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 *
따끔따끔 밝은 빛이 눈꺼풀을 찌르는 감각에 천천히 눈이 뜨였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눈동자를 굼뜨게 굴리자 흐릿한 시야에 영 익숙지 않은 풍경이 차례로 맺혔다. 낯선 천장, 낯선 벽, 낯선 가구, 그리고 낯선 햇빛. 마지막으로 홀로 덮고 있던 낯선 이불을 눈에 담은 재환은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은 부은 듯한 눈두덩을 주먹 쥔 손으로 비비고서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살을 한가득 머금은 방 안은 어젯밤보다 훨씬 더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빨강은 더욱 빨갛게, 파랑은 더욱 파랗게, 노랑은 더욱 노랗게 비쳤다. 모든 색이 그랬다. 공간을 뒤덮은 알록달록한 색감만큼이나 파란만장했던 어제의 일들이 하나둘씩 재환의 머릿속을 스쳤다.
카페, I See You, 피자, 와인, 젓가락 행진곡….
이어지던 기억은 한영과 함께 이 자리에서 들었던 촉촉한 빗소리에서 멈추었다.
‘맞다, 그거 알아? 네 노래 들었을 때도 비 왔었어.’
‘내 노래?’
‘어. 근데 그러고 있으니까, 노래에서도 꼭 비 오는 느낌 나는 것 같더라. 그래서 그냥 그 느낌대로 플레이 싹 뜯어고쳤지.’
‘I See You…?’
‘그래, 그거. I See You. 그 노래 너무 좋은 것 같아. 비 같은 노래야.’
아아…. 술에 취해 있던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으로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해 댔을까. 아무래도 침대에 눕기 전 한영과 둘이서 신나게 젓가락 행진곡을 쳤던 게 원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쓸데없이 기분이 들뜨고, 때마침 비까지 내리고, 답지 않게 감성이 넘쳐흘러서….
“아오.”
후회 섞인 탄성을 뱉으며 재환은 안 그래도 까치집이 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나마 눈뜨자마자 한영과 맞닥뜨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랬으면 꽤나 민망할 뻔했다. 그나저나, 한영은 어딜 간 걸까. 의외로 부지런한 성격인가 보네.
허리께까지 덮인 이불을 휙 걷어 내고 침대 밖으로 두 다리를 뻗었다. 그대로 훌쩍 일어서려는데, 무언가 푹신한 감촉이 발바닥에 닿았다. 뭐지 싶어 재환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어….”
침대 밑에 놓인 건 쫙 펼쳐진 이불이었다. 지난밤 한영이 가져왔다가 다시 구석으로 밀어 둔 이불이기도 했다. 그게 여기 깔려 있을 이유가 없는데. 문득 재환은 꺼림칙한 예감이 끼쳤다.
내가 혹시 코를 골았나? 아니다. 그러면 진즉 한영이 다른 방으로 가서 잤을 것이다.
아니면 잠꼬대라도 했나? 그것도 마찬가지로 굳이 방바닥에 이불을 펴고 잘 이유가 되지 못했다.
설마 자다가 막 발로 찼다거나…? 하나 자신에게 그런 고약한 잠버릇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기억도 없었다.
“아씨….”
답답한 마음에 재환은 이미 잔뜩 헝클어진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흩뜨렸다. 혹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싶어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그다지 쓸모없는 짓이었다. 당사자에게 직접 묻지 않는 이상 사건의 진상은 알 수 없었다.
이불 옆에 놓인 슬리퍼로 얼른 두 발을 껴 넣은 재환은 문제의 당사자를 찾아 나서기 위해 걸음을 뗐다. 그러나 문지방을 넘기 전 잠시 멈춰서 허리를 숙여야 했다. 뭔 놈의 바지가 이렇게 긴지. 아예 정강이까지 보라색 바짓단을 둘둘 접어 올린 후 성큼 방 밖으로 나갔다.
쿵쿵 나무 계단을 밟아 1층으로 내려갔다. 복도 어귀에 들어섰을 때, 주춤 걸음이 멎은 재환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코를 킁킁거리자 실내에서 줄곧 은은히 풍기던 향기 대신 딱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야릇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무언가 탄 것 같기도 하고, 생선 비린내 같기도 하고. 눈머리를 찌푸린 재환은 서둘러 냄새의 근원지로 향했다.
냄새를 쫓아 부엌으로 들어선 순간 우뚝 다리가 굳었다. 그 기척에 조리대 앞에 서 있던 한영이 홱 뒤를 돌았다. 우두커니 부엌 입구에 선 재환에게 한영이 조금 애매한 인사를 건넸다.
“어…, 잘 잤어?”
하지만 재환은 함께 인사해 주지 못했다. 일단은 한영이 걸친 왕 꽃무늬 앞치마가 문제였고, 그다음으로는 처참한 조리대 상황이 문제였다. 나와 있는 냄비와 프라이팬이 몇 개인지, 그 주위로 당최 어떤 식재료들이 널브러져 있는 건지 가늠되지 않았다. 입 쩍 벌어지는 광경을 불안하게 훑던 시선이 다시 꽃무늬 앞치마의 주인공에게로 옮겨 갔다.
“이게 다….”
“앉아 있어.”
말이 석둑 잘려 나갔다. 뭐냐, 하고 채 마저 묻지 못한 재환은 쭈뼛쭈뼛 부엌 중앙에 자리한 아일랜드 식탁으로 가 앉았다. 단, 식탁 상태도 조리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옆으로 긴 식탁 위에는 온갖 그릇들이 나와 탑처럼 쌓여 있었다. 부엌에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죄 끄집어낸 듯했다. 이를 보며 푹 한숨을 내쉬던 중, 재환은 그릇들 사이에서 투명 비닐 팩을 발견했다. 입구가 절반쯤 열린 팩 안에는 북어채가 들어 있었다. 그제야 재환은 괴상한 냄새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환은 조리대 앞을 서성거리는 한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저걸 그대로 둬, 말아.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가까이 온 한영이 식탁 빈자리에 탁, 하고 입구가 넓적한 그릇을 놓았다. 그릇 안에 담긴 하얀 액체가 찰랑찰랑 이리저리로 흔들렸다.
“뭐야?”
“우유.”
한영은 여상한 투로 대답하며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저 액체의 정체가 우유라는 것쯤 재환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가 궁금한 건 그러니까 대체 왜 우유를 주냐는 것이었다. 그 궁금증을 풀어 주는 대신, 한영은 종이 상자 하나를 불쑥 재환 앞에 내밀었다. 제법 커다란 상자 위에는 체크무늬 모양의 초코 맛 시리얼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야살스러운 표정을 한. 재환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이건 시리얼.”
상자를 선뜻 받지 못하고 재환이 입만 벙긋거리자, 한영이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어서 받으라고 상자를 두어 번 흔들기도 했다. 안에 담긴 시리얼이 함께 흔들리며 착착 소리를 냈다. 그 지나치게 경쾌한 소리가 잠깐 멍해져 있던 재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아침을 시리얼로 해결하는 거야 문제 될 게 없다지만, 저 뒤편의 끔찍한 상황을 내버려 두고 태연하게 바작바작 시리얼이나 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한영.”
처음으로 재환에게 이름 석 자가 불린 한영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다만 자신을 보는 재환의 표정이 썩 편치 않아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별안간 재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네지 못한 시리얼 상자를 품에 안은 한영은 쑥 눈높이가 올라간 재환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다시 움직이는 발간 입술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북엇국 먹고 싶어?”
정확히 말하자면 한영은 북엇국을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먹이고 싶은 거였다. 그러나 생각처럼 일이 안 풀린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먹일 수 없게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그렇게 서둘렀는데…. 어쨌거나 재환의 물음에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리 좀 와.”
시리얼을 놓고 서둘러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한영은 제게 고갯짓하는 재환을 뒤따라 조리대로 갔다. 조리대 모서리를 두 손으로 짚고 선 재환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가며 다시금 그 위의 참혹한 상황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완성된 요리는 하나 없는데 이미 개수대 안에는 설거짓거리와 음식물 쓰레기가 한가득하였다. 그 옆으로는 십수 개에 달하는 각종 조미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를 지나쳐 재환의 시선이 가장 우측에 자리한 가스레인지로 향했다.
“아….”
재환은 순수하게 경악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냄비 안 북어채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욱 좋지 않았다. 사실 저 시커먼 덩어리들이 북어채가 맞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웠다. 볶을 때 기름을 두른 흔적일랑 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면 식용유, 참기름, 들기름, 심지어 올리브 오일까지 왜 다 꺼내 둔 걸까. 재환은 휙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얌전히 서 있는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너 요리 해 본 적 없지?”
이번에도 한영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말 잘 듣는 아이 같은 한영의 태도에 재환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렇게 속없이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이내 ‘음….’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겼다. 손가락 끝으로는 토도독토도독 조리대의 대리석 표면을 두드렸다. 일의 순서를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슬쩍 한 발짝 움직여 재환 옆으로 간 한영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진지함이 잔뜩 어린 얼굴을 보다 가까이서 보려 자꾸 재환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기울고 기울던 어깨가 반듯하게 뻗은 어깨에 닿으려던 때.
“일단, 설거지부터 하자. 그게 낫겠다.”
냉큼 한 발 옆으로 떨어져 선 한영은 비장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재환에게 재차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먹어?”
“아, 응.”
멍하니 제 앞에 놓인 국그릇을 들여다보던 한영은 퍼뜩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김이 폴폴거리는 북엇국을 건더기까지 크게 떠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한 번 북어를 씹을 때마다 크게 뜨인 눈이 이내 화등잔만 해졌다. 맛에 대한 평가 한마디 내리지 못하고 서둘러 다음 숟갈을 떴다.
마주 앉아 이를 지켜보던 재환도 국물을 한 숟갈 떠 호로록 들이켰다. 하지만 맛을 감지하기도 전 온 얼굴이 왈칵 찌푸려졌다. 절로 입가에서 손이 팔랑거렸다.
“야, 이거 엄청 뜨거운데? 너 괜찮냐?”
옆에 있는 밥은 그대로 둔 채 연거푸 국만 떠먹던 한영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은 재환은 다시 자신 앞에 놓인 그릇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숟가락에 뜬 국물을 한참이나 후후 불고 나서야 입에 넣었다. 그제야 좀 맛이 제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음, 나쁘지 않네.”
급히 끓인 것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었다. 사실 생수 대신 쌀뜨물을 넣었다면 구수하니 더 맛있었겠지만, 밥을 즉석밥으로 대체하느라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해장은 될 성싶었다. 뭐, 지난밤 그렇게까지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자신보다는 한영 쪽이 해장을 필요로 했던 모양이었다. 직접 북엇국까지 끓이려고 한 걸 보면.
“먹을 만해?”
“아니, 맛있어.”
‘어?’ 하며 재환은 저도 모르게 폭 눈썹 사이를 움츠렸다. 먹을 만하냐는 질문에 ‘아니, 맛있어.’라는 대답은 아무래도 조금 이상했다.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맛있다는 뜻인 듯해 금세 미간에 힘을 풀고 ‘그래, 많이 먹어라.’라고 한영에게 말했다. 더불어 재환은 그제야 자신이 한 음식을 누군가와 함께 먹는 게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기분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썩 좋았다.
하지만 재환의 좋았던 기분은 왜 자신이 눈뜨자마자 부엌으로 왔었는지를 상기한 순간 이내 푸시시 꺼졌다. 분명 북엇국을 끓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식탁 가운데 놓인 메추리알 장조림으로 젓가락을 가져가며 재환은 말꼬를 텄다.
“아, 맞다. 유한영.”
제 이름 석 자가 불리자마자 거의 국그릇에 코를 박고 있다시피 했던 한영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쥐고 있던 숟가락도 곧바로 식탁에 내렸다. 국물이 묻은 입가를 급히 엄지로 닦아 내고서 ‘응?’ 하고 재환에게 답했다. 졸지에 밥 잘 먹고 있던 녀석을 숟가락까지 놓게 만들어 버린 재환은 겸연쩍은 마음을 숨기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마치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듯이.
“그, 어젯밤 무슨 일 있었냐? 나 잘 때.”
“왜?”
한영이 되묻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메추리알을 집어 입에 넣었던 재환은 서둘러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그 틈을 타 슬그머니 젓가락을 쥔 한영도 메추리알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재환이 한 번에 잘만 집었던 메추리알은 야속하게도 한영의 젓가락 사이에서 팅, 튕겨져 나와 데굴데굴 재환 앞으로 굴러갔다. 재환은 밥그릇 근처까지 용케 굴러온 메추리알을 가벼이 집어 아주 자연스럽게 제 밥 위로 올렸다.
“너 침대에서 안 잔 것 같길래. 혹시 내가 뭐 불편하게 했어?”
“아니.”
멀뚱히 재환의 밥그릇을 보고 있던 한영은 이번에도 냉큼 답했다. 다소 기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한영의 대답에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재환은 그러냐, 하며 조금 전 주운 메추리알과 함께 밥을 떠먹었다. 뒤이어 팔을 뻗어 새 메추리알을 집은 후 이를 아무렇지 않게 한영의 밥그릇에 올렸다. 순간 엑스 자 모양으로 젓가락을 움켜쥐고 있던 한영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제 앞에 놓인 갈색빛의 작고 반질반질한 덩어리를 건드리지도 못한 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야, 메추리알 먹고 싶었던 거 아닌가. 기껏 준 메추리알을 먹기는커녕 노려보고만 있는 한영을 슬쩍 일별한 재환을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가장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그럼 바닥에서 왜 잔 거야?”
“아….”
애먼 메추리알과 눈싸움을 벌이던 한영의 밝은색 눈알이 돌연 이리저리로 굴러갔다. 조금 전까지 꼭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바로 질문에 답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고민, 혹은 딴청으로밖에 해석의 여지가 없는 한영의 반응을 보며 재환은 지난밤 뭔 일이 있기는 있었다는 의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유한영, 이름 세 글자를 부르며 답을 재촉하려는 찰나 한영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추워서 그랬어.”
“뭐?”
“침대 이불 너무 추워서. 그래서 바닥에서 잤어.”
아, 이불이 너무 추워서…. 일순 멍청한 표정을 지은 재환은 되새기듯 한영의 말을 따라 했다. 맥이 탁 풀려 버릴 정도로 싱겁기 짝이 없는 이유였다. 옆에 누운 놈이 코를 골아서가 아니라, 발길질을 해 대서가 아니라, 그냥 침대 이불이 추워서 한영은 바닥에서 잔 거였다.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한영 본인 입으로 추위를 많이 탄다 말하기도 했고, 어젯밤은 비도 왔으니 평소보다 기온이 더 낮았을지 몰랐다. 게다가 옆방에서 가져온 이불이 좀 두꺼웠어야 말이지. 근데 아무리 덮은 이불이 두꺼워도 찬 바닥에 등 붙이고 자면 그게 그거 아닌가? 아, 진짜 모르겠네….
결국 한영을 완벽히 이해하기를 포기한 재환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뭐 얼마나 대단한 문제라고 한영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더 캐묻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속으로 ‘됐다, 됐어.’를 중얼거리며 재환은 한 손에는 밥그릇, 한 손에는 숟가락을 쥐었다. 그새 조금 식은 국 안으로 주저 없이 남은 밥을 퐁당 빠뜨렸다. 하지만 찌꺼기처럼 남은 찜찜함이 금방 또 재환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물론 자신에게 평생을 모르고 살았던 어마어마한 잠버릇이 있었다는 것보다야 한영이 내놓은 이유가 훨씬 나았다. 이로써 괜한 미안함을 느낄 필요도 없어진 셈이었다. 그래도 맨바닥에서 자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추웠으면 차라리 그냥…. 이윽고 뭉친 밥을 숟가락 뒷면으로 꾹꾹 누르던 재환의 입에서 다소 큰 혼잣말이 튀어 나갔다.
“꼭 붙어 자면 되지 않나.”
“어?”
재환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보다 똑같이 밥그릇을 뒤집던 한영의 눈이 한순간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풍덩 밥이 덩어리째 국 안으로 떨어지며 식탁 여기저기로 맑은 국물이 튀었다. 그중 몇 방울은 멀리멀리 날아가 톡 재환의 뺨과 코끝에 안착했다. 느닷없이 북엇국 비를 맞아 버린 재환의 입가에 황당하다는 웃음이 걸렸다.
“야, 너 뭐 하냐.”
반쯤 몸을 일으킨 재환은 쭉 손을 뻗어 식탁 구석에 놓인 티슈 곽에서 쓱쓱 티슈를 뽑았다. 일단 한 장은 한영 앞에 두고 다른 한 장으로는 제 얼굴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재환이 자신의 그릇 주변을 닦을 때까지도 한영은 미동이 없었다. 멍하니 국 위에 섬처럼 솟아 있는 밥 덩어리를 보던 한영이 머뭇머뭇 입을 뗐다.
“진짜야…?”
“뭐가?”
다 쓴 티슈를 꾹꾹 손으로 뭉치던 재환은 밥을 마저 먹을 생각도, 이리저리 튄 국물을 닦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한영을 의아하단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까는 시키는 대로 설거지나 그릇 정리도 곧잘 하더니 더러워진 식탁을 닦는 건 또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다시 일어나 내처 한영의 그릇 주위도 닦아 주려는데, 불시에 식탁을 가로지른 하얀 손이 덥석 팔목을 붙잡아 왔다. 왜 이러냐 물을 새도 없이 다소 조급한 물음이 따라붙었다.
“진짜 나랑 꼭 붙어서 자고 싶었어?”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힌 자세로 손목을 내어 준 재환은 답을 조르는 듯한 한영의 눈과 잠시간 말없이 시선을 맞추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대는 점점 초조해졌으나, 도리어 재환의 입꼬리는 슬금슬금 위로 올라갔다. 그새 조금은 힘이 빠진 손아귀에서 어렵지 않게 팔을 빼낸 재환은 직접 한영의 손에 티슈를 쥐여 주었다. 멍한 표정을 지은 한영이 손안의 티슈와 재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야, 왜. 내가 잡아먹기라도 했을까 봐?”
“어…?”
“됐고, 네 앞은 네가 닦아라.”
한영에게 제법 매몰찬 대사를 날리기는 했으나 식탁 의자에 도로 앉은 재환은 여전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제부터 한영에게 이상한 질문을 참 많이도 받았지만, 종전의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하고 우스웠다. 꼭 붙어 잔다는 게 그냥 좀 춥지 않도록 가까이서 잔다는 얘기지, 아무렴 뭐 부둥켜안고 더한 짓이라도 하자는 걸까 봐. 도무지 사고방식을 알다가도 모를 한영이 이제 재환은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북엇국 끓인다고 아침부터 부엌을 난장판 만들질 않나, 그러고서 태연히 우유와 시리얼을 내밀질 않나.
하여튼 희한한 녀석이라니까. 튄 국물이 마를 즈음에서야 티슈를 쥐고 쓱쓱 식탁을 문지르는 한영을 보며 재환은 재차 쿡쿡 숨죽여 웃었다. 덩어리진 밥알을 마저 국물에 풀어 한 숟갈 크게 떠 올렸다. 국은 식었을지언정 여전히 맛있었다.
* * *
“내가 해도 되는데.”
“됐다니까.”
싱크대 앞에 서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하는 재환 뒤를 한영이 불안하게 이리저리 오갔다. 재환의 어깨 너머 고개만 쭉 빼 그릇 씻는 모습을 훔쳐보듯 관찰하기도 했다. 결국 참다못해 콸콸 흐르던 수돗물을 잠근 재환은 홱 뒤를 돌았다.
“유한영, 너 저리 좀 가라.”
“…알았어.”
재환이 물 묻은 손을 휙휙 내젓고 나서야 한영은 저벅저벅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싱크대가 보이는 쪽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식탁에 두 팔을 포개 엎드렸다. 고개만 빼꼼히 들어 자신이 좋아는 핑크색 티셔츠에 보라색 바지를 입은 재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 설거지가 끝나면 휙 집으로 가 버릴 남자의 뒷모습이기도 했다.
하루 새 그럭저럭 익숙해진 빤한 시선이 콕콕 뒤통수에 와 박히는 것을 느끼며 재환은 부지런히 수세미로 그릇을 문질렀다. 재환이 이렇게 설거지를 자처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북엇국을 만들기 전, 자신이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고 죄 끄집어져 나온 온갖 식재료를 정리하는 동안 한영이 해낸 설거지 양이 적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설거지 또한 집주인에게 맡기는 게 자연스러울지 몰랐으나, 하룻밤 신세 진 입장에서 설거지 한 번 못 하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기실 지난밤 한영이 꽤나 강고한 투로 자고 가라 권해 왔을 때, 재환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다른 사람 집에서 먹고, 마시고, 게다가 자고 가라는 말까지 들은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거니와, 그 상대가 한영이라 더더욱 그러했다.
모르긴 몰라도 재환은 한영과 친해지는 데에 보다 긴 시간이 걸릴 줄 알았다. 애초에 서로에 대한 첫인상이 너무 좋지 않았다. 저쪽은 자신을 ‘아이돌 같다’라는 실없는 소리나 지껄여 대는 놈으로 알았을 테고, 재환은 한영을 잘생긴 개복치쯤으로 여겼다. 아, 물론 노래도 잘하고 잘 만드는 개복치. 그런데 하루를 같이 지내본바 한영은 예민하다기보다는 특이한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재환은 특이한 놈을 굳이 싫어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 별난 구석이 있어야 창작도 할 수 있는 것일 터였다. 생각해 보면 재환 자신이 좋아하던 밴드의 프런트맨들도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아, 유한영.”
여전히 식탁에 엎드려 까만색 뒤통수와 분홍색 등짝, 보라색 다리를 눈에 담던 한영의 눈썹 사이에 순간 폭 힘이 들어갔다. 제 이름 석 자가 불린 다음 재환의 입에서 반가운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아는 한영은 ‘왜…?’ 하고 대꾸하며 겹친 팔에 이마를 묻었다.
“넌 밴드 누구 좋아해?”
다행히 아까처럼 밤에 무슨 일 없었냐는 둥, 왜 바닥에서 잤냐는 둥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아니었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린 한영은 그릇이 가득 찬 유리 장으로 멀건 시선을 보내며 습관처럼 혀를 굴려 대답했다.
“Embryo….”
순간 뽀독뽀독 그릇 문지르는 소리가 뚝 멎었다. 물 흐르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왜지 싶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한영은 얼굴 가득 놀라움과 기대감, 희열 따위가 알록달록 새겨진 재환과 눈이 맞닿았다.
거실 테이블 위로 죽 놓인 DVD 타이틀을 하나씩 집어 올릴 때마다 재환의 입에서 헐, 와, 아, 하는 탄성이 연이어 흘러나왔다. 암스테르담 라이브에 파리 라이브, 거기에 런던 라이브까지. 심지어 맨 끝에 있던 밴드의 맨체스터 라이브 DVD를 눈앞으로 가져갔을 때는 절로 ‘와, 씨!’ 하고 욕에 가까운 소리가 터졌다.
그도 그럴 게 이 DVD로 말할 것 같으면, Embryo의 초창기 시절 한정 수량으로만 발매된 것이라 지금은 해외 사이트에서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가 어려운 물건이었다. 게다가 인터넷에는 당시 공연의 짧은 영상 하나 올라와 있지 않았다. 그 귀한 걸 이리 생각지도 못한 상황, 장소에서 맞닥뜨리니 재환은 그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더 감탄을 터뜨린 후에야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한영에게로 홱 고개가 돌아갔다.
“진짜 이거 다 네 거야?”
“응.”
트럼프 카드 쥐듯 두 손에 DVD를 모아 쥔 재환에게 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이 고스란히 드러난 재환의 표정과 달리 한영의 표정은 조금 미묘했다. 버릇처럼 소파 위로 두 다리를 올려 끌어안고서 재차 DVD를 한 장 한 장 살피는 재환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시 마지막 DVD에 얼굴을 붙인 재환은 고민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것만이라도 한영에게 빌리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나 값비싼 물건인지를 아니 쉬이 부탁의 말이 나가지 않았다. 나 이거 좀 빌릴게. 이건 좀 건방져 보인다. 한영아,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데 하루만 빌려주면 안 될까? 이건 또 너무 비굴하다. 적당히 중간쯤 되는 말을 찾던 때.
“그거 가질래?”
“뭐?”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를 들은 재환의 눈이 이 이상은 커질 수 없을 만치 커졌다. 하도 놀라 입까지 뻐끔히 벌리고서 두 무릎에 턱을 괴고 있는 한영을 바라보았다. 만약 농담으로 던진 얘기라면 전혀 웃기지 않았다. 순간적으로나마 ‘진짠가?’ 하는 생각을 해 버린 저 자신이 퍽 속없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영은 조금의 농담기도 찾아 볼 수 없는 표정으로 재환에게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그거 가져.”
“유한영.”
“난 많이 봤어.”
살짝 눈썹을 찌푸린 재환은 손에 들고 있던 타이틀을 슬그머니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자신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Embryo의, 그것도 한정판 DVD였다. 욕심나지 않는다면 뻔히 속 보이는 거짓말일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한영이 이걸 제게 줄 이유가 없었다. 재환 또한 덥석 받을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그 정도의 염치는 있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올린 재환은 고개를 저었다.
“야, 이런 걸 어떻게 받냐. 그냥 나 이거 하루만 빌려주라.”
대답 대신 몇 번 큰 눈을 깜빡인 한영이 안고 있던 두 다리를 바닥에 내렸다. 슬쩍 몸을 일으켜 테이블 모서리를 돌아 재환의 옆자리로 와 앉았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만큼 한영이 풍기는 달콤한 향도 진해졌다. 동시에 재환은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한영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한 탓이었다. 아니, 사실 줄곧 저런 얼굴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체 알 수 없는 표정인 건 매한가지였다. 그게 지금은 재환의 눈에 전혀 귀엽게 비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한영은 재환에게 통 의미 모를 질문을 던졌다.
“빌려주면 집 가서 볼 거야?”
“어? 그래… 야지?”
“그럼 안 빌려줄래.”
저도 모르게 ‘뭐야’ 소리를 뱉을 뻔한 재환은 꾹 입을 다물었다. 안 빌려주면 안 빌려주는 거지 집 가서 볼 거면 그러겠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거야말로 농담으로밖에 생각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한영의 표정이 그렇지가 않아 재환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니까 오늘 이거 나랑 같이 보자. 그다음에 너 줄게.”
“아니, 왜….”
“응?”
살포시 고개를 옆으로 꺾은 한영이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춰 왔다. 유독 동공이 큰 갈색 눈동자에 재환 자신의 얼굴을 담은 눈부처가 서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소파 뒤, 전면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살이 밝아 그 형상이 더욱 선명했다. 단, 지나치게 밝은 햇빛은 재환의 당황한 표정까지 숨길 수 없게 만들었다. 이래저래 난감해진 재환이 답을 망설이는 사이, ‘응?’ 하며 한영이 답을 재촉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결국 마지못해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실랑이 아닌 실랑이로 괜히 한영과 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재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어코 제 뜻대로 승낙을 받아 낸 한영의 입이 대뜸 활짝 옆으로 벌어졌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 위로 쏙 볼우물이 팼다. 어젯밤 환영회에서 와인 맛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하여 재환은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한영이 몹시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 잠깐 기다리고 있어!”
정말이지 발에 모터를 단 줄 알았다. 언제 은근슬쩍 가까이 다가왔냐는 양 벌떡 일어선 한영은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갔다. 뒤이어 저 멀리서 달그락달그락 뭘 뒤적이는 소리, 위잉 전자레인지 돌리는 소리, 그 안에서 무언가가 퍽퍽 터지는 소리 따위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아침의 사달을 이미 한 번 겪은 터라 재환은 영 마음이 불안했지만, 이번에는 가서 간섭하는 대신 그냥 소파 등받이에 푹 몸을 기댔다. 머릿속으로는 나름 오늘 세워 두고 있었던 일정을 되짚었다.
사실 일정이래 봐야 대단한 건 없었다. 내일부터 아르바이트 첫 출근이었으므로 그 전에 밀린 집안일을 좀 해 둘 요량이었다. 빨래니 청소니 하는 그런 것들. 시간 되면 장도 좀 보고. 그다음에야 뭐 더더욱 뻔했다. 당연히 기타 연습이었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했다지만, 솔직히 말해 어제 첫 합주에서 불안했던 부분이 더러 몇 군데 있었다. 〈I See You〉의 하이라이트에 나오는 연속 스트로크가 조금 불안정했으며, 〈I Miss You〉의 기타 솔로도 한영의 플레이에 맞춰서 살짝 손보고 싶었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제대로 밴드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매일매일 시간 내어 연습하는 건 재환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환은 또 맥없이 픽 웃음이 나왔다. 결국은 이렇게 밴드를 하고 마는구나, 싶었다. 안 한다고 그렇게 같잖은 고집을 부리더니. 이제 와 다른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영 속을 알지 못할 분홍 머리 남자의 노래에,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제 탓이었다.
재환의 감정이 자책과 설렘 사이를 안쓰럽게 갈팡질팡할 즈음, 한영이 무언가 한가득 담긴 쟁반을 가지고 거실로 왔다. 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DVD를 들고 티브이 앞으로 갔다. 재환은 약간의 당혹감이 서린 눈으로 쟁반에 놓인 것들을 훑었다. 빨대 꽂힌 캔 콜라와 팝콘, 감자칩, 오징어포, 그리고 스틱형 소시지 등 한 눈에 봐도 딱 극장에서 즐길 법한 주전부리 종류였다. 다만 조금 전 아침을 먹은 걸 생각했을 때 그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바리바리 준비해 온 놈한테 뭐라고 한마디 할 수도 없어 조금쯤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촥- 소리와 함께 별안간 실내에 어둠이 내렸다. 그새 창문 커튼을 친 한영이 1인용 소파를 지나쳐 자연스럽게 재환 옆으로 와 앉았다.
“틀게.”
“어, 응.”
기다란 손가락이 리모컨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벽 절반을 차지하다시피 한 거대한 티브이 화면에 새카만 실내 공연장의 전경이 떠올랐다. 곧 어마어마한 사운드로 꽉 찰 컴컴한 무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뒤통수. 티브이 양옆에 자리한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어렴풋한 룸 톤과 함께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모든 것이 삽시에 재환으로 하여금 침 꼴딱 넘어가는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자신 또한 화면 속 사람들 사이에 섞여 공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잔뜩 집중한 나머지 영상 비율이 16대 9가 아닌 4대 3이라는 것도, 화질이 꽤나 조악하다는 것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그때, 바짝 긴장한 채 허벅지 위로 올려 두었던 손끝에 머리털이 쭈뼛 곤두설 만큼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화들짝 놀라 시선을 떨어뜨리자 다름 아닌 한영이 내민 콜라 캔이었다. 엉겁결에 캔을 받아 든 재환은 ‘아, 고마워.’ 하며 고개를 들어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티브이 화면에서 새어 나온 공연장의 파란 불빛이 분홍 머리와 새하얀 얼굴, 갈색 눈동자를 온통 푸르스름한 빛깔로 비추고 있었다.
와-! 한순간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재환의 고개가 재빠르게 화면으로 돌아갔다. 환히 켜진 무대 조명, 고막을 찌르는 앰프 노이즈, 두 팔 번쩍 들어 환호하는 사람들. 공연의 시작이었다.
간간이 숨을 들이켜고, 눈을 깜빡이며,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금세 첫 곡이 끝났다. 팝콘으로 손을 가져가거나 콜라에 꽂힌 빨대에 입을 댈 여유조차 없었다. 북엇국을 잔뜩 먹어 배가 부른 게 문제가 아니었다. 영상에서 눈 한 번 뗄 수가 없는데 입이나 손이라고 움직일 수 있을까.
그렇게 곡 하나의 감동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또 다음 곡이 시작되고, 또 그다음 곡으로 이어지는 것의 반복이었다. 차마 정신을 차릴 겨를이 주어지지 않았다.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은 어느덧 쑥 앞으로 나와 티브이 화면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이윽고 마이크 앞에 선 밴드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이 멘트를 하는 타이밍이 되어서야 재환은 겨우 한숨 돌릴 틈을 얻었다. 그래 봤자 혼잣말인지 옆에 앉은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짧은 문장을 작게 중얼거리는 정도였다.
“대박이다, 진짜….”
공연을 볼수록, 들을수록 재환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밴드의 멤버는 고작 세 명뿐인데, 어떻게 저토록 풍부한 사운드가 나는 건지 감탄을 넘어서 경이롭기까지 했다. 따로 세션 맨을 무대에 세우거나 요새 식대로 MR을 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냥 저런 게 실력이고 재능이구나, 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왠지, 지금의 재환은 비슷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한 명 더 알 것 같았다.
“한영아.”
줄곧 곁눈질로 재환의 옆얼굴을 살피고 있던 한영의 고개가 아예 휙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이름을 불러 준 이의 시선은 여전히 티브이 화면에 붙박여 있었다. 조금 기운이 빠져 버린 한영은 다시 얼굴을 제자리로 돌렸다.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영상 속에서는 보컬이 영국식 억양의 영어로 멘트에 한창이었다. 다들 오늘 이 자리에 와 줘서 고맙다, 내 인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다, 최고의 노래를 들려주겠다, 어쩌고저쩌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뻔하디뻔한 이야기였다. 그 순간, 이보다 더 특별할 수 없는 한마디가 일렁일렁 한영의 고막 안으로 물결쳐 흘러들었다.
“나랑 같이 더 멋진 노래 만들어서, 더 멋진 공연 하자.”
이번에는 빗소리가 아닌 음악에 취해 퍽 낯간지러운 말을 뱉어 버린 재환은 지레 민망한 마음을 삭이며 벅벅 뒷목을 긁었다. 빨대로 콜라도 한 번 쪼옥 빨았다. 공연에 집중해 어찌나 캔을 손으로 꽉 쥐고 있었던지 차가웠던 콜라가 그사이 조금 눅눅해져 있었다. 그때까지도 상대에게서는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괜히 더 머쓱해진 재환은 한영에게 툭, 어깨를 부딪쳤다.
“야, 왜 말이 없냐. 사람 민망하게.”
때마침 멘트를 끝낸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잠깐 느슨해졌던 재환의 신경이 빠르게 티브이로 쏠리며, 한 사람이 끝내 입을 떼지 않은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 한 사람이 이제는 곁눈질이 아니라 숫제 타는 듯한 시선으로 저를 보는 것도 모르고 재환은 재개된 공연에 빠져들었다. 본인이 뱉은 말의 무게도 모르고 그저 터져 나오는 소리에 사로잡혔다.
공연 중반부 즈음 다다라서야 재환은 그럭저럭 조금 편한 마음으로 DVD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영상을 보며 한영과 기타 사운드가 죽인다느니 보컬이 장난 아니라느니 수다를 떨 만큼은 아니었고, 중간중간 미지근해진 콜라를 마시거나 팝콘을 먹는 정도였다. 그러다 몇 번 팝콘을 집는 한영의 손과 손가락이 스쳤던 것 같기도 한데 확실치는 않았다. 그러나 그 잠시간의 여유도 단숨에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영상 속에서 재환이 Embryo의 그 어떤 앨범에서도 들은 적 없는 곡의 인트로가 연주되고 있었다. 미발표곡이었다.
우와.
일순 숨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조차 잊은 재환의 입이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헤벌어졌다. 기타 리프 하나, 드럼 박자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감각이 눈과 귀로 몰렸다. 왜 저런 엄청난 곡을 앨범에 싣지 않았는지, 아예 녹음조차 하지 않은 건지 생각해 보는 건 나중의 문제였다. 그냥 지금은 보고 들어야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두근거림이 재환의 가슴을 온통 가득 채웠다.
“…재환아. 그거 알아?”
“뭐?”
무엇보다 놀라운 건, 기존에 익숙해져 있던 밴드의 곡과는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Embryo는 보통 감성적이면서도 기승전결이 확실한 곡을 연주하곤 했는데, 이 노래만큼은 달랐다. 감성적인 건 변함없었지만 시종 반복되는 가사와 멜로디가…. 그래, 마치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뽕 맞은 느낌이었다.
“저 보컬 게이래.”
“응…, 그래?”
한마디로 야릇했다. 노래하는 건지 속삭이는 건지 알 수 없는 보컬의 목소리가 야릇했고, 살짝 아래를 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야릇했으며, 느릿느릿 지판 위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이 야릇했다. 여기에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라색 조명까지 더해져 뭐라 딱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한없이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런 게 바로 노래에 취하는 거구나 싶은 기분이었다.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 것도 이 정도인데 현장의 감동은 어떠했을까. 재환은 감히 가늠도 되지 않았다.
“Castle Pride 기타리스트랑 사귄 적도 있대.”
“아, 몰랐네….”
템포 60도 채 되지 않는 느린 박자를 따라 천천히 재환의 상체가 앞뒤로 움직였다. 고개도 함께 까딱거리며, 오른손으로는 반복되는 기타 리프의 피킹을 흉내 냈다. 누가 보면 딱 정신 놓은 놈으로 보이기 쉬운 모습이었으나, 지금 그런 게 뭐 대수랴. 오늘 하루 종일 저 노래만 듣고 있으라 그래도 재환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
“…뭐가?”
“저 보컬 게이인 거.”
“아, 뭐. 응.”
다만 내심 옆에서 한영이 자꾸 말만 걸지 않으면 좋겠다 싶었다. 다른 노래가 나올 때야 크게 상관없었지만, 이 노래는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으니 대답하는 자신의 목소리마저 방해처럼 느껴졌다. 오롯이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려 재환은 아예 두 눈을 꾹 감았다. 시야에 장막이 덮이자 고막을 울리는 소리가 한층 증폭되어 덩달아 심장까지 쿵쿵쿵 울리게 했다. 재환은 속절없이 노래에 빠져들었다.
“재환아.”
“……응….”
바로 곁에서 불린 제 이름에 재환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웅얼거렸다. 그때,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있던 눈꺼풀이 번쩍 위로 들쳐졌다. 동시에 타의에 의해 천천히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의지와 상관없이 화면에서 멀어진 시선이 저를 순식간에 현실로 끌고 나온 남자의 얼굴을 향했다.
그제야 재환은 제 한쪽 볼을 감싸고 있는 게 한영의 손바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면으로 마주한 그의 눈빛이 어딘가 조금 낯설게 보인다는 것도. 분명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야릇한 빛깔의 조명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리 곡에 취해 있었다지만 그쯤의 판단은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다음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뺨에서 여전히 손을 떼지 않은 채 슬쩍 눈을 내리뜬 한영의 시선이 얼굴 한곳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눈이나 코가 아닌 더 아래쪽이었다. 그것이 자꾸 재환의 입 안을 바짝바짝 마르게 했다. 한영에게 특이한 구석이 있다는 건 이제 와 새삼 상기할 필요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건 좀 많이 이상했다. 불쑥 옆에 와 앉거나 대뜸 손목을 잡는 것과는 비교 선상에 둘 수 없는 행동이었다.
“너 뭐 하….”
…냐. 마지막 한 글자가 스르르 맞닿은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눈에 초점도 잡히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금세 멀어지는 희멀건 얼굴이 비쳤다. 가느다란 머리칼이 이마를 간지럽히는 감각과, 서로의 코끝이 스치는 느낌, 그리고 입술에 내렸던 몰캉한 감촉이 뒤늦게 와르르 쏟아졌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숨 한 번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바짝 굳어 있는 재환의 입술에 또 부드러운 살결이 닿았다 떨어졌다. 이번에는 쪽, 하는 소름 돋도록 간지러운 소리까지 울렸다. 다행인지 다행이 아닌 건지, 스피커에서 흐르는 노래와 연주에 그 소리가 묻히는 일은 없었다.
뺨을 감싸고 있던 커다란 손이 미끄러지듯 목덜미로 옮겨 갔다. 천천히 얼굴이 앞으로 당겨진 재환의 입술에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인 한영의 붉은 입술이 다시금 와 닿았다. 동시에 뾰족한 코가 왼뺨을 찔렀다. 그다음 떨어졌던 입술이 닿았을 때는 오른뺨이 찔리고, 또 그다음에는 왼뺨이, 그러다 다시 오른뺨이…. 더는 횟수를 셀 수 없었다. 거기까지 미처 재환의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 촉, 초옥. 물기 섞인 마찰음만이 쉴 새 없이 반복되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재환이 인지할 수 없는 행위가 잠시 멎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허벅지는 어느덧 딱 붙은 채였고, 입술이 떨어졌음에도 서로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속눈썹이 스칠 듯한 거리에 있었다. 그사이에도 손바닥으로 뒷덜미를 감싼 상대방의 엄지 끝이 뭉근하게 귓불을 매만져 왔다. 반사적으로 어깨는 흠칫흠칫 떨리는데,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처럼 뻣뻣이 굳은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나마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당황을 드러냈으나 상대에게 거부로 비치기에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다.
이상한 방식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불필요한 열을 피워 내던 손이 재환의 목덜미를 겨우 자유롭게 해 주었다. 지금이라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든, 한영을 밀어내든 무어라도 해야 하건만 미처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 양어깨가 붙잡혔다.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또렷또렷한 얼굴이 재차 가까워졌다. 이러다 또 입술이 닿을 것이다.
…뭐지?
재환은 보다 넋 나간 얼굴로 하도 크게 뜨고 있어 이제 뻑뻑하기까지 한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래 봤자 시야에 들어오는 건 사락사락 이마를 스치는 분홍 머리칼과 꾹 닫힌 눈꺼풀 아래 매달린 속눈썹뿐이었다. 분명 방금 무언가가 입술의 살갗을 건드렸는데, 아까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감촉이었다. 더 물컹하고, 뜨거웠으며, 축축했다.
꼭 인형의 것을 떼어다 붙여 놓은 듯 기다란 속눈썹이 한 번 파르르 떨리더니 위로 올라갔다. 그 아래 감춰져 있던 갈색 눈동자가 절대 피할 수 없는 거리에서 뜨거운 건지 차가운 건지 모를 시선을 보내왔다. 어쩌면 재환 자신이 판단을 못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잠시.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눈동자가 다시 하얀 눈꺼풀 아래로 감춰지며, 또 한 번 무르면서도 촉촉한 감각이 입술에 닿아 입과 입 주변 근육을 움찔거리게 했다. 혀였다. 한영의 혀가 조심스럽고도 찬찬하게 입술을 핥고 있었다. 재환의 당황이 커졌다.
커질 대로 커진 당황이 머리가 새하얘지는 충격으로 뒤바뀔 즈음, 굳은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고 억 소리가 날 만큼 우악스러운 힘은 아니었다. 한데도 재환의 상체는 한영이 미는 대로 손쉽게 슬슬 뒤로 넘어갔다. 넘어가고 넘어가다 소파 좌방석에 등이, 팔걸이에 뒤통수가 닿았다.
소파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걸려 있던 티브이 리모컨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깔린 러그 위로 떨어졌다. 버튼이라도 잘못 눌린 건지, 안 그래도 어느 시점부턴가 재환의 귀에 잘 들어오지 않던 밴드의 음악이 이제는 아예 음 소거가 되어 버렸다. 그사이에도 화면 속 연주는 계속되어 재환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영의 얼굴 절반을 무대 조명과 같은 보랏빛으로 비추었다. 사위가 끔찍이도 고요한 가운데 그 빛만이 번쩍번쩍 흐려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잘 나오던 연주가 뚝 끊겼든, 그래서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든 한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영 불편한 모양새로 걸쳐져 있던 재환의 두 다리까지 친히 소파 위로 올려 준 후 저는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재환은 완벽히 한영 아래 갇혀 눕혀진 자세가 되었다.
짧은 머리칼이 흩어진 팔걸이 양옆을 두 팔로 짚은 한영이 보다 상체를 아래로 숙였다. 재환의 코끝에 자신의 코를 갖다 대고서 장난치듯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딱히 누구의 것이 더 뾰족하다 하기 어려운 두 개의 코가 거듭 맞비벼졌다. 이를 몇 번 더 반복하다 한영은 슬쩍 혀를 내어 다시 재환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뒤이어 윗입술도 한 번 핥았다. 할짝대는 소리가 유독 컸다. 이윽고 한영은 저로 인해 촉촉이 젖은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맞물렸다.
이미 한참 전부터 벙긋하게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몰캉한 혀는 쉽게도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 행위가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는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재환의 혀를 찾아 감았다. 부드럽게 비비고 문질렀다. 그러다 쪽쪽 입술을 빨아올리고, 다시 혀를 넣었다. 작고 뜨거운 살덩이가 한데 뭉쳐지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겹쳐진 네 개의 다리가 부스럭거리며 얽히고, 소파가 미세하게 삐거덕거렸다. 호흡이 밭아졌다. 나도 같이 움직였나? 잘 모르겠다. 지금의 상황도 파악이 안 되는데 그런 걸 판단할 정신이라고 있을까. 그저 재환은 몸이 뜨거웠다. 입술만이 아니라, 뜨거워지면 안 될 곳까지 함께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게 어디냐면….
헉!
순간 재환은 맞닿아 있던 한영의 가슴팍을 왼손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오른손으로는 헐렁한 바지춤 안으로 들어온 손목을 다급히 붙들었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상대를 떨어뜨리고서,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소파를 등진 채 급히 바지를 추어올린 후, 얼얼한 혀를 겨우 움직여 가까스로 짧디짧은 문장을 만들어 냈다.
“나, 그만 갈게.”
재환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닥을 박찼다. 박차고 또 박찼다. 그러다 숨을 한 번 몰아쉬었을 때는 티브이 불빛과 어둠이 어지럽게 뒤엉킨 거실을 벗어난 후였고, 또 한 번 몰아쉬었을 때는 어깨에 기타 가방을 메고 있었다.
페달 보드 가방까지 쥐고 내달리듯 쿵쾅쿵쾅 복도를 가로지른 재환은 현관에 놓인 운동화로 두 발을 끼워 넣었다. 뒤축을 마구잡이로 구겨 신고 문밖으로 나서자 등 뒤로 쿵, 육중한 철문이 도로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눈이 시릴 만큼 쨍한 햇살이 정수리로 떨어졌다.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재환은 호흡을 골랐다.
조금씩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불안하게 오르내리던 가슴팍도 점차 가라앉았다.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긴 재환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불과 몇 시간, 아니, 몇 분 전까지 이 두꺼운 문 너머에서 느꼈던 설렘이 거짓말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커튼 쳐진 전면 창 뒤편에서 일어났던 일만이 떠올라 기껏 고른 숨을 다시금 어긋나게 했다.
정원을 반으로 가르는 돌길 위로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기타 가방 때문인지, 정말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고 있기라도 한 건지 거실을 박차고 나왔을 때와 달리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고개는 자꾸만 뒤로 돌아가려 했다. 그럴수록 이를 악문 재환은 시린 눈을 끔뻑이며 열심히 대문을 향해 걸었다. 아마, 이 길을 밟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파에 반쯤 걸터앉은 한영은 벽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현관 쪽을 멍하니 응시했다. 쾅, 문소리가 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꼼짝할 수 없었다. 저 문을 열고 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올 리 없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에야 천천히 고개가 움직였다.
현관과 마찬가지로 지금 앉은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부엌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그곳에서 한영은 제 앞치마를 빼앗아 보글보글 북엇국을 끓이던 재환을 보았다. 이어서 조금 위쪽을 향한 눈에 담기는 건 2층 자신의 방에서 두 손가락을 열심히 놀리며 젓가락 행진곡을 치던 재환이었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자, 지하 합주실 가운데 앉아 잔뜩 집중한 얼굴로 기타를 치던 재환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영은 방금까지 재환이 앉아 있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참아야 했다. 같은 바디 워시를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재환이 곁에서 달큼한 향을 흘려도, 그러면서 눈길 한 톨 주지 않아 자신을 안달 나게 해도 지난밤 잠든 그에게 몰래 입 맞춘 것으로 끝내야 하는 거였다. 더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그 노래 너무 좋은 것 같아. 비 같은 노래야.’
‘나랑 같이 더 멋진 노래 만들어서, 더 멋진 공연 하자.’
새빨개진 눈으로 더는 재환이 없는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한영은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위로 창백해진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찾아오는 건 그 어떤 소음보다 끔찍한 침묵이었다. 그 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한영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홍색 설렘, 하늘색 두근거림, 노란색 떨림 따위로 가득 찼던 가슴이 시꺼먼 후회로 물드는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다.
* * *
집에 오자마자 재환은 일단 화장실로 달려갔다. 양치질하고, 씻고, 익숙한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그나마 티끌 같은 안정감이 찾아왔다. 입고 있던 해괴한 색깔의 옷은 좁은 다용도실에 있는 통돌이 세탁기 안으로 던져졌다. 당장은 저걸 버려야 할지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지 아무 판단도 서지 않았다.
있으나 마나 한 커튼을 치고 어둑한 방구석에 놓인 매트리스로 털썩 엎어졌다. 낡은 스프링이 있는 대로 삐걱거리며 아주 요란한 소리를 냈다. 푹신하지도, 포근하지도 않은 매트리스 위에서 재환은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원래 낮잠을 즐기는 편도 아니었을뿐더러 지난밤은 지나치게 푹 잤으니 잠이 올 리 없었다. 제발 이대로 그냥 잠들어 버리고 싶은데, 그럴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결국 멀뚱멀뚱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군데군데 누렇게 비 샌 흔적이 새겨진 벽지의 얼룩을 시선으로 덧그리다가, 핸드폰으로 아무 음악이나 틀어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그마저도 옆집 사는 고시생이 쾅, 벽을 치는 바람에 그만두어야 했다. 어째 자신 주변에는 예민하고 이상한 놈들만 있는 것 같아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워 그저 숨만 쉬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이, 커튼 틈으로 좀스럽게 새어 들어오던 빛이 어느덧 껌껌하게 사그라들었다. 한 것도 없는데 밤이 된 모양이었다. 밥은 당연히 걸렀고, 청소? 빨래? 물론 하지 않았다. 기타 연습?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기타를 잡을 리가. 당장 기타를 꺼내 봤자 떠오르는 건 몇 날 며칠 죽어라 연습한 곡일 테고, 그러면 또 생각이 괜히 애먼 곳으로 흘러갈 게 분명했다. 당분간은 여러 가지 의미로 기타를 멀리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러다 2년 전, 당시 하던 밴드에서 탈퇴했을 때도 기타부터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놓았던 걸 떠올린 재환은 안 그래도 우울하던 기분이 저 끝까지 가라앉았다. 그때는 한 이삼일 갔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또 며칠이나 가려나. 이대로 아예 기타를 안 치게 된다면…. 뭐,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키스 한번 잘못해서 밴드에서 나왔었네.
따위의 하등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려 눕는 찰나 배에서 꼬르륵, 눈치 없는 소리가 울렸다. 매트리스 옆으로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켠 재환은 부스럭부스럭 몸을 일으켰다. 마치 시위하듯 낑낑거리는 스프링 소리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딱딱한 벽에 등을 기대앉고서 재환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뭘 먹어야 하나. 먼젓번 먹다 남은 된장찌개가 아직 냉장고 안에 있기는 했으나, 문제는 밥이 없었다. 이미 시각은 한밤중이었고, 지금부터 쌀 씻고 밥하느니 그냥 굶는 게 나았다. 다른 날이라면 몰라도 오늘은 그렇게까지 부지런 떨고 싶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그러면.
30분쯤 지났을까. 띵동, 현관 벨 울리는 소리에 재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안 남은 현금을 탈탈 털어 계산을 마친 후 뜨끈한 피자 박스를 들고 앉은뱅이책상으로 갔다. 책상 앞에 앉기 전, 냉장고 깊숙한 곳에 넣어 놓고 아껴 두었던 맥주도 꺼내 왔다. 남들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재환에게는 더없이 호화로운 저녁 한 상이었다.
넓적한 박스 뚜껑을 열자 안에서 노릇노릇 먹음직스러운 불고기 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조각을 집어 든 재환은 주저 없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마치 티브이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치즈가 주욱 늘어나는 게 씹어 삼키기도 전 벌써 피자가 맛있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한 입을 먹고, 두 입을 먹어도 눈으로 보는 것만큼 피자가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분간 식비를 줄여야 함을 알면서도 호기롭게 시킨 건데, 피자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맛이 없었다. 이건 재환의 계획과 전혀 달랐다. 지금 이 피자를 맛있게 배불리 먹어야 재환은 좀 기분이 나아질 수 있었다.
반나절을 누워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재환은 어젯밤 자신이 속없이 피자와 치킨에 넘어갔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디서도 받아 본 적 없는 환대에 홀랑 넘어가, 상대가 제게 무엇을 하든 멍청하게 가만두고 만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환은 미친 듯이 속이 버글버글 끓어올랐다.
이것저것 시켜 주고, 비싼 와인도 좀 따 주면 그런 이상한 장난쯤 쳐도 된다고 여긴 건가? 그래서 DVD도 준다고 한 건가? 내가 무슨 거지야?
뒤늦게 터진 화를 삭이듯, 재환은 맛도 없는 피자를 씹고 또 씹었다. 입에 있는데도 욱여넣고, 목이 막히면 꿀꺽꿀꺽 맥주를 마셔서 억지로 삼켰다. 그러다 찔끔, 아주 살짝 눈물이 나왔다. 아무리 피자가 맛없어도 그렇지 또라이도 아니고. 당황한 재환은 코를 훌쩍이며 기름기도 닦지 않은 손으로 벅벅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러자 이제는 애써 숨겨 뒀던 속마음이 툭툭 튀어나와 그를 괴롭혔다.
아직 이름도 없는 그 밴드가, 사실 재환은 너무도 하고 싶었다. 처음 태군이 보내 준 노래를 들은 순간부터 그랬다. 이제 밴드 따위 하지도 않을 거라는 나름의 다짐이 맥없이 뒤집힐 정도로, 재환은 고막에 담긴 멜로디와 목소리에 한순간 사로잡히고 말았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경험이었다.
물론 보컬이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예민한 건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 정도쯤 기실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이쪽도 썩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닌지라 첫 합주가 어이없이 끝나고서는 꽤나 성을 냈지만, 따지고 보면 이전 밴드에서는 더한 일도 당했었다. 아닌 말로 녹음한 트랙을 몰래 바꿔치기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멤버가 될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잠을 줄이고, 밥 먹을 시간을 줄였다. 무모한 짓인 줄 알면서도 거금 들여 새 페달도 샀다. 그리고 어제의 합주 후 마침내 밴드의 멤버로 받아들여졌을 때, 재환은 내 인생에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멋대로 쭉쭉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까지 했다. 이 친구들과 함께 밴드 이름도 짓고, 공연도 하고, 앨범도 내는 그런 상상.
하나 다 허망한 꿈 같은 생각이었다. 숫제 어제부터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 자체가 재환에게는 다 꿈 같은 거였다. 너무 달콤해서 깨기 싫었는데, 알고 보니 개꿈만도 못한 꿈이었다.
“씨발….”
결국 참고 참던 욕이 터졌다. 눈물도 함께 터졌다. 한 손에는 맛대가리 없는 피자, 한 손에는 씁쓸하기만 한 맥주를 쥐고서 재환은 병신처럼 훌쩍훌쩍 울었다. 저 자신도 왜 이렇게 서러운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남들 다 눈물 펑펑 쏟는다는 영화를 보고도 좀체 우는 일이 없던 재환이었다. 마지막으로 울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그래 봤자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변명도 되지 못했다.
이왕 꼴사납게 울기 시작한 거, 차라리 속이라도 좀 시원해지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않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칠수록, 넘어가지도 않는 피자를 억지로 씹을수록 어른어른 눈앞에는 단 하나의 형상만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분홍 머리가 떠올랐다.
절반쯤 남은 피자 조각을 눅눅하게 기름 먹은 상자에 내던진 재환은 빈 맥주 캔을 와작 찌그러뜨렸다. 대충 휴지로 손을 닦고서 옆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 고민 없이 메신저 앱을 켰다. 쓸데없이 즐겨찾기까지 걸어 둔 이름을 누른 후 빠른 속도로 타자를 눌렀다. 짧은 문장을 완성해 전송 버튼을 누르기까지는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화면 끈 핸드폰을 내려놓기 무섭게 벨 소리가 울렸다. 받지 않았다. 겨우 시끄러운 소리가 멈추는가 싶더니 또 울렸다. 또 안 받았다. 세 번째로 벨이 울렸을 때는 옆집 고시생이 쾅! 벽을 쳤다. 이번에는 재환도 지지 않았다.
“어쩌라고, 이 씨발 새끼야!”
똑같이 벽을 한 번 쾅, 발로 차 준 재환은 전원 끈 핸드폰을 매트리스 위로 던졌다. 저 또한 비슷한 모양새로 핸드폰 옆에 엎어졌다. 베개에 푹 얼굴을 파묻으며 속으로는 거듭 같은 말을 되뇌었다. 꿈이다. 다 개꿈이다. 난 개꿈을 꾼 거다. 내일이면 잊을….
* * *
오늘은 해가 서쪽, 아니, 북쪽에서 떴나. 잠에서 깨자마자 영 익숙지 않은 풍경을 맞닥뜨린 재환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엉뚱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과거 북동향이라는 집주인의 말에 속아 냉큼 계약했던 집은 나중 보니 완벽한 북향이었다. 따라서 계절이 어떻든 간에 내부로 해가 드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침부터 집 안이 제법 훤했다. 그렇다고 누구 방처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또렷또렷 보일 정도는 아니었고, 그나마 형광등이나 스탠드를 켜지 않고 버틸 만한 정도였다.
하루의 시작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한 번 쭉 기지개를 켠 재환은 핸드폰 전원부터 켰다. 아니나 다를까 대기 화면으로 접어들기 무섭게 그 위로 온갖 부재중 전화 표시와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물론 발신인은 장태군 한 사람이었다.
슬쩍 미리 보기로 확인한 메시지의 내용은 대충 ‘갑자기 왜 그러는데’에서 시작해서 ‘야이서재환씨발놈아’로 끝났다. 대뜸 이쪽에서 먼저 밴드 못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으니 태군이 저리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답을 보내는 대신 푸르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재환은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태군의 욕설 가득한 메시지에도 큰 변화가 없던 재환의 표정이 이윽고 어젯밤 내팽개쳐 놓았던 피자 박스를 발견한 순간 슬그머니 구겨졌다. 박스에는 피자가 반도 넘게 남아 있었다. 아깝게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재환은 밤새 바짝 마른 피자를 꼼꼼히 비닐봉지에 나눠 담아 냉장고 냉동 칸에 넣었다. 물론 반쯤 먹다 남은 피자 조각 하나는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갔다.
지난밤의 흔적을 얼추 정리한 재환은 내처 현관 옆에 고대로 두었던 기타 가방에서 기타도 꺼내 제자리에 놓았다. 며칠 멀리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했지만 사실 기타에는 죄가 없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을 담아 반질반질한 헤드를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이후 상쾌하게 씻고, 간단하게 아침도 해결하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재환은 옷장 앞에 섰다. 그러나 옷장 안을 뒤적이기도 전 낯빛이 허옇게 질리고 말았다.
내 셔츠. 내 바지.
한영의 집에서 꼴사납게 줄행랑을 치느라 정작 입고 갔던 옷을 챙기지 못한 게 이제야 생각났다. 하긴 좀 급하게 달음박질쳤었어야지. 그 와중 악착같이 기타와 페달을 챙긴 게 다 용하다 싶었다.
어쨌거나 재환은 퍽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셔츠야 그렇다 쳐도 바지를 두고 온 게 크나큰 문제였다. 재환이 한영의 집에 놓고 온 검정 바지는 다름 아닌 오늘 카페에 출근해서 입어야 할 옷이었다. 셔츠는 카페 측에서 준비한다고 하여 이쪽은 바지만 가져가면 되었는데, 그게 또 하필이면 검정 바지였던 것이다. 물론 재환의 옷장에 널리고 널린 게 검정 바지이기는 했다. 당장 입고 이불 안으로 들어가도 될 만큼 편한 추리닝 바지들이라 그렇지.
이것으로 또 생각지도 못하게 돈 나갈 일이 생겨 버린 재환은 아씨…, 하고 한숨도 욕도 아닌 소리를 길게 뱉었다.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놓인 시계를 확인하니 다행히 아직 출근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서두르면 어디서 바지 하나 살 시간은 될 것 같았다. 여유가 없는 건 통장 잔고뿐이었다. 이번에는 보다 한숨에 가까운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 나갔다.
“제가 오늘 오빠 교육 담당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저도 잘 부탁해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꾸벅이는 상대를 따라 재환도 같이 고개를 꾸벅였다. 이왕 미소도 함께 지어 주면 좋았으련만, 적잖게 속이 쓰려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말 편하게 하세요!’라는 말에 ‘아니에요.’ 대답하면서도 자꾸만 신경은 지금 입고 있는 바지로 쏠렸다.
자그마치 십만 원이었다. 딱 바지 한 벌 샀을 뿐인데 체크 카드를 긁는 순간 통장에서 빠져나간 돈이 십만 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만구천 원이었지만 그거나 저거나. 급한 대로 들어갔던 카페 근처의 캐주얼 브랜드 매장이 그렇게 금액대가 있는 곳인 줄 재환은 미처 몰랐다. 그래 봤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출근은 해야 하지, 검정 바지는 필요하지. 울며 겨자 먹기로 사는 수밖에. 이게 다 멀쩡한 바지를 남의 집에 버리고 온 자신의 탓이었다.
“일단 오늘은 메뉴랑 포스 다루는 것부터 익힐게요.”
일하는 데 하등 도움 되지 않는 구질구질한 상념을 애써 지워 내며 재환은 앞에 놓인 카운터 포스 기계로 시선을 내렸다. 화면에 빽빽이 자리한 카페 메뉴 중 그나마 재환이 알 만한 건 아메리카노나 라테 정도였다.
“이게 지금 저희 파는 메뉴예요.”
“아, 네.”
“아이참, 오빠. 말씀 편하게 하시래두!”
희연이라 그랬나. 오늘 하루 재환에게 일을 가르쳐 줄 아르바이트생은 웃음도 많고 성격도 밝아 보이는 게 상당히 붙임성이 좋은 친구 같았다. 재환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영 멋대가리 없는 그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저런 친구한테 일을 배워야 접객도 금방 늘 수 있을 터였다. 일단은 희망 사항이었다.
재환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큰 눈을 반짝이는 희연에게 ‘응, 그럼 말 편하게 할게.’라고 답했다. 그러자 희연이 ‘네, 오빠!’ 하며 아예 눈이 사라질 정도로 방글 웃었다. 이번에도 무표정으로 반응하는 건 좀 아닌 듯해 재환 역시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헤헤 소리를 내며 더 광대를 부풀리고 웃은 희연이 포스에 적힌 메뉴를 요목조목 짚어 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맨 위에는 커피 종류구요, 그 밑에는 커피 아닌 음료, 또 밑에는 디저트예요. 커피는 위에가 안 단 거, 아래쪽이 단 거 순서예요.”
희연의 말을 경청하며 재환은 가져온 수첩에 필요한 부분을 꼼꼼히 메모했다. 설명하는 틈틈이 희연이 그 모습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러다 재환이 수첩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면 다시 냉큼 포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럴 때마다 지금이 일하는 중이라는 것도 잊은 희연의 심장이 주책맞게 쿵쾅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희연은 왜 우리 카페만 이런 시커먼 옷을 입느냐며 사장인 세훈에게 볼멘소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게 다 사장님의 큰 그림이었다. 안 그래도 왜소한데 꺼멓게 입으면 더 작아 보이는 저와 달리, 올 블랙으로 입은 재환은 느낌 자체가 달랐다. 어떻게 다르냐면….
‘아, 진짜 멋있다….’
재환이 재차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 틈을 타 희연은 재빨리 손부채질 했다. 보나 마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 뻔했다. 슬쩍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얼굴을 비춰 보려는데,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컵을 정리하던 상지와 눈이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씩 웃은 상지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희연은 기겁하며 눈을 부라렸다. 다행히 아직 재환은 수첩에 코를 박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필기하는지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과 손등에는 푸릇푸릇 핏줄까지 돋아났다. 무얼 저리 집중하여 적나 또 쓸데없는 궁금증이 도져 재환의 수첩으로 쭉 고개를 빼는 찰나, 재환이 번쩍 얼굴을 들었다.
“미안, 다 적었어. 설명 계속해도 돼.”
“아, 응…. 네, 아니, 네!”
옆에서 키득키득 상지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또 한 번 흘깃 눈을 부라려 준 희연은 흠흠 헛기침한 후 포스 화면을 손으로 짚으며 설명을 이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기 맨 아래쪽이 디저트인데요, 저희는 커피가 주메뉴라 디저트는 요거 둘밖에 없어요. 완전 편하죠? 다른 카페에서 일하는 제 친구는 맨날 샌드위치 만드느라 죽겠대요. 샌드위치는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팔면 될 텐데. 으으.”
정말로 끔찍하다는 양 희연이 입술 끝을 죽 늘어뜨리고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으로 카페에서 파는 메뉴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는 재환은 그저 ‘아, 응.’ 하고 짧게 대꾸했다.
잠깐 옆에서 지켜본바, 희연은 발랄한 성격만큼이나 조잘조잘 말이 꽤 많은 편이었다. 그런 희연에게 지금처럼 계속 같은 대답만 들려주려니 재환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 오빠가 참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듯했다.
“아, 근데 저희 카페 자허토르테랑 비넨슈티히는 진짜 맛있어요. 이따 휴식 시간 때 하나 드릴게요. 사장님의 사모님? 아니, 사장님의 사장님인가? 암튼 전문가가 만든 건데 먹으면 완전 개안하는 맛이에요!”
이래저래 아리송한 희연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한 재환은 그녀가 가리키는 쇼케이스로 시선을 돌렸다. 한쪽에 있는 건 초코케이크, 다른 한쪽에 있는 건 아몬드 케이크 같아 보였는데, 희연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이 전부 낯설어 어느 게 어느 것인지 당최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건 둘 다 상당히 달 거라는 점 정도였다.
“아, 오빠. 근데요, 혹시 밴드 하세요?”
희연에게 발음도 어려운 케이크 이름을 다시 물으려는 순간, 수첩 위에 대고 있던 재환의 펜 끝이 삐끗 어긋났다. 기껏 지금까지 열심히 적은 내용 위로 주욱 검은 줄이 가자 자연스레 미간에도 금이 그어졌다. 어떻게 보아도 언짢은 기색이 확연한 표정은 질문을 꺼낸 상대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어, 아니, 그게…. 사장님이 오빠 밴드 한다고 하셔서….”
멋진 오빠랑 좀 친해져 보려다 도리어 불편한 분위기만 조성해 버린 희연은 속으로 ‘바보!’를 외쳤다. 항상 자신은 이게 문제였다. 괜한 오지랖과 알은체. 그리고 재환은 그런 걸 어지간히도 싫어하는 눈치였다. 점수를 따도 모자랄 판에 안 좋은 인상만 팍팍 심어 준 것 같아 시무룩해진 희연은 괜히 포스 기계를 만지작거렸다.
“방금 말해 준 케이크 이름이 뭐였지?”
“예…?”
눈을 내리깐 채 꾹꾹 포스 화면을 누르던 희연의 고개가 다시 휙 옆으로 돌아갔다. 새 페이지로 수첩을 넘긴 재환은 이미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자허토르테랑 비넨슈티히요.”
희연이 엉겁결에 답하자 재환이 ‘자허토르테랑 비넨슈티히….’ 하고 케이크 이름을 천천히 따라 하며 수첩에 적었다. 자못 진지해 보일 뿐 그다지 화난 티가 나지 않는 재환의 표정을 보며 희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밴드 하냐는 질문을 아예 못 들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나 밴드 안 해.”
“네?”
“그냥 기타만 쳐. 취미로.”
일순 재환에게 답할 말을 찾지 못한 희연은 ‘아….’ 하며 머뭇거렸다. 때마침 남녀 커플 손님이 카운터로 오는 바람에 둘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주문을 끝낸 커플이 다시 자리로 돌아간 후에도 재환이나 희연, 누구 하나 다시 밴드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돈을 아끼는 건 아끼는 거고, 흡연은 흡연이었다. 그제부로 금연 따위 완벽히 포기한 재환은 집 앞 가로등 밑에서 담배 하나를 시원히 태웠다. 역시 조금 피곤할 때 피우는 담배는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친히 가져다 놓은 커다란 사각 깡통에 꽁초를 버리고서 낡디낡은 연립 주택 입구로 들어섰다.
건물 외관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낡은 계단에는 각종 전단지와 쓰레기들이 계단참 구석마다 쌓여 있었다. 전에는 가끔 재환이 마음먹고 치우기도 했으나, 금방 또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중에는 그냥 그만두었다. 건물 자체가 원체 허름하여 쓰레기 좀 치운다고 크게 티가 나지도 않았다.
복도에 놓인 말라붙은 화분 몇 개를 지나쳐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익숙한 철문 앞에 다다랐다. 큼지막하게 캐주얼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을 옆구리에 낀 재환은 뻑뻑한 자물쇠 안으로 열쇠를 밀어 넣었다. 열쇠가 마모된 건지 자물쇠가 문제인 건지 열쇠는 잘 돌아가지 않았다. 요즘 들어 영 불안하다 싶었는데, 안 그래도 쪼들리는 상황에서 문까지 고장 나면 참 답도 없었다.
몇 번 더 열쇠를 흔들어 본 재환은 아예 쾅, 발로 문 위를 걷어찼다. 한 번 더 차려 발을 뒤로 당기는 찰나, 막 옆집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는 고시생과 눈이 마주쳤다. 밤낮 없는 공부에 지친 건지 커다란 안경을 쓴 고시생은 그새 사람이 더 핼쑥해져 있었다. 어제의 일도 있고 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 재환은 ‘안녕하세요.’ 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하지만 고시생은 재환의 인사를 받아 주기는커녕 말도 없이 도로 후다닥 문 안으로 사라졌다.
뭐야. 재환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도 가끔 얼굴 보면 인사는 하는 사이였건만, 상대는 이제 그마저도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이참에 아예 시끄럽다 찾아오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재환은 이제야 조금 수월히 움직이는 열쇠를 옆으로 돌렸다.
집이라 부르고 실상은 조금 큰 방에 가까운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재환은 매트리스 위에 대자로 뻗었다. 아직 밤이 된 것도 아닌데 아침만 해도 그럭저럭 밝았던 집은 평소와 다름없이 한밤중처럼 어두컴컴했다. 이대로 그냥 눈 감고 자 버리면 딱 좋겠지 싶었다. 하지만 카페 모카니, 카페 마키아토니, 카페 비엔나니 서로 그게 그거 같은 이름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녀 그럴 수도 없었다. 커피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재환에게는 그 어떤 코드나 주법보다도 어렵게 느껴지는 명칭들이었다. 그러니 고작 몇 시간 일했는데 느껴지는 피로감이 적지 않았다. 육체노동만 많지 않다뿐이지 역시나 카페 아르바이트는 허투루 볼 게 아니었다.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킨 재환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일하는 중 아예 무음으로 해 놓았던 핸드폰에는 예상대로 무시할 수 없는 양의 연락이 쌓여 있었다. 이번에도 몇 개의 광고 문자를 제외하면 발신인은 죄 한 사람이었다. 재환은 어느 하나 누르지 못하고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렇게 태군의 연락을 피하고 모른 체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건 재환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심지어 먼저 밴드 못 하겠다는 말을 통보하듯 꺼내고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하나 재환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 단순한 까닭에서였다.
말할 수 없었다. 니네 밴드 보컬이랑 키스했다고. 그래서 밴드 못 하겠다고.
피식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이유였다. 차라리 서로 쌍욕을 해 대며 드잡이라도 했다는 게 나았다. 무엇보다 재환은 굳이 한영과의 일을 입 밖으로 내어 당시 상황을 상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하룻밤 푹 자며 애써 기억 저편에 묻은 일이었다.
핸드폰 화면이 꺼지면 다시 켜고, 꺼지면 또다시 켜기를 수차례 반복했을 즈음, 종렬로 쌓인 메시지 위로 새로운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재환아 제발연락좀해줘라]
메시지를 확인한 재환의 눈썹 사이가 푹 좁혀졌다. 내용보다는 발신자가 그를 부르는 낯선 호칭에 원인이 있었다. 영 답지 않은 친구의 행동이 쿡쿡 양심을 찔렀다. 후, 한숨을 내쉰 재환은 머뭇거리던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끝내 메신저 창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지난밤부터 와 있던 메시지를 차례로 읽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왜 밴드를 못해?]
[무슨 일 있어?]
[야 전화받아라]
[장난하냐 지금]
뒤로는 개새끼, 소새끼니 존나, 씨발이니 하는 욕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상소리가 난무하는 메시지에도 스스로 한 일이 있어 기분 나빠 할 주제가 되지 못하는 재환은 거듭 긴 숨을 뱉었다. 더는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는 친구를 피 마르게 할 수 없었다. 벌떡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몇 되지 않는 걸음에 창가로 가 선 재환은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채 신호음이 가기도 전, 힘 빠지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이름 두 글자를 부르는.
- 재환아.
“미안.”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사과였다. 그것이 도리어 재환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대의 입을 다물리게 했으나, 재환으로선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연락을 무시해서 미안했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서 미안했으며, 결론적으로는 밴드를 같이 하지 못하게 되어 미안했다. 한참 후에야 태군의 답이 돌아왔다.
- 이게 갑자기 말이 되냐? 합주 다 해 놓고?
당연히 말이 안 되었다. 이쪽이 생각하기에도 퍽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태군은 오죽할까. 그렇다고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재환은 창 아래로 보이는 좁고 남루한 골목만큼이나 궁상맞은 변명을 주섬주섬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까 시간이 안 되겠더라고. 나 알바 시작했잖냐. 그리고 밴드 하면 앞으로 돈도 많이 들 텐데, 내 사정 알잖아. 이번 달 월세도 간당간당해.”
- 하….
태군이 내뱉는 긴 한숨이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재환의 귓가에까지 불어와 닿는 것 같았다. 좌우간 이것으로 체면은 좀 구겼지만 한영과 있었던 일은 묻어 둘 수 있게 되었다. 씁쓸한 안도감이 밴 시선이 창 너머 저 끝 골목 어귀로 향했다. 언제 다시 집 밖으로 나왔는지 고시생이 한 손에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저벅저벅 골목을 따라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말린 어깨와 굽은 등이 절로 짠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어제 벽에 대고 욕을 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미미한 후회가 일 즈음 발을 헛디딘 고시생의 다리가 휘청했다.
- 서재환, 너 한영이 새끼랑 뭔 일 있었지?
순간 고시생이 떨어뜨린 봉지에서 초록색 유리병 너덧 개가 튀어나와 데굴데굴 길바닥을 나뒹굴었다. 여기저기로 흩어져 굴러가는 소주병을 따라 재환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안타깝다는 듯 작게 혀를 찬 재환은 그럭저럭 태연한 투로 태군의 물음에 답했다.
“아니. 그런 거 없었어.”
일일이 허리 숙여 가며 고시생이 봉지에 병을 주워 담는 광경이 퍽 안쓰럽게 비쳤다. 그러다 누가 누굴 불쌍하게 여기는 건가 싶어 재환은 조금 쓰게 웃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친구에게 궁핍한 처지를 변명 삼은 자신이 남을 향해 품을 감정은 아니었다.
- 그럼 왜 그 새끼까지 또 밴드 안 한다고 난린데?
“뭐?”
가로등 밑에까지 굴러간 마지막 병을 줍는 고시생을 응시하던 재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핸드폰에 대고 되묻는 소리가 지나치게 컸던 탓인지 허리를 펴던 고시생이 흘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환은 재차 확인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뭔 소리야. 유한영이 왜?”
- 그러니까 너한테 묻는 거잖냐. 니네 뭐 있었던 거 맞지?
3층 창문에 선 옆집 남자가 심히 살벌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고시생이 다시 휙 시선을 내리는 것도 모르고, 재환은 더욱 인상을 구겼다. 뭐 낀 놈이 성낸다더니, 재환이 보기에는 한영이 딱 그 격이었다. 태군에게 사과할 건 사과하고, 변명할 건 변명하고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건만, 한영은 이토록 단순한 계획조차 도와주지 않았다. 재환이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사이 태군의 독촉이 이어졌다.
- 서재환. 말을 좀 해, 새끼야.
그럴수록 재환의 입은 더욱 꾹 다물렸다. 아무리 태군이 캐묻는다 한들 절대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하찮은 자존심 탓일 수도 있고, 한영을 향한 티끌 같은 배려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같은 남자랑 키스했고, 그러다 설 뻔하기까지 했다는 말을 제 입으로 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적어도 재환은 아니었다.
- 하아….
재환의 침묵이 길어지자 스피커 너머에서 또다시 길고 긴 한숨이 터졌다. 그 한숨에 담긴 것이 온전히 짜증이나 역정만은 아닌 것 같아 재환은 더럭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태군이 혹시 뭘 알고 저러나 싶었다. 자그시 아랫입술을 깨무는 재환의 머릿속이 어느 때보다 복잡해졌다. 뒤이어 태군이 꺼낸 말은, 예상대로 독촉이나 질타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 너, 알고 그러는 거지?
“뭐가.”
재환은 불안함을 뒤로하고 입을 뗐다. 무심코 골목에서 고시생의 모습을 찾는데, 그새 계단을 올라왔는지 문밖에서 옆집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아주 잠깐, 정신이 팔려 있던 때.
- 뭐냐니. 한영이 그 자식 남자 좋아하는,
“장태군.”
- 어, 어?
난데없이 말허리가 끊긴 태군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어쨌거나 저 이야기가 계속되도록 둘 수 없었던 재환은 부러 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유한영이랑 진짜 아무 일 없었어. 그리고 밴드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다. 다른 둘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 줘. 이만 끊을게.”
‘야, 서재환…!’ 하는 다급한 부름을 애써 못 들은 체한 재환은 꾹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아무도 없이 지저분하게 벚꽃 잎만 흩어져 있는 골목길을 한동안 멍하니 내려 보다가, 그대로 뒤돌아 창을 등지고 털썩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세운 무릎 위에 두 팔을 얹고 푹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입 밖으로는 한숨 같은 한마디만이 흘러 나갔다.
병신 새끼.
태군을 향한 말이기도 했고, 한영을 향한 말이기도 했으며, 또 저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했다. 한 놈은 눈치 없이 사람 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고, 한 놈은 저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주위에 민폐나 끼치고 있었다. 그게 죽도록 신경 쓰여 미치겠는 한 놈도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들 어찌나 너 나 할 것 없이 병신 같은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환은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그 이름도 없는 밴드와는 진짜 끝이 났음을.
한참을 앉은 자리에 붙박여 있던 재환이 고개를 들었을 무렵, 좁디좁은 집 안으로 어둑한 노을빛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문득 고시생이 떨어뜨렸던 소주 하나가 지금 제 손안에 있으면 참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 재환은 조금 실없이 웃었다.
* * *
떨어진 채 밟히고 밟혀 쓰레기나 다름없던 집 앞 골목길의 벚꽃 잎이 자취를 감추었다. 곧 있으면 잎사귀만 남은 나뭇가지에서 시끄럽게 매미가 울어 댈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그사이 재환은 이불을 얇은 것으로 바꾸었고, 첫 월급을 받았으며, 그 돈으로 결국 말썽 부리던 문 자물쇠를 교체했다.
이제 카페에서 어엿이 한 사람 몫을 하게 된 재환은 일에도 그럭저럭 재미를 붙였다. 처음 우유 스팀하는 법을 배울 때만 해도 새 우유를 몇 통씩이나 버리는 바람에 그 성격 좋은 희연이 한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지금은 음료도 척척 만들고 접객도 제법 무리 없이 해냈다. 단,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처럼 손님에게 방긋방긋 미소를 날리는 건 여전히 재환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노력한 결과,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정도는 가능하게 되었다. ‘무조건 스마일!’이 영업 방침인 사장 세훈 때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한번은 여자 손님에게 연락처를 받아 오히려 재환 주위 아르바이트생들이 소란스러워진 적도 있었다. 그날 하루 종일 재환은 연락할 거냐, 하면 언제 할 거냐, 왜 아직 안 하느냐 따위의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개중 유독 희연이 두 눈 부릅뜨고 끈질기게 물어 왔는데, 그녀에게 연락 안 할 거라는 대답만 한 열 번 해 줬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런 경험은 이제 두 번 다시 사양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고, 또 평화로웠다. 딱 그 정도의 일상적인 하루하루, 한 달이었다.
오늘은 모처럼 오후 출근인 덕분에 재환은 제법 느지막이 눈을 떴다. 그래 봤자 평소보다 1시간 정도 더 잔 것뿐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몸이 가뿐했다. 습관처럼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켜고서 창문 앞으로 가 섰다.
최근 들어 신기하게 아침부터 집에 볕이 드는 날이 잦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멀리 있던 30년 된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가 허물어졌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아랫집 사는 할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해를 가리던 건물이 사라졌으니 조금이라도 빛이 더 들기는 할 터였다. 앞으로 일이 년,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허락되는 나름의 소중한 햇빛이었다.
이렇게 미약한 햇빛이나마 창을 통해 받고 있을 때면, 재환은 문득문득 한 달 전 그날이 떠올랐다. 천장, 벽면 할 것 없이 사방이 밝은 빛을 쭉쭉 빨아들여 온갖 화려한 색채를 내뿜던 이상한 방. 그 방에 살던 더 이상한 녀석. 그 이상한 녀석과 함께 했던 우스꽝스러운 아침 식사와 나란히 앉아 보았던 Embryo의 귀하디귀한 한정판 DVD.
하지만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 더 기억이 뻗어 나갈라치면 본능이, 이성이 불안하게 경고음을 울려 댔다. 그러니 떠올리려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순간 지금의 평온한 일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늘 재환 안에 존재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잊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한낱 바람에 불과했다.
늘 그랬듯 재환은 씻고, 아침 먹고, 기타를 조금 쳤다. 그러다 방구석에 쌓인 먼지로 자꾸만 눈이 가 아예 두 팔 걷어붙이고 청소를 시작했다. 좁아터진 집도 집이라고 허리 숙여 가며 핸디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까지 싹 하고 나니 시간이 제법 지났다. 어느 정도 깔끔해진 방 안을 휘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탁탁 손을 터는데, 책상 위 올려 두었던 핸드폰에서 Embryo의 신곡이 흘러나왔다. 얼마 전 새로 설정한 벨 소리였다.
핸드폰을 집어 든 재환은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010으로 시작되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공연히 전화 받는 걸 꺼려지게끔 했다. 한 2주일 전쯤이던가. 그때도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았더니 아무 말도 없이 뚝 끊겨 속으로 뭐야, 한 적이 있었더랬다. 당연히 잘못 걸린 전화라 넘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혹시나 싶어서. 제가 아는 녀석일까 봐.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때처럼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을 애써 ‘그럴 리가’라는 결론으로 덮은 재환은 초록색 수화기 아이콘을 꾹 눌러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야, 서재환!
순간 재환의 얼굴에 억지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반가움으로 가득 찬 미소가 떠올랐다. 혹 누군가 보았더라면 한순간 넋을 잃었을 만한 미소였다.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왁자하게 뒤섞인 치킨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재환은 휙휙 고개를 돌렸다. 동네가 동네인 만큼 가게 안에는 재환 또래의 젊은이들이 빽빽이 앉아 있었다. 얼마 안 가, 재환은 그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몇 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은 발견했다. 줄곧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뺀 재환은 가벼운 걸음으로 고등학교 밴드부 동창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했다.
“와, 서재환. 얼굴 보기 존나 힘들다?”
“빨랑빨랑 좀 와라. 치킨 이제 없어, 인마.”
“새끼, 뒤졌는 줄 알았네.”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말만 들으면 꼭 시비 거는 듯한 사내놈들의 인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알바 끝나고 바로 왔다.’라고 심드렁히 대꾸하면서도 재환은 은근슬쩍 입가에 걸린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동시에 재빨리 눈알을 굴려 테이블에 둘러앉은 녀석들 틈에서 반짝이는 민머리를 찾았다. 이런 자리에 빠지는 법이 없는 태군이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온 건가.
약 한 달 전의 통화를 끝으로 재환과 태군 두 사람 간에는 그 어떤 연락도 오가지 않았다. 태군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처음에는 불편하고 나중에는 어색하여 재환은 더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물론 몇 번인가 메시지를 보내려 시도한 적은 있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고, ‘잘 지내냐’나 ‘뭐 하냐’ 따위의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마저도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를 반복하다 종국에는 그냥 핸드폰을 엎어 버리기 일쑤였다. 사실, 그보다는 ‘밴드는 어때?’를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거야말로 괜한 오지랖인 것 같아 더더욱 보내지 못했다.
그새 점원이 내온 500cc짜리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재환은 크, 하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치킨집을 찾아 부지런히 걷는 사이 등을 적셨던 땀이 한순간에 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시원함이었다. 내처 잔을 놓지 않고 쭉쭉 마셨더니 한 잔이 금세 비었다.
“야, 숨 좀 쉬고 마셔라. 뭔 일 있어?”
“여자한테 차임?”
이번에도 들려오는 말은 비슷비슷했다. 아무 의미도 없고, 저게 시비인지 뭔지 분간이 안 되는 시시껄렁한 얘기들. 그래서 더 재환은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꼭 철없는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야자 빼 먹고 부실에 모여 몰래 합주하다, 경비 아저씨가 들이닥치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곤 하던. 지금 생각하면 굳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일들이 그때는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환이 속해 있던 밴드부는 유독 그가 입부하던 해에만 여학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남학교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하니 안팎으로 비운의 동아리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돌았지만 정작 부원들은 전우애 비슷한 것으로 더욱 똘똘 뭉쳤다. 공연 멋지게 해서, 꼭 여친을 만들고 말리라는. 물론 그 야심 찬 계획을 성공시킨 놈들도 더러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재환도 축제 공연을 계기로 여자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태군 빼고는 다 그렇게 한 번씩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았었나 싶다.
“아, 맞다. 나 얼마 전에 길에서 정혜 봤는데.”
“정혜? 정혜가 누군데?”
“아, 왜. 서재환이랑 사귀었던 전교 부회장. 이정혜.”
일순 십수 개의 눈알이 동시에 재환을 향했다. 무슨 얘기가 나왔는지도 모르고 두 번째 맥주잔을 꿀꺽꿀꺽 들이켜던 재환은 난데없이 제게로 집중된 이목에 눈썹을 찌푸렸다. 슬그머니 잔을 내려놓으며 뭔데, 하고 물었다.
“와, 새끼. 쿨한 척.”
“저 자식은 쿨한 게 아니라 존나 콜드지. 나중에 고3 됐다고 뻥 찼잖냐. 그 퀸카를.”
그제야 재환은 저와 제가 사귀던 여자 친구의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말이 좋아 고3 수험을 계기로 찬 거지, 결국은 당시 집이 망해 도망치듯 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정을 이 자리에 모인 놈들은 알지 못하니 딱히 정정해 주기도 애매했다. 그나마 재환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태군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새끼들, 술이나 처먹어!’라고 한 소리 했을 터다. 대화 주제도 돌릴 겸, 재환은 치킨 한 조각을 앞접시로 가져가며 내심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장태군은? 오늘 안 와?”
“오늘 못 온다던데? 바쁜 척 쩔어요.”
“아….”
포크로 뜯어낸 치킨 살점을 입에 넣으려던 재환은 머뭇거리다 대신 맥주 한 모금을 삼켰다. 조금 입이 쓴 탓이었다. 혹 오늘 태군을 만나게 되면 같이 맥주나 마시며 한 달 전의 일을 털어 버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일 듯했다. 사실 그러려고 지금까지는 이런저런 핑계로 피했던 이 동창회 모임에 부러 나온 감이 없잖아 있었다. 졸업 후 가능하면 이런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으려 했었으니까.
“합주한다고 아주 딱 잘라 거절하더라. 그 장태군이.”
치킨을 집은 포크를 재차 입으로 가려가려던 재환의 손이 다시금 멈칫했다. 저도 모르게 ‘합주?’ 하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어. 자기 하는 밴드가 오늘 합주라던데?”
“헐, 장태군 밴드 해? 메탈?”
“그럼 그 메탈 빠돌이가 무슨 감성 록 밴드라도 하겠냐?”
“걔 실용음악과 갔잖아. 그럼 학교 밴든가?”
동시에 사방팔방에서 태군의 밴드에 관한 질문이 터져 나왔다. 다들 관심사가 비슷비슷하니 그가 밴드를 하고 있다는 소식에 열 내며 흥미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유일하게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은 분위기에 섞이지 못하고 멍하니 앞접시에 내려놓은 치킨만 쳐다보았다. 가게 벽 한쪽에 걸린 커다란 티브이에서는 제가끔 알록달록 머리를 물들인 남자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학교 밴드 아닐걸? 휴학 중이라던데?”
“밴드 이름 뭔데? 아예 활동하는 밴든가?”
“아, 몰라. 연락해 보든가.”
여전히 여기저기에서는 온갖 추측이 쏟아졌다. 잠시 딴생각에 빠진 재환은 그 시끄러운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다. 딴생각이래 봤자 태군에 관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군이 하고 있는 밴드 생각이었다.
태군은 오늘 밴드 합주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그 밴드의 예민한 보컬이 밴드를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바꾸었음을 의미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또한, 모르긴 몰라도 기타도 새로 구한 모양이었다. 이 역시 다행인 일이었다. 전부 다행인 일이었다.
정신 차리듯 고개를 한 번 흔든 재환은 잔을 들어 반절쯤 남은 맥주를 한꺼번에 꿀꺽꿀꺽 목구멍 너머로 흘렸다. 뒤이어 손을 번쩍 들고 점원에게 ‘생맥 하나 더요.’를 외쳤다. 가장 늦게 도착했던 재환 앞에는 어느덧 가장 많은 수의 빈 잔이 놓였다.
2차로 자리를 옮긴 곳은 근처의 곱창집이었다. 곱창이니 막창이니 하는 종류를 꽤나 좋아하는 재환으로서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메뉴 선택이었다. 다만 배가 온통 맥주로 가득 차 생각처럼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곱창 대신 자꾸 앞에 놓인 소주잔으로 손이 갔다. 벌써 혼자서만 두세 병은 마셨지 싶었다. 물론 내일이 모처럼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슬슬 주위로는 한두 명씩 뻗는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놈 하나는 한참 전 화장실 간다고 비적비적 일어나 나가더니 여태 소식이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다 찾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그나마 재환과 비슷하게 멀쩡한 윤호가 재환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윤호는 밴드부의 유일했던 베이시스트로, 태군 다음으로 재환과 가까운 사이였다. 오늘 이 모임의 주최자이기도 했다.
“너도 더?”
“야, 당연하지.”
뒤이어 윤호에게 병을 건네받은 재환 또한 그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친 후 서로 약속한 듯 한 번에 훅 소주를 털어 넣었다. 너나없이 크, 소리가 나왔다.
“요새는 뭐 하고 사냐?”
먹는 이가 없어 철판 가운데서 홀로 타고 있는 양념 곱창을 집게로 쓱쓱 가장자리로 밀며 윤호가 물었다. 그사이 재환은 윤호와 자신의 잔에 다시 소주를 따랐다.
“뭐, 그냥. 알바하면서.”
“학교는?”
“다음 학기에 복학해야지.”
아직 몇 달 후의 일이건만 재환은 다시 학교에 갈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턱 숨이 막혀 왔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전공, 그나마 장학금이라도 타려면 또 죽기 살기로 공부해야 할 테고, 틈틈이 아르바이트하며 돈도 벌어야 하니 그야말로 ‘나 죽었소’ 하는 생활이 시작되는 셈이었다. 입대 전에는 여기에 밴드까지 병행하느라 고3 때도 안 흘려 본 코피를 쏟은 적도 있었다.
“요새도 기타 치고?”
재환은 응, 대답하며 윤호가 내민 잔에 재차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두 사람은 한꺼번에 소주를 들이켰다. 거듭 소주만 마시려니 입이 심심한 감이 있어 잔을 내려놓은 재환은 밑바닥이 거뭇하게 탄 곱창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하나 혀를 얼얼하게 하는 매운맛에 그새 윤호가 따라 준 소주를 또다시 후루룩 마셔야 했다. ‘살살 마셔라.’ 하면서도 윤호는 점원에게 소주 두 병을 더 시켰다.
그즈음 화장실 갔다 이제야 돌아온 한 놈이 흐어, 소리를 내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한바탕 시원히 게워 내고 온 듯했다. 재환이 가까운 자리에 있던 얼음물을 내밀자 어지간히도 목이 탔던지 단숨에 꿀꺽꿀꺽 마신 후 ‘아, 땡큐….’ 하고 웅얼거렸다.
다들 이렇게 정신 못 차리는 와중에도 재환은 저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술이 끝도 없이 들어갔다. 심지어 아직 그럭저럭 상태도 말짱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반가운 녀석들을 만나 기분이 들떠 그런 모양이라고, 재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딱히 이유가 없었다. 소주 두 병을 가져다준 점원에게 얼음물 한 잔을 더 부탁한 재환은 다시 윤호와의 대화를 이어 갔다.
“넌? 지금 학교에서도 밴드부 한다고 그랬었지?”
“야, 그건 옛날에 관뒀어.”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 짜증 난다는 듯 윤호는 뚜껑 딴 소주를 꼴꼴꼴 잔에 부어 단번에 들이마셨다. 그러고 나서야 재환의 잔에도 소주를 따라 주었다.
“왜?”
“왜긴. 선배들이 존나 갈구니까 그러지. 무슨 군대인 줄. 합주랑 수업이랑 겹치면 수업도 못 들어가요. 미친 거 아니냐.”
“건 좀 심하네.”
‘말도 마라.’ 하며 윤호는 끔찍했던 동아리 생활을 조금쯤 더 읊었다. 대학 동아리의 문턱조차 밟아 본 적 없는 재환이 듣기에도 말이 안 되는 것들뿐이라, 종국에는 재환도 덩달아 ‘씨발놈들이네.’ 하며 윤호에게 맞장구쳤다. 즐겁기만 해도 모자랄 밴드부 생활을 끔찍하게 만드는 건 재환의 기준에서 세상 둘도 없는 중죄에 속했다.
“그래서 말인데, 서재환. 너 나랑 밴드 안 할래?”
반 이상이 욕으로 점철되던 윤호의 이야기가 대뜸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 언제 씨발놈 개놈 소리를 입에 담았냐는 양 두 눈이 반짝거렸다. 하나 얼마 전에도 친구 놈으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가 결과적으로 쓴맛만 본 재환에게는 그다지 달가운 소리가 아니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아니, 그때 내가 애들 몇 명 모아서 같이 탈퇴했단 말야. 얼마 전에 걔네들이랑 지금이라도 우리끼리 밴드 하자! 말이 나왔는데, 딱 기타만 없더라고.”
언제 또 소주 한 병을 둘이서 다 비웠는지 윤호가 새 병을 땄다. 냉큼 두 사람의 잔에 소주를 채우고서 채 재환이 잔을 집기도 전 끄트머리에 쨍, 제 잔을 부딪쳤다. 이윽고 찰랑거리던 맑은 액체가 또다시 두 사람의 목구멍 너머로 훌쩍 사라졌다. 크, 하며 손등으로 입가를 한 번 훔친 윤호가 다소 들뜬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뭐, 부담 가질 건 없고. 애들도 나도 바빠서 어차피 자주는 못 만나. 합주는 한 2주에 한 번 정도? 너한테도 딱이지 않냐? 어차피 너 또 알바다 뭐다 바쁠 거 아냐.”
나름 속으로 ‘나 알바하느라 바쁘다’라는 대답을 준비하고 있던 재환의 입을 다물리게 하기 충분한, 아주 그럴듯한 설득이었다. 그제야 재환은 공연 때면 늘 보컬도 아닌 윤호가 멘트를 도맡아 하던 것을 떠올렸다. 일단 재환은 잠자코 윤호의 얘기를 마저 들었다.
“우리 학교 밴드부 입부하기 엄청 빡센 거 알지? 애들 실력도 다 괜찮아. 보컬은 옛날에 실용음악과 준비하던 앤데, 장르 안 가리고 겁나 잘 불러. 걔가 건반도 치고.”
아…. 재환은 저도 모르게 슬쩍 눈썹을 구겼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나 봤자 하등 좋을 것 없는 얼굴이 생각나 버린 까닭이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소주를 따른 재환은 서둘러 술을 삼키며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분홍 머리를 애써 의식 속에서 밀어냈다.
“동아리가 아니니까 학교 합주실을 못 쓰는 게 좀 그런데, 이게 또 보컬이 다니던 실용음악 학원 합주실을 싸게 빌릴 수 있다 그러네? 잘만 얘기하면 공짜로 쓸 수도 있고.”
이것으로 ‘밴드 할 돈 없다’라는 이유도 댈 수 없게 되어 버린 재환은 다소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사실 하기 싫다는 말 한마디면 깔끔히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이었으나, 그러기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윤호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곡도 너 하고 싶은 거 맘대로 해도 돼. 누구냐, 너 좋아하던…. 아, Embryo! 그 밴드 곡 카피해도 되고. 어차피 재밌자고 하는 건데 우리가 좋아하는 거 해야지. 안 그러냐?”
“아…, 응.”
조금만 더 꼬시면 넘어올 듯한 재환의 반응에 윤호는 내심 신이 났다. 까칠한 감이 있는 말투나 태도와 달리 재환은 예전부터 주위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기로 유명했다. 본인은 알고 있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지만.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윤호는 이번 일을 구실 삼아 재환과 꼭 좀 밴드를 하고 싶었다. 실력 좋지, 성실하지, 게다가 짜식이 생긴 건 또 얼마나 멀끔한지. 대학 동아리에서도 기타 좀 친다 하는 놈들을 꽤나 보았으나, 까놓고 말해 재환만 한 기타리스트가 없었다.
“어때, 괜찮지 않냐? 너도 혼자만 기타 치기는 심심할 거 아냐.”
재환은 쉬이 답을 하지 못하고 애먼 소주잔만 탁,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부딪쳤다. 매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한번 생각해 볼게.”
됐다! 윤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일 수업이 있다는 놈들이 절반, 택시비가 아깝다는 놈들이 절반이라 술자리는 차 끊길 시간이 되기 전 파했다. 기실 그보다는 다들 너무 초반부터 달리는 바람에 3차를 가려야 갈 상황이 아니었다. 아예 인사불성이 돼 재환이 끝까지 챙겨 줘야 할 녀석이 없는 게 개중 다행이었다.
거의 마지막 버스를 타고 집 가까운 정거장에서 내린 재환은 검정 티셔츠 앞섶을 팔랑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약 1시간 남짓을 에어컨 빵빵 틀어 놓은 버스 안에 있어서 그런지 유독 바깥 공기가 후텁지근하게 느껴졌다. 아직 여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리 더우면 어쩌나 슬금슬금 걱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재환은 올여름도 낡은 선풍기 하나로 열심히 버텨야 했다. 보나 마나 뉴스에서는 또 최악의 더위니 폭염이니 하는 절망적인 이야기가 나올 터다.
집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기 전, 재환은 컴컴한 길가를 홀로 밝히고 있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음료 코너로 가 숙취 해소제 하나를 골라서 카운터로 향했다. 마침 아까 곱창집 앞에서 피웠던 담배가 돗대였던 걸 기억해 낸 재환은 담배 한 갑도 달라고 했다. 요새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덕에 그나마 담배를 살 때 느끼는 죄책감이 전보다 좀 덜했다. 물론 이게 다행인지 다행이 아닌 건지는 판단하기 애매했다.
단숨에 비운 숙취 해소제 병을 편의점 구석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린 재환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보다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양옆으로 낡은 연립 주택 건물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은 여느 때보다 더욱 조용했다. 멀리서 고양이 우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심심찮게 담배꽁초, 아이스크림 봉지 따위가 버려져 있는 길을 밟는 재환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길이 매끈하지 않은 탓에 발소리 또한 자글자글 잡음이 낀 것처럼 지저분한 느낌이 있었다.
굳이 소리를 죽이지 않고 나아가던 재환의 걸음이 이윽고 집 앞 가로등 아래 다다라서 멈추었다. 주머니에서 새 담뱃갑을 꺼내 비닐 껍질을 벗긴 후 힘주어 은박 종이를 뜯어냈다. 이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담배 사이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문 재환은 주변에서 살살 불어오는 더운 바람을 손으로 막으며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뒤이어 크게 한 모금 빨아올리려는 찰나.
무심코 골목 어귀를 향했던 재환의 눈이 못 볼 것, 혹은 너무 보고 싶었던 것을 본 것처럼 한순간 거대하게 뜨였다. 미처 타들어 가지도 않은 담배를 바닥에 떨구고서 급히 운동화 밑창으로 짓이겼다. 감히 담배가 아깝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재환은 시선이 향했던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판판한 등을 덮고 있던 검은색 옷감이 금세 땀으로 한층 시커멓게 젖어 들었다. 요란한 발소리 위로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가 얹혔다. 누군가 창밖을 내다보기라도 한다면 야밤에 웬 미친놈이 저리 뛰고 있냐고 딱 혀를 내두를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재환은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전거는 훌쩍 뛰어넘고, 머리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는 피해 뛰고 또 뛰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분명 재환은 저 골목 끝에서 마치 벚꽃 잎처럼 하늘하늘 흔들리던 분홍 머리칼을 보았다. 아까 멀리서 오는 버스 번호도 똑바로 보았는데, 그 정도도 잘못 볼 정도로 취하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다.
조금 전 신기루처럼 분홍 머리칼이 비쳤다 사라진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재환은 온 얼굴을 찌푸린 채 숨을 골랐다.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똑똑 발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닌 밤중의 달음박질이 무색하게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분홍색 비슷한 것조차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밤을 더욱 골똘히 하는 어둠만이 거미줄처럼 접붙은 골목을 빼곡히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 * *
“으….”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순간 마른 입술 새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 나갔다. 꼭 누군가가 주먹 쥔 손의 마디 끝으로 양 관자놀이를 힘껏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원인이 분명한 두통을 겨우 견디며 재환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면 뭐 하나. 중심을 잡지 못한 상체가 그대로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밑으로 푹 떨어진 머리 안에서 뇌가 이리저리 텅텅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다시 눈을 꾹 감았음에도 시야가 온통 어지러웠다.
아무리 정신이 말짱했다 한들 지난밤 몸속에 때려 부은 알코올이 어디 갈 리 없었다. 오천 원짜리 숙취 해소제로 해소될 양이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신이 말짱했다는 것도 순전히 자신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야밤중 집 앞에서 그런 헛것을 본 걸 보면 말이다. 하필이면 잘못 봐도 뭐 그딴 걸 잘못 봤을까.
“아오….”
한심함이 팍팍 묻어나는 한숨을 길게 늘어뜨린 재환은 가만있어도 흔들리는 듯한 머리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심으로 저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머리 색이 갈색이나 기껏해야 금발 정도만 됐어도 지나가는 길고양이와 헷갈린 것이라 여길 수 있었을 텐데, 왜 흔하지도 않은 분홍 머리를 봤다고 착각했는지 모르겠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난데없이 100m 달리기를 했으니 그런 멍청한 짓이 또 없었다. 쫓아가서 뭐 어쩌려고?
여러 가지 의미로 좀 정신을 차려야 했던 재환은 짝, 소리가 나게 제 양 뺨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이를 두어 번 더 반복한 후에야 추를 매단 듯 늘어지는 다리를 꾸물꾸물 매트리스 밖으로 내디뎠다. 그 상태로 조금 더 버티다가 겨우 미적미적 일어섰다. 멀지도 않은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는 길이 천리만리처럼 느껴졌다.
냉장고 안에서 커다란 생수병을 꺼낸 재환은 컵에 따르지도 않고 물을 병째 꿀꺽꿀꺽 들이켰다. 채 삼키지 못한 물이 주룩 턱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젖은 입가를 거칠게 손등으로 문지르고서 다시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휑하니 비어 있던 냉장고 안에는 그럭저럭 먹거리들이 차 있었다. 카페에서 첫 월급을 받은 후 숨통이 좀 트인 덕이었다. 우유나 달걀 같은 기본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해 사 놓은 과일도 있었으며, 구석에는 며칠 전 끓여 둔 김치찌개도 있었다. 아침으로 김치찌개와 밥을 먹어도 되고, 우유에 시리얼을 먹어도 되었으나 어째서인지 지금 재환은 어느 쪽도 크게 당기지 않았다. 그저 속이 쓰릴 따름이었다. 이럴 때 생각나는 음식은 하나뿐이었다.
냉장고 문을 닫은 재환은 곧바로 좁은 집에 딱 어울리는 크기의 욕실로 들어갔다. 후다닥 양치하고, 세수하고, 훌렁훌렁 옷을 벗은 뒤 샤워기 아래 섰다. 레버를 위로 들어 올리자 정신 번쩍 들 만큼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구태여 더운물을 틀지는 않았다. 궁상맞게 보일러비까지 아끼려던 것은 아니었고, 지금은 찬물로 흐리멍덩한 정신을 좀 깨울 필요가 있었다.
다시 물을 잠그고 온몸에 벅벅 비누칠을 하던 재환의 손이 잠시 머뭇하다 다리 사이로 향했다. 얼룩덜룩 물때가 낀 타일 위를 반대편 손으로 짚고서 손에 쥔 성기를 조몰락거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금세 관두었다. 그래도 남들만큼의 성욕은 있는지라 하루에 한 번쯤은 자위를 했는데, 오늘은 영 내키지가 않았다. 지금 자위하면, 꼭 이상한 이유가 덧붙여지게 될 것 같았다. 아니면 말도 안 되게 엉뚱한 기억이 되살아나거나. 씹…, 하고 괜한 짜증을 짓씹은 재환은 머리 위로 재차 찬물을 틀었다. 씻겨 나가는 비누 거품과 함께 한 톨의 쓸데없는 생각까지 몽땅 배수구로 빨려 내려가기를 바라며.
이가 닥닥 부딪치는 찬물 샤워 후 그나마 정신도 몰골도 얼추 정상으로 돌아온 재환은 옷장 앞으로 가 섰다. 여지없이 위아래로 시커먼 옷을 꺼내 입고 머리에는 같은 색 볼캡을 푹 눌러썼다. 담뱃갑과 핸드폰, 약간의 현금을 챙긴 뒤 슬리퍼에 두 발을 끼워 넣고서 슬렁슬렁 집을 나섰다.
집에서 약 15분쯤 걸으면 도착하는 재래시장 초입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쏟아졌다. 오늘은 시금치가 한 단에 천 원! 아이, 아저씨 좀 더 싸게 해 줘요, 하는 것들. 아직 머리에 지끈거림이 조금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 소리가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기실 재환은 시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소란함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장을 볼 때에는 집 가까운 슈퍼를 놔두고 굳이 이곳을 찾게 되었다. 물론 잘만 발품 팔면 슈퍼보다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간혹 어리숙한 청년이 부모님 심부름 나온 줄 알고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인도 있었으나, 재환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시장 골목을 빽빽이 메운 사람들 사이를 헤쳐 재환은 일단 건어물 가게로 갔다. 말린 새우, 김, 멸치 따위가 한가득 쌓여 있는 가판에서 북어채가 담긴 봉지를 집었다. 조금 양이 많은 듯도 했으나, 북어채야 두고두고 쓸 수 있으니 고민을 뒤로하고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오천 원을 거슬러 받았다.
그다음에는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오는 두부 가게로 향했다. 마침 새 두부가 나오는 시간인지 가게 앞에 대여섯 남짓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재환 역시 북어채가 담긴 봉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줄 끄트머리로 가 섰다. 얼마 안 가 커다란 찜통의 뚜껑이 열리며 구수한 두부 냄새를 실은 김이 사방으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머, 줄 좀 봐. 여기 두부 맛있나?”
그즈음, 양손 가득 장 본 봉지를 든 아주머니 하나가 가게 근처를 기웃거리며 혼잣말하듯 물었다. 하지만 다들 먹음직스러운 모양새로 썰리는 두부에 시선을 빼앗겨 대답을 하지 못했다. 흘긋 아주머니를 쳐다본 재환이 대신 입을 뗐다.
“맛있어요.”
“응?”
줄 서 있는 이들 중 유일한 남자, 게다가 젊은 청년의 답변에 아주머니의 두 눈이 다소 휘둥그레졌다. 재환은 크게 개의치 않고 몇 마디를 덧붙였다.
“한 모에 천 원인데, 슈퍼에서 포장해서 파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아, 그래요?”
그제야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재환 뒤로 와 줄을 섰다. 뉘 집 아들내미인지 생긴 것도 멀끔한 청년이 참 똑 부러진다 속으로 감탄하며.
천 원을 내고 뜨끈한 두부가 담긴 투명 비닐봉지를 손에 받아 쥔 재환은 조금 더 시장을 둘러보았다. 갓 쪄 낸 만두든 제철인 딸기든 사고 싶은 것은 넘쳐났으나, 그러다 보면 금세 들고 온 현금이 바닥날 테니 애써 참았다. 시장에 오면 늘 이런 게 문제였다. 군침 도는 먹거리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자꾸 엉뚱한 곳으로 새려는 시선을 붙들어 맨 재환은 채소 가게와 반찬 가게를 한 군데씩 더 들른 뒤 집으로 걸음을 틀었다.
시장과 집 중간쯤에 있는 초등학교 앞을 지나칠 무렵, 운동장을 두른 울타리 너머에서 왁왁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와르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때마침 솨 바람이 불며 머리 위로 드리워진 플라타너스 나무의 이파리들이 이리저리로 흔들렸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제법 쨍했다. 곧 계절이 바뀔 것을 알려 주듯 불어오는 바람에서 눅눅한 여름 냄새가 났다.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을 가르며 부지런히 걷던 재환의 발이 초등학교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잠시 멈추었다. 길 한구석에 죽 늘어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를 눈으로 훑다가, 그 끝에 앉아 있는 할머니 앞에 무릎을 접어 쪼그려 앉았다.
“할머니, 상추 얼마예요?”
“천오백 원.”
“깻잎은요?”
“이천 원.”
음, 하고 초록색 채소가 수북이 담긴 바구니들을 다시 살피던 재환은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바구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있는 건 뭐예요?”
“쌈추. 배추랑 양배추 섞은 놈. 저것두 천오백 원. 쌈 싸 먹으면 맛있어.”
아하, 고개를 끄덕인 재환은 할머니에게 ‘그럼 상추랑 깻잎이랑 쌈추 하나씩 주세요.’ 했다. 할머니가 자글자글 주름진 손으로 얇은 비닐봉지 입구를 벌리는 사이 재환은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장 보고 남은 돈을 꺼냈다.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나왔다.
“어, 할머니. 저 그렇게 많이 못 먹어요.”
다시 할머니에게로 시선을 옮긴 재환이 서둘러 손사래 쳤다. 그새 어찌나 채소를 한가득 담았는지 작은 비닐봉지가 터질 듯 빵빵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절대 오천 원어치는 아니었다.
“에이, 딱 봐도 키가 삐쭉한 게 잘 먹게 생겼고만.”
재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할머니는 기어코 봉지 입구가 한 손에 잡히지 않을 때까지 채소를 쑤셔 넣었다. 어르신을 상대로 괜한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재환은 결국 고개를 저으며 너털웃음 짓고 말았다. 상하기 전 저 채소를 다 먹으려면 몇 날 며칠 쌈밥만 먹어야 될 성싶었다.
“자, 여기. 다 해서 오천 원.”
할머니가 풍선처럼 동그랗게 부푼 봉지를 재환에게 내밀었다. 쫙 벌려진 봉지 입구를 겨우 모아 받아 든 재환은 손안에 있던 오천 원짜리 대신 만 원짜리 지폐를 할머니에게 건넸다. 잔돈을 꺼내기 위해 할머니가 허리춤에 찬 가방으로 손을 넣으려는 때, 재환이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삐쭉 위로 솟은 청년을 따라 할머니의 시선도 덩달아 올라갔다.
“잔돈 됐어요, 할머니.”
“아이고, 그럼 더 가져가!”
마디가 튀어나오고 끝이 뭉툭한 손이 급히 옆에 있던 바구니에서 채소를 한 움큼 집어 올렸다. 이러다가는 안 그래도 터지기 직전인 봉지에 채소를 더 욱여넣어 줄 기세라, 재환은 서둘러 집 가는 방향으로 발을 뗐다. 많이 파세요, 하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등 뒤에서 ‘아이고, 어째.’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푸념 같은 소리가 어째서인지 재환의 입꼬리를 실룩이게 했다.
부스럭부스럭 비닐봉지 스치는 소리를 내며 한 10분쯤 더 걸었을까. 골목 하나를 꺾자 저만치 앞에서 드디어 반가운 집이 보였다. 사실상 그렇게 긴 거리를 걸은 건 아니었지만,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운 햇살이 따끈하게 등을 데워 재환은 1초라도 빨리 집 안으로 피신하고픈 마음이었다. 이런 날 뜨거운 해를 피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북향집에서 누릴 수 있는 티끌만 한 장점이었다. 물론 진짜 여름이 오면 제아무리 북향집이라도 소용없다.
한데 한 발짝, 두 발짝 집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재환의 걸음은 느려졌다. 느려지고 느려지다 못해 아예 집을 열 발자국쯤 앞둔 자리에서 우뚝 멎어 버렸다. 상추 팔던 할머니와의 기분 좋은 실랑이로 미미한 미소가 남아 있던 얼굴에서는 어느새 웃음기가 싹 걷혔다. 봉지를 모아 쥐고 있던 양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사방이 훤한 대낮, 술에 취하지도 않은 재환의 눈에 비치는 건 분명한 분홍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1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