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 *
“어때?”
한영의 노래에 맞춰 부드러운 스트로크로 기타 연주를 끝낸 재환은 다른 두 멤버를 향해 물었다. 한영에게 가사를 알려 주기 위해 기타로 연주했던 〈I See You〉를 얼마 전 보다 제대로 편곡해 보았는데, 이를 오늘 처음 지우와 태군에게 들려준 것이다. 야유회 때 〈I See You〉의 기타 버전을 아예 EP 앨범에 보너스 트랙으로 싣자는 의견이 나온 까닭이었다.
“좋은데? 기타 톤은 이대로? 아니면 나중에 통기타로 녹음할 거야?”
“이게 좋아.”
지우의 물음에 재환 대신 한영이 즉각 답했다. 가끔가다 보여 주는 ‘이거 아니면 싫어’라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하니 지우는 두 번 더 캐묻지 않고 그저 피식 웃었다. 다만, 초조한 듯 다리를 떨고 있는 태군은 영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어땠냐는 재환의 말에 대답은 않고 연신 핸드폰 화면만 흘긋거렸다. 다들 그 이유를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장태군. 아직 5시 안 됐어.”
“아씨, 빨리 뜰 수도 있잖아.”
지난번 치렀던 대회 2차 예선의 결과가 마침 오늘 오후 5시에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직 5시까지는 20여 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태군은 핸드폰으로 대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몇 번이나 새로 고침을 눌렀다. 그 애타는 마음이 영 이해 안 가는 바가 아니니, 재환은 태군에게 마냥 그러지 말라 핀잔주기도 뭐했다.
“아오….”
역시나 이번에도 결과는 허탕인 모양이었다. 태군은 짜증스럽게 벅벅 뒤통수를 긁으며 옆에 있던 보면대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물론 채 1분도 가지 않아 다시 집어 들었지만. 그렇게 또 1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야! 떴어! 떴다!”
태군의 끈질긴 노력이 끝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한마디에 나머지 세 사람은 벌떡 일어나 태군이 앉아 있는 드럼 주위로 몰려들었다. 네 쌍의 눈알이 내뿜는 숨죽인 시선 속, 태군의 엄지가 핸드폰 액정에 뜬 팝업 창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약속한 듯 흡, 하고 모두의 호흡이 멈추었다. 잠시 후.
“헐!”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쥔 태군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상태로 얼음이 된 친구의 손에서 얼른 핸드폰을 가져온 재환은 작은 화면에 얼굴을 들이대고 부지런히 눈알을 굴렸다. 곧이어 흰자가 드러날 정도로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본선 진출 팀 명단’이라는 제목 아래 늘어선 열 개의 이름 중, 중간쯤 되는 곳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 있었다. 혹 잘못 보았나 싶어 엄지와 검지로 화면을 있는 대로 확대해서 보았지만, 틀림없었다. ‘더 숨’이었다.
“우리 맞지…?”
느릿느릿 핸드폰에서 얼굴을 든 재환은 꿀꺽 침을 삼키고서 태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움찔거리던 태군의 입꼬리가 이내 양옆으로 길게 벌어졌다. 동시에 흡사 크래쉬 심벌을 내리치는 듯한 데시벨로 ‘앗싸!’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어!”
작지만 매서운 손이 재환의 등을 제법 아프게 툭 때렸다. 얼결에 얻어맞은 상체가 앞으로 휘청 기울었다가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았다. 그럼에도 재환은 아직 현실이 완벽히 인지되지 않았다.
본선에 붙기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워낙 쟁쟁한 팀들이 많았고, 또 이렇게 큰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저희에게는 처음이라 당연히 가능성이 낮을 줄 알았다. 오늘이 다가올수록 그러한 생각은 더욱더 커졌다. 쓸데없이 기대감만 부풀렸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데, 열 팀 사이에 떡하니 더 숨의 이름이 있었다. 진짜로 더 숨이 본선에 진출한 것이다.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씨발, 내가 우리 된다 그랬잖아! 내 말이 맞았지?”
“그러게….”
아예 등 뒤로 팔을 둘러 제 어깨를 콱콱 흔드는 태군의 말에 재환은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동조했다. 옆에 있던 한영이 슬쩍 몸을 기울여 그 표정을 가까이서 살폈다. 한영과 시선이 마주친 재환은 또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본선 진출했어.”
“응.”
“우리 이제 본선에 가.”
“응, 맞아.”
굳은 낯으로 앵무새처럼 비슷한 말을 반복하던 재환의 표정 근육이 차츰 부드럽게 풀렸다. 이윽고 눈매가 둥글게 휘며, 얼굴 가득 훤한 웃음이 떠올랐다. 마침내 오롯이 기쁨만을 담은 목소리가 터졌다.
“유한영, 우리 본선이야!”
목멜 만큼 벅차오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재환은 답삭 한영의 어깨를 붙들었다. ‘본선이라고!’ 거듭 외치며 애매하게 웃고 있는 한영을 짤짤 흔들었다. 평소의 그라면 감히 생각도 못 할 행동이었겠으나, 지금은 기뻐 미치겠는 마음이 앞섰다. 그러다 휙 한영을 놓고 도로 핸드폰 화면에 코를 박았다.
아직도 완전히 실감을 할 수 없었던 재환은 페이지에 적힌 ‘더 숨’ 두 글자를 보고 또 보았다. 새로 고침을 해 보아도, 뒤로 나갔다 다시 들어가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 허, 와…. 단음절의 감탄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이렇게 아이처럼 좋아하는 재환을 본 일이 없던 한영은 곁에 서서 설렘이 잔뜩 핀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비친 핸드폰 화면의 페이지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얘졌다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그럴수록 단정한 이목구비가 더욱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너무 예쁜 웃음이었다.
결국, 숱 많은 머리칼로 덮인 관자놀이에 자연스레 입술이 향했다.
무언가 옆머리에 닿았다 떨어지는 느낌에 재환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차 시선이 닿은 한영에게 쑥 눈썹을 들었다 내리며 ‘응?’ 하고 묻자, 한영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의아하다는 듯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재환은 이내 벌쭉 웃었다.
그사이 지우의 핸드폰을 함께 들여다보던 태군이 ‘씨발, 그 새끼들도 있어!’라고 외쳤다. 누구 얘기인가 싶어 재환은 손에 쥔 핸드폰으로 눈길을 되돌렸다. 그제야 명단 맨 밑에 있는 ‘블루문’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기쁨이 넘실거리던 얼굴에 조금쯤 언짢음이 서렸다.
그때까지도, 한영의 눈은 재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아야!”
깨끗한 행주로 에스프레소 머신의 스팀 노즐을 닦던 희연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떨어뜨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쇼케이스에 케이크를 채우던 재환이 얼른 희연에게 다가갔다. 행주를 쥔 희연의 손을 살피자, 엄지와 검지 사이가 불긋한 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노즐에 손이 닿은 것이다.
“괜찮아?”
“아, 네…. 그냥 살짝 덴 것 같아요.”
“일단 찬물로 빨리 씻자.”
재환은 재빨리 희연을 싱크대 앞으로 데려갔다. 쏟아지는 찬물 아래 손을 대며 희연은 오늘따라 실수가 잦은 저를 속으로 나무랐다. 물론 이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짐작한 재환이 걱정이 스민 얼굴로 넌지시 희연에게 물었다.
“오늘 컨디션 안 좋으면 먼저 퇴근할래? 사장님한테 내가 연락드릴게.”
“아녜요, 오빠….”
차가운 물을 맞아 따끔따끔한 기운이 일단은 가신 손을 탈탈 털며 희연은 시무룩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카운터 너머, 홀의 창가 자리를 곁눈으로 흘끔거렸다. 자연히 재환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2인용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었다. 재환이 기억하는 게 맞는다면, 카페에 들어와 음료를 시킨 지 두어 시간은 지났을 터였다.
“아는 사람이야?”
희연은 절레절레 얼굴을 흔들었다.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친구를 향한 재환의 걱정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카운터 밖으로 들리지 않도록 재환은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데 왜 그래. 아까도 저기 몇 번 쳐다보는 것 같던데.”
제법 정곡을 찌르는 재환의 질문에 희연은 눈을 내리깔고 자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허리 아래에서 맞잡은 두 손을 꾹꾹 주무르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재환 오빠한테는 정말이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지난주쯤엔가 저 사람한테 번호를 받았거든요.”
우물쭈물 이어지는 희연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재환은 좁혀진 미간을 펴지 못했다. 유독 희연이 일하는 타임에 카페를 찾던 남자는 급기야 그녀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주었는데, 희연이 연락을 않자 요새는 아예 저리 몇 시간씩 죽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희연과 일하는 시간이 겹치지 않아 재환은 미처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래도 저 퇴근하기 전에는 돌아갔었는데, 오늘은 왜 안 가나 모르겠어요. 곧 퇴근인데….”
표정에 겁먹은 기색이 확연한 희연에게서 눈을 돌린 재환은 다시 창가 쪽을 보았다. 이곳을 향해 있던 남자의 고개가 재빨리 아래로 숙어졌다. 재환의 양미간이 한층 폭을 좁혔다.
“그 후로 더 말 건 적은 없고?”
“네. 그냥 와서 주문만 했는데, 제가 카드 돌려줄 때 좀….”
몸서리가 끼치는 듯 희연은 어깨를 움칠 떨었다. 재환은 재우치지 않고 진득이 희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안하게 양옆으로 눈을 굴리던 희연이 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었다.
“일부러 손을 만지면서 카드를 받는다고 해야 하나…. 한 번은 손목도 잡으려 그러고….”
팍 눈머리를 구긴 재환이 별안간 희연에게 ‘있어 봐.’ 했다. 그러고서 아예 카운터 밖으로 나서려기에, 희연은 다급히 재환의 팔을 붙잡았다. 걸음을 멈춘 재환이 뒤를 돌자 희연은 홱홱 고개를 저었다.
“오빠, 그래도 일단 손님이니까…!”
과거 진상 손님 하나를 재환이 냉큼 가게 밖으로 쫓아냈던 것을 떠올린 희연은 필사적으로 재환을 말렸다. 당연히 재환이 저 남자에게도 그래 주면 고맙겠으나, 아무래도 후환이 무서웠다. 여기에는 남자가 풍기는 영 음침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저 괜찮아요….”
흠…, 하고 코로 길게 숨을 뱉은 재환은 ‘진짜야?’ 하고 물었다. 그제야 슬며시 재환의 팔을 놓은 희연은 부러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사실 남자는 별생각이 없는데, 간 작은 제가 지레 겁먹은 것일 수도 있었다.
희연의 만류에 하는 수 없이 남자에게 가서 한마디 하려던 생각을 접은 재환은 포스 화면 귀퉁이에 표시된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오늘은 오픈부터 점심때까지만 근무였기 때문에 곧 있으면 퇴근이었다. 희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직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희연아. 끝나고 지하철역으로 가?”
“네? 아, 네…. 오늘은 바로 학교로 가서요.”
“그럼 역까지 같이 가자.”
희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새 계산대 아래 있는 서랍을 뒤적인 재환이 반창고 하나를 꺼내 쓱 희연에게 내밀었다. 머뭇거리며 받아 든 희연은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주책맞게 붉어진 귓바퀴를 손으로 조몰락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오빠.”
“아냐. 빨리 반창고 붙여. 홀 한 번 돌고 올게.”
다부지게 뼈마디가 불거진 손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눈빛 음침한 남자 때문에 졸아들었던 희연의 마음이 몽글몽글 풀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재환 오빠 앞에서 이게 뭐람. 희연은 설렘과 한탄이 섞인 한숨을 폭 내쉬었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한 희연이 지하 역사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재환은 겉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동그란 홈 버튼을 눌러 봤다가 ‘아….’ 하는 곤란함 섞인 소리를 뱉었다.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어젯밤 늦게까지 녹음한 기타 트랙을 정리하다 충전도 시켜 놓지 않고 껌뻑 잠이 든 결과였다. 그래도 한영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배터리가 버텨 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예 꺼져 버렸으니 조금 늦어진다는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당장의 시간도 확인하지 못한 재환은 일단 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역이 한영의 집 반대 방향이라 그 중간에 다시 카페 앞을 지나쳤다. 휙 들여다본 카페 내부에 더 이상 문제의 남자 손님은 없었다. 희연과 자신이 같이 퇴근한 후 그도 곧바로 가게를 나선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희연을 직접 역까지 데려다줘 재환으로서는 한시름 놓았다. 요즘 세상이 좀 흉흉해야 말이지. 다만 그로 인해 약속된 시간보다 늦어진 것을 한영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오늘 재환은 한영의 집에서 기타 버전으로 편곡한 〈I See You〉의 보컬을 새로이 녹음하기로 했다. 이제 2주 남짓이면 대회 본선이 열리지만, 그렇다고 EP 앨범 준비를 또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난달 발매했던 첫 싱글의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재환은 가능하다면 이 기세를 쭉쭉 이어 나가고 싶었다. 왜, 물 들어온 김에 노 저으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물론 더 숨이 보다 큰 바다로 나가려면 훨씬 많은 물과 노질이 필요할 터였다.
당장은 노질보다 한영의 집에 빨리 도착하는 게 급선무였던 재환은 헉헉 밭은 숨을 토하며 뛰듯이 오르막길을 올랐다. 익숙한 대문 앞에 다다라서야 그나마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이제는 거의 제집 비밀번호를 누르듯 도어 록에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하고서 헐레벌떡 대문을 통과했다. 다시 걸음에 속도를 높여 곳곳에 마른 낙엽이 떨어진 정원을 가로질렀다. 현관 비밀번호까지 마저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서둘러 운동화를 벗었다.
“유한영…?”
일단 거실로 향한 재환은 기다란 소파 한가운데서 홀로 두 다리를 끌어안고 있는 한영을 발견했다. 적잖이 놀란 마음에 이름을 부르자 무릎에 파묻혀 있던 분홍 머리통이 서서히 위로 들렸다.
“…재환아.”
놀란 건지, 기쁜 건지, 아니면 그냥 얼이 나간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로 휙 시선을 돌린 순간 재환은 흠칫했다. 기껏해야 10분쯤 늦었을 줄 알았건만, 한참을 더 돌아간 시곗바늘은 그가 무려 30분이나 지각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재환은 한영의 손에 꼭 쥐인 핸드폰을 보며 조급히 말문을 뗐다.
“미안, 카페에서 일이 좀 있었어서. 연락하려고 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됐더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입이 썼다. 대충 그럴싸한 변명이나 주워섬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여 재환은 말하는 동안 상대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꾹꾹 뒷목을 주물렀다. 만약 합주에 늦었어도 지금처럼 마음이 불편했을까. 잘 모르겠다.
“안 오는 줄 알았어.”
어느새 소파에서 일어선 한영이 긴 다리를 움직여 재환 가까이 와 섰다. 정말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듯 낯빛이 밝지 않아, 재환은 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시꺼먼 화면만 보여 주는 핸드폰을 좌우로 흔들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 오긴 왜 안 와. 어제 충전을 못 하고 잤는데, 반나절도 못 버티더라. 이제 슬슬 바꿔야 될까 봐.”
나름 한영의 분위기를 풀어 주고자 꺼낸 말인데, 그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물끄러미 재환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지레 양심을 콱콱 찔러, 결국 재환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술술 불고야 말았다.
“그게…, 우리 공연 왔던 희연이 알지? 요새 희연이 보러 카페에 스토커처럼 찾아오는 새끼가 있거든. 아무래도 좀 걱정이 돼서. 지하철역 데려다주고 온 건데, 생각보다 너무 늦었다. 미안해, 진짜.”
평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줄줄이 말을 늘어놓던 재환은 슬쩍 한영의 눈치를 살폈다. 푹 눈을 내리깐 한영은 여전히 무어라 대꾸가 없었다. 어디까지 저자세를 유지해야 하나 슬슬 혼란이 느껴질 무렵, 앞으로 뻗어 나온 하얀 손이 덥석 팔목을 붙잡았다.
“내려가자. 내가, 다 준비해 놨어.”
준비? 되물으며 재환은 한영을 따라 얼결에 발을 뗐다. 이윽고 계단을 밟아 지하로 내려갔을 때, 재환은 한영이 말한 준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합주실 방음문 앞에는 일전 재환이 세팅해 놓았던 그대로 노트북, 오디오 인터페이스, 헤드폰 따위가 차례로 연결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소 놀란 기색을 감춘 재환은 슬며시 제 팔목을 놓는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네가 미리 세팅해 둔 거야?”
“응.”
“왜?”
물어 놓고 재환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인데, 꼭 따지듯이 들렸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아니, 내가 해도 되는데….”
“그냥… 잘 보이고 싶어서.”
일순간 재환은 대꾸할 말을 잊었다. ‘여기서 더?’라는 말이 툭 목젖을 쳤다. 이미 한영은 재환에게 있어 나무랄 데가 없는 보컬이었고, 가끔가다 그가 보이는 어딘가 이해 안 갈 행동에도 이제는 충분히 익숙해졌다.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여하간, 한영이 굳이 제게 잘 보이고 싶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흠흠, 헛기침한 재환은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흘깃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 보이지는 않으나, 마이크도 벌써 합주실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준비한 한영을 연락도 없이 기다리게 했다는 죄책감이 또다시 콕콕 양심을 찔렀다. 서둘러 방음문을 연 재환은 합주실 안으로 한영의 등을 떠밀었다.
“잘했어. 그럼 빨리 시작하자.”
그러면서도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영 조짐이 좋지 않았다. 과연 오늘 녹음을 잘 마칠 수 있을까. 재환은 문득 막막해졌다.
“볼륨 밸런스는 다 괜찮아?”
한 번의 테스트 녹음 후, 오디오 인터페이스의 토크 백 버튼을 꾹 누른 재환은 합주실 안에 있는 한영에게 물었다. 그러자마자 푹 귀를 덮은 헤드폰에서 ‘응.’ 하는 짧은 답이 들려왔다. 혹시나 해 재환은 보다 구체적으로 질문을 바꾸었다.
“네 목소리 안 작은 거지? 기타 반주도 잘 들리고?”
- 응. 다 좋아.
한결같이 짤막한 대답에 재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처음에야 저 ‘좋아’에 한껏 의심쩍은 마음을 품었었으나, 인제는 꽤나 진심이 담긴 말임을 알고 있었다. 한영이 좋다 그러면, 정말로 좋은 거였다. ‘안 좋아한다’도 마찬가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 일단 1절 벌스만 갈까?”
- 응, 그래.
양반다리 하고 앉은 재환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놓인 노트북의 트랙패드 위에서 쓱쓱 손을 움직였다. 트랙에 녹음할 구간을 설정한 후 빨간 점으로 된 녹음 버튼에 커서를 가져갔다.
“시작할게.”
- 재환아.
“응?”
시작 전 제게 요청할 거리라도 생각났나 싶어 재환은 재빨리 답했다. 하지만 정작 한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지막한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설핏 눈썹 사이를 움츠렸다 편 재환은 다시 ‘유한영, 왜?’라고 물었다. 한영의 답을 기다리며 검지 끝으로 톡톡 트랙패드를 두드렸다.
- 아냐.
한영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이럴 때면 재환도 도리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재환은 그래, 하고 포기하듯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여기서 더 캐묻는다고 삼킨 말을 도로 뱉을 한영이 아니었다.
“그럼 진짜 시작한다.”
- 응.
재환은 주저 없이 시퀀서 프로그램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네 번의 메트로놈 박자가 울리고, 트랙 앞머리에 자리한 커서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하는 숨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노래를 들으며 재환은 등을 기대고 있던 복도 벽에 콩 뒤통수를 붙였다.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든 채로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문득 막연한 질문들이 스르륵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왜 저 목소리는 들을수록 좋은 걸까. 그새 노래 실력이 더 는 걸까. 아니면, 그냥 우리 팀 보컬이라서? 이전 밴드를 할 적에도 이랬던가….
당시 보컬이었던 형찬이 녹음 부스에 들어갈 때마다 밖에서 푹푹 한숨 쏟았던 기억을 떠올린 재환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즈음, 지정한 구간 끝에 도달한 커서가 화면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헤드폰으로 들리던 한영의 노래도 같이 멎었다. 그새 벌스를 다 부른 것이다. 녹음 중 감히 딴생각을 했음을 서둘러 반성한 재환은 정신 좀 차리자는 의미로 휙휙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중으로 이 곡의 녹음을 집중해서 잘 마쳐야 다시 대회 준비에 몰두할 수 있었다.
“녹음한 거 들려줄게.”
- 응.
방금 녹음된 부분을 재생시킨 재환은 한쪽 무릎을 세워 두 팔을 접어 올렸다. 겹쳐진 팔뚝에 턱을 얹고 헤드폰에서 흐르는 소리에 최대한 귀를 기울였다.
집중해서 들은 한영의 노래는 역시나 딱히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음정도 꽤나 안정적이었으며, 가사도 또렷이 들렸다. 특히, 악기가 다 들어간 원곡보다 힘을 빼고 담담히 부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들어 봤어? 어때?”
- …잘 모르겠어.
재생이 끝나고 의견을 묻자 한영은 영 애매하게 대꾸했다. 아주 낯선 반응은 아닌지라 재환은 기꺼이 제 감상을 밝혔다.
“그래? 내가 듣기엔 되게 괜찮은데. 어차피 반주가 기타 하나라서, 이렇게 힘 빼고 부른 게 곡 분위기랑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좋아.”
- 그럼, 한 번 더 갈게.
재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은 것 같다 했더니 다시 녹음하겠다는 말이 돌아온 까닭이었다. 그래도 이럴 때는 보컬의 의견이 먼저였으므로 흔쾌히 알았다는 답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녹음을 시작했을 때, 재환은 못내 감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와….
종전보다 숨소리가 농농하게 섞인 한영의 노래는 그야말로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여 제게만 노랫말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촉촉한 음색을 타고 흐르는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스르르 고막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간지러운 표현은 웬만해서 쓰고 싶지 않지만, 노래를 듣는 내내 재환은 귓속에 가랑비가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감상은 녹음이 후렴으로 접어들었을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우산 아래 있어도 내 맘속엔 비가 들이쳐’라는 가사가 더더욱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덩달아 우산도 없이 비를 맞았던 그날의 풍경이 다소 멍해진 재환의 눈앞에 멋대로 펼쳐졌다. 그 속에 서 있던 너까지….
또 시작이네. 급히 정신을 차린 재환은 답답한 숨을 토하며 제 머리칼을 마구 흩뜨렸다. 그 순간, 잘 흐르던 한영의 노래가 별안간 뚝 멎었다. 곡의 제목과 같은 ‘I see you’라는 가사가 막 나올 타이밍이었다. 대신 리버브가 넉넉히 들어간 기타 음만이 외로이 헤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재환은 얼른 자판의 스페이스 키를 눌러 녹음을 멈추었다.
“유한영?”
걱정스러운 투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지만 침묵이 이어졌다. 혹시 몰라 노트북 화면도 확인해 보았으나, 합주실의 마이크나 트랙 자체가 음 소거된 것은 아니었다. 세팅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퍼뜩 고개를 옆으로 돌린 재환은 등을 대고 있던 벽에 설치된 방음문 너머를 살폈다. 불투명한 유리에 어른어른 비치는 분홍색 형상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차마 놓칠 수 없는 가느다란 훌쩍임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 재환아….
이어서 물기에 푹 젖은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재환은 저도 모르게 쪼그려 앉듯 풀썩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벽에 등을 댄 채 바닥을 짚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저 애달픈 부름에 대답은 못 하고, 아랫입술만 꽉 깨물었다.
- 나…, 못 하겠어.
그대로 재환은 얼어붙었다. 복도 맞은편 벽을 멍하니 응시하는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 너랑 한 번만 하기로 한 거, 더 이상 못 하겠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 나 이제 너무 힘들어….
귀 전체를 덮다시피 한 헤드폰은 힘겹게 비어지는 목소리를 단 한 톨도 밖으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다. 꼭 이큐와 컴프레서가 동시에 걸린 것 같았다. 그럴수록 재환의 목구멍은 꽉 조여들었다.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 너랑 너무 하고 싶어. 한 번만이라고 약속했는데, 그래도 너랑 너무너무 하고 싶어, 재환아….
과거에도 한 번 들었던 듯한 언사가 계속되었다. 두 번 다시 상대가 입에 담을 리 없을 거라 여겼던 말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처럼 울화가 치미는 대신, 재환은 안도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저런 골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느낄 감정이 아니건만, 믿을 수 없게도 재환은 안도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경직됐던 입 주변의 근육이 풀리며 헛웃음이 지어졌다. 아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두덩이에 팔뚝을 얹고서 피식피식 웃었다. 그 와중에도 절절한 고백은 멈추지 않았다.
- 나, 요새 잠도 못 잤어. 네가 나한테 호모라 그런 애 때렸잖아. 그날, 나 네 생각 하느라 하나도 못 잤어. 그런데… 너 그냥 집 보내서 미안해. 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재환아….
어느새 차가운 복도 바닥에 홀로 놓인 헤드폰에서 울먹거리는 사과가 흘렀다. 그러나 더 이상 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모르는 한영은 푹 고개를 떨구고서 속눈썹을 적신 채 연신 ‘미안해’를 반복했다. 다른 말은 더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을 잊지 못해 미안했고, 밤마다 네 생각만 해서 미안했으며, 결국 ‘한 번만’의 약속을 지킬 자신을 잃어 미안했다. 그래서 끝내 한영은 비굴하게 빌고 말았다.
“재환아, 나랑 하자…. 내가 더 잘할게. 너 아프게도 안 하고, 기분 좋게 해 줄게. 나 정말 너랑만 하고 싶어. 너 말고는 싫어….”
속눈썹 끝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기어이 투두둑 아래로 낙하했다. 바닥을 디딘 두 발 사이에 점점이 작은 동그라미가 늘어났다. 제가 흘린 애처로운 미련의 증거를 내려다보는 한영의 어깨가 하릴없이 들썩거렸다. 많이 서글프고 조금 창피했으나, 그래도 재환이 ‘Yes’라는 대답만 들려준다면 한영은 다 괜찮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유한영.”
몇 방울의 눈물을 더 떨어뜨리던 한영은 반질반질 물길이 난 얼굴을 느리게 들어 올렸다. 제 앞을 막아선 꺼먼 벽을 따라 고개를 더 들추자, 저 높이 어룽진 시야에도 또렷이 보일 수밖에 없는 얼굴이 있었다. 그가 제게 건넬 모진 말을 기다리며, 한영은 찬찬히 눈을 깜빡였다.
“일어서.”
아…. 한영은 앞에 있던 마이크를 옆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 뺨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설핏 스쳤으나, 구태여 몸을 움츠리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재환이라면 그래도 괜찮았다.
딱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로 빤히 한영을 쳐다보던 재환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다, 미세하게 손가락이 움찔거리고 있는 한영의 손을 붙잡았다. 주위가 촉촉이 젖은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따라와.”
곧바로 걸음을 뗀 재환은 합주실 밖으로 나섰다. 긴장한 듯 움칠움칠 떨리는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계단을 오르고, 2층 복도를 지났다. 성내는 말도, 더 사과하는 말도 오가지 않는 가운데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심장 소리가 저음으로 쿵쿵 울렸다.
이제는 제 방만큼이나 익숙해진 알록달록한 공간에 들어서서야 재환은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이 방의 주인을 등지고서, 내려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기 가만있어.”
조금 전까지 상대에게 절대 뿌리칠 수 없는 온기를 전하던 손이 찰칵, 소리를 내며 허리께의 버클을 풀었다. 물려 있는 이를 가르며 지익 지퍼가 내려가고, 다리를 감싸고 있던 검정 바지가 툭, 발목 언저리로 떨어졌다. 그 밖으로 한 발짝씩 벗어난 맨다리 위를 신축성 있는 소재의 작은 천이 훑고 지났다. 이윽고 마냥 말랑하지 않은 엉덩이와 그 아래 쭉 뻗은 다리가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다음 등골을 따라 마찬가지로 검은색을 띤 티셔츠가 끌어 올려졌다. 엑스 자로 교차한 팔로 인해 도드라진 견갑골이 곧은 어깨 아래 선명한 사선을 그렸다. 뒤이어 티셔츠 목둘레가 얼굴을 통과하며 부스스 일어났던 머리가 다시 가라앉을 즈음, 벗은 티셔츠를 바닥에 떨군 재환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계절을 알려 주듯 짧아진 해가 창밖 하늘을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그 색은 고스란히 방 안으로 흘러들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을 같은 빛깔로 적셨다. 그리하여 재환 앞에 선 한영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불안하게 시선을 움직이다, 종국에는 홱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안 그러면 심장이 녹거나, 터지거나 둘 중 하나의 참사는 일어날 것 같았다.
“유한영.”
그것도 잠깐, 부드럽게 뺨을 감싼 손에 이끌려 얼굴이 정면을 향했다. 두 눈 가득 들어찬 광경을 믿을 수 없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까는 간절함을 술술 잘도 뱉던 입이 작은 소리 하나 만들어 내질 못했다.
완전히 얼이 나간 듯한 표정의 한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환은 제 맨살에 사락사락 스치는 노란색 티셔츠 자락을 슬며시 두 손으로 쥐었다. 단숨에 한영을 정신 차리게끔 만드는 행동이었다. 재환이 무엇을 하려는지 직감한 한영의 손이 다급히 뻗어 나갔다. 제 티셔츠를 위로 올리려는 위험천만한 손을 콱 붙들었다.
“재, 재환아…!”
“너도 벗어.”
덤덤한 어조로 내놓아진 칼 같은 명령에 한영은 멈칫 정지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당황과 흥분, 두려움 따위가 혼재된 눈으로 재환을 보았다. 그사이 한영의 상체를 덮고 있던 티셔츠가 기어이 옆구리를 훑으며 느릿느릿 위로 올라갔다. 그 아래로 옴폭 팬 배꼽과 제법 또렷이 갈라진 복근이 드러났다.
“너, 지난번에 옷 하나도 안 벗었잖아. 오늘은 나도 벗고, 너도 벗는 거야.”
“재환아….”
아무 이유 없이 안 벗은 게 아니다. 남자와 섹스한 적 없는 너를 겁주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었는데, 재환은 그걸 몰랐다. …아니, 어쩌면 반대로 다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빨리.”
어쨌거나 재환을 거부할 수 없는 한영은 끝내 순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촉감의 옷자락이 가슴께까지 둘둘 말려 올라갔다가, 이내 분홍색 머리칼을 스치며 완연히 몸에서 분리되었다. 그것을 툭, 재환은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러는 동시에 기억 속에 묻어 뒀던 누군가의 한마디가 불현듯 재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유한영 걔, 몸 되게 좋아.
과거 지우가 제게 했던 말을 오늘에서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재환은 속으로 ‘반칙이네’를 중얼거렸다. 모자람 없이 예쁘게 근육이 붙은 한영의 몸은 곱상한 얼굴과 어울리는 듯, 또 반대로 영 어울리지 아니하는 듯했다. 잘생긴 녀석들은 원래 몸도 좋은 건가, 라는 다소 실없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샘솟았다.
“보기 싫어…?”
재환이 말이 없자 문득 불안을 느낀 한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재환은 매끈한 곡선을 그리며 불룩하게 솟은 한영의 가슴팍에 가만히 손바닥을 얹었다. 부러 눌러 보지 않아도 충분히 딱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감촉이었다. 그러면서도 묘한 부드러움을 품고 있어 퍽 신기하게 여겨졌다.
“아니. 진짜 몸 좋았네. 예뻐.”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지 모를 말에 한영의 심장이 쿵, 바닥을 쳤다. 하지만 재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야해.”
제가 말하면서도 재환은 제법 놀랐다. 아무리 균형 잡혀 있다 한들 어차피 어깨 떡 벌어진 남자의 몸이었다. 그런데도 새하얀 살결 탓인지, 그냥 상대가 한영이라 그런 건지 재환은 더없이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직 한영이 벗어야 할 옷은 남아 있었다.
한영이 입은 청색 트레이닝팬츠를 쭉 아래까지 눈으로 훑던 재환은 허리춤 가운데 묶인 끈으로 손을 가져갔다. 끈 끄트머리를 잡고 리본 모양의 매듭을 풀려는 찰나, 아까보다 더 완고한 힘으로 손목이 붙잡혔다.
“내가 벗을게, 재환아.”
고개를 끄덕인 재환은 꽤나 서슴없는 짓을 벌이려던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한 발짝 뒤로 물러선 한영이 곱게 묶여 있던 끈을 풀고 바지 밴드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조금 허리를 굽힌 뒤 한 번에 바지를 쭉 아래까지 끌어 내렸다. 드로어즈와 함께.
한영이 다시 허리를 펴기 무섭게 언제부터 발기해 있었는지 모를 성기가 배꼽 언저리까지 툭 튀어 올랐다. 이를 눈에 담은 재환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당황이 서렸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우선 컸다. 거기 사이즈로 자존심이 상했네 마네 하는 유치한 소리를 할 나이는 지났지만, 재환의 기를 적잖이 죽이고도 남을 만큼 한영의 성기는 심히 컸다. 거기다 굵고 긴 성기는 깜짝 놀랄 만치 고운 분홍색을 띠었다. 살결이 원체 하야니 저런 곳도 색이 유별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이상해…?”
“그냥… 처음 봐서.”
아무리 봐도 성기 주변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한마디로 털이 한 올도 없었다. 뿌리 부근도, 아랫배도 모두 매끈매끈하기만 했다. 하여 더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한영이 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그사이 더 커진 듯한 성기가 툭 재환의 아랫배를 건드렸다. 저도 모르게 척추를 따라 움칠, 소름이 올랐다.
“재환아. 나랑… 할 거야?”
허리 옆으로 들어온 손이 완전히 소름이 가시지 않은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촉촉한 기운이 남아 있는 갈색 눈동자에 어느덧 당장에라도 활활 타오를 듯한 정염이 일렁였다. 재환은 그 열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영의 얼굴 가까이 손을 가져가 노을빛이 스며 더욱이 붉은 색채를 띠는 입술을 가만히 엄지로 덧그렸다. 이제 그에게 들려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래. 나랑 섹스하자, 유한영.”
너와 나를 옭아매던 ‘한 번만’의 약속, 내지는 저주가 파사삭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 * *
지는 해에 잠겨 한층 붉어진 기운이 감도는 방 안, 뜨겁게 달아오른 두 개의 몸뚱이가 침대 위에서 하나처럼 엉겨 붙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끈적한 소리와 이불 바스락대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반복되고, 밭은 숨소리가 그 사이사이 간헐적으로 섞여 들었다.
한영의 몸을 뒤덮은 재환이 조급하게 입맞춤을 퍼부으면, 다음 순간 우위를 바꾼 한영이 재환의 입 속으로 델 듯한 숨을 불어 넣었다. 각자의 손은 지금껏 닿아 본 적 없는 살결의 체온을 감각하기에 급급했다. 이미 선액으로 질척해진 한영의 성기가 어느덧 단단히 발기한 재환의 성기에 연거푸 문대어졌다. 낯선 접촉이 주는 쾌감은 오늘의 일을 내일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염려조차 저 멀리로 날려 버렸다.
“으, 음….”
“후…, 재환아.”
재환을 그리며 잠 못 들던 시간만큼, 그의 온기를 알게 된 후 더 부풀기만 하는 욕망을 눈물로 억눌러야 했던 시간만큼 한영은 참지 않았다. 참을 수 없었다. 얼마든 닿는 것이 허락된 재환의 유두를 기꺼이 만지고 느꼈다. 물론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목빗근이 선 목을 따라 쪽쪽 입 맞추며 내려간 한영은 엄지와 검지 사이 넣고 굴리던 유두를 합 입에 머금었다. 재환의 허리가 꿈틀 요동쳤다.
“읏, 응…. 하으….”
축축함을 동반한 오싹한 감각에 재환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구부러진 발끝으로 시트 위를 박박 긁다가, 내처 한영의 허리를 두 다리로 덥석 안았다. 그럴수록 유두를 빨아올리는 힘이 보다 거세졌다. 춥춥, 울려 퍼지는 젖은 소리가 위태로운 이성을 흩트렸다. 같은 남자에게 가슴을 빨리며 달뜬 숨을 흘리는 제 모습을 생경하게 여길 여유가 없었다.
다만 그날, 그 밤, 한영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참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때도 이리 허겁지겁 덤벼들었다면 자신이 마냥 가만히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한영이 주는 모든 접촉이 재환에게 가슴 터질 듯한 흥분을 일으켰다. 뭘 그렇게 무서워하고 피하고자 했는지 허무하게 여겨질 만큼.
“재환아…. 기분 좋아…? 괜찮아?”
그런데도 아직 완벽히 불안을 떨치지 못한 한영은 재환을 향해 초조하게 물었다. 베개에 푹 뒤통수를 묻고 있던 재환은 얼굴을 들어 납작한 가슴팍에 턱을 붙인 한영을 보았다. 머리칼보다는 조금 더 옅은 분홍빛을 띤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유한영. 오늘은 쓸데없는 거 묻지 마. 네 맘대로 해.”
한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불그스름한 입술이 달싹이다 ‘정말…?’ 하고 마지막의 마지막인 물음을 건넸다. 어렴풋이 미소 지은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한영은 더는 망설일 이유를 잃었다.
“허윽…!”
곧장 다리 사이로 향한 입술이 예쁜 모양으로 솟아오른 성기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아무리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지만, 한영이 다짜고짜 그곳부터 찾을 줄 몰랐던 재환은 여지없이 놀라 숨넘어가는 소리를 터뜨렸다. 유두를 물린 것과는 비교도 못 할 척척한 감촉이 순식간에 하반신을 뒤덮었다.
“읏, 으…, 유, 한영….”
어렵사리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힘주어 기둥을 빠는 음란한 소리만 돌아왔다. 이런 소리는 야동에서나 들어 보았던 재환은 베개에 한쪽 뺨을 파묻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안 그러면 살아생전 내어 본 적도 없는 소리를 내게 될 것 같았다. 이미 얼마쯤은 꽉 다물린 입술 새를 비집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후…, 크흑…!”
결국에는 시트를 쥐어뜯던 손이 구불구불한 분홍 머리칼 사이로 옮겨 갔다. 그래 봤자 바삐 위아래로 움직이는 한영의 머리통을 밀어낼 수 없었다. 점점 격해지는 입놀림이 손끝의 힘을 앗아 간 탓도 있었고, 또 그게 눈물 질금 나올 정도로 좋은 탓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크게 벌어진 입 밖으로 줄줄 신음이 흘렀다. 뜨겁고 좁은 데 갇힌 성기 끝에서 사정하듯 선액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처럼.
“아, 아…, 하윽! 흣…!”
당연히 한영은 주저 없이 재환이 흘린 모든 것을 꿀꺽꿀꺽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아예 더한 것도 뽑아낼 기세로 쭉쭉 기둥을 빨아들였다. 거듭되는 마찰로 인해 입가가 벌그스름 물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은 입이 찢어진대도 멈추지 못할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입을 더 크게 벌린 한영은 목구멍까지 재환의 성기를 품었다.
그러는 동시에 무릎 꿇은 다리 사이에서 꺼떡대는 제 성기를 쥐고 부지런히 흔들었다. 일단 한 번은 싸 두어야 재환 안에 들어가더라도 괜찮을 수 있었다. 지난번, 그의 집 욕실에서 한 번 자위한 후 콘돔 두 개를 끼고도 얼마 버티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늘은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직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으, 윽…, 흐읍…!”
빨리 사정해야 한다는 한영의 일념은 재환에게도 적용되었다. 목구멍 깊숙이 재환의 성기를 박아 넣은 한영은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곧은 기둥을 거세게 빨아올렸다. 연신 몸을 꿈틀거리는 재환이 벗어날 수 없도록 아예 허벅지 바깥쪽을 두 팔로 감아 고정했다. 영혼까지 빨아 먹히는 듯한 어찔함에 재환은 세모꼴로 능형근이 솟은 한영의 등을 어설프게 발뒤꿈치로 쿵쿵 내리찍었다. 일전 그의 손안에 속수무책으로 싸 버렸던 때보다도 더 빠른 사정감이 찾아왔다.
“유한…, 영. 아아…!”
시트 위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허리가 위로 둥글게 휘었다. 비슷한 각도로 목이 젖혀지고, 팔을 쭉 뻗어 가느다란 머리칼을 쥐고 있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거의 반강제로 습한 곳에 넣어진 성기 끝에서 왈칵 정액이 터지는 감각이 동그랗게 벌어진 입을 다물어지지 못하게 했다. 한영의 머리통을 있는 힘껏 허벅지로 조인 재환은 급기야 남의 입에 사정하며 눈물을 후두두 떨어뜨리는 경악스러운 경험을 하고 말았다.
“후….”
살갗이 벌게질 정도로 문질러지던 한영의 성기 끝에서도 머지않아 정액이 쏟아졌다. 붉게 익은 귀두 가운데서 쭈욱 솟구친 탁한 액은 멀리도 날아가 재환의 회음부를 타고 흘렀다. 거대한 폭풍 같은 사정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재환이 움칠, 엉덩잇살을 오므렸다.
쭉쭉 빠는 소리, 연이어 비어지는 신음, 습기 어린 마찰음 따위가 낭자했던 공간에 이제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남았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은 재환은 어깨와 가슴, 배를 모두 들썩이며 충격에 가까운 여운에 잠겼다. 이게 도대체 무슨…. 누구를 향해 따지는 건지 모를 말이 경직이 채 풀리지 않은 혓바닥 위를 굴러다녔다.
힘이 풀린 재환의 다리 사이에서 상체를 일으킨 한영은 입 주변에 묻은 허연 액을 쓱, 손등으로 훔쳤다. 대부분은 이미 목구멍으로 넘겨 버렸으므로 묻어난 양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입술에 조금 남은 것을 날름 혀를 내어 핥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재환의 맛을 담뿍 느끼며, 밤하늘처럼 촉촉이 젖은 까만 눈동자와 눈을 맞추었다.
“너….”
팔꿈치로 옆구리를 짚어 반절 상체를 새운 재환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질펀하게 싸지른 것이 어디로 갔을지 굳이 물어 확인하지 않아도 알조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그런 짓까지 포함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 손바닥 뒤집듯 뱉은 말을 물릴 수는 없었다. 오늘은 두말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재환은 착잡한 눈으로 한영을 보았다. 언제 남자 거기를 게걸스럽게 빨아 댔었냐는 양 한영이 순한 얼굴로 입을 뗐다.
“네 거 맛있어, 재환아.”
배시시 예쁘게도 웃는 한영의 표정과 반대로 재환의 얼굴에는 쩍 금이 갔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수치심이 빠르게 차올라 낯빛을 벌겋게 물들였다. 이를 식혀 주려는 건지, 부채질하려는 건지 얼굴을 가까이 붙인 한영이 재환의 이마와 뺨,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야, 간지러워….”
안 그래도 마음이 썩 편치 않았던 재환은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 가며 한영의 입맞춤을 피했다. 먼젓번 같았으면 싫다는 재환을 진즉 놓아주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던 한영은 재환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저와 정면으로 눈을 맞추게 했다.
“피하지 마, 재환아.”
한순간 덜컥 숨이 멎은 재환은 크게 뜬 눈만 깜빡거렸다. 대뜸 낮게 울린 목소리가 꽉 심장을 쥐어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저런 눈빛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아무래도 반칙이었다. 그럼에도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답은 한층 진득해진 입맞춤으로 돌아왔다.
“후, 음….”
맞붙은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혀를 얽으며 한영은 수시로 재환의 팔뚝, 옆구리, 허벅지 등을 손으로 쓸었다. 직접적인 자극을 끌어내는 접촉은 아니었으나, 평소보다 배는 뜨거운 기운을 품은 손바닥이 살결을 스칠 때마다 재환은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다. 한영이 만지는 자리 곳곳에 자르르 정전기가 이는 것 같았다. 한가득 정액을 토했던 성기로 어느덧 또 슬금슬금 열이 몰렸다. 조금의 거부감 없이 몸과 마음이 한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후읏….”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살짝씩 주무르던 손이 미지근하게 식은 정액이 묻은 회음부를 훑었다. 한영을 사이에 가두고 있던 재환의 다리가 흠칫 오므라들며 단단한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 아래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이제 어디로 향할지를 직감한 행동이었다. 겁먹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한영은 발긋한 색을 띤 재환의 귓바퀴에 쪽, 입술을 눌렀다.
“이제 손가락 넣을 거야, 재환아.”
전에 들었던 ‘넣어도 돼?’나 ‘넣을게’와는 확연히 다른 어조였다. 물씬 긴장감을 피워 올리는 한영의 예고에 재환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서 얼굴을 끄덕였다. 달칵, 플라스틱 뚜껑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잠시 재환의 살결에서 떨어진 손에 주르륵 투명한 젤이 부어졌다.
시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한영은 젤이 흥건히 고인 손바닥을 반대쪽 손바닥과 비볐다. 미끈거리는 젤에 찬기가 조금 가셨을 무렵, 느슨히 깍지를 꼈다 풀며 손가락 사이사이에도 꼼꼼히 젤을 묻혔다. 그 아래 누워 한영 하는 양을 지켜보던 재환은 미리 몸의 경직을 풀기 위해 가능한 한 느리게 심호흡했다. 그리해 봤자 한참 전부터 빠른 상태를 유지하는 심박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재환아.”
“…응?”
“허리에 쿠션 좀 넣어 봐.”
치덕치덕 젤이 발라진 손을 보여 주며 한영이 하는 말에 재환은 머리맡에 있던 사각 쿠션을 끌어와 허리 밑에 넣었다. 자연스레 하반신이 위로 들리고, 벌린 다리 사이를 한영에게 보다 들이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미 거기도 실컷 빨린 판에, 이런 자세쯤 새삼 창피해할 것도 없다며 재환은 몰려드는 수치를 애써 잠재웠다. 이와 별개로, 한영의 손가락이 다시금 은밀한 곳에 닿아 오자 어쩔 수 없이 팍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그 감촉이 여전히 낯설게 다가왔다.
“읏…!”
고환과 입구 사이를 부드럽게 문지르던 중지가 별안간 빨려 들어가듯 오밀조밀한 주름 가운데를 쑥 파고들었다. 일순 허리를 둥글게 띄운 재환은 옆얼굴을 베개에 묻으며 두 손으로 꽉 베갯잇을 움켰다. 무릎 꿇은 한영의 허벅다리에 걸쳐진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했다.
“후, 응….”
“재환아, 힘 풀어.”
긴장을 풀어 주듯 질척하게 젤이 묻은 반대편 손이 살살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 또한 생경하게 느껴져 허리를 움칠움칠 튕기는 와중에도 재환은 빨라진 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촘촘하게 수축된 복근이 그나마 조금 느슨해진 순간, 두 마디쯤 들어왔던 손가락이 한층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졌다.
“흣, 으…. 후윽….”
도로 학학거리는 숨이 터졌다. 멋대로 조여드는 내벽이 저 안까지 진입한 손가락을 꽉꽉 물었다. 감각이 있을 리 없는 그곳에서 퍼지는 질척한 젤의 촉감이 오싹오싹 뒷덜미를 소름으로 뒤덮었다.
괴로운 듯 불편한 듯 사지를 옴짝거리는 재환을 내려다보던 한영은 앞으로 허리를 숙여 짙은 분홍색을 띤 유두에 입술을 가까이 했다. 뾰족하게 내민 혀끝으로 돌기를 슬쩍슬쩍 핥아 올리자 재환의 입 밖으로 종전과 다른 온도를 띤 신음성이 흘렀다.
“하으…, 읏…. 야, 거기…. 응!”
아직은 익숙해질 수 없는 이질감이 야릇한 흥분으로 뒤바뀌는 시간은 빨랐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한영은 내처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재환의 유두를 빨며 뜨끈한 내벽 안에서 느릿느릿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작은 살점이 습한 숨결에 삼켜지는 소리, 더 습한 곳에서 찔꺽찔꺽 손가락이 젤과 함께 비벼지는 소리, 한층 고조된 신음 따위가 붉은 노을이 출렁이는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으, 응…!”
왕복운동 하던 한영의 손가락이 이제는 내벽의 일정한 곳을 꾹꾹 눌렀다. 전에도 재환을 소스라치게 했던 문제의 지점이었다. 하반신 전체를 징징 울리는 듯한 참기 버거운 자극에 재환은 베개에 뺨을 문대며 끙끙거렸다. 애매하게 발기했던 성기는 삽시에 위로 솟아 한영이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함께 덜렁거렸다.
퉁퉁 부을 때까지 재환의 유두를 빨아 젖히던 한영은 상체를 세워 이로 젤 뚜껑을 열었다. 곧이어 예쁘게도 선 성기 아래쪽으로 주르륵 젤을 붓자, 놀라 긴장한 안쪽 근육이 손가락을 꽉 조였다. 진한 숨소리를 내며 크게 가슴을 부풀렸다 꺼뜨린 한영은 뚝뚝 젤이 떨어져 미끄덩해진 손가락 하나를 구멍 안으로 더 밀어 넣었다.
“어흑…!”
그러자마자 곧바로 재환의 예민한 부분이 콱 짓이겨졌다. 와르르 덮쳐드는 사정감에 재환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몸을 바르작거렸다. 진짜 섹스는 정작 시작도 안 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또 금방 싸 버릴 것 같았다. 얼마 안 가 세 번째 손가락까지 들어와 합세했을 때, 끝내 위기감이 한계에 도달했다. 급히 팔을 위로 뻗은 재환은 턱 한영의 뒷덜미를 부여잡았다. 그제야 조급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유한영.”
오로지 재환을 느끼게 할 생각 하나에만 몰두해 있던 한영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다소 흐릿했던 눈에 초점을 잡고, 검정 머리칼을 촉촉이 땀으로 적신 재환을 내려 보았다. 손가락을 빼지 않은 채라, 쌕쌕 더운 숨을 내뱉는 재환의 뱃가죽이 미세하게 움칠거렸다.
“…왜 그렇게 급해.”
“재환아….”
“나 도망 안 가.”
붙잡은 한영의 목을 가까이 끌어당긴 재환은 분홍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하얀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맞대었다. 코끝이 스치며 서로의 눈동자가 시야를 한가득 메우는 거리에서 시선이 얽혔다. 한영의 눈가가 빠른 속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야.”
깊숙한 곳까지 들이박힌 손가락 세 개 때문에 꼼질꼼질 허리를 비틀면서도 재환은 여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불안함을 완전히 씻어 내지 못했던 한영의 마음을 순시에 벅차오르게 하기 충분한 미소였다. 말간 눈알을 굴려 곱디고운 표정을 만들어 낸 이목구비를 눈에 담던 한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와락 재환에게 입술을 묻었다.
“흐, 음….”
따뜻하고 몰캉한 혀를 얼른 얽으며 한결 부드러운 손길로 재환의 내부를 쑤석였다. 비슷한 온도를 띤 타액이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뒤섞이고, 빠듯한 틈으로 질금질금 새어 나온 젤이 뚝뚝 한영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부들부들한 머리칼 사이에 손을 넣은 재환은 찬찬히 아래가 풀어지는 감각을 느끼며 한영이 쏟아 주는 입맞춤에 열중했다.
한참이나 재환과 숨을 나누던 한영은 슬며시 상체를 세웠다. 구멍 안에서 손가락 세 개를 슬쩍슬쩍 동그랗게 벌려도 이제 재환은 괴로이 끙끙거리지 않았다. 대신 축축한 열이 고인 눈길로 한영을 바라보았다. 연결되기 위한 일련의 준비가 끝났음을 재환도, 한영도 알았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이 빠져나온 구멍이 몇 번 빠끔거리다 조붓하게 다물렸다.
장시간 발기가 지속되어 터질 듯한 성기를 쓱쓱 손으로 쓸어 올린 한영은 콘돔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귀퉁이를 찢어 돌돌 말린 고무 막을 꺼낸 후 최대한 침착히 성기 위에 씌웠다. 기둥 모양대로 늘어난 콘돔 겉에 죽 젤을 짰다.
성기 구석구석 꼼꼼히 젤을 펴 바른 한영은 밑에 누운 재환 위로 풀썩 허리를 숙였다. 구불구불 아래로 쏟아진 머리칼이 만들어 낸 그림자 속, 고요하지만 뜨거운 시선이 둘 사이를 오갔다. 최후의 허락을 구하는 입맞춤이 살포시 재환의 입술로 내렸다.
이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인제 영영 불가능해지리란 것을 재환은 알았다. ‘한 번만’이라는 맘 편한 면죄부, 혹은 비겁한 변명도 더는 지껄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세 번, 네 번은 너무나 쉽게 찾아올 것이다.
오롯이 온기만을 전하다 떨어진 한영의 입술을 재환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위로 다시 제 입술을 부딪치기까지 그다지 긴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번 더 입 맞추며 그간의 엇갈림과, 그로 인해 쌓였던 안타까운 마음들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한영의 목마름, 재환의 주저함 같은 것들도 함께 스르륵 무너졌다.
지금껏 누구와도 나눠 본 적 없는 부드러운 입맞춤 속, 한영에게 살며시 어깨가 붙잡힌 재환의 몸이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이제는 땀에 젖은 뒤통수, 발긋하게 물든 목덜미, 조금씩 떨리는 어깻죽지에 차례로 쪽쪽 입술이 새겨졌다. 베개에 뺨을 대고 엎드린 재환은 곧이어 엉덩잇살이 슬며시 벌어지는 것을 느끼며 흡, 숨을 들이켰다.
묽게 녹은 젤이 흘러나온 구멍에 귀두가 맞춰졌다. 검정 머리칼이 흩어진 베개 양옆을 손으로 짚은 한영은 그대로 재환 안에 천천히 저를 밀어 넣었다. 녹녹하게 풀린 내벽이 벌어지며 성기는 한 번에 쑥, 안쪽까지 들이박혔다.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는 압박감이 재환의 배 속을 꽉 채웠다.
“후읍…!”
“재환아, 숨.”
한 번 지금과 같은 순간을 맞이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재환은 어렵사리 들이켠 숨을 내뱉었다. 다시 들이켜고, 도로 길게 내쉬었다. 묵직한 살덩이를 받아들인 내부에 차츰 긴장이 풀리고, 호흡이 더디게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미안하다는 듯, 다 되었다는 듯 그새 더 달아오른 목덜미에 촉촉한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후….”
“아파, 재환아?”
재환은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진 느낌은 확실하나, 그래도 한영이 공들여 풀어 둔 덕에 아프다 엄살 부릴 수준은 아니었다. 오늘에서야 제대로 본 성기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 정도 버거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애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린 재환은 뒤로 손을 뻗어 더듬더듬 연결된 부위를 만져 보았다. 이를 내려다보는 한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진짜, 다 들어갔네….”
하하, 힘 빠진 웃음이 뒤따랐다. 유한영과 결국 또 섹스하게 되는구나, 라는 마냥 허탈하지 않은 자포자기가 섞인 웃음이었다. 반대로 한영의 낯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엉덩이 사이에 쏙 삼켜진 성기의 뿌리 부근을 더듬는 손을 멀거니 응시하다가, 휙 재환의 팔목을 낚아챘다.
“으읏…!”
베개 옆에 고정시킨 재환의 손등 위로 깍지를 낀 한영은 보다 힘주어 성기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동시에 엎드려 있어도 봉긋함이 사라지지 않는 엉덩잇살과 음모 없이 매끈한 사타구니가 철퍽, 맞닿았다. 한영의 두 다리를 사이에 두고 길게 뻗어 나온 재환의 다리가 덜컥 위로 접혔다 다시 펴졌다.
“윽, 읏…. 후으….”
언제 숨을 골랐냐는 양 재환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한영의 무게를 버티며 헐떡였다. 두툼한 성기를 품은 구멍이 한계치까지 벌어진 느낌이 한층 선연해졌다. 배 속의 장기도 성기에 밀려 짓눌린 것 같았다. 여기에 침대에 배를 딱 붙이고 엎드린 자세까지 더해져 호흡이 툭툭 짧게 끊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러한 괴로움이 아주 오래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엉덩이에 들러붙은 맨살이 떨어지며 안을 압박하던 성기가 느릿느릿 빠져나가는 순간, 재환은 모자란 숨을 한 번에 들이켤 틈을 얻었다. 굵은 기둥과 함께 속살이 딸려 올라가는 듯한 감각은 소름 끼치도록 괴이했으나, 그래도 저 안까지 딱딱한 귀두가 들이박힐 때보다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제 손등을 꽉 붙든 한영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열기가 그렇게 느끼게끔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비슷한 행위가 뒤이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재환에게 숨 쉴 여유를 주며 느리게 뽑혀 올라간 성기는 몸 전체에 산소가 돌았을 즈음 다시 꾸욱 안을 파고들었다. 넓혀진 길을 다지듯 충분히 버티다가, 딱 재환의 호흡이 달리기 직전 서두름 없이 물러났다. 두 번, 세 번, 네 번 이렇게 넣고 빼는 과정이 거듭될수록 거칠었던 재환의 숨소리에 슬슬 달뜬 숨이 섞이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한영의 허리도 조금씩 자연스러운 박자를 탔다.
“후…, 읏. 으응….”
땀과 젤로 적당한 물기를 머금은 살갗이 차진 마찰음을 내며 부드럽게 붙었다 떨어졌다. 잔잔한 파도처럼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한 매트리스 표면이 출렁이고, 유연한 허리 짓 따라 이제는 재환의 입에서 비교적 규칙적인 신음이 흘렸다. 삽입당하며 이런 외설적인 소리를 내는 저 자신이 어색하고 불편해 참아 보려 했지만, 한영이 주는 자극이 은근한 쾌감으로 바뀌어 영 그러기가 어려웠다. 이제 와 한영 앞에서 사릴 게 뭐가 있을까 싶은 마음 탓도 있었다.
“하…, 재환아.”
차라리 솔직해지기를 택한 재환의 반응은 시시각각 한영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럼에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수 없던 한영은 정신을 다잡고 오로지 재환과 연결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에 집중했다. 모질게도 비가 왔던 그날 이후, 더 깊어지기만 한 갈망, 그리움 따위가 한꺼번에 터져 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썼다.
“으, 읏…. 한영…, 한영아. 유한영….”
그러다 열에 잠긴 목소리로 거푸 이름이 불릴 무렵, 움직임이 멈추었다. 찰랑이다 가라앉은 분홍 머리칼 끝에서 또르르 흘러내린 땀방울이 재환의 견갑골 사이로 떨어졌다.
팔꿈치로 침대를 딛고 힘겹게 몸을 비튼 재환은 눈가와 뺨을 모두 불긋하게 물들인 한영과 시선을 맞추었다. 아마 제 얼굴도 크게 다르지 않지 싶었다. 갈라진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서 스스로 듣기에도 퍽 부끄러운 얘기를 꺼냈다.
“그…, 얼굴 보면서 하면 안 되나.”
한영의 눈빛이 일순간 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새 방 안으로 흘러든 어스름한 저녁 기운 탓에 재환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필사적으로 민망함을 삭이며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도… 서로 얼굴 못 봤잖아. 오늘은 안 그래도 되지 않아…?”
‘네 얼굴 보면서 하고 싶어’ 한마디를 꺼내지 못해 이렇게 에두른 소리나 어물거렸다. 그러자 엉덩이 사이에 박힌 성기가 재환에게도 느껴질 만큼 불끈, 하고 꿈틀거렸다. 하나 정작 성기 주인의 얼굴은 다소 멍해 있는 상태였다.
“유한영…?”
역시 괜한 소리를 한 건가, 라는 후회가 스멀스멀 재환의 마음속으로 밀려들 즈음, 절반쯤 들어가 있던 성기가 대번에 쑤욱 밖으로 뽑혀 나왔다. 갑자기 아래가 뻥 뚫린 듯한 괴이쩍은 느낌에 재환은 확 눈썹을 모았다. 그것도 잠시, 한영에게 답삭 허리가 붙잡혀 몸이 휙 앞으로 뒤집혔다.
“야, 자, 잠깐…!”
오금 아래로 들어온 손이 두 다리를 번쩍 위로 추어올렸다. 한영의 눈앞에 아랫구멍을 훤히 드러낸 구도가 되어 버린 재환은 제가 꺼낸 말대로 되었다는 것도 잊고 다급한 소리를 터뜨렸다. 하지만 곧바로 축축한 입술이 덮쳐드는 바람에 더 다그칠 수 없었다.
“흐, 읍…, 음…!”
물컹한 혀가 다짜고짜 입 안을 헤집는 동시에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푸욱 성기가 들이꽂혔다. 다리를 붙들었던 손은 어깨 아래로 감겨 으스러뜨릴 듯 상체를 옭아맸다. 결합이 깊어지고, 딱딱한 성기 끝이 내벽을 긁으며 어렵지 않게 재환의 민감한 부분까지 도달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내부 근육이 요동치듯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으, 읍…!”
깊이 들이박힌 성기는 빠르게 빠져나갔다가 같은 지점을 짓누르며 진입해 들어왔다. 번개 치듯 척추를 타고 오르는 쩌릿쩌릿한 감각에 재환은 가파른 숨을 토했다. 그러나 제대로 소리를 입기도 전 맞물린 한영의 입 속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뼈와 살가죽을 찢고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 요동치는 심장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어느덧 새하얀 등에 감긴 손이 자잘하게 땀 맺힌 살결 위로 죽죽 붉은 줄을 그었다.
찔꺽찔꺽. 단단한 살덩이와, 열이 오른 내벽과, 젤이 뭉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와중에도 한영은 집요하게 같은 부분만 찔러 올렸다. 두려움과 맞닿아 있는 쾌감에 당황한 재환이 달아날 수 없도록 상체를 결박한 팔에는 더욱 힘을 주었다.
“후, 읍. 으읍….”
재환의 숨이 껄떡 넘어가기 전까지 입술을 비비고 혀를 얽던 한영은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그새 흘러내린 타액은 모조리 쪽쪽 빨아들이고, 그것으로 모자라 붉어진 살결 위로 반복해서 입 맞췄다. 그러다 아예 귓가로 입술을 옮겨 헐떡이는 숨과 함께 ‘재환아’를 거듭했다. 재환아, 재환아, 재환아…. 온갖 애타는 마음과 절절함이 담긴 외침이었다.
그 애절한 음성을 들으며, 절대 풀리지 않을 듯한 품에 갇혀 덜컥덜컥 흔들리던 재환은 문득 신기한 감상이 일었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한영과 섹스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비단 그가 쏟아붓는 자극 때문만은 아니었다. 귓속으로 들이치는 거친 숨소리가, 결박하듯 저를 껴안은 팔의 떨림이 그렇게 느끼게끔 해 주었다. 재환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싫기는커녕….
“하아, 한영아. 유한영….”
저 또한 어느덧 젖은 목소리로 상대를 부르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손으로 헤집으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허리를 두 다리로 끌어안고 몇 번이고 한영을 불렀다. 그리고 마침내, 부름에 응답하듯 상체를 세운 한영이 열띤 시선을 맞춰 왔다. 격했던 움직임도 함께 잠시 가라앉았다.
“재환아….”
평소의 서늘함은 온데간데없이, 델 듯이 뜨거운 손바닥이 뺨을 감쌌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에 잠긴 갈색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펑 터질 듯한 감정을 안고 있었다. 너무도 거대하게 부풀어, 마주한 재환조차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 마음이 정말 힘겹게 붉은 입술을 가르려는 때였다.
재환은 두 손을 포개 한영의 입가를 막았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 좋으니 제발 그 말만 하지 말라는 주의, 내지는 부탁이었다. 어쩌면 재환이 한영과 저 사이에 그을 수 있는 실로 마지막 선일지도 몰랐다.
한영의 두 눈이 한층 축축이 젖어 들었다. 그 상태로 한 번, 두 번 느리게 눈꺼풀을 내려 앉혔다가 들어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재환의 손바닥 사이에 갇혀 몸부림치던 고백은 끝내 스르륵 바스러지고, 그 자리에 애달픈 중얼거림이 고였다.
이 말만 참으면, 재환이한테 하지 않으면, 그럼 다 괜찮을 거야.
우리, 괜찮을 거야.
한영은 다짐을 증명하듯 살짝씩 고개를 움직여 가며 재환의 손바닥에 쪽, 쪽 입 맞추었다. 그 행동에 이끌려 재환 또한 겹쳐진 제 손등 위로 입술을 눌렀다. 얼마 안 가 손이 거둬지고,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서로를 찾았다.
뜨겁고 습한 곳에 푹 파묻혔던 성기가 한풀 진정된 기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허리 놀림을 따라 분홍 머리칼이 사락사락 흔들리고, 그중 일부는 재환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땀 맺힌 가슴팍과 복부가 서로 비벼질 때마다 질척하면서도 미끄러운 감촉이 번졌다. 마찬가지로 촉촉이 땀에 젖은 한영의 등허리에서 자꾸 풀리려는 다리가 성가셔 재환은 아예 두 발목을 얽어 버렸다. 그 바람에 의도치 않게 서로의 하반신이 철떡 들러붙었다.
기다렸다는 듯 한영이 재환의 허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다 삽입하기 수월한 각도를 잡았다. 살갗이 맞닿았다 떨어지는 차진 소리가 차츰 커지고, 재환에게 가해지는 자극도 함께 커졌다. 한영과 조급히 숨을 섞던 재환은 중첩되는 흥분을 참지 못해 결국 제 성기로 손을 가져갔다.
이제 한영을 앞에 두고 자위하는 건 부끄러운 축에도 들지 못했다. 묽은 액으로 번들번들해진 성기를 쥔 재환은 빠르게 위아래로 손목을 털었다. 그럴수록 안을 파고드는 한영의 힘도 거세졌다. 성큼 다가온 절정 속에, 서로의 입을 넘나드는 숨결이 더욱더 거친 음색을 띠었다.
“읏….”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맞닿은 상체를 부둥켜안은 한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재환 안에서 울컥울컥 정액을 토했다. 얇은 고무 막 하나가 직접적인 접촉을 막고는 있었으나, 배 속에서 솟구치는 열기를 재환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으, 윽….”
그 때문이었을까. 조급한 손길이 이어지던 재환의 성기 끝에서도 기어이 희뿌연 정액이 터졌다. 동시에 바짝 경직된 몸이 사정이 채 끝나지 않은 한영의 성기를 쥐어짜듯 조였다. 겨우 멀어진 두 사람의 입 밖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잔뜩 힘이 들어간 한영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움푹움푹 깊은 고랑이 팼다.
“하아, 하아….”
한참을 사정하던 한영은 재환의 뒤통수가 닿은 베개 빈자리에 풀썩 얼굴을 묻었다. 폭풍 같은 절정은 한차례 지나갔으나, 가빠진 숨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손바닥과 배를 온통 정액으로 질척하게 적신 재환도 마찬가지였다.
재환은 더러워지지 않은 손으로 제 위에 엎어진 한영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매만졌다. 분명 땀에 흠뻑 젖어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주위로 달큼한 향이 살살 풍기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자연스럽게 그 위로 쪽, 입술을 눌렀다.
슬며시 고개를 튼 한영은 재환과 가만히 눈을 맞추다 꾸물꾸물 밑으로 내려갔다. 재환의 허리를 두 팔로 꽉 끌어안고서 아직 들썩임이 남은 가슴팍에 귀를 댔다. 쿵쿵 나지막하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재환아…. 나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
슬쩍 눈썹 사이를 좁혔다 편 재환은 아래로 시선을 내려 가슴에 척 들러붙은 분홍 머리통을 보았다. 그 안에서 비롯되고 있는 생각들이 선뜻 또렷이 읽히지 않았다.
“다음에는 고추 안 만지고 싸게 해 줄게….”
또 한 번, 움칠 재환의 미간이 오므라들었다. 일단은 대꾸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오늘은… 너무 좋아서 내가 빨리 쌌어. 다음에는 안 그럴 수 있어. 진짜야….”
아…. 이제야 재환은 한영 하는 말이 얼추 이해가 가는 듯했다. 문장마다 들어가 있는 한 단어가 그럴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작게 피식, 소리를 낸 재환은 상대가 가장 갈구하고 있을 답을 기꺼이 들려주었다. 단, 늘 그러하듯 길지는 않았다.
“그래. 다음에.”
재환의 가슴에 코를 묻고 있던 한영의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함께 팔랑거린 기다란 속눈썹이 재환에게 미약한 간지러움을 전했다. 그럼에도 밀어내는 일 없이, 재환은 한영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한영도 더 깊이 재환의 품을 파고들었다.
평생 이 품만 그리워하게 될 줄 모르고.
벗어나지 못할 줄도 모르고….
* * *
따뜻한 온기가 살결을 훑고 지나는 느낌에 재환은 부스스 눈을 떴다. 어느덧 방 안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사위가 금방 분간되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바지만 입고 곁에 앉은 한영이 시야에 잡혔다. 한영의 무릎에 올려진 한쪽 팔 위로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이 가만가만 문질러지고 있었다. 수건의 감촉이 부드럽고도 간지러워 재환은 살짝 몸을 뒤척였다. 어두운 중에도 잔잔히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재환의 얼굴로 향했다.
“깼어?”
“…응.”
당최 언제부터 잠들었던 건지 기억나지 않아 재환은 다소 멋쩍게 답했다. 한영을 품에 안고 섹스의 여운에 잠겨 있던 것까지는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안 아팠어…? 괜찮았어? 따위의 걱정 그득한 물음에 ‘좋았어’라는 멋없는 대답을 들려주었던 것도. 그러자 한영이 갈빗대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저를 꽉 안아 왔던 듯도 하다.
몸을 기울인 한영이 팔에 이어 재환의 가슴팍에 촉촉한 수건을 가져다 댔다. 아직 예민한 감각이 남아 있는 유두에 수건이 스치자 재환은 저도 모르게 움칠 어깨를 떨었다. 아닌 체하고서 말간 색으로 돌아온 한영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넌.”
“응?”
“씻었어?”
손등으로 매끈한 볼을 살살 쓸며 묻자 한영이 고개를 저었다. 하도 낯빛이 뽀얘 당연히 씻었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재환은 잠시 음…, 하며 생각에 잠긴 소리를 냈다. ‘왜?’라는 물음이 담긴 눈길로 한영이 재환을 보았다.
“그럼 같이 씻을까?”
그새 쇄골께로 옮겨 가 목 근처를 닦던 수건이 우뚝 멈추었다. 반대로 재환을 보는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붉은 입술은 얼른 답을 내지 못하고 벙긋거렸다. 할 거 다 하고서, 같이 씻자는 말 한마디에 저리 당황을 뚝뚝 흘리는 한영을 재환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싫은가, 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괜히 심술이 난 재환은 한영의 말랑한 콧방울을 한 번 꽉 집었다 놓았다. 한영의 표정이 어리벙벙해졌다.
“싫으면 말고.”
“아냐, 안 싫어…!”
퍼뜩 일어선 한영이 침대 밖으로 휙 재환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재환은 거의 끌려 나가듯 침대를 벗어나 엉거주춤 바닥에 두 다리를 디뎠다. 하지만 채 균형을 잡기도 전, 기우뚱 몸이 기울고 말았다. 그대로 재환은 풀썩 한영의 품으로 넘어졌다. 이제 당황은 재환의 몫이었다.
“재환아, 괜찮아?”
등이 끌어안긴 채로 단단한 어깨에 턱을 댄 재환은 한순간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한영과 섹스한 것까지는 그럭저럭 태연히 넘길 수 있었지만, 그 여파로 제대로 서지조차 못한다는 건 조금 얘기가 달랐다. 심히 창피스러운 일이었다. 한데, 눈치 없는 한영은 재환의 부끄러운 마음에 숫제 기름을 끼얹었다.
“욕실까지 안아 줘…?”
콱 눈머리를 구긴 재환은 한영의 양어깨를 붙잡고서 밀어내듯 몸을 떨어뜨렸다. 제 낯빛을 살피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피해 성큼 걸음을 뗐다. 하반신에서 저릿저릿 오르는 둔통이 작지 않았으나, 부러 더 쿵쿵 발소리를 내며 욕실이 있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발소리가 재환을 뒤따랐다.
옷을 벗을 필요가 없던 재환은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쏙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틈을 두고 따라 들어온 한영이 투명한 유리문을 당겨 닫았다.
이윽고 넓은 듯 좁은 공간에 마주 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보았다. 미지근한 긴장감이 둘 사이를 감돌고, 욕실 천장에 달린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작게 위잉 울렸다. 여기에 두어 번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더해졌을 즈음, 그럭저럭 수치가 가신 재환이 먼저 침묵을 깼다.
“바지 입고 씻을 거야?”
씻겠다던 한영이 아직도 트레이닝팬츠 차림이라 재환으로선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한영은 대답을 않고 곤란한 듯 눈알만 굴렸다. 얼마 안 가 재환은 아…, 하고 뒤늦은 이해를 뜻하는 소리를 흘렸다. 주저 없이 한영의 바지춤으로 손이 향했다.
한영이 막을 틈도 없이 바지 밴드가 훅 아래로 내려가고, 빳빳하게 선 성기가 불쑥 위로 튕기어 올랐다. 재환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한영은 얼른 뒷걸음질 쳤다. 그래 봤자 사방이 타일로 둘린 부스 안에서 도망칠 공간은 마땅치 않았다. 몇 발짝 제대로 떼지도 못하고 매끈한 벽에 뒤꿈치가 부딪혔다. 그 반동으로 허벅지에 걸쳐 있던 바지가 툭, 발목으로 떨어졌다. 그때까지도 재환의 시선은 색은 곱고 크기는 곱지 않은 한영의 성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순수한 궁금증이 담긴 질문이었다. 그러나 한영을 곤혹스럽게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네 잠든 얼굴만 봐도 서더라는 말을, 어찌 재환에게 솔직히 꺼낼 수 있을까. 제아무리 한영이라도 그 정도의 염치는 있었다.
“유한영.”
“…몰라.”
애먼 타일 벽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재환에게는 별생각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를 볼 때마다 고추를 발딱발딱 세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한영은 영 곧이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그랬던 과거까지 재환에게 들킬까 더럭 겁이 났다.
얼마간 더 한영의 성기를 빤히 바라보던 재환은 나지막한 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뒷목을 문질렀다. 왼쪽으로 눈을 돌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다가, 한영을 거의 기절할 지경으로 몰고 갈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나도… 빨아 줄까?”
물러설 곳 없는 공간이 재환의 목소리를 사방으로 웅웅 튕겨 냈다. 그 목소리를 고스란히 귀에 담은 한영은 차가운 타일에 바짝 등을 댄 채 도리 없이 혼란에 빠졌다. 맹세컨대, 지금껏 재환의 고추를 빠는 상상은 수도 없이 했을지언정 그 반대는 꿈에서도 바란 적 없었다. 그런데 현실의 재환이 지금 눈앞에서 꿈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빨 수 있을 것 같은데. 해 줄게.”
그사이 멋대로 결론을 내린 재환은 성큼 한영 가까이 다가섰다. 마침 벽에 붙어 알맞은 자세를 취한 한영 앞에 무릎 꿇자, 거대하게 발기한 성기가 바로 코앞에 놓였다. 엉덩이에도 넣은 거 까짓것 입에 못 넣으랴 하는 생각이 내심 있었는데, 이렇게 지척에서 마주하니 그러한 패기가 조금쯤 누그러드는 듯도 했다. 그렇다고 뱉은 말을 물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까 한영에게 받기만 한 게 못내 걸리기도 했고.
다만, 당장도 꼼틀대는 저것을 입에 넣기 전 한 가지는 확인하고 싶었다.
“유한영.”
재환의 눈높이가 낮아진 순간부터 쩍 굳어 얼음이 되어 있던 한영은 ‘으, 응….’ 하고 꺼질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에 반해 질문을 던지는 재환의 어조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털, 원래 안 나는 거야?”
잠깐 멈칫했던 한영은 ‘아니, 털 나.’ 하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제발 재환이 제 고추에서 좀 떨어져 주기를 바랐다. 이러다 정말이지 그의 입김만으로 픽 싸 버리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럼 왜? 털 없으면 느낌 이상하지 않아?”
한영이 속으로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는 재환은 아예 성기 근처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뿌리 부근에서 배꼽에 이르는 곳까지 쓱쓱 살결을 문지르며 ‘진짜 매끈매끈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끝내 자포자기에 다다른 한영은 한숨 쏟듯 재환에게 답했다.
“다… 좋아하니까.”
위쪽과 마찬가지로 매끈매끈한 고환으로 옮겨 가려던 재환의 손이 주춤 굳었다. 눈썹 사이에는 죽죽 짧은 금이 갔다. 다? 그 ‘다’가 누군데? 짜증 섞인 질문들이 툭툭 목젖을 때렸다. 이를 애써 삼키며 재환은 눈만 치떠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미세하게나마 헐벗은 어깨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옆으로 손을 뻗은 재환은 적당히 레버를 왼쪽으로 돌려 휙 들어 올렸다. 동시에 천장 가까이 달린 수전에서 소나기 내리듯 물줄기가 쏟아졌다. 금세 더운물이 시야를 흐릿하게 적셨으나, 재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단하게 선 성기 밑동을 움켜쥐었다. 큰 심호흡과 함께 단번에 성기를 입 안으로 집어삼켰다.
“윽…!”
순간 한영의 고개가 홱 뒤로 꺾였다. 그새 폭삭 젖은 뒤통수가 쿵, 타일 벽에 부딪히며 이제는 천장을 향해 들린 얼굴로 물줄기가 퍼부어졌다. 질끈 감은 눈, 꽉 깨물린 입술을 모두 흠뻑 적신 물이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넘어간 머리칼 아래로 줄줄 흘렀다. 발목에 걸쳐져 있는 바지도 함께 흠뻑 젖어 들었으나 한영은 그 상태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타일 위를 짚은 손가락의 마디만 새하얗게 도드라졌다.
“읍….”
방법도, 순서도 몰랐지만 일단 재환은 두꺼운 기둥을 쭉쭉 빨아올렸다. 그러기 무섭게 목구멍 가까이까지 넣은 귀두에서 미끈거리는 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입 속으로 들이치는 물과 합쳐져 맛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옅은 고무 향만 살짝 날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재환은 저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어느새 아무 거부감 없이 한영의 좆을 열심히도 빨고 있었다.
뿌옇게 피어오른 수증기 사이에서 까만 머리통이 보다 빠르게 앞뒤로 움직였다. 타일을 때리는 물소리, 입술이 딱딱한 살덩이를 스치는 젖은 마찰음이 하나의 음처럼 뒤섞였다. 그 중간중간, 떨어지는 물보다도 더 뜨거운 숨이 한영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후, 으…. 하….”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한영의 숨소리는 적잖이 재환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하여 재환은 자연스레 더 과감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 한영의 허벅지 뒤로 손을 넣어 바짝 힘이 들어간 엉덩이를 부여잡고, 음모 없이 매끈한 샅에 코가 부딪치도록 목구멍까지 성기를 삼켰다. 딱히 요령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한영을 밀어붙였다.
“하, 재환아…!”
그로 인한 자극은 거셌다. 물 먹은 외침을 터뜨린 한영은 기어이 재환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푹 상체까지 고꾸라뜨리고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로 거친 숨을 토했다. 손안에 들어온 작은 머리통을 한계까지 내리누르고픈 욕구, 그러기 전 지금이라도 이 상황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위기감이 결렬하게 맞부딪치며 터질 듯이 팔뚝의 근육을 불거지게 했다. 하나 안타깝게도, 한영은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으읏…!”
재환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은 한영은 일언반구 말도 없이 무릎 꿇은 몸을 훌떡 일으켜 세웠다. 꽤 오래 다리를 접고 있던 재환에게 균형 잡을 틈도 주지 않고 꽉 어깨를 붙들었다. 그대로 재환의 몸을 뒤집어 부스 문과 연결된 유리 벽으로 밀어붙였다. 당황한 재환이 급히 손바닥으로 습기 맺힌 유리를 짚었다.
“읏. 유, 유한영…!”
대꾸 않은 한영은 뒤에서 재환을 꽉 끌어안았다. 젖은 어깨에 턱을 얹고, 터지기 전까지 발기한 성기를 제법 딴딴한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어쩌면 제가 자초한 일일지 모름에도, 재환은 흠칫 굳을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재환의 귓가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재환아…. 넣고 싶어.”
물기를 머금은 귀두가 입구를 미끄러져 지날 때마다 절로 주름이 옴찔옴찔 오므라들었다. 목구멍 너머로는 꿀꺽 침이 삼켜졌다. 콘돔이니 젤이니 하는, 아마도 관계에 필요할 물건들이 휙휙 재환의 뇌리를 스쳤으나 이어지는 말이 그마저도 흐릿하게 지워 버렸다.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사방을 채운 부연 김, 멈추지 않는 물소리, 둘만 있는 좁은 공간. 이 모든 것이 재환에게 단 하나의 답을 종용했다. 두 번째 이후의 순간이 이리 빨리 닥칠 줄은 미처 몰랐지만, 어차피 한영을 거부하지 못하리란 것을 재환은 알았다. 아마, 앞으로도 쭉.
재환은 한영이 바라고, 어쩌면 저도 바랄지 모르는 답을 탁한 수증기 속으로 짧게 흘려보냈다.
“…응.”
좁은 샤워 부스 안은 두 사람이 세 번째로 몸을 겹치는 장소가 되었다.
자잘한 물방울과 습기로 덮인 유리에 손자국이 찍혔다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그 너머, 보얗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겹쳐진 두 개의 인영이 같은 박자로 움직였다. 뒤에 선 이가 한 번 허리를 치대면, 앞에 선 이의 잇새에서 더운 숨이 터졌다. 젖은 목덜미에 파묻힌 입술에서도 절절 끓는 숨이 흘렀다.
“하아…, 후, 윽…. 유, 한영….”
“재환아…. 하….”
침대에서 했던 섹스의 여파인지, 사위가 온통 물기로 가득 찬 탓인지 물렁물렁 풀어질 대로 풀어진 내벽은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가장 깊은 곳까지 쭉쭉 빨아들였다. 주름이 팽팽히 당겨질 정도로 벌어진 입구에는 조금의 틈이 없었다. 성기가 쑥 뽑혀 나올 때만 벌건 속살을 드러낼 뿐이었다.
부드럽게 허리 짓 하며 한영은 한시도 쉬지 않고 재환의 몸을 어루만졌다. 안을 찌를 때마다 움푹움푹 선이 패는 배를 쓰다듬고, 도톰히 부푼 유두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연결된 곳에서 퍼지는 열과 쏟아지는 물로 인해 벌겋게 물든 목덜미에 끊임없이 입 맞추었다.
“하, 으…. 으윽….”
두 손으로 유리 벽을 짚은 재환은 그 위로 이마까지 박은 채 한영의 움직임 따라 연이어 앞뒤로 흔들렸다. 덩달아 흔들린 성기가 턱턱 유리를 때렸으나 아픔보다는 흥분이 훨씬 컸다. 아니, 오히려 그마저도 발꿈치를 들썩이게 하는 쾌감으로 느껴졌다. 성기 주위로 흩어지는 물방울이 제가 흘린 것인지, 샤워기에서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영의 허리 짓에 맞춰 어설프게나마 함께 움직이던 재환은 연신 덜렁거리는 성기로 끝내 손을 가져갔다. 유리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한껏 뜨겁게 달아오른 살덩이를 마구 문질렀다. 이러다 보면 또 금방 싸 버릴 것 같았으나, 크게 괘념치 않았다. 일단은 그곳에 몰린 열을 해소하는 게 먼저였다.
그러나 몇 번 성기를 자극하지도 못하고 덥석 팔목이 붙잡혔다. 자위를 저지당한 손이 다시 유리에 붙고, 아예 꼼짝할 수 없도록 손등에 깍지가 끼워졌다. 다른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 엉덩이 사이 꽂힌 성기가 보다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절로 억 소리가 터졌다.
“허윽…!”
뒤에서 쳐올리는 힘이 확연히 거세졌다. 조금만 다리에 힘을 풀면 그대로 물이 흥건한 바닥에서 발이 미끄러질 것 같았다. 어디로도 새지 못하고 웅웅 울리는 제 신음 소리가 안 그래도 혼탁한 사고를 더 흐리멍덩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한영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듯했다.
“크, 흑…. 야, 자, 잠깐만….”
재환은 손등을 옭아맨 한영에게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팔을 비틀었다. 거기도 만지지 않고, 배 속을 찔리는 것만으로 싸 버리는 건 아무래도 아직 자신 없었다. 그러나 귓전을 녹이는 간절하면서도 달콤한 언사 탓에 반항을 멈춰야만 했다.
“재환아…. 조금만, 조금만 참아 봐. 응?”
곧이어 온몸의 젖은 솜털을 바짝 서게 할 정도로 끈적한 접촉이 귀로 쏟아졌다. 퍽퍽 샅을 치대면서도 한영은 요령 좋게 재환의 귓불을 깨물고, 귓바퀴를 핥으며, 좁은 구멍에 할짝할짝 혀를 넣었다. 그럴 때마다 악물린 입술 틈새를 비집고 줄줄이 신음이 샜다. 성기를 품은 내벽이 의지와 관계없이 움찔움찔 좁아 들었다. 이러다 머지않아 정말 한영이 바라는 대로 될 것 같다는 예감이 흐물흐물해진 머릿속을 떠다녔다. 아아, 안 되는데. 아직, 아직은….
“후으윽…!”
손등을 결박하던 손이 별안간 아래로 내려가 꽉 배를 끌어안았다. 철퍽, 젖은 살결이 맞부딪치며 딱딱한 귀두가 내벽 안쪽을 짓눌렀다. 밭은 숨을 터뜨린 재환은 허겁지겁 발꿈치를 세웠다. 과한 자극을 조금이라도 피해 보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반절 빠져나갔던 성기가 재빠르게 같은 지점까지 쾅 밀려들었다. 발꿈치가 다시 타일 바닥으로 떨어지고, 재환의 몸이 크게 덜컥였다.
“헉, 으윽…. 큽…!”
얕게 빼고 깊이 쑤셔 박는 허리 짓이 거듭 이어졌다. 그 와중 배를 뒤덮은 커다란 손은 잠시도 거둬지지 않았다. 그 덕인지, 딱딱한 귀두는 한 번을 어긋나는 일 없이 계속해서 한 지점만 집요하게 찔렀다. 하니 미끄러운 유리에 손가락을 세운 재환은 연달아 신음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붉게 물들어 위아래로 꺼떡꺼떡 흔들리는 성기 끝에서는 이제 자신이 흘리는 것이 확연한 맑은 액이 뚝뚝 떨어졌다.
“유한…, 윽, 읏….”
길지도 않은 이름의 마지막 한 글자마저 헉헉대는 신음에 묻혔다. 어쨌거나 이제 진짜 위험하다는 뜻이었는데, 한영은 이를 영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겨우 배에서 손이 떨어져 한숨 돌리나 싶었던 찰나, 재환은 다시금 한영에게 휙 양 손목이 붙들렸다. 높이 추어 올려진 손이 미끄러운 유리에 고정되고, 밀어붙이는 힘에 의해 가슴팍과 배가 철떡 같은 면에 맞닿았다. 허둥지둥 고개를 틀어 유리에 옆얼굴을 댄 재환의 등과 다리가 이윽고 온통 한영으로 뒤덮였다.
“읏, 윽…! 으응…!”
유리와 커다란 몸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재환 안으로 재차 굵직한 성기가 짓치고 들어왔다. 성기는 작정한 듯 또 한곳만 집요하게 찔러 올렸다. 당장 주저앉고 싶을 만큼 자극이 과했으나, 허벅지와 오금이 전부 한영의 다리에 눌려 재환은 어디로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다물리지 못한 입 밖으로 쏟아지는 신음이 점점 더 격한 곡조를 띠었다. 눈앞이 껌뻑껌뻑 점멸했다.
“후, 으…, 어흑…!”
“하, 재, 환아…. 윽….”
뿌리까지 성기를 집어삼킨 입구는 물론이고, 빈틈없이 기둥을 조인 내벽까지 빠르게 이완과 수축을 반복했다. 껄떡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호흡이 가빠지고, 귀에서는 시끄러운 이명이 들렸다. 한영이 들러붙은 하반신은 이미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멋대로 힘이 들어가고, 멋대로 들썩였다. 그러다 끝내, 재환은 숨이 턱 멎으며 시야가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상태에 다다랐다.
“아아…!”
사지가 쩍 굳고, 내벽이 요동쳤다. 배 아래 깔려 꿈틀거리던 성기 끝에서 솟구친 정액이 습기 맺힌 유리에 부옇고 질척한 자국을 그렸다. 단말마와 같았던 탄성이 타일 이곳저곳에서 튕겨 나와 수증기와 물기로 범벅된 공간을 부유했다.
재환에게서 비롯된 습한 잔향이 솨, 내리치는 물소리에 시나브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여운에서 헤어나기 위한 밭은 숨소리가 대신 조금씩 크기를 키웠다.
“하아, 하아….”
재환은 초점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눈알을 느리게 굴려 아래를 보았다. 어느새 유리를 타고 바닥까지 떨어진 허연 액이 한영과 자신의 발 주변으로 묽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사이에도 구멍이 흠칫흠칫 조였다 풀리는 감각이 선연했다. 하지만 아래에서 올라오는 느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
샤워기에서 떨어진 물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한영과 접붙어 있는 곳을 질척하게 적시고 있었다. 조금 미지근하고, 미끈거리며, 아마도 제가 쏟은 것과 같은 색일….
“재환아…. 미안.”
한숨 같은 사과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제야 재환은 한영 또한 저와 비슷한 시점에서 사정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제 안에. 그리하여 상대는 사과를 전하는 이 상황에서, 재환은 이상하게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한영의 다음 말을 들으니 더욱더.
“너무 좋아서…. 싸 버렸어….”
입꼬리를 슬금슬금 올리던 재환은 한결 힘이 빠진 한영 아래서 엉덩이를 꿈질거렸다. 평소의 크기로 돌아온 성기는 재환이 몇 번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어렵지 않게 밖으로 쏙 빠져나갔다. 동시에 탁한 액이 주룩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애써 그쪽으로 시선을 내리지 않은 채, 재환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물에 젖어 잔뜩 구불구불해진 앞머리로 이마를 덮은 한영이 보기만 해도 짠한 마음이 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지런히 난 눈썹 끝은 아래로 떨어지고, 한 군데에 고정되지 못한 시선이 안쓰럽게 떨렸다. 살짝 고개를 든 재환은 한영의 입술에 쪽, 입 맞추었다.
“나도 너무 좋아서 쌌는데.”
확인시켜 주듯 재환은 축 늘어진 제 성기를 쥐고 두어 번 살살 흔들었다. 그곳과, 재환의 얼굴을 오가던 한영의 눈이 서서히 커다랗게 뜨였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 가득 놀람, 기쁨과 같은 감정들이 빠르게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재환은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간 한영을 의아한 눈빛으로 보았다.
“왜…?”
“…제대로 못 봤어.”
어물어물 내놓아진 답에 재환은 도리 없이 하하,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짐승 같은 유한영, 순한 유한영, 야한 유한영, 바보 같은 유한영…. 도대체 어느 유한영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다 싫지 않다는 결론이 생각보다 금방 재환 안에서 나왔다. 어차피, 유한영이니까.
재환은 분홍색 머리칼 아래로 줄줄 물이 흐르고 있는 한영의 목덜미를 두 손으로 살포시 감쌌다. 코끝을 마주 대고 슬쩍슬쩍 비비자, 주춤하던 한영이 허리에 팔을 감아 왔다. 종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세로 두 사람의 몸이 바짝 밀착했다.
“재환아….”
“키스해 줘.”
자꾸 다른 모습이 드러나는 건 한영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재환은 지금처럼 저도 모르던 자신이 툭툭 튀어나왔다. 되바라진 서재환, 엉큼한 서재환, 너무 솔직한 서재환….
그게 다행히도 한영의 눈에는 꺼림칙하게 비치지 않은 모양이다. 흡, 하고 짧게 호흡을 삼킨 한영은 이내 촉, 초옥 소리를 내며 재환에게 부드럽게 입 맞추기 시작했다. 조금씩 고개를 돌려 가며 찬찬히 입술을 붙였다 뗐다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기도 했다. 그러면 재환도 한영에게 비슷한 행동을 돌려주었다.
“음….”
서로 주거니 받거니 간지럽고도 보드라운 감촉을 즐기던 두 사람은 슬슬 입을 벌려 혀끝을 맞대었다. 장난치듯 번갈아 가며 상대의 혀를 쪽쪽 빨다 아예 진득이 얽어 버렸다. 얼마 가지 않아 맞물린 입술 사이로 주변을 뿌옇게 채운 김보다 더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한영과 섹스하는 것도, 그러다가 아까처럼 생전 처음 겪는 방식으로 절정을 맞이하는 것도 다 좋았다. 하지만 재환은 역시 이렇게 서로의 숨을 나누는 순간이 가장 좋았다. 너와 처음 입 맞췄던 그날부터, 아마 쭉 그랬을 것이다.
* * *
씻는 것보다 딴짓하느라 더 긴 시간을 보내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완전한 밤중이었다. 친히 재환의 머리를 커다란 수건으로 털어 주던 한영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을 즈음에야 둘은 꽤나 허기가 진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모르긴 몰라도 서로 몸을 부대끼며 소모한 에너지가 적지 않을 터였다. 특히 한영은 더욱더.
늦어도 한참 늦어진 저녁 메뉴를 고민하던 두 사람은 멤버들과 가끔 시켜 먹던 중국집에서 간단히 몇 가지를 주문했다. 말이 ‘간단히’지, 얼마 안 가 도착한 짜장면 곱빼기 두 그릇과 탕수육 중짜는 그다지 간단한 양이 아니었다.
과거 한영에게 빌려 입고 또 돌려주었던, 위는 분홍색이고 아래는 보라색인 트레이닝복을 입은 재환은 탕수육 그릇의 랩을 벗겨 냅다 소스를 부었다. 소위 말하는 ‘부먹’은 죽었다 깨어도 용서 못 한다는 태군이 이 자리에 없는 덕이었다. 그사이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던 한영이 짜장면 그릇을 쓱 재환 앞으로 내밀었다. 재환이 더 젓가락으로 휘저을 필요 없이, 짜장면은 야무지게 비벼져 있었다.
‘고마워….’ 하고 열없이 웅얼거리며 재환은 뜨끈해진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물고 빨고 더 부끄러운 짓도 했으면서, 왜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에 가슴께가 간지러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재환의 싱겁기 짝이 없는 인사에도 한영은 입매를 둥글게 말며 예쁘게 웃었다.
다만 재환은 한영이 준 짜장면을 곧바로 먹지 않았다. 주린 배를 살살 문지르면서도 상대가 저 먹을 짜장면을 모두 비빌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한영이 제법 능숙한 젓가락질로 반질반질 소스가 묻은 면발을 집어 올릴 무렵에야 저도 젓가락을 들었다. 이번에는 재환 몰래 한영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던지 짜장면은 그야말로 술술 넘어갔다. 이 집 짜장면이 이렇게 맛있었던가, 생각하며 재환은 한영에게 내심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유한영.”
“응?”
“근데 왜 난 또 이 옷이야?”
한영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재환을 보며 붉은 입술에 걸린 면발 한 올을 호로록 빨아올렸다. 빠는 요령이 부족해 이리저리 흔들리던 면발이 결국 입 주변에 거무튀튀한 소스를 묻혔다. 살결이 하얘 유독 그것이 도드라져 보였다.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재환은 픽, 웃으며 휴지를 뽑아 한영의 얼굴로 가져갔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쓱쓱 닦아 주자 한영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이를 보며 재환은 처음 이 자리에서 함께 식사했던 날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영이 북엇국 국물을 사방으로 튀기던 장면이었다. 자연히 재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은 여지없이 한영의 마음을 콩닥거리게 만들었다.
다소 투박하게 입술 주변을 두드리던 손이 다시 젓가락을 향할 즈음, 한영이 어물어물 입을 뗐다.
“재환이 너한테 잘 어울리니까.”
탕수육 접시로 젓가락을 옮기던 재환은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 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설마. 너라면 몰라도. 나한텐 너무 알록달록한 거 같은데.”
“아냐. 잘 어울려. 재환이 너… 되게 알록달록해.”
되직한 소스에서 탕수육 하나를 집던 재환은 눈을 들어 한영을 보았다. 사람이 알록달록하다니, 꼭 어린애나 쓸 법한 표현이었다. 게다가 맨날 시꺼먼 옷만 입고 다니는 저한테 맞는 표현도 아니었다. 한영 본인이라면 몰라도.
다시 눈을 내리깐 재환은 얼른 탕수육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어째서인지 뒷덜미에 흠칫 소름이 돋을 만치 탕수육 소스가 달게 느껴졌다. 그때, 별안간 한영의 손이 훅 코앞으로 뻗어 나왔다.
길기도 한 엄지손가락이 재환의 입술 근처를 부드러이 훑고 지났다. 뒤이어 손가락 끝에 묻어난 노르께한 소스가 붉은 입술 새에서 날름 나온 혀에 의해 사라졌다. 아니, 왜 휴지를 놔두고…. 재환은 제게 신경 써 준 죄밖에 없는 한영을 괜히 속으로 탓하며 탕수육을 꿀꺽 삼켰다. 서둘러 짜장면 면발을 집어 후루룩 입 안으로 넣었다.
“재환아.”
“어?”
“다음에 북엇국 해 줘.”
“…어.”
미치겠네. 이제 재환은 짜장면에서까지 다디단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속이 간질거려 젓가락을 멈칫해야 했던 저녁 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사이좋게 싱크대 앞에 서서 함께 설거지를 했다. 기실 ‘사이좋게’는 한 사람만의 생각이었다. 혼자서도 충분하니 넌 좀 가라고 어깨를 툭툭 부딪치며 밀어냈지만, 한영은 재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꿋꿋이 재환 옆에서 거품 묻은 그릇을 물에 헹구었다. 뭐, 덕분에 그릇 씻는 시간이 훨씬 준 것은 사실이었다.
수거용 비닐에 넣은 그릇을 대문 앞에 두고 오며 재환은 정원에서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오늘 하루 참 길기도 하다, 생각하며 후 연기를 내뱉다가 거실 전면 창에 붙어 있는 분홍색 형상을 발견했다. 전에는 지금 같은 상황이 되면 공연히 머쓱해진 재환이 휙 몸을 틀거나, 창에서 분홍빛이 사라지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분홍색의 주인공은 계속해서 이쪽으로 빤한 시선을 보냈고, 재환은 구태여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들어간 재환은 2층 한영의 방으로 올라가 주섬주섬 제 옷을 집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알록달록한 차림으로는 집에 돌아갈 자신이 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하여 막 옷을 갈아입으려는 찰나, 후다닥 방에 뛰어 들어온 한영에게 와락 등을 끌어안겼다.
“자고 가.”
“나 내일도 출근…,”
“여기서 해. 자고 가, 재환아.”
하아…. 다부지게 배를 감싼 팔 위로 손을 얹으며 재환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마저 한영에게 거절의 말을 뱉을 수 없으니 저도 참 문제는 문제였다. 마지못해 ‘알았다, 알았어.’라고 답하자, 컥 숨이 삼켜질 정도로 재환을 안은 팔에 꽉 힘이 들어갔다.
광대를 도톰히 부풀린 한영이 또다시 후다닥 방을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우당탕, 와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한 10분쯤 지나서 방에 돌아온 한영의 손에는 온갖 얇은 플라스틱 케이스들이 들려 있었다. 절반은 영화 블루레이나 DVD였고, 또 절반은 콘솔 게임기에 넣는 게임 타이틀이었다. 갖고 온 것을 침대 위에 투두둑 떨어뜨린 한영이 재환에게 어서 와서 고르라는 눈빛을 보냈다.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에 기대와 설렘이 찰랑거렸다.
한영을 마주 보고 침대에 걸터앉은 재환은 케이스 몇 개를 차례로 집어 쓱쓱 앞뒤로 살폈다. 그러나 영화도, 게임도 지금은 딱히 당기는 게 없었다. 사실 그보다는 조금 다른 것이 하고 싶었다. 재환은 손에 쥔 케이스를 슬며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유한영. 나 피아노 치고 싶어.”
그리하여 재환과 한영은 아닌 밤중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밴드에 ‘더 숨’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곳에 묵었던 그날과 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재환은 이 집이 단독 주택이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새삼 다시 들었다. 제집 같았으면 이 시간에 피아노 연주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영을 따라 건반에 손가락을 얹은 재환은 제법 마음이 들떴다. 어차피 그때나 지금이나 칠 수 있는 곡은 젓가락 행진곡뿐이었지만, 왠지 오늘은 한영과 연주를 더 잘 맞출 수 있을 듯한 예감이 살랑살랑 마음을 스쳤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단, 한영이 하나만 조심한다면.
“오늘은 치면서 화내지 마.”
연주를 시작하기 전 재환이 툭 던진 말에 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과거 자신이 재환을 옆에 두고 분노의 행진곡을 쳤음을 떠올려 냈다. 그때야 젓가락이 싫으니 자연히 그런 연주가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재환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 그간 얼마나 부단히 젓가락질을 연습했던가. 그러니 한영은 이제 젓가락이 싫지 않았고, 따라서 젓가락 행진곡도 싫지 않았다.
응, 하며 가뿐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영은 하나, 둘, 셋을 셌다. 이윽고 알록달록한 방 안 가득 두 사람의 손끝에서 피어난 경쾌한 화음이 울려 퍼졌다.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연주가 끝났을 때, 재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영을 보았다. 고작 손가락 두 개를 쓴 것뿐이지만, 크게 틀린 부분도 없고 이 정도면 꽤나 그럴싸한 연주가 아니었나 싶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야, 나 지난번보다 훨씬 낫지 않아?”
“비슷한데?”
벌쭉벌쭉 웃음이 번졌던 재환의 표정이 순시에 딱딱하게 굳었다. 꼭 삐진 애새끼처럼 입술까지 부루퉁 나왔다. 아무래도 키보디스트에게 물은 것이 실수인 것 같았다. 고개를 기울인 한영이 영 편치 못한 재환의 표정을 잠시간 빤히 살폈다.
“농담이야.”
“…뭐?”
“지난번보다 훨씬 잘 쳤어.”
일순 낯이 얼뜨게 풀어진 재환의 입술 위로 쪽,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몰캉한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재미는 눈 씻고도 찾아 볼 수도 없는 한영의 농담에 재환은 눈썹 사이를 좁혔다. 윗입술 한쪽 끄트머리가 꿈틀거렸다.
“짜증 나, 유한영.”
재환은 한영의 옆구리를 냅다 한 움큼 꼬집었다. 그러나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는 살이 없어 딱히 뭐가 잡히지 않았다. 눈곱만큼도 안 아프다는 듯 한영은 배시시 웃었다. 얄미울 만큼 곱게 웃었다.
“재환아.”
“왜.”
“나 노래 하나 쳐 봐도 돼?”
재환은 떨떠름하게 어…, 하고 대꾸했다. 뒤이어 마디가 울퉁불퉁 불거진 손가락이 방해하듯 돌아다녔던 하얀 건반 위로, 건반 못지않게 새하얀 손가락이 저 홀로 얹혔다. 나직하게 흩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진짜 연주자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I wanna kiss you-
어느새 활짝 열려 버린 재환의 귀와 마음으로 흘러드는 한영의 노래는 바람 타고 팔랑팔랑 하늘을 나는 단풍 잎사귀 같았다. 듣는 사람의 가슴을 살살 간질이며, 또 울긋불긋하게 물들였다. 이 곡이 드물게 4분의 3박자라는 것도, 평소 한영이 잘 쓰지 않는 코드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금방 인지하지 못했다. 늘 그랬듯 가사 하나만 존재하는 노래에 재환은 속절없이 퐁당 빠져들었다.
흐르는 음에 취해 피아노 위에서 춤추는 손가락만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어느덧 노래와 연주를 끝낸 한영이 ‘어때…?’ 하며 물어 왔다. 서둘러 정신을 차린 재환은 ‘어, 어. 좋아.’라고 허둥지둥 답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감상이 피어났지만, 이럴 때라고 모자란 표현력이 어디 가지 않았다.
“진짜?”
“응. 요새 만든 노래야?”
“아니.”
살래살래 고개를 젓는 한영을 보며 재환은 설핏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요새 만든 게 아니라면, 이다지도 달콤한 곡을 도대체 언제 만들었다는 걸까. 재환의 의문이 길어지기 전, 한영은 생각보다 금방 답을 내어 주었다.
“방금 생각났어.”
재환의 입이 벙긋이 벌어졌다. 이어서 하, 하는 짤막한 탄성이 터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재환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님을 퍼뜩 깨달았다. 얼른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야, 빨리. 빨리 다시 불러 봐.”
액정 위에서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려 녹음기를 켠 재환은 초조한 마음으로 한영을 재촉했다. 그가 방금 부른 노래를 까먹기 전, 빨리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나 허벅지에 다소곳이 올라가 있는 한영의 손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재환의 초조함이 커졌다.
“유한영, 뭐 해.”
마이크가 위에 오도록 거꾸로 든 핸드폰을 흔들며 재환은 거듭 재우쳤다. 팔꿈치로 맞닿은 팔뚝을 툭툭 치기도 했다. 그제야 허벅지에서 떨어진 하얀 손은 피아노 건반으로 향하는 대신 재환의 뺨에 와 닿았다. 새까만 눈알이 휙 그곳으로 돌아갔다.
“재환아. 노래 못 들었어?”
유독 나긋나긋하게 흐르는 목소리가 재환의 심장을 쿵 쳤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던 재환은 어정쩡하게 들린 핸드폰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니, 그니까. 빨리 녹음하자고….”
“내가 노래로 불렀잖아.”
한영 하는 말을 잽싸게 이해하지 못한 재환의 표정에 점차 당황이 떠올랐다. 그러든 말든 손만큼이나 하얀 얼굴이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이마를 스칠 거리까지 다가온 분홍 머리칼에서 풍기는 진한 샴푸 향기가 훅 콧속을 파고들었다.
“뭘….”
매끄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고개가 슬쩍 옆으로 기울었다. 날렵한 턱뼈가 도드라지며, 반드러운 입술이 재환의 귓전에 바짝 붙었다.
I wanna kiss you.
흠칫 숨이 멎는 속삭임과 함께 뒤통수로 기다란 손가락이 감겼다. 한영과 반대 방향으로 고개가 꺾인 재환의 입술에 말캉하면서도 뜨거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머지않아 더 뜨거운 살덩이가 입술 새를 가르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재환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 제가 무엇 때문에 안달했는지, 손에 무엇을 쥐고 있었는지 따위가 한순간에 의식 속에서 흐릿해졌다. 대신 전혀 다른 생각들이 하나둘 퐁퐁 피어올랐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내고 싶다. 너는 노래하고, 나는 듣고, 기타가 있으면 노래에 맞춰 치기도 하고. 그러다, 또 지금처럼 입 맞추며.
이 관계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한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재환은 비겁하면서도 나약한 확신을 가슴에 움켰다. 밴드도, 한영도 지키는 방법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를 향해 한없이 부푼 마음을 이제 와 꺼뜨릴 수는 없었으므로.
재환은 녹을 듯 부드러운 입맞춤을 전하는 한영의 등을 그러안았다. 입술이 깊이 맞물리며 한층 녹녹한 숨이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이 달콤한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재환은 조심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