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 *
참 이상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게 좆같은 일은 사람을 피 말리듯 한꺼번에 찾아왔다. 지금 밴드의 상황이, 재환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우선, 대회가 끝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태군에게 영장이 날아왔다. 심지어 그의 생일날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 태군은 어떻게든 미뤄 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누구도 선뜻 알았다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밴드가 잘나가고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오히려 그나마 얻었던 기회도 제 발로 차 버린 형국에, 지금으로선 솔직히 밴드의 미래를 무조건 낙관하기 어려웠다. 태군을 붙잡을 구실이 없었다. 붙잡는다고 군대를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환 개인적으로는, 미루고 미루다 결국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다녀와야 했다. 그래도 아빤데…, 그래도 네가 아들인데…, 하는 어머니의 애원을 무시하지 못한 결과였다. 다만 시커먼 낯빛으로 병상에 누운 아버지를 보고도 재환은 어머니나 재희처럼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러게 술 좀 덜 마시지, 라는 매정한 생각만 들었다. 병실에서 나와 저를 껴안고 우는 어머니에게는 ‘병원비는 어떡하려고.’ 딱 이 한마디를 건넸다. 눈물은 그날 밤 잠을 청하려 누웠을 때에서야 비로소 조금 나왔다.
이러하니 재환은 기타 연습이나 합주에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대회 후 밴드 분위기가 있는 대로 가라앉았는데, 거기에 대고 평소처럼 조금만 더 힘내 보자 하는 소리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종종 딴생각에 빠져 있다 도리어 멤버의 부름을 받고 정신을 차리기가 일쑤였다. 꼭 지금처럼.
“재환아. 다음 곡 가야지.”
“아, 어. 미안.”
군데군데 빨갛고 파란 불이 켜진 페달 보드를 멀거니 내려다보던 재환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아버지의 병원비 생각을 하다 또 넋을 놓고 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눈은 또 왜 이리 시린 건지. 아무래도 에어컨 바람이 유독 제 쪽으로 불어오는 것이 원인인 듯했다. 피크를 쥔 손으로 얼른 눈가를 벅벅 문지른 재환은 기타에 달린 노브를 돌려 볼륨을 높였다.
“준비됐어. 하자.”
그렇게 합주를 재개했지만, 기실 마음이 흐트러진 게 재환만이 아니었으므로 네 명에게서 비롯된 소리는 참으로 처참했다. 박자는 제각각에, 중간중간 나온 실수는 굳이 집어내기도 뭐할 정도였다. 보다 못한 지우가 팔을 번쩍 들었다.
“자자, 우리 좀 쉬었다 하자. 안 되겠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휴식 시간을 갖자마자 재환은 1층 화장실로 달려갔다. 콸콸 찬물을 틀고 뺨이 얼얼해질 때까지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다 앞머리가 다 척척히 젖었을 즈음에야 물을 잠그고 수건에 얼굴을 문질렀다. 미처 닦이지 않은 턱 끝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훔치며 화장실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엇….”
열린 문틈을 비집고 키가 삐쭉한 녀석 하나가 재환을 뒤로 밀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상대는 재빨리 등 뒤로 문을 닫고서 재환이 나갈 길을 차단했다. 적잖이 당황한 재환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넓지 않은 공간에서 저를 마주 보고 선 한영을 의문 어린 눈으로 보았다.
“왜…?”
“오늘 많이 피곤해?”
질문에 대한 답이 질문으로 돌아오자 재환의 눈썹 사이가 보다 움츠러들었다. 그것도 잠시, 바로 다음 순간 재환은 한영이 이곳으로 들이닥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빨아 줄까, 재환아…?”
잠깐 멍한 표정이 되었던 재환은 이내 픽 하고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와 반대로 한영의 얼굴은 꽤나 진지했다. 이쪽이 슬쩍 바지만 내려도 당장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하나, 지금의 재환에게는 한영과 딱히 그럴 마음이 없었다. 대놓고 합주를 망쳐 놓고서, 무슨 염치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심지어 저 때문에 밴드가 이 지경이 된 건지도 모르는데….
“됐어. 다시 내려가야지.”
자신보다 조금 위에 있는 어깨를 툭툭 두드린 재환은 한영의 허리 옆으로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고 그만 나가자는 눈짓을 보내자, 고개를 느리게 끄덕인 한영이 주춤 문밖으로 발을 틀었다. 그 표정과 행동에 풀 죽은 기색이 역력했으나, 재환은 짐짓 모른 체 머뭇머뭇 화장실을 나서는 한영을 뒤따랐다. 우선은 남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합주할 생각만 했다.
그나마 정신을 얼추 추스르고 합주실로 내려갔을 때, 다시 기타를 잡은 재환은 멤버들에게 잼이나 한번 맞춰 보자는 제안을 했다. 아무래도 같은 곡들만 주구장창 반복하다 보니 분위기가 더 처지는 감이 없잖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말을 들은 한영이 잠시 눈을 굴리다 꽤나 반가운 이야기를 해 왔다.
나 노래 하나 만들었어.
실로 오랜만에 한영이 만들어 온 노래의 제목은 ‘I Owe You’였다. 누구에게 뭘 빚졌다는 건지 굳이 생각 안 하는 쪽을 택한 재환은 잠자코 한영이 건반을 치며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언제는 안 그랬겠느냐마는, 절절한 감성이 그대로 녹아 있는 노래는 여지없이 재환의 심금을 작신작신 밟고 주물렀다.
그리하여 재환은 참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시… 한영의 노래는 좋다고. 정말 좋다고. 그 감상이 어쩐지 오늘은 재환을 조금 서글프게 했다.
이후, 한영이 가져온 새 노래에 악기를 맞춰 보며 네 사람은 잠시 숨통 트이는 시간을 가졌다. 중간에 태군이 장난을 친답시고 갑자기 메탈 리듬을 연주할 때는 서로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즐거이 웃으며 합주하는 시간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태군 덕에 실컷 웃은 재환이 다시 하던 연습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꺼내려는 즈음, 그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클럽 코벤트의 사장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니네 당분간 공연 좀 쉴래?]
공연은 당장 다음 주였다. 그리고 다음 달 일정도 이미 일찌감치 잡혀 있었다. 그 두 번 다 올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왜? 갑자기? 이윽고 사장의 속내를 짐작한 재환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처음 더 숨이 오디션을 봤을 때 영어 가사를 지적했던 것처럼, 사장은 본인만의 철칙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전 대회에서 있던 일이 이 연락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보컬이 입 한 번 벙긋하지 않고 무대에서 내려갔는데, 그런 밴드를 자신의 클럽 무대에 세워 주고 싶을 리 없었다.
어쨌거나 이것으로 오늘 합주실에 모인 이유가 사라졌다. 붙잡히지 않는 마음을 다잡아 가며 억지로 악기를 쥐고 있을 까닭이 더 이상 없는 셈이었다. 사장에게 알겠다는 짤막한 답장을 보낸 재환은 기타를 내려놓고서 앰프의 전원을 껐다.
“오늘은 그만하자. 공연 취소됐어.”
정리는 빨랐다. 금방 가방에 기타, 페달 보드, 케이블 따위를 집어넣은 재환은 마지막으로 두고 가는 것이 없나 앉았던 자리를 휘 둘러보았다. 그러고서 멤버들과 함께 합주실을 나서던 중, 공간 구석에 놓인 박스로 눈이 갔다. 더 숨의 EP 앨범이 담긴 박스였다. 박스 안에는 아직 꽤 많은 양의 CD가 남아 있었다.
박스에서 눈을 거둔 재환은 문 옆에 달린 스위치를 눌러 미련 없이 합주실 불을 껐다. 비슷한 듯 다른 이유로 네 명의 마음이 방황하던 공간에 어둠이 내렸다. 덜컹, 문이 닫혔다.
해가 진 골목에 맴맴 매미 울어 젖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수시로 훔치며 부지런히 집 가는 걸음을 서두른 재환은 어느덧 눈에 익은 5층짜리 건물 앞에 다다랐다.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가로등 아래 서서 입에 담배를 물었다.
저 위에서 탁탁 날벌레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담배 끝에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하지만 불을 붙일 수는 없었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건지, 고장이 난 건지, 아니면 습한 날씨 탓인 건지 아무리 휠을 돌려도 라이터는 묵묵부답이었다. 몇 번을 흔들었다 다시 시도해 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입술 새에서 새하얀 담배를 빼낸 재환은 푸, 하고 맥 빠진 숨을 뱉었다.
몇 개 피우지 않아 아직 내용물이 빽빽이 차 있는 담뱃갑에 어렵사리 담배를 도로 밀어 넣었다. 그새 어깨에서 반쯤 흘러내린 가방끈을 고쳐 멘 뒤, 불그죽죽한 벽돌이 틈도 없이 발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 한 층을 거의 다 오를 즈음에서야 천장에 달린 센서 등이 하나씩 굼뜨게 켜졌다.
일단 집 안으로 발을 디딘 재환은 등에 멘 것과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서 책상 서랍을 뒤졌다. 피크, 기타 줄, 스트링 와인더 등을 헤쳐 저 구석에서 라이터 하나를 찾아냈다. 혹시 몰라 아예 불을 한번 켜 본 다음 현관으로 가 방금 벗었던 신발에 다시 발을 넣었다.
뒤이어 막 문을 여는 때, 옆집 문도 함께 열렸다. 그곳 사는 고시생과 거의 동시에 복도로 나서게 된 재환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고시생도 재환을 보고는 고개를 꾸벅였다. 그도 담배를 피우러 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양손에 쥐인 것을 보니 아닌 모양이었다.
“저, 하나 들어 드릴게요.”
재환은 고시생이 든 비닐봉지로 손을 뻗었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재환의 손으로 넘어온 봉지 안에는 빈 소주병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육안으로 보나, 무게로 보나 수십 병은 되지 싶었다. 거뭇거뭇 수염이 돋아난 고시생의 얼굴을 보는 재환의 눈빛에 아주 잠깐 짠한 기색이 스쳤다. 물론, 짠한 마음은 곧 ‘누가 누구를’이라는 자조적인 생각으로 뒤바뀌었다.
함께 밖으로 나가 재활용 쓰레기 두는 곳에 봉지를 내려놓은 재환은 습관처럼 탁탁 손을 털었다. 재차 감사하다고 인사한 고시생이 바로 자리를 뜨려기에, 재환은 얼른 그를 불러 세웠다.
“담배 한 대 드릴까요?”
같이 쓰레기를 들어 준다 했을 때보다 고시생은 오히려 지금이 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침 담배가 똑 떨어진 참이었다면서 재환이 건네주는 담배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 끝에 불을 붙여 주자, 고시생은 안 그래도 살이 내린 볼이 홀쭉하게 팰 정도로 깊이 필터를 빨아올렸다. 얼마 안 가 담벼락 앞에 선 두 사람 주변에 뭉게뭉게 희뿌연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밴드는 잘하고 있어요?”
서로 손에 쥔 담배가 절반 정도로 짧아졌을 즈음, 고시생이 넌지시 물음을 던져 왔다. 톡톡 담배를 두드려 재를 떨어뜨린 재환은 ‘뭐…, 네.’ 하고 답을 얼버무렸다. 이번에는 제 쪽이 비슷한 질문을 건넸다.
“공부는 잘되세요?”
뻐끔뻐끔 연기를 뿜던 고시생이 휙 고개를 틀어 재환을 보았다. 그러더니 별안간 허허, 쇳소리 섞인 웃음을 나지막이 터뜨렸다. 제 말에 웃을 거리가 있었나, 싶어 아리송해진 재환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곧이어 고시생의 답이 돌아왔을 때 재환의 눈은 조금 더 커졌다.
“나 공부 관둔 지 좀 됐는데.”
“네?”
“시험 준비 관뒀어요. 어차피 되지도 않는 거. 요샌 그냥 놀아.”
“아….”
때마침 불어온 습한 바람이 고시생이 털던 담뱃재를 반대로 그에게 날려 보냈다. 허리를 숙인 고시생은 무릎 늘어난 추리닝 바지를 툭툭 두드리며 옷감에 들러붙은 재를 떨어냈다. 그러고서 공연히 담배가 타들어 갈세라 냉큼 필터를 입에 물었다. 길게 빨아들인 연기를 마찬가지로 길게 뿜은 후, 멍한 얼굴로 뒷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요새는 아예 집에 내려갈까 생각 중이에요. 집이 하우스 하거든. 여기서 더 할 일도 없고.”
네, 하고 대답한 재환은 더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나 입에 물었다. 짧아질 대로 짧아진 담배는 이제 끽해야 서너 모금 정도 남은 듯했다. 그새 불 꺼진 꽁초를 휙 깡통에 버린 고시생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난 나온 김에 편의점이나 가야겠다. 암튼 담배 잘 피웠어요.”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들자 다시 손짓으로 인사한 고시생이 재환을 등져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리퍼 뒤축이 꺼끌꺼끌한 길바닥에 맥없이 끌리며 직직 소리를 냈다. 약간 어깨가 굽은 자세 탓에 똑같이 구부정한 모양새의 그림자가 그 뒤로 길게 따라붙었다.
갈수록 길고 좁아지는 고시생의 그림자를 우두커니 눈으로 좇던 재환은 그사이 필터까지 짧아진 담배 끄트머리를 얼른 손가락으로 튕겼다. 넋 놓고 있다 피우지 못한 마지막 몇 모금이 꽤나 아까웠다. 종전 고시생과 비슷한 자세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터벅터벅 다시 집으로 올라갔다.
굳이 잠그지 않았던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손만 씻은 뒤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기타에 찬찬히 케이블을 연결한 후, 간만에 시퀀서 프로그램을 켰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심지어 씻지도 않았지만 그런 건 다 나중으로 제쳐 둔 채 노래 하나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본인 말고는 들은 사람이 하나밖에 없는, 서재환 작곡의 노래였다.
* * *
장마가 지나가고 모처럼 하늘이 쾌청한 날이었다. 카페 휴가로 덩달아 휴일을 얻게 된 재환은 아침 일찍부터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집 안 청소에 들어갔다. 쓸고 닦아 봐야 잘 티도 안 나는 좁은 집구석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지런을 떠는 것과 그냥 두는 것은 달랐다.
여기에 얼마 전 생긴 새 청소기가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전에는 작은 핸디 청소기 하나 들고 허리를 굽힌 채 온 바닥을 기어 다녔어야 했는데, 방을 빼며 고시생이 주고 간 청소기는 손잡이가 높이 올라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작은 청소기로 분리도 되었다. 음악 장비 말고는 통 관심이 없던 재환에게 있어 실로 놀라운 신문물이었다.
아예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고시생이 주고 간 물건은 더 있었다. 이사 가기 바로 전날, 밤중 찾아온 그는 재환에게 CD가 한가득 담긴 상자를 불쑥 내밀었다. 안을 살펴보자 국내 밴드는 물론이고, 해외 밴드의 앨범까지 고루 담겨 있었다. 다 합쳐 값만 해도 상당할 것 같아, 재환은 한사코 받을 수 없다 손사래 쳤다. 하지만 어깨를 으쓱인 고시생은 딱 한마디로 재환의 거절을 거절했다.
“가면 딸기 따야지 이런 거 들을 시간도 없어요.”
그리하여 청소를 모두 마친 재환은 CD 정리에 돌입했다. 안 그래도 꽉 찬 CD 장에서 듣지 않는 것들은 모조리 빼내고, 고시생이 준 것 중 좋아하는 밴드의 CD를 골라 대신 채워 넣었다. 물론 가장 위 칸에 꽂혀 있는 더 숨의 CD는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무심코 집은 CD 하나에 시선이 붙들렸다. 재킷 사진에 있는 네 사람 중 한 명의 얼굴이 유독 눈에 익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다른 CD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일어선 재환은 손에 들린 한 장을 갖고 책상으로 가 앉았다. 납작한 케이스에서 꺼낸 내용물을 노트북 옆구리에 넣은 뒤, 노래가 재생되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맘껏 볼륨을 높인 모니터 스피커에서 찰랑거리는 스트로크 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쿠스틱 기타였다.
그렇게 재환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 않고 내리 여덟 곡을 모두 들었다. 더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가 없을 무렵에서야 손에 쥐고 있던 케이스로 눈을 내렸다. 재킷 사진 속 고시생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그에게 연락처 하나 묻지 않았음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그러니 당신 하던 밴드의 노래가 무지하게 좋았더라는 말을 들려줄 길이 없었다. 퍽 아쉬웠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CD 정리를 마저 끝냈을 즈음,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재환은 ‘어, 지금 와.’라고 짧은 한마디를 상대에게 전한 후 전화를 끊었다.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서서 혹 더 정리할 것이 없나 방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그러다 퍼뜩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떠올라 매트리스 위에 개어 두었던 이불을 번쩍 들어 올렸다. 후다닥 집 앞으로 뛰쳐나가 이불을 탈탈 털고 들어오자 그제야 진짜 집 안 정리가 모두 끝난 기분이었다. 더불어 마음도 가뿐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아까의 전화를 끊고 나서 정확히 15분 후, 콩콩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사이 집 안에서 입는 반팔, 반바지를 외출 시 입는 반팔, 반바지로 갈아입은 재환은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왔어?’ 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전 긴 팔이 와락 허리를 끌어안아 왔다.
“뛰어왔어.”
웬만해서는 땀이 나는 법이 없던 얼굴 가득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비슷하게 땀에 젖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준 재환은 아직도 숨을 할딱이는 한영에게 일단 들어와, 했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땀범벅이 된 몸을 잠깐이나마 선풍기 앞에서 식혀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집 깨끗해졌어.’ 하며 매트리스 앞에 앉는 한영 가까이 선풍기를 끌고 간 재환은 가장 강한 세기로 바람을 틀었다. 바람이 기분 좋은 건지, 그냥 여기 와서 신이 난 건지 벌쭉벌쭉 웃던 한영은 내처 입을 크게 벌려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직격으로 바람을 맞은 음성이 우스꽝스럽게 떨리며 재환까지 픽 웃게 만들었다.
그 옆에 앉아 핸드폰을 손에 쥔 재환은 메모장을 켜 이따 시장에서 살 것들을 찬찬히 적었다. 그러다 슬슬 시간을 확인하고서 한영에게 ‘이제 나갈까?’ 하고 물었다. 한낮이 되면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가 덮쳐 오기 때문에, 더 늦어지면 나가서 땀깨나 흘리게 될 터였다. 예외 없이 한영은 ‘응!’ 하고 목소리도 크게 대답했다.
최근의 한영은 재환이 무슨 말만 하면 저렇게 고민도 없이 응, 소리를 외쳤다. 대회가 있던 날 밤, 이쪽의 용서를 구하고자 본인이 뱉었던 말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인 듯싶었다. 재환이 너 하는 말은 다 듣겠다고, 네가 하라는 대로 뭐든지 다 하겠다고. 사실 사소한 일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한영은 꿋꿋이 재환 앞에서 말 잘 듣는 아이 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재환은 종종 웃음이 지어졌다. 또 종종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어느새 또 울컥함에 잠긴 재환은 속도 없이 축축해지려는 눈을 들어 제 앞에 내밀어진 하얀 손을 보았다. 언제 벌떡 일어났는지, 눈높이가 훌쩍 올라간 한영이 긴 팔을 뻗어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형광등 불빛이 일순 눈부신 후광으로 비친 것은 재환 자신의 분명한 착각이었다. 재환은 한영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어어…!”
그러자마자 휙 일으켜진 몸이 순시에 단단한 팔 안에 갇혔다. 재환의 허리 뒤로 팔을 둘러 냉큼 깍지를 낀 한영이 톡, 하고 코끝을 맞대어 왔다. 그러고는 단번에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말을 속삭였다.
“나가면 사람 많아서 뽀뽀 못 해, 재환아.”
재환이 멈칫하는 사이, 얼른 다음 말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키스도 못 해.”
“손도 못 잡고.”
“끌어안지도 못해.”
“그러니까….”
마지막 문장은 스르륵 부딪치는 입술의 보드라운 감촉으로 마무리되었다.
미리 서로의 입술을 실컷 맛본 후 부랴부랴 집 근처 시장으로 향했을 때, 재환은 한영의 말이 꽤나 설득력 있었음을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시장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래간 지속된 장마가 원인이었다. 재환과 한영이 모처럼 하늘이 갠 오늘을 날로 정했듯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이유로 장을 보러 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인파의 열기까지 더해져 시장 전체가 아주 절절 끓어올랐다.
그럼에도 한영은 잔뜩 신이 났다. 재환아 이거 봐, 재환아 저거 봐, 하는 말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 시장은 가 본 적이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아니고서야 저렇게 아이처럼 들뜰 리가…. 그런 한영을 때때로 곁에 붙잡고, 때때로 다그치며 재환은 핸드폰에 적힌 것들을 하나씩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기실 오늘 이렇게 둘이서 시장에 나온 목적은 단순했다. 북엇국 끓일 재료를 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전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왜 하필 북엇국이냐? 그 이유 또한 단순했다. 한영이 다른 건 몰라도 북엇국 끓이는 법만큼은 꼭 알고 싶다 재환을 조른 까닭이었다. 혼자 시도하다 몇 번이나 실패를 경험했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한영은 오늘의 본디 목적을 잊은 듯했다. 또 어디로 사라졌나 하고 보면 뻥튀기 기계 옆에 가 있질 않나, 아이들이랑 같이 쪼그려 앉아 달고나 만드는 걸 구경하고 있질 않나. 사람한테 할 생각은 아니다만, 재환은 진심으로 강아지한테 다는 목줄이라도 채워 두고픈 마음이었다. 아니면 남들이 보든 말든 차라리 손 꼭 잡고 다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머리 색이 하도 튀어 사람들 틈에서 금방 찾아낼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마침내 장보기가 모두 끝났을 때, 재환과 한영의 손에는 북엇국과 상관없는 물건들이 배는 더 많이 들려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뻥튀기와 달고나도 포함되었다. 혹 이것들이 나중에 다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버릴까, 재환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그래도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지금 한 손에 들고서 쪽쪽 빨대로 빨고 있는 슬러시였다.
뜬금없게도 속옷 가게 앞에서 팔던 슬러시는 재환이 어린 시절 학교 앞 분식점에서 사 먹던 맛 그대로였다.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하고,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불량 식품 느낌이 팍팍 나는 샛노란 빛깔은 덤이었다. 단, 한영의 것에 비하면 재환의 것은 양반이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재환은 꼭 제 머리 색처럼 분홍 빛깔이 도는 슬러시를 야무지게 빨아올리는 한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재환의 시선을 눈치챈 한영이 두꺼운 빨대 끝에서 입술을 떨어뜨리며 배시시 눈을 접어 웃었다. 그래도 재환이 별 반응이 없자, 큰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 재환 앞에 슬그머니 빨대를 내밀었다.
“마실래? 맛있어.”
잠시 머뭇거리던 재환은 앞으로 목을 빼 종전까지 탐스러운 붉은색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빨대에 입을 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도 벗어났겠다, 마침 방학한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는 참이라 주위에 인적이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윽고 입 안으로 흘러든 자잘한 얼음 알갱이에서 정신 번쩍 들 만큼 다디단 맛이 확 끼쳤다. 달기로 따지자면 제 오렌지 슬러시보다 배는 더 단 것 같았다. 거기다 인공적인 딸기 향이 강해 딱히 재환의 취향에 부합하는 맛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수리를 달구는 뜨거운 햇볕과 그로 인해 등을 덮은 땀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슬러시를 절로 시원하고 맛있다 느끼게 해 주었다. 사실은 다 아니고, 그냥 지금 곁에서 같이 걷고 있는 녀석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맛있지?”
“응.”
그리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이번에는 한영의 목이 재환 쪽으로 기울었다. 피식 웃은 재환은 들고 있던 슬러시를 옆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한영의 입술은 쪽, 소리를 내며 엉뚱한 곳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야…!”
안 그래도 더위 탓에 벌겋게 물들었던 뺨이 단숨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나 약 오르게도, 훤한 대낮 뻥 뚫린 길가에서 도둑 뽀뽀를 한 범인은 벌써 저만치 앞에 달아나 있었다. 긴 다리를 휙휙 뻗을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칼이 사방으로 솜사탕처럼 달콤한 빛깔을 퍼뜨렸다. 뒤를 돌아보며 환히 웃는 낯이 눈부시도록 희었다.
저 찬란한 장면을 영원히 기억 속에 박제해 놓을 수 있기를, 문득 재환은 간절히 바랐다.
두 사람이 함께 끓인 북엇국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한영이 자른 두부 모양이 가지각색 참 개성적이고, 풀어 넣은 계란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조금 아리송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한영은 한 그릇으로 모자라 거의 두 그릇 가까이를 먹었다. 군살 하나 없으면서 저리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나, 재환은 새삼 신기하게 여겨졌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에는 매트리스 위에 꼭 붙어 앉아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모처럼 공포 영화를 골랐는데, 오히려 한영은 덤덤한 반면 재환은 중간중간 몇 번이나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귀신 하나 나오지 않는 영화였음에도 그랬다. 그 얼빠진 모습을 보고 또 한영은 재환이 귀엽다며 뺨이고 입술에 쪽쪽 뽀뽀를 해 댔다. 나중에는 그 소리가 노트북 스피커에서 나오는 비명 소리보다 더 클 지경이었다.
이윽고 주인공의 허망한 죽음과 함께 내린 검정 장막 위로 천천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살점이 붙었다 떨어지는 행위는 어느덧 진득한 입맞춤이 되었다. 뚜껑 덮인 노트북이 매트리스 아래 놓이고, 그 옆으로 툭툭 옷가지가 떨어졌다. 얼마 안 가 두 남자의 무게를 지탱한 스프링이 삐걱대기 시작하며 젖은 살결이 쩍쩍 맞붙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거기에 더해진 ‘재환아’ 하는 애타는 부름, 밭은 신음성, 허겁지겁 입술이 비벼지는 소리가 모두 다 사그라지고, 마침내 찾아온 깊은 밤.
잔잔한 어둠이 깔린 집 안에 시트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뒤에서 허리를 껴안은 한영이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고 코를 비빌 때마다 재환은 몸을 꿈틀거리며 ‘하지 마, 간지러워.’ 하고 웃음기 밴 핀잔을 뱉었다. 그러나 간지러운 접촉은 멈추지 않았고, 끝내 재환은 휙 몸을 반대로 틀어 등 뒤에 붙어 있던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유한영.”
“응?”
“내가 하는 말은 다 듣는다며.”
“아….”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말간 눈동자에 곤란함이 서렸다. 조금쯤 ‘치사해’라는 문장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부터 재환은 그런 한영에게 한층 더 치사하게 들릴지 모르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한영아.”
낮게 흘러나온 이름 두 글자에 한영은 멈칫 굳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치렁치렁 매달린 눈꺼풀을 높이 들추고서, 전에 없이 진지해진 재환의 표정을 불안한 눈으로 살폈다. 순식간에 차오른 긴장감이 숨겨지지 않았다. 이를 달래 주려는 듯, 재환은 근육이 경직된 얼굴에 손을 올려 가만가만 손가락을 움직였다. 뭉툭한 손가락 끝이 볼록하게 나온 눈 밑 살, 뾰족한 코끝, 보드라운 입술을 차례로 스쳤다.
“우리….”
뒤이어 콩, 하고 이마가 맞대어졌다. 하얗게 굳은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재환은 아마도 평생의 후회로 남게 될 한마디를 짧은 날숨과 함께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밴드, 그만하자.”
잠시 침묵이 퍼지고,
“뭐…?”
“밴드 그만하자, 한영아.”
또 잠깐의 침묵이 퍼진 뒤,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린 한영이 매트리스 밖으로 뛰쳐나갔다. 옷도 안 입고 다짜고짜 현관문을 열려기에 허겁지겁 달려 나간 재환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갈래, 갈 거야! 한영은 어느새 줄줄 눈물을 쏟으며 재환의 품에서 몸부림쳤다. 얘기 좀 들어 봐! 덩달아 차오른 눈물을 억지로 집어삼킨 재환이 안간힘을 다해 한영을 붙들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씨발, 얘기 좀 들으라고…!’ 하는 거친 소리가 터졌다.
그대로 뒷걸음질 친 재환은 데굴데굴 발을 구르는 한영을 겨우 매트리스 위로 끌고 갔다. 그러나 한영의 반항은 멈추지 않았다. 퍼덕거리는 다리가 매트리스 옆 CD 장을 박차며 그 안에 담긴 CD들이 와르르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우지끈우지끈 깨지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리고, 한순간 방바닥이 플라스틱 파편과 무지개 색 반사 빛을 뿜는 CD들로 뒤덮였다. 재킷에 우산 그림이 그려진 CD 케이스가 처참히 금이 간 채로 그 사이를 나뒹굴었다. 이후에도 얼마쯤 더 눈물 섞인 고성이 오갔다.
내가 하는 말은 다 듣는다며, 유한영!
싫어! 그런 적 없어! 나 안 그랬어!
억지 부리지 말고 사람 말을 좀 들어 봐…!
싫어, 재환아. 싫어….
매트리스 위에서 밀려난 이불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분홍 머리통 아래 눌린 베갯잇이 온통 눈물로 젖었다. 한영은 버둥거리며 악을 쓰다, 또 막무가내로 재환에게 입 맞추려다, 끝내 눈두덩이에 팔을 얹고 끅끅거렸다. 그가 내뱉는 서러운 울음이 재환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 아픔을 필사적으로 참아 낸 재환은 축축하게 눈물이 묻어난 팔뚝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유한영.”
발갛게 달아올라 여러 갈래로 눈물 자국이 난 얼굴이 홱 옆으로 돌아갔다. 재환은 그곳으로 손을 가져가 다시 저를 보도록 한영의 고개를 돌렸다. 정말 최선을 다해 침착한 목소리로 한참 늦어진 이야기를 시작했다.
형네 회사랑 계약해. 아니면 미국 가야 된다며. 넌 이러다 그냥 미국 가 버려도 괜찮아? 그리고 우리 밴드 상황, 지금 별로인 거 너도 알잖아. 태군이 군대 문제도 있고. 밴드는 나중에라도 다시 할 수 있는 거니까, 너는 형네 회사에서 계속 음악 해. 응? 너 솔로로 성공한 다음에 우리 불러 주면 되잖아. 그리고 밴드 안 해도, 너랑 나랑은 지금처럼 같이 지내면 되지. 너 기타 칠 사람 필요하다 그러면, 내가 세션이든 뭐든 할게.
“그니까 밴드만 정리하자, 유한영.”
그제야 젖은 눈으로 재환을 올려 보던 한영이 부스럭부스럭 상체를 일으켰다. 눈망울에 고여 있던 눈물이 또 한 방울 뺨 위로 촉촉한 궤적을 그리며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정말 나랑 같이 있을 거야…? 기타도 쳐 줄 거야?”
그럼, 당연하지. 얼른 답한 재환은 손바닥, 손등, 그리고 손목까지 이용해 눈물이 흥건한 얼굴을 이리저리 문질렀다. 물기가 닦여 나간 살결에 그럭저럭 뽀얀 빛이 드러나자 작은 머리통이 풀썩 앞으로 기울었다. 툭 어깨에 닿은 이마에서 따끈따끈한 온기가 끼쳤다. 그곳으로 흘끔 눈을 내린 재환은 자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다, 애처롭게 움츠러든 어깨 뒤로 팔을 둘렀다. 헐벗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또 한 번 치사하고도 비겁한 문장을 속삭였다.
“유한영 너랑 계속 같이 있을 거야.”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이 매달리듯 재환의 상체를 껴안았다. 진짜지? 정말이지? 확신의 확신을 바라는 물음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재환은 다 진짜라고 했다. 다 정말이라고 했다. 오지 않은 미래를 약속하는 일은 이다지도 쉬웠다.
* * *
재환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을 때, 지우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그래야지, 뭐.’ 하고 짧은 답을 내놓았다. 재환의 결정을 탓하는 언사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전하다 눈가가 벌게진 것은 재환 쪽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제 입으로 멤버에게 밴드를 그만하자 얘기하는 순간이 오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는 건 딱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참 고루한 표현이었지만 달리 어울리는 말도 없었다.
그런 재환의 죄악감을 덜어 주려는 건지, 지우는 뒤이어 최근 본인의 상황을 지나간 이야기처럼 들려주었다. 얼마 전 밴드 일을 어머니에게 들켜 베이스가 두 동강 날 뻔한 위기가 있었으며, 베이스는 사수했으나 대신 차는 무기한으로 압수당했고, 결국 카드까지 빼앗겨 버리는 바람에 아주 거지꼴이 되었다는 얘기였다. 재환으로선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던 일들이라 듣는 내내 입이 벙긋이 벌어졌다. 하지만 지우의 고민은 정작 따로 있었다.
“근데 뭐, 나도 슬슬 학교 공부 다시 시작해야 해서 고민 중이긴 했어.”
그러면서 툭툭 재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괴로운 짐을 혼자 짊어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딱 그만큼, 재환의 마음 위로 한 단 더 죄스러움이 쌓였다.
“아, 한영이 설득은 어떻게 했어? 나도 상황은 대충 알고 있었거든. 근데 나랑은 계약 얘기 같은 거 하지도 않으려고 해서.”
재환은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웃었다. 언제나처럼, 눈치 빠른 지우는 재환에게 더 캐묻지 않았다.
문제는 태군이었다. 입대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태군은 여자 친구하고 헤어지기까지 하는 바람에 대화를 나눌 온전한 상태가 되지 못했다. 정말 어렵사리 재환이 밴드 이야기를 꺼냈더니, ‘씨발, 나 때문이냐? 나 군대 가서 그래?’ 하고 훌쩍훌쩍 울었더랬다. 재환은 다시 머리칼이 짧아진 친구를 안고 도닥도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너 때문 아니야, 장태군.’이라고 몇 번이나 부정해 줬으나, 태군의 울음은 여간해서 멈추지 않았다. 태군에게 안 보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재환도 몇 번인가 코를 훌쩍거렸다.
그리고 날은 흘러 흘러 바야흐로 태군의 입대일을 하루 앞둔 날이 되었다. 며칠 전부터 오늘은 마시고 죽을 거라 아주 장담을 했던 태군은 양손 가득 술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당당히 한영의 집으로 들어섰다. 맥주는 당연하고 소주에 막걸리에 동동주까지 정말로 작정을 한 듯했다. 하지만 아직 해가 중천이기도 했거니와, 술병을 따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줄지어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은 재환, 태군, 지우, 한영 네 사람은 평소와 다름없이 각자 정해진 자리로 가 앉았다. 앞에 놓여 있는 악기를 체크하거나, 가져온 악기를 꺼내 매만지며 연주할 준비를 했다. 지금껏 셀 수 없을 만치 반복했던 과정이었으므로 일말의 버벅거림이 없었다.
이윽고 ‘갈까.’ 하는 지우의 짧고도 경쾌한 한마디와 함께 연주가 시작되었다. 공연을 앞뒀을 때가 아니면 늘 자리에 앉아 기타를 치던 재환은 초반부터 벌떡 일어섰고, 이에 질세라 지우도 긴 몸을 일으켰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던 한영은 건반 치며 노래를 부르는 중간 아예 마이크 스탠드를 높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 늘 귀에 이어폰을 끼고 메트로놈 박자를 듣던 태군도 오늘만큼은 저 마음 가는 대로 드럼을 때렸다. 따라서 박자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머지 세 사람이 귀신같이 그 리듬을 쫓아왔다. 그러니 태군은 더 신이 나 심벌이고 탐이고 마음껏 내려쳤다.
그리하여 합주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원곡과는 다른 연주가 펼쳐졌다. 얌전히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던 부분에서 재환이 난데없이 속주를 선보이고, 지우가 엄지로 베이스 줄을 때리며 슬랩 솔로를 하기도 했다. 급기야 한영은 8비트로 치던 박자를 16비트로 바꿔 건반을 때렸다. 그야말로 시끄럽고, 어수선하고, 난장판인 합주였다.
하지만 다들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번졌다. 연주가 그게 뭐냐 타박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늘만은 어떤 짓을 해도 괜찮았다. 마지막 합주였으니까. 더 숨의, 마지막 연습이었으니까.
이마에서 쉴 새 없이 작은 땀방울이 떨어졌다. 최대치로 바람을 틀어놓은 에어컨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르르 흘러내린 땀방울은 속눈썹 끝에 걸렸다가, 툭 허공으로 튀었다. 그 안에 땀이 아닌 다른 것도 섞여 있을는지는 본인도 몰랐다. 그저 줄을 짚는 손끝이, 목구멍이, 눈가가 전부 뜨거웠다.
하늘에서는 불볕이 내리쬐고, 땅에서는 지글지글 복사열이 끓어오르던 바깥에 거뭇거뭇 땅거미가 내릴 무렵. 한 사람이 별렀던 대로 널따란 거실에 술판이 벌어졌다. 다만 오늘은 피자니 치킨이니 하는 호화로운 메뉴 따위 없었다. 가운데가 찢어져 쫙 펼쳐진 감자칩 봉지와 동전만 한 쥐포 몇 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진짜로 마시고 죽자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작심을 했던 문제의 한 사람이 몸소 가장 먼저 취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뭐, 나머지 셋은 얼추 예상을 하고 있었다만.
“내가 말야, 머리도 기르고! 눈썹에 피어싱도 빼고! 하란 대로 다 했는데! 왜? 착한 남자는 싫다 이기야?”
날이 날인 까닭에 오늘은 주사가 유독 요란했다. 테이블을 팡팡 내리치며 헤어진 여자 친구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던 태군은 내처 왜 두었는지도 모를 젓가락을 답삭 집어 들었다. 그마저도 거꾸로 쥐는 바람에 손잡이 부분으로 한 명씩을 가리켜 가며 참 답하기 뭐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째환아! 너가 보기엔 내가 영 매력이 없냐? 엉?”
“장태군 네가 왜 매력이 없어. 드럼도 잘 치고, 드럼 잘 치고…. 드럼을 잘 치잖냐.”
“야! 현지우! 솔직히 남자 키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 그치?”
“뭐…. 성격이 중요하지. 성격이.”
이따위로 사람을 진땀 빼게 하더니 젓가락이 한영을 향했을 때는 아주 정점을 찍었다. 그것도 제대로.
“유한영! 새끼 너 한번 솔직히 말해 봐. 이 중에 누가 제일 너 취향이냐? 난 별로냐?”
그제야 지우의 입에서 ‘장태군 진짜 제대로 취했네.’ 하는 소리가 나왔다. 반면 재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맥주 캔을 든 채로 멈칫 굳었다. 오히려 되지도 않는 질문을 받은 한영은 덤덤하게 손에 쥐고 있던 쥐포를 베어 먹었다.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며 다른 세 사람을 휘 둘러보자 태군이 ‘없어? 아무도?’ 하고 한영을 재촉했다. 마침내 한영의 입이 열렸다.
“나보다 큰 사람은 싫어.”
지우의 얘기였다.
“나랑 생긴 느낌이 비슷한 사람도….”
태군의 얘기였다. 이제 남은 건 한 사람뿐이었다. 재환은 캔을 움킨 손에 꽉 힘을 주었다.
“근데 재환이는….”
한 명씩을 차례로 스친 말간 시선이 마침내 재환에게 와 닿았다. 손 안에 목직한 무게를 전하는 맥주 대신 마른침만 꼴깍 삼킨 재환은 저 시선을 피하지도, 자리를 뜨지도 못한 채 붉은 입술 사이에서 떨어질 얘기를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재환이는 그냥 다….”
“워씨, 야! 조용히 해 봐!”
별안간 흥분으로 꽉 찬 목소리가 터졌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쥐어 올린 태군은 정말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다 ‘나 전화 받는다! 어?’ 하고 모두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크게 심호흡한 후 핸드폰을 얼굴 옆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어, 소영아. 응. 나 내일 입대야. 어? 아…. 전화 그만하라고? 그게, 네가 안 받길래…. 그래. 응, 알았어. 잘 지….”
절절매듯이 이어지던 말이 뚝 끊겼다. 어느덧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태군의 눈가가 벌그죽죽한 색으로 달아올랐다. 곧 발생할 일을 감지한 지우의 손이 슬그머니 테이블 아래로 놓인 티슈 곽으로 뻗어 나갔다. 그때였다.
“야, 씨발! 분위기 왜 이래! 마셔!”
소파 옆자리로 냅다 핸드폰을 던져 버린 태군이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로부터 약 10분 후, 태군은 철퍽 지우의 허벅지 위로 쓰러졌다. 오늘의 술자리가 다소 이르게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물먹은 솜 인형처럼 늘어진 태군을 가뿐히 등에 업은 지우가 현관을 나서고, 짧고 굵은 술잔치가 벌어졌던 자리에 이제 재환과 한영만이 남았다. 스탠드만 켜져 있던 거실에 일단 불부터 환히 밝힌 재환은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술병과 과자 봉지 따위를 재빠르게 정리했다. 뒤이어 재활용할 쓰레기와 그냥 버릴 쓰레기를 분리하는 사이 한영은 술을 따랐던 컵을 부엌으로 가져가 설거지했다. 그럭저럭 뒷정리가 끝났을 즈음, 고무장갑을 벗는 한영에게 재환이 물었다.
“라면 끓여 먹을까?”
오래지 않아 남자 둘이 선 부엌에 매콤한 라면 냄새가 풍겼다. 아예 펄펄 끓는 냄비째 식탁에 올린 재환과 한영 두 사람은 서로 먹자, 하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후루룩후루룩 라면을 들이마셨다. 너나없이 몹시도 허기가 진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땀 뻘뻘 흘린 합주 후에 술로만 배를 채운 결과였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면 한 올을 사이좋게 함께 젓가락으로 집었을 때야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사실 조금 울고 싶기도 했으나, 재환은 그냥 한영을 마주 보고 웃었다.
라면 먹으며 나온 설거지까지 마저 끝냈을 때, 이번에는 한영이 젖은 손을 탈탈 터는 재환을 등 뒤에서 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재환아, 같이 씻자.”
보통 재환이 한영의 집에서 묵을 때 씻는 공간은 2층 방에 딸린 욕실이었다. 하지만 오늘 재환은 2층이 아닌 1층 욕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욕실 한편에 있는 커다란 욕조였다.
“물 뜨거워?”
“아니, 괜찮아.”
딱 적당한 뜨끈함을 품은 물이 가슴팍에서 찰랑거렸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영이 물 위에 똑똑 떨어뜨린 기름방울 비슷한 것에서 솔솔 향긋한 꽃향기까지 풍겼다. 길었던 오늘 하루의 피로함을 사르르 녹이기 충분한 환경이었다. 여기에 약간의 술기운까지 더해져, 재환은 그야말로 사지가 노글노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마음을 완전히 편히 놓기가 어려웠다.
“불편하진 않고?”
“아, 응….”
“그럼 더 기대, 재환아.”
달아날 틈도 없이 허리에 감긴 손이 물에 잠긴 몸을 보다 바짝 뒤로 끌어당겼다. 욕조 바닥에서 부드럽게 엉덩이가 미끄러진 재환은 내처 한영의 단단한 가슴팍에 푹 등을 기대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판판한 가슴을 조물조물 주무르자, 촉촉이 물기가 맺힌 얼굴이 빠른 속도로 벌긋벌긋하게 물들었다. 절대 더운물 때문은 아니었다.
숱하게 서로의 알몸을 보고, 심지어 지금껏 수도 없이 온갖 군데를 물고 빨고 했으나, 지금의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재환에게 부끄러움을 안겨 주었다. 여기에는 뒤에서 한영에게 푹 안긴 듯한 자세 탓도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귓전에서 목소리가 울리고, 탄탄한 몸체의 굴곡이 고스란히 등으로 느껴져 자꾸 묘한 기분이 일었다. 그리고.
“이렇게 있으니까 좋다, 재환아.”
“…응.”
함께 욕조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뿐인데, 재환은 꼭 한영과 한 지붕 아래 사는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앞으로도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건만, 그런 가당찮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포근함이 재환은 조금 불편하게 다가왔다. 서글프게 다가왔다.
“유한영.”
“응?”
“오늘 합주 재밌었지?”
그 침울한 감상을 떨치려 그나마 즐거운 얘기를 꺼내 보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다지 즐거울 일도 아니었다. 오늘은… 그들의 마지막 합주였으므로.
“응, 엄청 재밌었어.”
다만 정말 재밌었다는 듯이 답한 한영은 손을 오목하게 모아 동그란 모양으로 솟은 재환의 무릎에 찰박찰박 물을 뿌렸다. 이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딱히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영의 장난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환은 슬그머니 무릎을 수면 아래로 내렸다. 한영이 작게 ‘어….’ 했다.
“근데 좀 제대로 할 걸 그랬나? 그래도 마지막 합주였는데.”
“나중에 제대로 하면 되지.”
“나중에?”
“응. 나중에 너랑 나랑.”
이제는 따끈한 물이 쇄골께에 살짝살짝 뿌려졌다. 이를 피해 몸을 옆으로 비튼 재환은 고개를 돌려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젖은 머리를 이마 위로 매끈하게 넘긴 얼굴이 물안개를 머금은 것처럼 뽀얬다.
“지우랑 태군이가 없잖아.”
“그래도 재환이 너 있잖아.”
그렇긴 한데…, 하며 말꼬리를 흐린 재환은 다시 자세를 되돌려 한영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이 이야기는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다른 쪽으로 주제를 바꾸었다.
“계약은. 언제 하기로 했어?”
“몰라. 다음 달…?”
“아, 아직 형님 드라마가 안 끝났나?”
이번에도 한영은 ‘몰라.’ 하고 조금 새초롬한 투로 대꾸했다. 어느 틈에 수면 아래로 내려온 손이 물에 아슬아슬 잠긴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얄망궂게도 움직이는 손을 끌어다 배 위에 올린 재환은 짐짓 모른 체 질문을 이었다.
“거기 회사 꽤 크지?”
“그런가 봐.”
“너 엄청 유명해지는 거 아냐?”
손을 묶어 두자 이제는 길게 뻗은 다리가 물속에서 슬쩍슬쩍 재환의 다리를 건드렸다. 발꿈치로 살살 정강이를 문지르다가, 아예 발가락을 세워 느리게 살결을 쓸어 올렸다. 미끄덩하면서도 간지러운 감촉에 재환의 허리가 꿈틀 휘어졌다. 수면에 찰랑찰랑 야트막한 파문이 일었다. 잠시 이를 사리물었던 재환은 태연한 척 도로 말문을 뗐다.
“이제 티브이에도 나오겠네.”
“나 꼭 계약해야 돼, 재환아…?”
축축한 입술이 목덜미에 붙었다. 종아리에 얽힌 다리가 허벅지의 각도를 벌리며, 배에 얹혔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한영의 말에 순간적으로나마 마음이 철렁한 재환은 이윽고 회음부로 미끄러지는 손가락을 막지 못했다.
“당연히 해야지.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긴 손가락이 욕조 바닥에 닿은 엉덩잇살 사이를 비집었다. 뜨거운 물과 함께 손가락은 너무도 쉽게 쑥 구멍을 파고들었다. 뒤늦게 무릎이 움칠 오므라들었으나, 이미 손가락 마디가 뜨거운 내벽에 파묻힌 뒤였다. 비어지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킨 재환은 자못 단호하게 상대의 이름 세 글자를 불렀다.
“유한영.”
“…알았어. 할게, 계약.”
마지못한 대답이 떨어지며 손가락이 보다 깊숙한 곳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었다. 썩 기꺼운 투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한영에게서 들을 대답을 들은 재환은 그제야 온몸에 감돌던 미미한 긴장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젖혀 곧은 어깨에 뒤통수를 기댔다. 욕조 턱에 두 팔을 올리고서, 조금 더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 한가운데 가장 은밀한 곳을 침범한 손가락이 보다 자유로이 안쪽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엉덩이를 들썩이는 사람도, 부드러이 손목을 움직이는 사람도 차츰 내뱉는 숨의 온도가 올라갔다. 찰방찰방. 찰방찰방. 꼭 붙은 두 개의 몸을 투과한 맑은 수면이 춤추듯 일렁거렸다.
* * *
“음…, 좀 갑작스럽네.”
“…죄송합니다.”
직원 휴게실 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세훈을 마주 보고 앉은 재환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썩 염치가 없는 통보라 달리 세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테이블을 가로질러 길게 뻗어 온 손이 재환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에이, 그런 게 아니라 서운해서 그러지. 재환이 네가 일을 좀 잘했어?”
“아….”
“근데 아르바이트는 왜 갑자기 그만두려고?”
재환은 나름 마음속으로 생각해 두었던 이야기를 찬찬히 세훈 앞에 꺼냈다. 요약하자면 이제 학교에도 복학해야 하고, 거기다 최근 집안에 일이 좀 생겨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빠지기는 했지만, 그것까지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잠자코 재환 하는 말을 듣던 세훈이 물음 하나를 더 던졌다.
“그래도 밴드는 계속하는 거지?”
재환은 잠깐 답을 머뭇거렸다. 그사이 세훈이 뒷말을 덧붙였다.
“태혁이가 니네 노래 엄청 좋아해. 차에서도 맨날 더 숨 CD만 틀어. 공연하면 또 보러 가고 싶은데.”
참 고마운 말이건만 재환은 도리 없이 살짝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테이블 아래에서 맞잡은 손을 꾹꾹 주무르다가, 아직 저 자신도 완벽히 익숙해지지 못한 문장을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내었다.
“저…. 음악 관뒀어요, 사장님.”
그제야 낯빛을 조금쯤 굳힌 세훈이 재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답했다. 세훈의 손이 또다시 재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진심 어린 걱정과 위로가 담긴 손길이었다.
세훈과의 면담 후, 퇴근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재환은 직원 휴게실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곧바로 집 가는 걸음을 떼는 대신, 손님 몇이 줄 서 있는 카운터 뒤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주문을 받아야 할 사람은 손님들을 등진 채 냉장고에 우유를 채워 넣고 있었다. 희연이 그만둔 후 새로 온 지 얼마 안 된 남자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우유 내가 넣을게. 일단 주문받아.”
바닥에 놓인 상자에서 우유를 꺼내며 말하자 ‘어, 네…!’ 하고 답한 아르바이트생이 허둥지둥 포스 기계 앞으로 가 섰다. 행동을 보아하니 카운터에 손님이 와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 그가 주문받는 모습을 흘끔흘끔 곁눈으로 살피며, 재환은 유통 기한이 짧은 우유는 앞으로 당기고 그 뒷자리에 새 우유를 채웠다. 손님을 대하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이, 조만간 세훈에게 ‘무조건 스마일!’이라는 소리를 한번 들을 성싶었다. 과거의 자신처럼.
그사이 다소 우왕좌왕하면서도 주문을 모두 받은 아르바이트생이 음료를 만들기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주문받은 수만큼 이미 빈 컵들이 쪼르르 놓여 있었다.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을 지은 아르바이트생은 재환을 보며 ‘형, 감사합니다…!’ 했다. 재환으로서는 아직 카페 일에 서툰 그를 더 도와주고 싶었으나, 가게 유니폼을 벗은 상태에서 이 이상은 무리였다. 재환은 꼭 예전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아르바이트생의 팔뚝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곧 상지 출근할 거니까 조금만 버텨 봐. 난 갈게.”
“네, 형! 내일 봬요…!”
목소리만큼은 씩씩한 아르바이트생이 재환을 향해 인사했다. 그를 뒤로한 재환은 인제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 이렇게 인사를 주고받을 날도 며칠 안 남았겠다는 생각을 하며 힘껏 카페 문을 밀었다. 여름의 끝자락이 전하는 바깥바람이 제법 후덥지근했다.
슈퍼에서 산 간단한 찬거리가 든 봉지를 손에 쥐고 골목을 걸은 재환은 어느덧 집 앞에 다다랐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라 거미줄처럼 엮인 전깃줄을 아슬아슬 비켜난 가로등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 아래 서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들어갔겠으나, 지금은 산 것 중 빨리 냉장고에 넣을 것도 있고 해 재환은 어둑어둑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오르기 전, 삐죽삐죽 광고 전단지가 꽂힌 우편함 앞에 잠깐 멈춰 서서 오늘 온 우편물을 챙겼다.
덥고 답답한 공기가 한가득 고인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재환은 일단 창문부터 활짝 열었다. 창가 옆에 있는 책상 모서리에 툭 우편물과 핸드폰을 던져 놓은 뒤, 냉장고 앞으로 갔다. 제대로 물건을 넣으려면 꼭 쪼그려 앉아야 하는 높이의 냉장고 문을 열고서, 오늘 장 본 것을 찬찬히 안에 집어넣었다. 오는 길에 벌써 반쯤 녹은 냉동 고기로는 이따 찌개를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 된장찌개를 끓일지 고추장찌개를 끓일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무어가 되었든 오늘은 밥을 좀 잘 차려 먹고 싶었다.
찌개에 넣지 말고 아예 구워 먹을까, 궁리하며 냉장고 문을 닫을 즈음 마침 책상 위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끙 소리를 내며 쪼그렸던 몸을 일으킨 재환은 저벅저벅 책상으로 걸어갔다. 통화 아이콘을 누른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며 ‘어, 유한영.’ 하고 상대를 불렀다. 털썩 의자에 앉아 다른 손으로는 겹쳐 놓인 우편 봉투를 집어 들었다.
“잘 다녀왔어? 회사 많이 크지? 에이, 내가 거길 같이 왜 가.”
봉투 두엇을 차례차례 앞뒤로 돌려 보던 재환은 내처 어깻죽지와 뺨 사이에 핸드폰을 끼웠다. 살살 두 손으로 첫 번째 봉투의 접합 부분을 뜯은 후 안에서 손바닥 길이보다 짧은 종이 두 장을 꺼냈다. 빳빳하면서도 매끈매끈한 재질의 종이가 희미한 반사 빛을 튕겨 냈다.
“아, 오늘은 그냥 얘기만? 그럼 계약은 다음에 하겠네. 난 방금 퇴근해서 집 왔어. 저녁은 밖에서 먹어?”
형, 싫어, 집 가고 싶어, 하는 말 따위가 적절히 섞인 문장이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왔다.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띄워 올린 재환은 ‘그래도 형이랑 맛있게 먹어.’ 하고 상대를 달랬다. 저쪽의 푸념은 조금쯤 더 계속되다 ‘보고 싶어’라는 수줍은 고백으로 이어졌다. 아마도 같은 답을 들려줌이 온당할 것을 알지만, 재환은 부러 다른 얘기를 꺼냈다.
“맞다. 티켓 왔어. 하마터면 예매 못 할 뻔했는데. 그러게. 빨리 Embryo 보러 가고 싶다. 나도 기대돼.”
상대의 기대와 설렘에 적당히 동조하는 사이 ‘아…, 형이 부른다.’ 하는 아쉬운 목소리가 건너왔다. 재차 저녁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를 전한 재환은 귀에서 떨어뜨린 핸드폰 화면의 빨간 버튼을 꾹 눌렀다. 금세 새카만 상태로 돌아간 액정을 멀거니 내려다보다가, 손에 쥐고 있던 티켓과 함께 핸드폰을 책상에 올렸다. 오늘 도착한 다음 봉투를 뜯었다.
이윽고 다소 구깃구깃한 봉투 안에서 꺼낸 편지지를 읽어 내리는 재환의 얼굴에 방금 통화 때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미소가 스몄다. 중간중간 픽픽 웃는 소리가 작게 터지기도 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평소에는 걸핏하면 이 새끼니 저 새끼니 차진 욕을 일삼던 친구가 ‘사랑하는 나의 친구에게’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보내오면.
태군이 보낸 편지에는 훈련소에 와서 재환이 너의 소중함을 처음 알았으며, 네 잔소리는 잔소리도 아니었고, 열 여자 친구보다 제대로 된 친구 하나가 훨씬 낫다는 이야기가 구구절절이 적혀 있었다. 다만 끝부분으로 가서는 ‘그런데 재환아. 지난번 내 전화를 씹었더구나.’라는 뼈 있는 내용이 나왔다. 열흘 전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이 있음을 떠올려 낸 재환은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그럭저럭 입꼬리가 위를 향한 채였다. 하지만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재환은 기어코 눈가를 시뻘겋게 물들이고 말았다.
재환아. 나중에 너랑 또 밴드 하고 싶다.
뜨겁게 열이 오른 눈가를 벅벅 팔뚝으로 문지른 재환은 서둘러 집에 편지지가 있었나 생각해 내려 애썼다. 단, 당장 답장을 쓴다 해도 태군에게 전할 말은 하나뿐일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태군아.
태군의 편지를 다시 봉투에 곱게 접어 넣은 재환은 슬리퍼를 끌고 집 앞으로 나갔다. 퇴근길 슬금슬금 하늘을 뒤덮던 노을이 그사이 바로 머리 위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붉은빛이 퍼진 허공으로 재환은 탁한 담배 연기를 흘려보냈다.
짧아진 하루해와 함께 여름이 가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온몸을 땀으로 젖게 만들어 사람을 참 성가시게 했던, 그럼에도 햇볕의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은 여름이 가고 있었다.
다시 오지 않을 여름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가을.
활짝 열린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이 얼굴 위로 제법 선선한 기운을 퍼뜨렸다. 부스스 눈을 뜬 재환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며 습관처럼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흐리멍덩한 시야에 LED 시계가 반뜩이는 숫자들이 어렴풋이 잡혔다. 차츰 숫자가 또렷해지고, 재환의 입에서 절로 ‘미쳤네….’ 하는 소리가 탄식처럼 새어 나왔다. 백번 양보해도 이미 아침이라 부를 수 없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이제 카페에 출근을 하지 않기로서니, 이렇게 늘어지게 늦잠을 잘 줄은 미처 몰랐다. 물론 지난밤 영업이 끝난 카페에서 늦게까지 제 송별회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적잖이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당황스러웠다. 비칠비칠 상체를 일으킨 재환은 정신 좀 차리자는 의미를 담아 짝, 하고 양 뺨을 내리쳤다. 덕분에 숙취가 남은 골만 아주 뎅뎅 제대로 울렸다. 하나 그것을 핑계 삼아 뭉그적거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매트리스 밖으로 두 발을 내려 일어선 재환은 일단 입고 있던 옷부터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뒤이어 화장실로 들어가 평소보다 배는 시간을 들여 온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꼭 목욕재계하는 사람인 양, 열심히도 씻었다.
씻고 나와서는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채 옷장 앞에 서서 고민에 잠겼다. 공연 때면 늘 입던 흰색 셔츠를 꺼냈다가, 아직 입기에는 이른 상아색 니트를 꺼냈다가, 결국에는 위아래로 시커먼 바지와 티셔츠를 꺼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는 그냥 이런 차림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멋 부리지 않고, 대충 있는 대로 입은 차림이.
일찌감치 외출복을 갖춰 입은 재환은 우유 한 잔으로 늦어진 아침을 때운 뒤 노트북 앞에 앉았다. 어젯밤의 송별회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마무리 지었을 작업 파일을 열어 시퀀서 프로그램이 로딩되기를 기다렸다. 손바닥에 턱을 괴고 톡톡 책상을 두드리기를 잠시, 노트북 모니터 위로 각 트랙마다 알록달록 색이 입혀진 작업 화면이 떠올랐다. 그중 실제로 재환이 직접 녹음한 것은 기타와 보컬 트랙뿐, 거의 대부분은 가상 악기를 통해 만든 트랙이었다. 진짜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도 얼추 음악 비슷한 것이 만들어지니, 참으로 편한 세상이었다.
재환은 틈틈이 책상에 놓인 시계를 확인하며 서둘러 남은 작업을 해 나갔다.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완성을 해야 했으므로 하릴없이 마음이 초조해졌다. 여기에 굳이 지금 떠올리지 않아도 될 기억이 자꾸 떠올라 키보드와 마우스를 오가는 손을 더욱이 더뎌지게끔 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작곡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이 노래를 어느 한 사람에게 처음 들려주었던 순간의 기억이었다.
이 노래 나 줘, 재환아. 나 잘 부를 수 있어.
그 한마디 때문에 재환은 1달이 넘도록 이 목적도, 의미도 없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아무리 후렴 빼고는 가사가 ‘음음’뿐이라 해도 노래 녹음에만 몇 날 며칠이 걸렸으며, 짧은 기타 솔로 하나 녹음하려 손끝이 다 아려 올 때까지 밤새워 기타를 치기도 했다. 안 그래도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해 정신없어 죽겠는데, 스스로 보기에도 참 미련한 짓이었다. 그뿐일까. 아버지를 간호하는 어머니를 챙기려 재환은 사나흘에 한 번씩 병원에도 갔다. 좌우지간, 이 미련한 짓도 오늘까지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라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작업을 이어 간 재환은 마침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담아 프로그램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약 3분 40초가량의 노래가 모두 끝났을 때, 재환은 조금 울었다. 아마도 감격스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이제 작업한 결과물을 음원 파일로 저장하는 일만이 남았다. 파일 제목을 입력하기 위해 노트북 자판으로 손을 가져간 재환은 별다른 고민 없이 탁탁 타자를 쳤다. 이윽고 짧은 영어 단어 하나가 완성되었다.
[Reverb.mp3]
저장한 파일은 곧이어 이메일에 첨부되었다. 메일 제목과 내용은 딱히 적지 않은 채로 전송 버튼을 누르자, 몇 초 지나지 않아 ‘메일이 성공적으로 전송되었습니다’ 하는 메시지가 인터넷 화면 한가운데 떠올랐다. 할 일이 끝난 노트북을 덮은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부디 한 가지를 바랐다. 오늘만큼은 한영이 메일을 확인하지 않기를.
이제 재환은 진짜로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그래 봤자 티켓 두 장을 챙기고 머리 위에 푹 모자를 눌러쓰는 정도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 모자 때문에 누구한테 꽤나 원성을 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재환의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모자 왜 썼어…?”
현관에 들어서는 재환을 보자마자 앞치마를 벗으며 나오던 한영이 쭉 입꼬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머리가 좀 이상해서, 라고 다소 뻔한 이유를 내놓은 재환은 운동화를 벗고 복도 입구에 놓인 제 전용 슬리퍼로 발을 끼워 넣었다. 얼른 한영에게 다가가 쪽 입 맞춘 후 통통 엉덩이를 두드려 주자 그제야 보로통했던 표정이 슬그머니 풀어졌다.
한영을 따라 들어간 부엌에는 벌써 식탁 위에 제법 그럴듯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불고기, 동태전, 계란말이 등 맛 좋아 보이는 반찬은 여럿 있었으나, 그중 단연 눈이 가는 것은 북엇국이었다. 사실 이걸 맛보기 위해 그토록 작업을 서둘렀던 거였다.
“잘 끓여진 것 같아?”
“지난번 너한테 배운 대로 하긴 했는데… 아직 맛을 제대로 못 봤어.”
자리에 앉아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본 북엇국의 모양새는 썩 나쁘지 않았다. 먼젓번처럼 두부 모양이 제각각이지도, 계란이 녹아 사라지지도 않았다. 식탁 건너편에 한영이 앉는 것을 확인한 재환은 숟가락을 들어 북엇국을 한 숟갈 떠 올렸다. 이윽고 호로록 국을 들이켜는 재환에게 기대와 걱정이 함께 어린 시선이 뜨겁게 와 꽂혔다.
“어때…?”
“아…. 맛있어.”
북엇국은 심히 짰다. 소금이 됐든, 새우젓이 됐든, 무언가 양 조절이 제대로 잘못된 느낌이었다. 거기다 국의 주인공인 북어가 잘 씹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리 긴장된 눈으로 자신을 보는 한영에게 재환은 차마 다른 감상을 들려줄 수 없었다.
“정말?”
“아, 응.”
재환은 한 숟갈 더 떠 국물을 맛보았다. 어깨가 흠칫 튈 정도로 짠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걸 빼면 영 못 먹을 맛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예 북어를 홀랑 태워 먹거나, 소금 대신 설탕을 넣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하여 밥을 크게 퍼서 입에 넣은 재환은 본격적으로 국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영의 얼굴에서 서서히 긴장이 걷혀 나갔다. 그리고 저도 조심스레 국물을 떠서 먹어 보았을 때.
“재환아. 이거 먹지 마.”
한영은 벌떡 일어서서 재환의 국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재환이 그릇을 쥐어 휙 옆으로 몸을 틀어 버리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다행히 아슬아슬 국물은 넘치지 않았다. 그 재바른 행동을 바라보는 한영의 표정에 하릴없이 난처함이 번졌다. 언뜻 보면 울먹거리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재환아, 그거 먹으면 안 돼….”
“맛있다니까. 멀쩡히 먹고 있는데 왜.”
얼마간 더 발을 동동 구르던 한영은 끝내 재환의 이해 못 할 고집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눈썹 사이를 잔뜩 오므라뜨린 채 풀썩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재환은 여봐란듯이 더 국을 푹푹 퍼먹었다. 그 애타는 광경을 담는 갈색 눈동자가 조금 촉촉이 젖었다.
반 정도만 물이 채워져 있던 재환의 물컵에 물을 더 따라 준 한영은 머뭇머뭇 식사를 이어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반찬처럼 북엇국도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부탁할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기껏 재환에게 끓이는 법을 배워 놓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는 하다마는…. 풀 죽은 표정으로 젓가락을 뻗은 한영은 식탁 가운데 놓인 접시에서 메추리알을 집었다.
“국만 먹지 말고 다른 것도 먹어, 재환아….”
“아, 고마워.”
연거푸 국만 떠먹고 있던 재환의 밥 위에 반질반질한 메추리알이 올려졌다. 밥과 함께 퍼서 입에 넣자 그다음에는 불고기 한 점이, 동태전이, 진미채가, 또다시 메추리알이 차례로 올라왔다. 머지않아 문득 재환은 깨달았다. 꽤나 먼 과거, 처음 이 자리에 앉아 식사했을 적 메추리알을 집어 상대의 밥 위에 올려 주는 건 자신의 몫이었음을.
재환은 내처 콩자반까지 야무지게 집어 올리는 한영의 행동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작고 윤기 나는 검정 알갱이가 하나둘 재환의 밥 위로 사뿐사뿐 얹혔다. 어떻게 보아도 더없이 능숙한 젓가락질이었다. 이렇듯 사실 마음만 먹으면 한영이 혼자서 뭐든 다 해낼 수 있음을 재환은 잘 알았다. 바람이 아닌, 확신이었다.
“유한영.”
“응?”
“계약은 잘했어?”
“…응.”
짧게도 답한 한영은 재환의 밥으로 콩자반을 열 개 가까이 옮겼을 즈음에야 제 앞에 놓인 밥을 떠먹었다. 그다음 북엇국을 후루룩 들이켜더니 새삼 짜다 싶었는지 주춤 굳었다. 경직된 얼굴에서 오직 눈썹만이 꿈틀꿈틀 춤을 췄다. 재환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스쳤다.
“이제 바빠지겠네.”
물컵을 들어 꼴깍꼴깍 물을 마신 한영은 이번에도 ‘응.’ 하고 같은 답을 내놓았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난 듯 퍼뜩 눈을 크게 뜨고서 재환을 직시했다. 도르르 흘러내려 턱 끝에 방울방울 매달린 물을 닦지도 않았다.
“바빠도 재환이 너 만날 거야.”
단호한 표정에 걸맞은 단호한 투였다. 못지않게 단단한 시선을 받으며 잠시간 눈을 껌뻑거리던 재환은 이내 ‘누가 뭐래?’ 하고 가볍게 한영의 말을 맞받아쳤다. 마치 뭘 그리 심각하게 구냐는 듯한 태도였다. 일부러 더 그렇게 반응한 거였다.
다소 애매한 시간에 치러진 점심 식사가 끝나고, 재환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비운 국그릇과 여타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그대로 싱크대 턱에 걸쳐진 고무장갑에 손을 넣으려다 휙 뒤를 돌아 식탁에서 남은 반찬을 정리 중인 한영을 보았다.
“유한영! 오늘은 설거지 네가 좀 해 주라. 나 학교에 메일 하나 보내야 되는 거 까먹고 있었어.”
‘그래.’ 하고 답하는 한영에게 ‘땡큐, 노트북 좀 쓸게!’를 외친 재환은 후다닥 부엌을 벗어났다. 한 번에 계단 두세 개씩을 밟아 2층으로 올라갔다. 고요한 복도를 지나 그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방으로 들어서자 어김없이 사방을 메운 알록달록한 색채들이 재환을 맞이했다. 비로소 조금 느긋해진 걸음으로 책상까지 간 재환은 드르륵 의자를 빼 앉았다. 다만 그러자마자 손이 뻗어 나간 곳은 노트북이 아니었다.
책상 첫 번째 칸 서랍의 손잡이를 쥔 재환은 그대로 잠시 행동을 멈추고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에 가득 담긴 공기를 길게 내뱉은 후, 손잡이를 바깥으로 잡아끌었다. 견고하게 나무로 짜인 서랍이 소리 없이 당겨져 나오며, 안에 든 물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껏 한 번 열어 본 적 없던 한영의 서랍은 생각보다 훨씬 정갈하게 물건이 정리되어 있었다. 다소 어수선한 감이 없잖아 있는 방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중에서 재빨리 물건 하나를 찾아내야 하는 재환으로선 꽤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서랍을 뒤지는 대신, 재환은 멍하니 표정을 굳힌 채 오와 열을 맞춰 놓인 물건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 눈에 익은 물건들뿐이었으니까.
서랍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종이 뭉치에는 한 사람이 휘갈겨 쓴 글씨가 빼곡했다. 재환 자신의 글씨였다. 지난날 이곳에서 밴드 멤버들과 머리를 맞대어 가사를 수정하던 시간의 흔적이었다. 고로 이 종이들은 이미 한참 전 재활용 쓰레기로 버려졌어야 했다. 그게 여기 얌전히 쌓여 있을 줄 미처 몰랐다.
그 옆으로는 작은 철제 케이스가 몇 개 있었는데, 첫 번째 것에는 곱게 줄을 꼬아 만든 끈 팔찌가 담겨 있었다. 지금 재환이 팔목에 찬 것과 같은 모양새의 팔찌였다. 이걸 당당히 차고 다니지 못해 한영이 속으로 얼마나 아쉬워했을지를 짐작한 재환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움직거렸다.
다음 케이스에 소복이 담긴 것은 놀랍게도 기타 피크였다. 개수도 꽤 되었으며, 끝이 갈려 나간 것에서부터 거의 새것에 가까운 것까지 상태도 다양했다. 언제는 바닥에 피크를 떨어뜨리면 피크 요정이 주워 간다더니, 정작 피크 도둑은 따로 있었다. 무심코 이게 다 얼마야, 라는 생각은 한 재환의 입꼬리가 끝내 슬쩍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눈가가 조금 뜨듯해졌다.
이외에도 제가 믹싱하다 적었던 메모, 새 콘돔 봉지… 등을 지나친 재환의 시선이 비로소 찾고 있던 물건에 닿았다. 서랍을 열 때와 마찬가지로 크게 숨을 들이켠 재환은 꼭 보석을 담는 용도로 보이는 작은 상자 안에서 낡은 열쇠를 집어 들었다. 지금 재환의 지갑에도 이것과 똑같은 열쇠가 들어 있었다. 얼마 안 가 손에 쥔 열쇠는 작은 금속성을 내며 지갑 안으로 떨어졌다. 집 열쇠 하나 찾아 챙기는 데 참 시간이 길게도 걸린 재환은 마침내 서랍을 닫았다.
이윽고 다시 비밀 같은 칠흑에 잠긴 서랍 안, 케이스 안에 담긴 끈 팔찌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그새 허전함이 감도는 팔목을 매만지며 복도로 나선 재환은 바로 1층으로 내려가는 대신 보다 복도 안쪽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웬만해서는 넘어가 본 적이 없는 무형의 선 근처에서 걸음이 주춤거렸다. 그러다 한영의 설거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며 과감히 발을 뗐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나아간 재환은 또 다른 비밀이 감춰져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전면 창을 통과한 가을볕으로 가득 찬 방은 마치 봄날과 같은 포근함을 품고 있었다. 동시에 놓인 물건이 커다란 피아노 한 대뿐이라 한겨울의 쓸쓸함 비슷한 것을 풍기기도 했다.
그 가운데로 발을 들인 재환은 어느덧 방을 가로질러 벽 한 면을 꽉 채운 그림들을 마주 보고 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이 반, 그 위를 덮은 얼룩덜룩한 페인트 자국이 반이었다. 심지어 중간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수가 없는 손자국까지 떡하니 찍혀 있었다.
괜히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편 재환은 슬그머니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본인 판단하기에 딱 1분만 더 벽을 쳐다봤다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을 쫓아 나무 바닥 위로 사선으로 기울어진 그림자가 길게 따라붙었다. 쿵, 문이 닫히며 차마 이곳에 남기지 못한 미련처럼 그림자도 자취를 감추었다.
메일 하나 보내는 것치고는 한참이 걸려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을 때, 한영은 조리대의 가스레인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생각에 빠진 건지, 딱히 발소리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다가서는 재환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에서 잘록한 허리에 팔을 둘렀을 즈음에야 설핏 놀래 고개를 뒤로 돌렸다.
“뭐 해?”
‘아….’ 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한영의 어깨 너머로 재환은 목을 뺐다. 한영이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한강수처럼 북엇국이 담긴 냄비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딱 냄비 밖으로 국물이 넘치기 직전이었다.
“물 넣었어?”
“응. 아까 짜길래….”
“나도 줘 봐.”
마침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올린 한영이 호호 김을 불어 재환 앞에 내밀었다. 딱딱한 어깨에 턱을 대고 있던 재환은 앞으로 고개를 기울여 숟가락에 입술을 붙였다. 곧이어 혀를 적신 국물에서는 멀게진 국물 색과 비슷한 맛이 났다. 한마디로, 별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환의 미묘한 기색을 눈치챈 한영이 풀 죽은 목소리를 내었다.
“다음에…, 다음에 진짜 맛있게 끓여 줄게.”
대답을 않은 재환은 뒤에서 한영을 껴안은 팔에 보다 힘을 주었다. 마치 체취를 맡는 것처럼 한 번 길게 호흡한 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슬슬 나가야 돼. 안 그럼 공연 줄 엄청 서야 될걸.”
북엇국에서 못내 아쉬운 마음을 거둔 한영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글보글 국물을 끓이던 가스레인지 불이 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없는 부엌에 복도 너머 현관문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 * *
조명 하나 켜지지 않은 무대가 컴컴했다. 원래는 운동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을 자리, 제법 넓은 공간을 차지한 스탠딩석 가운데쯤 선 재환은 무대에 놓인 장비들을 눈으로 훑으며 언제 시작하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비슷한 생각을 한 게 재환뿐이 아닌지, 주변에서 슬슬 ‘왜 안 나오지?’ 따위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럴 만도 했던 게, 예정된 공연 시작 시간이 방금 막 지난 참이었다. 물론 이런 공연에서 시작이 늦춰지는 건 허다한 일이었다.
그 와중 재환의 옆자리는 조용했다. 흘끔 그쪽으로 눈을 돌린 재환은 아무 말 없이 얌전히 서 있는 한영의 옆얼굴을 살폈다. 재환의 시선을 느낀 듯 멀거니 앞을 쳐다보던 한영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 왔다. 달싹달싹 움직인 붉은 입술이 소리 없이 ‘기대된다.’ 하는 말을 속삭였다. 재환 또한 입 모양으로 ‘응, 나도.’라고 답하자 동그스름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도톰한 입술이 예쁜 호를 그렸다. 그때였다.
무대 양옆에 설치된 스크린에 번쩍 불이 들어오는 동시에 관객들의 함성이 터졌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함성은 허탈함 섞인 탄식으로 뒤바뀌었다. 사람들을 김빠지게 만들려고 작정한 듯, 스크린에서는 잇달아 광고가 흘러나왔다. 뜬금없이 숙취 해소제 광고가 나오질 않나, 영화 예고편이 나오질 않나. 그러다 다른 공연의 홍보 영상도 몇 편 나왔다. 그곳으로 의미 없는 시선을 보내던 재환의 표정이 한순간 미세하게 굳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스크린에 잠깐이나마 커다랗게 떠오른 것은 분명 밴드 이데아의 사진이었다. 보아하니 곧 개최되는 페스티벌 무대에 ‘루키’라는 이름표를 달고 서는 모양이었다. 뭐,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먼젓번 대회에서 1등을 하고 난 후, 여름에 열렸던 록 페스티벌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이데아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중이었다. 크고 작은 공연에서 그들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노래 좋고, 거기다 이를 뒷받침해 줄 실력까지 있으니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니 부러워할 필요 없다고, 저들은 마땅히 누릴 것을 누리고 있을 뿐이라고 재환이 스스로 각고의 세뇌를 할 즈음, 스크린이 일시에 팍 꺼졌다. 대회장 전체에 긴장감 섞인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껌껌한 무대에 서서히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길쭉한 인영 셋이 등장하며, 우레와 같은 환호가 터졌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기다리던, 밴드 Embryo의 등장이었다.
드라이브와 리버브가 동시에 걸린 웅장한 기타 사운드가 삽시에 공간을 집어삼켰다. 쿵쿵 내리찍는 킥 드럼의 음압이 지면을 뒤흔들고, 둥둥대는 베이스 음이 쉬지 않고 사방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여기에 보컬의 몽롱한 목소리가 얹히는 순간, 더는 달아오를 수 없을 만큼 공연장의 열기가 뜨겁게 폭발했다.
그중 스탠딩석에 선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높이 팔을 치켜들고 스네어의 박자에 맞춰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때로는 내 것이 아닌 팔뚝이 머리통을 때리고, 잔뜩 무게가 실린 발이 콱 발등을 밟아도 짜증 부릴 틈이 없었다. 흥분에 젖어 몸을 흔들 뿐이었다. 단, 그 사이에 섞인 한 사람만은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이.
재환의 손을 콱 움켜쥔 한영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격한 몸짓들을 헤쳐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재환이 몇 번이나 ‘유한영!’을 외쳤으나 이 격정 어린 난리 속에 들릴 리 만무했다. 혹 벗겨질세라 잡히지 않은 손으로 모자를 내리누른 재환은 영문도 모른 채 한영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시꺼먼 늪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일순 갑갑했던 숨이 탁 트였다. 동시에 고막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급격히 증폭되며, 시야에 푸른빛이 물결쳤다. 어느덧 무대와 객석을 나누는 펜스 바로 앞까지 오게 된 재환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Embryo의 보컬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하지만 멍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도 잠깐이었다. 재환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한영이 번쩍 팔을 들었다. 새하얀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를 내지르며 긴 팔을 좌우로 휙휙 흔들었다. 맨 앞에 선 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더한 흥분에 잠식된 주변 사람들은 신경일랑 쓰지 않았다. 하니 재환도 결국 한영의 움직임에 저를 맡겨 버렸다. 그가 뛰어오르면 같이 뛰고, 그가 더 크게 소리치면 저도 따라 성대를 울렸다. 한영 곁에서, 한영과 함께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무대 위 세 사람이 연주하는 노래가 한 곡, 한 곡 빠르게도 지나갔다.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는 하도 소리를 내질러 목구멍이 다 찢어질 듯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잠시만이라도 좀 자중하려 했더니, 이번에는 재환이 하도 좋아해 핸드폰 벨 소리로 지정하기까지 한 노래가 흘렀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재환은 부끄러움도 잊고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한영이 도리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아도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지금의 재환은 더없이 신나고 즐거웠다. 그럴 터였다.
내리 열 곡이 넘는 노래를 연주하고 나서야 Embryo는 관객들에게 멘트를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뭐, 내한한 외국 밴드가 무대에서 하는 말이야 기실 뻔하디뻔했다. 다들 오늘 이 자리에 와 줘서 고맙다, 내 인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다, 최고의 노래를 들려주겠다, 어쩌고저쩌고…. 어쨌거나 사람들은 중간중간 ‘예-!’ 하고 크게 함성을 질렀다. 어차피 말의 내용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중요한 것은 꿈에 그리던 밴드가 눈앞에서 살아 라이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래지 않아 밴드의 연주와 노래가 재개되었다. 또다시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다만, 두 손으로 허리께까지 올라온 펜스를 꽉 움킨 재환은 그 흐름에 동참하지 못했다. 이번만큼은 소리를 지르지도, 팔을 흔들지도 않았다. 꼭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듯한 표정으로 기타 치며 입을 벙긋거리는 보컬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부르는 노래 때문이었다. Embryo가 지금껏 발표한 그 어떤 앨범에도 실린 적이 없는 이 노래를 재환은 분명 알고 있었다.
처음 느껴 보는 널따란 거실의 아늑함, 그곳에서 함께 앉아 보았던 DVD, 불현듯 흘러나온 밴드의 미발표곡, 푸르스름한 불빛, 다가오던 입술….
저 무대 위에서 보컬이 연주하는 기타 리프가 반복될 때마다, 재환의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점점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뚝뚝 끊기며 돌아가던 그날의 영상이 부드럽게 재생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완벽한 장면이 완성되었을 때, 재환은 마치 그 순간으로 내던져진 듯한 착각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사위에 흐르는 음악이, 시야에 퍼지는 조명이, 지금 제 곁에 서 있는 남자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어느새 무대에서 거두어진 시선이 까딱까딱 흔들리는 몸짓 따라 춤추듯 나붓대는 분홍 머리칼을 향했다. 이후 시선은 푸르스레한 무대 조명과 같은 빛깔이 고인 말간 눈동자로 옮겨 갔다가, 가사를 따라 부르는 붉디붉은 입술에 고정되었다. 그러다 위로 올라가 다시금 반짝반짝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에 닿았을 때, 그곳에 참 못난 남자의 얼굴을 담은 눈부처가 섰다.
이제는 무대가 아닌 저를 보는 한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재환은 사실 멀쩡한 머리 위에 덮었던 모자를 벗었다. 뒤이어 다부진 손에 들린 새카만 볼캡은 방향만 바뀌어 살짝 흐트러진 분홍색 머리카락 위로 얹혔다. 행동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한영이 눈을 조금 크게 뜨는 순간, 옆으로 고개를 기울인 재환의 입술이 한곳을 찾아들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번쩍 위로 들추어졌다 곧 스르륵 아래로 내려앉았다.
모자챙이 만들어 준 좁은 그림자 속, 두 개의 입술이 꼭 음악의 리듬을 타는 것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깊이 맞물렸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점차 데워진 숨이 그 사이를 오가며 크게 벌어진 입술 가운데서 흡착하듯 혀가 엉켰다. 위로 올라온 손이 모자를 쓴 사람의 어깨를 감싸고, 옆으로 뻗어 나간 손이 모자를 넘겨준 사람의 등허리를 지나 펜스를 붙잡았다.
저 아래서 난데없이 시작된 입맞춤 때문에 무대 위 연주가 멈추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듯, 앞에서 벌어진 다소 정신 나간 짓거리에도 주위 사람들은 그저 무대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그럴수록 몽롱하게 흐르는 음악 아래 묻힌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타액에 젖은 입술이 한층 격정적으로 비벼지고, 하나처럼 엉킨 혀가 델 것 같은 열기를 피워 올렸다. 이를 더는 참을 수 없어진 한 사람이 종내 입술을 떨어뜨렸다. 손으로 상대의 뺨을 감싸 지그시 시선을 얽었다.
“유한영. 나가자.”
대답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작은 머리통을 덮은 모자를 한 번 더 푹 눌러 준 재환은 무대 조명과 비슷한 색으로 물든 하얀 손을 콱 붙들었다. 그러자마자 휙 몸을 뒤로 틀어 다짜고짜 사람들 틈을 비집기 시작했다. 공연 시작과 동시에 지금 붙잡은 손에 이끌려 나아갔던 방향과는 정확히 반대 방향이었다. 하나같이 앞을 보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거꾸로 헤쳐, 재환은 뒤로, 더 뒤로 걸음을 옮겼다. 황홀과 열광에 젖은 군중의 틈바구니를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드디어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은 스탠딩석을 벗어난 두 사람은 굴처럼 생긴 통로를 지나 아예 공연장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서로 약속한 듯 널찍한 복도를 내달렸다. 텅 빈 역사 같은 경기장 복도에 두 남자의 다급한 발소리가 긴 잔향을 머금고 쿵쾅쿵쾅 울려 퍼졌다. 저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보다 컸다.
요란한 소리를 몰고 온 네 개의 발이 이윽고 사람 없는 화장실로 들어섰다. 엇박자로 타일 바닥을 박찬 두 쌍의 발은 서둘러 벙긋하게 문이 열린 칸 안으로 이동했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철컥 시건장치의 손잡이가 옆으로 당겨졌다. 기꺼이 좁은 공간에 저 자신을 가둔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허겁지겁 상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집어삼킬 듯 재환의 입술을 빨아 젖히던 한영의 두 주먹이 쿵 문 위를 디뎠다. 그 아래 갇힌 재환이 너른 등판을 더듬던 손을 보다 아래로 내려 빳빳한 옷감 위로 탄탄한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러다 내처 바지 앞섶으로 손을 옮겨 여며 있던 버클을 거의 뜯어낼 기세로 풀어 버렸다. 한영에게 악착같이 입술을 부딪치면서도 거침없이 지퍼를 내려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뜨거운 습기에 감싸인 살덩이가 손에 잡혔다. 이미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성기는 미끌미끌한 액으로 끝이 다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헉헉 터지는 숨을 맞붙은 입 안으로 넘기며, 재환은 한 손에 쥐기 다소 버거운 감이 있는 성기를 어떻게든 붙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물론 본인의 것도 바지 안에서 터질 듯 발기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위로 단단한 허벅지가 문질러졌다.
손과 다리를 이용해 서로의 성기를 애무하는 시간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훌떡 몸이 뒤집혀 문을 보고 서자마자 엉덩이에 휭 서늘한 공기가 스쳤다. 어느 틈에 재환의 바지를 허벅지까지 끌어 내린 한영이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입 속으로 쑥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연결이 헐거운 문짝을 두 손바닥으로 짚은 재환은 입에 들어온 길쭉한 손가락을 마치 본능처럼 쭉쭉 빨았다. 흥건히 침에 젖은 손가락이 곧이어 조붓하게 다물린 엉덩이 사이로 향했다.
“으, 응…!”
연이어 덜컹덜컹 불안정한 마찰음을 내는 문에 이마까지 박은 재환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고작 타액에 의지한 손가락이 뻑뻑한 내벽을 억지로 헤집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 불편함을 거둬 주기 위해 얼른 한영은 재환의 민감한 부분으로 손가락을 더 깊이 찔러 넣었다. 도톰하게 부푼 살점을 꾹꾹 손끝으로 짓이기자 재환이 내뱉는 신음에 빠르게 밭은 숨이 섞여 들었다. 흥분의 기색이 역력한 소리가 안 그래도 모자란 한영의 여유를 앗아 갔다. 한영은 한결 빠르게 손목을 털며 재환의 귓등, 목덜미에 쪽쪽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 사이사이 내뱉어지는 숨결이 흔들대는 문 위로 흩어지는 또 다른 숨결과 비슷한 수준으로 달아올랐을 무렵.
“크윽…!”
“읏…!”
급하게 안을 들쑤시던 손가락이 쑥 밖으로 뽑혀 나가고, 그 자리에 굵다란 성기가 대번에 뿌리까지 들어와 박혔다. 일순간 고개를 뒤로 젖힌 재환도, 결박하듯 그의 가슴팍을 감싸 안은 한영도 단말마 같은 숨을 터뜨렸다.
얼마 가지 않아 성급하게 살결 부닥치는 소리, 한층 더 요란하게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 탁탁 바지 버클이 문짝을 때리는 소리 따위가 사방이 막힌 좁은 공간을 꽉 메웠다. 저 밖에서 고음이 깎여 나간 채 흘러드는 먹먹한 음악 소리는 덤이었다. 물론 가장 크게 울리는 것은 누구의 것인지 구별하기 힘든 거친 숨소리였다.
“허윽, 읍…. 후으….”
“후…, 읏….”
재환의 골반을 붙잡고 퍽퍽 허리를 치대던 한영은 문 위에서 푸릇푸릇 힘줄이 불거진 손등에 손을 겹쳤다. 바짝 힘이 들어간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끼고서 허리 짓에 속도를 높였다. 화장실 바닥에서 손가락 마디만큼 발꿈치가 들린 재환은 한영이 등 뒤에서 몰아붙이는 대로 덜컥덜컥 흔들렸다. 곡 하나가 끝난 듯 저 멀리서 들리는 함성이 어지러운 이명이 되어 웅웅 귓가를 맴돌았다. 당장은 다시 저 소란 속으로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대를 올려 보며 느낀 것보다, 지금 한영이 쏟아붓는 열기가 가히 더 뜨거웠다. 공연장에서보다 심장이 배는 더 빠르게 뛰었다.
“어흑, 유…, 한영.”
“재환아…. 하아….”
고개를 기울여 벌게진 뺨에 수두룩한 입맞춤을 새기던 한영은 아예 뒤에서 재환의 턱을 붙잡아 입술을 찾아 물었다. 덕분에 둘 다 불편한 각도로 몸이 비틀리며 행동의 범위가 다소 제한되었다. 밖으로 반절씩 뽑혔다 다시 들어가던 성기가 이제는 좁은 속살에 파묻혀 콱콱 안을 쳐 댔다. 비슷하게 잇새를 벌리고 들어간 혀가 온 입 안을 훑었다.
“흐, 읍…. 음…!”
“후….”
옷감이 서로 스쳐 부스럭대는 소리가 커졌다. 그대로 재환 안에서 몇 번 더 성기를 짓친 한영은 기어이 내벽 가장 깊숙한 곳에 울컥울컥 정액을 토했다. 한영에게 굳은 혀를 내어 준 채로 재환 또한 번들번들한 문짝을 따라 주르륵 허연 정액을 흘렸다. 갖가지 난잡한 소리로 가득했던 공간에 헉헉 숨 몰아쉬는 소리가 중첩되어 퍼졌다.
잠시 후, 그럭저럭 사정의 여운을 추스른 한영이 허리를 뒤로 빼려 할 즈음이었다.
“빼지 마.”
서둘러 뒤로 뻗어 나간 손이 흘러내린 바지 위로 드러난 새하얀 엉덩이를 움켰다. 자못 당황한 한영은 얼결에 반쯤 빠져나온 성기를 도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영을 등진 재환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작게 튀었다.
“재환아…?”
“…빼지 마. 조금 더 그러고 있어.”
“근데 지금 안 빼면….”
보나 마나 또 발기할 테고, 그럼 화장실을 나서기가 어려워졌다. 재환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영을 놓아주는 대신, 재환은 주춤거리는 손을 끌어와 자신의 티셔츠 속으로 가져갔다. 얼핏 긴장한 손끝이 톡, 유두에 닿았다. 한영의 눈이 커졌다.
“계속해 줘. 계속하자, 유한영.”
방금 막 사정을 마친 성기로 삽시간에 또 피가 몰렸다.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대사가 한순간 이성을 흩트렸다. 재환의 양 유두를 꼬집듯 비튼 한영은 퍽,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밀어붙였다. 다시금 결합이 깊어지고, 아슬아슬 걸쳐 있던 두 사람의 바지가 툭, 발목까지 떨어졌다.
더 큰 신음, 더 애타는 부름, 더 격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러다 끝내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재환아, 재환아, 재환아, 하는 달뜬 목소리였다. 그 애달프면서도 달콤한 음성에 파묻혀 재환은 종전 정액을 싸질렀던 자리에 또다시 묽은 액을 흩뿌렸다. 굵은 성기가 박힌 배 속에서도 머지않아 같은 것이 퍼졌다.
재환은 부디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 좁은 곳에 한영과 영원히 갇혀 있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았다. 피식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허망한 꿈이었다.
그리고 이제, 꿈에서 깨야 할 시간이었다.
대충의 뒷수습을 끝내고 화장실을 나섰을 때, 공연장 안에서는 군중의 수런거림 말고는 딱히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이 있지도 않은 것을 보아, 본 공연이 끝나고 다들 앙코르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보는 눈도 없겠다, 한영의 손을 꼭 붙잡은 재환은 스탠딩석과 가장 가까운 입구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저만치 앞에 아까 공연장에서 나오느라 통과했던 입구가 보였다. 재환은 별안간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유한영. 너 먼저 들어가 있어.”
“나 먼저? 재환이 넌?”
언제 화장실에서 요란한 섹스를 벌었냐는 듯, 물음을 건네는 얼굴이 지나치게 무구했다. 그 얼굴을 유독 지그시 쳐다보며, 재환은 한영에게서 슬그머니 손을 풀었다.
“나 화장실에 다시 좀 가 보게.”
담담하게 이유를 들려주자, 순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에 빠른 속도로 넘실넘실 걱정이 드리웠다. 재환을 보는 눈빛이 자잘하게 흔들렸다.
“왜? 배 아파? 안에 싸서 그래? 미안해….”
그러더니 급기야 민망한 사과까지 내놓았다.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낯을 한 재환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냥 좀 흐른 것 같아. 암튼 금방 갈 테니까 빨리 들어가.”
아예 재환은 한영 뒤에 서서 공연장 입구 쪽으로 꾹꾹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두 다리에 힘을 준 한영은 제법 끈덕지게 버텼다. 슬슬 초조해지는 재환의 마음과 상관없이, 원치 않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내가 긁어 줄게. 화장실 같이 가.”
“됐다니까. 긁긴 뭘 긁어.”
“내 거잖아. 응…?”
“됐대도.”
“그리고 저 안에 들어가면 나 어떻게 찾아….”
그제야 재환은 밀어내던 어깨를 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한영이 냉큼 뒤를 돌았다. 답을 기다리는 기색이 역력한 한영의 표정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재환은 아직 작은 머리통에 씌워져 있는 모자를 휙 들어 올렸다. 모자는 다시 재환의 까만 머리 위로 얹혔다. 그새 살짝 눌린 감이 있는 분홍색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넣은 재환이 살살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널 왜 못 찾아. 이 머리만 찾으면 되는데.”
반문하기 곤란한 듯 한영은 ‘아….’ 하며 조금 난처한 티를 내비쳤다. 이때다 싶었던 재환은 다시 한영의 어깨를 붙잡아 휙 뒤로 돌려세웠다. 대신 이번에는 억지로 등을 떠밀지 않고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 뽀얀 뺨에 쪽, 하니 입을 맞추었다. 나름의 애정을 담아 통통 엉덩이도 두드렸다.
“빨리 들어가.”
“…알겠어.”
머뭇머뭇 답한 한영이 마지못한 걸음을 뗐다. 천장 가운데로 길게 이어지는 복도 등을 따라 점차 길쭉한 뒷모습이 멀어져 갔다. 이윽고 꼭 지하철 승강장처럼 위에 번호가 써진 공연장 입구로 한영이 쏙 들어가고 나서야, 재환은 한참을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어느새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다.
그 상태로 몇 초간을 더 자리에 붙박여 있던 재환은 한영이 사라진 방향에서 느릿느릿 시선을 거두었다. 발도 함께 틀었다. 그러다 방금 두 사람이 손잡고 함께 걸었던 길을 성큼성큼 되밟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걸음에 속도가 붙고, 종국에는 뛰었다. 사실 목적지 같은 건 없었지만, 일단 뛰고 보았다.
꼭 정신을 놓은 놈처럼 내달린 재환은 경기장 건물 안에 있는 편의점을 지나치고, 화장실을 지나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즈음에야 발을 멈추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휙휙 주변을 둘러보다가, 복도 한편에 서 있는 음료 자판기 하나를 발견했다. 그 옆으로 가 자판기 옆구리에 등을 기대고서 무너지듯 주르륵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무릎을 반쯤 접어 세운 채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 화면을 켜자마자 최근 통화 목록으로 들어갔다. 굳이 스크롤을 아래로 내릴 것 없이, 이미 목록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이름 하나를 눌렀다.
고개를 푹 아래로 수그린 재환은 작게 신호가 울리는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때마침 경기장 안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밴드가 다시 무대에 오른 모양이었다. 혹 저 소리에 진동이든 벨 소리든 묻혀 한영이 전화를 받지 못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먹으려는 찰나였다.
- 여보세요? 재환아, 어디야? 지금 Embryo 막 무대에 올라왔어.
여기서도 느껴지는 공연장의 소란이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하나 온갖 시끄러운 배경음에도 한영의 목소리는 한 음절 빠짐없이 정확히 재환의 귓속으로 들어와 꽂혔다. 마치, 어디에 있어도 그의 분홍 머리를 발견해 낼 수 있던 것처럼.
“유한영.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 어?
“너한테 할 말 있다고.”
‘잠깐만.’ 하며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래 봤자 포효에 가까운 환호성이 뒤섞인 침묵이었다. 5초…, 10초…, 20초가량이 지난 후 종전과 비슷한 물음이 또 이어졌다.
- 재환아, 어디야? 너 없어.
한영은 공연장을 벗어나 복도로 나온 듯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한참 떨어져 있을 테지만, 괜히 제 모습이 들킬세라 재환은 자판기 옆에 보다 등을 딱 붙였다.
“유한영. 잘 들어.”
- 재환아…?
“나 너 좋아해.”
또다시 침묵이 깔렸다. 그 틈을 ‘끼익-’ 하는 기타 앰프의 노이즈가 파고들었다. 재환은 핸드폰을 대지 않은 반대편 귀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물론 저 커다란 소리를 차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으나,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했다. 아니면, 볼품없이 떨리는 제 목소리가 상대에게 지나치게 생생히 전달될 터였다. 하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는 것은 재환만이 아니었다.
- 재…, 환아….
썩 애절한 부름을 가뿐히 무시한 재환은 더 아래로 고개를 떨어뜨린 채 멋대로 저 할 말을 이었다.
“나 너 좋아해, 유한영. 진짜 좋아해. 지금까지 너처럼 누구 좋아해 본 적 없어. 정말…, 너 좋아해.”
꼭 뭐라도 알아차렸는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스피커 너머에서 ‘재환아, 어디야? 너 지금 어딨어!’ 하는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이 또한 재환은 죽기 살기로 무시했다. 저쪽이 뭐라고 떠들건, 혼잣말보다도 못한 너절한 고백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아마 앞으로도 너만큼 누구 못 좋아할 거야. 어떻게 그래. 내가 어떻게 그러냐….”
- 재환아,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응? 너 지금 어딘데…!
시끄럽게 울리는 악기 소리를 가르는 음성이 한층 더 절절해졌다. 가쁜 숨소리도 얼마쯤 함께 섞여 있었다. 역시나 이를 못 들은 체한 재환은 휙 고개를 뒤로 젖혀 차가운 철제 면에 뒤통수를 기댔다. 레일처럼 길게 늘어진 천장의 조명이 시야에서 어룽어룽 번졌다. 쓸데없는 서두는 이 정도로 하고, 진짜 본론을 꺼낼 차례였다.
“그래서…. 나 이제 너 안 만날 거야, 유한영.”
- 재환아…!
“키스도, 섹스도, 음악도, 전부 다 그만할 거야.”
- 재환아, 잠깐만!
“그러니까 나 찾지 마, 이제.”
몇 번 더 ‘재환아!’라거나 ‘어디야?’ 하는 애타는 소리가 터졌다. 아무리 그래 봤자 재환은 더 이상 한영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해를 넘겨 품고 있던 말도, 지난 몇 달을 괴로이 고민했던 말도 모조리 다 털어놓았다. 참 짧고 멋없을지언정, 전부 들려주었다.
이를 눈치챈 듯, 울먹울먹 숨을 삼키던 한영이 두서없는 원망과 타박을 급히 내뱉기 시작했다.
- 가,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어. 얼굴도 안 보고. 나한테는 말하지 말라며. 그래서 참았는데…! 안 그러면 너랑 밴드 못 한다 그래서! 근데 이러는 법이 어딨어, 재환아….
그러다 서툰 반성을 했고,
- 전에 대회 때문에 그래? 그때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진짜 오해해서 그랬어. 너랑 그 카페 여자애랑 무슨 사이인 줄 알았어. 잘못했어. 나 다시는 안 그래….
끝내는 싹싹 빌었다.
- 나 버리지 마, 재환아. 진짜로 너 하란 대로 다 할게. 뭐든 할게. 네 말은 다 들을 테니까…. 진짜 이러지 마, 재환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 나 너 진짜 좋…,
“잘 지내, 유한영.”
잔인하게 말허리를 자르자마자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렸다. 액정을 깨부술 기세로 ‘유한영’ 세 글자 밑에 떠 있는 시뻘건 아이콘을 콱 눌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기계 측면의 버튼을 길게 눌러 아예 핸드폰을 잠재웠다. 하지만 심장이 찢어질 듯한 괴로움은 결코 잠재울 수 없었다.
결국 한 손으로 핸드폰을 움킨 재환은 다른 손으로 퍽퍽 가슴팍을 내리쳤다. 그 소리가 하도 크게 울려 경기장에서 들려오는 킥 드럼 소리와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 소리만 요란할 게 아니라, 차라리 이러다 심장이 펑 터져 버리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한영에게 하고 싶었던 말의 반도 꺼내지 못했다. 진짜 진심을 구구절절 다 전하려면 이 몇 분의 통화 갖고는 어림도 없었다. 적어도 밤은 새워야 했다. 감히 이제 와 고백하건대 한영을 향한 재환의 마음은 그 정도였다.
그냥 좋아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첫사랑이었다. 나름 연애도 해 보았고, 누군가를 좋아한다 느낀 적도 있었지만, 한영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된 감정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상대가 같은 거 달린 남자 새끼든, 그 남자 새끼한테 쑤셔 박히든 나중에는 하등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재환은 한영이 좋았다. 이런 게 진짜 첫사랑이구나, 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름 그 이유를 찾아내 보려 초반에는 적잖이 골머리 앓기도 했다. 하필이면 좋아해도 같은 밴드에서 노래 부르는 놈을 좋아하게 되었느니 저 스스로도 납득할 거리가 필요했다. 뭐, 작정하고 떠올리자면 이유야 숱하게 많았다. 한눈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외양이라든가, 기가 막힌 피아노 실력이라든가, 고막을 녹이는 목소리라든가….
그러나 정작 재환의 가슴을 무심코 뒤흔드는 순간은 따로 있었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 습관처럼 내쉬는 희미한 한숨, 새하얀 건반을 누르며 팔랑거리는 분홍 머리칼, 뒤에서 껴안아 올 때 풍기던 달큼한 내음, 절정에 다다라 애타게 터지는 ‘재환아’라는 부름. 그리고.
세상에 너밖에 없다는 것처럼 저를 쳐다보는 그 투명한 눈빛이 재환은 좋았다.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색색의 꽃잎들로 가득 찬 구렁텅이로 퐁당 굴러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에 빠져 때로는 현실이 끔찍한 무채색으로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재환은 한영이 주는 설렘과 안락이 좋았다. 그의 애정이 좋았다.
그래서 재환은 그가 부르는 노래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들어 내는 멜로디와 그 안에 담긴 순수한 감성을 사랑했다. 그것을 지키고자, 또 함께하고자 재환은 끝끝내 한영과의 사이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렇게만 하면 다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는, 이 관계는 결국 한영의 노래를 지켜 주지 못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뼈아픈 진실이었다.
물론 이대로 눈치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감정을 구실 삼아 계속 한영 곁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으나, 하찮고 같잖은 자존심이 문제였다. 앞으로 한영이 훨씬 더 훌륭한 기타리스트, 능력 있는 믹싱 엔지니어를 만나리란 것을 재환은 알았다. 이를 지켜보며 자신의 무능함을 새삼 절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다 핑계였다. 다른 사람과 음악 하는 한영을 보기 싫었다. 그럴 자신 없었다.
그리하여 재환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한영의 노래를 계속 들으려 이 비겁한 짓을 벌였는데, 앞으로는 감히 그의 숨소리 하나 듣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노래가 들려오면 어디서든 미친놈처럼 도망치게 될 것 같았다. 눈앞이 다 꺼멓게 물드는, 끔찍이도 막막한 예감이었다.
“재환아-!”
저 멀리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절망에 잠식돼 헐떡이던 재환을 한순간 당장의 현실로 끌고 왔다. 더듬더듬 자판기 옆을 손으로 디딘 재환은 서둘러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발꿈치, 등허리, 뒤통수를 죄 자판기에 붙이고서 숨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어느덧 질질 흐르는 눈물이 자꾸 끅끅거리는 추접한 소리를 빠져나가게 했다. 공연장 안에서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음악 소리에도 차마 묻히지 못할 소음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감쳐문 재환은 마치 저 자신을 질식시키듯 두 손을 겹쳐 입가를 틀어막았다.
“재환아!”
또 한 번 목 놓아 터뜨린 외침이 크게 울렸다. 그새 목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아무리 그래 봤자 답할 수 없는 재환은 아예 자판기가 붙은 벽 쪽으로 휙 고개를 틀어 버렸다. 댐 터진 듯 주룩주룩 솟구치는 눈물이 숨을 가둔 손바닥 안으로 스몄다. 어깨가 쉴 새 없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지금 저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에, 재환은 터져 나가려는 흐느낌을 안간힘을 다해 억눌렀다. 제발 꺼지라고, 유한영 너 좀 꺼지라고 간절히 빌었다.
“재환아….”
마침내, 비겁하게 자판기 뒤에 숨어 꺽꺽대는 사람 못지않게 서러운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애처로이 복도에 퍼졌다. 함께 바닥 위로 길게 뻗어 온 그림자가 아슬아슬 자판기를 비켜 갔다. 그 위태로운 선을 사이에 두고 한 명은 버티고, 한 명은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느 쪽도 안타깝고, 애타며,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사무치는 죄악감까지 떠안은 한쪽의 발끝이 종내 자판기 바깥으로 기울어지려 할 무렵이었다.
자판기 옆으로 비죽 튀어나왔던 그림자가 서서히 짧아졌다. 뒤이어 터벅터벅, 터벅터벅, 힘없는 발소리가 바닥에 깔리는가 싶더니, ‘와-’ 하고 벽 안쪽에서 쏟아지는 함성이 그 소리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덩달아 다시금 몰아치는 기타의 지글거림이, 베이스의 저음이, 드럼의 쿵쾅대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이 되어 재환의 귓속으로 들이박혔다. 이를 견디지 못한 재환은 끝내 바닥으로 털썩 무릎 꿇었다.
“허윽…, 흑….”
상체를 웅크린 채 주먹으로 두 귀를 막았다. 짓밟힌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마치 토악질하듯이 눈물을 쏟았다. 뚝, 뚝, 쉬지도 않고 떨어진 눈물이 무릎과 바닥에 보기 싫은 점을 한가득 그렸다. 이대로 벌벌 기어가 이미 한참은 멀어졌을 상대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넘쳐흘렀다. 가지 마, 유한영. 제발 가지 마…. 결심을 배반하는 한심한 중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쿵! 탐을 내리치는 소리가 별안간 천둥처럼 울렸다. 모든 악기의 연주가 일시에 멎으며, 지금껏 내질러졌던 것과 비교도 못 하게 큰 환성이 순식간에 온 사위를 뒤흔들었다. 차가운 복도 바닥 위로 흩어지는 흐느낌도, 저 바깥에서 서늘한 밤공기 중으로 퍼지는 울먹임도 모두 묻어 버리는 소리였다.
너와 나의 시간이 끝나는 소리였다.
넓지 않은 방 안에는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이 까만색이었다. 사방에 둘린 계란판 같은 방음재가 까맸고, 벽 한 면을 모두 차지하다시피 한 미디 책상이 까맸다. 그 위에 양옆으로 놓인 검정색 투웨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추며, 노트북 화면에 띄운 재생 프로그램에서 움직이던 커서도 함께 정지했다. 프로그램 상단에 적힌 파일명은 ‘유한영_Reverb(가믹스).mp3’였다. 얼마 가지 않아, 할 일이 끝난 노트북 화면이 알아서 꺼멓게 꺼졌다.
그리하여 한층 더 시커메진 공간 속, 노트북 앞에 멀거니 앉은 남자의 낯빛만이 벌겋게 물들어 당장이라도 와르르 눈물을 쏟을 듯 위태로운 기색을 띠었다. 하지만 흰자에 뻘건 핏발이 섰을지언정 눈물은 밖으로 흐르지 않았다. 8년 전, 공연장을 빠져나온 사람들 틈에 섞여 미친놈처럼 울어 젖혔던 그날을 기점으로 남자는 당시를 떠올리며 울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내렸던 선택에 대한 속죄이자 염치라고 여겼다. 남자에게는 감히 과거를 안타까워하며 울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3분 40초가량의 노래가 불러일으킨 지난날의 기억은 너무도 짙고 거대했다. 아이돌 같다는 생각뿐이 할 수 없었던 첫 만남과, 그로 인해 삐끗했던 밴드의 시작. 나를 좋아하면 함께 밴드 할 수 없다던 웃기지도 않은 선전포고와 이를 악착같이 지켜 내던 너. 그런 너와 함께했던 수두룩한 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맞이했던 우리의 끝…. 휘몰아치는 기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분홍 머리칼에서 풍기던 향기가 지금 당장 코끝을 간질이고, 투명한 눈동자가 보내오는 시선이 살갗을 훑으며, 서늘하면서도 따스한 체온이 온몸을 감싸는 듯한 되지도 않은 착각이 의식을 사로잡아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 온갖 알록달록한 색채로 도배된 방에서 한 남자와 꼭 붙어 있던 순간, 저 지하 합주실에서 땀방울 흘리며 기타를 치던 순간, 덩그러니 피아노 한 대만 놓인 방에서 새하얀 벽에 페인트를 뿌려 대던 순간 따위가 어지럽게 뒤엉켜 휙휙 눈앞을 스쳤다.
“아아….”
울음보다 더 사무치는 한숨을 토한 재환은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봇물 터지듯 와르르 쏟아지는 기억에서 감히 헤어날 수 없었다. 막아도, 막아도 흐르는 기억은 현재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해일과 같았다. 동시에 재환은 인정하기 못내 두려워 참담하게 다가오기까지 하는 사실 하나를 깨달아야 했다.
8년 전 끝났던 나와 너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