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6권) (22/29)

6권

5장

* * *

차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름만 들어도 눈이 커다래지는 기획사에서 겪었던 일은 희미해졌다. 우리는 아이돌 밴드를 키울 거고, 노래도 이쪽이 준비할 거고, 너희는 악기만 연주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느꼈던 감정이 더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나중 되어 생각해 보니, 관계없는 사람은 얼씬도 못 할 으리으리한 사무실을 구경한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싶기도 했다. 그런 것도 나름 경험이라면 경험이었다.

다소 어수선했던 일을 잊은 밴드는 다시 연습에 매진했다. EP 앨범을 부지런히 홍보하기 위해 공연 스케줄도 늘렸다. 아직 막연하기는 하지만, 정규 앨범에 대한 말도 슬슬 조금씩 나왔다.

그 와중, 적잖이 안타까운 소식이 밴드에 전해져 왔다. 지난 연말에 공연을 했던 클럽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었다. 클럽 코벤트와 함께 그 동네에서 제법 오랫동안 터줏대감 역할을 하던 곳이었건만, 장사가 이전처럼 되지 않으니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문 닫은 클럽이 한둘이 아니었다. 점점 인디 밴드가 공연할 장소가 줄어들고 있음을 생각하면 심히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클럽이 문을 닫기 며칠 전, 더 숨은 그곳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간 클럽을 찾아 주었던 관객들을 위한 아듀 공연인 셈이었다. 그리고 공연 당일, 재환은 클럽 대기실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맞닥뜨렸다.

“재환 오빠?”

과거 재환이 멤버로 있던 이데아의 키보디스트 유정이었다. 대기실 바닥에 기타 가방을 내려놓던 재환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오늘 출연하는 밴드 목록을 읊어 보았다. 그중 이데아는 없었다. 재환의 표정에 서린 의아함을 읽은 유정이 먼저 제 사정을 밝혔다.

“저 이데아 나온 지 몇 달 됐어요. 지금은 다른 밴드에서 객원 멤버로 키보드 쳐요. 사실 공연 전에 오빠한테 한번 연락하려고 하긴 했는데….”

말을 어물쩍 흐린 유정은 제법 티가 나게 재환의 눈치를 살폈다. 곁눈질로 잇달아 악기를 내려놓는 더 숨의 다른 멤버들을 보기도 했다. 재환에게 무언가 더 하고픈 말이 있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자꾸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대기실은 이야기를 나눌 장소로 마땅치 않았다. 기타 가방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빼 든 재환은 고갯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일단 나가서 얘기할까.”

“아, 네. 오빠.”

이윽고 먼저 대기실을 나가는 유정을 따라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어딘가에서 불쑥 뻗어 온 손이 답삭 재환의 팔목을 붙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영이었다. 빤하게 뜨인 갈색 눈동자 가득 ‘어디 가?’라는 물음이 찰랑찰랑 고여 있었다. 재환은 부드럽게 팔을 비틀어 한영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냈다.

“예전에 본 적 있지? 같이 밴드 하던 친구야.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저보다 조금 더 위에 있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한영의 얼굴이 묘한 기색을 띠었다. 곧이어 붉은 입술이 열리며 ‘싫….’ 하는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때, 재환이 두드렸던 어깨에 척 긴 팔이 얹혔다. 지우였다.

“갔다 와. 우린 먼저 사장님한테 인사나 하고 있을게.”

눈썹 사이를 폭 움츠린 한영에게서 시선을 돌린 재환은 지우와 눈을 맞추었다. 한영의 어깨를 보다 제 쪽으로 끌어당긴 지우가 눈짓으로 대기실 문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유정이 재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환은 응, 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잠시 묶였던 걸음을 뗐다.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한 사람 때문에 뒤통수가 아렸다.

무대에서 막 다른 팀이 리허설을 시작한 까닭에, 조금 더 조용한 장소를 찾던 재환과 유정은 아예 지하에서 올라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마침 바로 옆 건물에 편의점이 있어 두 사람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캔 커피 두 개를 사 편의점 한편의 테이블로 가 앉은 재환은 하나를 유정에게 내밀었다.

“잘 마실게요, 오빠.”

“그래.”

말과 달리 유정은 캔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별생각 없이 재환은 유정에게 ‘따 줘?’ 하고 물었다. 잠깐 멈칫하던 유정은 괜찮다며 홰홰 고개를 저었다. 하여 재환이 혼자 쭉 커피를 들이켤 즈음, 유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형찬 오빠랑 헤어졌어요.”

“아…, 응.”

나무 무늬를 흉내 낸 테이블 위에 캔을 내려놓은 재환은 조금 모호한 투로 대답했다. 유정이 같은 팀의 보컬이었던 형찬과 헤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몇 달 전, 동생을 만난 카페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형찬은 분명 유정이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였다. 그 둘이 제법 친밀한 사이로 비쳤던 것을 재환은 기억했다.

“그러고 나서… 이데아는 바로 탈퇴했어요.”

천천히 말을 이은 유정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표정은 밝지 못했다. 마주 앉은 재환은 그녀에게 위로라도 한마디 건네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저 또한 과거 밴드에서 쫓겨나듯 탈퇴한 입장이었기에, 선뜻 그러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버린 상대를 계속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밴드 탈퇴하는 거, 많이 힘들지?”

유정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코를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굳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환은 테이블 구석에 있는 휴지 곽에서 휴지를 뽑아 유정 앞에 내밀었다. 손등에 희미하게 물기가 맺힌 손이 휴지를 받아 들었다.

“그것도 그거고…, 오빠한테 너무 죄송해서….”

말을 또렷이 끝맺지 못한 유정이 재환이 건네준 휴지로 꾹꾹 눈 밑을 눌렀다. 그녀에게 사과받을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던 재환은 하릴없이 속이 갑갑해졌다. 지금의 그는 이데아 시절보다 훨씬 즐거운 마음으로 밴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정이 딱히 미안해할 거리가 없었다. 아마도… 그럴 터였다.

“유정아.”

“그때… 형찬 오빠가 저 때문에 오빠 녹음한 트랙 바꿔치기한 거 다 알았는데, 그냥 모른 척했어요.”

“그거야….”

“제가 오빠 좋아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 없었을 거예요….”

다소 예상치 못한 발언에 재환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렁그렁 눈물 고인 눈을 다시 휴지로 누른 유정은 저 깊은 곳에서 묵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듯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저, 밴드 들어가고 나서 계속 오빠 좋아했어요. 근데 형찬 오빠가 너무 저한테 적극적으로 잘해 주니까…. 아무리 그래도 밴드 안에서 연애하지 말 걸 그랬어요. 사내 연애 금지라는 오빠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유정은 짠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재환은 유정을 따라 웃기는커녕 그새 더 굳어 버린 얼굴을 풀 수 없었다. 가슴팍을 짓누르는 갑갑함은 한층 더 심해졌다. 술 취한 유정에게 고백받고, 그 후 유정과 형찬이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덕분에 괜한 오해를 사 제 발로 밴드를 나가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모든 상황을 떠올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저 자신에게 적잖은 환멸이 느껴져서 그랬다. 밴드 멤버끼리 연애 같은 거 하면 안 된다며 꼰대처럼 지껄일 때는 언제고, 현재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은 팀 멤버와 더한 짓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에 딱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밴드 나와서 속은 시원해요. 형찬 오빠 얼굴 계속 보기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또다시 유정은 눈썹 끝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재환 앞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모두 꺼내 조금쯤 속 시원한 마음이 담긴 웃음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아직 유정에게 들려줄 말을 찾지 못한 재환은 공연히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편의점 유리 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클럽이 있는 건물의 입구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재환에게 익숙할 수밖에 없는 머리 색의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영이었다.

“아무튼…. 그때 정말 죄송했어요, 오빠.”

한영은 미동도 없이 건물 입구에 서서 이쪽을 보았다. 무채색으로 칠해진 건물 외관과 톡톡 튀는 분홍 머리칼이 꽤나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래서인지 재환은 그곳에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재환 오빠…?”

“아, 응.”

유정의 입에서 제 이름 두 글자가 나오고 나서야 재환은 엉거주춤 정면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이제는 그럭저럭 눈물을 그친 유정이 순한 표정으로 재환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심 기대에 찬 표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재환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 남은 커피를 급히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제 슬슬 가 볼까. 곧 리허설 하겠다.”

묘하게 초조한 태도를 보이는 재환의 모습에 유정은 잠깐 머뭇거리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정이 그러자마자 다 마신 캔을 쥔 재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곳에 캔을 넣고서, 먼저 성큼성큼 편의점 문으로 걸어갔다. 짤랑짤랑 풍경 음을 울리는 문을 붙잡고 유정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재환이 이토록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문밖으로 나오는 사이 분홍 머리는 쏙 자취를 감추었다. 몇 발짝 거리밖에 안 되는 클럽 건물 입구에는 더 이상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일순 맥이 풀려 버린 재환은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다만, 제가 왜 이리 서둘렀는지는 스스로도 의아했다. 얘기 좀 하고 오겠다고 통보도 했겠다, 한영이 저와 유정을 보고 있는 게 뭐가 어때서. 보나 마나 별일 아닐 터였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며, 재환은 앞서 계단을 내려가려는 유정을 불러 세웠다.

“유정아.”

찰랑찰랑 긴 머리를 흔들며 유정이 휙 뒤를 돌았다. 재환은 진작 그녀에게 해 줬어야 할 말을 뒤늦게나마 꺼냈다.

“나 지금 밴드 즐겁게 하고 있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아…, 네. 오빠.”

언제 눈물을 훌쩍였냐는 듯 유정은 생긋 웃었다. 그제야 재환도 유정을 따라 어렴풋이 웃을 수 있었다. 물론 아주 매끄러운 미소라 하기는 어려웠다.

유정과 함께 클럽으로 내려간 재환은 그녀에게 ‘오늘 공연 잘 해.’라는 인사를 일찌감치 전한 뒤 혼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타이밍이 애매해 피우지 못한 담배를 도로 기타 가방에 넣어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을 통과해 몇 걸음 떼기도 전, 콱 손목이 붙들려 몸이 옆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곧이어 쿵, 소리와 함께 밴드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은 벽에 등이 부딪혔다. 등이 닿은 곳 바로 옆에는 방금 들어섰던 문이 있었다.

“유한영…!”

하여 밖에 들릴세라 맘껏 소리칠 수도 없던 재환은 억누른 목소리로 한영을 불렀다. 대뜸 사람을 잡아끈 한영은 이제 내처 두 손으로 재환의 어깨를 꼭 붙잡고 있었다. 우악스러운 행동과 달리, 표정은 당황스러울 만치 차분했다.

때마침 문 너머에서 유려한 건반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단박에 재환은 유정의 연주임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팀이 리허설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재환아, 키스해 줘.”

“…뭐?”

이윽고 한영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재환을 더욱 당황시켰다. 처음 듣는 대사는 아니었지만, 공연도 하기 전부터 한영이 이런 식으로 나온 적은 단연코 없었다. 무대에서 내려와, 온몸에 남은 흥분을 잠재우지 못해 서로 성마르게 입술을 부딪치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키스해 줘야 오늘 공연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한영이 이러는 원인이 재환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유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지금 한영은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일전 기획사에서 도망친 후, 재환이 던진 물음에 거친 섹스로 답했을 때처럼 그는 막무가내로 굴고 있었다.

“하….”

한 번 학습한 바가 있는 한영의 태도는 재환에게 빠른 포기를 불러일으켰다. 그 당시에도 한영을 피하지 않았듯이, 이번에도 재환은 어깨를 붙든 손아귀를 끝내 떨쳐 내지 않았다. 대기실에 언제라도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는 염려를 꿀꺽 삼키며, 재환은 한영에게 입술을 겹쳤다.

기다렸다는 듯 팔을 내린 한영이 와락 재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반대로 재환은 팔을 들어 한영의 목을 감쌌다. 교차된 손목에서 푸른빛을 띤 끈 팔찌가 달랑거렸다. 평소에는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팔찌가 어쩐지 지금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미끄덩한 혀와 함께 입 안으로 들이친 더운 숨이 차츰 호흡을 흩트렸다.

다행인지, 다행이 아닌 건지, 기나긴 입맞춤이 끝나도록 대기실 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헉헉 숨을 고르며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한 두 사람은 무사히 리허설을 마치고, 또 얼마 가지 않아 진짜 무대에 올랐다.

재환에게 예고했던 대로, 한영은 마지막으로 서 보는 이 클럽의 무대에서 최고의 연주와 노래를 펼쳤다. 한영의 기세에 맞추어 재환도 혼신을 다해 연주했다. 곡 하나가 끝날 때마다 커다란 환호, 박수가 쏟아졌다. 재환의 마음만 그만큼 들뜨지 못했다.

반응이 뜨거웠던 만큼 공연 후 더 숨의 CD를 사 가는 관객이 꽤 많았다. 어떤 이는 직접 CD를 들고 와 네 명에게 사인 요청을 하기도 했다. 싫은 부탁은 아니었으나,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은 재환은 시종 어색한 얼굴로 두꺼운 펜을 놀렸다. 경중만 조금 다를 뿐이지 태군이나 한영도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에 반해 지우는 여유가 넘쳤다. 사인한 CD를 돌려주며 다른 클럽에서 더 숨이 공연하면 꼭 보러 와 달라는 홍보성 멘트도 아주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그러자 꺅 소리를 터뜨린 관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사진도 찍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얼결에 핸드폰 앞에 서던 중, 재환은 클럽 뒤쪽, 드링크 바 앞에 홀로 자리한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삐죽 올라와 있는 듯한 남자는 장소에 걸맞지 않게 커다란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데, 모자 그림자에 가려진 남자의 얼굴이 꼭 이쪽을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재환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려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찰칵, 소리와 함께 재환의 눈앞에서 번쩍 플래시 불빛이 터졌다. 동시에 네 명 가운데 서 있던 관객이 펄쩍 뛰어올랐다.

“어머, 죄송해요! 플래시 켜 놓은 줄 몰랐네!”

발을 동동 구른 관객은 촬영을 부탁했던 친구의 손에서 냉큼 핸드폰을 가져왔다. 그사이 재환은 시야에 둥둥 떠다니는 노란색 동그라미를 걷어 내기 위해 부지런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서 다시 클럽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더 이상 모자 쓴 남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재빨리 클럽 입구까지 쭉 훑어보았으나, 이미 밖으로 나간 듯했다.

“다시 찍을게요!”

플래시 기능을 끈 핸드폰이 재차 위치를 잡았다. 재환은 퍼뜩 그곳으로 고개를 되돌렸다. 혹 아는 사람이었을까, 싶었지만 금방 또 다른 관객이 사진 촬영을 요청하는 바람에 진득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수줍은 표정을 한 관객이 네 사람 가운데로 와 섰다. 그 앞에서 핸드폰을 높이 든 이가 ‘찍을게요!’ 하고 크게 외쳤다. 재환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콩알만 한 렌즈를 응시했다. 하나, 둘, 셋. 숫자가 세어지고, 곧이어 찰칵 인공적인 셔터 음이 울렸다.

* * *

요즘의 한영은 조금 이상했다. 원래부터 겉모습이든, 행동거지든 평범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지만, 최근에는 유독 그랬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집착이다 싶을 정도로 재환과 함께 있으려 했다. 마치 잠시도 혼자 있기 싫은 사람처럼 굴었다. 합주가 끝나면 당연한 듯 재환을 붙잡았고, 합주가 없는 날에는 재환의 집 근처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그를 기다렸다. 아예 열쇠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영이 재환의 얼굴을 보고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은 늘 같았다. 키스해 줘. 뭐 언제는 안 그랬느냐마는, 요새는 아예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해 훤히 비치는 집 앞 골목에서건, 멤버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합주실에서건 한영은 집요하리만치 재환에게 입맞춤을 요구했다. 그럴 때는 가벼운 뽀뽀라도 한 번 해 주어야 순하게 물러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있다 재환의 핸드폰이라도 울리면 한영은 꼭 큰일 난 듯이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재환이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는지 무던히도 신경 썼다.

이 모든 행동의 계기를 재환은 딱히 하나로 특정 지을 수 없었다. 일전 유정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인 게 문제인가 싶다가도, 이미 그 전부터 한영이 유별나게 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대회가 있었던 날이라든가, 기획사 사무실에 다녀왔던 날이라든가…. 단, 다시 말하지만 애초 한영에게는 남들과 조금 다른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재환은 내심 헷갈렸다. 그에게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냥 엉뚱한 성격의 연장선인 건지.

그리하여 몇 번이나 너 무슨 일 있었느냐고 자못 진지하게 묻기도 했지만, 전부 허탕이었다. 재환이 그럴 때마다 한영은 샐쭉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질문을 두 번이라도 할라치면 뽀뽀 세례를 퍼부어 재환의 입을 막았다. 그런 한영의 속을 더 깊이 캐낼 재간이 재환에게는 없었다.

따라서 재환은 한영이 원할 때 입 맞추고, 섹스하다 보면 그의 집착도 언젠가는 사그라들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차츰 하게 되었다. 사실은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포기일 수도 있었다. 그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없었다. 한영이 괜찮은지, 제가 괜찮은지, 또 우리가 괜찮은지 전전긍긍 고민하는 것에 재환은 슬슬 지쳐 가고 있었다. 골머리 앓지 않고, 끙끙대지 않고 그냥 한영과 함께 음악 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다소 비겁한 바람이었다.

“야, 무거워….”

구깃구깃 얼굴을 찌푸린 재환은 자신의 몸에 친친 감긴 새하얀 팔다리를 하나씩 뜯어냈다. 그러자 아직 잠에 빠진 한영이 ‘으음….’ 하며 슬쩍 몸을 뒤척였다. 그 틈을 타 재환은 협탁 위에 충전시켜 놓고 있던 핸드폰을 얼른 집어 들었다. 아까부터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 위에는 ‘사장님’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재환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오늘이요? 네, 괜찮아요.”

세훈과의 짧은 통화를 끝낸 재환은 고요해진 핸드폰을 도로 협탁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슬슬 일어나야 할 듯해, 그새 또 허리에 감긴 팔을 살금살금 들어 올렸다. 하나 이번에는 물러나는 일 없이, 기다란 팔은 더 꽉 재환의 허리를 안아 왔다. 반쯤 세웠던 등이 매트리스에 닿으며, 판판한 가슴팍 위로 분홍색 머리통이 붙었다.

“…깼어?”

재환의 가슴에 푹 얼굴을 파묻은 한영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가는 머리칼이 살살 흔들렸다. 재환은 그 위로 손을 얹어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마도 상대가 질색할 얘기를 꺼내기 전, 나름 미리 달래어 두려는 행동이었다.

“유한영, 나 오늘….”

“싫어.”

하….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아니한 반응에 재환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오늘은 재환이 모처럼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었고, 누구보다 한영이 그 사실을 뛸 듯이 반겼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지난밤 섹스 도중에도 몇 번이나 재환에게 ‘진짜야?’ 하고 물었더랬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재환이 아무 일정 없이 하루를 보내는 날은 좀처럼 드물었다. 보통은 카페에 일을 나갔고, 그러지 않을 때는 예외 없이 합주를 잡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르바이트도, 합주도 없었으니 재환과 온종일을 함께 지낼 생각을 한 한영으로서는 잔뜩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영에게 지금 재환은 퍽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카페에 한 명이 갑자기 못 나오게 됐대.”

“싫어, 재환아….”

한영은 아예 나머지 팔까지 꾸물꾸물 움직여 재환의 허리를 답삭 끌어안았다. 토라진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재환이 몇 번 더 한영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어미 품에 안긴 아기 원숭이처럼 철썩 들러붙은 한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감까지는 아니니까, 밤에 너희 집으로 갈게.”

힘주어 재환을 안고 있느라 근육이 도드라진 어깨가 창으로 흘러드는 부연 햇살에 반사되어 희게 빛났다. 생각에 잠긴 듯, 혹은 떼를 쓰는 듯 한영은 그 상태로 얼마간을 더 움직이지 않았다. 하늘하늘한 머리칼로 덮인 뒤통수를 거듭 어루만지던 재환은 흘긋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 위에서 번쩍이는 LED 시계가 막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출근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읏.”

눈 뜬 후부터 반쯤 발기가 지속되고 있던 성기에 대뜸 뜨듯한 감촉이 쏟아졌다. 급히 고개를 내린 재환은 그새 가슴에서 떨어져 가랑이까지 내려간 분홍 머리통을 발견했다.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엎드린 한영이 두 손으로 재환의 성기를 꼭 쥐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그 끝에 닿기 직전이었다.

“유한영…!”

귀두에 붙을락 말락 하던 입술을 떨어뜨린 한영이 데구루루 눈을 위로 굴려 재환과 시선을 맞추었다. 절로 사람의 입을 합 다물리게 하는 순연한 눈빛이었다. 하여 재환이 잠시간 다음 말을 고민하는 사이, 한영이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그것도 꽤나 간절한 투로.

“그럼 일어나기 전에 한 번 빨기만 할게. 안 넣을게.”

재환이 한영을 말리려던 이유는 사실 한 가지였다. 펠라만으로 끝나지 않을까 봐. 아무리 시간이 여유롭다 한들, 섹스까지 일이 번지면 제때 출근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만 귀신같이 눈치 빠른 한영이 그 걱정을 먼저 잠식시켜 준 셈이었다. 여기에 한영은 내처 쐐기를 박았다.

“응? 재환아….”

남의 고추를 움켜쥐고 있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말간 시선이 콱콱 재환의 얼굴로 와 박혔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살갗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결국 재환은 한영의 고집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

승낙과 체념이 한데 섞인 한숨을 길게 늘이며 고개를 젖히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축축한 습기가 통째로 성기를 집어삼켰다. 뒤통수가 채 베개에 닿기도 전이었다. 동시에 시트를 짚은 팔꿈치가 두 다리 사이로 밀고 들어오며 허벅지의 각도를 보다 넓게 벌렸다.

“으, 읏…. 후….”

한숨이 빠져나간 입술 새에서 곧바로 밭은 신음이 비어졌다. 그만큼 한영의 입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시간이 지체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의식한 듯, 한영은 재환의 성기를 입 안 가득 문 채 크게 크게 얼굴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더불어 미끄덩한 혀가 쉬지 않고 기둥을 샅샅이 훑었다. 이토록 자극이 거세니, 성기는 단숨에 최대치까지 몸피를 키웠다. 체감상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응…, 윽….”

“음….”

바삐 움직이는 것은 입과 혀뿐만이 아니었다. 재환의 성기를 조급히 빨아올리며, 한영은 바지런히 자신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그에 따라 넓지 않은 집 안이 순식간에 온갖 난잡한 소리들로 꽉 찼다. 춥춥 타액과 점막이 성기에 비벼지는 소리, 탁탁 손날이 매끈한 사타구니를 치는 소리, 헐떡거리는 신음, 시트의 부스럭거림 등등…. 이러다 새어 들어오던 햇살이 다 놀라 달아날 지경이었다. 어떻게 봐도 아침 댓바람부터 울릴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영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재환을 싸게 하고, 또 저도 빨리 싸는 일에 집중했다. 그 결과 곧게 솟은 성기가 자의에 의해 콱콱 좁은 목구멍까지 들이박혔다. 새카만 음모가 수시로 뺨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그럴수록 저 위에서 재환이 내뱉는 신음이 한층 거칠어졌다.

“허윽, 응…. 후으….”

그 소리를 연료 삼아 한영은 가능한 한 온 힘을 다해 입에 문 성기를 조이고 빨아들였다. 제 성기를 쥔 손은 보다 다급하게 움직였다. 거듭 손바닥에 문질러진 여린 표피가 마찰을 견디지 못해 벌그스름히 달아올랐지만, 그런 건 안중에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적당히 복근이 잡힌 배가 움칠움칠 빠르게 수축하며 한영의 입 안으로 왈칵 미지근한 액이 터졌다. 늘 그랬듯 한영은 재환이 쏟은 것을 한 모금 남김없이 꼴깍꼴깍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다만 그 후에도 성기를 뱉지 않고 우물우물 혀 위에서 굴렸다. 저 또한 사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재환의 감촉이 필요했다. 탁, 탁, 탁. 샅에 손날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이 거세졌다.

“으, 음…!”

이제는 아예 붉은빛을 띤 성기 끝에서 뿌연 정액이 솟구쳤다. 하얀 손바닥이 흥건히 젖을 때까지 정액은 쭉쭉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긴 사정이 멈추고서야 한영은 재환의 성기를 뱉고 숨을 골랐다. 할딱이는 한영을 몽롱하게 잔열에 잠긴 눈으로 내려다보던 재환이 까딱까딱 손을 흔들었다. 비슷한 기운을 머금은 갈색 눈동자 위로 ‘응?’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올라오라고.”

냉큼 몸을 세워 뒤꿈치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한영은 휙휙 휴지를 뽑아 젖은 손바닥을 닦았다. 마음이 급해 꿍친 휴지를 매트리스 밖으로 던지고서, 위로 기어 올라가 재환과 상체를 포갰다. 코끝이 스칠 거리에서 지그시 시선을 맞추자, 촉촉이 땀이 밴 손바닥이 발갛게 물든 뺨을 감싸 왔다.

“재환아….”

“조금 빨리 쌌지?”

누구를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일단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보고 씩 웃은 재환이 한영에게 입술을 겹쳤다.

방금까지 헉헉대는 신음과 찔꺽거리는 소리가 낭자했던 공간에 촉, 초옥 간지러운 음이 퍼졌다. 아까는 짐짓 한영에게 단호한 체했지만, 그와 떨어지기 싫은 것은 재환도 마찬가지였다. 그 마음을 곧이 전할 수 없어 몇 번이고 부드러이 입을 맞추었다.

아무리 아이처럼 굴어도, 그래서 때로는 한숨이 나와도 아직 재환은 한영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여름이 온 것도 아닌데 바깥 날씨가 꽤나 무더웠다. 이러다 진짜 여름이 오면 도대체 얼마나 더우려는 건지, 부지런히 길을 걷는 희연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드디어 저만치 앞에 카페 입구가 보이고, 희연은 기운을 내 남은 걸음을 서둘렀다. ‘으으’ 소리를 내며 에어컨 바람이 퐁퐁 뿜어져 나오는 카페 안으로 들어선 순간, 희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툭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방끈을 얼른 쥔 희연은 머뭇머뭇 카페 카운터로 걸어갔다.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재환이 희연을 보고는 한 손을 들어 올리며 환히 웃었다. 통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봄 햇살이 청년의 멀끔한 얼굴을 한가득 비추었다.

“오빠…?”

“오늘 혜인이 못 온다 그래서. 내가 대타로 출근했어.”

“아….”

콩닥거리는 희연의 가슴에 반가움과 난감함이 함께 서렸다. 오랜만에 재환을 보아 너무 좋았지만, 요 며칠 일부러 그를 피해 출근했던 것을 생각하면 적잖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재환을 피한 이유는 단순했다. 얼굴을 안 보면…, 이 마음도 알아서 푸시시 꺼질 줄 알고.

“나 있어서 놀랐어?”

또다시 재환이 싱긋 웃었다. 그럴수록 희연은 최근 들였던 제 노력이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음을 여실히 깨달았다. 푸시시 꺼지긴 개똥이 꺼져.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재환에게 ‘옷 갈아입고 올게요….’ 한 희연은 터덜터덜 직원 휴게실로 걸어갔다.

이윽고 휴게실의 거울 앞에 선 희연은 한순간 쩍 얼어붙었다. 오늘 자신의 몰골이 어떠했는지를 지금에서야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귀찮아 감지 않은 머리는 대충 똥 모양으로 묶인 상태였고, 로션만 바른 얼굴은 꼭 어디가 아픈 사람 같았다. 이 꼴을 보고 반갑다 웃어 준 재환이 신기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지독한 창피함은 덤이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은 희연은 급한 김에 파우치를 뒤적여 꺼낸 틴트를 톡톡 입술에 발랐다. 입술에 불그스름 혈색이 돌고 나서야 좀 사람다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내 시무룩해져 어깨를 축 아래로 늘어뜨렸다. 어차피 이래 봐야 재환은 신경도 쓰지 않을 터였다.

밴드 하는 동생 하나가 희연이 너한테 한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희연은 재환을 향한 감정을 접기로 아주 굳은 마음을 먹었다. 사람 좋은 재환에게야 나쁜 의도가 전혀 없었겠지만, 짝사랑하는 오빠한테 다른 남자애를 소개받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또 없었다.

게다가 이 감정을 계속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술에 취해 진짜 돌이키지 못할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았다. 먼젓번에는 옆에 상지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녀가 팔을 꼬집어 가며 말려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재환에게 전화를 걸어 너 싫다, 밉다 온갖 헛소리를 지껄였을 것이다. 상상만으로 희연은 숨이 턱 막혀 왔다.

“짜증 나….”

애먼 거울을 향해 볼멘소리를 중얼거린 희연은 머리나 한 번 더 묶은 뒤 타박타박 휴게실을 나섰다.

잠깐 옷 갈아입고, 거울 좀 보고 오는 사이 카운터 앞에 줄 선 손님들이 꽤나 늘었다. 희연은 서둘러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리며 후다닥 카운터 뒤로 달려갔다. 주문받느라 바쁜 재환 곁에 서자, 아니나 다를까 금세 속이 소란스러워졌다. 하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간절히 평정심을 외치며, 희연은 주문 들어온 메뉴를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모두 음료를 찾아가고, 두 사람은 잠시 한숨 돌릴 틈을 얻었다. 한꺼번에 음료를 만드느라 어수선해진 조리대를 정리하던 희연은 넌지시 재환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오빠. 지난번에 공연은 잘하셨어요?”

“아, 응. 클럽이 곧 문 닫아서 그런지 관객이 많더라.”

“못 가서 죄송해요. 딱 학교 팀플이랑 겹쳐서….”

에스프레소 머신 옆에 일회용 컵을 크기대로 쌓아 올리던 재환이 별안간 희연을 향해 휙 몸을 틀었다. 못마땅한 이야기를 들은 듯 곧게 뻗은 눈썹 사이에 자잘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표정을 본 희연은 일순 졸아 움칠 어깨를 옹송그렸다. 가뜩이나 재환이 신경 쓰여 지금의 그녀는 그가 보이는 작은 행동에도 크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희연아.”

“예, 에…?”

“공연 못 온 게 뭐가 죄송해.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마.”

아…. 한동안 말을 못 하고 입을 벙긋거리던 희연은 카운터 너머로 휙 눈을 돌렸다. 왜 하필 이럴 때 주문하러 오는 손님도 하나 없는 건지. 이대로면 갑자기 쿵쿵 치솟은 심장 소리가 재환에게까지 다 들릴 것 같았다. 낭패였다.

“그리고 희성이한테는 내가 말했어.”

“희성이요?”

“희연이 너한테 반했다는 친구.”

희연은 속으로 헉 소리를 삼켰다.

“뭐, 뭐라구요…?”

“새끼, 너 차였다고.”

광대를 볼록 부풀린 재환이 꼭 짓궂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씩 웃었다. 사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일전 재환이 희성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희연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애를 소개받기는 싫다며 휙휙 고개를 저었다. 해서 혹시라도 재환을 언짢게 했을까 내심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물론 그보다는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훨씬 컸지만.

한데 저토록 훤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희연은 혼자 전전긍긍하던 게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재환에게 한가득 품고 있던 섭섭함도 대번에 사르르 녹아 버렸다. 제가 생각해도 참 속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모든 것이 저 눈치 없고 멋있는 오빠한테 반해 버린 자신의 탓이었다.

“안녕하세요.”

희연이 내쉬는 한숨이 주문하러 온 손님에게 인사하는 재환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묻혔다. 애써 상념을 지운 희연은 손님이 말하는 메뉴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짝사랑 때문에 애 끓이든 뭐 하든, 이제 이렇게 재환과 나란히 서서 함께 일할 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저와 교대한 상지, 그리고 아직 퇴근까지 두어 시간이 더 남은 희연에게 수고하라 인사한 재환은 카페를 나섰다. 최근 기타 연습을 맘껏 하지 못한 탓에,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집에 가 기타를 쥐고 싶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으므로, 그러는 대신 다른 이의 집을 향해 발을 뗐다.

큰길가에서 보다 좁은 골목으로 막 방향을 틀기 전, 재환은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작은 트럭 하나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트럭 위 기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어떤 것에 확 시선이 붙잡혔다. 벌그스름하게 익어 먹음직스러운 색도 색이거니와, 그곳에서 풀풀 풍기는 냄새 때문에 눈길이 안 갈 수가 없었다.

길 중간, 트럭과 몇 걸음 떨어진 지점에 서서 머뭇거리던 재환은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 목록에 제일 많이 보이는 이름을 꾹 눌러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제법 오랫동안 신호음이 울린 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재환아!

“뭐 하고 있었어?”

- 어? 아니. 아냐. 일 끝났어?

한영은 무언가 조금 허둥대는 기색이었다. 곁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통화로 더 캐묻기가 뭐했다. 대신 재환은 본디 전화를 걸었던 목적을 얼른 상기했다.

“통닭 사 갈까?”

- 통닭?

“응. 전기 구이 통닭. 여기 팔고 있어.”

그런 건 처음 들어 본다는 듯 한영이 ‘전기 구이 통닭?’ 하고 재차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재환은 전기로 구운 통닭이라는 궁색한 설명을 내놓았다. 살짝 뜸을 들이던 한영이 ‘응.’ 대답한 후, 전화를 끊은 재환은 성큼성큼 트럭으로 걸어갔다.

어렸을 적엔 두 마리에 만 원이 채 안 됐던 것 같은 통닭은 두 마리에 만오천 원, 세 마리에 이만 원이었다. 그러니 사는 입장에서는 세 마리를 사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통닭 세 마리가 담긴 봉지를 흔들며 재환은 걸음을 마저 서둘렀다.

이윽고 한영의 집에 들어섰을 때, 재환은 일단 콱 눈부터 구겼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냄새가 현관까지 물씬 풍겨 오고 있었다. 마치 과거에 한 번 맡아 본 바가 있는 듯한 냄새였다. 신발을 벗은 재환은 부리나케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달려갔다.

복도를 지나 부엌에 발을 디디자마자 싱크대 앞에 서 있던 한영이 휙 뒤를 돌았다. 그가 입고 있는 왕 꽃무늬 앞치마가 온통 물기로 흥건했다. 양손에 낀 진분홍색 고무장갑도 마찬가지였다. 아일랜드 식탁에 치킨이 든 봉지를 내려놓은 재환은 보다 자세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한영 가까이 다가섰다.

“뭐 만들고 있었어?”

목을 빼 싱크대 안을 들여다보려던 재환 앞을 갑자기 한영이 휙 막아섰다. 눈썹을 꿈틀거린 재환은 한영을 피해 옆으로 한 발짝을 옮겼다. 그러자 한영 또한 재환을 따라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또다시 앞이 막혀 버린 재환의 표정이 하릴없이 구깃구깃해졌다. 이럴 때만 약삭빠른 한영이 냉큼 입을 열었다.

“재환아, 뽀뽀.”

한영은 아예 입술을 쭉 앞으로 내밀었다. 저 탱글탱글한 입술을 콱 꼬집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얕게 한숨을 내쉰 재환은 쪽, 소리가 나게 한영에게 입을 맞추었다. 물론 그 소리는 금세 허겁지겁 입술이 맞물리는 질척한 소리로 변질되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뽀뽀해 달라던 한영은 절대 뽀뽀로 만족하지 않았다. 재환의 입 속으로 쭉 혀를 밀어 넣어 아주 제대로 여기저기를 훑었다.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던 재환은 어느새 식탁 근처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나름 몸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는 것 같았으나, 도리 없이 한영의 고무장갑과 앞치마에 있던 물기가 재환의 옷으로 옮겨 왔다. 그리하여 진한 입맞춤이 끝났을 때, 이제는 검정색 티셔츠 앞섶이 척척히 젖어 있었다.

“어….”

아직 재환이 무어라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도리어 당황한 한영이 고무장갑 낀 손으로 황급히 재환의 옷을 탈탈 털었다. 젖은 장갑으로 젖은 옷을 털었으니 결과가 어땠겠는가. 새카만 티셔츠가 더 새카맣게 젖어 드는 것을 보며, 재환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한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재환아…?”

“아예 더 젖으라고?”

머리카락이 부스스 떠오를 정도로 한영이 홱홱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옷을 갈아입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한영의 뺨에 부드러이 입술을 눌렀다 뗀 재환은 ‘옷 갈아입고 올게.’ 했다. 한영은 답지 않게 얼굴을 벌그레 붉혔고, 재환은 씩 입꼬리를 올리며 부엌을 나섰다.

한영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도로 부엌으로 왔을 때, 재환이 사 온 통닭이 식탁 위에 제법 그럴듯하게 차려져 있었다. 밑에 놓인 접시가 멋스러워 그런지, 언뜻 보면 꽤나 값나가는 요리 같았다. 알아서 놓인 캔맥주도 썩 재환의 마음에 들었다. 한때 한영은 재환에게 주구장창 흑맥주만 주곤 했었는데, 재환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한 후로는 나름 이것저것 번갈아 가며 주었다. 오늘은 밀맥주였다.

다행히 통닭은 재환이 기억하던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재환의 아버지는 무언가 좋은 일이 있으면 꼭 집 근처에서 이 전기 구이 통닭을 사 들고 왔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비싼 치킨 많은데 왜 이런 걸 사 왔느냐며 아버지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튀긴 건 다 가짜라는 이상한 논리를 펼쳤다. 어린 재환으로선 맛만 좋으면 그만이니, 동생 재희와 마냥 맛있게 먹었더랬다. 그것도 벌써 옛날 일이었다.

“재환아.”

아무 의미 없는 옛 추억에 잠겨 있던 재환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닭고기 살이 수북이 쌓인 접시가 내밀어져 있었다. 선뜻 받지를 못하자, 한영이 손에 쥔 접시를 살살 흔들었다.

“먹어. 맛있어.”

“아, 응. 고마워.”

이미 자신이 뜯던 닭고기 조각도 있었으나, 하는 수 없이 재환은 접시를 받아 들었다. 노릇노릇 껍질이 붙은 살을 하나 집어서 먹자,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이었다. 쓸데없이 옛날 일을 떠올려 그런 모양이었다. 꼴사나웠다.

생각이나 다른 쪽으로 돌릴 겸, 우물우물 닭고기 살을 씹던 재환은 한영에게 툭 물음을 건넸다.

“아까 북엇국 끓이고 있었어?”

“어?”

한껏 커져 재환을 보는 눈에 ‘어떻게 알았지?’ 하는 문장이 숨김없이 적혀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에, 재환은 피식 작게 웃었다. 흔적은 그럭저럭 치웠는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부엌을 떠도는 이 묘한 생선 냄새와 탄내는 아마도 북어를 볶다 태운 냄새일 터였다. 과거에도 맡은 적이 있으므로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아니야?”

“그게….”

그때도 북엇국 하나 끓이겠다 그 난리를 피우더니, 한영은 그사이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만약 능숙하게 요리한다면, 그 모습이 더 어색하게 비칠 것 같았다. 물론 이제 라면 끓이기는 제법 괜찮아졌지만.

“나 오면 같이 끓이지 그랬어.”

재환은 가운데 놓인 통닭에서 다리 하나를 뜯어 맛있는 살은 다 저에게 발라 주고 뼈를 깨작거리고 있는 한영의 접시 위에 놓았다. 한영은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 재환의 말에 딱히 답하지 않았다. 제힘으로 끓인 국을 먹이고 싶었던 마음을 상대가 몰라주어 조금 의기소침한 까닭이었다. 이 또한 알아차리지 못한 재환은 ‘너도 빨리 먹어. 맛있다며.’ 하고 한영을 부추겼다. 고개를 끄덕인 한영은 재환이 준 닭 다리를 집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애초 크기가 크지도 않았거니와, 장정 둘이 붙으니 통닭 세 마리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뒤집은 캔을 탈탈 털어 마지막 남은 맥주 몇 방울을 입 안에 흘려 넣은 재환은 불룩해진 듯한 배를 손바닥으로 통통 두드렸다. 물론 본인만 그렇게 느낄 뿐이지, 육안으로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진짜 배부르다.”

“나도. 잘 먹었어.”

마찬가지로 남은 맥주를 호로록 들이켠 한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바로 테이블을 정리하려는 눈치이기에, 재환은 어서 한영을 따라 일어났다.

“정리는 내가 할게.”

“아냐. 아직 저기 설거지도 남았어.”

닭 뼈가 쌓인 접시를 집어 올리며 한영이 눈짓으로 싱크대를 가리켰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북엇국을 끓이려 사용한 식기들이 아직 싱크대 안에 있는 듯했다.

“알았어.”

눈치껏 재환은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영이 영 보여 주기를 꺼려하는 기색이니, 그냥 모른 체하는 게 좋을 성싶었다. 대신 재환은 다음에 하루 날을 잡아 한영에게 제대로 북엇국 끓이는 법을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환은 목 긴 스툴을 빙글빙글 좌우로 돌리며 설거지하는 한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당탕퉁탕 소리는 요란하고, 중간중간 물도 이리저리 튀는 것이 상당히 부산스러웠다. 그럼에도 꿋꿋이 그릇을 씻는 모습이 어째서인지 조금 귀여워 보였다. 그러다 키가 삐쭉한 사내놈한테 무슨 감상을 품는 건가 싶어 피식 한 번 웃을 즈음이었다.

바지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이 급작스럽게 진동했다. 재환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쉬지 않고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찍혀 있었다. 흘긋 눈을 들어 여전히 설거지에 여념이 없는 한영을 본 재환은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핸드폰을 귀에 대자마자 묘하게 낯설지 않은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 한영이 옆에 있나?

핸드폰을 쥔 채 멈칫한 재환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아는 사람은 아닌 듯한데, 다짜고짜 전해진 물음이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통성명도 없었다. 그때, 싱크대 앞에 선 한영이 재환에게 말을 걸었다.

“재환아, 설거지 거의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얼결에 재환은 ‘아, 응.’ 하고 대답했다. 설거지에 한창인 한영은 이쪽이 통화 중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는 전화를 건 상대에게 꽤나 적절한 답이 되어 주었다.

- 아. 옆에 있나 보네.

그제야 재환은 상대방의 목소리가 방금 자신을 부른 목소리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미간의 주름이 짙어지며 눈빛에 적잖은 당혹이 서렸다. 똑 닮은 목소리, ‘한영이’라는 친근한 호칭, 주저함이 없는 말투. 왠지 재환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 나 한영이 형인데, 그럼 일단 듣기만 해.

콸콸 싱크대로 쏟아지는 물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핸드폰을 꼭 쥔 채 굳은 재환의 귀에는 미처 들리지 않았다.

* * *

일전 기획사 사무실에 갔을 때, 재환은 으리으리한 내부 인테리어를 보며 호텔 로비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진짜 호텔 로비가 어떤지를 제대로 느꼈다. 높다란 천장 아래서는 떨어지면 큰일 날 것 같은 크기의 샹들리에가 번쩍거리고,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가 쉬지 않고 은은한 클래식을 연주했다. 곁을 지나치는 직원들은 하나 같이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더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진짜 호텔은 모든 것이 불편할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그 가운데 몸이 푹신하게 잠기는 의자에 앉은 재환은 자꾸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되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분위기가 묘한 긴장감을 피워 올리는 탓이었다. 어떻게 보나, 이 장소에서 자신 혼자 물에 동동 뜬 기름처럼 겉돌고 있었다. ‘호텔 카페도 괜찮지?’ 하는 상대의 물음에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게다가 뭐가 급하다고 이리 약속 장소에 빨리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하여 이것저것 다 후회가 될 즈음, 양복을 차려입은 직원 한 명이 재환 앞에 공손히 메뉴판을 두고 갔다. 딱히 할 거리도 없겠다, 메뉴판을 집어 눈앞으로 가져간 재환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벌렸다. 촌스러운 반응인 줄은 알겠다만, ‘0’ 하나가 더 붙은 듯한 가격을 보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환은 조용히 메뉴판을 덮어 매끈매끈 윤이 나는 대리석 테이블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결국,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재환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습관처럼 자주 가는 밴드 커뮤니티로 들어가, 밴드 관련 소식들이 올라오는 게시판을 기웃거렸다. 이런 데를 잘 뒤져 보면 소소하게 밴드를 지원해 주는 사업 프로그램을 찾을 수도 있었고, 굵직한 대회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가끔가다 유명 밴드들의 공연 소식이 올라오기도 했다.

오늘은 뭐 없나, 하는 마음으로 재환은 액정에 올린 엄지를 느릿느릿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던 중 손가락이 멈칫하는 동시에 두 눈이 커다래졌다. 슬그머니 등받이에 붙으려던 허리까지 대번에 뻣뻣이 펴졌다. 흡, 호흡을 삼킨 재환은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하나를 서둘러 눌러 보았다.

[영국 인기 밴드 Embryo, 올해 가을 첫 내한 공연]

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인터넷 기사를 따다 올린 글은 제목 그대로 몇 달 후 Embryo가 첫 내한 공연을 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토씨 한 글자 빼놓지 않고 이를 읽어 내려가는 재환의 눈이 쉴 새 없이 좌우를 오갔다. 입술도 덩달아 작게 달싹였다.

그렇게 글을 맨 아래까지 모두 읽었을 때, 스크롤은 다시 위로 올라갔다. 같은 내용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재환은 그 횟수가 막 다섯 번을 넘어갈 즈음에서야 겨우 뒤로 가기를 눌렀다. 가슴팍 안에서 쿵쾅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요란했다.

가장 좋아하는, 혹은 존경하는 밴드가 누구냐 묻는다면 언제고 Embryo의 이름을 댈 수밖에 없는 재환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죽기 전 그들을 직접 제 눈으로 보는 날이 오기는 할까 평소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내한 공연이라니, 기사를 읽고 또 읽었음에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옆에 한영이 있었다면 실감 나게 뺨이라도 한 번 때려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재환에게는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이 다 덜덜 떨리는 소식이었다.

하나 이 기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장소가 참으로 마땅치 않았다. 호텔 라운지에서, 그것도 혼자 오도카니 있는 주제에 드디어 내 인생 최고의 밴드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소리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무엇보다, 아직 티켓을 팔기도 전이었다.

넘치는 흥분과 그로 인한 설레발을 애써 꽉꽉 내리누른 재환은 내처 얼굴 근처에서 펄렁펄렁 손부채질 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낯빛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을 것이 뻔했다. 지금 바로 약속 상대가 나타난다면 꽤나 민망할 상황이었다. 약속한 시간까지 아직 10분여가 남아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재환은 게시판의 다른 글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재환은 Embryo의 내한 소식을 잠시 잊게 하는 글 하나를 발견했다. 곧 시작될 밴드 경연 대회에 관한 글이었다.

종전에는 기대와 감격이 넘실거렸다면, 이제는 진지한 기색이 서린 눈동자가 스크롤되는 화면을 따라 빠르게 휙휙 움직였다. 가라앉았던 심장이 재차 콩콩 뛰었다. 단숨에 글을 모두 읽은 재환은 서둘러 멤버들에게 방금 얻은 정보를 정리해 메시지로 전송했다.

곧이어 멤버들로부터 하나둘 답이 왔다. 모두 1등 팀에게 주어지는 혜택에 대해 한마디씩을 하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최종 우승을 거머쥐는 팀은 여름에 열릴 록 페스티벌에 설 자격을 얻었으니까. 탐이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탐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기실 무슨 짓을 해서든 얻고 싶은 기회였다. 그때, 아직 답을 하지 않은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보낸 메시지가 핸드폰 화면에 떠올랐다.

[재환아. 일하는 중이야?]

내용을 확인한 재환은 일순 덜컥 숨을 들이켰다. 다른 멤버들이야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적어도 이 메시지를 보낸 사람만큼은 지금 재환이 카페에서 일하는 중일 거라 알고 있었다. 이쪽이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니 여유롭게 대회 소식이나 나르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게 당연했다. 이래서 거짓말도 해 본 놈이 하는 거였다.

어찌 됐든 미련한 제 행동을 타박하기보다는 수습이 먼저였다. 톡톡톡 핸드폰 화면 위에서 다급히 손가락을 놀린 재환은 ‘쉬는 중’이라는 짧은 문장을 완성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는 진리가 새삼 뼈저리게 실감되었으나, 당장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 양심에 꼬챙이를 찔러 넣는 심정으로 꾹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것으로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난데없이 부르르 몸을 떠는 핸드폰이 순식간에 손에서 미끄러졌다. 재환의 손을 탈출한 핸드폰은 어찌해 볼 틈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와장창 무언가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대신 재환이 쏟아 내는 한숨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천만다행으로, 카페 바닥에는 사방에 푹신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리하여 핸드폰 화면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철렁한 가슴을 쓸어내린 재환은 거듭 안도의 숨을 뱉으며 테이블 밑으로 허리를 숙였다. 바닥에 놓인 채 얌전히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에는 여전히 ‘유한영’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재환은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납작 숙였던 허리를 다시 폈을 때, 재환은 또 한 번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안녕. 재환이 맞지?”

테이블 맞은편, 오늘 이곳으로 재환을 불러낸 당사자가 앉아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네.”

먹는 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표현은 딱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마시는 거였지만,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호로록 빨대를 빨아올려도, 재환은 입 안으로 흘러드는 것에서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따라 넘어가는 감각마저 미미했다. 턱도 없는 커피 가격 때문은 아니었다.

“하여튼, 내 동생이지만 얼굴 무지 밝힌다니까.”

대부분의 원인은 건너편에 앉은 남자에게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한영이 형이야. 유진영.’이라고 참 간략하게도 본인을 소개한 남자는 연신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재환을 대했다. 그러나 그가 건네는 말 하나하나가 퍽 대꾸하기 곤란한 것뿐이라, 재환은 적잖이 난감함이 쌓여 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 그러니까 진영은 저 할 말을 이으며 휘핑크림이 산처럼 올려진 아이스코코아를 중간중간 야무지게 마셨다. 그와 한영이 형제임을 증명해 주는 듯한 메뉴 선택이었다.

다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두 형제의 닮은 부분을 썩 찾기가 어려웠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어 이목구비가 아주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진영은 한영과 생김새나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계속 웃음을 짓고 있어 그런지, 동생에 비해 훨씬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물론 둘 다 절대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외양이라는 점은 똑같았다. 뭐, 실제로 진영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게 맞았다. 소위 말하는 연예인이었으니까.

그 연예인이 잇달아 농담조로 건네는 이야기가 보이지 않게 재환의 불편함을 콱콱 자극했다. 다시 말하는 거지만, 비싼 커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 한영이랑 사귄 지는 얼마나 됐어?”

이번에는 정말 커피가 엉뚱한 데로 넘어가고 말았다. 쿨럭 기침을 터뜨린 재환은 급히 호텔 로고가 새겨진 휴지를 집어 입가를 막았다. 제대로 사레가 들린 탓에 어깨와 가슴팍이 모두 들썩였다. 이를 빤히 지켜보던 진영이 휘핑크림 가운데 꽂힌 빨대를 쪼옥 소리가 나게 빨았다. 그사이 재환은 억지로 기침을 삭였다. 그러고서 겨우 말문을 뗐지만, 온전한 대답이 되지는 못했다.

“그, 저희는….”

“사귀는 사이 아냐?”

흐려지는 말꼬리에 재차 물음이 따라붙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상대에게 분명한 답을 내어 줄 수 없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우선 한영의 형 되는 사람에게 그와의 사이를 어디까지 얘기해도 되는 건지 경계를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더 어려운 건, 그 ‘사이’를 정의 내리는 일이었다. 그것이 재환에게 있어 얼마나 버거운 난제인지, 아마 질문을 던진 당사자는 짐작도 하지 못할 터였다.

“그럼 그냥 섹파?”

그러니 저렇게 답하기 난처한 것들만 쏙쏙 골라 묻는 것이겠지. 끝내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재환은 사근사근 웃는 낯으로 무례함을 감춘 남자를 아무런 대꾸 없이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불편함, 내지는 적대감이 읽힌 모양이었다.

“아아. 한영이 남자 만나는 거, 나나 부모님이나 다 신경 안 써. 옛날에 그 일로 뭐라고 했다가, 애 굶어서 응급실까지 데려갈 뻔했거든. 그러고 나선 완전 노 터치.”

진영은 정말로 한영에게 손도 대지 않을 거라는 듯 두 손바닥을 들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름 이쪽을 안심시켜 주려는 의도였겠으나, 재환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진영을 향한 불편함이 배가되었다. 아무리 당신 동생의 일이라지만, 진영은 너무 거리낌 없이 한영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신 웬만하면 콘돔은 꼭 써. 남자끼리도 그거 중요해.”

그리고 진영이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낼수록, 재환은 그가 자신을 이 자리에 불러낸 의도를 더욱이 알 수 없어졌다. 웃고 있는 그의 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어쨌거나 섹스하는 관계에 있는 남자의 형으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 상황에서 재환이 유추해 낼 수 있는 목적은 한 가지뿐이었다. 자신의 동생한테서 떨어지라는 매몰찬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우습지만, 예전 어머니가 보던 드라마에서처럼 상대가 뺨을 올려붙이거나 물을 쏟아붓는 장면을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진영 앞에서 더 긴장한 부분이 없잖았다.

한데 진영은 둘 사이를 캐묻는 것치고는 한영이 누구를 만나든 정말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해 보였다. 그것이 무관심에서 기인한 건지, 관용에서 기인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점만 한가득 안은 채, 재환은 송골송골 물기 맺힌 컵을 들어 빨대를 빨았다. 여전히 커피 맛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쯤 되니 호텔 커피도 별거 없구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물 묻은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려 쓱쓱 허벅지에 문지를 즈음, 진영이 대뜸 새로운 화두를 내밀었다.

“한영이가 나 엄청 싫어하지?”

지나가는 얘기를 하는 것처럼 툭 질문을 던진 진영은 그새 거의 다 마신 코코아를 마저 호로록 빨대로 빨았다. 직원을 불러 얼룩덜룩 크림 자국이 묻은 컵을 내민 뒤, 아이스코코아를 한 잔 더 시켰다. 그러고서 재환에게도 눈짓을 보내기에, 그냥 ‘괜찮습니다.’ 하고 말았다. 아직 커피가 절반도 더 남았거니와, 이 비싼 것을 두 잔이나 마실 엄두가 안 났다.

코코아가 올 때까지 진영은 할 거리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테이블 한편에 놓인 휴지 한 장을 집어 종이접기 하듯 가로세로로 접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종전 재환에게 꺼낸 물음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곧은 선이 그어지는 휴지에서 잠깐 눈을 든 진영은 ‘응?’ 하며 재환에게 가볍게 답을 재촉했다. 재환은 마지못해 입을 뗐다.

“가족 얘기는 한영이가 잘 안 해서요.”

고로 나는 잘 모른다는 뜻이었다. 한영이 그러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의미도 조금쯤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또 상대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말도 꺼내기 싫어한다는 거지? 귀여워, 아주.”

두꺼운 안경테에 살짝 가려진 눈매가 훅 휘어졌다. 진짜로 동생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거기에 대고 어찌 반응할지를 몰라, 재환은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사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영이랑… 많이 안 친하신 건가요?”

다시 휴지를 향했던 진영의 눈이 휙 위로 올라왔다. 재환을 보는 시선에 약간의 놀라움이 담겼다. 지금까지 저 혼자 실컷 떠들던 것과 달리, 모처럼 상대가 먼저 물음을 건네 온 까닭이었다. 미끈한 입매가 옆으로 활짝 벌어졌다.

“난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한영이는 아닌가 봐. 솔직히, 엄마 탓이 크지.”

“한영이 어머니요?”

“응. 엄마가 자긴 안 예뻐하고, 형인 나만 예뻐하니까.”

듣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무겁게 다가오는 이야기가 가뿐한 말투로 흘러나왔다. 그사이에도 길쭉길쭉한 손가락이 거듭 꾹꾹 휴지를 눌렀다. 아직 무엇을 접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왠지 알아?”

때마침 다가온 직원이 테이블에 컵 받침과 밤색 음료가 담긴 유리컵을 차례로 내려놓고 갔다. 휴지 접기를 잠시 멈춘 진영은 소복이 덮인 크림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빨대를 쪽 빨아들이자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컵을 가득 채우고 있던 크림과 코코아가 단숨에 쑥 아래로 가라앉았다. 몇 모금 더 코코아를 마신 진영은 휴지를 마저 접으며 본인 하던 이야기를 재개했다.

“한영이는 엄마를 너무 많이 닮았거든.”

선뜻 이해가 안 가는 설명에 재환의 눈썹 사이가 미세하게 오므라들었다. 정리하자면 한영이 그의 어머니를 닮았는데, 따라서 그녀가 한영을 예뻐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게 무슨 의미냐 진영에게 물어보려는 찰나, 무언가가 휙 재환 앞으로 날아왔다. 재환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오목하게 모아 날아온 물건을 받아 냈다. 진영이 접은 휴지였다.

“특히 그게 아주 똑 닮았지.”

재환은 손바닥에 담긴 휴지를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가만가만 테이블 위에 올렸다. 휴지는 피아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재환이 너도 알지? 한영이 천재인 거.”

각이 잡혀 꼿꼿이 선 휴지에서 손을 떨어뜨린 재환은 ‘네, 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또 쪼옥 빨대를 빤 진영이 상체를 젖혀 의자 등받이에 편히 등을 기댔다. 손장난이 끝난 손이 이제는 톡, 톡 팔걸이를 두드렸다.

“모처럼 본인 닮은 피아노 천재로 낳아 줬는데, 애가 말을 들어 먹질 않으니 엄마 입장에서는 엄청 미운 거지. 반대로 난 천재가 아니니까 미워할 이유가 없는 거고.”

여전히 이해가 될 듯, 되지 않을 듯한 이야기였다. 하여 다소 굳은 표정으로 잠자코 있자, 진영은 굳이 이해할 필요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다 뭔가를 떠올린 표정으로 작게 ‘아!’ 소리를 외쳤다.

“근데 재환이도 기타 엄청 잘 치던데? 지난번 무대 보고 깜짝 놀랐어.”

“지난번 무대요?”

“클럽에서 공연한 거. 나 거기 갔었어.”

순간 기억 속에 있던 장면 하나가 문뜩 재환의 뇌리를 스쳤다. 공연이 모두 끝난 클럽 뒤편에 서 있던 이질적 분위기의 남자. 푹 눌러쓴 벙거지 모자에 가려 끝내 보이지 않았던 그의 이목구비가 어떤 생김새였을지, 이제야 재환은 제대로 상상이 갈 것 같았다.

“노래도 좋더라. 다들 호흡도 잘 맞고. 보면서 조금 감동했어.”

진영은 오른손을 올려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살짝 흔들었다. 빈말이 아님을 강조하는 행동이었다. 어찌 됐든 칭찬은 칭찬인지라, 재환은 짧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그러기 무섭게 의자에 잠겨 있던 진영의 상체가 별안간 훅 앞으로 기울었다. 마치 팔짱을 끼는 듯한 자세로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린 진영이 재환과 똑바로 눈을 맞춰 왔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제법 가까웠다.

“그런데 말야.”

줄곧 곡선을 그리던 눈매가 더는 웃음기를 머금지 않았다. 반대로 입꼬리는 씩 위로 올라갔다. 그 부조화한 표정이 일순간 재환의 뒷덜미를 따라 오스스 소름을 일으켰다. 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며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모양은 다르되 색만큼은 누군가와 똑같이 새빨간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소꿉놀이, 언제까지 할 거야?”

한참 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아이스커피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도르르 유리를 타고 떨어졌다. 어쩌면 그것이 잠깐 사이 둘 가운데서 일어난 유일한 변화일지 몰랐다. 기묘한 미소를 건 진영은 뚫어져라 재환을 보기만 했고, 재환은 호흡을 삼킨 상태로 얼음이 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곧이어 붉은 입술이 다시 열리며, 찰나의 침묵이 깨졌다.

“그쯤 했음 좋겠는데. 안 그러면 내가 좀 곤란해.”

천천히 몸을 뒤로 뺀 진영은 의자 등받이에 도로 등을 붙였다. 겹친 허벅지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고서, 비로소 오늘 만남의 진짜 이유를 재환에게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한영이 천재인 거, 재환이 너도 안다 그랬잖아. 작은 클럽에서 공연이나 하고 다니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한영이 너무 아까운 것 같거든. 물론 밴드가 잘돼서 유명해지면 좋지. 근데 그걸 누가 보장해? 재환이도 이제 슬슬 무리라고 느끼지 않아? 근데 우리 회사에서 한영이 진짜 뮤지션으로 키워 주겠대. 물론 밴드면 더 좋겠는데, 사장님이 밴드로는 계약할 생각이 없다 그러네. 그러니까 한영이 그냥 나한테 넘겨줄래? 재환이 생각은 어때?

매끄럽게 술술 이어지던 문장이 자못 상냥한 투의 물음으로 끝났을 때, 재환은 반쯤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시선은 재차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컵에 멀거니 붙박였다. 표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충격과 당황이 뒤섞여 뭐라고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의미 없이 입술만 두어 번 벙긋댔다.

“바로 답하긴 좀 그래? 뭐, 회사도 당장 계약하자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마냥 기다릴 수 없는 게, 내가 회사에 먼저 부탁한 거라서. 그리고 한영이가 내 동생인 거 냄새 맡은 인간들이 슬슬 나오는 것 같거든.”

그제야 재환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진영을 보았다. ‘냄새 맡은 인간’에 포함되는 사람을 그 또한 만난 적이 있는 듯했다. 형제가 둘 다 아이돌이면 화제가 될 거라고, 요전 만났던 기획사 이사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다 한영이 섹슈얼리티까지 까발려지면, 재환이가 옆에서 지켜 줄 수 있겠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한 까닭에, 재환은 꼭 추궁하는 것처럼 이어지는 물음에 제대로 답을 내지 못했다. 테이블 아래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꽉 주먹을 쥘 뿐이었다. 그런데, 아직 상대의 얘기가 다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 단계 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나긋나긋한 말씨를 타고 고막으로 흘러들었다.

“그것도 그거고, 엄마가 올해 안에 한영이 미국으로 부른다고 난리야. 그게 좀 그렇잖아. 피아니스트, 지휘자 아들이 이름도 없는 밴드에서 노래만 부르고 있으면. 그래서 지금 한영이 있는 집도 팔아 버릴지 몰라.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한영이 미국 가면 또 옛날처럼 술 마시면서 남자나 만나고 다닐 것 같거든. 그걸 뻔히 아는데, 형으로서 어떻게 가만있겠어.”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한 재환은 잠시간 머릿속으로 이러저러한 가정을 떠올려 보았다. 만약 한영과 지금처럼 깊은 사이가 되지 않았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답답한 고민에 잠길 정도로 그에게 빠져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방금까지 진영이 늘어놓은 말에 ‘네, 맞는 말씀입니다’ 하고 동조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이 너무도 명확히 보이는 것 같아, 재환은 한순간 목구멍이 콱 조여들었다. 안 그래도 말 못 하는 무지렁이가 되었는데, 참 잘하는 짓이었다.

“그렇다고 둘이 헤어지라는 거 아냐. 아까도 말했지만, 난 재환이 네가 한영이랑 사귀든 섹스만 하든 신경 안 써. 대신 한영이 좀 설득해 줘. 안 그러면 걔 진짜 미국 가야 돼.”

그럼에도 진영에게 하나만은 확인해야 했다. 뻣뻣이 굳은 얼굴 근육을 겨우 움직여, 재환은 더듬더듬 문장 하나를 만들어 냈다.

“한영이도… 이 상황을 다 알고 있나요?”

“응.”

답은 빨랐다. 하, 헛숨이 비어졌다. 최근 그가 보였던 행동을 이상한 집착 정도로만 치부했던 저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재환은 감히 판단도 서지 않았다. 결국 괴로운 숨만 연거푸 터뜨리다, 질척하게 젖은 컵을 들어 커피를 들이켰다. 하지만 얼음이 녹을 대로 녹은 커피는 조금의 시원함도 건네주지 못했다. 오히려 속이 한층 더 답답해졌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재환이 끝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릴 무렵,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울렸다. ‘잠깐만’이라는 의미를 담아 재환에게 가볍게 손짓한 진영이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받는 진영의 목소리에 다소 성가시다는 듯한 기색이 서렸다.

“벌써? 호텔 앞이라고? 하여튼 엄청 빨라. 알았어요. 곧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진영은 남은 코코아를 한 번에 마셨다. 마구 서두르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곧 자리에서 일어날 사람의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영은 옆을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 카드를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재환의 커피까지 함께 계산하려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불려 나온 입장이라도 평소 같았으면 일단 괜찮다며 거절하고 보았을 텐데, 다시금 말문이 닫혀 버린 재환은 이를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계산을 마치고 카드와 영수증을 가져다주는 직원의 손에서 카드만 쏙 뽑아 지갑에 넣은 진영은 훌쩍 일어섰다. 쑥 위로 올라간 눈높이를 따라 재환의 고개도 함께 들렸다. 진영의 정수리 위에서 번쩍이는 거대한 샹들리에 불빛이 순간 시야를 쨍하게 물들였다.

“난 스케줄 있어서 먼저 가야겠다. 커피 천천히 마시고 가. 다음에는 여유 있게 밥이라도 같이 먹자.”

희고 커다란 손이 굳어 있는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번에야말로 빈말일 듯한 이야기에 재환은 대답 대신 머뭇머뭇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자 싱긋 매끄러운 미소를 지은 진영이 ‘또 봐.’ 하면서 재환의 어깨를 한 번 더 짚었다. 이윽고 성큼성큼 걸음을 뗀 그는 금세 카페를 벗어났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던 테이블에 이제 한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다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종전까지 진영이 앉아 있던 자리가 꽤나 휑했다. 아직 그곳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망연한 시선을 보내던 재환은 쏟아지는 한숨과 함께 앞으로 몸을 고꾸라트렸다. 벌린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왈칵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이토록 중요한 일을 지금껏 한마디 해 주지 않은 한영이 야속했고, 또 그러도록 내버려 둔 자신이 한없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곱게 웃는 낯으로 폭탄 같은 말을 한 아름 던지고 간 진영도 원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쪽은 이렇게 환장할 것 같은데,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는 약 올리듯 계속해서 유려한 클래식 선율을 연주했다. 듣기 싫었다.

억 소리 나올 정도로 비싼 커피를 반이나 남기고서 터덜터덜 호텔을 나왔을 때는 이미 껌껌한 밤이었다. 공교롭게도 퇴근 시간과 겹쳐 호텔이 있는 번화가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맞은편의 건물 한 면을 온통 뒤덮다시피 한 커다란 전광판이 복잡한 거리를 쉴 새 없이 번쩍번쩍 비추었다.

그 빛을 피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피해 그나마 조금 한산한 길목으로 접어들었을 즈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구인지 알 듯싶어, 재환은 한참이나 핸드폰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지금 도망친다고 한영에게서, 이 상황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어온 바람에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긴 재환은 진동이 멈출 기미가 없는 핸드폰을 느릿느릿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 재환아. 일 끝났어…?

유달리 애달프게 들리는 상대의 목소리에 재환은 콱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얼른 대답을 못 하고 망설이던 중, 도로에서 요란한 경적이 울렸다.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차 한 대가 출발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빵빵거리는 소리가 금방 도로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귀를 아프게 하는 소음이 멎었다. 그때까지도 상대방은 잠자코 재환의 답을 기다렸다. 애먼 입술에 거듭 잇자국을 내던 재환은 쓸데없는 짓을 멈추고 코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뻔뻔한 거짓말을 읊을 시간이었다.

“지금 퇴근하고 집 가는 길이야. 아까는 막 쉬는 시간 끝나서 전화를 못 받았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태연한 투라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상대가 조심스러운 질문을 보내 왔다.

- 그럼 나 집에 가도 돼…?

잠시 대답을 유예한 재환의 시선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 한 대가 잡혔다. 집 가는 노선의 버스였다. 지금 전화를 끊고 바로 저 버스를 탄다면, 아슬아슬 거짓말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는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류장 가까이 온 버스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 보고 싶어, 재환아….

어느새 길 중간에 우뚝 멈춰 선 재환은 정지한 버스에서 승객 두엇이 내리는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타는 사람은 없어, 활짝 열렸던 앞문과 뒷문이 칙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닫혔다. 동시에 꾹 다물려 있던 입이 벌어졌다.

“오늘 말고 내일 보자.”

알았다, 아니다, 건너오는 답이 없었다. 차츰 멀어지는 버스 뒤꽁무니에서 시선을 거둔 재환은 한 박자 늦은 변명을 덧붙였다.

“오늘 카페에 손님이 엄청 많았어. 그래서 좀 피곤하네.”

- …응.

그제야 나온 한 음절의 대답에서 서운함과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듣고만 있어도 콱콱 양심이 으깨어지는 풀 죽은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재환을 만나고 싶다 고집부리지는 않았다. 사실 늘 그랬다. 평소에는 저 하고픈 대로 하는 것 같다가도, 한영은 이럴 때 항상 얌전히 재환의 뜻을 따랐다.

“미안해. 대신 내일 자고 가. 알았지?”

- 응, 알았어.

이번에도 한영은 순하게 답했다.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린 재환은 ‘그럼 내일 봐.’ 하는 짤막한 인사말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화면 꺼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아무도 없는 정류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밀린 건지, 다음 버스는 약 20분이 지나고서야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탄 재환은 기사에게 꾸벅 인사한 후 습관처럼 뒷좌석으로 가 앉았다. 오늘은 미처 이어폰을 챙기지 못한 탓에, 버스 안에 흐르는 최신 가요를 배경 음악 삼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번쩍번쩍 온갖 빛깔을 휘두른 밤의 도시가 눈부셨다.

얼마 가지 않아 버스는 아까 재환이 지나쳤던 전광판 앞에 잠시 정차했다. 무심코 눈에 담은 전광판에서는 한 방송사의 드라마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한데 광고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남자 배우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안 그럴 수가 없었다.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같이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스타는 스타였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허탈한 웃음이 되어 입가를 맴돌았다. 신호에 걸려 잠깐 멈췄던 버스가 출발함과 동시에 무표정으로 돌아간 재환은 차창에 쿵 옆머리를 기댔다. 문득 시야를 환하게 물들이던 전광판에 엉뚱한 얼굴이 걸려 있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피식, 보다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사실 터뜨리고 싶었던 건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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