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6/29)

5장

* * *

“흐아….”

팔랑팔랑 손부채질 하며 탈의실 겸 직원 휴게실로 들어선 희연은 옷도 갈아입기 전 일단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누가 이제 여름 아니랄까 봐 오전부터 쏟아지는 햇살이 어찌나 뜨거운지, 카페에 오는 도중 살갗이 다 타는 줄 알았더랬다. 이를 증명하듯 걱정했던 대로 거울에 비친 얼굴이 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안 그래도 안면 홍조 때문에 볼 터치 한 번 제대로 해 보지를 못했는데, 이건 뭐 따로 칠하지 않아도 불타는 고구마가 따로 없었다. 이러니 희연은 더운 여름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같이 일하는 재환에게 ‘어디 아파? 얼굴 빨간데?’라는 걱정을 듣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물론 평소 희연의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빨개지는 데에는 재환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다. 예고도 없이 어깨에 떨어진 머리칼을 떼 주질 않나, 우유 박스라도 옮길라치면 갑자기 휙 나타나 빼앗아 가질 않나. 안 그렇게 생긴 오빠가 소녀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솜씨가 아주 보통이 아니었다. 사실… 재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했으므로 속없이 흔들리는 저 자신이 문제였다.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질근 묶은 희연은 매장으로 나가기 전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 보다가 서둘러 파우치에서 틴트를 꺼내 입술에 톡톡 두드렸다. 하나 양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입술이 꼭 쥐 잡아먹은 것처럼 시뻘게지고 말았다. 어휴, 내가 미쳐. 한심함이 담뿍 담긴 혼잣말을 뱉으며 희연은 얼른 휴지를 뽑아 벅벅 입술을 문질렀다. 그런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묻어나오는 것이 없었다. 이 틴트 참 물건일세….

볼은 홍당무에 입술은 동동 뜨는 거울 속 촌년을 뒤로한 희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로커 안에 파우치를 집어넣었다. 힘없이 로커 문을 닫는데, 데구루루 굴러간 눈알이 로커 옆에 세워져 있던 시꺼먼 가방으로 향했다. 기타 가방이었다. 저 반질반질 윤이 나는 기타 가방이 누구의 것일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시무룩해져 있던 얼굴 가득 단숨에 화색이 돌았다.

“오빠, 안녕하세요!”

휴게실을 나와 카운터 뒤편으로 들어선 희연은 냉장고에 우유를 채우고 있던 재환에게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내심 흠칫했다. 안 그래도 말쑥한 재환의 얼굴이 오늘따라 한결 빛나 보였기 때문이다. 왜지, 생각하다 희연은 그의 헤어스타일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안녕.”

살짝 고개를 돌린 재환이 빙긋 웃으며 희연에게 인사했다. 아니, 근데 왜 저 오빠는 목소리까지 좋은 거야. 괜히 속으로 투덜거리며 희연은 살금살금 재환 옆으로 다가섰다.

“저도 할게요.”

재환을 도와 박스에 담긴 우유를 함께 냉장고에 넣으면서도 희연의 시선은 자꾸만 흘끔흘끔 같이 일하는 오빠의 단정한 옆얼굴로 향했다. 평소에는 내추럴하게 두었던 머리에 살짝 왁스도 바르고, 면접 날 이후 보지 못했던 기타도 가져오고. 이래저래 묻고 싶은 것이 많아 희연은 입이 근질거렸다. 그렇다고 또 오지랖 넓게 알은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은근히 속이 탔다. 짧은 시간 사이 머리를 굴리고 굴리던 희연은 겨우 에두른 질문 하나를 꺼냈다.

“오빠, 혹시 오늘 무슨 일….”

그마저도 주문하러 온 손님 때문에 중간에 뚝 끊기고 말았다. 희연 대신 재빨리 카운터로 간 재환은 희연 기준에서 지나치게 좋은 목소리로 ‘주문하시겠어요?’ 하고 손님에게 물었다. 이를 바라보는 희연의 한쪽 눈매가 게슴츠레 좁아졌다. 기껏 꺼낸 질문이 도중 끊긴 것보다는 ‘음….’ 하며 메뉴를 고르고 있는 손님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최근 들어 카페에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하는 저 여자 손님은 유독 재환에게 주문할 때만 이상하리만치 시간을 끌었다. 분명 전에 시킨 적이 있는 메뉴를 처음 본다는 양 물어본다든가, 결제 직전에 괜히 주문을 바꾼다든가.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그린티 라테가 다냐 안 다냐 재환을 붙잡고 한참이나 꼬치꼬치 묻고 있었다. 지난주 저한테 최소 두 번 이상 그린티 라테를 주문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지. 냉장고 문에 얼굴 절반을 가린 희연은 아예 양쪽 눈을 다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문제의 여자 손님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덤으로 응대하고 있는 재환도.

“아…, 그럼 단맛은 시럽으로 내는 건가요? 안 달게 먹고 싶은데.”

“저희는 녹차 파우더 자체에 단맛이 있어서 안 달게 드시려면 파우더를 덜 넣어야 해요. 그러면 녹차 맛이 잘 안 느껴질 수도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으휴, 으휴, 으휴! 희연은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저것일지도 몰랐다. 재환이 성실해도 너무 성실하다는 점. ‘안 달게는 어렵습니다’ 이 한마디면 될 것을 저리 구구절절 설명하니 상대가 자꾸 틈을 노리는 것 아닌가.

하는 수 없이 가늘게 뜨고 있던 희연의 눈이 점점 도끼눈으로 변해 갔다. 저러다 일전 다른 손님이 그랬던 것처럼 재환에게 전화번호를 건네주는 건 시간문제이지 싶었다. 가만 보니 그때 손님보다 저 언니가 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에이, 짜증 나.

씩씩 콧바람을 내뿜은 희연은 남은 우유를 다소 우악스럽게 퍽퍽 냉장고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무렇지 않은 체하려 해도 새빨갛게 틴트 물이 든 입술이 자꾸만 비죽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아마 오늘 상지가 있었으면 이런 저를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을 것이다. 지금은 기분이 울적해 그 웃음소리라도 좀 듣고 싶었다.

이후 점심시간에 접어들자 늘 그랬듯 가게 안으로 손님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덕분에 희연은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새가 없었다. 정신없이 우유를 스팀하고,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믹서기에 얼음을 갈다 보니 순식간에 몇 시간이 훌쩍 지났다.

“와, 오늘은 더 장난 아니었네요.”

한차례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그나마 좀 한산해진 가게를 휘 둘러보며 희연이 힘 빠진 목소리로 재환에게 말했다. 하도 왔다 갔다 하느라 뻐근해진 종아리를 한 짝씩 들어 꾹꾹 주무르기도 했다.

“그러게.”

언제나 재환의 대답은 딱 이 정도였다. 손님이 아무리 많더라도, 주문이 몰리더라도 재환은 불평 한 번 하는 법이 없었다. 그게 희연은 참 신기했다. 이제 그런 점까지 멋져 보이니 저도 중증은 중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 오빠랑 어떻게 해 보고 싶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당치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연예인을 바라보는 팬의 마음 같은 거였다.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네들과 연애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

“아, 맞다.”

좀 여유가 생긴 틈을 타 차가운 음료용 컵을 채워 놓던 희연에게 재환이 모처럼 먼저 말을 걸었다. 설렘이 뭉글뭉글 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희연은 가능한 한 태연한 투로 되물었다.

“네? 왜요, 오빠?”

“아까 나한테 뭐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어? 바빠서 깜빡 잊고 있었네.”

희연은 한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저조차 까맣게 잊었던 걸 재환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렸다. 얼굴도 덩달아 붉게 익는 것 같았다. 꼭 더워서 그런 것처럼 얼굴에 대고 손을 팔랑거린 희연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오빠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조금은 예상치 못했던 희연의 질문에 재환은 잠시 아…, 하며 답을 골랐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내심 또 아차 싶었다. 재환과는 아르바이트가 겹치는 날도 많고, 또 그에게 일을 가르쳐 준 것도 본인이라 그래도 좀 친해진 줄 알았다. 하나 아직 재환은 이런 종류의 질문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풀이 죽은 희연의 입술 끝이 쭉 아래로 떨어졌다. 컵을 다 꺼낸 비닐을 똘똘 뭉치는데, 재환에게서 기대 밖의 답이 돌아왔다.

“오늘… 클럽에서 오디션 있어.”

“오디션이요?”

귀가 번쩍 뜨인 희연은 언제 의기소침했냐는 양 고개를 홱 돌려 재환을 보았다. 두 눈은 더없이 반짝였다. 역시 오늘 재환이 더 더 멀끔해 보였던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다소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희연의 태도에 괜히 멋쩍어진 재환은 버릇처럼 뒷목을 주물렀다. 일하면서 저도 모르는 새 들뜬 티를 너무 많이 냈나 싶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디션이기는 하지만 클럽에서 연주하는 일 자체가 재환에게는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관객도 기껏해야 클럽 사장 정도겠으나, 무대에 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온종일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하니 바로 옆에 있던 희연에게 그러한 상태를 들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러다 혹 오디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지. 클럽 사장도 듣는 귀가 있으면 한영의 노래를 별로다 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결국 연주를 잘해야 한다는 소린데…. 쭉쭉 뻗어 나간 생각이 이른 긴장감을 불러올 즈음, 희연이 ‘오빠…?’ 하며 재환을 불렀다.

“아, 응. 오디션을 봐야 클럽에서 공연할 수 있으니까.”

“그럼 지금은 밴드 하시는 거예요?”

“응.”

부끄러움과 머쓱함이 반절씩 섞인 웃음을 지으며 재환이 짧게 대답했다. 저렇게 웃는 재환도 멋지고, 밴드를 한다는 것은 더 멋져 보여 희연은 팡팡 터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와, 진짜요? 어느 클럽인데요? 저 고등학교 때부터 클럽 공연 보러 많이 다녔어요!”

“아, ‘클럽 코벤트’라고….”

“저 거기 알아요!”

흥분이 넘쳐 순간 큰 소리를 내 버린 희연은 제가 더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마 사장 세훈이 있었으면 ‘희연아아-’ 하고 한 소리 했을 터다. 지레 바짝 졸은 희연은 눈알만 휙휙 돌려 카페에 있지도 않은 세훈을 찾았다. 그가 오늘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후에야 후, 긴 숨을 내쉬며 이래저래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예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고서 재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기 인디 밴드들 등용문 같은 데잖아요.”

‘맞아.’ 하고 대답하는 재환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클럽 공연을 보러 다녔다는 게 과장이 아닌 듯 희연이 이쪽에 대해 꽤나 잘 알고 있던 까닭이었다.

희연의 말마따나 재환이 오디션을 볼 ‘클럽 코벤트’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활동 좀 하려는 밴드라면 누구나 서고자 하는 클럽 중 하나였다. 물론 밴드 음악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듯, 클럽의 명성도 과거만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한때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 밴드들을 줄줄이 배출해 낸 곳답게 클럽 코벤트는 여타 비슷한 클럽들이 많이 사라진 지금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밴드의 활동 계획을 세우며 재환이 그곳에서의 공연을 제일 처음 목표로 삼은 것도 당연지사였다. 무엇보다, 재환은 그 무대에 꼭 다시 한번 서고 싶었다. 다른 밴드가 아닌, ‘더 숨’으로서.

“근데 오빠. 뭐 하나 더 물어봐도 돼요?”

재환은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를 만났는데, 굳이 대화를 꺼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재환 입장에서는 이렇게 밴드 음악에 관심을 가져 주는 것 자체가 나름 고마운 일이었다. 티브이만 틀면 아이돌 노래가 나오는 세상, 밴드 음악이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임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오빠 하는 밴드 이름이 뭐예요? 궁금해서요.”

양 뺨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묻는 와중에도 희연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펼쳐지고 있었다. 성실한 재환이라면 당연히 기타도 잘 칠 테고, 그럼 오디션도 어렵지 않게 통과할 거고, 그렇게 해서 공연 일정이 잡히면…. 아, 누구랑 같이 가지. 상지를 꼬셔야 하나. 눈앞에서 기타를 치는 재환을 볼 생각에 희연은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댔다. 단, 거듭 강조하지만 이는 순수하게 밴드를 응원하는 팬의 마음이었다. 아직 밴드 이름조차 모르기는 해도….

“더 숨.”

“‘더 숨’이요?”

“응.”

재환은 밴드 이름을 따라 하며 되묻는 희연의 표정을 넌지시 살폈다. 제 입으로 누군가에게 이 이름을 말해 주는 건 처음이라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대놓고 별로다, 라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겠으나 제가 멤버들에게 고집한 이름인 만큼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와. 발음이 되게 예뻐요. 무슨 뜻이에요?”

재환의 우려와 달리 희연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더욱 두 눈을 빛냈다. 또 눈치 없는 궁금증이 도져 재환을 불편하게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이미 저 멀리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녀는 가능한 한 재환이 하고 있는 밴드 이야기를 많이 많이 듣고 싶었다. 그렇다고 일하는 중 마냥 수다를 떨 수는 없어, 손으로는 다른 비닐봉지를 뜯어 안에 담긴 아이스 음료 컵의 뚜껑을 차곡차곡 에스프레소 머신 옆에 쌓아 올렸다.

다른 사람에게 밴드 이름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는 것 또한 처음인 재환은 음…, 하며 조금 머뭇거렸다. 말 못 할 정도로 대단하거나 어려운 의미가 담긴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그 이름이 정해진 경위가 적잖이 황당했다. 물론 당시에는 그저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던지라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엥? 밴드 이름 찾았다고?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어. 방금 찾았어.’

이때까지만 해도 태군을 포함한 세 사람은 영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재환을 보았다. 비슷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번번이 실망만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환은 설레는 마음으로 꿋꿋이 말을 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느낀 거긴 한데. 한영이 얘 숨소리 좀 야릇하지 않냐?’

다만 그 이어진 말이란 게 다른 멤버들이 동의하기 참 뭐한 거라, 누구 하나 대꾸하지 못하고 저게 뭔 괴상한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야릇한 숨소리의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재환은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이상한 뜻이 아니라. 충분히 우리 음악의 정체성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이, 진짜! 그래서 생각한 이름이 뭔데?’

결국 참다못한 태군이 바락 성을 냈을 때, 씩 웃음을 머금은 재환은 딱 한 글자를 입 밖으로 내었다.

‘숨.’

그렇게 해서 밴드 이름은 ‘더 숨’으로 결정이 났고, 이후 멤버들은 머리를 맞대 대외용 뜻 몇 가지를 더 고안해 냈다. ‘보컬 숨소리가 야릇해서’라고만 이름을 설명할 수는 없었으므로. 사실 재환은 그것도 별로 나쁘지 않다 생각했지만, 한영이 썩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꿈보다 해몽이라고, 그 결과 ‘더 숨’은 아주 그럴듯한 뜻을 가진 밴드명이 되었다. 숨 쉬듯 음악을 하자는 의미라든가, 숨소리조차 노래가 되는 음악이라든가, 공기처럼 늘 곁에 있는 밴드라든가. 아예 영어 이름은 ‘The Sum’으로 해 넷이서 함께 만드는 음악이라는 뜻까지 담았다. 이 하나하나를 종이에 정리해 적으며, 재환은 우리 밴드가 이름만 잘 못 지을 뿐이지 영 아이디어가 없는 건 아니었다고 내심 기뻐했다. 내심이 아니라 사실은 많이 다행이다 싶었다.

이렇게 큰 산을 하나 넘고 나니, 그다음은 모든 것이 재환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적어도 주에 두 번 이상은 모여 합주를 했고, 클럽에 메일을 보내 오디션 일정도 잡았다. 보통은 메일을 보내고서 적어도 한 달은 기다려야 오디션을 볼 수 있었지만, 클럽 사장과 재환이 안면이 있던 터라 생각보다 빨리 날이 정해졌다. 이데아의 전 멤버였던 게 나름 득이 된 셈이었다.

그 후에야 뭐 뻔했다. 연습, 연습, 연습. 오디션에서 연주하는 건 두 곡뿐이었으나, 그렇다고 절대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합주 시간을 보다 늘리고, 가능하면 실전처럼 연주하기 위해 노력했다. 곡 순서는 어떻게 할지, 무대에서 어떤 제스처를 취할지, 멘트는 어떻게 할지도 함께 고민했다. 그사이 시간은 금방도 지나갔고, 눈 깜짝할 새 오디션 당일이 되었다.

지난 몇 주간의 일이 휙휙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재환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조금 간지러운 말로, 새삼 참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옆에서 큰 눈을 깜빡이며 답을 기다리고 있는 희연에게 재환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대답을 건넸다.

“우리 보컬이 숨소리가 되게 섹시하거든. 거기서 따 왔어.”

순간 꺅 소리를 터트릴 뻔한 희연은 반사적으로 흡, 호흡을 삼켰다. 얼굴도 모르는 보컬 씨의 숨소리가 섹시하고 자시고, 그런 말을 근사하게 웃으며 하는 재환이 코피 터지도록 멋져 정신이 다 어찔할 지경이었다. 잠깐. 근데 혹시 그 보컬이….

“오빠, 보컬이 혹시 여자….”

“씨발, 뭐라고?”

말허리가 싹둑 끊긴 희연은 물론이고 재환의 시선이 동시에 카페 한편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몇 없던 손님들도 화들짝 놀라 거친 욕설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여자를 앞에 두고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긴 남자가 분을 꺼뜨리지 못해 씩씩대고 있었다.

“너 지금 뭐라 그랬냐.”

“화, 화 좀 내지 말고….”

“아니, 씨발. 장난하나! 누구 맘대로 헤어져?”

욕을 뱉는 것만으로 참지 못한 남자는 아예 쾅,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흔들린 컵에서 넘쳐흐른 커피가 주위를 흥건히 적셨으나,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카페 있던 모든 사람이 저를 보든 말든, 재환이 보다 못해 성큼성큼 다가가든 말든 남자는 더욱 목소리를 키웠다.

“이게 지금 말이 되냐? 어? 확 그냥!”

테이블로 모자라 이제는 여자를 한 대 칠 기세로 남자가 번쩍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무엇, 혹은 누구를 향해서도 손찌검할 수 없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시꺼먼 놈한테 손목이 붙들린 까닭이었다. 남자는 제 팔을 움켜쥔 재환을 올려 보며 또다시 욕을 터뜨렸다.

“씨발, 넌 또 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희연은 어쩔 줄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언제라도 112를 누를 수 있도록 손에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안 그래도 성질 더럽게 생긴 남자가 당장이라도 재환에게 주먹을 내지를 것만 같아 애가 탔다. 오늘 오디션도 있다면서 저러다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여기에 재환이 남자를 향해 내던진 한마디가 희연의 걱정을 한층 부추겼다.

“손님,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시죠.”

안 그래도 붉으락푸르락했던 남자의 얼굴이 더욱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뭐, 이 개새끼야?’라고 목청을 돋우며 붙잡힌 팔을 거칠게 뒤틀어 보았지만, 팔목을 거머쥔 손은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강한 힘으로 얽혀 왔다. 목이라도 졸린 것처럼 남자의 낯빛이 숫제 시뻘건 색으로 달아올랐다.

“너, 이….”

“영업 방해입니다. 나가세요.”

자못 살벌하게 눈알을 부라리는 남자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은 채 재환은 또박또박 제 뜻을 전했다. 틀린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 사람 새끼라면 이쯤에서 알아들어야 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남자의 대답을 종용했다.

“뭐, 이런 개 같은….”

입매를 비튼 남자가 몇 번 더 팔을 흔들었다. 제 딴에는 제법 힘을 주었건만, 여전히 상대의 손에서는 힘이 풀려 나갈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을 치켜들 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라, 남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꼴사납게 씨근덕대기만 했다. 그사이 많지 않던 인내심이 바닥나 버린 재환은 아예 남자의 팔을 위로 당겨 올렸다.

“어어…?”

억지로 몸이 일으켜진 남자가 당황을 숨기지 못한 눈으로 자신보다 꽤나 위에 있는 재환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붙잡힌 팔이 하도 아파 악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상대가 보기에는 그저 하찮아 보이는 자존심을 아득바득 긁어모은 남자는 뒤늦게서야 선심 쓴다는 듯 대꾸했다.

“씨발, 나가면 될 거 아냐? 좆같게, 진짜.”

부러 더 팔을 크게 흔든 남자는 그제야 힘을 푼 재환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냈다. 그러고는 여봐란듯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꼭 재환에게 그러지 못해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너, 뭐 하냐. 여기서 나가라잖아, 씨발!”

잔뜩 겁먹은 여자는 남자를 따라 일어서지 못하고 어깨만 움칠거렸다. ‘에이씨.’ 하고 짜증을 터뜨린 남자가 여자에게 성큼 다가서려는 순간, 시꺼먼 벽이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쪽만 나가라고.”

남자를 막아선 재환은 더는 좋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커피값을 도로 쥐여 주고 썩 꺼지라 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카드를 다시 받고, 결제를 취소하고 이래저래 절차가 복잡했다. 무엇보다 재환은 사장이 아니었으므로 거기까지는 권한 밖의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놈 하나 내쫓는 건 가능할 듯싶었다.

앞을 막은 놈은 비킬 생각이 없지, 힘으로 어떻게 될 것 같지도 않지, 이번에도 남자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더러워서 피한다는 양 ‘씨발!’ 하고 크게 외친 남자는 휙 뒤돌아 쿵쿵 발소리를 내며 카페 입구로 걸어갔다. 뒤이어 유리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의 등 뒤로 ‘어휴, 찌질해’라는 감상을 품은 시선 여럿이 따라붙었다.

끝까지 참 못나게 구는 남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즈음 재환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기분 나쁜 온기가 남은 손바닥을 쓱쓱 바지에 문지르며 아래를 보자, 고개를 푹 숙인 여자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나, 앞으로 두 번 다시 저런 놈이랑은 엮이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흘끔흘끔 이쪽을 보는 손님들을 향해 죄송하다는 뜻으로 허리를 꾸벅인 재환은 발을 틀어 카운터 뒤편으로 돌아갔다. 입까지 벙긋 벌린 희연이 저리 커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재환을 보았다. 욱하는 성질을 누르지 못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라, 재환은 ‘미안.’ 하고 희연에게도 사과를 전했다. 한데 희연이 조금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오빠. 짜, 짱이에요….”

그러더니 어물어물 엄지까지 위로 들어 올렸다. ‘오빠 때문에 못 살아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던 재환은 도리어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 ‘어, 어….’ 하고 답을 얼버무렸다. 부끄럽지만 저 정도 칭찬을 들을 만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술 먹고 어머니 앞에서 욕을 지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참지 못했던 것뿐이니까.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희연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해 재환은 에스프레소 머신 앞으로 가 섰다. 분쇄한 원두를 담은 탬퍼를 끼워 넣고 버튼을 누르자 이내 지잉- 하고 요란하게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희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 오빠 왜요? 주문 들어온 거 없잖아요.”

“응. 이건 이따 내가 결제할게.”

“네? 오빠가요?”

응, 하고 대답한 재환은 더운물로 한 번 데워 놓은 머그잔에 에스프레소와 뜨거운 물을 차례로 부었다. 뽀얀 김이 폴폴 올라오는 컵을 쟁반에 받쳐 카페 구석진 자리에서 홀로 훌쩍이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자 여자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어….”

“아까 커피가 다 넘쳤길래요. 마시세요.”

“가, 감사합니다….”

멀찌감치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희연은 다시 한번 엄지를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 * *

무더워진 계절을 증명하듯 내리꽂히는 햇살이 가히 뜨거웠다. 오디션이라도 공연은 공연인지라 오늘은 모자도 쓰지 않은 탓에, 이마고 콧잔등이고 온통 자잘한 땀방울로 뒤덮였다. 시커먼 기타 가방이 얹힌 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설상가상 일부러 챙겨 입은 흰 셔츠는 바람 한 톨 통과시키질 못했다. 아무리 소매를 저 위까지 걷어 올렸다 한들 갑자기 셔츠가 반팔 티로 바뀌지는 않았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올라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대문 앞에 다다른 재환은 양손에 들려 있던 페달 보드 가방과 음료 캐리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고서 재빨리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곳을 들락날락한 게 벌써 여러 번이니 당연히 과거 메시지를 뒤적여 비밀번호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다시 두 손으로 짐을 들어 올린 재환은 대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푸릇한 색이 올라온 정원은 몇 달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 이 더운 날에도 땀 하나 흘리지 않는 나뭇잎이 부럽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재환은 걸음을 재촉했다.

철문을 열고 실내로 발을 디디는 동시에 절로 흐어,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 나갔다. 햇볕에 달구어진 살갗에 서늘한 공기가 와 닿으니 그제야 좀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종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재환은 지하와 연결된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안녕.”

“어, 안녕.”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합주실에는 한영이 가장 먼저 와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기도 그의 집이니 사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한영에게 짧은 인사를 되돌려 준 재환은 일단 앰프 앞으로 가 손에 든 것, 등에 멘 것을 좀 내려놓았다. 살 것 같았다.

뻐근한 어깨를 앞뒤로 돌리며 재환은 맞은편에 앉아 건반을 누르고 있는 한영을 흘깃 쳐다보았다. 오디션 때문인지 한영의 차림 역시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집에서는 하지 않던 귀걸이도 했고, 목 늘어난 면티 대신 제법 단정한 티셔츠를 입었다. 물론 재환은 줘도 못 입을 화사한 색상의 옷임은 변함없었다.

바닥에 내려 두었던 종이 캐리어에서 유독 색이 다른 음료 하나를 꺼내 든 재환은 성큼성큼 키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하얀 손가락이 얹힌 건반을 가로질러 쓱 음료를 내밀자 분홍 머리통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굳이 꾸미지 않아도 무대에서 묻힐 수가 없을 듯한 얼굴이 재환을 향했다.

“마셔. 아이스코코아.”

표면에 송골송골 물기가 맺힌 컵을 일별한 한영의 눈동자가 슬쩍 저 뒤편에 놓인 캐리어로 옮겨 갔다. 캐리어에는 시커먼 아이스커피 세 개가 꽂혀 있었다.

“응.”

보기만 해도 입이 쓴 커피에서 시선을 거둔 한영은 주춤주춤 손을 뻗어 재환에게서 아이스코코아를 건네받았다. 동시에 재환의 손가락과 얼핏 스친 손가락이 움칠 굽어 들었다. 분홍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미간이 폭 좁혀졌다.

“왜. 코코아 싫어?”

기껏 가게에서 가져온 음료를 반기는 기색이 없는 한영을 보며 재환 또한 슬며시 눈썹 사이를 좁혔다. 먼젓번 같은 음료를 지우가 줬을 때 한영이 냉큼 다 마셨던 걸 나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 하나만 코코아로 준비한 것인데, 한영이 저런 반응을 보이니 살짝 당황스러웠다. 음료가 아니라 음료를 주는 사람이 문제인 건가 싶기도 했다.

“아냐. 좋아.”

“…그래.”

재환은 다소 떨떠름한 마음을 안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직은 더위에 전 몸이 완전히 식지 않아, 기타를 꺼내는 건 잠깐 뒤로 미루고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을 손에 들었다. 빨대로 쪼옥 한 모금 빨아올리자 쌉싸래한 향과 함께 차디찬 기운이 목구멍을 훑고 지났다. 여전히 ‘커피 맛 좋다’라는 감탄은 나오지 않았으나, 더운 여름에 이만한 게 없다는 뭇 사람들의 말에는 이제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일하며 겪게 된 변화였다.

이윽고 재환이 커피 절반을 비울 때까지, 한영은 옆 의자 위에 올려 둔 코코아에 손 한 번 대지 않았다. 잔뜩 고개를 숙이고서 볼륨을 작게 줄인 노드 연주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컵을 쥔 손바닥에 묻어난 물기를 툭툭 바지에 닦으며 재환은 말문을 뗐다.

“날씨 덥더라.”

“응.”

“이따 클럽 갈 땐 덜 더웠으면 좋겠다.”

“응.”

하…. 최근 계속 이런 식이었다. 조금이라도 한영과 말을 섞을라치면 지금처럼 대화가 뚝뚝 끊기기 일쑤였다. 원래도 조잘조잘 떠드는 녀석은 아니었으므로 처음에야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재환도 슬슬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다지 유쾌할 것 없는 한마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 너 안 좋아해.

저 정도면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싫어하는 걸로 봐도 무방할 듯싶었다. 눈도 잘 안 마주쳐, 말도 잘 안 해, 그나마 이쪽에서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응’, ‘아니’뿐.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감정이 복받쳐서인지 뭔지는 몰라도 가끔 합주하다 뛰쳐나가도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고, 어쩌다 늦잠 자서 지각했을 때도 그냥 다 넘어갔었는데 말이지.

이전 밴드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다. 담배 피우며 잔소리를 늘어놓든,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줄줄이 보내든 어느 하나는 했을 터다. 혼자 열 내는 게 밴드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으니 그러지 않는 거였다.

재환은 무의식중 입술 새 물고 있던 빨대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앞니로 깨물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미간에는 더욱 깊은 주름이 팼다. 그때,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린 한영과 시선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저게 진짜.

빛의 속도로 다시 얼굴을 푹 숙이는 한영을 보며 재환은 저도 모르게 보다 강한 힘으로 콱 빨대를 짓씹었다. 얇은 플라스틱이 꺾이며 입 안에서 까득, 하는 소리가 울렸다. 물고 있던 빨대에서 입술을 뗀 재환은 표면이 온통 축축이 젖은 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야, 유한….”

“와, 씨발! 밖에 존나 찜통인데?”

벌컥 문을 열어젖힌 태군의 커다란 목소리가 일순 합주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지간히도 더운 듯 벌겋게 익은 얼굴로 오만상을 쓴 태군이 옷을 펄럭펄럭 흔들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재환 아래 놓인 캐리어를 발견하고는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만면화색을 띠었다. 단숨에 재환 앞으로 쪼르르 달려온 태군이 해맑게 웃으며 커피를 집어 들었다.

“새끼, 존나게 땡큐다?”

재환은 대꾸 없이 참 타이밍 좋게도 나타난 태군을 그저 빤히 쳐다보았다. 친구의 살벌함 가득한 눈빛에 입으로 빨대를 가져가려던 태군이 멈칫했다.

“왜…. 이거 내 거 아냐?”

“네 거 맞아.”

“앗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호로록 빨대를 빨아올린 태군은 마치 댄스 스텝을 밟는 것처럼 리듬을 타며 드럼 쪽으로 걸어갔다. 한 발씩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허벅지 위로 길게 늘어뜨린 체인이 짤랑짤랑 촐싹대는 소리를 냈다. 티셔츠 위로 새겨진 현란한 프린트도 덩달아 춤을 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재환은 태군 또한 무대에서 묻히는 일은 없겠다 싶었다.

머지않아 평소와 다름없이 적당히 멋스러운 차림을 한 지우가 합주실로 들어섰다. 지우 역시 한 손에는 아이스 음료가 꽂힌 캐리어를 들고 있었는데, 짜 맞춘 듯 재환과 메뉴까지 똑같았다. 태군은 오늘 무슨 날이냐며 신나서 어깨춤을 췄고, 재환과 지우는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만 지우에게 아이스코코아를 받아 든 한영은 아까처럼 이마를 살포시 찡그리지도, 이를 옆으로 치워 놓지도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디션 전 마지막으로 해 보는 합주 내내 지우가 준 코코아를 틈틈이 잘도 마셨다. 아이스코코아가 뭐 대수라고.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덩그러니 놓인 또 하나의 아이스코코아를 곁눈질로 살피는 재환의 마음은 썩 편치 않았다.

2시간 내도록 오디션에서 연주할 두 곡을 질리게 연습한 네 사람은 이후 1층으로 올라가 햄버거를 시켜 먹었다. 서로 취향이 제각각임을 드러내듯 누구는 불고기버거, 누구는 새우버거, 또 누구는 치킨버거였다. 그래도 탁자 가운데로 종이봉투를 쫙 펼쳐 그 위로 탈탈 프렌치프라이를 쏟을 때는 모두 같이 한마음 한뜻이었다. 햄버거를 베어 물고 콜라를 마시며 넷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난 무조건 Doom Boys. 그냥 그 사람들은 신이야, 신!”

좋아하는 밴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태군은 여지없이 Doom Boys를 외쳤다. 혹 지금의 밴드를 하며 음악 취향이 조금은 바뀌었을까 싶었지만, 재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태군은 여전히 일편단심 메탈이었다. 의외의 대답을 내놓은 건 오히려 지우 쪽이었다.

“난 용광로.”

“용광로? 그 용광로?”

“응.”

용광로는 1980년대 대한민국 음악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록 밴드다. 소위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닌, 지금으로 따지면 아이돌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던 밴드였으나, 사라진 것 또한 혜성 같았다. 보컬이 마약 사건에 연루된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밴드의 전설은 아직까지 남아 있어, 재환도 고등학교 시절 그들의 노래를 몇 번인가 커버한 적이 있었다.

“하긴, 그 시절에는 용광로가 최고였지. 지금은 다들 뭐 하나 모르겠네.”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나는 재환의 말에 지우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러고는 ‘재환이 너는?’ 하고 물었다. 여기에 냉큼 먼저 입을 연 건 태군이었다.

“이 새끼야 옛날부터 뻔했지. 그, 뭐더라…. 엠….”

“Embryo.”

“그래! 엠브리요! 이름 한번 겁나 어려워요.”

사실 재환 자신도 태군에게 Doom Boys밖에 모른다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처음 밴드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기타를 잡았을 때부터 재환에게 있어 최고의 밴드는 Embryo 하나뿐이었다. 그들을 보러 언젠가는 꼭 영국에 가고 말리라는 목표를 세운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이제 대답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한영 혼자였다. 자연히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콜라에 꽂힌 빨대를 쪼옥 빨고 있는 한영을 향했다. 손등으로 입술을 쓱 문지른 한영은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입을 뗐다.

“난… 없어.”

“엥, 좋아하는 밴드가 없다고? 진심?”

질겅질겅 프렌치프라이를 씹던 태군이 그게 말이 되냐는 듯 턱을 뒤로 바짝 당기며 물었다. 한영이 ‘응.’ 하고 대답하자 ‘하여튼 겁나 특이해요.’라며 밉지만은 않은 소리를 투덜거렸다. 그러나 재환만큼은 태군처럼 ‘특이해’ 한마디로 방금의 대답을 별스럽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과거 같은 얘기가 나왔을 때, 한영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답을 내놓았었다. 하지만 저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는 상대에게 진짜 좋아하는 밴드가 없냐고, 아니지 않느냐고 따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스레 입맛이 뚝 떨어진 재환은 두 손에 쥐고 있던 햄버거를 내려놓고 빨대째 컵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콜라를 들이켰다. 저 분홍 머리통 안에 든 생각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이른 저녁 식사가 끝나고, 네 사람은 지우가 끌고 온 SUV 차량에 올라탔다. 당연히 지하철을 타고 갈 생각을 했던 재환은 적잖이 놀라는 동시에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가 싶어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데아 활동 시절에도 지방 공연이 있을 때면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기는 했으나, 그때는 십시일반으로 단기 렌터카를 빌렸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상황이 좀 달랐다. 유일하게 면허가 있던 재환이 늘 운전 담당이었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한영의 집을 떠난 차는 금세 한강을 낀 대로로 들어섰다. 잽싸게 태군이 조수석을 차지하는 바람에 한영과 뒷좌석에 함께 탄 재환은 차창 밖으로 비치는 한강의 풍경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스피커에서는 지우가 틀어 놓은 1980년대 가요가 작게 흘러나오고, 저 멀리 일렁이는 강물 위로는 붉은 노을빛이 부서졌다. 그 와중 영 엉망진창인 실력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태군의 목소리가 피식피식 재환을 웃음 짓게 했다.

그렇게 노래 두세 곡이 지나갔을 즈음,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아르바이트로 인한 피로와 식후의 노곤함을 이기지 못한 재환의 눈꺼풀이 점차 아래로 감겼다. 이윽고 찌꺼기처럼 기억 저변에 눌어붙어 있던 음성이 하나둘 몽롱한 의식 속으로 흘러들었다.

…아니, 씨발. 내가 일부러 그랬어? 어? 나도 미치겠어!

그 말이 아니잖아, 여보!

다 우리 가족 잘되자고 한 짓이잖아! 나만 몹쓸 놈이지. 나만 몹쓸 놈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고성, 와장창 무언가가 깨져 나가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울부짖음…. 당연하다 여겼던 가정의 행복이 와르르 무너지는 건 허무하리만치 한순간이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끌고 온 사람은 더 이상 수습할 힘이 없었고,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럭저럭 단란했던 가족 사이에 비난과 자책만이 남았을 무렵,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게 되었다.

그 후로 어떻게 됐더라. 10년 넘게 잘 살던 아파트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오고, 동시에 아버지는 자취를 감추고, 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세 사람은 월셋집을 전전하고….

이 모든 것이 고작 몇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너무 현실감이 없던 탓이었을까. 아직도 가끔 이렇게 꿈에 나와 재환에게 질척한 괴로움을 전했다. 니네 집은 망했다고. 어서 정신 차리고 살길을 찾으라고.

불안하게 꾸벅꾸벅 흔들리던 머리가 툭, 옆에 있던 어깨로 떨어졌다. 삐걱삐걱 눈알을 굴린 한영은 제 한쪽 어깨에 가뿐한 무게를 전하는 재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늘따라 곱게 정리한 앞머리 아래, 숱도 많고 모양도 좋은 눈썹이 푹 찌푸려져 있었다. 무언가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이대로 재환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긴장으로 뻣뻣이 굳은 손이 시트 위에서 움직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재환의 반대쪽 머리를 받쳤다. 몸을 기울여 헤드레스트에 동그란 뒤통수를 누이고 나서야 입술 새에서 참고 있던 숨이 길게 흘렀다. 그리고 다시 등받이에 등을 기댔을 때, 한영은 백미러 너머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어째선가 짠한 기운을 띤 친구의 눈빛을 피해 창밖으로 휙 눈을 돌렸다. 강물 위로 춤추는 새빨간 노을이 덩달아 한영의 가슴을 울렁울렁 물결치게 만들었다.

* * *

클럽 근처, 공영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둑어둑한 밤에 잠겨 있었다. 본의 아니게 지우가 운전하는 도중 맘 편히 쿨쿨 자 버린 재환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트렁크에서 짐 빼기를 자처했다. 태군에게 스네어 가방을 주고, 지우에게 베이스 가방을 주고, 한영에게 노드 가방을 주고, 저는 기타 가방을 메고 페달 보드 가방을 손에 든 뒤에야 탁 소리가 나게 트렁크 도어를 닫았다. 생각보다 짐이 참 많았다.

길목이 좁은 탓에 네 사람은 재환을 필두로 줄지어서 오르막길을 걸었다. 재환이 약 2년여 만에 다시 걷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길가에는 전에 없던 가게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저 일식 라멘집도 처음 보는 거였고, 그 반대편에 있는 서서 먹는 분식집도 처음 보는 거였다. 휙휙 고개를 돌려 과거 이데아 멤버들과 종종 가던 돈가스집을 찾아 보았으나, 그곳 또한 다른 가게로 바뀐 모양이었다. 해서 조금, 재환은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보다는 오디션을 앞둔 설렘과 긴장감이 훨씬 더 컸다. 부러 더 씩씩하게 앞으로 내딛는 걸음 뒤로 등에 뭐 하나씩은 인 그림자 네 개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얼마 걷지 않아 지하에 클럽이 있는 허름한 건물 앞에 다다랐다. 쿵쾅쿵쾅 건물 밖까지 제법 큰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왔으므로 저 아래에서는 다른 밴드들의 공연이 한창일 터였다. 그 소리를 따라 차츰 더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끼며, 재환은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이 또한 2년 만에 밟아 보는 계단이었다.

불그스름한 조명이 깔린 클럽 안으로 들어가자 고막을 때리는 온갖 악기 소리와 함께 지하 특유의 꿉꿉한 향이 훅 콧속을 파고들었다. 재환은 띄엄띄엄 자리한 원형 테이블을 지나쳐 곧바로 클럽 뒤편에 있는 카운터 겸 바(Bar)로 갔다. 2년 전 모습 그대로 빵모자를 쓰고 동그란 안경을 낀 사장에게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요란한 기타와 드럼 연주에 묻히지 않도록 목소리는 조금 키웠다.

“안녕하세요.”

“어, 오랜만이네.”

마치 어제 본 사이처럼 무심히 대꾸한 사장이 재환 뒤편에 서 있는 다른 멤버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시선을 받은 세 사람 또한 방금의 재환처럼 고개나 허리를 숙였다 펴며 사장에게 인사했다. 저 앞 무대에서는 밴드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아직 한 팀 더 남았어.”

“네, 공연 보면서 기다릴게요.”

“그래.”

사장과의 짧은 대화를 마친 재환은 멤버들을 데리고 무대 옆, 대기실이라 부르고 실상은 창고로 쓰이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와 앰프, 스피커 따위가 어지럽게 쌓아 올려진 방에는 이미 다른 밴드들이 가져다 둔 악기 가방이 여럿 있었다. 개중 요란하게 덕지덕지 스티커가 붙여진 와인색 기타 가방이 문득 재환의 눈에 들어왔다. 에이, 설마.

휙휙 고개를 저어 불길한 예감을 걷어 낸 재환은 서둘러 빈 공간을 찾았다. 그나마 저 구석진 자리가 조금 비어 있어 재환을 포함한 네 사람은 차례로 그곳에 어깨에 멘 악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걸음을 돌려 대기실을 나서려는 찰나, 불길한 예감을 단숨에 현실로 만들어 주는 목소리가 재환의 귓구멍으로 들이꽂혔다.

“와, 이게 누구야?”

반갑지 않은 목소리만큼이나 반갑지 않은 인물이 턱 대기실 입구를 막고 있었다. 순간 표정을 차게 굳힌 재환은 제 뒤쪽에 서 있는 멤버들을 향해 ‘먼저 나가 봐.’라고 침착히 말했다. 어차피 눈앞에 버티고 있는 놈과는 좋은 얘기가 오가지 않을 테고, 그 모습을 구태여 멤버들에게 보일 필요는 없었다.

슬금슬금 재환의 눈치를 살피던 태군이 ‘우린 나가자.’ 하며 지우와 한영을 밖으로 이끌었다. 그제야 이데아의 보컬 형찬은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뒤이어 한 명 한 명이 곁을 지나칠 때마다 불쾌한 호기심을 품은 눈알이 함께 굴러갔다. 꼭 상대를 품평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한영이 대기실 밖으로 나설 때는 아예 눈을 가늘게 뜨며 한쪽 입꼬리를 비죽 위로 끌어 올렸다. 재환의 표정을 더욱 굳게 하기 충분한 태도였다.

이제 대기실에 남은 건 재환과 형찬 두 사람뿐이었다. 공연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은 벽 너머에서는 여전히 무대에 선 밴드의 노랫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쿵쿵 드럼의 킥 베이스가 밟힐 때마다 대기실 구석에 층층이 쌓인 의자들이 음압을 이기지 못해 미세하게 삐거덕거렸다. 그럴수록 오디션을 앞두고 기분 좋게 두근대던 재환의 가슴은 오히려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잠시간 둘 사이에 드라이브가 잔뜩 걸린 기타 사운드와 포효하는 듯한 보컬의 노래가 뒤섞인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재환이었다.

“오랜만이다.”

피식. 덤덤한 투로 내놓아진 인사에 형찬이 대놓고 비웃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웃음을 흘렸다. 뒤따라 나오는 말에서도 상대를 비꼬는 기색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무슨 아이돌 밴드인 줄 알았네. 너 음악 취향 변했나 보다?”

한영을 일찌감치 대기실 밖으로 내보낸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슬며시 이맛살을 구겼다. 안 그래도 아이돌 같다는 말을 끔찍이도 싫어하는데, 방금의 얘기를 그가 들었다면 상황이 더 복잡하게 꼬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유치한 도발이 뻔한 말에 일일이 대꾸해 줄 생각이 없던 재환은 피곤하다는 듯 뒷목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공연 다음 순서야?”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무대에 오를 준비나 잘하라는 뜻이었다. 이를 무시로 받아들인 형찬의 입매가 다소 사납게 비틀렸다. 말투에도 한층 날이 섰다.

“그래도 다행이네. 이번엔 여자 멤버가 없는 것 같아서. 서재환 너 여자 멤버 있으면 가만 안 두잖아.”

“뭐?”

오늘은 오디션도 있고, 이래저래 좋게 얘기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형찬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밴드 안에서 먼저 연애를 한 건 형찬 본인이었다. 어떻게 봐도 그런 녀석이 할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런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듣고도 허허할 만큼 재환은 아량이 넓지 못했다. 다만 성질 가는 대로 행동하기에는 장소나 상황 등 걸리는 게 많았다. 무엇보다, 그래도 한때 같은 밴드에서 함께 고생하던 녀석과 더 험한 꼴을 보기는 싫었다.

어느새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편 재환은 성큼 형찬에게로 다가섰다. 공연하던 밴드의 마지막 노래가 막 끝난 참인지 대기실 밖에서 휘파람 부는 소리, 박수 치는 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재환은 흠칫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형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괜히 시비 털지 말고 공연이나 잘해, 새끼야.”

사람을 더 우습게 만드는 재환의 언사에 형찬은 있는 대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환은 씩씩대는 형찬을 뒤로하고 안 그래도 좁아터져 숨 막히는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곧바로 멤버들이 있는 관객석으로는 갈 수 없었다.

“재환 오빠?”

“어…, 유정아.”

무대 옆 복도에 서 있던 한유정, 그러니까 이데아의 키보디스트가 대기실에서 나오는 재환을 보고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은 얼굴 가득 놀란 기색이 확연했다. 형찬이 여기 있으니 같은 멤버인 유정도 함께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만, 그럼에도 재환 역시 적잖이 놀라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뭐라 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는 유정에게 재환은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아, 네. 오빠는….”

“오늘 오디션 있어. 공연 다음 순서지? 들어가 봐.”

대기실 방향으로 고갯짓한 재환은 유정이 지나갈 수 있도록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재환으로서는 형찬과 마찬가지로 유정과도 달리 할 얘기가 없었다. 과거 그녀와 조금 껄끄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래 봤자 2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누구처럼 당시의 기억에 사로잡혀 쓸데없는 소리나 뱉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한창 무대에서 악기를 정리하고 있는 밴드를 한 번 흘깃 쳐다본 유정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는 잘 다녀왔는지, 어떤 밴드를 하고 있는지 등 재환에게 궁금한 것을 무엇 하나 묻지 못하고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저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작은 뒷모습이 문 너머로 쏙 사라지고 나서야 벽에 등을 기댄 재환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갔다. 다리가 철제로 된 동그란 스툴에 엉덩이를 붙이자 태군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붙였다.

“누군데?”

“전 밴드 보컬.”

“싸웠었어?”

저도 모르게 재환은 픽, 쓰게 웃었다. 시선은 하나둘 무대에 오르기 시작하는 이데아의 멤버들을 향했다. 술에 취해 제게 좋아한다 고백했던 유정은 새빨간 노드를 매만지고 있었고, 거기에 눈이 돌아 재환이 녹음한 트랙을 작정한 듯 바꿔치기했던 형찬은 기타를 튜닝하고 있었다. 그 행태를 묵과했던 다른 멤버들도 저마다 악기를 세팅하느라 바빴다.

싸웠나. 나는 저들과 싸웠던 건가.

밴드에서 탈퇴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니 답지 않게 걱정 어린 눈빛으로 저를 보는 태군에게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이는 것이 지금의 재환으로선 최선이었다. 이윽고 다시 무대로 돌리려던 시선이 태군과 지우 사이에 앉아 가만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한영과 마주 닿았다. 이전 밴드에서 탈퇴한 이유를 들려줬던 유일한 상대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이번에는 재환 자신이 먼저 저 빤한 시선을 휙 피해 버린 것은.

그새 땀이 배어난 손을 테이블 밑에서 쥐었다 펴는 사이, 세팅 도중 살짝 밝아졌던 무대 조명이 껌껌하게 꺼졌다. 기타 줄을 튕겨 보고, 탁탁 스네어를 쳐 보던 소리도 모두 사그라들었다. 테이블 곳곳에서 두런두런 퍼지던 말소리도 고요하게 잦아든 가운데, 무대 위로 푸르스름한 빛이 깔리며 밴드 이데아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재환이 다시는 밴드 따위 하지 않겠다고 괜한 고집을 부리던 2년간, 눈앞의 밴드는 착실히 성장했다. 과거보다 다들 연주 실력도 늘었고, 호흡도 잘 맞았으며, 공연 진행도 매끄러웠다. 시원스레 노래하던 형찬이 멘트를 시작하면 객석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도 터졌다. 그렇게 물 흐르듯 다섯 곡이 지나가고, 밴드는 이제 마지막 한 곡을 앞두고 있었다.

“아, 잠깐 저희 밴드 홍보 좀 할게요. 저희가 얼마 전에 첫 EP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멤버들이 돈 든다고 반대했는데, CD도 찍었거든요.”

형찬은 네모난 플라스틱 케이스를 쥐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커다랗게 ‘IDEA’라는 글씨가 새겨진 CD 표면이 조명에 반사되어 매끄러운 빛을 튕겨 냈다.

“클럽 코벤트에서만 단독 판매하고 있으니까, 이 기회를 놓치시면 안 되겠죠?”

뻔뻔하면서도 능글맞은 보컬의 멘트에 또 관객 몇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에 더 힘입어 형찬은 유려한 말솜씨로 앨범 홍보를 이어 갔다.

“특별히 오늘 구매하시는 분들께는 저희 네 명이 직접 사인도 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아나요. 몇 년 후에 그 CD가 엄청 귀한 CD가 될지. 그때 가서 중고 사이트에 올리셔도 모른 척할게요.”

웃음소리가 보다 커졌다. 덩달아 픽 웃은 태군이 지레 뜨끔하여 재환의 눈치를 살폈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기타 플레이가 좀 뻔해서 그렇지, 형찬은 여러 방면으로 꽤나 재능 있는 보컬이었다. 완전히 재환의 취향에 부합한다 할 수는 없었지만, 곡도 잘 썼고 노래 실력도 좋았다. 무엇보다 무대에서 절대 떠는 법이 없으니 지금처럼 멘트도 술술 했다. 보기에 별거 아닐지 몰라도 말로써 관객의 이목을 끄는 것 또한 밴드의 프런트맨에게는 상당히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럼 마지막 곡으로 앨범 타이틀곡인 ‘Red Light’ 들려드리며, 저희 이데아는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클럽 코벤트에 자리해 주신 여러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함성과 함께 박수가 나왔다. 줄곧 무표정한 얼굴로 공연을 보던 재환 역시 느릿느릿 손뼉을 부딪쳤다. 그 와중에도 마음속에는 오늘 오디션을 무사히 치러 꼭 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모든 공연이 끝난 클럽 내부에 환히 불이 켜졌다. 오늘 같은 평일에 클럽은 공연이 끝나면 곧바로 문을 닫거나 오디션을 보았고, 주말에는 LP 음악을 틀어 놓고서 술장사를 했다. 하여 주말 공연이 있을 때면 재환도 종종 이곳에서 맥주 한잔을 하고 돌아가고는 했다. 그것도 벌써 한참 전의 일이었다.

“정리 좀 해야 하니까, 한 30분 있다가 시작하자.”

“네.”

대답하기 무섭게 사장은 쏙 클럽 밖으로 사라졌다. 실상 공연 뒷정리는 엔지니어나 하나 있는 직원이 했으므로 사장은 그사이 어디서 담배라도 피우고 오려는 모양이었다. 그 틈을 타 태군이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몸을 일으켰고, 지우 역시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며 태군을 뒤따랐다. 따라서 재환은 의도치 않게 테이블에 한영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화장실도, 편의점도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한영은 말끄러미 텅 빈 무대만 쳐다보았다. 오늘 오디션 잘하자는 말이라도 건네야 하나 재환이 고민하던 때, 마침 대기실에서 나온 유정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테이블 가까이 다가온 유정이 머뭇거리며 재환을 불렀다.

“저, 오빠.”

“응.”

“이거….”

주춤주춤 유정이 앞으로 내민 것은 무대에서 형찬이 열심히 홍보하던 이데아의 CD였다. 얼결에 CD를 받아 든 재환은 유정에게 의문 섞인 눈빛을 보냈다.

“옛날에 오빠랑 같이 공연하던 노래도 들어 있어서요. 들어 보시라고….”

“아…, 응.”

CD를 뒷면으로 돌린 재환은 흘깃 수록곡 리스트를 살폈다. 그중 제목 두엇 정도가 눈에 익었다. 순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재환의 심장을 뻐근하게 눌렀다. 그 바람에 유정에게 미처 고맙다는 인사도 돌려주지 못했다.

그사이 재환 옆에 있던 분홍 머리 남자로부터 당황스러울 만치 빤한 눈빛을 받은 유정은 다소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유정의 어깨 위로 손목굴을 따라 레터링 문신을 한 팔이 척 얹혔다.

“유정이 서재환이랑 인사했나 보네?”

“아, 응. 아까 잠깐 마주쳐서….”

보란 듯 유정의 어깨를 꽉 껴안은 형찬이 재환의 손에 들린 CD로 흘끔 시선을 보냈다. 이어서 진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을 툭 던졌다.

“니네도 나중에 CD 나오면 한 장 줘라? 오디션 잘 보고.”

재환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양 형찬은 유정을 감싸 안은 채로 휙 몸을 틀었다. 다시 대기실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재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형찬의 말대로 오늘 오디션은 아무래도 꼭 잘 봐야 할 것 같았다.

짐을 챙겨 대기실에서 나온 이데아 멤버들의 목소리가 클럽 밖으로 멀어졌을 즈음,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웬일로 또 눈을 맞춰 오는 한영에게 ‘담배.’라고 짧게 말한 후 객석을 가로질러 이제는 아무도 없을 대기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재환의 예상과 달리, 대기실은 사내 녀석들로 북적북적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어! 오늘 오디션 보시죠?”

“아, 네.”

개중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인 한 명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재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저들 또한 오늘 오디션을 보는 팀인 모양이었다.

“저희도 오늘 오디션 봐요! 야, 야. 인사드려!”

노랑머리가 악기를 꺼내느라 분주한 멤버들의 옆구리를 차례로 툭툭 때렸다. 그러자 다들 행동을 멈추고서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노랑머리 옆에 나란히 섰다. 적이 당황한 재환이 주춤하는 사이, 좁은 대기실을 일렬로 꽉 채운 사내 넷이 별안간 재환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코스믹 라테입니다!’라는 우렁찬 인사까지 곁들여서.

“아…, 네. 저는 더 숨이에요.”

엉겁결에 재환 또한 허리를 숙였다 펴며 비슷한 인사를 건넸다. 멤버들이 아주 파이팅이 넘치는 게, 모르긴 몰라도 음악 스타일 또한 비슷한 느낌일 것 같았다. 다들 얼굴에는 소년티가 역력하여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였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간 코스믹 라테의 멤버 사이를 헤쳐 재환은 자신의 기타 가방 앞으로 갔다. 손에 쥐고 있던 이데아의 CD를 가방 앞주머니에 찔러 넣은 뒤 담뱃갑을 꺼냈다. 그때, 쓱 옆으로 다가온 노랑머리가 귓속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재환에게 속삭였다.

“근데, 형님네 밴드 다들 비주얼이 장난 아니던데요?”

“예?”

“아까 같이 계신 거 잠깐 봤거든요.”

그러더니 번쩍 엄지를 치켜들었다. 갑자기 형님 소리를 들은 것도, 밴드 칭찬을 들은 것도 이래저래 민망해진 재환은 ‘아, 네….’ 하며 멋쩍게 대꾸했다. 멀끔한 놈들과 함께 다니니 이런 얘기도 다 들어보고,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오늘 오디션 파이팅입니다!’를 외치는 노랑머리에게 ‘네, 파이팅….’이라고 재차 멋없이 응수한 재환은 대기실을 빠져나와 곧장 지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마침 나란히 내려오는 태군과 지우에게 담뱃갑을 흔들어 보이고서 계단을 마저 올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시원하지는 않아도 지하에 비해 그럭저럭 상쾌한 공기가 재환을 맞이했다.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뱉은 재환은 건물 입구 왼편, 통나무 모양을 흉내 낸 벤치에 털썩 앉았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벤치의 모양새는 2년 전과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그새 다리가 한쪽으로 더 기울었는지 미세하게 몸이 옆으로 쏠렸다. 이러다 아예 나중에는 아래로 푹 주저앉는 거 아닌가 하는 조금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담뱃갑에서 하얀 담배를 빼 문 재환은 습관처럼 입가를 손바닥으로 막은 뒤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딱딱한 건물 벽에 뒤통수를 기대고서 후, 연기를 내뱉었다. 입 밖으로 흘러 나간 뿌연 연기가 어스름히 가로등 불빛에 물든 허공으로 뭉게뭉게 흩어졌다.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이를 좇던 재환의 눈동자에 천천히 초점이 잡혔다. 또렷해진 시야에 들어오는 건 좁은 2차선 도로 건너편에 있는 구제옷샵이었다.

클럽에서 공연이 있을 때 종종 형찬이 들르곤 했던 가게 쇼윈도에는 재환 기준에서 상당히 화려한 색감의 옷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무채색이라곤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자연스레 그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담배 연기를 뱉을 때마다 그 알록달록한 색들이 탁한 연기에 가려 부예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타닥타닥 미약한 소리를 내며 담배가 절반쯤 타들어 갔을 때, 엉덩이를 대고 있는 벤치가 덜컹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 앞을 바라보던 재환의 고개가 느릿느릿 옆으로 돌아갔다. 불 꺼진 가게 안에서 비치던 색보다 훨씬 선명한 색감을 띤 머리의 남자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름밤의 눅눅함을 실은 더운 바람이 솔솔 불어올 때마다 남자의 분홍 머리카락이 함께 사락사락 흔들렸다.

“담배…?”

상대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순간 멍청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재환과 반히 시선을 맞추던 한영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홍 머리칼이 다시금 춤추듯 나풀거리며 주위로 퍼진 달콤한 향이 재환의 콧속으로 스몄다. 은은한 줄 알았던 한영의 향기는 매캐한 담배 냄새를 덮을 정도로 꽤 강렬함을 품고 있었다.

‘그럼 왜 왔어?’라고 묻는 대신 재환은 도로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렸다. 부러 한영의 눈을 피했다기보다는, 사람의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을 수는 없던 까닭이었다. 그새 담배 끄트머리를 살금살금 차지해 들어온 재를 툭툭 바닥에 떨구는데, 곁에서 낮으면서도 또 바람결처럼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P 앨범이 뭐야?”

조금은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게 궁금해서 따라 올라온 걸까. 쭉 편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재환은 잠깐 답을 골랐다. 입술 새로 탁한 연기를 흘린 후 대답을 위해 말문을 뗐다.

“정규 앨범은 아니고, 한 네다섯 곡 정도 들어가는 미니 앨범. 요새는 그런 식으로 많이들 내. 밴드도 그렇고, 아이돌도 그렇고.”

말을 하면서도 마땅한 답이 되었을는지 확신은 없었다. 해서 슬쩍 옆으로 눈을 굴리자, 벤치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 끌어안은 한영이 작은 목소리로 ‘응.’ 하며 얼굴을 끄덕였다. 그러더니 또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너도 EP 앨범 내고 싶어?”

다만 이번에는 앞선 질문보다는 조금 모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냥 재환 본인이 내고 싶냐는 건지, ‘더 숨’을 통해서 내고 싶냐는 건지. 사실 어느 쪽이든 답은 같았다. 보다 길게 연기를 내뱉은 재환은 허연 연기가 공기 중으로 너울너울 흩어져 사라졌을 즈음 다시 입을 열었다.

“내고 싶지. 당연히.”

대답은 짧았을지언정 그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한 곡씩 발매하는 싱글도 좋기는 했으나, 재환은 언젠가 꼭 앨범의 형태로 곡을 내고 싶었다. 이데아 시절부터 그랬다. 물론 서양권에서야 EP를 앨범으로 취급하지 않는다지만, 그건 대한민국 사는 재환이 알 바가 아니었다. 네 곡이든 다섯 곡이든 여섯 곡이든 꽉꽉 담아 EP로 내고, CD도 찍고, 오늘 이데아가 그랬던 것처럼 공연을 보러 와 준 사람들에게 홍보를 빗대어 자랑도 좀 하고….

아. 문득 재환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부러움, 혹은 질투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은 깨달음은 이어서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불러왔다. 오늘 오디션을 잘할 생각만 해도 모자랄 판에, 이제는 저와 연이 없는 다른 밴드나 부러워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때, 자책에 빠진 재환에게 또 다른 질문이 던져졌다.

“오늘 오디션 잘하면… 우리도 나중에 EP 앨범 낼 수 있어?”

“어?”

어느덧 길바닥을 향해 숙어져 있던 재환의 얼굴이 휙 옆으로 돌아갔다. 최근 가까이서 마주한 적이 별로 없던 갈색 눈동자가 종전보다 한결 좁혀진 거리에서 지긋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제 몸이 한영 쪽으로 기운 건지, 반대로 그사이 벤치에 올렸던 다리를 내린 한영이 다가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로 말없이 눈빛만 주고받는 시간이 길어졌다. 도로를 달리는 차가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반짝, 헤드라이트 불빛을 드리우며 지나갔다. 요란했던 엔진 소리가 저만치 멀어졌을 무렵, 정확히 무엇에 대한 긍정인지도 모르면서 재환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도 덧붙였다. 그러자,

“그럼 나 더 열심히 할게. 꼭 EP 앨범 내자.”

옅은 빛깔의 눈동자를 받치고 있던 눈 밑 살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빙긋한 미소를 머금었다. 더는 지나가는 차도 없는데, 어째서인지 한영의 얼굴이 한층 훤한 빛을 품은 것처럼 보여 재환은 뭐라 대꾸를 못 하고 끄먹끄먹 눈만 감았다 떴다. 짧아진 담배 끝에서 미처 털어 내지 못한 재가 작게 바스스, 소리를 내며 뚝 아래로 떨어졌다.

더는 물어볼 게 없는 듯 한영은 훌쩍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재환은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서둘러 바닥에 지져 껐다. 그리고 굽혔던 허리를 다시 폈을 때, 지척에 있던 분홍 머리는 이미 건물 안으로 쏙 사라진 후였다. 남은 건 습기를 머금은 공기 중으로 살살 흩뿌려진 달콤한 향기뿐이었다.

* * *

내처 담배 하나를 더 피우고 클럽으로 내려온 재환은 대기실에서 기타를 꺼내 멤버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갔다. 때마침 지우도 베이스를 연주하며 손을 풀고 있던 차라, 재환 역시 그 옆에 앉아 연주를 맞춰 보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태군이 드럼스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리듬을 넣었고, 한영이 허밍으로 멜로디를 얹었다. 잠시 후 짧은 간이 합주가 끝났을 때,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던 코스믹 라테의 멤버들이 큰 소리로 박수를 보내왔다. 머쓱해진 재환은 그들을 향해 슬쩍 고개를 꾸벅였다.

30분만 있다가 오디션을 시작하자던 사장은 약 45분이 지나서야 클럽으로 돌아왔다. 손짓으로 두 팀을 부른 뒤, 이렇다 저렇다 긴 말 없이 대뜸 ‘누가 먼저 할래?’ 하고 물었다. 그 결과 두 밴드의 리더는 얼떨결에 가위바위보를 하게 되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내심 재환은 앞 순서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재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위바위보에서 단 한 판 만에 한영을 이긴 노랑머리가 목소리도 우렁차게 ‘저희가 먼저 하겠습니다!’를 외친 것이다. 그러고는 재환을 보며 슬그머니 엄지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쪽을 배려해 내린 결정인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고맙다면 고마운 일인지라, 재환은 또 한 번 고개를 꾸벅였다.

얼마 안 가 밴드 코스믹 라테의 오디션 겸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음악 스타일은 재환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씩씩하고 파이팅 넘치는 멤버들만큼이나 시원시원하고 힘 있는 음악이었다. 특히 보컬 겸 기타인 노랑머리의 레스폴 연주가 아주 발군이었다. 게다가 성량은 또 어찌나 좋은지, 마이크를 집어삼킨다는 게 딱 저런 거구나 싶었다. 두 번째 곡이 시작됐을 때는 저렇게 목에 핏대를 세우다 무대에서 쓰러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물론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짧은 공연이 끝난 후, 줄곧 팔짱을 낀 채로 무대를 지켜보던 사장이 딱 한마디를 던졌다.

“니네 그러다 죽겠다.”

동시에 재환은 코스믹 라테가 오디션에 통과했음을 직감했다. 그가 아는 사장은 공연이 별로면 ‘별론데?’라고 가감 없이 직언을 날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저들의 공연을 좋게 봤다는 뜻이었다. 하니 재환은 마이크 앞에서 헐떡이는 노랑머리에게 자연히 엄지를 들어 보이게 되었다. 일찌감치 축하한다는 의미였다.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 내며 부지런히 악기를 정리한 코스믹 라테의 멤버들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제는 더 숨이 무대에 오를 차례였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네 사람은 약속한 듯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각자 악기를 들고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무대 위로 올랐다. 재환과 지우가 앰프에 기타, 베이스를 연결하는 동안 태군은 제가 가져온 것으로 스네어를 교체했고, 한영은 건반 스탠드 위에 노드를 올렸다.

케이블을 모두 연결한 재환은 곡 순서를 상기하며 발밑에 내려놓은 페달 보드를 꼼꼼히 점검했다. 딜레이의 템포는 제대로 설정했는지, 리버브의 믹스 노브는 너무 과하게 돌리지 않았는지, 전원은 다 제대로 들어오는지. 무대 밑에서 이미 조율을 하기는 했지만, 혹시 몰라 기타 줄도 한 번씩 더 튕겨 봤을 즈음 얼추 다른 멤버들도 악기 세팅이 끝났다. 가운데 자리한 한영의 건너편에 선 지우가 재환에게 시작해도 좋다는 눈짓을 보냈다.

흠흠,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은 재환은 제 앞에 우뚝 솟은 마이크 가까이 입을 가져갔다. 멘트만큼은 죽어도 하기 싫다고 한영이 끝까지 도리질하는 바람에, 졸지에 리더 대신 밴드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게 된 까닭이었다. 그래도 관객이 있는 공연이 아니니 괜찮을 줄 알았다. 하나 과거 굳게 입 다물고 기타만 치던 재환에게 무대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대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사장과 겨우 눈을 맞춘 재환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서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밴드 ‘더 숨’입니다. 감성적인 음악을 추구하고 있고요,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해서 아직 경력은 부족하지만 앞으로 이 무대를 통해 꼭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오늘 오디션에서 연주할 곡은 ‘I See You’와 ‘I Love You’ 이렇게 두 곡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참고 있던 숨을 급히 몰아쉰 재환은 서둘러 마이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밝게 켜져 있던 무대 조명의 조도가 어둑하게 낮아지며, 보라색과 파란색의 중간쯤 걸쳐진 묘한 색깔의 빛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어두워진 객석 어딘가에서 관객을 자처해 준 코스믹 라테의 멤버들이 응원의 함성을 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멘트를 앞두고 있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재환의 심장이 쿵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이데아 시절 몇 번이나 섰던 무대이건만, 마치 처음 이 자리에 서는 것 같은 낯선 감각이 발밑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걷잡을 수 없이 심장 박동이 치솟는 가운데, 뻣뻣이 굳은 뺨에 고요한 시선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눈앞에서 더욱 껌껌하게 잠기는 관객석을 멀거니 응시하던 재환의 고개가 더디게 옆으로 돌아갔다.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서서히, 초록색으로 바뀌는 조명 속에서 더없이 오묘한 색채를 뿜는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그럼 나 더 열심히 할게. 꼭 EP 앨범 내자.

불어 봤자 시원할 것 없는 여름 바람에 분홍 머리칼을 살랑살랑 흩날리며, 저 너머로 멀어져 간 자동차 불빛을 등진 채 다짐인지 약속인지 모를 말을 제게 속삭여 오던 아까와 같았다. 한영의 눈과 입이 모두 부드러운 호를 그리고 있었다. 그 넋 나갈 정도로 고운 미소가 시끄럽게 울려 대던 재환의 심장 소리를 잠재웠다. 어느새 피크를 쥔 손끝까지 번져 나갔던 긴장감을 꺼트렸다. 파이팅이라든가, 잘하자든가, 어떤 고무의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재환 또한 자연스럽게 지어진 미소로 한영에게 화답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영 너머에 있는 지우와, 드럼 뒤에 외따로 떨어져 앉아 있던 태군에게까지 차례로 같은 미소와 눈빛을 보냈다. 마음속으로 멤버들에게 건넨 말은 짧고도 간결했다.

가자.

재환의 신호를 받고 씩 웃은 태군이 드럼스틱을 높이 치켜들었다. 가느다란 팔뚝에 다부지게 붙은 근육이 꿈틀거리며, 양손에 쥐인 스틱이 힘 있게 맞부딪쳤다.

딱, 딱, 딱, 딱.

연달아 네 번의 카운트가 울렸다. 도미노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건반 위로 얹힌 하얀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마이크에 바짝 다가선 붉은 입술이 스르륵 열리고, 무대 양 끝자락에 자리 잡은 스피커 밖으로 묵직한 피아노 음과 함께 숨소리 같은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I, see, you. 오디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날, 재환은 인생에서 최고의 공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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