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11/29)

2장

* * *

늦더위를 장식하듯, 나무도 몇 없는 동네에 아침 댓바람부터 매미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그 시끄러운 소리가 필터도 없이 들이치니, 재환은 잠을 더 자려야 잘 수가 없었다.

잔뜩 찌푸린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자 기상 알람을 맞춰 놓은 시간까지 아직 10분도 더 남아 있었다. 그 정도 덜 잔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겠다만, 그래도 재환은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밤 이제껏 녹음한 트랙들을 손보다 새벽 늦게나 잠이 드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어차피 믹싱은 따로 전문가에게 맡길 예정이었으나, 할 수 있는 만큼 정리를 해 두는 편이 여러모로 마음 놓였다. 이런 것도 남 시키면 다 돈이었다.

어쨌거나 일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태군과 지우의 결과물이 나쁘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니지. 녹음 초반 태군이 헤맸던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엄지 두 개를 치켜올려도 모자람이 없었다. 꼭 서로 얼굴을 마주한 것처럼 찰떡같이 어우러져 연주하는 두 사람을 보며 어찌나 뿌듯하던지. 역시나 밴드는 밴드였다. 그런 밴드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재환 자신의 복이었다.

매미로 인한 짜증을 금세 기분 좋은 기억으로 뒤덮은 재환은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씻고, 밥 먹고, 옷 챙겨 입고, 마지막으로 건조대 앞에 가 섰다. 한 손에는 빈 쇼핑백을 쥔 채 옷걸이에 걸려 축 늘어진 검정 셔츠를 잠시간 노려보았다.

카페에서 매일 같이 입는 옷이건만, 재환은 이 옷을 보면 가끔가다 그 위로 코를 박고 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집으로 가져와 깨끗이 빨았다.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혹 물이 빠질세라 두 손으로 벅벅 비벼 가며 열심히 빨았다. 어제도, 그냥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가지런히 갠 셔츠를 쇼핑백에 넣는 것으로 비로소 채비를 마친 재환은 현관에 서서 운동화를 한 짝씩 꿰어 신었다. 때 탄 타일 바닥에 툭툭 앞코를 찍은 뒤 문밖으로 나섰다.

매미 덕에 조금은 일찍 일어난 여파로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었다. 그런 김에 집 앞에서 느긋하게 담배나 한 대 피웠다. 여전히 맴맴 매미 소리가 쏟아지는 하늘로 길게 연기를 내뱉다가, 직직 슬리퍼를 끌며 건물을 나오는 고시생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편의점에서 함께 술을 마신 날 이후 처음 보는 고시생은 그새 살이 더 빠진 것 같았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나’라는 걱정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즉석 밥이니 죽이니 잔뜩 받아 버렸으니 새삼 고맙고 미안하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옆에 서서 담배를 꺼내는 고시생에게 재환은 늦어진 인사를 건넸다.

“주신 거 잘 먹었어요.”

“아, 예. 집에 있는 게 그런 것밖에 없어서.”

칙칙 소리를 내며 몇 번이나 라이터 휠이 돌아가도 고시생의 담배에는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보아하니 라이터에 기름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재환은 담뱃갑에 같이 넣었던 라이터를 얼른 꺼내 고시생에게 내밀었다. 라이터를 받아 든 고시생이 고개를 꾸벅였다.

“아, 근데 죽은 일부러 사신 것 같던데.”

“죽이요?”

돌려받은 라이터를 다시 하얀 담배 사이에 밀어 넣던 재환은 멈칫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고시생의 얼굴을 보자 미미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아직은 정체를 확실히 할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그…, 죽도 주고 가신 거 아니었어요? 편의점에서 사서….”

“나 아닌데.”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는 고시생에게 더 물어보지 못하고 재환은 꾹 입을 다물었다. 자연히 ‘그럼 누구지?’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 삐죽 솟아났으나, 이상하게 답을 찾기가 저어되었다. 몇 번 입지도 않은 셔츠를 깔끔 떨며 빨았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짧아진 담배 끝에 매달린 재를 툭툭 튕긴 재환은 옆에 놓인 깡통으로 휙 꽁초를 던졌다. 잠깐 바닥에 내려놓았던 쇼핑백을 집어 들며 퀭한 눈으로 연기를 뻐끔거리는 고시생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전 알바가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예. 라이터 잘 썼습니다.”

좁은 골목을 따라 걸음을 떼며 재환은 문득 집에 있는 죽을 떠올려 보았다. 밥 차리기 귀찮을 때 나름 요긴하게 먹었으니 이제 남은 게 몇 없을 터였다. 왜 먹었을까. 별로 배도 부르지 않는 거. 해 봤자 늦은 후회였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아이스코코아가 나란히 담긴 종이 캐리어를 쥔 재환은 한영의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일전 홈 리코딩 방식으로 기타 녹음을 마치고, 키보드는 가상 악기를 썼기 때문에 인제 남은 것은 한영의 노래뿐이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한영과 함께 집에서 보컬을 녹음하기로 했다. 기타도 그랬지만, 워낙 좋은 장비들을 들여 굳이 보컬까지 스튜디오에 갈 필요가 없었다. 공짜 녹음을 기회 삼아 또 엔지니어를 찾아가기가 조금 염치없다는 생각이 든 탓도 있었다.

동네 가리지 않고 맴맴 귀가 찢어지게 울어 젖히는 매미 소리를 뒤로한 재환은 반짝반짝한 타일이 깔린 현관으로 들어섰다. 내부에서 은은히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이 땀에 젖은 피부를 금세 시원히 식혔다. 이제는 완전히 제 것이 된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고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지나 한영의 방이 가까워질수록 재환은 여전히 시끄러운 집 밖 매미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훨씬 부드럽고, 달콤하며, 맑은 소리였다. 턱 낮은 문지방을 넘은 재환은 방만큼이나 알록달록한 피아노 앞에 등을 보이고 앉은 남자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무의식중 자박자박 바닥을 밟는 발소리를 살그머니 죽였다.

제법 넓은 어깨 너머로 보이는 기다란 손가락이 매끈한 건반 위를 춤추듯 사뿐사뿐 오갔다. 그로 인해 퍼지는 선율이 오르막길을 걷느라 조금 빨라졌던 재환의 박동을 점차 차분히 가라앉혔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칼 주위로 은연히 달콤한 향이 퍼졌다.

이토록 완벽한 풍경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뭐해 재환은 선뜻 왔다는 티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대신 오늘 카페에서 일하는 중에도 몇 번이나 떠올렸던 멍청한 질문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 네가 놓고 간 거야?

하나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물음이었다. 돌아오는 답이 무엇이든 분명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었다. 부러 구실을 만들어 실망하기도, 삿된 기대를 품기도 싫었다.

딱딱한 종이가 살에 배기도록 캐리어를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갔을 즈음, 가볍게 5도 화음을 짚으며 연주를 끝낸 상대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창으로 비껴 들어온 햇살에 반사된 갈색 눈동자가 반짝, 작은 빛을 틔웠다.

“왔어?”

“아, 응.”

재환은 들고 있던 캐리어를 쑥 앞으로 내밀었다. 마셔, 라거나 아이스코코아 사 왔어, 같은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는지 한영은 눈을 데구루루 굴려 캐리어에 담긴 음료와 재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행동이 안 그래도 조금쯤 복잡한 기분이었던 재환으로 하여금 괜히 불퉁한 목소리를 내게끔 했다.

“하나 네 거.”

퍽 멋없이 말한 재환은 툭, 소리가 나게 한영이 앉은 피아노 의자 빈자리에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냉큼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꺼내 플라스틱 뚜껑에 빨대를 꽂았다. 한 모금 크게 빨아올리자 입 안으로 흘러든 찬물이 몸에 미약하게 남아 있던 더위를 씻어 냈다. 그제야 한영도 캐리어에서 코코아를 꺼냈다.

“새로 쓴 노래야?”

몇 번 더 빨대를 빨며 책상 앞으로 간 재환은 털썩 의자에 앉으며 한영에게 물었다. 십자로 난 뚜껑 구멍에 콕콕 빨대를 찌르던 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은 엉덩이를 붙인 의자를 살짝살짝 좌우로 돌리며 ‘좋던데?’ 하고 짧은 감상을 전했다. 말투는 꽤나 무심했으나 안에 담긴 마음은 당연히 진심이었다. 다만 조금 궁금한 게 있었다.

“이번 건 제목이 뭔데?”

한영이 새 노래를 만들어 올 때마다 제목을 듣는 것은 재환에게 있어 나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물론 지난번에는 내리 세 번이나 이어진 ‘혐오’ 시리즈 때문에 적잖이 열이 뻗치기도 했지만, 설마 이번까지 그러지는 않을 터였다. 재환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I Feel You.”

“아….”

딱히 근거가 없음에도 재환은 왠지 제목 속 ‘You’가 지칭하는 이가 누구일지 짐작이 갈 듯했다. 아마 저도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인물이지 싶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괜히 사람을 떠보는 의뭉스러운 남자였음은 똑똑히 기억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맞다. 지우가 새로 우리 계정에 올린 동영상 봤어?”

“아니.”

고개를 젓는 한영을 보며 재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톡톡 액정을 두드렸다. 페이지 가장 위에 있는 동영상을 재생시킨 후 자리에서 일어나 한영에게 다가갔다. 하얀 손에 핸드폰을 쥐여 준 후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난번 공연 영상이야. 지우가 보기 좋게 편집해서 올렸어.”

“응.”

아래에서 올려다본 한영의 옅은 색 눈동자에 작은 사각 화면이 뿜어내는 푸르스름한 빛이 고였다. 양반다리 한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재환은 핸드폰을 보는 한영을 잠시간 말없이 응시했다. 작은 구멍 몇 개로 이루어진 스피커에서 나오는 다소 조악한 음질의 노래 따라 발끝을 까딱거리기도 했다. 영상이 모두 끝났을 때, 한영이 재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어때? 꽤 괜찮게 찍혔지?”

돌려받은 핸드폰 화면을 별 의미 없이 쓱쓱 아래로 내리며 묻자 한영이 ‘응, 그런 것 같아.’ 하고 답했다. 그러나 재환이 흘긋 본 표정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어 정말 괜찮다는 건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저는 내심 좋아서 몇 번이나 돌려 봤었는데 말이지. 그랬던 걸 생각하니 재환은 방금 영상에 대해 더 말을 붙이고 싶어졌다.

“이거 찍어 준 게 나랑 같이 카페에서 일하는 친구거든. 전에 인사했지? 희연이라고. 미디어 무슨 전공이라 그랬는데, 그래서 그런가 흔들리지도 않고 잘 찍었어. 나중에 고맙다고 밥이라도 한번 사 줘야겠다.”

“재환아.”

그사이 ‘좋아요’ 숫자가 꽤 늘어난 게시글들을 보고 눈썹을 씰룩이던 재환이 ‘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등을 돌린 한영은 피아노 뚜껑을 덮고 있었다.

“녹음, 빨리 하자.”

아, 응…. 어쩐지 커다란 벽처럼 느껴지는 한영의 등을 보며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칼 같은 모습이 왜 서운하게 다가오는지 영 모를 일이었다.

* * *

역시나 오늘은 매미가 문제였다. 이중으로 된 창문을 꼭꼭 닫아도 마이크로 수음되는 시끄러운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녹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재환은 머리를 싸매고 푹푹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그때 한영이 묘안을 제시했다.

“합주실 가서 녹음하면 안 돼? 거기 지하잖아.”

그리하여 재환과 한영은 부랴부랴 장비를 챙겨 지하로 내려갔다. 여기라면 밖에서 쓸데없는 소음이 새어 들어올 일도 없었고, 방음 설비가 되어 있으니 소리가 불필요하게 울리거나 튕기지도 않았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스스로를 나무라며 재환은 부지런히 갖고 온 장비를 세팅했다.

이왕 합주실에서 녹음하기로 한 거, 녹음 부스처럼 한영만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재환은 문밖 복도에 있기로 했다. 따라서 안에는 마이크와 한영이 쓸 헤드폰만 두었다. 이제 두 사람을 연결해 주는 것은 손톱만큼 벌어진 문틈으로 빠져나온 몇 가닥의 케이블이었다.

두꺼운 유리문 너머로 마이크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한영을 확인한 재환은 그 옆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바닥에 놓인 노트북을 앞으로 끌고 와 저도 머리에 헤드폰을 썼다. 오디오 인터페이스의 토크 백 버튼을 누른 뒤 입을 뗐다.

“내 목소리 잘 들려?”

- 응.

담담히 대답하는 목소리가 귀에 밀착한 헤드폰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이미 질릴 정도로 들은 목소리건만,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서인지 공연히 그 음성이 낯설게 다가왔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 부드러운 상아색을 띤 맞은편 벽을 응시하며 재환은 다시 확인차 물음을 건넸다.

“안에 덥지는 않고? 노래하다 더우면 잠깐 쉬고 에어컨 켜도 돼.”

- 괜찮아.

그러고 보니 더위보다는 추위를 더 탄다고 했던가. 어쩌다 닿았던 한영의 피부가 늘 서늘했던 것을 무심코 떠올린 재환은 슬그머니 미간에 힘을 주었다. 지금은 이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서둘러 녹음을 시작해야 했다.

“일단 목도 풀 겸 한번 끝까지 쭉 불러 보자. 그러고 나서 부분 부분 끊어서 녹음하면 돼.”

- 알았어.

“그럼 시작할게.”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하아….’ 하고 나지막이 숨을 내쉬는 소리가 두꺼운 이어패드로 감싸인 귓구멍 안으로 흘러들었다. 이 또한 충분히 익숙해진 소리인데, 재환은 순간 팔뚝에 돋아나는 오싹한 감각을 막지 못했다. 솜털이 쭈뼛 선 듯한 살을 급히 쓱쓱 문지르고서 시퀀서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는 노트북으로 손을 뻗었다. 톡, 자판의 ‘R’ 키를 눌렀다.

똑, 똑, 똑, 똑. 네 번의 메트로놈 박자가 흐르고, 들을 때마다 심장을 자르르 울리는 피아노 화음과 함께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 소리를 따라 물결치듯 크고 작은 파형이 그려지는 화면 속 트랙을 멀거니 쳐다보던 재환은 꾹 눈을 감고 딱딱한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아까처럼 엉뚱한 상념에 잠기는 대신 오로지 한영의 노래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목 상태는 괜찮은지, 음정이 불안하지는 않은지, 혹 발음이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 지금은 그런 것들이 중요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재환은 머릿속에 열거한 사항들을 스르륵 잊고 말았다. 그냥 이 노래가, 한영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러니 자꾸만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놀랍고, 놀랍고, 또 조금은 설레는….

정신 차려라, 서재환.

재환은 바닥에 늘어뜨린 팔을 들어 올려 짝, 소리가 나게 손바닥으로 양 뺨을 내리쳤다. 함께 합주실 안에 있었더라면 생각도 못 할 행동이었다. 이 소리까지 전부 녹음되었을 터이므로. 하니 이렇게 밖에 나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멍청한 표정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것은 덤이었다.

내처 고개까지 몇 번 휙휙 젓고서 미리 뽑아 뒀던 가사지를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래도 나름 디렉터의 입장에 놓인지라 한영에게 지시할 부분이 있으면 표시를 해 두려고 했는데, 딱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뭐, 늘 그랬듯 한영의 노래에 흠잡을 구석이 없는 까닭이었다. 이미 오래전 자신이 객관성을 잃은 탓인가 싶기도 했지만, 정말로 저 녀석은 노래를 잘 불렀다. 얼마나 바이브레이션을 잘하고, 얼마나 음이 높이 올라가느냐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한영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정서를 살살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음색인가. 역시 음색이 좋아서 그런 건가. 라는 조금쯤 허술한 결론을 내릴 즈음 노래가 끝났다. 등을 세워 자세를 고쳐 앉은 재환은 스페이스 키를 눌러 녹음을 중지시켰다. 꼭 제가 노래를 부른 것처럼 흠흠 목을 가다듬은 뒤 문 너머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악기 소리는 너무 크지 않아? 네 목소리는 잘 들리고?”

- 응, 다 괜찮아.

“보컬에 리버브 살짝 걸었는데. 더 넣을까?”

- 아냐. 지금 좋아.

‘그럼 일단 들려줄게.’ 하고서 재환은 방금 녹음한 트랙을 재생시켰다. 미리 쓸데없는 생각을 실컷 한 덕인지 다행히 이번에는 저 또한 보다 집중해서 한영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미세하게 혀가 굴러가는 듯한 발음이 나는 곳도 몇 군데 찾아 가사 위에 체크했다. 그런 자잘한 부분 말고는 사실 이대로 음원을 만들어도 될 것 같았다. 라이브 느낌도 살릴 겸. 물론 잠깐 스쳐 가는 생각이었다.

“이제는 1절 벌스만 갈 거야.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중간에 멈춰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

- 알았어.

괜찮아, 좋아, 알았어. 어째서인지 한영은 오늘따라 유독 고분고분했다. 재환 입장에서야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 나름이긴 하겠다만, 녹음할 때가 되면 신경이 있는 대로 날카로워지는 보컬도 분명 존재했다. 콕 집어 이전 밴드의 누구라고는 말 못 하겠다. 음이 안 올라간다며 지레 버럭 성을 내질 않나, 목 상태는 생각도 안 하고 곧 죽어도 담배는 피워야겠다며 고집부리질 않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은 시작부터 모든 게 썩 순조로운 셈이었다. 단, 자신만 한영의 노래를 듣다가 허튼 생각에 빠지지 않으면 될 터다.

- 재환아.

“응?”

트랙에 녹음 구간을 지정하던 재환은 마이크가 달린 오디오 인터페이스 가까이 상체를 기울이며 한영에게 답했다. 혹 그가 요구하는 바가 있다면 바로바로 들어주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 노래…, 괜찮아?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는 소리가 샜다. 당연히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저, 한영도 저런 걱정을 하는 줄 미처 몰랐다. 입매를 부드럽게 말아 올린 재환은 기꺼이 솔직한 대답을 내어 주었다.

“유한영. 네 노래 항상 좋아. 그냥 방금처럼만 불러.”

좀 더 귀 기울이고 있었으나 딱히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흘긋 눈을 옆으로 돌려 한 번 문 쪽을 쳐다본 재환은 녹음 준비가 끝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보컬 트랙에 아주 살짝만 리버브를 추가한 뒤, 헤드폰을 고쳐 썼다. 이제 진짜 녹음을 시작할 때였다.

“그럼, 시작한다?”

- 응.

입가에 걸린 잔잔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재환은 리코딩의 R 자가 새겨진 자판의 키를 가볍게 두드렸다.

재환은 내심 감탄하며 눈 깜짝할 새 녹음 전반이 끝나 버린 트랙을 바라보았다. 혹 오늘 내로 끝나지 않으면 몇 번은 더 한영의 집에 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필요가 없는 계획이었다. 벌써부터 이 트랙으로 믹싱을 끝내고, 마스터링까지 받은 듯한 두근거림이 마구 재환의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영락없는 설레발이었다.

“일단 잠깐 기다려 봐. 쫙 정리해서 끝까지 들려줄게. 들어 보고, 다시 부르고 싶은 부분 있으면 거기만 녹음하자.”

- 그래.

절로 신이 나 녹음된 한영의 노래를 콧노래로 따라 부르며 부지런히 트랙을 편집했다. 기실 끊어 간 부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손볼 거리가 얼마 없었다. 따로 녹음한 구간 사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크로스 페이드를 넣는 정도였다.

- 재환아.

트랙을 따라 휙휙 눈을 굴리던 재환은 꽤나 들뜬 투로 ‘응?’ 하며 대답했다. 머릿속에서는 이 보컬에 어떤 리버브를 넣는 게 어울릴지 즐거운 고민이 펼쳐지고 있었다. 촉촉한 빗소리 같은 곡 분위기를 생각하면 플레이트 리버브처럼 차가운 질감보다는 홀 리버브 계열이 좋을 것 같았다. 아니지. 바로 귓가에서 부르는 것처럼 들리게 아예 룸 리버브를 쓰는 쪽이 나을 수도 있겠다. 제가 믹싱을 할 것도 아닌데 이미 생각은 한참을 앞서가고 있었다.

- 그, 동영상 찍어 준 여자애.

“아. 희연이?”

내친김에 재환은 얼추 편집이 끝난 트랙에 방금 생각했던 리버브들을 차례로 걸어 보기로 했다. 씩, 입술을 얇게 펴며 시퀀서 프로그램의 리버브 플러그인을 열었다.

- 너랑… 사귀는 거야?

리버브를 선택하려 노트북 트랙패드 위에서 바지런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줄곧 위를 향해 있던 입꼬리가 슬며시 아래로 떨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살짝 벌어진 문틈을 들여다보았으나, 그 사이로는 합주실 벽만 보였다. 재환은 손가락과 함께 굳어 있던 혀를 더디게 움직였다.

“…뭐?”

- 친해 보여서.

비어지는 헛숨을 막으려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영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당황스러웠다. 아르바이트와 밴드가 일상의 전부인 제게 어디 연애할 구석이 있어 보인 건지. 그런 낭만적인 일은 사치로 넘긴 지 오래였다. 아직도 한영은 그걸 몰랐다.

“친하다고 다 사귀냐. 아냐.”

애써 태연한 투로 대꾸한 재환은 원래 하던 일로 서둘러 정신을 집중했다. 빨리 적당한 리버브를 찾아 보컬 트랙에 넣고서 한영에게 들려줄 생각이었다. 그다음 필요한 부분만 다시 녹음하면 오늘 녹음은 끝이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순간 혓바늘처럼 비죽 돋아난 물음을 내리누르지 못했다.

“넌.”

- 어…?

“지난번에 공연 왔던 남자. 사귀는 사람이야?”

‘둘이 잘 어울리더라’ 같은 사족은 덧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해도 빈말이었을 터다. 정말로 둘 사이가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한영이 뜬금없이 던져 온 물음을 자연스럽게 되돌려 줬을 뿐이다. 이런 대화쯤 주고받을 정도로는 친해졌을 테니까.

이윽고 잠시간의 침묵 후, 제법 단호한 대답이 헤드폰 너머에서 건너왔다.

- 사귀는 거 아냐.

‘그래?’ 하고 재환은 짤막하게 답했다. 서로 물어본 바에 대해 아니라고 했으니, 여기서 더 대화가 이어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재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 섹스만 해. 섹스만 하는 사이야.

판판하던 재환의 양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번에야말로 허, 하고 헛숨이 샜다. 아무리 사이가 가깝다 한들, 서로 해도 될 얘기가 있고 아닌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 왜 제가 저런 걸 알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재환은 그러한 마음을 부러 감추지 않았다. 일종의 무시였다.

“됐고, 처음부터 노래 다시 들려줄….”

그때였다.

- 난 너랑 더 섹스하고 싶어.

쿵. 별안간 재환의 가슴팍 안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막 자판의 스페이스 키를 누르려던 손이 파들파들 떨리다 주먹을 쥐었다. 뒤이어 머리는 하얘지고 눈앞은 벌겋게 물드는 괴란한 감각이 재환을 덮쳤다. 도무지 한영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너랑, 섹스, 하고, 싶어. 길지도 않은 문장이 조각조각 쪼개져 멍해진 뇌 속을 굴러다니는 가운데,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시처럼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 나랑 섹스하면 안 돼…?

시끄러워.

- 나 섹스 잘해. 나랑 한 번만 하자, 재환아. 아니면…, 한 번만 빨게 해 주면 안 돼? 나 잘 빨아….

시끄럽다고.

- 너 좋아하는 거 아냐. 그냥, 너랑 섹스하고 싶어서 그래. 진짜 한 번이면 돼….

시끄럽다고, 이 개새끼야!

목 조르듯 귀를 조이던 헤드폰이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닥을 나뒹굴었다. 씩씩 끓어오르는 숨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열이 오른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고 솟구치는 화를 억눌렀으나, 좀처럼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인내심이 싹둑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머리든 속이든 어디 한군데는 펑 하고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아마 한 번만 더 섹스하자는 개소리를 들으면, 안 좋아한다는 뻔뻔한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 나 너 진짜 안 좋아해, 재환아….

나무 바닥에 뱀처럼 구불구불 늘어진 전선 끝, 헤드폰 스피커에서 작게 새어 나온 소리가 한 글자 빠짐없이 재환의 귀로 기어들었다. 삽시에 차갑게 굳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길게 쓸어내린 재환은 무릎으로 바닥을 딛고 천천히 일어섰다. 몸을 틀어 있는 힘을 다해 문을 잡아당기기까지 일말의 고민도 필요치 않았다.

덩그러니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공간으로 들어서자마자 더운 공기가 와락 온몸에 퍼부어졌다. 진짜 이 안이 더운 건지, 머리끝까지 뻗친 화기가 그렇게 느끼게끔 만든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재환은 푹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는 한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 우뚝 발을 멈추고서 염치없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보다 더 싸늘할 수 없는 목소리가 비어졌다.

“일어나.”

“…재환아.”

“일어나라고, 새끼야!”

말귀를 못 알아 처먹고 주위가 발갛게 물든 눈만 끔뻑이는 한영의 옷깃을 움켜쥐어 냅다 일으켜 세웠다. 균형 잡을 틈도 주지 않고 쾅, 벽으로 밀어붙이자 긴 다리에 걸린 의자가 와당탕 야단스럽게도 넘어졌다. 하지만 지금 그따위 일에 신경 쏟을 정신일랑 없던 재환은 그저 씨근덕거리며 멱살 잡은 상대를 노려보았다. 한 뼘 거리에 있는 밝은색 눈동자에 비친 당황이 더 속을 뒤집어 놓았다.

“너….”

저 멀끔한 얼굴에 당장 주먹질하고픈 마음을 겨우 참고 달달 떨리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감당하기 버거운 분노가 꽉 목구멍을 조였다. 단어가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화가 지나치면 도리어 이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구깃구깃 주름지도록 옷깃을 틀어쥔 손아귀에서 힘을 뺄 수 없었다.

“재, 환아….”

헤드폰을 통해 들을 때는 그리 달콤하고 농롱하던 목소리가 지금만큼은 끔찍이도 듣기 싫었다. 은근슬쩍 팔뚝에 와 닿는 손을 온 힘을 다해 뜯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저 순연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이리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자니 재환은 부릅뜬 눈으로 속절없이 열이 몰렸다. 토악질이 일었다.

“네가, 씨발….”

어떻게 나한테 그래.

또 병신처럼 간신히 틔운 말을 끝맺지 못한 재환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손에 잡힌 멱살을 놓지 못한 채 뚝 고개를 떨구었다. 원망과 분심이 뒤번진 숨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진짜로, 유한영이 너무 야속했다.

정말이지 재환은 여태껏 마음을 다잡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지금도 지척에서 팔랑거리는 저 분홍 머리칼을 떠올리지 않으려, 그로 인해 퍼지는 향기를 의식하지 않으려 참 많이 노력했다. 어쩌면 처음 키스했던 그날부터 멋대로 커져 버린 건지 모를 이 감정을 어떻게든 무시했다. 같은 사내새끼한테 끌리는 게 무서워서, 그러다 혹 과거처럼 밴드에서 버림받을까 겁나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이유로 한영이 제게 눈치 없이 다가오려는 순간, 이따금 보이는 애달픈 표정 모두 모른 체했다. 날 안 좋아한다는 빤한 거짓말을 몇 번이나 들어도 번번이 인내심을 발휘했다. 밴드를 잃게 될 상황에 부나방처럼 뛰어드느니 차라리 이렇게 비겁한 놈이 되는 게 나았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지나가는 바람이었다고 여기게 될 날이 올 줄 알았다. 물론 가끔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널 좋아하면 같이 밴드 할 수 없냐던 한영의 물음에 동의했던 것을 곱씹었다. 그 대답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버텼는데, 저 새끼는 하나도 몰랐다. 정말 좆도 몰랐다. 그러니 널 안 좋아하지만 섹스는 하고 싶다는, 사람 미치게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테다. 이번만큼은 또 외로워서 그러는 거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길 수 없었다.

“재환아, 미안해. 난, 그냥….”

팔을 따라 슬금슬금 올라온 손이 손목을 감싸 쥐었다. 이미 한발 늦은 사과가 퍽 애처로운 목소리를 타고 흘렀다. 이를 듣는 재환의 입가에 비식비식 쓰디쓴 웃음이 피었다. 조금씩 힘이 풀려 이제는 매달린 것처럼 한영의 옷깃을 쥐고 있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난 그냥, 사실….”

진저리 쳐지도록 절절한 목소리가 더 이상은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 귓구멍 안에서 온갖 난잡한 이명이 뒤섞였다. 딜레이가 걸린 듯 끊이지 않고 몰아치는 빗소리,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하모닉스 음, 아득한 잔향의 숨소리, I see you, I see you, I see you….

“네가 너무….”

제발 좀 닥쳐!

흡, 삼켜진 숨소리와 함께 한 사람은 죽어도 듣기 싫었고, 또 한 사람은 죽을 만큼 용기를 내어 꺼냈던 말이 뚝 끊겼다. 동시에 재환의 손목을 배회하던 하얀 손가락이 뻣뻣이 펴졌다. 젖기 직전이던 눈이 거대하게 뜨이며, 모래색 눈동자에 박힌 동공이 쪼그라들었다. 그 위로 비치는 것은 가까이 닿은 검정 머리칼과, 질끈 감긴 눈꺼풀, 촘촘히 돋아난 속눈썹의 떨림이었다. 한영이 제 입술에 전해지는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을 느낀 것은 그다음이었다.

결국 재환에게 전하려던 말을 모두 잊은 한영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렸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맞닿은 입술 사이로 다소 성마르게 혀가 얽히고 숨이 오갔다. 서로의 목과 허리에 팔이 감겼다.

두 사람의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단, 이번에는 한영이 먼저가 아니었다.

* * *

혀와 타액이 엉기는 축축한 소리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서로 위치를 바꿔 가며 몇 번이나 벽에 등을 부딪쳤는지, 들러붙은 입술이 떨어진 적이 있기나 한 건지 누구 하나 알지 못했다. 그저 목덜미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등허리를 더듬으며, 이리저리 고개를 틀어 숨결을 주고받기에 급급했다. 낭만이나 애틋함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온몸을 주체 못 할 열기에 휩싸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느새 또 한영을 벽으로 밀어붙인 재환은 하늘거리는 분홍 머리칼 안으로 손을 감아 넣었다. 한영 또한 손바닥으로 재환의 뒷목을 감싸 바짝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고개가 홱 비틀어지며 뾰족한 코끝이 서로의 뺨을 찔렀다. 보다 깊이 맞물린 입술 안쪽에서 갈급하게 두 개의 혀가 뒤엉켰다. 그럴수록 너 나 할 것 없이 밭은 숨이 들끓었다. 특히 꿈에서도 이 감촉을 잊지 못해 매일 밤을 설쳐야 했던 한영은 더욱 그랬다.

그때, 얼얼할 정도로 아랫입술을 쭉 빨아들인 재환의 입술이 단숨에 매몰차게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한영은 화난 건지, 슬픈 건지 좀처럼 구분할 수 없는 얼굴을 맞닥뜨렸다. 자연히 그곳을 향해 손이 뻗어 나갔지만, 뺨에 닿기도 전 툭 하고 손목이 내쳐졌다.

“재환아….”

반쯤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의 한영을 보며 재환은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 자리에서 더 입술을 부딪치고, 서로의 몸을 만지고, 아예 옷까지 훌훌 벗어 던지고픈 충동을 모두 잠재웠다. 당장에도 떡하니 옆자리를 버티고 있는 앰프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드럼과, 등 뒤를 노려보는 새빨간 노드까지 그럴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여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장소인지를 생각해서라도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맞았다. 그럼에도 아직 속을 꺼멓게 태운 울분을 완전히 꺼뜨리지 못해 재환은 태어나 누구에게도 꺼내 본 적 없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하자, 섹스.”

“…뭐?”

“나랑 섹스하고 싶다며. 그러자고.”

한영의 얼굴이 한층 벙벙하게 풀어졌다. 적잖이 놀란 듯한 낯이었다. 그러든 말든 재환은 한번 내뱉은 말을 도로 물릴 생각이 없었다. 대신 뒤로 한 발 물러서서 한영과의 거리를 벌렸다. 뜨겁게 입 맞춘 적 없다는 양 엄지로 쓱 입술을 문질렀다. 그새 구겨질 대로 구겨진 티셔츠 자락을 툭툭 손으로 털고서, 허리 숙여 옆에 나동그라져 있던 의자를 다시 세웠다. 내처 흐트러진 머리까지 쓱쓱 손가락으로 빗은 후 아직도 꼼짝 않고 있는 한영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대신, 싱글 내면. 그때 해.”

그리고 이것이, 한영과 저 사이에 그을 수 있는 재환의 마지막 경계선이었다.

숨 막히도록 좁고 컴컴한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스탠드 불만 켠 재환은 털썩 매트리스 위로 쓰러졌다. 이미 오래전 쿠션감이 죽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똑딱똑딱 시계 초침 이동하는 소리, 위잉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따위가 거침없이 귓속에서 증폭되었다. 그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씹, 짧게 욕을 짓씹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유난히 길었던 샤워 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화장실을 나온 재환은 대충 옷을 껴입고 냉장고 앞으로 갔다. 한 손으로 문 모서리를 붙잡고 쪼그려 앉아 희미하게 불 켜진 냉장 칸 안을 살폈다. 어차피 안에 있는 것은 거기서 거기였지만, 제법 고민이 길었다.

딱 하나 남은 맥주 캔과 끽해야 두어 번 먹었을까 말까 한 더치커피를 번갈아 쳐다보던 재환은 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커피를 꺼냈다. 흡사 와인 병 같은 모양새의 병에 담긴 커피를 머그컵 가득 꼴꼴 따라 물도 타지 않고 책상으로 가져갔다. 당연히 한 모금 맛본 것만으로 눈썹 사이에 죽 고랑이 팼다. 하지만 오늘 밤은 할 일이 많았고, 노트북 앞에서 꾸벅꾸벅 졸지 않기 위해서는 커피의 힘이 좀 필요했다. 아니면, 자꾸 엉뚱한 곳으로 빠지려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서라도….

유독 더디게 느껴지는 부팅 끝에 드디어 노트북 모니터 위로 바탕 화면이 떴다. 그새 쓰디쓴 커피를 몇 모금 더 홀짝인 재환은 다리 한 짝을 허벅지에 걸치고서 시퀀서 프로그램을 켰다. 마우스를 부지런히 움직여 오늘 한영이 녹음한 소스를 실행 중인 프로그램 안으로 찬찬히 불러왔다. 로딩이 끝난 후 심드렁한 표정으로 트랙을 재생시켰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반주 없이 흐른 노래가 끝났다. 이번에는 이전 녹음한 악기 트랙도 모두 켜서 다시 프로그램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곡이 끝나면 또 자판의 스페이스 키를 누르고, 끝나면 또 눌렀다가 종국에는 그냥 반복 재생을 설정해 버렸다.

그렇게 열 번도 넘게 노래를 들었을 즈음, 재환은 의자 아래로 늘어졌던 팔을 들어 한참 만에 다시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주먹 쥔 손에 옆머리를 괴고 재생과 함께 커서가 멈춘 화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음악이 흐르던 자리를 대신 메꾸는 선풍기 소리가 꽤나 요란했다. 켜자마자 강풍으로 높인 게 원인이었다.

저걸 끄고 다시 노래를 들어 봐야 하는데, 좀체 선풍기로 손이든 발이든 뻗어 나가지 않았다. 호기롭게 노트북 앞에 앉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솔직한 마음으로, 재환은 지금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냅다 매트리스로 가 누워 버리기에는 정리가 덜 끝난 트랙이 화면 안에서 보란 듯 버티고 있었다. 거기다 연거푸 들이켠 카페인 때문에 잠이 잘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잠들지 못할 이유가 꼭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의자 등받이 너머로 휙 머리를 젖힌 재환은 얼룩덜룩 물 샌 자국과 스탠드 불빛 그림자가 엉킨 천장으로 의미 없는 시선을 보냈다. 바닥을 디딘 발끝에 힘을 주고 슬쩍슬쩍 의자를 좌우로 돌리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헤아렸다.

일단 중요한 녹음은 얼추 끝냈고, 인제 남은 것은 코러스 녹음 정도였다. 그다음에는 녹음한 소스를 한데 모아 믹싱을 맡겨야 했다. 그러면 일단 큰 산은 넘는 셈이었다. 믹싱 기사는 태군이 알아보겠다 호언했으니 곧 찾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믹싱하고, 마스터링하고, 음원도 내면….

싱글 내면. 그때 해.

천장이 뚫어져라 긴 한숨을 쏘아 올린 재환은 픽 앞으로 고꾸라졌다. 넓지도 않은 책상 빈자리에 이마를 묻고 엎어지자 한순간 마음이 끝 간 데 없이 복잡해졌다. 하아, 침음하며 딱딱한 책상 위로 쿵쿵 이마를 박았지만, 제 욱하는 성질머리를 탓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잘 나가다 한 번씩 홱 꼭지가 돌아 꼭 사고를 쳐 버리는 게 문제였다. 언젠가는 이런 큰일이 터질 줄 알았다.

무의미한 박치기에 애먼 이마만 벌게졌을 무렵, 재환은 고개를 틀어 딱딱한 나무 표면에 뺨을 댔다. 또 흐리멍덩한 표정이 되어 살짝 부은 듯한 입술을 살살 매만져 보았다. 그러다 뭐 하냐, 속으로 중얼거리며 쯧 혀를 찼다. 때마침 귀 바로 옆에 있던 핸드폰이 낭랑하게도 울어 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누구의 전화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 야! 유한영이랑 녹음 잘함?

손만 꾸물꾸물 움직여 스피커 통화 모드를 켜기 무섭게 벨 소리보다 배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 오랜만에 학교 동기랑 한잔한다더니, 전화를 건 태군은 꽤나 기분이 들뜬 듯했다. 다만 비슷한 기세로 대답할 여력이 되지 못하는 재환은 ‘뭐, 대충….’ 하고 얼버무렸다. 녹음 자체는 별문제 없이 끝났으니 영 거짓은 아니었다.

- 아, 딴 게 아니라. 오늘 만난 놈이 스튜디오에서 어시 하고 있거든? 잘 말하면 우리 믹싱 거기서 싸게 해 줄 수 있다던데? 바로 시작도 가능하댄다!

책상에 옆얼굴을 딱 붙이고 있던 재환은 머리를 들쳐 포갠 팔 위에 턱을 괬다. 안 그래도 슬슬 믹싱할 사람을 정해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마침 반가운 소식이었다. 게다가 비용까지 저렴히 해 주겠다니, 더할 나위 없었다. 친구에게 보일 리 없는 표정만 조금 심드렁할 뿐이었다.

“잘됐네. 샘플 좀 들어 볼 수 있나?”

- 엉. 유명한 밴드 노래도 작업한 데라서, 인터넷서 찾음 다 나올걸?

태군에게 참고할 음악 리스트를 보내 달라 얘기하는 것을 끝으로 통화는 금방 마무리되었다. 다시 손가락만 움직여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재환은 한동안 책상에 엎드린 채 멍하니 있었다. 얼마 안 가 꺼졌던 핸드폰 화면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태군의 메시지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거기 적혀 있을 곡도 들어 봐야 하고, 오늘 녹음한 한영의 노래도 튠 정도는 조정해 놔야 하고, 유통사랑 연락도 해야 하고….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한마디로, 이렇게 뭉그적거리고 있을 새가 없었다.

두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짚은 재환은 마치 팔 굽혀 펴기 하듯 가슴과 이두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켰다. 정신 좀 차리자는 의미로 찰싹, 양 볼을 가볍게 때린 후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참기 힘든 쓴맛에 얼굴이 있는 대로 구깃구깃해졌지만, 덕분에 머릿속은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왠지, 그런 기분이었다. 스트레칭 삼아 목도 크게 빙 돌리고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화면을 켜자마자 보이는 문장의 주인공은 태군이 아니었다.

[잘 자]

지금껏 상대에게서 한 번 받아 본 적 없는 종류의 메시지가 재환의 미간을 확 좁아 들게 했다. 답장 한 글자 입력하질 못하고 엄지가 불안하게 화면 위를 배회했다. 도대체 한영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낸 건지, 감히 짐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짐작할 거리가 애초 없는 건지도 몰랐다. 이 또한 자신의 책임일 테니까.

고민의 고민 끝, 자근자근 아랫입술을 깨물던 재환은 겨우 몇 글자를 적은 뒤 어렵사리 전송 버튼을 눌렀다.

‘미치겠네.’ 하며 자책한 재환이 아예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 놓았을 때, 어두운 방 홀로 침대에 옹크려 누워 있던 한영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불 들어온 핸드폰을 냉큼 집어 눈앞으로 가져가자 밝은색 눈동자에 액정 모양대로 작은 사각 불빛이 고였다. 동시에 도톰한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너도.]

‘응’이라고 서둘러 재환에게 답장을 적어 보냈다. 하지만, 오늘 밤 한영은 잘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 * *

“음….”

“흠….”

주인을 닮아 알록달록 갖가지 색채로 도배된 방, 책상 위 커다란 모니터 스피커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네 사람은 약속한 듯 연신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먼저 말문을 여는 이는 없었다. 서로 은근슬쩍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노래만 잘 만들고 잘 부르는 밴드의 리더 대신 재환이 총대를 멨다.

“어때? 일단 1차 믹싱본이긴 한데. 각자 피드백 있으면 정리해서 보내 줘야 돼.”

“그럼, 한 번 더 들어 볼까?”

자리가 마땅치 않아 책상 앞까지 끌고 온 피아노 의자에 앉은 지우가 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응.’ 하고 대답한 재환은 어젯밤 메일로 왔던 ‘I See You_mix_1.wav’라는 이름의 파일을 다시 처음부터 재생했다. 약 3분 50여 초가 지나고, 어김없이 넷 사이에 미적지근한 침묵이 흘렀다. 아마 얼추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좀… 깔끔하지?”

마땅히 생각나는 문장이 없어 멤버들에게 이리 묻는 것이 재환으로선 최선이었다. 기실 귀로 느껴지는 감상을 말로 딱 정리해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말재주가 없는 재환에게는 더더욱 어려웠다.

“깔끔이랄까, 너무 무난한데? 딱히 말할 거리가 없어서 더 애매하네.”

‘응, 응.’ 하며 지우의 말에 동의하는 듯 함께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던 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재환이 말하고 싶었던 바도 같을지 몰랐다. 분명 크게 거슬리거나 이상한 곳은 없는데, 그렇다고 ‘이거다!’ 싶지도 않았다. 물론 1차 믹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과거 했던 음원 작업을 떠올렸을 때, 이러다 몇 번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왔다. 단, 이번에는 어떻게 피드백을 줘야 할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미 집에서 몇 번을 듣고, 또 이 자리에서 다시 들으며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이 정도면 썩 잘된 믹싱이었다. 보컬도 잘 살아 있고, 악기 밸런스도 잘 맞았으며, 어디 과하거나 모자란 부분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재환은 머리통을 덮고 있던 볼캡을 벗고 쓱쓱 마른세수했다. 그 덕에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를 아예 이마 위로 넘기고 모자를 도로 썼다. 그때, 까닭 없이 오른쪽 귓바퀴로 뜨끈히 열이 몰리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아니나 다를까, 흘끔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말간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헙, 하고 짧게 숨을 들이켠 재환은 애써 태연한 척 바로 옆자리에서 빤한 눈빛을 보내오는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유한영 넌? 어떤 것 같아?”

“네가 좋아.”

막을 틈도 없이 붉은 입술 새로 튀어나온 말이 삽시에 주변 공기를 써느렇게 얼렸다. 덩달아 재환도 흠칫 얼어붙었다. 지우는 눈이, 태군은 입이 커다래졌다. 정작 이 당황스러운 사태의 범인만이 여상한 낯을 하고 있었다.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거리던 재환은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여 겨우 목소리를 냈다.

“뭔, 소리야.”

정확히 말하자면 ‘뭔 개소리야’였다. 하나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에는 반대편 있는 두 사람이 아무래도 걸렸다. 일전 합주실에서 같은 팀 멤버와 해서는 안 될 짓을 벌였다는 죄책감도 아직 완전히 씻어 내질 못했는데, 태군과 지우 앞에서 구태여 괴이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저 분홍 머리도 제발 같은 생각이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지나친 바람이었다.

“네가 좋다고.”

하릴없이 모자챙 아래 반절쯤 가려져 있던 재환의 얼굴 위로 슬슬 금이 갔다. 진심으로 저 녀석이 미친 건가 싶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재환은 이런 게 바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거구나, 라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대뜸 책상으로 쭉 팔을 뻗어 몇 번 마우스를 휙휙 움직인 한영이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 믹싱을 맡기기 전 재환이 만들었던 가믹스 파일이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절반은 재미 삼아, 절반은 유통사에 보낼 겸 만든 음원이었다. 이런 식으로 믹싱해 주십사, 믹싱 기사에게 참고용으로 들려주기 위함도 있었다. 그건 그거고.

“난 이걸로 하고 싶어.”

“그게 무슨 소린데. 말을 좀 제대로 해 봐, 유한영.”

여전히 선뜻 알아듣지 못할 한영의 말에 재환은 슬쩍 눈을 찌푸렸다. 일단 자신이 엉뚱한 오해를 했음은 확실한데, 그럼에도 한영이 뭘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건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데, 조금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빤한 눈빛으로 재환을 쳐다보던 한영이 별안간 폭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답답하다는 티가 확연한 행동이었다. 적반하장이란 말을 실감한 재환이 눈 밑 살을 파르르 떠는 사이, 한영은 아예 의자 바퀴를 직 끌어 노트북 앞으로 갔다. 마우스를 딸깍여 믹싱 기사에게서 온 파일의 후렴 부분을 재생하고, 바로 이어서 재환의 가믹스 파일에서 같은 부분을 재생했다. 일단 나머지 사람은 한영이 들려주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

이윽고, 재생을 멈춘 한영이 빙그르르 의자를 돌려 나란히 앉아 있던 태군, 지우, 재환을 마주 보았다.

“아무리 들어도 난 재환이가 만든 게 더 좋아. 진짜 비 내리는 것 같아. 뭐가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는데…, 훨씬 촉촉한 느낌이야. 마음에 들어. 그니까, 그냥 재환이 네가 믹싱하면 안 돼?”

세 사람을 따라 차례로 움직이던 시선이 말꼬리가 올라가는 물음과 함께 재환에게 고정되었다. 한영이 이렇게 얘기를 길게 하는 것도, 조곤조곤 잘하는 것도 들은 적이 없던 재환은 일순 대꾸를 하지 못하고 무지렁이처럼 눈만 껌뻑껌뻑 감았다 떴다. 한마디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응?’ 하고 살짝 고개를 기울인 한영이 재차 의사를 물어 왔을 때, 서둘러 모자챙을 푹 누른 재환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연히 모두 ‘왜 저래?’ 하는 눈으로 저를 올려 보고 있겠지만, 일단은 여기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러고 다시 얘기하자.”

마음이 급해 이 방에 버젓이 화장실이 딸려 있다는 사실도 순간 잊은 재환은 다짜고짜 방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가 쫓아올세라 복도를 달리고, 우당탕 계단을 밟아 1층까지 내려와서야 핸드레일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잠시 후 짚었던 곳에서 손을 떼자, 나무 재질로 된 표면에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새 축축이 손바닥에 배어난 땀 탓이었다.

손날로 쓱쓱 땀자국을 문질러 지운 재환은 다소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1층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모자를 벗고 거울 앞에 서니 예상대로 참담한 낯빛을 한 놈이 딱 그에 어울리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로 병신이냐, 소리가 비어지는 몰골이었다. 도대체 한영의 말 어디에 얼굴을 붉힐 거리가 있었던 건지. 그냥 내가 한 믹싱이 좋다고 해 준 것뿐인데. 여하간, 오늘처럼 모자 덕을 톡톡히 본 날도 없을 듯했다.

피부가 저릿저릿해지도록 한참이나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재환은 대충 물기를 닦은 후 화장실을 나섰다. 곧바로 한영의 방으로 돌아가기가 조금 뭐한 마음이 들어, 턱 끝에 매달린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저벅저벅 부엌으로 향했다.

널따란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한가득 들이친 부엌은 따로 불을 켤 필요 없이 훤했다. 덥기보다는 따사롭게 느껴지는 공간을 가로질러 냉장고 앞으로 간 재환은 문을 열고 생수병을 꺼냈다. 넘치기 직전까지 컵에 찬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신 뒤, 비슷한 양을 한 번 더 마셨다. 이제야 누구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르륵 번진 열이 비로소 완전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덩달아 여전히 들뛰던 심박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줄 알았다.

다시 생수병을 냉장고에 넣고 뒤돈 순간, 재환은 그야말로 심장이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어찔함을 경험했다. 억,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부엌에 흘러든 빛살 가운데 서 있는 상대를 적잖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사람을 이리 놀라게 하는 법이 어딨냐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그 뜻이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다.

“놀랐어?”

“…어.”

“나도 물 마시려고.”

아, 응. 대답하며 재환은 재게 걸음을 놀려 한영을 지나쳤다. 문제의 날 이후 이렇게 단둘이 된 적이 없어 아무래도 서먹함이 컸다. ‘잘 자’라는 영 애매한 메시지에 답장한 게 서로 주고받은 연락의 마지막이라 더욱 그랬다. 그대로 막 부엌을 벗어나려던 찰나, 퍼뜩 할 말이 생각난 재환은 발을 멈추고서 휙 뒤를 돌았다. 냉장고 앞에 선 한영은 무슨 영문인지 문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한영.”

“어?”

기다렸다는 듯 휙 고개를 돌린 한영과 눈이 마주쳤지만, 재환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러면, 정말 손쓸 수도 없는 비겁한 놈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한 입으로 두말하는 새끼로 낙인찍힐 것만 같아서. 결국 ‘지난번 그거, 없었던 일로 하자’ 한마디를 꺼내지 못한 재환은 생각에도 없던 엉뚱한 문장을 내뱉고 말았다.

“믹싱, 내가 한 거 좋게 들어 줘서 고맙다고.”

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얼른 발을 틀어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래 봤자 목적지는 계단만 올라가면 나올 한영의 방이었다. 그러나 뜻했던 바와 달리, 재환은 몇 발짝 떼지도 못해 걸음이 저지되고 말았다.

“유한영…!”

재환은 당황하여 난데없이 제 손목을 붙잡아 이끄는 한영을 다급히 불렀다. 혹 이 목소리가 2층까지 들릴지 모른다 걱정할 새가 없었다. 곧이어 빛이 들지 않는 복도 구석에서 한영을 마주 보고 서게 됐을 때, 재환의 당황은 한층 커졌다. 한영의 손이 꼬옥 양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왜 그러는….”

…데. 마지막 한 글자가 맞닿은 입술 사이로 쏙 사라졌다.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 재환은 쪽, 소리를 내며 단숨에 입술을 떨어뜨린 한영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일순 돌처럼 굳은 머리가 판단을 내려 주지 않았다. 하여 병신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 눈만 끄먹거렸다.

“네가 한 게 제일 좋아.”

이번에는 상대가 재환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훌쩍 자리를 떴다. 물 마시러 부엌에 왔다던 그가 향하는 곳은 복도 끝,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여전히 탁 풀어진 표정을 수습하지 못한 재환은 자신이 애써 그은 경계선을 가볍게 넘나든 남자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팔랑팔랑 산란스럽게도 흔들리는 분홍 머리칼이 시야를 온통 벚꽃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봄은 지나간 지 한참인데 말이다.

* * *

어느 순간부터 한영에게 ‘아니’라고 말하는 재환의 사고 기능은 물렁물렁 무뎌진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또 ‘응’이라는 대답을 내놓았을 리 없다. 하지만 재환이 네가 믹싱하는 거 아니면 싫다고 한영이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결국 비슷한 답을 들려줬었나 보다. 단, 그때는 울분을 참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면, 이번에는 속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모자란 실력으로나마 열 내서 믹싱을 하면 이전 밴드에서는 늘 조금쯤 힘 빠지는 반응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한테 맡길 거 왜 사서 고생하느냐, 그 시간에 기타 연습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럴 거면 엔지니어를 해라…. 그래도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당시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영락없이 비꼬는 말이었다.

그걸 누군가가 좋다 해 주었으니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들뜨는 게 당연지사였다. 굳이 그렇게 얼굴까지 벌겋게 물들일 필요가 있었나 싶기는 하다만. 단지 문제는 재환 자신의 실력이 실제 발매할 응원을 믹싱할 정도가 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아니면 인터넷으로 취미 삼아 조금씩 공부한 수준이야 어차피 뻔했다. 아마추어라는 이름표를 붙이기도 민망한 레벨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재환에게 지우가 시원스레 웃는 낯으로 묘수인지 악수인지 모를 방법을 제시했다.

‘그럼 현철 아저씨한테 배워.’

현철이라 함은, 지난번 감사하게도 공짜로 드럼 녹음을 해 주었던 엔지니어 선생님의 존함이었다. 진짜 전문가에게 믹싱을 배운다니, 재환으로선 생각만 해도 심장 쿵쾅거리는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기회는 돈 주고도 얻기 힘들었다. 하나 쉽사리 그러하겠다는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최소한의 염치는 있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건 좀 민폐 같은데….’ 하고 어물거리자, 지우가 또다시 가뿐한 투로 어쩐지 미심쩍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빵 사 가. 아저씨 빵 엄청 좋아해.’

그리하여 급작스럽게 잡힌 믹싱 수업 날, 재환은 녹음실로 향하기 전 태혁의 빵집부터 들르게 되었다. 여기 빵은 빵 맛을 잘 모르는 제 입에도 맛있으니, 어지간하면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기실, 달리 아는 빵집도 없었다.

“오늘은 기타가 없네?”

이제는 제법 눈에 익은 빵들을 쟁반에 한가득 담아 카운터로 가져가자 태혁이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을 보며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자세히 말하기에는 사연이 좀 길어, 재환은 ‘밴드 일로 누구 좀 만나려구요.’라고 쑥스럽게 답했다. 태혁은 더 깊이 묻지 않고 ‘아아.’ 하고 말았다. 뒤이어 봉투에 빵을 담는 태혁에게 체크 카드를 내밀던 재환은 카드가 그의 손에 닿기 전 도로 휙 뒤로 물렸다. 태혁의 눈이 둥그레졌다.

“뭐 더 사려고?”

“그게 아니라…. 오늘은 할인 안 해 주셔도 돼요!”

크게 뜬 눈을 끔뻑이던 태혁이 별안간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태혁이 이리 웃는 걸 본 적이 없던 재환은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알았어, 알았어.”

금방 웃음을 멈춘 태혁은 카운터 밖으로 쭉 팔을 뻗어 재환의 손에 있던 카드를 가져갔다. 알았다는 대답에 나름 안심하고 있는데, 막을 새도 없이 빵을 다 담은 봉투 안으로 카운터에 진열돼 있던 작은 쿠키들이 한 움큼 떨어졌다. 어어, 하며 재환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반면에 태혁은 씩 입꼬리를 올렸다.

“할인이 안 되면, 서비스라도 줘야지.”

낭패였다. 태혁이 자꾸 이러면 재환은 정말 다음부터 이 가게에 못 올 것 같았다. 태혁은 재환의 그런 마음까지 훤히 들여다보았다.

“다음에 또 빵 사러 와. 알았지?”

“아, 네…. 매번 감사합니다.”

하릴없이 묵직한 빵 봉투와 계산 끝난 카드를 받아 들며 재환은 고개를 꾸벅였다. 제가 걱정할 거리는 아니다만, 이렇게 장사해서 남기는 할까 싶었다.

“어클락에서 일하는 다른 친구들 와도 이 정도는 다 서비스로 줘.”

덧붙여진 태혁의 말에 걱정이 한층 커졌다. 주제넘은 속마음을 애써 감춘 재환은 빵 봉투를 꼬옥 품에 안았다. 갓 구운 빵의 훈기가 얇은 종이 너머로 느껴졌다. 가는 동안 식지 않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응.’ 하며 가볍게 손을 흔드는 태혁에게 재환은 재차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그대로 가게를 나서려다, 꼭대기에 작은 종이 달린 문을 몇 발짝 앞두고 발이 멈추었다. 다시 휙 뒤를 돌아 성큼성큼 카운터로 걸어갔다.

“왜? 진짜 뭐 더 사게?”

눈썹을 위로 들추며 묻는 태혁에게 재환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고 싶은 얘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질문이 있었지만 이런 걸 물어도 되는지 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쿠키 몇 개를 서비스로 날름 받는 것보다 훨씬 몰염치한 일일지 몰랐다. 하니 그…, 어…, 하는 답답한 소리만 반복되었다.

끝내 재환을 보는 태혁의 눈빛에 걱정이 스밀 즈음, 딸랑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리며 가게 문이 열렸다. 태혁이 가게에 들어온 손님에게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하는 동시에 재환의 입에서는 살았다는 안도의 숨이 비어졌다. 제가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었다. 빵 봉투를 보다 꽉 끌어안은 재환은 냅다 푹 허리를 숙였다.

“빵 잘 먹겠습니다…!”

빵을 고르기 위해 쟁반과 집게를 집어 드는 손님을 지나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보폭을 넓혀 가게의 전면 창 앞을 얼른 벗어났다. 고작 몇 걸음의 짧은 거리를 달음질친 것뿐인데, 숨이 다 헉헉 차올랐다. 가방과 티셔츠에 덮인 등 위로는 땀까지 흘렀다. 결국 생각한 말은 한마디 꺼내지도 못했다.

맨정신에 물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딜 가야 게이들을 만날 수 있겠느냐고. 유한영 같은.

“안녕하세요.”

“어, 왔어?”

신명 나는 트로트 가락이 울려 퍼지는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자 콘솔 데스크 앞에 앉아 있던 엔지니어, 다시 말해 현철이 빙그르르 의자를 돌렸다. 예외 없이 그의 입에서는 희뿌연 담배 연기가 뻐끔뻐끔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구면이긴 해도 단둘이 보는 건 처음인지라 어색함을 감추기 어려웠던 재환은 일단 빵 봉투부터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 든 현철이 ‘음?’ 하며 비죽 아래턱을 내밀었다.

“빵이에요. 드세요.”

현철이 두툼한 손가락으로 봉투를 벌리자 안에서 고소한 빵 냄새가 폴폴 새어 나왔다. 몇 번 코를 킁킁거린 현철의 입꼬리가 이내 씩 위로 올라갔다. 꺼슬꺼슬 수염이 돋아난 입 주변으로 제법 멋스러운 팔자 주름이 팼다.

“맛있겠네.”

얼마 지나지 않아, 재환은 빵을 사 가라는 지우의 조언을 듣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의 가감 없이, 정말로 현철은 빵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듯했다. 벌써 몇 개나 딱지 모양으로 접혀 데스크 위에 놓인 빵 비닐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귀신같이 단맛의 빵만 골라 먹던 태군과 달리, 그는 종류도 가리지 않았다. 중년 남성이 이렇게 빵을 잘 먹는 모습을 좀체 본 적이 없던 재환은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그, 옛날에 내가 시다바리 하던 녹음실에서 맨날 밥으로 빵만 줬었거든. 근데 그때야 이런 고급 빵 파는 데가 어디 있었나. 곰보빵, 앙꼬빵 이딴 것만 줄창 먹었지. 아주 내가 이를 득득 갈았어. 돈 많이 벌면 내 돈으로 더 비싼 빵 사 먹겠다고.”

게다가 빵 먹으며 기분이 좋아진 현철은 지난번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친근한 태도를 보였다. 한 업계에서 오래 종사한 사람이 으레 풍기는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 때문에, 일전 재환은 그에게 선뜻 말을 붙이지 못했다. 하여 오늘도 바짝 긴장한 상태로 스튜디오에 왔는데, 빵이 이렇게 제 역할을 톡톡히 해 줄 줄은 미처 몰랐다. 다만….

“그러다 일본으로 유학 가서 눈 뒤집히는 줄 알았지. 세상에, 거기는 무슨 빵 천국이야. 케키는 또 얼마나 맛있고. 근데 요샌 우리나라 빵이 더 맛있어. 참, 이게 어느 나라 빵이라고?”

“아, 독일이요.”

“내가 빵 참 많이 먹어 봤는데, 독일 빵은 또 처음이네. 무식해서 거기는 소시지만 맛있는 줄 알았지.”

“저도 이 가게에서 처음 먹어 봤어요.”

이러다 진짜 빵 얘기로 시간이 다 갈 것만 같은 흉한 예감이 슬슬 재환을 불안하게 했다. 그렇다고 당분간 스승으로 모셔야 될 분의 말을 모르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재환은 모자란 말주변을 최대한 동원해 어떻게든 대화를 쫓아가려 애썼다. 그럴수록 초조한 마음이 커졌다. 그러다 마침내, 얼마간 더 이어진 빵 얘기 끝에 참으로 반가운 말이 들려왔다.

“아, 그래서 밴드 노래를 자기가 믹싱해 보겠다고? 파일은 가져왔고?”

‘네!’ 하고 냉큼 답한 재환은 서둘러 가방에서 USB 메모리를 꺼냈다. 안에는 지금까지 작업한 파일이 담겨 있었다. 이를 데스크톱에 연결한 현철이 몇 번 마우스 버튼을 딸깍딸깍 눌렀다. 이윽고 좌우에 자리 잡은 커다란 투웨이 스피커에서 재환이 믹싱한 더 숨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래가 재생되는 내내, 현철은 시종 팔짱을 낀 채로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 옆에 앉은 재환도 나오는 소리에 집중을 해 보려 했으나, 사뭇 그러기가 어려웠다. 집에서 듣던 것과는 볼륨이나 음압부터가 달라 시작부터 주눅 든 탓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제 작업물이 더 형편없이 들리는 탓도 있었다. 덩달아 솟구치는 긴장감으로 입 안이 다 바짝바짝 말라 왔다. 이곳에 오기 전, 어떤 악평을 듣더라도 담담히 배우는 자세로 받아들이자고 각오했던 게 무색해졌다.

저도 모르게 달달 다리를 떠는 사이, 길게만 느껴지던 노래가 어느덧 끝이 났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재환은 눈알만 조심조심 굴려 현철의 눈치를 살폈다. 어찌나 마음이 떨리는지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몸 온갖 군데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굳게 닫혀 있던 현철의 입이 쓱 벌어질 때는 흡, 숨까지 참게 되었다.

“괜찮네.”

순간 재환은 그 자리에서 두 팔 번쩍 들어 만세를 외칠 뻔했다. 그 정도로 현철이 툭 내놓은 평은 짧디짧을지언정 재환에게 말 못 할 안도감을 안겨 주었다. 물론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근데, 집에 스피커가 별로 안 좋은가 봐?”

“예?”

“노이즈 같은 게 완전히 정리되질 않았어.”

‘아….’ 하며 재환은 현철의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기실 본인도 어느 정도 걱정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자고로 믹싱을 제대로 하려면 오디오 인터페이스는 물론이고 스피커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것이 갖춰져야 하는데, 재환에게 그런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실력을 지적받는 것보다 조금 더 뼈아팠다.

“뭐, 그건 그거고. 리버브 팍팍 넣어서 아주 축축하게 믹싱했네.”

“아, 네…!”

다만 덧붙여진 말에는 다시금 표정이 환해졌다. 제 의도를 상대가 알아주니 이리 기쁠 데가 없었다. 작업하며 오로지 추적추적 비 내리는 풍경만 머릿속에 떠올렸었으니까. ‘I See You’라는 제목처럼 딴에 빗속에서 누군가를 바라보는 느낌을 내 보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과하다. 넣을 건 넣고, 뺄 건 빼야 소리가 안 뭉개지지.”

라는 말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평가는 꽤 한참 동안 이어졌다. 때로는 어색한 부분을 직접 손보고, 또 때로는 비교 음원을 들려주는 현철 옆에서 재환은 가져온 노트에 부지런히 지적 사항을 적어 내려갔다. 중간중간 궁금증이 생기면 주저 없이 질문도 던졌다. 딱 열강 하는 스승과 수업에 집중한 학생의 모습이었다. 시답잖은 빵 얘기를 주고받을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사이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없이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보컬에 병렬로 컴프레서 넣는 법을 일러 준 것을 끝으로 ‘좀 쉬자!’를 외친 현철은 두 손을 완전히 데스크에서 떨어뜨렸다. 재환도 쥐고 있던 펜을 놓았다. 두 사람의 표정은 비슷한 수준으로 진이 빠져 있었다.

“학생이 열심이니까 나까지 쉴 틈이 없었네. 담배 피우는 것도 까먹었어.”

결린 어깨를 몇 번 크게 돌린 현철이 데스크 한쪽에 놓여 있던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서 기다란 담배를 꺼내다가, 재환에게 마치 ‘뭐 해?’ 묻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내 스튜디오는 금연 아닌데.”

현철이 말하는 바를 금방 파악하지 못한 재환이 ‘네…?’ 하고 순진하게 되물었다. 그 짧은 틈에 벌써 담배 끝에 불을 붙인 현철이 후, 천장 쪽으로 길게 연기를 내뱉으며 부연했다.

“지난번 보니까 담배 피우는 것 같더만. 눈치 보지 말고 그냥 여기서 피워.”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한 재환은 바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뱃갑을 꺼냈다. 어른과 맞담배 피우는 일에 영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고마운 배려라 저도 같이 하얀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수도 없이 더 숨의 노래가 반복되어 울려 퍼지던 스튜디오 안이 금세 두 사람이 내뿜은 희부연 연기로 가득 찼다.

“지우 놈은 밴드에서 잘하고?”

언제 담배 한 대를 다 피웠는지 담뱃갑에서 새 담배를 꺼내던 현철이 넌지시 재환에게 물었다. 지우야 늘 제 몫을 완벽히 해내고 있으니 재환으로선 아니다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예. 베이스도 잘 치고, 똑똑해서 다른 일도 잘해요. 밴드 홍보도 지우 담당이에요.”

“하긴, 지 엄마 닮아서 어렸을 때부터 머리 하난 좋았어.”

역시 재환이 어렴풋이 예상했던 대로 현철은 지우의 부모님과 아는 사이인 듯했다. 지우의 어린 시절 또한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정도로 가깝지 않고서야 오늘 같은 자리를 선뜻 허락해 주지 않았을 터다. 본인에게는 귀찮은 일이었을 텐데.

“근데, 가만히 있을라나 모르겠네.”

“누가요?”

“지우 엄마. 지 아들 밴드 하는 거 알면 거품 물 텐데. 베이스고 뭐고 다 부숴 버릴 양반이야.”

팔을 뻗어 유리 재떨이에 툭툭 재를 떨던 재환의 눈이 커다래졌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평소 집안일 같은 건 서로 말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더군다나 지우에게서 그런 기색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늘 여유가 넘치는 모습만 보아 왔기에, 그 나름의 어려운 사정이 있으리란 짐작을 요만큼도 하지 못했다. 같은 팀이면서.

“전혀 몰랐어요.”

“밴드끼리 그런 얘기도 안 해? 진짜 딱 음악만 하고 헤어지는 거야?”

그러니 현철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함께 밴드를 해 온 지난 몇 개월 동안 제법 친한 사이가 되었음은 분명했다. 합주하며 붙어 있는 시간을 생각하면 그러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그러나 일정 선을 넘어 멤버와 보다 가까워지는 게 재환에게는 퍽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 밴드에서 도망치듯 탈퇴했던 기억과 무관하다고는 못 하겠다.

“나 젊었을 때는 밴드가 녹음 한번 시작하면 녹음실에서 완전 먹고 자고 하니까, 가족보다 더 징글징글하게 붙어 있었지. 근데 또 그러다 싸우면 답도 없어요.”

잠깐 반성에 잠겼던 재환은 그새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꾹 재떨이에 눌러 껐다. 슬쩍 눈치를 살피다 현철에게 조심스러운 물음 하나를 건넸다.

“저, 혹시 기사님도 밴드 하셨어요?”

일순 현철의 얼굴이 으엑, 하는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안면 주름이 배로 늘어난 것이, 꼭 못 들을 걸 들은 듯한 낯이었다. 대답 또한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 안 해, 그런 거. 에이.”

아예 현철은 휙휙 손까지 내저었다. 밴드 하는 걸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반응이었다. 왜일까. 재환은 금방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난 음악은 듣는 게 좋아. 그러니 이 짓 하고 있지.”

듣는 것도, 연주하는 것도 좋은 저는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까. 지금처럼 밴드 하면 좋겠다고, 재환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이후로도 조금 더 이어진 믹싱 수업 후 녹음실을 나왔을 때는 벌써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지치거나 피곤하기보다는 들뜬 마음이 훨씬 컸다. 대학교 다니며 공부할 때는 생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흥미도 없는 전공, 아등바등 공부한 이유는 순전히 장학금이라도 한 번 더 타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동아리니 엠티니 하는 대학 생활은 제대로 즐겨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복학할 생각을 하면 재환은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하여 요새는 아예 더 길게 휴학하는 쪽으로 부쩍 마음이 기울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현재 제 인생에서 밴드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고, 재환은 이 시간에 충실하고 싶었다. 나중 가서 이럴걸, 저럴걸 후회하는 비겁한 놈이 되기 싫었다. 뭐, 다른 의미로 비겁한 짓은 이미 실컷 한 것 같다만….

올 때는 버스를 탔던 것과 달리 지하철을 타기로 마음먹은 재환은 터벅터벅 역사 계단을 내려갔다. 평일 늦은 시간이라 승강장은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제법 기다려야 할 듯해, 재환은 승강장 중간쯤에 있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뒤늦은 피로감이 살금살금 몰려왔다. 두 팔로 끌어안은 백팩에 머리라도 기대면 그대로 단잠에 빠질 것 같았다.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한 재환은 혹여나 잠들지 않기 위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어폰 끼고 음악이나 들을까 싶기도 했지만, 오늘은 이만 귀를 좀 쉬게 해 주어야 할 성싶었다. 녹음실에서 충분히 많은 소리를 들었으므로. 컴프레서로 댐핑을 한껏 살린 드럼, 공간감을 강조한 기타와 건반, 그 아래를 단단히 받쳐 주는 베이스, 그리고….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들으니 유독 더 사람의 심장을 간질거리게 만들던 목소리를 떠올릴 즈음, 바지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엉덩이를 꿈지럭거리며 핸드폰을 꺼낸 재환의 표정이 이윽고 미묘하게 굳었다. 선뜻 화면을 누르지 못하고 엄지를 까딱거리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꾹 눌러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집 가는 길이야?

노래 부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딱 붙은 핸드폰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알고 전화했나 싶어 재환은 좌우로 휙휙 고개를 돌렸다. 꼭 한영이 어디서 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러나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이제 끝나서 집 간다는 보고를 메신저 단체방에 올린 게 다름 아닌 저였음을 깨달았다. 차마 소리를 얹지 못한 실소가 작게 터졌다.

“응. 지하철역.”

- 어땠어?

“재밌었어. 기사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 다행이다. 힘들진 않았고?

“뭐, 할 만했어.”

적당히 답하면서도 재환은 지금의 대화가 몹시도 어색하고 낯설게 다가왔다. 그래서 괜히 가방끈을 만지작거리고, 목덜미를 쓸었다가, 백팩 위로 푹 머리를 숙였다. 왜 제가 한영과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지 머릿속에 둥둥 물음표가 떠다녔다.

- 빵은 사 갔어?

“응. 진짜 빵 엄청 잘 드시더라. 나도 좀 얻어먹고.”

- 잘했어.

그사이 재환의 머릿속을 차지한 물음표가 우수수 곱절로 늘어났다. 모른 체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가히 버거운 양이었다. 결국, 한영의 말에 줄곧 대답만 하던 입에서 툭 질문 하나가 튀어 나갔다.

“근데… 왜 전화했어?”

때마침 상냥하기도 한 안내 방송과 함께 열차가 승강장 안으로 들어섰다. 굼뜨게 고개를 들어 올린 재환은 스크린 도어 너머에서 서서히 속도를 멈추는 열차를 멍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상대의 말에 ‘응….’이라고 답한 후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을 느릿느릿 아래로 떨어뜨렸다. 전화가 끊긴 핸드폰 화면에는 짧은 통화 시간이 찍혀 있었다.

곧이어 칙, 소리와 함께 스크린 도어가 열렸다. 열차에서 몇 명의 사람이 내리고, 또 비슷한 숫자의 사람이 탔다. 도로 문이 닫히며 열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를 높인 열차가 역을 완전히 빠져나갔을 때, 적막이 내린 승강장에는 덩그러니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꽉 끌어안은 백팩 위로 푹 이마를 파묻은 재환은 승강장을 가득 채웠던 소음 속에서도 차마 놓치지 못한 문장을 곱씹었다. 아니, 곱씹기보다는 딜레이가 걸린 것처럼 멋대로 귓속에서 반복되었다. 피드백 설정이 잘못된 듯 소리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듣고 싶어서.

목소리 듣고 싶어서.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