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Epilogue (26/29)

5. Epilogue

종전까지 환호와 열광이 가득했던 공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적막이 흘렀다. 누군가는 두 손으로 입가를 막고, 또 누군가는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었다. 표정에는 하나같이 적잖은 충격이 서렸다. 그 가운데 무대 중앙에 선 한 사람만이 빙긋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잔잔히 웃는 얼굴로 흡사 폭탄과 같은 발언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그래서 저는 솔로 활동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해요.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노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요.”

‘어떡해’라거나 ‘안 돼’의 의미가 담긴 탄식이 슬슬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는가 싶더니 이내 장내 전체에 수런거림이 번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에 와서 은퇴 선언을 듣게 되리라고 기대한 이는 아마 단 한 명도 없었을 터다. 그나마 뒤에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졌을 때에서야 일부 관객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그래 봤자 확신을 주기에는 한참 모자란 말이라, 클럽의 공기 중을 떠다니는 아쉬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를 달래 주려는 듯 무대에 선 가수는 손에 있던 피크를 고쳐 쥐었다.

“마지막으로 ‘Memory of You’ 들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피크가 부드럽게 줄을 긁으며 딜레이가 적절히 걸린 화음이 울려 퍼질 때, 클럽을 벗어난 재환은 오늘 공연의 포스터가 연이어 붙어 있는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아까 그렇게 뜀박질을 한 것치고는 보도블록을 내딛는 걸음에 비교적 기운이 있었다. 단, 시선은 다소 멍하니 길바닥을 향했다. 대체 언제 모자를 잃어버렸을까 생각하느라 그랬다. 클럽을 나오기 위해 다시 사람들 틈을 헤치던 중 손에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그럭저럭 아끼는 것이었는데, 퍽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여기 와서 애먼 모자만 버리고 가는구나,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재촉할 즈음이었다. 등 뒤에서 묘하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발을 멈추고서 퍼뜩 뒤를 돈 재환의 얼굴에 당황과 놀라움, 반가운 기색 등이 한꺼번에 서렸다. 눈과 입이 모두 커다래졌다.

“정희연…?”

놀랍게도, 재환 앞에서 무릎을 짚은 채 학학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는 예전 카페 A’Clock에서 함께 아르바이트하던 희연이었다. 당시만큼 앳된 느낌은 없었으나, 생김새나 분위기가 그대로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보다 훨씬 짧아진 머리 정도였다.

“오빠 걸음이 왤케 빨라요…! 클럽 입구에서 보고 엄청 쫓아왔네.”

“아, 미안. 몰랐어.”

희연은 ‘에이, 미안할 건 아니고…!’ 하며 팔랑팔랑 손부채질 했다. 과거를 연상시키는 행동에 재환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 얼른 웃음을 갈무리하고 물음을 던졌다.

“오늘 공연 보러 왔었어?”

“아, 네. 바빠 죽겠는데 채희성 걔가 하도 오라고 난리 쳐서요. 안 그래도 기사 마감 때문에 앵콜 다 못 보고 먼저 나오는 길이에요. 아, 저 신문사에서 일하거든요.”

조잘조잘 이어지는 희연의 답변을 듣던 재환의 얼굴에 설핏 의문이 떠올랐다. ‘희성’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오늘 오프닝 무대에 섰을 코스믹 라테의 보컬 희성과 희연의 접점이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재환이 기억하는 건, 과거 희성이 본인에게 관심이 있다는 언질에 희연이 난색을 표했던 일 정도였다.

“희성이? 희성이랑 연락하고 지내?”

‘어….’ 하며 잠깐 머뭇거리던 희연이 눈을 굴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오빠 모르셨어요? 저 희성이랑 만난 지 되게 오래됐는데. 한 6, 7년 됐나. 걔가 얘기 안 해요?”

입이 벙긋이 벌어진 재환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금시초문이었다. 희성과는 꾸준히 연락을 하며 지냈고, 심지어 2달 전쯤에는 믹싱을 끝내고서 함께 술 한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또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눈을 도르르 굴리던 희연이 이내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외쳤다.

“그, 제가 옛날에 오빠한테 차였잖아요. 괜히 쪽팔려서 오빠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희성이한테 막 진상 부리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아직도 말 안 했었나 보다.”

‘으휴, 바보…!’ 하고 밉지 않은 타박을 덧붙인 희연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대충의 상황이 이해된 재환은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멋쩍게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함께 밤길을 걸으며 도란도란 그간 하지 못한 대화를 나누었다. 희연은 대학 졸업 후 잠깐 방송국 입사를 준비하다 아예 신문사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재환은 밴드를 관둔 뒤 믹싱 기사로 일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간략히 추려 서로에게 전했다. 그러자 희연은 ‘더 숨 노래 좋았는데….’라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대화는 희연과 희성에 관한 내용으로 넘어갔다.

“아니, 락페에 갔는데 딱 옆자리에 있는 거예요. 왜, 흔들다리 효과라 그러잖아요. 같이 공연 보면서 흥분하다 보니까 희성이 걔가 막 잘생겨 보이더라고요? 미쳤지, 증말…!”

말로는 툴툴거리면서도 과거를 반추하는 희연의 얼굴은 어느덧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남자 친구와의 사이가 여전히 좋음을 넌지시 짐작하게 하는 표정이었다. 옆에서 걷던 재환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번졌다.

“오빠는 애인 있어요?”

그 미소가 금세 힘 빠진 웃음이 되었다. 재환은 아니, 하고 답하며 두어 번 얼굴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사귄 게 언제였는지…,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것도 나름 제게 내린 저주라면 저주인 것 같았다. 냉정히 생각해 봤을 때 꽤나 통탄할 일이었다.

“진짜요? 오빠 지금도 인기 엄청 많을 것 같은데. 아, 근데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재환이 가뿐히 응, 이라고 대답하자 희연은 잠시간 입술을 달싹이며 어물거렸다. 자연스레 뭘 물어보려고 저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희연의 입이 열렸다.

“왜, 옛날에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 그랬었잖아요. 그다음에 혹시 어떻게 됐나 해서….”

재환은 기억을 더듬어 오래전 희연과 한강 변을 걸으며 그러한 얘기를 한 적이 있음을 떠올려 냈다. 다만, 그 상대와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적이 복잡한 내용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재환은 그냥 간단한 말로 답하는 쪽을 택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명확해진 진실이기도 했다.

“아직도 좋아해.”

‘우, 우와….’ 하며 희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사람만 근 10년을 바라본 셈이니 저리 기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인 보기에도 징글징글한데, 다른 사람 입장에선 오죽할까. 다행히도 얘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되었다.

“아, 오빠. 전 저기서 버스 타요. 회사까지 한 번에 가서. 그럼 또 봐요!”

“그래.”

어느새 정류장에 다다른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만간 희성과 셋이서 보자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마침 도착한 버스에 총총 올라타는 희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재환은 버스가 출발한 후 지하철역을 향해 마저 걸었다.

뜻밖의 만남이 준 설렘은 생각보다 길게 가지 않았다. 역에서 나와 집 근처를 걸을 때 즈음이 되어서는 모두 휘발되었다. 결혼식에, 축가에, 뒤풀이에, 갑작스러운 공연 관람까지. 기나긴 하루가 안긴 피로가 그 자리에 한꺼번에 몰려와 재환의 어깨를 짓눌렀다. 집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다리가 자꾸 처지고, 쌕쌕 호흡이 거칠어졌다. 결국 골목 귀퉁이에 멈춰 선 재환은 잠시라도 쉴 겸 느리게 담배 한 대를 피웠다. 하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쉰 만큼 집이 더 멀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재환은 집에 구태여 서둘러 갈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누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하여 어두운 길가에 홀로 환한 빛을 밝히고 있는 편의점으로 발을 틀었다.

딸랑딸랑 풍경을 울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평소와 다름없이 곧장 맥주 코너로 갔다. 냉장고에서 재빨리 표면이 시꺼먼 캔 두 개를 꺼내 저벅저벅 계산대로 향했다.

“어, 안녕하세요.”

이쪽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마찬가지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 재환은 카드를 건넸다. ‘담아드릴까요?’ 하는 물음에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계산이 끝난 맥주 캔을 덜렁 집어 들고 편의점을 나와 입구 바로 옆에 있는 파라솔로 직행했다.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철퍽 주저앉자마자 재환은 캔부터 땄다. 휙 고개를 뒤로 젖혀 꿀꺽꿀꺽 맥주를 삼키자 절로 캬, 소리가 나왔다. 막 냉장고에서 나온 맥주는 그야말로 시원함이 일품이었다. 솔솔 불어오는 밤바람이 온몸에 감돌던 더위까지 식혀 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앞 담벼락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에 벚꽃까지 소담하게 피어 있어 흔한 골목길치고는 경치가 제법 나쁘지 않았다.

그 결과 다음 모금도, 그다음 모금도 맥주는 아주 술술 넘어갔다. 괜히 술이라는 명칭이 붙은 게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가지를 안주 삼아 재환은 주전부리 하나 없이 금세 맥주 한 캔을 비웠다. 두 번째 캔의 꼭지 밑으로 엄지를 밀어 넣을 무렵이었다.

“저….”

휙 고개를 돌린 곳에 아르바이트생이 서 있었다. 재환이 ‘네?’ 하며 답하자 그녀가 재환 앞에 머뭇머뭇 가늘고 길쭉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노란색 스틱형 소시지였다.

“드세요.”

재환이 엉겁결에 소시지를 받아 들자마자 홱 뒤를 돈 아르바이트생이 편의점 안으로 사라졌다. 급히 열렸다 닫힌 유리문이 한참이나 앞뒤로 왔다 갔다 했다. 이런 걸 얻어먹고자 전에 커피를 건넨 게 아니었는데, 조금 머쓱해진 재환은 두어 번 뒷목을 긁적거렸다.

뜻하지 않게 공짜 안주를 얻은 재환은 인심 좋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속으로 고마움을 전하며 맥주를 이어 마셨다. 그러다 핸드폰을 꺼내 아까 통화했던 친구와 어머니에게 한참 늦어진 메시지를 남겼다. 이후 별 의미 없이 최근 통화 목록을 죽 훑다가 도로 핸드폰을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하늘거리던 나뭇가지에서 팔랑팔랑 꽃잎 몇 장이 떨어졌다. 사위가 고요했다.

그 탓이었을까. 미약하게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만 흘러들던 재환의 귓가에 조금씩 이 주변에서 날 리 없는 소리가 담기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쾅 내리찍는 스네어의 타격음이라든가, 둥둥거리는 베이스의 저음이라든가, 공간감이 한껏 살아난 기타 사운드라든가…. 거기에는 사람들의 환호성도 조금 섞여 있었다. 물론 가장 크게 울리는 건 심장을 콱콱 주무르던 노랫소리였다.

단 두 곡의 무대를 보고도 이런데 더 자리를 지켰으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오늘 밤 잠도 들지 못할 정도로 후유증이 남았을 것 같았다. 사실, 지금도 그럴 위험을 설핏 느껴 미리 술을 마셔 두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안 그러면 그의 목소리가, 눈빛이, 미소가 밤새 생각날 게 분명했다. 곡 후반부의 가사가 흐르는 내도록 서로 시선이 닿아 있던 탓에 더욱더 그랬다.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직, 아스팔트 바닥에서 의자를 끌며 일어선 재환은 빈 캔 두 개를 품에 안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곳에 캔을 집어넣은 뒤 아르바이트생에게 ‘소시지 잘 먹었어요.’ 하는 인사를 건넸다. 아르바이트생은 ‘아. 네,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처 편의점 근처에서 담배 한 대를 더 피운 재환은 슬렁슬렁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맥주를 연료 삼아 채워 넣은 덕에 아까처럼 마냥 걸음이 죽죽 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간간이 낮게 쏟아지는 한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명치 부근이 계속 답답했다. 내일 아침 제가 어떤 기분으로 눈 뜰지 조금도 예상이 가지 않은 탓이었다. 몇 번을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일상적인 하루를 맞이할지, 이불 속에 숨어 꺽꺽 그리움과 후회를 삭일지.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듯해 재환은 더럭 겁이 났다. 뭐, 양복 주머니에 티켓을 욱여넣고 집을 나서던 순간부터 어느 정도 각오한 미래이기는 했다.

이리도 갑갑한 마음과 상관없이, 아까부터 재환의 머리 위로는 몽글몽글한 꽃송이가 만들어 낸 분홍색 터널이 이어졌다. 새카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두고 있어 솜사탕 같은 꽃의 빛깔이 유독 더 곱게 비쳤다. 괜히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재환은 모자가 없어져 허전한 머리를 매만지며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저 앞에 익숙한 빌라 건물이 보일 즈음이었다.

그럭저럭 일정한 속도로 나아가던 걸음이 차츰 느려지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 두 다리가 좁은 길 한복판에 우뚝 멈추어 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볍게 머리칼을 만지던 손이 허벅지 옆에 딱 붙어 움칠거렸다. 빠른 속도로 눈꺼풀이 내려왔다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당장 제 시야에 잡히는 형상을 곧이 믿지 못해 나타난 반응이었다. 더불어 급격하게 치솟은 심장 박동이 귓속의 고막을 쿵쿵쿵 진동시켰다.

저 길쭉한 인영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가는 머리칼도,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도 다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왜’라거나 ‘어째서’와 같은 물음을 떠올리기에는 사고가 온전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머릿속이 빠르게 표백되었다.

한 사람이 이토록 얼이 나가 멍청히 제자리를 지키는 동안, 무채색의 빌라 앞을 지키던 한 사람의 몸이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달큼한 향기를 품으며, 가까운지 먼지 가늠을 할 수 없는 거리에서 시선이 얽혔다.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모든 것이 정지했다.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꽃잎 한 장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시간이 멈춘 모양이었다. 간절한 희망이 빚어낸 착각이었다.

휙 부는 바람을 타고 가지를 떠난 꽃 이파리 몇이 너붓너붓 흩날렸다. 그 아래 영영 머물기를 바랐던 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질수록 잠깐 주춤하는가 싶었던 온몸의 이상 신호가 배로, 곱절로 극심해졌다. 삽시에 열이 몰린 눈가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속에서는 간절한 한마디가 거듭되었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가까이 오지 마….

소리를 입지 못한 외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사이 상대는 불과 몇 발짝 거리까지 다가왔다. 더는 몰아치는 혼란을, 짙어지는 향기를 견딜 수 없던 재환은 끝내 털썩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일시에 주저앉았다. 이윽고 두 손으로 더러운 길바닥을 짚는 순간, 와르르 댐이 무너진 것처럼 오열이 터졌다. 어찌 손써 볼 틈이 없었다.

“후, 윽….”

순식간에 땅을 디딘 손과 그 주변, 그리고 팽팽히 늘어난 양복바지의 무릎 부근이 얼룩덜룩한 눈물방울로 뒤덮였다. 봇물 터지듯 줄줄 흘러내린 눈물이 아래를 보는 코끝에서, 파르르 경련하는 입술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움츠러든 어깨가 안쓰럽게 들썩거리고, 무너지는 상체를 지탱한 팔뚝이 바들바들 흔들렸다. 눈물샘을 비롯한 몸의 온갖 군데가 한꺼번에 고장 난 것 같았다. 저 깊숙한 곳에서 왈칵왈칵 솟구치는 흐느낌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한참 모자랐다.

자그마치 8년을 참아 왔던 눈물이었다. 그 긴 시간을 억눌러 왔던 울음이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눈두덩이에 팔뚝을 얹고 가슴을 들썩일지언정, 멀쩡히 작업하다 푹 고개를 떨굴지언정, 시도 때도 없이 아랫입술을 깨물어 피를 볼지언정 재환은 그동안 절대 눈물을 꺼내지 않았다. 거짓말 같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부풀 대로 부푼 풍선에 뾰족한 바늘을 갖다 대는 것처럼 그것이 위험한 일임을 알았다. 눈물 한 방울에 어렵게 일구어 낸 일상이 우르르 무너질 수 있음을 알았다. 나는 울 자격이 없어서, 아파할 자격이 없어서. 이따위 말들은 사실 모두 변명에 불과했다. 제가 겁 많은 인간이라 그저 무서웠을 뿐이다.

그랬던 노력의 순간들이 이다지도 손쉽게 허사가 되었다. 차라리 그렇게 아등바등 애쓰지나 말걸. 재환은 미련한 고집을 피웠던 저 자신이 꼴사납고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심하다 손가락질해야 할 일은 아직 더 있었다. 길게 읊을 것도 없었다. 질문 하나면 설명되었다.

왜 이 골목을 떠나지 못했는가.

기다렸다. 기다리지 않았지만 기다렸다. 꽃잎을 맞으며, 비를 맞으며, 눈을 맞으며 골목 한편에 서 있는 키 삐쭉한 남자의 모습을 수도 없이 그렸다. 당연히 일어나지 않을 일이겠으나, 솜털 한 올 같은 희망을 품었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현철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기타를 손에서 놓지 못한 것도 결국은 다 그러한 기다림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막상 희망이 현실이 되어 버린 지금, 재환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콧속으로 들이치는 향기마저 가슴을 할퀴는 쇄편이 되었다. 반가움과 두려움, 기쁨과 후회, 그리움과 괴로움이 상충하며 쉬지 않고 꺽꺽거리는 숨을 토하게 했다. 차라리 손과 무릎을 대고 있는 바닥으로 가라앉고 싶었다.

그때였다. 물기에 절어 어룽어룽 흐무러진 시야에 천천히 무릎 꿇는 두 다리가 잡혔다. 곧이어 새하얀 손이 뻗어 와 부드럽게 양어깨를 감쌌다. 심장이 뭉그러질 듯한 온기에 흠칫 어깨가 옹송그려지는 찰나, 마이크도, 스피커도 거치지 않은 낮고도 간지러운 목소리가 사르르 귓가를 파고들었다.

“재환아.”

아아. 들어서는 안 될 음성이었다.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속삭임이었다. 한때 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조차 듣지를 못해 편의점에서 도망치고, 카페에서 도망치고, 식당에서 도망쳤건만 이번에는 미처 그럴 겨를이 주어지지 않았다. 재환은 더 거세게 헐떡거리며 주룩주룩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리하여 눈앞은 온통 흐릿흐릿함에도, 청각은 멀쩡히 살아 있어 또 한 번 흘러드는 감미로운 목소리를 대비도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재환아.”

“후, 으…. 윽….”

아이를 어르듯, 연인을 달래듯 상냥한 부름은 턱 끝에 주렁주렁 눈물이 매달린 얼굴을 더욱 아래로 수그러들게 만들었다. 언어를 상실한 입이 들숨과 날숨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불규칙적으로 뻐끔거렸다. 채 목구멍으로 삼키지 못한 묽은 침이 뚝뚝 떨어져 사방에 얼룩진 눈물 자국에 섞였다. 그 꼬락서니가 상대에게 적잖이 안쓰럽게 비친 모양이다.

“서재환 씨. 잘생긴 얼굴 좀 들어 보세요. 응…?”

기가 막혀 더한 울음, 헛숨이 비어졌다. 하지만 곧게 뻗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턱 아래를 받치는 순간, 미약한 도피는 허무한 끝을 맞이했다. 8년 전 좋아하던 밴드의 라이브를 들으며 악착같이 숨어 있던 그날과는 달랐다. 느리게 고개가 들리고,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못난 얼굴이 서서히 달빛에 노출되었다. 일그러지고 어긋난 표정이 자애로운 눈빛 앞에 속수무책으로 드러났다. 더는 숨을 곳이 없었다.

“흐윽, 으…. 끅….”

“재환아….”

여전한 애정으로 점철된 시선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가만가만 살폈다. 뒤따라 기다란 엄지가 폭삭 젖은 눈가를, 뺨을, 입술을 차례로 훑었다. 흐리게 번졌던 시야에 차츰 초점이 잡히고, 비로소 또렷또렷 선 고운 이목구비가 눈에 담겼다. 눈 감고도 보고, 꿈속에서도 보고,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도 보았던 얼굴이 숨결이 맞물릴 거리에 있었다. 도톰한 입술이 달싹이며 사람의 심장을 작신작신 주무르는 목소리가 재차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나 오늘 어땠어? 멋있었어…?”

그사이에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하얀 엄지가 부지런히 훔쳐 갔다. 엄지로는 모자라 손바닥과 손등으로 뺨을 살살 문지르기도 했다. 다만 지나치게 다정한 손길은 재환의 눈물을 멈추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에 더 자르르한 통증을 퍼뜨렸다. 어깨가 계속해서 들썩거리고, 끅끅거리는 소리가 샜다. 그러든 말든 상대는 영 답할 상황이 되지 못하는 재환에게 연이어 끔찍이도 달콤한 물음을 속삭였다.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과거의 말씨를 흉내 내며, 은근하게 답을 독촉했다.

“나 멋있었어? 응…?”

결국 재환은 상대의 손에 고스란히 얼굴을 맡긴 채로 굼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하고 답했던 것 같기도 한데 목소리가 원체 나지 않아 확신은 없었다.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운 듯 붉은 입술이 얇게 펴지며 환한 미소가 내걸렸다. 저 밤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달보다도 밝은 미소였다. 저토록 눈부시게 웃는 얼굴로 상대는, 한영은 숫제 재환을 보다 궁지로 몰아넣을 마지막 한마디를 흘려 넣었다.

“그럼 키스해 줘, 재환아.”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밤중이라지만 이런 길바닥에서, 그것도 더럽게 눈물 콧물로 얼굴을 칠갑한 사람에게 할 요구가 아니었다. 아니, 그 전에 둘 사이에는 풀어야 할 이야기가, 전해야 할 말들이 많았다. 아마 산처럼 쌓여 있을 터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도리질 쳐야 하건만, 재환은 숨 막히는 향기를 풍기며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말간 얼굴을 피하지 못했다. 어쩌면 무대 위 대상으로 영원히 남겼어야 할 그에게 짭조름히 물기가 스민 입술을 내어 주고야 말았다.

포근포근한 감촉을 품은 입술이 조심스레 맞물리고, 다시금 주룩 흘러내린 눈물이 젖은 뺨을 갈랐다. 그 위로 따뜻한 손바닥이 덮이며, 맞닿은 입술 사이로 살그머니 나온 혀가 찬찬히 눈물을 핥아 갔다. 재환은 입술을 움칠움칠 떨면서도 그 간지러운 접촉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숱한 세월 동안 눈앞의 남자로부터 도망치는 데에 조금 지친 탓도 있었고, 이제는 다 포기하고픈 마음이 든 탓도 있었다. 아무리 멀리 달아난다 한들 상대는 다시 저를 찾아낼 것을 알았고, 저 또한 결국 그가 올 마지막 길을 열어 둘 것을 알았다.

촉, 초옥 부드러운 점막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차츰 커졌다. 입술의 각도가 틀어질 때마다 뾰족한 코끝이 스치고, 아슬아슬 생긴 틈으로 미약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채 가라앉지 못한 울음소리일 수도 있었으나, 어쨌든 재환은 조금씩 웃음이 났다. 이 꼴로 너의 입맞춤을 받아 내는 내가 우스워서, 이 꼴을 한 남자에게 이리도 정성스럽게 입 맞추는 네가 우스워서. 우리의 지난 시간이, 오늘이 다 우스워서 피식피식 아릿한 웃음이 흘렀다. 한영은 그 웃음마저 곱게 머금어 보드라운 숨결로 되돌려 주었다. 따뜻하고 달짝지근했다.

양옆으로 회색 담벼락이 둘린 골목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은 두 남자는 어느덧 서로의 목덜미를 붙잡고 달아오른 숨을 나누었다. 호흡이 점점 밭아지며 입술이 맞붙은 면적이 넓어졌다. 격하게 비벼지는 살점 사이에서 조급하게 혀가 얽히고, 뜨거운 타액이 함께 섞여 들었다. 8년을 기다린 입맞춤이었으나, 바로 어제 나누었던 듯한 입맞춤이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이 벅찬 감각을 지나치게 생생히 기억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이윽고, 솔솔 부는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춤추던 꽃잎 한 장이 흐릿하게 모자 자국이 남은 머리칼 위로 안착했다. 천천히 재환에게서 입술을 떨어뜨린 한영은 뜨겁게 열이 오른 목 언저리를 두 손으로 꼬옥 감싼 채 콩 이마를 맞대었다. 나눠 가진 들썩임이 얇은 셔츠에 감싸인 어깨를 느리게 위아래로 오르내리게 했다. 한층 붉은 기운을 머금은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재환아.”

“…응.”

바람이 조금 세지자 새카만 머리카락에 붙었던 꽃잎이 단숨에 휙 날아갔다. 그리고,

“좋아해.”

솨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비가 내렸다. 과거 첫눈에 한 사람의 넋을 빼앗아 갔던 누군가의 머리칼처럼, 어여쁜 분홍빛으로 물든 꽃잎이 우수수 비가 되어 내렸다. 까만 하늘을, 약속한 듯 서로를 와락 끌어안는 두 남자의 주변을 찬란한 색채로 수놓았다.

아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함께 맞게 될 벚꽃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Reverb - Epilogue〉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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