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16/29)

7장

* * *

노랗고 빨간 색으로 칠해졌던 거리의 나무들이 잎사귀를 떨구고 차츰 마른 몸을 드러냈다. 바깥으로 나설 때마다 절로 춥다, 소리가 나오는 계절이 성큼 다가온 가운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는 멈출 줄을 모르고 날로 깊어져 갔다. 아무런 제지도, 방해도 없었다.

합주가 있을 때면 재환은 평소보다 배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한영이 몇 번인가 싫다고 투정하여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에는 늘 쓰던 모자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머리칼을 사락사락 흩트리는 가을바람을 기꺼이 맞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익숙해진 길을 걸었다.

떨어진 낙엽이 군데군데 동그랗게 쌓여 있는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서면, ‘안녕’ 하는 인사말보다 진한 입맞춤이 먼저 재환을 맞이했다. 지하 합주실로 내려가는 길에도 계단참에서, 어둑한 복도에서 허겁지겁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쉬움을 담뿍 남기며 입술이 떨어질 때, 늘 재환의 귓가로 달콤한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오늘, 자고 가.

따라서 합주가 끝나도 재환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양심에는 좀 찔리지만, 멤버들에게 녹음이나 믹싱 따위의 핑계를 대고서 한영 곁에 남았다. 태군과 지우가 나선 문이 쿵, 닫히면 다시 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서로 입술을 부딪치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진 것처럼 네 번째, 다섯 번째로 몸을 겹치는 순간은 물 흐르듯 찾아왔다. 먼젓번 끝내지 못한 보컬 녹음을 마저 하다 뛰쳐나온 한영이 재환을 방으로 이끌기도, 함께 거실에서 음악 영화를 보며 입 맞추다 재환이 먼저 옷을 벗어 던지기도 했다. 한영이 내심 바랐던 대로 항상 재환이 자위 없이 사정에 다다른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체온을 느낌에, 열기를 나눔에 모든 의미가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토록 한영과 달콤한 시간에 빠져 있는 중에도 재환은 잊지 않고 착실히 현실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음악 장비라도 하나 바꾸려면 돈을 벌어야 했고, 기타 연습 또한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런 중요한 일들마저 잊게 되는 순간, 현재의 충만함이 끝나리라는 것을 재환은 잘 알았다. 무릇 행복에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한 법이었다.

오늘따라 일찍 눈을 뜬 재환은 모처럼 집 안을 쓸고 닦고 부지런히 청소했다. 요즈음 한영의 집에서 묵는 날이 잦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마냥 집을 내팽개쳐 둘 수는 없었다. 볕도 잘 안 들고, 코딱지만 하고, 겨울이 되면 더럽게 추워질 집이라도 일단은 자신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이런 데라도 지금의 제게는 감지덕지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먼지 뒤집어쓴 몸을 씻고, 간단히 식사하고, 출근 준비까지 싹 끝낸 재환은 제법 묵직한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러다 건물 현관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고시생을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하고 썩 반갑게 인사하자 뜬금없이 상대가 ‘좋은 일 있나 봐요?’라고 물어 왔다. 그런 거 아닌데. 재환은 조금 머쓱해졌다.

출근 후, 간만에 카페에 얼굴을 비친 사장 세훈에게서도 재환은 비슷한 말을 들었다.

“재환이, 요새 뭐 좋은 일 있어?”

“예? 아니, 별로….”

“그래? 여기 빛이 완전 다른데.”

세훈이 쫙 펼친 손을 자신의 얼굴 앞에서 휙휙 위아래로 흔들었다. 고시생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괜스레 멋쩍어진 재환은 재차 아니라는 답변을 반복했다. 한데, 그 이상 관심 두지 않고 넘어갔던 고시생과 달리 세훈은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이런 데는 감이 좋은데 말이지….”

훅 눈초리를 좁힌 세훈이 카운터 너머에 있던 재환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딱 그 거리만큼 재환은 얼결에 뒷걸음질 쳤다. 왜 하필 이럴 때 가게가 손님도 없이 한산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재환이 너, 연애하지?”

헙, 재환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옆에서 초코시럽을 만들던 희연도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앞에서 오직 세훈만이 싱글싱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시원한 모양새로 끝이 올라간 입매가 이윽고 더 넓게 벌어졌다.

“아냐?”

“그런 거 아니고, 그…, 저희 밴드가 곧 큰 대회에 나가서요. 그래서 기분이 좀 들떴나 봐요.”

급히 주워섬긴 말치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이제 진짜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영 거짓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재환은 세훈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데에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단, 곁에서 희연이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후 세훈은 재환에게 대회의 시간, 장소 등을 꽤나 세세하게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예의상 묻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릇된 짐작이었다. 세훈은 그 자리에서 연인인 태혁과 통화하며 대회 당일의 스케줄을 물었다. 또 카페 아르바이트생들이 함께 있는 메신저 단체방에 ‘재환이 대회 나간다는데 같이 갈 사람?’ 하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얼마 안 가 대화 창에 ‘저 갈래요!’ 따위의 메시지가 뜨는 것을 보며 재환은 더럭 긴장이 되었다. 왠지 그날 더 잘해야 할 것 같은, 마냥 피하고 싶지 않은 부담감이 팍팍 치솟았다. 문득 재환은 퇴근해서 빨리 합주를 하고 싶어졌다.

물론, 빨리 한영도 만나고 싶었다.

“야, 유한영. 여기 리타르로 끝내기로 했잖아.”

곡 하나가 끝나자마자 태군이 던진 말에 한영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갸웃하다, 태군에게 ‘리타르…?’ 하고 되물었다. 으잉, 소리를 낸 태군이 채 대꾸하기 전, 발로 이펙터 페달을 꾹꾹 밟던 재환이 여상히 답했다.

“리타르단도. 천천히 연주하라고. 우리 지난번에 엔딩 그렇게 바꿨잖아.”

적당히 명료하고 적당히 짧은 설명이었다. 이내 한영은 기억났다는 듯 ‘아.’ 했다. 뒤이어 자신이 방금 실수했던 부분을 다시 쳤다. 이번에는 ‘리타르’로 하라는 태군의 말에 맞게 마무리로 갈수록 건반을 누르는 속도를 점차 늦추었다. 끊어질 듯 말 듯 느릿느릿하게 마지막 한 음까지 누르고서 재환을 보았다.

“이렇게?”

“응, 그런 느낌으로.”

양옆으로 휙휙 고개를 돌려 가며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태군의 얼굴이 차츰 묘하게 바뀌었다. 약간의 놀라움과 약간의 미심쩍음이 서린 표정이었다. 참는 일이 영 서툰 태군은 결국 목구멍을 간질이는 질문을 뱉고야 말았다.

“니네 뭐냐?”

서로 길게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죽이 척척 맞는 재환과 한영의 모습이 아무래도 태군의 눈에는 영 수상스럽게 비쳤다. 최근 들어 둘이 연주도 부쩍 잘 맞는 듯한 것이, 분명 무언가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심지어 재환의 반응이….

“뭐가? 뭐? 왜?”

이것 봐라. 태군의 눈매가 가느스름히 좁아 들었다. 평소 무슨 일이 있어도 좀체 동요하는 법이 없는 재환이 아주 당황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깊게 고민할 것 없이, 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태도만 봐도 충분히 알 만했다. 이러니 더 의심이 갈 수밖에. 하지만, 태군은 본의 아니게 추궁을 계속 이어 가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

“맞다, 장태군.”

“엉? 왜?”

“지난번 페스티벌 가서 번호 따 갔다는 여자애, 연락해?”

오늘따라 끈덕진 친구 놈 때문에 속으로 비지땀을 흘리던 재환조차 화들짝 놀랄 정도로, 지우의 물음을 받은 태군의 낯빛이 한순간 백팔십도 바뀌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갑자기 주위로 펑펑 꽃가루를 터뜨렸다. 양 볼까지 발그레 붉히고서.

“아씨…, 니들한테 말 안 할라고 그랬는데….”

입이 근질거리는 듯 입술을 오물대는 것을 보아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다. 일단 재환은 ‘그러게. 어떻게 됐는데?’라며 지우의 질문을 거들었다. 정말 태군의 사정이 궁금했다기보다는, 저와 한영에게 쏠린 그의 괴상한 관심을 얼른 딴 데로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게…, 우리 대회 보러 온대.”

헐. 심지어 한영까지 포함해서, 태군을 제외한 세 사람이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비슷한 소리를 터뜨렸다. 태군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무도 저런 답변을 예상 못 한 까닭이었다. 물론 여자의 관심을 받는 게 이해 안 갈 정도로 태군이 못났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머리 스타일이 좀….

멤버들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는 태군은 부끄러워 죽겠다는 양 손바닥으로 머리털 한 올 없는 정수리를 박박 문질렀다. 그러면서도 해죽해죽 웃는 것이, 영락없이 사랑에 퐁당 빠져 버린 소년의 얼굴이었다.

“야, 나 존나 떨리는데 어떡하냐.”

아예 태군은 마른세수하듯 손바닥에 작은 얼굴을 푹 파묻었다. 내처 발까지 동동 구를 기세였다. 저런 태군이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 재환은 피식 낮게 웃었다. 그러다 맞은편 앉은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지우의 입꼬리가 씩 위로 올라갔다. 한데 어째서인지, 그 웃음이 꼭 태군 때문만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지레짐작이기를 바라며, 재환은 슬그머니 기타로 시선을 내렸다. 별 의미 없이 바디에 달린 톤 노브를 만지작거렸다.

며칠 안 남은 본선 무대에서 연주할 곡은 총 두 개였다. 하나는 당연히 〈I See You〉였고, 또 다른 하나는 재환의 적극적인 주장 아래 〈I Need You〉가 되었다. 전자가 비교적 기승전결이 확실한 곡이니, 분위기가 구분될 수 있도록 보다 잔잔한 곡을 연주하는 게 좋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다행히도 재환의 말에 딱히 이견을 제시하는 멤버는 없었다.

그리고 합주를 거듭할수록, 재환은 제 판단이 썩 나쁘지 않았다는 나름의 확신을 얻었다. 첫 곡을 〈I Need You〉로 시작해서 〈I See You〉로 마무리하면 딱 군더더기 없는 공연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재환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아주 작은 문제점이 있었다.

〈I Need You〉를 합주할 때면, 재환은 거듭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염없이 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한영, 그를 어떻게든 밀어내고자 했던 저, 그러다 노래 하나에 속절없이 뒤집히고 말았던 당시의 마음 같은 것들이었다. 그 마음이 흘러 흘러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한국어로 가사를 바꾸어 ‘I need you’ 대신 ‘네가 필요해’를 읊조리는 저 붉은 입술에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었다. 그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었다. 감히 합주 도중 이래서는 안 되었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재환은 노래하는 한영을 보며 자꾸 몸이, 가슴이 달았다.

노래에 맞춰 아르페지오 방식으로 기타 줄을 차례로 튕기던 재환은 어느덧 노드 건반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한영과 시선이 얽혔다. 이제는 눈 감고도 칠 수 있는 멜로디를 계속해서 연주하는 중에도 저를 보는 한영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눈꺼풀을 한 번 내렸다 들추지 못했다.

하얗게 뻗은 손가락이 건반을 짚을 때마다, 마이크에 바짝 붙은 입술이 벙긋거릴 때마다 가느다란 분홍 머리칼이 춤추듯 팔랑거렸다. 저 손가락이 다시금 제 살결을 어루만지고, 저 입술이 제 입술을 찾는 듯한 감각이 빠르게 재환 안에서 번져 나갔다. 안 그래도 찬찬히 몸을 덥히던 열이 순시에 심장까지 퍼졌다. 어쩌면 심장이 아닌 다른 곳일 수도 있었다.

어느새 기타 넥을 쥔 손과 피크를 쥔 손이 전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노래가 끝나 모두의 연주가 멎은 순간 재환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조급하게 기타를 기타 스탠드에 내려놓고서 다소 뻔한 대사를 읊었다.

“화장실 갔다 올게.”

껑충껑충 계단을 올라 1층 복도에 있는 화장실로 서둘러 들어갔다. 쾅, 문을 닫자마자 물때 하나 끼지 않은 매끈매끈한 세면대를 두 손을 짚었다. 푹 고개를 고꾸라뜨린 채 가쁜 숨을 흘렸다.

미쳤지. 이 정도면 진짜 미친 거지. 서재환, 제대로 미쳤네.

저 자신을 향한 힐난을 속으로 한 바가지 퍼붓던 재환은 세면대 위, 백색 도자기 재질의 컵에 꽂혀 있는 두 개의 칫솔을 발견했다. 하나는 당연히 집주인의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재환은 거실에서 영화를 보았던 날 제가 그대로 꽂아 두었던 칫솔로 황급히 손을 뻗었다. 거울이 붙은 슬라이드 장을 열어 빈 곳에 적당히 칫솔을 던지고 다시 닫았다. 그때, 똑똑 화장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깨가 흠칫 튀었다.

“안에 있어…!”

누군지는 몰랐지만 일단 냅다 외치고 보았다. 그런데, 구태여 잠그지 않은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이다. 휙 몸을 튼 재환의 눈이 쏟아질 기세로 커다랗게 뜨였다.

“재환아.”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마주했을 때, 벌렁거리던 심장이 그나마 살짝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완전히 편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왜, 들어오는데.”

대답을 않은 한영은 맨발로 반들반들한 타일을 밟아 재환 가까이 와 섰다. 세면대에 엉덩이를 대고 있던 재환의 허리를 다짜고짜 팔로 감아서 휙 잡아당겼다. 옷감 스치는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고간이 철떡 맞닿았다. 도리 없이 재환은 당황에 빠졌다. 갑자기 화장실에 들이닥친 한영에게 끌어안긴 것보다는, 이러다 제 상태를 들키고 말겠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유, 유한영…!”

“나도 그래….”

맞붙은 하반신이 뭉근히 비벼졌다. 야릇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접촉에 바르작거리던 몸이 움찔 굳었다. 발기한 걸 숨길 생각에 급급했던 재환은 그제야 한영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멀쩡히 합주하다 사이좋게 거기를 세우다니, 이건 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난 맨날 그랬어….”

더운 입김과 함께 목덜미로 쏟아지는 고백이 더욱 재환을 꼼짝 못 하게 했다. 잠그지 않은 문, 수건 옆에 걸려 똑딱똑딱 초침을 움직이는 욕실용 시계 사이로 휙휙 시선만 오갔다. 한영과 이리 딱 붙어 있는 것에 더 이상 저어함은 없었으나, 아무래도 장소와 시점이 마땅치 않았다.

“야, 애들 기다릴 텐데….”

“금방 끝낼게.”

뭘? 하고 묻기도 전 재환의 허리를 풀어 준 한영의 눈높이가 쑥 아래로 내려갔다. 설마, 라는 경악스러운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검정 트레이닝 바지가 살갗을 훑으며 허벅지께까지 끌어 내려졌다. 속옷까지 함께 내려간 탓에 재환은 속수무책으로 발기한 성기를 바깥 공기 중에 훤히 노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영의 말간 얼굴이 있었다.

“흡…!”

어찌할 새도 없이 꼿꼿하게 선 성기가 붉은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짧은 숨을 토한 재환은 꼬리뼈 부근이 닿은 세면대 모서리를 허겁지겁 양손으로 짚었다. 춥춥 빠는 소리가 요란하게도 울리는 가운데, 뜨겁고 축축한 기운이 삽시에 하반신을 덮쳤다.

“으, 윽…. 야, 유한….”

상체의 무게를 지탱한 팔과, 바닥을 디딘 다리가 죄 부들부들 떨렸다. 예고도 없이 시작된 펠라티오는 그만큼 말 못 하게 자극이 거셌다. 몰캉한 입술이 거듭 기둥을 훑고 지나는 감각도 견디기 버거웠지만, 그 사이사이 혀가 귀두를 마구 문지르는 감촉이 절로 숨을 껄떡껄떡 넘어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비어지는 밭은 신음을 재환은 제대로 터뜨릴 수 없었다.

백번 양보해 이 외설적인 행위 자체에는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치더라도, 멤버들과 한집에 있는 상황에서 벌일 일이 절대 아니었다. 합주실에 둘만 남은 틈을 타 쪽, 입 맞추는 귀여운 짓과는 전혀 달랐다. 그걸 다 알면서도 재환은 한영을 밀어내지 못했다. 뭐, 언제는 그러했느냐마는.

“후윽…, 읏…. 큽.”

“음….”

열심히 재환의 성기를 물고 빨던 한영은 자신의 바지 안에서 꺼낸 두툼한 성기를 쥔 손을 함께 부지런히 움직였다. 평소처럼 혼자 자위할 때 같았으면 한참은 더 지나야 ‘재환아…!’를 외치며 사정했을 텐데, 목구멍 깊숙이 콱콱 재환의 고추를 박고 있자니 사정감은 깜짝 놀랄 정도로 금방 찾아왔다. 그럴수록 한영은 앞뒤로 머리통을 움직이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재환의 엉덩이 뒤로 손을 감아 좁고 습한 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싶다는 마음은 애써 내리눌렀다. 그리하면, 이 자리에서 기어이 재환과 섹스하게 되고 말 것이다.

“윽, 읏…. 후으….”

재환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른 사정감이 닥쳐왔다. 한영에게 성기를 물린 채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픽 싸지르는 게 썩 창피할 법도 하건만, 지금 재환은 그런 걸 따질 정신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을 멤버들을 생각해 차라리 그래 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아아…!”

흐린 눈으로 올려다보던 화장실 천장이 새하얗게 번지며, 저 아래에서 끔찍한 해방감이 탁 터졌다. 세면대 모서리를 움킨 손가락에 있는 대로 힘을 준 재환은 속절없이 한영의 입 안에 흥건히 정액을 토했다. 허리 짓 하듯 엉덩이를 꿈틀거릴 때마다 몇 번 더 정액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헉헉, 진이 빠진 숨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하나 짙은 탈력감에 젖어 있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남은 한 방울까지 모조리 머금을 기세로 말캉한 혀가 차츰 물렁해지는 성기 곳곳을 샅샅이 핥아 올렸다. 그러니 재환은 또다시 툭툭 밭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손날이 탁탁 샅을 치는 다소 급한 소리가 더해졌다. 한영의 다리 사이에서 나는 소리였다.

얼마 가지 않아, 한영 또한 탁한 숨과 함께 하얀 손바닥에 더 하얀 정액을 뿜었다. 어깨를 들썩이다가, 가빠진 숨이 조금 가라앉았을 무렵 쓱 고개를 들어 재환과 눈을 맞추었다. 언제 사람의 정액을 꿀꺽꿀꺽 삼켰냐는 양 유순한 얼굴에 빙긋 웃음이 떠올랐다.

“…금방 끝났지?”

아직 집 나간 넋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재환은 무어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멀거니 눈만 끔뻑거리다 일시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는 한영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길기도 한 몸을 얼른 일으켜 세웠다. 덜렁 흔들리는 성기 위로 바지를 올려 준 뒤, 허옇게 정액 묻은 손을 세면대 안으로 잡아당겨 물을 틀었다. 얼결에 한영이 손을 씻는 사이, 도자기 컵에서 칫솔을 꺼내 그 위에 쭉 치약을 짰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밀회가 남긴 흔적이 말끔히 지워진 손에 칫솔을 들려 주었다.

“양치. 양치하고 나와. 알았어?”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지었던 한영이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한영을 등져 화장실 밖으로 나서려던 재환은 문고리로 손을 가져가기 전 휙 뒤를 돌았다. 아직 칫솔을 물지 않은 한영에게 성큼 다가갔다.

“앞으론… 서로 조심하자. 나도 그럴게.”

답할 틈을 주지 않고 조금 젖은 듯한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속으로 3초가량을 세고 다시 입술을 떼자, 종전까지 온갖 야릇한 소리로 가득했던 화장실에 쪽, 하니 새침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울렸다.

그 한가운데 한영을 남긴 재환은 둘만 있으면 이상하게 더 좁게 느껴지는 듯한 공간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러다 복도를 몇 발짝 걷지 못해 한영의 입술이 왜 젖어 있었는지를 불현듯 깨달았다. 윽. 순간적으로 재환의 표정이 구깃구깃해졌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새가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 푹 두 손을 찔러 넣은 재환은 최대한 태연스러운 걸음으로 계단을 밟아 합주실로 내려갔다.

한 5분쯤 지났을까. 재환이 남긴 향을 마지못해 독한 치약 냄새로 지워 낸 한영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복도로 나왔다. 때마침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는 지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주머니에 담뱃갑을 넣은 지우가 두 손을 위로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난 손 좀 씻고 내려갈게.”

“그래.”

그대로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덥석 어깨가 붙잡혔다. 걸음을 멈춘 한영은 ‘왜?’ 하는 눈빛으로 지우를 보았다.

“너, 양치질했어?”

“응.”

이번에는 지우가 반대로 ‘왜?’라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무어라 대답을 않은 한영은 깜빡깜빡 눈만 감았다 떴다. 언뜻 보면 순수한 청년이라 착각하기 딱 좋은 친구의 표정을 보며 지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머지않아 입 쩍 벌어지는 깨달음을 얻은 지우의 입이 정말로 크게 벌어졌다. 눈치가 지나치게 빠른 것도 이럴 때는 문제였다.

“와, 유한영….”

이건 뭐 대놓고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여태 붙잡고 있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기도 했다. 하나 한영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가 비치지 않았다. 은근히 짓궂은 구석이 있는 지우로서는 더 떠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너 이제 재환이랑 사귀….”

난데없이 위로 올라온 손이 턱 입가를 덮었다. 영문도 모르고 말문이 막혀 버린 지우는 황당한 눈빛을 했다. 그에 반해 한영의 눈에는 고집, 단호함 비슷한 것이 잔뜩 서렸다. 적어도 지우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야, 그런 거.”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 반절이 가려진 지우는 우물우물 입술을 움직여 ‘그럼?’ 하고 물었다.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들어 올린 한영이 지우에게서 스르륵 손을 거두었다. 뒤이어 내놓인 말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혼잣말 같았다.

“재환이는, 그런 거 아냐.”

웃음과 당황이 차례로 스쳐 갔던 지우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빤히 한영을 쳐다보다가, 설핏 움츠러든 듯한 어깨를 한 번 더 툭툭 두드렸다.

“뭐, 니들 일이니까. 알아서 해.”

한영은 어깨를 가뿐히 으쓱이며 화장실로 향하는 지우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가슴은 좀 쿡쿡 쑤시지만, 이걸로 재환과의 관계가 흔들릴 고비 하나는 넘겼다고, 애써 마음속에 안도감을 새겼다.

* * *

차라리 빨리 오기를 바랐던, 동시에 하루라도 늦춰졌으면 했던 대회 날이 드디어 밝았다. 새벽같이 번쩍 눈을 뜬 재환은 후다닥 씻고서 일단 기타부터 쥐었다. 책상 앞에 앉아 오늘 공연할 곡들을 너덧 번씩 쳐 본 후, 나름 만족스럽게 기타를 가방에 넣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 못한 곳에 있었다.

“흠….”

걸린 것도 몇 없는 옷장을 뒤적이던 재환의 입에서 절로 침음하는 소리가 났다. 평소 공연이 있을 때면 늘 검정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는 했었는데, 날이 점점 추워지니 아무래도 그 차림은 계절에 맞지 않는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라, 결국 재환은 다른 옷에 비해 유독 빳빳하게 다려져 있는 셔츠를 꺼내 들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재환은 또 한 번 고민이 담긴 소리를 흘렸다. 마지막으로 이발소를 다녀온 후, 생각보다 머리가 제법 자라 있었다. 넘기기도 애매하고, 그냥 두기도 좀 뭐하고. 그러다 끝내 ‘에이’를 속으로 뱉으며 화장실을 도로 나왔다. 무대에서 기타만 잘 치면 될 일이라고, 제법 속 편한 결론을 내린 결과였다.

다만 한 가지 재환의 마음을 갉작이는 게 있다면, 관객보다는 한영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부끄러운 바람이었다. 이런 생각을 품는 자신이 저조차 생소하고, 또 우스웠지만, 부정 못 할 진심이었다. 하나 그마저도 ‘안 어울리는 짓 적당히 해라, 서재환’ 하는 혼잣말과 함께 스러졌다. 기타리스트는 기타만 열심히 치면 되는 거라고, 또 저답게 뻔한 결론을 내렸다.

얇은 셔츠 위에 검정 점퍼를 꿰입은 재환은 마찬가지로 새카만 기타 가방을 등에 멨다. 멤버들과 집합하기로 한 시간은 11시였으나, 오늘은 꼭 빨리 오라는 한영의 재촉이 있어 9시도 되기 전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사실, 한영이 꼭 채근하지 않아도 재환은 늘 그의 집에 서둘러 가곤 했다. 빨리… 보고 싶으니까.

제법 쌀쌀한 가을바람을 묻히고 넓은 현관으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달콤한 향을 퐁퐁 풍기는 녀석이 덥석 재환을 두 팔로 안아 왔다. 재환은 부드럽게 웃으며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리는 한영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막 씻고 나왔는지 머리칼에 약간의 물기가 어려 있었다.

“잘 잤어?”

“아니.”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위를 오가던 손이 멈칫 굳었다. 붙어 있던 어깨를 잡아 거리를 벌린 재환은 ‘왜?’라고 물으며 물안개처럼 뽀얀 한영의 얼굴을 제법 심각하게 살폈다. 오늘같이 중요한 날 보컬이 잠을 제대로 못 잤다니, 썩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재환이 너 보고 싶어서.”

걱정으로 굳었던 표정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곱지 않게 바뀌었다. 슬그머니 눈썹을 찌푸린 재환은 주먹으로 가볍게 한영의 가슴팍을 퍽 쳤다. 한영은 방긋이 웃는 낯으로 아야, 했다. 그러고는 주먹 쥔 손의 손가락을 살살 풀며 입꼬리가 아래로 떨어진 입술에 쪽, 입 맞추었다. 이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못마땅함이 그득했던 재환의 마음이 버터 녹듯 스르르 풀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간지럽게 살결을 붙였다 떼는 정도의 접촉은 이내 입을 벌리고 혀를 얽는 농도 짙은 키스가 되었다. 기타 가방도 벗지 않은 재환은 한영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이른 시간 나누기에 다소 진한 입맞춤에 몰두했다.

“음….”

입가에 번진 침을 싹싹 핥아 가는 것을 끝으로 한영은 재환에게서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래도 못내 아쉬워 바깥의 찬 기운이 가고 발그레한 홍조가 떠오른 뺨에 입술을 붙였다. 반대쪽 뺨에도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가 뗀 뒤 덥석 재환의 손을 잡았다.

“재환아, 이리 와 봐.”

한영은 재환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오전의 햇살을 받아 화사한 색감이 더욱이 두드러진 방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 화사한 색채에 소파 위로 한가득 널브러진 옷들이 일조하고 있었다.

“너, 저게 다….”

혹 저러느라 밤늦게까지 못 잔 거냐는 타박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창으로 들이친 환한 가을볕보다 더 밝게 웃고 있는 한영 앞에서 차마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재환은 꾹 입을 다물고 겹겹이 쌓인 옷더미 위에서 하나를 집어 올리는 한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입어 봐.”

양손으로 쥔 옷을 어느새 재환의 가슴팍에 가져다 댄 한영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래로 시선을 내려 찬찬히 살피자, 자잘하게 세로로 꽈배기 무늬가 들어간 상아색 니트였다. 옷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싸구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입어 보라고…?”

한영은 ‘응, 응.’ 하며 머리칼이 팔랑거릴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뜻 알았다 대답을 못 하고 재환이 머뭇거리는데, 팔에 니트를 걸친 한영이 아예 재환이 입은 셔츠 단추를 하나씩 똑똑 풀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히기 위한 의도임을 알면서도 화들짝 놀란 재환은 얼른 한영의 손을 저지시켰다.

“내가 할게.”

안에 티셔츠라도 받쳐 입을걸, 생각하며 재환은 느릿느릿 단추를 마저 풀었다. 활짝 벌어진 셔츠 깃을 어깨 아래로 끌어 내린 뒤, 니트를 건네받기 위해 한영에게 쭉 손을 내밀었다. 한데 종전까지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한영의 얼굴이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두 손으로 꼭 쥔 니트는 이쪽으로 건너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 줘?”

“…저기, 재환아.”

재환은 말해 보라는 의미로 한영과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몇 번 입술을 벙긋거리던 한영이 슬쩍 시선을 내리깔고서 머뭇머뭇 입을 뗐다.

“잠깐만 빨아도 돼?”

아…, 하며 재환은 당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소리를 길게 뱉었다. 맨살이 드러난 어깨를 슬쩍 움츠리기도 했다. 구태여 되묻지 않아도, 한영이 빨겠다는 곳이 어디인지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싫다고 도리질 치기도, 그렇다고 좋다고 환영하기도 영 애매한 곳이었다.

잠깐 고민에 빠져 눈썹을 움찔거리던 재환은 끝내 상대가 기다리고 있을 답을 들려주고야 말았다.

“잠깐… 만이다?”

마지못해 허락을 내리면서도, 또 그러하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아마 두 사람은 알았을 것이다. ‘잠깐만’으로는 절대 끝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으, 읏…. 응…!”

늘어진 옷을 대충 옆으로 치우고 소파에 앉은 한영 위에 올라탄 재환은 연신 허리를 꿈틀거렸다. 길쭉한 허벅지에 붙인 엉덩이, 소파 빈자리를 무릎 꿇어 디딘 다리도 쉬지 않고 들썩였다. 고작 한쪽 유두를 빨리고 있는 것뿐인데, 그곳을 돌아다니는 축축한 감촉이 머릿속까지 흐물흐물 녹아내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할딱이는 숨이 계속해서 비어졌다.

“야, 깨물지…. 허윽…!”

빠는 데에서 그치지 않은 한영이 이를 세우는 시점부터 강제력 없는 약속은 금방 어그러졌다. 딱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잘근잘근 돌기를 씹히며 재환은 더욱이 흥분 어린 숨을 뱉었다. 분홍색 머리통을 끌어안은 팔은 상대를 떨어뜨리려는 건지, 더 바짝 잡아당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 재환아….”

잠깐씩 한영이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제 이름을 읊조릴 때마다 젖은 살점 위로 습한 숨이 쏟아졌다. 그것이 또 재환의 척추를 따라 오싹오싹 소름에 가까운 흥분을 일으켰다. 벗지 않은 바지 안에서 이미 팽팽히 부푼 성기가 팬티에 손톱만 한 얼룩을 새겼다.

“으, 응…. 후윽….”

거의 퉁퉁 부을 때까지 젖꼭지를 빨고 깨물던 입술이 반대쪽 가슴으로 옮겨 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 자극은 급기야 재환의 고개를 껄떡 뒤로 넘어가게 만들었다. 밝게 들이치는 햇살이 얼굴 가득 맺힌 흥분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툭툭 터지는 신음이 멈추지 않았다.

휘었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재환의 척추뼈를 어루만지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바지 안을 파고들어 엉덩이를 꽉 움켰을 때, 헉헉대던 재환이 퍼뜩 한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 얼른 손을 빼낸 한영은 미안, 하며 재환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휙 고개를 들어야 했다.

“바지 좀 벗고.”

“…어?”

얼뜬 표정이 된 한영 위에서 몸을 일으킨 재환은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쑥 발목까지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대로 적당히 근처에 던져두었겠지만, 오늘만큼은 주름진 바지를 도로 입기가 뭐해 툭툭 털어 소파 팔걸이에 얹었다. 덜렁 양말 하나만 신은 채로 재환은 다시 한영을 마주 보고 단단한 허벅지에 올라앉았다. 울대가 크게 꿀렁이는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재환아….”

벅찬 목소리를 내며 한영은 도리 없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재환의 매끈매끈한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재환이 이리 과감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정말이지 한영은 숨이 턱 멎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재환은 늘 맺고 끊음이 확실했다.

“오늘은 진짜 빨리 끝내야 돼. 이따 애들 오니까.”

벽시계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재환이 하는 말에 한영은 냉큼 ‘응.’ 하고 답했다. 창으로 쏟아지는 빛살을 맨몸으로 받고 있는 재환이 너무 예뻐, 그 어떤 말에도 감히 ‘No’를 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재환과 섹스할 때 빨리 끝내는 건 어떤 의미에서 한영한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문제지….

어쨌거나 한영의 대답은 제한 시간을 두고 나누는 격정적인 섹스의 신호탄이 되었다. 침을 잔뜩 묻힌 손가락이 푹 아래를 파고들자, 재환은 기다렸다는 듯 붉은 입술에 제 입술을 물렸다. 안을 휘젓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반신을 들썩이며 복근이 선명한 배에 성기를 문댔다. 끓어오르는 신음은 모두 맞닿은 입술 너머로 흘렸다.

재환이 넘겨주는 신음과 타액을 모조리 꿀꺽꿀꺽 받아 삼키며 한영은 제가 들어갈 길을 트는 데에 온 정성을 쏟았다. 조금이라도 내부가 뻑뻑해질라치면 수시로 손가락을 빼내 고루 침을 묻혔다. 그러고서 또 재환과 입 맞췄다. 메마른 내벽이 차츰 녹진하게 풀리는 소리와 갈급히 입술이 비벼지는 소리가 부유하는 먼지조차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 안으로 녹아들었다.

소파에 쌓인 옷을 툭툭 떨어뜨리다 결국 넓은 침대로 장소를 옮긴 두 사람은 서로를 탐하는 급급한 움직임을 이어 갔다. 젤까지 더해져 한층 더 미끌미끌해진 손가락이 쉼 없이 구멍을 들락거리고, 농후한 입맞춤이 몇 번이고 거듭되었다.

이윽고 성기가 그럭저럭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내벽이 물렁하게 풀어졌을 때, 한영은 급히 윗도리를 벗고 허벅지께까지 바지를 내렸다. 아플 정도로 발기한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서 빠끔거리는 입구에 성기 끄트머리를 물렸다.

“하, 재환아….”

“허윽…!”

한 번에 성기가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며 한영 아래 누워 있던 재환의 몸이 덜컥 흔들렸다. 잘록한 허리에 붙은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리고, 하얀 어깻죽지를 감싼 손아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괜찮아, 재환아…?’라는 물음에 재환은 악착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순간에는 늘 얼마쯤의 버거움이 따르지만, 곧 한영이 이를 잊게 해 줄 것을 알았다.

곧이어 침대 시트가 바스락바스락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맞붙은 두 사람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엉덩이와 허벅다리에 힘을 준 한영이 허리를 쳐올리면, 베개 너머로 고개를 젖힌 재환이 탁 트인 숨을 터뜨렸다. 그 소리를 이루는 모든 음이 한영의 귀에는 그리 맑고 녹녹하게 들릴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재환의 예민한 부분을 푹푹 찔러 올리며 한영은 동그랗게 불거진 목울대, 미끈한 턱뼈, 귀밑의 여린 살 등지에 쉼 없이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다소 불안하게 들썩이던 재환의 하반신도 차츰 한영의 허리 짓에 맞추어 자연스러운 박자를 탔다. 그새 땀에 젖은 살갗이 서로 부드럽게 달라붙어 찰박찰박 묽은 마찰음을 울렸다.

그리고 한영의 예상대로, 절정은 빠르게 찾아왔다. 그것도 약속한 것처럼 두 사람 모두에게 그랬다. 으스러뜨리듯 재환의 상체를 부둥켜안은 한영이 여지없이 ‘재환아…!’를 외치며 울컥 사정하는 순간, 재환도 맞닿은 뱃가죽 사이로 흥건히 정액을 쏟았다.

꽤나 오래 이어진 분출이 끝났을 즈음, 한영은 재환 위로 푹 엎어졌다. 둘의 몸은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척척해져 있었다.

“…우리 망했다. 다시 씻어야 돼.”

한숨처럼 재환이 중얼거린 말에 한영은 걱정 말라는 듯 땀에 젖은 까만 머리칼 위로 꾹꾹 입술을 눌렀다. 행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재환을 위해서라면 후딱 씻는 거든 반대로 씻기는 거든 무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섹스의 여운에 잠길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난 두 사람은 욕실로 달려가 그 어느 때보다 부리나케 씻었다. 다만 서두른다는 기준이 서로 조금 다르다는 데에 소소한 문제점이 있었다. 성미 급한 재환에게는 한영 씻는 모습이 굼벵이 기어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비쳤다.

종내 재환은 한영 대신 손을 움직이기에 이르렀다. 한영이 ‘아파, 재환아….’라고 할 때까지 샴푸 거품과 함께 벅벅 분홍 머리칼 사이를 긁고, 마찬가지로 거품 낸 샤워 타월로 하얀 살결을 빡빡 문질렀다.

기실 한영으로선 이 정도 아픈 것쯤 얼마든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 손으로 재환을 꼼꼼히 씻겨 주려던 단꿈이 푸시시 꺼져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다음에는 기회를 엿봐 아예 재환과 느긋이 욕조에라도 들어가야 할 성싶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도록.

행복한 상상으로 애써 울적함을 달랜 한영은 재환에게서 드라이어만큼은 필사적으로 사수했다. 한 손에는 드라이어를 쥐고, 또 다른 손으로 굵고 건강한 머리칼을 살살 흩트리니 서운하고 아쉬웠던 마음이 어느새 살살 무르녹았다. 하긴, 재환과 함께 있는데 계속 침울한 기분에 잠겨 있는 것이 한영에게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재환의 머리를 뽀송뽀송하게 말려 준 뒤 자신의 머리 또한 바지런히 말린 한영은 다시 니트를 가져와 재환 앞에 내밀었다. 니트를 건네고, 또 받아 들며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옷 한번 갈아입으려다 참 일이 커졌다는 생각이 사이좋게 스친 까닭이었다. 아직 다른 멤버들이 오기로 한 시간까지 그렁저렁 여유가 있어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이번에는 빨면 안 되냐는 조름 없이 재환이 옷 입는 모습을 얌전히 지켜보던 한영은 어언간 더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고민을 거듭해 고른 옷은 그냥 처음부터 재환의 옷이었던 것처럼 멋진 얼굴과 예쁜 몸에 꼭 맞았다. 뿌듯함이 찰랑찰랑 밀려들었다.

“…안 이상해? 나 이런 건 처음 입는데.”

한영의 기쁨을 알 턱이 없는 재환은 드레스 룸의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영 어색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도 포근포근하고, 몸에도 착 감기고, 질로만 따지면 참 좋은 옷 같은데, 제가 이를 소화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이리 화사한 느낌의 옷을 통 입어 본 적이 없어 어색함이 배가 되었다.

그다지 갑갑하지도 않은 니트 목둘레를 살짝씩 당겼다 놓는 재환 뒤로 한영이 와 섰다. 한영은 연한 색 니트에 덮인 재환의 허리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곧은 어깨에 턱을 얹고 진심이 넘실넘실 흐르는 말을 속삭였다.

“너무 멋있고 예뻐, 재환아.”

멋있으면 멋있는 거고, 예쁘면 예쁜 거지. 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재환은 하릴없이 귓불로 뜨듯한 열이 몰렸다. 어쨌거나 이것저것 고려했을 때, 허연 셔츠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는 점은 분명했다. 게다가 또 다행인 것이,

“이 옷은 그래도 색이 무난하네.”

아마 평소 한영이 좋아하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옷이었다면 입어 보기는커녕 들이미는 순간 저리 치우라며 기함했을 것이다. 그런 옷을 여기 머무를 때 잠시 빌려 입는 것과, 무대에서 입는 건 얘기가 달랐으니까. 재환의 마음을 한영은 훤히 꿰뚫었다.

“더 눈에 띄는 거 주면, 재환이 너 안 입을 거잖아.”

차마 부정할 수 없던 재환은 ‘뭐…, 그렇지.’ 하고 얼버무렸다. 그사이 귓불을 덥히던 열은 슬금슬금 가슴께까지 옮겨 갔다. 어쩌면 한영은 재환의 생각보다 훨씬 더 그를 잘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재환은 거울에 비치는 한영의 맑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유한영.”

“응?”

“이거 입고, 무대에서 기타 열심히 칠게.”

보드라운 감촉으로 감싸인 허리를 더욱 꽉 끌어안을 수밖에 없게끔 하는 언사였다. 못내 기꺼워진 한영은 재환의 보송보송한 머리칼에 쪽쪽 입 맞추었다. 거울을 보던 재환이 한영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어느덧 두 사람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찾았다. 한영은 재환의 허리에서 손을 풀지 않은 채, 그리고 재환은 뒤로 팔을 감아 한영의 목을 안은 채 부드럽고도 달콤한 입맞춤을 나눴다. 멤버들이 도착하면 이 꿈같은 시간도 잠시 접어 두어야 함을 알기에 더 쉽게 떨어질 수 없었다.

쪽, 하는 간지러운 뽀뽀와 함께 서로의 얼굴이 멀어지고, 그대로 한영에게 등이 떠밀린 재환은 드레스 룸의 화장대 앞에 앉게 되었다. 무엇을 하려나 싶어 조금 떨떠름한 낯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왁스를 담뿍 묻힌 손가락이 조물조물 머리칼을 주물렀다. 잠시 후 한영의 입에서는 또 ‘너무 멋있어, 재환아.’ 하는 말이 나왔다. 재환의 귀는 또 하릴없이 붉어졌다.

시계가 막 11시 5분 전을 가리킬 무렵, ‘존나 춥네! 뭔 겨울이냐?’를 외치며 태군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저를 보러 오는 특정 관객에게 잘 보일 겸, 추위도 피할 겸 목에 둘둘 두른 스카프를 풀던 태군은 2층에서 내려오는 재환을 발견했다.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친구의 멀끔한 차림에, 거기에 가르마까지 타서 말쑥하게 정리된 머리에 절로 더 큰 소리가 터졌다.

“워씨, 깜짝이야! 너 누구세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반응이라 재환은 큰 동요 없이 ‘네 째환이다.’ 하고 답했다. 그러자 태군은 ‘우리 째환이 이렇게 멋 낼 줄 모르는데?’라며 재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여지없이 내가 그렇게 평소 거지같이 하고 다녔나, 라는 조금 씁쓸한 의문이 떠오를 즈음 태군이 재환의 가슴팍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헐, 야! 이거 겁내 비싼 거 아냐?”

니트에 붙은 콩알만 한 마크를 요리조리 뜯어보던 태군의 입에서 조금도 볼륨이 줄지 않은 요란한 소리가 또다시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의심이 팍팍 묻어나는 눈길로 재환을 보기까지 했다. 일순 당황한 재환은 태군이 보내는 집요한 시선을 피해 눈을 옆으로 굴렸다. 그냥 한영에게 빌린 옷이라고 태연히 답하면 될 것을, 그 한마디가 퍼뜩 생각나지 않았다.

“뭐야? 선물 받았냐? 엉?”

대답 없는 재환에게 질문을 쏟던 태군은 급기야 ‘씨발, 여자 친구?’ 하며 도끼눈을 떴다. 답을 하든 안 하든 재환을 가만두지 않을 태세였다. 그때, 태군의 등 뒤에서 쓱 꺼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흐익!”

커다란 손이 양쪽 귀를 덮는 순간 태군의 몸이 펄쩍 위로 튀어 올랐다. 지우의 손임을 능히 짐작한 듯 왈칵 얼굴을 구긴 태군은 ‘현지우, 차갑다고!’라고 성내며 팔딱거렸다. 그러든 말든 지우는 작은 머리통이 주는 온기로 손을 녹이며 재환의 니트에 달린 마크를 일별했다. 이윽고, 싱글싱글 웃음이 걸린 입에서 꽤나 단정적인 말이 나왔다.

“짜가네.”

“엥, 진짜?”

지우의 손을 뜯어내려 펄떡이던 태군이 다소 벙벙해진 표정을 지었다. 재환도 비슷한 표정으로 태군 너머 지우를 보았다. 그제야 머리칼 없이 매끈매끈한 머리통을 놓아준 지우가 재환에게만 보이게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아…. 지우의 의도를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린 재환은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하긴, 태군에게 계속해서 이상한 추궁을 당하는 것보다야 짝퉁을 입은 셈 쳐지는 게 훨씬 나았다. 다만….

말끔히 외출복 겸 공연용 옷을 입고 내려오는 한영에게로 재환은 휙 눈을 돌렸다. 위아래로 청청을 입은 모습이 그렇게 멀끔하고 화사해 보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마냥 감탄의 눈길을 보내게 되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리 비싼 걸 제게 빌려주면 어떡하냐는 약간의 타박이 한영을 보는 시선에 섞였다. 재환이 그런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까닭도, 세 사람의 분위기가 조금 괴상쩍은 듯한 연유도 알지 못하는 한영은 손으로 계단의 핸드레일을 짚은 채 눈만 깜빡거렸다.

“아, 담배 피우고 들어온다는 걸 깜빡했네.”

딱 무어라 꼬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공기 속, 큼직한 손이 재환의 팔뚝을 슬쩍 붙잡았다. 한영에게서 시선을 거둔 재환은 같이 나가자는 지우의 눈짓에 조금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도 꽤나 맵찼던 바깥 공기는 해가 더 높이 떴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을인데 벌써 이렇게 춥나, 생각하며 지우와 정원 한편에 선 재환은 입술 새에 문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재환과 지우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부연 연기가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몇 번 더 후, 하고 연기를 뱉은 지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옷은 한영이가 고른 거?”

똑 부러지게 답하는 대신 재환은 ‘뭐….’ 하고 말았다. 그래도 지우는 훤히 알아들었을 터다. 어쩌면, 더한 것까지 모두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 짐작에 나름 확신을 심어 주는 말이 지우에게서 나왔다.

“유한영 또 재환이 너 멋있다고 난리 났었겠네.”

“난리까지야….”

어쨌거나 이번에도 재환이 돌려줄 수 있는 답은 비슷했다.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린 재환은 보다 길게 연기를 뿜었다. 잎사귀가 몇 남지 않은 정원의 나뭇가지 너머로 보이는 거실 전면 창에 어김없이 고운 분홍 빛깔이 어른거렸다. 다시 담배를 무는 재환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얇게 펴졌다. 눈머리를 덮을 듯 말 듯한 앞머리 아래서 지우의 눈이 흘깃 재환을 향했다.

“재환아.”

“어?”

얼른 무표정으로 돌아온 재환은 그새 제법 타들어 간 담뱃재를 검지로 탁탁 두드려 떨구었다. 짧아진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한영이랑, 사귀는 건 아니라며?”

진짜 다 알고 있었네. 어째서인지 재환은 조금 맥이 풀려 버렸다. 동시에 지우 앞에서 더는 사릴 것도, 숨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까닭이었을까. 딱히 지우가 묻지 않은 얘기까지 희뿌연 담배 연기와 함께 툭툭 흘러 나갔다.

“응. 근데, 할 건 다 했어.”

때마침 휭, 불어오는 바람에 정원 군데군데 소복이 쌓여 있던 낙엽 이파리 몇 장이 버스럭 소리를 내며 메마른 잔디 위를 굴렀다.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그중 하나가 재환의 발치까지 와서 톡, 신발 앞코를 건드렸다. 재환은 슬쩍 발을 들어 한때 푸릇푸릇한 색이었을 마른 잎사귀를 꾹 밟았다. 더 이상 정원을 헤매지 않을 수 있도록.

“근데 사귀는 건 아냐.”

“왜?”

잠자코 듣던 지우가 건넨 물음에 재환은 픽, 하고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저 좋을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저만 안다는 힐난을 받아도 할 말 없었다.

고개를 높이 쳐든 재환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결 사이로 마지막으로 들이마신 담배 한 모금을 천천히 내뱉었다. 나약한 진심이 그 뒤를 따랐다.

“…유한영이랑 계속 음악 하고 싶어서.”

이미 할 거 다 한 마당에 이런 고집이 다 무슨 의미일까 싶기도 했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결말은 똑같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환은 한영과의 관계에 정의를 내리고, 또 그 유효 기간이 끝나는 순간을 목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영도, 그의 노래도 잃게 되는 순간은 더욱더 맞이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리고… 유한영도 계속 음악 했으면 좋겠어서.”

이제 더 피우려야 피울 것도 없는 담배를 허리 숙여 땅바닥에 꾹 지진 재환은 깡통 안으로 꽁초를 던졌다. 담배를 다 피우려면 아직 몇 모금 남은 듯한 지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나 먼저 들어간다. 춥네.”

우유색 니트만 걸친 상체를 부르르 떤 재환은 어깨를 움츠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답지 않게 짠한 눈으로 저를 보는 지우를 뒤로하고 터벅터벅 돌길을 밟았다. 그러다 몇 발짝 못 떼 여태 거실 창에 딱 붙어 있는 한영과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유리 너머, 말간 얼굴에 포근포근한 미소가 스미는 것이 보였다. 재환은 한영을 따라 웃었다.

아직 우리 사이에는 찬 바람 부는 계절이 오지 않았으므로.

* * *

본선 장소가 열리는 곳은 서울 소재의 한 대학교 강당이었다. 아직 학기 중이라 캠퍼스 안에는 대학교 특유의 소란함이 가득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분위기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지우의 차에서 내린 재환은 멤버들과 함께 커다란 대회 포스터가 붙은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벽을 따라 쭉 포스터가 붙은 복도에는 벌써부터 앞선 팀의 리허설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일찌감치 도착한 덕에 아직 더 숨의 차례까지는 제법 시간이 있었으나, 쿵쿵 킥 베이스 밟는 소리만으로 재환은 은근한 긴장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건 다른 세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긴장은 보다 부풀었다. 상당히 많은 객석 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본격적인 무대 세팅 탓이 컸다. 팀 하나가 열심히 사운드 체크를 하고 있는 무대에는 거대한 앰프와 스피커만 수 대에 다다랐으며, 드럼은 아예 높다란 단상 위에 따로 자리했다. 널따란 무대 양옆으로는 실시간 영상 송출을 위한 커다란 스크린도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니 하나같이 꿀꺽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짝 언 티가 확연한 태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웬만해서는 떨지 않는 지우까지 그랬다. 안 그래도 하얀 한영의 얼굴은 더 새하얘졌다. 마찬가지로 뻣뻣이 긴장한 재환은 살짝살짝 제 손을 쥐었다 놓는 한영의 차가운 손을 미처 저지하지 못했다.

대회 스태프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대기실도 무대와 객석의 규모만큼이나 상당히 널찍했다. 곳곳에서는 이미 리허설을 끝냈거나 순서를 기다리는 팀들이 삼삼오오 모여 준비된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재환을 포함한 넷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지우가 한꺼번에 받아 온 도시락을 태군은 먹는 둥 마는 둥 하였고, 한영은 절반 정도를 먹다 말았으며, 재환과 지우는 꾸역꾸역 다 먹었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 더 숨의 리허설 차례가 돌아왔다.

리허설 자체는 큰 문제 없이 무난하게 끝났다. 그간 나름 죽어라 합주한 결과라면 결과였다. 그렇다고 대단히 만족스럽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지금같이 하면 꼭 예선 때처럼 ‘무대에 많이 안 서 본 티가 난다’라는 평가를 받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재환은 부디 자신의 지레짐작이기를 바랐다.

아직 덜 풀린 듯한 손을 접었다 펴며 멤버들과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재환은 정말이지 반갑지 않은 얼굴들을 딱 마주쳤다. 밴드 블루문이 하필이면 대기실 안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가운데 자리에 보란 듯 모여 앉아 있었다. 특히 그중 한 놈을 시야에 담는 것만으로 재환은 속이 부글거렸다. 지난번 제가 냅다 주먹을 날리고, 또 고맙게도 돌려받은 놈이었다. 하여 놈과 눈을 맞추며 저도 모르게 으득 이를 가는데, 재환의 어깨로 툭 커다란 손이 얹혔다. 지우였다.

“재환아, 오늘만 참자-.”

유들유들한 말투였지만 저들을 보는 지우의 눈빛도 그다지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오늘 같은 날 괜한 분란을 일으켜서 이쪽도 저쪽도 좋을 게 없었다. 무대에서 그대로 메고 내려온 기타의 넥을 꽉 움키며, 재환은 쯧 하고 낮게 혀를 찼다.

기타와 페달 보드를 다시 잘 정리해 가방에 넣은 재환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 영 불편한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릴 겸 핸드폰을 꺼내 리허설 중 찍어 놓았던 앰프 세팅을 확인했다. 사진을 좀 더 확대해 볼 즘, 테이블 아래서 의자 모서리를 짚고 있던 손에 슬그머니 서늘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이 와 닿았다. 퍼뜩 돌아간 재환의 고개가 옆에 앉은 한영을 향했다.

한영은 허리를 숙여 테이블 위에 옆얼굴을 딱 붙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속눈썹만 팔랑이는 한영과 눈을 맞추던 재환은 지레 흠칫해 테이블 맞은편의 태군과 지우에게로 휙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오늘 대회 일정표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도 이쪽에 신경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사이 뻗어 온 하얀 손이 재환이 쥐고 있던 핸드폰을 슬쩍 가져갔다. 재환은 눈을 끔뻑이며 한영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테이블에 턱을 댄 한영은 몇 번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리더니, 다시 쓱 재환에게 내밀었다. 핸드폰을 집어 작은 사각 화면을 내려다보는 재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환아 화내지마]

어느새 켜진 핸드폰 메모장에 작은 글씨로 그리 쓰여 있었다. 순간 멍한 표정이 된 재환은 살짝 혼란에 잠겼다. 답장을 적어야 하나.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 되나. 둘 중 무엇도 하질 못하고 있는데, 또 한영이 재환의 손에서 쏙 핸드폰을 빼 갔다.

이번에는 좀 더 길게 액정을 누른 후 방금처럼 테이블 위로 쓱 핸드폰을 밀었다. 집어 들어 화면을 보자, 한 줄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화내는 것도 섹시한데 그래도 화내지마]

허. 결국 재환은 맥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혹 앞에 앉은 녀석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들킬까 싶어 얼른 표정을 굳혔다. 그럼에도 자꾸 비죽비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려 앉히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적힌 내용이 참 어이없기도 하고, 또 이러는 한영이 말 못 하게 귀여워 보여서. 어쨌거나 그 덕에 재환은 버글버글 끓던 속이 한결 가라앉았다.

입술을 감쳐물고 잠시간 더 웃음을 참던 재환은 핸드폰 액정에 두 엄지를 얹었다. 큰 고민 없이 몇 글자를 입력하고서, 종전의 한영을 흉내 내 테이블에 내려놓은 핸드폰을 쭉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엎드린 채로 재환이 내민 핸드폰 화면을 보던 한영의 상체가 갑자기 용수철처럼 벌떡 위로 튕겨 올랐다. 두 눈은 튀어나올 듯이 거대하게 뜨였다.

섹시한 건 너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핸드폰과 저를 번갈아 쳐다보는 한영의 모습에 재환은 쿡쿡 숨죽여 웃었다. 어느덧 서로 주먹질하던 놈을 향한 분심도, 다가올 무대에 대한 걱정도 사르르 사그라들었다. 일단은 그랬다.

열 팀의 리허설이 모두 끝나고, 이제 남은 것은 초조하면서도 지루한 대기 시간을 견디는 일이었다. 재환으로선 내심 블루문의 무대가 궁금했으나, 경연 마지막 순서인 그들은 이쪽이 강당에 도착하기도 전 제일 처음으로 리허설을 한 터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라이벌이라는 유치한 표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 팀보다는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것이 재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경연 시작 시각이 다가오며 강당에는 하나둘 관객들이 찼다. 각 팀당 몇 장씩 초대권이 주어졌는데, 재환의 몫은 카페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대기실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재환은 ‘오빠, 도착했어요!’ 하는 희연의 메시지를 받았다. 재환은 부리나케 대기실을 나서서 건물 로비 쪽으로 나갔다. 카페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 몇과 세훈, 그리고 태혁이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어, 재환 오빠 왔다!”

“오빠!”

“오, 재환이!”

“오셨어요? 밖에 춥죠?”

이곳에서 보니 더 반가운 얼굴들을 향해 재환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저마다 다들 재환에게 한마디씩을 던졌다. 못 알아볼 뻔했다, 오늘 힘 좀 줬네, 멋있어요, 하는 얘기들이었다. 머쓱함을 숨기지 못한 재환은 한영이 잘 정리해 준 머리를 몇 번이나 쓱쓱 긁으려다 관두어야 했다.

“오빠, 그럼 이따 파이팅하세요!”

“응. 오늘 와 줘서 고마워.”

카페 사람들과 짧게 대화하며 그새 또 쑥쑥 커졌던 긴장감을 조금쯤 꺼뜨린 재환은 대기실로 발을 틀었다. 복도를 지나던 중 막 화장실에서 나오는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어.”

“와, 형님!”

밴드 코스믹 라테의 보컬 희성이었다. 물기 묻은 손을 잽싸게 바지춤에 쓱쓱 문지른 희성은 재환이 채 인사를 건네기도 전 덥석 손을 잡아 왔다. 희성의 힘찬 손길에 재환의 팔이 휙휙 위아래로 흔들렸다.

“오늘 무대 완전 기대할게요! 근데 형님 완전 딴 사람 같은데? 코벤트서 공연할 때도 좀 이렇게 하고 오시지.”

기대와 타박이 묘하게 섞인 말을 들으며 상체까지 휘청이던 재환은 두툼한 손이 떨어져 나갔을 즈음에야 입을 뗐다.

“희성이 너도 대회 보러 온 거야?”

“네! 친구 놈 팀이 나와서요. 와서 꼭 보라고 아주 지랄지랄을. 근데 사실 형님네 무대가 더 기대돼요.”

이후로도 희성은 자기 팀은 날짜를 깜빡해서 아예 대회 지원도 못 했다, 이게 말이 되느냐, 근데 어차피 예선에서 떨어졌을 거다 등등 목청 높여 이야기를 이었다. 적당히 위로하고 적당히 웃으며 재환은 또 희성 덕분에 얼마쯤의 긴장감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럼 형님, 꼭 1등 하십쇼!”

재차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드는 희성에게 ‘노력해 볼게.’ 하고 답한 재환은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사이 다들 밖으로 나간 건지, 함께 앉아 있던 테이블에는 태군이 당 떨어진다며 까먹은 과자 껍질 몇 개만 놓여 있었다. 비닐 껍질을 찬찬히 뭉쳐 쓰레기통에 버린 재환은 털썩 의자에 앉아 멤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재환이 핸드폰을 꺼내 괜히 메모장만 껐다 켰다 할 무렵, 그와 엇갈려 로비로 나온 한영은 분주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우는 담배 피우러 가고, 태군도 전화를 받으러 나가 영 자리에 혼자 있기가 싫어 대기실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재환이 없는 게 제일 싫었다.

그러나 경연을 보러 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로비 어디에서도 새카맣고 단정한 머리꼭지가 보이지 않았다. 분홍 머리칼이 팔랑거릴 정도로 이쪽저쪽 고개를 돌리던 한영은 혹시 몰라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강당 내부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손에 쥔 초대권의 번호를 확인하며 좌석을 찾는 사람, 벌써 자리에 앉아 떠드는 사람, 대회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바쁘게 오가는 스태프…. 그중에도 간절히 찾는 이의 뒷모습은 없었다.

아예 앞에서 살필 요량으로 한영은 객석을 따라 길게 난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내려갔다. 오르내리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 가장 아래까지 도달하니, 어느덧 불 꺼진 컴컴한 무대가 바로 앞에 있었다. 턱 높이까지 바닥이 올라오는 무대를 멀거니 쳐다보던 한영은 이럴 때가 아님을 상기하며 휙 뒤를 돌았다.

동시에 이미 좌석 태반이 차 있는 강당의 전경이 한꺼번에 시야로 쏟아져 들어왔다. 거기 앉은 사람 모두가 마치 저를 보고 있는 듯한 기괴한 착각이 삽시에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서서히, 사람들의 얼굴 위로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어느 과거의 순간이 겹쳐졌다.

하나같이 검정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 어딘가 축 처진 공기, 따분한 분위기. 아네스였나, 안젤라였나. 아마 옆집 사는 할머니의 장례식이었을 것이다. 그들 앞에서 한영은 홀로 신나 즐거이 피아노를 쳤더랬다. 그때 왜 엄마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더라. 거기까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얼굴이 파리하리만치 차갑게 굳어 있던 것은 똑똑히 기억한다.

일순 한영은 강당 층층이 객석을 채운 사람들의 얼굴이 다 그렇게 보였다. 차갑고, 매섭고, 무시무시하게. 그러자 안 그래도 눈에 띄게 하얀 얼굴이 차츰 핏기를 잃고, 비슷하게 새하얘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무대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툭툭 어깨를 치고 지나갔으나,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음조 높은 목소리가 수렁으로 떨어지기 직전이던 한영을 아슬아슬하게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어, 안녕하세요!”

흐리멍덩하던 눈에 초점이 돌아온 한영은 목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기억에 있는 듯 없는 듯한 얼굴이 저를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얼마 안 가 한영은 상대가 재환과 함께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아이들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유독 재환만 보면 얼굴을 발그레 붉히는 키 자그마한 쪽이 아닌, 더 키가 큰 쪽이었다.

“저 기억하세요? 이상지라고, 재환 오빠 공연 보러 클럽에 간 적도 있는데.”

“아….”

“저 더 숨 노래 엄청 좋아해요. 오늘 공연 잘하세요!”

두 주먹까지 꽉 쥐어 보이는 소녀에게 어물어물 고맙다고 인사한 후 황급히 강당을 뛰쳐나왔다. 그나마 사람이 적은 복도에 서서 벽을 짚고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난데없이 까마득한 과거를 떠올렸던 시점부터 쿵쾅쿵쾅 방망이질 치던 가슴팍의 진동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재차 눈앞에는 엄마의 얼굴이 그려졌다. 장미꽃같이 뾰족뾰족하던 그녀의 얼굴은 금세 흐물흐물 일그러져 핼러윈 마녀처럼 변했다. 내게서 피아노를 빼앗아 간, 못된 마녀.

그대로 무릎을 쪼그려 주저앉아 창백해진 손으로 두 귀를 막았다. 그렇게 해도 꺄르르, 꺄르르 마녀의 비웃음 소리가 귓속에서 멈추지 않았다. 보다 작게 몸을 움츠린 한영은 입술을 달달 떨며 거듭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유한영!”

푹 고꾸라져 있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물기가 찬 눈앞에 다부지고도 굳건한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맞잡은 순간, 컴컴한 심해에서 건져 올려지듯 한영의 몸이 휙 위로 일으켜졌다. 구세주 같은 한 사람의 손에 이끌려 그렇게 한영은 복도를 걷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영을 데리고 인적이 없는 지하 1층까지 내려온 재환은 잠깐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이곳저곳 살피다 계단 아래 천장이 바닥까지 기울어진 좁은 공간으로 한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명이 들지 않는 사각지대라 불을 꺼 놓은 듯 어두컴컴했지만,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층의 소란도 그곳까지는 와 닿지 않았다. 한영을 마주 보고 선 재환은 아직도 희게 질려 있는 두 손을 꽉 쥐었다.

“많이 긴장돼…?”

아…. 한영은 사선으로 떨어지는 그림자 속에 아슬아슬 들어온 발끝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느릿느릿 눈꺼풀을 움직이며 재환이 건넨 물음을 되새겼다. 그제야 새삼스러운 깨달음 하나가 스르륵 의식을 스치고 지났다. 긴장한 거였구나. 나, 긴장해서 그런 거였구나. 한영은 다시 눈을 들어 재환을 보았다.

“…응. 그런 것 같아. 그런 가 봐…. 나 긴장돼, 재환아.”

저조차 인지 못 했던 마음을 이실직고하자 재환의 얼굴이 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아닌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듯도 했다. 그러다 한영의 한쪽 손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쿵, 쿵, 쿵.

손바닥에 닿은 체온 아래에서 지금 제 가슴에서 울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나고 있었다. 펄떡펄떡 맥동하는 심장의 소리였다. 한영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나도 그래, 유한영.”

손등 위로 겹쳐진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그 힘에 눌려 한영은 손바닥으로 재환의 가슴을 더 지그시 내리누르게 되었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꼭 손에 직접 만져지는 것 같았다. 재환이 많이 떨고 있고, 또 동시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였다.

“원래 떨리는 게 당연한 거야. 잠깐 보니까 강당에 자리도 엄청 많이 찼더라. 나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

재환의 입꼬리가 움찔움찔 위로 올라갔다. 억지로 짓는 웃음이 확연했다. 한데도 한영의 눈에는 이 컴컴한 공간이 훤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웃음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그래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이, 따뜻한 품에 천천히 몸이 끌어안겼다. 곧은 어깨에 턱이 걸쳐지며, 품만큼이나 따스한 손이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간은 떨리는 듯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근데, 어차피 유한영 너 무대에서 엄청 멋질 거잖아. 그니까 나도 빨리 정신 차려야지. 내 말 맞지?”

속을 가득 채운 긴장을 몽글몽글 풀어지게 만드는, 너무도 달콤한 협박이었다. 그리하여 어느새 한영은 재환을 함께 꼭 껴안고 있었다. 이제는 다른 의미로 쾅쾅쾅 뛰는 두 개의 심장이 공명했다.

우람찬 박동음을 나누며 한참을 붙안고 있던 둘은 서서히 시선을 마주했다. 암암하게 그림자가 진 서로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술을 맞대었다.

꺼지지 않는 심장 소리 위로 조급하게 숨결 섞이는 소리가 얹혔다. 한기 대신 열이 가득 고인 손바닥이 쉬지 않고 맞닿은 몸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어둠 속에 숨어든 두 남자는 이토록 온 마음을 다해 입 맞추었다. 당장 몸이 달아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신성하고 경건한 의식에 가까웠다. 무대에서 너를 위해 노래하고, 너를 위해 연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갈구하는 몸짓이었다.

“하아, 하아….”

“하….”

겨우 입술을 뗀 두 사람은 숨을 할딱이며 콩, 이마를 맞대었다. 요란하게 뛰어 대는 심장이 이제는 긴장감 때문인지, 상대의 열기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를 확인하듯 몇 번 더 쪽쪽 입술을 부딪쳤지만, 그럴수록 가슴속만 더 빨갛게 달구어졌다.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하나뿐이었다. 한영과 재환은 어서 무대에 오르고 싶어졌다.

시꺼먼 앰프에 달린 스위치에 전부 빨간 불이 들어왔다. 하얀 건반 위에 더 하얀 손가락이 얹히고, 드럼스틱 두 개가 높이 들렸다. 음과 음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갈 준비를 모두 마친 무대 위 네 사람은 미미한 미소를 건 채 서로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관심 가는 여자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든, 눈엣가시 같은 밴드를 이기고 싶어서든, 아니면 지금 무대에 함께 서 있는 누군가를 위해서든 오늘 그들은 정말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유독 잔소리 많은 한 멤버 때문에 질리도록 합주한 시간이 억울해서라도 그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순간이 네 번의 나뭇결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숨소리 같은 노래에 심사 위원도, 관객들도 모두 빠져들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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