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3권 2. Early Reflection) (10/29)

3권

2. Early Reflection

1장

* * *

미국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한영의 집에서는 늘 피아노 연주 소리가 울렸다. 때로는 동네 주민들을 모아 놓고 어머니가, 또 때로는 그녀 곁에서 형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가끔 피아노 위에 와인 잔을 올려 둔 아버지가 술과 악상에 취해 즉흥곡을 치기도 했다. 그러니 한영이 한글이나 알파벳을 깨우치기도 전 건반부터 눌러 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막내아들답게 한영은 들었던 소리를 머릿속에 담아 놓는 데에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이를 손가락으로 재현하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제가 누르는 음계가 몇 도인지, 화음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면서 곡 하나를 어렵지 않게 뚝딱 연주해 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절반은 희고 절반은 검은 건반을 뚱땅뚱땅 누르다 보면 절로 기억 속 음악이 흘러나오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악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한영의 재미는 뚝 떨어졌다.

아무리 어머니에게 설명을 들어도 오선지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음표들이 한영의 눈에는 하나같이 콩나물로 보였다. 꼬리가 하나가 달리건 두 개가 달리건 콩나물 맛은 다 똑같은데 왜 악보에 있는 것들은 죄다 의미가 다른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옆에 점이 찍히면 건반을 더 길게 눌러야 한다는 것도, 또 꼬챙이에 쭉 꿰이면 이어서 연주해야 한다는 것도 아리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끈질긴 교육 끝에 악보를 ‘읽는 척’은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한 번은 슈베르트의 〈송어〉라는 곡을 연주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한영은 연주 전 머릿속으로 송어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만 한영이 지금껏 본 물고기라고는 식탁 위에 올라온 생선구이가 전부였다. 그러니 상상되는 것은 그물에 잡혀 눈알이 흐리멍덩하게 죽어 가는 송어 떼뿐이었다. 그리하여 송어는 한영에게 ‘죽음’을 의미했고, 그 느낌대로 건반을 눌렀더니 어머니의 얼굴 또한 죽은 생선 같은 싸늘한 낯빛으로 바뀌었다. 연주 후 돌아오는 말은 ‘너 악보를 보기는 했니?’였다.

슈베르트의 〈송어〉는 그렇게 연주하면 안 된다고 그랬다. 이 곡은 Moderato로 쳐야 하는데 왜 멋대로 Andante로 바꾸었냐며 어머니는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직접 시범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래도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한영은 ‘엄마 송어는 살아 있으니까 그러지!’라고 빽 소리를 질렀더랬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은 몇 번 더 이어졌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연주할 때는 옆집 사는 폴을 떠올리며 쿵쾅대는 심장 박동을 음으로 표현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이게 무슨 행진곡이니?’라고 했다. 스트라우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연주할 때는 또 죽은 송어가 생각나 버렸다. 그래서 죽음의 느낌을 담뿍 살려 연주하자 어머니는 푸른 강을 피바다로 만들었다며 표정을 굳혔다.

이쯤 되니 한영은 피아노가 싫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형은 무엇을 연주하든 엄마의 칭찬을 듣는데, 아무래도 이건 편애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평소 주위 어른들로부터 ‘형처럼 예쁘게 생겼네’, ‘형처럼 인사도 잘하네’, ‘형처럼 똑똑하네’ 따위의 말을 수도 없이 들었던 터라 안 그래도 형에 대한 감정이 곱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까지 저러니 한영은 그녀도, 형도 죄다 미웠다. 결국 피아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 혼자 씩씩대다가 손가락이 근질거려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피아노를 아예 놓지도, 형처럼 어머니의 칭찬을 받지도 못하는 사이 건너편 사는 안젤라 할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한영에게는 장례식에서 추모곡을 연주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생전 그녀가 한영을 유독 제 손주처럼 예뻐한 까닭이었다. 당연히 한영의 어머니는 ‘제대로 할 수 있겠니?’라며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하나 내심 사람들 앞에서 맘껏 피아노 칠 기회다 싶었던 한영은 맡겨 달라고 큰소리쳤다.

요청된 곡은 안젤라가 좋아하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앞, 이미 머릿속에 곡을 통째로 집어넣은 한영은 연주 전 늘 그랬듯 안젤라를 떠올렸다. 베이킹이 취미였던 안젤라는 종종 파이를 구워 집에 가져다주고는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에게서는 늘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때로는 애플파이, 때로는 크랜베리 파이, 또 때로는 레몬 파이 냄새…. 침샘을 자극하는 달콤한 파이 향에 입맛을 다시며 한영은 연주를 시작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한영의 독창적인 해석 아래 〈죽은 할머니를 위한 파이〉로 거듭났다. 도저히 추모곡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귀엽고 통통 튀는 파반느가 연주되는 광경을 지켜보며 일부 어른들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고, 꼬마들을 그저 신나 어깨를 들썩였다. 주먹을 쥐고 파들파들 떨던 한영의 어머니는 끝내 자리를 박차고 식장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한영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다디단 파이 반죽과 크림으로 범벅된 연주가 끝이 났을 무렵, 한영은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짜릿함에 전율했다. 피아노가 다시 재미있어질 것만 같았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생각만 해도 까르르 웃음 터지는 장례식 날 이후, 한영에게는 피아노 접근 금지령이 내려졌다. 물론 처음에는 저를 미워하는 엄마가 또 마녀처럼 괜한 심술을 부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한영은 이게 단순한 심술이 아님을 깨달았다. 피아노 근처에 가기만 해도 도끼눈을 뜬 그녀가 팔짱을 끼고 앞을 막아서니 연주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악악 소리를 지르고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도 보았지만, 어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디서 주워 온 애도 아니고, 진짜 아들에게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씩씩거리던 어린 한영은 그리하여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어차피 제가 연주할 수 없는 거라면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형도 그래야 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했다.

모두가 깊이 잠든 밤. 개러지에서 핑크색 페인트 통을 낑낑거리며 들고 온 한영은 피아노 의자에 두 발로 올라섰다. 뒤이어 작은 손에 들린 페인트 통이 휘딱 뒤집히는 순간, 검정색과 흰색만이 전부였던 피아노 위로 세상 가장 예쁜 빛깔이 와르르 쏟아졌다. 톡톡 튀는 스프링클처럼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피아노 건반을 보며 한영은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한영은 두 번 다시 집 안에서 피아노를 볼 수 없었다.

안젤라 할머니가 살던 집 앞에 ‘For Sale’이 붙고, 새 가족이 이사 오고, 또 옆집 사는 폴이 아예 다른 주로 떠나는 동안 한영은 훌쩍 나이를 먹었다. 당연히 그사이 피아노 같은 건 치지도 않았다. 대신 한영은 그림 그리기에 새로운 흥미를 붙였다. 문득문득 머릿속에 펼쳐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그림만 한 것이 없었고, 피아노를 칠 때처럼 어머니의 간섭도 받지 않으니 여러모로 딱이었다. 게다가….

짝사랑하는 조쉬를 몰래 숨어 그리는 일은 지루하기만 한 학교에서 한영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한영보다 한 살 위인 조쉬는 11학년 남학생이었는데, 방과 후 클럽 활동으로 밴드에서 기타를 쳤다. 밴드가 강당 구석을 연습실로 사용하는 덕에 한영은 늘 2층 계단 끄트머리에 쪼그려 앉아 조쉬의 멋진 모습을 맘껏 그렸다. 이렇게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홈 커밍 때에는 나름 고백할 계획도 세워 두었다. 그도 게이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복도에서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음을 보내오는 것이 분명 자신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랬던 게 웬 엉뚱한 놈이 등장하면서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우랬나, 지랄이랬나. 뜬금없이 한국에서 교환 학생을 왔다는 그는 밴드에 들어간 것으로 모자라 한시도 조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키만 멀대같이 큰 놈이 농구팀에나 들어갈 일이지 아주 눈엣가시가 따로 없었다. 결국 한영은 밴드 활동이 없는 날 녀석을 빈 강당으로 불러냈다.

“조쉬한테서 떨어져.”

“와, 너 한국말 잘하네?”

“조쉬 옆에서 꺼지라고.”

“싫은데?”

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던 한영은 결국 다음 날 밴드에 입부 신청서를 넣었다. 무슨 악기를 연주할 줄 아냐기에 눈앞에서 키보드를 몇 번 뚱땅거려 줬더니 바로 환영 인사가 날아왔다. 그러면 무엇 하나. 이미 조쉬는 그 능글맞은 놈한테 홀딱 넘어갔는데.

그렇다고 고등학교 생활 내내 찬찬히 키워 온 짝사랑을 이렇게 수포로 돌릴 수는 없었다. 지난 과거, 피아노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던 다짐을 깨끗이 잊은 한영은 밴드 활동에 매진했다. 키보드만 열심히 친 게 아니라, 갑자기 나간 보컬을 대신해 노래도 불렀다. 사 놓고 쓰지도 않던 MP3 플레이어는 어느새 조쉬가 좋아하는 Embryo니 뭐니 하는 밴드들의 노래로 꽉 채워졌다.

그리고 한영은 다시금 계획을 공고히 했다. 홈 커밍 때 조쉬와 함께 멋지게 공연하고, 당당히 고백도 할 작정이었다. 그 커다란 놈보다 내가 너를 더 많이 좋아한다고. 키스도, 섹스도 내가 더 잘한다고.

홈 커밍 당일, 전교생 앞에서 한 공연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댄스 팀이나 글리 팀보다도 훨씬 더 큰 박수를 받았다. 그때만큼은 앙숙 같은 지우와도 무대에서 내려와 서로 하이 파이브를 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계획은 절대 잊지 않았다.

각종 공연이 펼쳐지던 강당에서 댄스파티가 한창일 즈음, 한영은 부지런히 조쉬를 찾아다녔다. 손에는 그의 기타 치는 모습을 공들여 그린 그림도 쥐고 있었다. 이제 이 그림을 전해 주며 진하게 키스하는 일만 남았다. 이윽고 과학실이 있는 어둑한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한영의 발이 우뚝 멎었다.

투명한 창 너머를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에 널따란 실험 테이블 위에서 흘레붙은 두 남녀의 모습이 비쳤다. 한쪽은 한영이 그토록 찾고 있던 조쉬였고, 또 한쪽은 학교에서 퀸으로 불리는 치어리더였다. 바스락,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한영의 손안에 있던 조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터덜터덜 불 꺼진 복도를 걸어 나와 털썩 계단에 주저앉았다. 멀리 강당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고음이 깎여 나간 채로 쿵쿵 적막한 공간을 울렸다. 멍하니 눈을 껌뻑이던 한영은 조금 전까지 소중한 선물이었던 것을 휙 계단 아래로 집어 던졌다.

동글동글 뭉쳐진 종이 뭉치가 통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따라 굴러 내려갔다. 굴러가고 굴러가다, 계단참에 서 있는 기다란 다리에 부딪혀 멈추었다. 다리만큼이나 길쭉길쭉한 손이 이제는 한낱 쓰레기가 되어 버린 종이를 집어 올렸다. 뚜벅, 뚜벅. 워커 바닥이 계단을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차였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옆에 앉으며 묻는 지우에게 한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차라리 과학실에서 조쉬와 붙어 있던 상대가 이놈이었다면 기분이 좀 나았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게 왜 그런 놈을 좋아해. 알아주는 플레이보인데.”

한영은 새빨갛게 물든 눈으로 뭐가 좋다고 서글서글 웃고 있는지 모를 지우를 노려보았다. 적어도 본인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 눈빛을 눈치챈 듯 지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냥 Friend with benefit이고.”

한마디로 섹스 프렌드란 소리였다. 한영의 표정이 한층 구깃구깃해졌다. ‘난 조쉬랑 섹스도 못 해 봤어’라는 비참한 소리가 턱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좋아하는 상대와 섹스 프렌드라니, 한영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위로해 줄까?”

갑자기 불쑥 얼굴을 옆으로 들이민 지우가 씩 입꼬리를 당겼다. 한영은 기가 차다는 눈초리로 지우를 보았다. 모난 구석 없이 시원시원 잘생긴 얼굴임은 분명했으나, 단언컨대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마음이 너무 울적한 게 문제였다.

“Whatever.”

쾅, 소리를 내며 미술실 문이 닫혔다. 잡아먹을 기세로 서로의 입술을 집어삼킨 두 소년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겁지겁 웃옷을 풀어 헤쳤다. 맞닿은 입술을 뭉그러뜨리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문드문 서 있던 의자, 이젤 따위가 우당탕 요란스럽게 넘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게걸스럽게 목덜미를 빨고 귀를 핥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두 사람은 피할 수 없는 문제점에 직면했다.

“왜 콘돔을 네가 꺼내?”

“내가 쓸 거니까.”

“장난해?”

“그럼. 네가 나한테 박게?”

엎치락뒤치락 우위를 뒤바꾸며 한참을 실랑이했음에도 끝내 결론은 나지 않았다. 지우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고, 한영은 꼭 더러운 게 묻은 양 침으로 번들번들해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너, 진짜 안 귀엽다. 내가 미쳤지.”

“나도 너 싫어.”

그래 봤자 이미 물리적인 접촉에 의해 몸은 달 대로 단 상태였다. 둘만 있는 컴컴한 교실, 멀리서 울리는 미약한 음악 소리, 그새 후끈 덥혀진 주변의 공기가 자꾸만 소년들의 욕망을 부추겼다. 피차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엇비슷했다. 이대로는 좀 아쉽지.

아씨, 존나 큰데. 이거 뭐 말좆이야?

그럼 넌 황소좆이야?

진짜 하나도 안 귀엽다니까. 손이나 움직이시지.

너나 빨리해.

사이좋게 서로의 손에 사정한 두 사람은 그날 이후로 제법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렇다고 전에 없던 애정 따위가 갑자기 샘솟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야릇한 관계가 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영은 금방 조쉬보다 더 멋진 남자 친구를 사귀었고, 지우도 냉큼 비슷한 상대를 만들었으니까.

그냥, 밴드 연습 외의 시간에 얼굴을 마주쳐도 서로 아는 척할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다 가끔 점심을 같이 먹고, 방과 후 집에서 함께 게임을 하기도 했다. 기분이 좀 동한다 싶을 때면 베이스와 건반 연주를 맞춰 보는 날도 있었다. 그날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유한영. 너 나중에 한국 올래?”

“한국에 왜?”

“그냥. 할 거 없음 와서 밴드나 하자고.”

꼭 옆 동네에 놀러 오라는 듯 가벼운 투였다. 그래서 한영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말이 제일 먼저 생각날 줄은. 그리고, 정말로 한국에 가게 될 줄은.

한국에 가서, 밴드 하게 될 줄은….

“너, 서재환 좋아해?”

손에 쥔 보드카 잔을 털어 넣던 한영은 홱 고개를 돌려 지우를 보았다. 쿵쾅쿵쾅 울리는 음악 소리 사이에서도 선명히 들이꽂힌 질문이 슬그머니 눈썹을 구기게 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 저 싱글거리는 웃음 탓도 어느 정도 있었다.

“뭐…?”

“재환이 좋아하냐고.”

재차 확인하듯 건너온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한영은 정면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번쩍번쩍 요란한 조명이 터지는 스테이지에서 음악과 열에 취한 남자들이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개중 몇은 뒤로 눈을 흘끔거리며 스탠딩 테이블 앞에 선 한영과 지우에게 다소 의도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한순간 한영은 그 눈빛도, 지우의 질문도 성가셔졌다. 그래서 아예 꾹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한 반응이 상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긍정으로 비쳤다.

“재환이 걔, 완전 뼛속까지 헤테로 같던데.”

“아냐.”

이번에는 맥주병 주둥이에 입술을 붙이던 지우의 고개가 휙 한영에게로 돌아갔다. 호오. 대단히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시원스레 뻗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어떻게 알아.”

“섰어.”

“뭐?”

“나랑 키스할 때 섰었어.”

와, 유한영…. 못 이기겠다는 듯 지우는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예 한영의 보드카 잔에 캉, 맥주병을 부딪치기도 했다. 그러고는 짐짓 모르는 체 다른 질문을 던졌다.

“키스만 했어? 벌써 섹스까지 한 건 아니고?”

보다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긴 한영이 지우를 쏘아보았다. 마치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하는 눈빛이었다. 지우의 입매가 더 길게 위로 찢어졌다.

“하긴, 재환이 네 말좆 보면 바로 도망가겠다. 걔까지 나가면 우리 밴드 진짜 큰일이야.”

잔을 쥔 한영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새하얗게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다른 이들이야 봐도 모르고 넘어갈 정도의 미미한 움직임이었지만, 이미 몇 해나 한영을 알아 온 지우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저 반응이 의미하는 바까지도. 이 또한 모른 체하며 지우는 뼈 있는 말 몇 마디를 더 건넸다.

“기타 나가는 건 세웅이로 족하다. 재환이도 나가면, 그때는 또 어디서 멤버 찾게.”

살그머니 아랫입술을 깨문 한영의 시선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쾅쾅 킥 베이스가 울릴 때마다 잔 안에서 미세하게 물결치는 술을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짜증 나고 답답했다. 조금은 속상한 마음도 있었다.

“알아.”

“알면.”

잔잔하게 흔들리는 술 표면 위로 영락없이 멀끔하게 잘생긴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가 제게 건넸던 말이 동시에 귓전을 두드렸다.

I See You. 그 노래 너무 좋은 것 같아. 비 같은 노래야.

사방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시끄러운 음악으로 그 달콤한 목소리를 지워 낸 한영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니까, 안 좋아해.”

한 톨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물론 자신의 노래에서 흐르는 빗소리를 들은 건 재환이 처음이었지만, 또 그걸 좋다 말해 준 것도 다 그가 처음이었지만 그럼에도 한영은 재환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면, 함께 밴드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밴드 하지 않을 거라고 재환이 처음 확실히 답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재환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 좋아할 거였다. 좋아하면 안 되었다. 하지만….

재환아. 나 이제 너무 힘들어.

쿵. 쿵. 음악의 박자 따라 일렁이는 술 위에 툭 눈물을 떨굴 듯한 한심한 낯짝이 비쳤다. 그것이 꼴 보기 싫어 한영은 단숨에 남은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미 한계에 다다른 마음은 함께 삼킬 수 없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이제는 정말로 모르겠다.

* * *

방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한영을 발견한 재환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거대하게 뜨인 눈이 삐걱삐걱 굴러가 한영의 손에 들린 검정색 뭉치와, 급히 다른 손이 빠져나온 바지춤을 차례로 훑었다. 동시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더라.

산송장처럼 창백히 질린 얼굴. 비슷한 색을 띠었던 손. 그 손에서 빼앗듯 옷을 낚아채고, 미친놈처럼 휘청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대문을 박차고, 뛰고, 또 뛰고…. 폐가 터져 나갈 만큼 숨이 차오를 즈음이 되어서야 잠시 멈춰 섰던 것 같다. 그때 올려다보았던 하늘이 타오를 듯 붉어 공연히 더 숨이 막혀 왔던 듯도 하다.

그 후,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돌아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멀리 날아갔던 이성이 조금 돌아왔을 때는 편의점에 들러서 산 소주병을 따고 있었다. 잔도 없이 초록색 주둥이에 입술을 물려 휙 고개를 뒤로 젖히자 역한 향과 함께 술이 꼴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차라리 정신이 몽땅 나가 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소주 한 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한 병으로 모자라 또 다음 병을 따고, 물처럼 마시고, 결국 재환은 바람대로 누런 장판 위에 픽 쓰러졌다.

하아…. 알코올 냄새 풀풀 풍기는 숨을 길게 뱉으며 핑글핑글 돌아가는 천장을 올려 보았다. 무늬처럼 피어난 곰팡이도 함께 돌아가며 시야를 더욱 어지럽혔다. 진짜 정신 줄 놓은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병신 새끼. 왜 남의 옷 냄새 맡으면서 세우고 지랄인데.

불룩 솟은 바지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남자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냥, 재환은 좀 어이가 없었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사람을 내쫓을 때는 언제고. 아무리 생각해도 좀처럼 이해가 안 갔다. 그러기에는 한꺼번에 때려 부은 소주 때문에 사고가 온전치 않기도 했다. 근데… 이건 또 왜 이렇게 시끄러워.

눈썹을 잔뜩 찌푸린 재환은 축축 늘어지는 팔을 겨우 들어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었다. 쿵쿵 고막을 울리는 소리는 이명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살가죽과 뼈에 감싸인 심장이 요란스럽게도 뛰어 대고 있었다. 이러다 펑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뜀박질은 한참 전에 끝났는데….

이상한 놈의 이상한 짓거리를 바로 목전에서 봐 버린 탓에 저도 어딘가가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씨발…. 오늘따라 욕이 잦은 자신을 나무랄 기력도 잃은 재환은 꾹 눈꺼풀을 닫아 분홍 머리칼과 새하얀 얼굴이 어른거리는 시야를 차단했다. 자꾸만 열이 오르는 눈두덩에 팔뚝을 올렸다. 덥다. 선풍기 켜야 하는데. 하지만 너무 졸리다. 수마에 짓눌린 의식이 점차 흐릿해져 갔다.

“아오….”

짜증 섞인 탄식을 길게 흘린 재환은 옆으로 손을 더듬어 아까부터 계속 시끄러운 핸드폰을 집었다. 한쪽을 겨우 게슴츠레 뜬 눈 앞으로 핸드폰을 가져가자 화면 가득 쌓인 메시지 창이 보였다. 반대쪽 눈도 힘겨이 뜨고서 지금도 새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는 밴드 채팅방으로 들어갔다.

[와 존나 대박인데?]

[주위에 홍보 좀 많이 해]

홍보? 무슨 홍보? 바닥에서 빙그르르 반 바퀴를 돈 재환은 배를 깔고 엎드린 채 핸드폰 화면을 쓱쓱 위로 올렸다. 메시지를 주고받은 이는 지우와 태군이었고, 그 맨 위에는 지우가 올린 사이트 주소가 있었다. 밑줄 쳐진 링크를 누른 재환의 눈이 이윽고 번쩍 크게 뜨였다.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지우가 보내 준 링크는 재환도 가입한 적이 있는 SNS의 페이지 주소였다. 페이지 상단에는 익숙하면서도 어째서인가 조금 낯설게 다가오는 이름이 버젓이 적혀 있었다.

밴드 ‘더 숨’ 공식 계정.

와…. 태군의 메시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감탄이 재환의 입 밖으로 터졌다. 심지어 첫 게시물은 먼젓번 자신이 이 채팅방에 공유했던 클럽 코벤트에서의 공연 영상이었다. 공연에 왔던 희연이 핸드폰으로 찍어 준 것인데, 화질도 좋고 구도도 안정적이어서 꽤나 마음에 들었더랬다. 그때 공연 모니터링용으로 올린 걸 지우가 이렇게 활용할 줄 몰랐다. 거기에 자막도 달고, 그럴싸하게 편집까지 해 놓았다. 역시 법대생은 다르네.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씩 양쪽 입꼬리를 올린 재환은 서둘러 핸드폰 화면의 작은 자판을 톡톡 두드렸다.

[진짜 대박이네. 앞으로 여기에 공연 영상 많이 올려야겠다.]

근데 잠깐. 실시간으로 모두 읽었다는 표시가 뜨는 자신의 메시지를 보며 재환의 눈썹 사이가 옴폭 좁혀졌다. 혹시 몰라 ‘현지우 수고했어’라는 짧은 문장 하나를 더 적어 전송하자 그것도 금세 다 읽었다고 표시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메시지를 전부 봐 놓고도 유독 조용한 한 사람이 재환의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 현재 시각을 확인하니 이미 오전 11시. 잠결에 취해 메시지를 확인한 건 아닐 터였다. 아니, 혹시 모르지. 그도 저처럼 술이나 왕창 마신 탓에 지금 막 눈을 떴을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다 ‘그 녀석 괜찮을까’까지 생각이 번진 재환은 휙휙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제가 걱정할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현듯 솟구치는 불안감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초조한 듯 바닥에 닿은 발을 까딱거리던 재환은 그사이 ‘수고는 무슨’이라는 지우의 메시지가 뜬 핸드폰 화면에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우리 다음 합주는 언제?’라고 적어 보내자 금방 지우와 태군이 가능한 날을 답해 주었다. 여전히 단 한 사람, 한영만이 말이 없었다. 재환의 불안한 마음이 증폭되었다.

설마. 아니겠지. 고작 그런 일로? 그런데… 고작 그런 일이 맞긴 한 건가?

안 그래도 지난밤 안주 하나 없이 들이부은 소주 탓에 지끈거리던 머리가 한층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자꾸만 최악의 가정이 떠올라 재환을 괴롭혔다. 이거 절대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릴 즈음이었다.

[나 며칠만 합주 쉴래. 다음 주에 하자.]

하…. 한영의 메시지를 본 재환의 입에서 반쪽짜리 안도가 섞인 숨이 흘렀다. 나머지 반쪽을 차지한 걱정은 애써 모른 체하며 ‘알았어’ 하고 짧은 답을 보냈다. 어쨌든 합주를 하기는 하자는 거니까. 이걸로 된 거였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합주가 없는 일주일은 생각보다 더디게 흘러갔다. 카페에 나가 열심히 일하고, 그러지 않은 시간은 모조리 기타 연습을 하며 나름 알차게 보냈는데도 그랬다. 덕분에 밴드가 제 일상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재환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나 소중해진 밴드가 흔들릴 일은 그 무엇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다시금 공고히 굳혔다. 그저 다른 멤버들도 같은 마음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특히 한 사람이.

어쨌든 느리게나마 시간은 지나갔고, 나름 기다렸다면 기다린 합주 날이 되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새까만 볼캡을 푹 눌러쓴 재환은 똑같이 시꺼먼 기타 가방을 등에 메고 밖으로 나섰다. 직사하는 햇빛을 받으며 걸음을 재촉하던 중 잠시 발을 멈춰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카운터 뒤편에 서 있던 태혁이 하얀 제빵모를 벗으며 재환의 인사에 답했다. 그래도 몇 번 본 사이라 그런지, 처음처럼 그의 인상이 무뚝뚝하게 비치지 않았다. 세훈과 단둘이 있을 때 보였던 부드러운 표정을 기억하고 있어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오늘도 연습?”

“네. 빵 좀 사 가려고요. 지난번에 주신 거 다들 엄청 맛있게 먹었어요.”

‘그래?’ 하며 대답하는 태혁의 입매가 슬며시 위로 휘어졌다. 역시나 웃으니 한결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서로 생김새는 영 달랐지만, 그 표정이 설핏 세훈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주로 어떤 걸 많이 사 가나요? 제가 빵은 잘 몰라서.”

멋쩍은 듯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묻자 보다 입꼬리를 올린 태혁이 아예 앞치마를 벗고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얇은 유산지를 깐 나무 쟁반을 재환에게 들려 주고서 친히 가게 한 바퀴를 돌며 이것저것 빵 설명을 해 주었다. 사실 하나같이 다 맛있어 보여 고르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태혁의 설명을 참고해 재환은 개중에서 잘 팔린다는 것들을 종류별로 쟁반에 담았다. 특별히 태군을 위해 디저트용 빵도 몇 개 골랐다. 그리고 카운터 앞에 섰을 때, 재환은 생각지 못하게 조금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저…, 금액이 모자란 것 같은데요?”

“지인 할인이야.”

덤덤히 답한 태혁이 재환의 손에 들려 있던 체크 카드를 냉큼 가져갔다. 잠시 후 지잉, 소리와 함께 나온 영수증을 얼른 구겨 휙 옆으로 버렸다. 얼결에 반값에도 못 미치는 금액으로 빵을 구입해 버린 재환은 ‘어….’ 하며 난처하게 눈을 굴렸다.

“세훈이 가게에서 일 그렇게 열심히 한다며. 세훈이 대신 조금 보너스 주는 거라고 생각해. 어차피 거기엔 먹을 것도 별로 없잖아.”

“아…. 정말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빵이 한가득 담긴 봉투와 카드를 건네받은 재환은 꾸벅 허리 숙여 태혁에게 인사했다. 꼭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가게에 온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면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이는 재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도 개인적으로 좀 고마운 마음이 있고.”

“예…?”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넣던 재환이 멈칫하며 되물었다. 그새 태혁은 휙 뒤를 돌아 허리에 앞치마를 매고 있었다. 그래서 태혁의 표정이 재환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는 기분 나쁠 수도 있잖아.”

“뭐가….”

다만 이어지는 말 역시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라 재환은 또 머뭇머뭇 되묻고 말았다. 두 남자 모두 엇비슷한 수준으로 말주변이 없는 게 문제였을까. 잠시간 그들 사이에 애매한 공기를 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가지런히 넘긴 머리 위로 제빵모를 쓴 태혁이 천천히 몸을 틀었다.

“나랑 세훈이. 평범하게 봐 주는 것 같아서 내심 고맙게 생각해.”

“아….”

재환은 일순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말재간이 없는데, 거기에 예상치 못한 이야기까지 들으니 재빨리 무어라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또다시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품에 안은 빵 봉투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재환은 용기 내어 입을 뗐다.

“그냥, 두 분은 되게 좋아 보여요. 서로 오래 알고 지낸 느낌도 많이 나고….”

“뭐, 오래되긴 했지. 10년도 더 됐으니까.”

“어떻게 만나신 건데요?”

너무 과하게 용기를 낸 게 문제였을까. 제가 질문하고도 지레 놀라 재환은 합, 입을 다물었다. 원래 이렇게 남의 일에 궁금증을 품는 성격이 아닌데, 정말 별일이다 싶었다. 다행히도 그의 사적인 물음을 태혁은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엷은 미소를 띤 채 답해 주었다.

“한국에서는 그냥저냥 아는 사이였는데, 내가 독일로 유학 갔을 때 쫓아왔었어, 세훈이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별수 있나.”

제빵모 아래 드러난 태혁의 귓바퀴가 살짝 붉어진 게 재환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 괜히 저까지 부끄러운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더는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더 미적거리다가는 합주 시간에 지각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아, 그나저나 빨리 가 봐. 곧 세훈이 올 거야. 그럼 분명 붙잡힐걸.”

어느새 다시 카운터 밖으로 나온 태혁이 재환의 등을 떠밀었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 서둘러 ‘안녕히 계세요.’ 하고 인사한 재환은 가게를 나섰다. 한 번 더 뒤돌아 유리문 너머에서 손 흔드는 태혁에게 고개를 꾸벅인 뒤, 갈 길을 마저 재촉했다.

“다 와 있었네.”

저를 뺀 멤버 세 사람이 모두 와 있는 합주실에 들어서며 재환은 내심 안도했다. 아니, 거짓말이다. 사실은 죽을 만큼 안도했다. 최대한 태연히 내뱉은 인사말에 무심코 헛숨이 섞일 뻔할 정도였으니까. 만에 하나 이 자리에 한영만 있었다면 어땠을지….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옆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성큼성큼 합주실 가운데를 가로지른 재환은 드럼 뒤에 앉아 있던 태군에게 다짜고짜 빵 봉투를 내밀었다. ‘어…?’ 하며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든 태군의 얼굴에 금세 큼지막한 웃음이 걸렸다.

“와! 요새 우리 째환이 씀씀이가 존나 짱인데?”

이럴 때만 우리 째환이냐? 부러 더 무심한 투로 응수하며 휙 뒤를 돈 재환은 기타 앰프 옆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얼른 기타를 꺼내 튜닝부터 했으므로 자연히 푹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래서 정말 의도치 않게 맞은편에 시선을 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정확히 집어 말하자면, 키보드 뒤에 앉은 녀석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낯빛이 어떤지, 표정은 어떤지, 그리고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지 재환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물론 고개만 잠깐 들어도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튜닝이 먼저였다.

순서대로 헤드 머신을 만져 가며 정성스럽게 음을 맞춘 재환은 기타 바디에 붙어 있다시피 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동시에 심장이 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줄 알았다.

호흡을 삼킨 채 빠르게 눈을 끔뻑거리며 제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한영을 올려 보았다. 천장 조명을 등지고 있음에도 하얀 얼굴이 지나치게 또렷이 보였다. 그 위로 비친 무덤덤한 표정까지도.

“이거.”

‘어, 어….’ 하고 어정쩡한 투로 답한 재환은 쑥 내밀어진 빵 봉투를 받아 들었다. 보아하니 그사이 세 사람은 각자 마음에 드는 빵을 하나씩 고른 모양이었다. 그다지 입맛은 없었으나 일단 봉투 안을 뒤적인 재환은 태혁이 가장 잘 나가는 상품 중 하나라 설명했던 빵을 집었다. 이름도 알려 줬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미처 기억나지 않았다.

태군이 딱 좋아했을 법한 단맛의 빵을 우적우적 부지런히 먹은 재환은 늘 그랬듯 멤버들에게 ‘오늘은 뭐부터 할까?’라고 물었다. 이럴 때 대게는 지우가 먼저 대답하고는 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서 대뜸 답이 나왔다.

“나, 노래 만들었어.”

정말 오랜만에 한영이 갖고 온 신곡의 제목은 ‘I Don’t Like You’였다.

웃을 수도 없는 제목이었다.

최근 일주일이 넘도록 합주를 쉬었던 탓에 다음 합주는 바로 이틀 후가 되었다. 그날도 한영은 ‘노래 만들어 왔어.’란 말부터 꺼냈고, 재환의 불안 속 담담히 만들어 온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노래의 제목은 ‘I Don’t Love You’였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제목이었다. 속 편한 태군만이 ‘유한영 너 누구 저주하냐?’라며 낄낄거렸다.

‘다다음 주 공연 가능하니?’라는 클럽 사장의 문자를 받은 네 사람은 이틀 후 다시 합주실에 모였다. 일단 공연 셋 리스트부터 짜 보려는데, 여지없이 한영은 또 작정한 듯 재환을 바짝 긴장시킬 한마디를 던졌다. 나, 새 노래 있어.

이쯤 되니 재환은 절로 이가 악물렸다.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저로 인해 합주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바닥난 인내심을 정말 억지로 끌어모았다. 숨을 고르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래. 제목이 아무리 거슬려도, 가사가 온통 하나뿐이라 해도, 노래만 좋으면 그만이잖아? 전에도 그랬으니까. 저게 원래 유한영 스타일이니까.

그랬던 게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모조리 무색해졌다. 제아무리 굳은 마음을 먹었어도 이번만큼은 한영의 연주를 듣는 내내 표정 관리를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5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주구장창 ‘I hate you’라는 가사를 들으면. 한마디로, 노래를 끝까지 들은 재환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한영. 따라 나와.”

의외로 잠자코 따라나선 한영과 함께 재환은 어둑어둑 땅거미가 진 정원으로 나왔다. 그사이 버글버글 끓던 속이 조금이라도 가라앉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자를 한 번 고쳐 쓴 재환은 일단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 배려심을 발휘해 한영 반대편으로 길게 숨을 뱉으며 말문을 뗐다.

“뭐 하자는 건데.”

하는 수 없이 잔뜩 날 선 말투가 튀어 나갔다. 그래서인지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 선 한영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아래로 내리깐 시선은 발끝을 향해 있었다. 저렇게 풀 죽은 티를 팍팍 내는 모습마저 지금의 재환은 보고 싶지 않았다. 대놓고 ‘I Hate You’라는 노래를 만들어 올 정도면 차라리 당당한 태도를 보이던가. 다시금 솟구친 짜증, 내지는 울분이 재환으로 하여금 내리 필터를 빨아올리게 했다.

손가락 사이에 끼인 담배가 절반 가까이 타들어 갈 때까지도 한영은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재환도 더 이상 한영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담배 몇 모금 빤다고 해소될 게 아님은 제가 더 잘 알았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새 필터까지 짧아진 꽁초를 휙 깡통에 던지고서 내처 새 담배에 불을 붙일 즈음이었다.

“…재환아.”

칙 소리와 함께 발간 불꽃을 피워 올리던 라이터 휠이 제자리로 돌아가며,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불붙지 않은 담배를 아래로 떨어뜨린 재환은 푹 고개 숙인 채 도로 입을 다물어 버린 한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차라리 바라지 말 것을 그랬다.

“나…, 진짜 너 안 좋아해. 미안해.”

빳빳한 담배가 한순간 손안에서 짓이겨졌다. 새하얀 종이를 찢고 나온 담뱃잎이 손바닥을 더럽혔으나, 재환은 주먹 쥔 손을 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꾹 짓씹은 입술도 열 수 없었다. 안 그러면 당장 ‘씨발’이라는 거친 소리가 비어져 나갈 것 같았다. 물론 그것 말고도 쏟아 낼 말은 한참 더 있었다.

고작 할 말이 그것뿐이야? 그딴 가사로 사람 속은 다 뒤집어 놓고, 안 좋아한다는 한마디면 되는 거야? 밴드가 장난이야? 그런 거냐, 유한영?

얼마나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는지 턱이 다 얼얼했다. 뜨겁게 정수리를 태우던 해는 이미 저만치 물러갔음에도 머리로 뜨끈히 열이 올랐다. 그 순간에도 우르르 솟아난 말들은 입 안을 맴돌 뿐이었다. 원래 할 말을 참는 성격이 아닌데, 왜 이 녀석 앞에서는 그게 이다지도 힘든 일인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재환은 포기 아닌 포기를 택하고 말았다.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진 담배를 깡통에 탁탁 털어 버린 재환은 조경 삼아 놓인 판판한 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그제야 고개를 든 한영이 천천히 걸음을 떼 재환 옆으로 와 앉았다. 미미하게 부는 더운 바람 따라 그가 풍기는 예의 달콤한 향기가 살살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유한영.”

“…응.”

“나 안 좋아하는 건 잘 알겠어. 근데, 아무리 그래도 밴드가 장난은 아니잖아.”

앞의 말을 꺼낼 때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입이 썼다. 그래도 재환은 그럭저럭 담담한 어조로 뒷말을 덧붙일 수 있었다. 혹여나 상대에게서 반대되는 얘기를 듣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일단은 그렇게 여겼다.

“우리 공연도 하고, 싱글도 내고, 또 EP 앨범도 내야지. 나랑 그러기로 한 거 까먹었어?”

세운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있던 한영이 홰홰 고개를 저었다. 덩달아 흔들린 분홍 머리칼이 부스스 일어났다 금방 제자리를 찾았다. 주위로 한결 짙게 풍긴 향기가 고스란히 재환의 콧속으로 스몄다. 클럽에서 오디션이 있던 날, 함께 벤치에 앉아 밴드의 미래를 약속하던 그때와 같았다. 그 미래를 위해 포기해야만 할 것들이 있음을 재환은 잘 알았다.

“그니까 열심히 음악 할 일만 생각하자, 우리. 지난번엔… 너 또 외로워서 그런 거잖아. 맞지?”

당장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싶은 것을 참고 고개를 기울여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투명하리만치 말간 눈동자 위로 차라리 비겁해지기를 택한 겁 많은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재환은 속으로 빌었다. 빨리 알았다고 해, 유한영.

미세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한영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재환은 가뿐히 자리에서 일어나 툭툭 엉덩이를 털었다. ‘그럼 가자.’ 하며 걸음을 떼려는데, 다급히 뻗어온 손에 팔목이 붙잡혔다.

“노래…, 노래 그렇게 별로였어?”

아…. 재환은 잠깐 멈칫했다. 앉은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한영의 눈빛에 간절함 비슷한 것이 잔뜩 서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저 녀석 바본가’라는 생각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다.

인지하지 못한 새 좁게 오므라든 미간을 얼른 편 재환은 한영을 향해 부러 더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존나 좋았지. 빨리 들어가기나 하자. 같이 편곡해야 할 거 아냐.”

그날 네 사람이서 함께 완성한 한영의 신곡 〈I Hate You〉는 이후 재환이 가장 좋아하는 더 숨의 노래 중 하나가 되었다. 뭐…, 싫은 노래가 하나라도 있겠느냐마는.

* * *

합주 없는 일주일은 그리도 굼뜨게 흘러갔건만, 일단 공연 일정이 잡히고 나니 시간은 쏜살처럼 휙휙 지나갔다. 지난번 연주했던 카피곡 대신 신곡 하나를 더 추가한 것뿐인데, 상상 이상으로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첫 공연에서 부족했던 부분까지 신경 써서 연습하느라 더 그런 듯했다.

그래서 지치고 힘드냐, 하면 당연히 아니었다. 아르바이트하고, 합주하고, 집에 가면 또 밤새 기타를 놓지 못하는 날들의 연속이었으나, 재환은 진심으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어디서 이런 열정이 샘솟는지 제가 다 신기했다.

이유는 얼추 짐작이 갔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진짜 제대로 음원 작업에 들어갈 계획을 세워 놓았으니까. 일단은 욕심내지 않고 싱글부터 내기로 했는데, 이러다 보면 한영과 약속했던 것처럼 EP 앨범도 금방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칫국이래도 상관없었다. 꼭 그렇게 될 거였다. 그렇게 만들 거였다.

공연 당일, 일찌감치 클럽에 도착한 더 숨의 네 사람은 리허설을 마치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나름의 자유 시간을 보냈다. 태군은 늘 그랬듯 부산스럽게 스틱으로 테이블을 두드렸고, 재환과 지우는 서로의 핸드폰으로 최근 찾은 해외 밴드의 정보를 공유했다.

한국 밴드인 용광로를 가장 좋아한다던 지우는 의외로 국가, 장르 가리지 않고 다양한 노래를 들었다. 오히려 재환보다도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 그에게 새로운 밴드나 노래를 추천받는 게 또 쏠쏠한 재미였다. 그럴 때마다 재환은 내심 ‘난 정말 록밖에 모르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메탈 외길 인생인 태군에 비하면 양반이겠지만….

오늘도 당당히 메탈 밴드 Doom Boys의 티셔츠를 입고 온 민머리 친구를 한 번 흘긋 쳐다본 재환의 시선이 자연히 그 옆에 앉은 이에게로 향했다. 예외 없이 위아래 화사한 색으로 무장한 한영은 이 어두컴컴한 공간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거기에 머리까지 분홍색이니 자꾸 눈길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핸드폰이라도 보는 듯 줄곧 아래쪽을 향해 있던 한영의 얼굴이 순간 퍼뜩 위로 들렸다. 이어서 휙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재환의 고개도 함께 돌아갔다. 클럽 입구에 재환은 처음 보는, 꽤나 화려한 느낌의 남자가 서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한영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한걸음에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던 한영의 목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동시에 남자의 귀에 걸린 여러 개의 링 귀걸이가 서로 부딪치며 짤랑, 소리를 냈다. 늘어진 목둘레 아래로 복잡한 문양의 문신이 얼핏 드러났다.

“클럽 찾는 데 한참 걸렸네.”

‘그랬어?’라고 답하는 한영의 손이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가 제 쇄골께를 가로지른 남자의 팔뚝에 얹혔다. 남들이 보면 그냥 남자끼리 유별나네, 하고 넘길 만한 스킨십일지 몰랐으나, 그럴 수 없었던 재환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손에 쥐고 있던 재환의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지우가 모두를 대신해 물음을 건넸다.

“누구?”

“친구.”

한영이 내놓은 짤막한 대답에 남자의 입에서 이쪽까지 들릴 정도로 제법 크게 쳇, 하는 소리가 터졌다. 그 반응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은 까닭에, 테이블에 놓인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든 재환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가 있는지 확인했다.

“이쪽에 앉아요. 난 담배 피우고 올 테니까.”

굳이 남자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휙 뒤를 돌아 클럽 밖으로 나왔다. 쿵쿵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와 건물 외부로 나서자마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리허설이 끝나고 한 대 피운 지 얼마 안 된 터라 목이 좀 칼칼하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고 불을 붙여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

후-, 허공으로 탁한 연기를 뱉으며 재환은 오늘의 연주 순서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에 따라 바꿔야 할 이펙터 페달의 세팅도 머릿속으로 꼼꼼히 되짚었다. 그러다 건물로 들어가는 다른 밴드와 눈이 마주쳐 가볍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중 한 명이 멤버들에게 ‘잠깐만.’ 하고서 재환 옆에 와 섰다. 그 또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함께 담배를 피우며 재환은 상대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요새 밴드 누가 잘나가고, 클럽 어디가 문 닫았고, 또 언제 큰 경연 대회가 열릴 거라는 등 지극히 밴드 하는 이들다운 대화였다. 담배를 다 피운 후에는 오늘 공연 잘하시라는 말을 서로 사이좋게 주고받으며 같이 클럽으로 내려갔다.

그새 클럽 안은 한층 더 조명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있던 테이블에 딱 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금방 재환의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에 푹 두 손을 찔러 넣은 재환은 지우와 태군 두 사람만 앉아 있는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우리 맨 처음에 ‘I Hate You’였지?”

자리에 앉으며 묻자 지우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곡은 뭐였지?’라고 덧붙여 물으려다 이미 다 아는 걸 부러 확인하는 것도 웃긴 것 같아 재환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재빠르게 어두운 클럽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가 다시 일어섰다.

“기타 좀 체크하고 올게.”

물론 기타도 굳이 더 확인할 거리는 없었다. 그래도 왠지 얌전히 앉아 있기가 뭐해 악기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마지막으로 조율이나 한 번 더 해 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재환은 생각한 것처럼 대기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오늘은 더 예쁘게 입었네.”

“그래?”

“응. 엄청 섹시해.”

대기실 구석, 서로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거의 딱 붙어 있다시피 한 남자 둘을 발견한 재환은 저도 모르게 주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대로 몸을 틀어 문 옆 벽에 등을 대고 섰다. 그러면서도 문득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왜? 내가 왜 숨어야 하지? 이건 뭐 꼭 숨어서 저들의 대화를 엿듣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사이에도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운 두 남자의 밀담은 계속되었다.

“끝나면 뒤풀이 같은 것도 하나?”

“아직 몰라.”

“그럼 집에 가도 돼?”

간질간질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응.’이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재환의 얼굴이 푹 찌푸려졌다. 저러다 진짜 뒤풀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차피 저도 내일 오전부터 아르바이트가 있던 터라 딱히 뒤풀이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자신이 좁은 복도 한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재환은 마침 지나치는 입장객을 피해 발만 슬쩍 뒤로 물렸다. 그래 봤자 금방 벽에 뒤꿈치가 닿았다.

“근데 진짜 밴드 하는 줄 몰랐네.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거짓말 안 해.”

거짓말을 안 하긴. 입꼬리가 쭉 내려가 있던 재환의 입매에 허, 하는 비웃음이 스쳤다. 이대로 저 쓸데없는 대화를 듣고 있다가는 괜히 공연 컨디션이나 떨어질 것 같았다.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뱃갑을 만지작거린 재환은 ‘그래, 딱 한 대만 더 피우자’라는 결론을 내고서 훌쩍 벽에서 등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오빠!”

“오빠!”

재환은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앞에 선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옆으로도 여자애들 몇 명이 더 있어, 안 그래도 넓지 않은 클럽 복도가 꽉 찼다.

“오늘 약속 있다며. 어떻게 왔어.”

“원래 친구들이랑 딴 데서 약속 있었는데, 아예 다 끌고 왔어요!”

“저도 급 희연이 연락받고 뛰어왔잖아요. 아직 공연 시작 안 했죠?”

잔뜩 신이 나서 조잘조잘 말하는 희연과 상지를 보며 어느덧 재환도 빙긋 웃음 지었다. 종전 내걸렸던 옹졸한 웃음과는 확연히 달랐다. 반가운 얼굴들이 공연을 보러 여기까지 와 주었으니, 웃음이 안 날 이유가 없었다. 그 탓에 아주 잠시, 대기실 안에 있던 이들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어,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대기실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며 희연과 상지가 약속한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인사했다. 재환의 눈도 흘깃,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다행히도, 한영과 그의 친구인지 뭔지 모를 남자가 조금 거리를 벌린 채 복도로 나서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복도는 발 둘 곳이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곧 공연 시작할 거야.”

‘네!’ 하며 발랄하게 대답한 소녀들이 객석이 있는 클럽 안쪽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그 뒤를 재환이 따랐다. 제 뒤통수로 길게 들러붙는 두 남자의 눈빛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난 공연보다 유독 관객이 많았던 까닭일까. 컨디션 저조를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재환은 훨씬 즐거운 마음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물론 관객이 한 명이건 열 명이건 늘 연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변함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들뜨는 기분까지 꺼뜨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연주 중 자잘한 실수를 하지도 않았다. 그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부단히 연습한 덕이리라. 단, 보다 정신 차려 기타를 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공연 내도록 줄곧 제게 머물렀던 남자의 시선 때문이었다.

일단은 한영의 친구라고 불러야 할 그 남자는 이상하리만치 재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중간중간 한영에게도 눈길을 주는 것 같기는 했다만,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어찌 됐건 객석으로 얼굴을 돌릴 때마다 그와 눈이 마주쳤으니, 재환의 공연한 착각이 아니었다.

그래서였다. 오늘은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오기 비슷한 감정이 마구 샘솟은 것은. 밴드가 무대에서 완벽한 연주를 선보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사람을 뜯어보는 듯한 눈길 앞에 재환은 자연히 한층 굳은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이런 자신이 퍽 유치하다는 자각은 어느 정도 있었다.

여하간에 만족스러운 공연을 펼친 재환은 썩 기분이 고조되었다. 그것은 태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무대에서 내려와 대기실에서 악기를 정리하는 내내 ‘나 존나 쩔지 않았냐?’를 외친 걸 보면. 물론 지우가 ‘너 한 번 스틱 놓칠 뻔했잖아.’라고 사실을 꼬집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내가 언제 그랬냐고 악악거리며 지우에게 달려드는 태군, 그 옆에서 묵묵히 가방에 노드를 집어넣는 한영을 뒤로한 재환은 먼저 쏙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다음 팀의 무대 세팅이 한창인 클럽을 나선 재환은 가볍게 계단을 올라 1층 계단참에 접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른 볼일을 보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다가, 얼룩덜룩한 거울로 눈이 갔다. 그제야 재환은 자신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연주 중 꽤나 열심히 박자를 탄 모양인지 그나마 집에서 정리하고 나온 머리가 부스스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손에 묻은 물을 탈탈 털어 내고 손가락으로 쓱쓱 머리칼을 정리할 때였다.

덜컹거리며 열리는 문으로 슬쩍 눈을 돌린 재환은 딱히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와 시선이 부닥쳤다.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는 것도 조금 뭐해, 인사하는 셈 고개를 한 번 까딱인 뒤 거울로 눈길을 되돌렸다. 어째 건드린 머리가 더 엉망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쩍 금이 간 거울 귀퉁이에 붙여 놓은 청테이프도 유난히 지저분해 보였다.

“공연 잘 봤어요.”

소변기 앞으로 가거나 변기 칸으로 들어가는 대신 재환 옆에 와 선 남자가 그럭저럭 나긋한 투로 인사를 건넸다. 저처럼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남자에게 재환은 ‘감사합니다.’ 하고 짧게 답했다. 손길 닿는 대로 사락사락 흩어지는 남자의 머리칼은 반지르르 윤이 흘렀다. 쿰쿰한 화장실 냄새를 가르고 주위로 은은한 향수 냄새가 끼쳤다.

어설프게 빗었다가 더 모양새가 이상해진 머리를 아예 손바닥으로 흩트린 재환은 딱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 돌릴 때면 상당히 힘을 줘야 하는 화장실 문고리를 세게 잡는 동시에 대뜸 황당한 물음이 건너왔다.

“한영이 섹스 잘하죠?”

이건 또 뭔…. 공연의 여파로 아직 적당히 들떠 있던 재환의 기분이 한순간 팍 가라앉았다. 때마침 거뭇거뭇하게 페인트칠이 벗겨진 철문 너머에서 미약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공연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아까 밖에서 같이 담배를 피웠던 팀일 것이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천천히 뒤를 돌자, 재환과 눈을 맞춘 남자가 샐쭉 눈웃음 지었다.

“아, 내가 잘못 짚었나? 난 당연히 둘이 잤을 줄 알고.”

때 탄 천장 가운데 달린 등에 날벌레들이 부딪치며 타닥타닥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슬그머니 눈을 구긴 재환은 이대로 남자를 무시하고서 그냥 나갈까 잠시 고민했다. 그사이에도 남자는 대꾸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빤히 재환을 보았다. 가볍게 마음을 바꾼 재환은 남자에게 기꺼이 답을 내어 주었다.

“남이사.”

습하고, 냄새나고, 온갖 벌레들까지 득시글거리는 화장실을 벗어난 재환은 곧장 건물 밖으로 나왔다. 실내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습하고 더운 바람이 솔솔 불어와 끈적한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래도 답답한 화장실보다는 낫지 싶었다. 꼭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후딱 담배 한 대를 피운 후 공연이 한창인 지하로 내려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함께 앉아 있던 테이블에 한영은 없었다. 재빨리 근처를 눈으로 훑자, 조금 떨어진 관객석에서 분홍 뒤통수가 보였다. 그 옆에 있는 찰랑찰랑한 머릿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굳이 짐작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혹여 다른 관객들에게 방해될까 싶어 허리를 푹 숙인 재환은 재게 걸음을 놀려 태군과 지우 둘만 있는 테이블로 갔다.

지금 공연 중인 팀은 특이하게 보컬이 없었다. 소위 말하는 인스트루멘탈 밴드였다. 사실 한국에서나 드문 형태이지, 해외에는 저렇게 밴드에 보컬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대신 그만큼 악기 연주가 중요할 터였다.

밴드의 음악은 슈게이징 장르에 가깝게 들렸다. 기실 재환은 모던 록이다 얼터너티브다 밴드를 장르 따라 딱딱 나누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들어서 좋으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럼에도 저 밴드는 지향하는 느낌이 확실해 보였다. 디스토션과 리버브가 잔뜩 들어간 먹먹한 기타 사운드와, 그로 인해 번지는 몽환적인 분위기. 거기에 저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조명도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어 꿈꾸는 듯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한마디로, 좋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괜찮은 밴드를 눈앞에 두고서도 어째서인지 재환의 시선은 자꾸만 무대가 아닌 객석 한구석을 향했다. 흐르는 노래의 박자 따라 가볍게 흔들리는 분홍 머리칼, 그 곁에 바짝 붙어 있는 또 다른 남자의 뒷모습. 의지와 상관없이 그곳으로 눈길이 이끌렸다. 그러다 둘 중 한쪽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서 상대에게 귓속말이라도 건넬라치면, 들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중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음 올라온 마지막 팀이 메탈 밴드라는 점이었다. 무엇이 다행인고 하니, 공연 내내 옆자리 앉은 태군이 하도 요란하여 재환은 다른 곳으로 정신을 돌릴 틈이 없었다. 오히려 힐끔힐끔 이쪽을 향하는 다른 이들의 눈초리를 신경 써야 할 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군은 머리털 한 올 없는 정수리가 벌겋게 익을 정도로 난리 부르스를 떨었다. 나중에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펄쩍펄쩍 뛰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몇 번이나 ‘이게 네 공연이냐’ 하는 말이 재환의 목젖을 쳤다. 대신 재환은 지우와 눈을 맞추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러고 싶은 걸 우리 밴드에서 어떻게 참고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재환은 조금 웃었다. 실실, 숨죽여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네 밴드가 무대에 섰을 때보다 더 흥이 오른 태군은 모든 공연이 끝나고 클럽 밖으로 나왔을 때 뒤풀이 뒤풀이 노래를 불렀다. 여전히 ‘친구’와 딱 붙어 있는 한영은 당연히 내켜 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재환도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결국 불쌍한 지우가 희생양이 되었다.

‘먼저 간다-!’ 하고서 지우의 팔을 거머쥔 태군이 술집이 즐비한 먹자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하여 간간이 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길가에 덩그러니 세 사람이 남았다. 이윽고 예고된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태군이 간 방향을 응시하던 재환은 핸드폰을 꺼내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차 주인이 술집으로 끌려갔으니 이곳으로 왔을 때처럼 지우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기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다행히, 막차 시간까지는 아직 그럭저럭 여유가 있었다. 지하철도 버스도 충분히 다닐 거라는 얘기였다.

“넌 알아서 갈 거지? 그럼 나도 간다.”

‘아, 응….’ 하는 한영에게는 손을 흔들고 그의 옆에 있던 남자에게는 고개를 꾸벅였다. 가뿐히 뒤를 돈 재환은 손에 들린 페달 보드 가방을 고쳐 쥔 뒤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남은 두 사람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해서는 굳이 관심 두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문득 귀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을 재환은 잠시 멈춰 서서 페달 보드 가방 앞주머니를 뒤적였다. 한결같이 줄이 꼬일 대로 꼬인 이어폰을 꺼내 찬찬히 줄을 풀었다. 그러고서 핸드폰에 연결한 이어폰을 한쪽씩 귀에 꽂을 즈음, 은색 택시 한 대가 씽 곁을 지나쳐 갔다.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재환은 찰나와 같은 순간 차 안에 있는 분홍 머리칼을 보았다.

핸드폰으로 음악 켜는 것도 잊고 노란 번호판이 달린 차 뒤꽁무니가 멀어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여기서 집까지 택시 타고 가면 요금 장난 아닐 텐데. 딱 그런 궁상맞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남이사. 오늘 누군가에게 뱉었던 말을 다시금 속으로 중얼거린 재환은 한참은 더 가야 나오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돌아가는 길이 내리막길이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 * *

내리막길이면 무엇 하나. 괜히 발을 미적거리는 바람에 정류장에 다다른 건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지나서였다. 끙, 소리를 내며 정류장 벤치에 엉덩이를 붙인 재환은 남은 버스 도착 시간이 온통 15분, 20분 따위라는 내용만 보여 주는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푹 한숨이 나왔다.

버스는 잘 오지도 않는 10차선 대로에 택시는 많이도 지나갔다. 그때마다 ‘미친 척하고 한 대 잡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툭툭 재환을 건드렸다. 물론 실행에 옮길 의지도, 돈도 없었다.

17분이 걸린다던 집 가는 버스는 거의 20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그렇다고 기사 아저씨에게 짜증 낼 일이 아님을 잘 알기에, 그러는 대신 카드를 찍으며 고개를 꾸벅인 재환은 버스 맨 뒷자리로 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버스는 거의 텅텅 비어 있다시피 했지만, 악기까지 두려면 여러모로 뒤에 앉는 것이 편했다.

옆자리에 무거운 기타 가방과 페달 보드 가방을 내려놓은 재환은 귀에 꽂힌 이어폰을 한 번씩 꾹 안쪽으로 누른 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은 어둡고 안은 밝은 탓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남자의 얼굴이 차창에 지나치게 또렷이 비쳤다. 역시나 머리는 두서없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오래 봐서 좋을 꼴이 아니었으므로 재환은 애써 초점을 저 멀리로 두었다.

주말을 앞둔 밤인데도 거리에는 다니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블록처럼 틈 없이 늘어선 건물들도 불이 꺼진 곳이 대부분이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따라 줄이 흔들려 그새 귓구멍에서 또 느슨하게 빠져나온 이어폰에서는 때마침 재환이 좋아하는 슈게이징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가을밤인 양 고독을 불러일으키는 거리 풍경과 몽롱히 귓가를 울리는 기타 사운드, 그리고 승객 없는 버스. 상념에 빠지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콩, 재환은 차창에 옆머리를 기댔다.

한영이 섹스 잘하죠?

쯧. 버스 안에 사람도 별로 없겠다 재환은 맘 놓고 큰 소리로 혀를 찼다. 그딴 거 내가 알겠냐.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아서도 안 되는 거였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제게 투척하는 남자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그냥 확 잘한다고 대꾸할 것 그랬나. 그럼 그 곱상한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까. 상념은 점점 더 쪼잔한 망상으로 뻗어 나갔다.

좁은 화장실에서 아예 남자와 드잡이를 하고 싸우는 데까지 몹쓸 상상력이 도진 재환은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즈음 신호에 걸린 버스가 멈춰 서며 브레이크에서 칙,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멍한 시선을 창 아래쪽으로 내리자 옆 차선에 서 있는 은색 택시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결에 재환은 택시 뒷좌석을 살폈다. 물론 이 각도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는 보다 쓴웃음에 가까운 웃음이 비어졌다. 한심하다, 한심해. 서재환 너 진짜 한심하다. 거듭 속으로 자신을 향한 타박을 날리며 재환은 매끈한 차창에 쿵쿵 이마를 박았다. 그사이 기어를 바꾼 버스가 다시 출발하며 초록빛을 반뜩이는 신호등 아래를 지났다. 동시에 우회전하여 멀어지는 택시의 후미등이 재환의 시야에 흐릿한 궤적을 남겼다. 다른 택시를 또 눈으로 좇게 되기 전, 재환은 스르르 눈꺼풀을 내려 버렸다.

연신 덜컹거리는 뒷좌석에서 제대로 졸지도 못하는 사이, 어느덧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찌감치 손에 쥔 카드를 리더기에 찍은 재환은 터덜터덜 길가로 내려섰다. 씽씽 불어 나오던 에어컨 바람에 식혀진 살갗 위로 덥고 습한 공기가 스몄다. 얼마 걸음을 떼지도 않아 금세 온몸에 끈적한 기운이 감돌았다.

걷는 내내 몇 번이나 어깨를 들썩여 기타 가방을 고쳐 멘 재환은 집이 있는 좁다란 골목 어귀에 접어들었다. 그곳에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유일하게 불이 훤히 밝혀진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짤랑짤랑 종소리를 내며 닫히는 유리문을 뒤로하고 곧장 주류 코너로 갔다. 시원한 기운이 쏟아지는 냉장고에서 흑맥주 캔 두 개를 빼 든 재환은 과자 진열대를 지나치다 감자칩 봉지도 하나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평소 피우는 담배도 한 갑 달라고 한 뒤 카드를 내밀었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결제 알림 문자를 받고서 지잉, 미약한 진동음을 울렸다.

또 한 번 맑게 흩어지는 풍경 소리와 함께 재환은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군데군데 말라붙어 있는 라면 국물을 피해 퍼런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맥주 캔과 과자 봉지를 내려놓았다. 내처 기타 가방까지 벗고 철퍽 테이블과 같은 색의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가까이 의자를 끌자 아스팔트 바닥에 스친 의자 다리가 덜덜덜 요란한 마찰음을 일으켰다.

영 부실해 보이는 의자 위에서 그럭저럭 편한 자세를 잡은 재환은 주저 없이 맥주 캔 꼭지를 들어 올렸다. 부글부글 새어 나오는 거품을 쪽 빨아들인 뒤 단숨에 절반 가까운 양을 꿀꺽꿀꺽 삼켰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야심한 시각 편의점 앞에서 혼자 이러고 있는 꼴을 꽤나 청승맞다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재환 나름의 소박한 공연 뒤풀이였다. 돈도 아끼고, 주위는 조용하고. 얼마나 좋아. 덥다는 게 유일하고도 치명적인 문제점이었지만, 어차피 집 안이나 밖이나 열대야의 마수를 벗어날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좀 몰아내고 나서야 재환은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감자 맛보다는 짭조름한 맛이 강한 칩을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어 삼켰다. 그 뒤에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또 감자칩을 씹었다. 이를 몇 번 반복하니 한 캔이 금세 비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다음 캔을 딸 무렵, 등 뒤편에서 편의점 문에 달린 풍경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마 안 가 또다시 딸랑딸랑 소리가 울리고, 옆에 있던 다른 테이블에 사람 하나가 와 앉았다. 무심코 그쪽으로 눈을 돌린 재환은 상대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어….”

최근 얼굴을 보지 못했던 옆집 사는 고시생이었다. 소음 문제로 아주 사소한 갈등이 몇 번 있기는 했으나, 안면몰수할 사이는 아니므로 재환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집에 있다 나왔는지 다소 후줄근한 차림의 상대도 재환에게 같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그가 앉은 테이블에는 초록색 소주병 두 개가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힌 채로 올려져 있었다.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 편의점 앞 길가. 미지근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간간이 꼴깍꼴깍 음료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크, 하고 술의 쓴맛을 삼키는 추임새가 종종 뒤따르기도 했다. 종이컵 하나 없이 초록 병 주둥이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기를 반복하는 고시생을 흘긋거리던 재환은 제 앞에 놓인 감자칩 봉지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 감자칩은 절반도 줄지 않았다.

“저….”

봉지 귀퉁이를 잡아 테이블 끄트머리로 밀었다. 옆자리에서 손을 뻗으면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였다. 재차 병나발을 불려다 멈칫한 고시생이 콧잔등 중간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추어올리며 재환을 보았다.

“드세요. 많아서.”

“아, 예…. 감사합니다.”

멋쩍음 섞인 공기 속, 살이 없어 뼈대가 두드러진 손이 쭈뼛쭈뼛 뻗어 와 감자칩을 꺼내 갔다. 내심 혼자 먹기가 마음에 걸렸던 재환은 그제야 편히 봉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다만 양쪽에서 울리는 과자 씹는 소리는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딱히 풀어 주지 못했다.

“날이 덥죠…?”

결국 재환은 모자란 말주변을 동원해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래 봤자 나간 말은 꽤나 싱거운 것이었다.

“뭐…, 여름이니까요.”

거기서 대화는 다시 끊겼다. 저쪽도 만만치 않게 멋없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벽 너머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펄쩍 뛰며 예민하게 굴었던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하긴, 사람이 공부만 하다 보면 괜히 더 날카로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럴 때마다 ‘예, 예. 죄송합니다.’ 하며 머리 숙이는 것도 한두 번이었지만.

그랬던 지난날을 청산하자는 거창한 의미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나란히 앉아 술 마시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인연이다 싶어 재환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단, 주제가 크게 바뀌지는 못했다.

“집도 많이 덥죠?”

“예, 죽겠습니다. 맨날 사우나 하는 기분이에요.”

그래도 이번에는 비교적 답변이 길었다. 이 시기쯤이면 서로 같은 고통을 공유하고 있을 테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손가락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와 소금을 살살 비벼 털며 재환은 못내 긍정했다.

“그러게요. 선풍기 틀어도 거기서 거기에요.”

“난 선풍기도 고장 났어요.”

“아….”

“모터가 아예 타 버렸어.”

웃고 넘기기에는 속 편히 남의 일로 여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여 지금 제집에 있는 선풍기는 산 지 몇 년이나 됐을지 속으로 헤아려 보던 중, 대뜸 고시생으로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주제의 질문이 건너왔다.

“밴드는 잘돼요?”

“예?”

제법 놀라 반문한 재환은 언제 내가 밴드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 하고 재빨리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나 서로 얼굴도 잘 안 마주치는 사이에 그런 대화를 나눴을 리 만무했다. 감자칩 몇 개를 더 가져간 고시생이 덤덤히 부연했다.

“아닌가? 집에서 나는 소리도 그렇고, 악기 가방 갖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밴드 하는 줄 알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저렇게 버젓이 기타 가방을 옆에 두고 있었다. 하릴없이 재환은 조금 쑥스러워졌다. 의도치 않게 밴드 한다고 동네방네 티를 내고 다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밴드 하고 있어요. 근데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음악은 어떤 거?”

“그냥, 모던 록 계열이요.”

‘아, 모던 록.’ 하며 고시생은 그새 다 마신 병을 옆으로 치워 두고 새 소주병을 땄다. 편의점 불빛을 역광으로 받은 얼굴에 거뭇거뭇 돋아난 수염 자국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겸연쩍은 마음도 숨길 겸 재환은 이야기 흐름상 자연스러울 법한 질문을 그에게 건넸다.

“음악 좋아하세요?”

고시생은 병 입구까지 가득 찬 소주를 마치 물이라도 되는 양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 하고 손등으로 핏기 없는 입술을 문지르고서 답을 내놓았다.

“좋아한다기보다, 나도 옛날에 했었어요. 밴드.”

“진짜요?”

놀람이 커 생각보다 훨씬 큰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눈까지 함께 휘둥그레 뜨였다. 정작 깜짝 놀랄 말을 꺼낸 고시생은 표정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감자칩 몇 개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고 와작와작 씹었다.

“그냥, 대학생 때 잠깐.”

“악기 뭐 하셨는데요?”

밴드를 했다고 하면 보컬이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기타를 치는 재환으로서는 도리 없이 무슨 악기를 연주했냐는 질문이 먼저 나갔다. 다행히 고시생이 밴드에서 맡았던 역할은 보컬이 아니었다.

“드럼이요.”

재환의 놀란 마음이 한층 커졌다. 조금이라도 시끄러운 소리가 날라치면 학을 떼던 고시생이 밴드에서, 그것도 드럼을 쳤었다니. 이렇게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거였다. 동시에 보다 많은 질문이 퐁퐁 솟아올라 재환의 혀를 간질였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제대로 얘기를 나눠 본 상대에게 어디까지 물어도 될지 금방 판단이 서지 않았다. 유들유들하게 대화를 이끌어 갈 요령이 없는 탓도 있었다. 그래서 그냥,

“그러셨구나….”

하고 열없이 웅얼거렸다. 그랬더니 고시생은 의외로 먼저 자신의 얘기를 조금쯤 더 들려주었다. 본인이 했던 팀은 어쿠스틱한 음악을 했고, 클럽 공연도 꽤 했으며, 앨범까지 몇 장 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재환은 종내 가장 궁금한 것 하나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밴드 이름이 뭐였어요?”

“아, 밴드 이름….”

어물쩍 말꼬리를 흐린 고시생은 언제 또 다 비웠는지 모를 소주병을 쓱 빈 병 옆으로 밀었다. 그러고는 자잘하게 보풀이 일어난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해진 담뱃갑을 꺼냈다. 덩달아 휘어진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서 뻐끔뻐끔 뿌연 연기를 뱉었다.

“까먹었다.”

“하….”

양말 바닥에 쩍쩍 들러붙는 장판 위에서 휘청휘청 몇 걸음을 뗀 재환은 그대로 철퍼덕 매트리스에 쓰러졌다. 흥건히 땀에 젖은 옷은커녕 기타 가방을 벗을 기력조차 없었다. 이러다 내일까지 일어나지 못해 출근도 못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제법 그럴듯한 걱정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재환은 정말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무리 왜소하다 한들 성인 남자 하나를 질질 끌고 한참을 걸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 취해 픽 고꾸라질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옆에서 소주를 물처럼 마시기에 내심 ‘술 잘하시네’라고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자기 했던 밴드 이름을 까먹었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아니, 술술 본인 얘기를 꺼낼 때부터라도.

이제 와 한탄해 봤자 다 무슨 소용이람. 어찌 됐건 술 취한 고시생을 무사히 집까지 모셔다 놓았으니 이웃으로서 할 도리는 모두 한 셈이었다. 물먹은 듯 늘어지는 몸을, 그것도 기타 가방까지 멘 채로 부축하다 확 길바닥에 두고 가 버릴까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옆집 사는 사람이 동네에서 객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는 절대 사절이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이 제일 먼저 참고인으로 불려갈 터다.

이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걸 보니 저 또한 맛이 가긴 간 모양이었다. 씻는 건 둘째 치고, 당장에도 바윗덩이처럼 등을 짓누르고 있는 이 기타 가방부터 좀 벗어야 했다. 이대로 잠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낑낑대며 몸을 일으킨 재환은 등에서 내린 가방을 열어 기타를 꺼냈다. 그것을 방 한편에 곱게 세워 두고 또 낑낑거리며 몸에 쩍 붙은 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개어 둘 힘도 없어 대충 방구석으로 툭툭 차 버린 뒤 비척비척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래. 이렇게나 땀을 많이 흘렸는데 인간적으로 씻고는 자야지. 따위를 중얼거리며 샤워기 물을 틀었다.

후딱 찬물로 씻고 나온 재환은 몸에 물기도 덜 마른 상태로 저벅저벅 방바닥을 밟았다. 그 바람에 짧은 걸음을 옮기는 사이 발 떼는 자리마다 동그란 물 자국이 생겨났다. 닦을 생각일랑 하지도 못하고 방 절반을 차지하다시피 쫙 펼쳐져 있는 건조대 앞으로 가 섰다. 그 위에 나름 가지런히 널어놓은 빨래를 손으로 만져 본 재환은 낭패감에 빠졌다.

아무리 날이 습하기로서니, 빨래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났건만 아직도 옷들에 축축한 감이 남아 있었다. 속옷도, 집에서 입는 헐렁한 반팔, 반바지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젖은 게 싫어 기껏 씻고 나왔는데, 그 위로 또 이렇게 덜 마른 옷을 입을 수는 없었다.

결국 속으로 ‘에라, 모르겠다!’를 외친 재환은 불은 끄고, 선풍기는 켜고서 팬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풀썩 매트리스에 엎어졌다. 물론 이 더위에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멀지 않은 앞집 건물에서 훤히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보든 말든 외설죄로 신고나 안 하면 됐지 싶었다.

그것마저도 금방 ‘신고하면 뭐 어때’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너무 졸렸다.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눈 감는 순간 까무룩 의식이 날아갔다. 얼마 안 가 눅눅한 기운이 만연한 방 안에 색색 고른 숨소리가 퍼졌다. 아직 끄떡없다는 듯 어둠 속에서도 선풍기는 털털 열심히 돌아갔다.

* * *

“오빠, 목소리가 왜 그래요?”

“응…?”

직원 휴게실에서 나와 인사를 건네자마자 돌아오는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재환은 멈칫했다. 놀란 상지의 목소리가 제법 컸던 탓인지, 손님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던 희연이 조르르 두 사람 곁으로 달려왔다. 그녀 또한 친구의 걱정에 동참했다.

“헐, 오빠 얼굴 완전 안 좋은데요?”

재환은 급한 김에 옆에 있던 냉장고 유리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도대체 어떻길래, 싶었다. 하지만 유리 건너편에 있는 우유에만 자꾸 초점이 맞춰져 얼굴 상태가 확실히 가늠되지 않았다.

“재환이 너 상태가 왜 그래?”

때마침 가게로 들어선 세훈 역시 재환을 보고는 다른 두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척 손을 올려 재환의 이마에 손을 얹기까지 했다. 동시에 팍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펄펄 끓으면서 가게 온 거야?”

유독 서늘하게 느껴지는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재환도 손바닥으로 짚어 보았다. 뜨거웠다. 하나 사람의 체온이라면 원래 이 정도는 뜨거워야 되는 같았다. 다만 땀이 흥건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 순간에도 가게 안에는 뜨거운 음료를 마셔도 덥지 않을 만큼 씽씽 에어컨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련한 재환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가 온전치 않음을 깨달았다. 온전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

순간 아찔 현기증이 도진 재환은 급히 카운터 모서리를 두 손으로 짚었다. 자동적으로 푹 고개를 숙이자, 눈알은 물론이고 두개골 안의 뇌까지 아래로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아뜩한 감각이 끼쳤다. 한마디로, 이대로 픽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재환은 출근한 지 채 10분도 채우지 못해 등이 떠밀려 가게 밖으로 쫓겨났다. 어째 오늘은 아침부터 몸이 좀 으슬으슬하다 싶더라니, 진작 상태가 고장 난 것이었다. 어제 뜻하지 않은 이유로 체력을 소비한 게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기세 좋게 홀딱 벗고 잠이 든 게 원인이었을까. 아무래도 둘 다인 것 같았다.

이윽고 집 가는 길에 들른 어쩌고 이비인후과에서 재환은 무려 ‘여름 감기’라는 영광스러운 진단을 받았다. 개도 안 걸린다는 그 여름 감기 말이다. 그래서인지 병원 건물 1층에 있는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사서 나올 때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축 아래로 떨어졌다. 아파서가 아니라, 쪽팔려서 그랬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바야흐로 제대로 된 싱글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지우가 잘 안다는 스튜디오에 가서 드럼을 녹음하기로 했고, 또 하루는 날을 잡아 한영의 집에서 나머지 악기를 녹음할 계획도 세워 두었다. 그러고 나서 보컬까지 녹음해야 겨우 싱글 준비의 반 정도가 끝나는 셈이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로 우선 가믹스 파일을 만들어 유통사에 보내야 했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발매 스케줄을 잡을 수 있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믹싱만 해도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마스터링 스튜디오는 아직 확실히 정하지도 못했다.

미치겠네…. 집을 향해 더딘 걸음을 내딛던 재환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안 그래도 무거운 머리 위로 쿵쿵 돌덩이가 얹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앓고 있을 새가 없는데. 이럴 때일수록 내가 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나약해진 몸을 비웃듯 의지만 저만치를 앞서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밴드에서 싱글이라도 한 번 발매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재환 자신이 유일했다. 그래도 과거 보고 배운 게 있으니까, 제가 더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리 빌빌대고나 있으니…. 거기에 제일 바쁜 주말, 다른 카페 사람들에게 일을 떠맡겼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재환은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저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했다.

넘치는 자책과 걱정이 가뜩이나 굼뜨게 나아가는 걸음을 한없이 지체시켰다. 결국, 평소 같았으면 10분 만에 도착했을 목적지에 재환은 20분이 걸려서야 겨우 다다랐다. 이마를 흥건히 적신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벌건 벽돌이 덕지덕지 발라진 연립 주택 3층을 올려다보았다. 여름날 날개 달린 벌레쯤 가뿐히 날아드는 저 높이가 지금은 마치 10층, 30층처럼 느껴졌다.

삐질삐질 식은땀을 쏟으며 거의 기어가듯 3층까지 오른 재환은 복도 초입에 서서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제만 해도 별문제 없던 몸뚱이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 지경이 될 수 있나 싶어 헛웃음이 다 났다. 슬쩍 복도 창밖으로 내다본 골목은 오늘따라 아주 햇살이 만발이었다. 꼭 약 올리는 것 같았다.

애먼 해님이나 탓하며 어둑어둑한 복도를 힘없이 걸은 재환은 마침내 반가운 현관문 앞에 이르렀다. 당장이라도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으나, 이는 조금 뒤로 미뤄야 했다. 대신 동그란 문고리에 걸린 정체 모를 검정 비닐봉지로 손을 뻗었다.

봉지 위에 붙어 있는 누런색 포스트잇을 떼어 내 눈앞으로 가져갔다. 종이 끄트머리에 거뭇거뭇 때가 탄 포스트잇에는 제법 어른스러운 필체로 ‘어제 죄송했습니다’라는 짤막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 메모의 주인공이 누구일지는 굳이 짐작해 볼 필요 없을 듯했다. 은근 세심한 구석이 있네, 생각하며 재환은 흘긋 옆집 문을 한 번 쳐다보았다.

한 손에는 약봉지,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쥐고 문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뒤축을 번갈아 가며 밟아 답답한 운동화를 벗었다. 끈끈한 장판 위로 올라서며 봉지를 벌려 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픽, 맥없이 웃었다. 상대가 보내 준 성의에 이런 태도를 비치면 안 되겠지만, 안에 두둑이 담긴 즉석 밥을 보니 웃음이 안 나갈 수가 없었다. 어림잡아 열 개는 되지 싶었다.

그럼에도 혼자 사는 이에게 이만큼 유용한 선물이 없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벽 너머에 있는 이에게 속으로 심심한 감사 인사를 전한 재환은 좁은 조리대 위에 툭 봉지를 올려 두었다. 단 몇 걸음 거리에 있는 매트리스로 가 픽 쓰러졌다. 진심으로 지금은 저 즉석 밥을 꺼내 정리할 힘도, 옷 갈아입을 여력도 없었다. 그냥 한숨 좀 자고 싶을 따름이었다.

몸을 작게 옹크려 오슬오슬 몰려오는 한기를 버틸 즈음, 바지 주머니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허리를 꿈지럭거리며 핸드폰을 빼 든 재환은 가늘게 뜬 눈으로 화면에 뜬 메시지를 응시했다.

[대타 구해놨으니까 나을 때까지 출근할 생각 하지마!]

어투만 보면 꽤나 야박하게 읽힐 법한 세훈의 메시지에 재환은 불현듯 눈가가 시큰해졌다. 괜한 말이 아니라, 정말로 코를 한 번 훌쩍여야 했다. 몸에 열이 오르니 마음까지 속없이 물렁물렁해지는 모양이었다. 꼴사납게.

‘감사합니다, 사장님’ 하고 답장을 보낸 재환은 그대로 다시 잠을 청하는 대신 밴드 단체 채팅방을 열었다. 당장 이틀 후인 다음 주 월요일이 드럼 녹음 날이었지만, 내일 안으로 몸 상태가 말끔해질지 아무래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악으로 깡으로 녹음실에 갈 수는 있겠으나, 그랬다가 다른 멤버들에게 이 고약한 감기를 옮기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조금이라도 덜 염치없는 쪽을 택하는 게 나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꾹꾹 액정의 자판을 눌렀다.

며칠만이라도 녹음 일정을 늦춰 줄 것을 멤버들에게 간곡히 부탁한 재환은 답장도 확인하지 못한 채 핸드폰을 툭 매트리스 위로 떨구었다. 발치에 걸리는 이불을 낑낑거리며 목까지 끌어 올렸다. 한여름 날, 이게 무슨 처량한 처지인지 한탄할 새도 없이 눈꺼풀이 아래로 늘어졌다. 벌써 감기약을 사발로 먹은 듯 의식이 몽롱하게 가라앉았다.

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겨이 떴다. 사위는 온통 껌껌한 가운데, 무언가 바스락대는 소리가 살살 귓구멍을 건드렸다. 더듬더듬 팔을 뻗어 협탁 위 스탠드를 켠 재환은 어렵사리 상체를 일으켰다. 무심코 손으로 짚은 자리가 온통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질질 발을 끌며 경계가 모호한 부엌으로 간 재환은 간지러운 소리의 출처를 발견했다. 창 너머로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 즉석 밥이 담긴 봉지가 부스럭부스럭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얼핏 드러난 포장의 뽀얀 밥 사진이 꺼끌꺼끌한 입 안에 살짝이나마 침을 돌게 했다.

즉석 밥으로 흰죽을 끓인 재환은 냉장고에서 반찬 몇을 꺼내 그럭저럭 한 끼를 때웠다. 꼬박 반나절을 잠에 취해 있었음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몸 상태를 생각하면 이만큼이라도 차려 먹은 게 용했다. 차마 설거지까지 할 기운은 없어 싱크대에 빈 그릇을 던져두고 처방받아 온 약을 먹었다. 먹은 밥이 소화가 되건 말건 다시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대로 가물가물 잠에 빠지기 전, 베개 밑을 더듬어 핸드폰을 꺼내 그사이 온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참으로 고맙게도, 지우가 곧바로 녹음 스케줄을 옮겨 두겠다는 답을 보내 놓았다. 그 아래로는 ‘헐, 괜찮음? 병원 댕겨옴?’ 하는 태군 나름의 걱정 어린 메시지도 있었다. 다만….

무심코 나머지 한 사람이 보낸 메시지를 찾던 재환의 눈썹이 푹 찌푸려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싶은 마음이 들어 휙휙 고개를 저었다. 감기가 무슨 대수라고. 별말 않을 수도 있지.

그렇게 뒤따라오려는 서운함도 함께 걷어 낸 재환은 톡톡 화면을 두드려 지우와 태군에게 고맙고, 병원도 잘 다녀왔다는 답장을 전송했다. 그러자마자 곧바로 한 사람이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그럼에도 딱히 올라오는 메시지가 없어, 얼른 화면을 끈 핸드폰을 픽 옆으로 던졌다. 혹 새 메시지가 도착하더라도 불 켜진 화면이 보이지 않게끔 아예 뒤집어 놓기까지 했다. 불빛에 방해받지 않고 푹 자기 위한 행동이었다. 진짜였다.

이번에는 정말 약 기운에 취해 꼭 마취총에 맞은 것처럼 곯아떨어진 재환은 다음 날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거의 12시간을 잔 셈이었다. 여기에 어제 낮에 잔 시간까지 포함하면, 꼬박 하루를 잠으로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시간을 허투루 쓴 적이 없던 재환에게는 생소하면서도 적이 마음 불편한 일이었다. 그러고서 감기라도 뚝 떨어졌으면 모르겠는데, 컨디션은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아파 약해진 마음에 무시 못 할 허무함과 우울함이 찾아왔다. 짜증 나고 속상했다.

잔뜩 가라앉은 기분에 날씨까지 톡톡히 일조했다. 어째 이번 장마는 얌전히 지나갔다 했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 북상한 태풍이 온종일 하늘에서 야멸차게 비를 쏟아 냈다. 덕분에 해 뜨는 날에도 빛이 들까 말까 한 집 안이 온통 거무튀튀한 잿빛에 잠겼다. 덜컹덜컹 창을 뒤흔드는 살벌한 빗소리는 또 어떻고. 거지같은 날씨에 거지같은 컨디션. 종합적으로 참 거지같았다.

그 와중 옆집 고시생이 주고 간 즉석 밥이 재환에게 아주 효자 노릇을 했다. 때마침 냉동실에 얼려 둔 밥이 똑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마저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쌀 씻고 밥할 기력이 있을 리 만무하니 영락없이 쫄쫄 굶었을 터다. 그러니 재환은 감히 고시생을 향해 은인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즉석 밥으로 죽을 끓여 먹고, 꼬박꼬박 약 챙겨 먹고, 며칠을 더 내리 앓은 재환은 화요일 아침에 다다라서야 마침내 가뿐한 상태로 눈을 떴다. 몸 상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눈에 비치는 풍경 또한 그랬다. 어제만 하더라도 바깥의 먹구름이 새어 들어왔나 싶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던 공간에 나름 햇빛이라 부를 만한 것이 은은히 흘러들고 있었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창가로 갔다. 내도록 닫아 놓았던 창문을 힘껏 열어젖히자, 드문드문 구멍이 뚫린 방충망을 통과해 제법 상쾌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시원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사흘을 꽁꽁 이불에 싸여 있던 재환에게는 이것도 충분했다. 보다 밝게 들이친 햇살이 더위보다는 포근함을 건넸다.

방충망 군데군데에 맺힌 빗방울을 괜히 손끝으로 톡톡 두드려 털어 내던 중, 재환은 저 아래 길가에 쓰레기봉투를 내놓는 아랫집 할머니를 발견했다.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에게 ‘에비, 저리 가!’ 하고 휘휘 손을 젓는 할머니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저러면서도 할머니가 가끔 고양이들에게 남은 밥을 챙겨 준다는 것을 재환은 알고 있었다.

일단 화장실로 들어가 깨끗이 씻고 나온 재환은 두 팔 걷어붙이고 부엌에 섰다. 몇 날 며칠 심심한 죽으로 연명한 탓에 좀 자극적인 맛이 당겨 모처럼 김치찌개를 끓였다. 폴폴 김이 나는 찌개가 있으니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이번에도 고시생의 즉석 밥은 기특하게도 제 몫을 해 주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밥이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주말 내내 손도 못 댔던 집안일에 돌입했다. 바짝 마를 대로 마른 빨래들을 개고, 허리 숙여 가며 핸디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에 걸레질도 했다. 오늘이 쓰레기 수거일임을 상기하며 집 안 곳곳의 쓰레기도 싹싹 그러모았다. 혼자 사는 좁은 집에 쓰레기는 왜 이리 항상 많이 나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봉투 하나에 야무지게 쓰레기를 꾹꾹 눌러 담은 재환은 자못 뿌듯한 마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이게 도대체 얼마만의 외출인지 가늠해 보며 도로 문을 닫으려는데, 문고리에 걸린 채 부스럭대는 비닐봉지로 눈이 갔다. 손에 쥐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잠시 복도 바닥에 내려놓은 후 의문의 봉지를 집어 들었다.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봉지 안에는 참치 죽이니 소고기 죽이니 하는 각종 레토르트 죽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심지어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짓날 팥죽까지 있었다. 못해도 다 합쳐 열 개는 넘을 듯한 죽을 의심스럽게 살피던 재환은 얼굴을 들어 옆집 문을 보았다.

내가 아픈 건 어떻게 알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것 같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요 며칠 집 밖으로 한 발짝 나온 적도 없는데, 자신이 아파서 고생한 걸 어찌 알았나 싶었다. 하지만 정작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이미 즉석 밥을 받아 잘 먹은 상황에서, 이 많은 죽을 또 넙죽 받는 건 역시 과했다. 술 취한 상대를 옮기느라 꽤나 고생을 하긴 했다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사례를 받을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로 형편이 넉넉지 않음을 뻔히 알고 있는데….

죽이 든 봉지를 쥔 채로 재환은 음…, 하며 난처한 소리를 냈다. 그냥 옆집 문에 모른 척 걸어 둘까 싶기도 했으나, 그것도 썩 좋은 생각은 아닌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재환은 현관 안에 봉지를 들여다 놓았다. 다시 묵직한 쓰레기봉투를 집어 올리고서, 일단은 쓰레기 버리러 가는 길을 재촉했다.

* * *

천장에서 은은한 황색 조명이 비추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동안, 재환은 연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계단 벽을 따라 줄줄이 걸린 액자에 그 원인이 있었다. 녹음 스튜디오를 향하는 길답게 액자 안에는 각종 앨범의 재킷 이미지가 담겨 있었는데, 시대는 조금씩 다르나 장르가 시종 일관적이었다. 밴드 음악은 당연히 아니었고, 아이돌 음악 같은 팝 쪽도 아니었다. 트로트였다.

하나같이 가련한 눈빛을 한 트로트 가수들의 얼굴을 뒤로한 재환은 지우, 태군, 한영을 따라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먼저 느껴지는 것은 코를 찌르는 담배 연기였다. 흡연자인 자신의 숨조차 턱 막힐 정도이니 스튜디오의 주인은 대단한 골초임이 틀림없었다. 그 해당 인물로 짐작되는 이가 콘솔 데스크 앞에서 천천히 의자를 돌렸다.

“어, 왔냐.”

“안녕하세요.”

백발이 성성한 머리칼을 뒤로 질끈 묶은 중년의 남자를 향해 지우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재환을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도 지우를 따라 남자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뒤에 있는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하는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는 아니나 다를까 불붙은 장초가 들려 있었다. 데스크 위에 놓인 유리 재떨이 가득 꽂힌 꽁초가 흡사 고슴도치 등 같았다.

제법 옆으로 길어 보였던 낡은 가죽 소파는 남자 넷이 앉자 그야말로 움직일 틈이 없었다. 그 탓에 옆에 앉은 상대와 어쩔 수 없이 서로 어깨가 딱 붙었다. 그리고 오른쪽 끄트머리에 앉은 재환의 옆자리는 공교롭게도 한영이었다. 맞닿은 팔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살결의 감촉이 괜스레 피부 위로 잔소름을 일으켰다. 굳이 이를 버틸 필요가 없었으므로, 재환은 상체를 조금 앞으로 빼 무릎 부근에 팔꿈치를 대고 깍지를 꼈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쪼르르 앉은 네 사람을 흘긋 눈으로 훑은 남자가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뿜으며 지우에게 말을 걸었다.

“느이 아버지는 잘 있고?”

“뭐, 네.”

“그 양반 요샌 사고 안 쳐?”

“그럭저럭 얌전하세요.”

‘다행이네.’ 하며 남자, 그러니까 오늘 드럼 녹음을 도와줄 엔지니어는 더는 자리가 없어 보이는 재떨이에 꾹 꽁초를 꽂아 넣었다. 방금의 짧은 대화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두 사람은 아무래도 지우의 아버지를 통해 아는 사이인 듯했다. 자연히 재환의 머릿속에 ‘지우 아버님은 뭐 하는 분이시지’ 하는 궁금증이 톡 튀어 올랐다. 물론 구태여 물어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드럼 녹음한다고?”

“예.”

“베이스는? 드럼이랑 같이 녹음해도 되는데.”

엔지니어가 지우 옆에 놓인 베이스 가방을 일별하며 물었다. 실제로 스튜디오 리코딩 시 드럼과 베이스의 녹음을 동시에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 사람은 부스 안에서 드럼을 치고, 또 한 사람은 부스 밖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식이었다. 단, 그럴 경우 둘 간의 호흡이 꽤나 중요할 터였다. 서로의 연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아….’ 하던 지우는 슬쩍 몸을 돌려 옆자리 앉은 태군과 눈을 맞추었다.

“어떡할래? 태군이 너 편할 대로 해.”

“어? 아, 어….”

안 그래도 양옆에 앉은 길쭉한 녀석들 때문에 어깨가 잔뜩 좁아 든 태군이 긴장한 듯 말을 머뭇거렸다. 요 며칠 녹음하기 무섭다고 채팅방에서 징징거리던 것이 그냥 엄살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녹음이 처음이라면 얼마든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재환 자신도 이전 밴드에서 첫 녹음을 했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태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주하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그게 고스란히 귀에 쓴 헤드폰으로 들리니 그렇게 민망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멤버들도 다 듣고 있는 터라 민망함은 배가 되었다. 그것뿐인가. 실수하면 하는 족족 시간은 늘어지고, 또 시간은 비용과 관계가 있으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더라. 아무리 작은 스튜디오라도 한 프로 빌리는 금액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우로부터 아는 기사님이 공짜로 녹음해 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재환은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물론 궁상맞게 티 내지는 못했지만, 넉넉지 못한 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설사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스튜디오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는….

재환은 그새 또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고 있는 스튜디오 안을 눈만 굴려 천천히 둘러보았다. 요즘 스튜디오처럼 세련된 느낌은 없었지만, 놓인 장비들도 꽤 좋은 것 같고, 부스 안에 둔 드럼 또한 상당한 고가였다. 스튜디오 규모도 작지 않았다. 다만 소파 옆 CD 장을 빼곡히 채운 음반들이 재환에게 은근한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거기에 있는 것 또한, 온통 트로트 가수의 앨범이었다.

차마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재환의 불안과 상관없이 녹음이 시작됐다. 일단은 베이스 없이 태군 혼자 해 보기로 했는데, 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비치는 친구의 얼굴이 한층 경직되어 있어 부스 밖에서 지켜보는 재환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커다란 킥과 스네어, 수 개의 탐, 그리고 번쩍거리는 심벌 등으로 이루어진 드럼은 주위 설치된 마이크까지 더해져 뒤에 앉은 태군을 유독 더 작아 보이게 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 왜소했었나, 싶었다.

태군의 긴장은 테스트 연주 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녹음에서 보다 여실히 드러났다. 인트로부터 박자가 왔다 갔다 널을 뛰는 것은 물론이고, 1절 벌스로 들어가는 필인에서 대뜸 엉뚱한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평소 같았으면 할 턱이 없는 실수들이었다. 녹음하며 함께 튼 임시 기타 트랙과 연주가 잘 맞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상황을 좌우에 놓인 커다란 모니터 스피커를 통해 고대로 확인한 재환의 얼굴이 하릴없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렇게 인트로만 치고, 또 치다 훌쩍 1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엔지니어의 재떨이에는 어떻게 또 틈을 만들었는지 다 핀 담배꽁초가 눈에 띄게 늘었고, 담배 생각이 간절해지기는 재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가장 지친 사람은 몇 번이나 ‘다시 갈게요’를 말한 태군일 것이었다. 땀에 젖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부스 밖에서까지 다 보였다.

또 한 번 태군이 힘 빠진 목소리로 ‘다시 갈게요….’를 말할 즈음, 줄곧 말없이 자리를 지키던 지우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새 담배를 입에 문 엔지니어 옆으로 가 빨간 토크 백 스위치를 꾹 눌렀다.

“태군아. 잠깐 쉬었다 할래?”

시무룩한 얼굴로 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음 부스 안에서 나온 태군의 표정은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 좋지 않았다. 늘 보였던 까불까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풀 죽은 꼴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짠한 마음을 품게 했다. 그러니 재환은 의기소침해진 친구에게 무어라 쓴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전의 밴드 같았으면 녹음이 장난이냐, 우리가 취미 밴드냐 등 모진 말을 늘어놓고도 남았을 테지만,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그런 재환 대신 입을 연 것은 역시나 지우였다.

“장태군. 오늘 왜 이렇게 헤매.”

그다지 타박하는 투는 아니었으나 태군은 대답을 않고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한 스틱만 만지작거렸다. 푸, 땅이 꺼져라 한숨 쉬며 매끈한 머리통을 벅벅 긁기도 했다. 그러다 종내 ‘씨발….’ 하는 추임새와 함께 답답하다는 듯 말문을 뗐다.

“존나 외롭잖아.”

“어…?”

웬만하면 잠자코 있으려던 재환은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한영도 조금 커다래진 눈으로 태군을 보았다. 다소 뜬금없는 말을 뱉은 태군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그러다 이내 울컥하는 낯으로 바뀌었다.

“아, 맨날 같이 합주하다 저기 혼자 박혀서 치려니까 존나 어색해 죽겠다고…! 그리고 박자 나가는 건 또 겁내 잘 들려요! 어디 무서워서 치겠냐? 아오!”

봇물 터진 듯 와르르 불평을 쏟아 낸 태군은 있지도 않은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여하간에 요는 늘 네 명이서 함께 합주하다 혼자 드럼을 치는 게 영 낯설고 싫다는 소리였다. 그런 태군이 귀엽기도 하고, 또 어이가 없기도 해 재환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괜히 주워섬긴 변명 같지가 않아 더 그랬다. 그때, 마우스와 키보드를 딸깍이며 모니터 속 트랙을 정리하던 엔지니어가 쓱 의자를 뒤로 돌렸다.

“일단 지금까지 녹음한 거 들어 볼래?”

인트로도 미처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딱히 들을 게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모니터링은 나름 중요한 과정인지라 재환은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멤버들도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을 때, 엔지니어가 톡 자판의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이윽고 기대라고는 요만큼도 비치지 않았던 재환의 눈이 차츰 휘둥그레 뜨였다. 다른 이들도 약속한 듯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태군은 대놓고 ‘헐….’이라며 넋 나간 소리를 흘렸다. 아마 속으로 생각한 바도 서로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저 기사님, 도대체 뭘 한 거지…?

“이 정도면 들을 만하지 않나?”

엔지니어가 수염이 거뭇거뭇 돋아난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태군과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재환은 얼결에 ‘아, 네….’ 하고 어물어물 답했다. 아직도 머릿속에는 ‘뭐지?’라는 물음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놀란 마음이 커 시원찮은 답변을 내놓기는 했으나, 기실 이건 그냥 들을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박자가 어긋나는 부분도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계속 실수가 반복되던 필인도 몇 번에 한 번 겨우 성공한 플레이로 완벽히 대체되어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어 엔지니어가 마법을 부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퀀타이징의 마법.

“자세히 들으면 살짝 어색할 수도 있는데, 어차피 조금씩 틀리는 거야 이렇게 만지면 되니까.”

그제야 모니터 속에서 조각조각 나뉘었다 다시 붙은 드럼 트랙이 재환의 눈에 들어왔다. 저 또한 가믹스 따위를 할 때 몇 번이고 해 봤던 일이었다. 녹음 시 틀린 부분을 싹둑 도려내고 괜찮은 부분을 이어 붙여 멀쩡한 하나의 트랙을 만드는 것이다. 드럼의 경우에는 방금 엔지니어가 그랬듯 박자 단위로 쪼개 어긋난 템포를 맞추는 일도 가능했다. 소위 퀀타이징이라는 작업이었다.

정리하자면, 잠시 재환의 뇌리를 스쳤던 것처럼 엔지니어가 트랙에 말도 안 되는 마법을 부린 것이 아니었다.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을 했다는 뜻이다. 하나 이 짧은 시간 사이 키보드 몇 번 두드려 엉망진창이었던 연주를 저 정도까지 손보았다는 사실이 재환은 그저 감탄스러웠다. 그 마음이 가감 없이 입 밖으로 흘러 나갔다.

“엄청난데요…?”

“엄청나기는. 몇십 년 한 게 이 짓인데.”

손에 쥔 담뱃갑을 반대편 손바닥에 툭툭 내리치며 엔지니어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겸손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이쯤 엄청난 축에도 못 낀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를 보며 재환은 녹음실 여기저기에 놓인 트로트 가수들의 흔적을 어느새 말끔히 잊고 말았다. 그래, 역시 엔지니어는 실력이 중요하지.

“난다 긴다 하는 세션들도 녹음하고선 다 이런 거 해 드려야 돼. 암튼, 잠깐 담배 좀 사 오게 한 15분만 더 쉬었다 합시다.”

몇 번 더 담뱃갑을 두드리던 엔지니어가 느릿느릿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 이 자리에 지금 쉴 틈이 어딨냐고 그를 붙잡을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두꺼운 방음문을 열고 엔지니어가 나가자마자 지우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태군의 어깨에 긴 팔을 올렸다. 평소처럼 무겁다고 성질부리는 대신 태군은 슬그머니 눈썹을 구기며 지우를 째려보았다. 아직 표정에는 의기소침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왜.”

“우리 태군이 그렇게 외로웠어?”

“지랄한다.”

그래도 저런 말을 톡 쏘아붙일 정도면 녹음을 망친 직후보다는 그럭저럭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엔지니어가 들려준 마법 같은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그를 북돋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정말 의도한 게 아니었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이따가는 나도 그냥 같이 녹음해 볼까?”

“그러든가.”

한 박자 늦게 어깨를 돌려 지우의 팔을 떨어뜨린 태군이 볼통하게 답했다. 그런 둘을 옆에서 지켜보던 재환은 슬쩍 입매를 휘었다. 가만 보면, 지우가 태군을 어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인정하건대 재환 자신에게는 저렇게 친구를 살살 달래는 재간이 없었다. 윽박을 질렀으면 질렀지.

따위의 나름 객관적인 자기 평가를 내릴 무렵, 가까이 붙은 한영의 허벅지께에서 얕은 진동이 울렸다. 재환과 틈을 벌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한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 좀.”

무심결에 한영이 쥔 핸드폰 화면으로 눈을 돌릴 뻔한 재환은 ‘어, 응.’ 하고 재빨리 답했다. 금세 문밖으로 쏙 사라지는 분홍 뒤통수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저 또한 이렇게 멍청히 있을 때가 아님을 퍼뜩 깨달았다. 긴장을 풀기 위해 드럼스틱으로 탁탁 탁자 모서리를 두드리는 태군과, 가방에서 베이스를 꺼내는 지우에게 ‘담배 피우고 올게.’라고 짧게 말한 뒤 스튜디오를 나섰다.

휙휙 다리를 벌려 한 번에 계단 두세 개씩을 밟아 1층으로 올라온 재환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잠깐 두리번거리다 건물 입구와 연결된 필로티 주차장 구석으로 가 섰다. 벌써 해가 졌네, 생각하며 입에 문 담배 끝에 칙 라이터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길게 빨아올리자 태군에게 옮은 듯 미미하게 감돌던 긴장이 다소간 누그러졌다. 아무래도 오랜만의 녹음이다 보니 더 신경이 바짝 서 있던 감이 없잖아 있을 터였다.

“…응. 지금 스튜디오야.”

남은 녹음은 좀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으며 재차 연기를 뱉을 즈음, 마냥 덥지만은 않은 밤바람을 타고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재환의 귀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다시 입가로 담배를 가져가려던 손이 멈칫했다.

“아직 몰라. 언제 끝날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재환의 눈이 천천히 굴러갔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필로티 기둥 뒤쪽이었다.

“온다고? 스튜디오에?”

일순 재환의 미간에 폭 얕은 주름이 팼다. 기둥 뒤에 선 상대가 누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필터를 입에 댈 타이밍을 놓쳐 버린 담배 끝에서 치직, 까만 재가 꺾여 떨어졌다.

“아냐. 오지 마. 있을 데도 없어.”

휴.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명백한 안도의 숨이 비어졌다. 근데, 뭐가 안도된다는 거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 곧바로 기둥 너머에서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 내용이 다시금 재환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그냥 집에 가서 기다려.”

그것을 끝으로 더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곧이어 회색 기둥 밖으로 분홍색 머리칼이 빼꼼 내밀어지는 찰나, 재환은 서둘러 뒤를 돌았다. 애먼 담벼락을 노려보며 허겁지겁 필터를 빨았다. 한 번에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켜 목구멍이 아렸다. 그 와중 타박타박 차츰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청각 신경을 곤두세웠다. 미세하게 빨라진 박동음이 담배를 쥔 손끝에서 쿵쿵 울렸다.

“괜찮아?”

언제 급히 뒤돌았냐는 양 재환은 물음이 건너온 쪽으로 휙 몸을 틀었다. 그와 함께 쿵, 당황이 심장을 쳤다. 어슴푸레 그림자 진 한영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다. 슬며시 한 발을 뒤로 물리자 발꿈치가 툭 거칠거칠한 담벼락에 닿았다.

“뭐가?”

짐짓 태연하게 되물었으나 이를 비웃듯 박동은 조금 더 빨라졌다.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던 탓이 컸다. 어쩌면 괜찮지 않은 제 속을 들킨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수순대로 저 자신을 향한 물음이 뒤따랐다. 내가 왜 괜찮지 않아야 하는데? 하지만 한영이 뒤늦게 한마디를 덧붙였을 때, 이 모든 것이 하등 무용한 걱정이 되었다.

“감기.”

“아….”

한순간 맥이 탁 풀린 재환의 혓바닥에 문득 ‘존나 아팠지’라는 말이 고였다. 하지만 절대 소리 낼 수 없었다. 감기가 대수도 아니고, 한영 앞에서 엄살떨고 싶지 않았다. 하찮은 자존심이래도 할 말 없다.

“지금이야 싹 나았지. 죽 먹고 약 열심히 챙겨 먹어서.”

“죽, 먹었어…?”

이상하리만치 반색하는 한영을 보며 재환은 또다시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그즈음, 인기척이 난 듯 가까이 있던 건물 입구에 반짝 센서 등이 켜졌다. 담배 사러 갔던 엔지니어가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쉬는 시간은 이제 끝이라는 의미였다.

“야, 이제 우리도 내려가야겠다.”

“어…?”

“녹음 마저 해야지.”

재환은 절반 가까이 그냥 태워 버린 담배 끄트머리를 툭툭 검지로 튕겼다. 담벼락 위에 있던 종이컵 안에 꽁초를 집어넣고서 아직 등이 꺼지지 않은 건물 안으로 걸음을 틀었다. 재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한영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조금 서둘러서 계단을 내려온 재환은 스튜디오로 통하는 방음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문 바로 옆에 걸려 있는 액자로 시선이 향했다.

아까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액자 안에는 밴드 용광로가 마지막으로 냈던 앨범의 재킷 사진이 들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동아리에서 수록곡 중 하나를 카피한 적이 있어 나름 정확히 기억했다. 저 앨범을 마지막으로 혜성처럼 대한민국 음악 씬에 등장했던 밴드는 다시 혜성처럼 사라졌다.

“안 들어가?”

덥수룩한 장발 남자 넷이 함께 찍힌 흑백 사진을 멀거니 들여다보던 재환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파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응.’ 대답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태군은 부스 안에서 드럼을 치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이 잠잠한 것을 보아 그사이 녹음이 시작된 건 아닌 듯하고, 다시금 손을 푸는 모양이었다. 엔지니어 옆에 앉은 지우 역시 허벅지에 베이스를 올리고 검지와 중지로 줄을 튕기는 중이었다. 그러한 둘의 모습이 어째서인가 재환의 마음을 놓이게 했다. 기실 다시 처음부터 녹음을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잘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찾아왔다.

이윽고 녹음이 재개되었을 때, 재환은 자신이 느꼈던 기대가 마냥 뜬구름 같은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다시 갈게요’라는 말 없이 신나서 드럼을 치는 태군과, 씩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서 여유 있게 손가락을 놀리는 지우를 보며 재환도 덩달아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두꺼운 유리 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기는 했으나, 서로를 감도는 공기는 합주나 공연 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어느덧 재환의 오른손도 피킹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연주 따라 위아래로 까딱였다. 발꿈치로는 가볍게 바닥을 찍으며 박자를 짚었다. 그러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비교적 여유가 생긴 소파 옆자리에 앉은 한영이 붉은 입술을 벙긋거리며 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스피커로 나오는 연주 소리가 제법 커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문득 재환은 그의 노래가 귀에 담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I see you, I see you, I see you….

그 순간, 늘 그랬던 것처럼 재환의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펼쳐졌다. 솨- 소리를 내며 지면을 두드리는 빗줄기 속, 혼자서만 색을 입은 듯 반짝이는 분홍 머리칼이 조금씩 골목 끝으로 멀어지던 그날의 풍경이었다.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아직 그때 빌려줬던 우산을 받지 못했다. 뭐, 합주하다 비 오는 날 다시 집으로 쓰고 가면 될 터다. 비는 언제든 다시 내릴 것이므로.

이 여름이 끝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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