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17/29)

8장

* * *

“자, 짠! 오늘 다 존나 수고했어!”

유난히 우렁찬 태군의 외침에 맞춰 네 개의 맥주잔이 부딪쳤다. 넘실거리던 거품이 잔을 든 네 사람의 목구멍 너머로 금방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중 특히 재환이 쥐고 있던 잔은 한 번에 거의 절반 넘는 양이 줄었다. 그럼에도 딱히 개운한 기색이 없어 보이는 재환의 표정을 흘끔흘끔 살피던 태군이 부러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야, 우리 상금 받으면 어카지? 어칼까?”

이만큼은 앞으로 EP 앨범 낼 때 쓰고, 또 이만큼은 각자 용돈 삼아 나누고, 또 이만큼은…. 나름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지우의 제안에도 재환은 그저 ‘어….’ 하고 말았다. 정신이 영 딴 데 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거푸 맥주나 들이켰다.

보다 못한 태군이 퍽, 재환의 등짝을 때렸다.

“야, 서재환! 표정 좀 펴! 우리 오늘 존나 짱이었….”

상체가 휘청 흔들리며 입 주변에 맥주가 흠뻑 튄 재환을 본 태군은 한순간 합, 입을 다물었다. 어떤 짜증, 내지는 분노가 돌아올지 몰라 하릴없이 바짝 어깨를 움츠렸다. 하나 재환은 아무 말 없이 맞은편 앉은 한영이 쓱쓱 뽑아 건네는 티슈를 받아 들 따름이었다. 저 새끼 정말 왜 저러지…? 겁이 잔뜩 서렸던 태군의 동공 큰 눈동자에 슬슬 친구를 향한 걱정이 깃들었다.

그 순간에도 재환의 머릿속은 온통 오늘 보았던 블루문의 무대로 가득 차 있었다. 더 숨의 연주가 끝나고 받았던 박수도, 환호도 단번에 의식에서 지워질 만한 정도의 무대였으니까.

예선 때부터 연주력이든, 무대 매너든 여러 가지로 만만치 않은 팀인 줄은 알았지만, 오늘 그렇게 백팔십도 바뀐 모습을 보여 줄 줄은 미처 몰랐다. 편곡을 싹 다시 한 〈소낙비〉라는 곡은 말할 것도 없었고, 두 번째로 연주한 곡도 취향 같은 걸 다 떠나 재환에게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들렸다. 곡 퀄리티도, 무대 자체도 그랬다. 그러니 대상이 블루문에게 돌아갔을 때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재환 자신이 심사 기준에 의문을 제시했을 터다.

그래서 재환은 더 맥이 풀렸다. 더 숨이 금상, 다시 말해 2등 상을 받은 것에 대해 감히 아쉽다거나 아깝다는 마음을 가지려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속 쓰렸다. 내가 더 잘했으면 결과가 조금쯤 달랐을까, 하는 나약한 가정만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사라질 뿐이었다.

“야…, 우리 2등도 존나 잘한 거잖어. 엉?”

어느새 텅 빈 맥주잔만 멀거니 쳐다보던 재환은 태군이 거의 우는 소리를 낼 즈음에서야 고개를 들었다. 저 때문에 뒤풀이 분위기를 계속 망치는 것도 참 못 할 짓이었다. 결국 재환은 애써 씁쓸함을 지운 미소를 내걸어 보였다.

“맞아, 2등도 존나 잘한 거지. 마시자, 마셔. 여기요!”

재환은 번쩍 팔을 들어 목소리 크게 점원을 불렀다. 아이리시 스타일의 펍인 만큼 내부에 쩌렁쩌렁 브릿 팝이 흐르고 있어 어쩔 수 없었지만, 내심 속이 좀 뚫리는 듯하기도 했다. 종전 마셨던 흑맥주를 한 잔 더 주문한 뒤, 바싹하게 튀겨진 피시앤칩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음식에는 죄가 없다고, 맛이 썩 나쁘지 않았다.

몇 개를 더 집어 먹자, 포크와 나이프를 든 한영이 남은 덩어리를 쓱쓱 썰어 재환 가까운 쪽으로 접시를 밀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재환은 눈빛으로 ‘고마워’ 말을 전하며 삐뚤빼뚤하게 썰려 하얀 속살이 튀어나온 튀김 조각을 포크로 쿡 찍었다.

때마침 핸드폰에 ‘오빠 오늘 짱 멋졌어요!’ 하는 희연의 메시지와 함께 오늘 찍은 무대 영상이 도착했다. 새로 나온 맥주를 꿀꺽꿀꺽 삼킨 재환은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리며 얼른 다운로드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

이어폰을 연결해 희연이 찍어 준 영상을 함께 돌려 보는 사이 다행히 테이블 분위기는 그럭저럭 화기애애해졌다. 특히 제대로 무대 조명을 받은 태군의 머리통이 시도 때도 없이 영상 속에서 번쩍번쩍 빛을 터뜨려 너나없이 배를 잡고 웃었다. 처음에는 ‘새끼들아, 조용히 하라고!’라고 꿍얼거리던 태군도 결국 못 참겠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끅끅거렸다.

어쨌거나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다들 오늘 공연에 만족스러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더 잘한 팀이 있는 거야 어쩔 수 없었지만, 무대에서 그들이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 줬음을 네 사람은 잘 알았다.

다만 한 바퀴를 빙 돌아 손에 돌아온 핸드폰으로 영상을 다시 보며, 재환은 이상하게 귓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내가 무대에서 한영을 이렇게 많이 봤었나 싶었다. 그건 무대 중앙에 서서 빨간 노드를 치는 한영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노래가 다음 구간으로 넘어가는 타이밍에, 혹은 간주 틈틈이 서로를 눈으로 좇았다. 물론 지우와 태군과도 곡 중간중간 눈을 맞췄지만, 그러다 또 자연스레 재환의 고개는 한영을 향했다.

괜히 한 번 마른세수한 재환은 영상을 끄고 핸드폰을 테이블에 엎어 놓았다. 아직도 얼굴과 귀가 뜨끈한 기분이라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켜 열을 식혔다. 포크로 찍은 감자튀김을 푹 케첩에 담그는 찰나, 가게 입구 쪽으로 휙 고개가 돌아갔다.

불그스름한 나무 문이 열리며 저마다 등에 시꺼먼 가방 하나씩을 멘 사내놈 너덧이 가게로 들어섰다. 곳곳에 축구 포스터, 빈 맥주병 따위가 장식된 가게 내부를 둘러보며 ‘오, 분위기 괜찮네.’ 따위의 말을 주고받던 그들은 일순 멈칫 굳었다. 시선은 모두 더 숨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했다.

한때 영국을 주름잡던 밴드의 히트곡이 신명 나게 흐르는 가운데, 대회에서 나란히 1, 2등을 차지한 두 밴드는 테이블 몇 개를 사이에 두고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가는 눈빛에 딱히 적대감이 섞이지는 않았다. 이미 대회도 끝났고, 결과도 나온 마당에 여태까지 그러는 건 조금 유치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사이좋게 함께 앉아 술을 마실 정도냐, 하면 당연히 아니었다.

잠시 저들끼리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던 블루문의 멤버들은 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를 보며 재환은 픽, 헛웃음 지었다. 하기는 가게에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다고 해서 그냥 나가는 것도 웃겼다.

그리하여 두 팀은 서로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비슷한 모양새로 술을 마시는 상황에 놓였다. 주위로 악기 가방이 겹겹이 겹쳐 있는 것도, 테이블 구성원이 풍기는 분위기도, 심지어 시켜 놓은 메뉴도 엇비슷했다. 거기에 잊을 만하면 상대편을 한 번씩 흘긋 곁눈질로 보는 것까지도. 최대한 의식을 안 하려고 하면서도, 이미 서로를 다분히 의식하고 있는 셈이었다.

“야, 우리 2차나 갈까.”

결국 꺼림칙함을 떨치지 못한 태군이 넌지시 제안했다. 동시에 재환이 쥐고 있던 포크가 콱 감자튀김을 내리찍었다.

“우리가 왜. 먼저 온 건 이쪽인데.”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라 태군은 ‘그, 그지….’ 하고 말았다. 기실 저쪽이 신경 쓰이는 것보다는 재환을 거슬리게 하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다. 저기 앉아 있는 한 놈한테 냅다 주먹을 갈기던 모습이 좀 무서웠어야지. 그래도 재환이 그러했던 이유를 생각하면, 태군은 아주 조금 제 친구가 멋있어 보이는 듯도 했다. 같은 팀 멤버가 시비 좀 당했다고 그렇게 헐크처럼 돌변할 줄 알았나.

“왜?”

저도 모르는 새 멍하니 재환을 보던 태군은 갑작스러운 물음을 받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서둘러 휙휙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벌써 꽤나 여러 장이 덧대어진 계산서를 쓱쓱 넘겨 보던 지우가 대뜸 씩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음흉함이 담뿍 밴 미소였다. 저 새끼는 또 왜 저래. 태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썹을 꼼틀거렸다.

“여기 꽤 비싸네. 벌써 술값 많이 나왔다.”

쓱 고개를 기울여 지우의 손에 들린 계산서를 본 재환은 그러네, 했다. 평소 돈 한 푼 허투루 쓰길 싫어하는 걸 생각했을 때 몹시도 덤덤한 반응이었다. 오늘처럼 나름 자축하는 자리에서 궁상떨고 싶지 않기도 했고, 곧 상금도 받을 테니 좀 먹고 마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한데 지우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다 내기 조금 아깝지 않아? 아직 한참은 더 시켜야 할 텐데.”

돈 쓰는 데에 ‘아깝다’라는 말을 하는 지우가 꽤나 생소하게 느껴져 재환은 설핏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지우의 표정은 아깝다는 감정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태군과 마찬가지로 재환 역시 ‘현지우 무슨 꿍꿍이지?’라는 생각을 할 즈음, 지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쟤들한테 좀 내 달라고 해야겠다. 우리보다 상금도 두 배는 더 받았는데.”

그러더니 블루문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예상치도 못한 지우의 돌발 행동에 태군은 입을 뻐끔거렸고, 재환은 그마저도 하지 못해 눈만 휘둥그레 떴다. 한영 혼자 별다른 기색 없이 지우 가는 방향을 눈으로 좇았다. 왜냐하면, 그가 뭘 하려는지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으니까.

기어이 상대방의 테이블 바로 앞까지 간 지우는 싱글싱글 웃으며 꼭 뭐 씹은 듯한 표정의 녀석들을 한 번 주욱 훑어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멀리서 듣고 있던 태군과 재환을 더욱더 기함하게 했다.

“니네, 우리랑 좀 놀래?”

양쪽 모두를 당황시켰던 지우의 말은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단, 커다란 다트 게임기 앞에 선 이들의 표정은 그냥 ‘노는’ 것치고는 심히 비장했다. 다트 판이 번쩍번쩍 현란한 조명을 뿜어 댈 때마다 그들의 얼굴도 같은 색으로 번쩍번쩍 물들었다. 어서 게임을 시작하라는 듯 기계에서 끊임없이 방정맞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웃을 수도 없는 이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는 사이, 지우가 손에 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팔랑팔랑 흔들며 걸어왔다. 단연 그의 표정이 이 중 가장 밝았다.

“바로 시작한다?”

가게 카운터에서 바꿔 온 지폐를 차례로 기계에 넣은 지우는 몇 번 툭툭 버튼을 두드렸다. 게임기에 달린 모니터 화면이 휙휙 넘어가더니, 얼마 안 가 ‘START’라는, 의미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게임의 룰은 간단했다. 한 라운드에 세 번씩 다트를 던져, 더 점수가 높은 쪽이 게임 포인트를 가져가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총 아홉 번의 라운드 중 다섯 번을 먼저 이긴 팀이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패자는….

“진 쪽이 술 쏘는 거다. 알았지?”

“아씨, 알았다고.”

다트 핀을 쥐여 주며 지우가 건네는 말에 영수라나, 명수라나, 일전 재환과 맞붙었던 놈이 팩 성을 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고작 다트 게임 한판 하면서 다들 이토록 신경이 바짝 서 있는 것은. 역시 돈 앞에서 사람은 태연해질 수 없는 법이었다.

꽤나 살벌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드디어 첫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매도 처음 맞는 게 낫다고, 자진해서 첫 번째 주자가 된 재환은 한 손에 핀 세 개를 꾹 쥐고 바닥에 빨간 줄로 표시된 스로우 라인으로 가 섰다. 게임은 게임일 뿐,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이미 새카만 두 눈에는 호승심이 활활 타올랐다. 애초에 성격상 재환은 ‘지면 어때-’ 하는 맘 편한 사고가 잘 안 되었다. 그래서 오늘 대회 결과에 더 끙끙거린 것일 테지만.

그리하여 재환은 꼭 이기고 말리라는 의지를 담뿍 담아 냅다 다트 핀을 앞으로 내리꽂았다. 거의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핀이 겹겹이 그려진 동그라미 끄트머리쯤에 푹 하니 꽂혔다. 선 밖으로는 넘어가지 않았으니 꽝은 아니겠지 싶었다. 한데, 모니터에 뜨는 점수가 조금 이상했다.

1점.

꽝보다도 못한 점수에 재환의 한쪽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1점? 이게 말이 되나? 여기에 야유하는 듯한 괴상한 효과음까지 더해져 아주 사람을 대놓고 약 올렸다.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린 재환은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래, 처음이니까. 첫 발이니까. 충분히 이럴 수 있었다.

…는 개뿔. ‘3’이라는 숫자가 번쩍거리는 모니터를 노려보며 재환은 으득 이를 갈았다. 장난하나, 지금. 옆에서 태군이나 지우가 파이팅이니 뭐니를 외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귀에 영 들어오지 않았다. 재환은 천천히 가슴팍을 부풀렸다 꺼뜨리며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해 보았다.

아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원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핀이 꽂힌 게 아무래도 저 말도 안 되는 점수의 원인인 듯했다. 그러니 남은 한 발은 무조건 가운데를 노려야 했다. 1점에 이어, 3점에 이어, 설마 5점이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재환은 손에 쥔 핀을 과녁에 조준했다. 지글지글 끓는 오기를 담은 핀이 손을 떠났다.

그리고 계획한 대로, 혹은 간절히 기원한 대로 재환은 다트 판 중앙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핀을 꽂을 수 있었다. 씨발, 그러면 뭐 해!

6점.

차마 소리 내 욕은 뱉을 수 없어 헛숨을 터뜨리던 재환은 난데없이 큽,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블루문의 기타리스트, 그러니까 박세웅이 마치 꼴좋다는 표정으로 입매를 비틀어 웃고 있었다. 순간 어찔 혈압이 치솟는 느낌에 재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나 우뚝 서서 울화를 삭이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재환의 주먹다짐 상대였던 명수라는 놈이 팔을 크게 돌리며 어슬렁어슬렁 라인 쪽으로 걸어 나왔다. 낮게 혀를 찬 재환은 하는 수 없이 옆으로 물러났다. 저 자신에게 화도 나고, 멤버들 볼 낯이 없기도 해 시선을 내리깐 채로 태군과 한영 사이에 가 섰다. 그러자마자 등 뒤로 팔을 두른 한영이 부드럽게 한쪽 어깨를 감싸 왔다.

“괜찮아, 재환아.”

힐난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참으로 다정한 언사였다. 그러나 재환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좀처럼 풀 수 없었다. 내가 우리 팀의 지뢰였구나, 하는 생각만 거듭 들 뿐이었다. 명수가 다트를 던지고, ‘20’이라는 숫자가 어설픈 팡파르와 함께 모니터에 표시됐을 때 재환의 그러한 생각은 아예 확신이 되었다. 멤버들을 향한 미안함이 한 단 더 불편한 마음 위로 쌓였다.

하여 푹푹 한숨만 내쉬는데, 다시 한영이 꼬옥 어깨를 붙들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재환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였다. 적잖이 놀라 어깨를 움칠했던 재환은 얼마 안 가 한영이 소곤소곤 흘려 넣는 이야기에 두 눈을 번쩍 떴다. 맞은편에서 세웅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한영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휙휙 눈을 굴리며 달콤하게도 들려오는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사이 명수가 세 발을 모두 던지고, 1라운드는 당연히 재환의 패배로 끝났다. 뒤이어 핀을 던지는 손보다 입이 더 바빴던 태군 역시 보기 좋게 상대에게 지고 말았다. 세 번째 주자로 한영이 나서고 나서야 그나마 더 숨은 1승을 거두었다.

다트 판 앞에 선 한영은 조용하고, 빨랐으며, 또 정확했다. 집게손가락으로 쥔 핀을 몇 번 앞뒤로 움직이지도 않고 던지는 족족, 모니터에는 재환이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던 높은 점수가 떴다. 마지막 한 발이 57점을 맞췄을 땐 옆에 있던 태군이 ‘앗싸!’ 하며 온갖 오두방정을 떨기도 했다. 한영이 저런 재능을 숨기고 있는 줄 미처 몰랐던 재환도 소리만 안 질렀다뿐이지 내심 감탄했다.

그러나 다음 라운드에서 지우가 스로우 라인에 섰을 때, 재환은 진짜 숨은 고수는 따로 있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가 왜 하필이면 다트로 술값 내기를 제안했는지 완벽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60. 60. 60.

탄성밖에 나오지 않는 점수였다.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라 재환은 환호하며 손뼉 치지도 못했다. 얼이 나간 얼굴로 지우 하는 양을 지켜보는 건 상대편도 매한가지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재환은 이쪽에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슬슬 들었다. 잘만 하면 상금 두둑이 받은 저 팀에게 충분히 술을 얻어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단, 저만 아까 같은 처참한 상황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느덧 4라운드가 끝나고, 다시 스로우 라인에 서게 된 재환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매서운 눈빛으로 과녁을 주시하며 한영이 귓가에 속삭여 주었던 내용을 되새겼다.

재환아, 무조건 가운데 넣는다고 높은 점수 아니야. 넓은 칸은 점수가 낮고, 저 좁은 칸이 점수가 높아. 끝에 써진 숫자 곱하기 2, 곱하기 3. 그러니까 20 써진 저기가 제일….

다른 건 다 모르겠고, 한영이 제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한, 방금 지우가 연속으로 핀을 꽂았던 그 부분을 재환은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좀 맞춰 보고 싶었다. 여기에는 대놓고 저를 비웃었던 세웅도 한몫했다. 때마침 저쪽은 머릿수가 하나 많아, 이번 라운드에서 재환의 상대는 세웅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적어도 그는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뒤끝 있고 쪼잔하다 해도 할 말 없었다.

위기감 따위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상대 팀의 시선 속에서, 재환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고 다트를 향해 핀을 조준했다. 모 아니면 도, 라는 심정으로 들입다 핀을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20점.

재환은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을 터뜨렸다. 조금만 더 아래였으면 됐을 텐데. 그래도 아까처럼 1점이 아닌 것을 위안 삼으며, 심기일전하고 다시 핀을 쥐었다.

또 20점.

아쉬움이 넘친 나머지 재환은 주먹을 꽉 쥔 채 주춤 바닥에서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한영이 말한 지점에서 계속 아슬아슬 비켜나니, 참으로 애가 탔다. 이제 남은 기회는 한 번뿐. 이번에는 꼭, 이라고 다짐하는 것도 마지막이라는 뜻이었다.

그때, 정말 시답잖고도 유치한 생각 하나가 문득 재환의 머릿속을 스쳤다. 기적처럼 진짜 60점이 나오면, 그러면 앞으로 밴드 일도, 한영과의 일도 잘 풀릴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가 부풀었다. 적은 확률에 미래를 거는 참으로 무모한 발상이었으나, 기묘하게도 그것이 재환에게 한층 굳건한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반드시 60점을 맞추고 말겠다는. 고작 다트 한 발 가지고 뭘 이러나 싶겠지만, 지금의 재환은 그만큼 간절했다.

재환은 마치 무대에 섰을 때처럼 단단하게 벼린 마음으로 과녁에 핀 끝을 겨누었다. 이윽고 재환의 손을 떠난 작은 쇳조각이 매끈한 직선을 그리며 나아가 푹, 판에 들이꽂혔다. 동시에 선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수밖에 없는 숫자가 흥겨운 팡파르와 함께 모니터 가득 떠올랐다.

“와, 씨발! 60점!”

크게 포효한 태군이 주먹 쥔 손을 번쩍 위로 치켜들었다. 지우가 뿌듯한 얼굴로 짝짝 박수를 쳤다. 그 와중 어느새 한영 앞으로 달려간 재환은 지금 당장 안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어깨를 와락 얼싸안았다. 함박웃음 지은 한영이 기특하다는 손길로 재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재환은 알지 못했다.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국 미래는 오고야 만다는 것을. 바랐던 미래든, 혹 바라지 않았던 미래든.

* * *

펍이 있는 2층에서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선 세웅은 입구 맞은편 담벼락 앞으로 가 섰다. 대학가 골목인 만큼 시멘트 발린 벽 너머에서 온갖 소음이 들려왔으나, 어째서인지 가게 안보다는 사위가 조용한 것처럼 느껴졌다. 기어이 역전승을 거두고 난 상대 팀이 좀 시끄러웠어야지. 정확히 말하자면 그중 머리털이 없는 한 명이 유난히 난리였던 거지만.

가죽 재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 세웅은 어느새 세 개비로 줄어든 담배 사이에서 하나를 빼 물었다. 라이터 휠을 돌려 막 불을 붙이려다, 괜히 맥이 빠져 툭 손을 아래로 떨구었다. 대회에서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대상을 거머쥐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좆같은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 이유는 확실히 존재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한 가지 물음 때문이다. 들었을까. 서재환이라는 그 새끼는 들었을까.

자근자근 필터를 깨물던 세웅은 다시 담배 끝으로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발갛게 피어오른 불꽃이 옮겨붙은 담배를 길게 빨아들이며, 씁쓸한 후회로 점철된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렸다.

아니, 씨발. 그니까 그 빗소리가 뭔데?

세웅아, 화내지 마….

내 플레이가 그렇게 맘에 안 들면, 말을 똑바로 하면 될 거 아냐? 빗소리니 바람 소리니 개소리하지 말고.

그게, 아니라…. 세웅아, 내가 미안해.

미안하단 소리 좀 그만하라고! 씨발, 진짜 돌겠네!

그 후, 한영은 단 한 번도 이 부분은 빗소리 나는 것처럼 연주해 달라느니, 바람 소리 들리는 것처럼 쳐 달라느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웅은 더 이상 한영과 함께 연주하기가 버거웠다. 제 플레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앞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다 버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기타를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끝내 한영을 버리고, 밴드를 버렸다. 한영의 머릿속에서만 들리는 그 이상한 소리를 듣는 녀석 따위, 어디에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더 숨’이라는 이름이 붙은 밴드의 무대를 보는 내도록, 세웅은 제가 내린 판단에 자꾸 초라한 의구심이 들었다.

“씨발….”

세웅은 탁한 담배 연기와 함께 허무한 욕을 뱉었다. 괜히 뒤꿈치로 쿵쿵 담벼락을 찍을 즈음, 옆으로 쓱 길쭉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돌려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한 세웅의 표정이 한층 우그러졌다.

“뭐냐.”

“나도 한 대 피우려고.”

지우는 씩 웃으며 담뱃갑을 흔들었다. 그러다 ‘어….’ 하며 안을 열어 보더니 텅 빈 상자를 세웅에게 보여 주었다.

“하나도 없네. 있는 줄 알았는데.”

짜증을 숨기지 못한 세웅은 ‘어쩌라고’ 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하필이면 또 서로 같은 브랜드의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계속 모르쇠로 있기도 참 불편했다. 쯧,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찬 세웅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지우에게 내밀었다. 하나를 건네고 이제 남은 건 돗대뿐이라 더 기분이 언짢아졌다.

“땡큐.”

웃음을 거두지 않은 지우가 쏙 담배를 집어 갔다. 예전부터 세웅은 현지우의 저런 면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 아래 어떤 시꺼먼 속을 감추고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보나 마나 게이 바에서 닦았을 실력을 술 내기에 써먹을 줄이야. 참으로 음흉한 놈이었다.

“치사한 새끼.”

그 마음이 가감 없이 입 밖으로 흘러 나갔다. 정작 욕을 들은 놈은 태연한 낯짝으로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하릴없이 세웅의 입매가 한층 곱지 않은 모양새를 그렸다. 상대에게 빌려준 담배가 못내 아까운 탓도 조금 있었다.

어차피 길게 섞을 말도 없겠다, 연달아 담배 연기를 내뿜던 세웅은 그새 손가락까지 타들어 간 꽁초를 휙 바닥으로 내던졌다. 대충 워커 밑창으로 짓이긴 뒤 ‘씨발,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돗대를 꺼냈다. 하나 남은 귀중한 담배를 아끼고픈 마음보다, 갑갑한 속을 아예 매캐한 연기로 뒤덮어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슬쩍 고개를 기울여 담배에 불을 붙인 세웅은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길게 필터를 빨아올렸다. 툭, 담벼락에 뒤통수를 기대고서 멍한 눈으로 시커먼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러다 아주 자연스럽게, 목구멍에 걸려 있던 물음 하나가 뿜어져 나가는 담배 연기에 뒤섞였다.

“서재환인가. 그 새끼는 들었대?”

“뭘?”

“빗소린지 지랄인지 하는 거.”

풉, 하고 조금도 참을 생각이 없었던 듯한 웃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세웅은 그런 지우에게 새삼 화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다 됐고, 그냥 빨리 답이나 듣고 싶었다. 물론 세웅의 바람대로 입을 열 지우가 아니었다.

“오늘, 우리 공연 못 봤어?”

질문을 질문으로 되돌려 받은 세웅의 얼굴이 푹 구겨졌다. 뭐 저딴 걸 묻지, 하는 표정이었다. 더 숨의 공연이라면 당연히 보았다. 그것도 아주 잘 보았다. 심지어 무대에서 한영과 재환인지 뭔지 하는 기타리스트가 몇 번이나 눈빛을 교환하는 것도 다 눈에 담았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안 봤겠냐?”

“그럼 재환이 기타 치는 것도 다 봤겠네.”

“아씨, 그래서 뭐?”

결국 뾰족뾰족 날 선 말씨가 튀어 나갔다. 떨어낼 타이밍을 놓친 담뱃재가 톡, 꺾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전혀 달갑지 않은 깨달음 하나가 탁 세웅의 뒤통수를 쳤다.

존나 축축하네.

재환의 연주를 보고 들으며, 분명 그리 혼잣말했었다. 리프의 멜로디도 그렇고, 톤도 그렇고, 뭐 저렇게 척척한 소리를 내나 싶었다. 저라면 리버브나 딜레이를 좀 줄였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게… 문제였다. 기타 실력도, 센스도 제가 나은 줄로만 알았는데 정작 그는 자신이 못 하는 걸 하고 있었던 거다. 기타로 내는 빗소리. 유한영이 그토록 바라던.

하하. 스스로 답을 얻어 버린 세웅은 허탈함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했음을 인지하자 상대를 향한 이상한 승부욕 같은 것도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대신, 그 자리에 지우가 대뜸 욕 나올 만큼의 황당함을 심어 주었다.

“맞다. 혹시 외로워서 섹스하고 싶어지면 말해.”

“…뭐?”

“크기는 유한영 자지랑 비슷하니까. 아, 길이는 내가 더 긴가?”

씨발, 별…. 하도 기가 차 할 말을 잃은 세웅은 있는 대로 표정을 썩혔다. 그사이 몇 모금 빨지도 못한 담배가 또 훅 타들어 가 바닥으로 재를 떨구었다. 그 꼴이 딱 지금 세웅의 기분과 비슷했다. 절반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지우 탓도 있을 터였다. 여기에 내처 기름을 끼얹어 줄 인물이 하나 더 등장했다.

세웅은 미세하게 눈가를 씰룩이며 성큼성큼 골목을 따라 걸어오는 재환을 보았다. 그의 손에는 검정 비닐봉지가 덜렁덜렁 들려 있었다. 금방 세웅과 지우 가까이 다가온 재환이 다짜고짜 봉지를 활짝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골라.”

봉지 안에는 알록달록 포장 색이 모두 다른 하드 아이스크림 여러 개가 꽂혀 있었다. 언제 섹스니 자지니 음란한 소리를 뱉었냐는 양 지우가 ‘오, 재환이 짱인데?’ 하며 쏙 하나를 집어 갔다. 하필이면 세웅 자신이 좋아하는 호두 맛 아이스크림이었다. 그것도 그렇고, 아이스크림을 내민 상대가 하필 재환이라는 것까지 더해져 세웅은 좀처럼 저 먹을 것을 고를 수 없었다. 그러자, 입을 벌린 봉지가 훅 턱 아래까지 올라왔다.

“고르라고.”

말 한번 진짜 멋대가리 없게 하네, 생각하며 세웅은 마지못해 손에 잡히는 대로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냈다. 줘도 안 먹는 멜론 맛이었다. 그제야 봉지를 내린 재환이 입고 있던 점퍼 주머니를 뒤적였다. 안에서 비닐 껍질도 벗기지 않은 새 담배를 꺼내 쓱 지우에게 내밀었다.

“아까 담배 다 떨어졌다며.”

지우의 입은 활짝 옆으로 벌어졌고, 반대로 세웅의 입꼬리는 쭉 아래로 떨어졌다. 역시 현지우는 음흉한 새끼였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어 준 담배가 아까워 미치겠는 건 덤이었다.

저도 그냥 한 대 확 빼앗아 버릴까 잠시 고민하는 중, 핸드폰을 꺼낸 지우가 전화가 왔다며 갑자기 자리를 떴다. 뜬금없이 재환과 둘이 남게 된 세웅은 적잖이 언짢은 기분이 되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재환을 대하기가 좀 껄끄러웠다. 뭐,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쭉 그럴 테지만.

하여 아직 몇 모금 남은 듯한 담배를 미련 없이 바닥에 떨구었다. 아이스크림 봉지 끄트머리를 쥔 채 그대로 발을 떼려다, 담배를 입에 무는 재환을 향해 휙 뒤를 돌았다.

“녹을 텐데.”

“어?”

“담배 다 피우고 올라가면 아이스크림 녹지 않겠냐고.”

‘아, 맞네….’ 하며 재환은 입에서 뺀 담배를 도로 담뱃갑에 넣었다. 세웅은 속으로 등신, 했다. 별것도 아닌 걸로 괜히 한번 욕이나 해 본 것이었다.

몇 발짝 떨어진 두 사람은 천천히 2층 펍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중간 계단참에 멈춰 서서 남자 화장실 문을 열려던 세웅은 그새 앞서 계단을 올라가는 재환을 불러 세웠다.

“야.”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재환이 뒤를 돌았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오르내리지 않는 계단에 조금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몇 칸 위에 선 재환을 올려다보던 세웅은 의외로 덤덤하게 입을 뗐다.

“지금은 좋지?”

“…뭐?”

“유한영이랑 음악도 하고. 섹스도 하고.”

내용은 꽤나 도발적이었으나, 말투는 전혀 비꼬거나 떠보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러니 재환도 발끈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볼 안쪽 점막을 혀로 꾸욱 누르던 세웅은 하, 짧게 웃는 듯한 소리를 흘렸다. 사실 당연히 좋을 것을 알고 있으니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대신 내심 재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넌, 내 꼴 나지 말라고.”

구태여 재환의 답을 기다리지 않은 세웅은 휙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세게 문을 닫았다. 속으로 ‘씨발…!’을 외치며 차가운 철문에 쾅쾅 뒤통수를 부딪쳤다. 그러다 끝내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손에 쥔 아이스크림이 봉지 안에서 눅눅하게 녹았다.

그 무렵, 펍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저 안쪽에서 휙휙 손 흔드는 한영을 발견했다. 어딘가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지우의 자리만 비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봉지에서 초코 맛 아이스크림을 꺼내 건네자 한영이 환히 웃었다. 태군은 ‘아싸, 득템!’을 외치며 반으로 쪼개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을 쏙 빼 갔다. 재환은 남은 것을 블루문 멤버들이 있는 테이블로 가져갔다. 술 얻어먹는 대신 주는 정말 소소한 보답 같은 것이었다. 뭐, 반길지 어쩔지는 모르겠다만.

영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들 앞에 툭, 아이스크림을 봉지째 내려놓은 재환은 자리로 돌아왔다. 제 몫으로 빼놓았던 팥 맛 아이스크림의 봉지를 뜯어 뭉툭한 끄트머리를 콱 깨물었다. 아직도 태군은 막대 두 개가 달린 아이스크림을 반으로 가르지 못해 끙끙대고 있었다. 그 틈을 타 한영이 쓱 재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곤란한 듯 눈을 굴리던 재환은 마지못해 머뭇머뭇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그러자마자 붉은 입술이 잇자국 난 아이스크림을 합 물었다.

베어 문 아이스크림을 오물오물 씹어 삼킨 한영이 달아, 하며 웃었다. 휙휙 주위를 둘러본 재환도 한영의 아이스크림을 한 입 깨물어 먹었다. 팥 맛보다 훨씬 강렬한 단맛이 푹 혀를 적셨다. 물론,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심리적인 이유 때문인 건지, 비싼 값을 하는 건지 얻어먹는 맥주는 생각보다 꽤나 달고 맛있었다. 그리하여 조금 치사한 줄 알면서도 더 숨의 네 사람은 딱히 다른 가게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연거푸 맥주를 시켰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블루문과 합석을 하고 있었다. 니네 무대는 이게 별로였다느니 저게 구렸다느니 온갖 트집이 오갔지만, 신기하게도 누구 하나 진심으로 씩씩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실없이 픽픽 웃기나 했다. 참으로 놀라운 알코올의 힘이었다.

새벽 2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술자리는 파했다. 지우와 태군은 대리 기사를 불러 함께 차를 타고 돌아갔고, 재환과 한영은 택시를 잡았다. 서로의 집이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닌지라, 적당히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택시비를 계산하고 내렸다.

시각이 늦은 만큼 가로등만 일정한 간격으로 켜진 거리에는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안녕, 잘 가, 따위의 인사만을 남겨 놓은 두 사람은 괜히 바닥을 탁탁 차거나 별 하나 뜨지 않은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아마, 헤어지기가 영 싫어 그러했을 것이다.

옆구리로 늘어진 기타 가방의 끈을 만지작거리던 재환은 용기 내어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 북엇국 재료 있는데. 내일 아침 끓여 줄까?”

자고 가라는 얘기치고 참 멋도, 무드도 없었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을 둥실둥실 떠오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각자 등에 멘 악기 가방이 덜컥 흔들릴 정도로, 한영은 와락 재환을 끌어안았다.

“응…!”

간간이 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리는 밤거리를 따라 5분쯤을 걸은 두 사람은 방향을 꺾어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닥다닥 빌라 건물들이 틈 없이 붙어 있는 주택가가 나왔다. 재환의 집은 거기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나왔다. 그러나 오늘 보았던 다른 밴드들 얘기, 앞으로 받을 상금 얘기 등을 두런두런 나누며 걸으니 집 가는 길이 조금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보다 술도 깰 겸 이대로 몇 번을 더 왔다 갔다 하라 그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잠시 후, 재환은 이 길이 아예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슬쩍슬쩍 손끝을 스치는 듯했던 손이 어느덧 재환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예고도 없었고, 특별한 내색도 없었다. 그래서 재환도 미처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더한 짓도 많이 했으면서, 고작 이런 일로 쿵쾅거리는 제 심장한테만 좀 조용히 하라고 속으로 다그칠 뿐이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재환은 한영의 손에 슬그머니 깍지를 꼈다.

맞붙은 손바닥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땀이 살짝씩 배어날 즈음, 한영이 지금까지 나누었던 대화와 조금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냈다.

“재환아. 너 다니는 대학교도 오늘 간 데랑 비슷해?”

“음…. 분위기는 비슷한데, 좀 더 삭막한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궁금하다. 어떨지.”

재환은 슬쩍 눈을 옆으로 돌려 한영을 보았다. 부유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맑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이 제법 선명히 시야에 담겼다. 지금 한영이 부지런히 머릿속으로 가 본 적 없는 학교의 전경을 그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재환은 그가 바라는 말을 기꺼이 들려주기로 했다.

“내년에 나 복학하면, 한번 놀러 올래?”

“그래도 돼?”

데구루루 굴러온 갈색 눈이 재환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지는 않을 거지만, 혹여나 농담이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저기에서 툭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재환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예외 없이 한영의 하얀 얼굴 위로 보름달처럼 환한 웃음이 피었다.

“기대된다. 그럼 나 거기 가 보고 싶어. Cafeteria.”

“뭐…, 그래. 그때 봐서.”

대충 어물쩍댄 재환은 이번에는 자신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근데 넌 미국에서 대학 안 다녔었어?”

“응, 안 다녔어.”

재환은 속으로 아…, 했다. 어쩌면 스스로 인지하는 것보다 한영에 대해 아는 바가 훨씬 적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여 무엇을 어떻게 더 물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한영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쫓겨났어.”

“쫓겨나…?”

“응.”

너무도 산뜻한 긍정에 재환은 뜻했던 바와 달리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당연히 왜, 라는 물음도 건넬 수 없었다. 상대를 깊이 파고드는 일은 늘 재환에게 있어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다.

무의식중 한영의 손을 맞잡은 손아귀에 꽉 힘을 준 재환은 발길을 옮길수록 더 좁아지고, 지저분해지는 길목을 멍하니 응시했다. 앞으로는 이 길을 혼자 걷기가 퍽 싫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문득 가슴께를 스쳐 갈 즈음, 전혀 염두에도 두지 못했던 말이 스르륵 흘러 나가고 말았다.

“다시 미국 갈 거야…?”

재환과 나란히 나아가던 한영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 바람에 휙 뒤로 끌려가듯 재환도 발을 멈추었다. 다소 당황이 담긴 눈으로 한영을 보자, 고운 얼굴에 여전히 달처럼 은은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재환아.”

“…응.”

“나 안 가.”

줄곧 반대편에서 걸음 따라 흔들리던 한영의 왼손이 부드럽게 뺨을 감싸 왔다. 손바닥에 가을밤의 찬 기운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 재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칠했다. 그러나 결코 그 손이 떨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한영을 마주 보는 눈빛에 그러한 마음이 숨김없이 담겼다. 이를 능히 짐작한 듯, 말랑한 입술이 가볍게 재환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 너 두고 아무 데도 안 갈래. 가라 그러지 마.”

내가 언제 가라 그랬나. 작게 꿍얼거리면서도 재환은 또 끝을 모르고 치솟는 박동을 억누르기에 급급했다. 뭐, 그런다고 내려가겠느냐마는. 잘 걸어가다 한영 때문에 이게 자꾸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니까 재환이 너도….”

심장 쿵쾅대는 소리가 밖으로 샐까 전전긍긍하던 재환은 어물어물 흐려지는 한영의 말을 똑바로 귀에 담지 못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응?’ 하고 묻자 한영이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더니 아예 나머지 손도 재환의 뺨에 올려 양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자연히 가운데 끼인 입술이 붕어처럼 톡 튀어나왔다. 그 위로 입술을 겹친 한영은 재환의 입술을 쭈웁 소리가 나게 빨아들였다. 그 소리가 하도 커, 재환은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한 발 뒷걸음질 쳤다. 얼굴은 삽시에 한영의 머리와 비슷한 색으로 물들었다.

“야…!”

아무리 골목에 인적이 없어도 이런 식으로 입 맞추는 건 그냥 손잡고 걷는 것과 얘기가 달랐다. 비라도 세차게 내리고 있으면 몰라도. 해서 당황을 감추지 못한 재환은 꼭 투정 부리는 것처럼 주먹으로 한영의 단단한 가슴팍을 툭 쳤다. 물론 힘은 조금도 실리지 못해 그새 거리를 좁힌 한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기울여 재환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재환이 너 얼굴 빨개졌어.”

어떨 때는 남자답게 먼저 다가오면서, 또 어떨 때는 이렇게 온몸으로 부끄러움을 표시하는 재환의 태도는 한영에게 늘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던져 주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한 번 더 입 맞추고프게 만든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엇…!”

한영은 재환의 손을 붙잡고 냅다 골목 구석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가로등 불빛이 들지 않는 어둠 속으로 쏙 숨어들었다. 유한…! 다소 조급한 외침이 울렸으나 촉촉한 살결 맞닿는 소리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묵직한 페달 보드 가방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로의 어깨를 잡은 손에 열이 고이고, 그보다 더 뜨거운 숨결이 부드럽게 뭉개지는 입술 사이를 넘나들었다.

솨,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담벼락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가 춤을 췄다. 비처럼 쏟아지는 낙엽이 길바닥 곳곳에 떨어진 담배꽁초, 과자 봉지 따위의 지저분한 쓰레기를 덮었다. 그래 봤자 운치 있다 할 만한 풍경은 아니었으나, 아마 잠시 후 눈을 뜬 두 사람에게는 그리 비칠 것이었다. 낙엽이 소복소복 쌓인, 예쁜 가을 길처럼.

* * *

사각사각 무언가가 연이어 간지럽게 마찰하는 소리에 재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또렷이 차릴 수는 없었다. 지난밤, 한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온몸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상황에서도 기어이 섹스를 하고 잠든 결과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다. 차례로 씻고 나온 후, 남자 둘을 품기에는 한참 비좁은 매트리스에 함께 누워 두 사람은 나름 잠을 청했더랬다. 하지만 째깍째깍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를 듣다 어느덧 마주 누워 서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누가 먼저 다가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입술이 포개어진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거리를 벌릴 수 없는 좁은 매트리스, 점점 달아오르는 체온, 무대에서 느꼈던 흥분의 잔재 같은 것들이 결국 참지 못하고 상대의 옷을 벗기게 만들었다. 한영이 혀를 내어 유두를 핥으면 재환의 손가락이 분홍 머리칼 사이로 감겼고, 그러다 곧게 선 성기가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삐걱삐걱 들썩이는 매트리스 위에서 재환은 한영의 허리 짓 따라 연신 달뜬 숨을 흘렸다. 그러던 중 자연스레 뻗어 나간 손이 애애한 달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몸을 더듬었다. 탄탄한 가슴팍, 색이 옅은 유두, 꿈틀거리는 복근….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공존하는 신기한 감각을 손바닥으로 담뿍 느끼던 재환은 퍽 멋없는 질문을 꺼냈다.

“원래 운동 많이 해?”

그러자 한영이 설핏 묘한 표정을 지었다. 좌우로 눈을 굴리다가, 대답이라기에는 조금 애매한 듯한 말을 들려주었다.

“그런 것 같아…?”

제 머리맡을 짚은 두 손으로 상체를 지탱하느라 근육이 도드라진 어깨를 매만지던 재환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하루 이틀 운동해서 만들어진 몸은 아닌 것 같아서. 같은 남자로서 내심 부러운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했어.”

“얼마 전?”

“응.”

어쩌다, 라고 되물으려던 재환은 흡 숨을 집어삼켰다. 느릿느릿 빠져나갔던 성기가 비슷한 속도로 진입해 들어와 꾸욱 한 지점을 짓누른 까닭이었다. 잠깐 쉬어 보라고 하기도 뭐해 가슴만 할딱이는데, 다행히도 한영은 알아서 이유를 덧붙였다.

“재환이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래서 운동 열심히 했어.”

지나치게 솔직한 고백이 순시에 재환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간지럽혔다. 이를 애써 잠재우며 재환은 칭찬받길 바라는 아이처럼 두 눈을 반질반질 빛내는 한영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순연한 표정이 공연히 장난기를 자극했다.

재환은 팔을 들어 예쁘게 승모근이 자리한 목덜미를 두 손으로 감쌌다. 슬쩍 아래로 잡아당기자, 머뭇거리던 한영이 몸을 숙였다. 한영의 귓가에 입술을 딱 붙인 재환은 평소라면 감히 엄두도 못 냈을 도발적인 언사를 속삭여 보았다. 짓궂은 장난이었다.

“그럼 힘 좀 써 보시죠, 유한영 씨.”

그것이 크나큰 실수였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망울을 붉힌 한영이 시트와 맞닿은 허리 아래로 손을 넣는 동시에 재환의 몸이 훅 위로 들렸다.

“으윽…!”

근육이 바짝 돋아난 허벅지에 올라앉는 순간, 내벽에 박힌 성기가 사정없이 푹 안쪽을 찔렀다. 그대로 훌렁 뒤로 나자빠지게 될 것 같았던 재환은 허겁지겁 한영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시 숨 돌림 틈도 주지 않고 한영이 성기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읏, 윽…. 후윽…!”

터뜨릴 듯 양 볼기를 콱 움킨 한영이 무릎 꿇은 다리를 들썩일 때마다 재환의 전신도 함께 들썩였다. 닿아서는 안 될 곳까지 들이치는 성기가 눈앞이 번쩍번쩍 점멸하는 자극을 퍼부었다. 순한 모습에 깜빡 속아 세 치 혀를 잘못 놀린 결과는 이다지도 무지막지했다. 낯선 자세가 주는 공포, 혹은 흥분에 잠식된 재환은 그저 밭은 신음을 토했다. 몇 번이고, 한영이 사정할 때까지.

그리하여 현재, 잠에서 깨어난 재환은 좀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사지가 노글노글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과 한참을 씨름하다, 슬쩍 반 바퀴만 옆으로 돌아누웠다. 밤새 어지간히도 혹사당했던지 등허리 아래에서 매트리스 스프링이 아주 삐걱삐걱 아우성을 쳐 댔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여전히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환은 금방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북향으로 난 창을 통해 흘러드는 미미한 가을볕 속, 한영이 책상 앞 의자에 한쪽 무릎을 곧추세워 앉아 있었다. 접힌 다리에 얹힌 공책 위에서 쉴 새 없이 연필이 움직였다. 재환이 한영의 방에서 본 적이 있는 공책이었다. 부지런히 손에 쥔 연필을 놀리며 공책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꽤나 진지했다.

그 별거 아닌 자태가 일순 재환의 넋을 빼앗아 갔다. 이렇다 할 색이 없는 칙칙한 공간에서 한영 혼자 은은히 빛을 뿜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 있어도 눈에 띄는 외양 탓인지, 이제는 제가 그냥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뭐 하냐는 물음도 잊은 재환이 멍한 시선만 보내는 사이, 공책을 향해 숙어져 있던 분홍 머리통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잘 잤어?”

나긋나긋 건너오는 인사가 솔솔 부는 바람결 같았다. 그에 비해 ‘어, 어….’ 하고 어물쩍 답하는 목소리는 듣기 싫게 거칠거칠 갈라져 있었다. 뒤늦게 큼큼 헛기침한 재환은 여전히 공책 위를 사각사각 오가는 연필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한영은 무언가를 그리는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뭘 저렇게 열심히 그리나 싶었지만, 이 또한 재환은 묻지 못했다. 한영의 요청 때문이었다.

“잘됐다, 재환아. 움직이지 마.”

한영이 무엇을, 아니, 누구를 그리고 있었는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요청이었다. 동시에 재환은 조금쯤 곤란해졌다. 저를 그리는 거야 별문제 없었지만,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심지어 이불이 허벅지께까지 내려가 있어 사타구니도 훤히 보였다. 사타구니가 보인다는 것은, 성기가 보인다는 뜻이었다.

집중한 표정으로 연필을 놀리는 한영을 흘끔흘끔 살피던 재환은 슬쩍 이불자락을 쥐었다. 살살 위로 끌어 올리려는데, 귀신같이 눈치챈 한영이 한층 힘주어 종전의 말을 되풀이했다.

“재환아, 움직이지 마.”

더욱이 난감해진 재환은 슬그머니 눈썹을 구겼다. 초상권이니 뭐니 하는 말들이 입 안을 굴러다녔으나, 그림 그리는 한영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또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거절을 뱉으려야 뱉을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차라리 한영이 빨리 그림을 완성하길 바라는 게 최선이었다. 거시기를 그려 봤자 뭐 얼마나 자세히 그리겠어, 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의자에서 일어난 한영이 공책을 들고 사뿐사뿐 재환 가까이 왔다. 삐걱삐걱 소리를 울리는 매트리스 끝자락에 걸터앉아 재환에게 살며시 공책을 내밀었다. 이윽고 공책을 들여다본 재환의 얼굴에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꽤나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감탄, 당혹, 수치 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겼나.”

“응.”

한영을 보는 자신의 눈이 객관성을 상실한 것처럼, 저를 보는 한영의 눈도 만만찮게 인지력을 잃은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멀끔하게 생긴 남자를 그렸을 리 없다. 비록 푹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쓱쓱 그려 낸 선으로 이루어진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반듯반듯했다. 닮은 부분이라면, 까치집이 된 머리 정도였다.

하나 문제는 미화된 얼굴이 아니었다. 재환의 예상, 혹은 걱정대로 한영의 그림에는 다른 부분까지 불필요할 만큼 세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과장 없이 그려진 음모라든가, 그 아래 자리한 성기라든가…. 하는 수 없이 그림을 살피는 재환의 얼굴이 벌그스름히 달아올랐다. 그래서였나 보다. 한영 앞에서 한 번도 부려 본 적 없는 욕심을 부리게 된 것은.

“이거, 나 주면 안 돼?”

예상 못 한 말을 들은 것처럼 한영의 두 눈이 둥그렇게 뜨였다. 재환의 얼굴과 손에 들린 공책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적잖이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가지고 싶어?”

홀딱 벗고 있는 그림을 한영에게 남기기 남사스러운 마음 반, 실물보다 몇 배는 잘생긴 그림이 은근히 탐나는 마음 반으로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자보다는 후자의 마음이 조금 더 컸다. 한영이 아니면, 또 누가 제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 주겠는가.

대답은 쪽, 하는 귀여운 울림을 동반한 뽀뽀로 돌아왔다. 몇 번 더 재환에게 쪽쪽 입 맞춘 한영은 맞댄 코끝을 살살 비비며 기대 어린 투로 소곤거렸다.

“앞으로도 많이 그려 줄게. 재환이 네 몸 너무 예뻐. 매일 그리고 싶어.”

그러니까, 그리기는 그리되 벗은 몸을 그리고 싶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매일. 흔쾌히 그러라는 대답을 들려줄 수가 없는 말이라, 재환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해사하게 웃은 한영이 아예 재환에게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으, 읍….”

저돌적인 입맞춤을 이기지 못한 재환의 몸이 끝내 뒤로 슬슬 기울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책이 구겨질 것이 뻔해, 재환은 얼른 매트리스 밖으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공책이 툭 바닥으로 떨구어졌을 때, 재환의 등이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위에 닿았다. 애매하게 이불에 가려진 허벅지 양옆을 무릎으로 딛고 엎드린 한영이 차츰 입맞춤의 수위를 높여 갔다. 혀를 내어 재환의 입술을 아래위로 할짝할짝 핥다가, 어서 열어 달라는 듯 앞니를 문질렀다. 여지없이 벌어진 잇새로 쑥 혀가 밀려들었다.

“음….”

물컹거리는 살점이 자유롭게 입 안을 유영했다. 깍지 낀 손에 머리통을 가둔 한영이 잇몸을 훑고, 입천장을 간질일 때마다 재환은 절로 목을 울려 신음했다. 저 아래에서는 거듭 발가락이 움칠움칠 곱아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내도록 지긋한 눈길을 받으면서도 멀쩡했던 성기는 어느새 반쯤 발기한 상태였다.

얼마 가지 않아 성기가 완연히 위로 솟은 모양새를 갖출 즈음, 한영이 재환의 귓가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자근자근 말랑한 귓불을 씹다가, 귓속으로 녹녹한 음성을 흘려 넣었다.

“재환아, 넣고 싶어….”

어깨를 흠칫흠칫 떨던 재환은 고민에 잠겼다. 어차피 오늘은 오후 출근이라 비교적 여유가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마냥 매트리스 위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이곳으로 한영을 부르기 위해 구실 삼았던 약속을 지켜야 했다.

“북엇국…, 끓여야 되는데.”

한영의 입에서 아…, 하는 안타까운 탄성이 흘렀다. 자는 얼굴조차 눈길을 사로잡던 재환과의 섹스도, 그가 끓여 주는 북엇국도 모두 포기하기가 어려운 까닭이었다. 눈을 굴리던 한영은 결국 아쉬운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잠깐 손가락만 넣어도 돼…?”

여기에까지 차마 거절을 내놓을 수 없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재환은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아래로 떨어뜨린 한영과 눈을 맞추며 응, 하고 답했다. 재환의 고운 미소에 한영은 금세 아쉬움을 잊고 해족이 따라 웃었다. 발긋하게 열이 도는 뺨에 쪽 입 맞춘 뒤 상체를 세웠다.

곧이어 붉은 입술 사이로 쑥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갔다. 펠라티오 하듯 제 손가락을 쭉쭉 빨며 고루 침을 묻힌 한영은 재환의 동그란 무릎뼈를 잡고 조심스럽게 다리를 벌렸다. 엉덩잇살도 함께 벌어지며 그 사이 파묻혀 있던 구멍이 빠끔히 모습을 드러냈다. 미끈한 목선 가운데 불거진 울대가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응….”

오밀조밀한 주름을 꾹 누르며 손가락이 천천히 뜨끈한 속살을 비집었다. 지난밤 바로 아래에서 쳐올렸던 자세 탓에 평소보다 더 깊숙이 길이 났던 내벽은 무리 없이 진입을 받아들였다. 베개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달뜬 숨을 흘리는 재환을 내려다보던 한영은 부드러운 구멍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후, 으….”

재환이 내뱉는 숨의 농도가 짙어졌다. 재차 꿀꺽 침을 삼킨 한영은 마디를 접었다 펴며 축축한 내벽을 더듬었다. 도톰히 부어 있는 곳을 건드렸을 때는 여지없이 재환의 허리가 꿈틀거렸다. 동그란 귀두 끝에 이슬처럼 맺힌 맑은 물방울이 가느다란 빛을 틔웠다.

은근한 자극을 이끌어 내던 손가락은 질척한 소리를 내며 규칙적으로 안팎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섹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하니 재환은 손가락이 들어오면 힘을 주고, 빠져나가면 긴장을 푸는 일련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반복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얕게 꺼졌다 부푸는 배, 거듭되는 신음이 한영에게도 재환과 섹스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감상을 일으켰다. 잠깐만 손가락을 넣겠다는 나름의 약속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응….”

손목을 앞뒤로 움직이는 속도를 차츰 올리자, 베갯잇 양 끄트머리를 두 손으로 움킨 재환이 고개를 크게 뒤로 젖혔다. 곧게 솟은 목빗근, 날렵한 턱선을 차례로 좇던 한영의 시선이 슬쩍슬쩍 벌어지는 입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으로 옮겨 갔다. 다시 쭉 아래로 내려와 미약한 들썩임 따라 꺼떡거리는 예쁜 성기를 눈에 담았다.

그곳에 입과 손, 어느 것을 가져갈까 잠시 고민하던 한영은 열에 젖은 재환의 얼굴을 보다 진득이 쳐다보는 쪽을 택했다. 위에서 재환을 내려 보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그새 더 많은 선액을 흘리고 있는 성기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아흐…!”

안 그래도 하반신이 잔뜩 예민해져 있던 재환은 즉각 반응했다. 열띤 신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시트에서 떨어진 허리를 둥글게 휘었다. 그 바람에 엉덩이가 위로 들리며 한영이 두 손을 보다 편히 움직일 수 있는 자세가 되었다.

날름 내민 혀로 제 윗입술을 길게 핥은 한영은 표피가 당겨 올라갈 정도로 귀두까지 쭉 성기를 쓸어 올렸다가, 사타구니에 손날이 닿을 때까지 아래로 훑었다. 비슷한 박자로 재환의 회음부 가까이 놓인 손목을 털었다. 성기와 구멍, 양쪽에서 나는 습한 소리가 제법 컸다.

“한영…, 한영아…. 후윽…!”

물론 거센 자극을 견디지 못해 재환이 토하는 소리가 더욱이 컸다. 한영에게 아랫도리를 전부 내어 준 재환은 고개를 홱홱 저으며 연이어 밭은 신음을 내질렀다. 위로 무릎을 세운 다리에 흠칫흠칫 힘이 들어가고, 시트에서 발꿈치가 떠오른 발이 안으로 말렸다. 이미 하반신을 휘젓는 자극과 흥분은 성기를 넣었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치달아 있었다. 학학 숨이 가빠졌다.

“흐아아…!”

그것도 잠시, 발부리가 바짝 서며 온몸이 경직됐다. 입을 크게 벌린 재환은 한영의 손바닥에 푹 기둥을 감싸인 채 정액을 뿜었다. 멀리도 날아간 정액이 명치까지 튀었다. 남은 몇 방울이 픽픽 솟구쳐 성기를 꼭 쥔 하얀 손을 타고 흘렀다.

그 순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한영은 모조리 시야에 새겨 넣었다. 절정에 물든 재환이 심장 쿵 떨어질 만큼 예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라도 기억에서 꺼내 눈앞에 그릴 수 있도록, 한영은 재환의 작은 떨림까지 콕콕 뇌리에 박았다.

할딱할딱 남은 숨을 몰아쉬는 재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한영은 정액이 묻은 손등을 입가로 가져갔다. 허옇고 뜨끈한 액체를 샅샅이 혀로 핥아 재환의 맛을 음미했다. 허리 숙여 가슴팍 가운데를 타고 주룩 흐르는 것도 모조리 핥아 올렸다. 이대로 재환의 몸 곳곳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까지 다 머금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한참을 더 놓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혓바닥이 고인 액을 꿀꺽 삼키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 한영은 축 늘어진 재환의 팔을 붙잡았다. 조심조심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흔들거리던 머리가 풀썩 어깨로 넘어왔다. 아직 미약한 들썩임이 남은 등을 부드럽게 도닥였다.

“재환아. 씻자. 씻겨 줄게. 아니면… 나 먼저 씻을까?”

한영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던 재환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빨리 씻고 나와 꼭 북엇국을 끓이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 재환을 보며 애틋함이 퐁퐁 샘솟을 수밖에 없었던 한영은 아래로 처진 팔을 들어 제 목에 두르게 했다. 가운데 자리한 구멍이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엉덩이를 단단히 손으로 받친 뒤, 훌떡 일어섰다.

“어…!”

한순간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 재환은 허둥지둥 한영을 끌어안았다. 두 다리는 매끈한 허리에 감았다. 꼭 붙어 있으라는 의미로 재환의 뺨에 쪽, 입 맞춘 한영은 사분사분 가뿐한 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오늘이야말로 재환을 찬찬히 씻겨 주리라 생각하며.

다리 사이에 앉혀 젖은 머리를 말려 주자마자 재환은 벌떡 일어섰다. 그 바지런함에 내심 감탄하며 한영은 어느새 부엌으로 가 선 재환의 늘씬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과거에도 지금과 같은 순간이 있었으나, 그때는 이렇게 재환과 가까워지는 상황을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어떻게든 저와 같이 밴드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너 안 좋아한다는 말도 서슴없이 뱉었다.

그리고 현재, 그 말은 한영에게 달콤하고도 괴로운 족쇄가 되었다. 마음의 상자 안에 꾹꾹 눌러 담고 열지만 않으면, 언제까지고 재환과 지금처럼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이따금 열어 달라 상자가 요동치기도 했지만, 그럴 때는 재환을 생각하거나, 그리거나, 노래하면 되었다. 그럼 또 얼마간은 잠잠해졌다. 오늘 아침 잠든 재환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공책을 꺼내 든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매트리스 옆면에 등을 댄 채 두 다리를 끌어안은 한영은 모은 무릎에 턱을 댔다. 냉장고, 싱크대, 가스레인지 앞. 좁은 반경 안에서 재환이 오가는 곳을 따라 소리 없이 눈을 굴렸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허리를 답삭 안고픈 욕심이 몽글몽글 피어올랐으나, 그럴수록 제 다리만 꽉 안았다. 요리하는 데 방해하면 분명 재환은 싫어할 거였고, 한영은 절대 재환을 성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쁘게 웃는 얼굴만 보고 싶었다.

맞붙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재환만 보고 있기를 수 분.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소리, 치직 무언가를 볶는 소리 따위가 차례로 지나가고 솔솔 구수한 향이 풍겨 오기 시작했다. 코를 킁킁거려 맡는 것만으로 참으로 행복해지는 냄새였다. 그 행복에 겨워, 한영은 자신도 모르는 새 마음속에 숨긴 상자의 잠금장치를 느슨히 풀고 말았다.

“재환아.”

뽀얀 국물 위로 휘휘 계란을 풀던 재환이 ‘응?’ 하며 뒤를 돌았다. 예외 없이 어둑한 방 안에서 홀로 반짝반짝 빛나는 재환을 보며, 한영은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좋아해.”

“어?”

한 손에 국자를 든 재환의 눈이 커다래졌다. 보글보글 국 끓는 소리가 일순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을 메웠다. 이윽고 흐르던 침묵은 한영이 흡,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잔잔히 깨졌다.

“북엇국. 나 북엇국 진짜 좋아해.”

잠시간 멍한 표정을 유지하던 재환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하기도 했다. 한영도 재환을 따라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사이 가슴 깊은 곳에서 철컹,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마침 이리 와 보라는 재환의 손짓에 한영은 내도록 앉아 있던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다.

재환 뒤에 다가선 한영은 이 정도는 봐줘, 라는 마음으로 품 넉넉한 티셔츠에 감싸인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턱을 댄 곧은 어깨 너머로 냄비 안에서 한가득 끓고 있는 고운 빛깔의 국물이 보였다. 한 국자 뜬 재환이 폴폴 김이 나는 국을 호호, 불었다.

“자. 간 좀 봐 봐.”

한영의 입 앞에 국자가 내밀어졌다. 국자 끄트머리에 입술을 붙인 한영은 다정한 숨결이 식히고 간 국물을 호로록 빨아들였다.

“어때?”

말해 뭐 하겠는가. 역시나 국은 눈물 콕 나오도록 맛있었다. 건더기 같은 건 아직 먹어 보지도 않았지만, 이미 완벽한 맛이었다. 적어도 한영의 입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재환의 허리를 보다 꽉 안은 한영은 움칠하는 어깨 위로 이마를 문질렀다.

“재환아. 너무 맛있어. 진짜 좋아….”

“알았다니까. 간은 된 거지?”

“응.”

북엇국 진짜 좋아하네, 하며 쿡쿡거리는 재환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등에 맞닿은 가슴팍으로 전해졌다. 사실 더 좋아하는 건 따로 있었지만, 한영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 익숙해진 자기 암시였다.

“그럼 이걸로 국은 끝. 앉아서 기다려. 금방 상 차릴게.”

순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영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얌전히 상이 차려지기를 기다렸다. 하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혼자 부지런히 움직이는 재환을 멀거니 보고만 있기가 그래 한영은 다시 재환 가까이 다가갔다. 수저라도 놓을 요량이었다. 그 마음을 몰라 준 재환은 딱 1분만 참으라며 한영의 머리칼을 가볍게 흩뜨렸다. 거기에 또 속없이 가슴이 살랑거린 한영은 재환에게 쪽, 도둑 뽀뽀를 했다.

좁은 공간 가운데 놓인 앉은뱅이책상 위로 제법 그럴싸한 한 상이 차려졌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국, 뽀얀 쌀밥, 멸치볶음이니 메추리알장조림이니 하는 밑반찬들. 아무리 제집 냉장고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해 주고 간 반찬이 넘쳐나도 한영은 혼자 있을 때면 늘 대충 때우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재환과 함께 있으니 이리도 마음 포근해지는 호사를 누렸다. 봉긋하게 광대가 부푼 얼굴에 그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반찬은 시장에서 사 온 거야.”

혹시 몰라 재환이 덧붙인 말에도 설렘이 담긴 미소는 거두어지지 않았다. ‘잘 먹을게.’ 하며 한영은 냉큼 숟가락을 들었다.

비슷한 미소를 입가에 건 재환이 후루룩후루룩 국을 잘도 떠먹는 한영을 맞은편에서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단한 요리도 아닌데, 저리 맛있게 먹으니 절로 뿌듯함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북어채를 상시 구비해 두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꼭 엄마 같은 마음으로 밥 먹는 한영을 지켜보던 재환은 조금 뒤늦게 밥숟갈을 떴다. 그러다 문득 한영의 손에 쥐인 젓가락으로 시선이 가 닿았다. 기다란 쇠젓가락 사이에 야무지게 집어져 있는 것은 메추리알이었다. 갈색의 반질반질한 덩어리는 금방 오물거리는 입술 사이로 쏙 사라졌다.

“유한영, 너….”

“응?”

“젓가락질 이제 되게 잘하네.”

꿀꺽 입 안의 음식을 삼킨 한영은 설핏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젓가락 쥔 손을 몇 번 움칠거리다가, 오목한 접시에 담긴 메추리알을 집었다. 떨어뜨리기 전 재빨리 재환의 입 앞으로 내밀자 머뭇거리던 재환이 메추리알을 받아먹었다.

“젓가락 연습 많이 했어. 이제 콩도 메추리알도 잘 집어.”

한영이 준 메추리알을 우물우물 씹어 삼킨 재환은 아…, 했다. 그가 열심히 운동한 이유와, 또 젓가락질을 연습한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에서였다. 아마도….

“나한테 잘 보이려고?”

“응.”

밥 한 숟갈을 크게 떠 풍덩 국에 말던 한영은 유순하게 답했다. 한영이 내보이는 저런 솔직함은 늘 재환의 가슴을 멋대로 주물럭거렸다. 한영을 따라 국에 밥을 말며, 재환은 자신의 진심도 툭 꺼내어 보였다.

“나도 그래.”

“응…?”

“북엇국. 너한테 잘 보이려고 끓인 거야.”

한영이 떠 올리던 밥알과 국물이 후두두 다시 국 안으로 떨어졌다. 그중 몇 방울은 그릇 밖으로 튀어 깨끗하던 상 위에 크고 작은 동그라미를 찍었다. 일부는 잡티 없이 하얀 얼굴에 방울방울 맺히기도 했다. 여기보다 훨씬 더 큰 집에서 난장판 된 부엌을 정리한 후 함께 북엇국을 끓여 먹었던 그날과 참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재환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깨끗이 좀 먹어, 유한영.”

꼭 아이를 어르는 듯한 투로 타박을 날린 재환은 반쯤 몸을 일으켜 협탁 위 티슈 곽에서 쓱쓱 휴지를 뽑았다. 한 장으로는 국물이 낭자한 자리를 닦고, 또 한 장은 한영의 얼굴로 가져갔다.

투박하면서도 다정한 손길이 툭툭 입가와 뺨을 두드렸다. 재환에게는 정말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이를 받아 내는 한영은 다시금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

상자가 덜컹덜컹 흔들리고, 그 안에 숨긴 비밀 아닌 비밀이 함께 흔들렸다. 언제고 툭 잠금이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위험한 진동이었다. 왜 안 돼? 왜 나는 그걸 너한테 전하면 안 돼? 재환 앞에서 절대 뱉어서는 안 될 몹쓸 말들이 우르르 솟구쳐 올라 삽시에 목구멍을 조였다. 그게 조금 버거워, 한영은 질금 눈물을 흘렸다.

“유한영…?”

새빨개진 눈시울에 볼록 물기가 차오른 한영을 보며 재환은 더없이 당황했다. 무릎걸음으로 앉은뱅이책상을 돌아 얼른 한영 옆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떨군 한영의 어깨를 붙잡아 이쪽을 보도록 몸을 틀었다.

“유한영, 왜 그래.”

대답을 않고 한영은 살래살래 고개만 저었다. 재환의 초조함이 커졌다. 얼굴을 기울여 어떻게든 한영의 표정을 살피려고 할 즈음, 먹먹히 젖은 목소리로 힘 탁 풀리는 답이 들려왔다.

“맛있어서….”

“뭐?”

“북엇국 맛있어서 그래. 재환이 너가 끓여 준 게 너무 좋아서.”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쓱 문지른 한영이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말간 뺨 위로 갈래갈래 눈물 길이 나 있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어설퍼 보이는 미소가 쿡쿡 재환의 마음을 찔렀다. 잠시 눈썹 사이를 좁혔다 푼 재환은 두 팔을 넓게 벌려 한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얼굴 옆에 붙은 작은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었다.

“앞으로 더 많이 끓여 줄게.”

“응.”

“질릴 때까지 끓여 줄게.”

“응.”

다시 답 잘하는 아이로 돌아온 한영을 재환은 한참이고 보듬어 주었다. 밥 먹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재환은 한영의 예쁜 웃음이 참 좋았고, 가능하다면 항상 그렇게 웃게 해 주고 싶었다. 사실 방법은 하나일 텐데, 아직 재환은 그걸 몰랐다.

* * *

대회가 끝나고 약 2주 후, 나름 기다리고 있던 상금이 지우 이름으로 만든 밴드 통장에 입금되었다. 더 숨의 멤버들은 이것저것 사 들고 한영의 집에 모여 다시금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뭐, 그래 봤자 그냥 먹고 마시는 자리라는 점은 변함없었다.

지우가 처음 제안했던 대로, 넷은 상금 절반을 현재 작업 중인 EP 앨범에 쓰기로 했다. 아예 나머지도 밴드 공금으로 남겨 둘까 했지만, 그래도 기분인데 용돈 삼아 각자 조금씩 나누자는 데에 모두 의견을 같이했다. 반으로 나눈 돈을 또 넷으로 쪼개니 기실 한 사람당 돌아가는 금액이 크지는 않았으나, 재환에게는 나름 달가운 돈이었다.

이튿날, 재환은 평소 조금씩 모아 두었던 아르바이트비를 보태 그렇게 벼르고 벼르던 새 음악 장비를 샀다. 따라서 몇 달간은 또 영락없이 손가락 빨며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책상 위에서 번쩍거리는 새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모니터 스피커를 보면 그러한 걱정이 단숨에 훅 날아갔다. 이것으로 집에서도 얼추 믹싱 작업이 가능해졌으니,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다만, 그 결과 다른 한 명은 하나도 신나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자정이 다 된 밤, 제 방 피아노 앞에 앉아 의미 없는 음을 뚱땅거리던 한영은 악보 두는 자리에 엎어 놓았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재환아 뭐해?’라는 메시지를 보낸 지 벌써 1시간이 지났건만, 아직까지도 재환은 답이 없었다. 귀찮게 하기 싫어 더 메시지를 보내지도 못한 채 한영은 다시 핸드폰을 좁은 턱 위에 엎어 두었다. 서운함이 뚝뚝 흐르는 한숨을 길게 뱉으며 쿵, 건반 위에 이마를 박았다. 아주 듣기 싫은 불협화음이 났다.

같은 동작을 몇 번이고 반복해 더 더 시끄러운 소리를 낼 즈음, 핸드폰 진동하는 소리가 엉망진창 울리는 피아노 음을 가르며 귓구멍으로 꽂혔다. 앞으로 고꾸라졌던 상체를 벌떡 일으킨 한영은 서둘러 피아노 보면대로 손을 뻗었다. 엎어져 있는 틈새로 가느다랗게 액정 빛이 새어 나오는 핸드폰을 급히 집는데, 그대로 주룩 미끄러진 기계가 우당탕 건반을 누르고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허리를 숙여 냉큼 줍자 화면 한가운데로 쩍 하니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금을 따라 글자 하나가 어긋난 메시지가 한영을 속상하게 했다.

[믹싱]

‘믹싱해’라든가, ‘믹싱하고 있어’라든가 얼마든지 더 길게 적어 보내 줘도 될 것을 재환은 이다지도 무뚝뚝했다. 원래는 하나도 안 무뚝뚝하다는 걸 아는데, 정이 없어도 너무 없는 두 글자를 보고 있으려니 그리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꾸 부루퉁해지려는 입술을 감쳐문 한영은 최대한 침착히 톡톡 액정을 두드렸다. ‘그럼 많이 바빠?’ 하고 적당히 간결한 문장을 적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제, 또 지루한 기다림과 싸울 시간이었다.

한영은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EP 앨범에 실릴 곡들을 차례대로 한 번씩 치며 노래했다. 중간까지는 그럭저럭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I Miss You〉를 부를 때는 하릴없이 감정이 한가득 실렸다. 한영은 재환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입 맞췄던 게 벌써 나흘도 전이니 당연했다.

이렇게 재환을 보는 빈도가 줄어든 건 아마 그가 집에 새 장비를 들이고 난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들뜬 얼굴로 뭘 샀다, 뭘 샀다 하기에 처음에는 한영도 잘됐다며 같이 좋아해 줬다. 그런데 얼마나 작업에 몰두한 건지, 요즘 재환은 합주 때가 아니면 만나기도 어려웠다.

물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재환이 평소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쁘다는 건 잘 알았다. 거기에 틈틈이 합주하고, 녹음하고, 심지어 집에서 믹싱까지 하고 있으니 단둘이 볼 틈이 줄어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렇게 연락마저 잘 안 되면 한영은 진심으로 애가 탔다. 그러다 연락 문제로 재환을 탓할 명분이 제게는 없음을 깨닫고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그러다 또 굳이 안 해도 될 생각까지 해 버리고는 했다. 질릴 때까지 북엇국 끓여 준다고 했으면서. 아직 질리려면 한참 남았는데. 재환아,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참으로 못난 생각들이었다.

오늘도 그렇게 못난 생각을 하게 되는 날들 중 하나였다. 대회에서 2등을 안 했다면, 상금을 안 받았다면, 그걸로 재환이 새 장비를 안 샀다면. 그랬다면 지금쯤 여기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을 텐데.

우후죽순 돋아난 몹쓸 가정들이 손써 볼 새 없이 머릿속을 꽉 채울 무렵, 그렇게 기다리던 재환의 메시지가 금 간 핸드폰 화면에 반짝 떠올랐다. 혹 또 한 번 핸드폰을 떨어뜨려 아예 고장이라도 나 버리는 날엔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그리되면 가끔 오는 연락조차 받을 수 없었다. 최대한 조심조심 핸드폰을 집은 한영은 게슴츠레 뜬 눈 앞으로 화면을 가져갔다.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진짜….”

너무해. 일말의 기대가 서렸던 얼굴이 순시에 팍삭 어두워졌다. 이번에도 화면에 찍힌 두 글자가 문제였다.

[ㅇㅇ]

따지고 보면 저건 글자도 아니었다. 바쁘냐는 물음에 동그라미 두 개가 뭔가. 의미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한영은 둑 터진 듯 재환을 향한 서운함이 넘쳐흘렀다.

쾅, 소리가 나게 피아노 뚜껑을 덮은 한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를 도로 피아노 밑에 넣지도 않고 침대로 가 털썩 엎어졌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으로는 거듭 ‘재환아’를 중얼거렸다. 그 뒤에 오는 말은 전부 엇비슷했다. 재환아, 보고 싶어. 재환아, 나 안 보고 싶어? 재환아,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섭섭함, 그리움, 외로움 따위에 잠식돼 한참이나 꼼짝을 못 하던 한영은 그대로 깜빡 잠에 빠졌다. 꿈에서라도 재환을 만났으면 참 좋았으련만, 그런 달콤한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한영은 소위 말하는 개꿈이나 잔뜩 꿨다. 태군이 난데없이 장발을 하고 나타나는 둥, 지우가 애인이 생겼다는 말도 안 되는 선언을 하는 둥…. 그런데 이상하게 재환만 안 나왔다.

결국 꿈속에서까지 재환을 찾던 때,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번쩍 눈을 뜬 한영은 침대 시트에 화면이 닿아 있던 핸드폰을 천천히 뒤집었다. 아까는 ‘ㅇㅇ’이 왔으니, 이번에는 ‘ㅁㅁ’ 따위가 온 걸지도 몰랐다. 제발 아니길 바라며 화면에 뜬 내용을 확인했다.

눈동자에 사각 형태의 빛이 고인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입까지 벙긋거리던 한영은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 숙여 허벅지에 올린 핸드폰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확 가슴팍에 안았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작업했어. 집중하느라 아까는 답도 제대로 못 했네. 미안. 잘 자.]

그토록 기다렸던 보고 싶다는 말도, 안 보고 싶냐는 물음도 없었다. 딱딱하다면 참 딱딱한 메시지였다. 그럼에도 문장을 이루는 낱말 하나하나가 이루 말 못 할 설렘이 되어 넘실넘실 한영의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이러니까. 재환이 네가 자꾸 이러니까….

꿇은 무릎을 풀지 않은 채 한영은 풀썩 몸을 옆으로 누였다. 위로 뜬 눈을 좌우로 굴리며 자근자근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러면 못나게 울거나, 못나게 웃거나 둘 중 하나는 하게 될 것 같았다. 재환이 잘 자라고 그랬는데, 아무래도 그러지 못할 성싶었다.

반 바퀴를 데구루루 굴러 다시 침대에 엎드린 한영은 푹신한 베개에 턱을 얹었다. 핸드폰을 쥔 손도 함께 올리고서 찬찬히 메시지 창에 문장을 입력했다. 화면을 톡톡 두드려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 결국에는 그냥 가장 솔직한 마음을 적어 보냈다.

재환이 너도 잘 자. 내 꿈에 나왔으면 좋겠다.

“오빠, 머리 많이 자랐네요?”

“그래?”

카운터 뒤에 함께 서 있던 희연이 건넨 말에 재환은 쓱 뒤돌아 냉장고 유리 위로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안 그래도 대회가 끝나면 한번 머리를 자르려고 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벌써 눈머리를 덮을 정도의 길이가 되어 있었다. 근래 집에서 노트북 앞에만 붙박여 있던 탓이 컸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은 집 가는 길에 꼭 좀 잘라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앞을 본 재환에게 희연은 요 근처 본인 다니는 미용실 선생님이 남자 머리를 그렇게 잘 자른다는 얘기를 조잘거렸다. 지난달이었나. 남자 손님에게 번호를 받고, 또 스토킹 비슷한 것까지 당했던 희연은 한동안 가게에서 일할 때면 어딘가 겁먹은 기색을 내비치고는 했다. 하지만 재환이 몇 번 퇴근하는 희연을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준 후, 문제의 손님은 더 이상 가게에 나타나지 않았다. 희연도 금방 원래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행인 일이었다.

재환이 몇 번 얘기에 맞장구쳐 주자 희연은 더욱 신나 아예 재환의 핸드폰으로 미용실 주소를 보내 주었다. 이를 확인한 재환이 진짜 한번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할 즈음 카페 문이 열렸다. 이윽고 들어서는 손님을 확인한 재환의 얼굴에 놀라움, 반가움이 동시에 서린 미소가 큼지막하게 번졌다.

“장태군!”

“우리 째환이 일 잘하고 있어?”

벌써 겨울인 양 목에 둘둘 두른 머플러를 풀며 태군이 카운터로 왔다. 그렇게 추우면 모자를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긴 했지만, 일단 그런 속마음을 감추고 재환은 ‘어쩐 일이야?’ 하고 물었다. 그러다 카운터 모서리를 두 손으로 짚고 선 태군 옆쪽으로 휙 눈이 돌아갔다. 우연찮게 같이 들어온 거라 생각했던 여자 손님이 태군 옆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재환은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웃음이 나는 걸 참는 듯한 태군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쑥 눈썹을 들었다 내리며 ‘누구?’ 하는 눈짓을 보내자 태군의 입매가 끝내 크게 벌어졌다.

“아, 여기는 소영이.”

“안녕하세요.”

단발머리에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꾸벅 인사했다. 얼결에 재환도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새 태군의 손이 그녀, 그러니까 소영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이를 보는 재환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재환 옆에 있던 희연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우와, 드럼 오빠 여자 친구분이세요?”

“아, 네. 제 여자 친구예요.”

쑥스럽다는 듯 태군이 반지르르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태군에게 손이 잡힌 소영도 비슷한 표정으로 수줍게 웃었다. 보는 쪽이 다 부끄러워지는 반응에 재환은 저도 모르게 큼큼 헛기침했다. 저런 친구의 모습이 영 낯설게 다가왔다.

“연락 좀 하고 오지 그랬어. 놀랬네.”

“아, 이 근처에 맛있는 파스타집 있다 그래서. 먹고 나오다 갑자기 생각나드라. 너 여기서 일하는 거.”

‘아, 저 거기 알아요!’ 하며 희연이 반색했다. 그러자 태군은 ‘거기 짱 맛있던데요?’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이 꺅꺅거리는 소리가 제법 커 재환은 급히 매장 안을 눈으로 훑었다. 한차례 붐비는 타이밍이 지나가고 손님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러다, 소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 대회 날 저도 갔었는데. 무대 되게 멋있었어요.”

감사합니다, 하고 답하던 재환은 눈을 번쩍 떴다. 재즈 페스티벌에서 태군과 메탈 얘기를 나누다 친해졌다던 미지의 소녀와, 현재 눈앞에 있는 이가 동일 인물임을 불현듯 깨달은 까닭이었다. 물론 태군의 말을 의심했던 것은 아니나, 재환으로서는 놀라움이 적잖았다. 상대도 메탈을 좋아한다기에 막연히 태군과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렸던 게 사실이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이미지냐 하면….

재환은 희연과 근처의 맛집 얘기 삼매경에 빠진 태군을 흘긋 보았다. 그제야 오늘 제 친구의 차림이 꽤나 멀쩡, 아니, 깔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청바지에 평범한 니트를 받쳐 입은 태군은 마찬가지로 위에 평범한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평소 눈썹에 하고 다니던 피어싱도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눈에 띄는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점이 참 태군다워 재환은 어렴풋이 웃음이 지어졌다. 그 웃음을 눈치챈 태군이 지레 민망한 표정을 하며 다시 소영의 손을 쥐었다.

“소영이 뭐 마실래?”

소영은 가을 한정 메뉴로 나온 밤 라테를 시켰고, 태군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래도 저를 보러 온 손님이라 재환은 자신이 계산하겠다 했는데, 태군은 끝까지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얻어먹는 걸 마다하는 태군이 영 생소하게 느껴져 재환은 설핏 고개를 갸웃했으나, 저런 것도 다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이겠거니 싶었다. 음료가 담긴 쟁반을 들고 창가 쪽 자리로 가 앉는 두 사람을 보던 재환은 디저트 쇼케이스를 열었다.

“어, 오빠. 케이크는 왜요?”

“이건 내가 사게.”

아하, 한 희연이 얼른 쟁반을 꺼내 포크 두 개를 올렸다. 그 옆에 물티슈도 놓으며 넌지시 재환에게 속삭였다.

“근데, 드럼 오빠 여자 친구분 되게 귀엽네요.”

“그러게.”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인상도 비슷하고.”

같은 생각을 했던 재환은 희연이 준비해 준 쟁반에 케이크 접시를 담으며 ‘나도 그런 것 같아.’ 하고 답했다. 때마침 그 잘 어울리는 커플이 잔을 바꿔 사이좋게 서로의 음료를 맛보고 있었다. 재환은 가뿐히 쟁반을 들고 주위로 아주 달콤한 분위기를 솔솔 풍기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자.”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자 태군의 눈이 커다래졌다. 소영도 놀란 듯한 얼굴로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에게 이게 뭐냐는 물음을 받기 전, 재환은 먼저 덤덤히 입을 뗐다.

“서비스.”

일순 태군의 눈빛에 ‘새끼….’ 하는 기색이 서렸다. 아마도 ‘존나 고맙다!’라는 말을 하지 못해 입이 꽤나 근질거릴 터였다. 말 안 해도 안다는 듯 재환은 태군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린 뒤 다시 카운터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새 두 사람은 서로 입에 케이크를 떠먹여 주고 있었다. 그러고는 못내 부끄러운지 너 나 할 것 없이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옆에서 희연이 ‘우와, 짱 부러워….’ 하고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또 그러게, 라고 대답할 뻔한 재환은 흠칫 놀라 꾹 입을 다물었다. 태군과 그의 여자 친구를 보면서, 왜 자꾸 한영이 생각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젯밤 꿈에서도 만났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재환은 한영이 보고 싶은 듯했다.

미용실 문을 열고 찬 바람 부는 길가로 나온 재환은 유난히 써늘하게 느껴지는 목덜미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생각보다 머리가 더 긴 상태였던지, 잘려 나간 길이가 짧지 않아 영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딱 그만큼 통장 잔고도 가벼워졌다.

평소 재환은 집 근처에 있는 남성 전용 미용실, 다시 말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는 했다. 방금 갔던 미용실에 비하면 금액은 말할 것도 없이 싸고, 또 시간도 훨씬 덜 걸렸다. 한데 오늘은 이상하게 변덕이 일어 희연이 말해 줬던 곳으로 걸음이 향하고 말았다. 당분간은 돈을 좀 아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누군가한테 ‘멋있어’ 한마디가 듣고 싶어 그랬다.

제가 생각해도 참 속없는 이유라 재환은 피식피식 허무한 웃음이 샜다. 어쩔 수 없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안 된다는 희대의 명언이 떠올랐다. 그래도 이왕 돈 쓴 거, 좀 보기 좋은 호박이라도 되면 다행이었다.

재차 목덜미로 가려는 손을 아예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재환은 문득 눈을 들어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를 보았다. 몇 달 전만 해도 푸릇푸릇한 색채를 터뜨리던 거리의 가로수들이 이파리를 거의 떨군 채 꽤나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짧은 가을이 가고 곧 겨울이 온다는 방증이었다. 기실, 한껏 쌀쌀해진 날씨만 보면 이미 겨울이 온 것 같기도 했다. 저기 저렇게 벌써 트리를 내놓은 가게들도 있지 않은가.

이러다 한 해가 가는 것도 금방이겠다 생각하며 재환은 어둑어둑 해가 진 거리를 걸었다. 맵찬 바람이 짧아진 머리칼을 파고들자 절로 평소 쓰고 다니던 모자 생각이 났다. 그 모자를 장 깊숙이 집어넣게 한 장본인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집 가는 길에 들른 슈퍼에서 치약이나 휴지 따위의 생필품과 찬거리를 산 재환은 제법 묵직한 봉지를 두 손에 들고 낡은 연립 주택의 계단을 올랐다. 안 그래도 최근 껌뻑껌뻑하는 게 맛이 간 듯했던 복도 센서 등이 이제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창으로 어스름히 들이치는 가로등 불빛을 의지해 껌껌한 복도를 걸었다. 막 문 두 개를 지나쳤을 즈음, 제집 현관문 앞에 웅크려 있는 커다란 덩어리를 발견했다.

“유한영…?”

덩어리가 위로 길게 늘어나자 어둠 속에서도 뽀얗게 빛나는 얼굴이 드러났다. ‘안녕.’ 하고 재환에게 인사한 상대는 작게 코를 훌쩍였다. 재환의 눈이 푹 구겨졌다.

“추운데 왜 그러고 있어. 연락을 하지.”

도리 없이 타박하는 말을 뱉어 버린 재환은 순간 아차 했다. 양손에 장 본 것들을 쥐고 걷는 중 주머니 속 핸드폰이 잠깐 진동하는 느낌이 났었는데, 이제 보니 마냥 느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전화했었는데, 안 받아서.”

속으로 ‘아씨….’를 중얼거린 재환은 얼른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현관에 대충 신발을 구겨 벗고서 겉옷도 벗지 않고 다용도실로 달려갔다. 부산스럽게 좁은 공간을 뒤적인 끝에 비닐에 싸여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작은 전기 히터를 찾아냈다. 그 위로 덮인 먼지가 풀풀 날리건 말건 냅다 비닐을 벗겼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둘둘 말린 코드를 풀고 플러그를 꽂은 뒤, 인제는 한영의 지정석이 된 매트리스 앞으로 히터를 갖고 갔다. 발갛게 열선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히터 위로 손바닥을 가까이 대 보며 얌전히 앉아 있는 한영에게 물었다.

“얼마나 기다렸어?”

‘30분…?’ 하는 대답에 재환은 낮게 헛숨을 터뜨렸다. 보기만 해도 꽁꽁 언 듯한 손을 쥐어 보자 무시 못 할 한기가 전해져 왔다.

“날도 추운데. 감기 걸리려고.”

안타깝게 중얼거린 재환은 제 온기를 전하듯 한영의 손을 꾹꾹 주물렀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오늘 태군과 그의 여자 친구를 보며 괜히 한영을 떠올린 게 지금 상황의 원인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걸 포함해 전화를 못 받은 것도,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게 한 것도 다 너무 미안해 재환은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런데 저 속 편한 분홍 머리는 대뜸 엉뚱한 대사를 꺼냈다.

“오늘 재환이 멋있다.”

그러더니 빙그레 웃는 것 아닌가. 순간 대꾸할 거리를 잊은 재환은 더욱이 낯빛을 흐렸다. 분명 한영에게서 참 듣고 싶은 칭찬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같은 때는 아니었다.

“머리 잘랐어? 잘 어울려.”

그 마음도 모르고 한영은 순하게 웃는 얼굴로 수줍은 듯 말했다. 그래도 재환이 답이 없자 큰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재환은 억지로 인상을 풀고 ‘아,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집까지 와 준 한영 앞에서 계속 무거운 표정만 보일 수는 없었기에. 그래 봤자 한영처럼 예쁘게 웃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한영은 뭐가 좋은지 재환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춰 왔다.

“더 잘생겨 보여.”

이 또한 아마 듣고 싶은 말이었으리라. 결국 재환은 눈썹 끝을 떨어뜨리며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다행이네. 생각보다 많이 잘라서 어색해.”

그러자 이번에는 한영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재환 가까이 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갈색 눈동자가 눈썹 뼈, 콧잔등, 인중 등을 따라 찬찬히 움직이는 게 선명히 느껴져 재환은 하릴없이 귀가 붉어졌다. 어정쩡하게 뒤로 당긴 턱이 불편했다.

“안 어색해. 멋있어.”

나름의 관찰, 내지는 평가를 끝낸 한영이 확신에 찬 듯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묘하게 얄미워 보여 재환은 저도 모르게 한영의 하얀 볼을 콱 깨물었다. 돌연 나타나 사람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고, 또 죄책감을 팍팍 심어 준 것에 대한 작은 앙갚음이기도 했다. 재환이 보인 생소한 행동에 한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영이 콕콕 잇자국이 남은 뺨을 문질렀다. 그사이 재환은 아직 벗지 않은 점퍼 주머니에서 그 흔한 고리조차 매달리지 않은 열쇠를 꺼냈다. 작고 납작한 쇳덩어리를 그럭저럭 찬 기운이 가신 손에 쥐여 주자, 한영의 눈이 보다 거대하게 뜨였다. 저러다가 꼭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앞으로는 들어와 있어. 알았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한영은 작디작은 목소리로 ‘알았어.’ 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아…!’ 소리를 터뜨렸다. 휙 몸을 옆으로 틀어 가지고 왔는지도 몰랐던 작은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나도 줄 거 있어.”

쇼핑백에서 나온 것은 기타 이펙터 두 개 정도를 합친 크기의 종이 상자였다. 재빨리 상자를 뜯은 한영은 안에서 무슨 용도인지 좀체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을 꺼내 재환에게 보여 주었다. 옆으로 긴 타원 형태를 띤 것이, 거울 같기도 하고, 납작한 도시락 통 같기도 하고. 한영이 이리저리 만진 후 거울 부분에 반짝 불이 들어오고 나서야 재환은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계였다. LED 시계.

“웬 시계?”

대답 대신 ‘잠깐만.’ 한 한영은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본 뒤 시계 윗부분에 있는 버튼을 꾹꾹 눌렀다. 띡띡 울리는 기계음과 함께 ‘00:00’에 맞춰져 있던 숫자가 한 자리씩 현재 시각을 찾아 갔다.

이윽고 ‘19:31’이 표시된 시계를 들고 벌떡 일어선 한영은 재환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휙휙 눈을 굴리며 무언가를 살피는 듯하다가, 원래 있던 작은 아날로그시계를 치우고 그 자리에 제가 가져온 시계를 놓았다. 숫자가 어찌나 밝은지, 재환 앉은 곳에서도 훤히 보였다. 물론 뿌듯함이 담뿍 스민 표정으로 웃고 있는 한영의 얼굴보다는 밝지 않았다.

어느새 시계를 두고 돌아온 한영이 무릎 꿇고 앉아 재환의 손을 꼭 쥐었다. 아까와는 마치 반대가 된 듯한 상황이었다.

“재환아. 작업하다가, 저거 숫자가 뒤에 영영 될 때마다 내 생각 해 줘.”

“…뭐?”

알아먹을 듯 못 알아먹을 듯한 얘기에 재환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속뜻을 파악해 보려 들은 바를 곱씹는데, 재환의 손을 붙잡은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한층 달콤한 투로 간절한 부탁이 이어졌다.

“너 믹싱하면 시간도, 나도 까먹잖아. 근데 저 시계는 잘 보이니까. 저거 보고 내 생각 해 줘. 응?”

재환 가까이 얼굴을 붙인 한영이 콩, 이마를 맞대었다. 속눈썹이 스칠 거리에서 보내오는 눈빛이, 차츰 온기가 돌기 시작한 손의 따스함이 감히 거절을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응. 그럴게.”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매시간 한영을 떠올리면 되는 거였다. 사실 지금도 재환은 한영의 생각을 충분히 많이 하고 있었다. 옆집 고시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모니터 스피커의 볼륨을 높이고 간질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을 때면, 어쩔 수 없이 재환은 그가 생각나고 또 보고 싶어졌다. 당사자는 영 모르는 눈치 같다만.

“정말…?”

“응.”

그래서인지 재환은 어렵지 않게 보다 확신을 담아 답할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이런데 너는 어떤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갓 사귄 커플이나 주고받을 법한 질문을 무심코 툭 던졌다.

“너는. 넌 얼마나 내 생각 하는데.”

“나…?”

고개를 끄덕이자 인중 근처에서 숨결을 흩트리던 붉은 입술이 귓가로 옮겨 갔다. 주저함도 없이, 약간의 부끄러움을 안은 고백이 소곤소곤 흘러들었다.

재환아. 난 네 생각 엄청 많이 해. 밥 먹을 때도 하고, 피아노 칠 때도 하고, 오줌 쌀 때도 하고. 아, 잘 때도 해.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양치하면서도….

아직 한참은 더 남은 이야기가 불현듯 뚝 끊겼다. 그 자리를 흡, 숨 삼키는 소리가 대신했다. 한영의 목을 두 팔로 콱 끌어안은 재환은 항상 네 생각만 한다는 말을 길게도 읊던 입술에 허겁지겁 입 맞췄다. 앞니가 덜거덕 부딪치고, 금세 서로의 입가가 타액으로 질척하게 젖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읍, 재환….”

전에 없이 거칠게 다가오는 재환의 모습은 한영을 적잖게 당황시켰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숨과 타액을 착실히 받아 마시면서도 한영은 다소 어쩔 줄을 몰라 평소의 능숙했던 태도를 잃었다. 재환이 부딪쳐 오는 대로 이리저리 고개가 비틀리다가 덥석 옷깃이 쥐어 잡혔다.

훌떡 자리에서 일으켜지는가 싶더니 매트리스 위로 냅다 등이 내리꽂혔다. 낡은 스프링이 날카롭게 삐걱대는 소리가 요란했으나 미처 귀에 담을 겨를이 없었다. 재환이 입고 있던 얇은 가을용 점퍼가 툭, 바닥으로 떨어지며 까만 머리통이 다리 사이에 붙었다. 그곳에서 불붙은 듯 움직인 손이 벨트를 끄르고,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재환아…!”

어느새 드로어즈까지 아래로 끌어 내린 손이 반쯤 발기한 성기를 움켰다. 깜짝 놀랄 정도로 뜨거운 손바닥의 열기에 흠칫하는 것도 잠시, 더 뜨거운 곳으로 성기가 빨려 들어갔다.

“읏…!”

숨이 턱 멎을 만큼 빨아올리는 힘이 거셌다. 팔꿈치로 허리 뒤를 짚어 가까스로 상체를 지탱한 한영은 성기를 집어삼킬 기세로 빨고 조이는 재환을 말리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씻지도 않았다거나, 이대로 가다가는 금방 쌀 것 같다거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금세 부옇게 흐려졌다. 젖은 입술이 기둥을 문지르고 혀가 요도구를 쑤실 때마다 어찔한 감각이 척추를 달렸다.

그러다 아주 잠시, 한영은 다행스럽게도 숨 쉴 틈을 얻었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세게 성기를 빨던 재환이 마침 길게 침을 늘어뜨리며 상체를 세웠다. 지금이라도 좀 진정시켜 볼 생각에 어깨를 붙잡는데, 이미 재환의 손은 한영의 바짓단을 쥐어 쭉 잡아당기고 있었다. 벨트 버클이 덜렁덜렁 흔들리며 어느새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갔다. 뒤따라 성기만 밖으로 나와 있던 드로어즈도 같은 수순을 밟았다. 이제는 완전히 맨살이 드러난 다리 위로 재환이 납작 엎드렸다.

“재환아, 일단 씻고….”

“가만있어.”

강압적인 투는 아니었으나 한영의 입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이어지는 말이 더욱 그러하게 만들었다.

“그냥 지금 빨고 싶으니까.”

솔직한 마음을 짧게 내뱉은 재환은 그새 완전히 발딱 선 한영의 성기를 입 안에 머금었다. 여전히 남자 좆을 빠는 요령 같은 건 몰랐지만, 어떻게 하면 흥분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어차피 저도 같은 게 달렸고, 한영에게 꽤 여러 번 받아 보기도 했으니까. 그 기억을 더듬어 재환은 다시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환, 아…. 읏.”

다만 아까부터 마음이 급해 생각처럼 힘 조절이 잘 안 되었다. 하여 춥춥 빠는 소리가 급격히 요란해지고, 금방 입 주변이 타액으로 흥건히 젖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것은 기둥을 타고 뚝뚝 흘러내려 털 한 올 없는 매끈한 사타구니에 고였다. 그 자리에 코끝이 닿을 정도로 재환은 깊이깊이 성기를 삼키고, 또 반쯤 뱉기를 반복했다. 어서 한영의 몸을 더 뜨겁게 만들 일념뿐이었다.

“하아…, 아….”

움푹움푹 길게 근육이 패며 들썩이는 허벅지를 내처 두 팔로 감아 제 얼굴 양옆에 고정시켰다. 그 상태로 빨아올리는 속도를 높이자, 입에 담긴 침에 성기 끝에서 흐른 선액의 묘한 맛이 섞였다. 저도 같은 것을 흘려 속옷에 작은 얼룩이 생겼으나, 거기까지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재환을 멈춰 세우는 건 진작 포기하고, 사정을 참아 볼 여유도 함께 잃은 한영은 끝내 제 다리 사이에서 급히 움직이는 작은 머리통으로 손을 가져갔다. 짧아진 길이만큼 잘생긴 얼굴을 더 훤히 드러내 주던 머리칼 안에 손을 넣어 손바닥에 살짝씩 힘을 주었다. 매트리스에 닿은 엉덩이도 미세하게 위로 쳐올렸다. 원래는 재환이 제게 해야 할 행동인데, 지금 재환에게 받는 자극이 몹시도 거세 본능이 앞서고 말았다.

“읍….”

그런다 한들 재환에게는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재환은 한영의 성기를 더 세게, 더 열심히 빨았다. 거듭되는 마찰로 인해 입술이 홧홧하게 달아올라도, 하도 사타구니에 부딪혀 코끝이 얼얼해져도 한영이 쌀 때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재환은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하, 재환아…!”

시트 위에서 떠오른 허리가 둥글게 말리며 짧은 머리칼을 파고든 손가락의 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좁고 축축한 곳에 삼켜진 성기가 울컥울컥 정액을 토했다. 어서 재환의 머리를 떼어 내야 한다는 경고음이 시끄럽게 한영의 귓속을 울렸지만, 처음부터 재환을 막지 못했듯 그를 밀어낼 수도, 분출을 멈출 수도 없었다. 한참이나 이어진 사정이 끝났을 즈음에야 무책임하게 달아났던 이성은 다시 한영을 찾아왔다.

“아아….”

탈력감에 젖을 새도 없이 퍼뜩 일어나 앉은 한영은 울대를 꼴깍꼴깍 움직이는 재환의 입가에 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안타까움이 넘쳐 더없이 애타는 목소리가 흘렀다.

“재환아, 뱉어. 어…?”

다 삼켰는데 이러면 무엇 하나. 매끈하던 눈썹이 잔뜩 구겨진 한영을 보며 풋 웃은 재환은 입 주변에 묻은 침과 정액을 손등으로 쓱 훔쳤다. 몇 번 보았던 한영의 행동을 흉내 내 손등에 묻어난 것도 날름 혀로 핥자, 숫제 한영은 더 울상이 되었다. 낯빛까지 벌겋게 물들이고서 재환의 어깨를 붙잡아 짤짤 흔들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응? 왜 그랬어…. 왜 먹었어, 재환아.”

저러다 눈물까지 툭 떨굴 기세였다. 평소 제 것을 잘만 꿀꺽꿀꺽 삼켰던 걸 생각하면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었다. 울먹임 섞인 타박을 얼마간 더 들어 주던 재환은 머리칼과 비슷한 색이 된 뺨에 쪽, 하니 입을 맞추었다.

“싫었어?”

입은 다물되 눈빛에서 원망은 지우지 못한 한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재환의 입꼬리는 더 높이 위로 올라갔다.

“그럼 됐잖아. 너도 맨날 나한테 그랬으면서.”

사실 먹을 만한 맛이었냐 그러면 농담으로라도 그렇다 대답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토할 듯이 역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유야 명확했다. 한영의 것이었으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맛있든 맛없든 미쳤다고 남의 정액을 먹나.

“그래도….”

“됐어, 그럼. 사람 민망하게 자꾸 그럴 거야?”

얇은 머리칼이 팔랑팔랑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크게 저은 한영은 두 팔로 재환을 꽉 껴안았다. 제 아랫도리가 훤히 드러난 상태임도 잊은 듯 맞닿은 뺨을 비비며 꽤나 오랫동안 재환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 품이 싫지 않으니, 재환도 벗어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영이 귓속으로 작은 속삭임을 불어넣었을 때, 재환은 절로 흠칫 놀라 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뭐?”

“나도 빨고 싶어, 재환아.”

언제 울상을 드리웠냐는 양 한영의 표정이 제법 단호했다. 그만큼 재환의 당황이 커졌다. 한영이 말한 곳이 유두나 성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환은 뒷덜미로 오스스 소름이 돋아난 것을 느끼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아니, 거긴 좀….”

“안 돼?”

슬금슬금 몸을 뒤로 빼자 그 거리만큼 한영이 상체를 들이밀었다. 은근슬쩍 뻗어 온 손이 바지 위로 엉덩이를 감싸 한순간 재환을 확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대로 주욱 끌려간 재환은 하얗고도 탄탄한 허벅지에 미끄러지듯 올라앉는 자세가 되었다. 가까워진 갈색 눈동자에 유순함이 싹 걷혀 있었다. 재차 오싹오싹 소름이 끼치며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나도 해 주고 싶어.”

“읏….”

엉덩이를 더 바짝 당긴 손이 어느 틈엔가 바지 안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전체를 이용해 엉덩이 골을 살살 문질렀다. 딱 구멍에 도달하기 직전 쓱 올라가고, 또 쓱 올라가고. 이제는 다른 의미로 재환의 어깨가 움칠움칠 떨리며 허리가 꿈틀거렸다. 발기가 풀렸던 성기로는 다시금 슬슬 열이 몰렸다. 그만큼 한영의 손놀림은 야릇함을 잔뜩 품고 있었다. 제게 순하게 성기를 빨리던 남자는 어디 갔나 싶을 정도였다.

“응?”

대답을 재촉하듯 몰랑한 입술이 촉, 촉 소리를 내며 턱을 따라 간지러운 입맞춤을 남겼다. 귀밑의 여린 살에도 가볍게 붙었다가, 그 사이로 쏙 혀가 나왔다. 새빨간 혀는 끝이 뾰족해진 모양새로 느릿느릿 귓바퀴를 훑었다. 저 아래에서 손가락이 구멍 근처를 오가는 것과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그럴수록 아직 옷 하나 벗지 않은 재환은 숨이 밭아졌다. 바지 안에서 발기한 성기를 덮고 있는 속옷에는 또 작은 얼룩이 생겼다.

“야, 잠깐….”

“응, 이라고 해 줘. 재환아.”

세상에 이렇게 질척하고, 끈적하고, 야살스러운 부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속으로는 그리 볼멘소리하면서도, 재환은 결국 상대가 바라는 답을 들려주고야 말았다.

“…응.”

그러기 무섭게 겨드랑이 아래가 콱 붙잡혔다. 한영 위에 올라타 있던 몸이 번쩍 들리며 엇, 하는 순간 등이 매트리스로 꽂혔다. 삐걱삐걱 등허리 아래에서 요란스럽게 울리는 스프링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윗옷을 훌렁 벗어 던진 한영이 재환 위로 상체를 포갰다. 뺨, 입술, 목덜미에 수두룩한 입맞춤을 새기며 단숨에 버클을 푼 바지를 드로어즈와 함께 잡아 내렸다. 하나 남은 티셔츠는 벗길 여유도 없다는 듯 재환의 몸을 훌떡 뒤로 뒤집었다.

“으읏…!”

이미 한참 전 구겨지고 밀려난 시트에 가슴팍이 닿자마자 억센 악력으로 엉덩이가 움켜잡혔다. 하도 세게 쥐어 올록볼록 살이 튀어나온 볼기가 양옆으로 벌어지며 숨었던 속살이 드러났다. 이어질 행위를 직감한 재환이 이를 악무는 찰나, 이제는 그의 신체 중 가장 은밀하고도 민감한 부위가 되어 버린 곳에 습한 감촉이 쏟아졌다.

“허윽!”

단말마가 터지며 전신이 덜컥 튀어 올랐다. 그러나 접힌 두 팔이 허벅다리 뒤쪽을 꽉 누르고 있어 상체만 조금 들썩이는 꼴이 되었다. 그나마 자유로운 손으로 만만한 베갯잇을 꽉 그러쥔 재환은 발가락을 움칠거리며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괴란한 감각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끙끙거렸다.

“으응, 윽…!”

그토록 바라던 곳에 깊숙이 코를 박은 한영은 재환이 꿈틀거릴 때마다 함께 옴짝거리는 구멍에 쉬지 않고 입 맞췄다. 중간중간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기도 했다. 그리하여 재환의 하반신이 어느덧 거친 숨소리와 쪽쪽거리는 소리로 뒤덮였다. 매트리스 스프링이 꺼졌다 부풀며 위태롭게 토하는 소음보다도 컸다. 물론 가장 큰 건 재환이 줄줄 흘리는 신음이었다.

“하으, 읏…. 후응…. 흣!”

이렇게 높은 음조를 띠고 할딱거리는 제 소리도, 아랫도리 전체를 기어 다니는 듯한 축축한 느낌도 재환은 다 너무 낯설었다. 성기도 빨려 보고, 지금 저곳에 손가락도 넣어 보고, 최종적으로는 성기도 넣어 봤지만 그런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행위였다. 자극적인 면에서도, 수치스러운 면에서도. 사람 혼을 쏙 빼놓는 눈빛과 손길에 껌뻑 넘어간 저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으, 응…!”

아예 재환의 허벅지 밑으로 팔을 넣어 둥글게 감싼 한영은 촘촘한 주름과 거듭 마찰하던 입술 새로 길게 혀를 내밀었다. 그새 조금 흐물흐물해진 구멍을 혀끝으로 살살 건드리자 저 위에서 더 숨넘어가는 소리가 터졌다. 그것을 연료 삼아 한영은 옴찔대는 주름 위를 빠르게 덧그렸다. 그러다 입술을 붙여 쭈웁 빨아들이고, 또 혀로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그럴수록 재환의 헐떡임이 거세졌다.

“아아, 아…. 후윽…!”

이대로 아랫구멍만 내도록 빨리다가 픽 싸지를 것만 같은 오싹한 예감에 재환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기 전 차라리 제가 만지는 쪽이 낫겠다는 결론을 겨우 내리고서 하반신과 시트 사이에 끼어 있는 성기로 손을 내렸다. 꼭 사정한 것처럼 미끌미끌 젖은 기둥을 쥐고 조금이라도 편히 자위하기 위해 엉덩이를 위로 들었다. 하나, 그것은 결국 한영에게 더 빨아 달라고 구멍을 들이미는 셈이었다.

“끄윽, 윽…!”

작은 얼굴이 엉덩이 사이에 더 푹 파묻히며 벌름대는 구멍으로 뾰족한 혀끝이 파고들었다. 삽시에 머리 꼭대기까지 번진 질척질척한 기운이 재환의 정신머리를 엉망진창으로 헤집었다. 자위하기는커녕 손에 제대로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아랫도리에서 올라오는 습한 소리가 몇 배는 증폭되어 푹푹 귓속에 들이꽂혔다.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허으….”

결국 재환은 꺽꺽 신음하다 지쳐 쉬어 빠진 소리를 흘렸다. 그사이에도 혀는 바지런히 구멍을 들락거렸다. 그러니 여전히 허리는 꿈틀꿈틀 비틀리고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하지만 허벅지를 꽉 안은 팔이 풀리는 일도, 엉덩이 사이에서 한영이 고개를 드는 일도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지금 한영은 눈물 쏙 나올 만큼 넘치는 행복과 만족감에 퐁당 빠져 있었다. 제 여기가 얼마나 곱고 예쁜지 아마 재환은 상상도 못 할 터였다. 진짜 얼마나 예쁘냐면, 밤새 빨라고 해도 한영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재환이 알면 까무러칠 생각이었다.

입구가 침에 절어 퉁퉁 불 때까지 입 맞추고, 핥고, 쑤시던 한영은 재환이 거의 초주검이 되었을 즈음에야 슬그머니 얼굴을 들었다. 미약하게 들썩이는 어깨, 땀에 젖어 반짝이는 머리칼을 찬찬히 눈에 담다 살금살금 재환의 등을 타고 올라갔다. 쌕쌕 거친 숨을 내쉬는 재환의 귓가에 입술을 붙여 순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환아, 좋았어?”

부스럭거리며 베개에 박혀 있던 얼굴을 돌린 재환은 조금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한영을 보았다. 사람 잡아먹는 늑대인 건지, 순진한 양인 건지 당최 종잡을 수가 없는 한영 때문에 머리가 다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번들번들 침에 젖은 입가에 빙긋 걸린 미소를 보니 더 그러했다.

“너…. 사람을 아주 죽이려고….”

보나 마나 저 좋을 대로 해석한 한영이 한층 환히 웃었다. 아마 밑에 깔린 자세만 아니었어도 콧방울을 콱 꼬집어 줬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는 생각에 뒤늦게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한영의 눈이 흘끔흘끔 책상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재환의 눈도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20:24

와…. 시계에 훤히 밝혀진 숫자를 보는 순간 재환은 더욱이 황당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서로 빨기만 했는데 그새 훌쩍 1시간이 지났을 줄이야. 한데 어째서인지 눈을 깜빡거리며 시간을 보는 한영의 얼굴이 꽤나 시무룩했다.

“왜 표정이 그래.”

“8시 지났어.”

“그게 왜.”

“내 생각 할 시간이었잖아.”

순간 재환은 ‘얘 바본가’라는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너랑 이렇게 같이 있고, 너랑 이렇게 살을 맞대고 있는데 어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1초라도 있었겠느냔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재환은 한영 아래서 힘겹게 몸을 틀어 마디를 접은 검지와 중지로 뾰족한 코를 꼬집었다. 제법 아픈지 한영의 눈썹 사이가 폭 좁혀졌다.

“유한영.”

“…응.”

“나도 네 생각 많이 해, 충분히. 알았지?”

답하는 대신 한영은 아이처럼 재환의 품을 파고들었다. 한없이 넓게 느껴지면서, 또 작은 듯하기도 한 등을 재환은 손바닥으로 감싸 토닥토닥 두드렸다. 지금 제게 온몸으로 체온을 전하고 있는 이 남자만 생각하면서.

티셔츠에 감싸인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던 한영은 고개를 살그머니 들어 재환을 보았다. 날렵한 턱선에 쪽쪽 입 맞추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 재환에게 입술을 겹쳤다. 서로의 몸을 게걸스럽게도 빨아 젖히던 입술은 그런 적 없다는 듯 맞닿은 살결을 가만가만 스치고 머금었다. 한영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을 만큼 잘근잘근 깨물었을 때는 재환이 목을 울려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또 당하고만 있을 재환이 아닌지라 빨간 입술을 찾아 얼른 쪼옥 길게 빨았다.

가볍게 장난치듯이 이어지던 입맞춤은 한영이 재환의 티셔츠를 위로 쭉 끌어당겨 적당한 곳에 던진 후부터 진득하니 숨결을 주고받는 농염한 행위가 되었다. 입술에서 그치지 않고 목 언저리, 쇄골을 따라 입 맞추며 내려간 한영은 딱 적당히 예쁜 빛깔을 띤 유두에 입술을 붙였다. 자그마한 유륜을 따라 살살 혀를 굴리자 재환이 잘게 허리를 튕기며 한영의 머리를 안았다. 한영의 가슴을 빗물에 젖은 벚꽃 잎 같은 색으로 물들이는 녹녹한 신음성이 계속해서 흘렀다.

“하아…, 한영아. 유한영….”

타액에 젖은 입술을 반대편 유두로 옮긴 한영은 둥글게 부풀었다 꺼지는 재환의 늑골을 찬찬히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더 아래로 손을 내려 오늘 한 번도 제대로 사정을 하지 못한 성기를 부드럽게 움켰다. 엄지로 반지르르 젖은 귀두를 문지르며 기둥을 훑자 무릎을 세운 재환의 발끝이 오금 근처를 긁었다. 아마도 좋다는 표시였다.

서두르지 않고 성기를 쥔 손을 털던 한영은 다시금 재환의 살결에 입 맞추며 보다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머리칼만큼이나 까맣고 결이 고운 음모에 코를 비비적거리다 허벅지 안쪽의 보드라운 살에 길게 입술을 눌렀다. 느긋하게 빨아올리던 자리에 옅은 자국이 피어날 즈음, 실처럼 늘어진 침을 매단 입술이 딴딴하게 부푼 고환으로 옮겨 갔다.

“응, 읏….”

입을 크게 벌려 한쪽 고환을 머금은 한영은 혀에 힘을 빼고 긴장한 살덩이를 살살 문질렀다. 민감한 곳에서 퍼지는 야릇한 촉감에 재환은 연신 뱃가죽을 푹푹 꺼뜨렸다. 혹여 한영이 이라도 세우면 끔찍한 고통이 일 거라는 걱정과 발가락이 안으로 말리는 간질간질한 흥분이 뒤섞였다. 성기를 빨리는 것과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반대쪽 고환도 입에 넣어 우물우물 굴리기를 잠시, 평소보다 짙은 색을 띤 재환의 성기에 한영은 마침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펼친 손바닥으로 기둥을 고정하고서 입술을 위아래로 문지르자 저 위에서 한층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퍼졌다. 파르르 떨리는 허벅지가 한영의 머리를 가볍게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사실 이대로 세게 조여 버려도 한영은 좋았다.

“하으, 응, 후으…. 흐….”

꿈틀거리는 성기 곳곳에 입술과 코를 번갈아 비비던 한영은 몽글몽글 맑은 물기가 맺힌 요도구에 뾰족하게 세운 혀끝을 꽂았다. 날름날름 혀를 넣었다 빼며 쏙 들어간 구멍을 쑤시는 동시에 위로 손을 뻗어 짧게 깎은 손톱으로 유두를 긁었다. 재환의 헐떡거림이 격해졌다.

“으응, 흣…!”

이윽고 귀두 전체를 감싼 입술이 한 번에 기둥을 쭉 훑으며 뿌리까지 내려갔다. 곧이어 재환의 허리가 파드득 튀어 오르는 틈을 타 길쭉한 손가락이 살짝 들린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입구는 말랑말랑하게 풀어져 있되 내벽은 뻑뻑한 감이 있는 구멍이 다소 놀란 듯 움찔움찔 빠르게 수축했다.

구불구불한 분홍 머리칼이 아래로 쏟아진 머리가 일정 속도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쫀쫀한 속살에 파묻힌 손가락이 쉬지 않고 꾹꾹 내벽을 더듬었다. 얼마 안 가 손가락은 금방 두 개로 늘어나 재환이 깎아지른 숨을 토할 수밖에 없는 부위를 집요하게 건드렸다.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한 매트리스의 출렁거림이 심해지고, 시트를 구겨 잡은 손에 시퍼런 핏줄이 돋아났다.

“허으, 윽…. 끅!”

마디를 접었다 펴며 안을 자극하던 손가락이 이제는 가위질하듯 넓게 벌어졌다. 손가락에 걸쳐진 주름이 팽팽히 당겨지며, 그 사이로 난 틈바구니에 주변 공기가 쑥 들이쳤다. 아래가 휑 뚫리는 낯선 감각에 재환은 기어이 한영의 머리통을 허벅지로 꽉 조였다.

경직된 근육 사이에 갇혀 입과 손가락을 바삐 놀리던 한영은 긁듯이 내벽을 누르며 손가락을 빼냈다. 그제야 옆머리를 조이던 허벅지의 힘도 스르륵 풀렸다. 고개를 들어 젤로 쓸 만한 것을 찾아 눈을 굴리는데, 헉헉대던 재환이 눈짓으로 한영에게 매트리스 옆 협탁을 가리켰다. 덜컹거리는 서랍을 열자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긴 젤과 콘돔 상자가 나왔다.

“집에도 일단 둬야 할 것 같아서….”

창피함을 감추며 웅얼거리는 입술에 쪽, 입 맞춘 한영은 앞니로 젤의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한가득 부었다. 양손을 비벼 미끌미끌한 점성질 액체에 어느 정도 온기가 돌게 한 후 도로 손을 재환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이미 흐물흐물 풀린 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넣고 이리저리 돌리며 젤을 담뿍 묻혔다.

이어서 뜯지 않은 콘돔 박스를 집는데, 양 뺨을 발긋발긋 물들인 재환에게 팔목이 붙잡혔다. 얼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재환은 한영의 손에서 슬그머니 박스를 빼 갔다.

“오늘은… 없이 해 볼까.”

차마 ‘해 보자’로 끝맺어지지 못한 문장이 일순간 한영을 멈칫하게 했다. 과거 제집 욕실에서 딱 한 번 재환과 콘돔 없이 섹스한 후, 한영은 늘 착실히도 콘돔을 챙겼다. 재환을 배려하기 위함이 가장 컸지만, 그냥 넣었다가는 그때처럼 엇 하는 사이에 싸 버릴 것 같다는 우려 탓도 있었다. 재환을 알기 전에는 해 본 적도 없는 걱정이었다. 다만 선뜻 답을 하지 못하는 한영의 모습은 재환에게 작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아, 역시 콘돔 없이 하는 건 좀 그렇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면서도 재환은 덮쳐 오는 창피함에 귀가 다 새빨갛게 익을 지경이었다. 내가 무슨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냥 싫다고 한마디 하면 될 것을, 한영은 골똘히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국 재환은 제 손으로 콘돔 박스를 뜯었다. 안에서 꺼낸 납작한 봉지 끄트머리를 두 손으로 쥐는 찰나였다.

“어….”

앞으로 뻗어 나온 하얀 손이 봉지를 꼭 쥐었다. 눈을 들어 한영을 보자 그다지 밝지 않은 형광등을 등진 얼굴에 아까도 내비쳤던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일렁일렁 피어오르는 정염 같기도 했다.

재환의 손을 벗어난 작은 봉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 옆으로 툭, 떨어졌다. 한껏 솟아 꺼떡대는 분홍색 성기 위로 주룩 투명한 젤이 부어지고, 커다란 손이 쓱쓱 기둥을 문질렀다. 찔꺽찔꺽 질은 액이 비벼지는 소리가 야릇하게 울려 퍼졌다. 이를 지켜보는 재환의 목구멍 너머로 꿀꺽 침이 넘어갔다.

“재환아, 이대로 넣을게.”

“어, 응….”

재환은 무릎을 세우고 있던 다리를 슬쩍 옆으로 벌렸다. 그 사이에 자리를 잡은 한영이 한 손으로 성기를 쥐고 미끌미끌한 귀두를 입구에 댔다. 옴짝거리는 구멍 위로 몇 번 귀두를 문지르다가, 허리에 힘을 주며 쑤욱 안을 파고들었다.

“크흡…!”

여지없이 재환은 밭은 숨을 터뜨렸다. 이 순간이면 늘 느끼는 거였지만, 구멍을 아무리 넓히고 쑤셨다 한들 한영의 성기는 가뿐히 받아들일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재환이 이리도 껄떡 넘어가는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섞여 있었다.

하반신을 꽉 메운 압박감과 더불어 그곳에서 번지는 열이 당황스러울 만치 뜨거웠다. 아직 한영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접붙은 곳은 물론이고 성기를 품은 내벽까지 열기에 줄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다 몸이 얼음장처럼 식었던 한영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삽시에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간 열은 재환의 성대마저 눅눅히 풀어지게 만들었다.

“하아, 엄청 뜨겁네….”

열에 취해 저도 모르는 새 꽤나 외설적인 말을 흘려 버린 재환은 주위가 불긋하게 물든 눈을 치떠 한영을 보았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그 말과 표정은 안 그래도 곧 펑 터질 듯했던 한영의 가슴에 활활 불을 지폈다.

“허으윽…!”

그럭저럭 접힌 각도를 유지하고 있던 재환의 다리를 휙 낚아채 가슴팍에 끌어안은 한영은 초반부터 다소 거센 기세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퍽퍽 살갗이 맞부딪치는 차진 소리가 연이어 터지고, 성기가 얕게 뽑혀 나올 때마다 꿀렁꿀렁 넘친 젤이 재환의 회음부를 타고 흘렀다.

“읏, 윽. 후으…!”

“하….”

뜨겁다 못해 델 것 같은 재환 안으로 푹푹 성기를 쑤셔 박던 한영은 잔뜩 흐트러져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 넘겼다. 어깨에 걸쳐져 들썩이는 종아리에 길게 입술을 누른 뒤, 한 팔로 안은 허벅지를 더 바투 당겼다. 재환의 등이 구겨진 시트와 함께 미끄러져 내려오며 결합이 깊어졌다.

“아아…!”

이제는 성기가 안팎을 들락거리기보다는 구멍 깊숙이 묻혀 내벽을 짓치는 상황이 되었다. 땡땡하게 부푼 고환이 어느덧 벌게진 엉덩잇살에 납작 눌리고,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젤이 찔꺽거리는 소리로 뒤바뀌었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소리는 다소 잠잠해진 듯했으나, 재환에게 쏟아지는 자극까지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야, 잠…. 잠깐, 으윽….”

아래를 꽉 채운 성기는 미치도록 뜨겁지, 쩍 들러붙은 하반신은 조금도 떨어질 기미가 없지, 그야말로 재환은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얇은 고무 막 하나 없는 게 이다지도 큰 차이를 빚어낼 줄은 미처 짐작도 못 했다. 전에 한영의 집 욕실에서 콘돔 없이 했을 때도 이랬던가. 그러다 문득, 재환은 콘돔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띤 목소리로 ‘재환아….’를 중얼거리며 허리 짓 하는 한영을 올려다보던 재환은 옆에서 제 종아리가 덜렁거리고 있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달아오른 뺨을 조급히 매만지다가, 가까스로 긴 목덜미에 손바닥을 둘렀다.

“키스…. 키스해 줘, 유한영.”

꽉 안고 있던 허벅지를 풀어 준 손이 등허리 밑으로 들어왔다. 상체가 훌떡 위로 세워지며 이제 재환은 얼추 비슷한 눈높이에서 한영을 마주 보게 되었다. 성기를 품고 앉은 자세 덕에 한층 배 속이 뜨거워졌지만, 맞붙어 오는 입술에서 전해지는 숨결이 더 뜨거울 것을 알고 있었다.

“으, 음….”

“후….”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땀에 젖은 분홍 머리칼을 헤집고, 하얀 손등이 꿈틀거리는 척추뼈를 따라 수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허겁지겁 숨을 뱉고 삼키는 소리, 싸구려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질질 녹아내린 젤이 찰박찰박 튀기는 소리가 한데 섞여 들었다. 그 속에서 먼저 절정을 맞이한 것은 이른 사정을 걱정했던 한영이 아니었다.

맞닿은 뱃가죽에 질척하게 정액을 쏟은 재환은 온몸이 발발 떨리는 와중에도 절대 한영을 놓지 않았다. 경직된 혀를 어떻게든 움직여 저 아래서 분출되고도 가라앉지 않은 열을 한영과 나누었다. 그런 재환의 어깨를 꽉 끌어안은 한영이 풀썩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단단한 팔에 감싸인 등이 다시 매트리스 위에 닿고, 한차례 폭풍 같은 희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가르는 애틋한 몸짓이 이어졌다.

“읏, 으…. 유, 한영….”

“재환아…. 하아….”

슬쩍슬쩍 스쳤다 맞물리기를 반복하는 두 개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과 함께 달뜬 부름이 오갔다. 비로소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낀 한영은 샅을 부딪치는 움직임에 속도를 높였다. 곧이어 절정이 성큼 눈앞까지 왔을 때, 훅 허리를 뒤로 뺐다. 하지만 재환의 다리가 허리 뒤로 감기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윽….”

단단히 얽힌 발목으로 인해 물러날 길이 막힌 한영의 성기가 재환 깊숙한 곳에서 정액을 터뜨렸다. 두 번째임이 무색하게 사정은 제법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허벅지가 움칠거릴 때마다 젤과 뒤섞인 허연 액이 부글부글 결합부를 비집고 새어 나와 맞닿은 살을 적셨다. 흐르지 못한 것은 촉촉이 내벽으로 스몄다. 잠시간 멀어졌던 입술이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서로를 찾았다.

때마침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번쩍번쩍 빛나던 시계의 숫자가 ‘21:00’으로 바뀌었다. 한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떠올릴 시간이었고, 또 한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의식 속으로 찾아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그 어느 쪽에게도.

* * *

오늘따라 한영을 향한 마음, 혹은 욕망이 앞서 안 하던 짓을 꽤나 많이 했던 재환은 한영과 함께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을 즈음에야 미미한 후회에 잠겼다. 뜨끈한 정액이 아랫배를 채우는 감각은 썩 싫지 않았지만, 그걸 도로 빼내는 것은 얘기가 조금 달랐다. 한영이 하도 깊숙한 곳에 싸 버린 탓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그렇게 만든 탓에 재환은 다시금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야만 했다. 물론 여기서 손가락이란 한영의 손가락을 뜻했다.

한영이 정성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묽은 정액을 긁어낼 때마다 재환은 흠칫흠칫 어깨를 떨었다. 도리 없이 몇 번 야트막한 신음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게 제 몸이 또 슬금슬금 흥분하고 있어서인 줄은 미처 몰랐다. 손을 짚고 있던 타일 벽에 발딱 선 성기 끄트머리가 톡 닿는 순간 뒤늦은 깨달음이 닥쳤고, 하도 당황하여 재환은 피식 웃었더랬다. 그 웃음이 상대에게 쓸데없이 예뻐 보였던 게 문제였다.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어언간 입술이 맞붙고, 정액이 빼내어진 자리에 또다시 성기가 밀려들었다. 부드럽게 치대는 소리, 두 사람의 몸을 훑고 떨어진 물이 타일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소리, 열띤 숨소리 따위가 섞여 샤워 부스도 없는 좁은 화장실을 꽉 메웠다. 부옇게 피어오른 수증기로 인해 혼탁해진 이성은 사정 직전 빠져나가려는 성기를 어김없이 저지시켰다.

그리하여 섹스하고, 또 손가락을 넣고, 그다음에나 한영의 도움으로 몸을 씻은 재환은 화장실을 나섰을 때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울리는데, 매트리스에 늘어진 사지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도 한영도 쫄쫄 굶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재환은 겨우 일어서서 비척비척 부엌으로 갔다. 그러나 먹을거리를 뒤져 보기도 전 한영에게 답삭 허리가 붙잡혀 덜덜 매트리스로 끌려오고 말았다.

타의에 의해 푹 이불까지 뒤집어쓰게 된 재환은 눈을 껌뻑거리며 우당탕 좁은 부엌을 돌아다니는 한영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어디서 찾아냈는지 한영이 밥솥만 한 냄비에 라면을 한가득 끓여 들고 왔다. 한 다섯 봉지 끓였나 싶어 보았더니 끓인 라면은 두 개고 물만 한강수 같이 넣은 거였다.

물 조절에 실패해도 한참 실패한 라면이 맛이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먼저 한 젓가락 먹어 본 한영은 이건 먹으면 안 된다며 재환에게서 젓가락을 빼앗아 가려 했다. 하지만 재환은 성격상 음식을 버리는 게 안 되었다. 급한 김에 간장 넣고, 고춧가루 풀고, 김치까지 곁들였더니 죽어도 못 먹을 맛은 아니었다. 다만 어지간히도 속상했던지 마지막 남은 면 한 올을 건져 낼 때까지도 한영은 울상이 된 얼굴을 펴지 않았다.

결국 재환은 벌 받듯 설거지를 자처해 싱크대 앞에 선 한영 뒤로 살그머니 다가가 허리를 꼭 껴안았다. 움츠러든 어깨에 턱을 얹고 작은 귀걸이가 박힌 귓불에 쪽쪽 입 맞추었다. 잘 먹었다는 인사도 빼먹지 않았다. 그제야 숙어져 있던 한영의 고개가 머뭇머뭇 재환을 향했다. 못내 미안함을 전하는 붉은 입술에 재환은 조심히 제 입술을 포갰다.

다소 엉뚱한 타이밍에서 시작된 입맞춤은 부엌에서 매트리스 위로 장소가 바뀌었을 때 한층 농밀해졌다. 그러다 어느새 두 사람은 기껏 씻고 나와 꺼내 입었던 옷을 다시 벗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섹스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그렇게 서로 몸을 겹쳤다. 꼭 처음 섹스를 배운 소년들 같았다.

둘이 같이 있다 자꾸 몸이 다는 데에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아까는 고추를 세우고 부끄러운 듯 웃는 재환이 한영의 눈에 너무도 예쁘게 보였다면, 방금은 시무룩해진 한영이 재환에게 썩 귀엽게 비쳤을 뿐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입 맞추고, 살을 맞대게 되었다.

하나 인간의 신체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늘로써 막 네 번째 사정을 한 재환은 풀썩 매트리스 위로 쓰러져 헉헉 끊어지는 숨을 토했다. 속으로는 거듭 항복을 외쳤다. 아무리 싱거운 라면이라도 어쨌거나 먹고 나서 그럭저럭 기운을 차린 줄 알았는데, 지금은 도로 손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당연히 씻는 건 생각도 못 했다. 한영이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닦아 주는 대로 재환은 그냥 몸을 맡겼다. 그러던 중 껌뻑 잠이 들었다.

똑, 똑. 미약하게 물이 떨어지는 싱크대 옆에 커대란 냄비가 물기 맺힌 채로 엎어져 있었다. 그 옆에 놓인 수저 두 벌과 오목한 그릇 두 개도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누군가가 서서 부산스럽게 라면을 끓이고, 또 열심히도 설거지했던 자리에 창 모양대로 어스레하게 달빛이 들이쳤다.

그 희미한 빛조차 미처 닿지 않는 방 한구석, 좁디좁은 매트리스 위에서 한 남자에게 꼭 안긴 재환은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곳까지 잘 들지도 않는 달빛을 홀로 빨아들인 듯 눈앞에서 하얗게 빛나는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꾹 감긴 눈꺼풀 끝에 매달린 속눈썹이 깃털처럼 길고 고왔다. 모난 곳 없이 날렵하게 솟은 콧날이 고왔고, 한결같이 붉은 입술의 빛깔이 고왔다. 그래서 재환은 저도 모르는 새 그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검지 끝으로 덧그리고 있었다. 특히 촉촉한 입술에서 손끝은 한참을 머물렀다.

그때, 말간 뺨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위로 들추어졌다. 얼굴을 비춘 달로 부족해 어디서 별을 훔쳐다 박은 것처럼 또렷하게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가 말끄러미 재환을 응시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투명한 시선이 한순간 재환의 숨을 턱 멎게 했다. 얼른 손가락이 거두어진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안 자?”

약간의 잠기운이 묻은 음성이 지나치게 농농하고 달콤했다. 혼을 빼앗긴 듯 눈만 끔뻑거리던 재환은 한 박자 늦게 ‘자.’라고 조금쯤 빤한 거짓말을 속삭였다. 도담한 입술이 얇게 펴지며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이리 와, 재환아.”

옆머리를 받치고 있던 베개 틈으로 들어온 새하얀 팔이 재환의 뒤통수를 꼭 안았다. 자연히 귀가 상대의 심장께에 자리하게 되었다. 맨살 아래서 쿵쿵 낮게 울리는 박동을 듣는데, 붙잡힌 팔이 매끈한 허리 뒤로 넘어갔다.

부스럭부스럭 이불 아래서 맨다리가 얽혔다. 서로의 체온이 합쳐져 한층 포근한 열을 피워 내고, 어느덧 한영의 품에 안긴 재환에게 다시 솔솔 잠이 찾아왔다.

새카만 모니터 스피커가 자리한 책상 구석. 껌껌한 사위를 따라 어두워진 시계의 숫자가 한 번 깜빡이며 ‘23:59’에서 ‘00:00’으로 모양이 바뀌었다. 서로의 꿈속으로 찾아갈 시간이었다. 다만, 이 시간이 무엇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너와 함께하는 미래일지.

너만 그리게 되는 미래일지.

<4권 끝.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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