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y / We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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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주를 시작하고, 합주하며 신곡을 만들고, 그 수가 하나둘 늘어날수록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흘러갔다. 엇 하는 새에 장마가 지나가더니 푹푹 찌는 무더위가 찾아왔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이 여름이 언제 끝날까 한탄할 무렵에는 벌써 가을이 목전이었다.
그리하여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의 어느 날. 더 숨의 네 사람은 JY 엔터테인먼트의 사무실을 찾게 되었다. 한영이 적을 두고 있는 동시에 그의 형인 진영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였다. 그곳에서, 한영을 제외한 세 명은 사이좋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야, 이제 우리 회사에도 밴드가 생겼네!”
시원스레 웃으며 진영이 하는 말에 재환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어제 본 것처럼 그의 태도가 너무 친근한 까닭도 있었고, 원래 계약이 이렇게 간단한 건가 싶은 의구심이 스친 까닭도 있었다. 지난 과거 겪었던 비슷한 상황을 반추해 보건대, 그때와 달리 이 자리에서는 허튼 이야기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행사 전용 밴드를 원한다든가, 아이돌 밴드를 키울 거라든가. 뭐, 후자는 각자의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미 어려운 얘기였다.
심지어 진영은 앞으로 활동도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호쾌히 웃었다. 그러니 재환은 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회사가 돈 벌 생각이 별로 없나, 하는 주제넘은 걱정마저 슬금슬금 끼쳤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재환은 이토록 진영이 자신들을 환영해 주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몇 달 전 열렸던 콘서트에서 한영이 은퇴 선언을 했었다고 그랬다. 관객들 앞에서 솔로 활동은 이제 그만둘 거라고 했단다. 공연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왔던 재환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 뉴스난에 심심찮게 한영의 이름이 올라왔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인터넷을 잘 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언젠가부터 특히 연예 기사는 거의 병적으로 기피하다시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늘어놔 봤자, 같이 사는 연인으로서 변명밖에 안 되는 소리였다. 결혼설, 마약설, 음주 운전설 등 별별 추측과 루머가 난무할 때, 재환은 그저 한영과 함께하는 행복에만 풍덩 빠져 있었다.
그랬던 한영이 밴드로 음악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고 하니, 형이자 회사 사장인 진영의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반길 법도 했다. 그 어떤 조건 없이 덜컥 더 숨과 계약한 걸 보면 충분히 알 만했다. 이 모든 과정을 너무도 시원히 진행시켜, 재환은 그를 향해 과거의 앙금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밴드를 소꿉놀이 취급했던 일이라든가, 이쪽에게 한영을 놓아 달라고 했던 일이라든가…. 사실, 그렇게 진영을 원망한 적도 딱히 없긴 했다. 그보다 재환은 당장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주 간단히 설명해서, ‘나는 여전히, 유한영에 대해 좆도 몰랐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일단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보는 버릇이 또 도진 것이다.
따라서 진영이 근처 잘한다는 한정식집으로 데려가 거한 저녁을 사 주었을 때도, 이후 고급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다 같이 술 한잔 걸칠 때도 재환은 들뜬 분위기에 완전히 어우러지지 못했다. 함께 잔을 부딪치고, 누군가가 농담을 꺼내면 따라 웃기도 했지만 잠깐뿐이었다. 또 금방 어두컴컴한 수심에 잠겼다. 중간중간 한영이 테이블 아래서 꼭 손을 잡아 주기도 했으나, 애석하게도 큰 위안이 못 되었다. 연인이면서. 연인인 주제에. 이따위 음울한 혼잣말이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쓰린 마음을 삼키느라 줄곧 다물려 있던 입은 배 실장이라는 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트였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너, 밴드 다시 안 했으면 음악 아예 관두려고 그랬어? 그게 말이 돼? 그럼 지금까지 뭐 한 건데? 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또 어떡하라고. 내가 왜 그 개고생 하면서 믹싱 공부 했는데! 너랑…, 유한영 너랑…. 씨발, 진짜…!”
나이 먹고 웬만하면 쓰지 않았던 욕까지 뱉어 가며 한영을 타박하던 재환은 끝내 눈시울을 벌겋게 물들였다. 이렇게 한영을 잡을 일이 아님을 알았지만, 한번 터져 버린 울화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그러다 나중에는 쪼잔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언사까지 멋대로 지껄이고 말았다. 옛날에 밴드를 왜 정리했는지 아느냐고. 왜 내가 널 떠났는지 아느냐고. 억지와 다름없는 말을 잠자코 듣던 한영은 믿을 수 없게도 따뜻한 포옹으로 재환에게 답해 주었다.
“재환아. 내가 음악 왜 그만둬. 나 안 그만둬.”
“이제 활동 안 할 거라 그랬다며…!”
“응. 근데 나 다 알고 있었어.”
‘뭘…!’ 하고 몰아붙이자, 한영은 씩씩대는 몸을 보다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이윽고, 흐트러졌던 호흡이 가라앉고 터질 것 같았던 심장이 누그러지는 부드러운 속삭임이 조곤조곤 재환의 고막으로 흘러들었다.
재환아. 네가 나한테 다시 밴드 하자고 그랬잖아. 난 그럴 줄 알았어. 우리 꼭 밴드 할 거라고. 넌 아냐? 나 그러려고 혼자 진짜 음악 열심히 했어. 너랑 같이 노래 만들고, 기타 치고, 무대에 서는 거 생각하면서. 난 너하고만 하고 싶어. 네가 좋아. 재환이 너밖에 없어.
과거에도 들었던 바가 있는 듯한 이야기가 한없이 다정한 음성을 타고 귓속으로 물결쳐 들어왔다. 네가 치는 기타가 좋고, 네가 하는 믹싱이 좋고, 네가 만든 노래가 좋다고…. 당시에도 퐁당퐁당 마음 위로 떨어져 어김없이 달콤한 파문을 일으키던 말들의 위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랑해, 재환아.”
그때는 제 아집으로 인해 끝내 허락할 수 없었던 한마디가 마지막에 덧붙여지는 순간, 재환은 한숨도 웃음도 아닌 소리를 터뜨렸다. 상기된 뺨 위로는 기어이 툭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서로 멀어져 있던 세월 내도록 죽을힘을 다해 참았던 눈물은 한영 앞에서 이리도 쉽게 나왔다.
“재환아. 나 많이 잘못했어? 그래서 나 미워할 거야?”
보드라운 입술이 눈가에, 뺨에, 입 주변에 차례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응?’ 하는 애틋한 독촉과 함께 끝으로는 재환의 입술에 와 닿았다. 한영과 뜨거운 숨결을 맞붙인 채 재환이 낼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안 미워. 나도 너 사랑해.”
고백하듯이 나온 시인과 함께 언쟁 아닌 언쟁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딴에는 참 절절했는데, 나중 생각해 보니 그보다 더 남부끄럽고 창피한 짓이 또 없었다. 다 지난 일로 혼자 실컷 패악을 부리다가, 사랑해 한마디에 속도 없이 마음을 풀어 버린 꼴이었다. 나 미워? 안 미워. 아마 어린애들도 저딴 유치한 대사는 주고받지 않을 터다. 이렇게 연애는 사람을 참 바보로 만들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억으로 남은 그날 이후, 밴드에 관련된 모든 일이 당황스러울 만치 술술 풀려 나갔다. 도대체 어디서 영감을 얻는 건지 한영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곡을 가져왔고, 멤버 넷이 악기와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 편곡 또한 순식간에 끝났다. 여기에는 각자 안 보이는 곳에서 죽어라 개인 연습을 하는 것도 한몫했다. 한영과 밥 먹고 살 부대끼는 시간을 제외하고선 기타를 놓지 않는 재환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자처해 백수가 된 지우와 태군 역시 절대 연습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누구 하나 가벼운 마음으로 밴드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방증이었다.
한영이 질펀하게 섹스한 다음 날 유독 신곡을 들고 온다는 걸 재환이 슬슬 눈치챘을 무렵, 밴드는 본격적인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싱글이나 EP는 안중에 없었다. 1집. 정규.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꼭 미리 말을 맞춘 것처럼 모두가 똑같았다. 다만, 어떤 곡을 실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씩 의견이 나뉘었다.
재환은 콘셉트를 명확히 해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로 앨범을 구성하길 원했다. 반면 태군은 이왕이면 곡 느낌이 다양한 게 좋지 않겠냐고 그랬고, 지우는 아예 2CD로 내는 것을 방법으로 제시했다. 줄곧 듣는 역할을 하던 한영이 가장 후에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내고 싶어. 우리 옛날에 냈던 EP 앨범.”
이런 일에 한 발 빼고 노래와 연주만 열심히 하던 근 10년 전과 달리, 한영은 본인의 의견을 제법 강하게 피력했다. 적잖은 자신감도 함께 내비쳤다. 그러니 처음에는 ‘저게 뭔 소리지?’ 하던 멤버들도 끝에 가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영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아니었다. 언더에서 활동하던 밴드가 메이저로 데뷔하며 이전 곡들을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으므로. 대신, 앨범 전체를 리메이크곡으로 채우는 건 확실히 조금 무리수였다.
그 결과, 네 사람은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이 된 EP에 실렸던 곡들과 새로 만든 곡을 섞어 새 앨범을 준비하자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따라서 기존의 노래를 재편곡하는, 생각지 못했던 작업에 급히 돌입하게 되었다. 물론 누구도 그 과정을 번거롭다거나 귀찮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다시 모였는데,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좋네! 완전 좋아!”
무엇을 하든 좋다고, 열심히만 하라고 손뼉 쳐 주는 회사 사장님이 밴드의 뒤를 든든히 봐주고 있었다. 든든하다 못해, 재환은 설핏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래도 회사와 계약을 맺은 입장인데, 이렇게 우리 마음대로 하다 망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일었다. 하지만 정말 하찮은 걱정이었음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합주 몇 번이면 충분했다.
몇 시간 내리 계속된 연습으로 지치는 순간이 올 때, 조금만 더 힘내 보자 멤버들을 북돋는 것은 더 이상 재환의 몫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먼저 한영이 파이팅을 외쳤고, 솔선수범하여 연주를 시작했다. 때로는 꽤 진중한 표정으로 ‘우리 진짜 열심히 해야 돼’를 말하기도 했다.
가끔가다 생각이 고갈되어 편곡 작업이 막힐 때에도 한영은 자진하여 이것저것 대안들을 내놓았다. 거기 드럼을 아예 셋잇단으로 치면 어때? 기타랑 베이스랑 유니즌으로 가 보자. 여기는 다 브레이크 잡으면 좋을 것 같아. 개중에는 괜찮은 아이디어가 적잖게 있어, 재환은 몇 번이나 속으로 감탄했다.
이처럼 한영은 명성만이 아니라, 인기만이 아니라 정말로 능력 있고 멋진 뮤지션이 되어 있었다. 내면과 태도 모두가 그러했다. 동시에 더없이 듬직한 리더였다. 중요한 얘기라도 좀 해 볼라치면 눈을 내리깔고 딴청 부리던 예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밴드의 성공을 바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충분히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아마 진영의 눈에도 똑같이 비쳤을 터다. 자신감 넘치는, 믿음직스러운 동생이자 아티스트로.
그런 한영을 지켜보며 ‘우리 리더 멋있네’쯤만 생각하고 말았으면 참 좋았을 뻔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환은 그러지 못했다. 새 앨범을 준비하며 키보드 대신 과감히 기타를 잡은 한영을 볼 때마다, 재환은 제 안에서 위험 신호를 감지했다. 갈빗대 아래 숨은 심장이 아주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한영의 기타 치는 모습을 처음 맞닥뜨리는 것도 아닌데, 진심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설상가상 연주가 시작되면 증상은 더욱 극심해졌다. 긴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지판을 짚으며 눈을 맞춰 올 때, 그러고서 나오는 플레이가 자신의 연주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질 때, 어쩌다 한 번 실수하고 귀엽게 눈을 찡긋거릴 때…. 한영의 행동 하나하나가 재환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거기에 너와 함께 기타를 치고 있다는 벅찬 감정까지 더해져 들뛰는 마음이 쉬이 진정이 안 되었다. 물론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는 끔찍한 실수는 저지른 적 없었으나, 그러기 위해 재환은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수도 없이 써야 했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한영이 첫사랑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거나 저 정도의 사소한 어려움을 제외한다면 모든 상황이 실로 순조롭고도 완벽하게 흘러갔다. 앨범 준비는 착실히 진행되어 가고 있었고, 그럴수록 멤버들의 결속력은 단단해졌다. 당장 무대에 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호흡이 착착 맞아 들었다. 연습, 연습, 그리고 또 연습한 결과였다. 이대로만 한다면 ‘더 숨’으로서 다시 사람들 앞에 나설 날이 머지않아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위기란, 불식간에 튀어나와 사람의 뒤통수를 쳤다.
집 앞 정원을 색색으로 물들인 낙엽의 정취를 음미할 새도 없이 찾아온 겨울. 침대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깨어난 재환과 한영 두 사람은 외출할 채비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오늘만큼은 팬케이크니 스크램블드에그니 하는 손이 가는 음식 대신 식사도 우유와 시리얼로 간단히 해결했다. 현관에 서서 마지막으로 진득한 입맞춤을 나눈 후, 제가끔 등에 기타 가방을 메고 사이좋게 집을 나섰다.
그들의 행선지는 회사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녹음 스튜디오였다. 매일같이 합주하고 편곡하고 그야말로 앨범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더니, 벌써 녹음 작업에 들어갈 때가 된 것이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뿌듯한 감회를 느끼며, 재환은 세련된 간판이 달린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스튜디오로 들어선 재환은 거짓 없이 놀랐다. 일단은 고급 카페 같은 멋들어진 인테리어에 한 번 놀랐고, 그다음으로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에 놀랐다. 로비 역할을 하는 널찍한 공간에 난 문이 한두 개가 아닌 것으로 보아, 녹음을 진행하는 부스가 최소 두세 개는 되지 싶었다. 유학 시절 실습으로 나갔던 스튜디오 중에도 이렇게 큰 곳은 거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데는 한 프로에 얼마지?’ 하는 조금 궁상맞은 의문이 들었다. 미리 듣기로는 한영의 노래 대부분을 이곳에서 녹음했다던데,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뮤지션이었음이 새삼 실감 났다.
그중 하나의 문을 열고 발을 들이자, 크기도 거대한 콘솔 데스크 앞에 앉아 있던 엔지니어가 이쪽이 다 깜짝 놀랄 정도로 반색한 낯을 했다. 반가움이 주체가 안 되는 듯, 아예 벌떡 일어난 엔지니어는 오랜만에 뵌다며 인사하는 한영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아니, 한영 씨!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얼마 전에 같이 녹음했는데, 갑자기 은퇴 선언했다고 해서. 나 가짜 뉴스인 줄 알았다니까? 식겁했네, 진짜.”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하고 답한 한영은 멋쩍은 듯 웃었다. 이런 주위 반응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사이 재환은 휙휙 눈을 굴려 가며 컨트롤 룸 안에 자리한 장비들을 관찰했다. 높이도 올라간 랙케이스에 얼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칸칸이 컨버터니 컴프레서니 프리앰프니 하는 기계들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러다 한구석에 따로 놓인 테이프 머신을 발견하고서는 저도 모르게 입이 헤벌어졌다. 저 귀한 것을 실물로 보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거니와, 도대체 몸값이 얼마나 나가는 물건일지 선뜻 가늠이 되지 않았다.
기타리스트가 아닌 믹싱 기사 서재환으로서 장비 구경에 한창 정신이 팔렸을 즈음, 엔지니어가 나머지 멤버들에게 아는 체를 해 왔다.
“뒤에는 멤버분들? 밴드가 아니라 어디 잘나가는 보이 그룹인 줄 알았네!”
너스레를 떤 엔지니어가 사람 좋게 하하 웃었다. 인사할 생각도 못 한 채 넋 놓고 장비만 보고 있었던 것도, 과한 칭찬을 들은 것도 이래저래 민망해진 재환은 서둘러 엔지니어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다른 두 사람도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했다. 그때, 사뿐한 손길이 재환의 어깨 위로 얹혔다. 한영이 행한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재환은 움칠 굳었다.
“이 친구는 원래 믹싱 기사였어요.”
그러더니 한영은 대뜸 재환의 이력을 소개했다. 여기까지면 괜찮았을 텐데, 영 객관성을 잃은 듯한 부연이 뒤따랐다.
“센스도 좋고 되게 잘해요. 옛날에 냈던 저희 앨범도 다 이 친구가 믹싱했어요.”
민망함이 배가 된 재환은 선뜻 무어라고 말을 얹지 못했다. 조금 커다래진 눈으로 재환을 쳐다보던 엔지니어가 이윽고 더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오늘은 내가 더 바짝 긴장해야 되겠네! 전문가가 계셔서.”
‘에이, 아닙니다.’ 하고 서둘러 손사래 친 재환은 티 안 나게 한영을 흘깃 째려보았다. 안 해도 될 얘기를 굳이 왜 하느냐는 뜻이었다. 진짜 전문가에게 전문가 소리를 들어 버려 도리 없이 면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를 뻔히 짐작하고 있을 거면서, 한영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해사하게 웃기만 했다. 들뜬 기색이 퐁퐁 묻어나는, 얄미울 만큼 예쁜 미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영은 오늘 아침부터 꽤나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재환과 나란히 서서 양치질할 때도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치약 묻은 입으로 쪽쪽 뽀뽀를 해 댔다. 저리 가란 타박도 소용없었다. 딱히 안 그래도 되거늘, 친히 재환의 외출복을 골라 주기까지 했다. 따라서 현재 재환이 입고 있는 옷은 위아래 모두 한영의 것이었다. 기실 두 사람은 사이즈가 미세하게 달라 지금처럼 옷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재환이 한영을 따라 헬스장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몸에 부쩍 근육이 붙어, 구태여 네 옷 내 옷 가릴 필요가 없어졌다. 잘 이해는 안 되나, 한영이 이를 무척 반겼다.
여하간 한영은 진심으로 이번 녹음을 고대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주변으로 풍기는 산뜻한 공기가 이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어쩌면 단순한 멤버 사이가 아니기에 자연스레 와닿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영이 저리 들떠 있으니, 결국 재환도 언제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냐는 양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함께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곡은 과거 싱글로도 발매하고 EP에도 실렸던 〈I See You〉의 재편곡 버전이었다. 첫 녹음인 만큼 익숙한 곡을 택해 부담이나 긴장을 좀 줄여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을 앞두고 있자, 재환은 속에서부터 은근한 긴장감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스튜디오라는 공간 자체에는 제법 익숙했지만, 이런 곳에서 직접 녹음하는 일이 너무도 오랜만인 것이 원인이었다. 심지어 재환은 예전 더 숨의 앨범을 준비할 때 기타를 전부 홈 리코딩으로 녹음했었다. 그러니 본격적인 스튜디오 녹음은 딱 10년 만인 셈이었다. 오히려 긴장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했다.
그나마 다행히, 가장 먼저 녹음을 시작한 건 지우와 태군이었다. 두 사람은 큰 고민 없이 베이스와 드럼을 함께 녹음하기로 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녹음이 진행될수록 재환은 이를 여실히 깨달았다. 특히 태군을 보며 그랬다.
사실 지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원체 긴장을 안 하는 편이기도 했고, 녀석이 집중력도 좋아 옛날에도 멤버 중 제일 빨리 녹음을 마치고는 했었다. 그에 반해, 솔직히 태군은 좀 걱정이 되었다. 보기와 달리 은근히 소심하고 겁 많은 구석이 있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과거 더 숨의 첫 녹음 때, 잔뜩 긴장한 태군은 지켜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로 드럼 앞에서 전에 없이 헤매는 모습을 보였다. 박자도 왔다 갔다, 플레이도 왔다 갔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때도 급히 내려진 처방책이 다름 아닌 지우였다. 실수 연발이던 태군은 지우와 같이 녹음하기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완전히 다른 연주를 선보였다. 그제야 제대로 갈피를 잡은 듯했다. 부스 유리를 가운데 둔 두 사람을 보며, 재환은 그래도 우리가 한 팀은 한 팀이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녹음 초반, 태군은 몸이 덜 풀린 듯 몇 번 자잘한 연주 실수를 했다.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부스 밖에서 베이스를 치던 지우가 먼저 태군을 다독였다. 거기에 힘입었는지, 살짝 우왕좌왕하던 태군은 금방 기세를 되찾았다. 스틱을 쥐고 아주 펄펄 날았다. 나중에는 엔지니어의 입에서 ‘이야, 완전 칼박이네!’ 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재환은 또 한 번 생각했다. 아무리 서로 공백이 길었다 할지라도, 저들은 같은 팀이 분명하다고.
무사히 베이스와 드럼 녹음이 끝난 후, 더 숨의 네 명은 엔지니어, 그리고 어시스턴트와 함께 스튜디오에서 점심을 시켜 먹었다. 마침 근처에 잘하는 순댓국집이 있다고 하여 자연히 메뉴는 순댓국이 되었다.
주문하고 얼마 안 있어 도착한 순댓국은 진짜로 맛이 좋았다. 곧 자신이 녹음할 차례임도 잠시 잊은 재환은 김이 폴폴거리는 국에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녹음하느라 고생한 태군과 지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한영이 순댓국을 아주 잘 먹었다. 재환으로선 조금 의외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순댓국 좋아해?’ 하고 넌지시 물었더니, 한영은 ‘응, 나 이런 거 되게 좋아해.’라며 산뜻이 답했다. 순대뿐만 아니라 곱창, 막창 같은 내장 종류를 좋아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한영에 대해 이런 것 하나 몰랐다는 부정적 생각이 또 재환 안에서 슬금슬금 고개를 들 즈음,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태군이 툭 말을 던졌다.
“니네는 어째 식성도 닮냐? 천생연분이야.”
재미난 걸 발견한 것처럼 태군은 낄낄거리고 웃었다. 옆에 있던 어시스턴트가 ‘멤버 사이가 되게 좋은가 봐요.’ 하며 천진하게 태군을 따라 웃었다. 지우도, 엔지니어도 같이 웃었다. 반면 재환은 웃을 수 없었다. 지레 뜨끔한 탓에 기껏 맛있게 먹은 순댓국이 위에서 콱 얹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충분히 위기라 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후에 닥쳐올 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점심 식사가 끝났을 무렵, 한영의 담당에서 이제는 더 숨의 담당이 된 매니저 배 실장이 스튜디오를 찾았다. 양손 가득 바리바리 음료 캐리어를 들고 온 그는 부지런히 사람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안 그래도 밥 먹고 커피 한 잔 생각이 간절하던 참이라, 커피를 받은 재환은 진심을 담아 배 실장에게 감사하단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이런 대접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한영 말로는 익숙해져야 한다던데, 먼일 같았다.
진한 블랙커피로 말끔히 입가심까지 한 재환은 일찌감치 컨트롤 룸에 자리를 잡고 기타 세팅에 들어갔다. 오늘 재환의 녹음은 기타 앰프에 직접 마이크를 대서 수음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앰프에서 소리를 조절하는 헤드는 컨트롤 룸에 두고, 스피커에 해당하는 부분인 캐비닛만 부스 안에 두었는데, 따라서 재환은 굳이 부스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부스 밖에서 헤드를 조작하며 연주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엔지니어, 멤버들과 한 공간에 있으면서 녹음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꽤나 떨렸다. 여럿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혼자 악기를 연주하려니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이 되었다. 물론 내면의 사정이 그렇다는 거고, 녹음이 시작된 순간 재환은 마치 밥 먹고 기타만 친 사람처럼 완벽한 연주를 해냈다. 녹음을 앞둔 요 며칠, 밥 먹을 시간 빼고 기타만 친 게 맞기는 했다. 여기에 한때 태군이 ‘징글징글하다’라고 평했던 완벽주의 성향과 곧 죽어도 지켜야 하는 자존심까지 더해져, 재환은 연주 내내 작은 실수 한 번 하지 않았다. 테이크를 다시 가는 것도 남들은 다 괜찮다는데 저 혼자 만족을 못 하는 경우였다. 이번에도 태군은 ‘어휴, 저 징글징글한 새끼!’ 하고 혀를 내둘렀고, 지우는 ‘잘한다, 잘한다’며 재환을 응원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지게 기타를 치는 재환을 보며 한영만이 몰래 귀를 붉혔다.
그사이 억 소리 나는 장비들을 보고 눈이 돌아갔던 믹싱 기사 서재환은 깨끗이 의식 속으로 잠들었다. 그리하여 독한 기타리스트 서재환의 녹음이 완전히, 그리고 완벽히 끝났을 때, 컨트롤 룸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번쩍 엄지를 들었다. 특히 한영은 함박웃음 짓느라 입꼬리가 아예 광대까지 쑥 올라갔다.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애정이 가히 노골적이라, 재환은 차마 한영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스튜디오 사람들에게는 그냥 한영의 멤버 사랑이 유별난 것이라고 비치길 바랐다.
소위 단 꿀이 뚝뚝 떨어지는 한 사람의 눈길과, 다른 이들의 수고했다는 인사를 뒤로한 재환은 비척비척 컨트롤 룸을 나섰다. 잠시 후 시작될 한영의 녹음 준비를 좀 거들고 싶었지만, 당장은 무리였다. 헤드폰을 벗고 기타를 내려놓은 순간 긴장이 풀린 것과 함께 온몸의 진이 빠져나간 탓이었다. 손가락까지 다 파들파들 떨리는 것 같았다. 하여튼, 뭘 적당히 하지 못하는 성가신 성격이 문제였다.
저 때문에 같이 고생했을 엔지니어에게 적잖은 미안함을 느끼며 널찍한 로비를 크게 둘러보았다. 믹스 커피, 각종 티 따위가 올라간 간이 테이블 옆에 놓인 정수기가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정수기 앞으로 간 재환은 종이컵을 집었다. 찰랑찰랑 컵이 넘치기 직전까지 물을 받은 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번으로는 턱도 없어 비슷한 양을 또 마셨다. 입가에 방울방울 맺힌 물을 손등으로 쓱 문지를 무렵이었다.
“물도 섹시하게 마시네.”
재환의 고개가 휙 옆으로 돌아갔다. 그대로 멈칫 움직임이 정지했다. 동시에 커다랗게 뜨인 눈에 비치는 건 꼭 물감에 담갔다 뺀 것처럼 진하게 물든 보라색 머리칼이었다. 그 아래 자리한 이목구비로 한 박자 느리게 시선이 옮겨 갔다.
“이런 데서 다 보고, 우리 인연인가 봐요?”
정수기에서 두 발짝 정도 떨어진 자리, 벽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댄 남자의 입매가 시원히 벌어졌다. 분명 재환의 기억에 있는 미소였다. 사실, 기억을 되짚을 것까지도 없었다. 한참 지난 일이기는 하나, 하룻밤을 함께 보낸 남자를 잊을 정도로 재환은 기억력이 모자라지 않았다. 설사 상대방의 머리 색이 분홍색에서 보라색이 되었다 할지라도. 물론, 그가 밝힌 직업이 프로 세션 맨이었다는 것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묘한 기색을 띤 재환의 표정으로 자신을 알아봄을 확신한 남자가 다시금 말을 붙였다.
“근데 여기서 뭐 해요? 난 녹음하러 왔는데.”
녹음 스튜디오에 방문하는 목적이야 어차피 피차일반일 터였다. 그걸 뻔히 알고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곧이 답이 나가지 않는 이유는, 당시 상대에게 뱉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직까지 생각나는 것도 좀 우습긴 하다만.
혹시 악기 연주해요?
아니.
지금 생각해도 참 태연하고 뻔뻔한 대꾸였다. 방바닥에 떨어진 피크 하나로 금방 들통난 거짓말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재환은 그때의 뻔뻔함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길게 말을 섞을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재환은 남자의 어깨 너머로 흘깃 눈을 돌려 방금 자신이 열고 나온 방음문을 보았다. 때마침, 살짝 열린 문틈으로 부드러운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한영의 연주였다.
당장 제일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 시선을 거둔 재환은 앞에 선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혼란과 동요를 능숙하게 잠재우고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냥, 물 마시고 있는데.”
여기서 뭐 하냔 물음에 더없이 충실한 답변이었다. 이를 확인시켜 주듯, 재환은 정수기 앞으로 재차 종이컵을 가져갔다. 하마터면 무심코 우그러뜨릴 뻔한 종이컵 안에 조르르 찬물을 따랐다. 재환 하는 양을 빤히 지켜보던 남자가 별안간 푸하하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마시고 또 마시려고?”
미세하게 눈썹을 구긴 재환은 정수기 코크에서 슬그머니 컵을 뗐다. 졸졸 방정맞게 나던 물소리가 멎었다. 갈증이 가시고도 남을 만큼 물은 충분히 마셨지만, 짐짓 아직도 목이 마른 것처럼 컵 주둥이에 입술을 붙였다. 그러나 입 안으로 흘려 넣을 수 없었다.
물을 들이켜기 전, 제 손에서 슬쩍 종이컵을 빼 가는 손을 따라 가까스로 당혹을 감춘 눈이 삐걱삐걱 굴러갔다. 태연자약하게 남의 컵을 입으로 가져간 남자는 꿀꺽꿀꺽 목울대를 울리며 보란 듯 물을 마셨다. 다 마시고서는 무슨 소주라도 삼킨 것처럼 크, 하고 엄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조금 어이가 없어진 재환은 물끄러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씩 입매를 벌려 웃은 남자는 종이컵을 구겨 휙 옆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잠시 미지근한 침묵이 흐르고, 문득 재환은 더 이상 한영의 기타 소리가 들려오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다시 남자의 등 뒤로 시선을 던지려던 찰나였다.
종이컵을 빼앗겨 어정쩡하게 내려놓고 있던 손 아래로 쓱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지금까지와 달리 당황을 감추는 데 보기 좋게 실패한 재환은 흠칫 놀라 굳고 말았다. 너 미쳤냐는 말도 튀어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놀랐어도 그런 소란을 일으킬 장소가 아님을 알았다. 그사이 손바닥에서부터 손가락까지 훑고 내려간 남자의 손끝이 손톱과 살이 맞닿는 부분을 살살 매만졌다. 꼭 그 자리에 무언가가 있음을 확인하듯이. 재환의 짐작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아직도 딱딱하네.”
흰자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휙 돌아간 눈동자가 슬슬 귓가로 다가오는 남자의 옆얼굴을 향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리며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를 비웃듯, 보라색 머리카락이 기어이 재환의 관자놀이를 살랑살랑 간질였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문 열렸을 때 잠깐 기타 치는 거 봤는데, 무지 섹시하더라.”
손끝을 더듬던 손가락이 경직된 손가락 사이로 감겼다. 지금이야말로 이 겁 없는 남자를 밀어 내야 한다는 경고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 순간, 재환을 보다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목소리가 귓전에 닿을락 말락 한 입술과 귓바퀴 틈으로 소르르 불어왔다.
“재환아?”
자동적으로 다리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남자에게 잡혔던 손이 냉큼 허리 뒤로 숨었다. 잠깐 멈칫했던 남자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천천히 뒤를 돌았다. 뒤이어, 충분히 달갑지 않은 상황에 재를 뿌리듯 한층 기가 막힌 대사가 남자의 입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한영 씨?”
그때야 재환은 정작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베이시스트인 남자는 한영의 곡을 녹음해 준 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 둘은 서로를 아는 사이였다.
* * *
미치고 팔딱 뛸 것 같은 재환의 속내와 상관없이, 예기치 않게 조우한 두 사람은 제법 반갑게 대화를 나누었다. 잘 지냈어요? 오늘은 무슨 녹음? 하는 것들이었다. 도중 한영이 밴드를 시작한 것도 자연히 남자에게 전해졌다. 흥미로운 듯 눈썹을 씰룩이며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에 서 있는 재환을 흘깃거렸다. 재환의 불편함과 혼란함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다. 이를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 낯빛만 조금 파리해졌다.
그즈음에서 둘이 서로 어떻게 아는 사이냐는 얘기가 나올 법도 하건만, 한영은 딱히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남자에게 재환을 같은 밴드에서 기타 치는 친구라고 친절히 소개했다. 이를 들은 남자의 눈빛에 더한 흥미와 호기심이 서리는 것이 재환의 눈에 보였다. 환장할 것 같았다.
그때, 재환은 가정 하나를 떠올려 보았다. 혹 한영이 종전의 상황을 정말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거라면? 예를 들어, 자신과 남자가 그냥 우연찮게 정수기 앞에 같이 서 있었던 것이라고 여긴다든가. 서로 거리가 좀 가깝긴 했지만…. 저 홀로 궁지에 몰린 재환은 그다지 가능성 없는 일에 희망을 거는 한심한 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쩌면 턱없는 가정이 아닐지도 몰랐다. 남자와 서로 녹음 잘하시란 인사를 건넨 후, 컨트롤 룸으로 돌아가 기타 녹음을 시작한 한영은 지극히 상태가 좋아 보였다. 연주는 더없이 매끄러웠고, 그러니 녹음도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간간이 재환을 보며 ‘방금 거 괜찮았어?’ 하고 의견을 묻기도 했다. 정말로 그는 아까 일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영이 보컬 녹음에 들어갔을 때, 재환은 이러한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아무래도 본인이 괜히 제 발 저려 한영의 동태를 과하게 살폈던 듯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완벽하게 노래를 부를 리가 없었다. 부분 조명이 떨어지는 부스 안에 홀로 서서 노래하는 한영은 어떤 수식도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하고, 또 아름다웠다. 지그시 감은 눈, 살포시 헤드폰을 덮은 손, 마이크 앞에서 노랫말을 속삭이는 고운 입술. 그리고 모니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또렷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아직도 스물셋 청년의 순수함과 정제되지 않은 여린 감성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어려 있었다. 뒤통수를 치고 간 위기 따위 어느새 까맣게 잊은 재환은 흐르는 노래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영의 목소리가 심어 준 황홀함과 평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거의 한나절을 걸린 녹음을 마무리하고 엔지니어에게 인사한 뒤 컨트롤 룸을 나섰을 때였다. 웅성웅성 로비를 채운 사람들 틈에서 보라색 머리를 발견한 순간, 감미로운 노래에 묻혔던 경고음이 다시금 재환의 머릿속을 쾅쾅 울려 댔다.
“어, 한영 씨도 지금 끝?”
“네. 옆방도 다 끝났나 봐요?”
“네, 우리 쪽도 방금 끝났어요. 사실 내 녹음은 아까 끝났는데, 다른 사람 하는 것도 좀 보고 가느라.”
한영과 말을 섞던 남자의 눈길이 어중간한 거리에 있던 재환을 흘끔 향했다. 괜히 옆에 선 태군의 손에 페달 보드 가방을 들려 준 재환은 성큼성큼 정수기 앞으로 갔다. 종이컵에 찬물을 한가득 받아 오늘 몇 번이나 바싹 마르는 듯했던 목구멍으로 콸콸 쏟아부었다. 그러나 딱히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멀거니 벽만 쳐다보다 다시 정수기의 추출구 아래로 컵을 가져가려는데, 그 자리에 엉뚱한 컵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한영과 언제 얘기를 끝냈는지, 지척으로 다가온 보라 머리가 재환을 보고 씩 웃고 있었다. 급히 그에게서 눈을 돌린 재환은 본능적으로 한영부터 찾았다. 한영은 옆방에서 녹음하던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유한영 팬이 아니라….”
즐거이 대화하며 웃는 한영에게 꽂혔던 시선이 느리게 남자에게 되돌아갔다. 물은 폼으로만 따른 듯, 남자는 종이컵 주둥이를 입술에 대고 살살 문지르기만 했다. 재환의 눈썹 사이에 옴폭 골이 팼다.
“남자 친구였어?”
골이 더욱 깊어졌다. 남자는 재환이 어떤 반응을 보여도 상관없다는 양 느물느물 웃었다. 능글맞은 표정에 딱히 악의 같은 건 비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재환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필요 이상으로 과거 둘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갑자기 나온 한영의 얘기에 재환은 당연히 과민한 반응을 보였고, 남자는 종전과 매우 비슷한 질문을 던졌었다. 단, 방금 질문과는 단어 하나가 달랐다.
유한영 팬이었어?
그때는 고민 없이 부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에 있던 종이컵을 구깃구깃 우그려 쓰레기통에 버린 재환은 휙 남자를 등졌다. 그에게 아무 대답을 않은 채, 로비 한편에 서 있는 한영에게로 서둘러 돌아갔다. 침묵이 부정보다는 긍정의 의미로 여겨지기 쉽다는 것을 알았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유한영이랑 그런 사이 아니라는 거짓도, 그런 사이 맞다는 수긍도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남자의 얘기를 듣고 있기는 더더욱 싫었다. 좋다고 섹스할 때는 언제고, 남자에게 황당한 놈으로 찍힌대도 별수 없었다. 가까이 온 재환을 발견한 한영이 ‘그럼 갈까?’ 하며 방긋 웃었다. 재환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일찍 스튜디오로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창창했던 하늘에는 어느덧 완연한 밤이 덮여 있었다. 바뀐 계절을 알려 주듯 밤공기가 제법 맵찼다. ‘추워!’를 외친 태군이 냉큼 지우의 차에 올라타고, 피식 웃은 지우가 나머지 두 사람에게 수고했다 인사하며 먼저 차를 출발시켰다.
곧이어 재환과 한영은 배 실장이 운전대를 잡은 차의 뒷좌석에 올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맨 재환은 문득 콩콩 소리가 들려오는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꺼멓게 선팅이 된 창 너머로 보라색 형상이 비쳤다. 누구일지 뻔히 짐작이 가, 적이 당황한 재환은 주춤 굳고 말았다. 이를 알 리 없는 배 실장이 앞에서 친히 뒷좌석의 창문을 열어 주었다. 스르륵 창문이 내려가고, 보라색 머리의 남자가 싱긋 미소 지은 얼굴로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영이 ‘어?’ 하고 알은체를 하는 순간, 창틈으로 종이쪽지 하나가 톡 떨어졌다.
“심심하면 연락해요. 아, 한영 씨도 잘 가고요!”
재환과 한영에게 차례로 말을 건넨 남자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이제 출발해도 괜찮다는 듯 손바닥으로 탁탁 차 뚜껑을 두드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재환은 서둘러 창문 버튼을 눌렀다. 스윽 하고 창 올라가는 속도가 꼭 굼벵이 기어가는 것 같았다. 한참을 기다려 창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쪽지가 떨어져 있는 허벅지로 시선이 내려갔다. 스튜디오 이름이 새겨진 메모지에 11자리 숫자가 적혀 있었다. 핸드폰 번호였다.
헛숨을 들이켠 재환은 급히 종이를 집어 외투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당연히 옆자리에 있던 한영이 그 행동을 모두 지켜보았다. 때마침 기어를 바꾼 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다시 창으로 휙 고개를 튼 재환은 몇 박자나 늦게 속으로 ‘저 자식이…!’를 외쳤다. 그 대상이 더는 창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지근지근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사이였나 봐.”
‘아는 사이야?’라거나 ‘둘이 어떻게 알아?’ 하는 물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한영 쪽으로 얼굴을 돌린 재환은 선뜻 무어라 답을 꺼내지 못했다. 아직 히터를 튼 것도 아니건만, 등 뒤로 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믹싱하면서 알게 됐나 보다.”
이번에도 한영의 입 밖으로 나온 문장은 끝이 올라가는 일 없이 담담히 마무리되었다. 그것도 그렇고,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나 표정까지 더해져 재환은 입이 더욱 꾹 다물렸다. 연인의 차분함과 온화함이 소리 없이 양심을 난도질했다. 창밖을 스쳐 가는 가로등 불빛을 빨아들인 듯, 어두운 차 안에서도 재환을 보는 갈색 눈동자가 잔잔히 반짝였다. 그곳에서 비롯되는 눈빛이 한결같이 다정했다.
결국 한영과 더 눈을 맞추지 못한 재환은 툭 시선을 떨구었다. 주머니에 넣은 손에 꽉 힘이 들어가며, 손바닥 안에 있던 쪽지가 작게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에 맞먹는 희미한 목소리로 ‘응….’ 하는 비겁한 대답이 새어 나갔다. 가슴이 먹먹했다.
한산한 밤의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조용조용한 음악 소리가 흘렀다. 무슨 노래인지 영 신경을 못 쓰고 있던 재환은 몇 번 트랙이 바뀌었을 즈음에야 Embryo의 곡임을 알아차렸다. 올 초 나왔던 밴드의 새 앨범이었다. 역시 노래가 좋다느니, 대단한 밴드라느니 한영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지만, 대신 재환은 침묵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존경하는 밴드의 노래를 도피처로 삼고 싶지 않았다.
서로를 연인이라 부르고, 또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번도 ‘과거’의 이야기가 오간 적이 없었다. 물론 여기서 ‘과거’란, 남녀 통틀어 연애 상대에 관련된 과거를 뜻했다. 딱히 불문율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재환에게는 그런 대화가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그간 누구를 만났냐, 몇 명을 만났냐, 얼마나 만났냐…. 십 대 어린애들끼리 하는 연애도 아니고, 그런 유치한 질문은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모두 거짓말이고 핑계고 변명이다. 사실은 그저 겁이 나서 그랬다. 8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설사 그사이 한영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잘나가는 뮤지션에, 외모는 아이돌 뺨쳐, 거기다 한 사람만 바라보는 순정까지. 이런 남자를 어느 누가 가만둘까. 그중 하나와 얼마든지 풍덩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재환 자신에게는 이를 원망하거나 안타까워할 자격이 없었다. 염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걸 다 알면서 한영의 과거에 관심을 둘 만큼, 재환은 용기 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과거 또한 한영에게 말할 수 없었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너 없이도 멀쩡히 사는 척했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외로움에 허덕이는 밤이면 한영을 떠올리며 가슴을 치기가 일쑤였고, 그러다 끝내는 빈자리를 대신할 상대를 찾았다. 머리 색이 같아서, 눈동자가 닮아서, 키가 비슷해서…. 온갖 같지도 않은 이유를 붙여 가며 다른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그 한심한 밤들을 구태여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연인 앞에 결코 떳떳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답답한 상념에 잠겨 창 너머의 밤거리를 내다보던 재환은 옆자리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이름 한 번 부르지 않았는데, 그 작은 기척을 감지한 듯 한영의 고개 역시 재환을 향했다. ‘응?’ 하는 눈빛과 함께 붉은 입술이 곱게 휘어졌다. 재환은 ‘그냥’이라는 의미를 담아 살짝 얼굴을 저었다. 그 틈에 시트 가운데 좌석을 살금살금 가로지른 손이 살포시 손등에 닿아 왔다. 자못 놀란 재환은 배 실장의 눈이 비치는 백미러로 휙 시선을 던졌다. 곧바로 다시 한영을 보자, 기다란 검지가 입가로 올라오며 예쁜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입 모양으로 ‘쉿’을 말했다. 가슴을 채웠던 먹먹함이 한순간 목구멍까지 치밀어, 재환은 조금 찌글찌글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유한영. 사실 나 너 없이 살면서, 다른 놈들이랑 잤어. 널 못 잊어서 그랬어. 비겁하게 너한테서 도망치고, 그러면서 살았어. 그렇게 한심하게….
차마 소리 내어 뱉을 수 없는 말들이 우글우글 울음이 고인 목구멍으로 삼켜졌다. 한영은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띤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사실 정말 그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괜찮아?’ 한마디일지 몰랐다. 이 또한 마음속에서 출렁거릴 뿐이었다.
얼마 안 가 차는 금방 한영의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차고에 차를 두고 가려는 배 실장에게 그냥 키를 맡긴 한영은 재환의 손을 붙잡고 현관문을 열었다. 널찍한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한영의 입술이 재환을 찾아들었다.
“음….”
부드럽게 어깨를 붙잡아 재환을 벽으로 붙인 한영은 조심조심 입술을 문지르며 따뜻한 숨을 불어넣었다. 정원을 걷는 사이 잠깐이나마 살갗으로 스몄던 찬기를 단숨에 몰아내는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다소 갑작스럽게 시작된 입맞춤에 주춤하기도 잠시, 재환은 도톰한 코트에 덮인 너른 등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한영이 고개를 트는 반대 방향으로 턱을 비틀며 넘어오는 숨결을 꼴깍꼴깍 받아마셨다.
이윽고 포근한 숨결은 저 아래까지 흘러내려 시꺼멓게 고여 있던 서글픔을 녹였다. 연인에게 끝내 토하지 못한 비겁한 고백도 함께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 자리에, 오늘 일은 잠깐 스쳐 가는 위기일 뿐이라는 안도감이 차츰 퍼져 나갔다. 이렇게 서로를 원하고, 또 사랑하고 있는데 그따위 사소한 일에 우리의 관계가 흔들릴 리가 없었다. 다 낙관적이지 못한 성격이 빚어낸 쓸데없는 걱정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가슴 깊은 곳까지 온기를 채워 넣던 입맞춤이 멎었다. 엄지로 재환의 귓바퀴를 살살 문지르던 한영이 콩 이마를 맞대었다. 몇 번이나 센서 등이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다 끝내 컴컴해진 공간에서도 색 옅은 눈동자가 맑은 빛을 뿜었다. 타액으로 반지르르해진 입술이 더없이 붉었다. 그곳에 쌕 웃음이 걸렸다.
“오늘 재환이 멋있더라.”
“나…?”
“응. 기타 녹음하는데, 너무 멋있어서 좀 위험했어. 진짜 키스하고 싶었어.”
재환은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땐 깐깐하고 고집스러워 보일 모습이 멋있었다고 하니 좀 할 말이 없었다. 예쁜 각도로 떨어지는 어깨를 잠시 가만가만 매만지다가, 솔직한 답을 돌려주었다.
“너도 멋있었어. 노래도 잘 부르고, 이젠 기타까지 잘 쳐서.”
“그럼….”
키스해 줘.
또 한 번 픽 웃음을 흘린 재환은 슬며시 눈꺼풀을 내리며 얼굴을 틀었다. 딱 알맞은 각도에서 두 개의 입술이 맞물리고, 망설임 없이 혀가 얽혀 들었다. 열기를 입은 숨이 다시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바깥세상의 계절을 잊게 하는 뜨거운 입맞춤 속에서, 재환은 한영이 건네주는 평온과 안정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 * *
다음 날 아침, 재환은 평소보다 약 1시간 빠르게 눈을 떴다. 아니, 최근에는 기타 연습으로 새벽 늦게 잠드는 날이 잦았으므로 거의 2, 3시간은 일찍 일어난 셈이었다. 곁에서 곤히 잠든 연인의 뺨에 쪽 입 맞춘 재환은 침대 밖으로 가뿐히 두 다리를 뻗었다.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담뿍 받으며 쭉 기지개를 켠 후 벌떡 일어섰다. 오늘은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욕실에 들어가 간단히 씻고 나온 재환은 곧장 부엌으로 내려갔다. 왕 꽃무늬가 그려진 앞치마를 질끈 허리에 묶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눈을 굴리며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하나씩 필요한 준비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팬케이크 믹스부터 계란, 우유, 큼직한 믹싱 볼, 그리고 거품기까지…. 여기에 접시와 프라이팬도 함께 내놓으니 제법 넓었던 조리대 위가 금방 가득 찼다.
그 가운데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재환은 조리대 모서리를 한 손으로 짚고서 톡톡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그러다 턱을 매만지며 ‘흠….’ 소리를 내고, 다시 부지런히 화면을 눌렀다. 액정 위에서 검지를 위아래로 쓱쓱 움직이기도 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나름의 준비 과정이었다.
‘팬케이크 맛있게 굽는 방법’이 얼추 머릿속에 입력됐을 즈음, 재환은 핸드폰 화면을 껐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마다 조금씩 설명은 달랐지만, 결국 섞고, 붓고, 굽고, 뒤집으면 되는 것 같았다. 걱정한 만큼 단계가 복잡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 볼 만하다는 소리였다. 스멀스멀 샘솟은 자신감이 재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약 20분쯤이 지나고, 미소가 번졌던 자리에는 당혹과 의문만이 남았다. 눈썹 사이에 깊게 팬 주름과 쭉 떨어진 입꼬리가 ‘이게 왜 이러지?’ 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했다. 하…, 하는 한숨도 심심찮게 비어졌다. 골치 아픈 듯 이마를 문지르던 재환은 일단 가스 불을 끄고 핸드폰을 집었다.
아까 입력했던 검색어를 다시 넣고 주르륵 떠오르는 글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내용을 살펴도 딱히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 듯했다. 가루와 우유, 달걀을 정해진 용량대로 잘 섞었고, 팬도 충분히 달궜다. 식용유도 딱 알맞게 둘렀다. 그런데 대체 왜….
조그만 액정을 뚫어 버릴 기세로 노려보던 눈이 휙 가스레인지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무시 못 할 양의 실패작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어느 것은 한 면이 새카맣게 탔고, 또 어느 것은 너덜너덜 아주 누더기 꼴이었다. 그나마 괜찮게 익은 것은 울퉁불퉁 모양이 심히 괴상쩍었다. 한마디로, 예쁘게 접시에 담아낼 만한 것이 단 한 장도 없었다. 낭패였다.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긴 재환은 두 손으로 조리대를 짚고서 천천히 심호흡했다.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다 때려치우자는 욱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한영처럼 카페에서 팔아도 손색없는 모양새의 팬케이크를 굽는 건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것 같았다. 평소 요리 실력이 엉망진창이었으면 또 몰라. 예상도 못 한 난관에 부딪힌 재환은 하도 당황스러워 속까지 부글거렸다. 하나 이대로 결심한 바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30분 후, 흉흉한 분위기가 감도는 부엌에 한영이 내려왔다. 식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재환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한영은 재빨리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식탁 위 덩그러니 놓인 우유 그릇과 시리얼 병을 일별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재환아. 무슨 일 있어?”
깍지 낀 손에 코를 얹고 있던 재환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식탁 가운데쯤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느릿느릿 들어 올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은….”
그마저도 말이 도중에 끊겼다. 재차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은 후, 착잡한 목소리로 할 말을 마저 이었다.
“그냥 시리얼 먹자.”
한영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동작으로 재환의 그릇에 착착 시리얼을 부은 뒤, 자신의 그릇에도 비슷한 양을 부었다. 뒤이어 숟가락을 쥐고 우유에 잠긴 시리얼을 푸는 모습에서는 조금의 불평이나 불만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쁜 일정도 없으면서 연인에게 초라한 아침 식사를 대접한 재환의 마음이 하릴없는 미안함으로 가득 찼다. 실패의 쓰라림은 덤이었다.
그다음 날도 재환은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지난밤 늦게까지 합주실에서 곡 작업을 한 한영은 아직 옆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쌕쌕 고른 숨을 내쉬는 연인의 뺨에 부드러이 입 맞추고 일어선 재환은 부지런히 씻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조금 아쉽지만, 어제부로 재환은 목표에서 ‘팬케이크 만들기’라는 항목을 과감히 지웠다. 아침 메뉴가 그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 실패의 쓴맛만 곱씹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 도전할 메뉴는 스크램블드에그였다. 계란 물에 우유를 풀어 익히기만 하면 되니, 과정도 간단하고 실패 확률도 훨씬 낮았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늘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곤죽이 된 계란 덩어리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밀어 넣은 재환은 자괴감에 빠졌다. 아무리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해도, 이런 것 하나 못 해내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게 여겨졌다. 의욕이 넘치면 뭐 하나. 마음만 급해 또 일을 그르치고 말았는데. 멀쩡한 계란은 쓰레기로 만들었지, 시간은 시간대로 허비했지. 또다시 식탁 위로 시리얼을 꺼내는 재환의 기분이 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이러나저러나, 한영은 재환이 준비한 시리얼을 오늘도 아무 불평 없이 먹어 주었다. 식탁 분위기도 썩 나쁘지 않았다. 한영은 저번 녹음에 관한 얘기, 앞으로 남은 녹음에 관한 얘기 등 재환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고, 덕분에 재환은 그럭저럭 풀린 기분으로 차린 것 없는 식사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러다 한영의 손목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끈 팔찌를 보고는 또다시 살짝 침울해지고 말았다.
지난여름이던가. 한영이 한 번 넌지시 팔찌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이 팔찌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면 안 되겠느냐는 거였다. 그 당사자인 재환은 당연히 단칼에 ‘아니’라는 답을 내놓았다. 매몰차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한영은 지난 세월 저 팔찌를 한 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게 갑자기 자신의 손목에 떡하니 채워져 있으면,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았다. 그리고 한영은 쉽게 구설수에 올라도 될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게 거절을 합리화했지만, 이후 몇 날 며칠 풀 죽은 한영을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역이었다. 억지로 웃음 짓는 표정 한 번만 보아도 가슴이 사정없이 아리었다. ‘팔찌 내놔’라는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삼켰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재환은 흔들리는 이성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한영과 함께하는 인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굳세게 마음먹은 일이었다. 그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짓은 그 무엇 하나 하지 않겠노라고.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한 재환 나름의 각오였다.
그 각오가, 재환은 문득 후회되었다. 남들이 뭐라고 수군대든 말든, 그냥 그때 팔찌를 받을 걸 그랬다는 뒤늦은 안타까움이 찾아왔다. 지금이라도 손목을 내밀면 한영은 꽃처럼 웃으며 팔찌를 채워 줄 터다. 그러면… 내도록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 죄책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자꾸 비겁한 방향으로 생각을 틀려는 스스로를 다그친 재환은 마음을 다잡았다. 고작 이틀 아침 식사를 망친 것 가지고 참 청승이었다. 이리 약해 빠진 정신머리로 앞으로 밴드 활동은 어떻게 하려나 싶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조곤조곤 말을 잇는 한영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재환은 결심을 다졌다. 내일은 꼭, 한영에게 맛있는 아침을 대접할 것이다.
연인이 맞춰 놓은 알람을 살며시 끈 재환은 살금살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난밤도 곡 작업 때문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침대로 들어온 한영은 아직 일어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평소 아침 담당인 그를 대신해 미리 식사를 차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핑계인 감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만….
어제 아침, 재환은 야심 차게 와플에 도전했다. 그리고 보란 듯 실패했다. 하지만 의기소침해하지 않았다. 그냥, 서양식 메뉴와 자신은 맞지 않는다는 깔끔한 결론을 내렸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세 번의 실패로 충분했다.
어김없이 부엌으로 들어선 재환은 호기롭게 앞치마를 매고 두 팔을 걷었다. 냉장고와 조리대를 오가며 지난밤 한영이 합주실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몰래 사 온 재료들을 꺼냈다. 이윽고, 재환은 침착한 마음으로 본격적인 요리에 들어갔다. 이른 성공을 자신하는 건방을 떠는 대신 중간중간 몇 번이나 핸드폰을 꺼내 꼼꼼히 레시피를 확인했다. 믹서에 한가득 재료를 넣고 돌릴 때에는 혹 2층에서 자고 있는 한영에게까지 들릴까 싶어 마음 졸이기도 했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에 살살 손가락을 비벼 가며 소금을 넣는 것을 끝으로 재환은 탁 가스 불을 껐다. 부엌 한편에 걸린 벽시계를 흘끔거리며 손끝으로 톡톡 조리대 모서리를 두드렸다. 아직까지 내려오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한영은 잠이 들어도 아주 깊이 든 모양이었다. 피곤한 연인을 더 자게 하고픈 마음과, 다정히 깨워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재환 안에서 작은 충돌을 일으켰다. 반대 입장에 놓였던 경우 어느 쪽이 저를 더 행복하게 해 주었는지를 되새겨 본 재환은 가볍게 발을 뗐다.
사랑하는 사람이 잠든 방으로 들어서자, 그사이 더 높이 떠오른 해가 공간 가득 포근한 빛살을 비추고 있었다. 햇빛이 녹아내린 자리를 가로지른 재환은 가운데에 이불이 둥그렇게 솟아 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늘하늘한 갈색 머리칼 아래까지 덮인 이불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쥐어 조심조심 걷어 냈다. 그 아래서 눈밭처럼 뽀얀 얼굴이 드러났다.
“한영아. 아침 했어.”
‘응…?’ 하며 몇 번 움찔거린 눈꺼풀이 천천히 위로 들쳐졌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눈동자에 초점을 잡고 재환의 얼굴을 확인한 한영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굿 모닝.”
간질간질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상냥한 아침 인사를 전했다. ‘응, 굿 모닝.’이라고 나지막이 답한 재환은 예쁜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살포시 손바닥으로 넘겼다. 허리 숙여 티 한 점 없는 매끈한 살결에 부드럽게 입술을 누르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더 얼굴을 내린 재환은 창밖의 새 지저귀는 소리보다 더 듣기 좋은 음색을 흘린 입술에 폭 입술을 묻었다. 금방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이 목뒤로 감겼다.
“음….”
이른 시간 나누기에는 조금 농밀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잠시 후, 평소의 상대를 흉내 내 촉촉한 입술을 혀로 길게 핥은 재환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발그레한 홍조가 떠오른 뺨을 톡톡 두드리며 진작 했어야 할 말을 꺼냈다.
“씻고 내려와. 아침 해 놨어.”
약 15분쯤이 지났을 무렵, 혼자 아침 햇살을 받은 것처럼 말간 얼굴을 한 남자가 사뿐사뿐 부엌으로 들어섰다. 재환을 발견하자마자 함박웃음 지은 한영은 한달음에 식탁 앞으로 와 앉았다. 동시에 식탁 위 놓인 것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호박 타락죽.”
“타락죽?”
재환이 응, 하고 답하자 한영은 냉큼 숟가락을 들어 곱게 견과류 가루가 뿌려진 죽을 떠 올렸다. 오목한 숟가락에 담긴 노란색 죽에서 폴폴 가느다란 김이 올라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죽을 요리조리로 살폈다.
“꼭 수프 같아.”
“우유가 들어가서 그래. 우유 넣고 쑤는 죽보고 타락죽이라 그러거든.”
‘몰랐어….’ 하고 중얼거린 한영은 감탄 섞인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요 며칠 시리얼로만 아침을 해결했으니 충분히 저런 반응을 보일 만했다. 한영은 숟가락을 보다 얼굴 가까이 가져가 입을 크게 벌렸다. 화들짝 놀란 재환은 급히 한영을 제지했다.
“야, 뜨거워…!”
하지만 이미 죽 색깔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붉은 입술 사이로 쏙 숟가락 머리가 들어간 후였다. 순간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한 재환은 푹 눈을 찌푸렸다. 그러든 말든 정작 당사자는 숟가락을 쭉 빨며 샐쭉 웃었다.
“재환아. 진짜 맛있어.”
이윽고 나온 감상이 재환을 주춤하게 했다. 종전 상대에게 언성을 높인 것도 잊은 채 금세 민망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몇 번이나 도전한 끝에 들은 말이라 그런지, 부끄럽고도 뿌듯한 마음이 잘 감춰지지 않았다. 어제 연습 시간을 쪼개 인터넷을 뒤진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멋쩍게 뒷목을 주무른 재환은 애써 태연한 척 한영에게 답했다.
“그래. 많이 먹어.”
‘응!’ 한 한영은 죽을 호로록호로록 잘도 떠먹었다. 이쪽은 후후 불어야 겨우 한 입 먹겠는데, 뜨겁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수저질을 하는 사이사이 재환에게 쉼 없이 죽에 대해 묻기도 했다. 이런 건 어디서 알았냐, 만드는 거 어렵지는 않더냐, 다음에 또 해 달라고 해도 되냐…. 물론 번번이 재환의 답은 짧디짧았다. 인터넷, 아니, 응…. 못내 쑥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무리 맛있어 봤자 죽 하나 끓인 것뿐인데, 저렇게 좋아하는 한영이 적이 신기했다. 끝내 픽 입꼬리가 올라갈 즈음이었다.
“근데 재환아.”
재환은 ‘어?’ 하고 되물으며 죽 그릇에서 고개를 들었다. 자연히 자신을 보고 있을 줄 알았던 한영이 어째서인지 저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잠깐 죽 떠먹기를 유예한 재환은 한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또 어떤 부끄러운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었다.
“안 이래도 돼.”
또 한 번 ‘어…?’ 하는 소리가 흘러 나갔다.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얼빠진 목소리였다. 한영이 한 말을 재깍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제야 밑으로 떨어져 있던 한영의 시선이 천천히 재환을 향했다. 줄곧 지금까지 비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미소에, 재환은 멈칫했다. 왜 한영이 저렇게 안쓰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침, 원래 내 담당이잖아. 고생 안 해도 돼, 재환아.”
애매하게 숟가락을 쥔 채로 굳은 재환은 곧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라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한영과 진득이 눈을 맞추지 못하고 이쪽저쪽으로 눈알을 굴리다가, 꼭 둘러대듯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같이 사는데 네 담당 내 담당이 어딨어. 그냥,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차리면 되지. 어제까지는 내가 좀 헤맸어서 시리얼 준 거고…. 왜, 아침에 죽은 좀 별로야? 그냥 밥 주는 게 나아?”
급하게 혀를 놀리면서도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다. 쓸데없이 얘기가 장황해지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창피함이 차올라, 귀로는 벌겋게 열이 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을 꿰뚫리고 만 기분이었다.
며칠간 할 줄도 모르는 요리에 미련하게 매달린 것도, 그럼에도 끝내 포기하지 못한 것도 다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한영 본인은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재환은 더더욱 불편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속 보이는 짓을 할 게 아니라, ‘너 하란 대로 다 할게’라는 비굴한 말이라도 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일전 겪은 바가 있어서 그랬다.
약 한 달 전쯤, 두 사람은 모처럼 영화관에서 데이트할 약속을 잡은 적이 있었다. 말이 데이트지 그냥 같이 나가 영화 한 편 보고 오는 것이었으나, 한영은 그 며칠 전부터 적잖이 들뜬 모습을 내비쳤다. ‘데이트’라는 것 자체가 둘 사이에 너무 드문 일이라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영은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진, 소위 말하는 연예인이었고, 그런 그에게 연인과의 데이트는 결코 쉽게 허락되는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상대가 남자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티켓을 예매할 때도 영화관에 사람이 없는 가장 이른 시간을 노려야 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한영은 물론이고 재환도 함께 모자에 안경을 쓰고 나갈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면서도 둘은 꼭 첩보 작전을 짜는 것 같다며 옆머리를 맞대고 킥킥 웃었다. 저 때까지는 참 좋았더랬다.
그 바로 전날, 합주가 있었다. 제법 늦은 시간까지 편곡과 연습이 이어졌고, 후에도 재환은 혼자 합주실에 남아 기타를 쳤다. 핸드폰 시계가 ‘00:00’을 한참 넘어가도록 이것저것 새로운 플레이를 짜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곧 동이 틀 때가 되어 있었다. 화들짝 놀란 재환은 아뿔싸를 외치며 기타를 내려놓았다. 결과는 뭐…. 뻔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 홀로 침대에서 눈 뜬 재환은 망연자실하여 탄식했다. 그길로 허겁지겁 한영에게 달려가 미안하다고 골백번 사죄했다. 한영은 괜찮다며, 다른 일 때문에 늦잠 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며 재환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짠한 미소 뒤에 감춘 실망감이 재환의 눈에 훤히 보였다.
그날 밤, 재환은 홀딱 벗고 한영이 먼저 누워 있는 침대에 들이닥쳤다. 들입다 한영의 잠옷을 벗기며 오늘은 너 하고 싶었던 거 다 하자고 윽박 아닌 윽박을 질렀다. 기껏해야 서로 빨아 주는 정도까지만 생각했었기에 가능한 언사였다. 그리고, 역시나 인생이란, 늘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뿌려 줘.
뭐?
얼굴에 싸 줘, 재환아.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는 재주가 없는 재환은 결국 한영의 얼굴 앞에 대고 성기를 흔들었다. 자괴감, 죄악감, 회의감 등 온갖 배덕한 감정이 끓어올라 이성을 좀먹었다. 억눌린 신음을 뱉는 사이사이 혀를 길게 내어 성기 끄트머리를 건드리는 한영을 볼 때마다 속이 시뻘겋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사정 후 느껴야 했던 충격과 같은 기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축 처진 속눈썹을 타고, 새하얀 뺨을 타고, 벙긋 벌어진 입술을 타고 질척하게 흘러내리는 정액. 날름 나와 이를 훑고 가는 붉은 혀. 살포시 내걸린 미소. 제가 싸지른 것으로 온 얼굴을 허옇게 칠갑한 한영을 내려다보던 재환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위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을 열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너머로 발을 들이는 순간, 절대 되돌아올 수 없으리란 무시무시한 예감이 강하게 끼쳤다.
이후 재환은 몇 날 며칠 눈만 감아도 정액을 뒤집어쓴 한영의 얼굴이 떠오르는 흉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단언컨대 두 번 다시 그런 해괴한 짓은 사양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또 한영에게 너 하고픈 거 다 하겠다는 경솔한 발언을 내뱉는다면, 그때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니 매일 아침 부엌에서 애쓰는 것이 그나마 재환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론… 참 뻔한 행동임은 스스로도 잘 알았다.
재환이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지난 일을 되새기는 사이, 지그시 눈을 맞춰 오던 한영이 살짝 시선을 떨어뜨리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설득을 포기한 듯 약한 한숨 소리가 함께 새어 나왔다.
“죽 좋아. 그냥, 재환이 너 귀찮을까 봐.”
“안 귀찮아.”
아까만 해도 두서없이 말을 읊었던 것과 달리, 재환은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답했다. 재환의 단호함을 읽은 것인지, 한영은 더 같은 소리를 하지 않고 ‘알았어, 재환아.’ 하고 말았다. 입가를 맴도는 웃음은 한결 편안한 기색을 띠었다. 그제야 재환은 마음을 놓았다. 조심스럽게나마 이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데… 조금 이른 안도였는지도 모르겠다.
* * *
바쁘다면 바쁘고, 평온하다면 평온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차례대로 다음 곡들을 녹음하기 위해 밴드는 부지런히 스튜디오를 들락거렸고, 그럴수록 재환은 집에 돌아와 작업실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무 이의 없이 그가 앨범 믹싱을 맡기로 결정이 난 까닭이었다.
믹싱은 기대 이상으로 순조로웠다. 그래도 몇 년 동안을 해 온 일이라고, 작업에 막힘이 없었다. 간혹 한영이 옆에 앉아 이렇게 해 줘, 저렇게 해 줘, 하면 재환은 고민도 않고 착착 손을 놀렸다. 잔뜩 집중한 나머지 근래 이러저러한 사유로 마음을 갉작거리던 사사로운 생각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내년 봄으로 잡힌 발매일을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환이 이토록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실 스튜디오에서 두 번 다시 남자를 마주치지 않은 덕이 컸다. 재차 한영 앞에서 표정 관리가 어려운 상황에 놓일까 내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천만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남자는 그날 하루로 녹음이 완전히 끝난 모양이었다. 같은 업계에 있는 이상 또 언제 맞닥뜨릴지 몰랐으나, 당장 서로를 피한 것만으로 재환은 크게 한시름 덜 수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도 재환은 한영을 대신해 며칠에 한 번꼴로 꼭 아침을 준비했다. 제법 좋아하던 눈치라 타락죽도 두어 번 더 끓였고, 아예 제대로 밥을 차린 날도 있었다. 그러면 한영은 늘 맛있게 먹어 주었다. 전처럼 고생하지 말라느니 괜찮다느니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대신 정말 잘 먹었다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겼다. 그 한마디가 재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보상이었다.
오늘 아침도 바지런히 식사를 차렸다 정리한 재환은 한영과 나란히 작업실에 앉아 믹싱 작업에 열을 올렸다. 지금까지 신기할 정도로 술술 진행되었던 것과 다르게, 오늘은 조금 고민되는 부분이 있어 자꾸만 ‘흠….’ 하는 소리가 흘렀다. 어느새 자세는 비스듬해져 한쪽 손에 턱을 괸 상태였다. 다른 손으로는 연신 딸깍딸깍 마우스를 눌렀다.
“어때?”
“음…. 조금 애매한 것 같아.”
“그지?”
브리지에 등장하는 한영의 목소리에 무언가 임팩트를 주고 싶은데,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리버브 종류를 바꿔 보기도, 딜레이를 줘 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결과가 영 신통찮았다. 악기 없이 노래만 흐르는 구간이라 적당히 넘어가기도 어려웠다. 고민이 깊어졌다.
사실 과거에는 이럴 때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면 얼추 괜찮은 방법이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니코틴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말이 정확했다. 푹푹 한숨을 내쉬는 재환을 지켜보던 한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재환아, 좀 쉬었다 할래? 너무 스트레스 받은 것 같아.”
부드러운 손길이 옆머리를 살며시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바닥에 턱을 얹고 있던 재환은 슬쩍 고개를 틀어 가까이 있는 한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유독 나긋나긋하게 들린 이유에서였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던 마음이 덕분에 살짝 풀리는 것 같았다. 재환은 대답 대신 조금 다른 얘기를 꺼내 보았다.
“내일 둘이서 가까운 데라도 좀 갈까?”
“가까운 데?”
“응. 뭐, 아무 데나. 너 가고 싶었던 곳.”
쌕 보조개를 만들며 웃은 한영은 ‘생각해 볼게.’라고 답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다음 순간 곧바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덩달아 재환의 표정에도 의아함이 스쳤다.
“왜?”
“내일 결혼식 있었어.”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 한영이 곧 같은 회사 배우의 결혼식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재환에게도 함께 가지 않겠냐 물었는데, 재환은 그냥 됐다고 했다. 이제 자신도 한 회사 소속이니 가서 두루두루 인사라도 해 두면 좋을 성싶었지만, 아직까지 그런 복잡한 자리는 피하고픈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계약만 했다 뿐이지 정식으로 데뷔를 한 것도 아닌데다가, 굳이 가서 제 모자란 사교성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가지 말까…?”
못내 아쉬운 듯 한영은 재환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의자 위에서 어정쩡하게 몸이 비틀린 재환은 한영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귓전에서 아쉬움 가득한 한숨이 퍼졌다.
“하…. 가도 술이나 마실 텐데. 재환이 너랑 같이 있고 싶다.”
그때, 재환의 머릿속에 번쩍 불이 켜졌다. 퍼뜩 한영의 몸을 떨어뜨린 재환은 부리나케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조금 어안이 벙벙해진 한영이 재환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 봐.”
탁, 소리와 함께 키보드의 스페이스 키가 눌렸다. 동시에 1시간 가까이 작업자를 괴롭히던 구간이 비로소 다시 재생되었다. 이윽고 양쪽에 자리한 모니터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 한영의 눈이 차츰 커다래졌다. 딱 네 마디가 나오도록 설정된 노래는 머지않아 알아서 멎었다.
“지금은 어때?”
씩 회심의 미소를 지은 재환이 한영을 보며 물었다. 답하는 대신 잠시 머뭇거리던 한영은 ‘잠깐만.’ 하며 키보드로 손을 뻗었다. 또 한 번 스페이스 키가 눌리고, 노래가 흘렀다.
리버브를 몽땅 뺀 한영의 목소리는 꼭 바로 옆에서 나지막이 노랫말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공간감을 완전히 죽여 버렸으니 당연했다. 거기에 고음을 살려 치읓, 시옷 발음 따위의 치찰음이나 숨소리가 상당히 부각되어 들렸다. 조금 전 재환이 귓가에서 들었던 음성 그대로였다.
또다시 노래가 멈추고, 한영은 홱홱 고개를 돌려 가며 트랙이 쌓여 있는 모니터와 재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끝내 입매를 활짝 벌려 환한 미소를 틔웠다.
“재환이 최고야!”
순식간에 재환의 뺨 위로 쪽쪽, 쪽쪽 입맞춤 세례가 쏟아졌다. 워낙 서로 바짝 붙어 있었던지라 도망칠 공간도, 겨를도 없었다. 얼굴에 축축하게 침을 묻히는 한영을 피하려 재환이 이리저리 고개를 비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럴수록 쭉 내밀어진 붉은 입술이 재환에게 한층 집요히 따라붙었다. 오히려 어설프게 반항하다 눈두덩이, 콧잔등에까지 입맞춤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야…! 좀! 함께 부대끼기에는 넓지 않은 작업실이 다 큰 남자가 앙탈 부리는 소리와 살결에 입술이 흡착하는 민망한 소리로 가득 찼다.
마지못해 포기에 다다른 재환의 입술에까지 쭈웁 입술을 누르고서야 한영은 그를 놓아주었다. 입가를 손등으로 벅벅 문지른 재환은 오늘따라 애정 표현이 과한 연인이자 동료를 짐짓 원망스럽게 째려보았다. 그래 봤자 한영은 싱글거릴 뿐이었다.
“…암튼, 이제 괜찮지?”
“응. 완전 괜찮아. 노래에 딱 어울려.”
당연하지. 재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노래의 제목은 ‘Love Again’이었고, 가사 또한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 행복을 넘치도록 표현하고 있었다. 하니 재환 자신의 귓가에서 울리는 한영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것이 정답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를 곧이곧대로 당사자에게 전할 생각은 요만큼도 하지 않았다. 부끄러워 그랬다.
“유한영.”
도로 모니터로 시선을 되돌린 재환은 다음 작업을 위해 휙휙 마우스를 움직이며 한영을 불렀다. 아직도 들뜬 기분이 가시지 않은 듯 한영은 ‘응?’ 하고 발랄하게 답했다. 부러 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재환의 입이 짧게 열렸다.
“이따 섹스하자.”
역시나, 대답은 ‘응…!’이었다.
“하아, 하아….”
“하….”
며칠 만의 섹스라 그런지, 두 사람 모두 평소보다 사정이 빨랐다. 뒤에서 박던 자세 그대로 풀썩 쓰러진 한영은 재환의 가슴을 끌어안고 가쁜 숨을 토했다. 아래 깔린 재환 역시 숨을 몰아쉬며 할딱거리기는 매한가지였다. 난방을 세게 틀지도 않았는데 주위로 흐르는 공기가 한여름의 습기를 머금은 것처럼 후덥지근했다. 급히 시작해 급히 끝난 섹스의 여파였다.
양쪽 모두의 숨소리가 그럭저럭 사그라졌을 즈음, 살짝 상체를 세운 한영이 땀에 젖은 재환의 등마루를 따라 쪽쪽 입술을 새겼다. 등에서 퍼지는 간지러운 감촉에 재환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허벅지 뒤편에 슬쩍슬쩍 닿는 성기가 다시금 꼿꼿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럴 때마다, 재환은 아주 자연스럽게 벚꽃 비 내리던 재회의 날이 떠올랐다. 당시 성기가 잘 안 선다고 안타까이 고백하던 남자는 어디로 갔나 싶어서.
회상에 심취했던 탓이었을까. 재환은 저도 모르게 픽 소리를 흘렸다. 후희인지 전희인지 모를 애무가 동시에 주춤 멎었다.
“재환아…?”
“아…. 아니, 그냥….”
대충 얼버무리는 도중 또 큭, 소리가 비어졌다. 그러기 무섭게 겨드랑이가 붙들리며 홱 몸이 뒤집혔다. 단숨에 재환을 돌려 눕힌 한영이 두 손으로 베갯머리를 짚고 제법 진지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근육이 불거진 팔 사이에 갇힌 재환은 슬그머니 연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한영의 미간이 폭 움츠러들었다.
“웃었어.”
“내가? 언제?”
“방금 웃었어.”
일단 발뺌하고 보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슬쩍 곁눈으로 본 한영의 표정이 제법 심각해, 재환은 계속해서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럴수록 매끈한 이마에 잡힌 주름의 수가 늘어났다. 섹스 중 나누었던 격한 키스 때문에 통통해진 입술을 가르고 단호한 문장이 떨어졌다.
“서재환 씨. 말을 좀 해 보세요.”
저 이상한 호칭은 한영이 재환에게 무언가를 집요하게 요구할 때 나오는 말버릇 같은 거였다. 쉽사리 물러나 주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결국, 재환은 자못 삼엄한 기운을 풍기는 연인에게 진실을 실토했다.
“그…, 이제는 잘 서서.”
“뭐?”
“우리 다시 만난 날. 너 그때는 잘 안 섰잖아.”
“…….”
언제 적 얘기를 해. 그땐 긴장해서 그런 거잖아. 너무해. 너랑 있으면 당연히 잘 서지. 밤새 세울 거야.
뿔이 난 한 사람이 마구 간지럼을 퍼붓고, 뒤늦게 아차 한 한 사람이 발버둥 치느라 침대 다리가 있는 대로 삐거덕거렸다. 소란 아닌 소란은 얼마 안 가 입술을 빨아먹는 듯한 난잡한 키스로 변질되었다. 한영은 말할 것도 없었고, 재환의 성기까지 팽팽하게 부풀어 서로의 배, 허벅지, 사타구니를 마구잡이로 찔렀다. 잘도 발딱발딱 선다고 한영을 놀릴 입장이 아니었다.
아직 끝에 정액이 출렁거리는 채로 끼워져 있던 콘돔이 쑥 뽑혔다. 늘 재환을 당황시키는 크기의 성기를 손으로 급히 문지르며 몸을 튼 한영이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었다. 동시에 ‘에이….’ 하고 마뜩잖은 감정을 품은 탄성을 작게 터뜨렸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기를 주무르던 재환이 한영에게 의아함 섞인 눈빛을 보냈다.
“왜?”
“콘돔이 없네….”
정말 몸이 달아 미치겠는 날이 아닌 이상, 두 사람은 웬만하면 콘돔을 끼고 섹스했다. 그리고 오늘은 아슬아슬 이성이 제어 가능한 날이었으므로 초반부터 착실히 콘돔을 챙겼다. 잠시 눈을 굴리던 재환은 뭔가 생각난 듯이 아, 했다.
“밑의 서랍 열어 봐. 거기 한 상자 있을 수도 있어.”
응, 대답한 한영이 보다 허리를 숙여 협탁의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멈칫 굳었다. 고개를 튼 재환의 시선 또한 서랍 안을 향하려는 찰나,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이 급히 안쪽에 들어갔다 나오며 탁, 서랍이 도로 닫혔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유한영?”
“딱 한 상자 있었어.”
허리를 편 한영이 밑에 누운 재환을 보며 콘돔 상자를 흔들었다. 조도를 낮춘 스탠드 불빛을 의지해 재환이 살핀 한영의 표정은 서랍을 열기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흥분으로 인해 옅게 떠오른 홍조도 그대로였다. 흘끔 눈을 돌려 잠깐 협탁을 본 재환은 ‘응. 빨리 끼우고 넣어 줘.’ 하고 말았다. 얼마 안 있어, 두툼한 성기가 아래를 가르고 들어왔다. 뜨거운 숨이 터졌다.
세 번째 사정 후 까무룩 잠이 들었던 재환은 부스스 눈을 떴다. 습관처럼 몸을 돌려 누우며 침대 옆자리를 더듬었으나, 아무것도 손에 걸리는 게 없었다. 조금 더 팔을 뻗어 협탁 위의 스탠드를 켰다.
희미하게 퍼진 빛이 혼자 남은 너른 공간을 비추었다. 꾸물꾸물 상체를 세운 재환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땀에 푹 절여졌던 몸이 보송보송한 것을 보아, 아무래도 한영은 자신을 먼저 닦아 준 후 씻으러 간 모양이었다. 참 한결같이 다정한 연인이었다.
스탠드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뒤집어 몇 시나 되었나 확인해 볼 즈음, 문득 마냥 낯설지 않은 냄새가 재환의 코끝을 스쳤다. 미간을 좁히고 몇 번 코를 킁킁거려 본 재환은 내처 자리에서 일어섰다. 속옷은 생략한 채, 책상 의자에 곱게 걸쳐져 있는 트레이닝복을 위아래로 꿰입었다. 슬리퍼에 발을 넣은 후 살살 냄새가 풍겨 오는 곳으로 걸음을 뗐다.
방에 연결된 유리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자, 겨울의 찬 바람이 쌩하고 살갗을 엤다. 그럭저럭 참을 정도는 되어, 어깨만 한 번 부르르 떤 재환은 짙은 색 나무 데크가 깔린 발코니로 발을 디뎠다. 캠핑용 의자 두 개만 놓인 공간을 휙휙 살피던 중, 허리 높이까지 오는 난간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 앞으로 다가간 재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재떨이였다. 이 집에서 과거 딱 한 번 보고 다시 보지 못했던 물건이기도 했다. 안에 담긴 것은 당연히 짧아질 만큼 짧아진 담배꽁초였다. 하나도 아닌 셋이었다. 하…. 재환의 입 밖으로 착잡한 한숨이 흘렀다. 그것도 잠시, 재환은 꽁초 아래 부스러기처럼 남아 있는 담뱃재로 손을 뻗었다.
담뱃재 사이에 섞인 손톱만 한 종잇조각을 집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잘게 찢긴 듯한 모양새도 그렇고, 끄트머리에 꺼멓게 그을린 자국이 있는 것이 어떻게 봐도 불에 태우다 남은 잔여물이었다. 그곳에 적혀 있는 숫자 두어 개가 재환의 표정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이 종이는, 일전 재환이 남자에게 받은 쪽지였다.
받았을 당시 코트 주머니에 얼른 구겨 넣었던 쪽지의 행방을 되짚기 위해 급히 머리가 굴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환은 협탁 아래쪽 서랍에 쪽지를 처박아 놓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쓰레기통에 버리면 오히려 한영의 눈에 띌까 싶어 그나마 손이 안 가는 곳에 넣어 뒀던 건데, 아까 한영이 콘돔을 꺼내다 그걸 본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데 태워진 채로 버려져 있을 리가 없었다.
“미치겠네….”
안 그래도 추운 바깥 공기를 쐬고 있던 몸 안에서 피가 차갑게 식었다. 행복했던 섹스의 여운 따위 이미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그 자리에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스산한 소리를 싣고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한영의 미소를 보며 느꼈던 안도, 우리는 끄떡없을 거라는 믿음이 함께 힘없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역시, 한영은 괜찮지 않았다.
* * *
다음 날 재환은 평소 일어나던 시간에 느지막이 눈을 떴다. 대충 씻고 부엌으로 내려가자 한영이 차려 놓은 아침상이 그를 맞이했다. 예쁜 접시 위,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와플이 보는 것만으로 입 안에 군침을 돌게 했다. 한데 어쩐 일인지 와플의 바삭함도, 생크림의 부드러움도, 시럽의 달콤함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고생한 한영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는 잊지 않고 남겼다.
설거지까지 해 두겠다는 한영에게 마저 뒷정리를 부탁한 재환은 곧바로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어차피 오늘은 한영이 약속이 있어 함께 나가지도 못하겠다, 열 내서 믹싱이나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생각한 대로 머리고 손이고 놀릴 수 없었다. 진전 없이 모니터를 노려볼수록 눈만 빡빡하게 말라 왔다. 한영이 웬만하면 인공 눈물은 쓰지 말라고 그랬는데, 잠시만 모른 체하고 크게 뜬 눈으로 똑똑 맑은 액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후회했다. 이런 걸 쓰면 눈이 더 건조해진다는 한영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점심은 오랜만에 한영과 중국 음식을 주문해 먹었다. 몇 년 새 세상이 바뀌어 온갖 것을 배달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두 사람이 선택하는 메뉴는 과거와 크게 변함이 없었다. 사이좋게 짜장면을 잘 비벼 먹은 뒤, 깨끗이 씻은 그릇을 대문 앞에 내놓았다.
오후에도 재환은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샷을 세 번이나 내린 블랙커피를 옆에 두고 잘 되지도 않는 작업에 매달렸다. 허송세월하는 감이 없잖았지만, 그렇다고 작업실을 나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주 조금, 한영을 마주치기가 껄끄러운 탓이었다.
기실 한영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밥을 먹을 때에도 재환에게 평범하게 말을 걸었고, 심지어 쪽지 얘기 같은 건 꺼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저쪽이 아무 언급이 없으니, 이쪽도 무어라 해명을 하기가 뭐했다. 어쩌다 그냥 거기 둔 거야. 사실 나도 잊고 있었어. 진짜 몰랐다니까? 한영에게 그 어떤 얘기를 한들, 다 변명 나부랭이만도 못한 소리가 될 것 같았다.
식은 커피를 모조리 입 안에 털어 넣은 재환은 푹 한숨을 떨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슬리퍼를 직직 끌고 화장실로 가 치약 묻은 칫솔을 입에 물 무렵이었다. 달칵, 화장실 문이 열리며 기가 막힌 양복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아…. 내가 불 켜 둔 건 줄 알았어.”
“양치질하려고. 왜. 볼일 보게?”
입에서 칫솔을 빼며 물은 재환은 무의식중 아래위로 눈을 움직였다. 한영이 차려입은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쫙 정장을 빼입은 자태는 아무래도 낯설었다. 사실 저런 옷이 있는 줄도 잘 몰랐다. 어쨌거나 당황스러울 정도로 멋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웬만하면 ‘유한영이야 뭘 입어도…’ 하고 넘어가겠는데, 그러기가 어려웠다.
“오줌 싸려고 했어.”
훑기만 해도 한참이 걸리는 긴 다리에서 도로 시선을 올리던 재환은 한영과 눈이 마주치기 전 휙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급히 칫솔질을 시작하며 웅얼거렸다.
“그앙 하.”
그냥 싸라는 뜻이었다. 응, 대답한 한영이 세면대 옆에 자리한 변기로 와 섰다. 직 양복바지의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시원히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봐도 크게 상관없는 장면이었으나, 재환은 억세게도 칫솔질하는 거울 속 남자에게 눈을 고정했다.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함보다는,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두근대는 심장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풍기는 향은 왜 또 이리 향긋한지 모르겠다.
잠시 뒤, 볼일을 마친 한영이 변기 손잡이를 눌러 물을 내렸다. 그러고서 성큼 세면대 쪽으로 다가오기에, 재환은 저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그냥 손을 씻으려고 한 것뿐인데 말이다. 괜히 머쓱해진 재환은 주춤 비켜서며 더 열심히 칫솔을 움직였다. 그러다 칫솔 끄트머리로 푹 잇몸을 찍고 말았다. 막을 새도 없이 목구멍에서 윽, 소리가 비어졌다. 손에 비누칠을 하던 한영이 얼른 얼굴을 들어 거울로 재환을 보았다.
“칫솔에 찔렸어?”
재환은 ‘으으.’ 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치약에 비릿한 맛이 섞이는 것이, 찔러도 아주 피가 날 정도로 찌른 모양이었다. 그러나 ‘많이 아파?’ 하는 물음에는 냉큼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눈물 콕 나올 만큼 아팠지만, 별로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조심히 해.”
물을 튼 한영이 눈썹 끝을 떨어뜨리며 미소 지었다. ‘으.’ 하고 답한 재환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흐르는 물 아래 비눗기를 헹구어 내는 하얀 손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칫솔질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손을 모두 씻은 뒤, 한영은 벽면에 걸린 수건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탁탁 앞뒤로 손의 물기를 닦고서 다시 거울을 보고 섰다. 두 손으로 넥타이를 매만지던 한영이 재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혼자 저녁 먹어야겠다.”
“으.”
“낮에 짜장면 먹었으니까, 저녁은 밥 챙겨 먹어.”
“아아어.”
‘그럼 갔다 올게.’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영은 화장실을 나섰다. 그제야 재환은 입 안 가득 고인 거품을 세면대에 뱉어 냈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 거품에 발간 피가 섞여 있었다. 괜스레 칫솔에 찍힌 자리가 더 쓰라린 것 같아 눈이 찌푸려졌다. 그때, 불현듯 재환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평소라면 치약 묻은 입술에 입 맞추고 가고도 남았을 한영이 제게 손 하나 대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종일을 그랬다는 것을.
잇몸을 쿡쿡 찌르던 통증이 어느새 가슴께로 옮겨 가 심장을 건드렸다. 세면대 모서리를 짚고 고개를 숙인 재환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왠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혼자 있는 집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둘이 있다 한 사람 없는 것뿐인데 이렇게 적막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적막함이 못내 어색해, 재환은 거실 소파에 앉아 평소 잘 틀지도 않던 티브이를 틀고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영 되지 않는 믹싱은 진작 포기했다.
탁자에 발을 올리고 이리저리 채널이나 돌리던 재환은 어느새 쿠션을 끌어안고 털썩 옆으로 누웠다. 벽 절반을 차지하다시피 한 화면 속에서 저 아래 지방의 음식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해물 삼합에 게장에 생선구이에…. 이어서는 시푸른 바다의 풍경이 펼쳐졌다. 언제 시간 될 때 한영이랑 저런 데라도 한번 갔다 오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앨범 준비로 한창인 당장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기실 지금도 바빠야 했다. 바빠야 하는데…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결국 비척비척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재환은 리모컨 버튼을 눌러 티브이를 껐다. 동시에 거실 가득 컴컴한 어둠이 찾아왔다. 한층 깊어진 고요가 헛헛한 마음을 두드렸다. 사실은 배가 고픈 건지도 몰랐다.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은 조금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부엌으로 향했다. 이래저래 귀찮아 낮에처럼 배달 음식을 시킬까 싶기도 했지만, 저녁은 밥을 먹으라는 한영의 말이 생각났다. 은근히 제가 본인 말을 잘 듣는다는 걸 한영이 알려나 모르겠다.
그렇다고 대단한 요리를 할 마음은 들지 않아, 재환은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간단히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아침으로 먹으려고 사다 두었던 베이컨을 잘라 넣고, 위에 반숙한 계란프라이도 올렸더니 그럭저럭 모양새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마무리로 솔솔 깨까지 뿌린 뒤 식탁에 앉아 홀로 숟가락을 들었다. 보기에는 맛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맛이 그저 그랬다. 네 맛도 내 맛도 없었다.
배만 채운 식사를 끝낸 후에는 작업실로 들어가 노트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한영과 함께 믹싱할 때만 하더라도 고민되던 구간을 해결해 잔뜩 신이 났었는데, 그게 마치 아주 오래된 일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티브이를 보며 느꼈던 압박감, 내지는 죄의식이 나름의 채찍이 된 모양이었다. 아까처럼 모니터를 보며 시간만 허비하는 대신, 재환은 얼추 집중하여 작업할 수 있었다. 물론 곁에 한영이 없으니 이게 제대로 돼 가고 있는 건지 완벽히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뭔가가 진행되고 있음에 의의를 두었다.
약 2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키보드를 두드려 흐르던 노래를 멈춘 재환은 습관처럼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서 인공 눈물 튜브 하나를 꺼내려다, 그냥 관두고 도로 서랍을 닫았다. 뻑뻑한 감이 도는 눈을 꾹 감고서 관자놀이 부근을 양 엄지로 한참 눌러 주었다. 다시 눈을 뜨자, 시야가 좀 맑게 걷히는 느낌이었다.
곧바로 작업에 돌아가는 대신 흘깃 눈을 돌려 책상 한편의 LED 시계를 확인한 재환은 핸드폰을 집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다만, 그사이 온 연락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인의 연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이므로 사람도 많을 테고, 피로연이다 뭐다 해서 계속 떠들썩한 자리가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연예인의 결혼식이니 모르긴 몰라도 더 복잡한 분위기일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언제 온다 문자 한 번 할 틈이 없나….
재환은 얼른 휙휙 고개를 저어 속 좁은 애인이나 할 법한 생각을 떨쳐 냈다. 여기서 더 생각이 깊어지면 온갖 화려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 한영의 모습까지 상상하게 될 것 같았다. 굳이 필요치 않은 상상이었다.
한데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한영이 통 연락을 주지 않음을 인지하자, 이상하게 믹싱이 손에 안 잡혔다. 방금까지는 잘되든 못되든 어찌저찌 해 나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역시 오늘은 날이 아니다, 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까닭 없이 모니터 가득 띄워 놓고 있던 플러그인 창들을 모조리 닫은 재환은 저장 키나 반복해서 눌렀다.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노트북 전원까지 꺼 버린 후, 엎어 놓았던 핸드폰을 다시 들어 올렸다. 까만 액정을 톡톡 두드리자 깔끔히 시계와 날짜만 표시된 화면이 나타났다. 흠…, 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잠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인 듯해, 재환은 저벅저벅 지하 합주실로 내려갔다. 빠른 수순으로 세팅을 끝내고 기타의 볼륨을 높였다. 뭘 칠까 궁리하다가, 간만에 아예 작정하고 속주 메들리를 했다. 미친 듯 지판을 누르다 보니 나중에는 손가락이 얼얼해 더 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계절이 무색하게 이마에는 송골송골 자잘한 땀방울까지 맺혔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고 앰프 전원을 끄던 재환은 문득 피식, 열없는 웃음을 흘렸다. 믹싱은 그리 헤맸으면서 기타는 참 잘도 쳐진다 싶었다. 믹싱 기사보다는 기타리스트가 더 적성에 맞는 건가, 라는 아무 쓰잘머리 없는 생각이 스쳤다.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하면 다행이었다.
아까 칫솔로 대차게 찍어 버렸던 곳을 살살 피해 양치질하고, 씻고,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도 임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이던 재환은 끝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급히 핸드폰을 집어 인터넷을 켰다. 커서가 깜빡이는 검색 창을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다, 오늘 결혼한다던 배우의 이름을 쳐 보았다. 손톱보다도 작은 입력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불과 몇 시간 전 식장에서 찍힌 듯한 기사 사진이 주르륵 떠올랐다. 스크롤을 내려 그중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곧이어 사진 하나를 누른 재환의 눈살이 푹 찌푸려졌다.
[싱어송라이터 유한영 ‘저 아직 은퇴 안 했어요~’]
제목 참…. 재환은 쯧 혀를 찼다. 한영은 저런 경박한 말투를 쓰지도 않았을뿐더러, ‘아직 은퇴’라는 표현도 심히 거슬렸다. 자신도 잠깐 오해한 적이 있기는 하나, 한영은 절대로 은퇴 선언을 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본인과 버젓이 밴드를 하고 있는데, 은퇴는 무슨 은퇴란 말인가. 기사 제목을 저렇게 막 갖다 붙여도 되는 건가.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혼자서 씩씩대던 재환은 한발 늦게 제목 밑의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멋들어진 감색 양복을 빼입은 한영이 포토 월 앞에 서서 기자들을 향해 살포시 손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단정한 머리,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늘씬한 몸매. 감탄을 자아내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당장 재환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언제 와. 보고 싶어, 유한영.
연인의 사진을 늘려 보고 줄여 보던 손가락이 끝내 핸드폰 화면의 키패드 위에서 11자리 번호를 눌렀다. 속 좁아 보이든, 귀찮게 여겨지든 상관하지 않고 통화 버튼까지 꾹 누른 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따르르 신호음이 울렸다. 울리고, 울리고, 또 울리다가.
- 여보세요? 재환이이-?
찰나 기대감 같은 것이 서렸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분명 한영과 비슷한 목소리였으나, 한영이 아니었다.
“사… 장님?”
아직은 입에 익지 않은 호칭을 조심히 불러 보자 스피커 너머에서 ‘어? 금방 아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마저도 왁자한 주변 소음에 섞여 영 또렷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안 들렸다.
- 한영이 지금…, …서 취했어. 조금…, …건데, …봐!
‘예?’ 하고 되묻는 순간 전화가 뚝 끊겼다. 조금 황당한 표정이 된 재환은 그새 꺼멓게 꺼진 핸드폰 액정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전화를 받은 건지, 진영이 한 말 중 제대로 들리는 단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도 ‘취했어’ 하나만은 정확히 들었다.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던 재환은 휙 이불을 젖히고 자리를 박찼다.
탁탁 슬리퍼 소리를 내며 1층 거실로 내려간 재환은 일단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오른쪽, 왼쪽으로 눈알을 굴렸다.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영이 있는 곳으로 데리러 가자니, 지금 있는 장소를 몰랐다. 그렇다고 또다시 전화를 걸면 종전의 상황이 되풀이될 것 같았다. 사실 이게 이렇게 걱정할 거리가 맞는 건가 싶기도 했다. 옆에 형도 같이 있겠다, 집에서 발 동동 구를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일는지도 몰랐다. 다 큰 성인이 밖에서 술 마시다 좀 취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진짜, 유한영….”
생각을 포기하듯 한숨 같은 혼잣말을 흘린 재환은 소파 등받이 위로 휙 뒤통수를 젖혔다. 주황색 스탠드 불빛이 비친 천장을 올려 보며 몇 번 더 긴 한숨을 늘어뜨렸다. 이렇든 저렇든, 당장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인 듯했다. 여기서 이러고 버텨 봤자 뾰족한 수가 없었다.
들끓는 불안함을 ‘알아서 잘 오겠지’로 애써 치환한 재환은 터벅터벅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혹시 몰라 핸드폰 볼륨을 최대로 해 놓은 뒤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눈만 감고 1시간여를 꾸역꾸역 흘려보냈을 즈음, 요란한 벨 소리가 울렸다.
“유한영…!”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축 늘어진 모습에 재환은 다급히 두 팔부터 뻗었다. ‘재환이 잘 지냈어?’ 하고 다소 어색하게 인사한 진영이 자신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있던 한영을 재환에게 넘겼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휘청이는 몸을 붙들자마자 독한 술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원래 아까 도착했어야 하는데, 얘가 갑자기 막 요 근처 빌라 있는 동네로 가야 된다 그러더라고.”
“빌라 있는 동네요?”
“거기 가야 재환이 너 있다고. 그래서 거기까지 차로 빙 돌고 왔다. 당최 뭔 술주정인지.”
두 팔에 온 힘을 줘 한영을 부축하던 재환의 머릿속에 설핏 익숙한 골목길 풍경이 떠올랐다. 인제 자신은 둘이 함께 사는 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영이 언제 적 생각을 하고 그런 주정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재환아….’ 하며 웅얼거리는 한영의 등을 얼른 토닥토닥 두드려 준 재환은 ‘어, 나 여깄어.’라고 답했다. 이를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진영의 눈빛에 짠한 기운이 서렸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술을 아주 부어라 마셔라 하더라고. 재환이 네가 고생 좀 하겠다.”
“아니에요. 한영이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우리끼리 한잔하자!’ 하는 진영에게 조심히 가시라고 인사한 재환은 낑낑거리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사이에도 품에 기댄 한영은 ‘재환아….’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이쪽의 말이 들리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재환은 꼬박꼬박 ‘응’이나 ‘그래’ 따위로 한영에게 대답했다.
반지르르 광이 흐르는 구두를 겨우 벗긴 뒤, 커다란 몸을 질질 끌고 나무 바닥으로 올라섰다. 유독 까마득해 보이는 복도도 복도였지만, 이렇게 한영을 비스듬히 안은 상태로 계단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먹은 솜 인형처럼 축축 늘어지는 한영을 어렵사리 벽에 기대 앉힌 재환은 그 앞에 등을 지고 쪼그려 앉았다. 맥없이 떨어진 두 팔을 어깨 위로 끌어당기고서 다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일어섰다.
이어서 끙 하며 무릎을 곧게 폈을 때, 바닥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함께 고개를 떨어뜨린 재환의 시야에 발치를 구르는 작은 상자가 잡혔다. 담뱃갑이었다. 담뱃갑의 주인을 등에 인 채 주춤 굳은 재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저걸 도로 주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계속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한영이 떨어뜨린 담배를 애써 못 본 셈 친 재환은 거의 90도 각도가 될 정도로 허리를 낮게 숙였다. 매끄러운 양복바지에 감싸인 엉덩이를 양손으로 단단히 받치고 한 발 두 발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은 좀 들었으나 몸도 잘 못 가누는 녀석을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야 이쪽이 훨씬 수월했다. 한영처럼 사람을 번쩍번쩍 안아 올리는 힘이 있다면 좋겠는데, 거기까진 살짝 자신 없었다.
나름 안정적인 자세로 침착히 계단을 오른 재환은 계단참에서 잠시 쉬기도 하며 마침내 2층에 다다랐다. 몸을 들썩여 미끄러지는 한영을 보다 단단히 등에 고정한 후 복도 끝에 위치한 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반가운 문 앞에 도착했지만, 아직 여정은 남아 있었다. 엉덩이를 떠받든 손을 잽싸게 뻗어 문을 열고, 뒤뚱뒤뚱 방을 가로질러 침대까지 갔다. 여전히 ‘재환아….’를 우물거리는 한영을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숨이 길게 터져 흘렀다. 앞으로 쏟아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재환은 물끄러미 한영을 내려다보았다.
과거에도, 다시 함께 지내기 시작한 후에도 이리 취한 한영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많이 마셔도 기분이 좋아져 방긋방긋 웃거나 애정 표현이 과해지는 정도였기에, 당연히 술이 센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토록 취한 모습을 보자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건가 싶었다.
재차 긴 숨을 흘린 재환은 기사 사진 속 단정함을 잃고 잔뜩 흐트러진 한영의 머리칼을 양옆으로 넘겨 주었다. 얇은 눈꺼풀이 몇 번 움찔거리더니, 팔랑거리는 속눈썹 아래로 연한 빛깔의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났다. 혼탁한 기색을 띤 시선이 재환의 이목구비를 따라 굼뜨게 움직였다.
“…재환아.”
“그래. 나 여깄어.”
“재환아….”
침대 위에 처져 있던 손이 느릿느릿 얼굴로 뻗어 왔다. 힘없이 살살 뺨을 건드리는 손가락 끝에서 싸한 담배 향이 맡아졌다. 왜 담배는 다시 피우냐, 안 피운다고 하지 않았냐 따위를 따져 물을 생각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제대로 대답을 줄 상태도 아닌 것 같았고, 대답한다 한들 속만 더 아려 올 터였다. 그래서 재환은 중심을 못 잡고 흔들거리는 손을 끌어다 제 뺨에 대었다. 그 위로 손바닥을 겹쳤다. 살갗이 맞닿은 곳으로 뜨끈한 열이 전해졌다.
“술, 엄청 많이 마셨나 보네.”
“응…. 많이, 마셨어….”
비교적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한 한영이 배시시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평소 지어 보이던 웃음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예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괜스레 보고 있는 사람의 가슴을 쿡쿡 쑤시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어쩌면 재환 본인의 마음속에 쌓인 부채감 같은 것들이 그렇게 느끼게끔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영을 따라 미미한 미소를 지은 재환은 고개를 돌려 큼직한 손바닥에 쪽, 입을 맞추었다. 붙잡은 손을 가만히 침대 위로 내린 뒤, 이번에는 제가 한영의 뺨을 부드러이 톡톡 두드렸다.
“옷 벗어야지. 양복 망가져.”
“벗겨 줄 거야…?”
“응. 벗겨 줄게.”
그런대로 멀쩡한 대화가 오가던 중, 한영의 눈이 슬그머니 아래로 내리깔렸다. 무언가를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한영은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것도…, 다 해 줄 거야?”
도로 재환을 올려 보는 시선이 꽤나 진득한 빛을 띠었다. 어딘지 모르게 절박해 보이는 듯도 했다. 말씨 또한 상당히 또렷했다. 따라서 재환은 지금 한영이 술주정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다음 말을 들으면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또 뭐 해 줘. 말해.”
“……나 하고 싶은 거….”
“응?”
“나 하고 싶은 거, 하게 해 줘.”
별안간 한영이 벌떡 상체를 세웠다. 말뜻을 곱씹을 틈도 주지 않고 와락 재환을 끌어안았다. 절로 컥 숨이 막혔다. 술 취한 사람의 힘치고는 지나치게 억셌다. 아니, 오히려 술에 취해 이런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자, 잠깐만, 유한영…!’ 하고 뒤늦게 외치는 찰나 뜨거운 입술이 귓가에 붙었다. 그곳에서 풀풀 새어 나오는 더운 김이 고스란히 재환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괜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며, 꼴깍 침이 넘어갔다.
“오늘… 나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줘, 재환아.”
이번에도 제대로 생각해 보거나 대답할 겨를은 주어지지 않았다. 뼈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재환을 껴안은 한영이 그대로 휙 몸을 비틀었다. 단숨에 뒤로 눕혀진 재환의 등이 풀썩 침대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은 매트리스가 위아래로 크게 출렁거리며 희미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읏…!”
한쪽 어깨를 붙잡히는 동시에 휘딱 몸이 뒤집혔다. 아주 잠깐 등을 댔던 자리에 가슴팍과 배가 붙었다. 허둥지둥 어깨 옆을 손으로 짚는 순간, 콱 골반이 붙들리며 엉덩이가 위로 들추어졌다. 순식간에 재환은 납작 엎드려 엉덩이만 높이 추어올린 자세가 되었다. 자세도 자세거니와, 너무 급변한 상황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종전까지 인사불성이던 녀석이 난데없이 이리 거칠게 굴어 오니 마냥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 틈을 타 트레이닝 바지의 허리 밴드에 손가락이 걸렸다.
“한영아…!”
드로어즈와 함께 바지가 허벅지 중간까지 쑥 끌어 내려졌다. 예고도 없이 노출된 엉덩이에 서늘한 실내 공기가 스치며, 허옇게 드러난 살갗 위로 빠르게 소름이 번졌다. 하지만 이에 흠칫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눈 깜짝할 새 사람을 침대로 엎어뜨린 손이 있는 힘껏 양 볼기를 움켰다. 뾰족한 코끝이 엉덩이 골을 파고드는가 싶더니, 거칠게 호흡하는 소리가 곧바로 뒤따랐다. 꼭 냄새를 맡듯이 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였다. 반항하는 것도 잊은 재환은 버석거리는 시트에 이마를 맞붙인 채 쩍 얼음이 되었다.
“후….”
이윽고 축축한 숨결이 엉덩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코가 닿지 않은 곳은 드센 손아귀에 붙들려 쉼 없이 꽉꽉 주물렸다. 탄성 있는 살결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올록볼록 튀어나오고, 금세 그 자리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생겨났다.
“흐억…!”
작정한 듯 엉덩이를 주물럭대던 한영이 돌연 이를 세워 두툼한 살점을 한 움큼 콱 깨물었다. 절로 재환의 눈이 크게 뜨이며 억 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지금의 한영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쪽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한영은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이 강압적인 행위를 계속해서 이어 갔다. 애무라기에는 너무 이상했고, 장난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외설스러웠다. 도대체 한영이 무슨 생각인 건지, 뭘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재환은 판단이 잘 안되었다. 이렇게 막무가내인 한영은 몰랐다. 아무리 술 탓이라지만, 너무 낯설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박차고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혹 한영이 지난번처럼 얼굴에 싸 주기를 바란다면, 그 또한 잠자코 따를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굳은 마음을 먹은 재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힘없이 바닥을 구르는 담뱃갑, 자신을 향하던 절절한 눈빛, 애처로운 목소리 따위를 떠올리며 손바닥에서 흐른 땀이 배어든 시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잠깐, 엉덩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축축한 숨소리가 멎었다. 꽉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뜬 재환은 보일 리 없는 뒤쪽을 향해 흘깃 눈알을 돌렸다. 그때, 살을 터뜨리듯 한영의 손가락에 꾹 힘이 들어가며 엉덩이가 한껏 좌우로 벌어졌다. 놀란 재환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목도 함께 안으로 꺾이며, 정수리가 시트에 거꾸로 박혔다. 덩달아 뒤집힌 시야에 아래로 늘어져 달랑거리는 자신의 성기, 팽팽히 늘어나 허벅지에 걸쳐진 바지 따위가 담겼다.
한영은 그 상태로 미동이 없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시선이 한곳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느낌이 강하게 끼쳤다.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곳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재환은 유달리 크게 덮쳐 오는 민망함을 감당하기 벅찼다. 조도가 최대치로 올라가 있는 스탠드도 민망함에 한몫했다. 안 그래도 자세 탓이 피가 몰린 얼굴로 빠르게 열이 올랐다. 한영은 여기에 아예 기름을 끼얹었다.
“흐읍…!”
더운 콧김이 쫙 벌려진 엉덩이 사이에 닿는 순간, 재환은 차라리 지긋이 관찰당하던 방금이 나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드러난 구멍이 어쩔 줄을 몰라 제멋대로 벌름거리고, 그로 인한 수치를 견디려 윗니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래도 재환은 버텼다. 악착같이 버텼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를 다 안다는 듯이, 사람의 가장 부끄러운 곳에 코를 박은 한영은 재차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내뱉었다. 그 짓을 한동안 반복했다. 갈수록 중첩되는 뜨겁고 습한 기운에, 재환의 머릿속을 달구던 열이 슬슬 다리 사이로 향했다. 건드리지도 않은 성기가 서서히 윤곽을 잡아 가고, 그럴수록 옴찔옴찔 구멍이 오므라들었다 열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꼭 그곳에 더한 접촉을 바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정말로, 빠르게 개폐하는 구멍에 직접적인 자극이 가해졌다. 양 엉덩이를 더 단단히 붙잡아 벌린 한영이 그 가운데로 입술을 눌렀다. 쪼옥 소리가 나도록 주름에 입술을 뭉개었다 떼고, 또다시 붙였다. 연속해서 쪽쪽거리는 민망한 소리가 퍼졌다. 소리만 들으면 꼭 둘이서 격하게 뽀뽀라도 나누고 있는 듯했다.
하나, 실상 재환의 입술은 계속해서 앞니에 콱콱 짓눌리기에 바빴다. 여린 살을 저 스스로 씹어 대고 있으니 아픈 게 당연했으나, 신음을 참으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아래에 입맞춤을 받으며 좋다고 헉헉대는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연인이지만, 서로 오줌 싸는 모습 같은 걸 봐도 아무렇지 않은 사이라지만, 지금의 행위는 여전히 재환에게 있어 마냥 태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함께 몸이 달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상황이 아니어서 창피함이 더더욱 컸다. 이를 비웃듯, 이미 성기는 부풀 대로 부풀어 몸을 흠칫흠칫 떨 때마다 턱턱 복부를 때려 댔다.
어느덧 주름을 쪼던 입술 사이에서 길게 혀가 나왔다. 넓적하게 혀를 편 한영이 회음부에서 구멍에 이르는 곳을 쭈욱 핥아 올렸다. 역시나 이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미끈미끈한 살덩이가 쓸고 지나간 자리마다 번드르르한 침이 남았다. 그 질척한 촉감이 재환의 의식에까지 축축한 기운을 퍼뜨렸다. 뇌를 이루는 주름 하나하나가 척척히 타액에 절여지는 기분이었다. 숨이 밭아지며, 어쩔 수 없이 헐떡거리는 소리가 비어져 나갔다.
“허윽, 읏….”
그 와중, 단단히 발기해 흔들리는 성기 끝에서 기어이 똑똑 맑은 액이 떨어졌다. 그곳에 고인 열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울렁울렁 치밀었다. 힘겹게 상체를 낮춰 시트에 뺨을 댄 재환은 근육이 바짝 서 있는 허벅지 사이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붉게 부푼 성기를 쥐기도 전, 멈칫하고 말았다.
“싫어, 재환아.”
술기운에 잠식돼 유독 낮게 깔린 목소리가 재환을 저지했다. 모른 척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리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만지지 마.’ 하는 부탁, 혹은 명령이 같은 목소리를 타고 한 번 더 흘렀다. 결국 제 성기에 닿아 보지도 못한 손이 주춤주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시트를 짚었다. 그러자 잘했다는 듯이 침에 젖은 구멍 위로 두어 번 입맞춤이 내렸다. 곧이어, 입구와 입구 주변을 혀로 쭉쭉 핥는 행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언제 끝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수 분째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다리 사이에서 성기가 힘없이 덜렁거렸다. 몇 번이나 발기하고, 또 발기가 풀리는 사이 질질 흘린 선액으로 아래쪽 시트는 시커멓게 젖었다. 헉헉 새어 나오던 신음이 어느새 사그라진 가운데, 쉬어 빠진 숨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토록 시간이 흐르는 동안, 누구 하나 옷을 벗지 않았다. 평소라면 수십 번, 수백 번 나눠 가졌을 입맞춤 역시 한 번을 오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입맞춤은 입술이 아닌 다른 한곳에만 집요하게 퍼부어졌다.
손가락 하나 들어간 일 없는 입구가 온통 침에 절어 퉁퉁 불었다. 주름이고 주변의 살이고 질질 침이 흐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곳에 또다시 질척한 혀가 스치고 지나면, 마지못한 듯이 구멍이 미약하게 오물거렸다. 헐떡이다 종내 지쳐 버린 제 주인 같은 반응이었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이 내는 춥춥 물고 빠는 소리뿐이었다.
쭉 내민 혀로 노글노글한 구멍을 문지르던 한영이 혀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주름 가운데를 쑤셨다. 몇 번 옴찔거리던 구멍이 맥없이 스르르 열리고, 그 틈으로 혀가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것만으로 모자란 듯 양 엄지손가락이 엉덩잇살을 좌우로 보다 넓게 벌렸다. 길게 나온 혀가 한결 수월히 내벽을 헤집었다. 아까도 몇 번이나 반복한 행위였기에, 안쪽 또한 이미 침으로 흥건했다.
“흐, 으….”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딱 붙여 그 위로 이마를 박은 재환은 힘 빠진 신음을 흘렸다. 척추를 타고 다시금 축축하고 스멀스멀한 기운이 기어올랐으나, 그게 더 이상 흥분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한영의 입술이나 혀가 떨어진 적 없는 구멍은 죄 흐물흐물 녹아 버린 것 같았고, 마찬가지로 머릿속도 질척하게 타액에 잠긴 듯했다. 오랜 시간 무릎 꿇고 엉덩이만 들어 올린 자세를 지속한 탓에, 오롯이 쾌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다 끝내 허리와 다리에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작은 얼굴이 파묻혀 있던 엉덩이가 불시에 털썩 아래로 주저앉았다. 바지 위로 하얀 볼기만 내민 채 둥그렇게 몸을 만 모양새가 된 재환은 끙끙거리는 숨을 토했다. 그것도 잠시뿐, 상황을 인지하는 동시에 도로 힘겹게 엉덩이를 추어올렸다. 뒤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한영이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재환은 한영이 종전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상체를 더욱 납작 숙였다. 무리해서 힘을 준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리며, 엉덩이가 조금 더 위를 향했다. 이 자세가 얼마나 굴욕적인지를 가늠해 보는 건 진즉에 관두었으므로 그다지 수치심은 없었다. 한영이 다시 입술이든 혀든 붙여 오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뒤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트가 버스럭대는 소리조차 없었다. 뻑뻑한 눈꺼풀을 몇 번 끔뻑거리던 재환은 조용히 한영을 불러 보았다.
“유한영…?”
하지만 곧이어 ‘아아…!’ 하는 탄성이 나지막이 터졌다. 엉덩이 사이로 뜨겁고 습한 숨결이 훅 다가온 탓이었다. 그다음에야 뭐 뻔했다. 잠깐 휴식할 기회를 얻는 듯했던 구멍에 또다시 끈적한 입맞춤이 쏟아졌다. 커다란 손은 마치 차진 덩어리를 반죽하듯 양 볼깃살을 꽉꽉 주물러 댔다. 꼭 행위가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든 재환은 문득 살짝 막막해졌다. 하나 한영을 말리거나 포기를 외치는 데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연인 사이에 이 정도가 뭐 큰일이라고, 라는 낙관적 생각을 하려 애쓰며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차, 젖은 소리를 내며 이어지던 행위가 뚝 멎었다. 엉덩이를 사정없이 주물럭거리던 손에서도 힘이 풀렸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다시 한영을 부르려던 때, 별안간 등 전체가 무시 못 할 무게에 뒤덮였다. 하중을 감당하지 못한 하체가 아래로 내려앉으려는 순간 허리 아래로 긴 팔이 들어와 결박하듯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하여 재환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한영의 품에 갇히고 말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재환의 목덜미로 절절한 숨이 쏟아졌다.
“왜….”
함께 흐른 먹먹한 음성이 얼마 이어지지 못하고 잦아들었다. 그 뒤로 미약하게나마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기도 했지만, 양복 옷감이 바스락대는 소리와 뒤섞여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한영이 온몸을 안쓰럽게 떨고 있음은 분명했다. 재환의 뒷덜미에 코를 묻은 한영이 다시 입을 뗐다.
“왜 가만히 있어, 왜….”
가슴팍을 감싼 팔에 더욱이 힘이 들어갔다. 숨 쉴 틈을 얻기 위해 시트 위에서 얼굴을 외로 틀고 있던 재환은 몇 번 입을 뻐끔거리다 그냥 다물어 버렸다. 재환이 딱히 답이 없자, 뒤에서 힘껏 재환을 부둥켜안은 한영이 타박인지 추궁인지 모를 말을 이어 갔다.
“왜 그냥 있어…. 힘들잖아. 내가 이러는 거, 싫잖아.”
역시나 재환은 잠자코 있었다. 그 반응이 의도치 않게 상대를 더 초조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재환아….’ 하고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를 낸 한영이 허리에서 팔을 풀더니, 어깨를 붙잡아 재환의 몸을 휙 앞으로 뒤집었다. 줄곧 가슴팍을 대고 있던 자리에 등이 닿으며, 눈 뜨고 있어 봤자 시커먼 침대 시트만 담기던 시야에 말간 얼굴이 한가득 들어찼다. 다만, 오래도록 한영을 쳐다볼 수 없었던 재환은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번에도 재환의 행동은 조금 뜻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재환을 빤히 내려다보던 한영은 결국 툭 눈물을 떨구었다. 아래로 낙하한 맑은 눈물방울이 도르르 재환의 뺨을 타고 흘렀다. 같은 자리에 몇 방울 더 눈물이 떨어졌을 즈음, 언제 사람을 몰아붙였냐는 양 애절하기 짝이 없는 사과가 재환에게 전해졌다.
“재환아, 내가 잘못했….”
하지만 이십 대 시절의 애처로움을 담뿍 품고 있던 사과는 끝까지 마무리되지 못했다. 중간에 막아선 재환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미안해서 그래.”
진작 양 눈가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던 재환은 비로소 고개를 되돌려 한영을 마주 보았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촉촉이 젖은 갈색 눈동자 주변이 온통 발긋발긋한 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애들도 아니고, 사이좋게 서로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이 상황이 재환은 퍽 우습게 여겨졌다. 물론, 진짜로 웃음이 나지는 않았다. 대신 나오는 건 눈물을 그득 머금은 실토였다.
“너한테 미안해서 그래, 유한영.”
꾸물꾸물 팔을 들어 올린 재환은 팔뚝으로 눈두덩이를 덮었다. 누구처럼 예쁘게 울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못나게 질질 짜는 모습을 한영에게 보이기 싫었다. 혹 아래를 빨리다 눈물을 터뜨린 것처럼 비쳤을지 몰라 창피한 마음이 든 탓도 어느 정도 있었다. 사실 그런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재환아….”
재환의 머리맡을 두 손으로 짚고 있던 한영이 팔을 굽혀 상체를 낮췄다. 조심스레 재환에게 아랫배를 포개고서 얼굴 절반을 가린 다부진 팔뚝을 찬찬히 들쳐 냈다. 발갛게 물든 낯이 드러나자마자, 재환은 다시 고개를 홱 옆으로 틀어 버렸다. 그러기 무섭게 한영이 재환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감싸 얼굴이 제자리를 향하도록 했다. 약간의 원망과 죄스러움이 함께 번진 눈동자가 끝내 머뭇머뭇 한영을 올려 보았다.
“재환아.”
이로써 소심한 도피는 생각보다 빨리 끝을 맞이했다. 어차피 끝까지 감추고 숨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눈빛을 한 한영과 눈을 맞춘 재환은 떨리는 입술을 어렵사리 움직여 한 번 더 진심을 고했다.
“미안. 미안해, 유한영….”
염치, 자존심 따위를 핑계 삼아 마음속에 꾹꾹 담아 두기만 했던 진심을 고백하자 눈물은 여봐란듯 더 흘러내렸다. 연인을 앞에 두고 얼마나 꼴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을지 심히 알조였다. 그런데도 한영은 상관없다는 듯 재환의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저도 기다란 속눈썹 끝에 대롱대롱 눈물을 매달고 있기는 매한가지이면서, 호로록 재환이 흘리는 눈물을 머금어 갔다. 이윽고 벌겋게 물든 뺨을 타고 조금씩 아래로 움직인 입술이 마침내 할딱할딱 애달픈 흐느낌을 흘리던 입술에 닿았다.
포근한 감촉이 입술 위로 안착하는 순간, 재환은 저도 모르게 벙긋이 입을 벌렸다. 그 밖으로 혀를 내었다. 그제야 자신이 한영의 입맞춤을 얼마나 절실히 갈구하고 있었는지를 가슴 깊이 깨달았다. 한참 동안 얼굴 한 번 마주하질 못했으니 당연했다. 그러므로 이건 지독한 갈급증에 괴로운 와중 물을 받아 마시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곧바로 얽혀 오는 혀가, 건너오는 숨결이 재환에게는 거룩하디거룩한 성수처럼 느껴졌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꽤 오래간 참고 있던 입맞춤은 시작되자마자 격한 흐름을 탔다. 제대로 상대를 어루만지지 못했던 손이 금세 허리, 어깻죽지를 감싸고, 사정없이 고개가 이리저리로 비틀렸다. 쉼 없이 맞물린 각도가 뒤바뀌는 입술 사이에서 새빨간 두 개의 살덩이가 허겁지겁 엉겨 붙었다. 함께 뒤섞이는 숨이 빠른 속도로 밭아졌다. 그사이에도 사이좋게 고장 난 눈물샘이 눈머리, 눈꼬리 밖으로 조록조록 말간 눈물방울을 흘려보냈다.
재환의 어깨를 애달프게 더듬던 손이 어언간 티셔츠 아래로 들어왔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꿈틀거리는 복부를 더듬다가, 셔츠 자락을 둘둘 위로 말아 올렸다. 잠시도 멀어지기 아쉬워 끝까지 버텨 보려던 재환은 결국 마지못해 한영에게서 입술을 떨어뜨렸다. 두 팔을 들어 만세를 하자 셔츠 목둘레가 훅 머리통을 통과했다. 거의 안팎이 뒤집히다시피 한 티셔츠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부스스 일어난 머리칼이 가라앉기도 전 다시금 입술이 맞붙었다. 얼마 안 가 비슷한 수순을 밟은 바지와 속옷 역시 티셔츠 옆에 툭 떨구어졌다.
다만, 단시간에 몸이 극렬히 달아오른 재환은 한영의 양복을 벗겨 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런 식의 접촉이 숨넘어갈 만큼 달갑게 여겨진 까닭도 있었고, 그래서 눈물이 쉬이 멈추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보드라운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맞닿은 입술을 감각하기에 바빴다.
재환과 한동안 애틋하기 그지없는 입맞춤을 나누던 한영이 귓가로 입술을 옮겼다. 재환의 귓바퀴에 고인 눈물 또한 부드럽게 빨아들인 한영은 말랑한 귓불에 쪽,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바로 귓속으로 흘러들어 심장까지 번져 나가는 듯한 간질간질한 감촉에 재환은 하릴없이 더한 흥분에 휩싸였다. 오늘은 다시 발기할 일 없을 줄 알았던 성기가 어느덧 배까지 올라붙어 질금질금 맑은 액을 흘려 댔다. 아까만 해도 멍멍히 물속에 잠긴 듯했던 머릿속이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로 가득했다.
그러다 자연히 두 손이 사타구니로 향했다. 한영의 입술이 귀를 건드릴 때마다 달뜬 숨을 쏟던 재환은 꼿꼿이 솟은 제 성기를 두 손으로 쥐었다. 한데, 어쩐 영문이지 이번에도 한영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하지 마, 재환아.”
재환은 다소 몽롱해진 눈을 끔뻑이며 코앞으로 다가온 하얀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아래서는 큼직한 손이 이미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번번이 사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부풀었다 쪼그라들길 반복했던 성기가 손안에서 애타게 꼼틀거렸다. 몇 번 만지지 않아도 금방 쌀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참아 봐. 응?”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영은 강경한 건지 간절한 건지 모를 투로 재환에게 인내를 요구했다. 재환이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가슴팍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자, 한영은 남은 손으로 재환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내가 다 해 줄게.”
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 달라던 아까와 같은 말투로, 전혀 다른 대사가 흘렀다. 침을 꼴깍 삼키며 한영과 시선을 맞추던 재환은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도 그랬지만, 어차피 한영의 뜻을 거스른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듯, 혹은 잘했다는 듯 한영이 재환의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눌렀다.
애써 초조함을 몰아낸 재환이 당장에도 손바닥 안에서 펄떡펄떡 맥동하는 성기를 어렵사리 놓았을 무렵, 몰캉한 입술이 쪽쪽 소리를 내며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울대와 쇄골에도 보드라운 감촉을 새긴 입술은 이어서 더 아래로 향했다.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길게 혀가 나오고, 뾰족한 혀끝이 송골송골 땀이 맺힌 가슴골을 훑고 내려갔다. 그리고 촉촉한 궤적이 그려진 자리를 다시 핥으며 올라왔다. 간지러운 건지 야릇한 건지 모를 감각에 재환은 흠칫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새 혀가 도로 숨어들어 간 입술이 한쪽 유두에 붙었다. 낮게 헉 소리를 터뜨린 재환은 꿈틀 허리를 뒤틀었다. 안 그래도 온몸이 잔뜩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 유독 자극이 거셌다. 그러자 가만있어 보라는 듯 한영의 두 손이 부드럽게 옆구리를 붙들었다. 재환의 상체를 고정한 한영은 마치 입술에 입 맞추듯이 촉, 초옥 소리를 내며 유두를 빨았다. 아래로 떨어져 성가시게 흔들거리는 넥타이는 아예 목뒤로 휙 넘겨 버렸다. 발딱 선 채 매끄러운 양복 자락을 건드리는 재환의 성기 끝에서 갈수록 더 많은 액이 흘렀다.
하나, 비싼 양복이 자신 때문에 더러워지고 있는 상황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의미로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재환은 흥분을 참지 못해 연신 시트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어느 틈엔가 한영의 입술이 옮겨 간 반대편 유두에서 또다시 축축하면서도 자릿자릿한 쾌감이 퍼졌다. 동시에 번지르르 타액이 남은 유두가 기다란 엄지 끝으로 둥글려졌다. 어쩔 도리 없이 뻐끔히 벌려진 입 밖으로 줄줄 신음이 샜다.
“하, 아…. 한, 영아…. 후윽.”
양쪽 유두에 그린 것처럼 불그스름한 자국이 피어났을 즈음, 쉬지 않고 젖은 마찰음을 내던 입술이 호록호록 땀방울을 빨아들이며 배로 내려갔다. 가끔 함께 운동을 하러 다니기 시작한 이래 한층 선명해진 복근이 밭아진 호흡을 따라 진해졌다 흐릿해지기를 반복했다. 그 한복판에 입술을 묻은 한영은 혀를 내밀어 옴폭 들어간 배꼽을 살금살금 들쑤셨다. 바로 아래 자리한 장기에까지 짜릿짜릿한 자극이 전해지는 듯한 느낌에, 재환은 숨을 할딱거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그러면서도 내심 한영이 어서 더 아래로 내려가 주기를 바랐다. 가히 천박한 욕망이었으나, 빨리 거기를 빨아 줬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행인지 다행이 아닌 건지, 이를 태연히 조를 만큼 재환은 낯이 두껍지 못했다. 하여 어금니를 사리물고 손끝으로 애먼 시트만 득득 긁고 있는데, 문득 한영에게 손등을 붙잡혔다. 갑자기 쥐어뜯을 것을 잃은 손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얼굴 가까이 재환의 두 손을 가져간 한영은 먼저 왼쪽으로 고개를 틀어 오른손 손등에 쪽 입 맞추었다. 그다음에는 손을 뒤집어 새끼손가락부터 손끝에 차례로 가벼이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엄지에 입술이 닿았을 때는 성기를 빨 듯 손가락 아랫마디부터 쭈욱 빨아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쪽, 쪽 점막이 살결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정확히 다섯 번 울렸을 때, 입술은 왼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엄지부터 입맞춤이 내렸다. 단, 한영은 오른손에 입 맞췄을 때보다 한결 긴 시간을 들여 손끝에 입술을 눌렀다. 오랜 세월 악기의 현을 짚느라 생긴 굳은살 너머로도 충분히 포근한 감촉이 전해질 수 있도록. 그것이 이상하게 재환의 심장을 자르르 떨리게 만들었다.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방식의 애무라 그런 것인지, 제 몸이 달 대로 단 상태라 그런 것인지 선뜻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까만 해도 한곳만 집요하게 물고 빨던 입술이 어느덧 열 손가락 모두에 입맞춤을 남겼다. 원래 있던 자리에 재환의 두 손을 다시 얌전히 내려놓은 한영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쌕 미소를 지었다. 지금의 그에게서는 사람의 엉덩이를 붙잡고 심술 아닌 심술을 부리던 모습을 요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물론 껄떡 숨이 넘어갈 때까지 구멍을 괴롭히던 쪽도, 그걸 사죄하듯 전신이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애무를 이어 가고 있는 쪽도 모두 재환이 사랑하는 유한영이었다.
이윽고,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이 가장 열이 오른 곳 근처로 다가왔다. 재환의 음모에 코를 파묻은 한영은 곱슬곱슬한 기운이 도는 털 위로 살살 콧날을 비비며 스읍 소리가 나도록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로 인해 부는 더운 바람이 살랑살랑 성기 뿌리를 간지럽혔다. 그것만으로 크게 자극을 받은 성기가 또 한 번 찔끔 맑은 액을 흘렸다. 안 그래도 미끈미끈하던 귀두가 한층 번드르르하게 젖어 들었다.
짧게 난 털 사이로 몇 번 더 습한 숨을 흘리던 한영이 슬쩍 허리를 세웠다. 자신의 허벅지 양옆으로 늘어져 있는 두 다리를 조심히 들어 올린 뒤 어깨 위로 넘겼다. 다시 상체를 낮추자, 한영에게 종아리를 걸친 재환의 몸이 자연스럽게 납작 반으로 접혔다. 덩달아 훤히 드러난 엉덩이 사이에서 아직 통통하게 부어 있는 입구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잠깐 눈길을 준 한영은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옮겼다. 언뜻 아파 보일 만큼 팽팽히 부푼 재환의 성기가 붉게 물들어 꺼떡대고 있었다. 약하게 핏줄이 돋아난 기둥을 살며시 손으로 움키자, 머리 위에서 애단 한숨이 떨어졌다.
“하아….”
달콤한 숨소리를 들으며 보다 얼굴을 숙인 한영은 반질반질 젖어 있는 귀두에 살포시 입술을 대었다. 재환의 몸 곳곳에 그랬던 것처럼 미끈거리는 살결에 곧바로 쪽쪽 입 맞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휙 고개를 뒤로 젖힌 재환은 한영이 기껏 하나하나 성심껏 입 맞춰 준 손가락을 바짝 세워 시트를 콱 움켜쥐었다. 몰캉한 입술이 닿을 때마다 간질간질 밀려드는 쾌감이 적잖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애타는 마음이 부풀어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 으…. 으응, 읏….”
시원히 터지지 못하고 연이어 짧게 비어지는 신음이 답답함을 대변했다. 너른 등판에 닿을락 말락 한 발끝은 움칠움칠 굽어 들었다. 그사이에도 한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며 재환의 성기에 가히 정성스럽게도 입 맞추었다. 감질나는 접촉이 거듭될수록 귀두 가운데서 조록조록 투명한 액이 새어 나왔다. 한영이 살짝씩 입술을 떨어뜨릴 때마다 흘러나온 선액이 침처럼 가느다랗게 늘어났다.
“허윽, 응….”
간지러운 입맞춤이 행해지는 자리 바로 아래에서는 구멍이 저 혼자 알아서 빠끔거렸다. 숨은 더더욱 밭아졌다. 결국, 재환은 온 정성을 다해 애무하고 있는 연인의 이름을 부르고야 말았다.
“…한영아.”
마침 혀를 내밀어 귀두를 한 번 할짝거린 한영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최대한 목을 접어 제 다리 사이에 붙은 한영을 내려다본 재환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빨아 줘….”
“…재환아.”
“빨아 줘, 한영아….”
여태껏 해 본 적 없는 말을 뱉자, 그렇지 않아도 벌겋게 익었던 얼굴이 더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시선은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부끄러움보다는 한계까지 내몰린 몸의 열이 어서 해소되었으면 하는 갈망이 훨씬 컸다. 그리고, 지금의 사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또 한 번 울컥 성기 끝에서 투명한 액이 나오고 구멍이 확 좁아 들었을 즈음, 그 한 사람의 입에서 ‘응.’ 하는 나지막한 대답이 떨어졌다. 곧이어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이 푹 성기를 감쌌다. 어찌해 볼 틈도 없이 재환의 목구멍에서 단말마가 터졌다. 절로 허리가 안으로 둥글게 말리며, 한영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정강이가 휙 위로 들렸다. 순식간에 몸의 모든 신경이 한영에게 삼켜진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허으…, 윽. 크흡…!”
아예 재환의 허벅지 뒤쪽을 붙잡아 고정한 한영은 곧바로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입술을 좁게 조여 기둥을 쭉쭉 빨아올렸다. 평소에 비해 유달리 힘이 들어가거나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재환은 눈물 맺힌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격한 신음을 쏟았다. 불안정하게 시트 위를 배회하던 손이 결국에는 갈색 뒤통수로 향했다.
“하아, 한영아…. 으윽…!”
날이 날이었던 만큼 딱딱하게 스프레이를 뿌렸던 흔적이 남은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갔다. 두피에 손끝이 닿자, 멋대로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주어졌다. 몰아치는 성감이 극심해 한영의 움직임을 좀 막아 보려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재촉하고 있는 것인지 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굳이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어졌다. 한영이 알아서 행위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단, 그 원인은 재환에게 있었다.
“흐, 으….”
인지도 못 한 새 한영의 입 안으로 정액을 흘려보낸 재환은 거의 반으로 접히다시피 한 몸 전체를 흠칫흠칫 떨었다. 복부에 콱콱 힘이 들어갈 때마다 남은 정액이 마저 분출되었다. 미동 없이 머리를 한군데 고정한 한영이 볼을 홀쭉하게 좁혀 재환이 싸지른 것을 꿀꺽꿀꺽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마지막까지 짜내려는 것처럼 몇 번 강하게 기둥을 흡입하기도 했다. 더는 나오는 것이 없을 때에서야 한영은 슬쩍 고개를 들어 성기를 뱉었다. 정액과 섞여 희뿌연 색을 띤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황당할 만치 이른 사정을 맞이한 재환은 한영을 사이에 두고 털썩 다리를 떨구었다. 폭풍 같은 절정은 한차례 지나갔으나 호흡이 얼른 진정되지 않았다. 하여 헐떡헐떡 가슴을 들썩이고 있는데, 미지근한 온도를 품은 손바닥이 느릿느릿 정강이를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허벅지 측면을 지나 어느 틈에 골반 언저리까지 도달했다. 톡 튀어나온 골반뼈를 엄지로 가만가만 둥글리던 한영이 어렴풋한 미소를 띤 채 입을 뗐다.
“재환아. 내가… 너무 넣고 싶은데, 지금은 잘 안 서. 아직 많이 취해서….”
짭조름한 물기를 매단 눈가를 손등으로 벅벅 문지른 재환은 흘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침대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은 한영의 가랑이 사이가 조금쯤 불룩이 솟아 있었다. 하지만 저것이 평소의 상태임을 알았다. 정말 발기했다면 이미 양복바지가 터질 듯 늘어났을 터다. 저렇게 자연스러운 주름이 잡혀 있을 수가 없었다.
그사이 그럭저럭 안정된 호흡을 되찾은 재환은 픽 숨소리 같은 웃음을 흘리며 도로 눈을 들었다. 한영은 여전히 미안한 기색이 그득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벚꽃이 피었던 어느 날에도 지금과 똑 닮은 상황이 있었음을 기억해 낸 재환은 별말 없이 한영에게 휙휙 손짓했다. 빨리 이리 와서 키스나 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 신호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한영이 얼른 허리를 숙여 재환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재환은 기다렸다는 듯 코앞에 놓인 도톰한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살살 살점을 물고 빠는 간지러운 키스가 이어지는 사이, 한영의 양복 자락이 계속해서 살갗에 스쳐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영과 입 맞추던 재환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넓은 어깨 뒤로 양복 깃을 끌어 내렸다. 한영이 행동을 이어 받아 소매에서 한 쪽씩 팔을 빼냈다.
그다음으로 와이셔츠를 벗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입맞춤을 멈춰야 했다. 상체를 세운 한영은 밑으로 매듭을 당겨 느슨히 한 넥타이를 휙 얼굴 밖으로 벗었다. 이어서 셔츠의 단추를 풀 무렵, 양쪽 모두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씨….”
평소 하지도 않던 거친 소리를 뱉은 한영은 손가락 사이에서 헛도는 단추를 보며 푹 인상을 썼다. 정확히 말하자면, 헛도는 쪽은 단추가 아닌 한영 본인의 손가락이었다. 묘하게 위치가 어긋난 손가락이 단추 구멍에서 단추를 빼내기 위해 어지간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한영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재환은 결국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취하긴 진짜 취했나 보네.”
한영을 따라 몸을 일으킨 재환은 하얀 손가락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취한 건지, 취하지 않은 건지 오늘 몇 번이나 사람을 헷갈리게 하던 연인이 입은 셔츠의 단추를 친히 하나하나 풀어 주었다. 셔츠를 벗긴 뒤 혹시 몰라 바지 벨트로도 손을 가져가자, 한영은 얌전히 있었다. 재환이 버클을 열고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길 때는 알아서 반쯤 일어나 벗기기 쉬운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구겨진 트레이닝복이 떨어진 자리에 툭, 툭 만만찮게 구겨진 양복이 떨구어졌다. 하지만 옷의 주인도, 그 옷의 가격을 들으면 헉 소리를 터뜨릴 사람도 당장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꽉 끌어안은 채 풀썩 침대 위로 쓰러져 다시 입 맞추기에 바빴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재환은 한영이 말한 ‘다 해 줄게’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함께 혀를 얽고 타액을 나누던 한영의 손이 어느 순간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가락 하나 넣어 주지 않고 괴롭혔던 시간을 반성하듯, 한영은 아주 공들여 재환의 안쪽을 꾹꾹 눌렀다. 다른 손으로는 부드럽게 성기를 쓸어 올렸다. 그러니 재환은 이번에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가까이 닿은 뱃가죽 위로 왈칵 정액을 쏟았다. 나 원래 이렇게 안 빠른 거 알지…? 라고 변명하려다 그게 더 궁색하게 들릴까 싶어 그냥 관두었다.
한영은 그 정도 하고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꾸물꾸물 아래로 내려가 허연 정액이 덕지덕지 묻은 성기를 합 입에 물었다. 풀릴 대로 풀린 구멍으로는 또다시 푹 중지를 찔러 넣었다. 성기를 넣지 못하니 이외의 다른 모든 걸 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섹스하듯 규칙적으로 안을 들쑤시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성기 전체에 퍼부어지는 뜨겁고도 습한 자극에 재환은 정신을 못 차리고 헐떡거렸다. 그럼에도 재차 한영의 입 안에 사정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따라서 악착같이 버티는 어깨를 억지로 밀어 냈을 때, 작은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허으윽…!”
성기가 공기에 노출되는 순간, 그 끝에서 픽 하고 정액이 솟구쳤다. 여전히 빠른 사정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끔찍한 쾌감의 여운에 잠기는 것도 잊은 재환은 뿌연 정액을 뒤집어쓴 연인의 얼굴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이건 뭐 입에 싸지 않으려다 더한 곳에 싸질러 놓은 형국이었다. 무어라 말도 안 나왔다. 그런데 유한영이 한다는 소리가….
“…재환아. 나 섰어.”
일부러인지, 그냥 별생각이 없는 건지 얼굴에 칠갑한 정액을 보란 듯 그대로 둔 한영은 거대하게도 부푼 분홍색 성기를 쥐고 덜렁덜렁 흔들어 보였다. 들뜬 기색이 확연한 모습에 재환은 차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응….’ 하고 대답하자, 한순간 몸이 휘딱 옆으로 뒤집혔다.
한영은 언제 발기가 풀릴지 몰라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모로 눕힌 재환 뒤에 붙자마자 한쪽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입구에 귀두를 맞추었다. 그대로 퍽 소리가 나도록 하반신을 힘주어 밀어붙였다. 하도 빨고 쑤셔 동그랗게 풀어진 구멍 안으로 성기가 단번에 깊숙한 곳까지 들이박혔다. 양쪽 모두의 입에서 헉 하고 거친 숨소리가 터졌다. 한영은 지체 없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과거, 처음 몸을 겹쳤을 때에도 그들은 지금과 같은 그림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부끄러움을 핑계 삼아 벽을 보고, 또 한 명은 그 뒤에 꼭 붙어 있고. 하지만 한 방향을 보고 있는 자세를 제외하면 그때와는 참 많은 것이 달랐다. 오늘을 ‘단 하룻밤’으로 여기는 사람도, 그래서 눈물짓는 사람도 없었다. 수시로 고개를 비틀어 서로에게 입 맞추고, 사랑한다는 속삭임을 아끼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뜨겁게 피어나는 흥분과 쾌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단, 지금 안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잔뜩 들이부은 술은 끝까지 한영을 도와주지 않았다. 막 네 번째 사정을 한 재환이 품속에서 꺼질 듯한 숨을 내쉬고 있을 즈음에도 한영은 허리 짓을 멈출 수 없었다. 재환과 섹스할 때마다 도리어 빨리 싸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는데,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소위 말하는 ‘지루’가 되었음을 속으로 인정한 한영은 부단히 재환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한영의 팔에 갇힌 재환이 끙끙거리는 신음을 토했다.
“흐…, 으…. 으읏….”
안 그래도 오늘 침대에서 참 여러 일을 겪었던 터라 재환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엎드려 엉덩이를 빨린 것만 해도 한참이었고, 이후 이어진 애무도 평소에 비해 유난히 길었다. 그것만으로 상당히 지친 상태였건만, 거기에 몇 차례 사정까지 하고 나니 손끝, 발끝까지 농도 짙은 탈력감이 번져 나갔다. 그럼에도 엉덩이 사이를 들락거리는 성기의 육중함이나 뜨거움은 모자람 없이 전해졌다. 이러다 구멍이 정말로 물처럼 녹아 버릴 것 같았다.
“하윽…!”
그 와중 한영이 팔을 두른 가슴팍을 보다 꽉 끌어안았다. 슬쩍슬쩍 떨어졌다 붙기를 반복하던 사타구니가 아예 둔부에 철떡 들러붙었다. 성기가 한층 깊숙이 짓치고 들어오며, 오늘은 열린 적 없던 곳까지 기어이 길이 트였다. 그리하여 길기도 길고 굵기도 굵은 성기가 꿈틀대는 속살에 완벽히 파묻혀 아예 모습을 감춰 버렸다. 서로의 하반신이 일말의 틈 없이 연결된 상태였다.
“읏, 응…!”
한영은 그대로 유연한 듯 거칠게 허리를 놀렸다. 하얀 엉덩이 옆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직선으로 움푹움푹 근육이 패고, 땀 맺힌 목덜미에 묻은 입술에서 뜨겁게 끓는 숨이 흘렀다. 움직임의 폭이 크지는 않았으나, 옆으로 누운 두 개의 몸뚱이가 하나처럼 꿀렁거리는 바람에 그 튼튼하던 침대 다리가 계속해서 삐거덕삐거덕 어긋나는 소리를 터뜨렸다.
“하아…. 사랑해, 재환아….”
그 틈으로 백만 번을 고해도 모자란 고백이 숨소리처럼 퍼졌다. 혈관 곳곳으로 번진 알코올의 힘을 이긴 성기도 더, 더 안쪽을 찔렀다. 재환의 예민한 부분이 한 번의 어긋남 없이 딱딱한 선단에 눌려 짓뭉개지고 흐무러졌다. 이토록 자극이 거세니, 미지근한 정액을 묻힌 채 덜렁거리던 성기가 어느새 다시금 슬슬 몸피를 키웠다. 더는 흥분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은 몸에 과한 쾌감이 쏟아졌다. 위험했다.
“흐읏, 윽…!”
쾌감이 증폭될수록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생경한 감각이 재환을 뒤흔들었다. 아랫배가 꽉 조이며, 저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다 왈칵 넘칠 것 같은 느낌이 일었다. 사정감과는 또 달랐다. 무엇이 되었든 심상찮은 신호임이 틀림없었다. 위기를 인지한 재환이 허리를 뒤틀며 다급히 혀를 움직였다.
“자, 잠…! 크윽…!”
별안간 몸이 위를 향해 뒤집히는 동시에 말이 턱 끊기고 말았다. 엉덩이에 성기를 꽂아 넣은 채로 한영 위에 올라앉게 된 재환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틈을 타, 등 뒤에서 가슴을 껴안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넓적다리 뒤쪽을 단단히 붙잡았다. 놀라 오므라들려던 허벅지가 좌우로 쫙 벌어지며, 굵다란 기둥을 품은 입구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아래에서 쳐올리는 힘이 격해졌다.
“읏, 읍!”
의지와 상관없이 밑에 깔린 사타구니에 쾅쾅 엉덩방아를 찧던 재환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 넓은 공간에 저와 한영 둘뿐이라는 걸 판단할 정신이 못 되었다. 자신이 내지르는 소리가 너무 컸다. 더불어 배 속을 꽉 메운 팽만감 같은 것이 끝 간 데 없이 치솟았다. 아니, 이건 팽만감이 아니었다. 요의였다. 그 위험천만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허으으…!”
일시에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며 숨이 멎었다. 있는 대로 조여들었던 복근에 긴장이 풀리고, 무언가가 탁 터져 나가는 듯한 끔찍한 해방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이윽고 삐, 하는 이명으로 뒤덮인 귓속에 작게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꺼떡대는 성기 끝에서 솟구친 물줄기가 시트 위로 떨어지며 나는 소리였다.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던 물줄기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끊겼다. 덩달아 흐른 눈물로 어룽진 시야에 두 사람의 다리 사이에서 동그랗게 젖어 든 시트가 잡혔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광경이 사고를 마비시켰다. 비슷한 시점에 구멍을 쑤시던 성기 끝에서 짜내어진 정액이 부글부글 잔거품을 일으키며 결합부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회음부, 사타구니, 허벅지 안쪽…. 질척하게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랑해. 사랑해, 재환아. 너무 사랑해….
그사이에도 멈추지 않고 헐떡헐떡 속삭여지는 고백이 고막을 녹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경악감, 온몸을 쓸고 지나간 충격 따위가 함께 서서히 녹아내렸다. 우습지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깊이를 잴 수 없는 진한 애틋함과 사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단 한 사람에게서만 얻을 수가 있는 감정이었다.
온갖 것들로 더러워진 침대에 가장 순수한 마음을 가진 두 남자가 서로에게 꼭 붙어 털썩 쓰러졌다. 점점 의식이 혼몽하게 잠기는 중, 재환은 본능적으로 맞닿은 한영의 품을 파고들었다. 방금까지 거칠게 상대를 안았던 순간을 잊고, 한영 또한 재환을 꽉 부둥켜안았다.
식을 틈을 잃은 열기가 창밖의 추위를 새초롬히 비웃었다. 소복소복 내리는 첫눈을 모른 체했다.
* * *
사이좋게 함께 잠들었던 두 사람 중 먼저 번쩍 눈뜬 쪽은 재환이었다. 이런 데서 어떻게 잤을까 싶은 침대 먼저 침착히 수습한 재환은 뒤이어 한영의 몸도 꼼꼼히 닦아 주었다. 낑낑거리며 밑에 깔린 시트를 바꿀 때에도, 물 묻힌 수건으로 온몸을 문지를 때에도 한영은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지난밤을 되새기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을 즈음에야 재환은 밤새 눈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정원이 온통 새하얗게 뒤덮여 그야말로 그림 같은 경치를 이루었다. 기실 재환은 이런 풍경을 보고도 크게 마음이 들뜨거나 신이 나는 편이 아니었다. 진짜 겨울은 겨울이네, 라는 조금 심드렁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침대에서 콜콜 자고 있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감수성 풍부한 그라면 첫눈 오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고 퍽 애석해할 것 같았다.
곱게 눈 쌓인 풍경을 뒤로하고 부엌으로 내려간 재환은 간만에 정성 들여 북엇국을 끓였다. 바지런히 밥까지 지어 놓은 뒤 한영을 깨우러 갔다. 오전의 햇살이 들이치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 한영은 제가 덮어 준 이불 아래서 잔뜩 몸을 옹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몇 번이나 ‘유한영. 한영아.’ 하고 이름을 부르던 재환은 한영이 진작 깨어 있는 상태임을 깨달았다. 하나 어쩐 영문인지, 그는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도 이불 속에 숨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불을 걷어 보려 하자, 이불자락을 꽉 붙든 채 놓지 않기까지 했다. 눈썹을 꿈틀거리던 재환이 또 한 번 ‘유한영.’ 하고 이름 석 자를 힘주어 부를 무렵이었다.
“…미안해.”
두꺼운 솜을 통과해 희미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멈칫한 재환은 침대 옆에 우뚝 선 상태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이불 안에서 몸을 더 작게 웅크린 한영이 떠듬떠듬 뒷말을 덧붙였다.
“어제는… 취해서 그랬어. 원래 그렇게 많이 마시려고 한 거 아닌데, 그냥… 마시다 보니까…. 미안해, 재환아. 진짜 미안해.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데….”
세상에서 가장 안쓰럽고, 무책임하고,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덩어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재환은 있는 힘을 다해 한 번에 휙 이불을 젖혀 버렸다. 별안간 숨을 곳을 잃은 한영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침대 헤드 쪽으로 엉덩이를 끌었지만, 재환이 한발 더 빨랐다. 홀딱 벗고 있는 한영의 다리를 활짝 벌린 재환은 다짜고짜 그 가운데로 얼굴을 박았다. 온 기세를 몰아 반쯤 발기한 성기를 힘껏 빨기 시작했다.
재환아! 왜 그래…! 자, 잠깐만! 아아….
잠시 후, 싫다고 도리질하는 한영을 기어이 사정시킨 재환은 입술에 묻은 정액을 손등으로 쓱 훔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옆에서 티슈를 뽑아 태연히 입가와 손을 닦고서 한영에게 무시무시한 한마디를 남겼다.
“너 내려와서 밥 먹을 때까지 나 굶고 있을 거야.”
식은 국을 도로 데우기도 전, 한영은 옷을 챙겨 입고 헐레벌떡 부엌으로 내려왔다. 몰래 씩 입꼬리를 올렸다 내린 재환은 얌전히 식탁에 앉아 있는 한영 앞에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아 ‘먹자.’라고 말하자, 한영은 우물쭈물 숟가락을 들었다. 그랬던 것치고는 국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재환은 딱히 묻지 않고 두 번째 그릇을 퍼 주었다. 한영은 이것도 게 눈 감추듯 말끔히 비웠다.
식사가 끝난 뒤, 넌 그냥 가 보라고 한영에게 딱 잘라 말한 재환은 싱크대 앞에 서서 다 먹은 그릇들을 씻었다. 한데 어쩐지 계속해서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휙 뒤를 돌자, 아니나 다를까 한영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콸콸 흐르던 물을 잠근 재환은 한영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주저하며 다가온 한영의 옷을 휙 잡아당겨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역시나 한영은 잔뜩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든 말든, 재환은 도톰한 입술이 더 도톰해질 때까지 실컷 물고 빨았다. 구깃구깃 주름진 옷을 탁탁 펴 주며 ‘가서 넌 좀 쉬어.’라고 말하고 나서야 한영은 주춤주춤 부엌을 나섰다.
설거지를 마친 다음에는 곧바로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이 되는 둥 마는 둥 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제법 믹싱이 잘되었다. 어젯밤 한영에게 붙들려 이것저것 싸지르다 머릿속 상념들까지 깨끗이 비워진 것인지도 몰랐다. 실없는 생각이었다.
노트북 앞에 앉은 지 한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얼추 곡 하나를 마무리한 재환이 크게 기지개를 켰을 즈음, 문밖에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들어와.’ 하고 답하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당연히 문틈으로 빼꼼히 얼굴을 드러낸 이는 한영이었다.
“재환아.”
“잘됐다. 와서 방금 한 것 좀 들어 봐.”
재환은 한영이 늘 앉던 의자를 얼른 옆으로 끌어와 툭툭 좌방석을 두드렸다. 하나 한영은 문 앞에서 미적거릴 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뭐 해?’라는 의미를 담아 빤히 올려다보자, 흘끔흘끔 눈을 맞추던 한영이 더디게 입을 열었다.
“재환아. 나…, 가고 싶은 데 있어.”
하던 작업 따위 고민도 없이 멈춘 재환과, 재환을 그리하게끔 만든 당사자인 한영이 함께 차에 올라탔다. 단, 평소 외출 시 늘 운전이 한영의 몫이었던 것에 반해 오늘은 재환이 대신 운전석에 앉았다. 차에 타기 전 한영이 제가 운전하겠다는 뜻을 피력하기는 했으나, 재환은 ‘시끄러.’ 한마디로 한영의 의견을 묵살했다. 어제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서 운전은 무슨 놈의 운전이냐는 살벌한 말도 덧붙였다. 물론 찬바람 씽씽 부는 말투와 달리 만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한영을 설레게 하는 동시에, 약간의 아리송함을 건네주는 미소였다.
집을 출발한 차는 얼마 안 가 금방 한강 옆의 대로로 들어섰다. 오늘은 기온이 그다지 낮지 않은 까닭에, 지난밤 소복이 내렸던 눈은 오후의 햇살 아래 이미 흔적 없이 녹아 있었다. 따라서 얼룩덜룩 젖은 자국만 남은 길을 차창 너머로 응시하던 한영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와중 흘긋 곁눈으로 살핀 재환은 그럭저럭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낮은 볼륨으로 틀어 놓은 음악에 맞춰 핸들을 톡톡 두드리기도, 또 노랫말을 흥얼흥얼 작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과거 한영은 몰랐던 사실인데, 재환은 운전을 매우 잘했다. 자신이야 미국에서 십 대 시절부터 차를 몰았으니 운전에 익숙한 게 당연했지만, 재환이 이렇게 능숙한 줄은 미처 몰랐다. 급출발이나 급정거 한 번 하는 법이 없었으며, 차선도 참 스무드하게 바꿨다. 심지어 길도 여기저기 잘 알았다. 가끔 무리해서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무섭게 욕을 뇌까리기도 했으나, 금세 분을 꺼뜨리고 운전에 집중했다.
어느새 한영은 옆으로 완전히 고개를 틀어 운전도 잘하고 잘생긴 연인의 옆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차 앞 유리를 통해 들이치는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얼굴이 그리 훤할 수 없었다. 밝은 빛을 머금어 더 붉게 빛나는 입술에 시선이 머무를 즈음이었다.
“왜.”
“어?”
“왜 자꾸 그렇게 쳐다봐.”
살짝 한영 쪽으로 얼굴을 돌린 재환의 눈매가 고운 곡선을 그렸다. ‘아냐….’ 하고 어물쩍 말을 흐린 한영은 다시 창밖으로 휙 눈길을 되돌렸다. 어제 재환에게 그 몹쓸 짓을 하고서, 심장이 눈치 없이 두근거렸다. 키스하고 싶다.
오늘따라 유난히 귀엽게 구는 한영을 보며 픽 웃음 지은 재환은 차 센터패시아로 손을 뻗었다. 음악의 볼륨을 조금 키우자, 어쿠스틱 기타의 청량한 스트로크에 맞춰 하이햇이 간질간질 박자를 쪼개는 소리가 보다 또렷이 들려왔다. 또다시 기분 좋은 콧노래가 흘렀다. 평일 오후. 한산한 도로 위로 칠흑처럼 검은 스포츠카가 물살에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나아갔다.
약 30분을 더 달린 차는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의 텅텅 비어 있다시피 한 공영 주차장에 가뿐히 차를 주차한 재환은 한영과 밖으로 내려섰다. 동시에 짭조름한 기운이 섞인 찬 바람이 훅 불어왔다. 저 멀리서 아득하게 파도치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바다 냄새, 그리고 소리였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한 두 사람은 연안을 따라 난 길을 슬렁슬렁 걸었다. 길옆으로는 조개구이집이니 횟집이니 하는 음식점들이 즐비했는데, 피서와 거리가 먼 계절 탓인지 통 문을 연 곳이 없었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북적했을 공간이 그야말로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멀리 쫓아오는 갈매기 소리가 사위의 고요함을 달랬다.
혹시 몰라 차에 챙겨 온 모자나 안경은 오늘 영영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얼핏 스칠 무렵, 재환과 함께 걷던 한영이 앞을 가리키며 ‘재환아, 저기 봐!’ 하고 외쳤다. 한영이 가리킨 곳에는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트럭에서 폴폴 새어 나오는 하얀 김이 은근하게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를 풍겼다. 어차피 더 가 봤자 먹을 데도 없겠다, 재환은 덥석 한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기서 먹자.”
기껏 바다까지 와서 늦은 점심으로 먹은 메뉴가 떡볶이에 오뎅이었다. 심지어 배불리 먹었더니 나중 계산할 금액이 이만 원 가까이나 나왔다. 바가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다지 기분이 언짢지는 않았다. 허기를 반찬 삼아 나름 맛있게 먹은 덕일 수도, 간만에 코에 바깥바람을 쐬어 마음이 들뜬 덕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주인아저씨에게 ‘어휴, 청년 둘이 아주 다 잘생겼네.’ 하는 말을 들어서….
배를 채운 후 소화나 시킬 겸 왔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가자, 금세 널따란 해수욕장이 나왔다. 명칭은 해수욕장이었지만, 사람 하나 없는 곳은 그저 휑한 겨울 바다에 불과했다. 쏴아아 하는 스산한 소리를 싣고 규칙적으로 파도를 밀어 보내는 바닷물은 쪽빛보다 회색빛에 가까웠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하늘이 더 파래 보이는 듯도 했다.
그래도 모처럼 바다를 보러 왔으므로, 두 사람은 한동안 해풍이 섞인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모래사장을 밟고 걸었다. 드물게 보이는 조개껍질, 모서리가 동글동글해진 유리 따위가 조금쯤은 더 바다에 온 기분을 내게 해 주었다. 다만 쌀쌀한 날씨는 어찌할 수 없어, 코를 한 번 훌쩍인 재환은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옆에 있던 한영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왜?’ 하며 몸을 틀자, 한영은 코트 위에 둘둘 두르고 있던 와인색 머플러를 풀었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벗은 머플러를 재환의 목에 감았다. 딱히 뭐라고 싫은 소리를 하진 않았으나, 재환은 폭 눈썹을 좁힌 얼굴로 이럴 필요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영은 추위에 발긋발긋해진 재환의 코를 가볍게 꼬집었다 놓으며 빙그레 웃기만 했다.
드넓은 모래사장 한복판쯤 다다랐을 때, 둘은 약속한 듯 판판한 모래 위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걱정한 것만큼 엉덩이가 시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새 또 해가 기울어 수평선 가까이에는 흐릿한 노을빛이 퍼져 있었다. 그 아래서 끝도 없는 바다가 철썩철썩 느리게 출렁였다. 쓸쓸해 보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풍경이었다. 한영이 보고 싶어 했던 경치가 이런 거였을까 하고 생각하는 차, 옆에서 재환을 부르는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환아.”
“응?”
“나 여기서 옛날에 뮤직비디오 찍었다?”
‘그래?’ 하고 되묻자, 한영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재환에게 ‘잠깐만 기다려 봐.’ 하고서는 톡톡 액정을 두드려 영상 하나를 띄웠다. 곧이어 손바닥만 한 화면 안에 펼쳐진 것은 하늘 높이서 부감으로 찍은 바닷가 풍경이었다. 채도가 낮아 흡사 모래사장과 같은 빛깔로 보이는 바닷물이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계속해서 뭍으로 밀려왔다 도로 밀려났다. 그 위로 ‘유한영 - Too Far Away’라는 글자가 서서히 떠올랐다. 재환이 몰래 사 모았던 CD 재킷에서도 본 적이 있는 제목이었다. 아마도 이 노래는… 한영의 데뷔곡이었다.
얼마 안 가 화면은 아무도 없는 모래벌판을 쓸쓸히 걷는 남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위아래 흰옷을 입은 남자는 키는 크고 얼굴은 조막만 하여 언뜻 보면 모델 같았다. 하긴 누군데, 라는 생각을 한 재환은 픽 맥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퍼뜩 핸드폰으로 손을 뻗어 재생 중이던 영상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한영에게 ‘잠깐만!’을 외치고서 얼른 점퍼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서 나온 물건은 줄이 긴 검정 이어폰이었다. 음악을 듣든 안 듣든, 외출 시 이어폰을 챙기는 건 재환에게 있어 오랜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이어폰을 본 한영이 눈썹 끝을 떨어뜨리며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재환아. 누가 요새 이런 이어폰 써.”
요샌 밖에서 유선 이어폰 쓰는 사람 찾기가 힘들어졌음을 재환 자신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아직 이어폰을 바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가 써.’라고 심드렁히 대꾸한 재환은 핸드폰에 연결한 이어폰 한쪽을 한영에게 내밀었다. 이어폰을 받아 가던 한영이 재환의 뺨에 쪽, 하고 도둑 뽀뽀를 했다. 기겁한 재환은 얼른 휙휙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사이좋게 이어폰을 나눠 낀 두 사람은 어깨를 꼭 붙이고 다시 뮤직비디오 감상에 들어갔다. 이곳을 배경으로 찍었다는 뮤직비디오에는 정말로 바다 말고 다른 장소가 등장하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 선 인물도 한영 하나뿐이었다. 파도 속에서 피아노를 치는 한영, 바닷가를 달려 나가는 한영, 하늘을 보며 애타게 소리 지르는 한영…. 지금보다 얼굴에 조금은 앳된 티가 나는 한영이 영상을 꽉 채우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 ‘네가 너무 멀어’란 서글픈 가사를 노래하고 있었다.
수많은 각도에서 비치는 한영을 푹 빠져 보는 사이, 노래가 끝났다. 모든 소리가 음 소거된 화면 안에서 한영은 하얗게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 앞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윽고 카메라 앵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젖은 모래를 디딘 맨발이 느리게 페이드아웃 되었다. 작은 화면이 컴컴해지자, 이어폰을 끼지 않은 귓속으로 가까운 곳에서 솨아 파도치는 소리가 밀려들었다. 아직 노래를 듣고 있는 것처럼 재환은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재환아.”
한 박자 늦게 ‘…응?’ 하고 대답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쭉 뻗은 팔을 무릎에 얹은 한영은 먼 앞을 보고 있었다. 옅은 색 눈동자에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하얀 파도가 어른어른 비쳤다.
“나 이거 찍을 때 무지 혼났어. 연기 너무 못한다고. 근데 해 본 적 없는 걸 어떡해. 다 찍고 집에 오니까, 괜히 서러워서 막 눈물 나더라. 재환이 네 생각도 나고.”
말을 멈춘 한영은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던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다리를 좀 더 넓게 벌리더니, 꼭 아이가 낙서를 하듯 모래 위로 무언가를 죽죽 긋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귀에서 이어폰을 뺀 재환은 대충 줄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서 다음 뮤직비디오 찍을 때 난 처음부터 그냥 노래만 했어. 연기는 연기자가 하고. 그땐 하나도 안 혼났어.”
당시를 떠올린 듯 한영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여전히 나뭇가지를 쥔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을 얹는 대신, 재환은 계속되는 이야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때 남자 배우가 막 같이 술 한잔만 하자 그래서 따로 만난 적 있거든? 나중에 보니까 나 꼬시는 거였어.”
하지만 이런 얘기에는 어쩔 수 없이 푹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에도 재환은 침묵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제가 한영에게 무어라 할 계제가 못 됨을 넘치도록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드럽고도 까슬까슬한 바닥 위로 선 긋는 일에 더 열중한 한영은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나 여자 연예인들한테도 인기 되게 많았다? 특히 누나들이 동생 같다고 잘해 줬어. 데뷔 초반에… 내가 좀 많이 불쌍해 보여서 그랬나 봐. 말도 잘 못하고, 사람들이랑 눈도 잘 못 마주치니까.”
한영은 또 코를 찡긋거리며 귀엽게 웃었다. 물론 재환이 듣기에는 마냥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서 안쓰럽게 쭈뼛거리는 한영의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혹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좀 달랐을까. 순간 하등 쓸모없는 생각을 해 버린 재환은 한영 모르게 살짝 표정을 굳혔다.
“개그우먼 연정미 알지? 그 누나하고도 꽤 친해. 나중에 소개시켜 줄게. 근데 절대 술은 같이 먹으면 안 돼. 누나 완전 술고래야. 알았지?”
홱 고개를 튼 한영이 제법 단호한 얼굴로 재환을 보았다. 그제야 재환은 ‘응….’ 하며 머뭇머뭇 입을 뗐다. 한영은 만족한 듯 쌕 웃어 보였다.
이후로도 한영은 열심히 손을 움직이며 재잘재잘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간 서로 참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처음 듣는 것이 많았다. 과거 누구 때문에 며칠을 굶다 처음 먹었던 음식이 막창이었다든가, 처음 담배를 피웠을 땐 눈앞이 핑 돌아 토하기까지 했었다든가….
그사이, 나뭇가지를 잡지 않은 손이 어느덧 재환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재환은 구태여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저도 모르는 새 한영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전에는 막창집에서 회식한 적도 있어. 거기 유명한 데래. 다음에 같이 가자, 재환아.”
재환은 예외 없이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영은 살그머니 고개를 기울여 재환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피는 대신 재환은 그냥 픽 웃고 말았다. 찬 바람을 맞은 뺨에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의 감촉이 싫지 않았다.
잠시 뒤, 모래 위 작품을 얼추 완성한 한영이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잠깐 동안 재환과 한영 두 사람은 뿌연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흐르는 정적이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철썩거리는 파도가 적당한 소음을 만들어 주기도 했으며, 이런 시간이 불편하게 느껴질 사이도 아니었다. 틈 없이 맞붙은 손바닥 안으로는 포근한 온기가 맴돌았다. 추위와 따스함이 함께 섞인 침묵을 먼저 살며시 걷어 낸 건 한영이었다.
“재환아.”
“응.”
“난… 재환이 네가 전에 누굴 만나고, 뭘 하고, 그런 거 다 괜찮아.”
한영의 손을 쥐고 있던 손에 움칠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곧바로 한영이 더 강한 힘으로 재환의 손을 쥐어 왔다. 평소 같았으면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렸을 만한 아귀힘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근데… 그 시간을 내가 모르는 게 너무 속상해. 그리고 그때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워.”
한영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러나 매끈한 눈가가 점점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재환의 시선에 잡혔다. 슬슬 더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은 아닐 터였다. 말을 멈춘 틈을 타 파르르 떨리는 입술, 찡긋거리는 코 모두가 애써 꾹꾹 눌러 삼키고 있는 감정을 대변했다. 머지않아 재환에게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나 너무 늦은 거 아니지, 재환아?”
목이 메어 와 섣불리 대답을 내놓지 못한 재환은 한영의 발 근처에 펼쳐진 선들로 시선을 떨구었다. 어디 담벼락에 색색의 스프레이로 그려져 있을 법한 멋들어진 모양새로, ‘JH HY’ 네 글자가 모래에 적혀 있었다. 가운데에는 끄트머리가 한쪽으로 귀엽게 꼬부라진 하트도 자리했다. 나뭇가지로 쓱쓱 그린 것치고는 지나치게 멋진 문양들을 담던 시야가 일렁일렁 번졌다.
“나 그동안 정말 열심히 했어, 재환아. 너 만나려고 그랬어….”
“알아.”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훔친 재환은 저와 표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한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한영 역시 이미 눈동자고 속눈썹이고 모두 축축이 젖어 있었다. 어느 쪽이든 세차게 불어 젖히는 바닷바람을 핑계 댈 수준이 아니었다. 와중에도 재환은 안간힘을 써서 또렷한 목소리를 내었다.
“다 알아, 유한영. 너 하나도 안 늦었어.”
힘이 들어간 손에서 조심스럽게 빼낸 손을 하얀 뺨으로 가져갔다. 차갑게 언 살갗을 가르고 도르르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을 부드럽게 엄지로 쓸어 냈다. 곧이어 다음 방울이 떨어졌을 때, 재환은 그 위로 살포시 입술을 겹쳤다.
찬란하게 벚꽃 비가 내리던 날 누군가가 그래 주었던 것처럼, 재환은 연인이 흘리는 맑은 물방울을 한 모금 한 모금 머금었다. 혼자 삭이고 버텼을 그의 불안도 함께 삼켰다. 목뒤를 손바닥으로 감싸 이마를 맞댄 뒤, 태어나 해 본 말 중 가장 낙관적이고 긍정적일지 모를 말을 속삭였다.
“우리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을 거야. 잘 지낼 거야.”
두 사람이 떨어져 있던 8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채우고 칠해도, 빈틈은 남기 마련이었다. 그 자리를 완벽히 서로로 메우는 건 어쩌면 영영 불가능한 일일지 몰랐다. 마음 저변에 자리한 후회나 서글픔 따위가 불시에 비집고 올라와 이번처럼 잔잔한 위협을 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재환은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또다시 그런 시련이 찾아온다면 오늘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눈빛을 주고받고, 서로의 어깨를 내어 주면 될 것이다. 혹 그래도 안 풀린다면 진하게 키스하고, 섹스하고, 사랑한다는 진심을 전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 과정 또한 간질간질한 연애의 묘미라 생각한다면 충분히 즐길 만하지 않을까. 어떤 풍파가 불어와도 담담히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이토록 희망적인 마음을 품으며, 재환은 연인의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포갰다. 차가운 겨울 공기조차 파고들 틈 없이 꼭 맞물린 살결 사이로 진심 어린 애정과 확신이 오갔다. 서로 사랑하는 오늘과, 더 사랑하게 될 내일이 오갔다.
한겨울의 바다 앞에서 햇살 쏟아지는 봄날처럼 따스한 입맞춤을 나눈 두 사람은 살며시 입술을 떨어뜨렸다. 스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재환은 한영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한영도 옴폭 볼우물을 파며 예쁘게 웃었다. 이제, 서로에게 전할 가장 중요한 한마디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한영이 불쑥 꺼낸 얘기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맞다, 재환아.”
“…어?”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장면 보여 줄까?”
난데없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말을 할 새가 없었다. 별안간 벌떡 일어난 한영이 모래사장을 밟으며 훌쩍훌쩍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얼마나 힘차게 뛰는지 걸음걸음마다 모래에 깊은 발자국이 남았다. 저러다 차가운 바닷물에 풍덩 몸을 던질 것만 같아, 소스라친 재환은 서둘러 손바닥으로 모래를 짚으며 일어섰다. 손 터는 것도 잊고 종잡을 수 없는 연인을 쫓아 발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별안간 쩌렁쩌렁 터진 외침이 재환의 다리를 멈춰 세웠다. 당황한 재환은 그대로 주춤한 채 아슬아슬 뭍의 끝자락에 선 한영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두 손을 댄 한영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더 큰 소리로 다음 말을 외쳤다.
“서재환을 사랑해!”
하나, 우르르 밀려오는 파도에 삼켜져 소리는 생각보다 멀리 가지 못했다. 한영은 지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번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들어 주는 사람은 한 명뿐인데, 아주 세상 전체에 고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서재환을 사랑해! 진짜 사랑해!”
저 멍청이가 진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연인을 보며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을 짓던 재환은 결국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 생겨난 발자국을 고대로 밟아 여전히 ‘서재환을 사랑해!’를 외치고 있는 남자 곁으로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갔다.
출렁이는 파도가 가까워질수록 바람 또한 거세졌다. 소금기를 잔뜩 실은 해풍이 마구잡이로 불어와 머리칼을 헤집고 살갗을 때렸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배에 솟은 돛처럼 점퍼, 바지 자락이 모두 정신없이 펄럭거렸다. 매한가지 꼴을 한 남자 옆에 다다라서야, 재환은 비로소 발을 멈추었다. 그를 따라 입 옆을 두 손으로 막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나는!”
저 아래서부터 끌어 올린 목소리를 터뜨리자, 한영이 휙 고개를 돌려 놀란 얼굴로 재환을 보았다. 시선을 짐짓 모른 체한 재환은 어서 다음 말을 크게 외쳤다.
“유한영을 사랑해!”
보란 듯 재빨리 뒷말도 덧붙였다.
“진짜 사랑해!”
가는 머리카락만 휙휙 흩날릴 뿐 한영은 잠시 미동이 없었다. 흘끔 눈만 돌려 한영을 본 재환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사이에도 뺨 때리듯 얼굴로 바람이 쏟아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요란한 풍성 속, 재환과 시선을 나누던 한영이 꼭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입매에 콱 힘을 주었다. 언제 애처롭게 울먹였나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내가 더! 서재환을 사랑해!”
해보자는 걸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언사에 재환의 표정에도 덩달아 결연함이 서렸다. 아까보다 배는 더 가슴이 부풀 정도로 깊이 심호흡한 후,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쏟아 냈다.
“내가 더! 더! 유한영을 사랑해!”
한영도 가만있지 않았다.
“내가 더 많이! 진짜 많이! 서재환을 사랑해!”
여기에 또 보고만 있을 재환이 아니었다.
“내가 더! 죽도록 더! 유한영을 사랑해!”
한동안 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경쟁이 계속되었다. 붙일 수 있는 온갖 수식어는 다 끄집어져 나왔다. 너무너무, 미치도록, 바다만큼, 하늘만큼, 우주만큼…. 하지만 누구 하나 부끄럽다거나 창피하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진심이었기 때문에 당연했다.
그러다 마침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악악거리던 두 남자의 입에서 일시에 ‘사랑해!’가 터져 나왔다.
똑같은 울림, 똑같은 마음, 똑같은 열정을 품은 외침이 긴 잔향을 남기고 멀리멀리 뻗어 나갔다. 새하얀 파도에 삼켜지는 일 없이, 차가운 바닷물에 잠기는 일 없이 힘차게 바람을 갈랐다. 마치 세상의 끝까지 다다를 것 같았다.
* * *
[‘저 은퇴 아니에요’ 유한영 밴드 더 숨 결성]
[4인조 밴드 더 숨 늦깎이 데뷔]
[유한영 밴드 ‘더 숨’ 데뷔 앨범 〈Love Again〉 발매]
[더 숨 〈Love Again〉 각종 차트 1위 싹쓸이]
한때 한 가수의 은퇴 소식이 앞다투어 올라왔던 인터넷 연예 기사란에 하나둘 그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올라왔다. 밴드, 데뷔, 발매 하는 것들이 기사 제목에 빠짐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 더,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었다.
더 숨.
처음 사람들은 그 유한영이 결성했다는 ‘더 숨’을 향해 호기심 어린 관심을 보냈다. 개중에는 ‘은퇴한다고 할 땐 언제고’라는 못마땅한 시선도 더러 존재했다. 인기가 떨어지니 밴드를 한다는 악담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앨범이 발매되고, 세상 이곳저곳에서 그들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며 여론은 빠르게 하나로 수렴되었다. ‘역시 유한영’이었다.
이 과정 하나하나를 지켜보며, 재환은 때로는 어리벙벙해지고 때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옆에 누워 있는 한영에게 볼을 꼬집어 달라고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 한영은 힘을 뺀 손가락으로 살짝 뺨을 꼬집었다가, 꼭 그 자리에 입을 맞춰 주었다. 따라서 재환은 아픔 대신 간지럽고 따스한 감각으로 이게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데뷔곡 〈Love Again〉이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재환의 얼떨떨한 상태는 정점을 찍었다. 그때는 하는 수 없이 한영도 그의 뺨을 눈물 콕 나오도록 꼬집어 줘야 했다. 그 정도 해야 겨우 재환은 ‘진짜였어….’ 하고 혼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사실 재환 입장에선 이렇게 어리둥절한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그는 내심 한영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밴드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로부터 실망이 돌아오는 상황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본인 성격상 또 끝도 없는 죄책감에 빠질 것이 뻔한데, 차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1위라고 그랬다. 앨범 판매량도 웬만한 아이돌 버금간다고 그랬다. 그러니 쉬이 믿기지 않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얼굴도 본 적 없는 평론가들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한영이 유한영을 뛰어넘었다’, ‘유한영의 본질은 밴드였다’ 하는 글들을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뺨을 꼬집히는 걸로 모자라 따귀라도 한 대 맞아야 실감이 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처음 방송국이란 데도 가 보았다. 티브이로만 보던 유명 음악 프로그램의 무대에 서서 원 없이 라이브를 했고, 팬들이란 사람도 만났다. 목이 터져라 ‘더 숨’을 외치던 함성이 떠올라 그날 밤엔 잠도 잘 오지 않았더랬다.
생방송 라디오에도 출연했다. 그 자리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한 재환은 본의 아니게 ‘제2의 유한영’이란 별명을 얻었다. 한영도 데뷔 초엔 딱 이랬다는데, 현재의 그를 보면 아무래도 거짓말 같았다. 티브이 방송 때도 느꼈지만, 한영은 말이 청산유수였다. 전직 변호사 선생님이었던 지우가 다 놀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히, 태군이 재환의 정신적 동료가 되어 주었다.
그사이 봄이 무르익었다. 꽃샘추위가 저 뒤로 숨어들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햇살의 포근함이 실렸다. 인터넷 뉴스난에는 새로운 기사가 올라왔다.
[더 숨, 첫 단독 콘서트 개최!]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이 거리 곳곳을 고운 연분홍빛으로 물들인 날이었다. 작년 이맘때쯤 누군가가 은퇴 선언 아닌 은퇴 선언을 했던 클럽 한편의 대기실. 넓고 쾌적한 공간에 연신 찰칵찰칵 셔터 눌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는 카메라 렌즈 앞, 캐주얼한 검정 슈트 차림을 한 네 남자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자리한 기자가 곧 공연을 앞둔 밴드에게 다음 질문을 건넸다.
“데뷔 앨범이 이렇게 성공할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이번에는 한영 씨 말고 다른 멤버분이 답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럴 때 멤버들의 은근한 독촉을 받는 사람은 대개 한 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일시에 세 사람의 눈길을 받은 지우가 그 뜻을 훤히 알아들었다는 듯 씩 미소를 지었다. 순간 셔터 음이 배로 빨라졌다.
“솔직히 한영이 이름이 있으니까, 아주 망하지는 않겠다 생각하기는 했어요. 다른 밴드들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에서 데뷔한 건 사실이니까요. 대신, 그만큼 걱정도 되더라고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저희 노래를 좋아해 주시는 게 아직도 조금 얼떨떨해요.”
적당한 겸손과 내숭이 섞인, 아주 유창한 답변이었다. 기자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곧바로 지우에게 이전 직업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변호사란 업을 포기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지우가 상큼한 얼굴로 이어 답했다.
“딱히 포기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 밴드에 문제 생기면, 제가 변호사로 나서면 되니까요.”
듣는 입장에서 얼씨구, 싶으면서도 묘하게 믿음직스러운 대사인지라 재환은 작게 피식 웃었다. 태군과 한영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인터뷰 분위기가 누그러진 틈을 타, 기자가 넌지시 조심스러운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그…, 듣기로는 지우 씨 아버님께서 용광로 기타리스트 현형탁 씨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네, 맞아요.”
고민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오히려 기자 쪽이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내비쳤다. 아랑곳하지 않은 지우는 ‘이 얘기 기사로 팍팍 써 주세요. 저희 밴드 더 홍보되게.’라며 싱글거렸다. 저렇게 나오는데 별수 있나. 기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 네.’ 했다. 단, 오늘 인터뷰는 ‘첫 단독 콘서트를 앞둔 밴드의 생생한 대기실 모습’이 콘셉트였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서너 개 다른 질문과 답이 오고 가다, 한영과 태군에게 헤어스타일에 관한 질문이 건네졌다. 어쩌면 나올 수밖에 없는 주제였을지 몰랐다. 둘 다 최근 머리 색이나 모양에 꽤 큰 변화가 있었으므로. 한영이 먼저 ‘잘 보이고 싶어서요.’라고 모호하면서도 짧은 답변을 한 후, 태군에게 배턴이 넘어갔다.
한영보다도 더 파격적인 변신을 한 태군의 헤어스타일을 설명하자면, 그는 현재 시원한 반삭발 상태였다. 거기다 5mm가 채 될까 말까 한 머리털이 병아리처럼 고운 노란색을 띠었다. 사실 저것도 아주 빡빡 밀어 버리겠다는 걸 멤버들이 겨우 말려 나온 결과였다. 본인 말로는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라는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아…, 그, 제가 존경하는 드러머가 있는데, 밴드 Doom Boys의 채드 해머라고…. 그분 트레이드마크가 아무것도 없는 대머리, 아니, 민머리거든요. 그분처럼 열심히 드럼을 치자는 마음에서 비슷한 스타일을 시도했는데…. 멤버들이 자꾸 래퍼 같다 그래서 망한 것 같기도 하고…. 아, 랩 하는 분들을 비하하는 건 절대 아니고요. 저 가끔 힙합도 듣거든요? 노래는 다양하게 들을수록 좋으니까….”
나머지 세 멤버는 물론이고, 기자, 심지어 카메라 기자까지 차츰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것도 모르는 반 민머리는 귀를 발그스름히 물들인 채 최근 팬이 되었다는 래퍼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오늘 인터뷰가 후에 어떤 기사로 나갈지, 재환은 슬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제 일이 아닌 양 이런 염려를 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파이팅입니다!’로 태군의 답변이 마무리되었을 때, 대뜸 기자가 재환의 이름을 언급했다.
“8년 만에 밴드가 재결성된 감회를 좀 묻고 싶은데, 이 답변은 재환 씨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오늘 너무 말이 없으셔서.”
숨김없이 당황한 재환은 ‘아….’ 했다. 원래 묵묵한 사람인 척, 이대로 자연스럽게 자리만 지키고 있으려던 허술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그사이 줌이 바짝 당겨진 렌즈가 멍청히 굳은 얼굴을 정조준했다. 프로필 사진도 찍어 보고, 뮤직비디오도 찍어 보고, 심지어 방송국 카메라 앞에도 서 봤지만 아직까지 이런 상황은 재환에게 있어 꽤나 어색했다.
선뜻 말문을 떼지 못하고 눈을 굴리던 재환은 태군을 사이에 두고 한 자리 건너에 앉은 한영과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슬쩍 목을 빼 이쪽을 보는 한영의 눈빛이 한없이 따스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일시적으로나마 무지렁이가 되었던 재환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기 충분한 눈빛이었다. ‘괜찮아’라는 나긋한 속삭임이 소리도 없이 마음속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다. 스르르 입이 열렸다.
“…꿈꾸는 것 같아요.”
드디어 나온 대답에 기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녹음을 위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보다 가까이 재환 쪽을 향했다. 차분히 심호흡한 재환은 기자와 제법 똑바로 눈을 맞추고서 말을 이었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그냥, 모든 게 다 꿈같아요. 여기 이 친구들이랑 밴드 하고 있는 게, 다시 기타 치고 있는 게 전부 다요. 가끔은 정말로 안 믿겨서 한영이한테 뺨 좀 꼬집어 달라고 한 적도 있어요. 그만큼… 행복해요.”
쑥스럽게 웃은 재환은 슬쩍 손을 올려 습관처럼 뒷목을 쓸었다. 그로 인해 팔목 아래까지 당겨진 재킷과 셔츠 소매 위로 가는 가죽끈 팔찌가 드러났다. 팔찌에 달린 새끼손톱만 한 타원형의 금색 펜던트가 대기실 조명에 반사되어 작은 빛을 터뜨렸다. 단, 그곳에 적힌 ‘JH HY’라는 이니셜을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글자는 바짝 앞까지 눈을 들이대야 겨우 보일까 말까 한 아주 작은 크기였다.
재환이 도로 손을 내렸을 때, 대기실로 들어온 스태프 하나가 그들에게 휙휙 손짓을 보냈다. 슬슬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기자가 밴드의 보컬이자 리더를 향해 오늘의 인터뷰를 마무리 지을 질문을 건넸다.
“그럼 마지막으로 기다려 준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한영 씨.”
빙그레 웃은 한영은 잠깐 좌우로 고개를 돌려 가며 멤버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었다. 맨 끝자리에 앉은 재환과 눈길을 주고받을 때에는 보다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다시 기자에게로 시선을 되돌린 한영은 환한 웃음과 함께 진심이 담뿍 담긴 목소리를 내었다.
“기다려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이거 하나는 꼭 말하고 싶어요. 저, 죽을 때까지 음악 할 거예요!”
인터뷰가 끝난 대기실이 분주해졌다. 스태프 여럿이 바삐 안팎을 오가고, 그사이 멤버들은 마지막으로 헤어와 메이크업을 점검받았다. 그리하여 이제 진짜로 무대에 오르기 직전이 되었을 때, 네 사람은 둥그렇게 모여 서서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밴드의 듬직한 리더가 입을 열었다.
“하던 대로 하자. 그러면 돼, 우리.”
응, 그래, 옛썰. 대답은 제가끔 달랐으나, 담긴 뜻은 한가지였다. 오늘, 정말 잘해 보자는 거였다. 조금의 간지러움을 참고 다 같이 파이팅까지 외친 후, 가장 입구 가까운 쪽에 있던 지우부터 성큼성큼 발을 뗐다. 태군이 조르르 그 뒤를 따르고, 한영과 재환이 차례로 두 사람을 쫓아 대기실을 나섰다.
대기실에서 나와 무대에 다다르기까지는 좁고 컴컴한 복도를 지나야 했다. 채 열 발짝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지만, 한 발 두 발을 내디딜수록 재환은 저 아래서부터 묵직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쿵쿵 심장 박동하는 소리가 걸음걸음마다 따라붙으며, 덩달아 증폭된 숨소리가 귀 안쪽을 울렸다. 홀로 수도 없이 기타를 쥐고 연습했던 시간, 멤버들과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합주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주르륵 뇌리를 스쳤다. 난 제대로 준비가 된 걸까. 저 무대에 설 자격이 있는 걸까. 거침없이 팽창한 긴장이 빠르게 나약한 불안감으로 뒤바뀌었다.
앞서 걷는 한 사람을 향해 손이 뻗어 나간 것은 찰나였다. 걸음 따라 가볍게 흔들리는 팔을 저도 모르게 덥석 붙잡자, 기꺼이 발을 멈춘 상대가 경쾌한 몸짓으로 휙 뒤를 돌았다. 어두운 공간에서도 갓 피어난 꽃잎 같은 빛을 발하는 분홍색 머리칼이 찰랑이며 달콤한 향기가 풍겨 왔다. ‘응?’ 하는 다정한 물음과 함께 예쁜 눈이, 입술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천진하게 웃는 한영을 마주 본 재환의 의식이 순식간에 아득한 기억의 무더기 속으로 빨려들었다.
이제는 먼 옛날이라 불러야 할 과거의 어느 날, 오디션을 위해 ‘더 숨’이란 이름을 달고 처음 섰던 작은 클럽의 무대. 컴컴한 관객석을 담던 시야가 아득해지며, 피크를 쥔 손이 달달 떨려 오던 그 순간에도 재환은 이 미소를 보았다. 이 어여쁜 미소가 쿵쾅거리던 심장을 어루만져 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자리에 또 다른 두근거림을 심어 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머잖아 같은 현상이 지금의 재환에게 일어났다. 기껏해야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었으나, 영원처럼 한영과 시선을 나누던 재환은 어느덧 그를 따라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심장을 옥죄던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지고, 저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기대가 빛을 틔웠다. 그간 참 열심히 노력한 만큼, 어서 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이 부풀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붙들고 있던 팔을 슬며시 놓은 손을 위로 가져갔다.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던 지난날과 똑 닮은 색을 한 머리칼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하얀 얼굴을 바짝 잡아당겨, 붉디붉은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10년 전 처음 고막으로 느꼈던 순간부터 오늘에까지 저를 이끈, 달콤하면서도 포근한 숨을 힘껏 들이마셨다. 폐부 가득 너의 향기가 들어찼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은 어둠을 틈타 한영과 짧고도 진한 입맞춤을 나눈 재환은 쓱 입꼬리를 올리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살짝 당황이 떠오르는 듯했던 얼굴에 이내 사랑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좇아 더 활짝 웃은 재환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아래로 늘씬하게 뻗은 목에 팔을 둘렀다. 네모난 빛이 들이치는 출구를 함께 보고 서서 연인이자, 동료이자, 내 삶의 이유를 만들어 준 너에게 자신감 넘치는 한마디를 건넸다.
“가자.”
뒤에서 혼자 걷던 길을 나란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딛는 걸음에 일체 지체함이 없었다. 이윽고 터널 같은 어둠 속을 빠져나온 순간, 시야에 눈부시도록 환한 빛이 쏟아졌다. 쩌렁쩌렁한 환호가 고막을 뒤흔들었다. 수를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무대 아래서 단 하나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더 숨’ 두 글자가 만들어 낸 거대한 잔향이 끊임없이 공간을 메아리쳤다. 이제, 저곳에 우리의 잔향을 퍼뜨릴 시간이었다.
〈Reverb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