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 *
맴맴,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매미들 합창하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이를 배경 음악 삼아 내딛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덩달아 손에 들린 투명한 비닐봉지가 리드미컬하게 앞뒤로 흔들리며 사박사박 간지러운 소리를 울렸다. 여기에 음이 엉망진창으로 어긋난 콧노래까지 더해져 다소 수선스러운 느낌을 자아냈지만, 정작 노래하는 본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드러머는 드럼만 잘 치면 될 일이었다. 내처 흥겹게 박자까지 타며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자 머리털 한 올 없는 매끈한 머리통이 이리저리로 눈 부신 빛살을 반사시켰다. 부산함이 배가 되었다.
흥에 취한 태군은 합주실, 그러니까 한영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한층 기분이 들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일단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오디션에서 드럼을 진짜 끝장나게 친 것 같았다. 코스믹, 뭐더라…. 암튼 같이 오디션 본 밴드의 드러머가 먼저 와서 ‘형님 드럼 진짜 짱이던데요?’라고까지 했으니 절대 자화자찬은 아니었다. 사실 재환이 지겹도록 연습, 연습을 외칠 때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태군은 어제 절실히 깨우쳤다. 물론 재능도 있고, 거기에 노력을 곁들여야 저런 칭찬도 들을 수 있는 것일 테다.
태군이 신이 난 두 번째 이유는 덜렁덜렁 흔들리는 봉지 안에 담긴 몸값 비싼 녀석들에 있었다. 안 그래도 매번 멤버들에게 커피를 얻어 마셔 한번 거하게 쏘려고 하던 차였는데, 어제는 다들 수고도 했겠다 오늘이 여러모로 적기였다. 남들이 아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태군 자신은 이토록 의리가 넘치는 남자였다.
그러니 뜨거운 햇볕 아래를 걸으면서도 자연히 흥흥흥 콧노래가 흘렀다. 다만, 아주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어제 오디션이 끝난 후 클럽 사장으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가사가 특이하네.’
얘기만 들어서는 그래서 공연을 잘했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말을 하는 사장의 표정에 시종 변화가 없어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뭐, 일주일 안에 결과를 알려 준다 했으니 기실 지금 끙끙대며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못 했으면 못 했다고 했겠지. 어느덧 한영의 집에 도착해 계단을 내려온 태군은 저 나름 깔끔한 결론을 내리고서 벌컥 방음문을 열어젖혔다. 손에 쥔 봉지를 냅다 흔들며 얼마나 귀한 걸 사 왔는지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마카롱 사 왔다-!”
각자 자리에 앉아 있던 재환, 지우, 한영의 눈이 천천히 태군을 향했다. 동시에 반가움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멤버들의 시선이 팔랑팔랑 봉지를 흔들던 손을 멈칫하게 했다. 당혹스러울 만치 이쪽을 보는 낯빛들이 좋지 않았다. 어색하게 눈을 굴린 태군은 한풀 기가 죽은 목소리로 웅얼웅얼 종전의 말을 되풀이했다.
“마카롱 사 왔는데….”
‘싫어?’라는 말은 차마 덧붙이지 못했다. 혹여 누구 하나라도 그렇다고 대답하면 무지하게 서운할 것 같아서. 그런 태군의 여린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재환이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일단 와서 좀 앉아 봐. 긴급 사태야.”
어깨를 축 늘어뜨린 태군은 타박타박 드럼 뒤로 걸어갔다. 힘없이 발을 옮길 때마다 마카롱 봉지가 청바지에 스치며 버스럭버스럭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이 맛있는 마카롱을 안중에도 두지 못할 긴급 사태가 대체 무엇일지 태군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태군이 털썩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재환은 초반 설명을 놓친 그를 위해 다시 처음부터 얘기를 시작했다.
“그니까, 아까 사장님한테 문자가 왔는데….”
약 30분 전,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들렀다 한영의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재환은 사장으로부터 문자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니네 가사 다시 쓸 생각은 없니?]
끝에 물음표가 붙어 질문의 형태를 띠었다 뿐이지 사실은 통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가사를 바꾸지 않는 이상 무대에 세워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재환은 자신이 아주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클럽 코벤트의 사장은, 의외로 상당히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 고지식함이 밴드가 추구하는 음악 장르나 공연 스타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 어디에서 듣도 보도 못한 실험적인 음악을 연주하든, 멘트 하나 없이 주구장창 노래만 부르든 사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질색하는 건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이를테면 겉멋, 허세, 꼴값 같은 것들….
그런 사장의 기준에서 노랫말 하나가, 그것도 영어로 끝도 없이 반복되는 자신들의 노래는 겉멋이나 허세로 비칠 공산이 다분했다. 그걸 완벽하게 간과하고 있었으니 문자를 받은 재환의 낭패감이 적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사를 다시 써야 될 것 같아.”
“아….”
재환의 말이 끝나고, 지금 마카롱 따위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 태군의 입에서 망연자실한 듯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숱 많은 눈썹 끝은 뚝 아래로 떨어졌다. 태군이 오기 전 이미 한 번 재환으로부터 얘기를 들었던 지우나 한영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 또한 다들 비슷비슷했다.
그래서, 도대체 누가 가사를 쓸 것인가….
멤버들의 불안한 눈빛에서 이러한 속내를 충분히 읽어 낸 재환은 잠시 다물려 있던 입을 어렵사리 뗐다.
“그…, 일단 한영이 넌 어때? 사실 네가 쓰는 게 제일 좋긴 한데….”
대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일단 재환으로서는 한영에게 제일 먼저 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게는 밴드에서 곡을 쓰는 사람이 가사도 함께 붙여 오는 게 보통이었다. 재환이 전에 하던 밴드도 그랬고, 다른 밴드들도 거의 그럴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영이 가사를 다시 쓰는 쪽이 가장 무난하면서도 이상적인 해결방안이었다. 단, 밴드 이름을 지을 때처럼 이것 또한 한영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난….”
예외 없이 한영의 시선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가지런한 앞니가 자근자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어질 말을 백분 짐작한 재환은 서둘러 다음 사람에게 질문을 넘겼다.
“지우 넌?”
“뭐, 쓰면 쓰겠는데. 나도 자신은 없네.”
지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재환이 아는 한 지우는 할 수 있는 걸 귀찮다거나 괜히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이 없다면, 진짜 자신이 없는 거였다.
후, 한숨을 내뱉은 재환은 그나마 하나 남은 희망인 태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재환의 간절함 섞인 눈빛을 받은 태군이 제발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주지 말라는 듯 냅다 고개를 저었다.
“야, 너 알잖냐. 고딩 때 내 국어 점수….”
말을 꺼내기도 전 자백처럼 내놓아진 친구의 대답에 재환의 입 밖으로 보다 긴 한숨이 흘렀다. 중간고사였나, 기말고사였나. 태군이 국어에서 20점을 받았다고 낄낄대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던 모습이 언뜻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다고 국어에서 그럭저럭 높은 점수를 받던 재환 자신이 가사를 쓸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국어 점수와 상관없이 그의 글짓기 실력은 처참했으므로. 재환은 누구보다 본인 객관화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번에도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아예 다 하나씩 써 와 보는 건 어때?”
* * *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민망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각자 손에 종이 한 장씩을 쥔 더 숨의 네 사람은 1층 거실 탁자에 둘러앉아 말없이 서로서로 눈치만 살폈다. 이번만큼은 멤버들에게 숙제를 내줬던 재환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종이 위 적힌 내용을 공개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끝 간 데 없는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왜 이러자고 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닥쳤으나, 사실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가사를 쓰겠다는 이가 없으니, 억지로라도 개중 나은 사람을 찾는 수밖에. 괜히 종이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가, 모자를 고쳐 썼다가, 턱을 한 번 손으로 쓸어내린 재환은 겨우 운을 뗐다.
“어떻게 할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읽어 볼까?”
“이걸 소리 내서 읽자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태군이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라 재환은 얼른 ‘그건 좀 그렇지…?’ 하고 말을 덧붙였다. 원래 이렇게 겁 많은 성격이 아닌데, 막상 재환도 스스로 써 온 가사를 멤버들 앞에서 직접 읽는 일만큼은 절대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녹아서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냥 돌려 가면서 읽는 게 낫겠지? 눈으로?”
‘눈으로’라는 말에 부러 더 힘을 주자 기다렸다는 듯 나머지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옆 사람에게 손에 들린 종이를 넘겨주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재환이 총대를 멨다.
1인용 소파 팔걸이를 한 손으로 짚고 벌떡 일어선 재환은 가운데 놓인 탁자를 지나쳐 맞은편 앉은 한영에게 다가갔다. 당황하여 어깨를 움츠린 한영의 손에서 빼앗듯 종이를 낚아채고서, 태군과 지우에게도 어서 옆으로 넘기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제야 주춤주춤 태군이 옆자리에 앉은 지우에게, 그리고 지우가 1인용 소파에 따로 앉은 한영에게 차례로 종이를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태군에게 자신의 가사가 적힌 종이를 쥐여 준 재환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들 옆 사람에게 가사를 넘겼으니, 이제 사이좋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공유할 시간이었다.
네 명의 손안에서 네 장의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두 손으로 종이를 든 재환은 제법 집중한 표정으로 한영의 가사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맨 위에 적힌 ‘I Love You’라는 제목 다음 줄로 눈을 옮기는 순간 곧바로 푹 눈썹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가사의 내용보다는 흰 종이 위로 인쇄된 문자에 원인이 있었다. 서둘러 저 아랫줄까지 휙휙 훑어 내렸으나, 눈 씻고 찾아 봐도 한글은 한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죄다 영어였다.
‘There’s no reason’에서 시작해서 ‘Let me say I love you’로 끝나는 가사를 모두 읽은 재환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뒷목을 문질렀다. 전처럼 ‘I love you’만 주구장창 반복되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이런 가사라면 분명 또 클럽 사장이 탐탁지 않게 여길 게 뻔했다. ‘니네는 외국 밴드니?’라고 아예 한 소리 할 수도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영어라 완벽한 해석은 어려웠으나 한영이 이렇게도 가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재환에게 다소 색다른 놀라움을 전했다.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가져갔던 종이를 슬쩍 밑으로 내린 재환은 탁자 건너,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한영을 흘끔 살폈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종이 위로 빼꼼히 올라온 눈과 동그란 이마, 그리고 분홍색 머리칼이 전부였다. 오늘따라 소녀처럼 앞머리를 올려 하나로 묶은 탓에, 하얀 이마가 쉴 새 없이 구겨졌다 펴지는 것이 유독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한영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든 원인은… 아마도 지우의 가사일 터였다.
재환의 시선이 다른 소파에 앉은 지우에게로 옮겨 갔다. 태군의 가사를 읽고 있을 지우는 주먹 쥔 손의 옆면으로 입가를 틀어막고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좌우를 한 번 오갈 때마다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온 힘을 다해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태군이 마카롱에 관한 가사라도 써 온 걸까. 그러나 기실 지금 재환은 남의 가사를 걱정할 주제가 되지 못했다. 영 불안한 마음을 안고 제 것을 읽고 있는 태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태군의 표정은 덤덤했다. 한영처럼 인상을 쓰지도, 지우처럼 터지는 웃음을 참지도 않았다. 오히려 중간중간 ‘흠흠.’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재환의 가슴속에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 온 친구를 향한 고마움 같은 것이 몽글몽글 샘솟았다. 이쪽이 밤새 고민해 쓴 가사를 비웃지 않는 것만으로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이어서 한 장, 한 장 다음 사람의 가사를 받아 읽으며 재환은 태군이 괜히 제 생각을 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이 중 재환 본인의 가사가 가장 무난했다. 정말이었다.
일단 한영의 것 다음으로 넘겨받은 지우의 가사는 후렴 부분만 읽자면 이러했다.
내 사랑이 유죄라면 난 무기징역. 아무리 실력 있는 변호사도 소용없어. 법치주의 국가에서 넌 날 자꾸 범법자로 만들어. 감옥에서 외칠게. I love you.
〈I Love You〉라는 제목보다는 〈수감자의 노래〉가 훨씬 어울릴 듯한 가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디어는 참으로 신선하다만, 그 신선함이 하도 지나쳐 이건 뭐 저희가 감히 소화할 만한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해도 ‘감옥에서 외칠게’를 외치는 한영의 모습이 상상 가지 않았다. 한영이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래퍼였다면 좀 어울렸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다음으로 태군의 가사를 건네받았을 때는, 감옥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 노래로 서늘해졌던 뒷덜미에 소름 끼치도록 간지러운 감각이 화르륵 돋아났다. 세상 이리 애틋하면서도 달콤한 노래가 또 없었다.
꽃 피는 춘삼월 살랑이는 봄바람과 함께 내게로 온 너. 꽃내음 묻은 너의 향기가 내 마음을 분홍빛으로 물들여. 내 머릿속을 꽃밭으로 만들어. 그런 너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어. 달링, 아이 러브 유.
마카롱을 한 번에 열 개는 집어삼킨 듯한 느낌에 재환은 어깨를 떨며 몸서리쳤다. 동시에 메탈을 좋아하던 제 친구에게 이런 식의 문학적 감성이 있었다는 것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심 감탄하며 태군을 보자, 아직도 한영의 가사를 지우에게 넘기지 못한 태군은 살벌한 기세로 종이와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어 가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결국 ‘에이, 썅!’을 외치며 지우 쪽으로 던지듯 종이를 넘겼다. 종이를 받고서 쓱 가사를 일별한 지우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태군의 정수리를 문질렀고, 태군은 악악거리며 거품을 물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소란이 잠잠해졌을 즈음, 다시 재환에게로 제 가사가 적힌 종이가 돌아왔다. 부끄러움, 민망함 따위로 점철되었던 시간이 대충은 일단락된 셈이었다. 세 사람의 손을 거쳐 조금은 구깃구깃해진 종이에 쓰인 내용은 다시 봐도 참으로 무난했다.
네 생각 때문에 입맛이 없어. 밥이 들어가질 않아. 하루 종일 굶을 뿐이야. 아아, 넌 나를 배고프게 만들어. 너는 밥 같은 사람. 그런 너를 I love you.
어쨌거나 이제 남은 건 이 중 누구의 가사를 노래에 붙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가사를 적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 몰랐다. 살벌한 수감자의 노래로 할 것인가, 꽃 피는 춘삼월의 연애편지로 할 것인가, 밥 같은 노래로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다 포기하고 영어 가사로 갈 것인가…. 우위를 정하기 어려운 선택지를 늘어놓는 것만으로 재환의 머릿속에 스멀스멀 두통이 찾아왔다.
“다들… 어떤 것 같아?”
“음…, 내 가사는 확실히 좀 과격한 것 같네.”
지우의 자진 신고에 태군이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이 ‘어! 존나!’라며 큰 소리로 받아쳤다. 그러한 행동마저 귀여워 보이는지 지우가 태군의 머리로 재차 손을 가져가려다 도로 물리는 게 재환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알은체하지는 않았다.
“한영이 네가 보기에는 어때?”
끌어안은 두 무릎에 뾰족한 턱을 괴고 있던 한영이 느릿느릿 얼굴을 들었다. 여전히 눈썹 사이에는 자잘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름 답을 고르는 듯 불그스름한 입술이 달싹거리더니, 한숨 섞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잘… 모르겠어. 진짜….”
뒤이어 재환의 시선을 받은 태군 또한 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실 멤버들의 의견을 물으면서도 재환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쯤 되니 밴드 이름을 정할 때보다 더한 막막함이 느껴졌다. 생각이 고갈되자 입 안까지 덩달아 까끌까끌 말라 오는 듯했다.
손에 쥔 종이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재환은 푹 눌러쓴 모자 밑으로 마른세수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나 물 좀 마시고 올게.”
그대로 성큼성큼 발을 옮겨 거실 밖으로 나가려다 티브이 근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휙 몸을 튼 재환은 한 3시간은 내리 합주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멤버들을 향해 물었다.
“또 목마른 사람.”
아니나 다를까 태군이 ‘나, 나!’ 하며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우가 ‘아, 맞다.’ 하면서 한영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냉장고에 맥주 있었지?”
대답 대신 한영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를 가지러 가려는지 지우가 자리에서 일어서기에 재환은 되었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내가 가져올게.”
“아, 그럼 나도 맥주 마실래! 째환이가 내 것도 좀 갖구 와 주랑-.”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태군을 밉지 않게 흘겨 준 재환은 ‘알았다, 알았어.’ 대답하며 다시 부엌 쪽으로 발을 뗐다.
거실 에어컨을 약하게 틀어 놓은 탓에 미처 바람이 닿지 못한 부엌은 꽤나 후덥지근했다. 어느덧 기운 해가 커다랗게 난 창으로 타는 듯 붉은빛을 흘려보내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제목만 같은 4인 4색의 가사들과 씨름하느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던 재환은 더운색으로 물든 부엌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식탁을 지나쳐 냉장고 앞으로 갔다.
반지르르 윤이 흐르는 메탈 재질의 냉장고는 언제 봐도 참 컸다. 과장 조금 보태어 제집에 있는 것의 열 배는 되어 보였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늘 열 때마다 안에는 빈칸 없이 그럭저럭 먹거리가 차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주에 몇 번은 일하는 아주머니가 오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분의 손길이 닿은 결과이지 싶었다.
힘주어 냉장고 문을 여는 동시에 에어컨 버금가는 찬 공기가 흘러나와 사악 피부를 감쌌다. 잠시 넋 놓고 시원함을 만끽할 뻔한 재환은 맥주를 찾기 위해 서둘러 눈을 굴렸다. 하지만 재환의 눈길을 앗아 간 것은 한 칸을 몽땅 차지하다시피 한 수십 캔의 흑맥주가 아니었다. 열 맞춰 정리되어 있는 반찬통도, 맨 아래 칸에서 알록달록한 색을 뽐내는 온갖 종류의 과일도 아니었다. 싹 비워진 가운데 칸 중앙에 홀로 놓인….
“어엇…!”
아주 잠깐, 타박타박 급박하게 부엌 바닥 밟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재환의 허리로 불쑥 긴 팔이 들어와 감겼다. 제법 강하게 잡아끄는 힘에 의해 찬 공기 밖으로 한 발 뒷걸음질 쳐지는 동시에 모서리를 붙잡고 있던 냉장고 문이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종전까지 냉장고 한곳에 고정되어 있던 눈이 진회색의 매끈한 냉장고 표면을 꾹 누르고 있는 하얀 손등에 닿았다. 그때까지도 끌어안듯 허리를 붙잡은 팔은 떨어지지 않았다. 등 뒤로는 차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 알 수 없는 체온이 느껴졌다. 그 너머에서 쿵쿵쿵, 심장이 세차게 뛰며 일으키는 진동이 전해졌다. 그것이 멀쩡하던 재환의 심장에까지 풀무질을 해 댔다.
“아….”
언제 사람을 다짜고짜 뒤로 끌어냈냐는 듯 당황이 스민 목소리가 귓가에서 흘렀다. 복부를 가로로 감싼 팔에 스르륵 힘이 풀리며, 등을 덮었던 온기도 떨어져 나갔다. 지금의 상황이 하도 황당해 정작 소리 하나 뱉지 못한 재환은 꽉 닫힌 냉장고 문을 멍하니 쳐다보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맥주… 내가 가져가려고….”
그새 멀찌감치 뒤로 물러선 한영이 아래로 내리깐 눈을 부산스럽게 좌우로 굴리며 어물거렸다. 불안한 듯 기다란 손가락으로는 반대편 팔뚝을 꾹꾹 주물러 댔다. 얼마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하늘색 반팔 소매 아래로 드러난 하얀 살결에 금세 붉은 자국이 생겼다. 당장 손을 뻗어 스스로 제 피부를 혹사시키는 저 손가락을 떨어뜨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재환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응. 그래.”
그러고서 한영이 냉장고 문을 열 수 있도록 옆으로 한 발짝 비켜섰다. 그러나 맥주를 가지러 왔다는 말과 달리 한영은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재환 자신이 부엌을 떠나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저곳에 붙박여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난 먼저 가 있을게.”
괜스레 모자챙 끄트머리를 쥐고 아래로 꾹 내린 재환은 서둘러 발을 옮겼다. 시선까지 푹 떨구어 미처 앞을 보지 못한 바람에 한영과 어깨가 부딪칠 뻔했으나, 한영이 급히 몸을 틀어 아슬아슬 엇갈렸다.
부러 보폭을 키워 단 몇 걸음 만에 부엌을 벗어난 재환은 거실과 부엌 사이에 있는 어둑어둑한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저도 모르는 새 밭게 쉬고 있던 숨이 길게 터져 흘렀다. 벽 뒤편에서 다시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도, 맥주 캔 꺼내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그곳으로부터 바닥을 타고 흘러나온 붉은 노을빛이 발 옆을 사선으로 스치고 지났다. 멀거니 이를 내려다보는 재환의 눈앞에 어른어른 비치는 건 오로지 하나의 형상뿐이었다.
냉장고 안,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깨끗한 선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투명 플라스틱 컵. 그 위에 새겨진 시계 모양의 로고. 그리고 컵 안에 담겨 있던 묽은 밤색 빛의 음료. 며칠 전 재환이 한영에게 주었던 코코아였다.
왜 한영이 보란 듯 냉장고 가운데 코코아를 넣어 놨는지, 그냥 버리는 걸 깜빡한 것뿐인지, 아니면 아까워서 나중에라도 마실 생각이었던 건지 무엇 하나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재환은 터벅터벅 거실로 돌아왔다. ‘맥주는?’ 하고 속 편히 물어 오는 태군에게 ‘갖고 올 거야.’라고 주어 없이 대답하며 털썩 소파 위로 주저앉았다.
한데 탁자에 두고 갔던 가사 종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갔나 싶어 휙휙 고개를 돌리자, 다른 사람의 것까지 한데 모여 지우의 손에 들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는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뭐 해?’라거나 ‘왜?’라고 묻는 대신 재환은 가만히 지우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지우가 뒤로 넘겼던 종이를 다시 앞으로 한 장씩 되돌릴 즈음, 널찍한 나무 쟁반에 맥주 캔 네 개를 올린 한영이 거실로 왔다. 하나같이 표면이 시커먼 색인 캔을 보며 태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엥? 다 흑맥주야? 난 쓴 건 별룬데.”
“…좋아해서.”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한영이 짤막하게 답했다. 동시에 눈높이가 낮아진 한영의 시선이 불현듯 재환과 마주쳤다. 하지만 미처 표정을 살피기도 전, 탁자 위로 숙였던 허리를 쑥 펴 뒤도는 바람에 새하얀 얼굴이 금방 재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면 냉장고 한 칸을 몽땅 다 흑맥주로 채워 놓았을까.
그 순간, 문득 회의를 빙자하여 벌여졌던 지난 술판이 재환의 뇌리를 스쳤다. 당시 자신이 우연찮게 계속 흑맥주만 마셨던 것까지도. 떠오른 기억은 머지않아 오늘 냉장고 문을 열어 보지 말걸, 하는 까닭 없는 후회로 귀결되었다.
표면에 송골송골 물기가 맺힌 캔을 가져온 재환은 캔 꼭지 밑에 엄지를 넣었다 빼며 무의식적으로 탁, 탁 소리를 냈다. 제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어 슬쩍 눈썹을 구겼을 무렵,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 지우가 다소 확신에 찬 눈빛으로 멤버들을 한 번 크게 둘러보았다. 이윽고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온 말은 자꾸만 쓸데없는 상념에 빠지려는 재환을 구제해 주기 충분했다.
“나, 방법을 좀 찾은 것 같은데.”
재환은 소파 위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던 자세를 얼른 고쳐 앉았다. 꿀꺽꿀꺽 맥주를 삼키던 태군은 옆자리 앉은 지우를 향해 휙 몸을 틀었고, 한영은 허벅지 밑에 깔고 앉았던 한쪽 다리를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씩 입꼬리를 끌어 올린 지우의 표정이 세 사람의 기대감을 더욱 부풀렸다.
“솔직히 말해서, 내용만 보면 아무래도 한영이 게 제일 나은 것 같긴 해. 곡 분위기랑도 잘 어울리고.”
원곡자의 가사가 노래와 가장 잘 어우러진다는 점에는 재환도 딱히 이견이 없었다. 줄곧 같은 노랫말만 반복하던 한영이 이런 가사도 쓸 줄 알았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곡 분위기와도 맞고, 내용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한영의 가사에는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문제는 한영이가 영어로밖에 가사를 쓸 줄 모른다는 건데….”
말끝을 흐린 지우가 슬쩍 눈썹을 들었다 내리며 한영을 쳐다보았다. 마치 ‘맞지?’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에 한영은 대답 없이 두 손으로 감싸 쥔 맥주로 슬며시 눈을 떨어뜨렸다. 긍정을 의미하는 반응일 터였다.
“그건 존나 큰 문제 아니냐? 솔까 난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드라!”
불만스럽다는 듯 태군이 비죽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쯤 창피해하는 기색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런 친구가 은근히 귀여워 보여, 재환은 피식 엷게 웃었다. 그때, 재환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우가 대뜸 태군의 어깨 위로 척 팔을 올렸다. 홀로 부끄러움을 삭이던 태군의 표정이 금세 구깃구깃해졌다.
“뭐냐, 너?”
어깨를 흔들어 지우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기다란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층 더 뿔이 난 태군은 ‘새끼야, 무겁다고!’라며 바락 성을 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우가 꺼낸 얘기에 합 입이 다물리고 말았다.
“근데 생각보다 태군이 얘 가사도 괜찮더라고? 재환이 너 보기엔 어땠어?”
반질반질한 머리통과 달리 숱이 빽빽한 태군의 눈썹 사이가 폭 좁혀졌다. 본인의 가사가 괜찮다는 지우의 말을 선뜻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재환은 기꺼이 친구의 의심을 덜어 주기로 했다.
“솔직히 좀 놀라기는 했지. 달달한 연애편지 읽는 느낌도 나고. 괜찮던데?”
놀랐다는 말이 문제였을까, 연애편지 얘기를 꺼낸 게 화근이었을까. 보는 쪽이 다 깜짝 놀랄 정도로 삽시에 태군의 작은 얼굴이 시뻘건 색으로 달아올랐다. 그럴 리 없건만, 저러다 반짝거리는 정수리에서 폴폴 김까지 피어오르는 거 아닌가 싶었다. 지레 당황한 재환이 ‘너 괜찮냐?’라고 물으려는 찰나, 터지기 직전의 낯빛을 한 태군의 입에서 귀 기울여야 들을 만한 작은 목소리가 웅얼웅얼 새어 나왔다.
“새꺄, 여, 연애편지는 무슨….”
아…. 바람결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꽃잎 같은 감성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이 갈 것도 같아 재환은 그냥 꾹 입을 다물었다. 고등학교 시절, 태군이 책상 위에 답삭 엎드려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걸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데, 지금 보니 아무래도 수업 시간 놓친 필기를 하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럴 때 장태군, 하고 부르면 어째 기겁을 하더라니.
의도치 않게 알아 버린 친구의 비밀을 모른 체하기로 마음먹은 재환은 질문의 대상을 지우로 바꾸었다.
“그럼 한영이랑 태군이 가사 중에 고르자는 거?”
얼굴이 뻘겋게 물든 태군의 어깨를 그제야 놓아준 지우가 ‘아니.’ 하며 가뿐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차례대로 탁자 위에 죽 늘어놓았다. 한영, 지우 본인, 태군, 그리고 재환의 것 순서였다. 큰 키만큼이나 길쭉길쭉 뻗은 검지 끝이 맨 왼쪽, 한영의 영어 가사가 적힌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 ‘잘 들어 봐.’라는 말과 함께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일단 한영이가 이것처럼 영어로 가사를 쓰고,”
지우의 검지가 그 옆에 있는 자신의 가사로 옮겨 갔다.
“그다음에는 내가 우리말로 번역을 하는 거지. 영어는 그럭저럭 하니까. 근데, 아마 엄청 딱딱한 문장으로밖에 못 할 거야. 거의 직독직해 수준으로.”
지우는 ‘내 가사 봐서 알지?’라는 부연도 덧붙였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그 옆, 태군의 가사가 적힌 종이를 짚었다. 지우의 말에 잔뜩 집중하고 있던 재환의 시선 역시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한영이나 태군도 마찬가지였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느냐. 내가 번역한 걸 태군이가 그럴듯한 문장으로 고치는 거야. 진짜 가사 느낌이 나게.”
이제 마지막으로 지우의 손가락은 맨 오른쪽에 있던 재환의 가사로 향했다. 한참 전 등받이에서 떨어진 나머지 세 사람의 상체가 약속한 것처럼 그쪽으로 기울었다. 때마침 짙어진 어둠을 감지해 반짝, 켜진 정원의 조명이 전면 창을 통해 스탠드 불만 켜져 있던 실내로 들이쳤다. 그 빛이 제법 훤했다.
“그 가사를 재환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손보는 걸로. 검수라고 해야 하나? 한영이가 부를 수 있게 운율도 좀 맞춰 주고.”
말을 마치자마자 지우의 두 손바닥이 탕, 소리가 나게 탁자 위를 내리쳤다. 재환은 물론이거니와 태군과 한영까지 움찔 놀라 종이 위로 숙어져 있던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씩 웃음을 머금은 지우가 그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재환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슬쩍 눈썹도 띄웠다가 내렸다. 믿음직스럽되 거만해 보이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좀 황당하지? 그래도 해 볼 만할 것 같지 않아?”
당연히 황당하다면 황당한 제안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사를 쓴다는 건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그 황당하다는 감상은 기발하다는 감탄과 맞닿아 있었다. 그러니 재환이 지우에게 들려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일단, 해 보자.”
뒤이어 한영과 태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것이 묘안이 될지, 그 반대가 될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 *
처음에는 이게 될까, 하는 의심이 앞섰다. 그다음 의심은 되네, 하는 신기함으로, 그리고 종국에는 됐다! 하는 성취감으로 뒤바뀌었다. 그만큼 지우가 제안한 이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는 방법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차근차근 대한민국 밴드 역사에 없던 협업을 해 나갔다.
일단 한영이 몇 날 며칠 방에 틀어박혀 영어로 가사를 적으면, 그 가사를 지우가 전해 받았다. 영어를 그럭저럭 한다는 말이 허풍이 아님을 증명하듯 지우는 순식간에 한영의 가사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단, 본인이 미리 밝혔던 것처럼 그 어떤 꾸밈도 들어가지 않은, 정직하리만치 직역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하나 태군은 그 편이 편하다고 했다. 그래야 제가 맘껏 창작욕을 불태울 수 있다나 뭐라나. 그래서 더욱이 재환의 검수 과정이 꼭 필요했다. 중간중간 들어간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과감히 지우고, 원곡의 운율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태군의 문장을 다듬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한영이 쓴 ‘No one else can hear my heart, only you can’이라는 가사는 지우를 거쳐 ‘아무도 내 마음을 들을 수 없다, 너만 들을 수 있다’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면 태군이 창작 혼을 불살라 해당 문장을 ‘아아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내 마음, 오직 사랑하는 그대에게만 들릴 거야’라고 바꾸었다. 마지막으로 미간에 주름을 잡은 재환이 태군의 결과물을 ‘아무도 듣지 못한 내 마음, 오직 너에게만 들릴 거야’라고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하면 얼추 문장 하나가 완성되는 셈이었다. 그 문장들이 모여 벌스, 후렴 등을 이루었고, 또 그것들이 모여 곡 하나가 되었다. 이 과정을 보며 재환은 그야말로 경이롭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네 명의 머리와 손을 거쳐야 하다 보니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 소소한 문젯거리라면 문젯거리였다. 그리하여 작업은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네 명이 만날 시간이 맞지 않을 때는 메일로 결과물이 오갔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핸드폰 메신저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송되었다. 하니 재환은 태군으로부터 ‘너를 사랑해’라거나 ‘네가 너무 보고 싶어’와 같은, 친구 사이에 절대 주고받고 싶지 않은 메시지를 꽤나 여러 번 받아야 했다.
재환이 태군의 고백 아닌 고백 메시지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I Love You〉와 〈I Miss You〉 두 곡의 가사가 완벽한 우리말로 완성되었다. 한영의 입에 새 가사가 붙을 때까지 새로이 연습하는 과정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가사를 전부 뜯어고치는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 사람은 보다 파이팅을 외치며 하나 남은 〈I See You〉도 서둘러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득 재환은 깨달았다. 이전 녹음된 곡을 수십 번씩 들으며 따라 부르고, 때로는 잠을 줄여 가며 가사를 고치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이 과정이 하나도 고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고되기는커녕 시도 때도 없이 픽픽 웃음이 새어 나갈 정도로 즐거웠다.
그러다 즐거움이 지나쳐 멍청하게 콧날이 시큰해질 때도 있었다. 더불어 지금의 세 사람과 함께라면,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헤쳐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믿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았다. 단언컨대 과거 다른 밴드를 할 때에는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이 낯설면서도 간지러운 감정이 재환은 싫지 않았다.
이렇게 밴드 일을 하나둘 해결해 가는 중에도 착실히 일상을 흘러갔다. 기실 재환에게 있어 일상이란 뻔하디뻔한 것이었다. 돈 버느라 바빴다. 최근에는 카페에서 마감까지 일하는 날이 늘어나 더욱 그랬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잘 들지 않는 코딱지만 한 집이라도 꼬박꼬박 월세 내야지, 삼시 세끼 밥 챙겨 먹어야지, 가끔 기타 줄이나 피크도 사야지. 또래 녀석들처럼 밖에 나가 논다거나 옷, 신발 따위에 돈 쓰는 일 같은 거 하나 하지 않음에도 알음알음 돈은 쉴 새 없이 빠져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한영의 집 지하에 합주 공간이 있어 따로 합주실 빌리는 돈이 나가지 않는 건 재환에게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것 또한 자신의 복인 것 같았다.
오늘도 카페에서 마감까지 일한 재환은 평소처럼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카페에 남아 분주하게 홀을 돌아다녔다. 테이블 몇 개를 붙여 사람 여럿이 한꺼번에 앉을 자리를 만들고, 그 위로 접시와 포크 등의 식기를 날랐다. 카페에서 뒤늦어진 제 환영회를 겸해 직원 회식이 열리는 까닭이었다. 따라서 가게 문에 ‘Close’ 팻말을 걸어 놨음에도 하나둘씩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두 이곳 A’Clock에서 일하는 친구들이었다.
“오빠! 오늘 마감이었어요?”
“아, 응.”
“아니, 근데 오빠 환영횐데 오빠가 일하고 있음 어케요?”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의 차림을 한 희연이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못마땅하다는 듯 볼을 잔뜩 부풀렸다. 그러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조막만 한 핸드백을 내려놓고는 부리나케 재환 옆으로 달려왔다. 성을 내는 표정과 달리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제법 경쾌했다.
“괜찮아. 너도 앉아 있어.”
먼저 도착해 다른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아르바이트생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재환이 말했지만, 희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목소리를 키워 카운터 뒤편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장 세훈에게까지 한 소리 했다.
“싸장님! 재환 오빠만 막 부려먹으시고!”
“와, 재환아. 네가 희연이한테 말 좀 해 줘라. 내가 너 부려먹은 거 아니라고.”
파스타가 수북이 쌓인 커다란 접시를 들고나오며 세훈이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재환에게 SOS를 요청했다. 제가 먼저 테이블을 차리겠다고 자처했으니 세훈의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닌지라, 재환은 빙긋 웃으며 희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힘이 남아돌잖아. 그래서 그래.”
감질나게 닿았다 떨어지는 손길에, 그리고 좀처럼 보기 힘든 재환의 농담하는 모습에 희연의 표정이 한순간 얼뜨게 변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 같았던 희연은 재환이 손에 들고 있던 스푼 뭉치를 얼른 빼앗듯 낚아챘다. 괜히 ‘나 혼자 나쁜 애 됐어!’라고 볼멘소리를 하며 탁, 탁 소리가 나게 자리마다 스푼을 내려놓았다.
얼마 가지 않아 재환이 붙여 놓았던 테이블 위로 여느 레스토랑 못지않은 한 상이 거하게 차려졌다. 개중에는 피자나 치킨 등 배달 음식도 몇 있었는데, 세훈이 접시에 그럴듯하게 플레이팅을 해 놓아 꼭 유명 요리사가 요리한 음식처럼 보였다. 회식이라고 하면 끽해야 고깃집이나 치킨집 따위를 떠올리는 게 전부인 재환에게는 꽤나 생소한 풍경이었다. 애초에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열리는 회식 자리에 참석하는 일 자체가 재환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생소한 것은 눈앞에 놓인 음식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테이블 앞에 앉은 재환은 찰랑찰랑 와인이 따라진 목 긴 잔을 들고 사장 세훈, 그리고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 함께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세훈이 ‘A’Clock의 새 가족, 재환이를 환영하며!’라는 건배사를 크게 외칠 때는 절로 쑥스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다들 신이 나서 웃고 떠드는 가운데, 아르바이트 회식이라기엔 황송하리만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식사가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허기가 졌던 재환은 와인으로 간간이 목을 축이며 부지런히 포크를 움직였다. 피자, 치킨이야 아는 맛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세훈이 직접 만든 파스타나 리소토를 먹었을 때는 깜짝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진짜로 여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먹는 맛 못지않았다. 물론 실제로 가 본 일이 적어 비교하기는 좀 애매했지만, 그런 자신의 입에도 맛있게 느껴지는 걸 보면 보통 요리 실력이 아니었다. 그러니 재환은 순수한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사장님, 진짜 다 맛있어요.”
말하는 와중에도 토마토소스와 잘게 간 고기가 맛깔스럽게 어우러진 파스타로 포크가 뻗어 나갔다. 호로록 와인을 들이켠 세훈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집사람이 요리를 워낙 잘해서. 어깨너머로 배웠지.”
“어…, 사장님 결혼하셨어요? 전 몰랐어요.”
“뭐, 비슷해.”
세훈은 또다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남 일을 잘 캐물을 줄 모르는 재환은 그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음을 울려 더 물으려야 그럴 수가 없기도 했다. 재환은 테이블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뜬 메시지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오늘 중으로 아이씨유 완성본 꼭 보낸다! 기둘려!!!!!!!]
마치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태군의 메시지에 절로 입꼬리가 쑥 위로 올라갔다. 과하게 많은 느낌표 탓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또 어떤 기막힌 시 한 수를 적어 보내 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희연이 그런 재환을 보고서 두 눈을 회동그래 떴다. 재환의 시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 눈에 다시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는 핸드폰이 잡혔다. 사람 설레게 하는 부드러운 미소, 꺼지기 전 설핏 화면에 비쳤던 문자 메시지. 이 모든 상황이 희연에게 덜컥 불안한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생각에 잠긴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희연은 파스타를 돌돌 말던 포크를 슬그머니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저, 오빠.”
“응?”
“혹시… 누구 만나세요?”
재환이 다소 큰 목소리로 ‘어?’ 하고 되묻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세훈과 상지가 이 재미있는 대화를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냉큼 끼어들었다.
“그러게. 재환이 너 연애는 안 해?”
“맞아요, 오빠! 얘기 좀 해 보세요.”
제 얘기를 남에게 하는 것에도, 이런 종류의 대화를 하는 것에도 모두 익숙지 않은 재환은 살짝 당황하여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그러한 반응이 다른 이들의 궁금증을 더욱 자극한다는 건 미처 알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재환을 본 세훈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지고, 괜한 초조함을 느낀 희연의 눈에는 반대로 힘이 들어갔다.
“누구 있나 본데?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세훈에게서 약간의 짓궂음을 품을 질문을 받고 나서야 재환은 뒤늦게 입을 뗐다. 덩달아 손사래까지 쳤다.
“아뇨, 없어요. 전혀.”
‘전혀’라는 수식어까지 붙은 재환의 답이 저도 모르는 새 호흡을 참고 있던 희연의 숨을 길게 틔웠다. 건너편에서 이를 훤히 보고 있던 상지가 킥킥 숨죽여 웃었다. 세훈만이 재미없다는 듯 ‘에이.’ 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청춘들 연애하는 얘기나 좀 듣나 했더니. 근데 재환이 인기 많지 않아? 키도 크고 잘생겼는데.”
재환의 눈에는 그리 말하는 세훈이 훨씬 더 잘생겨 보였다.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도 시원시원한데다가, 하나로 묶은 범상찮은 머리 스타일 때문인지 세훈은 항상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참 멋진 사람이다 싶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가진 것도 없어, 말주변도 없어, 거기에 맨날 시커멓게만 입고 다니는 놈을 누가 좋아할까.
그때, 문득 자신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던 한 녀석의 얼굴이 휙 재환의 머릿속을 스쳤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 말이지. 지나치게 반듯한 그 얼굴을 애써 뇌리에서 지워 내며, 재환은 이번에도 ‘아뇨.’ 하고 세훈에게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이에 사람이 너무 겸손해도 안 되는 법이라며 세훈이 타박 아닌 타박을 날릴 즈음, 재환 뒤편에 있던 카페 문이 열렸다.
“빨리 와!”
이윽고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발견한 세훈의 얼굴 가득 보는 사람이 다 놀랄 법한 훤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재환도 함께 고개를 돌렸다. 세훈이 반갑게 맞이한 이는 그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는 청바지 위에 검정 티셔츠를 입은 비교적 편한 차림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가게 닫고 지금 온 거야.”
자연스럽게 세훈 옆으로 와 앉은 남자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옆에 내려놓으며 다소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비어 있던 자리라 혹 누가 더 오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 당사자인 모양이었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화려한 느낌의 세훈과 분위기는 많이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상당한 미남이었다. 하나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우면서도 무뚝뚝한 인상을 풍겼다. 그런 남자에게 아르바이트생들이 차례대로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건넸고, 그와 눈이 마주친 재환 또한 고개를 꾸벅였다.
“아, 새로 온 알바생?”
“응. 엄청 잘생겼지? 요새 우리 가게 자랑이야.”
재환이 대꾸하기도 전 세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칭찬이 과한 사장님 때문에 재환이 다시금 난감한 표정을 짓는데, 난데없이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남자가 손바닥으로 세훈의 등짝을 시원히 때린 것이다.
“너 그거 성희롱이야.”
바로 정면에서 그 장면을 봐 버린 재환의 눈이 커다래졌다. 등을 가격하는 소리가 워낙 크기도 컸거니와, 남자의 말투나 표정이 심히 살벌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이 자리에서 놀란 사람은 재환 자신뿐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미쳐, 정말! 어떻게 사장님은 맨날 혼나요?”
“우와, 소리 대박.”
“크, 역시 사모님.”
여기저기서 웃음기가 잔뜩 밴 소리가 한마디씩 툭툭 튀어나왔다. 이러한 광경, 혹은 상황에 다들 적잖이 익숙한 눈치였다. 다만 남자를 향한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재환의 고개를 설핏 갸웃하게 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야, 재환아. 내가 방금 너 성희롱한 거냐? 응?”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은 세훈이 손이 닿지도 않는 등을 매만지며 재환에게 물었다. 자연히 재환은 무어라 답을 하지 못했고, 이번에도 매몰차게 입을 연 것은 옆자리의 남자였다.
“황세훈, 네가 하면 성희롱이지. 내 말이 틀려?”
“와, 맞네. 사장님 혹시….”
“어머, 진짜.”
별안간 테이블에 둘러앉았던 이들이 하나같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세훈을 보았다. 그중 일부는 킥킥거리며 재환에게 묘한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세훈은 사람을 무슨 변태 호색한으로 보냐며 펄쩍 뛰었고, 이번에도 분위기를 쫓아가지 못한 재환만이 멀뚱히 혼자서 침묵을 지켰다.
“재환아, 진짜 그런 거 아니다. 오해하지 마! 응?”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술이 좀 들어가자 평소의 배로 말이 많아진 세훈은 억울함을 풀려는 듯 재환에게 거듭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대뜸 재환을 보고서 ‘나 그런 사람 아냐!’를 버럭 외치기도 했고, 또 그러다 방금처럼 간절한 투로 당부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재환은 멋쩍게 ‘예….’ 하고 대답했다. 사실 이외에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너 취했어? 재환 군 그만 괴롭혀.”
뒤늦게 태혁이라고 저를 소개했던 남자가 그런 세훈의 손에 물 잔을 쥐여 주었다. 세훈은 군말 없이 꿀꺽꿀꺽 물을 받아마셨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비치는 두 사람을 보며 재환은 그새 와인이 한가득 따라진 잔 기둥을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지금껏 마신 양에 비해 아직 상태는 비교적 멀쩡했다.
“두 분이… 사이가 되게 좋으신 것 같아요.”
하지만 저도 모르게 실없는 소리가 나간 걸 보니 또 아예 취하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공연히 머쓱해진 재환은 서둘러 와인 잔을 들어 호록 한 모금을 들이켰다. 언제 재환에게 우는소리를 했냐는 양 세훈이 함박웃음 지으며 옆자리 있던 태혁의 어깨에 척 팔을 둘렀다.
“우리가 사이가 좀 좋긴 해? 그치, 자기야?”
내처 고개까지 바짝 기울인 세훈이 눈을 맞추며 묻자 태혁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깨에 얹힌 팔을 떨쳐 내지는 않았다.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던 상지가 휙휙 손을 내저었다.
“어우, 재환 오빠.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그럼 사장님이 사모님한테 더 들러붙는단 말야.”
“뭐, 왜? 내가 우리 마누라한테 좀 들러붙겠다는데.”
보란 듯 세훈이 힘주어 태혁의 어깨를 보다 꽉 끌어안았다. 그제야 태혁은 세훈의 옆얼굴에 손을 넣어 저리 좀 가라는 듯 그를 쭈욱 밀어냈다. 그래 봤자 세훈은 또 금세 태혁에게 달라붙었다.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더 반복되었다. 이를 마주 보고 있던 재환의 입가에 어느새 엷은 웃음이 번졌다.
말로만 듣던 동성 커플을 이리 직접 보는 건 기실 재환에게 있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혐오감이나 거북함이 느껴지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냥,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좋아 죽겠다는 한 사람과, 싫은 척하면서도 끝내 받아 주는 한 사람은 서로를 향해 영락없는 연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주위 분위기까지 더해져 덩달아 재환까지 그들을 평범하게 대하게끔 했다.
“맞다. 새 디저트 갖고 왔는데.”
수차례 시도 끝에 드디어 세훈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한 태혁이 테이블 밑에 두었던 쇼핑백을 위로 올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제법 큼직한 플라스틱 통이었다. 뚜껑을 열자 주변으로 향긋하면서도 달달한 향이 물씬 풍겼다.
“우와, 이게 뭐예요?”
“아펠슈트루델이라고, 오스트리아식 사과 파이야.”
“냄새 짱 좋아!”
다들 한껏 들떠 솔솔 침샘을 자극하는 파이에 집중한 가운데, 그새 자리를 떴다 다시 돌아온 세훈이 테이블에 새 접시를 내려놓았다. 접시 위에 태혁이 파이를 담자, 다른 이들이 재빨리 옆으로 접시를 옮겼다. 재환 앞에도 먹음직스러운 파이가 담긴 접시 하나가 놓였다.
“자, 다들 한번 먹어 봐! 맛 괜찮다 그러면, 카페 메뉴로 추가하게.”
세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가 포크를 들고 푹 파이를 떴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환도 둘둘 전병 같은 것에 말린 듯한 모양새의 파이를 조금 잘라서 입에 넣었다. 금세 입 안 가득 달큼한 사과 향이 퍼졌다. 카페에서 일한 지 제법 되었음에도 여전히 디저트는 재환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이었지만, 그런 그가 먹기에도 파이는 상당히 맛있었다. 그 감상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진짜 맛있네요.”
“다행이네. 다음에 우리 가게도 한번 놀러 와. 근처에 있어.”
“가게요?”
재환이 포크 옆면으로 파이를 마저 자르며 묻자 태혁 옆에 있던 세훈이 대신 입을 열었다.
“아, 재환이한테 아직 제대로 설명을 안 했구나. 카페에 있는 디저트들, 다 태혁이가 만든 거야. 근처에서 빵집 하거든. 독일식 베이커리. 거기 빵 되게 맛있어. 태혁이 솜씨가 무지 좋거든.”
“아….”
못내 자랑스러운 듯 씩 입꼬리를 올린 세훈이 태혁에게 애정 넘치는 눈길을 보냈다. 파이가 이렇게 맛있으니 세훈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를 짐짓 모른 체하는 태혁의 얼굴도 이 자리에 처음 앉았을 때보다는 다소간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입들이 많아 그런지 그 푸짐하던 음식들이 어느덧 모두 동이 나고, 태혁이 한가득 꺼내 놓았던 파이도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배가 찰 대로 찬 A’Clock의 식구들은 남은 와인을 홀짝이며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웠다. 요새 아이돌은 누가 잘나간다느니, 최근 개봉한 영화 뭐가 그렇게 재밌다느니…. 아무래도 재환이 쉬이 낄 만한 주제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간간이 말을 섞으며 재환은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하나 남은 와인병마저도 바닥을 보일 즈음, 대뜸 희연이 휙 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 오늘은 그거 안 해요?”
그거? 희연이 말한 바를 선뜻 이해하지 못한 재환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번에도 나머지 사람들은 희연의 말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듯했다. 세훈이 ‘해야지!’라고 응수하자마자 날이 바뀔 때까지도 일어날 생각일랑 없어 보였던 사람들이 대번에 자리를 박찼다. 그중 몇은 잰걸음으로 카페를 돌아다니며 전면 창의 블라인드란 블라인드는 다 쳤고, 또 그중 몇은 빛의 속도로 테이블을 정리했다. 하니 재환도 얼결에 음식이 담겼던 흔적만 남은 접시들을 카운터 뒤편 싱크대로 날랐다. 그러면서도 이게 도통 무슨 일인가 싶었다.
사람 여럿이 바지런히 움직이니 한순간에 회식 자리가 말끔히 정리되었다. 그 자리에 언제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모를 낯선 물건이 턱 하니 놓였다. 둥그런 구 모양의 조명이었는데, 생김새가 꼭 노래방 천장에나 달려 있을 법해 보였다. 그리고, 재환의 짐작은 얼추 들어맞았다.
탁탁 몇 번의 벽면 스위치 누르는 소리와 함께 훤했던 카페 안이 컴컴한 어둠에 잠겼다. 세훈이 가운데 놓인 기계를 켜자, 기계 사방으로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 현란한 빛깔의 조명이 점점이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을 빨주노초파남보로 물들인 빛이 서서히 원을 그리며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별안간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쿵쿵쿵 요란스러운 음악 소리가 터졌다. 킥 드럼과 베이스가 한껏 강조된 일렉트로닉 음악이었다.
삽시에 클럽으로 뒤바뀐 카페가 진짜 클럽에 버금가는 흥분에 휩싸였다. 배 터져 죽겠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하던 이들은 온데간데없이, 하나같이 팔짝팔짝 뛰어오르며 금세 시끄러운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 가운데 외딴 섬처럼 덩그러니 놓인 재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끔뻑거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이 멍해진 표정을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였다.
라이브 클럽의 무대 조명은 받아 봤을지언정, 재환은 여태껏 춤추는 클럽의 문턱조차 밟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든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최대치로 음압이 끌어 올려진 노래가 빠른 BPM으로 내달릴수록 그저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무리 와인을 마셔도 종전까지 멀쩡했던 시야가 덩달아 울렁거리는 듯했다. 잔뜩 흥이 난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그때였다.
“오빠, 왜 가만히 있어요!”
누군가에게 덥석 손목이 붙잡히는 동시에 재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재빨리 초점을 되찾은 눈에 볼을 방긋방긋 부풀리고 있는 희연이 비쳤다. 바로 옆에서는 상지가 쉴 새 없이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이 이상야릇한 조명 속에서도 일순간 두 사람이 반짝반짝 빛나 보인 것은, 재환 자신의 착각이었으리라.
“오빠도 춤춰야죠!”
“어, 어….”
그러는 새 상지에게 나머지 손목까지 붙잡혀 버린 재환은 졸지에 흥이 오른 사람들 한복판에 섞이게 되었다. 그런다 한들 기타밖에 모르던 놈이 갑자기 춤추는 법을 알기는 불가능했다. 제 양손을 붙잡고 휙휙 번갈아 위아래로 흔드는 희연을 따라 어색하게 발을 살짝씩 움직일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마냥 낯설어야 할 작금의 상황이, 재환은 조금 즐겁게 다가왔다. 조금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이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는 새 슬금슬금 입매가 옆으로 벌어졌다. 벌어지고 벌어지다 이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환한 미소가 피었다. 그 웃음을 본 희연이 더 신나서 재환의 팔을 흔들었고, 옆에서 상지는 아예 작정한 듯 우스꽝스러운 춤을 선보였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해 같이 맞춰서 춤출 수는 없었지만, 재환은 더 크게 웃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춤추던 세훈이 태혁의 뺨에 기습 뽀뽀를 했다가 헤드록이 걸려 버렸다. 겨우 태혁에게서 빠져나온 세훈이 그나마 키가 엇비슷한 재환 뒤에 숨었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재환에게 어깨동무를 하고서 세훈은 십 대 소년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하는 수 없이 재환도 세훈을 따라 뛰었다. 둘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환호하며 함께 뛰었다.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음악도 멈추지 않았다.
* * *
평생 안 하던 짓을 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섰을 때는 책상 위 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까지 귓가에서 쿵쾅쿵쾅 인위적인 드럼 소리가 반복되는 것 같았다. 보나 마나 자고 일어나면 찾아올 근육통을 예견하며 재환은 철퍽 매트리스 위로 엎어졌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벌떡 일어났다. 핸드폰을 꺼내 회식 도중 도착했던 태군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 서둘러 책상 앞으로 갔다.
노트북을 열자마자 인터넷 창을 켠 재환은 곧바로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맨 상단에는 ‘아이씨유 완성!!!!!!!!’이라는 다소 요란스러운 제목의 메일이 와 있었다. 피식 웃은 재환은 망설임 없이 메일을 클릭했다.
“흠….”
뺨에 주먹을 괸 재환은 눈알을 좌우로 움직여 메일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그 중간중간 눈썹 사이가 좁게 움츠러들기도, ‘와’ 하는 나지막한 탄성이 흐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태군의 손을 거친 가사를 모두 읽었을 때, 재환은 잠시 멍한 상태에 빠졌다. 뒤늦게 이 가사가 실은 한영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한 까닭이었다.
가사는 가사일 뿐, 이라고 애써 속 편한 결론에 다다른 재환은 얼른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렸다. 일종의 고민이었다.
일하고, 먹고, 마시고, 심지어 춤까지 췄으니 당연히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이대로 앉은 자리에서 눈만 감아도 솔솔 잠이 쏟아질 듯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카페 사람들과 한데 섞여 느꼈던 설렘이나 흥분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고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공연 후의 두근거림과 닮은 그 기분이 끝내 재환을 번쩍 정신 차리게 했다.
후다닥 찬물로 씻고 나온 재환은 편한 옷을 입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 상태에서 발만 쭉 뻗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선풍기를 발가락으로 살살 끌어당겼다. 직, 장판 긁히는 소리를 내며 가까이 온 선풍기의 전원 버튼을 발끝으로 꾹 누르자 먼지 낀 날개가 털털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금은 눅눅함이 느껴지는 바람을 맞으며 재환은 뻗었던 다리를 접어 허벅지에 걸쳤다. 아직 덜 마른 머리에 헤드폰을 쓰고 몇 번 마우스를 딸깍였다. 곧이어 헤드폰의 두툼한 이어패드와 맞닿은 얼굴 틈에서 가느다란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밖으로는 완벽히 나오지 않는 음악 소리를 따라 재환의 머리통이 까딱거렸다. 그러다가 가사가 불명확한 노래를 몇 마디 흥얼거리고, 음악이 멈추면 부지런히 타자를 쳤다. 그러다 또 작게 음악이 흐르고, 고개가 움직이고, 타자 소리가 이어졌다. 같은 행동이 수 번, 수십 번 반복되었다.
“흐아….”
그렇게 약 1시간가량이 지났을 무렵, 큰 숨을 터뜨린 재환은 갑갑하게 양 귓가를 막고 있던 헤드폰을 벗어 던졌다. 내처 끙, 소리를 내며 길게 기지개도 켰다. 목도 한 번 크게 돌려 준 후 노트북 모니터로 시선을 되돌렸다.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한 탓에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가사 수정이 마무리되었다. 분명 몸은 꽤나 피로한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온 결과물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태군만의 간질간질한 감성도 적절히 살려 주면서 한국어 가사에 익숙지 않은 한영이 부르는 데에도 하등 문제가 없을 듯싶었다.
혹시 몰라 문서 파일을 한 번 더 저장한 재환은 그대로 노트북을 덮으려 노트북 상판 모서리로 손을 가져갔다. 하나 이번에도 또, 고민에 잠기고 말았다. 흘긋 쳐다본 책상 구석의 낡은 시계가 새벽 3시 30분을 말하고 있었다. 톡. 톡. 손가락으로 노트북 끄트머리를 두드리던 재환은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다시 의자에 앉은 재환의 허벅지 위에는 기타가 올려져 있었다. 노트북 옆에는 키 낮은 마이크 스탠드도 자리했다. 당연히 스탠드 홀더에 꽂힌 건 마이크였다. 녹음용 다이내믹 마이크치고는 비싸지 않은 녀석이었지만 나름 재환에게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이로써 기타 치며 노래를 녹음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사실 부끄러움이 앞서 여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나, 한영에게 새로 바꾼 가사를 알려 주려면 이렇게 직접 녹음해서 들려주는 것이 여러모로 가장 효과적이었다. 물론 노래에 영 자신은 없었지만, 어쩌면 춤 실력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르지만 회식의 여흥과 미약하게 남은 술기운이 재환에게 괜한 용기를 북돋았다. 늦은 새벽 시간이 주는 특유의 감성 탓도 조금은 있을 거였다.
시퀀서 프로그램을 켜고 헤드폰을 쓴 재환은 마이크 앞에 설치한 팝 필터로 입을 바짝 갖다 댔다. 낮게 ‘아, 아.’ 소리를 내 보다가 휙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선풍기가 탈탈 모터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 소리가 마이크로 고스란히 수음되어 헤드폰으로 들려왔다.
주저 없이 옆으로 다리를 뻗은 재환은 톡 튀어나온 선풍기의 전원 버튼을 발가락으로 꾹 눌렀다. 부지런히 돌아가던 날개가 서서히 멎고, 그제야 헤드폰을 통해 들리는 주변 소리도 한결 잠잠해졌다. 다만 이곳이 방음 부스가 아닌 이상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나 이외의 잡다한 노이즈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큰 소리로 노래하거나 세게 기타를 치는 것 또한 불가능할 터였다. 그렇다고 모처럼 마음먹은 일을 관둘 생각은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재차 팝 필터에 대고 아아, 소리를 내 본 재환은 한 번 크게 심호흡했다. 오디오 인터페이스에 연결된 기타의 볼륨을 끝까지 올리고서, 과감히 노트북 자판의 ‘R’ 키를 눌렀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리코딩의 시작이었다.
사방이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뒤덮인 방, 침대를 비추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연신 사각사각 소리가 울렸다. 오늘 밤도 여지없이 잠들지 못한 한영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열심히 연필을 움직였다. 납작하게 깎인 연필심이 한 번 종이 위를 오갈 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렸던 형상이 차츰 뚜렷해져 갔다. 입가에 여릿한 미소가 피었다.
아예 입 맞출 기세로 접은 다리에 얹은 공책 위로 분홍 머리가 납작 숙어졌을 즈음, 침대 한편에 두었던 핸드폰 액정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연필을 손에서 놓은 한영은 긴 팔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새 불 꺼진 액정을 다시 켜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동공이 확장된 갈색 눈동자에 비치는 메시지의 발신자는 ‘재환’이었다.
잠시간 굳어 있던 한영은 파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침대 밖으로 두 다리를 내밀었다. 후다닥 책상 쪽으로 달려가다 삐끗, 걸음이 어긋났지만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넘어졌어도 냉큼 일어났을 것이다.
책상 밑에 쏙 들어가 있던 의자를 거의 넘어뜨릴 기세로 밖으로 뺀 한영은 서둘러 의자 좌방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노트북을 열고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리며 부팅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노트북 액정에 바탕 화면이 뜨자마자 다급히 인터넷 아이콘을 클릭했다. 그마저도 곧바로 켜지지 않아 네 번, 여덟 번 눌렀다. 그뿐이면 다행이게.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메일 주소와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는 몇 번이나 오타가 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울 듯한 소리가 뱉어졌다.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간 메일함 꼭대기에는 정확히 ‘서재환’으로부터 온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심지어 제목은 ‘I See You’였다. 그 밑에 수두룩하게 쌓인 각종 광고와 스팸 메일이 한영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꿀꺽 침을 삼키고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클릭했다.
핸드폰 메시지로 예고됐던 것처럼 메일에는 음원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재환이 최종적으로 수정한 가사가 적혀 있었다. 스크롤을 맨 밑까지 내려도 사적인 내용은 일체 없었다. 그럼에도 시무룩해 있을 새가 없던 한영은 재환이 보내 준 파일을 어서 눌렀다. 다운로드가 완료되는 사이에 노트북 볼륨은 최대치로 키웠다. 습관처럼 의자 위에 두 다리를 올려 끌어안고서 재생이 시작되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그리고.
기타 반주 하나와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노래가 모두 끝이 났을 때, 한영은 무릎 위에 묻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이 영어로 적었던, 그런데도 처음 듣는 것만 같은 가사가 귓가에서, 머리에서, 가슴에서 메아리쳤다.
우산 아래 있어도 내 맘속엔 비가 들이쳐
그런 내게 가라고 손짓하지 마
그냥 나 여기 서서 너를 볼 수 있게 해 줘
너만 볼 수 있게 해 줘
Baby I see you
I see you
I see you
침대 위 덩그렇게 놓인 공책에는 가사 속 주인공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빗줄기 너머로 본 그때의 얼굴이었다.
네가 내게 우산을 줬던, 그날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