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97. 한여름 날의 꿈
득점 찬스를 향해 토히스와 제르마누가 동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햇살에 주춤하는 사이, 태양을 등지고 뛰어오른 준영이 독수리처럼 공을 낚아챘다.
「캡틴 리, 헤딩 컷! 앞쪽에서 Cho가 받아서 달려 나오는 캡틴 리에게 리턴, 한국의 역습입니다!」
준영이 치고 올라오자, 그라샤가 황급히 차단을 시도했다.
하지만 공은 그 전에 정병탁에게로 전달되었고, 성급한 태클은 허무하게 잔디를 긁고 지나갔다.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은 준영은 다시 정병탁에게 패스를 넘겨받아 포르투갈 진영으로 달려 나갔다.
“아빠, 달려!”
“힘내요, 준!”
수많은 환호성 속에서 가족들의 응원이 들려온 것 같았다.
싱긋 미소를 지은 준영의 눈앞으로 허둥지둥하는 포르투갈 수비진의 모습이 보였다.
“내려와. 얼른 수비를……!”
비명과 같은 비센테의 외침.
사력을 다해 달려 내려온 모라이스와 제르마누가 준영의 뒤를 바싹 쫓았다.
그들은 준영의 돌파와 동시에 측면으로 달려가고 있는 조윤옥과 이희택을 보았다.
그들이 가는 쪽은 빈 공간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만약 그쪽으로 패스가 들어가면…….’
어느 쪽이든 골키퍼와 일대일이 가능한 상황.
하지만 비센테는 이준영이 패스를 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정면밖에 보고 있지 않아.’
분명히 본인이 해결하겠다는 기세.
그 모습을 본 비센테는 이를 악물었다.
‘얕보지 마라, 존 Y. 리!’
제아무리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라고 해도 통과시켜 주지 않는다!
각오를 다진 비센테는 바로 준영의 앞을 막아섰다.
퉁-!
가볍게 공을 튕기는 소음과 함께 준영이 스텝 오버를 시도했다.
비센테는 페인트에 넘어가지 않고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잡을 수 있어! 막아 낼 수 있다고!’
슬쩍 방향을 전환하는 준영을 계속 쫓던 비센테.
그의 눈앞으로 갑자기 붉은 유니폼이 확 들어왔다.
‘저건 우리 편……!’
비센테처럼 준영을 막고 있었던 제르마누.
준영의 발재간에 동선이 겹쳐 버린 두 선수가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아, 안 돼!’
쓰러진 비센테는 자신들의 머리 위로 살짝 넘어가는 공을 보았다.
우회하며 그 공을 잡아챈 준영은 페레이라 골키퍼를 앞에 두고 그대로 슈팅을 때렸다.
‘정면!’
낮고 빠르게 날아오는 슈팅은 페레이라의 두 다리를 서늘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철썩이는 소음이 들리기 무섭게 우레 같은 함성이 구디슨 파크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골인! 골! 골!”
“캡틴 리가 때려 넣었다아!”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며 경기를 지켜보던 한국 응원단,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있던 준영의 가족들, 그리고 자신들의 캡틴이 사고 치기를 기대하고 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서포터들까지.
다들 어린애처럼 펄쩍펄쩍 뛰거나 서로 얼싸안고 정신이 나간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이 다시 앞서갑니다. 한국의 주장, 유나이티드의 수호신, 아시아의 거인이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만드네요.」
기뻐하지 않는 건 제대로 참교육을 당한 포르투갈 대표팀뿐.
준영과 한국 선수들이 얼싸안으며 골 세리머니를 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그들은 스코어보드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갱신되는 점수와 함께 남은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정규 시간은 앞으로 3분인가.”
중간에 모라이스의 노 매너 슛으로 인해 경기가 중단된 시간을 생각하면 추가 시간은 5~6분 정도 더 줄 것 같았다.
물론 이는 예상치일 뿐, 진짜 심판이 시간을 얼마나 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포기할 시간은 아니지.’
‘아직 한 골 차.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야.’
동점 골을 넣고 연장전으로 간다.
그럼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역전 골까지 가능할지 모른다.
아직 희망을 버릴 수 없었던 포르투갈 선수들은 마지막 대공세에 나섰다.
「포르투갈이 총공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모라이스의 패스가 아우구스투에게. 아우구스투, 슛-! 하지만 한국 선수의 육탄 방어에 튕겨 나갑니다.」
뒤이어 그라샤가 리바운드 볼을 잡아 토히스 쪽으로 패스해 주었지만, 김청남이 중간에 차단.
그는 측면으로 내달리는 이희택 쪽으로 길게 패스를 건네주었지만, 아쉽게도 너무 긴 패스는 라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간격 맞춰서 패스 길목 막고!”
“사람 놓치지 마! 특히 에우제비우!”
준영뿐만 아니라 한국 선수들 모두가 서로 독려하며 수비를 단단하게 다졌다.
앞서 모라이스의 동점 골로 흥분해서 흐트러졌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용식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차올라도 한 발 더 내딛고,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 주며 굳세게 막아 내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기에.
‘정말이지… 단 한 골이 간절하던 때가 있었는데…….’
까마득할 정도로 높아 보이던 세계의 벽.
자랑스러운 후배들은 그 벽에 용감히 기어올랐고, 이제 더 높은 곳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힘내! 할 수 있어!”
이제 전술이나 작전보다 의지가 중요한 시간.
그 의지를 북돋아 주기 위해 한국 코칭스태프들은 목청 높여 선수들을 응원하고 독려했다.
그렇게 정규 시간이 끝나고, 추가 시간에 접어들었다.
「두꺼운 한국의 수비 앞에 포르투갈이 계속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과연 승리의 여신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 것인지?」
심판이 잠시 시계를 보고 있을 때, 시모에스의 패스가 에우제비우 쪽으로 날아갔다.
황급히 박스 밖으로 달려 나오며 끊어 내던 김정석.
하지만 너무 급하게 처리하려다 실수를 했던지 볼이 튀면서 그의 팔에 맞고 말았다.
“앗! 이런……!”
삐익-
프리킥 판정에 김정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록 페널티킥은 아니지만, 골대와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웠으므로.
「마지막에 찬스를 잡는 포르투갈. 과연 구사일생에 성공할 것인지?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지?」
공 앞에 에우제비우와 시모에스가 섰다.
마리우 콜루나가 없는 지금 그들이 킥력이 제일 좋았다.
“벽 간격 맞춰! 좀 더 오른쪽으로!”
골키퍼 함흥철이 바쁘게 벽을 조정하며 기회를 노리는 아우구스투, 토히스 등을 살폈다.
부디 이 경기 최후의 순간이 되기를!
그와 반대의 소망을 가진 포르투갈의 흑표범이 달려들며 공을 강하게 찼다.
뻐- 엉!
에우제비우의 슈팅과 동시에 벽을 서고 있던 박중환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초고속의 슈팅은 그 육탄 방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골대로, 함흥철의 손이 닿지 못하는 방향으로 떨어졌다.
터엉!
왼쪽 포스트 바를 맞고 튀어 나온 공.
아우구스투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 준영과 김효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논스톱 발리슛은 그들을 지나 골망을 세차게 긁었다.
“설마 골?”
“아냐. 옆 그물이다!”
마지막 기회가 날아간 순간, 포르투갈 선수들은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최종 판결과도 같은 심판의 종료 휘슬이 들려왔다.
“이겼다아-!”
“4강이다! 4강! 4가앙-!”
또 한 번 역사를 고쳐 쓰고 환호하는 대한민국 선수들.
그들을 내려다보는 관중석의 커다란 태극기는 마치 춤을 추듯이 펄럭였다.
그 광경을 보는 준영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기대와 야심을 품고 달려들긴 했지만, 진짜 여기까지 올 줄이야!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군.’
단순한 망상이 아닌, 후대 많은 꿈나무들에게 긍지와 희망을 심어 줄 한여름 날의 꿈.
그 꿈을 이뤄 낸 레전드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그렇게 한여름 날의 꿈은 영광의 역사로 남았다.
***
1997년 7월.
KBS 스페셜 히스토리라는 교양 프로그램 제작진은 내년 1998 프랑스 월드컵 시즌에 대비해 ‘7월의 신화’라는 제목의 특별편을 만들고 있었다.
제작진은 당시 4강 신화의 주역들과 함께 구디슨 파크를 찾았다.
“와,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저는 종종 들릅니다만…….”
“윤옥이 너야 지금 영국에 살고 있으니 그렇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이들은 대한민국 축구의 영웅인 이희택, 박중환, 조윤옥, 함흥철.
31년 전 이곳에서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그들은 현재 지도자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저쪽 관중석 지붕이 좀 삐딱했던 것 같은데…….”
“리모델링했겠지. 그래야 오래 유지하니까.”
“아이레섬 파크도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한국 축구 첫 승의 성지.
미들즈브러의 아이레섬 파크는 올 초에 철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많이 노후화되기도 했고, 미들즈브러 구단에서 리버사이드에 새로운 경기장을 짓기로 결정했기 때문.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물론 이준영의 ML그룹도 나서서 아이레섬 파크의 매입과 보전을 시도했지만 협상에 실패했다.
“철거 계획 잡히기 전부터 손을 썼어야 했는데…….”
함흥철의 아쉬움에 조윤옥은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었을 겁니다. 미들즈브러 구단이랑 지역 주민들이 새 구장과 지역 재개발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거든요.”
“재개발되어서 동네 집값 오르는 걸 바란 건가? 거참 한국이나 영국이나 똑같구만.”
“사람 사는 데는 거기서 거기죠.”
부디 이곳이라도 오래오래 유지되기를.
4명의 영웅들은 관리 직원의 안내를 받아 텅 빈 필드로 들어갔다.
푹신한 잔디를 밟고 있으니, 30여 년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여기, 마지막에 딱 이 위치에서 에우제비우가 프리킥을 찼다고.”
“조금 더 옆쪽 아니던가?”
“아니, 여기가 맞아요. 그때 정석이 형이 핸드볼 파울 해 가지고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잖아. 준영이 형님이 괜찮다, 괜찮다고 그러면서 달래 줬었지.”
그 말에 곁에 있던 PD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들, 그때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까요?”
“자세하게라……. 내가 그때 수비벽을 서고 있는데 중환이 형이 갑자기 튀어 나가서 놀랐던 게 생각나는군.”
“흐흐흐, 그때 내 어깨를 스쳐서 슛이 살짝 굴절되었던 거야. 그래서 골대에 맞은 거지.”
박중환이 으스대자, 함흥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너 맞고 실점되는 줄 알았어. 진짜 그때 골 들어갔으면, 어휴…….”
함흥철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땐 정말이지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긴 순간이었으니까.
“뭐, 결국은 이겼잖습니까.”
“이겼지. 아직도 그때 함성이 귀에 선하구만.”
당시 승리에 대한 감격은 이탈리아전 때보다 2배, 아니 3배는 컸다.
아마 감히 바랄 수 없다고 여겼던 목표, 우승이라는 고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흥분감 때문이었으리라.
“거참, 아직도 어제 일같이 생생한데……. 어느새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가 버렸군.”
꿈을 향해 내달렸던 영웅들.
이제 그들은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년들의 등을 떠밀어 주고 있었다.
“그때 일이 꿈같다고 하는데, 난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하긴 30년 사이 정말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진짜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나라는 최빈국을 도와주는 부유한 산업 국가로 성장했다.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뤘다.
많은 음악과 예술가들, 그리고 스포츠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올림픽 같은 국제적인 대회도 성공리에 치렀고, 앙숙인 일본을 제쳐 내고 월드컵 개최권도 따냈다.
“준영이 형님 말이 맞았죠. 우리도 잘살 수 있다고.”
“그랬지. 언젠가 올림픽도, 월드컵도 할 수 있다고 했었지.”
“아마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없었으면 해낼 수 없었을 테지요.”
힘겨운 시기, 믿음과 희망을 안겨 준 대한민국 레전드.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를 떠올린 4명의 영웅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
아카데미 무관의 제왕이라는 명작 영화 ‘쇼생크 탈출’ 최후반부를 보면 주인공 앤디가 레드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죠.
희망은 좋은 거라고, 좋은 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없는 게 아니라 찾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