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3. Decay
1장
* * *
일찌감치 추워진 날씨를 뒤따라 계절이 바뀌고, 거리 곳곳이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뒤덮였다. 마른 이파리가 매달려 있던 자리에 둘러진 색색의 전구, 가게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이 벌써 끝나지도 않은 한 해, 그리고 다가올 한 해를 축하하기에 바빴다. 그 소란함이 유독 한 사람의 마음에도 살랑살랑 설레는 바람을 불어 넣었다. 물론 실제 부는 바람은 꽤나 매서웠지만.
양손 가득 제 몸집만 한 비닐봉지를 쥔 태군은 낑낑거리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몇 발짝을 걷다 멈춰 서서 할딱할딱 숨을 고르고, 또 몇 발짝을 나아가다 멈춰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사이사이 절로 ‘아오!’라든가 ‘이씨!’ 하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지금이라도 키만 멀대같이 큰 세 놈을 여기까지 불러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렇다고 또 계획을 어그러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짜증과 안타까움만 팍팍 터졌다.
나중에는 거의 봉지를 질질 길바닥에 끌다시피 해서 커다란 대문 앞에 도착한 태군은 일단 손에 든 것을 좀 내려놓았다. 흐아…, 탄성을 늘이며 장갑 낀 손으로 통통 허리를 두드렸다. 집에서 나설 때만 해도 추워서 발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지금은 몸에서 나는 열 때문에 불긋불긋한 색을 띠었다. 반지르르한 정수리에는 송골송골 땀까지 맺혔다.
속으로 ‘조금만 더!’를 외치며 봉지를 들어 올린 태군은 나름 힘차게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고지를 눈앞에 두고 무거운 걸음에 힘을 싣는데, 달가워할 수 없는 목소리가 귓구멍으로 날아와 꽂혔다.
“장태군, 그게 다 뭐야?”
망했어. 현지우 저 새끼 때문에 다 망했어!
하필이면 정원 구석에서 담배 피우는 지우와 딱 마주친 태군은 그와 함께 터덜터덜 합주실로 내려갔다. 힘없이 두꺼운 방음문을 열자, 미리 와 있던 재환과 한영이 둘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특히 재환은 두 사람 손에 사이좋게 들린 커다란 봉투를 쳐다보며 꽤나 당황스러운 낯을 했다.
“장태군, 너 집 나왔어?”
모처럼의 서프라이즈 이벤트가 허무하게 실패로 끝나 버린 태군은 ‘아니그든!’ 하며 팩 성질을 냈다. 짜잔, 하고 나타나 들고 온 물건들을 보이며 멤버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반도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 정원에서 현지우를 맞닥뜨릴 건 또 뭐람. 한데 지금 재환과 한영의 태도를 보니 설사 계획에 성공했더라도 기대했던 반응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짜증 나…. 태군은 속으로 거듭 꿍얼거리며 합주실 가운데에 풀썩 봉지를 내려놓았다. 씩 웃은 지우가 그 옆에 나머지 하나를 놓은 뒤 뿔이 난 태군을 대신해 다른 두 사람에게 가까이 와 보라고 손짓했다.
이윽고 봉지에 한가득 담긴 물건을 확인한 재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한영은 반짝반짝 눈을 빛냈고, 그제야 태군은 조금 어깨가 으쓱해져 표정을 풀었다. 이제는 네 사람이 사이좋게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 시간이었다.
온종일 제집 창고를 뒤져 태군이 찾아냈다는 트리는 생각보다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하니 조각조각 가지가 나뉜 나무를 완성하는 데에만 제법 시간이 걸렸다. 예전 태군의 어머니가 일하는 곳에 두었던 트리라는데, 그 얘기를 들으며 재환은 그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음을 떠올려 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지, 아마.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참 자유분방하게도 자라난 친구를 보며 재환은 새삼 신기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무에 장식을 다는 태군은 핸드폰으로 틀어 놓은 캐럴을 고래고래 따라 부르고 있었다.
어쨌거나 사내놈 넷이 달라붙으니 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트리 만들기가 어느새 마무리를 앞두었다. 마지막으로 사슴이니 천사니 각종 귀여운 장식이 대롱대롱 매달린 나뭇가지에 둘둘 꼬마전구를 두른 네 사람은 트리 주위에 빙 둘러섰다.
지우가 달칵 스위치를 켜자, 정신 번쩍 들 만큼 알록달록한 불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태군은 한껏 들떠 짝짝 손뼉을 쳤고, 재환도 내심 마음에 들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일은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나 해 봤던 것 같은데, 태군 덕분에 나름 재미난 경험을 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예상보다 더 예쁘기도 했고.
빨갛고 파란, 기타 이펙터에 달린 것과 비슷한 작은 불빛들을 한가득 시야에 담던 재환은 슬며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보고 있던 색색의 불빛들이 투명한 갈색 눈동자에 빼곡히 고여 있었다. 그 눈동자의 주인에게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기다란 새끼손가락에 살그머니 같은 손가락을 얽자, 반짝반짝 전구의 빛을 반사시키던 눈동자가 재환을 향했다. 태군이 틀어 놓은 캐럴이 여전히 신나게 울리는 가운데, 높다란 트리가 둘 사이에 오가는 수줍은 미소를 가려 주었다.
번쩍이는 트리를 보며 크리스마스 기분에 잠겨 있기도 잠시, 네 사람은 각자 악기 앞에, 혹은 악기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공연 기회를 늘리자는 재환의 의견에 따라 최근 몇 군데 더 클럽 오디션을 보았는데, 그중 한 곳에서 바로 연말 공연에 서 달라는 연락이 온 까닭이었다.
안 그래도 지난달 있던 대회 후, 다들 긴장이 풀린 탓에 그간 조금 느슨해진 마음으로 합주를 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연 스케줄이 잡힌 건 꽤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밴드 자체가 느슨히 굴러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공연 준비와 별개로 EP 앨범은 계속 제작 중이었고, 계획대로 봄에 발매하기 위해서는 녹음도 믹싱도 계속 부지런히 해야 했다.
그사이 기쁘게도 더 숨의 SNS 계정에 가입한 사람의 숫자가 꽤나 늘었다. 후에 공개되었던 대회 영상이 좋은 반응을 얻은 덕이었다. 재환은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나중 보니 댓글도 제법 많았다. 다른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게 썩 좋지 않음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재환은 궁금증을 못 이겨 올라온 글을 모조리 읽고 말았다.
다행히 소위 말하는 악성 댓글은 없었다. 노래가 좋다는 칭찬이 대부분이었고, 연주가 훌륭하다는 말도 더러 있었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뭐 봐?”
“그냥 인터넷 기사.”
한영의 물음에 은근슬쩍 핸드폰 화면을 꺼 버린 것은 댓글 중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적지 않다는 데에 원인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잘생겼다, 꽃미남이다, 연예인인 줄 알았다…. 거기까지면 모르겠는데, 아이돌 같다는 댓글은 아무래도 한영에게 보여 줄 수가 없었다. 저 또한 과거 아무 생각 없이 같은 대사를 뱉었다가 나름 호되게 당하기도 했고, 또 그만큼 한영이 싫어하는 소리였으므로.
같은 의미에서 본인이 모델 같다는 댓글을 본 지우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한영처럼 그런 칭찬에 질색하는 쪽이려나. 늘 싱글싱글 웃는 낯이라 지우의 속은 영 알기가 어려웠다.
건너편 앉은 한영과 지우를 번갈아 보며 잠깐 딴생각에 빠졌던 재환은 얼른 기타 넥을 고쳐 쥐었다. 그러다 건반에서 고개를 드는 한영과 눈이 마주쳤다. 눈 밑 살을 볼록하게 부풀린 한영이 방긋 미소 지었다. 아이돌 뺨치게 예쁜 미소였지만, 그런 속마음을 숨기고 재환은 어서 시작하자는 눈짓을 보냈다. 아마 콩콩 뛰는 심장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 * *
어둑어둑한 계단을 올라가며 태군은 연신 의심쩍은 눈초리로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뒤따라가는 재환도 비슷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서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비슷했다. 정말 이런 데 기획사가 있나…?
며칠 전 합주하는 도중, 지우가 낯선 번호로 온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본인은 이러저러한 기획사 직원인데, 인터넷에서 더 숨의 영상을 보고 관심이 생겨 연락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한번 얼굴을 보고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말도 전했다.
처음, 네 사람은 당연히 들뜨는 마음이 앞섰다. 인디 밴드에게 기획사에서 먼저 연락이 오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았고, 그 흔하지 않은 일이 더 숨에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셔서는 안 되겠지만, 혹 일이 잘 풀려 계약까지 이어진다면 밴드는 지금보다 더욱 승승장구하게 될 터였다. 물론 그건 아주 먼 날의 이야기였다.
어찌 됐든 밴드의 연주나 노래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아 재환은 내심 뿌듯했다. 넷이 모여 인터넷에서 기획사의 정보를 찾아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기획사 이름을 검색창에 입력하니, 홈페이지 하나가 나왔다. 그러나 홈페이지 관리를 하지 않는 건지 들어가 보아도 이렇다 도움 될 만한 내용이 없었다. 소속 뮤지션이 누가 있다든가, 어떤 비전을 갖고 있다든가. 혹 신생 기획사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불명확했다.
그리하여 일단은 만나 보고 판단하자는 결정을 내린 채 약속 당일인 오늘이 되었다. 사무실이 있다는 상가 건물 3층까지 올라온 재환은 두 주먹을 슬쩍 쥐었다 펴며 회색 철문 앞에 섰다. 그 옆에 붙은 스티커에 적힌 ‘떼인 돈 받아드려요’나 ‘XX 마사지’ 따위는 애써 못 본 체했다. 꿀꺽 침을 삼키며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초인종을 꾹 눌렀다. 설마하니 오는 길에 태군이 반 농담 삼아 던진 말처럼 사기나 인신매매,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싶었다. 이런 새파란 청년들에게 뭐 떼어먹을 게 있다고.
얼마 안 가 끼익, 하는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빼꼼히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이쪽과 같은 또래이거나, 더 많아 봤자 한두 살쯤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여자였다. 머리를 질끈 묶고 안경을 쓴 여자는 네 사람을 보고 ‘더 숨이죠?’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더 문을 활짝 열며 ‘들어오세요.’ 했다.
한영의 집 거실 반만 한 크기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지나갈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은 책상들이었다. 그 앞에 앉은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마우스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도 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뭐가 저렇게 많이 쌓여 있나 하고 보니 CD나 음악 잡지였다. 벽에는 주로 외국 뮤지션의 포스터가 큼직큼직 붙어 있었다.
안경 쓴 여자의 안내에 따라 넷은 사무실 구석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방 한 면은 온통 CD 장이 차지했고, 반대편 벽은 밖에서 보았던 것처럼 커다란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네 사람은 옆으로 긴 가죽 소파에 쪼르르 끼어 앉았다.
“잠깐 기다리세요.”
여자가 방을 나간 후, ‘하…!’ 하고 크게 숨을 터뜨리는 소리가 울렸다. 태군이었다.
“와, 씨발. 존나 쫄았네! 나 진짜 새우잡이 배 타는 줄 알았잖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저도 나름 마음이 살짝 졸아 있던 게 사실이라 재환은 괜히 태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는 물건들도 그렇고, 열심히 일하는 듯한 사무실 분위기도 그렇고, 이제 와 갑자기 수상쩍은 일에 연루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음악 관련 회사는 맞나 보네.”
재환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방 안을 빙 둘러보던 지우가 말했다. 재환과 딱 붙어 앉아 있는 한영은 별 말을 않고 허벅지 틈에서 살짝살짝 재환의 손을 잡았다 놓기만 했다. 이러한 행동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재환은 굳이 손을 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가끔씩 다가오는 한영의 접촉이 내심 싫지 않기도 했다.
내처 재환도 한영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 놓을 즈음, 쟁반에 오렌지 주스, 알로에 주스, 토마토 주스 따위를 담은 여자가 다시 방으로 왔다. 그녀 뒤로 캐주얼한 차림을 한 중년 남성이 따라 들어왔다. 아마도 이 회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일 거라는 직감에,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우, 태군이 연이어 일어서고, 한영이 가장 늦게 일어났다.
“아, 일단 명함부터.”
남자는 들고 온 명함부터 내밀었다. 와인색의 작은 종이에는 ‘대표 배선호’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데 그 위에 있는 회사 이름이 전화로 전해 들었던 것과는 달랐다. 일단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며 재환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예상대로 회사의 대표가 맞았던 남자도 탁자 건너편에 있는 소파로 가 앉았다.
“저는 여기 대표 배선호고요, 오늘 더 숨이랑 얘기를 좀 나눠 보고 싶어서 오라 그랬어요. 반가워요.”
나름 정중히 인사한 대표가 손을 내밀었다. 다만 이쪽은 사람이 넷이라 다들 잠시나마 주춤했다. 다행히 지우가 얼른 매끄러운 미소를 걸며 대표의 손을 맞잡았다.
“네, 안녕하세요.”
살짝 껄렁한 느낌이 있는 평소 어투와 달리 더없이 공손한 지우의 말씨에 재환은 설핏 눈이 커졌다. 태군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저런 게 ‘영업용’이구나 싶은 태도였다.
그사이 탁자에 음료를 내려놓은 여자가 방을 나갔다. 아무도 건드리지를 않자, 대표가 음료가 든 유리병을 네 사람 가까운 곳으로 밀었다.
“마셔요. 우리 사무실에 아직 커피 기계가 없어서. 다들 요새 사 달라고 난리이긴 한데.”
대표의 권유에 각자 앞에 있는 병을 대충 하나씩 집었다. 재환이 집은 것은 토마토 주스였는데, 하필이면 썩 좋아하는 음료가 아니어서 뚜껑을 열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이가 쓱 토마토 주스를 가져가더니 그 자리에 오렌지 주스를 놓았다. 살짝 눈썹을 꿈틀거린 재환은 태연하게 토마토 주스의 뚜껑을 따고 있는 한영을 흘긋 곁눈질로 보았다. 그럴 상황이 아님을 알면서도 하릴없이 속이 간질거려 왔다. 괜스레 낮게 헛기침하며 오렌지 주스의 뚜껑을 열었다.
“오늘 갑자기 이렇게 보자 그래서 좀 놀랬죠? 사실 더 숨 영상은 내가 인터넷에서 먼저 보고 직원한테 말했어요. 보자마자 속으로 ‘이거다!’ 했지.”
교차한 무릎에 손을 얹고 말하는 대표에게서 과장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켠 재환은 이어지는 대표의 말을 들었다.
“사실 우리 회사가 음악 유통 일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 아예 레이블을 만들었거든. 뮤지션도 키우고, 직접 음원 유통도 하고, 홍보도 해 보려고요.”
그제야 재환은 기획사의 정보를 인터넷에서 제대로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를 납득했다. 회사 자체는 원래 있던 곳이되, 레이블을 새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요새 괜찮은 밴드들 위주로 찾고 있는데, ‘더 숨’이 눈에 띄더라고. 특히 지난번 대회 영상 아주 잘 봤어요.”
지우와 재환이 거의 동시에 ‘감사합니다.’ 하고 답했다. 재환의 인사는 조금 딱딱한 감이 있던 반면, 지우의 목소리는 참으로 나긋나긋했다. 둘 사이에 앉았던 태군이 흘끔 눈을 돌려 재환에게 ‘얘 누구냐?’ 하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재환은 대꾸하는 대신 티 나지 않게 태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노래도 스타일리시하고, 다들 연주력도 좋은 것 같고. 아, 아직 싱글 하나만 낸 거죠?”
“네.”
“그럼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
대표가 방금 대답했던 지우를 보며 물었다. 멤버들과 차례로 눈을 맞춘 지우는 이어서 꽤나 조리 있게 현재 밴드가 세워 놓은 계획들을 짤막짤막 정리해서 읊었다. 지금은 클럽 어디어디서 공연하고 있는데 더 무대에 설 기회를 늘릴 거라든가, 작업 중인 EP 앨범은 내년 봄에 발매할 계획이라든가, 그 후에 가능하면 정규 앨범도 빨리 내고 싶다든가. 딱히 옆에서 더 첨언할 거리가 없었다.
“나름 계획을 잘 세워 놨네. 그럼 지금 유통사는 어디?”
이후 두 사람은 밴드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우의 설명은 매끄럽고, 상대는 충분히 관심을 보이고, 나름 순조로운 흐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슬슬 본론이 나왔다.
“그래서, 관심이 있으면 더 숨이 우리 회사랑 계약을 했으면 좋겠는데. 아,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자는 건 아니고. 이런 건 멤버들끼리도 상의해 봐야 하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물론 인디 밴드에게 있어 회사가 생긴다는 건 여러 가지로 이득이 많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앉은자리에서 넙죽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당연히 계약 조건도 따져 봐야 했고, 저쪽이 특별히 요구하는 사항은 없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간혹가다 밴드가 아닌 개인으로 계약하고 싶다거나, 전혀 다른 음악 스타일을 원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모두 재환이 밴드 활동을 하며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것이었다.
줄곧 듣는 쪽이었던 재환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저희 넷이랑 다 계약을 하고 싶으시다는 거죠?”
“당연하지. 우리는 치사하게 한 명만 빼 가고 그런 거 안 해요.”
밴드가 찢어지는 상황은 가정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재환으로서는 안심되는 답변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넷이 함께. 어쩌면 그게 재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건인지도 몰랐다.
“밴드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런 생각 하지, 밴드 음악이 뭐 한 명이서 만드는 건가. 싱어송라이터도 아니고. 그리고 원래, 밴드는 라이브 할 때가 진짜잖아요. 각자 악기 잡고, 시너지 내서. 그래서 난 레이블 운영할 때도 공연을 최대한 많이 할 거예요. 그쪽에 커넥션도 많고.”
갑자기 이야기가 공연 쪽으로 접어들자 대표는 꽤 열변을 토했다. 요새는 행사장에 가도 트로트 가수나 아이돌이 대부분이라 영 공연 볼 맛이 안 난다고도 불평했다. 재환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바였으나, 밴드의 인기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는 게 비단 하루 이틀의 얘기는 아니었으므로 완전히 맞장구치기가 뭐했다. 대표의 반응이 좀 격하다 싶은 감이 없잖아 있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랑 계약하면 행사 같은 것도 최대한 많이 잡아 줄게요.”
“행사요?”
재환이 되묻는 말에 대표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의 안광이 번뜩이는 것을 본 재환의 양미간이 슬쩍 움츠러들었다.
“그, 아직 더 숨은 많이 안 다녀 본 모양인데, 의외로 우리가 잘 모르는 행사들이 굉장히 많아요. 지역마다 무슨 축제, 무슨 축제 같은 거 있잖아. 기업 행사도 있고. 나는 그런 데에 밴드가 좀 많이 나가 줘야 한다고 봐. 밴드 음악만큼 분위기 띄울 수 있는 게 어딨어요.”
주제가 점점 계약과는 먼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니면 이게 진짜 본론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즈음 대표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 있던 상체도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솔직히 밴드라는 게, 백날 음악만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나도 유통 쪽 일을 하는 입장이지만, 요새는 CD도 안 팔리고, 음원 사이트들이 수수료 다 떼 가고. 밴드가 점점 먹고살 길이 없어. 밴드가 음악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진작 지났다 이거지.”
허벅지에 올라가 있던 재환의 손에 일순 힘이 들어가며 바지 위로 짧은 주름이 잡혔다. 불현듯 이 자리를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그사이에도 대표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점을 찍었다.
“그러니까 난 아예 밴드를 그쪽으로 키울 생각이에요. 공연 기회를 많이 주고, 고정적인 수입도 생기게 하고. 일주일에 행사 너덧 개만 뛰어도 충분히 할 만할걸? 아, 더 숨은 카피곡 많이 해 봤어요?”
결국은 행사 전용 밴드를 원한다는 얘기를 참 장황하게도 늘어놓았다. 그래, 충분히 그런 형태의 밴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재환 자신도 이데아 시절 알음알음 주변 소개로 합주비도 벌 겸, 앨범 제작 비용도 벌 겸 소위 말하는 행사 무대에 몇 번인가 선 적이 있다. 이쪽이 무대를 가릴 레벨도 아니고, 딱히 꺼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 이럴 게 아니라 계약서 견본을 한번 보여 주는 게 낫겠다. 잠깐 기다려 봐요.”
훌쩍 일어선 대표가 서둘러 방을 나갔다. 말하기보다 듣는 데에 곱절 이상의 시간을 소비했던 네 사람 사이에 찝찝한 침묵이 흘렀다. 볼 안쪽 점막을 꾹꾹 깨물던 재환이 무어라도 말을 좀 꺼내 보려는데, 금방 대표가 방으로 돌아왔다. 탁자 위로 작은 글씨가 깨알처럼 박힌 종이가 놓였다.
잠깐 멤버들의 눈치를 살피던 재환은 제가 먼저 종이를 집었다. 나머지 셋의 몸이 재환 쪽으로 기울고, 갑이니 을이니 하는 단어가 빼곡히 들어가 있는 문장을 따라 휙휙 재환의 눈이 움직였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종이가 뒷장으로 넘어가며 시선이 한군데에서 멈추었다. 이를 인지한 듯 앞에 앉은 대표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아, 거기 있는 숫자들은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에요. 여기에서 일단 제시하는 거고, 밴드마다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니까. 근데 더 숨은 아직 커리어가 많지 않아서….”
뒤로 더 길게 이어지는 말이 재환의 귀에 명확히 들어오지 않았다. 적힌 계약금도 그렇고, 회사와의 수익 분배도 그렇고,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만 머리를 가득 메웠다. 행사 얘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지금 제가 읽고 있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통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에 놓인 경험이 전무하여 더욱이 그랬다.
“일단 그건 가져가서 다시 찬찬히 챙겨 봐요. 아예 네 명 걸 다 줄까?”
“아, 괜찮습니다.”
재환은 빠르게 답했다. 이 계약서를 굳이 네 부나 갖고 돌아갈 필요가 없을 듯했다. 사실, 이미 중요한 내용은 다 확인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볼래?’ 하는 의미를 담아 멤버들과 한 차례씩 눈을 맞춘 재환은 다들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도로 계약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것도 놓고 갈까, 하는 중얼거림이 문득 마음속을 스쳤다.
무릎에 올려 둔 누런 종이봉투 끄트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재환은 차창 너머를 멍하니 응시했다. 지우가 틀어 놓은 옛날 가요가 나지막이 차 안에 흐르는 가운데, 딱히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다들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곱씹고 있지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표를 만나기 전 재환은 앞으로 밴드 일이 더 술술 잘 풀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회사와 계약하고, 보다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을 더 많은 사람이 들어 주고…. 한참을 앞서가는 생각이란 자각은 있었지만, 그래도 꿈은 얼마든 꿀 수 있지 않은가.
다만, 오늘 마주한 현실은 생각보다 달콤하지 않아 재환은 기분이 울적해졌다. 기실 대표가 한 말 중 틀린 소리는 없었다. 밴드 음악이 돈벌이가 잘 안 된다는 말도 맞았고, 그러니 나름의 궁리를 모색해야 한다는 점도 맞았다. 그 대안으로 대표는 열심히 행사를 뛰는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다. 중간에서 도둑놈처럼 다 떼어먹으려고 했어서 문제지.
우울한 기분이 슬슬 ‘생각할수록 열 받네’로 바뀌어 갈 즘, 핸들을 잡은 지우가 말문을 뗐다.
“그 새끼 사기꾼 같지?”
그 새끼가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 딱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재환은 ‘그러게.’ 하고 대꾸했다. 태군이 얼른 거들었다.
“야, 씨발. 결국 우리는 좆 빠지게 행사 돌리고, 돈은 다 지들이 먹겠다는 거잖아. 그게 무슨 기획사냐? 존나 양아치지. 삼 대 칠? 장난하나, 지금!”
꾹꾹 참아 왔던 울분을 토하는 태군에게 지우가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했다. 여기에 힘입어 태군은 개새끼니 소새끼니 하는 욕을 얼마간 더 시원스레 터뜨렸다. 태군의 차진 욕을 듣고 있으니 재환도 답답하던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욕쟁이 친구를 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태군의 욕과 지우의 부추김이 오가는 와중 당연하게도 ‘계약할까’라든가 ‘어떻게 생각해’ 같은 물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게 재환은 내심 좋았다. 조금 간지러운 비유이지만, 이럴 때면 멤버들이 굳세고 드높은 나무 같았다. 그 나무들이 모인 숲은 어떤 비바람도 들이닥치지 않을 것처럼 안락하고 평온했다. 재환은 이 평온함에 더 안주하고 싶었다. 그냥 즐겁게 기타 치고, 함께 노래나 만들면서.
늘 그랬듯이 태군을 제일 먼저 내려 준 차는 조금 더 달려 재환과 한영의 집 근처 길가에 멈춰 섰다. 한영을 뒤따라 내리려는 재환을 문득 지우가 불러 세웠다.
“재환아.”
“어?”
“그냥 오늘은 똥 밟은 셈 쳐.”
피식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재환은 차에서 내려 가 보라는 의미를 담아 키 높은 SUV의 지붕을 툭툭 두드렸다. 후미등을 밝히며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멀거니 응시하던 중, 한영에게 슬쩍 점퍼 소매를 붙잡혔다.
“재환아. 오늘은 나랑 같이 가.”
이제 더는 함께 돌아가는 데에 괜한 구실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오늘 집 가서 해야 할 일을 과감히 내일로 미룬 재환은 가뿐히 고개를 끄덕였다. 칙칙하기만 한 방구석, 지금은 그곳에 홀로 있어 봐야 기분만 가라앉을 것 같았다. 뉘엿뉘엿 떨어지는 해를 보며 두 사람은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먼지 한 톨 없는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영은 재환의 허리를 안고 길게 키스했다. 그사이 몇 번이나 센서 등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지만, 재환은 딱히 한영의 품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드라운 머플러가 둘러진 목에 팔을 감고 진득이 한영을 느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오늘의 기억을 덧씌우는 과정이었다.
아예 제 전용이 된 듯한 분홍색, 보라색 트레이닝복으로 편히 갈아입은 재환은 모처럼 부엌으로 가 섰다. 얼마 전 한영이 뺨을 붉히며 라면 끓이는 법을 좀 알려 달라 넌지시 말했었는데, 마침 잘됐지 싶었다. 팔을 걷어붙인 재환은 나름 한영에게 찬찬히 설명해 가며 정성스럽게 라면을 끓였다. 그 곁에서 한영은 잠시도 집중을 풀지 않고 재환의 설명을 콕콕 머리에 새겼다. 다음에는 제가 더 맛있게 끓여 주리라 다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면 국물에 야무지게 밥까지 말아 먹은 두 사람은 서로 은근슬쩍 눈치를 보다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몇 번 장난치듯 쪽쪽 입술을 부딪치다가, 재환을 시작으로 상대의 뺨이나 코끝에 몽글몽글 피어오른 거품을 묻히며 좋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진한 애무 없이도 충분히 마음이 데워지는 시간이 흘렀다.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터는 재환에게 한영이 다가와 손에 쥔 DVD 타이틀 여러 장을 쫙 펼쳐 보였다. 재환은 자연스럽게 그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네가 고른 게 나도 마음에 든다는 의미로 한영이 재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머리를 마저 말리고 거실로 내려갔을 때는 은은한 스탠드 조명을 받은 탁자 위에 캔맥주와 간단한 주전부리가 차려져 있었다.
오늘 재환이 고른 영화는 몇 년 전 국내에서도 히트 쳤었던 외국의 음악 영화였다. 당시 극장에서는 보지 못하고 나중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았는데, 다들 지루하다 구시렁거릴 때 재환 혼자 찔끔 눈물을 흘렸더랬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난한 길거리 음악가였던 주인공이 부르는 노래가 퍽 구슬프게 들려서 그랬던 것 같다.
한 손에 맥주를 쥐고 한영에게 기대어 다시 보는 영화는 그때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어렴풋이 기억하던 것보다 주인공의 삶이 훨씬 더 처량하고 지난하게 다가왔다. 제 머리가 큰 탓인지, 화면이 크고 음향이 좋아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재환은 간간이 맥주를 홀짝이고, 과자를 집어 먹으며 나름 영화에 집중했다. 중간중간 신이 바뀌는 즈음해서 한영이 머리칼에 부드러이 입 맞춰 오기도 했다.
한데 슬슬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재환은 왠지 오늘 영화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도 좋고, 노래도 좋고, 다 좋은데 그랬다. 특히 주인공이 아무도 없는 밤거리에서 홀로 고래고래 노래하는 장면을 보며 그러한 생각이 한층 강해졌다. 차마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내가 저 사람처럼 거리에서 노래하는 신세도 아닌데 말이다.
한영의 어깨에 옆머리를 대고 있던 재환은 문득 눈을 굴려 지금 제가 있는 거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커다란 티브이 화면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스민 거실은 넓고, 깨끗하며, 또 동시에 아늑했다. 이 집 주인의 방처럼 물건이 많지는 않았지만, 딱 적당한 곳에 위치한 가구나 장식들이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발바닥에 밟히고 있는 푹신푹신한 러그도 그러한 느낌에 한몫했다.
이렇게 포근한 장소에서, 포근한 온기에 기대 맘 편히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데 왜 자꾸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해 구질구질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이라는 싱거운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린 재환은 손에 쥔 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고개를 크게 뒤로 젖혀도 입 안으로 흘러드는 것이 없었다. 어느 틈엔가 다 마신 모양이었다.
재환은 한영에게 기댔던 몸을 슬그머니 바로 세웠다. 자리에서 일어서려 소파 모서리를 손으로 짚는데, 손등 위로 하얀 손이 포개어졌다. 조금 서늘한 감이 있는 손은 뒤이어 일어나지 말라는 듯 재환의 허벅지를 꾸욱 눌렀다. 한영이 이러는 영문을 몰라 재환은 다소 의문 어린 눈빛을 했다. 입만 움직여 ‘왜’라는 물음을 건넸지만 한영은 답이 없었다.
“유한영…?”
별안간 납작 허리를 숙인 한영이 재환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어정쩡한 자세로 맥주 캔을 들고 있던 재환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하려고.”
한영의 고개가 살그머니 위를 향했다. 얼굴 절반을 티브이 화면과 같은 빛깔로 물들인 한영은 그 와중에도 선명한 붉은빛을 띤 입술을 달싹였다.
“영화 계속 봐, 재환아.”
그러더니 재환의 바지춤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 행동이 뜻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재환은 어리숙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뜬금없이?’라는 마음이 컸다. 영화에서 진한 애정 신이라도 나왔다면 모르겠는데, 딱히 그런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갈 거리가 없었다. 오히려 재환은 영화를 보다 괜히 쓸데없이 기분이 가라앉던 차였다.
“유한영.”
“내가 알아서 할게.”
담담히 통보한 한영은 재환의 바지와 드로어즈를 함께 살짝 아래로 잡아끌었다. 그 안에서 성기만 꺼내 살며시 손에 쥐었다. 말랑말랑하게 늘어져 있던 성기가 한영의 손에 폭 들어갔다. 성기 끄트머리에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이 닿았다.
“읏….”
성기를 감싸는 축축한 감촉에 재환은 움칠 아랫배를 꺼트렸다. 여러 가지로 상황에 맞지 않는 흐름이란 자각은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딱히 한영을 말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은근히 한영에게 집요한 구석이 있음을 잘 아는 까닭이 컸다. 결국 이럴 때 백기를 드는 쪽은 늘 재환 자신이었으므로. 한영이 갑자기 이러는 연유를 몰라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를 뿐이었다. 그사이 성기를 문 입 안에서 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 으….”
한영은 세게 빨거나 핥는 대신 혀를 살살 굴려 가며 성기 이곳저곳을 부드럽게 자극했다. 그러니 재환의 목구멍에서도 간지러운 신음이 흘렀다. 당연히 영화에는 잘 집중할 수 없었다. 고개가 자꾸만 사타구니에 딱 붙은 분홍 머리통을 향해 숙어지는데, 그때마다 한영은 귀신같이 알아채 손바닥으로 탁탁 재환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아래를 보지 말고 영화를 보라는 신호였다.
하는 수 없이 손에 쥐고 있던 빈 캔을 탁자 위로 내려놓은 재환은 소파 등받이에 푹 등을 기댔다. 두 팔도 아래로 늘어뜨렸다. 나름 편하다면 편한 자세를 취하고서, 하반신으로 쏠리려는 신경을 애써 티브이 화면으로 돌렸다.
잠깐 사이 장면 몇 개를 놓치기는 했으나, 그다지 흐름이 빠른 편이 아니었던 영화는 다행히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 여전히 주인공은 참 지질한 일상을 살고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에도 미련하리만치 음악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꽤나 형편이 짠한 여자를 만나 함께 음악을 만들게 되었다. 고로 구질구질함은 배가 되었지만, 주인공 스스로는 즐겁고 좋은 모양이었다.
“응, 읏….”
그건 그거고, 오늘따라 입과 혀를 유난히 느릿느릿 움직이는 한영 때문에 재환의 아랫도리는 계속 뭉근한 열에 잠긴 상태였다. 차라리 빨리 끝나면 좋을 듯싶건만, 한영에게는 딱히 그럴 뜻이 없어 보였다. 아까는 성기를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굴리던 한영은 이제 혀를 길게 내어 그새 딱딱해진 기둥을 뿌리부터 천천히 핥아 올렸다. 선단까지 도달한 혀가 귀두를 할짝거릴 때마다 재환의 허리가 흠칫흠칫 작게 튀었다.
영화는 멈추는 일 없이 흘러가고, 혀가 단단한 살덩이를 문지르고 지나는 젖은 마찰음이 거듭 반복되었다. 다행인지 다행이 아닌 건지, 대사를 방해할 정도는 되지 않아 재환은 간헐적으로 툭툭 신음을 흘리며 이 기묘한 영화 감상을 이어 갔다. 사정에 이를 수준은 되지 못하는 은근한 열이 배꼽 아래에서 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끓어올랐다.
영화 안에서 몇 번의 몽타주가 지나갔다. 몇 번 더 남녀 주인공의 노래가 연주되고, 어느덧 이야기는 막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한영은 재환을 사정시키는 데에 전혀 목적이 없다는 듯 죽죽 성기를 핥기만 했다. 평소처럼 목구멍 깊숙이 박아 넣지도, 거센 힘으로 빨아 젖히지도 않았다. 조급함과 격정을 삭이고 오로지 부드럽게 애무했다.
사타구니를 타액으로 흥건히 적신 재환은 다소 몽롱한 눈빛으로 엔딩을 앞둔 영화를 마저 눈에 담았다. 나름 열심히 음악을 만들고, 또 연주하던 주인공의 상황은 마지막까지 그다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지 못했다. 음악적 성공? 그런 건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 주인공과 사이가 잘 풀리지도 않았다. 으레 영화에서 기대하게 되는 행복한 결말이 이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애틋하게 끝나는 이야기던가, 싶었다.
그럼에도 천천히 가슴을 부풀렸다 꺼뜨리는 재환에게 더 이상 영화는 울적하거나 서글프게 다가오지 않았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한참이나 제 샅에서 떨어지질 않고 있는 분홍 뒤통수 위로 재환은 가만히 손을 얹었다.
영화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곡이 흘렀다. 공간감을 줄인 버석한 기타 음과 담백한 피아노 선율이 귀를 메우고, 저 아래서부터 몸과 정신이 서서히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 차올랐다. 아랫배가 뜨거워지며 이윽고 꺼멓게 물든 화면에 올라가는 글씨를 좇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느리게 찾아온 절정은 천천히 스며드는 밀물 같았다. 금방 사라지지 않고 한참을 머무르며 재환을 잔잔한 환희에 젖어 들게 했다. 그리고 이 순간이 모두 지나면, 오늘의 우울 또한 남아 있지 않으리란 것을 재환은 알았다.
톡, 도톰한 이불 아래서 꼬물거리던 발가락 끝이 미끈한 정강이를 쳤다. 간질간질한 웃음소리가 울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하얀 발이 얼른 뒤로 숨으려는 발을 찾아 살살 발등을 긁었다. 쪽, 쪽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한영과 같은 베개를 베고 누운 재환은 뾰족한 코끝에 제 코를 비비며 속삭이듯 물음을 건넸다.
“유한영. 넌 우울할 때 뭐 해?”
가벼운 발 장난을 이어 가던 한영이 눈을 깜빡였다. 재환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다가, 마찬가지로 속삭이는 것처럼 소리 죽여 답했다.
“노래.”
“노래 말고.”
“피아노.”
음…, 하며 코를 몇 번 찡긋거린 재환은 ‘그것도 말고.’라며 재차 답을 요구했다. 노래니, 피아노니, 음악이니 하는 것들 말고 조금 다른 대답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저 또한 우울할 때면 기타부터 찾았으므로 사실 지금의 답변은 크게 참고되지 않았다. 하나, 그다음 나온 말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섹스.”
재환의 콧잔등에 주름이 늘었다. 고개를 갸웃한 한영이 ‘펠….’까지 다시 말문을 뗐을 때 재환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입을 아예 손바닥으로 덮어 버렸다. 그래 봤자 날름 나온 혀가 손바닥을 핥는 바람에 얼른 도로 떼어야 했다. 한영이 눈을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제야 귀여운 장난질에 놀아났음을 깨달은 재환은 눈앞에 놓인 코를 콱 앞니로 깨물었다. 한데 생각보다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아…!”
한영이 터뜨린 꽤나 커다란 외침에 재환은 화들짝 놀라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코를 감싸고 있는 한영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어쩔 줄을 몰라 한영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당황만 뚝뚝 흘렸다.
“괘, 괜찮아…?”
몸을 웅크린 한영이 홱, 뒤돌아 재환을 등졌다. 재환의 낯을 점령한 당황이 한결 짙어졌다. 그냥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치려 했던 것뿐인데, 아무래도 제대로 사고를 친 듯했다. 속으로 ‘아씨….’를 중얼거린 재환은 작게 움츠러든 어깨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야, 많이 다쳤어…?”
벌레처럼 옹크린 한영은 미동이 없었다. 결국 재환은 한영의 어깨를 붙잡아 휙 몸을 돌렸다. ‘좀, 봐 봐…!’ 하며 작은 얼굴을 푹 덮은 손을 뜯어내는 순간 왈칵 표정이 일그러졌다.
“야, 너 진짜!”
꽃처럼 만개한 웃음을 보자 절로 큰 소리가 튀어 나갔다. 하지만 더 말을 잇지 못한 까닭은 삐쭉 솟은 코끝에 난 미약한 잇자국에 있었다. 일순 속았다는 마음과 미안하다는 마음이 재환의 가슴팍 안에서 제법 치열하게 부딪쳤다. 미안함이 끝내 승리를 거뒀다.
“아니, 그…. 진짜 놀랬잖아.”
뭐가 그리 재미난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은 한영은 두 팔을 크게 벌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는 재환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분홍 머리칼이 살랑살랑 보라색 바지 위로 흩어졌다. 이윽고 진심 어린 대답이 조곤조곤 흘러나왔다.
“나 우울할 땐 재환이 네 생각 해.”
“재환이 네 생각하면서 피아노 치고.”
“노래도 부르고.”
“또 너 생각하면서 그림도 그려.”
그때에야 재환은 ‘그림?’ 하고 되물었다. 개중 솔깃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것들이 별 볼 일 없이 들렸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고….
“응.”
재환은 도로 침대에 털썩 누워 한영을 마주 보았다. 그새 조금은 잇자국이 옅어진 코에 쪽, 입 맞춘 뒤 쏙 들어간 허리에 슬쩍 팔을 둘렀다. 나름 아프게 해 미안하다는 뜻의 행동이었다.
“하긴, 넌 그림 잘 그리니까.”
“잘 못 그리는데.”
그릴 줄 아는 것이라곤 지렁이 기어가는 해골이 전부인 재환에게는 썩 탐탁잖은 대꾸였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콱 콧방울을 꼬집어 주려다 관두었다. 아무리 얄미워도 폭력은 옳지 않았다. 대신 재환은 새하얀 얼굴 가까이 갔던 손으로 보드라운 뺨을 살살 매만졌다. 남자 피부가 뭐 이래, 하는 생각이 설핏 스쳤다가 사라졌다.
“나도 그런 재주 하나 있음 좋을 텐데.”
꽤나 진심인 말을 속삭인 재환은 지레 멋쩍어져 피식 웃었다. 솔직한 말로, 재환 본인에게는 기타 말고 딱히 이렇다 할 재주가 없었다. 그러니 기분 좋을 때도 기타, 울적할 때도 기타, 그냥 다 기타였다. 그래서 한영에게 괜히 더 안 하던 질문은 던져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는 다를 것 같아서.
“재환이 너 잘하는 거 많잖아.”
길쭉길쭉 뻗은 손가락이 재환의 귀 옆으로 삐져나온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 뒤로 넘겨 주었다. 약간의 의문이 깃든 눈으로 재환은 한영을 응시했다.
“북엇국 잘 끓여.”
그럼 그렇지, 라는 마음이 담긴 웃음이 한숨 소리처럼 흩어졌다. 잠시나마 속없이 부풀었던 기대감을 접는데, 재환의 귓불로 손을 옮긴 한영이 말랑한 살을 조물조물 만지며 조금쯤 이야기를 더 이었다.
“또 믹싱도 엄청 잘해. 음악 상식? 같은 것도 많이 알고. 되게 똑똑해.”
한영이 만져서 그런 건지, 뜻밖의 말을 들어서인지 재환은 귀로 뜨끈뜨끈한 열이 몰렸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부러 심드렁히 ‘그런가?’ 하고 묻자, 갑자기 홱 몸을 튼 한영이 재환 위로 상체를 포갰다. 무시 못 할 무게에 재환은 끙, 신음했다. 손으로 실컷 조몰락거리던 귀에 입술이 붙었다.
“그리고 재환이 너 섹스도 잘해.”
폭력은 옳지 않다던 종전의 다짐 아닌 다짐이 단숨에 바스스 재가 되었다. 머리 밑에서 냅다 베개를 뽑아 든 재환은 제 몸을 뒤덮은 한영의 등판을 퍽,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적잖이 힘이 들어간 베개 찜질에 대한 복수는 숨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뽀뽀로 돌아왔다.
“너, 읍…. 야, 이…, 으읍!”
한 명은 도리질하고 한 명은 집요하게 입술로 따라붙는 남사스러운 추격전이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예외 없이 이번에도 항복, 내지 포기는 재환의 몫이었다. 얌전해진 재환의 입술을 찾아 기어이 맘껏 물고 빨고 깨문 한영은 한참 후에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며 재환을 놓아주었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죽 늘어지는 침을 보는 재환의 눈썹이 못내 분해 꿈틀거렸다. 양 뺨이 어느새 발그레 물들어 있어 그다지 위협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저도 이를 아는지라, 재환은 슬그머니 한영 반대쪽으로 등을 돌렸다. 당연히 옳다구나, 한 한영은 등 뒤에서 재환을 꼭 끌어안았다. 열이 번진 목덜미에 살포시 입술이 닿았다.
“다음에 같이 그림 그릴까?”
벽을 보는 재환의 눈이 휙 옆으로 굴러갔다 금방 제자리를 찾았다. 이미 손은 제 배를 감싼 한영의 손에 포개어져 있었다.
“나 그림 실력 최악인데.”
괜찮아, 하는 나긋한 안심의 말이 입술이 스치는 살갗을 간지럽혔다. 그게 꼭 재환의 귀에는 ‘다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듯이 들렸다. 다 괜찮다고. 앞으로도 우리는 다 괜찮을 거라고. 아늑으로 가득 찬 숲에 더 푹 감싸이게 하는 마법 같은 주문이었다.
* * *
꽤나 바쁜 일주일이 흘렀다. 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갑자기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재환은 일손이 부족해진 카페에서 몇 날 며칠을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다. 또 집에 와서는 밤늦게까지 믹싱 작업에 매진했다. 물론 집에 오면 눕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지만, 한영과 유유자적 보낸 시간을 반성하기 위해서라도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엔지니어 현철의 사정으로 급히 녹음 스케줄이 앞당겨져 부랴부랴 스튜디오를 다녀오기도 했다.
오늘은 꼬박 일주일 만에 얻은 귀중한 휴일이었다. 하지만 사람 앞일은 알 수가 없다고, 재환은 계획에 전혀 없던 외출을 하게 되었다. 무심한 아들내미가 엄마 얼굴도 다 까먹겠다는 어머니의 전화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일하는 식당 근처에서 만나 밥 먹고, 차 한잔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컴컴하게 저물어 있었다. 일단 집에 들어서자마자 대충 씻고 나온 재환은 목에 젖은 수건을 두른 채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한쪽 허벅지에 올린 발끝을 까딱거리며 노트북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무슨 인내심 테스트도 아니고, 담배 하나를 피우고 와도 되었을 법한 시간이 흐르고서야 노트북 액정에 바탕 화면이 떴다. 새 음악 장비 산다고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턴 상황에서 이 노트북이 맛이 가면 그때는 정말 답도 없었다. 속으로 ‘착하지….’를 중얼거리며 재환은 시퀀서 프로그램을 켰다.
부팅이 세월아 네월아 했는데 시퀀서 프로그램이라고 금방 켜질까. 가늘게 뜬 눈으로 서서히 차오르는 로딩 바를 노려보기를 한참, 담배 하나는 더 피우고 와도 됐을 듯한 시간이 지난 후 바는 겨우 끝 지점에 도달했다. 작업 시작까지만 도대체 몇 분의 시간이 걸린 건지. 후, 하고 절로 늘어지는 숨소리가 샜다.
때마침 노트북 뒤쪽에서 번쩍번쩍 불을 밝히던 시계의 숫자가 ‘8:00 PM’으로 바뀌었다. 한영이 맞춰 두었던 대로 쓰다 ‘20:00’이니 ‘23:00’이니 하는 시간에 적응을 못 해 한참을 붙잡고 만진 결과였다.
어쨌거나 시간 뒷자리가 ‘00’이 될 때마다 제 생각을 해 달라던 한영의 말은 꽤나 그럴듯한 효력을 발휘했다. 일부러 그러려는 게 아니라, 무심코 시계를 봤을 때 정각을 가리키고 있으면 재환은 자연스레 한영 생각이 났다. 사실, 시간과 상관없이 그냥 저 LED 시계를 볼 때마다 한영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다. 퍽 얄미운 시계였다.
괜히 한 번 손가락 끝으로 톡, 시계를 건드린 재환은 트랙이 층층이 쌓아 올려진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진짜 작업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분명 그리할 생각이었다.
‘학교 복학은 언제 할 건데.’
‘무슨 알바한다고 휴학까지 연장해.’
‘엄마가 돈 줄게. 너 생활비 정도는 나도 줄 수 있어.’
오랜만에 본 어머니는 식당 일이 좀 고된 게 아닌지 사람이 그새 더 늙어 있었다. 손등은 허옇게 트고 갈라져 보기만 해도 눈이 구겨졌다. 그저 날씨가 추운 탓만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또 걱정은 어찌나 많던지. 밥을 먹는 건지 잔소리를 먹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물론 그래 봤자 멋없는 아들의 대꾸는 ‘응’, 혹은 ‘아니’ 둘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너 또 밴드인지 뭔지 하는 건 아니지?’ 하는 물음에는 답을 주저하고 말았다. 기다, 아니다, 그 어느 쪽 말도 내놓지 못하고 ‘웬 밴드….’ 하고 얼버무렸다. 비겁한 행동이었으나 안 그래도 인생이 고단한 어머니에게 더한 근심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얼른 대학 졸업해서, 번듯한 일자리를 가지는 것. 대부분의 부모가 그러하듯 그녀의 바람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두 명의 자식 중 한 명에게는 아예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헤어지기 전, 연말에는 집에서 밥해 줄 테니 꼭 좀 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재환은 근처에서 사 온 핸드크림을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말로는 필요 없다 하면서도 어머니는 핸드크림을 핸드백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물론 만 얼마짜리 선물을 건넨다고 해서 그녀에게 진실을 은폐했다는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찜찜한 마음이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될 줄은 미처 몰랐다.
손에 턱을 괸 채로 노트북 자판의 스페이스 키를 누른 재환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다 화들짝 놀라 재빨리 재생을 멈추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를 중얼거리며 추가했던 리버브가 아주 보컬을 다 뭉그러뜨려 놓고 있었다. 목욕탕에서 노래하는 건지, 동굴에서 노래하는 건지, 원. 작업하며 정신이 도대체 어디 팔려 있었나 싶어 재환은 콱 눈을 찌푸렸다.
같지도 않은 실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리가 작은 듯싶어 베이스 트랙의 볼륨을 조금씩 높였더니, 나중에는 노래에서 둥둥거리는 베이스 음 말고는 들리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또 콱콱 줄였더니 저음이 사라진 노래가 아주 들을 만했다. 비슷하게 스네어를 개미 울음소리만큼 줄이질 않나, 바이패스를 걸어 두고 플러그인이 안 먹는다며 혼자 성내질 않나. 참 가관이었다.
진척은 요만큼도 없는데, 시계의 숫자는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애지중지해도 모자를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덮은 재환은 비척비척 매트리스로 걸어가 털썩 맥없이 엎어졌다. 수명 다 된 스프링이 삐걱삐걱 요란법석을 떨어 댔으나, 손을 대면 댈수록 엉망이 되는 오늘의 작업물보다는 차라리 듣기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매트리스를 꺼트릴 기세로 긴 한숨이 쏟아졌다.
보기 좋게 망한 집안에는 돈 한 푼이 없었다. 부모님은 진즉에 갈라섰고, 그 핑계로 어긋난 여동생은 제대로 살고 있는지 소식도 잘 몰랐다. 해 본 적 없는 식당 일에 어머니는 손이 다 부르텄으며, 아버지는 지금도 어디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지 싶었다. 그리고 나는….
재환은 베개에 푹 처박고 있던 얼굴을 슬그머니 옆으로 돌렸다. 눈앞으로 핸드폰을 가져가 통화 목록을 살폈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 위에서 엄지손가락이 머뭇거렸다. 그냥, 딱 네 목소리 한 번만 들으면. 그러면 이 거지같은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하지만 난데없이 부르르 몸을 떠는 핸드폰 때문에 재환은 끝내 그 이름을 누를 수 없었다. 약간의 당황이 스민 눈으로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세 글자를 보았다.
서재희.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학창 시절, 재환은 비교적 모범생이었다. 성적 좋고, 교우 관계 무난하고,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고. 선생님 눈에 밉보일 거리가 없었다. 오히려 예쁨을 받았으면 받았지. 하지만 ‘서재환 동생’으로 더 소문이 난 재희는 조금 달랐다. 공부보다는 꾸미는 데에 온통 관심이 있었으며, 따라서 성적은 앞에서보다 뒤에서 세는 게 더 빨랐다. 그러니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재희는 모범생 오빠와 종종 비교를 당했다. 반 1등과 반 꼴찌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문제아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건만, 아버지의 대책 없는 투자로 집안이 쫄딱 망하면서 재희는 아주 보란 듯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술, 담배는 기본이었고,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안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다. 사실 재환이라도 나서서 그런 동생을 좀 챙겼어야 했는데, 제 정신 건사하기도 벅찼다. 그때는 모든 가족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재환이 대학에 진학한 후, 둘 사이는 그야말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에 충실한 관계가 되었다. 서로 생일날 그 흔한 축하 메시지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뭐, 처음에야 재환도 나름 동생에게 신경 쓴답시고 몇 번 먼저 연락하기도 했지만, ‘어쩌라고’ 하는 답이 돌아오면 제아무리 한 가족이라도 더 연락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너 알아서 잘 살아라, 하는 생각을 하며 지냈다.
그런 동생에게 며칠 전 대뜸 전화가 왔다. 서로 목소리를 듣는 게 몇 년 만인지 가늠도 안 될 정도였다. 그래서 일단 ‘잘 지내?’ 하고 인사를 건넸는데, 다짜고짜 ‘오빠, 어디서 일해?’라며 따지듯 묻더랬다.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오빠.”
카운터를 두 손으로 떡하니 짚고 선 동생을 보는 재환의 눈에 숨기지 못한 당황이 고였다. 샛노랗게 물들인 머리나 요란한 화장은 그렇다 쳐도, 이렇게 무턱대고 일하는 곳으로 찾아오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 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저보다 옆에 있던 희연이 더 깜짝 놀란 듯해, 재환은 애써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 아직 일 안 끝났어.”
“손님도 없잖아. 잠깐이면 돼. 쟤한테 맡기든가.”
표정에서 굳이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재희가 턱 끝으로 희연을 가리켰다. 무어라 말은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던 희연은 더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카운터에 버티고 선 무서운 언니 못지않게 재환의 표정이 편치 않은 까닭도 어느 정도 있었다.
“기다리든가, 나중에 다시 오든가. 지금은 안 돼.”
아이, 씨발. 재희의 입에서 짜증 섞인 욕이 비어졌다. 심히 막 나가는 듯한 동생의 언사에 재환이 눈 밑 살을 파르르 떨었다. 바짝 졸은 희연은 휙휙 눈을 굴려 가며 아직 관계를 명확히 짐작할 수 없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기에 바빴다.
벽처럼 막아선 카운터 안팎으로 제법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징글벨, 징글벨, 카페 내부에 울려 퍼지는 캐럴이 꽤나 경쾌했다. 얼마 안 가 재희가 쳇, 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고집 오진다, 진짜. 그럼 여기서 제일 단 거 하나 줘.”
결국 따뜻한 코코아를 받아 든 재희는 카페 구석, 사람 열은 둘러앉을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로 가 털썩 자리를 잡았다. 그제야 재환의 눈치를 살피던 희연이 겨우 말문을 뗐다.
“오빠, 누구예요…?”
“동생.”
희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재희가 휙 컵만 낚아채 가 음료가 넘쳐흐른 쟁반을 닦으며 재환은 ‘안 닮았지?’ 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안 닮은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희연은 얼른 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반응을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한 재환이 살짝 경직되어 있는 희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툭툭 두드렸다.
“미안. 재희가 입이 거칠어서 좀 놀랬지? 괜히 곤란하게 만들었네.”
“괘, 괜찮아요…!”
희연은 정말로 괜찮다는 듯 휙휙 고개를 저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보다는 재환 쪽이 훨씬 더 곤란한 듯해 보였다. 그런데도 저 사람 좋은 오빠는 주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발그레 얼굴을 붉히던 희연은 이쪽을 보고 있는 재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재환과 그다지 닮지 않은 입매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한가득 걸려 있었다. 결국 희연은 슬쩍 등을 돌려 설거짓거리도 몇 없는 싱크대 앞에 섰다. 하나 이제는 뒤통수에 뾰족한 눈길이 콕콕 와 박히는 것 같아 자꾸 꼴까닥 침을 삼키게 되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재환은 평소보다 배는 서둘러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사람 혼자 앉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테이블 앞으로 가 서자, 재희는 맞은편 의자에 두 다리를 척 올린 채 코코아를 홀짝이고 있었다. 절로 답답함이 담긴 숨이 나지막하게 흘렀다.
“나가자.”
“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양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재희가 쥐고 있던 머그잔을 재환 쪽으로 기울였다. 잔 안에는 딱 밑바닥이 덮일 만큼의 코코아가 남아 있었다. 재희는 찰랑찰랑 소리가 나도록 컵을 크게 흔들었다.
“나 코코아 남았어.”
이번에는 후, 하고 보다 길게 숨을 뱉은 재환은 재희에게 턱짓으로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지금 재희가 차지한 테이블의 반의반 정도 되는 크기의 테이블이었다.
“그럼 이쪽으로 자리 옮겨.”
아예 의자를 빼서 테이블 앞에 앉자 재희가 ‘와….’ 하며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동생이 그래도 등받이에 등을 딱 붙인 재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여튼 존나 꼰대라니까.”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신 재희는 의자 다리를 죽 끌어 재환이 있는 테이블까지 왔다. 끽, 아주 요란한 마찰음이 울렸으나, 눈썹을 찌푸리는 것은 다른 손님들과 재환의 몫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신경 쓰는 척일랑 하지 않았다. 못 본 새 엇나가는 정도가 배는 심해진 동생의 모습에 재환은 골이 다 지끈거리는 듯했다.
“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
어차피 서로 잘 지냈냐, 뭐 하고 지냈냐 도란도란 안부를 주고받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특히 재희에게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재환은 길게 시간 끌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고운 얘기도 오가지 않을 거, 할 말이 있는 거면 빨리 하고 일어나자는 뜻이었다. 더는 카페에 민폐 끼치기 싫기도 했다. 이미 충분히 끼친 것 같기는 하다만.
마침 같은 시간에 일이 끝난 희연이 눈이 마주친 재환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후다닥 카페 밖으로 나갔다. 괜히 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던 중, 뜬금없는 질문이 건너왔다.
“여친이야?”
“뭐?”
“쟤 오빠 보는 눈이 아예 하트던데? 아주 인기인이셔.”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래?”
결국 재환은 애써 유지하던 평정심을 잃고 성을 냈다. 물론 커지려는 목소리는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래서 재희를 어떻게든 카페 아닌 곳으로 데려가려 했던 거였다. 꼴사납게 씩씩대는 모습을 카페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지금 카운터에는 막 출근한 상지가 서 있었다.
“아님 아닌 거지 왜 발끈하고 난리래. 하긴, 오빠 스타일은 아니더라. 오빤 좀 더….”
약 올리듯 말꼬리를 흐린 재희는 머그잔 밑동을 테이블에 부딪치며 연이어 탁, 탁 소리를 냈다. 한층 표정을 굳힌 재환은 손을 뻗어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머그잔을 손바닥으로 콱 내리눌렀다. 그제야 거슬리는 소리가 멎었다.
“서재희.”
몇 번 힘주어 다시 머그잔을 들어 올리려던 재희가 눈썹을 씰룩이며 확 잔 손잡이를 놓았다. 그러고는 상당히 매서운 눈빛으로 재환을 노려보았다.
“오빠는 내가 뭐 하고 살든 관심도 없지?”
눈빛만큼이나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이쪽에서 연락을 해도 무시, 혹은 반항으로 일관하던 것을 생각하면 참 황당한 소리였다. 재환은 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얼마 안 남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두 번 안 물어봐. 할 말이 뭐야.”
재희는 짜증을 삭이듯 앙다문 입술을 옴찔거렸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재환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드러날 것이 뻔했다. 저렇게 꾹꾹 참는 척하다가, 미친개처럼 돌변하는 게 그의 특기였으니까. 재희는 앞으로 조금 나와 있던 몸을 팍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몇 번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깨물다 툭 말을 던졌다.
“돈 좀 줘.”
재환의 눈초리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하도 기가 막혀 되묻거나 따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재희는 다리를 덜덜 떨며 알아서 이유를 덧붙였다.
“나 대학 갈 거야.”
이번에는 반대로 눈이 커다래졌다. 출석 일수가 모자라 고등학교 졸업도 겨우 했던 동생이 대학을 갈 거라 말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박수 치며 환영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러기에 재환은 동생을 너무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일단은 판단을 보류하고,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 보았다.
“대학 가서, 스튜어디스 할 거야. 그래서 학원 다녀야 돼.”
그제야 재환은 ‘학원?’ 하며 물었다. 사람을 꿰뚫을 것처럼 꽂히는 재환의 시선을 피해 재희는 슬그머니 눈을 옆으로 돌렸다.
“어. 스튜어디스 학원. 그거 다녀야 학교를 가지.”
솔직히 재환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였다. 문외한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저렇게 쉽게 말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이 갔다. 뭐, 세상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것과 별개로, 안타깝지만 재환은 동생을 도와줄 수 없었다. 이건 현실적인 문제였다.
“돈 없어.”
‘씨…!’ 하며 터지려던 욕이 급히 끊겼다. 잠시 씨근덕거리던 재희는 잔을 쥐어 식어 빠진 코코아를 훅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휴지는 옆 테이블에 버려두고 왔으므로 손등으로 입을 한 번 훔친 뒤, 제 딴에는 침착히 오빠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물론 억지로 비굴함을 삼키느라 표정은 썩 곱지 못했다.
“나 학원만 보내 주면 대학은 알아서 갈게. 등록금도 알바해서 벌 수 있어. 오빠 학교도 휴학하고 요새 알바만 한다며. 모아 둔 돈 있을 거잖아.”
얼핏 들으면 꽤나 절실하게 들리는 얘기에 재환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지끈지끈 두통이 몰려왔다. 갑자기 온 동생의 연락에 이러한 상황을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나, 생각보다 그녀는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했다. 아무리 그래 봤자 재환에게는 없는 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없었다.
“내 친구가 다니는데, 한 이백만 있으면 된다더라. 그냥 주는 게 그러면, 내가 나중에 갚을게. 취업하면 이백은 금방 벌 거 아냐.”
“서재희.”
“아씨, 이자도 붙여 줄게. 오빠가 안 주면 나 엄마한테 달라고 한다!”
“서재희!”
끝내 큰 소리가 터졌다. 손님 몇과 카운터에 있던 상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쪽팔림, 민망함, 면구함 등 온갖 감정이 솟구쳤으나 동생을 향한 울화보다는 크지 않았다. 한순간 속이 뒤집어져 재환은 눈가로까지 열이 끼치는 것 같았다.
“너, 엄마 만난 적은 있어? 엄마 사는 집에 가 본 적은? 며칠 전에 만났는데, 엄마 손등 다 부르텄더라. 식당에서 매일 설거지한대. 그런데 엄마한테 뭐 어쩐다고?”
엄마에게 무심한 걸로 따지자면, 재환 자신도 재희 못지않았다. 살기 바쁘다는 속 편한 핑계로 살뜰히 먼저 연락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당신 한 몸 건사하기 버거운 엄마에게 손 벌리는 파렴치한 아들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염치는 있었다. 그런데 동생에게는 그 정도의 도리를 지킬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큰 거 바라지 않고, 제 앞가림이나 잘하면서 살아 주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아, 그러니까 오빠가 좀 도와주면 될 거 아냐! 왜 승질이야, 진짜.”
지지 않기 위해 재희도 목소리를 높였다. 마음 같아서는 오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싹싹 빌고 싶었지만, 철옹성 같은 자존심이 감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뻔뻔하기 그지없는 재희의 모습은 그녀를 상대하는 재환의 맥을 탁 풀려 버리게 만들었다. 더 이상 언쟁할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너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억지 부리지 마. 더 할 말 없는 거면 난 간다.”
차분하게 마지막 말을 고한 재환이 반쯤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밴드 할 돈은 있고?”
다시 몸이 의자 위로 붙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낯으로 동생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 악에 받친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모를 줄 알고? 알바한 돈 다 거기 갖다 바치면서, 동생 도와줄 돈은 없어? 오빠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보나 마나 엄마한테도 구라 깠겠지. 밴드 같은 거 안 한다고!”
재희는 벼르고 있던 얘기를 터뜨리듯 단숨에 말을 뱉으며 온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눈가도 함께 새빨갛게 물들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이 쳐다보든 말든 안중에도 없었다. 재희가 그럴수록 재환의 입은 꾹 다물렸다.
“오빠가 구질구질하게 기타 치고 밴드 하는 건 괜찮고, 내가 스튜어디스 한다는 건 안 돼? 나중에 갚는다잖아! 갚는다고!”
재환은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 들치며 동생의 패악을 지켜보았다. 저를 쏘아보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어도 놀랍도록 요만큼의 동정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번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문도 구태여 하지 않았다. 그냥 점점 더 머리가 아파 왔다. 협박인지, 부탁인지, 억지인지 모를 이야기를 더 이상 듣고 있기가 버거울 정도로.
재환은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간다’라는 최소한의 인사도 남기지 않고 휙 재희를 등졌다. 등 뒤로 ‘엄마한테 말할 거야!’라든가, ‘나 또 여기 온다!’ 같은 치졸한 선전포고가 따라붙었으나 그러려니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맘대로 해라’에 가까웠다. 다 귀찮고, 다 시끄러웠다. 모조리 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재환은 편의점에 들렀다. 네 캔에 만 원 하는 맥주 여덟 개를 골랐고, 계산하며 담배도 두 갑 달라고 했다. 그러다 그냥 네 갑으로 정정했다. 그러고서 카드를 내밀었더니 몇만 원이 금세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돈 벌기는 어려워도 쓰기란 이렇게나 쉬웠다. 기왕 돈 쓸 거 안줏거리도 좀 살걸, 싶었지만 이미 편의점을 나선 뒤라 다시 돌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제법 목직한 봉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연립 주택의 낡아 빠진 계단을 올랐다. 지금껏 수도 없이 사람들의 발에 밟혔을 계단은 표면이 꽤나 반질반질해져 자칫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핸드레일을 짚으면 손에 녹이 잔뜩 묻어나니, 맛이 가기 직전의 센서 등을 의지해 조심조심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동굴처럼 컴컴한 복도를 지나 익숙한 문 앞에 섰다. 뒤이어 플래시 켠 핸드폰을 어깨와 뺨 사이에 끼우고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을 때였다. 대뜸 안에서 밀리는 문 때문에 재환은 으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알이 튀어나오기 직전까지 커진 눈으로 집 안의 형광등 빛을 등진 한영을 쳐다보았다.
“야, 깜짝 놀랐잖아…!”
해죽 웃는 한영의 어깨를 손으로 슬쩍 밀치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한 짝씩 운동화를 구겨 벗는데, 그새를 못 기다린 한영이 재환의 뺨에 쪽, 하니 입을 맞춰 왔다. 반대쪽 뺨에도 입을 맞추려 얼굴을 들이미는 한영을 재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피해 버렸다.
“재환아…?”
한영은 다소 놀란 듯한 표정으로 재환을 보았다. 제가 들어올 수 있도록 뒷걸음질 치는 한영을 모른 체한 재환은 일단 냉장고 앞으로 갔다. 무심한 뒤통수를 우두커니 응시하던 한영의 시선이 흘끔 재환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로 향했다.
“술… 마시고 싶었어?”
냉장고 앞에 쪼그려 앉은 재환은 응, 하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이 집 열쇠를 준 것도 저, 추운 날 밖에 있지 말고 안에서 기다리라 했던 것도 전부 저였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 재환은 한영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당연히 한영의 탓은 아니었다. 오늘만큼은 그를 보며 걱정 없이 웃을 자신이 나지 않는 제 탓이었다.
이를 알 턱이 없는 한영은 여전히 현관 근처에 서서 꾹꾹 한쪽 팔뚝을 주물렀다.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재환…,”
“유한영.”
냉장고에 맥주를 하나씩 넣던 재환은 부러 뒤를 돌지 않은 채 한영을 불렀다. 한영은 대답을 않고 이어질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사실, 대충 짐작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냥 가 주라. 미안.”
어디 아파? 카페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 정말 그냥 가? 가기 전에… 딱 키스 한 번만 하면 안 돼?
한영은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뜨며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아무리 버티고 있어도 재환은 여기를 봐 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울컥거리는 속마음을 능숙하게 감춘 한영은 당장 상대가 바라는 답을 순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응. 알았어.”
잠시 후, 재환이 열 때면 늘 반항하듯 덜컹거리던 문이 소리도 없이 조용히 열렸다 닫혔다. 그 너머로 들리는 사뿐사뿐한 발소리가 사그라들었을 즈음에야 재환은 쿵, 냉장고 문을 닫았다. 철퍽 두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닫힌 문짝에 등을 기댔다. 씨발…, 하며 꼭 울먹거리는 듯한 소리가 자그마하게 샜다. 콩콩 애먼 냉장고 문에 뒤통수를 박는 소리가 뒤따랐다.
한 번, 머리를 박을 때는 정말 저 좋을 대로 사는 재희를 욕했다. 또 한 번, 머리를 박을 때는 연락도 없이 찾아온 한영을 타박했다. 그리고 또 한 번, 머리를 박을 때 재환은 이 모든 상황을 그냥 제 탓으로 돌렸다. 재희가, 한영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저 자신이 문제인 것 같았다.
냉장고에 넣지 않고 하나 남겨 두었던 맥주를 부스럭부스럭 봉지에서 꺼냈다. 칵, 꼭지를 들어 올린 뒤 부글부글 거품이 비어져 나오건 말건 캔 끄트머리로 입을 가져다 댔다. 한 모금 훅 들이켠 뒤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고, 또 훅 들이켜고서 입에 묻은 맥주를 닦기를 반복했다.
삼킨 것보다 턱을 따라 흘린 게 더 많은지, 한 캔이 빨리도 비었다. 파삭 구긴 캔을 적당히 던져두고 냉장고에서 새 맥주 캔을 꺼낼 무렵이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스레 진동했다. 아주 조금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으며 핸드폰을 꺼냈으나 화면을 확인한 순간 안 그래도 편치 않던 낯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서재희. 동생의 이름이 뜬 화면의 통화 버튼을 누르고서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다짜고짜 스피커 너머에서 ‘진짜 너무해!’ 하는 원망의 소리가 터졌다. 이런 식으로 남매임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혀가 조금 꼬인 듯한 것이 지금의 저처럼 어디서 술이나 진탕 마시다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물론, 아직 이쪽은 취하려면 한참 남았다.
통화를 스피커 모드로 돌린 재환은 종전 빈 캔을 버렸던 것과 같이 바닥에 핸드폰을 툭 던졌다. 대답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상대는 알아서 술술 저 하고픈 말을 읊었다.
옛날부터 말야, 오빠만 비싼 학원 다니고, 좋은 옷 입고. 나는 그런 거 엄마, 아빠가 하나도 안 해 준 거 알아? 내가 그래서 옛날부터 얼마나 서러웠는데! 그것뿐이게? 학교에 가면 맨날 쟤가 서재환 동생이냐 그러고, 집 가면 넌 왜 오빠처럼 공부 못 하냐 그러고. 내가 무슨 오빠 너랑 세트냐고, 씨발! 그래서 나도 이제 나 하고 싶은 것 좀 해 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도와주기 싫어? 어? 내가 언제 오빠한테 한 번이라도 이렇게 빌붙은 적 있어?
두서도, 맥락도 없는 한탄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요약하자면, 다 가진 네가 좀 베풀라는 그런 소리인 것 같았다. 부모님 사랑도, 주변 관심도 지금껏 모조리 네 차지였으니.
몇 절은 더 이어지던 이야기가 ‘그니까 나 한 번만 도와 달라고, 좀…!’ 하는 애원으로 바뀔 즈음 갑자기 뚝 끊겼다. 다시 전화가 걸려 오지 않는 걸 보아 저쪽의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된 듯했다. 잠잠해진 핸드폰을 멀뚱히 바라보며, 재환은 맥주나 마저 마셨다. 술이 썼다.
* * *
안주 하나 없이 맥주를 세 캔까지 마셨을 때, 재환은 ‘씨발….’을 중얼거리며 싸늘한 장판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싱싱 찬 바람 부는 밖에 겉옷도 입지 않은 채로 나가 내리 담배 두 개비를 피웠다. 다시 집에 들어와서는 화장실로 달려가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차가운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실로 미련한 짓이었지만 올라오는 취기를 억지로 해소하기에는 이만한 방법도 없었다.
집 나갔던 정신도 번쩍 돌아올 찬물 샤워 후, 재환은 젖은 머리도 채 말리지 않은 상태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찬찬히 부팅을 기다린 뒤, 바탕 화면이 뜨자마자 시퀀서 프로그램을 켰다. 눈을 부릅뜨고 며칠이나 진척이 없던 믹싱 작업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난번 넣다 빼기를 반복했던 보컬 트랙의 리버브는 아예 싹 갈아엎었다. 플러그인 종류도 바꾸고, Pre Delay니 Decay니 하는 설정도 과감히 변경했다. 베이스에 넣었던 컴프레서도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 더불어 스네어는 EQ를 한참이나 붙잡고 늘어진 끝에 음색을 새로이 다듬었다. 이외에도 이곳저곳을 건드린 후, 트랙 몇 개에 걸었던 뮤트를 풀고서 노래 전체를 재생시켰다.
인트로부터 재생되는 곡을 들으며, 재환은 뒷목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 의자 등받이에 푹 등을 기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망했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던 것과 달리, 오늘 싹 다시 손본 작업물은 꽤나 들어 줄 만한 수준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내심 상당히 괜찮은 것 같았다. 게다가….
새벽 숲 같은 느낌이면 좋겠다.
믹싱 작업 초반에 한영이 분명 그리 요청했었다. 새벽 숲인지, 밤중의 숲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은 곡 전체에 적당히 산뜻함과 촉촉함이 살아 있어 그가 말했던 ‘숲 느낌’이 얼추 나는 듯싶었다. 일단 재환이 듣기에는 그러했다.
오늘은 이쯤 하면 됐다, 생각하며 재환은 앉은 지 약 3시간 만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잠자리에 들고도 남을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맥주로 저녁을 대신하는 미련한 짓을 한 탓에 영 속이 허했다. 크게 기지개를 켠 재환은 주린 배를 쓱쓱 문지르며 몇 걸음이면 닿을 부엌으로 갔다. 아무래도 밥 차리기는 귀찮고,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 다만 최근 라면을 사 놓은 기억이 없어 조금 불안했다.
싱크대 앞에 다리를 접어 앉은 재환은 그래도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하부장을 열었다. 이윽고 장 내부를 살피는 재환의 얼굴이 놀란 듯 당황한 듯 미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수차례 눈을 껌뻑거리기도 했다.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한 사람의 이름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와, 유한영….”
안 그래도 중간에 떡하니 지나가는 싱크 호스 때문에 공간이 넉넉지 않은 장 안이 아주 라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종류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냥 라면, 짜장 라면, 해물 라면, 비빔 라면…. 족히 몇 달은 라면만 먹고도 살 수 있을 법한 양이었다.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블록처럼 쌓인 라면을 살피던 재환은 개중 꺼멓고 뻘건 색을 띤 봉지를 집어 들었다. 활활 불이 타오르는 듯한 겉의 그림만 보아도 예사 수준 이상으로 매운 라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친히 ‘화끈한 매운 맛!’이라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그래도 어디 가서 매운 거 못 먹는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는지라, 재환은 가뿐한 마음으로 일어서서 냄비에 물을 담았다.
그로부터 약 10분 후. 후루룩후루룩 신나게 라면 면발 빨아올리는 소리가 나야 할 좁은 집 안에 궁상맞게 코 훌쩍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중간중간 후후, 뜨거운 면 부는 소리 대신 하…, 하며 입 속의 열을 식히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젓가락을 쥐고 있는 시간보다 물컵을 쥐고 있는 시간이 길었고, 반대편 손은 입 근처에서 손부채질 하기에 바빴다. 한마디로 재환은 라면이 너무 매워 딱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후…, 미치겠네.”
벌써 물을 몇 번이나 떠 왔는지 몰랐다. 눈물을 닦고 코를 푸느라 휴지도 수 장 뽑아 썼다. 먹을수록 이거 사람이 먹을 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지만, 또 음식을 그냥 버리는 짓은 용납이 안 되었다. 그러니 별수 있나. 온갖 난리 블루스를 추면서도 꾸역꾸역 다 먹는 수밖에. 미련하다 그래도 도리 없었다.
습, 하, 습, 하. 밭게 호흡하기를 반복하던 재환은 아직 절반도 더 남은 듯한 면을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어 크게 벌린 입 안에 욱여넣었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부지런히 면을 씹는데, 한 번에 꿀꺽 삼킨다는 것이 그만 훅 숨구멍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동시에 눈, 코, 입, 온갖 군데에서 우르릉 쾅쾅 폭발이 일어났다.
“커헉, 큭…. 크흡…!”
급히 휴지로 입을 틀어막은 재환은 목구멍이 찢어져라 컥컥 기침을 쏟았다. 눈에서는 왈칵 눈물이 솟구치고, 얼굴은 목 언저리까지 단숨에 시뻘건 색으로 달아올랐다. 한 치 과장 없이, 그야말로 딱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나 보다. 기침이 멈춘 후에도 눈물만은 멈추지 않은 까닭은.
“후, 윽….”
양반다리 하고 앉은 다리 사이를 두 손으로 짚은 재환은 푹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썩였다. 매운 라면을 먹다, 또 사레까지 들려 된통 고생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웃기다만, 자꾸 어머니, 동생, 한영의 얼굴이 번갈아 가며 젖은 눈앞을 어른거렸다. 거기에 소식이 끊긴 아버지까지 더해져, 재환은 걷잡을 수 없이 설움이 복받쳤다. 무어가 서러운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러다 정말이지 심장이 펑 터질 것 같았다.
“씨발….”
손에 쥐고 있던 휴지가 폭삭 젖어 그 대신 손등, 손바닥으로 눈가를 훔칠 때까지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 또 미친놈처럼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 아무 잘못 없는 한영을 매몰차게 내쫓은 죗값을 이렇게 받나 싶었다. 아마 한영은 상상도 못 할 터다. 본인이 사다 준 라면으로 이쪽이 얼마나 호된 일을 치렀는지.
양쪽 어깻죽지에 눈두덩이를 한 번씩 문지른 재환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대단한 다짐이라도 새기는 것처럼 그릇에 남아 있는 시뻘건 라면을 주시하다, 덥석 젓가락을 쥐었다. 울 만큼 울고, 난리도 칠 만큼 쳤으니 더는 라면을 불릴 수 없었다.
중간에 코 풀고 물 마시고 부채질하는 등 주접스럽게 굴지 않고, 재환은 남은 라면을 꿋꿋하게 모두 먹었다. 입에서는 불이 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음식물 쓰레기를 만드는 일은 피해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꼴사납게 실컷 눈물을 쏟은 덕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라면 먹다 난데없이 오열이라니.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이불을 발로 차고도 남을 추태였다.
다 먹은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간 재환은 빨간 양념이 묻은 그릇을 빡빡 깨끗이 씻었다. 물을 한 컵 더 마시고, 한영이 싱크대 장에 넣어 두고 간 라면을 다시 종류별로 잘 정리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언제쯤 나는 네 앞에 마냥 밝은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 보일 듯 말 듯한 그날이 아직 재환은 멀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