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8)

7.

왕족과는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리피는 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을 야문에게 맡기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노옴 아바리티와 함께였고, 그의 가신들에게 대현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전달했다.

저택에 돌아온 뒤에는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가신들을 일일이 위로해주며 하루 쉬었다.

왕의 까마귀는 이튿날 오전에 도착했다.

노옴 아바리티를 넘기라는 명이었는데, 언령으로 명해진 것은 아니었다. 리피는 잠시 고민하다가 까마귀에게 예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노옴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 일어나면 보낼게.”

“언제쯤 깨어나시나요?”

“늦어도 오늘 오후에는 일어날 거야. 아, 그리고 왕에게 이 말을 전달해줘.”

“예, 말씀해주세요.”

“7인교 전부가 없어진 게 아니야.”

“…….”

“당신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은 없으나 우리를 신으로 모시는 이들은 아주 많지. 두려워해야 해. 뿌리 뽑으려 할수록 더욱 불타오르고, 거세지는 것이 바로 신앙심이니까. 우리에게 건 제약을 줄이지 않는다면 또다시 그런 일을 계획하는 7인교가 나타날 거야. 부디 잘 생각해보라고 전해줘.”

거의 반협박이었다. 까마귀는 리피의 미모에 반쯤 홀린 채 네, 네만 반복했다.

왕에게 보고할 서류 또한 까마귀 편으로 전달해야 했다. 아직 한 자도 쓰지 않은 리피는 까마귀를 방으로 돌려보내고 오랜만에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첫 줄부터 고민에 빠졌다. 바로 ‘무한의 라타르’의 존재 때문이었다.

왕에게 보고할 때 꼭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다들 대충이었지만 특히 리피는 세 문장 정도로 짧게 끝낼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일은 자신의 전 보좌관과 대현자 두 명이 가담했고, 왕궁 내에서도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예의상 종이 한 장 분량은 써줘야 할 것 같았다.

후우…. 리피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밑에 있을 때도 저렇게 야하게 숨을 내쉬고는 했는데….’

‘펜을 쥔 손가락 빨고 싶다.’

‘동그란 이마에 대고 좆을 문지르고 싶어.’

가신들이 집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리피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들이 조르르 앉아 헤벌레 침을 흘리며 초롱초롱 눈빛을 보내는 모습은 리피가 보기에 무척 귀엽고 어여뻤다. 심지어 다들 상의는 벗어 던지고 잔뜩 성난 근육에 오일을 바른 상태였다. 보고서 작성은 야문한테 맡기고 사랑스러운 가신들이랑 놀까 고민하는 그때 야문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왔다. 여정을 함께했던 그레이, 기타크, 보더, 로모어 그리고 저택의 손님 신분인 이스리어, 티토가 함께였다.

“데리고 왔습니다만… 이 녀석들은 뭡니까.”

“그냥 인형이나 장식품 같은 거라 치고 놔두면 안 될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야문이 조금이라도 리피를 더 길게 보고 싶어서 찾아온 가신들을 집무실 밖으로 내쫓았다. 문을 쾅,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정을 함께했던 가신들만 이 자리에 부른 이유는 말을 맞춰놓기 위해서였다. 다른 녀석들이 어디 누설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비밀을 아는 이는 적을수록 좋았다.

“그럼 얘기해 보자. 어느 정도까지 밝히는 게 좋겠어?”

“있는 그대로 밝혀도 될 것 같은데요. 이미 노옴 공작님 일도 알고 있고…. 야문 보좌관님이 왕에게 대피하라고 얘기할 때 노옴 공작님 얘기도 하셨거든요.”

“아니, 노옴 공작의 결계가 해제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 적으로 돌아섰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에요? 배신했다고 알아들었을 것 같은데.”

“우리 공작이 배신이 아니라고 보고서에 쓰면 배신이 아니게 된다네.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해도 왕족은 대현자의 보고서를 믿어야만 하는 걸세.”

“아… 그런가요?”

로모어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왕은 언령을 이용해 보고서의 내용을 추궁할 수 있었고, 그럼 대현자는 진실을 밝혀야 했다. 다만 보고서는 10 대신관들에게도 공개되는데, 왕은 10 대신관보다는 그나마 대현자들과 친한 편이라 대현자가 속인 부분이 있어도 보고서 재작성을 요구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가신들과 리피가 어느 부분까지 넣을지 토의하는 동안 이스리어와 티토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었다.

러스티 리피의 저택에서 머문 지 며칠이 흘렀으나 저택의 주인과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리피는 바깥에서 볼 때와 달리 한결 편한 복장이었는데, 가벼운 차림새 때문에 더 야해 보였다. 저 아기 피부처럼 말랑말랑한 종아리를 벌리고 안쪽 깊숙한 것에 자신의 것을 심었던 그 날이 자꾸 떠올랐다.

“형, 리피 님은 되게 높으신 분인가 봐요…. 황제보다 높은가요?”

“그렇지. 까마득하게….”

아로수의 수원에서 살다 온 티토는 아직 리피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다. 후에 더 커서 이때를 회상하면 잠시라도 그분과 한 공간에 머물렀던 게 영광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스리어는 심장이 쓰라린 느낌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하면… 나도… 가신이 될 수 있을까.’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추억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검술 실력은 미흡하고, 커널도 찾지 못한 안티 마법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스리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언가 방법이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럼 다음은 티토에 대해서 얘기하자.”

“네? 저요?”

어느새 보고서에 대한 얘기는 끝난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티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혈 인어인 너는 살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전 여기서 사는 줄 알았는데….”

“아로수의 수원으로 돌려보내는 게 제일 좋아 보입니다.”

“전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은데….”

“맞아요, 리피 님. 거기에 다른 인어도 있을 거고 말이죠.”

“전 여기가….”

티토가 울먹거리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봤자 이미 가족도 없는걸요. 이스리어 형도 여기 있고…. 전 여기 있고 싶어요.”

어린애 같은 발언이었으나 실제로 이제 막 성장한 어린애가 맞았기에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리피는 티토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이곳엔 있을 수 없지만, 아로수의 수원에 정 가기 싫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뭔데요…?”

“요정왕의 성에 갈래? 그곳에 순혈 요정들이 모인 숲과 호수가 있거든. 최초로 순혈 인어가 들어온다면 요정왕도 좋아할 거야.”

“전 여기 있고 싶은데… 형이랑….”

티토는 그저 리피의 저택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며칠간 이곳에 머무르면서 티토와 이스리어가 리피와 잤다는 얘기를 들은 가신들이 잔뜩 텃세를 부리고 괴롭혔는데, 티토는 그게 괴롭힘인지도 모르고 튕겨냈다.

“이곳은 네가 있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란다.”

“그래도 저는 리피 님이랑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리피 님, 요정왕에게 지금 바로 말씀하시죠.”

“어?”

야문이 어느새 전화기에 요정왕의 번호를 찍어 리피에게 건넸다. 이미 전화가 걸린 상태였고, 요정왕은 곧 전화를 받았다.

-리피, 순혈 인어의 거처를 정하셨소?

이미 대충 얘기를 들은 건지 요정왕이 먼저 말을 해왔다. 야문의 일처리는 이렇게 리피가 명할 때보다 한 발 빠를 때가 있었다. 리피는 얼결에 거처를 부탁해놓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푸르스름한 얼굴의 인어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저는… 리피 님이 처음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먹고 버리는 건가요?”

리피가 이마를 감쌌다.

“그게 아니라….”

“리피 님께 동정을 바친 사람이 너뿐인 줄 알아? 나도 동정이었거든요.”

보더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신입인 보더는 다른 신입 가신이 들어올까 봐 바짝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리피 님이 먹고 버린 남자가 한둘도 아닌데, 저택까지 와 본 걸로도 고맙게 여기세요.”

“저는 순혈 인어란 말이에요. 절 성장하게 했으니 책임을 져야 해요.”

“아, 그러세요? 난 대신관을 목전에 두고 있던 유망한 신관이었거든요?”

티토와 보더의 다툼에 리피의 희미한 양심이 쿡, 쿡 찔려왔다. 로모어와 그레이는 웃으며 구경했고, 기타크는 핸드폰으로 몰래 녹음까지 했다. 야문만이 차가운 얼굴로 리피의 옆에 냉정하게 서 있었다.

“이스리어 형도 뭐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아, 나는….”

나이가 보더보다 어려서인지 말다툼에서 패배한 티토가 이스리어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스리어는 아까부터 가라앉아 있었다.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침통해 보였다.

“전….”

이스리어는 리피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무척 할 말이 많은 눈이었으나 꾹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아, 맞다.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리피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허공에 손짓했다. 리피의 손에 아주 작은 유리병이 들어있었다.

“오에흐 클럽에 있을 때 무슨 실험에 대해서 들은 적 있니?”

“예, 인어를 데리고 뭔가 실험을 한다고… 목적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건 본 적 있어?”

리피가 엄지와 검지로 유리병을 잡았다. 이스리어는 먼저 리피의 잘 다듬어진 손톱과 동그란 손가락 끝을 훑어 내린 다음 유리병을 봤다.

“모르겠습니다. 뭐가 들어있긴 합니까?”

“무한의 라타르래.”

“예…?”

이스리어가 눈을 깜박였다.

“무한의 라타르라고.”

“…정말로 이게….”

전설에만 나오던 통로를 이용했을 때 이 이상의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고, 리피와 섹스하면서 지금 이 순간이 기적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무한의 라타르가 있었다. 창조신 제페아의 신화 속에나 등장하던 것이….

“탐나니?”

“아닙니다. 전혀 욕심나지 않습니다.”

이스리어의 부정은 진심이었다. 어느 정도 상상 안쪽이어야 기대도 하고, 욕심도 내는 것인데, 무한의 라타르는 너무나 다른 세계였다. 눈앞의 이 사람은 내 것이 될 수 없단 걸 알고, 내 것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겠는 반면, 무한의 라타르는 처음부터 욕심이 들지 않았다.

리피는 유리병을 흔들며 고민에 빠졌다.

“어떤 실험인지 모른다는 거지. 이걸 어떻게 처리한다….”

‘처리?’

이스리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섭취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반면 가신들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먹을까, 노옴을 줄까….”

리피는 한두 방울 들었을까 싶은 작은 병을 공중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나는 당신에게 선물을 주려는 겁니다.’

그것은 지드의 유언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을 텐데 수많은 말 중에서 그것을 선택한 것이다.

‘내게 이걸 주는 게 지드의 목적인 거야.’

천년의 저주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목적….

고민하던 리피가 유리병의 코르크 마개를 마법으로 튕겨냈다. 무색무취의 용액이었다. 리피는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유리병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살짝 기울였을 때였다.

“잠깐만요, 리피 님!”

보더가 다급히 달려와 가로막았다. 뚜껑이 열린 채로 아슬아슬 걸쳐져 있던 용액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왜?”

“제가, 잠시,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리피가 흔쾌히 작은 유리병을 보더에게 건넸다. 보더는 자신의 손가락보다 작은 병을 눈앞에서 가까이 들여다보더니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벽에다 내던졌다.

챙그랑!

손가락만 한 유리병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무한의 라타르가 허무하게 공중 분해되었다. 황당하다 못해 황망한 짓거리에 이스리어가 눈을 크게 뜨고 보더를 쳐다봤다. 보더는 스태프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외쳤다.

“이게 있으면 우리랑 안 잘 거잖아요! 어쩔 수 없었어요. 전, 어쩔 수 없었어요…!”

“…미쳤어….”

이스리어는 입을 틀어막았다. 섹스를 안 해줄 거라는 고작 그런 이유로 무한의 라타르가 들어있는 병을 깨버렸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한의 라타르는 리피가 더욱 편히 살 수 있는 길인데…. 그 길을 가신이란 자가 망쳐버린 것이다.

이 자리에서 죽인다 해도 할 말 없다.

만약 내게 죽이라 명하신다면 당장 검을 빼어 들 텐데.

이스리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리피가 옅게 웃었다.

“걱정 마렴. 어차피 먹을 생각 없었어.”

“저, 정말요…?”

“그럼. 흑마법사가 준 걸 내가 왜 먹겠어.”

리피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이 깨진 자리로 다가왔다.

“조심하십시오. 유리 조각이….”

“공작, 파편이 여기저기 튀어있으니 멀리 계시게.”

이제 보니 리피의 다른 가신들은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무한의 라타르라는 게 대체 무슨 성분인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아예 깨버릴 줄은 몰랐네.”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 장난이 심했지.”

리피는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의 아쉬움도 없어 보이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어떡할까요? 파편이라도 주워 모을까요?”

“글쎄,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서.”

리피와 가신들은 깨져버린 무한의 라타르 앞에서 한가로이 대화를 나눴다.

이스리어는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우연히 떨어진 어린아이처럼 벙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한의 라타르였다. 어쩌면 리피를 언령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도 있었고, 영원히 자유롭게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노옴 공작이 깨어났나 봅니다.”

“그렇군. 이쪽으로 바로 달려오고 있네.”

마인인 야문과 로모어가 복도 저편의 소리를 듣고 미리 알렸다.

노옴 아바리티, 잠든 채 저택에 운반된 인색의 대현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

집무실에 갑작스러운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이유를 모르는 이스리어도 덩달아 긴장하며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리피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만들어졌다.

“벌써 일어났단 말이야? 큰일 났네. 비슷한 유리병이라도 구해 놓을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안 됩니다!”

“노옴 공작님, 멈춰요!”

“시끄러워. 난 리피 님을 만나야 해. 만나서 받을 게 있다고!”

“공작님!”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졌다. 리피의 가호를 받고 있는 가신들은 다치지 않았으나 이스리어와 티토는 부서진 문의 파편 몇 개에 바로 타격 당했다. 날카로운 조각이 이스리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인어인 티토는 본능적으로 비늘을 세워 방어했는지 상처가 없었다.

“리피 님, 무한의 라타르는, 어떻게…!”

“노옴, 일단 앉아. 방금 일어났지? 물은 마셨어?”

리피가 노옴에게 다가가며 다정히 물었으나 노옴은 리피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은 듯했다.

“설마 섭취하신 건 아니죠? 아니겠지. 당신은 필요 없잖아. 없어도 되잖아!”

“무한의 라타르라는 건 세상에 없어.”

“거짓말하지 마. 내 눈으로 봤단 말이야! 어디 있어요. 어디 있냐고!”

노옴은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고, 라타르가 그의 감정에 반응해서 일렁거렸다. 가신들이 저마다 무기에 손을 올리며 긴장했다. 이스리어는 티토를 구석 안쪽으로 보내고 경계하며 섰다.

“당장 내놓으세요. 그건 내 거야!”

“노옴….”

노옴이 방 안에 성큼, 성큼 들어왔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 리피가 낭패 어린 탄식을 내뱉고 노옴이 발밑을 내려다봤다. 아주 작은 유리 파편이 발에 밟혀 부서져 있었다. 노옴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거… 이게 뭐예요, 리피 님?

“내 얘기를 들어. 어차피 무한의 라타르가 아니었어.”

“어떻게… 그렇게 부탁했는데….”

“노옴!”

노옴의 주위에서 라타르가 휘몰아쳤다. 회오리바람처럼 노옴의 주위를 감싸더니 깨진 유리 파편이 공중에 날아올랐다. 야문이 검은 날개를 펼쳐 리피를 감쌌다.

“으아아아!”

인색의 대현자는 크게 절규했다.

“가만두지 않겠어. 죽여 버릴 거야…!”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이 투두둑 떨어지고 종이가 휘날렸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뒤로 몸이 밀려날 정도였다.

“윽….”

이스리어는 상체를 숙이고 팔을 들어 바람을 막았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반쯤 보이는 시야에서 리피에게 달려드는 노옴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가신들에게 보호받고 있을 줄 알았던 리피가 야문의 검은 날개 바깥에 서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안 돼…!”

이스리어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휘발되었다. 더 생각하고, 고민할 틈도 없었다. 노옴이 만들어낸 마법의 창이 그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러스티 리피가 대현자라는 것도,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그의 저택이라는 것도 모두 잊어버렸다.

다음 순간 이스리어는 리피의 앞에 서 있었고, 콰드득, 노옴의 창이 이스리어의 가슴을 꿰뚫었다.

“크윽…!”

이스리어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쓰러졌다. 대현자가 만들어낸 마법의 창은 심장부터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스리어…!”

아득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리피의 표정을 보고 싶었으나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다. 조금 더 이 분의 곁에 있고 싶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죽게 된다면… 내 죽음이 오랫동안 기억되기라도 하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이스리어는 정신을 놓았다.

***

-이스리어.

이스리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사방에 하얀 안개가 껴있는 공간이었다.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었다.

-정말 어리석구나. 대현자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는 사람이 어디 있어.

리피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정확히 위치를 알 수 없이… 모든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측은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 안개 속 어딘가에서 보고 있는 걸까. 이스리어는 어딘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잊었니?

‘너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아는 사람이 왜 나를 구하겠다고 뛰어들어.

리피가 책망했으나 이스리어는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개 속을 걸으며 물었다.

‘저는 죽은 겁니까?’

-죽어가고 있지.

‘이건 제 꿈입니까?’

-아니, 현실이야.

‘그렇다면 이게 마지막 인사군요….’

-뭐 하고 싶은 말 있니?

이스리어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리피의 물음은 달콤했고, 목소리는 다정했다.

어차피 죽어가고 있으니, 욕심을 내도 낼 것 같았다. 마지막이니까.

‘저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억?

‘예, 병신처럼 당신을 구하겠다고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고. 부디 오랫동안 저를 기억하고 계시기를….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이스리어의 진심이었다. 그는 리피를 만나기 전부터 7인교도였고, 정체를 알기 전부터 리피에게 끌리고 있었다. 조그만 몸으로 상상도 못 할 만큼 강한 마법을 사용해 존경심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킨 마법사, 알량한 정의감을 다정하게 칭찬해주었던 미인, 먼저 옷을 벗으며 유혹해오던 색욕의 대현자. 리피와 접한 시간은 아주 단기간이었으나 도저히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았어. 오랫동안 널 기억할게.

‘감사합니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고, 그의 곁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으나… 어차피 죽게 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게 끝이니? 네 동생에 대해서는 안 물어봐?

‘동생? 아….’

티토의 일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머릿속이 리피로만 가득 차서 생각하지 못했다.

‘티토에게 당신의 말을 잘 들으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이스리어가 낭패 어린 어조로 중얼거리자 리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스리어.

리피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더욱 가까워진 것처럼.

-내 가신이 되겠니?

‘가신…이라고요?’

-널 살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어. 혼의 서약을 하면 대현자의 험난한 여정을 함께할 수 있도록 몸이 튼튼해지거든.

‘당신의 가신….’

-그래, 내 가신.

리피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안타깝지만 고민할 시간은 오래 못 줘. 지금 네 혼을 혼의 서약을 하겠다는 핑계로 붙들고 있는 상태라 바로 결정해야 한단다.

이스리어에게 고민할 시간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가신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안개 속 어딘가에 리피의 모습이 보이는 듯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당신의 가신이 될 수만 있다면 전 또다시 죽어도 좋습니다.’

-좋아.

뿌옇게 앞을 가로막았던 안개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스리어의 눈앞에 둥근 구슬이 나타났다. 다홍색이었고, 삼킬 수 있을 만한 작은 크기였다.

-러스티 리피.

리피가 이름을 읊조리자 구슬 내부에 라타르로 글씨가 새겨졌다. 그의 이름을 구성하는 문자조차 너무나 아름다웠다.

-네 이름도 말해주렴.

‘…이스리어 델로.’

구슬 내부에 이스리어의 이름 또한 새겨졌다.

둘의 이름 뒤로 몇 문장이 떠올랐다. 혼의 서약에 따른 주의사항이었다.

보통 혼의 서약은 <두 사람은 서로의 혼을 엮는다>로 시작한다. 그러나 가신 서약은 달랐다.

<가신은 대현자에게 혼을 바친다>

그렇게 시작하는 몇 가지 문장은 가신이 될 자에게는 불합리한 요소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결국 뜻은 하나였다. 가신은 대현자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

이 단계까지 온 사람들은 조항이 불합리하든 얼마나 허무맹랑하든 아무 상관없었다. 이스리어가 마음속으로 모든 조항에 동의하자 구슬 속 문장들이 서로 얽혀갔다. 구슬은 다시 예쁘고 고운 다홍색으로 아름답게 빛이 났다.

‘이제 전… 가신이 된 겁니까?’

-그걸 삼키고 나면 끝나.

이스리어는 망설이지 않고 구슬을 삼켰다. 아무런 이물감이 없었다. 목 안쪽으로 무언가 넘어가는 느낌은 있었으나 단단하기보다는 물컹거렸고, 식도를 타고 내려오기 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정말 가신이 됐습니까?’

-이제 네 몸을 고칠 시간이지. 푹 쉬렴, 이스리어.

다시 눈앞이 흐려졌다. 처음보다 더욱 짙어진 안개 속에서 이스리어는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깨어나면…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당신의 가신이 되는 것보다 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록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보드랍고 상냥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응, 그것보다 더.

그것보다 더 놀랄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도 사실은 꿈인 건 아닐까. 죽음을 앞둔 자들은 이렇게 가장 바랐던 일이 이뤄지는 상황을 꿈으로 꾸는 걸까.

이스리어는 잠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리피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잠은 불가항력으로 쏟아졌고, 그는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두려움 없이 평안한, 잠이 쏟아졌다.

***

리피가 눈을 떴다. 눈앞에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보좌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성공적으로 끝냈어.”

“이로써 51번째의 가신이 생겼군요.”

야문은 리피를 부축하고 물컵을 입가에 대주었다. 물은 마시기에 딱 좋은 미지근한 온도였다.

물을 모두 비운 리피는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이스리어를 내려다보았다. 그 옆에서 티토가 퉁퉁 부은 눈으로 잠들어 있었다.

“혀엉… 죽지 마세요….”

거구의 인어가 애처롭게 칭얼거렸다. 리피는 티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인어는 안 됩니다.”

야문이 리피의 손가락을 잡아채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가신들로서는 끝까지 신입을 반대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목숨을 구하겠다고 뛰어든 이를 죽게 놔둘 수 없었던 리피의 뜻을 받아들여 준 것이다. 딱 여기까지,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었다. 이 애송이 인어는 절대 안 된다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리피가 걱정 말라는 뜻에서 웃으며 양팔을 내밀자 야문은 자연스럽게 리피를 안아 들었다. 소중하게 등을 끌어안고 단단한 팔로 작은 엉덩이를 받쳤다.

리피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혼의 서약을 한 적은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소모되는 라타르의 양은 상상 이상이었다.

‘혼의 서약’은 대현자들이 만든 마법으로, 만드는 과정은 리피가 주도했다.

지드 아자젤과 이별한 후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서, 서약을 맺은 상대는 조금 더 튼튼한 몸을 가질 수 있도록… 리피가 주도해서 만든 마법이었다. 천 년 전에는 가신이라는 제도가 없었으나 ‘혼의 서약’을 만든 후 가신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모두 지드 아자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리피는 야문의 단단한 어깨에 자그마한 얼굴을 포갰다.

“방으로 가자.”

“예.”

보통은 방금 가신 서약을 한 상대와 해서 라타르를 충전하지만, 오늘은 상대가 빈사 상태이니 야문과 해야 했다.

야문의 것은 이미 아까부터(리피의 라타르가 소진될 거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기립한 상태였다.

리피의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랐다.

***

“하읏…!”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호위대를 내쫓은 야문은 리피의 옷을 찢어발기고 곧바로 가슴에 입술을 맞췄다. 비트는 허리는 한 손으로 제압한 채 젖꼭지를 한입에 삼켰다가 혀로 빨아올리고, 이빨로 상처 나지 않을 만큼 살을 깨물었다. 다른 손으로는 이미 속옷까지 벗기고 아래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흐읏, 야문, 너무 세.”

“리피 님의 것도 서 있었군요.”

“당연하지… 흐, 힘 좀 빼줘.”

야문이 리피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리피는 신음하면서 야문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길게 하나로 땋았던 머리칼이 풀어졌다. 야문은 리피를 한 손으로 안아 들어 침대에 내려놨다.

“우선 바로 싸겠습니다.”

“응, 좋아. 입에다 할래?”

“원하신다면.”

리피가 냉큼 입을 벌렸다.

야문은 리피의 모습을 보며 말을 잃었다.

하얀 나신에 촉촉해진 분홍색 유두. 양 무릎을 살짝 벌린 자세로 앉아 붉은 입술을 열고 길고 뜨거운 몽둥이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새카만 눈은 음란하게 반짝였다.

이보다 야한 사람이 존재할까.

리피의 뒷머리를 감싸는 야문의 동공이 세로로 수축했다.

“넣겠습니다.”

“으응, 웁… 끕!”

야문은 리피의 작은 머리를 붙들고 커다랗게 선 말뚝을 조그만 입안에 집어넣었다. 리피의 입가가 찢어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벌어졌다. 양 볼이 다람쥐처럼 부풀었고, 금방 생리적인 눈물이 맺혀 흘렀다.

“그읍, 끕.”

리피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야문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쳤지만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야문은 리피의 머리를 붙잡고 흉기를 끝까지 박았다가 다시 빼내는 움직임을 반복했다.

“컥, 끕, 그읍. 큽!”

따뜻하고 좁은 입 안쪽을 지나 성기를 조여드는 목구멍 안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다시 뿌리까지 빼냈다. 움직일 때마다 질척질척한 소리가 났다.

흉기 수준의 성기를 가진 가신들은 리피에게 펠라치오를 시키기 힘들었다. 넣고 사정 안 봐주고 흔들고 싶어도 그럴만한 공간이 없었으며, 호흡이 부족해진 리피가 실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모어나 야문 같은 오랫동안 가신을 해왔던 이들은 없던 공간도 만들어내는 테크닉이 있었고, 리피의 호흡이 간단 간당할 때 숨 쉴 시간을 주기도 했다.

“끕, 커흑, 컥…!”

야문이 리피의 머리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흉기를 귀두 끝까지 빼냈다. 리피가 콜록, 콜록 기침하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작은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고, 리피의 얼굴은 타액과 쿠퍼액으로 반질거렸다. 잠시 숨 쉴 시간을 준 야문은 다시 가차 없이 좆을 끝까지 박았다.

“커읍!”

단번에 목구멍 안쪽에 들어간 좆에 리피가 눈을 크게 떴다.

야문은 리피의 체력 안배를 위해 이쯤 해서 오랄 섹스를 끝내기로 했다. 가신들은 ‘짧게’, 그리고 ‘많이’가 습관이 되어있었다.

꿀럭, 꿀럭. 좁은 목구멍 안에 곧바로 정액을 싸질렀다. 리피의 목울대가 정액을 맛있게 삼키며 움직였다. 야문의 정액은 무척 많아서 리피의 흡수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리피의 두 볼이 부풀었고 야문은 정액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흉기를 빼지 않고 틀어막았다.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한 리피의 눈에 실핏줄이 드러났다.

“음란하신 분….”

성기를 조여 오는 목구멍도 목구멍이었지만 저 얼굴에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싶었다.

야문은 실컷 싸지른 후 흉기를 천천히 빼냈다.

“끄으… 큽, 커헉…!”

워낙에 큰 성기라서 한 번 사정을 했어도 크기가 쇠말뚝만 했다. 리피가 콜록, 콜록 기침하며 고개를 떨궜다. 야문은 리피의 얼굴 길이보다 기다란 좆몽둥이를 발개진 눈가와 콧등, 뺨, 귓불을 문질렀다.

“콜록, 아, 목에, 콜록, 상처 난 것 같아.”

“나중에 봐 드리겠습니다.”

야문은 리피의 뒤통수를 붙잡고 입을 맞췄다.

쪽, 쪽이 아니라 쩌업, 쩌업 하는 소리가 났다. 리피의 작은 입술 안에 야문의 두터운 혀가 파고들었다. 작은 입안을 순식간에 가득 메운 혀는 리피의 혀를 제압하듯이 감싸고 빨아들였다.

“으읍… 므읍, 읍.”

야문의 이름을 부르려던 노력은 허무하게 실패했다. 야문은 언제 사정했냐는 듯 뜨겁게 서버린 커다란 흉기를 리피의 허벅지에다가 비비면서 깊게 키스했다.

두터운 혀가 영역 표시를 하듯 치아 표면을 훑었다. 입천장을 두드렸다가 다시 혀를 감싸 올렸다. 점막을 휘감기도 하고, 입술 안쪽의 여린 부분을 혀로 빨아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많이 싸질렀는데도 정액은 이미 흡수되어 없었고, 야문은 그것이 아쉬울 때가 있었다.

쯔읍, 쩝, 쩌업. 키스하며 나오는 소리라고 믿기 어려운 소리가 났다. 자신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몸이 뒤로 밀리지 않게 머리를 붙잡은 채 강압적으로 입 맞추는 야문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강간범으로 보였다. 그러나 상대는 대현자였고, 모두 대현자의 방임 하에 저지르는 짓이었다.

“읍, 브으… 읍.”

리피가 할 말이 있는 듯 고개를 돌리려 했다. 야문은 마지막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고 놔주었다.

“흣, 나, 쌀 것 같, 아.”

“방금 전 키스로?”

“으응, 네가 너무, 잘해서. 하아. 하.”

리피가 허리를 뒤틀었다. 야문은 리피의 성기를 손으로 붙잡았다. 사정하지 못하게 작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틀어막고, 입술을 잘근 물었다.

“흐읏, 야, 야문. 손 놔줘. 아흣.”

“당신은 너무 천박해서.”

“흣, 나, 나올, 아, 간지러….”

“매음굴에 던져놓으면 평생 구멍만 써왔던 남창도 당신을 강간하고 싶어 안달이 날 겁니다.”

“흐으, 싸고 싶어어.”

야문이 잘근 물었던 입술을 놔주고 턱에 키스했다. 야문의 입술은 한 손으로 으스러뜨릴 수 있는 여린 목에 내려앉았다가 땀에 젖은 쇄골을 깨물었다. 그사이 부은 듯한 가슴을 빨아들이고, 갈비뼈와 그 밑의 납작한 배, 귀엽고 사랑스러운 배꼽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아랫배를 지나 터럭 하나 나지 않은 매끈한 뿌리에 키스했다.

“흐읏, 야문, 손, 놔, 줘. 하으으.”

“사랑스러운 리피 님.”

“아흐, 흐으윽!”

야문은 손가락으로 막고 있던 성기를 입으로 덥석 물었다. 자유로워진 리피의 것이 야문의 입안에 분출되었다. 야문에 비해서는 아주 귀여운 양이었다. 야문은 리피의 성기를 혀로 빨아올리고 쪽, 쪽 핥아 올렸다.

“하아, 내 걸 먹어서 머하게….”

사정은 리피에게 있어서는 가벼운 절정이었다. 야문은 리피의 위에 올라타며 눈을 맞췄다.

“당신의 것은 모두 먹고 싶습니다. 정액이든 살점이든, 뼛조각도 다 씹어 먹고 싶죠.”

“참아 줘….”

리피가 미소 지으며 말하자 야문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야문은 리피의 무릎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고 활짝 벌렸다.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조그마한 입구가 얼마나 탄력이 좋은지 알고 있는 그는 곧바로 자신의 좆기둥을 갖다 댔다.

“흐으….”

리피가 기대감으로 숨을 들이켰다.

작은 구멍에 비해 너무 크고, 두껍고, 핏줄이 불거진 좆기둥은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야문은 세로로 좁아든 동공을 노랗게 빛내며 귀두 부분을 집어넣었다.

“흐읏…!”

하얀 입구 안쪽으로 흉측한 흉기의 귀두가 들어갔다.

“크윽.”

리피의 내벽이 쫄깃하게 흉기를 빨아들이며 환영해왔다. 야문은 가장 두꺼운 부분까지 멈추지 않고 억지로 내벽을 벌리며 밀어 넣었다. 좁고 따뜻한 내벽은 기둥의 표피에 달라붙어왔다.

“아흑, 아, 너무 커, 잠깐, 그만.”

“잠깐은 없습니다.”

“아, 안 돼, 아아윽…!”

“큭….”

두꺼운 부분을 삼킨 내벽이 비명을 지르듯이 꿈틀거렸다. 압박감이 야문의 인내심을 시험해왔다.

“진짜, 안 돼. 흑, 너, 무 커.”

리피가 비스듬히 누우며 양손으로 결합부를 가렸다. 수천 번을 삼켰는데도, 수천 번을 삼킬 때마다 이렇게 안 된다고 겁에 질려서 빌고는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직 반밖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팽팽하게 벌어진 입구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리피의 아랫배는 벌써 조금 부풀어 있었다.

“반만, 아흑, 넣자. 응? 야문….”

“아니요. 뿌리까지 쑤셔 박을 겁니다.”

“아, 안 돼…!”

“힘 빼십시오.”

“안, 아흐흑!”

야문이 필사적으로 결합부를 가린 리피의 양 손목을 교차시켜 붙잡고 하체를 밀어 넣었다. 저항하는 내벽은 무시하고, 힘으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갔다.

“아파, 아으윽!”

“큭… 좁아.”

“그, 만, 아흑, 그만 들어, 와.”

리피의 허리가 휘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양팔을 일직선으로 뻗게 하고,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은 야문은 다른 손으로 장골을 단단히 붙잡았다.

퍼억!

“아흐윽!”

남아 있던 뿌리까지 전부 리피의 안으로 들어갔다. 흡혈귀의 길고 두꺼운 성기가 내장의 안쪽 구부러진 곳을 지나 더욱 깊은 곳까지 쑤셔 박혔다.

거대한 흉기를 끝까지 삼킨 리피는 눈을 크게 뜬 채 헐떡였다.

“아, 안 돼. 흐으, 아파.”

“크윽… 수천 번을 해도 좁군요.”

“아, 하윽. 너, 무 깊어. 아.”

“배가 부풀었습니다.”

야문이 리피의 아랫배의 도드라진 부분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양손이 제게 제압된 채 몸 안쪽 깊은 곳까지 박혀 한껏 벌려진 양다리를 부르르 떨고 있는 러스티 리피는 세상 그 무엇보다 야했다.

***

리피는 내벽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진 충격에 잠시 숨을 골랐다. 조금의 틈도 파고든 야문의 좆은 너무 커서 조일 수도 없었다. 리피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베개에 파묻으며 혀로 붉은 입술을 축였다.

“흐으, 얼른 싸줘. 빨리이.”

“방금 들어갔습니다만.”

“먼, 저 싸줘. 으응?”

리피가 안달이 난 듯 허리를 들썩였다.

“싸고 시작해줘. 네 거 빨리 안에 담고 싶어.”

방금 전까지 안 된다고, 그만 들어오라고 해놓고는 허리를 흔들며 안에다 싸달라고 조르는 천박한 모습이 언제나 그렇듯 야문을 흥분시켰다.

야문은 리피의 양팔을 들어 올린 채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흐으…!”

리피의 허리가 휘어지면서 더욱 깊게 삽입됐다.

“그렇게, 바라신다면.”

야문이 추삽질을 시작했다. 커다란 좆으로 내장을 밀어내고 들어왔다가 기둥까지 빠져나갔다. 다시 들어올 때는 먼젓번보다 더 깊은 곳을 쑤셔 박았다.

퍼억!

“아흐, 읏, 야문, 아아.”

퍼억, 퍼억!

“좋아. 흐읏, 아, 으응!”

양손이 구속당한 리피는 허리를 뒤틀고 고개를 흔들며 신음을 내질렀다. 야문은 장골을 붙잡고 있던 손을 잘록한 옆구리로 옮겼다. 커다란 손이 옆구리를 움켜쥐자 배꼽까지 가려졌다. 안에 처박을 때마다 아랫배가 튀어나왔고, 빼내면 다시 납작하게 돌아갔다.

“야무운….”

“큿, 그만, 조여…!”

빠르게 왕복하던 야문이 조여 오는 내벽에 잇새로 신음했다. 그의 주인은 양팔이 구속된 채 거칠게 당하면서도 자신의 안에 얼른 사정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흑, 아, 싸줘. 안에….”

흥분으로 달아오른 눈이 야문을 담았다. 붉어진 눈가와 애원하는 눈썹, 젖은 뺨. 색정적으로 입술을 훔치는 혀.

“큿…!”

야문은 퍼억! 소리가 나도록 크게 흉기를 처박았다. 리피가 아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야문은 한 손으로는 리피의 양 손목을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옆구리를 붙잡은 채 좁은 내벽에 뜨거운 정액을 분출했다. 리피는 눈매를 휘며 웃었다.

“아, 흐읏… 좋아, 가득 싸줘….”

“소원대로, 해드리죠.”

이제 시작이었다.

***

리피의 침실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퍽, 퍼억, 퍽! 소리만 들으면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거센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 폭력적인 움직임이기도 했다.

열기와 땀에 젖은 살갗이 맞부딪치고 거센 흔들림 속에서 리피는 윽, 허윽, 버거운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악, 아윽, 아, 아파.”

퍽, 퍽, 퍼억!

“하으, 야, 문, 제발, 하으, 흐, 아흑!”

야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벌써 세 차례 사정이 이뤄졌다. 처음에는 입으로, 두 번째는 양 손목을 붙잡은 채, 세 번째는 돌려 눕혀 매끈한 등에 키스하면서.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작은 몸을 앉히고 상체를 감싸 안은 뒤 사정없이 흔드는 중이었다.

“흐, 천, 천히. 힘들, 어, 아읏, 흑.”

“당신의 내벽은, 힘든 것 같지 않군요.”

퍽퍽퍽, 야문은 쉼 없이 하체를 쳐올렸다. 그의 말대로 리피의 내벽은 야문의 흉기를 맛있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내벽은 한 번 강하게 박을 때마다 잘라먹을 듯이 수축했고, 빠져나갈 때마다 아쉬운 듯이 물고 늘어졌다.

“하으, 그만, 힘들, 흐윽, 아파, 힉.”

“큭.”

리피가 야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조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야문이 안에 쏟아냈다. 도합 네 번째 사정이었다.

“흐으으….”

리피가 몸을 부르르 떨며 커널을 흡수했다. 야문은 리피의 구멍에서 정액이 흘러넘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때가 있었다. 가끔은 위도 아래도 정액 범벅이 되어 숨만 몰아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리피.”

“흐….”

“리피 님, 몸에 힘주십시오.”

“힘드러…. 그만… 하윽!”

야문은 리피의 고개가 힘없이 늘어지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한 번 더 세게 쳐올렸다. 리피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으읏, 안 돼, 하아.”

쯧, 혀를 한 번 찬 야문은 리피를 안은 채 일어났다. 가느다란 두 다리는 허리를 감게 하고, 양팔로 목을 잘 안고 있으라 말했다. 어떤 행위가 있을지 너무 잘 알고 있는 리피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 말에 따랐다.

퍼억!

“아악!”

야문은 리피를 안은 채 반쯤 빠진 것을 다시 삽입했다. 리피가 느끼는 지점을 바로 직격했더니 작은 몸이 자지러졌다.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교성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퍼억, 퍼억, 퍽!

”아, 아파. 하윽! 깊, 어. 아으윽!”

들어 올린 채 박아대는 흉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로 안을 깊게 찔렀고, 리피는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결합부가 너무 뜨거웠다. 계속해서 가격 당한 내벽이 경련해댔다. 뇌까지 쾌감에 절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쾌락이 쉬지 않고 계속되니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리피는 자신의 성기가 무언가를 배출하고 있는 걸 느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는데도 지나친 쾌락으로 하얘진 머릿속으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허윽, 아흑, 읏, 흐으으….”

쾌감이 두려울 정도였다. 야문의 목을 껴안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동공이 뒤집혀 지는 리피를 야문이 추어올렸다.

“한계는, 아니겠죠, 리피 님?”

“흐, 흐으….”

“아직, 밤은 깁니다.”

퍽! 야문이 리피를 끌어안은 채 강하게 박았다. 리피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흘러내리는 리피의 양다리까지 한꺼번에 안아 든 야문은 침실의 벽에 리피의 등을 붙였다.

“아, 안, 하으윽! 악…!”

퍼억, 퍼억!

야문은 단단한 벽과 자신 사이에 리피를 끼우고 강하게 처박았다. 리피가 실금하듯이 배출한 투명한 액체 때문에 복부가 질척였다. 야문은 깊은 곳에 있는 리피의 성감대를 쑤셔 박았다가 짓누르며 문질렀다가 강한 힘으로 다시 처박았다.

“하윽, 하, 하아악…!”

극한까지 몰아붙여진 리피는 교성도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흔들렸다.

“안 되겠군요.”

야문은 송곳니를 꺼내며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땀에 젖은 여린 목은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달콤한 과실을 바라보듯이 탐욕스럽게 목덜미를 바라보던 야문이 입을 벌렸다. 리피는 그런 야문을 말릴 만한 정신이 없었다.

콰직.

“아아악…!”

야문은 하얀 목덜미에 송곳니를 쑤셔 넣었다. 붉은 피가 제자리를 찾아가듯 야문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리피의 피를 야문이 꿀꺽, 꿀꺽 삼켰다.

리피의 몸이 덜덜 떨렸다.

흡혈귀가 송곳니로 물 때, 물린 상대는 극한의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성분이 물린 상처부터 발끝까지, 뇌수까지 퍼져나가기 때문이었다.

“하윽, 흐… 하으…!”

리피가 침을 질질 흘렸다. 밤하늘처럼 반짝였던 눈은 이미 오래전에 혼탁해졌다.

리피의 피를 빨아들이는 그 와중에도 야문의 하체는 끊임없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빠르기로 계속해서 박아댔다.

퍼억-!

“아아윽!”

“큭…!”

조여드는 리피의 안쪽에 야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퍼억! 그는 고간까지 넣을 것처럼 강하게 박으며, 내벽의 최대한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리피가 아, 아, 입을 뻐끔거렸다.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야문은 리피의 여린 살결을 한 번 빨아올린 뒤 짐승이 상처를 그루밍하듯이 핥아주었다. 흐리멍텅한 눈을 바라보며 흉기를 빼내자 기둥에 정액이 묻어있는 게 보였다.

“흡수가, 아직이군요.”

“하으… 주, 주글 것….”

퍼억!

“아으윽!”

야문이 사정을 봐주지 않고 다시 깊게 삽입했다.

“정액은, 전부, 먹어야지, 리피.”

“하으, 허으으….”

리피의 내벽이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야문은 그 좁고, 뜨거운 곳의 경련을 즐기며 웃었다. 야문은 정액이 모두 흡수되었는지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흉기를 넣었다가 뺐다를 반복했다. 리피는 그때마다 자지러졌다.

“그만, 제, 발… 흐윽….”

“무슨 소리를.”

피에 젖은 송곳니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그만, 허윽, 아, 안 돼…!”

리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야문은 가차 없었다.

가신들이 리피에게 너무 심하게 할 경우 보좌관이 제지한다. 그러나 이곳에 야문을 제지할 보좌관은 없었다.

야문은 리피를 침대에 내려놓고 무릎을 세우고 엎드리게 했다.

“엉덩이를 드십시오.”

“못, 해… 흐윽, 이제 그만….”

“오늘따라 거부가 심하군요.”

리피는 불과 이틀 전 20명의 7인교도에게 윤간당했다. 아무리 섹스를 즐긴다지만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야문은 직접 20명의 7인교도들을 처분했으면서도 리피의 체력을 배려해주지 않았다. 두려움에 질린 리피에게 베개만 하나 쥐여준 게 배려의 전부였다.

엉덩이가 높이 들렸다. 야문은 가느다란 허리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체중을 실어 내리꽂았다.

“아흐윽…!”

지나친 힘에 무릎이 꺾이고 리피는 납작 엎드린 상태가 되었다. 야문은 무릎으로 리피의 양 허벅지를 크게 벌리게 하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아 여전히 연결된 것을 퍽! 더욱 깊게 삽입했다.

“허윽, 아…!”

야문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흉포하고 무자비했다. 한 번씩 깊게 찍어 내릴 때마다 리피의 발이 발작하듯이 들어 올려졌다.

퍼억, 퍼억, 퍼억!

“으윽, 흑, 흐읏, 허윽! 윽.”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으면서.”

“아, 아냐, 허으, 흐, 못 버… 악…!”

리피의 엉덩이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검붉은 흉기가 작은 엉덩이 사이를 팽팽하게 벌리며 왕복하는 모습은 섹스가 아니라 고문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철썩, 야문은 충동적으로 작고 둥근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악!”

“큭…!”

리피의 내벽이 순간적으로 좆을 끊어먹을 듯 조여 왔다. 사정을 참느라 야문이 움직임을 멈춘 사이 리피가 다급히 말했다.

“흐윽, 하, 하지 마. 때리는 건 안 돼.”

“…때리는 거? 뭘 말씀하시는 건지.”

야문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고는 방금 때린 볼기를 다시 철썩, 때렸다.

“아흐으! 아, 아파…!”

리피의 엉덩이가 과실처럼 붉게 익었다. 야문이 손바닥을 대보니 따끈따끈했다.

“하으으, 하지 말라고, 했는데, 흐윽.”

리피가 고개를 야문을 향해 돌렸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달아오른 뺨, 땀에 젖은 머리칼과 흐리멍덩해진 까만 눈, 방금 전 표식을 남긴 목덜미까지. 지나치게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리피의 신체는 연약했고, 스팽킹은 피스톤질보다 훨씬 더 극도의 힘 조절이 필요해서 마인이나 요정들은 자제하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고 나면 야문도 때리는 행위는 포기하게 되었다. 도저히 자제할 자신이 없었기에.

“리피 님.”

“으, 흐으, 하아윽!”

야문이 상체를 리피 쪽으로 숙였다. 더욱 깊어진 삽입에 리피가 두 팔을 허우적댔다.

“흐윽… 너, 너무 깊, 어…!”

야문은 리피의 뒷목에 입 맞추며 허리를 움직였다. 처음엔 느릿했다가 점차 빠르고 강하게, 내장 끝까지 파고들었다가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왔다.

야문의 추삽질은 격렬했다. 퍼억, 퍼억! 고간까지 쑤셔 넣을 기세로 그 어떤 가신도 다다르기 힘든 아주 깊은 곳까지 강하게 박고, 리피의 내벽이 익숙해지기 전에 빼냈다가 다시 처박았다. 리피의 무릎이 꺾였다. 작은 몸은 허으윽, 숨을 들이켜며 반항의 몸짓을 보였다.

“이런, 안 됩니다.”

필사적으로 시트를 붙잡고 도망치려 하는 리피를 보고 야문은 한 손으로 옆구리를 잡아 다시 끌어내렸다.

“하으읏…!”

야문은 경련하듯이 떨리는 등을 짓누르며 간단히 제압했다. 퍼억! 벌을 주듯이 내장을 밀어내고 깊숙이 박자 리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문은 빠르게 허리를 움직이면서 둥근 어깨와 날개뼈에 입 맞췄다. 흥분해서 송곳니를 박아내기도 했다. 그러면 리피는 “아아악!” 자지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꼿꼿이 선 성기에서 실금하듯이 투명한 액체가 분출됐다.

“오늘, 많이 싸시는군요.”

“허으으… 흐으윽.”

“큭, 아예 침대를, 바꿔야겠습니다.”

“흐으, 허으, 윽, 하아악!”

퍽퍽퍽퍽, 야문의 허릿질은 방금 절정에 오른 리피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허으, 하으윽….!”

리피의 교성에 숨소리가 많이 섞여 있었다. 정말로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리피는 이미 계속해서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고, 그것을 야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

“으읍, 븝… 읍…!”

야문의 커다란 체격에 깔린 리피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야문에게 키스 당하고 있는 리피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르르 떨리는 발끝 말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읍, 읍…!”

“…….”

“끕, 읍!”

“…이런.”

야문은 작은 혀를 마음껏 먹어치우고, 입 안쪽을 유린하다가 리피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놔주었다. 물고 빨았던 입술과 입가는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었고, 리피는 흐릿한 눈으로 하아, 하아 헐떡였다.

“폐활량을 늘리셔야겠습니다.”

“흐으… 그마안….”

리키가 애절하게 애원했다. 야문은 쪽, 쪽 아랫입술을 몇 번 빨아들인 다음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켰다.

찌걱, 찌걱. 여전히 연결되어있는 허리 아래에서는 질척한 소리가 났다.

“아, 아, 그만, 흐으, 허윽, 윽.”

“이런, 이제 내뱉을 것도 없습니까?”

야문은 리피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야문의 한 손에 쥐어지는 종아리는 힘없이 벌어졌고 접합부에서는 축축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밤을 지나 새벽 내내 시달린 리피는 이제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몇 번이나 절정에 다다라야 했고, 절정에 다다른 와중에도 박아대는 걸 멈추지 않아서 정신이 꼬르륵 넘어가기도 했다. 차라리 그렇게 기절해서 깨지 않는다면 좋으련만, 느끼는 지점만 집중적으로 쑤셔대는 흉기에 자꾸 정신이 들었다.

“흐으, 하아으….”

‘아파…. 너무 심해….’

정신이 들고나면 계속 이렇게 흔들리는 상태였다. 야문의 위에서 탄탄한 가슴팍에 올려진 채 흔들리거나, 엎드려져 목덜미를 내어준 채 쑤셔 박히고 있거나, 허리가 거의 반으로 접힌 채 범해지고 있거나.

“허윽, 더는 못…해. 하으윽.”

리피가 또다시 삽입 당하며 애원했다. 보좌관은 평소보다 더욱 집요했고, 거칠했다. 몇 번을 사정해도 여전히 큰, 오히려 더 커진 듯한 흉기가 리피의 흐물거리는 내벽을 다시 가격해왔다. 아랫배가 엉망이 된 것 같았다.

“허어으…! 아흐….”

리피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주, 주글 거 같… 흐읏.”

“불멸의 대현자께서, 무슨 말입니까.”

퍼억, 퍽. 야문이 엉덩이를 붙잡은 채 내장 끝까지 쑤셔 박았다.

커다란 흉기에 팽팽하게 벌어진 비부가 아팠고, 끊임없이 마찰 당한 내벽이 쓰라렸다. 흡혈귀가 잔인하게 휘저어놓은 안쪽은 이미 진탕이었다. 무자비하게 헤집어지고 몰아붙여진 온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너무나도 극심한 쾌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만하라고 빌고 있지만 정말 그만두기를 원했다면 마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아무리, 몰아세워도.”

“허으, 아아, 아흐으… 아파…..”

“당신은, 그만두는 법이 없죠.”

“히익… 배가, 흐으… 그만, 제바아…!”

리피의 양다리를 활짝 벌린 야문은 기둥까지 삽입되어 있던 흉기를 끝까지 집어넣었다. 리피가 허으윽, 울면서 어깨를 떨었다. 리피의 팔은 머리 옆에 놓인 채였다. 더 이상 팔을 휘저을 힘조차 없는 것이다.

야문은 리피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붉어진 발목의 복사뼈부터 종아리까지 집요한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하으으….”

야문은 달라붙는 속살을 뚫고 깊은 곳까지 들어가 느끼는 지점을 짓눌렀다.

“아으, 흐, 아, 아아…!”

그렇게 짓누른 채 가만히 있는 거대하고 뜨거운 살덩어리에 리피가 몸을 비틀었다. 맺혀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 헐어버린 눈가가 쓰라렸지만 그 이상으로 흥분에 젖었다. 내벽의 간지러운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서, 이제는 침대의 시트에 닿는 부위마저도 극심한 쾌감이 느껴졌다. 이성은 사라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휘발되었다. 짓누르고 있는 단단한 흉기가 어서 빠르게 움직여줬으면 했다.

“당신의 안은, 지치질 않는군요.”

“아아, 아악… 흐윽…!”

“가끔씩 생각합니다.”

야문이 리피의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를 짓눌렀다. 리피가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으나 어린아이의 움직임보다 약했다. 털 없이 매끈한 사타구니는 리피가 내뱉은 정액과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당신은, 이대로, 매음굴에 던져놓아도.”

“아흐, 하지, 하아악, 하지 마…!”

“좆을 세우며 달려오는 모든 걸, 기쁘게 받아들이겠지.”

그 어떤 추악한 것들이 범하려 달려들어도, 리피는 지금처럼 흥분에 젖은 눈으로, 발정 난 것처럼 허리를 돌리며, 안에 싸달라고 빌 것이다.

그것은 러스티 리피의 천명이었다.

이렇게 기절했다 깨어나면서까지 심하게 당하면서도 마법을 써서 제지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몇 시간 전부터 야문은 리피를 강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피는 이 모든 가혹한 행위를 받아들였다.

커널 마법사의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인 것인지 혹은 러스티 리피라는 사람의 천부적인 천박함과 음란함인 것인지.

퍼억!

리피의 내벽을 짓누르며 멈춰 있던 야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피스톤질은 형벌에 가까웠다.

“허억, 아아…! 흐으윽…!”

리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난폭하게 흔들렸다.

야문은 리피의 쾌락에 찌든 아름다운 얼굴을 내려다봤다.

‘나의 아름다운 주군.’

그곳에 있던 모든 가신들은.

‘저는 싫었습니다. 당신이 제가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내어주는 것이.’

그의 말에 공감했을 것이다.

너무나… 영혼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

야문 또한 그랬으니까.

“…리피.”

오직 자신을 위해 천년의 저주를 버텨낸 전 보좌관의 죽음을 방치했다. 이보다 잔혹한 사람이 또 존재할까.

나의 아름다운 주군. 천박하고, 다정하고, 잔인하고, 아름다운 색욕의 대현자.

야문이 검은 날개를 펼쳤다. 커다란 날개는 침대 위의 두 사람을 감쌌다. 검은 공간 안에서 야문은 리피의 발목을 붙잡은 채 흉포하게 흉기를 내리꽂았다. 이렇게 가는 발목은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리피의 내벽을 끝도 없이 헤집고, 구멍이 닫히지도 않게 만들 수 있었다.

퍼억, 퍽!

“아흑, 흑, 으윽… 아으윽…!”

“큭….”

“야, 무, 아흐, 아파아. 흐윽!”

리피는 야문의 눈빛에 깃든 깊고 어두운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알았다 한들 리피는 결코 야문에게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문은 그가 원하고 있는 모든 음험한 행위를 저지르지 못할 거란 걸 알기 때문에.

딱 이 정도의 선까지 허락된 것이다.

검은 날개 속에서 어둠이 리피의 양팔과 다리를 붙잡아 구속했다. 야문은 결코 해소되지 않은 갈증 속에서 오랫동안 리피를 탐했다.

***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리피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앓는 소리를 내자 야문이 물을 가져다줬다. 야문은 옆에서 보드라운 물티슈로 퉁퉁 부은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주거나 뜨끈하게 데운 쿠션을 허리에 깔아주는 등 지극정성이었다.

“지금… 몇 시야?”

“한 시입니다. 더 쉬십시오.”

“으….”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었고 앓는 소리만 나왔다. 눈가도 쓰라리고 이대로 다시 누워서 잠들고만 싶었다.

그러나 해결해야 되는 일이 산더미였다. 노옴 아바리티의 처우, 까마귀에게 줄 보고서, 새로 가신이 된 이스리어까지….

“이스리어는… 일어났대?”

“예, 대기실에 있습니다.”

사경을 헤맸던 이스리어가 먼저 깨어나서 리피를 기다리는 지경이었다. 리피가 야문에게 팔을 뻗자 야문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붙잡아주었다.

“흣….”

부드러운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면서도 사지가 지끈거리고 아파서 신음을 흘렸다.

“이스리어를 불러와.”

그 지시에 야문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곳은 침실이었다. 가신 외에는 그 어떤 자도 출입 불가능한 저택의 가장 내밀한 곳. 이스리어 델로는 정말로 가신이 된 것이다.

야문은 리피의 등허리에 쿠션을 넣어주고는 뒤쪽을 향해 말했다.

“먼저 진찰을 받는 게 좋겠습니다. 폰, 포레스모레를 불러주시죠.”

“아, 예!”

침실에는 야문 외에도 가신 다섯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리피의 호위대였다.

호위대는 리피와의 잠자리 횟수가 줄어드는 것도 각오하고 리피의 신변을 보호하는 역을 맡은 가신들이었다. 대현자인 리피에게 호위가 필요한 이유는, 리피가 스스로의 몸에 두른 보호 결계가 가신들에게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리피가 자고 있을 때 강간하려다가 보호 결계로 크게 다친 가신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리피는 아예 가신들에게는 자신의 보호 결계가 통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신들은 워낙에 개성이 강하고, 리피에 대한 소유욕과 독점욕으로 가득 찬 발정 난 짐승들이라서 집무를 보고 있는데도 리피를 덮친다거나 약을 먹여 납치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일이 몇 번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저택 내에서 위험한 짐승들로부터 리피를 보호할 필요성을 느낀 전 전대 보좌관이 호위대를 만들었다.

사실… 지금의 호위대는 매우 무능력하고, 감시역도 제대로 못 하는 놈들이지만 야문은 리피와의 섹스를 포기한 그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존대를 써 주고 있었다.

“어이구, 리피 님. 몰골이 말이 아니시네.”

호위대 대장이 데리고 온 가신은 관자놀이에 뿔이 돋은 요정족이었다.

포레스모레는 치유의 능력이 있는 요정인, 릴리족이었다. 요정족으로서는 특이하게도 제페아의 신관이 되려고 했으나 결국엔 신앙심을 잃고 산속에서 약초나 캐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우연히 리피에게 발굴되어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가신이 되었다.

가까이 와서 리피의 모습을 본 포레스모레가 한숨을 쉬었다. 입술은 다 헐었고, 목은 성한 부분 없이 잘근잘근 물어 뜯겼으며, 드러난 손목에도 검푸른 멍이 들었다.

“보좌관님,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니요?”

“얼른 치유나 하고 꺼져.”

야문이 눈을 서늘하게 내리깔았다. 흡혈귀와 릴리족은 본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너네… 싸우지 마….”

비 맞은 아기 새처럼 쿠션에 기댄 채 숨만 내쉬던 리피가 연약한 목소리로 말렸다.

“안 싸워요. 싸움이 성립되긴 하겠어요?”

포레스모레는 한숨을 쉬며 리피의 옆에 앉았다. 릴리족만이 가진 치유의 빛이 리피에게 스며들었다.

“흐… 으응….”

온화하고 따스한 빛에 리피가 눈을 감았다.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는 작은 입술에 가신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이것도 드세요. 몸을 보하는 약이에요.”

포레스모레가 들고 온 호리병은 자신의 뿔을 빻은 가루에 각종 약초를 섞어 만든 탕약이었다. 릴리족의 뿔은 무한히 자라기 때문에 일정 길이 이상이 되면 잘라놓는다. 장성한 릴리족의 뿔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명약으로 분류되었다. 리피의 저택에는 그런 명약이 수십 병 있었다.

“쓰고 맛없어서 싫어….”

“너무 하시네. 당신 먹으라고 힘들게 만들어놨더니.”

“폰, 초콜릿 있습니까?”

“아!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호위대 대장이 헐레벌떡 나가서 초콜릿과 사탕 등을 가지고 왔다. 전부 그레이가 만든 것이었다.

“그럼 이제 약을….”

“제가 먹여드리죠.”

포레스모레가 만든 약병은 야문이 낚아채 갔다. 야문은 리피의 턱을 조심스레 붙잡고 약병의 주둥이를 입가에 대줬다. 한두 번 먹이는 게 아니라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호위대가 바로 초콜릿을 갖다 줬고 리피는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고마워, 포레스. 좀 나아졌어.”

“오늘 식사는 피를 보충할 음식으로 만들라고 할게요. 흡혈을 심하게 당하셨으니까.”

“응.”

“이렇게 작은 몸 어디가 물어뜯을 데가 있다고 아주 난도질을 해놓으셔서.”

리피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그러는 포레스모레도 밤에는 상당히 거칠고 난폭한 스타일이었으니까.

“일어나셨습니까.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더 주무시죠.”

“난 괜찮아.”

포레스모레가 나가고 이스리어가 들어왔다. 러스티 공작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의복을 입고 들어오는 이스리어의 무척 훌륭한 외양에 리피가 흡족히 웃었다.

옆에는 티토도 함께였는데, 순혈 인어인 티토는 그새 더욱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그래서 리피는 정말 죽음을 헤매다 온 이스리어가 아니라 티토에게 괜찮으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보내지 말아 주세요.”

“티토.”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영원히 혼자가 되는 게 아니야. 가끔 놀러 오렴. 요정왕의 성에서 동족들에게 많은 걸 배우고 성장한 후에 말이야.”

리피의 말투는 다정했으나 단호했다. 리피는 사실 티토를 가신으로 들이는 것도 생각해봤으나 순혈 인어는 보호 가치가 있으므로 불가였다. 성기도 지나치게 크고 말이다.

“이스리어, 넌 괜찮아? 다 나은 거야?”

“예, 저보다는 당신이. 정말 괜찮으십니까 …주군.”

“주군이 아니라 주인이라고 불러. 차차 배우겠지만….”

리피는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야문이 옆으로 물러가 자리를 만들어줬다. 자리에 앉는 이스리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떻게 사람 목을 이런 상태로 만들어놓는단 말인가. 아무리 가신이라지만 감히 대현자에게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거라면 나도 앞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묻고 싶은 게 있지? 어서 물어봐.”

“아.”

이스리어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리피의 다정한 눈빛에 양심이 찔렸다.

당신의 목에 피멍이 들도록 흔적을 남겨도 됩니까.

라고는 차마 묻지 못하고, 대신 이스리어는 다른 물음을 던졌다.

“제게… 라타르가 생겼습니다, 리피 님.”

그가 눈을 뜨고 가장 놀란 것이 그것이었다. 죽음 속에서 깨어나고 보니 분명 소진되었던 라타르가 느껴진 것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처음 보는 리피의 가신들을 붙잡고 어찌 된 일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대기실에서 리피가 일어나길 기다리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자기 것이 아닌 기분이 들어서 사용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기쁨에 젖지도 못했다. 이 라타르가 어디서 온 것인지.

“리피 님께서… 주신 겁니까?”

“아니, 티토에게 감사 인사를 해.”

“티토…?”

“저요?”

티토는 영문이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리피가 말을 이어갔다.

“네가 쓰러졌을 때 티토가 달려와서 죽지 말라고 울더라고.”

“…….”

“널 껴안고, 아직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면서 오열했어. 그리고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네 입술 안으로 떨어졌지.”

이스리어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커널은….

“인어의 눈물인지, 순혈 인어의 눈물인지, 혹은 슬픈 상황에서의 눈물인지 자세한 건 더 시험을 해봐야겠지만 아마도 순혈 인어의 눈물이 아닐까 싶어. 오에흐 클럽에서 티토를 처음 봤을 때 왠지 모르게 끌렸다고 했지.”

“아….”

이스리어는 입을 벌리고 리피를 쳐다봤다.

“네 마법사로서의 커널을 알아본 거겠지. 참으로 찾기 힘든 커널을 가졌구나, 이스리어.”

리피가 다정하게 웃음 지었다.

이스리어는 길게 탄식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커널을 찾았다.

마법사였던 기억조차 희미해질 정도로 오랜 시간을 검만 휘두르며 보내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찾아낸 것이다.

감격과 환희와 그동안의 설움과…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다정하게 웃고 있는 리피의 얼굴이 들어왔다.

“리피 님.”

이스리어는 자리에서 내려와 리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충성의 자세를 취했다.

“당신 덕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티토의 눈물 덕분이었다.

“앞으로 평생 마법사로서 당신을 보필하겠습니다.”

“응… 그래. 잘 부탁해, 이스리어.”

엄밀히 말하면 티토의 눈물이 있어야만 마법사로서 보필이 가능했다. 하지만 리피는 현재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이스리어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너그럽게 웃었다. 가신들은 원래부터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도 모두 리피의 은혜 덕분이라고 여기는 녀석들이었다.

***

티토가 눈물을 핑계로 저택에서 살면 안 되겠느냐고 다시 부탁했지만 리피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눈물이 필요할 때는 요정왕의 성과 사물이동진을 통해 주고받으면 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티토가 다시 울어버려서, 이스리어가 부랴부랴 조그만 병에 눈물을 받았다. 이스리어의 커널이 ‘순혈 인어의 눈물’인지 ‘순혈 인어가 방금 흘린 눈물’인지 아직은 모르기 때문에(리피의 커널은 ‘방금 배출된 정액’이었다) 우선은 여러 가지 실험을 해봐야 했다.

이스리어는 티토의 목숨을 구하고, 티토는 이스리어의 마법사로서의 생명을 구했다. 연 깊은 형제가 방을 나가고 리피가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으어어… 다시 죽어가는 소리를 내는 리피의 볼을 야문이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식사하고 주무시죠.”

“아직 자면 안 돼… 노옴은 감옥에 있어?”

“예,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흠….”

리피는 잠시 고민했다.

노옴 아바리티는 자신에게 내려질 처분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고민하던 리피는 허공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는 애용하는 수첩에서 빈 종이 한 장을 찢고 라타르로 글자를 써 내려갔다. 노옴이 공격할 당시 리피가 야문의 품 안에서 벗어났던 이유는 공격을 맞아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면 노옴 아바리티의 처분은 왕이 아니라 자신이 결정할 수 있었다. 목적에서는 조금 벗어났으나 결론적으로 노옴은 리피의 가신을 다치게 한 게 됐으므로 여전히 처분은 리피의 몫이었다.

<노옴 아바리티, 대현자의 조약을 어겼으므로 근신형을 내린다. 기간은…>

리피가 멈칫했다.

10 대신관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신이 길어서는 안 된다. 시간 감각이 엉망인 리피를 대신에 야문이 조언했다.

“백 년은 어떻습니까.”

“백 년? 너무 짧지 않아?”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시간이니까.”

“그런가.”

리피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기간을 ‘백 년’으로 적었다.

이 내용을 대현자들에게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각자 맡고 있던 왕명은 이제 서서히 마무리되고 있다고 했다. 지드 아자젤의 음모는 리피를 향하고 있었고, 다른 대현자들의 발길을 잡아두기 위해 온갖 위험한 일을 꾸미면서도 결코… 정말로 라인데이아가 위험에 처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그렇게 조절한 것이다.

“폰, 이걸 노옴에게 전해줘.”

“예.”

폰이 근신 명령이 적인 종이를 건네받고 방을 나갔다.

“이제 식사를….”

“아직. 까마귀를 불러와.”

“이곳으로 말입니까?”

“응.”

야문이 눈썹을 찌푸리며 호위대 가신들에게 눈짓했다. 가신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은 까마귀를 부르러 갔고, 한 명은 목까지 가리는 가운을 가지고 왔으며, 다른 한 명은 가림막을 중간에 설치했다.

“어차피 가림막을 설치했는데 왜 옷을 입어야 해…?”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가림막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까마귀가 당신 모습이 보고 싶어서 갑자기 미쳐 돌아서 가림막을 찢어발길지도 모르고요.”

아마 그러기 전에 야문에게 살해당하겠지만, 리피는 가신들의 말을 들어줬다.

아직 몸 이곳저곳이 쑤셔 힘들게 가운을 입은 리피에게 야문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 보고서입니다.”

“누가 썼어?”

“벤터스와 노원입니다.”

리피가 야문과 밤을 보내는 동안 가신이 작성한 보고서였다. 리피가 대충 써놓은 것을 가신들이 신중하게 교정한 보고서는 딱 한 장 분량이었다. 자신이 쓴 것처럼 한껏 노력한 글을 다 읽은 리피가 흐뭇하게 웃었다.

“잘 썼네. 나중에 칭찬해줘야겠어.”

물론 몸으로 하는 칭찬이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왕의 까마귀는 리피의 모습을 볼 수 없음에 무척 침울해했다. 보고서 한 장만 들고 터덜터덜 돌아가는 모습은 불쌍하기까지 했다.

보고서를 받은 왕이 어떤 반응을 할지 리피의 가신들은 다소 긴장한 상태였다.

[대현자에 대한 차자국 왕족의 핍박을 두고 보지 못한 7인교도와 전 보좌관이 이 일을 일으켰으며, 왕족이 변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요지의 보고서를 보고 어쩌면 왕이 분노를 내비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리피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왕은 ‘수고했으며 당분간은 쉬도록 하라’는 뜻을 전달했다.

리피의 경고가 통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대현자들에게 왕의 새로운 언령이 내려졌다.

왕명을 한 번 거절할 수 있는 ‘거부권’이 주어졌고, 다른 대현자와 대면할 수 있는 횟수가 늘어났으며 시간도 길어졌다.

그러나 웨이더 프라이드와 러스티 리피는 여전히 백 년에 한 번, 10분이었다.

그 또한 리피의 예상 범위였고, 리피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

체니르의 산이 울긋불긋한 색으로 물드는 계절.

평화로운 저택에서 리피는 발개진 얼굴로 빠르게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리피의 허리를 누군가 낚아챘다.

“넘어지십니다.”

“이스리어.”

리피가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왕의 까마귀가 왔다면서. 얼른 들어가자.”

“먼저 의복을 단정히 하십시오.”

알현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스리어가 가신과 한바탕 뒹굴다 온 리피에게 단추를 채워주고 머리칼을 정돈해줬다.

얼마 전 사수인 그레이에게서 졸업한 이스리어는 이제 어엿한 가신이 되어 역할을 수행했다. 아직 신입 티가 많이 나는 보더와는 달리 매사 침착하고 차분해서 양 보좌관인 다윈과 야문이 자리를 비운 지금은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오랜만이에요.”

왕의 까마귀는 저번에도 왕명을 가지고 왔던 그 까마귀였다. 아무래도 리피 전담 자리를 차지한 듯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아니,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응, 너도 몸이 더 좋아졌는걸. 단련이라도 하는 거야?”

“가, 감사합니다.”

리피가 앉은 채로 다리를 꼬며 눈웃음을 짓자 까마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 이스리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공작님은 바쁘십니다. 어서 전언을 주십시오.”

야문을 연상하게 하는 차가운 태도였다.

까마귀가 눈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왕의 말을 전했다.

「지드 아자젤이 노옴 아바리티에게 보여주었다던 <끊임없이 태어나는 화초>를 분석한 결과, 잉가 유적의 나브테아 덩굴 뿌리임이 판명되었어. 부디 그대가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조사해주길 바라네. 지드 아자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그대가 제일 적임자인 것 같군. 물론 거절해도 되지만 말이야.」

***

집무실에 홀로 들어온 리피는 까마귀가 건네준 자료를 노트북 화면에 띄웠다. 이제 리피도 이 정도의 전자기기 사용은 가능했다.

“으음…….”

왕이 지정한 시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보좌관들이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서 출발하면 될 것 같았다. 이번엔 저번처럼 촉박하지 않으니 여정을 함께할 가신으로 뽑히기 위해서 온갖 교태를 부리고 유혹해댈 가신들의 모습도 기대되었다.

‘저번에는 야문을 데리고 갔으니 이번엔 다윈과 함께해야겠지. 신입인 이스리어와… 다른 애들은 웬만하면 요정족으로 구성해서….’

그렇게 생각하던 리피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못 박혔다.

시선이 향한 곳은 지드의 유리병이 깨어진 바닥이었다.

“…….”

까만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지드 아자젤을 언급한 전언을 들은 후부터 그가 준 마지막 선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리병은 산산조각 났으며 그 잔해도 이미 예전에 없어졌지만, 리피는 고대 마법을 사용하는 대현자였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사용하면 온전한 상태의 유리병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선물을 주려는 겁니다.’

그 선물은 정말로 무한의 라타르였을까.

[성공 개체 1구]

인어의 시신이 담겨 있던 실험실 속 그것은 무엇을 성공했다는 뜻이었을까.

리피가 허공에 손을 들어 올렸다.

라타르가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되돌아가면서, 지드 아자젤이 그의 단 하나뿐인 주군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 또한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 갔다.

“…….”

그러나 리피는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손을 내렸다. 거대한 마법의 흐름은 리피가 라타르를 거두자마자 곧바로 소멸되었고, 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다.

왕의 말대로 지드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리피였다. 그러나 그건 천년의 저주가 내려지기 이전,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지드, 네 소원은…….’

리피는 한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네 소원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유리병의 정체는 밝히지 않기로 했다.

진실을 아는 단 한 명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지드 아자젤이 천 년 동안 이어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원했던 단 하나의 소원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리피는 그렇게 결론 내리며 집무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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