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 *
번화가 중심에 자리한 카페는 여러 가지로 요란 법석했다. 테이블 곳곳에서 왁자하게 떠드는 손님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팝 가수가 부르는 캐럴이 거의 무슨 클럽처럼 쾅쾅 터져 나왔다. 굳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약속 장소를 정한 것은, 이 소란 속에 묻히면 서로 조금쯤 큰 소리가 오가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오늘까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만.
머그잔에 담긴 두 개의 음료 사이로 종이봉투를 내려놓자, 건너편 앉은 재희가 흠칫 놀라 재환을 보았다. 재환은 가타부타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이백.’ 딱 한마디만 던졌다. 머뭇거리던 재희가 봉투로 손을 뻗었다.
딴에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보는 재희에게 더 시선을 두지 않은 재환은 잔을 들어 호로록 커피를 마셨다. 아직 풀풀 김이 나는 커피는 조금도 식지 않은 상태라 꽤나 혀가 아렸다.
“돈 없다며.”
어느새 가방에 쓱 봉투를 집어넣은 재희가 조금 퉁명스러운 투로 물어 왔다. 고맙다거나, 오빠밖에 없다는 말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으나, 멋대가리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럴 때 서로가 피붙이임을 실감하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재환도 만만찮게 딱딱한 투로 짧게 대꾸했다.
“어. 없어.”
“근데.”
재환은 두 눈에 감동 대신 의심이 잔뜩 서린 재희를 빤히 쳐다보다가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이제 와서 아이스커피로 시킬 걸, 하고 생각해 봤자 한 박자 늦은 후회였다. 제값도 받지 못하고 급히 중고로 팔아 버린 새 장비들을 떠올리면, 기실 아이스커피가 아니라 소주를 병째 들이부어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이것 또한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사채.”
“미쳤어?”
재희가 발끈 성을 내며 와작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빠가 사채를 쓰든 도둑질을 하든 신경도 안 쓸 것 같았는데, 또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돈 잘못 빌려다 썼다 쫄딱 망한 본보기가 바로 그들의 아버지였다. 그 덕에 콩가루 가족이 되었고 말이지.
“지금 나 죄책감 느끼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재환은 속으로 방금의 판단을 얼른 정정했다. 오빠를 신경 쓰긴. 제 동생이지만, 끝까지 말 한번 참 예쁘게 했다. 여하간 어떻게 마련한 돈이든 다시 내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됐고, 학원은 언제부터 다닐 건데.”
“알아봐야지.”
“그래.”
심드렁하게 대답한 재환은 쓱 고개를 돌려 카페의 전면 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퇴근 시간인 만큼 가로등 켜진 거리에는 복작복작 사람이 많았다. 친구, 커플, 가족 등등….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겨울이라 날은 상당히 쌀쌀하겠으나, 따뜻한 카페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어째서인지 화사한 느낌이 있었다. 연말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 때문에 그러한 것 같았다.
“서재희.”
“어.”
“연말에 시간 비워 놔.”
“또 왜?”
대화를 영 이어 가고 싶지 않게끔 만드는 대꾸에 재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볼일도 다 끝났겠다,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듯 재희는 덜덜 다리를 떨고 있었다. 재환도 딱히 그녀를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 집에 좀 와. 나도 갈 거야.”
“엄마 이모랑 같이 사는 거 아녔어? 언제 이사했데.”
또 한 번 재환의 눈썹 사이가 푹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여기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끝도 없을 것 같아, 그냥 ‘연말이니까 한번 좀 와.’ 하고 말았다. 재희는 입술을 삐죽일 뿐 별다른 답이 없었다. 알았다는 소리지 싶었다.
남은 음료를 한 번에 쭉 들이켠 재희가 숄더백 형태의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커피가 절반 이상 남아 있던 재환은 쓱 눈을 들어 재희를 보았다. 혹 누가 훔쳐 갈세라 재희는 가방끈을 쥔 손에 바짝 힘을 주고 있었다.
“나 먼저 간다, 그럼.”
“그래.”
이왕 만난 거 저녁이나 먹고 헤어지자는 말은 재환의 목젖을 툭 건드리기만 할 뿐 금방 다시 가라앉았다. 마찬가지로 재희 역시 고맙다거나 돈 잘 쓰겠다는 말은 끝까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쟁반을 쥐고 오가는 사람, 빈 테이블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 재빨리 카페 밖으로 사라졌다.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한가운데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재환은 푸르르, 짧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그다지 넓지 않은 의자 등받이에 푹 등을 기댔다. 두 손으로 잔을 쥐자 초반의 펄펄 끓는 듯한 기운이 이제는 어느 정도 가셔 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꿀꺽꿀꺽 마시고 일어날 마음은 딱히 들지 않았다. 집에 빨리 돌아가 봤자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비를 팔아 버린 지금,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타나 뚱땅거리는 정도였다.
발꿈치로 두어 번 카페 바닥을 툭툭 내리찍던 재환은 느릿느릿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점퍼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쇼케이스에 한가득 진열된 색색의 케이크를 잠시간 살피다가, 개중 빨간색 하얀색이 섞여 가장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케이크를 골라 주문했다. ‘포크는 몇 개 드릴까요?’ 하는 점원의 말에 당당히 ‘하나요.’라고 답했다.
케이크와 포크 하나가 담긴 쟁반을 쥐고 자리로 향하던 재환은 바삐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문득 발이 멈추었다. 눈매에 힘을 주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테이블을 유심히 살폈다. 이데아의 보컬 형찬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다만 그가 팔로 어깨를 꼭 감싼 여자는 재환이 모르는 얼굴이었다. 같은 밴드의 키보디스트이자 형찬의 여자 친구인 유정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반갑다고 알은체할 사이도 아니고, 괜히 눈이 마주쳤다 서로 껄끄러운 상황만 생길 것 같아 재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제자리로 돌아가 부러 형찬 방향을 등져 앉았다. 카페 안이 워낙 소란스러워 형찬이 앉은 테이블에서 나는 소리가 이곳까지는 와 닿지 않았다. 괜히 그쪽으로 신경이 쏠리느니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재환은 포크를 집어 케이크를 큼지막하게 푹 떴다.
빨간색 빵 사이사이에 하얀 크림이 들어간 케이크는 재환의 예상과 달리 몹시도 달았다. 달지 않은 케이크도 있겠냐마는, 재환이 내심 기대했던 것처럼 새콤한 딸기 맛 같은 게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초콜릿 맛에 가까웠다. 아니, 색이 이렇게 새빨간데? 재환은 고개를 갸웃하며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잘라 입에 넣었다. 역시나 달았다.
케이크 접시도, 커피 잔도 얼추 바닥을 보일 즈음 재환은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돌렸다. 형찬, 그리고 그와 꽤나 사이가 친밀해 보이던 여자가 있던 테이블에는 그새 다른 손님이 와서 앉아 있었다. 다시 고개를 되돌린 재환은 남은 케이크를 아주 느리게, 그것도 여러 번으로 나눠 먹었다. 어떻게든 집에 천천히 돌아가기 위한 꽤나 궁상맞은 꾀였다.
지하철 대신 한참을 빙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그냥 이대로 씻고 자도 무방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편히 옷을 갈아입자마자 습관처럼 노트북 앞에 앉은 재환은 씹…, 하고 나지막이 욕을 뇌까렸다. 장비도 없는 판국에 여기 앉아서 뭘 하겠다는 건지. 하지만 이미 노트북을 켜 버린 터라 일단은 부팅이 완료되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바탕 화면이 뜨자마자 시퀀서 프로그램의 아이콘을 클릭한 재환은 또 ‘미친.’ 하고 꽤나 거친 소리를 중얼거렸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들 하는 모양이었다. 작업하던 파일은 이제 영락없이 외장 하드에 담아 곱게 한영의 집으로 들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는 오디오 인터페이스도, 모니터 스피커도 다 멀쩡히 있었으니까.
성질 옹졸한 것을 팍팍 티 내느라 한영을 돌려보냈던 날 이후, 재환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고, 공교롭게 요 며칠 녹음 스케줄도, 합주도 없어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물론 몇 번인가 메시지를 보내려 시도는 했었다. 네가 준 매운 라면을 먹다 죽을 뻔했다든가, 다음에 오면 너도 끓여 주겠다든가…. 제가 적으면서 봐도 정말 싱겁기 짝이 없는 내용이라, 결국 재환은 조용히 핸드폰 화면을 꺼야만 했다. 사실 ‘미안해’ 한마디면 되는 걸 텐데. 이러니 이백만 원이나 되는 돈을 받고도 고맙다는 말이 없던 동생을 차마 탓할 수가 없었다. 말주변 없는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핏줄이 어디 가겠느냐는 말이다.
막상 책상 앞에 앉았음에도 할 일이 없던 재환은 무의미하게 인터넷 창이나 들락거렸다. 하등 관심 없는 연예인의 기사를 클릭했다 뒤로 가기를 누르고, 볼 일도 없는 최근 개봉 영화의 소식을 살폈다가 또 뒤로 가기를 눌렀다. 시간을 허투루 쓴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재환은 게으름 부리는 일에 영 익숙하지 않았다. 천성이 그랬다.
멀거니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며 아까운 시간만 보내던 재환은 결국 기타를 쥐었다. 뭐가 됐든 일단 좀 쳐 볼 생각이었다. EP 앨범에 실릴 밴드 노래를 한 번씩 쫙 쳐 봐도 좋았고, Embryo의 기타 연주를 카피해도 좋았다. 이처럼 재환은 기타를 쥐었을 때 단 한 번도 무엇을 칠지 몰라 고민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치고 싶은 게 많아서 문제지. 그만큼 좋아하는 일이니 당연했다.
그런 저를 구질구질하다던 동생의 악다구니를 애써 기억에서 몰아내며, 재환은 앰프에 기타를 연결했다. 앰프의 마스터 볼륨을 적당히 키운 뒤, 손이나 풀 겸 속주를 몇 차례 연습했다. 평소 연주할 때 속도를 중시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가끔 이런 것도 해 둬야 손이 굳지 않았다. 뭐, 더 숨에 있는 한 무대에서 이리 정신 사나운 연주를 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만.
이어서 재환은 더 숨의 노래를 꽤나 진지하게 연주했다. 아직 두어 곡은 기타 녹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플레이에서 몇 가지 다른 것들도 시도해 보았다. 그랬더니 시간이 훅훅 빨리도 지나갔다. 목적도 없이 인터넷이나 기웃거릴 때와는 전혀 달랐다.
내처 핸드폰에서 녹음기를 켜 이것저것 새로운 리프들을 녹음해 보던 재환은 문득 손을 멈추었다. 휙 눈을 옆으로 굴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기를 잠시, 기타를 내려놓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로 다가가 꽁꽁 닫혀 있던 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투둑, 투둑. 촘촘히 얽힌 방충망 너머,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떠다니는 골목에 가느다란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꽤나 날이 맵차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눈이 올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창으로 들이치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재환은 그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한동안 우두커니 창가에 서서 내리는 비를 응시했다. 언젠가부터 비가 오면 이리 넋 놓고 쳐다보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라면 습관이었다.
슬슬 빗줄기가 세지며 피부를 때리는 찬바람에 물기가 섞여 들 즈음, 재환은 도로 창문을 닫았다. 털썩 책상 앞에 앉아 여전히 녹음기가 틀어져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정지 버튼을 눌러 구불구불 파형을 그리며 나아가던 바를 멈추었다.
방금 저장된 녹음 파일을 재생시킨 뒤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작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잔뜩 집중해 보았으나, 종전까지 생생히 듣고 있던 빗소리 대신 위잉-, 하는 룸 톤만 흘러나왔다. 하긴, 핸드폰 마이크에 바깥 소리까지 깨끗이 녹음되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무리수였다.
괜히 용량만 잡아먹는 파일을 과감히 삭제한 재환은 메신저 앱을 켰다. ‘00:00’이 표시된 전자시계를 찍은 사진으로 설정해 둔 프로필 사진 위에서 엄지가 까딱거렸다. 길어지는 고민의 시간에 비해 상대에게 적어 보내고픈 문장은 사실 매우 간결했다.
비 와.
네가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두 글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메시지는 끝내 한영에게 전송되지 못했다. 우물쭈물 멍청하게 고민만 하는 사이 비가 그쳐 버린 까닭이었다. 차마 웃지도 못할 이유였다. 대신 기타나 더 친 재환은 불도 훤히 켜 놓은 채로 기타를 죽부인 삼아 껌뻑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뜬 아침이었다.
꾸물꾸물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기타부터 스탠드에 세워 놓은 재환은 충전도 안 하고 방치해 뒀던 핸드폰을 집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그란 버튼을 콕콕 눌러 보아도 꺼먼 화면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 밑구멍에 충전 케이블을 꽂았다.
노트북 못지않게 기나긴 부팅 시간 끝, 드디어 핸드폰이 다시 켜졌다. 밤새 뭐 얼마나 연락이 왔었겠나 싶은 마음으로 메신저를 켰다. 이윽고 목록 맨 위에 떠 있는 숫자 ‘00:00’의 사진이 시야에 담기는 순간, 아직 잠기운이 묻었던 눈에 한순간 확 초점이 잡혔다. 서둘러 엄지가 메시지를 눌렀다.
[비 오다 그쳤어 재환아. 보고 싶다.]
하하. 잠시간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보던 재환의 입에서 힘 빠진 웃음이 흘렀다. 상대를 향한 자신의 항복을 인정하는 웃음이었다. 역시 재환은 한영을 이길 수 없었다. 제게는 어려운 일들을 이리 아무렇지 않게 해내니, 어찌 감히 그를 이길 수 있겠는가. 제가 부렸던 아집이나 몰래 키운 걱정 같은 것들이 이토록 한영 앞에서는 늘 쓸모없어졌다.
다만 이렇게 항복을 외치고 외치다, 그의 발아래 엎드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빌게 되는 순간이 올까 재환은 그것이 두려웠다.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당연히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재환의 사고방식은 썩 긍정적인 편이 아니었고, 언제든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는 건 이미 버릇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인생을 뒤흔들 정도의 변화를 겪으면 사람이 이리되는 모양이었다. 초라한 변명이었다.
재환은 안 그래도 까치집이 된 머리를 대차게 헝클어트리며 아침부터 스멀스멀 몰려오는 부정적인 기운을 애써 걷어 냈다. 하지만 한영에게 답할 말을 고민하는 동안 다시 퐁당 어두운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역시 나는 글렀다고. 그도 그럴 것이, 메시지 창에 적혔다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문장들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응]
[그래]
[ㅇㅇ]
아무리 노력해도 좀체 두 글자를 넘어가지 못했다. 저런 건 사실 문장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러다 겨우 ‘지금은 안 와’라는 말을 완성해 막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즈음이었다.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하며 유한영 세 글자가 수화기 표시와 함께 화면에 떠올랐다. 잠깐 멈칫했던 재환은 통화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얼굴 옆에 가져다 댔다. 그 짧은 시간 사이 재빠르게 소리 죽여 헛기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보세요.”
- 재환아, 그림 그리러 와…!
아주 조금의 부정적인 생각들조차 단숨에 저 멀리로 훠이훠이 날려 버리는, 오직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목소리가 고막으로 쏟아졌다.
* * *
“재환아!”
널따란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지 못한 재환은 잠시 넋을 놓았다. 상대의 만면에 피어 있는 꽃 같은 미소를 보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기 전까지 어떤 첫마디로 인사를 건넬까 고민하던 것이 덩달아 거짓말처럼 뇌리에서 새하얗게 지워졌다. 하여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끄먹거렸다. 그 틈을 타 덥석 팔목이 붙잡혔다.
“빨리 이리 와 봐…!”
어엇, 하며 다급히 신발을 벗은 재환은 오늘따라 보폭이 넓은 한영을 쫓아 반강제로 재게 발을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계단을 올라 2층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래 봤자 목적지는 뻔하다 생각했는데, 익숙한 방문을 지나치는 순간 재환은 한영이 그의 방이 아닌 다른 곳으로 저를 이끌고 있음을 깨달았다. 재환이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장소였다.
복도 맨 끝, 늘 굳게 닫혀 있던 문을 활짝 연 한영이 멀뚱히 문가에 선 재환에게 얼른 들어가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하나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기다리지 못하고 재환의 등 뒤로 다가와 부드럽게 양어깨를 감싸 쥐었다.
“빨리.”
“어, 어.”
결국 재환은 한영에게 슬슬 등이 떠밀려 매끈한 문지방을 넘게 되었다. 동시에 시야가 새하얀 빛살에 잠겼다. 얼굴도 같은 빛깔로 물들었다. 몇 번이나 눈꺼풀을 깜빡여도 눈부심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사위가 온통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 초쯤 시간이 지나고서야 재환은 그 빛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인지했다.
1층 거실보다도 널찍한 방, 벽 한 면을 모두 차지한 전면 창이 바깥의 햇살을 한 톨 거르지 않고 모두 안으로 통과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재환은 제가 실내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햇볕 아래 서 있는 것인지 일순 착각을 느꼈다. 창 너머로 펼쳐진 고즈넉한 겨울 정원의 풍경이 이 신비한 착각을 부추겼다.
하지만 재환의 시선은 창에 오래도록 머무르지 못했다. 몇 차례 더 눈을 끔뻑이던 재환은 가구도, 무엇도 없는 방 한가운데 외딴 섬처럼 홀로 자리한 검정색 그랜드 피아노를 발견했다. 매끄러운 피아노 표면이 주위로 자잘한 빛을 튕겨 내어, 마치 저 스스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 큰 피아노네….”
거기에 또 반쯤 얼을 빼앗겨 빈약한 감탄사를 중얼거리던 재환은 모래사장처럼 반짝이는 나무 바닥을 밟아 방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았다. 그때, 미처 시선을 주지 못했던 오른쪽 벽으로 휙 고개가 돌아갔다. 바닥에 널따랗게 깔린 투명 비닐 위에서 색색의 페인트 통이 알록달록한 빛을 뿜고 있었다. 동시에 재환은 아침나절부터 부지런히 서둘러 이곳으로 향했던 이유를 상기했다. 재환은 오늘 여기에 그림을 그리러 온 것이었다. 다만,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여기서… 그림 그리자고?”
“응.”
나긋한 대답과 함께 한영이 등 뒤에서 재환을 폭 끌어안아 왔다. 주위를 떠도는 온화한 공기보다도 한층 따뜻한 온기가 금세 맞닿은 곳에서 퍼졌다. 그대로 한영은 걸음을 옮겨 빨주노초파남보로 늘어선 페인트 통 가까이 다가섰다. 품에 안긴 재환도 함께 뒤뚱뒤뚱 걷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다 그릴 거야.”
“저기?”
“응, 저기.”
배에 얹혀 있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보낸 재환의 얼굴에 다소 난처한 기색이 서렸다. 새하얀 벽 말고는 딱히 눈에 보이는 게 없던 까닭이었다. 얼룩 하나 없는 벽을 말끄러미 응시하던 재환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시 입을 뗐다.
“저거 그냥 벽이잖아.”
“응, 벽이야.”
어깨에 닿은 고개가 끄덕이며 뾰족한 턱 끝이 쿡쿡 쇄골 근처를 찔렀다. 한영이 계획하는 바를 얼추 짐작한 재환은 보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끔찍한 그림 실력이 들통 나는 거야 이미 각오한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저 깨끗한 벽이 엉망이 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재환은 어쩔 수 없이 궁상맞은 소리가 나갔다.
“나중에 어떡하려고. 아예 도배 다시 해야 할 텐데. 그리고 여기 피아노 치는 방 아냐? 부모님 아시면….”
축축하고 물컹한 감촉이 쓱 뺨을 훑고 올라가는 느낌에 재환은 히익, 하며 몸서리쳤다. 혀 한 번 날름 내민 것으로 조잘거리는 입을 단번에 막은 한영은 제 팔에 감싸인 재환의 허리를 더욱 꽉 안았다. 입술은 잘생긴 귓바퀴로 옮겼다.
“안 지울 거야. 재환이 네 그림. 그니까 빨리 그려 줘.”
앗 하는 사이에 겉에 걸치고 있던 두툼한 점퍼가 벗겨졌다. 뒤이어 살짝 건조한 듯한 손이 훅 윗옷 아래로 들어와 맨살을 만졌다. 손이 슬금슬금 배를 타고 위로 올라감에 따라 옷자락이 함께 들추어졌다. 난데없이 옷이 벗겨지는 상황에 놓인 재환은 다급히 한영의 팔뚝을 붙잡았다.
“야, 자, 잠깐만. 옷은 왜…!”
바르작거리는 와중에도 티셔츠는 벌써 가슴 위까지 올라갔다. 여기서 만세만 하면 바로 휙 얼굴을 통과할 기세였다. 그림 그린다고 했지 야한 일을 하기로 한 기억은 없던 재환은 필사적으로 옷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뒤늦게 태연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옷 입고 그리면 더러워져.”
아득바득 옷자락을 사수하던 재환은 일순 멈칫했다. 한영에게 엉큼한 속셈이 없음은 이제 잘 알았다지만, 그렇다고 홀딱 벗고 그림 그리는 일이 괜찮을 것 같지는 않았다. 창이 저렇게 훤히 뚫려 있는데 아무래도 남사스러웠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영은 얼마쯤 더 재환의 옷을 죽죽 위로 당겼다. 그러다 별안간 재환을 와락 부둥켜안고 맑은 웃음을 톡 터뜨렸다.
“재환아. 다른 옷 있어. 벗어야 갈아입지. 응?”
아, 뭐야…. 눈썹 사이가 쪼그라든 재환은 눈을 굴려 제 뺨에 옆얼굴을 딱 붙인 한영을 힐끔 째려보았다. 그래 봤자 거리가 너무 가까워 싱글거리는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볼멘소리를 쏟고 싶어 입이 달싹거렸지만, 몇 번이나 엉뚱한 오해를 한 것이 영 민망하여 당장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그렇지. 옷 벗고 그림 그리는 건 좀 이상하지. 변태도 아니고.
“근데 난 벗고 그려도 괜찮아.”
재환은 냅다 팔꿈치로 한영의 배를 찔렀다. 하지만 지나치게 딱딱한 복부는 움찔거리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환에게 더 딱 붙을 뿐이었다.
그 상태로 잠시 미지근한 침묵이 흘렀다. 저를 놓아줄 기미가 없는 단단한 품, 그로 인한 포근함, 귀 가까운 곳에서 사락사락 흩어지는 따스한 숨결. 이 모든 것이 이윽고 재환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를 흘러 나가게 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미안해.”
슬쩍 고개를 떨군 재환은 자신의 배를 폭 감싸고 있는 하얀 손등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지난번 너를 그렇게 내쫓으면 안 되는 거였다고, 그러고서 사실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고 몇 마디를 덧붙여야 하건만, 어지간히도 멋대가리 없는 성격이 거기까지는 차마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이 그다지 필요 없을 정도로, 상대는 이미 재환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냐.”
한영이 도리도리 고개를 젓자 가느다란 머리칼이 간질간질 재환의 관자놀이를 스쳤다. 그럼에도 재환은 어느새 어두워진 낯을 펼 수 없었다. 이 방을 가득 채운 환한 빛도, 가까이 붙은 남자가 풍기는 다디단 향기도 저에게는 전부 어울리지 않는다는 못난 생각이 빠르게 울렁울렁 차올랐다. 빛 안 들고 좁은 방구석에서 신세 한탄이나 하는 게 제게는 딱 어울리는 것 같았다.
“진짜 미안해….”
그리하여 고개가 더 푹 숙어지며 한층 힘 빠진 목소리가 비어졌다. 종전까지 옷 안 벗겠다 악착같이 버티던 모습은 어디 가고 갑자기 왜 이리되었는지 저조차 모를 노릇이었다. 그냥, 최근 재환은 종종 이랬다. 멀쩡히 있다가도 뜬금없이 기분이 널을 뛰었다. 끝 간 데를 모르고 깊어지는 우울감이 바닥을 쳤다. 재환은 이 우울을 한영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재환아.”
“…응.”
“미안하면 나 뽀뽀.”
뒤에서 재환을 껴안은 한영의 고개가 쑥 앞으로 기울어지며 말간 낯이 시야를 꽉 메웠다. 숨기지 못한 기대로 반짝거리는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시간이 차츰 길어지고, 끝내 재환은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음속으로는 또 한 번 한영을 향해 항복을 고했다.
재환은 한영의 품 안에서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비로소 한참 만에 마주한 한영의 불그스름한 입술에는 여전히 연연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장 입 맞추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고운 미소였다. 재환은 자신의 본능과 의지가 시키는 바를 구태여 무시하지 않았다.
슬쩍 얼굴의 각도를 틀어 입술을 포갰다. 진득이 살결을 맞댄 뒤 입술을 떼자 맞물렸던 점막이 멀어지며 쪽, 하고 제법 큰 소리가 울렸다. 재환 나름의 아주 정성스러운 뽀뽀였다. 이 달콤한 접촉은 상대에게 만족과 불만족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한영은 조금 착잡한 눈으로 바로 놓인 도톰한 입술과 그 뒤로 넓게 펼쳐진 허연 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뽀뽀로만 끝내기는 못내 아쉬웠으나, 그 마음을 억지로 내려 앉히고서 재환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옷 갈아입자, 재환아.”
한영이 재환을 위해 준비해 둔 옷은 위아래가 시커먼 트레이닝복이었다. 그 옷을 입고 다시 벽 앞에 선 재환은 살짝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아니, 이렇게 무난한 옷이 있었으면 진작 좀 빌려줄 것이지, 하필 오늘 같은 날 꺼내 줄 건 또 뭐람.
소리 없이 푸념하다 흘끔 눈을 돌린 재환은 저와 마찬가지로 위아래 검정색을 뒤집어쓴 한영을 보았다. 내심 한영에게 저리 칙칙한 색은 안 어울릴 거란 예상이 있었는데, 멀끔한 생김새는 차림에 하등 구애받지 않는다는 걸 새삼 다시 느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검정 옷을 입으니 뽀얀 낯빛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괜히 한영이 얄미워진 재환은 입술을 한 번 삐죽였다. 그게 뽀뽀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거늘, 배시시 눈을 접어 웃은 한영은 재환에게 천연히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뭐 그리고 싶어?”
통창으로 들이친 햇살을 쭉쭉 빨아들인 얼굴이 맑게 빛났다. 거기에 괜히 넋을 빼앗기기 전, 재환은 슬그머니 눈을 돌리며 ‘모르겠어.’ 하고 어물거렸다. 물론 대충 주워섬긴 대답은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안타깝게도 재환의 그림 실력은 뭔가 그리고 싶다고 그릴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직 한영이 그걸 몰랐다.
“여기 자리 엄청 많으니까 그리고 싶은 거 다 그려, 재환아.”
자리가 문제가 아니라는 대꾸를 참은 재환은 페인트 통에 담긴 붓을 집고 탁탁 터는 한영을 따라 다른 통에 담긴 붓 하나를 집었다. 붓을 꺼낼 때부터 질질 흐른 퍼런 페인트가 바닥에 덮인 비닐 위로 못생긴 얼룩을 그렸다.
“저런 것도 괜찮다.”
그 얼룩을 내려다보며 한영이 중얼거렸다. 지금 누굴 놀리나, 라는 꼬인 마음을 먹기에는 너무도 순수한 표정이었다. 뒤이어 한영은 사박사박 비닐을 밟아 벽 가까이 다가섰다. 재환도 얼른 한영을 따라 벽에 붙었다. 한영이 이렇게까지 준비해 둔 거, 진짜 뭐라도 그리긴 그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한영이 빤히 이쪽을 보고만 있어 재환은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미친 듯이 부끄럽다는 소리였다. 무대에 서서 기타를 치던 패기는 이미 엿 바꿔 먹었다.
“너 먼저 그려. 너 그리는 거 보고 나도 따라 그릴게.”
‘음….’ 하던 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재환은 제가 뱉은 소리를 금세 후회하게 되었다. 새하얀 벽 위에서 춤추듯이 휙휙 움직이는 붓을 보고 있자니 그런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 몇 번 오가지도 않았던 붓은 벽 위로 새빨간 기타를 완성시켰다. 재환은 감탄하는 동시에 적잖이 주눅이 들어 버렸다.
“재환이 너도 빨리 그려.”
그사이 한영은 제법 신이 났다. 이쪽의 그림이 빨리 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눈가를 꿈틀거리던 재환은 마지못해 속으로 ‘에라, 모르겠다!’를 외치며 어설프게 한영의 몸짓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림 실력까지 흉내 낼 수는 없었다.
“뭐게…?”
그림을 완성한 재환은 몰려오는 민망함을 삭이며 짐짓 재미난 수수께끼라도 내는 양 한영에게 물었다. 하나 제가 물으면서도 이게 도대체 뭔가 싶었다. 나름 한영의 그림을 따라 해 본 것이었는데, 꼬불꼬불 두서없이 엉킨 선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요만큼도 엿보이지 않았다. ‘모른다’라고 답하는 대신 골똘히 고민에 잠긴 듯한 한영의 모습이 재환의 민망함을 더욱이 부추겼다. 끝내 재환은 그림 위에서 휙휙 손을 저었다.
“아, 이번 건 망한 것 같아. 다시 그려야겠다.”
“베이스…?”
흠칫 굳은 재환은 데구루루 눈알만 굴려 한영을 보았다. 그림을 유심히 살피는 표정이 나름 진지했다. 이어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대답에 보다 깊은 확신이 실렸다.
“베이스 맞지, 재환아?”
“어? 아, 어….”
도리어 정답을 듣고 놀라 버린 재환은 저도 모르게 얼뜬 소리를 내었다. 반대로 한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환히 웃었다. ‘줄 네 개잖아.’라는 썩 합리적인 추론 근거까지 덧붙였다. 저 기괴한 선이 제대로 베이스 줄로 보인 게 재환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다음으로 노란색 붓을 든 한영이 그린 것은 북엇국이었다. 처음에는 뭘 저리 정성 들여 그리나 싶었는데, 동그란 그릇 안에 퐁퐁 건더기가 띄워진 모양새를 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북엇국을 그림으로 표현한 한영도 대단하고, 또 그걸 찰떡같이 알아맞힌 저도 썩 신기해 재환은 한참을 웃었더랬다. 한영도 재환을 따라 고른 이를 활짝 드러냈다.
벽을 커다랗게 차지한 북엇국을 보고 한차례 시원히 웃어 젖힌 재환은 주황색 페인트 통에서 붓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도 슬쩍 한영의 그림을 참고해 동그란 그릇 안에 꼬불꼬불 면발 그려 넣었다. 여지없이 한영은 ‘라면!’이라는 답을 들려주었고, 재환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해 또 함박웃음 지었다. 제 처참한 그림 실력을 타박하던 청년은 어느새 눈앞의 벽을 빨갛고, 파랗고, 노란 색으로 알록달록 물들이는 데에 흠뻑 빠져들었다.
세 번째로 한영이 그린 그림은 다름 아닌 재환의 얼굴이었다. 머리 위에 시꺼먼 볼 캡을 쓰고 있어, 역시나 일부러라도 못 알아본 척하기가 어려웠다. 어째 표정도 좀 뚱한 것 같았다. 그래서 저게 뭐 하는 얼굴이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처음 만났던 날의 얼굴이란다. 그날은 아이돌 같다는 말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누구를 오지게 욕한 기억밖에 없는지라, 재환은 그냥 꾹 입을 다물었다. 다만 그게 벌써 반년도 더 지난 일이라는 생각을 하자, 공연히 가슴속에서 뭉글뭉글한 기분이 퍼졌다. 쓸데없이 코를 한 번 훌쩍이게 만드는 그런 기분이었다.
한영에 이어 다시 붓을 잡은 재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보란 듯 그의 얼굴을 그려 주고 싶었지만, 왠지 사람 얼굴은 용기나 패기로 어떻게 그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저 반듯반듯한 이목구비를 제 손으로 망치기가 영 뭐했다. 그 정도의 양심은 있었다.
재환이 빈 벽과 눈싸움을 벌이며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영의 표정에는 의문이 서렸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한영은 마침내 ‘재환아…?’라고 조심스레 상대를 불렀다. 그 순간, 갑자기 ‘아…!’ 하는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영의 눈은 동그래지고 재환의 입가에는 더없이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유한영.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게.”
붓 끄트머리를 벽에 댄 재환은 크게 심호흡했다. 부끄러움 따위 저만치 멀리로 날려 버린 채, 벙긋벙긋 입을 벌려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창문을 열어 보니 비가 오네요.
지렁이 세 마리가 기어갑니다.
아이고 무서워라, 해골바가지.
노래를 다 부른 재환은 넘실넘실 뿌듯함이 넘쳐흐르는 얼굴로 한영을 보았다. 그 앞의 벽에는 눈알 뻥 뚫린 해골바가지가 큼지막하게도 그려져 있었다. 그림 실력으로 한영을 이길 수는 없지만, 그가 미국에서 자란 걸 생각했을 때 그래도 이건 모르겠지 싶었다. 하여 발꿈치까지 들썩이며 한영의 반응을 기다리는 중, 드디어 붉은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What the fuck.”
꿈틀거리던 입꼬리가 추를 매단 듯 한순간 쭉 아래로 떨어졌다. 눈썹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팼다. 아무리 영어가 젬병이라도 저 문장이 순수한 의미의 감탄사가 아님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래도 사람이 보인 성의가 있는데…. 하릴없이 재환의 얼굴 위로 먹구름 같은 실망감이 드리웠다. 그때였다. 들입다 한영에게 양어깨가 붙잡히며 재환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나도 알려 줘!”
“어, 어…?”
“나도 빨리 알려 줘, 재환아!”
한영이 어깨를 짤짤 흔들 때마다 재환의 고개도 함께 앞뒤로 꺼떡꺼떡 흔들렸다. 아직 붓을 쥐고 있던 손도 덩달아 덜렁거리며 해골을 그린 보라색 페인트가 이리저리로 흩뿌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영은 재촉을 이어 갔다.
“빨리! 응?”
결국 팔랑팔랑 흔들리던 재환은 ‘알았어, 알았어!’를 외쳤다. 그제야 한영은 재환을 놓아주고서 얼른 붓을 집어 들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부릅뜨고 재환에게 ‘빨리, 빨리, 빨리’라는 눈빛을 쏘아 댔다. 따라서 재환은 얼결에 종전 부른 노래를 또 한 번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가 합창이 되기까지는 얼마 오래 걸리지 않았다.
커다란 창으로 흘러드는 햇살이 눈 부셨다. 몽글몽글 떠다니는 빛 무더기를 가르고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아침 먹고 땡-’ 하는 노랫말이 공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매끈한 나무 바닥 위를 미끄러지고, 새카만 피아노를 한 바퀴 둘러 지난 노래는 다시 돌아와 신이 나서 붓을 움직이는 두 청년의 귀로 스며들었다. 색색의 해골이 벽에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걱정이나 우울 따위 요만큼도 섞이지 않은 투명한 웃음이 피었다.
몇 번을 재환과 함께 노래하던 한영은 이번엔 저 혼자 해 보겠다며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팔짱을 낀 재환은 한영 하는 양을 잠자코 지켜보았고, 끝내 한영은 주룩주룩 비만 내리다 포기를 외쳤다. 재환은 그럴 줄 알았다며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가슴팍에 후드득 페인트가 튀는 바람에 웃음을 그쳐야만 했다. 놀림에 뿔이 난 한영의 앙큼한 복수였다.
당하고 있을 재환이 아니었다. 분홍색 페인트 붓을 냅다 쥔 재환은 마치 검객이 칼을 휘두르듯 휙휙 붓대를 내저었다. 그러다 기어이 한영의 옷에 앞뒤로 벚꽃 잎 같은 색을 와장창 흩뿌리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하필이면 머리칼과 페인트 색이 같은 것도 그렇게 웃길 수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승리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재환의 까만 머리에 샛노란 페인트가 방울방울 튀었다. 코끝에는 루돌프 코처럼 빨간 점이 콕 찍혔다. ‘야이씨, 너…!’를 외친 재환은 아예 양손에 붓을 들고 한영에게 달려들었다. 엎치락뒤치락 두 사람의 몸이 엉키고, 이제는 딱히 하나로 구분할 수 없는 색이 전신을 뒤덮었다. 알록달록한 소란 속에 오늘 이 자리에 섰던 목적은 어느덧 희미해졌다.
사이좋게 서로의 뺨에 치덕치덕 페인트를 묻히던 손이 등허리를 감쌌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온갖 색채를 가르고 타는 듯한 시선이 엉키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옅게나마 남아 있던 그림이니, 페인트니, 붓이니 하는 것들의 존재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얼룩덜룩 페인트 자국으로 범벅된 벽에 쿵, 재환의 등이 부딪쳤다. 허겁지겁 숨을 섞는 와중 한영이 옷자락을 끌어 올리면 자연히 재환이 팔을 번쩍 들었고, 뒤이어 서로 역할을 바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윗도리가 순식간에 비닐로 덮인 바닥에 나가떨어진 것처럼, 바지가 벗겨진 것도 한순간이었다. 검정색 옷감 위에 색색으로 손바닥 모양을 새기던 손이 기다렸다는 듯 맨살을 더듬었다.
얼굴에 페인트가 묻건 말건 한영은 목빗근이 바짝 솟아오른 재환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손바닥으로는 꿈틀거리는 옆구리를 거듭 쓸어 올리며 페인트 냄새에도 사그라지지 않은 체취를 담뿍 느꼈다. 어느새 벌떡 선 성기가 서로의 허벅지와 뱃가죽에 마구잡이로 비벼지며 겹겹이 칠해진 페인트 얼룩 위로 새로운 자국을 그렸다.
끝을 모르고 차오른 흥분은 이윽고 시간, 장소, 상황 따위의 개념을 휩쓸어 가는 달콤한 파도가 되었다. 빨강, 주황, 노랑, 파랑, 초록이 넘실거리는 이 무지갯빛 파도에 두 청년은 기꺼이 몸을 내던졌다. 밭은 숨결, 뜨거운 손길이 서로를 이끄는 유일한 길라잡이였다.
‘빨리’라든가 ‘안 돼?’라는 말은 오가지 않았다. 한영이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어언간 뒤를 돈 재환은 이미 두 손으로 벽을 짚고 있었고, 재환이 조르지 않았는데도 한영은 그 뒤에 바짝 몸을 붙였다. 그나마 깨끗한 손가락이 옴찔거리는 구멍을 휘젓기를 잠시, 더는 커질 수 없을 만치 부푼 성기가 메마른 내벽을 꿰뚫었다.
“허윽…!”
울툭불툭 마디가 도드라진 손등 위로 노란색, 빨간색이 칠해진 손이 포개어졌다. 벽과 손바닥 사이로 세게 깍지가 끼워지는 동시에, 길을 트듯 두어 번 얕게 안팎을 드나들던 성기가 한 번에 쑤욱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부유하는 햇살 속에 애타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짖는 외침이 녹아들었다.
“유, 한영…!”
“하아, 재환아…!”
아랫입술을 깨문 한영이 기어코 가장 깊은 곳까지 성기를 찔러 넣었을 때, 재환의 등이 뒤로 활처럼 휘어지며 동그란 뒤통수가 어깨에 닿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한영이 재환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싸 홱 각도를 잡았다. 곧바로 입술이 맞물리고, 찔꺽찔꺽 성기가 마른 주름을 헤집는 끈적한 마찰음 위로 다급히 타액 뒤엉키는 소리가 얹혔다.
죽 성기를 뒤로 빼면 빨판처럼 들러붙어 달려 나오는 속살이 어지러이 섞인 색채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빛을 띠었다. 반대로 쿡 안을 쑤셔 올리면 저 위에서 입이 크게 벌어지며 속살 못지않게 새빨간 혀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박자로 겹쳐 움직이는 허리가 구불구불 물결치는 듯한 곡선을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땀방울이 그 위를 도르르 구르다 툭 튀었다. 잘게 부서지는 물방울에서조차 반짝반짝 빛의 입자가 터졌다.
고개가 한껏 뒤로 꺾인 재환에게 쉬지 않고 입맞춤을 퍼붓던 한영이 한순간 입술을 떨어뜨렸다. 성기도 함께 밖으로 빼냈다. 동전 크기만큼 벌어졌던 구멍이 채 다물리기도 전, 벽을 보던 재환의 몸이 훌떡 한영을 향해 뒤집혔다. 손바닥이 허벅다리 뒤에 감기는 찰나, 하반신이 번쩍 위로 들리며 굵다란 성기가 다시금 아래를 파고들었다.
“어흐윽…!”
흥분과 쾌감이 사지에서 쭉쭉 힘을 앗아 가는 와중에도 허겁지겁 두 팔로 한영의 목을 껴안은 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허공에 뜬 몸이 당장이라도 쿵 바닥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하등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벽을 지지대 삼아 안정적으로 재환의 엉덩이를 받친 한영은 한층 거세게 푹푹 성기를 찔러 올리기 시작했다. 닿아서는 안 될 곳까지 성기가 닿고 있다는 두려움과, 그에 맞먹는 어찔한 자극이 재환의 눈앞을 번뜩번뜩 오색 빛으로 물들였다. 머지않아 닥쳐올 절정을 예고하는 빛이기도 했다.
그 찬란함 속에서 재환은 너절하고, 비루하며, 자기 파괴적인 사고를 잠시나마 벗어 던졌다. 백날 기타 쳐 봤자 어차피 뭣도 안 될 거라는 자포자기를 버렸고,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없다는 열패감을 버렸다. 과거 자신의 자리에 있던 누군가처럼 언젠가 저 또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결국 제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는 걱정도 모조리 다 버렸다. 그래야 이 뜨거운 품 안에서 제대로 숨 쉴 수 있었다. 오롯이 한영을 느낄 수 있었다.
“하아, 유한영…!”
“재환아…. 읏….”
한영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고 매달려 있던 재환의 성기에서 솟구친 정액이 얼룩덜룩한 색으로 덮인 뱃가죽을 적셨다. 터뜨릴 듯 볼기짝을 움키고 성기를 박아 올리던 한영 또한 얼마 안 가 재환의 가장 깊숙한 곳에 흥건히 사정했다. 그 후에도 두 사람은 한참을 더 부둥켜안고 있었다. 서로로 인해 세상 가장 달콤한 흥분을 맛보았던 증거가 회음부를 타고, 허벅지를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으나 누구 하나 신경 쓰기 않았다. 호흡과 박동을 공명하는 일에 오로지 집중했다.
이 꿈같은 순간을 언제까지고 잊지 않기 위한 성스러운 행위였다. 마음이 합쳐지는 과정이었다.
* * *
기타, 북엇국, 해골, 그리고 또 해골 그림이 잠시나마 빼곡했던 자리에 두서없는 페인트 얼룩이 낭자했다. 그 위로 두 손이 포개어져 있던 자국이 선명했다. 알록달록한 색채로 범벅되어 바닥을 나뒹구는 옷가지 옆에는 비슷한 색을 띤 두 개의 몸뚱이가 하나처럼 꼭 붙어 있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한영 위에 몸을 겹쳐 엎드린 재환의 정강이가 뒤로 접혀 달랑거렸다. 페인트가 말라붙은 손바닥이 쉴 새 없이 봉긋하게 솟은 엉덩이를 쓰다듬고, 맞닿은 코끝이 살금살금 서로를 건드렸다. 간헐적으로 숨소리를 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이제는 아예 살이 올록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란 손이 엉덩잇살을 조몰락거렸다. 이를 굳이 말리지 않은 재환은 페인트 때문에 원래의 분홍색이 숨어 버린 상대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며 그 아래 드러난 이목구비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누구 짓인지 아주 작정한 듯 페인트 칠갑을 한 얼굴은 기괴한 색과 무늬를 입고 있었음에도 미처 미모가 가려지지 않았다. 콱 꼬집었다 놓은 것처럼 코는 여전히 오뚝했고, 입술은 위아래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다. 게다가 눈은 또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흘러드는 햇빛 속에 옅은 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적잖이 신기했던 재환은 홍채 주름까지 셀 기세로 한참이나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탓에 쌕쌕 내뱉어지는 콧김이 계속해서 한영의 인중을 간지럽혔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한영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홱 고개를 돌렸다. 물론 입은 웃고 있었다.
“간지러, 재환아….”
“어? 왜?”
딱히 한영을 간지럽힌 기억이 없는 재환은 조금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나름 집중해서 하고 있던 눈동자 관찰을 저지당한 탓이었다. ‘간지럽긴 뭐가 간지러워’ 하는 속마음도 조금쯤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한영은 두 손으로 재환의 작은 머리통을 턱 부여잡았다. 바짝 제 앞으로 끌어당겨 붕어처럼 튀어나온 입술 언저리에 후, 하고 가느다란 숨을 불어넣었다. 재환의 얼굴 근육이 빠르게 씰룩거렸다.
“야, 간지러워…!”
겨우 한영을 벗어난 재환은 한참 만에 몸을 일으켜 바닥을 덮은 비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비닐은 온갖 색이 흩뿌려진 벽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재환은 이 얇은 한 장이 없었으면 나무 바닥이 어찌 되었을지 일순 어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 방에서 엉망진창이 된 건 벽 하나로 족했다. 한영은 저런 게 예술이고 아트라는 시답잖은 얘기를 조곤조곤 그에게 속삭였었지만.
페인트 폭탄을 맞은 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환은 눈을 가느스름히 떴다. 시야의 초점을 흐릿하게 만들고서 다시 벽을 보자, 얼추 예술적으로 보이는 듯도 했다. 하지만 슬그머니 뻗어 온 손에 의해 성기가 쥐이는 순간, 낙서가 예술로 보이는 마법은 단번에 풀리고 말았다.
“읏….”
한쪽 팔을 접어 옆얼굴을 받친 한영이 엉덩이를 조몰락대던 것처럼 재환의 성기를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이번에도 재환은 딱히 한영을 막지 않았다. 대신 재차 눈빛을 흐리멍덩하게 하고 벽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벽 한가운데 콕 찍힌 무늬 두 개가 감상을 방해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재환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영에게 덥석 팔목을 붙잡히는 게 더 빨랐다.
“재환아, 왜?”
“아니, 그게….”
곤란한 표정을 한 재환은 순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한영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흘끔흘끔 벽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저기 찍힌 남사스러운 손자국에 페인트를 덧칠할 생각뿐이었다. 다만, 그 속내가 한영에게는 훤히 보였다.
“엇…!”
재환을 휙 잡아끈 한영은 다시금 그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꼼짝 못 하게 다리까지 단단히 얽고서, 마주 보도록 눕힌 재환의 얼굴을 진득이 살폈다. 뺨이고 코끝이고 온통 페인트가 발라져 있었지만, 단정한 생김새를 가리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잘생기고 멋진 재환과 열기를 나누었던 순간의 흔적을 한영은 결코 지우고 싶지 않았다. 다시 손에 쥔 성기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한영은 절대 물릴 생각 없는 다짐을 재환에게 속삭였다.
“저거 그대로 둘 거야.”
“아니, 왜…. 읏, 응….”
“아무도 못 지워.”
“그래도…. 후….”
이미 두어 차례 사정했던 성기는 꽤나 정성스러운 손길 아래 또다시 살살 몸피를 키웠다. 이를 다분히 인지한 한영은 보다 손바닥을 넓게 사용해 성기를 주무르고 쓸었다. 살짝 아래로 내리깐 재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한층 가느다란 숨이 흘렀다. 한영으로서는 가히 이대로만 있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매일 볼 거야. 매일.”
“뭐? 으, 음….”
그래서 한영은 흥분한 와중에도 귀엽게 황당하다는 낯을 한 재환의 입술에 주저 없이 제 입술을 묻었다. 춥춥 소리를 내며 맞닿은 점막을 빨고, 몰랑한 혀를 찾아 부드럽게 문질렀다. 만질 때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모양 예쁜 성기에 감긴 손 또한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럴수록 뭉개지는 입술을 넘나드는 숨이 노골적으로 밭아졌다.
“후, 응….”
“흐….”
어느새 재환의 손도 자신의 다리와 교차된 길쭉한 다리 사이로 향했다. 만질 때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성기를 쥐고 다소 조급하게 손목을 털었다. 입술이 들러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보다 서로의 손날이 탁탁 사타구니를 때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찔꺽찔꺽 선액이 함께 비벼지는 소리는 덤이었다.
한영의 아랫입술을 길게 물어 당긴 재환이 불시에 휙 몸을 일으켰다. 한영은 당황이 담긴 눈으로 자신의 양 옆구리 가까이를 무릎으로 딛고 선 재환을 올려 보았다. 촉촉이 땀이 밴 손바닥이 가슴팍을 살포시 짚는가 싶더니, 위로 벌떡 솟은 성기에 닿은 구멍의 주름이 한순간 확 넓게 벌어졌다. 탱글탱글한 엉덩이가 철퍽, 매끈한 샅에 닿았다.
“크흡…!”
스스로 성기를 품은 채 주저앉은 재환은 허벅지를 발발 떨며 할딱할딱 숨을 골랐다. 함께 바르르 떨리는 입술 끝에서 한 방울의 침이 뚝, 떨어져 흘렀다. 햇빛에 반사되어 작은 보석 알갱이처럼 반짝이던 침은 이윽고 옴폭 팬 한영의 가슴 사이에 고였다. 그때까지도 반쯤 얼이 나간 한영은 멍청히 눈만 끄먹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 빛나는 재환은 눈부시도록 예뻤고, 그가 주는 열기는 숨 멎도록 뜨거웠으므로.
“하, 아….”
그사이 어느 정도 호흡을 되찾은 재환은 아래를 향해 푹 숙어져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덩달아 쏟아져 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긴 뒤, 허벅지에 힘을 주고 조심조심 엉덩이를 위로 띄워 올렸다. 팽창한 주름을 긁으며 성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절로 콧잔등을 찌푸리게 했으나, 다행히 아직 내벽 곳곳에 정액이 스며 있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뻑뻑하지는 않았다. 이를 윤활유 삼아 재환은 다시 한번 한영의 사타구니에 엉덩이를 붙였다. 재환이 같은 행동을 두어 번 더 반복했을 즈음, 한영의 눈이 차츰 초점을 찾았다.
“읏, 응…!”
근육이 발끈 솟아 길게 고랑이 팬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덮은 한영은 한 번 허리를 크게 위로 쳐올렸다. 재환의 고개가 휘딱 뒤로 꺾이며 가파른 숨이 터졌다. 축축함을 품은 내벽이 성기를 빈틈없이 조이고, 한영 또한 흥분으로 탁해진 숨을 흘렸다. 두 손이 탄성 넘치는 엉덩이로 옮겨 갔다.
“허윽…!”
구멍을 넓히듯 재환의 양 볼기를 움킨 한영은 반듯이 누운 자세에서 본격적으로 허리를 튕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몸이 덜컥거리던 재환은 급히 허리를 뒤로 젖혀 길게 뻗은 다리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그 덕에 위아래로 흔들리는 예쁜 성기가 한영의 시야에 한층 선명히 들어왔다. 허리 짓의 반동으로 곧게 선 기둥이 탁탁 군살 없는 배를 때릴 때마다 이루 말 못 할 시각적 흥분이 피었다. 갈수록 숨소리가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위에 올라탄 재환의 엉덩이 사이를 빠르게 드나들던 한영은 결국 훌쩍 상체를 세웠다. 동그랗게 벌어져 다물릴 줄 모르는 입술에 똑같이 크게 벌린 입술을 겹치고서, 바르작거리는 하반신 아래서 가뿐히 두 다리를 접어 앉았다. 그러자 재환의 다리가 자연스레 허리 뒤로 감기며 두 발목이 얽혔다. 손바닥이 허겁지겁 어깻죽지를 더듬고, 함께 몸이 들썩일 때마다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에서 길게 나온 혀가 뒤엉켰다. 오늘 몇 차례나 두 사람을 휩쓸고 갔던 열기가 다시금 활활 거세게 타올랐다.
“하아…, 재환아…. 재환아.”
“흣, 으…. 윽….”
땀, 새어 나온 정액, 질척하게 녹은 페인트가 한데 섞여 미끄럽게 맞부딪치는 살갗 위로 새로운 무늬를 그렸다. 한 번 성기가 깊은 곳을 찍을 때마다 살이 쩍쩍 붙었다 떨어지며 무늬는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었다. 마치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한시도 서로의 눈동자를 떠나지 않았다. 혀를 비비고, 머리칼을 헤집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집요하게 상대만 보았다. 아예 동공 위로 본인들의 눈부처를 아로새길 것처럼.
정말 딱 그렇게 되기 직전, 재환의 허리를 부여잡은 한영이 뜨거운 속살에 파묻혀 있던 성기를 쑤욱 밖으로 뽑아냈다. 그대로 재환의 몸을 휘딱 뒤집어 두 손과 무릎으로 바닥을 디딘 자세를 잡아 주었다. 한마디로 네발짐승처럼 엎드린 자세였으나, 이미 한영 앞에서 부끄러움을 잊은 재환은 수치나 창피 같은 감정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 열에 젖은 눈빛으로 한영에게 어서 들어와 주기를 종용했다. 재환의 엉덩이 골로 길게 침을 떨어뜨린 한영은 더 지체하지 않고 빠끔거리는 구멍에 귀두를 맞췄다.
“후으윽…!”
성기가 촘촘한 주름을 가르는 순간, 재환의 상체가 푹 아래로 고꾸라졌다. 덜덜 떨리는 입술 안쪽에 침이 한가득 고였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자세로 하는 섹스는 마치 내벽에 새로이 길을 트는 행위와 같았고, 이는 얼마쯤의 고통을 수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가 꿰뚫리는 버거움을 곧 한영이 열락과 같은 쾌감으로 바꾸어 줄 것을 재환은 알았다. 재환의 예상, 내지 바람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허으, 윽…, 후으…. 아아…!”
퍽퍽 샅을 치대는 차진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높은 곡조를 띤 신음성이 함께 터졌다. 굽혀졌던 팔을 도로 펴지 못한 상태로 재환은 한영이 내벽을 찌르는 족족 흥분에 잠긴 탄성을 내질렀다. 뒤에서 박는 자세 탓인지, 아니면 한영이 아예 작정을 한 탓인지 푹푹 쑤셔 박히는 성기는 단 한 번의 어긋남 없이 예민한 곳을 짓눌렀다. 스스로 내는 민망한 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 울리건 말건 도무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입에서 줄줄이 신음이 새듯이 한영의 허리 짓 따라 덜렁거리는 성기 끝에서는 투둑투둑 맑은 액이 떨어졌다. 그로 인해 어깨너비만큼 벌어진 무릎 사이가 꼭 비 맞은 것처럼 젖었지만, 당연히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저도 모르는 새 엉덩이를 더 높이 추어올린 재환은 바닥을 덮은 비닐에 뺨을 붙인 채 몽롱한 시야로 벽을 응시했다. 울긋불긋 온갖 색을 띤 선과 면들이 뱅글뱅글 소용돌이를 그리며 서로 엉키고 뒤섞였다. 너무 기괴한데, 또 너무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침에 젖은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번졌다. 초점이 흐릿해진 눈동자에 몽글몽글 희열이 고였다. 현실과 꿈의 경계 되는 곳에 퐁당 빠져 버린 재환은 한영이 허리를 치받는 대로 덜컥덜컥 흔들리며 더욱이 혼몽한 쾌감 속에 잠겼다. 어느새 제 다리 사이로 뻗어 나간 손이 성기를 쥐고 바지런히 손목을 털었다. 그사이에도 벌게진 입술 새를 가르는 야릇한 음성은 멈추지 않았다.
“으, 응…, 하아…. 아…!”
그러다 정확히 언제쯤 절정이 찾아왔는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쌕쌕 끊어지는 숨을 토하며 젖은 눈꺼풀을 깜빡거릴 즈음에는 이미 손바닥이 허연 액으로 끈적끈적 젖어 있었다. 허벅지가 바르르 떨릴 때마다 붉게 익은 귀두 가운데서 몇 방울의 뿌연 액이 더 튀었다. 하지만 재환에게 탈력감에 잠길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덥석 팔목을 붙잡히는 동시에 바닥 가까이 숙어져 있던 상체가 홱 위로 들렸다.
“크흡…!”
제법 유연한 사람인 체 허리가 둥글게 꺾인 재환은 천장을 보며 단말마를 토했다. 이는 재환의 의도와 상관없이 더 거센 섹스의 신호탄이 되었다. 붙잡은 팔을 있는 힘껏 뒤로 당긴 한영은 퍽퍽퍽 한층 요란한 소리가 울리도록 재환의 둔부에 세게 사타구니를 부딪쳤다. 역시나 딱딱한 귀두는 집요하리만치 한 지점만을 노렸고, 절정을 치른 지 얼마 안 된 재환에게는 자극이 지나치게 과했다.
“거, 거기…, 싫…. 후윽…!”
자극이 중첩될수록 호흡이 툭툭 끊어졌다. 조금 전 한차례 쾌감의 끝 지점에 도달했던 몸뚱어리에 또다시 버글버글 열이 끓어올랐다. 특히 성기가 빠른 속도로 짓치는 배 안쪽이 너무 뜨거웠다. 침, 신음, 헐떡대는 숨소리가 한꺼번에 줄줄 흘렀다. 눈앞이 반뜩반뜩 튀었다.
“유한…, 유한영…. 응, 읏….”
재빠르게 허리 짓 하던 한영은 한순간 재환의 허리를 두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녹은 페인트와 땀에 젖어 번들거리던 가슴팍에 철떡 등이 닿으며, 두 사람 사이에 조금의 틈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겨드랑이 아래로 둘러진 손이 쇄골, 유두, 배꼽 등지를 거침없이 더듬고 매만졌다. 거짓말처럼 다시 솟은 성기가 이리저리로 덜렁덜렁 흔들렸다. 그 순간에도 한영의 성기는 여전히 한곳만 찔러 댔다.
그때였다. 별안간 성기를 품은 내벽이 경련하듯 요동치며 재환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검은자가 까무룩 눈꺼풀 뒤로 넘어가고, 귓속에서 어지러이 이명이 울렸다. 한영의 허벅다리 옆을 짚고 있던 손가락이, 비닐에 닿아 있는 발가락이 모조리 굽어들었다. 사정을 하며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이었다. 설명을 붙일 수가 없는 쾌감이었다.
“흐, 으….”
그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한영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게 닿은 어깨 너머로 시선만 내려 꼿꼿이 선 재환의 성기를 눈에 담았다. 성기 끝에서는 딱히 흐르고 있는 게 없었다. 기둥에 부옇게 묻은 것은 이미 지나간 사정의 흔적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뜻하는 바를 깨달아 버린 한영은 일순 벅찬 감정에 사로잡혔다. 눈시울이, 가슴이 삽시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직도 쾌락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재환의 몸을 으스러뜨릴 듯 껴안고 뒷덜미, 어깻죽지, 뺨에 미친 듯이 입 맞추었다.
그대로 깊이 묻힌 성기를 몇 번 더 천천히 찔러 올린 한영은 자신의 정액이 스며 있는 내벽 안쪽에 새로이 뜨끈한 액을 쏟았다. 절절한 결박을 풀지 않은 채로 재환과 함께 풀썩 바닥에 누웠다. 온몸이 알록달록 물들어 같은 모양새로 겹쳐 웅크린 두 청년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었다.
재환의 가슴팍을 감싸 안은 한영은 손바닥 아래서 쿵쿵 맥박 치는 심장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기억 저변에 묻어 두었던 매정한 목소리가 서서히 떠올라 귓속을 울렸다.
한영이 넌 앞으로 피아노 못 쳐.
영원히 피아노 금지야.
피아노 근처에도 가면 안 돼.
엄마가 왜 그랬더라. 아아. 내가 집에 있는 피아노에 페인트를 쏟아부어서. 그래서 화내며 나한테서 피아노를 빼앗아 갔었지. 그리고, 그날 이후 정말로 한영은 집에서 영영 피아노를 볼 수 없었다. 그가 절대 들어갈 수 없도록 꼭꼭 열쇠 채워진 방에 피아노는 숨어들었다. 엄마만, 아빠만, 형만 들어가서 피아노를 쳤다. 나만 쏙 빼놓고 저들끼리만….
그랬던 엄마의 피아노가 이 집에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영은 그간 여기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와서 혼내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피아노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는 이 공간이 너무 무섭고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재환의 색이 저를 굽어보고 있었다. 하등 두려움에 떨 이유가 없었다.
“재환아….”
재환의 뒤통수에 입술을 댄 한영은 설핏 들으면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하나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맞이한 절정 탓에 혼이 싹 나가 버린 재환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현재 한영의 목소리가 명확히 들리는 상태가 아니었다. 쌕쌕 야트막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그럼에도 한영은 재환을 향해 간절한 다짐을 고했다.
“나 저거 절대 안 지울 거야…. 진짜 매일 볼 거야.”
아직 한영은 몰랐다. 방금 뱉은 말이 평생을 벗어날 수 없는 잔인하고도 달콤한 굴레가 될 줄. 그 안에 저 스스로를 가두게 될 줄. 재환과 하나처럼 붙어 있는 지금의 그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미래였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었으나, 온몸에 뒤집어쓴 페인트를 씻어 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되고 번거로웠다. 손가락이 아플 때까지 서로의 머리칼을 박박 주무르고, 몇 번이나 몸에 비누칠하고 헹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수챗구멍에 맑은 물이 빨려 들어갈 즈음에서야 재환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다만, 그 바람에 샴푸와 바디 워시 한 통을 거의 비워 버리다시피 한 게 못내 속 쓰렸다. 구질구질한 생각이었지만, 저걸 도로 사려면 다 얼마려나 하는 걱정이 일었다.
그 마음을 알 턱이 없는 한영은 백화점에 가야만 살 수 있는 외국 브랜드의 보디로션을 듬뿍 짜 재환의 몸 구석구석에 발라 주었다. 예쁜 성기 근처를 문지르고, 또 엉덩이 사이에 손날을 넣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또 거기가 살짝 설 뻔했더랬다. 하지만 저로 인해 도톰히 부은 입구가 만져지는 순간, 한영은 필사적으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안 그래도 답지 않게 격렬한 섹스를 했는데, 여기서 또다시 재환에게 들러붙으면 그거야말로 짐승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는 짓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영은 재환에게 미움받기 싫었다.
대신 갓 씻어 말갛게 빛나는 얼굴을 붙잡고 한참이나 쪽쪽 입맞춤을 퍼부은 한영은 젖은 머리까지 꼼꼼히 말려 준 후 재환의 손을 붙잡고 부엌으로 갔다. 내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팬트리 장을 활짝 열어 얼마 전 사서 한가득 넣어 둔 라면을 보여 주었다. 오늘이야말로 한영은 재환에게 세상 제일 맛있는 라면을 끓여 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혼자 몇 번이나 연습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재환이 씩 웃으며 라면 두 봉지를 집는 동시에 한영의 단꿈은 푸시시 꺼지고 말았다.
재환은 하필이면 골라도 국물 없는 라면을 골랐다. 물 양 알맞게 잡고, 면 적당히 익히고, 계란 맛있게 푸는 법만 열심히 연습했던 한영에게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왕 각오를 다진 거, 당황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 라면 싫어?’ 하는 재환에게 대차게 고개를 저어 보인 한영은 본격적으로 눈물 나올 만큼 맛있는 라면 끓이기에 돌입했다.
그리고, 라면을 먹으며 재환은 진짜로 울었다. 애처롭게 콧물도 흘리고, 기침도 했다. 그러니 한영은 재환이 걱정되어 좀체 마음 편히 라면을 먹기가 어려웠다. 반복해서 ‘재환아, 괜찮아?’를 물었지만, 그때마다 재환은 꿋꿋이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나도 안 괜찮은 거 같은데…. 고집부리는 모습이 귀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한영으로선 이해가 잘 안 가는 게 사실이었다.
당연했다. 재환은 한영이 저렇게 매운 걸 잘 먹는 줄 꿈에도 몰랐다. 저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고, 재채기하고, 아주 난리가 났는데 한영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저를 걱정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니 재환은 이미 안 괜찮은 다 티를 팍팍 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괜찮은 체할 수밖에 없었다. 매운 라면으로 한영을 살짝 골려 주려다 저만 이 사달이 난 게 아무래도 쪽팔려서. 역시 사람이 못된 마음을 먹으면 이렇게 꼭 벌을 받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재환은 젖은 눈가를 쿡쿡 휴지로 찍으며 넌지시 한영에게 물어보았다.
“너… 안 매워?”
“나? 응. 괜찮아.”
고민도 없이 대답한 한영은 재환의 입가에 묻은 빨간 양념을 엄지로 쓱 훔쳐 혀로 날름 핥았다. 이러한 행동도 그렇고, 산뜻한 표정도 그렇고 한영은 진짜로 라면이 하나도 맵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이쪽은 입에서 불이 나 아직까지 질금질금 눈물이 흐르는데 말이다.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만한 한영의 모습에 괜히 또 심장이 시끄러워진 재환은 젓가락으로 크게 집은 면발을 훅 입에 넣었다. 그다음 일이야…, 뭐 뻔했다. 콜록, 큭, 커흡!
목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기침하는 재환을 안쓰럽게 보던 한영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다란 아일랜드 식탁을 빙 돌아 재환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목이 긴 스툴 형태의 의자를 45도 돌려 재환이 저를 보게 하자, 숱 많은 속눈썹 끝에 가랑가랑 맑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한영은 매운 기가 올라와 발긋발긋한 색을 띤 입술에 주저 없이 제 입술을 눌렀다. 재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읍….”
놀라 바르작거리는 어깨를 두 손으로 꼭 붙잡은 한영은 아직 씹던 것이 남은 입 안으로 쑥 혀를 밀어 넣었다. 미련스럽게 재환이 다 삼켜 버리기 전, 바지런히 혀를 놀려 그것들을 싹싹 자신의 입으로 긁어 왔다. 엉덩이를 들썩이고 발을 구르는 등 재환의 반항이 작지 않았으나, 한영은 꿋꿋했다. 뜻했던 바를 모두 이루고 나서야 비로소 재환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너 미쳤어?”
얼른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른 재환이 기함하여 소리쳤다. 자신이 먹던 라면을 꿀꺽 삼키느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결후를 보고 있자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낯빛은 종전과 다른 의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껏 한영에게 부끄러운 일을 참 많이도 당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그걸 왜…!”
도로 뱉으라 하기에도 한발 늦은 터라 안타까움만 부풀었다. 그러한 심정을 능히 짐작한 한영은 순한 얼굴로 재환을 안심시켰다.
“나 괜찮아, 재환아.”
“아무리 괜찮아도…!”
“진짜 하나도 안 매워.”
안 매운 게 문제가 아니란 걸 왜 모를까. 그걸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대신 하…, 하며 숨을 길게 늘인 재환은 툭 고개를 떨구었다. 언뜻 보면 답답함을 삭이는 듯했지만, 기실 부끄러워서 그랬다. 그러자 붉게 익은 뺨을 손으로 감싼 한영이 살며시 재환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한층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맞추며 더없이 나긋나긋한 투로 속삭였다.
“내가 금방 다른 라면 끓여 줄게. 재환이 넌 그거 먹어. 알았지?”
결국 재환은 씩씩대며 상대를 다그치던 것도 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눈빛과 속삭임을 받으면 누구라도 그리할 수밖에 없었을 터다. 이토록 한영은 재환이 부리는 고집이나 심술 따위를 손쉽게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반성하고 자책하게 만들었다.
얼마 안 가 얌전히 앉아 있던 재환 앞에 폴폴 김이 나는 라면 냄비가 대령되었다. 면을 후후 불어 입에 넣자 국물 간도 딱 맞고 면발도 탱글탱글한 것이 그렇게 맛 좋을 수 없었다. 그게 또 이상하게 목이 메어 와 젓가락을 내려놓은 재환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랬더니 두 사람 몫의 매운 라면을 먹던 한영이 ‘맛없어?’ 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표정을 지은 재환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맛없다니. 이 라면은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
“맛있어. 진짜 잘 끓였네.”
아아,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칭찬인지. 재환의 한마디에 한영은 도리 없이 입꼬리가 활짝 옆으로 벌어졌다. 과장이 아니라, 지금 먹고 있는 라면에서 나는 약간의 매운맛이 순식간에 단맛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그만큼 한영은 기뻐 견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라면 먹는 재환을 방해하게 될 테니 애써 참았다. 대신 한영은 수줍은 고백을 건넸다.
“앞으로 내가 더 많이 끓여 줄게.”
응, 하며 주억거린 재환은 또 한 움큼 면발을 크게 집어 올렸다. 이번에는 후후 불지도 않고 한꺼번에 입에 넣어 야무지게 씹었다. 두 손으로 냄비째 들고 후루룩 국물도 마셨다. 그럴수록 한영은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을 실로 담뿍 실감했다. 정말로 재환을 보고 있기만 해도 배가 부른 듯했다. 그만큼 재환이를….
“아, 맞다. 유한영.”
“응?”
“…나, 다시 여기 와서 믹싱해도 돼?”
조금 뜸 들이는 듯하다 재환이 꺼낸 말에 한영의 얼굴 위로 빠르게 훤한 웃음이 번졌다. 어쩌면 라면 잘 끓인다는 말보다 더 듣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한영은 ‘응!’ 하고 크게 답했다.
이유도 묻지 않고 시원히 승낙해 준 한영에게 고맙다, 인사하며 재환은 어렴풋이 웃었다. 까닭 없이 조금 갑갑한 마음이 들었지만, 구태여 티 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한영이 정성스럽게 끓여 준 라면을 불기 전 어서 먹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재환은 다시 젓가락으로 라면을 큼지막하게 집어 입에 넣었다. 어디 한군데 모자라거나 과한 부분이 없는 라면은 역시나 참 맛있었다. 매운 걸 억지로 먹느라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었고, 면보다 물로 더 배를 채울 일도 없었다. 젓가락이 멈추지 않고 알아서 움직였다.
그런 재환을 보며 한영은 또 해쭉 웃었다. 믹싱하러 온 재환에게 다음에는 라면 말고 뭘 해 줄지 벌써부터 머릿속에서 즐거운 고민이 펼쳐졌다. 물론 당장 서둘러 답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냥 지금은, 이렇게 재환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 * *
일 년 열두 달 중 마지막 달인 12월은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빨리 갔다. 특히 진짜 연말이라 부를 날짜가 다가올수록 더욱 그랬다. 이 시기에 흔히들 그러하듯 송년회니 망년회니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늘 강조하지만, 재환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재환이 바쁜 이유는 어차피 거의 늘 한 가지뿐이었다. 밴드 때문에 바빴고, 또 부러 그렇게 되기 위해 애썼다. 곧 있을 새로운 클럽에서의 공연을 위해 합주 시간을 배로 늘렸으며, 장비를 파니 어쩌니 하는 문제로 방황하느라 잠시 소홀했던 믹싱에 다시 열을 올렸다. 그마저도 하지 않을 때는 강박적으로 기타를 잡았다. 물론, 연말이라 부쩍 손님이 는 카페에 매일같이 출근해 성실히 일하는 건 기본이었다. 이러니 하루에도 몇 번씩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라는 물음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 크리스마스를 그냥 보내는 건 말도 안 된다는 태군의 난리 때문에 조촐한 파티도 했다.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나, 뭐라나. 혹 없던 종교가 생긴 건가 싶어 넌지시 물었더니, 그건 또 아니란다. 어쨌거나 태군이 부린 고집 덕분에 재환은 생전 처음 밴드 멤버들과 함께 케이크에 촛불도 켜고 캐럴도 불렀다. 옆에서는 트리까지 번쩍거려, 생각보다 제법 크리스마스 기분이 났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촛불을 끄자마자 태군이 데이트가 있다며 쏙 사라질 땐 어쩔 수 없이 험한 욕이 튀어 나갔다. 부러워서는 절대 아니고, 그냥 조금 어이가 없어서.
그러고 나서 며칠 안 있어, 공연 날인 12월 30일이 되었다. 새해를 하루 앞둔 시점이라 그런지 클럽 분위기는 다른 어떤 공연 때보다 뜨거웠다. 관객도 많았고, 덩달아 무대에 선 이들도 잔뜩 흥이 났다.
더 숨의 라이브 역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사건이 바로 이날 터지고 말았다.
“아씨, 그만 좀 웃으라고!”
무대 옆 좁은 대기실로 들어서자마자 태군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바락 성을 냈다. 표정이나 어투는 꽤나 살벌했지만, 나머지 멤버 셋 중 그 말에 따라 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공연 도중 실시간으로 드러머의 가발이 훌렁 벗겨지는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그러했으리라.
“아, 미안, 미안. 일부러 웃으려는 게 아니라…. 크큭.”
“장태군. 나 진짜 피크 놓치는 줄 알았다.”
“태군이가 오늘 공연 Superstar야.”
결국 ‘니들 진짜!’ 하고 포효한 태군은 드럼스틱을 휘두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하나같이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사실 태군이 처음 가발을 쓰고 나타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공연 전 마지막 합주 때도 가발은 몇 번이나 매끈한 정수리 뒤로 휙휙 넘어갔고, 재환은 정말 진지하게 꼭 가발을 써야겠느냐 친구를 설득했다. 하지만 태군의 의지는 굳건했다. 오늘 공연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가발을 쓰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 그 이유가 참 기막혔다. 여자 친구가 그에게 머리칼 있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친구를 욕할 수도, 나무랄 수도 없던 재환은 결국 알았다고 씁쓸히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만 해도 ‘설마 진짜 공연하다 벗겨지겠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늘 설마는 사람을 잡았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태군은 편의점에서 급히 양면테이프를 사 와 가발 안쪽에 꼼꼼히 붙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재환은 저 정도면 괜찮겠다고 나름 안심했다. 하지만 실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공연 막바지, 무대 분위기가 가장 고조되었을 무렵 기어이 일이 터졌다.
재환은 그 순간 무대 아래서 사람들이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거대하게 뜨인 수십 쌍의 눈에 비친 건 당황과 경악을 넘어서는 공포였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재환도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고, 그리하여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미친 듯 드럼을 후려치는 친구의 머리 위에서 서서히 뒤로 넘어가고 있던 갈색 털 뭉치를. 아아, 정말이지 그때 재환은 진심으로 기타를 벗어 던지고 친구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달려가서 덜렁거리는 가발을 꾹 눌러 주고 싶었다. 한낱 바람일 뿐이었다.
그다음 무슨 정신으로 남은 연주를 했는지 기억이 묘연하다. 다른 두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터다. 키보드 뒤에서 노래하던 한영은 심지어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실수 없이 공연을 마무리한 건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어쩌면 평소 부단히 연습했던 덕일지도 몰랐다. 하필 그런 상황에서 노력의 결과를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마는…. 어쨌거나 클럽 역사에, 그리고 밴드 역사에 길이 남을 공연이 되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우리 태군이 열 받은 것 같은데 가서 형이 맥주나 사 줄까?”
“이거 놔라! 어?”
먼저 악기 정리를 끝낸 지우가 악악거리는 태군을 끌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대기실이 조금 조용해졌다. 좁은 바닥에 쪼그려 앉은 재환은 여전히 피식피식 작게 웃음을 흘리며 페달 보드에 연결되어 있던 각종 케이블을 정리했다. 쓱 문밖을 한 번 살핀 한영이 재환 옆으로 와 똑같이 다리를 접어 앉았다.
“재환아.”
“응?”
재환은 웃음기가 밴 투로 답하며 페달 보드 가방 앞주머니에 가지런히 만 케이블들을 넣었다. 이어서 커다란 보드도 가방 안에 넣으려는 때였다. 접힌 무릎에 얹은 손을 꼼지락거리던 한영이 제법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 왔다.
“나 오늘 어땠어?”
“너?”
“응.”
막 가방의 지퍼를 당기려던 재환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보내오는 시선이 꽤나 진지했다. 잠시 답할 말을 찾는 사이, 한영이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그니까, 태군이 그렇게 되기 전에.”
재환은 자연히 ‘아아.’ 했다.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는 연주를 한 것 자체가 용한 상황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런 전제가 붙는다면, 재환이 한영에게 들려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당연히 멋있었지. 엄청.”
평소 그랬듯이 벌쭉 웃을 줄 알았던 한영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층 재환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러다 꼭 입술이 부딪힐 것 같아, 재환은 엉거주춤 상체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재환의 예상은 얼추 들어맞았다.
“그럼 키스해 줘, 재환아.”
적잖이 당황한 재환은 대꾸를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여기서?’라고 묻기에는 한영의 눈빛에 진심이 가득해 보였다. 말투에도 묘하게 힘이 배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대기실 문 쪽으로 흘끔 눈을 돌리는데, 턱 아래로 마디가 접힌 검지가 와 닿았다. 동시에 입술이 포개어졌다.
더 숨에 이어 막 무대에 오른 팀이 악기를 체크하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쿵쿵 킥을 차는 소리, 베이스 줄을 튕기는 소리, 기타에 드라이브를 거는 소리…. 하지만 점막이 부드럽게 뭉개지고 간질간질 혀가 얽히는 소리보다는 크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재환에게는 그랬다.
“읍….”
복도를 지나는 사람이 조금만 문 안쪽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면 얼마든지 이 광경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기실 밖으로 나갔던 지우와 태군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걸 머리로는 모두 인지하고 있는데, 한영을 뿌리치기에는 재환에게 전해지는 숨결과 온기가 너무도 달콤하였다. 그러니 재환은 점점 밭게 숨 쉬며 한영이 이리저리 고개를 트는 대로 함께 얼굴을 움직이게 되었다. 이 모습을 누구에게라도 들킬 수 있다는 아슬아슬한 마음이 기묘한 쾌감을 일깨우는 듯도 했다.
“후….”
아랫입술을 혀로 길게 핥는 것을 끝으로 마침내 한영이 재환에게서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사이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 비슷한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고운 분홍빛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탓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콩 이마를 맞대고 푸스스 웃었다. 이미 각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네 안에, 내 안에, 들어가고 싶어, 들어왔으면 좋겠어.
그럴 수 없으니 누가 더 뾰족한지 겨루듯 높이 솟은 코끝을 살살 맞비볐다. 몇 번 더 쪽쪽 가벼이 입 맞추기도 했다. 당장은 이 정도로 참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어쩌다 제가 이리 욕구가 넘치는 인간이 되었나 싶어 재환은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발정 난 짐승도 아니고…. 구태여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 볼 필요는 없었다. 원인 되는 인물이 버젓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재환아.”
“응.”
“오늘 집에 같이 가자.”
사람을 시도 때도 없이 달아오르게 만드는 요망한 분홍 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환은 ‘아….’ 하고 곤란한 듯한 소리를 흘렸다. 그 순간에도 그를 직시하는 갈색 눈동자에 고인 열이 가히 뜨거웠다. 하나 오늘만큼은 저 눈빛의 주인에게 알았다는 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안 돼…?”
“그…, 내일 아침부터 일이 좀 있어서.”
약간의 틈을 두고 한영은 ‘응.’이라고 답했다. 살짝 내리깐 눈에 찰랑찰랑 실망이 서렸다. 제 딴에는 감춰 보려는 것 같긴 하다만, 함께 보낸 시간이 짧지 않기에 재환으로선 모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내일은 어머니의 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고, 따라서 손쉽게 물릴 수 있는 약속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그냥 점심만 먹고 올까. 저도 모르는 새 어머니를 서운하게 만들 궁리를 하고 있던 재환은 재빨리 마음을 다잡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무정한 아들이 될 수는 없었다.
“미안.”
“아냐. 우리도 나가서 빨리 맥주 마시자.”
훌쩍 일어선 한영이 재환의 손을 잡아끌었다. 입가에는 여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서 입 맞춰 줘야 할 것 같은 애잔한 표정이었으나, 이제 진짜 대기실 문 앞에 사람 여럿이 지나가고 있어 더는 무리였다. 재환은 한영을 따라 막 밴드의 연주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객석으로 나섰다.
연말에, 거기다 주말까지 겹친 날이라 꽤 늦은 시간임에도 버스 안에는 승객이 제법 많았다. 태군은 공연을 보러 왔던 여자 친구와 사라지고, 지우는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하여 한영과 둘이 버스를 타게 된 재환은 다행히 저 뒤에 남은 빈자리 두 개를 발견했다. 자연스레 한영의 팔목을 붙잡고 얼른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두 사람의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닌데, 여기에 제가끔 악기 가방을 하나씩 끌어안고 앉으니 그야말로 자리에 옴짝달싹할 틈이 없었다. 서로의 허벅지, 엉덩이, 어깨가 모조리 딱 붙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저리 떨어지라거나 좁아 죽겠다는 불평을 꺼내지 않았다. 가까이 닿은 신발 옆면을 번갈아 상대에게 툭툭 부딪치며 실없이 웃을 뿐이었다. 라디오를 틀어 놓은 버스 안에 여성 진행자의 발랄한 목소리가 흘렀다.
“이제 올해도 하루만 남았네요! 청취자 여러분들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행복한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전 이따 집에 가서 혼자 치킨이나 시켜 먹을 것 같아요.”
흑흑, 제법 서럽게 우는 듯한 소리가 뒤따랐다. 이를 듣다 무심결에 피식 웃은 재환은 바로 옆 차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깥 풍경이나 잠깐 살피려고 했는데, 그보다는 얼룩덜룩한 유리에 반사되는 분홍빛이 더욱 선명했다. 옆에 앉은 이의 하늘하늘한 머리칼에서 비롯된 색이었다. 검정 머리가 나긴 하는 건가, 라는 조금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틈에 별안간 꽉 허벅지가 붙잡혔다. 놀란 재환은 창에 비치던 분홍 머리가 있는 쪽으로 팩 고개를 돌렸다.
언제 사람의 허벅지를 움켰냐는 양 한영은 담담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조금 아프기도 하고, 그런 한영이 얄밉기도 해 재환은 미세하게 눈 밑 살을 꿈틀거렸다. 몇 초간 더 천연하기 짝이 없는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슬쩍 눈을 아래로 내렸다. 각자 다리 사이에는 부피 큰 악기 가방이 자리했고, 그것들이 나름 가림막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당하고만 있을 이유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재환은 살그머니 옆으로 손을 뻗었다.
와인색 바지의 가랑이 부분을 꾸욱 쥐었다 놓는 순간 한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번에는 재환이 짐짓 모른 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1인 좌석에 일렬로 앉은 사람들의 까만 뒤통수뿐이었다. 그 특별할 것 없는 광경에 잠시 눈을 고정한 사이, 재환의 시야를 벗어난 각도에서 불그스름한 입술이 매끄럽게 위로 휘어졌다. 이윽고 하얀 손이 다가간 곳은 허벅지도, 고간도 아닌 다른 곳이었다.
손바닥을 꽉 감싸는 온기에 홱 고개가 돌아간 재환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쪽을 보고 있는 옆자리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손이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아직 바깥의 찬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뜨겁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재환의 귓바퀴를 뜨끈히 달아오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기다란 엄지가 살금살금 손등을 매만지자 열은 금세 뺨으로 옮겨 가 낯빛까지 벌그스름하게 물들였다.
버스의 히터에서 나오는 공기가 더운 척, 재환은 입고 있던 상아색 니트의 목둘레를 살짝 당겼다 놓았다. 습관적으로 몇 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할 뻔했지만, 나름 선물 받은 귀한 옷인지라 금방 관두었다. 이러다 아예 목이 늘어나 버리면 곤란했다. 대신 한곳에 고정하기 못내 부끄러운 시선을 공연히 이리저리로 움직였다.
당연한 일이겠으나, 버스 구석진 자리에 앉은 두 청년이 손을 잡고 있건 말건 신경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꾹 눈을 감은 채 버스 움직이는 대로 휘청휘청 고개를 흔들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높다랗게 솟은 악기 가방이 떡하니 앞을 버티고 있으니, 굳이 다른 사람 눈에 들킬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재환은 내처 긴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 버렸다. 조금이나마 손이 맞닿은 면적이 늘어나며 가슴께에 간질간질한 기분이 퍼졌다. 가능하다면 상대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까지 기대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런 기분이었다.
어느새 진행자의 멘트가 끝난 라디오에서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림 샷이 강조된 알 앤 비 스타일의 곡은 그다지 재환의 취향이 아니었으나,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밤거리와 은근히 잘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여기에 연말이라는 특수한 시기적 상황까지 더해져, 듣는 이를 묘한 감상에 빠지게 했다. 애틋한 것 같기도 하고,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이 모든 감정은 현재 손을 맞잡고 있는 상대와 무관하지 않았다. 어쩌면, 전부 그에게서 시작된 감정일지도 몰랐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기실 재환은 음악을 한다는 놈치고 썩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 아니었다. 성격 자체가 멋없는 탓도 있었고, 심적으로 여유가 부족한 탓도 컸다. 아마 전에 같았으면 버스를 타고 가다 노래가 나와도 신경일랑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듣기 싫다며 귀에 이어폰이나 꽂았겠지. 그 상태로 눈까지 감으면 나름 완벽히 외부 세계를 차단할 수 있었다. 창밖 구경?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노래에 섞인 색소폰 선율이 스쳐 가는 가로등 불빛을 마치 춤추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감성 넘치는 보컬이 거리를 걷는 사람 하나하나를 대단한 사연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끔 했다. 잘 들리지 않는 영어 가사는 꼭 사랑을 속삭이는 말 같았다. 이쯤 되니 ‘사실 나 알 앤 비 좋아했었나?’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라는 싱거운 결론을 내며 창밖을 내다보던 재환의 눈이 한순간 설핏 커다래졌다. 곧이어 작은 불빛이 점점이 맺혔던 눈동자가 휙 버스 내부로 돌아갔다. 때마침 정차해 있던 버스 뒷문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급한 마음이 앞서 재환은 한영의 손도 놓지 않은 채 일단 소리치고 보았다.
“아저씨, 내릴게요!”
잠시 후, 청년 둘을 정류장에 내려 준 버스가 부르릉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도로 출발했다. 얌전히 앉아 있다 영문도 모른 채 차에서 내리게 된 한영은 놀란 듯 큰 눈을 끔뻑끔뻑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그들이 내린 곳은 집 근처도 아니었고 심지어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대로변이었다. 8차선 도로 양옆으로 불 꺼진 빌딩들만 높다랗게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파란불이다!’를 외친 재환이 한영의 손목을 붙들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등에서는 악기 가방이 덜컹거리고, 밭은 숨을 내쉴 때마다 입가에서는 보얀 김이 피었다. 얼결에 버스에서 내린 것으로 모자라 야밤중 뜀박질까지 하게 된 한영은 재환을 따라 길을 모두 건너고서야 숨 고를 여유를 얻었다. 잠시 뒤 의문이 펑펑 터지는 눈빛으로 재환을 보자, 재환이 눈짓으로 한영의 뒤쪽을 가리켰다. 고개가 그곳으로 돌아갔다.
“어….”
“예쁘지?”
횡단보도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컴컴했던 거리에 저쪽 끝에서부터 차례로 반짝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터널 형태를 띠며 가까워진 불빛은 이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통과했다. 고개를 높이 쳐들고 빛이 차는 자리를 눈으로 좇는 한영의 얼굴과, 가만히 한영을 보는 재환의 얼굴이 조명과 같이 밝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진짜 예쁘다….”
“여기 백화점에서 해 둔 건가 봐.”
혼자였다면 버스에서 눈으로만 감상했을 길에 한영과 함께 선 재환은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들뜬 목소리를 냈다. 일루미네이션이니 뭐니 하는 건 남이 찍은 사진에서만 보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직접 눈에 담으니 왜 겨울이면 사람들이 부러 이런 장소를 찾는지 조금은 알 듯했다. 어차피 다 인공적으로 만든 불빛이겠지만, 확실히 사람을 묘하게 꿈꾸는 듯한 기분에 젖게 했다. 단, 머리 위 조명이 아무리 별처럼 반짝여도 재환을 완벽히 현실에서 유리시키기는 무리였다.
“맞다! 아까 그거 우리 막차였지?”
뒤이어 ‘미치겠네!’란 자책 가득한 푸념이 덧붙는 순간이었다. 사위를 훤히 밝히던 불이 탁 꺼지는 동시에 커다란 손이 뺨을 감쌌다. 잠시나마 밝은 빛에 노출되어 있던 시야가 껌껌하게 잠기며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닿았다. 분명 주변은 어둠 속인데, 재환의 심장에는 번쩍 불이 켜졌다.
“으, 음….”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 가며 정성스럽게 문질러지는 살결이 눈가가 시큰해질 만큼 보드라웠다. 흘러드는 숨결은 너무도 포근하였고, 함께 미끄러져 들어오는 혀에서는 다디단 맛이 났다. 그래서 순간 재환은 계절도, 장소도 잊었다. 클럽 대기실에 몰래 숨어 입 맞추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어느덧 한영의 어깨를 붙잡고 격정적으로 입맞춤에 응하고 있었다. 언제 훤히 밝았냐는 듯 어두워진 주변이 괜한 용기를 불어넣은 탓인지도 몰랐다.
간헐적으로 쌩, 하고 도로에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꾹 감은 시야가 번뜩이는 빛에 물들었다 도로 캄캄해지는 것을 보아 몇 번쯤 다시 조명이 들어왔던 듯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얼마든 밝아지고 어두워지라지. 재환은 한영이 건네주는 열기에 몸과 마음을 맡길 뿐이었다.
노출된 살갗을 맵차게 훑고 가는 겨울바람마저 후끈하게 느껴질 즈음,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입맞춤이 끝났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아 두 사람은 한참을 더 코끝을 비비고 입술을 스치듯 문질렀다. 조금이라도 서로 간의 거리가 벌어질라치면 더운 숨결이 그 사이를 메웠다. 추위를 느끼려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재환아….”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 다시 빛의 터널을 이룬 조명 아래서 한영은 재환의 뒤통수와 어깨를 감싸 꼭 끌어안았다. 오늘 나랑 같이 가. 나 혼자 두지 마.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우르르 솟구쳐 입 안을 맴도는 말을 무엇 하나 뱉지 못하고 안타까움이 그득 배인 숨만 길게 흘렸다. 이를 눈치 못 챌 정도로 재환은 바보가 아니었고, 또 눈치채고도 무시할 만큼 박정하지도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환은 한참 전 페달 보드 가방을 내려놓은 손을 들어 제 어깨 위로 푹 숙어지다시피 한 작은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었다.
“내일 엄마 집에 가기로 했어.”
“…응.”
“저녁까지 먹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최대한 빨리 와 볼게.”
강제로 떨어뜨리기 전까지는 꼼짝도 안 할 것 같던 얼굴이 한순간 번쩍 위로 들렸다. 눈물이 고이기 직전이던 눈동자가 생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너무도 극적인 반응이라 오히려 말을 꺼낸 쪽이 당황할 정도였다.
“진짜야? 정말이야, 재환아? 우리 내일 만날 수 있어?”
“어, 어.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아직 확답을 내지도 못했는데 한영은 못내 감정이 벅찬 듯 재환을 와락 끌어안았다. 곱상한 외모와는 상반되는 힘에 갇혀 버린 재환은 ‘일단 가 봐야 알아…!’ 하고 나름 한영의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뭐 먹고 싶어? 내가 만들어 둘게…!”
어지간히도 신이 났는지 한영은 좀처럼 사람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재환은 다부진 어깨를 붙잡고 억지로 거리를 벌렸다. 어렵사리 마주한 갈색 눈동자가 여전히 반짝반짝 기대의 빛을 터뜨리고 있었다. 저렇게 좋을까, 싶어 재환은 결국 힘 빠진 웃음이 샜다.
“아, 저녁 먹고 온다 그랬지. 그럼 와인 마실래?”
“유한영.”
“와인 말고 맥주가 더 좋아?”
다시 한번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재환은 조금 편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와인이 좋냐, 맥주가 좋냐, 위스키도 있다 등등 집에 있는 술을 다 댈 기세로 달싹이는 입술에 쪽 입 맞추자 그제야 겨우 한영의 조잘거림이 멎었다. 진작 이럴걸, 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재환아…?”
“일단 내가 내일 상황 보고 알려 줄게. 이러다 안 될 수도 있어.”
뒷말을 들은 한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쉬지 않고 움직이던 입술도 꾹 다물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꺼낸 말에 책임을 져야겠다는 마음을 먹게끔 하는 짠한 표정이었다. 조금 더 입꼬리를 위로 올린 재환은 보라색 조명을 받아 유독 하얗게 빛나는 뺨을 살포시 손바닥으로 감쌌다.
“최대한 빨리 연락할 테니까, 일단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달래듯 속삭이자 한영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세하게 입매가 움찔거리는 것이, 애써 웃어 보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차라리 종전처럼 조잘조잘 떠드는 게 낫지, 저런 모습을 보면 재환은 절로 심장이 자르르 아렸다. 딱히 동정심이 넘치는 성격도 아닌데 말이다. 뭐, 굳이 따지자면 마냥 동정심은 아니겠지만….
“근데, 나 위스키는 안 마셔. 너무 독해서.”
풀 죽었던 얼굴이 빠르게 화색을 되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뭐가 좋아?’ 하고 다시 질문 세례가 시작되었다. 막걸리, 동동주, 사케, 보드카. 아주 술 종류란 종류는 다 나왔다. 사람을 무슨 술고래로 알고.
“그건 내일 얘기해.”
삐쭉 솟은 코끝을 살짝 꼬집어 주며 말하자 한영은 금방 또 시무룩해졌다. 오늘따라 참 표정 변화가 잦은 한영에게 재환은 쓱 손을 내밀었다. 쫙 펼쳐진 손과 빙긋 웃음 지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한영의 눈이 차츰 커다래졌다. 재환은 안 잡고 뭐 하냐는 듯 두어 번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눈썹 끝을 떨어뜨리고 입술을 옴찔거리던 한영이 머뭇머뭇 재환의 손을 잡았다.
수중에 들어온 손을 휙 잡아끌어 점퍼 주머니에 넣은 재환은 그대로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직 머리 위로는 저 멀리까지 아치형 조명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근데 우리 진짜 차 끊겨서 어떡하지?”
“택시.”
“이제 할증 붙을 텐데.”
“나 돈 있어.”
“나도 있어.”
택시를 탈 때 타더라도, 재환은 좀 더 이렇게 한영과 걷고 싶었다. 사람 없는 밤거리, 전력 낭비임을 부정할 수 없는 화려한 조명, 다가오는 새해. 그리고 맞잡은 손의 온기.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재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한 감정을 부풀렸다. 그 감정이 살짝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재환아.”
“응.”
“섹스하고 싶다.”
마치 감수성 넘치는 사람인 척 차오르려던 눈물이 순시에 팍 꺼졌다. 구깃구깃 눈썹 사이를 좁힌 재환은 주머니 안에 있던 손에 들입다 꽉 힘을 주었다. 옆에서 아야, 하는 엄살스러운 소리가 흘렀다. 하지만 곧이어 헤헤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아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내일 우리 집에 오면 섹스 많이 하자.”
“서로 빨아 줄까?”
“같이 욕조 들어가고 싶어.”
“아…. 나 조금 선 것 같아, 재환아.”
거리에 사람이 없다고 분홍 머리의 언사는 아주 거침이 없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어찌나 달콤하게 음담패설을 속삭이는지, 하도 기가 차 대꾸하기가 다 뭐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서 답을 하지 않았다는 건, 싫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재환은 싫은 건 싫다고 말해야 성미가 풀리는 성격이었다.
“유한영.”
“응?”
“노래 불러 줘.”
그리하여 끝까지 답을 피한 재환은 한영의 말을 멈추는 조금 색다른 방법을 택했다. ‘어….’ 하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한영은 이윽고 짧게 심호흡한 후 단 한 사람을 위해 나지막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재환도, 한영도 가장 좋아하는 〈I See You〉였다.
간질간질한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노랫말 속에서 ‘I’는 내리는 비 아래 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 가사처럼 지금 진짜 비가 내리면 어떨까, 라는 실없는 생각이 의식을 스칠 무렵, 문득 차가운 기운이 재환의 콧잔등을 건드렸다. 기분 탓인가 싶어 콧등을 실룩이는데, 이번에는 비슷한 감촉이 눈두덩이에 닿았다. 머지않아 뺨에, 이마에, 입술에 같은 느낌이 이어졌다. 그제야 먼지처럼 폴폴 날리는 작은 알갱이가 시야에 잡혔다. 그걸 보고 들뜬 목소리를 터뜨린 건 여지없이 재환 곁에서 걷던 한영이었다.
“눈 와, 재환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높이 쳐든 한영의 눈동자가 아이처럼 반짝였다. 그 보석 같은 눈빛이 뒤이어 재환을 향했다. 저리 신날 정도로 눈은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재환은 지금 이 순간 한영과 함께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음으로만 보이는 눈은 한영의 머리칼처럼 달콤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 * *
아침 일찍 나서서 발을 디딘 집 앞 길목에는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다. 바닥에 지저분하게 팬 홈, 떨어진 쓰레기 따위가 모두 하얀 눈에 덮인 길은 평소와 달리 꽤나 깨끗해 보였다. 물론 머지않아 시커먼 발자국과 오토바이 바퀴 자국 따위로 범벅될 것임을 재환은 알았다. 그러기 전 자신이 먼저 눈 위로 사박사박 신발 자국을 새기는 기분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어느새 바닥만 보고 걸을 정도로 재환은 이 의미 없는 행위에 꽤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먼저 다녀간 고양이가 총총 새긴 발자취를 맞닥뜨렸을 때는 쳇, 하고 옹졸하게 혀를 찼다.
지하철을 타고 열 정거장쯤을 가야 도착하는 어머니의 동네는 재환이 사는 동네와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좁은 골목을 중심으로 낡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초행길이 아님에도 핸드폰 지도를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빠지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이 동네는 길목마다 눈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있어 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꺅꺅 터지는 저들의 웃음소리가 마냥 시끄럽지 않았다. 좋을 때다, 라고 다소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며 아이들 곁을 지나치는데, 마침 그중 한 명이 던진 눈 뭉치가 제대로 재환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뒤를 돌자 조준에 실수한 꼬마가 울상이 되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뒤늦게 표정을 풀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이미 꼬마는 도망친 후였다.
5층짜리 주택의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밖에 눈 오냐는 말이 가장 먼저 건너왔다. 미처 다 머리에서 털어 내지 못한 눈을 툭툭 턴 재환은 어머니에게 딸기 사진이 붙어 있는 스티로폼 상자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뭘 이런 걸 사 왔냐고 했지만, 내심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당신 드시라고 사 온 딸기를 한 바가지나 씻은 어머니는 이를 접시 가득 담아 재환 앞에 내어 왔다. 탱글탱글한 딸기를 집어 입에 넣은 재환은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일은 잘하고 있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그렇다고 짤막짤막하게 대꾸했다. 기실 얼마 전 만났을 때도 한 번씩 들었던 질문이었다.
배 터질 만큼 딸기를 먹은 후 재환은 빗자루와 걸레를 집어 들었다. 끽해야 제집보다 한 평쯤 클까 말까 한 이 집에 생각보다 쌓인 먼지가 많았다. 하긴, 매일 같이 식당에 출근하여 일하다 보면 제대로 집 청소할 시간이 마땅치 않을 게 당연했다. 두 팔 걷어붙인 재환은 요령보다는 힘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용도실을 청소하던 중 제법 화면이 큼직한 티브이를 발견했다. 이게 왜 여기 있냐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아랫집이 이사 갈 때 받았는데 설치할 줄을 몰라 그냥 두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왜 저를 부르지 않았냐고 순간 어머니를 타박할 뻔했지만, 그녀가 의지할 만큼 살뜰한 아들이 되지 못함을 스스로 더 잘 알기에 그냥 관두었다. 대신 재환은 조용히 티브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찬찬히 연결한 티브이를 틀자, 어머니는 이제 혼자 있어도 적적하지 않겠다며 꽤나 좋아했다.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저를 부르라고 넌지시 말하면서도 재환은 내심 속이 쓰렸다. 아마 지금도 어머니는 제가 같이 살자 그러면 두말없이 환영할 터였다. 하지만 밴드를 하고 있는 한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중에, 아주 혹시 밴드를 그만두게 되면 그때나 어머니에게 함께 살자는 말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환이 작정하고 화장실 청소까지 하는 사이 어머니는 만둣국을 끓였다. 기실 그녀의 음식 솜씨는 아주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간만에 먹어 보는 뜨끈한 국은 남은 겨울 추위도 전부 몰아낼 만큼 맛이 좋았다. 어머니가 이렇게 요리를 잘했나 싶기까지 했다.
딱히 그 마음을 티 내지 않았는데, 후루룩후루룩 국을 잘도 떠먹는 아들을 보던 어머니는 일하는 가게에서 끓이는 법을 배워 왔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모르긴 몰라도, 거기에서 파는 국보다 이 국이 더 맛있을 게 분명했다.
국 끓인 어머니를 대신해 설거지를 끝낸 뒤, 재환은 부엌과 경계가 모호한 거실에 앉아 어머니와 함께 티브이를 시청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임을 알려 주듯 방송사별로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내기에 바빴다. 어차피 연예인이 출연하는 프로에는 큰 흥미가 없어, 재환은 마침 한 지상파 방송사에서 하는 음악 영화에 채널을 고정했다. 재환도 과거 꽤나 재미있게 본 밴드 영화였는데, ‘어휴, 시끄럽네.’ 하는 어머니의 한마디에 반의반도 보기 전 조용히 채널을 돌려야 했다.
휙휙 돌아가던 채널은 뉴스에서 멈추었다. 연말에 있던 각종 사건 사고 소식이 흘러나오는 뉴스를 멀거니 보던 재환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의 이름을 연락처에서 찾아 누를까 말까 고민하는 때, 대뜸 그 이름이 어머니의 입에서 나왔다.
“재희는 오늘 못 온대?”
“아…. 온다고 하긴 했는데.”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 지난번 만났을 때 연말에 시간 비워 놓으라고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통보했을 뿐 재희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걸 자연히 알았다는 뜻으로 여겼건만,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짚은 듯싶었다. 재환은 절로 푹 한숨이 나왔다.
“전화해 볼까.”
“됐어. 지가 오기 싫다는데. 냅둬.”
응, 대답하는 재환의 입이 썼다. 화면 끈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서 티브이로 시선을 되돌렸다. 이제 뉴스에서는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낸 단체나 사람들의 이름이 차례로 읊어지고 있었다. 저 살기도 참 팍팍한 세상에 의외로 훌륭한 사람이 많았다. 어머니도 재환과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참 훌륭한 사람이 많네. 나 먹고살기도 바쁠 텐데.”
재환은 그러게요, 했다. 속으로는 동생에게 준 이백만 원이 아쉬워 몇 날 며칠 우울감에 빠져 있던 저 자신을 떠올렸다. 씁쓸하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기는 영 그른 것 같았다.
조금 더 어머니와 휴식을 즐기던 재환은 얼마 안 가 다시 바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소 속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오늘 하루만이라도 효자 노릇을 좀 해 볼 요량이었다. 이 집에 너무 오랜만에 온 것이 못내 양심을 꼭꼭 찌른 탓이었다.
아까 화장실 청소 중 샤워기가 영 말썽이었던 걸 상기한 재환은 교체할 샤워기를 사러 일단 집 근처 철물점으로 향했다. 간 김에 단열 시트도 한 뭉치 사서 돌아와 집 안 창문마다 꼼꼼히 붙였다. 정작 제집에는 귀찮아서 붙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것으로 어머니가 보일러비를 조금은 아낄 수 있을 듯했다.
그녀 왈 흐릿해진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는 실내 등도 돌아가며 싹 갈았다. 그제야 어머니는 ‘어휴, 그렇게 어두웠는데 어떻게 살았지?’ 했다. 엄마 눈 다 버렸겠다는 잔소리로 대꾸하려던 재환은 이번에도 그냥 관두었다. 얼룩덜룩 먼지 낀 옛날 전구들이나 잘 모아 정리했다.
내처 화장실 등까지 갈고 나왔을 즈음, 어머니가 ‘저녁은 뭐 먹고 싶어?’라고 물어 왔다. 잠깐 고민하던 재환은 이럴 때 가장 무난한 답을 골라 어머니에게 들려주었다. 다만 이를 들은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떨떠름하게 바뀌었다.
“중국집 음식을 엄마가 어떻게 해.”
“시켜 먹어야지.”
“그러지 말고. 너 먹고 싶은 거 해 줄게.”
재환은 끝까지 ‘됐어요.’로 일관했다. 점심은 나름 한식으로 푸짐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짜장면에 탕수육으로 충분했다. 충분 정도가 아니라, 사실 그 정도면 제법 호화로운 축에 들었다.
재환은 핸드폰을 꺼내 근처 중국집을 검색해 보았다. 대한민국에 중국집 없는 동네가 있을 리 없었고, 그리하여 재환은 수많은 가게들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때, 슬그머니 다가온 어머니가 재환에게 전단지 한 장을 쓱 내밀었다.
“이 집이 맛있어. 그, 뭐지. 그냥 짜장면 말고 삼선 짜장면으로 시켜. 너 해산물 들어간 거 좋아하잖아.”
마치 방금 전의 어머니와 입장이 바뀐 것처럼 재환은 조금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엄마, 중국집 자주 시켜 먹어?’ 하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비겁한 아들은 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인 후 전단지에 큼지막하게 적힌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입력했다.
잠시 뒤 재환은 삼선 짜장면 두 그릇과 탕수육 하나를 시키고서 전화를 끊었다. 화면 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던 중 퍼뜩 무언가가 생각났다. 도로 핸드폰을 켜 얼른 메신저 앱으로 들어가는 찰나, 별안간 현관 쪽에서 쾅쾅 요란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설마 벌써 배달이 온 건 아니겠지.
“내가 가 볼게.”
이윽고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연 재환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과 놀라움이 떠올랐다. 잠깐 멍해 있는 사이, 열린 문틈으로 볼통한 목소리가 들이쳤다.
“나 계속 여기 서 있어?”
복도에 비뚜름히 선 재희가 쏘아붙인 말에 재환은 엉거주춤 옆으로 비켜섰다. 좁은 현관으로 들어선 재희는 낑낑거리며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벗었다. 어머니는 벌써 그 앞에 서서 딸이 빨리 신발 벗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지난번 오빠한테 말했어. 뭘 연락을 또 해?”
한겨울에 춥지도 않은지 반바지 아래 훤히 드러난 맨다리를 접어 철퍽 거실 바닥에 주저앉는 재희를 보며 재환은 낮게 허, 했다. 다시 떠올려 봐도 재희에게 오늘 오겠다는 확답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뭐, 결론적으로 그것이 긍정의 의미였음은 맞는 듯했다.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재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새 핸드폰을 꺼내 휙휙 화면을 올리고 있는 재희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가 입 모양으로 ‘짬뽕’을 말했다. 짬뽕은 재희가 늘 중국집에서 주문하던 메뉴였다. 머리를 주억거린 재환은 조용히 다용도실로 가 다시 중국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왜 굳이 자리를 피했는지는 모르겠다.
새빨간 국물에 푹 전 면발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는 재희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았다. 저럴 줄 알고 그녀 몰래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던 거였나 보다. 다만 심드렁한 재환과 달리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는 좌불안석이었다.
“짬뽕 먹기 싫어? 그럼 탕수육 좀 먹어.”
어머니가 상 가운데 있던 탕수육 접시를 재희 앞으로 밀었다. 하지만 재희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입이 댓 발이나 나와서는 못마땅함이 그득한 얼굴로 불평을 토로했다.
“기껏 왔는데, 중국집은 너무한 거 아냐? 그리고 나 밀가루 음식 이제 안 먹어.”
“그래? 그럼 만둣국 줄까? 낮에 끓여 놓은 거 있어.”
“아니, 만두는 밀가루 아냐?”
참다못한 재환이 탁, 소리가 나게 젓가락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밥상머리에서 싫은 소리 하기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동생 하는 말을 계속 듣고 있기가 영 힘들었다.
“내가 시키자 그랬어. 먹고 싶어서. 딴 거 먹고 싶은 거 있었으면 미리 연락을 하고 오든가.”
‘아, 내가 올 거라 그랬잖아!’ 하고 재희는 바락 성을 냈다. 사실 그게 요점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인 모양이었다. 거기에 대고 더 하고 싶은 말은 넘쳐났으나, 재환은 정말 억지로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삼십 번쯤 새겼다. 그래. 오늘 온 게 어디야. 그거면 됐지.
“그렇다고 버려? 그냥 먹자, 좀.”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에 재환을 노려보던 재희는 꼭 사약을 먹는 듯한 표정으로 짬뽕 면발을 입에 넣었다. 그제야 재환도 다시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죄 없는 어머니만 어쩔 줄을 몰라 두 자식의 눈치를 살폈다. 여러 가지로 재환에게 있어 참 불편한 식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세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에 의미가 있다고, 재환은 나름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큼직한 탕수육 조각 하나를 집어 어머니의 짜장면 그릇에 올리며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말투는 방금 전보다 다소 누그러졌다.
“학원은 알아봤어?”
짬뽕 그릇에 담길 기세로 쏟아져 내린 금색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던 재희가 멈칫했다. 뒤이어 ‘뭐, 어….’ 하는 영 애매한 답이 나왔다. 약간의 꺼림칙함을 감지한 재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지고, 둘 사이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학원?’ 하며 물었다. 그즈음, 재환의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지잉 짧은 진동음을 울렸다.
자연히 어머니의 시선이 재환을 향했다. 하지만 당장 핸드폰 확인할 생각을 하려야 할 수가 없던 재환은 뚫어져라 재희만 보았다. 그러자 재희는 홱 고개를 돌려 꽤나 노골적으로 재환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재환이 들고 있던 젓가락이 다시금 탁, 상 위로 내려갔다. 슬슬 남매간의 심상찮은 기류를 느낀 어머니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학원이라니, 그게 무슨….”
“서재희.”
버릇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재환은 어머니의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주머니에서는 재차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으나, 지금 재환의 신경은 모조리 동생을 향해 있었다. 그녀가 어떤 대답을 꺼내는지에 따라서 정말 오랜만에 모인 세 가족이 그럭저럭 즐겁게 한 해를 마무리할 수도, 아예 반대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반대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일지는… 아직 예단할 수 없었다. 일단은 동생의 답을 듣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서재희!”
“아, 씨발, 때려쳤다고!”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넓지도 않은 공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흥분을 참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한 사람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반대로 숨이 멈춘 듯 미동이 없는 한 사람의 표정은 시퍼렇게 굳었다. 조마조마함에 잠긴 어머니의 시선만이 어쩔 줄을 몰라 좌우를 오갔다. 그녀로서는 더 가만있기 어려운 형국이었다.
“니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몰라, 씨발!”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묻건 말건 재희는 다시금 악에 받친 욕지거리를 터뜨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재환의 인내심을 바닥까지 끌어 내릴 이야기를 더 늘어놓았다. 다만, 후의 상황까지는 내다보지 못했다.
“아, 선생들이 다 존나 꼰대 같은데 어떻게 다니라고! 오빠 지금 이백만 원 때문에 그러지? 갚을게, 걱정 마!”
“너 오빠한테 돈 받았어? 이백만 원이나?”
“갚는다니까! 엄마까지 이러지 좀 마! 안 그래도 돈 날려서 짜증 나는데.”
촥-.
그 순간 샛노란 머리에, 붉으락푸르락했던 얼굴에, 보기 싫게 깨작거리던 짬뽕에 정말로 찬물이 끼얹어졌다. 난데없이 물세례를 받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곁에 있던 어머니까지 눈이 커다래져 재환을 보았다.
“작작해, 서재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이 한가득 담겨 있던 컵을 쥔 재환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최근 가족 앞에서 내어 본 적 없는 목소리가 흘렀다. 폭발하는 분노를 억지로 내리누른, 위태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아마 마지막으로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술 먹고 행패 부리는 아버지 앞이었을 것이다.
“오빠….”
“널 믿은 내가 병신이지.”
“뭐라고…?”
저를 보는 동생의 눈에 볼록 차오른 게 눈물인지, 아니면 자신이 냅다 쏟아 버린 물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어느 쪽이든 지금의 재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재수 없게 날린 셈 칠 수 있는 이백만 원이었을지 몰라도, 재환은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도 마냥 철부지인 줄 알았던 동생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게 조금은 기특해서, 딴에 좋은 오빠인 척을 해 보려 했다. 한데 다 개짓거리였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 허망하고, 속상하고, 미치겠는 마음이 저 속에서부터 버글버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있는 대로 토해 낼 수 없어, 재환은 목구멍이 다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타다 남은 파편들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너를 믿은 내가, 미친놈이지! 어?”
“서재환!”
“그래! 오빠 너 미친놈이야! 됐어?”
“재희, 너까지…!”
어차피 형편이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골목. 그래도 다가올 새해를 축하하고픈 마음은 다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집에서는 모처럼 푸짐히 음식을 만들어 가족끼리 도란도란 나눠 먹고, 또 어느 집에서는 치킨을 시켜 일찌감치 맥주를 땄다. 저마다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올해의 마지막 저녁, 오직 한 집만이 너절하고 치졸한 절망에 잠겼다.
그 돈 엄마가 줄게, 재환아. 어?
그걸 왜 엄마가 주는데? 줄 거면 서재희가 줘야지!
씨발, 그래! 준다고! 준다니까?
제발 그만 좀 하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외침, 패륜을 각오한 아들의 분노, 거기에 지지 않는 딸의 욕설. 이만큼 콩가루일 수 있냐고, 마치 온 동네에 알리려는 듯 세 가족의 고성과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악다구니가 쏟아지고, 음식이 식어 갔다. 한 해의 남은 몇 시간이 원망으로 물들었다.
주섬주섬 오만 원권 지폐 몇 장을 갖고 와 쥐여 주는 어머니 때문에 재환이 울분에 가까운 탄식을 터뜨릴 때, 한영은 불 꺼진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유일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커다란 티브이 화면에서 채널이 한 번 바뀔 때마다 표정 없는 얼굴이 시시각각 화면과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곧 있으면 제야의 종이 울릴 텐데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이 이곳 보신각에 나와 있습니다. 그중 한 분과 인터뷰를….”
“올해의 연기 대상은….”
“다음 무대는 올 한 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맘때가 되면 으레 방송사에서 내보내는 뻔하디뻔한 그림이 별 의미 없이 휙휙 지나갔다. 그러다 리모컨을 누르던 손이 멈칫하며, 넘어가던 채널이 한군데에서 멈추었다. 연말의 공연 소식을 전하는 뉴스였다.
“5년 만에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정혜영 씨의 독주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녀의 배우자는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라 일컬어지는 지휘자 유찬진 씨인데요, 두 사람은 과거 한국인 최초로….”
화면 속에서 곱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이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홀린 듯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한 시선으로 보던 한영이 리모컨 맨 위에 있는 버튼을 꾹 누르자, 혼신을 다해 피아노를 치던 여인 위로 단숨에 장막 같은 어둠이 덮였다. 사위도 함께 고요에 잠겼다.
한영의 손을 떠난 리모컨이 테이블 빈자리에 맥없이 툭 던져졌다. 그 옆에는 주둥이가 긴 잔 두 개와, 오늘 밤 따지 못한 초록색 샴페인 병이 자리했다. 상대는 확실히 온다는 얘기도 없었는데, 가만있고는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마음이 들떴던 결과였다. 그 마음이, 이제는 끝없는 우울 속으로 가라앉았다. 수백 번 확인하다 결국 소파에 엎어 둔 핸드폰은 꿀단지에 풍덩 빠진 것처럼 여태껏 잠잠했다.
어느새 찰랑찰랑 눈물이 고인 눈가를 손등으로 벅벅 문지른 한영은 앉은 지 몇 시간이 훌쩍 지난 자리에서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터덜터덜, 힘 빠진 걸음으로 거실을 벗어나 계단을 올랐다. 당장에 생각나는 목적지는 한 곳뿐이었다.
컴컴한 복도를 지나 얼마 전까지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쥐고 문을 열자, 그 안에 잔뜩 고여 있던 훈기가 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추운 날 고생하며 올 재환을 위해 온 집 안에 지나치리만치 난방을 틀어 뒀던 탓이었다. 따뜻하다 못해 건조하게 메마른 공기를 들이마시며 한영은 어둠이 깔린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굳이 벽을 더듬어 불을 켜지 않은 채 자박자박 나무 바닥을 밟았다. 그러다 몇 발짝 떼지 못해, 방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새카만 피아노를 맞닥뜨렸다. 방금 티브이에서 보았던 것과 생김새가 엇비슷한 피아노에 최대한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한영은 옆으로 크게 걸음을 틀었다. 설마 진짜 그러지는 않겠지만, 저 피아노는 한영에게 있어 사람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피아노나 다름없었다. 가능한 한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재게 발을 놀린 한영은 피아노를 지나쳐 다른 벽과는 색이 확연히 구분되는 벽 앞에 다다랐다. 그곳에 가만히 멈춰 서서 느릿느릿 눈꺼풀을 껌뻑였다. 그럴 때마다 하얀 뺨에 늘어진 속눈썹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거듭했다. 몇 번 더 눈을 깜빡여 시야에 남은 어둠을 마저 걷어 낸 한영은 몸을 낮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닿은 딱딱한 나뭇결에서 절절 끓는 열이 올라왔으나, 다시 일어설 이유는 되지 못했다.
이제는 제법 밝게 느껴지는 달빛 속에서, 한영은 안으로 접은 두 다리 사이를 지그시 손바닥으로 짚었다. 고개를 높이 들자, 이 자리에 자신과 재환이 함께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색색의 증거들이 비로소 한가득 눈에 담겼다. 그때야 한영은 숨통을 짓누르는 우울감에서 벗어나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살 것 같았다. 더디게 눈알을 굴려 그제도, 어제도, 심지어 오늘도 몇 번이나 마주했던 그날의 흔적들을 다시금 찬찬히 눈과 마음에 새겼다.
재환이 낙서만도 못한 것 같다 투덜거렸던 크고 작은 페인트 자국들은 한 방울, 한 방울이 다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운 무늬 같았다. 그것들 때문에 처음 그렸던 결과물 대부분이 가려지기는 했지만, 또 신기하게 한영 눈에는 다 보였다. 거짓이 아니었다.
저기 저 노란색 덩어리가 동동 떠 있는 그림은 자신이 그린 북엇국이었다. 실물의 맛깔나는 모습은 반의반도 담지 못했으나, 그래도 세상에서 재환이 네 북엇국이 최고라는 진심은 제대로 담았다.
그리고 또 저기 줄 네 개가 휙휙 지나가는 그림은 베이스였다. 재환이 쑥스러운 티를 팍팍 내며 제일 처음 그렸던 그림인데, 기실 실제 베이스와는 모양새에서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특유의 투박한 감성이 잘 살아 있는 그림은 한영의 마음에 쏙 들었다. 살짝 흐린 눈으로 보면 여느 유명 추상화 못지않았다. 무엇보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볼을 발그레 붉혔던 재환의 모습이 심히 심장에 위험할 정도로 귀여웠던 것을 한영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다음 재환이 그린 라면 그림도 예술적인 걸로 따지자면 웬만한 화가 뺨쳤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고는 말만 해도 좋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그렸던 해골 그림이었다. 정말이지 그때 한영은 충격이 하도 커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는 줄 알았다. 태어나서 그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오죽하면 저도 재환을 따라 몇 번이나 해골을 그렸을까. 그중 절반은 망쳐 버렸지만….
페인트 얼룩에 덮인 그림들을 하나하나 좇던 한영의 시선이 이윽고 벽 가운데 부근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다. 그곳에는 형태만 보아도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수가 없는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큼직한 손바닥,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 그 끝의 굳은살…. 미처 표현되지 않은 부분까지 한영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앉은 자리에서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한영은 손자국을 향해 조심히 손을 뻗어 보았다. 안타까이 허공을 배회하던 손은 끝내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동시에 한영은 그토록 저와 즐겁게 그림 그리고, 격정적으로 입 맞추고, 뜨겁게 살을 섞었던 재환이 여기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가 그린 그림은, 흔적은 남아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정작 가장 보고 싶은 본인이 곁에 없었다.
옆으로 서서히 상체를 기울인 한영은 델 것처럼 뜨거운 바닥에 몸을 누였다. 뺨까지 바닥에 딱 붙인 채 벽을 보고서 사지를 작게 웅크렸다. 뒤이어 알록달록한 색채가 가득 맺힌 눈꺼풀을 조심스레 닫았다. 오늘은 이대로 잠들 생각이었다.
파노라마 사진처럼 넓게 펼쳐진 창밖 풍경 속에서 솜털 같은 결정이 펄펄 휘날렸다. 결정은 금세 고요한 정원을, 그리고 세상을 새하얗게 덮을 만큼 불어났다. 함께 늘어난 눈 그림자가 창 모양대로 나무 바닥에 새겨진 달빛 위를 이리저리 유영했다. 얼마 안 가 그림자는 애처로이 움츠린 청년의 몸을 전부 뒤덮어 버렸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차가운 눈 속으로 푹푹 발목이 잠겼다. 머리카락과 속눈썹 끝에 맺혔다가 무게를 못 이긴 작은 얼음 덩어리들이 거듭 아래로 투둑투둑 떨어졌다. 사무치는 추위를 견디려 입술과 어깨가 온통 파들파들 떨렸다. 하지만 발을 멈출 이유는 되지 못했다. 어머니의 집 근처에 꼬마들이 만들어 놓았던 눈사람과 비슷한 몰골을 하고서도 재환은 계속해서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올랐다.
바짓단이 무릎까지 다 척척히 젖어 들고, 그 위에 또 눈이 엉겨 붙어 아예 딱딱하게 얼어 버렸을 무렵, 재환은 드디어 익숙한 대문 앞에 다다랐다.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늘어선 숫자를 차례대로 꾹꾹 눌렀다. 머지않아 철컹, 매끄럽게 쇠가 스치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새파랗게 언 손을 다시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깨로 두꺼운 대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재환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적어도 한군데쯤은 불이 켜져 있을 줄 알았던 집이 1, 2층 모두 컴컴했다. 마치 안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새까만 창문 위로 흩날리는 눈발만 비쳐 어른거렸다. 저절로 스르륵 닫힌 대문 위에 등을 붙이고 있던 재환은 안타까움 섞인 탄식을 길게 흘렸다. 그러나 휘휘 불어 젖히는 바람 소리에 묻혀 입만 벙긋거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몇 초간 멀거니 불 꺼진 집을 응시하던 재환은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저기 저 창문과 비슷한 색을 띤 액정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위로 거미줄처럼 와자작 금이 가 있는 게 원인인 듯싶었다. 하긴, 재희 앞에서 좀 세게 핸드폰을 내동댕이쳤었어야지. 그녀 말마따나 지랄맞고 거지같은 이놈의 성질머리가 문제였다.
역시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씁쓸한 생각을 하며 먹통이 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사실 이대로 발을 틀어 도로 대문을 나서야 함이 맞겠지만, 온 길을 되돌아가는 대신 재환은 몸을 낮춰 철퍽 대문이 있는 턱에 주저앉았다. 저 위에 견고히 설치된 캐노피 덕에 다행히 지금 앉은 자리로는 눈이 많이 들이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이미 머리가, 어깨가, 마음이 모두 차게 젖었다. 그것이 몸을 움직일 의지도 함께 얼어붙게 만들었다. 세운 무릎에 힘없이 팔을 얹은 재환은 딱딱한 대문 위로 쿵 뒤통수를 기댔다. 슬며시 눈을 내리깔고 작은 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이층집을 희부연 눈보라로 어룽진 시야에 담았다.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 있으니 안 그래도 멋스러운 외관의 건물이 더 운치가 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얗게 눈꽃 맺힌 정원의 나무가 어우러져 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영락없이 거지꼴을 한 재환의 상황은 운치와 거리가 멀었다. 이 추위에 집에는 안 가고 여기서 무슨 청승인지 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러다 자칫 잠이라도 껌뻑 들면 내일 아침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었다. 서울의 한 부자 동네에서 새해 아침부터 꽁꽁 언 시체가 나왔다는 끔찍한 뉴스. 그러면 이 집 사는 잘생긴 청년한테 꽤나 미안할 듯싶었다.
다행히 온몸이 고단할지언정 재환은 졸리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간을 더 그 자리에 머물렀다. 아무 목적도 없이, 이유도 없이, 저 안에 한 사람이 잠들어 있을 집만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신기하게도 이곳을 향하는 내도록 머릿속을 꽝꽝 울리던 고성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좆같아서 더는 여기 못 있겠다, 나도 너 꼴 보기 싫다, 제발 둘 다 그만해라, 어쩌고저쩌고….
그럴 만도 했던 게, 성질머리 비슷한 남매의 대거리와 이를 말리는 어머니의 애원은 한참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도중 새해를 맞이해 버린 건 정말이지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딱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당시가 이랬던 것 같다. 집 안 곳곳에 붙은 차압 딱지, 집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술 마시고 큰소리치던 아버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던 나머지 가족들. 그 순간에서 오늘까지, 어쩌면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코를 한 번 훌쩍인 재환은 움츠린 어깨를 크게 떨었다. 지금이라도 저만치 앞에 굳게 닫혀 있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더라도 한영은 벌떡 일어나 자신을 따스하게 맞이해 줄 터였다. 그의 품이 얼마나 포근할지 재환으로선 굳이 상상해 볼 필요도 없었다. 함께 입 맞추고 살을 맞대다 보면, 오늘 저를 진절머리 나게 했던 소란이 아예 그런 적 없었다는 양 씻겨 내려갈 것을 재환은 알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어서 일어나 눈발을 헤쳐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재환은 그러기 싫었다.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이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는 괴이한 발상이었다. 이리 초라하게 쪼그려 앉아 볼품없이 눈물과 콧물을 삼키는 것보다야 추위가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는 게 백번 나았다. 그걸 빤히 알면서도 이상하게 재환은 당장 한영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여전히 자신은 끔찍한 겁쟁이라서, 그가 줄 무한한 안락함이 주저되는 모양이었다. 참 지질한 고질병이었다.
그리하여 재환은 불은 꺼져 있되, 한참 전부터 따뜻함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집을 몇십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눈으로만 보았다. 이러고만 있어도 살짝은 옷 속을 파고드는 한기가 가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어쩌면 착각이 아니라 필사적인 자기 암시일 수도 있었다.
얼마쯤 더 시간이 지났을까. 한 사람이 고집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자리에 이제는 주먹만 한 눈사람 하나만 오뚝 서 있었다. 새해 아침에는 눈도 그치고, 날도 풀린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해가 떠오르면 사라질 하룻밤살이 눈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