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 *
누군가의 입에서부터 폭탄처럼 쏟아진 얘기를 곱씹고, 고민하고, 또 때로는 부정하는 사이 시간은 착실히도 흘러갔다. 그리하여 포근하게 내리쬐던 햇빛이 이제는 덥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공기 중 떠도는 습기가 안 그래도 답답한 가슴을 더 답답하게 하고, 잊을 만하면 쏟아지는 비가 깊어지는 고민에 물을 주었다. 유난히 버거운 여름이었다.
그럼에도 합주실에 앉아 멤버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할 때면 재환은 짜증 나는 여름을, 숨 막히는 고민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비단 머리 위에서 펑펑 쏟아지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 놓지 못한 희망이 재환을 그렇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애쓰면 무언가 될 것 같다는, 막연하고도 애처로운 희망이었다.
그 희망에 나름 밑거름을 주는 일이 밴드에 찾아왔다. 큰 경연 대회의 본선에 더 숨이 당당히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이 대회는 지금껏 그들이 참가했던 다른 대회와는 여러 가지로 차원이 달랐다. 상금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1등을 차지하면 국내에서 열리는 유명 록 페스티벌 무대에 설 자격이 주어졌다. 난다 긴다 하는 밴드들 사이에서 1등을 거머쥐는 일이 당연히 녹록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참가하는 입장에서는 마구 욕심이 샘솟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재환에게는 이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내야 할 조금 더 개인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재환은 몸소 증명하고 싶었다. 지금 우리 하는 짓이 소꿉장난이 아님을. 대회에서 1등을 하고, 보다 큰 무대에 서고, 그렇게 해서 인정만 받으면 더 이상 괴로운 고민을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미국으로든 어디로든 한영을 보내는 일, 없을 것 같았다. 욕심을 넘어선 간절한 바람이었다. 단, 그 간절함이 조금 지나친 것이 문제였다.
“잠깐 멈춰 봐.”
팍 인상을 구긴 재환은 기타 치던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멤버들이 차례로 연주를 멈추고, 매서운 기색을 띤 시선이 계속 같은 구간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해 휙 돌아갔다.
“장태군. 거기 너 혼자서만 계속 빨리 들어오고 있잖아.”
“어? 내가?”
설핏 당황한 표정이 된 태군이 스틱 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전혀 몰랐다는 듯한 친구의 반응이 재환의 짜증을 부추겼다.
“그래.”
하여 대꾸하는 말이 전에 없이 짧아졌다. 가타부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대범하지 못한 상대를 기죽이기 딱 좋은 태도였다. 하지만 대회가 며칠 남지도 않은 시점에서, 재환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실수였다. 그러니 표정이나 말투가 곱게 될 수가 없었다.
“아, 조심할게….”
결국 힐난을 한가득 담은 눈빛을 견디지 못한 태군의 눈알이 슬그머니 옆으로 굴러갔다. 반성하듯 스틱 끝이 소복이 머리칼로 덮인 작은 머리통을 긁었다. 벽에 달린 에어컨에서 쉴 새 없이 써늘한 바람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보다 못한 지우가 나섰다.
“잠깐 쉬었다 할까? 우리 2시간 연속으로 합주했어.”
기실 한 명만 답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지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재환을 향했다. 다시 흘끔 눈을 돌린 태군도 재환을 보았고, 한영의 빤한 눈길도 재환에게 닿았다. 무언의 압박 속, 재환은 영 떨떠름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앞으로 1시간은 더 가뿐히 연습할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그래도 별수 있나. 멤버들이 저렇게 한뜻으로 저만 보는데.
“…그래.”
마지못해 쉬는 시간을 갖자마자 재환은 지우에게 이끌려 정원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질 때가 아니라 정수리로 직사하는 햇볕이 가히 뜨거웠다. 해서 구깃구깃한 표정으로 입술 새에 담배를 무는데, 라이터를 쥐기도 전 지우가 먼저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이 불볕더위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듯, 지우는 빙그레 웃는 낯이었다.
“아까 태군이 우는 줄 알았다.”
후 연기를 뱉으며 이번에는 재환이 피식 웃었다. 설마, 하는 마음이 담긴 웃음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또 마냥 지우의 말을 우스갯소리로 여길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근래 자신이 잔뜩 예민해진 상태라는 자각은 갖고 있었다. 평소라면 실수 좀 몇 번 했다고 멤버를 그렇게 쥐 잡듯 잡지는 않았을 터다. 하지만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초조함, 긴장감 따위가 날로 불어나 재환은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았다.
끝내 입가에 걸렸던 웃음이 씁쓸한 한숨으로 변질되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와 함께 긴 숨을 흘린 재환은 그새 훅 타들어 간 재를 손끝으로 두드려 털어냈다. 어째 니코틴이 기분 전환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우리…, 공연 망하지는 않겠지?”
덩달아 톡톡 재를 떨어뜨리던 지우가 휙 눈을 돌려 재환을 보았다. 답지 않게 이놈이 왜 이런 걸 묻지, 하는 눈빛이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재환은 혼잣말 같은 말을 몇 마디 더 이었다.
“이렇게 안달했는데 무대에서 실수하면… 존나 억울할 것 같아.”
지우는 재환의 얘기를 곱씹는 듯 잠깐 ‘음….’ 소리를 냈다. 사실 답을 바라고 꺼낸 말은 아니었기에 재환은 딱히 지우를 재우치지 않았다. 그냥 저 앞에 푸릇푸릇 이파리가 돋아난 나무들이나 멀거니 쳐다보았다. 쏟아지는 햇살이 그 아래로 얼룩덜룩한 나뭇가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잠시 후, 조금 예상치 못한 말이 지우에게서 건너왔다.
“공연 망해서 상 못 타면, 밴드도 망할까 봐?”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려던 재환은 주춤 굳었다. 삐걱삐걱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지우를 보자, 지우의 입꼬리가 싱긋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재환은 지우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 꼭 무언가가 들추어진 기분이었다. 푹 눈을 구긴 재환은 지우의 오묘한 눈빛을 피해 재빨리 고개를 앞으로 되돌렸다.
“뭔 소리야.”
부러 더 황당하다는 투로 대꾸하며 필터를 짧게 빨았다. 마찬가지로 짧게 연기를 내뱉고 다시 필터를 빨아들이기를 연거푸 서너 차례 반복했다. 그사이 담배는 금방 몽땅해졌다.
다소 성마르게 행동하는 재환을 물끄러미 보던 지우가 찬찬히 연기를 뿜은 후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생각 할 수도 있지, 뭐. 밴드가 계속 유지되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러다 그만두기도 하고.”
재환의 눈머리가 보다 움츠러들었다. 아예 휙 몸을 돌려 지우와 눈을 맞춘 재환은 저도 모르게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너…, 혹시 밴드 그만두게?”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 눈을 크게 뜬 지우가 이내 하하, 하며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마지막 연기를 길게 뱉은 지우는 가벼운 몸짓으로 옆에 놓인 깡통에 꽁초를 던졌다. 팅, 맑은 소리를 내며 꽁초가 알루미늄 바닥에 부딪혔다.
“재환아. 미국 있을 때, 내가 먼저 한영이한테 한국에서 밴드 하자 그랬어. 그랬는데 쉽게는 못 그만두지.”
“그럼 왜….”
“그냥, 그런 상황이 와도 이해는 할 수 있다, 뭐 그런 뜻이야.”
커다란 손바닥이 두어 번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뿐하게 떨어져 나갔다. 무어라 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썹을 움찔거리던 재환은 문득 담배를 쥔 손가락 사이가 뜨끈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간 피우는 것도, 재를 떨어내는 것도 잊은 담배가 필터 부근까지 짧아져 있었다. 서둘러 담배 끄트머리를 튕겨 불을 끈 재환은 발간 불빛이 사그라진 꽁초를 휙 깡통 안으로 던졌다. 양손을 탁탁 비벼 손가락에 묻어난 재를 털었다.
“그럼 들어갈까?”
지우가 고개를 까딱이며 한영의 집 현관을 가리켰다. 그때,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재환의 핸드폰이 미약하게 징, 소리를 냈다. 눈치 빠른 지우는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기도 전 재환에게 통화하고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슬렁슬렁 걸음을 뗀 지우가 조금 멀어졌을 즈음 재환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타이밍 참, 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재환은 ‘유진영’ 세 글자 밑에 표시된 통화 아이콘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호텔에서 만난 후 이렇게 연락이 온 것이 아주 처음은 아닌지라,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꽤나 덤덤했다. 그에 반해 상대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약간 들뜬 기색이 있었다.
- 재환이, 잘 지냈어?
“네. 안녕하세요.”
지난번 통화할 때, 진영은 진짜로 재환에게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을 꺼냈다. 빈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함께 식사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아르바이트와 합주로 바빠 그럴 틈을 내기가 어려웠다. 혹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전화를 건 것이라면, 아마도 이쪽이 들려줄 대답 또한 같았다. 하나 재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 곧 큰 대회 나간다며. 연습은 잘하고 있어?
네, 답하면서도 재환은 슬쩍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서로 이런 안부를 주고받을 사이도, 상황도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상대가 바라는 바가 하나뿐임을 재환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짐작만큼은 틀리지 않았다.
- 딴 게 아니라, 당분간은 대회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내가 전에 말한 건 천천히 생각하라고. 어차피 나도 앞으로 한두 달은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빠서 한영이 일 신경 못 써. 만약 계약하더라도 그다음에 해야지.
기다려는 주겠으나, 어쨌든 한영을 회사와 계약시킬 뜻에는 변함이 없다는 의미였다. 잠깐 답을 미룬 재환은 어깨와 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우고서 얼른 담뱃갑을 열었다. 막 하나를 피운 참이었지만, 당장 담배가 너무 당겼다.
“…알겠습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서야 재환은 짤막하게 답했다. 이후로도 상대는 바로 전화를 끊지 않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더 늘어놓았다. 그 집 지하 합주실 진짜 괜찮지 않느냐, 거기도 다 본인이 꾸며 준 거다, 하는 내용이었다. 재환으로선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내심 놀라웠지만, 그 감상을 고대로 드러내 맞장구칠 마음이 좀체 들지 않았다.
‘그럼 연습 열심히 해!’ 하는 응원으로 통화가 끝났다. 뿌연 연기를 뱉으며 재환은 짧지 않은 통화 시간이 찍힌 핸드폰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상대로부터 독촉의 말 한마디 듣지 않았음에도, 영 마음이 불편했다. 뭐, 요새 내내 그런 상태이기는 했다마는.
알아서 시커멓게 꺼진 액정 위로 별안간 톡, 톡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눈을 찡긋 찌푸린 재환은 하늘을 향해 높이 고개를 쳐들었다. 종전까지만 해도 따갑게 내리쬐던 해가 스멀스멀 몰려든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그 짧은 틈에 또 똑, 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눈두덩이 근처를 적셨다. 꼬락서니를 보니, 이러다 금방 소낙비가 퍼부어질 기세였다.
재환은 급히 마저 피운 담배꽁초를 깡통에 던졌다. 잿빛이 된 하늘 저 멀리에서 이제는 번쩍번쩍 빛까지 터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예 빗방울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굵어진 빗발을 막기 위해 머리 위로 손바닥을 덮은 재환은 집 현관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날씨는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습기 먹은 마음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역시나 사람을 유달리 힘들게 하는 여름이었다.
소나기는 소나기였다. 꼬박 2시간을 더 합주하고 1층으로 올라왔을 때는 언제 요란하게 비를 쏟아부었냐는 양 밖이 잠잠했다. 개인 연습을 핑계 삼아 태군과 지우를 먼저 보낸 재환은 거실 창에 딱 달라붙어 촉촉이 물기에 젖은 정원을 내다보았다. 붉은 노을빛까지 더해져, 창 너머로 비치는 정원 풍경이 그럭저럭 눈에 담을 만했다.
한 1분쯤 지났을까. 나름의 바깥 구경을 끝낸 재환은 천천히 창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부드러운 벽에 등이 부딪혔다. 놀라 멈칫하는 사이, 기다란 팔이 허리로 감기며 어깨에 가벼운 무게가 얹혔다. 투명한 창에 반사된 갈색 눈동자가 지그시 재환을 보았다.
“놀랐어?”
“조금.”
큰 의미 없는 물음을 전한 입술이 쪽, 쪽 목덜미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 반대편으로 목을 기울인 재환은 나지막하게 응…, 소리를 흘렸다. 간지러운 접촉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연거푸 새침한 마찰음을 울리며 위로 올라온 입술이 어느덧 귓가에 닿았다. 뒤에서 허리를 안은 팔에 꽉 힘이 들어가더니, 약간의 투정 섞인 속삭임이 재환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오늘 재환이 많이 무서웠어.”
한차례 쉬고 합주를 재개했을 때는 그래도 좀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엉뚱한 데서 가사를 틀린 한영을 보고 몇 번이나 ‘유한영!’을 외쳤으니 상대에게는 참는 티도 안 났을 것이다. 뒤늦은 미안함, 내지는 민망함에 재환은 ‘미안.’ 하고 짧은 사과를 전했다. 그러고서 얼른 어줍은 변명을 덧붙였다.
“근데 대회에서는 실수하면 안 되니까….”
“응, 알아.”
“진짜?”
“응, 진짜.”
유순하게 답한 한영은 이제 재환의 반대쪽 목덜미에 쪽, 쪽 입 맞추었다. 거듭되는 간지럽고도 야릇한 감각에 재환은 흠칫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다 별안간 휙 몸을 뒤로 돌려 한영을 마주 보았다. 다소 갑작스러운 행동에 한영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직 두 팔은 재환의 허리에 감겨 있었다.
“재환아?”
“유한영. 우리 1등 못 하면 어떡하지?”
자신이 묻고도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아닌 말로, 1등을 할 확률보다 그러지 못할 확률이 훨씬 컸다. 냉정하게 따지면 본선 진출 팀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자꾸 조바심을 내게 되었고, 그 마음을 내심 한영이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잠깐 고민에 잠긴 듯 이리저리 말간 눈알을 굴리던 한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
“어…?”
“난 1등 못 해도 괜찮아, 재환아.”
얼뜬 표정이 된 재환은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떴다. 한영 말하는 게 황당하게 들렸다기보다는, 이해가 잘 안 가서 그랬다. 1등 못 한다고 무슨 큰일이 터지는 건 아니겠다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은 좀…. 납득하기 어려웠다.
“왜?”
“그냥… 난 재환이 너만 있으면 돼.”
얼굴을 붉히며 답한 한영이 재환을 더욱 꼬옥 끌어안아 왔다. 두 사람의 몸이 바짝 밀착하며 뾰족한 턱 끝이 아프지 않게 어깨를 눌렀다. 얼결에 상대의 등판을 손으로 감싼 재환 또한 자연히 단단한 어깨에 턱을 얹게 되었다. 그 상태로 다시금 느릿느릿 눈을 껌뻑이다가, 짧은 한숨을 터뜨렸다. 참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이었다.
“유한영.”
“응?”
“그래도 가사는 실수하지 마.”
그새 귓바퀴까지 발그스름히 물들인 한영은 끄덕끄덕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때마침 정원 곳곳에 자리한 조명들이 차례대로 반짝 불을 틔웠다. 그곳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온 불빛이 창을 통과해 두 남자가 서 있는 거실에까지 스며들었다.
얼마간 더 재환을 꽉 껴안고 있던 한영은 턱을 댄 어깨에서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살짝 몸을 뒤로 젖혀 둘 사이에 틈을 만들고서, 재환에게 빤한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재환은 얼추 짐작했다.
“재환아. 나 가사 더 열심히 외울 테니까…. 한 번만 빨면 안 돼?”
이제는 딱히 허락이 필요 없는 일을 구태여 묻는 것은, 아마도 장소와 연관이 있을 터였다. 자잘한 기대와 흥분이 넘실거리는 눈동자와 눈을 맞추던 재환은 짧게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도톰한 입술이 얇게 펴지며 하얀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졌다.
얼마나 좋은지, 내처 꽉 어깨를 붙든 한영은 살점이 뭉개지도록 재환에게 입술을 눌렀다 뗐다. 그로 인해 쪽, 하고 울리는 소리가 지나치게 컸다.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재환은 뒤로 한 발 물러서서 딱딱한 유리창에 등을 기댔다. 어차피 제가 안 하면 한영이 할 것을 알았으므로, 바지 안에 손을 넣어 드로어즈까지 한꺼번에 아래로 끌어 내렸다. 팽팽히 늘어난 고무줄이 허벅지 중간에 걸쳐지며, 그 위로 드러난 사타구니가 훤히 상대방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읏….”
그러기 무섭기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앉은 한영이 재환의 성기에 입술을 묻었다. 동시에 큼지막한 손바닥이 통통한 엉덩이를 감쌌다. 등을 댄 유리창에 쿵, 뒤통수까지 기댄 재환은 차츰 아랫도리에서 번지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스르륵 눈꺼풀을 내려 앉혔다.
이것으로 한영이 실수 없이 공연한다면…. 뭐, 꽤나 싸게 먹히는 셈이었다. 그런 것 같았다.
* * *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래로, 재환은 가장 과감한 일을 결심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남들 보기에는 별거 아닐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감기로 쓰러지기 직전이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을 쉬어 본 적 없던 재환이었기에, 세훈에게 생각한 말을 꺼내기까지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그에 비해 세훈의 대답은 지나치리만치 빨랐다.
“그래, 그럼. 다음 주 일주일만 쉰다는 거지?”
“아…, 네.”
“근데 일주일이면 되겠어? 큰 대회라며.”
심지어 세훈은 재환이 더 쉬겠다고 하면 아예 그러라고 할 작정인 듯해 보였다. 그러나 재환이 생각하기에는 다음 주 한 주를 통째로 빠지는 것만으로 이미 큰 민폐였다. 카페에 더 누를 끼칠 수는 없었다.
“네, 일주일이면 될 것 같아요.”
“알았어. 애들 시험이다 뭐다 빠지면 항상 재환이 네가 대타 뛰어 줬는데, 그 정도 휴가는 줘야지. 연습 열심히 해.”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리하여 짧은 면담을 마친 재환은 꽤나 가뿐한 마음으로 직원 휴게실을 나섰다. 한데, 어쩐 영문인지 카운터 뒤에 서 있던 희연이 가까이 온 재환을 잔뜩 걱정 낀 눈길로 보았다.
“저…, 오빠.”
“응?”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재환이 ‘왜?’ 하고 묻자 희연은 눈짓으로 직원 휴게실 쪽을 가리켰다. 아아. 그제야 재환은 희연의 반응을 이해했다. 문 꼭 닫고 사장과 단둘이서만 이야기를 하다 나왔으니, 같이 일하는 희연 입장에서는 괜한 걱정이 될 법도 했다. 재환은 방금 세훈과 나누었던 대화를 간략히 추려 희연에게 들려주었다.
“헐, 오빠! 왜 말 안 해 주셨어요!”
이윽고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즈음, 작은 손바닥이 찰싹 재환의 팔뚝을 때렸다. 맞은 재환도, 무심코 손찌검을 한 희연도 서로 놀래 눈이 동그래졌다. 1초…, 3초…, 5초가 지나고, 희연의 얼굴이 빠르게 울상이 되었다.
“헉, 죄송해요…!”
당황이 넘친 희연은 방금 제가 때린 자리를 얼른 손목으로 싹싹 문질렀다. 아닌 게 아니라, 상지랑 같이 있을 때나 하던 버릇이 무심코 튀어나와 심히 난감했다. 때려도 하필 재환 오빠를 때리다니. 죄질이 나빴다.
“괜찮아. 아프지도 않은데.”
그런 희연을 보며 곤란한 듯 웃은 재환은 손사래 쳤다. 소리만 컸지 사실 하나 아프지도 않건만, 희연은 지나치게 쩔쩔매고 있었다. 하나 괜찮다는대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눈치라, 결국 재환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희연의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짚었다.
“희연아. 진짜 괜찮대도.”
“아…, 네….”
오늘 이렇게 좋아하는 오빠 앞에서 또 푼수 짓을 해 버린 희연은 시무룩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무룩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깐 잊고 있던 게 퍼뜩 생각난 희연은 재환을 향해 휙 몸을 반절 틀었다.
“암튼, 미리 말씀 좀 해 주시지! 저 그날 약속 잡았는데….”
그리고 또 시무룩해졌다. 큰 대회에 나서는 재환을 볼 수 없다는 건 희연에게 있어 그만큼 속상한 일이었다. 그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재환이 사람 좋게 웃었다.
“우리 공연 지금까지 희연이 네가 제일 많이 와 줬어. 한 번 못 와도 괜찮아.”
“…네.”
어깨를 축 늘어뜨린 희연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다지도 풀 죽은 와중, 그래도 하나 안도되는 일이 있었다.
“근데 전 오빠 일 그만두시는 줄 알았어요.”
“내가?”
“네. 사장님이랑 둘이서만 얘기하길래….”
일전, 희연도 그런 식으로 세훈에게 곧 그만둘 거란 얘기를 했었다. 그래서 세훈과 면담하러 들어간 재환을 보고 더 걱정한 감이 없잖았다. 재환까지 이 카페를 그만두면, 그와 자신 사이에는 인제 정말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에이. 그만두면 희연이 너한테도 진작 얘기했지.”
‘진짜요…?’ 하며 희연이 한껏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빛으로 재환을 볼 즈음이었다. 직원 휴게실 문이 열리며 멋들어진 중절모를 머리에 쓴 세훈이 밖으로 나왔다. 카운터 건너편으로 와서 선 세훈은 손끝으로 톡톡 카운터 위를 두드리며 희연과 재환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손님 없어도 그렇지, 자꾸 수다만 떨 거야?”
아차 한 재환은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반대로 희연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세훈의 말이 농담임을 알았거니와, 그의 행선지를 짐작한 까닭이었다.
“사장님 데이트 가시는 거죠?”
부러 가늘게 떴던 세훈의 눈이 금세 둥글게 휘어졌다. 덩달아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고서, 세훈은 아예 자랑하듯이 슬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데이트 간다. 오늘 우리 자기 생일이라.”
그 ‘자기’가 누구인지 희연도, 재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연히 두 사람은 축하 인사를 전해 달라는 말을 꺼냈다. 살짝 엎드려 절 받는 느낌이 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만족스럽게 웃은 세훈은 흔쾌히 ‘그러마.’ 하고 답했다.
“그럼 난 갈게. 마감 잘 부탁해.”
경쾌한 걸음으로 카페를 나서는 세훈을 보며, 희연은 어쩔 수 없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살그머니 눈을 옆으로 돌렸을 때, 세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재환을 발견했다. 오빠도 데이트 가는 사장님이 부러운 건가…? 살짝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알 길은 없었다.
여름에는 카페 일이 유독 바빴다. 밖이 원체 더우니, 더위를 피하려 카페를 찾는 손님이 많았다. 당연히 손님 모두 열이면 열 시원한 음료를 시켰고, 대게 이것들은 뜨거운 음료보다 손이 많이 갔다. 따라서 일하는 사람이 배는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그 사이사이, 희연은 심장이 쿵 떨어질 것 같은 상황에 수시로 부딪혔다. 재환과 나란히 서 있다 팔꿈치가 톡 맞닿는 상황이라든가, 동시에 같은 물건을 집으려다 손이 겹쳐지는 상황이라든가, 제 멍청한 실수에 재환이 슬쩍 웃는 상황이라든가…. 어쩌면 매 순간이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래 봤자 이제 이럴 날도 며칠 안 남았다. 곧 있으면 희연은 교환 학생을 떠날 거였고, 따라서 카페 출근도 이번 달까지였다. 재환의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몇 번 없다는 뜻이었다. 하니 희연은 재환 안 보는 곳에서 자꾸 푹푹 한숨이 쉬어졌다. 그러면 무엇 하나. 어차피 그녀에게는 재환에게 고백할 용기 따위 없었다. 입이 찢어져도 ‘오빠 좋아해요’ 하는 말 같은 건 꺼낼 수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우유 물에 확 코를 박는 게 나았다.
“희연아?”
“예, 에?”
“문.”
우유 냉장고를 연 채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희연은 화들짝 놀라 쿵 문을 닫았다. 한참 전 꺼낸 우유 팩을 에스프레소 머신 옆에 내려놓고 팔뚝을 문질렀다. 얼마나 냉장고를 오래 열고 있었는지, 안에서 흘러나온 냉기에 살갗 위로 오돌토돌 소름이 다 돋아나 있었다. 또 하염없이 잡생각에 빠져든 탓이었다. 속으로 에잇, 을 외치며 희연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에어컨 바람이 센 탓에 생각보다 추운 기운은 오래갔다. 팔꿈치 위까지 올렸던 셔츠 소매를 살살 끌어 내리던 희연은 무심코 옆에 선 재환의 손목으로 눈이 갔다. 다부지게 뼈대가 도드라진 손목에는 얇은 끈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몇 달 전부터 늘 재환이 차고 다니던 팔찌였다.
사실 희연이 재환에게 진심을 고백하지 못하는 데에는 저 팔찌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꾸미는 일에 관심 없는 재환이 직접 산 물건으로는 비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자 친구가 생긴 눈치는 아닌데….
어느새 또 영양가 없는 상념에 빠진 스스로를 발견한 희연은 컵 하나를 꺼내 와르르 얼음을 쏟았다. 높이 든 컵을 기울여 얼음 덩어리들을 입 안에 털어 넣은 뒤, 와작 소리가 나게 깨물었다. 그러자 골이 찡하니 울리는 동시에 쓸데없는 생각이 좀 덜어지는 것 같았다. 속도 그럭저럭 시원하게 뚫리는 듯했다. 하지만 곁에 있던 재환이 ‘희연이 더워?’ 하고 물어 왔을 때는 도로 답답해졌더랬다.
이후 손님이 몰려 바삐 움직이다 보니 금방 카페 영업을 끝낼 시간이 되었다. 문에 걸린 ‘Open’ 팻말을 ‘Close’로 뒤집은 두 사람은 카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바지런히 뒷정리를 했다. 정리가 마무리된 다음에는 차례로 휴게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카페를 나서기 전, 벽에 있는 스위치를 모두 눌러 실내조명을 껐다. 그리고.
“오빠, 오늘 수고하셨어요.”
“희연이 너도. 조심해서 가.”
“네.”
애석하게도 희연과 재환은 집 가는 방향이 정반대였다. 그리하여 희연은 타박타박 홀로 텅 빈 거리를 걸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자꾸 입술이 움칠거리며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주책이었다.
희연은 걷던 걸음을 빨리했다. 한데, 빨라진 발소리가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다. 저 뒤에서 쿵쿵 급하게 울리는 발소리가 묘하게 희연의 신경을 건드렸다. 후덥지근한 밤공기와 상관없이 뒤통수에는 오스스 한기가 끼쳤다.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윽고 두 가지 생각이 희연의 머릿속을 스쳤다. 가로등이 이리 훤하게 켜져 있고, 심지어 차 씽씽 다니는 큰길가인데 별일 있겠어, 하는 생각과 그래도 무서워 죽겠다는 생각이었다. 왜 하필 이럴 때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 하나 없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희연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계속해서 등 뒤를 따라붙던 발자국 소리도 함께 멎었다. 작은 얼굴 가득 빠르게 울먹울먹함이 번졌다. 아무래도 좀… 큰일 난 것 같았다.
차마 발을 떼지 못한 채, 희연은 가방을 부스럭부스럭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서둘러 카메라를 켜고서, 화면을 얼굴에 대고 셀카 찍듯 사진 한 장을 찍어 보았다. 곧이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찍힌 사진을 확대한 희연은 한층 더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사진 속에서 저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보고 희연이 숨을 집어삼킬 때, 길가에 멈춰 선 재환은 주머니 안에서 꼬일 대로 꼬인 이어폰 줄을 풀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처럼 음악이나 들으며 집까지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포기하는 게 좋을 성싶었다. 도로 이어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려는 찰나, 반대편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음을 울렸다.
“여보세요?”
- 오, 오, 오빠…!
희연에게서 온 전화를 끊자마자 재환은 지금까지 나아가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급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이어폰 줄을 푸느라 걸음이 지체되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거의 100m 달리기를 하듯 달음질한 끝에, 재환은 길 한복판에 서 있는 희연을 발견했다. 웬 낯선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재환의 얼굴이 퍼렇게 굳었다.
“시, 싫다니까요…!”
“한 번만요. 네? 밥 싫으면, 커피만이라도…!”
씩씩 숨을 고른 재환은 서둘러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난데없이 머리 위로 드리운 시꺼먼 그림자에 놀란 남자가 홱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재환이 그의 팔목을 움켜쥐어 희연에게서 뜯어냈다.
“오빠…!”
“으윽!”
재환의 아귀힘이 지나치게 셌던 탓에, 남자의 인상이 엉망으로 깨졌다. 곧이어 희연이 허둥지둥 자신의 옆으로 도망치고 나서야 재환은 집어 던지듯 남자의 팔을 놓았다. 그새 벌겋게 손자국이 남은 팔을 문지르며 괴로이 침음하던 남자가 한 박자 늦게 팩 성을 냈다.
“이씨, 뭔데요…!”
팔뚝과 마찬가지로 벌그스레하게 달아오른 남자의 낯이 눈에 익은 듯해, 재환은 잠시 눈매를 가느스름히 좁혔다. 동시에 어스레하게 기억에 남아 있던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서 재조립되었다. 카페, 창가 자리, 남자 손님, 겁먹은 희연. 오래지 않아, 재환은 눈앞의 상대가 작년 카페에서 희연을 스토킹하던 이와 동일 인물임을 깨달았다.
주저 없이 옆으로 손을 뻗은 재환은 희연의 손을 꽉 쥐었다. 무더운 여름 날씨가 무색하게, 붙잡은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심지어 파들파들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를 이토록 겁준 남자에게 재환은 곱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쪽은 뭔데. 경찰에 신고해 줘?”
“겨, 경찰? 내가 뭘 어쨌는데요?”
경찰이란 단어에 이제는 남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반대로 침착한 표정을 한 재환은 희연을 보다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럴싸하게 으르렁거렸다.
“남의 여자 친구 스토킹했잖아, 지금. 경찰 부르고 싶지 않으면 빨리 꺼져.”
“나, 난 그냥 커피 한 잔….”
“꺼지라고, 씨발.”
문장 하나를 제대로 끝맺지 못한 남자는 끝내 두 사람을 등져 줄행랑쳤다. 잠시 후 건너편으로 길을 건넌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재환은 꼭 붙잡고 있던 희연의 손을 놓았다. 차갑게 식었던 손이 온기를 되찾다 못해 펄펄 끓을 듯한 열을 머금을 즈음이었다. 하지만 이를 인지하기에는 당장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다.
“괜찮아…?”
천천히 몸을 옆으로 돌린 재환은 조심스레 희연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나 푹 눈을 내리깐 희연은 재환의 물음에 아무런 답이 없었다. 걱정이 깊어진 재환은 허리를 구부려 희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희연아, 하고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는 찰나, 대뜸 음조 높은 목소리가 탁 터졌다.
“와, 오빠! 저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어, 어…?”
“아직도 심장 떨려…!”
가슴팍에 손을 올린 희연은 장난기 서린 표정으로 흑흑 우는 시늉을 했다. 평소와 크게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에 반대로 조금 당황한 것은 재환이었다. 좁은 어깨에서 손을 떨어뜨린 재환은 반쯤 얼빠진 얼굴이 되어 눈을 껌뻑거렸다. 희연이 그런 재환의 옷자락을 톡톡 잡아당겼다.
“그니까 저 오늘만 집까지 좀 데려다주세요, 오빠. 여기서 10분이면 돼요…!”
“아, 응. 그래.”
나란히 서서 걷는 내도록, 희연은 재환 곁에서 조잘조잘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중 대부분은 거의 아까의 재환을 찬양하다시피 하는 내용이었다. 실상 별로 한 일도 없건만,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 무슨 영화 속 히어로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 희연이 과장되게 자신을 따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재환도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내 여자 친구 건드리지 말라고, 씨발!”
“아니…. 내가 언제 그랬냐, 희연아.”
“에이, 오빠 그랬잖아요! 내가 옆에서 똑똑히 들었는데?”
그러는 사이 어느덧 두 사람은 희연이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 안으로 희연을 들여보내기 전, 재환은 마지막으로 그녀가 괜찮은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진짜 괜찮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다음 주에도 웬만하면 상지나 다른 애들이랑 같이 다녀.”
“네, 오빠. 또 한 번 그 새끼 나타나면 그때는 경찰에 바로 신고 때릴게요. 오늘 감사했어요. 조심히 가세요!”
휙휙 팔을 흔드는 희연을 향해 얼른 들어가 보라고 손짓한 재환은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아파트 경비실 건물 옆에 선 희연이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안 가 재환이 2층으로 된 상가 건물을 끼고 돌아 희연의 시야를 벗어났을 무렵.
“흐아앙…!”
풀썩 쪼그려 앉은 희연은 폭포수 같은 눈물을 터뜨렸다. 직직 슬리퍼 끌며 지나가는 아저씨가 쳐다보건 말건, 야밤에 산책 나온 개가 저를 보고 짖건 말건 엉엉 울었다. 재환과 이곳으로 오는 내내 죽을힘을 다해 참았던 눈물은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다.
* * *
귀하게 얻은 일주일은 바삐도 지나갔다. 매일 같이 카페에 출근하던 때보다도 더 정신이 없었다. 재환의 열성, 혹은 닦달 아래 한영의 집에 모두 모여 거의 합숙을 하다시피 합주했고, 그러다 집으로 돌아오면 재환은 또 어김없이 기타를 잡았다. 기타를 쥔 채로 껌뻑 잠이 들 때는 꿈속에서도 연습을 이어 갔으니, 그야말로 잠시도 쉬지 않고 자나 깨나 연습한 셈이었다.
그러나 재환은 힘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힘들다 느끼는 것은 그 자체로 사치고 오만이었다. 다른 밴드들은 한 번 서 보기도 어려운 대회 무대에 운 좋게 서게 되었는데, 기쁜 마음으로 준비해야 함이 당연했다. 철석같이 그렇게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대회를 하루 앞둔 날. 제아무리 재환이라도 오늘까지 밤새워서 연습하자고 멤버들을 괴롭힐 수는 없었다. 일찌감치 연습을 마치고 합주실을 나선 재환은 멤버들과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내심 한영은 재환이 남아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둘이 함께 있다 하게 될 일은 어차피 뻔했다. 요 일주일 내내 그러긴 했다마는, 지금 재환에게는 맘 편히 한영과 살을 맞대고 있을 심적 여유가 없었다. 집에 가서 잠들기 전까지 또 연습해야 했다.
다만, 이리 안달복달하는 것도 끽해야 내일까지였다. 내일이 지나고 대회만 무사히 마무리되면, 그래도 한숨 돌릴 틈이 생길 터였다. 양껏 한영과 뒹굴 여유, 또 그와 밴드에 관련된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찬찬히 고민할 여유 모두 충분히 가질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속으로 ‘내일까지만….’을 열 번째쯤 중얼거린 재환은 덜컹거리는 현관문을 열고 컴컴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습기를 잔뜩 먹어 끈적끈적한 장판 위로 올라서자마자 재환은 기타 가방부터 벗었다. 답답하게 등을 덮고 있던 것이 사라지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계절이 여름만 아니었어도 대회를 준비하는 일이 훨씬 덜 고됐을 것 같다는 의미 없는 생각이 무심코 머릿속을 스쳤다.
뒤이어 훌렁훌렁 옷까지 모두 벗어 던진 재환은 쏙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 앞에 섰다. 다짜고짜 찬물을 튼 뒤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벅벅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찰박찰박 튀어 나간 물이 얼룩덜룩 때 탄 타일 벽을 때렸다.
세수가 단숨에 끝났듯이 비누칠도 거침이 없었다. 살결에 붉은 자국이 날 정도로 빡빡 샤워 타월을 문댄 재환은 또다시 찬물을 틀어 후딱 온몸의 비눗기를 씻어 냈다. 이다음으로는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을 차례였다.
대신 볼 안쪽 점막을 혀끝으로 꾹꾹 누르던 재환은 슬그머니 사타구니로 손을 가져갔다. 잘 씻다 갑자기 성기를 쥐고 흔드는 데에 큰 이유는 없었다. 아주 잠깐, 이층집 현관을 나서는 저를 못내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던 한영이 떠올랐을 뿐이다.
“으윽….”
얼마 안 가 빠른 절정과 함께 성기 끝에서 뿌연 정액이 솟구쳤다. 타일 벽을 타고 질척하게 흘러내린 정액은 바닥에서 소용돌이치는 물과 섞여 금세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헉헉, 여운이 담긴 숨소리가 세찬 물소리에 묻혔다.
잠시 후, 수건으로 짧은 머리칼을 비비며 화장실을 나온 재환은 대충 옷장을 뒤적여 속옷과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윗도리는 생략한 채, 기타를 들고 곧장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하도 연습해 공연 곡은 자다가도 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발 뻗고 잘 핑곗거리가 되지는 못했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재환은 내일 무대에서 연주할 두 곡을 차례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앉은 자리에서 2시간여가 훌쩍 지났다. 이제는 손가락과 손목이 얼얼해 더 기타를 치려 해도 치기가 어려운 형국이었다. 줄곧 숙이고 있던 목 뒤도 심하게 뻐근했다. 열과 성을 다해 연습하는 것도 좋았지만, 이러다 어디 한군데가 고장 나 정작 본방에서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면 그것만큼 낭패도 없었다. 게다가 책상 구석에서 번쩍이고 있는 저 LED 시계도 제 주인이 곧 자야 할 시간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기타를 방바닥에 내려놓은 재환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즈음.
집 열쇠와 함께 매트리스 위에 던져 놨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저벅저벅 걸어가 매트리스에 주저앉은 재환은 핸드폰을 집었다. 화면에 뜬 ‘엄마’ 두 글자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적잖은 의문을 품었다. 엄마가? 이 시간에? 일단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윽고 ‘재환아…!’ 하는 외침과 함께 울먹울먹 터져 나온 말이 단숨에 재환의 넋을 앗아 갔다.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재환은 한참 후에야 두어 마디 대꾸를 건넸고, 그러다 ‘알았어.’ 하며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툭 시트 위로 떨어졌다.
그대로 꼼짝을 않은 채 재환은 바닥에 놓인 새빨간 기타를 멀거니 응시했다. 딱히 까닭이 있어 그러한 것은 아니었고, 칙칙함만 넘실대는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물건이라 그랬다.
그 상태로 얼마나 더 지났을까. 하, 하고 웃음도 한숨도 아닌 소리를 짧게 터뜨린 재환은 상체를 뒤로 젖혀 철퍽 매트리스에 대자로 누웠다. 눈두덩이에 팔뚝을 얹어 시야를 차단하자, 비로소 웃음소리다운 소리가 비식비식 흘러나왔다.
재환아…! 아빠 암이래. 지금 병원에 입원했단다. 엄마 어떡하지? 어떡하지, 재환아…?
뭘…, 어떡해.
그래도 너희 아빠잖아. 저렇게 죽게 내버려 둬…? 어떻게 모른 척해.
“그럼 어쩌라고….”
픽픽 웃던 재환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솔직한 말로 몇 년째 얼굴도 못 본 아버지의 위중함이 썩 와 닿지 않았다. 대신 그가 전기 구이 통닭을 사 오던 모습, 술에 취해 어머니에게 윽박지르던 모습, 시험 잘 봤다며 용돈 쥐여 주던 모습, 상을 엎는 모습 따위가 번갈아 가며 머릿속에 번쩍번쩍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수선한 잔상을 지우듯 재환은 로션도 바르지 않은 얼굴을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어쩐지 얼굴을 덮은 손바닥을 떼어 낼 수 없었다. 동시에 오늘 잠은 다 잔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불현듯 몰려들었다. 내일이 대회 날인데. 푹 자야 하는데. 이거야말로 어떡하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큰일이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거울 앞에 서자마자 재환이 뱉은 네 글자였다. 평소에도 제 모습을 보고 괜찮다 생각한 적은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건 좀 많이 심각했다. 낯빛은 창백하고, 눈 밑은 거뭇거뭇한 것이 딱 ‘나 밤새웠소’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한 두어 시간은 잔 것 같은데 말이지. 재환은 세면대가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벅벅 뒷머리를 긁었다. 꼴이 어찌 됐든, 일단은 씻고 한영의 집으로 가야 했다.
후딱 씻고 나와 옷을 갖춰 입은 재환은 간만에 푹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머리와 화장은 주최 측에서 알아서 해 준다 하였으니 이대로도 괜찮겠지 싶었다. 다만, 재환을 본 멤버들의 반응이 필요 이상으로 열렬했다. 특히 태군이.
“야, 서재환! 너 상태가 왜 그르냐?”
“상태가 뭐.”
“헐. 목소리는 또 왜 그래? 너 괜찮냐?”
자신의 몰골이 실로 온전치 못하다는 것도, 목소리가 사포로 갈아 낸 것처럼 거칠거칠 갈라져 있다는 것도 다 알았지만 재환은 ‘괜찮아, 괜찮아.’ 하며 휙휙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태군의 걱정은 어물쩍 넘겼으나, 안타깝게도 한영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재환이 잠 못 잤어? 어디 아파? 몸 안 좋아?”
재환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방으로 끌고 간 한영은 아주 그의 얼굴을 있는 대로 조몰락거렸다. 무어라 대꾸를 하려고 해도 입술이 손가락에 이리 눌리고 저리 눌려서 쉽지가 않았다. 끝내 한영의 손목을 슬며시 붙든 재환은 짧은 한마디를 내놓았다.
“유한영. 나 괜찮아.”
빈말이 아니었다. 정신이 조금 몽롱하고, 그 상태가 얼굴로도 드러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회에 지장을 줄 정도는 되지 않았다. 오늘 하루를 위해 지금껏 얼마나 애썼는데, 그런 일이 생기게 놔둘 리 없었다. 한데 상대는 계속 재환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다.
“안 괜찮은 것 같아….”
“괜찮대도.”
살짝 고개를 든 재환은 한영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저 넘치는 걱정을 잠재울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다행히 재환의 미봉책은 얼추 효력이 있었다.
“…알았어.”
마침 방문 밖에서 ‘곧 출발한다!’ 하는 지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환은 살짝 흐트러진 한영의 분홍 머리칼을 쓱쓱 매만져 준 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그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웬일로 검정 바지에 흰 티셔츠를 넣어 입은 한영은 오늘따라 말쑥함이 유독 돋보였다. 제가 입은 것과 색은 같은데, 옷이 입은 사람의 미모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절로 ‘오늘 유한영 멋있네.’ 소리가 나갔다.
진짜야? 정말이야? 들떠 묻는 한영의 손을 붙잡은 재환은 방을 나섰다. 중간에 슬그머니 잡은 손을 놓고 계단을 전부 내려갔을 때, 등에 커다란 가방 하나씩을 멘 지우와 태군이 1층 복도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환도 어서 기타 가방을 메고 페달 보드 가방을 집었다.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출발할 시간이었다.
지우가 운전하는 차는 금세 복잡한 시내 도로를 벗어나 한강 변을 달렸다. 이 길을 따라 쭉 더 가면 대회가 열리는 장소가 나왔다. 오늘 대회는 대학교 강당도 아니고, 규모가 큰 클럽도 아닌, 한강 공원에서 열렸다.
날이 더운데 괜찮을까, 생각하며 재환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널따란 강줄기를 내다보았다. 햇빛에 반사된 수면이 반짝반짝한 금파를 퍼뜨리자, 지난밤 그를 잠 못 들게 만들었던 온갖 번잡한 생각들이 저 강물 아래로 스르륵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일 수도 있었다.
얼마쯤 더 창밖에 고정되어 있던 재환의 시선이 문득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재환은 고개를 숙여 흘끔 아래를 보았다가, 다시 위로 들어 올렸다. 옆자리 앉은 이의 손이 자신의 손 위에 포개어져 살살 손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먼 창 너머만 응시했다. 그 천연한 모습에 재환은 피식 옅은 웃음이 지어졌다.
거듭 간질간질한 감각을 전하는 손을 딱히 뿌리치지 않은 재환은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핸들을 잡은 지우와 조수석에 앉은 태군은 오늘 나올 팀들에 대해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태군이 ‘걔들 잘하냐?’ 물으면 지우가 ‘잘하지.’ 하고 답하는 식이었다.
얼굴을 되돌려 다시 창밖에 시선을 둔 재환은 그 틈에도 한영이 살살 어루만지고 있는 손을 한순간 휙 뒤집었다. 놀란 듯 멈칫 굳은 손에 냅다 손깍지를 끼자, 한영이 파뜩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다만 이번에는 재환이 그 눈길을 짐짓 모른 척했다. 입꼬리만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공지된 시간에 맞춰 도착한 대회장은 벌써부터 꽤나 분주했다. 대회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시꺼먼 장비 케이스가 그들 손에 이끌려 쉴 새 없이 날라졌다. 그 사이를 헤쳐 나아간 재환의 시선이 중력에 이끌리듯 저만치 앞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무대에 닿았다. 넘실대는 강물을 배경으로 한 무대 위에는 이미 앰프, 드럼, 건반 따위가 모두 올라가 있어 당장 공연이 시작 되어도 손색이 없을 듯한 모양새였다.
한동안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재환은 한영이 ‘재환아.’ 하며 슬쩍 소매를 잡아끌었을 즈음에야 머뭇머뭇 발을 뗐다. 대회 참가가 처음이 아니듯 저러한 풍경을 보는 일도 처음이 아니건만, 도리 없이 쿵쿵쿵 심박이 치솟았다. 아직 긴장할 때가 아닌데, 큰일이었다.
애써 날뛰는 속을 달랜 재환은 앞서가는 멤버들을 쫓아 부지런히 걸었다. 무대를 지나쳐 그 뒤쪽으로 향하자, 커다랗게 천막을 쳐서 만들어 둔 대기실이 나왔다. 대기실 안에는 일찌감치 도착한 다른 팀들이 벌써 여럿 있었다. 더 숨의 네 사람도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무지막지하게 더우리라는 염려와 달리, 햇볕이 차단된 천막 안은 그럭저럭 시원한 공기가 감돌았다. 곳곳에 놓인 선풍기 덕도 있었고, 아직 진짜 한여름이 오지 않은 덕도 있었다. 물론 에어컨 켜진 실내와 비교할 바는 되지 못했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있을 만한 편인 것 같았다. 적어도 한 팀이 더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걸어오는 사이 났던 땀을 식히기 위해 팔랑팔랑 셔츠 앞섶을 흔들던 재환은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한 사람과 무심코 시선이 얽혔다. 동시에 재환도, 상대방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데아지?”
“응.”
때마침 지우가 던진 질문에 재환은 짧게 답했다. 시선은 빈 테이블로 가 앉는 이데아의 멤버들을 좇았다. 유정이 탈퇴한 후 새 키보디스트를 들인 건지, 그중 한 명은 재환이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쟤네 무대는 좀 잘하는 것 같던데.”
“맞아. 잘해, 쟤들.”
무덤덤한 투로 대꾸하며 재환은 의미 없는 눈길을 그만 거두었다. 본선 진출 팀 명단이 발표됐을 때부터 오늘의 만남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사실 놀라거나 당황하는 마음은 크게 없었다. 그렇다고 저들이 반갑냐, 하면 입이 삐뚤어진대도 그리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까놓고 말해, 재환 자신은 과거 저 팀에서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팀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볼 만큼 재환은 관대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불편한 건 불편한 거였다.
다른 팀은 몰라도 이데아만 이겼으면 좋겠다는 다소 유치한 생각이 재환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를 무렵, 한 팀씩 대회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첫 팀이 다름 아닌 더 숨이었다. 보통 리허설은 공연 순서의 역순으로 진행되었는데, 더 숨은 오늘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라 반대로 리허설 순서가 가장 빨랐다. 그사이 제일 오랜 시간을 대기하는 셈이니, 사실 썩 좋은 순번이라 볼 수는 없었다.
스네어, 기타, 노드 등 각자 연주할 악기를 든 더 숨의 네 사람은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무대로 이동했다. 잠시 후, 테이블 하나가 빈 천막 안에 차례로 악기를 맞춰 보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쟤네가 게네야? 더 숨?”
“엉.”
핸드폰을 옆으로 뉘여 레이싱 게임에 한창이던 형찬은 옆에 앉은 키보디스트의 물음에 심드렁히 답했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의미도 조금 포함되어 있었는데, 상대는 눈치채지 못했다.
“저기 기타 치는 애가 원래 여기 있었다고?”
“어. 다 말해 줬잖아.”
“잘해?”
순간 화면 속에서 엉뚱한 차 하나가 자신의 차를 앞질러 가는 바람에 형찬은 팍 눈살을 구겼다. 버튼을 누르는 엄지가 바빠졌다.
“잘하긴. 존나 성질만 드러워서.”
“에이. 서재환 저 새끼가 기타는 잘 쳤지, 그래도.”
또 차 한 대가 쌩하고 앞으로 지나쳐 갔다. 형찬의 표정이 한층 구깃구깃해졌다. 다른 멤버 하나가 황당한 소리를 지껄여 댄 것도 한몫했다.
“그 정도도 못 치면 밴드 관둬야지, 씨발.”
과거 재환이 이 팀에 있었을 시절부터 그의 기타 실력이 형찬보다 배로 낫다는 것은 밴드 안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형찬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잘 아는 멤버는 그냥 ‘그래.’ 하고 말았다. 오늘 같은 날 리더 심기를 건드려 하등 좋을 것이 없었다.
모처럼 주위 녀석들이 조용해진 틈을 타 형찬은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작은 화면 안에서 그의 샛노란 차가 맹렬히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곧 결승선이 코앞이었다. 조금만 더. 씨발, 조금만 더…! 그때였다.
“너를 보고 있어-”
멤버들이 옆에서 뭐라 하건 말건 한 번을 들리지 않았던 형찬의 고개가 번쩍 위로 들쳐졌다. 그사이 뒤에서 오던 다른 차들이 노란색 차를 추월해 차례대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형찬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리지 못했다. 뭐, 그래 봐야 이미 꼴찌였다.
그 순간에도 천막 밖에서는 계속해서 건반 연주와 함께 보컬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를 들으며 눈썹을 꿈틀거리던 형찬은 처참한 등수가 떠 있는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직,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멤버들이 하나둘 ‘어디 가?’ 하며 형찬을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않은 채 그대로 발을 틀어 천막을 나섰다.
해가 뜨거운 바깥으로 나온 형찬은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는 무대 옆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무대 위에 있는 네 사람의 뒷모습이나 옆얼굴이 얼추 보이는 위치였다. 그곳에 우뚝 멈춰 서서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유독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건반 앞에 선 보컬의 분홍 뒤통수였다.
그리고 하나씩 악기가 들어올 때마다, 형찬의 시선도 악기를 연주하는 이에게로 함께 움직였다. 그러다 마지막으로는 2절이 되어서야 기타를 치기 시작한 재환을 보았다. 그가 튕기는 음 하나하나마다 형찬 본인은 학을 뗄 정도로 싫어하던 리버브 사운드가 아주 왕창 깔려 있었다. 그 소리를 고막에 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표정했던 얼굴이 차츰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주머니 안에 있던 손이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그럼에도 형찬은 선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래 하나가 끝났을 때.
씨발. 형찬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딱 이 한마디뿐이었다.
더 숨이 리허설을 무사히 마치고 대기실로 들어서자, 곧 스태프들이 도시락이 한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깡깡 얼린 생수병이었다. 뙤약볕 아래서 기타 치느라 땀범벅이 된 재환은 허겁지겁 생수병을 집어 뜨끈하게 열이 오른 목 뒤에 대었다. 그 옆에서 오늘 일정이 적힌 종이를 반으로 접어 쥔 한영이 살살 재환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똑같이 뜨거운 햇살 아래 있었음에도, 한영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르는 일 없이 갓 씻고 나온 것처럼 뽀얬다.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도시락은 나름 참가자를 신경 쓴 듯 상당히 푸짐했다. 단지 고기와 튀김류가 태반이라 재환으로서는 매 젓가락질마다 김치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른 반찬에 비해 김치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쉽다 여기며 딱 하나 남은 김치를 집는 찰나, 기다란 손가락 끝이 톡톡 재환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평소에는 잘 먹으면서 오늘따라 김치는 손도 안 댄 한영이 제 도시락 용기를 슬그머니 재환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재차 아래를 가리켰다. 빨리 김치를 가져가라는 뜻이었다. 무언의 재촉을 받던 재환이 머뭇머뭇 젓가락을 뻗을 즘, 시커먼 장정 넷이 그들 곁을 지나쳐 갔다. 이데아였다.
새것처럼 김치가 채워진 도시락을 마저 먹는 동안, 재환의 신경은 어쩔 수 없이 천막 밖 무대에서 이데아가 리허설을 하는 소리에 쏠렸다. 내심 맛있다 생각했던 돈가스를 한영이 밥 위에 한 조각 살그머니 놓고 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무대가 보일 리도 없건만, 자꾸 소리가 들려오는 천막 바깥쪽을 향해 눈이 흘깃거렸다. 그 와중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잘하긴 잘하네.
뒤이어 한 팀, 한 팀 리허설을 마치고 돌아올수록 재환은 오늘이 대회 본선임을 여실히 실감하게 되었다. 이데아뿐만 아니라, 다들 하나같이 실력이 출중했다. 자연히 저들보다 잘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때마다 재환은 죽어라 연습에만 매진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다른 팀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이, 더 숨이 무대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에만 유념하려 노력했다.
리허설이 전부 끝나자 이번에는 소위 말하는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으러 갈 차례였다. 스태프의 부름을 받은 더 숨은 천막 옆, 공원 관리를 위한 용도로 추정되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 1층의 방 하나에 마련된 공간에서 네 사람은 전문가에게 화장과 머리 손질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 재환에게는 이 시간이 리허설보다도 더 긴장되고 고되었다. 어디 이런 일을 겪어 봤어야 말이지.
얼굴 위에서 스펀지와 붓이 돌아다니는 간지러운 감각과, 다른 이의 손이 머리칼을 조물조물 매만지는 어색함을 견딘 끝에 드디어 재환은 ‘다 됐습니다.’ 하는 반가운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진짜 어색함은 거울 안에서 멀뚱멀뚱 눈을 껌뻑이고 있는 남자를 보았을 때 찾아왔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제가 아는 서재환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멋 부릴 줄 몰랐다.
재환의 넘치는 어색함은 한영을 마주하고 나서 숫제 곱절이 되었다. 무어라 말은 않고 입만 벙긋거리는 한영의 표정을 견디기 어려웠던 재환은 죄도 없는 그의 팔뚝을 퍽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나 한영은 아프다 하기는커녕 ‘재환이 진짜 멋있다….’ 하며 얼뜬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나마 딴 사람이 듣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는 한영은 꽃단장을 받았음에도 평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새하얀 피부나 빨간 입술 모두 그대로였다. 구불구불한 머리칼도 크게 건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기야 원판이 이미 완벽히 갖춰져 있는데, 구태여 불필요하게 손을 댈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그러다 이게 무슨 콩깍지인가 싶어 재환은 픽 티 안 나게 웃었다.
오히려 재환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지우 쪽이었다. 원래도 멀끔하니 잘생긴 녀석인 줄은 알았다만, 푹 이마를 덮었던 머리가 시원히 위로 올라가자 훤칠한 외모가 한층 더 눈에 띄었다. 곁에서 태군이 ‘저 새끼만 편애했나 봐.’라고 꿍얼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다 대고 또 지우는 ‘왜, 우리 태군이도 멋있어졌는데.’ 하며 뽀얘진 볼을 쥐고 흔들었다. 당연히 태군은 도끼눈이 되어 기겁했다.
이 작은 소란 속에서 재환은 공연을 향한 긴장감, 미뤄 둔 고민으로 인한 답답함, 지난밤 뜻밖의 소식이 준 막막함 따위를 조금씩 잊었다. 진심으로 즐거이 입을 벌려 웃었다. 더불어 대회장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빨리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무대 뒤에서 넘실대는 강물이 서서히 노을빛에 물들고, 차츰 밤이 찾아오며 불어오는 바람에 슬슬 시원한 강 내음이 섞여 들었다. 천막 안에 앉아 길고 지루한 대기 시간을 견디던 재환은 어느새 껌뻑 잠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해도 어림없는 일이었을 텐데, 밤을 새우다시피 한 여파로 야금야금 피로함이 몰려온 탓이었다.
그사이 태군은 대회를 보러 온 여자 친구를 맞이하러 나가고, 지우도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비웠다. 따라서 테이블에는 잠든 재환과 한영 단둘만이 남았다. 커다란 눈을 굴리며 주위를 살피던 한영은 살금살금 의자를 옆으로 끌어 재환 가까이 다가갔다. 슬며시 고개를 아래로 숙여 꾸벅꾸벅 흔들리는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 그래도 티 한 점 없는 살결이 화장을 받아 매끈매끈 빛났다. 쌕쌕 숨을 내쉬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이 반지르르한 윤기를 머금었다. 아침에만 해도 혈색이 평소 같지 않아 걱정이 앞섰는데, 이리 보고 있으니 꾹 눈을 감고 있음에도 절로 ‘우리 재환이 너무 잘생겼다’ 하는 감상이 퐁퐁 샘솟았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상대가 잠든 틈을 타 맘껏 얼굴을 관찰하던 한영은 문득 도르르 위로 눈을 굴렸다. 재환의 고개가 끄떡끄떡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정수리에 삐쭉 튀어나온 머리카락 한 올이 함께 흔들렸다. 완벽한 외양에 얄밉게 훼방을 놓는 존재를 바라보는 한영의 미간이 살포시 움츠러들었다.
또 한 번 휙휙 시선을 움직여 주위를 살핀 한영은 마치 총 쏘는 모양으로 세 손가락을 접어 입 가까이 엄지와 검지를 가져갔다. 날름 혀를 내어 쫙 펼친 손가락 끝에 살살 침을 묻힌 뒤, 예쁜 두상 위로 손을 올렸다. 여전히 약 올리듯 흔들대는 머리칼을 꼭 집으려던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부르르 소리가 울리는 테이블로 휙 고개가 돌아갔다.
“음….”
동시에 재환도 느릿느릿 눈을 떴다. 유달리 뻐근하게 느껴지는 뒷목을 두어 번 꾹꾹 주무른 재환은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는 제 핸드폰으로 굼뜨게 손을 뻗었다. 핸드폰을 집다 옆에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영과 눈이 마주쳤다.
“…응? 왜?”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묻자 한영이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별생각 없이 한영에게서 시선을 거둔 재환은 핸드폰을 뒤집어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응.”
재환이 밖으로 나간 후, 홀로 테이블에 남은 한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5분쯤 지났을까, 마침 지우가 기다란 몸을 숙이며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한영은 자리로 와 앉는 지우의 팔을 답삭 붙잡았다.
“근처에 편의점 있어?”
카드 지갑을 챙긴 한영이 후다닥 천막을 나선 시각, 막 대회장을 벗어난 재환은 귀에 핸드폰을 붙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거나 산책 다니는 사람들 사이를 눈으로 살피던 중,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휙휙 손 흔드는 희연을 발견했다.
“아, 저기 있네.”
전화를 끊은 재환은 걸음을 서둘러 희연에게 다가갔다. 재환을 보자마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희연이 이내 눈매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와, 오빠 오늘 짱 멋있어요!”
“오늘 약속 있다 그랬잖아. 어떻게 왔어.”
“에이, 오빠 보려고 약속 쨌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에 재환은 멋쩍게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서 엄지 끝으로 제 뒤편을 가리켰다. 무대가 있는 방향이었다.
“무대 저쪽에 있어. 같이 가자.”
어쩐 일인지 희연은 대답을 않고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희연이 대회 장소를 찾지 못해 연락한 것이라고 여겼던 재환은 살짝 아리송해졌다. 조금 있다 희연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저…, 오빠. 잠깐 저랑 얘기 좀 하실 수 있어요?”
“얘기?”
“네. 조금 조용한 데서….”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하기보다 일단 재환은 핸드폰으로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아직 대회 시작까지는 여유가 있었고, 따라서 희연과 잠시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좌우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재환은 눈짓으로 지금 그들이 서 있는 둑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럼 저 아래로 내려갈까?”
그리고 얼마 안 가, 재환은 자신의 선택이 썩 좋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운동화를 신은 저야 별문제가 없었으나, 구두를 신은 희연은 간격 높은 계단을 내려가는 데에 꽤나 애를 먹는 눈치였다. 거기다 치마를 입고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까지 쥐고 있어 움직임이 영 자유롭지 못했다. 미안한 눈으로 희연을 보던 재환은 쓱 팔을 내밀었다.
“에…?”
“잡아.”
희연에게 팔 하나를 내어 준 재환은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잠시 후 계단 맨 아래까지 도달했을 때, 한결 가까워진 강물에서 훅 밤바람이 불어왔다. 계절에 비해 제법 시원함을 품고 있는 바람이 어느덧 재환의 이마에 맺힌 자잘한 땀방울을 실어 갔다. 좁은 길 주변을 메운 초록색 갈대들이 바람 따라 스륵스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앉을까?”
이번에도 말을 꺼낸 재환은 아차, 했다. 거칠거칠한 시멘트 계단에 치마 입은 희연을 앉히기에는 아무래도 조금 무리가 있었다. 역시나 희연은 살살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오빠. 그냥 서서 얘기해도 돼요.”
“그래.”
하여 재환은 몸을 틀어 희연을 마주 보고 섰다. 잠자코 희연이 말꼬를 트길 기다리는데, 푹 눈을 내리깐 희연은 발간 입술만 자근자근 깨물 뿐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들고 있던 쇼핑백 안으로 주춤주춤 손을 넣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색색의 꽃이 소담히 묶인 꽃다발이었다.
“오빠, 이거요….”
어…, 하며 재환은 얼결에 희연이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이름은 모르나 하나같이 탐스러운 모양새를 한 꽃들에서 물씬 향긋한 내음이 풍겼다. ‘이걸 왜’ 하는 의문을 담아 재환은 희연과 꽃다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시 희연의 입이 열렸다.
“이따가 공연 끝나고는 오빠 정신없을 것 같아서…. 미리 드려요.”
“아…, 고마워.”
여느 때 같았으면 ‘이러다 상 못 받으면 어떡하지’ 하는 농담이라도 한마디 건넸을 텐데, 재환은 그러지 못했다. 희연의 분위기가 묘하게 평소와 다른 까닭이었다. 외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희연은 꼭 무언가를 억지로 꾹꾹 속에 눌러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번의 스토커 사건이 원인인 걸까. 섬세함 부족한 재환이 유추해 낼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였다.
“오빠.”
“응.”
“저, 그게…. 그러니까….”
별안간 커다란 눈망울에서 툭 떨어진 눈물이 말간 뺨을 갈랐다. 엉거주춤 꽃다발을 쥔 채 굳어 버린 재환은 어찌할 줄을 몰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마음 탓에 상대를 재우치지도 못하고, ‘희연아’ 이름만 겨우 한 번 불렀다. 다시 희연이 입을 뗐다.
“그게요, 오빠….”
…좋아해요.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어오는 바람도 멈췄는지 갈대 부딪히는 소리마저 울리지 않았다. 저 계단 위, 오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만 웅얼웅얼 덩어리져 자그마하게 이쪽까지 들려왔다. 이윽고 꽤 오랜 시간을 꾹꾹 눌러 왔던 희연의 마음이 울먹임과 함께 머뭇머뭇 뒤따라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빠, 사실은 저…, 다음 달에 독일로 교환 학생 가요. 사장님한테 독일 얘기 하도 많이 들어서 옛날부터 가고 싶었는데, 마침 합격해서…. 아, 이게 아니라…, 그래서 이번 달까지만 일해요. 근데 그러면 이제 오빠 못 보잖아요. 원래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곧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좋아해요, 오빠. 좋아해서 죄송해요. 오빠는 저 안 좋아하시는 거 아는데…. 그래도 좋아해요….
문장 사이사이를 안쓰럽게 채우던 훌쩍임은 끝내 끅끅거리는 울음이 되었다. 이토록 서글피 우는 상대를 눈앞에 두고 재환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았다. 동그란 턱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재환은 들썩이는 어깨를 향해 가만히 손을 뻗었다.
어깨를 쥔 손에 조금만 힘을 주어 당기자 작은 머리통이 콩,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그대로 희연을 살그머니 감싸 안은 재환은 움츠러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말주변이 없어 누군가를 달랠 재간도 없으니, 그에게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한마디만큼은 희연에게 전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해, 희연아.”
짧은 사과가 휘 불어오는 강바람에 섞였다. 그리하여 둑 위에 우두커니 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 새카만 강물을 배경으로 애틋하게 서로를 붙안은 남녀의 모습만이 눈에 비칠 뿐이었다. 그 그림 같은 장면이 담긴 갈색 눈동자 위로 차츰 볼록하게 물기가 차올랐다. 붉은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당장 안아 줄 사람이 없는 어깨가 위태로이 떨렸다.
차마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던 한영은 결국 아랫입술을 깨물며 휙 몸을 틀었다. 손에 쥐고 있던 비닐봉지가 바짓단을 스치며 부스럭부스럭 듣기 싫은 소음을 일으켰다.
* * *
“그게 다 뭐야?”
쿵,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놓이는 비닐봉지를 보며 지우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우의 물음을 가뿐히 무시한 한영은 털썩 의자에 앉았다. 입을 앙다문 한영을 흘끔 미심쩍은 눈초리로 본 지우는 긴 팔을 뻗어 편의점 이름이 박힌 봉지 끝자락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 보았다. 블랙커피, 자양강장제, 에너지 드링크, 거기다 이온 음료까지…. 담배도 안 피우는 놈이 편의점은 왜 찾나 싶었는데, 안에 담긴 물건들을 보아하니 누구를 위해 그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다녀왔는지 심히 알조였다.
“재환이는?”
“몰라.”
한데 정작 이것들을 안겨 줄 당사자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홱 고개까지 반대편으로 틀어 버리는 것이, 지금의 한영은 꼭 재환의 이름을 듣기도 싫다는 듯이 굴었다. 다만 한영이 제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지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툭툭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보나 마나 또 상대는 알지도 못하는 일로 혼자 삐진 걸 테다.
“무대 오르기 전까지 풀어. 재환이 신경 쓰게 하지 말고.”
한영은 대꾸를 하지도, 이쪽을 보지도 않았다. 삐져도 단단히 삐진 듯한 한영의 반응에 지우는 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였다.
“관객들 존나 많이 왔던데? 떨려 죽겠네!”
언제 왔는지 작은 얼굴 가득 상기된 기색이 역력한 태군이 철퍽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자마자 테이블 위 놓인 것을 보고는 종전의 지우처럼 눈을 땡그랗게 떴다.
“헐, 이게 다 뭐다?”
단, 다른 점이 있다면 태군은 일말의 고민 없이 봉지에 담긴 것 중 하나를 휙 집어 들었다. 누가 봐도 내용물이 가장 많아 보이는 에너지 드링크였다. 심지어 ‘아싸, 잘 마실게!’라고 발랄하게 인사까지 했다. 지우는 저렇게 늘 밝은 태군이 참… 귀여웠다.
공짜 음료에 신이 난 태군이 어깨를 들썩이며 캔 꼭지를 들어 올릴 즈음, 재환은 희연과 함께 깨끗이 닦인 공원 길을 걸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대회장이 나왔다.
“이제 좀 괜찮아?”
“네….”
눈물은 그쳤으나 작게 대답하는 희연의 목소리에는 아직까지 먹먹한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꽤나 오랜 시간을 서럽게 울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여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온 희연은 괜히 코를 두어 번 훌쩍거렸다. 세상에 이리 모양 빠지는 고백도 아마 없을 터였다. 그것과 별개로, 희연은 꼭 재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근데요, 오빠….”
“응?”
“오빠 좋아하는 사람 있죠?”
하마터면 주춤 걸음을 멈출 뻔한 재환은 애써 태연한 체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반짝 도시 그림자가 춤추는 강물을 슬쩍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저 멀리 무대 앞에 쫙 관객석이 깔려 있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그래… 보여?”
“네. 엄청. 가끔 핸드폰 보고 혼자 막 웃고, 무지 급하게 퇴근할 때도 있고. 그리고 오빠 팔찌요.”
“팔찌?”
“그것도 오빠가 산 거 아니죠?”
생각지 못한 희연의 예리함에 재환은 대답을 못 하고 아…, 했다. 그 반응이 어느 정도는 답이 되어 준 터라, 희연은 부러 삐진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에이! 그럴 줄 알았….”
그때, 난데없이 자전거 한 대가 아슬아슬 희연 곁을 휙 지나쳐 갔다. 반사적으로 재환이 희연의 팔을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희연은 순간적으로나마 재환의 품에 폭 안기는 자세가 되었다. 그것도 잠시, 희연을 놓자마자 뒤를 돈 재환은 벌써 저만치 멀어진 자전거 뒤꽁무니를 보며 아씨, 하고 화를 터뜨렸다. 그러고서 얼른 희연과 걷는 위치를 바꾸었다. 희연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오빠.”
“어?”
“오빠는 그게 문제예요…!”
뒤이어 이참에 마음을 단단히 먹은 희연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그렇게 친절한 것도 좋은 게 아니다, 특히 이성한테 그러면 그거 아주 죄질이 나쁜 거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오빠 그러시면 어떡하냐, 그러니까 카페에 오는 여자 손님들도 자꾸….
“암튼, 앞으로 조심하세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던 재환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희연이 풍기는 공기가 제법 매서워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제야 희연은 보로통해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사이 두 사람은 공원 공터에 마련된 대회장에 다다랐다. 이제 한 명은 대기실로, 한 명은 관객석으로 가야 할 시점이었다. 아직은 불이 꺼져 있는 무대 앞, 제법 자리가 찬 객석을 바라보던 재환은 곁에 서 있던 희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 아래에 있는 어깨에 무심코 손을 올리려다, 다시 거두어들이고 입을 열었다.
“희연아.”
와…, 하며 무대 규모에 감탄하던 희연은 옆으로 얼굴을 틀어 재환과 눈을 맞추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번쩍번쩍 빛이 나는 재환 때문에 또 심장이 쿵 떨어질 뻔하였지만, 안간힘을 다해 마음을 꽉 붙들어 맸다.
“네, 오빠…?”
“나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맞아. 근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암튼 오늘 와 줘서 진짜 고마워.”
희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대신 재환은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흔들었다. 그곳에서 물씬 풍겨 나온 꽃향기에, 그리고 저 하늘 달처럼 훤한 재환의 미소에 또다시 넋을 빼앗길 뻔한 희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부러 한껏 목소리를 높여,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발랄한 투로 재환에게 답을 전했다.
“네, 오빠! 오늘 꼭 1등 하세요…!”
총총 뛰어가는 희연의 뒷모습이 객석에 자리한 사람들 사이에 섞일 무렵, 재환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대기실로 향했다. 널따랗게 쳐진 천막 아래로 들어서서 이제는 가족보다도 익숙한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엥? 웬 꽃다발?”
테이블 위에 꽃다발을 내려놓자 아니나 다를까 태군이 놀란 낯을 했다. 지우도 ‘뭐야?’ 하며 거기에 동조했고, 둘 사이에서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한영만 한 번 흘끔 꽃다발을 쳐다보고 말았다. 자리에 앉은 재환은 뒷목을 문지르며 그럭저럭 거짓이 아닌 답을 내놓았다.
“같이 카페에서 일하는 친구.”
친구? 그냥 친구? 존나 수상해! 당연히 태군의 추궁이 이어졌으나 재환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절반은 고의이기도 했지만, 절반은 방금 막 핸드폰에 도착한 메시지 탓이기도 했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쥔 재환은 유독 한 사람이 저를 서러운 눈길로 곁눈질하는 것도 모르고, 네모진 액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곧 시작하겠네!]
조명 켜진 무대 사진과 함께 전송된 짧은 문장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진영이었다. 지금 객석에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바쁠 것이 분명한 사람이 이 자리에 몸소 와 주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는 한편, 재환은 일순 한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무대에서 진짜 좋은 공연을 보여서, 그의 인정을 받으면, 혹시 한영의 일도….
그사이 ‘화이팅!’이라고 적힌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어느새 눈동자 가득 긴장과 기대를 함께 띄워 올린 재환은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액정 위에서 톡톡 엄지를 움직였다. 다른 사람이 보면 웃고 있는지도 모를 표정이었지만, 하루에도 수 번 그의 얼굴만 떠올리는 한 명에게는 환한 미소로 비치기 충분했다.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답장을 적어 보낸 재환은 핸드폰을 뒤집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자마자 천막 밖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더운 여름 이곳까지 걸음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의 유창한 인사말이 단단한 북채가 되어 쿵쿵 재환의 가슴팍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빠르게 펌프질을 해 대며, 그로 인해 온몸에 뜨거운 피가 도는 감각이 끼쳤다. 손안에 땀이 배어났다.
크게 심호흡하던 재환은 문득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한영과 시선이 마주 닿았다. 그에게 옅은 웃음이라도 한 번 지어 주고 싶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단순한 긴장 탓이라 여길 수 없을 만큼 상대의 낯빛이 새하얗게 굳어 있다는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대기실에 들어온 스탭이 첫 번째 참가 팀을 호명했다. 줄지어 선 남녀 서넛이 각자 악기를 들고 천막을 나섰다. 그렇게 한 팀, 또 한 팀씩 순서가 지나가고, 순식간에 대회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거듭 고막에 중첩되는 환호와 박수 소리가 재환의 긴장을 마침내 한계까지 채워 올렸을 무렵이었다.
“더 숨 대기해 주세요!”
이미 한참 전부터 무릎 위에 꺼내 놓았던 기타를 쥔 재환은 두 다리에 힘을 실어 몸을 일으켰다. 다소 경직되어 있는 어깨에 스트랩을 메고, 매끈매끈한 빛을 뿜으며 뻗어 나간 넥을 왼손으로 움켰다. 다른 손에는 페달 보드 가방을 든 뒤, 그림자처럼 머리 위를 드리우고 있던 천막 밖으로 떨리는 걸음을 내디뎠다.
덜컹거리는 철제 계단을 밟아 무대 위로 올라섰다.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페달 보드부터 바닥에 내려놓은 재환은 시커먼 기타 앰프 앞으로 걸어갔다. 앰프에 케이블을 꽂은 후 줄곧 머릿속에서 되짚고 있던 위치로 찬찬히 노브를 하나씩 돌리기 시작했다. 트레블은 11시 방향, 미들은 1시 방향, 베이스는 2시 방향…. 리허설 때 했던 그대로 세팅을 모두 맞춘 후, 뒤를 돌아 한 발짝 한 발짝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정수리 위에서 뜨겁게 떨어지는 조명이 어느덧 시원한 강바람을 몰아냈다. 그로 인해 새하얗게 물든 시야 속, 이곳을 올려다보는 수백의 눈동자가 서서히 윤곽을 잡아 갔다. 발바닥에서부터 쿵쾅쿵쾅 고동이 치고 올라오며, 천천히 숨이 빠져나갔다 차오르는 소리가 컴프레서를 통과한 듯 거대하게 증폭되어 귓속을 울렸다. 피크를 쥔 손아귀에 꽈악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날, 한영은 무대 위에서 한마디도 노래하지 않았다.
단 한마디도.
* * *
눅눅한 어둠에 물든 방 안, 밖에서 세차게 퍼붓는 비가 연신 창을 때리며 덜컹덜컹 스산한 소음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에 젖건 말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재환은 홀로 그 소리를 견디며 간절히 잠을 바랐다. 하나 턱도 없는 바람이었다.
술렁이기 시작하는 관객석, 당황에 잠긴 멤버들, 그 사이에서 입을 다문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무대를 내려가던 뒷모습, 이윽고 홀로 덩그러니 남은 키보드….
기억에서 영원히 도려내고픈 장면 장면이 도리어 재환의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반복 재생되었다. 아무리 잠들어 보려 해도, 잠들지 못하면 생각이라도 좀 다른 쪽으로 돌려 보려 해도 하등 소용없었다. 갈수록 숨이 거칠어지고 눈가로 열이 몰렸다.
다만 신기하게도 재환은 그 이후의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영이 사라진 무대에서 무력하게 내려온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대회 결과는 어찌 되었는지, 도대체 집까지는 어떻게 온 건지 모든 것이 다 흐릿흐릿했다.
그러고 보니 집에 온 뒤로 쉴 새 없이 핸드폰이 울렸던 것 같기도 하다. 멤버들의 이름이 차례로 뜨고, 그다음으로는 진영의 이름이 뜨고, 또 마지막에는 ‘엄마’ 두 글자가 뜨고. 하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몇 번인가 콩콩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던 듯도 하지만 재환은 그 또한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렇게 오늘 일어났던 일도 무시할 수 있으면 참 좋을 듯싶었다.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셈 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지 못해 결국 재환은 또 하루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밤새 비는 그치지 않았고, 함께 주룩주룩 흐르는 괴로움도 멈추지 않았다.
방전되듯 잠깐 눈이 감겼던 재환이 도로 눈을 떴을 때, 습한 공기가 한가득 고인 방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슬쩍 고개만 틀어 내다본 창밖도 잠잠했다. 비가 그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창 너머로 비치는 풍경이 죄다 우중충한 회색빛이라, 으레 비 온 뒤 풍기는 상쾌함이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밤새 구겨지고 찌부러진 이불부터 정리한 재환은 대충 씻고 나와 우유 한 컵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도저히 입맛이 없어 뭘 먹을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꼭 술을 진탕 마시고 난 다음 날 같은 느낌이었다. 대신 담뱃갑을 손에 쥔 재환은 현관에 놓인 슬리퍼로 두 발을 끼워 넣었다. 이윽고 삐걱거리는 문을 여는 찰나.
“하….”
메마른 입술 사이에서 절로 탁한 숨이 비어졌다. 밖으로 나오지도, 문을 다시 닫지도 못하고 현관에 선 재환은 맞은편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덩어리를 망연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젖은 옷가지와 그 밑에 고인 얕은 물웅덩이를 차례로 살핀 시선이 푹 숙어져 있는 머리통으로 옮겨 갔다. 구불구불 늘어진 머리칼 또한 폭삭 물에 젖어 평소보다 짙은 분홍색을 띠었다.
문밖으로 걸음을 뗀 재환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한영 앞에 쪼그려 앉아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었다.
“일어나, 유한영.”
재환의 손길에 한영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드러난 얼굴이 내리 이틀 밤을 꼴딱 새우다시피 한 누구보다 배는 파리했다. 또 한 번 막막한 숨을 뱉은 재환은 이보다 더 딱할 수 없는 꼴을 한 한영을 집 안으로 이끌었다.
일단은 젖은 옷부터 홀딱 벗기고서 한영을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차피 저는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으므로 그대로 샤워기를 쥐고 한영의 몸 구석구석을 씻기기 시작했다. 팔을 들어 머리에 샴푸 거품을 낼 때는 한영이 슬그머니 목을 빼 입 맞추려 하기도 했는데, 재환은 휙 고개를 틀어 이를 피해 버렸다. 적잖이 서운했는지 한영은 조금 훌쩍훌쩍 울었다.
씻고 나와서는 온몸이 보송보송해진 한영의 손에 드라이어를 쥐여 준 후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으로 간단히 상을 차려 그새 머리까지 보송보송해진 한영을 앞에 앉혔다. 상 위에 밥공기를 두 개 놓기는 했지만, 기실 이쪽은 그다지 먹을 생각이 없었기에 재환은 몇 숟갈 끼적거리다 말았다. 그에 반해 한영은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홀랑 비웠다. 한 그릇 더 먹을 거냐 묻지 못할 것도 없었으나, 재환은 그냥 상을 정리했다.
이후 설거지를 다 마칠 때까지 한영은 얌전히 매트리스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니, 재환도 가타부타 말을 걸지 않았다. 친히 씻겨 주고 밥을 차려 주되, 지금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도저히 고운 말로 끝낼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멱살을 쥐어 잡고 악다구니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재환은 침묵을 택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시종 저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영을 지나쳐 매트리스로 오르던 재환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알아서 가. 아니면 여기서 한잠 자든가.”
얼마 안 있어, 매트리스 스프링이 삐걱거리며 벽을 보고 누운 재환의 뒷자리에 무게가 얹혔다. 재환은 상대가 누울 수 있도록 보다 벽 가까이 몸을 붙였다. 딱 그만큼 시트 위에서 꾸물꾸물 움직인 한영이 재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재환은 뒤에서 저를 껴안는 한영을 내버려 둔 채로 꾹 눈을 감았다. 아마도 잠은 오지 않겠으나, 그래도 일단은 청해 볼 요량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눈 떴을 때 한영이 집에 돌아간 상태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하지만 예상대로, 재환은 잠들 수 없었다.
“…재환아.”
도로 눈을 뜬 재환은 멀거니 눈앞에 놓인 벽을 응시했다. 한영의 입김이 쏟아지는 목덜미가 뜨거웠다. 가까운 곳에서 털털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가 미처 그 기운을 식혀 주지 못했다. 애초에 선풍기 바람은 등 뒤에 딱 붙은 한영에게 가려 재환에게 도달하지도 않았다.
“화 많이 났어…?”
순간 피식 튀어 나갈 뻔한 헛웃음이 꽉 다문 앞니에 막혔다. 아무래도 한영은 이쪽이 화가 나서, 그래서 줄곧 침묵을 유지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이를 풀어 주려는 듯, 재환을 보다 꽉 안은 한영은 사과와 변명, 그리고 반성이 섞인 말을 어물어물 내놓기 시작했다.
“사실 어제…, 재환이 너랑 그…, 카페 여자애 같이 있는 거 봤어. 그거 보고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오해한 것 같아. 그래서 어젯밤에 계속 기다렸는데…. 미안해, 재환아….”
촉촉함을 품은 입술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 또한 그대로 내버려 둔 재환은 벽지에 난 크고 작은 생채기들을 눈으로 세었다. 도배만 새로 싹 해도 집이 그럭저럭 깨끗해 보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집주인이 그렇게까지 해 주지는 않을 성싶었다.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기분 풀어, 재환아. 응? 너 하란 대로 뭐든지 할게. 너 말하는 거 다 들을게….”
그제야 재환은 한영의 품에서 슬그머니 몸을 뒤로 돌렸다.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한영은 두 눈가가 다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 사이에서 그렁그렁 빛나는 갈색 눈동자와 눈을 맞춘 재환은 덤덤한 투로 물음 하나를 건넸다.
“정말 나 하란 대로 할 거야?”
‘응.’ 하며 한영은 수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분홍 머리칼이 함께 팔랑팔랑 흔들리며 가까이 있던 재환의 콧속으로 가벼운 샴푸 향이 스몄다. 이토록 확실한 대답에도, 재환은 같은 물음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진짜…, 내가 하란 대로 할 거지?”
“응, 재환아. 그럴게. 너 말 다 들을 테니까, 화 좀 풀어…. 응?”
끝내 콧잔등을 가로질러 툭 눈물을 떨군 한영은 완전한 용서를 구하듯 재환의 입술에 쪽, 쪽 입 맞추었다. 그 사이사이에도 ‘기분 풀어’나 ‘하란 대로 할게’와 같은 말을 수 번 반복했다. 지금의 언사가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을 요하는지도 모르고, 다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종국에는 재환의 잇새로 머뭇머뭇 혀를 미끄러뜨렸다. 이 또한, 재환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 속으로 뜨거운 혀가 들어왔던 것처럼 속옷 안으로 뜨거운 열기를 품은 손이 파고들었다. 평소의 능숙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조급하게 재환의 엉덩이 사이를 손가락으로 헤집던 한영은 어느덧 벌떡 몸을 세워 재환이 빌려준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어 던졌다. 마찬가지로 재환의 아랫도리까지 벗기고서, 채 풀어지지 않은 구멍으로 허겁지겁 성기를 밀어 넣었다.
그대로 재환의 머리맡을 두 손으로 짚은 한영은 마치 처음 섹스를 경험하는 소년처럼 성마르게 허리 짓 했다. 끙끙거리며 퍽퍽 허리를 치댈 때마다 기껏 씻긴 것이 무색하게 땀범벅이 된 머리칼에서 자잘한 물방울이 튀었다. 그중 일부는 격한 몸짓 아래 덜컥덜컥 흔들리는 재환의 이마나 뺨 위로 떨어졌다.
마침내 장기 깊숙한 곳에서 미지근한 정액이 터질 때, 재환은 속눈썹과 뺨을 모두 파르르 떠는 한영을 올려 보며 문득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유한영에게는 서재환만 있으면 되는 것 같았다. 서재환만 있으면, 그에게는 음악도, 노래도 다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