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8)

2.

보통 어딘가로 이동할 때는 마법으로 공간이동하지만, 공간이동진이 설치되지 않은 소도시에서는 기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리피 정도의 대마법사는 진의 유무와 상관없이 워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왕이 불허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결계에 가까워질수록 육지 교통수단만 허용하는 도시가 많아서 전용기라는 훌륭한 교통수단은 고려해보지도 않았고, 러스티 공작 가 전용의 리무진이 열 대가 넘었으나 눈에 띌 것이 분명하므로 기차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날 밤의 격렬했던 잠자리로 늦게 잠이든 리피는 하품하며 저택을 나왔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새벽 시간에 저택에서 출발해야 기차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계획대로 한참 자고 있는 왕의 까마귀는 깨우지 않고 수도로 잘 돌아가라는 메시지만 전달하기로 했다.

저택 입구에는 외부에 있지 않은 가신들이 모두 나와 있었는데, 리피는 그들이 챙겨놓은 짐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다 뭐야?”

짐을 가득 올린 트럭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거의 이삿짐 수준이었다. 리피는 어안이 벙벙해서 야문을 바라봤다.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이 필요해?”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뭐, 뭐 있는데.”

“침대와 베개 3개, 이불 시트 5개, 간이전류소, 세탁기….”

“…….”

“식사 테이블, 티 테이블, 의자 5개, 흔들의자 1개, 흔들의자용 쿠션 1개, 데스크탑, 스피커.”

“미치겠다….”

야문은 매사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매사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서 꾸려놓은 짐들이 이 정도였다. 그러니 다른 가신들의 반응은….

“이걸로는 아직 한참 부족하지. 남은 짐들은 우편으로 부치는가?”

털이 북슬북슬한 로모어.

“리피 님께 질 좋은 식사를 대접해 드리기 위해서 냉장고도 있었으면 하는데요.”

요리를 맡은 그레이워드.

“리피 님의 모습을 담을 액자 몇 개와 이젤도 챙기고 싶군.”

“앗, 캠코더를 까먹었어요. 영상편집기도요.”

화가 기타크와 신입 보더까지.

다들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리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얘들아, 우리 야영 같은 거 안 해… 기차 타고 다닐 거고 도시에 들릴 때마다 깔끔한 호텔에서 묵을 거야.”

“기차를 길게는 일주일 동안 타야 하지 않습니까. 다 그때 쓰일 물건들입니다.”

“저것들이 기차에 다 들어가긴 해?”

“짐칸 한 칸을 통째로 빌렸습니다.”

“넌 너무 유능해….”

어제 오후에 결정됐는데 어느새 빌려놓고 짐 준비까지 끝내놓았단 말인가. 야문은 정말이지 유능한 보좌관이었다.

동행하지 않는 가신들도 은여우 털 코트나 모시 이불도 가져가라고 한 마디씩 보태니 금세 어수선해졌다.

가신들이 해달라는 건 웬만하면 모두 들어주는 다정한 리피였으나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해서 짐은 대폭 줄어들었다. 줄어들어도 승합차 트렁크에 다 못 들어갈 만큼 많은 게 문제였지만.

가신들은 기차역까지 배웅을 나가고 싶어 했으나 리피가 거부했다. 리피의 외양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곳, 체니르는 리피가 다스리는 도시라는 사실과 리피의 가신들이 무척 뛰어난 외양의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소문을 조합하면 기차역의 저 무리가 리피와 가신들이라는 것을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러스티 공작이 꽤 긴 시간 도시를 떠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가신들은 각자 저마다의 성격대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는 애써 웃었다. 왕의 명으로 이튿날 바로 떠나거나 심지어는 당일에 바로 떠나는 경우는 많았으나 이렇게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리피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가신들의 입술에 하나하나 입 맞춰주었고, 리피보다 커다란 체격의 사내들은 줄지어 입술을 맞추고 망극해했다.

리피는 가신들의 배웅을 받으며 말에 올랐다. 말은 다섯 마리였고, 사람은 여섯이라 리피는 야문과 함께 말에 올랐다. 기차역까지는 야문과 함께지만, 기차에서 내리고 난 후에는 상황을 봐서 다른 가신으로 동반자를 교체해야만 했다. 그리하지 않으면 시기와 질투로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

기차는 이미 역에 들어와 있었다.

야문은 짐칸 한 칸과 특실 여섯 칸을 빌려놓았다. 짐은 리피가 최대한 간추렸지만, 여전히 많은 수였다. 가신들이 짐을 싣는 동안 리피는 플랫폼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별의 슬픔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그림자도 없었다. 머릿결에는 윤기가 돌았고, 입고 있는 옷은 갓 빤 것처럼 보송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과 따스한 햇살 사이로 하얀 나비가 날아다녔다. 러스티 리피가 다스리는 체니르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이었다. 7인의 대현자라는 칭호가 생기기도 전, 아주 오랜 옛날부터 체니르는 리피의 도시였고, 리피는 심경 변화로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도 늘 이곳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아니, 짐칸을 이용할 수 없다니 무슨 말입니까?”

“말했잖소. 통째로 빌린 양반이 계시다고.”

“다른 승객의 짐까지 고려해서 빌려줬어야지. 지금 와서 이러면 됩니까.”

“미안하게 됐소. 최대한 줄여보시오.”

감상에 빠진 리피가 뿌듯함과 흐뭇함으로 미소 지을 때 짐칸 쪽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리피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승무원과 실랑이를 하고 중절모를 쓴 사람은 키 크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 짐칸을 통째로 빌렸단 말입니까?”

“그 어떤 놈이 헤븐이벤 상회라 어쩔 수 없었소.”

헤븐이벤 상회는 차자국은 물론 아로수의 12국 중 여섯 곳에 가지를 뻗은 세계적인 무역 회사였는데, 사실은 리피와 가신들이 활동할 때 사용하는 유령 회사였다.

“잠깐, 짐칸 창문을 보세요. 빈 곳이 있잖습니까.”

중절모 청년이 짐칸 두 개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안쪽은 텅텅 비어 있었으나 승무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곳이 통째로 빌린 곳이오.”

“저렇게 자리가 남으면 제 짐을 실을 자리도 충분하겠는데, 그 양반이 누군지 양해 좀 구해보십시오.”

“어허, 안 된다니까 이 청년 참.”

중절모 아래의 짙은 감색 머리칼은 결이 좋았고, 어깨가 넓으면서도 허리는 잘록하며 다리가 길게 쭉 뻗어 있었다. 고위급 자제인지 화가 난 와중에도 태도는 우아했다.

“제가 돈을 더 드린다고 해보십시오. 두 배, 원한다면 세 배로 드리겠습니다.”

목소리도 제법 단정했다.

“난처하게 하는구만. 헤븐이벤 상회는 체니르의 터줏대감이라 돈을 얼마를 줘도 안 된단 말이오.”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짐 실으세요. 이분 말고 다른 승객들도 짐이 있다면 실으라고 하세요.”

실랑이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짐칸을 빌린 이의 주인인 리피였다. 승무원은 먼저 리피의 외모에 시선을 빼앗겼다. 주홍색 머리에(러스티 리피가 검은 머리라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 자주 염색한다) 하얀 피부, 별이 빛나는 밤하늘 같은 눈동자, 살짝 올라간 눈꼬리… 묘하게 색기가 감도는 예쁘장한 외모였다.

“학생은 누구…?”

“헤븐이벤 관계자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짐이 많이 줄었거든요. 다른 승객들 짐도 실어도 됩니다. 비용은 제대로 지불할게요.”

“학생이 헤븐이벤 관계자라고? 예약한 목소리는 달랐는데.”

“예약한 사람은 내 집사입니다. 곧 전화 올 테니 기다리세요.”

야문과 미리 말해놓은 적은 없지만, 분명 뛰어난 청력으로 이 대화를 듣고 있을 터이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리피는 승무원의 휴대폰이 울리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청년의 외양을 구경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청년은 중절모 아래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작게 고개를 꾸벅했다. 자세히 보니 차자국 사람이 아닌 듯 이국적인 생김새였다.

-지이잉.

곧 승무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예.”

전화를 끊은 승무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짐칸을 개방하라는 소식을 전했다. 청년은 크게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승무원은 리피에게 고맙다고 거듭 인사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떠났다. 갑작스러운 지시로 열차의 출발 시간이 다소 늦어지게 되었다.

“양해해줘서 고맙구나. 나이가 어린데도 헤븐이벤 상회 관계자라니, 수습직원인가?”

“헤븐이벤의 마법사예요. 어리지도 않고.”

“마법사?”

중절모 청년이 마법사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그럴 만했다. 청년은 체니르시와 붙어 있는 발탄톱시 아카데미의 마법수련사 복장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목소리 좋고 몸 좋은 미남이라도, 목소리 좋고 몸 좋은 미남이 사방에 깔린 리피가 흥미를 보일 리가 없었다. 리피는 마법수련사라는 사실에 후한 점수를 쳐준 것이다.

“너 같은 어린애가 마법사라고?”

청년이 중절모 아래에서 코웃음을 쳤다. 리피의 입장에서는 새파란 핏덩이에게 비웃음 당한 상황이었지만 워낙 흔한 일이라 개의치 않았다.

“어리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마법을 부린다는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

리피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단정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삭막한 성격이 내비쳤다.

“미안합니다. 경솔했군요.”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와는 반대로 깔끔한 사과가 돌아왔다. 그 또한 리피의 마음에 차는 행동이었다.

“짐이 커서 객실에는 실을 수가 없었는데 덕분에 해결됐습니다. 세 배의 값을 바로 지불해드리죠.”

“괜찮아요. 나도 남는 게 돈뿐이라.”

“하긴 헤븐이벤의 마법사라고 했죠. 상회의 임무를 맡은 겁니까? 어디로 거래되는지 궁금하군요.”

“사우스지를 거쳐 국외로 나가는데, 그쪽은… 아, 이름이….”

“이스리어입니다. 이스리어 델로. 헤븐이벤 분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리프예요. 델로 씨 같은 발탄톱시 아카데미 분이 무슨 일로 우리 체니르시에 오신 건가요?”

“…역사 깊은 체니르시의 마법 유적을 직접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러스티 리피가 천 년 전에 세웠다는 빛의 기둥은 죽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할 문화유산 중 하나니까요.”

리피는 청년이 대답하기 전 한 박자 쉰 것을 알아챘지만 모른 척했다.

“그래서 실물은 직접 구경했습니까?”

“빛의 기둥 실물도 보고, 러스티 공작 가의 대저택 대문도 다녀왔습니다. 과연 위엄에 압도되더군요. 비록 저택의 일원은 마주치지 못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문은 평범한 대문이 아니었다. 저택에는 리피와 가신들이 이용하는 대문이 있고, 그 앞으로 넓은 숲이 펼쳐져 있다. 이 숲을 지나면 일반인들이 관광하는 대문이 나온다. 리피는 가끔 서비스 겸 자신이 집에 있다는 신호 겸 가신을 내보내 인사시키고는 했다.

“현재 러스티 대공작께서 쉬고 계신다던데 직접 보지 못해 무척 아쉬웠습니다. 리프 씨는 임무의 총괄 책임자이시죠? 중요 직책을 맡을 정도이니 대현자님을 뵌 적도 있겠군요. 소문대로 미인이십니까?”

“실물 별거 없어요. 오히려 당신이 훨씬 잘생겼지.”

“예?….”

“몸 좋은 마법사는 별로 없는데, 어깨도 두껍고. 체술도 뛰어난가 봐요.”

리피가 잘생긴 사내를 칭찬하는 건 숨 쉬듯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스리어는 미인 마법사의 외모 칭찬을 들으며 그려낸 듯 미소 지었다.

“당신이야말로 무척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러스티 공작님이 미인이어도 당신보다 못할 것 같군요.”

“경솔한 발언이네요. 기분은 좋지만.”

“당신은 농담이었겠지만, 전 진심입니다.”

“나도 진심이에요. 앞으로 며칠 기차에서 함께 보내면서 마주치면 종종 이렇게 얘기하면 좋겠네요.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은 지루하거든요. 지금 당장도 기차 타고 나면 바깥 구경 말고는 할 일이 없어서….”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 짐을 옮긴 후….”

“…….”

함께 차라도 마시자는 대사를 기다리며 눈웃음을 짓고 있던 리피였으나 청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스리어 씨?”

이름을 부르자 청년이 순간 숨을 멈추며 뒷걸음질 쳤다.

중절모 모자 아래에서 건강하게 혈색이 돌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안합니다. 이제 짐을 실으러 가야겠군요. 짐꾼이 다른 승객들에게 다 가버리기 전에 말입니다.”

청년은 리피가 아니라 허공을 보며 얘기했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리피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수작이 거절당한 건 오랜만이었다.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청년의 뒤쪽으로는 검은 천에 꽁꽁 싸인 커다란 짐이 놓여 있었다.

희미하게 물비린내가 났다.

“그래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좋은 여행이 되길.”

“좋은 여행이 되길.”

청년은 곧장 손을 들고 짐꾼 두 명을 불렀다. 리피는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는 모습을 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가신들은 막바지 짐 정리를 하는데 야문만이 혼자 멈춰 서서 리피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리 언질도 않고 짐칸을 개방하게 한 주인이 다가오자 야문이 한마디 했다.

“또 쓸데없는 짓을 하셨군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덕분에 공간이 좁아져 소파를 포개놓았습니다.”

리피는 어깨를 내려뜨리며 투덜거렸다.

“그럼 2인용 소파 세 개를 안 포개고 어떻게 두려고 했던 거니. 쓸데없는 건 우리가 넓은 칸을 차지하고 있는 게 쓸데없는 짓이지. 아니, 애초에 소파를 가지고 오는 게 아니었어. 세상 누가 잠행할 때 소파를 가지고 다녀.”

“귀엽군요.”

“뭐?”

생뚱맞은 칭찬이었다. 리피의 잔소리가 아기 새의 첫 지저귐으로 들리는 듯했다. 가신들은 종종 이렇게 이성을 거치지 않은 찬양을 툭툭 내뱉고는 했다.

“짐 정리도 끝나가니 미리 들어가 있죠.”

그는 리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젠가 리피가 그랬던 것처럼.

“잠깐만, 야문. 저 사람 어떻게 생각해?”

“당신 취향이더군요. 제법 얼굴이 있고, 키도 크고.”

“아니, 그거 말고… 물론 그 말도 맞지만, 그보다는 마법에 대해서. 아로수 마법수련사인 것 같지?”

“저 인간이 아로수든 커널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관심이 무척 많으신가 봅니다.”

“타국의 마법수련사가 우리나라, 그것도 내 도시에 왔으니 관심이 많은 거야.”

리피는 결백함을 주장했지만 야문의 눈빛은 무척 냉랭했다.

“목적보다는 외양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요. 뭐, ‘어깨도 두껍고, 체술도 뛰어난가 봐요’?”

“이상하잖아. 한참 커널 찾기 바쁜 아로수 마법수련사가 그렇게 몸이 좋은 게.”

“짐을 모두 실은 후 함께 차를 마시자는 대답을 기다리며 예쁘게 눈웃음 짓고 있던 모습을 우리 모두가 봤습니다만. 대화를 나누다가 몸의 대화도 나누고 싶었나 봅니다.”

“그건….”

체니르에 온 목적을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리피는 야문의 손바닥 아래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야문이 대표로 시위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가신들도 이미 모든 대화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 상태일 터였다.

다들 삐쳤을까….

리피가 오늘 밤 이벤트라도 해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때마침 그레이가 손을 흔들었다.

“짐 정리 끝났어요. 객실에 들어가시죠.”

“난 바깥바람 좀 쐬다가 나중에 갈래.”

“사람들이 짐을 싣기 시작하면 먼지가 날릴 겁니다.”

“먼지가 날리면 얼마나 날린다고.”

“리프!”

로모어가 리피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그레이가 그대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만들어왔다는군. 배가 출출한데, 어서 가세나.”

“넌 진짜 항상 배가 고프네.”

리피는 가볍게 웃었다. 로모어가 야문에게 추궁당하고 의기소침한 자신을 달래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디저트가 뭔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당연히 머랭 쿠키지 않겠는가.”

“로모어 씨, 드디어 머랭 쿠키라는 이름을 외운 겁니까? 맨날 뭐시기 쿠키라고 불렀잖아요.”

“그럼, 우리 공작이 좋아하는 거라면 외워야지.”

기타크가 핀잔을 주자 로모어가 털털하게 웃으며 리피의 어깨를 감싸왔다. 키는 210cm에 팔뚝이 리피의 머리통만 한 우람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 어여쁜 리피에게 치대니 불한당처럼 보였다.

“호칭 조심해요. 공작님은 밖에서는 리프라고 불러야죠.”

“그대야말로 지금 공작이라고 하질 않았나.”

“저기, 로모어 님, 기타크 님…. 지금 다들 너무 그 단어를 쓰고 있는데요.”

“바보들, 신입도 실수 안 하는데 지들이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요.”

그레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리피는 귀여운 재롱을 보듯이 웃었다. 리피의 웃는 모습에 야문의 냉랭했던 마음도 풀어져서 객실로 함께 들어가는 길은 평온했다.

사실 주변은 이미 개성 가득한 일행에게 시선이 집중된 상황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뜨겁게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리피와 함께 차를 마실 뻔했던 이스리어였다.

그는 특실 객차로 향하는 일행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곧 자신의 커다란 ‘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짐’이 외로워하지 않도록.

***

“입안에서 살살 녹고 아주 달달하네요.”

“음… 제 취향은 아니에요.”

“당신 취향이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우리 공작님 입맛이지. 어때요, 리피 님? 맛있어요?”

“응, 잘 먹었어.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주라.”

“보좌관께서 허락하시면요.”

“너무 달아서 안 됩니다.”

물론 야문 보좌관은 냉철하게 불허했다. 그레이워드가 몸에 좋지 않은 재료를 잔뜩 쓸 리가 없는데도 단 걸 많이 먹으면 안 좋다고 아주 단칼에 잘랐다.

다섯 가신은 자신의 특실에는 가방만 툭 던져놓고 모두 리피의 특실에 바글바글 모였다. 앞으로도 잠잘 때 말고는 계속 이런 상태일 터였다.

그들은 기차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풍경을 감상하는 리피를 감상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 대화로 웃음꽃을 피웠다.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은 그레이워드였고, 가장 질문이 많은 사람은 보더였다. 신입인 보더는 지금 이 상황의 모든 것이 신기한 듯했다.

“결계 지역이라 다섯 명이나 같이 가는 거면 더 안전지대일 때는 몇 명이 가는데요?”

“글쎄, 세 명 정도? 대부분 공간 이동할 수 있어서 시간 얼마 안 걸리니까. 이렇게 긴 여정일 때 함께한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지.”

“정말이지 임금님의 까마귀가 왔을 때 우연히 같이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가란노바가 욕하더라. 막내가 자길 제치고 올라갔다고.”

“아, 가란노바가 기타크 옆방이었죠.”

“그래, 밤새 울어서 얼마나 시끄럽던지.”

기타크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리피 님의 192번째 초상화를 완성하지 못하고 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타크는 가신들 중 유일한 화가였다. 그동안 음유시인이나 소설가, 시인은 몇몇 있었지만 화가는 기타크가 유일했기 때문에 가신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다. 그는 리피의 그림을 그려서 돈을 받고 팔기도 했다. 그 돈은 모두 리피에게 바칠 선물을 구입하는 데에 쓰였다.

“보더, 너는 이번이 몇 번째 여정이지?”

“처음이에요.”

“겨우 첫 번째에 이렇게 긴 여정이라고? 이런 운 좋은 새끼.”

“처음이라니… 자네 설마 신입인가?”

“아, 예. 작년에 들어왔습니다.”

“작년에 신입이 들어왔었구만….”

“로모어 씨, 집안일에도 관심 좀 가져주세요.”

가신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리피가 웃음을 터뜨렸다.

“신입이 온 것도 모르고 있으면 어떡하니. 너희들끼리 워크숍이라도 가야겠구나.”

리피의 웃음소리는 꽃망울이 톡, 톡 터지는 것 같아서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옆을 지키던 야문도 미소 지을 정도였다.

기타크는 리피를 그리기 위해 화구를 꺼내면서 말했다.

“사실 나도 네가 작년에 온 줄은 몰랐는데. 작년이면 우리 공작님 한창 나쁜 소문 돌 때 아니었나.”

“맞아요. 한창 그 소문 돌던 그 시기였어요. 저는 작은 마을의 신관이었는데, 교회에서 리피 님 편을 들다가 마침 잠행 나오신 리피 님과 마주쳤죠….”

보더는 수줍게 말을 이어갔다.

“리피 님의 대외적 신분이 신관수련생이어서 연하늘색 허리띠를 졸라맨 신관복을 입고 오셨는데, 신의 사자라고 해도 믿었을 거예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얼마나 심장이 뛰던지… 그때 야문 보좌관님도 계셨어요.”

“그때도 리피 님은 신관들에게 개수작질을 걸었지. 널 포함해서.”

개수작질이라니… 리피가 한마디 하려는데 보더의 목소리가 기쁜 듯이 한 톤 올라갔다.

“맞아요. 아까처럼 심심하다고 자기가 묵는 호텔 방에 놀러 오라고 하거나 넓지도 않은 신전을 길 잃을 것 같다고 길 안내해 달라고 하거나… 십수 년 순결을 지키고 살았던 신관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하룻밤 사이에도 서너 명씩 신전을 떠나고는 했죠. 심지어 대신관님까지 리피 님의 발등을 핥았어요.”

“누가 색욕의 러스티 리피 아니랄까 봐. 하긴 그 정도이니 나도 삼 일 만에 넘어가 버렸지.”

“그레이는 어떻게 만났는데요?”

“난 웬도 수도 호텔 레스토랑의 셰프였어. 그날도 열심히 디저트 만들고 있는데 지배인이 와서는 헤븐이벤의 관계자가 내 요리에 대해 칭찬하고 싶다는 거야. 나가보니 웬도에서는 보기 힘든 엄청난 미인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 나를 세워두는 게 아니라 맞은편에 앉히고는 어디서 영감을 받았냐, 원래 단 걸 좋아하냐 등등 질문을 쏟아냈어. 테이블 밑에서는 쭉 뻗은 발로 내 바짓단을 걷어내고 종아리를 감고 올라와 허벅지를 쓸어 올렸고.”

“맙소사….”

보더가 음란 영화를 보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그러고는 체리를 입술 사이로 쏙 넣으며 ‘달달한 디저트를 많이 먹으면 그것도… 달달해질까요? 셰프님은 어때요?’라고 하는 거야.”

“세상에….”

“그날 밤 바로 호텔 룸을 잡고 한바탕했지. 리피 님은 지금처럼 달디단 과일주스 마시듯 내 정액을 마셨어.”

가신들의 눈길이 리피에게 쏠렸다.

“큽, 콜록, 콜록.”

사과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다 말고 사레들린 리피의 등을 야문이 어루만져 주었다.

“그렇게 몸부터 맞고 그다음 빠져버렸지, 뭐.”

“결국 우리 공작이 먼저 접근한 거로군.”

“그렇죠. 로모어 씨는요?”

“야… 그런 얘기는 좀 나 없을 때 하면 안 돼? 어차피 다 알면서….”

“아, 리피 님은 좀 가만히 있어 봐요. 로모어 씨의 얘기, 신입은 모르잖아요.”

그레이에게 꾸짖음을 들은 리피는 타는 목에 사과 주스를 들이켜려다가 그냥 창문 밖만 바라봤다. 가신들끼리 첫 만남 얘기하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여전히 민망했다.

“나는 내가 먼저 접근했지. 추운 겨울밤, 삼각눈곰을 잡고 숲 입구 산장에 들어갔는데 1층 호프에서 검은 로브로 머리끝까지 가린 사람이 구석에 혼자 있었다네. 자신의 미모를 가리려는 거였겠지만 무척 시력이 좋은 내가 맥주잔에 비친 아름다운 미모를 알아채 버리고 말았지. 같이 술이나 마시자며 접근했는데 이 미인은 잠깐 고민하더니 흔쾌히 수락하더군. 그리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로 위층 내 숙소에서 뜨거운 밤을 보냈는데, 내 우람한 크기를 다 받아내겠다고 목구멍까지 열면서 애쓰던 얼굴이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하다네. 다음날 보니 입가가 찢어져 있어서 무척 미안했지.”

“로모어 씨의 것은 흉기니까요. 우리 리피 님의 입술은 무척 조그맣고….”

내용은 걱정하는 것 같지만 그레이와 기타크, 보더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리피의 목덜미를 쳐다보았다.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아 있어서 더 야했지만 그림 속의 떡이었다. 야문 보좌관이 냉랭한 얼굴을 유지한 채 리피의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기타크는요? 기타크도 몸부터예요?”

“아니, 난 나름 마음이 먼저였어. 그때 난 부유한 재산가의 후원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거리 화가였고, 며칠간 같은 시각에 거리를 지나가는 값비싼 옷을 입은 무리를 관찰하고 있었지. 헤븐이벤 관계자라는 얘기를 듣고 역시 다들 아름답고 잘생겼구나, 하고 말았고 깊은 관심은 없었어.”

기타크는 그림을 그리던 것을 멈추고 꿈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린 날이었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에 갑작스러운 비로 장사를 공치고 상심하면서 화구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멈추는 거야. 고개를 드니 매일 거리를 지나가던 미인이 우산을 씌워주며 미소 짓고 있었지. 얼빠진 내가 병신같이 고맙다는 인사도 잊고 ‘왜 이 시간에…?’라고 묻자, ‘늘 거리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소나기로 젖을 것 같아 걱정돼서 왔어’라고 하시는 거야. 순간 리피 님이 천사처럼 보였지.”

허흡, 하는 탄식이 들려왔다. 그레이, 로모어는 이미 아는 스토리라서 반응이 강하지 않았지만, 처음 듣는 보더는 제가 더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반할 수밖에 없겠네요. 제가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여러 번 들었지만 우리랑은 다른 순수한 시작이야.”

“그렇지.”

기타크는 웃으며 ‘내 만남이 제일 운명적이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레이와 로모어도 각자 자기 만남이 제일 운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겉으로는 절대 표현하지 않았다. 자신의 만남이 제일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리피를 독점하는 것만큼이나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네 이야기도 해봐, 보더. 듣다 말았네.”

“그러고 보니 신입, 자네는 얼마 만에 함락됐나.”

“아, 전 제일 마지막에….”

보더는 부끄러운 듯이 몸을 배배 꼬았다.

“대신관보다 더 오래 버틴 거냐?”

“예, 부끄럽지만 전 그때까지 자위 한번 한 적 없었고… 이 아름다운 분이 내게 하시는 행동이 유혹이라는 것도 몰랐거든요.”

“동정이었구만.”

로모어가 호탕하게 웃었다. 가신들 중에는 리피로 섹스를 알게 된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이었다.

“첫 관계 때 서툴렀겠네. 우리 공작님이 잘 리드해 주셨지?”

“아, 처음은… 그… 입으로만 했어요. 리피 님이 라타르가 소진되셔서 급하게 제 것을… 빠, 빨아주셨거든요.”

보더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그것참 기적이군. 동행한 가신들이 우연히 옆에 없었나.”

“그래서 어땠어? 자위 한번 안 하다가 세상에서 제일 펠라를 잘하는 사람이 빨아준 느낌은?”

“…너… 너무 부끄러워 말을 못 하겠어요….”

보더의 얼굴은 빨갛게 익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진짜로 심장박동이 귀에 들릴 만큼 거세서 선배 가신들은 순진한 막내를 그만 놀리기로 했다.

“너무 순진하네”, “아직 순수해” 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리피는 작년의 일을 떠올렸다. 지금은 저렇게 수줍어하고 있지만 그때 보더는 짐승 같았다.

처음에는 어떻게 당신의 입안에 이런 걸 넣느냐며 거부하다가 나중엔 뒷머리를 붙잡고 강제로 목구멍을 열게 했다. 그러고는 몇 번 빠르게 왕복 운동을 하는데 크기가 너무 크고, 동정이라 이 각도 저 각도 다 찌르다 보니 구역질이 나오고 숨 막혔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을 때쯤 보더는 리피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아 고정시킨 채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흡, 커업!’

‘죄송해요, 흑, 계속 나와. 가만히 있어요. 죄송해요.’

‘큽…!’

‘리프, 윽, 당신의 입안이 너무 좋아요. 죄송해요. 숨 막히죠? 죄송해요.’

‘커읍… 컥!’

‘죄송해요, 리프. 숨 막힐 텐데, 너무, 너무 좋아. 하윽, 계속 쌀게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입으로는 사과하면서 좆으로는 끊임없이 정액을 뿜어댔다. 채 다 흡수되지도 못해 입술을 타고 흘러내릴 만큼 엄청난 사정량이었고, 보더는 자신이 그것을 모두 마실 때까지 머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아무것도 모르는 초식동물 같은 생김새로는 상상하지 못할 굉장히 짐승 같은 행위였다.

“아, 근데 리피 님은 이 순수한 신관과 어떻게 가신 서약까지 했어요? 그냥 긴급한 순간에 커널을 흡수한 걸로 끝냈어도 될 텐데.”

그레이가 물어왔다. 리피는 괜히 야문에게 기대며 눈을 흘겼다.

“언제는 난 가만히 있으라며.”

“우리 리피 님, 어린애처럼 삐지지 말고 빨리 대답해주세요.”

그레이가 애교를 부리며 살살 달래자, 리피도 더는 튕기지 않았다.

“그 도시의 신전에서 사람들이 내가 라스, 문이랑 악티코를 멸망시켰다는 소문을 얘기하면서 욕하고 있는데, 어떤 어린 신관이 ‘악티코가 먼저 러스티 공작에게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잘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며 편들어줬었어. 그때부터 찜해뒀지.”

“저, 정말요? 들으셨다니 몰랐어요…. 그때 리피 님도 계셨구나….”

보더는 자신과 리피의 만남이 운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열심히 내 편을 들어주다가 욕하던 사람이 ‘그럼 그 잘못이 대체 뭐길래 멸망까지 당했어야 했냐’고 묻자 대답을 못했지만 말이야.”

“죄송해요, 악티코가 저지른 잘못이 뭔지 잘 몰라서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죠. 저희도 대충 주워듣기로만 알고 있는데요.”

“내가 말한 적 없나?”

“공작은 말한 적 없다네. 지금으로선 악티코 왕의 극악무도한 짓거리를 아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열도 안 되지. 그렇지, 야문 보좌관?”

“맞습니다. 오백 년 전의 일이니까요.”

야문은 리피의 다 비워진 사과 주스 컵을 물컵으로 교체해주며 대답했다.

오백 년 동안 또 많은 가신들이 수명을 다했구나 싶어서 씁쓸해진 리피가 목을 축일만 한 것을 찾을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리피가 물을 한 모금 홀짝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구나….”

리피의 나이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천 년 이상을 살아온 것은 확실했다. 그만큼 수많은 죽음을 겪어와 놓고도 언제나 이렇게 쓸쓸해했다.

“악티코의 일은 혹시 기밀인가요?”

“응? 기밀 아니야. 알고 싶니?”

“예!”

리피가 방긋 웃자 보더가 냉큼 대답했다. 그레이워드와 기타크도 눈을 반짝였다.

“당시의 차자국 왕이 일반 사람들이 알기에는 너무 속되었다 해서 대외적으로는 ‘악티코의 왕이 제국에 반란을 꿈꿨다’라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나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어.”

“리피 님이요?”

“응.”

여기서 리피가 ‘그냥 심심해서 멸망시키기로 했어.’라고 말해도 맹목적인 가신들은 ‘심심하셨다면 당연히 소국 하나쯤은 멸망시켜도 되죠’라고 대답할 터였다. 잠깐 놀릴까 고민하던 리피는 그냥 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당시에 난 악티코의 왕자와 친해서 자주 만나고는 했었는데… 어느 날 왕자의 아버지, 그러니까 악티코의 왕이 내 찻잔에 수면제를 탄 거야. 그러고는 모든 라타르가 소진될 때까지 구속구를 채우고 가뒀지. 날 구하려던 제 아들은 감옥에 가두고 말이야. 왕자가 간신히 탈출해서 차자국에 사실을 알릴 때까지 온갖 고초를 겪었어. 그 왕이 진성 변태에 S 성향이 있어서… 그때는 S나 M 같은 개념도 없었지만 말이지. 요도 고문은 기분이고 간수들의 윤간에, 목마 딜도에. 제일 싫었던 건 크오시랑 했던 거야. 마물의 흉측한 성기도 문제였지만, 육중한 무게 때문에 숨도 못 쉴 정도였거든. 진짜 힘들었어.”

“…….”

“치사하게 강간하고 윤간하면서도 절대로 내 안에 싸지르지는 않더라고? 왕자에게만 밝혔던 내 커널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 아무튼 라스랑 문이 구하러 오고 급히 라타르를 회복해서 왕부터 도륙을 냈어.”

“두 현자님들로 라타르를 회복하셨다는 거군요.”

“응, 난 거기서 끝내려고 했는데 분노한 라스랑 문이 아예 왕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렸지. 말릴 새도 없었어. 이게 끝이야. 별거 아니…지…?”

가벼운 말투로 얘기를 끝내던 리피의 솜털이 쭈뼛 솟았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가신들의 눈빛에 어두움이 감돌았다. 최소 20cm 차이 나는 장신의 사내들이 살짝 맛이 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리피는 저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뺐다.

분명 분노였다. 자신의 주인에게 감히 그딴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지른 자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신들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리피는 한 가지 더 눈치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네 발기했니…?”

“예, 했습니다.”

“당연하죠. 당신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세우는 놈들을 데려다 놓고 그런 수위 높은 얘기라니.”

“정말이지 자기 무덤을 파십니다.”

리피는 기가 차서 벌떡 일어났다.

“너넨 주인이 그런 험한 짓을 당했는데 화를 내야지 왜 발기를 해!”

“물론 화도 납니다. 죽고 나면 제일 먼저 악티코의 왕을 찾아가 다시 죽이겠습니다.”

야문은 서늘하게 말하며 리피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무릎 위로 앉혔다.

“지금은 우선 이것부터 하고 말입니다.”

그는 곧바로 뒤통수를 감싸고 입술을 맞춰왔다.

“흐읍….”

야문의 두꺼운 혀가 리피의 혀를 휘감았다. 네 명의 가신은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며 혀를 섞는 그들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섰다. 누군가가 리피의 상의를 벗겼고, 누군가는 리피의 어깨를 만졌다. 누군가는 리피의 하의 안으로 손을 넣었고, 누군가는 목덜미에 키스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리피는 현실에 빠르게 순응하고 다섯 쌍의 손길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

여정은 순조로웠다. 기차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일정은 분명 힘들어야 마땅하지만, 리피는 어느 때보다 한가로운 나날을 보냈다. 낮에는 가신들과 함께 영화나 방송을 보고 밤에는 침대를 뜨겁게 데우는 생활은 휴가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5일째 되는 날, 기차는 국경선을 넘기 전 마지막 정차역인 드미드리 역을 향했다.

리피는 가신들과 함께 카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기 내용은 웃긴 표정으로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기였다. 리피에겐 SNS 계정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가신들을 포함해 7인의 대현자와 그들의 가신들, 황족과 기타 친분 있는 사람들을 팔로우 해놓은 공개 계정이고, 다른 하나는 오롯이 자신과 가신들만이 오손도손 노는 계정이었다. 물론 오늘 내기에서는 두 번째 계정이 대상이었다.

“진짜 안 봐주네. 나, 너네 주인이다.”

“다들 공작의 사진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질 수 있겠나.”

“저희의 어깨에는 동행하지 못한 수많은 가신들의 염원이 짊어져 있다고요.”

“이것 봐라, 수상하네. 너네끼리 편먹은 거 아니지?”

내내 지기만 한 리피가 모처럼 예리한 발언을 할 때 카드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던 야문이 리피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승무원이 표를 확인하고 다니는군요.”

“아, 그래? 결계 근처라서 그런가 보다. 너네 표 다 가지고 있어?”

“예, 제가 다 가지고 있어요.”

보더가 품에서 여섯 장의 표를 꺼냈다. 곧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단정한 제복의 승무원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실례합니다. 곧 결계선에 도달하므로 법령에 따라 잠시 표 확인이 있겠습니다.”

“여기요. 옆 칸들 표도 같이 있어요.”

“아, 비어 있던데 여기 모여 계셨군요.”

듣기 좋은 목소리에 얼굴이 보고 싶어진 리피가 고개를 쏙 뺐다. 야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썼다. 일부러 자리를 옆으로 옮기면서 문 쪽을 완벽히 가렸는데, 이놈의 주인은 굳이 확인하겠다고 고개를 빼고 있었다.

“…….”

아니나 다를까 승무원을 본 리피의 눈빛이 반짝였다. 승무원은 제법 중후하고 단정한 외모의 남성이었다. 심지어 리피는 며칠간 이 특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간 적 없는 상태였다. 다른 남자와 얘기하고 싶어서 좀이 쑤신 상황인 것이다.

“고생하시네요. 다들 일행이라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

“방학 맞아 놀러 가나 봅니다. 종착지가 결계 지역이니 꼭 형들과 붙어 다녀야 해요.”

어린아이 대하는 듯한 말투에 리피가 웃었다.

“형들 아니고 친구예요. 여기 털보 아저씨만 삼촌이고 다 친구들인데. 학교도 옛날에 졸업했고.”

“아, 그렇습니까? 미안합니다. 무척 동안이시군요.”

“승무원님은요? 저랑 차이 별로 안 날 것 같아요.”

잘 봐줘도 30대 후반 외모였다. 어여쁜 청년의 아부 가득 담은 칭찬에 승무원이 활짝 웃음을 내걸었다. 반대로 가신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그들의 주인이 또 개수작질을 걸고 있는 것이다.

“너무 좋게 봐주는구나. 마흔이 넘었는데.”

“전혀 그렇게 안 보여요. 완전 형 같은데.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 얼마든지 부르고 싶은 대로.”

“확인 끝났으면 이제 가보세요. 안 바빠요?”

그레이가 시비 걸듯이 뾰족한 말투로 승무원과 리피 사이에 끼어들었다.

“바쁘진 않은데….”

명백한 축객령에도 미적거리던 승무원은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공기를 느끼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인들이 인간을 배려하지도 않고 살기를 뿜어댔다.

“…….”

이제야 객실 안 인원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체격이 좋은 미남들이 하나같이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인으로 짐작되는 팔뚝이 머리통만 한 근육질 남자도 무서웠지만, 머리를 하나로 땋은 남자의 얼어붙을 것 같은 시선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여행이 되시길!”

겁에 질린 승무원이 나가자마자 가신들이 홱 고개를 돌려 리피를 노려봤다.

“어떻게 저희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자리에서 그러실 수 있습니까?”

“공작님은 눈, 코, 입 달린 남자라면 그저 다 좋아요?”

“아니, 그게….”

리피는 땀을 삐질 흘렸다.

“저희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죠. 조금이라도 잘생긴 사람은 밥 먹을 때도 신경 써서 먹어야 한다고. 언제 리피 님이 접근할지 모르니까.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네요.”

“내가 그 정도야…?”

“그 정도냐고요? 리피 님은 바람둥입니다.”

“바람둥이라니. 그냥 인사 몇 마디 나눈 건데….”

“인사는 무슨, 저희 없었다면 그 ‘형’과 함께 맨몸으로 침대를 굴렀겠죠.”

“그뿐만인가. 이 기차에 탄 모두 남자들과 다 붙어먹었겠지. 반성 좀 하세요, 공작님.”

“저 승무원, 죽여버리겠어요.”

“…….”

서늘하게 뱉어진 말의 주인은 보더였다. 리피와 가신들이 쳐다보자 보더는 곧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했다.

“지, 진짜 죽인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로 속상하다고요….”

“그래, 미안… 잘못했어… 반성할게.”

그냥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또 말을 걸어가지고 이 사달을 냈을까. 리피는 후회하면서 가신들을 달랬다. 사실 워낙 비일비재한 일이라 가신들은 성질내다가도 리피가 미안하다며 살살 달래면 금방 돌아왔다. 특히 지금까지 숱하게 이런 일을 겪은 야문과 로모어의 회복이 제일 빨랐다.

“이해합니다. 당신이 남자만 보면 유혹해대는 건 생존본능이니까요.”

“그럼, 그럼. 너무 뭐라고 하지 말게나. 따지고 보면 자네들도 공작의 개수작질로 접점을 만들게 된 것 아닌가. 저 천박… 가벼운 언행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빨리 늙는다네.”

방금 천박하다고 하려던 것 같지만 이 분위기에서 지적할 수는 없었다.

“카드 게임이나 계속하자. 제발….”

가신들만큼이나 리피도 이런 일이 익숙하기 때문에, 그는 그저 한숨 쉬며 테이블 위의 카드나 정리했다.

***

“네 차례야.”

“…….”

“로모어?”

처음으로 이길 것 같아서 열중하던 리피가 고개를 들었다. 보더를 제외한 가신들이 모두 미간을 찌푸린 채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앞 칸 쪽을. 방금 전에 질투로 화를 내며 찌푸렸던 얼굴과는 조금 달랐다.

“왜 그래, 너네?”

“주위가 시끄럽군요.”

“귀찮은 일이네. 어떡할까요?”

“거, 어떡하긴 뭘.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주인인 리피에게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들끼리 얘기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신체적으로 매우 뛰어난 능력을 지닌 세 명의 가신들은 평범한 이들은 듣지 못하는 먼 거리의 무언가를 듣고서 대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앞에서 뭔가 일이 있나 봐요.”

“그런가 보네.”

신체적으로 뛰어난 능력이 딱히 없는 보더는 리피의 옆에서 긴장한 채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저 셋 만큼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리피를 지키려는 마음은 뒤지지 않았다.

“잠시 실례하지.”

로모어가 리피의 어깨를 붙잡았다. 곧이어 열차가 크게 마찰음을 내며 급정거했다. 보더는 나가떨어져 벽에 부딪쳤지만 리피는 로모어가 붙잡아준 덕에 무사했다.

“고마워, 로모어.”

“별말씀을.”

“일단 게임은 중단하죠. 리피 님, 신발 신어요.”

“그래, 뭐. 어차피 다 엉망으로 어질러졌어.”

모처럼 이기고 있던 판이라 아쉬웠지만 별 수 없이 발을 내밀었다. 리피는 당연하게 신겨달라고 하고 있었고, 누가 신겨주느냐에 대한 무언의 눈싸움이 잠시 오갔으며, 야문이 승리했다.

야문은 무릎 꿇고 앉아 리피의 발을 두 손으로 정중하게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기타크가 흰 양말을 건넸고, 야문은 양말을 리피의 발에 신겼다. 매끈한 발가락부터 하얀 발등을 지나 동그란 복숭아뼈가 양말 속에 쏙 들어가는 모습을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단화를 신기고 리본을 동여맬 때 누군가는 꿀꺽 침을 삼키기도 했다. 이런 집요한 시선에 익숙한 리피는 야문이 리본 묶기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에는 끝이 안 보이는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열차가 비탈길에서 급정거 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리피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밖에 무슨 일인데?”

“짐칸에 마족의 개들이 나타났어요. 우리 짐은 리피 님의 마법이 지키고 있으니 걱정 없습니다.”

“짐칸? 소리는 앞 칸 쪽에서 나는데.”

“그쪽에 나타난 개들은 미끼이고 짐칸이 진짜입니다. 지금 누군가가 혼자 대치하고 있군요. 꽤 강한 실력입니다.”

“뭔가 노리는 게 있는 모양이구나.”

그때 잡음이 들리며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방송이 시작됐다.

-안드리오 열차 기관사입니다. 열차 내 승객 여러분께 급히 알립니다. 현재 우리 열차는 알로라 무리로부터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열차 안에 마법사나 검사님이 계시다면 즉시 1번 칸으로 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현재 우리 열차는….

“알로라라면 그 갈고리 드래곤인가요?”

“치아가 갈고리 형태로 생긴 불을 뿜는 마수지. 리피 님, 어떻게 할까요?”

“우리도 오랜만에 알로라 사냥이나 하자. 보더랑 야문은 나랑 짐칸으로 가고, 앞쪽은 너네가 해결해.”

“저도 리피 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공작, 나도 짐칸으로….”

“본인이 해치운 알로라는 알아서 처리하면 돼. 아, 참. 알로라의 갈고리를 빻은 가루가 정력에 참 좋다더라. 뭐, 너희들에겐 필요 없겠지만.”

“다녀오겠습니다.”

리피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질 뻔했지만 리피는 능숙하게 가신들을 다루고 자신은 짐칸으로 향했다. 리피의 가신들은 때에 따라서는 몇 시간이고 성기를 발기시킨 채 유지해야 하거나 싸고 바로 세워야 하기 때문에 정력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사실 가신들은 정력이 부족하기는커녕 너무 넘쳐서 리피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으니 알로라의 갈고리 따위는 전혀 아쉽지 않았으나, 어찌 됐든 리피의 지시이기에 따랐다. 야문은 보좌관이기에 당연히 옆에 붙어 있어야 하고, 실전 경험이 부족한 어린 신입 보더는 리피의 싸움 방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서, 다른 가신들도 굳이 리피와 함께하고 싶다고 고집부리지는 않은 것이다.

기차 내부는 이미 혼비백산한 사람들과 울음이 섞인 비명 소리로 엉망이었다. 기타크와 그레이, 로모어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 칸에 도착하니 과연 알로라 무리들이 점령한 상태였다. 알로라 무리는 첫 번째 칸과 두 번째 칸의 지붕을 뜯어내고 사람들을 뜯어 먹었다. 날개가 있어 날아다니는 마수들을 기차 경비병들이 상대해내기는 무리이기에 이미 사상자들이 속출해 있었다.

“꺄아아악!”

“으아악, 살려줘!”

알로라 한 마리가 바닥에 쓰러진 부부를 공격하려 하는 모습을 본 기타크가 리피가 부여해준 마법 스페이스에서 창을 꺼냈다. 기타크는 알로라의 몸통에 창을 쑤셔 박으며 소리쳤다.

“다들 도망치세요. 저희는 헤븐이벤의 전사들입니다!”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부상자들을 데리고 뒤 칸으로 도망가세요!”

그레이워드도 마법 스페이스에서 리피가 준 활과 화살을 꺼냈다.

기타크와 그레이는 가신이 되기 전 싸움에 무지한 거리 화가였고, 디저트 셰프였다. 그러나 가신이 되고 나서는 창검사와 궁수가 되었다. 전투 능력이 강해야만 주인의 여정에 동행할 수 있으며, 주인을 지킬 수 있기에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

끼에에엑!

좌석을 물어뜯다가 달려드는 알로라의 꼬리를 기타크가 창으로 찌르고 그레이가 화살을 가슴에 명중시켰다. 그러나 알로라는 더 괴성을 내며 몸부림쳤다.

“으윽!”

몸부림치는 힘에 기타크가 손에서 창을 놓치고 튕겨 나갔다.

“이런!”

조종석으로 가는 길을 뚫던 로모어가 구하기 위해 급히 뛰어올랐다.

“윽.”

“무사하죠? 제발 무사하다고 말해줘요!”

“그래, 다행히 부딪치기 전에 받았네.”

로모어는 리피가 준 소중한 창을 품에 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벽에 부딪친 기타크는 뒤통수에서 흘리는 피를 벅벅 닦았다.

“저 피 흘린 거 비밀입니다.”

“당연하지. 우리 서로 다쳐도 모른 척해요.”

“모른 척할 수 있을 만큼만 다치게나.”

부상당하면 리피와의 여정에 함께 할 수 없으므로 가신들이 서로의 부상을 숨겨주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레이, 자네는 기관사의 상태를 알아보고, 기타크, 자네는 이곳에서 민간인을 보호하게. 난 외부에서 상대하도록 하지.”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로모어가 씨익 웃었다. 털이 북슬북슬 난 집채만 한 풍채의 그는 수인족 마인이었다. 알로라의 갈고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마수, 칼키리우스인 그에게 외부의 수십 마리 알로라는 조금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로모어는 그저 빨리 리피의 곁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더불어 리피가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안전하게 있으면서도, 라타르는 소진해버렸으면 하고 소박한 소망을 가져보았다.

***

뒤 칸도 앞 칸과 별반 다르지 않게 혼란스러웠다. 깊은 산속 비탈길에 만들어진 철로라 빠져나갈 곳도 없기 때문에 더했다. 그중에 용기 있는 자들은 앞쪽을 도우러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민간인들이 정말로 전기충격기나 열차에 배치된 손도끼 등을 가지고 가려고 들어서 리피가 야문의 팔을 툭 쳤다. 야문은 리피를 힐끗 보고는 보더의 팔을 툭 쳤다.

“예?”

“어서 진정시키도록.”

“제가 어떻게요….”

“헤븐이벤에서 왔다고 해. 다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리피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다른 가신들이라면 리피가 언질 주기 전에 알아서 진정시켰을 것이다. 신입다운 어수룩한 모습이 귀여웠다.

그렇게 민간인들을 진정시키면서 전진한 그들이 열차 후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말이나 당나귀 같은 가축들의 시체가 사방에 깔려있었다. 물론 결계로 보호하고 있는 리피 일행의 말은 무사했다.

“안쪽에서 대치 중이군요. 기척이 느껴집니다.”

“너무 어두운데.”

“제가 불을 켤게요.”

보더가 스태프를 꺼내 주문을 외우자 스태프의 구에 하얀빛이 감돌았다. 신관인 보더는 신의 힘을 빌려서 마법을 사용했다. 가신 서약을 하면서 신앙심이 희미해졌는데, 그럼에도 마법을 사용하는 건 창조신 제페아가 자신의 신관이 리피를 사랑하는 것을 허가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스태프의 하얀 빛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하얀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볼 수 있는 야문이 앞장서서 걸었다. 야문의 귀에는 아까부터 들리기 시작한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마물의 위협소리가 이제는 리피와 보더에게도 들리기 시작했다.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소리에 리피가 입을 열었다.

“야문, 먼저 가서 도와줘.”

“예.”

이런 명령이 내려올 것을 예상한 야문은 자리를 박찼다. 리피도 마법을 이용해 순식간에 그곳에 향할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상황을 모르는 이상 라타르를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리피는 하루 스물네 시간 쉬지 않고 라타르를 소진하고 있었다. 라인데이아의 결계에, 차자국의 결계에, 체니르의 결계에, 아카데미의 결계에, 작게는 짐칸에 있는 짐들의 보호 결계까지. 리피의 라타르는 지금도 끊임없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리피와 보더가 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하니 야문이 붉은 몸뚱어리의 거대한 마물과 대치하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한 남자가 푸르른 인영을 껴안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크르….

“조심하십시오. 금석의 콘실라입니다. 보더, 리프 님을 지켜라.”

“예!”

보더가 결의에 찬 얼굴로 스태프를 들고서 리피의 앞에 섰다. 사실 야문에게 콘실라는 손가락 한번 튕기는 것으로 끝낼 수 있는 상대였지만, 이 마물의 피는 사람의 피부를 녹이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다 찢어져 허물어져 가는 결계 속의 남자가 리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리피는 짐작했다는 듯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이 마물들은 당신들이 불러들인 거군요, 이스리어.”

그는 체니르의 기차역 플랫폼에서 마주쳤던 중절모를 쓴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때의 말끔하고 단정한 차림새와는 다르게 지금은 곳곳에 상처가 나고 핏자국이 튄 상태였다. 입가에도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이스리어보다 그가 안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

“몇 시간 동안 물 밖에 나와 있었죠?”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리어가 경계심 가득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답했다. 리피는 그런 답변 또한 예상했다.

“우선 저 녀석을 해치운 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보더는 두 사람에게 결계를 만들어줘. 이 다 찢어진 결계는 너무 조악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구나.”

“예.”

“보더가 결계를 완성하고 나면 네가 끝을 내.”

“괜찮겠습니까?”

야문의 물음은 저 어린 신관의 결계가 콘실라의 피를 막을 수 있겠느냐는 뜻이라기보다는, 이제부터 자신이 펼칠 어둠의 힘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리피는 대답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로 야문은 리피가 보더를 신뢰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 어둠을 막아낼 수 있다고 믿는군.’

질투심이 들끓으며 야문의 동공이 세로로 좁아졌다.

-크르르!

대치하고 있는 자의 기운이 변하면서 마물도 으르렁거렸다. 먼저 움직인 것은 콘실라였다. 마물은 입에서 불길을 내뿜으며 뛰어올랐고, 야문은 날개를 꺼내 방어했다. 무수한 박쥐 날개의 그림자가 모여서 만들어 낸 검은 날개였다.

“검은 귀족….”

이스리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검은 날개는 이렝트를 지배하고 있는 고귀한 검은 귀족, 흡혈귀의 상징이었다.

마물과 야문의 싸움은 결코 치열하지 않았다. 마물이 달려들고 물어뜯으려 할 때마다 야문은 방어하거나 피하기만 했다. 몇 분이 지나서 보더가 소리쳤다.

“완성됐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야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사방이 어두움에 잠겨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야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흡혈귀는 어둠과 피를 조종하는 마인이었다. 야문은 어둠 속이 가장 편했다.

-크르릉!

이 공간에서 빛을 내는 것은 유일하게 보더의 결계 안 스태프뿐이었기 때문에 마물이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보더는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태프를 꼭 붙든 채 눈을 부릅떴다. 이스리어와 그가 보호하고 있는 자가 눈을 질끈 감은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리피가 선택한 가신들은 모두 끔찍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눈을 부릅뜨는 성격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보더의 눈에는 오로지 어둠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박쥐의 날개 소리가 지나갔고, 마물의 울음이 길게 울리다 끊어졌으며, 이어서 뭐라 묘사할 수 없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보더는 몹시 두려웠으나 리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개어갔다.

“끝났습니다.”

야문이 여느 때와 같은 차가운 눈으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아니, 여느 때와 같은 표정이 아니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혀로 입술을 핥으며 포만감이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내 박쥐들이 오랜만에 포식했군요.”

“수고했어. 보더, 스태프를 놔도 돼.”

리피의 말에 보더가 손에서 스태프를 놓았다. 그러자 결계가 잘게 찢어져 녹아내렸다. 해제하기 전에도 이미 결계는 잔뜩 물에 젖은 종이 같은 상태였다. 보더는 그대로 쓰러져 손을 떨었다. 흡혈귀의 힘이 한 번만 더 폭발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법이군요. 리프 님이 선택한 신관답습니다.”

“내가 보는 눈이 있지.”

덜덜 떠는 보더와 달리 선배 가신과 주인은 칭찬을 나누고 있었다.

“네 박쥐들도 여전히 귀엽고 멋있더라. 피의 어둠을 지배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대단해.”

그 와중에 리피는 야문에 대한 달콤한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어둠이 사라진 짐칸 안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박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흡혈할 때 더러운 피는 뱉어내기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콘실라의 피에 열차의 천장과 벽, 바닥이 녹아들어 갔다. 물론 리피가 결계로 지킨 짐들은 무사했다.

“헤븐이벤에 어떻게 흡혈귀 마인이….”

이스리어가 중얼거렸다. 리피는 이제야 그의 존재를 깨달은 듯, 아, 하면서 이스리어에게 다가갔다.

“이제 대화를 좀 해야겠네요.”

리피는 마법으로 짐칸의 자신의 물건 중에서 의자를 움직였다. 먼지 한 점 내려앉지 않은 깨끗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바닥에 주저앉은 이스리어를 내려다봤다.

“우선 질문을 할게요. 그 인어는 어디서 만났습니까.”

“이… 인어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검은 눈자위와 은색 머릿결, 청백색의 피부. 미성년의 순혈 인어 요정족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시간 개념이 엉망인 불로불사 리피의 ‘오랜만’의 기준은 천차만별인데(단 하루 전이라도 오랜만이라고 표현하고는 한다), 여기서의 오랜만은 천 년 전을 뜻했다.

“이름이 뭐니?”

리피가 이스리어의 품에 안겨 오들오들 떠는 어린 인어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이스리어는 팔로 인어의 얼굴을 가리고 더욱 품 안으로 감싸 안았다. 인어는 팔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눈을 도르륵 굴렸다.

겁은 많으면서도 호기심은 있어서 눈만 굴리며 살피는 모습은 무척 귀여웠으나 인어는 야위었고 초췌한 상태였다. 이스리어의 품 안에서 늘어뜨린 두 팔은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저 인어 처음 봐요… 신기하네요.”

“순혈 인어는 저도 처음입니다. 군산 호의 괴팍한 녀석들과는 퍽 다르군요.”

야문이 다가오자 인어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본능적으로 마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리피는 야문이 더 가까이 오지 못하게 눈짓으로 막았다. 인어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행동에 이스리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 보여도 헤븐이벤의 총책임자가 맞군요. 순혈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인간이 어떻게 이런 고대 요정족과 함께 다니는 거죠?”

“이 녀석은 제 동생입니다.”

“동생?”

“아로수의 수원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부모를 잃어 울고 있는 아이를 내가 데리고 왔고,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아카데미를 떠나 여행하고 있죠.”

리피가 가볍게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네. 괜찮아요. 어차피 진실을 말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보다는, 당신의 동생이 물 밖에 얼마나 나와 있던 건지 말해줘요.”

이스리어는 흠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임을 알고 있다는 그 말투는 너무나 확신에 차 있었다. 생각이라도 읽는 게 아닌가 할 만큼.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원래 약한 녀석이라서…….”

“순혈 인어를 오염된 수조에 담아 짐칸에 두는 건 학대예요.”

이스리어가 품속의 인어를 쳐다봤다. 인어는 조약돌 같은 검은 눈으로 리피를 관찰하고 있었다.

“짐칸에 뒀단 말이에요?”

보더가 굉장히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들키지 않은 거예요? 승무원이 짐 검사도 했을 텐데.”

“짐 검사에서 걸릴 수가 없어. 순혈 인어는 물속에 들어가면 투명화가 되거든.”

“그걸 어떻게…….”

리피의 깔끔한 설명에 이스리어가 놀란 눈을 했다. 그 어느 서적에도 적혀 있지 않고, 방대한 온라인 속에서도 단 한 줄도 나와 있지 않은 지식을 당연한 것처럼 읊고 있었다. 자신도 이 인어를 책임지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헤븐이벤의 고위급 관계자라고 해도 어떻게…?

“우와, 마법의 일종인가요?”

“마법이 아니라 신체적 특이체질이라고 봐야 할 거야. 워낙 희귀한 종족이라서 제대로 알려진 게 없긴 하지만… 직접 보면 더 신기하단다. 난 모르고 있다가 물에 닿은 부위부터 투명해지는 걸 보고 거의 까무러쳤었어. 심지어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인어도 있단다. 대단하지 않니? 투명화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건 물속에서 허리만 투명해질 수도 있다는 거야.”

“잤군요.”

“…….”

야문의 싸늘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재잘재잘 인어의 신기한 특이체질을 얘기하던 리피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고, 보더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냥 요정족의 신기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듣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순혈 인어와도 섹스를 했단 말이죠.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제가 당신을 과소평가했군요. 아주 안 해 본 종족이 없으십니다. 콘실라도 생포해서 한번 쑤셔 박게 해준 뒤 죽일 걸 그랬군요. 아, 혹시 이미 경험이 있습니까?”

“야…….”

“비난할 생각 없습니다. 그건 당신의 본능이니까.”

실컷 비난해놓고 말해 봤자 설득력이 없었다.

“너무해요, 리피 님… 이렇게 갖고 노시다니. 전 순수하게 듣고 있었는데….”

“나도 순수하게 얘기하고 있었어….”

졸지에 가신들을 농락하는 나쁜 주인이 되어버린 기분에 시무룩해진 리피에게 이스리어가 물었다.

“물속에서 투명화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순혈 인어 중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인어라면요. 하지만 그 인어처럼 병약해진 상태로는 재능이 있어도 불가능하죠. 지금 물 밖에 얼마나 나와 있는 거죠?”

결국 이스리어는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고작 서너 시간인데 벌써 이렇게….”

“이 아이가 미성년 순혈 인어라는 사실은 또 누가 알고 있어요?”

“‘오에흐’에 들켰습니다. 마물을 보낸 곳도 그곳일 겁니다.”

“오에흐 클럽이라….”

각국에 악명이 자자한 노예 상인 오에흐가 만든 클럽, ‘오에흐’는 익명의 자산가와 권력가들이 구성원으로 있는 특이 성애 변태들의 집합소였다.

“조심해야겠네요. 그곳에 잡혀가면 끔찍한 일을 당하거든요.”

“당신도 끔찍한 일을 당하신 적 있습니까.”

야문이 리피의 경험담임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리피는 오래 살아온 만큼 아주 많은 일을 겪어왔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어. 고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강간이었거든.”

“그렇습니까.”

“강간부터라서 다행이네요….”

야문과 보더는 리피가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음에 안도했고, 이스리어는 이 대화를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 극악무도한 행위가 어떻게 다행일 수 있는가. 이스리어 본인도 결코 착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대화였다.

“아까의 그 조악한 결계는 당신이 만들어낸 거죠? 당신 정도의 마법수련사 하나가 오에흐에 대항할 수는 없어요.”

“사실은… 그 이유 때문에 오덴호르트에 향하는 기차에 오른 겁니다. 그곳에 있는 신전에 몸을 위탁할 계획입니다.”

“우연이군요. 우리도 그 신전에 가고 있는데.”

리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아로수의 뿌리가 메마르고 있다는 괴이한 미신이 퍼지고 있는 곳. 목적지가 겹치는 우연을 우연으로만 넘겨도 되는 걸까.

“여기서 오덴호르트까지는 역에서 내린 후 다시 전차를 타고 가야 해요. 요정족인 인어에게는 가혹한 여정이에요. 특히나 이 아이처럼 약해진 경우에는….”

“아뇨, 우선 오덴호르트 역의 검문에서 인어임을 들킬 겁니다. 경계 지역의 검문은 몹시 까다로우니까.”

“그럼 어쩔 생각이었죠?”

“열차 내에서 이동스톤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습격으로 라타르를 소진하는 바람에….”

라타르의 소진.

그것은 자신의 커널을 찾지 못한 아로수 마법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체니르에는 커널을 찾으러 온 거였군요.”

“예, 커널을 찾기 위해 체니르는 물론 거처가 알려진 대현자들의 도시에 모두 들렸습니다만 헛걸음했습니다. 조언이라도 얻으려고 했는데 만나지도 못했고, 그들의 유적에는 아무 힌트도 없었죠.”

이곳에서 오덴호르트까지 이동스톤을 이용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라타르가 필요하고, 이스리어는 방금 전 습격으로 남겨놓은 라타르를 소진하고 말았다.

리피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신들의 반발이 있을 것 같지만 궁금한 점도 해결할 수 있는 너무 좋은 생각이었다.

“리프 님.”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야문이 리피의 어깨를 붙잡고 허리를 단단하게 안았다. 조금 뒤에 기차가 크게 흔들렸다.

쿠웅,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큰 소리가 들리고 기차가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리, 리피 님! 기차가 떨어져요!”

“야문!”

야문이 리피를 안은 채 열차 벽을 부쉈다. 떨어지는 파편들로부터 리피를 보호하고 검은 날개를 펼친 채 외부로 나갔다.

“공작!”

마침 반수인화 한 로모어가 기차 지붕 위에서 마지막 알로라의 심장을 짓이기고 있었다. 야문이 리피를 단단히 안고 로모어에게 날아갔다.

“로모어, 무슨 일이야?”

“알로라들이 조종석 칸을 파괴했네. 기관사도 죽었고, 곧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테니 피해 있게.”

“구조대는?”

“그레이가 오덴호르트의 경비대와 구조대를 불러놨지만 다섯 시간은 걸린다더군.”

경비대와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차가 산산조각 나 있고, 시신조차 찾기 어려운 상태일 것이다.

이 시각에도 기차는 낭떠러지 아래로 기울고 있었다.

으아아악, 사람들의 겁에 질린 비명 소리가 고요한 산속에 울려 퍼졌다.

“리피 님.”

야문은 품속의 무게감이 없어지는 걸 느끼고 리피를 불렀다. 리피는 마법으로 허공에 떠올랐다. 야문은 두 손을 놓고 리피가 마법을 펼치는 광경을 바라봤다.

간혹 강한 마법사들의 라타르는 육안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대현자들의 라타르 또한 너무나도 강하여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그들 일곱 명의 라타르의 색은 각기 달랐는데, 리피의 라타르는 붉은 기가 감도는 주홍색이었다. 대현자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농도가 짙었다.

기울어져 떨어지는 10량 기차의 무게 따위 리피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리피는 기차를 공중으로 들어 올린 채 아래로 천천히 하강했다. 벼랑 아래는 거친 숲이었다. 마법으로 거친 풀줄기와 나무들을 가루로 분해하고, 만들어진 평원 위에 기차를 천천히 안착시켰다.

“…….”

야문의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졌다. 그것은 경이적인 광경이었으나 그 기적 같은 마법에 경외심을 느끼기 이전, 리피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흥분으로 다가왔다.

이 기적이 리피의 마법임을 안 모든 가신들의 머릿속에 어떤 사실이 동시에 떠올랐다.

‘리피의 라타르가 줄어들었다.’

가신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던 상황이었다.

***

기차가 평원에 안착하고 가신들은 리피가 있는 짐칸으로 모였다. 그레이와 기타크, 보더는 잔뜩 흥분한 눈빛에 이미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심지어는 옷 위로 꺼떡이는 흉흉한 성기까지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극심한 실망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스톤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어. 이대로면 아이는 곧 숨이 다할 거고, 그건 이 세상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혈 인어를 잃어버린다는 거야.”

가신들을 모아놓은 리피가 차분히 설명했지만 그들은 반항기에 접어든 사춘기 소년처럼 죄다 눈을 매섭게 뜨고 있었다.

“순혈 인어를 잃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요?”

“나는 대현자로서 요정족과 척을 질 일을 만들 수는 없단다. 이해해주렴.”

“리피 님이 죽게 만든 것도 아닌데 왜 척을 진다는 거예요?”

“내가 죽게 만든 거나 마찬가지지… 너네가 길 가다가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발견했는데 마침 품에 빵이 있어. 그럼 그 빵을 주지 않겠니?”

“…….”

리피는 도덕성은 둘째 치고, 이렇게 답을 정해놓고 하는 질문에 정해진 답을 하는 사람들을 가신으로 두었다. 그렇게 제 입맛으로 교육했기 때문에 가신들은 차마 빵을 주지 않겠다는 대답은 하지 못했다.

“야문 보좌관이 인어를 안고 날아가거나 로모어 씨가 수인화 해서 달려가면 되잖아요….”

“약해진 요정과 마인이 가까이 있으면 생명이 더 깎여나가. 저 아이도 마인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있고. 야문과 로모어는 이곳에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사람들의 혼란스러움을 정리해주는 게 나아.”

이동스톤은 딱 2인의 좌표를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결계들로 인해 끊임없이 라타르가 빠져나가고 있는 상태에서 방금 전 대규모 마법을 펼친 리피로서는 모두를 데리고 오덴호르트에 가는 방법을 택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빨리 라타르를 충전하는 건요…? 저는 리피 님의 얼굴만 있으면 바로 쌀 자신 있어요.”

“이 시간에도 인어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어. 어서 출발해야 해.”

보더가 꼿꼿이 세워진 성기를 자랑하며 말했다. 리피는 그런 변태적이면서 사실을 적시한 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왜냐하면 리피는 인어와 둘만 마을로 향할 거라고 결심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리피와 함께한 지 오래된 야문이나 로모어는 리피의 뜻을 눈치채고 일찌감치 포기했고, 납득하지 못하고 끈질기게 굴었던 그레이와 기타크, 보더도 이제는 리피가 뜻을 굽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이제 리피가 떠나고 나면 가신들끼리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사랑해 마지않는 주인에 대한 뒷얘기를 할 차례였다.

“금방 다시 올게.”

“아뇨, 마을에서 만나도록 하죠.”

“하지만.”

“어떻게 금방 다시 온다는 말입니까. 또 술집 놈팡이의 좆을 빠시려고?”

야문이 냉소했다. 리피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이곳의 상황을 정리한 후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리피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멀리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스리어를 불렀다.

이스리어는 리피의 부드럽고 가벼운 망토로 몸을 감싼 인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가신들이 못마땅해했지만 리피는 기꺼이 약한 인어를 위해서 망토를 내주었다. 리피는 그에게서 조심스레 아이를 건네받았다. 깡말랐지만 인어인지라 무게가 있어서 안아 들기 힘들었기 때문에 마법으로 공중에 들어 올렸다.

어린 인어는 망토 속에서 매끄러운 조약돌 같은 동그란 검은 눈으로 리피를 보고 있었다.

“안녕? 이름이 뭐야?”

“…….”

“티토, 은인에게 대답해야지.”

이스리어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리피는 일부러 환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두려울 테니까.”

인어는 겁에 질려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전 리프 씨가 떠나면 바로 신전으로 출발하겠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보게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예, 마을로 돌아가면 사례하겠습니다.”

이 와중에 사례를 운운하는 성격에 리피는 내심 웃음이 나왔다.

리피는 이동스톤에 라타르를 주입했다. 붉게 빛나는 라타르가 리피와 인어의 몸을 휘감았다.

“공작, 다른 곳은 싸돌아다니지 말고 신전에서 기다리게.”

“응… 안 싸돌아다닐게. 그나저나 기타크.”

리피가 붉은빛 속에서 사라져가면서 기타크에게 말했다.

“부상은 꼭 보더에게 치료받고 있으렴. 이따 다시 봤을 때도 나아있지 않으면 넌 여정에서 제외할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피가 사라졌다.

가신들의 시선이 기타크에게 향했다. 측은함이 담겨 있었다.

“치료… 보더, 치료해줘. 빨리, 어서!”

기타크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보다 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보더에게 매달렸다. 기타크는 리피를 다시 만날 때까지, 자신의 작은 부상을 알아채고 걱정해준 감사함과 여정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넋을 빼놓고 있었다.

***

이동스톤은 오덴호르트의 마을 입구로 둘을 안내했다. 보통 입구에는 경비나 군인이 있는데 오덴호르트는 특이하게 신관이 있었다.

“스톤을 보여주시겠습니까.”

경계 지역에서 이동 마법은 금지되어 있으나 미리 등록해놓은 이동스톤은 허용되는데, 일련번호로 등록 스톤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리피는 신관들이 번호를 확인하는 동안 마법으로 인어의 무게를 줄여 품에 안았다. 인어의 외관을 조금 창백한 안색의 아이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규모 마법이 아니므로 색은 드러나지 않았다.

신관들은 스톤을 확인하고 간단히 소지품을 검사한 후 리피를 들여보내줬다.

야밤의 깜깜한 마을은 야문이 좋아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덤 위에 세워진 듯 무척 음산한 분위기라는 뜻이다.

리피는 우선 신전을 찾았는데, 대개 마을의 외곽에 위치해있는 신전이 이곳에서는 마을 중심에 있었다.

“티토… 너 좀 더 참아야겠구나.”

신전에 도착한 리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전은 먹구름에 휩싸여있었다. 신전의 공기가 더럽다 못해 마계라 해도 믿을 만큼 썩어서 코끝을 찔렀다. 이런 곳에 강한 요정족을 데려가는 건 마기를 정화하는 방법이지만, 이 인어처럼 약한 요정족을 데려가는 건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였다.

“조금만 참으렴. 급한 대로 아로수의 수원과 비슷하게 만들어줄 테니.”

리피는 인어를 껴안으며 달랬다. 리피의 품 안에 안긴 인어는 반들반들한 눈동자로 리피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눈꺼풀이 깜박이는 것과 입술 모양이 달라지는 것까지 따라붙는 집요한 시선이었다. 다른 이가 이런 시선을 보내면 오해했겠지만, 인어는 깡마르고 병약한 미성년 인어였다. 리피는 인어가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물로부터 목숨을 한번 구해줬다고 경계를 풀어버리는 성격이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리피는 가장 값비싸고 깔끔한 호텔을 찾았지만 도시라고 할 수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는 선택권이 없었다. 밤늦은 시간, 술집도 문을 닫고, 유일하게 객을 받는 숙소는 여관 수준의 허름한 곳이었다.

“우리 마을에 손님이 오는 건 오랜만이라 아주 깨끗하진 않은 상태요.”

“괜찮아요. 잠시 쉬다 나갈 거라서요.”

“3층으로 올라가시오. 그 방이 그나마 깨끗하니.”

리피는 여관 주인으로부터 열쇠를 건네받았다. 카드키가 아니라 열쇠였다.

“저 근데 여기는 술집이 문을 굉장히 빨리 닫네요.”

“대부분 9시면 문을 닫지.”

“혹시 지금 문을 연 가게가 있을까요? 시원한 맥주 마시고 싶은데.”

“요즘은 파우즈 기간이라 없소. 전부 신전에 봉사하러 갔지.”

“아… 그래서….”

리피는 이 마을에 들어오고 남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을 출입구의 신관도 여자였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여관 주인도 여자였다.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신전에 노동하러 갔던 것이다. 신전의 힘이 강한 작은 마을 중에는 1년에 일주일씩 성별별로 신전에 봉사하는 곳이 있는데, 오덴호르트가 그런 곳이었다.

“우리 여자들 기간은 어제 끝났고, 오늘 파우즈가 시작됐소.”

“앞으로 일주일은 남자가 없겠네요.”

“신전엔 있겠지. 퍽 아쉬워하는군, 손님.”

“아쉬워 죽겠어요. 내일 신전이 문 열자마자 바로 찾아갈까 봐요.”

여관 주인은 리피가 농담한 줄 알고 웃어넘겼지만 리피는 진심이었다. 물론 그때는 인어라는 짐덩이도 치우고 든든한 가신들과 함께일 것이다.

마을에 온 뒤로 더욱 약해진 인어를 안고 계단을 올랐다. 3층엔 방이 하나뿐이었다.

문 걸쇠는 잔뜩 녹이 슬어있었고, 먼지가 쌓여 있었다. 리피는 고민하다가 마법으로 열쇠를 돌렸다. 손을 대기 싫었기 때문에.

“비위생적이지만 조금만 참아.”

방에 들어서니 먼지 쌓인 침대가 반기고 있었다. 잠시 멈칫한 리피는 마법으로 침대 위의 먼지를 없앴다.

“욕조에 물을 받고 있을 테니 여기서 쉬고 있으렴.”

“…….”

대답 없는 인어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가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욕조 상태를 깨끗하게 만들고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나왔다.

리피는 침대에 앉지 않고 계속 좁은 방 안을 서성거렸다. 리피의 동선을 인어의 까만 눈이 계속 따라왔다. 경계심과 호기심 어린 눈길이었다. 욕조의 물 받는 소리가 익숙해질 때쯤 시선이 마주쳤다. 리피는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이상한 냄새도 나고 너무 지저분하구나. 그래도 참아야 해. 너희는 한동안 도망쳐 다녀야 하니까 익숙해져야 할 거야.”

“…….”

그러나 결코 옆에 앉지는 않았다. 짐칸에서 생활하던 인어로서는 이 정도야 아무렇지 않았지만 리피 본인이 제일 못 참고 있었다.

리피는 인어에게 몇 마디 더 말을 걸다가 물이 받아졌는지 욕조를 확인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또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인어는 가만히 앉아서 리피를 보고 있었다. 리피는 꾀죄죄한 인어와 더 꾀죄죄한 방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이런 악취를 견디라고 하는 건 학대나 다름없는 일이야. 여기보다 차라리 악티코의 감옥이 낫겠어.”

그러고는 마법으로 방 전체를 깨끗하게 만들었다.

***

욕조에 물이 차자 리피는 물속에서 마법을 구현했다. 아로수의 수원을 소환할 수는 없으니, 아로수의 신성하고 정화된 기운을 소환해서 물을 깨끗이 만들었다. 또다시 라타르가 줄어들었다. 가신들이 알면 당장 옷 벗고 달려들 상황이었지만 현재 이곳엔 가신이 없었다.

“티토, 들어가 있으렴. 몸 상태가 훨씬 나아질 거야.”

리피는 인어를 부른 후 남아 있는 라타르의 양을 감지해보았다. 모든 커널 마법사들이 그렇듯 리피 또한 라타르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 불안해졌다. 대현자 정도 되면 절반 이하여도 웬만한 아로수 마법사가 평생 쓸 양이지만 본인에겐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남자를 찾아야겠어.’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리피는 결국 가신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남자를 찾으러 나서기로 했다. 진짜 신전에라도 쳐들어갈 기세였다.

그때까지도 인어는 경계심 때문인지 옷 벗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네 고향만큼 깨끗한 물이니까 안심하고 쉬어.”

“…들어가….”

“응?”

“리피가 들어가 보세요….”

인어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듯 쉰 소리가 났다. 리피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티토, 내 이름은 리프야.”

“…리피.”

“리프라니까.”

“신관이 리피라고….”

아까 보더가 무심코 이름을 불렀던가? 리피는 보더가 귀여운 신입이지만 이 실수만큼은 따갑게 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비슷해서 그렇게 들렸나 보구나. 내 이름은 리프란다. 그래서, 내가 들어가 봐야 인어가 들어갈 수 있는 물임을 믿을 거니?”

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피가 바짓단을 걷어 욕조에 담그자 인어는,

“전부 다 들어가야….”

라고 말했다. 당장 물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비리비리하면서 시킬 건 다 시키고 있었다.

“좋아. 이렇게 된 거 나도 반신욕이나 하지, 뭐.”

리피는 인어를 안심하게 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옷을 벗었다. 세상 사람들 중에 가장 탈의를 많이 해봤을 리피답게 순식간에 나체가 된 그는 마법으로 자신의 몸을 정화한 후 욕조에 들어갔다.

첨벙, 물이 욕조 밖으로 살짝 넘쳤고 리피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인어를 올려다보았다.

“티토, 이제 너도 들어와.”

“…….”

인어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앙상하게 마른 창백한 몸이었다. 턱을 괴고 보던 리피가 눈을 크게 떴다. 인어가 욕조에 들어올 때는 리피가 들어올 때보다 더 크게 물이 넘쳤다. 인어는 리피가 앉은 쪽 반대편에 붙어서 앉았다.

정화된 물에 닿자마자 피골이 상접했던 몰골이 조금 나아졌다. 인어의 피는 불로불사의 회복약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인어는 회복력이 좋은 종족이었다. 그 회복력이 정화된 물이 닿지 않으면 발휘되지 않아서 문제이지만.

순혈 인어인 티토는 아주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깨끗한 물속에 있었다. 평생 밀폐된 지하실에 살던 이가 처음으로 밖에 나갔을 때 이런 기분일 것이다. 티토는 벅차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리피를 봤다가 흠칫 놀랐다.

“…티토.”

리피가 물속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티토의 중심을.

“너… 미성년 아니네.”

티토는 왠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인어는 미성년일 때는 성별이 없고, 1차 성장을 하고 나면 성별이 생긴다. 티토도 성별이 있었다. 그는 수컷이었다.

“1차 성장을 최근에 했니?”

“그저께…….”

“그저께 했구나. 그럼 한참 됐네. 내가 잘 알려줄게.”

“…?”

“인어가 2차 성장을 하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하지. 난 지금 남자가 필요하고. 너도 빨리 경험을 쌓는 게 좋을 거야. 인어는 원래 1차 성장이 일어나자마자 성 경험을 하는 편이란다.”

리피는 생글생글 웃으며 무릎걸음으로 티토에게 다가왔다. 티토는 파랗게 질려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

“흐읏….”

티토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첨벙, 물소리조차 간지럽게 들려왔다.

춥, 츄읍….

외설적인 소리가 자신의 중심에서 들려왔다. 지금 티토는 다리는 물속에 넣고 욕조 벽에 걸터앉아 리피의 펠라를 받고 있었다. 다홍색에 가까운 주홍색 머리가 앞뒤로 움직였다. 자신과는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보이는 사람은 주저 않고 성기를 입속에 머금었고, 혀로 부드럽게 기둥을 쓸어내렸다. 혀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핥았다가, 손으로 기둥을 부드럽게 압박하기도 하고, 뿌리 끝까지 삼키기도 했다.

“흐윽, 이, 이상해져. 흣….”

리피의 입안은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성기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머리끝까지 간지러움이 퍼져갔다. 티토는 어쩔 줄 모르고 양손을 리피의 머리에 올렸다가 화들짝 놀라 뗐다. 그리고 욕조 손잡이를 붙잡았다가, 다시 리피의 정수리에 가져다 댔다가, 아예 그냥 허공에서 주먹을 꽉 쥐어버렸다.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리피가 성기를 입안에서 빼내고 올려다보았다.

“귀여워라.”

“…….”

“손은 편한 대로 두렴. 내 머리를 잡아도 돼.”

“하, 하지만….”

“뒤통수를 꾹 눌러도 된단다. 그러면 너의 것을 더욱 깊게 삼킬 수 있지….”

창백한 인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티토의 손이 멈칫멈칫 리피의 머리칼을 향하는데, 리피가 이어서 말했다.

“깊게 삼켜도 부담이 없는 크기라서 좋아. 인어의 것은 차갑고 비늘이 있어서 더 크면 힘들거든.”

“…….”

티토가 다시 창백한 낯빛으로 돌아왔다. 리피는 아차 싶어 얼른 덧붙였다.

“물론, 커질 거야. 2차 성장을 하고 나면 몸도, 여기도 인간보다 훨씬 커진단다. 내가 예전에 품었던 인어의 성기는… 이만했어.”

티토의 것이 수치스러움에 수그러들까 봐 달래듯이 말하며 팔뚝을 가리켰다. 성장한 인어의 평균키는 2m를 넘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완전히 발기한 티토의 성기는 14~15cm 정도였다.

“어서 내보냈으면 좋겠는데… 하아.”

“아, 안… 흐읏.”

리피가 다시 티토의 것을 흔들다가 입안에 넣었다. 티토는 허윽, 신음하며 리피의 작은 머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뒤통수를 누르는 행위 같은 건 차마 하지 못하고 머리칼을 쥐며 몸을 비틀었다.

츄읍, 츕. 리피는 티토의 것을 열심히 빨았다. 욕조에 물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물을 빼면 티토가 약해질까 봐 빼지 않았다) 리피는 어깨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그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은 사이즈인데도 빠는 데에 상당한 체력이 소모되었다.

‘어서 쌌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리피는 티토의 중심을 뿌리 끝까지 삼키고 혀로 휘감았다.

“흐윽, 이상해요, 저, 이상해져요…!”

“츱, 크흡.”

“아, 안돼. 그만… 흐윽, 흐응! 흐으읏!”

“크읍, 큽.”

역시 순혈 인어라서 아직 나이가 어리고 첫 경험인데도 쉽게 싸지 않았다.

“크릅, 츱, 쯔읍.”

리피는 혀와 입천장이 얼얼해지고 목구멍이 쓰라릴 때까지 티토의 것을 빨았다. 티토의 손은 이제 리피의 머리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점점 뒤통수를 압박해왔다.

“안 돼, 그만하세요. 리, 리프… 흐윽, 저 이상해져….”

티토는 그만하라는 말과는 다르게 리피의 뒤통수를 꾹 눌렀다.

“흐윽, 이상, 이상해져요… 흐으윽!”

“흐읍!”

동정인 티토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서 눌렀기 때문에 리피의 얼굴이 티토의 고간에 짓뭉개졌다.

“읍, 으읍!”

코까지 짓눌린 리피가 숨이 막혀서 바동거렸지만 티토의 깡마른 팔은 끄떡도 안 했다. 조그맸지만 인어라고 완력이 굉장히 강했다.

“뭔가, 나와요. 흐으응! 나와…!”

티토는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리피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기분 좋은 구멍에 자신의 것을 쏟아냈다.

리피는 숨이 막힌 와중에도 목구멍을 가득 메우는 것을 기쁜 듯이 꿀꺽, 꿀꺽 삼켰다. 티토는 자신의 것을 모두 쏟아내고 잘게 허리를 두어 번 더 흔든 후에야 리피의 뒷머리에서 손을 뗐다.

“커헉, 컥.”

리피가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에 달라붙었던 하얀 정액이 참방거리는 수면으로 뚝, 떨어졌다.

“허억… 하아, 하아….”

자신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댄 채 정신없이 숨을 쉬는 리피를 티토가 바라봤다.

“얼굴에… 묻었어요….”

“으응… 아깝게.”

리피는 가슴을 헐떡거리면서도 혀로 입술을 핥았다. 욕조 바닥을 짚었던 손으로는 자신의 볼에 묻은 하얀 정액을 쓸어내렸고, 그 손가락을 입술에 넣고 쪼옥, 쪽 빨았다.

“양이 많구나. 아직 2차 성장하지 않았는데도….”

“리프… 저….”

“으응?”

“하, 한 번 더… 더 하고 싶어요….”

리피가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았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볼에 달라붙었고, 입술에는 끈적끈적한 정액이 남아 있었다. 붉게 상기된 두 볼과 검은 눈동자, 다홍색에 가까운 주홍색 머리까지 너무나 색정적이었다.

티토의 성기는 언제 쌌냐는 듯 꼿꼿이 일어나 있었다.

“인어의 회복력이란.”

리피는 후후, 웃었다.

“좋아. 더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티토의 양손이 리피의 머리를 잡아 왔다. 리피가 몸을 슬쩍 빼자 티토가 파르르 떨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아앗!”

머리채를 붙잡은 거친 손길에 리피가 눈을 찡그렸다.

“아파, 티토. 손 놔.”

“하, 한다면서. 한다고 했잖아요…!”

“할 거야. 단 이번엔 여기에 하는 거야.”

리피는 자신의 아랫배를 가리켰다. 티토는 눈을 깜박이다가 손의 힘을 풀었다. 다시 경계심 많고 병약한 인어로 돌아온 티토가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보자 리피는 티토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물속에서 하는 건 체력이 많이 소진되지만 어쩔 수 없지… 발을 뻗고 여기 기대앉으렴. 나는 물속에서는 숨을 못 쉬니까 누워서 하지는 못해.”

티토는 리피가 하라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등받이에 등을 대고 앉자 리피가 살짝 일어나 두 발을 뻗을 자리를 만들어줬다.

“너나 나나 말라서 아프구나.”

리피는 티토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

두 손으로 티토의 어깨를 짚자 티토의 당황하는 시선이 꽂혔다. 리피는 안심하라는 듯이 웃으면서 자세를 잡았다. 꼿꼿이 선 귀여운 유두가 티토의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리피는 작게 웃으며 아래로 손을 뻗어 티토의 것을 쥐었다.

“흐읏.”

티토가 신음하며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리피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자신의 구멍으로 티토의 것을 안내했다.

“…뭐, 뭐 하는… 왜 그걸… 거기에… 흐으응!”

“손은… 목에 둘러줘. 응?”

“아, 흐, 흐읏!”

“읏, 차가워….”

인어의 은백색 성기는 매끈한 비늘이 표피를 덮고 있어 단단했고, 차가운 온도였다. 리피는 서늘한 온도에 몸을 떨었고, 티토는 따뜻하고 좁은 구멍의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압박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

인어를 품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라서 리피는 처음 겪는 듯한 통증까지 겪었다. 모든 성기가 그렇지만, 입으로 빨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비늘의 결이 성기 뿌리에서 귀두 쪽으로 나 있기 때문에 입으로 할 때는 입천장이 헐 것 같았는데, 그 비늘의 결이 내벽에는 어떤 통증과 쾌감을 가해줄지 무척 기대됐다.

“하, 흐응, 리프… 어떻게, 흐읏, 어떻게 해주세요…!”

리피의 입에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간지러운 쾌감을 느꼈던 티토는, 따뜻하고 좁은 구멍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리피는 후후, 웃으며 기둥은 완전히 삼켰다.

“흐읏, 흐으응!”

티토가 참지 못하고 안에 바로 내보내 버렸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인어는 회복력이 빠르므로.

다시금 단단함을 되찾는 성기를 느끼며 리피는 허리를 앞뒤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흐읏, 안 돼, 천천히… 바, 방금 갔어요. 리프, 천천히…!”

“충분히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

“아흣, 흐으응!”

“귀여워라.”

티토가 신음하며 리피를 끌어안았다.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리피의 시선이 조금 더 위쪽에 있었다. 차가웠던 온도도 점점 익숙해지고 비늘의 결에도 쾌감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리피는 내가 왜 인어 가신을 안 뒀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으응, 좋아….”

“흐읏, 간지러워요… 리프….”

오랜만에 부담 없는 사이즈였기에 리피는 잔뜩 서비스해주기로 했다.

“으으응, 좋아요….”

허리를 둥글게 돌리고.

“흐응, 하아읏….”

일어났다가 앉으며 귀두 끝까지 빼냈다고 뿌리까지 삼키기도 하고.

“아아앗, 흐윽! 하지, 마세요…!”

내벽을 조였다가 풀었다가 했다.

티토는 리피의 목을 끌어안은 채 신음을 흘려댔다. 그러다가 쾌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작정 허리를 흔들었다.

“아흐읏, 티토. 잠깐….”

“흐읏, 흣, 헉, 헉!”

“그렇게 무작정… 흣!”

“따뜻해, 좋아… 하으응! 흐응!”

티토의 손이 리피의 허리로 내려왔다. 티토는 리피의 잘록한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고 하체를 위아래로 빠르게 들썩였다.

“하앗, 흑!”

“좁아, 헉, 따뜻해요… 하으응, 항!”

리피는 아래위로 흔들리면서 두 손으로 티토의 가슴을 짚었다. 완력 차이가 크기 때문에 어차피 저항은 효과가 없으며, 동정에게 어떻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겠는가? 그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성기의 크기가 크지 않으니 어떤 각도로 박든 아플 일은 없어서 놔두기로 했다.

“하아… 좋으니? 흐응.”

“좋아요. 하읏!”

리피가 티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튀어나온 부분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볐다가, 손끝으로 둥글게 굴리고 꾸욱 압박하기도 했다. 천 년 넘는 대현자의 손기술에 티토는 신음하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하아앙! 나, 나올 것 같아. 아까 거가….”

“내 안에, 흐읏, 싸렴, 티토.”

“하, 하지만…!”

“걱정 말고, 빨리. 응?”

“흐으읏!”

리피가 재촉하며 내벽을 조였다. 티토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신음을 내뱉었다. 곧이어 세 번째 사정이 이어졌다.

“하아응!”

티토가 허리를 잘게 떨었다. 리피도 간지러운 쾌감에 몸을 흔들고 싶었으나 티토에게 꽉 잡힌 허리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리피의 내벽은 길게 내뿜어지는 인어의 정액을 흡수했다.

“하아….”

“…….”

“흐응, 이제 그만할까. 처음에 세 번 했으면 충분한… 티토?”

리피는 티토의 어깨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티토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왜 그러니?”

“…….”

“무슨 일… 으읏!?”

리피는 신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안에 품고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티, 토? 흐으윽!”

점점 부피를 키우고 있는 그것은 리피가 품을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앙상한 팔이 굵어지고 있었으며, 리피 쪽이 다소 높았던 눈높이가 순식간에 바뀌고, 점점 차이가 벌어졌다. 말랐던 목이 두꺼워지고 뼈가 드러나던 어깨가 두터워졌다. 리피의 시야에 단단한 가슴팍이 들어왔다.

2차 성장이었다.

“아, 안 돼, 아아윽! 티토!”

리피는 다급한 마음에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 있는 두 팔을 찰싹, 찰싹 때렸으나 오히려 배 속의 흉기가 더더욱 부피를 키우기만 했다.

‘아… 그래, 이거 때문이었어.’

장성한 인어는 키가 210cm에서 크게는 250cm에 달했고, 당연히 아랫것도 그만큼 커졌다. 길이와 둘레가 모두 허벅지만 하니 사이즈 차이가 너무 나서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리피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만, 어서 빼… 아으윽!”

“큿….”

쇳소리가 나던 목소리가 낮고 두꺼워졌다.

“아윽! 아, 안 돼. 움직이지 마. 윽!”

“…리프, 큭…!”

리피가 좋아하는 목소리 톤이었으나 리피는 그것을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티토는 리피의 상체를 끌어안은 채 허리를 쳐올렸다.

“아으윽! 하, 하윽.”

“…크흐….”

“멈춰, 티, 토! 아아윽!”

신음이 아니라 비명이 흘러나왔다.

티토는 방금 전까지 동정이었다. 아직 어떤 식으로 찔러야 품는 사람이 좋아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방금 전 경험에서 무작정 찔러도 리피는 좋다는 신음을 흘렸기에 다시 되풀이할 뿐이었다. 흉기의 크기가 전과 다르다는 게 문제였다.

진입할 때는 너무 커다랗고 두꺼운 부피 때문에 아팠고, 나갈 때는 비늘 결의 저항감에 고통스러웠다.

퍽, 퍽, 퍽, 퍽. 무작정 몰아붙이는 힘에 리피는 강제로 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윽, 제발, 아으윽! 아…파!”

“좁아, 크윽….”

“아파, 흐윽, 윽.”

리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피는 그나마 자유로운 고개를 좌우로 거듭 흔들었으나 티토는 리피의 상체를 껴안은 채 무자비하게 쳐올리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배가… 아윽, 흑…!”

“좁아졌, 어요. 큿… 좋아.”

인어의 힘에 리피는 망가진 인형처럼 위아래로 흔들리기만 했다.

“끄으윽!”

뱃속이 뒤엉키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랫배가 크게 부풀었음을 만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크게 벌어진 결합부가 아팠고, 내장이 꼬이는 것 같았다. 장성한 인어의 몸은 차갑고, 단단했으며, 성기는 안쪽을 거쳐 간 수많은 수컷 중 극소수만이 닿았던 깊은 곳을 강하게 박아왔다. 온도가 차가워서 마치 쇠몽둥이에 박히는 것 같았다.

물속에서 이뤄지는 행위라 움직일 때마다 물이 철퍽, 철퍽 욕조 밖으로 흘러내렸다. 욕조가 부서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거친 움직임이었다.

“처, 으흑, 천천히!”

“충분히, 천천히, 하고 있어요, 큭.”

낮은 음성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어흑, 흑, 흑!”

퍼억, 퍼억. 티토는 귀두까지 빼냈다가 뿌리까지 박는 행위를 빠른 속도로 반복했다. 내벽이 너무 깊은 곳까지 몰아붙이는 커다란 흉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빠져나갈 때마다 물이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것도 괴로웠다.

“너무, 큭, 커, 윽, 어흑!”

“크흣.”

“허윽! 깊, 엇! 흑!”

리피는 입을 크게 벌린 채 고통스러운 신음만 내뱉었다. 빠져나가고 싶어도 상체를 안은 단단한 팔뚝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호흡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흉기를 쑤셔 박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만이었다면 리피는 마법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티토를 멈추게 했을 것이다.

“하윽, 미칠 것, 으읏! 같아, 흐읏.”

각도도, 박자도 엉망인 동정의 움직임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뇌수를 간지럽히는 쾌감이 전신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체위를 바꾸지도 않고 한 자세로만 이어나가는데도 쾌감이 너무 진해서 이것이 고통인지 헷갈렸다.

리피의 성기가 그 증거였다. 티토가 세 번 사정하는 동안 한 번도 사정하지 않았던 리피가 지금은 참지 못하고 정액을 내보내고 있었다.

상대가 사정하는 와중에도 티토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리피의 눈앞이 흐릿해지고 쾌감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찰랑거리는 물의 움직임마저 자극적이었다. 리피는 발가락을 굽히고 고개를 마구마구 흔들었다.

“크흐!”

“아, 안… 아악!”

더 이상은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티토가 크게 신음하며 허리를 처박았다. 몸을 꿰뚫을 것처럼 깊숙하게 들어온 흉기가 드디어 정액을 내뿜기 시작했다. 본래 인어는 절륜한 종족이지만, 동정이었기 때문에 더 길게 참지 못한 것이다.

“아흐으윽!”

리피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곳까지 강하게 범해져서, 도저히 흡수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이 내벽에 차오르고 있었다. 뱃속이 쾌감과 고통으로 엉망진창이었다.

“하아, 하아….”

리피는 숨을 몰아쉬었다. 티토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좋았어요.”

“너… 이렇게 무작정 하면, 아윽.”

티토가 두어 번 더 피스톤질해서 리피가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나가… 아윽.”

“한 번 더요.”

리피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말하자 티토가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인어는 보통 고음이 많은데, 티토의 음성은 몸서리 쳐질 만큼 섹시한 낮은 톤이었다.

“안 돼, 윽… 아파.”

“아파요…?”

무자비하게 박히면서 아프다고 몇 번을 비명을 질렀는데 이제야 안 척이었다.

“응, 빨리 빼….”

“…울었어요?”

티토가 힘이 없어서 자꾸 고개를 숙이는 리피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붉어진 눈가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 놀랐다.

“왜….”

“지금 네 상태를 봐. 안 울게 생겼… 윽.”

“…크흣.”

티토가 상체를 옥죄고 있던 손을 풀어서 리피는 재빨리 빠져나오려고 하다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찰랑, 물이 다시 욕조 밖으로 튀었다.

“더 하면….”

“안 돼, 얼른 나와.”

“아까랑은 다르게 너무 좁아요….”

“…너 2차 성장했어.”

아무래도 자각이 없는 것 같아서 말해줬다. 티토가 눈을 깜박였는데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지금 티토는 완전한 남성 인어였다.

푸르른 빛이 감도는 피부와 새카만 눈동자, 단단한 콧대와 턱. 정성 들여 깎아놓은 대리석 조각 같은 외모였다. 아마도 220cm는 되어 보였다. 몸체에 비해서는 마른 편이지만 워낙 몸이 크다 보니 팔뚝이 리피의 허벅지만 했다.

“나 일으켜줘….”

리피는 힘없이 티토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허윽, 그거 일으키란 게 아니라 날 일으키라고!”

다시 아랫배에서 부피를 키우는 것 때문에 리피는 겁에 질렸다. 마법을 이용할까라는 생각도 했다.

“티토, 빨리.”

“더 할 수 있는데….”

“날 죽일 셈이야? 네 형, 이스리어를 어떻게 보려고?”

친형제는 아니지만, 저를 아껴주는 형의 이야기를 해서인지 티토의 표정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티토는 리피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쑤욱 들어 올렸다.

“아흐흑!….”

너무 거침없는 행위에 리피가 다시 신음을 토해냈다. 왜 또 아파하는지 티토는 영문도 모르고 리피를 들어 올린 상태로 멈췄다. 흉기의 부피에 맞춰줘 벌어졌던 내벽이 수축하고, 구멍이 다물어지면서 무척 쓰라리고 아팠다.

“하아….”

리피는 마법으로 욕조의 마개를 빼내고 자신과 티토의 몸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힘없이 침대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티토는 리피를 안아 들었다.

“윽!”

키가 너무 커서 쿵, 하고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괜찮아? 얼른 그 키에 적응해야겠어.”

리피는 강한 힘으로 옥죄인 허리도 욱신거리고, 아랫배와 구멍이 아픈 와중에도 티토를 걱정했다. 다만 아까처럼 미성년 대하듯 하던 말투는 집어치웠다.

리피가 안아서 와야만 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이제는 리피가 안겨서 부드럽게 침대 위에 눕혀졌다. 리피는 옷을 입는 대신 이불을 끌어안았다. 몸이 너무 고단했다. 잠시 쉬다 나갈 생각이었으나 가신들이 도착할 때까지 자야 할 것 같았다.

가신들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잔소리가 얼마나 이어질지… 하지만 결국엔 이해해줄 것이다. 한두 번이 아니니까.

아랫배가 아직도 부풀어 있는 느낌에 아랫배를 쓰다듬는데, 침대 옆에 목을 수그리고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너도 여기 누워.”

“…네.”

티토가 어색한 몸짓으로 옆에 누웠다. 침대는 인어의 키에 비해 무척 짧았다.

“왜 갑자기 성장한 건지 모르겠네. 섹스 한 번 했다고 성장하는 경우는 처음 봐.”

인어는 경험으로 성장하는 종족이었다. 경험치가 쌓여야 완전히 성장하는데, 그저께 1차 성장한 티토가 갑자기, 섹스 중에, 그것도 삽입한 상태에서 커버릴 줄은 몰랐다. 정말 아찔한 경험이었다.

“너무 좋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좋았다니 다행이야. 나도 정말 좋았어. 하지만 나중에 다른 이와 할 때는 오늘처럼 하면 안 돼.”

“왜요…?”

“나라서 버틴 거지 다른 사람이면 찢어졌어. 네 물건은 평균보다 훨씬 크니까 뿌리까지 다 넣지도 말고, 천천히 움직여야 해.”

“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남이 비명을 지르든 말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옥죄고선 마구잡이로 박아대던 녀석이 행위가 끝나자 온순해졌다. 리피는 이 기회에 이스리어가 거짓말한 내용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사연을 물어본다는 것은 그들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이다. 리피는 더 이상 누구의 인생에도 끼고 싶지 않았고, 인연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대현자로서 최소한의 할 일만 하고 손을 놓을 생각이었다.

***

리피의 가신들과 이스리어는 서너 시간이 지난 후에 도착했다. 야문이 가장 먼저 왔고, 삼십 분 후에 로모어가, 한 시간 후에 기타크와 그레이, 보더, 이스리어가 도착했는데, 덕분에 리피는 잔소리를 세 번이나 들어야 했다.

모시는 주인이 걱정돼서(라타르를 걱정한 게 아니라 가벼운 엉덩이를 걱정했다) 급히 날아온 야문은 그새 라타르를 채워놓은 리피를 보고 더 기우지도 못할 만큼 헤진 옷감을 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역시 정조대를 채워놓아야….”라고 중얼거렸다. 리피의 가신들 중에 발명가가 한 명 있는데, 얼마 전 오직 가신들만이 열쇠를 가진 리피 전용 정조대를 개발했다. 리피에게 정조대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라 결국 쓰이지는 않았지만, 야문은 저택에 돌아가면 바로 채울 기세였다.

그 뒤에 도착한 로모어는 야문보다는 나았다.

“그래, 당연하지. 이렇게 천박해야 리피 공작이지. 내가 내기에서 이겼구만! 우리 공작은 수컷의 좆이라면 마물의 좆도 반길 걸세. 아무한테나 다 다리를 벌려대도 할 때마다 조여 오는 건 신기하단 말이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하는데, 누가 들어도 비난이었다.

야문과 로모어는 리피에게 화내느라고 티토를 보고 놀라지 않았지만, 뒤에 도착한 세 명은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사람이… 티토라고?”

“네, 좀 달라졌죠?”

이스리어는 몇 시간 안 본 사이 완전히 달라진 인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리석 조각 같은 미남자가 자기 가슴까지밖에 오지 않는 리피의 뒤에 숨어서 힐끔거리고 있었다. 소심한 성격은 티토가 맞지만, 그 외에는 너무 달라져서 다른 인어를 데리고 와서 속이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형… 저 맞아요.”

“누가-”

하마터면 누가 당신 형이냐고 해버릴 뻔한 이스리어였지만 잘 참았다.

“둘이 인사 좀 나누세요. 나도 우리 애들하고 얘기 좀 해야 되니까… 티토, 가 봐.”

리피가 티토의 팔뚝을 툭 쳤다. 티토는 주춤주춤 이스리어에게 다가갔다.

종족이 다른 형제가 어색하게 인사하는 동안 리피는 부글부글 끓는 얼굴의 가신들에게 둘러싸였다.

“그새를 못 참고 해버릴 줄은 몰랐네요. 로모어 씨의 말이 맞았어요. 역시 리프 총책임자님을 오래 봐오셔서 저희랑은 다르군요.”

“그럼, 리프라면 당연히 남자를 끌어들일 거라 생각했네. 이건 일종의 신뢰지.”

리피의 가신들은 신뢰라는 단어까지 들먹이며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상대가 마을 사람이 아니라 인어라는 건 의외지만 말일세. 설마 저 녀석이 미성년이 아닌 줄은 몰랐지.”

“그러게요. 미성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우리 리프 님 얼마나 좋아 죽었을까. 아주 그냥 당장 옷 벗고 달려 드셨겠어요.”

“듣자 하니 엊그제 성인이 됐다고 하더니만 그걸 또 좋다고 싹싹 발라 드셨어요, 우리 리프 님 양심도 없으시지.”

“얘들아, 우리 그것보다… 이곳의 신전이 말이야….”

“얼굴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세요, 리프 님. 동정 발라먹은 게 퍽 몸보신이 되었나 봅니다.”

가신들의 비아냥이 신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기타크와 그레이는 비아냥 수준이었지만 보더는 눈빛이 아예 맛이 가 있었다.

“인어… 죽여 버릴 거예요….”

기차의 민간인들을 구조하는 데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신관 보더는 칭찬은커녕 다른 사람과 섹스한 리피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에 핏발 선 눈으로 인어를 죽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난처해진 리피는 야문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야문은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있었다.

“뭐 해, 야문?”

“길버트에게 열쇠를 챙겨놓으라고 말해놓는 중입니다.”

이를 빠드득 갈며 살벌하게 말하는 보좌관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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