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Memory of You
* * *
“이분 얼마 전에 제대하셨죠? 광고 후에 유한영의 ‘Night Fall’ 들려 드리겠습니다. 노래 듣고, 직접 스튜디오에도 모셔 볼게요!”
밤중의 편의점. 24시간 훤히 불이 밝혀 있는 내부에 라디오 진행자의 발랄한 목소리가 퍼졌다. 멘트가 끝나자마자 그보다 더 발랄한 광고가 이어졌다. 대리운전은 영식이 대리운전! 대리운전은 영식이 대리운전!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에 걸맞은 광고가 아닐 수 없었다. 그 흥겨운 소리 사이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작은 기계음이 섞여 들었다. 계산대의 바코드 스캐너에서 나는 소리였다.
띡. 띡. 매끄러운 맥주 캔에 대고 바코드를 찍는 아르바이트생 미래의 손이 달달 떨렸다. 첫 번째 원인은 조금 전 쾅 문을 박차고 나간 진상 손님에게 있었다. 한라산이라나, 백두산이라나. 이 편의점에서 팔지도 않는, 한 번 들어 본 적도 없는 담배를 내놓으라고 종주먹을 대니 절로 등에 식은땀이 났더랬다. 그나마 뒤에서 계산을 기다리던 다른 손님이 내쫓아 주어 한숨 돌렸건만, 안도는 찰나와 같았다. 그 다른 손님이 이토록 미래가 손을 발발 떨게 된 두 번째 원인이었다.
잠시나마 은인이라고 생각했던 남자 손님은 눈빛이 심히 살벌했다. 스캐너를 쥔 손을 어찌나 노려보는지, 저절로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생김새는 좀 멀끔한 것 같은데, 표정의 무시무시함이 가히 이를 뒤덮고도 남았다. 게다가 계산을 재촉하듯 자꾸 발로 탁탁 편의점 바닥을 찍어 대니, 미래로선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그녀가 이 편의점에서 일한 지 아직 채 일주일도 안 된 신참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그 와중, 기어이 마지막 맥주가 말썽을 부렸다.
아…, 왜 이러지.
슬슬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는 맥주 표면에 아무리 스캐너를 요리조리 갖다 대 보아도 바코드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그럴수록 계산대를 내려다보는 남자 손님의 표정이 시퍼렇게 굳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거 그냥 안 살게요.”
떨리는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이 단숨에 홱 낚아채였다. 어, 하는 새에 맥주를 가져간 남자 손님이 편의점 구석의 맥주 코너로 쿵쿵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미래는 당황한 눈으로 손님의 시커먼 뒷모습을 좇았다. 저렇게 눈빛과 행동으로 사람을 있는 대로 겁줄 바에야, 침 튀기며 손님은 왕이란 소리나 하던 아까 손님이 더 나았다. 미래는 튀어 나가려는 한숨을 막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문제의 손님이 다시 계산대로 돌아왔다. 그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은 미래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포스 기계 옆구리에 카드를 긁었다. 다행히 카드는 한 번에 읽혔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영수증이 출력되고, 미래는 계산이 끝난 카드를 주춤주춤 내밀었다. 역시나 그러기 무섭게 남자 손님이 휙 카드를 집어 갔다. 순간적으로 얇은 모서리에 긁힌 손바닥이 아팠다. 그래서 ‘안녕히 가세요’ 하는 인사도 미처 전하지 못하는 사이, 벌써 손님은 편의점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문을 세게 열어젖혔는지 투명한 유리문이 한참이나 앞뒤로 왔다 갔다 했다. 문 꼭대기에 달린 종 모양의 풍경이 짤랑짤랑 요란스럽게도 흔들렸다.
풍경 음이 사그라들었을 즈음에야 미래는 긴 한숨을 쏟았다. 오늘따라 손님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에 팍 풀이 죽어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울한 기분은 썩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 때문이었다. 미래가 좋아해 마지않는 가수 유한영의 곡이었다. 쭉 아래로 떨어져 있던 입꼬리가 차츰 위로 올라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노래가 끝나면 라디오에 유한영 본인이 직접 출연했다. 입대로 인한 약 2년 동안의 공백기 후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습이 아니라 목소리였지만, 그게 뭐 중요할까. 게다가 요즘 같은 세상에는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다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언제 진상 손님 때문에 바짝 졸았냐는 듯 배시시 웃은 미래는 편의점 조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보이는 라디오를 켜서 음량을 최소로 줄인 뒤, 포스 기계 옆에 핸드폰을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어차피 라디오 소리는 편의점 천장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잘 나왔다.
“자! 드디어, 드디어! 2년 동안 나라의 부름을 받고 돌아온 유한영 씨를 이 자리에 모셔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가수 유한영입니다.”
순간 꺅, 소리를 내지를 뻔한 미래는 흡 숨을 들이켰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2년 만에 듣는 소녀의 가슴이 도리 없이 콩닥콩닥 뛰었다. 물론 그사이 노래는 숱하게 들었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미래는 편의점에 나오는 라디오의 볼륨을 조금 더 키웠다.
“아니, 한영 씨는 얼굴만 봐선 군대에 갔다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그대로야!”
“에이, 아니에요. 머리도 빨리 길러야 되고, 살이 많이 빠져서 체중도 좀 늘려야 돼요.”
“지금 만년 다이어트 하는 제 앞에서 자랑하는 거죠?”
개그우먼 출신의 여성 진행자가 바락 성을 내자, 유한영이 ‘아니, 아니에요.’ 하고 웃으며 손사래 쳤다. 그 모습이 조막만 한 핸드폰 화면을 통해 미래에게 보였다. 본인의 말처럼, 과거 활동 당시보다 머리가 짧아진 유한영은 얼굴에서 한층 샤프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쨌거나 아이돌 뺨치게 잘생겼다는 점은 변함없었다. 그게 또 너무 좋아 미래는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편의점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급히 호들갑을 멈춰야 했다.
과자 코너 앞을 서성이던 손님은 한참이 지나서야 계산대로 왔다. 바로 이전 손님을 맞이했을 때와 달리 미래는 제법 능숙하게 착착 바코드를 찍었다. 계산을 끝낸 손님에게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한 뒤 다시 핸드폰 화면으로 홱 시선을 돌렸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은 유한영 씨랑 아주 딥 토크를 해 볼 거니까, 시청자 여러분들도 궁금한 거 있으면 문자 팍팍 주세요. 오늘 제가 이분 아주 탈탈 털어 드리겠습니다.”
귀가 번쩍 뜨인 미래는 다음 손님이 오기 전 얼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문자 창을 띄워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뻔하디뻔한 질문 하나를 적어 보냈다.
마지막 사랑은 언제?
어차피 이런 시시한 질문은 읽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일찌감치 기대를 버린 미래는 간간이 편의점에 들어서는 손님을 상대하며 유한영의 감미로운 목소리에나 집중했다. 그러던 중, 이반에야말로 확 귀가 뜨이고 눈이 뜨이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번 질문은 좀 뻔하긴 한데. 뭐, 저도 궁금한 거니까! 한영 씨의 마지막 사랑은?”
한순간 넘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미래는 흡사 돌고래나 낼 법한 초고음을 터뜨렸다. 지레 놀라 편의점 입구로 휙 고개를 돌렸으나, 때마침 손님이 들어오는 민망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꼴깍 침을 넘긴 미래는 곧 나올 유한영의 답변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조금 힘 빠지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 잠깐! 이거 옛-날에 우리 라디오 출연했을 때도 물어봤던 것 같은데. 맞죠, 한영 씨?”
“네, 맞아요. 그때도 물어보셨어요.”
아이, 참. 그래서 대답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초조함이 부푼 미래는 앞니로 자근자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그때랑 똑같이 대답하려는 건 아니죠? 그때 한영 씨가 뭐랬더라…. 엄청 인상 깊었었는데.”
“아…. 마지막 사랑 때문에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고요.”
‘맞다! 크, 역시 아티스트!’ 하는 진행자의 감탄이 크게 터졌다. 소리만 안 냈다 뿐이지 미래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런 애처로운 부분 때문에 미래는 더 유한영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묘하게 사람의 심장을 작신작신 주무르는 구석이 있었다. 노래에서도 그러한 감성이 다분히 묻어났다.
“그때는 그때고! 그 심장의 구멍은 아직 그대로입니까? 지금도 그대로라 그러면, 한영 씨 조금 컨셉 같은데? 어?”
유한영이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질문을 보낸 당사자로서, 미래는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침을 꿀꺽 삼키며 유한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후.
“아직 뚫려 있어요. 근데…, 곧 꽉 채울 거예요.”
그게 무슨 의미심장한 발언이냐, 내일 포털 사이트에 한영 씨 얘기로 도배되는 거 아니냐 하는 진행자의 호들갑이 이어졌다. 미래 또한 비슷한 기세로 주먹 쥔 두 손을 파르르 떨었다. 마음속으로는 한 가지를 바랐다. 부디 한영 님의 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아이돌 팬들이야 저런 소리를 들으면 기겁하겠지만, 미래는 제대로 아티스트의 행복을 빌 줄 아는 팬이었다.
짤랑, 하며 편의점 문이 열렸다. 손님이 들어서고, 몇십 분 전의 진상 손님 따위 까맣게 잊은 미래는 ‘어서 오세요!’ 하며 발랄한 인사를 외쳤다.
“와, 한영 씨 말 왜 이렇게 잘해?”
“제가요?”
막 방송이 끝난 라디오 스튜디오. 귀를 덮은 헤드폰을 벗던 한영은 맞은편 앉은 진행자가 건넨 말에 쑥스럽게 되물었다. 부스 밖에서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피디와 작가들의 인사가 들려왔다.
“어! 한영 씨 여기 처음 출연했을 때 생각 안 나? 쌩 신인이었을 때 말야.”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막 데뷔 앨범을 내고 가장 처음 출연했던 라디오 방송이 다름 아닌 이 프로그램이었으니까. 다만 방송 내용이 기억에 남기보다는, 방송 후 회사에서 와장창 깨졌던 것이 더 선명히 떠올랐다. 뭐, 이유야 단순했다. 말을 못해도 어쩜 그리 못하냐고. 하기야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이크 앞에서 노래는 해 봤을지언정 제대로 말 한마디 해 본 적이 없었던 한영이었다. 심지어.
‘심장에…, 구멍이 뚫려 버렸어요.’
당시에도 마지막 연애가 어땠냐 하는 식의 질문에 이따위로 대답하고 말았다. 딴에는 정말 진심이었는데, 가수가 본인 연애사를 그런 식으로 밝히는 법이 어딨느냐고 사장이 아주 길길이 날뛰었다. 그날부터 토 나오는 특훈이 시작되었다. 인터뷰 요령, 방송 요령, 무대에서 멘트 하는 요령 등등…. 어쩌면 말이 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판이었다.
“그때… 제가 많이 버벅이긴 했죠?”
“왜, 그래도 방송 반응은 엄청 좋았었잖아! 4차원에 완전 귀엽다고.”
역시 이 방송의 진행자인 정미는 사람이 참 좋았다. 콘셉트를 잡아도 뭐 저렇게 잡았냐는 악평도 상당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좋은 얘기만 쏙쏙 뽑아 들려주었다. 연예계 인맥이 참 빈약한 한영에게 있어 그나마 마음 놓고 대화할 상대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대 후 다른 방송이나 인터뷰 요청 다 제치고 더 여기부터 출연한 것이었다.
“오늘 방송은… 이 정도면 괜찮겠죠?”
“괜찮다니! 나 무슨 중견 연예인이 출연한 줄 알았어. 말을 너무 술술 잘해서.”
테이블 위 놓인 종이를 집어 탁탁 정리하던 정미가 너스레를 떨었다. 결국 한영도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환한 미소였다. 되찾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웃음이기도 했다. 이 또한 정미는 잽싸게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되게 좋아졌네. 옛날엔 시종 새초롬해 있더니. 군대 갔다 와서 으른 됐나 봐?”
“저 원래 으른이었어요.”
“어라? 이제 막 기어올라? 누나는 우리 한영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부스에 들어온 작가에게 정리한 종이를 건넨 정미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흑흑 우는 시늉을 했다. 한영과 눈이 마주친 작가가 빨리 일어나서 가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맞다, 한영 씨! 이걸로 스케줄 끝이지? 요 근처에 기가 막힌 꼼장어집 있는데, 쏘주 한잔 안 할래?”
정미는 연예계에서도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과거 한영도 멋모르고 한번 따라나섰다가 다음 날 오전까지 붙들린 경험이 있었다. 이쪽도 절대 술을 못 마시는 편이 아닌데, 정미 앞에서는 그런 말일랑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어느새 입 가까이 손을 가져간 정미가 답을 재촉하듯 검지를 튕기며 혀로 ‘딱딱’ 소리를 냈다. 오늘 끌려갔다가는 분명 그때와 같은 상황을 면치 못하리라.
“아, 죄송해요. 저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그나마 핑계 삼을 구실이 있어 다행이었다. 정미를 따라가기 무섭기도 했지만, 한영은 정말로 방송 후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왈칵 울상을 지은 정미가 테이블 위로 찰파닥 엎어졌다.
“와, 나 진짜 서러워! 한영 씨 옛날에 안 이랬잖아!”
정미의 실감 나는 연기에 눈썹 끝을 늘어뜨린 한영은 곤란함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 군대에서 그녀에게 축의금을 보낸 지 몇 달 지나지 않았다.
“집에 기다리는 분 계시잖아요. 빨리 들어가셔야죠.”
“오늘 남편 출장이란 말야! 한영 씨는 이런 날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를 거야. 행복을 만끽해야 하는데…. 흑….”
재차 우는소리가 뒤따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는 행복이라. 앞으로도 저는 영영 모를 거라는 생각을 하며, 한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술친구를 찾으려 마지못해 핸드폰을 꺼내는 정미에게 다시 한번 사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빨리 와, 빨리!”
지글지글 돼지기름 달구어지는 냄새가 자욱한 막창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영을 발견한 진영이 휘휘 손을 흔들었다. 회사 사장님의 반가운 외침에 다른 직원들도 서둘러 한영을 맞이했다.
“한영 씨, 빨리 와요!”
“지금 한영 씨랑 배 실장님 자리만 비었어!”
‘스케줄 끝나고 바로 왔어요.’라는 답을 전하며 진영이 있는 테이블로 향한 한영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원통형 의자 안에 코트를 넣고 앉자 곧바로 찰랑찰랑 술을 채운 소주잔이 내밀어졌다. 잔을 들고 있는 진영의 얼굴은 이미 몇 잔 마신 듯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너 기다리느라 제대로 건배사도 못 하고 있었어, 인마.”
“형 돈 벌어 주러 갔다 온 거잖아.”
“어쭈?”
과거와는 다른 의미로 건방져진 동생을 보는 형의 눈이 샐쭉 휘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잔을 받아 든 한영은 단숨에 훅 소주를 털어 넣었다. 동생과 짠 할 타이밍을 놓친 진영의 표정에 한층 못마땅함이 드리웠다. 그래 봤자 겉으로만 저런 거였다.
“오랜만에 떨리지는 않았고?”
“뭐, 그냥저냥.”
“그냥저냥? 배 실장님. 얘 말 믿어도 돼요?”
이제는 잔뜩 채워진 잔이 한영 옆에 함께 앉은 배 실장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배 실장은 이따가 운전을 해야 한다며 진영이 건넨 잔을 손에 받기만 했다. 오랫동안 한영의 매니저를 해 온 배 실장은 이토록 예나 지금이나 맡은 일에 대해선 융통성이 없을 만치 철저한 사람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으니 진영도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마저 이었다.
“오늘도 한영이 이상한 소리 한 거 아니죠?”
“오늘은 무난했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듯 진영은 휘유, 소리를 냈다. 제대 후 간만에 방송에 나간 동생을 내심 걱정하고 있던 눈치였다. 지금은 기획사 사장님이 되었으니 소속 아티스트인 한영이 더 신경 쓰이는 부분도 없잖아 있을 터였다. 그럴 만도 한 게, 한영에게는 과거 방송에 나가 실없는 소리를 한 전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므로….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멀쩡해졌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러했다.
오늘로부터 1년 전, 원래 소속되어 있던 회사에서 독립한 진영은 직접 연예 기획사를 차려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먼저 영입한 연예인이 다름 아닌 동생 한영이었다. 그와 같은 회사에 있던 한영도 마침 계약 기간이 끝나 가능한 일이었다. 수완 좋은 진영은 이후로도 인기 연예인들을 차례로 영입하며 빠르게 잘나가는 사장님으로서 자리매김했다. 물론 아이돌을 은퇴하고 자신의 본업이 된 연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이 그 1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우리 한영이 때문에 항상 고생이 많다며 배 실장과 몇 마디 더 이야기를 주고받던 진영이 슬슬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룻밤 전세 낸 막창집을 꽉 채운 직원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서 진영을 보았다. 한쪽 벽에 걸린 ‘축! JY 엔터테인먼트 1주년’이란 문구의 현수막을 쓱 일별한 진영이 큼큼 목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자자, 여러분! 제 못난 동생을 기다리느라 건배사가 조금 늦어졌네요. 아주 주인공티를 팍팍 내요.”
생김새는 전혀 못나지 않은 사장의 동생을 슬쩍 쳐다본 몇몇 직원들이 킥킥 웃었다. 반대로 한영은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래도 제 생각을 해서 비싼 가게 다 놔두고 막창집으로 온 것을 알고 있기에 무어라 형에게 싫은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이 형이 일부러 회식 장소도 막창집으로 잡아 준 건데 말이죠. 무심한 동생이 형 마음을 알려나 모르겠어요.”
아아. 이번에는 하는 수 없이 표정이 살짝 구깃구깃해졌다. 예전부터 진영은 꼭 저렇게 얄미운 말을 한마디씩 덧붙이는 게 문제였다. 어쨌거나, 얄미운 형이라도 있어 과거 한영은 처음으로 막창집에 가 볼 수 있었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일주일 내도록 밥도 안 먹고 이불 안에만 처박혀 있던 때였다.
“너 아주 굶어 죽을 거야? 어? 남자가 걔밖에 없어? 일단 일어나.”
당시 갑자기 집에 쳐들어온 진영은 한껏 웅크리고 있던 한영을 다짜고짜 침대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고서 뭘 먹고 싶냐고 집요하게 묻기에 한영은 딱 한 마디를 웅얼거렸다.
“막창….”
그때 한영은 태어나 처음 막창이란 것을 먹어 보았다. 온몸의 감각 체계가 무너져 있던 상태라 당연히 맛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질겅질겅 씹히는 식감만 조금 느껴졌을 뿐이다. 그래도 막창이니 곱창이니 하는 걸 좋아한다던 한 사람을 떠올리며 꾸역꾸역 먹었다. 그 후 오기 내지는 집착 같은 마음을 안고 빈번히 막창집을 찾았더니, 어느새 막창은 한영도 꽤 좋아하는 음식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그 한 사람이 왜 막창을 좋아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오늘로 우리 JY 엔터테인먼트가 문을 연 지 딱 1년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다 여러분 덕분이에요.”
아부 섞인 사장의 발언에 직원들 역시 아부를 섞어 환호를 보냈다. 썩 열렬한 호응을 받은 진영이 이에 힘입어 유려한 말솜씨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게다가 오늘은 축하할 일이 몇 개 더 있어요. 우선 한영이가, 아니지, 유한영 씨가 얼마 전 드디어 제대를 했습니다. 민간인 유한영을 환영해 주세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방 박수와 환호가 한영을 향했다. 형에 대한 사소한 언짢음을 얼른 지우고 쑥스럽게 미소 지은 한영은 이쪽저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자 일부 여직원들이 꺅, 하며 음조 높은 비명을 터뜨렸다. 누군가는 숟가락으로 탁탁 테이블을 두드리기도 했다.
“자자, 그다음 환영해 줄 분이 또 있죠? 내가 이분 꼬시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 원래는 나랑 라이벌 팀이었는데…. 우리 회사 새 식구가 된 조해진 씨!”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인 남자가 손을 흔들자 종전보다 더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을 입에 물고 크게 휘익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대를 주름잡던 아이돌 출신의 연예인과 한 식구가 되었으니 다들 한껏 들뜰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솔로 뮤지션으로 성공한 그는 현재에도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그러한 인물을 영입한 건 회사로서 더없이 호재인 일이었다.
분위기에 맞춰 함께 박수하던 한영은 여기저기 눈웃음을 지어 보이는 해진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상대의 눈웃음이 한결 짙어졌다. 반면 한영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 * *
자정이 한참 지난 시각. 막차를 핑계 대며 돌아갈 사람이 있을 법도 하건만, 여전히 사람들로 꽉 찬 막창집은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무르익은 분위기를 따라 여기저기서 ‘짠!’ 하며 잔을 부딪치는 추임새가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운 테이블은 단연 진영이 있는 곳이었다. 한 손에 소주잔을 쥔 진영은 이 테이블 저 테이블 옮겨 가며 신나게 술을 얻어 마시는 중이었다. 잘생기고 성격 서글서글한 사장님의 방문을 마다할 테이블은 아무 데도 없었다.
마침 테이블에 소주가 똑 떨어졌을 무렵, 한영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앉은 배 실장이 ‘어디 가?’ 하는 눈빛을 보냈다. 한영은 손에 든 작은 상자 갑을 살살 흔들어 보였다.
“담배요.”
약 두 시간 만에 마셔 보는 바깥 공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상쾌했다. 내내 막창 익는 냄새만 맡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가게가 있던 건물을 끼고 돌아 보다 좁고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선 한영은 불이 켜졌는지 꺼졌는지 모를 어둑어둑한 가로등 아래 자리를 잡았다.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에서 새하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익숙한 폼으로 끝에 불을 붙였다. 곧이어 후, 하는 숨소리와 함께 길게 새어 나온 연기가 겨울의 찬 공기를 갈랐다.
지금이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임을 일러 주듯 골목 밖에서 아득하게 술 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가 울렸다. 간간이 차가 빵빵 경적을 누르는 소리도 들렸다. 대충 시멘트를 발라 올린 담벼락에 쿵, 등을 기댄 한영은 재차 연기를 뿜으며 몽롱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앙상하게 뻗은 나뭇가지가 시야에 담겼다. 지금은 저래도 몇 달 안 있으면 가지 가득 몽글몽글 고운 꽃송이가 맺힐 것을 알았다. 그 아래 한 사람이 서 있는 풍경을 무심코 상상하던 중, 곁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배 피우네?”
고개를 돌린 곳에 생긋 웃음을 머금은 해진이 서 있었다. ‘네, 뭐….’ 하고 답하자 한영 가까이 온 해진이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한영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행동의 의미를 짐작한 한영은 해진의 담배 끝에 제가 피우던 담배 끄트머리를 갖다 댔다. 볼을 홀쭉하게 좁힌 해진이 필터를 길게 빨아올렸다. 담배 끝에서 끝으로 불이 옮겨붙으며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던 발간빛이 둘로 늘어났다. 해진은 매끄러운 입술을 살며시 벌려 가느다랗게 연기를 흘렸다.
“그때도 피웠던가?”
해진이 묻는 ‘그때’가 언제였는지 한영은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형의 소개로 알게 된 해진은 크고 작은 공연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친 경우가 더러 있었다. 굳이 그것을 따지지 않더라도, 한영은 줄곧 담배를 피웠다 안 피웠다 했으므로 명확히 답하기가 애매했다. 생각에 잠긴 듯한 한영을 본 해진이 말을 덧붙였다.
“나랑 호텔 갔었을 때만 해도 안 피웠던 것 같은데.”
한영은 ‘아.’ 했다. 생각해 보니 해진이랑 그런 적도 있었다. 아마도 특정 대상을 향한 그리움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한영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럼…, 피우긴 했을 거예요.”
“그래? 난 몰랐어.”
잠시간 부연 담배 연기가 섞인 침묵이 흘렀다. 재를 세게 튕기는 바람에 불이 꺼진 해진의 담배에 한 번 더 불을 붙여 줬을 무렵, 그가 다시 말문을 텄다.
“여기 회사에서는 담배 피운다고 꼽주지 않지?”
“꼽… 줘요?”
“아아. 눈치 주지 않느냐고.”
그런 거 없다고 답하자 해진은 이전 회사가 얼마나 빡빡하게 굴었는지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담배는 당연히 안 되고, 연애도 제대로 못 하고, SNS도 다 회사가 관리하고…. 다른 회사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한영은 그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어쨌거나 진영은 저런 걸로 ‘꼽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랬다면 애초에 게이 동생을 회사에 받아 주지도 않았을 터다. 같은 처지인 해진이 속 시원하다는 듯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 내가 게이인 것까지 알았으면 아주 제대로 난리 났을걸? 거기 나와서 살겠다, 진짜.”
그러더니 슬며시 한영 쪽으로 몸을 틀었다. 회청색 컬러 렌즈를 낀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
“근데 아직도 울어?”
“예…?”
“아직도 섹스할 때 우는 거 아니지?”
이번에도 한영은 짧게 ‘아.’ 했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금방 답을 내어 줄 수는 없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저도 잘 알지 못하니까. 이를 눈치챘는지, 해진의 눈빛에 빠른 속도로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서렸다.
“설마… 그 뒤로 아예 안 한 거야? 그니까, 나랑 호텔 가서 허탕 치고 난 다음에.”
“맞아요.”
얼빠진 표정이 된 해진이 ‘와….’라며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탄성을 뱉었다. 충분히 저런 반응을 보일 만했다.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섹스하려 할 때마다 펑펑 눈물이 솟구쳐 종국에는 그런 일을 영영 포기했다고 하면. 게다가 이런 본인과 섹스할 남자가 이제는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남의 엉덩이를 앞에 두고 딴 사람을 떠올리며 엉엉 우는 남자와 누가 섹스를 하고 싶을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황당한 상황이었다. 하여 픽 입꼬리를 올렸다 내리는데, 어느새 해진이 담배를 쥐지 않은 손으로 하나씩 손가락을 접고 있었다.
“1년, 2년, 3년…. 5년도 넘은 거 아니야? 그게 가능해? 거시기 썩진 않았고?”
경악을 담아 한영을 보던 해진이 흘끔 눈을 아래로 내렸다. 한영은 설핏 웃으며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잘 달려 있어요.”
해진은 정말로 안심한 것처럼 휴, 긴 한숨을 쏟았다. 반지 여러 개가 끼워진 손가락이 윤기 나는 금발을 쓸어 넘겼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 큰 거 썩어 떨어지면, 나 같은 애들 슬퍼서 살겠니?”
이후로도 해진은 오늘이라도 다시 꼬셔 보려 했는데 꽝이다, 내 맘이 더 착잡하다 등등 걱정인지 볼멘소리인지 모를 말을 조금쯤 더 이어 갔다. 그래 봤자 한영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가게의 영업 종료 시각이 훌쩍 넘었을 무렵에야 자리가 완전히 파했다. 하나둘 예약한 택시를 잡아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영은 배 실장이 모는 차에 몸을 실었다.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은 까닭인지 배 실장의 모습은 마치 지금 막 출근하는 사람 같았다. 뭐, 항상 저런 상태이기는 했다.
미약하게 히터를 틀어 놓은 벤이 얼마 안 가 한강을 따라 난 대로로 접어들었다. 멍하니 차창 밖만 내다보던 중, 핸들을 쥔 배 실장이 넌지시 말을 걸어 왔다.
“아직 결심은 그대로야?”
무엇을 묻는지 바로 파악한 한영은 ‘네.’ 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운전석에서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뭐, 사장님하고도 얘기 끝났다고 하니까 내가 뭐라 더 말할 건 없는데, 그래도 좀 걱정되네. 팬들이 엄청 놀랄 거 아냐. 너 은퇴한다고 하면.”
“에이, 은퇴는 아니죠.”
“솔로 활동 그만둔다는 게 그 소리지.”
한영은 그런가,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배 실장이 속으로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담당하는 뮤지션이 앞으로 영영 음악을 관둘지도 모르는데,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한영에게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제 인생에서 음악을 끝내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단, 혼자선 충분히 할 만큼 했을 뿐이다.
푹 등을 기대고 있던 좌석 등받이에서 조금 몸을 세운 한영은 보다 창 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주먹 쥔 손에 옆머리를 괴고 새벽의 불빛이 일렁이는 새카만 강물을 응시했다. 창문을 살짝만 아래로 내리자, 훅 맵찬 바람이 차 안으로 들이쳤다. 흘깃 백미러로 한영을 본 배 실장이 ‘술 안 깨?’ 하고 물었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라고 답한 한영은 강변의 찬 바람을 맞으며 지금껏 수백 번, 수천 번을 되새겼던 감회에 다시금 서서히 잠겼다.
8년이 지났다. 한 사람이 곁을 떠난 후,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여기서 몇 년만 더 버티면 세간에서 흔히들 말하는 강산이 바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한영의 마음은 여전히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네가 나를 떠나고 홀로 남겨진 그때, 그 자리였다.
처음에는 부정했다. 네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다. 눈가가 짓무르고 온몸의 기력이 바닥날 때까지 눈물을 쏟아도 도저히 현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당장 지하에 내려가면 기타 치는 네가 있고, 부엌으로 가면 앞치마를 입고 보글보글 북엇국을 끓이는 네가 있을 것만 같았다. 대신 한영을 맞이하는 건 사무치는 외로움과 절망이었다.
그다음으로는 끝도 없는 원망에 빠졌다. 네가 원하지 않아 좋아한다는 말도, 나를 좋아하냐는 말도 모두 다 삼켰는데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그러기만 하면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줄 것처럼 굴었으면서 말이 안 되었다. 발로 이불을 박차고 주먹으로 베개를 내리쳐도 서러움과 한스러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따지거나 매달릴 기회조차 주지 않는 네가 너무도 야속했다.
아무리 그런들 상대를 진심으로 미워할 재간이 한영에게는 없었다. 그리하여 실낱같은 희망을 품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키스한 게 몇 번이고, 섹스한 게 몇 밤인데. 그 시간들이 다 허사가 되었을 리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집 앞에서 밤낮으로 기다려도 보고, 심지어 학교로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너는 머리털 한 올조차 보여 주지 않았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용기 내어 네 아버지의 장례식장까지 발걸음해 보았으나, 그때도 너는 기어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한영은 비로소 인정했다. 이제 내 인생에 너는 없음을. 정말로 너는 나를 영영 떠난 것임을. 그러자 시꺼먼 밤바다 한가운데 첨벙 내던져진 듯한 막막함이 덮쳐 왔다. 멀쩡히 숨 쉬며 살아가는 내일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상실이자 좌절이었다. 심장에 뚫린 구멍이 너무 컸다.
그 구멍을 메울 방법을 알지 못해 결국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너를 생각하며 건반을 누르고,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눈물로 만든 노래가 세상 빛을 보자 여기저기에서 곡 참 좋다는 말이 들려왔다. 티브이에서, 거리에서 제가 부른 노래가 울렸다. 신기했다. 그리움과 미련과 애달픔이 덕지덕지 붙은 노래를 이토록 많은 사람이 들어 준다니. 회사가 얘기하는 ‘대박’이란 말은 잘 와닿지 않았지만, 어쨌든 한영으로선 적잖은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그즈음 한영은 한 가지 바람을 품었다. 네가 무심코 들어간 음식점에서, 담배 한 갑 사러 들른 편의점에서, 몸을 실은 버스에서 내 노래가 흘렀으면 좋겠다. 그리되어 이 절절한 마음이 부디 네게 한 번이라도 닿았으면 좋겠다. 내 생각…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 바람을 안고 오늘까지 왔다. 더 열심히, 마음을 다해 노래했더니 이제는 뮤지션이나 아티스트 같은 거창한 칭호에 그럭저럭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너도 내 노래를 들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그때, 네가 나를 그토록 매몰차게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을. 그래서 나는 너를 끝까지 탓할 수 없다….
어김없이 속눈썹이 축축이 젖어 올 무렵 한영은 도로 창문을 닫았다. 씽씽 몰아치던 바람 소리가 단숨에 잦아들었다. 다시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댄 한영은 조용히 배 실장을 불렀다.
“형. 노래 좀 틀어 줄래요?”
‘응.’ 대답한 배 실장이 차 센터패시아의 버튼 하나를 눌렀다. 곧바로 한영의 머리 뒤에 있는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리버브가 한가득 들어간 기타 음과 몽롱한 노랫소리. 몇 년 전 해체했다 최근 재결성한 Embryo의 신곡이었다.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밴드의 노래이기도 했다. 한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엔진음을 내며 오르막길을 오르던 차가 어느덧 커다란 철제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서두름 없이 기어를 파킹으로 돌린 배 실장이 운전석에서 뒤를 돌았다.
“내일 스케줄 알지?”
“네. 1시에 스튜디오.”
“근데… 그 노래 원곡자한테 연락 안 해도 돼?”
배 실장의 물음에 차를 타고 오는 내도록 줄곧 직선을 그리던 한영의 입매가 위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눈매도 함께 휘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그럼 오늘은 푹 쉬어라.’ 하는 배 실장의 인사에 ‘형도요.’라고 답한 한영은 차에서 내려섰다. 손을 스치자 환히 번호가 떠오른 도어 록에 ‘2431’이라는 숫자를 입력한 후 부드럽게 열린 대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분사분 정원을 가로지르다 오늘은 이걸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며 중간에 서서 담배 한 대를 피웠다.
대문 비밀번호와 같은 번호를 한 번 더 누르고 현관으로 들어서자 차갑게 식은 실내 공기가 한영을 맞이했다.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복도 중간쯤 있는 방문을 연 한영은 방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무채색이 주를 이루는 옷들을 훌훌 벗은 뒤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가 욕실 문 밖으로 샤워기 물 떨어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짧은 샤워를 마치고, 오래전 분홍색을 벗어난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욕실을 나섰다. 대충 드라이어로 말리고서 시계를 보니 벌써 동이 틀 시각이 되어 가고 있었다. 평소 밤샘 작업을 하다 이 시간까지 깨어 있는 게 이제는 허다한 일이라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드레스 룸을 벗어나자 짐작대로 방 안에는 어스름한 새벽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과거 침대니 책상이니 하는 가구가 있던 자리가 온통 푸르스름한 여명에 물들었다. 살짝 물기가 남은 듯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휑한 공간을 응시하던 한영은 가뿐히 방 밖으로 발을 틀었다. 이곳은 더 이상 그의 잠자리가 아니었으므로.
한영은 불 꺼진 복도를 걸어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종전 눈에 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짙은 새벽 해가 거실만큼이나 너른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로 다가갔다. 피아노에서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는 책상이, 그 옆에는 작은 협탁이, 또 그 옆에는 침대가 있었다. 하나둘 옮기다 보니 과거에는 피아노 하나만 덩그러니 있던 방에 가구가 제법 늘었다.
그럭저럭 푹신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한영은 새카만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가지런히 늘어선 하얗고 까만 건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근처에 가지도 못했던 피아노 위로 가벼이 한영의 두 손이 올라갔다. 기다란 손가락이 주저 없이 건반을 누르자, 새벽에 어울리는 잔잔한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난날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써 냈던 가사가 자연스레 그 위로 얹혔다.
난 오늘도 네 기억 속에 살아
너의 목소리를 듣고 네 모습을 봐
난 오늘도 지난 추억 속에 살아
너와 함께했던 순간 모두를 떠올려
담담한 노랫말로 시작한 곡은 연주 후반부에 접어들어 내 앞에 나타나 줘, 나를 안아 줘 같은 절절한 가사로 이어졌다. 이윽고 쾅 건반을 내리치며 노래가 끝났을 때, 길게 뻗은 속눈썹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툭 하얀 건반 위로 떨어졌다. 건반을 적신 맑은 동그라미가 금세 수를 불렸다.
“…재환아.”
멀쩡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이렇게 널 떠올리면서 울고 있었다. 어디 가서 창피해 말도 꺼내지 못할 일이었다. 실상은 사귄 적도 없는 사람을 장장 8년 동안이나 사무치게 그리워한다고 하면 누가 믿어 줄까. 집착이나 미련 같은 단순한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눈물을 떨구면서도, 한영은 과거처럼 마냥 괴로움에 허덕이지 않았다. 지독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부르는 노래가, 연주하는 멜로디가 너와 나를 연결해 주고 있음을 굳게 믿는 까닭이었다. 그 믿음으로 오늘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 다른 멤버의 눈을 피해 합주실에서 몰래 입 맞췄던 순간, 믹싱에 온 정신이 쏠린 네 뺨에 살짝 입술을 포갰던 순간, 격정적으로 맨살을 맞대었던 순간 하나하나가 간절히 부르는 노래에 담겨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너도 알아줄 것이다.
춤추듯 손가락을 놀리며 내리 몇 곡을 더 연주한 한영은 창밖이 환히 밝아 올 즈음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박자박 나무 바닥을 밟아 방 한쪽의 벽 앞으로 다가갔다. 통창으로 들이친 아침 햇살이 벽을 빼곡히 뒤덮은 알록달록한 색채를 더욱 선명히 비추고 있었다. 빨간색 기타, 파란색 베이스, 검은색 해골…. 그 가운데 찍혀 있는 보라색 손자국 위에 살포시 손바닥을 얹어 보았다. 차가운 벽에서 느껴질 리 없는 온기가 전해졌다.
내처 조금 떨어진 곳에 같은 색으로 난 손자국 위로 반대편 손을 올렸다. 벽에 콩, 이마까지 붙인 한영은 마치 누군가의 숨결을 느끼듯 깊이 심호흡했다. 길게 숨을 내쉴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끝에서 아직 덜 마른 눈물방울이 미세한 빛을 반사시켰다. 간절히 노랫말을 읊던 입술이 연연하고도 애틋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만날 수 있어.
곧 만날 수 있어.
내가 널 많이 기다리고 있어, 재환아….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영 씨!”
“어,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하며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녹음 준비에 분주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한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온갖 노브와 페이더로 가득한 콘솔 데스크 앞에 앉아 있던 엔지니어도 휙 의자를 돌려 한영을 반갑게 맞이했다.
“한영 씨 왔어? 오늘 컨디션 엄청 좋네?”
“네. 녹음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엔지니어는 ‘한영 씨야 항상 잘하지!’ 하며 껄껄 웃었다. 수줍은 듯 배시시 미소 지은 한영은 목에 둘둘 말고 있던 와인색 머플러를 풀었다. 검정 코트까지 벗고서 크게 숨을 들이켜자 믹서니 컴프레서니 하는 기계들의 냄새가 물씬 맡아졌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치 익숙해진 냄새이기도 했다. 그사이 배 실장은 바지런히 스튜디오를 돌아다니며 엔지니어와 어시스턴트에게 따뜻한 커피를 돌렸다. 인제 커피를 잘 마시긴 하지만, 목이 건조해질 수 있는 탓에 콘솔 데스크 뒤편의 소파에 앉은 한영은 커피 대신 물을 홀짝였다.
얼마 안 있어 오늘 녹음 디렉션을 봐 줄 프로듀서 한 명이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한영보다는 세 살 위의 형으로, 이전 회사에 있을 때부터 함께 음악 작업을 해 온 사람이었다. 이번 앨범에서는 편곡에서만 조금 도움을 받았다.
“아직 준비 중?”
“곧 시작할 것 같아요.”
프로듀서가 한영이 앉아 있던 소파에 앉자마자 어김없이 배 실장이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 안 그래도 밖이 쌀쌀해 따뜻한 게 당겼다며 커피를 받아 든 프로듀서는 반색했다. 그 말이 정말인 듯, 그는 얼른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 컵째 마셨다.
“오늘 이 노래만 하면 녹음은 다 끝이지?”
“네. 악기도 다 끝났으니까.”
“가사 좀 봐 봐.”
한영은 가사가 인쇄된 종이를 꺼내 프로듀서에게 건넸다. 몇 모금 더 커피를 마신 프로듀서가 얼굴 가까이 종이를 가져갔다. 휙휙 눈을 굴리며 가사를 읽어 내리던 프로듀서의 입가에 씩 웃음이 걸렸다.
“이제 우리 한영이 가사도 곧잘 써.”
“형. 저 데뷔 7년 차예요.”
“안다, 알아!”
아예 소리 내어 호탕하게 웃은 프로듀서가 한영의 어깨를 툭 쳤다. 제법 힘이 실린 감이 없잖았지만, 내심 칭찬이 기분 좋아 한영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자연히 처음 한국어로 가사를 썼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한영은 지금 옆에 있는 인물에게 아주 욕을 바가지로 먹었더랬다. 너는 유치원생이냐, 한글은 배웠냐, 우리 집 강아지도 이거보다는 낫겠다…. 도대체 뭐라고 썼었더라. 아마 ‘보고 싶어’, ‘미워’, ‘슬퍼’ 따위로 가득 찬 가사였을 것이다. 한데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딴에는 정말 진심이었으니까.
“옛날에 써 온 건 나 무슨 유치원생 일기장인 줄 알았잖아. 세상에.”
“아…, 네.”
그래 봤자 저만의 생각인 모양이었다. 한영은 도리 없이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다행히도 가사 얘기는 그쯤에서 끝났다.
“근데 남이 만든 노래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네, 맞아요.”
“그래도 들어 보니까 너랑 얼추 감성이 맞던데? 말 안 하고 들으면 그냥 네 노래인 줄 알겠어. 되게 좋드라.”
샐쭉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뿐이었다. 어쩌면 가사가 좋다는 말보다 더 듣고 싶었을지 모를 칭찬에, 한영의 입꼬리가 쌕 위로 올라갔다.
프로듀서의 말마따나, 정말로 참 좋은 곡이었다. 그래서 그간 한영은 이 노래의 원곡을 수천 번도 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혹 그 이상일 수도 있다. 한때는 정말 숨 쉬듯이 들었으니까. 그 노래를 이제는 제 목소리로 부를 차례였다. 단단히 굳힌 결심에는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맞다. 노래 쓴 사람이 누구랬지? 옛날 친구?”
“아…. 친군데, 제가 많이 좋아하는 친구예요. 진짜 많이.”
한영을 보는 프로듀서의 얼굴에 ‘참 유별난 우정이다’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썩 좋은 표정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한영은 빙긋 웃음 짓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그즈음 ‘한영 씨, 슬슬 들어가 볼까?’ 하는 엔지니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영은 ‘네.’ 하며 가뿐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손에는 가사가 적힌 종이, 다른 손에는 작은 생수병을 쥔 한영은 노란색 나무 바닥이 깔린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웬만한 합주실만큼이나 넓은 부스 양쪽 구석에는 리코딩 시 사용하는 드럼과 앰프가 각각 자리했다. 그런 까닭에, 한영은 여기에 들어올 때마다 제집 지하에 있는 한 장소가 떠올랐다. 그곳에 홀로 앉아 노래 부르던 나와, 문밖 복도에서 내 노래를 듣고 있던 너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이곳에서 한영은 지금껏 수많은 노래를 녹음했었다.
어깨를 쫙 벌려 몇 번 스트레칭한 한영은 푸르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술과 입 주변의 근육을 풀었다. 손목도 두어 번 탈탈 털어 준 뒤 딱 얼굴 높이까지 올라와 있는 마이크 앞에 섰다. 귀에 두툼한 헤드폰을 쓰고 촘촘히 짜인 그물처럼 생긴 팝 필터에 입을 가까이 댔다. 천장에서 부분적으로 떨어지는 난색 조명이 녹음 준비가 끝난 한영과 그 주변을 동그랗게 비추었다.
- 일단 연습 삼아 통으로 가 봅시다.
“네.”
대답하고 얼마 안 있어 촉촉한 잔향을 입은 기타의 아르페지오 선율이 귀를 덮은 헤드폰에서 흘러나왔다. 며칠을 고생하며 녹음한 보람이 있게 연주도, 톤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물론 다부진 손가락으로 지판을 짚어 가며 네가 만들어 내던 소리에 가까울는지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그 소리를 어떻게든 흉내 내 보려, 지난 몇 년간 한영은 참 부단히도 기타 연습을 했다. 언젠가 무대 위에서 너와 함께 연주하는 순간을 꿈꾸며.
그날이 아주 멀지는 않을 거라는 희망이자 바람을 품어 볼 즈음, 어느새 노래가 끝났다. 깊게 숨을 몰아쉰 한영은 두꺼운 유리 너머 앉아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프로듀서가 토크 백 버튼을 누르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 …유한영. 오늘 뭐 내렸어?
“예?”
- 노래 장난 아닌데? 이건 뭐 디렉 볼 것도 없겠네. 본 녹음도 지금처럼만 해.
‘네!’ 하고 답한 한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믹서의 페이더 몇 개를 위아래로 움직인 엔지니어가 까만 구즈넥 마이크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
- 자, 그럼 한영 씨. ‘Reverb’ 녹음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네!’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더없이 힘찼다. 너에게 온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는 듯한 설렘이 가슴 안쪽을 꽉 채웠다. 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간절히 움킨 한영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부스 안에, 부스 밖에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은 노랫소리가 낮고도 또렷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너를 다시 만나게 해 줄 노래였다.
벚꽃 비 내리는 밤
* * *
휘영청 떠오른 달 아래 사락사락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제법 세게 불어오는 봄바람 따라 손톱만 한 꽃잎들이 흩날리며 허공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찬란한 춤사위를 선보이던 꽃잎이 이윽고 하나둘 땅으로 내려앉고, 꽉 껴안은 서로를 놓지 못한 두 남자 주위가 어느덧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얗게 뒤덮였다. 그중 몇은 커다란 손바닥에 뒤통수가 감싸인 새카만 머리통 위로, 힘이 들어가 가늘게 떨리는 어깨 위로, 바닥을 적신 눈물 자국 위로 떨어졌다.
팔랑팔랑 공중을 맴돌던 마지막 꽃 이파리까지 사뿐히 땅에 안착했다. 그때까지도 어느 누구 하나 양팔에 안긴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보드라운 입술이 붙은 재환의 귓가에서는 거듭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몇 글자 되지 않을지언정 하염없이 심장을 파고드는 문장이었다.
“좋아해. 좋아해, 재환아. 그때도 지금도, 나 너 많이 좋아해.”
타의에 의해 참아야 했던 시간을 모조리 메우려는 듯 낮고도 간지러운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고백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잠시나마 그쳤던 눈물이 다시금 빽빽이 돋아난 속눈썹 끝을 적시고, 감쳐문 입 주변 근육이 움칠거렸다. 이 두서없는 고백을 재환은 오롯이 감당하기가 벅찼다. 끝내 한심한 한마디가 울먹임과 함께 흘러 나갔다.
“미안해. 미안해, 유한영….”
이토록 얄팍한 언사에도 상대는 ‘괜찮아.’ 하며 뒤통수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 옆머리에 꾹 입술을 누르기도 했다. 후로도 몇 번이나 ‘좋아해’와 ‘괜찮아’를 번갈아 가며 나긋나긋 귓속으로 속삭였다. 그 음성이 너무도 달콤하여, 재환은 지난날 자신이 저질렀던 죄가 마치 모조리 사하여지는 듯한 턱없는 착각이 일었다. 그날의 비겁함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그러기에는 한영의 품이 너무도 따뜻하였다. 안락하였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그럴 수 없었다. 이곳이 길바닥 한가운데라는 사실이 슬슬 인지되는 까닭이었다. 그제야 한영이 무대 위 차림 그대로 얇은 셔츠 한 장만 입은 상태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한참 만에 한영에게서 몸을 떨어뜨린 재환은 뒤늦게 손등, 손바닥으로 축축이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바지춤에 손바닥을 닦은 뒤 한영의 두 손을 꼭 쥐고 바닥에 닿아 있던 무릎을 천천히 폈다.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오랫동안 접혀 있던 다리에 피가 통하며 찌르르한 감각이 퍼졌다. 엄살 부릴 정도는 아닌지라 그냥 콧잔등만 한 번 찡긋거리고 말았다.
그사이 또 몰캉한 입술이 눈가에 살며시 붙었다가 떨어졌다. 재환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칠 좁혔다. 이토록 애틋한 접촉에 재빨리 적응하기 힘든 탓이었다. 장장 8년이나 잊으려 애썼던 감촉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 멍청한 반응에 한영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 웃었다. 가르마가 나뉘어 살짝 이마를 덮은 갈색 머리칼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재환의 시선이 꽃처럼 웃는 남자의 얼굴에 멍하니 고정되었다.
저 부드러운 표정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몇 시간 전 높다란 무대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세월이 무색하게 고운 이목구비에는 한 치 변함이 없어, 지어 내는 웃음 또한 과거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눈부시도록 어여쁜 미소였다. 그런데도 저리 숨김없이 웃는 한영이 재환은 조금 낯설었다. 과거에도 분명 보았던 모습인데, 그렇게 느껴졌다. 지금의 그는… 더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재환아…?”
“집…, 들어갈래?”
어쨌거나 이대로 상대를 계속 길바닥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재환이 어물어물 말은 건네자, 표정을 살피던 한영이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응, 들어갈래.’ 하는 산뜻한 대답이 뒤따랐다.
재환은 여태 꼭 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풀고 건물 현관 안으로 발을 틀었다.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계단을 올랐겠으나, 대신 작은 전광판에 ‘5’라는 숫자가 떠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버튼을 누르고 얼마 안 있어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더니,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스르륵 문이 열렸다. 네 개의 발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좁은 사각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기껏해야 3층인 목적지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짧은 틈에도 재환의 목구멍 너머로는 몇 번이나 꼴깍꼴깍 마른침이 넘어갔다. 한 발짝 떨어져 선 상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향기가 겨우 작동을 멈춘 눈물샘을 불안하게 건드렸다. 아직도 현실을 완벽히 받아들이지 못해 정신이 좀 멍했다.
유한영이 곁에 있다. 지금 내 곁에 있다. 유한영이. 한영이가….
띡띡띡. 깜빡깜빡 점멸하는 숫자와 함께 울리는 경고음이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재환을 일깨웠다. 도대체 뭘 입력한 건지 제집 도어 록이 열과 성을 다해 비밀번호가 잘못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혹시나 해 문짝에 붙은 호수를 확인해 보았으나, 자신의 집이 맞았다. 짐짓 당황한 재환은 뒤통수에 와 닿는 지긋한 시선을 느끼며 점멸을 멈춘 숫자판 위로 다시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어….”
결국 얼뜬 소리가 흘러 나갔다. 그즈음, 양어깨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얹혔다. 귓가로 따스한 숨이 불어왔다.
“천천히 해, 재환아.”
아…, 응. 떨림을 감춘 목소리로 답한 재환은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더 잘못된 번호를 입력하면 한동안 도어 록이 아예 작동을 멈출 터였다. 뒤에 손님을 세워 두고 그렇게 창피한 일이 또 없었다. 그런데 유한영이 손님이 맞긴 한 건가. 잘 모르겠다. 과거에는 그가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것도, 반대로 이쪽이 찾아가는 것도 다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갈피를 못 잡는 이성이 자꾸만 그때의 기억을 넘봤다.
다행히도 재차 비밀번호를 틀려 기약 없이 복도를 서성여야 하는 상황은 면했다. 매끄럽게 잠금이 풀린 문을 활짝 연 재환은 뒤에 서 있던 한영에게 들어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살았다는 기색은 애써 숨겼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유독 컴컴하게 느껴지는 거실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곧이어 달칵, 소리가 나며 좁아터졌다는 평가를 그럭저럭 피할 정도는 되는 거실에 훤히 불이 켜졌다. 그래 봤자 운동장만 했던 누구네 집 거실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집 넓다.”
그러니 뒤따라 들어온 한영이 진심을 섞어 들려준 말에 열없이 귓바퀴가 붉어졌다. 하긴, 그야말로 코딱지만 했던 옛날 집을 생각하면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보니 그런 집에서 커다란 사내놈 둘이 참 잘도 부대꼈다. 당시보다 그런대로 넓은 집에 살고 있는 것도, 마침 집이 아주 더럽지 않은 것도 참 다행이다 싶어 재환은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하는 것도 잠깐뿐이었다.
“그…, 뭐 마실래? 일단 앉아 있어. 아마 맥주 한두 캔 있을 거야.”
재환은 끈을 풀어야 하는 신발을 벗고 이제야 집 안으로 들어선 한영에게 눈도 안 마주친 채 재빨리 말을 쏟았다. 마찬가지로 재게 발을 놀려 거실과 연결된 부엌으로 향했다. 사실 맥주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일단 냉장고 문을 열고 보았다. 문 모서리를 붙잡고 하얀 불빛이 들어온 냉장고 내부를 휙휙 눈으로 훑었다. 그러나 방금 뱉은 말이 무색하게 맥주는커녕 생수 말고는 아예 마실 거리가 보이지 않았다. 난감하고 창피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짧게 한숨을 내뱉은 재환은 도로 냉장고 문을 닫았다. 급한 김에 근처 편의점에라도 다녀와야 할 성싶었다. 가서 맥주도 좀 사고, 먹을 것도 좀 사고. 사실은 다 핑계고, 가능하다면 잠시라도 한영과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부터 가슴팍 안에서 쿵쾅쿵쾅 울리는 심장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맥주가 있을 줄 알았는데 없네. 좀 사 올게.”
재환은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는 한영을 지나쳐 현관으로 갔다. 푹 허리를 숙여 방금 벗은 구두 대신 운동화 안으로 한 발씩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폈을 때, 한순간 등을 뒤덮는 온기가 느껴졌다. 느릿느릿 고개를 떨어뜨린 재환은 양복 재킷 위에서 가슴팍을 감싼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가지 마, 재환아.”
등 뒤에서 재환을 껴안은 한영이 어깨에 뾰족한 턱을 얹고 속삭였다. 짧을지언정 사지를 흠칫 굳게 하기 충분한 한마디였다. 여지없이 다른 집, 다른 현관에서 이런 식으로 수도 없이 붙잡혔던 과거의 날들이 떠올랐다. 가지 마, 재환아. 자고 가. 나랑 같이 있어…. 그때 단 한 번이라도 매몰차게 뿌리친 적이 있었던가. 없다.
재환은 저를 끌어안은 한영의 품속에서 머뭇머뭇 뒤로 돌아섰다. 시선을 맞추기 위해 살짝 고개를 위로 들자, 머리칼이 스칠 거리에 당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말간 빛을 띤 얼굴이 있었다. 다만 예전 문득문득 엿보였던 초조함이나 애달픔 같은 것은 더 이상 비치지 않았다. 가슴 언저리가 사르르 떨릴 만큼 어른스러운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온화하되, 안 그래도 위태로운 재환의 심장을 뒤흔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미소였다.
“나랑 같이 있자.”
대답을 전할 새도 없이 부드러운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골목길 한복판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이나 느꼈던 감촉임에도, 재환은 순간 내려 앉힌 눈꺼풀을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이토록 가벼운 입맞춤에도 가슴이 펑 터질 것 같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유한영은 분명 변했는데, 한심한 자신의 심장만 아직 이십 대의 그날에 머물러 있었다.
“일단 신발 좀….”
툭 고개를 떨군 재환은 맞닿은 가슴팍 안으로 손을 넣어 살며시 한영을 뒤로 밀어 냈다. 다시 운동화를 벗어야 하기도 했거니와, 이대로 더 붙어 있으면 위험하리만치 치솟은 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한영에게 전달될 것 같았다. 그러나 재환은 뜻한 바대로 한영과 거리를 벌릴 수 없었다.
두 손목이 덥석 붙잡히는 동시에 훅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 고개를 비튼 한영과 입술이 맞물리며 또다시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어느덧 손목을 놓아준 팔이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와 있는 힘껏 등을 그러안았다. 그 와중에도 신발을 신은 채로 집 안에 들어서는 일을 피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이 꿈지럭거렸다. 한 발을 겨우 운동화에서 빼낸 후 반대쪽 운동화 뒤축을 발꿈치로 밟을 무렵이었다.
뒷걸음질 치는 한영에게 끌려가며 발에서 벗겨진 운동화가 데굴데굴 현관의 타일 바닥을 굴렀다. 현관문에 부딪혀 엎어져 버린 운동화를 제대로 놓을 겨를 따위 당연히 주어지지 않았다. 거실과 부엌의 경계선쯤에 멈춰 선 한영은 집 밖에서 나누었던 입맞춤으로는 턱도 없다는 듯 재환을 안고 입술을 문질렀다. 집요하게 혀를 얽었다.
“음….”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더운 숨결과 익숙한 향취에 재환의 머릿속이 차츰 새하얗게 물들었다. 분명 서로 나눠야 할 이야기가 산적해 있을 터지만, 지금은 한영과 함께 하는 당장의 행위에 몰두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오래전 몸속 깊숙한 곳에 새겨진 타성 같은 것이었다.
잠깐 서로의 입술이 멀어진 틈을 타, 재환은 한영이 입은 흰색 셔츠의 옷깃을 꽉 그러쥐었다. 약간의 의문이 서린 갈색 눈동자와 겨우 눈을 맞추고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자.”
값싼 유혹이자 어줍은 제안이었다. 가끔가다 이 집으로 외간 남자를 불렀던 때의 패기나 호기 같은 것은 모조리 잊어버렸다. 부끄러움, 창피 따위를 이기지 못한 시선이 결국 아래로 떨어지고, 타액에 젖은 입술이 꾹 다물렸다. 옷깃을 쥔 손이 괜스레 움직거렸다. 물끄러미 재환을 바라보던 한영의 눈이 흘긋 저 뒤편의 방문을 향했다가 재환에게 되돌아갔다. 다음 순간,
“유, 유한영…!”
상체를 안고 있던 팔이 엉덩이 아래 감기며 몸이 붕 위로 떠올랐다. 당황한 재환이 다급히 한영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으나, 별안간 사람을 번쩍 안아 든 한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쌕 미소 지은 얼굴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목적지는 한 곳이었다.
높이 들려 불 꺼진 방 안으로 들어서는 동시에 몸이 뒤로 기울었다. 적당히 푹신한 침대에 등이 닿으며 매트리스가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하나 매일같이 느꼈던 이 푹신함이 재환은 익숙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바로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촉촉한 눈길이 그럴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을 예견하게 하는 한편, 또 막막함을 건네주는 눈빛이었다. 조금 겁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유한영….”
조심스레 손을 뻗어 여전히도 보드라운 감촉을 머금은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 위로 살짝 서늘한 듯한 손바닥이 겹쳐졌다. 살그머니 고개를 튼 한영이 재환의 손을 붙잡아 그 안쪽의 여린 살결에 쪽쪽 입 맞추었다. 이를 지켜보던 재환은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있던 용기를 주섬주섬 건져 올렸다.
“잠깐만.”
단단한 가슴팍을 짚은 손에 살며시 힘을 주며 상체를 일으켰다. 덩달아 몸을 세운 한영이 재환을 마주 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말없이 눈을 깜빡이는 한영의 셔츠 앞섶으로 손을 가져간 재환은 꿀꺽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가장 위의 단추를 풀었다.
뒤이어 아래로 내려간 손이 차례차례 그다음, 또 그다음 단추를 구멍에서 빼냈다. 마침내 활짝 벌어진 옷깃을 붙잡아 넓은 어깨 너머로 넘기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보다 더 새하얀 맨살이 온전히 드러났다. 거실로부터 새어 들어온 불빛이 그다지 밝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과거보다 선명해진 것이 분명한 몸의 윤곽까지도.
재환이 단추를 푸는 동안 끊임없이 뺨을 매만지던 손이 배턴을 넘겨받듯 얇은 간절기용 양복 재킷의 깃으로 향했다. 단추 하나 채워져 있지 않은 재킷이 금방 재환의 어깨를 훑고 내려가 몸에서 분리되었다. 침대 한편에 재킷을 놓은 손이 뒤이어 재킷 안에 입고 있던 와이셔츠의 단추를 건드렸다. 조금 전 재환이 했던 행위가 고대로 반복되며, 사락사락 소리를 내고 벗겨진 와이셔츠가 재킷이 놓인 곳에 겹쳐 놓였다.
더 이상 상반신에 걸친 것이 없는 두 남자는 잠시간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다 살짝씩 눈동자를 움직여 희미한 불빛에 노출된 살결을 눈에 담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군더더기 없이 예쁘게 균형 잡힌 몸과, ‘인제 연예인 아니랄까 봐’라는 감탄을 절로 자아내는 몸이 각자의 시야에 새겨졌다. 누구 할 것 없이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끝내 서로에게 손이 뻗어 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재환의 손이 매끈하면서도 제법 두툼하게 솟은 가슴을 스치면, 한영의 손이 일자로 뻗은 쇄골을 쓸었다. 양각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복근을 훑었을 때는 엄지 끝이 조심스럽게 유두를 문질렀다. 너와 함께 보냈던 숱한 과거의 시간을 복기하는 과정이었고, 멀어져 있던 지난 세월을 찬찬히 메우는 행위였다. 다만 이 정도로는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용기를 움킨 재환이 먼저 한영에게 다가갔다.
한결같이 붉은빛이 감도는 입술에 깊이 입술을 누른 재환은 조금씩 몸을 낮춰 가며 입술을 아래로 움직였다. 미끈한 턱선을 따라 가볍게 입 맞추고, 툭 불거진 울대에도 부드럽게 입술을 대었다가 떨어뜨렸다. 더 아래로 내려간 입술이 하얀 가슴팍에 붙었을 때, 뒤통수로 커다란 손바닥이 감겼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색이 옅은 유두에 떨리는 입술을 묻었다.
“읏….”
저 위에서 낮은 신음이 한숨처럼 흘렀다. 내처 슬며시 눈을 감은 재환은 입술에 닿은 작은 돌기를 정성스레 쪽쪽 빨았다. 살짝 혀를 내어 힘을 빼고 혓바닥으로 문지르기도 했다. 익숙한 행위는 아니었으나, 예전 자신의 모든 곳을 달콤하게 애무해 주던 보드라운 입술을 떠올리며 조심스러운 접촉을 이어 갔다. 짧은 머리칼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에 언뜻언뜻 힘이 들어갔다.
“하….”
더불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숨결이 한층 진한 신음성을 띠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반대편 유두에도 수 번 입 맞추던 재환은 아예 한영의 어깨를 붙들어 몸을 뒤로 누였다. 검정과 갈색 사이에 걸쳐진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남색 시트 위로 흩어졌다.
양옆으로 다리를 벌려 한영 위에 무릎 꿇고 앉은 재환은 다시금 허리를 아래로 숙였다. 야트막하게 꺼졌다 부푸는 복부에 가만가만 입술을 붙였다 떼며 이전 제가 받았던 행위를 돌려주는 데에 집중했다. 어쩌면 그 기저에는 얼마쯤의 죄책감도 함께 깔려 있을지 몰랐다. 이런 간편한 짓 몇 번으로 씻겨 나갈 리는 없겠으나…, 그래도 당장은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옴폭 들어간 배꼽 언저리에 쪽, 입술을 누른 재환은 차근차근 순서를 밟듯 더 아래로 얼굴을 내렸다. 최대한 침착히 한영이 입은 검정 바지의 버클을 풀고, 그 사이로 보이는 드로어즈에 손가락을 걸었다. 조심조심 드로어즈의 밴드를 아래로 끌어 내리자, 기억 속에 있던 민둥한 사타구니 대신 가느다랗게 자라난 음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이 생소한 풍경에 멈칫 놀라는 것도 잠시, 더 드로어즈를 밑으로 당긴 재환의 얼굴에 일순 미미한 당황이 드리웠다. 이를 눈치챈 한영이 ‘아….’ 하고 다소간 민망함이 섞인 소리를 나지막이 뱉었다. 한곳에 고정되어 있던 재환의 시선이 더디게 위를 향했다.
“미안, 재환아. 요즘…, 내가 그래.”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고운 입매에 안타까운 미소가 걸렸다. 사실 이쪽에 사과할 일은 전혀 아니었으나, 재환은 얼결에 ‘아, 응.’ 하고 대답했다. 그냥, 그는 지금의 상황이 조금 낯설었다. 거듭 서로의 숨을 섞고 체온을 맞대었음에도 발기하지 않은 한영을 보는 것은 짐작건대 처음이었다. 뭐, 이유야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인제는 과거처럼 이십 대의 신체가 아니라는 점, 따라서 성욕도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점, 혹은 더 이상 내가 너에게….
“아냐, 재환아.”
갑자기 내놓아진 부정에 재환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목적어도 없는 짧은 문장이 무어라 선뜻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안겼다. 뭐, 이런들 저런들 재환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설사 상대가 전과 같은 반응을 보여 주지 않더라도, 지금의 행동을 멈출 이유는 되지 못했다.
“으읏.”
다시 시선을 내린 재환은 옅은 음모 아래 얌전히 자리한 성기를 한 손으로 쥐었다. 전혀 발기하지 않은 상태로도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 성기 끄트머리를 주저 없이 입에 머금었다. 동시에 물컹물컹한 촉감이 점막을 건드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전해져 오는 것은 그립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맛과 향이었다. 그것이 괜한 울컥함으로 번지기 전, 재환은 천천히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엉덩이를 높이 들어 엎드린 재환은 가능한 한 성심을 다해 한영의 성기를 애무했다. 어떻게든 흥분시키고 말겠다는 유치한 오기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해 주고 싶었다. 이런 것뿐만 아니라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영에게 해 주고 싶었다. 몇 년간을 쌓아 온 후회와 자책의 발로였다.
꽤나 다행스럽게도, 흐물거리던 살덩이가 차츰 재환의 입 안에서 몸집을 키웠다. 느리게나마 확실히 단단해지고 있었다. 못내 기꺼운 변화에 혀 아래 고인 침을 꼴깍꼴깍 삼킨 재환은 보다 행위에 박차를 가했다. 동그랗게 벌린 입술을 좁게 조이고, 더 넓은 면적으로 혀를 문질렀다. 귀두 가운데서 익숙한 맛의 액이 살금살금 새어 나올 때 즈음엔 슬슬 얼굴을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하아, 재환아….”
그 와중 재환이 입은 양복바지의 옷감이 시트에 스쳐 계속해서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딱딱해진 기둥을 따라 흐르는 침을 핥아 올리던 재환은 불편하게 하반신을 감싼 바지의 허리춤으로 오른손을 옮겼다. 그럭저럭 능숙하게 한 손으로 벨트를 끄르고 단추를 풀었다. 지퍼를 열자마자 바지를 허벅지 아래까지 억지로 내려 버렸다. 몇 벌 있지도 않은 양복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걱정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잠깐 성기를 뱉은 틈을 타 이번에는 자신의 입술 사이로 쑥 중지와 약지를 한꺼번에 집어넣었다. 종전까지 두툼한 성기 곳곳을 핥던 혀를 이용해 스스로 손가락에 고루 침을 묻혔다. 설핏 몽롱한 기색을 띤 갈색 눈동자가 재환 하는 양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이런 짓 하는 내가 너도 낯설게 느껴질까. 떨어져 보낸 세월이 있으니 그래도 별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흥건히 침에 전 손가락을 높이 치켜든 엉덩이 사이로 가져갔다.
“윽….”
메마른 주름 가운데에 푹 중지를 찔러 넣자, 자동적으로 콧잔등에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재환을 보는 한영의 눈빛에 미세한 당황이 서렸다. 그래도 아주 놀라 기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표정을 했다면 퍽 창피했을 터다.
“재환아….”
“내가 알아서 할게.”
뒤로 뻗어 나간 손이 하고 있을 일을 능히 짐작한 한영에게 짧게 통보한 재환은 침으로 번질번질해진 성기를 도로 입에 물었다. 좁은 구멍 안에서 손가락을 놀리는 것과 비슷한 움직임으로 정성스러운 펠라티오를 이어 나갔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맞나.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하는 뒤늦은 의문들이 드문드문 뇌리를 스쳤지만, 큰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재환은 한영과 이러고 싶었다. 너무도 오랫동안을 그랬다. 이제 와 새삼 부정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읏, 음….”
손가락 하나를 빠듯하게 물고 있는 구멍에 조금 무리해 약지까지 밀어 넣었다.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내벽 안에서 손가락 마디를 접었다 펴며, 이제는 완연히 기억하던 크기를 되찾은 성기를 목구멍 깊숙이까지 박았다. 밭아진 숨이 목젖을 건드리는 선단 때문인지, 스스로 아랫구멍을 넓히고 있는 상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내처 둥그스름한 손톱 표면으로 내벽 안쪽의 불룩한 지점을 슬쩍슬쩍 건드릴 즈음, 큼직한 손바닥이 양 뺨을 감싸 왔다. 서두름 없는 손길로 고개가 들리며 온통 침에 전 성기가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입술에 걸린 한 방울의 침이 실처럼 길게 늘어지다 톡 끊겼다.
“나도 해 주고 싶어.”
다정한 속삭임과 함께 겨드랑이로 들어온 손이 상체를 위로 당겼다. 엉덩이 사이에서 손가락을 꺼낸 재환은 하는 수 없이 주춤주춤 무릎걸음으로 한영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다 허벅지에 애매하게 걸린 바지가 영 불편해 안에서 한 쪽씩 다리를 빼냈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양복바지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몸에 남아 있는 것은 발에 신고 있는 양말이 전부였다. 무릎으로 침대 위를 디딘 재환은 한영의 양어깨를 손으로 짚고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진득한 시선이 반절의 빛과 반절의 어둠 속에 드러난 살결을 찬찬히 훑고 지났다. 한참 전 발기하여 배에 붙다시피 솟은 성기도 물론 포함되었다.
“지금도… 예쁘네.”
잠깐의 침묵 후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감탄이 여지없이 재환의 귓바퀴를 뜨끈하게 덥혔다. 예쁘긴, 무슨. 이라는 싱거운 소리를 들려주려는 찰나, 길기도 한 팔에 와락 허리를 안겼다. 체격에 비해 작은 얼굴이 푹 가슴팍으로 파묻혔다.
“어떻게… 아직도 이렇게 예쁘지.”
이어지는 말에는 더 반응을 내놓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재환은 그냥 두 팔로 한영의 머리를 안아 버렸다. 서로가 내뱉는 뜨거운 숨이 갈색 머리칼 위로, 슬슬 땀이 맺히는 살결 위로 흩어졌다. 하지만 숨결보다 더욱 뜨거운 것은 맞닿은 곳에서 퍼지는 열기였다. 지난 8년 내도록 다른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가 없어 미련하게 그리워만 했던 체온이 조금의 틈 없이 서로를 감쌌다.
“유한영….”
“…재환아.”
“읏….”
곧은 척추를 쓰다듬으며 내려간 손이 양 엉덩잇살을 꽉 그러쥐었다. 그것만으로 재환의 고개가 껄떡 뒤로 넘어갔다. 애달픈 신음이 흘렀다. 불거져 나온 결후에 진한 입맞춤이 앉으며, 한영의 손가락이 진작 향했어야 할 곳으로 주저함 없이 진입해 들어갔다.
“으읏….”
달래는 건지 자극하는 건지 모를 키스가 목 언저리 곳곳에 퍼부어졌다. 뜨거운 속살에 파묻힌 양 검지가 마찬가지로 내벽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오랜 세월 자신이 들어간 적 없는 길을 넓히기보다, 이렇게나마 비로소 연결되었음을 거듭 확인하는 것 같았다. 네 안은 이리도 따뜻했노라고.
“하…, 재환아.”
“유, 한영…. 후으….”
크게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고 달뜬 숨을 흘리던 재환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풀썩 상체를 고꾸라뜨렸다. 짐짓 여유 있는 체하던 방금까지의 저를 잊고 허겁지겁 한영에게 입 맞추었다. 모난 곳 하나 없이 매끈한 선으로 이루어진 턱을 두 손으로 붙잡고 조급하게 혀를 얽었다. 지나치게 긴 손가락이 내부를 들쑤실 때마다 새하얀 손목에 채워진 끈 팔찌가 언뜻언뜻 엉덩이의 맨살을 스쳤다.
“으, 음…. 후….”
이리저리 누르고 둥글리던 손가락이 한층 깊이 파고들었다. 곧이어 자극이 몰린 지점이 꾹 눌러졌을 때, 단단한 복부에 비벼지던 성기 끝에서 왈칵 희뿌연 액이 터졌다. 조짐도 없었고, 따라서 대비도 없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한영의 혀를 물어 세게 빨아 대던 재환의 몸이 그대로 흠칫 굳었다.
급작스러운 사정으로 인한 전신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을 즈음,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맥 빠진 웃음이 흘렀다.
“하….”
서로의 배를 부옇게 적신 정액을 내려다보는 눈에 당황과 어이없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래도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닌지, 이전 같았으면 낯빛을 벌겋게 물들였을 일을 목도하고도 재환은 그저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저도 모르는 새 얼굴이 꽤나 두꺼워진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한영에게 하나만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건 진짜 처음이다.”
그리고 한마디 더.
“너라서 그래.”
재환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한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무너졌다. 눈썹 끝이 떨어지고, 입매가 휘며 참 곱게도 일그러졌다. 눈가가 조금 붉게 달아오른 듯도 했으나, 거실의 불빛을 의지해 거기까지 확인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어쨌거나 재환으로선 이 이상의 진실된 말을 들려주기가 어려웠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비루먹은 몸뚱이의 외로움을 달래려 다른 상대와 살을 맞대었을 때에는 감히 경험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었으므로. 오로지 배출을 목적으로 했던 행위였음에도 그랬다.
투명하리만치 뽀얀 뺨에 두 손을 포갠 재환은 무어라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한영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전희가 길게 이어진 탓인지 엉덩이 사이로 딱딱하게 닿아 오던 성기의 발기가 서서히 풀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건 잠시 뒷전으로 미뤘다.
“계속하자, 유한영. 너랑 죽도록 하고 싶어.”
엉덩이 안쪽에 박혀 있던 손가락이 움칠 굽어들며 미약한 자극을 전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옅은 색 눈동자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가간 입술이 서로에게 철떡 들러붙었다. 두서없이 혀가 엉키며 허리 짓 하듯 재환의 몸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잠깐 멈칫해 있던 한영의 손가락도 같은 박자로 내부를 쑤석였다. 허연 정액을 묻힌 채 또다시 슬금슬금 발기한 성기가 매끄러운 리듬의 움직임 따라 마주 닿은 복부를 툭툭 때렸다.
그러다 엉금엉금 방향을 튼 재환이 한영의 얼굴을 향해 엉덩이를 들고 엎드렸다. 제 크기로 돌아간 성기를 쥐어 동그랗게 벌린 입에 덥석 머금었다. 세상 가장 맛있는 과실을 맛보듯 점막 안에서 몰캉몰캉한 살덩이를 이리저리 굴렸다. 과거에는 큰맘 먹어야 한번 할 수 있었던 자세에도 부끄러움은 없었다.
이에 화답하듯 높이 들린 엉덩이 가운데로 또다시 푹 손가락 두 개가 꽂혔다. 그 사이로 물컹한 촉감이 다가들었다. 한영의 혀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었다. 물론 재환은 예전처럼 뭐 하는 짓이냐며 기함하거나 엉덩이를 감추지 않았다. 한영이 제게 그 무엇을 하든 그는 앞으로 다 받아 내고 다 감수할 작정이었다. 이것 또한 나름 절절한 사죄의 일환이었다.
“읏, 음….”
“후….”
저 뒤에서 꽤나 민망하고 질척한 소리가 이어지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재환은 물렁물렁한 성기 곳곳을 정성 들여 핥았다. 손으로는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고환을 주물렀다. 혀 놀리는 대로 이리저리 흐물거리던 성기가 느리게나마 다시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입 속을 차지한 면적과 부피가 조금씩 늘어났다.
그사이 한영 역시 재환의 구멍을 성심껏 애무했다. 손가락으로 벌린 자리에 쑥 혀를 밀어 넣어 벌그스름한 내벽을 문지르고, 재환의 목구멍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새면 춥, 소리가 나도록 늘어난 주름에 입 맞추었다. 마치 어제도, 그제도, 아니, 매일 밤을 이러했던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으…, 응….”
은밀한 곳에 내리는 다정하기 짝이 없는 입맞춤에 재환의 몸이 하릴없이 달아올랐다. 이러다 또 엇 하는 새에 사정해 버릴 것 같다는, 마냥 반갑지 않은 예감이 의식을 건드렸으나 이번에도 재환은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그럭저럭 커다래진 한영의 성기를 더욱이 열심히 물고 빠는 데에 집중했다.
“으음….”
아래를 보고 흔들거리는 성기 끝에서 똑똑 흐른 맑은 물이 그린 듯이 자리 잡은 복근 위로 떨어졌다. 재환의 입을 빠듯이 메운 성기에서도 같은 액이 흘렀다. 재환은 부지런히 울대를 꼴깍꼴깍 움직여 한영의 분비물을 식도로 넘겼다. 아까도 그랬지만, 역하다거나 불쾌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운 감상마저 일으키는 맛이었다.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한영 역시 거듭 재환의 엉덩이 사이에 입 맞추고 혀를 넣어다 빼기를 반복했다. 서로의 몸 위아래에서 젖은 마찰음이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러기를 한참, 어느새 또 자세를 바꾼 두 사람은 침대에 반대 방향으로 누워 사이좋게 성기를 물고 있었다. 마지막 남았던 한영의 바지는 매끈한 다리를 훑고 내려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침 범벅이 된 입 주변 감각이 숫제 얼얼해졌을 무렵, 재환은 거대한 성기를 뱉고 부스럭부스럭 상체를 일으켰다. 충분한 예열을 지나, 이제는 아마도 슬슬 다음 단계로 가야 할 시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자신이 그것을 원했다. 침대 밖으로 손을 뻗어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서 콘돔 봉지와 투명한 젤 통을 꺼내자, 덩달아 상체를 세워 앉은 한영이 물끄러미 재환을 보았다. 문득 그의 눈빛에 고이는 서글픈 물음을 재환은 왠지 알 것 같았다. 언제, 누구와, 왜…. 곧이 실토할 정도로 뻔뻔스러운 성격이 되지 못하는 까닭에, 슬그머니 눈을 내리깐 재환은 작은 사각 봉지의 귀퉁이를 찢었다. 봉지 틈에서 얇은 고무 막을 빼내 한영의 손에 건넸다.
욱신거리는 양심을 달래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찰나 고운 얼굴을 스쳤던 먹먹함은 다행히도 흔적 없이 걷혀 있었다. 염치없게도 안도한 재환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한영에게 쪽, 입을 맞추었다. 마주 보고 앉아 그가 성기에 콘돔을 씌우는 것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예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기껏 찾은 안도감이 빠르게 증발되었다.
“…유한영.”
귀두에 콘돔을 물린 채 멈칫한 두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이 확연히 눈에 보였다. 미처 기둥을 따라 끌어 내리지 못했다.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재환의 낯에 급속도로 당황과 염려가 번졌다. 한 번 더 한영을 부르는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왜 그래, 유한영.”
“재환아….”
의미 모를 웃음을 내비친 한영이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다른 손으로는 조금도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콘돔을 움켰다. 안쓰러운 미소가 걸린 입술이 시원히 말을 뱉지 못하고 달싹거렸다.
“조금…, 떨려서 그래….”
이까지 덜그럭덜그럭 부딪히는 것 같았다. 눈시울은 붉게 부풀었다. 한심하고도 멍청한 재환은 그때야 비로소 한영이 보이는 낯선 행동의 연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오늘 그가 발기하는 데에 꽤 애를 먹었던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사실 아까부터…, 실감이 잘 안 나서….”
마냥 낯설었다가, 왈칵 그리움에 잠겼다가, 괜한 초조함에 마음 끓였던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다. 한영도 같았다. 하긴, 끝까지 괜찮고 멀쩡한 체하기에는 서로의 공백이 너무도 길었다. 8년 만에 느껴 보는 체온과 감촉을 어찌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절대 가능치 않은 얘기였다.
“…나 바보 같지?”
한영은 자책하며 재차 안쓰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재환은 한영을 따라서 웃어 주지 못했다. 그의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보 같은 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방법을 모를 뿐이었다.
“유한영.”
재환은 손을 뻗어 동그란 이마에 붙은 손을 가만히 떼어 냈다. 다른 손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주먹에 얹었다. 애처로운 떨림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에서 멀어진 손을 제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난 나 혼자 그런 줄 알았어.”
“재환아….”
“아니었네.”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쿵쾅거리는 심장의 진동이 충분히 전해질 터였다. 이를 오롯이 체감하듯 한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심호흡했다. 재환은 어른스러워진 표정 뒤에 과거의 연약함을 감추고 있던 남자의 입술 위로 부드러이 입술을 포갰다. 주먹 쥔 손 안에서 살며시 콘돔을 빼냈다.
어쩌면 처음부터 필요 없었던 물건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환은 한영과 애틋하게 숨을 섞으며 그의 상체를 살살 뒤로 넘어뜨렸다. 저로 인해 타액에 젖은 입술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뗀 뒤, 허리를 세우고서 단단한 허벅지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았다. 다행히 아직까지 발기해 있는 성기가 위를 보고 꺼떡거렸다. 젤 통을 집어 고운 분홍빛을 띤 성기 위로 주룩 투명한 액을 부었다. 기둥을 타고 흘러내린 점성질의 액체가 뿌리 부근에 몽글몽글 고였다.
쫙 펼친 손바닥에도 젤을 부은 재환은 살짝 띄워 올린 엉덩이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충분히 물렁물렁해진 주름을 비집고 손가락을 넣어 뜨듯한 안쪽에 꼼꼼히 젤을 발랐다. 이것으로 마침내 너와 하나가 될 일련의 준비가 끝났다.
옆으로 던진 젤 통이 퉁, 소리를 내며 구겨진 옷가지와 쓸모없어진 콘돔 옆을 굴렀다. 손바닥을 이용해 굵직한 기둥에 젤을 펴 바른 재환은 미끈미끈해진 귀두 위로 입구를 물렸다. 허벅지에 힘을 준 채 그대로 조금씩 엉덩이를 내려 앉혔다. 오밀조밀한 주름을 누르며 딱딱한 선단이 서서히 내부로 침입해 들어왔다. 아래 누운 사람과, 위에 앉은 사람의 입에서 약속한 듯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으흑!”
딱 절반 성기를 집어넣은 재환은 울퉁불퉁한 복부를 두 손으로 짚고 숨을 골랐다. 무시 못 할 버거움과 그에 버금가는 희열이 빠른 속도로 저 아래에서부터 차올랐다. 파르르 떨리는 입가에 찌글찌글한 미소가 걸리고, 눈가가 벌그스름히 물들었다.
“읏, 으….”
못내 벅차올라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어렵사리 진정시킨 재환은 엉덩이를 더 아래로 주저앉혔다. 얇은 음모로 덮인 사타구니에 회음부가 닿는 순간 고개가 푹 아래로 숙어졌다. 자잘한 땀방울이 맺힌 가슴팍이 빠르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한층 숨이 밭아졌다. 이 모든 신호가 몸에 적잖은 무리가 가고 있음을 알려 주었으나, 끝내 재환은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하하….”
실로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웃음이었다. 우선, 삽입만으로 이렇게 좋을 줄 몰랐기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동시에 이 벅찬 쾌감을 이따금 다른 상대에게서 구걸하던 저 자신이 한없이 우습게 여겨졌다. 어차피 제 안은 오래전 한영의 모양대로 길이 나 버렸는데, 그곳에 애먼 것을 채워 넣었으니 만족이 되었을 리가 없다. 그걸 오늘에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후….”
재환은 앞으로 쏠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 상태로 잠시간 말없이 한영을 응시했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금 찬찬히 실감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배 안에 가득 찬 성기가 벌떡벌떡 맥동하는 감각이 생생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재환아….”
더운 기운이 감도는 손바닥이 양 허벅지를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몇 번 더 맥없는 웃음을 흘린 재환은 한영의 손 아래로 손을 넣었다. 손의 방향을 틀어 내처 꽉 깍지를 끼었다. 틈 없이 붙은 살결 사이로 촉촉한 땀이 고이며, 어둠을 가르고 뜨거운 시선이 얽혔다.
맞잡은 손에 힘을 준 재환은 천천히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젤과 땀이 뒤섞여 마찰하는 살결이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서두름 없는 움직임을 따라 매트리스 스프링이 미약하게 삐걱거렸다. 여기에 굳이 참지 않은 녹녹한 신음성이 더해졌다.
“읏, 응…. 후….”
애틋하기 그지없는 눈길로 재환을 올려 보던 한영도 살짝씩 허리를 위로 튕겼다. 축축한 내벽을 비집은 성기가 보다 안쪽을 찌르며, 붉게 달아오른 목을 따라 또르르 땀방울이 떨어졌다. 머리칼이 넘어가 새하얗게 드러난 한영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마냥 익숙하게 여길 수 없는 열기에 두 사람의 몸이 하릴없이 녹아내렸다.
어느덧 깍지를 풀어 손을 뒤로 뻗은 재환이 근육이 바짝 선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자연히 허리가 뒤로 휘며 가슴팍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옆구리를 쓸며 올라온 손이 유두에 닿았다. 두 엄지가 빠른 속도로 양쪽 돌기를 튕겼다. 흥분이 치솟았다.
“후, 윽…. 읏….”
부끄러움을 잊은 재환의 입에서 달큼한 신음이 줄줄이 샜다. 천장을 향해 들린 얼굴이 말 못 할 감회와 환희에 젖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내려앉고, 눈꼬리에 가랑가랑 매달려 있던 눈물이 가느다란 궤적을 그리며 관자놀이를 타고 떨어졌다. 죽을 만큼 좋고, 죽을 만큼 행복했다. 심장에 화르르 불이 붙었다.
“아아…!”
더 큰 신음을 터뜨린 재환은 한층 격한 박자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래 깔린 하반신이 얼른 그 움직임을 쫓아왔다. 두툼한 성기가 거세게 안을 찔러 올리고, 아랫배를 점령한 쾌감이 손끝, 발끝까지 번져 나갔다. 그즈음 한영이 콱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엇…!”
한순간 벌떡 상체를 세운 한영이 재환의 겨드랑이 아래를 덥석 붙잡았다. 몸이 쑥 위로 들리며 거듭되는 마찰로 불그죽죽 물든 엉덩이 사이에서 성기가 한 번에 뽑혀 나왔다. 녹을 대로 녹은 젤도 함께 흘러나와 주룩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그로 인해 서늘하리만치 휑한 느낌이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을 파고들었다. 이에 흠칫 어깨를 떠는 것도 잠시, 몸을 비튼 한영과 단숨에 우위가 뒤바뀌었다. 가슴과 배가 털썩 시트에 닿으며 침대가 크게 흔들렸다.
뒤에서 골반을 붙든 손이 엉덩이를 높이 추어올렸다. 허겁지겁 두 손으로 침대를 짚은 재환은 곧게 팔을 폈다. 완전히 한영 앞에 둔부를 훤히 내보이고 엎드린 자세였다. 물론 이런 걸로 수치나 민망함을 운운할 시점은 한참 전에 지났다. 1초라도 빨리 한영이 다시 들어와 주길 바랄 따름이었다. 천박하고도 애절한 욕망이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흘러내린 젤을 훑은 엄지가 엉덩이 골을 따라 두어 번 회음부를 문지르고, 미끈거리는 입구에 둥그런 귀두가 맞춰졌다. 닥칠 일을 예감하며 크게 심호흡하는 찰나, 단단한 기둥이 아래를 꿰뚫었다. 크게 벌어진 입에서 단말마가 터졌다.
“큽…!”
두 팔과 무릎으로 지지한 몸이 덜컥 흔들렸다. 덩달아 흔들린 새까만 머리칼에서 잔 땀방울이 튀었다. 침대를 디딘 손가락이 움칠 굽어 들며 시트에 구깃구깃 주름이 졌다. 이처럼 한영과 연결되는 순간은 재환에게 항상 얼마쯤의 압박감을 주었다. 그것이 곧 눈물 날 만큼의 만족감으로 뒤바뀔 것을 알았다. 이미 조금은 흘린 터라 몇 방울의 눈물이 땀과 함께 속눈썹 끝에 맺혀 있었다.
“후, 으윽…!”
아주 잠깐 숨 고를 틈을 주는 듯했던 한영이 허리를 치받기 시작했다. 지금껏 비교적 재환의 움직임에 완급을 맞춰 주었던 것과 달리, 초반부터 힘이 실렸다. 퍽퍽 살결 부닥치는 소리가 연이어 비어지는 신음에 맞먹었다. 성기가 밖으로 뽑혀 나올 때마다 끈적해진 젤이 사타구니와 둔부 사이에서 쩍쩍 늘어났다.
치대는 힘과 몰아치는 자극을 이기지 못한 재환의 상체가 끝내 풀썩 아래로 무너졌다. 온통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시트에 묻은 재환은 한영이 안을 들쑤실 때마다 헉헉 거친 숨을 토했다. 저 듣기에도 심히 외잡한 소리였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심지어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실로 허무맹랑한 생각마저 스쳤다. 아니, 마냥 황당한 생각이 아니었다. 지금의 행복이라면, 충족감이라면 재환은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걸 모조리 잊은 체 외면하고 살았던 지난 시간이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아, 재환아….”
저를 부르는 음성이 돌림 노래처럼 고막 안에서 웅웅 메아리쳤다. 그 달콤한 목소리에 취해 멀거니 침대 옆 벽면을 쳐다보던 재환은 시트를 움키고 있던 손을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아래를 보고 덜렁덜렁 흔들리는 성기를 답삭 쥐었다.
“허으…, 윽….”
구멍을 들락거리는 육중한 살덩이의 움직임을 느끼며 손에 쥔 성기를 흔들었다. 뒤에서 쳐 대는 힘이 상당해 몇 번이나 손이 미끄러질 뻔했으나, 그럼에도 자위하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더한 흥분에 빠져들고픈 생각뿐이었다. 가쁘게 흐르는 숨이 차츰 더 격한 곡조를 띠고, 시야가 번뜩번뜩 점멸하는 빛에 물들었다. 다물릴 줄 모르는 입에서 흐른 침이 시트에 동그란 자국을 그렸다.
다만 이토록 몰아치는 쾌감 속에서, 재환은 제 등 뒤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기의 정체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이미 흠뻑 맺혀 있던 땀에 금세 섞여 버렸으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한영에게는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재환아…. 후…, 읏.”
재환의 골반을 두 손으로 움켜쥔 한영은 오로지 뜨겁고 좁은 곳으로 저를 밀어 넣는 행위에 몰두했다.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며 달큼한 키스를 나누는 일 같은 건 꿈도 못 꿨다. 지금의 한심한 낯을 절대 재환에게 보일 수 없었다. 시선을 맞추고서 길게 버틸 재간도 없었다. 그러니 태어나 한 번 섹스해 본 적도 없는 무지렁이처럼 뒤에서 허리만 흔들었다. 기실 심장을 터뜨릴 듯한 긴장을 견디며 발기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군살 하나 없이 미끈한 등에 거듭 맑은 눈물방울을 떨구던 한영은 결국 그 위로 푹 상체를 엎어뜨렸다. 제 아래 깔려 헐떡거리는 몸을 으스러뜨릴 듯 껴안고서 고환이 납작 눌릴 정도로 허리를 밀어붙였다. 그 상태로 얼마 움직이지 못해, 세상 가장 따뜻하고 안락한 곳에 파묻힌 성기에서 울컥 정액이 터졌다. 땀 맺힌 목덜미에 붙은 입술 틈으로 뜨거운 한숨이 쏟아졌다.
“아아….”
그사이에도 스스로 성기를 쥐고 흔드는 재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한영의 절정을 어서 뒤쫓으려는 듯 더 박차를 가했다. 탁탁 손날이 사타구니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해지고, 단단한 팔에 갇힌 가슴팍이 격하게 들썩거렸다. 이윽고 비등점까지 끓어오른 숨이 턱 멎은 순간.
“으윽…!”
벌겋게 익은 귀두 가운데서 쭈욱 정액이 솟구쳤다. 직선을 그리며 후드득 떨어진 정액이 짙은 색 시트 위로 탁한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표피가 당겨 올라갈 정도로 기둥을 두어 번 더 훑자, 비슷한 지점에 몇 방울 더 뿌연 액이 뿌려졌다. 두 번째 사정임을 감안하더라도 적지 않은 양이었다.
폭풍 같은 사정이 끝난 자리에 빠른 속도로 탈력감이 차올랐다. 더러워진 시트 사정 따위 안중에 두지 못한 재환은 풀썩 침대에 배를 붙이고 쓰러졌다. 등 뒤를 모조리 덮은 한영의 체온이 느껴졌다. 더없이 안정감을 주는 온도와 무게였다. 귓가에서 쌕쌕 내뱉어지는 숨소리조차 가슴이 울컥하도록 달갑게 다가왔다. 종전까지 신음이 주렁주렁 매달렸던 입술에 어렴풋한 미소가 스쳤다.
아직 물기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던 재환은 침대 가까이에 난 창 너머를 응시했다. 새카만 밤과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섞여 만들어 낸 주황색 어둠 속, 눈발 같은 흰색 점들이 홀홀 날리고 있었다. 진짜 눈인가, 하고 멍청히 속으로 중얼거리던 중 아까 같은 것을 맞으며 한 사람과 입 맞추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한 사람의 손이 폭 손등을 감싸 왔다.
“재환아….”
잠꼬대인지 속삭임인지 모를 중얼거림이 목 근처를 간지럽혔다. 응, 하고 나지막이 대답했지만 더는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재환은 슬쩍 목을 빼 제 손에 겹쳐진 하얀 손등 위로 살며시 입술을 눌렀다.
방금의 섹스로 서로 멀어져 있던 시간이 얼마나 메워졌을까. 몇 밤을 더 함께 보내야 우리는 그 긴 시간을 다 채우고 지울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아무런 답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참 싱겁고도 유치한 생각 하나가 재환의 머릿속을 지나쳤다.
오늘, 답지 않게 덜덜 떨던 너를 두고두고 놀려 줘야지. 그래서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더라고 짓궂게 말해 줘야지.
두고두고.
네가 지겹다 몸서리칠 때까지.
* * *
혼곤한 잠에 빠진 의식 속으로 짹짹 간지럽게 새 우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간만에 듣는 상쾌한 소리에 서서히 눈꺼풀이 위로 들리며, 베개와 뺨 사이에 끼어 있던 손이 옆을 더듬었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찾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은 잡히지 않고, 버스럭거리는 시트의 감촉만 손바닥을 스쳤다. 몇 번 더 눈을 깜빡여 시야에 초점을 모은 재환은 텅 빈 옆자리를 응시했다. 사실은 핸드폰이 아니라 사람의 체온이 느껴져야 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까치집이 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시선은 흐릿하게 사람이 누웠던 자국이 남은 듯 만 듯 한 옆자리에 고정되었다. 불현듯 인정하기 싫은 불안감이 서늘히 재환의 심장을 훑고 지났다. 어젯밤, 혹시 제가 지독한 단꿈을 꾼 것이라면….
홱 이불을 젖힌 재환은 벗은 두 다리를 서둘러 바닥으로 내디뎠다. 하지만 일어서지 못하고 멈칫 경직되었다. 침대 밑에 아무것도 놓인 것이 없었다. 구겨져 뒹구는 옷가지도,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버려진 콘돔도 없었다. 설마, 정말로, 진짜…. 온갖 부정적인 가정이 삽시에 혼란한 머릿속을 꽉 메웠다. 쿵쿵 맥박이 치솟았다. 그 순간, 무언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미약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벌떡 일어선 재환은 허겁지겁 발을 뗐다. 잘 펴져 옷걸이에 걸린 양복에는 미처 눈길을 주지 못했다. 제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민망한 상태라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대로 막 문지방을 넘는 찰나, 우뚝 발이 굳었다. 선 자리에서 보이는 부엌으로 망연한 시선이 향했다.
길쭉한 뒷모습이 그다지 넓지 않은 부엌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조리대 위에서 두 팔이 연신 부지런히 움직였다. 듣기 좋은 콧노래도 함께 흘렀다. 낯섦과 그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풍경을 맞닥뜨린 재환의 다리에서 일순 힘이 빠져나갔다. 급한 대로 가까이 있던 소파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도 인기척을 귀신같이 알아챈 상대가 휙 뒤를 돌았다. 재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붉은 입술이 활짝 옆으로 벌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식도를 얼른 내려놓고는 한달음에 재환 가까이 다가왔다.
“굿 모닝.”
살며시 어깨가 붙잡히는 동시에 뺨으로 부드러운 입맞춤이 앉았다. 조금 어안이 벙벙해진 재환은 한영의 인사에 답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거실 창으로 들이친 햇살이 눈앞에 놓인 얼굴을 지나치게 환히 비추었다. 그 위로 빠르게 걱정이 드리웠다.
“왜 이러고 나왔어. 춥게.”
한영은 두 팔을 벌려 폭 재환을 끌어안았다. 익숙한 트레이닝복의 감촉이 맨살에 닿으며, 재환은 한 박자 늦게 적잖은 창피함을 감지했다. 그렇지. 아침나절부터 홀딱 벗고 돌아다니는 건 아무래도 좀 남사스럽지. 상대의 애틋한 염려를 무심히 넘기기 위한 재환 특유의 멋없는 사고방식이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고치지 못한 고질병이었다.
“빨리 씻고 나와. 내가 아침 차릴게.”
그러니 이어지는 말에도 ‘어….’ 따위의 무뚝뚝한 대답을 내놓았다. 한영을 솔직히 마주할 용기는 지난밤 침대에서 모두 다 꺼내어 쓴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집 안으로 밝게 쏟아지는 햇살이 괜히 더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괜한 핑계였다. 속으로 이러쿵저러쿵해도, 사실은 그냥 부끄러운 것뿐이었다. 잠시나마 어제 일이 꿈인 줄 알고 벌벌 떨었던 게 창피해서. 이곳 어디에도 네가 없을까 봐 가슴 졸였던 게 꼴사나워서….
“아, 참. 입을 게 없어서 옷 하나 빌렸어. 부엌도 좀 뒤져 봤는데, 괜찮지? 다행히 찾는 게 다 있더라. 암튼, 어서 씻어. 맛있는 거 해 놓을 테니까.”
그 마음을 알긴 하는지, 조곤조곤 들뜬 목소리를 낸 한영이 어느새 재환을 욕실로 떠밀었다. 긴장 탓에 발기가 잘 안된다며 애처로이 웃던 어제의 모습은 전혀 떠올릴 수 없는 태도였다. 엉거주춤 재환이 욕실로 들어서자 뒤에서 친히 문을 닫아 주기까지 했다. 그러다 문짝이 막 다물리기 전, 도로 휙 문을 열었다. 욕실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던 재환은 고개를 돌려 쌕 미소 짓고 있는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재환아.”
“…왜?”
“좋아해.”
무어라 반응할 틈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며 쪽, 하는 남부끄러운 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방에 둘린 타일이 그 소리를 조금도 흡수하지 못하고 고대로 튕겨 냈다. 덕분에 재환은 민망하기 짝이 없는 잔향을 고스란히 귀에 담아야 했다. 이미 문은 쿵 닫힌 후였다.
멍하니 서 있던 재환은 미적미적 몸을 틀어 세면대 앞으로 갔다. 차가운 세면대 모서리를 두 손으로 짚고 거울 안을 들여다본 순간 허, 하는 헛숨이 터졌다. 눈앞에 비치는 참담한 낯빛을 실로 믿기가 어려워 비어진 반응이었다. 30년 남짓한 세월을 살았지만, 사람 얼굴이 이리도 시뻘게질 수 있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다. 딱 뜨거운 물에 적당히 데쳤다 건져 올린 몰골이었다. 기가 찼다. 당장의 끔찍한 상태를 탈피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뒤집어쓴 재환은 대충 허리춤에 수건을 두르고서 욕실을 나섰다. 코끝을 건드리는 구수한 향에 부엌 근처를 기웃거리자, 득달같이 다가온 한영이 이번에는 재환을 방으로 떠밀었다. 도대체 무슨 요리를 하고 있나 살필 겨를이 없었다.
“머리 말리고 와. 감기 걸려.”
여지없이 뺨에 쪽 입맞춤을 남긴 한영이 통통 엉덩이를 두드렸다. 쉽사리 익숙해질 수 없는 상황과 처지에, 방으로 들어온 재환은 드라이어를 손에 쥐고도 한참이나 전원을 켜지 못했다. 기껏 찬물로 식힌 얼굴이 재차 벌그죽죽 달아올랐다. 복합적으로 마음이 심란했다.
과거를 되새겨 보자면, 뺨이나 입술에 입 맞추는 정도의 스킨십은 두 사람 사이에 있어 전혀 새삼스러울 게 없는 행동이었다. 원래부터도 한영은 그런 부분에서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물론 8년이라는 무시 못 할 공백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입맞춤 몇 번에 이토록 얼굴을 붉힐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결국 문제는 재환 자신이었다. 예고도 없이 맞이한 재회와, 그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달라져 버린 관계를 머리가 완벽히 받아들이질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마음이 미숙함과 비겁함의 소치로 솔직하지 못했던 어린 날의 어딘가쯤에 머물러 있는 건지도 몰랐다. 답답하고 한심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러고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뒤늦게 한영의 염려를 상기하며 꼼꼼히 머리를 말리고 옷을 꺼내 입은 재환은 다시 거실로 나갔다. 한영은 여전히 조리대 앞에 서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방에서 나온 재환을 발견한 그가 눈을 접어 웃었다.
“잠깐만 기다려. 거의 다 됐어.”
응, 하고 답한 재환은 꼭 남의 집에 온 사람처럼 주춤주춤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상황만 보면 정말로 한영이 여기에 사는 사람 같았다. 부엌 장을 뒤적이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고, 커다란 냄비 앞을 서성이는 모습에서 조금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풍기는 냄새 또한 가끔가다 이 집에서 나던 냄새와 상당히 비슷했다. 물끄러미 한영을 바라보던 재환은 자연스레 물음 하나를 건넸다.
“혹시 북엇국 끓여?”
막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던 한영이 멈칫하다 뒤로 돌아섰다. 무슨 이유에선지 양손에 계란 한 알씩을 쥔 채로 빤히 재환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한 재환은 별생각 없이 ‘아냐?’ 하고 덧붙였다. 몇 초간 더 묵비권을 행사하던 한영의 입꼬리가 이내 빙그레 위로 올라갔다. 어수선한 배경에 어울리지 않게 해사하게도 웃은 한영은 아쉽다는 듯 얼굴을 저었다.
“에이, 역시 서프라이즈는 안 되겠다. 재환이 너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는데.”
아….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싶어 재환은 살짝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눈치 없이 굴어서 한영을 실망시킨 것 같았다. 한데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나 이제 북엇국 엄청 잘 끓이거든. 연습 되게 열심히 했어. 못 믿겠지?”
자못 자신감 넘치게 선언한 한영은 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냐, 믿어. 라는 답변이 아마도 정답임을 알았으나, 재환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러한 반응에도 한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쪽이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성격이 되지 못함을 이미 잘 아는 까닭이리라.
조리대로 돌아간 한영은 마저 국 끓이기에 집중했다. 와중 몇 번 재환을 돌아보며 싱긋 미소 짓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한영에게 미소로 응답하며, 재환은 소파에 보다 편히 등을 기댔다. 시야에 담기는 풍경에 오래전 지나간 장면들이 하나둘 겹쳐졌다.
라면을 끓인다고, 북엇국을 끓인다고 부엌을 어지르다 끝내 포기와 실패를 고백하던 너. 그런 너 때문에 결국 대신 두 팔을 걷어붙였던 나.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싱거워 빠진 라면도, 혀가 아릴 정도로 짠 국도 그때는 다 좋았던 것 같다. 그 애틋한 마음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 무대에서 한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하던 한영을 보며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하여 재환은 확신했다. 설사 오늘 네가 끓인 북엇국 맛이 좀 덜하더라도, 나에게는 더없이 호사스러운 만찬이 되어 줄 것임을. 오늘뿐이 아니었다. 앞으로 한영과 하는 모든 식사가, 매 순간이 재환에게는 선물이었다. 왜냐하면….
“유한영.”
국 냄비 위로 살살 소금 통을 기울이던 한영이 ‘응?’ 하고 산뜻하게 답했다. 약간의 틈을 두고 재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해.”
소금 통을 비스듬히 쥔 채로 한영의 행동이 정지했다. 보글보글 국 끓는 소리가 갑자기 찾아온 침묵을 메웠다. 동상처럼 굳어 있는 뒷모습을 응시하던 재환은 천천히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솔솔 풍겨 오는 곳으로 걸음을 뗐다.
등 뒤로 다가갔을 때까지도 냄비를 보고 선 한영은 미동이 없었다. 무심코 어깨에 손을 얹어 보려던 재환은 잠깐 주춤하다 도로 손을 물렸다. 괜히 한 번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또다시 한영을 불렀다.
“한영아.”
그제야 앞만 보고 있던 한영에게서 ‘아….’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적당히 밝고 적당히 곤란함이 섞인 음성이 그 뒤를 따랐다.
“재환아, 어떡하지? 소금 덩어리로 떨어졌어. 엄청 짜지겠다….”
“유한영.”
“물 더 넣으면 될까? 그럼 또 싱거워질 것 같은데. 이거 완전히 재환이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깜짝 놀라서. 그니까, 네가…, 네가 갑자기….”
조잘조잘 이어지던 말이 갈수록 뚝뚝 끊겼다. 중언부언 맥락이 흐려졌다. 그럴수록 옹송그려진 어깨의 떨림이 커졌다. 애처로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남자의 뒷모습을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재환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두 팔을 뻗어 잘록한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살결이 원체 하얘 붉게 달아오른 티가 더 확연히 나는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사랑해, 유한영.”
“재, 환아….”
“사랑해.”
쐐기를 박는 고백과 함께 허리를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는 순간, 뒤 한 번 돌아보지 못한 얼굴이 푹 아래로 떨구어졌다. 웅크린 어깨의 떨림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끅끅 숨을 삼키는 안쓰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상황에 모든 책임이 있는 재환의 눈시울도 같이 붉어졌다. 고작 세 글자로 이루어진 한마디가 가지는 힘은 이토록 강력하였다. 한데, 막상 말하고 나니 별거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왜 그 오랜 시간을 참고 버텼을까 싶을 만큼.
“재환아, 난…. 나는….”
줄곧 발랄한 목소리를 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더듬거리기만 하는 한영의 몸을 살며시 뒤로 돌려세웠다. 그때까지도 바닥을 향한 고개가 들리지 않았다. 아래로 쏟아진 갈색 머리칼 너머, 뾰족한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투명한 물방울이 보였다. 그곳으로 계속 눈물을 미끄러뜨리는 뺨에 두 손을 가져갔다. 촉촉이 젖은 살결을 손바닥으로 감싸 들어 올리자,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우는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덩달아 눈가를 적시던 재환의 입술 새에서 피식 웃음이 샜다. 그사이에도 손바닥 아래로 계속해서 따뜻한 물기가 스몄다.
“재환아…. 나 정말 안 울려고 그랬는데….”
“그래.”
“혼자 있을 때만 울고…, 너 만나면 안 울려고….”
훌쩍임과 함께 말이 이어질수록 한영의 어투에서는 분홍 머리 시절의 느낌이 묻어났다. 표정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보고 있기만 해도 심장 한편이 자르르 저려 오는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지난날, 이 표정에 홀딱 넘어가 얼마나 많은 밤 홀로 속 끓이고 고뇌했던지. 단, 그때의 주저함과 망설임은 더 이상 재환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잘 참았는데. 진짜로….”
그래, 그래. 알았어. 재환은 다정히 속삭이며 눈물이 흥건한 한영의 얼굴 곳곳에 조심히 입술을 눌렀다. 푹 젖은 눈꼬리에 입술을 붙였을 때는 짭조름한 물기를 호록 빨아들이기도 했다. 어젯밤 길바닥에서 목 놓아 울던 제게 한영이 해 줬던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그 꼬락서니에 비하면 한영은 울어도 참 곱게 울었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도 귀여운 걱정을 멈추지 않았다.
“북엇국 망했어…. 어떡하지, 재환아…?”
재환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상대의 애타는 마음을 무시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은 북엇국을 크게 안중에 두고 싶지 않았다. 한영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장은 다른 것이 하고 싶었다.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물을 엄지로 가만가만 문지르던 재환은 슬쩍 고개를 기울여 유독 붉은빛을 띤 입술에 살포시 입술을 겹쳤다. 다짜고짜 살점을 문대거나 혀를 넣지 않고, 그 상태로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도톰한 입술 사이에 고였던 눈물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 혀를 적셨다. 그러자 한영이 재환의 입술 틈으로 머뭇머뭇 혀를 집어넣었다.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움직임에 재환은 목을 울려 웃었다.
낮게 흐른 웃음소리에 한영이 당황한 듯 멈칫했다. 이번에도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므로 재환은 크게 개의치 않고 한영의 목 뒤로 손을 감았다. 다른 손은 옆구리를 지나 가스레인지의 노브로 향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노브가 돌아가고, 기포를 올리며 바글바글 끓던 국이 일시에 잠잠해졌다. 이제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입술과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내는 촉촉한 마찰음이었다. 거실로부터 번져 오는 오전의 햇살 속, 달콤하면서도 진득한 소리가 차츰 커졌다. 죽죽 눈물이 떨어지던 자리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을 즈음, 두 남자가 엉겨 붙은 장소는 좁은 부엌에서 침대 위가 되었다.
지난밤의 부끄러운 기억을 지우듯 한영은 거침없이 재환의 안을 파고들었다. 가벼운 입맞춤 한 번에 얼굴을 벌겋게 붉히던 모습을 벗어 던진 재환은 다리를 활짝 벌려 기다렸다는 듯 한영을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한 덩어리로 태어난 것처럼 두 개의 몸뚱이가 맞물리고, 은밀하고도 질척하게 연결된 부위가 서로에게 더욱 끈끈히 달라붙었다. 그곳에서 번지는 열기가 신경 곳곳으로 감당키 벅찬 쾌감을 밀어 보냈다.
어느덧 무릎 꿇고 엎드린 재환이 밀려나고 구겨진 시트 자락을 움켜쥐면, 거센 허리 짓과 함께 한영의 손이 재환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다 한영을 넘어뜨린 재환이 위에 올라타 쾅쾅 엉덩이를 찧기도, 도로 우위가 뒤바뀌어 재환의 두 다리를 그러안은 한영이 온 힘을 다해 허리를 처대기도 했다. 어느 자세가 되었든, 어떤 구도로 붙어 먹든 결합은 한시도 풀리지 않았다. 꿀렁꿀렁 새어 나온 정액이 탄탄한 허벅지를 허옇게 적시고, 거기에 또 새로이 흐른 땀이 섞여 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렇게 몇 번의 절정을 맞이하고, 몇 번의 파정을 겪었는지 셀 수 없었다. 하도 내벽을 쑤셔 댄 성기는 끝내 살갗이 까진 것처럼 벌그스름히 물들었으며, 삽입이 끝나고도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은 다물리지 못하고 발간 속살을 드러냈다. 침과 땀, 정액이 섞여 번들거리는 몸이 가라앉지 않는 호흡을 따라 쉼 없이 들썩거렸다. 그 와중에도 철떡 들러붙은 입술은 서로를 물고 빨기에 여념이 없었다. 창밖으로 서서히 해가 지고, 소금 덩어리가 녹아내린 국이 한층 더 차갑게 식었다.
얼음장처럼 식은 국이 다시 따뜻이 데워진 것은 무려 밤 10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한데 엉겨 침대 위를 뒹굴던 두 사람은 시계를 보고 너나없이 웃음을 터뜨렸고, 한참 늦게나마 부랴부랴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모금씩 국물을 호로록 떠먹어 보았을 때, 웃음이 대번에 뚝 그치고 말았다. 그때부터 죽은 북엇국 살리기가 시작되었다.
물을 붓고, 추가로 북어를 볶아 집어넣고, 계란까지 한 알 더 풀자 겨우 북엇국에서는 얼추 먹을 만한 맛이 났다. 그제야 재환과 한영도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좁은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둘은 허기를 반찬 삼아 부지런히 밥을 먹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말 부지런히 먹었다.
설거지하여 엎어 둔 그릇의 물기가 반의반도 마르기 전, 또다시 침대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헉헉대는 숨소리와 절절 끓어오르는 신음이 끊임없이 겹쳐지고,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한 창에는 끝내 부연 습기가 맺혔다. 그 너머로 꽃송이가 몇 남지 않은 벚꽃 가지가 어른어른 흔들렸다. 물론 그 풍경을 눈에 담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로를 부르며 서로만 바라보기에 급급했다.
재환아, 한영아, 사랑해, 나도.
이토록 애틋한 외침 속에서 그들은 또 한 칸, 멀어져 있던 과거를 지웠다.
사방이 캄캄한 어둠이었다. 며칠이 지난 건지, 아니면 하루도 지나지 않은 건지 가늠되지 않았다. 남자 둘이 빠듯하게 누운 침대 위는 세상에서 철저히 유리된, 시간이 멈춘 공간이었다. 폐쇄와 안락으로 가득 찬 장소에 기꺼이 푹 몸을 파묻은 재환은 창으로 흘러드는 달빛을 의지해 함께 누워 있는 이의 얼굴을 가만가만 살폈다.
근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면 제아무리 잘생긴 녀석이라도 나이 든 티가 나기 마련일 텐데, 한영은 좀체 그렇지가 않았다. 당장 입술을 누르고픈 뽀얀 살결과, 변함없는 모양새로 머물러 있는 반듯반듯한 이목구비가 하릴없이 시선을 묶어 두었다. 그러니 재환은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넋 놓은 사람처럼 코앞에 놓인 얼굴만 쳐다보았다. 단, 훔쳐보기에 정신이 팔려 상대가 진작 깨어 있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재환아. 언제까지 볼 거야.”
천연히 눈 감은 채 씩 입꼬리를 올리며 한영이 건넨 말에 재환은 흠칫 굳었다. 빠른 속도로 얼굴에 뜨끈한 열이 몰렸다. 반짝 눈을 뜬 한영이 경직된 재환과 시선을 맞추며 쿡쿡 웃었다. 서서히 표정이 구겨진 재환은 얄밉기 그지없는 남자의 콧방울을 엄지와 검지로 콱 꼬집어 주었다. 그래 봤자 더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흐를 뿐이었다. 얼굴은 그대로이되 속은 적이 능청스러워진 한영을 보며, 재환은 삐진 애처럼 툴툴거렸다.
“웃지 마, 정들어.”
“그럼 난 더 좋아.”
이제는 말로도 유한영을 당할 수가 없구나, 싶어진 재환은 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빤한 눈빛 한 번에 마음이 녹아내리기가 일쑤였는데, 한영에게 말로도 상대가 안 된다면 그건 조금 큰일이었다. 하여 설핏 착잡한 표정을 짓자, 배시시 웃은 한영이 톡 코끝을 맞대어 왔다. 말랑하게 뼈가 솟은 부위를 살살 비비며 쭉 입술을 내밀었다. 괜히 몇 번 눈을 굴린 재환은 결국 못 이기는 척 한영에게 쪽 입술을 부딪쳤다. 원하는 바를 얻어 내 제자리로 돌아갈 줄 알았던 얼굴이 어째서인지 꼼짝을 안 했다. 따뜻한 숨결이 인중을 스쳤다.
“재환아.”
“왜.”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역시 상대가 꽤나 엉큼한 남자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었다. 재환 기준에서 상당히 부끄러운 질문을 던진 한영은 답을 기다리듯 투명한 눈동자를 반짝였다. 재환을 항상 곤란하게 하던, 집요함과 순수함이 적절히 섞인 예의 그 눈빛이었다. 참 난감했다. 난감해도 어쩌겠는가. 과거에도 무시 못 했던 걸 이제 와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재환은 머뭇머뭇 입을 뗐다.
“…처음부터.”
“어?”
한영의 얼굴이 일순간 얼뜨게 변했다. 눈은 휘둥그레 뜨이고 입은 벙긋이 벌어졌다. 기껏 대답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기 딱 좋은 반응이었다. 애써 무심함을 가장한 재환은 가라앉은 투로 다시 대꾸했다.
“처음 너 봤을 때부터 그랬다고.”
“정… 말이야?”
“뭐 하러 거짓말해. 근데 그땐 잘 몰랐지. 그냥 네가 너무 잘생기고, 노래도 잘하니까 놀란 건 줄 알았어.”
“아….”
붉은 입술이 보다 크게 벌어졌다. 딱히 더 들려줄 말이 없어, 재환은 휙 뒤로 돌아누웠다. 벽 쪽으로 몸을 붙이자 금방 등에 더운 체온이 닿아 왔다. 목덜미에 몰캉몰캉한 살점이 문질러졌다.
“나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리지?”
“아냐.”
“맞아.”
“아니래도.”
유치하고도 남사스러운 실랑이는 통통한 엉덩이 사이로 쑤욱 굵다란 성기가 미끄러져 들어갈 즈음에서야 멎었다. 증명해 보라느니, 내 말이 증거라느니 하는 유아적인 대화가 오가던 자리에 흥분으로 점철된 숨소리가 퍼졌다. 침대가 삐거덕거리고, 땀이 샘솟고, 타액이 뒤섞였다. 그렇게 또 묽은 정액을 싸지르고 나면,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딱히 주제가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소곤거렸다. 이 또한 지나간 시간을 서로의 색으로 한 칸 칠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한영은 주로 음악 일을 하며 겪었던 바를 재환에게 들려주었다. 그중의 대부분은 막 데뷔했을 적 회사에서 왕창 깨진 일화들이었다. 재환이 이미 메일에서 읽은 내용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다. 여하간 말만 들어도 어지간히 여기저기서 혼났구나 싶었다. 조용히 듣고 있다 ‘혼자 많이 힘들었지?’ 하고 묻자, 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한영처럼 조곤조곤 말하는 재주는 없었으나, 재환도 나름 그 사이사이 제 얘기를 꺼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회사가 얼마나 좆같았는지, 거기 있던 상사가 얼마나 재수 없었는지, 또 월급은 얼마나 짰는지…. 말하다 보니 불평불만만 넘치는 인간이 된 것 같아 재환은 조금 창피해졌다. 한영이 ‘그래도 재환이 넌 엄청 열심히 일했을 거 같아.’라고 했을 땐 공연히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그 재수 없는 상사 앞에 사표를 던지고 유학 다녀온 이야기를 한 다음에는 문득 주변 사람 생각이 났다. ‘맞다.’ 하는 서두로 말을 시작한 재환은 이전 일하던 카페의 사장님이 독일로 건너가 남자 친구와 결혼한 소식을 한영에게 전했다. 제법 집중해 듣던 한영은 재환의 눈치를 보다 살그머니 ‘우리도 나중에 거기 가서 결혼할까?’ 하고 물었다. 아마도 ‘시끄러워, 유한영’ 같은 답을 예상했으리라. 그러나 재환이 내놓은 말은 저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의외인 것이었다.
그럴까.
한영은 재환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 * *
밥 먹고, 욕실을 들락거리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이 침대 위에서 흘러갔다. 대부분은 몸이 연결되어 있는 채였고, 그렇지 않으면 마주 보고 누워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방해물은 조금도 끼어들 수 없는, 오직 서로로만 가득 찬 시간이었다.
세 번 달이 뜨고, 네 번째 해가 떠오른 날 아침. 여지없이 알몸으로 침대에서 일어난 재환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옆자리를 살폈다. 시트가 어렴풋이 팬 자국이 그곳에 사람 하나가 더 누워 있었음을 알려 주었다. 물론, 딱히 흔적이 없더라도 더 이상 재환은 지난밤의 애틋한 섹스를 꿈으로 치부하며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대신, 대충 바지를 주워 입고 어깨에 집업을 걸친 뒤 슬렁슬렁 방 밖으로 나섰다. 동시에 자신과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던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재환은 작게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는 곳으로 발을 틀었다.
작업실 문 앞에 멈춰 선 재환은 딱 손톱만큼 틈이 벌어진 문을 살짝 뒤로 밀었다. 그 기척에 책상 앞에 앉아 허벅지에 새빨간 기타를 올리고 있던 한영이 고개를 들었다. 기타를 연주하는 소리도 함께 멎었다.
“깼어?”
“응.”
재환은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문틀에 어깨를 기댔다. 딱딱한 나무 면에 툭 옆머리를 붙이고서 한영에게 ‘계속 안 쳐?’ 하고 물었다. 한영은 조금 우물쭈물했다.
“아침… 먹어야 하지 않아? 내가 차릴게.”
“배 별로 안 고파. 그냥 너 기타 치는 거 볼래.”
지난 며칠간, 재환은 몇 번인가 잠귀에 기타 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영이 내는 소리임을 알았으나, 온몸에 팽배한 섹스의 여파로 꼼짝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탓에 오늘에야 처음으로 기타를 쥔 한영을 보았다. 이런 귀한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재환의 눈빛으로 그 뜻을 능히 짐작한 듯, 쑥스럽게 웃은 한영은 기타 넥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다시 자리를 잡았다. 가볍게 심호흡한 후, 곧이어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꼭 누구의 취향을 노린 것처럼 리버브가 넉넉히 들어간 기타 음이 울려 퍼졌다.
한영이 연주하는 아르페지오 리프는 꼭 저같이 멜로디가 곱고 예뻤다. 지판 위를 오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럽고 능숙했다. 이를 지그시 지켜보는 재환의 마음속으로 어느덧 말 못 할 설렘과 먹먹함이 흘러들었다.
지금의 한영에게서는 지난날 분홍 머리칼을 흔들며 키보드를 치던 시절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으며 무대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하던 모습이 함께 비쳤다. 과거의 유한영과 현재의 유한영이 공존하였다. 그 유한영이 사방이 시꺼멓고 좁은 자신의 작업실 가운데서 새빨간 텔레캐스터를 연주하고 있었다. 두 눈이 의심될 만큼 생경한 광경 같다가도,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끼워진 것처럼 완벽한 그림으로 보이기도 했다. 재환은 감히 저 풍경의 한 부분이 되고 싶었다.
짧은 연주를 끝낸 한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작은 얼굴 가득 ‘괜찮았어…?’ 하는,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기대감 같은 것이 서렸다. 하지만 재환은 괜찮고 좋았다는 말 대신, 전혀 다른 말을 꺼내고 말았다.
“유한영. 우리…, 밴드 할까?”
염치와, 분수와, 주제를 모두 벗어 던진 한마디가 툭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저 자신조차 막을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충동적인 기분에 잠겨 뱉어 버린 말은 결코 아니었다. 무려 8년이나 가슴 한구석에 꽁꽁 움키고만 있던 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재환이 한영에게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용서였다. 설사 모진 힐난과 칼 같은 거부가 내려진대도 재환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재환아.”
“난… 그러고 싶어. 그냥 너 남는 시간에라도….”
그럼에도 계속 한영과 눈을 맞추고 있기가 어려워 결국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마든지 더 그럴듯하게 말할 방법이 있을 텐데, 잘나가는 뮤지션에게 시간 남으면 밴드나 하자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하지만 부끄러움과 창피를 가린 손은 얼마 가지 못해 다정한 손길에 의해 거두어졌다. 어느새 기타를 내려놓고 일어선 한영이 코앞에 있었다. 그것도 환히 웃으며.
“정말이지? 진짜지?”
“어, 어…?”
“정말 나랑 밴드 할 거지?”
그러더니 아예 두 팔을 크게 벌려 와락 재환을 끌어안았다. 그 힘이 얼마나 억센지, 순간 이쪽이 무슨 말을 꺼냈나 잊어버릴 정도였다. 한순간 이마에, 뺨에, 입술에 소나기처럼 우수수 입맞춤이 쏟아졌다. 피할 틈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재환의 혼이 반쯤 빠져나갔을 무렵에야 한영은 그를 놓아주었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길게 입 맞추고서 양어깨를 꽉 그러쥐었다. 마이크를 대었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외침이 터졌다.
“사랑해, 재환아!”
귀청이 따가웠다. 정작 물어본 것에 대한 답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재환은 한영을 따라 웃고 있었다. 눈가를 벌겋게 물들이고서 픽픽 웃었다. 그렇게 저도 모르는 새, 재환은 둘 사이에 남은 가장 큰 한 칸을 고운 분홍빛으로 채워 넣었다.
나흘이었다. 사랑하는 한 사람과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던 시간이 꼬박 나흘이었다. 공연 후 무기한 오프를 받았다는 한영이야 그렇다 쳐도, 재환에게 있어서는 실로 정신 나간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손도 대지 못한 일거리가 그득그득 쌓여 있었으며, 제대로 답 못 한 연락도 수두룩했다. 반대로 냉장고 안 먹을거리는 똑 떨어졌다. 한영이 끓인 북엇국마저 없었으면 몇 날 며칠 손가락만 빠는 신세가 되었을 뻔했다. 결국, 옷 입고 있던 시간보다 알몸으로 부대꼈던 시간이 더 길었던 두 사람은 한참 늦게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
간밤 봄비라도 내린 듯, 오랜만에 걸어 보는 골목길 바닥이 촉촉이 물기에 젖어 평소보다 짙은 색을 띠었다. 그 위로 드문드문 본래 색을 잃은 벚꽃 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높이 드리운 나뭇가지에는 언제 꽃을 한가득 피웠냐는 양 연녹색 잎사귀뿐이었다.
꽃이 폈던 흔적만 남은 풍경을 바라보는 재환의 머릿속에 무심코 ‘아쉽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올해는 유독 벚꽃이 참 예뻤던 것 같은데, 이제는 영락없이 내년 이맘때를 기약해야 했다. 그러다 자신이 참 답지 않은 감상에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솔직한 말로, 재환에게는 아무리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도 곧 낙화하여 길바닥을 지저분하게 만들 존재로 비치곤 했다. 속 편하게 꽃구경할 여유가 있는 삶을 살지도 못했을뿐더러, 애초부터 감성이 풍부한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땅으로 돌아간 꽃송이들을 퍽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었다.
“벚꽃 다 졌네. 예뻤는데 아쉽다.”
그런 기분에 잠겨 있던 게 저 혼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앞을 보고 걷던 재환은 고개를 틀어 곁에서 함께 걷는 이를 시야에 담았다. 재환과 눈이 마주친 한영이 살포시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근데 내년에 또 필 거니까. 괜찮아.”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던 재환은 부드러이 입꼬리를 올리며 ‘맞아.’ 하고 짤막하게 동의했다. 축축한 땅바닥을 밟는 걸음이 어째서인지 가볍게 느껴졌다.
해를 가렸던 구름이 살짝 비켜나며 좁은 골목길로 제법 화사한 빛살이 내려앉았다. 몇 걸음 걸러 눈에 띄는 담배꽁초, 담벼락에 기대어 늘어선 퍼런 쓰레기봉투, 통행을 방해하고 세워진 낡은 자전거…. 여전히 예쁘다거나 깔끔한 것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지만, 문득 재환은 이 풍경이 포근하고 아늑하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이 길을 함께 걸을 한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주 먼 과거, 이 자리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입 맞췄던 순간을 인제는 마음껏 떠올려도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기꺼이 추억에 빠질 수 있었다. 그 위로 새로운 기억을 한 단 한 단 쌓아 올리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다. 유한영 너와 함께라면.
골목을 따라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반듯하게 돌길이 난 정원을 지나, 클럽 앞 오르막길을 훑고, 우상 같은 밴드의 노래가 퍼지던 공연장을 감고 돌아 다시 두 사람 사이를 스쳐 갔다. 바람에서는 눅눅한 땅 냄새가 났다. 얼마 안 가 맴맴 매미 우는 계절이 찾아올 것을 넌지시 일러 주는 냄새였다.
그 계절이 지나가면 어느덧 낙엽이 지고, 소복소복 눈이 쌓일 것이다. 또 한 살 나이를 먹고, 초록색 이파리만 남은 나뭇가지에 다시금 꽃이 필 것이다. 그날에도 오늘과 같은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고, 재환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당한 행복과 적당한 안정, 그리고 적당한 설렘을 안겨 주는 그런 풍경이.
계속해서 야트막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재환의 손을 슬쩍 옆으로 떠밀었다. 보송보송한 손등에 손가락이 닿은 순간, 그 아래로 휙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을 오므려 꽉 깍지를 꼈다. 포개어진 살결 사이로 서로 긴 시간을 간직해 두다 비로소 하나가 된 마음이 따스하게 고였다.
“시장 가서 뭐 살 거야?”
“뭐 먹고 싶은데.”
“다 사 주려고?”
“봐서.”
“그럼 나 슬러시.”
참 야무지고도 소박한 소망을 말하는 연인의 들뜬 모습에 재환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한영도 재환을 따라 웃었다. 저 높이 마지막 한 장 매달려 있던 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져 다정히 스치는 어깨에 앉았다. 사랑스러운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