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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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달이 바뀌고, 또 달이 바뀌어 이제는 ‘춥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지 않아도 될 계절이 되었다. 나뭇가지에는 슬금슬금 새순이 움트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두툼함을 벗었다. 그럼에도 꽃샘추위라는 것이 버젓이 존재하여, 완연한 봄이라 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았다.
이렇게 계절이 옮겨 가는 사이, 재환에게는 크고 작은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카페에 두어 명 새로 일할 친구들이 들어왔다. 따라서 전처럼 부족한 일손을 채우려 밤낮으로 출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만큼 벌이가 줄어든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언제까지고 돈 버는 일에만 온종일을 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재환에게는 늘 밴드가 첫 번째였고, 사실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더 열심히 하는 거였다.
그런 의미로 과감히 복학을 포기했다. 몇 날 며칠 나름 고민하는 척을 하기는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재환은 아직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곧 EP 앨범도 나올 테고, 그럼 공연도 더 많이 해야 하고, 또 그 기세로 정규 앨범도 준비해야 하는데 몸이 두 개라면 몰라도 학업과 병행하기에는 도저히 무리였다. 이렇게 이유만 오만 가지를 대고 있으니, 설사 복학한다 한들 진득이 공부할 턱이 없었다. 결국, 답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밴드에도 나름 사건이라면 사건이랄 만한 일이 있었다. 지난달 초에 있었던 한영의 생일 파티 때였다. 합주가 끝나고, 미리 준비했던 케이크에 아무 생각 없이 초 스물네 개를 꽂아서 갔더니 한영은 초가 많다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에서 살다 온 놈이라 만 나이를 챙기는구나, 싶어 하나를 뺐더니만 그래도 풀 죽은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아직 하나가 많다는 것이다. 그제야 재환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너 몇 년생인데?’ 하고 물었다. 이윽고 나온 답이 재환을 적잖은 당황에 빠뜨렸다. 한영은 나머지 멤버들과 태어난 해가 달랐다. 한 살이 어렸다.
물론 고작 한 살 차이로 이제 와 형이네 동생이네 좀스럽게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속았다는 생각을 완전히 떨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1년 동안 감쪽같이 모를 수가 있었지. 심지어 가장 생일이 빠르다는 이유로 밴드 리더라는 감투까지 씌워 줬었는데 말이다.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 한영이 바보인 건지, 처음부터 출생 연도를 따질 생각을 하지 못한 제가 바보인 건지 재환은 헷갈릴 지경이었다. 친구라면서 너도 몰랐었냐는 의미를 담아 지우를 한 번 째려봤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재환으로서는 두 번 속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삼 한영에게 형 대접을 받을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이 맹랑한 분홍 머리가 예상치도 못하게 시원히 뒤통수를 때렸다.
며칠 후 한영의 진짜 생일날, 재환은 저 나름대로 그를 직접 챙겨 주고자 집으로 불렀다. 어차피 값비싼 선물을 안겨 줄 형편은 되지 못하니, 대신 앉은뱅이책상의 다리가 부러지도록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북엇국은 물론이고 오징어볶음에, 불고기에, 그 귀찮다는 잡채까지 했다. 당연히 한영은 입이 귀에 걸려 밥을 두 공기도 넘게 비웠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래도 생일인데 선물 하나 안 주기는 뭐해, 다 먹은 상을 치운 재환은 한영에게 곱게 포장된 납작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큰맘 먹고 백화점 1층에서 산 머플러였다. 세일 코너를 뒤적인 것이라 기실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가격 상관없이 보자마자 저건 한영에게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리고 재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한영이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냉큼 목에 두른 와인색 머플러는 처음부터 그의 소유였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하긴, 뭘 둘러도 어울릴 수밖에 없는 외모이긴 하다마는.
문제는 그날 밤 터졌다. 넋 놓고 온몸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받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재환은 제 손목에 친친 감긴 머플러를 발견했다. 뒤늦은 반항을 터뜨렸지만 이미 두툼한 성기가 아래를 가르고 있었다. 그 상태로 활짝 다리를 벌린 채 섹스하고, 엎드려서 섹스하고, 위에 올라타서 섹스하고. 정말이지 재환은 강제로 정액을 쥐어짜이다 껌뻑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거기다….
재환이 형, 기분 좋아? 응?
형 거 빨아도 돼? 형도 내 거 빨아 줘.
너무 예뻐, 재환이 형.
형, 나 쌀 것 같아요….
무슨 바람이 든 건지, 아니면 그냥 미친 건지 한영은 재환의 귀에 대고 쉼 없이 형 소리를 쏟아 냈다. 이쪽은 그렇게 불러 달란 말 한 번 꺼낸 적이 없는데,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았다. 하나 저놈의 요망한 입을 틀어막으려 해도, 두 손목이 묶인 상황에서는 좀처럼 여의치 않았다. 한영이 달아오른 목소리로 괴상한 호칭을 속삭일 때마다 재환은 그저 아랫구멍을 꽉꽉 조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소름이 끼치는 감각과 쾌감이 번지는 감각을 몸뚱이가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낭패로웠다.
그뿐이면 모르겠는데, 나중 가서는 끝내 한영의 장단에 맞추어 ‘응, 형 기분 좋아….’ 따위의 망발을 지껄이고 말았다. 형도 쌀 것 같다는 헛소리까지 뱉어 버린 듯싶기도 하다. 그러니 그날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재환은 콱 쥐구멍에 코를 박고픈 심정이었다. 문제의 머플러를 한영이 한동안 좋아라 하고 다닌 것은 별개의 사안이었다.
그러고서 약 1달 후, 재환의 생일이 찾아왔다. 당연히 한영은 며칠 전부터 그날 뭐 할까, 뭐 먹을까, 뭐 갖고 싶어 등등 재환에게 온갖 질문을 퍼부어 댔다. 당사자인 재환으로선 내심 곤란한 상황이었다. 우리 집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 생일을 챙긴다 말해 줘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생일날 당일, 재환은 오늘 하루 바쁘니 절대 저를 찾지 말라는 통보를 남기고서 당당히 잠수를 탔다. 혹 선물 하나라도 준비하면 앞으로 1달 동안 너랑 말도 안 섞겠다는 살벌한 협박까지 덧붙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한영에게 넘치도록 많은 것을 받은 시점에서, 더 빚을 질 수는 없었다. 재환 나름의 염치였다.
물론 그 말을 곧이 따를 한영이 아니었다. 기어이 한영은 밤 12시가 되기 몇 분 전 거대한 케이크를 들고 재환의 집에 들이닥쳤다. 서운함이 그득한 눈으로 이거 안 받으면 앞으로 1년 동안 너랑 말 안 하겠다는 협박을 들이대며 재환 손에 작은 선물 상자까지 쥐여 주었다. 포장을 뜯고 상자를 열어 보니, 끈을 꼬아서 만든 팔찌였다. 혹시나 싶어 직접 만든 거냐 묻자 한영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도 선물 따위 안 받겠다 고집부릴 만큼 재환은 매정하지 못했다. 결국 속으로 ‘졌다, 졌어’를 중얼거리며 쓱 한쪽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제야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환히 웃은 한영은 재환의 팔목에 팔찌를 채워 주었다. 절대 풀지 마, 라고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이기도 했다. 별수 있나. 이번에도 재환은 그냥 알았다, 하고 말았다. 그 밤, 재환은 사지가 노글노글 녹아내릴 때까지 한영과 섹스했다.
이윽고 며칠이 더 지난 3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합주실에 모인 더 숨의 네 사람은 몇 달간 두었던 트리를 정리하는 것으로 지난 계절을 향해 진짜 안녕을 고했다. 실은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룬 게 더 컸지만, 이렇게 함께 장식을 떼고 나무를 접으니 정말로 겨울을 보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삼 시간 참 빠르네, 하는 감상이 마음속에 촉촉이 차올랐다.
어쩐지 휑해 보이는 합주실에서 열심히 연주를 맞춰 보던 도중, 뜻밖의 소식이 그들에게 날아왔다. 한참 전 지원해 놓고 잊고 있던 경연 대회의 예선을 통과했다는 연락이었다. 최근 반대되는 소식만 받았던 탓에, 너 나 할 것 없이 잔뜩 신이 났다. 평소 안 하던 스타일로 잼, 그러니까 즉흥 연주를 펼치기도 했다. 흥이 넘친 나머지 미친 듯 드럼을 때리던 태군이 저 멀리로 스틱을 날려 버렸을 즈음에야 서로서로 정신을 차렸다. 그럼에도 제가끔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고조된 밴드 분위기에 힘입어, 재환은 남은 믹싱을 부지런히 해 나갔다. 파란 하늘처럼 해 줘, 바닷속처럼 해 줘 등등 온갖 기상천외한 요구가 옆에서 이어졌지만, 이제 한영의 그런 소리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터라 나름 당황하지 않았다.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침착히 이것저것 건드린 후 결과물을 들려주면 신기하게 열에 아홉은 ‘좋아’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이 기분 좋아 재환은 더욱이 작업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결국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이러니 재환은 지겨울 법도 한 믹싱이 늘 즐거웠다. 오롯이 한영이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인정하기 다소 부끄럽지만, 긴 시간 작업하다 보상처럼 나누는 섹스는 또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믹싱하는 날은 반드시 하자! 라고 합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러운 수순이 되어 있었다. 수고했다는 의미를 담아 한영이 재환에게 쪽 입 맞추면 재환이 한영에게 같은 행동을 돌려주었고, 이것이 몇 번 더 반복되는 사이 두 사람의 위치는 책상 앞에서 침대 위로 바뀌었다. 때로는 장소를 옮기기도 전 몸이 단 재환이 의자에 앉은 한영에게 먼저 올라타는 경우도 있었다. 침대까지 가기가 멀다 싶으면 보다 가까이 있는 소파에서 들러붙기도 했다. 그냥 한영의 방 전체가, 구석구석이 몸을 겹치는 행위의 무대였다.
가끔은 이런 제가 발정 난 짐승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재환은 대체로 이 모든 상황에 썩 만족했다. 믹싱도 찬찬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고, 그 외의 밴드 일도 별 탈이 없고. 여러 가지로 순조롭다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재환은 대중없이 영문 모를 답답함에 잠겼다. 당장은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들이 별안간 우후죽순 솟아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물음의 중심에는 늘 한영이 있었다.
언제까지 한영과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이 관계를 도대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당사자인 한영조차 단 한 번을 재촉한 적이 없거늘, 재환은 자꾸 무언가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 같다는 초조함에 시달렸다. 꼭 눈에 보이지 않는 시계가 뇌 어딘가에서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평소에는 숨어 있다가도, 시계는 이따금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 재환에게 왁왁 소리를 질러 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런데도 무엇이 이토록 자신의 결심을 막고 있는지, 재환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한영에게 버림받는 미래, 밴드에게 버림받는 미래, 그로 인해 제 모든 것이 무너지는 미래…. 지금 같아서는 오지도 않을 법한 미래의 일들이 재환은 두려웠다. 현재의 평안과 행복이 깊어질수록 그 두려움도 함께 커져 갔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항상 두려움에 떨면 어찌 살 수 있겠는가. 굳이 장황하게 설명을 하자니 저렇다는 얘기지, 대게 재환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딱히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특히 더 마음이 들뜨고 즐거운 날이었다.
“와, 씨발…. 나만 눈물 나냐? 어?”
투명한 비닐에 싸인 CD를 두 손으로 꼭 쥔 태군은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두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태군만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다른 세 사람도 나름의 감회에 젖어 합주실 바닥에 한가득 쌓인 CD 더미를 바라보았다. CD 안에 담긴 노래는 이미 질리도록 들은 것이었고, 겉에 찍힌 그림도 이미 볼 만큼 본 것이었지만 누구 하나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더 숨’의 이름으로 나온 첫 음반이었으니까. 각자 표현하는 방식은 달랐으나, 벅찬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진짜 나오긴 나왔네.”
CD 하나를 집어 이리저리 앞뒤로 돌려 보던 지우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 비닐에 손자국이라도 날까 싶어 쉬이 손을 대지 못하던 재환도 결국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앞면에는 과거 발매했던 싱글 재킷의 우산 그림이 색칠된 버전으로 들어가 있었고, 뒷면에는 총 여섯 개의 곡 제목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재환의 눈길을 붙잡는 것은 역시나 당당히 적힌 ‘The SUM’이라는 글자였다. 그걸 보니 재환은 비로소 진짜 앨범을 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어느새 숙어지고 숙어지다 못해 CD에 닿기 직전이던 얼굴을 들어 올린 재환은 가까이 있던 한영과 눈이 마주쳤다. 곱게 쌍꺼풀이 진 눈매가 완만하게 휘어지며, 하얀 얼굴 전체가 연연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 미소를 빤히 바라보던 재환은 문득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 한영과 단둘이 있었다면, 십중팔구 진한 입맞춤을 건넸으리라고.
그날 저녁, CD가 나온 것을 기념해 네 사람은 한영의 집 거실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이제는 부연하기도 참 뭐하지만, 말이 파티지 실상은 그냥 배불리 먹고 마시는 자리였다. 어차피 시켜 먹는 음식도 늘 거기서 거기였다. 그럼에도 음식은 빠르게 사라지고, 술도 빠르게 줄었다. 다들 기분이 꽤나 좋은 탓이었다.
그 바람에 일단은 파티를 표방한 자리가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었다. 더는 무얼 먹고 마시려 해도 배가 불러 도무지 무리였다. 클럽에서 판매할 것을 따로 떼어 두고, 각자 CD를 조금씩 챙긴 재환, 태군, 지우 세 사람은 한영에게 인사한 뒤 사이좋게 합주 장소 겸 멤버의 집을 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 이제는 민머리가 아닌 태군, 늘 한결같은 외양의 지우에게 차례로 잘 가라 인사한 재환은 어둠이 내린 길을 홀로 걸었다. 종전까지 남자 넷이 왁자하게 떠들다 혼자가 되니, 유독 주위가 조용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적막이 쓸쓸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기타 가방 앞주머니에 두둑이 든 CD 때문이기도 했고, 저 높은 곳에서 막 움트기 시작한 벚꽃 때문이기도 했다. 아직 활짝 핀 것도 아니건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나뭇가지에 새초롬히 매달린 꽃들이 재환의 눈에 썩 귀여워 보였다.
팍 튀어 오르기 직전의 팝콘 같은 꽃송이들을 동무 삼아 좁은 골목을 걸은 재환은 어느덧 익숙한 연립 주택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입구 건너편의 가로등 아래 서서 막 담배 한 대를 피우는 찰나,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나오는 고시생을 발견했다.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자, 상대도 재환에게 비슷한 인사를 건넸다. 가로등 옆, 재활용 쓰레기 놓는 자리에 들고나온 것을 털썩 내려놓은 고시생은 다시 쏙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시생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던 재환은 흘끔 눈을 옆으로 내렸다. 그가 버리고 간 것은 다름 아닌 노끈에 칭칭 묶인 책 뭉치였다. 책등에는 영어, 국어, 한국사에서부터 행정학, 회계학, 세법 등 다양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책 주인이 어떤 시험을 준비했는지를 대충 유추할 수 있게끔 하는 제목들이었다. 단, 책이 버려지는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집에 들어선 재환은 일찌감치 씻고 나와 잘 준비를 했다. 오늘은 계속 마음이 붕 뜬 상태라, 혼자 기타 연습을 한다 해도 집중을 잘 못 할 것 같았다. 대신 완전히 잠자리에 들기 전, 철퍼덕 매트리스에 앉아 다시 한번 찬찬히 CD를 살폈다.
앞면을 보고, 뒷면을 보고, 그러다 내처 비닐을 뜯어 케이스를 열어 보는 내내 재환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미미하게 웃었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가, 입매에 꽉 힘을 주었다가. 이다지도 표정이 급변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못내 감동이 넘친 까닭이었다.
정규 앨범도 아니고, 이제 EP 하나 처음 냈으면서 뭘 그리 좋아하냐 묻는다면 물론 할 말 없었다. 하지만 몇 달에 걸쳐 다 같이 곡을 완성하고, 녹음하고, 믹싱하고, 거기다 최종적으로 마스터링까지 해서 이 한 장이 나온 걸 생각했을 때, 재환은 속으로나마 호들갑 좀 떨어도 될 것 같았다. 저와 밴드 멤버들에게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 있는 것 같았다.
모처럼 일찍 자려던 계획은 결국 물 건너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은 재환은 노트북에 CD를 넣고 얼마 전 중고로 싸게 장만한 모니터 스피커의 볼륨을 살짝만 키웠다. 머지않아 스피커에서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를 따라 하듯, 의자 위에 올린 두 다리를 꼭 끌어안은 재환은 귓구멍에 담기는 소리에 온 마음을 집중했다. 믹싱하며 굳이 잘라 내지 않은 숨소리, 귓전에서 속삭이는 듯한 보컬, 공간감을 살린 악기의 멜로디…. 이 모든 것이 합쳐져 흐르는 박자 따라 절로 머리를 까딱거리게 했다. 가사를 읊조리게 했다.
그리고 감히 재환은 생각했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음악이라고. 이 정도면 썩 멋지고 훌륭하다고. 자화자찬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한영의 목소리는 녹아내리고, 건반은 춤을 추고, 베이스는 멋들어지며, 드럼은 생동감이 넘치고, 기타는 그 사이사이 끼고 빠질 곳을 알았다. 별로인 구석을 찾으려야 그럴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재환은 불현듯 한 사람이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도 계속해서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노랫소리의 주인공을 만나, 시선을 맞대고 입술을 겹치고 싶었다. 그 마음이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 눈가까지 뜨겁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 오늘 곱게 잠들기는 영 그른 것 같았다.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비어졌다. 그때였다.
저기 매트리스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발견한 재환은 안 그래도 짧은 거리를 단박에 달음질했다. 거의 다이빙하듯 매트리스로 뛰어들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에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 재환아…?
“응.”
- 뭐 하고 있었어?
숨을 고른 재환은 잠깐 머뭇거리다 씩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렸다.
“네 생각.”
봄이라지만 아직 한밤중 날씨는 겨울이라 해도 무방하리만치 쌀쌀했다. 불어오는 바람도 제법 맵찼다. 그러나 양말 신고 운동화 신을 겨를도 없어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뛰쳐나온 재환은 요만큼도 춥지 않았다. 춥기는커녕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할수록 온몸에서 후끈후끈 열이 올랐다. 심지어 겉에 얇은 후드 집업 하나만 걸쳤는데도 그랬다.
몽글몽글한 벚꽃 송이가 다시금 머리 위를 휙휙 스쳐 지났다. 그게 또 예뻐 보여서인지, 그냥 마음이 들떠서인지 달리는 내내 재환은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야밤에 웬 미친놈이 뛰고 있다고 오해하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그러라지. 얼마든 그렇게 생각하라지.
단숨에 오르막길까지 오른 재환은 이미 오늘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적이 있는 대문 앞에 다다랐다.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며 도어 록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던 차였다. 덜컹, 하고 열린 대문 사이로 눈부신 분홍색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환아…!”
밤중에 보아도 새하얀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상대를 따라 입을 옆으로 활짝 벌린 재환은 도톰한 티셔츠에 감싸인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상대도 재환의 등허리와 뒤통수에 손을 감았다. 비슷한 의미로 발그레 열이 오른 두 뺨이 맞비벼졌다.
“엄청 빨리 왔어.”
“너 보고 싶어서.”
“진짜…?”
“응.”
주저 없이 답하자마자 주저 없는 입맞춤이 내렸다. 아직 대문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누구 하나 안중에 두지 않았다. 시샘하듯 불어오는 바람을 가르고 맞물린 입술이 요리조리 각도를 틀어 가며 쪽쪽 붙었다 떨어지고, 또다시 붙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사이를 장난에 신난 아이처럼 맑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메웠다.
훤히 헤드라이트를 밝힌 차 한 대가 길목을 지나고 나서야 재차 푸흡, 웃음을 터뜨린 두 사람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두 손 꼭 쥐고 현관까지 난 돌길을 밟는 걸음걸음이 푹신한 구름을 밟듯 가벼웠다. 그 와중에도 조금의 틈을 참지 못해 또 몇 번인가 입술이 가볍게 부딪쳤다.
쿵, 조급한 소리를 울리며 현관문이 닫혔다. 비로소 완벽히 바깥세상에서 유리된 두 사람은 미약하게 남아 있던 망설임과 주저함을 한꺼번에 벗어 던졌다. 옮겨 가는 자리마다 툭, 툭 옷가지가 하나씩 떨어지고, 점차 맨살이 맞닿는 면적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복도를 통과해, 커다란 티브이 앞을 지나쳐, 포근포근한 러그 위로 올라섰을 때는 양쪽 모두 속옷 한 장 입지 않은 깨끗한 나신이었다. 2층까지 올라갈 여유 따위 진작에 잃은 두 남자는 동시에 풀썩 거실 소파 위로 쓰러졌다.
소파에 등이 닿자마자 흥분으로 예열된 재환의 온몸에 빼곡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뼈대가 두드러진 쇄골, 들썩이는 갈빗대, 옴폭 들어간 배꼽, 적당히 돋아난 음모에까지 수두룩이 입술을 새긴 한영은 맑은 물기를 매단 채 솟아오른 성기를 합 입에 물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끈적한 소리가 나게 기둥을 빨아올리자, 탁한 신음을 터뜨린 재환의 손가락이 소파를 긁었다. 하나 매끈한 가죽 표면은 곱아드는 손가락을 미끄러뜨릴 뿐이었다.
“읏, 응…!”
얼마 가지 않아 다부진 허벅지 사이에 머리가 낀 한영의 입 안으로 뜨끈한 액이 쏟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기꺼이 목구멍 너머로 꼴깍꼴깍 넘어갔을 액은 오목하게 만든 손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침과 섞어 손바닥에 주룩 뱉어 낸 한영은 허연 빛깔이 흥건한 손을 조붓하게 다물린 엉덩잇살 사이로 가져갔다.
“으읏….”
위로 옮긴 입술을 뾰족하게 선 유두에 묻고서 긴장 탓에 옴찔거리는 입구 주변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회음부의 여린 살을 수차례 위아래로 문지르다가, 재환이 길게 숨을 내뱉는 틈을 타 주름이 모인 구멍으로 푹 검지를 찔러 넣었다. 가는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감아 넣은 재환의 허리가 위로 둥글게 말렸다.
“후으, 윽….”
뜨거운 속살에 파묻힌 손가락이 다소 급하게 안을 넓히며 은근슬쩍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한영의 작은 머리통을 끌어안은 재환의 입 밖으로 연신 밭은 신음이 흘렀다. 판판한 가슴팍에 코를 딱 붙인 한영은 부지런히 혀를 할짝거리면서도 수시로 눈을 치떠 열에 젖은 재환의 얼굴을 보았다. 몽롱한 빛이 감도는 새카만 눈동자와 시선이 엉키는 것만으로 배꼽 아래로 한층 피가 몰리며 거대하게 발기한 성기가 꿈틀거렸다.
찔꺽찔꺽 습한 소리를 내며 거푸 손가락이 내벽을 들락거리고, 어느새 또 철떡 들러붙은 입술 사이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샜다. 소파의 흔들거림을 견디지 못해 연속해서 러그 위로 떨어진 쿠션이 주변에 보얀 먼지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하나가 냉큼 주워져 재환의 등허리 밑에 깔렸다.
“읏…!”
골반이 붙잡혀 하반신이 번쩍 들리는 동시에 등에 받친 쿠션과 함께 몸이 쭉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허리가 아예 반으로 접혀 버린 재환은 얼굴에 닿기 직전인 무릎 사이로 정염이 이글대는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거기까지는 할 필요 없다는 의미를 담아 휙휙 고개를 내저었지만, 상대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짐짓 못 알아들은 척 느리게 눈꺼풀을 끔뻑인 한영은 종전까지 손가락이 드나들던 곳에 깊이 입술을 눌렀다.
“끄윽…!”
단말마가 터졌다. 이미 어느 정도 풀어진 입구에 축축한 기운이 쏟아지며 가슴팍에 맞붙을락 말락 한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했다. 오물오물 개폐하는 구멍에 묽은 침이 뱉어지고, 그 자리에 혀끝이 파고드는 집요한 행위가 반복되었다.
“으응, 흣…, 허윽….”
머리 위로 팔을 접어 소파 등받이를 붙든 재환의 숨이 쉴 새 없이 껄떡껄떡 넘어갔다. 불편하게 접힌 몸이 자꾸 들썩이는 탓에 주황색 스탠드 불빛을 의지해 올려 보는 한영의 얼굴이 시야에서 어룽어룽 번졌다. 지금처럼 아래를 빨리며 느끼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자세에서는 이미 딱딱하게 발기해 덜렁대는 제 성기가 지나치리만치 잘 보였다. 밀려드는 수치와 그에 버금가는 쾌감이 움칠거리는 눈가에 열을 끼쳤다.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또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핥아 주기를 바랐다. 저조차 뭘 어쩌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크흡…, 윽!”
엉덩이 가운데로 할짝할짝 혀를 비비며 집요히 시선을 맞춰 오던 한영이 별안간 혀가 닿은 곳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검지 두 개가 푹, 구멍을 비집더니 좌우로 거리를 벌렸다. 입구가 한껏 확장되는 감각에 말린 척추를 따라 쭈뼛 소름이 돋아났다. 하나 재환이 어쩔 겨를도 없이 뾰족한 혀끝이 벌겋게 드러난 내벽을 꿰뚫었다.
“하으읏…!”
모양도, 감촉도, 심지어 길이나 굵기도 전혀 달랐지만 마치 성기가 안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재환에게 퍼부어지는 자극이 거셌다. 미끈거리는 살덩이가 속살을 헤집을 때마다 휙 고개를 뒤로 젖힌 재환은 연달아 젖은 신음을 내질렀다. 허공으로 들려 달랑거리는 발끝이 구부러지고, 한층 열이 몰린 성기 끝에서 뚝뚝 떨어진 맑은 액이 옴짝달싹 못 하게 접힌 뱃가죽을 적셨다. 감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구멍이 흐물흐물 풀어질 때까지 안을 쑤석이던 혀가 이윽고 회음부를 길게 핥았다. 내처 번들번들한 성기까지 한 번 쪼옥 빨았다가 뱉은 한영은 마침내 높이 들렸던 재환의 엉덩이를 제자리에 내려 주었다. 흥분이 지나친 나머지 발갛게 짓무른 눈가를 팔뚝으로 덮은 재환은 할딱할딱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부스럭부스럭 탁자 아래를 뒤적이는 소리가 났다.
지익 비닐 재질의 봉지를 가볍게 뜯는 소리가 이어지고, 얼마 안 있어 침에 척척히 젖은 입구에 미끄덩한 감촉이 닿았다. 곧바로 구멍을 쑤시는 대신, 얇은 고무 막에 쌓인 귀두는 느릿느릿 주름 주변을 배회했다. 들어올 듯 말 듯 감질나는 접촉에 재환의 아랫배가 흠칫흠칫 떨렸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팔을 치운 재환은 물기 어린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비로소 한영을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안 넣어?”
“아까워서….”
언제 사람이 자지러질 때까지 아랫구멍을 빨았냐는 듯 유순한 얼굴에 꽤나 진심인 듯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릴없이 푸스스 힘 빠진 웃음을 흘려 버린 재환은 위로 쭉 뻗은 손을 까딱거렸다. 어서 제 품에 와 안기라는 뜻이었다.
일순 눈썹 끝을 떨어뜨려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를 표정을 내비친 한영이 풀썩 재환 위로 상체를 포갰다. 보드라운 살결이 푹 재환의 맨살을 덮으며 아래로 쏟아진 머리카락이 땀 맺힌 이마를 간지럽혔다. 웃음기가 번진 얼굴로 몇 번 코를 찡긋거린 재환은 근육이 예쁘게 잡힌 등허리를 두 손으로 꼭 감쌌다. 두 사람의 몸이 보다 바짝 밀착하며, 비슷한 모양새로 뾰쪽 솟은 코끝이 톡 맞닿았다. 그제야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성기가 천천히 주름을 파고들었다.
“흐, 읍….”
웃음기가 사라진 자리에 미약한 괴로움이 떠올랐다. 아래가 서서히 벌어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제법 여러 밤 한영과 몸을 겹쳤지만, 이 순간만 되면 재환은 얼핏 넣어서는 안 될 자리에 억지로 몽둥이 같은 것을 쑤셔 박는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무언가를 넣는 곳이 아니기도 했지만, 한영의 거기가 상식선을 상회하는 수준의 크기인 탓이 컸다. 그러니 자꾸 표정이 구겨지고 억눌린 침음이 흘렀다.
이를 달래려 한영은 계속해서 재환의 뺨과 입술, 턱에 쪽쪽 입 맞추었다. 가닥가닥 붙은 앞머리를 넘겨 매끈하게 드러난 이마에도 부드러이 입술을 눌렀다. 발긋발긋 물든 귓가로 입을 옮겨 ‘재환아, 힘 좀 풀어 봐. 응…?’ 하고 다소 간절히 속삭이기도 했다. 더불어 진입의 속도는 가능한 한 늦추었다.
하나 더디게 들어온다고 해서 배 속의 압박감이 덜어지지 않음을 재환은 잘 알았다. 굵기도 굵고, 길기도 긴 성기가 저러다 어느 세월에 다 들어올까 싶었다. 그걸 느긋이 기다릴 성격이 되지 못했던 재환은 끝내 날씬한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았다. 발목을 교차시켜 다리를 꽉 조이는 순간, 한영의 사타구니가 철퍽 둔부에 와 부딪쳤다. 성기가 깊은 곳을 찔렀다.
“후, 윽…!”
“하아…!”
가까이 있는 입술 사이에서 동시에 뜨거운 숨이 터졌다. 한 명은 뱉은 숨을 도로 들이마시기 위해 애썼고, 또 한 명은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흥분에 잠식되지 않으려 애썼다.
“윽, 으…. 후으….”
“하아, 재환아….”
그것도 잠시, 어느 틈엔가 재환의 등허리 아래로 들어온 팔이 꽈악 힘을 머금으며 느짓한 허리 짓이 시작되었다. 두툼한 성기가 구멍을 드나들 때마다 높은 음조의 신음이 비어지고, 그중 절반이 겹쳐진 입술 새로 빨려 들어갔다. 여기에 부득부득 맨살이 소파 가죽에 비벼지는 소리가 덧대어졌다.
조급하지 않게 하반신을 밀어붙이는 사이사이, 한영은 늘 그랬던 것처럼 재환의 귓속으로 끊임없이 애타면서도 달콤한 부름을 흘려 넣었다. 재환아. 재환아. 아아, 재환아…. 째깍째깍, 재환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시계가 한층 요란히 돌아가게끔 만드는 애처로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 어떠한 선택도 내리지 못한 까닭에, 가까이 붙은 복부에 질펀히 정액을 싸지를 때까지, 제 안에 박힌 성기를 감싼 콘돔 끄트머리가 불룩 차오를 때까지 재환은 억지로 이 모든 걸 모른 체했다. 대신 희열로 뿌옇게 흐려진 머릿속에 어물어물 비겁한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 지금 다 좋잖아. 다 괜찮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렇게….
“재환아….”
어느덧 구석구석 땀이 밴 몸이 축 재환 위로 늘어졌다. 사정의 여운이 잔뜩 실린 숨결이 쌕쌕 어깨에 쏟아졌다. 굼뜨게 팔을 들어 올린 재환은 습기를 머금어 한층 구불구불해진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손목에 자리한 옅은 푸른빛의 끈 팔찌가 함께 사락사락 흔들렸다. 채워진 날부터 단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팔찌였다.
* * *
계획에도 없던 만남을 이루어야 했을 만큼 서로를 그렸던 감정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한번 화르르 불이 붙어 버린 몸뚱이도 마찬가지였다. 순시에 펄펄 기운을 차린 한영이 번쩍 재환을 안아 들어 계단을 오르자, 몸을 누이는 장소가 소파에서 아늑한 침대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탐하는 행위를 계속해서 이어 갔다.
구태여 더 부끄러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재환이 먼저 한영 위에 거꾸로 엎드려 엉덩이를 추어올리면, 알아서 한영이 부드럽게 풀린 구멍에 입술을 대었다. 재환 또한 지치지도 않고 다시금 벌떡 선 성기를 입 안 가득 물어 정성스럽게 혀를 놀렸다. 위아래서 울리는 온갖 외설적인 소리가 자못 요란했으나, 민망한 자세로 몸을 겹친 두 남자에게는 달아오른 마음을 부추기는 훌륭한 효과음일 뿐이었다.
두 번째 콘돔 봉지를 뜯으려는 손이 재환에 의해 저지되고, 침과 선액으로 번지르르해진 성기가 그대로 말랑말랑 풀린 내벽을 비집었다. 또 한 번의 절정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사그라들 때까지 몇 번의 입맞춤과 ‘재환아’가 오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재환도 화답하듯 거듭 ‘유한영’을 외쳤다. 자꾸 뒤에 쓸데없이 붙으려는 말은 애써 삭였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했으니까.
솨, 물줄기가 타일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채 침대에 엎드린 재환은 베개에 옆얼굴을 대고서 껌뻑껌뻑 눈을 감았다 떴다. 세 번? 네 번?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영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마찬가지로 침과 정액 따위로 끈적해야 할 몸이 어느 틈에 보송보송 닦인 건지도 흐릿했다. 다만 함께 씻으러 가자는 한영에게 힘없이 고개를 저었던 것은 어렴풋이 생각났다.
푹신한 침대에서 꾸물꾸물 몸을 반쯤 일으킨 재환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도배된 방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아마도 입고 왔던 옷은 1층 곳곳에 허물처럼 벗어 던져져 있을 터였다. 늘 여기 와서 입는 분홍색, 보라색 트레이닝복을 찾기도 내심 귀찮아 재환은 침대 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담요 한 장을 어깨에 둘렀다. 이 방 물건 아니랄까 봐, 포근포근한 촉감의 담요는 정열의 빨간색이었다.
팔락팔락 담요 자락을 흔들며 걸음을 뗀 재환은 언제 봐도 참 현란한 외관의 피아노 앞으로 가 슬쩍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몇 겹으로 페인트가 덧칠해진 피아노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 새하얀 건반 위로 가만히 손가락을 얹었다. 선뜻 손가락에 힘을 주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깊이 숨을 들이켜며 건반 하나를 꾹 눌러 보았다. 인공적인 소리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영롱한 음색이 제법 크게 울렸다.
그 뒤로 느리게나마 재환이 누르는 음 몇 개가 더 따라붙었다. 더듬더듬 아르페지오로 연주되던 리프는 이윽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럭저럭 자연스러운 박자를 탔다. 거기에 힘입어 재환은 어언간 저도 모르는 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는, 혼자 있을 적에나 기타 치며 장난삼아 흥얼거리던 멜로디였다. 한데 그걸 듣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미처 몰랐다.
“그거 좋다.”
지척에서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란 재환은 의자에서 펄쩍 엉덩이를 띄워 올렸다. 그 바람에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린 담요가 툭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곱게 혈색 도는 등과 엉덩이를 차례로 눈에 담던 한영은 허리를 구부려 직접 담요를 주웠다. 뒤이어 담요는 다시 재환의 어깨 위로 살포시 덮였다. 폭 맨살을 감싸는 보들보들한 감촉에 괜스레 어깨가 움칠거렸다.
“언제 나왔어…?”
“지금.”
향긋한 바디 워시 향기를 폴폴 풍기며 한영이 재환의 옆자리로 와 앉았다. 그러더니 ‘재환이 네가 만든 노래야?’라며 선뜻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건네 왔다. 방금 뚱땅거린 것이 ‘노래’라 할 만한 수준이 아님을 제가 더 잘 알기에, 이래저래 부끄러워진 재환은 ‘뭐, 응….’ 하고 얼버무렸다. 어쨌거나 한영 앞에서 더 피아노를 칠 생각은 없었다. 그 속마음을 한영은 알아차려 주지 않았다.
“더 안 쳐?”
막 씻고 나와 말간 빛을 띤 얼굴이 불쑥 재환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저를 빤히 올려 보는 시선을 피해 얼른 눈을 돌린 재환은 여전히 또렷하게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럴수록 한영의 고개가 기울어지며 눈부시게 뽀얀 얼굴이 가까이 붙었다.
“피아노 안 칠 거야, 재환아?”
“나 더 듣고 싶어.”
“진짜 좋았는데….”
“응? 재환아….”
뽀뽀하기 직전까지 한영의 얼굴이 가까워졌을 즈음, 끝내 재환은 ‘알았어…!’ 하며 약간의 짜증 섞인 대답을 터뜨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짜증이라기보다는 상대의 집요함을 향한 타박과 원망이었다. 제 피아노 실력을 뻔히 알면서 굳이 더 듣겠다는 한영의 심리가 잘 이해 가지 않았다. 차라리 짓궂은 심술이라면 모르겠건만, 한영은 정말로 순수하게 이쪽의 연주를 계속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진짜 별거 아니었는데 말이다….
기어이 만족스러운 답을 얻어 해쭉 웃는 한영을 한 번 흘겨 준 재환은 헐벗은 허벅지 위에 있던 손을 건반에 올렸다. 상대가 대놓고 생떼를 쓰는 것도 아닌데, 왜 번번이 당해 내지를 못하는 건지 저조차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한 답답함이 담긴 한숨을 푹 내쉬며, 재환은 정말 그 누구에게도 들려줄 일 없을 줄 알았던 멜로디를 찬찬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다만 반주에 맞춰 노래까지 흥얼거렸던 아까와 달리 입은 꾹 다물렸다. 그것이 또 한영의 불만, 내지는 서운함을 샀다.
“재환아. 아까 노래도 했잖아.”
더듬더듬 건반을 누르는 오른쪽 손 위에 유독 새하얘 보이는 손이 포개어졌다. 이번만큼은 양보할 생각 없던 재환은 슬며시 눈썹을 구겼다.
“아까는 어쩌다 나온 거고. 나 피아노 치면서 노래 못 해.”
대충 둘러댄 변명은 아니었다. 기실 악기 연주와 노래를 동시에 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고, 가뜩이나 피아노 실력이 꽝인 재환에게는 더더욱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그걸 아무렇지 않게 척척 해내는 쪽이 대단한 거였다.
나름 설득력이 있었는지, 재환의 말을 들은 한영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럼 기타 치면서는 불러 줄 수 있어?”
하고 물었더랬다. 재환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기타가 없음을 아는 까닭에 더 당당히 그랬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니까 나중에 기타 있을 때 들려줄게.”
잠시 후, 재환은 자신의 세 치 혀가 얼마나 무책임한 말을 지껄였는지 강제로 깨달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당황이 한가득 고인 눈을 삐걱삐걱 굴리며, 재환은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던 한영이 들고 온 물건들을 천천히 살폈다. 하나는 기타였고, 하나는 앰프였다. 다시 말하는데, 하나는 기타, 하나는 앰프였다. 그것도 분홍색 텔레캐스터였다.
“웬… 기타야?”
“지난번 거기에 혼자 가서 샀어. 나도 기타 연습 하고 싶어서.”
지난번? 거기? 거기가 어딘데? 혼란한 머리를 굴리던 재환은 꽤 오래전, 한영과 함께 음악 장비를 사러 악기 상가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상가에서 분명 저 기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뭐랬더라.
유한영. 저거 너 머리 색이랑 비슷하다. 네가 치면 잘 어울리겠네.
하아…. 또다시 재환은 이 빌어먹도록 경솔한 혀를 깊이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거고, 아무리 이쪽이 잘 어울리겠다 말했기로서니 저런 고가의 악기를 떡하니 사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확한 값은 알지 못하나, 초보자가 쉽사리 살 만한 금액대가 아님은 분명했다. 슬슬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저 분홍 머리를 기타 초보자라 부르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물론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기타가… 연습하고 싶었다고?”
“응.”
“왜…?”
“나중에… 재환이 너랑 무대에서 같이 치고 싶어서. 너 기타 치는 거 너무 멋있으니까.”
할 말을 잃은 재환은 입만 벙긋이 벌렸다. 이쯤 되니 말 몇 마디와 표정만으로 항상 제게 백기를 흔들게끔 하는 한영이 야속스럽기까지 했다. 방금 저 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질 뻔했다는 뜻이었다.
“뭐…, 그래….”
마지못해 웅얼거리듯 답하자 부끄러움과 수심이 함께 서렸던 한영의 얼굴이 맑게 폈다. 그러고는 기타를 쥔 채로 풀썩 침대에 앉아 얼른 재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단숨에 신난 아이처럼 변한 한영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재환은 침대로 가 털썩 앉았다. 반질반질 윤이 흐르는 핑크색 기타가 쑥 재환 앞에 내놓아졌다.
“아까 거 빨리 기타로 쳐 줘, 재환아. 노래도 불러 줘…!”
기타 연습은 얼마나 했냐, 왜 그간 나한테는 말 안 했냐 따위의 질문은 일단 나중으로 미룬 재환은 받아 든 기타를 허벅지에 얹었다. 보다 제대로 자세를 잡은 뒤 손가락을 움직여 차례로 기타 줄을 튕겨 보았다. 예상외로 기타는 음이 크게 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이대로 연주해도 무방할 듯했다.
두어 번 더 줄을 튕긴 재환은 바닥에 놓인 20W짜리 소형 앰프로 손을 뻗었다. 다른 것은 그대로 두고, 밑에 ‘Reverb’라고 적힌 노브만 쭉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다시 기타로 손을 옮겨 줄을 건드리자, 딱 취향에 부합하는 소리가 앰프 밖으로 흘러나왔다. 누군가는 ‘빗소리 같아’라고 표현했던, 아주 제대로 촉촉한 소리였다.
얼추 연주 준비를 마친 재환은 쓱 눈을 들어 마주 앉은 한영을 보았다. 옅은 색소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만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저러다 실망해도 난 모른다는, 조금 무책임한 생각을 하며 재환은 ‘한다.’ 하고 짧게 통보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흔들리며 주위로 훅 다디단 샴푸 향이 끼쳤다. 곧이어 그 향과 닮은 달콤한 멜로디가 재환의 손끝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음 세 개가 연속되는 리프는 재환이 코드를 바꿀 때에만 베이스 음이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그렇게 총 여덟 마디가 반복되었을 즈음, 공간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기타 음 위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얹혔다. 가까이서 귀에 담는 이의 심장을 순식간에 덜컥 뒤흔들기 충분한 목소리였다. 그리하여 고작해야 한 번의 인트로와 한 번의 벌스, 그리고 한 번의 후렴으로 이루어진 짤막한 노래가 흐르는 내도록 한영은 눈 한 번 제대로 깜빡이지 못했다. 숨도 편히 쉬지 못했다. 재환이 읊조리는 가사는 오로지 ‘음음’ 하나뿐이었는데도 그랬다.
노래와 연주를 끝낸 재환은 기타를 향해 숙어져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영에게 제 노래를 들려주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바로 코앞에서 불러 본 적은 없던지라 솟구치는 쑥스러움이 말도 못 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박차든, 이불 속으로 숨든 둘 중 하나는 하고 싶었다. 그 심정을 애써 감추며 짐짓 태연한 체 ‘됐지?’라고 멋없기 짝이 없는 문장을 뱉었다. 이 한 번으로 끝이라는 의미였다. 재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너무 좋다, 재환아…. 나 또 들려줘. 또 듣고 싶어.”
숱 많은 눈썹 사이가 슬그머니 좁혀졌다. 이 또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일련의 행동이었다. 누구보다 좋은 노래를 만드는 녀석이 저런 소리를 하니 재환은 영 속이 간질거렸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홀로 방금의 멜로디를 중얼거릴 때마다, 재환은 늘 한 사람을 떠올렸었다. 그 당사자가 지금 제게 노래가 좋다는 말을 해 주고 있었다. 기쁘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진짜… 좋아?”
“응. 진짜 좋아.”
달콤한 격려이자 세뇌였다. 수두룩이 가슴팍을 메운 민망함과 창피함을 어렵사리 내리누른 재환은 다시 기타 넥의 지판 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이번에는 한영과 눈을 맞추고서, 보다 자신감 있게 연주와 노래를 시작했다. 이윽고 가사 없는 노래가 후렴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접어들었을 때, 재환의 시선을 받던 한영의 붉은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I’m your reverb
I’m your reverb
I’m your reverb
설핏 눈을 크게 뜬 재환은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방해하는 제 목소리를 조금 사그라뜨렸다. 그러다 이내 어렴풋이 미소 지으며 들리는 가사를 따라 불러 보았다. 원래부터 노래에 붙어 있던 것처럼, 한영이 부르는 가사는 아무 위화감 없이 혀끝에 부드러이 감겼다. 더불어 재환은 이 노래의 제목이 생각날 듯했다. 입꼬리에 걸린 웃음이 한결 짙어졌다.
무심코 떠올린 노랫말을 읊조리던 한영은 재환의 미소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곧 재환을 담은 눈동자가 촉촉함을 머금었다. 어느 쪽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 가운데, 눈동자가 서서히 아래를 향해 움직였다. 담요와 기타에 가려진 예쁜 몸, 기타 줄 사이를 노니는 다부진 손가락, 박자 따라 까딱거리는 발가락이 차례로 젖은 눈동자에 비쳤다.
마지막으로 한영은 처음 똑바로 보았던 순간부터 늘 얼마쯤의 설렘과 애달픔을 함께 안겨 줬던 단정한 얼굴로 시선을 되돌렸다. 문뜩 한 가지 깨달음이 한영의 뇌리를 훑고 지났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평생, 재환이 너만을….
의심의 여지가 없어 두렵게 다가오기까지 하는 확신이었다. 절대 바뀌지 않을 진리였다. 그것이 기뻐서였을까, 아니면 사무치게 안타까워서였을까. 일순간 한영의 눈망울 가득 숨길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노래가 모두 끝났을 때, 한영은 눈물과 함께 솟구친 한마디를 참지 못했다.
“재환아.”
“너 울어…?”
“나 이 노래 줘.”
하얀 뺨 위로 주룩주룩 눈물을 떨구며, 한영은 전에 없이 간절하게 재환에게 졸랐다. 너 안 좋아한다는 혀가 아린 말을 뱉을 때도, 한 번만 섹스해 달라 못나게 빌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만큼 한영은 이 노래가 갖고 싶었다. 당장 재환이 네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네가 만든 노래라도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유한영.”
“이 노래 나 줘, 재환아. 나 잘 부를 수 있어.”
둑이 허물어진 듯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 한영을 보며 커다란 당황에 휩싸인 재환은 얼른 기타를 옆에 내려놓았다. 침대에서 엉덩이를 끌어 한영 가까이 몸을 붙인 뒤, 눈물에 폭삭 젖은 작은 얼굴로 두 손을 가져갔다. 투명한 살결에 갈래갈래 물길을 새기고 있는 눈물을 서둘러 엄지로 닦아 냈으나, 금방 또 다른 길이 생겨났다. 재환의 당황이 더 크게 부풀었다.
“유한영, 왜 그래. 진짜 노래 때문에 그래?”
“나 말고 다른 사람 기타 쳐 주지 마. 노래 만들어 주지 마. 응, 재환아…?”
재환의 양 손목을 꼭 그러쥔 한영이 한층 애타게 사정했다.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절절함이 뚝뚝 묻어났다. 무엇이 한영을 저토록 서럽게 만들었는지 재환은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요만큼도 짐작이 안 가는 것 같다가도, 또 동시에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음이 외면과 이해 사이를 위태로이 갈팡질팡했다. 마찬가지로 시선도 불안하게 흔들렸다.
쉼 없이 죽죽 눈물을 밀어내는 갈색 눈동자와 애처롭게 달싹이는 입술을 번갈아 쳐다보던 재환은 끝내 한영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깨를 덮고 있던 담요가 등허리를 타고 미끄러져 시트 위로 떨어졌다. 은은한 스탠드 불빛이 다시금 알몸으로 맞닿은 두 남자를 따스한 색감으로 비추었다.
“재환아…. 나 줘. 나한테 줘.”
가늘게 들썩이는 어깨에 턱을 얹은 재환은 함께 떨리고 있는 동그란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다른 손으로는 유독 왜소하게 느껴지는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어쩌면 상대가 바라는 답이 따로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얼핏 하면서도, 일단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답을 조곤조곤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당연하지. 너 아니면 누가 내 노래 불러 줘. 나한테 보컬은 너밖에 없어. 유한영 네가 최고야. 너 말고 딴 사람이랑 기타 안 쳐. 그러니까 울지 마….
달래는 역할을 자처한 주제에 어느덧 재환의 눈가도 덩달아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래서 재환은 한영을 보다 꽉 안았다. 조금이라도 더 고민의 시간을 벌기 위한, 참으로 비겁한 행동이었다.
달빛을 받은 길목의 벚꽃 송이가 기지개 켜듯 살포시 잎을 벌렸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거리에 온통 분홍빛이 넘실거리는 시기가 되었다. 이렇게 계절은, 시간은 멈추는 일 없이 찬찬히 지나가고 있었다.
* * *
새로이 발매한 EP 앨범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창에 ‘더 숨’ 두 글자를 입력해 나오는 글의 대부분이 듣기 좋다, 감성적이다, 하는 칭찬이었다. 물론 간혹가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는 둥, 노래가 지루하다는 둥의 악평도 존재했다. 하지만 밴드가 늘 호평만 받을 수는 없기에, 재환은 그런 글들을 보아도 나름 덤덤히 반응하려 애썼다.
그러나 한영이 언급될 때는 도리 없이 속이 버글버글 끓어올랐다. 이 팀 공연 봤는데 보컬이 얼굴만 믿고 깝치더라, 노래 실력은 꽝이더라 하는 악담을 보면 재환은 저도 모르게 눈이 뒤집혔다. 그 밑에 쌍욕이 난무하는 댓글을 달다 멈칫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이런 것도 다 사람들의 관심이라고, 씁쓸한 합리화를 했다. 실제로 인디 밴드가 대중의 관심을 받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재환은 그러한 사실을 더욱이 절감하게 되었다.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음원이 쏟아지고, 또 새로운 가수들이 생겨나는 상황에서 인디 밴드로 인기를 얻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다시 말해, 앨범 하나 냈다고 해서 갑자기 밴드가 대박 나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더 숨을 아는 사람들이 분명 늘어나고는 있었으나, 재환 보기에는 아직 그 속도가 턱없이 더뎠다.
그렇다고 새삼 의기소침해할 필요는 없었다. 이러한 현실도 모르고 밴드를 시작했을 만큼 재환은 어리숙하지 않았다. 이전 밴드를 하며 이미 한 번 느꼈던 바이기도 했고, 결국 기타 치는 게 존나 좋아서 덤빈 일이니 결론은 더 열심히 하자는 것뿐이었다.
다만, 한영의 노래는 충분히 많은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만한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 재환은 조금 속상했다. 이 문제 또한 제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재환은 오랜만에 나가게 된 대회에 더 큰 기대를 품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1등을 하는 팀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적지 않았다. 상금은 물론이거니와 정규 앨범 제작 지원, 뮤직비디오 촬영 지원, 프로필 사진 촬영 지원 등 지원해 주는 항목이 상당히 많았다. 이러니 욕심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모처럼 본선까지 갔겠다, 어떻게든 1등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
그리고 재환의 바람대로, 혹은 바라지 않았던 대로 더 숨은 대회에서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대상이 아닌 금상, 한마디로 2등 상이었다.
“더 숨이랑, 코스믹 라테랑 오늘 둘 다 짱이었음다! 자, 짠!”
튀김 냄새 솔솔 풍기는 치킨집 구석진 자리에서 총 여덟 개의 맥주잔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특히 한쪽에 나란히 앉은 네 명의 힘이 넘친 탓에 꽤 많은 양이 찰랑찰랑 잔 밖으로 흘렀다. 힘뿐만 아니라 흥분까지 넘친 듯, 쾅 잔을 내려놓은 희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더 숨이랑 같이 상을 다 받고, 저희 존나 울컥했잖아요.”
“울컥이 아니라 이 새끼 진짜 울었어요.”
“너도 울었잖아, 새끼야!”
금세 저들끼리 울었네 안 울었네 아웅다웅 시비가 붙은 코스믹 라테의 멤버들을 바라보며 재환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보기 미운 싸움은 아닌지라, 입가에 슬쩍 웃음이 번졌다. 저러는 것도 다 기분이 너무 좋은 탓일 터였다.
어쨌거나 더 숨과 코스믹 라테가 오늘 대회에서 사이좋게 금상과 은상을 수상한 것은 썩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친한 밴드를 경쟁자로 만나 내심 마음이 쓰였었는데, 이렇게 서로서로 축하를 건넬 수 있게 되어 재환으로선 참으로 다행이었다. 게다가 곧 멤버 둘이 군 입대를 하는 까닭에, 코스믹 라테에게는 이번 대회가 사실상 마지막 무대인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 활동은 2년 후를 기약해야 하니, 다들 저리 들뜨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사이 저쪽의 넷은 또다시 옥신각신 시비가 붙었다. 가만 들어 보니 이번에는 상금을 어디에 쓸까, 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입대 전 찐하게 여행 한번 가자, 무슨 소리냐 무조건 통장행이다, 이것도 저것도 싫고 그냥 오늘 다 써 버리자. 아주 갖가지 얘기가 오갔다. 그러다 대뜸 이쪽으로 질문이 넘어왔다.
“형님네는 지난번 대회에서 상금 받은 거 어쩌셨어요?”
“우리? 각자 조금씩 나누고, 나머지는 공금으로 해서 앨범 낼 때 쓰고.”
‘와, 역시 존나 체계적이야!’ 하는 찬사가 돌아왔다. 그 후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더 숨이 최근 낸 EP 앨범으로 바뀌었다. 아직 앨범을 낸 경험이 없어, 코스믹 라테는 녹음에서 믹싱, 그리고 유통까지 앨범 발매에 관한 모든 과정에 대해 궁금증이 많았다. 재환은 나름 아는 대로 성심껏 대답해 주었고, 중간중간 태군이나 지우도 답을 거들었다. 재환 옆자리에 앉은 한영은 딱히 대화에 끼지 않은 채 포크 두 개를 들고 열심히 치킨 살을 발랐다.
잠시 후 재환이 문득 시선을 내렸을 때, 한영이 바른 치킨 살 태반이 그의 앞접시에 올려져 있었다. 대놓고 이럴 필요 없다 핀잔하기도 뭐해, 재환은 조용히 치킨을 집어 먹었다. 그러자 한영은 더 신이 나 부지런히 포크를 놀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대에서 그토록 간절한 목소리로 노래하던 녀석이 맞나 싶었다.
포크질에 열중하던 한영이 재환과 눈이 마주쳐 배시시 웃을 즈음이었다.
“맞다! 형님들은 여자 친구 있어요?”
한영과 시선을 교환하던 재환의 고개가 휙 앞으로 돌아갔다. 질문을 꺼낸 희성이 캬, 하고 맥주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부연했다.
“아니, 진짜 형님들 노래 들으면 다들 이별 한 백 번쯤은 한 것 같어. 어디서 그런 감성이 나와요?”
꽤나 궁금했던지, 옆에 있던 다른 멤버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맞아. 우리끼리 전에 그런 얘기 했었잖아.”
“그니까. 완전 인기도 많으실 텐데.”
“참고로 저흰 다 여친 없어요. 채희성 얘는 아예 모솔.”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답을 기다리던 희성의 표정이 순간 와작 구겨졌다. ‘씹새야, 그런 얘기는 왜 하는데!’ 하고 버럭 성을 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얼뜬 표정을 지었다. 지우가 태군을 가리키며 ‘얘만 여자 친구 있어.’ 하는 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희성은 못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헐. 그럼 태군 형 빼고 다 솔로예요? 재환 형도?”
갑자기 코스믹 라테 네 명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게 된 재환은 적잖이 당황했다. 쥐고 있던 맥주잔이 슬그머니 테이블 위로 내려갔다.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 전혀 고민할 거리가 없는 질문이었다. 어차피 재환이 할 수 있는 말은 ‘응’, 혹은 ‘아니’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답은 당연히….
“비밀이야.”
여덟 개, 총 네 쌍의 눈알이 일제히 재환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이에 태군이 동참한 것으로 모자라, 맥주를 삼키던 지우는 아예 컥 짧은 기침을 터뜨렸다. 재환 역시 삐걱삐걱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별안간 테이블 밑에서 다가온 손이 재환의 손을 꽉 쥐었다. 어찌나 아귀힘이 센지, 순간 재환은 어깨를 흠칫 떨 뻔했다. 정작 손의 주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안 알려 줄 거야. 비밀이야.”
어느 틈에 깍지를 껴 온 손가락이 이제는 아예 억 소리가 터질 정도로 손등을 조였다. 하나 차마 티 낼 수가 없어, 재환은 귀만 새빨갛게 물들였다. 치킨집의 조명이 밝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사실은 하나도 다행이 아니었다. 한영이 뱉은 소리 때문에 제대로 이상해진 테이블 분위기는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잔머리 부족한 재환이 택할 수 있는 방도는 뻔하디뻔한 것이었다.
“이 새끼 취했네. 혼자 조용히 마시더니.”
제가 비웠던 생맥주 잔을 슬그머니 한영 앞으로 미끄러뜨린 재환은 천연덕스럽게 눈짓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기실 지금껏 한영이 취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누명을 씌우는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억울한 처지에 놓인 한영이 폭 눈썹을 구겼다.
“나 하나도 안….”
벌떡 일어선 재환은 서둘러 한영을 테이블 밖으로 잡아끌었다. 그 탓에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모양새가 썩 어색하지 않게 비쳤다.
“같이 바깥바람 좀 쐬고 와야겠다. 마시고들 있어.”
남은 이들이 여전히 당황한 표정을 짓건 말건 재환은 한영을 이끌고 단숨에 가게 밖으로 나섰다. 건물을 끼고 돌아 조금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한 발짝 뒤에 선 한영을 향해 휙 몸을 트는 순간 ‘너 미쳤어?’ 소리가 목젖을 탁 쳤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말간 눈빛을 마주하는 동시에 그만 맥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얼마 전 엉엉 우는 모습을 본 것이 전혀 관계없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괜히 뭉친 것처럼 느껴지는 뒷목을 두어 번 꾹꾹 주무른 재환은 애써 차분히 입을 열었다.
“유한….”
“재환아.”
이름 세 글자를 다 소리 내기도 전 숭덩 말허리가 잘려 나갔다. 하릴없이 눈썹 사이가 푹 구겨졌다. 서로 입장만 바뀌었을 뿐, 가게를 나오기 전과 몹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주변에 보는 눈이 없었다.
“키스해 줘.”
“뭐…?”
“오늘 공연하고 나서, 한 번도 키스 못 했어.”
말문이 막힌 재환은 입을 뻐끔거렸다. 한영이 대체 왜 저런 소리를 꺼내는지는 얼추 짐작이 갔다. 큰 공연에 서든, 작은 공연에 서든, 무대에서 내려오면 항상 서로 약속한 듯이 입술을 부딪쳤었으니까. 그게 라이브 도중 달아오른 몸과 마음을 달랠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인제 재환도 잘 알았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한영에게 입 맞춰도 하등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지금…?”
“응.”
그러나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것이 많았다. 종전 한영이 가게에서 뱉었던 영문 모를 언사라든가, 그로 인해 괴상해진 테이블 분위기라든가. 여기에 더해 재환은 한영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진짜 아무렇지 않느냐고. 대회에서 2등을 한 게 나만 이토록 아쉬운 거냐고.
2등 상을 받은 것도 당연히 박수 받아 마땅한 결과였다. 머리로는 재환도 그렇게 여겼다. 그럼에도 무릇 사람인지라, 재환은 분한 마음을 완전히 떨치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세상은 1등만 기억했고, 또 이렇게 더 숨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생각을 하면 속이 다 울컥울컥 뒤집혔다. 그런데, 한영은 하나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오직 신경 쓰는 건….
“키스해 줘, 재환아. 응?”
저도 모르는 새 자그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재환은 한영 가까이 한 발 다가섰다. 길기도 한 목에 손을 두르고서, 얼굴의 각도를 틀어 단숨에 입술을 겹쳤다. 아무리 어둑한 골목이라도 얼마든지 사람이 지나갈 수 있었고, 지우나 코스믹 라테의 멤버들이 담배를 피우러 올 수도 있었다. 하나 그런 것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와서 보든지’라는, 소위 말해 좆 까라는 마음이 컸다. 재환은 그저 한영이 바라는 대로 입맞춤을 퍼부었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입술을 비비던 재환은 한영을 보다 강하게 밀어붙였다. 점점 뒤로 밀려난 한영의 등이 꺼칠꺼칠한 건물 벽에 부딪쳤다. 이 또한 재환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처 슬슬 열이 몰리기 시작하는 고간을 바지 너머로 비비며 거세게 혀를 얽고 맞닿은 입술을 빨아들였다. 질척하게 살점이 뭉개지는 소리가 꼭 섹스 때 성기가 내벽을 들락거리는 소리와 엇비슷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재환은 이 자리에서 제 바지도 내리고, 한영의 바지도 벗겨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의 그는 조금 뵈는 게 없었다.
“으, 음….”
“후음….”
이토록 성마른 재환의 움직임을 한영은 마다하지 않았다. 진짜로 섹스하듯이 함께 사타구니를 치대며 줄줄 흘러드는 숨과 침을 삼켰다. 한영이 그럴수록 재환은 더, 더 키스의 농도를 높였다. 이리저리 혀끝을 휘둘러 축축한 입 안을 헤집고, 그러다 침이라도 한 방울 밖으로 흐를라치면 날렵한 턱에 입술을 붙여 빨아 먹었다. 한영의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쉴 새 없이 물먹은 신음성이 울렸다.
안팎으로 타액이 묻은 아랫입술을 쭉 물어 당기는 것을 끝으로 재환은 한영에게서 입술을 떨어뜨렸다. 실처럼 가느다란 침이 그 사이로 길게 늘어나다 톡, 끊어졌다. 씩씩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재환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꺼먼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한영의 얼굴 위로 어스름히 가로등 불빛이 들었다.
“재환아….”
평소에 비해 유독 난잡한 입맞춤을 나눈 까닭에, 재환을 보는 갈색 눈동자가 몽롱한 기색을 띠었다. 머리칼은 다소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실상 재환의 외양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이상하게 마음만은 금방 차분해졌다.
쓱쓱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린 재환은 한영의 머리로도 손을 뻗어 덤덤히 머리칼을 빗겨 주었다. 타액으로 인해 번지르르한 빛을 띤 빨간 입술도 엄지로 두어 번 문질렀다. 대충의 뒷정리를 끝낸 재환은 얇은 니트에 감싸인 어깨 위로 툭, 손을 얹었다.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
“기다릴래.”
“아냐. 먼저 들어가 있어.”
뜻하는 바를 이뤄서인지 한영은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 양순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영은 재환을 등져 걸음을 뗐다. 그가 건물 귀퉁이 너머로 쏙 사라지고 나서야 재환은 가까이 있던 건물 외벽에 쿵 등을 붙였다. 딱딱한 벽에 아직 미약하게나마 한영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지 싶었다.
주섬주섬 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낸 재환은 새하얀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필터를 빨아들이며 슬쩍 고개를 쳐들자, 아까는 미처 눈에 담지 못한 벚꽃 가지들이 시야에 잡혔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몽글몽글 맺혔던 꽃송이가 이제는 완연히 만개해 밤하늘 중으로 분홍빛을 한 아름 퍼뜨리고 있었다. 그 고운 자태를 보고도 재환은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 술집 즐비한 골목에 피어난 벚꽃이 얼마나 예뻐 보이겠느냐마는.
곧 길목을 더럽히는 쓰레기로 변질될 꽃잎들을 멀거니 쳐다보던 재환은 담배 연기와 함께 긴 한숨을 흘렸다. 보나 마나 이따 한영이 같이 돌아가자는 소리를 할 텐데, 어떤 답을 들려줘야 할지 설핏 고민이 되었다. 오늘 밤 그는 좀 혼자 있고 싶었다.
내리 담배 두 개비를 피우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일단 화장실부터 갔다. 한참 전 발기가 사그라든 성기를 꺼내 볼일을 본 뒤, 찬찬히 손을 씻었다. 젖은 손을 털며 화장실을 나서던 중, 좁은 복도에서 떡하니 희성을 마주쳤다.
“아, 형님…!”
아까의 어색한 상황을 잊은 듯, 재환을 불러 세우는 희성의 얼굴에 묘한 화색이 돌았다. 지레 껄끄러운 마음을 감춘 재환은 ‘화장실 가려고?’ 하며 답지 않게 살뜰한 물음을 건넸다. 사실 빨리 저를 보내 달라는 뜻이었는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희성이 갑자기 덥석 팔뚝을 붙들어 왔다. 그러더니 복도 끝, 켜켜이 맥주 박스가 쌓여 있는 곳으로 재환을 이끌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재환은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갑자기.”
“형님, 저, 그게….”
밝지 않은 복도 조명 아래서도 발그스름히 달아오른 희성의 낯빛이 비교적 또렷이 보였다. 그것이 더럭 재환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부끄러운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지금 희성의 태도가 왠지 자신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끼쳤다. 알아서 뜨끔한 것이었다. 예감은 절반 정도 들어맞았다.
“그…, 오늘 형님 보러 온 여자애 있잖아요. 전에 클럽에도 몇 번 오고.”
여자애? 하고 되묻는 재환의 머릿속에 동글동글 귀여운 인상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대회나 공연 때마다 꼬박꼬박 저를 응원해 주러 오는 여자애라면, 딱 한 사람이 있었다.
“아, 희연이.”
“헐, 이름이 희연이에요? 나랑 비슷하네.”
이름 하나 들은 희성의 얼굴에 재차 발그레한 생기가 감돌았다. 그 수줍은 반응의 영문을 알지 못하는 재환은 저도 모르게 살그머니 눈매를 좁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희성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한참이나 더 뜸을 들였다. 그사이 앳된 티가 있는 얼굴이 한층 빨갛게 달아올랐다.
“형님… 여자 친구는 아닌 거죠?”
이윽고 한참 만에 나온 질문이 일순 재환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심어 주었다. 왜 희성이 테이블에서 대뜸 여자 친구 얘기를 꺼냈는지, 방금 희연에 대해 물은 건지 재환은 이제야 납득이 갈 듯했다. 입꼬리를 씩 위로 끌어 올린 재환은 바짝 경직되어 있는 희성의 어깨를 탁 쳤다. 무대에서 마이크를 집어삼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희성은 살짝 긴장한 낯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희연이랑 나랑 그냥 알바 동료야. 안 사귀어.”
‘아…!’ 하는 짧은 탄성이 터졌다.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새카만 두 눈이 활활 타오르는 열의로 뒤덮였다. 언제 수줍게 어물거렸냐는 듯, 희성은 우악스러운 힘으로 답삭 재환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살짝 땀이 밴 손바닥도 열이 끓기는 마찬가지였다.
“형님. 사실 저 진짜 걔한테, 아니지, 희연이한테 한눈에 반했거든요?”
다만 이렇게 직구를 날려 올 줄은 미처 몰랐던지라, 재환은 다시금 슬쩍 당황했다. 일단은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희성의 목소리가 한 단계 더 커졌다. 복도 밖까지 들릴 기세였다.
“제 얘기 좀 전해 주세요! 예?”
감히 ‘아니’라는 대꾸를 내놓으려야 그럴 수가 없는 표정과 어투였다. 평소 주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로 일관했을 테지만, 아무리 재환이라도 지금만큼은 그러기가 어려웠다. 단번에 태세를 바꾼 희성의 기에 조금 눌린 탓도 있었다.
“꼭 좀 부탁드릴게요! 형님!”
재환은 마지못해 알았다, 했다. 그랬더니 입꼬리가 귀에 걸린 희성이 아예 재환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필이면 그 광경을 화장실 가던 한영이 보았다. 도끼눈이 된 한영은 한달음에 달려와 재환에게서 희성을 뜯어냈다. 당연히 놀란 희성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고, 이번에도 재환은 이 새끼 술 취해서 그런다는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어쩌면 충분히 웃으면서 지나갈 수도 있는 소란이었다. 실제로 희성은 ‘와, 한영 형님 술 취하면 장난 아니네요!’ 하며 하하 웃기도 했다. 그러나 재환은 웃을 수 없었다. 하나도 유쾌하지 않았다.
* * *
참 감수성 없는 누군가가 걱정했던 대로, 한때 거리 곳곳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던 벚꽃 잎은 귀찮은 쓰레기가 되었다. 밟히고 밟혀 뭉크러지다가, 결국 하나둘 빗자루에 쓸려 나갔다. 오종종히 꽃잎이 매달렸던 자리에는 이제 푸릇푸릇한 잎사귀만이 남아 내년 이맘때를 기약했다.
초록빛이 드리운 나무 아래를 부지런히 걸은 재환은 오늘도 카페로 향했다. 유리문을 어깨로 밀며 안으로 들어서자, 가게 오픈부터 일하고 있던 상지와 희연이 카운터 너머에서 재환을 맞이했다. 상지도 상지지만, 희연을 본 재환의 만면에 꽤나 훤한 미소가 번졌다. 최근 근무 시간이 맞지 않아 서로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까닭이었다. 그 미소가 의도치 않게 상대의 가슴을 뒤흔들어 버린 것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빠, 수고하세요!’ 하며 상지가 나간 자리에 재환이 섰다. 검정 셔츠의 소매를 찬찬히 팔꿈치 위까지 접어 올리던 중, 옆에 있던 희연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퍼뜩 떠오른 것이 있어 재환은 나지막이 아, 소리를 뱉었다.
“맞다, 희연아.”
“예?”
“너 지난번에 우리 대회 보러 와 줬었잖아.”
재환은 내심 이게 맞나 싶었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판국에 남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건 아무리 봐도 오지랖 같았다. 하나 이미 희성에게 ‘알았다’라는 답을 내준 시점에서 무용한 고민이었다. 어찌 됐건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기에, 재환은 제가 생각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때 상 받았던 코스믹 라테 기억해?”
도글도글 눈을 굴리던 희연이 ‘네, 기억나요!’ 하고 답했다. 그것만으로 재환은 나름 한시름 놓았다. 기억도 못 하는 상대의 얘기를 희연에게 꺼낼 수는 없었으므로. 그러나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가뜩이나 말재간 없는 재환에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쥐약이었다. 하여 어물어물 다음 말을 고르는 사이, 중년 여성들로 구성된 단체 손님이 우르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주문을 받고 바빠진 두 사람은 바지런히 카운터 뒤를 오갔다. 한 명은 장장 열 몇 개에 달하는 음료를 서둘러 만들었고, 또 한 사람은 비슷한 수의 케이크를 접시에 담았다. 사람 수에 맞춰 포크, 휴지, 물티슈도 넉넉히 담아 픽업 바에 쟁반을 쪼르르 늘어놓자, 자리를 잡고 기다리던 손님들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들이 쟁반을 모두 가져가고 나서야 재환과 희연은 그럭저럭 여유를 찾았다.
그러자마자 또다시 카페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손님이 아니라 베이커리에서 갓 만든 케이크를 들고 온 태혁이었다. 마침 케이크가 한꺼번에 나간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알아서 쇼케이스 빈자리에 척척 케이크를 채워 넣었다. 하나 이는 원래 아르바이트생의 몫이었으므로, 다 넣고 가겠다는 태혁을 재환은 얼른 카운터 밖으로 떠밀었다.
보기 좋게 케이크를 정렬하고, 내친김에 쇼케이스 유리까지 한 번 싹 깨끗하게 닦았을 무렵 단체 손님들이 재차 카운터로 몰려왔다. 이 집 커피 참 맛있다며 한 명씩 차례대로 리필을 주문했다. 새로 들어온 케이크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추가 주문을 하는 손님도 있었다. 따라서 재환과 희연은 또다시 바빠졌다.
음료와 케이크를 모두 준비한 후,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을 도로 카운터로 부르기가 뭐해 재환은 제가 직접 쟁반을 날랐다. 하하 호호 웃음꽃이 핀 손님들 사이에 쟁반을 내려놓자, ‘고마워, 총각!’ 하는 인사말이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어떤 손님은 ‘커피도 잘 타고 얼굴도 잘생겼네!’라며 영 반응하기 난처한 칭찬을 보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맞받아칠 넉살 따위 없는 재환은 그저 멋쩍게 웃어 버렸다.
몇 번 더 카운터와 단체석을 오가던 재환은 마지막 쟁반을 나른 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간 정신이 없었던 탓에, 아까 희연과 정확히 어디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또렷하지 않았다. ‘우와, 정신없었네요.’ 하며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떨어진 음료를 닦는 희연도 그때의 대화를 기억 못 하는 눈치였다.
이거 어떻게 또 얘기를 꺼낸담.
속으로 고심하던 재환은 결국 앞뒤 다 자르고 본론을 내놓는 쪽을 택하고 말았다. 다만, 잘라도 너무 많이 자른 것이 문제였다.
“희연아.”
“네, 오빠?”
“너한테 반했나 봐.”
희연이 쥐고 있던 행주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니, 그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법이 어딨냐고…!”
“그지. 없지. 그러면 안 되지.”
“진짜 너무해! 너무해!”
해도 지기 전부터 다짜고짜 술 마시자는 연락이 왔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자꾸 이쪽을 흘끔거리는 주변 테이블 사람들에게 눈짓으로 사죄하랴, 맥주 두어 잔에 맛이 가 버린 친구를 챙기랴 상지는 정신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희연 혼자 내버려 두고 곱게 집에 가고 싶었으나, 질질 짜는 모습을 보니 또 그렇게 안 되었다.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나 정말 심장 멎는 줄 알았다고…!”
“응응, 그랬겠네.”
“야, 껍데기 타.”
“아, 어.”
주위에 사과하고 희연의 하소연에 맞장구치는 사이사이 상지는 불판 위 껍데기까지 돌봐야 했다. 치직 소리를 내며 익고 있는 껍데기가 상당히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이놈의 기지배는 타는 걱정은 하면서 옆 사람에게 하나 주워 먹을 틈을 주지 않았다.
“짜증 나….”
“야, 그만 마셔…!”
다 익은 껍데기를 부지런히 불판 가장자리로 옮기던 상지는 입을 비죽이며 술을 따르려는 희연의 손에서 재빨리 갈색 맥주병을 낚아챘다. 그 자리에 얼른 찰랑찰랑 투명한 물이 담긴 잔을 쥐여 주었다. 안 그래도 혀가 꼬일 대로 꼬인 희연이 여기서 더 취하면 그때는 답도 없었다. 이미 가게에서 진상 손님으로 찍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희연이 저리 징징거리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좋아해 마지않는 재환 오빠가 난데없이 엉뚱한 남자애 얘기를 꺼내니 희연의 입장으로선 억장이 무너질 터였다. 안 그래도 고백 한 번 제대로 못 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대뜸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보나 마나 재환에게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겠지만.
“내 맘도 하나 몰라주고…. 어쩜 그래….”
어쨌거나 인제 희연은 재환을 향한 마음을 숨길 생각이 딱히 없는 듯했다. 하긴, 그러기에는 초반부터 티가 너무 팍팍 났었다. 원래는 그냥 팬심 같은 거였다고, 어쩌다 보니 좋아하게 된 거라고 본인은 끝까지 아득바득 우겼지만, 턱도 없는 소리. 상지가 봤을 때, 희연은 재환을 처음 만난 순간 진작 마음을 홀라당 빼앗겨 버렸다. 안 하던 다이어트를 하질 않나, 아르바이트비 받아서 옷과 화장품에 탕진하질 않나. 그 후 희연이 보인 모든 행동이 다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였다.
그런 희연 옆에서 상지는 때때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재환의 생김새가 멀끔하다는 건 그녀도 백번 인정했다. 잘생긴 오빠가 키도 크고, 성실하고, 거기다 기타까지 잘 치니 충분히 소녀의 가슴을 흔들 만했다. 다만….
다 좋은데, 재환에게는 어째 좀 선비 같은 구석이 있었다. 멋지고 좋은 오빠임은 분명하나, 누군가와 열렬히 연애하는 모습이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확 벽으로 밀어붙여 박력 넘치게 키스하는…. 내가 뭐라는 거야.
“그리고 걔 진짜 무섭게 생겼단 말야….”
“어? 누구?”
“아씨, 재환 오빠가 말한 남자애!”
팩 성을 낸 희연은 옆 의자에 올려 두었던 캔버스 백을 한참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코앞까지 가져간 핸드폰을 몇 번 신경질적으로 콱콱 누르더니, 상지에게 휙 내밀었다. 얼결에 상지가 받아 든 핸드폰 화면에는 도대체 무슨 염색을 한 건지 머리가 은발도, 백발도 아닌 남자애의 사진이 크게 띄워져 있었다.
“걔야, 걔!”
희연의 언성에 상지는 보다 핸드폰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이목구비가 큼직하고 눈알도 부리부리한 것이, 희연이 왜 그를 무섭다고 했는지 얼추 이해가 갈 듯했다. 하나 인상이 좀 억셀 뿐, 객관적으로 못난 외양은 아니었다. 그래 봤자 이는 상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무대에서는 더 무서워! 기타도 얼마나 무섭게 치는데!”
목소리도 엄청 크다, 거기 팀 다른 멤버들도 다 무섭다, 노래도 내 스타일 아니다 등등 희연은 지극히 주관적인 불평을 얼마쯤 더 토로했다. 결국, 결론은 재환 오빠 말고는 다 싫다는 소리였다. 그런 줄 알았는데….
“어케 딴 남자애 얘기를 나한테 할 수 있어…. 재환 오빠 증말 싫다….”
급기야 희연은 재환까지 싫다는 속에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앞으로 그의 얼굴도 안 볼 거라는 폭탄선언까지 했다. 그 모습이 하도 볼만해 동영상으로 남겨 둘까 싶었지만, 상지는 금방 계획을 철회해야 했다. 어느 틈에 다시 핸드폰을 가져간 희연이 ‘안 되겠어. 재환 오빠한테 말해야겠어.’라며 꾹꾹 화면을 누르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상지는 희연의 손에서 잽싸게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야, 정희연! 너 미쳤어?”
“이씨, 내놔…. 말할 거야!”
“뭘 말해, 뭘!”
“서재환 너 싫다고…!”
두 여자애가 핸드폰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할 시각, 재환은 어디 잡지에나 나올 법한 세련된 인테리어의 사무실 방 한가운데 멤버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사방이 유리로 둘린 공간에는 은은한 향이 풍기는 동시에 딱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흘렀다. 기획사 사무실이 아니라, 꼭 어디 호텔 라운지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재환의 마음은 그다지 편치 않았다. 장소만 조금 다를 뿐이지, 일전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있었다. 그쪽 밴드에 관심이 있다기에 만나 보니, 정작 상대는 기대와 달리 뼈아픈 얘기만 실컷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때의 일을 겪고도 며칠 전 온 비슷한 종류의 연락에 또 응하고 만 것은, 저기 저 유리 벽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기획사 이름에 이유가 있었다.
오직 밴드에만 정통할 뿐, 연예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재환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대형 기획사였다. 이 널따란 방까지 안내받으며 본 복도의 액자 속 가수나 배우들도 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그러니 재환은 자꾸 마음 깊은 곳에서 품기 싫은 기대가 꾸물꾸물 피어올랐다. 요컨대 ‘혹시 이번에는 진짜….’ 하는 생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이야기가 잘 풀려, 더 숨이 커다란 기회를 얻는 상황이 멋대로 머릿속에서 상상되었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멈춰야 할 설레발이었다.
그러지 못해 답답한 숨만 길게 내쉴 즈음, 유리문이 열리며 직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직원은 네 사람이 한쪽에 쪼르르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머그잔 네 개를 내려놓았다. 잔 안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블랙커피가 흐릿하게 재환의 얼굴을 비췄다. ‘이사님 곧 오실 거예요.’라는 말을 남긴 직원은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얼마 안 가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정장 차림의 여자가 등장했다. 많아 봐야 삼십 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자마자 재환과 멤버들에게 명함을 건넸다. 명함 가운데 ‘Director Manager’라는 직함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본인을 이 기획사의 이사 매니저라고 소개한 여자는 쓸데없는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았다. 어디어디에서 더 숨의 음악을 처음 접했고, 영상은 모두 찾아봤으며, 지난 대회에는 직접 가 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빠르게 정리해 들려주었다. EP 앨범에서는 이 노래, 이 노래가 좋았고, 또 이 노래는 별로였다는 솔직한 평도 서슴지 않았다. 결론도 빠르게 나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우리 회사랑 더 숨이 계약을 했으면 좋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만큼 금방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이었다. 고민이 되어 그렇다기보다는, 선뜻 믿기가 어려워서 그랬다. 동시에 오지도 않은 미래를 향한 기대가 걷잡을 수 없이 재환 안에서 부풀었다. 보다 많은 사람이 더 숨의 무대를 보고, 한영의 노래를 듣고, 나의 연주에 열광하고…. 지금이야말로 정말 허벅지를 꼬집어 끝 간 데 모르고 뻗어 나가는 상상을 멈출 때였다. 하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일단 우리가 생각해 둔 컨셉이 있어요.”
‘컨셉이요?’ 하고 묻기도 전, 화면 켜진 태블릿 피시가 테이블 위로 미끄러졌다. 재환은 살짝 고개 숙여 가까이 온 태블릿 피시를 내려다보았다. 시원시원한 크기의 액정에는 4인조로 이루어진 외국 밴드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재환은 모르는 밴드였는데, 화면을 함께 들여다본 지우가 ‘아.’ 하며 알은체를 했다. 그러더니 긴 팔을 뻗어 사진을 옆으로 넘겼다. 딱 집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비슷한 느낌의 밴드 사진이 몇 장 더 이어졌다. 그리고.
“그 밴드는 알죠?”
마지막으로 나온 사진에서 재환은 저도 모르게 푹 눈이 구겨졌다. 지우도 마찬가지였고, 태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 한영은 아직까지 딱히 반응이 없었다. 사진 속 밴드를 알지 못해 그런 것 같았다.
“옆 기획사에서 재작년에 낸 애들인데, 아마 지금 우리나라 아이돌 밴드 중에서는 제일 잘나갈 거예요. 일본 시장에서도 반응 좋고. 계약하면, 더 숨도 그런 느낌으로 키우고 싶어요.”
이제는 한영의 낯빛도 파리하게 변했다. 그 변화를 기민하게 감지한 이사가 쐐기를 박는 말을 내놓았다.
“우리는 인디 밴드를 키우려는 게 아니에요. 진짜 대중한테 사랑받을 만한 팀을 만들려는 거지.”
곱상한 외모의 남자 다섯이 악기를 들고 있는 사진에 붙박여 있던 재환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상대의 얼굴에 걸린 매끄러운 미소가 넘치는 자신감과 확신을 대변했다. 그야말로 성공을 보장하는 듯한 미소였다. 반대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재환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아이돌… 밴드를 키우시겠다는 건가요?”
“맞아요. 그렇다고 춤추면서 노래하란 얘기는 아니고. 밴드니까 악기 연주는 리얼로 가야지. 대신, 곡만 우리 쪽 작곡가 팀에서 준비할 거예요. 더 숨은 다들 연주 실력이 좋으니 스타일만 바꾸면 분명 잘 먹힐 거라고 봐요. 게다가….”
막힘없이 술술 계획을 읊던 이사가 휙 고개를 돌려 한영을 보았다. 한영의 시선은 태블릿 피시도 아닌, 이사의 얼굴도 아닌, 테이블 어딘가쯤에 멍하니 고정되어 있었다. 테이블 아래서 허벅지에 얹힌 하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언뜻 재환의 시야에 잡혔다.
“형제가 둘 다 아이돌이면, 화제성도 엄청 크지 않을까요? 벌써 그쪽 기획사에서 컨택 온 건 아니죠?”
형제? 그쪽 기획사? 한영의 손에서 시선을 거두려던 재환은 잠시 멈칫했다. 지금 이사가 하는 말이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답을 내어 줄 수 있는 한영에게로 한 박자 늦게 몸을 틀었지만, 여전히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무거운 적막 아래로 깔리는 피아노 선율이 공연히 재환의 뒷덜미에 오스스 소름을 일으켰다.
적막은 드르륵, 거칠게 의자 끌리는 소리에 의해 깨졌다.
우뚝 일어선 한영을 따라 이사, 재환, 그리고 나머지 멤버 둘의 고개도 함께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분홍 머리는 네 사람의 시선을 가뿐히 등져, 유리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 * *
한영이 형 유명한 아이돌이야.
트루쓰의 진영이라고, 재환이 너도 티브이에서 본 적 있을걸.
그 형 때문에 아이돌 소리만 들으면 거품 물어.
아, 부모님도 두 분 다 엄청 유명한 음악가고.
잠깐이나마 가슴팍을 찰랑찰랑 채웠던 설렘이나 기대감은 완벽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허탈함, 허무함 따위의 감정을 끌어안은 재환은 터벅터벅 어두운 골목길을 걸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으리으리한 기획사 건물 뒤편에서 지우와 담배 피우며 나눴던 대화가 툭툭 뇌리에 떠올랐다. 그러다 어렵지 않게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난 유한영에 대해 좆도 몰랐구나.
숱하게 서로의 알몸을 보고, 애무하고, 몸을 겹쳤을지언정 재환은 정작 유한영이라는 인간에 대해 부끄러울 만치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한 번도 제대로 알려고 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왜 이제야 그런 얘기를 해 주느냐고 지우에게 따지지도 못했다. 지금껏 한영에 관해 물을 생각을 하지 못한 건 다름 아닌 저 자신이었다. 지우에게는 물론, 한영 본인에게도.
그러므로 한영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가족 얘기 좀 안 해 줬다고 삐지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한영과 저는 굳이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할 사이가 아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심장을 꽉 조였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재환은 끝내 집을 몇백 걸음이나 앞둔 시점에서 발을 멈추었다. 급한 김에 가까운 담벼락 앞으로 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가능한 한 길게 필터를 빨아올렸다 후 연기를 내뱉기를 반복했지만, 으레 니코틴이 건네주던 안정감이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씁쓸한 맛만 남긴 담배는 짧은 꽁초가 되어 길바닥 쓰레기를 모아 놓은 봉지 안에 툭 떨어졌다.
다시 걷기 시작한 재환은 겉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새것 티가 물씬 나는 핸드폰의 화면을 켜 어느새 최근 통화 목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름을 꾹 눌렀다. 이것으로 벌써 몇 번째 전화인지 몰랐으나, 여전히 저 너머에서는 ‘전원이 꺼져 있어…’ 하는 갑갑한 소리만 들려왔다. 씨발, 유한영 진짜…! 절로 탄식에 가까운 욕설이 터졌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부러 걸음을 재촉했다. 담배도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얼른 집에 가 맥주라도 콸콸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이런저런 이유로 지난번 대회 후 기분이 영 별로였는데, 오늘이 날이지 싶었다. 냉장고에 맥주 말고 소주도 있던가. 거기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재환은 편의점에 들러 맥주 네 캔과 소주 두 병을 샀다. 이것도 나름의 사치였으므로 안줏거리는 그냥 건너뛰었다. 한영이 과거 한가득 쌓아 두고 간 라면도 아직 남아 있었고, 냉장고를 뒤져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싶었다. 사실 지금은 안주 없이 술만 마셔도 잘 넘어갈 것 같았다. 돈 날리고 술로 매일을 위안하던 아버지와 지금의 제가 다를 게 뭔가, 하는 좆같은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다 사라졌다.
제법 목직한 비닐봉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여태 등이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컴컴한 복도를 지났다. 어둠 속에서도 능숙하게 열쇠를 꽂아 넣은 뒤, 힘껏 문을 열었다. 곧이어 복도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현관에 발을 들일 때였다. 운동화 앞코에 툭, 하고 채는 것이 있었다. 사시사철 현관 바닥에 두는 슬리퍼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신발이었다.
슬쩍 눈을 구긴 재환은 서늘한 장판 위로 올라서서 더듬더듬 벽을 짚었다. 이윽고 좁은 공간에 불이 켜지고, 동시에 매트리스에 옹크려 있는 커다란 덩어리를 발견했다. 구태여 그 정체를 헤아려 볼 필요는 없었다. 다소 맥 빠지는 안도감을 느끼며, 재환은 들고 있던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매트리스 가까이 다가갔다.
“유한영.”
예외 없이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이불도 덮지 않고 뒤 돌아 있는 상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옹송그린 어깨를 살짝 흔들자 벽을 보고 있던 얼굴이 느릿느릿 재환을 향했다. 동그란 이마로 손을 가져간 재환은 그 위에 붙어 있는 몇 가닥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었다. 촘촘하고도 길게 난 속눈썹이 천천히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핸드폰은 왜 꺼 놨어.”
가능한 한 추궁하지 않는 투로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위로 뻗어 온 손이 재환의 뺨을 감쌌다. 지금의 행동이 답이 될 수는 없기에, 재환은 조금 답답한 마음으로 영 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얼굴에 닿은 엄지가 가만가만 입술을 문질렀다.
“유한영.”
간지러운 손길을 견디며 재환은 다시 한번 상대의 이름 세 글자를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꾹 다물린 입술은 벌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만 깜빡깜빡 감았다 뜨며, 한영은 재환의 얼굴 위에서 엄지를 움직이는 데에 집중했다. 뾰쪽 솟은 코끝, 볼록 튀어나온 눈 밑 살, 숱 많은 눈썹 사이로 엄지는 느리게 위치를 옮겨 갔다. 그럼으로써 한영은 꼭 재환이 거기 있음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사이 평소보다 나름 길게 유지되던 재환의 인내심이 스르륵 바닥을 드러냈다. 재환은 이제 자신의 귓불을 어루만지고 있는 한영의 손을 붙잡아 슬그머니 시트 위로 내렸다. 의외로 한영은 얌전히 재환의 저지를 받아들였다. 다만 다른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어느 틈에 허벅지로 올라와 살살 바지 위를 쓰다듬는 손도 붙들어 시트에 고정시킨 재환은 보다 고개 숙여 똑바로 한영을 바라보았다. 그가 대꾸를 하든 하지 않든, 이제는 할 말을 꺼내야 했다. 길을 걷는 내도록 느꼈던 서운함이나 허망함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으나, 그래도 한영과 저 사이에는 분명 나눌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조금 건조한 듯한 손등 위로 살포시 손을 포갠 재환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네 형이 아이돌인 줄 몰랐어.”
재환을 올려 보는 한영의 미간이 움찔, 하고 미세하게 좁아 들었다. 재환이 집에 돌아온 후 나름 처음 보이는 반응다운 반응이었다. 그 작은 변화에 힘입어, 재환은 한영의 손등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형 얘기 때문에… 오늘 중간에 나간 거야?”
이쯤 물으면 무언가 한마디라도 답이 나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한영은 여전히 지독한 묵비권을 행사했다. 잠시간 빤히 재환을 쳐다보다가, 그의 손바닥 아래서 쓱 손을 빼냈다. 곧이어 다시 위로 뻗어 온 손이 이번에는 재환의 목 뒤에 감겼다. 반사적으로 재환이 멈칫하는 틈을 타, 한영은 재환을 휙 아래로 잡아끌었다.
“으, 읍….”
피할 새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허둥지둥 매트리스를 두 손으로 짚은 재환은 어서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목덜미를 부여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준 한영은 뭉개지듯 맞닿은 입술 너머로 쑥 혀를 밀어 넣었다. 이 또한 피해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혀가 엉키고, 철떡 들러붙은 입술이 마구잡이로 비벼졌다. 그 사이로 뜨끈한 타액이 두서없이 뒤섞였다. 한순간 사람의 혼을 쏙 빼놓고도 남는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재환은 한영이 막무가내로 주입시키는 열기에 이대로 잠식될 수 없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또 그가 들려줬으면 하는 게 많았다. 한참 늦어졌지만, 이제라도 재환은 그와 진솔한 대화가 나누고 싶었다. 턱도 없는 바람이었다.
“유한…, 유한영…. 으읏!”
아예 매트리스 위에서 휘딱 몸을 뒤집은 한영은 단번에 재환과 우위를 뒤바꾸었다. 두 팔목을 잡아 올려 재환을 꼼짝 못 하게 내리누른 뒤, 귀밑, 턱선, 목을 따라 쭉쭉 끈적끈적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이 상황에서 재환이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곤 허리를 꿈틀대는 것뿐이었다. 버스럭버스럭 옷과 시트가 마찰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지금이라도 한영을 멈추어야 한다는 머릿속 경고가 차오르는 흥분에 잠식되어 결국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래서 하나씩 옷이 벗겨져 나가는 것을 재환은 막지 못했다.
툭툭 떨어진 옷가지가 바닥을 나굴었다. 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입술이 다리 사이에 닿았을 때, 더 이상 재환은 입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한영도 마찬가지였다. 침에 젖은 입술이 가린 것 없는 성기를 집어삼키고, 길쭉한 손가락이 메마른 주름을 비집었다.
그 자리에 선홍빛 성기가 밀려들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한영의 목을 끌어안은 재환은 아래를 가르는 쾌감과 고통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헐떡헐떡 신음했다. 한영 또한 뼈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재환을 부둥켜안고 미친 사람처럼 퍽퍽 허리를 치댔다. 완전히 풀리지 않은 입구가 벌그스름히 물들고, 민숭민숭한 사타구니에 거듭 부딪히는 볼기가 엇비슷한 색으로 달아올랐다.
그사이 단 한 번도 한영은 재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오로지 재환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일에만 몰두했다. 오히려 상대의 이름을 숨넘어갈 듯 터뜨리는 것은 재환이었다. 아프고, 버겁고, 이제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으나 들불처럼 번지는 열기에 새하얗게 타들어 갈 뿐이었다.
끝내 재환은 장기 가득 뜨거운 정액을 받아 낼 때까지 한영의 품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본인의 의지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재환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한영의 애처로운 발버둥임을.
과거, 재환 역시 이런 식으로 한영이 주는 안락함에 숨은 적이 있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이 한영을 품어 줄 차례였다. 염치를 아는 인간이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한데 왜 이리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인지, 재환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으읏….”
끙 소리를 뱉으며 몸을 뒤척이던 재환은 눈을 내려 제 배 위에 얹힌 새하얀 팔을 보았다. 두 번이었나, 세 번이었나. 횟수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연달은 사정 후 팔의 주인은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쌕쌕 고른 숨을 뱉을 때마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상대의 팔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시트 위에 얌전히 내린 재환은 재차 낑낑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삐걱삐걱 움직이는 뼈 마디마디에서 일순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졌다. 한참이나 두 다리를 활짝 벌린 모양새로 커다란 몸 아래 깔려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굵다란 성기가 콱콱 들이박히던 구멍은 아예 감각이 사라진 듯했다.
하나 그곳을 포함한 아랫도리가 정액으로 흥건한 상태임은 확실히 느껴졌다. 평소에는 언제, 어느 곳에서 섹스하든 늘 조심조심한 손길에 의해 꼼꼼히 닦이곤 했었는데,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꽁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천사처럼 잠든 얼굴 너머로 뻗어 나간 손이 협탁 위에서 휙휙 휴지 두세 장을 뽑았다. 끈적한 사타구니를 대충 문지른 후 보다 안쪽으로 손을 넣어 입구 주변도 쓱쓱 닦았다. 질척한 기운이 그럭저럭 가신 것을 확인한 재환은 한영을 건너뛰어 바닥으로 내려섰다.
아직 씻기는 영 귀찮고, 일단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속옷을 주워 들어 꿰입었다. 내처 티셔츠까지 위에 걸치고서 저벅저벅 현관 근처로 걸어 나갔다. 쪼그려 앉아 편의점 로고가 찍힌 봉지 속 술들을 확인하는 순간, 재환의 입에서 ‘아아….’ 하는 짜증 섞인 탄식이 작게 비어졌다. 캔맥주고 소주고, 당연하게도 술은 찬기가 가실 대로 가신 상태였다.
뒤늦게 냉장고에 술을 집어넣은 재환은 부러 남긴 맥주 캔 하나를 들고 한영이 누워 있는 매트리스 가까이 갔다. 매트리스 옆면에 등을 대고 앉아 캔 꼭지를 들어 올렸다. 새까만 입구에 입술을 붙여 맥주를 들이켜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생각보다는 그럭저럭 시원했다. 꽤나 목이 탔던 상태라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하긴, 좀 신음을 내질렀어야지.
괜히 얼굴로 뜨끈하게 열이 오른 재환은 얼른 다음 모금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러던 중, 저도 모르게 푹 눈이 구겨졌다. 엉덩이 사이에서 조르륵 흘러내린 액이 속옷을 축축이 적시는 감각이 선연했다. 빈말로도 괜찮다 하지 못할 찜찜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싼 거야,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에도 꾸물꾸물 흐른 정액이 속옷을 한층 더 새카만 색으로 물들였다. 그만큼 찜찜함도 배가 되었으나, 그냥 무시하는 쪽을 택한 재환은 연거푸 맥주나 마셨다. 어느새 비어 버린 캔을 뒤집어 입 속으로 마지막 몇 방울을 탈탈 털 무렵이었다.
“…재환아.”
잠깐 멈칫했던 재환은 천천히 상체를 뒤로 틀었다. 옆으로 누운 한영이 제법 또렷한 시선으로 재환을 올려 보고 있었다.
한영은 베개 빈자리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 뜻을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재환이 ‘어…?’ 하며 물었다. 그러자 앞으로 쭉 뻗어 온 손이 티셔츠에 감싸인 어깨를 잡아 슬쩍 당겼다.
“나랑 같이 있어.”
“아…, 응.”
그제야 한영이 바라는 바를 파악한 재환은 쥐고 있던 캔을 바닥에 내렸다. 여전히 관절 하나하나가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매트리스 위로 기어 올라갔다. 한영이 뒤로 물러난 자리에 누워 그를 마주 보자, 흘긋 눈을 아래로 내린 한영의 미간이 무언가 못마땅한 듯 살짝 주름졌다. ‘왜?’라고 물으려는 순간 티셔츠 자락이 훅 쇄골까지 말려 올라갔다.
“읏….”
새빨간 입술이 그 아래 드러난 가슴에 붙었다. 한영은 쪽쪽 소리가 나게 재환의 유두를 빨며 엉덩이 부근이 동그랗게 젖은 드로어즈 안으로 슬금슬금 손을 넣었다. 탄탄한 볼기를 몇 번 꾹꾹 주무르다가, 그 가운데로 쑥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으, 응….”
뿌연 정액이 채 다 흘러 나가지 못한 구멍 안에서 이리저리 손가락이 돌아다녔다. 입술 못지않게 새빨간 혀가 볼록 튀어나온 유두를 쉴 새 없이 할짝거렸다. 애매한 온도의 맥주로 그나마 갈증을 사그라뜨렸던 재환의 목구멍에서 또다시 절절 끓는 소리가 울리게끔 하는 움직임이었다.
끝내 재환은 가슴팍에 닿은 한영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움찔거리는 눈꺼풀 아래, 점점 혼탁한 빛을 띠기 시작하는 눈동자가 멀거니 천장을 향했다. 하나, 둘, 셋…. 아무 이유 없이, 목적도 없이 천장의 얼룩을 세던 재환은 문득 스스로에게 한 가지 물음을 던져 보았다.
우리,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답을 알 것만 같아, 재환은 그냥 콱 눈을 감아 버렸다. 덮쳐든 어둠 속, 비로소 한영이 흘려 넣는 쾌감만이 남았다. 이제는 그 쾌감으로 재환 자신이 도망갈 차례였다.
<5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