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을 외곽의 신전은 텅 빈 곳이었다. 마을 주민의 말로는 며칠 전 모든 신관과 성기사들이 일제히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현재 수도의 대신관에서 사람을 보내 조사 중이므로 리피 일행은 그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밤에 잠입했다.
신전은 스산한 분위기였고 다소 너저분했다. 여기저기 발자국이 나 있었고, 신전의 촛대나 은쟁반 등이 나뒹굴었다.
“지저분하네요. 관리를 안 했나 봐요.”
“아니, 나름 열심히 관리한 것 같아.”
리피가 마법으로 어두운 내부를 밝혔다. 부서진 협탁과 깨져버린 성수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관리요? 마물이 사는 동굴에라도 온 것 같은데요. 다 깨지고 부서지고 난리잖아요.”
“수도에서 보낸 조사대가 이렇게 만든 거겠지. 신전 안의 기기들을 거칠게 다뤘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야문은 리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레이에게 설명했다.
“천장 구석에 거미줄도 없고, 조각화에 먼지도 끼지 않는 걸 보면 정성 들여 관리한 모양이군.”
그제야 그레이의 눈에도 보였다. 신전 내부 벽면에 신의 모습을 조각해놓는 조각화가 색이 바래지 않고 깨끗했다. 벽과 조각의 틈 사이에 내려앉은 먼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했다.
“나름 신앙심은 깊나 봅니다. 어차피 사이비 종교인 것을.”
“응, 그렇지.”
야문의 뛰어난 관찰력을 칭찬하듯 리피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인간 가신들은 뒤에서 이를 갈았다.
흡혈귀가 아니면 저 벽의 틈이 어떻게 눈에 들어온단 말인가. 신체적 유리함으로 칭찬을 받은 보좌관에 시기심이 들었다.
일행은 신전 내부를 둘러봤지만 발견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페아의 신전으로 위장하고 있었을 테니 당연했다.
“지하로 가자. 통로의 건너편에 있는 곳이 진짜 7인교의 신전일 거야.”
“복도 아래가 텅 비어 있군요.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응.”
야문이 리피의 허리를 끌어안고 한 팔로 안아 들었다. 그레이와 보더도 안전하게 벽에 붙은 걸 확인한 후 기타크는 창을 꺼냈다.
쾅, 복도를 내리찍고, 다시 한번 더 갈라진 부분을 내리찍자 복도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2m 남짓한 공간 아래에 투명한 유리 바닥이 보였다.
야문이 리피를 안은 채 뛰어내렸다. 다른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정 같은 푸른 벽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온전한 상태였고, 매끄럽게 빛이 났다. 보더가 스태프를 움켜쥐며 위를 올려보았다. 뛰어내린 신전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수정으로 이루어진 천장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유스치파에 있는 건가요?”
“응, 유스치파의 밀리밀리 페어리 마을에 있는 수정 동굴이야. 이곳을 신전으로 삼고 있었다는 걸 알면 요정왕이 대단히 화를 내겠는데.”
“요정 중에도 7인교가 있네요. 종교에 관심 없는 종족을 어떻게 포교했을까요.”
“왜? 대단해?”
그레이는 감탄하듯이 말했고, 그 때문에 충실한 제페아교 신도인 리피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그레이의 뒤통수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뇨, 그 뜻이 아니라 제페아교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요정이나 흡혈귀에게도 포교하고 싶고, 얼마든지 포교할 능력이 있음에도 참고 있잖아요. 이런 사이비 종교는 눈앞의 이득에만 급급해 싫다는 사람도 붙잡고 전도하는 반면 제자리를 지키며 필요한 자들에게 설교를 이어가는 제페아교는 정말 대단한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어진 그레이의 말이 끝나자 리피는 재롱부리는 강아지를 보는 것처럼 눈을 접으며 웃었다.
“네 말이 맞아. 잘 파악하고 있구나.”
그레이가 점수 1점을 획득했다. 탁월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그레이를 보고 가신들의 속이 끓었다.
일행은 수색을 계속했다. 예상대로 7인교도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 지하의 거대한 공간 위에 그려진 소환진과 제물들을 발견했다. 한덴국 은신처에서와 똑같았다.
“으어….”
“…으….”
제물로 쓸 생각이었을 사람들이 감옥에서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리피 일행을 발견하고는 입을 뻐끔거렸다.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체력이 없어서 손발만 움찔거리는 듯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보더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태프를 쥔 손도 덜덜 떨고 있었고, 눈가가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울망울망 한 모습에 리피가 어깨를 토닥여줬다.
“울지 마렴. 정말 눈물이 많구나.”
심지어 발돋움해서 손가락으로 보더의 눈가를 문질러주기도 했다.
“너무 안타까워요. 도망치려면 이 사람들은 풀어주지 왜 그냥 놔뒀을까요. 일자리가 있다고 유혹하고서는 먹을 것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보더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가신들의 얼굴이 썩어갔다.
리피는 정의로운 사람을 좋아했다. 기본적으로 몸이 좋고, 잘생기고, 절륜하다는 전제하에 불의를 참지 않는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 리피의 취향이었다. 가신들은 정의로운 성격이었고, 이런 동정심의 표출 따위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었다. 연기에는 도가 튼 그들이었다. 그러나 보더처럼 울먹이는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다른 가신들은 불가능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인 것이다.
“그릇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 최소한의 양심도 없나 봐요.”
훌쩍이는 와중에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비난 한 줄도 덧붙이며 리피의 목에 얼굴을 부비는 가증스러운 신입에 대한 가신들의 반감이 올라갔다.
보더를 가만히 토닥이던 리피가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정말 잔인한 것들이지. 이 불쌍한 사람들 여기 놔두면 죽을 테니 우리가 위층 수색하는 동안 보더 네가 치유해줘.”
“네? 바로 이동시키지 않고요?”
“메일에서 일식의 날 시행이랬잖아. 사흘 남았으니까 분명 오늘 밤 누군가가 사람들이 죽지 않을 만큼 음식을 주고, 소환진을 점검하러 올 텐데, 만약 요정일 경우 동굴에 사람들 기척이 안 느껴지면 들어오지 않겠지.”
“아….”
“한 시간 후에 데리러 올게.”
“…네….”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하는 보더를 보며 그레이가 비웃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갔네.’
리피의 뒤에 서서 표정으로 비웃는데 갑자기 리피가 뒤돌아 얘기했다.
“그레이, 네가 옆에서 좀 도와줘. 혼자 두면 위험할 수도 있어.”
“…예….”
제 꾀에 제가 당한 그레이와 보더를 지하에 버려두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리피가 앞장서고 중간에는 야문이, 뒤는 기타크가 지켰다. 요정국의 휘황찬란한 동굴에서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당장 마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바닥이 현대식으로 매끄럽게 닦여있는 걸 보고 기타크가 점수를 얻을 생각으로 말했다.
“바닥을 닦아놓았군요. 자연보호를-.”
“아, 천 년 전에도 그랬어. 나랑 친구들이 다니기 편하려고 매끄럽게 닦아놓고 다녔거든.”
“그렇군요. 탁월한 생각입니다.”
하마터면 리피와 대현자들을 자연 파괴를 일삼는 나쁜 악당으로 몰 뻔한 기타크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리피는 미로처럼 복잡한 동굴 내부를 주저 없이 앞서 걸었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을 내 집처럼 돌아다녔던 경험으로…. 천 년이나 오지 않았으나 새록새록 기억났다.
코너를 돌고 돌아 걷다 보니 수정 동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최신식 복도가 나왔다. 복도에는 누군가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안경잡이에 주근깨가 난, 예민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인색의 대현자이시군요.”
노옴 아바리티의 얼굴을 알아본 야문이 말했다.
“응, 인색하게 생겼지.”
리피는 실없는 농담을 하며 복도에 들어섰다. 카드 인식을 해야 열리는 곳이 두 군데 나왔다. 중요한 곳이라고 나름 마법 결계도 쳐놓았지만 리피는 후, 먼지를 불 듯이 없애버렸다.
“이곳도 대현자님들과 함께 만드셨습니까?”
“그럴 리가.”
일행은 그중에서 빨간 불이 들어와 있는 문 앞에 섰다.
“열겠습니다.”
“응.”
야문이 검은 날개를 펼쳐 리피를 감싼 채 한발 물러났다. 콰앙! 기타크가 창으로 문 한가운데를 부쉈다. 파편이 야문의 날개에 막혀 튕겨 나갔다.
기타크는 나머지 부분을 발로 차서 리피가 들어오기 편하도록 만들었다.
충직한 가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들어선 리피의 눈에 인어족이 보였다.
정확히는 시험관 안에 보관되어 있는 인어족의 시신 10구였다.
얼마나 많은 실험을 당했는지 피부가 벗겨진 것도 있었고, 내부 장기가 텅 비어 있는 것도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역겨워 당장 뛰쳐나갔을 끔찍한 모습이었다. 리피는 그중에서 어느 인어의 앞에 섰다. 리피의 시선을 따라간 기타크는 눈을 크게 떴다.
뱃가죽이 푹 꺼졌고, 갈비뼈가 살가죽 위로 그대로 드러났으며, 온몸에 자글자글한 주름은 마치 노인처럼 보였다.
“늙은 인어…? 인어족은 불로불사의 종족 아닙니까?”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하는 불로의 요정 맞아.”
“그럼, 대체 무슨 짓을….”
기타크가 노인이 되어 죽어있는 인어를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어떤 실험을 했길래 늙지 않는 요정이 이렇게 허무하고 무기력한 얼굴로 죽어있는 것인지.
기타크는 진심으로 7인교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는 인어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묵념했다. 그 모습을 본 리피가 기특해했다는 걸 기타크가 몰라서 다행이었다. 알았다면 묵념 중에 미소를 지었을 테니.
묵념을 끝낸 기타크는 리피의 지시를 받아 휴대폰으로 하나하나 사진을 찍었다.
“이 인어들은 모두 어디에서 납치해왔을까요.”
“유스치파에 사는 인어들이었겠지. 조달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곳에 실험실을 마련한 걸 거야.”
리피는 티토를 떠올렸다.
티토도 이렇게 될 예정이었을까. 순혈 인어이기에 더욱 중요한 실험체로 다뤄졌을 것이다. 이스리어는 정말 큰 용기를 내줬다.
“교배시키려는 목적은 아닌 것 같군요.”
다른 시험관 속의 인어들을 관찰하던 야문이 냉정하게 진단했다.
“회복력이 좋은 인어를 굳이 장기를 적출하거나 목을 베어 죽게 만들었으니 교배 목적은 아닐 겁니다.”
“7인교는 오에흐 클럽과 이어져 있잖아. 인어를 교배시켜 팔아치울 생각이 아니었다면 대체 인어를 데리고 무슨 실험을 한 거지?”
“늙지 않는 비법이겠죠.”
“요즘 같은 때에?”
아주 오랜 과거에는 불로불사의 마인과 요정을 데리고 반인륜적인 실험이 자행되고는 했으나 그것은 정말 오랜 옛날, 고대 시대였다. 지금은 굳이 인어를 데리고 생체 실험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과학이 발전했다. 불로의 존재에게 가끔씩 혈액이나 조직 세포 따위를 받는 것으로 모든 실험이 가능한 시기였다.
“불로의 이유도 모두 밝혀졌어. 아로수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노화하지 않는다면서. 인어가 늙지 않는 이유는 아로수에서만 살 수 있는 깨끗한 종족이기 때문이고. 더 이상 미지의 영역도 아닌데 더 파헤칠 이유가 뭐야?”
“아로수의 축복을 받지 않은 자들은 그 결론을 믿지 않습니다. 그 결론을 믿어버리면 그들은 늙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까.”
“늙는 게 뭐 그렇게 괴로운 일이라고….”
영원히 늙지 않는 리피의 말에 지금도 늙어가고 있는 기타크는 씁쓸히 웃었다. 가신 서약을 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과 같은 속도로 노화하진 않지만 흡혈귀 마인인 야문보다는 수 배 빠른 속도로 노화해 언젠가는 리피와 영원히 헤어지게 될 것이다. 늙지 않는 방법만 있다면 생체 실험에 지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것들은 이상하긴 합니다.”
야문은 생체 실험 피해자들의 시신을 서슴없이 이것들이라고 칭하며 리피의 곁에 다가갔다. 야문은 여전히 검은 날개를 펼친 채라 자그마한 리피의 옆에 있으니 거대한 마수 같았다.
“이 정도의 잔인함은 불로의 비밀을 알아내려 했다기보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시험한 것 같은 모습 같군요.”
리피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이곳에 있는 시신은 10구지만, 더 많은 인어들이 이곳에서 비명을 지르다 죽어갔을지 모른다. 리피가 생체 실험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드는 이런 잔혹한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대체 뭘 원했던 건지 리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추측할 수 있었다.
“결국 원하는 것은 알아낸 모양이야.”
늙어 죽은 인어의 옆에 있는 실험관이었다. 그곳에는 겉보기에는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멀쩡한 모습의 인어 시신이 있었고, 그 실험관에 메모가 적혀 있었다.
[성공 개체 1구]
그 아래에 쓰여 있는 날짜는 리피가 왕의 까마귀로부터 왕명을 전달받기 바로 전날이었다.
***
인어의 시신이 있던 곳에서 나와 맞은편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곳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정돈이 되어있는 실험실이었다. 리피가 마법으로 불을 밝히자 기타크가 먼저 들어가서 안전한지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게 확인된 후 리피도 안에 들어갔다.
불 꺼진 화면들과 비어 있는 시험관들이 수십 개 있었다. 리피는 가만히 살피다가 시험관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곳에 있던 것이 아주 결정적인 증거가 되리라는 직감이 들었던 리피는 들고 있던 시험관에 시간을 돌리는 고대 마법을 사용해서 사이비 신관과 성기사들이 떠나기 전으로 되돌렸다. 겉보기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리피 님, 혹시 무슨 마법을 사용했습니까?”
야문의 물음에 다른 쪽을 살피던 기타크가 눈을 크게 떴다. 기타크는 느끼지 못했으나 야문은 압도적인 라타르의 흐름을 느낀 것이다.
“잘 알아봤네. 며칠 전으로 시간을 되돌렸어.”
“고대 마법을 사용하셨군요. 아무 변화는 없나 봅니다.”
“보기에는 그런데… 뭔가 있는 것 같아.”
“비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까?”
“응, 무게가 느껴져.”
리피가 든 병은 제법 무게감이 있었다. 기타크와 야문이 나머지 병들을 확인했는데 모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빈 병들이었다.
“이 병들도 마법으로 되돌려보시죠. 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병들은 원래도 안에 아무것도 없었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것만 탐지 마법에 걸렸거든.”
“라타르 탐지 마법? 그걸 계속 사용하고 계셨어요?”
기타크가 반색했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생각보다 리피 님이 라타르 쓸 일이 없어서 걱정 근심이 많았는데, 계속 사용하고 계셨다니 다행입니다. 게다가 고대 마법까지 사용하시고, 훌륭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물 쓰듯 라타르를 낭비해주세요.”
다른 대현자들의 가신들은 대현자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걱정과 근심에 가득 찼지만 리피의 가신들은 리피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걱정과 근심에 가득 찼다. 야문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병들에도 고대 마법을 사용하길 권한 것도 그 증거였다.
“대체 뭘까요? 라타르의 정수일까요?”
“글쎄…. 이건 가져가서 알아보자.”
“예.”
기타크는 당연하게 공손히 건네받을 준비를 했는데 리피는 그것을 자기 품으로 쏙 집어넣었다. 기타크는 신뢰를 받지 못하는 건가 싶어서 서운했다가 보좌관도 같은 처지라는 생각에 금방 나아졌다.
도망치면서 증거가 될 만한 걸 싹 다 가져갔는지 시험관 외에는 발견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실험실을 나가려는 그때 야문이 발을 멈췄다.
“리피 님, 잠시만. 방금 뭔가 반짝였습니다.”
야문은 구석으로 성큼성큼 향하고는 뭔가를 주워들었다. 리피에게 돌아와 건네주는 그것은 손톱보다 작은 크기였다.
“도망가면서 흘린 걸 몰랐나 보네.”
실험자들을 포함해 리피와 기타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실험실은 전등이 꺼져있어 어두웠고, 리피가 마법으로 밝힌 불빛만이 빛이 났기 때문에 구석에서 떨어져 있는 쌀알 크기의 물체는 오로지 어둠의 종족인 야문만 볼 수 있었다.
“마도스톤으로 보이는군요.”
“응, 뮤다 화산의 자연스톤이야. 아직 사용하기 전의 것이고.”
“저번 흑마법사도 뮤다 화산의 자연스톤을 사용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좁쌀만 한 스톤을 바라보는 리피의 눈빛이 다소 혼탁했다.
뮤다 화산의 모든 자연스톤은 노옴 아바리티의 소유였다. 노옴은 스톤을 아주 오랜 시간 모아왔기 때문에 그가 찾지 못한 뮤다 화산의 자연스톤을 7인교도가 우연히 두 개나 갖고 있었다고 가정하기는 어려웠다. 이 스톤들을 가신들의 목숨만큼이나 아끼는 노옴은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가 훔쳐갈까 봐 창고에 겹겹이 결계를 만들어 보호했고, 그 결계는 차자국의 국경을 감싼 결계만큼이나 강해서 사실상 스톤을 훔칠 사람은 두 부류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 다른 대현자거나.
둘, 노옴 아바리티 본인이거나.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은 가운데 기타크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설마 7인교와 결탁한 대현자가 노옴 공작인 걸까요?”
“그건 모르겠어. 일단… 그 녀석과 만나봐야겠지.”
리피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렇게 답하며 스톤을 품에 챙겼다.
***
보더와 그레이를 챙겨 유스치파의 마을로 향한 리피는 제일 먼저 라타르를 충전했다. 요정왕에게 누군가를 심부름 보내야 하는데 흡혈귀인 야문이나 제페아교의 충실한 신관인 보더는 요정왕과는 상극이기 때문에 기타크와 그레이가 가야만 했다. 그래서 이번 충전 상대도 기타크와 그레이였다. 그들은 리피의 안에 실컷 싸지르고 아침이 되어서야 요정왕에게 리피의 편지를 전달하러 떠났다. 편지에는 당신의 영역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투명한 시험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봐달라는 부탁이 담겼다.
밀리밀리 마을은 배타적인 곳이기 때문에 일행은 통로를 통해 한덴국으로 돌아갔다. 아직 체크아웃 하지 않은 호텔에서 씻은 후 리피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보더는 리피의 앞에 무릎 꿇고 가느다란 종아리를 부드러운 타월로 닦아주고, 야문은 리피의 뒤에서 머리칼을 빗질했다.
리피는 야문에게 등을 기대며 물었다.
“이스리어는 아직 도착 안 했대?”
“예, 연락 없습니다.”
“나 핸드폰 좀 줘 봐.”
“예.”
리피는 이스리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덴국에서 로모어, 이스리어와 헤어진 후 론파국으로 온 리피는 로모어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선 차자국 왕의 친위대에게 전후 설명을 해줄 것. 그 후 체니르의 저택에 티토를 데려다줄 것. 이때 이스리어는 저택을 보면 리피의 정체를 알게 될 수도 있고, 이스리어에게서 오에흐 클럽의 본거지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론파국으로 따로 보내라고 했다.
야문은 핸드폰으로 로모어에게 전화를 건 후 리피에게 건넸다. 리피의 번호로 걸려왔기에 로모어는 바로 받았다.
-공작! 밑구멍은 잘 닫혀 있는가?
“넌 첫인사가 무슨….”
-목소리로 보아하니 목구멍도 안 헐고 잘 있나 보구만.
“…이스리어는 언제 와? 지금 기다리고 있는데.”
-그 인간 애송이는 이동진에 잘 태워서 보냈네. 지금은 인어 애송이와 저택으로 향하고 있지.
“인어 애송이 상태가 많이 심각해?”
-성장기에 걸리는 흔한 열병이네. 신경 쓸 필요 없네.
“저택에 가면 그웬이 알아서 잘 해줄 거야.”
리피의 가신들 중에는 요정도 많았다. 정화된 공기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을 위해 리피는 저택에 정화 마법을 설치해놓았다. 리피에게서 쉼 없이 라타르가 빠져나가는 이유 중 하나였다.
사실 인어, 그것도 순혈 인어가 살 수 있을 정도의 고급 정화 마법은 아니기 때문에 저택으로 옮기는 건 비상 대책일 뿐이고, 차차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보다 이스리어는 언제 보냈는데?”
-보자, 한 시간은 지났군.
“뭐? 그럼 도착하고 남았을 시간이잖아.”
-촌놈이라 길을 헤매나 보지.
“우리 호실 잘 알려준 거 맞지?”
-물론.
리피는 로모어에게 호실을 확인했는데 제대로 알고 있었다.
-애송이 걱정은 그만하고… 지금 벗은 상태인가?
“옷 다 껴입고 있거든.”
-그럼 상의부터… 벗어 보게.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조그맣게 세운 젖꼭지를 더듬으며.
전화를 끊은 리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종아리를 더듬고 있던 보더가 놀라서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리피 님?”
“이스리어가 길을 잃었나 봐. 데리러 가야겠어.”
“계십시오.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니, 나도 갈게. 어차피 가까운 곳에 있네. 옷 입혀줘.”
리피는 살며시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야문과 보더는 기쁘게 명을 받아들였다.
***
이스리어는 난감했다. 공간이동진을 다섯 번 연속으로 거쳐 겨우 론파국으로 왔는데, 로모어가 말한 호텔이 보이지 않았다. 로모어는 크레센도 호텔이라고 말했는데, 이곳에 있는 호텔명은 크레덴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호텔 앞에 서 있던 사람 두 명에게 물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곳이 크레센도 호텔 맞습니까?”
“크레센도? 예전엔… 아.”
대답해주던 사람은 이스리어의 얼굴을 보고서는 말을 멈췄다. 친구인 듯한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잘생긴 분이시네. 이 마을 사람이 아니죠?”
“외지에서 왔습니다. 크레센도 호텔이 맞는지요.”
“여기 뷔페가 끝내줘요. 우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여행 온 거면 우리가 안내해줄게요. 우리 이 동네 사람이라.”
그들은 이스리어의 팔뚝이나 어깨를 터치하면서 대놓고 수작질을 걸었다. 단정한 미남처럼 생긴 그는 이런 추근거림을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유독 기분 나빴다. 체구 작은 리피가 수작질을 했을 때는 절대로 허락받지 않은 스킨십은 없었고, 자기 말만 내뱉는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팔뚝이 터질 것 같네.”
이젠 아예 팔뚝을 쓸어내리는 행동에 이스리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괜한 소란은 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그냥 호텔이 맞는지만 확인한 후 들어가고 싶었다. 이 마을에 머무르고 있다는 그분에게 혹여라도 피해가 될까 봐 당장 손목을 분지르고 싶어도 참는 그때 허리를 감싸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내 수하에게 볼일이 있으신지요?”
리피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번엔 저번과는 다르게 옅은 갈색 머리로 염색한 상태였으나 미모는 어떤 머리 색이든 빛이 났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잠시 멈춰 바라볼 정도였다.
“내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자입니다. 할 말이 있다면 저를 통해 하시지요.”
리피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 저희는….”
“그게 아니라….”
미모는 둘째 치고서라도, 조그만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부드러운 위압감에 이스리어에게 추파를 던지던 사람들은 제대로 말도 못 하다가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났다.
“여기서 고생하고 있었어? 날 만나려면 이 정도는 가볍게 뚫고 와야지.”
리피가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스리어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리피의 귀에 들릴까 걱정스러웠다.
“리프… 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 너는 못 본 사이 더 잘생겨졌네.”
누가 보면 오랜 기간 헤어졌다가 감격의 상봉을 하는 연인인 줄 알겠으나 그들은 단 나흘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리프 님이야말로…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고마워. 들어가자. 애들이 기다려.”
“예….”
이스리어는 아직도 전율에 젖어 있는데, 리피는 굉장히 산뜻하게 뒤를 돌았다.
엘리베이터에는 둘밖에 없었다. 숨 막힐 정도로 향긋한 향기가 났다. 이스리어는 눈앞으로 보이는 리피의 뒷목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고 싶었다. 그 충동을 참는 게 아까의 추파 던지던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땡-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문이 1초라도 늦게 열렸다면 이스리어는 자그마한 리피의 허리를 낚아채 엘리베이터 구석에 처박고 하얀 목덜미에 이를 박았을지도 몰랐다.
‘티토랑 있었더니 발정기가 옮았나.’
스스로 반성하는데, 리피가 나가면서 웃는 얼굴로 작게 말했다.
“잘 참네.”
“…….”
“얼른 와. 뭐 해?”
리피는 멍하게 서 있는 이스리어를 부르고는 복도를 앞서 걸었다. 이미 보더와 야문이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언제 오시나 했어요…. 리프 님도 길 잃어버린 줄 알았잖아요.”
“나간 지 5분 됐어. 들어가자.”
리피는 징징거리는 보더의 손목을 붙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보더는 이스리어에게 눈인사를 했으나 야문은 이스리어를 힐끗거리지도 않고 리피의 뒤를 따랐다. 둘 다 아주 싫은 것을 씹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방에 들어간 이스리어는 깜짝 놀랐다.
“이게 다 뭡니까?”
“너 주려고 가져왔어.”
바닥에 검들이 늘어져 있었다. 단검부터 대검까지, 날이 두꺼운 것부터 가는 것까지. 총 열 개의 다양한 검들이었다.
“하나 골라. 어차피 두 개 이상은 못 들고 다닐 테니까.”
라타르를 잃은 이스리어는 검을 제법 쓰는 민간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장점인 검술을 제대로 선보일 수 있도록 리피가 은행에서 직접 찾아왔다. 가까운 은행까지 옮기는 데에 들어간 이동스톤 수와 비용을 알면 이스리어는 기겁할 것이다.
“저를 위해서….”
이스리어는 큰 착각을 했다. 리피가 이것을 선물하는 이유는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뜻에서였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별거 아닌데 뭘. 하나 고르렴.”
“추천해주시겠습니까?”
“내가? 나는 검 볼 줄 모르는데.”
몸 쓰는 일은 침대 위에서 하는 일 말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리피는 당연히 검 보는 눈도 없었다. 리피가 보기에는 손잡이에 붉은 보석과 푸른 보석이 박힌 레이피어가 가장 좋아 보였으나 이스리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야문, 네가 골라 줘.”
“예, 그럼 이것을.”
야문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검은 날의 장검이었다.
‘그냥 가까이에 있는 것 중에서 대충 고른 거 아닌가.’
이스리어는 괜한 의심을 했다. 보기에는 좋아 보였고, 자신도 이것을 선택했겠지만 차갑게 생긴 흡혈귀에 대한 신뢰감이 전혀 없는 바람에 오히려 의혹만 생겼다. 그러나 그 검은 실제로 좋은 검이었다. 모두 장인이 상급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지금 당장 천금을 준다 해도 부족했다.
이스리어가 원래 있던 검을 검집 채로 내려놓고 새로운 검을 새로운 검집에 넣어서 허리에 차자 리피가 감탄했다.
“근사하구나. 제 주인을 찾은 것 같아.”
키 크고 어깨가 벌어진, 잘생긴 남자가 좋은 검을 차고 서 있으니 리피의 말대로 명화에 나올 것처럼 근사한 모습이었다.
다섯 개의 공간이동진을 거쳐 오느라 힘들었을 이스리어를 위해 검을 고른 뒤에는 우선 식사부터 했다. 이스리어는 리피에게 티슈를 챙겨주는 보더와 당연한 듯이 스테이크를 잘라주는 야문을 보고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 뒤 호텔 지배인에게 부탁해 옥상 문을 개방하게 해서 이스리어에게 검을 휘두를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검은 주문 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손에 딱 들어맞았고, 이스리어는 달이 떠오르도록 검을 휘두르다가 옥상 문을 닫아야 해서 돌아갔다. 론파국의 밤은 마치 한겨울 밤처럼 추운 곳으로 달이 뜨고 나면 모든 야외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리피도 전날 누구에게 들킬 걱정하지 않고 신전에 침입한 것이다.
“오늘은 이만 자렴. 너네는 내일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니까.”
“‘너네’요?”
잠들기 위해 각자 방 앞에서 헤어지는데 리피가 이상한 말을 했다.
“같이 움직이는 게 아닙니까?”
“난 볼 일이 있어서 지금 나가야 해. 내일 네가 보더와 야문을 오에흐 클럽의 본거지로 안내해주렴.”
이스리어는 이상한 것이라도 씹은 얼굴이 되었고, 보더와 야문이 오늘 만났을 때부터 내내 이 표정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헤어질 줄 알았다면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저질러버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리프 님께서는 바로 출발하시는 겁니까?”
“응, 야문.”
“예.”
“완전히 와해시켜 버려.”
“…예.”
리피는 야문을 올려다보며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고, 와해시킨 후 전화 한 통 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아 갔다.
“끝내기 전까지는 전화하지 말라는 뜻이군요.”
보더가 해석했고, 야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리어는 멀어지는 리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쉬움에 한숨만 내쉬었다. 오에흐 클럽의 본거지를 단 셋이서(90%는 흡혈귀가 다 해 먹겠지만) 와해시키고 연락하라니…. 어쩌면 한 달은 지나도록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내일 밤쯤엔 연락드리도록 하지.”
“예, 보좌관님. 그럼 주무세요.”
“…….”
보더가 대수롭지 않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야문도 돌아가고 혼자 남은 이스리어는 나만 모르는 그분 부하들만의 농담 같은 건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
호텔을 나온 리피는 곧바로 노옴에게 전화했다.
-러스티 공작님의 보좌관이십니까.
신호음이 짧게 울린 후 다소 긴장한 목소리의 보좌관이 전화를 받았다.
“랑케니?”
-…공작님?
“노옴은 뭐 하고 있어?”
-야, 야문 보좌관에게 전했습니다만, 아바리티 님께서는 심연을 막기 위해 대양에….
“정확한 위치 알려줘. 심각한 일이니까.”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보좌관이 난처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대현자가 다른 이의 보좌관과 직접 전화 통화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보통 보좌관은 보좌관끼리 상대하지만, 이렇게 직접 전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일임이 분명하므로 노옴의 보좌관은 리피의 말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러스티 공작님, 사실은….
잠시 후 보좌관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저희도, 함께 심연으로 나간 헤스피스 공작님께서도 저희 공작님의 위치를 모릅니다. 이틀 전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받고 급히 자리를 떠나셔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
보좌관이 대현자의 위치를 모른다는 말은 고양이가 생선가게 위치를 모른다는 말이나 똑같았다.
“그쪽으로 갈게.”
-그쪽이요?
“너네한테, 지금.”
-아… 예, 오십시오.
리피는 바로 이동스톤에 라타르를 주입했다. 곧 눈앞의 풍경이 노옴 아바리티의 저택으로 바뀌었다.
전화를 받고 있던 보좌관과 그 옆의 가신이 긴장한 얼굴로 공손하게 인사했다. 리피는 안부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심연에 따라간 다른 보좌관은?”
“현재 항구에 있습니다. 그 역시 아바리티 님의 위치를 몰라 헤매고 있고요.”
“어차피 밝혀진 김에 러스티 공작님께서 저희 공작님의 위치를 찾아주실 수 있으신지요.”
옆에 있던 가신이 허리를 숙여 부탁했다. 리피가 빤히 바라보자 부탁드린다며 무릎까지 꿇었다. 외양만 보자면 리피의 할머니뻘이었다. 색욕의 대현자를 처음 보고 어려 보이는 외모에 놀랐을 텐데도 전혀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공작님.”
급한 사안이라면 대현자들은 서로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 혼자서 나라 하나쯤은 가볍게 멸망시켜버리는 자가 연락 두절이 되는 것은 세계에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대현자 셋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위치를 추적해도 된다고 그들끼리 정한 규칙이었다.
“걱정 마. 나도 걜 만나서 할 말이 있거든. 동의해줄 애들을 찾아볼게.”
“헤스피스 공작님께서 동의해주실 겁니다.”
“그렇겠지.”
함께 대양에 나갔다가 졸지에 혼자 심연을 막게 된 헤스피스는 상당히 열 받은 상태일 것이다. 바다를 싫어하는 리피는 대양까지 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돌아가기 전에 들를 데가 있어. 창고로 안내해줘.”
“창고라 하시면….”
“아바리티의 보물창고. 이유는 말할 수 없어.”
리피의 말에 보좌관과 가신이 난감한 듯 눈빛을 교환했다.
노옴의 가신 수는 적은 편이었고, 그래서 저택도 넓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리피의 저택만큼 넓은 이유는 뮤다 화산의 자연스톤을 보관할 공간이 필요해서였다.
“상의가 필요한 일이라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응.”
랑케는 리피를 다과실로 안내했고 리피는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노옴에게 목숨만큼 소중한 보물창고를 개방해달라는 요청이니 논의에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했다. 리피의 가신들이었다면 허락이 있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겠지만, 노옴의 가신들은 이성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녔기 때문에 결국은 안내해줄 것이다.
리피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곧 노옴의 가신들은 창고로 안내해줬고, 리피는 노옴이 이중삼중으로 걸어둔 결계를 해제한 뒤 거대한 문을 열었다.
“어떻게…!”
드러난 창고 안을 보고 노옴의 가신들이 경악했다. 뮤다 화산의 자연스톤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창고의 1/3이 비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치치, 우 보좌관님께 당장 연락드리고 가신들 불러 모으세요.”
“예!”
노옴의 보좌관과 가신들이 바빠졌다. 리피는 그 이유를 알았다.
뮤다 화산의 자연스톤은 노옴의 커널이었다.
평생을 모은, 지금도 모으고 있는 커널이 이렇게 상당수 사라졌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리피는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확인하고 다시 결계를 쳤다. 창고 문을 닫는 보좌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대현자의 커널이 이렇게 많이 사라졌으니 당연했다. 절망감에 사로잡혀있을 것이다.
“러스티 공작님, 이게 어찌 된 연유인지 저희가 알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로부터 탈취당한 것인지….”
보좌관으로서는 노옴이 누군가에게 직접 줬다는 생각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커널을 1/3이나 다른 이와 공유하지 않았다. 웨이더 프라이드 정도 되지 않는 한…. 특히 노옴 아바리티는 누군가와 공유할 성격이 더욱더 아니었다. 다름 아닌 인색의 대현자인 것이다.
“난 말 못 해. 나중에 걔한테 직접 들어.”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것만 알려주십시오. 없어진 자연스톤이 이미 소모되었는지. 아니면….”
“그건 모르겠어. 알게 되면 말해줄게.”
보좌관이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이라는 걸 알아서 소모됐을 확률이 높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스톤이 소모되는 순간부터 노옴에게 있어서는 커널이 아니라 돌멩이가 된다. 노옴 아바리티의 커널은 리피처럼 무한히 생성 가능한 게 아니었다. 다시는 생성되지 않는, 한정적인 커널을 1/3이나 잃었다고 한다면 엄청난 절망에 빠질 것이다.
“이만 가볼게.”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참담한 얼굴의 보좌관을 뒤로하고 리피는 이동스톤을 이용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읏….”
칼날을 섞은 듯 매서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사방에 하얗게 얼음이 얼어있었고, 파도가 얼었다가, 깨졌다가, 다시 쩌저적 얼어붙었다. 추위를 이기지 못해 빙하조차 깨져버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곳은 대현자들의 결계 바깥이며 보호받지 못하는 곳, 라인데이아의 끝, ‘절벽’이었다.
이 세계, 라인데이아의 중심에는 아로수가 있고, 그 뿌리가 내린 곳을 12개의 나라가 둘러싸고 있다. 대현자들의 결계가 보호하는 것은 각 나라의 국경선까지였다.
아로수의 뿌리가 닿지 않는 곳은 항상 차가운 바람이 부는 죽음의 대지였다. 그 어떤 생명도 자랄 수 없는…. 심연에서 쫓겨난 마물만이 산 자를 노리고 숨어있는 곳이 바로 이 ‘절벽’이었다.
리피는 절벽 끝에 서서 전화를 걸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절벽에서 통신이 될 리가 없었다. 대현자들은 휴대전화가 개발된 후 특별한 마법 장치를 만들어 모든 곳에서 대현자들끼리는 연결할 수 있게 해놓았다. 기계가 아니라 마법이었다.
신호음이 꽤 길게 울린 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뭐야. 바빠.
“인비디아니?”
대양에 나가 있는 사람과 통화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걱정했으나 제대로 연결이 되었다.
-리피 님? 웬일이세요, 이렇게 직접?
“지금 절벽이야. 네 위치 불러주면 바로 이동할게.”
-노옴 새끼 대신에 리피 님이 오신 거예요? 와, 새우 대신에 고래가 오다니. 오늘 집에 갈 수 있겠다.
인비디아는 혼자 설레발 치며 위치 좌표를 읊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친 바다 한가운데, 허름한 배의 갑판 위였고, 그 덕에 리피는 이동하자마자 홀딱 젖었다.
“리피 님!”
리피는 반갑게 달려오는 대머리를 가볍게 피하고 마법으로 물기를 털어냈다.
요정과 인간의 혼혈인 헤스피스 인비디아는 남자일 때는 머리카락을 기르고, 여자일 때는 머리를 밀었다. 대부분 대머리로 다닐 때가 많았고, 구릿빛 피부색에 울퉁불퉁 튀어나온 근육 때문에 변태로 보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외양이 알려진 대현자였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리 있어도 단번에 눈에 띄는 외양인 것이다.
“젖잖아. 저리 가.”
“여기에서 어떻게 안 젖으시려구요.”
리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공간 왜곡 마법을 사용했다. 리피에게 튀는 물방울은 모두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여전히 아낌없이 라타르를 사용하시네요.”
“여기에 서명해.”
리피가 허공에 손가락을 덧그리자 마법 동의서가 나타났다.
[노옴 아바리티의 위치를 추적하는 데 동의한다.]
[서명 리피.]
[서명.]
[서명.]
인비디아는 심드렁하게 동의서를 훑었다.
“찾을 필요 없어요. 어차피 리피 님이 도와주면 금방 심연을 닫을 텐데.”
“심연 때문에 찾는 거 아니야. 빨리 서명이나 해.”
“다른 이유가 있나 보네요. 뭔데요?”
“네 보좌관에게는 말할 수 있어.”
“아하, 왕명.”
대현자들끼리는 대화의 많은 부분이 언령으로 막혀 있어서 어떤 특정 의도, 주제에 대한 대화가 불가능했다. 예를 들면 왕이 비밀이라고 언급한 왕명이라든가, 차자국 왕실을 전복하자는 음모라든가…. 뿐만 아니라 대현자끼리 일정 시간 이상 붙어 있는 것도 금지였다. 예를 들어 리피와 인비디아는 하루 이상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지만, 리피와 웨이더는 단 10분도 같이 있지 못했다. 이것은 차자국의 왕이 너무나 강한 대현자들에게 쳐둔 일종의 보호 결계였다. 그래서 보통 대현자들은 각자 보좌관을 두고, 보좌관을 통해 소통했다.
“도와주세요. 그럼 서명할게요.”
“무슨 도움?”
“저기 심연 보이시죠.”
인비디아가 폭풍우 몰아치는 검은 하늘을 가리켰다. 민간인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라타르로 바라봐야 보이는 붉은 구체. 저 구체가 바로 심연, 마계의 입구였다.
“제 커널 좀 가져오는 동안 빠져나오는 것들 해치워주세요. 충분히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노옴 자식이 도망쳐버려서.”
리피는 배 위를 둘러보았다. 빈 유리병 열댓 개와 인비디아의 커널로 가득 찬 유리병 다섯 개가 굴러다녔다.
“항구에 정착해놓은 배에 한 박스 더 있어요.”
“알았어. 다녀와.”
“고마워요, 리피 님.”
인비디아는 어지간히 급했는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리피는 여전히 공간 왜곡 마법을 건 채 허공으로 떠올랐다. 심연 앞에 선 그의 눈에 몸뚱이를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는 마계가 보였다. 심연은 리피도 통과하기 어려운 작은 크기였으나 마계는 검은 손길을 뻗어 꿀렁거리며 넘어오고 있었다.
리피는 마법으로 단두대를 만들어 심연의 앞에 세웠다. 심연을 빠져나온 검은 그림자는 단두대에 목이 잘려 흩어졌다.
인비디아가 열심히 줄인 크기겠지만, 리피는 딱 이만큼, 딱 막을 수 있는 만큼만 열어둔 것도 참 지드답다고 생각했다.
***
몇 시간 후 인비디아가 유리병을 한 아름 안고 등장했다. 뭔 짓을 하고 왔는지 근육의 때깔이 번지르르한 인비디아를 보고 리피는 혀를 찼다.
‘이번엔 소문의 좌 보좌관을 항구로 데리고 왔나 보지.’
소리 내서 묻지는 않았다. 시기와 질투의 대현자, 헤스피스 인비디아의 좌 보좌관은 리피조차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보좌관과 같은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을 질투하는 인비디아가 보좌관을 저택에 감금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긴 여정인 만큼 함께 나온 모양이었다.
인비디아는 외롭다며 같이 있어 주면 안 되겠냐는 엄살을 부리다가 결국 리피의 마법으로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에 한 번 빠졌다 나온 후 동의서를 작성했다.
[노옴 아바리티의 위치를 추적하는 데 동의한다.]
[서명 리피]
[서명 인비디아]
[서명]
인비디아의 서명은 ‘인비디아’였다. 세 번째 서명할 대현자 또한 현자의 칭호로 서명하게 될 터였다. 오직 리피만이 이름 자체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리피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이므로.
동의서를 받아든 리피가 론파국 마을로 돌아오니 오후의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방금까지 뼈 시리게 추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온도가 변하니 노곤해진 기분이었다. 리피는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청소를 부탁하지 않은 객실은 야밤에 헤어지기 전 그 상태였다.
“으… 뼈마디가 쑤시네. 늙었나.”
고단해진 리피는 말도 안 되는 혼잣말을 하며 어깨를 두들겼다.
‘나머지 한 명의 서명은 어떻게 받지.’
생각해둔 방법은 많았다. 가장 간단한 노선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그때 지잉, 휴대폰이 울렸다.
“응, 그레이, 기타크.”
-리피 님, 결과가 나왔어요.
리피가 어깨를 안마하던 손길을 멈췄다. 요정왕에게 동굴 실험실 시험관의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는데, 벌써 결과가 나온 것이다.
-수원이었어요. 아로수의 수원.
“그렇구나.”
그레이는 목소리를 깔며 세상에 하나뿐인 비밀을 밝히듯 얘기했으나 리피의 반응은 건조했다.
-별로 안 놀라네요.
-요정왕도 놀라던데. 혹시 예상하셨습니까?
예상해서 요정왕에게 보낸 것이다. 그는 아로수의 수원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혹시나 싶었지. 은행으로 보내. 그게 왜 여기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누구에게요?
누구긴, 바보 같은 물음에 리피는 가볍게 웃었다.
“수원을 지키는 자에게.”
웨이더 프라이드, 그가 허가하지 않았다면 아로수의 수원은 절대로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만약 웨이더가 지드와 한편이라면 무척 어려운 상황에 놓이겠지만, 리피는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레이와 기타크에게 곧바로 호텔로 돌아오라고 지시하고 전화를 끊은 리피는 벌떡 일어나 화장대 앞에 섰다.
‘커널을 찾아야겠어.’
앞으로 진행할 일을 대비하려면 충분한 라타르를 확보해놔야 했다. 마을 사람 아무나 유혹할 생각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카드키 대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끼익, 열렸다.
“…리프 님?”
이스리어가 리피를 발견하고 얼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 갑자기 이스리어가 튀어나올 줄 몰랐던 리피도 눈을 깜박였다. 다소 헝클어진 머리칼과 구겨진 옷 주름, 핏방울이 튄 오른쪽 바짓단을 차례차례 본 리피가 물었다.
“오에흐 클럽 일이 끝난 거야?”
“아뇨, 아직…. 야문 님께서 제가 다쳤다고 쫓아내셨습니다. 더 싸울 수 있었는데.”
이스리어는 문을 닫고 들어왔다.
존경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지쳤던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왜인지 모를 위압감에 눌려 다가가지 못했다. 리피의 별 박힌 밤하늘 같은 눈동자가 진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의 미소는 평소보다 더욱 매혹적이었다.
“어차피 넌 길 안내용이었고, 부상자는 방해니까. 얼마나 다쳤는데?”
이스리어는 바지 밑단을 걷어 보였다. 단단한 종아리에 날카로운 검상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신관님이 치유해주셔서 심하진 않습니다.”
“그러게, 심하진 않네. 옷 벗어.”
“예… 예?”
“옷 벗으라고.”
리피는 상의의 단추를 풀며 이스리어에게 다가갔다.
“내가 금방 세워줄 테니까.”
작은 혀가 붉은 입술을 훑었다. 요요하게 빛나는 새카만 눈동자에 이스리어는 뒤로 주춤 물러났으나 단단한 문에 막혀 어디에도 도망칠 수 없었다.
***
침대 끝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리피는 걸리적거리는 이불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근육으로 잘 짜인 몸의 남자가 침대 등받이에 조신하게 앉아 리피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피는 무릎걸음으로 이스리어에게 다가갔다. 움찔하며 시선은 피하는데 중심은 단단하게 팽창해 있는 것이 아주 보기 좋았다. 체술을 수련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져진 몸을 시선으로 훑으며 내려가다 커다랗게 발기한 것에 일부러 시선을 고정하니 이스리어가 다리를 오므리고 손으로 중심을 가렸다.
“너 설마 처음이니?”
“그럴 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리피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이스리어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리피 또한 나신이었고, 기울어진 상체의 봉긋하게 선 유두나 납작한 배, 탐스러운 허벅지 같은 것에 자꾸 시선이 향해서 눈 둘 곳이 없었다.
“다리 벌려.”
“…….”
“손 치우고.”
이스리어가 쭈뼛거리자 리피는 양반다리로 앉은 이스리어의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틈을 만들게 했다. 리피의 보드라운 손바닥이 단단한 허벅지를 건드릴 때마다 이스리어의 몸이 움찔, 움찔했다.
리피는 이스리어의 정면에서 양 무릎을 벌린 채 미소 지었다.
“손 떼자, 이스리어. 시간 없어.”
“먼저 풀어야….”
“뭘 풀어?”
리피는 정말로 의아한 듯 물었다가 아래로 향하는 이스리어의 시선에 곧 아, 하고 깨달았다.
“내 구멍 말이야? 괜찮아. 익숙해서.”
“제 것이 좀… 큽니다.”
“나 네 인어 동생이랑도 한 거 알지? 티토보다 커?”
짓궂은 놀림에 이스리어의 얼굴이 붉어졌다. 티토와의 비교에 급격히 겸손해진 이스리어가 중심을 가렸던 손을 뗐다. 흉흉하게 일어난 검붉은 성기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핏대가 서 있었다.
리피는 그 앞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이스리어의 꼿꼿이 선 중심의 높이와 자신의 배 높이를 손바닥으로 비교해봤다. 배꼽 위까지 올라왔다.
“크긴 크네.”
리피가 입맛을 다셨다. 그는 한쪽 팔로는 이스리어의 어깨를 짚고 조준한 후 그 위로 앉았다.
“하아….”
이스리어의 귓가에 리피가 내뱉는 뜨거운 숨이 닿았다. 작은 구멍이 귀두부터 천천히 먹어치웠다. 풀어주지 않아서 찢어질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삼키고 있었다.
“으…흣.”
리피의 미려한 미간에 주름이 지어졌고, 고운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좁고 따뜻한 내벽은 기다렸다는 듯 중심을 빨아들였다.
“큿….”
타이트한 느낌에 이스리어가 신음을 내뱉었다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신음, 읏, 참지 마.”
“…다 못 들어갑니다.”
“충분히, 들어가.”
리피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옆 머리칼에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리피는 한 손으로는 이스리어의 기둥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둔부를 벌리며 천천히 엉덩이를 내렸다. 충분하다면서 무척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하아….”
리피의 숨이 뜨거웠다. 이스리어는 기둥을 빨아들이는 좁고 뜨거운 내벽에 인내심이 끊어질 것 같았다. 얼른 뿌리까지 박고, 거칠게 흔들고 싶었다.
“머리가, 진입했으니….”
“하아, 응?”
“찢어지진, 않을 겁니다.”
“무슨… 아흑!”
이스리어가 놀고 있던 손으로 리피의 어깨를 눌렀다. 다른 손으로도 잘록한 허리를 쥐고 꾸욱 아래로 누르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 마. 아흐윽!”
푸욱, 아직 반이나 남은 두꺼운 기둥이 한 번에 내벽의 가장 깊은 곳에 처박혔다.
“흐윽…!”
“큿, 좁아.”
팽팽하게 벌어진 입구가 통증을 호소했다. 끊어질 듯 조이는 내벽에 이스리어 또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리피와 이스리어 모두 결코 고통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흣, 흐응.”
금방 익숙해진 리피가 허리를 들썩거렸다. 접합부로부터 시작된 간지러운 쾌감이 온몸으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마음껏 허리를 돌리며 교성을 지르고 싶었으나 이스리어가 워낙 강하게 끌어안고 있어서 움직이기 어려웠다. 리피는 이스리어의 목에 팔을 둘렀다.
“팔에 힘 풀어줘. 응? 하아… 움직이고 싶어.”
“…큿.”
리피가 애교 부리듯이 이스리어의 목에 작은 얼굴을 비볐다. 그 움직임에 자극받은 이스리어가 오히려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아흣! 아!”
이스리어는 놔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리피를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돌같이 단단한 가슴과 부드러운 가슴이 맞닿았다. 리피의 몸무게까지 실려 안쪽에 들어온 거대한 불기둥은 내장의 구부러진 끝을 밀고 들어왔다. 가신들만이 닿는 깊은 곳까지 찌르는 크기에 리피의 머릿속은 기대감으로 젖어 들어갔다.
“아, 깊어. 어서 움직여줘. 응?”
리피가 엉덩이를 흔들며 안달을 냈다. 양팔로 이스리어의 목을 끌어안은 채 움직여주기를 보챘고, 목과 턱에 보드라운 입술을 쪽, 쪽 맞췄다.
“이런… 분이셨다니.”
이스리어는 리피의 음란한 모습에 더 참을 마음이 없어졌다. 그는 작은 상체를 빈틈없이 끌어안고 자세를 잡은 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쑤욱, 쑤욱. 거대한 말뚝이 내장 끝에 뿌리까지 박혔다가 좁은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갔다. 반쯤 빠져나간 그것은 다시 안쪽을 쳐올렸다. 크기가 컸기 때문에 리피가 느끼는 지점을 굳이 조준하지 않아도 직격으로 박았다.
“으응! 흣, 좋아, 응, 깊어어.”
“큭….”
“신음, 참지 마. 흣, 응, 참을 필요 없… 아흑!”
단단하고 커다란 것이 안쪽을 찌르니 내벽이 찌르르 울렸다. 모든 곳이 성감대가 된 것 같았다. 퍼억, 퍼억! 부드러운 움직임에 점차 속도가 붙으면서 침대가 끼익, 끼익 소리를 냈다.
“흐응, 좋아. 아! 흣!”
리피의 것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꼿꼿이 세워진 성기는 몸이 흔들릴 때마다 이스리어의 단단한 복근에 문질러졌다. 이스리어는 리피를 끌어안은 채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쳐올렸다.
“아흐, 응! 읏, 너무, 빨, 랏.”
“…….”
“천, 천히… 아흣. 흐으.”
이내 리피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쳐올리는 빠른 박자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허리라도 놓아주면 시도해보겠지만 구속당한 상태여서 리피는 이스리어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려야만 했다.
“으응, 응, 흣! 흐읏….”
흔들리는 시야로 입술을 꾹 다문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리피는 애원하듯이 바라봤다.
“신음, 응, 내줘.”
“…….”
“읏, 들려줘. 응, 아응!”
하체는 끊임없이 쳐올리면서도 끝까지 목소리는 들려주지 않는 이스리어가 괘씸해서 리피가 잘근, 귓불을 물었다.
“큿, 하지, 마십시오.”
“흐읏, 그럼 신음, 내줘. 응?”
리피가 혀로 이스리어의 귓불을 빨았다. 혀끝으로 귓바퀴를 쓸어내렸다가 귀 뒤쪽의 튀어나온 뼈를 핥고는 이빨로 귀 뒤쪽을 잘근 씹었다.
“아읏….”
정작 신음을 내뱉는 건 리피였다. 안쪽에 들어와 있는 쇠말뚝이 더욱 커진 느낌이었다.
“이스리어….”
리피는 귓가에 바로 대고 이름을 불렀다. 이스리어의 하체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췄고, 허리를 안고 있던 팔에서도 순간 힘이 풀어졌다. 리피는 더욱 적극적으로 이스리어의 목에 매달려 혀를 귓구멍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윽, 그만.”
“으응, 좋아. 하아….”
“…큭.”
귀의 솜털을 모두 핥으며 구멍 안에 혀를 밀어 넣자 이스리어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아, 이스리어. 만져볼래?”
“…무엇을, 말입니까.”
“네 거, 만져 봐.”
리피가 한쪽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단단한 팔뚝을 붙잡았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리피는 팔뚝을 붙잡고 앞쪽으로 안내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고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만지게 했다.
“여기까지 들어와 있어. 흐읏….”
“…….”
아랫배에 윤곽이 만져졌다. 리피는 이스리어의 손등을 누르며 손깍지를 꼈다.
“으응, 좋아. 눌러 봐.”
이스리어는 멍하니 리피를 바라봤다. 상상 이상으로 야했다. 땀이 맺혀 이마에 붙은 채 흔들리는 앞머리와 살짝 찌푸려진 눈썹, 반들반들한 입술. 밤하늘 같은 새카만 눈동자에 욕망을 참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담겼다.
“하으으, 흐읏, 으응….”
“큭.”
리피가 허리를 둥글게 돌렸다. 좁고 따뜻한 내벽이 기둥을 맛있게 빨아들였다. 이스리어도 다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고, 그 박자에 맞춰 리피 또한 엉덩이를 위에서 아래로 들썩였다. 결합부로부터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대로라면 뇌수까지 녹아버릴 것 같았다.
“하읏, 좋아. 앗.”
“윽… 큿.”
“신음, 참지 마, 흣, 응.”
“나올 것, 같습니다.”
“싸. 하으, 내 안에 싸 줘.”
음란한 대화 속에서 철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리피의 아랫배를 누르고 있는 이스리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으윽!”
리피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려 하자 이스리어는 그 손목을 잡아채 뒤로 꺾었다. 그리고는 다른 손으로 상체를 안고 아까처럼 빈틈없이 껴안았다.
젠장, 이스리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리피의 하얀 목에 코를 묻었다.
“싸겠, 습니다.”
“응, 으읏, 하으응!”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속도를 리피가 따라잡지 못했다. 크기가 너무 커서 어느 각도로 들어오든 안 찌르는 곳이 없었다. 리피의 발가락이 점점 곱아들어갔고, 이스리어도 크읏,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싼다며, 얼, 른! 아윽!”
리피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으으! 얼른 싸 줘. 흐읏…!”
“하아… 큭.”
퍽, 퍼억! 이스리어가 리피의 안으로 크게 쳐올리자 리피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허윽…!”
내벽에 퍼지는 뜨거운 정액에 리피의 상체가 바르르 떨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리피의 것에서도 분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크윽.”
“아으으….”
리피의 상체가 힘없이 무너졌다. 이스리어는 여전히 리피의 손목과 허리를 안은 채 따뜻한 내벽에 계속해서 사정했다. 평균에 비해 크기도 컸고, 양도 많았다. 리피가 흡수하는 속도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
“흐읏….”
리피는 이스리어의 어깨 위에 얼굴을 기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정액에서 얻을 수 있는 라타르는 사람마다 다른데, 이스리어로부터 가신들만큼이나 많은 라타르가 충전되었다. 흔치 않은 케이스였다. 사정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점만 빼면 아주 훌륭했다.
“이스리어, 이제 됐어…. 흐읏.”
“…….”
“수고했어.”
더 하고 싶었으나 시간도 없고, 어느 정도 라타르도 충전했기에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리피는 무릎에 힘을 주고 이스리어의 위에서 일어났다.
“흐으읏.”
내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두꺼운 기둥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리피는 몸서리치며 신음했다. 너무 길어서 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하아….”
다 빠져나오고 나서 보니 어떻게 이런 걸 품었나 싶을 정도로 거대했다. 한차례 사정했음에도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좆을 보는 리피의 눈에 아쉬움이 담겼다. 리피는 침대에서 휘청거리며 내려오면서 인사했다.
“진짜 좋았어. 나중에 또 하자.”
“…뭘 보고 인사하는 겁니까.”
리피의 시선은 검붉은 성기에 박혀 있었다. 리피의 내부가 모두 빨아들였기 때문에 하얀 정액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성기는 너무나 먹음직스러웠다.
“그럼 부상 치료 잘하고 있어. 난 어디 좀 갔다 올게.”
“아니요.”
“어? …윽!”
이스리어가 리피의 팔을 잡아당겼다. 리피는 침대 위로 내동댕이쳐져 이불에 얼굴을 박았다.
“잠, 깐…!”
리피의 뒤쪽에 자리 잡은 이스리어는 리피의 양손을 한 손으로 구속해 위로 들어 올리고, 자연스럽게 상체도 세우게 했다. 리피의 허리가 휘었다. 이스리어는 리피의 다리를 벌리고 뒤쪽으로 뻗은 양 정강이 위로 자신의 다리를 올렸다. 리피는 양팔과 양다리 모두가 이스리어에게 구속당하게 되었다.
“티토와는 몇 번 했습니까?”
“그건 왜… 지금은 바빠서 그래. 나도 빼는 스타일은 아니야.”
“제 정액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러스티 리피 공작님.”
“뭐…?”
리피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뭐라고…! 아아윽!”
잔뜩 성난 불기둥이 한 번에 리피의 뒤쪽을 꿰뚫었다. 방금 전까지 격정적인 움직임에 시달렸던 입구가 다시 팽팽하게 벌어졌다.
“안 돼, 아흐으윽! 하지, 마…!”
이스리어는 반항하는 리피의 다리를 힘주어 제압하고, 양손으로 장골을 손에 쥐어 고정했다. 자유롭게 풀려난 손으로 어떻게든 이스리어의 손을 떼려고 시도하는 움직임은 어린애 장난처럼 힘이 없었다.
이스리어는 길게 삽입했다가 귀두 끝까지 빼냈다. 그리고 퍼억, 작은 구멍이 오므라들기 전 다시 쑤셔 박았다. 뒤에서 넣다 보니 아까보다 깊은 삽입이었다. 리피가 손톱으로 이스리어의 단단한 팔뚝을 할퀴었다.
“아으으, 안 돼, 하악, 아읏!”
“이렇게, 큭, 음란한, 분이실, 줄은.”
“아윽! 이스, 아, 이스리어, 하으윽!”
“말과는 달리, 당신의 내벽은, 날 환영하는군요.”
“하지, 마! 아윽, 아! 제…발, 으윽!”
퍼억, 퍼억! 불에 달군 쇠말뚝이 내장을 밀어내고 깊은 곳까지 찔렀다가 머리까지 빠져나갔다. 깊이가 너무 깊어서 뱃속이 징, 징 울렸다. 퍼억, 퍽, 퍽퍽! 거대한 성기가 리피의 내장을 헤집었다. 이스리어는 너무 컸고, 리피는 작았기 때문에 이스리어의 것이 리피의 안에서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때마다 리피의 아랫배가 오목해졌다가 다시 볼록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흐윽, 아, 파! 아흑! 하으으….”
퍽퍽퍽퍽, 봐주지 않는 격렬한 움직임에 리피가 고통을 호소했다. 눈 꼬리에 매달렸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스리어의 시선에도 그것이 보였다. 지나치게 색정적이었다.
“좋아, 하면서.”
“아니, 아악, 지금, 은, 안 된단… 아흐흐!”
“왜 전, 안 됩니까.”
“나, 중에, 하으, 아악, 아윽!”
리피의 대답이 마음이 들지 않은 이스리어는 더욱 격렬하게 쑤셔 박았다. 무자비한 피스톤질에 리피는 침을 흘리며 교성을 내질렀다. 리피의 머릿속에 마법으로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단단한 불기둥이 내벽을 강하게 꿰뚫을 때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허리를 휘감은 이스리어의 팔뚝은 돌처럼 단단해서 손톱으로 할퀴어도 끔쩍도 안 했고, 저항하고 싶어도 이스리어가 체중을 싣고 다리를 얽혀 놔서 반항할 수 없었다.
“그만, 흐윽, 제, 발, 아아흐, 흐으으.”
“좋다고, 말하십시오.”
“아읏! 윽. 조, 조아. 흐윽!”
퍽 퍽 퍽! 쇠말뚝처럼 굵고 단단한 것이 아랫배를 뚫고 나올 듯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지나친 쾌감에 내벽이 비명을 질러댔다.
“허으…으으….”
리피가 입을 벌린 채 눈을 크게 떴다. 리피의 것에서 실금하듯이 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이스리어가 한 번 크게 박을 때마다 리피의 것에서 물이 튀었다. 리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너무 오랜만에 다다른 절정에 리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큭…!”
안 그래도 좁고 뜨거운 내벽이 경련하면서 더욱 조여들자 이스리어도 참지 못하고 사정해버렸다. 리피의 몸은 주인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기쁘게 커널을 맞이했다.
“큭, 허윽.”
이스리어는 안쪽에 분출하면서도 허릿질을 멈추지 않았다. 리피의 장골을 힘주어 붙잡고 고간까지 넣을 기세로 퍽, 퍼억! 강하게 쑤셔 박았다. 리피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아아… 아흐으…!”
“크으….”
이스리어는 추욱, 힘이 빠져 앞으로 쓰러지는 리피를 그대로 뒀다. 발개진 꼬리뼈부터 움푹 뼈가 튀어나온 등줄기를 따라가니 땀에 젖은 목덜미가 보였다.
이스리어는 리피의 등허리 위로 쓰러지듯이 상체를 숙였다.
“흐, 아, 아악!”
달라진 각도에 뱃속이 분탕이 난 리피가 비명을 질렀다. 이스리어는 리피의 양팔을 옆구리에 붙여 끌어안고, 허벅지를 눌렀다. 리피의 등이 이스리어의 탄탄한 가슴에 맞닿았다.
“흐윽!”
그는 리피의 뒷목에 입술을 붙였다. 쪽, 쪽 거리면서 빨아들이다가 리피가 고개를 옆으로 젖히는 순간 콰직, 이로 깨물었다.
“아, 안 돼…!”
“내, 흔적입니다. 러스티 공작님.”
이스리어는 상처 낸 곳을 잘근잘근 씹었다. 리피가 흐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고, 붉은 상처 부위가 커졌을 때 이스리어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읏!”
이슬비처럼 가늘게 몸을 떨던 리피가 안쪽에서 다시 흉흉하게 세운 흉기의 움직임을 느끼고는 정신을 차렸다.
“안 돼, 하윽, 이, 제 그만! 아읏!”
“더 할 수, 있으면서, 왜.”
“제발, 아아, 하으윽!”
리피의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조금의 틈도 없이 뒤에서 끌어안은 이스리어는 허리를 뒤로 뺐다가 체중을 실어 퍼억! 내리찍었다.
“아으윽!”
너무 무자비한 움직임이었다. 더 이상 하면 몸이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진 리피는 순간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
이스리어의 움직임이 멎더니 곧 리피의 뒤통수에 얼굴을 박으며 엎어졌다.
“허으, 윽…!”
기절시켜놓으니, 오히려 체중이 실려 더욱 깊이 들어와 버렸다. 리피는 이스리어의 아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바르작거렸다. 단단한 팔뚝에서 겨우 팔을 빼내 이불을 붙잡고 커다란 몸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하으으….”
이스리어의 것이 내벽을 긁었다. 리피는 허리를 흔들고 싶은 걸 참으며 흉기를 내보내고 이스리어의 아래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침대 아래로 쓰러진 리피는 그대로 누워 헐떡였다. 너무 버거웠던 교합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가신들과 할 때는 늘 절정에 다다르지만, 이렇게까지 강한 오르가즘을 겪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렇게 되기 전 강간이라 판단한 보좌관들이 막아버리기 때문이었다. 두 차례 만에 자신을 이 정도까지 몰아세우다니 정말이지 칭찬할 만했다.
리피는 흐으, 신음하며 침대를 붙잡고 일어났다. 잠이 든 탄탄한 몸의 남자를 바라보는 리피의 시선에 애정이 가득했다. 크기와 테크닉, 정체를 알았음에도 다소 강압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까지 더할 나위 없이 취향이었다. 심지어 사정 한 번으로 얻을 수 있는 라타르도 많았다.
‘아쉽네….’
저번 여정에서 보더라는 신입을 데려왔기에 이번 여정에서 또 데려가면 가신들이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리피는 이스리어의 잔뜩 성난 등 근육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해야만 하는 일을 위해 나갈 준비를 했다.
***
밖은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리피는 은행에서 기타크와 그레이가 보낸 유리병을 찾았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여전히 무게는 느껴졌다. 요정왕이 탐냈을 텐데 잘 사수한 두 가신을 칭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전의 통로를 통과하려 할 때쯤 야문과 보더에게서 연락이 왔다. 리피는 둘에게 만날 장소와 시간을 지정해준 후 밀리밀리 요정의 수정 동굴로 넘어갔다.
곧장 소환진이 있는 장소로 향한 리피는 그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너는…!”
흉측한 외모의 마법사가 리피를 발견하고는 급히 후드를 뒤집어썼다. 7인교의 흑마법사였다.
“너 혼자구나.”
“정체가 뭐냐! 여긴 어떻게 왔지?”
“이제 시간이 다 됐으니 정비하러 왔니?”
“닥쳐라!”
흑마법사가 마법을 일으켰다. 리피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 마법에 걸려든 척했다. 검은색의 그림자가 사지를 구속했다.
“하, 별것도 아닌 게….”
흑마법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덴국의 은신처를 박살 내버린 마법사는 아닐지 걱정했던 것이다.
“어디서 보냈지? 정체를 밝혀라.”
흑마법사는 리피를 소환진 위로 옮겼다. 공중에 뜬 채 구속된 상태에서 리피는 심드렁한 얼굴로 감옥에 갇힌 제물들의 상태를 살폈다. 보더가 치유를 잘해놨는지 전처럼 죽어가는 모습들은 아니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너는 이곳에서 같이 제물이 되어주어야겠다.”
“이런다고 아로수의 수원을 소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뭐?”
“통로의 힘을 이용해서 아로수의 수원을 소환하려는 거잖아. 제물을 백 명 넘게 준비한 것도 모자라 통로 속 라타르를 이용하기 위해 은신처를 모두 통로에 지어놓고…. 준비 열심히 했는데, 겨우 이 정도로는 절대로 소환하지 못해.”
“어떻게 그걸….”
후드의 그림자 속에서 흑마법사는 순간 표정 관리를 못했다. 한덴국의 은신처를 와해시켰다는 마법사는 작은 체구의 미인이라고 들었다. 딱 맞아떨어지는 생김새였다. 흑마법사는 다시 마법을 일으켜 더 많은 그림자들로 리피의 몸을 꽁꽁 묶었다. 리피는 순순히 당해줬다.
“하, 이제 보니 너, 라타르가 다 된 모양이군.”
“포기하고 사람들을 풀어줘. 어차피 너희는 실패할 거야.”
“지금 상황을 알고나 있는 건가.”
흑마법사는 코웃음을 쳤다.
“조금 있으면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지나 말아라.”
“아로수의 수원을 누가 지키고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리피가 보란 듯이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렸다. 비웃음이었다.
“너희 설마 교만의 웨이더 프라이드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분에게 이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흑마법사의 어조가 달라졌다. 대현자를 섬기는 7인교답게 목소리에 존경심이 감돌았다.
“통로는 그 자체로 거대한 마법진이며, 차자국의 국경을 감싸고 있는 결계보다 더 상위의 것. 이 고대 마법사의 힘을 빌려 겨우 물줄기 하나를 소환하겠다는 거다. 바꿔 말하면 이 정도 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분의 결계를 뚫을 수 없다는 뜻이지.”
차자국의 국경을 감싸고 있는 결계는 대현자들이 만들고, 유지하고 있었다. 통로의 마법이 그 결계보다 상위이니, 웨이더 프라이드의 결계를 꿰뚫고 수원을 소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인데 리피로서는 비웃음만 흘러나왔다.
“그래… 지드에게는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없구나. 다시 만나면 말해줘야겠어.”
“지드…? 어떻게 그 이름을.”
그때 쿠웅- 큰소리가 울렸다. 흑마법사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투시 마법을 이용해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붉은 별의 그림자를 가리고 있었다.
‘일식의 날’이 시작되었다.
쿠웅, 쿠궁. 굉음과 함께 바닥이 흔들렸고, 천장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동굴이 붕괴하고 있었다.
“소환 후 바로 은신처가 붕괴되게 만든 거야? 나름 철저히 준비했네.”
리피는 이 상황에서도 여유로웠다.
온몸을 구속당하고도 뿜어져 나오는 여유에 흑마법사는 자신이 우위에 있음에도 왜인지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리피의 정체를 예쁜 외모의 침입자로만 알고 있음에도,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이는 것이다.
“언제 해? 다 무너지기 전에 해야지.”
“너… 제정신이냐? 소환진을 활성화하면 너도 같이 제물이 되는데….”
“언제 하냐니까.”
리피가 되물었다. 흑마법사는 초조한 기분에 혀로 입술만 훔쳤다. 그때 전자음이 들리고 흑마법사가 품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아로수의 소환진이 설치된 곳은 총 여섯 곳. 소환의 시각을 동일하게 맞추기 위해 상부에서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타이머의 시각은 3분이었다.
“…….”
02:59, 02:58, 02:57….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는 시간과 리피의 여유로운 표정을 번갈아 본 흑마법사는 곧 결심했다.
그는 태블릿을 조작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유스치파의 다다운이다. 잠깐 계획을 멈추길 바란다. 여기 어떤 애송이가….”
그 내용을 들은 리피는 내심 감탄했다. 흑마법사와 사이비 종교를 굉장히 얕보고 있고, 그 둘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리피로서는 저 흑마법사가 당연히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소환 마법을 진행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그 일도 있었고….”
-…….
“…아니, …알았다. 시각이 되면 시행하도록 하지.”
그러나 흑마법사와 통화한 자는 리피의 편견 속에 있는 사이비 교도가 맞는 듯했다. 중지 요청을 거절당한 흑마법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피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어쩔 수 없이 소환해야 하네.”
“닥쳐라.”
요청이 묵살 당한 흑마법사는 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노란색의 질척이는 뭔가가 담겨 있었다. 리피는 그것이 커널임을 바로 알아봤다.
유리병 하나를 전부 비운 흑마법사는 혐오스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 내다 버렸다. 챙그랑, 유리병이 산산조각이 나고 유리 조각에서 역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흑마법사는 찡그린 얼굴로 뱃가죽을 쓰다듬었다. 당장이라도 게워내고 싶은 걸 참는 듯 보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역겨운가 봐.”
“발정기에 접어든 반톨레스 남성 개체의 오줌이다.”
곧 죽을 사람이라 생각해서인지 흑마법사는 순순히 답해줬다. 그는 입가를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이 일만 성공하면 이딴 건 더는 마시지 않아도 돼….”
흑마법사의 중얼거림으로 리피는 지드가 어떤 말로 이런 실력 있는 흑마법사들을 끌어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모든 마법사들의 유구한 소원이었다. 커널을 찾지 못해도, 커널을 섭취하지 않아도, 라타르를 보유하는 것. 시한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
지드가 협조를 요청했을 때 똑똑한 흑마법사들이 순순히 수락했을 리가 없었다. 수많은 선조들이 실패한 과제라는 것도, 7인의 대현자, 차자국 황실, 10 대신관 등을 적으로 둔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지드는 전설에나 등장하는 통로를 보여주고, 아로수의 수원이 담긴 병을 이 일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증표로 보여주었을 것이다.
무한의 라타르…. 누구라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아주 강력한 유혹이었다.
“애송이, 네 정체는 모르겠지만 이제 끝이다. 제물들과 같이 여기서 죽어라.”
흑마법사는 소환진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공간 전체에 그려둔 소환진은 중심에 서 있는 마법사만 제외하고 모든 걸 제물로 희생시켜버릴 것이다. 소환이 성공한다면 말이다. 리피는 흑마법사의 그림자에 묶인 채 가만히 지켜봤다. 얼굴은 후드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태블릿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본 애송이의 말 몇 마디에 영향을 받아서 긴장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있을 일을 고대하는 떨림이었다. 염원했던 것을 곧 이루리라는 기대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5, 4, 3, 2, 1. 타이머의 시간이 다하는 동시에 흑마법사가 소환진에 라타르를 주입했다. 어느 고대 마법사가 통로에 깃들어놓은 거대한 라타르가 함께 반응했다. 소환진이 흑마법사의 라타르 색인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흑마법사는 이 공간에 가득하게 될 아로수의 수원을 기대하며 크게 양팔을 벌렸다.
“…….”
그러나 아무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있는 변화라고는 검은빛이 사그라지는 것뿐이었다.
“무슨…!”
당황한 흑마법사는 자신의 라타르가 다할 때까지 불어넣었다. 그러나 검은빛은 마지막 불씨가 꺼져가듯 희미해지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흑마법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검은빛은 소환진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통로의 라타르, 백 명이 넘는 산 제물과 수십의 흑마법사가 라타르로 새긴 소환진, 수많은 흑마법사 중 가장 큰 틀을 가져 소환진의 중심에 설 자로 선택된 자신의 라타르까지. 모든 걸 합해도 절반조차 채울 수 없었다.
‘대체 아로수의 수원을 지키는 결계는 얼마나 강력하다는 것인가.’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블릿이 징, 징 소리를 냈다. 전화를 받은 흑마법사는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라는 걸 들었다. 계획은 실패였다.
우선 동굴의 파괴를 막고 연락을 기다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다. 소환의 성공을 확신한 그는 여분의 커널을 챙겨오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너무나 허무하고 처참한 실패였다. 그러나 어차피 무한의 라타르를 얻는 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나았다. 흑마법사는 두 손을 늘어트렸다.
“지드가 예상 못 했을 리 없어.”
귓가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애송이가 있는 곳을 보니 몸을 구속해놓았던 그림자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애송이는 태평한 얼굴로 허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 녀석이라면 모든 상황을 가정해놨겠지.”
“대체 무슨… 말이냐.”
다홍색의 마법이 펼쳐졌다. 허공에서 나타난 그림자가 흑마법사의 사지를 묶었다. 저항할 라타르조차 남아 있지 않은 흑마법사로서는 그저 꿇어앉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계획은 틀어졌고 그의 마음속에는 허탈함과 허무함만이 가득했다.
“이제 어쩔 셈이냐. 날 제페아교에 데려가 고문해봤자 무엇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넌 내 가신들이 수거해갈 거야.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렴.”
“가신들…?”
흑마법사가 멍하게 리피의 말을 되물었다. 부하 혹은 수하거나 수행원이었지 가신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대현자들의 수행원들을 가신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다. 간혹 아주 오만한 이들이나 높은 지위의 귀족들만이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소환진은 제법 정교하게 만들었네.”
리피는 칭찬하면서 마법으로 소환진을 지워갔다.
“아, 안 돼…! 이걸 만드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어차피 실패했잖아.”
소환진에 깃든 라타르가 흩어졌다. 마법의 힘이 없어진 소환진은 이제는 낙서에 불과했다. 리피는 이 낙서까지 없었던 것처럼 지울 수 있었으나 증거용으로 남겨뒀다.
“아아….”
흑마법사가 탄식했다.
이 잠깐으로도 격이 다른 마법사임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이 요정 같은 외모의 애송이가 바로 그 한덴국의 은신처를 와해시킨 마법사였던 것이다.
“이제 시작할 테니 넌 조용히 있어.”
“뭐?”
흑마법사는 떨궜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엇을 시작한다는….”
“아로수의 수원 말이야.”
“소환진을 다 지워놓고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소환진이라….”
리피는 피식 웃었다.
“소환진을 지우면 소환 마법을 못하니?”
“…!”
“제물과 소환진은 라타르가 부족한 마법사들이나 필요하지.”
흑마법사는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 했다. 소환진이 없으면 소환 마법을 못 한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소환 마법에 드는 라타르는 대규모의 고급 마법 열 개를 동시에 펼치는 것과 맞먹으니까. 마법진이나 소환진, 공간이동진 등은 그 마법을 행할 때 소모되는 라타르를 대폭 절감시켜준다. 소환진 없이 소환을, 그것도 아로수의 수원을 소환하겠다는 건 맨발로 바다 위를 걸어가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맨발로 망망대해를 걸어 그 어떤 도구도 없이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르겠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리피의 다홍색 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흑마법사는 숨을 멈추고 바라봤다. 자신도, 제물들도 소멸되지 않고 멀쩡했다.
소환 마법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순간, 흑마법사는 이 마법사의 정체가 그분들, ‘대현자’ 중 하나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정도의 라타르를 가진 마법사는 그분들 외에는 없었다. 정말 대현자가 맞다면 저 퇴폐적인 아름다운 외모는, 색욕의 대현자 러스티 리피임이 분명했다.
지드 아자젤은 다른 대현자들의 외양은 모두 알려줬으나 러스티 리피의 외양만은 알려주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외모의 대현자라면 오직 그밖에 없었다.
“범…람 할…!”
흑마법사가 멍하니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발버둥 쳤다.
“안 돼, 안 됩니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왜 그래? 빨려 들어가고 싶어?”
“중심으로 오세요!”
흑마법사는 자신이 차지한 소환진의 중심으로 오라고 리피에게 외쳤다.
“범, 범람할 겁니다. 소환이 시작되면…!”
“중심으로 간다고 달라져? 소환진을 통한 마법도 아니고 소환진은 이미 사라졌는데.”
“그, 럼 어떻게….”
“만약 범람한다면 나 혼자 멀쩡하고 너랑 제물들은 다 죽겠지.”
“아….”
그 말에 흑마법사는 오히려 안도했다. 흑마법사는 7인교의 신도였다. 지드 아자젤이 끌어들이기 전부터 그는 7인교였다.
영원한 라타르를 추구하는 마법사들 중에는 대현자들을 존경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질투하고 시기하는 자들도 그만큼 많지만, 존경하는 이들은 대부분 존경을 넘어서 말 그대로 광적이었다. 대현자를 살아 있는 신으로 모시는 광신도였다. 자신의 목숨도 계획의 실패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현자 러스티 리피와 말을 섞었는데 더 무엇이 중요할까. 여기서 죽는다 해도 영광스러운 죽음이었다.
“어차피 수원은 그 녀석이 지키고 있어서 범람할 만큼 많이 소환되지 못해. 한두 방울이나 떨어질까.”
“그 녀석이라면….”
“오랜만에 보겠네.”
리피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아, 너는 이만 잠들도록 하렴.”
리피가 흑마법사를 흘깃 바라봤다. 흑마법사는 뭐라 입을 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수면 마법에 의해 잠에 들었다. 리피는 사지를 묶고 있던 그림자를 풀어주고, 흑마법사가 정신을 잃음으로써 최면 마법에서 풀려나는 사람들도 모두 잠재웠다. 동굴이 붕괴되는 것도 간단히 멈추게 했다.
뚝, 뚝.
순식간에 고요해진 공간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리피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방울이 천장에서 땅으로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리피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허공의 틈을 가르며 순백의 차자국 전통 의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백금발의 머리칼은 물기에 젖어 흔들렸고, 허무로 가득 찬 푸른 눈은 빛이 바래져 있었다. 무심하고 허무한 얼굴로 천천히 공간을 훑던 남자가 리피를 발견했다.
“…….”
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푸른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안녕, 리피.”
“…웨이.”
리피는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리피에게 다가오는 그 또한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