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 *
새해가 되었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 변한 것은 달력에 표시되는 숫자와 한 살 늘어난 나이뿐이었다. 그마저도 재환에게는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어차피 그는 올해도 변함없이 밴드 때문에 바쁘게 지낼 예정이었다. 일종의 바람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더 숨의 새해 첫 모임은 어김없이 합주가 되었다. 태군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아직 트리를 치우지 않은 덕에, 합주실 안에는 그럭저럭 화사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각자 악기를 쥐거나, 혹은 악기 뒤에 앉은 멤버들의 분위기는 썩 밝지 못했다. 연초부터 밴드에 반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온 까닭이었다.
‘더 숨’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전했던 대회에서 제법 좋은 성적을 낸 후, 그들은 비슷한 종류의 대회에 가능한 한 모두 지원서를 냈다. 밴드 경연의 경우 대게 동영상과 음원으로 1차 심사를 했는데, 이상하게 요 며칠 낙방했다는 결과만 줄줄이 이어졌다. 사실 이상하다는 거야 이쪽의 생각일 뿐, 딱 잘라 말해 더 숨의 노래나 연주가 심사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니 합주 도중 자꾸 집중력이 떨어졌다. 특히 재환이 그랬다.
“오늘 합주는 이쯤 할까?”
불량한 상태를 눈치챈 지우가 던진 말에 잠시간 멍해 있던 재환은 퍼뜩 고개를 저었다. 무릎에 눕혀 놓았던 기타도 얼른 세웠다.
“아냐, 계속하자. 좀 멍때리고 있었네. 미안.”
다만 재환이 합주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바로 지금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녀석 때문이었다. 재환은 아무래도 한영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그야, 당연히 미안해서.
도둑놈처럼 밤에 몰래 찾아왔다 간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동생과 악다구니하느라 그날 그에게 간다 못 간다 연락을 하지 못한 건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물론 후에 제대로 연락하여 나름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재환은 좀처럼 한영을 향한 미안함이 떨쳐지지 않았다. 차라리 제게 화난 기색이라도 내비치면 좀 나을 텐데, 문제의 날 이후 오늘 처음 마주한 한영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였다. 그 모습이 어째서인 재환의 죄책감을 한결 자극했다.
“그럼 조금만 쉬었다 하자. 그건 오케이?”
이번에는 굳이 고개를 저을 필요가 없었다. 재환은 가뿐히 지우에게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노드의 전원을 끈 한영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쏙 합주실 문밖으로 사라지는 분홍 뒤통수를 쳐다보던 재환은 저도 슬그머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합주실을 나선 재환은 벌써 한참 위로 멀어진 듯한 발소리를 좇아 서둘러 계단을 밟았다. 1층 복도로 올라서서 좌우로 홱홱 머리를 돌렸지만, 어디에서도 분홍색 머리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눈썹을 찌푸리는 순간 갑자기 팔이 휙 옆으로 잡아끌렸다.
“어어…!”
곧이어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방금 전까지 복도를 살피던 재환은 어언간 발 한 번 들여 본 적 없는 좁은 공간에서 한영을 마주 보고 있었다. 놀란 마음이 커 심장이 다 콩콩 뛰었다. 급히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피자, 창고처럼 보이는 좁은 방 안에는 비닐에 덮인 크고 작은 물건들이 빼곡히 겹쳐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각품이나 그림 따위의 미술품들이었다. 지금까지 재환은 미처 몰랐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놀란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재환은 다시 한영을 보았다.
“…깜짝 놀랐네.”
“미안.”
재환은 일순 속으로 아…, 했다. 근래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어 평소에는 대개 괜찮았던 한영의 ‘미안’ 소리가 영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여 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한영에게 답삭 허리가 안겼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한층 좁혀지며 뽀얀 얼굴이 재환의 시야를 크게 메웠다
“유한영….”
“나 삐졌어, 재환아.”
어렵사리 뗐던 말문이 도로 닫혔다. 삐졌다는 사람치고 한영의 표정이 너무 순해 보이는 탓도 있었고, 그럼에도 말 못 하게 양심이 콱콱 쑤신 탓도 있었다.
그사이 몸을 더 밀착해 오는 한영을 내버려 둔 채, 재환은 내리뜬 눈을 불안정하게 좌우로 굴렸다. 모자란 말주변으로 어떻게 해야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할 수 있을지 나름 부지런히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끝내 잔뜩 의기소침해진 투로 ‘미안….’이라는 변변찮은 한마디를 웅얼거릴 즈음이었다. 재환의 허리 뒤로 꽉 깍지를 낀 한영이 그게 아니라는 듯 살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서 톡 코끝을 맞대었다.
“키스해 줘야 풀릴 것 같아.”
따뜻한 숨결이 입술을 간질이는 거리에서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가 상당히 진지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던 재환의 시선이 급히 휙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은근하게 하반신을 압박해 오는 고간이 무시 못 할 정도로 불룩이 부풀어 있었다. 그 상태로 한영은 자연스럽게 성기를 비비적거렸다. 본인도 이러한 행동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응?”
동시에 살짝 조급한 감이 있는 채근이 떨어졌다. 그제야 재환은 뜻밖에도 한영이 적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영은 그가 아는 방식대로 재환의 애정을 확인하며, 또 갈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환은 한영이 충분히 그럴 만한 여지를 제공한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의 불안감을 해소해 줄 의무가 있었다.
“재환아, 키스….”
재차 밉지 않게 재우치는 한영의 목을 두 손으로 턱 부여잡은 재환은 주저 않고 입술을 부딪쳤다. 맞닿은 입을 크게 벌리자마자 한영이 기다렸다는 듯 혀를 엮어 왔다. 2층 그랜드 피아노의 주인이 취향 따라 모은 물건들로 가득 찬 공간. 어느새 그곳이 허겁지겁 숨과 타액을 섞는 질척한 소리로 빈틈없이 메워졌다.
그 와중 저 아래서 재환의 손이 입과 혀 못지않게 바지런히 움직였다. 어느새 한영의 바지 끈을 끄르고, 드로어즈를 내리고, 발기한 성기를 밖으로 꺼낸 재환은 단숨에 몸을 낮춰 한영 아래 무릎 꿇었다.
“재환아…!”
격정적으로 비벼 오던 입술이 사라져 놀란 마음 반, 그 입술이 떡하니 제 성기 앞으로 옮겨 가 놀란 마음 반으로 한영은 다급히 재환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었다. 그러나 어찌해 볼 틈도 없이 축축한 입 속으로 성기가 빨려 들어갔다.
“읏….”
한 번에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성기를 쑤셔 넣은 재환은 긴장으로 딱딱해진 엉덩이를 붙잡아 고정시킨 뒤 서둘러 얼굴을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 합주 중 잠시 쉬는 시간임을 상기하며 혀도 열심히 움직였다. 오롯이 제 의지로 인해 귀두가 쿡쿡 목젖을 찌를 때마다 어깨가 들썩였지만, 한영을 빨리 사정시켜야 한다는 마음이 버거움을 이겼다. 혓바닥에 한가득 고인 특유의 맛과 향을 인지할 여유도 없었다. 뭐, 애초부터 한영의 냄새를 역하다 느낀 적도 없긴 하다마는. 재환은 그저 열과 성을 다해 한영의 좆을 빨았다.
“재, 환아…. 하아….”
재환이 밀어붙이는 힘이 워낙 거세 뒷걸음질 치던 한영은 끝내 좁은 창고 벽에 쿵, 등을 부딪쳤다. 그곳에 기대어 있던 두툼한 캔버스 하나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넘어졌으나, 누구 하나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기실 한영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작품도 아니었으므로 그림이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없었다.
대신 한영은 짐짓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검정 머리통 안으로 손을 넣었다. 굵다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움키고 허리를 털었다. 이러면 재환을 더 힘들게 할 수 있음을 머리로는 어렴풋이 인지했지만, 흥분이 지나쳐 행동이 잘 제어가 안 되었다. 계속해서 뜨거운 숨만 비어졌다.
“후우…. 재환아….”
“으, 음….”
머지않아 재환의 목구멍에 처박힌 성기에서 뜨듯한 정액이 터졌다. 꿈틀거리는 성기가 더 이상 아무것도 쏟지 않을 때까지 재환은 악착같이 입을 떼지 않았다. 내처 목울대를 움직여 야릇한 맛의 액을 삼키려는 때였다.
“읏…!”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온 손이 훌쩍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재환은 단번에 한영과 위치가 뒤바뀌었다. 종전까지 한영이 등을 대고 있던 벽에 등허리를 부닥치며 속절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야, 으읍…!”
마구잡이로 혀가 엉키고, 한 사람의 입 안을 적시던 허연 액체가 자연히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성급하게 비벼지는 입술 주변도 같은 색으로 범벅되었다. 제 정액을 먹는 한영의 이상한 짓을 멈추기 위해 재환은 제법 부단히 반항했지만, 그럴수록 깍지 낀 손이 작은 머리통을 꽉 조였다. 벗어날 구석이 없었다.
“읍….”
끈덕지게 입 맞추던 한영은 재환의 입에 침 말고는 더 남은 것이 없을 즈음에야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 후에도 인중, 입꼬리 등 입 언저리에 몇 번이나 쪽쪽 입 맞추며 허옇게 번진 정액을 샅샅이 핥아 갔다. 하는 수 없이 한영을 말리기는 포기했으나, 여전히 재환의 표정은 썩 편치 않았다. 방금 일은 지금껏 한영이 보인 이해 못 할 행동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혔다. 만약 같은 일을 제게 해 보라 한다면 부디 사절이었다.
비로소 해죽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한영을 한 번 대차게 흘겨 준 재환은 아직 밖에 덜렁 나와 있는 그의 성기를 찬찬히 드로어즈 안으로 넣어 주었다. 그게 또 기분 좋은지 한영은 작게 숨죽여 웃었다. 내처 트레이닝바지의 허리끈까지 곱게 리본 모양으로 묶어 주던 재환은 종내 불편한 심기를 참지 못하고 불퉁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걸 왜 먹어, 왜.”
배꼽까지 기어 올라간 티셔츠 자락을 다소 거칠게 쑥 아래로 끌어 내렸다. 핀잔을 듣고도 여전히 유순하게 웃던 한영은 슬그머니 재환 뒤로 팔을 둘렀다. 커다란 손에 꽉 엉덩잇살이 움켜잡힌 재환의 얼굴이 자연스레 ‘이건 또 무슨….’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재환이 네 입에 있는 건 다 좋아. 다 먹고 싶어.”
그래. 그러겠지. 그러시겠지….
더 한영을 타박하는 대신 푹 한숨을 내쉰 재환은 다소 흐트러진 분홍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쓱쓱 빗겨 주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몇 번 재환이 만지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얌전히 제자리를 찾았다. 한영도 마찬가지로 제 손에 쥐이느라 부스스하게 일어났던 재환의 머리를 꼼꼼히 빗어 정리해 줬다. 사실 묘하게 나른하면서도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내심 재환을 이대로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모습을 다른 멤버들에게 보이는 건 한영으로서 조금 곤란했다. 특히 지우가 보는 게 싫었다.
얼추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두 사람은 슬슬 나가자는 눈빛을 교환했다. 이윽고 한영이 문고리를 쥐었을 때, 뒤에 있던 재환이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붙잡았다. 한영이 뒤를 돌았다.
“…기분 풀렸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리며 묻자 한영의 눈이 설핏 동그래졌다. 그러다 이내 입매를 둥글게 휘며 재환의 이마에 쪽, 하니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뒤이어 보드라운 입술은 더 아래로 향했다. 살점이 스치는 정도로만 재환에게 가볍게 입술을 맞댄 한영은 언뜻 그를 헷갈리게 하는 말을 속삭였다.
“사실 안 삐졌어.”
“어…?”
“근데 좀 슬펐어.”
“아….”
양미간을 폭 구겼다 편 재환은 손바닥으로 한영의 말간 뺨을 감쌌다. 오늘 중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저릿저릿 저려 오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를 마땅히 가라앉힐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재환은 다시금 한영에게 깊이 입술을 눌렀다.
“이제 합주…, 음….”
답지 않게 합주를 걱정하는 말도 가뿐히 무시했다. 촉촉한 입 속에 쑥 혀를 밀어 넣고 가능한 한 어느 한 곳 빠짐없이 정성스럽게 훑었다. 지금 저 하는 행동이 꽤나 비겁한 방식의 사죄라는 자각은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달콤한 언사 같은 것은 처음부터 재환에게 무리인 일이었다.
보다 진득이 혀를 얽다 마침내 입술을 떼었을 때, 한영이 반들반들해진 입술을 움직여 혼잣말하듯 솔직한 심정을 중얼거렸다.
“내려가기 싫다….”
“그러게.”
자연스럽게 대답하던 재환은 지레 놀랐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합주를 등한시한 적이 없었는데, 방금이 딱 그런 상황인 것 같았다. 아쉬운 듯 옴찔거리는 입술에 정말 마지막으로 콱 입술을 붙였다 뗀 재환은 상대보다도 먼저 손을 뻗어 창고 문을 열었다.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좌우를 살피자 다행히 복도에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 틈에 한영이 재환을 지나쳐 쏙 문을 빠져나갔다. ‘가자, 재환아.’ 하며 지하와 연결된 계단 쪽으로 걸음을 틀기에, 아연한 재환은 다급히 한영의 팔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 양치해야지.”
먹은 것도 없는데 양치는 왜 하냐는 한영에게 네가 먹은 게 왜 없냐고 다그치며 얼른 화장실로 이끌었다. 친히 그의 손에 치약 짠 칫솔을 쥐여 준 뒤 재환 자신도 칫솔을 쥐고 바지런히 양치질했다. 급한 와중에도 구석구석 이를 닦고 물로 헹궈 내니 한결 마음 놓이는 상쾌함이 찾아왔다. 적어도 한영과 무엇을 나눠 먹었는지 다른 멤버들에게 들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화장실을 나선 재환은 다시 한영을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부지런히 계단참을 돌던 중, 본의 아니게 두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저 아래, 계단 맨 아래 칸에 앉아 있는 이의 보송보송한 뒤통수가 보였다. 태군이었다. 놀랍게도, 연말 공연 후 태군은 드디어 머리칼을 기르는 중이었다. 여자 친구가 가발 쓴 모습을 보고 그렇게 좋아했다나. 마침 태군은 그 여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 하면….
“우리 애기 많이 아야 해? 병원은 갔오? 기침은? 아이, 감기가 빨리 안 나아서 어뜨캐….”
핸드레일을 짚고 있던 재환의 손에 저도 모르게 꽉 힘이 들어갔다. 눈썹 사이도 마찬가지로 잔뜩 경직됐다. 마카롱 백 개는 삼킨 듯한 통화 내용에 결국 ‘으윽’ 소리가 비어지는 찰나, 커다란 손바닥이 푹 입가를 덮었다. 휙 눈을 옆으로 돌리자 입술에 검지를 댄 한영이 재환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재환은 쑥 눈썹을 들추며 눈빛으로 ‘왜?’라는 물음을 건넸다. 씩 미소 짓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한영은 마치 고양이가 걷듯 살금살금 남은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가까이 다가간 태군 뒤에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원숭이 귀처럼 톡 튀어나온 동그란 귀 옆에 입을 갖다 댔다. 그리고.
“태군아-.”
“흐아악!”
남은 합주를 하는 내내, 재환은 친구의 얼굴이 시시각각 붉어졌다 퍼레지기를 반복하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멤버들에게 통화 내용을 들킨 게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던지 태군은 드럼을 치며 한시도 낯빛을 가만두지 못했다.
그런 태군이 귀엽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재환은 어느새 피식피식 웃으며 썩 즐거운 마음으로 기타를 연주했다. 어떤 의미로든 이 자리에 있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 셈이었다. 물론 한영과 짧고 굵게 농밀한 시간을 보낸 원인도 컸다. 다만 사이좋게 치약 냄새를 풍기는 두 사람을 보며 지우가 ‘껌 씹어?’ 하고 물었을 때는 그야말로 숨도 못 쉬었다. 다행인지 다행이 아닌지, 그 반응을 본 지우는 두 번 묻지 않았다.
합주가 끝나고서도 태군은 슬금슬금 재환과 한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던 중 재환이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는 핸드폰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큰 소리를 냈다.
“야, 서재환! 너 폰이 왜 그래?”
나머지 멤버들의 시선도 재환의 손에 들린 핸드폰으로 집중되었다. 도리 없이 머쓱해진 재환은 슬그머니 핸드폰을 움키며 뒷목을 긁적거렸다.
“아…. 전에 쓰던 핸드폰 고장 나서.”
“그럼 그건?”
“급한 김에 중고로 샀어.”
간략히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재환 눈에도 핸드폰 상태가 심히 심각해 보이기는 했다. 중고 거래 사이트를 뒤져 가장 빨리, 가장 싸게,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있는 물건으로 찾아 거래한 핸드폰은 그야말로 작동을 하는 게 경이로운 수준의 몰골이었다. 모서리는 죄다 깨졌으며, 여러 갈래로 금이 간 액정에는 둘둘 투명 테이프까지 감겨 있었다. 그럼에도 사용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다. 믿을 수 없지만, 전화도, 메시지도 다 잘 되었다.
“와…. 그래도 그건 좀 심하다.”
“겉 빼곤 멀쩡해.”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웃겨 재환은 픽, 하니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빨리 시간만 확인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다가 이쪽을 빤히 보는 한영과 눈이 마주쳤다. 핸드폰 꼴이 하도 끔찍한 탓에, 한영 또한 태군 못지않게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재환으로선 적어도 다음, 혹은 다다음 월급을 받을 때까지는 이 핸드폰을 조심히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영에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재환은 악기나 마저 정리했다.
“아, 오늘 같이 짜장면이나 시켜 먹을까? 중국집 좀 당기는데.”
얼추 재환이 정리를 끝냈을 무렵, 일찌감치 베이스를 가방에 넣은 지우가 멤버들을 향해 물었다. 내심 배가 고팠던 태군이 재깍 ‘좋지!’ 하고 반색했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재환은 기타 가방을 어깨에 멨다.
“나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알바 있어.”
“지금부터?”
기실은 없던 스케줄이었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 못 나오는 아르바이트생 대신해 재환이 출근을 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재환은 ‘응, 바로 가야 돼.’ 하고 짧게 답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짜장면이 별로 먹고 싶지 않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먹었을 때의 기억이 썩 좋지 않았으므로.
‘헐, 배고플 텐데.’라며 태군이 나름 친구 걱정을 할 즘, 여지없이 재환의 눈이 한영과 부닥쳤다. 한영의 얼굴에 못내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너랑 더 같이 있고 싶어, 라는 말을 속으로만 삼킨 재환은 허리 숙여 페달 보드 가방의 손잡이를 쥐었다.
“난 먼저 갈게. 다들 짜장면 먹고 가.”
안 그래도 시간이 넉넉지 않았던 재환은 멤버들에게 손을 흔든 뒤 곧바로 합주실을 나섰다. 열었던 문을 도로 닫기 위해 복도에 서서 문고리를 미는 차였다. 좁아지는 문틈으로 재환은 또 한 번 한영과 시선이 잇닿았다. 손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어 얼굴 가까이 댄 한영이 재환에게 나중에 통화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깐이라도 좋으니 목소리 좀 들려 달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재환은 두꺼운 문을 꾹 눌러 닫았다. 발을 틀어 약하게 노을빛이 흘러드는 계단을 제법 씩씩하게 올라갔다. 이제는 열심히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급한 일이 생겼다던 아르바이트생은 끝내 며칠 후 카페를 관두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아무래도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 같았다.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다른 이들은 그녀에 대해 저마다 물음표를 던졌다. 무슨 일이기에 잘하던 아르바이트까지 관두느냐고. 그 와중 재환만이 침묵을 지켰다. 남에게 관여하기를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을뿐더러, 살다 보면 언제든 뜻하지 않은 일을 맞닥뜨릴 수 있음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것이 좋은 일이 되었든, 나쁜 일이 되었든.
이를테면, 함께 살던 가족이 난데없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은 재환에게 있어 나쁜 일이었다. 반대로 지금의 밴드를 만난 건 또 행운과 같은 일이었다. 이처럼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어떠한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섣불리 낙담하거나 절망할 필요 없었다. 호들갑 떨며 기뻐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좌우간 갑자기 일손이 부족해진 카페에 재환은 더 자주 출근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모자란 시간에 제가 더 일하겠다 사장 세훈에게 말한 결과였다. 밴드까지 하면서 괜찮겠느냐고 세훈은 은근히 재환을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지금 재환에게는 밴드를 열심히 하는 것만큼 돈을 열심히 버는 일도 중요했다. 돈 없으면 음악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고 진리였다. 이를 무시한 채 ‘기타나 존나 치면 되지!’라는 생각을 할 만큼 재환은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요 며칠 틈날 때마다 한영의 집을 들락거리며 믹싱까지 하느라 잠을 거의 못 자다시피 한 재환은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자꾸 일하는 중 하품이 나왔다. 그 모습이 자연스레 함께 일하던 희연의 염려를 샀다.
“오빠, 많이 피곤하세요?”
“아냐. 그냥 요새 잠을 좀 못 자서.”
뒤이어 재환은 희연이 흠칫 놀랄 정도로 양 뺨을 세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살갗에 얼얼한 통증이 번지고 나서야 눈이 좀 말똥말똥 뜨이는 기분이었다. 실로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이만큼 즉각적인 것도 없었다. 잠깐 볼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부작용만 잘 넘기면 되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갈 즈음이 되자 카페에 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시 하품을 하려고 해도 할 여유가 없을 정도였다. 한 사람은 정신없이 주문받고, 또 한 사람은 미친 듯이 음료를 만드는 사이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테이크아웃 손님이 한차례 빠져나간 매장 안에는 인제 여유 있게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는 손님들만 남았다. 퇴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재환은 오늘 저보다 늦게까지 근무하는 희연을 대신해 행주를 쥐고 홀로 나섰다.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 주고자 함이었다.
재환은 부지런히 홀을 돌아다니며 밖에 나와 있는 의자를 집어넣고 테이블에 떨어진 케이크 부스러기 따위를 깨끗이 닦았다. 손님들이 미처 갖다 주지 않고 간 쟁반과 컵도 함께 정리했다. 휴지, 빨대 따위가 있는 셀프 바도 한 번 체크한 후 더 할 게 없나 두리번거리던 중, 가까이 있던 카페 문이 열렸다.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간 재환의 두 눈이 적잖은 놀라움으로 인해 커다래졌다.
“엄마…?”
본인이 결제한 커피 두 잔과 케이크를 쟁반에 담은 재환이 중년 여성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할 때, 막 출근한 상지가 후다닥 희연에게 달려갔다. 상지는 호기심이 잔뜩 어린 표정으로 얼른 친구에게 소리 낮춰 물었다.
“헐. 누구야?”
“재환 오빠 어머니이신가 봐.”
“진짜? 되게 미인이시네.”
“오빠도 미….”
미남이잖아, 라는 말을 차마 끝맺지 못한 희연은 합, 입을 다물었다. 재환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상지 앞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린 지는 이미 한참이었으나, 그렇다고 굳이 더 티 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희연은 번번이 주책맞은 실수를 저질렀다. 이를 놓치지 않은 상지가 예외 없이 씩 웃으며 저보다 키 한 뼘은 작은 희연의 어깨에 척 팔을 둘렀다.
“재환 오빠가 미남이기는 하지? 그지?”
“시끄러, 이상지.”
“왜?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은 주문하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얼마간 더 옥신각신했다. 그 무렵 재환과 그의 어머니가 마주 앉은 테이블에는 다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 사람은 상대가 짠해서 그랬고, 또 한 사람은 상대에게 죄스러워 그랬다. 짠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환아.”
“…응.”
“왜 엄마한테 말 안 했어.”
커피 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재환의 눈머리가 미약하게 구겨졌다. 어머니의 말에서 생략된 목적어를 능히 짐작한 까닭이었다. 그 와중 잔을 꼭 쥐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이 여전히 버석버석해 보여, 재환은 괜히 더 표정이 딱딱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어머니는 제가 준 핸드크림을 잘 바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쓰기 아깝다는 이유 때문일 터다. 재환은 테이블 가운데 있던 케이크 접시를 쓱 자신의 반대 방향으로 밀었다.
“이거 맛 좀 봐 봐. 우리 가게 케이크 맛있어. 엄마 옛날에 이런 거 좋아했잖아.”
머뭇거리던 어머니는 포크로 케이크 귀퉁이를 작게 썰어 입에 넣었다. 잠시 후 ‘맛있네.’ 하며 도로 접시를 재환 가까이 밀었다. 내밀어진 케이크를 재환이 조금 떠먹고 나서야 그녀는 한 입을 더 먹었다. 케이크가 4분의 1 정도 줄었을 즘 어머니는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왜 재희 얘기 엄마한테 안 했는데.”
“하면 뭐. 엄마가 돈 주게?”
“그래야지.”
손에 있던 포크를 내려놓은 재환은 폴폴 김이 나는 커피를 훅 들이켰다. 예상대로 커피는 아직 식지 않아 꽤나 뜨거웠다. 그렇다고 호들갑 떨며 펄펄 뛸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답답한 마음이 컸다. 만약 재희가 날린 돈이 제 돈이 아니라 어머니의 돈이었다면, 재환은 그녀를 더욱 쥐 잡듯이 잡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해 돈 버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엄마도 돈 없으면서. 이 얘기 그만할래. 나 이제 신경 안 쓸 거니까.”
어쨌거나 재환은 더 이상 이 문제로 골머리 앓기 싫었다. 처음 재희에게 돈을 내어 줄 때부터 돌려받을 생각일랑 하지도 않았었고, 따라서 그녀가 학원을 때려치웠든 말든 엄밀히 말하면 재환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제야 동생이 뭘 좀 진득이 해 보려는 줄 알았는데, 뻔한 결과가 된 것 같아 재환은 그게 참 실망스러웠다. 정말… 그뿐이었다.
“재환아.”
“오신 김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 시간이 좀 애매한가.”
“서재환.”
테이블을 가로질러 뻗어 온 건조한 손이 재환의 손을 꼭 쥐었다. 그 탓에 모자란 말재간으로나마 대화를 다른 쪽으로 돌려 보려던 어설픈 시도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꾹 입을 다문 재환은 대답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에게 이런 상황은 여러 가지로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를 더 불편하게 하는 한마디가 마른 입술 새에서 떨어졌다.
“엄마가 미안해.”
씨발. 차마 이 자리에서 내뱉을 수 없는 험한 욕이 입 안에 고였다. 잘못한 거 하나 없는 어머니가 난데없이 사과를 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재환은 어금니를 사리물고 눈썹 사이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요동치는 마음을 어떻게든 눌러 앉히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온종일 물에 닿아 거칠거칠해진 손바닥에서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재차 아들의 손을 꽉 쥐어 왔다.
“이거 받아.”
그러고는 테이블에 닿은 손바닥 밑에 종이봉투를 밀어 넣었다. 재환의 눈알이 휙 그곳으로 굴러갔다 다시 정면을 향했다.
“이게 뭔데…?”
“이백만 원은 다 못 넣었어. 그래도 몇 달 월세는 낼 수 있을 거야. 얼른 옷 안에 넣어.”
뒤늦게 콱 표정을 일그러뜨린 재환은 황급히 손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예 몸을 반절 일으켜 재환의 점퍼 안으로 꾹꾹 봉투를 찔렀다. 봉투를 받기도 싫고, 일하는 카페에서 소란을 일으키기도 싫었던 재환은 그야말로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오죽하면 눈가로 열이 다 몰렸다.
“나 이런 거 필요 없어…!”
“너 이럴 거야? 엄마 이제 식당 가 봐야 돼.”
“그니까 좀!”
카운터에 서 있는 상지와 희연이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다른 손님들도 내심 궁금한 눈빛으로 재환을 흘끔거렸다. 지난번 재희가 찾아왔을 때와 참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억장이 무너지지 않았다. 대학생 아들이 어머니한테 돈 좀 받는 게 뭐 그리 유난 떨 일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재환은 어머니에게 손 벌리기 죽어도 싫었다. 같잖은 자존심이든, 억지로 끌어모은 효심이든 상관없었다.
“빨리, 재환아. 엄마 이러다 지각해…! 그럼 이모랑 사장님한테 혼나.”
“아, 진짜….”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 감정에 호소하려는 어머니와, 이를 필사적으로 모른 체하려는 아들의 실랑이가 조금쯤 더 이어졌다. 그러다 어머니는 급기야 재환을 쩍 굳게 만드는 협박을 내놓았다.
“너 이거 안 받으면 엄마 두 번 다시 네 얼굴 안 봐.”
울기 직전의 얼굴로 연을 끊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어머니를 재환은 망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겠다, 안 그러겠다, 그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사이 기어이 재환의 점퍼 안쪽에 봉투를 찔러 넣은 어머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환은 여전히 무어라 말을 못 한 채 어머니를 따라 삐걱삐걱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엄마 정말로 식당에 늦었어. 간다.”
빨리도 걸음을 옮긴 어머니는 어느새 카페 문을 나섰다. 이제 테이블에 남은 것은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한 커피와, 반도 더 남은 케이크와, 당장 울고 싶은 걸 참는 재환뿐이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이 창 너머로 서둘러 버스에 올라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좇았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버스는 문이 닫히자마자 재빠르게 떠났다. 그제야 재환은 어머니가 탄 버스가 식당 쪽으로 향하는 노선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하…. 웃음도 한숨도 아닌 소리가 나지막이 비어졌다. 봉투가 닿은 가슴께에서 욱신욱신 통증이 번졌다.
납덩어리가 든 것도 아닌데 점퍼 안주머니에 넣은 봉투가 한없이 무거웠다. 그래서인지 재환은 지금껏 매일 같이 걸었던 길이 마치 천 리 길처럼 느껴졌다. 걸음은 죽죽 처지고, 설상가상 해가 지며 더 심하게 불어닥치는 바람이 귀가를 방해했다. 최근 충분한 숙면을 취하지 못해 몽롱한 정신도 느려지는 걸음에 한몫했다.
점퍼 주머니에 푹 두 손을 찔러 넣고 힘없이 터덜터덜 걷기를 한참, 저기 저 골목 끝에서 드디어 익숙한 건물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낡디낡은 5층 주택을 바라보는 재환의 마음에 ‘곧 집이다’라는 미미한 안도감이 번졌다.
한시라도 빨리 코끝을 얼게 하는 추위를 피하려 걸음걸이를 재촉할 때였다. 주머니 안에서 손에 닿아 있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도 진동했다. 밖으로 손을 빼낸 재환은 이렇게 달달 떨리다 꼭 바스러질 것 같은 모양새의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환…, …디야?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던 재환의 미간이 폭 움츠러들었다. 전파가 문제인 건지, 기계가 문제인 건지 상대의 목소리가 뚝뚝 끊겨 좀체 내용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핸드폰에서 얼굴을 떨어뜨려 화면을 확인해 보았으나 전파 수신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시 귀에 핸드폰을 댄 재환은 일단 상대에게 짧게 통보했다.
“유한영. 전화가 이상해. 내가 다시 걸게.”
일시적인 문제이기를 바라며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걸었다. 하지만 재환의 바람을 비웃듯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 재…, 아직, …려?
여전히 듣기 싫게 말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핸드폰 스피커에 귀를 바짝 대고 있던 재환은 결국 푹 한숨을 흘렸다. 대화가 통하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반, 그래도 기능은 멀쩡한 줄 알았던 핸드폰을 향한 짜증이 반이었다. 마침 홱 불어온 칼바람이 머리칼을 온통 산발로 흩트렸다. 앞으로 쏟아진 머리가 성가시게 눈알을 찌르는 가운데, 재환은 끝내 다 포기한 마음으로 맥 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아직도 잘 안 들리네. 폰이 아예 맛이 갔나 봐. 오늘은 피곤해서 믹싱 못 갈 것 같고,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환, 아….’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핸드폰의 통화 종료 아이콘을 꾹 눌렀다. 이대로 핸드폰을 길바닥에 버려 버리고픈 충동이 치밀었지만, 애써 누그러뜨리며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어쩌면 아까보다 더 느려진 걸음으로, 재환은 그새 꼭 저만치 뒤로 달아난 듯한 집을 향해 터벅터벅 발을 뗐다. 지금은 그저 모든 것이 피곤할 따름이었다.
피곤함과 귀찮음이 넘친 나머지, 집에 온 재환은 라면으로 대충 저녁을 때웠다. 평소 같았으면 최소한 파를 썰어 넣고 계란을 푸는 정도의 정성은 들였겠으나, 그마저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심지어 물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멀건 라면에서는 일전 한영이 엉망진창으로 끓였던 라면과 비슷한 맛이 났다. 그럼에도 재환은 크게 개의치 않고 꾸역꾸역 먹었다.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더불어 라면을 잔뜩 채워 주고 간 한영에게 속으로 심심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최근 귀찮은 날이 많아서였는지, 그사이 라면은 제법 줄었다.
오늘은 한영의 집에 믹싱을 하러 가지 않았으므로 이제 남은 시간은 기타를 연습하며 보냄이 마땅했다. 재환 스스로도 늘 상기하는 것이었지만, 원래 악기 연습에는 끝이 없는 법이었다. 무릇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 연습을 소홀히 하면 안 되었다. 단, 그것도 사람에게 최소한의 의지가 있을 때나 가능한 얘기였다.
벽에 붙인 베개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재환은 손바닥에 받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연신 낄낄거렸다. 잘 몰랐는데, 요새는 동영상 사이트를 조금만 뒤져 보아도 배꼽 빠질 만큼 웃긴 영상들이 넘쳐났다. 축구 경기 중 어이없이 골이 들어가는 장면, 이상한 자세로 잠든 고양이, 각종 방송 사고…. 하나가 끝나면 알아서 뒤따라 재생되는 영상들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훅훅 지나갔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웃은 덕에 스트레스도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왠지 그런 기분이었다.
통화는 안 되는 대신 영상은 잘 나오는 기특한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재환은 그만 깜빡 졸았다. 아까 동영상에 나온 고양이처럼 불편하게 목이 접힌 자세였다. 눈을 뜨면 기억도 안 날 개꿈을 몰아 꾸던 재환은 이윽고 콩콩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부스스 잠에서 깼다. 갖가지 황당한 꿈에 절여 있던 정신이 영 혼몽했다.
콩콩. 다시 같은 소리가 났다. 누구야…, 중얼거리며 비칠비칠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벅벅 뒷머리를 긁으며 문을 열자, 겨울 추위 따위 모조리 비껴간 듯 산뜻한 외관을 한 남자가 어두컴컴한 복도에 서 있었다.
“유한영…?”
“미안, 재환아…. 보고 싶어서.”
재환은 한영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군말 없이 문을 활짝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서 얼룩 하나 없는 밝은색 가죽 워커를 벗는 그를 보며 문득 ‘열쇠는?’ 하고 물으려다 관두었다. 먼젓번 한영이 열쇠로 이 집 문을 열고 들어와 있었을 때, 제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뻔히 기억하는 탓이었다. 더러운 성질머리를 어쩌지 못하고 기껏 저를 보러 와 준 사람을 그대로 내쫓았었다지. 번번이 한영을 상처 입히고 마는 자신도, 그래도 굴하지 않는 한영도 참 대단하다 싶어 재환은 무심코 힘 빠진 웃음이 흘렀다. 가슴 한구석이 조금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저녁 먹었어?”
목에 두르고 있던 얇은 녹색 머플러를 푼 한영이 살살 고개를 저었다. 재환은 그의 고정석인 매트리스 앞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앉아 있어.’ 했다. 살포시 미소 짓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한영은 누런 장판 위에서 사뿐사뿐 발을 뗐다. 또 무엇을 가져왔는지 매트리스에 등을 대고 앉은 그는 옆자리에 작은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아무렴 이번에도 라면은 아니겠지 싶었다.
슬그머니 보일러 온도부터 올린 재환은 며칠 전 끓여 놓았던 김치 콩나물국과 반찬 몇 가지를 꺼내 앉은뱅이책상 위로 간단히 상을 차렸다. 아무래도 혼자서 먹게 하기는 조금 마음에 걸려 반의반만 채운 밥공기를 들고 한영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늘 그랬듯, 한영은 빈말로도 푸짐하다 할 수 없는 상을 내려다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맛있겠다.”
그런 말을 들을 차림이 아님을 제가 더 잘 알기에 재환은 ‘계란프라이라도 해 줄까?’ 하고 물었다. 하나 한영은 이미 밥 한 숟갈을 크게 떠 입에 넣고 있었다. 볼을 우물거리며 ‘갠찬아.’라고 답한 한영은 젓가락으로 야무지게 콩자반도 집어 입에 넣었다. 풋, 웃은 재환은 손을 뻗어 하얀 턱에 묻은 깨를 엄지로 닦아 주었다. 깨는 재환의 입술 사이로 쏙 사라졌다.
혹 점심도 거른 걸까 싶을 정도로 한영은 밥 한 공기를 금세 뚝딱 비웠다. 더 줄까, 물었더니 조금의 고민도 없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은 듯 만 듯했던 자신의 밥을 한참 전 다 먹은 재환은 두 번째 밥그릇을 받고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는 한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근 그의 집에 가서 성실히 믹싱만 하고 돌아왔던 것이 불현듯 생각났다.
“유한영.”
“응?”
“밥 다 먹고 섹스할까.”
꼭꼭 음식을 씹던 한영의 눈이 회동그래졌다. 쿨럭, 기침을 삼킨 한영은 꼭 못 들을 얘기를 들은 것처럼 놀란 토끼 얼굴을 하고 재환을 보았다. 반면 재환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한영에게 쓱 물컵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컵을 받아 든 한영은 재차 콜록거리면서도 한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다.
“요 며칠 안 한 것 같아서.”
“…재환아.”
“맞다. 너 지난번에 서로 빨아 주자 그랬지? 그것도 할까?”
가히 거침없는 재환의 제안에 한영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표정은 한층 어리벙벙해졌다. 다만 이리 시원시원 말한다고 해서 재환에게 아무 부끄러움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못내 멋쩍어진 재환은 슬쩍 눈을 옆으로 돌렸다.
“싫으면… 다음에 하고.”
“아냐, 좋아! 할래. 다 하자. 섹스하자, 재환아…!”
옆집까지 들릴 만치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한영은 그 어느 때보다 밥숟갈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반찬도 한 움큼 집어넣고 우적우적 열심히도 씹었다. 결국 재환은 못 당하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먹어, 천천히.”
응, 하고 답하는 한영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다.
* * *
“후, 읍….”
“후으….”
낡은 벽. 낡은 천장. 낡은 매트리스. 구석의 새빨간 텔레캐스터만이 새것 같은 빛을 뿜고 있는 협소한 공간이 살과 점막이 비벼지는 끈적하고도 습한 소리로 가득 찼다. 하반신만 훤히 내놓은 채 반대 방향을 보고 누운 두 사람은 서로의 사타구니에 코를 박고서 한시도 쉬지 않고 바지런히 입과 혀를 놀렸다. 한 사람의 코가 음모 한 올 없는 매끈한 사타구니에 콱콱 부딪치면, 한 사람의 혀가 줄줄 침을 묻히며 곧게 선 기둥을 핥아 올렸다. 여기에 삐걱삐걱 매트리스 스프링이 힘겹게 주저앉았다가 튕겨 오르는 소리까지 더해져 처음 해 보는 외설스러운 행위의 현장이 꽤나 요란했다.
“으, 음….”
물론 한영으로선 재환의 성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빨고, 맛보고 싶다는 욕구가 한껏 넘쳐흘렀다. 지금이라도 날씬한 허리를 휙 접어 수줍게 뻐끔거리는 구멍에 혀 한 번 대 보면 참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재환은 무조건 싫다며 한사코 도리질했다. 따라서 한영은 지금처럼 혀 대신 검지로 재환의 그곳을 푹푹 쑤시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못마땅하냐, 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았지만….
잠깐 입에 문 성기를 뱉은 한영은 구멍에서 빼낸 검지를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 새에 넣었다. 위아래로 쭉쭉 빨며 손가락 마디마디에 골고루 침을 발랐다. 재환의 체취를 음미하는 것은 덤이었다.
매트리스에 옆면이 닿은 엉덩이 뒤로 손을 둘러 그 가운데로 다시 푹 검지를 찔러 넣었다. 쫀쫀한 내벽이 부드럽게 진입한 마디를 조이며 저 아래 팽팽하게 부푼 성기를 물고 있던 목구멍에서 으음, 하는 신음이 흘렀다. 그 소리는 한영의 아랫배를 타고 올라와 고스란히 귓구멍 안쪽에 고였다. 자연히 상대를 더 자극하고 싶어지게끔 만드는 끔찍이도 달콤한 울림이었다.
“응, 읏…!”
허리가 꿈틀거릴 때마다 함께 흔들리며 쿡쿡 뺨을 찌르는 성기를 재차 한가득 입에 머금은 한영은 선단, 기둥을 따라 요리조리 혀를 굴렸다. 성기 끝에서 졸졸 흐른 액과 타액이 섞이는 질척한 소리가 한층 커지고, 재환이 내뱉는 신음도 보다 격한 곡조를 띠었다.
그 와중에도 재환은 한영의 성기를 빨아올리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한영처럼 구석구석 찬찬히 애무하는 요령은 없어, 세게 흡입하며 힘으로 밀어붙였다. 바스락바스락 짧은 옆머리가 빠르게 시트 위를 스쳤다.
“후….”
내처 동글동글한 고환까지 입에 넣고 우물우물 굴리던 한영은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무슨 한계인고 하니, 재환이 극구 싫다던 일을 기어이 하고 싶다는 욕망이 펑 터지기 직전이었다. 결국 한영은 휙 몸을 틀어 단숨에 매트리스에 누인 재환 위로 거꾸러지게 올라탔다.
“야…! 으, 읏!”
하반신을 낮춰 재환의 입에 도로 성기를 물리는 동시에 조붓하게 붙은 엉덩잇살을 두 손으로 힘껏 벌렸다. 거의 시트에 이마를 처박다시피 한 자세로 빠끔히 드러난 구멍에 혀끝을 대었다. 긴장으로 움츠러든 주름을 헤쳐 쑥 혀를 밀어 넣자, 거대한 성기가 박힌 목구멍에서 더운 숨이 끓어올랐다. 반대로 감싸 줄 곳을 잃은 성기가 울컥 흘린 맑은 액이 날렵한 턱을 적셨다. 아랑곳하지 않고 한영의 혀는 빠르게 구멍을 들락거렸다.
“후, 응…, 읏….”
둑 터진 듯 젖은 신음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이래서 재환은 한영에게 거기만큼은 빨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바가 있기에, 자신에게 퍼부어질 참기 힘든 수치와 그에 버금가는 흥분을 뻔히 짐작했다. 그리고 재환의 짐작은 한 치 비켜나지 않았다. 뒤통수를 소름으로 뒤덮는 척척하면서도 야릇한 감각이 끊임없이 엉덩이 골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상대의 성기를 핥던 혀가 흐물흐물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음…. 재환아, 너무 맛있어….”
거기에 더해 오롯이 진심인 것 같아 재환을 더 소스라치게 하는 감상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맛있다는 건 예사였고, 예쁘다, 귀엽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아주 온갖 감탄이 다 내놓아졌다. 평소에는 말이 많은 편도 아니면서 남의 엉덩이에 대고 뭐 저리 할 말이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끝내 참지 못한 재환은 허벅지로 그 사이 있던 작은 머리통을 냅다 조였다. ‘밤새 빨고 싶어’라는 망발까지 서슴지 않던 입과 혀가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도 헐떡이느라 모자란 숨을 급히 들이켠 재환은 입에서 뱉은 한영의 성기를 손으로 꽉 쥐며 퍽 간곡한 부탁을 으르렁거렸다.
“너, 좀…. 조용히 해.”
아…. 그건 좀 곤란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침음이 길게 흘렀다. 답은 못 하고 침에 젖은 입술만 우물거리던 한영은 꼭 시위하듯 얼굴을 묻고 있던 둔부를 보다 활짝 벌렸다. 다소 놀란 재환의 허리가 시트 위에서 파드득 튀어 올랐다. 그럴수록 탱탱한 살을 비집은 양 손끝에 힘을 준 한영은 도글도글 눈을 굴리며 색도 형태도 고운 재환의 그곳을 찬찬히 시야에 새겼다.
“근데… 진짜 너무 예뻐, 재환아.”
쪽, 하는 새침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주름에 붙었다 떨어졌다. 재환의 표정을 왈칵 구겨지게 하기 충분한 행동이었다. 분홍색 머리통을 가둔 허벅지에 다시금 바짝 힘을 준 재환은 거의 레슬링 하듯 홱 몸을 비틀어 단번에 한영과 위치를 뒤바꾸었다. 당황이 깃든 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우위를 점령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재환아…?”
쭉 뻗은 허벅지에 올라앉은 재환은 대꾸 없이 젤 통을 집어 들었다. 아까는 아래를 보고 덜렁거리다 이제는 위를 향해 꺼떡대는 성기에 주저 없이 주르륵 젤을 부었다. 투명한 점성질의 액체가 길고도 굵은 기둥을 따라 뭉글뭉글 흘러내렸다.
“이제 그만 넣자.”
미끌미끌한 성기를 붙잡고 감에 의지해 선단을 입구에 물렸다. 그만큼 지금 재환은 적잖이 몸이 단 상태였다. 콘돔을 씌울 생각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물고 빨고 너 하고팠던 거 다 하자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했으나, 다 제치고 내심 1초라도 빨리 한영과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정신 쏙 빠져나갈 때까지 그가 제 안을 휘저어 주기를 바랐다. 지난했던 하루에서 어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랬다. 엉큼하고 영악하다 해도 할 말 없었다.
“읏….”
그리하여 이를 악문 재환은 엉덩이를 아래로 주저앉혔다. 아직 조금은 더 풀어질 여지가 있던 구멍이 억지로 벌어지며 뭉툭한 귀두가 안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뜨거운 성기가 배 속을 가득 메웠다. 그야말로 복부의 장기가 다 위로 밀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 집 안이 쩔쩔 끓을 정도로 보일러 온도를 높인 것도 아닌데, 이마는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되었다.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딱딱한 배를 짚은 손과 팔이 모두 파들파들 떨렸다.
“재환아….”
평소 같지 않게 초조해 보이는 재환을 올려 보던 한영은 자신의 배 위에서 직각으로 꺾인 팔목을 살며시 움켰다. 그대로 위태로운 떨림을 따라 조심스럽게 손을 위로 움직였다. 근육이 경직된 팔뚝을 훑고, 옹송그려진 어깨를 쓰다듬다가, 뾰족한 턱 끝을 매만졌다. 열이 오른뺨을 두어 번 손등으로 문지른 후 땀 맺힌 이마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었다.
“재환아, 무슨 일 있었어…?”
여전히 아래에서 올라오는 무시 못 할 압박감에 눈썹을 움찔거리던 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동생에게 줬던 돈을 어머니한테 대신 돌려받아서, 그래서 지질하게 속 끓이고 있다는 얘기를 어찌 한영에게 할 수 있을까. 차라리 길 한복판에서 미친놈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를지언정 절대 한영 앞에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정말이야?”
“…응.”
이번에는 평상시 한영을 따라 하듯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란 엄지손가락 끝이 마치 속내를 파악해 보려는 것처럼 살짝살짝 재환의 아랫입술을 더듬었다. 재환은 그 위로 쪽, 하니 입을 맞추었다. 한영을 유혹하는 저 나름의 서투른 몸짓이었다. 효과는… 당연히 없을 수가 없었다.
허리 옆을 팔꿈치로 디딘 한영은 큰 힘 들이지 않고 훌쩍 상체를 세웠다. 그 반동으로 뒤로 기울어지려는 재환의 등허리를 얼른 손바닥으로 받쳤다. 얼추 두 사람의 눈높이가 맞추어지며, 따뜻한 숨결이 서로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황색 스탠드 조명을 등지고 있음에도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게 확연히 보이는 뺨에 부드럽게 입 맞춘 한영은 비슷한 색을 띤 귀에 입술을 붙였다.
“재환아, 만세.”
역시나 재환은 한영의 말에 따라 순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한참 전 바지와 속옷을 벗고 마지막으로 한 장 걸치고 있던 티셔츠가 둘둘 말려 올라가 금세 자그마한 머리통을 통과했다. 이를 적당히 바닥에 떨군 한영은 저 또한 재환의 도움으로 티셔츠를 벗었다.
비로소 새하얀 나신이 된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거의 동시에 서로의 몸을 꽉 부둥켜안았다. 그 상태로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움직임 없이 뜨거운 체온을 나누었다. 맞닿은 가슴팍 아래서 두 개의 심장이 쿵쿵 비슷한 속도로 박동했다.
그리고, 이 가만한 행위는 서서히 재환의 몸과 마음에서 긴장을 걷어 냈다. 무리하게 성기를 삼킨 내벽의 근육이 차츰 이완되고, 묵직한 압박감이 가득했던 자리에 슬슬 야릇한 감각이 차올랐다. 이에 따라 간헐적으로 발끝이 움찔움찔 오므라들며, 쌕쌕 내뱉는 숨이 조금씩 밭아졌다. 한영을 품은 몸이 찬찬히 흥분에 젖어 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 유한영.”
한숨을 내뱉듯이 상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러한 상태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배 속에서 뭉근한 열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재환은 꼭 껴안고 있던 한영의 너른 등판을 손으로 더듬었다. 단단한 근육과 뼈대로 이루어진 부드러운 굴곡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지금 만지고 있는 이 살결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인지, 자신이 달아오른 것인지 구분 가지 않았다.
한영 또한 손 아래 닿은 재환의 매끈한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도르르 땀방울이 떨어지는 턱선을 따라 쪽, 쪽 입 맞추었다. 늘 신기하다 여기는 것이지만, 재환은 흘리는 땀에서조차 다디단 맛이 났다. 땀뿐만일까. 그의 모든 것이 한영은 달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톰한 입술을 와락 머금었다.
“음….”
재환을 앉힌 하반신을 살짝씩 튕겨 올리며 한영은 입술 사이에 들어온 말랑한 살점을 춥춥 소리가 나게 빨아들였다. 자연히 입술 안쪽에 고여 있던 타액도 함께 한영의 입 속으로 흘러들었다. 이 또한 빠짐없이 빨아 삼키던 한영은 내심 바라던 바를 용기 내어 속삭여 보았다.
“재환아…. 더. 더 줘….”
“으, 응…?”
“침…. 네 침 먹고 싶어.”
아마 보통 때 같았으면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며 기겁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경악한 눈빛을 하고 한영을 보았을 터다. 하지만 이미 그가 건네주는 열기에 잠식된 재환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영이 움직이는 대로 얕게 흔들리며 ‘뭐…?’ 하고 몽롱한 얼굴로 되물었다. 비교적 또렷한 말씨로 한영이 다시 한번 재환에게 부탁했다.
“재환이 네 침….”
문장을 채 완성하기도 전 재환의 입술이 한영에게 포개어졌다. 구불구불한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잡아당긴 재환은 고개가 들린 한영의 입 안으로 그가 기꺼이 바라던 것을 천천히 흘려 넣었다. 이를 한 톨도 밖으로 흘리지 않기 위해 한영은 부지런히 꼴깍꼴깍 목울대를 움직였다. 덩달아 아래에서 쳐올리는 행위에 속도를 붙였다.
“으, 음…!”
더, 더, 라고 조르듯 한영은 맞물린 재환의 입술을 허겁지겁 깨물고 빨았다. 기어이 몇 방울의 침이 뒤로 젖혀진 턱을 따라 조르륵 떨어졌지만, 이제는 안중에 둘 수 없었다. 몇 날 며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재환의 숨과 타액을 성마르게 삼키며, 한영은 아래로 내린 손으로 탄탄한 엉덩잇살을 한껏 움켰다. 두꺼운 기둥을 품은 구멍이 좌우로 벌어지는 동시에 더 안으로 파고들 틈이 생겼다.
“후, 윽…!”
결합이 깊어지며 접붙은 두 개의 몸이 보다 격한 박자로 오르내렸다. 그 바람에 마구 비벼지던 입술이 도리 없이 멀어졌다. 이 틈을 참지 못한 한영이 냉큼 길게 혀를 내밀자, 한영의 뜻을 능히 알아챈 재환이 쭉 혀를 내어 한영에게 혀끝을 문질렀다.
같은 색을 띤 살덩이가 허공에서 엉키는 사이, 아래 자리한 하반신이 한 번 들썩일 때마다 땀에 전 엉덩이가 단단한 허벅지에 부딪혀 부드럽게 뭉개졌다. 빠르게 입구를 들락거리는 기둥 따라 벌건 속살이 반복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영의 손끝이 그 부근을 더듬었다.
“하…, 재환아…. 재환아.”
“응, 읏…. 흐으….”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직접 감각해 본 한영의 마음속에 차마 표현 못 할 벅찬 감정이 밀려들었다. 조금 불편한 자세로 무릎을 세우고 있던 재환의 다리를 친히 끌어당겨 제 허리에 감게 한 한영은 자잘하게 땀방울이 맺힌 등판을 두 손으로 꽉 감쌌다. 그리하여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조금의 틈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완연히 한 몸처럼 엉긴 재환에게 한영은 다시금 입술을 파묻었다.
“우, 응…!”
하도 아래에서 박아 올리는 힘이 거세 조급하게 혀를 엮던 재환은 굳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맞물은 입술 너머로 줄줄이 침을 흘렸다. 그것이 마치 생명수라도 되는 양 한영은 모금모금을 모두 꿀꺽 삼켰다.
머지않아, 받아 삼킨 것을 돌려주듯 한영은 재환의 몸속 깊숙한 곳에 흥건히 정액을 쏟았다. 비슷한 시점에서 재환 또한 성기가 비벼지던 딱딱한 복근 위로 울컥울컥 사정했다. 다만 제가 흘린 양이 생각보다 많아 재환은 탈력감에 사지가 축축 늘어지는 상황에서도 얼른 한영의 복부를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그러나 곧 팔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재환의 손을 얼굴 가까이 가져간 한영이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더 붉은 빛깔을 띤 혀가 나와 손바닥에 치덕치덕 발린 뿌연 액을 핥아 갔다. 몰캉하면서도 축축한 살덩이가 찬찬히 살갗을 훑고 지나는 감촉에, 그리고 그 행위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한영의 모습에 재환은 계속해서 눈썹 사이를 옴찔거렸다.
정성스럽게도 재환의 손바닥을 돌아다니던 혀가 마침내 목적한 바를 모두 이루고 입 안으로 숨었다. 질척하게 정액이 묻었던 자리에는 투명한 타액만이 남아 번들거렸다. 그곳과 한영의 갈색 눈동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재환은 저 또한 쑥 혀를 내밀었다. 한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바닥에 한가득 발린 침을 길게 핥아 올리자, 이를 지켜보는 한영의 눈에 당황과 기꺼운 마음이 함께 고여 일렁였다.
재환은 어렴풋한 미소를 지으며 다소 넋이 나간 듯한 한영에게 쪽, 입 맞추었다. 그사이 저 아래 꽂힌 성기가 재차 슬슬 몸집을 키우는 것이 느껴졌다. 잘록한 허리에 감겨 있던 다리를 풀어 무릎 꿇은 자세를 취한 재환은 허릿심을 이용하여 엉덩이를 은근슬쩍 앞뒤로 움직여 보았다. 곧바로 한영의 잇새에서 ‘읏….’ 하고 가느다란 숨이 샜다.
내처 한영의 양어깨를 붙잡은 재환은 보다 본격적으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볼기짝 사이를 파고든 성기가 빠른 속도로 최대치까지 부풀었다.
“하, 재환아….”
“후, 읏….”
내부에 잔뜩 고여 있던 정액은 제법 훌륭한 윤활제가 되어 주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땀이 비벼지는 살결을 부드럽게 마찰시키고, 여기에 한영 또한 재환의 박자에 맞춰 살짝살짝 하반신을 튕기며 또다시 불붙기 시작한 행위를 거들었다. 첫 사정의 여운이 채 가실 겨를이 없었다.
중간중간 자세가 바뀌고, 위치가 바뀌었다. 재환을 아래 눕힌 한영이 유연하게 허리를 놀리며 성기를 박아 대면, 또 어느새 재환이 휘딱 몸을 뒤집어 한영 위에 올라탔다. 반대로 매트리스에 배를 대고 엎드린 재환 위로 한영이 푹 몸을 겹치기도 했다. 어떤 구도가 되었든 둘 사이에 타오르는 정염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이토록 뜨거운 열기 속에서 재환은 오늘도 한영이 주는 벅찬 안락함을 넘칠 만치 영유했다. 괴로운 기억은 쏙쏙 지우고 좋은 것만 남게끔 하는 평안함이었다. 대신 제가 한영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몇 번의 격정적인 입맞춤과 그로 인해 넘어가는 타액, 헐떡거리는 숨소리 같은 것들뿐이라, 그것이 재환은 조금 서글펐다.
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정사가 끝나고, 먼저 씻고 나온 재환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한영이 누워 있는 매트리스 끝에 걸터앉았다. 아직 옷도 안 입고 있기에 뭘 하나 봤더니, 한영은 엎드린 채 자신이 가져왔던 쇼핑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톡 튀어나온 복사뼈를 매만지며 ‘안 씻어?’ 하고 묻자 벌떡 일어나 앉은 한영이 재환에게 쓱 쇼핑백을 내밀었다.
목에 수건을 걸치고 쇼핑백 입구를 벌려 본 재환의 표정이 이윽고 조금 미묘한 기색을 띠었다. 미미하게 당혹과 당황이 밴 표정이었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이게 뭐야…?’ 하는 물음이 불쑥 튀어 나갔다.
“핸드폰.”
굳은 재환 대신 쇼핑백에서 작은 종이 상자를 꺼낸 한영은 친히 상자도 열어 그 안에 담긴 핸드폰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표면이 온통 검정인 핸드폰이 사방으로 번쩍거리는 광을 뿜었다. 한영은 핸드폰을 살포시 재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켜 봐.”
아, 어…. 마치 거울처럼 제 얼굴을 훤히 비추는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재환은 영 또렷치 못한 대답을 흘렸다. 일단 알았다고는 했으나, 핸드폰을 쥔 손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한영은 등 뒤에서 끌어안듯이 재환의 옆구리로 손을 넣었다. 곧은 어깨에 턱을 얹고서 이번에도 재환을 대신해 기계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금방 핸드폰의 전원이 켜지고, 한영은 이리저리 화면을 누르며 들뜬 목소리로 조곤조곤한 설명을 덧붙였다.
카메라가 엄청 좋대.
봐 봐. 사진 되게 잘 찍혀.
아, 스피커 음질도 좋댔어.
원래는 빨간색으로 사려고 그랬는데, 재환이 너 검정 좋아하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야 ‘마음에 들어, 재환아?’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그사이 몇 번이나 한영에게 찰칵찰칵 사진이 찍힌 재환은 조금 멍한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한층 신이 난 한영은 갓 씻고 나와 말간 빛깔을 띤 재환의 뺨에 쪽쪽 입 맞추었다. 그러다 아예 헐렁한 티셔츠를 걸친 어깨를 꼭 끌어안고서 함께 몸을 풀썩 뒤로 누였다. 샴푸 냄새 폴폴 풍기는 머리통을 제 옆머리에 딱 붙인 뒤 천장을 향해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재환아, 스마일.”
화면 속 한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환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웃음이 풍족하지 못한 재환에게는 썩 쉽지 않은 부탁이었다. 그 이전에, 이렇게 누군가와 사이좋게 사진을 찍어 본 경험 자체가 재환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하여 얼른 한영의 말에 따르지 못하고 애먼 곳으로 눈알만 굴렸다. 그 애매한 반응이 세로로 긴 화면을 통해 한영에게 다 보였다.
“재환아.”
“어…?”
다시 핸드폰 화면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목 뒤로 감겨 턱을 잡은 손이 휙 얼굴의 각도를 틀었다. 마주 보게 된 한영과 일시에 입술이 겹쳐지고, 높이 들린 핸드폰에서 찰칵, 하는 인공적인 셔터 음이 터졌다. 곧 떨어질 줄 알았던 입술은 아예 진득이 맞비벼 오며 재환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찰칵찰칵, 몇 번의 셔터 음이 더 이어졌다.
불편하게 꺾인 목과 말랑한 뺨에 눌린 코로 인해 슬슬 들이마시는 숨이 부족해질 즈음에서야 한영은 재환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얼굴 가까이 내린 핸드폰 화면 위에서 기다란 검지가 휙휙 움직이자, 적나라한 입맞춤의 현장이 차례로 지나갔다. 심지어 화질이 지나치게 좋아 이를 구겨진 눈으로 올려 보는 재환의 귀가 여지없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괜히 팔꿈치로 한영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나중에 지울 거야.”
“안 돼.”
“내 맘인데.”
“그래도 싫어.”
시답잖은 고집의 말들이 오갔다. 그러다 재환은 아직 한영에게 핸드폰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전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니 이제라도 인사를 해야 할 텐데, 대신 재환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두 남자가 찍힌 사진을 확대하고 줄여 보는 한영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토록 받기만 하는 주제에 저는 한영에게 줄 게 없다는 비루한 생각이 또다시 슬금슬금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사실, 한영이 그에게 진짜 바라는 것은 딱 하나뿐인데 말이다.
창으로 살살 새어 드는 햇빛이 매트리스 위에 홀로 잠들어 있는 남자를 비추었다. 딱히 눈 부실 정도는 아니었으나, 목까지 덮은 이불 아래서 뒤척이던 남자를 끝내 눈 뜨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일단 크게 하품부터 한 남자, 다시 말해 재환은 찔끔 눈물이 맺힌 눈가를 벅벅 팔뚝으로 문지르며 반대쪽 손을 베개 옆으로 뻗었다. 어제까지 쓰던 것과는 달리 표면이 매끈매끈한 핸드폰이 손에 잡혔다.
깨지거나 흠집 난 곳 하나 없는 핸드폰을 코앞으로 가져간 재환의 입에서 별안간 컥, 숨 집어삼키는 소리가 터졌다. 눈곱도 떼지 못한 얼굴에는 경악이 잔뜩 서렸다. 잠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본 배경 화면이 깔려 있던 자리에 대뜸 적나라한 키스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 알조였다.
배경 화면을 바꾸는 일은 일단 나중으로 미루고서 약 30분 전쯤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신인은 저 몰래 핸드폰을 건드리고 간 범인과 동일했다.
[오늘 일 있어서 일찍 가. 이따 전화할게. 사진 지우지 마!]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음이 났다. 저 말을 강조하고 싶어 이리 귀엽고도 앙큼한 짓을 해 놓고 사라진 모양이었다. 하나, 재환은 굳이 한영과 찍은 사진을 지울 생각이 없었다. 어제 사진이 찍혔던 순간부터 줄곧 그랬다. 물론 겉으로는 실컷 툴툴댔지만.
왤까. 왜 저 민망한 사진을 지울 마음이 들지 않는 걸까. 재환은 그 이유가 얼추 짐작이 갈 듯했다.
어느새 사진첩으로 들어가 두 남자가 입술을 맞대고 있는 사진을 다시 찬찬히 살피던 재환은 핸드폰 액정에 붙인 엄지와 검지를 크게 벌렸다. 사진이 확대되며 머리는 고운 분홍색에, 얼굴빛은 밀가루처럼 뽀얀 남자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 얼굴이 예뻐서. 자꾸 눈에 새기고 싶어서. 먼 훗날에도 계속 보고 싶어서….
그래서 재환은 사진을 지울 수 없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이유였다.
* * *
천장에는 서까래가 대어지고, 벽에는 창호지 문이 난 한옥 형태의 공간에 흐르는 음악은 모순되게도 은은한 클래식 연주곡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저 또한 피아노로 쳐 본 적이 있는 곡을 대충 흘려들으며 한영은 말없이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입에 넣고, 씹고, 삼키기를 반복했다. 이름도 모르는 음식들은 차림만 화려할 뿐 딱히 맛있지는 않았다. 자연히 재환이 끓여 주던 뜨끈한 국 한 그릇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짙은 나무색 테이블에 둘러앉은 다른 이들도 한영처럼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조용히 쇠젓가락 부딪치는 소리만 내며 음식 먹는 일에 집중했다. 한영 옆자리에 앉은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이 입을 떼고 나서야 비로소 잔잔한 침묵이 깨졌다.
“이번에 하신 공연, 언론사 평이 되게 좋던데요?”
축하의 기색이 다분한 말에 건너편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티슈로 두어 번 입가를 찍은 후 답하는 말투에는 감정이랄 게 담기지 않은 것처럼 고저가 없었다.
“다 그냥 하는 소리지.”
“에이, 그 누구냐. 맨날 싫은 소리 하던 평론가 있잖아요. 박, 뭐였더라…. 암튼 그 사람도 이번에는 좋게 좋게 말하던데.”
“그런 사람이 있었나? 잘 기억이 안 나네.”
흐르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넘겨듣던 한영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는 접시로 젓가락을 뻗었다. 잘게 썰린 묵 같은 요리를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자, 고소한 향이 입 안에 퍼졌다. 한데 간을 안 한 건지, 원래 이런 요리인 건지 맛이 영 심심했다. 하니 한영은 또 재환이 만든 음식 생각이 났다. 아니, 어쩌면 그냥 재환이 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기억이 안 나긴. 당신 전에도 그 양반 죽일 거라고 이를 갈았으면서.”
옆에 앉은 동년배의 남자를 보는 여자의 눈초리가 설핏 날카로워졌다. 외모에 걸맞지 않게 백발이 성성한 남자는 자못 매서운 아내의 눈빛에도 ‘아니면 말고.’ 하며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 얘기를 꺼냈던 그들의 첫째 아들, 진영만이 싱글싱글 웃음을 머금었다.
“엄마라면 그러고도 남죠. 암튼, 이번에 못 가서 죄송해요. 촬영이 영 안 끝나서.”
“봄에 한다는 드라마?”
“네.”
여전히 한영은 관심도 없고, 알아먹기도 힘든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구태여 그들과 말을 섞지 않은 한영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입에 넣는 행위를 묵묵히 반복했다. 과거처럼 집은 것을 놓치거나 테이블에 더럽게 흘리는 실수는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못 본 사이 이 집 둘째 아들의 젓가락질이 놀랍도록 발전한 사실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못 할 때는 그리도 비난을 아끼지 않았으면서. 대신 영 달갑지 않은 물음이 대뜸 한영에게 던져졌다.
“한영이 너,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 거야.”
어머니의 질문에 한영은 앞접시를 향해 숙어져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더 오가는 말 없이, 잠시간 같은 명도와 채도를 띤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윽고 한영이 내놓은 답은 짧디짧았다.
“계속.”
날렵한 곡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뻗은 눈썹이 살그머니 구겨졌다. 얼마쯤 더 아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어머니는 뒤이어 그의 분홍 머리칼로 시선을 옮겼다. 종전과 비슷한 말투로 내용만 바뀐 질문이 건네졌다.
“머리는 그대로 둘 거야?”
“응.”
그 후에도 꼭 취조하듯이 몇 개의 질문이 더 따라붙었다. 그 집에 계속 살 거야? 대학은 아예 안 갈 거야? 그렇게 놀고먹기만 할 거야? 이럴 거야, 저럴 거야, 어쩌고저쩌고…. 그 어떤 질문이 건너오든 한영의 답은 한결같았다. 응. 응. 응.
더 묻기를 포기한 어머니가 차가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쉴 즈음, 직 크게 의자 끌리는 소리를 내며 한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이 이상 제게 관심 두지 않을 가족들을 향해 ‘화장실.’ 하고 짧게 통보한 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답답한 공간 밖으로 나섰다.
크고 작은 개별실로만 이루어진 식당 복도에는 양옆으로 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를 모두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선 한영은 순간 폭 눈살을 찡그렸다. 여기가 한정식집인지, 아니면 무슨 서양식 레스토랑인지 화장실에서까지 피아노와 스트링으로 이루어진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소름 돋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선율에 진저리 치듯 어깨를 떤 한영은 서둘러 변기 칸으로 들어갔다. 쾅, 문을 닫은 후 잠금을 채우고서야 사위가 좀 조용해졌다.
닫힌 문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한영은 오늘 어머니가 보자마자 ‘바지가 그게 뭐니.’라고 핀잔을 주었던 구멍 숭숭 뚫린 청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 목록을 뒤질 것도 없이 달달 외우고 있는 번호 하나를 빠르게 눌러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몇 번 신호음이 울리지 않아, 당장 듣고 싶어 미칠 것 같았던 낮고도 달큼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 어, 유한영.
그 음성이 하도 반가워 일순 울컥 눈물이 치밀 뻔한 한영은 얼른 벅차오르는 감정을 내려 앉혔다. 마음 같아선 상대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싶었으나, 장소를 생각해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내었다.
“재환아.”
- 응.
“뭐 해?”
- 나 방금 점심 먹었어. 곧 카페 출근하려고.
핸드폰을 반대쪽 손에 고쳐 쥔 한영은 ‘뭐 먹었어?’ 하고 물었다. 재환은 조금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뭘 먹고, 뭘 먹고, 또 뭘 먹었다고 조곤조곤 답해 주었다. 기실 서로 몰라도 되고, 말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였지만, 어느새 재환의 말을 듣는 한영의 입가에는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긁을 수 없는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 넌. 점심 먹었어?
“응. 약속 있어서 외식했어. 근데….”
말꼬리를 흐린 한영은 좁은 화장실 칸 안에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잠시간 뜸을 들였다. 그러다 밴드 멤버 하나가 기분 나쁠 때마다 종종 쓰던 표현이 문득 생각났다.
“맛이 좆같았어.”
귀에 딱 붙인 핸드폰 스피커에서 침묵이 흘렀다. 1초, 3초, 5초…. 침묵은 제법 길게 갔다. 얼핏 불안함을 느낀 한영은 재차 눈알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쪽저쪽으로 굴렸다. 적잖은 초조함이 담긴 부름이 자연스레 흘러 나갔다.
“재환아…?”
그때, 저쪽에서 ‘푸흡!’ 하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헤매던 시선을 새카만 타일 벽에 고정한 한영은 느리게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재환의 반응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 유한영.
“응.”
- 너 장태군 따라 한 거야?
“응.”
순순히 답하자 또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건너편에서 울렸다. 그게 듣기 좋아, 한영도 종내 재환을 따라 헤헤 웃어 버렸다. 웃긴 얘기가 오간 것도 아닌데 그냥 웃음이 났다. 이처럼 재환의 목소리는 늘 신기한 힘을 갖고 있었다. 들은 것만으로 사람의 눈시울을 젖게 했다가, 또 정신을 차려 보면 바보처럼 웃게 만든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딱히 목적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조금쯤 더 나누었다. 오늘은 날씨가 살짝 풀렸고, 이따가는 뭘 할 거고, 또 내일은 뭘 할 건지 따위의 이야기였다. 다만 한영이 ‘근데 몸 괜찮아? 어제 섹스 많이 했잖아.’라고 물었을 때 재환은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이번에도 제가 웃긴 소리를 한 건가 싶기도 했지만, 어물쩍 재환이 말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걸 보아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뭐, 괜찮다는 의미인 것 같아 한영은 두 번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정말 재환에게 하고 싶었던 한마디가 남아 있었다.
“재환아.”
- 응.
“보고 싶어.”
내심 이번에도 한영은 침묵이 이어질 줄 알았다. 그만큼 본인의 눈치가 빠른 편이라기보다는, 지금껏 이런 종류의 얘기를 꺼냈을 때 재환이 늘 같은 반응을 보인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뭐라도 뒷말을 재빨리 덧붙이려 할 때였다.
- 나도.
이제 침묵은 한영의 몫이 되었다. 아까처럼 잠깐 울컥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두 눈가를 촉촉이 적신 한영은 무어라 대답을 못 하고 핸드폰에 가까이 댄 입만 벙긋거렸다. 사실 이럴 때 재환에게 되돌려 주고픈 말은 하나뿐이었지만,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으므로 억지로 꿀꺽 삼켰다. 대신 끌어당긴 옷소매로 꾹꾹 눈두덩이를 눌렀다. 그사이 상대를 보내 주어야 할 아쉬운 시간이 다가왔다.
- 나 이제 출근해야 돼.
“응. 일 열심히 해.”
- 그래.
한없이 짧게 느껴지는 통화 시간이 찍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한영은 한 번 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살짝 눈물이 묻어난 손바닥을 쓱쓱 바지에 문지른 뒤,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곧이어 칸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 마음이 순식간에 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세면대 앞에 선 진영이 기분 나쁘게 거울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표정을 차갑게 굳힌 한영은 재게 발을 움직여 얼른 형의 등 뒤를 지나쳤다. 그러나 뜻했던 대로 화장실을 나설 수 없었다.
“손 안 씻어? 더럽게.”
꼭 말 안 듣는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씨였다. 굳이 대꾸를 하지 않은 한영은 신발 밑창을 죽 끌며 비어 있는 세면대로 가 섰다. 뭐가 웃긴지, 옆에 선 진영이 여전히 거울로 그를 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인 한영은 물을 틀었다. 잠시 후 적당히 물 묻힌 손에 쭉 액체비누를 짤 무렵이었다.
“이번 남자 친구 이름이 재환이야?”
야무지게 맞비비려던 손이 우뚝 멎었다. 삐걱삐걱 시선만 위로 들춘 한영은 거울 너머로 진영과 눈을 맞추었다. 이쪽은 아직 대답도 안 했는데, 상대는 별 상관 없다는 듯 태연한 낯으로 다음 질문을 내던졌다.
“전에 만나던 애는 이름이 뭐였지? 무슨 웅이었는데.”
형인 진영이 누구보다 기억력 좋은 인간임은 한영이 제일 잘 알았다. 따라서 저건 그냥 말버릇 같은 것이었다. 사람의 속을 은근슬쩍 떠보는, 아주 고약한 말버릇. 그러니 한영은 더더욱 답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행인지 다행이 아닌 건지, 진영은 처음부터 동생의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양 저 할 말을 이었다. 아마도 지금 얘기가 진짜 본론이었으리라.
“엄마가 곧 그 집 팔아 버린다는데. 너 그럼 어떡할래?”
“…뭐?”
“너 그러고 있는 거, 계속 봐주실 것 같아?”
옆에서 탈탈 털리는 손이 튕겨 낸 물방울이 한영의 뺨까지 튀었다. 팍 눈을 구긴 한영은 어깻죽지에 박박 뺨을 문질렀다. 대단히 더러운 거라도 묻은 것처럼 굴고 있는 동생을 보며 픽 웃은 진영은 옆으로 손을 뻗어 핸드 타월 세 장을 연속으로 뽑았다. 거울로 그 행동을 본 한영의 표정이 한층 더 구깃구깃해졌다. 이 자리에 재환이 있었다면 물건 아까운 줄 모르는 그에게 아주 따끔한 일침을 날려 줬을 터다. 그런데, 진영의 몹쓸 짓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니면 아예 나처럼 아이돌을 하던가. 넌 어째 머리만 아이돌이다?”
뒤늦게 비누칠하고 물에 헹구던 손이 다시금 멈칫했다. 숙였던 허리까지 편 한영은 콸콸 물을 틀어놓은 채로 거울을 통해 형을 노려보았다. 아이돌 같다느니, 아이돌 하라느니, 여하간 아이돌이 들어간 모든 문장은 한영에게 있어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이었다. 방금 진영이 그걸 건드린 것이다. 게다가 진영은 한영이 그 단어를 몸서리치도록 싫어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넌 형처럼 아이돌 안 하냐는 소리를 좀 많이 들었어야지. 하니 형을 보는 눈에 노골적인 적대감이 이글거릴 수밖에 없었다.
“뭘 그렇게 봐. 농담한 건데.”
꿍꿍 뭉친 핸드 타월을 휙 휴지통에 버린 진영은 아예 몇 장을 더 뽑아 친히 한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쏟아지는 물을 대신 잠가 주기도 했다. 그러더니 거울 앞에 서서 태연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탈색과 염색을 반복하다 결국 검정으로 덮어 버린 머리칼에서 그런 적 없다는 듯 자르르 윤이 흘렀다.
빳빳한 타올을 힘껏 움킨 한영은 계속해서 거울로 형을 주시했다. 진영도 흘긋 눈을 돌려 한영을 보았다. 동생의 눈빛이 실로 살벌하여, 진영은 절로 휘유 소리가 나왔다. 적어도 형을 때리지는 않을 테지만, 가끔가다 한영은 미친 짓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완전히 마음을 놓긴 어려웠다. 집에 있던 피아노에 페인트를 쏟아붓고, 수영장에 안 보내 준다며 욕실 바닥을 물로 채우고, 헤어진 남자 친구의 집 앞에 텐트를 치고…. 모두 다 과거 한영의 소행이었다.
“유한영.”
그다지 흐트러지지도 않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진영은 휙 옆으로 몸을 틀었다. 한영도 형을 향해 비뚜름히 몸을 돌렸다. 그제야 키는 비슷하되 제가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아 생김새는 사뭇 다른 형제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비싼 샵에서 손톱까지 꼼꼼히 관리받은 손이 뾰족한 턱 끝을 슬그머니 받쳐 올렸다.
“너 남자만 쫓아다니는 것도, 밴드로 소꿉장난질 하는 것도 다들 봐주고 있잖아. 그럼 알아서 적당히 놀아. 응?”
기분 나쁜 손길에 의해 턱이 들린 한영은 거부감이 득시글거리는 눈으로 형을 내려 보았다. 곧이어 천천히 올라간 손이 저와 길이나 모양새가 크게 다르지 않은 손을 뜯어냈다. 피아노를 쳤거나, 혹은 치고 있는 손이었다. 뜯어낸 팔목을 꽉 쥔 한영이 으르렁거렸다.
“논 적 없어.”
이는 한 톨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재환을 쫓아다니는 것도, 그와 함께 밴드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한영에게는 단 한 번도 놀이인 적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벅차면서도 기꺼운 놀이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진영은 그걸 좆도 몰랐다.
전에는 본 적 없던 의지, 내지는 집념 따위가 활활 타는 동생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진영은 끝내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밴드에 빠진 건지 남자에 빠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영은 단단히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그사이에도 섬유한 외형과 달리 다부진 손아귀가 뼈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진영의 팔목을 조여 왔다. 더불어 새빨간 입술이 보다 굳은 일자를 그릴 즈음이었다.
스르륵 화장실 문이 열리며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심상찮은 자세로 붙어 있는 형아 둘을 본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찰나, 진영은 한영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린 틈을 타 가볍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얼마나 그악스럽게 붙잡고 있었는지 살결에 불그스름한 손자국이 다 나 있었다. 하여튼, 성깔하고는.
자못 놀란 듯한 아이의 오해나 풀어 줄 겸, 진영은 아직도 사나운 눈초리를 한 한영의 옷깃을 쥐고 두어 번 툭툭 당겨 판판하게 펴 주었다. 하나 그때까지도 눈을 똥그랗게 뜬 아이의 시선은 두 사람을 떠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 중에서도 진영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진영은 눈썹을 한 번 쑥 들추며 아이에게 ‘응?’ 하는 물음을 보냈다. 꼼지락꼼지락 두 손을 맞잡은 아이가 우물쭈물 입을 뗐다.
“저…, 혹시 트루쓰 진영 아니에요…?”
진영의 입가에 재빠르게 매끄러운 미소가 걸렸다. 수년에 걸쳐 다듬어지고 벼려진, 아주 그럴듯하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알맹이가 없는 미소였다. 적어도 바로 앞에 있는 한영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응, 맞아.”
한시도 이 자리에 머무르기가 싫어진 한영은 손에 들린 핸드 타월을 급히 버리고서 문 쪽으로 발을 뗐다. 이윽고 휙 열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다른 사람한테는 나 여기서 봤다고 말하면 안 된다?’라며 상냥한 체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한영은 형이 싫었다. 한국에서 제 뒤를 봐주는 건 형뿐이었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좆같은 점심 식사가 모두 끝난 후, 근처 있는 호텔에서 차나 마시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연히 한영은 단박에 싫다고 했고, 그런 한영을 아무도 두 번 설득하지 않았다. 다만 ‘쟤는 항상 왜 저럴까’라는 시선으로 볼 따름이었다. 이를 뒤로한 한영은 발레 파킹 맡겼던 차를 어서 찾아 올라탔다. 운전을 하는 내도록 재환이랑 조금이라도 더 뒹굴걸, 오늘 그 자리에는 왜 나갔을까 하는 후회가 바글바글 끓어올랐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한영은 습관처럼 제 방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무엇을 칠까 잠깐 고민하다, 오늘 식당에서 나왔던 클래식 곡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여 차례로 연주해 보았다. 어머니가 보았다면 보나 마나 표정을 썩혔을, 아주 제멋대로인 연주였지만 그래서 한영은 더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어서 밴드 노래도 치고, 즉흥곡도 치고, 아예 즉흥곡에 ‘재환아’라는 가사까지 붙여 노래하는 사이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식당의 좁은 룸에 앉아 꾸역꾸역 밥 먹을 때는 1초가 1분처럼 느껴졌었는데, 그때와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재미있는 피아노를 어머니 때문에 영영 싫어할 뻔했던 걸 생각하면, 한영은 아직도 억울함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실컷 연주하던 피아노 뚜껑을 덮은 한영은 침대로 가 풀썩 엎드렸다. 베개에 턱을 얹고 코앞으로 가져간 핸드폰에서 사진 한 장씩을 차례대로 띄웠다. 혹 상대가 싫다고 할까 봐 자는 틈을 타 몰래 전송할 수밖에 없었던 사진들이었다. 하여 지금도 못내 양심이 콕콕 쑤셨으나, 언제 또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몰랐다. 배시시 웃음을 머금은 한영은 화면 속에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재환, 그러다가 부루퉁한 얼굴을 한 재환, 부끄러워하는 재환, 저와 입 맞추는 재환을 보고 또 보았다.
다만 이렇게 재환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영은 진짜 재환이 보고 싶어졌다. 하다못해 목소리라도 한 번 더 듣고 싶었지만, 지금 재환은 열심히 일하는 중일 테니 이루지 못할 바람이었다.
끝내 한영은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당장의 마음을 달래는 길을 택했다.
빙그르르 몸을 반 바퀴 돌려 천장을 보고 누운 한영은 살짝 엉덩이를 위로 띄워 올렸다. 그대로 바지의 밴드 부근을 붙잡고 드로어즈와 함께 쭉 끌어 내렸다. 무릎까지 내려간 옷에서 한 발씩을 빼낸 뒤, 허물처럼 벗은 옷가지를 방바닥에 떨구었다.
훤히 드러난 하반신의 살결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에 반사되어 희게 빛났다. 목 뒤에 두툼히 베개까지 받쳐 나름의 준비를 마친 한영은 한 손에는 핸드폰을, 다른 한 손에는 성기를 쥐었다.
눈앞에 바짝 들이민 핸드폰 화면 속 인물을 응시하며, 한영은 손에 쥔 성기를 찬찬히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몇 번 손바닥이 스치지 않았음에도 분홍색 성기는 금세 발기하여 우뚝 솟아올랐다. 직접적인 접촉으로 인한 자극보다는, 시각적으로 흥분한 덕이 컸다. 재환의 사진만 보고도 이리될 수 있는 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퍽 신기했으나, 그 이유를 고민할 시기는 이미 한참 전 지나 버렸다. 처음 재환이 기타 치는 모습을 보며 고추를 발딱 세웠던 그때 진작 했어야 할 고민이었다.
바스락바스락 발꿈치가 시트에 비벼지는 소리, 손날이 탁탁 사타구니를 치는 소리, 차츰 밭아지는 숨소리가 방 안을 부유하는 햇살 속에 섞여 들었다. 그 중간중간 ‘재환아…’를 중얼거리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시선은 핸드폰 화면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흥분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길게 뻗은 다리가 침대 위에서 움칠움칠 떨렸다. 눈가가, 뺨이, 성기가 있는 대로 달아올라 온통 붉은빛을 띠었다.
보고픈 상대를 부르는 소리가 급기야 ‘재환아…!’ 하는 커다란 외침이 되었을 즈음, 손바닥에 흥건히 정액이 쏟아졌다. 지난밤 원 없이 섹스한 여파로 색은 조금 묽었다. 이를 멀거니 내려다보는 한영의 가슴팍이 천천히 부풀었다 꺼졌다. 잔뜩 구겨진 후드 티의 모자 때문에 목 부근이 다소 불편했지만, 탈력감이 커 굳이 자세를 바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정액 묻은 손바닥도 그냥 내버려 둔 한영은 밀려드는 허무함을 삭였다. 평소에는 한차례 시원히 사정하고 나면 재환이 곁에 없어 외로운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는 했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렇지가 않았다. 하도 좆같은 하루를 보내 그런 모양이었다.
멀끔하게 잘생긴 재환의 얼굴 한 번만 보면, 한영은 이 울적한 기분이 가실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한영이 얇은 트레이닝복 위에 서둘러 무스탕을 걸친 시각. 카페 카운터에 선 재환은 조금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아주 잠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을 뿐인데,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사장 세훈의 관심이 온통 새 기계에 쏠려 버린 까닭이었다. 이거 완전 최신 기종 아니냐, 거의 노트북 한 대 값 아니냐, 요새 구하기 어렵다던데 어디서 샀냐 등등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이중 제대로 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던 재환은 그저 진땀만 흘렸다. 손님이 카운터로 와서 주문을 할 때는 그나마 잠잠해졌다가, 손님이 가면 또 질문 세례가 이어지니 참으로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희연이 눈을 반짝이며 ‘오빠, 폰 구경 좀 해도 돼요?’ 했을 때는 그냥 빨리 핸드폰을 내어주었더랬다. 적어도 핸드폰을 보는 동안은 계속해서 질문을 쏟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다 사진첩에 버젓이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이 생각나 버린 재환은 퍼뜩 희연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희연에게 ‘아, 그, 연락 올 데가 있어서….’ 하고 어줍은 변명을 대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토록 쩔쩔매면서도 재환은 핸드폰이 선물 받은 거라는 한마디를 끝내 사람들 앞에 꺼내지 못했다. 그리하면 또 어떤 질문이 새로이 시작될지 몰라 겁나는 마음도 있었지만, 뻔뻔한 자랑질이 될 것 같아 저어되는 마음이 컸다. 대신 카운터를 벗어날 기회만 틈틈이 노리던 재환은 마침 손님 하나가 떠난 테이블에 냉큼 행주를 들고 달려 나갔다.
방금 손님이 앉았다 간 테이블은 물론이고 빈 테이블은 모조리 돌아다니며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은 재환은 아예 깨끗한 걸레까지 손에 쥐었다. 손님들을 위한 소설책과 잡지가 비치된 선반은 물론이고, 창틀까지 박박 닦았다. 카페에서 성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재환이기에, 그 모습을 보고 다들 딱히 의아함을 품지는 않았다.
급기야 재환이 의자까지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을 무렵, 카운터에 있던 상지가 희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씩씩히도 움직이는 재환을 멍하니 지켜보던 희연은 깜짝 놀라 화드득 어깨를 떨었다.
“어우, 깜짝이야.”
“너 재환 오빠한테 말했어?”
“뭘?”
‘재환’이라는 이름이 언급된 것만으로 일단 바짝 긴장한 희연은 휙휙 눈을 굴렸다. 재환은 여전히 저 멀리서 힘차게 걸레질을 하고 있었고, 세훈은 그사이 직원 휴게실로 들어갔다. 따라서 카운터에는 그녀와 상지 단둘뿐이었다. 그럼에도 선뜻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자, 상지가 그런 희연을 위해 보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카페 관두는 거.”
“에이, 아직 몇 달이나 남았는데.”
“그래도. 아예 외국으로 나가는 거잖아.”
“아, 몰라. 말 안 해.”
희연은 절대 그럴 일 없다는 듯 홱홱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달 후 교환 학생을 간다는 것도, 그래서 앞으로 딱 반년간만 더 카페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아직 재환에게는 절대 말할 계획이 없었다. 원체 나중의 일이기도 했거니와, 재환의 반응이 어떨지 안 말해도 대충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사람 좋은 재환은 또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공부 열심히 해!’ 하고 씩씩하게 응원해 줄 터다. 벌써부터 그 상황이 훤히 눈에 보이는 희연은 하릴없이 시무룩해졌다. 여기에는 아까 재환이 새 핸드폰에 관련해 보인 태도도 한몫했다.
“그리고 재환 오빠 아무래도 여친 있는 것 같어….”
“엥? 왜? 절대 아닐걸?”
“맞아. 재환이 여친 없을걸.”
난데없이 옆에서 울린 낮은 목소리에 두 소녀는 동시에 끼악, 소리를 터뜨렸다. 어언간 기척도 내지 않고 다가온 세훈을 보며 너 나 할 것 없이 순시에 사색이 되었다. 특히 희연이 그랬다.
“사, 사장님….”
“난 먼저 간다. 마감 잘하고.”
희연과 상지는 다소 과장스러워 보일 정도로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두 소녀를 보며 속으로 좋을 때다, 중얼거린 세훈은 오늘 아예 작정한 듯 가게에 광을 내고 있는 재환에게도 수고하라 인사했다. 재환은 언제나와 같이 세훈에게 깍듯이 허리를 꾸벅였다. 이러니 세훈은 재환을 볼 때마다 참 요즘 애들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인물도 훤칠한 것이, 그를 볼 때마다 희연의 눈이 하트가 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윽고 카페를 나선 세훈은 쓱 고개를 들어 막 해가 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실내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은은히 퍼진 허공에 홀홀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목에 두른 머플러를 한 번 꽉 여민 세훈은 눈이 더 굵어지기 전 연인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몇 발짝 옮기지 못해, 걸음이 느려지고 말았다. 시선은 카페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청년을 향했다.
언뜻 보아도 청년의 키는 저나 재환 못지않게 커 보였다. 하나 눈길이 간 이유는 비단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머리에 푹 티셔츠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기는 했으나,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봤냐 하면….
아. 재환이네 밴드. 워낙 눈에 띄는 생김새라 기억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왜 여기에…? 세훈은 미동도 없이 선 청년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 뜻밖에도 제가 종전까지 속으로 꽤나 칭찬했던 또 다른 청년이 있었다. 새카만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리고, 이제는 카페 유리창을 박박 닦고 있는 성실한 청년이.
어찌나 창을 열심히 닦는지, 재환은 창밖 구석진 자리에서 누군가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물론, 그 시선의 주인공 또한 재환을 보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세훈의 눈길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다. 공교롭게 둘 사이에 선 세훈으로선 절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코트 주머니에 푹 두 손을 찔러 넣은 세훈은 혹여나 상대에게 제 시선을 들키기 전 다시 걸음을 뗐다. 슬슬 불어나는 눈이 길바닥을 희끄무레한 색으로 덮고 있었다. 우리 희연이가 재환 오빠의 여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오지랖 넓은 생각이 얼핏 머릿속을 스쳤다.
얼마 안 가 세훈이 태혁의 베이커리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주위로 날리는 눈발이 제법 거세졌다. 머리칼에 묻은 눈을 툭툭 털며 고소한 빵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서 나온 태혁이 아무 말 없이 세훈에게 쓱 수건을 내밀었다. 씩 웃으며 수건을 받아 든 세훈은 정수리와 어깨에 매달린 눈을 차례로 닦아 냈다. 미처 닦지 못한 것은 태혁이 친히 손으로 털어 주었다.
베이커리의 제빵사 겸 사장님이 오늘 남은 빵을 정리하는 사이, 태혁은 카운터 뒷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퍼뜩 생각난 것이 있어 얼른 태혁을 불렀다.
“태혁아.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재환이 말야.”
“응.”
“남자한테 인기 많은 거, 맞는 것 같아.”
허리 숙여 커다란 쟁반에 빵을 담던 태혁이 휙 몸을 틀어 세훈을 보았다. 그 행동에, 세훈은 태혁이 무언가를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한 사람을 10년도 넘게 만나다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기실, 대부분이 그랬다.
“갑자기 왜.”
“카페 밖에서 기다리는 남자애가 있더라고.”
“아아.”
다소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 태혁은 쟁반에 빵을 마저 담았다. 카운터에 팔꿈치를 올려 손바닥에 턱을 괸 세훈이 그런 태혁을 떠보는 말을 넌지시 던졌다.
“남자 친구일까?”
“글쎄. 그건 우리도 모르지.”
친구도 많고 지인도 많은 세훈은 천성이 주위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태혁은 완전히 그 반대였다. 따라서 세훈이 여기서 더 재환의 얘기를 꺼낸다면 태혁에게 남 일에 관심 끄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 주제는 그만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차, 빵이 담긴 쟁반을 갖고 카운터에 온 태혁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근데… 아마 서로 좋아하는 사이는 맞을 거야.”
“어? 재환이가 그랬어?”
“응.”
눈이 커다래진 세훈은 주방으로 빵을 가져가는 태혁을 졸졸 쫓아가며 그게 진짜냐는 둥, 어떻게 알았냐는 둥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하나 아무리 연인이라도 태혁이 세훈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그의 입 무거운 성격을 알고 있으니, 세훈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가게 문을 닫고 길가로 나섰을 무렵에는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바닥에 눈이 쌓여 있었다. 심지어 아직도 까만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눈이 내리는 중이었다. 이 정도 눈은 맞아도 괜찮다는 세훈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태혁은 친히 우산을 펼쳐 연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저 또한 하나를 더 펼쳐 들고 나란히 걷다가, 문득 과거 재환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재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친구 문제를 상담해 왔을 때였다.
아무래도… 걔가 절 좋아하나 봐요.
그럼 재환이 너는?
그때 재환이 들려주었던 답을 태혁은 나름 선명히 기억했다.
…저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 좋아해요. 걔가 좋아요.
과연 두 사람은 과거의 저나 세훈처럼 서로에게 한 발 더 다가서는 길을 택했을까. 직접 묻지 않는 이상 태혁으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런 사이가 되었다면, 오늘처럼 눈 내리는 날이 조금은 덜 춥게 느껴지지 않을까, 라는 퍽 간지러운 생각이 들었다.
들고 있던 우산을 접은 태혁은 쏙 세훈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웬일?’ 하고 놀라는 척하면서도 세훈은 슬쩍 태혁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투명한 우산 위로 퐁퐁 새하얀 눈이 쏟아졌다.
그 눈이,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한영의 어깨에도, 재환의 어깨에도 소복소복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