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9)

5.

이른 아침 눈을 뜬 알렉사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한참 보았다. 지난 5년 동안 느꼈던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방은 약간 어색했다.

항상 차갑게 식어버린 볼에 손을 얹으며 “추우니까 조금만 더.”라고 중얼대며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는 게 일과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수도 빈터투어는 그런 추위와는 거리가 먼, 남쪽에 있었으니까.

따뜻하고 말랑한 자신의 볼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본 알렉사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본 방 한구석에는 푸른빛의 제복이 걸려있었다. 구김 하나 없는 그 옷은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올랐다.

이제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열여덟 살, 그때 저 제복을 입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거의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그 꿈이 이루어졌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만약 알렉사가 그 변두리 국경 지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오러를 각성해 내지 못했다면 아마 그녀는 영원히 수도 근처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검에 마침내 오러가 타오르던 순간, 그녀와 함께 싸우던 동료들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린다우 경, 드디어……!’

‘와, 젠장. 내가 눈앞에서 오러 각성자를 보게 되다니!’

다들 마치 자기 일처럼 환호하더니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축하한다고 몇 번이고 말해주었다. 알렉사는 처음에 그냥 북서부 전선에 남아있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곳의 지휘관은 고개를 저었다.

‘린다우 경, 그대가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에 잔류하겠다고 하는 뜻은 알겠네. 하지만 원칙은 원칙이야. 어찌 되었든 오러를 사용하는 모든 기사는 무조건 수도로 돌아가서 왕실 기사단에 소속되어야 하지 않나. 그곳에 가서도 여기로 다시 오고 싶다면, 그때 가서 돌아오도록 해.’

하지만 지휘관은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는 듯 씩 웃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어떤 이가 그 척박한 변경에서 내내 있고 싶을까? 게다가 북서부 전선은 아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진 않지만 종종 오리악과 부딪치면 거의 서로를 죽이려고 들었다.

만일 콘스탄츠 왕국이 오리악 왕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중이었다면 오러를 쓰는 기사들 모두 이 전선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말하자면 조금 규모가 큰 시비 걸기에 지나지 않았다. 사이가 나쁘긴 해도 전면전까지 가기엔 각자 나라 내부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알렉사에 대한 보고는 곧장 수도로 들어갔고 그녀는 바로 빈터투어로 불려 가게 되었다. 빈터투어에 도착, 왕궁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왕실 기사단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왕위에 오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린 국왕은 그녀를 보고 ‘잘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알렉사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주군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멀리서 오느라 피로하실 테니, 사흘 후에 왕실 기사단장과 만나라는 명이십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수도에 머물 곳이 있으신가요?”

“아쉽게도… 없습니다.”

“그럼 왕실 기사단 단원을 위한 숙소가 있으니 그쪽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최고 시종은 시녀 하나를 시켜 알렉사를 기사단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대다수의 왕실 기사가 귀족이기에 기사단 숙소는 비어있는 방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알렉사는 건물에서 가장 높은 층인 3층의 볕이 가장 잘 드는 남향의 큰 방을 선택했다.

그녀는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왕궁을 나섰다. 알렉사가 수도로 돌아오길 기다린 이가 ‘당장 봐야 한다’며 방방 뛰었던 탓이다.

“알렉사! 알렉사!”

“비앙카!”

두 사람은 마치 오래 헤어졌던 연인인 양 애틋하게 서로의 손을 맞잡고는 빙빙 돌았다. 졸업 후 왕실 마법사가 되는 대신 마탑으로 들어가 버린 비앙카는 5년 내내 알렉사가 변경에 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너 같은 인재를 그런 구석에 처박아 놓다니!’

자신보다도 더 분개하는 비앙카 덕분에, 알렉사는 도리어 위안을 얻기도 했다. 어쨌든 그 긴 시간을 지나 마침내 수도로 돌아와 다시 만난 친구는, 아카데미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성숙하고 아름다워져 있었다.

“이런, 바이로이트 후작 부인께서 널 마탑에 빼앗긴 원한이 깊어지셨겠는데.”

“어떻게 알았지! 헤헤.”

“너 정말 예뻐졌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젠 정말… 말이 안 나오게 예쁜데?”

“그런 입에 발린 말 하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 응? 변경에서 남자 동료들한테서?”

깔깔 웃으며 비앙카는 알렉사의 팔을 탁탁 때렸다.

두 사람은 내내 웃으며 시내의 한 펍으로 향했다. 각자 앞에 잔을 하나씩 받자마자 둘은 그것을 들어 올리고는 신나게 건배했다.

“돌아온 걸 축하해!”

“고마워, 비앙카.”

“오러라니, 난 네가 분명 일 저지를 줄 알았지. 알렉산드라 린다우, 역시 내 친구답다.”

호기롭게 잔을 벌컥벌컥 비우는 비앙카를 보며 알렉사는 잔에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뗐다. 둘은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비앙카가 알고 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며 알렉사는 눈이 동그래지기도 하고, 까르르 웃기도 했다.

“다들 잘 살고 있어서 다행이네.”

“그러니까. 다들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 그 험한 데에 가있는 알렉사 네가 괜찮은지 모이기만 하면 그 얘기였어.”

“…고마운 일이네, 정말.”

알렉사는 빙긋 웃었다. 또다시 가볍게 입술을 축이는 알렉사를 보며 비앙카는 그녀가 5년 전에 비해 조금 차분해졌다고 느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그다지 발랄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사이에 성숙한 어른이 되면서 아주 정적으로 변했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친구를 보며 비앙카는 생각했다.

‘만약 ‘그 사실’을 알면, 알렉사가 어떻게 나올까?’

사실 비앙카는 ‘그 사실’을 이야기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알렉사를 만나기 직전까지도. 어차피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질색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도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가 알렉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마음을 딱 정하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점점 흘러버렸고, 어느새 말을 꺼내기가 애매해지고 말았다. 비앙카는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자신이 미리 말한다고 해서 뭐가 얼마나 달라질까? 알렉사가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그럴 이유는 없지 않나. 사실 그녀가 잘못한 것도 없고… 그냥 남인데 말이다.

그래서 비앙카는 사흘 뒤에 알렉사가 얼마나 크게 놀랄지에 대해서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밤이 늦도록 실컷 놀다 헤어지고 말았다.

하루를 비앙카와 보내고 나서, 그다음 날에는 수도에서 살며 급히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부모님께 편지를 부쳤다. 왕국에 속한 기사가 되고 나니 고향인 무스에 가기는 더 어려워졌다. 북서쪽 변경에서는 아예 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왕국 동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무스는 닷새를 내내 쉬지 않고 달려야 도착할 수 있을 만큼 멀었기 때문이다.

미안해하는 알렉사에게 부모님은 항상 ‘우린 괜찮으니 네 몸만 신경 쓰라’고 하셨다. 알렉사는 다음번에 휴가를 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무스에 가리라 결심했다. 그나마 빈터투어에서 무스까지는 갈 만한 거리였다.

그다음 날은 가볍게 몸을 풀 정도로 수련을 하고 쉬었다. 저녁이 되고 혼자 침대에 눕자, 알렉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아침이 되면 드디어 알렉사는 왕실 기사단원으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벽까지 기대감으로 조금 잠을 설치고 나서 이른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따뜻한 볼을 문지르며 침대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

빳빳하게 다려진 제복을 입고 왕실 기사단이 있는 건물에 들어서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왕실 기사단은 실상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다 해도 고작 30여 명 남짓이었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들만 모아 왕실, 그러니까 국왕 폐하와 왕실 가족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 가운데 오러를 쓸 수 있는 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고 했다. 그 손가락에 꼽히는 자 중 하나가 알렉사였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이미 다 퍼져있었는지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눈 아래로 향하는 손을 멈추려고 주먹을 꼭 쥐었다. 언젠가부터 조금 난감하다고 느껴지면 눈 아래에 있는 눈물점을 손가락으로 쓰다듬곤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버릇을 첫날부터 보이는 건 곤란했다. 제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

누군가가 살가운 목소리로 먼저 다가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니, 옅은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 부드러운 푸른 눈을 빛내며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알렉사보다 고작 한두 살쯤 많을까 싶었다. 알렉사는 자세를 한번 가다듬고는 경례를 붙였다.

“안녕하십니까. 왕실 기사단 소속으로 명받은 알렉산드라 린다우입니다.”

“이미 얘기는 많이 많이 들었어. 반가워. 난 울리히 폰 에슈바일러라고 해.”

울리히 폰 에슈바일러가 이 사람이었다니. 알렉사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그는 아카데미의 3년 선배인데, 그 실력이 대단히 뛰어난 걸로 유명했다. 에슈바일러 백작의 독자로, 실력이며 집안이며 뭐 하나 빠지지 않는 데다 성격도 좋고 잘생겨서 아카데미의 수많은 여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는 아쉽게도 울리히와 아카데미에서 검을 맞댈 기회가 없었다. 4년 차 생도들은 보통 자기들끼리 수련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반갑습니다, 에슈바일러 경.”

“그냥 울리히라고 불러. 단장님부터 보러 가야지?”

알렉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울리히의 뒤를 따라 걸었고, 울리히는 빙긋 웃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3년 후배라며?”

“네, 그렇습니다.”

“어차피 여기 다 선후배 사이만 모여있으니까 아는 얼굴들 많을 거야. 그래서 단장님이 널 잘 아는구나?”

“네?”

그의 말에 알렉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왕실 기사단장이 알렉사를 안단 말인가? 하지만 알렉사는 아는 바가 없었다. 수도에서 멀고 먼 국경에 있는 동안에 이쪽 소식은 제대로 들은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기억하기로 5년 전 왕실 기사단에 배속된 동기는 아무도 없었다. 왕족을 직접 모시는 기사가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선배들 가운데는 두세 명쯤 있었고 후배는 소식을 알지 못했다.

먼저 입단한 선배가 벌써 기사단장이 되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 가운데 오러를 사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대대로 왕실 기사단장 자리는 오러 사용자의 몫이었다.

뒤를 흘끔 돌아본 울리히가 놀란 알렉사의 얼굴을 보고는 픽 웃었다.

“왜, 긴장돼서?”

“…저를 잘 아는 사람이 여기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기사단장님이라니…….”

“진짜 몰라? 들은 게 없어?”

“북서부까지 소식을 물어다 줄 만한 마음씨 좋은 ‘전령 새’는 없어서요.”

그제야 울리히는 알렉사가 실력은 있지만 뒷배 없는 자들이 가는 국경 분쟁 지역에서 복무하다 왔다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입 모양으로 아, 하고 탄식하는 듯하더니 곧 미묘한 웃음을 띠었다.

“그렇구나. 음… 그럼 제법, 즐거운 만남이 되겠는데?”

왠지 울리히의 말이 불안하게 들렸다. 결국 알렉사는 제 눈 밑을 손끝으로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 건물 2층 중앙에 자리 잡은 방은 그 문에 기사단의 상징인 뱀 머리가 꼬리로 달린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울리히는 그 문을 두드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안에 보고했다.

“단장님, 울리히입니다. 신입 기사단원을 데리고 왔습니다.”

안에서 누군가 들어오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사이에 두고 들리는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은 듯도 했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울리히가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눈짓으로 ‘들어가라’고 했고, 알렉사는 가볍게 묵례한 뒤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곧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단장은 문 쪽에서 등을 돌린 채로 창문 밖을 보고 서있었다. 단정하게 자른 금발을 가진 남자는 키가 매우 컸고 등도 아주 넓었다. 그의 체구만으로도 웬만한 기사들은 압도당할 만했다. 대단한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알렉사는 몇 걸음 걸어 집무 책상 앞에 선 뒤 뒷짐을 지고 섰다.

“알렉산드라 린다우, 7월 10일 자로 왕실 기사단에 배속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단장이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숨겨져 있던 얼굴이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느릿하게 알렉사의 시야로 들어왔다.

알렉사는 자신이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지 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멍해진 얼굴로 자신과 마주한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리석을 깎아놓은 듯한 이마와 콧날, 짙은 눈썹 아래에서 번뜩이는 진한 녹색의 눈동자. 굳게 다물린 붉은 입술과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턱까지.

그녀는 이 얼굴을 알았다. 잊으려고 했지만 잊히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때는 꿈에도 나왔다. 이제는 그녀의 인생에 더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그 사람이 지금 알렉사의 앞에 서있었다.

“오랜만이야, 알렉산드라.”

마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라인하르트는 그녀의 이름을 부드럽게 혀끝에서 굴렸다.

그의 목소리는, 제길!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고, 또 다정했다. 5년 전, 아니지, 그는 갑자기 사라졌으니 6년 전이 맞았다. 그때만 해도 어쩐지 냉랭하고 딱딱하기만 하던 목소리를 내는 사내였다. 그랬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사탕이라도 잔뜩 먹고 왔는지 왠지 달콤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알렉사의 입이 바보처럼 조금 벌어졌다. 그녀는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혀가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자 상대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

“단장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네.”

“…허.”

알렉사는 자신이 단장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였다. 눈만 끔뻑이는 그녀를 보며 놀랍게도 라인하르트가 빙긋 웃었다.

그렇다. 웃었다! 그렇게 눈도, 입도 다 웃는 라인하르트를 알렉사는 처음 보았다.

“많이 놀랐나 보네.”

“…그, 크흠. 네. …단장, 님.”

“편하게 불러도 괜찮아. 아, 예전처럼 소공작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곤란하지만. 그냥 라인하르트라고 불러도 좋고.”

되겠냐, 그게! 알렉사는 속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표정만은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다. 그러고는 애써 웃어 보이며 답했다.

“일개 기사가 감히 단장님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넌 그냥 기사가 아니니까.”

뭐지. 대체 뭐지!

알렉사의 머릿속은 아주 팽팽 돌아가는 중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아카데미 졸업도 하지 않고 갑자기 사라진 뒤로 못 본 세월이 6년이었다. 변했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였다. 고고하고, 오만하고, 저 구름 위에 서있는 듯하던 그 라인하르트! 그가 자신을 보면서 저렇게 헤벌쭉―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알렉사에겐 그리 보였다― 웃으며 이름을 부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다니.

과거의 기억에 비추어 보아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겉껍데기만 라인하르트이고, 내용물은 다른 자로 바꿔 치기라도 된 건 아닐까? 하지만 사람의 영혼이 바뀌는 일 따위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럼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은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 본인이 맞는다는 소리인데.

그나저나 ‘그냥 기사’가 아니라는 말은 뭘까. 아무래도 알렉사가 오러를 쓸 수 있으니까…….

“알렉산드라, 네가 이곳으로 온다고 해서 정말 기뻤어. 아쉽게도 우리 동기들 중에는 왕실 기사단 소속이 없잖아.”

이쯤 되니 알렉사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을 진짜로 밀 수밖에 없었다.

저건 진짜 라인하르트가 아닌 모양이다.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자, 라인하르트가 눈치채고는 픽 웃었다.

“아무래도 이건 나만 기대했던 모양인데.”

“…애초에 저는 단장님이 이곳에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북서부 쪽은 아무래도 소식이 잘 닿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네.”

“네, 그렇습니다.”

“나는 네가 북서부에 간 것도, 거기에서 뭘 했는지도, 오러를 언제 발현했는지도 알고 있었는데.”

또, 또 저러네! 알렉사는 라인하르트가 뭔가 비밀을 고백하듯 말하며 또 배시시 웃는 걸 보면서 기함했다.

그러니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랬다. 왜 이렇게 친한 척인데?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의 소식을 궁금해할 만한 사이였는데? 동기가 없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들의 마지막이 너무 험악하지 않았던가?

알렉사는 어쩐지 울컥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감추려고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그렇게나 제게 관심이 있으셨다니, 놀랍군요. 어찌 되었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래. 혹시라도 불편하거나 힘든 점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말해줘. 그리고 내일 오후에 환영식이 있을 텐데 참석할 거지?”

‘네가 안 가면 얼마든지 가고 싶지!’라고 말하려 했지만, 알렉사는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감히’ 단장에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인하르트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그때 보자고.”

“…알겠습니다.”

“일단 오늘까지는 편하게 쉬도록 해. 내가 직접 기사단 안내를 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일이 있거든.”

하나도 안타깝지 않거든! 알렉사는 속으로 꽥 소리 질렀지만 겉으로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알렉사를 잠시 바라보다가 어째서인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밖에서 에슈바일러 경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가 기사단 시설과 생활에 대해 안내해 줄 거고.”

“알겠습니다.”

“나중에 보자. 그리고 정말로… 다시 만나서 반가워.”

차마 그 말에는 대답을 더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례를 붙이고 돌아서는데, 라인하르트가 뒤에서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알렉산드라.”

“네?”

“혹시…….”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을 우물거리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목 뒤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만 결국에는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아니야, 가봐도 좋아.”

“……?”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의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금방 등을 홱 돌렸다. 어쩐지 등 뒤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지만 그걸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단장실 문을 열고 나오니 과연 아까 그녀를 단장실로 인도했던 울리히가 서있었다. 그는 가볍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물었다.

“단장님하고는 인사 잘했어?”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러셨습니까?”

“뭐, 단장님이 오덴발트 공작 각하라고?”

“들어가서 많이 놀랐단 말입니다.”

코를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알렉사를 보고는 울리히가 크게 웃었다.

“뭐, 단장님이 중도에 아카데미를 그만두긴 하셨지만, 그래도 동기잖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음, 많이 친하지 않았었어요.”

그녀의 말에 울리히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안 친했다고?”

“울리히 경, 생각해 보십시오. 저 같은 평민 생도가 미래의 공작 각하랑 친해봐야 뭐 얼마나 친했겠습니까?”

안 그러려고 했는데 목소리에 조금 가시가 돋쳤다. 울리히는 그녀의 반응에 놀랐는지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혼자 뭐라 중얼거렸다.

“분명… 랬는데. 하, 설마…….”

“네?”

“어? 아, 아니야. 아, 나야 당연히 동기니까 친할 줄 알았지. 어쨌든 몇 년을 부대끼고 지내니까.”

친해질 뻔도 했지. 분명 그에 대한 평가는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라인하르트가 알렉사를 속인 게 문제였다. 아직도 알렉사는 왜 그가 자신을 속이고 대련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있는 기회도, 시간도 이미 다 지나가 버렸다.

하긴 조금 전에 보니 라인하르트는 그 일은 다 잊은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나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맞이하겠는가. 여전히 그때의 일을 마음에 담아둔 자신이 꽁한 인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그는 너무나도 친근하게 그녀를 이름만으로 불렀다! 기사단장인 만큼 당연히 린다우 경이라거나, 그렇게 부를 줄 알았는데. 아니, 애초에 ‘경’이라는 호칭조차 쓰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그건 정말 기이한 기분을 자아냈다. 마치 과거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따위는 기억에 없는 사람처럼 구는 라인하르트라니. 울리히가 두 사람 사이가 가깝지 않았느냐고 오해할 법도 했다.

설마 밖에서도 그럴까. 알렉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라인하르트, 그의 말대로 ‘동기가 없었던 탓’에 갑자기 반가운 마음이 솟아서 잠시 이성을 잃은 모양이다. 아마도 정식으로 소개된 뒤에는 이런 난감한 상황도 없지 않을까? 알렉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애써 가슴 한편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뭉개버렸다.

알렉사는 울리히를 따라서 기사단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아는 얼굴도 몇몇 만났다. 동기가 하나도 없다는 라인하르트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안면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선배였고, 후배도 둘 있었지만 동기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기사단 안내가 모두 끝난 뒤, 알렉사는 울리히와 헤어져 방으로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수련을 하러 나가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들었지만, 오늘까지가 그녀에게 주어진 휴가였다. 아카데미에서의 알렉사는 휴일에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연습벌레였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두어야 나중에 고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른이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알렉사는 침대에 드러누워 뒹굴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

단장실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서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와 마주 앉아있었다. 둘의 무릎이 서로 맞닿을 정도로 테이블은 작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인지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와 두 손을 맞잡은 채였다. 그들의 이마와 코가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라인하르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있었다. 살짝 내리감은 눈꺼풀 끝에 매달린, 그의 머리칼을 닮은 금색 속눈썹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는 아주 작게 소리 내어 웃는 중이었다.

“알렉사.”

폐부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마치 생크림처럼 달콤하고 보드라웠다. 그가 그런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게 알렉사는 싫지 않았다. 둘의 손가락이 서로서로 얽혀 들어갔다. 상대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단단히 얽매였다. 알렉사는 엄지로 그의 조금 거친 손등을 문질렀다.

“으응, 라인하르트.”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했다. 제 목소리에 담긴 얕은 숨소리가 자극제가 되었는지, 라인하르트는 급하게 숨을 멈추었다가 알렉사의 손을 끌어당겨 그 손등에 입술을 꾹 눌러 붙였다. 후우, 하고 내뱉은 한숨이 뜨겁게 알렉사의 손을 어루만졌다.

입술로 손등을 지분거리며 라인하르트는 알렉사를 슬몃 올려다보았다. 한여름의 숲처럼 짙디짙은 녹색 눈동자에 어리는 열망을 알렉사는 정확하게 읽어냈다. 그게 그렇게나 좋아서 그녀는 잇몸이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어?”

그 말에 라인하르트는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의 입술은 알렉사의 손등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상태 그대로 라인하르트가 읊조렸다.

“네 생각을 하지 않은 때가 없어.”

“흐응.”

“매 순간, 널 떠올렸어.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하고 바랐어.”

그의 입술은 이제 손등을 지나 손목으로 향했다. 손목 안쪽, 여린 살 아래에서 팔딱이는 맥박에 살며시 입술을 댄 라인하르트는 또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그건 숨을 깊게 들이마시기 위한 준비였다. 알렉사의 체향을 새기기라도 할 것처럼 숨 쉬는 라인하르트는 목이 타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손목에 이마를 비볐다.

“너도 그랬지, 알렉사? 내가 보고 싶었지?”

내가 필요했지? 내가 그리웠지?

그의 속삭임에 알렉사는 숨을 할딱거렸다. 그의 체온이 옮겨 올 때마다 알렉사는 제 심장이 멋대로 쿵쿵 뛰어대는 걸 느꼈다. 내가 너를 보고 싶어 했느냐고? 널 필요로 했느냐고? 그리워했느냐고?

알렉사는 손에 힘을 주어 라인하르트를 제게로 끌어당겼다. 어느새 그의 코와 그녀의 코가 가볍게 맞닿을 정도로, 그들은 가까워져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숨이 가늘게 떨렸다. 그 숨이 너무 뜨거워서 알렉사는 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라인하르트…….”

둘의 입술 사이에는 이제 고작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거리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고, 좁혀지고, 좁혀져 갔다. 마침내 한 점이 닿은 순간, 알렉사가 말을 이었다.

“나도 널…….”

*

“으헉!”

알렉사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황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남색 어둠에 물들어 버린 낯선 방이 보였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알렉사는 마침내 이곳이 왕실 기사단의 숙소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녀의 새 보금자리였다.

끄응, 알렉사는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고는 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으으, 하고 짐승처럼 끙끙대다가 잇새로 작게 욕설을 지껄였다.

“뭐야, 그게.”

아주 그냥,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어디 꿀 꿈이 없어서, 라인하르트와 그런… 낯간지럽고… 낯 뜨거운 짓을 하는……!

대체 왜 그런 이상한 꿈을 꾼 건지 알렉사는 스스로의 머릿속을 헤집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꿈이라서 다행이지, 누군가가 알기라도 했다면 알렉사는 쪽팔려서 죽어버렸을 것이다.

솔직히 북서부 변경에 있던 5년 동안 라인하르트의 꿈을 꾼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기억에 서너 번쯤은 그가 나왔다. 그때마다 꾼 꿈은, 모두 라인하르트가 오러를 발현하던 때의 것이었다. 그 분한 마음을 안고 잠에서 깰 때마다 얼마나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는지!

그랬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꾼 꿈의 꼴 좀 보라지. 알렉사는 스스로를 한 대 세게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미친 거 아닐까. 알렉사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신의 괴이한 꿈을 잊으려고 애썼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써야 할 듯싶었다.

한참 찬물에 머리를 처박고 난 뒤에야 그녀는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얼마 후 단정한 모습으로 숙소를 나온 그녀는 미리 고지받은 대로 기사단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 모여든 기사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서 섰다. 모두들 줄을 맞춰 도열한 가운데, 오늘 소개될 알렉사는 단상 아래에 서서 대기했다.

잠시 후, 부기사단장이 목소리 높여 소리쳤다.

“일동, 차렷!”

그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그들을 보고 서있는 알렉사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왕국에서 실력으로 뽑은 이들의 기세란! 저들과 합을 맞출 것도, 대련을 할 것도 모두 그녀를 짜릿하게 했다.

이어 뒤에서 나는 기척에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았다. 그의 기운은 모른 척하려야 할 수 없을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단상 위로 올라오는 라인하르트가 등 뒤에 있는데도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어쩐지 그쪽으로 신경이 잔뜩 쏠렸다.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슬쩍 핥았다.

경례! 부기사단장의 구령에 맞추어 기사들이 일제히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알렉사도 뒤로 돌아 똑같이 인사를 올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단상 위를 보았는데…….

어라, 왜 나를 보고 있어.

라인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당연히 앞을 바라보고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일전에 단장실에서 보았던 그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을 하고―그냥 살짝 웃은 것에 불과했다―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당황한 낯을 애써 감추며 알렉사는 허리를 펴고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쉬어, 하는 명령과 함께 기사들이 모두 뒷짐을 지고 섰다. 알렉사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라인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은 새로운 단원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지금은 아까 그 멍청하게 웃는 얼굴이 아닌 모양이지. 알렉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라인하르트의 목소리는 예전, 그 재수 없던 때의 것처럼 딱딱하고 근엄했다. 하긴 그 어린 시절부터 격을 중시하던 오덴발트 공작님이 어제처럼 그런 맹탕 같은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말할 리가 없었다.

그의 말에 기사들의 시선이 단번에 알렉사 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나이 많은 기사부터 저보다 어린 자까지,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눈에 어린 건 대부분 신기함이나 호감뿐, 질시나 비웃음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알렉사는 속으로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지금 자신은 아카데미에 막 입학했을 때의 그 어린 평민 소녀가 아니었다. 무려 단상 위에 있는 기사단장과 똑같이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기사였다.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닌 게 바로 자신이었다.

괜히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이었다. 5년 전, 북서부 발령이 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은 앞으로.”

라인하르트의 호명에 알렉사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당당하게 어깨를 쫙 편 채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미소 어린 얼굴에 다른 이들도 미소로 화답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새삼스럽게 알렉사는 감개무량해졌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서 라인하르트가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미 다들 알 테지만,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은 오늘부로 정식 왕실 기사단원으로 명받았다. 아카데미 졸업 후 기사 서임을 받자마자 북서부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끝에 영광스럽게도 오러를 발현하게 되었음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니 강조할 것도 없을 테지.”

그 뒤로 이어진 라인하르트의 말에 알렉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북서부에서 세운 여러 공적들과 전투를 모조리 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알렉사에 대해 잘 알았다.

언젠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상찬을 듣는 건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려는 걸, 마음속의 작은 알렉사가 빽 소리 질러 막았다. 야, 넌 밸도 없냐! 라인하르트가 너 좀 칭찬했다고 금세 그렇게 신나 하게! 그 바람에 알렉사는 흐물흐물하게 풀어지려던 얼굴 근육을 다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라인하르트는 단장실에서 보였던 멍청한 모습이나 친한 척 따위는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새 단원에 대한 높은 평가와 앞으로 잘 지내라는 당부를 끝으로 알렉사에 대한 소개는 끝났다. 알렉사가 단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자, 모두들 박수로 그녀를 환영해 주었다.

그녀는 부단장인 오버팔츠 경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서 섰다. 신입 단원이니 맨 끝에 서지 않을까 했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자리는 가장 앞줄, 가운데였다.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라고 ‘특별 대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알렉사는 그야말로 라인하르트와 얼굴을 바로 마주하고 설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에게 몇 마디 독려의 말을 전한 라인하르트가 뒤로 물러나자, 오버팔츠가 앞으로 나섰다.

“몇 가지 전달 사항이 있다. 먼저 각 궁에 배치될 인원에 변동이 있을 예정이다. 국왕 전하께서 계신 브레사노네 궁부터…….”

부단장의 말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상반기 전체 원정 훈련이 있을 것이라는 공지는 알렉사를 조금 슬프게 했다. 어쩌면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단체 훈련 따위가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편히 쉴 운명은 아닌 모양이었다.

곧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모두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렸다.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함께 알렉사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신입에 대한 관심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아마 저기에는 새로운 오러 사용자에 대한 호기심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여자에, 평민이 아닌가. 호기심이 넘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다가온 건 울리히였다. 그는 상큼한 웃음을 띤 채 와서는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여어, 후배님.”

“휴, 드디어 끝났네요.”

“그러게 말이야. 다들 린다우 경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오늘만 다들 목 빠져라 기다렸을걸?”

“네? 아니, 왜…….”

“나부터 대련하기야. 알았지?”

“네?”

울리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야유와 항의가 쏟아졌다.

“아니, 에슈바일러 경! 치사하게 이러깁니까?”

“그럼 먼저 와서 줄 서지 그랬어?”

“어허,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린다우 경, 내가 에슈바일러 경보다 선임인데 나랑 먼저…….”

“여기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럼 저는 언제 린다우 경이랑 검 한번 대보나요?”

갑자기 우후죽순 쏟아지는 대련 요청에 알렉사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그녀가 난감해하며 한 발 물러서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어어, 하며 알렉사는 몇 걸음이나 뒤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선 건…….

“대련이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나.”

라인하르트가 피식 웃으며 조금 전까지 알렉사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히익, 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츠리고 주춤 물러났다. 누군가가 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단장님…….”

“알렉산드라 경의 검은 매우 흥미롭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몸이 하나이니… 오러 사용자와 검을 맞대보고 싶은 거라면 언제든 날 찾아와도 되는데 말이다. 단장실 문은 항상 열려있거든.”

“아하하하, 단장님도 참……!”

“하하하, 무슨 말씀을!”

조금 전까지 개미 떼처럼 모여들던 기사들이 썰물 빠지듯 삽시간에 사라졌다. 알렉사는 조금 황당한 기분이 되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리에 남은 건 라인하르트와 울리히, 그리고 오버팔츠뿐이었다.

황당한 기분을 느낀 건 알렉사만이 아닌 듯했다. 울리히도 뜨악한 얼굴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단장님, 너무 짓궂으신 것 아닙니까?”

“아직 기사단 적응 시작도 하지 못한 신입에게 검부터 들이밀 생각을 하는 저 머저리들보단 낫지.”

“말이야 바른말이지, 누가 감히 단장님에게 대무 신청을 합니까? 그나마 알렉산드라 경이니까…….”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알렉산드라 경도 나도, 똑같은 사람에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데.”

라인하르트의 말을 듣고 있던 알렉사의 낯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이름으로 부른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성으로 부르는데? 하지만 그걸 따질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울리히는 곧 말을 말자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만 얼른 알렉사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나랑 제일 먼저 대련하는 거다, 알렉산드라 경?”

“아, 그… 네, 알겠…….”

“에슈바일러 경이 그렇게 원하면 지금 당장 나랑 연무장으로 가지.”

알렉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라인하르트가 말을 뚝 잘라먹었다. 그에 울리히는 사색이 되어서 뒷걸음질 치더니 얼른 인사를 올리고는 도망쳐 버렸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오버팔츠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중년의 낯이 제법 피로해 보였다.

“왜 심술이십니까, 단장님. 다 아시면서…….”

“이따 점심 식사 후에 아까 모여들었던 녀석들 집합시켜 두십시오.”

“하아…….”

오버팔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런 부단장에게 라인하르트는 먼저 가있으라고 말하고는 알렉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엄격해 보이는 얼굴이 미묘하게 부드러워지는 건,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잠깐 시간 좀 내지 않겠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감히 기사단장의 말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알렉사는 툴툴대며 라인하르트의 뒤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라인하르트가 멈추어 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뒤에서 따라오는 거지?”

“네?”

“옆에 와서 걸어.”

정말 해괴한 것을 보듯 알렉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심이십니까?”

“알렉산드라, 둘이 있을 땐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는 뜻인즉, 상하 관계인 것처럼 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알렉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단장님은 단장님이십니다.”

“…그래, 차차 익숙해지면 되겠지.”

그가 알렉사를 인도해 간 곳은 어느 별궁의 후원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데로 나를 데려온 걸까. 알렉사는 약간의 의문과 많은 의심을 품은 채 라인하르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여긴 지금은 비어있는 궁이라서 사람이 오지 않아.”

“그렇군요.”

“다시 만나게 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돌아서는 라인하르트의 얼굴은 언뜻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알렉사는 그가 긴장했음을 알았다. 오른쪽 눈을 몇 차례 슬쩍 찌푸리는 건, 라인하르트가 대련하기 전에 자주 보이던 버릇이었다.

그게 대련 직전, 긴장감의 표현이라는 걸 알렉사는 우연히 알아차렸고. 아주 오래전에 보고 만 얼굴인데도 그의 기분을 알아차리는 자신이 좀 우습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아카데미에서 그는 언제나 신경 쓰이는 존재였으니까.

그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알렉사는 가볍게 뒷짐을 진 채로 그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라인하르트는 문득 그녀가 부동자세로 제가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허, 하고 헛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단장으로서 말하는 게 아니라, 친… 아카데미 동기로서 하고 싶은 말이니까 그렇게 불편하게 있지 않아도 돼.”

“말씀하십시오.”

“…하아.”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을 걸 알았는지, 라인하르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괜히 책잡힐 만한 행동은 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 이거야, 알았냐?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한 말은 알렉사의 열중쉬어 자세를 풀기에 충분했다.

“6년 전에 대련에서 널 속인 거… 미안하다.”

“…네?”

“오러를 쓸 수 있는데도 아닌 척하고 너와 내내 대련했던 것. 그걸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알렉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 그걸 사과한다고?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라인하르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때는… 오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어. 그리고 네가 나를 더 싫어할 거라 생각…….”

“그게 무슨 소리야?”

결국 알렉사의 말이 짧아지고 말았다. 그에 잠시 라인하르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그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말을 이었다.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알렉산드라.”

“…부정하진 않겠어.”

“안 그래도 나만 보면 씩씩거리면서 이길 생각뿐인데, 내가 이른 나이에 오러 발현까지 한 걸 알면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상대도 안 할까 봐…….”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알렉사는 세상 한심한 것을 본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걸 내가 미리 알았으면 가르쳐달라고 할까 봐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고?”

“맹세컨대 절대 그런 건 아니었어.”

“하, 진짜.”

뭐 이런… 멍청이가 다 있지? 그 근엄하고 오만한 얼굴을 하고 있던 소공작님 머릿속에 그런 얼빠진 추측이 들어있었다니. 알렉사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재수 없다고 피하긴! 어떻게든 라인하르트를 넘어서고 싶었던 과거의 알렉사라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오러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매달렸을 게 뻔한데!

하루라도 더 빨리 오러를 발현할 수도 있었는데……. 갑자기 성질이 확 솟구쳐서 알렉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입술이 오리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단박에 짜증이 오른 게 빤히 보이는 알렉사에게 라인하르트가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정말로 널 무시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됐습니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해, 나한테는.”

라인하르트가 한 발 다가오자 알렉사는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아카데미에서처럼 날 꺼려하거나 멀리하지 않으면 좋겠어.”

“어차피 저는 말단 기사고, 단장님은 단장님이니 가까이 지낼 일이 없을 텐데요.”

“우선 알렉산드라, 넌 말단이 아니야. 오러를 쓰는 기사가 말단 기사 취급을 받을 리 없지 않겠어?”

아, 그건 그렇네. 알렉사는 코를 찡긋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평범한 기사로 취급받기에는 그녀의 능력이 너무 출중했다.

그녀가 납득한 듯하자 라인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아마 중요한 임무가 있다면 너는 나와 함께 나갈 가능성이 커. 아니면 부단장과 함께 책임자 지위를 맡거나.”

“그건 좀…….”

“그리고 꼭 그런 문제가 아니라 해도, 난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이게 무슨 사춘기 소년 소녀 사이에서 나올 법한 소리인가. 지금 그들의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었는데 쑥스럽게 ‘친구가 되고 싶어’라는 말을, 그것도 오덴발트 공작 라인하르트가 하고 있단 말인가?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려운 일일까?”

제기랄. 알렉사는 아직도 라인하르트의 저 빛나는 외모가 자신에게 너무나도 잘 먹힌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대체 왜 갑자기, 자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려한 미남이 그렁그렁한 녹색 눈동자로 ‘친구가 될 수 없는 걸까?’ 하고 조금은 불쌍하게―그걸 불쌍하게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물으니,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6년 사이에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알렉사는 매우 혼란스러우면서도 어색하고, 불편했다.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상관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각오한 불편함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알렉사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는 거 봐서.”

“그래. 고마워. 내가 노력할게.”

그리고 알렉사는, 미소에 눈이 멀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라인하르트가 부드럽고도 환한 미소를 띤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데,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파괴력이 너무나도 큰 얼굴이었다. 만약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순간에 라인하르트가 저를 보고 이렇게 웃었다면, 아마도 알렉사는 그에게 완전히 홀딱 반해서는 미친 듯이 쫓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못내 부끄러워서 알렉사는 눈을 돌리고 말았다.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한 그녀는 일부러 더 딱딱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가보겠습니다.”

“아. 돌아가면 대련하자고 들러붙는 놈들 많을 거야. 다 상대할 필요 없으니 적당히 쳐내. 상대해 줄 거면 봐주지 말고.”

“네, 상태 봐가며 하겠습니다. 그럼…….”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리려는데 라인하르트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네 검, 맨 처음 상대하는 건 나였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줄 거지?”

야, 나한테 대련 맡겨놨니! 알렉사는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뻣뻣하게 고개가 먼저 끄덕끄덕, 그의 말에 답하고 말았다. 그에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알렉사는 더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

아무리 라인하르트가 부탁했다고 한들 그의 말대로 곧장 ‘친하게 지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사과를 받았다고 해서 알렉사의 마음속에 있는 앙금이 파도 앞 모래성처럼 스르르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좋게 변해버린 둘 사이에 생긴 6년이라는 공백, 그리고 단장과 일반 기사라는 계급 차이는 라인하르트를 편히 대하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이것 보라지. 알렉사는 라인하르트를 향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 제 눈앞에 디밀어진 날카로운 검 끝과 마주했다. 저절로 잇새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 끝에 맺혔다가 톡 떨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뒤로 물리고는 바로 서서 허리춤에 검을 집어넣고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졌습니다.”

그녀의 패배 선언이 나오자마자 기사들이 전부 괴성을 질러댔다. 알렉사의 맞은편에 있던 라인하르트는 희미한 미소가 담긴 얼굴로 검을 집어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날카롭고 변칙적인 공격이었다, 알렉산드라 경. 굉장하군.”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여든 기사들이 더욱 괴성을 지르며 와글와글 떠들어댔다.

“와, 단장님이 칭찬하는 거 처음 봅니다!”

“이런 젠장, 린다우 경 정도의 실력자는 되어야 칭찬 한번 받아볼 수 있는 건가?”

“휴우, 단장님 상대로 저렇게 잘 싸우는 인간은 처음 봤어.”

왁자지껄한 기사들을 향해 픽 웃은 라인하르트가 목소리를 조금 키웠다.

“왜, 원한다면 누구든 지금 나와 겨룰 수 있는데. 그럼 칭찬해 주지. 칭찬할 거리가 있다면.”

“우우, 싫습니다!”

“단장님 검은 질릴 만큼 받아내 봤다고요!”

“옳소, 옳소! 우리에게는 새바람이 필요하다!”

알렉사는 단장에게 스스럼없이 농 섞인 대거리를 해대는 기사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라인하르트에게? 저렇게 막 대한다고? 6년 전만 해도 자신이 선 위치에 걸맞은 행동이나 관계를 중요시하던 남자 아니었나? 더 놀라운 건 라인하르트 자신이 그런 수하들의 말에 화를 내거나 정색하긴커녕 오히려 파안대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북서부 전선 쪽이야 워낙 평민 기사들뿐이라 이런 일이 당연했지만, 여긴 대부분이 귀족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스스럼없이 구는 모습은 알렉사에게는 너무 어색했다. 기묘한 기분으로 알렉사는 슬쩍 물러나려 했다. 이 희한한 분위기가 못내 불편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붙들었다.

“앗, 어딜 도망가려고.”

“도망가려던 거 아닌데요… 울리히 경.”

“나 상대해 줘야지. 약속했잖아!”

“린다우 경, 다음은 납니다!”

“어어, 내 뒤로 줄 서라!”

또다시 왁자지껄해지는 기사들 사이에서 라인하르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만, 신입에게 선임들이 그렇게 들이대면 어떻게 거절하겠나?”

그의 말에 또 우습지도 않게 다들 얼른 자제하는 것 좀 보라지.

알렉사는 괜히 이 왕실 기사단과 그들의 단장이 고까워졌다. 아니, 사실은 라인하르트에게 남은 반감이 그녀를 불뚝거리게 했다.

조금 퉁명스러운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늘 가능한 만큼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오오! 우리 새 단원, 패기가 대단합니다!”

“하긴 보통 신입이 아니잖아. 단장님이랑 똑같은 오러 발현자라고.”

그녀의 말에 라인하르트가 대번에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 채로 다가왔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대련의 기운이 남은 그의 볼에는 아주 옅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괜찮겠어, 알렉산드라 경?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직 적응도 끝나지 않았고 여독도…….”

“전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단장님.”

그의 걱정 어린 말을 딱 잘라 거절한 알렉사의 말에 한 기사가 동조하며 종알거렸다.

“어우, 단장님. 너무 린다우 경을 싸고도시는 거 아닙니까? 저희한테는 한 번도 그런 말 안 하셔놓고!”

우우, 여기저기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인하르트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알렉산드라 린다우 경의 대련은 하루 3인으로 제한한다.”

“단장님!”

“알렉산드라 경도 내 말에 따라줬으면 좋겠군. 의욕을 보이는 것도 좋지만, 시작부터 내달릴 필요 없어. 하루 이틀 보고 말 얼굴들도 아닌데. 그리고 대련 말고도 경이 해야 하고 알아야 할 일들이 많이 있으니.”

꽁한 얼굴로 알렉사는 라인하르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여기에 단기로 머무르는 것도 아닌데 급할 건 없었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알렉사는 아직 기사단 업무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숙지한 후에 대련을 해도, 늦는 게 아니란 뜻이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뭐 하나 틀린 말을 안 하네. 재수 없어. 속으로만 그렇게 꿍얼거렸다.

그나저나 라인하르트가 누군가를 칭찬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는 선임 기사의 말이 마음에 조금 남았다. 여전히 그를 이길 수 없는 데다, 심지어 평가받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알렉사를 씁쓸하게 했다.

알렉사는 애써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사단장 자리를 빼앗지 않는 이상 뭐 어쩌겠는가. 이제는 동등한 학생 입장도 아닌 상관과 부하이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뒤 알렉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의 나머지 대련 상대가 되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선임들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해야 했다.

어쨌든 왕실 기사단에서의 첫발은 무리 없이 내디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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