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y / Wet 1 (28/29)

Dry / Wet 1

* * *

꼭 기타 앰프처럼 생긴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간질간질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누군가가 좋아할 법한 스타일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커다란 창을 통해 부엌으로 들이치는 햇살과 섞여 제법 상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위로 콧노래를 얹는 한 사람의 손에 들린 작은 채반 사이에서 솔솔 흰색 가루가 떨어졌다. 눈처럼 흩날린 가루가 도톰하게 구워진 팬케이크 위에 뽀얗게 덮였다. 흥얼흥얼 영어 가사를 중얼거리던 입에 빙긋 미소가 번졌다.

곱게 슈거 파우더를 뿌린 팬케이크 접시 두 개를 식탁에 올려 두는 것을 끝으로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났다. 다시 한번 흡족하게 웃은 한영은 앞에 두르고 있던 꽃무늬 앞치마를 벗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깨우러 갈 시간이었다.

가볍게 발을 놀려 2층과 연결된 계단을 올랐다. 양옆에 일정 간격으로 문이 난 복도를 지나 맨 끝에 위치한 문 앞에 섰다.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다 짙게 물들인 한영은 부드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이 집에서 가장 밝은 해가 들이치는 공간으로 더없이 사뿐한 발걸음이 내디뎌졌다.

눈부신 햇살에 반사되어 매끄러운 빛을 뿜는 피아노를 손끝으로 쓸며 방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방 한편에 사선으로 기울어져 놓인 침대 앞에 다다랐을 때, 풋 하고 나지막한 웃음이 터졌다. 알록달록 복잡한 패턴이 그려진 이불 가운데가 불룩이 솟아 있었다. 조심스레 침대 끝에 걸터앉은 한영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덩어리를 살포시 두 팔로 끌어안았다. 얇은 이불 안에서 ‘으….’ 하는 침음이 샜다.

“재환아, 일어나.”

알았다는 대답 대신 또 한 번 ‘으응….’ 하고 칭얼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평소에는 절대 들려줄 리 없는 귀여운 목소리에 한영은 꾹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끝 간 데 없이 위로 삐죽삐죽 솟구치는 입꼬리를 진정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더 이불 안쪽으로 꾸물꾸물 파고드는 작은 머리통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아침 다 해 놨어.”

“어어…, 응….”

이불 한 겹을 통과해 웅얼웅얼 들려오는 대답이 여전히 혼곤한 잠기운에 묻혀 있었다. 꼴딱 밤새우다시피 해서 기타 연습을 했으니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영도 이리 헤매는 연인을 더 푹 자게 놔두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이따 불같은 원성을 들을 게 뻔했다. 오늘같이 중요한 날 저를 안 깨우면 어떡하냐고. 다 망했다고. 그런 짜증 몇 번 듣는 거야 크게 상관없었지만, 후가 문제였다. 한영의 연인은 모든 일을 다 제 책임으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고, 따라서 곧바로 끔찍한 자책에 빠질 공산이 컸다. 한영은 사랑하는 이가 그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재환아. 오늘 합주 있….”

채 말을 끝맺기도 전 휙 이불이 젖혀졌다. 순간 주위로 보얗게 피어오른 먼지가 홀홀 햇빛 속을 날아다녔다. 어느새 벌떡 일어나 앉아 핸드폰을 집어 든 재환이 화면에 뜬 숫자를 확인하고서는 긴 한숨을 터뜨렸다.

“하…. 합주 시간 지났는 줄 알았네.”

“에이, 그 전에 깨웠지. 아직 여유 있어.”

‘다행이다….’ 하고 혼잣말 같은 탄식을 흘린 재환은 재차 길게 한숨을 쏟았다. 베개에 이리저리 눌려 부스스하게 일어난 재환의 머리칼을 쓱쓱 빗어 넘겨 준 한영은 매끈하게 드러난 이마에 쪽 입술을 눌렀다. 그것만으로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어 살짝 건조해 보이는 입술에도 입술을 포개 요리조리 혀로 할짝거렸다.

충분히 촉촉해진 살결에서 도로 입술을 떼자, 핸드폰을 쥔 채로 엉거주춤 굳은 재환이 아직 잠이 완전히 떨쳐지지 않은 눈을 느리게 껌뻑거렸다. 귀엽게 풀린 얼굴을 보며 입매를 활짝 벌린 한영은 내처 두 팔로 와락 재환을 껴안았다. 따끈하게 햇볕이 스민 귓가에 입술을 붙여 한순간 걷잡을 수 없이 부푼 마음을 속삭였다.

“사랑해, 재환아.”

“…….”

보다 멍한 얼굴이 된 재환은 단숨에 훌쩍 침대에서 일어나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몇 번 뒷목을 긁적이다가, 상대가 방을 벗어났을 즈음 슬쩍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남은 잠을 쫓고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한 재환만의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화사하게 들이치는 해를 고스란히 흡수한 벽은 한 면이 온통 요란한 페인트 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꽤나 비싼 페인트였던지 칠하고 적잖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색 하나 바래지 않았다. 그 덕에 재환은 저 알록달록하기 그지없는 색채를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 침대를 벗어나기 싫은 아침에 저만한 각성제가 없었다. 단, 벽 한가운데 보란 듯 찍혀 있는 손자국은 아직도 지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 방을 같이 침실로 쓰는 사람이 기각시킬 의견임이 뻔했으므로 차마 피력해 보지는 못했다.

머지않아 잠이 얼추 깬 재환은 헐렁한 티셔츠 아래 드로어즈만 입은 맨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디뎠다. 구불구불 기하학적으로 생긴 옷걸이에서 바지를 집어 한 쪽씩 발을 껴 넣은 뒤, 침대 다리까지 늘어진 이불을 잘 정리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내려갈 시간이었다.

1층 부엌에서는 입구부터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자연히 코를 킁킁거리며 식탁으로 다가간 재환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혹 핸드폰을 가져왔을까 싶어 얼른 트레이닝 바지의 주머니 부근을 더듬어 보았으나, 잡히는 게 없었다. 썩 아쉬운 마음을 삭이며 의자에 앉은 재환은 카메라 렌즈 대신 눈으로 열심히 식탁 위 풍경을 담아냈다.

은은한 무늬가 들어간 접시 가운데, 눈이 내린 것처럼 곱게 새하얀 입자가 흩뿌려진 팬케이크가 자연광을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다. 팬케이크는 두툼하기도 꽤나 두툼했다. 그 옆으로는 딱 한입 크기로 자른 딸기, 바나나, 키위 등이 오종종히 예쁘게도 자리했다. 담긴 모양새까지 심히 그럴듯해 카페에서 파는 메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대 콩깍지가 씌어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고 속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중얼거릴 무렵, 팬케이크 접시 옆에 폴폴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이 놓였다.

“커피.”

“아, 땡큐.”

제 몫의 접시 옆에도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내려놓은 한영이 의자를 빼 재환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 끄트머리에 두 팔을 얹고 재환을 바라보는 한영의 밝은색 눈동자가 햇살에 반사되어 유리알처럼 빛났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 재환은 씩 입꼬리를 올리며 한영이 바라 마지않을 말을 들려주었다.

“맛있겠다. 먹기 아까울 정도네.”

“에이, 그러지 말고 식기 전에 빨리 먹어 봐.”

그러는 본인은 정작 포크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쪽이 먼저 맛보기 전에는 한 입도 먹지 않을 듯한 모습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한 재환은 재빨리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두툼한 팬케이크 귀퉁이를 썰었다. 스펀지처럼 단면에 작은 구멍이 뽕뽕 뚫린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때였다.

“아, 재환아. 잠깐만.”

식탁 너머로 뻗어 온 손이 포크를 쥔 손을 가볍게 붙잡아 아래로 당겼다. 얼결에 행동을 저지당한 재환은 노릇노릇한 빵 조각을 다시 접시 위로 내려놓았다. ‘왜?’ 하며 쳐다보자, 식탁 가운데 있던 작은 컵 모양의 종지를 든 한영이 뾰족한 입구가 아래로 향하게 종지를 기울였다. 그 안에서 되직한 갈색빛 액체가 주룩 흘러내려 팬케이크 위로 뭉글뭉글 퍼졌다. 팬케이크에서 풍겨 오는 달큼한 향이 배가 되었다.

“시럽.”

“아, 응.”

재환은 도로 포크를 들어 촉촉이 시럽을 머금은 팬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시럽으로 인한 단맛이 혀를 적시는 동시에 폭신폭신한 빵이 이 사이에서 부드럽게 으스러졌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 맛이 좋다는 생각을 할 즈음, 하얗고 기다란 검지가 종지 주둥이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 시럽 방울을 쓱 훑어갔다. 무심코 눈으로 좇자, 끈적한 시럽이 묻은 손가락 끝이 붉은 입술 사이로 쏙 사라졌다. 곧이어 미약한 쪽 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시럽이 맺혔던 손끝에는 반지르르한 침만 조금 묻어 있었다.

별거 아닌 행동도 참 색정적으로 비치게 하는 연인의 재주에 재환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티슈를 뽑아 쓱쓱 손가락을 문지르던 한영의 눈이 살짝 커다래졌다. 재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서둘러 다음 팬케이크 조각을 자르며 잠깐 의식을 지배했던 위험한 생각 대신 다른 진심을 꺼내어 보였다.

“진짜 맛있다. 매일 아침 나 너무 호강하는 거 아냐?”

“호강은 무슨….”

한영은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고 쌕 미소 지었다. 방금 저 한 말이 누군가가 부끄러울 때마다 자주 써먹곤 하던 말임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건 당사자인 재환도 마찬가지였다. 그새 또 한 입 넣은 팬케이크 맛에 푹 빠진 까닭이었다. 거기에 직접 내린 커피까지 곁들여지니, 정말로 밖에서 비싸게 사 먹는 브런치니 뭐니 하는 식사가 부럽지 않았다. 괜히 한영을 치켜세우려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재환에게는 이런 시간 자체가 호강이고 호사였다. 분에 넘쳤다.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저릿저릿해지는 재회를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영은 재환에게 ‘같이 살자’라는 말을 꺼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이었으나, 의외로 고민은 필요 없었다. 한영과 함께하기로 한 순간부터, 재환은 그가 바라는 모든 바를 들어주기로 이미 굳은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한순간 품었다 마는 얄팍한 결심이 절대 아니었다. 하여 그 자리에서 ‘그래’라는 답을 전하자, 한영은 재환을 꼭 껴안고 한참이나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얼굴이 푹 파묻힌 어깨가 조금쯤 젖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로부터 한영의 집에 이사 오기까지 단 며칠이 안 걸렸다. 말이 이사지, 실상은 그냥 커다란 여행 가방 하나 덜덜 끌고 한밤중에 들이닥쳤다. 눈이 튀어나올 만치 놀란 얼굴을 보며 ‘빨리 오고 싶어서.’라고 멋없는 한마디를 툭 던지자, 어김없이 한영은 뼈가 으스러지도록 재환을 꽉 끌어안았다.

원래 살던 빌라에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던 탓에, 제집을 정리하는 건 그다음이 되었다. 한영의 차를 빌려 여러 번 짐을 옮기고, 필요 없어진 물건들을 중고로 내다 팔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것들을 차근차근 버려 나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꽤 귀찮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텅텅 비어 버린 집 안을 마지막으로 휘 둘러보았을 때, 재환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짧게 축약하자면, 시원섭섭쯤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던 거리를 영영 떠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퍽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 감상에 잠겨 있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커다란 침대에서 눈뜨면 다정한 입맞춤이 내리고, 창밖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사랑한다는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대충 옷만 입고 부엌으로 내려가면 지금처럼 정성스럽게 차린 식사가 재환을 맞이했다. 이리 아침마다 고생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겠지 싶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어느덧 한영은 재환 자신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거의 하루를 쉬는 법이 없었다. 그런 한영과 함께하는 매일매일이 너무도 완벽하여, 재환은 설핏 생소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물론 둘 사이에 조그마한 갈등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의외로 충돌은 같이 살기 시작한 초반 생각지 못한 곳에서 벌어졌다. 최소한의 염치라도 챙기려 월세를 내겠단 소리를 꺼냈더니, 한영은 하루 종일 풀이 죽어 재환과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그때 재환은 과거와 다른 의미로 한영이 조금 성가신 성격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서운함을 어떻게든 숨기려 애쓰는 모습은 정말이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콱콱 꼬집히는 기분이었다.

한영은 그날따라 유독 집요한 섹스를 하며 ‘정말 그럴 거야, 재환아…? 응?’ 하고 몇 번이나 재환에게 애처로이 물어 왔다.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는 와중에도 ‘미안, 미안하다고…!’라고 외치고 나서야 비로소 꽁했던 마음을 풀었다. 다행인지 다행이 아닌 건지, 고추가 잘 서지 않는다며 안쓰럽게 웃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여하간 그 일을 계기로 재환은 이 집이 한영의 부모님이 아니라 한영 본인의 명의가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기 말로는 신혼집… 이라던데, 그건 못 들은 척했다.

이런 사소한 일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충만함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였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후 불면 날아가는 꽃잎처럼 언젠간 이 행복도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늘 오래가지는 않았다. 햇살 같은 미소, 다정한 손길 한 번이면 금세 사그라질 하찮은 걱정이었다. 재환은 지금 이대로 좋았다. 너와 나 사이에 쌓인 그리움의 시간을 얼마나 깨끗이 지워 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 우리는 괜찮을 것이었다. 이처럼 자신도 모르는 새, 재환은 연인에게서 밝은 미래를 꿈꾸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제 안에 화사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환의 시선이 투명한 갈색 눈동자와 부딪쳤다. 그린 것처럼 단정한 눈썹이 쑥 위로 올라가며 ‘응?’ 하는 물음이 건너왔다. 시럽이 담긴 종지를 살짝 들어 나긋한 목소리로 ‘더 줄까?’ 하고 묻기도 했다. 재환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팬케이크 맛있어서.”

“다음에 또 해 줄게.”

팔랑거리는 속눈썹으로 감싸인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로 인해 피어난 미소가 부엌에 가득 퍼진 초여름의 빛살보다 눈부셨다. 곧바로 이어진 한마디가 재환의 가슴속으로 더욱이 환한 빛을 불러들였다.

“사랑해, 재환아.”

나도.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마친 재환은 모처럼 먼저 한영에게 같이 씻지 않겠냐는 말을 꺼냈다. 대답 대신 뼈가 으스러지도록 재환을 끌어안은 한영은 빛의 속도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게 후닥닥 설거지를 끝냈다. 한영이 언제 저리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게 되었을까 싶어 재환은 새삼 다시 놀랐다. 그걸 말로 전하면 ‘사랑의 힘’ 같은 민망한 답이 돌아올 것 같이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한영처럼 그때그때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란 아직 재환에게 있어 퍽 어려운 일이었다. 이 또한 언젠가는 자연히 나아지리라 여겼다. 희망 사항이었다.

약속한 듯 함께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진 두 사람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욕실의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기실 씻기만 하는 거라면 그다지 오래 걸릴 게 없었다. 하지만 풍덩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알몸으로 서로를 마주한 상황에서 그리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거품 묻은 몸을 씻어 내는 시간보다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로 입 맞추는 시간이 더욱 길었다. 손으로는 함께 성기를 모아 쥐고 정성스럽게 흔들었다. 부옇게 피어오른 수증기에 가쁜 숨소리가 섞이며, 거의 동시에 솟구친 정액이 투두둑 타일 바닥으로 떨어졌다. 깨끗한 타일을 더럽힌 뿌연 액이 수챗구멍으로 꼬르륵 빨려 들어갈 즈음, 한층 흥분에 젖은 시선이 오갔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엄지가 색 옅은 유두를 가만가만 둥글렸다. 저 아래서는 길고도 미끈한 중지가 탱탱한 엉덩잇살 사이를 느리게 문질렀다. 엉덩이 골을 따라 세로로 움직이는 손가락이 촘촘한 주름을 스칠 때마다 구멍이 움찔움찔 오므라들었다. 끊어지지 않고 울리는 물소리, 둘만 있는 좁은 공간, 데워질 대로 데워진 숨결. 다시 입술을 겹치든, 푹 손가락을 찔러 넣든 행위를 한 발 더 진전시키기에 너무나도 좋은 여건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죽을 만큼 아쉬워도 그럴 수 없었다.

재환은 곧 있을 합주 때문에 그랬고, 한영은 합주를 앞둔 재환을 위해 그랬다. 인제 한영은 예전처럼 빨고 싶어, 섹스하고 싶어, 하고 칭얼거리며 재환을 보채거나 조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재환의 상황과 상태에 맞췄다. 요 며칠 재환이 기타 연습 삼매경에 빠져 독수공방하는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파르르 끓어오르는 욕망을 나름 능숙히 잠재웠다. 대신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뺨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제 나가자, 재환아.”

욕실을 나와 드레스 룸의 거울 앞에 앉은 재환은 한영의 바지런한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하얀 손에 쥐인 드라이어가 요리조리 휙휙 움직이며 두피 구석구석에 따끈한 바람을 쏘았다. 동시에 드라이어를 쥐지 않은 손이 머리칼을 조물조물 빗어 모양을 잡았다. 저 스스로 머리를 말릴 때에는 오로지 물기를 날려 버리는 것만 신경 쓰곤 했었던 것과 참 달랐다.

한영이 이토록 정성 들여 머리를 만져 주는 이유는 합주를 위해 곧 집에 손님이 오기 때문일 터였다. 아니, 손님이라 칭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그보다는 옛 친구, 동료, 팀원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오늘은 다시 모인 ‘더 숨’의 첫 합주 날이었다.

벌써 꽤 시일이 지난 봄날의 일을 돌이켜 보자면, 재환이 한영에게 밴드를 하자 얘기를 꺼냈던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따라서 고민이나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던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밴드 할까?’라는 뻔뻔한 물음이 튀어 나갔다. 물론 말을 뱉자마자 끔찍한 면구함이 밀려들었지만, 그마저도 ‘재환아, 사랑해!’ 하는 외침에 스르르 녹아 버렸다.

정작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영으로부터 눈물 나도록 벅찬 응답을 들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정말로 밴드를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재환은 한때 가족보다 더 가까웠던 친구들을 만나 사죄하고, 부탁하고, 그리고 고백해야 했다. 그들 외의 다른 이와 함께 한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하지만 온갖 핑계를 대 가며 제 손으로 밴드를 멈춰 세웠던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는 까닭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한영이 재환의 손을 꼬옥 붙잡아 주었다. 다 잘될 거라는 더없이 자애로운 말과 함께.

그리하여 크나큰 용기를 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태군을 만난 순간, 재환은 다짜고짜 울컥 눈물부터 터졌다. 지난날을 향한 미련을 끊어 내고자 그간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친구를 마주하니 복받치는 감정이 제어가 안 되었다. 그래서 그냥 체면도 뭐도 다 갖다 버리고 눈을 붉히며 울었다. 지금 생각해도 썩 창피한 상황이었다.

이쪽의 꼴사나운 모습과 별개로, 태군은 철부지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재환을 보자마자 ‘씨발, 서재환 너 이 새끼!’ 하고 차진 욕부터 터뜨린 걸 보면 말 다 했다. 옛날처럼 대뜸 헤드록부터 걸지 않은 게 개중 다행이었다. 욕으로 시작해 어디 숨어 있었냐, 서운해 뒤질 뻔했다, 근데 넌 왜 늙지도 않았느냐 등등 원망과 투정을 줄줄이 쏟던 태군은 끝내 재환을 따라 눈시울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런 태군에게 재환은 끝까지 미안하단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뒤늦게 약속 장소에 등장한 지우에게는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워낙 놀란 마음이 큰 탓이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다는 지우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멀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그야말로 젊고 잘나가는 변호사 선생님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제도 만난 것처럼 어깨를 치는 행동이나 씩 미소 짓는 얼굴은 과거와 변함이 없었다. 길쭉길쭉한 손가락으로 여유 넘치게 베이스를 치던 그 시절 그대로였다.

그렇게 한영의 집 근처 술집에서 만난 네 사람은 한동안 맥주잔을 기울이며 8년 묵은 회포를 정신없이 풀었다. 각자 가진 과거의 이야기, 현재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나왔다. 서로 참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구나 싶을 즈음이면 함께 밴드 하던 날들의 추억이 소환되어 8년간 벌어졌던 틈을 메웠다. 그 사이에 섞여, 어느덧 재환은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철없던 시절을 흉내 내 짧은 욕을 뱉기도 했다. 열정 하나로 음악에 몸을 부딪치던 그때로 정신도, 마음도 빠르게 되돌아갔다. 모두가 그러했다.

그러다 태군이 핸드폰을 꺼내 차례차례 사진을 보여 주며 여자 친구 자랑을 늘어놓았다. 재환이 ‘예쁘네.’ 했더니 입이 아주 귀에 걸렸다. 지우가 넌지시 ‘결혼은?’ 하고 묻자 그럴 돈 없다며 시무룩해하기도 했다. 태군은 예전 재환도 종종 찾던 악기 상가의 한 매장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장사가 생각보다 잘되는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상가에 악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푸념을 들었을 때는 재환도 퍽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화제가 재환에게로 넘어갔다. 맥주 몇 잔에 얼굴이 불콰하게 익은 태군이 ‘서재환 넌? 누구 만나는 사람 없냐?’라고 물은 것이 시작이었다. 지우까지 싱글싱글 웃으며 말 좀 해 보라고 태군을 거들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과거를 연상시키는 지우의 유들유들한 표정이 묘한 의미심장함을 품고 있었다. 뜸 들이다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켠 재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유한영이랑 같이 살아.”

‘엥?’ 하며 태군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우는 ‘와….’ 하는 감탄사를 흘렸다. 상호 전혀 상의가 되지 않았던 고백에 옆자리 앉은 한영은 아예 몸을 틀어 놀란 얼굴로 재환을 보았다. 제각각인 반응을 앞에 두고도 침착함을 유지한 재환은 테이블 아래서 한영의 손을 꼭 쥐었다. 비겁한 겁쟁이를 자처했던 과거에 더는 머무르기 싫었다.

“얼마 전에 아예 얘네 집으로 들어갔어.”

“왜? 뭐 집에 불이라도 났냐? 아님 침수?”

평소의 서늘함을 잃고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 손을 보다 힘주어 붙잡은 재환은 고개를 저었다. 태군은 전혀 짐작을 못 하고, 아마도 지우는 예상하고 있을 얘기를 담담히 꺼냈다.

“유한영이야. 내가 만나는 사람.”

태군의 턱이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한영은 굳은 채로 무어라 말은 얹지 못했다. 지우만이 씽긋 미소 지은 얼굴을 보였다. 마침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가요가 경쾌하기 짝이 없는 아이돌의 노래로 바뀌었다. 요란스러운 비트가 테이블에 내려앉은 침묵을 메꿨다. 얼마간 더 지속되던 어색한 공기는 태군의 외침이 터지고 나서야 흐트러졌다.

“와씨, 야! 존나 놀랬잖아! 뭐냐, 니네? 이거 몰래카메라야? 아, 식겁했네.”

태군은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휙휙 쓸어내렸다. 하지만 과장된 너스레는 오래가지 않았다. 덤덤한 표정의 재환과, 그 옆에서 어느새 눈가가 발개진 한영을 번갈아 쳐다보던 태군은 차츰 아연한 표정이 되어 입을 뻐끔거렸다.

“그니까…, 농담 맞지? 그, 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마치 한국어가 서툰 사람처럼 말을 더듬거리자, 잔뜩 경직된 어깨에 커다란 손이 얹혔다. 빠른 속도로 얼이 나가고 있는 옛 친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지우가 친절히 결론을 내려 주었다.

“머리 돌릴 거 뭐 있어. 둘이 사귄다잖아. 애인 사이.”

“아니, 그…. 어….”

참으로 명료한 지우의 설명에도 태군은 있는 대로 어리벙벙해진 표정을 풀지 못했다. 몇 번 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가며 재환과 한영을 보다가, 별안간 ‘으아!’ 하는 포효와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작은 얼굴을 뒤덮은 손바닥 사이로 기막히다는 듯한 탄성이 우르르 비어져 나왔다.

“실화냐고! 유한영 혼자, 그냥 옛날에 지 혼자 좀 그런 건 줄 알았지! 이게 씨발, 뭔 일이야. 야, 서재환…. 으아!”

뒤죽박죽 내용이 섞인 토로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말이 되냐, 진짜냐, 미치겠네, 하는 말들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애먼 불똥이 지우에게 튀었다. 술기운이 아닌 흥분으로 얼굴을 뻘겋게 물들인 태군은 대뜸 도끼눈을 뜨고서 지우를 다그쳤다.

“현지우, 넌 알았지? 엉? 너 이 새끼, 다 알고 있었지?”

대답 대신 씩 입꼬리를 올린 지우가 태군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대놓고 표정이 구깃구깃해진 태군을 제 쪽으로 휙 끌어당겨 정면 방향에 있는 한영을 콕콕 검지로 가리켰다. 못마땅함이 그득그득 밴 시선이 재환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는 한영의 옆얼굴로 향했다.

“태군아아-. 저 표정을 보고 모르는 게 더 바보 아닐까?”

“하….”

태군은 반문하지 못하고 탄식했다. 그즈음 테이블 아래서 꼭 쥐고 있던 손을 놓은 재환은 말 못 할 감정이 넘실넘실 흐르는 눈길로 저를 보는 한영에게 툭툭 어깨를 부딪쳤다. 이쪽은 그만 보라는 의미였다. 실로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재환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테이블 가까이 온 점원이 지우가 시켜 놓았던 맥주를 두고 갔다. 태군은 지우 대신 냅다 잔을 낚아채어 숨도 쉬지 않고 뽀얀 거품이 얹힌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단번에 맥주 절반을 비운 태군이 크,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았을 무렵, 재환은 침착하게 말문을 뗐다.

“현지우, 장태군.”

차례로 이름이 불린 두 사람이 재환을 보았다. 지우는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고, 그에 반해 태군은 또 어떤 폭탄 발언이 떨어질지 몰라 바짝 긴장한 태세였다. 준비한 말을 꺼낸 후 그들의 얼굴이 어떻게 바뀔지, 재환은 조금도 예단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 다시 밴드 하자.”

태군은 울었다. 그리고 지우는 웃었다. 지난했던 고민의 시간이 무색하게, 답은 너나없이 너무도 빨랐다.

씨발, 그래, 하자, 해야지.

그 밤, 넷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이십 대 시절처럼 간이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도 무시하고 끝없이 술을 들이부었다. 다 같이 한영의 집으로 우당탕 들어섰을 때는 이게 3차인지, 4차인지도 가물가물했다. 일단 부엌 장을 열어 눈에 보이는 비싼 술은 모조리 꺼냈다. 위스키에, 코냑에, 셰리에, 병만 봐도 그럴싸한 술들이 거실 탁자 위로 줄줄이 늘어섰다. 그래 봤자 기절하기 직전의 태군은 물론이고 나머지 셋도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라 얼마 마시지 못했다. 태군은 소파에서 뻗었고, 지우는 소파 아래 깔린 러그에 누워 뻗었다. 재환과 한영은….

더운물을 콸콸 틀어 놓은 샤워 부스 안에서 두 사람은 정신을 놓은 것처럼 허겁지겁 들러붙었다. 쏟아부은 알코올 때문에 사이좋게 발기가 되지 않아 삽입까지는 못 하였지만, 그 외의 모든 짓을 하였다. 입술이 퉁퉁 부을 때까지 키스하고, 더는 깊이 들어갈 수 없을 때까지 손가락을 집어넣고, 또 그 자리에 입술을 문지르고…. 집에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참으로 미친 짓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후에 상황을 제대로 기억할 만큼 의식이 또렷지 않았던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이날 서로 어떤 약속을 했는지, 어떤 각오를 다졌는지를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거 멈춰 두었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기로, 분명 모두 함께 굳은 마음을 먹었다. 앞으로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깨어지지 않을 단단한 약속이었다.

눈물과 반가움, 그리고 숙취를 한가득 안겼던 재회의 날을 떠올리는 사이 어느덧 드라이어 소리가 멎었다. 재환이 거울을 들여다보자, 정성스러운 손길 아래 보송보송 마른 머리가 제법 그럴듯한 스타일로 정리되어 있었다. 평소와 달리 가지런히 눕힌 머리칼을 몇 번 손가락으로 빗어 본 재환은 거울 속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결과물이 만족스러운 듯 한영의 입이 빙긋이 벌어졌다.

“우리 재환이 진짜 멋있다.”

“선생님 솜씨가 좋아서 그렇지.”

시답잖은 농담에도 헤헤 소리 내어 웃은 한영이 재환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서 정수리로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도로 입술이 떨어질 무렵, 재환은 한영의 손등 위로 살포시 손을 겹쳤다.

“합주 기대된다.”

“나도. 엄청 기대돼.”

“근데 옛날만큼 다들 잘 맞을지 모르겠네. 너무 오랜만이라.”

손바닥 아래서 살그머니 빠져나온 손이 위치를 뒤바꾸어 재환의 손등을 꼭 움켰다. 반대편 어깨를 쥔 손에도 함께 부드럽게 힘이 들어갔다. 고운 미소가 걸린 입술이 귓가 가까이 붙었다.

“괜찮아. 우리 잘할 거야.”

오늘이 오기까지 끈덕지게 저를 이끌어 주었던 손이 더없이 따스한 온기를 전했다. 앞으로 함께 키보드를, 기타를 연주할 귀하디귀한 손이기도 했다. 재환은 고개를 틀어 사랑하는 연인의 뺨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의미 없는 걱정과 의심을 버리고, 그가 건네주는 용기를 기꺼이 가슴 한편에 품었다.

“맞아. 네 말처럼 우리 잘할 거야.”

잠시 후, 몇 분 간격으로 지우와 태군이 집에 도착했다. 초여름으로 접어들어 날이 꽤나 후덥지근해진 탓에, 손에 덜렁덜렁 드럼스틱 케이스를 든 태군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더워!’를 외쳤다. 재환은 오느라 고생했을 두 사람을 위해 직접 내린 아이스커피를 내밀었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커피 잔을 건네받은 태군이 ‘아주 집주인 다 되셨어!’ 하고 밉지 않게 빈정거렸다. 재환은 곱게 커피나 마시라는 의미로 태군의 어깨를 두어 번 꽉꽉 주물러 주었다. 어김없이 아파 죽겠다는 엄살이 돌아왔다.

시원한 커피가 특히 한 명의 더위를 얼추 식혀 줬을 즘,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네 개의 발소리가 겹쳐 울렸다. 덜컹 두꺼운 방음문이 열리고, 먼 과거와 마찬가지로 포근한 나무 냄새와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장소에 탁 불이 켜졌다. 곧바로 자리를 찾아가는 대신, 잠시 합주실 입구에 멈춰 선 네 사람은 쉽사리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회를 공유했다. 반가움, 설렘,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얼마 안 가, 각자의 마음에 자리한 설레는 감정을 한층 부풀리는 소리가 합주실 이곳저곳에서 나기 시작했다. 쿵쿵 킥 베이스를 밟는 묵직한 소리, 가볍게 베이스 줄을 튕겨 보는 소리, 아무 이펙트도 걸리지 않은 기타의 깨끗한 생톤, 산뜻하게 퍼지는 건반의 멜로디…. 이곳에 흐르는 시간을 차츰 8년 전으로 되돌려놓는 소리들이었다. 그 사이에는 딱히 누구의 것이라 정의할 수 없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의 박동음이 함께 섞여 있었다.

오랫동안 연주된 적 없던 스네어의 나사가 쪼여지고 심벌의 높낮이가 조절되었다. 시커먼 베이스 앰프와 기타 앰프에 쪼르르 달린 노브들이 이리저리로 돌아갔다. 새빨간 노드 건반 위에서 작은 버튼들이 차례대로 꾹꾹 눌렸다.

이윽고, 서서히 흥분으로 예열된 공간에 가만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약속한 것처럼 시선이 오갔다. 머지않아 경쾌한 목소리가 흘렀다.

“뭐부터 할래?”

지우의 물음이 건너온 순간 재환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기억의 한 장면이 빠르게 머릿속에 펼쳐졌다. ‘아이돌 같다’라는 말에 치를 떨던 누구 때문에 겨우 다시 잡았던 합주. 그때, 완벽한 연주를 선보이고 말리라는 귀여운 오기로 똘똘 뭉쳐 있었던 저. 당시도 같은 사람에게서 같은 물음이 던져졌었다. 그에게 어떤 답을 전했더라.

“너희 편한 것부터 하자.”

그다음에는….

“I See You.”

한영의 짧고도 단호한 주장에 재환은 또 한 번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은 금세 주변으로 전파되었다. 장소와 상황은 같되 과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피어났다. 긴장과 서먹서먹함이 맴돌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넘실거리는 기대와 믿음이었다. 우리, 분명 잘할 수 있으리라는.

“그럼 바로 간다?”

태군이 다부지게 쥔 스틱을 높이 치켜들었다. 동시에 다 함께 숨을 들이켰다. 폐부를 가득 채웠던 숨이 쏟아져 나오며, 매끈한 나뭇결이 힘 있게 맞부딪쳤다.

딱. 딱. 딱. 딱.

8년 만에 더 숨의 합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 합주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오랜만에 연주를 ‘맞춰’ 보는 데에 있었다. 계속 음악의 길을 걸어온 한 사람을 제외하더라도, 다들 예전처럼 드럼을, 베이스를, 기타를 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물며 연주가 잘 어우러질지는 더더욱 미지수였다. 열정 하나로 밀어붙일 나이는 한참 전 지났을뿐더러, 설사 그런다 한들 각자 ‘더 숨’이란 이름을 벗어나서 산 세월이 짧지 않았다. 듣기에 엉망진창이 아닐 정도만 되어도 다행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습관이란 것은, 몸에 새겨진 감각이란 것은 참으로 무서웠다. 익숙한 노래와 익숙한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먼 옛날 이 자리에서 밤을 꼴딱 새우던 시절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억지로 불러일으키거나 그럴듯하게 흉내 낸 것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소리와 소리 속에서, 음악 하나로 뭐라도 해 보겠다던 그날로 몸과 마음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합주는 꼬박 3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과거에도 이런 강행군은 중요한 공연이나 대회가 잡혔을 때나 했었다. 하물며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닌데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종국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심지어 더위를 잘 안 타는 한영마저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뻘뻘 땀을 흘렸다. 우리의 연주가 괜찮았는지를 따져 볼 필요성 같은 건 아무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체력의 한계까지 무시하기에는 무리였다. 몇 시간 내리 죽을힘을 다해 드럼을 내리치던 태군이 가장 먼저 ‘이제 그만!’을 외쳤다. 서로서로 비슷한 상태였던지라, 아직 꺼지지 않은 속의 열기는 다음번 마저 풀기로 하며 하나둘 악기를 정리했다. 비교적 정리가 금방 끝난 지우가 페달 보드를 가방에 넣던 재환을 불렀다.

“재환아, 담배?”

하지만 재환이 답을 돌려주기도 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적잖은 미안함이 멀끔한 얼굴을 덮었다.

“맞다, 이제 끊었다 그랬지.”

“뭐…, 응.”

끊은 건지 참고 있는 건지 확신은 없었으나, 일단 재환은 긍정했다. 자고로 합주가 끝나 기진맥진해 있을 때가 가장 담배가 당기는 타이밍이었고, 그러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못 피울 것도 없었다. 대신 재환은 흘끔 눈을 돌려 지우와 같은 방향에 앉아 노드를 끄고 있던 한영을 보았다.

재회 후 이 집에서 처음 섹스를 하고 난 다음이었던가. 침대 옆자리가 빈 것을 확인하고 미적미적 일어났을 때, 재환은 방에 딸린 발코니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영을 발견했다. 눈으로 보고도 실로 믿기가 어려운 생소한 광경에 순간 그야말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더랬다. 허옇게 표정이 굳은 재환을 본 한영은 ‘들켰다.’ 하며 민망한 듯 웃기만 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해서 현재까지, 재환은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한영이 피우던 담배가 자신이 예전부터 쭉 애용하던 것과 같아 왠지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영에게까지 금연을 강요한 건 아니었다. 상대가 무슨 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에게 끊어라 마라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혹 그런다 하더라도 저 안 보는 곳에서 몰래 피우면 그만이었다.

어쨌거나, 후로 재환은 한영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저 또한 얼마든지 흡연 욕구를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금연이 되겠거니 생각하는 중이었다.

“니네 오늘 바로 가야 돼?”

그럼에도 당장은 니코틴의 유혹을 떨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온몸에 남아 있는 합주의 흥분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환은 얼른 다른 얘기를 꺼냈다. 물음을 받은 지우와 태군이 사이좋게 ‘왜?’ 하고 되물었다.

“밥 먹고 가라고.”

이번에도 사이좋게 ‘좋지!’ 하는 답이 돌아왔다.

과거 합주가 끝나고 허기진 이십 대 청년들이 찾던 음식은 늘 거기서 거기였다. 짜장면이니 햄버거니 하는 배달 음식들이었다. 음식을 펼쳐 놓고 거실 탁자에 둘러앉아 밴드 얘기, 공연 얘기 따위를 나누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대신 오늘 넷은 한 상이 거하게 차려진 부엌 식탁에 마주 앉았다. 국이나 각종 밑반찬은 물론이고, 식탁 중앙에는 푸짐히 쌓아 올려진 갈비찜까지 있었다. 양손에 젓가락 한 짝씩을 쥔 태군이 갈비에서 살을 뜯어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베이스를 사 가고서 왜 기타가 줄이 네 개냐 그럼 뭐라 그러냐? 어?”

“진짜 그런 사람이 있다고?”

“일렉 사 갖고 가서 통기타처럼 소리가 안 난다고 환불한 사람도 있다니까?”

태군은 흥분한 듯 아예 젓가락으로 탁탁 식탁을 내리쳤다. 상기된 표정을 보아하니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것 같지는 않아, 재환은 ‘허.’ 하고 탄식을 뱉었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지만, 악기 매장에서 일하는 건 짐작보다 훨씬 더 고된 일인 듯했다. 하기야, 좋아하는 악기에 둘러싸여 신나는 것도 하루 이틀일 터였다.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면 뭐든 맘껏 즐기기 어려운 법이었다.

“야, 근데 이거 겁내 맛있다? 사 온 거임?”

언제 씩씩 성냈냐는 양 야무지게 발라낸 살점을 입에 넣은 태군이 감탄을 터뜨렸다. 옆자리에 앉아 같이 갈비찜을 맛본 지우도 ‘그러게. 진짜 맛있는데?’ 하고 태군을 거들었다. 재환이 답을 꺼내기도 전 한영이 먼저 입을 뗐다.

“이거 니네 오면 주려고 재환이가 어제 재워 둔 거야. 오늘 첫 합주 기념.”

“진심? 뭐냐, 서재환. 완전 이 집 주부네, 주부야!”

“주부는 무슨. 조용히 먹어라.”

‘칭찬을 해 줘도 저래요.’ 하고 투덜거린 태군은 냉큼 갈비찜 접시로 젓가락을 뻗었다. 태군에 이어서 갈비 한 점을 집어 온 지우가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럼 주로 밥은 재환이가?”

“저녁은 내가 하고, 아침은 얘가 하고.”

재환은 고개를 옆으로 까딱여 한영을 가리켰다. 아니나 다를까, ‘엥? 유한영이 밥을 해?’ 하며 태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영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반응이었다. 과거 숱하게 이 집을 들락거릴 때에도 한영이 요리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기실 재환이 본 몇 번도 대차게 망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뭐 만드는데? 뻥 아니지?”

그랬던 유한영이 인제 북엇국도 잘 끓이고 팬케이크도 잘 굽는다는 대답 대신, 재환은 그냥 ‘이것저것.’ 하고 얼버무렸다. 여기서 대화가 더 나가면 신나서 아내 자랑 하는 팔불출 남편 같은 꼴이 될 것 같았다. 아닌가. 남편 자랑에 신이 난 팔불출 아내인가. 그거나 저거나. 어찌 됐든, 멤버들 앞에서 한영과 한집 사는 티를 내는 얘기는 더 하고 싶지 않았다. 민망하고 쑥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연인을 향한 자랑을 속으로만 삼킬 즈음, 재환의 밥그릇 위로 살포시 갈비찜 한 점이 얹혔다. 이쪽의 취향을 기가 막히게 파악해 지방이 두둑이 붙은 부분이었다. 재환은 휙 눈을 굴려 옆자리에 앉은 한영을 보았다. 슬그머니 남의 그릇에 갈비를 놓고 간 한영은 태연히 김치를 집고 있었다. 곧이어 재환의 시선이 자연히 식탁 맞은편을 향했다. 지우와 태군은 이것도 맛있네, 저것도 맛있네, 하며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는 중이었다. 그때까지도 재환은 밥에 놓인 갈비찜에 젓가락을 대지 못했다. 때마침 재환과 눈이 마주친 지우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맞다.’ 하고 말문을 텄다.

“나 사무실 관뒀어.”

재환은 그대로 멈칫 얼어붙었다. 한영이 준 갈비찜 따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하도 놀라 지우를 쳐다보는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다래졌다. 한데, 비슷한 얘기가 옆에서 한 번 더 나왔다.

“어? 뭐야. 나도 어제 막 사표 냈는데?”

재환의 뒤통수를 때리고 간 당황이 두 배가 되었다. 졸지에 백수 두 명을 눈앞에 둔 재환은 무어라 얼른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물론 밴드를 다시 하잔 얘기를 꺼냈을 때, 이런 상황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진지하게 밴드에 임하려면 누구든 영위하던 것을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오리라고 여겼다. 다만 프리랜서로 일하는 저와 일정한 곳에 적을 두고 있는 지우, 태군은 달랐다. 이토록 빠르게 결정할 문제가 아닐 거라는 의미였다.

재환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태군은 어째 하는 짓이 똑같냐며 지우를 보고 낄낄거렸다. 우리가 그렇지 뭐, 라며 지우도 같이 웃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뒤따라 나온 얘기는 한층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 이사도 가야 돼.”

“엥? 왜 이사까지?”

“우리 법무법인 대표님이 나 살던 아파트 소유주거든. 한 여사님이라고. 바로 짐 싸서 나가라던데? 딴따라 아들은 필요 없으시단다.”

물론 재미난 이야기를 전하듯 싱글싱글 웃는 지우에게서는 요만큼의 심각함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럴수록 재환은 잘 먹던 밥이 위에서 얹히는 기분이었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이 다름 아닌 저 자신에게 있었으므로. 참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었지만, 지금으로선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었다. 그 책임이 대뜸 엉뚱한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거지 신세가 따로 없어. 뭐, 우리 리더가 어떻게든 먹여 살려 주겠지?”

“응. 걱정 마.”

산뜻하게 대답하는 한영을 보며 태군이 ‘와, 믿음직하다잉?’ 하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진지한 건지 가벼운 건지 알 수 없는 이 분위기에 재환 혼자 끼질 못하고 있었다. 지우처럼 능청스럽게 굴 재간도, 태군처럼 까불까불하게 분위기를 탈 재간도 그에게는 없었다. 한영처럼 고민 없이 답을 낼 재간은 더욱더.

“내가 열심히 해서, 꼭 밴드 성공시킬 거야.”

적잖은 혼란에 잠긴 재환의 고개가 머뭇머뭇 옆으로 돌아갔다. 한영의 시선이 부드럽게 움직여 재환을 마주했다가 다시 앞을 향했다. 그 잠깐 사이, 재환은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에서 빛나는 자신감을 보았다. 과거에는 본 적 없던 단호함과 굳건함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그래야지.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명쾌한 반응이 나왔다. 한 박자 늦게 재환도 어,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밴드 일로 늘 안달하고 노심초사하던 서재환은 인제 과거에 묻어 두어도 될 것 같다고. 이리 듬직한 리더가 있는데, 더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재환은 또 한 번, 찬란한 미래로 이끄는 손을 잡았다.

* * *

제법 왁자하게 남자들의 대화가 오가던 부엌에 조용히 물 흐르는 소리가 울렸다. 식탁 정리를 마저 끝낸 재환은 한 걸음 두 걸음 싱크대로 다가갔다. 고무장갑 낀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한영 뒤에 서서 살며시 허리를 끌어안았다. 둘뿐인 지금, 이제는 다시 연인 사이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설거지 많지?”

“아냐, 얼마 안 돼.”

싱크대에 한가득 쌓인 그릇들을 두고도 귀여운 거짓말을 읊는 연인의 어깨에 재환은 코를 묻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자 달콤한 체향과 은은한 섬유 유연제 향이 함께 섞여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간만의 합주로 지친 몸의 피로를 단번에 사르르 녹여 주는 향이었다. 날씬한 허리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재환아.”

나지막한 부름과 함께 졸졸 흐르던 물이 멎었다. 재환은 코를 대고 있던 어깨에서 얼굴을 들며 ‘응?’ 하고 답했다. 물에 헹구던 그릇을 슬그머니 싱크대 바닥에 내려놓은 한영이 조심스러운 물음을 건네 왔다.

“반찬 주는 건 좀 그래…?”

“반찬?”

“응.”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의 뜻을 곱씹기 위해 재환은 잠깐 눈을 굴렸다. 얼마 안 가 식사 도중 닥쳤던 소소한 갈등 상황이 생각났다. 밥 위에 곱게 얹힌 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다만 앞자리에서 사무실을 관뒀네, 사표를 냈네 하는 폭탄선언이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고민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뭐, 나중에 뼈에서 발라 밥이랑 맛있게 먹긴 했을 것이다.

“그 정도는 괜찮은 줄 알았어.”

“그야, 뭐….”

재환은 선뜻 그렇다 아니다 대꾸를 못 했다. 한영이 이런 걸 묻는 이유는 어지간히 짐작이 갔다. 멤버와 함께 있을 때는 서로 철저히 선을 지킬 것. 밴드를 다시 하기로 하며 재환이 한영과 한 약속이었다. 같은 팀, 그것도 둘 다 남자. 이렇게 환영받지 못할 조건을 가득 안고 있으면서 멤버들 앞에서 알콩달콩 연애하는 모습을 보일 만큼 재환은 얼굴이 두껍지 않았다.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저희를 너그러이 받아들여 준 멤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미안.”

단, 그 기준이 각자 조금 달랐던 것뿐인데 한영은 미안하단 말을 하고 있었다. 같이 살기 시작한 후, 그는 재환에게 이런 종류의 얘기를 부쩍 많이 꺼냈다. 미안해, 몰랐어, 안 그럴게, 조심할게. 그렇다고 평소 재환이 대단히 한영을 다그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아니었다. 걸핏하면 한영에게 싫은 소리 하던 옛날처럼 굴기 싫었을뿐더러, 그때보다 성질이 많이 죽은 탓도 있었다. 그나마 잔소리 비슷한 것을 하는 경우도 손에 꼽았다. 그마저도 정말 별거 아닌 일들이었다. 이왕이면 치약은 밑에서부터 짜자든가, 생수병 뚜껑 좀 꽉 잠가 달라든가. 그때마다 한영은 면목 없는 일을 저지른 것처럼 ‘미안해, 재환아.’ 하고 사과했다. 기실 재환으로선 썩 달갑지 않은 반응이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건지. 마음속에 케케묵은 자책감을 꺼내어 보이자면, 아마도 재환 자신의 것이 훨씬 크고 무거울 터였다.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지금도 한영에게 굳이 핀잔 같은 건 주기 싫었다. 미안하다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하는 대신, 재환은 하얀 목덜미에 살며시 입 맞추었다. ‘응.’ 하는 나지막한 대답에 이어 다시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안은 팔을 슬그머니 푼 재환은 몇 걸음 옆으로 움직여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워낙 고기를 넉넉히 준비했던 탓에 아직 갈비찜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다들 맛있게 잘 먹던데 좀 싸 줄 걸 그랬나, 생각하며 조리대 아래쪽 장을 열어 밀폐 용기를 꺼냈다. 국자를 들고 남은 갈비찜을 용기 안에 조심조심 옮겨 담을 때였다.

“재환아. 오늘은 기타 연습 안 하지?”

누군가가 동글동글 예쁘게도 자른 갈비찜의 감자를 보고 피식 웃던 재환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한영이 ‘응?’ 하며 순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 안에는 얼마쯤의 기대감도 함께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재환이 사과하는 역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유한영.”

“어…?”

“나 오늘 믹싱할 거 있어. 희성이가 지네 라이브 음원 좀 해 달라고 해서.”

‘아….’ 한 한영은 거품을 헹구어 내던 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만 재환의 시선은 풀 죽은 기분을 감추려는 티가 역력한 연인에게 한동안을 더 머물렀다. 곧이어 어렴풋한 미소를 띤 입술이 벌어지며, 애써 발랄함을 입은 목소리가 흘렀다.

“그럼 오늘도 나 먼저 자야겠다.”

“…응.”

짠하게도 웃는 한영에게서 눈길을 거둔 재환은 갈비찜을 마저 옮겼다. 내일 저녁엔 이걸 데워 먹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한영이 좋아하는 다른 요리를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설거지 거의 다 했으니 걱정 말고 가 보라는 한영을 뒤로하고 부엌을 나섰다. 한영에게 말했던 대로 오늘은 간단히 믹싱할 거리가 있어, 재환은 곧바로 1층 복도 구석에 위치한 방으로 향했다. 창문 없는 좁은 공간에 불을 켜고서 기다란 미디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익숙한 노트북과 커다란 모니터가 재환을 맞이했다.

과거 한영의 어머니가 소장한 미술품을 보관하던 이 장소는 현재 재환의 작업실이었다. 하얀 벽지가 발렸던 자리에는 미색 방음재가 꼼꼼히 붙여져 있었고, 천장에서는 은은한 황색 조명이 떨어졌다. 구석에는 성능 좋은 공기 청정기도 자리했다. 모두 다 한영이 재환을 위해 설치하고 준비한 것들이었다. 전체적으로 지하 합주실과 분위기는 비슷하되, 믹싱 작업에 최적화된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은 한영이 ‘짜잔!’ 하고 이곳을 처음 보여 줬을 때, 당연히 재환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내심 앞으로 믹싱 작업은 어디서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는데,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이었다. 목이 멘 목소리로 ‘고마워, 유한영….’ 하고 감사를 전하자, 어김없이 한영은 재환을 힘껏 껴안아 왔다. ‘앞으로 여기서 우리 노래 많이 믹싱해 줘.’라는 달콤한 요청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른다.

연인의 배려와 사랑으로 가득 찬 공간 가운데 자리를 잡은 재환은 노트북을 켰다. 얼마 안 가 경쾌한 부팅 음과 함께 로그인 화면이 떠올랐다. 비밀번호 창에 ‘더숨24314563’을 입력하자 금세 바탕 화면이 나타났다. 단, 과거와 달리 여러 개의 아이콘 뒤에 자리한 사진은 산이니 바다니 하는 기본 이미지가 아니었다. 햇살 좋은 날 한강 공원에서 남자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을 보고 픽 웃은 재환은 마우스를 움직여 시퀀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기타 연습에 다시 매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재환은 기존에 하던 믹싱 일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믹싱도 하고 밴드도 하고 다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재환은 멀티플레이에 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애매한 마음가짐으로 밴드를 하기 싫다는 생각이 컸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가까운 지인의 부탁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이전 앨범을 작업해 줬던 희성의 부탁이라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형 아니면 싫다고 징징거리니 별수 있나. 비교적 손이 덜 가는 작업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늘 믹싱할 노래는 밴드 코스믹 라테의 스튜디오 라이브 영상에 들어갈 음원이었다. 팬 서비스 차원에서 합주 영상을 찍었다는데, 그때 실시간으로 녹음한 트랙을 듣기 좋게 믹싱하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믹싱은 밸런스를 맞추고 현장감을 살리는 데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 세세히 작업하면 그것이 되레 자연스러움을 해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보컬의 음정이 살짝 엇나가는 곳이 있더라도 심하지 않은 이상 구태여 건드리지 않는 쪽이 좋았다. 그런 거 하나하나 다 뜯어고치면, 어떻게 라이브 느낌이 살 수 있겠나.

그렇다고 해서 대충 작업해도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그럴 성격도 되지 못했다. 어느새 앉은 자리에서 훌쩍 두어 시간을 보낸 재환은 쩌렁쩌렁 흐르던 노래를 멈추고 양 관자놀이로 엄지를 가져갔다. 두 눈을 감은 채 엄지로 딱딱한 뼈 부근을 꾹꾹 힘주어 눌렀다. 눈의 피로를 푸는 데 좋다는 지압법으로, 한영이 알려 준 것이었다.

한 1, 2주 전쯤이던가. 지나가는 말로 한영에게 믹싱할 때 눈이 힘들어 고생이라고, 이제 나이는 못 속이겠다는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때 한영은 인터넷을 뒤져 눈에 좋다는 지압법, 안구 운동법, 자는 자세 등을 찾아 줄줄이 재환에게 알려 주었다. 말만 한 게 아니라, 엎드려 자면 눈에 안 좋다며 잠든 재환을 깨운 적도 몇 번인가 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블루 라이트인지 뭔지를 차단해 준다는 안경도 사 왔다. 그리고….

콩콩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재환은 눈동자를 덮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응.’ 하고 답하자 작업실을 꾸미며 함께 시공한 방음문이 천천히 열렸다. 방싯하게 열린 문틈으로 한영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나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쟁반 위 놓인 길쭉한 유리컵이 재환 앞에 내밀어졌다.

“이거 마시면서 해.”

“아…, 고마워.”

재환은 색 고운 보랏빛 음료가 담긴 유리컵을 받아 들었다. 작은 민트 이파리까지 띄워진 주스에서 싱그러운 과실 향이 확 풍겼다.

“지난번에 별로 안 달다 그래서 오늘은 바나나도 좀 넣었어.”

“응. 바나나 향 난다.”

지금처럼 한영은 매일 밤 꼬박꼬박 재환에게 직접 간 블루베리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일전 갑자기 집에 커다란 택배 상자가 도착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상자 안에서 나온 물건은 크기도 으리으리한 믹서였고, 믹서 주인의 정성으로 재환은 하루도 빠짐없이 신선한 주스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블루베리가 눈에 좋다는 말만 들어 봤지, 이렇게 분에 넘칠 정도로 섭취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영의 기대 어린 시선을 마주하던 재환은 ‘아.’ 하며 얼른 컵 주둥이에 입술을 붙였다. 슬쩍 고개를 젖혀 호록 주스를 들이켜자, 향만큼이나 상큼한 맛이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오늘은 바나나를 넣어서 그런지 유독 달콤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맛있었다.

“맛있다.”

엄지로 쓱 입술을 훑으며 건넨 말에 한영의 광대가 도톰히 부풀었다. 쟁반을 가슴팍에 껴안고 부끄러운 듯 웃던 한영이 살그머니 모니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많이 남았어?”

“응, 좀 더 해야 돼.”

아이고, 하고 안타까움이 밴 소리가 흘렀다. 한 발 더 방으로 들어온 한영이 허리 숙여 재환의 뺨에 가볍게 쪽 입을 맞추었다.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알았어.”

반대쪽 뺨에도 부드러운 입맞춤을 남긴 한영은 방 밖으로 나가 왔을 때처럼 소리 없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윽고 벽과 마찬가지로 도톰한 방음재가 발린 문짝이 문틀과 막 맞물리려던 순간이었다. 문이 다시 열렸다.

“재환아.”

“어?”

“담배, 피우고 싶으면 피워도 돼.”

한 손에 주스 컵을 쥔 상태로 재환은 멈칫 굳었다. 다소 놀란 얼굴이 되어 이렇다 저렇다 대꾸를 못 하고 있는 새, 문을 잡고 선 한영이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작업하다 보면 생각날 수도 있잖아. 아까 합주할 때도 그렇고. 난…, 괜찮으니까.”

그러더니 한영은 눈썹 끝을 떨어뜨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합주가 끝나고서 지우가 ‘담배?’ 하고 물었던 게 저런 얘기를 꺼내게 된 원인 같았다. 잠시간 더 침묵을 지키던 재환은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나 담배 안 피우는 거랑 너랑 무슨 상관 있다고. 신경 쓰지 마.”

딴엔 상대의 불편한 마음, 내지는 염려를 덜어 주려 한 소리인데 어떻게 들렸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재환은 괜한 일로 한영을 마음 쓰게 만들기 싫었다. 설사 약간의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부러 더 표정을 부드럽게 풀고 한층 목소리 톤을 높였다.

“진짜야.”

“…응.”

머뭇머뭇 답한 한영은 ‘그럼 수고해.’라는 말을 남기고 조심히 문을 닫았다. 완전히 문이 닫히고, 아래로 내려갔던 문고리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서야 재환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 막론하고 연인에게 거짓을 고하는 상황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한 차례 더 푹 한숨을 쏟은 재환은 벌컥벌컥 주스를 들이켰다. 주스가 너무 달고 맛있어서, 조금 마음이 아렸다.

약 1시간 반을 더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재환은 자판에서 손을 떼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습관처럼 엄지로 관자놀이를 몇 번 누른 후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작업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집중력도 슬슬 흐트러지겠다 화장실에라도 한번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볼일을 본 후 내처 찬물로 세수도 한 재환은 물방울이 맺힌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장실을 나섰다. 곧바로 방금까지 있던 작업실로 향하려다 주춤 걸음이 멎었다. 간접 등만 켜져 있어 어둑어둑한 복도 끝자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쫑긋 귀를 기울이자, 작업 내내 수없이 ‘우주 같은 너!’가 들이꽂혔던 귓속으로 희미하게 사분대는 피아노 음이 흘러들었다. 눈과 더불어 귀도 상당히 피로한 상태였으나, 절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래도 소리를 듣는 걸 업으로 삼는 사람인데 착각일 리가 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작업이 기다리고 있을 작업실 문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재환은 그곳이 아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1층과 달리 컴컴하게 불 꺼진 2층으로 올라오자 간지럽게 귓가를 건드리던 피아노 소리가 한결 커졌다. 무의식적으로 발소리를 줄여 복도를 밟은 재환은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문 앞에 섰다. 어둠 속에서도 매끄러운 빛을 뿜는 문고리를 쥐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슬며시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통하는 틈이 생기자마자 훨씬 더 선명한 피아노 선율이 귀 안으로 굽이쳤다. 다만 방에도 불이 꺼져 있기는 마찬가지라, 문지방을 넘은 재환은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을 의지해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야 했다. 뭐, 사실은 눈 감고도 다가갈 수 있었다.

처음 들어 봄에도 익숙함과 그리움을 함께 안겨 주는 음과 음 사이를 나아간 재환은 비로소 피아노 가까이 다다랐다. 그 앞에 앉은 이의 손끝이 달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나는 건반 위에서 더 희게 빛났다. 재환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너른 어깨 너머로 너울너울 춤추는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심장 저변에서부터 알 수 없는 울컥함, 애틋함 같은 것들이 잔잔히 차올랐다.

잠시 후, 리타르단도로 점점 느려지던 연주가 눌릴 듯 말 듯이 아슬아슬하게 3도 음이 눌리며 끝났다. 아득하게 퍼지던 잔향까지 모두 사그라졌을 즈음, 재환은 움직임을 멈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건반을 향해 숙어져 있던 고개가 천천히 들리며, 손과 마찬가지로 파르스름한 달빛에 물든 얼굴이 재환을 향했다.

“재환아.”

“아직 안 자고 있었네.”

‘응.’ 하고 대답한 한영은 옆으로 목을 기울여 어깨를 짚은 손 위로 뺨을 비볐다. 손등에서 번지는 따끈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에 재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거렸다.

“믹싱은? 다 끝난 거야?”

“아니, 아직. 좀 더 남았어.”

더 얼굴을 숙여 재환의 손등에 쪽 입 맞추던 한영이 피아노 의자 위에서 휙 몸을 틀어 뒤로 돌아앉았다. 재환을 올려다보는 말간 눈동자에 연인을 향한 우려가 찰랑였다.

“근데 왜 올라왔어.”

너 보고 싶어서. 라는 구태의연한 답을 내놓는 대신 허리를 굽힌 재환은 한영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작은 얼굴을 찬찬히 살피자, 불 하나 켜지지 않은 공간에서도 선명한 붉은색을 띤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 위로 살포시 제 입술을 포갰다.

흡,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더한 스킨십도 아무 거리낌 없이 해 오면서, 가끔가다 한영은 재환이 먼저 다가가면 이렇게 순진한 소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서른 넘은 남자에게 쓸 법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퍽 귀여웠다.

“음….”

도톰한 입술 사이로 쑥 혀를 밀어 넣자 이번에는 듣기 좋은 신음이 흘렀다. 한숨을 닮은 그 소리가 빠른 속도로 재환의 머릿속에서 현실을 지워 나갔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층 작업실에 남겨 두고 온 일거리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희성이 언제까지 해 달라고 했더라. 내일까지랬던가. 그 말인즉슨 아침이 되었든 밤이 되었든 내일 중으로만 결과물을 보내 주면 된다는 소리였다. 어느새 친한 동생의 요청을 저 좋을 대로 해석한 재환은 한영과 나누는 입맞춤에 한층 몰두했다. 엉거주춤 허리를 접고 있던 자세를 풀어 아예 바닥에 무릎을 대고 높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제는 피아노 의자에 앉은 한영의 상체가 재환을 향해 낮게 숙어졌다. 그 와중에도 꼭 붙어 숨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입술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후….”

무릎 꿇은 자세로 한참을 한영과 입 맞추던 재환은 크게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묽은 마찰음을 내며 멀어지는 입술 사이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은실처럼 길게 늘어났다. 한영 또한 재환의 얼굴을 폭 두 손으로 감싼 채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삼켰다. 애써 흥분을 내리누른 목소리가 가쁜 숨소리에 섞여 나왔다.

“…일 남았다며. 내려가 봐야지.”

할 일이 남은 연인을 위한 다정한 축객령이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힌 재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언뜻 불룩하게 부푼 한영의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간 재환은 재빠르게 허리 밴드를 아래로 잡아끌었다. 부드러운 소재의 트레이닝 바지가 늘어나며 안에 입은 드로어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한영에게 덥석 손목이 붙잡히는 동시에 다시 바지가 훅 위로 올라갔다.

“재환아, 안 그래도 돼.”

빠르게 내뱉는 말에 적잖은 다급함이 묻어났다. 아직도 한영은 이쪽을 곱게 작업실로 내려보낼 생각만 하는 모양이었다. 분위기 흐리는 소리 하지 말라는 양 부드럽게 한영의 손을 뿌리친 재환은 내처 두 손으로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꺼번에 붙잡아 확 아래로 당겼다. 안에서 반쯤 발기한 성기가 한 박자 느리게 튕기어 올라왔다. 그 위로 거침없이 입술을 붙였다.

“읏….”

근육이 바짝 일어난 허벅지를 두 손으로 붙잡아 각도를 벌린 재환은 곧바로 얼굴을 아래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인의 곤란한 마음과 상관없이 붉게 달아오른 성기가 금세 입 안에서 몸피를 키웠다. 딱딱해진 기둥을 따라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이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질금질금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선액을 축축한 혀가 핥아 갔다. 어느덧 새카만 머리칼로 덮인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감싼 한영은 푹 얼굴을 떨구고 밭은 숨을 토했다.

“윽…. 재…, 환아.”

그사이 한영의 한쪽 허벅지를 놓은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헐렁한 바지춤 안으로 손을 넣은 재환은 언제부터 발기해 있었는지 모를 자신의 성기를 조급히 움켰다. 점막 가득 들어찬 뜨거운 살덩이를 목구멍까지 콱콱 박아 넣으며 바지 밖으로 끄집어낸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지금의 행동이 과거 상대가 제 것을 빨며 줄곧 하던 짓이란 자각은 미처 갖지 못했다. 미안하다 사과를 건네는 안쓰러운 목소리, 주스를 내미는 다정한 손길, 홀로 잠들지 못하는 밤을 달래듯 건반을 누르던 고운 손가락 같은 것들만 휙휙 흥분에 젖은 뇌리를 스쳤다.

비슷한 강도로 열이 오르던 두 개의 성기 중 먼저 분출을 일으킨 건 동굴 같은 입 속에 갇힌 쪽이었다. 짧은 머리칼에 감아 넣은 손가락 마디마디를 새하얗게 세운 한영은 탁한 숨을 쏟으며 재환의 입 안으로 정액을 뿜었다. 복부를 움칠움칠 꺼트릴 때마다 쭉쭉 비어져 나온 정액이 기둥을 감싸고 있던 혓바닥에 한가득 고였다. 늘 그랬듯, 재환은 꿀꺽 울대를 움직여 그것을 모조리 삼키려 했다. 하지만 사정을 끝낸 한영이 손을 뻗어 온 것이 조금 더 빨랐다.

턱 아래를 붙들리는 동시에 고간에 붙어 있던 얼굴이 휙 위로 들렸다. 아까와 비슷한 자세로 입술이 겹쳐지고, 두서없이 혀가 엉켰다. 한 사람의 입을 채우던 정액이 이윽고 데워질 만치 데워진 숨에 섞여 양쪽 모두의 혀와 점막을 적셨다. 꼴깍꼴깍 목이 움직였다. 한마디로, 서로 사이좋게 정액을 나눠 마시는 상황이었다. 하나, 이 기괴한 키스를 거부감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 사이에 그런 걸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잇몸, 입천장, 혀뿌리 등을 모두 허옇게 물들인 액이 각자의 목구멍 너머로 자취를 감췄을 무렵, 허겁지겁 비벼지던 입술이 멀어졌다. 흥분의 잔상을 떨치지 못한 눈동자가 저와 달리 아직 절정에 도달하지 않은 연인의 얼굴을 훑었다. 뒤이어 시선은 아래로 내려가 탁탁 샅을 치는 다부진 손에 다다랐다. 더없이 색정적인 광경을 지켜보던 한영의 손이 끝내 쑥 재환의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갔다.

“읏…!”

몸이 가볍게 위로 들리며 끌어 내린 바지 위로 반쯤 드러난 엉덩이가 단단한 허벅지 위에 얹혔다. 세운 발끝으로 바닥을 디뎌 서둘러 균형을 잡는 차, 잠깐 놓았던 성기에 커다란 손이 닿아 왔다. 재환의 입에서 더운 숨결이 터졌다.

“하아…!”

곧게 선 성기를 쥔 손이 지체 없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한영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 재환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연이어 달뜬 신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사정감이 한껏 부풀어 있던 상태였는데, 다른 감촉, 다른 힘을 지닌 손에서 비롯되는 자극이 과했다. 이를 증명하듯 벌그스름해진 귀두 가운데에 계속해서 방울방울 맑은 액이 맺혔다. 투명한 물방울은 금세 기둥을 쓸어 올리는 손바닥 아래로 스며 찔꺽찔꺽 습한 소리를 일으켰다.

“읏, 윽. 하, 한영아…!”

절정은 단숨에 찾아왔다. 넓은 손바닥에 감싸인 성기가 어찌할 틈도 없이 왈칵 정액을 토했다. 한참을 꿀렁꿀렁 새어 나온 정액이 못지않게 하얀 손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푹 고개 숙여 흔들리는 시야로 그 모습을 담는 재환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렸다. 나무 바닥에 닿은 발가락도 함께 곱아들었다. 그러다 서서히 몸의 경직이 풀렸을 무렵, 한없이 달콤한 입맞춤이 입술에 와 앉았다. 꼭 수고했다는 것처럼.

“재환아….”

이어서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직까지도 미약한 머뭇거림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투명한 눈동자에 총총히 맺힌 정염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조금 안쓰럽고 많이 사랑스러운 연인을 지그시 쳐다보던 재환은 종전의 입맞춤을 돌려주듯 한영에게 부드러이 입술을 부딪쳤다. 미세하게 땀이 맺힌 이마에도 쪽, 입술을 눌렀다 뗀 뒤 슬며시 한영의 한쪽 손목을 붙들었다. 엉거주춤 굳어 있는 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손바닥 안에 작은 웅덩이를 만든 정액이 보다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재환의 다른 손이 고민 없이 그 위로 포개어졌다.

한영과 손을 맞댄 재환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손바닥을 비볐다. 자연히 그 사이에서 아직 뜨끈함이 가시지 않은 정액이 함께 비벼졌다. 이를 지켜보는 한영의 눈이 영락없이 커다래졌다. 자처해서 손바닥에 치덕치덕 정액을 묻히고 있는 상황이니 당연했다. 다음 순간, 당황을 머금은 눈이 더욱더 크게 뜨였다.

“재환아…?”

한 번의 사정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아직 절반쯤 서 있는 분홍색 성기로 흠뻑 정액이 발린 손이 옮겨 갔다. 한영과 슬쩍 눈을 맞추었다 다시 시선을 내린 재환은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성기를 쥐었다. 곧이어 미끈미끈한 손이 연인의 성기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함께 내려간 한영의 시선이 그곳에 붙박여 떨어지지 못했다. 거듭 질척한 마찰음이 울리는 가운데, 얼마쯤의 의문과 다시금 차오르는 흥분이 섞인 침묵이 흘렀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야릇한 행위에 한영의 성기가 금방 최대치까지 부풀었다. 동그란 귀두, 완연한 윤곽을 잡고 솟은 기둥 할 것 없이 고루 정액이 묻어 희끄무레하고도 반질반질한 빛을 띠었다. 제 분출물을 윤활유 삼은 손이 부드럽게 움직일 때마다 얇은 티셔츠에 덮인 복부가 크게 꺼졌다 부풀었다.

“하아….”

더불어 농농한 숨소리가 섞인 신음이 샜다. 그즈음 재환의 입술이 파란 달빛에 붉게 달아오른 기색을 숨긴 귓바퀴로 붙었다.

“한영아. 나 바지 좀 더 내려 줘.”

어깨를 움찔하며 잠시 머뭇거리던 한영의 손이 주춤주춤 탄탄한 허벅지에 걸쳐진 트레이닝 바지의 허리 밴드로 향했다. 한영 위에 올라앉아 있던 재환이 살짝 엉덩이를 띄우고, 그 틈을 타 한영이 재환의 바지를 보다 아래로 잡아끌었다. 어려움 없이 당겨진 바지 위로 알맞게 탄성을 머금은 맨 엉덩이가 완전히 드러났다. 누구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성기를 애무하던 손이 딱딱한 살덩이를 놓고 기다렸다는 듯 엉덩이 사이로 향했다. 그로 인해 정액이 발릴 대로 발린 성기가 홀로 남아 꺼떡였다. 하지만 금세 재환의 반대편 손이 다가와 성기를 쥐었다.

“으, 읏….”

동시에 재환은 자신의 엉덩이 구멍 안으로 푹 중지를 찔러 넣었다. 한영에게 묻히고 남은 정액이 약하게나마 마찰력을 줄여 주어 그럭저럭 진입이 수월했다. 재환은 곧바로 손가락 마디를 접었다 펴며 살살 입구를 풀었다. 물론 커다란 성기를 쥔 손의 움직임도 멈추지 않았다. 가까이서 재환을 바라보는 한영의 눈동자가 여전한 당황에 젖어 흔들렸다.

“…재환아.”

“잠깐만 있어 봐.”

재환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부지런히 구멍을 넓혔다. 처음에야 좀 민망했지, 이제 이런 일은 창피한 축에 들지도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빨리 한영과 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무리해서 두 번째 손가락까지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속으로 ‘에라, 모르겠다’를 외쳤다.

엉덩이 사이에서 손가락을 뺀 재환은 손에 묻은 정액을 대충 티셔츠에 문질렀다.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한영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짚은 뒤, 단단한 허벅지 위에서 몸을 앞으로 당겼다. 그대로 엉덩이를 들어 제가 바른 정액으로 번질번질해진 성기 끄트머리에 입구를 댔다. 이제 이대로 주저앉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 한영의 두 손이 덥석 옆구리를 붙들어 왔다. 명백히 삽입을 저지당한 상황이었다. 조금 전까지 줄곧 상대의 것이었던 당황이 빠르게 재환에게 옮겨 왔다.

“유한영…?”

“재환아. 우리 일주일 안 했어.”

선뜻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이 재환의 당황을 키웠다. 미끌미끌한 귀두에 주름을 맞물린 채 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엉거주춤 있던 재환은 ‘근데…?’ 하고 물었다. 기타 연습을 이유로 일주일이나 너를 홀로 잠들게 했으니, 그래서 나도 하고 싶고 아마 너도 하고 싶을 행위를 하려던 것뿐인데 한영이 이러는 이유가 잘 이해 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재환은 곧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나, 오늘은 살살 못 해.”

아니, 어쩌면 다행이 아니었다. 평소의 유순함과 온화함을 싹 걷어 젖힌 눈빛이 덜컥 재환의 심장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쿵쿵쿵 박동이 치솟았다. 알았다, 몰랐다 얼른 답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한층 단호함을 입은 경고가 붉은 입술 새를 갈랐다.

“그래서 너 금방 못 내려보내.”

옆구리를 붙잡은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말처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기도, 반대로 아예 휙 들어 올려 떨어트려 버릴 것 같기도 한 아귀힘이었다. 긴장한 재환은 저도 모르게 하반신에 움칠 힘을 주었다. 하반신이라 함은, 굵다란 성기의 선단에 닿아 있는 구멍도 포함된다는 소리였다. 힘을 주는 순간 주름이 확 오그라들며, 의지와 상관없이 입구가 입 맞추듯 귀두 끝머리를 빨아들였다. 동시에 한영의 미간이 움푹 움츠러들었다. 가지런한 앞니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를 눈에 담을 겨를도 없이, 재환은 거센 힘에 붙들려 아래 있던 허벅지로 철퍽 주저앉혀지고 말았다.

“으윽…!”

구석구석 자신이 싸지른 정액을 묻힌 성기가 한 번에 밑을 꿰뚫었다. 편한 진입을 위한 준비이기는 했으나, 이렇게 틈도 주지 않고 파고들면 하는 수 없이 헉 소리가 터졌다. 허둥지둥 두 팔로 한영의 목을 안은 재환은 척추를 타고 오르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어쩔 줄을 몰라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풀지 못한 입구는 물론이고, 뜨거운 성기가 들어찬 배 속까지 델 듯이 홧홧했다. 아래서부터 퍽퍽 치대는 허리 짓이 시작되는 동시에 목구멍에서도 감당키 벅찬 열이 버글버글 끓어올랐다.

“허, 윽…. 한영, 한영아…. 큽…!”

아예 손자국을 새길 기세로 재환의 엉덩잇살을 움켜쥔 한영은 친히 전했던 경고를 증명하려고 작정을 한 듯이 움직였다. 쳐올리는 힘이 하도 거세, 재환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운 사람이 된 양 한영 위에서 쉼 없이 들썩들썩 튕겨 올랐다. 딱딱한 허벅지에 부딪히는 볼기가 계속해서 납작하게 짓눌리고, 좁고 뜨거운 곳을 비집은 기둥 아래서 붉게 익은 고환이 함께 콱콱 눌렸다. 난데없이 시작된 거센 삽입에 절절 끓는 신음이 멈추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하아…, 재환아.”

“후, 윽. 으응…!”

탱탱한 엉덩이에 벌건 손자국을 새긴 손이 허리 짓 따라 흔들거리는 허벅지로 옮겨 갔다. 아직 채 바지를 벗지 못한 다리를 끈적하게 쓸어내리다가, 오금에 손을 걸어 휙 위로 들쳤다. 쪼그려 앉듯 재환의 몸과 다리가 접히며, 두 발이 피아노 의자의 빈자리로 얹어졌다. 더없이 불안정한 자세를 취하게 된 재환은 본능적으로 한영의 목을 보다 꽉 부둥켜안았다. 엉덩이가 활짝 벌어지고, 이미 사정없이 안을 찌르던 성기가 더욱이 깊은 곳을 들쑤셨다.

“헉…, 읏…. 아윽!”

일주일 만의 섹스, 전에 없이 몰아붙이는 연인, 슬슬 역할을 다해 가는 정액.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옴찔거리는 눈꼬리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게끔 했다. 눈물은 금방 벌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더 아래로 떨어지지 못했다. 붉은 입술이 재빨리 따라붙어 호록 머금어 간 까닭이었다. 그즈음 격하게 휘몰아치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재환아, 힘들어?”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하되, 보내오는 눈길은 안 그래도 위태로운 호흡을 토막 나게 하기 충분할 만큼 뜨거웠다. 만만찮게 뜨거운 입김이 땀 맺힌 턱 끝을 간질였다. 그사이에도 한계까지 주름을 벌리고 들어온 성기가 배 속에서 펄떡펄떡 맥동하는 감각이 선연했다. 우리가 틈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너무도 생생히 느끼게 만드는 감각이었다. 그것이 재환에게 단 하나의 답을 종용했다.

“…안 힘들어. 좋아.”

뻔한 거짓과 그에 상반되는 진심을 한데 붙여 대답하자, 목덜미로 뻗어 온 손이 단숨에 뒤통수를 휘감았다. 앞으로 푹 고개가 꺾이고, 짓이기듯 입술이 포개어졌다. 온몸의 무게를 받친 하반신이 재차 들썩이기 시작하며,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마구잡이로 혀가 얽혔다. 저 속에서부터 툭툭 터져 나오는 신음이 모조리 더운 숨결에 의해 흐무러졌다.

“으, 음, 후으….”

재환은 불편하게 접혔던 다리를 뻗어 한영의 허리 뒤로 감았다. 두 발목을 교차하자 그야말로 사지를 이용해 한영에게 매달린 자세가 되었다. 서로에게 붙지 않은 곳이 없었다. 땀에 젖어 드는 머리칼마저 가까워진 이마, 눈꺼풀을 스쳤다. 닿으면 안 될 듯한 곳까지 성기를 삼켜 버린 아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달아오른 살결을 타고 도르르 구른 땀방울들이 하나처럼 섞여 흘렀다.

몇 날 며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재환의 혀와 숨을 쭉쭉 빨아들이고, 또 그에 버금가는 열을 불어넣던 한영이 어언간 벌떡 일어섰다. 제 성기를 꽂은 엉덩이를 단단히 받친 채 한 걸음 두 걸음을 옮겨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를 감고 돌았다. 피아노 옆구리에 다다랐을 때, 한영은 허리를 숙여 굳게 닫힌 피아노 뒤뚜껑 위로 재환을 눕혔다. 동시에 바퀴가 달린 피아노 다리가 덜컹, 하고 크게 흔들렸다. 전혀 개의치 않은 한영은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새카만 뚜껑 위에 그보다 더 새카만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재환의 머리맡을 두 손으로 짚었다. 침묵을 가장한 대화가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눈길 속에 오갔다. 절절할지언정 내용은 지극히 짧고 명료했다. 어서, 빨리, 당장, 같은 것들이었다.

무언으로 건네진 요구에 응하기 전, 벌떡 허리를 세운 한영은 등 뒤로 팔을 교차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뒤집어지듯 갈색 머리통을 통과한 셔츠가 휙 나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몇 번 머리를 흔들어 부스스 일어난 머리카락을 내려 앉힌 한영은 다시 재환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달빛에 노출되어 아름다운 굴곡을 이루는 상반신이 재환의 눈동자에 새겨지는 차, 격정 어린 몸짓이 재개되었다.

“허윽, 읏…. 큭…!”

덜컥덜컥 몸이 흔들리며 벗으면 유독 더 눈을 뗄 수 없는 연인을 담던 시야가 함께 흔들렸다.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신음만큼이나 피아노 온갖 군데가 토하는 삐걱거리는 소음이 요란했다. 건반 뒤로 비스듬히 선 보면대가 기우뚱거리고, 뚜껑 아래 자리한 해머들이 건반 하나 눌리지 않았음에도 절로 요동쳤다. 하지만 들으면 억 소리 나는 몸값의 피아노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정신이 되지 못했다. 한영은 이 방의 마지막 한 군데까지 재환과의 기억으로 덧씌우는 일에 급급했고, 재환은 그런 한영을 더 깊이깊이 받아들이려 애쓰기에 급급했다. 이성이, 본능이, 욕망이 오로지 서로로 범벅되어 날뛰었다. 이를 잠재울 수 있는 것 또한 서로뿐이었다.

길쭉한 종아리를 어깨에 걸치고 퍽퍽 허리를 쳐 대던 한영이 한순간 성기를 훅 뒤로 뺐다. 거추장스럽게만 여겨지는 바지를 급히 벗어 내린 뒤, 마찬가지로 재환의 바지 또한 한 번에 쭉 잡아당겨 벗겨 버렸다. 같이 딸려 내려오다 발끝에 달랑달랑 걸린 드로어즈는 재환이 몇 번 발목을 흔들고서야 떨구어졌다. 그다음 알아서 만세 자세를 취하자, 한영이 기다렸다는 듯 재환의 티셔츠 자락을 붙잡아 위로 말아 올렸다. 난잡하게 옷가지가 떨어진 자리에 짧은 머리카락을 훑고 벗겨진 티셔츠가 마지막으로 떨어지며, 이제 두 연인이 몸에 두른 것은 습기와, 흥분과, 들끓는 애정으로 물든 공기가 전부였다. 물론, 한영의 팔목에 채워진 끈 팔찌는 예외로 두어야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들썩이는 어깨가 덥석 붙잡혔다. 상대를 마주 보고 있던 몸이 휙 뒤로 돌려지며, 아랫배가 피아노 모서리에 걸쳐졌다. 서둘러 두 발로 바닥을 디딘 재환은 땀이 흥건한 손으로 매끄러운 피아노 표면을 짚었다. 동시에 커다란 손바닥에 뒤통수가 눌려 두 손 사이에 왼뺨이 붙었다. 곧이어 보란 듯 내밀어진 엉덩이 가운데로 주룩 길게 늘어진 침방울이 떨어졌다. 새하얀 엄지 끝이 구멍 주변을 세로로 문지르며 넓게 침을 펴 바르고, 그 자리에 귀두가 맞춰졌다.

“크읍…!”

거대한 성기가 푹 주름을 누르며 단번에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이박혔다. 함께 틀어막힌 숨을 터뜨릴 새도 없이 뒤에서 쾅쾅 치받는 행위가 이어졌다. 당연히 피아노의 덜컹거림은 더 요란해지고, 각자의 허벅지 앞뒤가 퍽퍽 맞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에 더해졌다. 쉴 틈 없이 내뱉어지는 신음과 거친 숨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 위로 내려앉는 달빛이 연인과 아예 한 덩어리가 되고자 하는 남자의 등을 아슴푸레하게 비추었다.

피아노 뚜껑에 찰딱 가슴을 붙인 재환은 갈색 머리칼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땀방울을 등으로 받아 내며 눈을 껌뻑였다. 혼탁한 시야에서 저 멀리 자리한 페인트 자국과 그림들이 울렁울렁 뒤번졌다. 아침에 눈뜰 때는 정신 번쩍 차리게 해 주던 존재가 지금은 현실에서 한 발짝씩 멀어지는 아득함을 선사했다. 이곳에 올라오기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고, 또 이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툭하면 튀어나오는 한영의 ‘미안해’나 잔여물처럼 제 안에 남은 죄책감도 흐릿흐릿했다. 그 자리에 퍼지는 것은 온몸이 화르르 타 버릴 것 같은 흥분과, 깊은 물 속에 풍덩 잠긴 듯한 안온함이었다. 양립할 수 없는 감각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당장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문득 한영도 저와 같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함께 스쳤다.

“하아, 아…! 허윽!”

그것도 잠시, 중첩되는 쾌감 속에 호흡이 한층 급박해졌다. 인지하지 못한 새 두 손목이 붙들린 재환은 어느덧 피아노 위로 쭉 팔을 뻗고 있었다. 따라서 손바닥을 대고 있던 자리에는 얼룩덜룩한 땀자국만 남았다. 그 위로 제게 가슴을 포갠 이의 그림자가 비쳤다. 안팎을 드나들던 성기가 이제는 내벽 깊이 파묻혀 쿡쿡 명치를 찔러 올렸다. 터질 듯이 발기한 자신의 성기는 움직임에 맞춰 툭툭 피아노 옆면을 때렸다. 지금이라도 그곳으로 손을 내리고 싶었지만, 한영에게 온통 등을 뒤덮인 당장의 자세로는 무리였다.

그러한 생각마저 얼마 가지 못해 새하얗게 휘발되었다. 귓바퀴가 씹히고, 귓구멍에 혀가 들어오고, 목덜미에 집요한 입맞춤이 퍼부어지는 사이 걷잡을 수 없이 사정감이 부풀었다. 헉헉 끊어질 듯한 숨이 불거져 나오며 힘겹게 바닥을 디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안으로 접힌 복부에 멋대로 힘이 들어가고, 땀방울 맺힌 속눈썹이 파르르 진동했다. 한참이나 다물린 적 없던 입 밖으로 단 한마디가 튀어 나갔다.

“한영아, 사랑해…!”

부끄러움을 핑계로 평소에는 마음먹어야 한 번 할 수 있었던 고백을 비명처럼 쏟으며 정액을 뿜었다. 허연 액이 후드득 피아노 옆에 튀어 까만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영이 꾹꾹 성기를 밀어 넣을 때마다 같은 자리에 몇 방울의 정액이 더 흩뿌려졌다. 이윽고 축 늘어지는 몸을 받치기 위해 허리 아래로 두 팔이 들어왔다. 조금만 더 버텨 달라는 듯 기다란 팔이 꽉 배를 끌어안았다. 먹먹해진 귓속으로 조급하면서도 애절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 흘러들었다.

“재환아. 재, 환아…. 윽….”

…나도 사랑해.

굵고 긴 성기를 빈틈없이 품은 배 속에서 뜨끈한 기운이 퍼졌다. 그 상태로 모든 움직임이 정지하였다. 으스러뜨릴 것처럼 상반신을 감싸 안은 팔은 친친 동여맨 밧줄 같았고, 등을 모조리 덮어 버린 체온은 식지 않은 용암 같았다. 그리고, 귓전에서 연이어 흐르는 숨소리는 이 모든 것을 안락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달콤한 주문이었다.

“하아, 하아….”

손자국이 찍혔던 자리를 다시 손으로 짚은 재환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덩달아 위에 있던 한영도 푹 쓰러뜨렸던 몸을 일으켰다. 그 틈에 재환은 꾸물꾸물 뒤를 돌아 한영을 마주 보고 섰다. 땀에 젖어 가닥가닥 붙은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넘겨 주며, 이럴 때가 아니면 실컷 하기 힘든 말을 다시금 속삭였다.

“사랑해, 유한영.”

“재환아….”

아직 열기를 완전히 꺼트리지 못한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꺼지기는커녕 살살 불씨가 되살아나는 것이 재환의 눈에 잡혔다.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아느냐고 하면, 시선으로, 공기의 흐름으로 와닿는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너의 하나뿐인 연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영의 어깨를 살며시 두 손으로 짚은 재환은 천천히 바닥으로 몸을 낮췄다. 다리를 접어 무릎 꿇는 재환을 따라 한영도 나무 바닥에 무릎을 대었다. 재환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줘 한영을 아예 아래로 앉혔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엉거주춤 다리를 뻗는 한영 위를 무릎걸음으로 걸어 바로 얼굴 앞까지 다가갔다. 여전히 손은 넓고 곧은 어깨에 얹혀 있었다.

“유한영.”

어둠을 핑계로 모른 체할 수가 없는 축축한 눈빛이 부름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재환은 한영의 한쪽 손을 쥐어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그곳에 팽배한 척척함을 감지한 손가락이 일순 움칠 굽어 들었다. 뭐, 사실 그렇게 놀랄 건 없었다. 어차피 한영 본인이 한가득 쌌던 것이니.

재환은 설핏 긴장한 듯한 손을 보다 당겨 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손등에 손을 겹쳐 질척질척해진 회음부를 함께 문질렀다. 오롯이 자신의 손길에 의해 기다란 손가락 끝이 주름을 스칠 때마다 구멍이 절로 빠끔거렸다. 격렬한 삽입으로 근육이 잔뜩 풀리기도 했거니와, 접촉에 의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한영의 손을 두어 번 더 엉덩이 사이로 비볐다. 얼마나 많이 젖었고, 그래서 얼마나 더 넣을 수 있을지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오늘따라 낯선 행동이 잦은 연인을 앞에 둔 한영의 표정에 서서히 복잡함이 서릴 즈음, 재환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나 금방 못 내려보내겠다며.”

잠깐 숨을 골랐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려보내지 마, 한영아.”

순식간이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위로 뻗어 온 손이 양어깨를 콱 그러쥐었다. 그대로 두 사람의 몸이 우당탕 뒤로 넘어갔다. 쿵 하고 뒤통수가, 등이 모조리 딱딱한 바닥에 부딪혔다. 하지만 아프다고 눈 한 번 찌푸릴 새가 없었다. 흡입하듯 철떡 들러붙은 입술 틈에서 목구멍이 다 녹아내릴 듯한 열이 쏟아졌다. 그보다 더 뜨거운 혀가 입 안 곳곳을 성마르게 헤집었다.

이에 질세라, 재환은 제 위로 온 무게를 전하고 있는 한영의 등판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리저리 더듬다 못해 목덜미, 어깻죽지, 등골 등지에 죽죽 붉은 자국을 그어 댔다. 당연히 한영 또한 그로 인해 번지는 통증에 일말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리어 매끈한 살을 긁고 지나는 촉감 하나하나가 애틋하고도 오싹한 자극이 되었다. 땀이 채 안 마른 네 개의 다리가 질서 없이 부대끼고, 엎치락뒤치락 몇 번이나 몸이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그사이 서로를 갈구하는 마음에 또다시 활활 불이 붙었다. 이 밤이 모두 가도록 꺼지지 않을 불이었다.

* * *

내려보내지 못하리란 경고와 부디 그렇게 해 달라는 바람은 사이좋게 현실이 되었다. 벽 하나를 차지한 전면 창 너머로 먼동이 밝아올 때까지 방을 벗어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침대에 오르지도 못했다. 바닥 여기저기서, 종국에는 부끄러움도 잊고 창에 붙어서 정신 나간 듯 몸을 섞었다. 이십 대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무아지경으로 서로를 탐했다. 섹스 없이 보낸 일주일의 여파는 이다지도 거셌다.

정작 섹스 도중 침대 근처에 가 보지도 못했던 것과 달리, 재환이 눈 뜬 곳은 보드라운 이불 속이었다. 곁에는 지난밤 사람 잡는 짐승과 맘 여린 연인을 몇 번이고 넘나들던 남자가 곱게도 잠들어 있었다. 방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부채꼴로 뻗어 나간 속눈썹, 오뚝 올라온 코끝, 도톰한 입술 등 미동 없는 이목구비 곳곳을 포근히 비추었다.

베개와 뺨 사이에 손을 넣고 한참이나 연인의 얼굴을 감상하던 재환은 불현듯 픽 하고 웃는 소리를 흘렸다. 동시에 제법 센 콧바람이 샜으나, 다행히 쌕쌕 잠든 한영을 깨울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소소한 용기를 얻은 재환은 아예 엄지와 검지로 뾰족한 코를 슬쩍 꼬집었다 놓았다. 판판했던 미간이 옴찔거리며, 재환의 코에서 또 한 번 쿡쿡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갔다. 부드러움과는 조금 거리가 먼 눈매도 함께 휘어졌다. 정작 한영이 깨어 있을 때는 잘 보여 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잠결에 미약한 거부를 표시했던 이마에 조심히 입술을 눌렀다 뗀 재환은 살살 이불을 걷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나중에는 세는 의미를 잃을 정도로 정액을 싸고, 그에 만만치 않은 양을 받아 냈던 몸 전체가 지금 보니 보송보송하게 닦여 있었다. 누워서, 엎드려서, 앉아서, 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세로 붙어 먹느라 그대로 곯아떨어졌을 법도 한데, 한영이 어느 틈에 이렇게 꼼꼼히 닦아 준 건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사정한 후부터는 기억이 영 흐리멍덩했다.

다만 속 편히 할 일을 뒤로 미루었던 것은 정확히 생각났다. 작업 중이던 믹싱을 아침에 마저 하든 밤에 마저 하든 상관없을 거라 낙관했지만, 그때뿐인 마음이었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 만큼 느긋한 성정이 못 됐다.

완전히 침대를 벗어나기 전, 걸터앉은 자세로 허리를 비튼 재환은 상체를 숙여 한영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자는 남자의 모습을 한동안 더 관찰하다가, 아침 빛살을 머금어 유독 탐스러워 보이는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이대로 그냥 확 덮쳐 버리고 싶다는 음흉한 속내를 추스르고 훌쩍 몸을 일으켰다.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선 재환은 예전 한영이 쓰던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섹스한 적 없다는 양 몸은 비교적 깨끗했으나, 구멍 안쪽에 지난밤의 적나라한 흔적이 남아 있어 씻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빼낼 때는 어쩔 수 없이 성기가 반쯤 서 버리기도 했는데, 다시금 몸과 마음을 잘 추슬렀다. 머릿속에는 못다 한 작업을 빨리 마무리해 의뢰인에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욕실을 나와 대충 머리를 말린 후에는 곧바로 1층 작업실로 향했다. 두꺼운 방음문을 열자 어젯밤 그대로 훤히 켜 두고 간 불빛이 재환을 맞이했다. 괜히 전력 낭비를 했다 싶어 미미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차, 책상 한곳에 얌전히 놓인 유리컵으로 눈이 갔다. 길쭉한 컵 안에는 절반이 좀 못 되게 보라색 주스가 담겨 있었다. 재환은 고민도 없이 컵을 집어 들었다.

내도록 상온에 있던 주스가 상했을지 모른다는 걱정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남은 블루베리 주스를 꿀꺽꿀꺽 단숨에 들이켠 재환은 달짝지근한 맛이 남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빈 컵을 내려놓았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한 사람을 향한 미안함이 조금쯤은 덜어지는 것 같았다. 덤으로 갑자기 눈이 맑아지며 시야가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밤새워 받아 마신 애정이 멋대로 빚어낸 플라세보 효과였다.

괜히 머쓱해진 재환은 뒷목을 주무르며 애먼 마우스를 툭 건드렸다. 동시에 시커멓던 노트북 화면과 모니터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흠흠 헛기침한 재환은 작업을 기다리는 트랙들 앞에 자세를 바르게 해 앉았다. 이제는 날이 밝도록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섹스의 여운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맑아진 것이 분명한 듯한 눈을 반짝이며 경쾌히 자판의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양쪽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우주 같은 너!’가 본격적인 작업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꼼짝 않고 3시간이 지났을 무렵에서야 재환은 탁, 소리가 나게 노트북을 덮었다. 책상 모서리를 짚고 훅 의자를 뒤로 빼며 긴 숨을 쏟았다. 그대로 몸을 젖혀 천장을 보고 늘어져 있기를 잠시, 다시 벌떡 허리를 세우고 책상 구석에 있던 핸드폰을 집었다. ‘형’, ‘제발’, ‘ㅠㅠ’가 태반인 메시지 창으로 들어가 ‘보냈다’ 하는 짧은 문장을 입력한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화면이 온갖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도배되었다. 보낸 사람을 조금도 연상할 수 없는 깜찍한 캐릭터들의 향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마시다 남긴 주스를 내팽개치지 않고, 불을 켜 둔 채로 방치하지 않고 나름의 뒷정리를 모두 끝낸 후 작업실을 나섰다. 컵을 갖다 놓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던 중, 저도 모르게 코를 찡긋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짭조름하면서도 기름진, 그야말로 침샘을 솔솔 자극하는 냄새가 부엌 밖 복도까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지만 남은 걸음을 서둘렀다.

벽을 끼고 돌아 부엌으로 들어선 순간, 재환은 더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멈칫 발이 굳었다. 살랑살랑 커튼을 흔드는 여름 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햇빛 때문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시야가 찰나 쨍하게 번진 까닭은 더더욱 아니다. 한마디로 표현 못 할 감정을 안은 눈동자가 식탁 위 차려진 접시와 그 옆에 엎드려 있는 남자를 느리게 훑었다. 잠시간 정지했던 걸음이 머뭇머뭇 그곳으로 나아갔다.

식탁 가까이 다가간 재환은 햇볕이 스며 평소보다 더 밝은 갈색빛이 도는 뒤통수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따끈한 기운이 감도는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자, 겹친 팔에 묻혀 있던 작은 얼굴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재환과 마주친 눈이 살포시 호를 그렸다.

“믹싱 다 끝났어?”

“응.”

“방해될까 봐 그냥 기다렸는데. 깜빡 잠들었나 봐.”

배시시 웃은 한영은 주먹 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그사이 재환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옮겨 갔다. 세련된 모양새의 접시 안에 반질반질 기름기가 도는 베이컨과 포슬포슬 익힌 스크램블드에그가 함께 담겨 있었다. 단, 만들어 둔 지 좀 됐는 듯 위에는 투명한 랩이 덮인 상태였다. 그럼에도 붉은색과 노란색이 이루는 먹음직스러운 조화가 절로 입 안에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작업에 집중했던 나머지 이제야 슬슬 허기가 느껴지던 참이었다. 하나 빨리 먹자고 재촉하는 대신, 재환은 벽면의 시계를 보고 ‘진짜 브런치다.’ 하며 웃는 한영의 허벅지에 슬그머니 올라앉았다. 약간의 졸음이 묻어나던 눈이 크게 뜨였다.

“재환아?”

“사랑해.”

목에 두 팔을 두르며 건넨 말에 한영의 눈이 한층 커다래졌다. 그러다 이내 얼굴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 활짝 미소 지었다. 도톰해진 눈 밑 살에 닿을 듯 말 듯 한 속눈썹이, 봉긋하게 부푼 광대가, 매끄럽게 휘어진 입술이 모두 햇살을 머금어 반짝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빨갛게 빛나는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위로 입술이 가 닿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초옥. 초옥. 점막과 점막이 붙었다 떨어지며 더없이 애틋하고도 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모든 방면, 각도로 상대를 느끼려는 듯 계속해서 고개가 이쪽저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서로 코끝이 부딪히면 슬며시 눈을 뜨고 푸스스 웃었다.

순전히 접촉을 즐기는 수준의 입맞춤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진득한 키스가 되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혀가 맞닿은 순간부터는 내처 호흡이 밭아지고 상대를 더듬는 손길이 조급해졌다. 지난밤 몇 번이고 샅을 치댔던 엉덩이가 덥석 움켜잡히면, 옷 아래 붉은 손톱자국이 가 있는 곳을 더운 손바닥이 훑고 지났다. 한가득 들이치던 오전의 햇살이 남사스러움을 못 견뎌 도망가고도 남을 만한 몸짓이 쉬이 멈추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식었던 음식이 완전히 차가워졌을 즈음에서야 입맞춤은 겨우 멎었다. 차례로 전자레인지에 들어갔다 나온 접시를 앞에 둔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각자 머릿속에 머무르는 생각은 엇비슷했다. 어제, 그렇게 하고도…. 이 사태의 책임 또한 사이좋게 서로에게 돌렸다. 상대가 너무 사랑스러운 게 문제였다.

“베이컨 딱딱해지지 않았어?”

“응, 괜찮아.”

“스크램블드에그는? 오늘 소금이 조금 많이 들어간 것 같아.”

“유한영.”

부지런히 포크질 하던 재환은 혹여 연인에게 맛없는 음식을 먹일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한영을 조용히 불렀다. ‘응?’ 하고 답하는 표정에 얼핏 긴장의 기색이 드리웠다. 한영은 아직도 몰랐다. 설사 소금을 들이부었다고 해도, 네가 만든 음식은 내게 있어 맛없을 수가 없음을. 물론 그런 마음을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재환의 입에 담기는 음식은 충분히 맛있었다.

“다 맛있어. 전부 다.”

“…응.”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깐 한영의 입술이 살짝 안으로 말리며 입매가 옆으로 벌어졌다. 하얀 볼은 발그레한 빛을 띠었다. 스물셋에도 예뻤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더없이 예쁜 미소였다. 그래서 저 미소를 볼 때마다 재환은 가슴 한 부근이 무지근해졌다. 과거를 후회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짓이 없겠으나, 왜 진작 저렇게 웃게 해 주지 못했을까 지난날의 저를 자꾸 탓하게 되었다. 한영이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해’를 말하려 애쓰는 것도, 그러면서 저에게 같은 말을 들으면 늘 먹먹한 표정을 짓는 것도 모두 그날의 기억에서 비롯된 모습일 터였다. 명백히 재환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고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사로잡혀 있고 싶지 않았다. 함께 하는 아침 식사, 둘 사이를 오가는 소소한 대화, 웃음, 온기…. 앞으로도 이런 시간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관계는 분명 더 단단해질 것이었다. 원망, 그리움, 죄책감이 자리했던 곳에 굳은살이 돋아나 서로에게 남긴 후회를 무디게 만들어 줄 것이었다. 수없이 기타 줄을 짚으며 생겨난 손끝의 굳은살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네 손가락 끝에도 같은 것이 있었다.

유독 손톱이 짧게 깎인 한영의 왼쪽 손을 흘긋 본 재환은 노릇노릇한 스크램블드에그를 푹 떠 입에 넣었다. 이를 지켜보던 한영이 쿡쿡 숨죽여 웃으며 긴 팔을 뻗었다. 입가에 묻은 계란 부스러기를 훔쳐 가는 손길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재환아. 영화 보러 갈까?”

“오늘?”

“응.”

“안 돼. 당분간은 얌전히 기타 연습 해야지.”

치, 하는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서운한 티를 팍팍 내는 태도와 달리 훤한 낯에 서린 웃음기는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 고운 표정에 홀랑 넘어가 버린 탓도 있고, 또 안 어울리게 마음 약한 구석이 있는지라 재환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이따 밤에 집에서 보자. 요샌 극장에서 하는 것도 금방 티브이로 볼 수 있던데.”

대답은 역시나 ‘응!’이었다. 나름 양쪽 모두 만족할 만한 타협안이 된 셈이었다. 형이 얼마 전에 그 영화 봤는데 재밌었대. 그것도 올라왔을까? 아니면 뭐 보고 싶어? 들뜬 한 사람의 조잘거림과, 그 한 사람을 사랑하는 다른 한 사람의 웃음이 식탁 주변을 넘실거리는 햇살 속에 녹아들었다.

또 하루, 행복한 날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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