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 *
올해는 장마가 늦어져 이제야 시작이라더니, 밖에서 비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거셌다. 덕분에 거의 닫아 두다시피 한 창문은 안 그래도 실내에 고인 꿉꿉한 공기를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빗소리 못지않게 털털거리며 낡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그래 봤자 꿉꿉한 공기만 좁은 집 안을 빙빙 돌 뿐이었다.
에어컨의 부재를 한탄하기에도 지친 재환은 연신 옷깃을 펄럭이며 마우스 버튼을 딸깍였다. 책상 앞에 앉기 전 물 묻힌 휴지로 노트북의 키보드고 마우스고 열심히 닦았건만, 그새 손에 닿는 표면이 모조리 끈적끈적해진 기분이었다. 기계도 하물며 이 모양인데 사람 몸은 오죽할까. 이렇게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이면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온몸에 찬물을 끼얹었으나, 시원함은 그때뿐이었다. 근데, 노트북은 또 왜 이리 뜨거워.
그럼에도 당장 노트북 뚜껑을 덮고 ‘더워!’를 외치며 매트리스 위로 엎어질 수 없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가까이 있던 선풍기를 발가락으로 조금 더 끌어당긴 재환은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에 ‘가성비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적었다. 엔터 키를 치고 주르륵 화면에 떠오른 내용을 눈으로 훑다가, 이번에는 ‘오디오 인터페이스 추천’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몇 번 더 비슷한 내용을 검색창에 적어 찾아보기를 반복하던 재환은 후, 길게 숨을 뱉으며 비스듬히 기울인 턱에 왼손을 괴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열심히야.
그래도 아무 정보 없이 악기 상가에 가는 것보다야 뭐 하나라도 더 조사해서 가는 편이 나았다. 그건 무슨 물건을 사든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쪽이 먼저 한영에게 오디오 인터페이스랑 마이크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을 꺼냈으니, 성격상 두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왕 약속한 거, 어떻게든 한영이 만족할 만한 물건을 골라 주고 싶었다. 이런 게 바로 오지랖이라는 자각은 얼추 있었다.
‘오디오 인터페이스’ 대신 ‘마이크’란 단어를 넣어 몇 차례 검색을 반복하던 재환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발바닥에 쩍쩍 들러붙는 장판을 가로질러 냉장고 앞으로 갔다. 카페에서 받아온 지 좀 된 더치커피를 꺼내 콸콸 컵에 쏟아붓고, 거기에 찬물을 반절 섞었다. 위에는 동동 얼음을 띄워 올렸다.
그새 표면에 송골송골 물기가 맺힌 컵을 들고 도로 책상 앞에 와 앉았다. 많이 씁쓸하고 그럭저럭 시원한 물을 꿀꺽꿀꺽 삼킨 재환은 다시 마우스 스크롤을 죽죽 아래로 내렸다. 이제는 또 무슨 검색어를 입력해야 하나 잠시 고민할 즈음이었다.
노트북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에서 유독 시끄럽게 느껴지는 벨 소리가 울렸다. 특정 사람에게 전화가 왔을 때에만 울리는 벨 소리였다. 부러 더 신나고 밝은 음악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어, 엄마.”
벨 소리의 경쾌함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전히 오른손은 마우스 위에서 느릿느릿 스크롤 휠을 굴리고 있었다.
“응. 밥 잘 먹고 다녀. 어. 일도 할 만해. 사람들도 다 착하고. 복학은 뭐…, 다음 학기에 해야지. 밴드? 안 해, 그런 거. 돈 벌기도 바빠.”
밴드는 당연히 하고 있었고, 솔직히 말해 복학은 조금 고민 중이었다. 그럼에도 거짓말은 술술 나왔다. 사실, 한두 번 해 본 거짓말도 아니었다.
“재희? 몰라. 나도 연락 안 해. 잘 살고 있겠지.”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집안의 골칫덩이로 전락한 여동생과 언제 마지막으로 연락했는지 재환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 마지막도 아마 돈 좀 빌려 달라는 것이었을 거다.
“그러는 엄마는. 이모랑 잘 지내고 있어? 뭐? 병원?”
인터넷 창이 맨 아래까지 내려간 후에도 계속 의미 없이 마우스 휠을 돌리던 손이 멈칫 굳었다. 왼손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재빨리 오른손으로 옮긴 재환은 스피커 부근에 귀를 더 바짝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병원은 왜? 아니, 얼마나 뎄으면 병원까지 갈 정도야? 그걸 왜 이제 말하는데…!”
점점 더 다그치는 투가 되자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한층 작게 줄어들었다. ‘엄마 괜찮아?’가 먼저인 것을, 이토록 재환은 멋대가리 없는 아들이었다. 하긴, 살뜰한 성격이었으면 어머니가 먼저 연락하게 만들지도 않았을 터다.
“어. 어.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알았어. 다음에 한번 갈게. 엄마도 잘 지내고. 글쎄, 재희 나한테도 연락 안 한다니까. 응, 들어가.”
짧은 통화 시간이 깜빡이는 핸드폰을 내려놓은 재환은 그대로 책상 빈자리에 푹 엎어졌다. 습기를 잔뜩 먹어 끈끈한 기운이 감도는 나무 표면에 옆얼굴을 대고 긴 한숨을 흘렸다. 속이 답답했다.
평생을 가정주부로 살아온 재환의 어머니는 밖에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최근 이모가 일하는 식당에서 같이 일한다고 했을 때, 재환은 펄쩍 뛰었더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안일과 식당 일은 천지 차이였으므로. 하지만 어머니를 말린다 한들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시원히 사업을 말아먹고 난 후, 그들에게는 남은 돈이 없었다. 정말, 땡전 한 푼 없었다.
그래도 계산대 일만 보면 된다기에 마음을 좀 놓고 있었건만, 주방에서 팔을 데었다는 걸 보니 그것도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러게 왜 할 줄도 모르는 식당 일은 한다고 해서는. 다치기나 하고.
“짜증 난다, 진짜….”
그새 더 굵어진 빗줄기가 요란하게 창문을 때렸다. 이 기세라면 보나 마나 집 안 곳곳에 곰팡이가 배로 피어날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도 기타가 습기 먹을 걸 걱정하는 저 자신이 재환은 문득 한심하게 느껴졌다.
털털털 옆에서 유독 시끄럽게 돌아가는 선풍기 대가리에 살짝 손을 얹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모터 부분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거의 온종일을 틀어 놓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끌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올여름만이라도 버텨 주기를 그저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다.
* * *
모처럼 비가 그친 날이었다. 마감까지 일하는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카페를 나선 재환은 핸드폰을 꺼냈다. 2시 25분. 아직 한영이 오기로 한 시간까지 5분 남짓이 남아 있었다. 사실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카페 안에서 한영을 기다려도 상관없었으나,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혼자서만 멀뚱히 시간을 죽이기가 좀 그랬다.
다만, 한영이 굳이 카페 앞을 약속 장소로 잡은 것이 재환은 의아했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거,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도 되었을 텐데. 물론, 그런 사소한 궁금증보다는 앞으로 갈 장소에 대한 설렘이 훨씬 더 컸다.
그럴 만도 했던 게, 이렇게 날을 잡고 악기 상가에 가는 일이 재환에게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가격도, 성능도 만족스러운 물건을 사려면 발품 좀 팔아야겠지만, 그것도 나름 상가 구경의 묘미이니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모처럼 날도 맑았다. 요 며칠 궂은 날씨 따라 축 가라앉았던 마음이 꽤나 들뜰 수밖에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괜히 어깨를 한 번 쭉 위로 당긴 재환은 한영이 나타나리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고개를 뺐다. 슬슬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분홍 머리가 보여야 할 타이밍이었다. 실상 그건 재환의 바람이었고, 평소의 한영을 생각하면 적어도 5분 이상은 늦어질 공산이 컸다. 설마 그 5분도 벌써 지났나 싶어 핸드폰을 꺼내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해 볼 무렵이었다.
빵빵. 멀지 않은 곳에서 제법 커다란 경적이 울렸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핸드폰을 향해 숙어져 있던 얼굴이 자동적으로 휙 위로 들렸다. 동시에 재환은 굳이 소리가 난 곳을 찾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눈이 아플 만치 새빨간 스포츠카가 길가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차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지만, 적어도 저 차가 국산 차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것 같았다. 그런 싱거운 생각도 잠깐이었다. 안에서 밖이 보일까 싶은 조수석의 시커먼 창문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재환의 표정이 멍청하게 풀어졌다.
“유한영…?”
저 차가 외제 차고 자시고, 운전석에 앉아 이쪽을 향해 슬쩍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한영이었다. 그림자 진 이목구비를 자세히 살필 것도 없이, 분홍색 머리칼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윽고 크게 외쳐진 목소리가 재환에게 확신을 안겼다.
“재환아, 빨리 타!”
이게 도대체 무슨….
적잖은 당황을 삼킨 재환은 머뭇머뭇 발을 뗐다. 통유리 너머, 카페의 손님들은 물론이고 카운터 뒤편의 아르바이트생들까지 여길 보고 있다는 것은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냥,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썩 반가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차 안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한영의 집에 가면 늘 맡아지던 은은한 향기와 비슷한 향이었다. 밖에서 들을 때만큼 엔진 소리가 요란하지도 않았다. 대신 스피커에서 딱 귀에 거슬리지 않는 크기로 재환이 좋아하는 모던 록 장르의 음악이 흘렀다.
고개를 젖혀 푹신한 헤드레스트에 뒤통수를 기댄 재환은 차창 밖으로 멍한 시선을 보냈다. 피부를 서늘하게 식히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눈으로만 보는 여름날의 거리는 활기차고, 또 밝은 느낌이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더위로 인한 짜증보다는 환한 생기가 엿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재환의 상태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딱 꼬집어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난데없이 어마어마한 차를 몰고 나타난 한영 때문에 지나치게 놀란 탓일 수도, 꼭 데이트를 가는 것 같은 지금의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낀 탓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좋은 차에 타 본 적이 없어 단순히 몸과 마음이 불편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순탄하지 못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유였다.
스쳐 가는 거리의 풍경을 담던 재환의 눈이 느릿느릿 옆으로 굴러갔다. 흘러나오는 노래의 박자 따라 한영의 기다란 손가락 끝이 톡톡 핸들을 두드리고 있었다. 입가에는 어렴풋한 미소도 스몄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런 한영에게 재환은 기분을 조금 언짢게 만들지도 모르는 말을 꺼내야 했다.
“유한영.”
손가락으로 가볍게 리듬을 타던 손이 순간적으로 핸들을 꽉 움켰다. 마침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도 못했다. 지금처럼 재환에게 ‘유한영.’이라고 불릴 때면 줄곧 힘 빠지는 얘기가 들려왔던 것을 기억하는 한영은 더디게 입을 열었다.
“…어?”
“이 차… 네 거야?”
“형 건데…, 근데 나도 같이 몰아.”
도어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재환은 응…, 대답하며 주먹 쥔 손에 턱을 괬다. 아직 카페 근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창밖 거리를 내다보며 다시 말문을 뗐다.
“차, 네 형한테 갖다 주고 가자.”
“어?”
운전 중에는 전방 주시가 기본이라는 것도 순간 잊고 휙 조수석으로 얼굴을 틀었다. 그래 봤자 한영에게 보이는 것은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재환의 옆얼굴뿐이었다. 마침 노래 하나가 끝난 차 안에 찰나의 침묵이 흘렀다. 내도록 들떴던 마음이 푸시시 가라앉는 소리가 한영의 귓가에 울렸다.
“거기 어차피 주위에 주차할 데도 없어. 워낙 복잡해서 차 끌고 가면 너만 고생할 거야.”
조금 머뭇거리던 한영은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차에 태워 주면 모두 좋아하던데, 재환을 기쁘게 하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 가운데, 누군가의 기타 색처럼 새빨간 차가 도로 위에서 가던 방향을 바꾸었다.
이윽고 차가 도착한 곳은 겉면 전체가 거울 같은 유리로 뒤덮인 10층짜리 건물 앞이었다. 왔다 갔다 하는 일 없이 한 번에 주차 라인 안으로 차를 주차한 한영은 기어를 P로 돌린 뒤 시동을 껐다. 비로소 차 안이 진짜로 조용해졌다.
“여기에 차 두면 되는 거야?”
차창 밖에서 교복 차림으로 서성이는 여고생들을 의아한 눈길로 보던 재환이 한영에게 물었다. 차 키를 바지 주머니에 넣은 한영은 ‘응, 여기 두면 돼.’ 하고 답했다. 뒤이어 한영을 따라 차에서 내린 재환은 건물 꼭대기에 붙은 회사 이름이 영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예계 일에 무지한 그라도 저 이름이 유명 기획사의 이름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머릿속에 ‘왜?’라는 물음이 피어났다.
그러나 한영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그들 쪽으로 몰린 수십 개의 시선 때문에 재환은 차 문을 닫은 채로 멈칫 굳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들 재환 가까이 있는 분홍 머리의 남자를 보고 있었다.
아, 혹시.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재환은 픽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결국 사람 보는 눈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었다. 저 소녀들 눈에 한영이 어떠한 인물로 비쳤을지 충분히 알조였다. 그럼 난… 아이돌 매니저쯤으로 보이려나. 물론 저처럼 자신이 챙기는 연예인보다 더 성미 까다로운 매니저는 아마 없을 터였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번쩍번쩍한 차를 끌고 악기 상가까지 가는 건 역시 아닌 것 같았다. 그 근처는 정말 복잡하기도 했거니와, 그러다 차에 스크래치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그러니 좀 번거롭더라도 이게 맞는 거라고, 재환은 애써 스스로 내린 결정을 합리화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눈길을 피해 건물 근처를 벗어난 두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운 좋게도 상가 근방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였다. 뒤쪽에 있는 2인 좌석으로 가는 대신 재환은 버스 중간쯤의 1인 좌석에 앉았고, 자연히 한영도 그 뒤에 앉았다.
기사 아저씨의 취향인 건지, 마침 라디오 선곡이 그랬던 건지 버스 안에서는 꽤나 방정맞은 뽕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왜 이어폰을 챙기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재환은 얼룩덜룩한 차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원체 차가 덜컹거려 진득하니 바깥 풍경을 눈에 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아예 꾹 눈을 감아 버렸다. 뒤통수가 조금 간지러운 듯한 것은 기분 탓으로 넘겼다.
혼잡한 시내에 접어들수록 버스 안으로 꾸역꾸역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도로 멍하니 눈을 뜨고 있던 재환은 비좁게 선 승객들 사이에서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주저 없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자 ‘고마워, 청년.’ 하는 인사가 돌아왔다. 고개를 꾸벅인 재환은 한 발 옆으로 움직여 한영이 앉은 자리 앞에 가 섰다. 좌석 등받이에 달린 손잡이를 꽉 움키는 바람에 한영의 등에 슬쩍슬쩍 손이 닿았으나,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이번에는 두툼한 보따리를 쥔 할머니가 버스에 올라탔다. 힘겹게 사람들 사이를 헤친 할머니가 재환 뒤쪽을 지나치는데, 별안간 한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머니! 여기 앉아요!”
대뜸 터진 외침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한곳을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영은 얼른 자리 밖으로 나왔고, 덕분에 가까이 있던 재환이 엉거주춤 비켜서야 했다. ‘미안해서 어쩌누.’ 하면서도 할머니는 냉큼 빈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편히 앉아 가던 두 청년은 어느덧 나란히 서서 버스 손잡이를 하나씩 붙들고 있었다. 버스가 한 번 정차할 때마다 계속해서 주위로 사람들이 들어찼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어깨가 바짝 밀착했다. 씽씽 머리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무색하게 모두가 다닥다닥 붙은 차 안에 후끈한 공기가 감돌았다. 여름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무릇 감당해야 할 불편함이었다.
그때, 마디가 튀어나올 정도로 손잡이를 꽉 붙잡고 있던 재환의 손 위로 문득 서늘한 감촉이 포개어졌다. 슬쩍 미간을 좁힌 재환은 아주 자연스럽게 제 손과 버스 손잡이를 겹쳐 잡은 하얀 손을 쳐다보았다. 재환 또한 자연스럽게 그 아래서 슬그머니 손을 빼내었다. 그러자 태연히 차창 너머를 보고 있던 한영의 눈이 재환을 향했다.
“곧 내릴 거야.”
저를 보는 갈색 눈동자에 어떤 감정이 서렸는지 구태여 확인하지 않은 재환은 재빨리 몸을 틀었다. 아직 두어 정거장이 더 남아 있었으나, 성격 급한 그로서는 미리미리 버스 카드를 준비해 문 근처에 가 있는 것이 여러모로 마음 편했다.
하필 길에 차가 많아 상가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는 예상보다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일찌감치 준비했던 카드를 찍고 겨우 버스에서 내리자, 썩 상쾌한 바깥 공기가 재환을 맞이했다. 버스 안과 비교해 훨씬 덥고, 습하고, 심지어 도로의 매연까지 섞여 있었지만 이상하게 지금의 재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조금만 걸으면 돼.”
바지 주머니에 푹 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하자 재환을 뒤따라 내린 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흐트러진 채로 팔랑팔랑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칼에서 눈길을 거둔 재환은 목적지가 있는 쪽으로 어서 걸음을 재촉했다.
평일 오후의 악기 상가는 비교적 한산했다. 예전에 왔을 때도 그렇게 붐비는 느낌은 없었다만, 오늘은 유독 더 사람이 적은 듯했다. 악기를 사려는 이들이 과거보다 줄어든 탓인 것 같았다.
가게 안팎으로 전시된 기타나 이펙터 따위에 묶이려는 시선을 단단히 붙들어 맨 재환은 한영을 데리고 곧장 음향 장비를 취급하는 상점들이 모인 층으로 향했다. 대충 조사해 온 모델이 있으니 일단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가격을 좀 알아볼 생각이었다. 우선 가장 가까이 있는 가게부터 들어가 보기 전, 재환은 한영에게 확인차 말을 건넸다.
“오늘 오디오 인터페이스랑 마이크, 이렇게 찾아 보려고. 아, 혹시 헤드폰은 있어?”
“아니. 근데 헤드폰 말고 그것도 사고 싶어.”
“그거?”
“모니터 스피커.”
재환의 한쪽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녹음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한영도 저 나름 필요한 것을 찾아 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제 도움이 크게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활짝 문이 열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환은 자신의 예상이 마냥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틀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아주 정확한 짐작이었다.
“와…. 다 엄청 좋은 것들로만 알아 오셨네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한영이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를 본 점원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한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옆에 서서 쪽지의 내용을 흘긋 살핀 재환이 속으로 느낀 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힌 모델명만 보아도 애초부터 자신이 찾아볼 생각조차 안 했던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하나같이 상당한 고가의 물건들이었다. 저런 걸 한영이 어디서 찾아 왔는지 궁금증을 품기 이전에, 재환은 어쩔 수 없이 조금 옹졸한 마음을 먹게 되었다. 뭐야. 난 처음부터 올 필요도 없었네.
“아, 근데 이건 공식 수입처가 한 군데밖에 없어서 저희 가게에는 물건이 없어요. 일단 다른 것들은 다 있는데, 보여 드릴까요?”
“네.”
점원이 종이 한구석을 툭툭 가리키며 말하자 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역할이 없어진 재환은 멀뚱히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저렇게 딱 리스트를 뽑아 왔는데 이렇다 저렇다 훈수 두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럴 마음도 딱히 없었다. 그냥, 점원이 자리를 뜬 틈을 타 적당한 말이나 몇 마디 건넸다.
“조사 열심히 했나 보네. 저것들 다 사면 홈 리코딩은 문제도 아니겠다.”
“정말?”
순수한 기대로 가득 찬 말간 눈빛이 재환을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상가에 올 때까지 내비쳤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한영이 내내 시무룩한 상태였던 것을 재환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저 정도면 거의 스튜디오에서 쓰는 거 아냐?”
“몰라, 나도. 아무튼 좋은 거래.”
당연히 좋은 거지, 라는 말을 쏙 삼킨 재환은 ‘누가?’ 하고 짐짓 무덤덤한 투로 물었다. 속으로는 한영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꽤나 궁금해하고 있었다.
“형 아는 사람.”
“아…. 형이 기획사에서 일한다고 그랬나?”
‘비슷해.’라고 답하며 한영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일 즈음, 상자 여러 개를 아슬아슬하게 겹쳐 든 점원이 두 사람에게 돌아왔다. 재환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점원의 품에 있는 상자 몇 개를 받아 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일단 이건 오디오 인터페이스고요, 이건 마이크, 이건 마이크 프리앰프예요. 이쪽이 헤드폰이고요.”
점원이 가리키는 상자를 따라 재환과 한영의 눈이 함께 순서대로 이동했다. 이제 박스에서 제품을 꺼내 보거나, 성능을 자세히 확인해 볼 차례였다. 헤드폰의 경우엔 청음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한데, 대뜸 한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어느 쪽에도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럼 계산할게요.”
점원과 재환의 눈이 동시에 비슷한 크기로 뜨였다. 흰자위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눈꺼풀을 한껏 들어 올린 재환은 저 녀석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벙한 얼굴로 한영을 보았다. 이미 그는 카드를 꺼내 들고 있었다.
한영 대신 점원에게 다급히 ‘잠깐만요…!’를 외친 재환은 그대로 새하얀 팔목을 붙잡아 가게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한 손에 카드를 쥔 한영은 이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운 건 도리어 재환 쪽이었다.
“야. 그냥 저대로 산다고?”
응, 하며 순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반응에 재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가격도 안 물어보고? 사는 건 그렇다 쳐도, 에누리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에누리?”
“아니, 그러니까…!”
답답한 듯 팍 한숨을 내쉰 재환은 살 거면 조금이라도 싸게 달라고 해야 할 것 아니냐, 현금가가 얼마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카드부터 꺼내는 게 어딨냐, 이외에도 어쩌고저쩌고 잔소리와 다름없는 말을 줄줄이 한영에게 늘어놓았다. 그럴수록 씩씩 성내는 재환의 얼굴을 바라보는 한영의 얼굴은 어리벙벙해졌다. 그러니 재환은 더 속이 탔다.
잠깐. 근데, 나 왜 이러고 있지…?
“화… 났어?”
한영의 물음에 지레 당황한 재환은 꼭 삐진 아이처럼 홱 고개를 옆으로 틀어 버렸다. ‘화난 게 아니라…!’라는 설득력 없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돈 내는 것도 아닌데 뭘 이렇게 열 내고 있는 건지 저조차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었다. 그걸 깨닫자 손쓸 틈도 없이 우르르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눈가가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숨고 싶다.
“화내지 마, 재환아.”
‘아니라니까…!’ 하고 또 쪼잔하게 부정하고 보는 찰나 슬며시 손목이 붙잡혔다. 이윽고 자못 조심스레 들어 올려진 손바닥에 톡, 하니 손가락 두 마디 길이도 안 되는 누런 봉지가 떨어졌다. 그 위에 적힌 익숙한 듯 생소한 문구가 일순 재환을 조용해지게 만들었다. 약간의 당혹감이 서린 눈으로 재환은 손안에 놓인 누룽지 사탕과 한영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까 버스에서 할머니한테 받았어.”
아아. 버스에서 씩씩하게도 자리를 양보해 드렸던 그 할머니. 근데 이건 왜, 라고 묻기 전 한영이 얼른 말을 이었다.
“이거 먹고 화 풀어. 그냥, 오늘 다 내가 미안해….”
씨발…. 순간 재환은 속으로 딱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물론, 한영에게 한 소리는 아니었다.
구수한 맛의 사탕을 입 안에서 살살 굴리는 동안 재환은 한영을 데리고 부지런히 상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열심히 발품을 판 끝에 한영의 쪽지에 적힌 물건을 현금가로 가장 싸게 파는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무료로 택배 발송을 해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아버지뻘 되는 사장님에게 부리지도 못하는 애교를 부려 몇만 원 하는 고급 케이블도 덤으로 얻었다. 한꺼번에 비싼 물건 여럿을 팔았으니 판매하는 쪽도, 그걸 나름 싸게 구입했으니 사는 쪽도 모두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다만 모니터 스피커만큼은 스피커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에 가서 가능한 한 이것저것 많이 들어 보았다. 한영이 알아 온 스피커도 좋은 제품임은 분명했으나,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소리도 안 들어 보고 무턱대고 살 수는 없었다. 눈이 밝지 않아 피크는 못 찾아도 대신 재환은 귀가 꽤나 민감한 편이었고, 그 결과 비슷한 가격대에서 더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당연히 선택은 한영에게 넘겼는데, 한영은 군말 않고 재환이 고른 것으로 결제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재환은 ‘내가 아까 너무 개지랄을 떨었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이 욱하는 성질이 문제였다.
알찬 쇼핑을 끝낸 두 사람은 각자 아이스커피, 아이스코코아를 손에 쥐고 상가 건물 옥상으로 올랐다. 파라솔 같은 거 하나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옥상이었지만 나름 아는 사람만 아는 이곳의 명소였다. 왜냐하면,
“좋다.”
“그지?”
여기에서 내려 보는 도시의 전경이 꽤나 근사했다. 고만고만한 옛 빌딩들이 모인 동네이기 때문에 우뚝 솟은 마천루 같은 건 없었지만, 대신 그만큼 정겨운 느낌이 있었다. 좀 더 간지러운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풍경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노을이 이뻐.”
“그러게. 오늘 하늘이 죽이네.”
딴에 감탄이 묻어나는 투로 대답하며 재환은 거칠거칠한 콘크리트 난간에 두 팔을 올렸다. 푸른 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저녁 하늘에 노을빛을 품은 조개구름이 솜사탕처럼 몽글몽글 퍼져 있었다. 그 경치가 제법 운치 있어, 솔솔 불어오는 눅눅한 바람이 어째서인지 재환은 조금 산뜻하게 느껴졌다. 빈말로도 선선하다 할 수 없는 날씨인데 말이다.
“유한영.”
“…응?”
그새 얼음이 녹아 묽어진 커피를 빨대로 쪼옥 빨아올린 재환은 요 며칠 줄곧 생각했던 것을 담담히 꺼내 한영에게 들려주었다.
“공연, 엄청 즐거웠어.”
재환과 마찬가지로 노을 지는 하늘을 보고 있던 한영의 얼굴이 천천히 옆을 향했다. 재환은 마치 혼잣말하듯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진짜로 즐거웠어….”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재환은 난간에 포갠 두 팔 위로 턱을 얹었다. 파랗고 붉은 하늘에서 떨어뜨린 시선을 저 아래로 내리자, 악기를 등에 메고 길을 걷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나도, 즐거웠어.”
그제야 재환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하늘의 오묘한 빛이 고대로 흘러든 한영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하얀 얼굴에도 그 신비로운 색이 담뿍 스며 있었다. 누구네 밴드 보컬인지 참 곱게 잘생겼다 싶었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 밴드 오래오래 같이하자.”
사람을 감상에 젖게 하는 풍경을 핑계 삼아 부끄러운 속내를 전했건만, 상대에게서는 마땅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가만한 시선을 보내올 따름이었다. 전에 같았으면 여지없이 ‘왜 저러지’라는 생각을 품었을 만한 눈빛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그니까 나 버리지 마라?”
절반의 장난과 절반의 진심이 섞인 말을 던지며 재환은 한영의 팔뚝을 가볍게 툭 쳤다. 바람결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분홍 머리칼도 한번 대차게 헝클어뜨려 주고 싶었으나, 그건 참았다.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오버인 것 같았다.
“그만 내려가자. 나 기타 좀 잠깐 구경하게.”
남은 커피를 한 번에 호로록 빨아들인 재환은 난간에 기대었던 상체를 훌쩍 일으켜 세웠다. 빨리 가자는 뜻을 담아 한영에게 까딱 고갯짓한 후 계단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석양빛을 머금고 한 발짝씩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영의 입이 작게 달싹였다.
너도 나 버리지 마.
답을 해 줘야 할 사람은 이미 옥상을 내려가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그곳은 바깥 빛이 잘 들지 않아 더는 모습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여기서 내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 * *
기타를 ‘잠깐’ 구경하겠다던 말은 의도치 않게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처음에야 재환 자신도 정말 잠깐만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눈으로 보면 한번 만져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고, 또 그러다 보니 몇 대는 홀린 듯 연주까지 해 보고 말았다. 특히 제 기타와 같은 브랜드의 커스텀샵 기타를 쳐 봤을 때는 정말이지…. 이 녀석을 집으로 데려가려면 몇 달을 굶어야 하나 무심코 계산해 보다 저 스스로 뺨을 내리칠 뻔했더랬다. 몇 달 전 페달 하나 사고도 그 고생을 했으면서,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그러다 이제는 정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재환은 그 많던 기타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기타 한 대를 발견했다. 제 것과 같은 텔레캐스터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반짝반짝 빛나는 기타의 바디가 지닌 색깔에 원인이 있었다.
“유한영. 저거 너 머리 색이랑 비슷하다. 네가 치면 잘 어울리겠네.”
재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한영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기타를 보고서도 선뜻 재환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그래…?’ 하며 영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재환은 조금 아리송해졌다.
“왜? 아니야? 내가 보기엔 완전 비슷한데.”
“저건 좀 베이비 핑크 같아. 인디 핑크 느낌도 나.”
뭐래는 거야. 한영의 설명을 듣던 재환의 미간에 슬며시 옅은 금이 갔다. 분홍이면 다 같은 분홍이지, 저렇게 종류가 많을 건 또 뭐람. 재환은 자연히 한영에게 질문 하나를 더 건네게 되었다.
“그럼 네 머리는?”
“내 머리는 코랄 핑크.”
아무래도 내가 괜한 얘기를 꺼낸 모양이다, 라고 얼른 결론지은 재환은 ‘알았다, 알았어.’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진짜 갈 거라는 의미로 한영의 팔소매를 툭툭 잡아당기는데, 그에게서 재환을 한층 더 당황시키는 말이 건너왔다.
“저거 살까?”
미치겠네….
끝까지 ‘사면 안 돼…?’ 따위를 웅얼거리는 한영을 끌고 상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발아래까지 어둠이 성큼 내려앉아 있었다. 그제야 재환은 자신이 상당히 허기가 진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상가 안을 들쑤시고 돌아다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해서 ‘근처에서 국밥이나 먹을까?’ 하고 한영에게 물었더니 오늘은 저한테 맛있는 걸 사 주고 싶단다. 무언가를 얻어먹을 정도로 제 몫을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재환이 한영을 데리고 간 곳은 상가에서 조금 걸으면 나오는 치킨집이었다. 이 동네에서는 나름 맛집이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따라서 정말 ‘동네 아저씨’로 보이는 이들이 테이블 곳곳에서 치킨을 시켜 놓고 맥주를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다.
그 중간쯤 자리를 잡고 앉자 한영은 또 ‘맛있는 거 사 준다니까….’ 하고 웅얼거렸다. 물론 재환은 ‘이게 맛있는 거지.’라고 단호히 대꾸하며 소쿠리에 담겨 나온 옛날통닭을 열심히 뜯었다. 재환 하는 양을 유심히 보던 한영도 치킨을 집어 오물오물 먹었고, 끝내 그의 입에서도 ‘맛있다.’ 하는 말이 나왔다. 조금 뿌듯했다.
괜히 사람들이 치맥, 치맥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재환은 맥주도 꽤나 마셨다. 얻어먹는 김에 뽕을 빼자! 같은 건 아니었고, 무더운 날씨 탓인지 시원한 맥주가 잘도 넘어갔다. 이쪽이 새 맥주를 시킬 때마다 ‘내 것도’라고 하는 걸 보면 한영 역시 오늘은 맥주가 술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자신 못지않게 부지런히 맥주를 마시는 한영을 보며 재환은 문득 ‘저 녀석 주량이 어떻게 되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사람을 생긴 걸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한영은 확실히 술을 잘 마실 듯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혹 마시더라도 맥주가 아닌 와인이니 칵테일이니 하는 술들을 마실 것 같았다. 쓸데없는 편견이었다.
어쨌거나 지금껏 밴드 술자리에서 한 번도 한영이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음을 재환이 떠올려 냈을 즈음, 그 둘 앞에 몇 번째인지 모를 생맥주 잔이 새로 놓였다. 한영이 마신 것까지 점원에게 빈 잔 두 개를 넘긴 재환은 새 잔을 들어 가볍게 한영의 잔에 부딪쳤다. 잔 안에 담긴 뽀얀 거품이 이리저리로 넘실거렸다. 맥주 거품처럼 몽글몽글 풀어진 시간이 흘렀다.
재환아.
응?
넌 왜 기타 빨간색이야?
…무대에서 잘 보이잖아. 나는 안 보여도, 기타는 보이라고. 그리고 예쁘니까. 넌?
나?
넌 왜 머리 핑크색인데.
예뻐서.
그게 다야?
하트는 핑크니까.
뭐야, 그게.
몰라, 나도.
싱겁기는.
치킨 하나 두고 맥주 좀 마신 게 다인 것 같은데, 가게를 나서니 벌써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서두르면 집 가는 막차는 얼추 탈 수 있을 듯했지만, 대신 재환은 부른 배나 꺼뜨릴 겸 천천히 밤의 거리를 걸었다. 재환과 거의 비슷한 양을 마셨음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한영이 그 옆에서 함께 걸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주말이던가, 생각하는 사이 주위 풍경이 점점 더 화려해졌다. 알록달록 온갖 빛깔을 뿜는 네온사인이 여기저기서 번쩍거리고, 그에 걸맞은 요란함이 거리를 꽉 메웠다. 음식 냄새, 술 냄새, 담배 냄새 등 각종 냄새가 곳곳에서 진동하는 가운데, 푹 고꾸라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무작정 걷다 길을 조금쯤 엉뚱한 곳으로 든 모양이었다.
다시 큰길가로 나갈 생각에 걸음을 서두르던 재환은 개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운 음악이 울리는 곳 근처에 문득 발이 멈추어 섰다. 안에서 푸르스름한 조명이 새어 나오는 입구 앞으로 젊은이 여럿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아래가 뭐 하는 곳일지 재환은 짐작이 갈 것 같았다.
“우리도 들어가 볼래?”
“뭐?”
안 그래도 커다란 한영의 눈이 더 큼지막해졌다. 하얀 얼굴 가득 당황의 빛이 선연했다. 그 놀란 토끼 같은 표정을 보며 재환은 어깨를 으쓱였다. 요새 젊은 애들치고 저런 데 한 번 안 가 본 애들이 없는 것 같은데, 저라고 가지 말란 법 없었다. 카페에서 불리는 ‘뚝딱 오빠’라는 별명이 내심 신경 쓰였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니 이참에 클럽 구경이나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적당히 도는 술기운 덕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혹은 싫다, 말을 못 하고 있는 한영의 손목을 냅다 붙잡은 재환은 아예 줄 끄트머리로 가 섰다. 하지만 호기롭게 샘솟은 패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재환의 당황은 시작되었다.
재환은 클럽 입장료가 이다지도 비싼 줄 처음 알았다. 게다가 남자와 여자의 금액이 다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신분증 검사는 또 왜 그리 꼼꼼히 하는지. 시커먼 양복을 입은 사람이 손전등으로 제 주민등록증을 비춰 볼 때는 괜히 손바닥에 땀이 났더랬다.
손목에 형광 빛이 감도는 종이 팔찌를 차고 지하로 내려갔을 때도 당황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또 다른 당황의 시작이었다. 시끄러워. 번쩍번쩍해. 어지러워. 그냥 딱 이런 생각만 들었다.
베이스가 기괴할 정도로 강조된 음악은 트는 게 아니라 거의 사람을 향해 때려 붓는 수준이었고, 조명은 또 어찌나 현란한지 시야에 조금도 쉴 틈이 주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스테이지는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같았다. 그 사이에서 다들 펄쩍펄쩍 잘도 뛰었다. 혼란스러운데, 또 신기했다.
어쨌든 오늘은 이 생경한 분위기를 경험해 보는 데에 큰 의의가 있었다. 그새 푸시식 꺼진 패기에 다시 불을 붙인 재환은 한영의 손목을 붙들고 스테이지, 그것도 가장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어깨가 부딪히고, 발이 밟히고, 뒤통수를 맞았으나 멈추지 않았다. 이것도 다 경험의 일환이라 여겼다.
문제는 어렵사리 목표한 곳까지 왔건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긴, 근처 있는 사람들처럼 신나게 몸을 흔들 줄 알면 ‘뚝딱 오빠’라는 별명을 얻지도 않았을 터다. 그래서 재환은 그냥 눈을 멀뚱멀뚱 뜨고 앞에 있는 한영을 보았다. 나는 이 지경이지만 너라도 좀 움직여 보라는 뜻이었다. 왠지 한영이라면 저처럼 이런 분위기에 주눅 들지 않고 잘 어우러질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한영 역시 멀거니 재환을 보기만 했다. 시시각각 바뀌는 조명 따라 머리칼을 색색의 빛깔로 물들이며 뚫어져라 재환만 보았다. 그나마 움직이는 곳이 있다면 느리게 내려왔다 올라가는 눈꺼풀이었다. 그 안의 갈색 눈동자가 머리칼만큼이나 신비롭고 다채로운 색을 뿜었다.
춤추던 여성이 다가와 은근슬쩍 몸을 밀착해도, 흥이 넘친 사람에게 등이 떠밀려도 한영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난데없이 재환의 손목을 턱 하니 붙잡았다.
“재환아, 뒤로 가자.”
“어?”
사방에서 꽝꽝 터지는 소리가 너무도 요란하여 재환에게는 한영의 입술이 벙긋거리는 것만 보였다. 몇 번이나 ‘뭐라고?’를 반복하던 재환은 결국 상대의 얼굴 가까이 귀를 들이댔다.
“크게 말해! 안 들려!”
“뒤로 가자고!”
아까와는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춤 한 번 제대로 춰 보지 못한 채 재환은 한영에게 손목이 잡혀 스테이지 밖으로 나왔다. 억지로 끌려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껏 저 안쪽까지 갔는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왜? 춤추기 싫어?”
본인이 던지기에는 우스운 질문임을 알면서도 일단 묻자 한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하고 다시 물었더니 ‘그냥, 오늘은….’ 하는 애매한 답변이 돌아왔다. 어쩌면 사위가 하도 시끄러워 뒷말을 못 들은 것일 수도 있었다. 좌우지간 싫다는 놈을 또 저 사람들 틈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클럽을 나가야 하나 고민하며 눈을 굴리는데, 한영이 재환에게 팔랑팔랑 작은 종잇조각을 흔들어 보였다. 입장하면서 받은 프리 드링크 티켓이었다.
잠시 후, 길기도 한 드링크 바 끝 쪽에 등을 기대고 선 재환 앞으로 한영이 투명한 잔 두 개를 들고 왔다. 잔 안에는 꼭 어렸을 적 먹었던 감기 시럽 같은 붉은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치킨집에서 나눴던 시시콜콜한 대화를 어렴풋이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다.
“맥주 배부르다 그래서.”
“응. 아무거나 괜찮아.”
잔을 받아 든 재환은 짧고 납작한 빨대에 입술을 붙여 한 모금 호로록 빨아 보았다. 순식간에 시큼,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쏟아졌다. 그중에서 익숙한 향을 발견한 재환은 작게 ‘복숭아네….’ 하고 중얼거렸다.
한쪽 팔을 뒤로 들어 바 모서리에 팔꿈치를 얹은 재환은 간간이 칵테일을 홀짝이며 저 앞에서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그럭저럭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듯도 했다. 그새 이 정신없는 분위기에 익숙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또 와 보고 싶냐 하면…. 이번 한 번으로 된 것 같다.
잠깐 눈치를 보다 다른 사람들처럼 바 위에 다 먹은 잔을 올려놓은 재환은 한영에게 ‘화장실 좀.’ 하고서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한영은 아직 절반 정도 있는 칵테일을 홀짝홀짝 마시며 종전까지 재환이 보던 곳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떻게든 여자에게 접근 좀 해 보려는 남자들, 그런 분위기를 굳이 마다하지 않는 여자들. 한영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재미없었다.
제게도 은밀히 보내지는 시선 여럿을 무시하며 데구루루 굴러가던 밝은색 눈동자가 이윽고 한군데에서 멈추었다. 화장실에 간다던 재환이 저쪽 좁은 복도에서 웬 여자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한영의 눈초리가 빠르게 가늘어졌다. 쪼옥 소리와 함께 빨대 꽂힌 칵테일이 줄어들었다.
짧은 미니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딱 보아도 술에 꽤나 취한 상태였다. 벽에 세워 주려는 재환의 손길도 무시하고 자꾸만 그의 어깨 위로 축축 늘어졌다. 계속해서 이를 지켜보던 한영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괜찮으세요?”
새빨간 칵테일과 비슷한 색을 띤 입술 새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금세 요란스러운 비트에 묻혔다. 그즈음 여자가 메고 있던 핸드백에서 작은 소지품들이 쏟아져 후두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급히 허리를 숙인 재환이 그것들을 허겁지겁 주웠다. 또 한 번, 한영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여기요.”
재환은 주운 것들을 여자의 핸드백에 도로 넣었다. 친히 가방 지퍼도 잠가 주는 듯했다. 상체를 휘청이며 무어라 중얼거리던 여자가 갑자기 재환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순식간에 재환과 여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번에도 한영의 입술 사이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와, 되게 잘생기셨다.”
엉거주춤 여자의 허리를 붙잡은 재환은 하는 행동만으로 당황한 게 뻔히 보였다. 상대를 떨어뜨리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럴수록 여자는 재환에게 얼굴을 한층 가까이 들이밀었다. 다시금 한영의 입이 벌어졌다.
“키스해 줘요.”
그리고, 진짜로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호로록 한영이 남은 칵테일을 빨아올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때였다.
“남자 친구예요?”
빨대에 올라오는 게 없을 때까지 숨을 들이마시던 한영의 얼굴이 찬찬히 옆으로 돌아갔다. 바에 비스듬히 기댄 남자가 한영을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귀에 피어싱 여러 개를 하고 목둘레를 따라서 트라이벌 문양의 문신을 한 남자는 제법 예쁘장한 인상이었다.
“뚫어져라 보길래.”
굳이 대답을 않은 한영은 원래 향해 있던 곳으로 눈을 움직였다. 그 자리에 더 이상 재환은 없었다. 대신 친구로 보이는 듯한 여자가 문제의 여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한영은 다시 옆에 선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뭐냐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여기 말고 다른 쪽 클럽에서 몇 번 봤어요. 머리 색이 하도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지.”
아아, 거기. 그제야 한영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토록 따분한 반응에도 남자는 불그스름한 입술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몸을 움직여 한영과의 거리를 좁혔다. 두 사람의 팔꿈치가 톡, 맞닿았다.
“그래서, 아까 그 사람 남자 친구 맞아, 아니야?”
“그건 왜?”
‘왜긴….’ 하며 말꼬리를 야릇하게 흐린 남자의 새끼손가락이 살그머니 한영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보통의 남자 같았으면 기겁을 했을 법한 접촉에도 한영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게 실그러뜨렸다.
“나랑 섹스하고 싶어?”
한영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으려던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남자는 커다래진 눈으로 한영을 보았다. 여전히 한영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주위에서 보았다면 ‘나랑 놀고 싶어?’쯤의 대화를 나누는 줄 알았으리라.
잠시 당황하는 듯했던 남자가 배시시 웃었다.
“하고 싶다 그러면?”
재환이 놓고 간 잔 옆에 빈 잔을 놓은 한영은 천천히 몸을 틀었다. 덥석 남자의 손목을 움켜잡아 그대로 휙 잡아끌자 두 사람의 가슴팍이 철떡 맞닿았다. 제법 놀란 듯한 남자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싼 한영은 피어싱 여러 개가 꽂힌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였다.
“근데, 내가 너한테 넣는 거야.”
뭉근히 고간을 문질러 오는 한영으로 인해 남자의 입에서 속절없이 ‘아…!’ 하는 나지막한 신음이 터졌다. 물론 이 또한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시끄러운 음악 속에 파묻혔다.
두 남자가 섰던 자리에 푸르스름한 LED 조명만이 번쩍이고 있을 때, 담배 연기로 자욱한 화장실에서 재환은 물 묻힌 손으로 몇 번이고 입가를 문질렀다. 원래 클럽에서는 그런 스킨십이 당연한 건지 뭔지, 아직도 당황스러운 마음이 잘 추슬러지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어깨 한 번 부딪힌 생판 남과 갑자기 키스한 건 그렇다 쳐도, 문제는 입술 언저리에 남은 이 불그스름한 자국이었다. 살갗이 따가워질 때까지 벅벅 입가를 문질러도 도통 지워질 기미가 안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냥 립스틱이 아닌 것 같았다. 여자 화장품에 문외한인 재환으로서는 그녀가 당최 뭘 바르고 있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게 왜 평소 안 하던 짓을 해서는. 클럽까지 와서 춤은 추지도 못해, 설상가상 난데없이 입맞춤이나 당한 작금의 상황이 하도 황당해 재환은 피식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람이 안 어울리는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또 오늘 이런 식으로 배웠다. 뭐, 나중에 무용담 삼아 태군에게 들려주면 낄낄거리며 좋아할 것 같긴 하다.
집념을 가지고 입술을 문지른 끝에 겨우 묻은 걸 지워 내는 데에 성공한 재환은 변기 칸에 들어가 휴지를 조금 뜯었다. 그러다 바닥에 낭자한 온갖 쓰레기를 보고 으윽, 눈살을 찌푸렸다. 물이 흥건한 입가를 대충 휴지로 툭툭 두드린 뒤 다시 화장실을 나왔다.
화장실 갔다 늦어진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걱정하며 서둘러 한영이 기다리고 있을 드링크 바로 갔다. 그러나 한영은 없고, 같은 자리에서 다른 남녀가 바짝 붙어 진득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푸,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재환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켜자마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몸이 안 좋아서 먼저 갈게. 미안.]
뭐야. 한영의 메시지를 확인한 재환은 저도 모르게 칫, 하고 낮게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슬슬 나가자는 말을 하려 했었는데, 한영은 그새를 기다려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타박을 하기에는 자신이 늦게 돌아온 탓이 컸다. 게다가 친절히 메시지까지 남겼으니 딱히 뭐라 할 거리가 없었다. 꼭 사이좋게 함께 집에 가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쓸데없는 서운함을 얼른 삭인 재환은 컴컴한 클럽 안에서 유독 밝아 보이는 핸드폰 액정을 엄지로 톡톡 두드렸다.
‘괜찮아?’라고 썼다가 다시 지운 후 ‘그래’라는 짤막한 메시지를 적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대기 화면으로 돌아가 현재 시각을 확인해 보니, 막차는 진즉에 끊겼고 차라리 첫차를 기다리는 게 나을 판이었다. 근처에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재환은 느릿느릿 이 답답하고 어지러운 공간을 벗어나는 계단을 밟았다.
* * *
클럽을 다녀와서 재환이 새삼 깨달은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자신은 춤추는 클럽보다 라이브 클럽이 훨씬 좋다는 점. 둘째, 마찬가지로 클럽 음악보다는 역시 록 음악이 좋다는 점. 결국 ‘하던 거나 열심히 하며 살자’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깨우침들이었다. 그래도 나름 색다른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면 입장료에 들인 몇만 원이 마냥 아깝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두 번은 사양이었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
“네, 오빠!”
“들어가세요!”
같이 일하는 친구들의 발랄한 인사를 받으며 카페를 나선 재환은 이제는 집보다 더 익숙해진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단, 오늘은 평소처럼 악기 가방 탓에 등이나 손이 묵직하지 않았다. 합주가 아닌 다른 이유로 한영의 집에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페달 보드 가방 대신 세탁할 유니폼이 든 쇼핑백을 덜렁덜렁 손에 든 재환은 어서 발을 서둘렀다. 이미 도착해 있을 그 대단한 물건들이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와…, 짱이네.”
그리고 한영의 집에 도착해 방으로 들어선 순간, 재환은 숨김없이 감탄했다. 바닥 가득 놓인 박스들을 보는 것만으로 괜히 제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저거 하나하나가 웬만한 기타 한 대 값에 맞먹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것도 잠시, 얼른 들뜬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휙 한영을 보았다.
“몸은 괜찮아? 주말에 잘 쉬었어?”
“아, 응….”
재환은 미묘하게 말꼬리를 흐리는 한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본디 창백해 보일 만큼 얼굴색이 하얀지라, 이렇게 봐서는 상태가 좋은지 어쩐지 영 알기가 모호했다. 그래서 그냥 구불구불한 앞머리 사이로 쑥 손을 넣어 보았다. 매끈한 이마에 손바닥을 얹자 에어컨 바람에 식혀진 피부가 기분 좋은 서늘함을 전했다. 멀쩡하네.
‘암튼, 건강관리 잘해라.’라고 툭 한마디 던지며 손을 내린 재환은 멀거니 눈만 끔뻑이는 한영을 뒤로하고 철퍽 상자들 앞에 주저앉았다. 사실 진즉 마음은 여기에 와 있었다.
“일단 다 뜯어보자.”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하자 한영도 엉거주춤 재환 옆에 앉았다. 이윽고 빨갛고, 노랗고, 파란 방 안에 종이 상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서로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도 조금은 섞여 있었을 터다.
잠시 후, 물건을 전부 꺼낸 상자를 방 한편에 잘 정리해 두는 것을 마지막으로 가슴 설레는 개봉 과정이 끝났다. 이제부터 더 설레는 일을 앞둔 재환은 손바닥을 탁탁 털며 두 눈을 반짝였다.
“다 꺼내니까 꼭 스튜디오 하나 차리는 것 같네.”
과장이 아니었다. 저 오디오 인터페이스만 해도 당장 스튜디오에서 쓰는 데에 무리가 없는 제품이었으며, 스피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마이크는 진공관 마이크였다! 녹음이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게 다 무슨 소리야, 하겠지만 재환은 이런 일에 관심이 차고 넘쳤다. 오죽하면 이전 밴드를 할 때 ‘넌 기타리스트가 아니라 엔지니어를 했어야 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물론 그때는 그게 비꼬는 말인 줄 몰랐다.
그때는 그때고. 재환은 한영이 보는 앞에서 착착 노트북에 새 장비들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노트북도 아예 새로 산 것 같은데, 굳이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이미 이렇게 된 시점에서 한영의 씀씀이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누구보다 저 자신이 이리 들떴으면서…. 서재환 참 속도 없다, 싶은 생각이 들어 재환은 한영 몰래 한 번 피식 웃었다.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재환은 이리저리 플러그를 꽂고 케이블을 연결했다. 혹 조금이라도 선이 늘어질라치면 집에서 미리 챙겨 온 벨크로로 꼼꼼히 정리했다. 기계 세팅이 대략 끝난 후에는 부지런히 노트북도 만졌다. 다행히 음악 작업 시 사용하는 시퀀서 프로그램이 미리 깔려 있어 조금은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키보드 키 하나를 누르자 몸통은 꺼멓고 우퍼는 샛노란 스피커에서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노래가 크게 터져 나왔다. 재환이 이 밴드의 노래 중 가장 처음으로 들었던 〈I See You〉의 데모 버전이었다. 노래를 듣는 한영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와….”
“스피커 소리 죽이지? 실제 음원 들으면 더 좋아.”
재환이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자 이번에는 Embryo의 유명 곡이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재환은 싱글벙글 웃으며 모니터 스피커는 사실 소리가 과장되면 안 된다, 이게 원음에 가까운 소리일 거다 등등 상대가 딱히 묻지 않은 말을 술술 읊었다. 한껏 고양된 기분 탓이었다. 그러다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 ‘마이크 체크해야지, 마이크.’를 중얼거렸다.
또 몇 차례 바지런히 움직여 노트북에 마이크를 연결한 재환은 헤드폰을 쓰고 마이크 앞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그물처럼 생긴 팝 필터에 입을 대고 ‘아, 아.’ 소리를 냈다가 헤드폰을 벗었다.
“유한영, 에어컨 좀 꺼 주라.”
“에어컨?”
“어. 저 소리 마이크로 다 들어와. 조용히 하고 노이즈 끼는지도 좀 체크해 보게. 아까 스피커로 들었을 때 화이트 노이즈는 괜찮았거든?”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인 한영은 얼른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재환의 말마따나 에어컨을 끄니 방 안이 한결 조용해졌다. 그새 다시 헤드폰을 쓴 재환이 마이크에 입을 붙였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풉! 그때 대뜸 한영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마이크로 수음되어 그대로 재환의 귀에 들어왔다. 눈이 동그래진 재환은 퍼뜩 한영을 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무슨 웃을 거리가 있었던 건지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귀여워서.”
한순간 재환의 얼굴이 구깃구깃해졌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라는 공기를 온몸으로 팍팍 풍기며 마이크로 신경을 되돌렸다. 괜스레 불퉁해진 투로 ‘아, 아.’ 소리를 내 보았다. 그 소리 또한 마이크, 오디오 인터페이스, 그리고 노트북을 거쳐 재환 자신이 쓴 헤드폰에서 흘러나왔다. 미세한 딜레이는 존재하겠으나, 장비들이 워낙 좋아 느끼려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니 한영으로 인해 살짝이나마 꿍해졌던 마음이 금세 사르르 풀렸다.
씩 웃으며 재환은 귀에서 헤드폰을 벗었다. 제 손으로 직접 설치한 장비들을 죽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진짜 나중에 녹음하고 가믹스하는 데 아무 문제 없겠다. 돈이 좋긴 좋네.”
“가믹스? 그게 뭐야?”
한영의 물음을 받은 재환은 잠시간 아…, 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또다시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조금, 재미난 생각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어때? 내 목소리 잘 들려?”
재환이 오디오 인터페이스의 토크 백 버튼을 누르고 묻는 말에 저쪽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한영이 ‘응.’ 하고 답했다. 피아노 바로 옆에 마이크를 설치해 놓은 터라 그 소리는 재환이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그대로 들렸다. 새 헤드폰은 한영의 귀에 씌워져 있었다.
다시 설명해, 지금 두 사람은 피아노 연주를 녹음할 간단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따라서 마이크는 당연히 피아노 가까이 두었고, 헤드폰을 쓴 한영은 피아노를 연주하며 본인이 직접 그 소리를 확인 가능했다. 또한 멀찍이 떨어져 책상 앞에 앉은 재환도 녹음되는 한영의 연주를 바로바로 이어폰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영에게 말할 일이 있으면 오디오 인터페이스에 내장된 토크 백 마이크를 이용하면 되었다. 마치 스튜디오에서 녹음 부스 안의 아티스트와 부스 밖의 엔지니어가 소통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제법 그럴듯하다는 뜻이었다. 진짜 스튜디오처럼 구즈넥 마이크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당장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그럼 피아노 한번 쳐 봐.”
재환이 말하자마자 건반 위에 얹혔던 하얀 손가락이 춤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재환이 앉은 각도에서 보이는 건 조금씩 들썩이는 등과 꾹꾹 피아노 페달을 밟는 발 정도였지만, 귀로 생생하게 듣고 있으니 바로 앞에서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잠깐의 시험 연주가 끝나고, 이제는 제대로 녹음을 할 차례였다. 이것저것 세팅하는 사이 켰던 에어컨을 다시 끈 재환은 사위가 완전히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후 신중히 입을 뗐다.
“이제 진짜 녹음할 거야. 준비됐어?”
- 응.
그래도 녹음은 녹음이라고 이쪽은 슬쩍 긴장이 되는데, 대답하는 한영의 목소리는 시종 차분했다. 하긴, 첫 공연 때나 살짝 긴장하는 기색을 비쳤지 한영은 늘 저런 느낌이었다. 저 녀석도 손이 오들오들 떨릴 만큼 긴장할 때가 있을까. 따위의 시답잖은 생각을 잠깐 하던 재환은 ‘시작한다.’ 하고서 노트북 자판의 ‘R’ 키를 눌렀다. 진짜 리코딩의 시작이었다.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재환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한영이 치는 〈I See You〉의 피아노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주만 녹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노래는 얹히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연주를 듣는 내내 재환은 한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 노래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리라. 그 와중 머릿속을 스치는 감상은 하나뿐이었다. 피아노 잘 친다. 진짜, 존나 잘 친다.
보컬이건 악기건 상관없이, 보통 녹음에 들어가면 몇 번이나 테이크를 반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음정이 틀리거나 박자가 어긋나는 등 크고 작은 실수가 발생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지금은 따로 템포를 설정하지 않고 한영의 감에 따라 녹음을 진행했지만, 그럼에도 정말 잘한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연주였다. 그리하여 리코딩 중이라는 것도 잠시 잊은 재환은 아예 몸을 틀어 홀린 듯 한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재환아?
어느새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던 이어폰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부랴부랴 정신을 차린 재환은 노트북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여전히 녹음이 진행 중인 프로그램에서 트랙을 따라 커서가 천천히 횡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뒤늦게 스페이스 키를 눌러 녹음을 멈추었다.
“이제 보컬 녹음하자.”
원 테이크로 피아노 녹음을 마친 두 사람은 이윽고 보컬 녹음으로 들어갔다. 굳이 마이크를 옮길 것 없이, 한영이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로 진행하기로 했다. 몇 번 마우스를 움직여 수음되는 소리의 레벨을 조정한 재환은 이번에도 ‘시작한다.’라는 말과 함께 자판의 ‘R’ 키를 눌렀다. 그때였다.
- 하아….
이제는 분명 익숙해졌어야 할 숨소리가 귓구멍 깊숙이 흘러드는 순간 재환의 어깨가 뻣뻣이 긴장했다. 마치 태군에게 처음 이 곡을 받아서 들었을 때와 같았다. 저 야릇한 숨소리 덕분에 ‘더 숨’이라는 밴드명도 지을 수 있었던 거지만, 어쨌든 심장에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괜히 더 눈을 부릅뜬 재환은 한영의 숨소리로 인해 물결치듯 파형이 그려진 트랙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피아노 반주와 함께 드디어 노래가 시작되며, 그 뒤로 더 큰 파형들이 차례로 그려졌다. 동시에 또 하나의 생각이 재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노래도 존나 잘하네.
그렇게 보컬 녹음도 한순간에 끝났다. 이게 진짜 녹음이었다면 중간중간 수도 없이 끊어 갔을 터고, 어쩌면 하루 안에 끝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하나 한영에게 믹싱이 뭔지 설명해 줄 겸 테스트로 해 보는 녹음에서 그 정도로 힘을 쏟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잠깐 사이 트랙 두 개를 이리도 뚝딱 완성시켜 버린 한영을 보고 ‘저 새끼 진짜 천재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개월이나 함께 밴드를 했으니 새삼 감탄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일단 에어컨부터 다시 켠 재환은 한영을 옆자리로 불렀다. 그가 보는 앞에서 방금 녹음된 두 개의 트랙을 손보았다. 그래 봤자 이큐, 컴프레서를 조금씩 만지고 리버브를 넣는 정도였지만, 이런 작업이 워낙 간만이라 생각보다 진행이 더뎠다. 음정 같은 것은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 과정을 한영은 묵묵히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사이 온갖 색채들로 빼곡히 덮인 방 안에 불그스름한 석양빛이 살금살금 흘러들었다.
“됐다!”
트랙 전체에 간단히 컴프레서를 거는 것을 끝으로 재환은 노트북 자판과 마우스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내처 크게 기지개도 켰다. 문득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냥 설치만 하고 나 몰라라 하기에는 장비들이 너무 좋았다. 아니, 사실 무슨 일이든 한번 벌이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제 귀찮은 성격 탓이었다.
“다 된 거야?”
“응, 다 됐어.”
가까이 앉은 한영을 지나쳐 쭉 팔을 뻗은 재환은 책상 끄트머리에 있던 에어컨 리모컨을 다시 집었다. 전원 버튼을 눌러 위잉 요란하게도 돌아가던 에어컨을 끈 뒤 ‘노래 튼다?’라고 자못 의미심장한 예고를 던졌다. 한영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재환은 주저 없이 노트북의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그러나 노래가 시작되기도 전, ‘아…!’ 하며 재생을 멈추었다.
“원래 이런 건 딱 스피커 가운데서 들어야 돼.”
그러고서 훌쩍 일어나 한영에게 자신이 있던 자리에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방구석에서 끌어온 작은 스툴에 앉아 있던 한영은 재환의 말에 따라 자리를 옮겼고, 재환은 한영의 뒤로 가 섰다. 제법 넓은 어깨 너머로 상체를 숙여 다시 달칵, 노트북 자판을 눌렀다. 아래로 쳐진 티셔츠 옷자락이 가볍게 한영의 뺨을 건드렸다.
노래가 나오기 전, 다시 허리를 세우는 대신 그대로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재환은 팔을 포개 한영이 앉은 의자 등받이 위를 디뎠다. 저 또한 몸을 낮춰 최대한 스피커와 귀 높이를 맞추고자 함이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옆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재환이 내뱉는 숨결이 분홍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를 스쳤다. 그 순간에도 재환의 정신은 온통 곧 소리가 흘러나올 스피커로 향해 있었다.
“하아….”
믹싱 시 굳이 잘라 내지 않았던 숨소리가 제일 처음 흐르고, 곧이어 4비트의 피아노 반주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었다.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목소리, 따뜻함과 서늘함을 함께 품은 피아노 음, 사박사박 서스페인 페달을 밟는 부드러운 마찰음. 한 사람이 그 소리들에 속절없이 빠져들 때, 또 한 사람은 차츰 이성을 흩트리는 숨결과 체취에 빠져들었다. 에어컨을 꺼 점점 더운 공기가 고이는 방 안, 커다랗게 울리는 노랫소리에 빨라지는 두 개의 박동음이 섞여 들었다.
쾅-! 서스 코드를 강하게 누르는 건반 플레이로 노래가 끝났다. 묵직한 피아노 소리가 남긴 잔향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그 자리에 여운이라 부를 만한 침묵이 찾아왔다. 적어도 재환에게는 그랬다. 몇 번 천천히 숨을 나눠 쉰 재환은 직각으로 접혀 있다시피 했던 허리를 폈다. 여전히 두 손은 한영의 등이 닿은 의자 등받이를 짚고 있었다.
“어때?”
침묵을 깨고 건넨 질문에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흘끔 내려다본 분홍 머리통은 미동조차 없었다. 한영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갈 듯해, 미세하게 입꼬리를 씰룩인 재환은 한참 늦어진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아까 피아노, 보컬 이렇게 트랙을 따로따로 녹음했잖아? 그거 하나하나 소리 다듬고 밸런스 맞춰서 합치는 게 믹싱이야. 뭐, 내가 한 거야 애들 장난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들을 만하지? 너 노래하는 목소리도 생생하고.”
목소리에서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한 재환은 여전히 꼼짝 않고 있는 한영의 어깨에 툭 손을 얹었다. 네가 이렇게 노래를 잘한다, 라는 의미도 조금쯤 포함되어 있는 행동이었다. 내심 그가 꺼낼 말이 기대되기도 했다. 아까부터 슬금슬금 치켜 올라간 입꼬리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둥글둥글 호를 그리던 입매가 순식간에 직선을 그었다. 판판하던 눈썹 사이가 좁게 움츠러들었다. 쭉 떨어뜨린 시선에 곧은 어깨를 짚은 손 위로 겹쳐진 하얀 손이 담겼다. 그 손이 아래 있는 손등을 꽉 움켜쥐는 동시에 재환의 미간이 더욱 폭을 좁혔다. 에어컨이 멈춰 있는 탓인지 제 손을 붙잡은 손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닿은 살갗이 화끈거릴 정도로.
“재환아.”
말문이 닫혔다. 손의 열기와는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이쪽을 부르는 한영의 목소리가 너무도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당황이 커 ‘이 새끼 왜 이래’라는 생각도 미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반문을 하지 않으려야 그럴 수가 없었다.
“집에 가.”
“…뭐?”
한영의 손이 그다지 힘도 들어가지 않았던 재환의 손을 꾹 잡아 뜯어냈다. 당연히 손은 가뿐히 떨어졌다. 갑자기 갈 곳을 잃어버린 손이 새하얀 목덜미 근처에서 움찔거렸다. 그러다 다음 순간, 꽉 주먹을 쥐어야 했다.
“너 그만 집에 가, 재환아.”
씨발, 진짜 뭔데. 뭐 하자는 짓거린데. 내가 뭘 어쨌는데…!
길지도 않은 나무 계단을 쾅쾅 밟아 내려가는 재환의 얼굴이 시시각각 붉으락푸르락한 색으로 달아올랐다. 몇 번이나 ‘허…!’ 하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숨이 터졌다. 아니, 정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참을 수가 없던 재환은 계단참에 우뚝 멈추어 섰다. 휙 뒤를 돌아 벽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한영의 방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뭐 때문에 별안간 저를 내쫓을 정도로 심기가 상한 건지 일말의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재환의 속을 뒤집는 건 따로 있었다.
그날, 함께 거실에 앉아 DVD를 보았던 그때. 무엇 하나 잘못한 게 없는데도 이 집에서 줄행랑쳐야 했던 당시의 기억이 다시금 살아나 재환의 숨을 씩씩 거칠어지게 했다. 다만 그때는 감정 전반을 황당함이 차지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조금 달랐다. 이제는 진짜 밴드 멤버로서, 동료로서 친해졌다고 생각한 한영을 향해 서럽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우후죽순 돋아났다.
아무리 쏘아보고 있어 봤자 저 위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으려 내려오는 기척일랑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멍청한 기대를 했나 싶어 속으로 재차 ‘씨발…!’을 외친 재환은 신경질적으로 남은 계단을 밟았다. 한 발 한 발에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뒤꿈치가 다 얼얼할 정도였다. 그것마저 화가 났다.
그대로 1층 복도를 성큼성큼 지나 휙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등 뒤로 요란한 문소리가 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은 재환은 부지런히 대문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사이에도 몇 번이나 ‘그래. 집에 간다, 가!’를 마음으로 외쳤는지 모른다.
이윽고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다다른 순간, 재환은 아예 입 밖으로 ‘씨발!’을 터뜨려야 할 상황을 맞닥뜨렸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이곳으로 오는 길 내도록 손에 달랑달랑 흔들고 있던 것이 없었다.
재환이 정원을 가로지르는 돌길을 콱콱 깨부술 기세로 되밟을 즈음, 책상 앞에 멀거니 앉아 있던 한영은 느릿느릿 의자에서 일어섰다. 재환이 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눈길 한 번 보내지 못했던 방문으로 뒤늦게 시선을 보냈다가, 그 옆에 있는 종이 쇼핑백을 발견했다. 조용한 걸음걸이로 쇼핑백 가까이 다가갔다.
두 다리를 접어 쇼핑백 앞에 쪼그려 앉은 한영은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형태는 조금 흐트러졌으나, 나름 가지런히 개어 둔 검정 셔츠가 안에 들어 있었다. 이 옷을 입은 재환을 보러 몇 번이나 카페에 갔음에도 결국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던 한영의 맥동이 쿵쿵쿵 치솟기 시작했다.
꿀꺽 침을 삼킨 한영은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쇼핑백 안으로 넣었다. 다소 뻣뻣한 감이 있는 옷을 집어 조심스럽게 밖으로 꺼내자 주위로 쌉싸래한 커피 향이 퍼졌다. 하지만, 콧속 점막을 건드리는 향은 분명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늘도 수차례 한영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향기가 미약하게나마 함께 섞여 있었다.
손에 들린 셔츠를 얼굴로 가져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위로 코를 박고 한껏 숨을 들이켜기까지 고민이나 망설임은 없었다. 미끈하게 뻗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을 수 없다면, 그 목덜미에 닿았던 옷깃에 남은 냄새라도 원했다. 날렵한 턱을 따라 떨어지는 땀방울을 핥을 수 없다면, 그 땀이 스민 옷의 감촉이라도 원했다.
“하아, 재환아….”
두 손으로 움켜쥔 셔츠에서 슬그머니 떨어진 오른손이 무릎 꿇고 앉아 있던 다리 사이로 향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거듭 깊이 숨을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훅훅 폐부로 들이친 향기가 한영의 이성을, 눈앞을 새하얗게 태웠다. 허리를 조이고 있던 바지의 고무줄을 벌리고 열과 습기가 고인 속옷 안으로 손이 들어갔다. 그 순간.
저벅.
지척에서 난 발소리에 어느덧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급히 셔츠에서 들어 올린 고개가 문가로 돌아갔다. 그곳에 돌처럼 굳어 서 있는 이의 그림자가 노을빛에 젖은 얼굴 위로 먹구름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차라리 시간이 멎기를 바라야 하는 순간이었다. 숨이 안 쉬어질 만큼 끔찍한 순간이었다.
그 어느 쪽에게도.
* * *
쾅!
두 쪽으로 쪼개질 듯한 소리를 내며 닫힌 욕실 문에 등을 댄 한영은 그대로 주르륵 바닥으로 무너졌다. 어정쩡하게 접힌 무릎 위에 두 팔을 얹고 멍하니 천장에 달린 황색 조명을 올려다보았다. 똑, 똑. 꽉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에서 반복적으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귓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죽을 것 같았다.
제대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헐떡이던 한영은 주춤주춤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가랑이 부근을 주물주물 더듬자 속옷을 뚫을 기세로 솟은 성기의 윤곽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 울음에도, 신음에도 온전히 닿아 있지 못한 소리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 새를 가르고 길게 흘렀다. 타르처럼 시꺼먼 후회가 스멀스멀 밀려들어 졸도할 듯한 괴로움을 전했다.
오늘 재환과 단둘이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내, 한영은 칭찬받아 마땅할 만큼 크나큰 인내심을 발휘했다. 재환이 갑자기 제 이마에 척하니 손을 올려도,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밖으로 삐죽 엉덩이만 내밀어도, 믹싱이라는 것을 하며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을 보여도 한영은 다 참았다. 함부로 손을 뻗지도, 전처럼 멍청하게 마음만 앞서 키스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재환이 제 곁에서 살살 뿌리는 향긋한 체취에 취해 결국 한계가 성큼 다가왔을 때, 한영은 친히 그를 집을 돌려보냈다.
그 정도로 애썼건만, 단 한 순간의 실수가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오늘까지 부단히도 애썼던 시간들이 죄다 쓸모없어졌다. 네 연주하는 모습을 보다가 합주실을 뛰쳐나가 자위하고 싶었던 걸 몇 번이나 참았는데. 끌어안고, 입 맞추고, 더한 것까지 하고 싶었던 순간 모두 다 참았는데…!
마치 더러운 것, 못 볼 것을 보는 듯했던 재환의 얼굴이 부옇게 흐려진 눈앞을 어른거렸다. 사실 진짜로 그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왠지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 한마디 말도 없이 옷을 낚아채 도망쳤겠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어내린 한영은 입술을 사리물고 바지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드로어즈까지 한꺼번에 내리자 아직도 가라앉을 기미가 없는 성기가 툭 튀어 올랐다. 열이 몰릴 대로 몰린 성기는 짙은 분홍빛을 띠었다.
“읏….”
뜨거운 기둥을 붙잡고 다짜고짜 위아래로 세게 문질렀다. 이미 귀두 끝에서 새어 나온 미끌미끌한 액이 함께 비벼지며 습한 소리를 냈다. 듣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필사적으로 억누른 신음이 욕실 타일 벽 여기저기에 부딪혀 돌아와 고막을 헤집었다.
조급하게 성기를 흔들던 한영은 아예 바지의 고무줄 부근에 손을 넣어 허벅지께까지 내려 버렸다. 맨살에 닿은 타일 바닥에서 소름 끼치는 한기가 올라왔다.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성기를 쥐었다.
“읏, 으….”
밴드 초반, 합주 도중 도망치듯 나와 기타 줄을 튕기는 투박한 손가락과 몽롱히 연주에 취한 얼굴을 떠올리며 자위했던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때처럼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감각은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닥쳐올 상실을 향한 두려움이 한영을 집어삼켰다. 재환의 연주에 맞춰 노래하는 내일, 가끔 저를 보고 지어 주던 숨 막히게 예쁜 웃음, 무심히 닿아 오던 손길 같은 것들….
그럼에도 한영은 이 비참한 짓거리를 멈출 수 없었다. 비겁하게 그 탓은 전부 재환에게로 돌렸다. 그러게 왜 그렇게 잘생겨서는. 기타를 잘 쳐서는. 저 어려운 기계들도 잘 다뤄서는. 어디 그뿐인가. 집안일 한 번 안 해 본 도련님처럼 생겼으면서 재환은 요리도 잘했다. 처음 그가 해 준 북엇국을 맛보았을 때는 정말이지 눈이 다 튀어나오는 줄 알았더랬다. 커피를 못 마시는 저를 위해 사다 준 코코아는 감동이 넘쳐 몇 날 며칠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러다 재환에게 이전 애인이 흘리고 간 피크를 들켰을 때는 사라지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재환의 향을 정신 어찔해질 정도로 마셨는데, 이 열기가 사그라질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으니 충분히 잘 알았다.
“읏, 재…, 환아.”
결국 한영은 재환의 이름을 부르며 묽은 정액을 싸질렀다. 덕분에 허벅지 주변이고 손바닥이고 다 척척해졌다. 그나마 깨끗한 손등으로 덩달아 젖은 눈가를 문지르며 지금껏 홀로 수없이 뱉었던 말을 넋 나간 사람처럼 또다시 중얼거렸다.
안 좋아해. 나 너 안 좋아해. 하나도 안 좋아해….
새빨간 거짓말만도 못한 진실이 그렇게 또 매끈한 타일 벽에 부딪혀 울적한 잔향을 만들어 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 소리는 끔찍이도 길고 질척했다.
<2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