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9)

3.

어느덧 아카데미에서의 2년째 생활도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여름에는 약 3주 동안의 방학 기간이 있었고, 생도들 대부분은 그동안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알렉사는 올해 아카데미에 머무르기로 했다. 작년에는 하도 부모님이 서운해해서 무스까지 다녀왔었다. 하지만 오가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가봐야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괜히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만 알려져서 영주님과 불편한 식사 자리를 가져야 했다.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대부분 수도에서 왕실을 위해 일하게 되니 영주 입장에서야 알렉사와 친분을 다지고 싶었겠지만, 그녀는 괴롭기 짝이 없었다.

학생들이 빠져나간 아카데미는 조용했다. 알렉사는 대부분의 시간에 수련을 하거나, 도서관에 갔다. 가끔 시내에 나가기도 했는데 어차피 혼자 돌아다니는 터라 간단히 필요한 것만 사서 돌아오곤 했다.

느긋하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지내니 몸과 마음이 편했다. 다만 그녀의 신경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방학이 끝나기 닷새 전, 아직 다들 돌아오지 않은 때에 먼저 돌아온 라인하르트였다.

연무장으로 수련하러 가자마자 마주친 그의 얼굴에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구겼다.

‘대체 여기에 저 인간이 왜 있어?’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멀찍하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신경 쓰지 않고 각자 할 일만 하고 갔으면 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렉산드라… 고향에 가지 않았다더니.”

그가 말을 건 사람은 알렉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 넓은 연무장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들 둘뿐이었으니까.

아, 대답하기 싫은데. 하지만 그냥 무시하는 것도 어려웠다. 알렉사는 슬쩍 고개를 돌려 라인하르트의 어깨쯤을 보고는 빠르게 답했다.

“그래, 안 갔어.”

“왜 안 갔는데?”

“그냥 너무 멀어서.”

얼른 다시 고개를 돌린 알렉사는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내려 베기를 시작하는 알렉사를 바라보던 라인하르트는 곧 눈을 돌리고는 자기 수련에 몰입했다. 신경 꺼줘서 고맙네. 알렉사는 속으로 비뚜름한 감사 인사를 하고는 검에 집중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알렉사는 연무장에 자신만 남아있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수련을 끝낸 라인하르트가 먼저 돌아간 모양이었다. 아마 오늘 돌아온 모양인데 오자마자 수련을 하러 온 듯했다.

‘그 인간도 진짜 난 놈이다.’

하긴 그런 성실함이 있으니 여태 그녀가 꺾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벌써 2년 차지만 알렉사는 아직도 라인하르트를 이기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비길 뻔한 적도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검의 재능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 라인하르트의 실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알렉사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오기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라인하르트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그런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매일 검을 휘둘렀다.

알렉사도 그 못지않게 성실함으로는 손꼽혔다. 첫해만 해도 여자에 평민인 차석 입학생을 시기하는 녀석들도 많았지만, 이제는 대부분 알렉사의 실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전처럼 빈정대거나 날 세우는 동기도 거의 없었다. 알렉사도 동기들과 검을 맞대면서 제법 친해진 터였다.

그 와중에도 라인하르트만은 여전히 거리가 있으니 그건 알렉사 때문인지, 아니면 라인하르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루의 수련을 끝낸 알렉사는 기분 좋게 방으로 돌아가 씻고 식당으로 향했다. 거기에서도 라인하르트를 만났다. 시야의 끝에 걸려있는 정도라서 무시할 수 있었다. 이어 도서관에 갔을 때도 라인하르트와 마주쳤다. 빌린 책을 반납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은 방학 기간 내내 그렇게 자꾸만 라인하르트와 동선이 겹치니 제법 짜증이 났다.

“대체 왜 가는 데마다 나타나는 거지?”

‘설마 나를 따라다니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나타나는 순간도 제각각이었고, 딱히 알렉사를 신경 쓰는 눈치도 아니었다. 아카데미가 넓다 한들 검술부 생도가 갈 만한 곳이 한정적이니 겹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자꾸 거슬렸다.

어차피 방학도 곧 끝이었다. 학생들이 다 돌아오고 나면 더 이상 이렇게 볼 일도 없을 터였다.

*

방학이 끝나 학생들이 돌아오자, 아카데미는 다시금 활기차게 북적였다. 다들 가족을 만나고 와서 그런지 얼굴빛이 좋았다. 알렉사는 부모님을 보지 못했던 게 조금 아쉬워졌지만, 내년에는 두 분이 수도로 오기로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달랬다.

“알렉사! 혼자 심심했지?”

“심심하긴. 부모님은 잘 뵙고 왔어?”

“어휴. 보자마자 편지는 왜 안 쓰냐, 방정맞게 굴지 마라, 잔소리가 끊이질 않더라. 나도 내년에는 가지 말까 봐!”

투덜투덜하는 비앙카의 얼굴에는 그래도 웃음이 피어있었다. 그녀를 약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는 바이로이트 후작 부부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많아서 알렉사도 그냥 픽 웃었다.

“혼자서 뭐 하고 지냈어?”

“그냥… 검술 수련하고, 책 읽고, 자고, 놀고 먹고?”

“와… 검술 수련 빼고는 다 부러운데.”

“감시자 없는 3주, 진짜 좋더라.”

“으으, 진짜로 다음 방학에는 나도 남아야겠어!”

두 사람의 반가운 해후도 잠시, 그들은 또다시 수업의 늪에 빠졌다.

알렉사는 가무잡잡하게 탄 검술부 생도들과 함께 구르고 또 굴렀다. 그녀의 실력으로는 제법 선배까지도 상대할 만했기에 대련하자는 이들도 많았다. 대련은 언제나 환영하는 알렉사는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검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알렉산드라, 나 좀 상대해 주라.”

“좋아.”

그녀에게 다가온 건 에릭 폰 니에빌이었다. 사납게 생긴 얼굴에 덩치도 알렉사 두 명을 합한 것처럼 커다랬지만, 사실 제법 순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동기였다.

에릭은 힘이 세서 한번 붙고 나면 기운이 모조리 빠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만큼 집중해서 붙어야 했기 때문에 알렉사는 그와 상대하는 걸 즐겼다. 지금까지의 전적은 7전 5승 2패. 여기에 승 하나를 더 붙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알렉사와 에릭이 붙자, 동기들이 둥글게 그들을 둘러싸고 앉았다. 우우, 와와, 사방에서 두 사람을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 앞에 선 알렉사를 보고 에릭이 씩 웃으며 말했다.

“3주 동안 갈고닦은 걸 보여주지.”

“고작 3주 만에 나를 완전히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무슨 자신감이야?”

이를 드러내고 마주 웃으며 알렉사가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곧장 두 사람의 검이 딱, 하고 부딪쳤다.

생각보다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에릭이 공언한 대로 3주 동안 무슨 수련을 한 건지 에릭의 검은 힘으로만 밀어붙이던 것에서 정교함이 더해졌다. 신선한 자극에 알렉사의 눈도 반짝였다. 수십 번 검을 부딪친 끝에, 무승부 판정이 났다.

“후아… 진짜 많이 노력했나 보네, 에릭.”

“놀랐냐?”

“어, 놀랐어.”

히히 웃으면서 알렉사가 답하는데 에릭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그는 조금 쑥스러운 듯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너는, 너보다 센 남자가 좋다며.”

“어?”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알렉사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에릭이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좀 더 노력해야겠지.”

그 말에 두 사람을 둘러싸고 앉은 녀석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목소리를 높여 소리쳐 댔다.

“오오, 뭔데에.”

“야, 에릭. 너 지금 공개적으로 알렉산드라한테 고백하냐?”

“이야아. 청춘이다, 청춘!”

갑작스러운 고백 분위기에 알렉사는 당황했다. 이미 에릭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벌게져 있었다. 그 꼴을 보고 동기들은 더욱 소리 높여 야유하고 지껄여 댔다. 그 속에서 알렉사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에릭이 나를? 아니, 왜? 그보다 왜 이 타이밍에?

알렉사는 몰랐지만 에릭이 그녀를 꽤 전부터 마음에 담고 있다는 걸 동기들 중 몇몇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둘이 검을 맞대는 걸 틈타서 에릭을 밀어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에릭이 때맞춰 도와주기 좋은 발언까지 했고.

그러나 알렉사 입장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검술부 동기들은 거의 그냥 형제 같아서―재수없는 라인하르트만 빼고 말이다― 애초에 연애 상대로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에릭이 이렇게 물꼬를 트니, 뭔가 알렉사도 대답해 줘야 할 거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하지만 정말로, 알렉사는 그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차버리자니 에릭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렇다고 나보다 더 강해져 보라고 말하자니… 마치 그건 고백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뭣보다 자신보다 에릭이 강해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나빴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하고 난감해하던 찰나였다.

“진지해야 할 대련을 두고, 너무 경솔하게 구는 거 아닌가?”

찬물을 끼얹는,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모두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들 그 말을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제법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무릎을 툭툭 치더니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손에 든 게 목검이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부딪쳐도 되는 건 아니라는 건 알 텐데. 안 그래, 에릭?”

“…그건, 알아.”

“그런 경솔한 말을 내뱉는 수단으로 대련을 이용하지 않는 게 좋겠어. 왕국의 기사를 목표로 하는 자라면 더욱 그래야 하지 않을까?”

라인하르트는 말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서늘한 녹색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에릭이 아니라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고백 비스무리한 말이라도 했나? 알렉사는 대체 라인하르트가 왜 자신을 쳐다보는지 알 수 없어서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이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좀만 더 있었으면 어느 놈의 입에서 ‘사귀어라!’ 따위의 말이 나왔을지도 모르니.

이런 시시한 놀음 따위 관심 없다는 듯 라인하르트가 떠나고, 결국 공개 고백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다들 그 자리를 떠나고 남은 건 알렉사와 에릭뿐이었다. 에릭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알렉사에게 사과했다.

“미안, 널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생각한 게 그냥 입 밖으로 튀어나와서…….”

“아니, 뭐… 됐어. 그냥 넘어가도 돼.”

“그래도 나는……!”

“아, 얼른 마저 수련하러 가자. 나 이따 비앙카랑 약속도 있어서 얼른 마쳐야 돼.”

알렉사는 에릭에게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처량한 얼굴을 하고 알렉사를 바라보는 에릭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형제 같은 놈과 연애라니, 그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수업이 다 끝난 뒤 방으로 돌아온 알렉사는 그날 있었던 일을 절친에게 털어놓았다. 비앙카는 묵묵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거, 왠지 일부러 그런 느낌인데…….”

“일부러?”

낙낙한 잠옷 차림으로 침대를 뒹굴며 알렉사의 이야기를 쭉 듣던 비앙카가 툭 던진 말에 역시 침대에 대자로 뻗어있던 알렉사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좀 더 설명해 보라는 듯한 눈빛을 받은 비앙카가 말을 이었다.

“굳이 그 분위기에 찬물 끼얹을 이유가 없지 않아? 솔직히 에릭 폰 니에빌이 너 좋아하는 건 검술부 동기들은 다 알았을 텐데.”

“…너도 알았어?”

“내 귀는 어디에나 있거든.”

비앙카는 킥킥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 귀를 가리켜 보였다.

“하여튼 이미 다들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굳이, 그 상황에, 어깃장을 놓는다? 그거 완전 고의지.”

“하지만 오덴발트 소공작이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

기억을 되짚어 보면, 라인하르트와 에릭은 그렇게 소원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히 친교가 있는 편이랄까. 그런 식으로 괜히 감정 상할 만한 일을 만들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알렉사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직히 아까 그 상황에서 밀어붙이기식으로라도 알렉사가 에릭을 받아주었다 한들, 그게 라인하르트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을 보며 비앙카는 코를 울려 웃었다.

“글쎄, 왜 그랬을까?”

“…내가 못마땅해서 그런 걸까. 소공작은 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얼굴을 팍 찌푸린 채 알렉사가 중얼거리는데도 비앙카는 그에 대해 별다른 답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이야기만 해주었다.

“그냥, 그 멍청이가 뭘 어쩌든 내버려 둬. 사실 이번에 라인하르트가 그 상황에서 한마디 해서 에릭이랑 억지로 사귀지는 않게 됐잖아?”

“그건 그렇지만…….”

“요새 딱히 부딪치는 일도 없다며.”

“음…….”

비앙카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오늘 그가 꽤 재수 없게 굴긴 했지만, 그 외에는 최근 그다지 거슬릴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결국 알렉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앙카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신경 쓴다고 해서 어쩔 것인가? 라인하르트가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의구심이 남았다. 문득 예전에 헨드릭 선배가 갑자기 사귀기로 한 걸 번복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우연히 바로 그 근처에서 라인하르트를 만났는데…….

그러고 보면 작년에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차인 다니엘은 아예 알렉사와 둘이 붙어있는 상황조차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특히 수업이나 대련 때는 더더욱. 그때마다 당연히 같이 수업을 듣는 라인하르트가 있었고…….

“설마…….”

“응?”

알렉사는 자신이 추측한 걸 비앙카에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라인하르트가 싫은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추측하는 건 비약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라인하르트가 굳이 알렉사의 연애를 방해해서 얻을 게 뭐가 있겠는가?

어색하게 웃으며 알렉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뭐야아, 싱겁게.”

이상한 상상은 하지도 말자. 알렉사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러나 다음 날, 비앙카는 이상한 생각을 한 알렉사 대신에 다른 이를 추궁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삐딱하게 서서는 팔짱을 끼고 제 앞에 서있는 키 큰 나무 같은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부러 그랬지?”

“뭘 말하는 거지?”

“알렉사한테 고백하는 남자들마다 네가 그런 거잖아, 라인하르트.”

아니야? 되묻는 비앙카에게 라인하르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뜻 모를 눈으로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비앙카가 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라인하르트, 그래도 내가 너랑 보아온 시간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그러다가 후회한다?”

“무슨 소리인지…….”

“그렇게 다가가는 놈들만 쳐내면 알렉사가 돌아보기나 할 거 같아? 전혀! 사실을 알게 되면 너 싫어하는 게 더 심해지기나 하겠지.”

그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포기할 거면 그냥 빨리 포기해. 오덴발트의 후계자답게, 후계자로만 살 생각이면 그냥 이쯤에서 잊어버리라고.”

“…….”

“괜히 내 친구 주변 얼쩡거리면서 연애할 거 방해하지 말고. 알았어?”

제법 매섭게 으름장을 놓은 비앙카가 라인하르트를 위아래로 쏘아보고는 홱 몸을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비앙카의 뒤에 남은 라인하르트는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손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곧 걸음을 옮겼다. 언제 한숨을 쉬고 표정을 구겼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

방학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름은 금세 달아나고 그 자리를 가을이 차지했다. 금세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래서인지 아카데미 곳곳에 새로 생긴 연인들이 꼭 붙어 다니는 게 눈에 띄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늦은 오후, 알렉사는 빌렸던 책을 들고 도서관을 방문했다. 마법 인형 사서에게 책을 넘기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로맨스 소설 서가 쪽을 향했다.

역시나 이 시간의 로맨스 서가 쪽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러 차례 오가며 알아낸 사실이었다. 저녁 식사 직전의 이 애매한 시간대에는 언제나 한산했다. 알렉사는 편안한 마음으로 책장에 꽂힌 책들을 죽 살펴보았다.

“아, 새 책 들어왔구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들어와 있었다. 누가 보아도 분홍빛 물씬 풍기는 책을 꺼내 든 그녀는 이어 두 권의 책을 더 골랐다.

알렉사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맨 마지막에 꺼냈던 책을 중간쯤 펼쳤다. 이렇게 무작위적으로 고른 페이지를 읽고 마음에 들면 빌려 가는 게 알렉사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녀는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울었다. 우는 어깨가 가늘게 떨려왔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감춘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그러니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말해서는 안 되었다. 설사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고, 그녀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위하는 연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어 짐을 나눠 지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고통은 그녀 혼자만 겪어도 충분했다. 이 구렁텅이에 사랑하는 이를 끌어들이는 참혹한 짓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거기까지 읽은 알렉사는 책을 덮고는 표지를 쓸어내렸다.

비록 이 소설 속의 여주인공과 같이 뭔가 거대한 비밀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알렉사에게도 이 취향은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검이나 휘두르는 투박한 손으로 간질간질한 연애소설을 좋아한다고 놀림받았던 어린 날은 제법 깊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굳이 숨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 감추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제 동기나 선후배들이 그녀의 사소하고 유치한 취향을 알면 과연 어떤 눈으로 볼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답답한 마음을 나누고 싶을 때가 이따금씩 있었다.

비단 로맨스 소설을 보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담고 있는 자잘하고 별것 아닌, 하지만 누군가에게 툭 털어놓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생각과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비앙카를 비롯한 아카데미에서 만난 친구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얼굴을 맞대고 모든 걸 터놓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알렉사의 머릿속에 기묘한 발상이 떠올랐다. 그녀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자신의 노트 뒷장을 쭉 찢고는 짧은 메모를 써 내려갔다.

펜을 든 손이 조금 떨려서 글자가 비뚤어졌다. 그러나 기이한 열기에 휩싸인 그녀는 펜을 놓을 수가 없었다. 책 위에 올려둔 노트에서 대충 찢어낸 종이 한 장에 써 내려간 문장은 몇 줄 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혹시 없을까.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

나에 대해 알지 못하더라도 이야기를 듣고 나눌 사람이 있을까.]

조금 힘주어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난 뒤, 그녀는 누가 볼세라 조급하게 종이를 두 번 접었다. 손안에서 바스락 작은 소리를 내며 접히는 종이가 마치 뜨거운 쇳조각이라도 되는 양 급히 책과 책 사이에 끼워 놓았다. 볼품없는 그 작은 종이쪽지를 줄지어 선 금박 입힌 책등들이 보고 웃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뜨지 않고, 자신이 내려놓은 것을 잠시 바라보았다.

입술이 달싹거리면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마치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손을 가슴 위에 얹고 한 번, 두 번, 세 번 토닥였다. 어쩐지 양쪽 볼이 발그레했다. 기사가 될 사람이 고작 쪽지 하나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정상인 걸까. 자기 자신에게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후우. 한숨을 내뱉자 그녀의 몸이 주문에서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침내 움직였다. 종이쪽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발 뒤로 물러났다가, 결연하게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떴다.

어차피 누군가 자주 오지도 않는 서가, 이 쪽지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쓰레기로 버려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알렉사가 썼다는 건 누구도 모를 테니까.

그녀는 또 한 번 뒤돌아 잠시 책 사이에 꽂힌 쪽지를 바라보다가, 얼른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귓불이 홧홧했다. 누군가 쫓아와서 그녀의 뒷덜미를 잡고는 ‘이거 네가 남긴 거지?’ 하고 물을 것만 같았다. 도서관을 나온 알렉사는 거의 뛰다시피 하여 기숙사로 돌아왔다.

*

고요한 서가에 홀로 남은 쪽지는 그대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묵직한 발걸음이 들어찼다. 발걸음의 주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녀가 놓고 간 쪽지를 주워 들었다. 마치 접힌 튤립 꽃잎을 펴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쪽지를 펼쳤다.

곧 쪽지는 다시 원래 모양대로 접혔다. 그리고 원래 놓인 자리로 되돌아가는 대신, 발걸음 주인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그 사람이 떠나고 나자, 서가는 다시금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예쁘고 화려한 금박 장정의 책들이 줄지어 꽂힌, 고요한 서가로.

*

쾅 하고 문을 닫고 선 알렉사를 본 비앙카가 눈이 동그래져서는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알렉사? 너 볼이 새빨개.”

“응? 아, 아니. 아니야. 그냥 뛰어서… 그래서 그런가 봐.”

화끈거리는 뺨에 손등을 댄 알렉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비앙카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왔는데도 알렉사는 도무지 남겨두고 온 쪽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괜히 안절부절못하고 방문을 바라보거나, 책을 펼쳤다 덮기를 반복했다.

좀 있으면 도서관도 닫을 시간이었다. 이대로 밤을 보내고 아침에 도서관에 가보는 게 나을까?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고작 쪽지 하나 두고 온 게 뭐라고, 잠을 설친단 말인가.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알렉사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참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있던 알렉사가 카디건까지 걸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 본 비앙카가 물었다.

“어디 가게? 차림새를 보니 연무장 가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별일 아냐. 잠깐만 나갔다 올게. 금방 돌아올 거야.”

방을 뛰쳐나온 알렉사는 경보하듯 걸었다. 카디건 앞섶을 단단히 여몄지만 가을밤 바람이 제법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다행히도 도서관이 폐관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뛰어 들어가는 알렉사를 당연히도 사서는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까 자신이 쪽지를 남겨두었던 그곳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로맨스 서가 2열은 고요했다. 은은한 마법 등 불빛만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알렉사는 약하게 숨을 할딱이면서 아까 쪽지를 꽂아두었던 세 번째 칸을 살폈다.

바로 그 자리에 쪽지가 꽂혀있었다. 그녀는 급히 그것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꽂았던 종이가 아니야.’

알렉사의 노트에서 찢어낸 종이와 다르게, 남겨진 쪽지는 잘린 단면도 깨끗했고 종이도 훨씬 좋은 것이었다. 두 번 접힌 종이를 펼치자, 거기에는 정갈한 글씨로 쓰인 문장이 남아있었다.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뭐든 들어줄 테니, 답을 남겨줘.

기다리고 있을게.]

얼굴이 새빨개진 알렉사는 급히 쪽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녀가 남긴 쪽지를 읽고 답한 사람이 여전히 여기 남아있을까? 하지만 서가는 고요하기만 했고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쪽지를 쥔 주먹에 힘을 주자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일단… 방에 돌아가자.’

그녀는 이곳에 왔을 때만큼이나 급하고 빠르게 서가를 벗어났다. 도서관을 나와 거의 달음박질치다시피 해서 기숙사 앞까지 온 알렉사는, 자신이 지금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하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어쩐지 팔짝팔짝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에 답을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어쨌든 정말로 이 답장을 보낸 사람이 진심이라면, 얼굴을 보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생긴 게 아닌가.

알렉사는 자꾸만 활짝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오므려 웃음을 참았다. 당장이라도 쪽지에 답을 하고 싶었다. 뭐라고 쓰면 좋을까. 뭐부터 이야기하면 좋지? 어떤 걸 쓸지 고민하느라 알렉사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어딜 다녀온 거냐는 비앙카의 물음에도 건성건성 대답한 알렉사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버렸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그녀는 잠들기 직전까지도 고민했다.

첫인사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 안녕, 반가워. 답해줘서 고마워. 만나게 되어서 기뻐.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

[안녕, 누군가 답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는데.

답장을 보고 정말 기뻤어.

나는 A라고 해.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알려주겠어?]

[디어라고 불러주면 고맙겠어.

나야말로 A와 만나게 되어서 기뻐.

힘든 이야기이든, 즐거운 이야기이든 전부 알려줘.

기다릴게.]

[쪽지를 찾은 데를 봐서 알겠지만,

나는 로맨스 소설이랑 서정시 읽는 걸 좋아해.

누구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너는 뭘 좋아하니?]

[난 소설은 그다지 많이 읽어보진 않았어.

최근에는 역사에 관해 관심이 생겨서 그에 관한 책을 읽고 있지.

그런데 왜 네가 좋아하는 걸 얘기하지 않지?]

[왠지 로맨스 소설 좋아해, 서정시 좋아해, 하면 좀…

약해 보이지 않아? 너무 소녀 같고.]

[글쎄, 취미 하나로 누군가의 전체를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친분을 쌓을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전혀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상에 존재하는 소중한 감정에 대해서 다루는 문학이잖아.]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좀 힘이 된다.

고마워, 디어.]

[네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 A.

용기 내서 쪽지에 답을 남기길 잘한 것 같아.

내 쪽지를 받은 누군가가 나로 인해 기운이 났다는 사실에 나도 같이 힘이 나거든.]

*

알렉사는 정갈한 글씨체가 쓰인 작은 쪽지를 두 번 접어서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오른 얼굴에는 옅게 홍조도 어려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디어’와의 쪽지 교환은 대략 이틀에서 사흘 간격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이게 진짜 될까?’ 싶은 마음에 두근거렸다면, 이제는 상대가 무슨 답을 해줄지 궁금해 두근거렸다.

자신이 쪽지를 써서 꽂아둔 자리에 남겨진 답장을 꺼내어 조심스레 펼치면, 사려 깊은 문장들이 가지런하게 적혀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깨끗하게 적힌 쪽지들은 마치 상대의 인품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겠지. 알렉사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느꼈다. 쓰레기로 여겨져 버려지지 않은 쪽지도, 그것을 발견한 사람도, 또 그 사람의 성품도 모두 하나같이 운이 좋았다.

‘어떤 사람일까?’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학생 가운데 자신과 비밀스럽게 쪽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지나다니는 모두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쪽지를 쓰거나 받은 날이면 알렉사는 상대방에 대해서 상상해 보았다. 남자일지, 여자일지. 검술부일지, 마법부일지, 학술부일지. 후배일지, 동기일지, 선배일지. 어떻게 생겼을지. 목소리는 어떨지.

하지만 그런 것을 궁금해하고 물어보는 건, 너무 이른 듯했다. 조금 더 친해지고 나서 천천히 물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사실 상대도 가명으로 답한다는 건, 자신에 대해서 노출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니까. 물론, 알렉사도 자신에 대해 드러내는 건 아직 꺼려졌다.

알렉사는 무심결에 재킷 안주머니 쪽에 손을 올리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툭툭, 등을 치는 게 느껴졌다. 깜짝 놀란 알렉사가 뒤를 돌아보고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냥 부르면 되지.”

“선배가 뭔가 집중하고 있는 거 같아서요. 놀라게 해주려고.”

그녀를 놀라게 한 건 마법부의 마티어스였다. 그는 비앙카의 친척 동생이었는데, 입학하자마자 비앙카의 소개로 알렉사와 금세 친해졌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항상 웃음을 띠고 있어서 알렉사는 그와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성공했네. 놀랐어, 진짜. 그런데 어디 가?”

“아, 벨스 교수님이 심부름시키신 게 있어서요. 리엔츠 교수님 방에 가요.”

마티어스는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라탄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마법부 벨스 교수가 만든 게 분명한 마법 물약 병이 여러 개 담겨있었다. 검술부 리엔츠 교수는 종종 벨스 교수에게 수업이나 대련 중에 다친 학생을 위한 치료용 물약을 부탁하곤 했는데, 아마도 그걸 배달하는 모양이었다.

알렉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같이 갈까? 리엔츠 교수님 방까지.”

“괜찮아요? 선배 할 일 있는데 괜히 시간 뺏는 거 아니에요?”

“아냐,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고.”

마티어스는 굳이 알렉사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란히 걸으며 두 사람은 사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마티어스는 가벼운 농담도 잘하고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화법을 써서, 알렉사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어릴 적 비앙카와 티격태격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 웃는 사이에, 검술부 교수들의 방이 있는 건물에 다다랐다.

“그래서 비앙카 누님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잉크가 담긴 물방울을 마법으로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거든요. 그런데 딱 누님 머리 위로 올려서 터트리려고 움직이는데, 어린애의 마법 컨트롤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 설마. 아니라고 해줘.”

“안타깝게도 그게 제 머리 위에서 터져버린 거죠. 저만 머리에 까만 잉크를 뒤집어쓰고, 그걸 보고 비앙카 누님은 배 잡고 굴러다니고……. 억울해서 막 엉엉 우는데 그걸 듣고 달려온 부모님들은 그 꼴을 보고 같이 웃고, 저는 더 울고.”

“아, 하하하. 아, 어떡해.”

잉크를 뒤집어쓴 채 엉엉 우는 여덟 살의 마티어스를 상상하던 중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뭐가 그리도 언짢은 건지, 라인하르트의 얼굴은 그냥 보아도 어둡기 짝이 없었다. 알렉사는 그와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마티어스 쪽에서 먼저 손을 들어서 그에게 인사했다.

“아, 레오 형!”

아, 맞다. 얘네 친하댔지. 알렉사는 비앙카와 마티어스,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가문이 서로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비앙카가 라인하르트에게 뾰족하게 굴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건, 두 사람이 어릴 적부터 자주 보고 자란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라인하르트를 만난 마티어스는 신이 난 강아지처럼 보였다.

“형,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지난주에도 모임에 안 나오고. 매일 수련하느라고 연무장에서 사는 거예요?”

“그냥 좀, 할 일이 많은 것뿐이야.”

“에이, 다들 형 얼굴 보고 싶다고 날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몰라요. 이번 주엔 좀 참석해 주면 안 돼요?”

“봐서.”

간단히 대답한 라인하르트의 눈이 잠시 알렉사에게 머물렀다.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알렉사는 똑바로 응시하느라 눈에 힘을 잔뜩 줬다. 뭐, 왜. 그녀의 얼굴에 금방 심술 꽃이 피어났다. 마티어스랑 어울린다고 뭐라고 또 하면 진짜 결투 신청해야지.

알렉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라인하르트는 갑자기 픽 하고 웃더니 그녀에게 난데없이 질문했다.

“마티어스와는 많이 친해진 모양이지?”

“어……?”

“알렉사 누님이 비앙카 누님의 단짝이잖아요! 그래서 나도 얼른 친해졌지요, 헤헤.”

이렇게 멋있는 누님이랑 친해지지 않으면 손해니까. 대답은 마티어스가 대신했다. 라인하르트의 눈이 그제야 마티어스 쪽으로 돌아갔다. 실없이 웃고 있는 마티어스와, 왠지 차게 웃는 라인하르트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알렉사는 뭔가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얘네 둘, 제법 친하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서늘하지.’

그때 라인하르트가 평이한 목소리로 알렉사에게 말했다.

“연무장 쪽에서 레니가 찾던데. 오늘 알렉산드라 너와 뭘 하기로 했는데 안 보인다고.”

“아, 맞다!”

알렉사는 그제야 검술부 후배인 레니와 한 약속을 떠올렸다. 올해 들어온 두 명의 여자 후배 가운데 평민 출신인 레니는 알렉사를 우러르며 엄청 따르는 편이었다. 오늘은 그녀와 가볍게 검을 맞대어 보기로 했는데, 그걸 깜박 잊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알렉사는 마티어스의 어깨를 손으로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라인하르트의 눈이 그녀의 손에 가 닿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미안, 마티어스. 나 약속 있는 걸 깜빡했지 뭐야.”

“약속도 잊을 정도로 절 소중히 여겨주다니, 감동이에요.”

“하하, 그러게. 나중에 봐!”

급하게 연무장으로 뛰어가는 알렉사의 뒷모습을 보며 마티어스는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멀어지자 마티어스는 씩 웃고는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형, 무서우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내가 뭘.”

“마치 제가 형 걸 빼앗아 가기라도 한 듯 보잖아요.”

그 말에 라인하르트는 답하지 않았다. 마티어스는 다 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비앙카의 말대로 라인하르트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그가 답을 늦게 찾을수록 마티어스는 좋았다.

“전 이제 가볼게요. 심부름 가던 중이라.”

“…그래.”

“이번 주 모임엔 좀 나와주세요. 진짜 형 찾는 인간들 때문에 저 너무 힘들어요!”

인기인의 친구는 힘들다느니 너스레를 떨며 마티어스가 멀어져 갔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마티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그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번져갔다.

*

가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아카데미가 술렁거렸다. 주로 아카데미 2년 차 생도들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매해의 마지막 날 아카데미에서는 성년이 되는 2학년 생도가 중심이 되는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연회에는 누구나 참석하지만, 특히 2학년 학생은 파트너를 동반해야 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이때를 틈타 서로 마음이 있던 이들은 아예 연인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평소 몰래 짝사랑하던 이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고백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하아…….”

하지만 알렉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누구랑 간단 말인가? 일단 검술부 안에서는 파트너를 찾을 수 없었다. 일전에 에릭이 고백하다시피 한 일도 있었던 데다, 대부분의 동기나 선후배들은 그녀를 악바리나 철벽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니까 몇몇 극소수 외에는 알렉사를 여자로 안 본단 뜻이었다.

하긴 대련을 하면 아주 기를 팍 꺾어놓을 정도로 무섭게 달려들곤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그럼 마법부라든가 학술부에서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데… 알렉사는 자신의 빈약한 인간관계를 한탄했다. 첫 입학 때 너무 움츠러드는 바람에 친구를 사귀는 데 소극적이었던 데다, 이상하게도 남학생들은 그녀에게 거리를 두는 듯 느껴졌다. 여자 친구들은 그래도 꽤 있었지만, 그 친구들은 파트너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는 이유를 알겠다는 듯 마주 앉은 비앙카가 흐흥, 하고 코를 울리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돼?”

“이러다 나만 연회에 참석 못 하는 거 아닌가 몰라.”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엔 알렉사 너, 지금 아주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중이거든.”

“솔직히 누가 나한테 파트너 하자고 그러겠어? 내가 하자고 하기엔… 친한 남자애도 없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가 처진 알렉사를 보던 비앙카가 손가락을 튕겨 그녀의 이마를 탁 쳤다. 아얏, 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며 알렉사가 따끔한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비앙카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찼다.

“그런 걱정 할 시간 있으면, 나랑 같이 나가서 드레스나 보자고.”

“…파트너도 없는데 무슨.”

“너, 진짜 딱 기다려봐라. 내가 뭐 하러 그런 쓰레기 같은 고민을 했지? 하게 될걸.”

“비앙카… 넌 너무 나를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여전히 알렉사의 울상은 펴질 줄 몰랐다.

*

[곧 연말 연회인데, 나는 아무래도 연회 못 갈 거 같아.]

[왜? 그때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혹시 집에 가야 하거나… 그런 거야?]

[그런 건 아니고, 파트너가 없을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다들 누군가와 손잡고 들어가는데 혼자 들어가는 건 좀, 그렇지?

디어는 같이 갈 파트너가 있어? 참, 디어는 여자야 남자야?

사실 여자든 남자든, 상상해 보면 디어는 대단히 인기가 많을 것 같아.

이미 파트너가 정해졌을 거 같아!]

[A에게 파트너가 없을 거라니, 믿어지지 않는데.

내가 생각한 A는 워낙 멋있는 사람이라서 파트너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 같거든.

그리고… 나는, 남자야. 나도 아직 파트너를 정하진 못했어.

그렇게 인기가 많지도 않고…….]

[그럴 수가! 내가 디어의 얼굴을 알면 파트너 해달라고 졸라봤을 텐데!

그나저나 디어는 왜 디어야?]

[나도 그래.

A와 함께 연말 연회에 간다면 큰 영광일 거야.

그리고 디어는… 내가 사슴(deer)을 좋아해서 그래.]

*

아니나 다를까, 연회가 고작 2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알렉사는 파트너를 정하지 못했다. 사실 스스로 파트너 신청을 해도 괜찮을 테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간질간질한 감성이 가득 찬 가슴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소설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알렉사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나와 함께 연회에 가주지 않겠어?’ 하고 묻는, 그런 장면을 원했기 때문이다.

바보 같으니라고. 알렉사는 마지막으로 검을 한 번 더 휘두르고는 자세를 풀며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기사 지망생이면 기사 지망생답게 먼저 연회 파트너 신청을 하면 되는데 꼴에 고상한 숙녀처럼 남자가 다가와 주길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렇게 자신을 꾸짖어보았지만, 차마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알렉사는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검술부 안에는 절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가서 파트너 신청을 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눈에 차지도 않고, 마음에도 안 들었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적어도 알렉사와 겨루어 쉬이 지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하고……. 그러다 그녀의 시선 끝에 라인하르트가 걸렸다. 그는 알렉사가 쳐다보는 걸 모르는지 선배 하나와 한창 이야기 중이었다.

‘그러니까 저 인간 정도만 되어도… 헉,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알렉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급하기로서니, 라인하르트를 보며 파트너를 생각하다니. 알렉사는 손으로 가볍게 뺨을 착착 치고는 자리를 떴다. 어쨌든 오늘의 연습은 끝났고,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러 명의 눈동자가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중 몇몇은 직접 그녀를 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렉사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실내 수련장에서 나온 그녀는 뜻하지 않은 인물과 맞닥뜨렸다. 알렉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티어스, 여기서 뭐 해?”

“당연히 선배 기다리고 있었지요. 오늘 수련을 다 끝낸 거예요?”

“응, 이제 씻고 도서관 좀 가보려고.”

“선배는 참 도서관을 좋아하는 거 같아요. 학술부에 갔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실은 말랑말랑하고 콩닥콩닥한 로맨스 소설과 서정시를 찾아 읽기 위해 가는 거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 알렉사는 답하는 대신 어설프게 웃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마티어스는 슬쩍 등 뒤를 넘겨다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따라오는 인간들 보라는 듯이.

“그런데 선배, 연회 파트너는 정했어요?”

“으응… 아니. 아직.”

“아니, 다들 눈이 삐었나? 어떻게 이렇게 멋있고 예쁜 알렉산드라 선배를 여태 그냥 뒀지?”

“아하하, 칭찬 고마워. 근데 그렇게 안 띄워줘도 돼.”

“에이, 사실을 말하는 거라고요. 근데 선배.”

“응?”

“아직 아무도 파트너로 정하지 않은 거면, 나랑 갈래요?”

그 말에 알렉사는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 걸 본 마티어스가 킥킥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아니, 너… 내가 알기론 파트너 신청 엄청 많이 받았다고…….”

“아, 그렇지만 선배랑 함께 가고 싶은걸요.”

마티어스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능글맞게 알렉사의 손을 덥석 잡고는 장난스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나랑 같이 가요. 네?”

“정말 괜찮겠어?”

그녀가 알기로, 마티어스는 아카데미에서 소문이 자자하도록 인기가 많았다. 항상 웃는 낯에 성격도 쾌활하고, 배려심도 넘치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이미 비앙카에게 듣기로 마티어스에게 같이 연회에 가자고 말한 여학생이 열 손가락을 모두 꼽아도 모자란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지, 마티어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히 완전 좋죠. 그럼 저랑 가기로 한 거예요?”

“…그래.”

알렉사는 엉겁결에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그 순간, 마티어스는 승자의 눈빛이 되어 알렉사의 뒤편에 따라붙은 검술부 남학생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아차 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리고 마티어스의 눈이 실내 수련장 입구에 서있는 라인하르트에게까지 닿았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마티어스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좋아요, 알렉사 누님. 그럼 나중에 옷 같이 맞춰요! 저 갈게요.”

“어?”

“헤헷, 사실 이거 물어보려고 기다린 거였거든요! 나중에 봐요!”

상쾌한 웃음을 띤 마티어스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알렉사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그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침내 마티어스가 보이지 않게 되자 헙, 하고 숨을 멈추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상대는 비앙카의 친척 동생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연회에 같이 가자고 신청받았다!

괜한 안도감에 알렉사는 가린 손 아래로 배시시 웃었다. 아마도 자신이 너무 풀 죽어 있으니, 비앙카가 마티어스의 옆구리를 찔러서 파트너 신청을 하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갑자기 가슴을 짓누르던 큰 돌덩어리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조금 민망하지만 소원하던 걸 이루고 나니 모든 게 다 괜찮게만 느껴졌다. 알렉사는 가벼운 걸음으로 기숙사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몇몇 검술부 생도들은 혀를 차고 후회했고.

라인하르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멀어지는 알렉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알렉사는 비앙카를 끌어안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영문도 모른 채 알렉사의 품에 안겨 빙글빙글 돌던 비앙카는 전후 사정을 듣고는 “흐응… 그래.” 하고 말할 뿐,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알렉사는 그에 대해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후 2주는 후딱 지나갔다. 중간에 알렉사와 마티어스는 드레스 코드를 맞추느라 몇 번 만났다.

화려한 연회용 드레스를 입어본 적이 없는 알렉사는 겸연쩍어하며 튀지 않는 드레스를 고르느라 애썼다. 비앙카와 마티어스가, 또 다른 친구들이 옆에서 부추겼지만 알렉사가 고른 건 결국 차분한 옅은 회색빛 머메이드 드레스였다.

하지만 레이스와 반짝이는 작고 작은 모조 보석들로 장식되어서, 너무 칙칙해 보이거나 재미없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키가 큰 알렉사를 우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연회 전전날. 알렉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로맨스 서가 2열 세 번째 칸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 빨리 멈추었다.

“이게 뭐지…….”

거기에는 평소처럼 쪽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손바닥 반만 한 작은 상자가 놓여있었다. 물론 그 위에 놓인 쪽지는, 이 상자가 디어의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알렉사는 우선 쪽지부터 펴 보았다.

[이제 곧 연회 날이네.

A가 아마도 그날 가장 아름답고 멋진 이가 아닐까 생각해.

상자에 든 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비록 같이 연회에 참석하진 못하지만, 나 대신으로 생각해 주겠어?]

“뭐야… 나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알렉사는 조금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카메오 브로치 하나가 들어있었다. 아름답게 양각된 흰 수사슴은 매우 고상해 보였다. 마치 디어가 쓴 글씨처럼 말이다.

“…예쁘네.”

한눈에 보아도 가벼이 넘길 만한 물건은 아닌 듯했다. 알렉사는 디어라는 이가 귀족일 거라고 확신했다. 이런 고가의 브로치를, 얼굴도 모르고 쪽지만 주고받는 이에게 떡하니 선물로 줄 정도면 당연한 일이었다.

약간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맙고 기뻤다. 디어가 진실로 자신을 생각해 주고, 또 만나서 파트너로 참석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는 듯 느껴져서.

그녀는 조심스레 브로치를 꺼내어 가슴 중앙에 대보았다. 쪽지 친구인 디어의 세심함에 가슴이 방정맞게 두근거렸다.

미리 맞춘 드레스에 달아도 괜찮을 듯싶었다. 파트너는 마티어스지만, 이 브로치를 다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알렉사는 브로치를 다시 상자에 집어넣고는 쪽지와 함께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미리 들고 온 종이에 빠르게 답신을 적었다.

[나는 널 위해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어떡하지?

받기만 해서 미안한걸. 이 브로치는 꼭 연회에 달고 갈게.

거기에서 널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다음 날도, 연회 당일에도 답장은 남아있지 않았다. 알렉사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

반짝거리는 조명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 환상 마법, 희고 붉은 천들이 나부끼는 연회장. 그 속에서 학생들은 평소와 다르게 잔뜩 들뜨고 풀어진 기분으로 모였다. 거의 대부분 파트너의 손을 잡고 나타났고, 그걸 본 알렉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티어스가 아니었으면 정말 입구에서 돌아 나왔을 거야.’

문득 알렉사는 제 손을 잡는 체온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짙은 남색의 재킷으로 차려입은 마티어스가 있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들어갈까요, 선배?”

“그럴까?”

두 사람이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마도 마티어스와 짝이 되고 싶었던 여학생들인 모양이다. 설마 이런 일로 적을 만들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알렉사는 괜히 머릿속으로 혹시라도 누군가 따져 물으면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생각해 보았다.

그때 마티어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선배, 그 브로치 어디서 산 거예요?”

“응? 아, 이거…….”

알렉사는 손끝으로 수사슴 조각을 살짝 쓰다듬으며 웃었다.

“음… 친구가 준 거야.”

“친구… 어떤 친구요?”

“그냥, 이래저래 알게 된 친구가 연회에 하고 가라고. 예쁘지?”

마티어스는 그녀의 물음에 비죽 웃을 뿐 답하지 않았다.

연회는 즐거운 일의 연속이었다. 알렉사는 2주 동안 속성으로 배운 두 가지의 춤을 마티어스와 신나게 추었다. 몸으로 하는 일은 다 잘하는 알렉사는 마티어스의 발을 거의 밟지 않고 잘도 춤을 췄고, 그에 마티어스는 박수를 쳐주었다.

이어 안면 있는 몇몇 동기와 선후배들이 조심스럽게 춤 신청을 했고, 알렉사는 들뜬 기분에 기꺼이 그들과 손을 맞잡았다.

대부분은 귀족들이 즐기는 음악이었지만, 중간중간 평민들이 즐기는 춤곡들도 나와서 알렉사는 더 신이 났다.

이런 게 연회구나. 알렉사는 상대의 팔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며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여주인공들이 남자 주인공들과 춤을 출 때 이런 걸 본 걸까? 아니야, 대부분은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열리는 연회인데 아카데미의 것보다야 훨씬 화려하겠지. 하지만 춤을 출 땐 이렇게 즐거웠겠지!

연달아서 여섯 차례나 춤을 춘 알렉사는 더 이상 춤출 기운이 없다며 벽 쪽으로 빠졌다. 발그레해진 볼로 연회장 안을 둘러보니, 마티어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 친구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니면 용감한 여학생이 고백하려고 데리고 나가기라도 한 거 아닐까?

어차피 입장할 때 파트너가 필요한 거였지, 연회 중간에도 내내 마티어스를 붙들고 있을 생각이 아니었기에 알렉사는 마음이 편했다.

“음, 뭐지? 이거.”

알렉사는 느긋한 마음으로 옆에 놓인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달짝지근한데 끝맛은 약간 쌉싸름한 게 그녀의 취향에 딱 맞았다. 한 잔을 비운 그녀는 옆에 있는 것을 연달아 두 잔 더 비웠다. 기분이 한결 더 좋아졌다.

그때, 악단이 아주 익숙한 선율을 연주했다. 아마도 이 콘스탄츠 왕국에 사는 이라면 다 알 그 곡이었다. 일곱 번째 왕이었던 카를이 5주 전쟁에서 승리하고 병사들과 함께 불렀다는 노래에서 따온 이 곡은, 다 같이 서서 발을 구르고 손을 마주치며 춤을 추고 파트너를 여러 번 바꾸는 게 특징이었다.

“이건 빠지면 섭섭하지!”

한껏 기분이 고양된 알렉사는 춤을 추러 모이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언제 찾아온 건지 비앙카도 그녀의 옆에 와있었다.

“어라, 너 왜 혼자야?”

“음, 춤 좀 추다 보니 마티어스가 사라졌더라고.”

“이 자식, 파트너를 혼자 두고 어딜 간 거야?”

“괜찮아, 입장 같이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한걸.”

“그래도 예의가 그게 아닌데……!”

비앙카가 버럭, 성질을 내려는 순간 음악이 본격적으로 연주되기 시작했다. 두 줄로 선 학생들은 까르르 웃으며 발을 구르고 옆 사람과, 또 앞사람과 손뼉을 치고 빙글빙글 돌다가 마주 선 파트너를 바꾸었다. 알렉사도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신나게 발을 움직였다.

휙휙, 몇 번이나 파트너의 얼굴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춤이었기에 사실 파트너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돌고 나니 검술로 다져진 체력의 소유자인 알렉사의 이마에도 땀이 살짝 맺혔다.

그리고 어쩐지 아까부터 조금 더운 기분이었다. 동시에 몸이 약간 비틀거리는 듯도 했고, 머리도 조금 멍해졌다.

아, 설마……. 알렉사는 춤추기 전에 신나게 들이켰던 그 달콤한 음료가 술이 아니었을까 의심했다. 연회에는 2학년도 성년이 되기 하루 전이라 대부분 무알코올이었지만, 간혹 아주 약한 술들이 있기도 했다.

새삼 알렉사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술에 약하다고?

그리고 그 충격에 뒤이어 만나게 된 이번의 파트너 때문에 알렉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라인하르트……?’

이런 춤을 출 사람같이 보이진 않았는데, 웬일인지 라인하르트도 이 신나다 못해 방정맞은 춤의 대열에 껴있었던 것이다.

알렉사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발을 구르고 옆 사람과 박수를 쳤다. 그리고 한 발을 앞으로 불쑥 내밀며 라인하르트와 손을 맞대었다. 순식간에 그와 몸이 가까워졌다.

커다란 몸이 바짝 붙자 알렉사의 등이 긴장했다. 검을 부딪치면서는 코앞까지 그의 얼굴이 들이밀어져도 이렇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격렬한 춤을 추면서도 라인하르트는 어디 하나 흐트러진 데 없이 단정하기만 했다.

그 상태로 몇 번 발을 움직이고 빙글 돌아 다시 뒤로 빠지려는데, 마침 음악이 딱 끝났다. 다행이다 싶은 마음으로 알렉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얼른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라인하르트가 불쑥 그녀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어어?”

“춤이 이어지니, 나와 한 곡 추지.”

그의 말대로 악단이 느릿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맞잡은 손도 그렇지만, 날개뼈 근처까지 와 닿는 상대의 커다란 손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뒤로 몸을 빼려 하자, 놀랍게도 라인하르트는 힘을 주어 알렉사를 끌어당겨 안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바짝 좁혀졌다.

알렉사가 항의의 눈빛으로 쏘아보자, 놀랍게도 라인하르트는 그녀를 놓아주는 대신 도발했다.

“도망치려고?”

“도망치긴 누가 도망쳐!”

알렉사에게도 불이 붙었다. 이 춤도 비앙카와 마티어스에게 배운 것이었다. 두 사람의 다리가 엇갈리고 따라붙으며 천천히 연회장을 거닐기 시작했다.

울컥해서 라인하르트와 춤을 추기 시작한 것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막상 붙고 보니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아까 춘 춤이 너무 격렬해서 땀도 났고, 머리도 좀 흐트러졌을 것만 같았다.

그런 알렉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라인하르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디 하나 이상한 부분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춤춰.”

그 순간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의 얼굴에 떠오른 옅은 미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인간이 이렇게 웃을 줄도 알았어? 맨날 조각상처럼 딱딱한 얼굴로만 다녀서, 웃을 수 있는 인간이라고는 상상도 한 적 없었다. 그가 웃어서 그런지 알렉사는 조금 편한 마음이 되어 춤을 출 수 있었다.

어차피 할 말도 없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려 했는데 라인하르트가 먼저 또 말을 걸었다.

“오늘 많이… 괜찮아 보이네.”

“소공작님 눈에 그렇게 보인다니 영광이네?”

“진심이야.”

“그래, 뭐. 고마워?”

입술을 비죽거리고 웃은 알렉사는 이어 농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대체 언제쯤 나한테 질 거야?”

“글쎄, 그건 네가 하기 나름 아닐까 싶은데.”

“뭔가 발언이 굉장히 재수 없는데.”

“난 항상 너와 검을 맞댈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언제든 와. 그래서 날 꺾으면 기꺼이 패배를 인정하겠어.”

“호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라인하르트를 이기는 것도 물론 목표였지만, 그 정도 되는 실력자와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성장하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알렉사는 이번에야말로 환하게 씩 웃으며 라인하르트에게 말했다.

“그만 오라고 할 때까지 대련하자고 그럴 테니까 기대해.”

“얼마든지.”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라인하르트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알렉사는 능숙한 라인하르트의 리드에 따라 춤을 추다가 순간 그의 크라바트 중간에 작게 꽂힌 장식에 눈을 두었다.

그건 금으로 세밀하게 만들어낸 수사슴의 흉상이었다. 마치 그녀가 하고 있는 카메오 브로치처럼 말이다. 우연인 걸까? 왜 하필 라인하르트가 사슴 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을까?

혹시…….

알렉사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이내 마음속으로 기각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귀족 중 귀족인, 로맨스 소설 따위는 평생 읽을 일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어떻게 디어일 수 있을까?

알렉사는 자신이 한 생각이 우스워서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왜 그러냐는 듯 라인하르트가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의 춤을 이끌던 음악은 서서히 끝났고, 연회장 중간에 남아 춤을 추던 이들은 서로의 손을 놓고 떨어져 인사를 했다. 알렉사도 예의 바르게 라인하르트에게 인사를 하며 그를 슬쩍 훑어보았다. 역시나, 어디 예법 교본에 있을 법한 모습으로 그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라인하르트는 에스코트하려는 듯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 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돌아서서 아까 술을 마셨던 자리를 쳐다보는데, 그곳에 서있는 마티어스와 비앙카가 보였다.

알렉사는 활짝 웃으며 라인하르트가 제 손을 잡고 있는 것도 잊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라인하르트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곧장 알렉사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옆을 따라 걸었다.

“비앙카! 마티어스!”

“알렉사, 춤 연습한 보람이 있는데? 완전 잘 추더라?”

“후훗, 내가 몸으로 하는 건 좀 잘하지. 그나저나 마티어스, 어디 갔었어? 한참 안 보이던데.”

자연스레 라인하르트의 손을 놓은 알렉사는 마티어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누가 잠깐 불러냈는데…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죠.”

그렇게 말하는 마티어스의 눈이 잠시 라인하르트에게 향했다. 둘이 서로를 쳐다보긴 했지만, 정말 잠시였다. 라인하르트는 미련 없이 그들에게서 돌아섰으니까. 알렉사는 두 남자가 어떤 눈빛을 주고받았는지 조금도 알지 못하고 까르르 웃었다.

그녀가 기대했던 2학년의 끝, 성년을 기념하는 연회는 그렇게 좋은 기억만을 남기고 마무리되었다.

그날 늦은 밤, 알렉사는 거의 잠에 빠져가는 비앙카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비앙카, 근데… 소공작이 사슴 모양 장식을 크라바트에 했더라고.”

“어어… 그거… 오덴발트… 하아암… 공작가 문장일걸.”

“공작가 문장?”

“으응…….”

비앙카는 웅얼웅얼 대답하고는 곧 고르게 숨을 쉬었다. 빠르게 잠에 빠진 비앙카와 다르게 알렉사는 그녀의 대답에 조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럴 리가 없지.’라는 결론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

“A, 만나서 반가워.”

“으응, 나야말로.”

드디어 만나게 된 디어의 앞에 선 알렉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연회에 달고 갈 브로치 선물이 고맙다고, 만나서 감사 인사를 꼭 하고 싶다고 쪽지를 남겼더랬다.

그런데 놀랍게도 디어가 바로 보자고 했고, 그래서 마침내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분명 만나자고는 자신이 먼저 제안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어색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앞에 선 디어의 목소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냥하고 달콤했다. 그녀가 꿈꾸었던, 그런 남자의 목소리였다.

알렉사는 슬쩍 눈을 들어 상대의 얼굴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다부진 턱선과 도톰하고 매혹적인 붉은 입술뿐이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움직이는 목울대가 자꾸만 시선을 빼앗았다.

“너를 정말로 만나고 싶었어.”

“나도… 그래.”

이상하게도 자꾸만 몸이 배배 꼬였다. 누구 앞에서든 부끄러워하면서 손가락을 어쩌지 못하고 꼼지락대거나, 괜히 몸을 돌리는 행동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디어는 무슨 마법을 쓴 건지, 자꾸만 알렉사를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만들었다.

디어가 훗, 하고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에 알렉사는 또 고개를 떨구었다. 귓바퀴가 뜨끈뜨끈하고 목덜미도 후끈했다. 분명 새빨개져 있을 것이다. 아마 볼도 그럴 테고. 그게 고스란히 디어에게 보인다고 생각하니 더 부끄러웠다.

“귀엽네, A.”

속삭이듯 작고 낮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귓가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간지러워서,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정말 귀여워. 그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조금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고작 머리카락을 넘겨준 것뿐인데, 닿은 부분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절대로, 평소의 알렉사라면 이런 식의 접촉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친 거 아니냐며 손부터 쳐냈으리라.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게 안 되느냐 말이다!

알렉사는 눈을 꽉 감으며 살짝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이어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디어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긴 것이다.

놀란 알렉사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짚고 슬쩍 밀어냈다. 바보 같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왜 이래.”

“도망치지 마.”

“도망, 안 쳐.”

“하지만 뒷걸음질 치려고 했잖아.”

“그건, 좀 놀라서…….”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디어가 두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탓이었다. 남자의 체취는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옅은 땀 냄새와 어쩐지 익숙한,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듯한 향긋한 라벤더 향. 하지만 그의 체취를 음미할 새도 없이 알렉사는 움찔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 잠깐만…….”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까, 너는.”

“잠깐, 간지럽다고. 으읏, 디어…….”

“근데 그거 알아, A?”

사실 난 이미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

그 말에 알렉사는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구나. 디어는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계속 나와 쪽지를 주고받고, 또 연회에 하고 갈 장신구도 선물하고, 만나자는 말에 흔쾌히 나오기까지 했구나. 알렉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쳤다.

혹시 디어는, 어쩌면 이전부터 내게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랬는데 우연하게도 쪽지를 통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거고? 그렇다면 정말 기쁜 우연이었다.

알렉사는 그의 가슴에 뺨을 대었다. 넓고 뜨거운 가슴에서는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디어도 나만큼이나 긴장한 걸까. 알렉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전부터… 나에게 관심이 있었어?”

“관심뿐일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진 듯했다. 디어의 큰 손이 알렉사의 등줄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항상 너와 함께 있는 꿈을 꿨어. 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널 보고, 너와 이야기하고, 이렇게 끌어안고…….”

그의 입술이 귓가와 이마, 정수리를 지분거렸다. 그의 입술이 한번 닿을 때마다 알렉사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손으로 꽉 쥐었다. 순진한 소녀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알렉사의 반응이 귀여웠는지 디어가 또 한 번 나지막하게 웃었다.

알렉사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리지 마. 하지만 그 말에 디어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놀리는 거 아니야. 내가 널, 얼마나 원했는데.”

그의 굵은 허벅지가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알렉사는 이미 그의 열기에 전염되어서 그런 작은 자극에도 몸을 떨었다. 마치 춤을 추듯 두 사람의 걸음이 천천히 옮겨졌다.

디어가 이끄는 대로 알렉사는 뒷걸음질 쳤다가, 끌려갔다가, 또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이리저리 휘둘리던 끝에 알렉사는 그만 다리 뒤에 걸리는 무언가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아픔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침대? 이상함을 떠올릴 새도 없었다. 그녀의 위로 올라탄 디어가 조금 여유를 잃은 목소리로 물었다.

“입 맞춰도 괜찮을까?”

대답을 할 새도 없었다. 그의 입술이 알렉사에게로 찾아들었으니까. 알렉사는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여전히 어설프게 그의 옷을 붙잡고 있는 것을, 디어가 직접 떼어내서는 그의 목을 감싸 안게 만들었다.

“으읍… 흣.”

“숨 쉬어야지.”

“하아, 하지만… 읏…….”

디어의 혀가 느릿하지만 능란하게 알렉사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마치 천천히 움직이는 뱀처럼, 그의 혀는 알렉사의 입 안을 여유롭게 탐색했다. 어디가 보드라운지, 어디가 예민한지 찾아내려는 듯 그의 혀가 가볍게 알렉사의 것을 얽었다가 풀어주더니, 오돌토돌한 입천장을 쓸어댔다.

알렉사는 제 입천장에 그렇게 많은 감각이 존재하는지 처음 알았다. 간지럽다가 짜릿하고, 또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아니, 그냥 간지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왜 이렇게 찌릿한 건지.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게 마음에 든다는 듯, 디어가 조금 더 알렉사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좀 더 깊이 자신을 원하는 디어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디어는 그녀의 입술에만 머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알렉사의 입술 옆과 턱선을 따라 입을 맞추더니, 야들한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처음 겪는 기이한 감각에 알렉사는 디어의 머리를 끌어안고는 끙끙대기만 했다.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있어.”

“어떻게, 편안, 하게… 그게 안 되는걸. 아!”

“그냥 즐기면 돼.”

네가 원하는 걸, 내가 모두 해줄게. 디어는 아주 살짝 알렉사의 목을 물었다. 잇자국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애교 섞인 입질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알렉사는 자신이 초식동물이고 상대가 육식동물이 된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잡아 먹힐지도 몰라. 아니, 잡아먹혀.

연약하디 연약한 초식동물이 된 것처럼, 알렉사는 디어 앞에서 무력했다.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말의 뜻을, 알렉사는 잘 알았다. 그게 어떤 행위를 의미하는지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소설책으로 모두 배웠다.

하지만 책으로 배워 아는 것과 실제로 겪는 건 천지 차이였다.

알렉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상의는 어느새 다 풀어 헤쳐지다 못해 거의 벗겨져 있었다. 벌어진 셔츠는 어깨 아래까지 내려가 그녀의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그리고 미처 저지할 틈도 없이, 디어의 입이 이미 빳빳하게 서있는 유두를 머금었다.

“아……!”

“이미 서있네. 귀여워.”

단단해진 그 작은 첨단을 이로 살살 씹으면서 디어가 속삭였다. 알렉사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읏, 그런 말, 하지 마.”

“정말이야. 귀엽고 예뻐. 아니, 아름다워. 네가 얼마나 환상적인지 직접 봐야 하는데…….”

디어는 제법 집요했다. 기대감으로 충혈된 젖꼭지를 아이처럼 열렬하게 빨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머지 한쪽도 잡고 짓이기고 빙글 돌려댔다. 배 안쪽,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에서부터 저릿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알렉사는 허리를 비틀고 헐떡이며 끙끙댔지만, 디어의 육중한 몸에 눌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흐응, 아, 제발… 아앗!”

“네게서 달콤한 향기가 나. 더 먹고 싶어.”

“아앗, 아, 아흣! 디어, 나, 점점 이상, 이상해지는데…….”

“괜찮아, 전부 받아들여도 돼.”

그의 커다란 손이 풍만한 가슴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의 모양대로 우그러졌음에도 알렉사는 아프다고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짜릿함을 느꼈다. 디어는 혀를 굴려 그녀의 유두를 간질이다가 송곳니로 꽉 깨물어 버렸다. 점점 민감해지는 가슴 끝이 자극될 때마다 알렉사는 제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더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정신없이 핥고 빨아대는 디어의 머리를 움켜쥔 채, 알렉사가 헐떡이며 말했다.

“디어, 으응, 그만……. 너무 자극이, 흑, 세서… 생각을 못 하겠어, 흐읏, 아!”

“아직 멀었는걸.”

네가 원하는 건 이 정도가 아니잖아. 디어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어쩐지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 같기도 했다. 그의 말을, 알렉사는 이상하게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보다 더한 걸 원했다고?

그러자 어딘가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잖아, 알렉산드라. 너 항상,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어떤 건지 궁금해했잖아. 알렉사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게 사실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궁금하긴 했지.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알게 될 줄은 몰랐는걸. 게다가 상대가 디어라니, 그것도 예상 밖이라고!’

그러나 그런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오직 열락에 젖은 신음과 디어에게 애원하는 몇 개의 단어가 전부였다. 그리고 어느새 디어는 천천히 납작하고 단단한 알렉사의 배를 지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렉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바지는 사라졌고, 얇디얇은 속옷 한 장만이 그녀의 은밀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디어는 그대로, 입을 벌려 알렉사의 음부를 입에 머금었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그녀의 달아오른 도톰한 살을 쓸어 올리자, 알렉사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아아……!”

더 이상 디어의 머리카락을 붙들 수 없었던 알렉사는 그대로 팔을 뻗어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얘지도록 잔뜩 힘을 주었다. 이런 건 정말 처음이었다. 아니, 이런 망측하고 음탕한 행위가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읽었던 로맨스 소설에는, 물론 조금 야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야한 행위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누군가가 자신의 손만 닿았던 부분에 입을, 혀를 가져다 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던 알렉사는 크게 놀랐다. 하지만 온몸을 덮치는 파도 같은 쾌락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디어, 아! 흐아앙……!”

제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애타는 교성에 알렉사 스스로도 놀랐다. 마치 고양이처럼 앙앙대며 엉덩이와 허리를 들썩대는 게 알렉산드라 린다우, 자신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의 혀가 얇은 천을 적시며 핥고 지나가는 감각이 너무나도 선연해서, 알렉사는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속옷을 적시는 건 디어의 타액만이 아니었다. 알렉사는 제 다리 사이 안쪽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흘러나오는 걸 알아차렸다.

디어도 알렉사의 안쪽이 젖어 드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걸어 속옷을 옆으로 젖히더니, 아예 그 두툼한 혀로 직접 속살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천 위로 닿는 것과 직접 닿는 건 천지 차이였다. 그의 혀가 도톰한 대음순을 비집고 들어와 그 안의 예민하디 예민한 작은 살점을 건드린 순간, 알렉사는 거의 펄쩍 뛰어오르다시피 했다.

“아앗! 아! 흐응, 으아앙… 아흑, 디, 디어, 아… 아아!”

“너무 맛있어. 좀 더…….”

“그마안. 아앙, 나, 흐으, 이상해, 이상해애!”

“그건 안 돼.”

생전 처음 겪는 쾌감에 흐느끼며 애원하는데도 디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예 작정이라도 한 사람인 양 혀를 안쪽으로 슥 밀어 넣었다. 제 손가락조차도 넣은 적 없는 그 은밀하고 좁은 길에 디어의 혀가 들어오자마자 알렉사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디어는 두 손으로 알렉사의 허벅지를 단단하게 잡고는 질 안으로 더 깊이,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그 바람의 그의 코가 자꾸만 알렉사의 음핵을 짓눌러 댔다.

알렉사는 짐승처럼 울며 계속 빌었다. 이제 그만. 죽을 거 같아, 디어. 내가 이상해지는 거 같아!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좀처럼 디어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점점 많아져서, 어느새 디어의 입가와 코 주변을 흥건히 적시다 못해 아예 시트까지 흠뻑 젖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저릿저릿하기만 하던 배 속에서 한껏 뭉치던 쾌감이 그대로 폭발했다. 무언가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강렬한 감각이 알렉사의 몸을 뒤흔들었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쾌락이 순식간에 머리끝과 말초까지 달음박질쳤다. 알렉사는 몸을 달달 떨고 튕기며 허덕였다.

“아아, 아흐으응!”

그 와중에도 알렉사의 절정을 더욱 재촉하듯, 디어의 혀는 도무지 쉴 줄 몰랐다. 끊임없이 온몸을 때리는 쾌감에 알렉사는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덜덜 떨리고 목이 메었다. 숨을 헐떡이며 꺽꺽대던 알렉사가 마침내 모든 기운을 소진한 듯 축 늘어지자, 그제야 디어의 애무도 멈추었다.

하아, 하아. 알렉사는 그저 밭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 사이에서 디어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제 우리, 하나가 되는 일만 남았어.”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또 갈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알렉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렇게 처음을 경험하게 되는 건가? 디어와 함께?

오래전부터 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급작스럽긴 해도 알렉사는 만족했다. 그 누구도 아니고, 디어이지 않은가. 그녀가 반쯤 충동적으로 남겼던 쪽지에 성실히 답하고 세심하게 마음을 써준, 그이니까.

디어가 천천히 알렉사의 위로 올라왔다. 바지를 내리는 듯 천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알렉사의 얼굴 옆에 한 팔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미 검붉게 달아오른 페니스를 잡은 채 말했다.

“이제 내 얼굴을 봐줘, 알렉산드라.”

‘내가… 내 이름을 디어에게 알려주었던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니 이름을 알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디어는 한 번도 알렉사를 ‘알렉산드라’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목소리가 좀 익숙했다.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분명 어디에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아는 사람이 디어였단 말이야?

하지만 디어가 누구인지 아는데 내가 그를 못 알아보고 계속 ‘디어’라는 가명으로 불렀다고?

알렉사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상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만난 이후로 제대로 쳐다본 적 없던, 그리고 지금은 어쩐지 흐릿한 디어의 얼굴이 천천히 누군가의 얼굴로 변해가는 듯했다.

“알렉산드라.”

햇빛을 머금은 듯한 금발에 짙은 녹음을 닮은 녹색 눈동자. 단정한 이마와 오뚝한 코, 굳센 성미를 그대로 반영한 듯한 입술.

“말도 안 돼!”

디어의 얼굴은 알렉사가 그토록 진저리 내던 오덴발트 소공작, 라인하르트의 것이었다.

“아니야!”

알렉사는 비명처럼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마와 등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땀이 나있었다. 아직 검푸른 새벽빛이 가득한 방에는 오직 비앙카의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헉… 허억… 미친…….”

알렉사는 무릎을 세워 앉으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입이 바짝 마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새해 첫날부터 이게 무슨 개꿈이람! 정말이지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디어를 만나는 꿈은 그렇다 치고, 그게 라인하르트라니 말이 되냔 말이다. 알렉사는 그대로 머리를 쿵쿵, 몇 번이나 내리받았다.

‘‘그’ 라인하르트를 상대로 그런… 음란하기 짝이 없는 꿈을 꾸다니… 알렉산드라 린다우, 완전 미쳤다. 정말!’

벌러덩 드러누운 알렉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없는 아우성과 함께 발버둥 쳤다.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진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마 연회에서 그와 잠시 춤을 추고, 그보다도 더 잠깐 웃으며 대화했다고 이런 꿈을 꿨단 말인가? 라인하르트에 대한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다 접었는데 이게 무슨 개꿈인지. 알렉사는 꿈을 머릿속에서 싹싹 지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자꾸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손길과 입술과…….

‘아니야악! 그거 아니야!’

알렉사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눈을 꽉 감았다. 그러고는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쉽게 되지 않자, 왕국 기사단 입단 시에 외우는 기사의 맹세를 외우기 시작했다.

나의 하나뿐인 주군 앞에 무릎 꿇고 서원을 바치나이다. 나는 주군의 검이며 방패이며 충실한 종이외다. 왕국을 해하려는 무리 앞에 가장 먼저 나서 검을 들 것이며…….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알렉사는 울상이 되어 손바닥으로 이마를 연신 쳤다.

결국 그녀는 아침 해가 뜨고 기상 알람이 울릴 때까지 다시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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