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5장
* * *
집 앞에서, 카페 근처에서, 합주하러 가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나뭇가지에 어느덧 노랗고 빨간 색이 덧칠해졌다. 함께 찾아온 서늘, 내지는 쌀쌀한 공기가 옷 두껍게 입기를 영 싫어하는 재환에게도 결국 외투를 꺼내 입게 만들었다. 그래 봤자 죄 색이 시커먼 후드 집업이나 바람막이 따위였다.
진작 학교에는 휴학 연장 신청을 해 두었으니, 내심 재환은 싱글만 내면 그럭저럭 시간에 여유가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간 넉넉히 하지 못했던 합주를 몰아서 해야 했고, 곧바로 EP 앨범을 낼 준비에도 들어갔다. 못내 집에 있는 스피커나 오디오 인터페이스가 성에 차지 않아 큰맘 먹고 바꿀 생각에 아르바이트 시간도 늘렸다. 그러다 보니 딱히 의도한 게 아니었음에도 엉뚱한 데에 생각을 돌릴 여유 없이 하루하루가 휙휙 지나갔다. 이를테면, 비가 매몰차게도 쏟아지던 날의 기억이라든가….
그러던 중 밴드에 꽤나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 달 열리는 제법 큰 규모의 밴드 경연 대회에서 1차 예선을 통과한 것이다. 기실 동영상 심사로만 진행된 비교적 간단한 과정이었으나, 지금껏 이런 대회에 참가해 본 적이 없는 더 숨에게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물론 이 뒤로 2차 예선과 본선이라는 더 큰 관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더, 더 시간을 쪼개 합주해야 할 이 시점에 태군이 대뜸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 왔다. 좋게 말해 그렇다는 거지, 처음 재환은 친구를 향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조금 야박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야유회! 야유회 가자니까!”
이런 맘 편한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다만, 재환에게 아군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괜찮을 것 같은데? 이럴 때 잠깐 한숨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아?”
아니, 나빠. 아주 나빠. 라고 지우에게 속으로 대꾸하며 재환은 한영을 향해 자못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너마저 설마 같은 생각은 아니겠지, 라는 마음이 담긴 눈빛이었다. 야속한 한영은 재환의 믿음을 가뿐히 져 버렸다.
“나도 좋아.”
그리하여 실연으로 치러지는 2차 예선을 일주일 앞둔 날, 무진장 들뜬 한 사람, 적당히 기분 좋은 두 사람, 여전히 떨떠름함을 떨치지 못한 한 사람이 도시를 벗어나는 차에 올라탔다.
네 사람의 목적지는 서울에서 출발해 약 1시간 반가량이 걸리는 비교적 인근 지역이었다. 대학생들이 엠티로도 자주 찾는 곳이었는데, 마침 재즈 페스티벌도 열려 이의 없이 야유회 장소로 채택되었다. 단,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재환은 그 과정에서 구태여 가타부타 의견을 보태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가겠어?’ 하는 조금 안일한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이 어느새 ‘와…, 진짜로 가고 있네’로 바뀌어 버렸다. 멍하니 차 안에 흐르는 음악을 듣고 있던 재환은 차 뒷좌석에 함께 앉은 한영을 흘긋 쳐다보았다. 활짝 열린 차창에 팔꿈치를 얹은 한영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났음을 확실히 알려 주는 초록빛의 고즈넉한 풍경과 휙휙 들이치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칼이 다소 기이한 대조를 이루었다. 꼭 인물만 합성을 해 놓은 듯 좀처럼 어우러지질 못하는 것 같다가도, 한 폭의 그럴싸한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긴, 저 이목구비라면 무엇을 배경으로 두든 그렇게 보일 것이다.
이제는 같은 밴드의 멤버 이상, 이하도 아닌 사이로 돌아간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재환은 저 역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지우가 운전대를 잡은 차가 강을 가로질러 걸린 아치형 교량으로 접어들었다. 키 낮은 산으로 둘러진 강물에 잔잔히 물비늘 이는 모습이 그렁저렁 운치가 있었다. 아무래도 최근에는 이런 풍광을 눈에 담을 일이 없었는데, 그걸 생각하면 재환은 속이 좀 뻥 뚫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저는 경험해 보지 못했다만, 이래서 대학생들이 그렇게 엠티를 가는 모양이었다.
약 20분쯤을 더 달린 차는 곧장 예약해 둔 숙소로 향하는 대신 근처의 마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다들 페스티벌 구경을 하러 온 건지, 그냥 주말이라 그런 건지 지상 주차장에 제법 차가 많았다. 차에서 내린 네 사람은 쪼르르 줄지어 빽빽이 주차된 차 사이를 걸었다.
서울 촌놈답게 마트 안으로 발을 디딘 재환은 두 눈이 커다래졌다. 자주 들르는 동네 슈퍼보다 몇 배, 몇십 배는 큰 듯한 마트 내부에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다. 훤히 켜진 조명 아래 끝도 없이 늘어선 온갖 먹거리들을 보고 있자니, 꼴에 감상에 잠겨 강물을 바라봤을 때보다도 더한 설렘이 살랑살랑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당장 뭘 먹을 것도 아닌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마실 거리를 담당한 지우와 한영이 카트를 끌며 음료 코너로 사라졌다. 저도 카트 하나를 뺀 재환은 태군과 함께 먹을 것들을 느긋이 구경했다. 주로 태군의 주장, 혹은 억지 같은 생떼 아래 코너 하나를 옮겨 갈 때마다 카트 안으로 과자, 마른안주 따위가 계속해서 툭툭 떨어졌다. 그중 일부는 팍 인상을 쓴 재환의 손에 들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태군이 대뜸 컵케이크나 브라우니 믹스를 담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살짝 성을 내기도 했다. 그랬더니 태군은 못내 아쉬운 듯 ‘아, 왜…. 같이 만들면 재밌잖아….’ 하며 웅얼거렸다.
시식대는 빠지지 않고 들르는 태군을 기다리다 어느덧 혼자가 된 재환은 내일 아침 뭘 먹을까, 고민하며 라면 코너 근처를 서성였다. 이름은 야유회라지만, 사내놈 넷이 모여 밤새 무엇을 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렇다면 아침에는 다들 해장할 만한 것을 찾을 테다. 해장국을 끓일 수는 없으니 대신 라면으로 할까 생각할 무렵이었다.
카트 손잡이를 쥐고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 너머, 저 멀리 삐죽 위로 올라와 있는 분홍 머리통이 재환의 시야에 잡혔다. 주위에 비슷한 길이의 녀석 하나가 더 안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혼자인 모양이었다. 재환은 벌써 절반 정도가 찬 카트를 덜덜 끌며 한영이 있는 곳으로 발을 틀었다.
“뭐 해.”
가까이 다가서서 말을 걸자 건어물 코너 앞에 서 있던 한영이 손에 든 것을 퍼뜩 진열대에 끼워 넣었다. 봉지에 담긴 황태채였다. 대답을 않고 큰 눈을 굴리는 한영과 어중간하게 놓여 꼭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봉지를 번갈아 보던 재환은 ‘아….’ 하며 작은 탄성을 냈다.
“북엇국 먹고 싶어?”
한영은 가는 머리카락을 팔랑거리며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절로 ‘그럼 내가 끓여 줄게’라는 말이 나오게끔 하는 순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재환이 냉큼 그러지 못한 까닭은, 마땅한 재료도 없는 펜션에서 국을 끓일 엄두가 좀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듯 한영이 도톰한 입술을 움직였다.
“그냥, 먹고 싶기만 해.”
“어…?”
“안 먹어도 돼.”
그때, 진열대 뒤쪽에서 ‘유한영!’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우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먹겠다는 건지 안 먹겠다는 건지 통 모를 말을 남긴 한영은 한 번 벙긋 웃더니 재환에게 ‘이따 봐.’ 했다. 응, 대답한 재환은 금세 코너를 돌아 쏙 사라지는 한영의 뒷모습에서 진열대로 시선을 옮겼다. 곧 낙하할 듯 바깥으로 튀어나온 황태채 봉지를 꾹꾹 안으로 눌렀다. 그대로 걸음을 뗐다가, 덜컹하며 카트를 멈추었다.
“아씨….”
카트와 함께 뒷걸음질 친 재환은 다시 황태채 앞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와, 씨발! 존나 쩔어!”
아니나 다를까, 신발 벗고 펜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태군은 격한 감탄을 터뜨렸다. 뒤따라 들어간 재환도 태군만큼은 아니지만 속으로 은근히 감탄했다. 예약한 숙소라며 지우가 사진을 보여 줬을 때만 해도 영 사진발 같다는 조금 비뚜름한 생각을 했었는데, 사진발이 아니었다. 통유리 너머로 펼쳐지는 강변의 풍경이 가히 볼만했다. 여기에 내부 골격이 드러나도록 나무로 지어진 내관이 제법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복층 구조라 층고가 높은 덕에 답답함도 없었다. 이 정도면 남자 넷이 하룻밤을 부대끼는 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성싶었다.
다만 재환은 하루를 묵는 것치고 장 본 양이 심히 과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만 좀 담으라고 몇 번이나 눈치를 줬더니, 결국 태군이 다른 두 사람 쪽으로 붙은 결과였다. 게다가 술은 또 어찌나 많은지. 개중 흑맥주 캔은 몇 개나 되나 감히 세어 볼 엄두가 안 날 정도였다. 이것들이 아예 마시고 죽으려고 작정을 했나…. 어차피 오후에는 재즈 페스티벌을 구경하느라 펜션에서 먹고 마실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아씨, 나도 몰라’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환은 부엌에서 부지런히 장 본 것을 정리했다. 그중 껴 있는 황태채는 물건들을 담아 온 종이 박스에 얼른 도로 넣었다. 태군이 잔뜩 고른 과자로 대충 위를 덮었다.
펜션에 적당히 짐을 푼 네 사람은 지우의 차를 타고 10분쯤을 달려 재즈 페스티벌이 한창 열리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주위에 건물 하나 없는 넓은 부지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벌써부터 저 멀리서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드럼이 어우러진 재즈 연주가 은은히 들려왔다.
기실 더 숨에서 재즈를 즐겨 듣는 사람은 지우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도 함께 페스티벌을 관람하는 데 있어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태군이 공연 스태프로 일한다는 학교 선배에게서 얻어 온 공짜 1일 티켓 덕이 컸다. 적어도 재환의 경우에는 그랬다.
야외 공연장 입구에 마련된 부스에서 티켓을 종이 팔찌로 교환한 후, 드디어 안으로 입장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커다란 무대를 앞에 두고 펼쳐진 잔디밭에는 관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재즈 트리오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 아예 접이식 의자를 가져온 사람, 그냥 풀밭에 엉덩이를 붙인 사람 등 모습은 다 제각각이었다. 가족도 있었고, 커플도 있었으며, 친구끼리 온 사람들도 더러 있는 것 같았다. 단, 남자 넷이서 온 무리는 어째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청년 넷은 중간쯤 되는 자리에 미리 준비한 돗자리를 넓게 펼쳤다. 태군과 지우는 잔디밭을 향해 다리를 내놓고서 돗자리에 걸터앉았고, 재환과 한영은 신발을 벗고 위로 올라앉았다. 자연히 재환 옆에 가을바람 따라 하늘거리는 분홍색 머리칼이 자리하게 되었다. 함께 풍겨 오는 달큼한 향이 몇 번 재환의 코를 킁킁거리게 만들었으나, 금방 관두었다.
공연의 이름은 재즈 페스티벌이었지만, 그렇다고 출연진 모두가 재즈 뮤지션인 것은 아니었다. 라인업 중에는 재환이 아는 밴드의 이름도 몇 껴 있었다. 주로 어쿠스틱한 음악을 연주하는 팀들이었다. 재즈에 큰 관심이 없는 재환은 내심 빨리 그들의 순서가 오기를 바랐는데, 얼마 안 가 그런 생각이 말끔히 사라졌다.
계절이 무색하게 공연장을 빙 둘러싼 짙은 초록의 나무, 그 가운데서 돗자리로, 겉옷으로 알록달록한 색감을 이루는 사람들, 그들을 굽어보는 쪽빛 하늘. 이 모든 풍경이 어우러져 들려오는 음악을 감히 지루하거나 심심하게 느낄 수 없게끔 했다. 따라서 재환은 어느새 무대 위 오른 이들의 연주에 흠뻑 빠져들었다.
잠깐 공연이 쉬는 타이밍에 자리를 비웠던 지우와 한영이 맥주와 소시지, 치킨 등 먹고 마실 것을 잔뜩 사 들고 왔다. 대단히 특별한 메뉴는 아니었지만, 분위기 탓인지 재환은 먹으며 몇 번이나 속으로 ‘맛있다’를 반복했다. 어쩌면 ‘맛있다’가 아니라 ‘즐겁다’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밴드 멤버들과 멀리 나와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음악 페스티벌에 와 보는 것도 전부 다 처음이었으니까.
공연 팀이 서너 차례 바뀌는 사이, 정수리를 포근히 내리쬐던 해가 서서히 기울고 사방이 넓게 트인 공연장에 어스름한 저녁이 내려앉았다. 짙은 남색으로 물든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듣는 재즈 선율은 재환에게 여태까지와는 또 다른 감상을 전했다.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까닭 없이 애잔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듯도 했다.
흐르는 박자 따라 슬쩍슬쩍 머리를 좌우로 흔들던 재환은 살짝 등을 젖히고서 손바닥으로 돗자리를 짚었다. 그러다 이미 자리해 있던 누군가의 손끝을 툭, 건드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손가락이 움칠 오므라들며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비슷한 자세로 앉아 있던 상대도 재환을 보았다.
“노래 좋다.”
“아…, 응.”
어물쩍 답하자 불그스름한 입술이 얇게 펴지며 호를 그렸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절반의 어둠과 절반의 빛이 부드럽고 뾰족한 선으로 이루어진 옆얼굴을 타고 흘렀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분홍색 머리칼이 사락사락 흩날렸다.
다시금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드는 한영에게서 시선을 거둔 재환은 저 또한 무대 쪽으로 고개를 되돌렸다. 해가 지며 한결 쌀쌀해진 공기 탓에 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춥다고 불평하거나 자리를 정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대부분이 두툼한 웃옷을 걸친 채였다.
재환은 흘끔 곁눈질로 한영의 옷차림을 살폈다. 얇은 티에, 또 만만찮게 얇아 보이는 청재킷을 걸친 것이 절로 쯧 소리가 나오는 차림새였다. 추위도 많이 탄다는 녀석이. 속으로 덜덜 떨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런 걱정도 다 오지랖이다 싶어 이내 재환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입고 있는 바람막이의 주머니 부근을 더듬어 안에 든 담배나 확인했다. 돗자리 바깥쪽으로 몸을 기울여 자리에서 일어서자, 무대를 보고 있던 하얀 얼굴이 재환을 향해 높이 들렸다.
“어디 가?”
“담배 피우러.”
“같이 가. 나도 맥주 더 살래.”
대답할 새도 없이 무릎으로 돗자리를 디딘 한영이 재환을 따라 일어났다.
조심조심 사방에 깔린 돗자리 사이를 걸은 두 사람은 콘솔 부스를 지나 공연장 뒤쪽, 좌우로 죽 늘어선 푸드 트럭 앞에 다다랐다. 제가끔 알록달록한 색을 입은 트럭에서는 꽤나 다양한 종류의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맥주나 칵테일, 심지어 지역 전통주까지 술을 파는 트럭도 많았다. 단, 재환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으므로 한영에게 ‘이따 봐.’ 하고서 공연장에 넓게 둘러진 펜스 밖으로 나섰다.
재환은 티켓 부스, 이벤트 부스 등이 옹기종기 모인 장소 끄트머리에서 흡연 구역을 발견했다. 좁은 천막 아래로 들어가 뭉게뭉게 부연 연기를 피워 올리는 사람들 틈에 서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 한 대를 금방 피운 재환은 바람막이의 지퍼를 목까지 올리며 다시 공연장 안쪽으로 들어섰다. 우리 자리가 어디쯤이더라 생각하며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건 사람들의 웅크린 등뿐이었다. 분간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한영이 자리로 돌아갔을 것 같아, 재환은 비슷비슷한 뒷모습 사이에서 분홍색 뒤통수를 찾았다. 그 대신 무대 조명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반뜩이는 민머리를 막 발견했을 즈음이었다. 익숙한 듯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휙 고개가 돌아갔다.
금방 맥주를 사서 자리로 갔을 줄 알았던 분홍 머리의 주인공이 아직 푸드 트럭 앞에 서 있었다. 그 주위로 공연을 보러 온 듯한 백인 남녀 너덧이 함께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다들 대화를 나누며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남자 한 명의 손이 한영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는데, 헤어 컬러가 어쩌고 하는 것이 특이한 머리 색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그 외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고, 설사 들린다 한들 재환의 가난한 영어 실력으로는 알아먹기에 무리가 있었다.
다만, 낯선 언어를 쓰며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한영은 어째서인지 조금쯤 먼 곳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재환은 한영에게 다가가 같이 자리로 가자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 우두커니 서서 그쪽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냥 주머니에 푹 두 손을 찔러 넣고 태군과 지우가 있는 돗자리로 돌아갔다. 태군이 ‘유한영은?’ 하기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해 주었다.
한영은 오늘의 마지막 팀이 무대에 오를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린 플라스틱 컵에는 기껏해야 한두 모금 정도의 맥주가 남아 있었다. 이를 쳐다보는 눈길을 알아차렸는지, 한영이 ‘마실래?’라고 물으며 재환에게 컵을 내밀었다. 재환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일렬로 죽 늘어선 빅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다. 시원하게 터지는 브라스 멜로디에 공연의 재개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 쳤다. 재환도 무대를 향해 열심히 박수를 보냈다. 음악과, 그리고 멀고도 가까운 너와 함께 깊어 가는 가을밤이었다.
* * *
재환이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처럼, 느지막이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제법 거한 술판이 벌어졌다. 맥주, 소주, 와인 등 온갖 술이 냉장고 밖으로 나왔고, 태군이 고른 과자 봉지들도 야무지게 뜯어졌다. 피자니 만두니 하는 냉동식품도 모두 데워 내놓으니 네 사람이 빙 둘러앉은 펜션 거실에 빈자리가 없었다.
운전 때문에 공연 관람 도중 맥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던 지우가 부지런히 맥주에 소주를 섞어 잔을 하나씩 옆으로 돌렸다. 이윽고 ‘짠!’을 외치기 무섭게 유리잔 가득 찰랑찰랑 담겼던 술이 여기저기서 울리는 꿀꺽꿀꺽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동시에 재환은 지우가 맥주에 소주를 탄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음을 깨달았다. 소주에 맥주 몇 방울만 떨어뜨린 것이었다.
차츰 거실에 빈 병이 늘어나고,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사실 그림만 보면 이것저것 구실 삼아 한영의 집에서 술을 마셨던 때와 비슷했지만, 장소가 바뀐 탓인지 재환은 이 상황이 적이 생소하면서도 또 즐겁게 다가왔다. 대학생들 가는 엠티라는 게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지우가 챙겨 온 통기타를 꺼냈을 때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재환은 지우가 기타를 썩 잘 친다는 것도, 노래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알아주는 음치인 태군이 고래고래 지우의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면 좀 더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자꾸 재환을 피식피식 웃게 했다.
이후 기타는 자연스럽게 재환에게 건너왔다. 그러나 제 노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재환은 일렉 기타보다 두꺼운 감이 있는 넥을 쥐고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앞서 지우가 뽐낸 노래 실력 때문에 살짝 기가 죽은 탓도 있었다. 괜히 엉망인 노래를 불러 기껏 그가 끌어 올린 흥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의 염치는 있었다.
“나 노래 진짜 못 하는데.”
“에이, 서재환! 시시하게!”
역시나 태군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못 하는 건 못 하는 건지라 재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신 다른 멤버들도 만족할 만한 제안을 했다.
“‘I See You’ 기타 버전 들려줄게.”
“기타 버전?”
“응. 노래는 유한영이 할 거야.”
뜬금없이 이름이 언급된 한영이 안 그래도 큰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재환을 봤다. 재환은 뭘 그런 반응을 보이냐는 뜻으로 눈썹을 한 번 쑥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I See You〉를 기타 한 대로 편곡한 버전은 일전 가사를 다시 쓸 때 제가 직접 녹음해서 한영에게 들려준 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영도 모르지 않았다. 따라서 부르는 데에도 전혀 무리가 없을 터였다.
“나? 재환이 너 아니고?”
“응. 네가 불러.”
더 이상의 반문은 듣지 않겠다는 듯 재환은 한영에게 단호히 대꾸했다. 그러고서 오른손에 있는 0.5mm짜리 피크를 밭게 고쳐 쥐었다. 곧이어 왼손으로 지판을 짚자, 장력이 짱짱한 통기타 줄이 손끝의 굳은살을 은근히 파고들었다. 재환은 한영에게 시작한다는 눈짓을 보낸 뒤, 카운트 삼아 손가락 마디로 기타 바디를 가볍게 네 번 두드렸다.
부드러운 스트로크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쳐 보는 통기타였지만 재환의 연주에는 막힘이 없었다. 마이크 없이도 또렷하게 울리는 한영의 노래가 그 위로 아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이미 들을 만큼 들은 노래라 처음에는 덤덤했던 태군과 지우의 표정에 점차 흥미와 감탄이 서렸다.
노래의 감정이 무르녹는 하이라이트로 접어들자, 목소리를 키운 한영이 재환을 보았다. 보다 힘 있는 스냅으로 기타 줄을 튕기며 재환 또한 한영을 보았다. 태군, 지우뿐만 아니라 지금은 늘어선 술병, 술이 남은 유리잔 모두가 그들의 관객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었다.
기타 줄을 세게 내리친 재환이 넥을 잡아 음을 끊으며 노래가 끝났다. 멍하게 풀어진 표정을 짓고 있던 태군이 느릿느릿 박수를 쳤고, 반대로 입꼬리를 쭉 위로 올린 지우가 여기에 박수 소리를 보탰다.
“좋네, 기타 버전.”
“그르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객 반응에 재환과 한영은 서로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이를 보던 태군의 눈초리가 갑자기 훅 좁아 들었다.
“근데 니네 뭐냐.”
태군은 짐짓 의뭉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기라도 한 듯이 손가락 끝으로 톡톡 바닥을 두들겼다. 노래 잘 들어 놓고 난데없이 비뚜름한 반응을 보이는 태군에게 재환은 ‘뭐가?’ 하고 다소 뚱하게 되물었다. 변화 없는 표정과 달리 가슴팍 안에 숨은 심장은 조금 빨리 뛰었다. 지레 뜨끔한 사람처럼.
“왤케 갑자기 합이 잘 맞아? 우리 빼고 연습하냐? 몰래? 엉?”
목을 앞으로 쭉 빼고 추궁하는 태군의 눈이 점점 도끼눈이 되어 갔다. 사실도 아니었지만, 혹 그렇다고 대꾸하면 아주 대놓고 으름장을 놓을 기세였다. 이를 보며 지우는 소리 죽여 쿡쿡 웃기만 했다.
“수상해! 존나 수상한데?”
무슨 흉내를 내는 건지 태군은 척 팔짱까지 꼈다. 거기에 한쪽 눈은 가느스름하게 뜨고, 반대로 한쪽 눈은 부릅떴다. 그때, 눈만 깜빡이던 한영이 완전히 다른 얘기를 꺼냈다. 참 시기적절하게.
“맞다. 나 아까 태군이 너 봤어.”
“나?”
“응. 어떤 여자애랑 같이 있는 거.”
보는 사람이 다 화들짝 놀랄 정도로 한순간 태군의 낯이 벌그죽죽한 색으로 달아올랐다. 언제 사람에게 따지고 들었냐는 양 표정 가득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봐, 봐, 봤냐?”
설상가상 태군은 말도 또렷이 잇질 못했다. 한영이 무얼 묻는 건지, 태군의 태세가 왜 저리 갑자기 바뀐 건지 알 턱이 없는 재환은 종전의 태군과 비슷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눈이 가늘어지고, 양미간이 슬그머니 좁혀졌다.
“응, 화장실 근처에서.”
“아, 그…. 아씨, 말 안 하려고 그랬는데….”
태군은 있지도 않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행동이… 꼭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비쳤다. 그리고 재환의 판단은 얼추 들어맞았다. 태군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 내가 헌팅을 당한 것 같거든…?”
“헌팅?”
“엉. 중간에 화장실 갔다 오다가. 어떤 여자애가 내 티셔츠 보고 먼저 말 걸더라고…?”
태군을 향해 있던 세 쌍의 눈알이 자연히 그가 입고 있는 티셔츠로 내려갔다. 시커먼 티셔츠 앞면에는 해외 메탈 밴드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것도 시뻘건 해골 마크와 함께.
“걔도 이 밴드 좋아한다고, 재즈 페스티벌에서 보니까 신기하다고…. 그러고서 번호 물어보드라. 나랑 메탈 얘기 하고 싶대.”
남자치고는 조금 작은 듯한 손이 제 가슴팍 부근을 쓱쓱 문질렀다. 그새 더 벌게진 얼굴이 이제는 완연한 진분홍빛을 띠었다. 그런 태군을 응시하며, 나머지 세 사람은 잠깐 동안 비슷한 의미의 침묵을 공유했다. 그러다, 결국 소중한 멤버를 위해 입을 열었다.
“그거 헌팅 아닌 것 같아.”
“진짜 반갑고 신기해서 그런 거 아냐?”
“주위에 메탈 팬이 없나 보네.”
자못 진지한 첨언이 이어질 때마다 짝사랑에 빠진 열여덟 소녀 같던 태군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졌다. 끝내는 입꼬리가 거의 턱에 닿을 정도로 쭈욱 내려갔다. ‘씨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중얼거린 태군은 누가 봐도 맥주잔 사이즈의 컵에 콸콸 소주를 들이부었다. 이를 단숨에 들이켜는 태군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약 1시간여가 지나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해야 할 펜션 안에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못 말리겠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떨어뜨린 지우가 두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 태군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몹쓸 술버릇이 또 도져 버린 탓이다.
“집에 갈래…. 집 가고 시퍼어….”
“여기가 네 집이야.”
“내 집 아니야…. 내 집 더 좁아….”
맞은편에서 둘 대화하는 꼴을 보는 재환의 얼굴이 점점 얼씨구,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속이 영 느글느글한 게 절로 담배가 당겼다. 그러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 재환은 보다 마뜩잖은 상황에 부딪혔다.
“아씨….”
“왜?”
“담배 다 피웠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 재환은 텅 빈 상자를 좌우로 흔들어 보이며 한영에게 답했다. 끙, 하고 한참 만에 일어서서 등을 대고 있던 소파 위에 벗어 둔 바람막이를 집었다. 한영도 덩달아 일어났다.
“담배 사러 가? 나도 같이 갈래.”
뭐 하러, 라는 물음을 담아 눈을 조금 크게 뜨고 한영을 보았다. 한영은 ‘바람 쐬고 싶어.’라는 다소 심상한 답을 들려주었다. 하긴, 계속 여기 있어 봤자 태군이 징징거리는 소리밖에 더 듣겠나. 어차피 달래는 건 지우의 몫일 테니 나머지 사람은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응, 대답한 재환은 바닥에 늘어 놓인 술병과 과자 봉지 따위를 피해 현관 쪽으로 걸음을 뗐다. 막 신발을 신기 전, 저를 뒤따르는 한영을 휙 돌아보았다. 한영은 흰 바탕에 남색 줄무늬가 쳐진 티셔츠 하나만 덜렁 위에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대로 나갈 심산인 듯했다. 감기 걸리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재환은 쯧, 낮게 혀를 찼다.
“잠깐 기다려.”
얼른 방에 들어갔다 나온 재환의 손에는 두툼한 후드 집업이 들려 있었다. 이를 휙 앞으로 내밀자 한영이 엉거주춤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러고서 눈만 깜빡이기에, 재빨리 뒤돈 재환은 운동화 안으로 발을 끼워 넣으며 말을 덧붙였다.
“입으라고.”
역시나 강 근처의 새벽 공기는 상당히 찼다. 그다지 추위를 타지 않는 재환의 어깨가 으슬으슬 떨릴 정도였다. 하니 한영도 보나 마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오지랖이든 뭐든, 옷을 빌려주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진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차를 타고 지났을 때, 저 아래 뜬금없이 작은 편의점 하나가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길 중간쯤 내려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자박자박 모래 섞인 길바닥을 밟는 소리, 강바람 따라 나뭇가지가 흔들거리는 소리가 그 틈을 대신 메웠다. 지금이 영락없는 가을임을 일러 주듯 귀뚤귀뚤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섞여 들었다.
슬슬 시려 오는 손을 주머니에 넣은 재환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아래쪽에 시선을 두고 입을 뗐다.
“너 영어 잘하더라.”
“어?”
“아까 외국인들하고 말하는 거 봤어.”
한영은 ‘아….’ 했다. 쓸데없는 얘기를 꺼낸 건가, 싶은 생각에 재환은 발부리에 채는 작은 돌멩이를 괜히 앞으로 툭 찼다. 돌멩이가 맥없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미국에서 살았으니까.”
“그렇네.”
몇 마디 이어지질 못하고 대화는 그쯤에서 끊겼다. 그래도 넷이 술을 앞에 두고 있었을 때는 뭐라도 계속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그중 절반이 없다고 이렇게나 분위기가 달랐다. 거기에는 재환 자신의 탓도 어느 정도 있을 터였다.
으슥한 밤기운 속, 다시금 저벅저벅 모랫길 밟는 소리만 이어졌다. 공연히 답답한 기분이 든 재환은 소리 죽여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합주실에서든 어디에서든, 한영과 단둘이 될 때면 가끔가다 이랬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차게 비바람 불던 그날 이후부터였다.
원인은 제법 명확했다. 한영을 보다 보면, ‘저 새끼는 괜찮나?’ 하는 물음이 문득 재환의 마음속에서 삐죽 고개를 들었다. 고백하건대, 재환은 남자, 여자 구분하기 이전에 사귀지 않는 상대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 후에 느껴지는 어색함에 대처할 방법을 몰랐다.
그에 비해 한영은 지극히 태연해 보였다. 진짜 우리 사이에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물론 한영처럼 행동하는 것이 맞았다. 서로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한 건 아니지만, ‘오늘 한 번만’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했던 하룻밤이었다. 그래 놓고서 혼자 서먹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도 꽤나 우스운 일이었다. 재환은 그러기 싫었다.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태도와 속마음에 깊은 괴리가 있으니 답답함이 쌓일 수밖에. 해소할 길이 없어 또 쌓이고, 그게 괜스레 억울해져 또 쌓이고…. 참 난감한 악순환이었다.
“재환아.”
“어?”
결론 없는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재환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답했다. 고개까지 휙 옆으로 돌렸다. 한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아까 왜 노래 안 불렀어?”
“노래?”
“응. ‘I See You’ 기타 버전으로 만든 거. 처음 네가 불러서 나 보내 줬잖아.”
‘그랬었지….’ 하며 재환은 말꼬리를 흐렸다. 노래 부르기를 마다한 대단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멤버들 앞에서 그러기가 적잖이 창피했을 뿐이다.
“나 진짜 노래 못 부르니까. 쪽팔리잖아.”
“아닌데.”
그러더니 한영은 ‘재환이 너 노래 잘 불러. 난 좋아.’라고 덧붙였다. 도리 없이 재환의 눈썹 사이에 푹 힘이 들어갔다. 전에도 한 번 듣긴 했다만, 별로 달갑지 않은 칭찬이었다. 보컬인 녀석이 저리 말해 봤자 큰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한 바를 고대로 전하면 어지간히 꼬인 놈으로 비칠 것 같아, 재환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 요새도 그거 자주 들어.”
“야, 그걸 왜…!”
하나 다음 말에는 어쩔 수 없이 큰 소리가 나갔다. 바꾼 가사를 익히라고 녹음해서 보내 준 거였지, 좋을 대로 감상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제 와 그걸 따져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근데 내가 듣는 건 안 부끄러웠어?”
언제 발끈했냐는 양 재환은 또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전적으로 한영의 탓이었다. 저런 치사한 질문은 반칙이었다. 그에게 노래 좀 들려주는 게 부끄러웠다면, 함께 섹스할 생각은 숫제 하지도 못했을 거다.
그럼에도 재환은 절대 한영에게 진실을 고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평소 당연하다 느꼈던 것들을 자꾸 네 앞에선 잊게 된다는,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어찌 내뱉을까. 그래서 재환은 그냥 한영의 물음을 무시하기로 했다.
“재환아?”
재환은 단숨에 보폭을 키웠다. 주먹까지 다부지게 쥐고서 가능한 한 빠르게 걸었다. 한데, 하필이면 이번에는 진짜 돌부리에 턱 발끝이 걸리고 말았다.
“어엇…!”
일순 걸음이 꼬이며 반대편 발이 다급히 바닥을 짚었다. 날갯짓하든 두 팔을 허우적거린 재환은 깽깽이걸음으로 몇 발짝을 더 휘청휘청 내디뎠다. 그럴수록 몸이 앞으로 기울며 땅바닥이 눈앞에 가까워졌다. 모랫바닥에 얼굴을 갈아 버리기 직전이었다.
“크윽…!”
한순간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허리를 감쌌다. 앞으로 고꾸라지던 상체가 훅, 뒤로 젖혀지며 단단한 벽에 뒤통수가 부딪혔다. 지직, 모래를 긁는 마찰음과 함께 벗겨진 운동화 한 짝이 저만치 앞으로 탕탕 굴러갔다.
신나게 굴러가던 운동화가 이윽고 나무 밑동에 걸려 멈추었을 즈음에야 재환은 제 머리통에 닿은 것이 한영의 가슴팍임을 알아차렸다. 기다란 두 팔은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와 상체를 꽉 붙들고 있었다. 그 상태로 두 다리를 쫙 뻗은 재환의 몸이 제대로 니은 자를 그렸다.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한 니은 자.
“괜찮아?”
재환의 머리 위로 푹 고개를 숙인 한영이 거꾸로 눈을 맞춰 오며 물었다. 꽤나 놀란 탓에, 재환은 혀가 뻣뻣이 굳어 괜찮다는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여기에는 얼마쯤의 쪽팔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정도 사고는 쳐야 한영 앞에서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이…, 일으켜 줘.”
“아, 응.”
한영은 팔에 힘을 주어 재환의 몸을 쭉 위로 끌어 올렸다. 재환은 땅에 닿은 발뒤꿈치를 질질 끌며 겨우 다리를 곧게 세웠다. 발 한 쪽이 신발을 시원히 날려 먹은 상태이기는 하나, 이제는 한영이 놓아주어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뒤에서 가슴을 껴안은 팔은 풀리지 않았다.
그대로 1초, 5초, 10초가 흘렀다. 귀뚜라미 소리도 멎고, 바람도 잦아든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안 그래도 순간 식겁하여 빨리 뛰던 재환의 심장이 쿵쿵쿵 더욱이 위험한 소리를 울렸다. 어쩌면, 이쪽이 내는 소리가 아닐 수도 있었다. 뒤섞인 심장 소리가 차츰 더 재환을 혼란스럽게 할 무렵, 등에 맞붙어 있던 몸이 훌쩍 멀어졌다.
“운동화 주워 올게…!”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사람처럼 한영은 후다닥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멀리도 날아갔던 운동화를 손에 쥐고 돌아왔다. 가뜩이나 꼬질꼬질한 운동화가 아주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게 또 쓸데없이 재환의 귓바퀴를 뜨끈하게 달구었다. 하여 얼른 한영의 손에서 운동화를 낚아채려는 때였다.
“야! 내가 신을게…!”
운동화를 쥔 채로 갑자기 무릎 꿇는 한영을 보며 재환은 기겁했다. 저 더러운 운동화를 가져다준 걸로 충분하거늘, 이 이상의 친절은 단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들은 체도 않은 한영은 친히 재환의 발에 신발을 신겨 주었다. 풀린 끈도 직접 묶었다. 어느새 손을 툭툭 털며 일어선 한영의 얼굴을 재환은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내가 신는다니까….”
몇 번을 고맙다 해도 모자랄 판에 열없는 소리나 중얼거렸다. 이제는 귀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 오늘은 모자도 쓰지 않았는지, 이래저래 난감할 따름이었다.
“괜찮아.”
가뿐하게 대답한 한영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속으로 ‘아씨….’를 중얼거린 재환도 한영을 따라 얼른 발을 뗐다. 저 멀리서 하얀 빛을 반짝이는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절로 재환의 입술 새에서 안도의 숨이 샜다. 그와 동시에 왔던 만큼을 도로 걸어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약간의 막막함을 안겼다. 그 길이 재환은 꽤나 멀게 느껴질 것 같았다.
무사히 담배를 사서 다시 펜션으로 돌아왔을 때, 거실 벽에 등을 기댄 태군과 지우는 사이좋게 어깨를 맞댄 채 잠들어 있었다. 작정한 듯 술을 퍼마신 태군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 시간부터 운전대를 잡은 지우도 실은 꽤나 고단했을 터였다. 재환은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태군을, 한영은 저 이상으로 기다란 지우를 이고 1층 방으로 옮겼다. 서둘러 편 이불 위로 두 사람을 누이고 나서야 서로 한숨을 돌렸다.
하나, 잠든 사람을 치우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내일 일어나 할 일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잔뜩 어질러진 거실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신나게 먹고 마시던 흔적들을 내려다보던 재환이 두 팔을 걷어붙이는데, 어깨 위로 툭 한영의 손이 얹혔다.
“내가 할게.”
“같이 하면 되지.”
“너는 먼저 씻어.”
아예 한영은 재환의 등을 꾹꾹 욕실 쪽으로 떠밀었다.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재환은 영 마음이 불편해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같이 하면 금방 치울 텐데.”
“맨날 저런 거 네가 했잖아. 오늘은 내가 할래.”
기어이 한영은 재환을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까지 닫아 주려기에, 재환은 다급히 문 모서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한 뼘쯤 벌어진 문 틈새로 두 사람의 시선이 잇닿았다.
“…고마워.”
어물어물 인사를 전하자 한영은 오늘 몇 번을 그랬던 것처럼 빙긋 웃기만 했다. 참 예쁘게도 웃었다. 거기에 괜히 눈길을 붙들리기 싫었던 재환은 제 손으로 문을 마저 닫았다. 그러자마자 닫힌 문 위로 쿵 등을 기댔다.
“미치겠네….”
한숨 같은 혼잣말을 흘리며 두 손으로 뒷목을 감싸 쥐었다. 아까 한영이 닿았던 등이, 숨이 쏟아졌던 목덜미가 아직도 델 듯이 뜨거운 것 같았다. 하지만 제가 씻는 사이에 일할 한영을 조금이라도 도우려면 이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짝, 소리가 나게 양 뺨을 내리친 재환은 오랜만에 보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 섰다.
감기에 걸리든 말든 찬물로 씻고 나온 재환은 허리에 수건만 두른 채 저벅저벅 거실로 갔다. 제법 서두른 만큼 아직 도울 거리가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바닥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한영이 이렇게 손이 빠른 줄 미처 몰랐다.
제법이네, 생각하며 재환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어느 틈엔가 등 뒤로 다가선 이에게 덥석 양어깨가 붙잡혔다.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또, 등이 떠밀려 버렸다.
“야, 또 왜 그러는데?”
억지로 걸음을 옮기며 재환은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한영은 꿋꿋이 재환의 등을 밀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복층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이르러서야 이 이상한 소란이 겨우 멎었다.
“네 가방, 저 위에 갖다 놨어. 방에 애들 자서.”
“그게 왜?”
“가서 제발 옷 좀 입어….”
이제야 고개를 좀 뒤로 돌려 보려던 재환은 멈칫 굳었다. 눈썹 사이에는 움푹 작은 골짜기가 팼다. 내가 실수를 저질렀구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영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팔을 쭉 펴 재환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한영은 푹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한층 더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 나갔다.
“그러고 돌아다니지 좀 마…. 응?”
부탁이라기보다 숫제 빌고 있는 투에 가까웠다. 그럴수록 재환은 대답의 말을 잃었다. 한영이 이러는 이유를 조금도 눈치 못 챌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유연히 대처할 만큼 능청스럽지도 못했다. 그냥 알았다 하면 되는 것인지, 미안하다 사과해야 하는 것인지 좀처럼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었나 보다.
“왜…?”
재환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젖은 앞머리 끝에서 똑똑 떨어진 물방울이 훤히 드러난 가슴팍을 적셨다. 물방울이 살결을 따라 도르르 흐르며 설핏 간지러운 감각을 일으켰으나, 크게 개의치 않고 한영과 빤히 눈을 맞추었다. 지금 저 하는 행동이 상황적으로 그다지 적절치 않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이 공간에 저와 한영 둘뿐이 아니라는 것도.
“왜 이러고 다니면 안 되는데?”
“재환아….”
구불구불한 분홍 머리칼 아래서 갈색 눈동자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붉은 입술이 거듭 달싹였다. 이 모든 반응이 재환에게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실수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질 낮은 도발. 그러나 도둑질도 해 본 놈이 한다고, 재환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그냥 해 본 소리야. 가서 옷 입을게.”
언제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었냐는 듯 재환은 휙 뒤돌아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두 주먹을 꽉 쥔 한영의 눈이 차마 그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시선을 내리깐 채로 눈 주위만 벌겋게 물들였다.
한 칸, 두 칸 계단을 오를수록 걸음이 빨라진 재환은 마지막 계단을 거의 뛸 듯이 밟아 다락으로 올라섰다. 난간 아래쪽에서는 보이지 않을 각도의 벽에 대고 쿵쿵 이마를 찧었다. 절로 ‘서재환 진짜 미쳤냐? 미쳤어?’ 소리가 비어졌다.
사실 가능만 하다면 재환은 악악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을 떠보는 것도 아니고, 제가 뭘 물은 건가 싶었다. 감당 못 할 후회가 쾅쾅 더 세게 벽에 이마를 처박게 했다. 아무리 그리해 봤자 종전 보았던 한영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씨발….”
하등 효과 없는 자학을 포기한 재환은 비척비척 한영이 갖다 둔 백팩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라도 그의 말에 따를 생각에, 쪼그려 앉아 가방 안을 뒤적였다. 챙겨 온 속옷과 트레이닝복을 꺼내 입자 가슴을 답답하게 조이던 죄악감이 딱 손톱만큼 덜어졌다.
1층 방에는 이미 태군과 지우가 곯아떨어져 있으므로 씻고 올라올 한영을 위해 요와 이불도 깨끗이 펼쳐 놓았다. 두 개의 베개 중 숨이 덜 죽은 쪽을 한영 누울 자리에 두고, 저는 납작한 베개를 베고 누웠다. 아래층에서 미세하게 샤워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한영은 상당히 긴 시간을 씻었다. 정확히 확인해 보지는 않았으나, 욕실에 들어간 지 한 30분은 지난 것 같았다. 한영이 올 때까지 웬만하면 잠들지 않고 버티려던 재환은 점점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결국 껌뻑 잠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재환은 어느 틈에 허벅지까지 내려간 이불을 끌어 올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부스스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주변이 온통 어두컴컴한 것이, 잠든 사이에 거실 불도 모조리 꺼진 모양이었다. 동그랗게 뚫린 다락 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의지해 옆자리를 살폈다.
한 사람을 위해 곱게 펴 두었던 요가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 위에 덮인 이불은 물론이고, 불룩하게 솟은 베개에도 사람이 누웠던 흔적일랑 없었다. 하…, 재환은 허무한 숨을 뱉으며 키 낮은 천장을 보고 누웠다.
혹시 이미 사내 녀석 둘로 꽉 찬 방에 비집고 들어갔나. 아니면 그 키에 불편하게 소파에서 구겨져서 자고 있나. 몇 가지 가정을 떠올려 봤지만, 자꾸 앞에 ‘굳이’라는 말이 붙었다. 어찌 됐든, 여기서 자기는 싫다는 뜻이었다. 그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보다 긴 한숨을 틔워 냈다.
얇은 요 하나 깔린 딱딱한 나무 바닥에서 슬금슬금 찬 기운이 올라왔다. 더위는 타도 추위는 잘 타지 않던 재환은 이상하게 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펜션이 강 근처라 추운 거라고, 게다가 서울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왔으니 당연한 거라고 여기며 아예 목 아래까지 이불을 당겼다.
그 후로 재환이 몇 번 더 잠에서 깼을 때도, 심지어 짹짹 새 소리 들려오는 아침이 되어서도 주인 없는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한영은 끝내 오지 않았다.
일찌감치 잠에서 깬 재환은 까치집이 된 머리를 벅벅 긁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전면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손으로 막으며 눈을 깜빡이다가, 거실 소파에 옹크려 누워 있는 한영을 발견했다. 기껏해야 3인용이 될까 말까 한 소파에 긴 다리를 억지로 접어 욱여넣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저 맥 빠진 웃음이 흘렀다. 심지어 담요도 없이 어제 제가 빌려준 후드 집업만 덜렁 덮은 채였다.
재환은 다시 다락으로 올라가 둘둘 말린 이불을 갖고 내려왔다. 움츠린 어깨를 감싼 집업을 걷고, 반으로 접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말간 얼굴을 한가득 비춘 햇살이 아무래도 잠을 방해할 것 같아 창의 블라인드도 조심조심 내렸다.
짧은 할 일을 마친 재환은 부엌으로 가기 위해 발을 뗐다. 그러나 몇 발짝 나아가지 못하고 소파 옆에서 도로 멈추어 섰다. 이제는 환한 빛살 대신 잔잔한 그림자를 품은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위로 천천히 허리를 숙여 얼굴을 붙였다.
잠시 후 발소리를 낮춰 부엌에 들어서자, 지난밤 한영이 가져다 놓은 빈 병이 바닥에 죽 늘어서 있었다. 그 옆에 비닐은 비닐대로,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나름 분리수거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평소 한영의 집에서 간단하게 술을 마시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때면 늘 제가 해 놓던 것과 얼추 비슷한 모양새였다.
픽, 웃은 재환은 능숙하게 남은 뒷정리를 했다. 한영이 씻어 둔 컵과 식기 따위를 제자리로 돌리고, 미처 덜 된 분리수거도 마저 끝냈다. 일단 나온 쓰레기들을 펜션 앞 쓰레기 버리는 곳에 갖다 두고 돌아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젯밤 한영에게 그 많은 정리를 떠넘긴 것이 은근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태군과 지우가 잠들어 있는 방에서는 문 너머로 아직도 간간이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조금 촐싹대는 느낌이 있는 게, 추측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태군이지 싶었다. 문 앞에 서서 둘을 깨울까 고민하던 재환은 그냥 발을 돌렸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아침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넓지 않은 조리대 아래를 뒤져 커다란 냄비를 꺼내고, 그 안에 넉넉히 물을 받았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리고서 어제 장 본 것들이 담긴 박스를 뒤적였다.
박스 가장 아래쪽에서 황태채 봉지를 찾은 재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앞니로 입술 안쪽 살을 꾹꾹 깨물다가, 황태채 대신 다섯 개가 한 묶음인 봉지 라면을 집었다. 얼마 안 가 북엇국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파와 계란이 벌겋게 수프가 풀린 라면 국물 안으로 퐁당퐁당 떨어졌다.
아직 면이 조금 덜 익었다 싶었을 때 불을 끄고 냄비에 뚜껑을 덮었다. 방, 거실을 돌아다니며 차례로 멤버들을 깨웠다. 이윽고 얼굴이 퉁퉁 부은 태군, 제법 멀끔한 지우, 비슷하게 멀끔한 한영이 넓지 않은 식탁 주위로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재환이 최고네. 엄마, 짱이에요! 잘 먹을게. 따위의 말을 들으며 재환은 젓가락을 들었다. 아주 잠깐, 북엇국이 더 나았으려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후루룩 면을 빨아올리는 순간 단번에 지워졌다. 라면이야 언제 먹어도 늘 맛있는 음식이었으므로. 게다가 이렇게 멤버들과 함께이니, 재환은 라면이 더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한영도 같은 생각이기를 바랐다.
* * *
단꿈 같았던 1박 2일간의 야유회에서 돌아온 후, 밴드는 언제 맘 편히 놀았냐는 듯 곧 있을 대회의 2차 예선 대비에 열을 올렸다. 찬찬히 진행하던 EP 앨범 준비도 모두 멈추고, 오로지 합주에 매진했다. 혹 서로 시간이 맞지 않으면 아예 새벽에 모여 해가 뜰 때까지 연습하기도 했다. 가히 살인적인 일정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을 늘어놓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열심히 해야 할 이유를 부러 찾을 단계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므로.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어느샌가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재환과 한영의 관계도 표면적으로는 아무 변함이 없었다. 합주실에서 만나면 서로 그럭저럭 살갑게 인사를 건넸고, 연습 도중에는 자연스럽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몇 번은 재환이 떨어뜨린 피크를 눈 좋은 한영이 직접 찾아 주기도 했다. 이처럼 둘은 썩 괜찮은 사이를 유지했다. 단, 다시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야기였다.
한영은 가끔 그랬던 것처럼 재환이 담배 피우러 갈 때 더 이상 따라나서지 않았다. 까닭 없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일도 없었다. 조금 더 쉽게 말해, 재환에게 보다 확실히 선을 그었다. 거기에 재환은 딱히 불만을 가지거나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영에게는 마땅히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 터고, 저는 그걸 파고들 입장이 아니었다. 펜션에서 괜히 한 번 어중간하게 건드렸다가 결과적으로 후회만 잔뜩 얻지 않았던가. 재환은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저 또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더 집중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명확히 존재했다. 그것 때문에 모든 멤버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혼자서만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려 있을 수 없었다. 그럴 시간에 재환은 기타를 한 번 더 잡았고, 전에 찍었던 무대 영상을 한 번 더 돌려 보았다. 오로지 대회에서 완벽히 연주할 일만 생각했다.
이렇게 바삐 지내다 보니 예선 당일은 금방 다가왔다. 일찌감치 한영의 집에 모여 합주를 마친 네 사람은 늘 그랬듯 지우의 차를 타고 함께 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이동했다.
2차 실연 심사가 진행될 클럽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재환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유명 밴드들도 종종 공연하는 곳인 만큼 어느 정도 규모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클럽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평소 공연하는 클럽 코벤트와는 감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시커먼 객석, 시커먼 무대, 시커먼 앰프와 스피커…. 긴장감이 빠르게 발끝부터 차올랐다.
먼저 도착한 밴드들은 클럽 뒤편의 계단식 좌석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순서가 되면 무대로 나가 간단히 리허설 하고, 바로 연주를 시작하는 식이었다. 대회 진행 스태프에게 대강의 설명을 들은 재환도 멤버들과 함께 대기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단 한 번 마주친 것뿐이지만 똑똑히 기억하는 얼굴을 맞닥뜨렸다. 차마 반가운 얼굴이라고는 못 하겠다.
“헐, 박세웅?”
태군의 부름에 자리에 앉아 덜덜 다리를 떨던 가죽 재킷 차림의 남자가 휙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곱상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장태군….”
뒤이어 태군과 함께 있던 나머지 셋을 차례로 본 남자, 그러니까 세웅의 얼굴이 한층 일그러졌다. 표정에 떠오른 건 노골적인 거부감이었다. 니들이 왜 이딴 데 있냐는. 같은 팀 멤버로 보이는 주위 다른 녀석들이 ‘누군데?’ 하며 세웅에게 말을 붙였지만, 그는 대답을 않고 아랫입술만 질겅질겅 씹었다. 시선은 한 계단 아래 서 있는 한영에게 꽂혀 있었다.
“오랜만이야.”
전 멤버이자, 어쩌면 전 애인에게 건네는 인사치고 한영의 어투는 꽤나 덤덤했다.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나가다 아는 사람을 본, 딱 그 정도의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세웅과는 정반대였다.
“오랜만?”
따지듯 튀어나온 세웅의 말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그래 봤자 요만큼도 한영을 자극하지 못했다. 한영은 ‘응, 오랜만.’ 하고 종전과 다름없이 단조로운 어조로 세웅에게 답했다. 이에 대꾸 않은 세웅의 시선이 흘깃, 제가 앉은 계단 줄에 서 있는 재환을 향했다. 서로를 한영의 집 앞에서 맞닥뜨렸을 때와 같은, 몹시도 불쾌감이 어린 눈빛이었다.
“씨발….”
뻔히 들리도록 욕을 뇌까린 세웅은 벌떡 일어섰다. 저 새끼 왜 저래, 하는 팀원들의 수군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군을 지나쳐, 재환의 어깨까지 툭 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순간 욱, 하고 치미는 화를 가까스로 꺼트린 재환은 뒤늦게 어깨에서 기타 가방을 벗었다. 다른 멤버들도 제가끔 등에 이고 있던 악기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저 앞 무대에서 막 리허설을 끝낸 팀이 본격적인 연주를 시작했다.
팀당 연주하는 곡은 하나였지만, 여기에 곧바로 심사평이 이어지고 쉬는 시간까지 더해져 예선은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온 더 숨의 네 사람은 그만큼 더 오랫동안 앉아서 대기해야 했다.
기다리기 지겹다, 라는 생각이 슬슬 고개를 들 즈음 재환은 스태프가 나눠 주었던 오늘의 일정표를 꺼냈다. 손가락으로 종이 위를 짚어 가며 앞으로 남은 팀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순서가 올 때까지 웬만하면 자리를 뜨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정도면 담배 한 대, 아니, 몇 대를 피우고 와도 무방할 듯싶었다. 고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럽이 있던 지하에서 올라와 건물 뒷문으로 나오자, 비슷한 처지에 놓인 참가자들이 이미 좁은 골목 곳곳에 서서 뿌연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재환은 그 사이 적당히 빈 곳으로 가 섰다. 담벼락을 등지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데, 대각선 방향에 있던 무리에게로 무심코 시선이 향했다. 세웅과, 그의 팀원들이었다.
저들끼리 무어라 떠드는 듯했던 그들은 재환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행동이 전혀 자연스럽게 비치지 않아, 재환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꼭 몰래 남 욕하다 들킨 새끼들 같았으니까. 특히 기분 나쁘게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세웅이 그래 보였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인 재환은 잠시간 고민에 잠겼다. 지금이라도 가서 멱살을 쥐어 잡고 왜 사람을 그렇게 꼬나보냐 따질지,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갈지. 기실 마음 가는 대로 하자면 진작 놈에게 욕을 날리고도 남았겠지만, 곧 있으면 무대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재환의 충동을 강제로 누그러뜨렸다. 거기에다가, 지금 놈과 드잡이를 벌인다면 꼭 쓸데없는 사심이 섞여 들 것만 같았다. 인정하기도 끔찍하고 진저리 나는, 치졸한 사심이….
재환은 시종 저를 흘끔거리는 세웅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거푸 연기를 내뱉었다. 이윽고 담배가 절반쯤 타들어 갔을 때, 저쪽 멤버 중 하나가 ‘야, 이제 우리 시작하겠다!’를 외쳤다. 서둘러 담배를 끈 무리가 자리를 뜨고, 재환도 급히 마저 피운 담배 끄트머리를 툭툭 손가락으로 튕겼다. 재떨이 삼아 놓인 커다란 사각 깡통에 꽁초를 떨군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저들의 연주가 아주 조금, 재환은 궁금해졌다.
다시 클럽으로 내려가자, 이미 무대에 오른 세웅의 팀은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리허설이래 봤자 진짜 공연이 아니었으므로 사운드를 체크하고 악기 간 볼륨 밸런스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여덟 마디쯤 잠깐 연주를 맞춰 본 팀이 진짜 연주에 앞서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밴드 블루문입니다. 오늘 저희가 연주할 곡은 ‘소낙비’인데요, 비 오는 날 경험한 이별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설명을 들은 재환은 속으로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마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우가 준비한 더 숨의 소개 멘트와 참으로 비슷했으니까. 기분 언짢아지는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음악까지 비슷한 건 아니겠지. 재환이 불길한 예감을 삭이는 사이, 블루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블루문의 노래와 더 숨의 노래에는 제법 차이가 있었다. 일단 저쪽은 건반 없이 기타리스트만 둘이었기 때문에 악기 구성부터가 달랐다. 그러니 곡의 느낌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보컬이 판이했다. 블루문의 보컬은 기교를 많이 넣는 스타일이었는데, 노래 실력은 상당히 출중한 것 같다만 솔직히 말해 재환의 취향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한영의 노래가 훨씬 낫지 않나 싶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을 여실히 증명하는 감상이었다.
그에 반해 세웅의 기타 연주는 썩 마음에 들었다. 내키진 않았으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만 봐서는 꽤나 거친 플레이를 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그는 상당히 섬세하고 정교한 기타를 쳤다. 하긴, 더 숨이 이름이 없던 시절 녹음했던 데모를 들었을 때도 재환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연주, 참 좋다고.
다만 재환은 한영이 어떤 마음으로 세웅의 연주를 보고, 또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필이면 그의 뒷자리에 앉은 탓에 보이는 건 분홍 뒤통수뿐이었다. 뭐, 얼굴을 보았어도 속마음을 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 아무 생각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재환의 머리를 스칠 무렵 블루문의 노래가 끝났다. 멤버들의 헉헉대는 숨소리가 사그라들기도 전 곧바로 심사평이 이어졌다.
“잘 들었습니다. 확실히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네요. 연주도 안정적이고. 그런데 어디서 들어 본 느낌이 좀 나요. 아무래도 레퍼런스로 삼은 브릿 팝 밴드가 있는 것 같은데, 본인들만의 스타일을 더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심사 위원의 평가도 말만 좀 달랐지 내용은 엇비슷했다.
“무대에서 호흡이 잘 맞는 게, 많이 연습한 티가 나네. 내공이 있는 팀인 것 같아요. 근데, 솔직히 말해서 나도 막 신선하다는 느낌은 못 받았어요. 신인 밴드 특유의 재기 발랄함이 더 느껴지면 좋겠어.”
살벌하네…. 재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혼내는 자리가 아니니 표현은 다소 완화되어 있었으나, 가만 들으면 꽤나 직설적인 평들이었다. 물론 앞서 연주한 밴드 중에서는 더 혹독한 평을 받은 팀들도 수두룩했다. 더 숨이 그중 하나가 되지 말란 법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루함에 잊고 있던 긴장이 다시금 쾅쾅 재환의 심장을 두들겼다.
“다다음 팀 더 숨이니까, 무대 대기실에서 대기해 주세요.”
스태프가 전하고 간 말이 긴장을 가속시켰다. 얼굴 근육이 빠근히 굳는 게 느껴졌다. 이를 풀기 위해 재환은 푸르르,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자리 두었던 기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페달 보드 가방을 손에 들었다. 세웅보다는 무대에서 잘해야 해. 블루문보다는 좋은 평을 들어야 해.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이토록 옹졸한 욕심들은 모두 버렸다.
그냥 우리 밴드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너를 위해서 잘하고 싶었다.
“더 숨이라 그랬죠? 노래 잘 들었습니다.”
헉, 헉. 연주는 모두 끝이 났으나, 가빠질 대로 가빠진 숨소리가 스피커에서 흐르는 잔향과 함께 꽤나 오래간 이어졌다. 정수리로 직사하는 무대 조명에, 속눈썹 끝에 맺힌 땀방울에 마이크를 쥔 심사 위원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재환의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잘했어. 이 정도면 잘했어. 할 만큼 했어. 그러니 어떠한 평을 받더라도, 지금의 재환은 안연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이보다 더 나은 연주는 보이기 힘들었을 테니까.
여전히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데, 잠시 말을 멈추었던 심사 위원의 입꼬리가 씩 위로 올라갔다. 그것 하나만은 재환의 눈에 정확히 보였다.
“좋네요.”
안연은 무슨. 종전의 생각, 내지는 다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한마디였다. 혼신의 연주로 안 그래도 가라앉질 못하고 있던 재환의 심장 박동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쿵쿵쿵 치솟았다.
“처음 소개 들었을 때는 앞에 공연했던 블루문 팀이랑 비슷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이 팀은 색깔이 확실한 것 같아요. 지향하는 바도 분명해 보이고. 무엇보다 보컬이 굉장히 매력 있어요. 물론 악기 연주도 탄탄하고요. 근데, 밴드 결성한 지 별로 안 됐죠?”
오늘 멘트를 담당했던 지우가 ‘네, 반년 정도 되었습니다.’ 하고 답했다. 심사 위원은 꼭 무언가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이 벅차올랐던 재환의 가슴에 미미한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살짝 그런 티가 났어요. 뭐,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무대 잘 봤습니다.”
다음으로 마이크를 가져간 심사 위원도 같은 맥락의 평가를 들려주었다. 노래도 좋고, 보컬도 좋고, 연주도 좋았지만, 무대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솔직한 말로, 반박할 거리가 없는 지적이었다.
평이 모두 끝나고, 심사 위원을 향해 감사합니다, 허리를 꾸벅인 더 숨의 네 사람은 악기를 정리해 무대에서 내려왔다. 일단 악평은 그럭저럭 피했다는 생각에 서로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했다는 인사를 전했다. 물론 적당한 충고가 섞여 있어 본선 진출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오늘 2차 예선을 치르는 밴드는 총 서른 팀이었고, 그중 열 팀만이 최종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결코 낮지 않은 경쟁률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할 일이 보다 확실해진 것 같아, 재환은 결과 상관없이 조금 가뿐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합주 더 많이 해야겠다. 공연도 더 늘리고.”
“그러게.”
“응.”
“그래도 우리 이 정도면 존나 선방한 거야! 다 존나 잘했어!”
아예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는 태군의 행동에 나머지 멤버들이 피식 웃었다. 내심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우리 썩 잘했다고.
얼마쯤 더 이어진 태군의 귀여운 자화자찬을 들으며, 예선 일정을 모두 끝낸 네 사람은 이제 집으로 가기 위해 클럽을 나와 지하 복도를 걸었다. 마침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화장실을 나서는 블루문의 멤버들을 지나칠 때였다.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기분 나쁜 목소리가 훅 재환의 귀로 들이꽂혔다.
“호모 새끼.”
넷의 걸음이 일제히 우뚝 멎었다. 같은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바로 등 뒤에 서 있던 블루문의 멤버들이 저들끼리 낄낄거리고 있었다. 한 명은 ‘저 새끼가 세웅이 꼬셨다고?’ 하기도 했다. 정작 그들 사이에서 세웅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노골적인 눈빛으로 한영을 쳐다보는 것이, 누구에게 지껄이는 소리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종전의 망발을 뱉었던 놈이 이번에는 재환을 향해 이죽거렸다.
“뭘 봐. 너도 호모냐?”
툭. 재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져 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게 인내심이었는지, 자제력이었는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이성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어가 되었든,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없었으니까.
재환은 들고 있던 페달 보드 가방을 털썩, 바닥에 떨구었다.
“이 씨발 새끼가.”
누구 하나 말릴 겨를이 없었다. 성큼성큼 놈들과 거리를 좁힌 재환의 한 손이 상대의 멱살을 쥐어 잡고, 다른 손이 주먹을 쥐어 높이 올라갔다. 뒤이어 ‘뻑!’ 하는 둔탁한 소리가 넓지 않은 복도를 갈랐다. 뭐야, 씨발! 재환아! 야! 한순간에 복도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우는 당장 달려가 재차 주먹질하려는 재환의 등을 기타 가방과 함께 끌어안았다. 그 틈에 멱살을 잡힌 놈이 냅다 재환의 얼굴로 주먹을 후려갈겼다. 블루문의 팀원 하나도 서둘러 그를 붙잡고, 아예 한 명은 억지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씨발, 을 외치며 달려온 태군이 재환의 팔을 붙들었으나, 그럴수록 얼굴이 벌게진 재환은 태군과 지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사지를 비틀었다.
“놓으라고, 씨발!”
“서재환! 그만하라고, 좀!”
이 끔찍한 소란에서 몇 발짝 떨어져 선 한영은 새하얀 얼굴로 느리게 눈만 감았다 떴다. 두어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 덩어리로 엉켜 있는 두 팀을 향해 천천히 발을 뗐다.
이윽고 어쩌면 현 사태의 중심에 있을지 모르는 인물이 바로 지척에 다가왔을 때, 낭자하던 욕설과 몸부림이 멎었다. 팀원들보다 한발 늦게 화장실을 나서던 세웅이 이 기가 차는 광경을 보고 쩍 굳었다.
“재환아.”
멤버 둘에게 거의 결박당하다시피 한 재환의 고개가 삐걱삐걱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갔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태군과 지우가 재환의 몸을 옭아맸던 팔의 힘을 풀었다. 한 걸음, 한영이 보다 재환 가까이 다가섰다.
“씨발, 넌….”
“괜찮아.”
어깨를 들썩이며 씨근덕거리던 재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상대의 표정이, 말투가 전부 소름 끼칠 만치 차분했다. 그래서 넌 저딴 소리를 듣고도 가만있냐는 윽박이 터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재환은 더 당황스러운 일을 맞이했다.
“나 괜찮아, 재환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뻗어 온 팔이 어깨와 뒤통수를 꼭 껴안았다.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두 눈이 확장된 재환은 어느새 저를 감싼 품에 안겨 벙긋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상대방을 다그칠 말은 모조리 증발해 버렸고, 머릿속도 마찬가지로 새하얘졌다. 속을 시뻘겋게 태우던 화기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재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한영은 떨리는 어깨를 토닥이며 한차례 더 진심을 속삭였다.
“나 진짜 괜찮아, 재환아.”
어느덧 두 사람 주위를 에워싼 이들은 들러리가 되었다. 그것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어금니를 사리물고 있던 세웅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한 팀이었을 때, 한영이 자신의 기타에 영 만족을 못 하기에 세웅은 열이 뻗쳐 제가 먼저 이별을 고했다. 이후 제 발로 밴드를 나왔으며, 그러다 나중에는 또 제가 먼저 붙잡았다. 하지만 한영은 그의 연락조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로 인한 울분이 오늘 세웅으로 하여금 비겁한 짓을 하게 만들었다. 저 새끼 게이라고. 옛날에 나도 꼬신 적 있다고. 아무 사정도 모르는 지금의 멤버들에게 그리 속살거리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우습게도 그 결과, 세웅은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인 사살당하고 말았다. 한영의 마음은 이제 다른 놈의 차지임을. 주먹을 움킨 세웅의 손이 가늘게 파르르 떨렸다.
품에 안긴 어깨와 가슴팍에 남아 있던 아주 작은 들썩임까지 모두 잠잠해졌을 즈음, 한영은 재환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살며시 시선을 내려 뼈마디가 울긋불긋해진 손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 밑으로 손을 넣었다.
“가자.”
재환의 손을 부드럽게 쥔 한영은 복도 끝에 있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뗐다. 재환은 잠자코 한영에게 이끌려 갔고, 후 한숨을 내쉰 지우도 함께 걸었다. 냉큼 뒤따르던 태군이 별안간 휙, 블루문의 멤버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앞으로 니네 입 조심해라!”
두 손을 들어 대차게 쌍엿을 날려 주자, 안 그래도 당혹감이 가득했던 얼굴들에 더한 황당함이 서렸다. 입술이 터진 한 놈만이 한쪽 볼을 부여잡고 씩씩거렸다.
“씨발, 진짜 호모 밴드야, 뭐야! 좆같게!”
* * *
차를 타고 가는 내도록, 네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늘 지우가 틀어 놓던 8, 90년대 가요도 흐르지 않는 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나마 태군이 한 번씩 ‘미친놈들’ 하고 낮게 욕을 뇌까렸다. 그 미친놈에 저 또한 속한다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뒷좌석에서 멍하니 차창 밖만 내다보았다. 터진 입 안이 아렸다.
어릴 적, 동생인 재희가 오빠는 그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에 한번 된통 당할 거라고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부은 적이 있다. 그녀가 저금통에서 몰래 돈 빼 가는 현장을 발견하고서, 아예 저금통을 박살 냈던 때였을 것이다. 심지어 망치로 때려 부쉈었지, 아마.
후로도 아주 가끔, 재환에게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지각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배 째라고 개지랄 떠는 밴드부원의 기타를 두 동강 낸다든가, 술 먹고 엄마에게 행패 부리는 아빠를 보고 눈이 돌아 밥상을 엎어 버린다든가. 평소에는 잠잠하다가도 한번 정신이 껌뻑 나가면 이렇게 꼭 사고를 쳤다. 그래도, 맹세컨대 사람을 때린 적은 없었다. 이게 무슨 자랑거리겠느냐마는.
하지만 오늘로써 재환은 제가 이성을 잃으면 사람도 충분히 팰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것도 맨정신에, 멤버들이 버젓이 보는 앞에서. 이보다 더 낯부끄러운 일이 또 있을까. 쿵, 차창에 옆머리를 박은 재환은 차마 소리 내어 욕은 뱉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축 빌라들이 모인 동네에 차가 멈춰 서고, ‘오늘 수고했다!’라며 크게도 인사한 태군이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렸다. 이후 15분쯤을 더 달린 차는 한영의 집 근처에서 한 번 더 정차했다. 지우와 차에 단둘이 남기가 조금 껄끄러웠던 재환은 악기 가방을 챙겨 한영과 함께 내렸다. 차 문을 닫으며 지우에게 고생했다는 인사를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사실, 정말 전하고 싶었던 말은 못 보일 꼴을 보여 미안하다는 사과일지도 몰랐다.
두 사람을 내려 주고 다시 출발한 차가 골목 끄트머리를 기점으로 완전히 시야를 벗어났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매끈한 오르막길, 한영과 어정쩡하게 거리를 벌리고 선 재환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제는 그에게도 오늘 고생했다고 인사할 차례였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 같이 가.”
“어?”
적이 놀란 재환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한영은 난데없는 제안의 이유를 들려주는 대신 손가락 끝으로 제 하얀 볼을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멀거니 그 행동을 쳐다보던 재환은 잠시 후 아…, 하며 재킷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냈다.
그럭저럭 훤한 가로등 불빛 아래, 까만 핸드폰 액정에 비춰 본 재환의 왼뺨에는 짧게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그냥 주먹에 맞아 생긴 것 같지는 않고, 얼굴을 갈겼던 손에 반지라도 끼워져 있던 모양이었다. 씨발놈. 재환은 다시금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욕을 삭였다.
“밴드 붙여 줄게.”
뒤늦게 상처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도로 핸드폰을 넣던 중 덥석 손목이 붙잡혔다. 제집에도 반창고 정도는 있겠지만, 혹 없다면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사면 될 테지만 재환은 익숙한 방향으로 이끄는 한영을 잠자코 따라나섰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한영을 뿌리치는 일은 너무도 어려웠기에.
어두컴컴한 집에 들어서서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탁, 탁 불이 켜졌다. 먼저 들어가 있으라는 한영의 말에 따라 방 안으로 발을 디딘 재환은 손에 든 가방과 등에 멘 가방을 차례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이 가뿐해진 상태로 잠깐 우물쭈물하다, 방 가운데 자리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등허리가 푹신하게 잠기는 감각이 까무룩 잠들 것만 같은 안락함을 선사했으나, 묘한 긴장감이 금세 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했다.
반창고를 찾아 온다던 한영은 제법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설마 사러 간 건 아니겠지. 재환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의식중 바지의 무릎 부근에 튀어나온 실밥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시간이나 죽일 겸 볼 때마다 참 색이 강렬하다 싶은 벽 위로 다닥다닥 붙은 그림들을 눈으로 훑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그새 그림 수가 몇 장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진짜 반창고 사러 간 거면 어떡하지, 하는 뒤늦은 걱정과 함께 시선을 정면 방향으로 되돌렸다. 책상 가운데를 차지한 꺼먼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문득 그 왼쪽으로 눈길이 옮겨 갔다. 손가락에 감긴 실밥을 툭, 뜯어낸 재환은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모서리를 두 손으로 짚고 선 재환은 키보드 옆에 놓인 몇 자루의 색연필과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놓인 모양새가 그다지 가지런하지는 않은 것이, 사용하다 그냥 대충 던져 놓은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뒹구는 색연필이라도 한데 모아 정리해 주고 싶었지만, 남의 물건에 멋대로 손을 대기가 조금 꺼려졌다. 그러면서 공책 안은 또 왜 이리 궁금한 걸까.
저도 모르는 새 미간을 움츠린 재환은 손가락 끝으로 톡, 톡 책상을 두드렸다. 그 횟수가 막 열 번을 넘어갔을 즈음, 끝내 못된 호기심이 무릇 지켜야 할 도리를 이기고 말았다. 머뭇거리던 손이 공책을 향하고, 덮여 있던 페이지 중간쯤으로 손가락이 들어갔다. 이윽고 공책을 펼친 재환의 눈에 비를 맞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이 비쳤다. 제가 보지 말아야 할 그림임을 직감한 재환이 퍼뜩 다시 공책을 덮을 때였다.
방문 밖에서 우당탕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재환은 지레 놀라 얼른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얼마 안 있어, 깜짝 놀랄 만큼 큼지막한 구급상자를 든 한영이 방으로 들어왔다. 구급상자의 크기만 보아서는 이쪽이 꼭 대단한 부상이라도 입은 것 같았다. 하나 실상은 그냥 둬도 무방한 아주 작은 상처였다. 혹 흉터가 남는대도 재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반대로 재환의 얼굴에 난 작은 상처 하나 그냥 둘 수 없었던 한영은 서둘러 재환 옆에 앉아 허벅지에 구급상자를 올렸다. 뚜껑을 여는 동시에 계단처럼 층층이 나뉜 칸이 위로 딸려 올라왔다. 그 사이를 뒤적여 반창고 상자를 찾아낸 뒤, 상처에 바르는 연고와 소독약도 꺼냈다. 솜에 소독약을 묻혀 상처 위로 가져가자 재환이 눈을 찡긋 구겼다.
“읏.”
“아파…?”
재환은 아프다는 대답을 꿀꺽 삼켰다. 가까이서 마주한 한영의 얼굴에 아주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상처가 따끔거리기는 했으나, 대신 ‘아니.’ 하고 답하며 구깃구깃했던 표정을 재빨리 풀었다. 후-, 하고 한영이 소독약이 닿았던 자리에 가볍게 바람을 불었다.
다음으로는 검지에 연고를 쭉 짜 상처에 꼼꼼히 발랐다. 기다란 손가락이 번드러운 감촉과 함께 살결을 쓱쓱 문지르고 지날 때마다 양말 안에 숨은 재환의 발가락이 움찔거렸다. 그 와중 한층 가까워진 한영의 얼굴을 자꾸 흘끔흘끔 곁눈질로 살피게 되었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그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이 불필요하게 가슴을 간지럽혔다. 차마 손으로 긁어 해소할 수가 없는 간지럼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늘, 왜 그랬어.”
말끝이 올라가지 않는 물음이 일순 재환을 주춤하게 했다. 정말 한영이 주먹질의 이유를 묻는 건지, 그저 제 한심한 행동을 타박하는 건지 쉽사리 구분 가지 않았다. 어쩌면 양쪽 다일 수도 있었다. 작은 종이 상자에서 둘둘 접힌 반창고 뭉치를 꺼내는 한영을 보던 재환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방금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대뜸 툭 입술 새를 비집고 튀어 나갔다.
“많이 좋아했냐? 세웅이란 놈.”
“응.”
대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빨랐다. 내렸던 시선을 슬쩍 들자 한영은 덤덤한 표정으로 반창고를 감싼 종이 껍질 모서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 장처럼 붙은 종이 사이가 잘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영의 손에서 반창고를 가져온 재환은 아예 종이 끄트머리를 북, 찢어 다시 건넸다.
“근데 이젠 아냐.”
찢은 틈으로 반창고를 꺼내던 한영이 덧붙인 말에 재환은 또다시 멈칫 굳었다. 재차 아래로 내려간 눈이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즈음, 접착 면을 덮었던 얇은 종이가 양옆으로 벌어지며 재환의 상처 위로 반창고가 붙었다.
“다 됐어.”
뜯어낸 종이를 손안에서 돌돌 뭉치며 한영이 말했다. 아…, 응. 굼뜨게 대답한 재환은 뺨으로 손을 가져가 반창고가 붙은 자리를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아까는 따끔거리던 그곳에, 이제는 화끈화끈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무심코 한영에게 멍청한 질문을 던져 버린 것이 하도 창피하여 그런 듯했다. 그 모습이 상대에게 작은 오해를 일으켰다.
“많이 아파?”
“어? 아니, 괜찮아. 안 아파.”
“응.”
잠시 후, 연고와 소독약이 제자리로 돌아간 구급상자 뚜껑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물끄러미 이를 쳐다보던 재환은 문득 지척에서 보내지는 시선을 감지했다. 상자 손잡이를 쥔 한영이 반창고를 붙일 때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재환은 눈을 어디에도 편히 둘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조금만 아래로 내리뜨면 한영의 붉디붉은 입술이 담길 터고, 그렇다고 내처 눈길을 피해 버리는 건 심히 어색한 행동이었다. 너를 미친 듯이 의식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재환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재환아.”
“…어?”
“집에 데려다줘?”
한순간 맥이 탁 풀렸다. 저도 모르게 짤막한 숨을 토한 재환은 멍한 얼굴로 한영을 쳐다보았다. 재환의 답을 기다리는 한영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실그러졌다.
“차고에 차 있어.”
그제야 재환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본인의 집까지는 굳이 차를 타고 갈 거리도 아니었으며, 뺨을 조금 다친 것뿐이지 두 다리는 매우 멀쩡했다. 어쨌거나, 한영의 말인즉슨 그만 가 보라는 뜻이었다. 어렵지 않게 이를 눈치챈 재환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걸으면 금방이야. 아무튼, 반창고 고맙다.”
아냐, 대답하며 한영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관까지 배웅을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재환은 구태여 그럴 필요 없다고 한영을 말리지 않았다. 반창고를 붙여 주겠다며 집으로 이끄는 손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처럼.
재환의 짐작대로 한영은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타일 바닥에 한 발씩 운동화 앞코를 툭툭 두드린 재환은 허리 숙여 페달 보드 가방의 손잡이를 들어 올렸다.
“갈게. 오늘 고생했어.”
“재환이 너도.”
따로 잠금을 풀 필요가 없는 문은 손잡이를 슬쩍 뒤로 민 것만으로 철컥 열렸다. 그 밖으로 재환이 막 걸음을 뗐을 때였다. 닫히는 문을 손으로 막은 한영이 다급히 재환을 불러 세웠다.
“재환아…!”
재환은 휙 뒤를 돌았다. 목구멍을 뚫고 꿀꺽, 침이 넘어갔다. 문 모서리를 잡고 선 한영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는 순간이 거짓말처럼 길게 느껴졌다.
혹 네가 나를 붙잡는다면. 가지 말라고 조른다면.
그래서 ‘단 한 번’을 없던 일로 하자고 한다면, 그러면 나는….
“잘 가.”
대답할 틈도 없이 하얀 손이 붙잡고 있던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이는 철문을 앞에 둔 재환은 한 번, 두 번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제가 잠시나마 무슨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품은 건지, 실로 믿을 수 없었다. 그게 너무 기가 막혀 이토록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거였다. 하, 하고 몇 박자나 늦게 황당한 숨을 터뜨린 재환은 더디게 발을 틀었다.
터벅터벅 정원 가운데로 난 돌길을 걸어 대문을 나섰다. 올 때는 오르막길이던 길이 이제는 내리막길이 되었지만, 어째서인지 좀처럼 걸음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뒤에서 빵빵 울리는 경적에 퍼뜩 고개가 돌아갔다. 헤드라이트를 훤히 밝힌 차는 기억 속 누군가의 빨간 스포츠카가 아닌 보통의 승용차였다.
그새를 못 참은 차가 썩 비키라는 듯 재차 시끄러운 경적을 울렸다. 아니, 누가 귀먹은 줄 아나. 짜증을 짓씹은 재환은 마지못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기 무섭게 차는 위협적인 엔진음을 내며 휙 재환을 지나쳐 갔다.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잠깐 노려보던 재환은 어깨 바깥쪽으로 흘러내린 기타 가방의 끈을 고쳐 멨다. 그러고서 다시 내딛기 시작하는 걸음에 부쩍 힘을 실었다.
예기치 못한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오늘 2차 예선에서 선보인 더 숨의 무대는 나쁘지 않았다. 심사 위원에게 나름 좋은 평도 들었고, 나중 발표될 결과에 상관없이 저나 멤버들도 꽤나 만족했다. 의기소침한 꼴로 집에 걸어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한데, 제법 씩씩하게 걸으면서도 재환은 자꾸 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혹 가을비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러면 꼭, 제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워 줄 누군가가 나타날 것 같아서.
바보 같은 망상이었다.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꿈같은 일이었다.
* * *
“헉, 헉….”
슬리퍼 차림으로 골목을 뛰어 내려온 한영은 길 중간에 멈춰 서서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한참을 온 것 같은데, 어디에서도 기타를 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닫히는 문을 활짝 열고 그 너머에 서 있던 이를 끌어안지 못한 후회가 눈가가 축축해지는 애달픔을 피워 올렸다.
다시 허리를 편 한영은 복잡한 터널처럼 시야에서 굽이치는 새카만 골목을 응시했다. 영영 끝나지 않을 듯한 길에서 눈을 거둬 휙 뒤를 돌아보았으나, 여전히 바라는 상대의 모습은 잡히지 않았다. 좌우를 살펴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생각난 듯 한영은 뒤늦게서야 주섬주섬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있을 줄 알았던 핸드폰이 없었다. 도대체 언제 꺼내 놓았는지 기억도 안 났다. 차라리 이대로 집까지 찾아갈까, 하는 생각이 슬픔에 여울진 머릿속을 스쳤다. 상대를 겁먹게 할 것이 두려워 차마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계획이었다.
“재환아….”
안타까이 대답 없는 부름을 흘린 한영은 주저앉듯 다리를 쪼그렸다. 접힌 무릎 사이로 쭉 팔을 떨어트리고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껌껌한 어둠과 노오란 가로등 불빛이 한데 섞인 골목. 길가에 동그랗게 쌓아 둔 낙엽 뭉치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졌다. 누군가에게 줄 수 없는 한영의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