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400. 낯선 고향에서
서울 거리에 시민들이 구름같이 몰려나왔다.
고개를 쭉 빼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군악대를 앞세운 카퍼레이드 행렬이 나타나자 감격의 환호성을 지르며 태극기를 흔들어 댔다.
“왔다! 축구대표팀이다!”
“대한민국 만세! 축구왕 이준영 만세!”
사흘 전 3, 4위전을 끝으로 잉글랜드 월드컵 일정을 마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7월 마지막 날 고국으로 귀환했다.
4강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거두며 대한의 이름을 만방에 떨친 개선장군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고, 꽃잎과 색종이가 흩날렸다.
“저기 이준영이 온다!”
“나도! 나도 가까이서 볼 거야!”
“어허, 밀지 마쇼! 민주 시민답게 질서를 지켜야지!”
지나치게 흥분한 시민들이 난입하며 행렬이 정지되는 일이 몇 차례 있었지만, 그래도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쩝, 분명히 북괴 놈들이 수작질을 벌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뜻깊은 행사에 사고가 터지길 바랐단 말이야?”
“그럼 대특종이잖아.”
“미친놈아! 특종이 고파도 정도가 있지!”
사실 일부 기레기들이 바라는 상황은 일어날 수 없었다.
행사 준비를 하면서 경찰과 헌병들이 서울 시내를 탈탈 털었으니까.
위험한 폭발물이 설치된 건 아닌지, 거동이 수상한 놈들이 있진 않은지 등등.
“뭐, 이것만 해도 특종이지.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 아닌가.”
“하긴 언제 또 우리가 4강까지 가겠습니까.”
“글쎄, 그건 모르지. 희망을 품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또 그런 날이 오지 않겠어?”
기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행렬은 저편으로 멀어졌다.
여의도에서 시작했던 개선 행진은 동대문 운동장에서 끝났다.
대통령과 정부 각료, 국내외 인사들과 축구인들이 시민들과 더불어 대표팀을 맞았다.
“고맙소, 축구대표팀 여러분. 국민 모두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주어 정말 감사하오.”
모두를 대표하여 감사의 뜻을 전한 김홍일 대통령은 선수들에게 체육 훈장을 수여하며 공로를 치하했다.
준영은 가슴에 달린 훈장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 입성은 확정이군.’
잉글랜드 대표로 첫 월드컵 우승도 일구었으니 영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문제없이 입성할 수 있으리라.
이 시대에 와서 잡았던 거대한 목표 중의 하나는 확실히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건 석유 재벌 구단주지. 뭐, 이것도 순조롭게 진행되곤 있으니…….’
준영은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꿈을 꾸었다.
호마리우, 미카엘 라우드럽, 데이비드 베컴, 게오르게 하지, 다보르 슈케르 등등.
미래의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 자신을 보고 정중히 허리를 굽히는 광경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실룩실룩 웃었던지, 최정민이 뭐 그리 좋은 꿈을 꾸었냐며 묻기도 했다.
‘그 꿈도 분명 현실이 될 테지.’
꿈은 이루어진다.
그 말을 강하게 믿을 수 있었던 준영은 먼 미래가 무척 기대되었다.
***
훈장 수여식이 끝난 후, 대표팀 선수들은 반도 호텔에 마련된 만찬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앗, 할머니!”
“희택아! 아이구, 내 새끼!”
호텔에는 선수 가족들이 먼저 와 있었다.
다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해후하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준영도 한국에 함께 온 아내와 딸, 그리고 할아버지 일가와 이억관의 가족과 어울려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4강 진출도 대단하긴 한데요. 좀 아쉽더라고요. 좀 더 잘했으면 결승, 아니 3위도 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아야얏!”
멋대로 떠벌리던 강윤은 여친인 소희에게 옆구리를 꼬집혔다.
뒤이어 이 씨가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준영이 네가 이해해라. 이놈이 아직 철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아쉬운 건 사실이고, 다들 그 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으니까요.”
준결승에서 패한 후 한국은 3, 4위전에서 브라질과 맞붙었다.
서독의 베켄바워에게 일격을 맞고 결승 진출이 좌절된 펠레는 존 Y. 리라도 잡겠다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렇게 독이 바짝 오른 펠레에게 전반전에만 해트트릭을 내주고, 후반엔 신예 미드필더 자이르지뉴에게도 골을 허용.
그나마 후반전 세트 플레이에서 준영이 프리킥 득점에 성공하며 무득점 패배는 면했다.
3, 4위전 완패 때문에 대표팀 선수와 코칭스태프는 강한 체력을 기반으로 한 기동력 축구에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풍부한 경험과 높은 수준의 테크닉, 그리고 번득이는 창의성을 모든 선수가 두루 갖춰야 한다는 걸 알았죠.”
“패배로부터 배우게 된 거구만. 결과적으로 한국 축구가 전반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이억관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다 저변이 넓어져야 하고, 우수한 유망주를 발굴해서 육성해야죠.”
“실업팀, 아니 전문 프로팀도 필요하려나?”
“그거야 차근차근 할 일입니다.”
이억관의 말에 따르면 이번 월드컵으로 국내에서 축구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축구단 후원과 창설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들도 늘어났다고.
“어제는 도로공사 사장인 박정희란 양반이 신문에 사설을 냈어. 우리나라도 메르데카 컵같이 정기적인 국제 대회를 만들자는 주장이었지.”
‘박스컵의 창시자다운 주장이군.’
준영은 그런 데 쓸 돈이 있으면 축구 저변을 넓히는 게 더 낫다고 보았다.
‘공무원들이야 눈에 띄는 성과를 좋아하니 국제 대회 창설에 솔깃할지도 몰라.’
안 그래도 내일 대통령과 독대 약속이 잡혀 있었다.
준영은 그때 이와 관련한 얘기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
다음 날, 청와대를 방문한 준영은 국제 대회 신설과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래, 맞는 말이야.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도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겠지. 그래도 말이지…….”
수긍하는 듯하던 김홍일 대통령은 국제 대회 창설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런 국제 대회가 국가 위상을 높이거나, 국민의 단합을 고취시키는 데 유용한 구석도 있지 않겠나?”
“그렇긴 합니다만,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봅니다.”
“그럼 메르데카 컵처럼 매년 치르지 말고 격년, 아니 월드컵처럼 4년에 한 번은 어떤가? 다른 국제 대회랑 겹치지 않게 일정을 조절해서 말이지.”
“글쎄요…….”
“간소하게 4개국 정도만 초청하는 거야. 초청 국가도 6.25 전쟁 참전 우방국들 중에 뽑는다거나. 그럼 외교적으로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참전국들 중에 축구 잘하는 나라들이 꽤 있긴 합니다. 당장 영국이나 프랑스만 해도 공 좀 차는 나라들이니까요.”
물론 그쪽이 풀 전력을 내보낼지는 미지수.
아무튼 대회 간격이나 규모를 적절히 조절한다면 준영도 마냥 반대하고 싶진 않았다.
“아예 차라리 유소년 대회로 할까? 자네도 말했잖나. 어린 선수들의 육성이 중요하다고 말이야.”
“나쁘진 않습니다만, 자칫 성적 우선주의를 부채질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준영은 자칫 폭주할지 모르는 열차에 적당히 브레이크를 걸어 준 후 청와대를 나왔다.
‘대통령 각하도 이런 점에서는 옛날 사람이군.’
혹시 사설을 낸 박정희가 대통령을 부추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독단을 부리진 않고,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타협을 하려는 노력은 한다는 점.
아직 유럽 일부 국가들도 막장 독재자들이 설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뒤바뀐 한국의 역사는 올바른 궤도를 탔다고 할 수 있었다.
‘다음 대통령도 좋은 사람이 당선되어야 할 텐데……. 아니, 그 전에 차기 대표팀 감독 임명도 문제로군.’
윈터보텀 감독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한 것 같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 때문에 후임 감독을 두고 대한축구협회가 고심하고 있었다.
일단 수석 코치인 톰 피니에게 맡기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지만, 한편으로 김용식이나 최정민 등 다시 한국인 감독으로 임명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일단 틀을 유지한 채 대표팀을 개선해 가기를 바라는 준영은 전자의 의견에 찬성했다.
물론 톰 피니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기에 우선 그의 뜻을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
톰 피니는 한국 측의 제의를 수락했다.
원래 가족들 때문에 귀국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내가 한국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남기로 했다고.
“아내분이 다른 것보다 햇볕을 많이 쬘 수 있다는 점이 마음이 드셨다고 하더군.”
“하긴 영국은 흐리고 비가 많으니까요.”
리즈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한국의 높고 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살이 좋았으므로.
“그래도 오늘처럼 더운 날은 반갑지 않기도 해요.”
“하하, 뚜렷한 사계절이라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지.”
차창을 몽땅 열어 놓았음에도 차량의 실내 온도는 높았다.
그 때문에 준영과 리즈는 부채질을 하느라 바빴다.
‘에어컨이 간절한데, 아직 자동차 에어컨이 대중화된 시대는 아니니…….’
준영이 한국에서 렌트한 자동차에도 에어컨은 없었다. 나름 고급 미제 차량인데도 그랬다.
“안나는 데려오지 않길 잘했군.”
“걔는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던걸요. 어제도 강윤 군이랑 놀러 다닌다고 바쁘더라고요.”
안나는 준영과 닮은 강윤을 좋아했다.
강윤도 막냇동생뻘인 안나를 귀여워하며 잘 돌봐 주었다.
‘실제론 증손녀일 텐데 말이지.’
나중에 안나가 자라면 강윤의 아이, 아버지와도 만나게 될지 모른다.
타임 슬립 덕분에 꼬여 버린 가족 관계를 생각하니, 준영은 저도 모르게 실소가 지어졌다.
‘뭐, 크게 문제 되진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가 탄 차는 목적지인 경기도 화성 한마음 보육원에 도착했다.
한국에 온 김에 보육원 아이들을 격려하고 위문품도 전달할 마음에 찾아왔던 것.
그런데 이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어? 사장이 여긴 웬일이야?”
“터너 씨?”
윌리엄 터너.
21세기에 준영을 돌봐 주었던 고마운 신부님.
건달 같은 외양을 벗어던진 그는 신학생 같은 차림을 하고서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한창 공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 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 봉사 활동 중이야. 지난번에도 들렀다가 아이들이랑 정이 들어서…….”
대충 사정을 설명하던 터너는 흥분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 참, 여기서 TV로 사장이 월드컵에서 뛰는 경기를 다 같이 봤어! 진짜 엄청난 활약이더군.”
“그래요? 한국은 생중계가 안 된 걸로 아는데…….”
“당연히 녹화 중계였지. 그래도 굉장했다고. 결과를 알고 보는데도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더군.”
준영은 한동안 터너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리즈와 함께 보육원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불편한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 뒤 리즈와 단둘이서 주변을 거닐며 낯선 고향의 풍경을 감상했다.
“준, 저길 봐요. 애들이 축구 하고 있네요.”
“녀석들, 날씨도 더운데 기운도 좋군.”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던 준영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아, 갑자기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나네.”
“어떤 거요?”
“그게, 미래에 프레드로 저택을 샀었던 게 말이야. 보육원 동생들과 같이 살고 싶어서 그랬거든.”
“아하, 그래서…….”
“큰 집에서 같이 살면서 앞뜰에 축구장도 만들어서 축구도 하면서 즐겁고 시끌벅적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
어느샌가 잊고 있었던 꿈.
그의 소망을 들은 리즈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안 늦었으니 그 꿈을 이뤄 보지 그래요?”
“그래도 돼?”
“나도 도와줄게요. 그렇게 다 같이 ‘Lee’s United’를 만드는 거예요.”
“하하핫! Lee’s United라! 확실히 재밌겠네!”
잊고 있었던 꿈을 이뤄 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새로운 목표를 세운 준영.
서둘러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소년이 있었다.
“범곤아, 뭐 해? 빨리 패스!”
“앗! 알았어!”
친구들과 축구를 하던 차범곤은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미래에 분데스리가를 주름잡는 갈색 폭격기.
자신의 꿈을 부풀려 준 레전드 플레이어를 알아보지 못한 소년은 내일을 향한 슈팅을 날렸다.
마침
***
작년 3월 12일에 연재를 시작해 1년하고 한 달 넘어서 본편을 마무리했습니다.
솔직히 저도 고전(…) 축구는 잘 아는 편이 아니었다 보니 소설 쓰면서 조사하다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았습니다.
낯선 배경과 소재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봐 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날 얘기했듯, 남은 몇 가지 이야기는 외전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당장은 어렵고, 저도 연재한다고 미뤄 놓은 수술이 있다 보니 잠시 쉬고 회복도 한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