, 지금 세간에 도는 소문을 알고 계십니까?”

“소문이라니…….”

“단장님이 저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저절로 빈정대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녀의 말에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흥, 것 보라지. 너도 의도한 게 아닌데 이런 결과가 나와서 기분 상했지? 알렉사의 혀가 좀 더 못된 마음을 품었다.

“그래서 레이디 라이헨할의 다과에 모인 아가씨들이 전부 벌 떼처럼 달려들어서 저를 추궁해 댔습니다. 정말로 단장님이 저를 좋아하기라도 하느냐고.”

“…….”

“게다가 어디서 그런 말이 새어 나갔는지, 하… 제 이상형이 어쩌고 하면서 저보고 단장님을 마음에 두고 있느냐고. 그런 소리도 듣고 말입니다.”

그녀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숨을 푸― 하고 내뱉었다. 그 숨결에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이 위로 훅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그 머리카락 뒤편에서 번뜩였다.

“모르셨나 봅니다, 단장님?”

“…전혀, 몰랐어.”

“가능하다면 단장님께서 주변에 오해라고 정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에 라인하르트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래, 너도 할 말 없겠지. 어디서 되지도 않는 평민 기사랑 엮이다니, 어처구니도 없을 거고.

알렉사는 아예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두기로 했다.

“…라인하르트.”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라인하르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녹음 짙은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네가 아카데미에서처럼 나와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서, 잘해주려고 노력한 건 알아.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다른 기사들 대하듯 그렇게 하란 말이야.”

“알렉산드라, 나는…….”

“이런 오해 때문에 듣기 싫은 소리를 듣고 다니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주면 정말, 고맙겠어.”

그리고 아예 쐐기를 박았다.

“애초에 원한 적 없는 배려야.”

라인하르트는 그 말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으로 알렉사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쩐지 좀 억울해 보이는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울적해 보이는 듯도 하고…….

하지만 알렉사는 애써 그의 슬퍼 보이는 눈을 무시했다. 내가 알 바 아니다. 내가 신경 쓸 게 아니다. 저 인간은 그냥 내 상관이다. 나랑 아무 관련 없는 인간이다.

자세를 바로 하고 알렉사는 고개를 숙였다. 이게 그와 개인적으로 마주하는 마지막이길. 예전에 아는 사이로서 대화하는 마지막이길 바라며.

“그러니 부탁합니다, 단장님. 오해받을 만한 일은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올리고 돌아 나오는데, 라인하르트는 끝내 그녀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 나오면 마음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어쩐지 기분이 찜찜하고 불편했다. 알렉사는 고개를 흔들고 미련의 찌꺼기를 털어버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한번 생긴 소문이라는 건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의 당사자들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으면 결국 제풀에 지쳐 꺾이기 마련이었다.

알렉사와 라인하르트를 둘러싼 얼토당토않은―알렉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랬다― ‘염문설’도 그랬다. 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다’던 소문은 잠잠해졌다. 여전히 아가씨들이 가끔 눈을 흘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의 그 다과 자리에서처럼 대놓고 알렉사에게 뭐라 하는 이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라인하르트는 그날의 부탁을 제법 충실히 수행했다. 전처럼 알렉사를 보고 말랑한 얼굴로 웃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없었다. 혹시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물어오는 일도 없었고, 개인적으로 대화할 순간도 없었다. 그녀의 검에 대한 칭찬은, 글쎄… 아예 그는 알렉사와 검을 맞대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알렉사의 목표는 더 이상 라인하르트를 꺾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에게 계속 경쟁의식을 불태워서 뭐 하겠는가.

그러나 알렉사는 종종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왜 그렇게 미련이 잔뜩 남은 옛 남자 친구 같은 눈을 하고 있느냐 말이다. 언제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나 있었다고.

그냥 차라리 ‘저 발칙한 평민 기사가 과거의 인연을 믿고 까불고 대든다’며 막 더 혹독하게 굴었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는 대귀족일지언정 상대를 권력과 권위로 깔아뭉개는 인간은 못 되었다. 알렉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그의 얼굴을 못 본 척하고 지나치느라 바빴다.

어쨌든 점점 수도에서의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이대로 좀 더 지내다가 상황을 봐서 다른 곳으로 이전 배치를 해달라고 요청해야겠다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가능하다면 다시 북서부로 돌아가는 것도 좋으리라. 그곳에 가면 자신을 반가이 맞이해 줄 전우들도 있으니.

하지만 상황은 알렉사가 뜻하는 대로 조금도 돌아가 주지 않았다. 오히려 훨씬 혼란스럽고 엄혹한 방향으로 마구 달려갔다.

*

“온다! 다들 검 들고, 자기 위치를 지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번쩍하고 번개가 쳤다. 비에 젖은 서로의 면면이 잠시 보였다가 다시 어둠에 잠겼다. 뒤이어 꽈르릉! 산이 무너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소리가 세상을 메웠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비는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렉사는 거칠게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검을 다시 바투 잡았다. 제기랄. 그녀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다시 한번 날카롭고 환한 빛이 어둠을 갈랐다. 알렉사는 저 너머에서 와아아, 고함을 치며 달려오는 병사들을 확인했다. 번개는 순간이기에 다시 모두 암흑에 휩싸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충분히 적의 존재와 규모를 인식할 수 있었다.

“퉤, 꼼짝 않고 성에 틀어박혀 있더니 이딴 잔재주로 뒤통수를 다 치고!”

선배 기사 하나가 거칠게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아마 모두의 마음이 그와 비슷할 것이다.

이제 거의 다 끝난 전쟁이었다. 아마도 적들의 한밤중 우중 기습이 마지막 발악이리라. 이 정도를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왕실 기사단은 약하지 않았다. 검을 꼬나쥔 손들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알렉사는 검에 오러를 덧씌우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지난 시간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번 전투만 이기면! 그녀의 검에서 오러가 좀 더 거세게 불타올랐다.

이 싸움은 고작 4개월 전에 시작되었다. 알렉사가 왕실 기사단에 적을 둔 지 1년이 되기 한 달여 전의 일이었다.

어린 왕, 알폰소 노이에 폰 콘스탄츠는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데다, 어머니인 대비 라리에트는 타국에서 온 터라 왕의 뒤를 받쳐줄 외척 세력이 없었다.

아버지인 선왕이 너무 일찍 죽은 탓에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새 왕은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층을 단단히 하려고 애썼지만 그리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왕의 형, 콜로만 공작이 야심을 드러내고 방해를 해댔기 때문이다.

처음에 콜로만 공작은 자신이 섭정공이 되어 왕이 안정적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 지원하겠다며 나섰다. 그러나 그의 속셈을 뻔히 아는 대비 라리에트가 그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알폰소 왕이 비록 어리다 해도 얼마 안 있으면 성인이 될 나이인데, 굳이 백부가 나서서 왕의 권한을 대리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제법 대놓고 까인 탓일까, 콜로만 공작은 앙심을 품고 아예 제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린 왕을 못 미더워하거나, 콜로만 공작 쪽으로 붙어 뭔가 한탕 해 먹어보려는 자들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이 어느덧 2년이었다.

그나마 알폰소 왕이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온 데에는 오덴발트 공작가의 힘이 컸다.

‘콘스탄츠의 유일하고도 적법한 왕은 오직 알폰스 노이에 폰 콘스탄츠 전하 단 한 분뿐이십니다.’

대귀족 중 대귀족인 오덴발트 공작가의 가주, 라인하르트가 그렇게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신왕의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되길 맹세했다. 그렇기에 그가 이끄는 왕실 기사단이 강력한 우군으로 자리 잡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알렉사는 몰랐지만 그녀는 그런 와중에 오러를 발현, 왕실 기사단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왕실에서는 당연히 쌍수 들고 그녀를 환영했다. 오러를 쓸 수 있는 일당백의 강력한 기사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적잖은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콜로만 공작은 오히려 더 제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불온한 조짐이 보인다는 첩보가 연신 들어온 지 4개월, 결국 그는 내란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콜로만 공작의 영지는 수도 빈터투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왕실 모르게 그곳에 사병을 잔뜩 모아두었던 그는 심지어 불측한 소문까지 퍼트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왕은 선왕의 적자가 아니며 외국인 대비가 사통하여 낳은 사생아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선동에 넘어갈 만한 귀족은 없었다. 알폰소 왕은 그야말로 선왕의 판박이였으니까. 하지만 왕과 선왕의 얼굴을 모르는 백성들 사이에서는 의구심과 불안감이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알폰소 왕 대 콜로만 공작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미리 오덴발트 공작이 단속을 해둔 덕에 왕실 기사단과 수도의 기사단, 그리고 병력에서는 이탈자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숨어들었던 쥐새끼를 조용하지만, 착실히 잡아내어 처리해 둔 덕이었다. 수도 내부에서의 공모를 의도했던 콜로만 공작의 입장에서는 뼈아픈 일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이끄는 병력은 폭풍처럼 콜로만군을 몰아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단 한 걸음도 내어주지 않고 수도로 진격하던 콜로만군을 박살 낸 것이다. 예상보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본대가 허물어지자, 콜로만 공작에게 붙었던 귀족들이 하나둘 발을 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왕실의 방비가 단단한 데다, 전투에서도 자꾸 지니 이길 공산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왕이 사생아라는 소문에 반격이라도 하듯, 다른 소문이 퍼져나갔다.

‘콜로만 공작이 왕이 되고 싶어서 아우인 선왕을 독살한 게 아니냐.’

점점 불리해져만 가고 마침내 조금의 승산도 보이지 않자 콜로만 공작은 급하게 후퇴했다. 이 모든 일을 주도한 라인하르트의 철두철미함에 사람들은 경의를 표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콜로만 공작이 숨어든 그의 성 앞에서, 왕실 기사단과 병사들은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 번의 발악은 남았을 것이라고 라인하르트뿐만 아니라 모두가 예상하였다.

콜로만 백작의 독기가 하늘에 닿기라도 한 건지, 그의 급습을 도울 폭우가 쏟아진 건 늦은 오후부터였다. 기사단은 방비를 철저히 하였지만, 독 안에 든 쥐의 발악은 제법 매서웠다.

“아, 제기랄! 비라도 안 왔으면!”

왼쪽에서 검을 휘두르던 울리히의 목소리에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할 뻔했다. 그러나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전투에서 여유를 부릴 만큼 그녀는 오만하지 않았다.

알렉사가 검기를 흩뿌리자, 달려들려던 적병들이 기겁하며 흩어졌다. 어차피 저들도 콜로만 공작의 종용에 싸우러 나왔기 때문이다.

한밤중 폭우를 틈탄 기습은 성공적인 듯 보였으나, 승기를 잡은 건 국왕군 쪽이었다. 마침내 자정이 되었을 즈음, 굳게 닫혔던 성문이 열렸다. 와아아, 함성과 함께 쏟아져 들어간 병사들은 곧장 영주 저택으로 향했다.

저벅저벅. 빗물에 젖은 발이 활짝 열린 콜로만 공작 저택을 밟았다. 깨끗하게 반짝였을 대리석 바닥은 금세 진흙투성이로 변했다.

“니콜라스 콜로만을 찾아라!”

“보이는 자들은 모조리 잡아라!”

미리 빠져나가지 못한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콜로만 공작 부인과 그 자식들은 금세 잡혔다. 그들은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밧줄에 꽁꽁 묶여 1층 로비에 무릎 꿇려졌다. 미래에 어떤 꼴이 될지 이미 짐작한 자들은 흐느끼며 살려달라고 연신 빌어댔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잡혔음에도 콜로만 공작만은 보이지 않았다. 라인하르트가 공작 부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그녀의 턱을 잡아 들었다. 희끗한 머리가 산발이 된 채, 공작 부인은 울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는 입술로 공작 부인이 애원했다.

“살… 살려주시오, 오덴발트 공작. 제발…….”

“니콜라스 콜로만은 어디에 있지?”

“그는, 그는 3층… 공작의 집무실 서가에 연결된 비밀의 방에…….”

목숨 앞에서는 남편도 별 볼 일 없었다. 어차피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게 콜로만 공작이었으니 이 정도 배신쯤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라인하르트는 공작 부인의 턱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3층으로 향했다.

“오버팔츠, 카를로, 린다우. 따라와.”

알렉사는 기사단장의 부름에 착실히 그의 뒤를 따랐다. 어쩌다 보니 그녀가 라인하르트의 바로 뒤에 붙어서 걷게 되었다. 3층으로 향하는 동안, 라인하르트가 차분하게 주의해야 할 것을 알려주었다.

“니콜라스 콜로만은 대단치는 않아도 마법사이긴 하다. 어떤 마법을 준비해 놓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하도록 해. 생포가 목표이지만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사살해라. 그깟 쥐새끼의 목숨 하나 살리려다가 경들이 다치거나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말에 뒤를 따르는 세 기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사는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물을 손으로 대충 쓸어 떨어내 버렸다. 발소리조차 죽이지 않고 네 사람은 3층의 공작 집무실에 금세 도착했다. 라인하르트가 발로 문을 걷어차자, 잠겨있었던 모양인지 문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우당탕 열렸다.

공작 부인이 말한 대로 콜로만 공작은 비밀의 방에 있는 모양이었다. 집무실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라인하르트가 검에 검기를 두른 채 책장을 하나씩 밀어보았다. 다른 이들도 각자 책장에 들러붙어서 비밀 통로가 어디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알렉사가 작게 그들을 부르며 손짓했다.

“여기, 움직입니다.”

그 말에 라인하르트가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책장을 뜯어낼 듯 당겼다. 문처럼 활짝 열린 책장 너머로 어둑어둑한 방 하나가 있었다. 작은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그 공간에, 초췌한 사내 하나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그를 향해 다가서자, 그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빌어먹을 오덴발트… 네놈만 아니었어도…….”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닌 자리를 탐낸 결과일 뿐이다, 니콜라스 콜로만.”

“감히 그따위로 나를 부르다니! 발칙한……!”

“네놈이 여전히 왕가의 일원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너는 그저 반역자에 불과하다. 순순히 항복해라.”

라인하르트의 항복 요구에 콜로만 공작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리쳤다.

“내가 여기에서 졌다고 해서 순순히 개처럼 수도까지 질질 끌려갈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여기에서 다 같이 죽어버리는 거야!”

그때, 라인하르트의 발아래에서 눈 부신 빛이 솟구쳤다. 반사적으로 라인하르트가 소리쳤다.

“오지 마!”

제기랄, 오지 말란다고 안 가겠냐! 알렉사는 검을 뽑아 들고 곧장 그들에게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검이 번개처럼 콜로만의 가슴팍을 베었다.

그러나 그가 발동시킨 마법은 멈추지 않았다. 뒤편에서 함께 온 오버팔츠 부단장과 카를로 경의 고함이 들렸지만,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렉사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나도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경악과 체념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게 무슨 마법이든 넌 거기서 그냥 죽으면 안 되지! 알렉사가 손을 뻗으며 바닥을 박찼다. 그녀의 손이 아주 느리게,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라인하르트에게 닿는 순간, 알렉사는 아주 세게 그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알렉산드라, 왜……!”

라인하르트의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흰빛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공기가 응축되었다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방을 메웠다. 오버팔츠와 카를로가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비밀의 방에 남아있는 건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콜로만 공작의 시체뿐이었다.

콜로만 공작의 마지막 회심의 마법에 휩싸였던 라인하르트와 알렉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시야가 바뀌었다고 느낀 순간, 알렉사는 자신이 라인하르트의 품에 꽉 끌어안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어마어마한 충격이 두 사람을 덮쳤다. 아니, 알렉사는 그나마 충격이 덜했다. 그녀를 감싸 안은 라인하르트가 등을 부딪친 바람에 알렉사는 무사했으니까.

쿵, 쾅, 몇 번이나 어딘가에 부딪치는 동안 라인하르트는 몸을 웅크리며 알렉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첨벙!

얼음장 같은 물이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정신없는 와중에 알렉사는 제 몸을 끌어안고 있던 라인하르트의 팔에서 힘이 풀려버리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은 채 라인하르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물 아래로 가라앉으려고 했다. 몇 번이나 충격을 받아 기절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라인하르트를 붙든 채 팔다리를 휘저었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야 했다.

“푸하!”

폐를 가득 채우는 공기에 감사하며 알렉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끄무레하게 동이 터와 다행히 주변을 살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웬 절벽이었다. 저런 절벽은 콜로만 공작 저택 근처에 없었는데.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물 밖으로 나왔다. 축 늘어진 거구의 남자를 끌고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알렉사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다행히 비는 그쳐있었지만 당최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가야 할 길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알렉사는 일단 이동하기로 했다. 둘 다 쫄딱 젖어서 이대로 있는 건 위험했다.

일단 풀과 나무가 보이는 쪽으로 걸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작은 숲이 있었고, 그 초입에 허름한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아마도 사냥꾼들이 썼던 모양인데, 사람 손이 닿은 지 오래된 듯 문짝도 반쯤 떨어져 있었고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했다.

알렉사는 오두막 한쪽에 라인하르트를 눕히고는 그의 뺨을 탁탁 쳤다.

“단장님. 단장님, 일어나 보세요.”

그는 조금도 반응이 없었다. 입술이 퍼런 것이, 체온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알렉사는 제 허리춤을 더듬거려 보았다. 작은 가죽 통이 잘 매달려 있었다. 그 안에는 다행히도 비상용으로 챙겨 온 마법 물약이 있었다.

그녀는 급히 물약을 라인하르트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약이 잘 듣는지, 곧 그의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돌아오고 숨도 고르게 바뀌었다.

급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온몸에 힘이 풀렸다. 알렉사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벽에 등을 기대었다.

“어휴… 제기랄.”

아마도 콜로만 공작은 위치 이동 마법을 사용한 뒤 절벽 아래로 라인하르트를 떨어트려 죽이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죽은 것은 오로지 콜로만 공작뿐이었다. 지옥에서 그가 탄식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알렉사는 자신이 무모하긴 했지만 참 잘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녀는 잠시 의식이 없는 라인하르트를 내려다보다가 이마에 철썩 붙어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정리해 주었다. 이 와중에도 미모를 뽐내고 있는 그가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진짜, 내가 이 인간 때문에 별일을 다 겪네.”

하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까 그 상황에서 몸이 먼저 움직인 건 상대가 라인하르트여서일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그는 왕실 기사단장이니 중요한 인물이었고, 그녀의 상관이었고, 흔치 않은 오러 사용자였고…….

어쨌든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애증으로 얽힌 관계였다.

알렉사는 손끝으로 라인하르트의 코를 톡 치고는 중얼거렸다.

“나한테 목숨 빚진 거야. 이 값은 아주 톡톡히 받아낼 거라고.”

그러고 나서 알렉사는 몸을 일으켰다.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일단 불이라도 피워야 할 것 같았다. 그녀도 물에 쫄딱 젖은 터라 턱이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주변에는 쓸 만한 나뭇가지 등이 없었다. 비가 온 탓에 그것들을 모아다가 불을 피우기에는 매우 부적절했다.

알렉사는 조금 고민하다가 삭아서 부서진 듯한 바닥 판자를 뜯어냈다. 굴러다니는 쇠 화로에다 불을 피우고 그녀는 최소한의 옷만 남기고 나머지 옷을 벗어 널었다. 일부러 문과 창문 근처에 널어서 조금이라도 바람이 덜 들어오게 했다.

그러고 나서 보니, 라인하르트가 여전히 젖은 옷을 입은 채인 게 눈에 들어왔다. 알렉사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 또한 셔츠와 바지만 남겨두고는 모조리 벗겼다. 그러고 나니 라인하르트가 목에 걸고 있는 금빛 로켓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싸우러 나오면서 뭐 저런 걸 걸고 왔대? 알렉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관심을 껐다. 젖은 옷가지들을 여기저기 널어둔 뒤, 그녀는 화로와 라인하르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옹송그렸다.

‘일단 이 인간이 깨어나고 난 뒤에 기사단을 찾아 합류를 해야 하는데… 대체 여기는 어딜까?’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던 알렉사는 점차 몰려오는 피로에 잡아먹혀 갔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느새 그녀도 수마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알렉사는 멍한 기분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야 물에 빠지고 라인하르트를 옮긴 여파가 오는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녀가 화로에 피워둔 불꽃이었다. 따뜻한 주황색으로 타오르는 불은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도 화력이 죽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저나 분명 아까 앉아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지금 그녀는 누워있는 듯했다. 의아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알렉사는 자신이 뭔가를 베고 누웠다는 걸 알아차렸다. 손으로 조심스레 그것을 만져보자 뜨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알렉사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려 했지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나긋하게 눌렀다.

“괜찮으니 좀 더 누워있어.”

“아니, 아, 이게 무슨……!”

그 말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그게 사람이니! 알렉사는 화다닥 일어나서는 뒤로 약간 물러나 앉았다. 민망함에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죄송,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내가 그런 건데. 그보다…….”

라인하르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말했다.

“대체 왜 그렇게 무모한 거야? 그게 무슨 마법일 줄 알고 뛰어들어?”

“…네?”

“그냥 이동 마법이었으니 망정이지, 공격 마법이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그러다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했으면……!”

“그럼, 당장 위험한 걸 보고 가만히 있었어야 된다는 말입니까?”

구해줬더니 타박을 하네! 알렉사는 울컥해서 따졌다. 그녀의 얼굴에 억울함과 분함이 서린 걸 보고 라인하르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헤집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네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다면…….”

“아무 일도 없잖습니까. 단장님도, 저도 살았으니 됐잖아요! 아니 기껏 살려놨더니……!”

알렉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말을 잃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라인하르트가 불쑥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탓이었다. 맞닿은 가슴 너머에서 라인하르트의 심장이 아주 거세고 빠르게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라인하르트는 알렉사의 목덜미에 눈을 대고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마워, 알렉산드라.”

구해줘서… 또 살아줘서.

생각하지도 못한 반응에 알렉사는 조금 얼떨떨했다. 아니, 그보다 지금 라인하르트가 나를 끌어안은 거야? 그녀는 당황해서 밀어내려고 했지만, 라인하르트는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알렉사는 귀가 뜨거워졌다. 당황해서 그녀는 자신이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다.

“어, 나 좀 놔봐. 응? 라인하르트, 야! 왜 이래…….”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나는 정말… 정말이지…….”

뭔데, 왜 이렇게 혼자 애틋하고 그런데! 알렉사는 좀 더 꿈지럭대다가 밀어낸 끝에 라인하르트와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주한 얼굴은…….

‘와, 씨… 어떡하냐.’

울었나? 진짜 울었어? 눈가가 발그레해진 라인하르트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했다. 울음을 잔뜩 힘주어 참고 있는지, 턱은 호두알처럼 우글쭈글해진 채였다.

커다란 덩치의 미남이, 한껏 약해진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 생각 이상으로 파괴력이 굉장했다. 알렉사는 얼른 눈을 돌린 뒤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헛기침을 몇 번이나 했다.

“그, 음… 그래, 뭐…….”

“알렉산드라.”

“응……?”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너에게 사과해야만 했던 일이 있어.”

이미 사과할 건 다시 만났을 때 다 하지 않았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알렉사는 눈이 동그래져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목에 걸고 있던 로켓 목걸이를 풀어서는 알렉사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까 그녀가 보고 ‘뭐 이런 걸 하고 다녀’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금 로켓의 묵직한 감각이 그녀의 손바닥을 지그시 누르는 듯했다. 알렉사는 로켓을 바라보다가 라인하르트를 보며 물었다.

“이게 뭔데?”

“열어봐.”

이게 뭔데 그래. 알렉사는 조금 심란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로켓을 열어보았다. 그 로켓 안에는 여느 것들과 다르게 그림이나 초상 따위는 없었다. 아주 작게 접은,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 노랗게 변한 종이 한 장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게 뭐냐고.”

“펼쳐봐.”

아까 한 말이랑 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알렉사는 꼬깃꼬깃한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그러고는 곧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녀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는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빽 소리 지르다시피 물었다.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어?!”

그건 바로 알렉사가 아카데미에서 디어에게 보냈던 바로 그 쪽지였다. 그녀는 다시 제가 쓴 그 쪽지를 보았다.

[너와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디어.]

학생 때의, 조금 동글동글했던 필체가 그 종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쪽지를 라인하르트가 가지고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알렉사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뇌 속에서 삐걱삐걱, 기름칠되지 않은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다가 결국 말하는 걸 포기하고 라인하르트를 쳐다보았다. 황망한 얼굴을 한 알렉사에게, 라인하르트가 드디어 오래도록 하고 싶었던 그 사과를 건네었다.

“그날, 나가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그게, 너였다고?”

“하필 그때 가문에 문제가 생겨서, 네게 어떤 말도 전하지 못하고 곧장 떠나야 했어.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어떻게, 그게… 그게, 너일 수가 있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힘들 때마다 다정한 말들로 위로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었던 얼굴 모를 그 사람이… 라인하르트였다고?

그 재수 없는 얼굴에 쌀쌀맞고 오만했던 남자가, 세상 둘도 없는 다정한 문장들을 종이에 정성껏 써서, 그걸 알렉사에게 보냈단 말인가? 알렉사는 자신의 머리가 완전히 멈추어버린 것만 같았다. 들은 이야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더듬더듬 또 질문했다.

“그럼 너…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쪽지, 그거 답한 거야? 대체 어떻게? 아니, 왜 그 답을 할 생각을 한 거야?”

“그건…….”

놀랍게도 알렉사는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불타듯 새빨개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 그래도 새하얀 피부의 그는 이제는 붉은 인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라인하르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수그렸다. 커다란 몸이 둥글게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 상태로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가 똑바로 알렉사를 쳐다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순간만큼 그녀의 숨통을 옥죄는 눈빛을 본 일은 없었다.

설마… 설마아……. 알렉사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문장을 부정했다. 고개를 삐걱대며 저으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끝내 그녀가 예상했으며 부정한 그 문장을 내뱉고야 말았다.

“내가 너를… 계속 좋아했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처음 본 순간부터 쭉 널 좋아했어. 네가 날 싫어하는 걸 알았지만, 그리고 그때는 되도 않는, 가문에서 요구하는 사람과 미래를 약속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애써 그 감정을 모른 척하고 널 멀리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너, 나한테 격에 맞게 사람을 만나라느니, 뭐 그딴 소리를 해대고 그랬잖아!”

“내가 그때는 정말… 말주변이 최악이었어. 내가 말할 때마다 알렉산드라… 네가 기분이 상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진심으로 널 무시하거나 화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러면서 라인하르트는 급히 오해를 풀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네 주변을 맴도는 놈들이 하나같이 변변치 않은데, 그런 놈들이 네게 치근덕대는 걸 보니 화가 났어. 그런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그때 내가 배운 언어로 할 수 있는 표현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 알아, 나도 내가 얼마나 머저리였는지…….”

“하아…….”

알렉사는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현실인가요? 누구든 붙들고 짤짤 털며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입학시험 때 반했던 그 남자애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알렉사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하지만 대귀족가인 오덴발트에서 가르치기를, 라인하르트는 그와 수준이 맞는 이와 결혼해야 한다고 했고, 그는 그 말에 따르느라 마음을 두었음에도 알렉사에게 제대로 표현을 못 했다는 거다.

아니, 누가 사귀자고 하기나 했나? 혼자서 1부터 100까지 다 생각하다가 좌절하곤 주변을 멍청이처럼 맴돌면서 미움만 산 꼴 아닌가.

…누가 이 남자보고 명석하고 냉철하다고 했어. 알렉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을 아주 절절하게 체험 중이었다.

아예 오늘 모든 고백을 다 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건지, 라인하르트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인간이 이렇게 길게 줄줄 말하는 것도 처음 보는 듯했다.

“먼발치에서 널 지켜보다가 네가 도서관에 자주 드나드는 걸 봤어. 그리고… 우연히 네가 쪽지를 남기고 가는 걸 발견했고. 익명으로라면, 네가 싫어하는 소공작이 아니라 그냥 나로서… 너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럼 성년 무도회 때 브로치는 정말로 네 가문 상징을 넣은 거야?”

그 말에 라인하르트의 얼굴에 수줍은 기색이 떠올랐다. 알렉사는 그 꼴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흠칫 놀랐다.

“네 파트너는 될 수 없어도… 그렇게라도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 그날 춤을 출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고.”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 디어가 너였다니, 대체… 하하.”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이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서 그때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걸까? 알렉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 뒤로도 라인하르트의 고해성사는 줄줄이 이어졌다. 가문을 완전히 장악한 뒤에 제일 먼저 한 것이 알렉사의 동향을 살피는 일이었다나. 거의 주 단위로 알렉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고받았다고 하는 말에 알렉사는 질린 얼굴이 되었다.

또 어떻게든 그녀를 왕실 기사단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물밑 작업을 해대다가 오러를 발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단다(“어쩐지 보고를 올린 것치고 너무 빠르게 불러들인다 했지!” 알렉사가 비명을 질렀다).

기사단에 온 다음에는 티 나지 않게 계속 조금이라도 말을 붙이고, 잘해주려고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보려고 노력했지만…….

“네게 불쾌한 소문만 났지. 정말 미안하다.”

“티가 안 났다고 생각한 거야?”

“내 딴에는 그랬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전혀 아니었나 보더군.”

“하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알렉사는 어두운 얼굴이 되어서 눈을 내리깔고 시무룩해진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바닥에 다시 드러누웠다. 그를 등지고 누운 채 그녀는 눈을 꽉 감고 퉁명스레 말했다.

“일단 난 더 잘래.”

“…그래. 좀 쉬는 게 맞아. 붙들고 있어서 미안해.”

어쩐지 소심하게 들리는 그의 사과에 알렉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태 감추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자마자 저렇게나 불쌍하게 굴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러나 알렉사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억지로 잠을 청하는 그녀의 입꼬리는 몇 번이나 씰룩거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스르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그녀는 어렴풋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와, 몸을 살살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그런데 아까 라인하르트를 피해 자려고 누웠을 때와 다르게 몸이 이상했다. 몸도 입술도 덜덜 떨렸고, 숨쉬기가 버거웠다. 눈이 뜨끈하고 머리가 띵한 게, 멍한 정신에도 자신이 아프다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알렉산드라, 정신 차려봐.”

“흐으… 추워…….”

“열이 심해서 그래. 하아, 약이 없어서 큰일이군.”

“내, 내… 내 가방…….”

“응?”

“창문에 걸어둔……. 거기에 물약… 있어.”

라인하르트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가 말한 마법 물약을 찾아 왔다. 마법 물약은 대체로 신체적 부상에 효과가 있었지만, 이런 상태 난조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한 팔로 알렉사를 단단히 받쳐 안아 들고는 다른 한 손으로 단번에 물약의 뚜껑을 날렸다. 그러고는 작은 약명을 그녀의 입가에 대주었다. 입 안으로 쓴 것도 단 것도 아닌 미묘한 맛의 끈끈한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천천히, 그렇지.”

물약을 모두 삼킨 알렉사는 끙끙대며 몸을 웅크렸다. 몸의 떨림이 멈출 줄 몰랐다. 너무 추웠다. 알렉사는 본능적으로 제게 닿아있는 뜨거운 체온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몸을 바짝 붙였다. 얼굴에 닿는 가슴 근육이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얼굴을 느릿하게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너무, 추워…….”

“열이 떨어지려면 몸을 시원하게 해야 해.”

“추워, 춥다고…….”

지금 자신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알렉사는 알지 못했다. 흐느끼듯 칭얼대며 그녀는 더욱 라인하르트를 꽉 끌어안았다. 머리가 빙빙 돌고 세상이 마구 흔들리는 듯했다. 너무 괴롭고 춥고 아파. 살면서 한 번도 이렇게 앓아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검에 두들겨 맞는 쪽이 훨씬 덜 아플 듯했다.

라인하르트는 난감해하며 알렉사를 밀어내려는 듯했지만 도리어 그의 팔은 그녀를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느새 알렉사는 그와 나란히 누워있었다. 팔을 베고 누워 그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끙끙댔다. 머뭇거리던 라인하르트의 다른 한 팔이 그녀의 등을 감싸고는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조금 더 자봐. 약효가 돌면 나아지겠지.”

그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알렉사는 다시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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