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99. 마지막 승부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9만 4천여 명의 관중들이 들어찬 경기장의 필드로 잉글랜드와 대한민국 선수들이 입장했다.
“Oh, Come on, England! It’s coming~ Football’s coming home!”
“아- 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잉글랜드 팬들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절대다수인 그들에 비하면 한국 응원단은 한 줌밖에 안 되었지만, 힘껏 응원가를 불러 댔다.
관중석에서 응원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삼사자 군단과 태극 전사들은 악수를 나누었다.
“멋진 경기를 하자, 존.”
“좋지. 후회 없이 뛰어 보자고.”
누구보다 굳게 손을 잡으며 미소를 주고받은 준영과 던컨.
그런 그들의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선명하게 잡혔다.
「유럽을 제패한 버스비의 붉은 악마들이 오늘은 적수로 만났습니다. 아시아의 거인과 잉글랜드의 천재, 과연 결승 무대에 오르는 건 누가 될까요?」
잠시 후 저녁 7시 30분.
심판의 휘슬과 함께 준결승 잉글랜드 대 대한민국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얀 상의에 짙은 남색 하의의 잉글랜드 선수들은 조심스럽게 전진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붉은 유니폼의 한국 선수들은 이전 경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활발한 움직임으로 축구 종가에 맞섰다.
“흠, 양 팀 포메이션이 비슷해 보이는군.”
여왕과 함께 오늘 경기를 보러 온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의 말에 FIFA 회장인 스탠리 루스가 바로 설명했다.
“양쪽 모두 최전방 측면보다 미드필드를 강화한 포메이션이라 그렇습니다.”
잉글랜드는 미드필더를 다이아몬드 형태로 배치한 4-4-2.
한국 대표팀은 이전 경기에서 효과를 보았던 4-5-1 대형으로 맞섰다.
“한국 측이 꽤 과감하게 덤벼드는구려. 자신감이 상당해 보여.”
“저들이야 더 이상 손해 볼 것이 없으니까요.”
루스가 보기에 한국은 이미 충분, 아니 과분한 성적을 거두었다.
여기서 진다고 해도 수치는 아니니, 마음 놓고 덤벼드는 것.
‘그에 비하면 우리는……. 씁!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지만, 저렇게 소심해서야 축구 종가의 위엄이 안 서는데!’
루스는 불만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닥치고 공격!’을 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 팀은 비록 기량이 모자라는 선수가 많지만, 발이 빠르고 체력도 좋았다.
거기다 조직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무턱대고 뛰어들어 뒷공간을 내줬다간 멍청한 이탈리아나 포르투갈과 같은 망신을 당하고 말리라.
‘아시아의 변방 국가 따위가 이렇게까지 치고 올라올 줄은 몰랐는데…….’
이번 월드컵에서 ‘코리안 인베이전(Korean Invasion)’을 목격한 많은 유럽 축구인들은 과거 몽골의 침공과 같다고 평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루스 역시 그랬다.
‘뭐, 그 덕에 관심도나 TV 시청률이 폭등하기도 했지.’
유럽과 남미 두 대륙의 잔치로 여겨지던 월드컵이 진짜 월드컵다워졌다고 평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본선 티켓 배분 문제 때문에 월드컵에 냉담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국가들도 한국의 선전에 큰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존 Y. 리 녀석이 기특하긴 하지.’
정말이지 놈을 기특하게 생각할 날이 올 줄이야.
쓴웃음을 지은 루스는 애증 어린 눈길로 준영의 플레이를 지켜보았다.
***
「캡틴 리, 중간에서 차단. 한국 선수들이 잉글랜드 진영으로 달려갑니다. 역시 빠르군요.」
전진하던 준영이 측면의 이희택 쪽으로 공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공을 잡기 전에 레이 윌슨이 끊어 내 라인 밖으로 내보냈다.
박승옥이 스로잉으로 공격을 재개하자, 김기복이 바로 우측면의 정병탁에게 패스.
하지만 이번엔 조지 코헨에게 차단되었다.
잽싸게 공을 확보한 준영은 중앙의 조윤옥에게 패스했다.
그러자 잭 찰튼과 바비 무어가 앞을 가로막았다.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한 윤옥은 뒤쪽의 김기복에게로 공을 돌렸다.
「Kim, 과감하게 슛! 하지만 노비 스타일스의 태클에 막히고 맙니다. 뒤에서 바로 공을 잡아 주는 Park…….」
이후, 좌우 중앙으로 공격 시도가 계속되었지만, 잉글랜드 수비진은 쉽사리 흔들리지 않았다.
‘역시 쉽지 않군.’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견고한 요새와 같은 잉글랜드 수비.
그런데 그 모습이 무척 낯익었다.
체력과 수비 능력이 뛰어난 좌우 풀백이 맨유에서 한솥밥을 먹은 레이 윌슨과 조지 코헨.
그리고 중앙 센터백은 풋볼 리그에서 명성이 높은 장신 수비수 잭 찰튼과 뛰어난 스위퍼인 바비 무어.
여기에 미드필더에는 던컨 에드워즈와 노비 스타일스, 바비 찰튼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견제해 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군. 상대 팀 놈들이 우리 수비진을 어떤 심정으로 봤는지 알 것 같은걸.’
하지만 난감함보다는 흥미로운 마음이 더 컸다.
훈련이 아닌 실전에서 현직 동료들, 그것도 후대 레전드, 명예의 전당에 오를 선수들과 맞붙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준영은 이 기회를 마음껏 즐겨 보기로 했다.
***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한국 선수들은 끊임없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찬스를 노렸고, 잉글랜드는 단단한 수비를 앞세워 이를 잘 차단했다.
이 와중에 집중 견제를 받은 건 준영이었다.
“던, 떨어져라. 그렇게 바싹 붙으면 리즈가 오해한다고.”
“후후, 걱정되면 공격하러 오지를 말든가.”
던컨의 집요한 마크에 준영은 김기복 쪽으로 공을 돌렸다.
그리고 잽싸게 던컨을 뿌리치고 리턴 패스를 받았다.
“주장, 못 가십니… 꿱!”
“넌 인마, 멀었어.”
육탄으로 저지하는 노비 스타일스를 밀치고 들어가니, 이번에는 장신 공격수 잭 찰튼이 기다리고 있었다.
“씁! 이번엔 노예 센터백인가.”
“누가 노예란 거냐!”
“너 말이야, 너. 리즈 유나이티드 공식 노예잖냐.”
혓바닥만큼이나 현란한 발놀림으로 잭 찰튼을 제쳐 낸 준영은 곧장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비 무어가 뻗은 발에 맞고 튕겨 나갔다.
곧장 리바운드 볼을 향해 달려든 조윤옥.
하지만 골키퍼 고든 뱅크스가 먼저 잡아챘다.
「뱅크스가 던컨에게 공을 던져 줍니다. 빠르게 한국 진영으로 치고 올라가는 빅 던, Park을 제치고 마틴 피터스에게 패스를 찔러 줍니다.」
마틴은 수비수 김청남을 앞에 두고 과감하게 중거리 슛을 날리는 척하다가 쇄도하는 바비 찰튼 쪽으로 공을 내줬다.
그대로 한국 문전으로 들어간 바비의 강슛.
함흥철의 펀칭에도 불구하고 공은 골대 안에 떨어졌다.
「골! 전반 30분, 바비 찰튼의 발끝에서 선제골이 터졌습니다!」
웸블리에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상대의 역습에 제대로 당했지만, 준영과 한국 선수들은 기죽지 않고 다시 반격에 나섰다.
“대한민국 파이팅!”
“한국 축구의 매운맛을 보여 줘!”
한국 응원단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 정병탁과 조윤옥, 이희택이 빠른 발로 잉글랜드 수비진을 부지런히 교란했다.
「리틀 리, 레이 윌슨을 제치고 돌파! 위험합니다. 중앙에서 존 Y. 리가 쇄도하고 있는데요!」
이희택이 바로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문전으로 달려드는 준영을 막기 위해 잭 찰튼과 바비 무어가 뛰어올랐다.
준영의 머리를 스쳐 간 공은 페널티 박스 바깥쪽으로 떨어졌다.
노비 스타일스를 뿌리치고 달려든 김기복이 논스톱 슛.
면도칼 같은 슈팅은 그대로 잉글랜드 골대를 갈라 놓았다.
“그렇지! 그거지!”
“이게 한국의 고추장 축구다!”
전반 42분, 맵고 화끈한 동점 골을 맛본 영국 관중들은 단체로 침묵했다.
이후 잉글랜드가 두 차례 기회를 만들었지만, 로저 헌트와 제프 허스트의 슈팅은 골대를 빗나가 버렸다.
결국 전반전은 1 대 1로 종료되었다.
***
“전반전 흐름이면 후반에도 고전하겠는걸.”
“한국 놈들, 진짜 장난이 아니군. 존 Y. 리를 끝까지 잘 막아야 할 텐데…….”
잉글랜드 팬들이 우려와 불안을 품은 가운데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휘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준영의 패스가 잉글랜드 골문으로 파고든 이희택에게 연결되었다.
하지만 바비 무어의 빠른 견제 덕분에 이희택의 슛은 골대를 비껴 나갔다.
“휴, 간 떨어질 뻔했네.”
“정신 차려, 잉글랜드!”
서둘러 전열을 정비한 잉글랜드는 한국의 공세를 적절히 끊어 내며 반격을 펼쳐 나갔다.
전반 12분, 제프 허스트의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오며 관중석에서 크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6분 후에는 기습적으로 공격에 가담한 바비 무어의 슛이 크로스바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연달아 상대에게 기회를 내주자, 준영은 박승옥과 함께 서둘러 흔들리는 수비 라인을 다잡았다.
「조지 코헨이 한국의 패스를 끊어 내며 치고 나옵니다. 전진하는 빅 던에게 패스. 빅 던 앞으로 존 Y. 리가 막아섭니다. 아, 속공 기회가 무산되네요.」
팽팽한 경기 양상은 후반전 절반이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후부터 한국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공격은 둔해졌고, 공수의 움직임도 전반 같지 않았다.
“휴, 여기까지인가…….”
윈터보텀 감독과 한국 대표팀 코칭스태프들은 아쉬운 기색으로 선수들의 플레이를 바라보았다.
“다들 지쳤구만.”
“어떻게든 버틴다 싶더니…….”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기동력 축구에는 한계가 있군요.”
파워 트레이닝으로 쌓은 체력도 준결승까지 오면서 바닥을 드러냈다.
거기다 상대도 나빴다.
던컨과 바비 찰튼을 비롯해 대다수 잉글랜드 선수들은 체력과 활동량이 뛰어났다.
거기다 경험과 기술에서 우위.
초반에 한국의 공세에 신중하게 대처하며 경기를 안정적으로 진행해 나간 점도 유효했다.
이탈리아나 포르투갈처럼 선제골을 내주고 심리적으로 휘둘리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때가 왔군. 이제 한 번에 밀어붙이면 되겠어.”
알프 램지 감독의 사인에 좌우 풀백 조지 코헨과 레이 윌슨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왕성한 활동량과 공격 전개 능력을 가진 그들이 가세하자 잉글랜드의 공격은 훨씬 강하고 묵직해졌다.
‘이런, 효랑 중환이가 버텨 내지 못하고 있어.’
김청남과 김정석이 양 풀백의 수비를 거들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들 대신 준영과 박승옥이 중앙을 지켰지만, 그리되니 중원이 잉글랜드 쪽으로 넘어갔다.
「레이 윌슨이 돌파하며 크로스! 캡틴 리가 끊어 내지만, 던컨이 다시 볼을 확보합니다.」
예사롭지 않은 던컨의 눈빛에 준영은 황급히 달려 나왔다.
하지만 저지하기도 전에 던컨의 발끝에서 중거리 슛이 터졌다.
골대를 비껴 갈 것 같던 슈팅은 거짓말처럼 궤적을 꺾으며 골대 우측 상단 구석에 박혔다.
「UFO슛! 빅 던의 엄청난 슛으로 잉글랜드가 다시 리드를 잡습니다!」
“Big Dunc! Big Dunc-!”
관중들이 크게 환호하는 가운데, 던컨이 껑충 뛰어오르며 세리머니를 펼쳤다.
실제 역사에서는 요절했을 천재의 멋진 플레이.
준영은 씁쓸함과 흐뭇함이 뒤섞인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자, 빨리 전열 정비해!”
“존 Y. 리가 올 거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
잉글랜드 선수들이 수비진을 구축한 가운데, 준영과 한국 선수들은 남은 기력을 짜내 공격에 나섰다.
남은 시간 약 10분.
흐름을 바꿀 수 있다면 결과를 뒤집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끈질기게 잉글랜드 문전을 두들기는 한국. 측면에서 Jung의 크로스가 올라옵니다. 막아야죠, 저건!」
잭 찰튼이 뛰어올랐지만, 먼저 날아오른 준영이 헤딩슛을 내리찍었다.
‘다, 당했다!’
잭이 사색이 된 순간, 고든 뱅크스가 뻗은 손이 헤딩슛을 쳐 냈다.
뒤이어 바비 무어가 황급히 공을 걷어 내면서, 잉글랜드는 최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삐익- 삑!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리며 아쉬움과 기쁨이 필드를 교차했다.
그리고 양 팀의 지주인 준영과 던컨은 가볍게 포옹을 나누었다.
“축하한다, 던. 꼭 우승해라.”
“고마워. 너희 한국 팀도 마지막까지 건투하길 빌게.”
함께하며 새로운 운명과 역사를 만들어 간 레전드 플레이어들.
자리에서 일어난 관중들은 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
1. 그동안 우리나라가 여러 차례 월드컵에 나가며 내로라하는 유럽 축구 강국들과 경기를 했는데, 잉글랜드하고 맞붙은 적은 없더군요.
월드컵이 아닌 올림픽에서는 맞붙어 봤지만, 그때는 영국 단일팀이라…….
혹시 이번 카타르 월드컵 때는 같은 조가 되지 않을까 했는데, 이번에도 엇갈렸습니다.
2. 다음 편이 마지막 회입니다.
남아 있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건 외전으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