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98화 (398/400)

Round 398. 그때 그 장소에서

“호외요! 호외!”

“대한민국 승리! 월드컵 4강이요!”

1966년 7월 24일 오전.

이탈리아를 이겼을 때와 같은, 아니 그보다 큰 환호성이 서울을 비롯해 대한민국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손을 잡거나 얼싸안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곤 했다.

“4강! 우리가 월드컵 4강이라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쟁쟁한 축구 강국들도 하기 힘든 일을 해낼 줄이야…….”

상공 회의소에 모인 여러 기업 대표들도 기뻐하긴 마찬가지.

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이억관은 얼굴에서 쉬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그는 정부와 언론 관계자들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4강 진출 소식을 제일 빨리 전해 들은 사람이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준영이 낭보를 전해 줬으므로.

“정말 엄청난 일을 해냈어요. 아무리 이준영 선수가 잘한다고 해도, 다른 대표 선수들의 실력은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할 텐데…….”

“정말 놀랄 일이죠. 설마 우리 공장 실업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가 세계 무대에서 그만한 활약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니까요.”

“이거 은근히 자랑하시는 겁니까? 4강 쾌거에 한몫했다고 말이죠.”

“허허, 자랑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랑 좀 하고 다녀야겠습니다.”

즐겁게 떠들어 대는 기업 대표들을 향해 이억관이 말했다.

“마냥 기뻐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깨달아야 한다고 봅니다. 막연히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상대가 강하다고 움츠러들었으면 이런 쾌거가 가능했겠습니까?”

“희망을 품고 도전해야 한다 이거군요. 더 큰 시장, 세계를 향해서 말이지요.”

제1제당 대표 이명철의 말에 이억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우리가 불우한 역사를 거치면서 비관적이고 소극적으로 되어 버렸지 않습니까. 스스로 가능성도 모른 채 망설였고요.”

4월 혁명으로 자유당 독재가 끝나고, 경제와 민생이 차츰 발전하면서 내일에 대한 기대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진 세계 무대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한 게 현실.

그러나 이번에 준영과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그런 국민들에게 보란 듯이 활약을 펼쳐 보였다.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희망을 품고 도전해 보라고.

“이활 사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덤벼들어서도 안 될 겁니다. 단순히 끈기나 정신력 같은 것으로 해낸 건 아니니까.”

“물론입니다. 대표팀이 어떤 식으로 경기를 준비했는지, 감독이 어떻게 선수들을 가르치고 지휘했는지 분석하고 배워야죠.”

이미 몇몇 언론과 지식인들도 주장 이준영이나 월터 윈터보텀 감독의 리더십에 대해 들먹이고 있었다.

또 대표팀이 체계적인 훈련으로 선수들을 관리한 점이나, 상대 팀 정보 수집과 분석에 노력한 점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었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요. 이번 축구대표팀의 쾌거는 그 점에 충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전직 공군 참모 총장인 김신 국회의원은 군관민이 모두 이 점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인들이 듣기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회사 관리를 잘하고, 시장 상황이나 경쟁사의 상품이나 마케팅을 파악하고 대비해야 성공할 수 있으니까.

“아무튼 참 대단해요. 한 사람의 활약과 노력이 이렇게 나라를 춤추게 하고,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 수 있다니…….”

이억관은 처음 준영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비참한 민족의 운명에 대해 토로하던 자신의 앞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던 청년.

그는 산불이 휩쓸어 간 자리에도 새싹이 돋아난다고 말했다.

억관은 그 말을 듣고 준영이야말로 잿더미에서 자라나는 새싹이라 여겼다.

그 새싹은 어느새 훌쩍 자라나 꽃을 피우고 씨를 뿌려 불타 버린 산에 다시 녹음을 채우고 있었다.

“우리에게 참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죠. 이 사장님, 이준영 선수에게 이 이명철이가 4강 진출을 축하한다고, 그리고 감사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우리 금성방직도 축하와 감사의 뜻을 보내는 바입니다.”

“저희 낙희공업도…….”

앞을 다투어 인사를 전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업 대표들.

흐뭇하게 받아들이는 이억관은 상상하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이들의 회사가 앞으로 세계를 주름잡게 될 것을 말이다.

***

유럽과 남미의 신문에도 한국의 4강 진출이 대서특필되었다.

그야말로 굉장한 대이변이라 할 만했기에 세계 축구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아시아 팀이 준결승에 오르다니…….”

“지금까지 유럽과 남미를 제외하고 4강에 오른 팀이 없었지?”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때 미국이 4강에 오르긴 했지. 하지만 그땐 조별 리그만 통과하면 4강이었어.”

거기다 당시 미국의 상대는 파라과이나 벨기에 등 약체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한국이 맞붙은 팀들은 소련과 이탈리아 등 죄다 만만찮은 팀들이었다.

당연히 돋보일 수밖에.

“캡틴 리가 2골을 터트리며 조국의 4강 진출을 견인했군.”

“FA 놈들도 멍청하지. 잉글랜드 대표로 붙잡아 두었다면 훨씬 수월하게 준결승에 올랐을 텐데.”

“어디 그뿐이야? 지난 대회도 우승했을걸?”

한국이 대이변을 일으켰을 때, 같은 날 런던과 셰필드, 선더랜드에서도 준결승 팀이 나왔다.

잉글랜드는 허스트의 골로 아르헨티나를 물리쳤고, 서독은 우루과이를 4 대 0으로 대파했다.

창과 방패의 대결로 주목을 받았던 브라질과 소련의 경기는 펠레가 야신을 상대로 결승 골을 터트렸다.

그리하여 4강은 잉글랜드와 대한민국, 서독과 브라질이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하핫! 언젠가 존이랑 제대로 맞붙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그런 날이 올 줄이야!”

던컨은 한국과, 준영과 상대하게 된 것에 놀라면서도 매우 기뻐했다.

그건 바비 찰튼이나 노비 스타일스, 레이 윌슨과 조지 코헨도 마찬가지.

그들은 26일 웸블리에서 열릴 준결승 경기를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건 둘째 치고, 캡틴 리를 어떻게 막을지 생각해야지.”

수비수 잭 찰튼의 말에 바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형, 혹시 자신이 없는 거야?”

“자신이 없긴, 인마!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는 거지!”

잉글랜드의 젊은 주장 바비 무어도 잭의 말에 동의했다.

“맞는 말이에요. 절대 얕볼 수 없죠.”

월드컵 우승 팀인 이탈리아도 격파하고, 조별 리그에서 브라질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다크호스 포르투갈도 해치운 상대.

무엇보다 현재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들은 준영을 잘 알고 있었다.

맨유에서 한솥밥을 먹은 이들도, 그의 활약에 쓰라린 패배를 맛본 이들도.

그렇기에 방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

4강 진출의 기쁨을 뒤로하고, 한국 대표팀은 준결승 준비에 돌입했다.

24일 아침 일찍 런던으로 이동한 그들은 회복 훈련을 진행하고 남은 오후에 선수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덕분에 준영은 런던까지 따라온 리즈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훈련에 더 매진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네요.”

“사실 티가 안 나서 그렇지, 다들 많이 지쳤거든.”

한국 대표팀은 기동력을 극대화하여 역습을 진행하고, 상대를 압박해서 수비하는 플레이를 해 왔다.

그것으로 기량이 뛰어난 상대에 맞서 싸울 수 있었지만, 한발 앞서 뛰는 플레이는 엄청난 체력을 소모했다.

“대회 전에 파워 트레이닝으로 쌓아 뒀다고 하지만, 경기를 계속 치르다 보면 바닥이 날 수밖에 없거든. 거기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도 상당하고.”

승전의 기쁨도 그 피로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거기다 일부 선수들은 예상외의 성적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고.

“그래서 윈터보텀 감독님이 자유 시간을 준 거군요.”

“응, 덕분에 우리 여왕님과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지.”

준영은 팔짱을 낀 리즈에게 바싹 다가섰다.

“호호, 나야 좋지만, 우리 공주님이 투덜대고 있을지 몰라요.”

“그럼 삐지지 않게 조공을 준비해야겠군.”

준영은 리즈와 쇼핑몰을 돌면서 안나가 좋아할 만한 과자나 장난감을 샀다.

알버트나 처제들에게 줄 선물도 잊지 않았다.

“어? 저거 캡틴 리잖아.”

“진짜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사인 받을 수 있을까?”

거리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준영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거기다 타블로이드 쪽 기자들도 파파라치처럼 쫓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경호원들이 적절히 막아 준 덕분에 준영과 리즈는 크게 성가심을 느끼지 못했다.

“어? 저긴 분명…….”

준영은 템즈강 부근에 있던 호텔을 보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도 참, 그동안 런던에 몇 번이나 왔으면서 여기를 잊고 있었네.”

“여기가 왜요? 무슨 장소인데 그래요?”

리즈의 물음에 준영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비밀을 알려 주었다.

“21세기에 있을 때 저기서 처음 장인어른을 봤었어.”

“어머, 그래요?”

“그래, 그러니까 그때 상황이 어땠냐 하면…….”

준영은 당시 일을 설명하면서 리즈를 호텔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곤 21세기에 손웅민과 앉았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여기야. 인테리어는 좀 다르긴 하지만…….”

“전경이 좋은 자리네요.”

“미래에는 더 좋았지.”

21세기와 달리 아직 템즈강 정화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보니 물빛이 탁했다.

하지만 그런 단점도 잠시 후 어둠이 내려앉자 금방 지워졌다.

준영은 리즈와 와인을 마시며 느긋하게 야경을 감상했다.

“그때 마신 와인보다 맛이 더 좋군.”

“더 고급이라서요?”

“아니. 시커먼 남정네들끼리 마시는 것보다, 아리따운 여왕님이 따라 주는 술이 더 달콤할 수밖에.”

“아이, 준도 참…….”

발그레하게 붉어진 리즈의 얼굴이 와인 잔에 비쳤다.

준영은 그 와인 잔을 잠시 들고 있었다.

혹시 그때처럼 루이스 대령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던 것.

하지만 장인은 딸과 사위의 데이트를 방해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혁명이 난 한국으로 가던 중에 만난 후로 뵌 적이 없군.’

모든 위기를 넘겼기 때문일까.

모두를 구해 달라는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자신을 비롯한 프레드로 일가는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맹구라 불릴 일 없이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는 중이다.

그렇게 유럽 정상에 오른 버스비의 붉은 악마들은 이제 삼사자 군단의 주축이 되어 두 번째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어찌 생각해 보면 호랑이, 아니 사자를 키운 것 같단 말이지.”

“아, 사자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안나가 사자를 키워 보고 싶다고 했어요.”

“어휴, 사자개도 아니고 사자를?”

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시대에 10년 가까이 살면서 충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일도 있었다.

바로 호랑이나 사자, 곰 등 새끼 맹수들을 백화점 등에서 애완동물로 판매하고 있다는 점.

몇몇 호사가들은 맹수를 길들여 키우기도 하지만, 준영은 테이머가 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당신은 찬성하는 거 아니지?”

“설마요. 그냥 나중에 커다란 사자 인형이나 사 줘요.”

“그래, 그게 좋겠지.”

일상의 이런저런 해프닝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행복.

준영은 자신에게 이런 행복을 안겨 준 루이스에게 감사하며 그에게 올릴 와인을 따랐다.

눈앞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 주기를 바라면서.

***

오심 덕분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2002 월드컵 경기를 다 보고, 그 전에 대표팀 선수들이 얼마나 피눈물을 쏟았는지 목격한 입장에서는 저 성과를 결코 깎아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홈 어드밴티지라고 해도 조 편성이나 토너먼트 대진이 너무 험난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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