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4장
* * *
꼼짝 않고 서서 건물 입구 턱에 쪼그려 앉은 한영을 바라보던 재환은 흡, 숨을 들이켰다. 최대한 슬리퍼를 신은 발끝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그러나 완벽히 발소리를 죽일 수는 없었다. 저벅, 하고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을 밟는 소리가 바로 앞까지 가까워졌을 때, 분홍 머리통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재환과 눈이 마주치자 ‘어….’ 하고 붉은 입술 새에서 얼뜬 소리가 흘러나왔다. 난데없이 제집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맞닥뜨린 사람보다 더 당황한 얼굴이었다. 재환의 눈썹이 푹 구겨졌다.
“너, 거기서 뭐 하냐.”
한영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쑥 올라간 눈높이를 따라 하는 수 없이 재환도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제야 가까이서 마주한 한영의 얼굴은 한 달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살이 내려 있었다. 큰 눈은 더 커지고, 갸름한 턱은 더 뾰족해졌다. 그것이 왠지 모르게 재환의 표정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잠시 후 한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기서 뭐 하냐는 물음에 대한 답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지금… 들어오는 거야?”
“뭐?”
재환이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틈을 타 재빨리 한영의 시선이 남자답게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에 들린 비닐봉지와 발등을 덮은 슬리퍼, 그리고 다시 떨떠름한 표정의 얼굴로 옮겨 갔다. 괜한 오해를 사기 전 한영은 냉큼 입을 열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았지만 일단 재환은 꾹 입을 다물었다. 사실 물어볼 말은 이쪽이 훨씬 더 많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자신이 여기 사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그리고 혹시 어제도….
대신 재환은 슬쩍 눈알만 굴려 한영의 차림새를 살폈다. 와인색 바지에 옅은 미색 셔츠를 넣어 입은 한영은 오늘도 참 알록달록했다. 단, 집에서 편한 옷을 입고 있었을 때와는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양쪽 귓불에 한 작은 귀걸이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여러 가지 의미로 지금 그가 서 있는 장소와는 썩 어우러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저 옆에 놓인 큼지막한 쇼핑백은 또 뭐고. 그 와중에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햇살이 착실히 재환의 등을 뜨끈하게 달구고 있었다.
“야.”
“어…?”
“너 아침…, 아니다. 점심 먹었어?”
고작 사람 하나 들인 것뿐인데 어째 좁고 칙칙한 집이 더 비좁고, 더 칙칙하게 느껴졌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불부터 켰으므로 실내가 어둡기 때문은 아니었다. 유한영이라는 알록달록하고 반짝반짝한 녀석이 이 공간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그, 뭐라더라…. 맞아. 대학교 교양 시간에 배웠던 콜라주인지 뭔지 하는 기법으로 딱 한영만 이 방에 오려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거기에는 아까부터 그가 풍기던 달콤한 향도 한몫했다. 이미 한참 전 져 버린 벚꽃 같은 머리 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 데나 앉아 있어.”
“아, 응.”
재환이 민망할 정도로 이리저리 큰 눈을 굴리던 한영은 그제야 긴 다리를 접어 매트리스 앞에 앉았다. 귀한 거라도 들은 듯 앉아서도 옆에 놔둔 쇼핑백 손잡이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안에 뭐가 있냐 물을 만큼 관심이 가는 것은 아닌지라, 재환은 모자를 벗고 장 본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재환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고, 좁은 싱크대 하부장을 뒤적이는 중에도 한영의 시선은 줄곧 그의 새카맣고 늘씬한 뒷모습에 머물렀다. 그러다가도 재환이 ‘물 줄까?’라든가 ‘선풍기 틀어 줘?’라고 물을 때면 괜찮다고 대답하며 재빨리 휙 다른 곳을 보았다. 얼마 안 있어 그러한 대화마저 끊긴 집 안에 개수대에서 물 흐르는 소리, 칼이 도마에 탁탁 부딪치는 소리 따위만 차례로 이어졌다.
그사이 한영은 단 한 번도 재환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집 주소는 태군에게 물어봤고, 줄 게 있어서 왔고, 또 오늘 처음 온 거라는 말도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재환이 지나치게 바빴다. 물론 열심히 무언가를 만드는 재환을 보는 것도 싫지는 않았으나, 이왕이면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한영은 작게 한숨 쉬며 습관처럼 두 다리를 모아 안았다.
조금쯤 시무룩해진 한영이 계속해서 바삐 움직이는 재환의 등을 보다가, 쇼핑백 안을 흘끔 들여다봤다가, 또다시 재환에게로 시선을 돌리기를 수 번 반복했을 즈음 솔솔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 왔다. 전에도 한영이 한 번 맡아 본 바가 있는 냄새였다. 줄곧 다시 맡고 싶었던 냄새이기도 했다.
뽀얗게 색이 우러난 북엇국에 마지막으로 파를 송송 썰어 넣은 재환은 한 국자 국물을 떠 올려 후후 불었다. 살짝 식은 국을 호로록 들이마시자 절로 음, 소리가 나왔다. 오늘은 쌀뜨물까지 넣고 끓여 먼젓번 한영의 집에서 급히 만들었을 때보다 확실히 더 깊은 맛이 있었다. 제법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갓 지은 밥과 뜨끈한 국, 여기에 시장에서 사 온 반찬과 쌈 채소까지 올리니 앉은뱅이책상 위로 제법 그럴듯한 한 상이 차려졌다. 다만 손님이 왔다고 해서 괜히 더 이것저것 내놓은 것은 아니었고, 재환 혼자 있었더라도 오늘은 이 정도쯤 차려 먹을 계획이었다. 그것도 알지 못하는 한영은 재환이 다소 멋쩍어질 만큼 감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 다 네가 한 거야?”
“무슨. 밥하고 국만 한 거야. 다른 건 다 사 왔어.”
부러 무심한 투로 대꾸하며 한영에게 부엌에서 들고 온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밀었다. 이를 건네받는 희고 기다란 손가락과 손끝이 스치자 순간 어깨가 움칠거렸다. 다행히 상대가 알아챌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더 머쓱해진 재환은 서둘러 옆에서 휴지 한 장을 뽑아 한영에게 주었다. 별 뜻 없는 행동이었다. 단, 이를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한 한영은 손에 들린 휴지를 내려다보며 오늘은 국이든 반찬이든 절대 흘리지 말고 먹어야겠다 다짐했다.
“많이 먹어.”
“응….”
잠시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숟가락을 든 재환이 국을 한 숟갈 크게 떠 호호 불었다. 슬쩍 이를 일별한 한영도 똑같이 국을 떠서 입김을 불었다. 사실 국 냄새가 너무도 좋아 그냥 이대로 그릇째 후루룩 마시고픈 마음이었으나, 혹여 눈앞의 남자에게 못나 보일까 싶어 꾹 참았다.
몇 번 국을 떠먹은 후 재환은 가지런히 쌓여 있던 채소 위에서 상추 한 장을 집어 그 위에 밥을 얹었다. 젓가락 끝에 콕 찍은 쌈장도 묻힌 뒤 상추를 동그랗게 뭉쳤다. 그 모습 또한 눈알만 굴려 유심히 살피던 한영은 저도 덩달아 상추를 집었다. 재환처럼 밥도 올리고 쌈장도 묻혀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미묘한 표정으로 한영이 우물우물 풀 맛만 느껴지는 쌈을 씹는데, 이번에는 재환의 젓가락이 식탁 가운데 놓인 콩자반 접시로 향했다. 가볍게 집어 올려진 콩자반 하나가 금세 쏙 재환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한영도 콩자반으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하나 한영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콩자반은 일전 재환과 함께 먹었던 메추리알보다 더 작고, 더 매끄러웠다.
엑스 자로 쥔 젓가락 끝에 잠시 닿았던 새카만 콩알이 어김없이 팅 튕겨져 나가 데굴데굴 재환 앞으로 굴러갔다. 한영의 여전한 젓가락질에 슬쩍 웃은 재환은 굴러온 콩자반을 집어 제 입에 넣었다. 내처 새로 집은 콩자반을 맞은편 밥 위에 올려 주려는 때, 대뜸 한영이 큰 소리를 냈다.
“주지 마!”
“뭐?”
“나 그거 안 먹어도 돼.”
안 먹으면 안 먹는 거지 저렇게 정색할 건 뭐람. 알다가도 모를 한영의 반응에 살짝 미간을 움츠린 재환은 갈 곳 잃은 콩자반을 그냥 입으로 넣었다. 맛만 좋네.
또 속없이 재환의 무자비한 친절에 넘어갈 뻔한 한영은 후루룩후루룩 연거푸 국만 떠먹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재환이 끓인 북엇국은 역시나 눈물 콕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주에 두 번씩 집에 오는 도우미 아주머니도 한영에게 이렇게 맛있는 북엇국은 끓여 준 적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아예 두 손으로 들어 올린 국그릇 끄트머리에 입술을 붙이려는 찰나.
“합주는 잘했고?”
“어…?”
한영은 쥐었던 그릇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재환을 쳐다보았으나, 고개를 푹 숙인 재환은 한영을 볼 생각도 없이 재차 쌈만 싸고 있었다.
“기타 구했나 보네?”
그러더니 또 사람 속도 모르는 질문을 던져 왔다. 여봐란듯이 숟가락으로 콩자반을 한 움큼 퍼서 입에 넣은 한영은 한참이나 우물우물 씹어 삼킨 후에야 입을 뗐다.
“아니. 안 구했어.”
“안 구했다고…?”
“응. 안 구했어.”
강조하듯이 같은 대답을 두 번 반복했다. 꽁꽁 뭉치던 쌈에서 시선을 뗀 재환은 백번 물으면 백번 다 같은 답을 들려줄 듯한 표정의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유달리 힘이 들어간 눈빛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쌈을 쥔 손아귀에도 괜스레 힘이 들어갔다. 응, 구했어. 그래, 다행이다. 당연히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될 줄 알았다.
“아…, 난 합주했다고 해서. 구한 줄 알았어.”
“안 구할 거야.”
이윽고 대화는 점점 더 재환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손에 있는 쌈을 먹지도 못하고 꼭 쥐고만 있는 사이, 더욱 예상치 못했던, 혹은 절대로 예상하기 싫었던 말들이 계속 한영의 입에서 이어졌다.
“난 너랑 밴드 하고 싶어.”
“유한영.”
“지난번엔…. 외로워서 그랬어. 갑자기 너무 외로워서 너한테 그랬어. 그러니까 그냥 나랑 밴드 하면 안 돼?”
일순 팍 눈썹을 일그러뜨린 재환은 서둘러 입 안으로 쌈을 욱여넣었다. 아무 맛도 잘 느껴지지 않는 쌈을 우적우적 씹으며 넘치는 당황을 삼켰다. 이쪽은 애써 모른 체하고 있었건만, 다짜고짜 한영이 그날 일을 꺼낼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 누구는 바보라서 내내 입 다물고 있었는지 아나. 그나마 쌈이 튀어 나가려던 욕을 막아 준 게 다행이었다. 이를 비웃듯 또 한 번 간절한 음성이 흘렀다.
“진짜야. 정말 그래서 그런 거야….”
마치 억울하다는 것처럼 비슷한 말을 되풀이한 한영의 분홍 머리통이 툭 아래로 떨구어졌다. 아예 국그릇에 머리를 담글 기세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재환은 아침에 그를 괴롭혔던 두통이 다시금 우르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기껏 정성 들여 끓인 국을 앞에 두고 한영이 저러는 것도 싫었고, 혹 저러다 울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이 이는 것도 싫었다.
결국 재환은 참다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번쩍 고개를 들어 다소 놀란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한영을 무시한 채, 저벅저벅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냉수가 가득 담긴 컵 두 개를 들고 온 재환은 하나를 탁, 소리가 나게 한영 앞에 내려놓았다. 출렁이다 못해 밖으로 넘쳐흐른 물이 컵 주변으로 동그랗게 고였다. 다른 컵에 든 물을 한 번에 쭉 들이켜 답답한 속을 좀 달랜 재환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딱 한 마디를 꺼냈다.
“일단 밥 다 먹고, 그러고 나서 얘기해.”
식사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온 재환은 서둘러 입에 문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비라도 오려는 듯 그새 더 눅눅해진 공기 중으로 부연 연기를 뱉으며, 손가락을 크게 벌려 꾹꾹 양 관자놀이를 눌렀다. 숙취가 문제인 건지 같이 밥 먹은 놈이 문제인 건지 쉬이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북엇국이 아니라 다른 엉뚱한 것을 먹은 것처럼 속도 더부룩했다.
그 와중 언뜻언뜻 제집 창에 비치는 분홍색 형체가 더욱 재환의 정신을 산란하게 했다. 같이 담배라도 피우고 싶은 건가. 괜스레 한 번 뒷목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재환은 은근슬쩍 건물 반대 방향으로 등을 졌다. 그래 봤자 눈에 보이는 건 대충 시멘트를 발라 세운 낡은 담벼락이었다. 덕분에 길게 내뱉은 담배 연기가 흩어지지 못하고 재환의 얼굴로 고스란히 쏟아졌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펴질 못하고 있던 미간에 더 깊은 주름이 팼다.
사실 ‘꺼져, 호모 새끼야’ 이 한마디면 해결 날 일일지 몰랐다. 그러나 제가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상대의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럴 거였으면 한 달 전 그때 했어야 했다. 한영이 처음 손으로 뺨을 감쌌을 때, 어깨를 쥐었을 때, 살짝 입술을 맞대어 왔을 때, 아니면 그 사이로 부드럽게 혀를 넣었을 때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 많은 기회를 모조리 날려 버린 건 재환 자신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와 입 맞췄던 게 한영이 처음은 아니었다. 군대 첫 외박 때던가. 동기 한 놈이랑 부대 근처에서 진탕 마시다 난데없이 기습 뽀뽀를 당한 적이 있었다. 입대 전 헤어진 여친이 그리 보고 싶다며 엉엉 울어 젖히던 놈이 갑자기 외롭다고 입술을 부딪쳐 온 것이다. 그때는 미쳐도 곱게 미치라며 있는 욕 없는 욕 다 퍼부어 주고 덤으로 니 킥까지 날려 줬었더랬다. 고로, 사실 마음만 먹으면 한영에게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였다.
“미치겠네….”
얼룩덜룩 지저분하게 때가 탄 담벼락을 발로 툭툭 차며 재환은 한탄 섞인 혼잣말을 흘렸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찾아온 거, 밥 잘 먹인 후 앞으로 밴드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겠다고 대충 그럴듯한 말 몇 마디 해 주고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한영이 대뜸 듣고 싶지도 않았던 얘기를 꺼낸 것도, 거기에 순간 확 화가 끼쳐 오른 것도 모두 다 재환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당장의 타개점이 보이지 않았다.
내리 담배 두 개를 연달아 피우고 칼칼해진 목을 문지르며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한 번도 간 적 없다는 양 한영은 얌전히 매트리스 앞에 앉아 있었다. 무릎만 안 꿇었다 뿐이지 꼭 벌 받기를 기다리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이를 보고 있자니 재환은 절로 맥이 탁 풀려 버렸다. 한영을 상대하다 이런 경우가 분명 한 번은 아니었을 터다.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시선을 짐짓 못 본 체한 재환은 냉장고 앞에 가 섰다. 이럴 때 쓰게 될 줄은 몰랐으나, 어쨌든 손님은 손님이기에 가게에서 받았던 더치커피를 꺼내 대충 물을 타고 위에 얼음 몇 개를 띄웠다. 마음 같아서는 소주 하나 딱 까서 가운데 두고 도대체 넌 무슨 생각이냐 따져 묻고 싶었지만, 왠지 그랬다가는 또 한영에게 말려들게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집에 소주가 없었다.
커피 두 잔을 들고 한영에게 간 재환은 아까처럼 던지듯 컵을 내려놓는 대신 쓱 앞으로 내밀었다. 나머지 하나는 밥 먹자마자 깨끗이 치운 앉은뱅이책상 위에 두고서 한영을 마주 보고 앉았다.
국이 짰던 것도 아닌데 괜스레 입 안이 말라 와 재환은 일단 커피부터 꿀꺽꿀꺽 마셨다. 가게를 찾는 사람마다 이 집 커피 참 맛있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재환에게는 조금 아리송한 맛이었다. 함께 입으로 들어온 얼음을 우적우적 씹어 삼킨 후,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그, 내가 전에 밴드를 했었는데.”
그러나 몇 마디 잇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두 손으로 쥔 컵 주둥이에 입술을 붙였다 뗀 한영의 표정이 온통 구깃구깃 구겨져 있던 까닭이었다. 어쩐 이유인지 재환에게 원망 어린 눈초리를 보내기까지 했다. 또 왜 저러나 싶어 재환도 덩달아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는 때.
“써.”
“어?”
“이거 엄청 써….”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던 재환은 이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분위기 한번 제대로 이상해졌다. 한영의 두 눈이 동그래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영 안 그렇게 생긴 놈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와 재환으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왠지 한영은 진한 블랙커피쯤 아무렇지 않게 마실 듯한 이미지였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이미지냐, 묻는다면 저도 잘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한영이 저런 반응을 보일 만큼 기실 커피는 쓰지 않았다. 재환 자신도 마실 만한 정도였으니.
“물 더 타 줘?”
한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픽 웃으며 일어선 재환은 한영의 컵을 들고 거실과 경계가 모호한 부엌으로 가 물을 좀 더 따라 왔다. 조금은 색이 옅어진 커피를 다시 건네주고서 자리에 앉았다. 컵을 두 손으로 꼭 쥔 한영이 호로록 소리를 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됐어?”
“아직 써.”
“그럼 커피가 쓰지, 달겠냐.”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환은 조금 웃음이 나왔다. 같이 밥 먹을 때만 하더라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속이 지금은 김빠질 만치 잠잠했다. 왠지 아이스커피의 효과인 것 같기도 했다. 이래서 날이 더워지면 사람들이 그렇게 아이스아메리카노니 아이스라테니 찾는 모양이었다.
“유한영.”
“응?”
쓰다면서도 연신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던 한영이 크게 뜬 눈을 맞춰 왔다. 우중충한 골목길에서건 형광등 아래서건 투명한 빛을 뿜는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재환은 잠시 끊겼던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내가 군대 가기 전까지 밴드를 했었거든. 거기서 멤버랑 좀 안 좋게 얽혔었어.”
“안 좋게?”
“어. 밴드 멤버랑 키스…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걔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도 하더라고. 뭐, 사실 나도 호감이 있었고. 근데 나중 보니까 다른 멤버랑 사귀고 있는 거더라.”
말을 꺼내면서도 재환은 이게 맞나 싶었다. 사실 제 입으로 그때 일을 먼저 누군가에게 언급하는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다시금 떠올리는 것조차 짜증 나는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뻑뻑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굴리고 굴린 결과, 이 이상의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쓴 커피 하나에도 울상을 짓는 녀석에게 ‘꺼져, 호모야’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얘기가 그냥저냥 주워섬긴 변명, 내지 핑계란 뜻은 아니었다.
“더 자세히 말하기는 좀 복잡하고. 암튼 그러다 난 밴드에서 나왔어.”
재환은 그새 얼음이 녹아 조금 묽어진 커피를 아예 맥주 마시듯 몽땅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왜 사람들이 아이스커피를 마시는지를 다시 한번 담뿍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젖은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훔치고서 슬슬 결론을 내놓았다.
“그래서… 밴드 멤버랑 또 그런 일 생기는 게 좀 무서워. 다시 그런 식으로 밴드 나오기도 싫고.”
말을 마친 재환은 슬쩍 한영의 눈치를 살폈다. 한영은 종전처럼 커피를 홀짝이지도, 쓰다고 인상을 쓰지도 않은 채 그저 큰 눈만 끔뻑였다. 흘긋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컵 표면을 감싸 쥔 기다란 손가락의 마디가 하얗게 튀어나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위잉 낡은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유독 요란했다. 언제부터 꽉 다물려 있었는지 모를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너 좋아하면, 너랑 밴드 못 하는 거야?”
한순간 목구멍 점막이 쩍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환의 컵에 남은 것은 작아진 얼음 알갱이 몇 개가 전부였다. 이 타이밍에서 대뜸 일어나 물을 떠 올 수도 없어, 미간을 좁힌 재환은 거푸 마른침만 삼켰다. 그 상태로 잠시 침묵을 지킨 후에야 머뭇머뭇 답을 꺼냈다. 괜한 부연까지 덧붙여서.
“그… 렇지. 아니, 네가 날 좋아한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건 말도 안 되고. 너 외로워서 그랬다며.”
틀린 말 하나 하지 않았음에도 재환은 입이 썼다. 꼭 상대를 비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나름 고심해서 세운 계획이 보기 좋게 어긋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더럽게 말주변이 없는 건지, 상대가 한영인 게 문제인 건지 이제 재환은 헷갈릴 지경이었다.
자책도 뭐도 아닌 복잡다단한 감정에 휩싸인 재환이 시선을 떨구고 쓰린 한숨을 내쉴 즈음, 부스럭부스럭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한영이 줄곧 옆에 끼고 있던 커다란 쇼핑백이 앉은뱅이책상 위로 올라와 있었다. 재환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한영을 보았다. 예상외로 한영의 표정은 덤덤했다.
“너 거야.”
한영이 재환 쪽으로 쓱 쇼핑백을 밀었다. 주춤거리던 재환은 가까워진 쇼핑백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장 먼저 잡히는 건 매끈한 비닐이었다. 제법 목직한 무게를 느끼며 밖으로 꺼내 보니 곱게 개여 비닐 커버 안에 들어가 있는 흰 셔츠와 검정 바지였다. 재환 본인의 옷이었다. 멍청하게 남의 집에 두고 와 하는 수 없이 버린 셈 쳤던 옷이기도 했다.
“하….”
세탁소에 맡기기라도 한 듯 빳빳하게 다려진 옷을 보며 재환은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이어서 다음 물건을 꺼낼 때는 아예 눈썹 끝이 푹 아래로 떨어졌다. 절레절레 고개까지 저어졌다. 한영과 함께 보았던 Embryo의 한정판 DVD였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그에게 받겠다 대답한 기억이 없었다. 아니, 결과적으로는 대답한 거였나. 잘 모르겠다.
“난 그거 많이 봐서….”
“그래.”
괜히 또 얘기가 길어지기 전 재환은 빠르게 대꾸했다. 이제 와 이 DVD를 가지니 안 가지니 한영과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걸로 사람을 꼬시려는 거냐 발끈할 마음 또한 들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물건을 모두 꺼낸 쇼핑백을 바닥으로 내리려는 때, 재환은 쇼핑백 안쪽에서 손가락 마디만 한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발견했다. USB 메모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챈 재환은 한 번 더 쇼핑백 안으로 손을 넣었다가 뺐다.
“이것도 내 거야?”
“응.”
“뭐 들었는데?”
“노래.”
손바닥에 올린 USB 메모리와 한영을 번갈아 쳐다보던 재환은 ‘노래?’ 하고 되물으며 더욱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거야 왜 이런 걸 내게 주냐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이것만큼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안에 든 것이 음악 파일이라고 하니 보다 궁금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제 이거 녹음하려고 합주했어.”
“아….”
재환의 궁금증은 생각보다 금방 풀렸다. 그러니까, 이 작은 USB 메모리 안에 담긴 건 한영과 그의 밴드의 노래였다. 그럼에도 아직 약간의 의문은 남아 있었다. 해서 ‘네 노래는 왜?’라고 물으려는 순간, 한영의 입에서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너 안 좋아해. 너 안 좋아하니까, 저 노래 듣고 나랑 밴드 했으면 좋겠어….”
아까부터 내도록 시끄럽게 울려 대던 냉장고 모터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좁은 공간 가득 적막이 깔렸다. 그제야 재환은 한영의 두 손이 여전히 컵을 꽉 쥐고 있다는 것도, 잘게 떨리는 컵 안에서 서로 부딪힌 얼음이 미세하게 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머지않아 그 작디작은 소리가 투둑투둑 창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빗소리에 감춰졌다. 역시나 오늘따라 유독 눅눅하게 느껴졌던 공기는 기분 탓이 아니었다. 한영에게 무어라 대답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선 재환은 창가로 걸어갔다. 그새 조금은 안으로 들이친 비가 먼지 낀 창틀에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한층 우중충한 빛깔로 물든 골목을 잠시간 눈에 담던 재환은 활짝 열려 있던 창을 드르륵 밀어 닫았다. 축축함을 품고 있던 빗소리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사이에도 한영에게 들려줄 대답을 찾지 못한 재환은 가능한 한 천천히 뒤를 돌았다. 동시에 주인도 없이 앉은뱅이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컵을 맞닥뜨렸다. 황급히 돌아간 시선이 어느 틈엔가 현관에 가 서 있는 한영에게 닿았다. 어, 야…! 외치며 재환은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갔다.
“가려고?”
“응.”
이미 한영은 신발까지 신은 상태였다. 당황한 재환은 정작 중요한 말 대신 어물어물 뒤늦은 인사를 내놓았다.
“그…, 옷 고맙다. DVD도.”
영 멋없는 말을 흘리던 재환은 불현듯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잠깐만 기다려, 하고서 멀뚱히 선 한영을 두고 방구석에 있는 옷장 앞으로 뛰어갔다. 옷장의 아래쪽 서랍을 열어 제일 위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옷 두 벌을 집어 들었다. 급한 김에 한영이 가져왔던 쇼핑백에 옷을 넣고서 다시 현관으로 걸음을 틀었다. 그래 봤자 몇 발짝이면 닿을 거리였다.
저 때문에 현관에 발목이 묶인 한영에게 쓱 쇼핑백을 내밀었다. 고개 숙여 쇼핑백에 담긴 분홍색과 보라색을 일별한 한영의 눈이 살짝 커다래졌다.
“이거….”
“깜빡 잊을 뻔했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 담긴 쇼핑백을 쥔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고마워, 하고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재환이 멋쩍은 듯 뒷목을 긁적였다.
“일단 빨아 두긴 했어. 아, 세탁소에 맡긴 건 아니고.”
“응, 괜찮아. 그럼…, 나 갈게.”
“아, 응. 그래.”
자물쇠를 바꾸기는 했지만 여전히 열려면 조금 요령이 필요한 문손잡이로 재환은 한영 대신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스치듯 부딪치며 한영이 주춤 현관 벽으로 물러섰다. 동시에 신발 뒤축이 재환이 벗어 둔 슬리퍼 위를 꾹 밟았다. 그러나 한영에게는 더 이상 피할 구석이 없었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진해진 상대방의 체취가 흡, 숨을 들이켜게 했다.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몇 번 문소리를 잡고 흔든 재환이 활짝 문을 열고 한영이 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겨우 호흡이 자유로워진 한영은 최대한 벽에 붙어 문밖으로 발을 디뎠다. ‘잘 가라.’ 인사하는 재환에게 ‘응.’ 대답하며 복도로 발을 떼려다 휙, 뒤를 돌았다.
“재환아.”
문고리를 안쪽으로 잡아당기던 재환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문틈 사이로 어둑어둑한 복도를 등지고 서 있는 한영과 시선이 잇닿았다. 쿵쾅쿵쾅, 왜인지 모르게 심장 소리가 거세졌다. 한영의 붉은 입술이 다시금 열리기까지의 시간이 재환은 이상하리만치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 너 진짜 안 좋아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뒤돌아선 한영의 분홍색 뒤통수가 복도를 따라 멀어져 갔다. 얼마 안 가 쿵쿵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벙한 얼굴로 눈만 끔뻑이던 재환은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다음에야 천천히 문고리를 마저 당겼다. 쿵 닫힌 철문에 뒤를 돌아 등을 기대는 순간 허, 하고 헛숨이 터졌다.
뭐야 이게.
아까도 두어 번 들었다만, 태어나서 이런 이상한 고백은 처음이었다. 아니, 이게 고백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반대로 상대에게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럼에도 기분이 영 이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안 좋았다. 따라서 재환은 인정해야만 했다. 같은 사내놈한테서 듣는 ‘안 좋아한다’라는 말이 생각보다 훨씬 더 별로라는 것을.
머리를 한 번 거칠게 헝클어뜨린 재환은 차가운 현관 타일에서 발을 떼 습기를 먹어 끈적끈적해진 장판 위로 올라섰다. 형광등을 켜 놓은 게 무색하게 그새 실내는 더욱 어두워진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예 밤이 된 것처럼 창밖이 온통 시꺼멨다. 지면을 때리는 빗소리도 한층 요란해졌다. 오늘 비 온다는 얘기가 있었던가, 하고 일기예보를 더듬던 재환의 얼굴이 한순간 왈칵 일그러졌다.
다시 뒤돌아 황급히 슬리퍼 안으로 두 발을 쑤셔 넣은 재환은 현관 구석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장우산 두 개를 낚아채듯 집어 올렸다. 문고리를 힘껏 돌려 문을 열어젖힌 뒤, 도로 잠글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득달같이 복도로 달려 나갔다.
쿵쿵쿵 시끄러운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던 중 슬리퍼 하나가 벗겨져 데굴데굴 저 아래 계단참으로 굴러떨어졌다. 씹, 짜증스럽게 욕을 짓씹은 재환은 주저 없이 맨발로 남은 계단을 디뎠다. 뒤집어져 있는 슬리퍼로 발을 밀어 넣은 후 다음 계단을 한 번에 두세 개씩 밟았다. 다행히 또 슬리퍼가 벗겨지지는 않았다.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떼 서둘러 건물 입구로 방향을 튼 재환의 걸음이 별안간 우뚝 멎었다. 허무함과 안도감이 반절씩 섞인 한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얼룩인지 무늬인지 모를 모양들이 점점이 새겨진 회색 바닥을 밟아, 몇 시간 전 처음 봤을 때처럼 입구 턱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남자의 등 뒤로 다가갔다.
“유한영.”
무릎에 두 손을 얹은 채 코앞에서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던 한영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한 짝이 찢어진 슬리퍼를 신고 있는 발에 닿은 시선이 점점 위를 향했다. 곧이어 방금까지 빗줄기 위로 덧그리던 얼굴을 발견한 한영의 표정이 멍멍하게 풀어졌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던 재환은 한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살포시 눈머리를 찌푸렸다. 종전 인사할 때와는 설핏 다른 빛을 띤 눈가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를 못 본 척, 그냥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손길의 의미를 이해 못 한 듯 한영은 기다란 속눈썹을 내렸다 올리며 눈만 깜빡였다. 재환은 밑으로 뻗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안 일어날 거야?”
“아…, 응.”
우물쭈물 맞잡아 오는 손을 힘주어 쥐어 그대로 쭉 당겨 올렸다. 끌려오듯 일어선 한영의 눈높이가 순식간에 쑥 위로 올라갔다. 웅크리고 있을 때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역시나 상당히 큰 키였다. 후덥지근한 바깥 공기에 비해 제법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손에서 손을 빼낸 재환은 그 자리에 우산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쓰고 가.”
습기로 인해 보다 구불구불해진 분홍 머리칼 아래서 갈색 눈이 이리저리로 굴러갔다. 무슨 생각으로 한영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지금은 알 것도 같아, 재환은 무심코 상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기 충분한 대사를 덧붙이고 말았다.
“다음에 줘, 다음에.”
그 다음이 언제냐고 차마 묻지 못한 한영의 두 손이 우산 손잡이를 꼭 쥐었다. 매끈한 플라스틱 표면에 미세하게 우산 주인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가. 난 담배 하나 피우고 올라갈 거니까.”
“응.”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한 한영은 느릿느릿 몸을 틀었다. 건물 바깥쪽, 쉴 새 없이 비 떨어지는 곳을 향해 우산을 쫙 펼쳤다. 반원을 그린 우산 표면에 부딪힌 빗방울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 서둘러 우산을 머리 위로 세운 한영은 빗속으로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막 다음 걸음을 떼기 전, 도로 뒤를 돌았다.
시야를 가르는 빗줄기 너머, 바지 주머니에 쿡 한 손을 찔러 넣은 재환이 어서 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이로써 좋아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한영은 못내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머뭇머뭇 거두었다. 그새 비에 젖은 신발이 지난 한 달간 몇 번이나 밟았던 길을 다시금 밟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빗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알록달록한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건물 입구에 선 재환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후, 숨을 내뱉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부연 연기가 축 아래로 가라앉았다. 지금 내리는 건 늦은 봄비건만, 꼭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넋 놓은 채 몇 번 필터를 빨아올리는 사이 담배는 빨리도 타들어 갔다. 맞은편 있는 가로등 아래로 훌쩍훌쩍 뛰어간 재환은 빗물 고인 사각 깡통에 꽁초를 버리고서 다시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귀찮은 마음에 우산은 펼치지 않았는데, 그 덕에 머리고 어깨고 제법 축축하게 젖었다. 걸음을 옮겨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마다 덩달아 젖은 슬리퍼가 철퍽철퍽 물 먹은 소리를 냈다.
벙싯하게 열려 있던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비 오는 날 유달리 심해지는 꿉꿉한 냄새가 예외 없이 훅 끼쳐 왔다. 하지만 느껴지는 냄새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남긴 달큼한 향이 미미하게나마 함께 재환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흔적 한번 확실하게 남기네, 생각하며 재환은 우선 화장실로 가 빗물에 젖은 발부터 씻고 나왔다.
한영이 남긴 흔적은 향기 말고 더 있었다. 안 그래도 그렇게 쓰다고 투덜거리더니, 그가 마시던 컵에는 커피가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물론 얼음이 녹아 양이 더 불어난 감이 없잖을 터였다. 그대로 커피를 싱크대에 부어 버리려다, 역시나 조금 아까운 것 같아 재환은 주저 없이 남은 커피를 훅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묽어질 대로 묽어진 커피에서는 맹물에 가까운 맛이 났다. 문득 이것도 쓰다고 하려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재환은 조금 엷게 웃었다.
한영이 가져다준 옷은 비닐 커버 그대로 옷장 안에 걸고, DVD는 언제라도 꺼내 볼 수 있도록 책장 가장 중앙에 꽂아 넣었다. 만사 제치고 지난번 어쩔 수 없이 보다 만 부분부터 다시 보고픈 마음이 그득했으나,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의외로 평범하게 흰색인 USB 메모리를 노트북에 꽂은 재환은 폴더가 읽히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노트북 화면 위로 덜렁 파일 하나가 든 폴더가 떠올랐다.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을 클릭하려는데, 그냥 넘길 수 없는 파일명이 재환의 손가락을 멈칫하게 했다.
[I Need You.mp3]
와, 유한영…. 그대로 마우스에서 손을 떨어뜨린 재환은 의자 등받이 너머로 휙 머리를 젖혔다. 입 밖으로 웃음도 한숨도 아닌 애매한 소리가 잇달아 새어 나왔다. 여전히 창밖에서는 축축한 빗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누렇게 색이 바랜 천장 위로 비를 보며 쪼그려 앉아 있던 한영의 얼굴이 그려졌다. 눈가가 온통 발긋발긋하게 물들어, 당장이라도 커다란 눈망울 아래로 툭 눈물을 떨굴 것 같았던 유한영의 얼굴이.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래. 밴드 하자, 해.’라는 말이 튀어 나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옆집에서 또 벽을 치든 말든 재환은 책상 양옆으로 자리한 모니터 스피커의 볼륨을 제법 키웠다. 이번에야말로 보다 한숨에 가까운 소리를 길게 뱉고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붙였는지 모를, 혹은 너무도 속이 빤히 보이는 이름의 파일을 짧게 두 번 클릭했다. 뒤이어 핸드폰으로 바로 녹음한 듯 잡음 섞인 룸 톤과 함께 예의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I need you’를 속삭이는.
그리고 약 4분 20초가량의 노래가 전부 끝날 때까지, 재환은 정확히 아흔아홉 번의 ‘I need you’를 더 귀에 담아야 했다.
그리하여 모두 백 번의 ‘I need you’가 반복되던 스피커에서 더는 나오는 소리가 없었다. 책상 위로 고개를 숙인 재환은 주먹 쥔 손으로 한쪽 관자놀이를 받친 채 하…, 하고 긴 숨을 흘렸다.
결론적으로 노래는 좋았다. 마치 잔잔하게 내리는 비처럼 고막 안으로, 마음속으로 스르륵 스며드는 노래였다. 이쯤 되니 재환은 자신이 이미 객관성을 잃은 건가 싶기도 했다.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다시 재생 버튼이 눌러지지가 않았다. 처음 한영의 노래를 들었을 때는 마냥 감탄하여 듣고 또 들었었는데 말이다. 그저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어떡하라고, 진짜….
이 좋은 노래를 다시 듣지도, 아예 노트북을 끄지도 못하는 사이 어느덧 빗소리까지 잠잠해진 사위가 온통 고요했다. 고개만 돌려 창 쪽을 내다본 재환은 책상 끄트머리를 두 손으로 짚어 의자를 쭉 뒤로 뺐다. 마치 스트레칭 하듯 몸이 접힌 자세로 조금 더 버티다가,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푹 떨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글동글 물기가 맺힌 창문을 옆으로 활짝 열었다. 언제 그리 퍼부었냐는 양 빗줄기는 흔적만 남긴 채 먹구름과 함께 사라진 후였다. 대신 그럭저럭 밝은 햇빛이 축축하게 젖은 골목을 꽤나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덕분에 길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는 더욱 지저분하게, 맞은편 담벼락에 난 금은 더욱 흉물스럽게 비쳤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비 온 뒤면 늘 마주했던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는 지금의 풍경이 재환의 가슴에 아주 조금, 상쾌한 바람을 불러들였다. 간지러울 정도로 미약한 바람이었으나 속을 복잡하게 하던 고민 몇 개쯤을 쓸어 가기에는 충분했다.
창틀 위쪽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똑, 똑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중 한 방울이 재환의 코끝을 적셨다. 엄지손가락 마디로 코를 한 번 문지른 재환은 다시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핸드폰 화면을 켜 액정을 톡톡 두드린 뒤 스피커를 귀로 가져다 댔다.
“어, 윤호야. 응. 밴드 하자는 거 생각해 봤는데, 못 할 것 같다. 미안해. 아니, 그건 아니고….”
말꼬리를 흐린 재환은 잠시 뒷말을 고민하다 입을 뗐다. 여전히 친구에게 거절의 말을 꺼내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망설임은 없었다.
“다른 밴드, 하게 됐어.”
* * *
쏟아지는 햇살이 눈 부셨다. 매끈하게 닦인 길바닥에는 쓰레기는커녕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 없었다. 집 앞마다 높다랗게 솟은 담벼락은 막 어제 세운 것처럼 깨끗했다. 그 위로 길게 드리운 나뭇가지가 바람결에 살랑거릴 때마다 초록으로 뒤덮인 이파리들이 함께 흔들리며 청신한 내음을 풍겼다. 걸어서도 충분히 올 수 있을 만큼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이토록 한영의 동네는 재환이 사는 곳과 참 많은 것이 달랐다.
기분 탓인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도 유난히 파랬다. 심지어 해를 가려 줄 구름조차 없어,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재환은 눈이 부셔 자꾸 눈을 찡그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정수리로 직사하는 햇빛이 마냥 덥거나 성가시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커다란 기타 가방에 뒤덮인 등 위로는 벌써 땀이 차올랐으나, 내딛는 발걸음이 제법 가벼웠다.
키를 훌쩍 넘는 대문 앞에 멈춰 선 재환은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핸드폰을 꺼냈다. 주위가 너무 밝아 자꾸 제 얼굴만 비치는 화면 옆을 손바닥으로 가리고서 메시지 창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확인한 숫자를 입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꼼꼼히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얼마 안 가 철컹, 금속성이 마찰하며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살짝 문을 뒤로 밀자 육중한 철문은 끼익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밀려났다.
마치 온 적 없는 곳을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재환은 조심스럽게 대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돌길을 걸어 건물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시 밟을 리 없다 여겼던 길을 밟아서 그런 건지, 오랜만의 합주에 긴장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금쯤 입 안도 말라 오는 것 같았다.
건물 좌측, 지하로 향하는 계단과 바로 연결된 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한 번 더 누르고서야 재환은 비로소 실내로 들어섰다. 갑자기 쨍한 햇살에서 벗어난 시야가 비교적 어두운 내부에 적응하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간이 현관에 신발을 벗어 둔 재환은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이윽고 두꺼운 방음문 앞에 선 재환의 손이 쉬이 문을 열지 못하고 한동안 머뭇거렸다. 방음문의 불투명 유리에 비치는 분홍색이 괜히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저어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민망하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으며,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문득 두 눈가가 새빨갛게 물든 얼굴이 떠올랐다가, ‘나 너 안 좋아해’라는 한마디가 귓전을 울렸다.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I need you’가 웅웅 머릿속을 맴돌기도 했다.
불이 부풀 정도로 후-, 크게 숨을 내뱉은 재환은 일반 문고리보다 돌리는 데 배는 힘이 필요한 방음문 손잡이를 힘껏 아래로 내려 문을 당겼다. 뒤이어 한 달 만에 마주하는 합주실 안으로 들어서자, 방음문 밖으로는 미처 새어 나오지 않았던 건반 연주 소리가 뚝 멎었다. 키보드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한영과 시선이 맞물렸다.
“아…, 와 있었네.”
아직 합주실에 와 있는 사람이 한영뿐임은 문을 열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사말이 없어 재환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퍽 멋없는 말을 뱉었다. 그렇다고 ‘안녕!’ 반갑게 인사하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안녕.”
라고 생각했던 게 금세 무안해졌다. 여상한 투로 인사하는 한영을 향해 재환도 ‘어, 안녕….’ 하며 다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하나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다시 고개를 숙인 한영은 기다란 손가락을 건반 좌우로 미끄러뜨리며 연주를 이어 갔다. 클래식 곡인 것 같긴 한데, 재환은 처음 들어 보는 곡이었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멜로디가 익숙한 감이 있었다.
잠시 뒤, 앰프 옆에 앉아 기타와 페달 보드를 꺼낼 즈음에서야 재환은 한영이 연주하는 음악이 슈베르트의 〈송어〉임을 깨달았다. 한데 어쩐지 재환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느리고, 또 구슬펐다. 〈송어〉가 저렇게 슬픈 노래던가. 그저 연주에 심취해 있는 한영을 보며 재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과는 딱히 더 얘기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한영에게서 시선을 거둔 재환은 앰프와 페달 보드, 그리고 기타에 차례로 케이블을 연결했다. 기타 헤드에 튜너를 끼우고 찬찬히 음을 맞추던 중, 한영에게 인사차 꺼내지 못한 한마디가 뒤늦게 떠올랐다.
그날, 잘 들어갔냐.
다시 밴드를 하겠다는 연락도, 합주 시간을 잡는 연락도 모조리 태군과 주고받았으므로 그날 이후 재환은 딱히 한영과 얘기를 할 일이 없었다. 우습지만 아직 연락처를 모르기도 했거니와, 알았어도 그에게 직접 ‘그래, 밴드 하자’라는 말을 들려줄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물론 예외 없이 한 바가지로 퍼부어지는 태군의 욕 메시지를 보며 차라리 지우에게 연락할 걸 그랬나, 싶은 마음이 잠깐 들기는 했다. 그래 봤자 재환은 태군 앞에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기에 나름 끝까지 저자세를 유지했다. 어쨌거나 밴드 일로 이랬다저랬다 하여 태군의 속을 태운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적어도 같은 이유로 친구의 신의를 잃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한영에게 ‘그날 잘 들어갔냐’, 혹은 ‘DVD 잘 봤어’ 따위의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때 벌컥 합주실 문이 열렸다. 번쩍, 매끈한 머리통이 내뿜는 반사 빛과 함께 우렁찬 목소리가 터졌다.
“야이, 씨발! 서재환 너 이 새끼!”
드럼스틱 케이스를 흔들며 냅다 달려든 태군에게 어찌할 틈도 없이 헤드록이 걸려 버렸다. 그 와중 본능적으로 기타를 사수해 낸 재환의 얼굴이 단숨에 시뻘건 색으로 달아올랐다. 누가 드럼을 때려 부수던 놈 아니랄까 봐 목을 조르는 힘이 상당했다. 설상가상 두 팔로 기타를 끌어안고 있는 바람에 거머리처럼 등 뒤에 철떡 들러붙은 이 민머리를 떨어뜨릴 수도 없었다. 연신 컥컥 기침이 터졌다.
“야, 미친…. 장태군…!”
“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아주, 어? 탈모가 올 뻔했어요!”
그때였다. 푸흡! 하고 웃음소리가 터진 곳으로 태군과 재환의 눈알이 동시에 굴러갔다. 주먹으로 입을 가린 한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눈은 잔뜩 휘고, 얼굴도 발그레 물든 것이 영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한영의 모습에 재환은 물론이고 태군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씨발, 오늘은 해가 동쪽에서 떴냐?”
스르르 팔에 힘을 푼 태군이 내뱉은 말을 미처 정정해 주지도 못한 채, 재환은 크게 뜬 눈만 끔뻑거렸다. 괴롭게 토하던 기침이 어느새 뚝 멎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들썩이는 어깨를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칼 때문인지, 한영 주위로 꼭 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황당한 착각이 일었다. 머지않아 재환의 착각은 귀청을 찢는 비명과 함께 지지러졌다.
“아악-!”
오만상을 쓰며 뒤를 돌자 두 손으로 귀를 감싼 태군이 펄쩍펄쩍 제자리에서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 뒤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담긴 아이스커피를 양손에 들고 달그락달그락 흔들고 있는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보아하니 불시에 태군의 귀를 공격한 것은 저 차가운 커피인 듯싶었다.
“와씨, 겁나 차가워! 야, 현지우! 존나 애 떨어질 뻔!”
“네가 애가 있었어? 누구랑 만들었는데?”
느물느물 웃은 지우가 더 미쳐 날뛰는 태군 너머로 쭉 긴 팔을 뻗어 재환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아, 고마워.’ 하며 받아 들고 보니 컵 위에 새겨진 시계 모양의 로고가 낯익었다. 재환이 일하고 있는 카페 A’Clock의 로고였다.
“어, 여기 나 일하는 데야.”
“아, 진짜? 오늘 지나가다 처음 들어가 봤는데. 분위기 좋더라?”
여전히 씨근덕거리는 태군의 손에도 커피 하나를 쥐여 준 지우는 한영에게 다가가 하나만 색이 다른 컵을 건넸다. 아이스코코아인 것 같았다. 오전에 재환도 몇 번이나 만들었던 음료이므로 거의 확실했다. 아무래도 한영이 커피를 못 마시는 건 주위에서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하긴, 물 잔뜩 탄 아이스커피도 쓰다며 코를 찡그리던 녀석이었으니.
또 그때 생각이 난 재환은 쪼옥, 빨대로 코코아를 빨아올리는 한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비적비적 드럼 뒤로 가 앉던 태군이 ‘넌 오늘 웃지 마, 새꺄!’ 하고 재환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다. 그러다 ‘그래서 애 아빠가 누구냐니까?’라고 재차 묻는 지우 때문에 다시 일어서서는 개새끼니 소새끼니 하고 펄펄 뛰었다.
싫지만은 않은 소란 속, 재환은 며칠 전 비 온 뒤 불었던 상쾌한 바람이 다시금 가슴께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여지없이 첫 합주는 〈I See You〉로 시작되었다. 노래하기 전 한영이 내쉰 긴 한숨 때문에 이번에도 살짝 당황하기는 했으나, 재환은 그럭저럭 큰 실수 없이 연주를 마무리했다. 요 며칠간 다시 죽어라 연습한 덕이었다. 무엇보다 조금 불안한 감이 있던 후반부의 연속 스트로크를 제법 괜찮게 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두 번째 곡은 〈I Love You〉였다. 〈I Love You〉는 다른 곡들에 비해 비교적 템포가 빠른 편이라 합주 중 너 나 할 것 없이 잔뜩 신이 났다. 온몸을 흔들며 드럼을 때리던 태군은 당연히 연주가 끝나자마자 ‘더워!’ 하는 포효와 함께 에어컨 밑으로 달려갔고, 그 바람에 합주는 잠시 중단되었다. 물론 재환에게도 잠깐이나마 등을 덮은 땀을 식힐 수 있는 기회였다.
세 번째로 합주한 곡은 〈I Miss You〉였다. 유일하게 재환의 기타 솔로가 들어가는 곡이기도 했다. 최근 다시 연습하며 한영의 연주에 맞춰 솔로 플레이를 조금 바꾸어 보았는데, 따라서 솔로를 연주하는 사이 재환의 시선은 몇 번이나 맞은편에서 건반을 누르고 있는 한영을 향했다. 그의 연주에 보다 녹아들고픈 마음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단, 어째서인지 한영은 재환에게 눈 한 번 맞춰 오지 않았다. 줄곧 이쪽을 빤히 쳐다보며 노래하던 지난 합주를 생각하면 조금 이상했으나, 오늘따라 더 집중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재환은 생각했다.
그렇게 세 곡의 합주가 모두 끝났을 무렵.
“어떡할까? 한 번씩 더?”
습관처럼 노브를 놀려 베이스 볼륨을 줄인 지우가 나머지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메탈 밴드인 ‘Sucker’의 티셔츠를 입은 태군이 옷 앞섶을 펄럭거리며 투덜거렸다.
“야, 좀. 쉬엄쉬엄하자!”
매끈한 정수리까지 땀범벅이 된 태군을 보면 이해 못 할 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곡 하나 끝날 때마다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 켜진 페달들을 꾹꾹 밟아 끈 재환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거 해 보면 어때?”
“엥, 뭐?”
“니네 지난번에 합주한 노래. ‘I Need You’. 좀 연습해 왔는데.”
재환이 그 노래를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합주까지 준비했다는 말에 더 놀란 태군의 눈이 동그래졌다. 굳이 이 자리에서 〈I Need You〉를 듣게 된 자세한 경위를 설명할 마음이 없던 재환은 다른 두 사람에게도 ‘어때?’ 하며 뜻을 물었다.
“나야 좋지. 신곡이기도 하고.”
시원스레 답하는 지우와 달리 한영은 선뜻 답을 내놓지 않았다.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또 그렇다고 반기는 눈치도 아니었다. 영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이었다. 뭐, 언제는 저런 표정이 아닌 적이 있었느냐마는. 아, 있기는 했다. 지난번엔 외로워서 그랬다는 이상한 변명을 흘릴 때, 쓴 커피를 마셨을 때, 혼자 건물 입구에 쪼그려 앉아 내리는 비를 보고 있었을 때….
지금 떠올려 봤자 별 좋을 것 없는 기억들을 서둘러 머릿속에서 거둬 내며, 재환은 인내심 있게 한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몇 번 눈알을 굴린 한영의 입에서 좋아, 싫어 그 어느 쪽도 아닌 조금 애매한 말이 나왔다.
“해도 돼?”
“어?”
한영이 당최 뭘 물어보는 건가 싶어 재환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온전히 의아함에서 기인한 반응이었으나, 보는 이에 따라서는 짜증으로 비치기 충분한 표정이었다. 구불구불한 분홍색 머리칼이 흔들릴 정도로 한영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하자. 할래.”
“아…, 응.”
한영을 완벽히 이해하는 게 어려운 일임을 인제 잘 아는 재환은 떨떠름히 답하며 발밑에 놓인 페달 보드 위로 허리를 숙였다. 연습 때의 기억을 더듬어 페달에 달린 노브 이것저것을 조절한 뒤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이건 템포….”
“79. 맞을 거야.”
묻기도 전 대답하는 재환을 한 번 대놓고 부라려 준 태군은 핸드폰에 연결된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았다. 메트로놈 앱의 숫자를 ‘79’로 맞추고서 스틱을 높이 치켜들었다.
“자, 간다!”
딱, 딱, 딱, 딱.
네 번의 카운트 후, 재환이 내심 끝까지 연습할까 말까 고민했던 곡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사실 재환 본인이 먼저 이 곡의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단순했다. 역시나 그냥 넘기기에는, 노래가 너무 좋았다.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중에는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기타를 치며 연주까지 얹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니 오늘 멤버들에게 합주를 하자고 제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I nee you’라는 노랫말이 딱 백 번 반복되는 동안, 단 한시도 한영의 시선은 기타 연주에 집중한 재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지하 합주실로 향하는 문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쨍하게 정수리로 쏟아지던 햇빛이 1층 거실에 붉은빛을 늘어뜨렸다. 약 한 달 전, 이곳에서 환영회가 열렸던 때와 풍경은 엇비슷했지만 탁자 위 놓인 것이 조금 달랐다. 한자로 어쩌고 반점이 적힌 그릇 수 개가 피자, 치킨 따위가 있었던 자리를 대신했다. 단, 판이 벌어진 지 한참 후라 그릇들 위에는 음식이 담겼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으아, 배 터져 죽겠네.”
그다지 나오지도 않은 배를 팡팡 두드리며 태군이 소파 위로 늘어졌다. 합주 후 허기가 진 속을 짜장면, 탕수육, 깐풍기로 허겁지겁 채운 재환도 과하게 배가 불러 오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른 멤버들과 달리 아직 중요한 할 일이 남아 있었으므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탁자부터 좀 깨끗하게 치울 필요가 있었다.
‘엥, 벌써 치우게?’라며 눈을 크게 뜨는 태군에게 ‘어. 내가 할게.’라고 대꾸한 재환은 서둘러 빈 그릇들을 부엌 싱크대로 옮겼다. 내친김에 그 앞에 서서 꽃무늬 앞치마까지 두르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이거 설거지 안 해도 되는데….”
남은 그릇을 들고 재환을 따라 부엌으로 온 한영이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먹은 중국집 그릇은 그대로 문밖에 두면 알아서 가져가는 게 보통이었다. 굳이 씻어서 내놓을 필요가 없었다.
“찜찜하잖아.”
반대로 깨끗이 닦은 그릇을 내놓는 데에 익숙한 재환은 기름기 가득한 그릇들 위로 부지런히 세제 묻힌 수세미를 문질렀다. 들고 있던 그릇을 그 옆 조리대에 놔둔 한영은 말없이 식탁으로 가 앉았다. 두 팔을 포개 엎드려 잠깐 재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슬그머니 일어섰다. 이어서 작게 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부엌 밖으로 발을 뗐다. 슬리퍼 밑창이 바닥을 밟는 소리가 유독 컸으나, 설거지에 여념이 없는 재환에게는 미처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단무지가 담겼던 일회용 용기까지 물에 깨끗이 씻어 헹구는 것을 끝으로 설거지가 마무리되었다. 내처 그릇에 남은 물기를 모두 닦아 비닐봉지에 모아 담은 재환은 이를 대문 앞에 갖다 두었다. 다시 들어오는 길에는 정원 구석에서 시원하게 합주 후 겸 식후 담배도 한 대 피웠다.
다 피운 꽁초를 정원 바닥에 놓인 깡통에 떨군 재환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사방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빛이 어느덧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위로 푸르스름한 밤이 몰려오는 것을 아는 듯, 때마침 정원 군데군데에 자리한 조명들이 차례로 반짝 불빛을 틔웠다. 대단히 낭만적이지는 않았으나, 평소 이 시간쯤 눈에 담던 집 앞 골목길의 모습을 떠올리면 충분히 예쁘다는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이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풍경이기도 했다.
현관으로 들어선 재환은 신발을 벗자마자 복도에 세워 두었던 기타 가방 앞으로 갔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집에서부터 넣어 온 종이 뭉치를 꺼내 제법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거실로 향했다.
“야, 씨! 너 이 사기꾼 새끼!”
“사기가 아니라 실력이지, 태군아-.”
스탠드 불만 켜 놓은 거실이 커다란 티브이 화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현란한 불빛으로 온통 번쩍번쩍했다. 소파에 앉아 그 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태군과 지우가 손에 쥔 게임 컨트롤러를 조작할 때마다 스피커에서는 끼익, 거리는 요란한 타이어 마찰음이 터졌다. 여기에 거친 엔진음과 응원하는 사람들의 함성까지 더해져 소리만 들으면 실제 F1 경기가 따로 없었다. 다만 여유가 넘치는 지우와 달리 태군은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쉴 새 없이 이씨, 야씨, 아이씨 등 시끄러운 소리를 뱉는 게 손으로 게임을 하는 건지 입으로 게임을 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픽, 웃은 재환은 1인용 소파로 가 앉았다. 푹신한 등받이에 편히 등을 기댄 재환의 시선이 자연스레 맞은편 소파에 앉은 한영을 향했다. 소파 위에 두 다리를 올려 끌어안은 한영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게임을 관람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달리던 차끼리 부딪쳐 쿵, 하는 소리가 터지면 저도 덩달아 어깨를 움칠거리고, 그러다 아예 차 하나가 뒤집혔을 때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폭 눈썹을 찌푸렸다. 그 와중에도 옆에서 태군의 숨넘어가는 추임새는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광경이 재환은 너무도 낯설었다. 과거 하던 밴드도 문제의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사이가 좋은 편이었으나, 이렇게 합주 외 다른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은 드물었다. 합주가 끝나면 각자 집으로, 학교로, 아르바이트 장소로 돌아가기 바빴다. 아마 그중엔 데이트로 바쁜 사람도 있었을 터다.
그런데 이 밴드는 달랐다. 저렇게 함께 앉아 게임을 하는 모습이, 그 게임을 구경하는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한영과 지우 두 사람은 원래부터 친구였다고 하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태군 또한 조금의 위화감 없이 저들 사이에 녹아들어 있었다. 저만 무시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했지만, 아무리 봐도 친구의 귀여운 투정인 것 같았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이런 밴드의 멤버가 되어서 재환은 좋았다. 좋은데 또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 음울한 마음이 들었다. 저 알록달록한 녀석들 사이에서 자신 혼자만 참 시커먼 것 같아서. 물론 입은 옷을 뜻함은 아니었다. 그냥 가끔, 어디에 속하든 재환은 이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카페에서 늘 발랄하게 웃는 희연을 보며, 그 옆에서 덩달아 신이 난 상지를 보며, 손님들을 보며, 그리고 지금…. 기타 가방에서 꺼내 온 종이를 쥐고 있던 재환의 손에 저도 모르게 슬며시 힘이 들어갔다.
얼마 안 가 게임은 태군의 괴성과 함께 끝이 났다. 보는 입장에서는 그다지 아슬아슬한 게임도 아니었건만, 어지간히도 분했던지 태군은 있지도 않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있는 대로 지우를 흘겼다. 이를 가뿐히 무시한 지우가 재환을 보며 ‘너도 한 판?’ 물었다. ‘아니.’ 하고 대답한 재환은 살짝 꾸깃꾸깃해진 종이를 허벅지 위에서 판판히 펼쳐 탁자에 내려놓았다. 비루한 음울함을 뒤로하고, 이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였다. 재환이 내놓은 흰색 A4 용지 위에는 커다란 글씨로 〈서유장현 밴드 기획안〉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헐, 이게 뭐임?”
언제 지우에게 분통을 터뜨렸냐는 양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태군이 스테이플러로 귀퉁이를 집은 종이를 냉큼 갖고 갔다. 아래에는 같은 내용이 적힌 종이 뭉치가 몇 개 더 있었다. 탁자로 팔을 뻗은 지우와 한영도 차례로 종이를 가져가고, 그사이 훤히 거실 불을 켜고 온 재환이 소파에 앉아 마지막 남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별 건 아니고, 앞으로 니네 밴드에 필요할 것 같은 걸 좀 적어 봤는데.”
“우리 밴드.”
제법 단호한 투로 한영이 재환의 말을 딱 잘랐다. 잠시 벙한 표정을 지었던 재환은 아아, 하고서 ‘우리 밴드에 필요한 거.’라고 말을 정정했다.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한 번 문지른 뒤 이야기를 이었다.
“가능하면 활동 계획도 좀 제대로 세워 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태군과 지우, 그리고 한영의 손이 거의 동시에 표지를 뒤로 넘겼다. 재환 역시 표지를 넘겨 첫 페이지에 제가 적어 두었던 내용을 재바르게 눈으로 훑었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밴드 이름을 정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다시 입을 떼려는데.
“크! 역시 내 친구!”
난데없이 벌떡 일어선 태군이 자못 근엄한 표정을 짓고서는 고개를 저으며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러더니 ‘니네 봤지? 우리 째환이 클래스?’라며 지우와 한영에게 한껏 거들먹거렸다. 나름의 칭찬인 것 같다마는, 몰려드는 창피함과 민망함에 재환은 서둘러 친구의 옷자락을 쥐어 아래로 잡아끌었다.
“장태군. 앉아라, 좀.”
마지못해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면서도 태군은 재환을 더 민망하게 만들기 충분한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있지도 않은 사실까지 덧붙여서.
“우리 째환이가 말야, 학교 다닐 때 공부도 겁나 잘했어요! 막 전교 부회장도 하고…. 아, 아니다. 부회장이랑 사귄 거였든가? 암튼! 짱이지?”
“그러네, 진짜.”
페이지를 몇 장 더 뒤로 넘겨 보며 지우가 혼잣말하듯 태군의 친구 자랑에 답했다. 다만 한영은 또 예의 빤한 눈빛으로 재환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래저래 불편함이 쌓인 재환은 또 ‘우리 째환이’로 말을 시작하려는 태군을 급히 막아섰다.
“야, 나 말 좀 하자.”
“아, 응! 하십쇼!”
그러자 태군은 즉각 고개 숙여 두 손으로 무언가를 받드는 시늉을 했다. 얄미운 친구를 한 번 흘겨 준 재환은 덕분에 한참 늦어진 본론을 꺼냈다.
“일단, 밴드 이름부터….”
하지만 이번에는 태군 옆에 있던 지우가 훌쩍 소파에서 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재차 말이 끊기고 말았다. 당연히 태군과 같은 이유는 아니겠으나, 적잖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재환의 표정에서 이를 충분히 짐작한 듯 쓱 입꼬리를 당겨 올린 지우가 시원스레 말을 던졌다.
“이럴 때는 맥주가 있어야지. 야, 유한영. 따라와. 편의점 가자.”
아, 응. 하며 덩달아 한영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붙잡을 새도 없이 위로 삐쭉 솟은 두 사람의 뒷모습이 금세 거실 밖으로 사라졌다.
“저 새끼들은 뭘 먹고 저렇게 크냐?”
재환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태군이 부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타박을 날렸다. 그것도 잠시, 종전까지 지우가 앉아 있던 자리로 잽싸게 엉덩이를 옮기고서는 제가 앉았던 자리를 탁탁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재환보고 빨리 여기 와서 앉으라는 신호였다.
“왜?”
“왜긴. 우린 겜이나 한 판 하고 있자!”
갑자기 할 일이 사라져 버린 재환은 엉겁결에 태군 옆에 앉아 컨트롤러를 받아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잡아 보는 컨트롤러였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거, 두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는 것도 썩 나쁜 생각은 아닐 것 같았다.
태군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몇 번 휙휙 돌아가던 티브이 화면이 미끈한 스포츠카를 순서대로 보여 주었다. 태군은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영화에 나왔던 것과 비슷한 노란색 차를, 재환은 습관처럼 검은색 차를 선택했다. 뒤이어 기름칠한 듯한 영어 발음의 카운트다운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재환은 소소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아까 지우가 게임을 잘한 것도 분명 있었겠지만, 아무리 봐도 태군이 그냥 이 게임과 잘 맞지 않는 듯했다. 좋게 말해 그렇다는 거지, 못 해도 너무 못 했다. 갑자기 왁 소리를 지르며 멀쩡한 벽에 차를 갖다 박질 않나, 그러다 난데없이 역주행을 하질 않나. 하니 재환은 별 수고도 들이지 않고 태군보다 한참이나 앞서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태군은 다 이겼다 진 것처럼 씩씩거렸다.
“아오, 진짜!”
커다란 화면 속에서 재환의 검정 스포츠카가 ‘Winner’ 표시를 달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승자를 축하하는 경쾌한 팡파르도 울렸다. 진 사람의 약 오른 마음을 부추기기 딱 좋은 연출이었다. 더욱이 분통해하는 친구의 눈치를 살피며 재환이 ‘또 해?’라고 물으려는 찰나, 발랄한 효과음과 함께 지금껏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들의 순위가 주르륵 화면 위로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맨 위에 적힌 이름은 ‘Jiwoo’, 그러니까 지우였다. 몇 칸 아래에 ‘Hanyoung’이란 이름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태군의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낯선 이름 하나가 문득 재환의 눈에 들어왔다.
Saewoong.
아마도 세웅이라 읽는 것일 터다. 재환은 한 달 전, 바로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음을 떠올려 냈다.
‘째환이 기타가 세웅이보다 훨 좋았지?’
술 취해 꼬부라진 혀로 태군이 던졌던 물음에 한영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리고 지금 저 이름을 보고 괜히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또 왜일까. 재환이 스스로 던진 질문에 무엇 하나 답을 찾지 못하는 사이, 곁에서 쩌렁쩌렁 태군의 목소리가 울렸다.
“야, 안 되겠다. 한 판 더 해!”
이후 내리 다섯 판을 진 태군은 아예 컨트롤러를 집어 던지고서 답삭 탁자 위로 엎어졌다. 티브이 화면에서 재환의 검정 차가 빙글빙글 돌아갈 때마다 태군의 정수리도 비슷한 색으로 번쩍였다. 이제 더는 성낼 기운도 없는지 태군은 ‘이게 말이 되냐….’ 하면서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치 않게 친구를 묵사발 내 버린 재환은 슬그머니 옆에 있던 리모컨으로 손을 뻗어 티브이를 껐다. 거듭 ‘한 판 더!’를 외치는 태군의 말을 곧이듣는 게 아니었던 듯싶었다. 아무리 게임을 못 해도 그렇지, 이리 한 번도 못 이길 줄 알았나.
재환이 망연자실해 있는 친구를 짠한 눈빛으로 내려다볼 즈음, 거실 밖에서 현관문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엇박자로 울리는 발소리가 차츰 가까워지더니, 태군의 말마따나 뭐 먹고 저리 큰 건지 모를 사내놈 둘이 쑥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양손에는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태군이 엎어져 패배의 쓰라림을 삭이던 탁자 위로 과자니 땅콩이니 하는 온갖 주전부리가 쫙 펼쳐졌다. 맥주는 절반만 꺼내 놓고 절반은 냉장고에 넣어 놨음에도 그 수가 상당했다. 하지만 지난 환영회 때 넷이서 마신 양을 생각하면 아주 많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어쨌거나 간단히 회의나 잠깐 하려던 재환의 계획과는 영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약간의 어리둥절함을 품은 채 재환은 멤버들과 캔을 부딪쳤다. 더워진 날씨 탓에 내심 목이 탔던 것도 사실이라, 주저 없이 꿀꺽꿀꺽 맥주를 삼켰다.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청량감이 훅 목구멍을 훑고 지났다. 오늘은 흑맥주를 골라 여기에 쌉싸래한 향까지 더해졌다. 내처 한 번 더 맥주를 들이켠 재환은 지금이 그냥 벌어진 술판이 아님을 상기하듯 다시 기획안을 집어 들었다. 다른 이들도 재환을 따라 기획안을 집었다.
“첫 페이지에 적혀 있기는 한데, 일단 밴드 이름부터 정하면 어때?”
기획안을 나눠 준 건 한참 전인데, 이제야 제대로 본론이 나왔다. 사실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재환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밴드의 노래는 취미 선에서 끝낼 수준이 아니었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면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노래 분위기에 잘 맞는 밴드 이름도 짓고, 리더도 정하고, 클럽 오디션도 준비하고…. 나름 이전 밴드를 하며 재환이 직접 경험한 것들이었다. 그 내용이 빼곡히 기획안에 적혀 있었다.
“좋지. 우리도 전에 한 번 정하기는 했었어.”
지우의 말에 재환은 ‘아, 그래?’ 하며 눈썹을 쑥 위로 들어 올렸다. 만약 정해 둔 이름이 있다면 첫 번째 안건은 의외로 금방 해결되는 셈이었다.
기실 밴드 이름을 짓는다는 건 생각보다 상당히 머리 아프고 피곤한 일이었다. 다른 밴드랑 겹치지 말아야지, 그렇다고 너무 특이하고 이상해도 안 되지, 또 밴드 색도 잘 묻어나야지…. 게다가 멤버끼리 의견이 다르면 이거야말로 답도 없었다. 그러니 재환은 지우의 말이 더욱더 반갑게 들렸다. 그 마음이 훤히 묻어나는 표정으로 ‘뭔데?’ 하고 물었더니.
“싫어.”
지우가 답하기도 전 한영이 샐쭉한 목소리로 다소 뜬금없는 의사표시를 해 왔다. 그러나 말이 하도 짧아 그 이름이 싫다는 건지, 지우가 말하는 게 싫다는 건지 잘 분간 가지 않았다. 다만 살짝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둘 다일 가능성이 큰 듯해 보였다. 이윽고 쿡쿡 웃으며 지우가 내놓은 이름은 가히 한영이 싫어할 만한 것이었다.
“유한영과 아이들.”
아…. 재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힘 빠진 탄성이 흘러 나갔다. 한영은 대놓고 지우를 째려보았고, 옆에서 태군은 ‘존나 구려!’ 하며 입술 끝을 쭉 늘어뜨렸다. 사실 재환의 감상도 태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지 싶었다.
“뭐…, 한영이 이름을 넣고 싶은 거면 유한영밴드로 짓는 방법도 있긴 한데, 이것도 요새 스타일은 아닌 것 같네. 혹시 뭐 또 생각나는 거 있어?”
이것으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약속한 듯 맥주를 한 모금씩 들이켠 네 사람은 잠시간 말없이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재환도 딱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태군이었다.
“‘분홍머리’ 어때? 저 새끼 머리 존나 튀잖아.”
“나중에 한영이 머리 색 바꾸면?”
이번에는 지우가 재환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태군은 시무룩함을 숨기지 못하고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제 딴에는 썩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재환은 서둘러 이 중 가장 창의력이 좋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에게로 질문을 돌렸다.
“유한영 너는? 아무래도 네가 노래를 만드니까, 밴드 이름도 네 아이디어가 들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슬쩍 눈을 아래로 내리깐 한영은 두 다리를 소파 위로 올려 끌어안았다. 재환의 시선을 피해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도 했다. 입을 열기 싫다는 티를 아주 팍팍 내는 모습이었다. 이를 정면에서 지켜보는 재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아니, 내가 무슨 틀린 소리 했나. 밴드 이름 좀 생각해 보라는데. 하지만 다음 순간, 재환은 지우 덕분에 자신이 한 얘기가 틀린 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재환아, 너 한영이 가사 상태 알지?”
“아, 응….”
이것으로 상황은 또, 원점으로 돌아갔다.
* * *
탁자 위로 하나둘 빈 캔이 늘어나고, 대화가 오가는 시간보다 침묵이 이어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회의를 빙자한 술자리가 벌여진 지 한참이건만, 태군의 ‘분홍머리’ 이후로 나온 이름들도 하나같이 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남자가 넷이니 ‘네 남자들’로 하자거나, 그게 별로면 ‘Four Boys’로 하자거나, 합주실이 지하에 있으니 ‘지하실’로 하자거나….
개중 그나마 ‘유한영과 아이들’이 낫다는, 거의 포기에 가까운 생각이 재환의 뇌리를 스칠 무렵 기획안을 이리저리 넘겨 보던 지우가 입을 열었다.
“근데 표지에 있는 ‘서유장현’은 뭐야?”
“아, 우리 성. 가나나 순서대로 붙인 거야, 그냥.”
“아아.”
고개를 끄덕인 지우는 ‘서재환, 유한영, 장태군, 현지우….’ 하며 멤버 넷의 이름을 차례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별안간 중지와 엄지를 부딪쳐 크게 딱, 소리를 냈다. 자연히 재환을 포함한 나머지 세 명의 시선이 지우를 향했다. 그러나 대단히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랬다가 서로서로 실망한 게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이거 거꾸로 읽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거꾸로?”
종이를 앞으로 넘겨 표지로 되돌아온 재환은 ‘서유장현’이라는 글자를 천천히 뒤에서부터 읽어 보았다. 동시에 안 그래도 밝지 않던 낯빛이 조금쯤 더 어두워졌다.
“현장유서….”
“엄청 있어 보이지 않아? 미스테리어스하고.”
안타깝게도 재환은 지우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다들 음악만 너무 열심히 해서 이런 쪽으로는 영 센스가 없는 거라고, 애써 스스로 위안할 따름이었다. 물론 이 중 음악 전공생은 태군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일전 태군이 지나가는 말로 한영과 지우 중 법대생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해 낸 재환의 시선이 물끄러미 지우를 향했다. 턱을 매만지며 ‘현장유서 괜찮은데….’라고 혼잣말하는 지우를 보며 재환은 방금의 생각을 살짝 정정했다. 음악과 공부만 열심히 해서 저런 거라고.
여하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건 뭐 오늘 중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하루 만에 뚝딱 그럴듯한 이름이 나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일지 몰랐다. 또 그렇게 억지로 저 자신을 위안한 재환은 짝짝 손뼉을 부딪쳤다. 여전히 ‘현장유서….’를 중얼거리던 지우와 점점 눈빛이 흐릿해져 가던 태군, 한영이 일제히 재환을 보았다.
“일단 오늘 이름 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다음 것부터 하자.”
재환은 2페이지로 넘긴 기획안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리더 선정의 중요성이 간략히 설명되어 있는 페이지였다. 그래도 이 안건만큼은 어려움 없이 금방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환의 경험상 리더는 밴드의 프런트맨이 맡는 게 여러 가지로 가장 무난했다. 그리고 이 밴드의 프런트맨은 당연히….
“유한영.”
“싫어.”
또다. 또 다짜고짜 한영은 싫다는 말부터 뱉고 보았다. 미간을 잔뜩 좁힌 재환은 볼캡을 한 번 고쳐 쓰고서 팔짱을 꼈다. 고개를 기울여 탁자 건너편에 앉은 한영을 빤히 쳐다보자, 여지없이 재환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깐 한영이 소파 위로 올린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름 이유를 들려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난, 그냥 네가 했음 좋겠어….”
단, 그 이유가 재환의 마음에 썩 들지 않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아도 가장 마지막으로 밴드에 합류한 제가 리더를 맡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렇다고 싫다는 녀석에게 억지로 역할을 떠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푹 한숨을 내쉰 재환은 이럴 경우를 대비해 차선으로 생각해 놓았던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하자.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에잉? 다 동갑 아녀?”
그리하여 동갑내기 네 사람은 조금 뜬금없지만 제가끔 돌아가며 태어난 달과 일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쉽게 말해, 생일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난 6월 30일. 다음 달이다! 알았지? 6월 30일!”
“난 4월. 4월 5일.”
“난… 3월 1일.”
지우에 이어 생일을 말하며 재환은 더럭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만약 한영의 생일이 3월 1일보다 늦는다면, 자연히 재환 자신이 리더가 되는 것이었다. 나이로 결정하자고 이쪽에서 먼저 제안했으니 비겁하게 물릴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난감해진 재환은 다소 간절함이 담긴 눈길로 한영을 바라보았다. 저 붉은 입술 사이에서 1월, 혹은 2월이 나오기를 바라며. 다행히도, 얼마 가지 않아 재환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2월 4일.”
차마 ‘앗싸!’를 외치지 못한 재환의 엉덩이가 순간적으로 들썩거렸다. 자꾸 위로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붙들어 놓고서 재환은 덤덤한 체 상황을 정리했다.
“어쩔 수 없네. 한영이가 리더네.”
태군이 신나라 박수를 쳤다. 지우는 ‘잘 부탁한다.’며 긴 팔을 뻗어 툭툭 한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원망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한영이 재환을 보았을 때, 재환은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그 후로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한영만이 태어난 해가 달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영은 한 살 동생이었다.
며칠 후, 합주를 마친 네 사람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 없이 같은 자리에 다시 모였다. 어쩌면 합주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던 까닭이었다. 단, 오늘은 지난번처럼 마냥 대책 없이 머리를 모으기보다는 나름의 맥락을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아직은 리더 자리에 익숙해지지 못한, 혹은 그렇게 될 생각이 딱히 없어 보이는 한영 대신 재환의 주도 아래.
“다들 생각해 봤어?”
“야, 존나 어렵드라!”
이보다 더 끔찍한 숙제가 없었다는 양 태군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래 봤자 재환이 멤버들에게 대단한 과제를 내준 것은 아니었다. 각자 좋아하는 단어를 세 개씩 찾아 올 것. 나온 단어들을 대충 조합하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사람이 넷이나 되니까…. 물론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찾아 오긴 했지?”
“아, 엉….”
답지 않게 수줍은 표정을 하며 태군이 손바닥으로 매끈한 머리통을 문질렀다. 그것이 공연히 재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뭘 생각해 왔길래. 귓바퀴까지 불그스름 물들인 태군은 한참이나 큰 눈을 굴리다 어물어물 입을 뗐다.
“슈퍼 파워랑, 매미랑…, 마카롱.”
아…, 음…. 순간 다른 세 사람의 입에서 엇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는데, 한층 붉어진 귓불을 손가락으로 조몰락거리던 태군이 알아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슈퍼 파워야 드럼 치는 데 필요한 거고, 매미는 이제 곧 매미의 계절이잖냐. 나 태어난 날 그렇게 매미가 울었다드라고? 그리고 마카롱은….”
이제는 태군의 작은 머리통 전체가 숫제 고운 분홍빛을 띠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친구의 수줍음 가득한 모습에 재환의 얼굴까지 덩달아 화끈거렸다. 오죽하면 태군에게 그만 얘기해도 된다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요새 존나 빠졌걸랑. 마카롱에.”
태군 옆에 있던 지우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홱 고개를 돌렸다. 한영은 대놓고 눈썹 사이에 좍좍 줄을 그었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듯 얼굴을 푹 숙인 태군이 이를 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마 보았다면 또 둘이서 저를 무시했노라고 꽤나 서운해했을 터다.
저까지 친구를 서운하게 만들 수는 없어, ‘에라이, 이 마카롱 같은 새끼야’라고 말하는 대신 재환은 탁자 위에 둔 종이에 슈퍼 파워, 매미, 마카롱을 차례로 적었다. 마지막 것을 적을 때는 하는 수 없이 작게 픽 웃음이 터졌으나, 서둘러 흠흠 헛기침을 덧붙인 덕분에 다행히 태군이 눈치채지는 못했다.
이제 다음은 지우의 차례였다.
“난 좀 단순한데. 정의, 질서, 평화.”
말한 이가 풍기는 분위기와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듯한 단어의 나열이 다시금 재환을 멈칫하게 했다. 하나 상대가 ‘현장유서’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을 떠올리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마카롱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지우가 가져온 세 개의 단어를 종이 위에 적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오늘도 밴드 이름 정하기는 영 글렀지 싶었다. 왜냐하면.
“재환이 넌?”
본인이 생각해 온 것도 피차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난… 리버브, 딜레이, 코러스.”
“What?”
어떤 단어가 나오든 줄곧 표정으로만 반응하던 한영이 대뜸 눈을 크게 뜨고서 되물었다. 그것도 툭, 영어로. 도리어 당황한 재환이 말을 머뭇거리는 사이, 고맙게도 지우가 재환 대신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기타에서 쓰는 사운드 이펙트야. 너 노드에도 다 있는 거잖아.”
“아…, 응.”
문득 재환은 태군이 왜 그토록 얼굴을 붉혔는지 십분 이해가 갈 듯했다. 막상 말로 뱉고 나니 꼭 기타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관심도 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그럼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런 인간 맞는 것 같다.
좌우지간 이제 남은 희망은 한영뿐이었다. 아무리 가사 센스가 없다 하더라도 한영이라면 뭐든 좀 그럴듯한 걸 생각해 왔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재환의 기대는 한영의 입이 열리는 순간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나는 Love랑 Kiss랑…, Sex.”
차라리 유한영과 아이들을 하고 말지.
며칠 후, 합주를 마친 네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또, 같은 자리에 다시 모였다. 여전히 괜찮은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고, 다들 안타까운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재환만이 열심히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가 죽죽 줄을 긋기를 반복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젓번 나온 단어들을 이리 조합하고 저리 조합해 보아도 어째 건질 만한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매미들의 코러스, 정의로운 마카롱, 섹스와 평화. 이딴 것들을 어떻게 밴드 이름으로 쓴단 말인가. 결국 펜을 놓아 버린 재환은 땅을 꺼뜨릴 기세로 긴 한숨을 쏟았다. 모자를 벗고 머리도 한 번 대차게 헝클어뜨렸다.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전 밴드에서는 어떻게 정했더라. 오히려 그때는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처음부터 리더였던 형찬이 이거 아니면 싫다고 쭉 하나를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던 덕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이름은 ‘IDEA’, 즉 ‘이데아’였다. 절대불변의 노래를 만들 거라나 뭐라나. 플라톤의 철학 이념을 내세워 무언가 장황하게 설명을 하긴 했는데, 사실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발음이 쉽고 어감이 괜찮아 밴드 이름으로는 썩 나쁘지 않다 여겼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밴드에는 고집쟁이가 없는 게 문제였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재환은 슬슬 멤버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펜을 쥐었으나 이제 더는 조합할 단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글자보다는 직직 지운 흔적이 더 많은 종이를 내려다보며 재환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하…, 우리 이제 이거 그만하면 안 돼…?”
정면에서 들려온 한숨 섞인 목소리에 재환은 그대로 쩍 얼어붙었다. 제가 뭘 들은 건가 싶어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종이 위에 박고 있다시피 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동시에 언제나처럼 소파 위로 두 다리를 올려 끌어안고 있는 한영과 시선이 맞닿았다. 종전 재환의 고막을 파고들었던 길고 긴 한숨 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거의 집어 던지듯 펜을 내려놓은 재환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성큼성큼 탁자 옆을 지나쳐 한영에게 다가서자, 갑작스러운 재환의 행동에 놀란 한영이 주춤주춤 발을 아래로 내렸다. 소파에 푹 등을 기대고 있던 태군과 지우도 덩달아 놀라 벌떡 허리를 세웠다. 여기서 그치지 않은 재환은 아예 허리를 숙여 한영이 앉아 있던 소파 등받이 위를 두 손으로 짚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기껏해야 손 한 뼘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 재환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 뭐라 그랬어?”
한영의 얼굴 위로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운 채 재환이 다그치듯 물었다. 재환이 이러는 영문을 알지 못하는 한영은 몸이 굳어 눈만 깜빡거렸고, 태군은 또 일이 터졌구나 싶어 아이고, 탄식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과거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부원의 기타를 때려 부수던 재환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꼭 겹쳐 보이는 까닭이었다. 보다 못해 소파에서 반쯤 엉덩이를 뗀 태군이 조심스레 재환을 불렀다.
“야, 서재환. 너 왜 그르….”
“유한영, 너 뭐라 그랬냐고.”
용기 내어 친구의 이름을 불러 본 게 무색하게 다시 태군의 입이 합 다물렸다. 일단 가만있어 보라는 듯 옆에서 지우가 허벅지를 지그시 짚어 오는 바람에 무어라 더 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즈음에서야 재환의 집요한 추궁을 받아 내던 한영이 더듬더듬 입을 뗐다.
“너 스트레스 받으니까, 그만하면 좋겠어서….”
“아니, 그거 말고.”
“어?”
재환은 다소 짜증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상대에게 짜증이 났다기보다는 조급함에서 기인한 행동이었으나, 바로 앞에 있는 이를 더욱 움츠러들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초조해진 재환은 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앞에 한 거…! 그거 한 번 더 해 봐.”
아무리 생각해도 한영은 재환을 걱정한 것 말고는 한 게 없었다. 하니 당황과 억울함이 한데 뒤섞인 눈으로 재환을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도 비슷한 눈빛으로 재환을 바라보는 가운데, 재환은 아예 고개를 홱 외로 틀어 한영의 입가에 바짝 귀를 붙였다. 그러고는 주위를 더욱 당황시킬 말을 꺼냈다.
“빨리 한숨 쉬어 봐, 한숨.”
재환은 마음이 급했다. 몇 날 며칠 골을 지끈거리게 하던 문젯거리를 해결할 실마리가 이제 겨우 보이는 차였다.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멍청하게 놓쳐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환이 다짜고짜 왜 저런 부탁, 혹은 명령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는 한영의 눈알이 불안하게 이리저리로 굴러갔다. 그 와중에도 코앞으로 디밀어진 모양 좋은 귓바퀴는 한 치도 물러날 기색이 없어, 결국 한영은 단념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간 호흡을 멈추었다가 조금쯤 진심을 담아 하…, 하고 길게 한숨을 늘어뜨렸다. 상대가 원하는 게 이게 맞는 건지, 확신은 없었다.
이윽고 붉은 입술 새에서 흘러나온 더운 숨결이 훅 귓구멍으로 불어닥치는 순간, 여지없이 재환의 목덜미를 타고 오스스 잔소름이 돋아났다. 한영의 머리맡을 짚은 팔뚝의 살결도 함께 오톨도톨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것과 별개로 머릿속에서는 번쩍 불이 켜졌다. 지금 제 모습이 주위에 얼마나 이상하게 비치는지도 모르고, 재환은 씩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숙였던 허리를 편 재환은 자못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태군과 지우, 그리고 어쩐지 조금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한영을 차례로 보았다. 숨길 수 없는 설렘이 가슴을 온통 두근거리게 했다.
“나, 밴드 이름 찾은 것 같아.”
그날, 만장일치로 결정된 밴드의 이름은 ‘더 숨(The Sum)’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