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9)

4.

아카데미에서의 3학년은 조금 특별했다. 성인이 되기도 했고, 이제는 상급생이라고 불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어도, 상급생이 되었어도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엄격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훈련하고,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 와중에 적당히 아카데미에서 졸업장만 받으려던 학생들은 급격하게 버거워지는 수업과 주변의 열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중도 탈락했다. 알렉사는 비로소 왜 선배들의 수가 적은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알렉사는 절대 중도 탈락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왕국의 기사가 되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또 극소수만이 다다를 수 있다는 검의 경지인 오러 사용을 해내겠다는 목표도 있었다.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꿈이었다.

매일매일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수련과 학습이 계속되었다. 제법 지쳤지만, 그 와중에 알렉사를 지탱해 주는 소중한 존재는 여전히 그녀 곁에 있었다.

오늘도 알렉사는 품에 갖고 있던 작은 쪽지를 꺼내어 읽었다.

[목표를 향해서 올곧게 나아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고 생각해.

지치지 않고 매일의 일과를 수행해 내는 A가 대단한걸.

그리고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대단해.

A는 자기 자신을 칭찬해 줘야 해.]

그저 몇 줄 안 되는 응원인데도 알렉사는 저절로 피로가 씻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디어는 항상 다정하면서도 든든하게 그녀를 지지해 주었다. 가끔 얼토당토않은 칭얼거림을 쪽지 가득 써놓아도, 그는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알렉사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디어는 나를 어떤 존재로 생각할까.

그냥 얼굴 없는, 가끔 서로 좋은 문구를 적어 주며 서로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친구? 그냥 심심풀이로 글자를 끼적일 수 있는 상대?

하지만 이토록 정성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려고 하는 걸 보면 절대 심심풀이는 아니었다.

아니면, 조금이라도 나에게 관심이 있고…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알렉사는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디어의 쪽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멋지다, 아름답다, 가슴 두근거린다, 자랑스럽고 사랑받을 만하다, 내가 널 실제로 본다면 꼭 안아주고 싶다, 언제고 내게 기대어 쉬어도 좋다. 이런 말들을 그냥 지인이나 단순한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디어는……. 알렉사는 자신의 마음이 반영되어 그리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를 놓지 못했다.

성년식 연회 때 받은 선물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 꾸었던 꿈 때문일까.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쪽지를 볼 때마다 알렉사는 괜히 볼이 발그레해지고 민망해졌다. 디어를 떠올리며 어떤 이일지 상상하다 보면 심장이 쿵쿵 뛰고 입이 말랐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걸까?

디어를 알기 전의 그녀였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법 긴 기간 쪽지를 주고받으며 알렉사는 서서히 변해가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연회가 끝난 밤을 기점으로 점점 더 급격하게 그에게 물들어가는 제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브로치에 대한 보답으로 약소하다 못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을 주었는데도 디어는 기쁘게 받아주었다.

알렉사가 디어에게 준 것은 콘스탄츠에서 전쟁에 나가는 이의 안녕을 바라며 만드는 매듭이었다. 보통은 검에 다는 것인데, 그녀가 만들 줄 아는 장신구는 그것뿐이었다. 알렉사는 직접 질 좋은 가죽을 사서 매듭을 엮은 뒤, 아껴두었던 용돈의 일부를 털어 작은 녹색 수정 장신구를 달았다.

디어가 검술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덥석 그런 장신구를 준 게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리고 제 선물에 대해 남긴 쪽지를 보고 또 알렉사는 마음이 흐물흐물해지는 걸 느꼈다.

[…네가 직접 만든 물건이라서 더 소중한걸.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닐게.

A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기뻐.]

너무 쉽게 얼굴도 모르는 이의 친절에 빠져버린 건 아닐까? 경계해 보려고 애썼지만 로맨스 소설 책장 앞에 서서 그가 남긴 쪽지를 읽으면 자꾸만 마음의 벽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져 버렸다.

우스운 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짐과 비밀들을 털어놓으려다가 또 다른 마음의 짐이 생겼단 점이다. 가장 친한 비앙카에게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 얼굴도 모르는 어떤 남자와 서로 쪽지를 주고받다가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비앙카라면 정신 차리라며 볼을 꼬집을지도 모른다.

“휴우…….”

알렉사는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쪽지를 품 안에 넣었다.

이런 마음을 과연 디어는 알까. 알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애써 디어에 대해서 생각하는 걸 의식의 뒤편으로 물렸다. 그러고는 바삐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휴일 늦봄 오후의 햇빛이 제법 따사로웠다. 알렉사는 은은한 라일락 향기가 점점 짙어지는 장소로 향했다.

“어떻게 그런 장소는 아는 거지?”

알렉사가 향하는 곳은 아카데미 교수동 뒤편의 작은 후원이었다. 거기에는 박석이 깔린 구역이 있었는데, 제법 검을 휘두르기 적당한 장소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곳으로 거의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교수들과 마주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곳으로 알렉사가 가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조금 늦었군.”

“소공작님이 너무 빨리 온 건 아니고? 나는 정시보다 딱 2분 늦었어.”

알렉사는 입을 비죽거리며 재킷을 벗어서 바닥에 대충 던졌다. 그걸 보고 있던 라인하르트가 살며시 눈가를 찌푸리더니 그녀의 재킷을 주워 들어서는 털고 근처 나뭇가지에 가지런하게 걸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사는 공터 한복판에서 팔다리를 풀고 목을 돌리며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런 건 대충 두고 빨리 오라고.”

“…잠시만.”

“어휴, 그깟 옷이 뭐가 중요하다고…….”

마침내 라인하르트가 제 앞에 서자, 알렉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목검을 손에 쥐고 겨누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오지 않는 이 장소에 온 건 바로 라인하르트와의 대련 때문이었다.

사실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일 따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든 기다릴 테니 같이 검을 겨루자’고 말했던 라인하르트의 말은 너무나도 달콤한 미끼였다. 그를 꺾고 싶다는 욕망과, 그의 검에서 배울 것을 찾아내겠다는 집념 때문에 알렉사는 연회 다다음 날, 아직 신년 연휴가 끝나지 않았을 때 그를 찾았다.

라인하르트는 약간 당혹스러운 듯 보였지만 이내 그녀의 도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건을 걸었다.

‘교수동 뒤편에 다들 잘 가지 않는 후원이 있다. 거기에서 대련하는 걸로 해.’

‘왜? 굳이 거기까지 가야 할 이유가 있어?’

‘우리가 대련한다고 할 때마다 다들 우르르 몰려드는데, 불편하다.’

‘아, 그건 인정해.’

그의 말마따나 검술부 전체를 통틀어 실력으로는 1, 2위를 다툰다고 평가받는 알렉사와 라인하르트가 어쩌다 서로 대련하기라도 하면 거의 검술부 전체가 모여서 그들을 구경했다. 알렉사가 짜증스러워하며 제발 다들 꺼지라고 해도 껄껄 웃으며 ‘이런 좋은 구경을 안 볼 수 있냐!’고 입을 모아 소리치곤 했으니까.

그래서 알렉사는 흔쾌히 라인하르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딱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괴물 같은 라인하르트와의 승률이 엇비슷하면 모르겠지만,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듯 아직 알렉사는 그를 꺾기에는 약간 실력이 모자랐다. 도전하는 건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지는 꼴을 남들에게 보이는 건 아무리 알렉사라 해도 싫었다.

그 결과 알렉사는 라인하르트를 만나러―이렇게 말하니 굉장히 뉘앙스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남들 눈을 피해 이 외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얼른 시작하자고.”

“몸은 충분히 풀었나?”

“당연한 거 아니야?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다 준비하고 왔다고.”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목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알렉사는 그런 라인하르트를 보며 아주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또 저 웃음.’

이상하게도 라인하르트는 연회 이후, 그 전까지 보여준 적 없던 희미한 미소를 짓곤 했다. 알렉사가 편해지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렇게나 껄끄러워하고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급의 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만한 얼굴만 보이던 라인하르트였다. 왜 웃는 건지 알렉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와 검을 맞댈 만한 사람이라서, 그래서 조금 자극이 되어서 그러는 걸까?

하지만 사소한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적의 검을 눈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알렉사가 먼저 뛰어들었다. 그녀의 검은 주저 없이 상대의 품 안으로 향했다. 라인하르트는 당황하지 않고 알렉사의 검을 미끄러트려 치우고는 곧장 위로 베어 올렸다. 검을 회수해서 막는 대신 알렉사는 허리를 비틀어 그것을 피했고, 발을 옮기며 라인하르트의 등 뒤를 노렸다.

라인하르트는 쉽게 뒤를 내어주지 않았다. 거대한 몸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돌려 알렉사와 다시 마주하고는 빠르게 여러 차례 찌르고 들어갔다.

딱딱딱, 잇따른 공격과 방어에 목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빈 후원에 울렸다. 뒤로 물러나며 라인하르트의 검을 막아내던 알렉사는 단박에 훌쩍 물러났다가 몸을 낮추어 그에게로 돌진했다.

또다시 연격이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말 한마디 없이 입을 꾹 다문 채로 서로의 검을 치워내고 상대의 목과 심장을 노렸다.

“하압!”

알렉사가 짧게 기합을 넣으며 상대의 검을 세게 올려 쳤다. 힘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건 아주 짧은 틈이었다. 역시나 라인하르트는 힘으로 저를 밀어붙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그 틈을 노려 알렉사는 검을 찔렀다. 그의 오른쪽 가슴을 노리는 검이었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에 라인하르트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됐다! 알렉사는 속으로 환호했다.

하지만 이내 쿵, 하는 충격과 함께 알렉사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라인하르트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알렉사를 어깨로 받아버린 것이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으윽!”

엉덩이와 등에 이어 뒷머리까지 살짝 부딪치는 바람에 입에서 제법 큰 신음이 튀어나왔다. 항상 덤덤한 라인하르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는 들고 있던 목검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하곤 알렉사의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은 건가? 머리를 부딪친 거 같던데.”

“아으, 괜찮아. 별거 아냐.”

“의무실에 가는 게 좋겠어.”

“괜찮다니까? 왜 이런 걸로 호들갑이야.”

솔직히 알렉사는 창피한 마음이 더 커서, 라인하르트가 옆에서 자꾸 의무실에 가야 한다고 말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그녀의 몸이 유리로 된 것도 아니고, 이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어차피 검술부에서 남이 휘두른 검에 맞거나 찔리거나, 피하려다가 바닥을 구르거나 엎어지거나… 그런 일은 너무나 흔해빠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요란을 떨 것도 아니란 소리다.

대체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 건지. 알렉사는 손을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뒷머리는 세게 부딪치지 않았는지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대충 손으로 뒤통수를 문지르고 옷을 툭툭 턴 알렉사는 아직도 제 곁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라인하르트에게 말했다. 발끝으로 라인하르트의 발을 툭툭 건드리면서.

“그만하고 일어나, 소공작님. 이런 게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난 멀쩡하니까 한 번 더 하자고.”

“그러지 말고…….”

“아, 진짜! 정말 이럴 거야? 시간 없어, 안 돼! 나 약속 있어!”

“무슨 약속?”

왠지 그 말 앞에 ‘나와의 대련 말고’라는 말이 생략된 것처럼 들리는 건, 알렉사만의 착각일까? 그녀는 바닥에 나뒹구는 라인하르트의 목검을 집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개인적인 일이야.”

“누구와?”

“…그걸 소공작님이 왜 궁금해하는데?”

그 말에 라인하르트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알렉사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다시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녀가 누구와 뭘 하러 가든 라인하르트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그냥 알렉사와 남몰래 대련하는 상대일 뿐이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와 검을 맞댈 준비를 하기는커녕, 조금 삐뚜름하게 서서는 팔짱까지 끼고 다시 물었다.

“그냥 궁금하다고 하면, 말해줄 건가?”

“성격 이상하네.”

“그래서, 누구랑 어딜 가지?”

“하아…….”

알렉사는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굳이 비밀로 할 건 아니었다. 그녀의 일정은 그냥 비앙카와 마티어스, 그리고 몇몇 다른 친구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기로 한 것뿐이었다.

비앙카가 시내에서 끝내주는 주점을 발견했다고 꼬드긴 것이다. 3년 차 이상 생도들은 휴일에 그렇게 수도 시내로 나가곤 했고,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쩐지 삐죽한 마음이 들었다. 라인하르트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네가 왜 나를 궁금해하느냐는, 그런 삐딱한 마음에서였다.

어차피 우리는 사는 세계가 다르잖아. 서로의 사이에 그어진 선이 있는데 왜 너는 이쪽을 궁금해하는데?

숨어서 대련하며 라인하르트가 그렇게까지 귀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성격이 좋은 편이라는 건 그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 박힌 인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건 마치 깊은 원한 같았다.

라인하르트에게 대답하는 대신 알렉사는 검을 거두었다. 그녀가 대련 자세를 풀어버리자 라인하르트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대련도 안 하겠다는 건가?”

“솔직히 왜 그걸 소공작님에게 말해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대련보다 다른 데에 관심을 둔 건 그쪽이잖아? 할 마음 없는 사람 붙들고 있을 생각 없어.”

알렉사는 자신이 제법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새침하게 몸을 돌렸다.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라인하르트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라인하르트가 걸어둔 그녀의 옷을 집어 들고 후원을 떠날 때까지도 그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사는 그가 끝까지 그녀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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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FY

조금 일찍 비밀스러운 대련을 끝내고 돌아온 바람에 알렉사는 여유가 제법 있었다. 씻고 나와서 평소처럼 헐렁한 셔츠에 바지만 입고 침대를 뒹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비앙카가 들어왔다. 그녀는 알렉사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너 왜 지금 여기 있어?”

“그냥 수련 좀 일찍 끝냈어. 아직 나가려면 시간 많이 남아서 자다 갈까 하는데… 어, 뭐야. 왜?”

“자다 가긴 뭘 자다 가! 일어나!”

비앙카는 야무지게 알렉사의 팔을 잡고는 침대에서 일으켜서는 질질 끌고 제 옷장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차린 알렉사는 난색을 표하며 손을 뿌리치려 했다.

“저기, 비앙카. 나 지금 이 옷이면 충분하거든.”

“내가 안 충분해!”

“어차피 네 옷은 나한테 안 맞아.”

비앙카는 알렉사보다 거의 머리 반만큼 작은 데다, 운동과는 담을 쌓은 마법사이자 귀족 아가씨였다. 당연히 그녀의 옷이 알렉사에게 맞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비앙카는 어쩐지 스산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내가 샀어. 네게 잘 어울릴 만한 옷.”

“뭐? 하지만…….”

“돈 아깝고 어쩌고 그딴 소리 하지도 마!”

앙칼지게 쏘아붙인 비앙카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어서는 알렉사에게 덥석 안겼다.

“갈아입고 나와.”

“비앙카…….”

“너 치마 입고 다니는 거 안 좋아해서 일부러 바지로 준비했으니까, 입고 나오라고!”

비앙카의 성화에 결국 알렉사는 그녀가 마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흰 셔츠는 부드러운 재질의 천이라 어느 정도 낙낙한데도 알렉사의 몸 선을 언뜻언뜻 드러내 주었다. 어깨와 가슴에 은사로 수를 놓은 것도 알렉사와 잘 어울렸다. 또 짙은 남색의 바지는 훈련용과 다르게 몸에 예쁘게 맞았다. 전반적으로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모양새였다.

비앙카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꾸만 뭘 더 내놓았다. 구두와 귀걸이를 여럿 내놓고 그중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걸 골라줬다.

시키는 대로 다 입고 걸치고 나자, 알렉사는 한 것도 없이 피곤한 기분이었다.

“이제 다 됐지?”

“무슨 소리야!”

번뜩이는 비앙카의 눈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알렉사는 몸을 움츠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시간이 되어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마티어스였다.

“알렉사 선배 맞아요?”

“…그렇게 됐어.”

“와, 세상에. 왜 평소에 이렇게 안 하고 다녔어요?”

마티어스를 필두로 친구들이 와글와글 떠들어댔다. 알렉사는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웃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연회를 제외하고 한 번도 한 적 없는 화장도 했고, 조금 부스스했던 머리도 윤기 나고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하나로 높게 묶었다. 그동안의 알렉사가 오로지 기사 지망 생도의 모습이었다면, 오늘은 그야말로 생기발랄한 스무 살 아가씨다운 모습이었다.

“…괜찮아 보여?”

“괜찮은 정도인 줄 알아? 알렉사, 평소에도 이러고 좀 다녀!”

친구 하나가 가볍게 팔뚝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알렉사의 볼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라고 해서 꾸미는 걸 싫어하진 않았지만, 하도 하지 않다 보니 이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너무 어색했다.

모두가 칭찬하자 알렉사의 기분도 둥둥 뜨는 듯했다. 그녀의 옆은 항상 그렇듯 비앙카가 차지했고, 어느새 마티어스도 다른 한쪽에 자리 잡았다.

이윽고 비앙카가 기운차게 외쳤다.

“가자! 밤은 짧다고! 가서 실컷 마시고 노는 거야!”

우와아! 다들 함성을 지르며 아카데미에서 탈출하기 위한 걸음을 재촉했다. 어쩐지 들뜬 기분으로 알렉사도 함께 걸음을 옮겼다.

*

“흐흥, 흥.”

알렉사는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아니, 그건 그녀만의 생각이었다. 알렉사의 발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완전히 일직선으로 가지 못했다.

스스로 술이 제법 세다고 생각했지만, 알렉사는 술이 꽤 약한 편이었다. 주점에서 나온 맥주를 큰 잔으로 두 잔 마시고 나니 이미 취기가 잔뜩 오른 뒤였다. 다른 친구들은 좀 더 마시고 놀자고 붙잡았지만, 알렉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 먼저 들어갈래. 졸려서 안 되겠어.’

비앙카가 마티어스에게 같이 들어가라고 했지만, 알렉사가 극구 말렸다. 마티어스가 많이 즐거워 보여서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 나오려는 마티어스를 힘으로 눌러 앉히고―그때 마티어스가 얼마나 당혹스럽고 억울한 얼굴이었는지 그녀는 모른다― 알렉사는 먼저 거리로 나왔다.

공용 마차 대기소까지 가는 길은 잘 알았으니 금세 도착할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알렉사는 전혀 다른 곳에 다다르고 말았다.

“어라.”

멍한 눈으로 그녀는 제 앞에 있는 거대한 분수를 바라보았다. 이건 수도 빈터투어에서 두 번째로 큰 광장에 있는 비슬링 전쟁 승전 기념 분수였다.

공용 마차는 여기서도 탈 수 있지만, 아까 주점에서 가까운 건 첫 번째 광장에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알렉사는 거리를 제법 오래 헤매고 다녔던 거다.

취한 나머지 ‘자신이 잘못된 장소에 다다랐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몸이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알렉사는 분수 근처에 걸터앉았다. 조금 쉬었다가 마차를 타러 갈 생각이었다. 훈련으로 다져진 체력은 이 정도로 지치지 않았지만, 취기는 알렉사의 몸과 머리를 속였다.

그녀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항상 아카데미에 있으니 보는 얼굴만 보고 살아서, 이렇게 다양한 낯선 얼굴들이 지나다니는 곳은 꽤 신선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다들 자신을 모르는 곳에 있으니 어깨에 들어간 힘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좋다아.”

알렉사는 히히, 하고 웃으며 턱을 괴고는 팔을 무릎에 얹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눈에 띄는지 알렉사는 조금도 몰랐다.

그때 누군가가 알렉사의 옆으로 다가왔다. 취한 정신에도 다가오는 이의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거기에는 낯선 두 남자가 서있었다. 그들은 조금은 긴장한 듯한 얼굴로 알렉사의 옆에 다가왔다.

“저기, 혹시 일행이 있습니까?”

“응? 아니, 없는데요.”

“그, 아까부터… 보고 있었습니다만. 크흠.”

왼쪽에 선 남자가 헛기침을 하고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알렉사는 그의 모습을 금방 훑었다. 차림새를 보니 귀족은 아니고, 돈 많은 평민 집안의 자식인 모양이었다.

“혹시 시간이 있다면, 우리와 함께 술 한잔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알렉사는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술을 더 마시자고? 알렉사는 흥, 하고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싫… 일행도 없고, 여기서 그냥 앉아만 있는 것보단 우리랑 노는 게 재미있지 않겠어요?”

다른 남자가 어르듯 그녀를 꼬드겼다. 알렉사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생각하는 척하다가 또 웃으며 답했다.

“아니, 됐어요.”

“저기…….”

“둘 다 재미없어 보이는데.”

알렉사의 눈에 두 사람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저보다 강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잘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렉사는 눈꺼풀이 무거워 더 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거절이 무안했는지, 한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 얼굴 좀 반반하다고 튕기는 거야? 어차피 이 시간에 혼자 술 냄새 풍기고 이런 데 앉아있는 거면, 어디 귀한 집 아가씨도 아닐 텐데 왜 비싸게 굴어?”

그러더니 그 남자는 알렉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몸에 타인의 손이 닿자, 알렉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근데 이 자식이……. 알렉사는 상대를 쏘아보았다. 좀 전까지는 헤헤거리며 순한 듯 보이던 알렉사가 눈을 사납게 뜨고 노려보자, 그 남자는 움찔했지만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나 참, 꼴은 사내놈들처럼 하고 다니면서……. 잠자코 따라오면 여자답게 노는 법을 알려줄 테니 가자고, 어?”

아, 이거 봐라. 알렉사는 울컥 솟구치는 짜증을 누르며 상대를 어떻게 조질지 궁리했다. 어디 부러트리거나 하지만 않으면 대충 여기저기 때려도 되지 않을까? 근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함부로 때렸다가는 치안대가 출동하고, 아카데미에 알려지고 할 수도 있을 듯했다. 어떻게 해야 소란스럽지 않게 이 새끼들을 (반만) 죽이지.

그렇게 궁리하던 때였다.

“선배, 기다렸죠? 하하.”

갑자기 그들 사이로 슥 끼어든 마티어스 때문에 알렉사의 손목을 잡고 있던 자는 엉겁결에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알렉사도 상대를 (반쯤만) 죽이려던 생각을 멈추고는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 여기는 어떻…….”

“늦어서 미안해요! 저기, 무슨 일이신지……. 저희 선배님께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마티어스의 말에 남자 둘은 움찔했다. 이 수도에서 딱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선배라고 부를 만한 여자라면 역시 귀족에 아카데미 생도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두 손을 필사적으로 내저으면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외치곤 사라졌다.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던 마티어스가 픽 웃으며 알렉사의 옆에 앉았다. 알렉사는 눈을 끔뻑거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여기 왜 있어?”

“선배 찾아온 거죠.”

“왜? 나 혼자 잘 갈 수 있어.”

“알아요.”

그래도 같이 가고 싶어 할 수 있잖아요. 마티어스가 순하게 웃었다. 그 말에 알렉사는 픽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순간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얼굴에 걸렸다. 마티어스의 손가락이 다가와 그녀의 귀 뒤로 그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 손짓이 제법 느릿했다.

“선배는 여기까지 와서 뭐 했어요?”

“그냥 앉아서 쉬면서 사람 구경했지. 나 어떻게 찾았어?”

“마법은 그냥 있는 게 아닌데요.”

둘은 킥킥대며 웃었다. 다시 적당히 취기가 올라오는 걸 느끼며 알렉사는 마티어스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그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알렉사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아, 들어가기 싫다. 아카데미 돌아가면 또 훈련하고, 공부하고.”

“선배는 그거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훈련이랑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런 변태가 있을 리가… 아니, 하나는 있을지도. 알렉사는 중얼거렸다. 아마도 라인하르트는 그런 변태가 아닐까?

그 순간 알렉사는 광장 건너편에 어쩐지 라인하르트처럼 보이는 사람이 서있는 걸 보았다. 이미 사위가 어두운 데다 사람들이 하도 지나다녀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인 듯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빈터투어 시내에는 뭐 하러 나온단 말인가?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에 놀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단 얘길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럼 저건 취한 제 눈이 만든 환각일까.

그를 생각했다고 그가 보이는 거야? 알렉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라인하르트는 뭐기에, 이토록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가질 않는 걸까. 그녀는 그게 조금 피곤하다고 느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라인하르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알렉사가 중얼거렸다.

“10분만 더 있다가 가자.”

“…그보다 더 긴 시간도 어깨, 빌려줄 수 있는데.”

“네 연약한 어깨가 감당하기엔 충분히 긴 시간인 거 같은데.”

“아, 선배. 저 그렇게 허약한 마법사 아니라니까요.”

둘은 티격태격하다가도 키득거리며 사소한 잡담을 이어갔다. 소소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알렉사는 더없이 즐거웠다.

그리고 알렉사는 어느새 라인하르트의 환영이 사라진 걸 알아차렸다.

*

한 해를 둘로 나누어 상반기와 하반기에는 각각 두 차례의 평가가 있었다. 상반기 중간 평가 기간이 다가오자 학생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이때의 평가가 어떠하냐에 따라 졸업 이후 그들의 진로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검술부는 실력순으로 넷씩 끊어서 조를 짠 뒤, 세 가지의 테스트를 거쳤다. 1 대 1 대련과 1 대 3, 2 대 2 대결이었다. 개인과 개인과 맞설 때, 개인이 다수와 맞설 때, 협공할 때의 모습을 평가하는 것이라서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평가에서는 날이 무딘 검을 사용했다. 입학할 때 검술부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었다. 평소에도 혼자서는 쇠 검으로 연습하기에 그다지 부담스럽진 않았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렉사는 솔직히 1 대 1 대결 말고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다수와 대결하거나 협공하는 쪽은 항상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성적순대로 짝을 지어 하게 되는 1 대 1 대련이 항상 문제였다. 알렉사의 상대는 입학한 이후로 한 번도 변하지 않고 라인하르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중간 평가는 제법 자신감이 붙어있었다. 그동안 라인하르트와 내내 붙으면서 그와 싸우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순간을 잘 노리면 아슬아슬하게 이기거나 비기는 정도는 충분히 노려봄 직했다. 라인하르트는 그 누구와 견주어도 발군의 실력인 건 사실이기에, 아마 그 정도만 해내도 교수는 알렉사의 성장을 인정할 것이다.

“오, 오늘 왠지 얼굴이 밝은데? 알렉산드라, 뭐 숨겨둔 비기 같은 거라도 있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몸 상태가 좀 좋을 뿐이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어깨가 쫙 펴졌는데.”

“왜, 불만이야? 네 어깨도 아주 쫙 펴줄까?”

은근슬쩍 알렉사의 옆구리를 찌르던 동기 놈은 그녀가 두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붙들고 뒤로 확 젖힐 듯 굴자 낄낄대며 도망쳤다. 그녀는 슬쩍 뒤로 돌아서서는 뺨을 매만지며 표정을 가다듬어보려 했다.

‘그렇게 얼굴에 자신감이 드러나나? 아니, 이렇게까지 자만하면 안 되지.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잖아.’

알렉사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때 저쪽에서 다가오는 라인하르트가 보였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인사하려던 알렉사는 가까스로 손을 옆구리에 붙인 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모양 빠지게, 뭘 먼저 인사를 하고 그래! 우리가 무슨, 친구라도 된다고? 알렉사는 속도 없는 자신을 꾸짖었다.

그런데 무뚝뚝하긴 해도 먼저 눈인사라도 건네는 편이던 라인하르트는,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그런 인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차가운 얼굴이었다. 왜 저렇게 서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지 알렉사는 조금 의아해졌다.

알렉사가 무안하리만치 퉁명스럽게 대해도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말을 거는 게 오덴발트 소공자 아니었던가.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하지만 그런 것까지 물을 만한 사이는 아니었으니, 알렉사는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알렉사는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다들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 교수님들이 들어왔다. 약식으로 인사를 하고 나자 검술부의 대표 교수인 트리어가 앞으로 나섰다.

“자, 올해도 어김없이 즐거운 상반기 중간 평가가 돌아왔군. 다들 그동안 열심히 수련해 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자신이 흘린 땀과 눈물이 아깝지 않게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도록. 알겠지?”

생도들 모두 힘차게 대답했다. 트리어 교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시작은 4학년 학생들부터였다. 다른 이의 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바가 많기에 다들 평가에 집중했다. 4학년만 되어도 한 학년에 겨우 열 명 남짓이었기에 그리 평가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알렉사는 선배들의 검과 몸짓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평가는 약 한 시간에 걸쳐 끝났다. 약 10분간의 휴식 뒤에 곧장 3학년의 평가가 시작되었다.

“3학년 첫 번째 조, 앞으로.”

그 말에 알렉사가 벌떡 일어났다.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라인하르트도 일어났고, 다른 학생 둘도 따라 일어섰다.

네 사람은 바로 연무장 가운데로 나섰다. 먼저 1 대 1로 대련한 쪽은 알렉사와 라인하르트가 아니라 다른 둘 쪽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을 방해하지 않을 만한 곳에 선 채로 알렉사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몇 차례나 했다.

라인하르트도 자신만큼 긴장했을까? 알렉사는 슬쩍 옆을 보았다. 정면만 보고 있는 라인하르트의 얼굴은 아까의 그 불쾌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덤덤하고, 오만한 기운이 어린 잘난 얼굴이었다.

‘그럼 그렇지.’

아주 잠깐 뭔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평소의 라인하르트라는 걸 확인하자 알렉사는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대체 왜 그의 기분에 따라 제가 이렇게 달라지는 건지!

‘대련 상대잖아. 상대 컨디션은 나한테도 중요한 거라고.’

알렉사는 스스로 그렇게 합리화하며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와 알렉산드라 린다우는 앞으로!”

드디어 그녀의 차례가 돌아왔다. 알렉사는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마주 선 라인하르트와 인사를 나누고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스르릉, 쇠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좋았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알렉사는 씨익 웃으며 검으로 라인하르트를 똑바로 겨누었다.

“잘 부탁해.”

그녀가 이렇게 인사를 건네면 라인하르트도 곧장 “나도 잘 부탁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 왜냐하면 라인하르트의 예쁜 초록 눈동자가 알렉사를 제대로 응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녀의 등 뒤를, 다른 걸 보고 있는 듯했다.

대체 뭐지. 알렉사는 이렇게 집중하지 못하는 라인하르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상태라면 제대로 이겨볼 수도 있겠단 자신감이 들었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알렉사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검이 빠르게 라인하르트의 오른 손목부터 노렸다. 딴생각을 하는 듯하던 라인하르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하게 알렉사의 검을 막아냈다. 그의 검이 알렉사의 팔을 타고 뱀처럼 기어오르는가 싶더니 목덜미를 노렸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하고는 그 속도 그대로 라인하르트의 몸을 베어 들어갔다. 부웅,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묵직했다. 그리고 뒤이어 쨍, 하고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두 사람은 검을 연달아 부딪쳤다. 쇠끼리 부딪치고 긁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또 울렸다. 둘은 한 치도 봐주지 않고 서로의 급소를 노렸다. 알렉사는 빠른 연격 속에서 딱 한 점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렉사가 라인하르트와 겨뤄본 횟수는 무려 서른네 번이었다. 누구도 그와 이만큼 검을 맞대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비록 서른네 번을 졌지만 그사이에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의 버릇이나 검로를 몸으로 익혔다. 당연히 그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가 예상하는 대로 알렉사가 움직이는 일은 없으리라. 그것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알렉사는 제 왼쪽 옆구리를 슬쩍 비웠다. 당연히 라인하르트는 그쪽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가 빈 곳을 공략할 때, 알렉사는 검으로 그 공격을 막는 대신 몸을 유연하게 틀었다. 그녀의 몸이 빙글, 라인하르트의 검과 팔, 그리고 등을 따라 돌았다.

“……?!”

라인하르트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이거지! 알렉사는 속에서부터 희열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그의 검을 피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알렉사는 강공을 즐기는 편이었으니까. 그에게 그 점을 지적받으면서도 단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피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사실은 당연히 알았다. 다만 직접 검을 받아내고 반격하여 이기고 싶었던 게 지난 서른네 번의 대련이었다면, 오늘은 무슨 수를 쓰든 꺾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가 완전히 라인하르트의 등 뒤를 잡아냈다. 알렉사의 눈이 반짝였다. 됐어! 그녀의 검이 곧장 목덜미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이대로 검이 그의 목에 닿기만 하면 마침내 알렉사는 라인하르트를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작 손가락 몇 마디만을 남긴 순간.

쨍―!

그녀는 자신이 허공에 헛손질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눈으로는 보았는데 뇌가 따라가지를 못했다.

라인하르트의 몸이 반쯤 알렉사를 향해 돌아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도 따라서, 아래에서 위로 죽 그어 올려졌다. 제 목을 향해 달려들던 알렉사의 검을 쳐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쳐낸 것이 아니었다.

쨍그랑―

날 수가 없는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사방이 고요해서 그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알렉사는 제 손에 들린 검이 아니라, 라인하르트의 손에 들린 검을 보고 있었다.

은은한 흰 기운이 안정적으로 검신을 두른 채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오러……?”

누군가가 작게 속삭인 소리가 알렉사의 귀에 그대로 꽂혔다. 알렉사는 그제야 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검 중간이 잘려 나간 채였다. 오러를 두르지 못한 검은 그냥 쇠막대기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오러가 담긴 라인하르트의 검과 부딪치자마자 잘린 것이다. 알렉사의 손아귀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망가져 버린 검이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와, 우와아!”

“세상에, 라인하르트 소공자가 오러를 쓸 줄 알았어?”

“야, 말도 안 돼. 미쳤다!”

학생들의 아우성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교수들도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거나 삿대질을 해댔다. 알렉사는 제 빈손을 보다가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에서 오러가 흩어졌다. 처음 해낸 거라고 보기에는, 오러를 다루는 게 익숙해 보였다. 그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눈만 깜빡거리는 알렉사를 향해 걸어온 라인하르트는 바닥에 떨어진 알렉사의 잘려 나간 검을 주워서는 그녀에게 내밀었다. 제 망가진 검을 한번 보고 라인하르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당혹스러움은 사라진 뒤였다. 그의 담담한 얼굴이 정말이지 꼴 보기 싫었다.

“하…….”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렉사는 제 검을 받아 드는 대신에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재밌었어?”

“무슨…….”

“이미 경지에 이르신 분을 이겨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내 꼴이 참 우스웠겠지.”

분하고 또 분해서 알렉사는 입술이 덜덜 떨렸다. 눈물? 너무 화가 나면 눈물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대체 이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계속 대련을 해준다고 한 걸까? 저 한번 이겨보겠다고 달려들고 또 달려들고 하는 게 그렇게 웃겼나? 그나마 그동안 남들 앞에서 개망신당하지 않게 해준 걸 고맙다고 해야 할까? 아니, 아예 모두 앞에서 둘 사이의 격차를 이렇게 보여주는 걸로 더 큰 망신을 주려고 한 걸까?

“라인하르트, 진짜 넌 내가 같잖았겠다.”

“알렉산드라, 잠깐…….”

알렉사는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온갖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지금은 중간 평가 중이고 검술부의 모든 이들이 모여있었다. 심지어 교수들까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토해냈다가는 진 것도 모자라서 오러를 쓸 줄 아는 라인하르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모자란 인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는 라인하르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아마도 알렉사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본 모양이었다. 우는 건 난데, 제가 왜 당황하는지. 알렉사는 입술 끝을 올려 웃어 보이며 말했다.

“오덴발트 소공자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알지도 못하고 감히 이겨보려 해서 죄송합니다.”

이미 처음부터 경고하셨는데 말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빈정대고 있었지만, 너무 소란스러운 나머지 누구도 그걸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오직 라인하르트만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졌습니다.”

그녀가 깔끔히 패배를 시인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는 저 멀리 날아간 잘려 나간 검날을 주우러 갔다.

그녀는 교수 중 하나에게 ‘예비용 검을 새로 가져오겠다’고 말하고는 연무장을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모두들 소드 마스터가 된 젊은 소공자에게 환호할 뿐이었다. 교수들은 그런 학생들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라인하르트를 계속 힐끔댔다.

그 혼란 속에서 라인하르트만이 망연한 얼굴로 알렉사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

중간 평가는, 다행히도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다.

라인하르트에게 배신당했다고―그것을 배신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알렉사 입장에서는 그랬다― 해서 미래가 걸린 평가를 개판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를 좋게 보는 한 교수는 ‘상대가 라인하르트여서 그렇지, 네 실력도 누가 쉽게 덤벼 이길 만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기뻐야 당연하겠지만, 알렉사는 그저 짧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소식을 들은 비앙카가 알렉사를 위로해 주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위로받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라인하르트의 검이 제 검을 쳐내는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검을 타고 화르륵 붙던, 흰 오러의 일렁거림도 되새겼다.

마침내 그녀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와 자신 사이에는 정말 거대한 강 하나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건 비단 계급뿐만이 아니라 실력에서도 그렇다는 걸.

차라리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아예 라인하르트는 논외로 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언젠가 자신도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검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알렉사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아카데미에서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 기이한 패배 의식에서 알렉사는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일주일 넘게 그 좋아하는 소설도 읽지 않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거절하고 그녀는 방에 틀어박혔다. 수업과 식사 외에는 방에서 나가지 않는 것을 비앙카와 마티어스 등 친구들이 걱정했지만, 지금은 딱히 다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단 한 번도 빼먹지 않는 수련조차도.

“아잇, 진짜. 라인하르트 녀석한테 진 거 때문에 이렇게 계속 처져있을 거야?”

비앙카가 바락 성질을 냈지만 알렉사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씩 웃기만 했다. 항상 씩씩하던 알렉사였기에 비앙카는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그깟 오러, 너도 곧 쓸 거야!”

“하하.”

“내가 장담한대도? 아휴, 진짜! 좀 일어나서 나가서 놀든가, 니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검이라도 휘두르든가!”

“알았어. 근데 딱 하루만 더 누워있을게.”

알렉사가 실실 웃으며 이불을 뒤집어쓰자, 비앙카는 발을 구르며 끙끙거렸다.

사실 그녀도 그렇게까지 오래 처박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풀 죽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다시 의욕을 채우고 스스로를 일으키려면 약간 다독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내일쯤에는 연무장도 다시 가고, 친구들이랑 맛있는 것도 좀 먹고, 도서관도 가야지, 도서관.

‘도서관?’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알렉사는 이불을 걷으며 벌떡 일어났다. 드러누워 있던 알렉사가 갑자기 일어나자 비앙카는 깜짝 놀라서 으악,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었다.

“아, 나 도서관을 안 갔네.”

“도서관은 왜? 연체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의욕 없는 얼굴로 누워만 있던 애가 갑자기 도서관 타령을 하니, 비앙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렉사에게 이건 제법 큰일이었다.

‘혹시 답이 없어서 기다리거나 하면……. 그러다가 연락이 끊기면!’

그건 정말 곤란했다. 디어와의 쪽지 교환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니,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팍팍한 아카데미 생활에 얼마나 힘이 되는 달콤한 작은 비밀인데.

알렉사는 침대에서 나와서는 옷을 갈아입었다. 펜과 종이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아예 옷까지 갈아입으니, 비앙카의 얼굴에는 더욱 ‘어처구니없음’이 그려졌다.

“너 지금 도서관 가게?”

“응. 잠깐이면 돼.”

“아니, 여태 누워있다가 도서관이 웬 말인데?”

“그, 잊어먹은 게 있어서. 금방 올 거야. 그리고 비앙카, 내일부터는 나 다시 훈련도 하고 그럴 거니까 걱정하지 마. 고마워, 내 친구.”

알렉사는 비앙카를 한 번 꼭 끌어안아 주고는 방을 나섰다. 등 뒤에서 비앙카가 뭐라고 막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그건 이따 돌아와서 다시 들으면 될 일이었다.

로맨스 소설 서가 근처에서 아마도 신입생으로 보이는 여학생과 잠깐 마주쳤다. 역시나 약속된 서가까지 다가가는 동안 마음이 두근거렸다.

혹시 그사이에 내가 오지 않아서 쪽지를 두었다가 다시 회수해 가기라도 했음 어떻게 하지? 아니면 다른 누가 보았다면? 어느 쪽이든 디어의 쪽지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성적표를 받아 드는 심정으로 로맨스 서가 2열에 들어섰다.

세 번째 칸에, 언제나 그렇듯 단정하게 접힌 쪽지가 놓여있었다. 알렉사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퍼졌다. 그녀는 쪽지를 집어 들고 얼른 펼쳐 읽어보았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벌써 일주일째 A의 답이 없어서 걱정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더 이상 나와 이렇게 쪽지를 주고받고 싶지 않은 거니?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늘은 꼭 답을 받아볼 수 있었으면…….]

항상 반듯하기만 하던 디어의 글씨는 조금 다급해 보였다. 그녀가 답을 하지 않아서, 불안해서 그런 걸까? 디어가 답답해하고 불안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이하게도 알렉사의 마음속에 작은 환희가 들어찼다.

디어도 나를 필요로 했구나. 그도 나를 계속 생각했어. 나를 잃고 싶어 하지 않았어.

알렉사는 품에서 쪽지를 꺼내어서 줄줄이 적어나갔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품어두었던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있잖아, 나 너무 어처구니없게 중간 평가에서 졌어. 날 상대한 녀석이 그렇게 비겁하게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어. 그 녀석, 한 번도 그런 티를 내지 않고 나를 상대했거든. 완전히 속은 기분이야. 처음부터 왜 나에게 그 녀석은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내가 가르쳐달라고 귀찮게 굴까 봐 그랬을까? 아니면 내가 저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달려드는 게 웃겨서 지켜본 걸까? 너무 속상해서 일주일 동안 뭘 하고 싶지가 않았어. 애초에 그 자식, 진짜 재수 없는 놈이었거든. 나한테 주제를 알라는 듯 훈계하질 않나. 아, 나 이제 그런 놈 신경 안 쓸 거야. 정말이지, 내가 뭐에 씌어서는 그런 자식이랑 계속 상대했는지. 다시 생각해도 속상한데…….

그렇게 줄줄이 써 내려가다가 알렉사는 펜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써낸 부분을 쭉 찢어냈다. 그러자 겨우 한 뼘만 한 종이가 남았다. 디어의 쪽지와는 다르게 각 변이 삐뚠 그 작은 종이에 알렉사는 간단하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적었다.

[너와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디어.]

이것 또한 처음에 쪽지를 남길 때와 같이 충동적이었다. 하지만 쪽지를 내려놓고 느껴지는 심장의 쿵쿵거림은 조금 달랐다. 처음 쪽지를 남겼을 때는 뭐랄까, 남들 눈에 띄면 안 되는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것만 같았지만, 지금은 기대로 가득 차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디어는 분명히 그녀를 좋아했다. 알렉사를 아꼈고,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어 했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항상 응원했다.

그럼 그런 일을, 이제는 서로 얼굴을 보며 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줄줄이 글로 적어서 그의 답을 기다리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알렉사는 디어를 만나게 된다면 어쩐지 허해진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쪽지를 다시 집어서 꾹꾹 눌러 접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디어는 분명 답을 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것도 그녀가 원하는 답을.

그리고 다음 날 저녁, 알렉사는 다시 같은 자리에 섰다. 그녀가 놓았던 종잇조각은 사라지고, 거기에 반듯하게 접힌 쪽지가 놓여있었다. 디어가 그녀의 쪽지를 보고 답을 한 모양이었다.

알렉사는 조금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했다. 고작 쪽지를 확인하는 것뿐이잖아. 그녀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두 손으로 쪽지를 집어 들고 천천히 폈다.

다른 때와 다르게 디어의 답은 아주 짧고, 간결했다.

[나도 네가 보고 싶어, A.]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알렉사는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책장에 몸을 기댄 채로 숨을 할딱거리다가 다시 쪽지를 펼쳐 보고는 입을 다시 막고 발을 동동 굴렀다.

디어도 그녀가 보고 싶다고 한 게 현실이라니!

‘서로 얼굴을 모르는 채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라는 답을 받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했던 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 드디어 요 몇 년 동안 알렉사에게 큰 힘이 되어준 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알렉사는 제 볼을 세게 꼬집어보았다. 얼얼하게 아픈 것이, 정말이었다.

그럼 언제 보면 좋을까. 벌써부터 알렉사는 디어와의 만남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일단 그에게 묻는 게 좋을 듯했다. 알렉사는 그에게 만날 약속을 잡자는 쪽지를 써서 그 자리에 두었다. 그에게 답이 어떻게 올지,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

두 사람 사이의 쪽지는 다른 때보다 빠르게 오갔다. 이전까지는 어떤 때는 2~3일에 한 번 쪽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느긋했다면, 이번에는 재깍재깍 서로 답을 했다. 서로가 서로의 답을 기다렸다는 듯 쪽지가 오갔다.

날짜와 장소를 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시간표도, 개인적인 일정도 공유하지 않은 상태였다. 얼굴을 보고 말한다면 금방 맞춰볼 수 있겠지만 그들은 이제야 서로 만나기로 한 사이였다.

알렉사는 첫 만남을 위한 약속을 잡는 일이 마치 어둠 속에서 퍼즐 조각 하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더듬더듬 끼워 맞추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A’와 ‘디어’는 해냈다. 그들이 만나기로 결의한 지 9일째 되는 날이었다.

날짜는 나흘 뒤의 휴일이었다. 그날부터는 또 운 좋게 5일간 연휴라서, 여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듯했다. 장소는 빈터투어 시내의 어느 작은 찻집이었다. 알렉사는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사실 빈터투어는 굉장히 큰 도시였다. 그래서 그곳을 모두 둘러볼 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약속이 완전히 정해지고 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자꾸만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났다.

‘뭘 입고 나가야 하지?’, ‘처음엔 뭐라고 인사하면 좋지?’,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닐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등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알렉사는 약속 이틀 전, 비앙카를 붙들고 비장하게 물었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비앙카?”

“응? 왜? 뭔데?”

“…나, 옷을 좀 골라줘.”

“옷?”

“내일모레 만날 사람이 있는데… 괜찮은 옷이 없네.”

그 순간 비앙카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남자야?”

“어, 어? 그게… 응.”

순간 알렉사는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주춤 물러났다. 그만큼 비앙카의 눈에 어린 빛은 광기에 가까웠으니까. 그녀는 성큼 다가와서는 알렉사의 두 팔을 덥석 붙들고는 열렬하게 외쳤다.

“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싹 맞춰줄게!”

“아니, 맞춰주진 않아도…….”

“세상에, 알렉사! 데이트잖아! 데이트인데, 대충 하고 나가면 안 되는 거야. 알았어?”

데이트까진 아닌데…라고 말하려던 알렉사는 문득 비앙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쨌든 디어와 자신 사이에는 호감이 오갔다. 그래서 단둘이 따로 아카데미도 아닌 시내에서 보기로 하지 않았는가.

알렉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부탁해, 비앙카.”

“맡겨둬! 내가 아주, 그 친구 누군지는 몰라도 완전 눈 돌아가게 해줄 테니까!”

열의에 불타오르는 비앙카는 그날 오후, 정규 수업이 끝나자마자 알렉사를 끌고 시내로 뛰어나갔다. 그날 알렉사는 검을 수천 번 휘두르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 당일이 되었다. 긴 연휴의 시작이라 아카데미 학생들 모두 들떠있었다. 이미 아카데미를 뛰쳐나간 이들도 많았다.

알렉사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조금 어색하게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차림이라서 정말이지 어디 하나 편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꾸미는 걸 제대로 해보지 않은 알렉사의 눈에도, 그녀는 여느 때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붉은빛 도는 갈색 머리는 평소와 다르게 윤기가 흐르고 적당히 구불거렸다. 잘 손질된 머리카락은 견갑골 근처에서 찰랑였다. 머리에 꽂은 에메랄드 핀은 비앙카가 제가 가진 것 중 제일 예쁜 것이라며 꽂아주었다.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던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성긴 레이스로 장식된 흰 블라우스에 무릎 아래까지 오는 남색 플레어스커트였다. 게다가 훈련하는 데 편한 부츠 대신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다.

“예쁜데… 이상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가만히 있어봐, 라고 종알거리며 비앙카는 알렉사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비앙카의 손가락이 지나가자, 알렉사의 입술에는 붉은 생기가 돌았다.

사실 옷보다도 화장이 훨씬 어색했다. 얼굴에 뭔가 한 겹 씌운 것처럼 답답했지만, 확실히 그녀가 이상향으로 꿈꾸던 ‘숙녀’의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나 진짜 괜찮아 보여?”

“있지, 알렉사. 네가 평소에 꾸밀 일이 없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비앙카는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는 씩 웃었다.

“너 안 꾸며도 예쁘지만 이 정도만 치장해도 주변에 남자 놈들 다 눈 돌아간다?”

“…괜히 그렇게 띄우지 마.”

“진짜라니까. 속고만 살았나.”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자신감 가지라고 하는 얘긴 건 알아.”

비앙카는 곧 애잔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더 이상 뭐라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곧 표정을 바꾸어 씩 웃으며 알렉사의 어깨를 톡톡 쳤다.

“완전 예쁘고 멋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데이트 잘하고 와. 아주 그 남자애 코를 콱 꿰어서 오라고!”

“그냥 만나기만 하는 거라니까.”

비앙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두 사람의 방에 울렸다. 알렉사는 비앙카의 응원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어쩐지 마음이 비장해졌다.

오후 두 시 십 분. 조금 일찍 아카데미를 나선 탓인지, 알렉사는 약속한 장소에 약간 일찍 도착했다. 그리 크지 않은 한 층짜리 건물의 입구에는 ‘델린의 티 룸’이라는, 아주 소박한 간판이 달려있었다. 알렉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오세요!”

주인 아가씨의 활기찬 인사에 고개 숙여 답한 알렉사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일행이 오면 주문할게요.”

그녀의 말에 아마도 델린이라는 이름일 주인은 싱긋 웃으며 물러났다.

알렉사는 창밖을 바라보며 점점 기대감을 부풀렸다. 디어는 언제 올까. 시간에 딱 맞춰서 올까?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어느 학부일까?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약속 시각까지는 10여 분이 남아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기대감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로 30분이 지났을 때도 알렉사는 여전히 혼자였다. 알렉사는 이번에는 민망하게 웃으며 주인에게 차를 부탁했다. 먼저 마시고 있어도 실례는 아닐 것이다. 약속에 늦은 쪽은 디어니까. ‘네가 늦어서 내가 먼저 주문을 해버렸잖아.’ 하고 가볍게 타박을 놓을 수도 있었다.

따뜻한 홍차가 나오고, 알렉사는 그것을 조금 홀짝였다. 쌉싸름하면서도 향긋한 홍차가 조금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주 미약한 불안함이 싹트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알렉사는 입술을 깨물지 않으려고 애썼다. 비앙카가 곱게 발라준 입술연지가 지워지면 곤란했다.

그 뒤로 한 시간. 그때까지도 알렉사는 혼자였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 놓인 찻잔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어느새 알렉사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체 왜 오지 않는 걸까? 분명 디어도 흔쾌히 그녀와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걸까.

‘혹시 내가 시간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늦게 왔나? 아님 너무 일찍 왔나?’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알렉사는 몇 번이고 쪽지를 보고 또 봤고, 달력에 작게 적어놓기까지 했다. 결코 틀릴 리 없었다. 알렉사는 불안함으로 수런거리는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올 거야. 오기로 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리고 약속 시간으로부터 네 시간이 지난 뒤, 해도 뉘엿뉘엿 저물어갈 즈음 알렉사는 결국 비어있는 앞자리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오지 않을 이를 더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바람맞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준비한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같이 느껴졌다.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인사하는 주인에게 알렉사는 애써 웃어 보이고는 가게를 나왔다.

가게 밖에 나오자 분주한 거리가 보였다. 길을 오가는 저 수많은 사람 가운데 디어가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시간, 많은 횟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비록 종이쪽지를 통한 것이었지만― 디어는 한 번도 알렉사를 실망시키거나 오래 기다리게 만든 적이 없었다. 항상 그녀의 힘과 기쁨이 되어준 이였다.

그 최고조의 순간이 될 오늘, 알렉사를 나락으로 밀어버리다니…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알렉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무 당혹스럽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한숨조차 쉴 수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아카데미까지 걸어온 걸까. 제법 먼 거리라서 마차를 타고 왔다는 것도 잊고, 그녀는 내내 걸어서 어둑해진 뒤에야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비앙카가 쏜살같이 튀어나와서 알렉사를 맞이했다.

“어때? 누구랑 만난 거야? 응? 알렉사, 왜 그래?”

“그게… 하하.”

알렉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내내 흐트러질까 봐 걱정스러워서 만지지도 못한 머리였다.

“안 나왔어, 그 사람.”

“뭐어?”

“기다렸는데… 안 오더라.”

“연락도 없이? 사람이라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

힘없이 웃은 알렉사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머리에서 에메랄드 핀을 빼서는 비앙카의 손에 쥐여주었다.

“빌려줘서 고마워. 오늘 꾸며준 것도.”

“아니, 알렉사.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괜찮아. 뭐… 인연이 아니었나 보지.”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는 욕실로 향했다. 열심히 차려입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들어가서는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너무 차분히 가라앉았다. 눈물이라도 나면 뭔가 편안해질 것 같은데 눈물도 안 나왔다.

그녀는 그날 밤 기이하리만치 푹 잤다. 디어와 약속을 잡고 며칠 동안 기대감에 너무 잠을 설친 터라 정말 기절하듯 자버린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알렉사는 도서관으로 갔다. 혹시 자신에게 ‘미안하지만 약속 장소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디어가 남긴 쪽지가 있을까 해서.

하지만 로맨스 서가 2열, 세 번째 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각을 맞춰 곱게 접혀있던 고급스러운 종이쪽지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알렉사는 두 사람이 서로 쪽지를 주고받던 자리를 쓸어보았다.

“뭘 기대했어.”

알렉사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디어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만나기로 약속하기 전까지만.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들의 관계가 얼굴을 보는 순간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막판에 마음을 바꿨을지도. 그도 아니라면, ‘A’의 정체를 어떤 루트로든 알아내고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되었든 결론은 하나였다. 디어는 알렉사와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떤 변명도 남기지 않았다.

아마도 이걸로 그와의 인연은 끝이리라. 나중에라도 그가 사실은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었다며 쪽지를 남기더라도 알렉사는 답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것이 디어의 선택이었고, 알렉사는 그 선택을 존중했다. 이상하게도 그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그러나 가슴 한쪽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하긴 하루 이틀 서로의 속내를 주고받은 사이도 아니었다. 거의 3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알렉사는 그만큼 긴 시간, 디어를 의지했고 그가 건네는 달콤한 말들로 목을 축여왔다.

이제는 그것조차 없겠지만. 알렉사는 한숨을 폭 쉬었다.

“…고마웠어.”

그는 듣지 못할 인사를 건네고는 알렉사는 그곳을 돌아 나왔다. 어쩐지 앞으로 이쪽 서가는 오지 못할 것 같았다. 또 로맨스 소설도, 서정시도 읽지 못할 것 같았고.

연휴가 끝난 뒤, 외출했던 학생들이 속속 돌아오고 수업이 재개되었다.

원래의 편한 복장으로 돌아온 알렉사는 쾌활하게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제게 인사하는 후배나 선배와도 밝은 표정으로 마주 인사했다. 마치 무슨 일이나 있었냐는 듯, 너무나도 이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알렉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연무장 한편에 몇몇이 모여서 수군대는 걸 목격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제법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모두 라인하르트와 친한 녀석들이었다. 이상한 점은 그들 사이에 라인하르트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왜 없지?’

라인하르트가 대련에서 오러를 꺼내 든 이후로 알렉사는 의식적으로 그를 마주하는 일을 피해왔다. 그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절대로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렇게 피했는데도 이상하게 라인하르트의 부재가 신경 쓰였다. 알렉사는 어슬렁어슬렁 몰려있는 동기들 쪽으로 걸어갔다. 결코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려고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대충 몸을 푸는 척하면서.

“…정말이야?”

“젠장, 난리도 아니겠는데.”

“그래서 그 새벽에 갑자기 뛰쳐나간 거였군.”

새벽? 알렉사의 귀가 쫑긋해졌다.

그녀가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한 놈이 약간 목소리를 키워서는 말했다.

“그럼 안 돌아올 수도 있는 거야?”

“야, 조용히 해!”

“어떻게 돌아오겠냐, 공작 위를 받아야 하는데. 아카데미 졸업이 문제야?”

공작 위를 받다니……. 알렉사는 거기까지 듣자 그냥 엿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갑자기 불쑥 알렉사가 끼어들자, 모여있던 놈들이 화들짝 놀라며 비켜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공작님이 어디 갔는데?”

“어, 어? 그게…….”

“공작 위를 물려받아서 안 온다니, 뭔데? 나도 좀 알자.”

“네가, 그, 알아서 뭐 하게!”

“아니, 나름 우리 ‘동기’님인데 갑자기 사라지신다니 궁금하잖아?”

그러나 다들 어물어물 입을 다물어버리고는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알렉사는 뚱한 시선으로 흩어지는 놈들을 보다가 코웃음 쳤다. 저들이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알렉사가 알아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라인하르트와 아주 친분이 깊은 두 사람을 친구로 두었으니까.

그날 수업이 끝나고 방에 돌아온 비앙카를 붙들고 알렉사가 사정을 묻자, 웬일인지 비앙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 너도 들었어? 그게, 오덴발트 공작가에 좀 문제가 생겼거든.”

“문제?”

“뭐… 원래 돈 많고 힘 있는 집안은 주인 자리를 두고 다툼이 있는 법이거든. 하물며 오덴발트 공작가잖아.”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네.”

아니나 다를까, 공작가 가주 자리를 욕심내던 공작의 남동생이 일을 친 모양이었다. 오덴발트 공작, 그러니까 라인하르트의 어머니를 독살하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왕족 출신인 그 부군까지도 같이 독살당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독을 얼마나 독하고 희귀한 걸 쓴 건지, 해독하기 매우 어려운 종류였단다.

그 소식은 연휴 전날 새벽, 라인하르트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곧장 자신의 부모님이 계신 공작가 영지로 내려갔고, 가까스로 두 사람의 임종은 지켰다고 한다. 그의 삼촌이 저지른 짓이라는 증거는 다행스럽게도 남아있었고.

“아마 삼촌이랑 한바탕 싸워서 이기고 난 뒤에 공작 위를 계승하지 않을까 싶어.”

“아니, 증거가 있는데 왜 싸워야 돼? 그냥 처벌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쪽이 가만히 있겠어? 어쨌든 삼촌 쪽도 그냥 독살만 준비한 건 아닐 거야. 병사도 모았을 거고. 가문 내에서의 다툼은 왕실에서도 개입 안 하니까, 아마 라인하르트는 제 삼촌을 완전히 제거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주가 될 수 있을걸.”

문득 알렉사는 차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라인하르트가 떠올랐다. 항상 큰 감정 변화 없이 담담하기만 하던 그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부모님의 죽음에 슬퍼하며 울고 있을까. 아니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하고 있을까.

비앙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여기로는 이제 못 돌아오겠지.”

“그럼 졸업은 어떻게 해?”

“졸업은 무슨…….”

비앙카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오덴발트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였어. 굳이 아카데미에 오지 않아도 될 텐데, 무슨 고집으로 입학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게다가 걔는 이미 오러를 사용할 수 있잖아. 아카데미 졸업이 의미가 있겠어?”

“아… 그렇네.”

하긴 그와 같은 대귀족에게는 아카데미 졸업이 큰 의미가 없었다.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어 있으니 여길 졸업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라인하르트는 극히 소수에 불과한 오러 사용자였다. 아마도 공작이 되고 나면 왕실에서 알아서 데려다가 높은 자리를 주고도 남으리라.

아마 알렉사와 같은 이와 얽힐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알렉사는 묘하게 아쉬운 기분이 들어서 흠칫 놀랐다.

‘그런 재수 없는 자식이랑 더 이상 안 엮이는 걸 기쁘게 생각하진 못할망정. 알렉산드라, 정신 차려!’

이제 그녀의 삶에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가 등장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알렉사는 비앙카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 대해서 잊기로 했다. 푸른 하늘 아래에 빛나는 금발 머리의, 잘생긴 소년을 보고 두근거렸던 그 감정을 기억 한편에 꾹꾹 눌러 담고 덮어버렸다.

그렇게 라인하르트가 없는 아카데미에서의 날들이 시작되었고,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 어느새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아카데미 졸업장을 쥔 알렉사는 원하던 대로 왕국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도에 남지 못했다.

연줄도 없고 평민 출신인 알렉사가 배치된 곳은 콘스탄츠 왕국의 북서부였다. 오래된 적국인 오리악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그곳의 국경 수비대에 자리 잡게 된 알렉사는 무려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끝에 그녀는 마침내 오러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검에 옅은 노란 빛이 도는 순간, 알렉사는 그곳이 전장 한가운데인 것도 까먹고 왁왁 환호했다.

국경에서 오러를 사용하는 이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왕은 그녀를 곧장 수도로 불러들였다. 오러 사용자는 왕실 기사단에 소속되는 게 관례였다. 계급이나 성별 따위는 오러 앞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이었다.

그리하여 기사가 된 지 5년 만에, 알렉사는 모두가 우러르는 왕실 기사로서 수도 빈터투어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렉사는 아주 오래된, 이미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 속의 인물과 조우하게 되었다.

“단장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다.”

매끄러운 미소를 띤 채 제게 손을 내미는 라인하르트를 보며 알렉사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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