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re Delay
1장
* * *
9년 전, 4월. 조금만 창문을 열어 놓아도 우수수 벚꽃 잎이 들이치는 완연한 봄날이었다. 거리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차림이 모두 포근한 봄에 물들었다. 그러나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둑어둑한 방 안은 화창한 봄 날씨와 조금 거리가 있었다. 다소 우중충한 공기 속, 달칵달칵 연신 마우스 누르는 소리만 울렸다.
책상 앞에 앉은 재환은 거의 뚫어 버릴 기세로 노트북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한 번 마우스를 클릭할 때마다 화면에 떠오르는 내용은 비슷비슷했다.
제목: 직밴 기타 찾아요
취미로 하는 직장인 밴드입니다. 30세 이상 환영하구요, 월 2회 합주합니다. 연습하고 맥주 한 잔 같이 할 수 있는 멤버 찾아요.
제목: 기타 구함
취미 밴드 아닙니다. 장르는 록 발라드입니다. 한국 가요 좋아하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전공자 선호합니다. 합주는 월세로 계약한 곳에서 합니다.
제목: 실력 있는 기타리스트 급구
The Spring 카피 밴드입니다. 가끔 오리지널 곡도 연주합니다. 당연히 The Spring 팬이어야 하구요, 무대 매너 화려하신 분일수록 좋습니다.
읽다가 눈썹을 찌푸리며 뒤로 가기를 누르고, 또 읽다가 쯧 혀를 차며 뒤로 가기를 누르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재환은 종내 보던 창을 꺼 버리고 다른 인터넷 창을 띄웠다. 종전 보던 사이트와 구조는 엇비슷했으나, 쓰여 있는 내용이 조금 달랐다. 편의점 야간 알바 구해요, 카페 여 알바 급구, 홀서빙 파트 모집해요 등등…. 기실 재환에게는 이쪽이 더 시급했다. 어차피 밴드는 이제 안 할 거였으니까.
그중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생 찾습니다’라는 글에 눈길이 갔다. 커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이 카페가 바로 집 근처에 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보다 찬찬히 살피기 위해 제목을 클릭했다.
시급 좋고, 근무 시간도 괜찮고, 위치는 더할 나위 없고. 내용을 읽을수록 마음에 쏙 들었다. 그대로 이력서를 제출하려는데, 그냥 넘길 뻔했던 마지막 조건 하나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용모 단정.
에이, 하며 여지없이 뒤로 가기를 누르려는 찰나 대뜸 핸드폰이 울렸다. 그 소리가 워낙 요란하여 저도 모르게 마우스에 얹었던 손이 삐끗 어긋나고 말았다. 곧이어 모니터에는 ‘이력서 제출이 완료되었습니다’ 하는 문구가 떠올랐다. 황당함에 헛숨을 삼키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
- 뭐 하냐?
제대 축하한다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던져진 친구의 물음에 재환은 ‘집.’이라고 심드렁히 대꾸했다. 뭐, 상대가 태군인 만큼 그런 간지러운 인사는 사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 아니. 요새 뭐 하냐고, 새끼야.
돈 없어서 알바 찾는다, 새끼야. 라고 대답하려다 그건 좀 궁상맞은 것 같아 얼른 다른 답을 골랐다.
“그냥 있지.”
- 오. 씨발, 잘됐다. 서재환! 너 나랑 밴드 하자.
이번에는 재환이 ‘뭐, 씨발?’ 하고 욕을 뱉을 뻔했다. 그 정도로 태군이 꺼낸 이야기는 재환에게 있어 황당무계하기 그지없었다.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2년 이상을 함께한 사이라지만, 태군과 밴드라니 말도 되지 않았다. 하여 고민도 없이 입 밖으로 나간 대답은 매우 짧고 명료했다.
“싫어.”
- 야, 이. 새끼, 넌 고민도 안 하냐?
“나 메탈 밴드 안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태군은 알아주는 메탈 빠돌이였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시 유행하던 록 발라드를 카피할 때도 트윈 페달을 가져와 아주 드럼을 두들겨 패던 녀석이었다. 간질간질한 팝송이든 서정적인 브릿 팝이든 그가 연주하면 무조건 미친 듯한 메탈로 변질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그에 비해 재환의 음악 취향은 보다 감성적인 쪽이었다. 그렇다고 말랑말랑한 느낌은 아니고, 들으면 눈앞에 다른 세상이 펼쳐지며 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지금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할까. 어쨌거나 이제 재환은 누구와도 밴드 할 생각이 없었다. 아까 열심히 밴드 구인 게시판을 들락거렸던 것도 그냥 아이 쇼핑 같은 행위였다. 당연히 안 살 거지만, 일단 장바구니에 넣고 보는 그런 거.
- 메탈? 뭔 개소리야. 누가 메탈 밴드 하재.
“어?”
저도 모르게 재환은 얼뜬 소리가 나갔다. 귀에서 핸드폰을 슬쩍 떨어뜨려 화면에 뜬 이름 세 글자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지금 통화 중인 상대는 고등학교 동창인 장태군이 맞았다.
- 내가 지금 밴드 하나 하고 있는데, 노래가 조온나 감성적이다. 너도 겁나 좋아할걸?
그럼 그렇지. 저거야말로 개소리였다. 아무리 친구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태군과 ‘감성적’이라는 표현에는 접점이 없었다. 메탈이 아닌 다른 장르의 밴드를 하고 있다는 것도 도무지 믿기가 어려운데, 거기다 ‘감성적’이라니. 결국 태군이 뒤늦은 만우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 재환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야, 됐다. 나 지금 밴드 할 돈도 없어.”
이 말은 괜한 핑계가 아니었다. 인디 밴드로 활동하기란 사실 하나부터 열까지가 다 돈이었다. 합주실 빌려야지, 모이면 밥도 먹어야지, 왔다 갔다 교통비도 무시 못 하지. 그뿐인가. 곡이라도 하나 낼라치면 녹음비에 믹싱비에 마스터링 비용까지. 여간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 물론 그걸 알면서도 한때는 참 열심히 했었다. 그만큼 기타 치는 게 너무 좋았으니까. 다 옛날 얘기였다.
- 씨발, 네가 돈이 없기는 무슨 돈이 없….
여지없이 차진 욕으로 시작되던 태군의 말이 일순 뚝 끊겼다. 이윽고 스피커 너머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얼마 안 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어조의 ‘씨발….’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군 자신에게 하는 욕인 듯했다.
- 미안.
답지 않게 풀 죽은 목소리였다. 그러니 재환은 그저 헛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로 일일이 성낼 단계는 이미 한참 전 지났으므로. 어디 집안이 망하는 경우가 세상에 한둘도 아니고.
“암튼 안 해.”
- 그르지 말고 한번 들어나 봐. 진심 존나 죽인다니까? 메일 주소 불러라.
금세 경박한 말투로 돌아온 태군은 집요했다. 은근 막무가내인 구석이 있는 그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들어 보겠다’라는 답을 들려줄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리고 재환은 빨리 전화를 끊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보아야 했다.
“reverb, 언더바, reverb, 골뱅이….”
- 리…, 언더바 뭐? 아씨, 스펠링으로 부르라고.
하는 수 없이 재환은 ‘야, 그냥 톡으로 찍어 줄게.’ 했다. 그걸로 통화가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태군은 진짜 꼭 들어 봐야 한다느니, 노래가 대박이라느니 어디까지가 과장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를 이야기를 조금쯤 더 늘어놓았다. 이쯤 되니 재환도 ‘이 새끼, 진짠가…’ 하는 마음이 은근슬쩍 들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어야 노래를 들어 보든지 말든지 하지.
“야.”
- 엉?
“메일 보낸다며.”
그제야 태군은 ‘아, 일단 끊자!’라며 전화를 뚝 끊었다. 벅벅 뒷머리를 긁은 재환은 마지못해 핸드폰 메신저로 태군에게 메일 주소를 적어 보냈다. 메일이 오기까지를 기다리며 의미 없이 앉아 있던 의자를 한 바퀴 빙 돌렸다. 누르스름한 벽지 위에 큼지막하게 붙은 밴드 포스터, 세로형 CD 장을 가득 채운 CD들, 그리고 새빨간 텔레캐스터 기타가 차례대로 시야를 스쳤다.
고2 겨울 방학. 집안이 망했다. 작은 용역 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난데없이 기숙 학원인지 뭔지에 전 재산을 투자했고, 결과는 참혹했다. 그때 재환은 처음으로 차압 딱지를 실물로 보았다. 처음에는 워낙 현실감이 없어 ‘시뻘건 색은 아니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로 집 꼴은 마치 짜 맞춘 듯 최악으로 치달았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어머니는 쓰러지고, 두 살 터울 여동생은 보란 듯 엇나가고.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이 이혼 절차에 들어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나름 유복했던 가정은 하루아침에 파탄이 났다. 하도 흔해 빠진 사연이라 아침 드라마 소재로도 쓰이지 않을 이야기였다.
그 후에야 뭐 뻔했다. 아주 활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럭저럭 친구도 많고 공부도 잘해 나름 늘 학교의 중심에 있던 재환은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자처했다. 누가 아는 것도 아닌데, 망한 집 자식이라는 게 지레 쪽팔려서. 그 와중 수능을 죽 쑤지 않은 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래 봤자 명문대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등록금 낼 돈이 없었다. 따라서 담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서를 넣은 곳은 하향에 하향을 거듭한, 개중 가장 등록금이 싸다는 학교였다. 당연히 전공은 아무래도 좋았다.
툭, 발로 바닥을 짚어 돌아가던 의자를 멈춘 재환은 먼지 하나 앉지 않은 기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도 기타는 자체 발광하듯 탐스러운 붉은빛을 번쩍였다. 당시 거의 모든 집안 살림살이에 차압 딱지가 붙을 때에도 저 기타만큼은 지켜 냈었다. 적어도 그때는 언젠가 기가 막힌 밴드를 하고 만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삿된 희망이었다.
그러니 이제 정말 밴드 따위 하지도 않을 거라면, 저 기타부터 처분하는 것이 맞았다. 안 그래도 한 푼 두 푼에 허덕이는 처지, 샀던 값의 반만 받아도 몇 달 식비는 걱정 없을 터였다. 식비가 뭐야. 월세도 걱정 없겠다.
하지만 늘 여기까지였다. 중고 시세를 알아보고, 볼썽사납게 눈물을 참으며 판매 글을 써 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팔 수 없었다. 기타는 재환에게 있어 거의 유일하게 남은 숨통이었다. 그리고 숨통이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그래. 그냥 취미로 집에서 혼자 치면 되잖아, 혼자. 라고 또 애써 짠한 합리화를 하며 메일함을 열었다. 뒤이어 막 도착한 ‘존나 죽임’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클릭하는 순간, 재환은 어쩔 수 없이 풉 웃음이 터졌다.
아오, 장태군.
보내는 이의 메일 주소가 무려 ‘metal_prinse’였다. ‘prince’도 아닌 ‘prinse’. 참으로 태군다웠다. 몇 번을 더 픽픽 웃은 재환은 메일에 첨부된 음악 파일 세 개를 주르륵 다운로드 했다. 한데 파일 이름들이 조금씩 이상했다.
[I Love You.mp3]
[I Miss You.mp3]
[I See You.mp3]
뭐야. 무슨 ‘I ___ You’ 트릴로지야?
절로 재환의 미간이 슬그머니 좁아 들었다. 제목 센스 한번 참 뭐했다. 아직 노래를 들어 보기도 전인데, 왠지 제 취향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슬금슬금 끼쳤다. 다소 근거 없는 예감이기는 했으나, 이런 경우 대게는 들어맞았다. 그렇다고 뭐 노래 한번 듣는 데에 돈이 드는 건 아니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노트북에 헤드폰 잭을 연결했다. 헤드폰을 머리에 끼고서 개중 그나마 제목이 덜 간지러워 보이는 〈I See You〉부터 재생시켰다.
헤드폰에서 이내 칙- 하는 화이트 노이즈가 들려왔다. 벙벙한 룸 톤은 아닌 것을 보아 라인 아웃 리코딩이 가능한 합주실에서 녹음한 모양이었다. 다만 따로 파일 길이를 정리하지는 않았는지 연주가 시작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느릿느릿 막대가 움직이는 재생 프로그램을 멍하니 응시하며 한쪽 손에 턱을 괴는 때였다.
“하아….”
순간 의자에서 움찔 몸이 튀어 오른 재환은 다급히 자판의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그대로 헤드폰을 벗어 던진 뒤 좌악 소름이 돋은 뒷덜미를 두 손으로 감쌌다. 벌렁벌렁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덩달아 호흡도 빨라졌다.
뭐야, 이거.
숨소리였다. 그것도 마이크에 입을 딱 붙인 채 내쉰. 게다가 상당히 낮았다. 확인해 볼 것도 없이 남자가 낸 소리가 분명했다. 그런데도 당황스러울 만큼 야릇함을 품고 있어, 귀에서 헤드폰을 떨어트린 당장에도 재환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단언컨대 야동에서도 이런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었다.
재환은 아직도 열이 내릴 기미가 없는 두 뺨을 아예 손바닥으로 철썩철썩 내리쳤다. 눈물 찔끔 나올 정도로 뺨이 얼얼해지고 나서야 좀 정신이 드는 듯했다. 그러다 혹시 몰라 제 다리 사이로 슬쩍 불안한 시선을 내렸다. 다행히 남자 숨소리에 거기를 세우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다행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사실 말도 안 되는 거였다.
“미친….”
여전히 자잘한 소름이 돋아 있는 팔뚝을 매만지며 노트북 앞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음악을 재생시킬 수는 없었다. 종전의 충격이 작지 않은 까닭이었다. 재환은 조금 더 숨을 고른 후에야 도로 헤드폰을 쓰고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공교롭게도 재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있던 덕인지,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어깨 한 번 흠칫 떠는 것으로 문제의 구간을 넘길 수 있었다. 그 별것도 아닌 일에 안도하며 긴 숨을 내쉴 즈음, 4비트의 건반 플레이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었다. 예고도 없이.
이윽고 노래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멍한 표정으로 노트북 뒤쪽 벽면을 응시하던 재환은 몇 번 눈을 끔뻑였다. 넋 나간 사람처럼 입은 벙긋이 벌어져 있었다. 그 상태에서 삐걱삐걱 눈알만 돌려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다소 기계적인 동작으로 다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약 3분 30초 정도가 흐른 후, 같은 행동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세 번째 노래까지 모두 끝나고, 이제 헤드폰 스피커 너머로는 침묵만이 흘렀다. 그러나 재환은 헤드폰을 벗을 수 없었다. 아예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천천히 숨만 들이마셨다 내뱉기를 반복했다. 위잉, 노트북 팬 돌아가는 소리가 유독 요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잠잠해지고, 모니터에 시꺼먼 보호 화면이 떠올랐다. 그 위로 ‘서재환의 노트북’이라는 문구가 깜빡깜빡 점멸했다. 보호 화면까지 꺼질 무렵, 시끄러운 핸드폰 벨 소리가 한순간에 적막을 깨뜨렸다.
그제야 집 나갔던 정신이 되돌아온 재환은 급히 헤드폰을 벗고서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그러기 무섭게 스피커에서 ‘야, 들어 봤냐? 존나 죽이지?’ 하는 태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이에 재환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딱 하나뿐이었다.
“어. 존나 죽인다.”
밤새 태군이 보내 준 노래를 듣고, 또 듣고, 내친김에 기타까지 얹어 보았더니 어느덧 창문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손가락이 아파 더 기타를 치고 싶어도 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기타 스탠드에 새빨간 텔레를 세워 놓은 재환은 온통 결리는 어깨를 꾹꾹 주물렀다. 몇 시간 동안 꼬고 있던 다리도 저릿저릿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자신이 겁나 좋아할 거라던 태군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세 곡 모두 더도 덜도 말고 딱 재환의 취향이었다. 한마디로 욕 나오도록 감성적이었다.
여기에는 보컬이 가장 큰 몫을 했다. 온몸에 소름을 일으켰던 숨소리가 예고편으로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음색이었다. 살짝 쇳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는 다른 비슷한 보컬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이크에 입을 바짝 대서가 아니라, 그 독특한 음색 때문에 꼭 귓가에 입술을 붙여 노래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마 제가 여자였으면 얼굴도 보지 않고 반했겠지 싶었다.
악기 연주도 꽤 훌륭했다. 미친 듯이 화려한 플레이는 아니었지만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모두 상당히 센스가 좋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건반이 마음에 들었다. 뭐라 딱 집어 설명하기는 어려웠으나, 시종 보컬의 감성을 기가 막히게 살려 주었다.
그러니 재환은 더욱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다른 멤버들이야 얼굴을 모르니 그렇다 쳐도, 태군이 이런 스타일의 드럼을 연주했다는 사실이 영 믿기지가 않았다. 절대 심술 같은 것은 아니었다. 거의 마하의 속도로 더블 베이스를 밟아 대던 녀석이 이렇게 감성 넘치는 곡에 드럼을 입히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을 따름이었다. 재수해서 어떻게든 실용음악과에 들어가더니, 그래서 이토록 스타일이 바뀐 건가 싶기도 했다. 물론 피를 찢을 기세로 스네어를 내리치는 힘은 여전했다.
여하간 이토록 취향에 부합하는 밴드 음악은 또 처음이었다. 내가 전에 하던 밴드는 뭐였지, 라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이런 밴드라면 자질구레한 고민 따위 만사 제치고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그랬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가사가 좀… 많이 특이했다.
처음 들은 〈I See You〉에는 ‘I see you’라는 구절이 정확히 여든여섯 번 나왔다. 다른 가사는 없었다.
두 번째 곡 〈I Miss You〉에서는 마찬가지로 ‘I miss you’만 총 예순다섯 번 반복되었다. 그게 가사의 전부였다.
세 번째 곡 〈I Love You〉는…. 세다가 포기했다.
노래는 진짜 좋은데, 너무 좋은데 가사에 대해서는 차마 뭐라 평가를 내리기가 곤란했다. 딱 한 노래만 그런 거면 곡 콘셉트거니 했겠지만, 세 개가 죄 똑같으니 조금 난해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 부분은 나중에 태군에게 제대로 확인을 해 봐야 할 성싶었다. 아니, 그냥 이럴 게 아니라.
핸드폰을 집어 든 재환은 서둘러 메시지를 입력했다. 누군가에게 연락하기에는 많이 늦은, 혹은 이른 시간이었으나 예상컨대 태군도 아직 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원래 밴드맨에게는 밤낮의 경계가 없는 법이었으니까. ‘합주해 보고 싶은데 언제 가능?’이라고 메시지를 적은 뒤 곧바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몇 초 안에 답장이 돌아왔다.
[ㅋㅋㅋ 바로 시간 잡겠음]
‘그래’라고 짧은 답을 적어 보낸 재환은 노트북 모니터로 시선을 되돌렸다. 이제는 진짜 전원을 끄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우스 커서는 ‘시스템 종료’ 대신 켜져 있던 음악 재생 프로그램으로 향했다. 자기 전 딱 한 번만 더 들어 보고 싶어서. 그러다 딱 한 번만 더 쳐 볼 생각으로 기타를 잡았고, 결국 재환이 잠자리에 든 건 창밖이 훤히 밝아진 후였다.
* * *
“사장님, 안녕하세요.”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
유리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반가운 목소리가 재환을 맞이했다. 그와 동시에 익숙하면서도 그리웠던 냄새가 확 코끝으로 끼쳤다. 약간의 쇠 냄새가 섞인 나무 냄새. 사방을 가득 채운 기타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재환은 등에 메고 있던 기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서 언제 봐도 뿌듯한 빨간색 텔레캐스터를 꺼냈다.
“세팅 좀 하려고요.”
“아, 세팅 받은 지 엄청 오래됐지? 그럼 이제 아예 제대한 거야?”
네, 하고 대답한 재환은 널찍한 융이 깔린 작업대 위에 기타를 올렸다. 그 위로 바짝 얼굴을 붙인 사장이 잠시간 요리조리 기타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세팅 받은 게 군대 가기 전인가? 근데 관리 진짜 잘했네. 넥도 별로 안 휘었어.”
과거 휴가 나오면 일단 집으로 달려가 기타 상태부터 살폈던 것을 떠올린 재환은 속으로 다행이다, 생각했다. 습도가 쭉쭉 올라가는 장마철에는 혹 기타가 상하지는 않을까 부대에서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줄은?”
“010으로 해 주세요.”
“그래, 잠깐 기다려.”
사장이 기타를 손보는 동안 재환은 늘 그랬듯 어슬렁어슬렁 가게 안을 돌아다니며 기타와 이펙터 페달 등을 구경했다. 과거에는 피크나 케이블 구입 따위를 구실 삼아 제집처럼 드나들었을 정도로, 이 커스텀샵은 재환에게 있어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집 같은 곳이었다. 멋진 자태의 악기들을 눈에 담고 있노라면 시간이 훅훅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 나이 차가 제법 나는 사장과도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재환의 기준으로 ‘수다’라 부를 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는.
“사장님, 이 페달 새로 나왔나 봐요? 못 보던 건데.”
가게 한 바퀴를 빙 돌아본 재환이 유리 진열대 안에 있는 페달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쨍한 남색의 직사각 표면 위에는 decay니 mix니 하는 명칭이 붙은 노브들이 쪼르륵 달려 있었다. 기타 연주 시 이러저러한 효과를 내어 주는 이펙터 페달 중에서도 재환이 환장하는 리버브 페달이었다.
리버브란 잔향을 뜻하는 말로, 리버브 페달은 기타 사운드에 잔향을 입혀 주는 역할을 했다.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널따란 들판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또 때로는 좁아터진 욕실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만들 수 있었다. 인공적으로 소리에 울림을 만드는 셈이었다. 그리고 재환은 이 리버브를 과할 정도로 먹인 기타 사운드를 좋아했다. 거의 광적으로. 그러니 리버브 페달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거? 생긴 것도 예쁘지? 미국에서 수입한 건데, 부티크 페달 중에서도 요새 잘 나가.”
“아….”
재환의 얼굴에 설핏 시무룩한 기색이 서렸다. 수작업으로 만드는 부티크 페달은 이펙터 페달 중에서도 상당한 고가였다. 재환이 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가격일 거란 뜻이었다. 레몬 오일로 기타 넥을 닦아 내던 사장이 풀 죽은 얼굴로 페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재환을 슬쩍 곁눈질로 살폈다.
“한번 써 볼래?”
“예?”
“기타 세팅 끝나면 한번 연결해 봐. 시연은 공짜야.”
사장이 사람 좋게 웃자 재환은 감사합니다, 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면서도 살짝 걱정이 되었다. 막상 기타에 연결해 봤는데 소리가 엄청나면 어떡하지 싶었다. 그럼 당연히 사고 싶어질 테고, 살 수가 없으니 더 생각날 테고…. 어쨌든 간에 당분간 새 페달은 어림도 없었다. 아직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지 못했을뿐더러, 혹시나 다시 밴드를 시작하게 되면 줄줄이 돈 나갈 일투성이였다. 오늘 세팅을 받으러 오기까지도 얼마나 고민했던가.
“자, 다 됐다!”
그제야 페달에서 시선을 거둔 재환은 서둘러 작업대 앞으로 갔다. 넥도 바디도 싹 닦아 내고, 줄도 새로이 간 기타는 그야말로 번쩍번쩍 빛이 났다. 이럴 때마다 재환은 전문가 손길이 다르긴 다르다는 걸 담뿍 실감했다. 내심 감탄하며 매끈매끈해진 넥을 손끝으로 쓸어 보는데, 사장이 재환 앞에 종전의 페달을 쓱 내밀었다. 이미 앰프에는 케이블도 꽂혀 있었다. 그새 구질구질한 걱정 따위 싹 잊은 재환은 고민 없이 반대편 케이블을 기타에 꽂아 넣었다. 곧이어 줄을 튕기는 손가락이 나비 날갯짓처럼 가벼웠다.
“이거 진짜 죽이네요.”
잠시간의 연주를 끝낸 재환은 짧지만 진심 어린 감상을 내놓았다. 이 이상은 딱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풍부한 공간감은 말할 것도 없고, 꿈꾸는 듯한 몽환적인 사운드가 한마디로 예술이었다. 이러니 사람들이 비싼 값 주고 부티크 페달을 사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회사에서 나온 딜레이도 잘 나가. 아, 얼마 전에 형찬이도 사 갔는데.”
“최… 형찬이요?”
재환의 눈썹 사이에 미세하게 주름이 잡혔다. 최형찬은 이전 재환이 하던 밴드의 보컬 겸 세컨드 기타였다. 기실 굳이 들어서 반가운 이름은 아니었다. 재환 자신이 밴드를 나왔던 과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사장은 그러한 사정까지는 당연히 알지 못할 터였다. 주위에는 재환의 밴드 탈퇴가 군 입대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참으로 편리한 이유였다.
“어. 아예 페달 보드 싹 새로 맞췄어.”
재환은 저도 모르게 ‘돈도 많네.’ 중얼거렸다. 형찬이 기타 연습에 매진하는 대신 장비에 돈을 쏟는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형찬이랑은 다시 밴드 안 해?”
그새 기타와 앰프에 꽂혔던 케이블을 모두 뽑아 가지런히 정리한 재환은 ‘안 해요.’ 하고 대답했다. 티는 나지 않았으나 그 앞에는 ‘죽어도’, 혹은 ‘절대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럼 새 밴드 하는 거야?”
“그럴 것 같아요.”
반짝거리는 기타를 가방에 집어넣던 재환은 제가 뱉은 말에 지레 놀라 합 입을 다물었다. 아직 태군의 팀과 만나서 합주 한 번 해 보지도 않았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의욕은 벌써 저만치를 앞서가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설레발치는 성격이 아닌데. 혹 이러다 저쪽에서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면 꽤나 실망할 것 같았다.
“아, 지금 기타에 딱히 문제는 없는데, 더 쓰다가 2, 3번 프렛은 한 번 교체해 줘. 1, 2번 줄 쪽이 조금 마모됐더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세팅 감사합니다.”
세팅비 계산을 마친 재환은 가게에 들어올 때처럼 기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페달 보드 가방을 손에 들었다. 그 상태로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다 더 탐나게 되어 버린 리버브 페달을 슬쩍 일별했다. 그러자 사장은 ‘나중에 사고 싶으면 말만 해. VIP 가격으로 해 줄게.’ 했다. 그렇게 되면 좋겠다, 생각하며 재환은 가게를 나섰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거리 곳곳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살랑살랑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이리저리 흩날리는 벚꽃 잎이 재환의 눈에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아무래도 간만의 합주를 앞두고 있어 쓸데없이 마음이 들뜬 모양이었다. 답지 않게.
피식 열없는 웃음을 지은 재환은 핸드폰을 꺼내 태군과 만나기로 한 카페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는데, 마침 버스 한 대가 재환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에 끼익 소리를 내며 정차했다. 그 안에서 분주히 내리는 사람들을 무심히 눈으로 좇던 재환은 버스 옆구리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광고를 발견했다.
최강 아이돌 진영의 26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눈에 확 띄는 색의 문구 옆에는 소위 꽃미남이라 부를 만한 남자의 얼굴이 크게 박혀 있었다. 이목구비도 시원시원, 웃음도 시원시원. 누군지는 몰라도 참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일반인은 절대 소화 못 할 보라색 머리가 거짓말처럼 잘 어울렸다. 하긴, 저러니까 아이돌을 하는 거겠지.
따위의 싱거운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던 중 앞뒤로 문을 닫은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오늘따라 별스러운 데 관심을 다 쏟는다 생각하며 재환은 머리에 썼던 볼캡을 습관처럼 한 번 꾹 눌렀다. 남은 걸음을 서둘러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화창한 날씨 탓인지 카페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사이에서 1년 전 휴가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친구를 찾기 위해 검정 눈동자가 부지런히 굴러갔다. 아직 안 온 건가 싶어 빈 테이블로 향하려는 찰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던 스킨헤드, 그러니까 민머리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순간 당황한 재환은 그대로 슬슬 뒷걸음질 쳤다. 아예 입구로 되돌아가려는데, 벌떡 일어난 스킨헤드가 후다닥 재환 앞으로 뛰어왔다. 어찌해 볼 틈도 없이 덥석 팔이 붙잡혔다.
“야, 서재환! 왜 그냥 가?”
저를 붙잡은 상대를 따라 엉겁결에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 자리에 앉은 재환은 연신 맞은편을 흘끔거렸다. 아직도 놀란 마음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씨발, 서재환 어째 넌 변한 게 없냐. 그놈의 검정 추리닝.”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특유의 맑은 목소리, 경박한 말투까지 앞에 앉은 이는 제 친구 장태군이 맞았다. 그러나 머리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갓 태어난 아기처럼 정말 매끈했다. 심지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그런데 숯검뎅이 같은 눈썹은 또 그대로니 당최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불교에 귀의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차림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딱 달라붙는 검정 티셔츠에는 태군이 죽고 못 사는 메탈 밴드 ‘Doom Boys’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청재킷을 걸쳤고, 아래에는 같은 색 청바지를 입었다. 패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재환이었지만, 저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저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낙천적이기 짝이 없는 친구는 재환이 절대 동의할 수 없는 말을 신나서 떠들어 댔다.
“왜. 이 형님이 존나 멋있어져서 놀랬냐?”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가고 싶었다. 한 명은 머리털 한 올 없는 스킨헤드에, 한 명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꺼먼 놈. 저야 늘 이렇게 하고 다녔으니 이제 와 새삼 신경 쓰일 건 없었으나, 아무래도 두 사람의 조화가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 손님들로 바글바글한 카페에 있으려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따끔따끔 뺨을 찌르는 시선은 절대 기분 탓이 아니었다. 결국 재환은 고르고 골라 최대한 절제된 질문을 조심스레 건넸다.
“너…, 무슨 일 있었냐?”
“엉? 뭔 일?”
폭 눈썹을 구긴 재환은 손가락 끝으로 제 모자를 톡톡 두드렸다.
“아, 머리? 어때. 존나 똑같지?”
태군은 기다렸다는 듯 재킷 앞섶을 활짝 열어젖혔다. ‘너 뭐 하냐?’라는 말을 꾹꾹 눌러 삼킨 재환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태군의 티셔츠로 시선을 내렸다. 아….
“내가 대한민국의 채드 해머다, 이 말이야.”
채드 해머. 고등학교 시절 귀에 인이 박일 정도로 들은 이름이라 재환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밴드 Doom Boys의 드러머이자 얼굴은 절대 boy가 아닌 근육질의 민머리 형님. 태군의 티셔츠에 프린트된 인물 중 하나였다. 11기통 드럼을 그렇게 간지 나게 친다나 뭐라나.
“…그래.”
어찌 됐든 이 이야기로 더 시간을 보낼 수는 없기에, 재환은 부담스러운 자신감으로 충천해 있는 친구에게 짧은 답을 전했다. 약속된 합주 시간까지는 약 40분 남짓. 그 전에 물어볼 것들이 많았다.
“근데 밴드 이름은 아직 없는 거야?”
“엉. 멤버도 빵꾸 났는데 이름은 무슨. 요샌 합주도 거의 못 했어. 벌써 기타 새끼 나간 지 한 두 달 됐나.”
“꽤 오래됐네.”
태군은 ‘말도 마라.’ 하며 휘휘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마다 반질반질한 정수리가 거듭 이리저리로 빛을 튕겨 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군은 당시 제가 얼마나 힘들었었나에 대해 왕창 푸념을 늘어놓았다. 원래 있던 기타리스트가 나간 후 보컬까지 밴드를 그만두겠다고 개지랄 떨던 걸 겨우 말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기타가 왜 나갔는데?”
“보컬이랑 싸워서.”
기타가 보컬이랑 싸워서 밴드를 나갔는데, 그다음에는 보컬이 밴드 안 한다 난리를 쳤다고? 어째 앞뒤가 잘 안 맞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게, 재환은 어쩔 수 없이 2년 전 자신이 밴드를 그만두던 상황이 떠올랐다. 설마 그 정도로 개판은 아니었겠지. 여하간 제가 더 깊이 파고들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지금 남은 건 보컬이랑 건반이랑 베이스랑 너?”
“아, 보컬이 건반도 쳐.”
‘그래?’ 하며 대답하는 재환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당연히 키보드 담당의 멤버가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조금 의외였다. 매력적인 음색에 건반까지 잘 친다니. 보통 재능 많은 친구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곡도 보컬이 쓰는 거야?”
“어. 약간 천재? 그런 쪽인 것 같아.”
매력적인 음색에 건반도 잘 치고 심지어 기가 막힌 곡까지 쓰는 보컬. 이쯤 되니 재환은 보컬의 얼굴이 한층 궁금해졌다. 뭐, 어차피 곧 보게 될 테지만.
“근데…, 쫌 예민해.”
“예민?”
“어.”
전에 없이 태군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래 봤자 사실 놀라운 얘기는 아니었다. 나름 창작하는 일이라고, 이 바닥에서 소위 예민하다는 사람들을 재환은 지금껏 수두룩하게 보아 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 또한 예민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이쪽에 안 그런 사람 어딨냐. 나도 예민할 때는 예민하지, 뭐.”
“넌 예민한 게 아니라 지랄 맞은 거지, 새끼야.”
장태군 너만 하겠냐, 라고 대꾸하려다 재환은 그냥 커피에 꽂힌 빨대나 쪼옥 빨았다. 이유는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쓸데없이 대화가 다른 데로 샜다가 괜히 합주에 늦어지게 될까 봐.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타이밍이었다. 첫 합주부터 지각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근데 이제 가야 되는 거 아니냐?”
“아, 괜찮아. 걸어서 5분임.”
태군의 ‘걸어서 5분’은 적어도 10분 이상일 가능성이 컸다. 재환은 주저 없이 남은 커피를 쭉 빨아올리고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이미 늦었네. 빨리 일어나.”
‘이씨, 새끼 존나 빡빡하다니까.’ 하고 툴툴거리며 태군도 재환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창으로 쏟아진 햇살에 반사된 매끈한 머리통이 또 한 번 번쩍, 화사한 빛을 터뜨렸다.
* * *
역시나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한다는 태군의 말은 신뢰할 만한 게 되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아니었다. 태군을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며, 재환은 어쩔 수 없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질반질하게 길이 닦인 골목 좌우로 자리 잡은 건 죄다 단독 주택들뿐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으리으리해 보이는.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재환조차 한 번 올 일이 없던 동네였다. 아무리 봐도 합주실이 있을 장소가 아닌 것 같았다.
“야, 여기 합주실이 있다고?”
세 번째 같은 질문이 던져졌을 때, 결국 우뚝 걸음을 멈춰 선 태군이 홱 뒤를 돌았다.
“아씨, 너 형 못 믿어? 다 왔다니까!”
그러더니 다시 씩씩하게 걷기 시작한다. 도리 없이 그 뒤를 쫓으면서도 재환은 여전히 못 미더운 눈초리로 태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따라갔더니 다단계더라, 하는 군대 동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에이, 설마. 이내 재환은 휙휙 고개를 저었다. 입은 걸지언정 태군은 남 뒤통수칠 성격은 아니었다. 적어도 재환이 아는 한은.
그리고 잠시 후.
“다 왔다, 인마!”
“…어?”
재환은 얼뜬 얼굴로 이 골목에서도 가장 세련돼 보이는 대문 앞에 선 태군을 쳐다보았다. 재환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태군이 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심지어 한두 번이 아닌 듯 매우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얼마 안 카 덜컹,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태군의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뒤를 돌더니 재환에게 ‘안 오냐?’ 하기까지 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거두지 못한 채, 재환은 대문 건너편으로 난 돌길 위로 발을 디뎠다.
이런 게 진짜 정원이구나, 싶은 곳을 가로지른 재환은 비로소 주택 현관에 다다랐다. 하지만 태군은 현관으로 들어서는 대신 건물 좌측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이번에도 태군은 주저 없이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뒤이어 건물 외벽과 같이 진회색을 띤 철문이 입을 벌렸다.
예상 밖에 철문 안쪽은 건물 계단참에 접해 있었다. 위아래로 난 나무 계단을 번갈아 쳐다보던 재환은 얼결에 태군을 따라 좁은 현관에 신발을 벗었다. 사람 사는 집이 아닌 건가, 생각하며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계단 아래에는 반투명 유리로 된 두꺼운 방음문이 있었다. 설비가 좋은 합주실이나 녹음 스튜디오에서 종종 보던 종류의 문이었다. 철컥, 소리를 내며 문고리를 아래로 내려 당긴 태군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서 태군을 뒤따라 들어간 재환의 눈이 한순간 휘둥그레졌다. 덩달아 입까지 크게 벌어졌다.
단언컨대 지금껏 재환이 가 보았던 합주실 중에서도 가장 넓고, 가장 깨끗하며, 가장 쾌적한 곳이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드러운 황색 조명과, 아이보리색 벽면, 깨끗한 나무 바닥. 지하실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끼치기는커녕 공기 중으로 은은한 향기까지 감돌았다.
놓인 장비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120W 이상은 되어 보이는 풀 진공관 기타 앰프가 두 대나 있었으며, 베이스 앰프 또한 무대에서나 쓸 법한 400W짜리였다. 출력도 출력이지만, 하나같이 상당한 고가의 모델들이었다. 가운데 놓인 드럼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전부터 태군이 입이 닳도록 부르짖던 독일제 드럼인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최소 천만 원은 넘겠지 싶었다.
감탄 어린 눈빛으로 그 하나하나를 훑던 재환의 시선이 우측에 놓인 빨간 노드 건반으로 향했다. 자신의 기타와 비슷한 색이기도 했거니와, 이전 밴드의 키보디스트도 연주하던 것이라 꽤나 눈에 익은 모델이었다. 다만 이곳에 놓인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고가인 88 건반이었다.
이 정도쯤 되니 재환은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건물 외관만 보았을 때는 영락없는 가정 주택 같았는데. 한데 일반 가정집 지하라 하기에는 또 설비나 장비가 지나치게 본격적이었다. 결국 답을 구하기 위해 태군을 바라보았지만, 속없는 민머리는 벌써 드럼 뒤에 앉아 스네어의 나사를 쪼이고 있었다. 콧노래까지 흥흥거리며. 저 새끼가 진짜.
재환이 소리 내어 ‘장태군’ 석 자를 크게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철컹하고 합주실 문이 열리며 문틈으로 훅 긴 다리가 뻗어 나왔다.
“와 있었네.”
이윽고 등장한 이는 키가 족히 190은 되어 보이는 장신이었다. 얼마나 크냐면, 등에 멘 베이스 가방이 무슨 입문용 미니 기타 가방처럼 보일 정도였다. 여태 앉지도 못하고 서 있던 재환은 상대를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아. 태군이 친구?”
“엉, 내 친구다! 졸라 잘생겼지? 모자 벗으면 훨배 나.”
흠칫 당황한 재환은 휙 태군을 쳐다보았다. 저건 또 꿍꿍이인가 싶었다. 그러다 금세 태군에게 별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냥 평소 제 자랑하듯, 친구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이걸 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진짜 잘생겼네. 난 현지우. 스물셋 동갑.”
그사이 베이스 가방을 내려놓은 지우가 재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키만큼이나 손가락도 길쭉길쭉했다. 딱 베이스 치기 좋아 보이는 그런 손. 서둘러 오른손에 들려 있던 페달 보드 가방을 내려놓은 재환은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아, 난 서재환.”
저를 향한 ‘잘생겼다’라는 말이 머쓱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서 본 지우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쌍꺼풀 없이 좌우로 긴 눈과 쭉 뻗은 콧대, 미끈한 입매가 약간은 껄렁한 듯하면서도 시원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이런 녀석이 무대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면 절로 눈이 갈 듯했다.
긴 다리를 접어 자리에 앉은 지우가 가방에서 베이스를 꺼냈다.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내추럴 피니시의 재즈 베이스였다. 재환의 기타와 같은 브랜드의 모델이었는데, 자연스러운 멋이 나는 디자인이나 색이 주인과 꽤나 잘 어울려 보였다.
지우와 마주 보는 자리, 기타 앰프 옆쪽에 앉은 재환 역시 가방에서 텔레를 꺼냈다. 늘 그렇듯 헤드에 튜너를 끼우고서 한 줄씩 음을 맞춰 보는 중, 태군이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툭 한마디를 뱉었다.
“야, 이거 아직 자는 거 아냐?”
“슬슬 내려오겠지.”
“아냐. 내가 봤을 때 그 새끼 분명 아직 자고 있다. 함 올라가 봐.”
대화의 흐름으로 보아 아직 등장하지 않은 한 명의 멤버를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슬슬 내려올 거라느니, 올라가 보라느니 하는 말이 재환의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설마 이 위에 사는 사람이….
“일단 전화해 보고.”
베이스를 내려놓은 지우가 핸드폰 화면을 톡톡 두드린 뒤 귀로 가져갔다. 이내 뚜르르 신호음 울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다만 ‘여보세요’나 ‘어’ 하는 대답은 끝끝내 들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태군이 ‘거 봐!’ 하며 팩 성질을 부렸다. 귀에서 떨어뜨린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지우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얘 단체방 메시지 아직 확인 안 했는데? 합주 모르는 거 아냐?”
“뭐?”
일순 합주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군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고, 지우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턱 끝을 매만졌다. 둘을 보고 있던 재환 역시 섣불리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쨌거나 지금이 좆된 상황인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기타를 다시 집어넣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지우가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올라가 볼게. 잠깐 기다려.”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을 보고 있던 재환이 태군에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보컬이 위에 살아?”
“어. 여기 걔네 집이야. 서프라-이즈!”
할 말을 잃은 재환은 그저 태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금세 꼬리를 내린 태군이 있지도 않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지….’ 하고 꿍얼거렸다.
“됐다, 됐어.”
애먼 태군을 탓해 봤자 뭐가 달라지나. 일단 기다려 보자는 마음에 재환은 마저 기타를 튜닝했다. 줄을 간 지 얼마 안 된 터라 금방 또 음이 틀어질 것이었으므로 중간중간 밴딩도 했다. 그럭저럭 튜닝이 끝난 다음에는 앰프 볼륨을 올려 연습한 곡들을 차례대로 쭉 쳐 보았다. 드럼스틱을 조몰락거리며 이를 지켜보던 태군이 슬쩍 재환에게 말을 걸었다.
“연습 많이 했냐?”
“어, 존나 많이 했다.”
“그른 것 같네…. 하여튼 완벽주의자 새끼.”
“고오맙다.”
아닌 게 아니라, 요 며칠 재환은 정말 간만에 밤새워 가며 연습했다. 태군이 보내 준 음원에 있던 기타는 하루 만에 마스터했고, 조금씩 자신의 스타일대로 변형한 다른 버전도 준비해 두었다. 세 곡에 맞는 각각의 기타 톤도 나름 열심히 연구했다. 이제 합주만 하면 되는 셈이었다. 단, 보컬이 와야 말이지.
“아, 맞다. 장태군.”
“엉?”
“니네 곡 말야, 가사가….”
왜 그러냐. 물으려는 찰나 철컹, 묵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약속한 것처럼 재환과 태군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합주실 문 쪽으로 홱 돌아갔다. 반절 정도 열린 문 사이로 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 올 거야.”
그제야 ‘아오.’ 하며 태군이 안심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재환 역시 적잖이 안도했다. 그냥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퍽 허무할 뻔했으니까. 태군이 ‘천재’라던 보컬의 얼굴도 내심 궁금했고.
자리에 앉아 다시 베이스를 집어 든 지우가 둥둥 줄을 튕기며 음을 맞추었다. 태군 또한 킥을 밟거나 스네어를 두드리며 몸을 풀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재환은 어쩔 수 없이 점차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이런 분위기를 다시는 맛보지 못할 줄 알았다. 보컬이 늦잠을 잤든, 합주가 있는 것도 몰랐든 빨리 저들과 연주를 맞춰 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또 혼자 설레발치는 것 같아 재환은 멋대로 들뜨려는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볼캡을 더 푹 눌러쓰고 습관처럼 크로매틱 스케일을 연주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슬슬 보컬이 오려나 싶어 재환은 아직 열려 있는 문 쪽을 흘끔거렸다. 그 횟수가 막 열 번을 넘어갔을 즈음, 별안간 재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차례대로 지판을 짚던 손이 우뚝 멎었다. 합주실 안으로 쑥, 분홍 머리의 남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짜 분홍색. 핑크.
분홍 머리칼에, 헐렁한 연두색 면바지와 목 늘어난 노란색 티를 입은 남자가 저벅저벅 키보드 뒤로 걸어가 앉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눈으로 좇던 재환은 정면으로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입까지 벙긋이 벌어졌다.
우와.
딱 그 한마디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꼭 연예인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 정말로 연예인 같았다. 눈은 크고, 코는 오뚝하고, 입술은 붉고. 이목구비를 이루는 선이 너무도 섬세해 차라리 잘 만든 마네킹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피부까지 새하얬다. 그래, 마치 아까 버스 광고에서 봤던….
“…아이돌 같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합주실이 조용해졌다. 불 들어온 노드의 버튼을 이것저것 매만지던 분홍 머리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멀리서 봐도 확연히 모래색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눈동자가 빤히 재환을 응시했다. 그 색이 하도 오묘하여, 재환은 태군과 지우 역시 저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늦은 인사를 전하려는 때였다.
뭐지…?
키보드 뒤로 손을 뻗어 전원을 끈 분홍 머리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재환을 쓱 일별하고는 그대로 길지 않은 길을 다시 걸어 합주실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쿵, 하고 문이 닫혔다.
도무지 상황 파악을 할 수 없는 재환은 넋 나간 얼굴로 분홍 머리가 사라진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뭐지? 이게 뭐지? 머릿속에서는 거듭 같은 질문만이 반복되었다.
“씨발….”
재환은 한숨 같은 욕을 뱉는 태군에게로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벌써 앰프를 끈 지우는 가방 안에 베이스를 집어넣고 있었다. 그러더니 훌쩍 일어서서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멨다.
“나 간다.”
두 손으로 매끈한 머리통을 감싸던 태군이 다급히 ‘야!’ 하고 지우를 불렀다. 그러나 이미 지우는 합주실을 나간 후였다. 이제 남은 건 재환과 태군, 두 사람뿐이었다. 꼭 몇십 분 전 처음 여기에 들어왔을 때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무릎에 기타를 올린 재환은 그저 눈만 끔뻑였다. 좀체 이 상황이 인지되질 않았다.
“아이씨, 미치겠네!”
쿵! 한 번 세게 킥을 밟은 태군은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했다. 거의 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의 재환을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합주는 이미 물 건너갔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야, 우리도 가자.”
그렇게 네 명이 모두 모인지 약 2분 30초 만에 시작도 못 한 합주는 끝이 났다.
안 그래도 해가 길어진 탓에 밖이 대낮처럼 훤했다. 이를 비웃듯 재환과 태군이 마주 앉은 깡통 테이블 위로는 벌써 빈 소주병 두엇이 늘어서 있었다. 그 옆에서 소금 막창이 지글지글 맛깔스러운 소리를 내며 익었다. 간간이 재환의 잔에 소주를 채우며 태군이 부지런히 막창을 뒤집었다.
“이름이 뭐라고? 유….”
“한영이. 유한영.”
태군은 먼저 익은 막창을 서둘러 집게로 집어 재환의 앞접시 위에 올렸다. 쌈장이 담긴 종지도 슬쩍 재환 가까운 쪽으로 밀었다.
“암튼. 그 새끼 진짜 뭔데?”
“내가 예민하다고 했잖냐.”
탁, 소리가 나게 탁자에 소주잔을 내려놓은 재환은 태군에게 눈을 부라렸다. 생긴 건 모범생처럼 단정한 놈이 저럴 때마다 태군은 등골이 다 오싹했다. 아니, 모범생이 맞긴 했다. 빡돌면 양아치보다 무서운 모범생이라 문제지.
“씨발, 그게 예민 정도냐? 무슨 개복치야?”
“개…, 뭐? 야, 그래도 개라니 말이 좀 심하다….”
“야이씨, 장태군!”
아예 재환에게 줄 요량으로 쌈 하나를 크게 싸던 태군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저러다 재환이 정말 소주잔이든 뭐든 집어 던질 것 같았다. 이건 괜히 쫄아서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조금 까칠하기는 해도 재환은 평소 그럭저럭 성격이 좋은 축에 속했다. 은근 주위 사람도 잘 챙기고 부탁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일단 꼭지가 돌면 거의 무슨 헐크 수준으로 돌변했다. 일례로 고등학교 밴드부 시절, 지각을 밥 먹듯이 하던 부원의 기타를 재환이 아예 박살 낸 적이 있었다. 진짜 또각, 두 조각으로. 태군은 그때 처음으로 기타가 참 연약한 악기라는 걸 알았다. 아니면 화난 재환이 말도 안 되는 괴력을 내뿜었던 거거나. 어쨌든 두 번 볼 모습은 되지 못했다.
“이거나 좀 먹어.”
씩씩대는 재환의 입 안으로 태군은 쓱 쌈을 밀어 넣었다. 빈 잔에 재빨리 소주도 채웠다. 이렇게 알아서 기고 있으니까, 제발 그만 성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내친김에 태군은 ‘이모, 여기 막창 1인분 더요!’를 외쳤다.
우물우물 채소와 막창을 씹으며 재환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분을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태군에게 종주먹을 들이댈 일이 아님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해명 내지 설명도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으니 자꾸 입 밖으로 거친 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 분홍 머리가 아이돌 같다는 말에 게거품 문다는 건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든, ‘감히 나를 아이돌 따위에 비교해?’라는 건방진 생각을 하든 재환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그렇게 개무시하고 합주실을 나가는 건 경우가 아니었다. 경우가 아닌 정도가 아니지. 거의 미친 거지. 남의 시간을 개똥으로 여기는 거지.
“아오, 씨발.”
탁! 이번에는 더 큰 소리가 나게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당시에는 당황이 커 그야말로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지만, 재차 상황을 되새기자 재환은 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러다 ‘씨발, 잘생기면 다야?’라는 옹졸한 마음까지 먹게 될 것 같았다.
“야, 장태군.”
“어?”
재환의 앞접시에 막창으로 거의 탑을 쌓던 태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 더 시킬까?’ 하기에 재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유한영이란 놈이 전에 있던 기타 좋아했냐?”
“에? 그건 왜? 왜 물어보는데?”
태군은 거짓 없이 당황했다. 재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쯧, 혀를 차며 눈썹을 구겼다. 몇 번이나 녹음된 연주를 들어 봤으니 재환 자신도 전 멤버가 실력 있는 기타리스트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플레이 센스도 좋았고 기타 톤도 썩 괜찮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재환은 보컬 앞에서 아직 연주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전 멤버와 비교할 때 하더라도 합주를 해 보고 나서 하는 게 맞았다.
“아냐, 됐다. 그래서, 오늘 막창집에는 왜 온 건데?”
“어?”
태군의 눈이 다시금 동그래졌다. 그게 당최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재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재환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너 한 입도 안 먹고 있잖아, 인마.”
“야, 이. 네가 좋아하니까 온 거지.”
“그니까 왜.”
“왜는 무슨. 새끼 졸라 의심도 많아요….”
어물쩍 말꼬리를 흐린 태군이 불판 위로 새로 나온 막창을 올렸다. 금세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돼지기름 냄새가 피어올랐다. 재환이 환장하는 냄새였다. 하지만 그가 아는 한 태군은 아니었다. 과거 군에서 휴가 나온 제가 그렇게 막창이 먹고 싶다고 했을 때, 태군이 뭐랬던가. 씨발, 막창 냄새만 맡아도 졸라 토 나오거든? 야만인 새끼! 다시 말해, 태군이 그저 그 유한영이란 새끼 대신 오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건 아닐 거라는 뜻이었다.
재환은 소주잔 바닥으로 탁탁 테이블을 두드리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군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군의 머리털 하나 없는 정수리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아무리 재환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는 시선이었다.
“아이, 씨발. 왜?”
결국 발끈한 태군은 집게를 내려놓고는 버럭 성을 냈다. 조금 더 눈치를 살폈다가 슬슬 얘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재환은 그새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징글징글한 새끼. 집요한 새끼.
“뭐냐고.”
“뭐긴 뭐? 너랑 밴드 하고 싶으니까 꼬시는 거잖아! 새끼, 다 알면서 꼭 이래요!”
흠…, 하며 재환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기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왜?”
“왜냐니.”
“니네 밴드 음악이 내 취향인 건 맞긴 한데, 그것 말고도 또 있을 거잖아. 같이 하자고 꼬시는 이유.”
태군은 곤란함을 숨기지 못하고 끙, 소리를 냈다. 술도 세지 않으면서 소주 한 잔을 훅 털어 넣고, 같은 행동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입꼬리가 쭉 늘어진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고서 어렵사리 말문을 뗐다.
“아, 존나 무시하잖아.”
태군의 잔에 꼴꼴 소주를 따라 주던 재환은 ‘누가?’ 하고 물었다. 종전과는 달리 상당히 누그러진 투였다. 거기에 확 마음이 풀어져 버린 태군은 쪽팔린 걸 알면서도 줄줄이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
“그 새끼들이! 유한영이랑 현지우랑. 그래, 지들은 미국 출신에 법대생에 다 알겠다 이거야. 근데 그렇다고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면 안 되지, 씨발. 원래 친구 사이라고 툭하면 자기들만 아는 얘기 하고, 어? 서러워서 진짜!”
눈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태군은 진심으로 서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여기서 술이 더 들어가면 아예 눈물까지 펑펑 쏟을 기세였다. 저러는 태군의 마음을 재환도 영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밴드에서 소외된다는 건, 생각보다 더 기분 더러운 일이었으니까. 누구보다 재환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둘이 밴드 하기 전부터 친구였대?”
“씨발, 그렇단다. 아니, 근데 그 새끼들이 친구인 거가 어쨌다는 게 아니라, 둘이서 세트로 사람을 존나 우습게 보니까 그게 짱나는 거지!”
다만 재환으로선 보다 사실 관계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태군은 은근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고, 따라서 과거에도 남모르게 혼자 상처받는 일이 종종 있곤 했다. 밴드부원들이 생일을 안 챙겨 주고 넘어갔을 때는 한 달이나 합주에 안 나오기도 했었지, 아마. 한마디로 녀석이 답지 않게 소심하다는 뜻이었다.
“어떨 때 널 무시했는데.”
“하, 나 지금 생각해도 진짜 어이가 없어서. 지난번에는 어쨌는지 아냐? 내 메일 주소를 보고 존나 낄낄대드라?”
얘기를 듣자마자 재환은 태군의 메일 주소를 떠올렸다. ‘metal_prinse’. 무어라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꾹 참았다.
“씨발, 나 같은 놈이 메탈 좋아한다고 하면 웃기냐? 어? 메탈은 무슨 몸 좋고 키 크고 그런 새끼들만 좋아해야 돼? 그르냐, 서재환?”
“아니.”
‘metal’이 문제가 아니라 ‘prinse’가 문제라는 걸 왜 모를까. 하나 여기서 괜히 바른 소리를 했다가는 ‘씨발, 너도 한패냐?’ 하는 원성이 돌아올 게 뻔했다. 그래도 친구라고 재환은 태군을 더 서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실, 조금 귀찮기도 했다.
“그니까, 씨발, 재환아. 네가 있으면 내가 얼마나 든든하겠냐? 어? 나랑 그 밴드 하자.”
그러더니 태군은 아직 막창이 남아 있는 재환의 앞접시에 수북이 새로 익은 막창을 쌓았다. 그 사이사이에도 재환에게 전에 없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안 그래도 눈 땡글땡글한 놈이 저리 쳐다보니 재환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머리털도 없어서 이건 뭐…. 꼭 시주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그거야 네 생각이지. 유한영인지 뭔지 걔는 나랑 할 맘 없을 텐데. 나도 솔직히 좀.”
“내가 다시 잘 말해 본다니까? 한영이 그 새끼가 존나 예민해도 은근 순수하고 착해요, 또. 글고 너 기타 치는 거 제대로 보면 찍소리도 못 할걸?”
들을수록 유한영이란 녀석에 대한 태군의 평가는 일관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쁜 놈이라는 건지 좋은 놈이라는 건지 좀처럼 알기가 어려웠다. 뭐, 그러든 말든 사실 재환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합주 시간 잡아서 알려 줘. 이번에는 걔 메시지 확인하나 제대로 좀 보고.”
“씨발, 서재환! 내가 너 존나 사랑하는 거 알지?”
벌떡 일어난 태군은 아예 테이블 너머로 두 팔을 뻗어 재환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게다가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쪽팔림은 오롯이 재환의 몫이었다.
* * *
“미친 새끼.”
“아, 왜애. 원래 다 그러려고 밴드 하는 거 아냐?”
태군과 가게를 나와 술집이 빼곡한 골목을 걷던 재환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왜 메탈 밴드 안 하고 이 밴드를 하냐 물었더니, 돌아오는 그의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여자 관객들이 많을 것 같아서란다. 하긴, 고등학생 시절 드럼 하나 칠 줄 모르면서 밴드부에 들어왔을 때도 태군은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여자 친구 사귀고 싶어서 왔다고. 물론 세상일이 그렇게 녹록지 않듯, 태군의 바람도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드럼을 좀 무섭게 쳤어야 말이지.
“하긴 서재환 넌 가만있어도 존나게 인기가 많지? 그지?”
“야. 돈 없는 남자 누가 좋아하냐?”
당연한 사실을 말하면서도 재환은 조금 입이 썼다. 태군의 말대로 한때 이성에게 관심을 받은 적도 있었던 것 같으나, 그래 봤자 다 옛날 얘기였다. 데이트할 돈도 없는 가난한 대학생을 누가 좋아해 줄까. 그마저도 기타에 정신이 팔려 있다면 더더욱.
“씨발, 넌 이게 되잖냐.”
척 제 얼굴 밑으로 손등을 가져간 태군이 앞뒤로 휙휙 손을 흔들어 댔다. 그 모습에 재환은 픽 웃었다. 그러는 태군도 남자다운 느낌은 좀 없어서 그렇지, 이목구비가 또릿또릿한 게 절대 못난 인상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머리 스타일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태군 본인만 그걸 모르는 듯했다.
“아, 근데 어칼래? 어디 가서 한 잔 더?”
괜히 먹지도 못하는 막창집에 가느라 거의 굶다시피 한 태군을 앞에 두고 재환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이래저래 걸리는 게 많았다. 일단 여기서 더 마시면 안 그래도 술이 약한 태군은 분명 취할 터였고, 그럼 뒤처리는 재환 자신의 몫이 될 가능성이 컸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재차 결심을 굳힌 재환은 툭툭 태군의 어깨를 두드렸다.
“밴드 일 잘 풀리면, 그때 제대로 마시자.”
“에이, 형님만 믿으래도!”
“그래.”
‘간다아-!’ 하며 팔을 휘휘 젓는 태군을 향해 재환도 손을 들어 보였다. 금방 멀어진 태군이 시야에서 작아졌을 즈음,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재환은 서둘러 반대편으로 걸음을 뗐다.
부엌과 거실, 침실의 경계가 죄 모호한 월세방에 들어서자마자 채 기타 가방도 벗지 못한 재환은 매트리스 위로 철퍽 엎어졌다. 오늘 하루 이동양이 적지 않았던 탓에 온몸이 축축 늘어졌다. 그나마 분홍 머리의 집이 멀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으나, 그러면 뭐 하나. 합주 한 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했는데. 다시금 분노를 곱씹던 재환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단 가방에서 기타부터 꺼낸 후 페달 보드 가방을 열었다. 철제 보드 위로 죽 늘어선 이펙터들 사이에서 남색 페달 하나가 새것다운 반지르르한 빛을 뿜었다. 태군과 헤어지고 다시 재환을 커스텀샵으로 향하게 한 원인이었다. 저 녀석 때문에 앞으로 한 두 달간은 손가락 빨아야 될 성싶었다.
“미쳤지….”
하니 절로 자책하는 소리가 흘러 나갔다. 변명의 여지 없이 충동구매였다. 그렇다고 고작 소주 두 병에 취한 것도 아니었다. 재환은 상당히 술이 센 편이었다. 태군과 막창집에서 나눴던 대화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왜긴. 존나 오기가 나니까 그러지.
온종일 답답하게 머리통을 덮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진 재환은 매트리스 앞으로 앰프를 끌고 왔다. 가방에서 케이블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앰프와 보드 사이, 또 하나는 보드와 기타 사이에 연결했다. 앰프 전원을 켜고서 시간이 시간인 만큼 마스터 볼륨은 최대한으로 줄였다. 새 리버브 페달의 노브를 이것저것 만진 후 좡- 하고 오픈코드를 쳐 보았다.
“크….”
조금 전 자책 상태에 빠졌던 게 무색하게 재환은 진심 어린 탄성을 뱉었다. 이 소리에 매료되어 기어이 미친 짓을 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황홀하면서도 몽환적인 소리를 들려주니 차마 후회를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기존의 리버브 페달도 썩 괜찮은 녀석이었지만 감히 비교가 안 되었다. 줄곧 손가락이 장비를 이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안일한 생각이었던 듯했다.
내친김에 3.5 케이블을 꺼낸 재환은 앰프의 Aux 단자에 핸드폰을 연결했다. 뒤이어 지금까지 족히 백 번은 넘게 들었을 〈I See You〉를 틀었다. 그다음에는 순서대로 〈I Miss You〉와 〈I Love You〉도 재생시켰다.
세 곡이 모두 끝났을 무렵, 재환은 기타를 끌어안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아예 기타를 옆에 내려 두고서 풀썩 침대 위로 누웠다. 다시 핸드폰으로 음악을 재생시킨 후 앰프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노래 좋다. 목소리도 좋고. 근데 오늘 말하는 걸 한 번도 못 들어 봤네. 개싸가지 새끼. 아씨, 그래도 음색 하나는 진짜 죽인다.
감탄 반, 짜증 반으로 노래를 듣는데, 문득 창밖에서 툭툭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몸을 일으킨 재환은 한걸음에 창가로 갔다. 몽글몽글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어룽진 새카만 창문에 투둑투둑 빗방울이 부딪치고 있었다. 커다래진 빗방울이 또르르 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면 새 빗방울이, 또 흘러내리면 새 빗방울이 맺혔다. 늦은 밤 내리는 봄비였다. I see you, I see you. 때마침 들려오는 노랫말이 촉촉한 빗소리를 따라 함께 흘렀다.
잠시간 그 상태로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던 재환은 다시 앰프 앞으로 가 앉았다. 서둘러 기타를 집어 들고 오른손에 쥔 피크로 주저 없이 줄을 튕겼다. 이윽고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맑게 터지는 멜로디는, 지금껏 재환이 연주한 적 없는 것이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번쩍 눈을 뜬 재환은 습관처럼 핸드폰으로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막 오전 8시가 지난 참이었다. 제대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그런가, 이른 저녁에 잠이 들든 한참 지난 새벽에 잠이 들든 깨는 시간은 늘 엇비슷했다. 아직 몸에서 군기가 빠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늦게까지 기타를 연습하는 일이 잦아 1시간 정도 기상이 늦춰졌다.
한 번 기지개를 쭉 켜고서 옆자리에 곱게 누워 있던 기타를 스탠드에 올려 두었다. 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진 케이블을 주섬주섬 주워 정리하고 페달 보드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앰프까지 제자리로 되돌려 놓은 후 몇 걸음이면 닿을 창가로 갔다.
끝이 누렇게 바랜 커튼을 끝까지 열어젖혔다. 하지만 늘 그랬듯 마구 햇빛이 들이치지는 않았다. 보증금도, 월세도 싼 방. 해까지 들기를 바란다면 기실 그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이럴 때면 재환은 문득 몇 년 전까지 살았던 평수 넓은 아파트가 생각났다. 특히 재환의 방은 남향으로 창이 나 있어서, 아침만 되면 눈꺼풀이 따가울 정도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는 했다. 하니 늦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다.
이내 쓸데없는 옛 기억을 떨쳐 낸 재환은 겨우 허리까지 오는 아담한 사이즈의 냉장고 앞으로 가 쪼그려 앉았다. 냉장고 문을 열자 우유와 계란, 요구르트, 그리고 김치나 과일 따위가 나름 내부를 넉넉하게 채우고 있었다. 고추장, 된장, 미림 같은 식재료도 제법 있었다. 한 푼이 모자란 형편을 생각하면 꽤나 호화로운 냉장고인 셈이었다. 먹는 데에서까지 궁상떨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새로 산 페달 때문에 이 작은 호사도 당분간은 누리지 못할 것 같았다.
냉장고 안쪽에서 된장을 꺼낸 재환은 조리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 앞에 섰다. 허리를 숙여 하부장 안에서 양파와 감자도 꺼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나 보기에는 좀 흉했으나, 그 덕분에 나름 싸게 산 것들이었다. 차례대로 손질을 한 후 냄비에 넉넉히 물을 받았다. 쌀뜨물이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쌀을 씻어 밥까지 하기에는 조금 귀찮았다. 아직 전에 해 둔 밥이 냉동실 안에 있기도 했고.
얼마 안 가 좁은 월셋집 안에 제법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퍼졌다. 마무리로 다진 마늘을 넣어 한 번 휘저은 재환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조금 떠올렸다. 후후, 불어 호로록 들이마시자 절로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정말로 꽤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들어간 재료가 몇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이 그랬다. 양도 많으니 앞으로 며칠간은 여기에 밥 하나 있으면 끼니 걱정 없겠지 싶었다.
앉은뱅이책상을 끌어다 방 가운데 놓은 재환은 그 위로 찌개와 밥, 그리고 김치를 올렸다. 노트북까지 갖고 와 가장 좋아하는 영국 밴드인 ‘Embryo’의 라이브 영상을 틀었다. 이미 열 번도 넘게 본 거였지만, 여지없이 첫 장면의 함성만 들어도 재환은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곡의 인트로를 따라 양반다리 한 발끝을 까딱거리며, 밥 한 숟갈을 크게 떴다.
언제나처럼 먹자마자 설거지를 깨끗이 끝낸 재환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팔뚝에 코를 묻어 킁킁거리자 미세하게 막창 냄새가 맡아졌다. 지난밤 집에 돌아와 옷도 안 갈아입고 기타 삼매경에 빠졌던 탓이었다. 그래도 밤새워 뜯어고친 새 플레이가 썩 마음에 들어 다행이었다. 다만 분홍 머리도 그렇게 느껴 줄지는 미지수였다. 이번에도 개무시하면 좀 기분 더러울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재환은 샤워기 물을 틀었다. 이내 낡은 타일에 물줄기 부딪치는 소리가 좁은 욕실을 가득 메웠다.
씻고 나온 재환은 머리도 다 말리지 않은 채 어김없이 기타부터 집었다. 매트리스 위에 앉아 한 줄씩 음을 맞춰 보는데, 옆에 둔 핸드폰으로 흘끔 눈이 갔다. 당연히 아직 합주 시간을 다시 잡았다는 태군의 연락은 없었다. 사실 지금은 태군이 자고 있을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다 재환은 답지 않게 안달 내는 제 모습이 퍽 우습게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번 다시 밴드는 안 할 거라고 큰소리쳤으면서. 사람 마음이란 게 이리도 간사한 거였다.
늦은 밤 시간이 아니니 어제보다는 앰프 볼륨을 조금 더 키웠다. 그렇다고 해서 성에 찰 정도로 높일 수는 없었다. 지은 지 한참 된 연립 주택의 방음 상태야 뻔하디뻔했다. 게다가 옆집 사는 건 예민한 고시생이었다. 재채기만 해도 시끄럽다며 재환의 집 문을 두드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괜히 부딪히기 싫어 그럴 때마다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때는 재환도 참을 자신이 없었다. 그 전에 미리미리 조심하는 게 나았다.
대신 리버브 페달에서 리버브의 양을 조절하는 mix 노브를 7시 방향 정도까지 돌렸다. 드라이브도 충분히 걸었다. 그 상태에서 새로 짠 리프를 연주해 보았다. 역시나 만족스러웠다. 플레이와 사운드 모두. 내친김에 노래까지 틀고 다시 기타를 쳐 보려던 때, 핸드폰에서 Embryo의 음악이 요란하게 울렸다.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벨 소리였다. 이렇게 일찍 전화 올 데가 있나. 재환은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 아, 서재환 씨? 여기 알바 사이트에서 이력서 넣으셨던 카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